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거구의 중학생 (3/13)

3. 거구의 중학생

매주 수요일은 혼돈의 설화 정기 점검일이었다. 주현은 목 스트레칭을 하는 척 파티션 너머 사무실 분위기를 살폈다. 다들 모니터에 집중하고 있는 걸 확인한 후, 재빠르게 혼돈의 설화 홈페이지에 접속했다.

울창한 푸른 숲 배경 위로 뾰족한 귀를 가진 키 작은 실루엣이 떠올랐다. 손엔 활대로 추정되는 기다란 무기를 들고 있었다. 숲을 지키는 수호자, D-14. 이번 직업의 이름은 수호자인 모양이었다.

내용을 읽어 보자 수호자의 발자취를 쫓아, 던전에서 아이템을 모으라는 임무였다. 직업 정식 출시 전, 기대감을 높이기 위한 사전 이벤트였다.

주현은 다음 페이지로 넘어갔다. 캐릭터 커스터마이징과 코디를 자랑하는 스크린 샷 공모전이 열렸다. 참가상으로 혼돈의 설화 로고가 그려진 티셔츠 아바타를 증정한다고 한다. 당장은 쓸모없어 보여도 나중에 입을 일이 있을지 몰라, 이건 꼭 참여해야 한다고 주현은 머릿속에 정보를 집어넣었다.

그리고 새로운 아바타 상자가 출시되었다. 계절이 여름이라 그런지 얇은 원단과 시원한 디자인의 의류가 대다수였다. 주현은 이벤트 페이지 속 캐릭터가 쓰고 있는 베이지색 챙모자를 훑어보며 어떻게 염색하면 좋을까 고민했다.

[김경찬] 오늘 저녁 안 잊었지?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서 올라오는 PC 톡 알림을 보며 주현은 한숨을 삼켰다. 집에 도착하자마자 아바타 상자를 깔 생각에 신이 났는데, 하필이면 오늘 경찬과 약속이 있었다.

‘수요일에 왜 약속을 잡았지?’

주현도 스스로 이해할 수 없었다.

[윤주현] 어

[김경찬] 야 나 알고 보니까 오늘 약속이 두개였던거야

주현은 경찬의 메시지를 읽으며 속으로 몇 번이고 빌었다. 두 개의 약속 중 취소가 되는 게 자신이길 간절하게 바랐다.

[김경찬] 그래서 다른거 취소함ㅋ

[김경찬] 의리 인정?

[윤주현] 어

[김경찬] 반응 뭐임ㅡㅡ?

인생은 원래 바라는 대로 흘러가지 않는 법이었다. 경찬에게 대충 대답한 주현은 작업표시줄에 숨겨 뒀던 편집 프로그램을 켰다. 경찬은 대답이 너무 성의 없는 거 아니냐며 대화방을 도배했지만, 주현이 끝까지 읽어 주지 않자 시무룩한 상태로 사라졌다.

퇴근 시간이 다가오자 주현은 미적미적 책상을 정리하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사무실 사람들에게 간단히 인사를 하고 밖으로 나오니 후더분한 공기가 주현을 반겼다. 괜히 만나겠다고 했나? 경찬이 일방적으로 잡은 약속도 아닌데 막상 당일이 되니 귀찮았다.

[블랙] 나 오늘 늦어

혹시나 밍채가 기다릴까 봐 주현은 지하철에 올라타며 메시지를 보냈다. 출퇴근 시간엔 늘 그렇듯 사람이 많아 주현은 인파에 묻힌 채 휴대폰을 확인했다. 때마침 제 메시지 옆 숫자 1이 사라졌다.

[밍채] 왜요?

[블랙] 친구랑 밥 먹기로 했어

[밍채] 저희 신혼인데 다른 사람이랑 밥을 먹는다고요?

주현은 아직 밍채와 결혼을 하지 않았다. 밍채의 말에는 어폐가 있었지만, 트집을 잡지 않고 웃고 넘어갔다.

[밍채] 형 뭐 먹는데요?

[블랙] 아마도 돼지고기?

경찬과 만나기로 한 식당이 돼지고깃집이었다.

[밍채] 그럼 저도 그거 먹어야겠어요

중학생 남자애가 제 메뉴를 따라 먹는다고 상상하니까 귀여웠다. 그러다가 문득 밍채가 버리겠다고 말했던 걸 떠올리면 기분이 울적해졌다. 열다섯 살 주제에 벌써 사람을 들었다 놓았다 한다니. 나이가 더 차면 사람들을 꽤 울리고 다니겠거니 싶었다.

[블랙] 오늘은 학원 안 가?

[밍채] 갔어요

[밍채] 아직도 학원이에요

‘공부 진짜 열심히 하는구나.’

저 나이대 주현은 숙제를 미룰 때까지 미루고 컴퓨터 게임을 했던 기억밖에 없었다. 밍채도 마침 방학이라 친구들이랑 놀거나 게임을 더 하고 싶어 할 텐데, 꾹 참고 학원 다니는 게 기특했다.

[블랙] 무슨 학원이야?

[밍채] 영어요

얼마 전까진 수학 학원도 간간이 언급했는데, 요즘엔 온통 영어 학원 이야기였다. 밍채와 대화를 하며 시간을 보내니, 사람이 어느 정도 빠져 열차 안이 한산해졌다. 주현은 에어컨 아래에서 열을 식히다가 다음 역에서 내렸다.

“야, 윤주현. 오랜만! 잘 지냈냐?”

경찬과는 고깃집 앞에서 만났다. 멀리서부터 경찬이 손을 흔들며 다가오는 탓에 내심 창피했다. 두 달 전에도 봤고, 그간 전화도 몇 번 했었는데 경찬은 몇 년 만에 만난 사람처럼 굴었다.

“요즘 일은 어떠냐?”

“어떻긴…… 바쁘지.”

도저히 한가할 수가 없는 직업이었다. 조금 여유가 생겼다 싶어지면 바로 업무 메일이 도착해 숨이 턱 막혔다. 그래도 막 입사했던 신입 때보다는 요령이 생겨서, 몰래 혼돈의 설화 업데이트를 확인한다거나 밍채의 톡에 답장을 보낸다거나 이따금 딴짓할 수가 있었다.

식당에 입장한 둘이 원형 테이블에 자리를 잡고 메뉴를 주문하니 밑반찬과 함께 고기가 나왔다. 주현이 자연스럽게 집게로 손을 뻗자 경찬이 재빠르게 뺏어갔다.

“야, 야. 내가 구울게.”

구워 주겠다는데 거절할 이유도 없어서 얌전히 불판을 구경했다. 고기가 노릇노릇 익어 가자 경찬은 어서 먹으라고 권유했고 주현은 젓가락을 들었다.

식당은 대학가에 있어 젊은 사람이 많았고, 인기가 좋은지 출입문이 빈번하게 열리며 새로운 손님들이 들어왔다. 주현과 경찬에게 다가와 더 필요한 게 없느냐고 묻던 직원은 마침 가게 안으로 들어오는 무리를 발견하고 잠시 자리를 비웠다.

“어서 오세요. 몇 분이세요?”

“세 명이요.”

“편하신 데 앉으세요.”

고기 한 점을 집어 익었는지 앞뒤로 확인을 마친 후 입 안에 넣으려 하는데, 출입문을 바라보던 경찬이 별안간 손을 번쩍 들었다.

“야, 채하야!”

경찬의 입에서 나오는 이름에 주현은 놀라서 고기를 놓쳤고 아깝다는 경찬의 타박이 이어졌다. 주현은 테이블로 다가오는 발소리를 들으며 눈을 꽉 감았다. 편의점에서 채하를 만난 후로 그곳엔 얼씬도 안 했는데, 이래선 그동안 피해 다닌 보람이 없었다.

주현이 채하에게 잘못한 건 딱히 없지만, 여전히 껄끄럽고 불편해 마주치는 일을 최소한으로 줄이고자 했다. 하지만 경찬 탓에 다 물 건너가 버렸다. 어느새 가깝게 다가온 채하가 둘에게 고개 숙여 인사했다.

“안녕하세요, 선배님.”

주현은 무심코 채하의 행색을 훑다가 빠르게 시선을 거뒀다. 아무것도 그려지지 않은 흰 티에 발목을 가리는 연청색 바지. 매번 안경을 쓰는 건 아닌지 콧대 위가 휑했다. 열심히 꾸민 것도 아닌데 예쁘장한 얼굴과 타고난 뼈대 덕분에 겉모습에 힘주고 다니는 놈들보다 월등히 나았다.

“야, 언제까지 선배라고 할 거냐? 형이라고 불러. 친구들이랑 여기 앉아.”

경찬은 넉살이 좋은 건지 눈치가 없는 건지, 비어 있던 옆 테이블을 권유했다.

“네. 선배님.”

죽어도 선배님 호칭은 포기 안 하는 채하가 제 친구들을 끌고 자리를 잡았다. 경찬은 제 제안이 거절당했단 것도 모르고 오랜만에 만나서 반갑다며 말을 붙여 왔다. 주현은 이 자리가 언제쯤 파할지 시간을 계산하며 손에 쥔 물컵을 홀짝였다. 정 안 된다면 중간에 도망갈 의향도 있었다.

불판 위에 피어오르는 연기 사이로 편의점에서 봤던 채하의 친구와 시선이 부딪쳤다.

“안녕하세요. 전 김민준이에요.”

“전 박건우예요!”

초면인 사람도 하나 있었다. 어차피 또 만날 일도 없을 텐데 통성명을 성의있게 할 필요가 없다 싶어서 주현은 대충 대꾸했다.

“아, 네. 전 윤주현이요.”

“난 경찬. 김경찬. 형이라고 불러.”

이제 곧 졸업이라 앞으로 조별 과제도 없을 테고, 타 학과 사람들과 엮일 일도 손으로 꼽힐 텐데. 둘에게 필요할 때 연락하라며 번호를 알려 주는 경찬을 생소한 눈으로 바라봤다. 귀찮은 걸 싫어하는 주현은 절대 하지 않을 짓이었다.

인맥은 일단 늘려놓는 게 좋다고 하지만, 사람 만나는 걸 좋아하는 경우에나 가능했다. 한 사람씩 신경을 써 주기 성가셨고, 언제 또 채하 같은 놈이 나타나 말문을 막히게 할지 모르는 일이었다.

“야, 채하야. 그래서 네가 먼저 윤주현한테 연락했냐?”

“……고기나 먹어.”

경찬에게서 집게를 뺏어 온 주현은 익은 고기를 경찬의 앞접시에 잔뜩 쌓아 줬다. 입을 막으려고 고기를 몰아 준 건데, 씹으면서 말을 이어 가는 경찬을 보고 주현은 한숨을 삼켰다.

“누가 먼저 연락했어?”

아무도 연락하지 않았다. 남의 일이 뭐 그렇게 궁금한지 경찬은 둘을 번갈아 바라보며 답을 기다렸다.

“제가 먼저 했어요.”

채하가 고개를 기울이며 대답했다. 갈라진 머리카락 사이로 둥근 이마가 보였다. 가질 수 있는 건 다 가진 것 같다가도, 어김없이 지어낸 말을 쏟아 내는 채하를 보면 마냥 완벽하지 않을 수도 있단 생각이 들었다. 저렇게 사는 것도 참 피곤한 일인데, 들키지 않고 성격을 유지해 온 채하가 경이로웠다.

“너희 같은 게임 한다며? 그거 재밌냐?”

“재미없으니까 그 시간에 다른 걸 해.”

“너 직업 뭐 키우는데?”

“소환사.”

경찬은 아직 혼돈의 설화에 미련을 못 버린 건지, 같은 게임을 한단 점이 신기한 건지 끈질기게 질문을 이어 갔다. 주현은 본캐인 블랙을 대신해 부캐인 카민의 직업을 팔았다.

“채하, 너는 뭐 키우는데?”

“전 성기사요.”

주현이 당황한 얼굴로 채하를 돌아봤다. 절대 남을 위해 희생 안 할 것 같은 놈이 성기사를 키운다니까 믿을 수 없었다.

“둘이 만나서 게임 한 적은 없고?”

고기나 먹을 것이지, 상추 쌈을 만들던 경찬이 또다시 질문했다.

“선배랑 저랑 장비가 안 맞아서요.”

이어지는 채하의 대답에 자존심이 상했다. 혼돈의 설화를 먼저 시작한 건 채하겠다만, 주현은 웬만한 과금 유저 못지않게 돈을 투자했고 랭킹도 결코 낮다고 말할 수 없었다. 장비 욕심은 없는 편이었으나 채하에게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주현은 굳어 가는 입꼬리를 애써 숨기며 채하에게 물었다.

“몇 위인데?”

“300위 초반이요.”

“……그렇구나.”

주현은 말꼬리를 흐리며 시선을 피했다. 먼저 랭킹을 말하지 않은 게 다행이었다. 성기사 300위 초반대면 주현의 블랙과 고만고만했다. 장비 수준이 비슷하다고 말을 꺼낼 수도 있겠지만, 채하를 따라 한 느낌이 들어서 영 별로였다. 그리고 경찬이 같이 게임을 하라고 부추길 가능성도 있어서 주현은 몸을 사렸다.

채하에게 지고 싶지 않은 주현은 집에 가면 괜찮은 장비 매물이 있는지 확인해 봐야겠다고 마음을 굳혔다.

“300위?”

입에 고기를 욱여넣던 민준이 고개를 갸웃했다. 채하가 많이 먹으라고 앞접시에 고기를 쌓아 주자 민준은 턱을 끄덕이며 젓가락질 속도를 높였다.

“그런데 너희는 놀고 온 거야?”

“아뇨. 저희 토익 학원이요.”

식사를 이어 가며 경찬과 민준이 말을 주고받았다.

본인도 2학년이던 시절이 있었을 텐데, 뭐 그리 궁금한 게 많은지 모르겠다. 채하가 있는 테이블로 자꾸만 질문을 던지는 경찬을 주현은 못마땅하게 훑어보며 몸을 일으켰다.

“나 화장실 좀.”

손에 묻은 기름기가 진득해 화장실로 향했다. 세면대 앞에 서서 비눗물로 손을 씻으며 숨을 골랐다. 사무실보다 채하와 한 공간에 있는 게 더 숨이 막히는 기분이었다. 채하가 자꾸만 주현을 도발하는 탓도 있었다.

주현은 벽에 기대서서 휴대폰 알림을 확인했다. 밍채로부터 도착한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가 있었다.

[밍채] 형 그러면 언제 와요?

어려서 그런가, 별것도 아닌데 귀여웠다. 중학교 2학년이라고 하면 알 거 다 아는 나이였지만, 주현과는 열한 살 차이가 나니 마냥 어린애 같았다. 주현은 숨죽여 웃으며 답장을 보냈다.

[블랙] 아마 한 시간 후?

[블랙] 너는?

[밍채] 전 지금 밥 먹고 있어요

[블랙] 맛있게 먹고 날 어두워지기 전에 집 들어가

[밍채] 네

말 잘 듣는 걸 보면 참 순수한데, 어쩌다가 사사게에 박제되며 방황을 하게 된 걸까. 주현은 밍채가 처한 상황이 안타까워졌다. 어떻게 보면 밍채를 바로잡아 주지 못한 어스름의 잘못도 있었다.

주현이 다시 자리로 돌아오자, 휴대폰을 쥐고 있던 채하가 벌떡 몸을 일으켰다.

“먼저 간다. 저 가 볼게요.”

“벌써 간다고?”

고기 몇 점 먹지도 않고 집에 간다고 하니까 경찬이 아쉬운 얼굴로 채하를 붙잡았다. 친구들과도 상의하지 않은 일이었는지, 민준이 채하의 옷자락을 잡아당겼다. 건우와 민준은 경찬과 초면일 텐데, 친구들의 처지 따위 전혀 고려하지 않은 결정이었다.

떠들썩하고 정신없는 식당 안에서, 채하가 얼른 사라져 주길 바라는 건 주현 하나였다.

“뭔데, 여친이야?”

민준의 말에 주현의 눈이 채하의 휴대폰으로 향했다. 자리로 오면서 채하를 살폈을 때, 채하는 옅은 미소를 지으며 휴대폰을 붙들고 있었다. 여자 친구에게 아직 음습한 속내를 들키지 않은 건지, 아니면 여자 친구만 채하에게 예외인지 궁금해졌다.

“아니. 남친.”

그 말을 남기고 채하는 부리나케 식당을 빠져나갔다. 경찬은 잘못 삼켰는지 컥컥 기침해댔고, 민준은 눈알을 굴려 둘의 눈치를 봤다. 주현은 조용히 물을 따라 경찬에게 컵을 내밀었다. 채하의 말을 수습하는 건 자리에 남은 친구들의 몫이 되었다.

“채하가 가끔 장난을 쳐서요. 원래 그래요.”

“맞아요.”

민준에게 맞장구를 치는 건우의 모습이 자연스러운 걸 보아 농담은 맞는 모양이다. 오해받을 걸 알면서도 농담을 던지는 채하의 심리는 경찬과 주현이 받아들이기에 난해했다.

어떻게 되었든 간에 자리를 뜬 채하 덕에 마음이 한결 홀가분해졌다. 주현은 등받이에 몸을 기대며 긴장을 풀려 하는데, 마음 놓기 무섭게 테이블에 올려 뒀던 휴대폰 화면에 불이 들어왔다. 주현은 바짝 숨통을 조인 채로 손을 뻗었다.

[밍채] 형 더 일찍 오면 안 돼요?

다행히 발신인은 밍채였다. 주현은 웃음을 꾹 삼켜 내고 경찬에게 통보하듯 말했다. 결단을 내리기까지 조금의 고민도 없었다.

“간다.”

“뭔데! 나 혼자 먹으라고?”

“내가 계산할게.”

“어, 잘 가라!”

기가 찬다는 얼굴로 주현을 바라보던 경찬은 계산하겠다는 말에 이빨을 드러내어 웃더니 양손을 흔들며 배웅했다. 옆 테이블에서 식사 중이던 민준과 건우도 몸을 일으켜 인사하려고 하길래 서둘러 둘을 말리고 어수선한 공간에서 벗어났다.

[블랙] 그래

계산을 마친 주현은 밍채에게 답장을 보내며 결심했다. 하루빨리 어스름을 밀어내고 밍채를 제 편으로 만들어야겠다고.

* * *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월월월 : 블랙님 ㅎㅇㅎㅇ염

[길드] westone : 오늘은 늦으셨네요?

[길드] 블랙 : 친구랑 약속이..ㅎㅎ

[길드] westone : 수요일은 약속 안 잡는 거 모르시냐구요

[길드] 블랙 : 그러게요 ㅠㅠ

[길드]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원과 인사를 마친 후 주현은 친구 목록을 열어 밍채의 위치를 확인했다. [CH.4] 대도시 채예스 – 광장. 던전이라도 돌고 있을 줄 알았는데 줄곧 주현을 기다린 모양이었다. 4채널은 재앙 길드의 서식지였다.

[귓속말] 밍채에게 : 어디야?

위치는 광장이라고 쓰여 있는데 주위를 둘러봐도 밍채의 모습이 보이지 않았다. 주현은 밍채에게 귓속말을 남기고 거래소로 향했다. 지금 장비도 괜찮은 편이었지만, 채하에게 무시당한 게 기분 나빠서라도 새로운 장비를 맞춰야만 했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해킹이죠

[길드] 블랙 : ?저요

거래소 장비 매물을 확인하는데 서쪽이 느닷없이 해킹 의심을 해 왔다. 길드원과 인사도 제대로 했고, 채팅으로 중국어를 쓴 것도 아닌데 다짜고짜 해킹으로 몰아가는 서쪽의 행동이 의아했다.

