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1.
갈증이 났다.
마른 목구멍이 따가워 침을 삼켰다. 그래도 바늘로 속살을 쑤시는 듯한 감각은 여전했다. 냉수를 쏟아부어도 이 통증은 가시지 않을 것만 같았다.
괜히 입술을 깨문 탓에 찢어진 살갗을 건드렸다. 배어 나온 피의 비릿한 내음이 입 안에 퍼져 나갔다. 나도 모르게 꼴사나운 신음이 샜다.
“힘들어?”
무미건조한 물음이 귓가에 쏟아졌다. 대답할 힘도, 의지도 없었기에 나는 눈동자만 굴려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잘 다듬은 조각상 같은 얼굴에서는 어떠한 감정도 읽어 낼 수 없었다. 소름이 돋는다. 나를 보는 눈빛에 서릿발이 쳤다.
“여진서 씨.”
“…….”
“사람이 물으면 답을 해야지.”
상식을 벗어난 건 당신이면서. 속에서 차오르는 말을 겨우 억누르며 몸을 옹송그렸다. 가만히 내 모습을 관망하던 남자가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할 줄 아는 거라고는 질질 짜는 것밖에 없고.”
짓무른 눈가가 수치심에 달아올랐다. 나는 입술을 몇 번 벙끗거리다가 끝내 아무 말도 못 한 채 다물었다.
“오메가가 아니라 백치를 들였나.”
육체적으로도, 정신적으로도 저 굴욕적인 언사에 반박할 힘이 없었다. 몸 이곳저곳에 범벅이 된 체액이 솜털을 타고 미끄러졌다. 분명 무게가 없을 터인데 투명한 이슬이 묵직하게 느껴졌다. 어쩌면 떨어지는 건 오물이 아니라 자존감일지도 모르겠다.
“하다못해 남창처럼 굴어 봐. 하는 일은 같잖아.”
남자가 뱉어 내는 진실이 칼날처럼 날아와 살점을 가차 없이 베어 냈다. 그의 말대로 내가 할 줄 아는 건 청승맞게 울어 대는 것이 전부였다. 또 비죽비죽 차오르는 눈물을 삼키느라 콧잔등이 얼얼했다.
그 모습을 보고 무슨 생각을 한 건지, 남자는 커다란 손으로 내 얼굴을 쥐어 잡았다. 강한 악력 때문에 얼굴 뼈가 저릿거렸다.
자꾸만 희미해지는 시야를 추스르고 그와 눈을 맞췄다. 이쪽을 내려다보는 시선은 여전히 냉랭하기 짝이 없었다.
남자는 그대로 엄지손가락을 내 입가에 짓눌렀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치달아, 나는 입술을 꾹 다물었다. 하지만 힘의 차이를 앞세워 억지로 비집고 들어오는 손길을 막기는 어려웠다.
“으, 우윽.”
다부진 손가락 끝이 혓바닥을 찾아 무게를 가했다. 안에 고인 끈적한 타액이 입가를 타고 흘러나왔다. 숨을 쉬기가 버거워 호흡이 거칠어졌다. 괴로움에 눈을 질끈 감았다가 뜨자, 아슬아슬하게 맺혀 있던 눈물이 주르륵 흘러내렸다.
주인을 닮아 집요한 손가락이었다. 남자는 마치 제 지문을 새기려는 것처럼 끈질기게 혀를 더듬었다. 점점 깊이 미끄러지던 엄지가 목젖을 건드려, 헛구역질이 왈칵 치밀어 올랐다. 나는 어깨를 부들부들 떨어 대며 기침을 토해 냈다.
발끝 하나 내 마음대로 움직여지지 않았다. 몸뚱어리가 아니라 나무토막을 짊어지고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억울하고, 서럽고, 당장 그만두라고 소리치고 싶었다. 그러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그와는 정반대의 것이었다.
“……너무 좋아요.”
마주친 눈은 뱀의 눈초리를 닮았다. 남자는 그렇게 무감각한 시선으로 나를 감았다. 똬리 속의 먹잇감이 된 나는 거짓으로 점철된 애원을 쏟아 냈다.
“더 해 주세요, 본부장님.”
목소리를 내는 나 자신도, 듣고 있는 상대도 이 말이 진심이 아닌 것을 안다. 남자는 내 입에 손가락을 처넣은 채 마른 웃음을 흘렸다.
“말 잘하네.”
고통스럽게 입 안을 메우고 있던 이물감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나는 타액으로 범벅이 된 입가를 닦을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지푸라기처럼 늘어져 눈을 감았다. 언뜻 남자가 침대에서 내려가는 듯한 소리가 들렸다. 그와의 지긋지긋한 시간에서 드디어 해방될 수 있다는 뜻이었다.
“근데 아양 떨 거면 똑바로 해. 가증스러우니까.”
바스락, 하얀 이불이 마찰했다. 그와 동시에 남자의 무게가 침대를 짓눌러 왔다. 자유를 얻었다고 판단한 건 오만일지도 모르겠다.
나는 떨리는 눈으로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일말의 애정도 묻어 있지 않은, 그저 무정하기만 한 낯이 나를 맞았다.
“엎드려.”
우성 알파가 내뿜는 페로몬이 질척한 중압감으로 숨을 조여 왔다. 본능적으로 직감했다. 이러다가 정신을 잃거나, 이성을 놓고 처절하게 빌어도 이 밤은 끝나지 않을 것이라고. 철저히 사육된 몸은 이미 남자의 말을 따르고 있었다.
어쩌다 이렇게 됐을까.
족쇄의 근원을 찾기에는 이미 너무 멀리 와 버린 듯했다. 살갗을 좀먹는 열기에 파묻혀, 나는 차라리 눈을 감아 버렸다.
***
투둑, 툭-.
무언가 창문을 두드리는 소리가 났다. 나는 덜 마른 머리카락을 수건으로 감싸고 멀거니 밖을 내다보았다.
잿빛으로 물든 하늘에서 빗줄기가 주룩주룩 쏟아지고 있었다. 날씨 탓인지, 간밤의 흔적 때문인지 방 안에서 비릿한 내음이 풍겼다. 이미 체액과 페로몬은 다 씻겨 내려갔을 테지만, 나는 괜히 내 살갗에 코를 붙여 킁킁거렸다. 아직도 코언저리에 묘한 기운이 감도는 것만 같았다.
눈을 떴을 때 남자는 곁에 없었다. 아마 새벽 너머까지 제멋대로 남의 몸을 취하다가 가 버렸을 것이다. 익숙한 일이었다.
팔이며, 다리며 간밤에 혹사당한 이곳저곳이 얼얼했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다시 눕고 싶었다. 그러나 우습게도 주린 배가 요동을 쳐 댔다. 꼴에 육체노동을 했다고 허기진 걸 보면 사람은 참 단순했다.
천근만근인 몸을 일으켜 문고리를 잡았을 때였다. 힘을 주지 않았는데도 자동으로 문이 열렸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러서자, 곧 의아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으응?”
이 집에서 일하는 가정부였다. 서로 통성명을 할 정도로 친밀한 사이가 아니었기에 이름은 몰랐다. 그녀 또한 굳이 나를 궁금해하지 않았다. 내가 어떤 이유로 이 집에 머물고 있는지, 이미 다 눈치챘을 것이다. 어쩌면 처음 마주친 순간부터.
“오셨어요.”
“아까요. 안 그래도 깨울까 했는데, 너무 곤히 자고 있어서.”
그럼 그 엉망진창인 꼴을 다 봤겠구나. 새삼 부끄럽지도 않았기에 나는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축축한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목덜미를 타고 굴러떨어졌다.
“밥 먹어야죠. 배고플 텐데.”
“네.”
나는 가정부를 따라 방을 나섰다. 부를 과시하듯 길게 펼쳐진 복도를 지나면 거실이 나온다. 마찬가지로 재력을 자랑하는 커다란 창은 바깥을 적나라하게 비췄다. 비 오는 날의 우중충한 풍경이 유리를 가득 메우고 있었다.
가정부가 물기 어린 손을 앞치마에 문지르며 말했다.
“앉아 있으면 바로 차려 줄게요.”
하얀 대리석으로 만든 식탁은 족히 6명은 앉고도 남는 크기였다. 물론 단 한 번도 이 집에 그렇게 많은 사람이 방문한 것을 본 적은 없다. 나는 기계적으로 오른쪽 끝자리 의자를 빼고 앉았다.
식기가 달그락거리는 소리와 단조로운 빗소리에 파묻혀, 멀뚱멀뚱 식사를 기다리는 내가 우스웠다. 마치 혼자서는 아무것도 못 하는 사람 같았다.
얼마 지나지 않아 대여섯 가지의 반찬과 콩나물국이 상에 올랐다. 계란말이, 갈비찜, 나물무침. 혼자 먹는 식사인데 분에 넘치는 정성이 깃들었다. 쓸데없다고 생각했다. 숟가락으로 국을 한 바퀴 저으니 제멋대로 엉겨 붙은 콩나물 뭉텅이가 딸려 왔다. 그 꼴이 어딘가 지저분해 보이기까지 했다. 그렇게나 배가 고팠는데 식욕이 돌지 않았다.
멀거니 국을 바라보고 있자면, 나풀나풀 유영하던 양념이 바닥으로 가라앉았다. 매콤한 콩나물국이 맑아지고서야 나는 숟가락을 들었다.
온기를 품은 국물이 식도를 타고 넘어가는 감각이 선연했다. 특별히 맛이 좋다는 느낌은 없었다. 그냥 이렇게라도 빈속을 채우고 싶었기에, 나는 계속해서 국물만을 밀어 넣었다. 고춧가루가 섞이지 않은 투명한 부분만을 먹겠다는 기이한 집착에 휩싸인 채로.
“국만 먹지 말고 다른 것도 좀 들어 봐요.”
뒤에 선 가정부가 걱정스러운 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김이 모락모락 피어오르는 갈비찜을 내 쪽으로 밀어 주었다. 원치 않는 호의만큼 부담스러운 일도 없다. 나는 입술을 잘근거리며 조그마한 당근 조각을 집어 들었다.
“그렇게 깨작깨작 먹으니까 살이 안 붙죠. 안 그래도 깡말라서는.”
“…….”
“맛이 없어요?”
오늘따라 유독 말을 걸어오는 빈도가 잦았다. 나는 애꿎은 밥알만 건드리다가 짧게 대답했다.
“아뇨.”
말이 더 따라붙는 게 싫어, 밥을 한 큰술 떠 입에 욱여넣었다. 곧장 메스꺼움이 밀려왔다. 숟가락이 두 번 움직이는 일은 없었다. 나는 조용히 식기에서 손을 떼어 냈다.
“속이 안 좋은가 봐요.”
“입맛이 없어서요.”
내 말을 들은 가정부가 작게 탄성을 흘렸다. 그녀는 분주한 걸음으로 부엌 찬장을 뒤적거리기 시작했다. 이 정도로 말했으면 더 식탁에 엉덩이를 붙이고 있을 필요는 없으리라. 나는 창문을 끝없이 들이받는 빗방울을 바라보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혼자 보내는 시간에 가장 괴로운 것은 고요함이었다. 아무것도 듣지 않고, 아무것도 보고 있지 않으면 우울함이 가슴을 좀먹는다. 스스로 만든 잡념에 물어뜯겨 걸레짝이 되어 가는 순간이 가장 두려웠다.
내가 찾은 곳은 거실에 놓인 커다란 가죽 소파였다. 일종의 강박이었다. 타인과 대화하는 것은 피하고 싶지만, 침묵 속에 갇혀 있는 건 더욱 싫었다. 나는 자연스럽게 손을 더듬어 TV 리모컨을 찾았다. 어떤 프로그램이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집중해서 보기는 힘드니까.
전원 버튼을 꾹 누르자, 까만 화면이 서서히 밝아졌다. TV에서는 뉴스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저소득층 근로 소득이 줄어 가고 있다는 내용의 보도였다. 나는 멀거니 복잡한 그래프가 펼쳐진 화면을 바라보았다. 고급스러운 가구에 둘러싸여 소식을 듣고 있자니 참 머나먼 일처럼 느껴졌다.
“대학생이죠?”
달그락, 유리가 부딪치는 잡음과 함께 가정부가 내 쪽으로 다가왔다. 그녀는 뒤이어 향긋한 냄새가 풍기는 차를 내밀었다. 원래 이렇게 말을 자주 주고받지 않았는데. 나는 잠자코 찻잔을 받아 사이드 테이블에 내려놓았다.
“네.”
“전공은 뭐예요?”
“음대요.”
흔치 않은 전공에 관심을 가지기라도 했는지, 가정부의 얼굴에 흥미가 감돌았다. 그녀가 한층 살가운 말투로 물었다.
“그, 오메가 맞죠? 오메가들 예체능 많이 한다더라구.”
아, 전공이 아니라 그쪽이었구나. 나는 부정도 긍정도 하지 않고 눈을 내리깔았다. 그 행동을 긍정의 의미로 받아들인 가정부는 들뜬 목소리로 대화를 이어 나갔다.
“얼굴 보고 오메가일 것 같았는데, 음대 다닌다는 거 들으니까 딱 맞네. 어쩜 그렇게 곱상하게 생겼어요.”
그녀에게 내가 대꾸를 하는가의 여부는 상관없어 보였다.
“우리 옆집 아들내미도 오메가거든요. 근데 오메가들은 티가 나더라니까요. 학생도 꼭 그렇게 생겨서 전부터 한번 물어보고 싶었어요.”
굳이 알고 싶지 않은 정보가 흘러 들어왔다. 나는 TV에 시선을 고정한 채로 무감각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귀를 통과한 문장이 그대로 반대쪽을 통해 빠져나가는 듯한 기분이었다.
가정부의 말을 듣지도, 그렇다고 뉴스 내용에 집중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멍한 의식은 차라리 창밖의 빗소리에 반응했다. 이른 아침부터 내린 비는 아직 그칠 기미가 없어 보였다.
TV 속 화면이 가볍게 명멸한 건 그때였다.
직전과는 전혀 다른 장면이 송출되기 시작했다. 뉴스에 무엇이 나오고 있는지 인식하자, 검게 가라앉았던 눈동자가 동요로 일렁였다. 나도 모르게 미간 사이가 구겨진 종이처럼 일그러졌다.
「LS 인터내셔널 주태승 본부장, 오늘 새벽 美 출국」
잠들기 전까지 질릴 정도로 마주한 얼굴이었다.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싸늘한 눈매, 멀끔히 정리한 검은 머리카락, 높게 뻗은 키. 아마 태생적으로 고압적인 분위기를 타고난 사람일 것이다. 타인에게 허리를 굽히며 빌빌거린 경험이 있기나 할까.
TV 속의 주태승은 오만한 무표정으로 카메라를 한 차례 바라보고, 곧장 공항 내부로 들어섰다. 생각해 보면 정말 미친놈이었다. 분명 나를 밤새 기절하기 직전까지 몰아세웠으면서, 본인은 그 직후 빈틈 하나 보이지 않는 모습으로 외출했다는 게.
점점 곪아 터져 가는 나와 실금조차 없는 주태승 사이의 간극이 미치도록 분했다. 목구멍을 타고 넘어가는 타액이 소금물로 변한 듯, 괴로운 갈증이 느껴졌다.
“어, 우리 사장님 나오셨네.”
주태승을 발견한 가정부가 나지막이 말했다. 거기까지만 했으면 좋았을 텐데, 그녀는 언뜻 살가운 투로 한마디를 더 했다.
“잘난 애인 둬서 좋겠어요. 돈도 많아, 인물도 좋아. TV 나오면 내가 다 자랑하고 다닌다니까.”
환멸감에 말문이 턱 막혔다. 주태승과 얽혀 보지 않은 사람의 시선은 저런가 보다. 재벌가 우성 알파 핏줄을 타고나서 젊은 나이에 탄탄대로를 달리는, 우월한 별종. 그가 곁에 둔 이는 무조건 복에 겨운 것이라고 생각하는 듯했다.
“그럼 대학 졸업하고 결혼하나요?”
가정부가 들뜬 목소리로 말을 얹을 때마다 속이 부글부글 끓어올랐다. 평소에 이렇게 말을 많이 걸어온 적이 있었나.
