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03. (1) (3/14)

03. (1)

‘과학사’를 마지막으로 모든 시험이 끝났다. 그리고 이는 곧 고대하던 종강을 의미했다.

며칠 밤을 샌 채로 시험을 쳤기에 종전에는 무슨 정신으로 글자를 썼는지도 가물가물했다. 그냥 모르는 게 있으면 고민하고 아는 게 나오면 답을 썼다. 파도에 휩쓸리듯 시간을 보내고 나니, 어느새 몸이 강의실 밖으로 나와 있었다.

“아, 여진서 나왔다.”

누가 소파에 이렇게 건어물처럼 늘어져 있나 했는데 내 친구였다. 오민지는 눈 밑에 그림자를 달고 인사를 건넸다.

“시험 잘 봤어?”

“잘 모르겠어, 넌?”

“난 그냥 적당히 망한 것 같아.”

깁스를 칭칭 감은 저 다리로 시험을 치러 온 것만 해도 대단하다. 나는 오민지의 발을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그녀는 내 시선 따위는 전혀 개의치 않고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렸다.

“오늘 시험 끝난 애들 다 같이 술 먹으러 가기로 했어. 너도 갈 거지?”

“난 집에서 쉬고 싶은데.”

“미안한데 이미 너도 간다고 했다.”

그럴 거면 왜 물어본 거야.

“애들이 먼저 가서 자리 잡아 놨대. 빨리 가자.”

“메뉴 뭐야?”

“너 먹고 싶은 거 다 시켜 줄게.”

억지로 끌려가는 마당에 먹고 싶은 것도 못 먹었다면 너무 억울했을 것이다. 나는 약간 풀린 기분으로 오민지의 뒤를 따랐다. 차이가 났던 보폭은 곧 수평으로 맞춰졌다. 절뚝이느라 잘 걷지 못하는 친구를 보니 짠한 마음이 들었다.

나는 오민지의 가방을 대신 들어 주며 물었다.

“다리 다쳤는데 술 먹어도 돼?”

“몰라, 어쨌든 먹을 거야.”

술을 마시겠다고 악착같이 목발을 옮기는 모습이 조금 무서웠다. 아마 이날만을 위해 열심히 공부했을 것이다. 오민지 본인은 다리의 통증보다 정신적 고통이 더 크다고 여길지도 모른다.

우리는 천천히 학교 정문을 향해 걸어갔다. 동기들이 모이는 술집은 정해져 있었다. 복사실 앞의 삼겹살집, 아니면 골목 안 치킨집이나 정문 맞은편 퓨전 포차. 아마 걷는 방향으로 보았을 때 오늘은 포차가 아닐까 싶다.

“아, 맞다.”

열심히 걸음을 옮기던 오민지가 문득 생각났다는 듯이 운을 띄웠다.

“교수님이 너 찾으시던데, 조만간 연락 갈 듯?”

“왜?”

“뭔 공연 있다고 하셨어. 플루트 파트 넣으신다고 그랬나.”

갑자기? 방학 때 계속 누워 있으려고 했던 계획에 적신호가 들어왔다. 그다지 내키지 않아 보이는 기색을 읽은 오민지가 곧바로 덧붙였다.

“근데 잠깐 껴서 몇 곡만 연주하는 거 아니야? 다 연습해 본 곡들일걸.”

“아…….”

“아마 페이도 있을 건데, 자세한 건 교수님한테 들어.”

슬슬 포차 건물이 가까워졌다. 당장 횡단보도 건너에 불그스름한 간판이 눈에 들어왔다.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고, 오민지는 나를 달래듯이 말했다.

“이거 다 너 밀어 주는 거야. 우리 진서, 나중에 꼭 훌륭한 연주자가 되어야 해요?”

“네가 나 추천했지.”

“응.”

하여튼 오지랖은. 나는 속으로 투덜거리며 포차 안으로 들어섰다. 우리 과만 종강 파티를 하는 게 아닌지, 술집 내부는 대학생으로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었다. 가운데서 두리번거리고 있으려니 멀찍이서 나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여진서! 여기!”

확인하지 않아도 박상훈이라는 것을 알았다. 나는 오민지를 데리고 목소리가 들린 테이블로 걸어갔다. 어디서 본 듯한 얼굴들이 네 테이블 정도를 차지한 상태였다. 이름까지 아는 이는 박상훈, 오민지를 제외하면……. 서정후밖에 없었다.

그래도 대학을 4년째 다니고 있는데 이렇게 아는 사람이 적다니. 내 교우 관계에 대한 회의가 밀려왔다.

“야, 앉아. 김치찌개 시켜 놨어.”

우리 테이블은 나와 오민지, 박상훈이 전부였다. 박상훈은 사람 머릿수대로 거품이 몽글몽글 올라온 생맥주를 따랐다. 그가 황금빛으로 물든 유리잔을 치켜들고 말했다.

“첫 잔 원샷 알지?”

“그럼, 그럼.”

옆에 앉은 오민지가 능청스럽게 맞장구를 쳤다. 아직 안주도 안 나왔는데 원샷을 할 수 있을까.

좌우지간 우리는 동시에 술잔을 입으로 가져갔다. 차가운 맥주가 목구멍을 넘어가자, 더위가 씻겨 내려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날씨가 더우니까 술이 달다. 나는 잔을 떼지 않고 단숨에 벌컥벌컥 들이켰다.

본인 몫의 술을 다 마신 박상훈이 빈 잔을 채우며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충권 진짜 깐깐하지 않냐.”

여기서 말하는 이충권은 까다롭기로 악명 높은 교수의 이름이었다. 당한 게 많은 박상훈은 교수라는 호칭을 붙이지 않았다. 사실 대다수의 학생이 그를 그냥 이름으로 불렀다.

