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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앤 라이-42화 (42/58)

42화.

“하아, 그만. 그만하자. 설은하.”

하지만 은하는 스스로 생각하기를 멈추었다. 답은 이미 알고 있었으니까. 내기를 시작했고, 설은하와 차태건 둘 다 서로를 진심으로 좋아하게 되었다. 그대로 해피엔딩으로 끝났으면 좋았겠으나, 세상일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는다. 특히 저와 엮인 건 더욱 더.

“그래. 이게 맞지.”

사랑해서 헤어지느니 그런 숭고한 이유 따위는 아니고. 은하는 단지 차태건이 저보다 조금 더 밝고 정상적인 인간을 만나기를 바랐다.

정은수를 향했던 10년의 지독한 세월 말고, 저와 나누었던 피폐하고 찐득한 감정 말고, 그에게 맞는 풋풋하고 설레는 감정을 품어 볼 수 있기를. 그 애는 그럴 만한 자격이 있는 애니까. 거짓말을 좀 하긴 했어도, 차태건은 천성적으로 나쁜 놈이 될 수 없는 사람이니까.

“괜히 여기로 왔나.”

실은 이곳에 온 이유가 차태건의 흔적을 찾고 싶어서였다는 걸 알고 있었다. 아주 조금만 이대로 더 머물러야지. 어차피 이 향기도 금방 날아갈 테니.

작디작은 어두운 방 안에서, 은하는 눈을 감고 오랫동안 숨을 들이쉬었다.

* * *

“잘 잤어?”

“…….”

“사모님이랑 가구 보러 가기로 했다며. 내가 백화점까지 너 데리고 가기로 했어.”

오진주와 혼수를 보러 백화점에서 만나기로 한 날이었다. 차를 보내겠다는 말에 적당히 거절의 말을 둘러댔는데, 웬일인지 계속해서 권유했다. 어쩔 수 없이 오피스텔 주소를 알려 줬는데, 나와 보니 태건이 앞에 서 있었다.

“정윤오 일 그만뒀다고 하지 않았어?”

“복직했어.”

간단하게 대답한 태건이 은하에게 뒷좌석 문을 열어 주었다. 정중한 그의 태도에 은하의 눈썹이 슬쩍 올라갔지만, 이내 아무 말 없이 차에 올라탔다.

“무슨 생각인지 모르겠지만, 나 이 결혼 안 물러.”

“그래.”

태건은 긴말을 하지 않았다. 은하의 용건이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라디오 볼륨을 올렸다. 귓가에 익숙하지만 제목은 모르는, 서정적이고 구슬픈 클래식 음률이 차 안에 흘렀다.

“도착했어.”

차에 오른 지 삼십 분이 흘렀을까. 창밖을 바라보던 은하의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꽂혀 들었다.

“고마워.”

은하는 태건이 문을 열어 주기 전에 먼저 차에서 내렸다. 그러고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백화점 안으로 들어갔다.

안내를 받아 VIP룸 안으로 들어선 은하는 삐딱한 표정으로 앉아 있는 정윤오와 눈이 마주쳤다. 씽긋 웃어 주는 은하의 얼굴에 그의 미간이 더 심각하게 구겨졌다.

“오느라 고생했어.”

“차 보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편하게 왔어요.”

“원래 혼수는 여자들끼리 보는 거긴 한데, 첫날이라 윤오도 같이 왔어. 괜찮지?”

“그럼요. 오랜만이다?”

정윤오를 향해 인사를 건네자 날카롭게 벼려진 그의 눈빛이 은하에게 향했다.

“저 윤오랑 먼저 할 말이 있는데, 조금만 있다가 나가도 될까요, 어머니?”

“그래. 천천히 얘기하다 와. 난 먼저 둘러보고 있을게.”

“네.”

먼저 밖으로 나서는 오진주의 뒷모습을 보다 정윤오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는 이제 아주 죽일 듯이 은하를 쏘아보고 있었다.

“뭐 하자는 거야?”

“뭐가?”

“씨발, 어머니?”

“미리미리 정붙여 놔야지. 몇 년을 함께 살지도 모르는데.”

“지금 뭐 하냐. 너 졌잖아. 근데 구질구질하게 왜 이래.”

“그래. 졌지. 그래서 약혼식 안 갔잖아.”

“뭐?”

“내가 다시 약혼하자고 했니? 결혼하자고 했지.”

“말장난하지 마.”

“정윤오.”

“…….”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네 마음을 모르겠더라고. 도대체 왜 양쪽에 그런 내기를 건 건지. 재밌었다는 말로 지나치기엔 네 표정이 썩 유쾌해 보이는 것도 아니고. 계속 곱씹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너도 이유를 잘 모르는 건 아닐까.”

정윤오의 눈썹이 꿈틀거렸다.

“그냥, 네가 그런 인간이라서. 나처럼 아주 망가진 인간이라서 그랬겠구나, 하는 결론을 내렸거든.”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확실히 하자고.”

“뭐?”

“다 망가지자. 죄 없는 정은수랑 차태건은 빼고.”

하, 실소를 머금은 정윤오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섰다. 그런 정윤오의 뒤통수에 은하는 실없는 말을 던졌다.

“혹시 결혼식 안 올 예정이면 미리 말해 줘? 나도 마음의 준비는 해야지.”

정윤오는 다시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런 그의 뒷모습을 보며 은하는 조용히 속삭였다.

“잘 살자. 우리 되게 잘 어울릴 거 같아.”

다짐처럼 제 결심을 되뇌는 입 안이 몹시도 씁쓸했다.

