04.
언뜻 나를 둘러싼 모든 일이 잘 풀려 가는 듯했다.
주태승과 마음이 통했고, 다음 날의 수강 신청도 성공적으로 마쳤다. 그리고 건강한 상태로 퇴원했다. 여기까지는 더할 나위 없이 호재의 연속이었다. 다만 내게는 한 가지 과제가 더 남아 있었다.
퇴원 후, 나는 곧장 동네에서 가장 오래된 부동산을 찾았다. 가능하면 다시는 원래 살던 집으로 돌아가고 싶지 않았다.
내가 정한 새 보금자리의 조건은 간단했다. 적당한 보증금과 월세에, 빠르게 입주가 가능하며, 학교와 가까울 것. 하지만 불행히도 중개사는 내가 제시한 기준을 듣자마자 인상을 찌푸렸다. 안 그래도 개강이 바짝 다가와 매물 자체가 별로 없다는 이유였다.
중개사가 컴퓨터를 뒤져 가며 소개해 준 방들은 자꾸 한 가지씩 부족했다. 도보로 등교가 가능하면 월세가 너무 비쌌고, 월세가 적당하면 아예 대학가가 아니었다. 간신히 두 조건을 전부 충족하는 방을 찾아냈다 싶으면 아니나 다를까 그 방은 이미 나갔다.
예상은 했으나 개강 시즌에 방을 구하는 건 하늘의 별 따기였다. 결국 나는 하루를 날린 채 걸음을 돌릴 수밖에 없었다.
밤에는 박상훈의 자취방에서 잠을 청했다. 그가 흔쾌히 곁을 내어 줘서 참 다행이었다. 오메가라는 형질 때문에 찜질방에서 지내는 건 꿈도 꾸지 못했다. 자는 사이에 어떤 일이 일어날지 모르니.
멀쩡히 집이 있는데 남에게 신세를 지는 꼴이 우스웠다. 그날은 서정후의 머리를 몇 대 쥐어박는 꿈을 꿨다. 너 때문에 이게 무슨 고생이냐고.
계속 친구에게 민폐를 끼칠 수는 없었기에 날이 밝자마자 나는 다른 부동산을 찾았다. 오늘은 기필코 내 방을 마련한다. 박상훈이 챙겨 준 요구르트를 마시며 결의를 다졌다.
나는 중개인을 만나자마자 또박또박 원하는 조건을 나열했다.
“보증금은 오백 정도 생각하고요, 월세는 사십 아래요. 학교 근처였으면 좋겠어요.”
“월세 너무 아끼는 거 아니야, 학생?”
“돈이 없어요.”
방 구할 때는 똑똑한 척해야 하는데 벌써 바보같이 말해 버렸다. 내 말을 들은 중개인이 심드렁한 표정으로 마우스를 딸깍거렸다.
“한 오십은 잡아 보지.”
“돈이 없는데…….”
나는 앵무새처럼 돈이 없다는 말만 반복했다. 하지만 정말 돈이 없는데 어떡하라는 말인가. 월세는 다달이 하늘로 날아가는 돈이다. 차라리 올렸으면 보증금을 올렸지, 월세는 아껴야만 했다.
물론 그렇다고 보증금을 파격적으로 올릴 수 있는 건 아니다. 천만 원까지는 가능하겠으나 그 정도로 월세에 유의미한 영향을 주기는 어려울 것이다.
서울에서 집 구하기가 참 팍팍했다. 나는 다 마신 요구르트병을 손가락으로 득득 긁어 댔다. 중개인은 입술을 쭉 내밀고 모니터를 들여다보았다가, 수첩에 무언가를 끄적였다.
“몇 개 나온 게 있긴 한데, 지은 지 좀 됐어.”
“괜찮아요.”
“그럼 일단 보기라도 해 봐요.”
중개인이 키홀더를 주머니에 쑤셔 넣으며 일어섰다. 나는 그를 따라 졸래졸래 부동산을 나섰다. 오래되고 투박한 소나타 한 대가 우리를 이끌었다. 중간에 차가 꺼져 버릴까 봐 불안했다.
첫 번째 매물은 멀지 않은 곳에 있었다. 중개인은 먼저 붉은 벽돌 빌라의 계단을 내려갔다. 나는 멀거니 주변을 둘러보며 깨달았다. 여기는 반지하구나.
방은 반지하 중에서도 채광이 좋지 않아 사위가 어두컴컴했다. 천장 구석과 바닥에 곰팡이가 핀 게 보였다. 살고 싶은 욕구가 뚝 떨어졌다. 나는 의미 없이 변기 물을 내리고 말했다.
“반지하는 좀 그래요.”
“그 예산에 좋은 집은 못 찾아.”
“벽에 곰팡이 피었어요.”
“집주인한테 말하면 도배해 줄 거야.”
여기 살다간 내 몸에도 곰팡이 피겠구먼. 내가 미온적인 반응을 보이자, 중개인은 한숨을 쉬며 개미굴 같은 원룸으로부터 등을 보였다. 아직 하나밖에 보지 않았는데 벌써 피로가 밀려왔다.
다음으로 본 집은 옥탑방이었다. 5층 높이를 계단으로 올라가야만 하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하지만 현관문을 열고 가장 먼저 보인 생물이 문제였다.
바닥을 바쁘게 돌아다니는 바퀴벌레를 보니 심장이 차게 식었다. 나는 집에 들어가지도 않고 고개를 저었다. 이번엔 중개인도 이해했는지 별말이 없었다.
뒤이어 본 매물들은 앞선 것들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다. 곰팡이가 피었고, 수압이 시냇물 같았으며, 벌레가 살았다. 다시금 전에 지내던 집이 참 좋았다는 게 실감 났다. 그럴수록 서정후에 대한 분노가 부글부글 끓었다.
건물이 이렇게 많은데 내 몸 하나 붙이고 살 곳이 없다. 중개인도, 나도 몇 시간의 강행군으로 지쳐 버렸다.
“이 방이 마지막이야.”
“네.”
“돈 없으면 너무 따지지 말고 적당히 눈 낮춰.”
안 그래도 많이 내려놓았다. 그냥 등 붙이고 잘 곳만 있으면 계약할 생각이었다. 나는 중개인과 함께 마지막 집에 들어섰다.
기대치가 한껏 낮아져서 그런지 꽤 괜찮은 방처럼 보였다. 허름한 외관과는 달리 바닥이나 벽지 따위가 꽤 깔끔했다. 흠이 있다면 방이 복도처럼 세로로 길었고, 정말 내 몸을 뉠 공간 정도밖에 없다는 것이었다.
나는 무감각한 눈으로 방을 둘러보았다. 사실 워낙 좁아터졌기에 이곳저곳을 볼 필요가 없었다.
“여기가 오백에 삼십오. 이 정도면 컨디션 나쁘지 않아, 학생.”
“그러네요.”
이 정도 선에서 타협을 봐야 하나.
영 시원찮은 표정으로 방을 보고 있을 때였다. 주머니에 넣어 둔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나는 발신인을 확인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어딥니까?”]
“집 보고 있어요.”
[부지런하네요.]
이렇게 진심 없는 칭찬을 들은 건 처음이다. 나는 중개인을 피해 열린 현관문 쪽으로 걸어갔다.
[어제도 부동산 갔다더니, 허탕 쳤고?]
“네.”
[편한 길 두고 왜 사서 고생을 해요. 하여간 말도 징그럽게 안 듣지.]
돈 많은 알파가 내 마음을 어떻게 알겠어. 나는 피로한 눈을 비비며 말했다.
“근데 지금 집 계약할 것 같아요.”
[마음에 들어요?]
“별로 안 드는데, 힘들어 죽겠어요. 그냥 아무 데서나 살면 되지 않을까요.”
[사진 찍어서 보내 봐요.]
귀찮은데……. 나는 잠시 전화기를 귀에서 떼고 대충 방 안을 찍었다. 작아서 한 앵글에 담기 용이했다. 주태승 덕분에 엉겁결에 장점을 하나 찾아냈다.
내가 보낸 사진을 본 주태승이 고저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무슨 신발장에서 살려고 하네.]
옆에 중개인 있다고요, 아저씨. 험한 말을 한 건 주태승인데 내가 눈치를 보게 되었다. 다행히 들리지 않았는지, 중개인은 휴대 전화를 만지작거리고 있었다.
[내버려 두려고 했는데……. 지금 다시 생각해 봐요.]
“뭘요?”
[거기서 살 건지, 내 집에서 같이 살 건지.]
“그건 부담스럽다니까요.”
아무리 애인 비슷한 관계가 됐어도 덜컥 동거부터 하기는 싫었다. 동성 간을 떠나서 알파와 오메가 사이다. 결혼할 것도 아닌데 어떻게 같이 살아.
[같이 사는 게 부담스러워서 그래요?]
“네, 좀.”
[그럼 같이 살지 맙시다.]
뭐라는 거야?
[성북동에 노는 집 하나 있어요. 거기서 지내요.]
주태승이 가진 집이라면 반드시 그의 오피스텔만큼이나 좋은 곳일 것이다. 듣자니 위치도 학교에서 멀지 않다. 나는 혹하는 마음을 애써 억누르고 대답했다.
“너무 잘해 주시는 거 아니에요?”
[친구랍시고 모르는 새끼 집에서 지내는 꼴도 보기 싫고, 쥐 좆만 한 방에서 새우잠 자는 꼴도 못 보겠는데 어떡합니까.]
쥐 거시기가 그렇게 클 리가 없는데. 내가 쓸데없는 생각을 하는 동안, 주태승은 차분하게 말을 이어 나갔다.
[어차피 빈집입니다. 거기 여진서가 들어와서 살든, 깽판을 치든 내 경제력에 전혀 영향 없어요.]
‘저 때문에 주태승 씨가 손해 보는 것 같아서 못 살겠어요.’라는 말이 쏙 들어갔다. 상대가 돈이 정도껏 많아야 저런 소리도 하는 법이다. 주태승이 가진 돈은 아마 내 상식의 범주를 넘어설 것이다.
그래도 매번 받기만 하는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나름 좋아하는 사람인데 내가 해 줄 수 있는 게 뭐가 있을까. 나는 통화하다 말고 가만히 고민에 빠졌다.
플루트 불어 주면 기뻐하려나? 시끄럽다고 치우라는 거 아니겠지.
“저기, 학생? 어떻게 할 거야.”
뒤에 서 있던 중개인이 내 어깨에 손을 얹고 물었다. 이제 퇴근하고 싶으신가 보다. 나는 황급히 휴대 전화에 대고 속삭였다.
“저 끊어야 될 것 같아요.”
[주소 보냈으니까 생각 잘해요. 미련하게 굴지 말고.]
아니, 뭔 간다고도 안 했는데 주소를 보내? 나는 입꼬리를 떨떠름하게 비틀고 휴대 전화를 내려놓았다. 이제 통화를 끝냈으니 화가 난 중개인을 상대할 차례였다. 나는 열심히 눈동자를 굴리며 입을 열었다.
“그, 어…….”
“내가 볼 때 여기보다 좋은 집 없어. 다른 부동산 가도 마찬가지야.”
“일단 고민 좀 해 보고 연락 드릴게요.”
중개인의 눈매가 순식간에 구겨졌다. 진짜 죄송해요. 나는 도망치듯 방을 빠져나왔다.
***
성북동 카밀팰리스에 도착한 건 늦은 저녁이었다.
나는 한적한 길목에 우뚝 선 빌라를 가만히 올려다보았다. 부자 동네는 집 사이의 간격이 이렇게 넓구나. 새삼 어울리지 않는 사람이 된 것 같아 어색했다.
주소까지 보내 준 정성이 있으니 구경이나 하자는 마음이었다. 나는 주태승이 알려 준 호수 앞에 어정쩡하게 서서 비밀번호를 입력했다. 삐빅, 비싼 빌라는 도어 록 해제 음도 달랐다.
비어 있다는 말이 사실인지, 집에는 인기척이 없었다. 대리석으로 보이는 현관 타일을 밟자 머리 위에서 밝은 빛이 쏟아졌다. 나는 숨을 죽이고 내부를 바라보았다. 분명 살아 있지도 않은 집이 묘한 위압감을 풍겨 왔다.
나는 신중하게 나아가 거실 불을 켰다. 빈집이라는 게, 사람만 없다는 뜻인 모양이었다. 언제든지 들어와 살아도 될 정도로 내부에는 웬만한 수준 이상의 가구가 갖춰져 있었다.
드넓은 거실에 자리 잡은 소파가 편안해 보였다. 하지만 나는 선뜻 앉지 못하고 그 주변을 서성거렸다. 이상하게 기시감이 든다. 평생 이런 집은 근처도 가 본 적이 없으면서 왜 이런 기분이 드는 걸까.
기시감이 익숙함을 뜻하는 건 아니었다. 집 안을 거닐 때마다 속이 불편했다. 말로 표현하기 어려운 복잡한 감정이었다. 가구나 구조가 낯이 익긴 했지만, 결코 편안한 느낌은 아니었다.
내 안의 소시민이 본능적으로 거부감을 표출하는 건가 싶었다. 나는 영 찝찝한 기분으로 욕실에 들어갔다. 기시감은 이곳에서도 마찬가지였다.
전에 드라마에서 봤나?
그럴 가능성은 적었다. 재벌이 돈 놀음하는 내용은 좋아하지 않는다. 나는 고뇌에 잠기면서도 꼼꼼히 손과 얼굴, 발을 씻었다. 먼지를 개운하게 닦아 내자 더욱 피로가 짙어졌다. 종일 고생하며 돌아다녔으니 무리도 아니었다.
너무 지쳐서 예민해진 걸 수도 있겠다. 나는 주태승에게 도착했다는 문자를 보내고 침실로 들어섰다. 방 하나가 내 자취방 몇 개는 합쳐 놓은 크기였다.
“으.”
침대를 마주하니 저절로 신음이 나왔다. 이번에는 불편한 정도가 아니라 강한 거부감이 일었다.
진짜 왜 이래, 미쳤나. 죽을 때까지 부자는 못 될 팔자를 타고난 듯했다. 어이가 없다. 그럴 거면 주태승이 데려간 호텔에서도 싫었어야지, 왜 이 집에서만 이러냐는 말이다.
피곤해서 쓰러질 것 같아도 침대에서는 자고 싶지 않았다. 나는 두툼한 이불을 질질 끌고 거실로 나왔다. 머리를 부딪친 탓에 살짝 돌아 버린 건가. 뻔히 침대가 있는데 소파가 훨씬 안락해 보인다니.
소파에 누워 이불을 둘둘 감으니 눈꺼풀이 무거워졌다. 여기서는 또 잠이 오네. 나는 한숨을 쉬며 시트에 얼굴을 파묻었다.
잠깐만 지내다가 얼른 집 찾아서 나가자.
주제도 모르고 좋은 집에서 쉬려니까 몸이 거부 반응을 일으키는 거다. 탁 트인 집에 감도는 정적이 조금 무서웠다. 나는 불을 끄는 대신 이불을 머리까지 뒤집어썼다. 주태승 냄새라도 났으면 좋겠는데, 야속한 이불은 아무 향도 풍기지 않았다.
그냥 같이 산다고 할 걸 그랬나.
떨어진 지 얼마나 되었다고, 심지어 아까 통화도 했는데 주태승이 보고 싶었다. 요즈음 계속 함께 있었던 탓에 그가 익숙해졌다. 어제는 박상훈의 집에 있어 깨닫지 못했으나, 혼자 보내는 밤은 이토록 쓸쓸한 것이었다.
***
잠결에 무언가 얼굴을 쓰다듬는 감촉이 느껴졌다.
“황당한 짓 골라서 하네, 아주.”
“…….”
“멀쩡한 침대 두고 왜 이런 데 누워 있어.”
