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웨딩데이(Wedding day) (12/14)

외전. 웨딩데이(Wedding day)

보고 싶은 엄마에게

잘 지내?

편지 쓰는 건 오랜만이라 어색하네.

가끔은 안 하던 짓도 하고 싶어서.

그동안 자주 못 가서 미안해. 너무 많은 일이 있었거든.

아프기도 하고, 외롭기도 하고.

근데 힘들 때마다 엄마가 지켜보는 느낌이 들더라.

나에게 일어난 말도 안 되는 기적들이 사실은 다 엄마가 도와주는 게 아닐까, 하는 생각도 들어.

사실 아직도 현실감이 없어. 들으면 깜짝 놀랄걸. 나중에 만나서 하나하나 이야기해 줄게.

엄마.

나 조금씩 행복해지고 있어. 옆에 있고 싶은 사람도 생겼어.

그러니까 계속 지켜봐 줘, 아들이 얼마나 잘 살아가는지.

나도 늘 엄마를 생각할게.

사랑해.

이 정도면 하고 싶은 말은 다 했으려나.

나는 오뚝한 펜 끄트머리를 이로 잘근잘근 씹다가, 편지지에 빼곡히 들어찬 글씨를 훑어보았다. 적당히 쓰려고 했는데 주절거리다 보니 말이 길어지고 말았다. 물론 엄마가 그만큼 덜 심심할 테니 나쁜 결과물은 아니었다.

설명을 조금만 덧붙일까.

행복하다고 강조해야 엄마도 안심하지 않겠나, 그렇게 되뇌며 다시 종이에 펜촉을 가져갔을 때였다.

“어…….”

문득 어깻죽지에 보들보들한 옷감의 감촉이 전해졌다. 구부정하게 숙인 몸뚱어리가 반사적으로 퍼뜩 움찔거렸다. 나는 놀란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왜 이렇게 춥게 입고 있어.”

주태승이 체온을 가늠하듯 내 목덜미에 비스듬히 손등을 붙였다. 무뚝뚝한 어조와 달리 다정이 묻어 나오는 손길이었다. 그가 걸쳐 준 카디건 자락이 어깨선을 타고 살짝 흘러내렸다.

맞아, 이제 혼자 사는 게 아니야.

피부에 닿는 건 조금은 어색하고, 또 기쁘기도 한 타인의 관심. 불쑥 존재감을 드러내는 동거인 때문에 얼굴이 연약하게 달아올랐다.

“별로 안 추워요, 주태승 씨가 보일러 세게 틀어 놔서.”

“그래도 걸치고 있어요.”

체감상으로는 방 온도가 족히 30도는 넘는 듯했다. 과보호도 정도가 있지, 감기 한번 걸리면 죽는 줄 아나 보다. 나는 괜히 입술을 샐쭉거리며 카디건을 추슬렀다.

주태승은 무표정으로 나를 지그시 바라보더니, 책상 위를 향해 시선을 옮겼다. 그가 눈매를 가늘게 고쳐 뜨고 물었다.

“뭐 하고 있어요?”

“아, 이거, 그…….”

어쩐지 비밀 일기장을 들킨 초등학생이 된 기분이었다. 나는 얼른 팔을 뻗어 내 저녁 감수성의 산물을 품으로 감췄다. 종이를 완전히 덮기 위해 상체를 푹 숙이자, 주태승은 곧장 내 몸을 책상에서 떼어 놓았다.

“배, 조심 안 하지.”

“이 정도는 괜찮아요.”

“그래서 그게 뭔데요?”

부끄러운 일은 아니었으나 청승 떠는 꼴을 보인 것 같아 민망했다. 나는 책상 모서리 쪽으로 눈동자를 굴리며 들릴 듯 말 듯 입술을 어물거렸다.

“편지요.”

“편지?”

주태승은 말을 차분히 되풀이했다가, 내가 최선을 다해 보호 중인 종이를 내려다보았다. 애석하게도 등허리는 견고한 시멘트 벽 따위가 아니었기에 내 비밀을 충분히 가려 주지 못했다.

별 유난을 떨어 대는 나와 다르게 주태승은 덤덤한 태도였다. 그가 가볍게 내 뒤통수를 쓰다듬은 후 중얼거렸다.

“하고 싶은 말이 많은가 보네.”

“그냥요. 오랜만이라.”

“마저 써요.”

그 말을 끝으로 주태승은 방을 나서려는 듯 물러났다. 나는 그를 돌아보고 얼른 편지지를 구석에 정리했다.

“침실 가려고요?”

“응.”

“같이 가요. 다 썼어요.”

툭, 두툼한 카디건이 결국 바닥에 곤두박질쳤다. 나는 문턱에 선 주태승을 따라 몸을 일으켰다. 이미 방이 충분히 따끈따끈했기에 겉옷이 없어도 서늘하지 않았다.

내 움직임에 반응한 건지 배 속의 겨울이가 표면을 콩콩 때렸다. 한국에 돌아와 주태승과 함께 살고부터 태동이 더욱 잦아졌다. 아직 세상으로 나오려면 더 기다려야 하는데, 벌써 바깥 풍경이 궁금한 모양이었다.

나는 자그마한 웃음을 입가에 내걸고 아이의 또 다른 아빠를 올려다보았다.

“지금 배 두드렸어요.”

“그게 느껴져요?”

“네. 주먹으로 작게 콩콩, 하는 것 같아요. 한 이 정도?”

내 주먹이 주태승의 팔을 약하게 두드렸다. 그는 제 옷에 닿은 손을 보았다가, 야트막한 둔덕이 생긴 배에 눈길을 주었고, 마지막으로 내 얼굴을 지그시 바라보았다.

“귀엽네.”

“네?”

나와 겨울이 중 어느 쪽을 일컫는 말일까. 별것도 아닌 게 신경 쓰였다. 그리고 에둘러 말하는 법이 없는 주태승은 내가 원하는 답을 들려주었다.

“귀엽다고, 여진서 씨.”

곧 부모가 될 인간이 이러면 안 되지만, 그의 애정 표현을 들으니 입꼬리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나는 자꾸만 차오르려는 뺨을 억누르고 공연히 주태승의 팔을 잡아당겼다.

“빨리 가요. 저 졸려요.”

“왜, 오늘 집에 있던 거 아니야?”

“집에서도 할 일 많아요. 겨울이 노래도 들려줘야 하고, 산책도 하고.”

“또?”

“책도 읽어야 하고요, 플루트 연습도 했어요. 오늘 레슨받았잖아요. 아니, 이거 아까 저녁 먹을 때 한 말인데…….”

끊이지 않는 둘만의 대화를 소곤소곤 이어 나가며, 우리는 따사로운 노을빛 조명 아래를 가로질렀다.

***

째깍, 째깍-.

한밤의 적막 가운데, 벽에 매달린 시계의 초침이 분주하게 다음 행선지를 향해 나아가는 소리가 퍼졌다. 간간이 이불이 스치는 잡스러운 울림이 더불어 공백을 채웠다.

나는 감았던 눈을 반짝 떴다. 애초에 정신이 말똥말똥했기에 눈두덩을 들어 올리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다. 자야만 하는데 잠이 오지 않는다는 사실이 굉장히 유감스러웠다. 수마에 몸을 맡기고자 오랜 시간 노력을 기울였으나 의식은 말을 듣지 않았다.

결국 나는 제시간에 잠드는 것을 포기했다. 하지만 깨어 있는다고 하여 특별히 할 일도 마땅치 않다. 그저 멍하니 천장을 보고 있다가 또 눈 감고 양이나 세겠지. 모두가 잠든 새벽에 홀로 버티기가 지루하기 짝이 없었다.

뜻 없이 고개를 돌리자 검은 실내복에 싸인 커다란 등판이 눈에 들어왔다. 잠든 건지 그 주인은 미동조차 없었다.

나는 잠자코 너른 등을 바라보았다.

피곤할 터다. 일하고 온 사람이 새벽 두 시까지 깨어 있기는 쉽지 않다. 높은 직책을 맡고 있으니 이래저래 어깨에 짊어진 일도 많을 것이다. 정말로, 알고 있었다. 하지만 자아를 가진 손가락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주태승 씨.”

콕콕, 손가락이 두어 번 더 등을 찔렀다. 곧 작은 손짓에 반응한 주태승이 몸을 돌렸다. 은은한 스탠드 조명에 나른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이 비쳤다.

주태승은 자연스럽게 팔을 내려 나를 감싸 안았다. 평소에 비해 조금 잠긴 목소리가 뒤를 따랐다.

“안 잤어요?”

“잠이 안 와요.”

“낮에 자서 그렇지.”

나는 주태승의 팔을 벤 채 고개를 위아래로 주억거렸다. 베개보다 딱딱했으나 사물은 주지 못하는 온기가 살갗을 감싸 왔다. 그 감각이 기꺼워, 체취와 페로몬을 쫓아 더 품을 파고들게 되었다.

끝이 단단한 손가락이 내 뺨을 쓰다듬었다. 주태승은 어루만지던 말랑한 살갗에 살며시 입을 맞추고 물었다.

“내가 어떻게 해 줄까.”

“자지 말고 저랑 이야기해요.”

“그래요.”

주고받은 말과 다르게 그 누구도 바로 입을 열지 않았다.

주태승은 조용히 내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고, 나는 손길에 취해 팔뚝에 뺨을 문질렀다. 고양이들이 이렇게 만져 주면 좋아서 꾸벅꾸벅 졸지 않나. 그 이유가 어느 정도 공감이 되었다.

한동안 나를 어르던 주태승은 내가 작게 하품을 토해 내고 나서야 말문을 뗐다.

“레슨받는 건 할 만해요?”

“……플루트요?”

“응.”

나도 모르게 주태승의 손바닥에 이마를 비볐다. 그간 떨어져 있던 보상을 톡톡히 취하려는 듯, 몸은 짝 알파와 접촉하며 달콤한 안정감을 느꼈다. 내가 이럴 때면 이따금 그는 참지 못하고 입술을 부딪쳐 오고는 했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대화 중간에 주태승이 내 뒷덜미를 끌어당겼다. 페로몬이 몰고 온 갈증으로 아랫도리 사이에 은근히 피가 몰렸다. 상대 또한 마찬가지인지, 허벅지 언저리에 페트병과 비슷한 물체가 무게를 싣는 게 전해졌다.

오스트리아에서도, 한국에서도 섹스 없이 밤을 보낸 탓에 둘 다 애가 닳을 대로 닳은 상태였다. 다만 지금은 수술을 마친 지 얼마 되지 않았기에 무작정 서로를 취하기는 조심스러웠다. 주태승 역시 이를 알고 있어 섣불리 배를 맞추려 들지 않았다.

오늘은 키스하면 정말 일 저지를지도 몰라.

나는 입술이 맞물리기 직전에 고개를 돌렸다. 그리고 혀를 섞는 입맞춤을 대신해 그의 뺨에 쪽, 소리가 나도록 입을 맞췄다. 그 모습에 주태승은 바람 빠진 웃음을 흘렸다.

“사람 말려 죽이려고 하네.”

“할 말 생각났어요.”

“뭔데요.”

화제를 돌리기 위함이 아니라 정말 할 말이 생각났다. 나는 주태승의 손가락을 더듬거리며 웅얼거렸다.

“레슨이요. 도희 씨랑 좀 친해졌어요.”

“왜?”

“왜냐니, 둘이 몇 시간은 붙어 있으니까요. 좋은 분 같아요.”

주태승이 내 플루트 선생으로 붙여 준 민도희는 한국에서 유명한 플루티스트였다. 젊은 나이에 해외 교향악단을 거친 후 현재 대학에서 교수를 맡고 있으며, 각종 콩쿠르의 심사를 다니다가 지금은 안식년을 맞아 쉬고 있다고 했다.

이런 사람한테 일대일로 레슨을 받을 수 있다니, 내 알파가 다른 건 몰라도 능력 하나는 확실한 듯했다.

“그래서 이런저런 이야기 했는데……. 하암, 도희 씨 고향이 광주라고 했나.”

“몇 번 봤다고 고향까지 알았어.”

“광주에 맛있는 거 많은데.”

몸이 노곤노곤하니 풀어져 정신까지 흐리멍덩했다. 나는 의식의 흐름대로 생성되는 말을 입 밖으로 줄줄 흘려 댔다.

“좀, 배고픈 것 같기도 하고.”

아까 TV에서 무등산 수박을 먹는 프로그램을 보았다. 그러고 보면 무등산이 광주에 있는 산이 아니던가. 나는 말하다 말고 입맛을 쩝쩝 다셨다. 주태승은 실없는 소리에 답하는 대신 물끄러미 바라볼 뿐이었다.

무등산 수박.

화면으로 봤을 때 참 빛깔이 영롱했었다. 그 어마무시한 크기와 호박을 닮은 생김새가 사람의 호기심을 끌어당겼다. 보통 수박보다 당도도 높고 임금님 진상품으로까지 바친 과일이라고 했다.

“으으.”

갑작스레 발작적인 허기가 나를 찾아왔다. 당장 무등산 수박을 먹지 않으면 세상이 무너질 것처럼 서러움이 밀려들었다. 내가 짐짓 심각한 표정으로 아랫배를 감싸 쥐자, 심상치 않은 기운을 느낀 주태승이 내 팔을 붙잡았다.

“왜.”

“무등산 수박…….”

다른 수박은 안 된다. 반드시 그 호박인지, 수박인지 모를 민무늬를 가진 거대한 수박이어야만 했다. 나는 무등산 귀신에 홀린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무등산 수박 먹고 싶어요.”

“무, 뭐?”

주태승이 황당하다는 투로 되물었다. 나는 서글픔을 얼굴에 있는 그대로 드러내며 말을 이었다.

“하지만 사람이 먹고 싶은 거 다 먹고 살 수는 없겠죠? 새벽에 어떻게 무등산 수박을 구해요. 아무리 주태승 씨라도 무등산 수박까지는 안 되는 거잖아요.”

“…….”

“그냥 해 보는 말이니까 신경 쓰지 마세요. 이제 잘 거예요. 내일 아침에 수박 사서 먹을게요.”

혼자 떠들다 보니 더욱 씁쓸해졌다. 나는 시무룩하게 주태승의 팔을 밀어 내고 이불을 목까지 덮어썼다. 울적하기는 했으나 이대로 누워 있으면 금방 아침이 될 것이다.

나는 이불에 고개를 파묻는 척, 슬쩍 눈을 굴려 주태승을 올려다보았다. 주태승은 특유의 무표정을 유지한 채 내게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곧 눈길이 맞물리고, 일자로 굳어 있던 입매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취향 한 번 고급이네.”

주태승은 번데기와 닮은 형태로 변한 나를 응시하더니 자리에서 일어났다. 설마 진짜 구해다 주려는 건가? 나는 기대 반, 걱정 반으로 내놓은 눈을 끔뻑거렸다.

“자고 있어요.”

짤막한 한마디를 던진 후, 주태승은 침대맡에 걸린 가운을 꿰입었다. 그 길로 그는 느릿하게 침실을 나섰다. 이불에 둘둘 말려 있어 명확히 들리지는 않았으나 누군가와 통화하는 듯한 소리가 언뜻 들려왔다.

“나야, 잠깐 일 좀 해야겠는데…….”

찰칵, 침실 문이 경쾌한 마찰음과 함께 닫혔다. 때문에 더는 주태승의 통화를 엿들을 수가 없었다. 나는 약간의 죄책감과 무수한 만족감을 품고 이불 속에서 바르작댔다.

임금님은 못 되어도 한밤중에 무등산 수박은 먹여 준다니. 역시 돈이 좋다. 오스트리아에서 한국까지 온 보람이 있어.

나는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소소한 행복을 느끼다가, 살그머니 입을 벌려 하품했다. 수박 구하러 간 사람한테는 미안한 일이나 뒤늦게 잠이 쏟아졌다. 본인 입으로 자고 있으라고 했으니까 괜찮으려나.

“겨울이가 수박이 먹고 싶었어?”

겨울이와 나, 둘 중 누가 수박을 찾은 건지는 모르겠다. 그간 살아오면서 이토록 과일이 당긴 적이 없었으므로 전자일 것이다. 나는 멋대로 결론을 내리고 아랫배를 살살 쓰다듬었다.

“아빠가 능력 있어서 다행이다, 그치. 무등산 수박도 다 먹고.”

뱃가죽을 문지르는 손이 차차 속도를 늦춰 갔다. 나는 반쯤 졸음에 잠겨 비몽사몽 입속말을 우물거렸다.

“겨울이는, 흐암, 좋겠네…….”

이윽고 곧게 편 손이 완전히 운동을 멈췄다. 흐릿해져 가는 의식을 더는 붙들어 두기 힘들었다. 염치없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나는 옷자락에 손을 집어넣은 너저분한 자세로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잠결에 실내용 슬리퍼가 끌리는 소리가 언뜻 들려왔다. 뒤이어 누군가 아주 신중한 태도로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었다. 그 주인을 알고 있어, 나는 수마에 이끌리는 와중에도 넌지시 미소 지었다.

***

다음 날 아침에 눈을 떴을 때, 무등산 수박은 당연하다는 듯 식탁 위에 올라 있었다.

나는 잠기운이 덕지덕지 묻은 얼굴로 하얀 접시를 바라보았다. 네모반듯하게 잘려 불그스름하다 못해 보라 빛깔을 띠는 과육이 자태를 뽐냈다. 확실히 보통 수박과는 꽤 차이가 있는 모습이었다.

부스스한 매무새의 나와는 달리 주태승은 출근 준비를 마친 정장 차림이었다. 그는 수박과 나를 향해 차례로 눈동자를 굴렸다. 나는 무언의 권유에 대답하듯 중얼거렸다.

“씨가 있어요.”

“수박이니까.”

“씨 없는 줄 알았는데.”

나는 포크를 집어 속살에 박힌 노란 씨를 일일이 발라내기 시작했다. 좀스러운 행동에서 드러나듯이 그다지 수박을 먹고 싶은 생각이 없었다. 어제 새벽에는 그토록 무등산 수박 생각이 간절했음에도 참 얄궂은 일이었다.

그래도 가져온 성의가 있으니 먹어는 봐야겠다. 나는 씨의 흔적대로 듬성듬성 구멍이 난 수박을 한 조각 베어 물었다.

보통 수박보다 단 것 같기는 한데, 상상한 만큼 특출한 무언가가 있는 건 아니었다. 그는 그다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으나, 나는 새벽에 고생한 주태승에게 성의를 표했다.

“맛있어요.”

“씨 없는 수박 먹고 싶었어요?”

“아뇨, 제가 TV에서 잘못 봤나 봐요.”

씨가 노란색이라 잘 안 보인 모양이었다. 나는 각박한 평가를 내리면서도 계속해서 수박을 입 안에 밀어 넣었다. 씹을 때마다 과즙이 줄줄 터지는 식감이 나쁘지 않았다.

주태승은 말없이 나를 구경하다가, 하얗고 깔끔한 디자인의 머그잔을 입에 가져다 댔다.

그의 도드라진 목울대가 커피 향을 싣고 위아래로 요동쳤다.

“오늘은 친구 만난다고 했나?”

“아, 네. 오후에요.”

“데리러 갈 테니까 끝나면 전화해요.”

나는 입에 남은 과일을 볼 한쪽에 몰아 우물거렸다. 먹이를 저장하는 햄스터처럼 나머지 한쪽에도 수박을 채우니 입 속이 과즙으로 가득했다.

“히료 어허요.”

“왜.”

부정확하게 뭉그러진 발음을 주태승은 잘도 알아들었다. 나는 잘게 토막 나 형태를 잃은 과일을 꿀꺽 삼키고 대답했다.

“택시 타면 돼요.”

길게 찢어진 뱀 같은 눈초리가 빤히 나를 응시했다. 새삼 신비로운 외모였다. 당장이라도 얼음 결정이 맺힐 듯 한기가 서린 얼굴에 아름다움이 공존한다는 게. 나는 위축과 경외을 동시에 느끼며 포크를 지분거렸다.

이내 주태승은 천천히 시선을 떨어트렸다. 그가 목을 울리는 소리가 식탁에 낮게 드리웠다.

“이 정도는 하게 해 줘요.”

“…….”

“무서워서 그래, 내가.”

저 철면피 주태승이 두려워하는 일이라는 건 내가 가장 잘 알고 있었다. 그가 왜 저런 행동을 취하는지 이해 못 하는 바는 아니었다. 바쁜 사람을 생각해 필요 없다고 말했으나 정작 당사자는 배려를 올곧이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

이는 우리 사이에 잔존하는 상흔이자, 앞으로 안고 가야 할 후유증의 일환이다.

나는 애꿎은 수박 표면을 포크로 긁다 말고 대답했다.

“알았어요, 데리러 와요.”

동의가 떨어졌지만, 주태승의 침체된 눈동자는 여전히 식탁 어딘가를 더듬거렸다. 저절로 분위기가 착 가라앉았다. 나는 할 말을 찾으려다, 다부진 손목에 걸린 은빛 시계를 내다보았다.

“출근 시간 됐어요.”

내 말에도 주태승은 이렇다 할 반응을 보이지 않았다. 나는 자리에서 일어나 맞은편에 앉은 그에게 다가섰다.

“기다리고 있을게요.”

단단한 목덜미를 끌어안자, 곧 악력을 실은 손이 내 등허리를 짓눌러 왔다. 주태승은 그대로 내 가슴 언저리에 코를 묻은 채 집요하게 살 내음을 들이켰다.

접촉은 거기에서 끝나지 않았다. 나를 끌어당기는 힘이 점점 강해져 똑바로 서 있기가 어려웠다. 결국 몸을 지탱하던 다리가 무너져, 나는 주태승의 상체에 엉성하게 기댄 자세가 되었다.

“계속 업고 다닐 수도 없고, 이걸.”

“못 걷는 게 아닌데요.”

“대견하네. 혼자 잘 걸어서.”

별안간 주태승이 내 목덜미에 입술을 짓눌러 왔다. 그리고 마치 괘씸한 놈에게 벌을 주듯이 살짝 따끔할 정도로 살갗을 빨았다. 피부를 조이는 입술, 이로 깨문 자리를 달래는 젖은 혀가 주는 감각이 선연했다. 나는 앓는 소리를 내며 무의식중에 그의 와이셔츠를 바짝 구겼다.

이러면 안에 폴라 티 받쳐 입어야 하잖아. 속으로 투덜거리면서도 야릇한 느낌이 싫지 않았기에 나는 그를 내버려 두었다.

주태승에게 안기고 5분 남짓한 시간이 흘렀다. 마음 같아서는 조금 더 이러고 싶었지만, 내 알파는 여유로운 백수가 아니었다.

“아무튼, 다녀와요.”

“응.”

못내 미련을 떨치지 못한 입맞춤이 내 눈가에 달라붙었다. 나는 접시 위에 남은 수박을 한 조각 주워 먹고 뒤로 물러났다. 빨리 가라는 의미로 손을 휘젓는 나를 본 주태승이 헛웃음을 흘렸다.

