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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앤 라이-47화 (47/58)

47화.

“아버지, 죄송해요.”

―…….

고요한 태건의 음성에 부친은 침묵했다.

“사랑하는 사람이 있어요. 엄청 예쁘고, 착한 사람이에요.”

―…….

“이제 그 사람 지키려구요.”

가끔 태건은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제 아버지와 저는 정말로 어딘가 영혼이 연결되어 있는 건 아닐까. 말을 하지 않아도, 굳이 얼굴을 보지 않아도 부친은 언제나 저의 마음을 꿰뚫고 있는 듯했다.

―지킬 게 있으면 지켜야지.

짧은 아버지의 대답을 마지막으로 태건은 전화를 끊었다. 그리고 깊게 숨을 한 번 들이쉬었다.

“으, 하여튼 설은하 때문에 되는 게 없어. 이게 무슨 개망신이야.”

“그나마 이쯤 해서 끝난 게 다행일지도 몰라. 두현이네는 좀 아깝지만, 더 좋은 사람 있을 거고. 저번에 말한 이정 회계 쪽은 어때요?”

“조만간 날 잡아 보기로 했어.”

아침부터 무슨 회동이 있는지 설준호의 가족 전부가 한 차에 올라탔다. 도우미의 배웅을 받으며 차에 올라서는 그들을 주시하며 태건은 발걸음을 옮겼다. 손에는 알루미늄 야구 배트가 들려 있었다.

“일단 만나서 간단하게 식사부터 하고, 그 뒷일은…….”

“어, 아빠! 저기!”

설준호가 뭐라 말을 맺기도 전 그가 앉아 있는 쪽 창문에 쾅! 하는 굉음과 함께 금이 갔다.

“아악!!”

갑작스러운 공격에 놀란 강유화와 설은진이 소리치는 사이, 설준호는 기사에게 얼른 손짓을 했다.

“김 기사, 얼른! 얼른 차 출발시켜!”

하지만 차는 출발할 수 없었다. 미처 출발을 시키기도 전, 창문을 다 부순 태건이 차창 너머로 손을 뻗어와 설준호의 멱살을 움켜쥐었기 때문이었다.

“아아! 아빠!!”

“여보!!”

강유화가 창밖으로 딸려 나가려는 설준호의 몸을 끌어당기는 사이, 태건은 창 너머로 손을 넣어 차문을 열어젖혔다. 그러고는 뒤로 물러나 있던 설준호를 한 번에 잡아채 땅바닥에 내팽개쳤다.

“너 누구야! 내가 누군지 알고 이러는 거야!”

두려움에 찬 설준호가 혼신을 다해 팔로 얼굴을 방어했다. 그러거나 말거나 그의 머리 위로 꽂히는 태건의 주먹에는 거침이 없었다.

“아악! 아빠!! 김 기사, 어떻게 좀 해 봐요!”

뒤늦게 기사가 태건의 등에 매달려 봤지만 역부족이었다. 죄 없는 사람에게 주먹을 휘두르기 싫었던 태건은 한쪽으로 기사를 끌고 가 눈으로 경고했다. 더는 건드리지 말라고. 꿀꺽 침을 삼킨 기사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뒤돌아본 곳에 얼굴이 피떡이 된 설준호를 강유화가 살피고 있었다. 설은진은 태건이 떨어뜨렸던 야구 배트를 들고 떨고 있었다.

“너……. 너, 그때 설은하랑 같이 있던 남자지!”

“뭐? 은하?”

순간 강유화의 눈이 매섭게 태건에게 향했다. 태건은 설은진의 손에서 야구 배트를 뺏어 멀리 던져 버리고, 다시 설준호에게 다가갔다.

“너 이 새끼 뭐야! 우리가 누군지 알고 이 행패야!”

“내가 뭔지는 알 거 없고, 네들이 짐승보다 못한 것들이라는 건 알고 있어.”

“뭐?”

