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3화.
“뭐? 누구?”
온통 공주풍으로 꾸며진 새하얀 방에 피치 높은 소리가 가득 울려 퍼졌다. 침대에 누워 통화를 하던 설은진이 잔뜩 미간이 구겨진 얼굴로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네 언니. 누구지, 누구지 했는데 오늘에야 생각이 났네.
“두현 오빠가 설은하랑 있었다고?”
―응. 근데 두 사람 분위기 심상치 않던데?
“하. 미친년. 약혼식 내팽개치고 도망가더니, 남의 남자나 만나고 있었던 거야?”
아침부터 친구와 수다 삼매경에 빠져 있던 설은진은 며칠 전 바에서 이두현이 여자와 함께 있는 걸 봤다는 친구의 말에 있는 대로 열이 뻗쳐 있던 상태였다. 안 그래도 요즘따라 소홀해진 게 느껴져서 또 뭔가 꼬라지가 났구나 싶었는데, 결국 설은하 때문이었어?
“알았어. 일단 끊어.”
전화를 끊은 설은진은 곧바로 이두현에게 전화를 돌렸다. 하지만 그는 받지 않았다.
“이두현, 진짜.”
이렇게 나온다 이거지. 비틀린 미소가 설은진의 입가에 내걸렸다.
―고객님이 전화를 받지 않아…….
“후우.”
전화를 끊은 태건에게서 얕은 한숨이 새어 나왔다.
오늘 아침 태건은 은하로부터 메시지를 받았다. 지난번 가구 맞춘 게 문제가 생겼다며, 백화점에 동행해 줄 것을 요청한 것이었다.
은하가 먼저 연락을 해 온 것에 고무된 태건은 약속 시각인 10시가 되는 것을 가만히 앉아 기다릴 수가 없었다. 결국 아침 식사도 건너뛴 채 냉큼 밖으로 나선 그는 8시가 채 되기도 전, 은하의 오피스텔 앞에 도착했다.
약속 시간이 한참 남았지만 태건은 기꺼이 그 기다림을 즐겼다. 오늘따라 짱짱한 그의 컨디션만큼이나 날씨도 아주 맑고 쾌적했다.
하지만 하늘을 찌를 듯 치솟았던 기분은 머지않아 푹 가라앉았다. 은하가 나타나지 않은 것이었다.
“무슨 일 있나.”
시간은 오후 8시를 훌쩍 넘어가고 있었다. 혹시 사고라도 생긴 건 아닐까 걱정되는 마음에 가슴이 두근거렸다.
뚜르르. 다시 한번 걸어 본 전화의 수화음이 이번에는 빨리 끊겼다. 여보세요, 낮게 깔린 한 남자의 목소리가 태건의 귓가에 꽂혔다.
―누구예요.
나른하게 묻는 은하의 목소리에 벅찬 숨소리가 섞여 있었다. 전화기를 쥔 태건의 손에 핏줄이 불뚝 튀어 올랐다.
띵동. 깊게 누른 초인종에 잠시만요!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문이 열리고, 멀끔한 차림으로 서 있는 이두현의 모습에 태건은 몰래 숨을 멈췄다.
“어, 난 또 룸서비슨 줄 알았네. 어떻게 오셨죠?”
“설은하 씨 모시러 왔습니다.”
“아. 잠시만 기다려요. 은하야.”
이두현이 부르는 소리에 안쪽에서 희미하게 응답하는 은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뿌듯한 얼굴로 미소를 짓는 이두현의 모습에 태건은 결국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잠깐 들어와서 기다릴래요?”
“아닙니다. 여기 있겠습니다.”
이두현은 문을 반 정도만 열어 놓고 안으로 들어갔다. 등을 지고 돌아선 태건은 5분 정도 후에 차태건, 하고 부르는 은하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기둥에 한쪽 팔을 짚고 선 은하의 머리카락이 조금 젖어 있었다. 헐렁하게 풀린 가운 사이로 하얀 가슴골이 훤히 보여, 태건은 황급히 시선을 돌렸다.