[길드] 월월월 : 갑자기염? ㅋㅋㅋㅋㅋㅋ

[길드] westone : 왜 상자 안 까세요?

[길드] 월월월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 해킹이시네여!!!

[길드] 잔혹동화 : 블랙님 초심 잃으셨네요 오자마자 까실줄

[길드] 블랙 : 거래소 좀 보느라 ㅎ

[길드] 블랙 : 아니.. 그리고 저 그렇게까지 혼설에 진심 아니에요

[길드] westone : 아 네 곧 상자깡[26]하실 분 인터뷰 잘 들었습니다

[길드] 블랙 : 아니;;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사실 아바타 상자를 사기 위해 접속 전 홈페이지에서 미리 캐시를 충전했다. 새로운 직업인 수호자의 업데이트 예고가 올라와서 그런지 평소보다 장비 매물이 비쌌다. 랭킹을 올리고 싶긴 하지만 웃돈 내고 장비를 맞출 만큼 간절하진 않아서 거래소 창을 꺼 버렸다.

주현은 다시 광장으로 캐릭터를 옮기고 새로 나온 아바타 상자를 100개 구매했다. 마침 광장을 지나던 서쪽이 주현을 발견하고 다가왔다.

[전체] westone : 이번에 몇 개 사셨어요?

[전체] 블랙 : 100개요

[전체] 블랙 : 서쪽님 되게..

[전체] westone : 되게?

[전체] 블랙 : 화끈해지셨네요

[전체]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이번 아바타 상자 구성에는 수영복도 있었는데, 서쪽도 이미 한바탕 상자깡을 한 뒤인지 피부색으로 염색한 쇼트 사각 수영복을 입고 있었다. 뒤에서 보면 엉덩이 선이 노골적이라 주현은 서둘러 시점을 변경했다. 거기다가 하얀 고양이 귀와 기다란 꼬리까지 착용해, 피시방 유저들이 가장 꺼리는 최악의 코디를 완성 시켰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광장에서 상자깡하신대요~~

[길드] 월월월 : 기다려주세염

[전체] 월월월 : ?????????

채팅을 보고 광장으로 달려온 월월월은 서쪽의 탄탄한 엉덩이와 정통으로 눈이 맞고 기겁했다.

[전체] westone : 님도 줘요?

[전체] 월월월 : 아념;;

[전체] 월월월 : 저 피방인데 매너 어디 갔어염 ㅠㅠ

[전체]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 아 차단하시든가요!!

[전체] 월월월 : 친구가 저 이상하게 봤다구염 ㅠㅠㅠ

[전체] westone : 숨겨왔던 취향이라고 하면 되지 뭐 그런 걸 다

[전체] 블랙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월월월 : ㅠㅠㅠㅠㅠㅠㅠ

서쪽의 캐릭터는 원래도 상의를 벗고 다녔지만, 이제는 하의까지 벗은 듯한 모습이라서 공개적인 장소에서 같이 게임을 하기엔 부끄러웠다. 하지만 그건 월월월의 사정이었고, 주현은 집에서밖에 게임을 하지 않으니 서쪽이 뭘 입든 상관없었다.

[길드] 레아 : 와 웨스트님

[길드] 레아 : 제 취향이세요...

[길드] 월월월 : ?????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 사귈래요?

[길드] 레아 : 저도 남캐 키울걸...ㅜㅜ

곧이어 레아까지 도착했다. 재앙 길드에는 유독 남자 캐릭터를 키우는 유저가 많았고, 그래서인지 본캐의 성별이 여자인 건 레아 하나였다. 물결처럼 굽은 밤색 머리카락을 가진 여자 캐릭터가 서쪽의 몸을 훑으며 순수하게 감탄했다.

주현은 인원이 모인 걸 확인한 후, 인벤토리에 가득 쌓인 상자를 10개 단위로 까기 시작했다. 친구나 길드원이 주변에 있으면 확률이 올라간다는 미신을 믿었다.

[전체] 월월월 : 블랙님 까고 계신거예염???

[전체] westone : 알림이 하나도 안 뜨는데..

[전체] 레아 : 엇.....

[전체] 블랙 : 쿠폰 모아서 템 바꾸는 거 모르시나요?

[전체] westone : 울지 말고 얘기해보세요

[전체] 블랙 : ..

아바타 상자에선 쿠폰이 1개 이상 무작위로 나오는데, 쿠폰을 모아다가 특정 아바타를 교환할 수 있는 방식이었다. 주현처럼 운 없는 사람들을 위해 마련된 안전장치이지만, 끝내 아바타를 뽑지 못하고 쿠폰으로 교환할 때면 게임 운영진에게 고까운 마음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SYSTEM] 신사님이 [썸머 바캉스 아바타 상자]에서 [한낮의 바캉스 세트 (남)]를 획득하셨습니다.

[길드] 암흑기사 : ㅊㅋㅊㅋ

[길드] 레아 : 우와 축하드려요!!!

[SYSTEM] 신사님이 [썸머 바캉스 아바타 상자]에서 [한낮의 바캉스 세트 (여)]를 획득하셨습니다.

[길드] 마우스지키미 : 와 운 뭐임??????

[전체] westone : ㅁㅊ 저게 뭐예요?

운이 없는 게 하루 이틀 일도 아니라서 그러려니 마음을 추스르는데, 상자깡이 끝나자마자 연달아 떠오르는 신사의 아이템 획득 알림에 애써 진정시킨 속이 허탈하고 서글퍼졌다.

[귓속말] 밍채 : 저 왔어요

때마침 잠수였던 밍채가 깨어나며 주현의 앞에 나타났다. 밍채의 캐릭터가 잠시 서쪽을 응시하더니 갑작스럽게 웃통을 벗어 제 몸을 드러냈다. 신사의 알림을 보며 우울해하던 주현은 깜짝 놀라서 서둘러 키보드에 손을 얹었다.

[전체] 블랙 : ㅅㅂ 옷 입어

[전체] 밍채 : 아바타 입은 건데

[전체] westone : 속살은 블랙님만 보겠답니다

[전체]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레아 :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블랙 : ㅅㅂ 아니거든요

[귓속말] 밍채 : 형만 있을 때 벗을게요

[귓속말] 밍채에게 : 아니라고;

상자를 사서 뽑은 건지, 거래소에서 골드로 산 건지, 출처 모를 [한낮의 바캉스 세트 (남)]를 착용하고 있던 밍채가 느릿느릿 옷을 갈아입었다. 상의는 야자수가 그려진 품 넓은 반소매로, 하의는 쇼트에서 5부로 변했다. 주현은 그제야 당황한 마음을 가라앉혔다.

[전체] westone : 와 밍채님 이번 아바타 다 뽑으셨어요?

[전체] 밍채 : 네

[전체] westone : 여캐도요?

[전체] 밍채 : 여캐 아바타는 팔았어요

[전체] 월월월 : ㄷㄷ 다 뽑을 수가 있었다니

[전체] 밍채 : 시험 잘 봐서 돈 받았거든요

신사의 알림은 질투가 났는데, 밍채는 공부 열심히 해서 받은 돈으로 뽑았다니까 귀엽게 느껴졌다. 시험 잘 봤다고 은근히 자랑하는 모습이 깜찍하기도 했다.

[전체] westone : 아 시험...ㅋ

[전체] 월월월 : 망치셨나염?

[전체] westone : 아 초커가 어딨더라

[전체]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월월월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월월월의 캐릭터가 감정 표현을 이용해 무릎을 꿇고 빌자, 서쪽이 너그럽게도 용서했다. 주현은 그 광경을 지켜보면서 절대 피시방에서 게임은 안 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다.

[전체] 신사 : 밍채님 맨날 4채널에 계시네요 ㅋㅋ

광장에 모여서 한참을 떠들고 있자, 상자깡을 끝낸 신사가 수영복 차림으로 길드원에게 다가왔다. 상의는 밍채처럼 야자수 셔츠를 입은 상태였는데, 초록빛 도는 형광으로 염색해 등산복의 느낌이 물씬 풍겼다.

[전체] 신사 : 평온 아니라 재앙인줄ㅋ

[전체] westone : 재앙 맞죠 블랙님 남편인데

[전체]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 아 그쵸!!!

신사가 은근슬쩍 밍채에게 눈치를 주자, 서쪽이 재빨리 반박했다. 서쪽이 신사와 기 싸움을 한단 걸 모르는 레아는 해맑게 맞장구를 쳤다. 주현도 밍채가 기죽을까 봐 빠르게 말을 얹었다.

[전체] 블랙 : 저희만 쓰는 채널도 아닌데요

[전체] 신사 : 그런 뜻은 아니었는데 ㅋㅋ 오해하셨나봅니다

[전체] 신사 : 자주 봐서 반갑단말이었어요

[전체] 신사 : 그럼 전 레이드하러 이만

신사는 분위기를 망치고 퇴장했다. 서쪽은 떠들 마음이 사라졌는지 광장에 서 있던 유저들에게 파티 초대를 보내기 시작했다. 주현은 초대를 거절하고 서쪽이 오해하기 전에 말을 쏟아 냈다.

[전체] 블랙 : 전 이벤트 하려고요

[전체] westone : ㅠㅠ 아쉽

[전체] westone : 그럼 밍채님도 빠지실테고

[전체] westone : 셋이서 레비아탄 가죠

[전체] 월월월 : 그걸 왜 셋이서 잡아염 ㅠㅠㅠ 배 중심도 안 잡히는데염???

[전체] 레아 : 살려주세요.......

그렇게 레아와 월월월은 서쪽에게 붙잡혀 <시기의 레비아탄>으로 끌려갔다. 아직 3인 클리어가 나오지 않았는데, 서쪽이 이번에 도전해 보겠다며 각오를 다졌다. 레아와 월월월의 의사는 반영되지 않았다.

광장에 남은 주현은 스크린 샷 공모전부터 처리하기로 했다. 어디서 찍으면 좋을까 주위를 둘러보다가, 직업을 고려했을 때 신전이 괜찮겠다 싶어서 그곳으로 향했다. 주현의 뒤를 밍채가 졸졸 쫓았다.

[ 블랙님이 기도합니다. ]

포즈를 취해야 예쁘게 찍히는데 밍채를 앞에 두고 감정 표현을 쓰기가 민망했다. 주현은 멋쩍은 얼굴로 일부러 밍채를 시야에서 지우는데, 밍채가 먼저 말을 걸어왔다.

[전체] 밍채 : 형

[전체] 블랙 : ?

[전체] 밍채 : 저 두고 왜 혼자 찍어요?

[전체] 밍채 : 제가 부끄러워요?

밍채가 사진 찍는 걸 좋아할 줄 몰랐다. 주현은 섭섭해하는 밍채에게 곁으로 오라고 권유했다. 밍채는 기다렸다는 듯 주현에게 달려와 캐릭터를 겹쳤다. 밍채의 품에 안긴 것 같은 모양새에 이건 너무 가깝지 않나 싶어 거리를 두자 밍채가 그만큼 다시 달라붙었다. 이후에도 광장, 항구, 상가 등 장소를 옮겨 가며 사진을 찍는데, 어디서든 밍채가 진득하게 몸을 밀착해 왔다. 결국에 주현은 밍채를 떨어뜨리기 포기한 채 스크린 샷 버튼을 연타했다.

사진첩에 들어가 찍은 스크린 샷을 확인하자 배경과 따로 노는 느낌이 들었다. 시커먼 기운을 풍기는 캐릭터의 외양이 신성한 채예스와는 어울리지 않았다. 더군다나 밍채는 피서 온 것 같은 가벼운 복장이었다. 딱히 순위를 노리던 건 아니지만, 이래서는 참가상밖에 못 받을 미래가 훤하게 보였다.

[전체] westone : 블랙님

[전체] 블랙 : 벌써 잡으셨어요?

광장에서 고심하며 서 있자, 레이드를 마친 길드원들이 돌아왔다.

[전체] 월월월 : 못 깼어염

[전체] westone : 배 중심이 안 잡히더라고요

[전체] 블랙 : 그래도 많이 잡으셨네요

레비아탄은 망가진 배가 뒤집히지 않게끔 중심을 유지하여 싸우는 레이드였다. 최대 인원을 채우지 않고 출발하면 화력이 부족하게 된다. 3페이즈 진입이 늦어질수록 배의 손상이 컸고, 무게를 맞추기 위해 더 많은 유저를 필요로 한다. 길드원들이 클리어를 실패한 원인이었다.

[전체] westone : 블랙님은 이벤트 다 하셨어요?

[전체] 블랙 : 저 스샷 이벤트 하는 중이에요

[전체] westone : 아 스샷 이벤트도 있었죠

[전체] westone : 밍채님이랑 같이 찍으시는 거예요?

[전체] 블랙 : 네

[전체] 블랙 : 혹시 제 캐릭터랑 어울리는 장소 아세요?

주현은 던전에 입장할 때마다 잔뜩 긴장해서 풍경을 잘 기억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서쪽은 잠시 고민하듯 말이 없더니, 불가능한 장소를 불렀다.

[전체] westone : 루시퍼 어떠세요?

[전체] westone : 잘 어울리실 것 같은데

[전체] 월월월 : 오 괜찮네염

[전체] 레아 : 맞아요!!!

레이드에서 스크린 샷을 찍으려면 보스를 잡아야 하는데, 주현은 루시퍼를 클리어할 자신이 없었다. 7대 악마 레이드를 배경 삼는 건 서쪽 같은 유저들이나 가능한 일이었다.

[전체] 블랙 : 못 깰 것 같은데요..

[전체] westone : 도와드릴까요?

[전체] 블랙 : 월요일에 안 가셨어요?

[전체] westone : 횟수 증가권 있어요~!

[전체] 월월월 : ㄷㄷ...

스크린 샷 찍겠다고 루시퍼를 잡는 건 과한 감이 있었지만, 서쪽이 나서서 도와주겠다고 하는 걸 굳이 거절할 이유도 없었다. 답장을 위해 키보드에 손가락을 얹었으나, 주현보다 밍채가 빨랐다.

[전체] 밍채 : 형이 둘만 있고 싶대요

[전체] westone : 아.. 네

[전체] 블랙 : ㅅㅂ 아니에요

[전체] 밍채 : 둘만 있을 거니까 옷 벗어도 돼요?

[전체] westone : ..............블랙님

[전체] 블랙 : 아니에요;;

억울해서 땀을 쏟아 내는데 파티 초대가 날아오며 주현의 입을 막았다. 그사이, 길드원들은 광장을 벗어났고 주현의 해명도 함께 물 건너가 버렸다. 근심 섞인 숨을 뱉으며 레이드 방에 입장하자, 벗고 있을 거란 선포와 달리 밍채는 지난번 주현이 선물해 줬던 [지적인 학자 세트]를 입고 있었다.

방향을 돌려가며 밍채의 겉모습을 살피던 주현은 비슷한 디자인의 [축복의 성자 세트]로 아바타를 갈아입었다. [지적인 학자 상의]처럼 팔뚝까지 내려오는 검은색 케이프 옷인데, 차이점으론 중심에 십자가 모양의 브로치가 달려 있었다. 염색도 밍채가 입은 아바타와 유사해서 시밀러 룩처럼 보였다.

레이드가 시작되고, 맵에 입장한 두 캐릭터가 새까만 하늘 아래 황폐해진 신전 바닥을 나란히 밟고 섰다.

[파티] 밍채 : 형 그냥 누워있어요

[파티] 밍채 : 제가 잡을게요

빠르게 채팅을 쏟아 낸 밍채가 제단으로 다가갔고, 안개가 걷히며 희뿌옇던 시야가 선명해졌다. 검붉은 달과 함께 등장한 루시퍼는 가까이 서 있던 밍채를 향해 스태프를 휘둘렀다. 밍채의 캐릭터가 몸을 낮게 숙이며 공격을 피했다.

[파티] 블랙 : 혼자 잡는다고?

[파티] 밍채 : 네

악마 레이드 솔플은 고인물들도 꺼리는 콘텐츠였다. 실수하여 죽을 경우, 살아남은 파티원이 본인 혼자라서 부활도 못 하고 재도전을 해야 했다. 그래서 보통은 듀오나 트리오 클리어가 많은 편이었다.

자신만만하게 대답을 하는 밍채가 꼭 믿어 달라는 것처럼 보여서, 밍채의 뜻을 존중하기로 했다. 루시퍼에게 공격 한 방을 먹인 후 시체가 되어 신전 바닥에 잠들었다.

주현은 자리에서 일어나 냉장고로 향했다. 지난번에 먹으려고 했다가 밥 때문에 미뤄 둔 초콜릿 맛 콘 아이스크림을 가지고 컴퓨터 앞으로 돌아왔다.

아이스크림 포장지를 벗겨 내며, 채하가 자기 캐릭터라고 소개하던 300위대 성기사를 상상했다. 그리고 모니터 속에서 부지런히 루시퍼의 체력을 깎는 밍채를 바라봤다. 유치하지만, 채하에게는 어디로 튈지 모르는 귀여운 힐러가 없다고 생각하니 이긴 기분이 들었다. 파티 플레이 게임에서 본인 캐릭터의 스펙은 하등 중요하지 않았다. 중요한 건 파티원을 잘 만나는 거였다. 주현은 남부럽지 않은 게임 친구를 소유하고 있었다.

주현도 한때는 말 안 통하는 파티원만 만나서 랭크전 심해를 헤엄쳤었다. 영원히 빠져나오지 못하리라 믿던 깊숙한 바다에서 주현을 끄집어내 준 게 밍채였다. 과거엔 재앙이라고 여겼던 녀석이 이제는 은인이 되어 있었다. 역시 사람의 앞날은 모르는 법이다.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애교를 부립니다. ]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

《 주신 리라의 은총 》

“……뭐야?”

어처구니가 없어서 밍채의 캐릭터를 보며 헛웃음을 지었다. 혼자서 루시퍼를 상대하는 일이 심심했는지 공격 중간마다 감정 표현을 섞어서 싸우고 있었다. 두 손을 붙여서 작은 하트를 만든 밍채가 화면 밖 주현에게 한쪽 눈을 감아 윙크했다.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춥니다. ]

주현이 지켜보고 있단 걸 아는지 모르는지, 밍채는 유유히 감정 표현을 이어 갔다. 까치발을 디딘 밍채가 눈을 감고 블랙이 있는 방향으로 입술을 내밀었다. 안타깝게도 주현의 캐릭터가 죽어 있어 허공에 입을 맞추는 격이었다.

어지간한 고인물들도 저렇게 싸우진 않을 텐데, 경이로울 지경이었다. 희한하게 싸우는 밍채를 당장 자랑하고 싶었으나, 길드원들이 콩깍지라고 몰아갈 게 뻔해 꾹 참아 냈다.

난리를 피우는 밍채를 구경하고 있으면 지루할 틈이 없었다. 다 먹은 아이스크림 껍질을 쓰레기통에 버리고 오자, 체력이 바닥난 루시퍼가 무릎을 꿇으며 여섯 개의 날개를 잃었다.

[파티] 밍채 : 형 언제 와요?

루시퍼를 해치운 밍채가 주현의 캐릭터에게 다가와 빛을 불어넣었다. 몸이 허공에 떠오르더니 멀쩡한 상태로 돌아와 땅을 밟고 섰다.

[파티] 블랙 : 왔어

[파티] 밍채 : 찍어요

말을 끝마친 밍채가 저번처럼 가깝게 밀착해 왔다. 입은 옷과 캐릭터 외양이 비슷해서 그런지 사이좋은 형제처럼 보였다. 그 느낌을 밀고 가기로 한 후, 어떤 감정 표현을 쓰면 좋을지 고민하던 순간이었다.