“하긴, 벌써 데려다가 살 정도면 엄청 잘해 주겠네.”
나는 숨을 고르며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찻잔을 쏘아보았다. 가정부의 말에는 악의가 없었고, 그녀가 나와 주태승 간의 관계에 무지한 건 당연했다. 알면서도 신경이 날카로워진 이유는 어지간히 망가진 성격 탓이리라.
한 번 일렁인 감정은 둑이 무너진 댐처럼 쉽사리 추슬러지지 않았다. 나는 고장 난 기계라도 된 듯 중얼거렸다.
“애인 아니에요.”
이쪽을 바라보는 가정부의 시선이 느껴져 뺨이 따끔거렸다. 하지만 나는 개의치 않은 채로 입술을 움직였다.
“학교 못 나가서 졸업도 못 해요. 몸 팔아서 스폰받는다고 소문났거든요.”
“어, 네?”
“근데 그거 진짜예요. 어제도 대 주다가 잤으니까.”
나는 말하는 내내 찻잔을 향해 있던 고개를 들어, 가정부를 비스듬히 올려다보았다. 그녀는 적잖이 놀란 표정을 짓고 있었다. 뭐라 말을 잇지 못하고 앞치마를 더듬는 손에서 당혹스러움이 묻어났다.
나는 본의 아니게 주태승을 뒤에서 헐뜯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자랑스러운 사장님의 애인이라는 작자가 싸구려 지라시 같은 소리를 지껄였으니 황당할 만도 하다.
가정부는 잠시 그 자리에 얼어 있다가, 한 모금도 입에 대지 않은 차를 정리했다. 뭐라고 혼잣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기도 했다. 나는 그녀를 뒤로한 채 방으로 걸음을 옮겼다. 내 입으로 치부를 밝혔는데도 부끄러움보다는 피로가 몰려왔다.
어쩌면 아무 일 없었을지도 모르는 하루였는데. 주태승의 얼굴을 보지 않아도 되는, 운 좋은 날이었을 수도 있었는데.
TV를 괜히 틀었다. 나는 피딱지가 앉은 입술을 잘근잘근 짓이겼다.
***
“으읏.”
온몸이 끈적이고 답답한 느낌에 강제적으로 정신이 들었다. 대체 언제부터 잠들었던 건지, 일어나 보니 사위가 고요했다.
나는 이마에 송골송골 맺힌 땀방울을 훔쳐 내며 눈을 깜빡였다. 이불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지만 피부가 과하게 뜨끈거렸다. 등줄기를 타고 식은땀이 흐르는 감촉이 소름 끼쳤다.
입고 잔 옷이 습기를 머금어 살갗에 지저분하게 달라붙었다. 이성보다는 본능이 앞서, 일단 몸을 답답하게 옥죄는 것들을 벗어 던졌다. 반신을 드러낸 상태가 되었는데도 속에 고인 열감은 여전했다.
“진짜, 되는 일이 하나도…….”
이 불쾌함은 낯설지 않았다. 오메가였기에 알고 있는 자극이었다. 나는 자꾸만 멍해지는 정신을 바로잡으려 애쓰며 침대 주변을 더듬었다. 원목으로 만들어진 수납장의 표면이 손바닥에 닿았다. 팔을 뻗어 첫 번째 서랍을 열자, 알약이 든 투명한 통이 늘 있던 자리에서 나를 맞았다.
허물어지려는 상체를 겨우 추슬러, 입 안에 약을 두 알 털어 넣었다. 딱딱한 알약이 목구멍의 살갗을 쿡쿡 찌르며 굴러떨어졌다. 물조차 마시지 않은 탓에 무언가 걸린 듯한 이물감이 따끔하게 남았다.
히트사이클은 알파가 내뿜는 페로몬에 영향을 받고는 한다. 어제 주태승이 흘린 페로몬에 허우적댄 여파로 주기가 앞당겨진 듯했다.
오메가로서는 무척 난감한 일이었다. 밖에서 일을 보고 있다가 갑작스레 히트사이클이 터지면 약을 가지고 다니는 게 아닌 이상, 꼼짝없이 병원행이었다. 병원까지 가는 사이에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을지는 둘째치고.
주태승은 이런 속사정 따위 절대 신경 쓰지 않는다. 늘 자기 욕구가 먼저인 사람이다. 그나마 이런 적이 처음이 아니었기에 미리 약을 구비하고 있어서 다행이었다.
한편으로 내 처지가 우스웠다. 주태승의 욕구에 끌려 발정기가 찾아오는 꼴이라니. 알파와 오메가는 어떻게 이리도 야속한 관계로 얽혀 있는 건지.
약을 먹은 의미가 무색하게, 마치 불꽃을 통째로 집어삼킨 듯 배 속이 얼얼했다. 이 열기는 해소되지 않고 점차 기갈로 번져 애를 태울 것이었다. 피부에 닿는 모든 게 터무니없는 자극으로 변할 것을 생각하니 진저리가 쳐졌다.
몸이 예민해지는 만큼 쉽게 지치는 것도 힘들었다. 그러고 보면 몇 시간이나 잔 걸까. 방에는 시계가 없었으므로 나는 머리맡에 널브러진 휴대 전화를 집어 들었다.
시간을 확인하기 위해 화면을 본 것이었으나, 상단에 도착한 알림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요즘 뭐 하고 지내?」
이렇게 살갑게 안부를 물을 사람이 있었던가. 나는 몽롱한 정신으로 메시지 창을 꾹 눌렀다. 곧 내게 도착한 세 개의 메시지가 액정에 가지런히 표시되었다.
「진서야」 오후 5:30
「오랜만이다」 오후 5:30
「요즘 뭐 하고 지내?」 오후 5:33
나는 묵직한 눈꺼풀을 두어 차례 비비고 발신자를 확인했다. 왼쪽에 표시된 이름은 ‘서정후’. 같은 대학에 다니는 동기였다. 아니, 이제 얘는 졸업했을 테니 다녔던 동기라고 해야 하나. 그간 연락을 주고받은 빈도가 드물었기에 편하지 않은 상대였다.
뺨의 열을 손등으로 식히며 ‘왜?’라고 메시지를 보냈다. 그러자 전송이 완료되기 무섭게 답장이 왔다.
「부탁하고 싶은 게 있어서」 오후 5:34
부탁? 종일 집에만 있는 처지에 뭘 들어줄 수나 있을지 모르겠다. 나는 심드렁하게 무슨 일이냐고 묻는 답장을 건넸다.
「지금 전화해도 돼?」 오후 5:34
그렇게 친하지도 않은 사이에 무슨 전화까지. 그러나 서정후는 거절의 틈을 주지 않았다. 뭐라 메시지를 치기도 전에 휴대 전화 액정이 수신 화면으로 바뀌었다.
나는 신경질적인 표정을 숨기지 못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 음, 여진서 맞지?]
“맞는데.”
[목소리 듣는 거 오랜만이다. 잘 지냈어?]
대체 무슨 소리를 하고 싶기에 이렇게 서론이 긴지 모르겠다. 원래 어떤 놈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봐도 뚜렷한 윤곽이 떠오르지 않았다. 그렇게 말이 많은 녀석은 아니었던 것 같은데.
“그냥 똑같지 뭐.”
[다행이다. 가끔 문자 보내도 답장 안 보내길래.]
뭐라 할 말이 없었다. 애초에 친구라 부를 만한 사람이 적었기에, 학교를 그만둔 이후로 자연스럽게 동기들과의 연락도 끊겼다. 나는 멀거니 손톱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그래서, 왜 전화했어?”
[아.]
서정후는 한 차례 숨을 고르는 듯하다가, 드디어 용건을 내놓았다.
[혹시 지금도 플루트 해?]
플루트. 그 단어를 듣자마자 내 시선은 무의식중에 방의 구석에 처박힌 케이스를 향했다. 2년 전까지만 해도 분신처럼 어딜 가든 손에 들려 있던 물건이었다.
주태승과 처음 만난 것도 연주자로서 참석한 공연에서였다. 문자 그대로 후원자라는 의미의 스폰서를 구할 기회이기도 했기에 상당한 기대를 품었던 기억이 났다. 물론 주태승과 시작된 관계는 그런 허울 좋은 게 아니었고, 그의 관심사는 내 연주가 아니었다.
이 병적인 인연이 시작되고부터 플루트를 부는 횟수는 줄어 갔다. 그리고 어느 순간, 나는 내 반평생을 함께한 악기를 놓아 버렸다. 취구에 입을 대는 건 가끔 주태승의 변덕으로 한 곡 연주할 때뿐이었다. 그마저도 마무리는 박수가 아니라 배를 맞추는 것으로 끝났다.
입을 다물고 있으니, 수화기 너머로 서정후의 걱정스러운 목소리가 들려왔다.
[진서야?]
“플루트 안 해.”
서정후는 잠시 말이 없었다. 즉답에 당황한 듯한 기색이었다. 그는 몇 차례 목을 가다듬고 짧게 물었다.
[왜?]
“왜냐니.”
[너 플루트 잘하고 좋아했잖아. 교수님들도 늘 칭찬하셨는데.]
굳이 내 입으로 지금 나의 생활이 어떤지 설명해 주기를 바라는 건가. 안 그래도 히트사이클 때문에 신경이 곤두섰기에 긍정적인 사고가 불가능했다. 나는 순간적으로 욱한 심정을 간신히 누르며 말했다.
“그거 물어보려고 전화했어?”
[아니, 그게 아니라.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 아쉬워서 그랬어.]
“미안한 거 알면 끊자.”
[어? 잠까, 잠깐만. 아직 끊지 말아 봐.]
아직도 용건이 남았나, 입에서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내가 일방적으로 전화를 끊을세라, 서정후는 허겁지겁 이야기를 시작했다.
[내가 지금 아마추어 오케스트라 팀에 있는데, 플루트 제2 연주자 자리가 펑크 났어.]
“그래서.”
[네가 대신해 줬으면 좋겠어. 여기 우리 대학 사람 한 명도 없어, 다 모르는 사람들이야. 너 불편할 일 없게 할게. 공연 규모도 별로 안 커서 부담 하나도 안 가져도 돼.]
서정후는 지금까지 더듬거리던 게 믿기지 않을 정도로 빠르게 문장을 토해 냈다.
[그냥 연습만 도와줘도 되니까. 아니, 한 번만 만나기만 해도 좋아. 응?]
어찌나 간절하게 부탁을 하는지 전화를 통해서도 그의 절박함이 눈에 보일 정도였다. 하지만 부탁을 들어주기도 마음이 걸렸다. 플루트를 놓은 시간이 그렇게 긴데, 오케스트라 연주를 따라갈 자신이 없었다. 어중간한 생각으로 참여해 봤자 타인에게 짐만 될 뿐이다.
결정을 마치는 데는 짧은 시간이면 충분했다. 나는 거절을 담은 대답을 전하고자 입을 열었다.
“미안한데, 안…….”
[안 된다고 할 거 알아. 그래도 한마디만 더 할게.]
아까는 내내 우물쭈물하더니 황당할 정도로 말이 많아졌다.
[나 대학교 다닐 때부터 너 플루트 연주하는 거 진짜 좋아했어. 확실히 재능 있다고 느꼈어. 자리 채워 달라고 헛소리하는 거 아니야.]
한마디만 한다고 하지 않았나?
“왜 하필 나야. 다른 동기 중에 플루트 하는 애들 많잖아.”
[네가 곡이랑 제일 잘 어울려. 너밖에 생각 안 났어.]
선뜻 반박할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조개처럼 입을 꾹 다물어 버린 나를 두고, 서정후는 마지막 문장을 통해 대화를 맺었다.
[정말 네가 필요해서 전화한 거야. 생각해 보고 연락 줘. 기다릴게.]
뭐라 대답도 하기 전에 서정후는 자기 할 말만 늘어놓고 전화를 끊어 버렸다. 나는 새까만 화면만 남은 휴대 전화를 바라보다가, 조용히 내려놓았다. 안 그래도 잔잔한 두통이 있던 머리가 더욱 복잡해졌다.
-너밖에 생각 안 났어. 네가 필요해서 전화한 거야.
주태승과 얽힌 2년, 사회에서 동떨어져 지푸라기 같은 삶을 살아오는 동안 누구에게도 듣지 못한 말이었다. 그동안 잊고 있었던 내 모습들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그러고 보니 난 플루트를 연주했었지, 그러고 보니 난 음악을 좋아했었지.
저수지에 고여 이끼와 함께 썩어 가는 혼탁한 물에 누군가 조약돌을 하나 던진 느낌이었다. 문제는 그 작은 파동이 싫지 않았다. 이런 나를 누군가 필요로 해 준다는 게. 당장 위기를 모면하기 위한 거짓말일지 몰라도. 그냥, 그렇다는 게.
마침 주태승이 집에 없었다. 미국에 갔다면 아마 며칠은 돌아오지 않으리라. 생각할 것도 없이 부탁을 거절하려던 마음이 조금씩 흔들렸다. 그리고 깨달았다. 나는 사람이 고팠구나. 주태승의 첩이 아니라 여진서로 살고 싶었나 보다.
주태승에게서 벗어나자는 대단한 계획을 가진 게 아니었다. 다만 그가 없는 며칠 정도는 괜찮지 않겠냐는 객기가 자꾸 속을 뒤집었다. 어차피 내가 뭘 하든, 밤에 몸만 대 주면 관심 없을 사람이 아닌가.
얼굴에 열이 올라 마른 입술을 혀로 간신히 축였다. 한 차례의 심호흡 후, 나는 결국 휴대 전화를 집어 들고 말았다.
***
날이 더웠다.
오랜만의 외출이라 더욱 그렇게 느껴졌을지도 모른다. 매일 일정한 온도에 맞춰진 집 안에서만 생활하다 보니, 여름의 햇볕이 유독 따가웠다. 나는 바깥에 노출된 마른 팔을 무안하게 쓸어내렸다.
“여진서?”
누군가 부르는 소리에 뒤를 돌자, 어디서 본 듯한 남자가 손을 흔드는 게 보였다. 기억이 맞다면 저 사람이 서정후였다.
“아, 응.”
“일찍 왔네. 오래 기다렸어?”
나는 말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서정후는 다소 시끄러워졌다는 점을 빼면 대학교를 다닐 때와 비슷했다. 머리카락은 짧고 키는 컸다.
오메가인지, 베타인지, 알파인지는 모르겠다. 페로몬 억제제를 몸속에 쏟아붓고 온 탓에 당장 내 페로몬도, 타인의 페로몬도 분간하기가 어려웠다. 그래도 속이 울렁거린다는 점을 빼면 컨디션은 괜찮았다. 히트사이클 기간에 외출하려면 감수해야 할 불편함이었다.
“덥지. 연습실 이 앞이야.”
연습실이라는 단어를 듣는 것도 오랜만이었다. 나는 괜히 플루트 케이스를 만지작거리며 어색함을 눌렀다. 어제는 주태승이 돌아오지 않았기에 간밤을 혼자 보냈다. 괜스레 잠이 오지 않아 몇 개월 만에 꺼내는 악기를 닦고 또 닦았다.
서정후를 따라 걸으니 곧 작은 건물이 하나 나왔다. 외관은 깔끔한 검은색에, 꽃이 핀 작은 화단까지 갖추고 있었다.
“지하에 있어. 안에 사람들 좀 모여 있을 거야.”
탕탕, 철제 계단을 밟는 소리와 서정후의 목소리가 한데 뒤섞여 퍼져 나갔다. 편하게 행동하고자 노력했으나 자꾸만 심장이 두근거렸다. 낯선 이를 만나는 것에 대한 두려움과 꼴사납게 들뜬 기분이 공존했다. 나는 뭐라 대꾸하는 대신 침을 꿀꺽 삼켰다.
진짜 이게 뭐 하는 짓이지. 갑자기 이러는 게 맞나. 나중에 후회하지 않을까.
서정후가 연습실 문을 열기 직전까지도 뇌 속의 실타래가 뒤엉켰다. 이윽고 그가 손잡이를 잡아당겼을 때는 차차 머리가 하얗게 표백되었다. 플루트 케이스를 쥔 손에 힘이 들어갔다.