“어떤 애 실기 시험 치다가 울었잖아. 긴장해서.”

“헐, 어떻게 됐어?”

“벌벌 떨다가 연주 망쳤지, 뭐.”

“오바야.”

한참 오민지와 박상훈이 이야기꽃을 피우고 있을 때, 직원이 버너와 김치찌개를 들고 걸어왔다. 나는 김칫국물에 빠진 고기를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역시 찌개 안에 들어가는 건더기는 목살이 좋았다. 박상훈이 먹을 줄 아는 놈이라 다행이다.

“여진서는 시험 어땠어?”

질문의 화살이 나에게로 돌아왔다. 김치찌개가 끓는 것에 온 신경이 쏠려 있던 터라, 정확히 무슨 소리를 하는지 몰랐다. 나는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무슨 시험?”

“이충권. 아, 근데 괜히 물어봤다. 하나도 안 틀리고 잘하던데.”

“그냥, 계속 연습한 거니까.”

“역시 플루트 신동이야. 하긴, 콩쿠르 우승이 몇 개야.”

나이가 몇인데 신동 같은 별명을 붙여. 급하게 들이켠 맥주 때문에 얼굴에 홧홧한 열이 올랐다. 배고프다. 나는 숟가락을 들고 이제 막 끓기 시작한 김치찌개를 떠먹었다. 그 모습을 본 오민지가 기겁해서 소리쳤다.

“야, 익혀서 먹어!”

“쟤 취한 거 아니야?”

“겨우 한 잔 먹고?”

박상훈은 낄낄거리며 내 술잔을 손가락으로 톡톡 두드렸다.

“여진서 술찌잖아. 곧 귀가하실 예정.”

저게 또 사람 열받게 하네. 자존심이 상해서 하는 말이 아니라, 정말 취하지 않았다. 나는 따뜻한 김치찌개를 한 술 더 입에 넣었다. 양념과 국물이 따로 노는 느낌이 들었으나 먹을 만한 수준이었다.

“익혀서 먹으라니까. 배가 그렇게 고팠어?”

결국 오민지가 내 숟가락을 빼앗았다. 나는 갈 곳 잃은 손을 허공에서 움찔대다가, 맥주잔을 집어 들었다. 그대로 몇 모금 넘기니, 목구멍이 시원해졌다.

“네가 약 올려서 저러잖아.”

오민지가 혀를 끌끌 차는 소리가 흐릿하게 들렸다. 박상훈은 호탕한 웃음과 함께 새로운 대화 주제를 꺼냈다.

“너네 대학 졸업하고 뭐 할 거냐?”

“갑자기 그런 진취적인 이야기를 해?”

“이제 우리도 나이가 있잖아.”

저 새끼 무조건 취했다. 원래 술 취한 사람이 뜬금없는 이야기를 꺼내는 법이다. 내가 이겼다. 나는 안 취했으니까. 빈 잔만 봐도 입가에 은은한 미소가 걸렸다.

“난 교직 이수 과목 들어 놔서, 임용 준비 하려고.”

“너 선생님 하면 뉴스 나오는 거 아니냐.”

“뒤질래?”

오민지는 선생님이 하고 싶구나. 나는 느릿하게 눈을 깜빡이며 둘의 대화를 곱씹었다. 바로 앞에서 말하고 있는데 왜 잘 안 들리는지 모르겠다.

박상훈이 둥근 앞접시에 고기 기름이 뜬 김치찌개를 덜어 놓는 게 보였다. 나도 모르게 말이 먼저 튀어 나갔다.

“나도 국자 줘.”

“아니, 이거 네 거야.”

“김치찌개 못 먹어서 죽은 귀신이 붙었나.”

내가 제일 빨리 먹을 수 있어서 다행이다. 나는 이번에야말로 맛있는 김치찌개를 허겁지겁 퍼먹었다. 혀를 끌끌 차던 오민지가 말을 이었다.

“난 여진서 유학 갔으면 좋겠어. 쟤는 재능이잖아.”

“그건 맞지.”

“오메가들이 예체능에 특출하다는 말, 나 원래 안 믿었는데 여진서 보니까 맞는 것 같기도 해.”

“그래서 본인 생각은 어떤데?”

목덜미가 달아올랐다. 언뜻 유학이 어쩌고, 재능이 어쩌고 하는 단어가 귀에 들어왔다. 기회가 되면 가고 싶기는 하지만, 구체적으로 생각해 본 적은 없었다. 나도 새삼 앞으로 뭐 해 먹고살지 안 정해 놨구나.

나는 맥주를 홀짝홀짝 들이켜며 말했다.

“잘 모르겠어.”

“지금 상태로는 알아도 모르겠다고 하겠네.”

대답할 말이 생각나지 않았다. 머리가 몽롱하다. 나는 뜨끈한 눈두덩을 마사지하듯 손으로 꾹꾹 눌렀다.

그때, 뭔가 사람처럼 생긴 형체가 우리 테이블로 다가왔다.

“여긴 무슨 이야기해? 종강 파티인데 왜 너희만 따로 놀아.”

“아, 지금 테이블 순회하려고 했어.”

쟤는 누구지. 대화하는 걸 들으니 박상훈은 아는 사람인가 보다. 낯선 동기가 나를 흘끗 바라보고 말했다.

“여진서는 벌써 취했어? 아쉽다.”

“원래 술 잘 못 마셔.”

“거의 자려고 하는 것 같은데?”

“내버려 둬.”

덜컹, 의자가 밀리는 소리와 함께 박상훈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를 올려다보다가 고개를 푹 숙였다. 눈꺼풀이 무겁고 정신이 하나도 없었다.