[파티] 밍채 : 누가 봐도 게이처럼 찍어주세요

[파티] 블랙 : ㅅㅂ

주현이 구상한 형제 콘셉트는 밍채로 인해 일순간 땅에 묻혔다. 주현은 마우스를 돌려가며 빛의 방향을 확인했다. 확실히 눈부신 채예스보다는 으스스한 루시퍼 레이드 조명이 캐릭터와 한결 어울렸다. 주현은 각도를 바꿔 가며 스크린 샷 버튼을 연타했다.

[ 블랙님이 기도합니다. ]

감정 표현을 사용하자 주현의 캐릭터가 살포시 눈을 내리감으며 두 손을 교차해 맞잡았다. 감정 표현 시간이 끝나가 눈꺼풀을 들어 올리는 순간, 옆에 서 있던 밍채가 불쑥 얼굴을 들이댔다.

[ 밍채님이 블랙님에게 고개 숙여 입을 맞춥니다. ]

[파티] 블랙 : ?

당황한 주현의 캐릭터가 서둘러 뒷걸음을 치며 밍채와 거리를 뒀다. 아무리 캐릭터라고 해도 입술을 비비는 건 낯부끄러웠다. 주현은 목덜미를 쓸어내리고 담담한 척 채팅을 쳤다.

[파티] 블랙 : 가만히 있어

[파티] 밍채 : 네

밍채가 철썩 들러붙더니 이번만큼은 조용히 곁에 머물렀다. 그제야 안심한 주현은 다시 스크린 샷을 찍기 시작했다.

* * *

촬영을 마치고 채예스 광장으로 돌아온 주현은 곧바로 수호자의 숲으로 향했다. 말도 안 하고 장소를 옮겼는데, 밍채는 친구 목록에 뜨는 위치를 보고 알아서 쫓아왔다.

혼돈의 설화에는 마을로 불리는 장소가 총 세 곳인데, 수호자의 숲이 그중 하나였다. 유독 마족의 습격을 받지 않는 구역이어서, 숲 앞에 수호자란 이름이 붙었다. 혼돈의 설화에서 유일하게 낮과 밤이 구분되는 공간이기도 했다. 특유의 누르스름한 조명 때문에 유저들 사이에서도 호불호가 갈렸다.

수호자의 숲에는 정령사와 소환사, 연금술사를 배출한 마법사의 탑이 있어서, 수호자 직업 업데이트 전까진 그들이 숲을 지킨다는 해석이 있었다. 알고 보니까 숲에는 엘프들이 살고 있었고, 엘프들이 마족으로부터 숲을 지켜낸 거였다. 그중 영웅의 힘을 물려받은 엘프도 있었다. 그가 수호자 직업을 대표하는 NPC였다.

첫 번째 혼돈 때 엘프들은 힘을 실었지만, 주신 리라를 비롯하여 영웅들이 점차 사라지고 시대가 바뀌자 인간들에게 박해받고 숲에 숨어 살게 되었다. 그 때문인지 인간을 믿지 않는 경향이 있었고, 또 배신을 당할까 두려워 인간의 일에 나서려 하지 않았다.

그런 수호자를 설득하는 게 이번 사전 퀘스트였다.

[NPC] 수호자 : 나는 인간을 믿을 수 없어. 그들은 또 우리를 버리고 말 거야!

수호자는 직업 NPC 중 상당히 어린 축에 속했다. 색소 옅은 금빛 정수리가 내려다보이는 키 작은 소년이 주현을 향해 소리쳤다.

【 어떻게 하면 우리를 믿어 줄 건가요? 】

[NPC] 수호자 : 서, 성의를 보인다면야!

선택지 없이 대화가 자동으로 이어졌다. 말을 더듬는 수호자의 태도를 보아 영웅들에게 합류하고 싶지만, 과거의 기억이 발목을 붙잡는 모양이었다. 다신 인간을 돕지 않기로 마음을 굳혔으나, 세계가 혼돈으로 뒤덮이니 그들의 결심도 무용지물이었다. 태초의 전쟁에 이바지했던 엘프들의 천성은 그대로였다.

【 알겠어요. 우리는 당신이 필요해요. 】

[NPC] 수호자 : 그렇다면…… 타란툴라의 거미줄과 키브스의 유골로 활을 만들어줘! 화살통도 필요하니, 마족의 가죽도 구해오고.

재료 한번 난해하다 싶었다. 타란툴라는 커다란 덩치를 가진 거미였고, 키브스는 붉은 표피의 용이었다. 둘 다 일반 레이드로 7대 악마와 달리 포션 섭취와 부활이 자유로웠다. 문제는 마지막 재료인 마족의 가죽인데…….

[길드] 블랙 : 수호자 사전퀘 오래 걸리나요?

[길드] westone : 거미줄이랑 유골은 레이드 깨면 바로 얻을 수 있구요

[길드] westone : 가죽이 랜덤이어서 좀 빡쳐요 ㅋㅋㅋ

[길드] 월월월 : 전 4트했어염

[길드] westone : 11트..ㅋㅋㅋㅋㅋ

[길드] 신사 : 바로 나오던데요?

가죽은 일반 던전 어디에서든 얻을 수 있어서, 맵 구조가 단조로운 곳으로 가면 될 듯싶었다. 마침 밍채로부터 파티 초대가 날아왔고 주현은 단숨에 수락했다. 밍채는 타란툴라 방부터 개설했다. 출시된 지 오래된 레이드들은 뉴비를 배려해 공격 패턴이 단순하게 패치가 된다. 그뿐만 아니라 체력까지 줄어서, 구태여 최대 인원인 다섯 명을 채울 필요가 없었다.

철 지난 거미 굴과 용암 동굴에서 잽싸게 보스 몬스터를 해치우고 재료를 획득한 둘은 마지막으로 [마족의 가죽]을 얻기 위해서 일반 던전으로 향했다. 밍채가 고른 던전은 <망각의 숲>이었다.

[파티] 블랙 : 망숲?

[파티] 밍채 : 네

<망각의 숲>은 지나친 길을 다시 돌아가는 특이한 구조를 가진 유일한 던전이었다. 돌아가는 과정에서 이미 죽였던 몬스터가 되살아나서 결코 빨리 끝난다고 말할 수 없는 맵이었다. 주현은 혹시 몰라 길드 채팅으로 조언을 구했다.

[길드] 블랙 : 일반던전 중에서 가장 빨리 끝나는 거 뭔가요?

[길드] westone : 밀려오는 해변이요

[길드] 신사 : 얼어붙은 절벽이 제일 빠릅니다

[길드] 월월월 : 전 해변으로 했어염

[길드] 잔혹동화 : 절벽이요

[길드] 레아 : 둘다 해봤는데 전 해변이 더 괜찮았어요!!!

[길드] 블랙 : 감사합니다

채팅 창엔 <밀려오는 해변>과 <얼어붙은 절벽> 두 맵의 이름만 오를 뿐, 누구도 <망각의 숲>을 언급하지 않았다. 이쯤 되면 밍채의 농간이 아닌가 의심이 되었다. 본인도 함께 고생할 텐데 사람 하나 놀려 먹겠다고 복잡한 길을 고르다니. 그 나이대 아이들의 심리를 공감하기 힘들었다.

다른 맵을 하자고 말을 꺼내 봤자 밍채가 들어주지 않을 녀석이란 걸 아는 주현은 체념하고 준비 버튼을 눌렀다. 파티장인 밍채가 게임을 시작하고, 둘은 우중충한 분위기의 숲으로 진입했다. 그무레한 하늘에서는 가는 빗줄기가 뚝뚝 떨어지고 있었다.

둘은 잡몹 처리에 썩 좋은 직업이 아니었다. 대검을 휘둘러 묵직한 한 방을 날리는 성기사는 공격 속도가 느렸고, 쏟아지는 빛 기둥이 주 스킬인 성직자는 공격 범위가 좁아서 한 번에 많은 몬스터를 죽이기 어려웠다.

[파티] 블랙 : ?

[파티] 밍채 : 스킵 눌러요

로딩이 끝나고 화면이 밝아지자, 먼저 앞서 나간 밍채가 몬스터를 모두 쓸어 버린 채 포탈에 도착해 있었다. 주현은 얼떨떨한 얼굴로 스킵을 눌렀다. 다음 장소로 넘어가 밍채가 빛 기둥으로 몬스터를 학살하는 동안, 주현은 밍채의 정보 창을 훑었다.

평소 밍채는 장비 옵션을 치명타 확률 증가로 해 두는 편이었는데, 지금은 공격 속도 세팅으로 바뀌어 있었다. 장비엔 옵션 슬롯이 존재해, 던전 특성에 따라서 옵션을 바꿔 입장하는 게 가능했다. 상위 던전에선 공격력과 치명타가, 하위 던전에선 공격 속도 증가 옵션이 유행했다. 또 마나 소비량이 큰 직업은 마나 회복 증가 옵션을 사용하기도 했고, 탱커로 분류되는 대장장이와 성기사 중에는 방어력 향상을 붙이는 경우도 간혹 있었다.

모든 장비에 원하는 옵션을 달기엔 상당한 골드가 필요해, 주요 장비 몇 가지에만 해 놓는 사람들이 많았다. 옵션을 고를 수 있는 것도 아니라서, 원하는 게 나올 때까지 인내심을 갖고 옵션을 변경해야 했다. 모든 장비에 공격 속도 증가를 띄워 놓은 밍채의 집념에 순수하게 감탄했다.

[파티] 밍채 : 형 스킵이요

어느새 밍채가 또다시 몬스터를 전멸시켰다. 사냥을 마친 밍채는 조금 전 들어왔던 포탈에 서 있었다. 주현이 스킵하자, 둘은 지나쳤던 첫 번째 장소로 복귀했다.

돌아온 풀숲에서 맞닥뜨린 건, 빗자루를 타고 날아다니는 중간 보스 이로였다. 어린 소녀의 모습을 한 마족으로, 장난을 좋아해 죽은 몬스터를 다시 살리는 게 특징이었다. 이로는 양 갈래로 묶은 보랏빛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바닥에 마법 약을 뚝뚝 흘리고 다녔다. 이로가 떨어뜨린 액체가 땅을 오염시켜 죽은 몬스터를 부활시키는 구조였다.

밍채가 지금껏 잡았던 몬스터는 모조리 독버섯이었다. 마법 약이 스며든 땅에서 얼룩진 모자를 쓴 버섯 두 마리가 몸을 일으켰다. 밍채의 캐릭터가 그 모습을 심드렁히 바라보더니, 허공을 떠다니던 이로의 몸을 빛으로 만들어진 사슬로 속박했다.

뒤이어 이로의 정수리를 하늘에서 쏟아진 강렬한 빛이 뚫고 지나갔다. 이로는 빗자루를 놓치며 눅눅한 땅 위로 쓰러졌다. 레벨 차이가 있긴 해도 이로가 한 대 맞고 죽을 만만한 보스는 아니었다. 주현은 새삼스럽게 밍채의 장비에 감탄하고 남은 독버섯 두 마리를 잡았다.

함께 다음 포탈로 이동하자, 밍채가 한바탕 독버섯을 휩쓸고 다시 첫 번째 장소로 돌아왔다. 최종 보스 몬스터인 아니스가 둘을 기다리고 있었다. 바위에 앉아 있던 아니스는 몸을 일으키며 땅에 내려 뒀던 해머를 그러쥐었다. 아니스는 이로와 같은 인간형 보스로, 두툼한 근육형 몸매를 가졌다. 얼굴엔 눈을 가로지르는 기다란 흉터가 있었다.

<망각의 숲>의 특이점은 최종 보스인 아니스보다 중간 보스인 이로가 더 까다롭다는 것이었다. 빗자루를 타고 허공을 휘젓는 이로와 달리, 아니스는 땅에 붙박여 있기에 해치우기 쉬웠다.

주현이 스킬을 사용해, 검을 감싼 푸른 기운으로 아니스에게 거대한 대미지를 줬다. 밍채도 그 위로 빛 기둥을 퍼부었다. 빗물 고인 땅에 아니스가 머리를 박으며 고꾸라지고, 인벤토리에 보상이 들어왔다.

[SYSTEM] 블랙님이 [아니스의 해머 조각]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밍채님이 [마족의 가죽]을 획득하셨습니다.

[파티] 블랙 : ?

열한 번의 시도 끝에 재료를 얻었다는 서쪽의 후기가 있었다. 그 말을 듣고 다섯 번은 기본으로 잡아야겠거니 생각했는데, 밍채가 단번에 재료를 얻어 버렸다. 주현에게 들어온 건 아니스가 남긴 잡템뿐이었다.

[파티] 밍채 : 레디해요

파티장인 밍채가 재도전을 요청했고, 재료를 얻어야 하는 주현은 당연히 수락했다. 이전 판처럼 잡몹을 깨끗하게 쓸어 버리는 밍채를 구경하다가, 보스인 아니스가 등장할 때 공격을 욱여넣었다.

[SYSTEM] 블랙님이 [아니스의 해머 조각]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밍채님이 [아니스의 해머 조각]을 획득하셨습니다.

[파티] 블랙 : ..

[파티] 밍채 : 레디해요

둘은 다시 <망각의 숲>으로 출정했다.

[SYSTEM] 블랙님이 [아니스의 해머 조각]을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밍채님이 [아니스의 해머 조각]을 획득하셨습니다.

[파티] 블랙 : ㅅㅂ

[파티] 밍채 : 레디

그렇게 열 번 넘게 아니스를 처치하자, 밍채가 맵을 바꿔 보는 게 어떻겠냐고 먼저 제안을 했다. 다른 맵이라고 딱히 재료가 잘 나오는 건 아니었다. 같은 맵끼리도 횟수가 갈리는 걸 보면, 결국엔 확률 싸움이었다.

[파티] 블랙 : 그냥 이거 계속 ㄱㄱ

[파티] 밍채 : 네

[길드] westone : 블랙님 혹시 갇히셨나요?

주현이 한 던전에 오래 머물러 있자, 의아하게 여긴 서쪽이 질문해 왔다.

[길드] 블랙 : 가죽이 안 나오네요..

[길드] westone : 저런..

[길드] 월월월 : 힘내세염 ㅠㅠ

길드원들의 위로와 응원을 받으며 다시 맵에 입장했다.

안타깝게도 주현의 인벤토리엔 [아니스의 해머 조각]만이 쌓여 갔다. 이쯤 되면 조각을 모아서 아니스의 해머를 만들 수 있을 지경이었다. 재도전이 스무 번을 넘어가자 밍채에게 미안해져 혼자 하겠다고 말을 꺼냈다. 밍채는 주현의 말을 가뿐히 무시한 채 레디하라고 재촉했다.

주현은 그렇게 서른 번의 도전 끝에 [마족의 가죽]을 손에 넣을 수 있었다.

* * *

【 여기, 활과 화살통이에요. 】

인벤토리에 있던 활과 화살통 아이템이 사라지며 수호자에게 전해졌다. 원하던 무기를 손에 넣은 수호자는 천진난만하던 표정을 지우더니 송곳니를 드러내어 킬킬댔다.

[NPC] 수호자 : 내 말을 믿었어? 난 인간 따위와 함께하지 않아!

수호자가 빈정거리는 얼굴로 소리쳤다. 마우스를 쥔 주현의 오른손의 힘줄이 불거졌다. 정해진 시나리오라는 걸 알지만 던전 서른 번 돌아서 힘겹게 구해 온 재료가 찬밥 신세를 당하니 열 받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주현은 화를 삭이며 다음 대화로 넘어갔다.

[NPC] 사냥꾼 : 어, 너는?

마침 숲을 지나던 사냥꾼 직업 NPC가 등장했다.

[NPC] 수호자 : 아저씨……?

【 아는 사이인가요? 】

[NPC] 사냥꾼 : 내가 구해 줬던 아이야.

수호자는 당혹스러운 낯빛을 그대로 드러내며 사냥꾼과 주현의 캐릭터를 번갈아 훑었다. 우물쭈물하는 기색을 보아 사냥꾼에게 은혜를 입었단 말은 진실인 모양이었다. 한참을 고심하던 수호자는 내키지 않은 얼굴로 말을 뱉었다.

[NPC] 수호자 : 난 빚지고는 못 사는 엘프야! 그러니까…….

말끄트머리를 흐린 수호자가 흔들리는 눈빛으로 사냥꾼을 응시하다가 결심하듯 눈에 힘을 줬다.

[NPC] 수호자 : 같이 가겠어.

마지막 대사가 끝나고 화면 가득 삽화가 떠올랐다. 숲을 빠져나가는 사냥꾼의 뒤를 헐레벌떡 쫓는 수호자의 모습이었다. 유저들이 구해 온 무기는 냅다 버렸는지 나무로 된 활을 손에 쥐고 있었다. 결국, 수호자를 설득한 건 유저가 아니라 사냥꾼이었다.

잔잔한 피아노 음악과 함께 삽화가 지나가고 까맣게 암전된 모니터 화면엔 어처구니없어하는 주현이 비쳤다. 엔딩이 끝나고 숲으로 복귀한 주현은 바로 길드 채팅을 켰다.

[길드] 블랙 : 수호자 스토리 왜 이래요?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westone : 다 그 반응이었어요

퀘스트 재료였던 [타란툴라의 거미줄], [키브스의 유골], [마족의 가죽] 모두 아무짝에도 쓸모가 없었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길드] westone : 수호자한테 말 한 번 더 걸어보세요

주현은 긴가민가한 상태로 수호자에게 다가가자 또다시 대화가 시작되었다.

[NPC] 수호자 : 재, 재료 구해 준 건 고마워.

【 저를 놀린 거예요……? 】

[NPC] 수호자 : 너도 인간이잖아! 인간을 믿을 수 없었어!

【 ……. 】

[NPC] 수호자 : 우린 이제 동료잖아. 옹졸하게 굴지 말라고!

【 ……. 】

[NPC] 수호자 : ……이씨. 받든가 말든가!

[SYSTEM] 블랙님이 [수호자 사전 퀘스트 보상 상자]를 획득하셨습니다.

얼굴을 붉히며 꽥꽥 소리치던 수호자는 주현에게 보상을 던지고 달아났다. 주현은 마우스 커서를 올려 [수호자 사전 퀘스트 보상 상자]의 구성을 확인하고 수호자를 용서하기로 했다.

[길드] 블랙 : 착한 친구였네요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월월월 : 서쪽님이랑 반응 똑같아염

[길드] westone : ㅎㅎ~

포션, 각종 레벨 장비, 직업 아바타가 들어간 보상 상자에 속 좁던 마음이 너그러워졌다. 시나리오가 이 모양인데 게시판에 욕 하나 없길래 의아하다 싶더라니. 모두 상자의 구성을 보고 수호자와 화해한 게 분명했다.

보상 상자를 바라보며 포만감을 느끼던 주현의 시야에 밍채의 채팅이 들어왔다.

[파티] 밍채 : 형

[파티] 밍채 : 톡 봐주세요

[파티] 블랙 : ?

주현은 게임 화면을 내리고 PC 톡에 접속했다. 밍채로부터 사진이 한 장 도착해 있었다. 대화방에 들어가 메시지를 확인하자 익숙한 외양의 두 사람이 프레임 안에 담겨 있었다. 밍채가 입술을 들이받았을 때 주현은 당황해서 아무것도 못 했지만, 밍채는 야무지게 스크린 샷 촬영까지 마친 상태였다. 밍채가 있는 방향으로 살짝 고개를 튼 주현의 캐릭터 입꼬리에 도톰한 입술이 닿아 있었다.

