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53화 (53/58)

53화.

아들을 낳아 주면 아파트를 주겠느니 어쩌니 하는 오진주의 말을 듣는 동안, 설은하의 얼굴에는 묘한 미소가 걸려 있었다. 기분 나빠하는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크게 동조하는 것도 아닌, 그냥 딱 그 자리에 있기만 하는 눈빛이었다.

“정윤오.”

“왔어?”

오늘은 내가 직접 차를 몰고 다니겠다는 말에 태건이 스마트 키를 건네주었다. 무심코 내 시선이 향한 곳을 보던 태건의 입에서 짧은 탄성이 새어 나왔다.

“어, 저 여자.”

“……뭐야? 아는 사람이야?”

“아는 사람까진 아니고. 몇 번 고양이 밥 주는 걸 본 적이 있어서.”

학교에 데려다주며 교내 길고양이와 안면을 튼 태건은 그때부터 고양이 사료 캔을 가지고 다니며 밥을 주는 게 취미가 되었다. 몇 번인가 민원이 들어가 험한 소리를 들었다는 것을 알고 있지만, 아직도 그 짓을 하고 다니는 모양이었다.

“뭐야, 차태건. 그새 취향 변했냐?”

“뭐래. 용건 없으면 나 간다.”

돌아서는 차태건의 모습에 왠지 입 안이 말랐다. 머릿속에서 뭔가 알람이 울렸다.

* * *

“정은수.”

“응?”

“차태건 연애하는 거 본 적 있어?”

“음. 아니?”

“그럼 그 새끼가 여자 얘기하는 건.”

“글쎄. 나한테는 딱히 한 적 없는데.”

정은수한테만이 아니라, 차태건은 그 누구에게도 여자 얘길 한 적이 없었다. 연애를 했는지, 잠자리는 가졌는지, 모든 걸 공유하는 차태건이 여자와 관련해 입을 뗀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그러니까, 설은하 말고는.

10년 동안 외사랑 길만 걸어온 차태건이 설은하를 기억한다? 이건 분명 눈에 띄는 일이었다. 물론 혹자는 나의 이런 작은 의구심이 타당하지 않다고 할 수 있겠으나, 그건 차태건을 모르는 사람들이나 하는 말이고.

“하아.”

“무슨 고민 있어?”

말간 눈으로 나를 보는 정은수의 얼굴에 가볍게 고개를 저었다.

“아니.”

사실 고민은 진즉에 끝났다. 단지 방법을 찾고 있었을 뿐.

나는 휴대폰을 들어 아버지에게 전화를 걸었다. 그리고 이런저런 말을 늘어놓으며 얻어낸 열한 자리 숫자를 야무지게 저장했다. 정윤오의 계획을 완성하기 위해 필요한 재료. 그것은 다름 아닌 설은하였다.

* * *

“내 친구 중에 26년 동안 동정인 애가 있거든. 걔 동정 좀 떼 주라.”

“뭐?”

설은하가 황당하다는 표정을 지었다. 그래도 오진주를 향했던 것보다는 솔직한 얼굴이다.

“너 정도면 그 새끼 넘길 수도 있을 거 같은데. 어때, 할래?”

“하. 하다 하다 별…….”

“네가 해내면 약혼해 줄게.”

순간 움찔하는 설은하의 몸짓에 문득 제 아버지의 말이 떠올랐다.

‘그나마 네놈 새끼 사위로 받아 주겠다는 곳 있을 때 일찌감치 가. 이 자리 저 자리 다 놓치고 후회하지 말고.’

‘이런 개차반한테 시집보내려는 그 집은 도대체 뭔 속셈일까.’

‘뻔하지. 이런 거 저런 거 주고받는 거.’

모르긴 몰라도 그때 분위기로 봐서는 설은하는 집안에 꽉 매여 사는 듯했다. 아버지가 말하는 이런 거 저런 거에는 아파트도 들어 있겠지?