“좀 자고 있어. 나 다른 테이블 다녀올게.”

나는 한숨을 쉬며 테이블에 뺨을 기댔다. 분명 앞으로 술은 적당히 먹자고 다짐했는데, 사실 ‘적당히’가 어느 정도인지를 모르겠다.

그래도 술에 취해서 하는 짓이 숙면이라는 게 얼마나 다행인가. 적어도 토를 하지는 않으니.

사위가 소란스러웠다. 하지만 몸을 덮쳐 오는 수마의 힘이 소음보다 강했다. 떠들어 대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렸다. 애써 졸음을 쫓아내려 차가운 맥주를 들이켜 봤으나 역부족이었다.

결국 나는 테이블에 기대 잠에 빠져들고 말았다. 가끔 눈을 뜰 때마다 맞은편에 앉아 있는 사람이 바뀌었다. 물론 그들은 잠든 나를 신경 쓰지 않았다.

한 번은 낯설지 않은 목소리가 들렸던 것도 같다.

“진서야, 자?”

“…….”

“자나 보네.”

얘가 누구더라.

아, 맞다. 서정후. 그랬었지. 이름이 서정후였다. 기억하기로 했는데 그새 까먹을 뻔했다. 그가 곁에 앉자 묘한 페로몬이 풍겼다. 미약하지만 형질을 구분할 정도는 되었다.

얘 알파인가?

그 생각을 마지막으로, 나는 다시 수마에 발목이 붙들렸다.

***

“진서 내가 데려다줄게. 상훈이 너도 취했잖아.”

뭐야, 내 발로 갈 수 있는데.

“응, 주소만 알려 줘.”

누군가 자꾸 허물어지려는 내 몸을 부축했다. 시야가 빙빙 도는 바람에 한 치 앞도 똑바로 보이지 않았다. 나는 뜨거운 숨을 뱉으며 팔을 붙잡은 사람을 밀어 냈다.

“혼자, 갈 수 있어.”

“그러다가 무슨 일 나면 어쩌려고 그래. 위험해.”

나는 뭐라 반박하려다가 말하기를 그만뒀다. 속이 울렁거려서 말이 아니라 다른 게 나올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술집의 시끄러운 잡음이 점차 작아졌다. 나는 힘겹게 다시 눈을 감았다.

“으으.”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정신을 차리자 보이는 장면이 바뀌었다. 삶은 영화가 아니었으니 내가 장소를 이동한 모양이었다. 익숙한 현관문이 시야에 들어왔다. 나를 여기까지 데려온 사람이 내 귓가에 속삭였다.

“문 열 수 있겠어?”

비밀번호 뭐였지.

나는 부들부들 떨리는 손가락을 들어 기억나는 숫자를 더듬었다. 2, 3, 8, 다음은 5를 눌러야 하는데 자꾸만 그 아래의 8이 눌렸다.

“내가 대신 눌러 줄까?”

“아니……. 근데 너 누구야?”

따져 보면 도움을 받아 놓고 너무 퉁명스럽게 말했나. 나는 아무래도 좋을 생각을 하며 계속해서 비밀번호를 눌렀다. 한 번만 똑바로 누르면 되는 것을, 답답해서 속이 타들어 갔다.

“또 까먹었네. 서정후라니까.”

아, 열렸다.

서정후고 뭐고 빨리 침대에 누워서 자고 싶었다. 나는 인기척이 느껴지는 방향으로 손을 흔들었다.

“그래, 정후야. 고마워.”

상대는 말이 없었다. 나는 굳이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집으로 들어갔다. 삐리릭, 도어 록이 잠기는 단조로운 소리가 빌라 복도에 울려 퍼졌다.

***

교수님이 나를 찾을 거라던 오민지의 말은 거짓이 아니었다.

나는 제대로 된 방학을 즐겨 보지도 못하고 학교에 불려 나가야만 했다. 용건은 이전에 들은 말과 같았다. 여름에 클래식 공연이 하나 있으니, 플루트 파트로 몇 곡 참여하라는 제안이었다.

자리를 받은 건 <오베론 서곡>, <카르멘 전주곡> 등 전부 한 번쯤 연습한 곡들이었다. 교수님은 즉석에서 연주해 볼 것을 요구했다. 그 때문에 나는 아침 댓바람부터 플루트를 불었다. 이른 시간부터 집중하려니 온갖 피로가 밀려왔다.

수난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예리한 교수님은 내 실수를 콕콕 집어냈고, 나는 혼자 남아 몇 시간을 더 연습하게 되었다. 마지막에는 오기로 버티며 취구에 입을 가져다 댔다. 나를 추천한 오민지가 그렇게 원망스러울 수가 없었다.

연습을 끝내고 나니, 시계는 어느새 오후 6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나는 플루트를 챙겨 연습실을 나섰다. 드디어 집에 간다. 도착하자마자 침대에 드러누워 자는 생각을 했다. 달콤한 상상에 젖으니 이 더위를 뚫고 걷는 마음이 조금은 가벼워졌다.

등줄기에서 땀이 삐질삐질 흘러나왔다. 나는 최대한 날씨를 의식하지 않고자 이를 악물었다. 이 와중에 주린 배가 꼬르륵 소리를 냈다. 더워 죽겠는데 배까지 고프다. 세상에 나보다 불행한 사람이 더 있을까 싶었다.

손에 든 플루트 케이스가 자꾸 미끄러졌다. 이걸 갖다 버리고 갈 수는 없었으므로 손잡이를 고쳐 쥐려던 때였다. 주머니에 넣은 휴대 전화가 묵직하게 진동했다.

아씨, 누구야.