각 잡고 찍지 않아서 자연스러운 건지, 밍채의 그래픽 카드가 좋아서 그렇게 보이는 건지. 오묘한 핏빛 하늘을 배경 삼은 사진이 주현의 마음에도 들었다. 다만 밍채의 바람대로 너무 게이 같아 보여서 문제였다. 서쪽이나 월월월이 발견한다면 놀림을 당할 게 뻔했다. 그렇다고 멀쩡한 사진을 버리기엔 주현의 사진첩엔 이만한 작품이 없었다.

어차피 홈페이지 스크린 샷 게시판은 죽은 지 오래였다. 아바타 자랑하는 걸 좋아하는 룩덕 유저들이나 활동하는 공간인데 길드원들이 발견할 리가 없었다. 주현은 구차한 변명을 늘어놓으며 스스로 위안했다. 간단한 보정을 끝마친 스크린 샷을 게시판에 올린 후 숨을 돌렸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길드] 블랙 : 네?

[길드] westone : 스샷 뭐예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블랙 : 아니.. 거긴 왜 들어가셨어요

올린 지 5분도 안 돼서 서쪽에게 적발이 되었다. 서쪽이 길드 채팅으로 이목을 끈 덕분에 다른 길드원들도 게시판에 들어가 주현이 올린 게시물 조회 수를 늘려줬다.

밍채가 찍어 준 거다, 그럴 의도가 아니었다. 몇 가지 이유를 만들어 뒀지만, 어린애 앞세워서 변명하기엔 구질구질하다 싶어서 주현은 해명을 관뒀다. 조금 곤란하고 창피할 뿐, 놀림 좀 받는다고 주현이 손해 입는 건 없었다. 머쓱해서 괜히 목덜미를 쓸어내렸다.

[길드] westone : 근데 진짜 잘 나왔어요

[길드] 레아 : 맞아요 분위기 너무 예뻐요!!

[길드] westone : 이루어질 수 없는 위험한 사랑 같고..

[길드] 블랙 : ????

[길드] westone : 암튼 잘 나왔다구요 ^^~

[길드] 블랙 : ㅅㅂ 칭찬 아니잖아요

[길드] westone : 에이 블랙님 전 감동해서 한 말인데!!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 * *

[밍채] 형

[밍채] 닉네임 뭐 할거예요?

대망의 수호자 업데이트 날. 대다수 혼돈의 설화 유저들은 오늘 연차를 사용해 집에서 게임을 하고 있겠지만, 이제 막 정직원이 된 주현에겐 그런 여유 따위 없었다.

[블랙] 글쎄

[블랙] 비어있는 거 보고?

짓궂은 장난을 좋아하는 밍채에게 닉네임을 알려 주는 건 위험한 행위였다. 주현은 일부러 두루뭉술하게 답장을 보냈다. 정확하게 말해 버리면 밍채가 먼저 그 닉네임을 선점할 수도 있었다. 그럴 애가 아니란 걸 알지만, 간혹 유치하게 구는 탓에 방심은 금물이었다.

커플이 된 지도 이제 두 달이 가까워지는데 주현은 밍채의 속내를 조금도 가늠하지 못했다. 예상컨대 밍채의 심리는 측근인 어스름조차도 쉬이 읽지 못할 것이다.

[블랙] 너는 뭐할 건데?

[밍채] 형 하는 거 보고요

[블랙] 어.. 그래

밍채와 한배를 탔단 게 실감이 났다. 이럴 때면 처음 만났던 순간을 회상하게 되었다. 커스터마이징 좀 따라 했다고 밍채를 떨떠름히 여겼던 주현이 이제는 닉네임을 커플로 맞추든 아무런 상관이 없게 되었다.

[밍채] 형 스샷 2등 한 거 알아요?

[블랙] ?

온라인과 오프라인을 구분하는 걸 좋아하는 주현은 길드 단톡방에 들어가지 않았다. 그건 서쪽과 월월월도 마찬가지라서 더더욱 들어갈 이유가 없긴 했다. 정보를 얻으려면 직접 움직여야 하는 주현은 게임 소식에 느린 편이었다. 업데이트 날짜인 수요일마다 게임 홈페이지에 접속하는 거 말고는 마땅히 정보 수집이라 할 게 없었다.

[밍채] 형 이제 도망 못 가요

‘……또 시작이네.’

주현은 밍채의 말을 흘려듣고 게임 홈페이지에 들어갔다. 커다란 눈을 치켜뜬 수호자가 주현을 노려보고 있었다. 처음 봤을 때도 느꼈지만 마니아층이 있을 법한 외모였다. 수호자의 대사는 재수 없지만, 얼굴 보고 용서했단 반응도 간혹 있었다.

페이지를 넘기자 스크린 샷 공모전 결과가 시야에 들어왔다. 밍채의 말대로 주현이 2등이었고, 1등은 평온 길드의 블루베리였다. 보통 길드원이 상 받았으면 그 얘기도 같이 하지 않나? 블루베리의 수상 소식을 깔끔히 지워 버린 밍채는 종잡을 수 없는 놈이었다.

블루베리가 올린 건 같은 평온 길드의 스트로베리와 함께 찍은 사진이었다. 블루베리는 눈 밑에 다이아몬드가, 스트로베리는 하트가 박혀 있었다. 둘은 닉네임대로 보라색과 분홍색이 어우러진 커스터마이징이었다.

주현은 3위 사진으로 넘어갔다. 이쪽도 커플이었다. 밝은 백금발에 눈 색만 차별을 둬서 남자 캐릭터가 적안, 여자 캐릭터가 벽안이었다. 장려상도 몇 명 있길래 훑어보자 혼자 찍은 유저들이 많았다. 그중엔 벌거벗고 엉덩이를 흔드는 서쪽도 있었다.

주현은 식겁한 얼굴로 서둘러 창을 닫아 버렸다. 게임 홈페이지를 보는 걸 들키는 것도 곤란했지만, 서쪽의 캐릭터는 감당할 수 없는 경지의 일이었다. 월월월의 심정을 뒤늦게 이해하게 되었다.

“주현 씨, 언제까지 줄 수 있어요?”

마침 앞자리에 있던 대리가 말을 걸어왔다. 절대 주현의 모니터를 볼 수 없는 각도였지만, 주현은 제 발 저린 사람처럼 목 뒤가 서늘해지는 기분이었다.

“마무리하고 드릴게요.”

“네. 보내고 말 한 번 해 주세요.”

주현은 이미 다 끝내놨지만, 대리에게 보내지 않은 작업물을 켰다. 그 위를 브러시로 덧그리며 일하는 것처럼 굴었다. 한 번 빨리 주면 그게 평균 속도인 줄 알기 때문에 적당한 타협이 필요했다. 주현은 치워 놨던 PC 톡을 다시 모니터로 끌고 왔다.

[블랙] 그럼 너 지금 혼설 안 해?

[밍채] 영어 학원이에요

[블랙] 네가 나보다 영어 잘하겠다

뭐 하고 있느냐고 물으면 밍채는 늘 영어 학원이라고 답했다. 저 정도면 모국어보다 영어가 더 익숙할지도 모른다. 아직 수능 볼 나이도 멀었는데 벌써 치열하게 공부하는 밍채에 주현은 혀를 내둘렀다.

[밍채] 형은 언제 와요?

[블랙] 7시 30분?

[밍채] 네

얌전히 ‘네’ 하고 대답할 때면 참 귀여운데, 괴상한 콘셉트 지키겠다고 질척거리는 걸 보면 사람이 그렇게 지독해 보일 수가 없었다.

주현은 느릿느릿 완성된 작업물을 대리에게 넘기며 얼른 퇴근 시간이 다가오길 염원했다.

* * *

[SYSTEM] 길드원 블루셀레스트님이 입장하셨습니다.

[SYSTEM] 길드원 채예스의수호자님이 입장하셨습니다.

[SYSTEM] 길드원 양궁달인님이 입장하셨습니다.

[SYSTEM] 길드원 김모란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컁컁컁 : 어서오세염

[길드] 잔혹동화 : 재앙의 길드 채널은 4채널입니다

[길드] 잔혹동화 : 키우다가 모르는 거 있으시면 길드 채팅으로 편하게 질문 주세요

[길드] 채예스의수호자 : 안뇽하세요 늅늅입니다

재앙 길드의 운영진인 잔혹동화가 가입을 승인해 주자 신입 길드원들의 입장 메시지가 쏟아졌다. 수호자 부캐를 만든 주현도 그 속에 파묻혀 있었다.

커스터마이징 단계에서 어떤 성별을 고를지 꽤 고심했는데, 결국엔 남자를 선택했다. 닉네임을 따라서 옅은 푸른빛이 도는 머리카락과 눈동자를 가진 소년이 화면 너머를 바라보며 미소를 지었다.

접속 중인 길드원을 살피자 처음 보는 낯선 닉네임이 상당수였고, 다음으론 조금씩 변형된 닉네임이 눈에 들어왔다. 월월월의 부캐일 게 뻔한 컁컁컁이라든가, westone에서 방향만 바뀐 eastone이라든가. 수호자 업데이트 직후여서 그런지 확실히 신규, 복귀 유저와 부캐를 키우는 기존 길드원의 비율이 높았다.

[귓속말] 밍채에게 : 밍채야

‘왜 귓속말이 보내지지?’

엔터를 누르고 나서 아차 싶었는데 원활하게 전송된 귓속말에 주현이 되레 당황했다. 평소 친구와 길드원에게만 귓속말을 허용하던 놈이 느닷없이 변덕을 부렸다.

《 밍채님이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

주현이 보낸 건 ‘밍채야’가 전부였으나, 밍채는 그 세 글자에 상황 파악을 끝내고 친구 신청을 걸어왔다.

[귓속말] 밍채에게 : 뭐야?

[귓속말] 밍채 : 감시요

[귓속말] 밍채에게 : ?

[SYSTEM] 대화 상대가 로그아웃하여 채팅을 보낼 수 없습니다.

본인 할 말만 하고 사라지는 건 여전했다. 주현이 하는 걸 보고 닉네임을 결정하겠다고 했으니 아직 캐릭터를 생성하기 전일 게 뻔했다. 주현은 밍채가 새로운 캐릭터를 생성하고 돌아오길 기다렸다.

하지만 밍채는 오랜 시간이 지나도록 주현의 앞에 나타나지 않았다. 커스터마이징에 공들이는 것도 아닌 애가 이토록 시간을 끌 일이 있나? 소식이 뚝 끊긴 밍채에 주현은 초조하게 마우스를 손가락으로 두드렸다. 혹시 친구 신청이 왔는데 확인 못 한 건가 싶어서 친구 목록도 들어갔다 나갔다 반복해 봤지만 묵묵부답이었다.

‘……진짜로 날 버렸다고?’

커플 초기에나 데면데면했지, 이후 한 달은 거의 붙어 먹었으니 부캐 육성도 당연히 같이할 줄 알았다. 업데이트가 끝나자마자 톡으로 부캐 닉네임을 물어온 것만 봐도 그랬다.

안일했다. 밍채에게도 길드가 있고, 길드원이 우선시 될 수 있단 걸 간과해 버렸다. 또 어스름에게 순서를 밀렸다고 생각하니까 이젠 오기가 생겼다. 주현은 어떻게 해야 밍채를 손에 넣을 수 있을지 고민하기 시작했다. 새로운 게임 친구를 사귄다는 선택지는 주현에게 존재하지 않았다.

[길드] eastone : 블랙님 있으세요?

[길드] 컁컁컁 : 커마 만들고 계실 것 같은데염

[길드] 블루셀레스트 : 저 있어요

[길드] eastone : 레벨 1 뭔가요?

[길드] 블루셀레스트 : 아니 ㅋㅋㅋ 저 방금 왔어요

[길드] eastone : 다들 레벨 왜 그래요

[길드] 컁컁컁 : 님이 이상한거라구염 ㅠㅠ

서쪽의 부캐 eastone의 정보를 열어 보자 벌써 레벨이 170이었다. 혼돈의 설화 만렙은 200이었고, 서쪽의 레벨 업 속도를 고려하면 오늘 안에 졸업이었다. 겸사겸사 컁컁컁의 정보도 확인했다. 레벨 100. 서쪽과 비교하면 낮아 보일 뿐 월월월도 빠른 편이었다.

[전체] 활쏘는애 : 블루님

길드원들의 정보를 열람하는 동안, 캐릭터를 채예스 광장에 세워 뒀는데 누군가 앞에서 얼쩡거리고 있었다. 레벨은 주현보다 조금 높은 20이었다. 광장에 서 있으면 간혹 뉴비와 복귀 유저가 질문하기 위해 말 거는 경우가 있었다.

[전체] 블루셀레스트 : 네

[전체] 활쏘는애 : 돈 주까요?

[전체] 블루셀레스트 : 네?

주현은 눈동자를 이리저리 굴리다가 제 행색을 훑었다. 수호자 사전 퀘스트로 얻은 아바타와 장비를 착용하고 있었다. 절대 뉴비나 복귀로 오해를 살 만한 차림이 아니었다.

[전체] 블루셀레스트 : 저 돈 많은데요?

[전체] 블루셀레스트 : 저 뉴비도 아니에요

[전체] 활쏘는애 : 알아요 ㅋㅋㅋ 걍 도와드리고 싶어서요

설마 밍채인가? 밍채가 상황극을 하는 게 아닌지 의심이 갔지만, 그러기엔 활쏘는애 머리 위에 달린 길드 이름이 마음에 걸렸다. 평온이 아닌 ‘블랙홀’이 자리를 차지하고 있었다. 밍채에게 길드 가입을 안 한 부캐는 있어도, 다른 길드에 들어간 건 단 한 번도 보지 못했었다.

[전체] 블루셀레스트 : 괜찮아요

[전체] 활쏘는애 : 저 본캐 랭킹 100위임

[전체] 블루셀레스트 : 높으시네요

[전체] 활쏘는애 : 빠르게 육성하는 법 가르쳐드림

[전체] 블루셀레스트 : 괜찮아요

밍채가 아니라면 상대해 줄 이유가 없었다. 주현은 서둘러 거절하고 던전으로 직행했다. 활쏘는애에게 친구 신청이 날아왔지만, 왠지 꺼림칙해 받지 않았다.

뉴비와 복귀에게 친절을 베푸는 유저는 흔한 편이었다. 장비가 조금만 허술해도 도와주겠다고 나서는 유저가 더러 있었다. 주현도 뉴비 시절에 월월월과 서쪽의 도움을 받아 가며 성장했다.

하지만 제안을 거절한 유저를 쫓아오며 도와주겠다고 강요하는 놈들은 또라이밖에 없었다. 엮이기 전에 피하는 게 상책이었다.

* * *

[전체] 호두아빠 : 블루님

[전체] 블루셀레스트 : 네?

벌써 이번이 다섯 번째였다. 입고 있는 사전 퀘스트 보상 장비 때문인지 사람들이 고인물로 착각하고 자꾸만 말을 걸어왔다. 주현도 잘 모르는 건 마찬가지라서 아는 데까지만 성심성의껏 답해 줬다. 그 모습을 지켜보던 초보자 유저가 다가와 또다시 말 거는 바람에, 주현은 채예스 광장에 갇혀 있는 상태였다.

[전체] 호두아빠 : 입으신건 어떻게 얻나요?

[전체] 블루셀레스트 : 아바타요?

[전체] 호두아빠 : 네

[전체] 블루셀레스트 : 제가 입은 건 사전 퀘스트 때 받은 거라.. 지금은 얻을 수 없고 나중에 몇 주년 이런 식으로 이벤트 할 때 보상으로 줄 거예요

[전체] 호두아빠 : 아하 감사합니다

마지막 질의응답을 끝낸 주현은 도망치듯 광장을 벗어났다. 계속 그곳에 서 있다가는 오늘 안에 레벨 50도 못 찍을 위기였다.

[길드] eastone : 블랙님 렙업하시는 거 맞나요?

[길드] eastone : 아까도 20이었잖아요

[길드] 블루셀레스트 : 아니.. 왜 제 레벨을 체크하세요

[길드] 컁컁컁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eastone : 다같이 루시퍼 잡고 싶어서요 ㅠㅠ

[길드] 컁컁컁 : ;;;;;;;

만렙을 앞둔 서쪽은 레벨 업이 한창이었다. 이번에도 서쪽의 목표는 악마 레이드였다. 수호자의 성능을 확인하려면 그만한 던전이 없긴 하지만, 컨트롤에 자신 없는 주현은 별로 가고 싶지 않았다. 본캐로도 몇 대 맞으면 쉽게 방어구가 깨지는 던전인데, 제대로 된 장비를 갖추지 못한 부캐는 어림도 없을 테다.

[전체] 컬러수집가 : 블루셀레스트님

키 작은 여자 캐릭터가 불쑥 앞에 나타나 고개를 갸웃댔다. 주현이 침묵을 지키자, 사파이어를 연상시키는 투명한 눈동자를 두어 번 깜빡였다.

[전체] 컬러수집가 : 잠수예요?

주현의 반응을 살피듯, 앞에서 얼쩡거리며 시야를 방해했다. 좌우로 움직이는 캐릭터의 움직임을 따라 하나로 땋은 은빛 머리카락이 흩날렸다. 주현의 캐릭터와 상당히 유사한 생김새를 가진 유저였다. 주현의 캐릭터 머리카락 색이 조금 더 푸른빛이 돈단 게 유일한 차이점이었다.

밍채인가 싶어 이번에도 확인해 봤지만, 컬러수집가의 길드는 ‘컬러칩’이었다.

《 컬러수집가님이 블루셀레스트님에게 교제를 신청하셨습니다. 》

‘……뭐야. 얘도 또라이야?’

유입된 유저가 많은 신직업 업데이트 첫날이라고 해도, 빈도수가 과할 정도였다. 식겁한 주현이 주저 없이 교제 신청을 거절하자, 컬러수집가가 바닥에 엎드리더니 땅을 치며 엉엉 울기 시작했다.

[ 컬러수집가님이 땅을 치며 눈물을 흘립니다. ]

[전체] 컬러수집가 : 잠수도 아니면서

[전체] 블루셀레스트 : 누구신데요..?

설마 아는 사람인가 싶어서 질문을 던지자, 어처구니없는 답이 돌아왔다.

[전체] 컬러수집가 : 컬러수집가요

괜히 말을 섞었다고 후회를 하며 매몰차게 등을 돌렸다. 주현이 아는 또라이는 밍채로 충분했다. 주현이 걸음을 옮겨 상가로 향하자, 뒤를 컬러수집가가 쪼르르 쫓아왔다. 차단할까도 고민해 봤지만, 주현의 시야에서 컬러수집가가 보이지 않는 것일 뿐. 컬러수집가는 얼마든지 주현을 쫓아오는 게 가능했다.

놈의 닉네임이 컬러수집가고 길드 이름이 컬러칩인 걸 고려했을 때, 주현을 스토킹하는 이유는 닉네임이 컬러여서일 가능성이 컸다. 그렇다고 닉네임을 변경하기엔 스토커 놈한테 지는 기분이 들뿐더러, 바꾼다고 안 쫓아올 확신도 없었다.

[전체] 컬러수집가 : 저랑 결혼해요

[전체] 컬러수집가 : 잘해줄게요

[전체] eastone : ??????

[전체] eastone : 뭐예요

채예스의 상가에는 한창 퀘스트를 진행 중인 서쪽이 먼저 와 있었다. 샛노란 천막 아래에서 햇빛을 피하던 서쪽이 주현의 캐릭터가 있는 방향으로 고개를 틀었다. 서쪽의 캐릭터는 이번에도 키가 컸고, 상의는 당연하게도 없었으며, 다행히도 바지는 입고 있었다.

바삐 걷던 주현은 서쪽의 앞에서 걸음을 멈췄다.