직접 눈으로 확인하지 않아도 불청객의 정체를 알 수 있었다. 낮은 목소리와 은은한 체취는 틀림없이 주태승의 것이었다. 나는 끈질긴 수마에 발목을 붙들린 채로 옅게 미소 지었다.
보고 싶다고 생각했더니 진짜 왔다. 살갗이 닿자마자 웃음부터 나오는 걸 보면 나도 참 어지간히 이 사람을 좋아하나 보다. 물론 이 밤에 찾아온 주태승의 마음도 나와 같으리라 생각했다.
몸이 허공으로 떠오르는 느낌이 들었다. 구름 위를 걷는 꿈을 꾸고 있는 게 아니었으므로 주태승이 나를 안아 든 모양이었다. 나는 잠에 취해 그의 목에 꾸물꾸물 팔을 둘렀다.
어제는 혼자 살라고 했으면서, 양반은 못 된다니까.
역시 주태승은 나를 좋아해. 내가 몽롱한 와중에 이죽거리자, 주태승이 어이가 없다는 듯이 중얼거렸다.
“뭘 잘못 먹고 잤나.”
뭘 먹기는커녕, 어제 저녁밥도 못 챙겨 먹었는데. 반박하려고 해도 너무 졸려 입이 떨어지지 않았다. 주태승은 나를 짊어진 자세를 한 차례 고쳤다가 느릿하게 걸음을 옮겼다. 그가 이불째로 안아 주었기에 승차감이 꽤 괜찮았다.
잠시 후 주태승은 어딘가에 나를 내려놓았다. 뒤통수에 닿는 푹신함으로 침대라는 것을 깨달았다. 문득 장난기가 일었다. 이 새벽에 나 보고 싶어서 왔냐고, 그런 짓궂은 말을 꺼내고 싶어졌다.
나는 바위 같은 졸음에 짓눌려 있던 눈꺼풀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침실에 켜진 어슴푸레한 스탠드 조명이 주태승을 비췄다. 정장 차림을 보면 퇴근하고 곧장 이곳으로 온 듯했다.
방긋 웃으며 주태승의 얼굴을 제대로 마주한 순간이었다.
“주…….”
검은 침대 위에서 나를 양팔에 가두고 있는 주태승을 보자, 그대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출처를 알 수 없는 거부감이 강하게 밀려들었다. 태어나서 처음 느껴 보는 생소한 감정이었다.
나 왜 이러지.
순식간에 얼굴에서 웃음기가 사라졌다. 마음의 온기를 밀어 내고 그 사이를 비집고 들어선 건 공포심이었다. 갑자기 주태승이 무서웠다. 그것도 어깨가 바들바들 떨릴 정도로 심각하게.
내 감정을 나조차 이해할 수 없었다. 말이 되지 않는다. 방금까지 그의 방문을 그토록 반기고 있었는데, 어째서 별안간 두려워지냐는 말이다. 잠이 덜 깬 희미한 의식 속에서 공포심만이 뚜렷하게 존재를 드러냈다.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주태승과 닿은 부위를 바라보았다. 소름이 끼치고 심장이 거세게 박동했다.
아직 꿈속에 있는 건가?
“더 자요.”
주태승이 내 머리카락을 넘기며 자세를 낮췄다. 곧 그가 내뱉는 숨결이 이마 언저리에 쏟아졌다. 입을 맞추려는 것 같았다. 배 속에 일렁이던 거부감이 뾰족한 첨단을 가진 창으로 변해 치달았다. 나는 무의식중에 고개를 돌려 접촉을 피해 버렸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몸이 말을 듣지 않았다. 나는 당황스러운 마음으로 주태승을 곁눈질했다. 그는 예상치 못한 반응에 심기가 비틀린 듯했다.
“무슨 투정이야, 이건.”
이마에 머무르던 손이 미끄러져 내 턱을 감쌌다. 이번에는 주태승의 숨이 입술을 향해 떨어졌다. 목덜미에 식은땀이 배어 나왔다. 몸이 명백히 그를 거부하고 있었다.
뇌가 명령을 내리는 것보다 손이 주태승을 밀쳐 내는 게 더 빨랐다. 퍽, 둔탁한 소리가 고요한 침실에 퍼졌다.
뒤이어 내 입에서 나오는 게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로 날 선 문장이 정적을 관통했다.
“안 어울리게 이런 짓 하지 마세요, 본부장님.”
“…….”
“역겨워…….”
혀가 자아라도 가진 것처럼 통제를 벗어났다. 나 왜 주태승을 본부장님이라고 불렀지? 혼란스러운 정도를 넘어 뇌에 먹구름이 낀 듯했다. 나는 떨리는 손을 들어 스스로 입을 틀어막았다.
진짜 왜 이래.
주태승 또한 상당히 놀란 듯했다. 그는 어떠한 제스처도 취하지 않은 상태로 나를 내려다보았다. 검은 눈동자가 술렁이는 모습이 보였다. 그 아래의 입술은 무언가 말하려는 듯 달싹거렸다.
“여진, 서?”
힘겹게 꺼낸 목소리에서 강한 동요가 엿보였다. 주태승은 내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가, 이내 닿지 못한 채로 허공에 멈춰 섰다. 요동치는 눈빛은 여전히 나를 담아내고 있었다.
시선이 무언가를 확인하려는 것처럼 내 얼굴을 빠르게 훑었다. 나로서는 저 행동이 어떤 의미를 갖고 있는지 알 수 없었다. 다만 주태승이 이토록 여유를 잃은 모습은 처음 보았다. 병실에서 내가 고백했을 때와는 결이 달랐다.
나는 입술을 깨물고 눈을 질끈 감았다. 자꾸만 정신을 잠식하려 드는 낯선 감정이 싫었다. 주태승의 표정을 보고 있으려니 가슴이 뻐근하게 저려 왔다. 저 절박해 보이는, 흔들리는, 심지어 상처받은 듯한 주태승을 보면…….
혐오감이 짙어진다.
별안간 내 것이 아닌 듯한 증오가 머릿속으로 흘러 들어왔다. 나는 다시금 의식을 감싸 오는 잠기운에 끌려가며 생각했다. 아니, 생각당했다.
그런 눈으로 쳐다보지 마. 날 망가뜨린 건 당신이잖아.
***
“으응, 음.”
입가를 타고 질척한 게 흐르는 느낌에 잠이 깼다. 나는 눈을 게슴츠레 뜨고 입술을 더듬거렸다. 투명한 물이 손가락 끝에 반들반들 묻어 나왔다. 이게 뭔지 파악하는 데 다소 시간이 걸렸다.
아씨, 침 흘렸네.
나는 부스스한 뒷머리를 긁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두 명이 누워도 남아돌 것 같은 커다란 침대가 눈에 들어왔다. 어제 분명히 소파에서 잠들지 않았나. 너무 곤히 잔 탓에 직전의 기억이 흐리멍덩했다.
잘 잔 것 치고는 뭔가 나쁜 꿈을 꾼 듯한 기분이었다. 주태승이 나왔던 것 같기도 하고, 아닌 것 같기도 하고. 떠올리려 하면 새까만 물감을 끼얹은 듯 사고가 먹통이 되었다.
나는 침대에 앉아 기억을 더듬다가, 결국 포기하고 늘어지게 하품했다. 어차피 꿈이니까 상관없다. 그보다 당장 텅 빈 배가 신경 쓰였다. 집에 주워 먹을 게 있으면 좋을 텐데.
“뭐 먹지.”
맹한 혼잣말이 허공에 흩어졌다. 휴대 전화 어디에 뒀더라. 여기도 배달시키면 오나? 아침을 어떻게 해결할지에 대한 고찰이 뇌리를 채웠다.
일단 냉장고라도 열어 봐야겠다. 나는 배를 긁으며 비틀비틀 걸어 거실을 가로질렀다. 시선은 멀찍이 부엌 쪽을 내다보았다.
“어?”
뭐야.
식탁 앞에 익숙한 인영이 앉아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진짜 집주인을 보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정말 밤에 주태승이 와서 나를 침대로 옮긴 건가? 퍽 다정한 행동이었다.
평소의 예민한 태도와는 달리, 주태승은 내가 다가가는 것을 눈치채지 못한 듯했다. 그는 앞에 머그잔을 두고 골몰히 생각에 잠겨 있었다. 고소한 향이 풍기는 것으로 보아 내용물은 커피인 듯했다.
뭘 하기에 남이 이렇게 가까이 가도 모르지.
바로 옆에서 주태승의 어깨를 건드리려던 찰나였다. 그가 불현듯 이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오히려 내가 소스라치게 놀라 머그잔을 잘못 짚고 말았다.
와장창, 컵이 쓰러지며 안에 넘실대던 커피가 쏟아졌다. 삽시간에 흐른 액체가 테이블 바깥까지 넘쳐 내 옷자락을 적셨다. 나는 옷이 더 젖지 않게 뒤로 물러나 중얼거렸다.
“읏, 차가워.”
내가 말해 놓고 조금 이상했다. 커피가 차갑다. 그럼 주태승은 이게 식을 때까지 여기 앉아 있었던 건가? 딱히 휴대 전화를 보고 있지도 않았는데, 재벌은 멍때리는 것도 일반인과 규격이 다른가 보다.
주태승은 나와 쏟아진 커피를 번갈아 바라보다가, 한 박자 늦게 입을 열었다.
“여진서 씨?”
“아, 네. 언제 오셨어요?”
“밤에요.”
자리에서 일어난 주태승이 어디선가 수건을 들고 돌아왔다. 나는 그에게서 수건을 받아 커피로 물든 옷을 닦았다. 애석하게도 그 정도로는 스며든 수분을 전부 흡수할 수 없었다. 하루의 시작이 다소 찝찝했다.
“혼자 살라고 하시더니, 오셨네요?”
“네.”
묘하게 말수가 적은 느낌이다. 나는 커피 향이 풍기는 옷자락을 짜내며 말했다.
“커피 쏟아서 죄송해요. 뭐 하시는지 궁금해서.”
“딱히, 아무것도.”
주태승은 짧은 대답을 내놓고 나를 물끄러미 응시했다. 얼굴을 맴돌던 눈길이 조금씩 아래로 떨어졌다. 마지막으로 시선이 닿은 곳은 옷을 더럽힌 얼룩이었다. 그가 옅은 한숨과 함께 물었다.
“옷 있습니까?”
“아, 아뇨.”
“내일 짐 옮겨 줄게요. 오늘은 불편해도 내 옷 입고 있어요.”
체격 차이가 크긴 했으나 같은 남자니 괜찮을 것 같다. 나는 고개를 끄덕이고 부엌을 떠나 욕실을 향했다. 원래는 아침밥을 먹고 씻으려는 계획이었는데, 약간 틀어졌다. 큰 문제는 아니지만.
샤워기 앞에 가지런히 정리된 샴푸 통을 보니, 이전에 주태승이 한 말이 떠올랐다. 여기 볼일이 있으면 이 집을 쓴다고. 언제든지 들어와 지낼 수 있도록 생필품은 항상 구비해 두는 듯했다. 덕분에 바로 씻을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간단한 샤워를 마친 후, 나는 몸에 수건을 두르고 욕실과 이어진 드레스 룸 문을 열었다. 바닥에 품이 커 보이는 실내복 세트가 놓여 있었다. 옷을 펼치자 섬유 유연제에 섞여 연하게 주태승 냄새가 났다.
나는 무심코 잠옷에 코를 박았다가, 괜히 주변의 눈치를 보며 얼른 꿰입었다.
분명 동성 간이니 사이즈가 얼추 맞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오산이었다. 나는 주태승의 우악스레 뻗은 뼈대를 간과하고 말았다. 어깨선이 맞지 않아 상의는 자꾸 흘러내렸고, 바지는 허리와 아랫단을 몇 차례씩 접은 후에야 그 겨우 들어맞았다. 이 꼴로 나가기 상당히 부끄러웠다.
……그래도 다 젖은 옷을 입는 것보단 나으니까.
나는 수건으로 머리카락을 털고 쭈뼛쭈뼛 거실로 들어섰다. 그 광경을 본 주태승이 살며시 입꼬리를 올렸다. 새삼 웃는 얼굴이 참 잘생겼다. 그가 좋아하는 만큼, 나 역시 이 사람의 웃음이 좋아질 듯했다.
“남의 옷 훔쳐 입은 것 같네.”
“내 옷 아닌 건 맞잖아요.”
“이리 와 봐요.”
얌전히 말을 따르자, 주태승은 길게 늘어진 소맷자락을 한 단 접어 주었다. 살갗을 스치는 체온이 간지러웠다. 나는 민망함에 눈동자를 굴리며 물었다.
“오늘 출근 안 해요?”
“일요일.”
“아.”
“대학생들은 학교만 안 가면 시간 개념도 같이 잊나 봅니다.”
전에도 이런 대화를 주고받았던 것 같다. 나는 주태승을 따라 소파에 앉아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럼 계속 같이 있어요?”
“아마도요.”
“저 배고파요.”
우리 맛있는 거 먹어요. 뒷말은 굳이 전하지 않아도 알아들을 것이다. 나는 입을 여는 대신 기대에 차 눈을 빛냈다. 이 사람은 항상 부자들 입맛에 맞는 훌륭한 음식을 먹여 주었으니까, 오늘도 실망시키지 않을 터다.
내 말에 주태승이 가만히 자리에서 일어났다. 나는 그가 부엌으로 들어가 냉장고를 뒤적이고, 사과 한 알을 꺼내는 장면을 지켜보았다. 곧 무언가를 자르는 듯한 칼 소리가 뚝뚝 울려 퍼졌다.
얼마 지나지 않아 주태승은 접시 하나와 함께 돌아왔다. 나는 멀거니 그가 든 접시를 관찰했다. 껍질을 벗기지 않은 사과가 정직한 네모 모양으로 잘려 있었다. 사과를 이렇게 토막 내는 사람은 생전 처음 봤다. 심지어 어떻게 하면 이토록 완벽한 사각형으로 자를 수 있는지도 의문이었다.
“주태승 씨, 혹시 파산했어요?”
“무슨 소립니까?”
“아침으로 사과를 주실 줄은 몰랐어요.”
주태승은 잠자코 사과를 한 조각 입에 넣어 주었다. 보기는 이상해도 맛은 좋았다. 나는 우걱우걱 과육을 씹어 삼키며 물었다.
“저희 둘이 이거 하나 나눠 먹나요?”
“어떡할까요.”
“뭐가요? 설마 진짜 이 집 사 주고 파산…….”
“헛소리 그만하고 여진서 씨가 결정해요. 그 차림으로 나가서 먹을 건지, 건조기 돌아갈 때까지 기다렸다가 본인 옷 입고 갈 건지.”
아, 그 소리였구나. 그런데 어째 선택지가 둘 다 나가서 먹는 것밖에 없다. 나는 깍두기를 닮은 사과를 하나 더 집어 들었다.
“냉장고에 아무것도 없어요?”
“뭐가 있긴 한데, 내가 요리하는 취미가 없습니다.”
“그럼 제가 해도 되는데요.”
주태승이 보통 먹는 음식 수준에 맞출 자신은 없었으나, 나름대로 자취를 오래 했다. 한 끼 정도는 자신 있다. 나는 으깨진 과육을 꿀꺽 삼키고 발을 내디뎠다.
패기롭게 부엌으로 들어서자 거실에서 이곳을 보는 시선이 느껴졌다. 저렇게 보면 부담스럽다. 나는 곁눈질로 주태승이 앉은 소파를 힐끗거리며 냉장고를 열었다.
“어…….”
주태승의 말은 사실이었다. 뭐가 있긴 했다. 다 식자재가 아니라서 그렇지. 과일 칸에는 사과 두어 개가 들어 있었고, 그 위에는 와인 안주용 치즈가 몇 개 돌아다녔다. 불그죽죽한 고기가 있어 꺼내 보면 하몽이었다. 이 넓은 냉장고에 드문드문 들어 있는 게 전부 안줏거리였다.