나는 주먹을 꽉 쥐었다가 풀며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화면에 찍힌 건 모르는 번호였다.

“여보세요?”

[여진서 씨.]

목소리를 들은 순간, 나는 눈을 비비고 액정을 다시 확인했다. 내가 이 사람 번호를 안 저장해 놨었구나. 주태승의 오피스텔에서 헤어진 후로 대략 일주일 만의 연락이었다.

상대가 상대인지라 괜히 주변의 눈치가 신경 쓰였다. 나는 휴대 전화를 귀에 댄 채 인적이 드문 곳으로 걸어갔다.

“아, 네.”

[지금 어딥니까?]

“저 학교인데요.”

[종강했을 텐데 학교는 왜 갔어요.]

“……그러게요.”

진짜 나 왜 이러고 있지.

[오늘 뭐 했는지는 만나서 듣죠.]

“네?”

나는 가만히 서서 방금 주태승과 나눈 대화를 되짚었다. 주고받은 몇 마디 문장에 오늘 만나겠다는 말은 없었다. 왜 마음대로 정하고 난리야. 나는 생각한 그대로를 입으로 내뱉었다.

“저 오늘 그럴 기분 아니에요. 피곤하고, 배도 고프고, 땀도 많이 났고…….”

[그럴 기분이 뭔데요.]

“정말 몰라서 물으세요?”

주태승은 무미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기대해 준 건 고마운데, 섹스 하자고 전화한 거 아닙니다.]

아무리 수화기 너머라지만, 밖에서 그런 단어를 들으니 뺨이 후끈거렸다. 나는 침을 꿀꺽 삼키고 지나가는 사람이 없는지 두리번거렸다. 다행히 골목에는 나뿐이었다.

어이가 없다. 섹스밖에 모르는 것처럼 굴면서 왜 오늘은 정상적인 사람인 척하냐는 말이다. 애초에 서로 함께한 건 그것밖에 없는 관계인데, 내 사고의 흐름이 자연스러운 거 아닌가?

나는 부끄러움을 간신히 억누르고 물었다.

“그럼 뭔데요?”

[여진서 씨 데려가고 싶은 곳이 있어서.]

“저를요?”

섹스 하려고 전화한 게 아니라고 하니, 설마 호텔은 아닐 거고. 이 사람이 얼마나 대단한 곳에 데려갈지 감도 잡히지 않았다. 수상하다. 게다가 어딘가를 가기에는 너무 지치고 허기졌다. 나는 부정적인 기운이 뚝뚝 묻어나는 어조로 말했다.

“저 집에 가서 밥 먹으려고 했는데요.”

[저녁 아직이에요?]

“네.”

잠시 대화에 공백이 생겼다. 그러나 얼마 지나지 않아, 주태승에 의해 통화는 다시 이어졌다.

[소고기 어떻습니까?]

소고기……?

저 말을 흘려듣기에는 지금 너무 배가 고팠다. 나는 조심스럽게 소고기를 먹은 지 얼마나 지났는지를 헤아렸다. 엄마랑 같이 살았을 때 먹은 게 가장 최근이었으니, 족히 1년은 넘었다.

“그, 혹시 사 주시나요?”

굉장히 속물 같았지만, 반드시 거쳐야 할 절차였다. 만약 소고기를 내 돈으로 사서 먹게 된다면 며칠간은 라면만 먹고 살아야 한다.

주태승은 내 말을 황당하다는 듯이 받아쳤다.

[그럼 대학생한테 돈 받습니까?]

“…….”

[학교라고 했죠. 데리러 갈게요.]

돈 많은 게 좋긴 좋구나. 소고기를 사 준다는 걸 보면 엄청 나쁜 놈은 아닐지도 모르겠다는 안일한 생각이 들었다. 내 안에서 주태승에 대한 인상이 더 복잡해졌다.

나한테 허락 없이 페로몬 샤워하고, 의미 모를 소리 해 대고, 섹스를 잘하고, 맛있는 걸 자꾸 먹이는 사람.

아, 여전히 그를 모르겠다.

***

주태승은 이때까지 늘 산해진미만 먹고 살아왔을 것이다. 그게 아니라면 가는 곳마다 이렇게 맛이 좋을 리 없다.

오늘 먹은 소고기는 여태껏 먹은 고기 중에 최고였다. 아니, 고기가 아니라 음식을 통틀어 으뜸일지도 모른다. 입에 넣자마자 솜사탕처럼 사르르 녹는 요리가 실존하는 줄 처음 알았다. 거의 문화 충격에 가까운 맛이었다.

이번에도 주태승은 내가 고기를 먹는 모습을 빤히 구경했다. 그 부담스러운 시선이 차츰 익숙해지고 있는 게 아이러니했다. 뭐, 귀한 고기를 공짜로 먹은 대가라고 생각하면 버티지 못할 일도 아니었다.

“근데 저희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나는 부른 배를 쓰다듬으며 운전석에 앉은 주태승을 바라보았다. 그는 무표정으로 정면을 주시하다가, 고개를 돌려 나와 눈을 마주쳤다. 오랜만에 봐도 변함없이 서늘한 얼굴이었다.

“가 보면 알아요.”

“아.”

“저녁은 입에 맞았습니까?”

“네, 감사해요. 비싼 고기 사 주셔서.”

순간적으로 주태승의 눈이 가늘어졌다. 뒤이어 혼잣말에 가까운 듯한 음성이 들려왔다.

“별말을 다 들어 보네. 여진서한테.”

밥 사 준 사람한테 고맙다는 말도 못 하나? 나는 주태승을 이해하기를 포기했다.

두 사람을 실은 자동차가 밤거리를 부드럽게 달려 나갔다. 다소 의외였다. 워낙 돈이 많은 사람이라 스스로 운전하리라고는 예상하지 못했다.