“밑에 내려가 있을게. 준비 다 되면 전화해.”
“응. 금방 돼. 로비에서 기다리고 있어. 아!”
다시 안으로 들어가려던 은하는 퍽 미안하다는 표정으로 태건을 돌아보았다.
“약속 잊어서 미안. 백화점에서 다 해결됐다고 전화 왔길래 그냥 대답만 하고 말았는데. 너한테 연락하는 거 깜빡했다. 괜찮지?”
“응.”
“오래 기다렸어?”
“아니.”
“그래. 그럼 좀 더 기다려.”
순순히 고개를 끄덕이고 돌아서는 태건을 은하는 길게 주시했다. 하, 이게 잘하는 짓인지 모르겠네.
“저 사람이야?”
어느덧 곁에 다가온 이두현에게서 향수 냄새가 강하게 풍겼다. 재밌다는 듯 미소를 띤 그를 외면하며 은하는 몰래 미간을 찌푸렸다.
“뭐가요.”
“정착하고 싶은 사람.”
“…….”
“이런 쇼까지 하는 거 보면 진짜 마음이 있나 보네.”
딱히 대답을 원하는 것 같지 않아 은하는 말없이 돌아섰다. 축 처진 태건의 어깨가 떠올랐지만 이내 고개를 저었다.
마음 독하게 먹어, 설은하. 차태건 떨쳐 내야지.
뭐든지 어설프게 구는 건 인생에 도움이 되지 않았다. 다시 한번 제 결심을 되뇐 은하는 가차 없이 마음의 문을 닫았다.
* * *
“설은하.”
로비로 막 들어서는 은하를 부른 건 태건이 아니었다. 낯선 여자의 음성에 고개를 돌린 은하는 정통으로 부어지는 빨간색 물벼락에 온 얼굴이 젖었다. 진득한 점성을 자랑하며 느릿하게 흘러내리는 빨간 것은 마치 페인트를 물에 섞은 듯한 느낌이었다.
뚝뚝 흐르는 것을 닦지도 못한 채 눈을 감은 그녀의 뺨에 매서운 손날이 내렸다. 짜악! 사람들이 몰린 로비에 날카로운 소리가 크게 울렸다.
“설은진!”
난데없는 뺨 세례에 이두현이 설은진의 손을 잡아챘다. 그러거나 말거나, 소동의 장본인인 설은진은 은하를 보며 식식거렸다. 수군거리는 사람들의 기척을 느끼며 은하는 느릿하게 머리를 쓸어 올렸다. 비참해진 꼴과는 달리 입가에 밴 미소는 몹시 나른했다.
“오랜만이네? 그동안 잘 지냈어?”
“잘 지냈겠니? 언니란 년이 동생 애인을 뺏어 갔는데?”
“너 진짜 왜 이래?”
“오빤 이따가 얘기해.”
이를 꽉 깨물고 이두현에게 말한 설은진이 고개를 쳐들고 은하에게 말했다.
“너 진짜 해도 해도 너무 한다. 아무리 걸레처럼 몸 굴리고 다녔다고 해도, 약혼 깨진 지 얼마나 됐다고 동생 애인한테 치근덕거리고 있어?”
“…….”
바락바락 악을 쓰는 설은진을 보는 은하의 눈이 차갑게 내려앉았다. 설은진은 조용한 그녀가 기가 죽었다고 생각했는지 더욱 더 목소리를 높였다.
“네가 이따위로 구니까 우리 집까지 욕을 들어먹는 거잖아! 너 약혼식 때 도망쳐서 아빠랑 엄마랑 얼마나 사람들한테 손가락질 받았는지 알아? 나는 또 어떻고? 정말 너 하나 때문에…….”
“내가 왜 도망쳤는데?”