[귓속말] eastone에게 : 몰라요 개또1라이가 쫓아와요..

[귓속말] eastone : 아 ㅋㅋㅋㅋㅋㅋㅋ

서쪽은 남의 일이라서 웃긴 모양이었다. 무한으로 파티 초대를 날려 던전 출정을 방해한다거나, 우편함을 도배해 거래를 가로막는 부류는 아니어서 웃어넘길 수 있는 수위이긴 했다.

[귓속말] eastone : 블랙님 저분 무기 보세요

[귓속말] eastone에게 : ?

초면에 들이대던 스토커에게 당황해 미처 확인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컬러수집가는 하얗게 염색한 두툼한 책을 허리춤에 매고 있었다. 신직업인 수호자를 제쳐 두고 성직자를 키울 유저는 주현이 아는 이 중에서 한 사람밖에 없었다.

서쪽이 웃음을 쏟아 낸 이유도 비로소 이해가 갔다.

[전체] 블루셀레스트 : 야..

[전체] ea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블루셀레스트 : 밍채라고 말을 해야지..

밍채가 아닐 수가 없었다. 조금만 자세히 훑었어도 밍채라는 걸 알아볼 만큼 노골적인 형태였다. 길드 이름에 정신이 팔려서 중요한 걸 놓쳐 버렸다. 탄식한 주현이 억울함을 털어 내자 돌아오는 답이 기막혔다.

[전체] 컬러수집가 : 형도 제 말 무시했잖아요

[전체] 블루셀레스트 : 그건 너인지 몰랐으니까..

[ 컬러수집가님이 주저앉아 눈물을 흘립니다. ]

징그럽던 스토커의 정체가 밍채라는 걸 알게 되어서일까. 쪼그려 앉아 눈물을 쏟아 내는 모습이 애처로워 보였다. 밍채가 자신을 속인 행위에 화를 내야 정상이지만 주현은 그럴 마음이 없었다. 심각하던 표정을 풀어 낸 주현의 입꼬리가 슬며시 치솟았다. 과정이 어쨌건 평온 길드원을 뒤로하고 제 곁으로 와 줬단 사실에 감명을 받았다.

[전체] 블루셀레스트 : 아니.. 컬러칩 그 길드는 뭔데?

[전체] 컬러수집가 : 저희 신혼집이요

[전체] 블루셀레스트 : ㅅㅂ

[전체] ea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블랙님 얼른 길탈하고 가세요!!

[전체] 블루셀레스트 : 아 됐어요

컬러칩의 길드 정보를 살펴보자 방금 막 만든 길드인지 모인 포인트도 없었고 당연히 레벨도 1이었다. 원활한 레벨 업을 위해선 길드 버프를 받아야만 했다.

[전체] 블루셀레스트 : 너 왜 평온 안 들어갔어?

[전체] 컬러수집가 : 형이랑만 놀건데요

[전체] eastone : 제가 방해했네요 좋은 시간 보내세요

밍채의 담담한 고백에 서쪽이 다급히 자리를 떴다. 왠지 쫓아낸 모양새가 된 것 같아 주현은 괜히 민망해 제 목덜미를 손바닥으로 쓸어내렸다.

[길드] eastone : 상가 가지 마세요 블랙님이 데이트한다고 쫓아냅니다

[길드] 블루셀레스트 : ㅅㅂ 제가 언제요

[길드] eastone : ㅡㅡ

[길드] 컁컁컁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굳이 따지자면 쫓아낸 사람은 형이랑만 놀겠다고 말을 꺼낸 밍채였다. 어차피 길드원들도 장난임을 알기에 주현도 크게 부정하지 않고 넘어갔다.

[ 컬러수집가님이 바닥에 앉습니다. ]

주현이 길드원들과 떠드는 동안, 밍채는 웬일로 옆에 잠자코 앉아서 기다리고 있었다. 늘 시끌시끌하던 애가 얌전한 게 귀여워서 주현은 방향을 돌려가며 스크린 샷 버튼을 연타했다. 밍채의 캐릭터는 사진 찍히는 줄도 모르고 눈꺼풀을 깜빡였다.

주현은 충동적으로 캐시샵에 들어가 커플링을 구매하곤 밍채에게 신청을 넣었다. 밍채의 캐릭터가 벌떡 자리에서 일어나더니 머리 위로 분홍 꽃가루가 흩날렸다.

[ 컬러수집가님이 블루셀레스트님에게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춥니다. ]

[길드] 레아지킴이 : 허얼...

기분이 그렇게도 좋은지 주변을 빙글빙글 돌던 밍채의 캐릭터가 말도 없이 주현의 캐릭터를 덮쳤다. 혼돈의 설화 감정 표현은 상대 캐릭터의 동의를 받지 않기 때문에 일방적이었다. 보통은 캐릭터끼리 묻히거나 방향이 맞지 않는 경우가 많은데 밍채는 정확하게 입술을 빼앗아 갔다.

기습 공격을 당한 주현은 놀랄 틈도 없었다. 뒤에 서 있던, 왠지 황당해 보이는 레아의 캐릭터와 눈이 마주쳤다. 서둘러 해명을 하려고 키보드에 손가락을 얹었지만, 레아가 도망가 버렸다.

[길드] 레아지킴이 : 퀘스트 때문에 간 건데...ㅠㅠㅠ 다들 상가 가지 마세요..........

[길드] eastone : 저 장난이었는데 ㅋㅋㅋㅋㅋㅋ 거기 블랙님 말고 뭐 있나요?

[길드] 레아지킴이 : 안 본 거로 할래요 ㅠㅠ

[길드] eastone : 뭘 보셨길래..

게임에서 랜선 데이트하는 커플이 아예 없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대다수가 인적이 드문 수호자의 숲에나 있었지, 상가 한복판에서 당당하게 입술을 비비는 놈들은 없었다. 어차피 밍채와 진짜 사귀는 것도 아니고 장난인데 이렇게 낯부끄러울 필요가 있나 싶겠지만, 뻔뻔하지 못한 천성 탓에 얼굴에 쉽게 열이 올랐다.

[귓속말] 컬러수집가에게 : 나 너랑 레벨 안 맞아서

[귓속말] 컬러수집가 : 형 어딘데요?

[귓속말] 컬러수집가에게 : 퀘스트 같은 데까지 밀

[귓속말] 컬러수집가에게 : 나 이제 메마른땅 갈 차례

밍채의 레벨은 주현보다 조금 높은 30이었다. 사람을 완벽하게 속여 먹으려고 레벨까지 올리고 온 모양인데 괘씸해 보여야 했지만 귀여워서 문제였다. 주현은 대장간에 들러 대장장이에게 퀘스트를 받았다. 메마른 땅의 작태를 살피고 오라는 의뢰였다.

메마른 땅은 수호자의 숲과 어깨를 나란히 하는 서브 마을이었다. 수호자의 숲이 조명 때문에 인기가 없다면 메마른 땅은 PvP존이라는 이유에서였다. 혼돈의 설화에는 대련장과 랭크전 등 다양한 PvP 시스템이 있지만, 마을에서 PvP가 가능한 곳은 메마른 땅이 유일했다. 그래서인지 사사게 네임드라고 불리는 유저들은 메마른 땅에 모여 있는 경우가 허다했다.

[귓속말] 컬러수집가 : 같이 가요

《 컬러수집가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밍채를 귀찮게 만드는 게 아닌지 내심 미안했지만, 주현의 손가락은 수락 버튼을 누르고 있었다. 주현은 밍채와 함께 항구로 이동해 메마른 땅으로 향하는 배에 올라탔다. 배에는 초보자 행색의 유저들이 가득했다.

[파티] 컬러수집가 : 형 돌아서 가요

메마른 땅에는 퀘스트 지역으로 향하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첫 번째는 유저들 사이에서 안전지대라고 불리고 혼돈의 설화에서는 약속의 길이라고 표기되는 곳이었다. 태초의 영웅들이 모여 평화를 약속하고 오른 길이라 그리 이름이 붙었다. 영웅들의 약속 때문인지 보호를 받아 PvP가 불가능한 장소였다. 대신 퀘스트 지역까지 빙빙 돌아가야 해서 PvP존을 가로지르는 것보다 시간이 오래 걸려 유저들도 별로 선호하지 않는 방식이었다.

두 번째는 약속의 길을 제외한 PvP존이었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요즘 레벨 100 안 되는 사람 죽이면 바로 사사게 가

사사게 스타인 밍채는 공감 못 하겠지만, 혼돈의 설화 민심이 그랬다. 아무리 안전지대가 존재해도 초보자의 경우엔 정보를 모르기 때문에 PvP존을 거쳐 가다가 죽는 경우가 종종 있었다. 그래서인지 유저들 사이에선 레벨 100 이하는 죽이지 않는다는 암묵적인 규칙이 세워졌다.

실제로 주현도 뉴비 시절에 PvP존을 당당하게 밟고 퀘스트 지역으로 향했었다.

[파티] 컬러수집가 : 형

랭크전에서 그렇게 날아다니는 놈이 PvP존이라고 움츠러드는 게 수상했다. 혹시 자신을 죽이려고 간 보는 건가도 싶었지만, 주현이 먼저 발을 떼자 밍채도 순순히 뒤를 따라왔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죽어도 어차피 기분만 나쁜건데 뭐

마을에서 싸우다가 죽는다고 경험치를 잃는다거나, 가지고 있던 아이템을 떨어뜨린다거나 하는 일은 없었다. 단지 어이가 없고 기분이 무진장 나빠진다는 정도.

마족에게 습격을 당해 폐허가 된 땅을 밍채와 함께 거닐었다. 마을 사람들 대다수가 마족의 손에 숨이 끊겨 인기척이 느껴지지 않는 공간이었다. 꺾인 나무들은 밑동만 남았고 꽃과 곡식은 삐쩍 말라 시든 상태였다.

물론 버려진 땅에도 생존자는 있었다. 직업 검사와 암살자, 창술사가 살아남은 이들이었다.

주현은 뿌연 먼지를 가르며 저 멀리 흐릿하게나마 보이는 허름한 집을 쫓았다. 그러던 중 캐릭터의 체력이 반이나 날아가더니, 어디선가 날아온 화살을 맞고 피를 흠뻑 쏟아 내며 바닥에 쓰러졌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

갑작스럽게 죽은 상황이 황당해서 헛웃음을 지은 주현은 마우스를 흔들어 유저가 있는 방향을 확인했다. 밍채가 죽였다고 의심하기엔 공격 모션 한 번 내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무너진 건물 뒤에 숨어 있던 활쏘는애가 모습을 드러냈다. 밍채는 기다렸다는 듯 그곳으로 빛 기둥을 퍼부었다. 활쏘는애가 다시 건물에 몸을 숨기더니 반대편으로 나와 활시위를 당겼다. 밍채가 몸을 낮춰 화살을 쓱 피하고서 다시 빛 기둥을 갈겼다.

둘은 한동안 치열하게 결투를 벌이다가 밍채가 먼저 바닥에 뻗어 버렸다. 활쏘는애의 레벨이 77이었기에 당연한 결과였다. 수호자 사전 퀘스트 보상 중 하나인 렙제 장비는 25단위로 지급이 된다. 밍채는 25레벨의 장비를, 활쏘는애는 75레벨의 장비를 착용했으니 이 정도 버틴 것만으로도 대견한 수준이었다.

[귓속말] 컬러수집가 : 형 기다려요

[SYSTEM] 컬러수집가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밍채는 알 수 없는 말을 남기고 느닷없이 접속을 종료했다. 홀로 남은 주현의 시체 위를 활쏘는애가 잘근잘근 밟으며 조롱했다.

[전체] 활쏘는애 : 남친 걍 도망갔죠?

[전체] 활쏘는애 : 그러니까 내가 도와준다고 했을 때

[전체] 활쏘는애 : 도움받을걸 그랬죠? ㅋㅋㅋ

‘……말투가 왜 이래?’

한창 중이병이 올 시기인 밍채도 저렇게 말을 하진 않았다. 주현이 바람 빠지게 숨을 뱉는 사이, 활쏘는애와 주현의 사이를 선명한 빛 기둥이 가르고 들어왔다.

[전체] 채채 : 뭐예요 얘?

하는 짓이 기막힌 건 마찬가지인지 놈을 말끔히 처치한 밍채가 주현에게 물었다. 그리고는 시체가 된 활쏘는애를 발로 걷어차 주현에게서 멀리 치워 버렸다. 활쏘는애는 한 대 맞고 뻗은 게 부끄러웠는지 금세 시체가 사라졌다. 마을로 귀환한 모양이었다.

밍채는 주현에게 다가와 빛을 불어넣어 캐릭터를 일으켰다.

오랜만에 보는 채채였다. 길드 자리는 여전히 비어 있었고, 검은 로브를 뒤집어쓴 몰골이 음산해 보였다.

[전체] 채채 : 형 아는 사람이에요?

[전체] 블루셀레스트 : 몰라.. 도와주겠단 거 거절하니까 저러는데

[전체] 채채 : ?

밍채도 활쏘는애의 심리를 이해할 수 없었는지 어리둥절한 반응이었다. 밍채는 혹시 몰라 주현의 캐릭터 위로 투명한 방어막을 씌웠다. 그리고 예측대로 들어맞듯, 기습 공격이 들어왔다.

살아난 지 얼마나 됐다고 다시 바닥과 한 몸이 된 주현은 허탈한 얼굴로 놈의 정보를 훑었다. 밍채가 컬러수집가를 수납하고 채채를 꺼내 온 것처럼, 놈도 캐릭터를 바꿔 왔다. 직업 창술사, 랭킹 100위. 자랑하던 대로 랭킹이 딱 100위로 떨어진단 게 신기했다.

[전체] 창쓰는애 : ㅈ밥이죠?

방어 기술이 없는 성직자는 공격을 모조리 캐릭터를 움직여 피해야 했다. 밍채가 아무리 게임을 잘해도, 같은 랭커 유저를 상대로 한 대도 맞지 않는 건 불가능했다. 본캐가 아닌 채채는 공격 속도가 느리기도 했고, 장비에 따른 대미지 차이도 있었다. 밍채는 창쓰는애보다 많은 공격을 먹였지만, 장비 차이로 아쉽게도 패배했다.

[전체] 창쓰는애 : 랭킹 499윜ㅋㅋㅋㅋㅋㅋ

[전체] 창쓰는애 : 499도 랭커라곸ㅋㅋㅋㅋ

채채를 방치해 둔 지 꽤 시간이 지나서일까. 첫 만남 때보다 랭킹이 9위가 하락한 상태였다. 499위든, 500위든, 랭킹이 뜬다면 랭커인 거지. 별것도 아닌 것에 트집 잡는 창쓰는애가 더 이상해 보였다. 주현은 밍채에게 채널을 바꾸고 돌아서 가자고 귓속말을 보내려 하는데, 밍채가 이미 퇴장을 해 버렸다.

그리고 화면 오른쪽 아래에 보여서는 안 되는 닉네임의 접속 알림이 떠올랐다.

[귓속말] 밍채에게 : 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ㄴ

[귓속말] 밍채에게 : 하지마

[귓속말] 밍채에게 : 아니지?

컬러수집가는 컬러칩 길드에 소속되어 있었고, 채채는 애초에 길드가 없었다. 이깟 싸움에 발끈해서 밍채 캐릭터를 들고 오기엔, 창쓰는애에 비해 밍채가 잃을 게 너무나 많았다.

[귓속말] 밍채에게 : 멈춰봐 밍채야

[귓속말] 밍채에게 : 그건 진짜 아냐

주현이 밍채를 설득하는 동안, 창쓰는애는 아직 상황 파악을 하지 못한 채 입을 조잘대고 있었다.

[전체] 창쓰는애 : 499위는 ㅈㄴ웃기넼ㅋㅋ

얼른 마을로 돌아가 부활하고 싶었지만, 밍채가 나타나 창쓰는애를 죽여 버릴까 걱정되어서 자리를 뜨지도 못했다. 주현은 밍채에게 귓속말로 몇 번이고 애원했다. 간절한 주현의 바람은 밍채에게 닿지 못했다.

주현은 제가 만든 커스터마이징에, 제가 선물한 옷을 입고 있는 성직자를 바라보며 가파른 낭떠러지에 서 있는 기분을 느꼈다. 주현이 있는 곳에 도달한 밍채는 놈에게 망설임 없이 빛 기둥을 날렸다. 어느 때보다 눈부시게 확산하는 빛의 형태에 주현은 당장에라도 도망치고 싶었다.

밍채는 한 번에 죽지 않을 걸 고려해 여러 번 빛 기둥을 때려 넣었다. 첫 번째 공격에 맞은 창쓰는애는 자세가 무너졌고, 두 번째 공격에 뒤로 자빠졌으며, 세 번째 공격을 맞고 바닥을 구르더니, 네 번째 공격에 완전히 뻗어 버렸다. 창쓰는애가 시체가 되는 과정을 지켜보며 정신이 아득해졌다.

‘이걸 어떻게 수습해야 하지?’

멍하니 눈만 깜빡이다가 흐려지는 사고를 간신히 붙잡았다. 주현은 마우스에 손을 얹고 버튼을 바쁘게 딸깍였다. 조언을 구할 사람들에게 보내는 파티 초대였다.

[SYSTEM] 밍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SYSTEM] eastone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eastone : 이거 뭐예요?

[SYSTEM] 컁컁컁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컁컁컁 : 저 루시퍼 갈 준비 안 됐어염 ㅠㅠ

다들 마을에 있었는지 하나둘 파티에 입장했다. 루시퍼 파티로 오해한 월월월은 들어오자마자 눈물을 흘려댔다. 아직 루시퍼 레이드 입장 레벨도 안 됐으면서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건지, 주현은 그 모습을 지켜보며 헛웃음을 흘렸다.

파티 모집을 끝낸 주현은 간략하게 정리한 현재 상황을 채팅에 옮겨 담았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스토커가 메마른 땅까지 쫓아오길래 죽였는데 문제가 될까요?

[파티] ea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컁컁컁 : ????

[파티] eastone : 밍채님이 죽였어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밍채 : 네

서쪽의 질문에 밍채가 이실직고했다. 반성은커녕 제가 한 일을 자랑스럽게 여겼다.

[파티] eastone : 스토커는 뭐예요? 상가에선 둘만 있지 않았어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뭐 때문인지 모르겠고.. 렙업 도와주겠단거 거절하니까 미1친놈이 쫓아오더라고요

[파티] 컁컁컁 : ㄷㄷ

[파티] 블루셀레스트 : 메마른땅에서 저 죽으니까 밍채랑 싸움이 붙었어요..

[파티] eastone : 그런거면 괜찮을 것 같은데요?

[파티] 컁컁컁 : 맞아염

[파티] eastone : 그쪽에서 먼저 죽인거라서

[파티] 블루셀레스트 : 그런데....... 밍채가 부캐로도 싸웠거든요 그게 사사게 박제된적 있어서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채채라고..

[파티] eastone : 앗..

서쪽은 탄식했고 월월월은 말을 잃었다. 주현도 근래 들어 자주 사사게에 이름을 올렸지만, 밍채의 부캐인 채채와는 비교할 수 없었다. 채채는 비매너용이라고 설명해도 될 정도로 사건을 몰고 다닌 캐릭터였다. 주현도 한때는 채채의 닉네임에 치를 떨었다.

[파티] 밍채 : 괜찮아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내가 안괜찮아 ㅅㅂ

[파티] 밍채 : 네

[파티] ea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eastone : 웃을 상황이 아니지만.. 두분은 너무 웃기네요

[파티] 컁컁컁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밍채는 믿는 구석이 있는 건지, 대책이 없는 건지. 온갖 사람을 불러 모아 해결 방법을 찾는 주현과 대조되게 차분했다. 이 정도 일은 끄떡없다는 그 태도가 주현의 속을 갑갑하게 만들었다.