나는 빠르게 풍경을 바꾸는 창문 밖으로 시선을 돌리고 입을 열었다.

“저기요.”

“네.”

“혹시 뭐라고 부르면 돼요?”

이미 주태승 씨라고 실컷 불러 놓고 이제 와서 이런 질문을 던지는 건 우스운 일이었다. 하지만 그건 다시는 안 볼 사이라고 여겼기 때문에 한 행동이었다. 어쨌든 앞으로 몇 번을 더 보기로 한 사이에 호칭 정리는 필요하다고 생각했다.

더 솔직히 말하면 조금 찔려서 그랬다. 몇 살은 어린 사람이 주태승 씨, 주태승 씨 거리면 아무래도 예의 없어 보이니까.

“어떻게 부르고 싶은데요.”

“직책으로 부를까요?”

“뭐, 본부장님?”

본부장님.

나는 혼자 입 모양으로 주태승을 칭해 보았다. 그리고 당황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거부감이 속에서 치달았기 때문이었다.

본부장인 사람을 본부장이라고 부르는 게 이렇게 기분 나쁠 일인가?

나조차 내가 왜 이 호칭을 받아들이지 못하는지 알 수 없었다. 나는 미간을 좁히고 내 입술을 매만졌다. 꼭 단어 자체에 마법이 걸린 듯이 입이 굳어 버렸다. 본부장님이라고 부르느니, 차라리 안 부르는 게 나을 정도로.

의식하지 못한 사이에 직장 내 수직 관계를 싫어하게 됐나? 물론 말도 안 되는 이유라는 건 알았다. 하지만 이런 게 아니면 이 원인 모를 불쾌함이 설명되지 않았다.

나는 입에서 손을 떼지 못한 채로 말했다.

“……그냥 주태승 씨라고 부르면 안 돼요?”

“그렇게 해요.”

정말 개의치 않는 모양이었다. 애초에 호칭에 관심이 있기나 한지 모르겠다. 나는 못내 마음에 걸려 더듬더듬 웅얼거렸다.

“기분 나쁘시면 다르게 부를게요.”

“이름 불러요.”

주태승은 그대로 입을 다무는 듯하더니, 뒤늦게 한마디를 덧붙였다.

“내가 지금 여진서 씨 고용한 것도 아니고.”

다행이다. 본부장님이라 부르라고 뻗대지 않아서. 나는 안도의 한숨을 내쉬고 운전석을 곁눈질했다. 주태승은 낮게 가라앉은 눈으로 앞 유리를 바라보고 있었다.

약간의 시간이 흘렀다. 차체가 조금씩 속도를 줄여 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아마 목적지에 다다른 게 아닌가 싶었다. 대체 어디를 데려온 건지 궁금한 마음에, 나는 고개를 빼꼼 내밀어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꽤 높고 하얀 건물이 시야에 들어왔다. 하지만 그게 전부였다. 외관만 봐서는 저게 뭐 하는 곳인지 알기 어려웠다.

“거의 다 온 거예요?”

“네.”

“어디 가는 건데요?”

도착한 마당에 계속 숨기려는 건 아니겠지. 우리를 태운 승용차는 벌써 건물 앞쪽에 마련된 주차장에 들어서는 중이었다. 주태승은 한쪽으로 치우친 핸들을 느슨하게 풀어 복귀시키며 답했다.

“갤러리.”

“갤러리, 요?”

전혀 예상치 못한 답변이 튀어나왔다.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떠 의문을 표했다.

“왜요? 아니, 이 시간에 열기는 했어요?”

“하나씩 물어보지 그래요.”

점점 느려지던 차가 마침내 움직임을 멈췄다. 주태승은 무덤덤한 얼굴로 기어를 바꿔 주차를 마쳤다. 그가 몸을 가로지른 안전벨트를 풀고 말했다.

“갤러리는 여진서 씨랑 섹스 말고 할 만한 거 생각하다가 떠오른 거고.”

“저 그림 볼 줄 모르는데요.”

“사진전이라 그림보다 직관적일 겁니다. 별로 여진서 씨한테 훌륭한 예술적 소양을 기대하는 거 아니니까 편하게 봐요.”

묘하게 기분이 나쁘다. 나는 차에서 내리는 주태승을 따라 조수석을 벗어났다. 시간이 늦은지라 건물 전체가 어두웠는데, 특이하게도 1층에만 환한 조명이 들어와 있었다. 내 어리둥절한 기색을 읽은 주태승이 약간 뜸을 들이다가 말을 이었다.

“시간은……. 그냥 보고 싶으면 보는 거지.”

저 말에서 일반적으로 허가되지 않는 것을 되게 했다는 인상이 강하게 들었다. 이 갤러리, 혹시 LS 계열사에서 운영하는 곳인가. 나는 앞서가는 주태승의 뒤를 쫓으면서 건물의 외관을 눈에 담았다. 화려한 장식이 없는데도 고급스러운 분위기가 풍겨 왔다.

주태승과 함께 내부에 들어선 나를 기다리는 건, 상당히 의외의 장면이었다. 이 넓은 로비에 사람이 아무도 없었다. 나는 머릿속에 떠오른 의문을 그대로 전했다.

“왜 아무도 없어요?”

“그러면 안 됩니까?”

“직원까지 없는데요. 누가 들어가서 뭐 훔쳐 가면 어떡해요.”

내 말을 들은 주태승이 실소를 터트렸다. 눈은 웃지 않는데 입으로 바람 소리만 내는 게, 진심으로 기가 막혀 보였다.

“오지랖 부리는 건 기특한데, 신경 쓸 거 없어요.”