이건 요리하는 취미가 있고, 없고의 문제가 아니었다. 생존 요리 기술을 가지고 있는 내가 봐도 뭘 해야 할지 막막했다. 어느 것 하나 조화롭게 어우러지는 재료가 없었다.
나는 다시 한번 소파를 바라보았다가, 가장 위 칸의 투명한 봉지를 꺼내 들었다. 버터롤이 가득 채워진 봉지였다. 이건 그냥 이대로 먹어도 괜찮지 않나. 제가 해도 된다니, 뭐니 거들먹거린 게 민망해도 별수 없다. 재료가 없는데 어떻게 요리를 해.
아침은 조금 부실하게 먹어도 돼. 오늘부터 그렇게 정했다. 나는 억지로 자신을 세뇌하며 버터롤을 접시에 쏟아부었다. 옛날에 라면으로 끼니 때우던 것과 비교했을 때, 이 정도면 임금님 밥상이다. 사과도 있으니까.
버터롤이 가득 쌓인 접시를 전자레인지에 돌리자 그럭저럭 고소한 냄새가 났다. 내가 아니라 기계가 요리했다는 부분이 다소 마음에 걸렸다. 그렇지만 원래 가사는 기계가 하는 거다. 빨래는 세탁기가 하고, 설거지는 세척기가 하고, 요리는 전자레인지가 하는 거지.
나는 뜨끈한 접시를 들고 어색하게 거실로 돌아갔다. 주태승의 눈길이 내 얼굴을 지나 널찍한 접시를 향해 떨어졌다. 그가 조용히 중얼거렸다.
“요리?”
단 두 글자에 많은 의문이 담겨 있는 듯했다. 나는 일부러 시선을 피한 채 버터롤을 테이블 위에 내려놓았다.
“저 원래 아침은 뭐 보면서 간단하게 먹거든요.”
“아, 네.”
“아침밥 많이 먹으면 속 안 좋더라고요.”
“네.”
“사과도 먹었잖아요.”
“알겠어요.”
변명 그만해. 나는 점점 추해지는 자신을 타이르고 소파에 앉았다. 소라 모양 버터롤에서 고소한 냄새가 풍겨 왔다. 도저히 한 입 먹지 않고는 참기 힘든 향이었다.
주태승과 나는 동시에 버터롤을 베어 물었다. 꽤 놀라운 맛이었다. 진한 버터의 풍미가 단번에 입 안을 부드럽게 감쌌다. 씹는 식감도 보들보들하니, 몇 개라도 들어갈 것 같았다.
주태승이 반 정도를 먹을 동안, 나는 하나를 입에 다 욱여넣었다. 검은 TV 모니터에 우리의 모습이 오롯이 반사되었다. 식사 장면이 적나라하게 비치는 게 어색했다.
“TV 켜도 돼요?”
“마음대로 해요.”
나는 새 버터롤을 집으며 리모컨을 찾아 TV를 켰다. 뭘 틀어 놔야 하지. 주태승은 드라마도, 예능도 그다지 흥미롭게 보지 않을 듯했다. 애초에 이 사람은 여가 시간에 뭘 하는 걸까?
내가 버튼을 누름에 따라 TV 속 화면이 휙휙 바뀌었다. 고기를 먹으며 웃는 개그맨들, 고운 한복을 입고 연기하는 배우들, 무대에서 열심히 노래하는 가수들. 수많은 연예인이 시야를 스쳐 지나갔다.
화면은 한 영화 채널에서 전환을 멈췄다. 주태승하고 같이 보려면 이 정도가 제일 무난하다고 생각했다. 나는 빵을 우물거리며 편안하게 자세를 늘어뜨렸다. 등받이에 기대앉은 주태승과 어깨가 맞닿았다.
이제 막 제목이 떠오르는 것을 보면 시작한 지 얼마 안 된 모양이었다. 곧 여자 주인공이 모습을 드러냈다. 그녀는 울면서 자신의 언니에게 도망가고 싶다고 이야기했다.
첫 장면치고는 자극적이다. 나는 빵을 꿀꺽 삼키고 주태승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무덤덤한 얼굴이었다. 아마 예능을 틀었어도 같은 표정이었겠지 싶다.
우리는 잠자코 영화를 관람했다. 진부한 줄거리였다. 사랑에 빠진 남녀가 집안의 반대로 괴로워하는 내용이었다. 그런데 한 가지 특이한 점이 있었다. 나는 멀거니 영화를 보다 말고 물었다.
“저건 어디 말이에요?”
배우들이 주고받는 언어가 생소했다. 발음하기도 어려워, 자막이 없으면 무슨 말인지 전혀 몰랐을 것이다.
내 물음에 주태승은 영화에 시선을 고정한 상태로 대답했다.
“독일어.”
독일어구나. 나는 혼잣말로 배우가 방금 한 말을 웅얼거렸다. 따라 하기도 힘들다. 이히, 이히리…….
가만히 TV를 보던 주태승이 내게로 고개를 돌렸다. 그가 내 입술을 빤히 내려다보며 말했다.
“Ich liebe dich immer noch.”
“뭐예요?”
“자막에 나왔잖아요. 아직도 사랑한다고.”
뜻을 물어본 게 아니었다. 무역 회사 간부 정도 되면 독일어는 유창하게 할 수 있는 건가. 발음이 배우와 완전히 똑같았다. 나는 주태승의 입 모양을 상기하며 더듬더듬 그를 따라 했다.
“이히 리베, 디, 으음.”
잘 안된다. 나는 답답한 마음에 인상을 찌푸렸다. 그러자 주태승이 불쑥 내 입술에 손을 올렸다. 그가 가운데를 엄지로 지그시 누르고 말했다.
“해 봐요.”
“이, 으.”
“혀 내밀고.”
이렇게까지 가르쳐 달라는 건 아니었는데.
나는 입술을 어물대다가 살짝 다물었다. 덕분에 치아와 혓바닥이 주태승의 손가락 끝에 닿았다. 마치 내가 그의 손을 문 듯한 모양새였다.
분위기가 조금 이상해졌다. 나는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끼며 주태승을 흘끗거렸다. 그의 눈빛 또한 방금 전과는 다른 색을 띠었다. 손가락이 느릿하게 입 안으로 파고들었다.
“읏.”
성적인 의도가 다분한 손길이었다. 이물이 혀를 문지르는 느낌이 간지러웠다. 거기에서 끝나는 게 아니라, 삽입은 옅은 흥분까지 가져왔다. 마치 구음이라도 하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도 모르게 손가락을 빨아 들이고, 정성스럽게 살갗을 핥았다. 숨이 거칠어졌다. 나는 눈을 반쯤 감고 주태승의 옷자락을 쥐었다.
“이런 건 어디서 배웠어.”
그 말과 함께 주태승이 손가락을 빼냈다. 아쉬울 틈도 없이 그가 입술을 밀어붙였다. 엄지보다 훨씬 뜨거운 살덩이가 틈을 파고들었다. 몸이 뒤로 넘어가는 것을 느끼며, 나는 주태승의 목덜미에 팔을 둘렀다.
“으, 응.”
침입한 혀가 집요하게 예민한 살점을 건드렸다. 혀끝이 입천장을 핥을 때는 등골에 소름이 돋았다. 흥분한 알파의 페로몬이 눅눅한 공기를 휘감았다. 나는 잠시 입을 떼고 헐떡였다.
“주태승 씨, 페로몬…….”
“알아요.”
“아직 아침인데, 흐으.”
“그러니까 왜 아침부터 꼴리게 만들어.”
느슨한 실내복 단추가 손쉽게 풀려 나갔다. 자세를 낮춘 주태승이 이를 세워 내 목덜미를 깨물었다. 오랜만에 자극받은 몸은 민감하게 반응했다. 나는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내저었다.
“싫은 거 맞아요? 젖꼭지는 발딱 세워 가지고.”
주태승의 손이 실내복을 젖히고 유두를 살짝 꼬집었다. 내가 어디를 어떻게 만져야 좋아하는지 너무 잘 아는 사람이었다. 나는 그의 아래에서 어깨를 비트는 수밖에 없었다.
“누가 옷 그따위로 입으래. 손가락은 누가 그렇게 빨으랬어.”
“하, 윽, 주태승 씨가, 그랬잖…….”
“아주 섹스 하자고 시위를 하지, 응?”
그런 적 없는데. 반박은 이어지지 못했다. 주태승이 손톱을 세워 유두를 은근히 굴려 댔다. 단단해진 선단이 더욱 뾰족하게 곤두섰다. 강한 쾌감에 나는 주태승의 팔을 연약하게 밀어 냈다.
그게 거슬렸는지, 주태승은 아예 내 팔을 붙잡아 위로 고정하고 유두에 입을 가져갔다. 가슴 끝이 빨리자 엉덩이가 제멋대로 들썩거렸다. 나는 소파 시트를 발로 차 대며 울먹였다.
“아으, 읏, 주태승 씨……!”
망아지처럼 군 것에 대해 벌을 주듯, 주태승이 유두에 따끔한 입질을 가했다. 곧 통증은 빠르게 쾌감으로 뒤바뀌었다. 그는 이를 세웠다가, 혀로 달랬다가 하며 성감을 자극했다.
오래 섹스를 하지 않은 탓에 가슴만으로 자잘한 절정이 밀려왔다. 사타구니 사이가 축축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눈에 이슬을 매달고 입술을 빠끔거렸다.
주태승의 손이 헐렁한 바지를 쑥 끌어 내렸다. 허리를 고정하는 고무줄은 제구실을 똑바로 이행하지 못했다. 나는 순식간에 맨다리를 내보이게 되었다. 나를 내려다본 주태승이 작게 웃으며 물었다.
“속옷은?”
“어, 없어서.”
“몸 비빌 때 알아봤는데, 진짜 안 입고 있었네.”
주태승은 그대로 민둥한 성기를 세게 쥐었다. 쿠퍼액으로 젖은 표면에서 물기 어린 소리가 퍼져 나갔다. 나는 눈물과 타액을 동시에 흘리며 흐느꼈다. 달아오른 기둥이 큰 손바닥 안에서 까딱였다.
“이 차림으로 팔랑팔랑 돌아다닌 주제에 입으로만 싫다고 하면.”
“…….”
“대체 누가 변태고, 파렴치한입니까?”
단단한 손톱이 액체를 찔끔찔끔 흘리는 구멍을 후벼 팠다. 쾌감이 극에 달해 머리가 하얗게 변했다. 나는 신음인지, 울음인지 모를 것을 정신없이 토해 냈다.
“그만 낑낑대요. 개가 친구 하자고 하겠어.”
“아, 하으, 주, 주태승 씨가, 주태승 씨 때문에…….”
진짜 다 당신 때문이잖아. 주태승은 도통 내가 말을 잇도록 내버려 두지를 않았다. 그가 빳빳이 선 음경을 살살 주물렀다.
“응, 내가 자지 만져서 그래요?”
나는 눈물을 뚝뚝 흘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주태승의 손가락이 음낭 아래, 굳게 닫힌 입구로 미끄러졌다. 그가 주변에 묻은 애액을 구멍에 살살 펴 바르고 말했다.
“솔직해서 좋네.”
히트사이클도 아닌데 지나치게 기분이 좋았다. 주태승의 페로몬이, 목소리가, 손짓이 나를 이렇게 만들었다. 오메가의 음부가 기대에 차 움찔거렸다. 주태승은 그에 부응하듯 굵은 중지를 밀어 넣었다.
“흐, 아응!”
아득바득 벌어진 내벽이 침입을 빠듯하게 맞았다. 드디어 가장 원하는 곳을 자극하는 데에 환희가 들끓었다. 주태승은 손가락을 갈고리 모양으로 만들어 주름 하나하나를 진득하게 긁어 댔다. 더는 입에서 제대로 된 문장이 나오지 않았다.
“하긴, 여진서 씨 처음에는 섹스 할 때만 만나려고 했었죠.”
“…….”
“날 딜도로 쓰려고 했잖아, 우리 강아지가.”
주태승의 손가락이 움직일 때마다 입구에 자잘한 거품이 일었다. 이미 쾌락을 감당할 수가 없는데 묘한 갈증이 일었다. 부족하다. 더 안을, 더 굵은 것으로 쑤셔 줬으면 좋겠다. 나는 그게 어떤 감각인지 알고 있었다.
“빨리이…….”
“빨리, 뭐.”
“그거요.”
“그게 뭔데, 똑바로 말해요.”
나한테 왜 이래. 나는 훌쩍이며 주태승을 흘겨보다가, 마지못해 그가 원하는 말을 들려주었다.
“자지 넣어 줘요.”
“자지 먹고 싶어?”
“으응.”
주태승의 손가락이 천천히 내벽에서 빠져나갔다. 그는 몸을 일으켜 테이블 아래에 있는 서랍을 열었다. 나온 건 콘돔이었다. 포장지를 뜯는 소리가 더운 공기를 뚫고 귓가로 흘러들었다.
“말 잘 듣네, 예뻐 가지고.”
언제 봐도 크다. 나는 주태승이 묵직하게 발기한 성기에 콘돔을 끼우는 과정을 떨리는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저게 안으로 들어온다고 생각하니, 걱정과 기대가 동시에 채워졌다.
“힘 빼요.”
주태승이 내 다리를 붙잡고 넓게 벌렸다. 애액으로 범벅이 된 입구에서 야릇한 잡음이 샜다. 나는 구멍에 맞닿은 귀두를 보고 고개를 돌렸다. 접합의 순간은 언제 봐도 부끄러웠다.
곧 손가락과 차원이 다른 부피의 이물이 입구를 비집어 열었다. 전부 들어온 게 아닌데도 허리가 빠질 듯이 뻐근했다. 고통스럽기도 하면서 한편으론 갈증이 완전히 채워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주태승의 목을 끌어안고 신음했다.
“아, 하윽……!”
뺨에 주태승이 흘리는 한숨이 쏟아졌다. 그가 내 몸 이곳저곳에 입을 맞추며 성기를 뭉근히 밀어붙였다. 내벽이 한계까지 벌어져 힘겹게 기둥을 삼켜 갔다.
“아파, 아파요.”
“참아요.”
사실 아픔보다 쾌감이 컸으나 민망함에 그런 말을 했다. 주태승 또한 그 사실을 알고 있는지 가차 없는 대답을 내놓았다. 그러나 말과는 다르게 유두를 애무하는 손길은 다정했다. 마치 쾌락으로 고통을 덮어 주려는 것 같았다.
어느 정도 내벽이 성기에 적응하자, 주태승은 느릿하게 허리를 치받기 시작했다. 이 크기 앞에 성감대라는 말은 의미를 잃었다. 뭉툭한 귀두는 느끼는 부분, 덜 느끼는 부분 할 것 없이 내벽을 전부 자극했다. 나는 손톱을 세워 너른 등을 파드득 긁었다.
“흐, 아응! 아, 하아.”
몸이 뜨거웠다. 성기를 품은 접합부는 아예 녹아 버릴 듯했다. 귀두가 내벽을 찌르는 감각이 선연했다. 주태승과의 섹스는 늘 이랬다. 이성을 잃을 정도로 끔찍하게 좋았다.
나는 무의식중에 자꾸만 호흡을 참았다. 주태승은 그를 귀신같이 알아채고 키스로 숨을 넘겼다. 정신이 없었다. 넘어오는 타액이 달았고, 아래를 쾅쾅 울리는 진동은 황홀했다.
“하아, 여진서 씨.”
“응, 으응.”
“자지는 마음에 들어요?”
마음에 들다 못해 죽을 것 같다. 나는 주태승의 목덜미에 매달려 힘겹게 입을 열었다.
“네, 네에.”
