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49화 (49/58)

49화.

“은수 출국 잘 했다.”

정윤오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침대 위에 반듯이 누워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깍지 낀 두 손을 가슴에 얹고 고요히 눈을 감은 그를 정호승이 착잡한 얼굴로 내려다보았다.

태건이 설준호를 폭행한 지 한 달이 지나는 날이었다. 그사이에 날씨는 더 추워졌고, 사람이 여럿 빠진 집은 고요했다.

뭐라 더 할 말이 없어, 정호승은 아들의 방을 벗어났다. 스르륵, 눈을 떠 허공을 맴돌던 정윤오의 시선이 비가 내리고 있는 창밖으로 향했다.

‘정윤오. 이 미친 새끼!’

비가 내리면 어김없이 예전 그날이 떠올랐다. 엄마가 죽은 날이 아니라, 치기 어린 마음에 손목을 긋던 날.

태건이 제 손목을 부여잡고 철철 눈물을 흘리던 모습도, 코에 감겨드는 피비린내도, 이런 날엔 더 생생히 기억이 되살아났다.

‘정신 차려. 술 적당히 마시고.’

‘달리러 가자. 옷 입어.’

‘지랄 좀 그만 떨어. 당 떨어지겠다.’

차태건은 제가 아는 사람 중에서 가장 단단한 사람이었다. 강건하고, 의지가 굳고. 그렇게 안 생겨서는 사랑이 많았다.

‘아! 근데 너 잘 나가다가 존나 클리셰로 돌아서는 거 아니지?’

‘뭔 소리야.’

‘왜, 영화나 드라마 보면. 꼭 이런 거 하다가 진심이 돼서 사랑하니 어쩌니, 뭐 그러잖아.’

‘되면 되는 거고. 약혼녀 뺏길까 봐 겁나?’

‘퍽이나. 하긴, 일평생 정은수 해바라기인 네가 그럴 리는 없지. 차태건, 난 너 믿는다. 우리 인생 그렇게 재미없게 살지 말자, 어?’

애초에 이렇게 되라고 시작한 일이었지만, 가슴속에 의구심 하나 없는 것은 아니었다. 근데, 이렇게까지 완벽하게 성공할 줄이야.

“말이 씨가 된다더니. 씨발.”

피식 웃음을 흘리던 정윤오의 얼굴이 금세 일그러졌다.

‘사과해. 더 늦기 전에.’

정은수가 떠나기 전 남긴 말이 계속 맴돌았다. 꼭 그 때문이 아니더라도 언젠가 태건을 마주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뭔가 계속 가슴에 덜컥거렸다. 그게 뭔지 확인부터 해 보려 했지만 도저히 답을 알 수 없어서, 정윤오는 아주 늦게 몸을 일으켰다.

* * *

“내일 불기소 처분 날 겁니다.”

변호사의 말에 은하는 조용히 숨을 내쉬었다.

“감사합니다. 고생하셨어요.”

결국 태건은 기소 유예를 받았다. 매일같이 쓰는 반성문과 설준호 측과의 합의, 평소 태건의 생활을 적극적으로 증언해 준 주변인의 노력 등이 통해서였다.

사실 맘을 졸였다. 혹시라도 의식을 차린 설준호가 중간에 말을 바꿀까 봐. 제가 약점이랍시고 쥐고 있던 것들이 통하지 않을까 봐. 하지만 설준호는 역시나 속물이었고, 그들이 뻔하게 나와 준 것에 대해 은하는 가슴을 쓸어내렸다.

“전 이만 가 보겠습니다.”

변호사와 헤어진 후 은하는 마지막으로 면회를 신청했다. 태건이 구치소에 들어간 후, 은하는 거의 매일 그를 보러 왔다.

“드디어 내일이네?”

“응.”

“그동안 고생했어.”

“너도.”

“차태건.”

“…….”

“너 나오면, 우리 같이 살래?”