이별의 순간은 담백했다. 아니, 매일 아침 펼쳐지는 풍경인데 거창하게 배웅하는 편이 더 우스웠다.

겉옷을 챙겨 입고 현관에 선 주태승은 나를 한 차례 더 끌어안고서 집을 나섰다. 넓은 집이 겨울이와 나, 둘만의 공간으로 변모하는 시점이었다.

나는 적막이 흐르는 집 안을 흘끔 내다보았다.

지금은 두 명이고, 앞으로 셋이 될 예정이긴 하지만 집이 지나치게 넓었다. 1층만 해도 어지간한 가정집과 비교하는 게 죄스러울 지경인데, 계단을 오르면 그런 공간이 하나 더 있었다. 게다가 야외에는 고급스러운 조경을 가진 마당까지 펼쳐져 있어 이곳이 서울 한복판이 맞는지 의심스러울 정도였다.

이전에 살던 빌라도 무척 호화로웠으나, 지금의 주택에 비하면 귀여운 수준이었다. 주태승이 회사에서 잘릴까 봐 고민한 지난날의 나를 생각하면 한숨이 나왔다.

나는 햇살이 비치는 전면 창을 보고 기지개를 켜다가, 느지막이 옷방으로 걸어갔다.

머릿속으로는 수많은 옷가지가 즐비한 옷장을 떠올렸다. 아무리 선택지가 다양해도 손이 가는 녀석은 몇 개 없다. 아이보리색 니트와 허리에 밴딩 처리가 되어 있는 청바지 정도가 편했다.

어떤 옷을 입을지 정하고 나니 굳이 옷방까지 갈 필요가 없어졌다. 나는 대리석이 깔린 복도에 멀거니 서서 괜히 허벅지를 긁었다.

……페로몬이 참, 사람 기분을 이상하게 만든다.

잠시 뜸을 들이다가 향한 곳은 주태승의 옷방이었다. 누구도 볼 사람이 없는데, 나는 살금살금 주변을 둘러보고 빠르게 문을 통과했다.

옷장 문을 열자마자 익숙한 체취와 페로몬이 코언저리로 흘러 들어왔다. 나는 말라 가는 입술을 혀로 축이며 와이셔츠 두어 벌을 낚아챘다. 도둑질하는 건 아니지만, 떳떳하게 남들 앞에서 자랑할 만한 행동도 아니었다.

와이셔츠 옆에 걸린 코트까지 팔에 짊어진 후, 나는 옷방 가운데 마련된 큼지막한 스툴에 앉았다.

진짜 창피한 건 아는데.

손이 저절로 움직여, 부지런히 코트와 와이셔츠를 스툴 위에 원형으로 깔았다. 옷으로 만든 어설픈 둥지가 완성되는 건 순식간이었다. 나는 주태승의 냄새가 진하게 밴 와이셔츠를 옆구리에 낀 채 그 요새 비슷한 공간에 누웠다.

“아.”

무어라 형용하기 어려운 만족감이 밀려왔다. 나는 달큼한 한숨을 내쉬며 몸을 늘어뜨렸다. 주태승의 품에 안겨 있는 듯, 나른하고 편안한 기운이 주변을 둥실둥실 감쌌다.

새벽녘에 잠든 것치고 너무 일찍 일어나기는 했지. 와이셔츠 깃에 코를 푹 파묻으니 잠이 솔솔 밀려왔다.

네 시 반 약속이니까 더 자고, 골라 둔 옷 입고 나가면 되겠다.

속으로 얼기설기 계획을 짠 나는 그렇게 옷가지에 둘러싸여 잠들었다. 나도 모르게, 입가에 충만감으로 미소가 퐁퐁 솟아났다.

***

“아, 여기서 내릴게요.”

나는 운전석에 앉은 남자를 흘끗 바라보며 문손잡이를 잡았다. 최대한 자연스러운 어조를 흉내 냈으나 어색함이 섞여 나오는 건 별수 없었다. 팔자에도 없는 운전기사를 두려니 이렇다.

“기다리지 마세요.”

간결한 말을 덧붙이고 문을 열자 시린 겨울 공기가 뺨을 에워쌌다. 나는 하얀 입김을 내쉬며 약속 장소인 카페를 내다보았다. 건물 1층에 자리 잡은 앙증맞은 규모의 가게였다.

어디서 이런 곳을 귀신같이 찾아내나 모르겠다.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날 생각에 광대가 느슨하게 풀어졌다. 한편으로 묘하게 긴장도 되었다. 그리 긴 시간은 아니었지만, 떨어져 있는 동안 내가 많이 변했기 때문이다. 외형도, 마음도.

의식적으로 깊은숨을 들이쉬고, 나는 힘을 주어 유리문을 열었다.

“어서 오세요.”

입구와 가까운 카운터에 앉은 점원이 밝은 얼굴로 인사를 건넸다. 나는 그녀에게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며 카페 내부를 훑었다. 홀 구석에서 눈에 익은 인영 둘이 대화를 주고받는 모습이 보였다.

먼저 나를 발견한 건 오민지였다. 이야기하다 말고 목을 축이던 그녀의 시야에 내가 잡힌 듯했다. 새침한 눈매가 동그랗게 변했다가, 곧 밝은 초승달처럼 완만히 휘었다.

“여진서!”

오민지는 내 이름을 부르는 데 그치지 않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성큼성큼 다가온 그녀가 나를 와락 끌어안았다. 나는 편히 팔을 두를 수 있도록 살짝 자세를 낮추며 웃었다.

“잘 지냈어? 잘난 얼굴은 여전하네?”

끝이 둥근 손가락이 내 얼굴을 감싸 왔다. 오민지가 반가움을 온몸으로 드러내는 사이에 맞은편에 앉아 있던 박상훈도 일어났다. 그가 내 옆으로 바짝 다가와 물었다.

“나도.”

이번에는 박상훈이 나를 덥석 껴안았다. 오민지에 이어 박상훈까지, 이리저리 끌려다니느라 정신이 없었다. 나는 친구의 가슴팍에 반쯤 파묻혀 입을 웅얼거렸다.

“영상 통화 가끔 했잖아.”

“그거랑 직접 만나는 거랑 같아? 우리가 네 이야기 얼마나 했는지 모르지.”

다시금 매달리려는 오민지를 겨우 떼어 놓고, 나는 비틀비틀 자리에 앉았다. 테이블 위에는 벌써 내 몫의 커피가 놓여 있었다. 아무래도 카페인은 가급적 피하고 싶은 마음에 입을 대지는 않았다.

“근데 여진서 한국 올 줄 몰랐어. 그것도 이렇게 갑자기.”

본인 몫의 스무디를 빨아들인 오민지가 바로 화젯거리를 던져 왔다. 아무래도 저 부분이 가장 궁금할 터다. 해외에서 스카우트 들어왔다고 멋대로 출국하더니, 몇 개월 만에 다시 돌아왔으니까.

나는 애매한 웃음을 내두르고 대답을 망설였다. 어디서부터 어떻게 설명을 해야 할까. 친구들에게 금방 들킬 거짓말 따위는 하고 싶지는 않았다.

“어, 휴직했어.”

“뭐?”

군더더기 없이 명료한 이유를 털어놓자 오민지와 박상훈의 동공이 동시에 커다랗게 벌어졌다. 놀람도 잠시, 둘은 허공에서 짐짓 심각하게 시선을 교환했다. 그중 앞서 입을 연 것은 박상훈이었다.

“휴직이 되냐? 멀쩡히 다니다가 왜?”

“나도 몰라. 잘릴 수도 있어.”

“야, 너 무슨 사고쳤어?”

직설적인 물음에 오민지가 박상훈의 등을 세게 후려쳤다. 목소리를 낮추고 말하는 듯했으나, 그녀가 면박을 주는 소리가 대놓고 들려왔다.

“미친놈아, 좀! 다 사정이 있었겠지.”

이걸 사정이라고 해야 하나? 박상훈 말대로 사고에 가까운 건가, 계획적인 건 아니었으니. 나는 아랫배를 만지작대며 골몰히 생각에 잠겼다. 어느 타이밍에 임신했다고 말해야 자연스러울지 모르겠다. 그냥 지금 말할까.

오민지는 화기애애한 분위기가 깨지는 걸 우려하는 듯했다. 내 멍한 표정을 좀 다른 의미로 해석했는지, 그녀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말하기 싫으면 말 안 해도 돼.”

“그래도 궁금하긴 한데.”

“혹시 플루트 아예 그만둔 건 아니지……?”

박상훈을 만류하면서도 의문스럽긴 했던 모양이었다. 나는 자그마한 미소와 함께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오민지는 한결 안도한 표정을 지었다. 사실 내 이야기보다는 이 녀석들이 뭐 하고 지냈는지가 더 알고 싶었다.

“너희는 잘 지냈어?”

“그냥 똑같지, 뭐.”

“박상훈은?”

내 시선이 네모난 허니브레드를 우걱우걱 삼키고 있는 박상훈을 향했다. 그는 입가에 묻은 캐러멜 시럽을 엄지로 닦아 내고 대답했다.

“나 애들 과외 봐주면서 악단 알아보는 중.”

“고깃집은?”

“얼마 전에 관뒀어. 마지막 날에 사장님이 한우 구워 줬다. 우리 마장동에서 직접 떼 오잖아, 개존맛이야.”

한우 맛있겠다. 저녁에 주태승한테 고기 먹자고 하면 바로 사 줄 것 같은데. 나는 소리 없이 입맛을 다셨다.

그 모습을 본 오민지가 푸스스, 웃음을 터트리고 물었다.

“고기 먹고 싶어? 그냥 식당에서 볼 걸 그랬나.”

“괜찮아, 민지 너는 요즘 뭐 해?”

“나 임용 준비하는데, 집에 있기 좀 그래서 조교 해.”

성격이 꼼꼼하니 잘 어울릴 것도 같다. 조교. 나는 입술로 그녀의 말을 되풀이하다가 포크에 묻은 크림을 빨아 먹었다. 아릿한 단맛이 혀끝에 남아 턱이 당겼다.

“이제 곧 새 학기 되잖아. 교수님들 일거리 대신 받느라 정신없다.”

“으응.”

“당장 과에서 하는 특강도 있고, 신입생 대상으로 그런 거 좀 있어서.”

귀찮은 일이 많겠다. 나는 테이블에 놓인 물을 따라 마시며 오민지의 말을 경청했다. 그녀 또한 나를 빤히 바라보다가 무언가 떠오른 듯 물었다.

“너 그럼 지금 뭐 하고 있어?”

“나 집에서 쉬면서……. 레슨도 받고.”

“아, 진짜? 그럼 너 선배 특강 한번 해 볼래?”

갑자기 무슨 특강. 나는 의아함을 고스란히 얼굴에 내비치고 되물었다.

“특강이라니?”

“우리도 전에 들었잖아. 아, 너는 쨌나? 잘 된 선배들 와서 빔프로젝터 켜고 강의하는 거. 질문도 받고.”

“내가 그걸 왜 해. 졸업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았는데.”

“그게 무슨 상관이야. 여진서 스펙이면 대단하지. 학교 다닐 때 국내 콩쿠르 휩쓸고, 졸업하자마자 몬트 교향악단에서 데려가고.”

학생들 앞에서 강의를 하라니, 하물며 내 이야기를 하라고. 벌써부터 속이 울렁거렸다. 내가 가진 경력은 아주 남다르지도 않았으며 오스트리아에서 보낸 시간은 좋게 쳐줘도 긍정적인 경험은 아니었다.

다른 걸 다 떠나서 너무 떨린다. 나는 입술을 시원찮게 일그러뜨리고 대답했다.

“못 할 것 같은데.”

“고민도 안 해? 부담되면 와서 질의응답만 해도 돼.”

“……생각은 해 볼게.”

“그럼 네 메일로 관련 자료 보낸다?”

“어.”

별 의미는 없겠지만. 나는 심란한 낯으로 재차 물을 들이켰다. 그에 오민지의 시선이 내 얼굴에서 물컵으로 떨어졌다. 그녀는 기울어진 잔을 바라보더니, 의외라는 투로 물었다.

“근데 너 왜 커피 안 마셔?”

“아, 좀 줄이려고.”

“커피를?”

잠자코 우리의 대화를 듣던 박상훈이 짐짓 진중한 눈빛을 하고 나를 훑었다. 시간이 지날수록 그의 표정이 아리송하게 변해 갔다.

“너 원래 커피 잘 먹잖아.”

“응.”

“뭐, 오스트리아에서 입맛 변했냐?”

“그건 아닌데.”

박상훈은 다시 한번 내 신체 부위를 하나하나 뜯어보았다. 니트 소매를 들춰 손목을 관찰하기도 하고, 어깻죽지를 주물러 두께를 가늠하기도 했다. 나는 그가 마음껏 나를 진단하도록 내버려 두었다.

“음식이 입에 안 맞은 거야?”

“아니.”

“그래 보이긴 한다. 한국에 있을 때보다 살은 훨씬 붙은 것 같아.”

“그런가?”

“어. 내가 본 여진서 중에 제일 덜 말랐네, 지금.”

아무래도 겨울이와 함께하며 식욕이 왕성해진 건 사실이었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딱히 절제하지 않고 음식을 먹었고, 한국에 와서도 주태승이 차려 주는 수라상을 매일 같이 받았으니 살이 찌는 게 당연했다.

몸이 무거워졌다는 자각은 있었지만, 타인의 눈에 띄는 수준인 줄은 몰랐다. 함께 사는 사람은 별말 없었는데.

박상훈은 얼떨떨한 낯을 하며 천천히 눈길을 떨어트렸다. 눈동자의 궤적이 내가 입은 니트 가운데를 가로질렀다. 나도 그를 따라 굴곡이 드러난 아랫배를 바라보았다.

“배도 좀 나왔고…….”

겨울이를 품은 지 6개월 남짓한 시점, 아랫배는 다른 신체 부위에 비해 도드라지게 불러 있었다. 나는 아무 생각 없이 니트 위의 윤곽을 쓰다듬었다.

박상훈의 말이 끝나자마자 거짓말 같은 정적이 테이블을 휘감았다.

오민지와 박상훈은 동시에 입을 다물고 내 배에 시선을 빼앗긴 상태였다. 두 사람 다 처음 보는 표정을 짓고 있었다. 재채기가 나오기 직전의 사람처럼 콧구멍을 벌름거렸다가, 입술을 달싹이는 모습이 조금 우스웠다.

“왜 배만, 나왔을까……. 여진서가.”

맥없이 침묵을 깬 건 오민지였다. 나는 얼이 빠져 혼잣말을 중얼대는 그녀를 조용히 지켜보았다. 아마 머릿속으로 수만 가지 상상을 하고 있을 터다. 어쩌면 지금이 소식을 전하기에 최적의 타이밍일 수도 있겠다.

나는 넋이 나간 친구들을 향해 간결한 답변을 내놓았다.

“임신해서 그래.”

흐읍, 누군가 급히 숨을 들이켜는 소리가 들렸다. 그와 더불어 식기가 접시에 부딪혀 떨어지는 잡음이 크게 귓가를 관통했다. 나는 테이블을 나뒹구는 포크를 물끄러미 응시하다가 눈동자를 들어 올렸다.

“뭐 했다고?”

다음으로 들려온 건 사시나무 떨리듯이 요동치는 목소리였다. 오민지는 눈이며, 입이며 할 것 없이 얼굴의 모든 부위를 화등잔만 하게 벌렸다. 옆에 앉은 박상훈은 어울리지 않게 손으로 입을 틀어막고 있었다.

내가 너무 태평한 걸까. 저 반응이 오히려 약간 재미있게 느껴졌다. 나는 모호한 미소를 머금고 대답했다.

“임신.”

“너, 임, 뭐?”

좀처럼 말을 더듬는 친구가 아닌데, 오민지는 어지간히 놀란 모양이었다. 그녀는 바닥을 향해 낙하할 기세인 턱을 추스르지도 않고 물었다.

“나, 나 잘못 들은 거 아니지? 너, 너 지금 그, 애 가졌다고?”

“응.”

나로서는 이미 아이를 가진 후로 많은 시간이 흘렀기에 울고불고할 시점도, 당황할 시점도 아니었다. 이 덤덤한 태도가 이들에게 더욱 혼란을 가중시키는 듯했다. 오민지의 열린 입술에서 성대를 긁는 듯한 거친 숨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내 상황을 지켜보던 박상훈이 나지막이 중얼거렸다.

“와 씨발, 세상에…….”

욕지거리가 섞인 문장은 하나의 도화선이 되었다. 타들어 간 심지 끝에서 불꽃이 튀듯, 오민지는 목구멍에 막혀 있던 질문을 연거푸 발사했다.

“아니, 언제부터? 이걸 어떻게 숨겨? 너 미친놈이야? 정신 나갔어? 애 아빠는 누구야?”

“…….”

“아, 진짜 너, 너! 야!”

별안간 오민지가 크게 소리를 지른 탓에 얼마 없는 사람들의 이목이 이쪽으로 집중되었다. 어여쁜 입매가 울기 직전의 사람처럼 일그러졌다. 가까스로 박상훈이 그녀를 만류했기에 그녀는 숨을 씨근대며 목소리를 죽였다.

“너, 무슨 일이냐고. 변명이라도 해 봐. 왜 말 안 했어?”

친누나가 있다면 오민지와 같은 행동을 취하지 않았을까 싶다. 저 악에 받친 어조가 싫지 않았다. 도리어 가슴이 뭉근해지는 게 참 오묘한 기분이었다.

“미안해. 나도 바로 안 건 아니야. 계획한 게 아니라서.”

“그, 그럼 더 말해야지. 너 또 혼자, 응? 그게 얼마나 힘들고 중요한 일인데 혼자서……!”

화를 내는 만큼, 속상해하는 만큼 나를 걱정했다는 걸 알았다. 나는 그녀의 타박을 얌전히 받아 냈다.

“그래서 딸이래, 아들이래?”

박상훈은 다른 한 명에 비해 회복이 빨랐다. 그는 놀라움과 흥미가 반쯤 섞인 기색으로 내 배를 내다보았다. 나는 부푼 둔덕을 살짝 쓸어내리고 질문에 응했다.

“딸이래.”

“오.”

작은 감탄이 돌아왔다. 박상훈은 대강 오민지의 어깨를 두드리며 말을 이었다.

“근데 여진서 닮았으면 개귀엽겠다. 아역 배우 시켜.”

“넌 지금 그런 소리가 나오냐? 정신 나갔니?”

서운해도 할 말은 해야겠는지, 오민지는 곧장 박상훈에게 핀잔을 놓았다. 나는 무척이나 그리웠던 친구들의 대화를 기꺼이 관조했다. 그러나 구경꾼 역할은 오래 가지 못했다.

“외국에서 애인 생긴 거야?”

오민지가 저렇게 묻는 것도 일리가 있었다. 주태승과의 관계를 말한 적이 없으므로 당연한 흐름이었다. 나는 침착하게 고개를 저었다.

“그럼 누군데? 애를 뭐 혼자 만들지는 않았을 거 아니야.”

“으음.”

어쩌면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보다 아버지가 주태승이라는 사실이 더 큰 충격으로 다가올지도 모르겠다. 나 역시 이쪽을 전하기가 훨씬 어려웠다. 주태승과 어떻게 만나게 되었는지, 또 어쩌다 일이 이렇게 되었는지 물어 올 게 뻔한데, 그 모든 게 쉬이 믿기지 않을 이야기일 테니 자세한 서술을 덧붙여야 할 터였다.

어디부터 어떻게 말을 해야 하나. 내가 사실 전생의 기억을 가지고 있는데, 이 사람은 그때의 인연으로 어쩌다 다시 만나서 아이까지 생기게 되었다고…….

실제로 일어난 일이었으나 지나치게 현실성이 없었다. 나는 설명을 포기하고 뒷머리를 긁적였다. 오민지는 입을 꾹 다문 내가 답답하다는 듯 대답을 보챘다.

“응? 우리가 아는 사람이야?”

“아는 사람이긴 해.”

“우리 과야?”

“그건 아니야.”

망설이다 보니 자꾸만 대화가 겉돌았다. 나는 오민지의 복장이 터져 버리기 전에 조심스럽게 말을 얹었다.

“데리러 오기로 했으니까 이따가 얼굴은 볼 수 있어.”

“아니, 뭔 연예인 만나? 왜 걱정되게 말을 안 해!”

“소개해 주고 싶은데……. 좀 바쁜 사람이라.”

허니브레드 두 조각을 한 번에 입에 넣은 박상훈이 호기심 어린 말투로 물었다.

“진짜 연예인 만나는 거 아니냐? 여진서 정도면 가능하다고 본다.”

졸지에 주태승을 연예인으로 만들고 말았다. 끝내 원하는 답변을 듣지 못한 오민지가 샐쭉하게 눈을 흘겼다. 그녀는 야속하다는 듯이 나를 바라보다가, 한숨 섞인 물음을 내놓았다.

“지금 애는 몇 개월이나 됐어?”

“여섯 달 정도.”

“뭐, 진짜? 근데 배 많이 안 나왔네.”

“원래 마르기도 했고, 남자 오메가는 좀 그렇대.”

오민지의 동공이 재차 휘둥그레 벌어졌다. 그리고 니트로 가려진 배의 부피를 가늠하듯 허공을 손으로 더듬었다.

“진짜 안 믿겨. 여진서가 임신……. 애가 애를 가졌네.”

“야, 대학 졸업까지 했는데 쟤가 무슨 애야.”

“말이 그렇다고, 이 자식아.”

나는 오민지가 박상훈을 팔꿈치로 가격하는 장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애꿎은 옆 사람에게 한껏 폭력을 행사한 친구는 곧 의기소침한 표정을 지었다.

“결혼은?”

“어?”

“설마 식도 이미 올렸다고 하지 마라. 그럼 진짜 죽여 버릴 거야.”

이번에 받은 질문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어쩐지 허를 찔린 기분이 들었다. 물음을 던진 건 상대방인데도 내가 더 어리둥절한 낯으로 변했다.

결혼? 나랑 주태승이?

왜 여태껏 이 부분에 대해 생각해 보지 않았을까. 돌이켜 보면 단지 함께 지낸다는 계획은 상당히 막연한 것이었다. 만남과 이별, 그리고 다시 연애까지 평범과 동떨어져 있었기에 나도 모르게 이 상황을 자연스레 받아들이고 있었다.

결혼에 대해서는 부정적인 인식도, 그렇다고 기대하는 마음도 없었다. 지금도 같이 살고 있으니 사실혼이나 다름없는 관계 아닌가. 부부의 연을 맺으면 정확히 어떤 변화가 생기는지 잘 알지 못했다.

“잘 모르겠어.”

“뭐? 얘 또 나 걱정시키네.”

오민지는 심란한 기색을 그대로 얼굴에 내비쳤다. 그녀가 자신의 머리카락을 거칠게 헤집어 흩자, 박상훈이 헝클어진 부분을 손으로 정리해 주며 말했다.