“그럼 가져요. 평생 여진서 씨 알파 해 줄게요.”
뭐지, 고백하는 건가?
“대신 너도 내 거야. 죽을 때까지 내 아래만 깔리고, 내 좆만 받아야 해.”
살벌한 집착이었다. 그러나 쾌감에 취해 있는 탓에 그다지 와닿지 않았다. 오히려 가슴이 떨리기까지 한다면 내가 고장 난 건가. 나는 똑바로 대답하는 대신 주태승을 꽉 끌어안았다.
찌걱, 구멍이 내부를 채운 성기를 세게 조였다. 주태승이 더운 숨을 흘리며 허리를 강하게 치댔다. 애액이 엉덩이를 넘어 허벅지까지 흘러넘쳤다. 쾌감을 이기지 못해 발끝이 발발 떨려 왔다.
“흐아, 아, 윽, 죽을 것, 같아.”
“또 가려고?”
“윽, 후으, 으.”
내벽을 찌르는 움직임이 빨라졌다. 정말 숨을 못 쉬겠다. 겁을 먹고 허리를 빼려 들었으나, 주태승이 골반을 단단히 잡고 있는 탓에 나는 꼼짝하지 못했다.
“주태, 주태승 씨, 제발……!”
애원해도 주태승은 허리 짓을 멈추지 않았다. 그가 부푼 내벽을 세차게 찌른 순간, 몸 안의 혈액이 전부 정수리에 몰리는 기분이 들었다. 배에 바짝 붙어 있던 성기가 울컥 정액을 내어놓았다. 절정이었다.
끝에 달한 여운으로 손가락이 움찔움찔 경련했다. 나는 넋이 나가 팔다리를 늘어뜨렸다. 숨을 쉬기 위해 납작한 가슴이 부풀었다 꺼지기를 반복했다.
이대로 잠들고 싶다. 그러나 주태승은 내가 쉬도록 편히 둘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는 내 등 아래 팔을 집어넣어 나를 일으켰다.
“응?”
문제는 아직 성기가 빠지지 않은 상태라는 것이었다. 주태승의 무릎에 앉게 된 탓에 내벽에 바득바득 귀두가 밀고 들어왔다. 딱 내 몸무게만큼 깊은 삽입이었다.
“흐아, 아윽!”
절정 직후에 받는 자극으로는 심하게 과했다. 나는 주태승의 어깨를 붙잡고 비명을 질렀다. 그는 나를 기다려 주지 않고 허리를 움직였다. 작살에 꿰인 물고기가 된 기분이었다.
“지금 하면 아, 안 돼. 너무, 흐윽.”
“왜 안 돼.”
“그, 금방 또 가요. 싫어.”
이 자세면 분명 주도권이 나에게 있어야 하지 않나. 주태승이 이끄는 대로 흔들리는 처지가 억울했다. 그래 봤자 그의 어깨를 깨무는 정도가 할 수 있는 보복의 전부였다.
주태승은 내벽을 찌르며 내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살 내음을 맡는 것 같더니, 그는 곧 선단으로 혀를 미끄러뜨렸다. 바짝 곤두선 유두가 입으로 빨려 들어갔다. 나는 울먹이며 품 안의 머리를 감싸 안았다.
“하윽, 흐윽, 으.”
체내에 흐르는 모든 수분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이러다 쓰러지겠다. 나는 주태승의 팔을 붙잡고 애원했다.
“그마안, 힘들, 어요. 응?”
“…….”
“좀만, 쉬고, 흐윽.”
그 말에 주태승이 허리를 멈췄다. 정말 그만하는 건가? 일말의 희망이 빼꼼 고개를 내밀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기대는 와장창 깨지고 말았다. 주태승은 내 몸을 돌려 TV를 마주 보게 했다. 잠시 빠졌던 이물이 재차 안을 파고들었다. 심지어 이번에는 그가 손으로 내 성기를 붙잡고 있었다.
“이, 이거 뭐……!”
나머지 손은 내 유두를 꼬집었다. 몸의 모든 성감대가 주태승에게 희롱당하는 자세였다. 주태승을 품은 내벽이 훤히 보이기도 했다. 나는 화들짝 놀라 고개를 돌렸다.
“아, 하으, 응!”
입구에서 튄 물방울이 시트에 후드득 떨어졌다. 사실은 저게 어디에서 나온 물인지 잘 몰랐다. 주태승에게 잡힌 음경도, 주태승에게 찔리는 구멍도 전부 물을 쏟아 내고 있었으니까.
주태승이 내벽 깊은 곳에 성기를 박으며 팔을 움직였다. 그런데 느낌이 이상했다. 정액이 아닌 무언가가 나올 것만 같았다. 불길한 예감이 들어, 나는 다급하게 주태승을 불렀다.
“주태승 씨이.”
“응.”
“화장실 갈래요. 쉬, 쉬 마려워요.”
“그래요.”
들린 건 분명 긍정의 대답이었으나 주태승은 놓아주기는커녕, 오히려 몸이 흔들릴 정도로 강하게 내벽을 파고들었다. 점차 성기를 자극하는 손놀림도 빨라졌다. 꼭 억지로 요의를 유도하는 듯했다.
“안 돼. 손 놔줘요, 제발!”
입이 다물어지지를 않았다. 나는 눈물범벅이 되어 절정으로 견인 당했다. 끝내 주태승은 성기를 놓아주지 않았고, 내 요도는 투명한 물을 내뿜었다. 수치심과 쾌락이 동시에 머릿속을 감쌌다.
“착하다.”
“이, 이게 뭐, 나, 오줌…….”
“부끄러운 줄 모르고 쌌네.”
주태승은 얼어 버린 나를 들어 자신의 성기를 빼냈다. 그도 함께 사정한 모양이었다. 이, 이 미친놈. 나는 휙 뒤로 돌아 주태승의 어깨를 꽉 붙잡았다.
“내가 화장실 보내 달라고 했는데!”
창피해서 차라리 죽고 싶어졌다. 더 흐를 눈물도 없다고 생각했는데, 금세 눈가가 축축하게 젖어 들었다. 주태승은 옅게 웃으며 눈물을 닦아 주었다. 그가 나를 안고 조용히 속삭였다.
“좀 놀린 겁니다. 오줌 아니에요.”
“그럼 저게 뭐예요, 진짜, 흐윽, 쪽팔려.”
“저게 뭔지도 모르고 순진하네. 우리 여진서는.”
그래서 뭐냐고. 나는 몸에 남은 기력을 엉엉 우는 데 쏟아부었다. 주태승은 내가 악을 쓰는 사이, 이마에 입을 맞추다가 긴장한 엉덩이를 살살 쓸어내렸다.
진짜 미친놈 아니야. 또라이, 변태.
나는 몇 분간 주태승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퍽 내리치다가,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눈을 떴을 때는 사위가 온통 고요했다. 빨강과 노랑, 그 중간 어디쯤의 불빛이 은은하게 시야를 밝혔다. 나는 아득한 조명에 둘러싸여 천천히 눈을 깜빡였다. 귓가에서 책장을 넘기는 소리가 들려왔다.
뜨거운 물에 몸을 담그고 난 뒤처럼 노곤한 기분이었다. 팔을 들어 눈을 비비기도 귀찮아, 나는 베개에 얼굴을 비비적거렸다. 잡스러운 움직임에 곁을 지키고 있던 이가 고개를 돌렸다.
“일어났습니까?”
“……네.”
나는 한 차례 늘어지게 하품하고 옆에 앉은 주태승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는 침대 헤드에 기대앉아 책을 읽고 있었다. 자연스럽게 시선이 표지를 향했다. ‘인간 심리의 이해.’ 저런 책도 보는구나. 그다지 남의 심리 같은 건 궁금해하지 않을 것 같은데.
창문 밖이 어두컴컴한 것을 보면 꽤 오래 잔 듯했다. 나는 어리광 피우듯이 주태승의 허리를 끌어안았다. 그가 손에 쥐고 있던 책이 허벅지 아래로 미끄러졌다.
“왜.”
“그냥요. 주태승 씨 냄새 좋아요.”
시원하면서도 포근해 주태승에게 어울리는 향이었다. 살갗에서 나는 건지, 옷에서 나는 건지는 모르지만. 나는 단단한 복부에 가만히 뺨을 파묻었다. 주태승은 손바닥으로 내 뒷목을 무심히 감쌌다.
나는 살갗에 닿는 타인의 체온을 느끼다가, 나른하게 입을 열었다.
“저 오래 잤어요?”
“적당히.”
“지금 몇 시예요?”
“저녁 8시쯤. 한나절 잤네요.”
적당히 잔 게 아니었다. 낮을 통째로 날려 버리고 말았다. 그래도 아침부터 그 고생을 했으니 정상 참작해 줘야 하는 부분 아닌가 싶다.
“그럼 주태승 씨는 그동안 뭐 했어요?”
“알아서 뭐 하게요.”
“궁금하잖아요. 계속 혼자 있었을 텐데.”
주태승의 손가락이 목덜미를 넘어 내 뺨을 가볍게 꼬집었다. 그는 거기에서 그치지 않고 엄지와 검지로 살을 주물럭거렸다. 말랑한 피부가 손안에서 이리저리 비틀렸다.
“이거 씻기고.”
“아.”
맞다. 잠들기 전에는 여러모로 만신창이였는데, 지금은 뽀송뽀송하다. 하지만 주태승이 그 꼴로 만들었으니 책임져야 하는 게 당연하다. 나는 스멀스멀 떠오르는 난잡스러운 정사의 기억을 애써 지워 냈다.
“일 좀 보고, 통화하고. 나가서 요깃거리 사 왔습니다.”
“버터롤…….”
“네가 다 먹었잖아, 그건.”
그랬나? 무의식중에 턱턱 집어 먹어서 그런지, 먹은 개수가 생각나지 않았다. 어쩐지 격한 운동을 하고 잔 것 치고 허기가 없었다.
“냉장고에 넣어 놨으니까 배고프면 먹어요.”
“별로 배 안 고파요.”
뭐 사 왔으려나. 궁금한 마음도 있었으나 지금 이 장소를 벗어나기는 싫었다. 딱 알맞게 따뜻하고, 편안하니 기분 좋았다.
새삼 주태승의 체력이 놀랍기도 했다. 몇 시간을 자고도 골골대는 나와는 태생부터 다른 사람 같았다.
아, 태생부터 다른 거 맞지. 알파랑 오메가니까. 그러고 보면 주태승이 자는 모습을 본 적이 없었다. 우성 알파는 원래 적게 자고 많이 움직이는 능력을 타고난 집단인 걸까?
내가 아무래도 좋은 생각을 하는 동안, 주태승은 책을 정리해 사이드 테이블에 올려놓았다.
“내일부터 잠깐 얼굴 비치기 힘들 것 같습니다.”
“왜요?”
“해외 출장이 있어서.”
그렇구나. 갑자기 기분이 확 가라앉았다.
나는 아쉬운 감정을 숨기지 못하고 시무룩하게 눈을 내리깔았다. 좋아하는 사람이 생기니 속이 좁아진다. 주태승은 원래 바쁜 사람이었다. 당연히 매일 만나자고 응석 부리면 안 되는 건데, 서운함이 좀처럼 가시지 않았다.
함께 있어도 보고 싶다는 게 이런 마음이구나. 나는 뒤틀린 심기를 어찌할 줄 몰라 애꿎은 이불을 구겼다. 그 모습을 본 주태승이 내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집어넣었다. 덩달아 팔과 다리가 이불 속에서 쑥 딸려 나왔다.
주태승은 나를 자신의 무릎에 앉힌 채 눈을 맞췄다. 무슨 짐짝도 아니고 사람을 자유자재로 끌고 다닌다. 나는 괜히 부루퉁한 표정을 지었다. 곧 커다란 손이 내 양 볼을 감싸 쥐었다.
“왜 또 그래요.”
“뭐가요.”
“주둥이가 붕어보다 더 나왔네.”
그 정도는 아닌데. 나는 표정을 바꾸고자 노력하며 입꼬리를 움찔거렸다. 그러나 원만히 뜻대로 되지는 않았다.
“나 출장 가는 거 싫어요?”
“…….”
“못 만나서?”
왜 이렇게 집요하게 물어봐. 나와 달리 주태승은 낯빛에 변화가 없었기에 그가 놀리려는 것인지, 순수하게 궁금해서 묻는 건지 알기 어려웠다. 나는 미간을 찌푸리며 뜸을 들이다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네.”
주태승은 답을 듣고 나를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한동안 안 이러더니 또 시작이다. 나는 그의 시선을 피하기 위해 다부진 몸뚱어리에서 하산하듯 내려왔다. 애벌레처럼 꾸물꾸물 이불을 파고드니, 뒤통수에 조용한 음성이 쏟아졌다.
“여진서한테 이런 말도 듣고, 참 사람을 들었다 놨다…….”
누가 할 소리야. 이쪽이야말로 주태승 말 한마디에 기분이 오락가락한다. 당장 지금도 그렇지 않은가.
한참 어린 티 내는 것도 아니고, 어쩔 수 없는 일에 토라지는 내가 싫었다. 어른스럽게 굴고 싶은데 잘 안된다. 나는 침울하게 눈을 감았다. 옆에서 뻗어 온 주태승의 손이 흐트러진 이불을 제대로 덮어 주었다.
“잘 자요.”
나는 가만히 몸을 웅크렸다. 발가락에 주태승의 다리가 닿았다. 그 온기가 너무 좋아서 속이 쓰렸다.
***
잡채, 어묵볶음, 콩나물무침, 삼치구이, 김치찌개.
나는 식탁에 오른 음식을 보고 얼떨떨하게 숟가락을 쥐었다. 아침으로 먹기에 더없이 만족스러운 밥상이었다. 식탁 옆에는 가정부 여사님께서 사람 좋게 웃고 있었다.
“얼른 들어요.”
“아, 네.”
일이 이렇게 된 경위는 간단했다.
늦은 아침, 눈을 뜨니 밖이 다소 소란스러웠다. 안방을 나서자 웬 50대 후반 정도로 보이는 아주머니께서 박스를 정리하고 계셨다. 박스에 들어 있는 건 내 짐이었다. 어제 주태승이 누구와 통화를 한 건지 어렴풋이 알 것도 같았다.
나는 일어나자마자 영문도 모르고 여사님과 함께 짐을 풀었다. 짐이 얼마 없었기에 작업은 금방 끝났다. 그러나 가사 도우미의 역할은 끝나지 않았는지, 여사님은 다시 부지런히 부엌을 향했다.
잠시 후, 부엌에서 온갖 입맛을 돋우는 냄새가 전부 피어올랐다. 사람이 요리를 저렇게 빨리할 수 있다는 것을 처음 알았다. 나는 멀뚱멀뚱 서서 주름진 손에서 작품이 만들어지는 과정을 직관했다.
그 결과가 이 밥상이었다. 나는 맑은 김치찌개를 숟가락으로 한술 떴다. 처음은 매콤하고, 마지막은 개운하게 끝나 깔끔한 맛이었다.
“맛있어요.”
“아이구, 양껏 먹어요. 더 있으니까.”
“네.”
역시 전문가다. 어떻게 그 짧은 시간에 이렇게 맛있는 음식을 만들지. 나는 흰 쌀밥에 삼치 살점을 발라 김치찌개에 적셨다. 입 안에 꽃이 피는 것 같다. 콧노래가 저절로 나왔다.
주태승도 같이 먹었으면 좋았을 텐데. 눈을 뜬 시점에 그는 곁에 없었다. 잘 다녀오라는 말을 하지 못한 게 마음에 걸렸다.
“뭐가 제일 맛있어요?”
“김치찌개요.”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이야기해요. 복스럽게 잘 먹네.”
조금 민망하다. 나는 뺨을 긁으며 콩나물을 우물거렸다.
