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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이 앤 라이-48화 (48/58)

48화.

부들부들 떠는 강유화의 입이 제멋대로 나불거렸다.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감옥 가게 만들 거야! 최고형 때려서 전과자 만들고 말 거라고! 출소한 다음? 사회에 발도 못 붙이게 해 줄게. 내가 못할 거 같아?”

악에 받친 강유화의 앞에 은하가 따로 챙겨 온 봉투를 흔들어 보였다. 영문 모를 그 제스처에 강유화의 이마가 잠시 찌푸려졌다.

“나 나가면 냉수 한 잔 떠 드세요. 그렇게 숨 좀 가라앉히고, 이 안에 있는 것들 확인해요.”

“뭐?”

“이것들 보고도 그런 소리 나오면, 그땐 나도 어쩔 수 없고.”

자리에서 일어난 은하가 싸늘하게 식은 눈빛으로 강유화를 내려다보았다.

“생각 끝나면 내일 아침 9시까지 경찰서로 사람 보내요. 세운로펌에서 제일 유능한 변호사로. 기다릴게요.”

“야아아!”

끝까지 고함을 지르는 강유화를 뒤로하고 은하는 밖으로 나섰다. 턱, 문이 닫히자마자 다리에 힘이 풀렸지만, 굳건히 힘을 주고 다시 발걸음을 옮겼다.

물론 현행범으로 체포된 만큼 구속을 피하기는 어려웠다. 은하의 폭로를 막기 위해 설준호가 합의 의사를 밝힌다고 해도 검찰로 넘어가는 것은 분명했다. 하지만 분명 양형을 조절할 여지는 있을 것이다.

평소 태건의 성품이 온화하고 생활이 성실했던 점, 비슷한 범죄를 저지른 적이 없고 주위 평판이 나쁘지 않은 점. 그런 식으로 어떻게든 태건에게 유리한 조건을 만들어 교도소행만은 막는 게 은하의 목적이었다.

“하아.”

완전히 병원 건물을 벗어난 은하는 꾸역꾸역 대로변까지 내려가서야 자리에 주저앉았다. 순간 어지러운 기운이 들어 눈을 감고 있자니, 안 그래도 복잡한 머리가 더 정신없이 돌아갔다.

설마 강유화가 다 같이 자폭하자는 건 아니겠지. 일단 차태건부터 부수고 저희들은 어떻게든 빠져나오려고 한다면, 그땐 어떻게 하지. 온갖 부정적인 생각이 몰려와 울컥, 속에서 뭔가가 올라왔다.

“욱! 우욱!”

“어, 저기 괜찮으세요?”

질척이는 손을 입에서 떼지 않고, 은하는 필사적으로 구역질을 참았다. 무너지면 안 돼. 여기서 쓰러지면 안 돼, 설은하.

다 잃었다고 생각했는데. 진짜 혼자라고 생각했는데.

결국 저에게 차태건이 남았다는 걸 깨달아 버린 은하는 그렇게 한참을 홀로 사투했다.

* * *

“은하 양.”

고개를 올린 은하는 잘빠진 수트 차림에 서류 가방을 손에 든 남자를 눈에 담았다. 강유화 어지간히 겁먹었나 보네. 다행이라는 생각과 함께 맥이 탁 풀려 은하는 잠시 눈을 감고 숨을 골랐다.

“반성문 쓰세요. 하루에 열 장씩, 제가 부르는 대로 쓰면 됩니다.”

“…….”

변호사와 함께 면회를 들어온 은하는 저만 보는 태건을 향해 말을 이었다.

“현행범으로 체포된 거라 구속은 피할 수 없어. 설 대표 부상 정도도 심하고. 그래도 열심히 노력할 테니까 너도 시키는 대로 해.”

태건은 또다시 고개를 끄덕였다. 그리고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제 볼일은 다 끝났다고 생각했는지 변호사는 먼저 묵례를 하고 밖으로 나섰다. 아직 시간이 좀 남았기에 은하는 태건을 보며 힘없이 미소를 지어 보였다.

“밥은 먹었어?”

끄덕. 굳게 입을 다문 태건을 보며 은하는 잠시 머리를 짚었다.

“너 지금, 내가 입 열라고 할 때까지 아무 말도 하지 말라고 해서 그러는 거야?”

끄덕. 또다시 내려가는 태건의 고개에 은하의 눈빛이 애틋하게 변했다.

“너 진짜……, 어쩌려고 이래.”

순식간에 차오르는 눈물을 은하가 두 손바닥으로 꾹 눌렀다. 잠시 후 흘러나오는 목소리에는 지친 기색이 가득했다.

“말해. 말해도 돼. 네 목소리 듣고 싶어.”

“괜찮아? 많이 아팠지.”

고개를 든 은하가 울먹이는 표정을 그대로 드러낸 채 웃음을 흘렸다.

“지금 네가 내 걱정 할 때야.”

“그러게 병원 가자니까.”

“차태건.”

“어.”

크게 숨을 들이쉰 은하는 마음을 추스르기 위해 이를 꽉 깨물었다.

“내가 너 꼭 빼 줄게.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마.”

“…….”

“고마워. 나 대신 애써 줘서.”

철철 흐르는 은하의 눈물을 대신 훔쳐 줄 수가 없어 태건은 빈주먹만 쥐었다. 그래, 이거면 됐다. 은하가 잘 울고 있으니까. 이제야 솔직한 제 감정을 터뜨리는 은하의 모습이 태건은 몹시도 기꺼웠다.

