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1화.
“아버지, 뭐 하나만 물어봐도 돼요?”
“뭐?”
“왜 그동안 고향에 안 오셨어요?”
예고 없이 던져진 태건의 질문에 부친의 입이 딱 다물렸다. 태건이 말하는 건, 아들을 제 엄마에게 맡겨 두고 난 7년 동안, 저를 찾지 않았던 시간이었다.
“내가 그렇게 보기 싫었나. 엄마 죽이고 태어난 아들이라서.”
태건의 모친은 생전에 만성 신부전증을 앓고 있었다. 시골에서 올라와 어렵게 생활하던 차영조는 마음 깊이 그녀를 사랑했지만, 제 병을 잘 알고 있던 그녀는 그 마음을 거절했다. 하지만 결국 두 사람은 결혼을 하게 되었고, 태건을 가졌다.
임신 후 들어가는 모든 돈을 대기 위해 부친은 평소에 저를 좋게 보고 있던 정호승의 전용 기사가 되었다. 하지만 아이를 낳은 후 급격히 몸이 쇠약해진 모친은 결국 세상을 떴고, 아버지는 태건을 제 엄마에게 버리듯 던지고 서울로 돌아갔다.
“태건아.”
“섭섭하거나 그런 건 아니구요. 생전에 할머니한테는 좀 살갑게 굴어 주시지, 그런 생각이 들어서.”
언젠가 술에 취한 부친이 고백한 적이 있었다. 뒤늦게 찾아간 아들이 저와 함께 있기 싫다고 떼쓰는 걸 보았을 때 아차 싶었다고. 제가 지켜야 할 건 아내뿐만이 아니었는데, 그걸 너무 늦게 깨달았다고.
‘미안했다. 더 일찍 사랑을 주지 못해서.’
태건은 사과를 받아들였다. 시간이 좀 걸렸다 뿐이지, 저를 향한 아버지의 사랑이 얼마나 큰지 그는 아주 잘 알았다.
“내년 기일은 같이 챙겨요.”
질문에 대한 답을 들은 건 아니었지만, 태건은 이쯤에서 말을 마치기로 했다. 죄책감에 물든 아버지의 눈을 보기가 힘들어서. 아버지의 손에는 어김없이 귀에 붙이는 멀미약이 들려 있었다.
* * *
덜컹덜컹. 태건을 태운 시외버스가 공사 중인 비포장도로를 열심히 달렸다. 여기도 계속 변하네. 서울깍쟁이들은 모르는 시골 깡촌 출신들만 아는 변화라 하여도, 근래 급격하게 변해 가는 무래리의 풍경은 태건에게 놀랍기만 했다.
예년보다 기온이 높아, 입고 온 옷이 조금 두껍게 느껴졌다. 마을에 들어서고도 삼십 분 정도를 더 걸어야 나오는 태건의 집은, 모르는 이들은 자연인이 사는 곳이냐며 껄떡껄떡 숨이 벅차 하는 곳이었다.
“앙! 앙!”
시릴 정도로 푸른색으로 칠한 대문이 눈에 들어오기도 전. 태어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것 같은 어린 강아지의 울음소리가 귓가에 꽂혔다. 집 앞 작은 언덕을 오르는 태건의 시선에, 아궁이에서 불을 때는 연기가 하늘로 솟아오르는 것이 들어왔다.
“…….”
끼익. 기름칠을 한 덕분인지, 오래도록 집을 지킨 철 대문은 크게 소리가 나지 않았다. 조용히 마당으로 들어선 태건은 마침 부엌에서 나오는 한 인물의 모습에 우뚝 멈춰 섰다.
“왔어?”
“하아…….”
결국 소리 없이 허물어져 버린 태건을, 은하는 아주 조심히 감싸 안았다. 이제껏 힘들게 버텨 온 차태건이, 온전히 무장 해제되는 순간이었다.
“다녀왔어.”
고마워, 고마워…….
누구의 것인 줄도 모르는 목소리가 태건의 귓가를 황홀하게 감쌌다.
아아, 결국 해피엔딩이었다.
〈라이 앤 라이〉, 완결
외전 1. 시발점
“넌 걔 못 가져.”
“뭐?”
안 그래도 험상궂게 생긴 얼굴에, 시뻘건 색으로 입술을 칠한 박수무당이 처음 날 보자마자 대뜸 던진 말이었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이 돌팔이의 말이라면 자식 죽이는 일 빼고 다 할 정도로 미친 엄마는, 그야말로 눈에 불을 켜고 그에게 달려들었다. 열여섯이 될 무렵, 아버지의 불륜이 극에 달하고 엄마의 신경 안정제 개수가 눈에 띄게 늘어나 있을 때였다.
“타고난 재복에 뭘 해도 돈이 붙네. 심지어 아무것도 안 해도 돈이 붙어. 그냥 화수분이야. 죽을 때까지 안 말라. 근데…….”
고작 열여섯의 나이로, 돈을 벌기 위해 뭘 해 본 적은 없었다. 부모란 사람들은 저희들의 죄책감을 상쇄하기 위해 뭐든 손에 쥐여 주었고, 나는 당연하다는 듯 받아들였다.
머리가 굵어진 나는 더 이상 가망 없는 데에 힘을 쓸 정도로 멍청하지 않았다. 사랑이 아니면 돈으로라도 보상받는 관계. 그들과 나의 관계는 이 정도가 딱 적당했다.
“너, 여자 있지?”
여자라는 단어를 내뱉자마자 엄마의 눈이 가늘게 찢어졌다. 평소에 별 대화를 나누지 않는 모자 관계였지만, 엄마는 내가 정은수를 좋아한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하긴, 사람들 앞에서 가감 없는 망나니 행동이 그 애 앞에서만 유독 순해지니. 모르려야 모를 수가 없었다.