“앞으로 매일 오시는 거예요?”
“응, 도련님 밥 해 줘야지.”
내가 도련님인가? 주태승은 나를 뭐라고 소개한 거지?
간단한 집안일 정도는 스스로 할 수 있는데, 버터롤 때문에 신뢰를 다 잃은 모양이었다. 물론 내 어설픈 자취 요리가 여사님 손맛에 비할 바는 아니긴 했다. 매일 이런 밥을 먹을 수 있게 되어 좋은 일이라고 봐야 하나.
“그럼 먹고 있어요. 집 오래 비웠다더니, 먼지가 좀 있더라구. 청소 좀 해야지.”
“네, 잘 먹겠습니다.”
여사님은 나를 두고 어딘가로 사라졌다. 나는 남은 밥을 김치찌개에 말아 두부와 함께 떠먹었다. 숟가락에 삼치를 올리는 것도 잊지 않았다. 정말 최고의 조합이다. 순식간에 그릇이 깨끗해졌다.
머리가 아플 정도로 차가운 물 한 잔을 끝으로 식사는 막을 내렸다. 오랜만에 아침밥을 든든하게 먹었다. 나는 부른 배를 문지르며 싱크대에 식기를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어제 주태승이 뭐 사다 놨다고 하지 않았나.
배는 불렀지만, 그가 뭘 가져다 놓았는지는 궁금했다. 나는 순수한 호기심에 의거하여 냉장고 문을 열었다.
식자재들은 여사님이 사 놓으신 듯하고, 그 아래 칸에 고급스럽게 포장된 상자들이 눈에 띄었다. 안에 들어 있는 건 빵이었다.
참나, 빵은 별로 안 좋아하는데 센스가 없다니까. 나는 크루아상 하나를 입에 집어넣고 웃었다. 짠 거 먹은 다음에 먹으니까 균형이 맞춰지는 기분이다.
입에 크루아상 하나, 손에 베이비슈 하나를 들고 나는 서재로 들어갔다. 오늘은 해야만 하는 일이 있었다.
이제 개강까지 2주가 남았다. 수강 신청이 끝났으므로, 등록을 위해서는 대학에 돈을 지불해야만 한다. 다행히 저번 학기를 차석으로 마무리해서 꽤 많은 액수를 감면받았다.
노트북을 켜고 등록금을 내는 과정이 물 흐르듯이 지나갔다. 나는 크루아상을 씹으며 멀거니 학교 홈페이지를 들락거렸다.
2학기 되면 졸업 연주회 때문에 정신없겠지. 1학기 때보다 더 열심히 해야 할 것이다. 바빠서 끌려다니다 보면 졸업하고, 졸업하면…….
잠깐만, 졸업?
뭔가 싸한 느낌이 들었다. 나는 입매를 딱딱하게 굳히고 홈페이지에 졸업 요건을 검색했다. 좋지 않은 예감이 점점 짙어졌다. 떨리는 눈동자가 다급하게 항목을 훑었다.
“아, 미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졸업 요건에 봉사 시간이 있다는 사실을.
나는 일단 베이비슈를 입에 넣고 침착하게 기억을 되짚었다. 1학년 때 요양 병원으로 봉사 활동을 가긴 했었다. 필요한 게 30시간이고, 그때 채운 게 15시간. 반절이 모자라다.
2학기 때는 졸업 연주회 때문에 도저히 시간이 날 것 같지 않았다. 개강까지 남은 2주 동안 어떻게든 이 난관을 해결해야만 한다. 짧은 시간 안에 봉사 활동 할 만한 곳을 구할 수 있을까. 근데 이렇게 급히 봉사를 하는 게 취지에 맞기나 한가?
이 와중에 베이비슈가 맛있다. 한 개 더 가져올 걸 그랬다. 나는 입에 묻은 커스터드 크림을 닦고 휴대 전화를 꺼냈다. 높은 확률로 봉사 시간을 채우지 않았을 인물이 한 명 떠올랐기 때문이었다.
무미건조한 연결음이 이어진 끝에, 상대가 전화를 받았다.
[어, 여진서!]
“상훈아.”
[너 또 목소리 왜 그래. 무슨 일 있냐?]
일이 있긴 하지. 아마 너한테도 일이 생길 거다.
“너 봉사 시간 채웠어?”
[어?]
“우리 졸업 요건에 봉사 시간 있잖아.”
[어?]
박상훈이 고장 났다. 반응을 보아하니 이 녀석도 같은 처지인 듯했다. 혼자 망한 게 아니라는 안도감과 앞으로 어떻게 할지에 대한 고민이 동시에 밀려왔다.
[야, 우리 1학년 때 했잖아.]
“그거 15시간. 졸업하려면 15시간 더 해야 돼.”
[와, 아, 씨…….]
나는 박상훈의 목소리를 들으며 열렬히 봉사 활동 사이트를 뒤적거렸다. 그냥 포기하고 학기 중에 채워야 하나. 찾아보면 교내에서 봉사 시간을 주는 행사도 있을 것이다. 참여할 시간이 날지는 둘째치고.
“그럼 일단 같이 신청은 할래?”
[아니, 잠깐만.]
“왜?”
[우리 고모 보육원 하시거든? 한번 여쭤볼게. 아마 될 듯?]
생각지도 못한 기회였다. 박상훈한테 이런 인맥이 있었을 줄이야. 전화하기를 참 잘했다. 나는 베이비슈의 잔해와 함께 한숨을 넘겼다.
박상훈과의 짧은 통화를 끊고, 나는 의자에 등을 푹 기댔다. 쿠션에서 희미하게 주태승의 냄새가 났다.
문득 그에게 어디로 출장을 가는 건지, 언제 돌아오는지 묻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올랐다. 진짜 엉망이구나. 자느라 아무것도 알아낸 게 없었다. 나는 다시 휴대 전화를 꺼내 주태승에게 문자 하나를 남겼다.
「저 봉사 활동 갈 것 같아요」 오후 12:38
이렇게만 보내면 너무 뜬금없겠다.
「보육원으로요」 오후 12:38
「출장 잘 다녀오세요」 오후 12:38
마지막으로는 미처 하지 못한 말을 전하기로 했다. 꼭 아이가 일 나간 아빠한테 보내는 메시지 같다. 나는 혼자 옅은 미소를 지으며 전송 버튼을 눌렀다.
「보고 싶어요」 오후 12:39
***
“와아, 이랴이랴.”
“히이잉.”
알록달록한 쿠션 타일 위에 엎드려, 네발로 기어 다니는 친구를 나는 안쓰럽게 바라보았다. 박상훈은 넓은 등판 위에 두 명의 아이를 짊어지고 있었다. 그와 더불어 허벅지에도 아이 한 명이 매달려 있었다. 구슬피 우는 소리에 진심이 담긴 듯했다.
“나도!”
“현준아, 형 허리 부러질 것 같…….”
“어어! 말이 사람 말하면 나빠!”
“히이잉, 끼룩끼룩.”
끼룩끼룩은 갈매기 아닌가? 반나절 만에 정신이 나가 버린 모양이었다. 나는 차마 박상훈을 돕지 못하고 구석에 웅크렸다. 괜히 오지랖 부리다가 2번 말이 될지도 모른다.
“애들 신났네.”
그 광경을 지켜보던 박상훈의 고모이자, 원장 선생님이 다가왔다. 키가 큰 게 유전인지 중년 여성임에도 나와 눈높이가 비슷했다. 그녀가 앞치마에서 요구르트 두 개를 꺼내며 말했다.
“진서 고생한다. 이거 저쪽 말이랑 먹어.”
원장님은 내 손에 요구르트를 쥐여 주고 미련 없이 자리를 벗어났다. 나는 자아를 잃은 박상훈에게 다가가 그의 어깨를 툭툭 쳤다.
“원장님이 요구르트 먹으래.”
“힝?”
“힝은 무슨, 일어나.”
박상훈이 몸을 일으키자, 매미처럼 붙어 있던 아이들이 우수수 떨어졌다. 바닥을 나뒹굴면서도 발랄한 웃음이 끊이지를 않았다. 나는 장난감을 빼앗긴 아이들이 달려들지 않게 얼른 박상훈과 책장 뒤로 피신했다.
“와, 죽겠다.”
자그마한 요구르트가 빠르게 바닥을 드러냈다. 박상훈은 음료를 단번에 들이켜고 한숨을 내쉬었다. 그에게 비할 바는 못 되었으나, 피곤한 건 이쪽도 마찬가지였다.
“내가 존나 잘못 생각했어.”
“뭐가?”
“애들 보는 봉사라 개꿀 빨 줄 알았는데 존나 착각이었네. 차라리 내가 양봉해서 꿀을 만들어 빠는 게 더 쉽겠다.”
얼마나 격한 감정을 느꼈으면 존나를 두 번이나 쓸까. 마지막 헛소리를 제외하면 어느 정도 공감되는 이야기였다. 체력적으로나, 정신적으로나 아이들과 부대끼는 건 쉽지 않았다.
요구르트 한 모금으로 목을 축이려던 때였다. 멀찍이서 원장님이 우리를 부르는 소리가 들려왔다.
“봉사자분들, 화분 가꾸기 할 거니까 나오세요.”
쉴 틈이 없다. 나는 남은 요구르트를 입에 털어 넣고 책장 밖으로 나갔다. 그러자 원장님이 손뼉을 치며 분위기를 환기했다.
“어제 우리 천사들이 화분에 예쁜 그림을 그렸어요. 그렇지요?”
“네에.”
“오늘은 거기에 씨앗 친구들을 심어 줄 거예요.”
“와아아!”
원장님이 설명하는 동안, 나와 박상훈은 마당으로 가 흙과 비료 봉투를 뜯었다. 나 유치원 다닐 때도 이런 걸 했었나. 그때 선생님들이 얼마나 고생이 많으셨을까.
손에 묻은 흙을 털고 기다리고 있으려니, 아이들이 개인 화분을 들고 쏟아져 나왔다. 저마다 손에 쥔 플라스틱 모종삽이 앙증맞았다.
“한 줄로 서서 흙 받아 가세요.”
원장님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아이들은 흙 앞에 몰려들었다. 나는 화분에 쓰여 있는 이름을 살피며 흙을 퍼 주었다. 기연이, 하람이, 성재. 흙을 받은 아이들은 삼삼오오 둥그렇게 앉아 모종삽으로 씨앗을 심은 화분을 두드렸다.
흙 배부는 빠르게 끝이 났다. 나는 박상훈과 떨어져 흙이 쏟아진 마당을 치우고, 떠드는 아이들을 지켜보았다.
그러던 중, 별안간 어디선가 서러운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으아앙!”
소리의 근원지는 마당에 자란 나무 아래였다. 나는 그 앞에 선 세 남자아이에게 얼른 다가갔다.
뭐가 그렇게 서글픈지, 한 명은 얼굴에 흙을 다 묻힌 채 눈물을 쏟아 내는 중이었다. 나머지 중 하나는 어쩔 줄 몰라 친구를 달래려 들었고, 다른 하나는 씩씩대며 화분을 노려보고 있었다.
“무슨 일이야?”
“세, 세현이가 내 화분……. 허어엉.”
뭐부터 해야 하지. 나는 짧은 고민 후에 우는 아이를 안았다.
“왜 울어?”
“세혀, 화분, 밀었어. 흐윽.”
“세현이가 동주 화분을 밀었어?”
“으응.”
혼을 내야 하는 건가? 아이에 관한 지식이라고는 전혀 없는 대학생에게 너무도 어려운 일이었다. 나는 쓰러진 화분을 세우며 세현에게 물었다.
“왜 동주 화분 밀었어?”
“몰라.”
네가 밀었는데 왜 몰라……?
“동주가 저랑 씨앗 심으니까, 세현이가 동주 화분 망가뜨렸어요.”
이유를 설명한 건 옆에 서 있던 다른 아이였다. 아무래도 친구 사이에 질투가 나서 짜증을 부린 듯했다. 나는 바닥에 쭈그리고 앉아 세현이와 눈을 맞췄다. 아직 화를 억누르지 못해 벌게진 얼굴이 불타는 고구마와 닮았다.
“친구가 좋으면 잘해 주고 아껴 줘야지, 세현아.”
“안 좋아해.”
“못되게 말하면 동주가 슬퍼할 거야.”
세현은 대답하지 않고 나를 노려보았다. 애가 눈빛이 뭐 이렇게 살벌해. 나는 약간 긴장한 채 동주와 세현의 고사리 같은 손을 가져왔다.
“먼저 세현이가 동주한테 사과하자.”
좀 괜찮은 방법을 생각하고 싶었는데, 내가 기껏 취한 행동은 지극히 평범한 어른 관점의 화해였다. 그나마 아이들이 잘 따라 주어서 다행이었다. 나는 손을 맞잡는 두 아이들을 웃으며 바라보았다.
“자, 세현아. 미안하다고……. 억.”
일이 잘 풀리는 듯하다고 느낀 건 오만이었다. 세현은 동주의 손을 잡는 것처럼 굴더니, 궤도를 틀어 나를 세게 밀었다. 덕분에 나는 바닥에 엉덩이를 찧고 말았다.
“와아아악! 선생님!”
의도치 않게 그 광경을 직관한 동주가 놀라 대성통곡을 시작했다. 뒤이어 둘 사이에 낀 다른 아이도 울음을 터트렸다. 나는 화가 난 아이 한 명과 우는 아이 두 명에게 둘러싸여 넋이 나간 표정을 지었다.
아, 집 가고 싶다.
나는 힘껏 울어 젖히는 아이들을 멍하니 감쌌다. 멀찍이서 박상훈이 뛰어오는 모습이 보였다.
“야, 여진서! 너 왜 넘어져 있냐?”
“아.”
“뭐야, 애들은 왜 울어?”
그건……. 나도 몰라.
“세현이가, 선생님 밀었어, 흑.”
“오, 여진서 유치원생한테 졌네.”
그럼 스무 살도 더 먹은 어른이 어린애들한테 이기냐고. 진이 빠져 반박할 힘도 없었다. 박상훈은 손을 뻗어 나를 일으키며 아이들에게 말했다.
“형이 들어가서 말놀이해 줄게. 뚝 그쳐.”
“진짜?”
“응.”
박상훈이 친구라서 참 다행이다. 나는 짙은 피로감에 한숨을 쉬었다. 역시 세상에 무엇 하나 쉬운 일이 없었다.
***
봉사 활동을 마친 후, 원장님은 내 손에 화분 두 개를 쥐여 주었다. 듣기로는 방울토마토라고 했다. 잘 키워서 수확해 보라는 당부도 잊지 않으셨다.
나는 손에 화분이 든 봉지를 들고 터덜터덜 집으로 돌아왔다. 마침 집에 정을 좀 붙이고 싶었는데 잘됐다. 나는 삭막하기 짝이 없는 거실 한쪽에 화분을 올려놓았다. 도시적인 인테리어와 귀여운 화분의 조화는 형편없었다.
이름은 뭐라고 짓지.
특별히 떠오르는 단어가 없었다. 주태승이 돌아오면 같이 지어 보자고 하는 게 낫겠다. 성실하게 아이디어를 내줄지는 미지수지만.
나는 냉장고를 열어 빵을 입에 물고, 그대로 욕실을 향했다. 당장이라도 침대에 눕고 싶었으나 땀을 많이 흘렸으니 어쩔 수 없었다. 훌렁훌렁 벗어 던진 옷가지가 문 앞에 쌓여 갔다.
파김치가 되어 샤워를 마치자 몸이 노곤하게 풀렸다. 이제 정말 어디서든 머리만 대면 잘 수 있는 상태가 되었다. 나는 휴대 전화를 쥐고 조금 망설이다가, 아직 거부감이 남은 침대를 향했다.