“비켜. 아줌마까지 때리고 싶진 않으니까.”

꺄악! 태건의 손짓 한 번에 강유화가 멀리 나가떨어졌다. 파편이 뿌려진 땅바닥 위를 뒤로 기어가던 설준호의 얼굴에 두려움이 깃들었다.

“자네, 자네가 누군지는 모르겠네만, 우리 말로 하세. 은하 관련해서 온 거면…….”

퍽! 설준호의 고개가 꺾였다.

“더러운 입에 은하 이름 담지 마.”

퍽! 퍽! 내려치는 주먹에 자비는 없었다. 주먹질 세 번에 거리에 핏물이 튀고, 이가 날아갔다. 설준호의 눈이 가물거리고, 점차 의식을 잃는 게 보였다.

“여기요! 여기 사람 좀 살려 주세요!!”

평소에는 고요하기만 하던 골목에 마침 지나가던 차가 그들의 곁에 급정거했다. 운전석과 보조석에서 내린 남자 두 명이 가까스로 태건을 떼어 냈지만, 무감한 얼굴로 숨을 훅훅 뱉어 내던 태건은 그 손길을 뿌리치며 다시 설준호에게 다가갔다.

퍽. 퍽. 퍽. 퍽.

결국 뒤늦게 나타난 경찰이 그에게 테이저 건을 쏠 때까지, 태건은 설준호의 얼굴과 팔과 다리를 모조리 부숴 놓았다.

씨발, 머리가 나쁘면 손발이 고생한다더니. 운동 적당히 하고 책 좀 읽을걸.

은하를 위해 할 수 있는 일이 겨우 이런 것뿐이라는 사실이 태건은 원통했다.

미안, 설은하. 내가 진짜 저놈 죽여 주고 싶었는데. 미안, 미안해.

쓰러진 태건의 중얼거림은 허공 속으로 부서졌다.

* * *

“헉, 헉!”

이렇게 숨이 차도록 뛰어 본 것은 지난번 태건이 손을 잡고 달리던 때 이후로 처음이었다. 턱 끝까지 차오른 호흡이 뇌까지 들어찬 것 같았지만 은하는 달리는 두 발을 멈출 수가 없었다.

“하아, 하아.”

은하는 경찰서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초췌한 모습으로 선 정은수를 발견할 수 있었다. 그 옆에는 태건의 부친이 벽에 기댄 채 힘없이 쪼그려 앉아 있었다.

“은수 언니.”

“은하야.”

“차태건은요?”

은하를 발견한 정은수의 눈이 놀라움으로 커졌다. 그녀의 얼굴에 새겨진 커다란 멍 자국 때문이었다.

“은하야, 너 얼굴이 왜…….”

“차태건 어디 있냐구요!”

“안에. 지금 조사받고 있어.”

허망함이 깃든 부친의 얼굴에 은하의 시선이 오랫동안 머물렀다. 나 때문이다. 그때 내가 그런 말만 하지 않았어도.

‘다 죽여 버리고 싶어. 진짜 다…….’

‘그래. 알아. 네 마음 알겠어.’

한 번만 더 참을걸. 무너지지 말걸. 아니, 그게 아니면 맞은 거라도 들키지 말걸.

눈을 질끈 감은 은하가 속으로 후회를 되뇌고 있을 그때였다.

“저번에 용수 똘마니들 어떻게 됐다고 했지?”

덜컥 문이 열리고 형사로 보이는 두 사람이 사무실에서 나오고 있었다. 눈을 번쩍 뜬 은하는 문이 닫히기 전 손을 집어넣어 안으로 들어갔다. 순식간에 일어난 일에 정은수가 미처 잡을 새도 없었다.

“왜 그랬어요?”

“…….”

“하, 차태건 씨. 지금 몇 시간쨉니까.”