“솔직히 난 약혼하나 마나 상관없거든? 근데 넌 꼭 해야 하잖아. 저번에 보니까 꼰대들 눈치 엄청 보드만. 아니야?”

“…….”

“그냥 하는 말 아냐. 내가 쓰레기라도 약속 하나는 잘 지켜. 그리고 이거 쉬운 것도 아니다? 그 새끼 존나 어려워. 10년 넘게 한 여자만 보고 살아서, 절대 안 넘어올걸.”

이브를 꼬셔서 사과를 물게 하려는 뱀이라도 된 듯 말이 술술 흘러나왔다. 잠시 당황했던 설은하의 표정은 이제 완벽히 무표정하게 변해 있었다.

“그 친구 싫어하니?”

“아니, 사랑하는데?”

“친구 아닌 거 같은데.”

“맞아. 존나 베프야.”

“근데 이런다고?”

“어. 혼자 청승 떨고 있는 거 지랄 맞아서.”

어떻게든 설명해 달라면 해 줄 수도 있었지만 역시 좀 귀찮았다. 혼자가 되기 위해, 세 사람의 관계를 완벽하게 망치려고 너를 끌어들였다는 말을 어떻게 잘 설명할 수 있단 말인가.

그랬다. 나는 차태건과 정은수를 떠나보낼 생각이었다. 7년이고 10년이고 몸 잘 간수할 다짐은 섰으니, 이제 완전히 혼자가 되는 방법을 강구해야 했다.

정에 약한 차태건과 나를 좋아하는 정은수는 웬만한 방법으로는 내 곁을 떠나지 못할 것이다. 이 지랄 맞은 관계의 끈을 쥐고 있던 게 나니까, 놔주는 것도 내가 해야지.

하지만 문제가 하나 있었다. 나 없는 새에 정은수와 차태건이 붙어먹지 않게 하기 위해서는 보험이 필요했다.

“정윤오.”

“아파트 준다고 했다며.”

“…….”

“그거 내가 줄게. 걔랑 한 번만 자면.”

“와…….”

이게 흔들리네. 소리 없이 무너지는 설은하의 모습에 마음 한구석 확신이 들어찼다. 얘라면 가능해. 태산인지 목석인지 모를, 차태건의 10년 짝사랑을 무너뜨릴 수 있는 복병.

왠지 모를 무한한 신뢰를 가지고 설은하에게 내기를 제안했다. 차태건을 설득하는 것은 껌이었다. 옛날이나 지금이나 정은수 이름 한 방이면 됐으니까.

“윤오야!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기껏 밥 먹으러 레스토랑까지 와 놓고는, 창밖을 보며 멍 때리고 있는 나를 정은수가 타박 어린 손길로 툭 쳤다.

“만지지 마.”

씨발, 흥분할 거 같으니까.

상처받은 얼굴로 입을 꾹 다무는 정은수의 모습에 미간이 찌푸려졌다.

내가 너 하나를 가지기 위해서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다고 말하면, 너는 어떤 표정을 지을까. 모르긴 몰라도 아마 질색하고 보겠지.

박수무당 새끼.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정은수 내 거 못 만들면 그땐 죽을 줄 알아라. 혹시나 네가 먼저 뒈지면, 그땐 시체까지 다 파헤쳐서 다시 죽여줄게.

* * *

설은하는 생각보다 연기를 잘했다.

나와의 거래가 있다는 티를 내지도 않았고, 적당히 칠 때 치고 빠질 때 빠질 줄 알았다. 하긴, 여러 남자 찜 쪄 먹었다는 게 그냥 소문만은 아니겠지. 하지만. 그렇게 제 역할을 하는 것까지는 좋은데, 너무 나대는 감이 없지 않았다.

별장에 갔을 때, 쑥스러운 표정으로 제 어릴 적 꿈을 읊는 정은수의 모습에 열이 올랐다. 떠돌아다니기는 씨발. 내 옆에 딱 붙어 있어. 어딜 간다는 거야.

그렇게 혼자가 되려고 발버둥을 치면서도, 막상 그 입에서 떠난다는 말이 나오니 짜증이 울컥 솟았다.

