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5화.
‘난 더 이상……, 널 이해할 수가 없어. 결국 너 혼자 남을 거야. 이렇게 하다가는 정말…….’
눈가가 온통 붉어져 울먹이던 정은수의 얼굴이 떠올랐다.
“씨발.”
진짜 성공했네.
혼자 남기 위해, 아니, 결국은 혼자 남지 않기 위해 벌인 일은 이렇게 끝이 났다. 나는 완벽히 혼자가 되었다.
“하아.”
외롭다.
친구도, 사랑하는 사람도 없는 이 땅이 마치 낯선 행성처럼 느껴진다. 중력에 중력을 더해, 내 몸이 지구 내핵으로 빨려 들어가는 느낌이다.
하지만 난 버틸 것이다. 그 돌팔이 말이라도 믿어야 할 정도로, 그래서 이런 미친 짓을 할 정도로 정은수 하나만을 원하고 있으니까.
툭. 투명한 눈물방울 하나가 빈 손바닥에 떨어졌다. 그와 함께 내내 입 속에서 맴돌던 말도 밖으로 튀어나왔다.
“미안. 미안해. 내가 미안해.”
차태건. 인생에 단 하나뿐이었던 내 친구.
다시는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게. 너를 잃은 슬픔은 오늘 이 자리에 다 두고 간다.
행복하게 잘 살아.
자격 없는 나지만, 감히 너의 평안을 빌어 본다.
외전 2. 푸른, 하늘, 은하수
“차푸른.”
“네.”
“하늘이도 같이 들어올게요.”
“네. 아버지.”
“하늘아, 이제 할아버지한테 오세요.”
매트 위에서 알록달록한 블록을 가지고 놀던 하늘이 저를 부르는 소리에 잽싸게 일어났다. 어이쿠. 바로 어제 12킬로그램을 찍은 아이가 달려오는 무게에, 부친의 입에서는 신음 소리가 절로 흘러나왔다.
“아직 충치는 안 보이고, 뒤에 어금니가 하나 더 나면 그때부터 이가 썩기 쉬우니까 관리 잘해 주세요.”
“알겠습니다.”
“다음 정기 검진은 6개월 후에 오시면 됩니다.”
“감사합니다.”
차례대로 검진을 마친 아이들은 간호사 선생님에게 받은 작은 자동차 장난감에 정신이 쏙 빠졌다. 후우, 긴장했는데. 아이들의 생애 첫 치과 검진을 무사히 마친 태건이 얕은 한숨을 내쉬었다.
“어, 차 사장님. 여기서 뵙네요?”
“안녕하세요.”
밖에 나와 유모차에 아이들을 태우는 뒤로, 누군가 아버지를 아는 체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고개를 들어 보니, 태건네 건물 앞 부동산 사장이었다.
“이번에 진짜 괜찮은 매물이 나와서 연락 한번 드리려고 했는데.”
“아, 네.”
10년 전, 태건의 부친은 정호승의 권유로 경기도의 땅을 사 놓았다. 고속도로와 지하철 등의 개발 호재로 땅값이 많이 오르자, 그는 그것을 팔고 4층짜리 작은 건물 하나를 매입해 태건 내외를 불러들였다. 강남에 있는 건물들처럼 아주 으리으리한 건 아니었지만, 나름 상권이 잘 조성되어 있어 월세와 공실 걱정이 없는 알짜배기 건물이었다.
처음 부친이 그 얘기를 들려주었을 때, 태건은 이제 저도 망나니처럼 살아도 되는 거냐며 농을 쳤다. 요즘 세상에서 주님보다 더 높게 쳐 준다는 건물주님이 된 아버지의 모습이 아무리 봐도 신기한 탓이었다.
“차 사장님 그럼 이건 어떠세요?”
아버지를 설득하는 부동산 사장의 목소리를 뒤로하고, 태건은 유모차에 얌전히 앉은 아이들의 사진을 찍어 메시지를 보냈다.
