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2화.
“윤오야. 이거 봐 봐. 되게 귀엽지?”
말을 잃은 내 앞에서 정은수는 참 예쁘게도 조잘댔다. 말로 엄마를 죽였으니 다시는 입을 열고 싶지 않았는데, 정은수는 끊임없이 내 대답을 요구했다.
“흡!”
엄마가 널브러져 있던 장면을 떠올리면 갑자기 혀가 말려 들어갔다. 말을 하고 안 하고는 내 맘대로 되는데, 몸은 그렇지가 않았다. 그럴 때마다 차태건이 두꺼운 팔로 단단하게 나를 붙잡고 제 손가락을 내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잔뜩 이가 악물려 차태건의 손가락에 피까지 났지만, 쉽사리 턱의 힘이 빠지지 않았다. 그런 나를 차태건은 끝까지 붙잡아 주었고, 정은수는 옆에서 하염없이 중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나 오늘 지각했다? 요즘 군기 빠졌다고 선생님한테 완전 혼났어. 그러니까 네가 책임져. 매일 너 보러 오는 바람에 늦잠 자느라 그런 거니까.”
“이거 네가 저번에 말했던 영화 시리즈 맞지? 이번에 개봉한대. 너 퇴원하면 보러 가자.”
끊임없이 말을 붙이는 정은수의 모습에 정신이 조금씩 드는 것이 느껴졌다. 그리고 그런 정은수를 애틋하게 보고 있는 차태건이 내 시야에 들어왔다. 아, 진짜 존나 거슬렸다.
3개월이 흐른 어느 날, 나는 홀연히 집을 나와 발걸음을 옮겼다. 세 시간을 허위허위 걸어 찾아간 그곳은 박수무당의 거처였다.
예약도 없이 방문한 나를 그는 따로 방으로 불러들였다. 그런 그에게 다짜고짜 나는 내뱉었다. 3개월 만에 처음으로 타인에게 하는 말이었다.
“걔 가지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데.”
화장기가 없는 그의 얼굴은 생각보다 멀끔했다. 하지만 사람을 뚫어보는 안광만은 어쩔 수 없었다.
“그리 쉬운 일이 아닐 텐데?”
“말이나 해 봐요.”
“7년.”
“뭐?”
“7년 동안 수절하고 살아.”
“그게 뭐야, 씨발. 존나 쉽네.”
정은수를 두고 다른 여자랑 잘 생각은 없었다. 애초에 다른 사람에게 욕망 자체를 느낀 적이 없었으니까.
“대신 그 7년 동안 네 옆에 아무도 없어야 해. 그 애도, 너희 곁에 붙은 그 태산 같은 아이도.”
“뭐?”
“완벽히 혼자서 7년을 수절하고 살면, 네 팔자가 바뀔 거야.”
그러니까 그 돌팔이의 말은 정은수고 차태건이고 다 떠나보내고, 나 혼자서 7년을 병신같이 죽어 있으면 된다는 얘기였다.
하, 이게 뭐야.
혹시나 싶어 찾아왔지만 역시나 헛소리만 들었다는 생각에 허탈했다. 되지도 않는 조언을 들은 나는 가차 없이 그곳을 떠났다.
* * *
“인사해. 앞으로 새어머니가 될 분이다.”
모르는 얼굴도 아닌데 뭘 그렇게 정성스럽게 소개를 하는지. 순간 머리가 돈 나는 부엌에 가 아무거나 잡히는 대로 들고 나왔다.
그 뒤의 일이 어떻게 흘러갔는지는 솔직히 기억나지 않는다. 그저 차태건의 뜨거운 눈물과 피비린내 정도만 떠오를 뿐.
대신 내 앞에서 철철 울고 있는 정은수는 똑똑히 기억이 났다. 의아하게도, 그런 정은수의 모습을 보는 내내 박수무당의 말이 머리에서 떠나지를 않았다.
넌 걔 못 가져. 넌 걔 못 가져.
“윤오야…….”
“꺼져.”
