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46화 (46/58)

46화.

“난 내 아버지만큼 큰 능력은 없지만, 언젠가는 당신 꼭 망하게 할 거예요. 어떻게든.”

“…….”

“그러니까 가만히 안 있어. 계속 꿈틀거릴 거야. 당신이 몇 번을 짓밟아도.”

“설은하.”

돌아선 설준호가 손목에서 시계를 벗었다. 무서워야 정상인데, 이미 극한의 공포감을 느껴 봐서 그런지, 별 느낌이 없었다. 그렇다고 공짜로 맞아 줄 생각은 없었다.

“맷값 준비됐어요? 나 비싼데.”

“……이 꽉 물어.”

아무도 드나들지 않는 식당 룸 안, 한동안 은하에게는 고요한 폭력이 자행되었다.

몸을 뒤흔드는 진동과 통증을 느끼는 그 와중에, 은하는 뜬금없이 태건과 헤어지기를 정말 잘했다는 생각을 했다. 분명히 다른 곳에 빛이 있는 걸 아는데도, 이렇게 끝도 없이 자기 파멸로 가고 싶은 걸 보면 진짜 어디 한 군데 잘못된 인간이라는 생각이 들었기에.

멀리 멀리 도망가, 차태건. 진짜로 내가 너 붙잡고 늘어지기 전에.

문득 차태건이 너무 보고 싶었다. 동시에, 이대로 영원히 눈을 감아 버리고도 싶었다.

* * *

―집에 거의 다 왔어. 정윤오 데리고 올라갈게.

후우, 전화를 끊은 정은수의 입에서 한숨이 흘러내렸다.

어제도 술을 마시고 호텔에서 잠든 정윤오를 태건이 데리러 간 참이었다. 도저히 정신을 차리지 못하는 그를 겨우 깨워 차에 태웠다며, 태건은 정은수에게 집에서 수액 맞을 준비를 해 놓으라고 전화를 걸었다.

벌컥!

부서질 듯 현관문을 열리는 소리에 소파에 앉아 있던 정은수가 황급히 일어났다. 오늘 은하를 만나고 온다던 모친이 씩씩거리며 안으로 들어왔다.

“무슨 일이에요?”

“하! 나, 기가 막혀서, 정말! 허!”

붉으락푸르락 열이 오르는 얼굴을 어찌할 줄 모르고, 모친은 그대로 서서 이마를 짚었다. 잠시 후 제 딸을 바라보는 오진주의 눈에 불길이 일었다.

“너 알고 있었어?”

“어?”

“설은하랑 차태건! 둘이 붙어먹은 거 알고 있었냐고!”

갑작스러운 질문에 정은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이미 그녀의 표정만으로 오진주는 답을 얻었다.

“이 미친 것들을…….”

부르르 떠는 모친의 낌새가 심상치 않았다. 잠시 후 태건이 올 것을 떠올린 정은수가 얼른 모친의 팔을 잡았다.

“일단 방으로 들어가요.”

“이거 안 놔?”

“진정해요.”

“내가 진정하게 생겼어? 이것들이 쌍으로 우리 집안을 모욕했는데!”

“엄마.”

“차태건 이 개 같은 놈, 내가 가만 안 둘 거야. 내가 가만 안 둘 거라고!”

“그게 무슨 소리예요?”

흥분해서 다짜고짜 막말을 하는 모친의 입을 막을 새도 없었다. 낮은 목소리에 고개를 돌린 정은수는 축 처진 정윤오를 부축한 태건이 현관 앞에 서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런 그를 본 오진주의 눈에 불길이 확 일었다.

“너……너 이 자식!”

성큼성큼 걸어간 오진주가 손을 홱 쳐들었다. 언젠가 그랬던 것처럼 날카로운 소리가 공간을 울렸다.

“아, 씨발. 존나 아프네.”

어느새 태건의 앞을 막아선 정윤오가 느른하게 뺨을 감싸 쥐며 중얼거렸다. 부들부들 손을 떨던 오진주가 경악에 찬 표정으로 그런 그를 바라보았다.

“이 아줌마 손이 왜 이렇게 매워. 귀청 다 나가겠네.”

“……윤오야.”

“뭐. 설은하랑 얘가 사귀는 거 알게 됐다고? 그래서 이러는 거야?”

흥분해서 아무 말도 못하는 오진주의 모습에 태건은 정윤오를 부축하던 손을 놓았다. 순간 몸이 휘청인 정윤오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밖으로 나서는 제 친구를 허망한 눈으로 바라보았다.

“새끼 정신줄 놨네.”

“…….”

“씨발, 청춘남녀가 눈도 좀 맞고, 배도 좀 맞추고 그러는 거지. 그거 가지고 왜 이렇게 지랄이야, 지랄이.”

점점 험해지는 정윤오의 말에 잠시 얼이 빠져 있던 오진주도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다.

“너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야! 저것들이 우릴 가지고 장난쳤잖아. 네 아버지랑 널 농락한 거라고!”

“농락은 무슨. 그 두 사람 내가 붙인 거예요.”

“……뭐?”

“둘이 짝짜꿍 놀아 보라고 붙인 게 나라고.”

“그게 무슨.”

입술을 사리물던 오진주가 이내 크게 고함을 쳤다.

“무슨 일이 날 뻔한 줄 알아? 네 친구랑 놀아나던 애가 네 부인이 될 뻔했어! 그 애가 제 입으로 직접 네 아들을 낳겠다니 어쩐다니 했단 말이야!”

“그래서.”

“뭐?”

“그게 잘못된 거야? 아줌마도 그랬잖아.”

메마른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정윤오의 눈빛에 오진주는 온몸이 굳었다.