푹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리자, 가장 먼저 보인 풍경은 커다란 피아노였다. 그 뒤에는 여러 명의 사람들이 제각각 자신의 악기를 조율하거나 대화를 나누는 중이었다.
“어, 정후 왔네.”
키가 작은 여학생이 반가운 얼굴로 아는 척을 해 왔다. 그녀는 곧 서정후의 곁에 어물쩍 서 있는 나를 보고 물었다.
“이분이 연수 대타야?”
“네, 대학교 다닐 때 제일 잘하던 애예요.”
“그런 분을 어떻게 데리고 왔대. 능력도 좋아.”
저런 소리를 뭐 하러 하지. 나는 쓸데없이 입을 놀린 장본인을 야속하게 흘겨보았다. 여학생은 관찰하듯 호기심 어린 눈길을 보내다가,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 아픈 건 아니에요? 원래 얼굴이 하얀 건가.”
억제제를 너무 많이 복용해서 속이 안 좋다 싶었는데 그게 낯빛에 티가 났나 보다. 나는 겸연쩍은 태도로 뺨을 쓸어내리며 말했다.
“괜찮습니다.”
“다행이네요. 아, 연수가 쓰던 악보 드릴게요.”
여학생은 잠시 자리를 벗어나는가 싶더니, 구석에서 종이 뭉텅이를 들고 돌아왔다. 다행히도 첫 번째 악보는 눈에 익은 곡이었다. 요한 스트라우스 2세의 <박쥐 서곡>. 대학에서 질리도록 연습하고 실제로 공연한 적도 있었다.
“전공자시니까 많이 어려운 건 없을 텐데, 그래도 개인 연습할 시간 필요하시죠?”
“네, 조금만.”
“보면대는 뒤에 빈 거 아무거나 쓰시면 돼요.”
그녀의 말대로 연습실 한쪽에 주인 없는 보면대들이 듬성듬성 늘어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나는 곧장 악보와 플루트를 가지고 구석으로 걸어갔다. 이상하게 가슴의 싱숭생숭한 떨림이 멎지를 않았다. 히트사이클 기간이라서, 혹은 억제제 탓이라고 생각했다.
달칵. 경쾌한 울림과 함께 케이스 뚜껑이 열렸다. 나는 신중하게 플루트를 들어 취구에 입을 가져다 댔다. 혹시 소리가 전혀 엉뚱한 음으로 나지는 않겠지, 일순간 우스운 잡념이 스쳐 가기도 했다.
조금 두려운 심정으로 취구에 숨을 불어 넣자, 다행히도 플루트 특유의 청아한 소리가 연습실에 울려 퍼졌다. 눈이 악보를 훑으면 손은 자동으로 운지를 찾아갔다. 꽤 오랜 시간을 쉬었는데, 머리보다 몸이 먼저 악기를 기억하는 듯했다.
플루트를 연주하고 있다는 것에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감정이 밀려들었다. 사전에 전혀 연습하지 않았는데도 음계를 틀리지 않는 게 신기했다. 이 정도라면 적어도 합주에 지장을 주는 일은 없을 것 같았다.
악보의 마지막 페이지까지 연주했을 때, 서정후가 웃으며 말을 걸어왔다.
“플루트 그만둔 거 맞아? 잘한다.”
“그냥, 뭐.”
“내가 다 아까워. 다시 하면 안 돼?”
그게 말처럼 쉬우면 얼마나 좋을까. 돌이키기에는 이미 놓친 기회가 너무도 많았다. 흘러가 버린 2년의 세월은 손을 뻗어도 잡을 수 없는 먼지와도 같았고, 트라우마를 이겨 내 대학에 다시 다닐 용기도 없었다. 음악에 열중할 수 있도록 주태승이 나를 놓아주는 상상도 우스꽝스러운 백일몽이었다.
나는 대답하는 대신 그대로 입을 다물었다. 약간의 정적이 흐른 후, 우리를 지켜보고 있던 여학생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합주 시작해도 될까요?”
“다른 곡은 안 해 봤는데요.”
“일단 박쥐만이라도 해 보게요. 바로 가 봐야 하는 사람도 있어서요.”
하긴, 아마추어 오케스트라였으니 본업이 아니라 취미로 하는 사람이 더 많을 터였다. 이곳에 속한 서정후도 연주자가 아니라 다른 쪽으로 빠진 모양이었다. 나는 옆에 선 그를 흘끗 바라보았다가 대답했다.
“시작하셔도 돼요.”
내 말이 끝나자마자 여학생은 기다렸다는 듯이 손을 확성기 모양으로 만들고 소리쳤다.
“박쥐 서곡 맞춰 볼게요! 준비해 주세요!”
우렁찬 목소리는 저마다 흩어져 있던 이들을 모으기에 충분했다. 사람들은 각각 보면대와 악보를 끌고 오케스트라 대형을 맞췄다. 여학생은 인파를 한 차례 둘러본 후에 중앙으로 걸어갔다. 아마 그녀가 지휘자 역할을 맡은 듯했다.
자잘한 소음과 악기 소리로 가득하던 실내가 순식간에 찬물을 끼얹은 것처럼 조용해졌다. 다들 숨을 죽인 채 지휘자의 지시만을 기다리고 있었다.
하나, 둘.
속으로 셋을 셈과 동시에 여학생이 든 지휘봉이 부드러운 곡선을 그렸다. 난잡하게 흩어진 퍼즐과 닮은 개개인의 음계는 곧 하나의 선율이 되었다. 나 또한 조각의 일부가 되기 위하여 취구에 입을 맞췄다.
간만에 느껴 보는, 기분 좋은 만족감이 퍼져 나갔다.
***
연습을 마치고 집에 돌아온 건 오후 6시쯤이었다. 혹시 주태승이 돌아오지는 않았을까, 조급한 심정으로 걸음을 옮겼으나 집에서 나를 기다리는 이는 아무도 없었다. 텅 빈 현관을 보자 안도감이 물밀듯 밀려들었다.
그동안 이렇게 움직인 적은 드물었기에 체력이 금방 바닥을 드러냈다. 나는 대충 냉장고를 열어 식빵 하나를 주워 먹고선 욕실로 들어갔다. 식사와 샤워를 마치기까지 30분도 채 걸리지 않았다. 피곤해서 얼른 눕고 싶은 마음뿐이었다.
주태승은 오늘도 안 들어오려는 건가. LS 인터내셔널은 무역 회사였기에 높은 직위에 있는 그가 출장을 가는 건 자주 있는 일이었다. 보통 미국에 가면 사흘에서 닷새 정도 머물다가 돌아오고는 했다.
빠르면 내일, 늦으면 내일모레.
물론 이는 순전히 나의 추측일 뿐이었으므로, 주태승이 당장 5분 후에 문을 열고 들어와도 할 말은 없었다. 다시 그와 함께 보낼 날들을 생각하자 숨이 답답하게 막혀 왔다.
축축한 머리카락을 베개에 푹 파묻고 있으려니, 별안간 테이블 위에 둔 휴대 전화가 가볍게 진동했다. 서정후가 보낸 문자일까. 피곤해서 답장할 마음은 안 들었으나 일단 손을 뻗었다.
「아들 잘 지내지?」 오후 6:28
발신인은 서정후가 아니었다. 나도 모르게 침대에 붙어 있던 상체를 반쯤 일으켰다. 그 사이에 나머지 문자가 차근차근 도착했다.
「보고 싶다」 오후 6:28
「엄마가 우리 아들 공연 보러 가야 하는데」 오후 6:28
「병원에 있느라 보지도 못하네」 오후 6:29
키패드 치는 것도 느리면서 뭐 이렇게 많이 보냈대. 손에 링거 바늘을 꽂고 더듬더듬 타자를 입력했을 어머니가 떠올라 목구멍이 따끔거렸다. 사실은 전혀 잘 지내지 못하는데, 나보다 더 잘 지내지 못할 어머니에게 그런 말을 할 수는 없었다.
어머니는 내가 꾸역꾸역 살아가는 이유였고, 주태승에게서 도망치지 못하는 이유였다. 고등학교 선생님이었던 그녀는 내가 대학교 2학년이 되는 해에 환자가 되었다. 몸속의 페로몬이 세포를 공격한다는 무척 희소한 질병이었다.
선천적으로 열성 오메가였으며 몸이 약한 어머니는 오래 버티지 못할 거라고 했다. 워낙 난치병인 데다가 위험한 병이었기에 입원 치료는 불가피했다. 그에 따른 천문학적인 비용은 고스란히 우리 모자의 발목을 잡았다.
어렸을 때 아버지가 돌아가시고부터 어머니는 내 전부였다. 그래서 스폰서가 절실했다. 플루트 연주자로 성공해야 많은 돈을 벌 수 있으니까. 세상에 유일한 내 편을 잃을지도 모른다는 공포는 나를 움직이는 원동력이었다.
주태승은 나를 죽이고 있었지만 어머니를 살리고 있었다. 내 몸뚱어리가 그의 맘에 든 건 불행이자 행운이었다. 모순투성이인 관계는 오직 주태승의 칼자루에 모든 걸 의존한 채 위태롭게 이어져 오고 있다.
나는 어머니가 보낸 문자를 물끄러미 바라보다가, 잘 지내고 있다는 짧은 답신을 보냈다.
「아들 연주 듣는 게 엄마 소원」 오후 6:33
「지금은 어디니 전국 순회공연이라고 했잖아」 오후 6:34
이번에는 전국 순회공연 중이라고 거짓말을 했던가.
어머니의 상상 속에서 난 한창 여기저기 공연을 다니는 오케스트라 단원이었다. 그녀는 추잡스러운 진실을 알 필요가 없다. 아니, 알아서는 안 된다. 돈의 출처를 알면 어머니는 차라리 치료를 그만두기를 선택할 것이다.
양심의 가책에 입술을 물어뜯으며, 나는 지방에서 공연 준비를 하고 있다고 문자를 남겼다. 그나마 오늘은 연습하러 간 게 사실이니 전부 다 거짓은 아니다. 입꼬리가 건조하게 비틀렸다.
이번에는 답장이 바로 오지 않았다. 저녁 식사 시간인가, 아니면 잠이 들었나 유추하고 있을 때였다. 뒤늦게 휴대 전화가 자잘한 진동으로 흔들렸다.
「오늘은 목소리 들려주면 안 돼?」 오후 6:38
어머니는 사랑하는 아들의 목소리를 그렇게나 듣고 싶어 하셨다. 하지만 나는 번번이 통화를 피했다. 어머니께 떳떳하지 못해서, 부끄럽고 수치스러워 차마 말이 나오지 않아서 그랬다. 다정한 말을 들으면 사실은 힘들어 죽겠다고 엉엉 울어 버릴 것 같았다.
어머니와 연락을 주고받고 있으면 가슴이 물렁물렁해졌다. 나는 결국 바쁘다는 핑계와 함께 대화를 마무리했다.
***
닷새가 지났다. 오늘도 억제제를 한 주먹 삼키며 집을 나섰다.
주태승은 돌아오지 않았고, 나는 의외로 성실하게 오케스트라 연습에 참여했다. 플루트를 불고 있으면 숨통이 트이는 기분이었다. 그래서였을까, 살갑게 치대는 서정후와 조금은 친해졌다.
“아, 진서야. 진짜 미안.”
“괜찮아.”
“카페 가 있자. 내가 살게.”
지금 서정후는 벌써 세 번째 사과를 건네는 중이었다. 이유는 단순했다. 연습 시간이 바뀐 것을 모르고 있다가, 너무 이르게 도착해 2시간이 붕 떠 버렸기 때문이었다.
밖에서 기다리기엔 날이 너무 더워 우리는 근처 카페로 들어갔다. 서정후는 카페라테, 나는 아이스 아메리카노를 주문하고 자리에 앉았다. 예전에는 곧잘 이런 곳에서 시간을 보냈던 것 같은데, 오랜만에 타인과 나와 있으려니 이 상황이 낯설었다.
딱히 할 이야기도 없었으므로 나는 앉은 자리에서 카페를 둘러보고 있었다. 구석에 진열된 잡지를 내려다보고 있을 때, 어디선가 시선이 느껴졌다.
나는 의아한 표정으로 고개를 틀었다. 그리고 이쪽을 바라보고 있던 여자와 눈이 마주쳤다. 그녀는 황급히 커피를 마시는 척 눈빛을 돌렸다.
그 광경을 지켜보고 있었던 듯한 서정후가 입을 열었다.
“오메가들이 눈에 잘 띄긴 하는구나.”
“뭐?”
“아니, 뭔가 생긴 것도 엄청 튀기도 하고. 근데 신기하게 네 페로몬은 잘 안 느껴지네.”
“베타가 오메가 페로몬을 어떻게 느껴?”
내 물음에 순간적으로 정적이 흘렀다. 서정후는 당황스러운 기색으로 눈을 깜빡이다가, 검지로 자기 자신을 가리키며 말했다.
“나 알파야.”
“어?”
이번에는 내가 어리둥절한 낯이 되어 반문했다. 아무리 억제제를 들이부었어도 히트사이클 기간에 알파 페로몬을 눈치채지 못하는 게 말이 되나. 주태승과 함께 있으면 늘 억제제고 나발이고 페로몬 때문에 할딱대느라 정신이 없었다. 그래서 보통 알파라면 다 그 정도로 강한 인력을 가지고 있는 줄로만 알았다.
서정후는 나의 반응을 살피고 변명하듯 덧붙였다.
“근데 우성은 아니라서, 그냥……. 베타랑 비슷해.”
“아, 응.”
그렇다면 눈앞에 있는 이 녀석은 알파라는 뜻인데, 히트사이클에 이러고 있어도 괜찮나. 어딘가 찝찝했다. 서정후는 끊어지려 하는 대화를 이어 나가려는 듯이 다른 화제를 던졌다.
“우리 공연 얼마 안 남았네.”
“언제라고 했지?”
“다음 주 일요일. 시간 괜찮아?”
조심스러워하는 모습을 보자 약간 장난기가 솟았다. 나는 서정후와 똑바로 눈을 마주치고 물었다.
“안 괜찮으면 어쩌게?”
“그럼, 어, 아니 처음부터 연습만이라도 같이 해 달라는 건 나였으니까…….”
어찌나 쩔쩔매는지, 까무잡잡한 피부가 발긋하게 물들어 있었다. 서정후를 즐겁게 구경하다가 한편으로 정말 내게 시간이 있는지 의구심이 들었다. 주태승의 행동을 예상할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일주일이나 돌아오지 않는 건 이상하다.
주태승은 해외에 나간다고 말을 하는 법도, 귀국했다고 알려 주는 법도 없었다. 그저 그가 마련한 집에 항상 붙어 있는 나를 취하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나 역시 굳이 그에게 연락해 언제 돌아오냐고 물은 적은 전무했다. 귀국 날짜가 궁금한 적이 없었다기보다는, 추가적인 대화를 나누는 게 싫었다. 어떻게 말해야 주태승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을 수 있는지도 몰랐다.
하여, 나는 주태승이 유명 인사인 점을 이용하고는 했다. 재벌가의 일원이자 성공한 30대 사업가답게 그는 꽤 많은 가십거리와 기사를 몰고 다녔다. 물론 일거수일투족이 문서화되지는 않았으나 운이 좋으면 귀국 기사 정도는 확인할 수 있었다.
“진서야?”
“어.”
아, 이야기하는 중이었지. 나는 경청하고 있었던 것처럼 고개를 끄덕였다.
“시간 정말 안 돼?”
“그건…….”
지금 한번 봐야 할 것 같은데. 말을 덧붙이려는 순간, 테이블에 올려 둔 진동벨이 부르르 떨어 댔다. 자연스럽게 서정후가 벨을 쥐고 일어났고, 나도 그와 함께 엉덩이를 떼어 냈다. 그에 서정후가 웃으며 나를 만류했다.
“내가 다녀올게. 앉아 있어.”
“화장실 가는 건데.”
“아.”
나는 그대로 굳은 서정후를 내버려 둔 채 화장실로 걸어갔다. 푸른 철제로 된 문을 여니 인위적인 비누 향이 훅 풍겨 왔다. 아무 칸이나 들어가 문을 잠그고 곧장 휴대 전화를 꺼냈다. 검색할 단어는 정해져 있었다.