“알아서 잘하겠지. 넌 뭐 여진서가 바보인 줄 아냐?”

“그건 아니지만, 애가 가끔 이상한 데서 나사가 빠지니까 그렇지.”

하고 싶은 말이 무척 많은 것처럼 보였으나, 고맙게도 오민지는 타박을 멈춰 주었다. 그녀는 동그스름한 분홍빛 손톱으로 빨대를 잘근잘근 짓눌렀다. 나는 기형적으로 휘어진 빨대를 말없이 바라보았다.

“……좋은 사람인 거지?”

다정한 우려의 종착역은 그 질문이었다. 나는 희미하게 웃으며 대답했다.

“응.”

“그럼 됐어. 다음에 자리나 만들어 줘.”

그 담백한 대화를 마지막으로 나에 대한 화젯거리는 끝이 났다. 고개를 돌리며, 아이 선물은 어떤 걸 해야 하냐고 중얼대는 오민지의 목소리가 자그맣게 들려왔다.

“야, 너 구찬혁이랑 김은조 사귀는 거 아냐?”

잠시 휴대 전화를 들여다보던 박상훈이 새로운 이야기를 가져왔다. 나는 흐릿해진 동기들의 얼굴을 떠올리려 애쓰며 그의 말을 경청했다. 오민지는 그럴 줄 알았다는 둥, 다 눈에 보였다는 둥 능청을 떨어 댔다.

우리는 지나간 인연들의 근황에 대해 말하고, 과거의 사건들을 얼마간 추억했다. 당시에는 아등바등 괴로워했으나 지금에 와서는 웃을 수 있는 일들이 대화 속에서 되살아났다.

같은 계절을 공유한 사람들과 보내는 시간은 이토록 소중한 것이었다. 새삼 좋은 친구들이 곁에 있어서 참 다행이었다.

몇 년이 흘러, 언젠가 이 순간을 떠올리고 즐거워할 날도 오겠지.

나는 가슴 한편이 충만하게 차오르는 것을 느끼며 미지근한 물을 입술 사이로 흘려보냈다.

***

회포를 풀다 보니 어느덧 창문 밖이 캄캄해져 있었다.

무르익은 분위기가 소강되고, 슬슬 약속이 파하려는 기미가 감돌았다. 나는 버스 시간을 확인하는 박상훈을 바라보다가 휴대 전화를 꺼내 들었다. 주태승으로부터 온 간결한 문자가 화면을 채우고 있었다.

「차에 있을 테니까 천천히 와요」 오후 8:40

지금 나간다는 답장을 보낸 후 고개를 들자, 오민지와 박상훈은 이미 나갈 채비를 끝낸 상태였다. 나는 그들을 따라 카페 문 앞까지 걸어갔다.

“여진서 메일 주소 그대로지? 집 가서 확인해.”

“아, 응.”

밖에 있는 건가. 나는 눈을 굴려 창문 너머를 슬쩍 내다보았다. 과연, 고즈넉한 카페 골목 뒤에 이질적인 고급 승용차 한 대가 서 있는 게 비쳤다.

“그분은 도착하셨대?”

“그런 것 같아.”

“얼굴 좀 보자. 대체 어떤 새끼가 우리 여진서 잡아먹었는지, 어중이떠중이 같은 놈이기만 해 봐라.”

“저건 무슨 지가 친누나라도 되는 줄 아네.”

박상훈의 시비를 무시한 채, 오민지는 결의에 찬 표정으로 주먹을 꽉 쥐었다. 객관적으로 보면 오히려 부족한 건 주태승이 아니라 내 쪽인데. 나는 어색하게 웃으며 유리문을 열어젖혔다.

봄이 성큼 다가왔으나 여전히 밤바람은 차가웠다. 코트 자락을 잘 추슬러도 드러난 살갗이 시렸다. 나는 왼팔을 손바닥으로 문지르며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눈에 익은 고급 승용차는 아까 봤던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오래 기다린 건 아니겠지. 피곤할 텐데 쉴 시간을 빼앗은 것 같아 마음이 편치 않았다.

“저 차야?”

차까지는 멀지 않았다. 친구들을 주렁주렁 매달고 주태승을 만나려니 어색했다. 내 옆에 선 오민지는 차를 빤히 들여다보았다. 그녀가 회색 승용차를 전체적으로 훑고 짤막한 감상을 내놓았다.

“돈은 많은가 보다.”

엔진 소리가 들릴 만큼 차와 가까워지자, 오민지는 패기롭게 전진하다 말고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무언가를 유심히 관찰하는 듯했다. 그녀의 시선이 닿은 끝을 보고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운전석 문이 천천히 열리고 있었다.

이윽고 다음 순간, 아침에 현관에서 마주했던 차림의 주태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야, 뭔 키가 저렇게 크…….”

그와 동시에 오민지의 목소리가 끊겼다. 그녀는 문장을 맺지 못한 채 크게 숨을 들이켰다. 흐읍, 호흡을 삼키는 울림이 귓가에 바짝 달라붙었다.

주태승이 넓은 보폭으로 다가올 때까지도 오민지는 입을 다물지 못했다. 나는 괜히 그녀의 눈치를 보다가 시선을 옮겼다. 눈썹을 찌푸린 박상훈이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많이 본 것 같은데.”

내 동거인은 무신경한 사람이었고 주변에 좀처럼 관심을 두지 않는다. 하여, 그는 무척 천연덕스러운 태도로 곧장 내게 걸어왔다. 도시의 야경을 떠올리게 만드는 향수 냄새가 체취와 섞여 코언저리를 맴돌았다.

주태승은 마치 이 공간에서 나밖에 보이지 않는다는 듯, 내 뺨에 덤덤히 손을 얹어 왔다.

“잘 놀았어요?”

긴 엄지가 식은 살갗을 몇 차례 어루만졌다. 눈을 가늘게 뜬 그 주인이 낮은 목소리로 속삭였다.

“얼굴이 다 얼었네.”

“밤 되니까 조금 추워서요.”

“오늘은 이불 똑바로 덮고 자요. 어제처럼 잠결에 다 걷어차지 말고.”

주태승은 나를 품에 끌어당기고 귓불에 살짝 입을 맞췄다. 오민지의 표정이 점점 경악스러움을 더해 갔다. 민망함에 얼굴이 달아오르는 게 느껴졌다.

그제야 주태승의 시선이 주변에 닿았다. 서늘한 눈동자가 얼어붙은 두 사람을 훑고 지나갔다. 안 그래도 인상이 살갑지 못한데 저렇게 보면 어떡하나. 친구들을 소개하고자 고개를 들었을 때, 주태승이 한 박자 먼저 말문을 열었다.

“친구?”

“네, 대학 동기예요.”

주태승은 잠시 오민지와 박상훈을 바라보더니, 몸을 완전히 틀어 그들을 마주했다.

“인사가 늦었네요. 이야기는 많이 들었습니다.”

뒤이어 그의 손에서 명함 두 장이 딸려 나왔다. 얼떨결에 각진 종이를 받아 든 오민지가 더듬더듬 대답했다.

“아, 어, 네. 저도 뉴, 뉴스에서 가끔 뵀어요. 저번에 강의도 오시고…….”

“기억해 주니 영광입니다.”

사무적인 어투로 호응한 주태승이 팔을 뻗어 내 어깨를 감쌌다. 나는 물음표가 잔뜩 찍힌 친구의 눈빛과 타인에게 무관심한 연인의 손길을 동시에 받아 내야만 했다.

“여기서 이럴 게 아니라 다음에 식사 대접 한번 하죠.”

비싼 거 사 주려나 봐, 라고 박상훈이 속살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주태승은 굳이 대꾸할 가치를 느끼지 못하는 듯했다. 그는 감흥 없이 짧게 고개를 까딱여 보였다.

“바람이 차서 먼저 가 보겠습니다. 오늘 여진서 씨랑 놀아 줘서 고마워요.”

어서 차에 타라는 듯, 주태승이 어깨에 두른 손에 힘을 실었다. 나는 어색한 미소를 머금고 오민지와 박상훈에게 눈인사를 건넸다. 이제야 멍한 기색을 벗어난 오민지가 조금 큰 목소리로 말했다.

“전화, 할 거니까 받아.”

“으응.”

나는 오민지에게 들려줄 이야기를 속으로 생각해 보며 손을 흔들었다. 아무래도 꽤 긴 통화가 될 것 같았다.

***

어느새 겨울도 끝물이었다.

구석에 소담스럽게 쌓여 있던 눈 더미는 토양의 틈바구니로 녹아 버리고, 그 자리를 드문드문 피어오른 새싹이 채웠다. 가냘픈 나뭇가지에도 연둣빛 꽃눈이 앙증맞게 돋아났다. 바야흐로 꽃과 나무는 봄을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나는 납골당 앞을 장식한 화단을 바라보다가 안으로 들어섰다. 특유의 차분한 클래식 음악 때문인지, 몇 번을 와도 기분이 가라앉는 공간이었다.

낮 시간이었기에 실내에는 나만 있는 게 아니었다. 유골함이 늘어진 구석에 한 무리의 인파가 서 있는 모습이 보였다. 주고받는 대화로 미루어 보면 가족인 듯했다.

한 여성은 입을 손으로 가린 채 눈물을 참았고, 그 곁의 남성이 그녀의 어깨를 토닥거렸다. 울지마, 괜찮아. 그는 입술을 뻐끔대며 그렇게 위로를 건넸다. 아이는 여성의 손을 잡고 함께 울먹거렸다.

혼자 온 건 나밖에 없구나. 같이 가 주겠다는 주태승의 제안을 만류한 건 나인데도 은근한 쓸쓸함이 느껴졌다. 나는 입가에 맴도는 쓴 기운과 함께 걸음을 옮겼다. 주머니 속에 감춘 편지가 바스락대는 잡음이 뒤를 따랐다.

엄마는 늘 그래 왔듯이, 좁고 투명한 유리 장 안에서 나를 맞아 주었다.

“나 왔어.”

나는 작게 인사를 보내고 편지를 꺼내 유골함 앞에 내려놓았다. 살짝 구겨진 모퉁이를 열심히 펴내자, 그럭저럭 깔끔한 모양새가 되었다.

“오랜만에 편지 썼어. 잘 있었지?”

액자에 걸린 환한 미소가 더욱 짙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나는 느릿하게 입꼬리를 올려 웃음에 화답했다. 엄마는 내가 웃는 얼굴이 그리도 좋다고 했었으니까.

“하고 싶은 말은 편지에 거의 다 했는데, 보여 줄 게 있어. 아니, 소개한다고 해야 하나.”

이번에는 주머니 속에서 빳빳한 사진 하나가 머리를 내밀었다. 나는 거무스름한 종이를 엄마가 잘 볼 수 있도록 액자 앞에 가져다 댔다. 얼마 전에 병원에서 찍은 겨울이의 초음파 사진이었다.

“태명은 겨울이고, 엄마 손녀.”

사진 속의 겨울이는 이제 또렷이 사람의 형태를 갖추고 있었다. 둥그스름한 머리와 다리, 심지어는 양수를 유영하는 발바닥까지 보였다. 처음 영상을 보았을 때 얼마나 신기했는지 모른다. 주태승마저 화면에서 눈을 떼지 못할 정도였다.

“배 속에 있어. 계속 발로 찬다. 할머니 봐서 좋은가 봐.”

젊기만 한 엄마를 갑작스레 할머니로 만들다니, 묘한 부끄러움이 일었다. 애가 애를 가졌다는 오민지의 말이 틀리지 않았다. 아무래도 부모가 되기에는 이른 나이였다.

“그, 나 사고 쳤어. 근데 너무 혼내지 마. 벌써 많이 고생했어.”

참 많이도 울고, 도망치려고도 했다. 돌이켜 보면 겨울이에게 미안한 생각을 한 적도 있었다. 아이를 고생시킨 만큼 화수분보다 무한한 애정으로 보듬어 줄 각오는 되었다.

“엄마처럼 좋은 어른이 되어 주고 싶은데, 잘 되려나. 꿈에 자주 나와서 많이 도와줘.”

나는 초음파 사진을 주머니에 머뭇머뭇 돌려놓았다. 임신하면 감정 기복이 심해지는 건가, 오늘따라 울적한 마음이 들었다.

“사실 그냥 엄마 보고 싶어서 그래. 그러니까 만나러 와…….”

얼마 전에 오스트리아에서 엄마가 나오는 꿈을 꿨지만, 그리움은 단번에 해소되는 감정이 아니었다. 나는 뜻 없이 유리 장을 쓰다듬다가 손을 거두었다. 가슴이 심해 아래로 가라앉아 차가운 물에 잠기는 듯했다.

이제껏 엄마를 만나러 와서 이렇게나 컨디션이 침체된 적은 드물었다. 대체 나 자신이 왜 이러는지 도통 알 수가 없었다.

내내 숙였던 고개를 들어 올렸을 때였다. 문득 뒤에서 자그마한 대화 소리가 들려왔다.

“여보 울었으니까 맛있는 거 먹을까?”

“나아, 돈까스.”

“엄마 먹고 싶은 거 먹을 거야, 오늘은.”

직전에 본 그 가족이었다. 나는 물끄러미 그들을 구경하다가 가만히 시선을 떨어트렸다.

가족이라.

나는 엄마를 잃고부터 완벽한 혼자가 되었다. 따로 형제가 없었으며, 먼저 돌아가신 아버지는 얼굴도 기억나지 않았다. 어렴풋이 오늘 왜 이토록 언짢은 기분이 드는지 알 것도 같았다. 가족의 부재에서 오는 적막이 그 이유일 터다.

주태승은 사랑하는 연인이었으나 가족은 아니었다. 겨울이는 아직 세상 밖에 나오려면 시간이 걸린다. 지금의 여진서는 납골당에 함께 갈 혈육이나 식솔이 없는 혈혈단신이었다.

내 손으로 해결할 수 없는 문제를 두고 우울해하다니, 참 팔자도 좋았다. 요즘 고생을 안 하니까 별게 다 심각한 일이 되었다.

정신 차리자. 아주 복에 겨웠지, 여진서.

나는 스스로 뺨을 두어 번 두드리고 한숨을 쉬었다. 심기가 뒤틀리니 몸까지 피로가 몰려왔다.

“엄마, 나 오늘은 가 볼게. 이제 계속 한국에 있을 테니까 자주 올 거야.”

당장 눈앞에 있지는 않으나 엄마는 하늘에서 지켜보고 있을 터다. 나는 그녀가 볼 수 있도록 편지를 손가락으로 가리켰다.

“편지 읽고 있어.”

돌아서는 발걸음이 묵직했다. 마음엔 보폭보다 조금 더 우중충한 먹구름이 끼었다. 가을 타는 것도 아니고, 이제 곧 봄이 오는데도 나는 시기를 잊은 청승을 떨며 집을 향했다.

***

집으로 돌아와서도 침체된 정서 상태는 여전했다. 나는 옷도 갈아입지 않고 소파에 누워 시간을 보냈다. 구부정히 허리를 옹송그린 자세가 발에 치인 애벌레와 다를 바가 없었다.

옆에는 심기를 달래기 위해 가져온 주태승의 와이셔츠가 나뒹굴고 있었다. 다 구겨 놔서 어떡하지, 어차피 옷 많으니까 상관없으려나. 나는 셔츠를 꽉 끌어안은 채 옷깃에 코를 푹 파묻었다.

TV, 하다못해 음악이라도 틀어 놓을 걸 그랬다. 넓은 집 안을 휘감은 침묵이 달갑지 않았다.

소파 옆 사이드 테이블에 놓인 리모컨을 향해 손을 뻗었을 때였다.

삐빅, 삑-.

멀찍이서 희미하게 도어 록이 해제되는 소리가 들려왔다. 평소라면 주인을 맞는 강아지처럼 현관까지 마중 나갔겠으나 지금은 딱히 내키지 않았다. 계속 누워 있고만 싶을 뿐이었다.

문이 닫히고, 슬리퍼가 바닥에 끌리는 울림이 간헐적으로 퍼졌다. 나는 퍼진 밀가루 반죽 같은 모습으로 멀거니 정면을 응시했다.

곧 좁은 시야에 길게 뻗은 다리가 들어왔다. 나는 특별한 반응을 보이는 대신 몇 차례 속눈썹을 깜빡였다. 와이셔츠의 주인이 코앞에 있는데도 민망함은 없었다. 혹사당한 셔츠가 내 품에서 재차 주름을 만들어 냈다.

“병든 닭 같네.”

내 태도에 대해 단출한 감상을 남긴 주태승이 팔을 뻗어 왔다. 그의 손이 겨드랑이 사이를 비집고 들어와 나를 들어 올렸다. 그렇게 나는 타의에 의해 소파에 비스듬히 앉게 되었다.

주태승은 늘 그렇듯 흠잡을 데 없이 아름답고, 말끔한 얼굴이었다. 나는 곁에 앉은 그에게 꾸물꾸물 기어가 몸을 기댔다.

“왜 이렇게 기분이 안 좋아요. 무슨 일 있었습니까?”

“아닌데요.”

“아니야?”

짧은 대답을 내놓은 후, 주태승은 얼마간 침묵을 유지했다. 큼직한 손으로는 부드럽게 내 뒤통수를 쓰다듬었다. 더 캐물을 줄 알았는데 다소 의외의 일면이었다.

도리어 의구심이 든 나는 기댔던 몸을 일으키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았다.

“더 안 물어봐요?”

“잠깐 생각 중이었습니다. 여진서가 왜 그럴까, 하고.”

“결론은 뭔데요?”

“잘 모르겠네요. 나한테 거짓말해서 이득 될 게 없는 것 같은데.”

참 합리적이고 타당한 사고 흐름이었다. 그래서 조금 얄밉기까지 하다. 나는 괜한 오기가 생겨 눈을 바짝 올려 뜨고 물었다.

“만약에 제가 벽돌로 사람 쳤으면 어떡할 거예요?”

“쳤어요?”

“아니, 만약이라고요.”

“얼른 데리고 도망가야지, 별수 있나.”

주태승은 내 눈가를 가만가만 어루만지며 말을 이었다.

“아니면 너 대신 잡혀 들어가도 되고. 근데 다 늙어서 나오면 여진서가 돌아봐 주려나 모르겠습니다.”

“…….”

“내 얼굴 좋아하잖아.”

사실이긴 하지만, 아주 사람을 외모 지상주의자로 만들고 있다. 나는 팔을 올려 그 잘난 상판을 손바닥으로 감쌌다. 주태승은 내가 이상한 짓을 하거나, 말거나 아랑곳 않고 입술을 움직였다.

“뭐 담그고 싶은 거면 그냥 나한테 말해요. 그게 나을걸.”

“그런 거 아니에요. 미운 사람 없어요.”

“그럼 누가 기분 안 좋게 했어.”

나는 손을 내려놓고 이번에는 그의 품에 폭삭 안겨 버렸다.

전부터 참 이해가 되지 않았다. 유별나게 다정한 것도 아니고, 남의 감정에 공감도 못 하는 사람인데 왜 속을 줄줄 털어놓고 싶어지지. 아무래도 저 도통 예상하기 힘든 언사가 내 취향에 딱 들어맞는 모양이었다.

“이유 없어요. 저 혼자 그래요.”

“…….”

“납골당 다녀왔는데 나만 가족이 없어서 외로웠어요. 웃기죠. 원래 없었으면서 오늘은 이상하게 서러워요.”

마침내 대답을 들은 주태승은 말없이 내 등을 토닥여 주었다. 이 사람도 참 고된 역할을 맡았다. 바쁘게 일하고 와서 멋대로 우울해하는 애인도 달래 줘야 하고.

그래도 타인의 온기를 맞으니 팅팅 부풀어 있던 속의 응어리가 점차 풀리는 것도 같았다. 이러니까 매일 어리광 부리고 싶어진다. 내가 철없이 구는 건 다 주태승 탓이다.

“조금 있으면 기분 좋아질 것 같아요.”

주태승은 여전히 말문을 열지 않았다. 또 뭔가 혼자 생각 중이겠지. 상관없었다. 그저 안겨 있을 가슴만 내어 주면 충분했다. 나는 편한 살냄새에 마음에 묻은 진흙이 씻겨 내리는 걸 느끼며 뺨을 비볐다.

귓가에 낮은 목소리가 쏟아진 건 그로부터 몇 분 뒤였다. 주태승은 흐트러진 옆머리를 넘겨 주고 나지막이 나를 불렀다.

“여진서 씨.”

“으응.”

“같이 목욕할까요.”

목욕? 예상하지 못한 말에 내 눈이 동그랗게 벌어졌다. 영 터무니없는 소리는 아니었으나 갑작스럽지 않은가. 이때까지 주태승과 짧지 않은 하루하루를 보내는 동안 함께 씻은 적은 전무했다.

“목욕이요?”

“씻으면 기분 좀 나아지잖아.”

“그, 같이 들어가는 거죠?”

“부끄러워서 싫습니까?”

뭐라 말하기가 창피해 소파 시트만 긁고 있으려니, 주태승이 자신의 손을 내 손등 위로 겹쳐 왔다. 그가 맞닿은 손에 살짝 무게를 실으며 말했다.

“뭐가 부끄러워, 이것저것 다 한 사이에.”

“…….”

“난 머리 처박고 여진서 씨 젖꼭지 빨 때도 안 부끄럽던데.”

그건 당신이 파렴치하기 짝이 없는 화상이라 그런 거고. 이 변태에게 대항하려면 나도 좀 상스러워질 필요가 있는 건가 싶었다. 나는 가자미눈을 뜨고 입술을 움찔거리다가, 고개를 휙 돌려 버렸다.

“해요, 목욕.”

“잘 생각했어요.”

허락이 떨어지자마자 주태승은 곧장 내 윗옷 틈으로 손을 비집어 넣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엉덩이를 뒤로 물리고 말했다.

“오, 옷은 제가 벗을게요.”

다행히 뱀의 꼬리 같은 손길이 허공에 멈춰 섰다. 나는 얼른 바닥에 발을 딛고 소파에서 일어났다.

***

똑-.

수도꼭지에 아슬아슬하게 매달려 있던 물방울이 떨어져, 수면에 표표히 너울을 만들어 냈다.

그 울림에 맞춰 내 움츠러든 어깨도 미약하게 경련했다. 나는 뒤통수에 달라붙은 시선을 의식하며 재차 몸을 동그랗게 말았다. 긴장을 늦추면 돌덩이 같은 타인의 가슴팍에 등을 기대고 말 터였다.

애초에 욕조가 이렇게 넓은데 왜 굳이 밀착한 자세로 목욕해야 하는 거야.

욕조에 고인 물은 뜨거웠고, 뿌연 수증기가 올라와 피부를 후덥지근하게 데웠다. 하지만 가장 달아오른 건 주태승과 접한 엉덩이였다. 체감상 맞닿은 부위는 다리나 허벅지 따위가 아닌 듯했다.