“가전이랑 가구는 얼추 된 거 같으니까, 다음 주에는 반지 보러 가자. 제대로 된 거 해 주라고 아버님이 벌써 성화셔.”

“기대되는데요?”

자애로운 시어머니와 말 잘 듣는 며느리. 은하와 오진주가 보이는 모습은 마치 잘 짜인 일일 드라마를 보는 듯했다.

차를 주차하고 매장으로 올라온 태건은 중간중간 오진주가 은하에게 사 주는 가방이나 옷 등을 손에 들었다. 양은 많지 않았지만 하나같이 최고급으로 된 것들이었다.

“윤오도 참, 이왕 나온 김에 점심도 같이 먹고 하면 좋을 텐데.”

“괜찮아요. 저도 제가 쇼핑하는데 옆에서 인상 찌푸리고 있으면 별로라서요.”

“하긴. 그건 그래. 아! 주말에 라운딩 있는데, 골프는 좀 치니?”

“아뇨. 아직 못 배웠어요.”

“골프는 배워 두는 게 좋아. 요즘 비즈니스 꼭 회사에서만 하는 거 아니다.”

“네. 내일 바로 레슨 등록할게요.”

은하는 정호승에게서 블랙카드 한 장을 건네받았다. 원래 혼수나 예단은 여자 쪽에서 준비하는 거지만, 은하의 사정이 사정이니만큼 미리 건넨 것이었다. 세운 쪽에는 얼추 윤곽이 잡히면 정호승이 연락을 건네기로 입을 맞춘 상태였다.

“난 선약이 있어서 가 봐야 하는데 어쩌지?”

“가 보세요. 오늘 피곤하셨을 텐데, 내일 마사지도 꼭 받으시구요.”

“그래. 필요한 거 있으면 언제든 연락하고.”

은하의 어깨를 조심히 두드린 오진주가 뒤에 있는 태건은 본 체도 않은 채 쌩 지나갔다. 그런 오진주의 뒷모습을 보던 은하의 얼굴에서 미소가 걷혔다.

“피곤하네.”

은하가 봤을 때 오진주는 허세도 심하고 욕심도 많은 사람이었다. 저런 엄마 밑에서 어떻게 정은수같이 순한 딸이 태어났을까. 은하의 머릿속에 쓸모없는 질문이 슬쩍 떠올랐다.

“발 괜찮아? 아까 보니까 절뚝거리는 거 같던데.”

새 구두를 신어서 그런가. 뒤꿈치가 따끔하기는 했다. 근데 그건 그거고.

“넌 내 발만 보나 보다?”

피식 웃음을 흘린 은하가 먼저 엘리베이터 앞으로 가 섰다. 태건은 그런 은하의 뒤로 조용히 따라붙었다.

“계속 이렇게 할 거야?”

잔잔한 음악이 흐르는 사이로 은하가 나직이 물었다. 하지만 태건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보다 이기적이네, 차태건.”

“어?”

“내가 너 보기 불편하다는데, 넌 네 사과 받아 달라고 계속 강요하는 거잖아. 아니야?”

미처 그렇게는 생각 못 했다는 듯 태건의 얼굴이 당황으로 물들었다. 하여튼 표정 하나 제대로 못 숨기는 게. 은하는 일부러 태건의 여린 부분을 자극했다.

“기억 안 나? 내가 너 크게 속여 먹어도 한 번은 봐주기로 했던 거. 그거 다 거짓말이었나 봐? 이렇게까지 치사하게 나올 줄은 몰랐는데.”

“난 그런 게 아니라…….”

“우리 잤잖아. 그것도 아주 격하게, 많이.”

“…….”

“내가 결혼을 한다는 건, 지금껏 너와 했던 짓을 이제 정윤오와 한다는 거야. 그런데도 너 계속 나 볼 수 있니? 괜찮겠어?”

태건은 입을 열지 않았다. 잠잠한 그의 눈빛을 바라보던 은하는 먼저 시선을 거두었다.

“이제 그만하자. 너 다르게 살아 보고 싶다며. 나도 그래. 그나마 웃으면서 헤어질 수 있을 때, 인사하는 게 맞는 거 같아.”

“난 상관없어.”

“……뭐?”

“네가 누구와 자든. 정윤오와 결혼을 하든 말든, 난 상관 안 해.”

“차태건.”

“난 그냥……. 네가 활짝 웃었으면 좋겠어. 나한테 기쁨을 나눠 줬던 그날 밤처럼.”

담담히 흘러나오는 태건의 목소리에 은하의 눈빛이 덜컥거렸다. 말을 고르는 그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넘어갔다.

“난 네가 행복한 게 좋아. 그러니까 네가 원하는 걸 해 주고 싶어. 그게 뭐든.”

앞만 보던 은하의 눈길이 서서히 태건에게로 향했다. 이어져 나오는 말에는 허탈함이 짙게 배어 있었다.

“넌 참, 속도 좋다.”

“나 소원 하나 남았잖아. 그거 쓸게.”

“뭐?”

“너 별일 없이 결혼식 잘 마칠 때까지, 옆에 있게 해 줘. 그것만 끝나면 더 안 괴롭힐게.”

날아오는 애절한 눈빛에 은하는 눈을 감았다. 그렇게 한참 동안 숨을 고른 후에야 태건을 다시 볼 수 있었다.

“그래. 그렇게 해. 그래야 네 마음이 편해진다면. 대신 결혼식 끝나면 바로 내 눈앞에서 사라지는 거야. 알겠지?”

은하가 말을 마치자마자 엘리베이터가 도착했다. 차갑게 돌아서는 뒷모습에, 태건의 눈가가 결국 아프게 이지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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