주태승. 내 일상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고 있는 사람의 이름을 검색하자 관련 기사들이 주르륵 쏟아졌다. 나는 괜한 불안감에 입술을 우물우물 뜯었다. 죄는 아니지만, 그렇다고 떳떳하게 말할 수 있는 일도 아니었다.
3일에 출국한다는 기사, 이전에 한 인터뷰. 쓸데없는 정보들이 가득했다. 역시 이런 식으로 입국 날짜를 알아내는 건 무리였을지도 모르겠다.
단념하고 화장실을 나가려고 했을 때, 기사 하나가 눈에 띄었다.
「‘LS’ 주태승, 일반인 오메가와 짙은 관계? 美에서 비밀스러운 밀회」
이건 뭐야.
도저히 누르지 않을 수가 없는 자극적인 제목이었다. 기사를 누르자 한 남자와 귓속말을 나누고 있는 주태승의 사진이 보였다. 배경은 밤이었고, 화려한 파티장이었다. 사진 바로 밑에는 기자가 달아 놓은 듯한 사족이 붙어 있었다.
「상대는 그의 비서인 우성 오메가로, 둘은 수개월 이상 관계를 유지해 온 것으로 알려졌다.」
그 문장을 뒷받침하듯 호텔에서 나오는 두 사람의 사진이 이어졌다. 몰래 찍은 사진 특유의 흐릿한 화질 때문에 이목구비를 선명하게 볼 수는 없었으나, 주태승인 건 확실했다.
나는 빠르게 기사의 작성 일자를 살폈다. 7월 9일. 이틀 전에 나온 기사였다. 이러면 주태승의 귀국이 늦어지는 이유가 얼추 들어맞았다. 비서와 붙어 먹느라 바빠서 돌아오지 않는 모양이었다.
“뭐…….”
가슴에 들어차는 감정을 뭐라 형용하기가 어려웠다. 주태승과 관계를 이어 온 2년간 이런 기사가 난 적은 없었다. 그래서 나는 그가 내 몸만으로 만족하고 있다는 건방진 착각을 하고 있었다.
전부터 이런 관계였으면 나는 왜 붙잡고 있는 것인지, 주태승이 정말 나를 버린다면 이제부터 어떻게 해야 하는지, 원래 이런 사람인 걸 알았는데도 왜 이렇게 당황스러운 건지. 수많은 의문이 머릿속에서 제멋대로 교차했다.
꼬여 버린 내면의 실타래는 기묘하게 분노로 이어졌다. 매번 첩 취급을 당하다 보니 진심으로 그 역할에 이입하기라도 했나 보다. 이런 걸 보고 기분 나빠 하는 스스로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밖으로 나돌면서 그나마 안정을 되찾았던 정서가 불꽃처럼 튀었다. 첨예하게 곤두선 원망의 화살촉이 주태승을 가리켰다.
이성적으로는 내가 이런 마음을 가질 위치가 아닌 것을 알고 있었다. 굽히고 들어가 버리지 말아 달라고 아양이라도 떨어야 함을 알았다. 하지만 나는 그가 미웠다. 미워하지 않고서는 견딜 수 없었다.
격한 감정을 따라 호흡이 거칠어졌다. 나는 가쁘게 숨을 내쉬며 화장실 문을 열었다.
“진서야, 괜찮아?”
문 앞에는 서정후가 서 있었다. 내가 인상을 찌푸리고 올려다보자, 그는 변명하듯이 말을 늘어놓았다.
“너무 안 와서 혹시 어디 아픈가, 했어. 연습 시간도 거의 다 됐고.”
벌써 시간이 그렇게 됐나. 지금 이 상태로 연습을 할 수나 있을까. 막연한 두려움과 불안이 자꾸만 머리를 쥐어짜는 바람에 무엇에도 집중하기 힘들 듯했다.
“응.”
마른 입술에서 가까스로 대답을 끄집어냈다. 하지만 서정후는 전혀 납득하지 못했다는 투로 재차 물어 왔다.
“안색이 너무 안 좋아. 진짜 괜찮은 거 맞아?”
더는 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이마에 맺힌 식은땀이 목을 타고 내려오는 감각이 뚜렷했다. 시원찮은 반응이 더욱 서정후의 걱정을 가중하는 건지, 그는 굳은 얼굴로 내 어깨를 잡았다.
“나 좀 봐 봐, 응?”
갑작스럽게 위장에 경련이 일어난 듯이 토기가 치밀어 올랐다. 예컨대 누군가와 대화를 주고받을 상황이 아니었다. 귀가 막히다 못해 이명까지 들려왔다. 앞에 선 서정후의 목소리가 드문드문한 잡음으로 변질됐다.
어떻게든 역류하는 것을 참아 보려고 했으나 도저히 메스꺼움이 눌리지 않았다. 나는 결국 화장실 칸막이 문을 열고 변기에 속을 게워 냈다. 먹은 게 없었기에 아무것도 삭이지 못한 말간 위액이 쏟아졌다.
“진서야!”
놀란 서정후가 따라 들어와 등을 두드렸다. 그사이에 내 등허리는 몇 차례 경련을 반복했다. 입 안에서 전에 먹었던 알약의 씁쓰름한 맛이 감돌았다. 어렴풋이 구토의 원인이 짐작되었다.
“병원 가자. 많이 아파 보여.”
“아픈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지금 토하고 난리 났는데.”
“괜찮다니까. 병원 안 가…….”
억제제 과다 복용으로 병원을 갔다가 무슨 소리를 들으려고. 기진맥진한 정신으로 서정후의 오지랖에 대꾸하려니 힘에 부쳤다. 무릎이 부들부들 떨리다 못해 서서히 풀려 갔다. 나는 변기 커버를 부여잡은 채, 흘러내리는 액체처럼 주저앉았다.
“진서야, 여진서.”
서정후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공기 중에 흩어졌다. 대답을 하려는데 목에서는 철판을 긁는 듯한 쇳소리만 새어 나왔다. 마른 손가락 끝이 자잘하게 요동치는 게 느껴졌다.
자그마한 불씨가 소리 없이 꺼지듯, 느릿하게 눈앞이 어두워져 갔다.
한 번의 점멸과 함께 나는 정신을 잃고 말았다.
***
눈을 떴을 때, 가장 처음 보인 건 낯선 천장과 회색 벽지였다. 머리가 어질어질해 좀처럼 시야가 선명해지지 않았다. 나도 모르게 몸을 덮고 있는 이불을 꽉 쥐었다. 살갗이 무척 뜨거운데도 오한이 들었다.
여기가 어디지. 아무리 정신이 없어도 생판 모르는 곳에 누워 있는 건 사양이었다. 나는 주변을 둘러보기 위해 억지로 상체를 일으켰다.
단출한 장소였다. 침대 옆에는 우드 톤의 테이블이 놓여 있었고, 바닥에는 검은 러그가 깔린 게 눈에 들어왔다. 사위를 살피며 아무리 되짚어 봐도 와 본 기억이 없었다.
건너편에서 누군가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온 건 그때였다.
“일어났어?”
찰랑찰랑, 유리잔에 든 물이 투명한 표면에 부딪혀 흔들렸다. 나는 멀거니 그 모습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들었다. 쟁반을 든 서정후가 이쪽을 향해 다가오고 있었다.
“네가 병원은 싫다고 해서 일단 우리 집으로 왔어. 몸은 좀 어때?”
정신을 잃은 나를 집에서 간호해 준 모양이었다. 서정후는 대체 무슨 죄인가. 연습도 못 가고 괜한 민폐를 끼친 것 같아 마음이 불편했다.
나는 고맙다는 인사를 전하고자 입을 열었다가, 그대로 다물었다. 갑자기 몸이 이상했다.
속에서 불쾌한 정욕이 주체할 수 없을 만큼 들끓었다. 서정후가 가까워질수록 그 욕구는 더욱 강해졌다. 나는 황급히 코와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나 페로몬은 계속해서 예민한 살갗을 자극했다.
그제야 위액과 함께 토해낸 억제제가 떠올랐다. 전부 게워 냈으니 약효가 정상적으로 나타날 리가 없었다. 나는 히트사이클 중인 오메가였고, 내 앞의 서정후는 알파였다.
안 돼. 오지 마.
삽시간에 머릿속이 공포로 가득 찼다. 엉덩이 걸음으로 아등바등 물러나 봤지만, 뒤는 꽉 막힌 벽이었다. 미칠 노릇이었다. 본능에 사로잡힌 몸은 알파의 등장에 환호하듯 점점 더 민감해져 갔다.
내게 걸어오던 서정후의 표정 또한 미묘하게 굳어 있었다. 검은 눈동자가 귀신에 홀린 것처럼 흐릿했다. 그가 혀로 입술을 축이는 장면이 은근한 위협으로 닥쳐왔다.
“진서야, 혹시.”
“…….”
“히트사이클이야?”
벌써 침대맡까지 다가온 서정후가 손을 뻗었다. 나는 애꿎은 이불을 찢어 버릴 기세로 세게 잡아당겼다. 심장 박동이 정상적인 궤도를 벗어난 듯 빨리 뛰었다.
“너 페로몬 엄청…….”
우웅-.
불현듯 구석에서 들리는 잡음에 서정후는 입을 다물었다. 덩달아 나도 소리의 출처를 찾아 시선을 틀었다. 그의 말을 끊은 건 내 휴대 전화의 진동이었다.
휴대 전화는 조금 떨어진 테이블에 올려져 있었으나, 검은 화면에 떠오른 글자는 단번에 알아볼 수 있었다. 주태승에게서 온 전화였다. 보고 있으면서도 눈을 의심했다. 한참 비서랑 재미 좋을 사람이 왜.
나도, 서정후도 침묵한 공간 속에서 휴대 전화만이 소란스러운 울림을 반복했다. 나는 초조하게 화면을 내다보다가 침을 꿀꺽 삼켰다. 간신히 붙잡고 있는 정신이 빨리 이 장소를 벗어나라고 외쳤다. 어쩌면 이건 기회일지도 몰랐다.
알파의 페로몬이 강하게 옥죄어 오는 탓에 팔다리가 모래주머니를 단 것처럼 무거웠다. 나는 밭은 숨을 내뱉으며 간신히 바닥을 딛고 섰다.
서정후는 여전히 같은 자리에 서서 나를 지켜보는 중이었다. 언뜻 스친 시야에 그의 상기된 얼굴이 들어왔다. 원초적인 날것의 욕구를 오롯이 드러내는 표정이었다.
나는 애써 못 본 척, 고개를 돌리고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갑자기 일 생겨서 가 봐야 돼. 챙겨 준 건 고마워, 다음에 연락할게.”
마음이 급해 소지품을 꼼꼼히 챙길 여유도 없었다. 일단 부재중 알림이 표시된 휴대 전화와 지갑을 대충 주머니에 쑤셔 넣었다. 온몸의 솜털이 곤두서 피부가 따가울 지경이었다. 이곳에 더 있다가는 정말 무슨 짓을 저지를지 몰랐다.
집이 크지 않았기에 현관까지 가는 건 금방이었다. 신발에 대충 발가락을 구겨 넣으려던 때였다. 느닷없이 몸이 기우뚱 뒤로 넘어갔다.
“가지 마.”
데일 듯 뜨거운 숨이 내 목덜미에 열렬히 쏟아졌다. 순간적으로 눈앞에 하얀 불꽃이 튀었다. 정신이 나가 버릴 것만 같았다. 내 어깨를 감싸고 있는 두툼한 팔, 질척하게 코끝에 달라붙는 냄새, 비정상적으로 높은 체온. 서정후가 지닌 모든 것이 불쾌한 의도를 내뿜었다.
“진서야, 지금 만나는 사람 있어?”
“이거 놔.”
“있어도 상관없어. 나랑 같이 있자.”
별안간 무언가 축축한 것이 내 어깨선을 쪽쪽 빨아 들였다. 그게 서정후의 입술이라는 것을 깨닫자 숨이 턱 막혀 왔다. 나는 그의 품에서 벗어나기 위해 미친 듯이 상체를 비틀었다. 그러나 오메가와 알파 간 힘의 차이는 절망적이었다.
“미쳤어? 그만해.”
“나 너 좋아해. 대학생 때부터 좋아했어.”
이건 또 무슨 소리인가. 서정후와는 밥을 같이 먹은 횟수도 손에 꼽았다. 그마저도 강의 시간이 겹쳐 얼떨결에 먹게 된 거였다.
“너 몸 판다고 퍼진 사진도 안 믿었어. 좋아해, 진서야. 응?”
“흐윽, 이것 좀, 놓고…….”
“너도 지금 힘들잖아. 내가 편하게 해 줄게.”
논리 따위는 상실한 채, 인간보다는 차라리 짐승이 되기로 결심한 사람 같았다. 소름이 돋다 못해 헛구역질이 나왔다. 나는 내 어깨를 감싼 서정후의 팔을 꽉 잡고서 있는 힘껏 깨물었다.
“아, 씹.”
몸을 옥죄는 밧줄이 느슨해진 찰나를 틈타, 나는 얼른 서정후와 거리를 벌렸다.
“난 너 안 좋아해. 정신 차려.”
대답은 듣지 않았다. 나는 그대로 현관문을 열어젖히고 도망치듯 자리를 피했다. 서정후가 따라오기라도 할까, 재빨리 계단을 뛰어 내려갔다. 성치 못한 몸으로 질주를 하려니 두개골이 깨질 것처럼 아팠다.
겨우 빌라를 빠져나오자, 어둠을 어슴푸레 비추는 달이 떠오른 게 보였다. 밤이 되도록 정신을 잃고 있었나 보다. 서정후가 내려오는 기색은 없었으나 무방비 상태로 밖을 나도는 것도 위험했다.
나는 일단 도롯가로 가 택시를 잡았다. 여기가 어느 동네인지는 몰라도 차가 금방 잡혀 다행이었다.
“성북동 카밀팰리스요.”
“어이구, 좋은 데 사시네.”
엉망진창인 나와 달리 택시 기사는 느긋하게 차를 몰았다. 히트사이클인 오메가를 태우고도 별 반응이 없는 걸 보면 베타인 듯했다. 그나마 마음이 놓여, 나는 시트에 어깨를 파묻고 한숨을 쉬었다.
왜 억제제를 토해서……. 지나간 일에 대한 후회가 파도처럼 밀려들었다. 당장 오늘만이 아니라 더 근본적인 잘못도 떠올랐다. 플루트 연습에 참여하지 말걸, 서정후가 건 전화를 받지 말걸.
신중하지 못한 내가 싫었다. 당장 성욕에 눈이 멀어 속절없이 민감해지는 형질 또한 혐오스러웠다.
이제 서정후와 다시는 친구로 돌아갈 수 없겠지.
창문 너머로 스쳐 가는 야경이 형형색색의 꽃처럼 보였다. 얼른 집으로 돌아가 억제제를 먹고 싶었다. 아니, 약을 다 토해서 이 사달이 났으니 혼자 풀어야 할지도 모르겠다. 알파 없이 보내는 히트사이클은 고역이었다.
매일같이 몸을 섞는 주태승은 내 알파가 아니니까. 나는 그의 오메가였지만, 그는 나의 알파가 아니었다. 상대는 나에게 잠자리를 요구할 수 있었지만, 나 좋을 때 그와 잘 수는 없었다. 우리는 그런 관계였다.
별별 생각이 다 드는 걸 보면 히트사이클이 어마어마한 영향을 끼치긴 하는 듯했다. 당장 집에 있지도 않을 사람인데.
……집에 있지도 않을 사람?
불현듯 주태승이 전화를 걸었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순식간에 온몸을 타고 흐르는 피가 다 새어 나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떨리는 손으로 주머니에서 휴대 전화를 꺼냈다. 부재중 전화 한 통. 알림은 여전히 그 자리에 있었다.
“다 왔네요.”
달리던 택시가 서서히 멈춰 섰다. 나는 이도 저도 못 하고 가만히 휴대 전화를 내려다보았다. 예감이 좋지 않았다. 내가 주태승에게 품고 있는 두려움은 서정후 따위와 차원이 달랐다.
“학생?”
“아, 네.”