두꺼운 기둥이 계속 엉덩이골을 스치며 존재감을 명확히 드러낸다. 온 신경이 거기에 쏠려 머리카락이 쭈뼛쭈뼛 곤두섰다.

“누가 잡아먹는다고 했나.”

귓바퀴 바로 근처에 나른하게 풀린 음성이 쏟아졌다. 주태승이 팔을 들어 올리자 욕조 안에 잔잔한 물결이 일었다. 그는 한 팔을 욕조 헤드에 걸친 채, 다른 쪽으로 내 배를 감싸 안았다. 자연스럽게 둘 사이의 거리가 단번에 좁아지고 말았다.

“그러고 있으면 목욕하는 게 다 무슨 소용입니까, 편하게 있어요.”

“주, 주태승 씨가 못 있게 하잖아요.”

“뭐가.”

서로 빈틈없이 붙은 탓에 이제 주태승의 성기가 꼬리뼈 윗부분을 살살 찔러 대고 있었다. 발기한 건가, 말하는 걸로 봐서는 아직인 것 같은데. 그럼 평소에 이것보다 더 큰 게 들어왔던 건가?

몸을 들썩일 때마다 단단한 기둥이 회음부를 스치는 감각이 야릇했다. 맨몸으로 밀착해 있는 게 오랜만이었기에 더욱 예민했다. 나는 뺨과 귓바퀴에 열이 오르는 걸 느끼고 얕게 신음했다.

주태승이 뱉는 더운 숨결이 목덜미를 간질였다. 그러자 살갗에 돋은 가느다란 솜털이 움찔거렸다. 나는 성심껏 웅크렸던 몸을 서서히 늘어뜨렸다. 잔뜩 경직되어 있던 근육이 조금씩 풀어지는 듯했다.

“팔 들어 봐요.”

나를 품에 기대게 만든 주태승이 팔에 물을 끼얹어 주었다. 뒤이어 피부를 문지르는 손길이 부드러웠다. 나는 그의 쇄골에 뺨을 붙이고 노곤한 한숨을 쉬었다.

“진짜 씻겨 주려고 그래요?”

거리가 너무 가깝다. 몸이 이완됨에 따라 의식까지 물에 녹아 흐물거렸다. 이러면 페로몬에 저항할 수 없어진다. 나도 모르게 주태승의 입술에 시선이 끌렸다.

“봐서요.”

주태승이 나를 향해 고개를 비스듬히 기울였다. 나 역시 눈을 게슴츠레 뜨고 살짝 혀를 내밀었다. 서로의 입술이 가볍게 맞물렸다가 물기 어린 소리와 함께 떨어졌다. 찰나의 접촉이 그토록 안타까울 수가 없었다.

한 차례의 입맞춤으로 분위기가 눈에 띄게 농밀해졌다. 이마에 내려앉은 젖은 공기가 묵직했다. 주태승의 손이 느른하게 내 배에 생긴 둔덕을 쓰다듬었다.

겨울이가 보고 있을 텐데 이런 짓을 해도 될지 모르겠다. 다만 단전 깊은 곳에서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삿된 애욕을 무시하기 힘들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데도 호흡이 거칠어지고, 뺨에 열이 오르는 감각이 선연했다.

나는 상기된 얼굴로 주태승을 올려다보았다. 입술이 저절로 움직여 애달픈 바람을 토해 냈다.

“……다른 데도, 만져 주면 안 돼요?”

“씻겨 달라는 거 아니고?”

“그게, 그거잖아요.”

미치겠다. 머리에 희뿌연 안개가 낀 듯한 기분이었다. 주태승의 손가락이 명치를 지나, 가슴골로 미끄러져 올라왔다. 진짜 예민한 곳은 거기가 아닌데. 민둥한 살갗만을 쓰다듬는 손이 야속했다.

“흣, 아.”

주태승이 손목을 붙여 은근히 젖꼭지를 누르자, 곧장 몸은 정직한 반응을 토해 냈다. 사소하기 짝이 없는 자극에도 선단에 피가 몰렸다. 오랜만에 닿는 타인의 온기가 그토록 달큼했다.

“주, 태승 씨이.”

뜨거운 입술이 목덜미를 짓누르고, 손가락이 발딱 선 유두를 살살 굴려 댔다. 나는 발가락을 구부렸다가 펴며 끙끙 앓았다. 짙게 쏟아지는 쾌락과 페로몬 탓에 등골에 소름이 끼쳤다.

엉덩이 사이를 문지르는 성기가 더욱 부풀어 오르는 게 전해졌다. 그 또한 나만큼이나 흥분하고 있었다. 성욕이 들끓어 머리가 어떻게 될 것 같았다.

뒤에서 뻗어 온 손이 유두를 희롱하는 장면이 선명하게 보였다. 손가락 사이에서 꼬집히고, 긁혀 발갛게 익은 과실의 모습은 욕정을 돋우기에 충분했다. 흐르는 신음을 주체할 수 없었다.

“더 만지면, 하고 싶어…….”

사실 이미 성기를 받고 싶어 안달이 난 상태였다. 물에 잠긴 구멍이 제멋대로 수축과 이완을 반복했다. 내 유두를 지분거리던 주태승이 낮게 욕지거리를 내뱉었다.

주태승은 그대로 내 허리를 안아 욕조에서 꺼내 버렸다. 몸을 타고 흐른 물줄기가 수면에 부딪혀 작은 물보라를 만들었다. 나는 그의 어깨에 손을 짚고 숨을 할딱였다.

엉덩이가 닿은 곳은 욕조의 넓은 턱이었다. 나는 기진맥진하여 벽에 등을 기댔다. 온수 밖으로 나왔는데도 몸은 식을 기미가 없었다.

주태승은 탁한 눈으로 나를 올려다보더니, 거칠게 목을 긁는 신음을 냈다. 곧 그가 내 흉통을 붙잡고 가슴에 얼굴을 묻었다. 팽팽히 솟은 유두가 수려한 입술 안으로 빨려 들어갔다.

“흐으, 아, 읏.”

따스한 점막이 가슴을 빈틈없이 감쌌다. 주태승은 유두를 빠는 데 그치지 않고 혀로 뭉근하게 돌렸다가, 이를 세워 깨물어 댔다. 마치 살코기를 게걸스레 먹어 치우는 개 같았다.

가랑이에 힘이 빠져 자꾸만 다리가 벌어졌다. 자연스럽게 분홍빛으로 물든 성기가 훤히 드러났다. 나는 울먹이며 주태승의 머리통을 끌어안았다.

“겨울이도, 아니고 왜 그렇게 아가처럼, 으, 빨아요.”

내 말을 들은 주태승이 유두를 입에 머금은 채 대답했다.

“여진서 젖물은 한번 먹어 보고 싶은데.”

“읏, 흐응, 지금은 안 나와요.”

“그럼 나올 때까지 매일 빨아 줄게요.”

매일 이런 애무를 받으면 유두가 팅팅 부어오를 것이다. 여기서 더 예민해지기는 싫었다. 나는 눈물을 그렁그렁 매달고 고개를 내저었다.

주태승은 유두 끄트머리를 혀로 살살 건드리며 나를 욕조 턱에 완전히 눕혔다. 마치 젖이 흐른 듯, 가슴이 흥건하게 젖어 버렸다. 커다란 손에 잡힌 종아리가 바들바들 떨려 왔다.

수면 아래에 반신이 잠겨 있었으나 주태승의 도드라진 성기가 눈에 들어왔다. 자궁에 남은 상처가 아물었는지는 몰라도 당장 저걸 안에 넣고 싶었다. 가려운 내벽을 긁고, 충만하게 채워 부른 배 속을 마구 찔러 줬으면 했다.

“아래, 아래도 해 줘요. 으응.”

나는 흐느끼다시피 애처롭게 주태승을 보챘다. 그는 대꾸 없이 내 다리를 올려 자신의 어깨에 걸었다. 그리고 은밀한 구멍 앞에 코를 들이밀어 담뿍 향취를 맡았다. 지나치게 외설적인 풍경이었다.

민감하게 빠끔거리는 구멍에 간지러운 숨결이 닿았다. 흘러넘친 애액으로 범벅이 된 입구를 본 주태승이 중얼거렸다.

“이건 여기서도 단내가 나.”

“그런 말 좀, 안 하면, 아……!”

혈색 좋은 혓바닥이 느릿하게 입구의 주름을 핥아 냈다. 나는 말을 맺지도 못하고 고개를 뒤로 젖혔다. 유두와는 차원이 다른 쾌감이 통제할 수 없이 범람했다.

아래에 흐르는 혈관 하나하나가 성감대로 변모한 듯했다. 갈 곳을 잃은 손이 허공을 허우적대다가 주태승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그는 아랑곳 않고 입술로 구멍을 바짝 조여 왔다.

“흐, 으, 주태승 씨, 제발.”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그의 이름을 애타게 부르는 것뿐이었다. 대체 뭘 어떻게 해 줬으면 하는지도 모르면서 나는 열렬히 애원했다. 주태승은 대답 대신 허벅지를 감싼 손에 힘을 실었다.

입구를 더듬던 혀끝이 서서히 안으로 미끄러졌다. 그간 어떠한 이물의 침입도 없었기에 내벽은 살덩이를 반갑게 맞았다. 축축한 주름을 타고 애액이 꿀럭꿀럭 넘쳐흘렀다.

머리가 뜨겁다 못해 새하얗게 표백되어 갔다. 츠읍, 난잡하게 구멍을 빨아 대는 소리가 욕실의 습한 공기를 갈랐다. 나는 간헐적으로 허리를 들썩이며 눈물을 뚝뚝 흘렸다.

“여진서 씨, 한 번 갈래요?”

“윽, 하아, 무슨, 어떻, 게.”

“안으로 갈 수 있잖아. 여기 쑤셔 주면 좋아서 자지러지니까.”

수치스러운 말이었으나 거짓은 아니었다. 주태승은 나보다 내 몸을 더 잘 알고 있다. 부드럽게 들어온 혀가 구멍의 얕은 곳을 찌걱찌걱 건드렸다. 그때마다 나는 엉덩이와 허리를 동시에 파드득 경련했다.

입술이 주름을 조이고, 혀끝은 예민한 속살을 헤집으니 정신이 나갈 듯했다. 눈물이 번진 시야가 흐리멍덩했다. 이러다 목이 쉬어 버리지 않을지 걱정될 정도로 신음이 연거푸 쏟아졌다.

혀가 내벽을 찌르는 속도가 점차 빨라졌다. 타액과 애액이 한데 섞인 물이 엉덩이를 지나 줄줄 흘러내렸다. 아주 높은 곳까지 올라갔다가, 갑작스레 추락하는 것처럼 아찔한 감각이 계속해서 나를 뒤흔들었다.

“흐아, 아, 읏, 잠깐만요, 그만…….”

고양된 의식이 절정을 향해 달려갔다. 쾌락이 너무 강해 공포심마저 느껴졌다. 나는 순간적으로 겁을 먹어 주태승을 밀어 내려 들었다. 하지만 그는 순순히 나를 놓아주지 않았다.

곧 눈앞에서 형형색색의 폭죽이 터지는 느낌이 들었다. 발가락이 저절로 바짝 곱아 들고, 배에 붙은 성기가 말간 정액을 게워 냈다. 나는 허공에 뜬 허리를 내려놓지도 못한 채 오한이 든 사람처럼 떨었다.

아, 이러다 죽을 것 같다. 한 번 사정했는데도 여운이 가시지를 않았다. 온몸의 구멍에서 물이 흘러나오는 듯했다. 나는 눈물로 뺨을 적시며 잔기침을 토했다.

“미안한데, 일어나요.”

“으, 네?”

몸을 추스를 사이도 없이 주태승은 나를 일으켰다. 나는 그의 손에 이끌려 엉거주춤 벽을 짚고 섰다. 뭘 하려고 그러지. 주태승이 잡고 있지 않았다면 다리가 풀려 바로 주저앉았을 것이다.

“너 보니까 나도 좆대가리 터질 것 같거든.”

“…….”

“허벅지 똑바로 조이고 있어요.”

그 말이 끝남과 동시에 묵직한 기둥이 허벅지 틈을 비집고 들어왔다. 혈관이 솟은 표피는 내 살갗과 비교도 되지 않게 뜨거웠다. 검붉은 귀두에 투명한 액이 방울방울 맺힌 게 보였다.

“뭐, 해요?”

“좆질.”

주태승은 짧게 대꾸하며 허리를 치대기 시작했다. 난폭하게 발기한 성기가 내 다리 사이를 드나들었다. 여린 피부와 기둥이 마찰하는 감각이 생경했다. 나는 어쩔 줄 모르고 그의 말대로 허벅지에 힘을 줬다.

삽입하지 않아도 기분이 이상야릇하게 달아올랐다. 엉덩이에 닿는 까슬한 음모, 이따금 볼기를 때리는 음낭, 허벅지를 파고드는 열기. 모든 감각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문란한 광경을 목도하니 얼굴이 홧홧했다.

이러면 기분이 좋아지나?

주태승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조용했다. 그가 내쉬는 거친 숨소리가 욕실 벽에 부딪혀 울렸다. 어떤 행동을 원하는지 알 수가 없어, 나는 어영부영 허벅지 사이를 더 조였다.

“이, 이렇게 하면 돼요?”

“…….”

“응?”

대답을 보채자 뒤에서 살짝 이를 가는 소리가 들렸다. 주태승이 내 목덜미에 더운 한숨을 흘리고 답했다.

“입 좀 다물어.”

다음 순간, 기다란 손가락이 내 성기를 꽉 움켜쥐었다. 직전에 사정을 마친 터라 성감이 예민하게 곤두선 상태였다. 나도 모르게 자그마한 비명이 새어 나왔다.

주태승은 기둥을 느른하게 비비며 탁탁, 소리가 나도록 손을 움직였다. 나는 벽과 흉근 사이에 갇혀 강제로 쾌락의 물결에 휩쓸리게 되었다. 딱딱한 타일 벽에 눌린 유두가 재차 뾰족하게 곤두섰다.

“흐으, 아, 방금 갔는데……!”

나는 원망스럽게 쏘아붙이며 울먹거렸다. 물론 주태승이 귀를 기울여 주는 일 따위는 없었다. 한 차례 물을 뿜었던 성기가 또 찔끔찔끔 쿠퍼액을 흘렸다.

이제 몸에 흐르는 게 욕조에 받은 물인지, 땀인지 구분하기 어려웠다. 숨이 차올라 아릿한 현기증이 느껴졌다. 주태승은 무너지려는 나를 억지로 붙잡고 허리를 쳐올렸다.

“무슨 남자 허벅지가 이렇게 부드러워요.”

“윽, 하아, 으.”

“밀가루에 자위하는 기분이네.”

슬슬 머리가 아프고 목이 탔다. 내 심정을 모르는 주태승은 손톱을 세워 요도를 후벼 댔다. 수치를 모르는 입술이 타액을 흘려보냈다. 나는 눈을 질끈 감아 속눈썹에 맺힌 눈물을 떨어트렸다.

“흐으, 싫어요. 계속, 나 혼자 가잖아.”

내가 울든, 말든 주태승은 손을 멈춰 주지 않았다. 제멋대로 차오른 사정감이 다시금 머릿속을 물들였다. 나는 반쯤 내려앉은 자세로 주태승에게 몸 이곳저곳을 물렸다. 성욕을 가다듬지 못해 입질을 하다니, 정말 개가 아닌가 싶었다.

호흡을 아무리 들이쉬어도 부족했다. 귓가에서 삐, 이명이 울렸다. 탈진하듯 몸의 기운이 서서히 빠져나갔다. 모든 부위가 녹아내린 가운데, 허벅지와 성기만이 뚜렷한 열감을 품고 화끈거렸다.

“흡, 윽, 주태승 씨…….”

꺼지기 직전의 촛불과 같은 목소리가 흩어졌다. 나는 결국 부끄러움을 뒤로하고 다시 절정에 달하고 말았다. 이번에는 묽고 투명한 액체가 비죽비죽 쏟아져 욕조를 더럽혔다.

한계였다. 의식을 유지하기에는 너무 많은 기력을 소모하고 말았다. 나는 끝내 몸을 무너뜨리고 주태승에게 완전히 기댔다. 그는 나를 안아 욕조 턱에 눕혔다.

흐릿해지는 시야에 주태승이 내 손바닥에 자신의 귀두를 문지르는 모습이 비쳤다. 흘러 들어오는 페로몬의 농도가 지독하게 짙었다.

나는 물먹은 속눈썹을 연약하게 깜빡이다가, 엄습해 오는 수마에 의식을 맡겨 버렸다.

***

어떻게 욕실을 나서게 되었는지, 그 후 얼마나 잠들어 있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다만 정신을 차렸을 때는 뽀송뽀송한 가운 차림이었다. 부드러운 이불의 감촉이 맨다리를 간질였다. 그와 함께 잠자리에서 풍기는 익숙한 섬유유연제 향이 심신에 안정을 가져다주었다.

나는 가물가물 감기려는 눈을 게슴츠레 올려 떴다.

스탠드에서 뿜어져 나오는 은은한 불빛이 시야를 밝혔다. 밤에 침실을 비추는 조명은 항상 옅은 주황빛이었다. 아마 주태승의 개인적인 취향이 아닐까 싶었다.

“……씻겨 준다면서요.”

나는 사람을 늘어진 파김치로 만든 범인을 향해 투덜거렸다. 그는 평온하기 그지없는 낯을 하고 내 머리카락을 쓰다듬고 있었다. 불퉁한 원망 따위는 흘려듣는 모양이었다.

“씻겨 줬잖아요.”

“잘 때 씻겨 주는 거 말고요.”

“나도 원래는 멀쩡한 사람 씻길 생각이었습니다.”

내가 베개에서 그의 무릎으로 머리를 옮기자, 주태승은 뺨을 손등으로 문지르며 말을 이었다.

“억울하면 체력 좀 키워요. 몸이 따라 줘야 하고 싶은 거 다 하지.”

“주태승 씨 운동할 때 같이 할까 봐요.”

“그건 같이 못 해요. 나중에 아기 낳고 천천히 해.”

하긴, 계속 운동을 해 오던 사람을 갑작스레 따라가기는 어려울 것이다. 나는 나른하게 하품을 쏟으며 그의 단단한 아랫배에 얼굴을 묻었다. 비스듬히 누워 있으려니 겨울이가 만드는 아담한 태동이 울렸다.

“운동 말고, 또 하고 싶은 건?”

“별로, 없는 것 같은데.”

사실 운동도 그다지 하고 싶은 건 아니었다. 하고자 하는 일은 다 주태승이 들어줬기에 딱히 원하는 바가 없었다. 그러나 상대는 같은 생각이 아닌 모양이었다.

“무등산 수박은 잘만 구해 오라고 하더니.”

“그, 그건 너무 먹고 싶어서.”

“나름 재밌었습니다. 원래 종놈 체질인지.”

남의 종노릇을 하는 주태승이라니. 징그럽게 안 어울렸다. 설마 귀찮게 했다고 나무라는 건가 싶었는데 표정을 보니 그렇지도 않았다. 입꼬리가 느슨히 올라가 있는 게, 그는 보기 드문 잔잔한 미소를 짓고 있었다.

저렇게 웃으니까 지나치게 잘생겼다. 갑자기 속이 울렁거리고, 뺨과 귓바퀴에 피가 몰려 뜨거워졌다. 나는 우스운 꼴을 숨기기 위해 이불을 목 끝까지 추켜올렸다.

“……더워요.”

“지금?”

“바다 가고 싶어요.”

덥다는 소리를 시작으로 나는 생각나는 말을 곧이곧대로 중얼댔다.

“바다는 겨울에 봐야 예뻐요.”

“그건 몰랐네요.”

“저도 사실 겨울에는 안 가 봤어요.”

나 뭐라는 거야. 헛소리라는 걸 알았는지 주태승은 굳이 대답하지 않았다. 나는 이불 안의 발가락을 꼼지락대며 열 오른 뺨을 진정시키고자 애썼다.

조곤조곤 주고받던 대화가 잦아들고, 자연스럽게 침묵이 그 공백을 채웠다.

이제 주태승의 손은 내 손가락을 더듬고 있었다. 늘 만지는 손인데 왜 저리도 집요하게 지분대는 건지 모르겠다. 마음이 통해도 속까지 점치기 까다로운 건 여전했다.

나는 생각에 잠긴 듯한 주태승을 내버려 둔 채 눈을 감았다. 촘촘히 엮은 둥지처럼 아늑한 이부자리, 사랑하는 내 알파, 그리고 배 속의 어여쁜 아기. 지금 누리는 평화가 만족스러웠다.

어쩌면 이것도 가족의 형태일지도 모른다. 혼자 있어 외롭다고 우울해하는 건 이들에 대한 실례일 터다. 나는 명백히 이 울타리 안의 구성원이니까. 이제 태어날 아이를 위해 흔들림 없이 견고한 버팀목이 되어야 하는 사람이다.

나는 손가락 마디를 훑는 타인의 체온을 느끼다가, 재차 까무룩 잠이 들고 말았다.

***

예상치 못한 소식을 접하게 된 건 그로부터 일주일이 지난 시점이었다.

“오늘 고생 많으셨어요. 숨차거나 하지는 않아요?”

한국에 온 뒤로 플루트 레슨을 맡아 주고 있는 민도희가 살갑게 물었다. 나는 야트막하게 부른 배를 내려다보고 멋쩍은 웃음을 내걸었다.

아무래도 만전의 상태가 아닌 건 사실이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게 넘긴 파트에서 호흡이 부족했고, 연습량을 늘리면 손가락이 떨려 오고는 했다.

“무리하지 마세요. 연습 꾸준히 하고 계시니까 현역 복귀할 때 어려움 없으실 거예요.”

“감사해요.”

“플루트보다는 몸조리 잘하세요. 슬슬 몸 무거우시죠?”

“조금요, 근데 괜찮아요.”

솔직히 말하자면 꽤 불편했다. 팔다리가 연결된 이곳저곳이 쑤시고, 기분은 오락가락 놀이기구를 타는 데다가, 틈틈이 배가 얼얼하게 당겼다. 하지만 견디지 못할 정도는 아니었다.

민도희는 위로하는 듯한 미소를 보내고 말했다.

“어린 나이에 큰일 하시네요. 본부장님께서 잘 케어해 주시겠지만…….”

“아, 네. 항상 배려해 주세요.”

“그럼 다행이에요, 이만 가 볼게요. 다음 주에 뵙겠습니다.”

민도희는 끝까지 다감한 미소를 보이며 자리를 떠났다. 그녀의 인영이 완전히 사라진 후, 나는 한숨과 함께 방을 나섰다. 고작 한 시간 남짓한 레슨인데도 피로가 몰려왔다.

오늘 뭐 하기로 했지. 낮잠 잘 시간이 있으려나.