[파티] eastone : 어차피 그쪽에서 먼저 글 올리기 전까진 기다려야 하지 않아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네..

밍채에게 죽임당한 창쓰는애의 상황도 썩 무결하진 않았다. 어쨌거나 메마른 땅에서 먼저 사람을 죽인 건 창쓰는애였고, 주현은 이 사건의 완벽한 피해자였다. 창쓰는애가 제 발 저려, 되도록 이 일을 공론화하지 않길 바랐다. 떳떳하지 못한 입장에서 해명하며 싸우는 건 피차 귀찮은 일이었다.

[파티] eastone : 그럼 이제 던전을 갑시다!

[파티] 컁컁컁 : ???????

[파티] 블루셀레스트 : ??

[파티] eastone : 블랙님 렙업 도와드릴게요

[파티] eastone : 아 밍채님이랑 둘만 있고 싶으신가?

[파티] 블루셀레스트 : 아뇨

[파티] 밍채 : 네

[파티] 블루셀레스트 : 네

[파티] 블루셀레스트 : ㅅㅂ 사칭하지 말라고

[파티] 컁컁컁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eastone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앞이 조금 밀려난 제 닉네임이 황당해서 주현의 말문이 막혔다. 밍채가 주현인 척 채팅하는 걸 처음 보는 서쪽과 월월월은 웃음을 잔뜩 쏟아 냈다. 남의 눈치를 보지 않는 밍채는 뻔뻔한 낯짝을 유지하며 다시 부캐로 오겠다고 파티를 탈퇴했다.

[SYSTEM] 컬러수집가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eastone : 블랙님 방 만들어주세요!!

[파티] 컁컁컁 : 밍채님 닉네임이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eastone : 커플닉이랍니다

커플 닉네임이라고 보기엔 모호했지만, 주현은 구태여 지적하지 않았다. 대기실에 입장해 밍채의 길드 이름까지 확인한 월월월은 숨넘어갈 정도로 웃어댔다.

[파티] 컁컁컁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이름이 컬러칩이라니

[파티] eastone : 두분 신혼집인데 블랙님이 안 간대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아니 버프도 없는데 가겠냐고요

[파티] 컬러수집가 : ㅠㅠ

[파티] eastone : ㅠㅠ

[파티] 컁컁컁 : ㅠㅠ

[파티] 블루셀레스트 : ;;

셋이 준비를 마치자 주현이 게임을 시작했다. 로딩 화면이 넘어가고 넷의 캐릭터가 으스스한 분위기의 공동묘지로 입장했다.

용케도 살아남은 마을 이장이 생존자가 더 있는지 확인하라고 퀘스트를 내밀었다. 다른 곳이라고 멀쩡한 건 아니었다만, 적어도 공동묘지에 숨어들진 않을 것 같은데. 부캐를 키우며 몇 번이고 반복했던 스토리였다. 주현은 투덜대며 캐릭터를 움직여 울타리 안으로 진입했다.

가지만 남은 앙상한 나무 아래, 십자가가 박힌 무덤이 줄지어 놓여 있었다. 그중 몇몇 군데는 인위적으로 파헤친 흔적이 보였다. 마을을 공격한 마족의 짓이었다.

이번 던전 일반 몬스터의 이름은 고스트였다. 흰 천을 뒤집어쓴 작은 몸집의 유령으로 커다랗고 동그란 눈을 가져 귀여운 외모였다. 이따금 목이 찢어지게 우는 까마귀 소리가 들려 괜히 불안한 느낌이 드는 던전과는 상반되는 인상이라 유독 기억에 남는 몬스터 중 하나였다.

[파티] eastone : 두분 아직 스킬 다 못 찍으셨죠?

[파티] eastone : 제가 수호자 스킬 보여드릴게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밍채는 성직자예요..

[파티] eastone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쵸

서쪽의 캐릭터가 갑작스럽게 무게를 잡고 고스트들이 모여 있는 곳으로 화살을 날렸다. 바람을 타고 뻗어 나가던 화살이 여러 갈래로 나뉘며 복제가 되더니 단번에 몬스터 무리를 쓸어 버렸다.

[파티] eastone : 잡몹처리 대박이죠?

[파티] 컁컁컁 : 전 수호자 탱커일줄 알았는뎀 ㅠ

[파티] 블루셀레스트 : 저도요

직업의 이름이 궁수가 아니라 수호자로 출시되어서일까. 직업 스킬 영상이 공개되기 전까지 포지션이 탱커일 거란 반응이 다수였다. 혼돈의 설화는 다른 RPG 게임과 비교하면 포지션이 엄청나게 중요하지 않았지만, 경직 스킬의 유무 때문에 파티 모집 시 탱커를 우대하는 경우가 많았다.

아직 탱커 포지션이 대장장이와 성기사 두 직업밖에 없단 게 가장 아쉬운 점이었다.

[파티] eastone : 숲을 지킨다고 했지 인간을 지킨다고는 안 했다고요

[파티] 컁컁컁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렇다. 수호자는 거짓말을 하지 않았다. 그는 사냥꾼을 제외한 인간을 증오했고, 단 한 번도 인간을 위해 싸워 본 적 없는 자였다.

[길드] 숲의귀공자 : 하.... 블랙님 사사게 보세요

말을 주고받으며 몬스터를 사냥하던 중, 낯선 닉네임이 주현을 불렀다.

[파티] eastone : 쟤 누군데요?

[파티] 컁컁컁 : 신사님이염

[파티] eastone : 아..ㅋㅋㅋ

잘 넘어갔나 했더니 기어이 창쓰는애가 글을 올린 모양이었다. 신사의 부캐 닉네임을 알아보지 못한 서쪽은 경계부터 했다가 정체를 알고 탄식했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이 판 끝나고 잠시 쉴게요

[파티] 컬러수집가 : 네

던전을 나가기엔 지금껏 잡은 몬스터가 아까웠고, 잠수 타고 사사게를 살피기엔 나머지 파티원에게 미안했다. 주현이 양해를 구하자 밍채가 가장 먼저 활기찬 답을 내놓았다.

주현은 문득 밍채가 같은 길드가 아님을 깨달았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사사게에 글 올라왔대

[파티] 컬러수집가 : 네

아무것도 모르는 밍채에게까지 상황을 알렸다. 주현은 얼른 던전을 탈출하기 위해 마우스를 클릭하는 손가락에 속도를 붙였다. 파티원들도 눈치껏 스킬을 아낌없이 들이부으며 몬스터의 시체를 쓸어 담았다.

[파티] eastone : 게시글 봤는데 여론 괜찮더라구요

[파티] 컁컁컁 : ???

[파티] 블루셀레스트 : ..?

서쪽은 쉴 틈 없이 화살을 날려 고스트의 숨을 끊어 놓고 있었다. 캐릭터가 멈춰 있는 걸 보지 못했는데, 벌써 게시글을 확인했다니까 의아했다.

[파티] 컁컁컁 : 계속 잡몹 잡고 있었는데 언제 본 거예염???

[파티] eastone : 누가 모니터 하나만 쓰죠?

[파티] 컁컁컁 : 피방이라구염 ㅠㅠㅠ

[파티] 블루셀레스트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현도 모니터는 하나였지만, 매번 억울해하는 월월월의 반응이 웃겨서 말을 아꼈다. 듀얼 모니터를 사용하는 서쪽은 캐릭터가 스킬을 사용하느라 정체된 시간을 이용해 사사게 반응을 살폈다. 주현은 모니터가 두 개가 된다고 해도 서쪽처럼 부지런히는 못 살 듯싶었다.

[파티] eastone : 밍채님한테 돈 받은 분들이 편들어주고 계시던데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어둠의 밍채단이요?

[파티] ea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네 그분들이요

[파티] 컁컁컁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밍채의 악명은 하는 짓에 비해 과장된 면이 있었다. 그렇다고 또 억울하기만 한 것은 아니라, 밍채를 두둔해 주는 사람들이 있다는 게 신기했다. 그들이 밍채의 친구나 길드원이 아니라는 점도.

비틱[27]질 하는 놈들밖에 없는 게임에서 돈을 나누는 밍채의 행동은 참신했다. 누구는 겨우 100만 골드냐고 할지라도, 내내 득이 없다가 받는 골드는 대다수의 유저에게 강렬하게 기억될 선심이었다. 보통 아이템을 획득하면 지인들과만 돈을 나누니, 밍채가 주는 골드는 예상치 못한 깜짝 선물이기도 했다.

당연한 것보다, 당연하지 못한 것에 더 감동하는 사람들의 심리 덕에 밍채는 어둠의 밍채단을 결성시킬 수 있었다. 주현은 알 수 없는 그 집단을 어둠의 밍채단이라고 명명하기로 했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수호자 속박 있네요?

[파티] 컁컁컁 : 넴 ㅋㅋㅋ 피빕에서 쓸만할 것 같아염

보스 몬스터인 메가 고스트가 등장하자, 월월월이 타이밍에 맞춰 스킬을 사용했다. 바닥에서 뻗어 나온 싱싱한 식물 줄기가 메가 고스트의 몸을 꽁꽁 옭아맸다. 메가 고스트의 움직임이 묶인 틈을 타 파티원들이 공격을 쏟아부었다. 레벨이 높은 서쪽과 월월월 덕분에 메가 고스트는 순식간에 체력을 모조리 잃었다. 검푸른 빛이 스며든 바닥에는 메가 고스트의 흔적인 흰 옷감만이 남았다.

[파티] eastone : 자 이제 사사게로~~

[파티] 블루셀레스트 : 왜 이렇게 신나셨어요

[파티] eastone : 아무래도 제 일은 아니라서

[파티] 컁컁컁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블루셀레스트 : ..

[파티] eastone : 그리고 여론 보니까 두분이 무조건 이겨요

[파티] 컁컁컁 : 맞아염 ㅋㅋㅋ

정산이 끝나고 보상까지 들어온 걸 확인한 주현은 서둘러 던전을 나왔다. 인터넷 창을 켜 사사게에 접속하면서 제발 서쪽과 월월월의 말이 들어맞기를 바랐다. 그 과정이 영겁처럼 느껴졌다.

[비매너] 평온길드 [밍채] 메땅에서 마주쳤는데 초면에 죽이네요

작성자 : 창쓰는애 | 댓글 : 29개 | 조회수 : 1240

(_00227.jpg)

수호자 부캐 키우고 있었는데

밍채 부캐인 [채채]한테 맞고 죽었음

짜증나서 본캐인 창술사 데려와서 채채 죽였음

(_00228.jpg)

바로 본캐 꺼내와서 나 죽이는 밍채ㅋㅋ

사사게에 채채 검색해보니까 전적 화려하던데ㅋㅋ

채채는 길드 없이 다니더라고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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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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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에 죽어있는 애는 뭐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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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바닥에 죽은애가 제일 무서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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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쟤도 밍채한테 맞은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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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와 채채 저 ㅆ발새ㄲ 드디어 본캐를 알아내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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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마른땅에서 사람 죽이면 안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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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벨 100이하는 안 죽이는게 매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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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애는 레벨100 넘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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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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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벨100 넘든안넘든 안 죽이는게 매너지 ㅅㅂ 피빕 가능하다고 다 죽이고 다니는게 정상이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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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싸우라고 만든 구역이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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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글쓴애가 안전지대로 갔으면 될일인데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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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솔직히 안전지대로 다니는사람 몇이나 된다고ㅋ;; 메땅에서 사람 안죽이는게 암묵적인 룰임 게임 좀 했으면 다들 아는거 아닌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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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메마른 땅에서 밍채가 글쓴이를 왜 죽였는지는 중요하지 않음. 밍채가 채채 저 씨.발놈이란게 중요하지. 랭크전 실버였던 사람들은 저 씨.발놈 한번쯤 봤을텐데 진짜 개좃같애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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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니까 왜 실버여서 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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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 니는 티어 높아서 좋겠다^^ 씨.발놈아

* * *

- 1시즌 마스터 티어였는데 밍채랑도 팀해봤음 잘함 ㅇㅇ 마스터~다이아까지는 힐하는 힐러 거의 없다고 봐야하고 플래에도 종종 힐 안 하는 애들 보임 힐할 마나 아껴서 한놈 잡을 수 있다면 난 힐러가 힐 안하는거 비매너로 취급 안함

* * *

↳ 쟨 잠수탄적도 있어서 욕먹는거

* * *

↳ 팀원이 노답이었나보지

* * *

- 얜 사사게 올라올때마다 왜이렇게 지인들 출동해서 빨아주는거임?

* * *

↳ 저번에 댓글 보니까 돈 받은거 있다던데

* * *

↳ 댓글 알바임?

* * *

↳ 그건 아니고 레이드 때 득하면 나눠주나봄

* * *

- 바닥에 시체 하나 재앙 길드인데 그 커플 아님? 맨날 같이 올라오는 사사게 파트너

* * *

- 블루셀레스트 누가 죽인지 봐야 비매너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을 듯 스샷 더 풀어

* * *

↳ 밍채가 사이코도 아니고 지 커플을 죽이겠냐

* * *

↳ 랭크전 잠수충이면 사이코 맞는데

* * *

- 둘이 캐릭터 바꾸면서 싸울동안 내내 잠들어있는 블루셀레스트가 진정한 광기임 일어날법도 한데 구경만 함

* * *

↳ 살아났는데 또 죽었을수도

* * *

↳ 그럼 제일 불쌍함 블루셀레스트 입장 들어보자

[파티] 컁컁컁 : 블랙님 내내 죽어있는거 안쓰럽네염...

[파티] ea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본래 메마른 땅에 있던 구조물처럼 같은 자리를 지키고 있는 블루셀레스트의 시체는 주현도 예상하지 못한 부분이었다. 창쓰는애가 밍채를 고발했을 때의 대응만 염두에 뒀지, 같이 찍힐 제 캐릭터는 관심 밖의 일이었다. 당시에는 치고받는 둘 때문에 정신이 없어서 이상해 보일 거란 생각 자체를 못 했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굳이 해명 안 해도 되겠죠?

[파티] 컁컁컁 : 넴 ㅋㅋㅋ

[파티] eastone : 글 올리면 또 관심 끌리니까 내버려두는게 나을 것 같아요~

[파티] eastone : 어차피 밍채님 정도는 뭐.. 게임하면서 흔한 경우고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다행이네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신사님한텐 뭐라고 말해야 할까요..

[파티] eastone : 그냥 씹으세요 애초에 블랙님 잘못도 아닌데요 ㅋㅋ

[파티] 컁컁컁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따로 반박 글을 올리지 않아도 될 정도로 수습할 수 있어서 다행이었다. 서쪽은 신사에게 상황을 전달할 필요가 없다고 말했지만, 신사는 재앙의 길드 마스터였다. 주현이 재앙에 소속된 이상, 신사도 알 권리가 있었다.

[귓속말] 숲의귀공자에게 : 신사님 사사게 확인했는데 따로 해명할 부분은 없어서 글은 올리지 않으려고 해요

[귓속말] 숲의귀공자 : 네

‘……이게 끝인가?’

대화가 단답형으로 끝날 줄은 몰랐다. 이번 일은 주현의 잘못이 아니었던 터라 억울한 감이 있었다. 그렇다고 기분 나쁜 티를 내는 신사를 붙잡고 변명할 정도로 눈치 없는 것은 아니라 설득을 관뒀다. 길드 마스터인 신사로선 재앙 길드의 이름이 사사게에 오르락내리락하는 게 불쾌했을 수도 있었다.

[파티] 컬러수집가 : 저는 이제 숙제하러 갈게요

[파티] eastone : 아 네네 고생하셨어요~

[파티] 컁컁컁 : 다음에 봬염

[파티] 블루셀레스트 : 내일 보자

[파티] 컬러수집가 : 네

[SYSTEM] 컬러수집가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신사에게 상황을 보고하는 사이, 밍채가 숙제하러 가겠다며 파티를 떠났다. 학원에서 돌아온 지 얼마나 됐다고 벌써 숙제라니. 주현의 친구 목록에 있는 유저 중 가장 바빠 보였다.

[파티] eastone : 블랙님 밍채님이랑 진짜 친해진 것 같아요

[파티] eastone : 예전에 안 친했단 건 아닌데

[파티] 블루셀레스트 : 그땐 안 친했어요

[파티] 컁컁컁 : 너무하시네염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블루셀레스트 : 아니.. 사사게스타랑 누가 친구를 먹어요

[파티] ea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eastone : 아무튼 사이좋아 보이시네요~

서쪽의 말처럼 밍채와는 요즘 따라 부쩍 가까워졌다. 주기적으로 함께 사사게에 오른 탓도 있었다. 누가 잘못했건 싸잡혀서 욕을 먹으니 주현은 전적으로 밍채의 편을 들 수밖에 없었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중2라는데 잘해줘야죠

[파티] 컁컁컁 : 부모님처럼 말씀하시네염

[파티] 블루셀레스트 : ㅅㅂ

[파티] ea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eastone : 저 밍채님 중2 컨셉이라고 생각했거든요?

[파티] 컁컁컁 : 컨셉 아니에염???

밍채의 나이는 아직도 미궁 속이었다. 본인이 열다섯이라고 주장하는데 진짜냐고 캐묻는 것도 모양새가 이상했다.

[파티] eastone : 볼수록 진짜 같아서 무서워요

[파티] 컁컁컁 : ㅋㅋㅋㅋㅋㅋㅋㅋ 그럼 진짜 중2일까염...?

[파티] eastone : 맞는 것 같으면서도 아닌 것 같은..

[파티] eastone : 평일 4시? 5시? 때 공팟[28] 가면 중고딩 많거든요

[파티] eastone : 혼설에 중딩 없는 건 아니니까 가능성 있긴 해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말 진짜 안 듣고 대답만 잘하는 걸 보면 중2가 맞아요

[파티] eastone : 아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컁컁컁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쩔 땐 천진난만하고, 또 어쩔 땐 세상 풍파 다 겪은 사람처럼 냉정하게 굴어서 주현도 가끔은 밍채가 열다섯이 맞나 의심하는 순간이 있었다. 그럴 때면 밍채가 영어 학원을 간다고 말을 꺼내는 탓에 금방 생각을 지우게 되었다.

오늘처럼 밍채가 제멋대로 굴 때면 주현은 자신이 게임이 아니라 육아를 하는 게 아닌가 싶었다. 이제는 밍채가 성인인 걸 감히 상상할 수 없는 경지에 도달했다. 밍채는 주현을 위해서라도 미성년자여야만 했다.

[파티] eastone : 그래도 밍채님 요즘 블랙님 말 잘 듣지 않아요?

[파티] 컁컁컁 : 맞아염

[파티] 블루셀레스트 : 저게요..?

[파티] eastone : 네 ㅋㅋㅋㅋ

붙어 다니는 입장에서 별로 체감은 안 됐다. 서쪽이 그렇다고 말을 하니 그런가 보다 하고 넘어갔다.

‘……내가 재밌나?’

문득 코쿄아가 전했던 말이 떠올랐다. 밍채와 어스름의 대화. 주현을 곁에 두는 이유가 재밌어서라고 답했던 밍채. 친구들 사이에선 재미없단 평이 주를 이뤘는데, 밍채는 제 어디가 마음에 들었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렇게 밍채를 향한 궁금증이 한 겹 더 쌓여 갔다.

