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이 앤 라이-54화 (54/58)

54화.

아버지는 생각 외로 흔쾌히 고개를 끄덕였지만, 내가 믿는 구석은 그게 아니었다. 아니나 다를까. 아침부터 차태건의 집에 가서 행패를 부리는 오진주의 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그 일이 계기가 됐는지, 차태건은 설은하와 쓰라고 맡긴 카드를 펑펑 써 대기 시작했다. 펑펑이라고 해 봐야 새 발의 피도 안 되는 수준이었지만, 카드 승인 문자가 쌓여 갈수록 가슴에는 만족감이 쌓여갔다. 어서 둘이 붙어버려라, 휴대폰 화면을 쓸며 유치한 주문까지 외웠다.

둘이 잤다는 것은 진즉에 눈치채고 있었다. 내비게이션과 블랙박스만 확인해 보면 됐으니까. 애초에 잠자리로 내기를 한 것은 설은하뿐이었으니 차태건으로서는 감출 필요도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혹시나 하는 마음에 둘이 어떻게 돼 가고 있는지 설은하를 불러 슬쩍 떠보았다. 차태건의 내기 조건이 정은수의 유학이라는 사실을 알게 된 설은하는, 상처받은 듯 내기를 무르자는 말까지 내뱉었다. 흔들리는 설은하의 눈빛에 희열감이 들어찼다. 모든 게 제대로 되어 가고 있었다.

둘이 잘 어울려. 그러니까 잘 만나 봐. 그사이에 나는 정은수를 멀리 멀리 보낼게.

하지만 생각지 못한 복병이 있었다. 설준호. 설은하의 양아버지인지 친아버지인지 모를 그 인간은 기어이 약혼식에 제 딸을 들어앉힐 기세였다.

“윤오 군. 오랜만이네.”

뱀처럼 웃는 이 교활한 얼굴을 잘 알았다. 매일 아침, 거울을 통해 확인하는 얼굴이었다.

“이 사진 좀 보게. 은하가 참 곱지 않은가.”

아버지와 셋이 잡은 식사 자리에서 설준호는 드레스를 입은 설은하의 사진을 계속 보여 주었다. 하아, 머리 아프네. 차태건은 도대체 뭘 하고 있는 거야.

“너 뭐 하냐?”

―…….

“듣고 있어?”

식사 자리를 끝내고 바로 차태건에게 전화를 걸었다. 하지만 차태건은 별말이 없었다.

“야, 차태건.”

―……약혼 축하한다.

씨발, 이게 지금 뭐 하자는 거야.

―그날 참석은 못 할 거 같다. 요즘 내가 바빠져서.

“너 어디야. 일단 만나서 얘기해.”

―정은수 포기해.

“…….”

설마…… 알았나? 내가 이 미친 짓을 하는 이유를? 그럴 리가 없을 텐데.

끝까지 부연 설명을 하지 않는 차태건을 뒤로하고 전화를 끊었다.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고 느낀 건 이때가 처음이었다.

* * *

“약혼 축하해.”

은은한 드레스를 입은 정은수의 입에서 낯선 말이 흘러나왔다. 무감한 표정으로 그 모습을 바라보다 눈을 감았다. 그래. 약혼식은 괜찮아. 이까지는 수습할 수 있을 거야……. 그렇게 생각하고 있던 때였다.

“은하가 사라졌대.”

불쑥 들려오는 오진주의 목소리에 금방이라도 땅으로 고꾸라질 것 같던 마음이 순식간에 바닥을 치고 올라갔다.

“하.”

나도 모르게 한숨을 뱉어 낸 후, 벽에 걸려 있는지도 몰랐던 거울에 내 모습을 바라보았다. 웃는 것도, 우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의 정윤오가 들어 있었다.

길길이 날뛰는 가족들을 모두 보내고, 익숙한 호텔 방 안에 들어앉았다. 이제 곧 누구에게라도 연락이 오겠지, 확신이 들었다. 먼저 연락을 해 온 건 설은하였다.

설은하는 제가 내기에서 졌으니, 차태건이 원하는 걸 해 주라는 말을 꺼냈다. 그래, 그러지 뭐. 나는 선뜻 휴대폰을 들어 차태건에게 문자를 보냈다.

하지만 이미 나는 알고 있었다. 차태건은 정은수와 아무 데도 가지 않을 것이다. 차태건은 이미 다른 사랑에 빠졌으니까.

지금 내 눈앞에 초췌한 모습으로 서 있는 설은하와, 어느 순간부터 더 이상 내 앞에 나타나지 않는 차태건. 나는 두 사람이 완전히 마음을 주고받았음을, 강하게 느낄 수가 있었다. 마치 정은수와 내 사이에 존재하는 인력처럼 아주 거세게 작용하는 것이었다.

“비 온다, 정윤오. 조심히 가.”

허위허위 걸어가는 설은하를 잡지 않았다. 그저 모든 게 뜻대로 되었다는 것만 되새길 뿐, 그 와중에 누가 상처를 받는지 따위는 중요하지 않았다.

* * *

내 계획은 생각보다 더 크게 성공했다. 혼비백산 달려온 태건은 다시는 날 보지 않을 것처럼 떠났고, 정은수의 유학 이야기를 들은 오진주는 눈에 띄게 반색하며 지금이라도 당장 보낼 듯 부산스럽게 굴었다.

그래, 박수무당. 이제 이렇게 조용히 7년만 버티면 된다는 거지.