나는 가만히 멈춰 일정을 떠올렸다. 레슨은 끝났고, 아까 오민지에게 메일 답장을 주기로 했으니 확인해야 한다. 그리고 저녁에는 주태승과 외식을 하기로 했다. 오랜만에 소고기가 먹고 싶어진 게 이유였다.

원하는 음식을 매일 먹을 수 있다니, 참 복에 겨운 팔자다. 나는 찌뿌둥한 허리를 두어 번 두드리고 서재에 들어섰다.

노트북을 켜 메일함에 들어가자, 가장 위에 오민지로부터 온 메일이 보였다. 시일이 꽤 지난 날짜가 내 무신경함을 나무라는 듯했다. 나는 죄책감에 입꼬리를 살짝 구부렸다.

메일 내용은 평이했다. 이전 강의 내용에 대한 기록과 사용했던 프레젠테이션 파일이 첨부되어 있었다. 대충 훑어본 결과, 그다지 어려운 내용은 아니었다. 오민지의 말대로 자신이 연주자로서 살아온 이야기를 하면 되는 모양이었다.

그래서 특강 이름이 ‘선배와의 대화’인가. 강의 자체보다는 후에 진행되는 질의응답에 더 무게가 실린 느낌이었다.

그냥 물어보는 거 대답하는 정도면 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생각보다 규모도 크지 않은 듯하고, 발표 전에 긴장만 풀어 두면 할 만해 보였다.

나는 휴대 전화를 들어 오민지에게 메일을 확인했다는 답변을 보냈다. 이제 낮잠을 잘 생각으로 인터넷 창을 닫으려던 때였다. 오민지의 메일 바로 아래에 영어로 쓰인 메일 하나가 눈에 띄었다.

이건 뭐지?

보낸 이 또한 영어였다. ‘Joshua’. 누구인지 오래 생각할 필요도 없었다. 나는 놀란 마음에 메일이 도착한 날짜를 확인했다. 이 또한 일주일도 훨씬 전에 온 녀석이었다.

할 말이 있으면 전화로 하면 되는 걸, 왜 메일을 보냈을까. 외국인은 펜팔 감성이 따로 내재되어 있기라도 한가? 나는 떨떠름한 표정으로 이국에서 온 메일을 읽어 내렸다.

「진서, 잘 지내고 있어요?

갑작스러운 한국행으로 충분히 인사를 나누지 못했네요.

잠깐이지만 진서와 함께 일할 수 있어서 즐거웠어요.

긴 휴가를 냈다고 들었어요. 돌아올 거죠?

사실은 단장이 무척 골머리를 앓고 있어요.

사라진 게 진서뿐만이 아니거든요. 정확히는 그들이 진서보다 먼저 악단을 나갔어요. 자세히는 몰라도 아예 은퇴했다고 들었어요. 열등감과 차별로 똘똘 뭉쳤던 친구들이니 수준 높은 우리 악단에는 잘된 일이네요.

그 후로 거리에서조차 한 번도 마주치지 않은 걸 보면, 꽤 멀리 떠난 모양이에요. 하하.

그동안 진서를 제대로 챙겨 주지 못해서 미안해요.

보고 싶어요. 단장도 가끔 진서 이야기를 해요.

당신의 재능과 노력에 대한 이야기를요.

아이가 얼마나 귀여울지도 아주 궁금해요. 진서를 닮아 사랑스러운 공주님이겠죠.

다음 휴가 때 진서가 사는 나라에 가 보고 싶네요.

조만간 만나요.」

메일은 거기에서 끝이었다.

간략한 글에 많은 내용이 실려 있었다. 악단의 근황, 아마도 나를 계단에서 떠밀었을 놈들의 말로, 한국에 놀러 오겠다는 조슈아. 그중 가장 무게감이 있는 소식은 역시 몹쓸 단원들의 이야기였다.

큰 감정의 동요가 일지는 않았다. 주태승이 개입한 후로 어느 정도 예상한 결말이었다. 분명 ‘다시는 내 눈에 보이지 않게 해 두었다’고 했으니, 저 정도의 대가는 치렀을 거라 추측하긴 했다.

나는 조용히 화면에서 시선을 거두고 노트북을 덮었다. 그럭저럭 반가운 메일이었다. 조슈아에게는 신세를 많이 졌으니 정말로 한국에 초대해도 괜찮을 터다. 주태승의 심기를 약간 거스르게 되겠지만.

돌이켜 보면 오스트리아에서 참 많은 일이 있었다.

나 개인적으로도, 주태승과의 관계도 여러모로 전쟁과 같은 날들이었다. 매일 울고, 싸우고, 깨지고, 찢기고. 기껏해야 한두 달 전의 순간들이 지금은 소설 구석에 남은 빛바랜 문장처럼 멀게 느껴졌다.

오르막길과 내리막길 구분 없이 데굴데굴 구르다 다다른 곳. 여기가 비탈길인지, 평탄한 지름길인지는 몰라도 이곳에서 난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온화한 일상을 맞았다.

그럼 됐다.

하루하루를 안정과 행복으로 채우자. 힘든 날에는 그 기억을 꺼내 허기를 달래며 걸으면 된다. 다들 그렇게 살아가니까.

나는 의자에 앉아 유리창에 비치는 고즈넉한 마당을 바라보았다. 아직 꽃이 피는 계절이 아니기에 정원은 푸른 잔디를 제외하면 아무것도 없었다. 넓은 땅덩이가 아까울 지경이었다.

슬슬 봄이 다가오니 뭐라도 심을까. 키우기 힘들겠지만, 수국이랑 장미가 있으면 좋겠다. 전에 오스트리아에서 갔던 온실에 또 뭐가 있었더라. 이런저런 식물이 많았는데.

새로운 취미를 만들어도 즐겁겠다. 겨울이가 태어나면 주태승과 함께 셋이서 정원을 가꿔 봐야겠다. 낯선 것들을 마주하는 기쁨을 아이가 잔뜩 누릴 수 있기를 바랐다.

“……하암.”

살그머니 하품이 흘러나왔다. 나는 서재 벽면에 놓인 흔들의자에 조심스레 몸을 뉘었다. 푹신한 쿠션이 살갗을 포근하게 감싸 왔다. 비스듬히 고개를 떨어트리니 저절로 눈이 감겼다.

***

저녁에는 고급스러운 식당에서 소고기를 잔뜩 먹었다. 이 가게에 온 건 처음이 아니었지만, 방문할 때마다 혀가 다시 태어나는 기분이었다. 세상에 이토록 부드럽고 문자 그대로 살살 녹는 고기가 있을 수 있는지 경이로웠다.

실로 만족스러운 식사였다. 혼자서 족히 3인분은 먹은 듯했다. 나는 부른 배를 문지르며 뒤뚱뒤뚱 차 조수석에 올랐다. 어쩌면 사람은 맛있는 음식을 먹기 위해 열심히 사는 게 아닐까 싶었다.

대충 안전벨트를 매고 시트에 널브러져 있으려니 차가 출발했다. 열선이 깔린 등받이가 따뜻해 몸이 나른했다. 요즘엔 어디 머리만 붙이면 잠이 와서 큰일이었다.

운전대에 손을 얹은 주태승이 나를 흘끗 바라보고 입을 열었다.

“소고기만 먹으면 과식하네.”

“그래도 냉면까지는 안 먹었잖아요.”

“소화제 안 먹어도 되겠어요?”

“괜찮아요.”

이대로 집에 가자마자 드러누우면 최고일 텐데. 나는 포근한 이불 속에 파묻히는 상상을 하며 창에 머리를 기댔다. 유리 너머에는 형형색색으로 빛나는 도시의 야경이 비치고 있었다. 망막에 맺힌 잔상이 참 요란스러웠다.

차체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가 살살 귓가를 울렸다. 문득 궁금한 점이 떠올라, 나는 주태승을 향해 물음을 던졌다.

“근데 왜 직접 운전하세요? 기사님 계시잖아요.”

“계속 이랬는데 빨리도 궁금해하네요.”

“좀 그럴 수도 있지…….”

“그냥 누가 내 물건에 손대는 게 싫습니다.”

저 독특한 성격을 생각하면 놀랍지도 않은 이유였다. 새삼 나는 주태승에게 특별한 취급을 받고 있다는 점이 실감 났다. 아무래도 내내 그의 집에서, 그의 물건을 건드리며 살고 있으니까.

“어디 안 좋으면 말해요.”

내가 잡념에 잠겨 있든, 말든 주태승은 내 배 속 사정에 관심이 쏠려 있는 듯했다. 속은 괜찮으니까 빨리 가서 눕고픈 마음이 가득했다. 나는 대강 고개를 끄덕이고 창문 밖을 내다보았다.

그런데 스쳐 가는 풍경이 다소 낯설었다. 시간을 두고 조금 지켜보아도 차가 달려가는 방향이 오리무중이었다. 집이 있는 신사동은 이 사거리에서 좌회전해야 한다고 써 있는데, 주태승은 반대쪽으로 차를 틀었다.

“……집 안 가요?”

“응.”

“왜요? 저 눕고 싶어요.”

“그렇게 먹고 바로 누우면 역류해서 속 버립니다. 이따 밤에 실컷 누워요, 뭐라고 안 할 테니까.”

구구절절 옳은 소리를 들으니 무척 게으른 인간이 된 기분이었다. 좌우지간 주태승은 나를 납득시키는 데 성공했다. 나는 고분고분 그의 말에 동의하며 물었다.

“알겠어요. 그럼 지금 어디 가요?”

“산책.”

산책을 얼마나 거창하게 시키려고 모르는 동네까지 차를 몰지. 나는 재차 창문을 향해 눈동자를 굴렸다. 아까는 마냥 생소한 장소였는데, 지금은 한번 길을 와 본 적이 있는 것 같기도 했다. 어두컴컴한 탓에 도통 명확하게 판별하기 어려웠다.

대화가 멈춘 잠시 동안에도 차는 부지런히 목적지를 향해 달려갔다. 의미 없이 휴대 전화를 보는 것도 지루해, 나는 주태승의 옆모습을 빤히 구경했다. 그는 내 시선 따위는 아랑곳 않고 내내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바퀴가 자갈을 가로지르는 소리가 들리고, 마침내 차체가 속도를 늦췄다. 앞 유리에 비치는 건 언젠가 보았던 하얗고 깔끔한 건물이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린 채 잠시 고민하다가, 미심쩍은 목소리로 웅얼거렸다.

“여기, 그전에 온 곳 아니에요?”

주태승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무렵, 그가 전시회장에 나를 데려갔던 기억이 났다. 올바르게 짚은 게 맞다면 이곳은 그 건물이었다. 주태승은 고개를 끄덕여 내 추측에 긍정했다.

“전시회장은 왜 왔어요?”

“좋아했잖아요.”

그랬나? 그때 사실 전시회 자체는 인상 깊지 않았다. 기억에 남은 거라고는 계속 웃어 보라며 이상한 요구를 했던 주태승의 모습뿐이었다. 잠깐 웃은 걸 가지고 그는 내가 전시를 좋아했다고 여기는 듯했다.

조금 귀엽다.

“맞아요, 괜찮았어요.”

나는 눈꼬리를 살짝 접으며 차에서 내렸다. 일 년 전이나, 지금이나 참 조용한 공간이었다.

우리는 나란히 주차장을 가로질러 투명한 문을 지나쳤다. 넓은 로비에 현재 진행 중인 행사에 대한 패널이 세워져 있는 게 보였다. B관에서 어느 화가의 개인전이 열리고 있었다. 아기자기하고 따스한 화풍으로 유명한 사람이라고 했다.

나는 사람이 없는 데스크에서 팸플릿을 꺼내 손에 넣었다. 그림을 잘 모르니 설명을 읽으면서 볼 생각이었다. 잠자코 나를 지켜보던 주태승이 목에 두른 목도리를 잘 추슬러 주었다. 그의 손에서 향긋한 냄새가 풍겼다.

이러고 있으니까 정말 예전과 비슷하다. 그때도 소고기를 배부르게 먹고 전시회장에 갔었는데. 혼자 히죽히죽 웃고 있으려니, 별안간 주태승의 얼굴이 가까워졌다. 그는 나비가 꽃에 내려앉듯이 내 뺨에 가볍게 입을 맞추고 떨어졌다.

이 사람은 꼭 갑자기 이런다.

발그레한 뺨을 애써 목도리에 숨기고 앞장서자, 주태승은 느긋하게 뒤를 따라왔다. 파란이 일어난 마음을 들키고 싶지 않아 괜히 고개를 푹 숙였다.

입구에 걸린 첫 번째 그림은 고양이를 담은 작품이었다. 얼룩덜룩 노랗고 까만 무늬의 고양이가 꽃과 함께 잠든 모습이 화폭에 담겨 있었다. 노란색과 주황색의 색감이 따뜻한 분위기를 더욱 살려 주는 듯했다.

왜 이 작가가 유명세를 타게 되었는지 어렴풋이 와닿았다. 별것 아닌 일상을 묘사한 그림이 신기하게 시선을 잡아끌었다. 나는 팸플릿 모서리를 만지작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이번에는 강아지 한 마리가 꽃밭 위에 앉아 있는 그림이 눈에 들어왔다. 아래에 적힌 제목은 간결했다. <낙원>. 강아지의 행복한 표정으로 미루어 보면 퍽 어울리는 이름이었다.

뒤로 돌아 대충 그림들을 둘러보니 동물이 주인공인 작품이 다수였다. 잠을 자거나 한가로이 누워 있는 동물들을 보면 나까지 평화로운 기분이 들었다.

한편으로 어릴 적에 강아지를 키우고 싶다고 칭얼댄 일이 떠올랐다. 밀빛 털을 가진 큰 강아지와 신나게 놀고, 함께 낮잠을 자는 꿈을 꾸고는 했었다. 이 작가의 그림이 인기를 얻은 건 추억의 향수를 자극하기 때문이 아닌가 싶었다. 누구에게나 동심은 있을 터이니.

나는 집중해서 작품 몇 점을 감상하다가, 홀로 앉은 고양이의 그림 앞에 멈춰 섰다.

어두운 배경에 검은 털을 가진 고양이가 정면을 응시하고 있었다. 마주친 눈이 푸르고 깊었다. 문득 누군가가 떠오르는 눈빛이었다. 나는 녀석과 시선을 교환하다 말고 주태승의 소매를 잡아당겼다.

“주태승 씨랑 닮았어요.”

“……고양이가?”

“네.”

“처음 듣네요.”

아무래도 남에게 이런 말 들으면서 살 인상은 아니긴 하지. 나는 자그맣게 콧노래를 부르며 옆으로 걸어갔다. 산책을 한다기에 영 달갑지 않았는데, 막상 와 보니 꽤 즐거운 여가 시간이었다.

고양이, 강아지, 아이, 차와 음식들. 안정을 가져다주는 요소들이 즐비하게 늘어져 나를 기다렸다. 나는 입가에 미미한 웃음을 내걸고 그림을 바라보았다.

그러다 문득, 나만 전시회를 만끽하고 있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 주태승은 내 헤실대는 얼굴이나 보고 있을 것이다. 이런 오밀조밀한 감성의 그림들은 그의 취향과 상당히 동떨어져 있으리라. 애초에 작품에 대한 호불호가 있을지도 의문이었다.

나는 그와 눈이 마주칠 것을 예상하고 고개를 돌렸다. 그러나 주태승의 눈은 나를 향해 있지 않았다. 그는 바닥에 눈길을 떨어트린 채 생각에 잠겨 있었다. 오만한 착각을 하고 말았다.

무슨 고민이라도 있나.

멋쩍음 반, 호기심 반으로 주태승을 들여다보아도 시선이 맞닿는 일은 없었다. 나는 슬그머니 그림으로 눈동자를 돌려놓았다. 상대는 가만히 있었는데 혼자 괜히 무안해졌다.

묘하게 섭섭하기도 했다. 참 우스운 감정이었다. 주태승이라고 맨날 나를 지켜보고 있어야 하나, 이 시선이 부담스러워 툴툴댄 적도 많으면서.

나는 최대한 주태승을 의식하지 않고자 노력하며 그림을 올려다보았다. 원피스를 입은 소녀가 정원에 서서 웃고 있는 장면이 보였다. 그 앞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리본을 물고 도망가고 있었다.

재미있는 그림이 많다. 겨울이가 태어나고 다시 한번 볼 수 있다면 좋을 텐데.

이런저런 생각을 하는 사이에도 주태승은 입을 열지 않았다. 그림에 집중하라고 배려하는 건가, 평소에 안 하던 행동을 한다. 나도 모르게 입술이 샐쭉하게 밖으로 불거져 나왔다.

어느덧 전시회장을 반 바퀴 이상 돌았다. 나는 꽃이 만발한 풍경화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주태승은 여전히 침묵을 유지하며 내 곁을 지키고 있었다.

잠깐 걸은 것도 운동은 운동인가 보다. 벌써 배가 다 꺼진 느낌이 들었다. 케이크가 먹고 싶어졌으니 돌아가는 길에 사 가자는 말을 건네려던 때였다.

허공에 떨어트린 손가락이 무언가에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응……?”

피부를 감싼 건 단단한 촉감을 가진 금속이었다. 동그란 고리가 내 왼손 약지에 맞춘 듯이 감겨 들어갔다. 나는 별안간 묵직해진 손가락을 천천히 들어 올렸다. 난데없이 이게 무슨 상황인지, 흐름을 따라가지 못한 뇌가 순간적으로 정지했다.

시야에 들어온 건 깔끔한 디자인의 반지였다. 은빛이 도는 테두리에 자그마한 보석이 박힌 세련된 모양새였다. 나는 가만히 팔을 든 채로 눈을 끔뻑거렸다.

뭐지, 지금 나한테 반지 끼운 건가?

멍한 동공이 그대로 주태승을 향해 굴러갔다. 그는 내 눈을 마주한 채로 아무 말도 하지 않다가, 뒤늦게 입술을 달싹거렸다.

“사이즈는 잘 맞네요.”

“네?”

저절로 얼빠진 대답이 튀어나왔다. 주태승은 이어 붙일 말을 떠올리지 못한 듯, 설명 없이 입을 다물었다. 설마 그냥 손가락이 허전해 보여서 준 건 아니겠지. 나는 의문으로 가득한 속을 오롯이 내비치고 물었다.

“이거 뭐예요?”

주태승은 손가락에서 빛을 내는 반지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더니, 낮게 한숨을 쉬었다. 툭 불거진 목울대가 느릿하게 오르내렸다.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저토록 망설이는지 모르겠다.

애가 탄 내가 답을 보채려는 찰나, 주태승이 느지막하게 말문을 열었다.

“가족, 갖고 싶다고 했잖아요.”

“어, 네?”

“아니야?”

되묻는 어조가 사뭇 신중했다. 나는 흔들리는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았다. 얼마 전에 그런 푸념을 하긴 했었다. 하지만 큰 뜻을 두고 한 소리는 아니었다. 그저, 그날따라 기분이 안 좋아서…….

“늦어서 미안합니다. 데려다 살기 전에 이렇게 했어야 했는데.”

“…….”

“난 가족이라는 집단에 특별한 애정을 둔 적이 없습니다. 그래서 여진서 씨가 외로워할 줄은 몰랐어요. 사실 지금도 가족의 의미가 와닿지는 않아요.”

쓸쓸함은 곧 사그라들 감정이었다. 컨디션이 조금만 좋았더라면 입 밖에 내지 않았을 투정을, 주태승은 마음에 담아 둔 모양이었다.

“근데 네가 갖고 싶다잖아. 그것만으로도 이럴 이유는 충분할 것 같아서.”

주태승은 조심스럽게 팔을 뻗어 내 손을 잡았다. 손가락에 걸린 반지가 그의 체온에 완전히 덮였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핏줄이 도드라진 손등을 바라보았다.

“결혼합시다.”

“…….”

“내가 여진서 씨 가족이 되는 건, 싫어요?”

이거 청혼이었구나.

살다 보면 언젠가 결혼할 수도 있겠다는 막연한 생각은 했었다. 사실은 결혼에 대해 깊게 고민하고 싶지 않았다. 나와 주태승은 너무나도 다른 환경에 놓여 있었고, 그로부터 비롯된 현실적인 문제로 상처받는 게 겁이 났던 것 같기도 하다.

그런데 정말 이상했다. 막상 저 입에서 결혼하자는 말을 들으니, 그런 복잡한 걸림돌 따위가 대수롭지 않게 느껴졌다. 달콤한 고백에 들떠 현실감이 사라지라도 한 건지.

나는 주태승에게 잡힌 손을 빤히 응시하다가 옅은 웃음을 터트렸다. 무슨 프러포즈가 이렇게 갑작스러워. 전혀 예상하지 못한 장소에서, 뜬금없는 시점에 일을 벌이는 게 참 그다웠다.

이렇든, 저렇든 내가 내놓을 대답은 하나였다.

“안 싫어요.”

내내 진중한 빛을 띠던 주태승의 안색이 살짝 풀어졌다. 그가 말하고자 입술을 벌린 찰나, 나는 장난스럽게 덧붙였다.

“운이 좋으시네요. 애만 아니면 한 번 거절하는 건데.”

그 말을 들은 주태승이 문장을 뱉는 대신 헛웃음을 흘렸다. 곧 다부진 팔이 내 어깨를 빈틈없이 감싸 왔다. 연인은 나를 품에 당겨 안고 나긋나긋 속삭였다.

“맞아요, 평생 운은 다 끌어다 쓴 것 같네.”

나는 너른 가슴에 뺨을 파묻은 채 그의 손을 잡았다. 어느 시점부터 끼고 있었던 건지, 주태승 또한 약지가 묵직했다. 금속 고리가 서로 부딪히는 울림이 좋았다.

“겨울이 태어나면 또 와요, 그때도 이 전시회 할지는 모르겠지만.”

“그럼 하게 해야지.”

“능력도 좋으시네요. 아, 맞다. 저 케이크 먹고 싶어요.”

누가 먼저랄 것 없이 우리는 마디를 벌려 손깍지를 꼈다.

***

“저 지금 내려가요.”

[거기 있어요. 데리러 갈게요.]

“엘리베이터만 타면 되는데 뭘요. 금방 갈게요.”

하여간 주책이다. 세상에 주차장에서 2층까지 데리러 온다는 사람이 어디 있다고. 나는 통화가 종료된 휴대 전화를 대충 주머니에 넣고 엘리베이터 버튼을 눌렀다. 어깨에는 아기 수첩과 사진 따위 든 가방이 매달려 있었다.

오늘은 한국에 와서 처음으로 혼자 병원에 간 날이었다. 그간 진료에는 늘 주태승이 동행했으나, 불가피하게 퇴근이 늦어져 이번에는 운전 담당만 맡게 되었다.

엘리베이터에 몸을 싣고 기다리자, 기계 상자는 빠르게 나를 주차장까지 데려다주었다. 입구에 들어서니 가장 앞에 선 검은 외제 차가 눈에 들어왔다. 나는 가방끈을 붙든 채 걸음을 재촉했다.

“오래 기다렸어요?”