* * *

주현은 퇴근 시간이 되자 딴 길로 새지 않고 곧장 집으로 달려왔다. 따로 톡을 나누진 않았지만 늘 그랬던 것처럼 혹시나 밍채가 기다리고 있을까 하는 마음이었다. 들뜬 낯으로 친구 목록을 살피다가 금세 얼굴빛이 어두워졌다. 밍채는 로그아웃 상태였다. 아직 영어 학원인 모양이었다. 학생들 데리고 너무 늦게까지 하는 거 아닌가?

그날 밍채가 숙제하러 떠난 후, 주현은 블루셀레스트의 레벨을 밍채와 같은 30으로 만들어 놓았다. 같이 퀘스트를 하려고 레벨을 맞춰 놓았던 건데, 밍채가 부재중일 거란 생각을 못 했다. 밍채의 접속을 기다리며 부캐를 육성하기엔 기껏 맞춰 놓은 레벨이 어긋나서 문제였다.

붕 떠 버린 시간에 주현은 채예스 광장 한구석에 캐릭터를 세워 놓았다.

[길드] 양궁달인 : 형들 저 지금 설산인데 길을 모르겠음요

[길드] 잔혹동화 : 미니맵[29] 보세요

[길드] 블랙 : 거기 길 좀 복잡한데 제가 알려드릴까요?

어차피 할 것도 없겠다, 시간 보내기에 적절해 보였다.

[길드] 양궁달인 : 형 저 지금 나가요!!!!

《 양궁달인님이 파티에 초대하셨습니다. 》

주현은 양궁달인에게서 온 파티 초대를 수락했다. 양궁달인은 수호자 업데이트 날 길드에 합류한 뉴비였다. 주현의 캐릭터가 대기실에 들어오자 양궁달인이 게임을 시작했다.

설산은 겉보기엔 단순해 보이지만 구조가 복잡해 주현도 두 번째 캐릭터를 키울 때까지는 헤맸던 장소였다. 거센 눈보라가 치는 산에 입장한 주현은 곧장 앞으로 달려 작위적으로 뭉쳐져 있는 설괴를 갈랐다. 눈 덩어리가 흩어지며 숨기고 있던 지름길이 드러났다.

[파티] 양궁달인 : ㅁ1친 와 형 ㅅ1발 개멋있어요

양궁달인의 채팅을 읽으며 나이가 어린 건지 원래 말투가 저런 건지 궁금해졌다. 주현의 캐릭터가 지름길로 진입하자, 일반 몬스터인 북극곰이 등장해 뾰족한 발톱을 휘둘렀다. 검날을 세워 막은 후 반격으로 대미지를 돌려줬다. 북극곰은 볼록한 배를 자랑하며 뒤로 뻗어 버렸다.

[파티] 양궁달인 : 형 저 반했음

따지고 보면 썩 대단한 것도 아니었다. 설산은 레벨 100대의 던전이었고, 주현은 레벨이 200이었으니 오히려 공격 한 번에 죽이지 못하면 수치스러운 상황이었다. 별것도 아닌 거로 자꾸만 치켜세워주는 양궁달인 탓에 주현의 귀 끝이 붉어졌다.

[파티] 양궁달인 : 형 캐리 감사요

보스 몬스터인 대왕 북극곰을 잡을 때까지 양궁달인의 아부는 계속됐다. 던전을 한 판 더 도와줄까 고민하는데, 때마침 떠오르는 밍채의 접속 알림을 발견하고 서둘러 캐릭터를 바꿨다.

밍채도 눈치껏 컬러수집가로 다시 입장했다.

[길드] 양궁달인 : 아!!! 블랙형이 블루형이구나

[길드] 컁컁컁 : 넴 ㅋㅋㅋ 블랙님 닉네임 색깔로 하는거 좋아하세염

주현은 밍채에게 파티 초대를 보낸 후 방을 만들었다. 초대를 수락한 밍채는 무슨 파티냐고 묻지도 않고 방에 들어왔다. 밍채는 오히려 저번보다 오른 주현의 레벨에 관심이 있었다.

[파티] 컬러수집가 : 형 레벨 올랐네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어 너랑 맞췄어

[파티] 블루셀레스트 : 퀘스트하기 편하게

[ 컬러수집가님이 블루셀레스트님에게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춥니다. ]

[파티] 블루셀레스트 : ㅅㅂ

밍채가 예고도 없이 제 캐릭터 볼에 입술을 붙여 왔다. 저놈의 감정 표현은 몇 번을 당해도 도저히 익숙해지지 않았다. 주현은 질겁하며 밍채로부터 캐릭터를 떨어뜨려 놓았다.

[길드] 양궁달인 : 블랙형 저 이제 해변인데 여기는 지름길 없음요?

[길드] 블루셀레스트 : 해변도 지름길 있어요

[파티] 컬러수집가 : 형 뭐해요?

던전에 입장하고 주현의 캐릭터가 움직이지 않자, 밍채가 다가와 주위를 빙글빙글 돌았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아 미안

[파티] 블루셀레스트 : 길드 뉴비가 뭐 좀 물어보느라

[파티] 컬러수집가 : 길드에 사람 없어요?

불같은 성격과 달리 말간 얼굴을 가진 밍채의 캐릭터가 물었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너 오기 전에 잠깐 도와줬었거든

[파티] 블루셀레스트 : 내가 편한가봐

주현은 앞으로 달리며 활시위를 당겨 고스트의 머리를 꿰뚫었다. 뒤이어 반대편으로 초록빛을 머금은 화살을 날렸다. 고스트를 하나둘 처치해 완전히 전멸시킬 때까지 밍채는 시작 지점에서 멀뚱멀뚱 서 있었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잠수야?

[파티] 컬러수집가 : 아뇨

주현이 부르자 그제야 밍채의 캐릭터가 총총 뛰어와 곁에 섰다. 주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일단은 포탈을 타고 다음 구역으로 넘어갔다. 밍채는 이번에도 주현이 고스트를 잡는 걸 구경만 했다. 매번 자신이 버스만 탔다고 이제 와서 눈치를 주는 건가 싶었다.

[길드] 양궁달인 : 해변 너무 어렵네

[길드] 양궁달인 : 블랙형님 바빠요?

[길드] 블루셀레스트 : 지금 던전이라..

[파티] 컬러수집가 : 형 안 잡아요?

채팅을 치느라 마우스에서 손을 떼자, 타이밍을 엿보던 고스트가 잽싸게 다가와 주현의 뺨을 치고 달아났다. 그걸 지켜보던 밍채가 못마땅한 말투로 물어왔다.

주현은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었다. 무엇 때문인지 몰라도 밍채의 심기가 불편했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학원에서 무슨 일 있었어?

[파티] 컬러수집가 : 아뇨

[파티] 블루셀레스트 : 그렇구나

본인이 아니라는데 더 캐물을 수도 없었다. 주현은 괜히 멋쩍어서 삐걱대는 손가락을 숨기며 고스트에게 화살을 날렸다. 이 나이 먹고 열한 살이나 어린 밍채의 눈치를 봐야 하는 처지가 서러웠으나, 이렇게나마 기분이 풀렸으면 하는 마음도 있었다.

애초부터 둘의 관계는 평등하지 않았다. 밍채가 없으면 아쉬운 건 주현이었으니 져 주는 수밖에.

[ 블루셀레스트님이 컬러수집가님에게 애교를 부립니다. ]

[파티] 컬러수집가 : ?

[파티] 컬러수집가 : 형 뭐한 거예요

밍채가 그동안 했던 짓을 똑같이 따라 했을 뿐인데 호들갑이었다. 밍채가 과하게 반응하는 탓에 큰마음 먹고 한 감정 표현이 민망해졌다. 고개를 살랑살랑 흔드는 제 캐릭터의 몸짓이 얼른 끝나길 바랐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너는 맨날 하면서 내가 하니까 뭐라고 하냐

[파티] 컬러수집가 : 제가 언제 뭐라고 했어요

뭐한 거냐고 무안을 준 본인의 채팅은 안 보이는 모양이었다. 말싸움으로는 이길 수 없는 놈이니 주현은 깔끔하게 포기했다. 대화를 잇지 않고 고스트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자 밍채도 다시 잠자코 주현을 구경하기 시작했다.

[ 컬러수집가님이 바닥에 앉습니다. ]

이제는 아예 대놓고 게으름을 피우겠다고 선포했다. 심술을 부리는 밍채를 처음 보는 건 아니지만 이렇게 이유를 예측하기 힘든 적은 없었다. 어디서부터 잘못되었을까 하루를 되짚어가며 보스 몬스터인 앵그리 고스트의 사냥을 마쳤다.

[길드] 양궁달인 : 블랙형 아직도 바빠요?

[길드] 숲의귀공자 : 블랙님 엄청 좋아하시네

[길드] 양궁달인 : 블랙형 짱차캐요

[길드] 블루셀레스트 : 이제 던전 끝났어요

[파티] 컬러수집가 : 형 안 나가요?

평소에는 느릿느릿해도 별말 없던 놈이 오늘따라 과하게 예민했다. 아무래도 저번처럼 또 이상한 사람을 만나서 기분이 상한 게 분명했다. 주현은 만만하게 생겼을 밍채의 얼굴을 상상했다. 흐릿한 이목구비를 그리다가 내심 미안해져 머릿속에서 얼굴을 지웠다.

《 양궁달인님이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

[길드] 양궁달인 : 형 양궁이랑 친구해요 ^0^

얜 도대체 무슨 콘셉트일까 고심하면서 친구 신청을 수락했다. 양궁달인이 접속했다는 알림이 모니터 오른쪽 아래에 떠올랐다.

[전체] 양궁달인 : 형!!!

주현은 밍채와 함께 던전을 벗어나 광장으로 돌아왔다. 우연히 마주친 건지 주현을 기다린 건지 알 수 없는 양궁달인이 불쑥 주현 앞에 나타났다.

[전체] 블루셀레스트 : 또 모르는 거 있으세요?

[전체] 양궁달인 : 모르는게 너무 많음요

[전체] 컬러수집가 : 형 안 가요?

주현은 이제 밍채의 입에서 나오는 형 소리가 무서워졌다. 형 뭐해요? 형 안 잡아요? 형 뭐한 거예요? 형 안 나가요? 형 안 가요? 밍채의 목소리도 모르는데 텍스트가 싸늘한 음성으로 재생됐다.

끝없는 형 수렁에서 벗어나기 위해 주현은 다음 퀘스트 던전의 방을 만들었다. 주현이 말도 없이 사라지자 양궁달인은 길드 채팅에 질문을 던졌다.

[길드] 양궁달인 : 저 사람은 다른길드인데 왜 같이 다녀요?

[길드] 컁컁컁 : 밍채님이염?

[길드] 양궁달인 : 아뉴 컬러수집가요

[길드] 컁컁컁 : 넴 그게 밍채님인데 블랙님 커플이에염

[길드] 양궁달인 : 저도 형이랑 커플하고 싶은데

[길드] eastone : 길드 채팅이라서 다행이네요

[길드] 레아지킴이 :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컁컁컁 : 동의해염

양궁달인이 공개적으로 커플 하고 싶다고 말한다고 무슨 일이 생기는 건 아니었다. 오늘 유난히 기분이 저기압인 밍채는 주현에게만 화풀이했지, 다른 사람에겐 관심도 없었다. 광장에서 양궁달인과 마주쳤을 때도 그에게 말을 걸긴커녕, 무시했다고 봐도 될 만큼 없는 사람 취급을 했다.

길이 조금 달라진 공동묘지에 입장한 주현은 밍채의 눈치를 힐끔 보고 활시위를 튕겼다. 차라리 앉아서 구경하는 게 나을 판이었다. 밍채는 시작 지점에서 눈을 부릅뜨고, 주현이 하는 걸 낱낱이 지켜보고 있었다. 그 시선에서 이상하게도 살기가 느껴졌다. 왠지 조금 전보다 더 심기가 사나워 보이기도 했다.

주현이 한눈판 사이 미처 죽이지 못한 고스트 한 마리가 밍채에게 다가갔다. 주현은 재빨리 뒤를 돌아 화살을 날렸다. 아니, 날리려고 했다. 고스트를 향해 활시위를 당기는 순간, 손에 쥔 활대가 펑 터지더니 깨끗하게 사라져 버렸다. 마우스를 쥔 주현의 손가락이 굳었다.

[파티] 컬러수집가 : 형

주현은 죽고 싶었다.

[파티] 컬러수집가 : 뭐하는 거예요?

밍채가 제 앞에 있는 고스트를 빛 기둥으로 때려잡았다. 주현은 모니터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눈알을 슬쩍 다른 곳으로 굴렸다. 그럴 리 없겠지만 밍채의 캐릭터가 자신을 한심하단 눈빛으로 바라보고 있는 듯했다.

장비에는 내구도가 존재했다. 제때 수리하지 않으면 지금처럼 사냥 중에 장비가 사라지는 경우가 있었다. 아예 소멸한 건 아니었고, 마을에서 수리하면 다시 복구된다.

평소에는 던전이 끝날 때마다 꼬박꼬박 수리해서 한 번도 장비를 잃어 본 적이 없었다. 반면에 부캐 육성 시에는 조금만 레벨이 올라도 장비가 바뀌니 수리의 필요성을 못 느껴서 까맣게 잊고 있었다.

수호자 사전 퀘스트 보상으로 받은 장비가 있는 주현은 던전에서 새로운 장비를 얻더라도 능력치 차이 때문에 입지 않는 편이었다. 그러면 사전 보상 장비라도 잘 챙겨 입어야 했는데, 밍채와 같은 레벨에 맞춘다고 집중하느라 25레벨 때 장비를 교체하는 걸 깜빡해 버렸다.

에어컨을 틀어 뒀는데도 방의 공기가 후끈하게 느껴졌다. 열이 바짝 오른 얼굴과 목덜미는 빨갛게 익었을 게 분명했다.

밍채가 마지막 고스트를 처치해 준 덕분에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는 포탈이 열렸다. 주현은 추궁하는 밍채에게 답하지 않고 등을 돌렸다.

아무 일 없이 포탈을 밟았으면 좋았겠지만, 운 없게도 달아나던 제 캐릭터가 울타리에 걸렸다. 마우스로 방향을 바꿔 가며 앞으로 달려 봤으나 망가진 울타리 사이에 꽉 끼어서 도저히 빠지지 않았다.

[파티] 컬러수집가 : 형 웃기려고 이러는 거예요?

차라리 웃었으면 좋겠는데 그런 기색 없이 진지하게 물으니까 도망치고 싶어졌다. 주현이 침묵을 지키자 밍채도 더 캐물을 생각은 없는지 울타리를 지나쳐 포탈로 향했다. 주현은 조용히 스킵을 눌렀다.

무기를 잃은 탓에 다음 구역부턴 밍채 혼자서 고스트를 사냥해야 했다. 주현은 밍채가 했던 것처럼 멀뚱멀뚱 서서 죽어 가는 고스트를 구경했다. 그러다가 밍채의 캐릭터가 주현을 쳐다보면, 주현은 힘내라는 의미로 응원 감정 표현을 사용했다.

[ 블루셀레스트님이 응원합니다. ]

밍채는 별 반응 없이 심드렁하게 고개를 돌렸다. 밍채의 감정 표현을 무시할 땐 몰랐는데 외면받는 건 굉장히 마음 아픈 일이었다. 주현은 멋쩍게 웃으며 밍채의 뒤를 쫓았다.

한 명만 포탈을 밟고 나머지 파티원이 스킵을 누르면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는 간편한 기능이 있었으나 무기 없는 처지에서 포탈 이동까지 날로 먹기엔 눈치가 보였다. 조금 전까지 날로 먹던 밍채는 주현의 눈치 따위 한 번도 보지 않았지만. 아무튼, 주현은 그랬다.

밍채의 뒤를 따라다니다 보니 어느새 보스 몬스터인 고스트 킹이 등장했다. 밍채는 자신과 주현에게 버프부터 둘렀다. 본인에게 쓴 모양인데 파티원인 주현까지 덩달아 영향을 받았다.

주위를 두리번거리던 고스트 킹은 빈손으로 서 있던 주현을 발견하더니 대뜸 머리를 들이받았다. 고스트 킹한테 맞고 죽었다고 하면 아무도 안 믿을 것 같은데……. 이젠 하다 하다 저렙 던전에서 죽는구나 싶었다.

다행히도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고스트 킹의 몸이 공중에서 빛으로 묶여 꼼짝할 수 없는 상태가 되었다. 뒤이어 고스트 킹의 머리 위를 원기둥 형태의 빛이 뚫고 지나갔다.

아무리 봐도 자신보다 밍채의 사냥 속도가 훨씬 빠른 것 같은데, 무슨 이유로 내내 구경만 한 건지 알 수 없는 노릇이었다. 힘 잃은 고스트 킹이 바닥에 쓰러지고 보상 정산이 끝나자 주현은 기다렸다는 듯 재빨리 퇴장했다.

채예스 광장으로 돌아와 장비부터 바꿨다. 던전 레벨보다 한참 낮던 장비가 불편할 만도 한데, 레벨 업에 집중한 나머지 눈치채지 못했다. 주현은 새롭게 갈아 끼운 25레벨 장비를 보며 만족스러운 미소를 머금고 다시 던전으로 출발했다.

[파티] 컬러수집가 : 형 또 무기 부수는 거 아니죠?

밍채는 주현의 새 출발을 응원해 주지 않았다. 대기실에 입장한 밍채가 주현의 옆으로 찰싹 붙어 섰다. 기분이 좀 나아진 모양이었다. 수리 안 했다가 무기를 잃은 건 부끄러워서 잊고 싶었지만, 그게 밍채에게 웃음이 되었다면 창피한 것 정도야 참아 낼 수 있었다.

밍채는 이후에도 던전 출정 때마다 주현의 무기 상태를 물어왔다. 참을 수 있다는 말은 취소였다. 주현은 어디로든 숨고 싶었다.

* * *

[길드] 양궁달인 : 블랙형 레벨 왤케 높아졌음요?

[길드] eastone : 아무래도 사랑의 힘으로..

[길드] 블루셀레스트 : ㅅㅂ

어제 밍채와 늦게까지 게임을 한 덕분에 벌써 120레벨을 돌파했다. 서쪽이 들으면 ‘겨우’라고 할 레벨이었지만, 주현치곤 굉장히 빠른 속도였다.

밍채는 보통 새벽에 게임을 하는 경우가 드물었는데 어제는 무슨 바람이 분 건지 그 시간에도 남아 있었다. 방학이더라도 학원 일정이 있어서 일찍 자야 할 애가 새벽 2시가 넘어갈 때까지 주현을 붙잡고 놔주지 않았다.

출근해야 하는 주현으로선 곤란한 일이었다. 적당히 거절하고 게임을 끄는 게 맞았지만, 매번 숙제한다고 먼저 사라지던 녀석이 가지 말라고 붙잡으니 그럴 수가 없었다.

[길드] 양궁달인 : 같이 키우면 안대요?

[길드] eastone : 블랙님은 남편분이랑 같이 키우셔서 ^^

[길드] 양궁달인 : 엥 형 남자 아님요?

[길드] 블루셀레스트 : 남자 맞아요

[길드] 블루셀레스트 : 커플인 애도 남자여서 서쪽님이 그렇게 부르는 거예요

[길드] 양궁달인 : 앜ㅋ 컬러 어쩌구요?

주현과 밍채는 아직 결혼하지 않았다는 모순이 있었지만, 밍채가 남자는 맞으니 남편이란 호칭도 마냥 틀린 건 아니었다.

[길드] eastone : 그런데 양궁님 블랙님보다 어리세요?

[길드] eastone : 자꾸 형이라고 부르시길래

[길드] 양궁달인 : 저 걍 다 형이라고 부름요 ㅋㅋ

[길드] eastone : 아~

[길드] 양궁달인 : 저 15인데 서쪽형 저보다 어려요?