이런저런 관계가 변하고 간신히 평화를 얻은 것처럼 보였지만, 생각지 못한 일이 일어났다. 나를 보는 정은수의 눈빛이 싸늘하게 식은 것이었다.

“정윤오, 나 지금 네 얼굴 보고 싶지 않아.”

덜컥 겁이 났다. 안 돼. 네가 지금 이러면 안 된다고.

자신 있었다. 착한 애들이니까. 더럽게 헤어져도 내가 손만 내밀면 다시 돌아와 줄 거라고 굳건하게 믿고 있었다. 그런데 언젠가부터 모든 게 삐거덕거리기 시작했다. 차태건은 상처받았고, 정은수는 나를 외면했다.

한 달이 지나 설은하가 다시 나타났다. 이번에는 결혼을 하자며 같잖게 구는 그 모습에 열이 올랐다. 그런 나에게 설은하는 피식 웃음을 흘리며 입을 열었다.

“내가 아무리 생각해도 네 마음을 모르겠더라고. 도대체 왜 양쪽에 그런 내기를 건 건지. 재밌었다는 말로 지나치기엔 네 표정이 썩 유쾌해 보이는 것도 아니고. 본의 아니게 쉬는 시간이 좀 생겨서, 계속 곱씹다 보니까 그런 생각이 들었어. 어쩌면 너도 이유를 잘 모르는 건 아닐까.”

아닌데. 난 내가 이러는 이유를 아주 명확히 알고 있는데.

설은하는 완전히 헛다리를 짚고 있었지만, 한 가지만큼은 제대로 인지했다.

“하고 싶은 말이 뭐야.”

“이왕 이렇게 된 김에 확실히 하자고.”

“뭐?”

“다 망가지자. 죄 없는 정은수랑 차태건은 빼고.”

씁쓸하게 웃는 설은하에게서 돌아섰다. 그런 내 뒤에 대고 설은하는 즐거운 듯이 한 마디를 더 붙였다. 결혼식 안 나타날 생각이면 미리 얘기하라고.

그래, 인정해. 내가 완전히 망가진 인간이라는 것을. 정상적인 사람이라면 이렇게까지는 하지 않았겠지. 아니, 정상인이라면 의붓남매에게 욕정 자체를 품지 않겠지.

하지만 나는 다른 사람이 아니었다. 나는 나였다. 정은수를 가져야만 숨을 쉴 수 있는, 나를 이루고 있는 뼈와 살, 피 모든 것이 정은수만을 향해 반응하는. 미친 개새끼 정윤오였다.

* * *

“나 갈게.”

“…….”

“태건이한테 사과해. 더 늦기 전에.”

일은 점점 이상하게 돌아갔다. 차태건이 구치소에 갇혔다.

아무 작별 인사 없이 정은수를 보내고, 아버지를 설득해서 설준호를 찾아갔다. 그리고 말했다. 원하는 대로 다 들어줄 테니, 차태건을 봐 달라고. 이것저것 이해득실을 따지던 설준호는 다행히 고소를 취하하기로 했다.

마지막으로 얼굴을 보러 간 자리에서 우리는 말없이 서로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렇게 길지 않은 면회 시간이 침묵으로 서서히 흐르고 있었다.

결국 그 고요를 먼저 깬 건 차태건이었다. 내가 답지 않게 머뭇거리며 입을 열 찰나였다.

“사과하지 마.”

“…….”

“무릎 꿇지도 말고.”

씨발, 그딴 거 할 생각 없었거든? 나오면 쓸데없는 짓 하지 말고 생긴 대로 살라는 말이나 하려던 건데, 무감하게 나오는 낮은 목소리에 가슴이 살짝 저렸다.

“네 제안에 응한 건 나야. 네가 뭘 잡고 협박해도 나만 제정신 차리면 되는 거였어. 그러니까 네가 사과할 일은 없어.”

짐짓 이해라도 해 주는 듯한 말투였지만 표정은 건조하기 그지없었다.

“옛날에, 우리 강아지 키웠던 거 기억나? 포미. 네가 밥도 주고 놀아 줬는데 유독 나를 따르던 그 개.”

“…….”

“생각해 보니까 너 참 억울했겠다 싶더라고. 근데 따지고 보면 나도 억울해. 좋아하는 데는 이유가 없는 거잖아.”

헛소리처럼 옛날 일을 끌고 나오는 차태건에 의아함부터 들었다. 그러거나 말거나, 차태건은 마치 고백이라도 하듯 조용히 제 말을 이어나갔다.

“정은수가 내가 아닌 널 좋아하게 된 것도 그런 거였겠지. 그걸 빨리 깨달았어야 했는데. 내가 너무 멍청했어. 무슨 수를 써도 그 마음의 방향이 바뀔 리는 없었는데.”

차태건의 목울대가 천천히 내려갔다.

“다 자기 몫이 있는 건데, 내가 감히 정은수를 위한답시고 그런 짓을 해서 이렇게 된 거야. 그러니까 너 사과할 필요 없어.”

“…….”

“나 설은하 사랑해. 네가 무슨 생각으로 그랬는지 모르겠지만, 덕분에 은하 만날 수 있어서 그거 하나만은 고마워. 근데 딱 거기까지야.”

“…….”

“평생 보지 말자. 건강하게 지내라.”

구차한 변명도, 어설픈 사과도 없었다. 그렇게 태건이 들어가고, 제대로 말 한마디 꺼내 보지 못한 나는 그대로 빈손을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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