괜찮아. 이제 괜찮아질 거야. 네가 나를 끝내 빼내지 못한다고 해도, 그래서 감옥에 들어간다고 해도, 너만 괜찮으면 돼. 그러니까 맘껏 울어.

태건의 소리 없는 고백이 가슴속에서 한없이 맴돌았다.

결국 태건은 구치소에 수감되었다. 갈색 죄수복을 입고 버스에 올라타는 태건의 모습에 머리가 아찔한 정도로 울렸지만, 은하는 꿋꿋이 정신을 부여잡고 끝까지 그를 배웅했다. 어떻게든 견뎌 내려고 하는 그 마음은, 아마 그의 아버지도 다르지 않았으리라.

“죄송합니다. 태건이, 별일 없을 거예요.”

“밥은 먹었어요?”

“…….”

“어째 지난번 봤을 때보다 살이 더 빠진 것 같네.”

수척한 차영조의 입에서 처음 나온 말은 평소 태건의 언행과 몹시도 비슷했다.

“다이어트 중이라서요.”

“더 뺄 데도 없구만.”

의미 없는 농담을 흘리며 차영조는 작게나마 미소를 지었다.

“날도 시린데, 국밥이나 한 그릇 하고 갈까요?”

“네.”

식당에 들러 김이 모락모락 나는 국밥을 앞에 두고 은하는 천천히 수저를 놀렸다. 그런 은하를 미소 띤 채 보면서, 차영조도 묵묵히 제 몫을 비워 냈다.

“이번 일 잘 마무리되면.”

“…….”

“태건이 앞에 나타나지 않겠습니다.”

멈칫하는 차영조의 손길에 은하가 힘없는 표정으로 고개를 들었다.

“태건이가 저 때문에 겪지 않아도 될 일을 겪었어요. 앞으로도 그런 일이 없다고는 보장 못 하구요.”

제가 좀 팔자가 센 사람이라. 농담조로 덧붙이는 은하의 말에 차영조는 웃지 않았다.

“아버님이 보시기에 저희 얼마나 어리석어 보일지 알아요. 뭐 얼마나 만났다고. 세기의 사랑이라도 하는 것처럼 구는 거 어이없으실 거예요. 나중에 되돌아보면 저도 너무 부끄러울 거 같은데, 지금은 그냥 태건이 빼내는 데 집중하려구요.”

“은하 양.”

물컵을 쥔 차영조가 천천히 한 모금 삼켰다. 뭔가 말을 고르는 그의 표정에 은하는 조용히 입을 다물었다.

“내가 배움이 짧고 언변도 좋지 않아서 은하 양에게 큰 도움이 되지는 않겠지만, 한 가지 말해 주고 싶은 게 있어요.”

“네.”

“시절인연이라는 말 알죠?”

“네.”

모든 인연에는 다 그 시기가 있다. 굳이 애쓰지 않아도 만나게 될 인연은 다 만나게 되어 있고, 아무리 애를 써도 만나지 못할 인연은 만나지 못한다.

“요즘 젊은 사람들 생각으로야 무책임한 말이라고 할 수도 있겠지만, 난 나이 든 사람이라 그 말을 믿어요.”

“…….”

“지금 이런 일이 일어난 것도 다 이유가 있겠지. 은하 양이 태건이를 떠나야겠다고 생각한 이유도 분명히 있을 테고.”

언변이 좋지 않다던 차영조의 목소리는 부드럽고 완곡했다. 뭐야, 차태건. 네 아버지 하나도 안 무뚝뚝하시잖아.

“은하 양이 뭘 하든 말리지 않을게요. 다만 한 가지 당부하고 싶은 건.”

“…….”

“건강해요. 아프지 말아요.”

“……네.”

지극히 일상적이고 상투적인 그 인사가 그 어느 때보다 깊이 들어왔다. 애석하게도, 그 입에 발린 말을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이 살았던 탓이었다.

시절인연이라.

지금까지 일어났던 모든 일에 이유가 있는 거라면, 내가 차태건을 만나게 된 건 어떤 이유에설까.

그를 속이기 위해 은하가 애썼던 날은 사실 알고 보면 허상에 불과했다. 당황스러움을 느낄 순간도 없이 속절없이 차태건에게 빠져 버렸고, 감정을 인지한 후에는 정말 단 한 순간도 제 감정을 숨기지 않았으니까.

“마지막까지 들어요. 식으면 맛없어.”

“네.”

얘기를 하느라 잠시 손을 멈춘 은하를 차영조가 서둘러 채근했다. 온전히 따뜻하기만 한 그 목소리에 은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수저를 들었다.

아, 너무 따뜻하다.

뜨끈한 국물을 애써 삼켜 내린 은하는 가슴속에 딱딱하게 굳어 있던 해묵은 감정이 조금씩 풀리는 것을 깨달았다.

참 기이한 감각이었다. 한때는 제 삶의 전부를 지배할 만큼 컸던 그 어떤 것들이, 차태건 아버지의 온기 어린 한 마디에 모조리 해체되고 있었다.

‘건강해요. 아프지 말아요.’

그래, 아프지 말아야지. 더는 날 아프게 하지 말아야지.

오랜 시간 앞을 못 보던 맹인이 빛을 찾은 것처럼, 깨달음은 순식간에 다가왔다. 피식, 잇새로 가볍게 웃음을 흘려버리듯, 은하는 모든 것을 그만두기로 했다. 쓸데없는 감정 소모도. 눈에 훤히 보이는 불구덩이로 자기를 몰고 가는 것도.

“감사합니다.”

은하는 정중히 고개를 숙여 감사 인사를 했다. 살면서 처음으로 만나 본, 좋은 어른에게 올리는 진심 어린 인사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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