조수석에 몸을 구겨 넣으며 던진 물음에 주태승이 나를 돌아보았다. 열선 덕분에 앉자마자 등과 엉덩이가 뜨끈뜨끈했다.

“온 지 얼마 안 됐어요. 병원에서는 뭐라고 합니까?”

“아, 검사 결과는 다 정상이에요. 상처도 깨끗하게 아물었다고 하고요. 스카이다이빙 같은 것만 안 하면 될걸요.”

“그런 거 할 계획이 있었어요?”

당연히 없다. 비싼 돈 주고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스포츠라니. 아마 아이를 낳은 후에도 절대 하지 않을 것이다. 차가 부드럽게 출발함에 따라, 나는 등받이에 몸을 푹 파묻었다.

병원에서 집까지는 멀지 않았다. 나는 흐트러짐 없는 차림새의 주태승을 구경하다가, 운전대에 뻗은 그의 팔을 톡톡 건드렸다. 차분한 시선이 곧장 내게 떨어졌다.

전해야 할 말이 있었다. 나에게는 아무렇지 않은 소식이었으나, 주태승은 어떻게 받아들일지 모르겠다. 하지만 부모로서 그도 알아야만 하는 이야기였다.

“주태승 씨, 있잖아요.”

“네.”

“알파로 태어나서 좋은 점이 뭐였어요?”

엉뚱한 질문이라는 자각은 있었다. 주태승 또한 느닷없다고 생각했는지, 고개를 돌려 잠시 내 낯빛을 살폈다. 살그머니 웃어 보이자, 그는 한층 유해진 표정으로 다시 정면을 바라보았다.

“글쎄요, 난 형질에 따라 능력치가 정해진다는 말은 안 믿는 주의라서. 뭐로 태어나든 이렇게 살았을 겁니다.”

“음……. 그럼 제가 베타였으면 저희는 안 엮였을까요?”

“무슨 말이 하고 싶어서 그래요?”

역시 빙빙 돌려 말하기에는 언변 능력이 부족했다. 나는 애꿎은 엄지를 손톱으로 꾹꾹 눌러 댔다. 벌어진 입술에서 저절로 끙, 앓는 소리가 흘러나왔다.

붉은 신호 앞에 차가 멈춰 섰다. 이제 주태승은 아예 몸을 틀어 나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입을 열기에 적절한 시점이었다. 분명히 심각한 문제가 아닌데도 어쩐지 말을 꺼내기가 망설여졌다.

“……그, 겨울이가요.”

“겨울이가 왜.”

“검사 중에 페로몬이 안 보여서요. 베타로 태어날 가능성이 높대요. 나중에 발현할 확률은 희박하고요.”

우성 알파와 우성 오메가 사이의 아이는 대부분 알파로 태어난다. 그보다 드물게 오메가, 베타인 경우는 통계적으로 현저히 수치가 낮았다. 거의 없다고 보아도 될 정도로.

아마 오스트리아에서 사용한 약의 부작용이 아닌가 싶었다. 아이를 잃네, 마네 했던 상황에 이 정도의 반향은 감사한 수준이었다. 하지만 주태승의 생각은 그렇지 않을 수 있었다. 그와 나는 사회적으로 처한 입장이 달랐으니까. 알파들이 모인 폐쇄적인 재벌가에서 베타 아이가 그다지 환영받을 것 같지는 않았다.

나는 복잡한 심경으로 주태승의 안색을 흘겨보았다. 맞닿은 눈동자가 직전에 비해 싸늘하게 식었다. 어딘가 심기가 뒤틀린 듯 보여, 어깨가 조금 움츠러들었다.

“설마 그 이야기하면서 내 눈치 보는 겁니까?”

“…….”

“애가 베타인데 왜 네가 기죽어. 알파든, 오메가든 알 게 뭐야. 내가 만들었는데.”

화가 난 주태승은 오랜만에 본다. 한국에 온 후로 한 번도 격양된 모습은 드러낸 적이 없었는데. 나는 묘한 안도감과 걱정스러움을 동시에 느끼며 옷자락을 구겼다. 반지에 걸린 니트에서 실밥이 풀려 나왔다.

“주태승 씨 집안이 보통 집안은 아니잖아요.”

“그게 뭐, 객관적으로 봐도 내가 유망한 플루티스트 채간 도둑놈이지. 네가 위축될 게 아니라.”

“…….”

“그래도 신경 쓰여요?”

어느새 주태승의 목소리가 노기를 덜어 낸 차분한 음성으로 바뀌었다. 앞 유리에 비치는 신호가 파랗게 물들고, 그가 액셀을 지그시 누르며 말했다.

“그냥 호적에서 내 이름을 파 버릴까.”

“네?”

“나쁘지 않네요. 살면서 계속 걸리적댈 거면 지금 없애 버려도.”

뭐라는 거야, 미쳤나 봐. 나는 배우자를 혈혈단신으로 만들기 전에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전혀 농담조가 아닌 걸로 보아 실제로 저질러 버릴 가능성도 있었다.

“그런 말 들으려고 한 소리 아니에요, 괜찮아요.”

주태승은 대답이 없었다. 그가 운전하는 차는 이제 고급 빌라가 모인 주택가를 가로지르는 중이었다. 도로 끝에 우리가 거주하는 집이 빼꼼 머리를 내밀었다.

마침내 차가 주차장에 다다르기 직전, 주태승이 운전대를 손가락으로 두어 번 두드리고 입을 열었다.

“행사가 하나 있는데, 여진서 씨 파트너로 데려가도 괜찮습니까?”

“무슨 행사요?”

“거창한 건 아니에요. 그냥 가서 맛있는 거 먹고 옆에 붙어 있으면 됩니다. 근데 여진서 씨가 같이 가 줬으면 해서.”

갑자기 행사를 데려가겠다니, 나는 어리둥절한 얼굴로 고개를 갸웃거렸다. 파트너가 필요한 행사면 꽤 격식을 차리는 행사가 아닐까 싶었다. 하지만 가서 하는 일이 옆에 붙어 있기 뿐이라고 한다. 좀처럼 어떤 분위기일지 예상이 가지 않았다.

“꼭 가야 돼요?”

“응.”

가기 싫으면 가지 말라고 할 줄 알았는데 어지간히 중요한 행사인가 보다. 뭐, 옆에 있으면 알아서 하겠지. 나는 미적대는 투로 그렇게 하겠다고 대답했다.

***

시간이 흘러, 비로소 계절은 싱그러운 초봄에 접어들었다.

간만에 찾은 대학은 변함이 없었다. 유명 건축가가 만든 동상이 자리한 정문도, 학생회관 앞에서 자태를 뽐내는 벚나무도, 카페 앞에 줄을 선 사람들도.

새 학기의 교정은 어딜 가나 바쁜 인파로 붐볐다. 그중에서도 내가 오늘 마주한 건 파릇파릇한 신입생들이었다. 잔뜩 긴장한 표정과 어리숙한 행동거지를 보니 웃음이 나왔다. 나도 저런 시절이 있었는데, 시간이 참 빠르다.

선배 특강, 통칭 <선배와의 대담>은 순조롭게 진행되었다. 오민지의 안내를 받아 들어간 강의실에는 스무 명 남짓한 학생이 앉아 있었다. 대부분 신입생이라고 생각하니 그다지 떨릴 것도 없었다.

연습 삼아 주태승 앞에서 발표했을 때가 긴장의 밀도는 훨씬 짙었다. 면접관으로 들어간 적도 있다고 했었나, 날카로운 눈빛에 몇 번이고 말을 더듬었다. 조언이라는 이름 아래 돌아온 매서운 피드백은 덤이었다.

하지만 덕분에 발표는 성공적이었다. 나는 빔프로젝터 리모컨을 손에 쥐고 학생들을 둘러보았다. ‘질의응답’이라고 적힌 페이지가 화면에서 깜빡였다.

[궁금한 점 있으신가요?]

내 말에 앞줄에 앉은 여학생들이 서로 시선을 교환했다. 공책에 메모까지 해 가며 열정적으로 이야기를 들어 주던 학생들이었다. 조금 기다리자, 오른쪽에 앉은 이가 머뭇머뭇 손을 들었다.

“선배님은 플루트 하면서 힘든 일 없으셨나요?”

[힘든 거요?]

신입생보다는 슬럼프에 빠진 재학생이 할 법한 질문이었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가 질문한 학생을 바라보았다. 미안하지만 다소 심심한 대답이 될 수도 있겠다.

[연주가 뜻대로 안 되고, 콩쿠르에서 좋은 성적을 내지 못하고. 물론 그런 문제도 괴로울 수 있어요.]

“…….”

[근데 저는 제 컨디션이 망가져서 실수가 나올 때 참 답답하더라고요. 건강 관리는 정말 중요해요. 관객들은 내가 아프든, 실연을 당했든, 그런 사정 몰라요. 알 필요도 없고.]

요는 건강 챙기면서 연습하라는 소리다. 경험에서 우러나온 진심 어린 조언이었다. 질문을 던진 학생은 납득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이번에는 뒤에서 모자를 푹 눌러쓴 남학생이 손을 들었다. 나는 말하라는 의미로 그에게 시선을 돌렸다.

“오스트리아 밥 맛있나요?”

뭔 질문이 이래. 하지만 궁금할 수도 있었으므로 나는 진중한 답변을 내놓았다.

[저는 한국이 더 맛있었어요. 굴라쉬는 먹을 만한데, 김치찌개가 나아요.]

“감사합니다.”

[마지막 질문받을게요. 더 없나요?]

나는 마이크에서 입을 떼어 내고 학생들이 손을 들기를 기다렸다. 말을 오래 했더니 슬슬 배가 고프다. 끝나고 교수님과 저녁 약속을 했으니까 고기라도 사 달라고 해야겠다.

중간 줄에 앉은 여학생이 손을 들었다. 나는 아랫배를 살짝 문지르며 그녀에게 눈길을 주었다.

“저, 휴직은 왜 하게 되셨는지 물어도 될까요?”

“아이가 생겨서요. 곧 복직할 겁니다.”

주태승이 반지를 줘서 다행이었다. 임신했다고 해도 뒷말이 따라붙지는 않을 터이니. 나는 담백하게 질의응답을 마무리하고 고개를 숙였다. 박수 소리와 함께 짧은 강의는 끝이 났다.

학생들이 줄지어 빠져나가고, 홀로 남아 가방을 챙기는데 오민지가 앞문으로 들어왔다. 조교가 되어도 변함이 없는 인상이었다. 나는 옅은 미소로 그녀를 맞았다.

“여진서! 오늘 고생 많았어.”

“아니야, 재밌었어.”

“교수님이 고기 사 주신대. 너한테 오스트리아 관련해서 이것저것 물어보신다더라.”

“으응.”

교수님은 악단을 연결해 준 장본인이었으므로 물을 것도 많을 것이다. 하나하나 이야기를 해야 하나. 나는 가방을 더듬다 말고 씁쓸하게 입꼬리를 당겨 올렸다. 그나마 바라던 고기를 입에 넣을 수 있어 기뻤다.

“그, 본부장님은 안 데리러 온대?”

소개해 준 이후로 오민지는 틈만 나면 주태승에 관한 것을 물어 왔다. 타인의 시선으로는 당연히 흥미진진한 관계로 보일 터다.

“오늘 출근했어. 바쁜 사람이야.”

“그럴 것 같긴 하더라. 전에 인터뷰한 거 봤어.”

인터뷰를 했다고? 집에 가서 찾아봐야겠다. 그러고 보면 전에도 ‘올해의 젊은 기업인 10인’ 따위에 오르기도 했었다. 내가 생각에 잠긴 동안, 오민지가 살갑게 팔짱을 껴 왔다. 그리고 은근한 눈빛을 보내며 물었다.

“손에는 뭐야, 반지?”

“아, 이거.”

“본부장님이 줬어? 나 미치겠다, 뭐라고 하면서 줘?”

“그냥 끼우던데.”

“야, 그런 게 어딨어. 부끄러워서 빼는 거야?”

진짜인데 어떡해. 친구의 기대에 부응할 만큼 주태승이 낭만적인 배우자가 아니라서 유감스럽다. 강의실을 떠나 교수 연구실로 향할 때까지도 오민지는 나를 보챘다. 그래 봤자 해 줄 이야기가 없었다.

“아무튼, 오랜만에 학교에서 너 보니까 좋다.”

오민지는 하얀 이를 드러내고 웃어 보였다가, 연구실 문을 열었다. 코를 찌르고 들어오는 익숙한 커피 향에 나 또한 한숨 섞인 웃음을 흘렸다.

***

저녁으로 먹은 스테이크는 그럭저럭 입에 맞았다. 다만 여러 번 방문할 맛은 아니었다. 주태승 때문에 입맛이 너무 고급이 된 모양이다.

나는 엷은 주황빛의 노을이 깔린 하늘을 올려다보다가 비밀번호를 눌렀다. 네모난 판이 반짝이며 잠금장치가 열렸다.

“다녀왔습니다.”

넓은 현관에 내 목소리가 맥없이 울려 퍼졌다. 퇴근하고도 남을 시간인데, 집에 있을 동거인은 묵묵부답이었다. 방에 있는 건가. 나는 주변을 둘러보며 욕실로 들어가 손을 씻었다.

“주태승 씨?”

대충 씻고 나와도 여전히 대답은 들려오지 않았다. 나는 복도에 서서 그가 있을 만한 장소를 추려 보았다. 잠들 시간은 아니니까 침실에는 없겠고, 서재에서 일이라도 하고 있나.

서재는 2층에 있었다. 집이 지나치게 크면 이런 문제가 생기는구나. 보통 가정집은 현관에서 부르면 바로 답이 들려오는데.

계단으로 가고자 옷방을 지나치려던 때였다. 안에서 바스락대는 잡음과 인기척이 느껴졌다. 나는 걸음을 멈추고 굳게 닫힌 문을 응시했다. 곧 내가 손잡이를 잡지 않았는데도 문이 저절로 틈을 벌렸다.

“여진서?”

실내복 차림의 주태승이 모습을 드러냈다. 나는 얼떨떨한 표정으로 방 안과 그를 번갈아 바라보았다.

“여기 제 옷방인데…….”

“마침 잘 왔네요. 들어와요.”

주태승도 내 옷에 묻은 페로몬을 들이쉬면 기분이 좋아지고, 뭐 그런가? 하얀 와이셔츠에 코를 박고 있는 그가 머릿속으로 그려졌다. 그다지 잘 어울리는 장면은 아니었다. 차라리 내 목덜미를 물고 빠는 모습이 와닿겠는데.

“멍하니 서서 뭐 해요, 이리 오라니까.”

쓸데없는 망상을 일축하듯 주태승이 가운데의 스툴을 가리켰다. 종종걸음으로 다가가 보니, 그 위에 넓적한 상자 하나가 놓여 있었다. 나는 고개를 갸웃대며 물었다.

“이게 뭔데요?”

“전에 행사 하나 참석해 달라고 했죠. 여진서 씨 옷이에요. 입고 나와요, 어울리는지 보게.”

“아.”

그래서 내 옷방에 들어와 있었구나. 나는 주태승을 뒤로 하고 상자의 뚜껑을 열어 보았다. 대체 몇 겹으로 포장을 해 놓은 건지, 지퍼를 내리고 천 조각 따위를 걷어 낸 후에야 비로소 옷걸이에 걸린 슈트가 드러났다.

큰 케이스 안에는 그 외에도 부산물이 많았다. 일단 다 꺼내 놔야겠다. 내가 옷가지들을 바닥에 하나하나 내려놓는 동안에 주태승은 방을 나갔다. 언뜻 귓가에 필요하면 부르라는 말을 속삭인 것 같기도 하다.

나는 입고 있던 카디건과 면티를 훌렁훌렁 벗었다. 이건 또 얼마나 비싼 옷이려나. 아마 내가 감히 상상도 하기 어려운 가격일 것이다. 깊게 파고들면 옷을 입기가 두려워질 테니, 이쯤에서 잡념을 멈추는 게 낫겠다.

“어.”

비싼 양복은 원래 속옷까지 세트로 맞춰 입어야 하나 보다. 그런데 들어 있는 팬티가 양복과는 다소 이질적인 디자인이었다. 하얀 삼각에 치렁치렁한 레이스가 장식되어 있었다.

“뭐야……?”

설마 주태승 취향인가? 어차피 안 보일 거니까 상관없나. 나는 찝찝한 기분을 누르고 팬티를 갈아입었다. 살갗에 닿는 레이스가 조금 까끌까끌했다.

속옷 차림에 와이셔츠를 걸치는 것까지는 좋았다. 사실 옷이라는 게 몸에 걸치는 용도이니, 어디에 어떻게 입어야 할지는 직관적으로 알 수 있었다. 바지는 다리에 끼우고, 벨트는 허리에 두르면 되는 것처럼.

근데 이건 대체 어디에 쓰는 물건이지.

나를 혼란에 빠트린 건 정체를 알 수 없는 장신구였다. 동그란 레이스 고리에 띠 몇 가닥이 붙어 있는 이상한 형태였다.

심지어 새하얀 색상과 하늘하늘한 촉감이 검은 슈트와 동떨어진 분위기였다. 오히려 팬티와 결이 맞아 보였다. 마치 면사포를 만들 때나 쓸 법한 재질이었다.

목에 하는 건가?

그런 것 치고는 통이 너무 컸고, 허리에 차자니 레이스가 찢어져 버릴 듯했다. 아무리 생각해도 이 고리를 얹기에 적절한 장소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때, 문 너머에서 두어 번의 노크 소리가 들렸다.

“다 입었어요?”

고민하는 사이에 시간이 좀 흐른 모양이었다. 주태승은 이게 뭐 하는 물건인지 알고 있을지도 모른다. 하의를 입지 않았다는 점이 조금 걸리지만, 나는 최대한 뒤로 물러나 옷방 문을 살짝 열었다.

“아뇨…….”

“뭐 문제 있어요?”

“조금요.”

주태승은 아무렇지 않게 문을 벌리고 들어왔다. 나는 의미 없이 와이셔츠를 끄집어 내리고 그를 맞았다. 곧장 옷자락이 제자리를 찾아 올라갔기에 정말 괜한 짓이었다.

“왜 그러고 있어.”

새까만 눈동자가 느릿하게 내 전신을 훑었다. 아무리 볼 장 다 본 사이라고 해도 이런 차림은 수치스러웠다. 나는 미적미적 손에 쥔 고리를 내밀었다.

“이거 어떻게 하는지 몰라서요.”

주태승의 눈길이 고리를 향했다가, 내 허벅지 언저리로 떨어졌다. 그가 눈매를 가늘게 좁히는 게 보였다. 어쩐지 뺨이 달아올라 한 걸음 물러서게 만드는 시선이었다.

“……그게 왔어요?”

“네?”

직접 주문한 게 아닌 걸까? 내가 의문이 가득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그는 낮은 목소리로 말을 정정했다.

“아닙니다. 가까이 와요, 해 줄게요.”

나는 재차 와이셔츠 끝자락을 잡아당기며 머뭇머뭇 그에게 다가갔다. 주태승은 나를 바로 세우고 한쪽 무릎을 꿇었다. 그와 이런 구도로 마주하는 건 드문 일이었다.

이러면 속옷이 다 보일 텐데. 맨다리에 쏟아지는 미지근한 숨결이 간지러웠다. 옷방에 감도는 공기의 흐름이 어색했다. 주태승은 진지한 표정으로 내 다리를 살짝 들어 올렸다.

고리가 들어간 위치는 놀랍게도 허벅지였다. 기다란 손가락이 살갗에 두른 레이스를 가볍게 정돈해 주었다. 안쪽의 여린 살갗에 부드러운 천 조각이 닿는 느낌이 이상야릇했다.

거기에 그치지 않고, 주태승은 옆에 늘어진 띠를 와이셔츠에 고정했다. 이렇게 쓰는 용도였구나. 자세가 이렇지 않으면 흥미로워했을지도 모르나, 촉각이 예민하게 곤두서 머릿속이 엉망이었다.

“가터벨트라고, 와이셔츠가 안 빠지게 도와주는 겁니다.”

“아, 네…….”

그런 용도면 꼭 이렇게 레이스를 달아 놓을 필요는 없지 않나. 나는 어쩔 줄 몰라 허공에 뜬 손을 주태승의 어깨에 짚었다. 그는 짧은 설명을 마치고 반대쪽 다리를 쓰다듬고 있었다.

옷방이 너무 조용했다. 잡담이라도 나눠야 긴장이 풀어지겠는데 입술이 떨어지지 않았다. 그저 맨살을 어르는 주태승의 손길만이 선연하게 느껴졌다.

바스락, 손끝이 와이셔츠를 스치는 소리가 팽팽한 분위기를 고조시켰다. 허벅지 안쪽을 들여다보는 시선이 집요했다. 주태승은 벨트가 맞는지 확인하려는 듯 살갗을 만지작거렸다.

“속옷도 예쁜 거 입었네.”

가터벨트를 다 채운 주태승이 넌지시 중얼거렸다. 그 말을 듣자 얼굴이 불이 붙은 것처럼 화끈거렸다.

“그, 상자에 들어 있어서. 흐, 읏.”

별안간 밭은 신음이 튀어나왔다. 주태승이 속옷 위에 코를 짓눌렀기 때문이었다. 뒤이어 그는 불룩하게 도드라진 음낭을 입술로 조여 왔다.

“흐, 거기, 뭐 해요……!”

언뜻 그의 왼쪽 허벅지에 굵은 기둥이 윤곽을 드러낸 게 보였다. 남 옷 입히면서 발기하는 사람이 어딨어. 부끄러움이 몰려와, 나는 더듬더듬 뒷걸음질 쳤다. 하지만 주태승은 순순히 엉덩이를 놓아주지 않았다.

주태승은 입술 가득 음낭을 집어삼켰다가, 이로 살짝 깨물었다. 야릇한 쾌감이 바짝 치달아 올랐다. 이제 옷방을 채운 건 정적이 아니라 농밀하기 짝이 없는 페로몬이었다.

“잠깐만요, 으응, 못 서 있겠어.”

자극을 견디지 못한 다리가 휘청거렸다. 주태승은 성대를 긁는 숨소리를 내고는 바닥에 깔린 슈트 위에 나를 눕혔다. 그 탓에 비싼 정장이 제멋대로 구겨지고 말았다. 물론 일을 저지른 범인은 전혀 신경 쓰는 기색이 아니었다.

그대로 주태승은 내 허벅지를 제 어깨에 올리고서 입술을 짓눌렀다. 말랑한 살갗을 빨아 대는 소리가 야살스럽게 퍼졌다. 나는 고개를 비틀며 얕은 신음을 흘렸다. 피가 몰린 아랫도리가 점점 부피를 키워 갔다.

“갑자기 이러는 게 어딨어요.”

“네가 떠다 먹였잖아.”

적당히 대꾸한 주태승이 허벅지를 조금 아플 정도로 씹어 댔다. 늘어진 타액을 따라 붉은 열꽃이 피어올랐다. 그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는지, 그는 결국 얇은 속옷을 부욱 찢어 버렸다.