주태승과 함께 잘 때는 괜찮았는데 혼자 있으니 좋지 않은 기운이 감돌았다. 나는 찝찝함을 애써 모른 척하고 침대에 누웠다. 이불에서 희미하게 알파의 페로몬이 느껴졌다.
“아, 죽겠다.”
진심이 가득 담긴 혼잣말이 흘러나왔다. 나는 눈을 반쯤 감고 늘어지게 하품했다. 초저녁에 자면 새벽에 깰 텐데. 하지만 그런 걸 신경 쓸 여유가 없었다.
거의 수마에 끌려가기 직전이었다. 별안간 머리맡에 둔 휴대 전화가 진동했다. 그냥 못 본 척할까 싶었지만, 나는 손을 더듬어 액정을 눈으로 훑었다.
이건 받아야겠다.
“여보세요.”
[어디예요?]
“저, 집이요.”
[목소리 다 죽어 가는데.]
그야, 자려던 참이었으니까. 나는 베개에 뺨을 묻고 웅얼거렸다.
“오늘 힘들었어요.”
[보육원 간다고 하지 않았습니까?]
“네, 다녀왔어요.”
[혼자?]
“상훈이랑요.”
매끄럽게 오가던 대화가 잠시 멈췄다. 따로 뭘 하고 있나? 화면을 본다고 주태승이 보이는 건 아니었으나,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휴대 전화를 바라보았다.
곧 다소 심드렁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징 하게도 붙어 다니네.]
“친구가 상훈이밖에 없어요.”
[누가 보면 서로 죽고 못 사는 사이인 줄 알겠습니다.]
뭐야, 질투하나? 단어 자체가 주태승과 절대 어울리지 않았다. 나는 이불에 묻은 체취를 맡으며 웃었다.
“언제 와요?”
[한 사흘은 더 걸립니다.]
봉사 끝나고 나면 보겠네. 나는 속으로 주태승과 만날 날짜를 가늠했다. 그와 동시에 개강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사실도 함께 와닿아 끔찍했다.
[보육원은 어땠어요?]
“애들 많았어요.”
[그렇겠죠. 이름부터 보육원이잖아.]
졸려서 바보 같은 소리를 했다. 하품 때문에 눈물이 맺혀 눈앞이 흐릿하게 번졌다.
“근데 진짜 오늘 고생했어요. 저보다는 상훈이가 더 하긴 했지만……. 걔는 말놀이도 했거든요. 말처럼 엎드려서 히이잉.”
[넌?]
“전 못 해요. 힘없어서.”
나 왜 이렇게 말이 많지. 원래 이런 성격이 아닌데, 주태승 앞에서는 자꾸 하고 싶은 말이 생긴다. 적극적인 반응이 돌아오지는 않아도 저 짧은 대답이, 낮은 음성이 수다를 불러일으켰다.
“그리고 애들 둘이 싸웠어요. 화해시키려고 했는데 잘 안됐어요.”
[그래서?]
“애 돌보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았어요, 하루만 봐도 진이 다 빠지고. 만약에 애 낳으면 너무 힘…….”
새삼 별소리를 다 하고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는 입을 다물었다. 잠자코 내 이야기를 듣던 주태승이 대신 문장을 맺었다.
[힘들 것 같아요?]
“아, 네.”
[여진서 씨 성격 닮으면 얌전하겠는데.]
“…….”
[나 닮으면 귀여운 구석은 없겠고.]
지금 뭐라는 거야?
당혹스러움에 얼굴이 화닥거렸다. 왜 자연스럽게 우리 둘이 부모가 되는 걸 가정하냐는 말이다. 참 웃기는 사람이다. 누가 자기 애 낳아 준다고 했나? 착각도 유분수지.
심장이 달리기를 하고 난 뒤처럼 미친 듯이 뛰었다. 나도 모르게 이불에 발길질을 가했다.
고백하는 것도 아니고, 본인이 무슨 말을 하는지 자각도 없어 보였다. 항상 저지르는 건 주태승인데 나만 혼자 안절부절못한다.
“그, 저 잘래요.”
[벌써?]
“갑자기 피곤해요. 내일 또 전화해요.”
[그래요.]
나는 누군가에게 쫓기듯이 황급히 통화를 마무리했다. 수신 화면이 종료되어도 들뜬 마음이 진정되지 않았다.
자꾸 저 입에 휘둘리게 된다. 주태승과 진지한 미래 따위를 그려 봤자 나만 상처받을 걸 알면서도 그런다. 아무리 뜻이 통했다고 한들, 상대는 다른 세상 사람이잖아.
그래도 만약에, 정말 만약에 주태승과 가족이 된다면…….
상상을 가지고 뭐라 하는 사람은 누구도 없다. 하지만 나는 죄를 저지르는 듯이 조심스럽게 미래를 그려 보았다. 결혼해서 아이를 낳으면 첫째는 누구를 닮았으려나. 오메가일까, 알파일까.
“으음.”
이상하게 좀처럼 아이의 얼굴이 떠오르지 않았다. 떠오르지 않는 정도가 아니라, 아예 검은 크레파스로 덧칠한 것처럼 머릿속이 새까맣다. 너무 현실감이 없어서 의식적으로 상상을 막고 있는 건가.
맞아, 주제 파악하자.
주태승의 말에 큰 의미를 부여하면 안 된다. 애는 무슨, 대학 졸업이나 해. 기대하지 마. 잠이나 자.
저 사람은 괜히 엉뚱한 소리를 해서 사람 착잡하게 만든다. 별안간 잠자리가 불편해졌다. 나는 몇 번을 뒤척이며 돌아눕다가, 신경질적으로 몸을 일으켰다.
발걸음이 향한 곳은 옷장이었다. 나는 문을 열고 주태승의 와이셔츠 한 장을 꺼냈다. 섬유유연제 향과 페로몬이 동시에 올라왔다.
약간 변태 같다는 자각은 있었다. 하지만 지금 위로받고 싶은데 여기 없는 걸 어떡하냐고. 속에 불씨를 던진 게 주태승이니, 진정시키는 데에 와이셔츠 한 장쯤은 써 줄 수 있지 않나.
나는 하얀 와이셔츠를 품에 안고 침대에 누웠다. 사실 조금 부족했다. 직접 본인이 와서 안아 줬으면 좋겠는데.
“짜증 나.”
주태승을 좋아하는 마음이 커져서 화가 난다. 나는 이불을 머리끝까지 뒤집어써 버렸다.
***
“하아…….”
나는 막막한 심정으로 화면에 비친 숫자를 내려다보았다. 액정에 표시된 날짜를 볼 때마다 한숨은 깊이를 더해 갔다. 휴대 전화를 쥔 손이 소파 가장자리로 툭 곤두박질쳤다.
오늘부로 개강이 5일 남았다. 일분일초가 흐르는 게 아쉬웠다. 이번 여름은 사실상 마음 놓고 보낼 수 있는 마지막 방학이었다. 졸업하면 사회인이 되고, 사회인에게는 방학이 없으니까.
이미 놀고 있지만 조금 더 최선을 다해 놀고 싶다. 2학기에 접어들자마자 바쁜 일정에 쫓기는 내 모습이 눈에 선했다. 남은 날들에 반드시 아쉬움이 없었으면 했다.
며칠을 고생해 봉사 시간을 채웠으므로 이제 나를 방해할 요소가 전무했다. 다만 그렇다고 흥미를 끄는 게 있는 것도 아니었다. 그 탓에 벌써 이틀째 소파와 한 몸이 되어 허송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뭐 볼 게 없어.”
영화, 드라마, 예능. 어느 것 하나 만족스럽지 않다. 그렇다고 나가서 사람들과 어울리기는 싫었다. 누워서 시간을 보내되, 즐거운 오락거리와 함께해야 최고의 휴식이라는 생각이었다.
그러나 방영 중인 프로그램이 죄다 이토록 재미없을 줄은 몰랐다. 나는 1화만 재생한 목록들을 대충 훑어보다가 소파에 얼굴을 처박았다. 손은 본능적으로 주태승의 와이셔츠를 만지작거렸다.
언제 와.
누워 있는 내내 끼고 있던 바람에 옷감이 쭈글쭈글해졌다. 이제 주태승이 아니라 내 와이셔츠라고 해도 손색이 없을 정도로 알파 페로몬이 옅어졌다. 그게 못내 아쉬워, 나는 소매 부분을 코에 대고 킁킁거렸다.
인터넷에 넷X릭스 프로그램 추천이라도 검색해 볼까. 재밌는 거 안 나오면 진짜 플랫폼 바꾼다. 심드렁하게 휴대 전화를 두드리려던 때였다.
멀찍이서 도어 록을 해제하는 소리가 들려왔다.
“응?”
여사님이 뭐 두고 가셨나. 문을 열고 들어올 사람은 가정부 아주머니나 진짜 집주인, 둘 중 하나인데 주태승은 어제 전화하며 별말이 없었으니 전자라고 예상했다.
나는 현관문 쪽을 바라보았다가, 다시 고개를 돌려 다시 휴대 전화에 시선을 주었다. 블로그에서 추천한 액션 영화가 더럽게도 따분해 보였다.
옷자락이 스치는 울림이 가까워졌다. 그에 따라 희미한 페로몬이 코끝에 감돌았다. 문득 의문이 일었다.
여사님이 알파였던가?
그럴 리가, 단 한 번도 그녀의 페로몬을 느낀 적이 없다. 나는 물끄러미 소파에 널브러진 와이셔츠를 응시했다. 순식간에 침입자의 정체가 피부로 와닿았다.
“뭐야, 주태승 씨? 왜 왔어요?”
“내가 내 집 들어오는데 왜가 어딨어.”
말을 잘못 꺼냈다. 나는 소파에서 벌떡 일어나 그에게 다가갔다.
“오늘 온다는 말 없으셨잖아요.”
“말 안 했습니까?”
“전혀 몰랐어요, 윽.”
주태승이 아무렇지 않게 팔을 뻗어 나를 당겨 안았다. 그의 콧날이 목덜미에 내려앉았다. 살 내음을 훑는 숨이 간지러웠다. 나는 어깨를 살짝 비틀며 너른 등판을 더듬더듬 짚었다.
진짜 본인이다. 와이셔츠에 남은 것과는 비교도 안 되게 짙은 페로몬이 나를 휘감았다. 반사적으로 기분이 고양되는 것에 저항할 수 없었다. 핏줄을 타고 몸을 순환하는 혈액이 속도에 박차를 가했다.
“그건 그렇고.”
나를 감싼 주태승이 넌지시 운을 뗐다. 그가 거실 구석 어딘가를 턱으로 가리키며 물었다.
“못 보던 게 있네요.”
“아.”
나도 주태승을 따라 눈알을 굴렸다. 우리의 눈길이 닿은 곳은 화분이 있는 자리였다. 검은 흙 속에 자그마한 새싹이 두어 개 움터 있었다.
“방울토마토요.”
“어디서 났어요?”
“보육원에서 받았어요. 나중에 같이 이름 지어요.”
말은 그렇게 했으나 별 기대는 갖지 않았다. 이름을 짓기는커녕, 지어 놓으면 똑바로 부르기나 할지 의문이다. 뭐라고 하는 게 좋으려나. 방울토마토니까 방울이라고 하면 진부한가.
“그럼 저건 뭡니까?”
주태승의 고개가 소파 쪽으로 돌아갔다. 그는 시선으로 시트 위를 훑어보더니, 맞붙은 몸을 천천히 떼어 냈다. 나는 주태승이 본인의 와이셔츠를 집어 드는 모습을 당혹스럽게 지켜보았다.
미친, 당장 저것부터 치웠어야 했는데.
주태승은 주름으로 엉망이 된 와이셔츠를 보고 차분히 중얼거렸다.
“남의 옷을 잘도 이렇게 구겨 놨네.”
“아, 그…….”
“썼으면 돌려놔야지.”
뭘 썼다는 거야? 얼토당토않은 오해를 하는 게 분명했다. 나는 얼른 뛰어가 주태승의 손에서 와이셔츠를 빼앗았다. 뺨이 민망함으로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다림질하려고 꺼내 놨어요.”
“여진서 씨 페로몬 범벅인데, 와이셔츠랑 섹스라도 했습니까?”
“…….”
“아니면 자위했어요?”
“다림질하려고 꺼냈다고요.”
진짜 또라이 아니야. 이상한 소리를 한 건 주태승인데, 내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했다. 나는 허둥지둥 와이셔츠를 세탁 바구니 안에 던져 넣었다. 주태승은 조금 떨어져 가만히 나를 지켜보았다.
“그동안 원 없이 놀았어요?”
“아뇨. 볼 게 없어서.”
“잘됐네. 짐 싸요.”
순간적으로 대화의 맥락이 이해되지 않았다. 갑자기 짐을 싸라고? 나를 집에서 내보낼 결심이라도 선 건가. 아직 자취방도 못 알아봤는데 낭패가 따로 없었다. 나는 놀란 표정으로 되물었다.
“네?”
“짐 싸라고.”
“저 쫓아내시게요?”
주태승의 미간이 확 좁아졌다. 그는 성가신 투를 숨기지 않고 머리카락을 쓸어 올렸다.
“뭔 말 같지도 않은 소리를 합니까.”
“지, 짐 싸라면서요.”
“그게 왜 여진서 씨 내쫓는다는 소리로 귀결되는지 모르겠습니다.”
당연한 흐름이잖아, 일단 얹혀사는 처지니까. 나는 이도 저도 못한 채 우뚝 서서 주태승을 올려다보았다. 그러자 한숨과 함께 부가적인 설명이 돌아왔다.
“전화할 때마다 더 놀아야 한다고 칭얼댔죠. 귀에 딱지가 앉도록.”
“제가요?”
“너 말고 누가 있어.”
생각만 한 줄 알았는데 무의식중에 밖으로 나왔나 보다. 나는 얼떨떨하게 내 입술을 손으로 매만졌다. 주태승이 그렇게 편해졌나. 속에 있는 이야기를 아주 미주알고주알 다 고해바쳤네.
“놀아 줄 테니까 짐 챙겨서 나와요.”
“지금요?”
“내려가 있겠습니다.”
주태승은 말을 마친 후, 곧장 거실을 나서 현관으로 걸어갔다. 나는 덩그러니 남아 상황을 파악하려 애썼다. 오간 말로 유추해 보자면 여행을 가자는 게 아닌가 싶다. 얼마나 거하게 놀아 주려고 짐까지 준비하라는 거지.
나는 멀거니 뺨을 긁다가 방으로 들어가 가방을 열었다. 그리고 눈에 보이는 옷가지와 휴대 전화 충전기를 대충 쑤셔 넣었다. 크지 않은 가방이 빵빵하게 부풀었다.
그냥 여행 가자고 하면 되는 걸 말을 저렇게 한다. 참 주태승답다.
***
저 사람은 다 계획이 있구나.
언제부터 작정한 건지는 몰라도, 주태승이 운전해 목적지로 가는 과정은 물 흐르듯이 흘러갔다. 내내 어리둥절한 태도를 취하는 건 나뿐이었다. 미리 이야기 좀 해 주면 참 좋을 텐데 말이다.
주태승과 나는 꽤 오랜 시간 동안 밤의 도로를 달렸다. 체감상으로는 두 시간이 넘게 차에 타 있었던 것 같다. 운전자는 목적지에 대해 별다른 언질을 주지 않았다. 그가 이상한 곳을 데려가지는 않겠지만, 말수가 너무 적은 것도 문제가 아닌가 싶다.
이윽고 차가 멈춰 선 곳은 한적한 공터였다. 나는 창문을 내리고 바깥을 내다보았다. 잘 가꿔진 마당 뒤에 커다란 전원주택 하나가 자리 잡고 있었다.
“집……?”
나는 설명을 요하듯이 주태승을 바라보았다. 그는 안전벨트를 풀어내고 간단히 답했다.