[치과 잘 다녀왔어. 지금 장난감에 정신 팔려 있음.]
한 10초나 흘렀을까. 손안에서 바로 울리는 진동에 태건의 입가에는 느른한 미소가 걸렸다.
“쉬는 시간이야?”
―어. 자기 고생했지. 미안 미안. 담엔 꼭 내가 갈게.
“자기가 더 고생이지. 힘들지 않아?”
―우리 가족 보고 싶은 거 빼면 하나도 안 힘든데?
은하는 지금 싱가포르에서 열리는 국제 통번역 학술 대회에 참가하기 위해 닷새째 집을 비운 상태였다. 일정은 이틀에 걸쳐 진행되지만, 오고 가는 품이 많이 들어 태건의 부친이 아예 일주일간 은하에게 휴가를 주었다.
은하는 아버지의 제안에 손을 저었지만, 달러까지 환전해 직접 손에 쥐여 주는 아버지의 성화에 결국 일정보다 사흘 먼저 출국을 했다.
“빨리 와. 보고 싶어.”
―응. 나도. 어제 시내 돌면서 아버님이람 푸른이, 하늘이 선물 샀어. 좀 예쁜 쓰레기 같은 느낌이긴 한데 엄청 귀엽다?
“잘했네. 근데 내 선물은?”
―자기 선물은 당연히 제일 특별한 걸로 준비했지. 기대해.
전화기 너머로 은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금방 갈게요, 응수하는 은하의 목소리가 급격히 침울해졌다.
―우리 남편 보고 싶어 죽겠다. 나 얼른 일 마치고 갈게요.
“응.”
―아, 여보.
“어?”
―사랑해.
가벼운 키스를 마지막으로 은하는 전화를 끊었다. 아, 아쉽다. 내가 먼저 말할걸. 하염없이 휴대폰 화면을 매만지던 태건의 귀에 까랑까랑한 부동산 사장의 목소리가 꽂혔다.
“아이구, 얘네가 차 사장님 손주들이에요? 잘들 생겼네. 얜 아주 장군감이네요!”
푸른이를 보며 엄지손가락을 치켜드는 부동산 사장의 모습에 태건은 입술을 씰룩였다.
“그러게요. 시대가 변했으니, 여자 장군도 한 번쯤 나올 때가 됐죠.”
“……네?”
딸입니다, 조용히 속삭이는 부친의 음성에 부동산 사장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아, 아하…… 전 또, 아기가 아빠를 쏙 빼 닮아서…….”
“감사합니다.”
고개를 숙여 정중히 인사를 한 태건이 장난감에 흥미를 잃고 저를 쳐다보는 푸른이와 눈이 마주쳤다.
“빠! 빠!”
곧은 눈썹, 쌍꺼풀 없는 눈매. 먹물로 물들여 놓은 듯 한 치의 빈틈도 없는 새까만 머리카락. 엄마를 닮아 포슬포슬하고 밝은 분위기를 가진 아들 하늘이와는 달리, 푸른이는 정말 누가 봐도 차태건의 딸이었다.
“푸른아, 하늘아. 선생님한테 안녕히 가세요, 인사해야지?”
차분한 부친의 목소리에 아이들이 끄덕 고갯짓을 했다. 돌이 갓 지날 무렵부터 인사하는 시늉을 내던 쌍둥이는 말은 아직 못 해도 인사는 곧잘 했다.
“어이구, 이뻐 죽겠네. 차 사장님 밥 안 먹어도 배부르시겠어요.”
“네. 안 그래도 요즘 허리가 휠 지경입니다.”
만면에 미소를 띤 부친의 말은 거짓말이 아니었다. 실제로 은하가 없는 요즘, 유독 활기찬 쌍둥이 육아에 태건이고 아버지고 모두 허리가 휘고 있었다.
* * *
“아버님, 안녕하세요.”
“안녕하세요. 푸른, 하늘! 이따가 봐.”