반응을 보면 내 생각보다 건물 보안이 잘 되어 있나 보다. 나는 민망함에 주변을 둘러보는 척, 고개를 틀었다. 살다 살다 텅 빈 갤러리를 다 와 본다. 늘 사람이 북적북적한 보통 전시회장과는 사뭇 다른 느낌이었다.

주태승이 걸어가는 방향은 제1 전시관이 있는 쪽이었다. 입구의 패널에 사진전에 대한 간단한 설명이 쓰여 있었다. 유명한 외국 사진작가가 해외를 돌며 찍은 사진들이라나. 글만 봐서는 어떤 분위기일지 명료하게 와닿지 않았다.

첫 번째 자리에 걸린 것은 노을이 지는 바닷가에 한 소녀가 서 있는 사진이었다. 그 아래, 조그맣게 나라와 지명이 눈에 들어왔다. 이건 태국에서 찍은 사진인 듯했다.

나는 사진 옆의 시멘트 벽을 손가락으로 더듬으며 물었다.

“태국 가 보셨어요?”

“네.”

“맛있는 거 많아요?”

“모르겠습니다. 일하러 간 거라.”

태국이라는 나라에 대해 아는 상식이 별로 없었기에, 내 사고는 곧장 음식으로 연결되었다. 졸업하면 그동안 모은 돈으로 세계 음식 기행이나 떠날까. 시답잖은 생각을 뒤로하고, 나는 다음 사진으로 시선을 옮겼다.

이번에는 에메랄드빛 바다 위를 둥둥 떠다니는 소년의 사진이 보였다. 바닷물이 이런 빛깔이 날 수도 있구나. 나는 작게 감탄을 토해 냈다. 역시 세상에는 아직 보지 못한 풍경이 아주 많았다.

정신없이 사진을 들여다보고 있으려니, 뒤에서 주태승이 말을 걸어왔다.

“바다 좋아해요?”

“보는 건요. 주태승 씨는요?”

“사람 많은 걸 별로 안 좋아해서.”

“아, 저도요.”

이런 데서 공통점이 있네. 호불호가 있는 걸 보면 주태승도 사람은 사람인가 보다. 그건 그렇고, 사람 많은 게 싫다면서 잘도 무역 회사에서 일한다. 필연적으로 여러 인물을 만나야 하는 업종일 텐데.

잘 모르겠다. 나는 주태승에 대한 호기심을 접어 두고 다른 사진을 둘러보았다.

어딘가 신비한 분위기의 호수에서 낚시를 하는 남자, 평화로운 광장을 배경으로 꽃을 파는 여자, 감자를 먹으며 어색하게 카메라를 들여다보는 가족. 사진은 대부분 특출하게 화려한 풍경보다는 개인의 소박한 일상을 그려 낸 장면이 많았다.

주태승의 말대로, 사진이었기에 작품이 주는 메시지가 직접적으로 와닿았다. 지구 반대편에는 이런 삶의 형태도 있다. 실제로 해외 이곳저곳을 다녀 보지 못한 게 아쉬워졌다.

외국이라고는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나와, 여러 국가를 돌아다니는 주태승. 당장 한 달 식비를 걱정하느라 고기는 꿈도 못 꾸는 나와, 소고기 정도는 아무렇지 않게 살 수 있는 주태승. 같은 공간에 있는 두 사람의 차이가 너무도 컸다. 보통 사람과는 다른 세상에 살고 있는 듯한 그는, 왜 자꾸만 나를 곁에 두고 싶어 할까.

나는 사진을 보다 말고 뒤에 선 주태승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는 비스듬히 고개를 틀고 이쪽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사진 안 보세요?”

“보고 있습니다.”

“저 말고, 사진이요.”

“여진서 씨는 사진, 난 여진서 씨. 각자 보고 싶은 거 보면 되는 거 아닙니까?”

굳이 전시회장까지 와서 그런 짓 하는 이유가 뭔데요. 나는 목 끝까지 올라온 말을 삼켰다. 주태승은 나와 눈을 맞추다가, 가만히 입을 열었다.

“해외는 가 봤어요?”

“아뇨, 집안 형편이 여유롭지는 않아서요.”

엄마는 수입이 안정적인 교사였으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외벌이로는 가정을 유지하기 빠듯했다. 하물며 내가 악기를 배우는 탓에 해외여행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엄마도 세상을 떠나고 혼자가 된 이후엔 여행을 갈 의지가 없었고.

나는 서글퍼지려 하는 마음을 다잡으며 걸음을 옮겼다. 그때, 갤러리의 가운데 걸린 사진이 시선을 사로잡았다.

“아, 이거.”

아는 풍경이었다. 사진은 오스트리아의 크리스마스 마켓을 담고 있었다. 잘 만든 장난감처럼 아기자기한 서양식 건물에 꽂힌 깃발, 하늘을 수놓은 불꽃이 동화 같은 분위기를 자아냈다.

내가 직접 간 건 아니지만, 대학교 2학년 시절에 박상훈이 다녀온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나는 반가운 마음에 사진을 가리키고 말했다.

“여기 제 친구가 다녀왔어요. 겨울에 가서 구경하고 있는데, 처음 보는 사람이 거리에서 술을 줬대요.”

“…….”

“평소에는 엄청 대범하게 구는 애거든요. 근데 무서워서 바로 도망갔대요, 쫄보도 아니고.”

그 덩치에 꽁지가 빠지도록 뛰는 모습을 상상하니 다시 생각해도 웃기다. 나는 터져 나오는 웃음을 참지 못하고 키득거렸다. 그런데 정작 이야기를 듣는 청자는 조용했다. 괜히 아는 곳 나왔다고 너무 떠들었나. 나는 슬그머니 입매를 늘어뜨리고 주태승의 눈치를 살폈다.