“미안해. 내가 미안해.”
“안 꺼져?”
“윤오야, 내가 어떻게 가…….”
왜 못 가. 하루라도 빨리 가야지. 네가 떠나야 네 엄마도 떠나잖아. 안 그럼 우리 정말 가족이 돼 버리는 거잖아.
진심으로 반항하면 결혼을 막을 수 있을 줄 알았다. 하지만 세상은 그렇게 쉽게 돌아가지 않았고, 열여섯이라는 나이는 생각보다 힘이 없었다.
“윤오야. 밥 먹으러 내려오래.”
결국 가족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에 머리가 아찔했지만, 내 방 옆에 마련된 정은수의 방을 보는 기분은 나쁘지 않았다. 아니, 실은 희열마저 느껴졌다. 씨발, 못 가지면 어때. 그냥 옆에 두면 되지.
평생 옆에 두고 못 떠나게 하면 된다고 생각하면서도, 하루에도 열두 번 마음이 변덕을 부렸다. 굳이 가질 필요는 없다고 스스로를 세뇌시키면서도, 정작 얼굴을 보면 제발 떨어져 나가라고 열심히 괴롭혔다. 대놓고 발을 걸거나 침을 뱉기도 했고, 집에서는 절대 제 방에서 나오지 못하도록 했다. 내 말을 곧이곧대로 들어먹는 정은수를 보며 비열한 만족감을 느낀 적이 부지기수였다.
언젠가 정은수가 방 안에 있으라는 내 말을 듣지 않고 잠깐 외출을 한 적이 있었다. 성깔이 날대로 난 나는 그날 밤 정은수의 방 안에 쳐들어가 그 앞에서 또 팔목을 그었다. 죽을 만큼 깊은 상처는 아니었지만, 이미 한번 사경을 헤맨 내 모습을 기억하는 정은수는 그때부터 무조건 내 말에 응했다.
당시엔 정말 정은수의 모든 것을 망가뜨리고만 싶었다. 누군가의 옆에서 웃는 모습만 봐도 속에서 뭔가가 치받고 올라왔고, 괜찮은 척 웃는 그 얼굴을 어떻게든 흔들고 싶었다.
그렇게 하다 하다 학교 창고에까지 가뒀다. 그 다음 날, 나는 차태건에게 떡이 되도록 맞았다.
“존나 한심하네, 정윤오.”
돌팔이 말 안 믿는대 놓고.
결국은 엄마처럼 열렬히 미쳐 버린 내 모습이 웃겼다.
“됐다, 그만하자.”
그래, 정은수. 이제 진짜 욕심 안 낼게. 그냥 보기만 할 테니까, 이렇게 쭉 살자.
그때는, 진짜 그게 최선인 줄만 알았다.
* * *
“나도 결혼할까.”
모든 것은 정은수의 이 한마디에서 시작되었다.
“뭐?”
“너 약혼하고 나면 나도 좋은 사람 만나 볼까 싶어서. 여기저기서 선 자리도 들어오고.”
하, 결혼?
기가 막힌 내 표정을 읽지 못했는지, 정은수는 눈을 내리깐 채 제 할 말만 계속했다.
“이번 주말에 엄마가 만나 보라는 사람 있어서 나가 보려고. 엄마 친구 아들인데, 미국에서 잠깐 들어왔대.”
오진주, 씨발. 어째 요즘 좀 조용하다 싶더니.
그 여자는 항상 이런 식이었다. 뭔가 원하는 게 있으면 일단 내 눈부터 속이려 들었다.
내 생활은 다름이 없었다. 들어야 할 강의는 들었고, 넘겨도 되는 것들은 넘겼다. 밤에는 여느 때와 같이 친구들과 한 잔 거하게 걸쳤고, 몸이 동할 때면 외박을 했다.
어린 시절 다른 여자는 절대 안지 못할 거라고 생각했던 나는, 근래까지 몸을 아주 문란하게 구르고 다녔다. 사실 내게도 핑곗거리는 있었다. 언제나 그렇듯, 그 핑곗거리는 정은수였다.