처연한 은하의 눈빛이 태건의 얼굴에 길게 가닿았다. 어딘지 현실 같지 않은 은하의 모습에 태건은 가슴이 덜컥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너만큼 좋은 사람은 다시 못 만날 거 같아.”

“……진심이야?”

응. 선뜻 고개를 끄덕이는 은하에 태건은 어리둥절했다. 정말인가. 내가 혹시 꿈을 꾸고 있는 건 아닌가.

“이런저런 일을 겪어 보니까 아직 너랑 만들고 싶은 이야기가 많다는 생각이 들었어. 너만 괜찮으면, 나 너랑 같이 있고 싶은데.”

꿀꺽, 느릿하게 움직이는 태건의 목울대를 보며 은하가 잠시 고개를 숙였다.

“근데, 그 전에 한 가지 부탁이 있어.”

“부탁?”

“응. 나 조금만 기다려 줄 수 있을까? 시간이 필요하거든.”

시간이 필요하다. 부연 설명을 하지 않아도 태건은 은하가 무슨 말을 하는지 가슴으로 느낄 수 있었다.

“지금까지…… 어떻게든 살려고 노력해 본 적은 있는데, 정작 날 사랑해 주려고 해 본 적은 없는 것 같아서.”

“…….”

“조금만 있다가 돌아올게. 그러니까 기다려 줘. 꼭 다시 올게.”

“……응. 알았어.”

은하는 진심이었다. 태건의 부친에게 떠나겠다고 말은 했지만, 어떻게든 그의 곁에 돌아오고 싶었다. 시절인연. 은하는 저희들이 언젠가 꼭 만날 인연이라고 믿고 싶었다.

“차태건.”

사랑하는 나의 차태건.

“고마워.”

날 구원해 줘서.

“금방 다녀올게.”

마지막으로 손끝의 온기 한번 느껴 보지 못하고, 그렇게 은하는 태건을 떠났다.

다음 날 출소한 태건은 구치소 앞에서 저를 기다리는 부친의 품에 풀썩 안겼다. 그리고 아무 말 없이 어깨를 두드려 주는 그 손길에 오래도록 눈물을 흘렸다.

기다릴게. 기다릴게, 설은하. 그러니까 꼭 와 줘. 꼭 돌아와야 돼.

은하에게 차마 하지 못했던 말이 가슴속에서 소용돌이쳤다. 어리고 미숙한 차태건의 사랑이, 그렇게 또 한 번 기다림의 늪에 빠진 순간이었다.

* * *

은하야. 나의 은하수.

오늘은 바람이 많이 부는 날이야.

책상에 앉아 공부를 하는데, 창밖의 바람 소리가 너무 크게 들려서 한눈을 팔았어. 한번 한눈을 팔다 보니까 다시 글자가 눈에 안 들어와서 이렇게 또 펜을 든다.

너는 지금 어디에 있어? 혹시 그곳에도 바람이 불고 있니?

가끔 네가 머물고 있을 그곳을 상상해 볼 때가 있어. 우리가 함께 가려던 태국에 있는 건 아닐까. 아니면 동양인이 하나도 없는 유럽에서 길을 헤매고 있나.

사실 내 상상력이 아주 빈약해서 구체적인 그림은 그려지지 않았는데, 한 달 전 효주 씨가 보여 준 에세이에서 힌트를 얻었어. 독일의 어떤 광장에서 여행객 하나가 계단에 걸터앉아 샌드위치를 먹는 사진이 있었는데, 문득 그게 너일 수도 있겠다는 생각이 들더라고. 그렇게 자유로운 모습으로 네가 떠돌고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니, 마음이 따뜻해지더라. 아주 행복했어.

막연히 너를 떠올릴 때마다 가슴 한구석이 찌릿찌릿해. 뭐가 어찌 됐든 춥지 않았으면 좋겠는데. 외롭지도 않았으면 좋겠고.