택시 기사의 재촉에 겨우 정신이 들었다. 잔금을 치르고 나오자 익숙한 건물의 외관이 기다리고 있었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부재중 전화 알림을 꾹 눌렀다. 곧 무미건조한 연결음이 적막을 채워 나갔다.
휴대 전화 화면이 통화 중으로 바뀌는 데에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여보세요?”
전화를 받은 건 확실한데, 주태승의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조마조마한 심정으로 거짓말을 늘어놓았다.
“못 받아서 죄송해요. 자고 있었어요.”
잠시 후, 주태승 특유의 고저 없는 음성이 돌아왔다.
[어디서.]
“네? 집, 에서요.”
짧은 시간에 짜낸 변명답게 조잡하기 짝이 없었다. 자느라 전화를 못 받았다니. 왜 더 영민한 머리를 가지고 태어나지 못했을까. 그렇게 스스로 자책하며, 나는 계단을 오르는 걸음을 서둘렀다. 혹여 다른 소리가 섞여 들까 봐 엘리베이터를 타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집.]
주태승은 내 말을 곱씹듯이 한 차례 반복했다. 전화를 받지 않아서 화가 난 건지, 났다면 얼마나 났는지. 그 무엇도 가늠하기 어려웠다.
[그럼 지금도 집이겠고.]
이제 도어 록만 열면 도착이었다. 나는 입술이 바짝바짝 마르는 걸 느끼며 어떻게 전화를 끊을지 생각했다. 씻으러 간다고 말을 해야 하나, 아니면 피곤해서 다시 잔다고? 애초에 주태승은 왜 전화를 걸었던 거지?
“아, 저 잠시만, 그, 끊어야 하는데.”
[왜?]
그리고 주태승은 너무도 자연스러운 태도로 말을 이었다.
[문 열어야 해서?]
문장이 귀를 파고든 후 뇌에 도착하지 못한 것처럼 나는 듣고도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어쩌면 곧 닥쳐올 미래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았던 것일지도 모른다. 분명히 제자리에 있을 심장이 땅으로 곤두박질치는 기분이 들었다.
다음 순간, 멀거니 선 나를 두고 육중한 철문이 열렸다. 물론 나는 도어 록을 누른 적이 없었다.
드러난 현관에는 내가 가장 미워하는 남자가 서 있었다.
“여진서는 거기가 집인가?”
“흐, 악.”
기민하게 다가온 긴 손가락이 내 멱살을 쥐어 챘다. 나는 눈을 커다랗게 뜬 채로 속절없이 끌려갔다. 이럴 때는 어떤 행동을 하며, 어떻게 무마해야 하는지 아무도 가르쳐 주지 않았다.
“거짓말한 것도 모자라서……. 어디서 굴러먹다 왔길래 페로몬을 덕지덕지 붙이고 왔을까.”
끼익, 주태승이 사는 집의 문이자 나를 가둔 우리가 비틀린 금속음과 함께 아가리를 닫았다.
***
“옷 벗어.”
주태승은 제3자도 하지 않을 법한 무심한 눈으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동공에 놀라우리만큼 동요가 없어서 겁이 났다.
옷을 벗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이곳은 현관이었다. 원래 어떤 놈이었는지 기억을 더듬어 봐도 뚜렷한 윤곽이 떠오르지 않았다. 나는 모래알 같은 침을 삼키며 머뭇거렸다. 죄 없는 옷자락만이 손바닥 안에서 가엾게 구겨졌다.
가만히 나를 관망하던 주태승이 담담한 어조로 물었다.
“못 하겠어?”
나는 눈을 질끈 감고 더듬더듬 고개를 주억거렸다. 차마 주태승과 눈을 마주치기에는 공포심이 컸다.
“돈 주고 사 온 창놈이 몸을 안 팔면 타산이 안 맞잖아.”
주태승은 시선을 피하는 것조차 용납하지 않았다. 내 얼굴을 감싸고도 남을 만한 커다란 손이 강제적으로 턱을 들어 올렸다. 의도와 상관없이 맞닥뜨린 눈빛은 서슬 퍼런 칼날을 닮아 있었다.
“아니면, 지금까지 같이 뒹굴다 온 새끼가 정조라도 지켜 달래?”
“…….”
“말하지 그랬어. 다른 알파한테 매일 따먹히느라 제대로 못 조인다고.”
히트사이클이 온 오메가가 알파 페로몬을 붙이고 왔으니 저런 오해를 하는 건 당연했다. 그러나 납득과 억울함은 별개였다. 당장 주태승의 페로몬을 버티고 서 있는 것만 해도 버거웠지만, 나는 꾸역꾸역 입술을 달싹거렸다.
“……뒹군 적, 없어요.”
“이제 입 여네.”
주태승의 손아귀에서 서서히 힘이 빠져나갔다. 나는 비틀거리며 등 뒤의 철문에 몸을 기댔다. 페로몬으로 어찌나 사람을 괴롭히는지, 몸이 달아 눈앞의 초점이 흐릿했다. 이 남자가 돋우는 성욕은 고통이 되어 화살처럼 날아들었다.
“더 거슬리게 하지 말고 벗어.”
요구를 따르지 않고는 어쩔 도리가 없었다. 주태승이 내 행동을 더 거슬려 하면, 다음 옷을 벗는 장소는 현관이 아니라 집 밖이 될지도 모른다.
나는 자잘하게 경련하는 손끝을 더듬어 카디건을 벗었다. 여름이었기에 몸에 걸친 옷은 느슨하고 널찍한 종류였다. 최대한 뜸을 들여도 나는 손쉽게 태어난 본연의 모습이 되어 갔다.
사박사박, 부드러운 옷가지가 하나둘씩 현관 바닥에 떨어졌다. 주태승은 한 걸음 떨어진 곳에서 나를 지켜보고 있었다. 눈빛에는 촉감이 없으나 그의 시선이 스쳐 간 곳마다 인두에 지져진 듯 열이 올랐다.
이윽고 나는 속옷 하나 걸치지 않은 나체를 드러냈다. 허연 몸 이곳저곳에 불그스름한 열꽃이 피었고, 공기와 마찰한 젖꼭지가 빳빳이 선 게 보였다. 내 모습이 너무도 노골적으로 흥분한 오메가의 모습이라 차라리 죽고 싶어졌다.
나와는 정반대로 정갈한 실내복을 갖춰 입은 주태승이 가까이 다가왔다. 이 장면이 우리의 관계와 무척 닮아 있었다. 나는 수치스러움에 마른 주먹을 꽉 쥐었다. 손톱이 말랑한 살갗을 파고들 것처럼 깊게 박혔다.
주태승이 갑작스레 내 몸을 내리누른 건 그 순간이었다.
그는 한쪽 팔만 들어 나를 현관문 쪽으로 밀어붙였다. 예민한 유두가 차가운 문에 닿아 저절로 신음이 샜다. 나는 문을 짚은 채로 철문에 뺨을 묻었다.
“흐, 윽.”
곧 무언가 굳게 닫힌 음부를 더듬는 느낌이 들었다. 보지 않아도 그게 손가락이라는 것은 알 수 있었다. 짙은 페로몬 때문에 다리 사이는 이미 애액으로 범벅이 된 상태였다. 주태승의 손길을 따라 찔꺽, 하는 지저분한 소리가 불거져 나왔다.
“좆 달라고 애원하는 수준인데.”
그 말과 함께 긴 손가락이 구멍을 비집고 들어왔다. 일주일 동안 관계를 맺지 않았기에 입구는 빠듯하게 입을 벌렸다.
나는 거부감과 쾌락, 그 어딘가에서 신음했다. 흘러넘친 액체가 허벅지 사이를 타고 주르륵 미끄러졌다.
“이런 몸으로 옷 안 벗고 버텼어?”
“흐윽, 여기서, 하는 거, 싫…….”
“내 오메가한테 어디서 좆질을 하든.”
주태승은 내 입에서 신음만 나오기를 바라는 듯했다. 그것만은 들어주고 싶지 않아서 나는 입술을 꽉 깨물었다. 하지만 손가락은 그 주인을 닮아 자비가 없었다.
“하윽, 천천히, 제발……!”
입구를 억지로 벌린 검지와 중지가 내벽에서 꿈틀거렸다. 주태승은 안을 가늠하는 것처럼 빠르게 손가락을 찔러 넣었다가, 속살을 꾹꾹 누르기를 반복했다. 그때마다 허리가 쾌감으로 비참하게 휘었다. 오메가라는 형질은 항상 이렇게 나를 절망에 빠트렸다.
몇 차례 음부를 희롱하던 손가락이 천천히 빠져나갔다. 나는 기진맥진한 상태로 현관문에 의지해 숨을 골랐다. 하지만 휴식은 짧았다.
주태승은 내 허리를 부여잡고 손가락과 차원이 다른 이물을 입구에 밀어붙였다.
“아, 아악!”
이번에 닥쳐온 감정은 쾌감이 아니었다. 농도 짙은 고통이 전신으로 번개처럼 퍼져 나갔다. 벌써 수십 차례나 몸에 들인 것이었으나 삽입은 매번 살갗이 찢어지는 듯한 아픔을 동반했다.
거친 나무 몽둥이가 배 속까지 들어찬 기분이었다. 나는 호흡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 허벅지를 발발 떨었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이 주태승의 성기를 삼키기 위해 아득바득 빠끔거렸다.
“주, 죽을 것 같, 흐읏, 아!”
“붙어먹은 놈은 여기까지 안 찔러 줬나?”
“흑, 읍, 안 했다고, 아까, 읏.”
주태승이 뭉근하게 허리를 치고 빠지면, 내벽도 함께 딸려 나가는 느낌이었다. 어느새 서러움을 견디다 못해 눈물이 터져 나왔다. 입술 사이로 들어온 물방울에서 짠맛이 났다.
내 말을 듣고는 있는 건지, 주태승은 뒤에서 나를 덮치듯 끌어안았다. 그의 거친 숨결이 목덜미 위로 자잘하게 쏟아졌다. 진짜 우성 알파는 보통 알파와 페로몬의 질이 달랐다. 마치 급소를 물어뜯긴 먹잇감이 된 것만 같았다.
“더러운 거나 묻히고 와서, 좆같게.”
다른 사람과 섹스 하지 않았다는 것쯤은 삽입을 시작하면서 이미 알았을 터다. 그런데도 주태승은 저런 소리를 했다. 억울함이 치밀어 올랐다. 나는 묵직한 고통에 눈물을 쏟아 내며 웅얼거렸다.
“읏, 본, 본부장님도 했, 잖아요.”
“뭐?”
“비서랑, 미국에서 했으면서, 왜 나만, 흐윽.”
안을 제멋대로 휘젓던 움직임이 조금씩 잦아들었다. 아픔이 사그라드는 한편으로 불안감이 몰려왔다.
본능적으로 깨달았다. 내가 주태승의 심기를 건드리는 말을 했다는 것을.
“다시 말해 봐.”
목소리에 묻어 나오던 열감은 온데간데없었다. 눈앞이 깜깜해졌다. 아직도 내 안에 박혀 있는 성기가 맥박이 뛰듯 꿈틀거렸다. 나도 모르게 굵직한 기둥을 빠듯하게 조였다.
“좆 대가리 오물대지 말고.”
주태승은 그대로 손을 뻗어 내 머리카락을 쥐어 잡았다. 나는 목이 꺾인 채로 그를 돌아본 자세가 되었다. 그렁그렁 맺힌 눈물 때문에 시야가 희뿌옇게 번졌다.
“말해.”
“……미국에서, 사진 찍혔던데. 그냥 비서 데리고 사시지.”
제정신이 아닌 상태로 꺼낸 말이었으나 반은 진심이다. 관계를 가지며 내 마음을 드러낸 건 처음이었다.
내 말을 들은 주태승은 웃는 것 같기도, 화가 난 것 같기도 한 표정을 지었다. 언뜻 헛웃음 비슷한 소리가 들렸다. 저런 행동을 하는 주태승은 본 적이 없었기에, 나는 그가 어떤 감정을 느꼈는지 전혀 깨닫지 못했다.
안을 가득 메우고 있던 성기가 느릿하게 빠져나갔다. 나는 의아함을 감추지 못하는 표정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태승은 바닥에 떨어진 내 옷가지를 들춰 휴대 전화를 찾아냈다. 그리고 말릴 새도 없이 어딘가에 전화를 걸었다.
“나야.”
“뭐, 하는…….”
“성북동으로 와, 지금.”
통화는 금방 끝이 났다. 역할을 마친 휴대 전화가 요란한 소리를 내며 바닥으로 떨어졌다. 이 상황에 누군가를 불렀다. 그야말로 미친놈이 할 법한 발상이었다.
“왜, 왜 그러시는 거예요. 지금 대체, 왜.”
이 사람은 정말 나의 인격을 티끌 하나 없이 부숴 버리고 싶은 걸까. 나는 상기된 뺨을 일그러뜨리며 눈물을 참았다. 마른 눈물 자국으로 인해 눈가가 따끔거렸다.
“여진서가 귀엽게 굴잖아.”
“…….”
“갑자기 그런 소리를 다 하고.”
주태승의 페로몬이 야살스러운 색을 띠고 나를 감싸 왔다. 정사는 끝나지 않았다. 오히려 또 다른 시작이었다.
이번에는 주태승과 마주 본 상태에서 등이 신발장에 닿았다. 난폭하게 치솟아 쿠퍼액을 흘리는 검붉은 성기가 안을 꿰뚫었다.
“하으, 으응!”
더 깊게 들어가려는 것처럼 주태승은 내 다리를 들어 올렸다. 음경의 형태를 따라 아랫배가 불룩해졌다. 한 발로는 움직임을 감당할 수가 없었기에 나는 그에게 매달렸다.
허기를 채운 내벽이 물을 질질 흘리며 기둥을 조여 댔다. 귀두가 주름을 긁는 감각이 생생했다. 비죽비죽 새어 나온 애액으로 주태승의 실내복이 축축이 젖어 갔다. 수치가 몰려와 나는 차라리 고개를 돌려 버렸다.
주태승은 지독했다. 시야에 띄는 모든 걸 집어삼키려는 듯이, 그는 발딱 선 유두를 빨아 올렸다. 강제로 이끌린 쾌감 때문에 뒤통수가 저릿거렸다.
“흐, 싫어, 거기는, 하지 마세요. 우윽.”
바닥에 끈적하고 더러운 물방울이 튀었다. 내 귀두와 구멍에서 흐른 물이자, 명백한 쾌락의 증거였다.
왜 나는 오메가여서, 하필 지금 히트사이클이어서. 평소보다 갑절은 느끼는 몸이 원망스러웠다.
내가 지쳐서 축 늘어지든 말든, 주태승은 계속해서 자신의 것을 박아 댔다. 크기가 컸기에 어딜 찌르든 예민한 살점에 닿았다. 벌써 몇 번째 가벼운 절정에 다다랐는지 모르겠다. 아랫배가 희끄무레한 정액으로 지저분해졌다.
“뭘 하지 마. 좆 끊어 먹을 것처럼 조이면서.”
“아, 흐으, 본부장, 님.”
“내가 미쳤지. 히트사이클 내내 따먹었어야 했는데.”
히트사이클 기간 동안 계속 이렇게 지냈다면 아래가 망가졌을 것이다. 체감상으로는 이미 찢어졌다. 나는 애원하듯 주태승의 목을 두른 팔에 힘을 주었다.
그때, 열락으로 가득한 공기를 깨는 소리가 났다. 그 둔탁한 울림은 문에서 나고 있었다.
나는 입을 조그맣게 벌린 상태로 문을 바라보았다. 반면, 주태승은 자세를 낮춰 내 귓가에 속삭였다.
“주제넘게 안주인 노릇이라도 하고 싶었어?”
“…….”
“그럼 비서한테는 절대 안 줄 만한 거 줄 테니까, 잘 받아먹어 봐.”
삑, 삑. 도어 록을 해제하는 전자음이 들리고, 철옹성 같은 현관문의 틈이 조금씩 벌어졌다. 나는 얼음처럼 굳어 그 광경을 살피다가 비명을 내질렀다. 주태승이 내 안에서 움직이려 하고 있었다.
“안 돼, 지금 안 돼요. 사람 오는데!”