지친 듯 마른세수를 하는 형사 앞으로 한껏 굽은 태건의 등이 보였다. 서서히 다가가는 은하의 시선에 그의 두 손을 속박하고 있는 은색 수갑이 들어왔다. 그 순간 은하는 숨이 막혔다. 결국 내가 너를 이 지경으로까지 모는구나.

“지금 저쪽에서 차태건 씨 당장 검찰에 넘기라고 난리예요. 뭐라도 좋으니까 한 마디만 해 봐요.”

“말하지 마.”

불쑥 끼어든 은하의 목소리에 태건의 고개가 옆으로 돌아갔다. 이 와중에도 얼룩진 제 얼굴부터 살피는 그의 모습에 은하는 목이 메었다.

“누구세요?”

“내가 입 열라고 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마.”

“저기요. 누구시냐구요.”

은하를 수상하게 보는 형사가 미간을 얕게 찌푸렸다. 그러거나 말거나 은하는 태건을 직시하며 말을 이었다.

“다시 돌아올 거야. 그러니까 아무 말 하지 말고, 나 기다리고 있어.”

“김 형사!”

거칠게 동료를 부르는 형사의 목소리에도 은하는 태건을 향한 시선을 거두지 않았다.

약속해. 기다리겠다고. 내가 너 구하러 올 거야. 그러니까 나만 믿어.

끌려가는 은하를 보며 태건이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응. 얕게 끄덕이는 그 모습에 은하는 이를 꽉 깨물었다.

* * *

짜악!

안 그래도 멍으로 가득한 얼굴에 다시 한번 손바닥이 내려쳐졌다. 돌아간 얼굴을 느릿하게 원위치 시킨 은하가 매섭게 강유화를 노려보았다.

“여기가 어디라고 찾아와! 너 때문에 무슨 일이 일어난 줄 알아?”

침대에 누운 설준호의 꼴이 아주 엉망진창이었다. 태건에게 무자비하게 폭행을 당한 그는 팔뼈와 갈비뼈가 골절되었고, 얼굴에는 다발성 열상이 가득했다. 그나마 방어를 열심히 했는지 경미한 뇌출혈까지 보였던 그는 여섯 시간여의 수술 후에 병실로 옮긴 후에 잠시나마 의식을 차렸다고 했다.

“내가 언젠가 이럴 줄 알았어. 너 때문에 큰일 날 줄 알았다고!”

좀처럼 흥분을 가라앉히지 못한 강유화가 다시 한번 손을 치켜들었지만, 이번에는 순순히 맞아 줄 생각이 없었다. 허공에 뜬 그녀의 손을 잡아 던져 버린 은하는, 몸을 휘청거리면서도 표독스럽게 저를 보는 강유화에게 무표정으로 대응했다. 강유화의 얼굴이 순식간에 일그러졌다.

“너, 설은하 너!”

마구잡이로 달려드는 강유화를 간단히 피했다. 온몸으로 달려들었던 강유화가 제힘에 못 이겨 바닥으로 쓰러졌다.

“팔팔하네요? 그 기운으로 아까 좀 막아 주지 그랬어요.”

“설은하!”

악을 지르는 강유화의 얼굴은 정말 마귀 같았다. 아, 지겹다, 정말. 순간 떠오른 생각에 은하의 미간이 옅게 구겨졌다.

“그 정도 소리로 남편 깨울 수 있겠어요? 한참 모자란 거 같은데.”

“너…….”

분에 못 이긴 듯, 강유화의 온몸이 떨렸다. 은하는 그런 그녀의 앞에 한쪽 무릎을 꿇고 깊게 눈을 마주쳤다.

“방금 전에 한 대 맞아 준 건, 내 친구 대신 맞아 준 거야. 어쨌든 사람이 사람을 때리는 건 잘못한 거니까.”

“뭐?”

“근데 더는 안 맞아 줘. 저 인간이 맞은 거, 딱 내 뺨 한 대 가치랑 똑같거든.”

“내가 그 새끼 가만둘 것 같아?”

“가만히 안 두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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