그리고 다음 순간, 커다란 손이 올라와 느닷없이 내 뺨을 감쌌다. 놀란 정신에 나도 모르게 신음이 샜다.

“읏.”

“여진서 씨.”

“왜, 왜요?”

피부를 감싼 손바닥이 뜨거웠다. 나는 겨우 눈동자를 굴려 주태승의 손과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았다.

갑자기 왜 이래.

“한 번 더 해 봐요.”

“뭘요?”

“웃는 거.”

“웃겨야 웃죠…….”

주태승은 또 이상한 요구를 시작했다. 이런 상황에서는 입가에 걸린 미소도 싹 달아나게 생겼다. 그에게 잡힌 볼이 파들파들 떨려 왔다. 거절하고 싶은데, 저 눈빛을 봐서는 다시 웃어 줄 때까지 절대 놓아줄 것 같지 않았다.

나는 미약하게 경련하는 입꼬리를 애써 위로 올렸다. 아마 자연스러운 웃음이 아닌, 잔뜩 일그러진 모양새일 터다. 주태승의 표정이 점점 심각해졌다. 그는 재차 잠긴 목소리로 나를 불렀다.

“여진서 씨.”

“네?”

“지금 섰는데, 해도 됩니까?”

뭘 해?

순식간에 끓어오른 열기가 귓바퀴까지 화끈하게 치달았다.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주태승을 위아래로 훑었다. 진짜 미친 사람인가? 대체 방금 대화의 어느 맥락이 그의 성욕을 건드렸는지 알 수 없었다.

“여, 여기서 될 리가.”

“그럼 입 벌려 봐요. 자빠뜨리진 않을 테니까.”

“아니, 으읍.”

내가 뭐라 말을 꺼내기도 전에 주태승은 입술을 짓눌러 왔다. 키스가 아니라 더듬는 것에 가까운 접촉이었다. 그는 젖은 혀로 내 입꼬리를 끈질기게 핥아 댔다. 간지러운 데다가 민망하기 짝이 없었다. 주태승을 이해하는 건 이미 엊저녁에 포기했으나, 이건 너무 돌발적이었다.

이러다가 입술이 사라지겠다고 느껴질 때쯤, 혀가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밭은 숨을 내뱉으며 턱을 달싹거렸다. 예민한 속살을 건드리는 혀끝이 야속했다. 다리에 조금씩 힘이 풀려 갔다.

“흐, 으응.”

나도 모르게 주태승의 옷깃을 꽉 감싸 쥐었다. 그는 멱살을 부여잡은 내 손을 겹쳐 잡고 키스에 열중했다. 혀가 내 것과 엮여 들자 심장이 쿵쿵 뛰었다. 미친놈이면서 이렇게 잘할 건 뭐야. 혀뿌리가 빨리는 감각이 과하게 자극적이었다.

주태승은 그렇게 만족할 만큼 혀를 맛본 후에야 입을 떼어 냈다. 투명한 타액이 입술 사이에 거미줄처럼 늘어졌다. 나는 기진맥진하여 그의 가슴에 뺨을 붙였다.

“갤러리 오길 잘했네.”

“뭐가요.”

“그런 게 있어요.”

“따라가기 너무 벅차요. 주태승 씨 또라이 같아요.”

급격히 피곤해졌다. 사진전이고 뭐고, 누워서 자고 싶었다. 나는 지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집에 갈래요.”

“데려다줄게요.”

이번에는 굳이 거절할 마음이 안 들었다. 정확히 여기가 어딘지도 모르겠고. 나는 주태승에게 기댄 채로 전시관을 빠져나왔다. 직원들이 아무도 없어서 천만다행이다.

“당분간 출장 가 있을 것 같은데.”

“그래요?”

“보고 싶으면 먼저 연락해요.”

그럴 일이 있을지 모르겠지만,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거렸다.

***

“그럼 가 볼게요.”

나는 운전석에 앉은 주태승을 등지고 안전벨트를 풀어냈다. 골목길을 비추는 가로등 아래, 날벌레들이 폴폴 날아다니는 게 보였다. 벌써 10시가 넘었다. 여름에는 밤만 되면 벌레가 극성을 부린다.

“……다음엔.”

문을 열어 나가려고 했을 때, 뒤에서 주태승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어정쩡하게 고개를 돌려 그를 바라보았다.

“상스러운 목적으로 만나고 싶은데.”

주태승은 눈 하나 깜빡이지 않은 채로 그런 말을 뱉어 냈다. 심지어 웃고 있는 것도 아니라서 농담인지, 진담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나는 질린 표정을 굳이 감추지 않았다.

“생각해 보고요.”

대답은 안 들어도 상관없을 것 같았다. 나는 얼른 손잡이를 당겨 조수석을 벗어났다. 내내 코끝에서 맴돌던 주태승의 체취와 페로몬이 서서히 옅어졌다. 내가 내려도 검은 세단은 여전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가는 방향으로 정확한 주소를 알아내려는 건 아니겠지.

나는 괜히 눈을 가늘게 뜨고 차체를 노려보다가, 빨리 가라는 의미에서 손을 흔들었다. 주변이 어두워 주태승이 나를 보고 있는지는 확실치 않았다. 내 노력이 무색하게 차는 요지부동이었다.

“에휴.”

됐다, 그냥 가자. 빙 돌아가면 주태승이 아니라 올빼미가 와도 이 빽빽한 빌라촌에서 내가 사는 집을 구분하기는 힘들 것이다.