인성을 선으로 표현할 수 있다면 주태승의 것은 반드시 복잡하게 뒤틀린 곡선일 것이다. 변태, 미친 새끼. 어떤 욕지거리를 갖다 붙여도 부족했다. 나는 그가 스폰서라는 사실도 잊고 다부진 어깨를 마구 때리고 발버둥 쳤다.
주태승은 내 객기를 훈육하듯, 귀두를 깊숙이 찔러 넣었다. 의지와는 다르게 울음 섞인 신음이 흘러나왔다.
문을 열고 들어온 것은 정장 차림의 남자였다.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풍경에 몹시 당황한 기색이었다. 그러면서도 이쪽을 흘끔흘끔 바라보는 시선이 나를 벼랑 끝으로 몰았다.
나는 주태승에게 안을 꿰뚫린 채로 처절하게 울먹였다.
“하윽, 윽, 보지, 마세요. 제발.”
“왜 질질 짜고만 있어. 서 비서한테 자랑해야지.”
그 말은 저 남자가 미국에서 밀애를 가진 비서라는 소리였다. 왜 굳이 그를 불러서 이런 꼴을 보여 주는지, 주태승은 이미 내 이해의 범주를 넘어섰다.
실시간으로 정신의 심지가 무너져 갔다. 나는 좆이 박히는 대로 덜컥거리며 빌었다.
“제가, 읏, 후으, 잘못했으니, 까. 그만해요. 이런 거……!”
간청의 대상은 주태승뿐만이 아니었다. 성기를 게걸스럽게 먹어 치우는 내 모습을 보고 있을 남자에게도 사정했다.
“보면, 흐윽, 안 돼요. 아앗, 하아. 부탁, 이에요.”
“…….”
“제발, 제발요.”
사실 이제 남자가 어딜 보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끝을 모르고 차오르는 눈물이 시야를 다 가리고 말았다. 내가 뭘 그렇게 잘못했길래 이런 일을 당해야 할까. 이 비참한 상황에서 주태승이 얻는 건 뭘까.
내벽을 휘젓는 움직임이 점차 빨라졌다. 주태승이 절정에 가까워졌다는 신호였다. 나는 가쁜 숨을 할딱이며 이 남자가 사정하기를 기다렸다. 그런데 그의 행동이 뭔가 이상했다.
끝을 향해 내달리는 순간, 주태승은 나를 붙잡고 짐승 같은 숨을 내쉬었다. 뒤이어 하체를 반으로 쪼개는 듯한 아픔이 삽시간에 밀어닥쳤다.
“하으, 아, 악!”
큰 성기가 음부에 꽉 끼어, 다시는 빠지지 않을 듯 부풀어 올랐다. 이런 고통은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했다. 목에서 껄떡껄떡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노팅이었다. 히트사이클 기간에 알파의 영역 표시가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주태승이 모를 리가 없었다.
“싫어! 미친 새끼야, 하지 마. 그만해!”
성기의 모양으로 불룩해진 아랫배에 주태승의 씨가 쏟아졌다. 그제야 깨달았다. ‘비서에게는 주지 않는 것’의 의미를. 미친개처럼 날뛴 탓에 상처 난 입구에서 피가 배어 나왔다. 선혈은 주태승의 정액과 섞여, 추접스러운 모습으로 바닥에 자국을 남겼다.
몸에서 나올 수 있는 체액은 전부 다 흘린 듯했다. 시야에 마지막으로 들어온 것은 나를 감싸 안은 주태승의 팔이었다.
나는 결국 간신히 붙어 있던 의식의 끈을 놓아 버렸다.
***
주태승에게 사랑을 바란 적 없었다.
다만 살 수는 있게 해 달라고, 짓밟아 먼지로 만들지는 말아 주길 바랐다. 당신에게는 어려운 일이 아니잖아. 싸구려 동정이라도 좋으니 나 하나쯤에게 자비를 베푸는 건.
지금에 와서야 깨달았다. 이 소망은 우습게도 전제부터 틀려먹었다. 자비는 사람에게나 베푸는 것이다. 그러나 주태승은 나를 사람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내가 자신을 더 객관적으로 보지 못해서 이런 일이 일어난 거다. 심장이 나락으로 꺼져 버릴 것만 같은 것도, 고장 난 수도꼭지처럼 눈물이 쏟아지는 것도. 진즉에 내 위치를 명확하게 자각했어야 했다. 바닥 아래에는 심해가 있다는 걸 미리 알았더라면 지금 이렇게 아프지 않았을까.
그 지옥 같은 밤에 주태승이 내 몸을 가지고 또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른다. 기억이 없었다. 드문드문 의식을 찾을 때마다 그가 위에 올라타 있었다는 것 정도만 떠올랐다.
침대에서 구르는 사이 히트사이클은 끝났다. 어느 순간 고통이 쾌락을 웃도는 점을 통해 알았다. 힘이 다해 그만하라고 빌지도 못하는 나를 주태승은 놓아주지 않았다. 통증 빼고 모두 무뎌진 감각으로 보내는 밤은 형벌과 같았다.
잠깐 기절해 잠을 자고, 눈을 뜨면 안겼다. 그렇게 시간이라는 개념을 잊은 채 여러 날이 지나갔다.
문득 눈을 떴을 때, 침대에 혼자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며칠 만에 자유가 되었는데도 손가락 하나 까딱할 수 없었다. 나는 멀거니 누워 새하얀 천장을 바라보았다. 차라리 잠을 자는 게 현실에 버려진 것보다 나을 듯했다.
이제 어떻게 해야 할지. 나에게 어떤 일이 일어났었는지를 회상하면 뇌가 저절로 사고를 멈췄다. 그 순간에 느꼈던 두려움과 수치만이 생생하게 남아 나를 괴롭혔다.
방에서 역겨운 냄새가 났다. 어쩌면 방이 아니라 침대에서, 침대에 누운 나에게서 나고 있을 수도 있다. 환기라도 시키면 조금 나아질까 싶었다. 나는 있는 힘을 다해 몸을 일으켰다.
큰 창문은 침대 바로 옆에 있었다. 두어 걸음만 가면 되는 거리인데도 발을 떼는 것이 힘에 부쳤다. 혼자 창문조차 열지 못하는 한심한 인간이 되기 싫었다. 그래서 기력이 다한 하체를 억지로 질질 끌었다.
“아, 윽.”
쿠당탕, 꼴사나운 소리와 함께 내 몸은 바닥에 나뒹굴었다. 순간적으로 배에 충격을 받아 토기가 올라왔다. 나는 엎드린 상태로 헛구역질을 해 댔다. 한 번 몸을 들썩일 때마다 머리가 웅웅 울렸다.
위액 대신 눈물이 질질 흘러나왔다. 이 상황이 너무도 혐오스러웠다.
마음대로 움직여 주지 않는 팔다리가 한심해 살갗을 벅벅 긁었다. 날카로운 손톱에 베인 피부에 핏방울이 송골송골 맺혔다. 그 모습을 보니 내 혈관을 돌아다니고 있을 주태승의 씨앗이 조금은 빠지는 기분이 들었다. 나는 발작하듯이 허연 팔을 마구 할퀴었다.
그 미친 새끼, 나한테 노팅했어. 씨발 놈, 정신 나간 새끼.
별안간 주태승에 대한 분노가 끓어올랐다. 그럴수록 메스꺼움이 심해졌다. 나는 바닥을 짚은 채 욕지기를 반복했다. 동물에게서 나올 법한 흉한 괴성이 퍼져 나갔다.
“어머, 세상에!”
멀찍이서 누군가 비명을 지르는 소리가 들렸다. 구역질하느라 문이 열린 것도 모르고 있었다. 목소리의 주인공은 가정부였다. 그녀는 질겁한 표정을 지으며 내게 달려왔다.
“괜찮아요? 아이고, 어쩌면 좋아. 옷도 못 입고…….”
가정부의 투박한 손이 등허리를 두드리는 게 느껴졌다. 맨몸으로 넘어져 토악질하고 있는 게 얼마나 추할까. 더 상할 자존심도 없었기에 나는 잠자코 손길을 받았다.
“이러다 사람 잡겠어요. 밥이라도 먹여서 보내야 하는데.”
“어딜, 보내요?”
가만히 듣고 있으려니 뒷말이 뭔가 이상했다. 가정부는 물음에 답하는 대신 우물쭈물하며 시선을 피했다. 그녀는 내 처우에 대해 나 자신보다 잘 알고 있는 듯했다. 답답한 마음에 한 번 더 물으려던 때였다.
대답은 난데없이 문 앞에서 들려왔다.
“병원이요.”
들어 본 적 없는 낯선 음성이었다. 나는 소리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소스라치게 놀랐다. 목소리는 처음일지 몰라도 얼굴은 눈에 익었다. 아니, 익다 못해 저절로 숨이 가빠 왔다.
“처음 뵙는 건 아니지만, 그땐 말 주고받을 상황이 아니었으니까.”
“…….”
“서다원입니다. 주태승 본부장님 비서로 일하고 있습니다.”
자신을 서다원이라 소개한 남자는 가볍게 머리를 꾸벅였다. 피가 거꾸로 솟는 듯했다. 주태승은 사이코패스가 틀림없었다. 내 정신을 어디까지 갈기갈기 찢으려고 저 사람을 집에 보내지. 어떻게, 어떻게…….
머리가 하얗게 변해 말은커녕, 입을 열기도 힘겨웠다. 아랫입술이 제멋대로 부들부들 경련했다. 제발 이쪽을 보지 말아 달라고 오열하던 내 모습이 떠올랐다. 저 사람도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주태승에게 매달려 진창을 구르는 처절한 창놈을.
온몸에 오한이 든 사람처럼 떠는 나와 달리, 서다원은 아무렇지 않은 낯이었다. 그는 내 의사와는 상관없이 통보하듯 말을 이었다.
“본부장님께서 여진서 씨 몸 상태를 많이 염려하셨습니다.”
“뭐, 요?”
“깨어나면 바로 병원 데려가서 링거라도 맞추고 오라고 하셨어요. 아마 저녁에 확인하실 겁니다.”
내가 걱정되니까 병원에 데려가라고? 웃기지도 않았다.
관계를 가지는 도중에 자꾸 기절하니까, 더 괴롭히고 싶은 욕구를 채우기에 부족하니까. 그래서 링거까지 대동하는 것이다. 주태승은 그러고도 남을 위인이었다. 나는 기가 차서 물었다.
“저녁에 확인을 해요?”
“신경 쓰지 않을 이유가 있나요. 여진서 씨는 본부장님 사람이잖아요.”
갈수록 말도 안 되는 소리를 늘어놓는다. 경악스러워 시야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그 꼴을 봐 놓고도 그런 소리가 나와요?”
서다원은 내 말을 듣고 잠시 입술을 달싹였다가, 결국 못 들은 척 시선을 돌렸다. 분해서 정신이 나갈 것만 같았다. 나는 속에 맺힌 응어리를 목소리에 꾹꾹 눌러 담아 쏘아붙였다.
“제가 가기 싫다면요?”
이번에는 서다원이 내게 경멸의 눈빛을 보냈다. 그는 나를 위아래로 훑어보며 대답했다.
“억지로 끌고 가면 그 몸으로 반항할 수는 있어요? 여기서 대체 누가 당신 뜻을 따라 준다고.”
“…….”
“옷이나 입어요. 여진서 씨 벗은 몸에 환장하는 거 본부장님밖에 없으니까.”
촌철살인이었다. 말을 뱉는 이가 서다원이었기에 문장은 더욱 굴욕적으로 다가왔다. 내내 우리 둘 사이에 끼어 어쩔 줄 몰라 하던 가정부가 조심스럽게 내 등을 쓰다듬었다. 그리고 작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다녀와요, 사장님이 챙겨 주시는데.”
그놈의 사장님, 그놈의 본부장님. 주태승이 고용한 사람들 틈에서 나는 그냥 정신 나간 환자였다. 내가 주태승을 미워해서, 그에게 휘둘리고 싶지 않아 하는 게 무척 이상한 행동처럼 여겨지고 있었다.
제자리에서 꿈쩍 않는 나를 보고, 서다원은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가 성큼성큼 다가와 내 팔을 붙잡았다. 같은 오메가인데도 악력이 남달랐다. 아니면 내가 너무 쇠약해져 있거나.
서다원의 말대로였다. 똑바로 걷지도 못하는 놈에게 반항할 힘 따위는 없었다. 주태승은 자신이 없는 자리에서도 내게 체념을 강요한다. 세상에서 가장 잔혹한 사람이었다.
***
서다원이 나를 데려간 곳은 고급스러운 외관의 병원이었다. 규모가 크지는 않았으나 풍겨 오는 분위기가 보통 동네 의원과는 상당히 달랐다.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흐르는 복도를 지나쳐, 그는 데스크의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직원은 곧장 우리를 내부 깊숙한 위치에 자리한 진료실로 안내했다. 주태승 정도의 재력이 있으면 이런 병원에서도 바로 의사를 만날 수 있나 보다. 감탄이 아니라 화가 났다. 그렇게 다 가진 사람이 왜 하필 나 같은 걸 괴롭히는 건지.
진료실에 들어가자, 젊어 보이는 여자 의사가 우리를 맞아 주었다. 그녀는 신중한 표정으로 이것저것을 물었다.
우성 오메가인가, 밥은 먹었나, 어지러운 적은 없었나, 최근에 쓰러진 적 있나.
나는 긴 설명을 하는 대신 고갯짓으로 의사를 표시했다. 의사가 청진기를 갖다 대거나 입을 벌리게 할 때는 고분고분 그에 따랐다. 진찰을 받는 일련의 과정이 물 흐르듯 무난하게 흘러갔다.
“탈수에 영양불균형도 왔어요. 꽤 오래 맞으셔야 할 것 같은데.”
주사를 맞는 건 이미 정해진 일이고, 어느 수액을 투약할지를 정하는 진료였던 모양이다. 의사가 무어라 건강에 대한 이야기를 꺼냈으나 관심이 없었다. 그녀는 나와 몇 번 대화를 시도했다가, 결국 포기하고 서다원에게 내 상태를 설명했다.
진료를 마친 후, 나는 병원의 1인실을 하나 차지하게 되었다. 입원한 것도 아닌데 오직 수액을 맞는 용도로만 마련된 방이었다. 뒤따라 들어온 간호사가 나를 침대에 눕혔다.
“혈관이 잘 안 보이네요.”
그 말과 달리 간호사는 단번에 주삿바늘을 꽂아 넣었다. 나는 내 손에 매달린 몇 가지의 수액을 물끄러미 올려다보았다.
“약 들어가려면 좀 걸려요. 주무시고 계세요.”
주태승의 비서가 끌고 온, 주태승과 연이 있는 병원에서 아무런 저항 없이 누워 있는 내가 가소로웠다. 물론 갖은 의심을 하면서 앙칼지게 굴었어도 결과는 같았을 것이다. 몸도 못 가누는 새끼가 저항을 했으면 얼마나 했겠나.
창가에 기대 팔짱을 낀 서다원의 옆모습이 시야에 들어왔다. 무언가 내키지 않는 표정이었다. 그는 곧 간호사에게 다가가 귀에 입을 대고 속살거렸다.
그 광경에 왜 이토록 잠이 쏟아지는지 모를 일이었다. 나는 그대로 제어할 수 없는 수마에 빠져들었다.
다시 눈을 뜬 건 사위가 제법 어두컴컴해진 저녁이었다.
꿈조차 꾸지 않고 달게 잤다. 정신을 차리니 팔 한쪽에 묵직한 붕대가 감겨 있었다. 낮에 손톱으로 긁다가 끝내 피를 본 상처 부위였다. 손가락을 움직이는 게 어색해 괜히 손을 쥐었다가 펴는 걸 반복했다.
“일어났으면 가죠.”
서다원은 잠들기 직전에 보았던 그 위치에 여전히 서 있었다. 그는 손목에 걸친 시계를 한 차례 확인하고 날 부축했다. 잠든 사이에 뽑아 갔는지, 링거를 세우는 거치대는 온데간데없었다.
수액을 맞고 나니 확실히 몸이 전보다 가벼웠다. 이제는 서다원이 없어도 더듬더듬 걸을 수 있었다. 어깨를 빌려주려는 그를 만류하고 나는 천천히 발을 내디뎠다.