“걘 안 돼. 걔랑 있으면 평생 외롭게 살 팔자야.”
“뭔 쌉소리를 이렇게 진지하게 해.”
듣자 듣자 하니 도저히 두고 봐 줄 수가 없었다. 애초에 이 자리까지 따라온 것도 이 박수무당이 아버지의 사업에 도움을 주는 사람이었기 때문일 뿐, 이딴 말까지 들은 마당에 참고 앉아 있을 이유가 없었다.
“다신 여기 데리고 오지 마.”
차갑게 돌아서는 나를 엄마는 붙잡지 않았다. 대신 오래도록 자리에 눌러앉아 그의 말을 경청하고 집에 돌아왔다.
* * *
문제의 그날. 그날은 갑자기 비가 많이 내렸다.
집에 가기 전, 성당에 잠시 들를 거라던 정은수의 말이 떠올라 서둘러 나갈 채비를 했다. 더 늦으면 차태건에게 선수를 뺏길 수도 있으니까. 하지만 방을 나서려는 찰나 엄마가 내 앞을 막았다. 엄마의 눈이 완전히 돌아 있는 것이 보였다. 씨발, 또 약 했네.
실은 알고 있었다. 엄마가 수시로 챙겨 먹는 약 중에 신경 안정제가 아닌 다른 것이 섞여 있음을.
약의 정확한 이름이나, 그 약이 정확히 어떤 반응을 야기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확실히 그 약을 먹을 때의 엄마는 달랐다. 단시간에 나타나는 감정 기복이 너무나 컸고, 힘도 비정상적으로 세졌다. 나이 먹을 만큼 먹었다고 생각한 나도 버겁다고 느껴질 정도였다.
“씨발, 이거 열어! 문 열라고!”
아무도 몰래 약을 버리고 또 버려도 어느샌가 엄마는 눈이 풀려 있었다. 도대체 왜 저러는 거야. 부모라는 것들이 왜 다 저 모양이야. 밖에서는 비가 억수같이 쏟아지는데 속에서는 열불이 났다.
“씨발, 엄마라고 있는 게 맨날 약이나 처먹고. 그럴 거면 그냥 뒈지든가!”
참을 수 없어서 내뱉었다. 무슨 말인지도 모르고 되는대로 퍼붓고 나서는 방 안의 모든 물건을 때려 부쉈다. 그 와중에 깨진 컵 따위에 손이 베였지만, 아픔도 느낄 수 없었다. 그만큼 머리에 열이 차오른 탓이었다.
“하아.”
위이잉. 그때 전화가 울렸다. 정은수였다.
―윤오야!
정은수의 목소리는 아스팔트에 빗방울이 튀는 것처럼 아주 생기발랄했다. 청량함을 머금은 그 음성에 불타올랐던 내 감정도 어느 정도 가라앉았다.
“비 왔는데 집에 잘 갔어?”
―어. 건이가 데리러 와 줘서 다행히 안 젖었어.
씨발. 이럴 줄 알았다니까. 순간 휴대폰을 잡은 손에 힘이 잔뜩 들어가, 찢어진 부위에서 피가 뚝뚝 흘렀다.
―건이가 그러는데 너 수학 경시대회 상 받았다며?
“어.”
―진짜 대단하다. 완전 날라리같이 놀면서 공부는 또 잘하네?
“수학만. 딱 그것만 잘하는 거야.”
―그게 어디야. 어차피 다른 과목은 어느 정도 암기하면 되는 건데. 너 진짜 대단하다.
워낙 사고를 많이 쳐서 그랬겠지만, 어른들은 내가 상을 타도 ‘그나마 재주가 하나라도 있어서 다행이다’라는 식으로 굴었다. 하지만 정은수는 달랐다. 어딜 가도 골칫덩어리 취급만 받는 나에게 언제나 칭찬을 퍼붓고 추켜세워 주었다. 그 모습이 기꺼웠던 나는 아주 작은 일이라도 생기면 정은수에게 자랑을 하곤 했다.
―나중에 나 수학 과외 좀 해 줄 수 있어? 과외비 줄게.
“됐어. 과외비는 무슨. 커피나 사든가.”
―흠, 커피 말고 쉐이크 사 줄게.
내가 아직도 어린앤 줄 아나. 이상한 데서 보수적인 정은수는 아직 커피는 안 된다며 절충안을 제시했다. 코웃음이 났지만, 기분이 나쁜 건 아니었다.
“지금 집이야?”
―어.
“나와. 바로 공부하자.”
―아. 그게 지금은 좀.
“왜?”
―집에 아빠가 와 계셔서.
아, 그 씨발 새끼.
정은수의 모친인 오진주는 그다지 남자 복이 좋은 사람은 아니었다. 아주 어렸을 때 부부의 연을 맺게 된 오진주의 전남편은 술에 취하거나, 제 기분이 수틀릴 때면 수시로 손을 들었다. 한 가지 다행이라면, 퍼뜩하면 손을 올리는 그 개새끼가 정은수 앞에서만큼은 폭력을 쓰지 않는다는 것.
“그 인간이 너 못 나가게 해?”
―엄마가 불안해해서.
무슨 기준인지는 모르겠지만, 그들은 그 일련의 현상에 적응을 했다. 그리고 그지 같은 오진주는 제 서방이 올 때마다 딸을 끼고 돌았다.
―이따가 다시 나가신대. 6시쯤 볼까?
시계를 확인하니 세 시간 정도 남아 있었다. 그 정도면 엄마도 곯아떨어져 있겠지.
흔쾌히 고개를 끄덕이고, 세 시간 후에 방문을 걷어차고 나왔다. 그리고 그것을 보고 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