언젠가 잠든 정은수의 방에 몰래 들어간 적이 있었다. 어김없이 흥청망청 마시다 아주 늦게 집으로 돌아온 날이었는데, 술김에 안으로 들어갔던 나는 곤히 잠들어 있는 그 모습에 잠시 숨을 멈췄다.
어떻게 보면 특징 하나 없는 것 같은 수수한 외모였지만, 정은수는 이상하게 사람의 마음을 끄는 구석이 있었다. 그날은 특히 더 그랬다. 여릿한 피부 위로 하얀 달빛마저 창백하게 돌아 현실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주었다. 그런 그녀의 모습에, 눈치 없게도 몸이 반응을 했다.
그때 처음으로 깨달았다. 빌어먹을 정은수를, 내가 아직도 욕망하고 있다는 것을. 그저 옆에 두기만 해서는 이 괴롭고 기괴한 감정을 풀 수 없음을.
하지만 아무리 알아주는 망나니라고 해도, 명색이 남매라는 타이틀을 가진 정은수에게 흥분할 생각은 없었다. 밖에 나가면 널린 게 여자고, 돈이라는 건 무한정 주어졌으니 성난 몸 한 번 달래는 건 일도 아니었다.
그때부터 닥치는 대로 여자를 안았다. 거리에서 줍든, 돈을 주고 사든. 여자를 구하는 데에 어려울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당연하게도 그런 나를 말리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왜, 좋은 사람이래?”
“뭐, 그냥.”
정은수도 몇 번인가 연애를 한 적이 있었다. 그동안 키스를 하고, 관계도 하고 마냥 어린애처럼 굴지 않는다는 것은 알았지만……. 결국엔 내 곁을 떠나지 않을 것을 알았기에 무시하고 있던 것들이었다.
“결혼하고 싶어?”
“좋은 사람 있으면. 하는 것도 나쁘지 않지.”
그렇게 애틋하게 나를 보는 주제에, 이제 와서 날 버리고 가겠다고? 터질 듯한 분노를 속에 감추고 일단 웃어 보였다. 지금 이 감정을 그대로 얼굴에 드러내면 도망갈지도 모르니까.
“뭐 좋은 일 있어?”
“글쎄.”
정은수는 조금만 곁을 주면 헤실거렸다. 자존심도 없는 게. 근데 그것도 좋다고 웃길래 일부러 쥐고 흔들었다. 보기는 좋아서. 일단 옆에 있으면 마음이 편해서.
그래서 지금껏 참을 수 있었다. 죽을 듯이 괴로워도, 잠자리건 뭐건 그저 내 옆에만 있으면 된다고 생각했다. 근데 뭘 한다고?
문득 오래전에 잊고 있었던 박수무당의 말이 떠올랐다.
‘7년 동안 수절하고 살아.’
‘완벽히 혼자서 7년을 수절하고 살면, 네 팔자가 바뀔 거야.’
아, 안 되겠네. 정은수, 진짜 내가 가져야겠네.
스치듯 떠오른 그 말은 며칠 후, 생각지도 못한 만남으로 구체화가 되었다.
* * *
“인사해, 설 대표님 장녀 설은하 양.”
보자마자 알 수 있었다. 고등학교 때 나한테 크게 한번 데인 인물이라는 걸. 뭐라고 말하며 거절했는지 세세하게 기억은 안 나지만 아마 첩딸 운운했을 것이다. 그맘때가 정은수에 대한 괴롭힘을 시작할 때였으니까. 그 비슷한 것만 봐도 열이 오르던 시절이었다.
“이런 말 너무 이상하게 듣지 말고.”
식사 자리를 박차고 나왔지만 차가 없었다. 삼십 분은 족히 걸린다는 태건의 말에 대충 로비에서 시간이나 때워야겠다고 생각하던 참이었다. 생각보다 식사 자리가 일찍 끝난 모양인지, 밖으로 나오는 설은하의 뒤에 오진주가 따라붙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