차를 세워 둔 주차장에 다다를 때까지 누구 하나 입을 열지 않았다. 굳이 대화를 주고받을 사이가 아니라고 생각했다. 어쩌다 폐를 끼치게 되었으나, 나는 서다원이 거북스러웠다. 가능하면 같은 공간에 있는 걸 피하고 싶었다.
“오메가는 몸이 재산인데 왜 자해까지 했어요?”
그런 말로 서다원은 뜬금없이 물꼬를 텄다. 그와 동시에 우리를 태운 세단이 매끄럽게 주차장을 빠져나갔다. 운전대를 쥔 손이 툭툭, 춤을 췄다. 마치 대답을 기다리는 것 같았다.
자해라면 팔의 상처를 염두에 두고 한 말일 터다. 뭐라 해 줄 말이 떠오르지 않았다. 자해라고 인식하고 한 행동도 아니었으며, 주태승이 몸속에 뿌린 체액이 빠지는 기분이었다고 말하기도 같잖았다.
“뭐가 그렇게 분했어요.”
왜 저렇게 궁금한 게 많지. 일방적인 이 담화가 피로했다. 나는 끝내 입을 닫기를 택했다.
서다원은 곁눈질로 나를 흘끗 바라보았다가, 혼자 이야기를 계속했다.
“내가 여진서 씨였으면 조금 더 영리하게 굴었을 거예요.”
그러고 보니, 이 사람은 주태승과 밀애를 나눴다는 기사가 난 적이 있었다. 정말 잤을까. 그 미친 새끼한테 따로 마음이 있어서 지금 나한테 이러나. 나는 무심결에 스친 의문을 툭 뱉어 냈다.
“주태승 좋아하세요?”
“뭔……. 사고가 편협하네요.”
백미러에 비친 서다원의 표정이 나빴다. 질렸다는 듯이 미간을 확 구기는 게, 화난 고양이와 비슷했다.
“어디서 뭔 소리를 들었는지 몰라도 상사로서는 좋아하죠. 일 잘하고, 돈 많이 주고. 오늘은 좀 이상한 거 시키긴 했는데.”
나도 서다원을 처음 보았으니, 원래 이런 뒤치다꺼리가 주 업무는 아닐 것이다. 많은 사람들 중에 하필 이자에게 나를 맡긴 걸 보면 확실히 주태승은 악질이었다. 머리에 뭐가 들어 있는지 모를, 소름 끼치는 뱀 새끼.
서다원은 얼마간 조용히 차를 몰았다. 그러나 침묵은 길지 않았다. 슬슬 창문을 통해 익숙한 동네의 풍경이 지나갈 무렵, 그는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냥 살아요, 여진서 씨.”
“…….”
“죽는 것보다는 그게 나아요.”
아.
나는 서다원에게 동정받고 있었다.
***
집 앞에 도착한 건 8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
분명 도착은 했으나, 나는 안으로 들어가지 못했다. 본능적인 거부감이 들어 문을 열 수 없었다. 심장이 세게 뛰고 호흡이 빨라졌다. 보이지도 않을 만큼 좁은 틈 사이로 주태승의 페로몬이 빠져나오고 있는 것만 같았다.
“뭐 해요?”
옆에 선 서다원이 답답하다는 투로 물었다. 나는 별다른 대답 대신 조용히 주먹을 쥐었다. 이 사람은 내가 지금 어떤 심정으로 서 있는지 평생을 가도 모르겠지. 그런 일을 겪어 본 적이 없을 테니까.
“이러다 여기서 또 쓰러지겠네.”
서다원은 보다 못해 앞장서 도어 록에 손을 올렸다. 그러나 그는 곧 놀란 표정을 지으며 뒤로 물러났다. 비밀번호를 누르지 않았는데도 문이 열렸기 때문이었다.
안에서 나온 건 가정부였다. 의아했다. 분명히 퇴근해서 없을 시간일 텐데. 그녀는 나가는 순간까지 누군가에게 계속해서 허리를 굽히다가, 나를 발견하고 은근하게 웃어 보였다.
“좋겠어요. 맛있게 먹고 푹 쉬어요.”
대체 뭘 먹으라는 거고, 뭐가 좋겠다는 건가.
꺼림칙하고 불안한 기운이 스멀스멀 밀려들었다. 당혹스러워하는 사이 서다원은 나를 실내로 밀어 넣었다. 가정부의 웃음소리, 엘리베이터에서 나는 잡음 따위가 순식간에 사그라들었다. 뒤를 돌아봤을 때는 이미 현관문이 굳게 닫혀 있었다.
최대한 신발장을 보지 않으려 고개를 숙였다. 하얀 바닥 타일을 보자, 또 이 장소에서 당한 일들이 단편적으로 떠올랐다. 입구에서부터 거미줄처럼 늘어진 주태승의 페로몬이 상념을 부채질했다.
집이 쓸데없이 넓었다. 보기 싫은 현실로부터 벗어나 얼른 꿈속으로 도망쳐야 하는데. 나는 손바닥으로 코와 입을 틀어막은 채 걸음을 재촉했다. 머릿속에는 얼른 방으로 들어가겠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니, 뛰어서라도 그렇게 했어야만 했다.
“어딜 그렇게 바쁘게 가.”
뒤에서 들려온 목소리에 의해 나는 억지로 멈춰 섰다. 저 남자가 있으면 공기의 흐름부터가 달라진다. 방을 채운 모든 것들이 바늘이 되어 나를 찌르는 것만 같았다.
나는 시선을 떨군 상태로 신음했다. 실내화 밑창이 단정하게 바닥을 스치는 소리가 들렸다. 음습한 페로몬이 점차 가까워지고 있었다. 무의식중에 속눈썹이 잘게 파들거렸다.
“병원 보내 놨더니 이런 걸 달고 오고.”
주태승은 그렇게 말하며 붕대가 감긴 팔을 세게 쥐어 챘다. 아물지 않은 상처에서 저릿한 아픔이 번졌다. 저절로 밭은 숨이 흘러나왔다.
“아…….”
내가 힘들어하거나 말거나, 무심한 손길은 붕대를 여민 테이프를 뜯어 냈다. 힘을 잃은 붕대가 하늘하늘 풀려 살갗을 간질였다. 주태승은 느슨해진 천을 거리낌 없이 잡아당겼다. 뒤이어 나타난 거즈까지도 그의 손을 거쳐 사라졌다.
허연 살갗 위를 긁은 상처가 적나라하게 드러났다. 노란 소독약 사이에 거무튀튀한 피딱지가 앉은 모양새가 보기 흉했다. 내 팔을 눈으로 훑은 주태승이 짧게 혀를 찼다.
“지랄을 해 놨네.”
이게 누구 때문에 일어난 일인데. 울컥하는 마음이 솟아 그대로 팔을 당겨 빼 버렸다. 주태승은 의외로 쉽게 나를 놓아주었다. 나는 그의 뒤에 있는 소파를 노려보며 물었다.
“이 시간에 왜 계세요?”
“…….”
“저녁에 들어온 적 없잖아요, 평소에는.”
주태승과 몇 년을 함께 지내면서 그가 이 시간에 집에 온 건 처음이었다. 늦은 밤에 들어와 나를 취한 뒤, 내가 일어나기 전에 나간다. 그게 저 남자의 행동 양식이었다. 물론 기분에 따라서 며칠을 괴롭히는 날도 비일비재했지만.
좌우지간 주태승이 돌아오기에는 이른 시각이었다. 그리고 나는 그게 달갑지 않았다.
“여진서.”
주태승은 질문에 대답하는 게 아니라, 넌지시 내 이름을 불렀다. 마치 내가 어떤 행동을 가장 큰 위협으로 느끼는지 아는 사람 같았다. 그는 대화의 주도권이 넘어가게 두지 않았다. 이름을 불린 것만으로도 나는 저 남자가 두려웠다.
“식탁 가서 앉아.”
“네?”
너무 난데없는 요구였다. 내가 어리둥절한 기색으로 우두커니 서 있자, 주태승은 무표정으로 재촉했다.
“진짜 백치가 됐나. 가서 앉으라고.”
부엌에 뭐가 있나? 가면 뭘 하려고 그러지? 길지 않은 순간에 여러 생각이 머리를 스쳤다. 내가 혼란스러워하는 사이에 주태승은 나를 지나쳤다. 나는 너른 등판을 바라보다가 뒤를 따랐다. 어차피 선택권은 없었다.
부엌에 가니, 아직 따뜻해 보이는 식사가 차려져 있었다. 이래서 가정부가 늦게까지 남아 있던 거였구나. 나는 식탁을 흘끗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그런데 무언가 이질감이 들었다. 말로 설명하기 어려웠으나 분명히 보통과는 달랐다.
이 불편함의 출처를 찾기 위해 나는 접시 위를 바쁘게 살폈다. 그리고 조금 후에 깨달았다.
이상한 건 음식의 종류였다.
하나부터 열까지, 죄다 평소에는 오르지 않는 종류의 반찬이 접시에 담겨 있었다. 미역국, 연근조림, 잉어찜, 삶은 두부. 화룡점정은 식탁 가운데 덩그러니 담긴 석류였다. 저 피처럼 붉은 과실은 다산의 상징이었다.
석류뿐만이 아니다. 미역국도, 연근도, 잉어도. 죄다 임산부에게 좋기로 유명한 음식이었다. 접시에 담긴 반찬 하나하나가 명백한 목적을 담고 있었다. 발끝까지 피가 차게 식는 느낌이었다.
주태승이 직접 요리했을 리는 없고, 아마 가정부에게 따로 언질을 준 모양이다. 그녀가 한 ‘좋겠다.’라는 말이 어렴풋이 떠올랐다.
안 그래도 없던 식욕이 깨끗하게 달아났다. 허기는커녕 도리어 구역질이 치밀었다. 식탁에 주태승 몫의 밥은 놓여 있지 않았다. 오롯이 나만을 위해, 그의 씨앗을 위해 차려진 밥상이라는 뜻이었다.
이 미친 새끼는 정말 내가 애라도 낳아 줬으면 하는 건가. 범인의 상식이 통하는 놈이 아니었다.
“먹어.”
내 맞은편에 앉은 주태승이 나지막이 말했다. 나는 숟가락도 들지 못하고 가만히 어깨를 떨었다. 진짜 제정신이 아닌 사람과 함께 있는 기분이 들었다. 너무 속을 알 수 없어서 무서웠다.
왜 이러는 거지, 나한테 대체 왜…….
통째로 양념에 파묻힌 잉어와 눈이 마주쳤다. 저걸 어떻게 먹어야 하는지도 몰랐다. 이렇게 반찬이 많은데 어느 것 하나 입에 대고 싶지 않았다.
“자리가 불편해서 안 먹나?”
저 남자는 이미 다 알 것이다. 내가 밥을 왜 안 먹는지, 지금 어떤 심정인지. 나는 입술을 꽉 깨문 채로 그를 바라보았다. 주태승의 입매가 한가하게 곡선을 그렸다. 그는 내 반응을 즐기는 듯 보였다.
“이리 와.”
주태승이 손가락으로 가리키는 곳은 다름 아닌 자신의 허벅지였다. 다시 말해, 어린아이처럼 무릎에 앉아 밥을 먹으라는 소리였다. 당연히 죽을 만큼 싫었다. 진심으로 살의가 일 지경이었다.
“무슨, 말이에요.”
“여진서는 항상 두 번 말하게 하네.”
뒤이어 주태승은 눈 하나 깜짝하지 않고 말했다.
“윗입 말고 다른 쪽으로 먹고 싶어서 그래?”
그냥 하는 말이 아니라, 충분히 실행으로 옮길 사람이었다. 그는 늘 이런 식으로 나를 움직이게 만들었다. 본인은 손가락 하나 까딱하는 법이 없었다. 굴욕감과 수치심은 나의 몫이었다.
따르기 싫었다. 주태승의 무릎에 앉아 밥을 먹느니, 차라리 죽어 버리고 싶을 정도로. 하지만 반항하기에 그는 너무 큰 벽이었다. 썩고 깨진 계란으로 바위를 치는 것과 비슷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그냥 잠자코 밥을 먹는 편이 나았겠다. 나는 뒤늦은 후회를 곱씹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당장 엎어지면 코가 닿을 거리인데, 주태승에게 가는 길이 무척 고되게 느껴졌다.
이윽고 목적지에 다다랐을 때, 다부진 팔이 내 허리를 휘어 감았다. 나는 지푸라기로 만든 인형처럼 풀썩 주저앉았다. 주태승이 가진 체취와 페로몬이 뒤섞여 코로 흘러 들어왔다.
“읏.”
자연스럽게 주태승의 가슴에 기댄 자세가 되었다. 깔끔하게 정돈된 와이셔츠가 나로 인해 살짝 구겨졌다. 나는 눈살을 찌푸리며 반대쪽으로 고개를 틀었다. 엉덩이에 닿는 타인의 온기가 무척 불편했다.
주태승은 별말 없이 내게 숟가락을 들이밀었다. 윤이 나는 쌀밥 위에 통통한 생선 살이 잘 발려 있었다. 이 꼴로 선뜻 입이 열릴 리 없었다. 나는 고집스레 입술을 닫고 손길을 외면했다.
“윽, 읍.”
무언의 시위는 오래가지 못했다. 커다란 손이 우악스럽게 내 입을 벌려 음식을 구겨 넣었다. 준비가 되지 않은 상태에서 들어오는 이물 때문에 기침이 나왔다. 나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억지로 밥을 씹었다.
“잘 먹으면서 왜 악을 써.”
이게 어딜 봐서 잘 먹는 모습인가. 나는 치욕스러움에 계속 숟가락을 피했다. 하지만 이 보잘것없는 저항은 주태승의 앞에서 한낱 앙탈에 불과했다. 그는 힘으로 나를 짓눌러 강압적으로 밥을 먹였다.
한 번에 많은 양을 떠서 그런지, 몇 숟가락 먹지 않았는데 반 공기가 비었다. 그동안 밥을 거른 것에 대한 벌로는 가혹했다. 나는 한 술을 더 뜨려는 주태승의 손을 다급히 붙잡았다.
“배불러요. 그만 먹어도 될 것 같아요.”
“…….”
“화장실 가고 싶어요. 그러니까…….”
놔주세요. 마지막 말은 들릴 듯 말 듯 웅얼거렸다. 주태승은 가라앉은 눈으로 나와 밥그릇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팔에 힘을 풀었다.
자유를 얻자마자 나는 빠르게 부엌을 벗어났다. 걸음이 향한 곳은 화장실이었다. 얹힐 대로 얹힌 속을 당장이라도 게워 내고 싶었다. 급하게 먹었다는 이유도 있었으나, 가장 큰 건 주태승의 징그러운 의도였다.
음식을 토했다는 걸 알면 다시 저 상황이 반복될지도 모른다. 나는 최대한 소리를 죽이고 속에 든 걸 뱉어 냈다.
석류, 그 새빨간 석류가 자꾸만 머릿속을 맴돌았다. 석류, 아이, 임신, 주태승.
절대 안 돼.
나는 구역질하다 말고 주먹을 쥐어 스스로 배를 가격했다. 생기면 안 돼, 태어나면 안 돼, 제발. 그렇게 스스로 되뇌며 몇 번이나 살갗을 내리쳤다. 눈물이 뚝뚝 흘러 화장실 바닥에 튀어도 멈추지 않았다.
이미 창놈이었다. 여기서 씨받이까지 되기는 지긋지긋했다. 여진서로 남고 싶었다. 이렇게 살다가 죽게 되더라도, 여진서로 죽고 싶었다.
***
주태승이 만든 우리에서 그의 뜻을 거스르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눈을 뜨면 가정부가 식사를 차려 놓고 기다렸다. 메뉴는 임산부에게 좋은 음식으로 가득했다. 석류와 미역은 언제나 빠짐없이 한 자리를 차지했다. 물론 먹을 생각은 추호도 들지 않았다. 석류 알갱이만 봐도 역겨움에 속이 울렁거렸다.
가정부는 밥을 거르는 나를 보고 염려로 가득한 말을 건네고는 했다. 사장님이 신경 쓰시는데, 사장님이 아껴 주시는데, 사장님이, 사장님이. 마치 부드러운 헝겊으로 잘 감싼 칼날 같은 선의였다.
