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8화.
“그때 핑키가 말했어요. ‘제이콥, 너를 위해 저 푸른 하늘의 아름다움을 물어다 줄게. 활강할 때의 짜릿함과 오로지 나만이 느낄 수 있는 그 자유로움을. 그러니 기억해. 넌 혼자가 아니야.’”
쌔근쌔근 들리는 두 아이의 숨소리에 책을 읽던 태건의 목소리가 점점 잦아들었다. 태건은 통통하게 오른 아이들의 뺨에 입술을 한번 찍고, 조심히 밖으로 나왔다.
“네, 아…… 알겠습니다. 들어가세요.”
전화를 끊은 은하의 입에서 옅은 한숨이 잘게 부서졌다. 서재로 들어오던 태건이 그런 그녀를 의아한 듯 바라보았다.
“무슨 일 있어?”
작업용 안경을 벗어 낸 은하가 어딘지 허탈한 표정으로 태건을 보며 미소 지었다.
“설 대표, 암 걸렸대.”
“어?”
“췌장암 말기래. 오늘 내일 하나 봐.”
“직접 전화 온 거야?”
“아니, 비서 통해서. 얼굴 한번 보고 싶다네? 뭐, 죽기 전에 회개라도 할 셈인가.”
“…….”
은하의 결혼이 무산되었지만, 어쩐 일인지 설준호는 정호승의 도움을 받아 정치계 인맥을 제대로 만들어 냈다. 그렇게 조금씩 정치로의 발걸음을 준비하고 있던 그는 3개월 전, 갑자기 회사에서 쓰러졌다.
그는 췌장암 말기 선고를 받았다. 매년 건강 검진을 받고 끔찍이 제 몸을 아끼던 그에게는 아주 비참한 결말이 아닐 수 없었다.
“나 괴롭힌 벌을 받는 거라기엔, 너무 쉽게 끝나는 거 아닌가 싶기도 하고.”
턱을 괴고 삐뚜름한 미소를 짓는 은하의 머리통을 태건이 콱 붙들어 안았다.
“생각하지 마. 괜히 마음 아프잖아.”
“응. 그러려고.”
“병원 같이 갈까?”
“아냐. 굳이 전화까지 해서 오라는 거 보면 둘이 오붓하게 할 말이라도 있는 거 같은데, 마지막 부탁 들어줘야지. 나도 가서 할 말 있고.”
“곧 죽는 사람 뺨이라도 때리고 오는 건 아니지?”
“내가 왜? 우리 남편이 벌써 다 때려 줬는데.”
피식 웃음을 흘린 은하가 태건의 목을 감싸고 그의 뺨에 입술을 내렸다.
“잘생겼다, 내 남편.”
“뭐야, 갑자기.”
“수시로 말해 줘야지. 한눈 안 팔게.”
“그럴 일 없거든요.”
장난스러운 미소와 함께 손가락으로 은하의 이마를 퉁 튕겨 내는 그때, ‘아앙!’ 하고 우는 소리가 들려왔다. 데시벨이 큰 걸 보면 아마도 푸른이 쪽인 것 같았다.
“자기 쉬고 있어. 내가 다녀올게.”
“잠깐만.”
돌아서는 은하를 돌려세워 품에 꼭 껴안았다.
“일 아직 남았잖아. 내가 갈게.”
은하를 책상 앞에 다시 앉히고 입술에 가벼운 키스를 내렸다. 사랑해, 흘리듯 내뱉은 말에 은하의 눈가가 사르르 휘어졌다.
“삼십 분 안에 끝내고 갈 테니까 먼저 잠들지 마.”
“응.”
어렵게 손을 떼고 아이들이 있는 방에 들어가 보니, 어느새 울음을 멈춘 푸른이가 잠든 하늘이의 볼을 쿡쿡 찌르며 놀고 있었다. 흠, 이럼 곤란한데.
푸른이를 안아 든 태건이 쉬쉬 백색 소음을 내며 온몸을 웨이브 시켰다. 얼른 자라, 차푸른. 그래야 엄마랑 아빠랑 네 동생 만들지. 그런 태건의 속을 아는지 모르는지, 그날 푸른이는 새벽 두 시가 되어서야 다시 잠이 들었다.