“뭐?”
천천히 가방에서 손수건을 꺼낸 은하가 한쪽 뺨을 거칠게 훑어냈다. 형형한 그녀의 눈빛과 함께 완전히 지워지지 않은 빨간빛이, 마치 피를 뒤집어쓴 것처럼 섬뜩해 보였다.
“내가 왜 그 쓰레기 같은 집에서 도망쳤는데. 넌 알 거 아냐.”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 입으로 그랬잖아. 엄마 죽은 지 한 달이나 지났는데 그것도 모르고 있다고. 그래 놓고 안에서 하하호호 웃을 거 생각하니까 소름 끼친다고.”
“너…….”
단지 약혼을 하기 싫어서라고만 생각했지, 은하가 그 사실을 알고 있다는 생각은 하지 못했다. 당황스러움에 버벅거리는 설은진을 향해 은하는 한 발짝 한 발짝 천천히 다가갔다.
“인간 이하 취급을 해 놓고, 겨우 도망 한 번 친 것 가지고 사람을 이렇게 패면 어떡해, 은진아.”
“…….”
“네가 이러면…….”
은하의 눈빛이 깊게 가라앉았다. 한없이 굳은 그녀의 표정이 본능적으로 설은진의 오감을 떨리게 했다.
“고작 뺨 한 대로 끝낼 수가 없잖아, 내가. 응?”
짜악! 설은진의 뺨을 내려치는 은하의 손길이 매서웠다. 순식간에 고개가 홱 돌아간 설은진은 방금 제가 무슨 일을 당했는지 믿을 수 없다는 듯, 눈을 커다랗게 떴다.
짝! 똑같은 강도로 다시 한번 뺨을 때리는 은하의 모습에 이번에는 이두현이 움찔했다. 옆에서 느껴지는 기운은 거의 살기에 가까운 것이었다.
“너……, 네가 감히.”
“왜? 때리는 건 항상 네 역할이었는데, 이제 바뀌니까 억울해? 그러게 적당히 하지 그랬어. 쥐도 궁지에 몰리면 고양이를 문다는데, 너랑 네 부모가 날 너무 끝까지 몰았잖아.”
“설은하!”
“함부로 내 이름 부르지 마!”
지금껏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는 피치 높은 목소리로 은하가 일갈했다. 설은진을 향한 그녀의 얼굴은 온통 일그러져 있었다.
“너한테 뺨 맞고 발로 걷어차일 때도, 네 엄마한테 말도 안 되는 핑계로 모욕을 받고 지하실에 갇힐 때도, 병원에 누워 있는 내 엄마 생각하면서 꾹 참았어. 견뎌 내야 하니까. 그걸 견뎌 내야 그나마 엄마 숨이라도 붙여 놓을 수 있으니까. 근데 뭐? 엄마가 죽은 걸 몰라서 소름 끼쳐? 너 진짜 제정신으로 그런 소릴 한 거니?”
“…….”
“네가 양심이라는 게 있었으면 처음 그 사실 알았을 때 귀띔이라도 해 줬어야지. 네가 사람이라면, 네가 일말의 감정이라도 있는 인간이라면!”
“그, 그건 아빠가…….”
“그래, 그게 네 방식이지. 하고 싶은 대로 다 했다가 불리하면 엄마, 아빠 뒤에 숨는 거. 근데 그거 알아? 숨만 쉬던 그 사람도 나한테는 방패막이였어. 말 한 번 못 섞고, 눈빛 한 번 못 쳐다봐도, 나한테는 살 이유였다고. 근데 니들이 뭔데, 니들이 뭔데 내 엄마를!”
점점 흥분의 고조가 높아지고, 어느덧 은하의 눈가에 붉은 기운이 몰렸다. 다시 한번 손을 치켜드는 은하를 본 설은진이 눈을 감던 찰나, 부드러운 목소리가 은하의 몸을 감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