“아줌마도 처음에는 내 엄마한테 언니, 언니 그러지 않았었나? 둘이 죽고 못 사는 친구 사이였던 걸로 아는데. 아니야?”

“너…….”

“그래도 난 결혼까진 안 했잖아? 남의 가정 파탄 낸 분도 이렇게 잘 살고 계시는데, 걔네 연애한 거 그게 뭐 어때서.”

“윤오야.”

잔뜩 굳어 있는 모친의 모습에 결국 정은수가 나섰다. 안 그래도 지쳐 있던 정윤오도 더는 힘이 없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괜히 힘 빼고 그러지 맙시다. 따지고 보면 다 막장인데, 왜 그렇게 힘들게 살아요.”

“…….”

휘적휘적 제 방으로 올라가는 정윤오를 아무도 막지 못했다. 충격에 굳은 제 엄마를 정은수도 더는 감싸지 않았다. 저마다 지은 죗값이 각자에게로 돌아갈 시간이었다.

* * *

[조윤아 작가 북 토크 잡혔어. 도와줄 거지?] 오후 5:42

까만 화면에 떠올랐다가 사라지는 메시지를 힘없이 바라보았다. 휴대폰을 잡기 위해 손을 뻗는데 온몸의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어설픈 은하의 도발에 넘어간 설준호는 그야말로 미친 듯이 굴었다. 나중에는 제 남편의 지나친 폭력에 강유화가 만류해야 했을 정도였다.

비서를 불러 자리를 정리한 설준호는 자리를 뜨자마자 은하의 계좌로 2천만 원을 송금해 왔다. 맷값치고 적지도 많지도 않은 금액이었다.

[미안. 이번엔 못 도와줄 것 같아.] 오후 3:52

힘겹게 답장을 보내고 의자에 자리 잡은 은하는 서랍에 고이 넣어 놓은 불룩한 서류 봉투 하나를 책상 위에 올려놓았다. 툭툭 내용물을 터니, 서류 더미와 녹음기 등이 쏟아져 나왔다.

‘씨발, 너 때문에 되는 일이 없어! 내가 제대로 줄 서라고 했잖아! 도대체 할 줄 아는 게 뭐야!’

‘나가! 너같이 쓰레기 같은 건 이 집에 발붙일 필요도 없어! 당장 꺼져! 지하실로 사라져!’

고래고래 악을 쓰는 설은진과 강유화의 목소리가 녹음기에서 흘러나왔다. 밖에서는 그렇게 점잖은 척하는 인간들이 어쩜 이렇게 이중적일 수 있는지. 아무리 돈으로 처발랐다고 해도 고용인들 사이에서 말 한 번 새어 나가지 않았다는 게 신기할 정도였다.

“하아.”

지금 이걸로 뭘 할 수 있을까. 견고한 세운의 이름에 생채기라도 하나 낼 수 있을까. 언론이든 뭐든, 한 번쯤 떠들썩하게는 만들 수는 있겠지만 그게 과연 최선일까.

시간이 흐르면 모든 게 망각되기 마련이었다. 하물며 돈으로 모든 것을 뒤덮는 그 사람들이야.

정윤오와의 결혼이 무산되고 나니 마음이 헛헛했다. 뭔가 목표를 잃은 기분이랄까. 다 망가뜨리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결국 제대로 한 일은 태건을 떼어 놓은 것밖에 없었다.

“아, 아프다.”

어디 하나 부러진 게 아닌가 싶을 정도로 온몸이 욱신거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리게 보게 된 거울 안에는 눈가에 커다란 멍을 단 제 모습이 똑바로 비쳤다. 그렇게 얼굴만은 때리지 않으려고 애쓰더니.

겨우 몸을 움직여 부엌으로 간 은하는 진통제를 털어 넣고 냉수를 머금었다. 쨍할 정도로 차가운 물을 들이켜고 나니 정신이 좀 드는 것 같았다. 그렇게 잠시 멍하니 서 있을 때였다.

딩동! 딩동! 딩동!

평화롭기만 하던 집 안에 성급한 초인종 소리가 연신 울려 퍼졌다. 제집을 아는 사람이고는 효주와 태건밖에 없고, 그 두 사람은 지금 올 리가 없었기에 은하는 느릿느릿 걸음을 옮겨 보조 자물쇠를 건 채 문을 열었다.

“…….”

문 사이로 비친 은하의 얼굴을 확인하는 순간, 태건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꽉 다문 입가가 부서질 듯 떨리고, 잠잠하던 눈빛이 순식간에 분노로 일렁였다. 하아, 그런 태건을 보는 은하의 입가에 자잘한 한숨이 부서졌다.

“어쩐 일이야. 네가 여기 왜 왔어?”

잘 얘기했다고 생각했는데. 왜 또 그런 표정으로 서 있어.

“……누구야?”

꽉 다문 잇새로 나직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설준호야?”

“…….”

질끈 눈을 감은 태건의 목울대가 느릿하게 넘어갔다. 잠시 후 눈을 뜬 그가 은하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문 열어 줄래? 병원 가자.”

싫어. 거절의 의미로 은하는 느릿하게 고개를 저었다.

“지금은 아니야. 나중에 내가 알아서 할게.”

완전히 열리지 않는 문 하나를 사이에 두고, 태건은 은하의 마음을 조용히 짐작해 보았다. 너는 진짜 끝까지 나를 밀어내는구나. 이런 순간에서마저도. 이렇게 아프고, 누군가 필요한 상황에서도.

“알았어. 갈게.”

태건은 조용히 돌아섰다. 은하가 거부하면 다가가지 않을 것이다. 진정 그녀가 그것을 원한다면.

대신 그는 제가 할 수 있는 일을 하기로 했다. 이번에는 예전과 다르게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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