“찌, 찢을 거면 왜 입힌 거예요?”

이번에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고개를 숙인 주태승이 단번에 내 성기를 머금었다. 분홍빛의 귀두가 입에 빨려 들어가는 광경이 적나라했다. 맞물린 틈에서 츠읍, 야살스러운 잡음이 샜다.

“흐윽, 아, 그거, 읏.”

습한 살점이 예민한 기둥을 세게 조여 왔다. 갑작스럽게 밀어닥치는 강한 쾌감에 저절로 허리가 반쯤 허공에 떠올랐다. 나는 사타구니 사이에 처박힌 머리통을 애달프게 밀어 냈다.

“이, 이상해. 흐, 아윽, 너무, 세요. 좀…….”

정신이 몽롱해졌다. 주태승은 더 깊게 내 성기를 삼키려는 듯, 허벅지에 걸린 가터벨트를 잡아당겼다. 그의 목구멍이 귀두 끝을 조이는 게 느껴졌다. 입이라고는 상상도 할 수 없을 정도의 쾌감이 몰아닥쳤다.

잔머리에 가려진 주태승의 눈빛이 살벌했다. 언뜻 비치는 눈동자에 애끓는 정염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입술은 끈질기게 기둥을 조였고, 젖은 혀는 둥근 귀두를 살살 굴려 댔다.

성기 전체가 주태승의 입에서 희롱당하고 있었다. 쾌락이 버거워 숨이 막혔다. 나는 허벅지를 발발 떨어 대며 헐떡거렸다.

발가락이 제멋대로 곱아 들고, 눈가에 뜨거운 물방울이 맺혔다. 입에서 자꾸만 흐느낌이 터져 나왔다. 할 수 있는 거라고는 고개를 마구 휘젓는 것뿐이었다.

“안 돼, 갈, 읏, 갈 것 같아. 빼요, 응?”

왜 이렇게 잘하는 건데. 내 애원에도 오히려 주태승은 성기를 압박하는 입술에 더욱 힘을 실었다. 빈혈이 온 것처럼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나는 그에게 허벅지를 붙들린 채로 마구 발버둥 쳤다.

“흐, 윽, 아니야, 놔요. 제발……!”

성기를 빨리고 있는데도 아래의 구멍이 빠끔거렸다. 꾸읍, 끕. 타액과 표피가 마찰해 질척한 소리가 퍼졌다. 강제성을 띤 힘이 나를 절정으로 끌어 올렸다.

끝에 달하는 순간, 음부와 귀두가 동시에 물을 토해 냈다. 나는 결국 주태승의 입 안에 사정하고 말았다. 절정을 맞은 여운 때문에 허벅지가 마구 경련했다. 쾌락과 수치심이 한데 섞여 혈관을 핑핑 돌아다녔다.

입에다가 해 버렸어.

심지어 주태승은 내 정액을 뱉어 내지도 않았다. 나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그의 목울대가 일렁이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새빨간 혀가 입가에 묻은 액체를 느릿하게 핥아 냈다.

“그, 그걸 먹으면 어떡해요.”

“왜요, 처음도 아닌데.”

그렇게 말하며 파렴치한은 내 위로 올라왔다. 유려한 손가락이 다급하게 와이셔츠 단추를 풀어냈다. 순식간에 허여멀건한 피부가 훤히 드러났다. 그 와중에 유두는 벌겋게 솟아 존재감을 표출하고 있었다.

주태승은 가슴의 둔덕을 손바닥에 넣고 주무르다가, 손톱을 세워 젖꼭지를 긁어 댔다. 유두는 가장 민감한 부위 중 하나였다. 나는 절정감을 추스르지도 못하고 또 신음할 수밖에 없었다.

“흐아, 앗, 으응.”

목덜미에는 짐승 같은 입질이 가해졌다. 허벅지와 마찬가지로 그는 상체 이곳저곳에 울혈을 남겼다. 목과 가슴, 쇄골의 무른 살이 난잡한 잇자국으로 지저분해졌다.

유두를 괴롭히던 손가락이 떨어지고 입술이 그 자리를 채웠다. 이전에 젖물이 나올 때까지 빨겠다는 말을 들었다. 정말 그렇게 하려는 건지, 주태승은 게걸스럽게 선단을 혀로 애무했다.

죽을 것 같다. 이마가 아니라 뇌에 화상을 입은 듯, 머릿속이 뜨거웠다. 흘러넘치는 페로몬을 제어하기 어려웠다.

이러다 유두가 퉁퉁 부을 것만 같았다. 오늘은 유독 몸을 더듬는 행위가 거칠었다. 연달아 자신의 사타구니를 꾹꾹 밀어붙이는 게, 주태승 역시 욕구를 주체하지 못하는 듯했다.

“읏, 아윽……!”

미끄러진 손가락이 음부를 살살 문질렀다. 이미 애액으로 흥건해 얕은 접촉으로도 허벅지까지 물이 튀었다. 부족했다. 갈증이 샘솟아 올랐다. 안이 간지러워 고통스러운 수준이었다.

안타깝게도 손가락이 더듬는 건 입구의 주름이 전부였다. 배 언저리에 주태승이 거센 숨을 토해 냈다. 그리고 혀를 내어 뱃가죽을 길게 핥아 내렸다.

“아, 하읏, 겨울이 있는데.”

“지금은 잘 거야.”

“어떻게, 알아요, 읏, 응.”

“그러니까 조용히 해요. 여진서 씨 신음 소리 듣고 깨기 전에.”

그럼 소리 안 내게 도와주면 되잖아. 물론 그렇다고 여기서 정말 그만두면 가만 안 둘 것이다. 나는 사막 한가운데 떨어진 듯한 기갈에 이를 뿌드득, 갈았다.

이제 저 손가락이 얄미워서 분통이 터졌다. 나는 주태승의 어깨를 붙잡고 꼴사납게 울음을 쏟아 냈다.

“그냥, 그냥 좀 넣어요. 흑.”

“…….”

“흐윽, 읏, 상처 다 아물었으니까. 빨리이, 네?”

방울방울 맺혀 있던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주태승은 시뻘겋게 충혈된 눈으로 나를 응시했다. 뱀에게 잡아 먹히기 직전의 먹잇감이 된 기분이었다. 강자에게 짓눌리는 기분이 도리어 흥분을 돋웠다.

손가락이 안으로 들어온 건 그 순간이었다. 안달 난 내벽은 이물의 침입을 반갑게 맞았다. 눈가가 환희에 찬 눈물로 축축해졌다. 나는 비명을 닮은 신음을 내질렀다.

“너 진짜…….”

주태승은 말을 잇는 대신 손가락을 연거푸 찔러 넣었다. 안을 넓히려는 손길이 조급했다. 기분이 좋으면서도 아쉬움에 목이 탔다. 나는 이보다 더한 쾌락을 알고 있었다.

구멍을 대강 벌린 손가락이 기민하게 빠져나갔다. 성욕에 점령당한 가슴이 기대감으로 부풀어 올랐다. 나도 모르게 다리가 덜렁 벌어져 음부를 드러냈다. 번들번들한 애액이 울컥 흘러넘쳤다.

주태승은 힘겨운 숨을 내쉬며 바지를 끌어 내렸다. 어린아이의 팔뚝만 한 성기가 튕겨져 나왔다. 검붉은 기둥에 굵직하게 솟은 핏줄이 또렷했다.

“힘 빼요.”

저 말을 따르지 않으면 아래가 찢어질지도 모르겠다. 나는 동아줄에 매달리듯, 팔을 뻗어 주태승의 목덜미에 둘렀다. 귓가에 낮게 짓씹는 욕설이 들렸다. 곧 그가 두툼한 귀두로 입구를 꽉 짓눌러 왔다.

“흐, 아, 아악……!”

꾸드득, 난폭하게 발기한 성기가 단번에 구멍을 꿰뚫었다. 그간 그토록 원했던 압도적인 충만감이 두려울 정도로 들이닥쳤다. 배에 달라붙은 성기가 순간적으로 묽은 액체를 뿜었다. 좆을 받은 것만으로 절정에 달한 것이었다.

목구멍에서 껄떡껄떡 숨이 넘어가는 소리가 들렸다. 입가를 타고 타액이 곤두박질쳤다. 나는 입을 벌린 채 아랫입술을 덜덜 떨어 댔다.

“아, 씨발.”

재차 욕지거리를 흘린 주태승이 내 팔목을 세게 쥐었다. 두꺼운 기둥이 내벽을 마구잡이로 긁으며 뒤로 물러났다. 머리카락에 숨은 두피까지 소름이 돋았다.

몇 개월 만의 삽입은 너무도 자극적이었다. 성기가 한 차례 들어오고, 나가는 과정이 거대한 해일처럼 느껴졌다. 나는 파도에 휩쓸려 정신없이 울어 젖혔다. 눈물이 범람하는 것을 막을 수 없었다.

“흐아, 아! 읍.”

움직임이 빠르지 않은데도, 아니, 오히려 그렇기에 자극이 강했다. 쾌감을 기억하는 내벽이 기둥을 감싸고 움찔거렸다.

“이걸, 대체 어떻게 참아서.”

“하, 우윽.”

“그동안 여기 좆 처박는 상상, 후으, 몇 번 했는지 모르지, 넌.”

성기를 깊게 치받는 움직임이 조금씩 격렬해졌다. 이러다 귀두가 내장을 파고들 것만 같았다. 나는 주태승의 움직임대로 덜컥대며 신음했다.

“볼 때마다 징그럽게 예뻐 가지고.”

의식하지 않아도 구멍이 저절로 성기를 조여 댔다. 마주한 이마에서 흐른 땀방울이 내 가슴에 떨어졌다. 마른 몸뚱어리는 그렇게 체액으로 범벅이 되어 갔다.

“계속 이러고 싶었어. 너 울어도, 화내고 욕해도. 알아?”

“흐으, 읏, 응, 태승, 씨이.”

“자는 얼굴 보면서 좆대가리 세우고, 짐승 새끼처럼 그렇게…….”

중얼대던 주태승이 갑작스레 입을 맞춰 왔다. 나는 자그맣게 혀를 내밀고 열심히 호응하려 들었다. 다만 삽입을 견디는 것만 해도 힘에 부쳤기에 적극적인 키스를 나누지는 못했다.

다행히 주태승은 알아서 혀를 엮고, 입 안에 고인 타액을 마셨다. 맞물린 입술에 막혀 신음이 뭉그러졌다. 내벽을 범하는 성기가 조금 더 크기를 키웠다. 과장이 아니라, 진심으로 귀두가 목까지 차오른 느낌이었다.

이제 끙끙 앓는 것도 힘에 부쳤다. 주태승은 늘어진 나를 안고 마구 음부를 찔렀다. 비죽비죽 흐른 애액이 넘쳐 옅은 물보라가 튀었다. 쾌락이 극에 달해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오늘만 자지 말고 버텨 봐.”

“하, 으윽, 으응.”

“낑낑대는 소리 밤새 들려줘, 응? 진서야.”

그게 내 뜻대로 되는 게 아닌데. 나는 일단 어영부영 고개를 주억거렸다. 미지근한 손이 부드럽게 내 뺨을 쓰다듬었다. 그러나 아래를 꿰뚫는 성기는 난폭하기 그지없었다.

속살을 가르는 움직임이 격했다. 연신 가쁜 숨을 내쉬던 주태승이 스스로 입술을 짓씹었다. 흥분한 알파의 페로몬이 강한 압력이 되어 나를 내리눌렀다.

다음 순간, 구멍을 파고드는 속도가 걷잡을 수 없이 빨라졌다. 나는 깜짝 놀라 몸을 마구 비틀었다. 주태승은 내가 움직이지 못하도록 어깨를 단단히 감싸 안았다. 그가 흘리는 숨소리가 귓바퀴에 바짝 쏟아졌다.

“윽…….”

주태승의 신음과 함께 질척한 무언가가 내벽을 가득 채웠다. 나는 타액을 꿀꺽 삼키며 아래를 내려다보았다. 안에 담기지 못한 정액이 질질 흘러 검은 슈트를 적시고 있었다.

나와 주태승의 체액이 덕지덕지 묻은 옷은 그야말로 엉망이었다. 걱정스러운 마음에 나는 안감을 만지작거렸다. 그러나 다른 생각을 해도 되는 시간은 길지 않았다.

“옷, 어떡……. 아!”

강한 힘에 의해 나는 슈트 위에 엎드린 자세가 되었다. 한 번 사정했을 텐데, 구멍을 긁는 성기의 크기는 전혀 변함이 없었다. 또 쾌락의 진흙탕에 빠질 생각을 하니 공포심마저 들었다.

내가 기어서 도망가는 것보다 허리가 붙잡히는 게 빨랐다. 입구를 문지르던 귀두가 재차 안으로 파고들었다. 나는 몸을 옹송그리고 울먹이는 듯한 신음을 내질렀다.

“히, 힘들어. 힘들어요.”

“알아요.”

“알면서, 응, 하윽!”

이미 몸을 지탱할 힘 따위는 남아 있지 않았다. 나는 엉성하게 팔을 무너뜨리고 바닥에 뺨을 묻었다. 눈에서 떨어진 물방울이 입술 사이로 흘러 들어왔다.

자세가 달라진 탓에 얄궂게도 접합이 깊어졌다. 주태승이 성기를 밀어 넣을수록 나는 쓰러져 내려앉았다. 이러다 볼록한 배가 바닥에 짓눌릴 것 같았다.

뱃가죽이 바닥에 닿기 직전, 주태승이 내 몸을 옆으로 누였다. 그리고 다리를 들어 자신의 어깨에 걸쳤다. 나는 숨을 고르지 못하고 잔기침을 토해 냈다. 끝까지 밀고 들어온 귀두가 내벽 끝에 닿았다. 성기가 연결된 부위에서 하얀 거품이 일었다.

“흐아, 읍, 이거, 너무 깊, 어요.”

요도가 망가지기라도 한 걸까. 내 귀두는 구멍 끝에서 계속 하얀 액체를 흘렸다. 절정감이 계속 유지되어 이제 끝이 어딘지도 알 수 없었다. 배우자와 내 체력의 간극이 원망스러웠다.

주태승은 내 종아리를 잘근잘근 깨물다가, 슈트 위에 퍼진 정액을 손으로 훔쳐 냈다. 더럽혀진 손가락이 향한 곳은 내 가슴이었다. 그는 야트막한 살갗에 정액을 바르며 속삭였다.

“슈트, 흰색으로 바꿔야겠네요.”

“무슨…….”

“그게 더 잘 어울리겠어.”

미쳤나 봐. 돈이 넘쳐나니 음담패설을 이런 식으로 한다. 마음 같아서는 욕이라도 해 주고 싶었으나, 정작 입에서 나오는 건 달큼한 신음밖에 없었다.

주태승이 치받을 때마다 까슬까슬한 음모가 사타구니를 간질였다. 그것마저 자극이 되어 구멍은 애액을 울컥 뱉었다. 눈앞이 아득했다. 그간 눌러 놓은 욕구를 전부 분출하려는 건지, 나를 찌르는 성기는 사그라들 기미가 없었다.

“겨울이가 기쁘겠네. 부모끼리 사이가 이렇게 좋아서.”

“흐윽, 읍, 짜증 나, 주태승.”

애한테 참 훌륭한 꼴 보이고 있다. 주태승은 내가 부끄러워하는 반응을 즐기는 듯했다. 서러움에 눈물이 비죽비죽 쏟아졌다. 그와 모순되는 내벽은 연달아 경련하며 기둥을 오물거렸다.

가까스로 붙들고 있던 의식이 갈수록 흐릿해졌다. 자지 않고 버티기로 했는데 아무래도 역부족인 모양이었다.

“하, 으, 진짜 이러다, 나…….”

“자고 싶어?”

“으응.”

“그래도 오늘은 오래 참았어, 기특하게.”

칭찬 아닌 칭찬이 돌아왔다. 미친놈, 편히 재워 줄 것처럼 말하면서 삽입을 멈추지는 않는다. 나는 바닥을 긁으며 흐느끼다가 결국 눈을 감아 버렸다.

***

“종아리도 아파요.”

팔을 주무르던 손이 느지막하게 다리로 옮겨 갔다. 나는 부루퉁한 표정으로 허공에 뜬 발가락을 꼼지락댔다. 주태승은 차분하게 종아리 아래의 뭉친 부분을 풀어 주었다.

“주태승 씨 진짜 변태 아니에요?”

“맞아요.”

“그, 아……. 네.”

이렇게 즉시 인정하면 할 말이 없다. 나는 큰 손에 붙들린 종아리를 물끄러미 내려다보았다. 하얀 살갗이 불그스름한 울혈로 가득했다. 개중에는 보랏빛으로 변한 멍 자국도 있었다. 아프지는 않았으나 미관상 좋지 않았다.

종아리를 더듬던 손이 발까지 내려왔다. 주태승은 내 발바닥을 엄지로 문지르며 물었다.

“더 아픈 곳 없어요?”

대략 열 번 정도 들은 질문이었다. 나는 심드렁하게 허벅지를 가리켰다. 사실 온몸이 두들겨 맞은 것처럼 욱신거렸다. 이렇게 걱정할 거면 왜 사람 탈진할 때까지 몸을 섞은 거냐고.

눈을 떴을 때 주치의가 옆에 있는 것을 보고 얼마나 어처구니가 없었는지 모른다. 물론 진찰 결과는 모두 정상이었다. 아마 의사도 섹스 하다가 기절한 사람 상대해 본 건 처음이 아닐까. 철면피 주태승 대신 민망함은 전부 나의 몫이었다.

벌써 30분째 마사지를 하고 있는데도 주태승은 지친 기색이 요연했다. 갖고 태어난 체력 자체가 다른 건지, 규칙적인 운동의 산물인지, 아니면 둘 다인지 알 길이 없다.

주태승이 커다란 손을 허벅지 안쪽으로 떨어트렸다. 이쪽은 종아리보다 훨씬 난잡한 모습이었다. 그토록 물고 빨아 댔으니 이 사달이 나는 것도 당연했다.

나는 얄미운 변태를 노려보다가, 그의 실내복 자락을 꾹꾹 잡아당겼다.

“근데 그 속옷 주태승 씨 취향이에요?”

“뭐, 너 입고 있던 거?”

“네.”

가만히 내게 시선을 주던 주태승이 뺨을 살짝 건드렸다. 그가 검지와 중지로 살을 집자, 약한 피부가 저항 없이 늘어났다. 무표정으로 이런 짓을 하니 괴리감이 상당했다.

“그런 거 주문한 적 없습니다. 뭔가 착오가 있었나 봐요.”

“그럼 컴플레인 걸어야 하는 거 아니에요?”

주태승은 진중한 낯으로 내 얼굴을 주물럭거렸다. 설마 얼굴이 뭉친 것 같아서 마사지해 주는 건가? 원래 이렇게 생긴 건데. 딱히 아프거나 하지는 않아 내버려 두었다.

“컴플레인을 왜 걸어, 성과급이라도 주면 몰라.”

“네?”

“덕분에 좋은 꼴 봤잖아요. 언제 또 여진서한테 가터벨트 입혀 보겠어.”

“조금 재수 없어요.”

욕을 들어 먹어도 무반응이었다. 주태승이 자세를 낮춰 이마에 입술을 짓눌렀다. 눈가와 콧잔등, 마지막으로 입꼬리까지 흔적을 새긴 후에야 그는 떨어졌다.

갑작스러운 스킨십에도 가슴이 떨리는 걸 보면, 내가 참 어지간히 이 인간을 좋아하나 보다. 참 신기했다. 한때 죽도록 미워하다가도 지금은 좋아서 죽을 것 같은 기분이 드는 게.

역시 사랑은 정신병일지도 몰라.

나는 옆으로 누워 있던 몸을 일으켜 주태승의 무릎에 앉았다. 이 자세를 취하니 내 눈높이가 약간 더 높았다. 다부진 어깨에 손을 얹자, 검은 눈동자가 올곧이 나를 향했다.

“배고파요.”

“밥 먹을까요?”

“그 전에 키스 더 하고 싶어요.”

말을 끝내자마자 나는 주태승에게 얼굴을 들이밀었다. 입술이 맞물리고, 젖은 혀가 부드럽게 서로를 얽맸다. 길쭉한 손가락은 자연스레 뒤통수를 감싸 왔다. 나를 원한다는 듯한 손길이 마음에 들었다.

고즈넉한 오후의 노을이 거실을 평화롭게 비추고 있었다.

***

낯설어하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내 몸은 신사동 2층 주택에 점점 적응하고 있었다.

집에서 보내는 시간이 길기 때문이라고 생각했다. 거실 소파에 드러누워 TV를 보고, 침실에서 동거인과 부대끼고, 식탁에서 꼬박꼬박 끼니를 챙겨 먹는다. 얼마 전에는 옷방에서 생난리까지 쳤다.

그리고 오늘은 영역을 마당까지 넓히는 날이었다.

나는 바깥에 내놓은 안락의자에 몸을 파묻은 채 화단을 내다보았다. 시선의 끝에는 남자의 너른 등판이 꿈틀대고 있었다. 정확히는 쭈그려 앉은 주태승의 뒤태였다.

“하나 더 심으면 안 돼요?”

“뭐 심고 싶은데요.”

“방울토마토요.”

내 말에 주태승이 자리에서 일어났다. 모종삽을 들고 선 모습이 도회적인 외모에 전혀 어울리지 않았다. 아마 실제로 흙을 만져 본 건 처음이 아닐까. 아무래도 고급 인력에게 미안한 일을 시키고 말았다.

“제가 씨앗 가져올게요.”

“앉아 있어요.”

주태승은 손에 묻은 흙을 가볍게 털어 내고 안으로 들어갔다. 나는 못내 신경이 쓰여 시선으로 그를 쫓았다.

화이트칼라 주태승 씨가 텃밭을 가꾸게 된 경위는 간단했다. 하필이면 그가 쉬는 날에 내가 상추를 심겠다고 설쳐 댄 탓이었다. 독서 중인 주태승을 보고 심심해진 게 화근이었다.

모종과 씨앗은 언젠가 심을 생각으로 이전에 사 놓았다. 그걸 꺼내 마당에서 땅을 두드리고 있으려니, 곧 나를 찾으러 온 주태승에게 잡혀 들어갔다. 그토록 황당하다는 듯한 표정을 짓는 그는 오랜만에 보았다.

처음에는 사용인에게 부탁할 것을 권유받았다. 하지만 취미로 시작한 일이고, 머지않아 태어날 겨울이에게 직접 가꾼 작물을 보여 주고 싶었다. 거기에 손수 키운 채소를 먹을 수 있다면 금상첨화였다.

절레절레 고개를 젓자, 주태승은 한숨을 쉬며 내 모종삽을 대신 손에 쥐었다. 하여간 선택적인 과보호였다. 섹스 할 때는 그렇게 걸신들린 것처럼 발라 먹더니.