* * *
달칵.
조용히 문이 열리는 소리에 침상에 누워 있던 설준호의 눈이 느릿하게 돌아갔다. 안으로 들어온 은하의 모습을 확인한 그의 동공이 아주 살짝 커졌다.
“안녕하세요.”
“오랜만이구나.”
“얘기 들었어요. 많이 편찮으시다고.”
“그래.”
마지막으로 얼굴을 본 게 5년 전이었다. 그렇게 독하게 저를 잡아 패던 인간이 다 죽을상으로 깡말라 있는 걸 보니, 은하의 마음속에는 알 수 없는 감정이 그득 들어찼다.
“찾으셨다고 들었는데요.”
“할 얘기가 있어서.”
“하세요.”
몇 번이고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던 설준호는 정말 어렵게 입을 떼었다.
“……그동안 미안했다.”
“…….”
“내가 너한테 몹쓸 짓을 많이 했어. 그러면 안 되는 거였는데.”
“하.”
태건에게 회개 어쩌고저쩌고 운운한 건 농담이었는데. 설준호가 정말 이렇게 나올 줄 몰랐던 은하는 그저 실소만 뱉어 냈다.
“괜찮아요, 큰아버지. 다 옛날 일이고, 이제 잊었으니까 용서해 드릴게요. 마지막 가시는 길 편하게 가세요.”
“…….”
“이런 말이라도 듣고 싶었어요?”
비교적 온화하던 은하의 말투가 순식간에 바뀌었다.
“제가 웬만하면 모든 가능성을 다 열어 놓고 사는데, 정말 이런 장면은 상상해 본 적이 없어서요.”
“…….”
“도대체 무슨 생각이신 거예요?”
궁금했다. 이 사람의 사죄가 정말 진심인지. 그나마 불지옥만은 피하고 싶어 거짓으로 용서를 구하는 건 아닌지.
“저 그쪽 용서 못 해요. 아니, 안 해요. 이렇게 쉽게 끝나 버리는 것도 억울해 죽겠는데, 내가 어떻게 감히 당신을 용서해요. 그럼 하늘에서 보고 있는 내 엄마, 아빠가 서운하지.”
“은하야.”
“이거 잠깐만 봐 줄래요?”
가방에서 휴대폰을 꺼낸 은하가 뭔가를 조작하더니 동영상 하나를 설준호의 눈앞에 들이대 주었다.
‘네가 제정신이 아니지. 제정신이면 이럴 수가 없지. 어디 감히 나한테! 이 더러운 년이!’
그것은 설준호가 무자비하게 은하를 폭행하던 영상이었다. 혹시나 하는 마음에 그 자리에 카메라를 숨겨 놓았던 은하는, 태건을 구하기 위해 애써 모아 왔던 자료를 건네면서도 이것 하나만큼은 꼭꼭 챙겨 놓았다.
혹시라도 설준호가 말을 바꿀 경우, 마지막 보루로 사용할까 싶어서. 하지만 다행히 일은 이 영상의 폭로가 없이도 잘 해결되었다.
“어떠세요? 직접 자기 모습 보니까?”
영상을 보던 설준호의 눈빛이 사정없이 흔들렸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을까. 그런 그를 물끄러미 보던 은하는 건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쪽이 반성을 하든 안 하든 난 상관 안 해요. 뭘 어떻게 한다고 해도 용서할 마음 없으니까. 오늘 여기 온 건, 생전에 자신이 어떤 얼굴을 했었나 잘 기억하고 가시라고 온 거예요. 인간 설준호. 이렇게 살았구나, 가슴속에 깊이 새기면서 가세요.”
“…….”
“빈말로라도 그동안 키워 줘서 고맙다는 말은 못 하겠네요. 덕분에 열심히 살았어요. 안녕히 가세요.”
더 이상 남은 말은 없었다. 정말 아무 미련도 없다는 듯 무감한 표정으로 돌아서는 은하를 설준호는 잡지 못했다.