“별장.”
“진짜 놀러 온 거네요?”
“쉴 때 가끔 옵니다.”
별장에서 느긋하게 휴가를 보내는 주태승은 상상하기 힘들었다. 나는 반신반의하며 차에서 내렸다. 주차장으로 보이는 공터에서 별장까지 넓적한 돌로 길이 이어져 있는 게 보였다.
나는 은은한 조명과 주태승에게 의지해 발을 내디뎠다. 재벌가 별장치고 아주 큰 집은 아니었다. 물론 이런 주택을 한두 개 가지고 있는 게 아닐 터다.
주태승은 익숙하게 높은 철문을 열었다. 외관만큼이나 내부도 깔끔했다. 바닥에 먼지 하나 없는 걸 보면 평소에는 따로 관리인을 두는 모양이었다.
“편하게 있어요. 욕실은 아무 데나 쓰고.”
“짐은 어디에 놔요?”
“2층.”
평소에도 조용하지만, 오늘은 유독 더하다.
간결한 대화가 오가고 주태승은 먼저 계단을 올라갔다. 나는 푹신한 소파가 놓인 거실을 둘러보았다. 아까 보니까 정원도 갖춰져 있던데, 하필 밤에 와서 구경하지 못하는 게 아쉬웠다.
주태승과 만들어 가는 관계는 당황스러운 부분이 많았다. 분명 몇 시간 전만 해도 집에서 뒹굴뒹굴하고 있지 않았나. 정신 차려 보니 강원도까지 와 있다. 이런 여행을 갈 때는 만반의 준비를 하고 가는 게 보통인 것을.
나는 부엌으로 가 검은 장식이 달린 찬장을 열었다. 안에는 갖가지 찻잎과 포트가 정렬되어 있었다. 좀 부담스럽다. 뭐가 뭔지도 몰라, 아무 티백이나 꺼내 물을 따랐다.
차를 한 잔 마시니 정서가 약간 현실감을 되찾았다. 나는 서울에 막 상경한 시골 쥐처럼 호기심 어린 눈으로 집 곳곳을 관찰했다.
“오…….”
1층 구석에는 서재가 자리 잡았다. 열린 문 사이로 즐비하게 늘어진 책장과 LP 턴테이블이 눈에 들어왔다. 지금은 밤이니까 내일 구경해야지. 나는 슬금슬금 뒷걸음질 쳐 서재를 나섰다.
나중에 나이 들면 이런 집에서 살고 싶다. 한적하고 편안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었다. 물론 돈을 아주 많이 벌어야겠지만.
주인이 없는데 혼자 더 둘러보는 것도 어색했다. 우선 씻어야겠다. 나는 주태승이 기다리는 2층으로 느직느직 올라갔다.
2층에는 응접실과 침실, 욕실이 있었다. 내가 선택한 건 올라가자마자 바로 보이는 욕실이었다. 나는 테이블 위에 가방을 내려놓고 잠옷과 속옷을 꺼냈다.
……근데 오늘 하려나?
며칠 못 만났으니까 하는 거겠지. 나는 은근슬쩍 기대하는 몸뚱어리를 손바닥으로 찰싹 때렸다. 주태승과 붙어 다녔더니 변태가 다 됐다.
나는 도망치듯 욕실로 들어섰다. 과장을 조금 보태서, 내 옛날 자취방을 몇 개 합쳐 놓은 크기였다. 욕조는 침대보다 훨씬 컸다. 두 명은 수용하고도 남을 듯했다.
그래도 혼자 들어왔으니까 욕조까지 쓸 필요는 없다. 나는 간단하게 샤워를 끝냈다. 몸에서 올라오는 바디 워시의 머스크 향이 산뜻했다.
잠옷을 집어 들려던 참이었다. 욕실 문 앞에 걸린 하얀 가운을 보자 손이 멈춰 섰다.
역시 오늘 할 것 같은데, 그럼 어차피 벗게 될 테니까 잠옷보다 가운 입는 게 낫지 않나.
섹스 할까 봐 이런 배려까지 갖추고 참 대견하다. 나는 괜히 헛기침하며 가운을 꿰입었다. 속이 비치는 옷감은 아니었으나 매듭이 느슨해 살갗이 비스듬히 드러났다.
욕실은 침실과 가까웠다. 나는 젖은 발바닥을 문질러 닦고 심호흡했다. 그리고 용기를 담아 침실 문을 열었다.
“응?”
가장 먼저 보인 건 침대에 뻗어 있는 인영이었다. 나는 조심스럽게 그에게 다가갔다. 주태승과 많은 날을 함께 보냈으나 이런 모습은 생경했다.
“주태승 씨……?”
대답이 없었다. 고요한 침실에 주태승이 내쉬는 얕은 숨소리가 퍼져 나갔다. 나는 침대에 걸터앉아 그를 자세히 내려다보았다.
긴 속눈썹 아래에 짙은 그림자가 졌다. 살짝 찌푸린 이마에서는 쌓인 피로가 느껴지는 듯했다. 짠한 마음이 들었다. 피곤해 잠이 든 얼굴을 보니 주태승도 사람은 사람이었다.
여기 오려고 무리해서 일한 건가.
주태승은 안 그래도 바쁘고, 나 때문에 자리를 비운 일도 있었으니 수습해야 할 것도 많았을 터다. 당장 오늘도 해외에서 막 귀국했다. 그 정신에 운전은 또 어떻게 했담. 이 시간을 내기 위해 그가 고생했을 걸 생각하자 속이 상했다.
“옷도 못 갈아입었네.”
나는 안쓰럽게 주태승을 바라보다가, 목을 조인 넥타이를 편하게 풀어 주었다. 평소에 무척 예민하게 구는 주제에 전혀 일어날 기미가 없었다. 섹스니 뭐니, 혼자 망상한 내 꼴이 애새끼 같았다.
이렇게 보니 새삼 고운 얼굴이었다. 잘생기고 예쁘다기보다는, 아름다움에 가까운 외모였다. 나는 우뚝 솟은 날렵한 코끝을 손가락으로 가만가만 쓸어내렸다.
“잘 자요.”
수려한 이마에 입을 맞춘 건 다분히 충동적인 행동이었다. 고맙고 미안해서, 다시금 사랑스러워서 그랬다.
좋아하는 이의 빈틈을 마주친 더없이 애틋한 밤이었다.
***
투둑, 얼굴에 떨어진 물방울이 잠을 깨웠다.
“읏.”
나는 묵직한 눈을 게슴츠레 올려 떴다. 둔해졌던 오감이 의식과 함께 서서히 제자리를 찾아가는 듯했다. 그러나 침입자는 정신이 완전히 돌아올 때까지 기다려 주지 않았다.
“아, 으응, 잠깐만.”
아침부터 뭐 하는 거야. 나는 목덜미를 깨무는 주태승을 아등바등 밀어 냈다. 젖은 머리카락에서 떨어진 물이 맨살을 간질였다. 일어나자마자 이게 무슨 날벼락인가 싶다.
“차가워요……. 좀.”
막 씻고 나왔는지, 맞닿은 살갗에서 바디 워시 향이 났다. 주태승은 별다른 대꾸 없이 내 가운을 어깨까지 끄집어 내렸다. 뜨거운 입술이 드러난 쇄골에 내려앉았다. 나는 영문도 모르고 얕은 신음을 토해 냈다.
주태승은 입술로 쇄골을 지분거리다가, 민둥한 가슴팍을 살짝 깨물었다. 손으로는 움푹 파인 등줄기를 쓰다듬고 있었다. 이러다 잠도 못 깨고 섹스 하겠다.
나는 주태승에게 살갗을 내준 채 웅얼거렸다.
“흐으, 저 방금 일어났어요.”
“알아요.”
알면서 왜 이래. 나는 있는 힘껏 주태승을 떼어 냈다. 유감스럽게도 의도한 만큼 거리는 벌어지지 않았다. 그는 나를 침대 헤드에 몰아붙인 상태로 목덜미에 얼굴을 묻었다. 쏟아지는 숨결 때문에 솜털이 바짝 곤두섰다.
“나도 자는 사람한테 좆질하는 취미 없습니다. 그래서 기다렸잖아.”
세상에 이걸 기다렸다고 보는 사람이 몇 명이나 될까 싶었다. 내 원망스러운 시선이 주태승을 찔렀다. 하지만 그는 아랑곳하지 않고 말을 이어 나갔다.
“홀딱 벗고 옆에 누워 있던 여진서 탓이 크다고 보는데.”
“안 벗고 있었어요.”
“젖꼭지 다 보이는 가운도 옷이라고.”
“네?”
그 말에 나는 황급히 상체를 내려다보았다. 분명 자기 전에는 멀쩡했는데, 밤사이에 매듭이 흐트러졌는지 맨살을 다 내보이고 있었다.
내가 당황한 틈을 타, 주태승은 재차 팔을 감아 왔다. 나는 침대에 눕혀지기 전에 헤드 기둥을 꽉 붙잡았다. 그 모습을 본 상대가 어이가 없다는 듯이 말했다.
“별걸 다 끌어안네.”
“저 배고파요.”
“섹스 하면 배부를 텐데 뭐가 문제예요.”
바빠서 안쓰럽다는 생각 다 취소다. 나는 열이 오른 얼굴을 맹렬히 휘저었다. 아침부터 몸을 섞으면 보나 마나 오후 내내 자느라 시간을 다 날리고 말 것이다. 별장까지 왔는데 하루를 그렇게 보내는 건 너무 아까웠다.
“씻고 올래요.”
살갗을 감은 팔을 다시 한번 밀어 냈으나, 내 속을 모르는 주태승은 어깨를 순순히 놔주지 않았다. 그가 귀에 입술을 바짝 붙이고 속삭였다.
“가운 여기서 벗고 가요.”
“왜, 왜요?”
“혼자 손장난이라도 치게.”
진짜 미쳤나?
나는 끙, 앓는 소리를 내며 주태승을 밀쳤다. 혹여 억지로 벗겨질까 걱정되어 가운을 단단히 여몄다. 일어나서 곧장 성희롱을 당했더니 잠이 확 달아났다.
가만히 침대에 앉아 있는 주태승을 뒤로하고, 나는 욕실로 들어갔다. 처음 만났을 때에 비해 약간 능글맞아진 것 같다. 사소한 변화가 싫지 않았다. 그의 새로운 표정을 볼 수 있었으니까.
그래도 아침부터 저건 좀. 나는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세면대 물을 틀었다.
가볍게 씻고 나온 후, 우리는 토스트와 차로 아침을 해결했다. 미리 언질을 해 놓은 건지는 몰라도 냉장고에 기본적인 식자재가 갖춰져 있었다.
버터를 바른 토스트가 맛있었고, 날씨가 좋았다. 이런 날은 한껏 나른한 기분이 든다.
나는 창문을 통해 별장의 정원을 구경하다가 소파에 누워 여유를 부렸다. 그동안 주태승은 옆에서 책을 읽었다. 언제 그렇게 난잡하게 굴었냐는 듯, 점잖은 태도였다. 참 웃기지도 않는다.
그러고 보니 어제 서재를 발견했다. 심심한데 오랜만에 책이나 봐야겠다. 나는 독서에 집중한 주태승을 등진 채 서재로 들어갔다.
볼만한 게 있으려나.
책장에는 한눈에 봐도 책이 아주 많았다. 나는 심드렁한 표정으로 즐비하게 늘어진 책등들을 훑어보았다. ‘인문 사회학’, ‘역사와 문화 콘텐츠 사업’ 등 딱히 흥미를 끄는 제목은 없었다.
그냥 나가서 TV나 켜 달라고 할까. 책장에서 눈을 떼려던 때였다. 책 사이에 삐죽 튀어나온 무언가가 시선을 잡아끌었다.
이건 뭐지. 나는 홀린 듯이 손바닥보다 약간 큰 종이 쪼가리들을 끄집어냈다.
“응?”
사진이었다. 오래전에 찍은 건지, 화질이 요즘 것처럼 선명하지 않았다. 나는 멀뚱히 서서 렌즈 속에 담긴 장면을 들여다보았다.
환하게 웃고 있는 여자와 자상해 보이는 남자, 그 가운데에 뚱한 얼굴의 남자아이가 앉아 있었다. 곱상하게 생겨서 인상을 구기고 있는 게 주태승과 똑 닮았다.
다른 사진도 마찬가지였다. 남자아이는 내내 무표정이거나, 심기가 뒤틀린 기색이었다. 그에 비해 부모로 보이는 이들은 활기찬 분위기를 자아냈다. 무심한 아들을 무척 귀여워하고 있는 듯했다.
나는 사진을 들고 거실로 나갔다. 그리고 미동도 없이 독서 중인 주태승에게 말을 걸었다.
“주태승 씨, 이거.”
주태승은 천천히 고개를 들어 나를 보았다가 내 손의 사진에 시선을 주었다. 나는 둥글게 차오른 광대를 샐룩거리며 그를 향해 다가갔다. 가까이 붙어 사진을 들이밀자, 차분한 물음이 돌아왔다.
“어디서 났습니까?”
“서재에서 찾았어요. 어렸을 때 사진이에요?”
“네.”
주태승은 별다른 감흥이 없는 눈치였다. 나는 그의 곁에 엉덩이를 붙이고 앉아 사진을 구경했다. 어떻게 하나같이 표정이 없지. 귀여워.
“사진 찍히는 거 싫어해요?”
“별로 좋아하지는 않습니다. 어렸을 때는 싫었고.”
“그래서 표정이 다 이래요?”
“그런가 봅니다.”
되게 남 일처럼 이야기하네. 나는 입가에 슬그머니 미소를 띠고 사진을 만지작거렸다. 이때 얼굴이 조금 남아 있는 것 같기도 하다. 비록 덩치는 어마어마하게 커졌지만.
“근데 되게 화목해 보여요.”
솔직히 말하자면 의외였다. 저 괴상한 성격이 만들어진 데에는 슬픈 가정사가 배경에 도사리고 있을 줄 알았다. 그러나 사진에 드러난 가족의 분위기는 너무도 따사로웠다.
“화목하니까.”
“부모님은 어떤 분들이세요?”
“좋은 분들입니다. 늘 부모 역할에 충실하려고 애썼고, 우성 알파 집안치고 꽉 막히지도 않았고.”
근데 댁은 성격이 왜 그러냐는 질문이 목구멍까지 올라왔다. 들을수록 신기하다. 저 바람직한 가정에서 대체 주태승이 어떻게 나온 거지?
의아함을 갖고 사진을 넘기던 나는 묘한 장면을 하나 찾아냈다. 어린 주태승이 책상에 앉아 무언가를 열심히 쓰는 모습이었다.
“이건 뭐 하는 거예요?”
“이름 쓰는 겁니다.”
주태승은 읽던 책을 덮고 아예 내 쪽으로 몸을 돌렸다. 그가 고저 없는 목소리로 설명을 덧붙였다.
“부모님께 받은 것, 내 돈으로 산 것, 하다못해 길에서 주운 것까지 전부 이름을 썼습니다. 누가 내 거 건드리는 게 끔찍하게 싫었거든.”
“…….”
“그건 지금도 그래요.”
나 주태승 물건 건드린 적 꽤 많은 것 같은데. 나는 눈동자를 굴려 그의 눈치를 보며 말했다.
“다음부터 허락받고 쓸게요.”
“뭘?”
“주태승 씨 와이셔츠나, 냉장고나, TV나, 뭐 그런 거요.”
내 말을 들은 주태승이 마른 웃음을 지었다. 곧 긴 손가락이 말랑한 뺨을 느른히 감싸 쥐었다.
“그런 건 별 의미 없어요.”
“아, 음.”
“여진서 씨한테도 이름 써 놓을까요. 어디 도망 못 가게.”