그런고로 나는 텃밭 디자이너 역할을 맡았다. 하는 일은 심고 싶은 작물 말하기, 주태승 구경하기 등이 있다. 때때로 남은 자리에 모종을 하나 더 심자고 훈수도 둔다.

나는 씨앗을 들고 돌아온 주태승을 향해 물었다.

“상추 자라면 먹을 거예요?”

“응.”

“방울토마토도?”

“응.”

그런 거 왜 먹냐고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고분고분하다. 주태승은 이제 말없이 화단의 흙을 파내고 씨앗을 심기 시작했다. 툭, 툭, 툭. 모종삽 끄트머리가 일정하게 땅을 두드리는 울림이 퍼져 나갔다.

뭐라 지적할 건더기가 없었다. 주태승은 마치 자로 잰 듯이 칼 같은 간격으로 텃밭을 정리했다. 나는 그를 지켜보다가 늘어지게 하품했다. 안락의자가 이름값을 제대로 하려는 듯, 지나치게 푹신푹신했다.

“저녁에는 뭐 먹을까요?”

“하루 종일 먹는 생각만 하네요.”

“휴직 중이라 그래요.”

물론 휴직과는 아무 상관 없었다. 사실 심심해서 그렇다. 바쁘게 일에 치여 살다가 몸을 아끼려니 그렇게 지루할 수가 없었다. 맛있는 음식이라도 먹어야 삶이 풍요롭다.

나는 상추 모종이 옹기종기 모인 화단을 바라보고 말했다.

“다음에는 깻잎도 심을래요. 꽃 시장 가서 묘목도 사 오고요.”

“…….”

“근데 이 날씨에 수국 심어도 될까요? 키우기 힘들다던데. 그건 여름에 심어야 하나.”

조용히 땅을 두드리던 주태승이 모종삽을 내려놓았다. 그가 뒤를 돌아본 덕분에 눈이 마주쳤다. 살짝 주눅이 들었으나 나는 소심한 투로 덧붙였다.

“라일락도 있으면 좋을 것 같아요.”

“그리고?”

“뒷마당에는 나무……. 조경을 해치지 않는 선에서요.”

“그래요. 깻잎에, 수국에, 라일락이랑 나무.”

주태승은 옆에 둔 수건으로 멀끔히 손을 닦고, 내 원예 계획에 대한 짤막한 의견을 내놓았다.

“아예 농장을 차리지 그래요.”

서울에 농장을 하려면 돈이 아주 많아야 할 터다. 따지고 보면 조금 억울했다. 그러게 누가 정원을 비워 놓으라고 했나, 오스트리아에서는 꽃내음으로 가득한 온실을 보여 줬으면서.

“천천히 할 거예요. 겨울이가 좋아할지도 모르잖아요.”

“마음대로 해요. 대신 나 있을 때.”

나는 바짝 다가온 주태승에게 물컵을 건넸다. 그는 의자 등받이에 팔을 얹고 가만히 물을 마셨다. 흐트러진 앞머리가 불어오는 바람에 살랑살랑 나부꼈다.

“주태승 씨가 직접 심을 줄 몰랐어요.”

“정말 별짓을 다 해 보네요.”

쉬고 싶은데 나 때문에 억지로 한 걸지도 모르겠다. 뒤늦게 밀려오는 죄책감에 입꼬리가 스르르 내려갔다. 그에 주태승이 빈 잔을 손에 쥐고 말을 이었다.

“나름 재밌었습니다. 여진서가 시켜서 그런가.”

“정말요?”

“그러니까 마음껏 부려 먹어요.”

진심인지는 몰라도 그렇게 말해 주니 마음이 놓였다. 나는 주태승을 똑바로 올려다보며 물었다.

“저한테 뭐 해 줬으면 하는 거 없어요?”

나만 이것저것 요구하기에는 공평하지 않았다. 직접 해 줄 만한 게 몇 가지나 될지 몰라도 그에게 무언가 주고 싶었다.

내 물음에 주태승은 나를 가만히 응시하더니, 넌지시 대답했다.

“일단 아기 낳고, 천천히.”

“……뭐 시키려고요?”

답변은 돌아오지 않았다. 어쩐지 좋지 않은 예감이 들었다. 찝찝한 표정을 짓고 있는 내게 주태승이 손을 뻗어 왔다.

“이제 들어가요. 바람 부니까.”

내 어깨에 두른 주태승의 팔에서 옅은 흙냄새가 났다. 그와는 끔찍하게도 어울리지 않아 자그마한 웃음이 터졌다.

***

“여진서 씨, 일어나요.”

달빛조차 숨을 죽인 고요한 새벽, 나지막한 목소리가 나를 불렀다. 그 주인을 알고 있었으나 좀처럼 눈이 떠지지 않았다. 사위가 어두운 데다, 포근한 이불은 자꾸만 몸을 늘어지게 만들었다. 나는 베개에 얼굴을 파묻으며 웅얼거렸다.

“한밤중인데.”

“곧 해 뜰 시간입니다.”

“못 일어나겠어요…….”

별난 일이었다. 이제껏 주태승은 잠든 나를 깨운 적이 없었다. 뭔가 급한 사정이 있는 모양이었다. 애석하게도 머리로는 이해하겠는데 몸이 따라 주지 않았다. 나는 잠을 방해하는 요인을 피해 이불 속으로 꾸물꾸물 기어 들어갔다.

“그럼 자고 있어요.”

“네에.”

고맙다는 말을 덧붙이려는 찰나, 몸이 타의에 의해 쑥 뽑혀 나왔다. 나는 상황을 파악하지 못하고 신음했다. 슬쩍 실눈을 떠서 보니 다리가 허공에 떠 있었다.

“무슨, 자라면서요?”

“자요. 내가 옮기면 되니까.”

“네?”

비몽사몽 한 와중에 주태승이 내 어깨에 담요를 두르는 게 느껴졌다. 잠옷 차림으로 대체 어딜 가자는 거야. 짜증과 졸음이 함께 밀려들었다. 나는 주태승의 옷깃을 붙잡고 성난 투정을 부렸다.

“아니, 꼭두새벽에 어디 가요?”

“오늘 행사 있다고 말했잖아요.”

“이, 이 시간에 뭔…….”

“알겠으니까 다시 눈 감아요.”

이 상태로 행사라는 걸 참석해도 되나? 좌우지간 알아서 하겠다니 다 계획이 있겠지만, 머릿속은 의문 부호로 가득해졌다.

서늘한 공기를 맞자 주태승의 품이 아주 따뜻하게 느껴졌다. 나는 온기를 찾아 단단한 가슴팍을 파고들었다. 은은히 안정감을 가져다주는 페로몬 때문에 잠기운이 짙어졌다.

눈꺼풀이 무거워 깊게 생각하기가 귀찮아졌다. 설마 주태승이 날 어디 팔아먹기야 할까, 돈도 많은데.

모르겠다. 그냥 자야지.

그렇게 의식을 놓아 버리자 수마는 금세 나를 다시 찾아왔다. 나는 주태승에게 몸을 맡긴 채, 마음 놓고 곯아떨어지고 말았다. 잠결에 자동차 엔진 소리 비슷한 게 어렴풋이 들린 것도 같았다.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높은 곳에서 떨어지는 듯한 느낌에 정신이 들었다. 나는 화들짝 놀라 주변을 두리번거렸다. 흐릿한 시야에 비치는 건 차 시트와 운전기사, 그리고 내 옆에 앉은 주태승이었다. 아마 어디서 떨어진 게 아니라 그의 어깨에 기댔던 머리가 미끄러진 듯했다.

나는 멍하니 입맛을 다시며 창문을 내다보았다. 헛것을 보고 있는 게 아니라면, 유리 너머에 파아란 수평선이 펼쳐져 있었다. 다시 말해 바다 근처라는 뜻이었다.

“우리 바다 가요……?”

“응, 다 왔어요.”

주태승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우리를 실은 차가 멈춰 섰다. 나는 창문에 손을 짚고 눈앞에 놓인 풍경을 바라보았다. 도착한 곳은 희미한 짠 내가 풍기고, 아침의 햇살이 내리쬐는 항구였다.

“행사를 외국에서 해요?”

“아니.”

“그럼 배를 왜 타요?”

“배 타는 건 용케 알았네요.”

당장 뱃고동 소리가 나는 항구에 차를 대는 이유야 뻔하지 않은가. 정신이 맑아짐에 따라 의구심이 점점 짙어졌다. 나는 그중 가장 근본적인 의문을 입 밖으로 뱉어 냈다.

“근데 무슨 행사예요?”

참 빨리도 물어본다. 이전에 주태승에게 들은 설명은 ‘맛있는 걸 먹으면서 옆에 붙어 있으면 되는 행사’였다. 참석이 썩 내키지 않았기에 더 캐물을 마음이 안 들어 이 사달이 난 거였다. 또한 내 알파는 워낙 철두철미한 사람이었으니 어련히 잘 챙겨 줄 거라는 믿음이 있었다.

잠시 후, 주태승의 간결한 응답이 돌아왔다.

“결혼식.”

“결혼식이요?”

남의 결혼식을 이딴 차림으로 참석하게 한다고? 애초에 행사를 위해 마련한 옷은 죄다 어디 있다는 말인가. 나는 경악스러운 표정으로 주태승을 바라보았다. 심지어 그 또한 평상복 차림이었다.

정작 기행을 벌인 장본인은 무덤덤한 태도였다. 그는 내 어깨를 감싼 담요를 잘 추슬러 주고 자동차 문을 열었다. 바람에 실려 들어온 바다 내음이 시원하게 코를 간질였다.

차에서 내리자, 부두에 어마어마한 크기의 선박이 정착해 있는 게 보였다. 태어나서 이런 규모의 배는 처음 보았다. 이 정도면 사람이 족히 천 명은 넘게 탈 수 있을 듯했다.

이런 걸 호화 여객선이라고 하던가. 위풍당당한 자태를 뽐내며 얕은 물살을 일으키는 배는 서양 영화에서나 볼 법한 모양을 띠고 있었다. 새하얀 선체 위에 빼곡히 들어찬 객실이며, 언뜻 보이는 드넓은 갑판이며 어느 것 하나 현실감이 없었다.

이 꾀죄죄한 꼴로 저기에서 열리는 결혼식을 가라니, 믿기지가 않았다. 주태승에게 사회적 지위 따위는 그저 의미 없는 껍데기에 불과한 걸까. 하지만 평소에는 멀쩡한 행색으로 다녔으면서.

내 허망한 눈빛을 본 주태승이 가만히 입을 열었다.

“무슨 생각 하는지 알겠는데, 배 올라가서 준비할 겁니다.”

“……축의금 안 챙겨 왔는데.”

“여진서 씨가 그걸 왜 내요.”

아마 오늘 결혼하는 사람은 반드시 부자일 것이다. 결혼식에 축의금을 내는 관행은 어쩌면 나와 같은 일반인에게나 통용되는 것일지도 모른다. 나는 홀로 납득하고 고개를 끄덕였다.

역시 재벌들은 살아가는 세상이 다르긴 하구나. 주태승의 옆에서 부끄럽지 않게 살려면 배워야 할 점이 많겠다.

선체가 워낙 거대했기에 배에서 나는 소음도 상당했다. 나는 인상을 찌푸리고 주태승과 함께 승선했다. 건실해 보이는 승무원은 내 차림새를 보고도 예의를 갖춰 인사를 건넸다.

“와…….”

겉으로 보아도 충분히 호화스러웠으나, 여객선 내부는 더욱 상상을 초월했다. 배가 아니라 호텔에 와 있는 듯한 기분이었다. 안에 들어서자 드러난 로비는 오페라 하우스나 그에 준하는 고급 홀을 방불케 했다. 나는 서울에 갓 상경한 시골 쥐처럼 조그맣게 입을 벌리고 주변을 살폈다.

샹들리에를 저렇게 크게 달아 놓으면 파도가 쳤을 때 위험하지 않을까. 천장에 매달린 조명을 보고는 그런 생각도 들었다.

옆에 주태승이 없었다면 기가 죽어 뛰쳐나갔을 수도 있겠다. 나는 사사롭지 않은 기색을 띤 그의 소맷자락을 붙잡았다. 그러자 주태승은 붙들린 소매와 내 얼굴을 번갈아 바라보고 물었다.

“어색해서 그래요?”

“많이요.”

“곤란하네요. 잠깐 헤어져야 하는데.”

여기 혼자 두겠다고? 삽시간에 불안이 밀려왔다. 나는 엄마 손을 놓친 아이와 같은 표정을 지었다.

“왜요?”

“준비를 같이 할 수는 없잖아. 안에 있으면 금방 데리러 올게요.”

대체 뭐가 어떻게 흘러가는 건지 혼란스러웠다. 보통 하객이 따로 대기실을 잡아서 관리를 받나? 호화 여객선에서 치르는 결혼식은 뭐가 달라도 다른 건가. 살면서 만나 본 부자는 주태승이 전부였으므로, 나는 그들의 생활 전반에 대한 정보가 부족했다.

아무래도 주태승의 말을 따르면서 경험하는 게 상책일 터다. 달리 좋은 방법도 없었다. 따로 책이 나와 있는 것도 아니고.

문득 몇몇 직원들이 카트에 생화를 싣고 이동하는 모습이 보였다. 내가 시선을 뺏긴 동안에도 주태승은 묵묵히 걸음을 옮겼다. 이 사람은 이런 환경이 자연스러운가 보다. 가장 가까운 사이인 그가 약간 멀게 느껴졌다.

“조금 이따 봅시다.”

주태승은 큼직한 문 앞에 나를 데려다 놓고 어디론가 사라졌다. 나는 쭈뼛쭈뼛 대기실 안으로 들어섰다. 앞치마를 두른 여성이 반갑게 나를 맞아 주었다.

“어서 오세요, 이쪽에 앉으세요.”

대기실 안에는 직원이 많았다. 정면에 자리한 거울 앞에는 형형색색의 화장품이 늘어져 있고, 한쪽에는 스타일러까지 갖추고 있었다. 나는 가운데 놓인 의자를 보며 말했다.

“일단 세수 좀 하고 싶은데요.”

“대기실 오른쪽에 세면실이 마련되어 있습니다. 다녀오시면 준비 도와드릴게요.”

“네…….”

기분 탓일까, 직원들의 시선이 전부 나를 향해 있는 듯했다. 나는 영 불편한 기분으로 세면실에 들어섰다. 호화 여객선답게 간단한 세면도구가 모두 준비된 상태였다.

양치와 세수를 마쳐도 개운하지 않았다. 얼굴의 물기를 닦고 나오자 직원은 기다렸다는 듯이 나를 의자에 앉혔다.

눈썹을 다듬는 것을 첫발로 직원들은 나를 분주히 치장하기 시작했다. 누군가는 뺨에 뭔지 모를 화장품을 바르고, 누군가는 고데기로 머리카락에 컬을 넣었다.

이전에 수많은 공연을 거쳐 왔기에 꾸미는 것 자체는 익숙한 일이었다. 다만 그 세심함의 정도가 달랐다. 입술에 옅게 생기를 입히는 손길과 머리카락 한 올까지 심혈을 기울이는 노력이 예사롭지 않았다.

거울 속에 비친 나를 멀거니 구경하고 있으려니, 머리카락을 다듬던 직원이 말을 걸어왔다.

“워낙 외모가 출중하셔서 손댈 곳이 없네요. 우성이시죠?”

“아, 네.”

“어제 잠은 잘 주무셨어요? 좋으시겠어요.”

남이 결혼하는데 내가 좋을 건 뭐지. 이 배에 오른 후로 여러 의문을 넘겼으나 이번에는 도무지 이해가 가지 않았다. 나는 결국 머릿속에 떠오른 문장을 오롯이 내뱉었다.

“뭐가 좋아요?”

“네?”

오히려 직원이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그 태도가 나를 더욱 깊은 혼란에 빠트렸다. 거울 너머로 직원들이 시선을 교환하는 모습이 보였다. 어쩐지 돌아가는 분위기가 이상했다.

“어, 떨리지는 않으세요?”

“제가 왜 떨어야 돼요?”

분명히 대화를 나누고 있는데 핀트가 어긋나는 느낌이 들었다. 직원의 낯빛에서 어찌할 바를 모르는 기색이 강해졌다. 덩달아 내 눈동자에도 자잘한 경련이 일었다.

잠은 잘 잤냐, 좋겠다, 떨리지는 않냐.

하객에게 왜 저런 말을 하는 거지. 결혼해 보지 않아도 적절한 말이 아니라는 건 알 수 있었다. 오히려 저건 식을 올리는 당사자에게나 건넬 인사가 아닌가. 생각할수록 머리가 끝도 없이 복잡해졌다.

설마…….

아니야, 아니겠지. 설마 그 정도로 주태승이 미친놈일까. 나는 잠깐 뇌리를 스쳐 간 하나의 가능성을 얼른 지워 냈다. 지나치게 어처구니없는 상상이었다.

어느 정도 단장이 끝나자, 직원 하나가 구석에 마련된 탈의실로 나를 안내했다. 집에서 봤던 새하얀 턱시도가 주인을 기다리고 있었다. 과연 전문가답게, 직원들은 빠르게 내 차림새를 바꾸어 놓았다.

배가 많이 나오지 않은 덕분에 그럭저럭 옷매무새가 괜찮았다. 재킷과 바지가 순백색에 가까웠기에 마치 백합 속에 들어가 있는 듯했다. 옷이 날개라는 생각을 하면서도, 한편으로 묘한 의구심이 들었다.

내가 하얀 옷을 입어도 되는 건가. 보통은 주인공을 돋보이게 하기 위하여 하객들은 다른 색의 의복을 선택할 텐데. 의상을 고른 건 주태승이었기에 의문을 해소해 줄 이가 없었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멀끔해진 후에는 직원이 나를 다른 방으로 데려갔다. 만개한 꽃으로 장식이 되어 있고, 기다란 소파 하나가 덩그러니 놓인 장소였다.

“아!”

마침내 나는 그곳에서 내 짝과 재회하게 되었다. 검은 슈트를 입은 주태승은 여느 때보다 수려한 모습으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나는 가슴에 문제를 한가득 품고 그에게 뛰다시피 다가갔다.

내 목소리에 이쪽을 돌아본 주태승이 살며시 미소 지었다. 그가 자리에서 일어나며 입을 열었다.

“준비 다 했어요? 예쁘네.”

“아니, 이거 하얀 옷 입어도 되는 거예요?”

“괜찮아요.”

나는 의심스러운 눈으로 주변을 둘러보았다. 이 대기실은 나와 주태승을 제외하면 누구도 없었다. 속에 쌓아 둔 의문에 대해 마음껏 캐물어도 괜찮을 듯했다.

“결혼하는 사람이랑 친해요?”

“그런 것 같은데.”

“부자들은 결혼 다 이렇게 해요?”

“아닐걸.”

어째 질문을 던져도 후련하게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원래 이런 화법을 사용하는 사람이 아닐 터인데, 주태승은 계속해서 알쏭달쏭하고 애매한 소리만을 풀어 놓았다.

나는 답답한 심정에 입술을 샐쭉 내밀고 불평했다.

“왜 데리러 안 왔어요? 뭐 먹고 옆에 붙어 있으라면서요. 전 주태승 씨랑 계속 같이 있을 줄 알았는데.”

“이제부터 그렇게 하면 돼요.”

주태승이 팔을 들어 내 뺨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잘 정돈된 손끝에서 늘 그렇듯 은은한 향기가 풍겼다. 그는 시간을 들여 조심스레 나를 어루만지다가, 한 박자 늦게 덧붙였다.

“근데 그 전에 내가 여진서 씨 자랑을 좀 해야겠는데.”

“자랑이요?”

“응.”

그 뒤에 따라온 건 나를 끔찍한 충격의 도가니탕에 빠트리는 말이었다.

“이거 네 결혼식이니까.”

“……네?”

이 인간 지금 뭐라는 거야?

사람이 너무 놀라면 순간적으로 뇌가 정지한다. 나는 한겨울에 발가벗고 내쫓긴 사람처럼 얼어붙고 말았다. 정말 혹시나 했다. 설마 내가 결혼하는 당사자겠어, 그걸 비밀로 하는 인간이 세상에 존재할 리가. 현실에서 벌어지기에는 너무도 황당한 일이 아닌가.

그런데 그 정신 나간 작자가 코앞에 있었다. 심지어 내 배우자라는 작자가 벌인 행동이었다. 너무도 다양한 감정이 밀려들어 뭐부터 꺼내야 할지도 몰랐다.

나는 달달거리는 목소리를 가다듬지도 못하고 물었다.

“저, 저기, 미쳐, 미쳤어요? 결혼식인 거 본인한테 말 안 하는 사람이 어딨어요?”

“결혼하자고 했잖아요.”

“근데 오늘이라고 안 했잖아요. 무슨, 하.”

한마디조차 똑바로 내뱉지 못하는 나와 달리, 주태승은 태연자약하기가 이를 데 없었다.

“보통 비밀 이벤트 좋아한다고 하던데, 아닙니까?”

“이게 무슨 이벤트예요? 누가 자기 결혼식을 모르고 오냐고요, 진짜 또라이도 아니고……!”

입매가 평소에 비해 유하게 곡선을 그리는 게, 뻔뻔한 걸 넘어 상당히 즐거워하는 듯했다.

“반응 보면 왜 남들이 이런 짓 하는지 알 것도 같네요.”

대체 누가 이런 상식에 어긋난 짓을 한다는 말인가. 프러포즈를 비밀로 하는 경우는 많이 봤어도 결혼식을 숨기는 건 들어 본 적 없었다. 아마 세상천지를 다 뒤져 봐야 한 두어 명 나오지 않을까. 물론 다들 제정신이 아닐 것이다.

“이왕이면 웃어 줘요. 그래야 내가 보람 있지.”

이미 보람은 혼자 넘치게 챙긴 것 같은데. 어처구니가 없어 헛웃음이 나왔다. 그에 만족한 듯 주태승은 넋이 나간 내게 손을 잡아 깍지를 꼈다. 서로의 약지에 걸린 반지가 찰칵, 소리를 내며 부딪쳤다.

“시간 다 됐는데, 갈까요.”

내 정서 상태를 아이 또한 느낀 것인지 묵직한 태동이 느껴졌다. 나는 아랫배에 손을 얹은 채 속으로 되뇌었다.

관계의 시작, 이별, 심지어 아이를 가지는 것과 가족이 되는 날까지. 전부 다 도무지 예상할 수 없었다. 주태승과 보내는 나날은 늘 이토록 놀라움으로 가득하다. 이 사람은 크나큰 하나의 물결이 아닐까. 나를 무던히 흐르던 시냇물에서 일렁이는 바다로 이끄는 예상치 못한 파란.

흰 포말 대신 나부끼는 꽃잎으로 가득한 길을 걸으며, 나는 주태승과 맞잡은 손에 힘을 실었다.

외전. 웨딩데이(Wedding day) f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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