난 잘 지내고 있어. 매일 새벽에 일어나서 운동을 하고, 아침 식사를 한 후 학원에 가. 공부를 시작하는 게 쉽지는 않았는데, 하다 보니 꽤 적성에 맞는 것 같기도 해. 나 운동했던 거 알지? 어렸을 때부터 성실한 것과 참는 것 하나는 잘 해내는 나니까.

어제는 아버지와 식사를 하는데 그런 말씀을 하시더라. 내가 구치소에 들어가 있는 동안, 네가 나에게 너무 많이 미안해하더라고. 그러지 말지. 나 진짜 하나도 안 힘들었는데.

아주 무식하고 폭력적인 방법이지만, 너를 위해 할 수 있는 게 있어서 좋았어. 그래도 다음부터 주먹 쓰는 건 삼갈게. 너랑 오래오래 재밌게 지내야 하니까.

아버지는 요즘 고향에 내려가서 살 준비를 하고 계셔. 정 대표님의 일을 그만둔 지는 좀 됐는데, 바로 농사를 짓는 데는 무리가 있다고 그것과 관련한 공부를 하시는 중이야. 덕분에 집이 도서관같이 아주 조용해. 졸지에 수험생이 둘이나 된 기분이랄까. 하하.

아, 춥다.

이렇게 날씨가 안 좋은 날에는 더 외로운 것 같기도 하고.

떼라도 써야 네가 올 것 같은 마음에, 부치지도 못하는 편지를 매일매일 일기처럼 쓰고 있어.

잔인한 설은하. 이렇게까지 꽁꽁 숨어 버릴 줄은 몰랐는데.

그래도 괜찮아. 너니까. 난 정말 언제까지고 기다릴 수 있어.

오랜 시간 다른 이를 마음에 품었지만, 결국엔 너를 만나기 위해 살아온 것 같기도 해. 그러니까 빨리 돌아와. 너무 보고 싶다.

사랑해, 설은하.

내 마음을 온 우주에 담아, 너를 사랑하고 있어.

네 존재 하나만으로도 내 세상이 밝아지는 것을.

오늘도 너를 그리며 이렇게도 행복해지는 것을 감히 고백해 본다.

―겨울의 끝자락, 네가 아주 많이 사랑하는 차태건이.

에필로그

“형!”

“왔어?”

“저도 왔어요.”

180센티미터를 넘는 민재 뒤에서 그와 동갑인 소현이 고개를 빼꼼히 내밀었다.

“아, 진짜! 너 귀여운 척 좀 하지 말랬지. 완전 쏠린다고!”

“죽을래? 너 보라고 하는 거 아니거든?”

오늘도 여전히 제 앞에서 투닥거리는 두 사람을 보며 태건은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이제 갓 성인이 된 아이들이라 그런지 참 귀엽게도 놀았다.

수업이 끝난 후,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 나오는 길이었다. 기말고사를 앞두고 일찌감치 공부를 시작한 태건은 밥 먹는 시간 빼고는 대부분 도서관에서 지냈다. 아직 1학년 주제에 너무하는 것 아니냐며, 민재와 소현은 그런 태건을 닦달하곤 했다.

“형, 오늘 기분도 꾸리꾸리한데 치맥 어때요?”

“너 지난달 모의 토익 개판 났다고 하지 않았어?”

“아, 형.”

태건이 한참 나이가 많은데도, 사회체육과 동기 민재와 소현은 그를 아주 잘 따랐다. 만학도라면 만학도라, 아웃사이더 같은 학교 생활을 예상했던 태건은 그런 두 사람이 퍽 신기했다.

“술은 안 되고, 치킨만 먹어. 오늘 내가 쏠 테니까.”

“아싸!”

“하여튼 이 빈대. 너 일부러 그런 거지.”

“뭐, 너는 싫냐?”

또 한바탕 다툼이 벌어지기 전에 태건은 먼저 걸음을 옮겼다. 가로수 사이로 초여름의 따스한 바람이 불었다.

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