태건의 양손을 나눠 잡고 어린이집으로 들어선 푸른 하늘 남매는 신발을 신발장에 넣자마자 잽싸게 안으로 들어갔다. 아빠와의 작별 인사 따위는 없이 쿨하게 사라지는 아이들의 모습에, 태건에게서는 피식 웃음이 새었다.
“아이들이 많이 시크해졌죠?”
“그러네요. 잘 부탁드리겠습니다.”
인사를 하고 나온 태건이 급히 시계를 확인했다. 8시 5분. 학교가 바로 옆이니 망정이지, 아니었으면 아침까지 아버지의 손을 빌릴 뻔했다. 오늘 저녁은 맛있는 걸 사 드려야겠네, 다짐하며 태건은 서둘러 걸음을 옮겼다.
* * *
“쌤, 이제 어디 가세요? 저랑 같이 코노 가실래요?”
“나 유부남이다. 애도 둘이나 있어.”
“아, 뭐래. 누가 연애하재요? 쌤 진짜 웃겨.”
길고 긴 하루의 달콤한 퇴근길. 킥킥거리며 제 옆을 스쳐 가는 아이들을 보며 태건은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었다.
집 근처에 있는 여고에 교생 실습을 나온 지 드디어 마지막 4주 차가 되었다. 처음 태건이 등장했을 때 소리를 질렀던 여고생들은 계속되는 그의 철벽에 이제는 아예 대놓고 그를 놀렸다.
“차 쌤, 그렇게 무르게 대하면 안 된다니까요?”
수학 교생으로 실습을 나온 실습 동기 최가영이 운동장을 천천히 가로지르는 태건에게 은근히 몸을 기울이며 입을 열었다.
“요즘 고등학생들이 얼마나 영악한지 알아요? 까딱하다간 위험한 일에 휘말릴 수도 있어요.”
지금 나한테 위험한 건 애들이 아니라 그쪽 같은데.
실습 첫날부터 태건에게 관심을 보였던 최가영은 유부남이고 애도 있다는 그의 말을 학생들을 떨쳐 내기 위한 변명쯤으로 여겼다. 무슨 영문인지, 떡하니 왼손에 끼워져 있는 반지도 같은 맥락으로 이해했다.
바로 어제 공개 수업까지 다 마친 태건은 지칠 대로 지친 상태였다. 오늘이 마지막 날인만큼 회식이라도 잡혀 있어야 정상이었지만……. 다행히 담임선생님은 마침 집에 일이 있었고, 동기라고 해 봤자 한 명밖에 더 없었으므로, 태건은 서둘러 집에 가기로 했다.
“오늘 마지막인데 치맥이라도 한잔할까요?”
흠, 안 되겠네. 굳이 은하나 아이들까지 팔 이유가 없어서 가만히 있었는데, 이렇게 대놓고 유혹을 해 온다면 문제가 달라졌다. 팔을 붙여 오는 최가영에게서 멀어진 태건이 입을 떼려던 그때였다.
“와, 저 여자 뭐야? 장난 아니다.”
“몸매 봐. 대박! 모델인가? 완전 예쁘다.”
교문에 가까워질수록 커지는 학생들의 웅성거림에 태건의 시선도 앞쪽으로 향했다. 화제의 중심에 선 인물을 알아본 그의 얼굴이 순식간에 환해졌다.
“어, 여보!”
한 학생에게 뭔가를 물어보고 있던 은하가 곧바로 태건을 발견하고는 반갑게 손을 흔들었다. 화사하게 웃으며 손짓하는 은하를 따라 수십 쌍의 눈이 태건에게 꽂혔다.
“언제 왔어.”
“방금. 그동안 고생하신 우리 남편 모시러 왔지.”
긴 다리로 성큼성큼 다가온 은하가 태건의 두 뺨을 잡고 쪽 입술을 찍었다. 헉, 하는 소리가 주위에서 들려왔지만, 태건은 아랑곳하지 않고 다시 한번 은하에게 키스를 돌려주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