가까운 길을 두고 돌아가려니 지루했다. 나는 노래라도 들을 심산으로 주머니를 뒤적거렸다. 딸려 나온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자, 문득 화면에 표시된 세 건의 문자 알림이 눈에 들어왔다.

「야 여진서」 오후 8:45

「저기요」 오후 9:30

「문자 보면 빨리 답장 좀」 오후 10:03

메시지는 전부 오민지로부터 온 것이었다. 저렇게 재촉할 시간에 그냥 용건을 같이 보내는 게 낫지 않을까. 나는 가로등 불빛에 의지해 걸으며 무슨 일이냐는 답장을 보냈다.

오민지는 절대 양반은 못 되는 성격이었다. 문자가 전송되자마자 휴대 전화 액정이 전화 수신 화면으로 바뀌었다. 나는 한숨을 푹 쉬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야, 너 왜 이렇게 전화가 안 돼?]

“밖이라.”

[밖? 우리 말고 친구도 없으면서.]

속상하게도 맞는 말이었다. 씁쓸한 심정에 나도 모르게 입꼬리가 아래로 내려갔다.

“그래서, 왜 전화했는데?”

[아.]

오민지가 뜸을 들이는 동안, 나는 멀찍이 보이는 빌라와의 거리를 눈대중으로 가늠했다. 걸어서 5분 정도 걸리려나. 피곤한데 그냥 집 앞까지 태워 달라고 하는 편이 나았을지도 모르겠다.

[우리가 곧 졸업이잖아. 이번이 마지막 방학이란 말이야?]

밤이라 아주 덥지는 않아서 그나마 다행이다. 빠른 걸음으로 걷자, 붉은 벽돌이 장식된 빌라가 점점 가까워졌다.

[그리고 진서가 학교생활을 성실하게 하지 못해서, 인맥이 넓지 않잖아? 그래서 말인데.]

조금만 있으면 집이다. 나는 멍한 눈을 빌라에 두었다가, 허공을 훑었다가 하며 비틀비틀 걸어갔다. 그러던 중에 빌라 옆 골목을 보게 된 건 순전히 우연이었다.

저게 뭐지?

거무스름한 인영 같은 것이 내가 사는 빌라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야, 너 듣고 있어?]

“으응.”

[그럼 나 계속 말한다?]

오민지에게는 미안하지만, 좀처럼 통화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나는 잘 보이지도 않는 그림자를 관찰하기 위해 오만상을 찌푸렸다. 체격을 보면 남성에 가까운 듯했고, 한여름인데 옷으로 몸을 꽁꽁 싸매고 있었다.

[요약하면 졸업을 앞둔 동기들끼리 한번 놀러 가자는 이야기야.]

남자의 고개가 향한 방향을 따라 내 시선도 올라갔다. 1층과 2층은 아니고, 3층보다 더 높은 곳. 4층? 아니야. 각도를 보면 그보다 더 위를 보고 있는 듯했다.

[아예 다른 지역 가는 건 부담스럽잖아. 근데 서울 근처에도 갈 만한 펜션이 꽤 많더라고?]

설마 5층인가. 나도 모르게 침이 꼴딱 넘어갔다. 남자가 보고 있는 5층의 저 위치는 내가 사는 집이었다. 슬슬 그와의 거리가 좁아졌다.

뭐 하고 있냐고 물어봐야 하나? 하지만 기분 탓일 수도 있는데. 만약의 경우에는 단지 이사할 예정인 사람이 외관을 구경하러 온 것일 수도 있었다.

[차로 한 시간도 안 걸린다더라. 박상훈이랑 서정후가 면허 있으니까, 둘이 차로 움직이면 될 것 같아.]

“…….”

[또 대답 안 하네! 너 진짜 죽을래?]

“아, 어.”

[죽겠다고?]

“아니, 미안.”

하마터면 친구를 살인자로 만들 뻔했다. 나는 뒤늦게 오민지의 말에 귀를 기울였다. 분명히 펜션이 어쩌고 했던 것 같다.

[아무튼 너도 가는 거야, 알았지?]

“어디를?”

[이게 진짜, 입 아프게 설명하니까!]

나도 사람인지라 죄책감을 느꼈다. 대화를 소홀히 한 건 사실이기에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나는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잠깐 다른 생각 좀 하느라…….”

[됐어. 넌 그냥 다음 주에 박상훈이 데리러 가면 짐만 챙겨서 나오면 돼.]

“꼭 가야 하는 거지?”

[어.]

여태껏 오민지가 세운 계획 중에 내 신변을 위협한 일은 없었으니까 괜찮으려나. 나는 상대가 보지 못한다는 걸 알면서도 고개를 끄덕였다. 침묵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오민지의 말투가 약간 누그러졌다.

[너 종강 파티 때 혼자 자고 있는 거 보고 내가 얼마나 가슴이 아팠는지 알아? 우리 진서, 친구가 없어서 저러고 있구나.]

그냥 취해서 잔 건데.

[이번 기회에 과 애들이랑 좀 친해져라. 어차피 사회 나가면 또 봐야 하잖아.]

“응.”

[그래, 그럼 끊는다? 다음 주에 보자.]

번개처럼 걸려 온 전화는 그와 비슷한 속도로 빠르게 끊어졌다. 한차례 폭풍이 지나간 느낌이었다. 나는 오민지와의 통화를 마무리하고, 빌라 근처를 다시 살폈다. 사람 형체는커녕, 개미 한 마리조차 보이지 않았다.

너무 피곤해서 헛것을 봤나. 눈을 비비고 다시 봐도 비치는 풍경은 같았다.

“뭐야.”

아무래도 정말 잘못 본 모양이다. 괜히 꺼림칙한 느낌을 떨쳐 내며, 나는 빌라 안으로 들어섰다.

-2권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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