내 결식은 그대로 주태승의 귀에 들어갔다. 그는 저녁에 돌아와 나를 개처럼 다루며 밥을 먹였다. 그리고 나는 억지로 삼킨 음식들을 몰래 게워 냈다. 괴로움의 굴레 속에서 장기는 걸레짝이 되어 갔다. 이런 상황을 거치는 몸이 정상적인 기능을 해낼 리 없었다.
나는 오히려 내가 망가지기를 바랐다. 그래서 절대 아이를 가질 수 없는 몸이 되었으면 했다. 더 추락하지 않기 위한 나름의 발버둥이었다. 바닥 아래에는 심해가 있고, 분명히 심해 아래에도 무언가 있을 테니까. 그 끝에 다다르면 어떤 게 나를 기다리고 있을지 생각하고 싶지도 않았다.
시간 감각이 사라져 오늘 날짜조차 구분할 수 없었다. 나는 가만히 소파에 앉아 창문 밖을 바라보았다.
오랜만에 비가 왔다.
온종일 하늘이 어둑어둑해 지금이 몇 시쯤 되었는지 가늠하기가 어려웠다. 시간도, 날짜도 모른 채 하루하루를 보내는 꼴이 송장과 비슷했다. 주태승은 나보고 백치라고 했던가. 틀린 말이 아니다.
머리가 멍했다. 나는 손을 들어 손톱이 살갗을 파고들 정도로 세게 주먹을 쥐었다. 불그스름한 손바닥에 반달 모양의 자국이 남았다. 아픔은 느껴지지 않았다. 감각이 심하게 무뎌진 듯했다.
“왜 또 다 죽어 가고 있어요?”
문득 옆에서 사람 목소리가 들렸다. 나는 느릿하게 소리의 근원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어느새 다가온 서다원이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언제 왔어요?”
“남이 옆에 오는 것도 모르고, 정신 좀 차려요.”
“……서다원 씨 보는 거, 별로 달갑지 않아요.”
내 말을 들은 서다원이 가벼운 헛웃음을 지었다. 그가 손가락에 낀 차 키를 보여 주며 말했다.
“저도 여기 오는 거 귀찮거든요. 그러니까 빨리 용건 끝내러 가죠.”
“무슨 용건이요?”
“여진서 씨 병원이요. 피골이 상접해서 보기 안 좋아요.”
꼭 보기 좋아야 하나. 나는 건조하게 입꼬리를 비틀었다. 서다원은 익숙한 듯이 내 팔을 붙잡았다. 밀가루처럼 하얗게 질린 나와는 달리, 그는 혈색이 좋았다. 차라리 이 사람을 첩으로 들이지. 주태승은 취향이 참 특이했다.
병원에 가지 않으면 어떻게 될지 생각하다가 그만두었다. 어차피 링거를 안 맞는 방법은 없을 것이다. 불편한 실랑이를 하느니 얼른 서다원과 헤어지고 싶었다. 나는 현관으로 이끄는 그의 뒤를 따라 절뚝절뚝 걸어갔다.
“여진서 씨.”
앞서가던 서다원이 문득 나를 돌아보았다. 그는 한동안 내 얼굴을 빤히 쳐다보기만 했다. 무언가 관찰하는 것처럼, 물끄러미.
“네?”
“아니에요. 갑시다.”
짤그랑, 차 키가 부딪치는 소리가 빗소리에 섞여 들었다. 비는 도무지 그칠 기미가 없었다.
***
서다원은 처음 병원에 왔을 때와 같이 데스크의 직원에게 말을 걸었다. 나는 그동안 몇 가지 사실을 알게 되었다. 이곳은 예약제로 운영되는 고급 병원이었고, 오메가만을 전문적으로 진료하는 의사가 근무하는 듯했다.
살면서 이런 곳에 두 번이나 오게 될 줄이야. 전혀 기쁘지 않았다. 오히려 평생 와 보지 못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른다.
진료실에 들어가자 눈에 익은 의사가 나를 기다리고 있었다. 그녀는 다소 놀란 표정으로 내 낯빛을 살폈다.
“아니 무슨, 안색이 더 안 좋아졌어요.”
뭐라 대꾸할 말이 없었기에 나는 그냥 입을 다물었다. 의사는 뒤에 선 서다원의 눈치를 보다가, 한숨을 푹 내쉬었다. 곧 간호사가 은색 트레이를 들고 진료실로 들어왔다. 안에는 주사기와 바늘이 담겨 있었다.
“채혈 좀 할게요.”
그 말에 뒤에 선 서다원이 내 소매를 걷었다. 핏기가 없는 앙상한 팔이 드러났다. 링거 맞는데 피까지 뽑아야 하나. 나는 바늘이 꽂힌 주사기를 당황스럽게 바라보았다.
“따끔해요.”
잠시 후, 뾰족한 첨단이 살갗을 뚫고 들어오는 느낌이 났다. 주사기의 몸통에 새빨간 피가 주욱 들어찼다. 채혈은 순식간에 끝이 났다. 의사는 알코올 냄새가 풀풀 풍기는 솜을 구멍 난 팔에 누르며 말했다.
“한 10분 정도 걸리긴 할 텐데, 수액 먼저 맞고 계시겠어요?”
“뭐가 10분이 걸려요?”
“네?”
질문을 던진 건 나인데, 오히려 의사가 의아한 기색이었다. 그녀는 내가 아니라 서다원과 묘한 눈빛을 주고받았다. 뭔가 흐르는 분위기가 이상했다. 둘 사이에 내가 모르는 무언가 오가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럼 링거 먼저 맞고 있죠.”
서다원은 내가 의사와 더 말을 나누지 못하도록 대화를 끊어 냈다. 그가 뒤에서 어깨를 잡고 일으키는 탓에 나는 엉겁결에 자리에 섰다. 서다원은 그 길로 나를 주사실로 데려갔다.
주사실에는 간호사가 이미 수액을 준비해 놓고 있었다. 나는 마치 짐짝처럼 침대에 눕혀졌다.
“방금 뭐예요?”
“그건…….”
서다원은 내 물음에 대답하는 대신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었다. 갈수록 찝찝한 기운이 짙어졌다. 나에 관한 일을 나만 모르고 있다.
“어차피 조금 있으면 알 거예요.”
불안의 그림자가 쇄골을 타고 목덜미를 조여 왔다. 분명 실내는 서늘했으나 식은땀이 등줄기로 미끄러졌다. 따라 들어온 간호사가 표정 없이 손등에 링거 바늘을 꽂았다. 몸의 모든 신경이 심장으로 쏠린 듯, 박동이 거세게 느껴졌다.
똑, 똑. 나는 침대에 누워 떨어지는 수액 방울을 셌다. 주사실의 적막이 초조함으로 채워졌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복잡한 표정으로 서 있던 서다원이 별안간 문 쪽을 바라보았다. 발자국 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고 있었다. 이유 모를 강한 거부감이 숨을 틀어쥐었다. 문을 열고 의사가 들어오는 그 순간이 느릿하게 보였다.
의사는 단번에 내가 누운 침대까지 다가왔다. 웃고 있는 건지, 심각한 건지 모를 미묘한 형색이었다. 그녀는 먼저 수액을 더 천천히 떨어지도록 조절했다. 나는 저 입이 열리기를 기다리며 침을 꿀꺽 삼켰다.
“음, 여진서 씨.”
내 이름으로 운을 뗀 의사가 다정하게 내 팔을 쓰다듬었다. 내 불안을 최대로 고조시키는 행동이었다. 자꾸만 입이 말랐다.
“앞으로 계속 뵙게 될 건데, 그래도 링거 맞으러 오는 일은 없었으면 좋겠어요.”
“…….”
“건강 관리 더 신경 쓰셔야죠. 두 사람 몫으로요.”
두 사람? 초점 잃은 동공이 확장되었다. 멍하니 입을 벌린 나를 두고 의사는 차분히 말을 이었다.
“격한 운동 삼가시고, 몸조리 잘하세요. 초기에는 조심하셔야 해요.”
“뭐, 가…….”
대체 뭐가 초기인데.
혀가 마비된 듯 말을 듣지 않았다. 주삿바늘을 꽂은 손이 바들바들 경련했다. 귀로 듣고, 머릿속으로 이해했으나 마음은 의사가 하는 말을 받아들이지 못했다. 발가락부터 올라온 절망이 허리를 돌아 뒤통수에 진득하게 달라붙었다.
내 반응을 지켜보던 의사가 고개를 꾸벅이고 말했다.
“축하드려요. 임신하셨습니다.”
저 말은 기쁘고 즐거운 일이 일어났을 때 하는 말이다. 하지만 내게는 확인 사살로 들렸다. 아까 피를 뽑아 간 것은 임신 여부를 확인하기 위해 한 짓이었다.
그래, 그랬다. 오늘 병원에 온 건 처음부터 이러기 위해서…….
주태승이 노팅한 순간부터 어렴풋이 예상한 일이었다. 다만 그것이 실제로 일어나는 건 완전히 별개였다. 숨을 쉬는 게 괴로웠다. 공기가, 소리가, 모든 게 날 죽이는 것 같았다.
배 속에 미치도록 혐오스러운 남자의 아이가 있다. 아무리 죽으라고 빌어도, 때려도 사라지지 않았다. 이렇게 끔찍한 관계에서도 아이는 생기는구나. 이딴 걸 축복이라고 말해도 되는 건가?
안 돼. 싫어. 그만해.
“산모님? 괜찮으세요?”
아니야, 그딴 이름으로 부르지 마.
정신이 나갈 것 같았다. 아니, 어쩌면 이미 나갔을지도 모른다. 심장이 빨리 뛰다 못해 폭발할 지경이었다. 아까부터 시야가 희끄무레하게 번져 앞이 잘 보이지 않았다. 호흡이 모자라, 나는 짐승처럼 입으로 거친 숨을 쉬었다.
주태승, 당신은 도대체 나를 어디까지 끌어 내려야 만족하는 거야. 왜 하필 나한테, 왜.
내 옆에 선 의사, 날 보는 서다원, 배 속에 든 아기. 전부 다 주태승의 것이었다. 나를 둘러싼 이들 중에 여진서를 알아주는 건 아무것도 없었다. 창놈 다음은 씨받이다. 혹여 아이가 태어나기라도 하면 나는 영원히 나를 잃을 터였다. 다시는 여진서로 돌아가지 못한다.
그건 싫었다. 나는 창놈이 아니다. 씨받이는 더더욱 아니다. 주태승과 엮이지만 않았어도, 좋아하는 일을 계속하면서 살았다면, 나는.
“여진서 씨, 진정 좀 해요.”
“플루트.”
“네?”
서다원이 진정시키려는 듯 내 어깨를 내리눌렀다. 그에게 닿은 피부가 썩는 느낌이 들었다. 타인의 목소리가 음성이 아니라 파열음으로 들렸다. 애초에 귀 기울여 들을 의지도 없었다.
플루트를 연주해야만 했다. 전국 각지를 돌아다니며 공연을 해야 했다. 왜냐면 나는 여진서니까, 사랑하는 엄마의 아들이니까.
내 플루트. 지금 어디 있지.
서정후의 집에서 쓰러진 이후로 보지 못했다. 아마 여전히 거기 있을 것이다. 나는 멍하니 침대에서 내려왔다. 거추장스러운 바늘은 손으로 잡아 뜯어 뽑아 버렸다.
“미쳤어요? 갑자기 왜 이래요!”
“찾으러 가야 돼.”
“뭘 찾아요?”
서다원이 다급히 팔을 붙잡았으나, 나는 온 힘을 다해 그를 뿌리쳤다. 뇌리에 온통 하나의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플루트를 찾아야 한다. 그동안 외면하고 체념해 왔지만, 이제라도 잘 닦으면 용서해 줄 것이다.
발바닥에 닿는 바닥의 감촉이 차가웠다. 주사실을 뛰쳐나오자 멀찍이 병원의 출구가 보였다. 서정후를 만난 게 어느 방향이었지. 무작정 걸어가면 알 수 있으리라 믿었다.
사람들의 시선 따위는 무시했다. 바깥에 쏟아지는 비의 냄새가 코를 관통했다. 목적이 생기고서야 오감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그대로 병원 문을 열고 나가려고 했을 때, 강한 힘에 의해 어깨가 흔들렸다.
“하아, 혼자 어딜 간다고 그래요.”
나를 막은 건 역시 서다원이었다. 그가 뼈가 부서져라 내 어깨를 쥔 채 말했다.
“뭘 찾는지 몰라도, 그럼 같이 가요. 나 그러라고 있는 사람이에요.”
“서다원 씨도 서 씨네요.”
“그게 왜요.”
“서정후 아세요? 제 대학 동기인데, 그 친구 집에 플루트 두고 왔거든요. 아, 제가 그 친구한테 강간당할 뻔하긴 했는데 괜찮아요. 플루트만 가지고 나온다 그러면 이해할 거예요. 이번에는 별일 없을걸요.”
이쪽을 보는 서다원의 눈이 커다랗게 벌어졌다. 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그를 정면으로 바라보며 재차 중얼거렸다.
“서다원 씨 보니까 돌아 버릴 것 같아요. 주태승 생각이 나서요. 그러니까 같이 못 가겠어요. 가능하면 함께 있고 싶지 않아요. 제가 노팅당하는 거, 배가 불룩해져서 엉엉 우는 거……. 다 보셨잖아요?”
“여진서 씨.”
“뭐가 그렇게 분했냐고 물어봤죠, 더 영리하게 굴라고 했죠. 여기까지가 제 최선이에요. 지금 살아 있는 게 분해요. 서다원 씨랑 말 주고받는 이 순간이 치욕스러워요.”
내 어깨를 잡은 손에서 차차 힘이 풀렸다. 나는 얼이 나간 서다원을 두고 병원을 나섰다. 어디로 가야 플루트를 찾을 수 있는지 몰랐으나 일단 걸어갔다.
먹빛으로 물든 하늘에서 투명한 비가 추적추적 쏟아졌다. 덕분에 물을 잔뜩 머금은 속눈썹이 묵직했다. 자꾸만 눈이 감기려 했다. 호흡이 간헐적으로 끊어지는 탓에 머리가 몽롱하고 어지러웠다.
상상과 현실이 좀처럼 구분되지 않았다. 나는 그 사이에 조롱하듯 모습을 드러냈다가, 재빨리 감추는 허상을 열렬히 쫓았다.
휘청이는 걸음이 도로 한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끼익, 끽. 곳곳에서 플루트와 닮은 소리가 났다. 드디어 서정후의 집에 가까워진 걸까?
-이름이 뭡니까.
-여진서요.
-여진서.
문득 2년 전, 주태승과 처음 만났을 때 나눈 말이 떠올랐다. 그는 내 이름을 물으며 비스듬히 웃었다. 후견인의 앞이라고 긴장한 나를 지그시 바라보았다.
‘잘하네, 예쁘게.’
그렇게 말했었다. 그 이후로 들을 수 없었으나, 분명히 나를 칭찬했었다.
맞아. 나는 플루트를 잘했어. 좋아했어. 그런 나를 당신은 왜 이렇게 망쳐 버린 거야.
끼이익!
도로에서 자아내는 연주의 클라이맥스였다. 내가 그토록 찾아 헤매던 소리가 귓가에서 아주 크게 울려 퍼졌다. 그리고 나는, 더 이상 걸을 수 없게 되었다. 다리를 움직이기엔 몸이 너무 아팠다. 근근이 내뱉는 숨이 뚝뚝 끊어졌다.
곳곳에서 플루트 소리가 났다. 연습을 더 해야겠다. 이렇게 소리가 제각각이어서야, 합주를 할 수 있을까.
잠이 쏟아졌다. 오늘 너무 무리를 한 모양이다.
이제 플루트를 찾았으니 자고 일어나면 열심히 연습해야지. 작은 지방 공연부터 시작해서 해외까지 순회하는 연주자가 되어야지. 이번에는 엄마도 초대해야지. 미안하다고, 사랑한다고. 그동안 들려주지 못했던 목소리를, 꼭.
일단 지금은 자고, 조금만…….
나는 달라붙는 수마를 이기지 못한 채 눈을 감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