진심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어 약간 소름이 돋았다. 나는 입에 고인 침을 꿀꺽 삼켰다. 주태승의 검은 눈동자가 요동치는 목젖을 따라 움직였다.
“아무 데도 안 갈게요.”
“그래요.”
주태승의 팔이 내 허리를 슬슬 감싸 왔다. 뻗어 나온 나무줄기 같기도 했으며, 서늘한 비늘을 가진 뱀 같기도 했다. 나는 그의 손등에 더듬더듬 손을 얹었다.
“약속 지켜요.”
저 말은 진심일 거다. 낮은 음성에서 짙은 소유욕이 묻어 나왔다.
***
해가 지고 사위가 어두워졌다. 슬슬 저녁 먹을 시간이 가까워졌다. 나는 허기진 배를 쓰다듬으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제가 밥할게요.”
소파에 앉아 나를 바라보던 주태승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차도 있는데 그냥 밖에서 먹죠.”
“저 못 믿으시나요?”
“빵은 아침에 먹었으니까.”
역시 일전의 버터롤이 그에게 불신을 심어 준 게 틀림없다. 하지만 그때와 지금은 상황이 다르다. 내가 전자레인지에 돌린 버터롤만 내간 건 어디까지나 재료가 부족했기 때문이었다. 오늘처럼 냉장고가 든든한 상황에서는 나도 그럭저럭 괜찮은 식사를 만들 자신이 있었다.
이번에야말로 실패를 만회할 때다. 나는 침착하게 부엌을 뒤져 쌀을 꺼냈다. 뭘 먹든 밥은 필요하니까. 일단 밥부터 하고 메뉴를 생각해 보면 될 것이다.
주태승은 한숨을 쉬며 식탁 의자를 꺼내 앉았다. 그가 비스듬히 턱을 괴고 물었다.
“왜 자꾸 뭘 하려고 합니까? 그냥 있지.”
무슨 애라도 돌보는 줄 아나 보다. 나는 쌀을 벅벅 씻고 손등이 살짝 잠길 만큼 물을 부었다. 밥을 안치는 손바닥에 쌀알이 몇 개 달라붙었다.
“할 줄 아는데 왜 가만히 있어요. 맨날 주태승 씨한테 날름날름 받아먹기만 하는 것도 좀 그래요.”
내가 말 해 놓고 꽤 대견한 소리였다. 낯이 간지러워 입꼬리가 이상하게 비틀렸다. 나는 어정쩡한 표정으로 냉장고를 열었다. 한번 둘러보니 몇 가지 재료가 눈에 띄었다.
그중 단연 내 신경을 잡아끈 것은 채소 칸의 묵은지였다. 색깔만 봐도 아주 잘 익은 김치라는 느낌이 들었다. 더불어 햄과 계란도 발견했다.
속도 느글느글한데 김치볶음밥 하면 딱이겠다. 나는 고슬고슬한 식감을 떠올리며 입맛을 다셨다. 김치도 넣고, 햄도 넣고, 쪽파도 있으니까 썰어 넣어야지.
나는 재료를 다 꺼내 놓고 주태승의 눈치를 봤다. 그는 얌전히 앉아 내 행동을 물끄러미 관찰하고 있었다.
“주태승 씨, 김치볶음밥 먹어요?”
“찾아서 먹지는 않습니다.”
“그래요……?”
반응이 미적지근하다. 해 주면 먹는다는 소리인가? 나는 이미 꺼낸 재료를 들여다보다가 햄과 김치를 도마에 올려놓았다. 혼자 먹을 때는 그냥 가위로 다 자르지만, 손님이 있으니 정성스레 칼로 다지는 편이 좋겠다.
2인분의 김치와 햄을 썰고, 파 기름을 내기 위한 쪽파도 다졌다. 주태승은 내가 능숙하게 칼질하는 것에 흥미로운 시선을 보냈다. 뭔가 실수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아 손끝에 힘이 들어갔다.
재료 준비를 마치고 나니 밥솥에서 취사가 완료되었다는 음성이 흘러나왔다. 나는 식용유를 두른 프라이팬에 파를 볶아 향을 냈다. 그리고 김치와 햄을 전부 집어넣었다. 곧 고소한 냄새가 솔솔 풍겨 왔다.
맛있겠다. 지금까지 만든 김치볶음밥 중에 가장 예감이 좋았다. 나는 더운 김을 이겨 내며 갓 지은 밥을 퍼냈다. 볶음밥에 쓰기는 약간 아까울 정도로 잘 되었다.
김치와 햄, 쪽파가 담긴 프라이팬에 밥을 투하하자 군침 도는 소리가 났다. 나는 주걱을 쥐고 열심히 밥을 풀었다.
그 와중에 한 가지 문제가 생겼다. 타기 전에 얼른 계란프라이도 부쳐야 하건만, 손이 모자랐다. 나는 뒤로 돌아 식탁에 앉아 있는 주태승을 불렀다.
“주태승 씨.”
“네.”
“저 계란프라이 해야 하니까 이것 좀 봐 주실래요?”
내 말을 들은 주태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처음부터 끝까지 다 내가 해 주고 싶었으나 어쩔 수 없게 됐다. 나는 볶음밥을 주태승에게 맡기고 다른 작은 프라이팬을 집어 들었다.
모양 예쁘게 해야 하는데……. 목표는 보름달처럼 동글동글한 반숙이었다. 나는 신중하게 계란을 집어 적당히 달궈진 프라이팬에 깨트렸다. 흰자가 가장자리부터 하얗게 익어 갔다.
이제 뚜껑 덮고 조금만 기다리면 된다. 집중한 탓에 눈이 따끔거렸다. 그래도 김치볶음밥에 계란이 빠지면 팥 없는 찐빵이나 마찬가지다. 볶음밥도 잘되었으니 계란도 완벽하게 부쳐야 아쉽지 않을 듯했다.
나는 속으로 몇 초를 세고 가스 불을 껐다. 노른자는 프라이팬에 남은 잔열로 익혀도 충분하다.
문득 주태승은 잘하고 있나 궁금해졌다. 나는 곧장 고개를 들어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다음 순간, 바보 같은 비명이 튀어나왔다.
“으아아, 뭐 하세요?”
사실 뭐 하냐는 물음은 어폐가 있었다. 왜냐하면 주태승은 아무것도 안 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문자 그대로 프라이팬을 보는 중이었다.
나는 헐레벌떡 주태승을 밀치고 불쌍한 볶음밥을 휘저었다. 그는 멍하니 옆으로 밀려났다가, 의아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뭐가 왜예요. 진짜 보고만 있으면 어떡해요?”
“보고 있으라며.”
말귀를 더럽게 못 알아먹는다. 진짜 가사는 전혀 모르는구나. 다행히 아래만 살짝 탔다. 이 정도면 누룽지라고 우기고 먹을 만하겠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접시에 볶음밥을 각각 1인분씩 담은 후, 멀뚱멀뚱 내 곁을 맴도는 주태승과 함께 자리에 앉았다. 나름 맛있게 잘 됐다고 생각하는데 막상 먹이려니 긴장이 앞섰다.
“빨리 드세요.”
“응.”
주태승의 숟가락 끝이 통통한 노른자를 툭 찔러 터트렸다. 뒤이어 정갈하게 뜬 볶음밥을 입에 넣었다. 이게 뭐라고 떨린다. 나는 그가 밥알을 씹는 장면을 숨도 쉬지 않고 지켜보았다.
“어때요?”
음식이 목구멍을 넘어가는 것을 확인한 직후, 저절로 물음이 튀어 나갔다. 주태승은 조용히 물로 목을 축이며 접시를 향해 시선을 깔았다. 곧 덤덤한 시식 평이 들려왔다.
“좀 달긴 한데.”
가슴 속에 둥실둥실 차올랐던 기대가 살짝 수그러들었다. 나는 시무룩하게 입매를 늘어뜨렸다. 마지막에 설탕을 괜히 넣었나. 나름 경험이 쌓인 레시피이거늘.
달그락, 주태승이 재차 밥을 퍼 입에 넣었다. 그가 무음으로 밥을 씹어 삼키고 덧붙였다.
“그래도 맛있습니다.”
진심인가? 나는 반신반의하는 표정으로 주태승이 볶음밥을 먹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잠시 기다려도 숟가락이 멈추는 일은 없었다. 축 처진 입꼬리가 슬금슬금 위로 올라갔다.
“진짜요?”
“네.”
그제야 나도 입맛이 돌았다. 기름이 반지르르한 볶음밥을 가득 퍼 넣으니 김치 특유의 매콤한 기운이 올라왔다. 나는 둥근 계란을 깨트려 밥과 함께 입 안을 와구와구 채웠다.
볶음밥을 반 정도 비운 주태승이 넌지시 말을 건넸다.
“여진서 씨는 재주가 많네요. 악기도 다룰 줄 알고, 요리도 하고, 밥도 잘 먹고.”
마지막은 재주가 아니지 않나? 어찌 됐든 맨날 욕만 들어 먹다가 칭찬을 받으니 기분이 좋았다. 나는 뺨을 씰룩거리며 남은 밥을 마저 먹었다.
식사가 끝나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뒷정리를 마치고, 주태승은 갑자기 걸려 온 전화 때문에 혼자 위층으로 올라갔다. 언뜻 들린 내용으로 미루어 보면 업무와 관련된 통화인 듯했다.
별안간 혼자가 되었다. 나는 소파에 앉아 TV를 켰다. 최근 인기가 많은 주말 예능이 방영되고 있었다. 출연진들이 시사 상식과 관련된 문제를 맞히는 프로그램이었다.
문제는 대체로 난이도가 쉬웠다. 현재 대통령의 형질을 맞추시오. 저건 대통령이 누군지 몰라도 맞힐 수 있겠다. 무조건 알파지. 나라의 지도층 대부분은 알파였고, 우두머리도 예외는 없었다.
따분하다. 나는 쿠션을 끌어안고 왁자지껄 떠드는 개그맨들을 바라보았다. 한계는 세 번째 문제가 끝날 무렵에 찾아왔다.
지루함을 견디지 못한 나는 TV를 끄고 일어났다. 차라리 집 구경을 더 하는 게 재미있겠다. 아까 보니 서재에 턴테이블이 있던데, 가서 노래라도 들을까 싶었다.
나는 주태승이 있을 2층을 한 차례 올려다보았다가, 조심스럽게 서재로 걸음을 옮겼다. 턴테이블은 입구 가장자리에 그대로 놓여 있었다. 그냥 보기에도 꽤 값이 나갈 듯했다. 실수해서 고장 내면 안 되는데.
서랍에 꽂힌 LP판 중 가장 눈에 띄는 건 클래식 음반이었다. 나는 신중하게 전원을 켜고 판을 꺼내 턴테이블에 맞췄다. 그러자 바늘이 자동으로 판 위에 올라갔다.
“오.”
곧 잔잔한 클래식 음악이 흘러나왔다. 턴테이블을 만지는 건 처음이라, 바늘을 꽂았더니 노래가 나오는 인과가 생경했다. 나는 호기심이 가득한 눈으로 턴테이블을 이곳저곳 구경했다.
핑핑 돌아가는 음반을 보고 있자니, 괜히 손가락으로 건드리고 싶어졌다. 선풍기 팬에 손을 집어넣어 보는 심리와 비슷했다. 내가 멍하니 LP판에 손을 짚으려던 때였다.
뒤에서 낮은 목소리가 불쑥 들려왔다.
“여진서 씨?”
“허, 으업.”
놀란 마음에 나도 모르게 바늘을 콱 붙잡고 말았다. 정신이 팔려 누가 들어온 것도 눈치채지 못했다. 방을 채우던 클래식 음악이 가위로 자른 것처럼 뚝 끊겼다.
주태승은 바늘을 움켜쥔 내 손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그거 자동일 텐데.”
“아, 이게, 어…….”
나는 얼른 손을 떼어 냈다. 방해에서 벗어난 턴테이블이 다시 노래를 불렀다. 주태승은 내 이상 행동에 개의치 않고 서재 소파에 앉았다. 손에는 커피 두 잔이 들려 있었다.
“이리 와요.”
뱃속을 채운 창피함을 모른 척하고, 나는 주태승의 옆에 엉덩이를 붙였다. 그러자 주태승이 김이 모락모락 올라오는 커피를 건넸다. 방금 타 왔는지 표면이 따뜻했다.
“통화 끝났어요?”
“네.”
“휴일인데 전화가 오네요.”
“이슈 터지는 건 휴일이 없으니까. 말레이시아 현장에서 사고가 있었습니다.”
사고라는 말에 나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럼 꽤 심각한 거 아닌가.
“사람들은 괜찮대요?”
“네.”
“다행이에요.”
주태승은 별다른 대꾸 없이 머그잔에 입을 가져갔다. 나도 그를 따라 커피를 한 모금 들이켰다. 씁쓸한 액체가 목구멍을 내려가 식도를 뜨끈하게 데웠다. 저절로 한숨이 나왔다.
정적이 내려앉은 서재를 클래식 음악과 커피를 홀짝이는 소리가 채웠다. 나는 눈을 끔뻑이다가 단단한 어깨에 몸을 기댔다. 아무 말 하고 있지 않아도 TV를 볼 때보다 기분이 좋았다.
만난 지 얼마나 됐다고 주태승을 편안하게 느끼는 내가 조금 우스웠다. 생각해 보면 죽었다 깨어나도 연이 닿지 않을 상대였다. 첫인상은 그야말로 최악이었고.
이 남자와의 관계는 일종의 일탈이었다. 만남의 시작이 섹스였다는 것부터가 그렇다. 이렇게 마음을 다 내줄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잘 맞는 건 몸뿐이라고 생각했으니까.
주태승은 머리가 좋았다. 나는 영악한 그를 막기에는 어리숙했고, 결국 밀어 내지 못했다. 함께 있으면 여태껏 느껴 본 적 없는 정서들로 가슴이 가득 부풀었다. 그게 너무 즐거워져서 그랬다.
가끔은 주태승이 밉다. 종종 무섭다. 하지만 그가 좋았다. 어쩌면 이 감정을 사랑이라 정의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불투명한 내일보다 함께 있는 오늘이 소중하고, 단지 몸을 맞대는 사소한 접촉에도 심장이 뛰는 게 사랑이라면, 그렇다면.
턴테이블에서 흘러나오는 노래가 귓가를 맴돌았다. 엘가의 <사랑의 인사>. 나는 입에 머금은 커피를 꿀꺽 넘기고 운을 뗐다.
“주태승 씨.”
주태승이 제 가슴팍에 늘어진 나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나는 그의 품에 더욱 파고들며 말했다.
“이거 제가 좋아하는 노래예요. 되게 흔한 노래긴 한데.”
“네.”
“엄마가 저한테 제일 처음 들려주신 클래식이거든요. 그래서 들으면 엄마 생각나요.”
분명히 엄마가 떠오르는 노래였는데, 이제는 다른 사람이 한 명 더 떠오를 듯했다. 나는 주태승과 눈을 맞추고 입꼬리를 살며시 올렸다. 좋아하는 사람과 함께 좋아하는 노래를 듣는다. 이 순간이 참 복에 겨웠다.
주태승이 손을 들어 내 뺨을 감쌌다. 그의 눈동자에 내 모습이 오롯이 담겼다. 숨결이 느릿하게 가까워졌다.
“왜 웃어.”
두 입술이 천천히 맞붙었다. 성적인 의미보다 애정이 담긴 입맞춤이었다. 호흡을 나눌수록 가슴이 충만하게 차올랐다.
걷잡을 수 없이 주태승이 좋았다. 언제까지고 함께 있고 싶었다. 후에 무슨 일이 있든 간에 이 마음을 가지고 있다면 이겨 낼 수 있을 것 같았다.
그래, 그때는 그렇게 생각했다. 지금 품은 이 온기가 계속될 거라고.
바보같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