“정신 차려. 그나마 네 곁에 있어 주는 사람들 다 떠나기 전에.”

설은하의 되지도 않는 참견에 자리를 박차고 일어났다. 새벽에 역시나 저를 따라오는 정은수를 보며 치졸한 마음이 들었다. 하지만 서울로 올라간 직후, 빌어먹을 답답증이 또 돋았다.

가끔 제대로 숨이 쉬어지지 않을 때가 있었다. 온갖 검사를 해 봐도 뚜렷한 병명은 없고, 그저 심리적인 문제가 있는 것 같다며 정신과 치료를 권유했다.

평생을 미친놈으로 살 수는 없으니까, 이런 증상이 생길 때면 한 3, 4일을 아예 병원에 입원하면서 상담도 받고 약도 먹었다. 이번엔 증세가 좀 오래 갔는데 집에 오랜만에 돌아와 보니 마당에서 또 정은수와 차태건이 붙어먹고 있었다.

차태건에게 다시 한번 설은하를 상기시키고, 그때부터는 계속 침대에 파묻혀 생활했다. 병원에서 받아 온 약이 유독 안 받는지, 며칠 동안 잠을 자는지 깨어 있는 모르는 멍한 상태가 이어졌다.

“윤오야.”

꿈인 게 분명했다. 그렇지 않았다면, 정은수가 내 허락 없이 방 안에 들어올 리 없을 테니까.

걱정스럽게 내려다보는 정은수의 팔을 잡아끌었다. 꿈이니까 이 정도는 해도 되겠지. 본능적으로 정은수의 허리를 감싸고 그 따뜻한 입술을 물었다.

품에 들어온 몸이 심하게 버둥거리자, 갑자기 짜증이 솟구쳤다. 그래서 이번에는 그 몸을 강하게 부여잡고 무자비하게 입술을 씹었다. 제발 꿈속에서까지 이러지 마. 그럼 진짜 내가 돌아 버리잖아. 그런데 꿈이 아니었다.

짜악! 뺨에 내려오는 마찰감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찢어진 입술을 손으로 막은 정은수가 겁에 질린 표정으로 서 있었다.

“너, 너…….”

“씨발.”

말을 더듬는 정은수를 보는 순간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그렇게 한동안 머리통을 부여잡고 있자니, 겁먹은 표정은 어디로 가고 정은수가 금세 내 앞으로 다가왔다.

“윤오야! 괜찮아?”

“정은수.”

“…….”

“제발 내 눈앞에서 알짱대지 좀 마.”

“윤오야…….”

“너 때문에 진짜 미쳐 버리겠어.”

쥐어짜듯 나오는 목소리에 정은수는 더 다가오지 못하고 뒤로 물러섰다. 씨발, 가지 마. 씨발, 씨발, 씨발! 오락가락하는 정신에 욕만 짓씹는 동안 정은수는 완전히 방을 벗어났다.

“아아.”

눈앞이 핑 돌았다. 병원을 바꾸든지 해야지. 세상에 돌팔이가 너무나 많았다.

* * *

“넌 진짜, 하아…… 진짜 도대체 뭐가 문제냐.”

차태건의 화난 모습은 딱 두 번째로 보는 것이었다. 사흘 동안 행방불명되었던 정은수를 데리고 들어온 그는, 나를 밖으로 끌고 가 약을 했느니 이상한 소리를 해댔다. 하겠냐? 내 엄마가 그러다 뒤졌는데.

“약혼만 깨면 되는 거지.”

“……뭐?”

“네 약혼식 깨지는 날, 나 정은수랑 바로 비행기 탈 거야. 나머지는 네가 다 알아서 해.”

갑자기 결의를 다지는 차태건의 모습에 겁이 확 돋아났다. 저러다 진짜 둘이 같이 떠나면 어떡하지. 그래서 아버지에게 슬쩍 말을 흘렸다. 둘이 붙여 보는 건 어떠냐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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