“여보.”
느릿하게 병원 밖으로 걸음을 옮기던 은하는 갑자기 들려오는 태건의 목소리에 고개를 돌렸다. 하이, 환하게 웃으며 다가오는 그의 모습에 은하의 눈꼬리가 휘어졌다.
“뭐야, 혼자 온다니까.”
“그냥. 데이트하고 싶어서?”
“치.”
남들 눈에는 무심하게 보일지 모르겠지만, 태건은 알았다. 은하가 지금 몹시 힘들어하고 있다는 걸.
차태건이 있고 푸른, 하늘이 있지만 어쩔 수 없는 공백이 은하에게는 늘 존재했다. 외로움과 허망함이 산재해 있는 그 공백은 평생 은하를 따라다니는 것이었다.
아무리 열심히 털어 내 본다고 해도 몇십 년 동안 서서히 새겨진 상처가 한 번에 싹 다 나을 리는 없으리라. 가끔 아무도 몰래 눈물을 터뜨리는 은하를 알았기에, 태건은 그녀를 혼자 둘 수 없었다. 정신 사납지만, 쌍둥이까지 대동하고 밖으로 나온 이유였다.
“사실, 차에서 아버지랑 아이들이 다 기다리고 있어.”
“응?”
“오랜만에 다 같이 외식할까 싶어서.”
“감당되겠어?”
“어른이 세 명인데 죽기야 하겠어.”
“어째 쌍둥이 두 명이 어른 셋을 가뿐하게 이길 것 같지만……. 그래, 가자! 오늘은 돼지갈비가 땡긴다.”
제 팔에 팔짱을 끼고 활기차게 대답하는 은하의 모습을, 태건은 아주 오래도록 바라보았다. 왜? 묻는 듯한 은하의 표정에 고개를 젓고는 가족들이 기다리고 있을 주차장으로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엄마! 마!”
저를 부르는 아이들의 목소리에 은하가 팔짱을 풀고 빠르게 다가갔다. 한꺼번에 달려오는 아이들을 한 품에 안고 은하가 환하게 미소 지었다.
태건은 문득 생각했다. 저희에게 푸른, 하늘이 한꺼번에 와 줘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르겠다고. 항상 어딘가를 부유하면서 살던 저와 은하를 땅에 딱 뿌리내리게 해 준 아이들에게 새삼 고맙다고.
“아빠 빨리 오세요, 해.”
“아이야, 아이야. 키, 피키! 핑키!”
대뜸 태건을 핑키라고 부르는 하늘이의 목소리에 부부는 시선이 마주쳤다. 풉, 한번 터져 나온 웃음을 그칠 줄을 몰랐다.
“아…….”
한참을 웃던 태건의 눈에서 이유 없이 눈물 한 방울이 툭 떨어졌다. 아이들을 안고 있던 은하가 놀란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왜?
아무것도 아냐.
눈으로 묻는 은하에게 태건은 조용히 고개를 내저었다. 그런 다음 뒤에서 미소 띤 얼굴로 지켜보는 아버지를 일별했다.
성큼성큼, 제 가족에게 다가가는 태건의 발걸음이 가벼웠다. 한껏 벌린 그의 팔 안으로 은하와 아이들이 답삭 감겨 왔다.
푸른, 하늘, 은하수.
사랑해, 그리고 고마워.
덩치가 크고 외로움을 많이 타는 동화책 속 고릴라 제이콥. 태건은 여태껏 자신이 그와 비슷하다고 생각했지만…… 그것은 잘못된 생각이었다. 하늘이가 저를 핑키라고 부르던 순간, 태건은 깨달았다. 자신은 창공을 날고 싶어 하는 작고 작은 동박새 핑키였다는 것을.
스스로에게 꿈이 있는지조차 몰랐던 비루한 차태건은, 저를 품은 푸른 하늘 은하수에서 마음껏 날개를 펼쳤다.
“고마워.”
너희들 안에 날 살게 해 줘서.
거짓말처럼 완벽한 해피엔딩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