대화를 주고받던 서쪽이 잠시 자리를 비웠다. 주현의 눈에는 말문이 막혀서 대답을 못 한 것처럼 보였다. 게임을 하다 보면 간간이 중학생을 만나기도 했지만, 열다섯이면 주현보다 열한 살이나 어린 나이였고 밍채와는 동갑이었다.

[길드] eastone : 아뇨 제가 나이가 더 많네요 ^^

조금 시간이 지나고 서쪽이 등장했다. 길드 채팅에는 유연하게 대답했으나 주현에게 도착한 귓속말은 식겁한 기색이 가득 묻어나왔다.

[귓속말] eastone : 왜 이렇게 중2가 많죠?

[귓속말] eastone에게 : 왠지 말하는 게 밍채랑 잘 놀 것 같았어요

[귓속말] ea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아

처음에는 양궁달인도 이상한 콘셉트를 잡는 유저라고 착각했는데, 나이를 고려하면 조금 독특한 수준이었다. 주현은 성격의 다양성을 존중하기로 했다.

호랑이도 제 말 하면 온다는 속담처럼 때마침 밍채의 접속 알림이 떠올랐다. 이제는 본인이 평온 길드라는 자각도 없는지, 광장에 서 있던 주현의 옆에서 등장했다. 주현은 늘 그렇듯 재앙의 서식지인 4채널이었다.

[ 컬러수집가님이 블루셀레스트님에게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춥니다. ]

밍채는 다짜고짜 주현의 캐릭터 뺨에 입술을 갈겼다. 그 광경에 광장 중앙으로 걸어오던 서쪽의 캐릭터가 멈칫했다.

[전체] eastone : 화끈하시네요

[전체] 블루셀레스트 : 서쪽님한테 그 말을 들을 줄은 몰랐는데..

[전체] ea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어느새 서쪽은 부캐인 eastone에게도 쇼트 수영복을 마련해 줬다. 본캐와는 차이를 둬 이번에는 강렬한 빨강으로 물들였다. 주현은 얼른 월월월이 접속해 서쪽을 발견하기를 바랐다.

[전체] 양궁달인 : 다들 광장에 있었네요

상가가 있는 방향에서 양궁달인이 고개를 빼꼼 내밀었다. 그는 광장에 사람들이 모여 있는 걸 발견하고 반가운 기색으로 달려왔다.

[전체] 양궁달인 : 블랙형 퀘 어디임요?

[전체] 양궁달인 : 렙도 비슷한데 같이 하면 안됨여?

양궁달인의 머리 위에서 연달아 떠오르는 말풍선에, 주현은 키보드에 올려 둔 손을 머뭇거렸다. 조금 전에 서쪽이 에둘러 안 된다고 말했던 것 같은데, 또 거절하기가 미안했다.

그렇다고 초면인 양궁달인을 파티에 합류시키기엔 밍채가 불편해할 것 같았다.

[전체] 컬러수집가 : 껴요

절대 허락하지 않을 거로 생각했던 밍채가 긍정의 의사를 내보였다.

[전체] eastone : 헐 그럼 저도 껴도 되나요?

재밌어 보이는 일에 빠질 수 없는 서쪽이 냉큼 물었고 밍채는 이번에도 기꺼이 수락했다. 주현은 정말 이래도 되나 싶은 심정으로 사람들에게 파티 초대를 보냈다. 밍채가 재앙 길드원과 파티를 맺는 게 처음 있는 일도 아닌데 왜 이렇게 불길한 기분이 드는지 주현도 알 수가 없었다.

[파티] 양궁달인 : 컬러형은 왜 수호자 안 키움요?

파티에 입장한 양궁달인이 순수하게 물었다. 주현은 밍채는 형이 아니라고 정정해 주려다가, 밍채의 동의 없이 나이를 밝힐 순 없어 말을 아꼈다.

[파티] 컬러수집가 : 형?

밍채도 자신이 형이라고 불리는 게 의아했는지 곧장 반응해 왔다.

[파티] 양궁달인 : 다 형이라고 부름요

[파티] 양궁달인 : 저 15인데 저보다 나이 많아요?

[파티] 컬러수집가 : 저도 중2인데요

[파티] 양궁달인 : 헐 동갑이네 반말ㄱ?

[귓속말] eastone : 왜 이렇게 자괴감이 들까요?

[귓속말] eastone에게 : ..ㅎ

동갑내기인 둘의 대화를 보며 서쪽은 때아닌 창피함을 느꼈다.

서쪽이 주현보다 어리긴 했지만 둘과는 꽤 나이 차이가 났다. 주현도 서쪽만큼이나 기분이 싱숭생숭했다. 주현이 초등학교에 입학했을 때 둘은 태어나지도 않았다.

[파티] 컬러수집가 : 아뇨

밍채가 무뚝뚝한 말투로 답변했다. 살갑게 손을 내민 양궁달인을 매정하게 걷어차 버렸다.

[파티] 컬러수집가 : 저 반말 싫어해요

평온 길드원이 밍채에게 반말하는 걸 몇 번이고 봤는데 밍채는 뻔뻔한 낯짝으로 거짓말을 해 왔다.

[파티] 양궁달인 : ???????? 블랙형은 반말하잖아요

[파티] 컬러수집가 : 남친이랑 모르는 사람이랑 같아요?

[파티] eastone : 와 저 감동했어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ㅅㅂ

서쪽이 밍채를 두고 남편 타령하는 것만 봐 와서일까. 밍채가 갑작스럽게 남친 호칭을 사용하니 조금 당황스러웠다. 하지만 물끄러미 지켜보고만 있을 때가 아니었다. 밍채가 뱉는 어조가 날카로운 걸 보아 싸움이 붙는 건 시간문제였다. 양궁달인을 고까워했으면서 왜 파티에 넣자고 한 건지 의문이었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방 만들게요

[파티] 컬러수집가 : 네

어김없이 대답을 잘만 하는 밍채를 보며 주현은 묘한 기분을 느꼈다. 양궁달인한테는 사소한 것도 트집 잡으며 가시 돋치게 견제하더니 주현에게는 평소처럼 상냥해졌다. 주현은 어떻게 하면 이 파티를 깨뜨릴 수 있을지 고심하며 방을 생성했다.

방이 만들어지자마자 입장한 밍채는 주현에게 달려와 캐릭터를 치대기 시작했다. 한두 번 그랬던 것도 아니라 주현은 그러려니 넘기고 나머지 파티원의 입장을 기다렸다.

[파티] eastone : 해변이네요? 빨리 끝나겠다

[파티] 양궁달인 : 해변 개어렵던데

[파티] eastone : 뒤로 가면 좀 복잡하긴 해요 ㅋㅋㅋ

서쪽과 양궁달인이 준비 상태가 되자 주현은 게임을 시작했다. 이번 던전은 맵 길이가 짧다고 유명한 <밀려오는 해변>이었다. 수호자 사전 퀘스트 당시 레아, 서쪽, 월월월이 선택한 일반 던전이기도 했다.

기울어진 야자수 아래, 이따금 물결치는 파도가 듬성듬성 자리한 바윗돌을 간지럽혔다. 로딩이 끝나고 선두로 달려가던 서쪽은 조개 무리를 향해 냅다 스킬을 날렸다. 서쪽의 손에서 뻗어 나가던 화살이 여럿으로 나뉘어 조개껍데기를 산산조각 내 버렸다.

해변의 일반 몬스터는 납작하고 단단한 껍데기를 가진 조개였다.

[파티] 양궁달인 : 이열ㄹㄹ 서쪽형 ㅈㄴ 쎄네요

[파티] eastone : 거의 만렙이라 ㅋㅋㅋ

업데이트 첫날 만렙을 찍을 줄 알았던 서쪽은 느닷없이 월월월과 주현의 레벨 업을 기다리겠다고 선포했다. 그래서 잠시 제자리에 머물러 있는 상태였다. 월월월과 주현의 레벨이 서쪽과 비슷해지면 바로 루시퍼 레이드로 끌려갈 게 분명했다.

[파티] eastone : 얼른 렙업해서 다같이 루시퍼 가요 ^^!

[파티] 블루셀레스트 : ..ㅎ

주현은 차마 긍정은 못 하고 어색하게 웃었다. 서쪽이 마지막 몬스터까지 처치하자, 이동 속도가 가장 빠른 성직자 직업의 밍채가 단숨에 포탈을 밟았다.

밍채가 원래 말이 많은 편은 아니었지만, 맵에 입장한 후로 쭉 말 한마디 내뱉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며칠 전과 달라진 점은 파티에 양궁달인이 합류했단 것 하나였다. 말이 없는 이유가 낯을 가려서라고 하기엔 첫 만남 때부터 커플 하자고 달려들던 놈이 밍채였다. 그렇다고 양궁달인이 싫어서라고 하기엔…… 밍채가 굳이 양궁달인을 떨떠름하게 여길 이유가 없었다.

[SYSTEM] 길드원 컁컁컁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숲의귀공자 : 어서오세요

[길드] eastone : 월월님 어서 오시고

[길드] eastone : 얼른 렙업하세요~~~

[길드] 컁컁컁 : 안녕하세염....ㅠㅠㅠㅠ

[길드] 양궁달인 : 월월형 ㅎㅇ!

다음 구역으로 넘어가자 월월월의 입장 메시지가 떠오르며 인사가 쏟아졌다. 한편 해변은 껍데기를 쩍쩍 벌리며 뾰족한 이빨을 드러낸 조개들로 가득했다. 그들은 살벌한 기세를 보이며 파티원에게 다가오고 있었다.

[파티] eastone : 이 판 끝나고 185cm의 건장한 노예남 불러도 되나요?

서쪽이 향료가 발린 화살을 모래사장을 향해 쏘았다. 화살에서 피어오르는 오묘한 초록빛 연기에 조개들이 이끌려 한곳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밍채는 그 위로 눈부신 빛 기둥을 때려 부었다. 따로 말을 나눈 것도 아닌데 호흡이 척척 맞았다.

[길드] 블루셀레스트 : 월월님 혹시 키가 185인가요?

[길드] 컁컁컁 : ???? 넴

[파티] 블루셀레스트 : ㅅㅂ

서쪽과 밍채가 조개껍데기를 박살을 내는 동안, 주현은 사실 확인에 들어갔다. 예상대로 노예남의 정체는 월월월이었다. 주현이 없을 때, 둘이 내기를 했다가 월월월이 진 것으로 추정되었다.

[파티] ea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양궁달인 : 월월형 키 엄청 크시네요

[파티] eastone : 블랙님은 키 몇이에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전 노예남 안 해요

[파티] ea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그냥 물어본 건데요?

[파티] eastone : 어차피 밍채님 무서워서 못 데려가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175요

신체검사 때 나온 키는 178cm이었지만, 그렇다고 말하면 사람들이 커 보인다, 작아 보인다 평가하는 일이 잦았다. 남의 키 가지고 싸우는 사람들의 반응이 귀찮아서 일부러 줄여서 말하는 편이었다.

친구인 경찬이 남들 다 키를 키워서 말할 때 왜 혼자 줄이느냐며 별난 놈이라고 어이없어했지만, 3cm 작게 말한다고 해서 인생에 큰 변화가 생기는 것도 아니라 주현은 개의치 않아 했다.

[파티] 양궁달인 : 형 귀엽겠다 저랑 10차이남요

10cm 차이가 나려면 양궁달인의 키는 월월월과 같은 185cm였다.

[파티] eastone : 밍채님은요?

[귓속말] eastone에게 : 작은 것 같은데 묻지 마요..

[귓속말] eastone : 아..

키에 자신이 있었다면 묻지 않아도 진작에 알려 줬을 테다. 중학교 2학년인데 벌써 185cm에 도달한 양궁달인이 별난 거지, 아직 자라는 중인 밍채의 키가 작은 건 당연한 일이었다. 주현은 그렇게 밍채를 위안했다.

[파티] 컬러수집가 : 190이요

떠오른 밍채의 채팅에 주현이 헛웃음을 지었다.

저건 아무래도 거짓말이었다. 중학교 2학년 나이에 190cm를 넘기는 게 가능할 리가 없었다. 중학생 때 180cm를 넘기는 애들은 간혹 보였어도, 190cm는 단 한 명도 없었다. 그리고 저 키는 교실 문에 머리를 부딪칠 정도로 거대해서 더욱이 현실성이 없었다.

양궁달인이 185cm라고 해서 더 높여 부른 듯한데, 그 숫자가 터무니없어서 문제였다.

[파티] eastone : 헐 뼈 안 아프세요?

[파티] 컬러수집가 : 네

[파티] 양궁달인 : 중2가 어케 190 ㅋㅋㅋㅋ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서쪽도 신기했지만, 대놓고 시비를 거는 양궁달인은 골이 아팠다. 안 그래도 밍채가 양궁달인을 별로 좋아하지 않는 눈치인데 불을 지피는 격이었다.

[파티] 컬러수집가 : 뉴비가 템세팅 그렇게 하는 건 말이 되고요?

<밀려오는 해변>은 분명히 유저들 사이에서 빨리 끝나는 던전으로 유명한데, 주현은 왜 이곳에 갇혀 있는 건지 의문이 들었다. 바스러진 조개껍데기 잔해가 남은 모래사장에 싸늘한 적막이 몰려왔다.

주현은 마우스를 움직여 양궁달인의 정보 창을 열었다. 장비 세팅을 도와줄 만큼 게임에 대해서 잘 아는 건 아니라서 정보 창을 열어볼 생각을 못 했었다. 양궁달인이 착용한 장비를 훑어보자 확실히 주현의 뉴비 시절과 확연한 차이가 있었다. 누가 도와줬거나 스스로 정보를 열심히 찾아보지 않은 이상, 절대 나올 수 없는 적절하고 센스 있는 세팅이었다.

장비가 자주 바뀌는 저렙 구간에서 초보들은 돈을 펑펑 쓰는 실수를 하는 경우가 많았다. 장비를 강화하지 않으면 몬스터 사냥 속도가 느려 레벨 업이 더뎠고, 그렇다고 높은 강화 단계까지 가기엔 골드가 쉽게 바닥나게 된다.

신기하게도 양궁달인은 여느 고인물처럼 딱 과하지 않을 만큼 투자를 했다. 그 행색을 보니 밍채가 의심하는 이유도 이해가 갔다.

[파티] 양궁달인 : 저 뉴비 맞는데요?

[파티] 양궁달인 : 영상 보고 템 따라한건데ㅋㅋㅋ

[파티] eastone : 음.. 일단 던전부터 깨죠?

상황을 중재한 건 서쪽이었다. 계속 던전에서 싸우는 건 둘도 내키지 않았는지 순순히 서쪽을 따랐다. 포탈을 타고 다음 구역으로 이동한 주현은 누구보다 열심히 조개껍데기를 때려잡았다. 얼른 이 지옥의 파티에서 벗어나고 싶었다. 냉랭한 분위기에서 사냥하는 건 고역이었다.

[파티] 양궁달인 : 야 성격 좀 죽이고 살아

[파티] 양궁달인 : 길드에 친구 없으니까 여기에 빌붙는거면서ㅋ

[SYSTEM] 양궁달인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보스 몬스터인 진주알의 사냥을 끝내고 보상 정산이 들어왔다. 양궁달인은 밍채에게 저격의 메시지를 남기고 재빨리 파티를 탈퇴했다. 이렇게 되면 수습은 파티에 남은 서쪽과 주현의 몫이었다.

[파티] eastone : 저분은 말을 왜 저렇게..

친구 많은 밍채를 독점하고 싶어 했던 건 오히려 주현이었다. 얼마나 힘들게 뺏어온지도 모르는 놈이 밍채에게 저런 말을 지껄이니 주현은 제대로 열이 받았다.

당장에라도 채팅으로 따져 묻고 싶었지만 그럴 수 없어서 속이 답답했다. 길드 마스터인 신사가 이 일을 알게 되면, 당연히 길드원인 양궁달인의 편을 들어줄 게 뻔했다. 그리고 길드에서 분란을 일으킬 시엔 추방이었다. 재앙 길드에 큰 미련은 없지만, 그러면 주현을 데려온 월월월과 서쪽의 처지가 난처해져서 이 방법은 피하고 싶었다.

메마른 땅으로 몰래 불러와서 죽일 순 없나? 그렇게 양궁달인을 어떻게 처리할까 고민하던 차에 밍채의 채팅이 떠올랐다.

[파티] 컬러수집가 : 형은 어리면 다 좋아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

[파티] eastone : ......????

왜 제 편을 들어주지 않았냐는 원망이 이어져야 할 자리에 취향에 대한 추궁이 들어찼다. 주현은 밍채의 엉뚱한 질문이 황당해서 되물었다. 잘못 본 건가 싶어서 채팅 창을 몇 번이고 훑었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내가 어린 걸 좋아한다고?

[파티] 컬러수집가 : 네

‘……그랬나?’

밍채가 단호하게 말할 정도면 그런 여지를 보였다는 건데, 주현의 기억은 텅 비어 있기만 했다. 생각해 보면 밍채에게 잘해 주기로 마음을 먹었던 건 나이 덕이 크긴 했었다. 정말로 어린애한테 관대한 편인가?

그렇다면 조별 과제 이후에 채하에게 따져 묻지 못했던 것도 이해가 갔다.

무례했던 채하를 봐주고, 밍채에게 쉽게 휘말리고, 널린 뉴비 중에 양궁달인을 도와주고 싶었던 이유를 비로소 깨달았다. 당시에 밍채와 양궁달인의 나이는 몰랐지만, 형이라는 호칭에 깜빡 넘어간 모양이었다. 차근차근 정리해 보니까 밍채의 주장이 일리가 있었다.

[파티] eastone : 블랙님 유아교육과인가요?

[파티] 블루셀레스트 : ㅅㅂ 아니에요

주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모니터를 바라봤다. 순진하게 생긴 밍채의 캐릭터가 주현을 빤히 응시하고 있었다. 어린 걸 좋아하느냐 묻는 이유는…… 양궁달인을 도와주는 주현이 고까웠거나, 서운했거나 둘 중 하나일 텐데. 둘 다일 가능성이 컸다.

의도치 않게 열한 살씩이나 어린 밍채의 마음을 서럽게 만들었다. 주현은 어떻게 달래 줄까 고민하다가 솔직한 감상을 꺼내 보였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그래도 니가 제일 귀여워

[파티] eastone : .......?

[SYSTEM] eastone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주현의 고백에 서쪽이 달아났다. 주현의 입장에선 딱히 못 할 말은 아니었는데, 서쪽이 과하게 반응하니 밍채에게도 별로이지 않을까 걱정이었다.

[ 컬러수집가님이 블루셀레스트님에게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춥니다. ]

도망치던 서쪽과 다르게 밍채는 입술로 화답을 해 왔다. 주현은 다시 상처 받은 밍채의 마음에 어떻게 보상을 해 줘야 할까 고민에 빠졌다.

[파티] 블루셀레스트 : 양궁한테 사과하라고 할까?

[파티] 컬러수집가 : 아뇨

[파티] 블루셀레스트 : 왜?

[파티] 컬러수집가 : 그런 애 저희 길드에도 많아요

‘그런 애’가 많다는 건 그동안 시비에 걸린 일이 더 있었다는 게 아닌가? 참 할 짓도 없는 사람들이었다. 저 어린애가 뭘 그렇게 잘못했다고 못 잡아먹어서 안달인지. 주현은 밍채가 한때 사사게를 빛냈다는 걸 잊고 있었다.

밍채가 양궁달인을 왜 ‘그런 애’라고 표현했는진, 일주일 후 알 수 있었다.

[길드] 신사 : 저 사람 누가 받았어요?

[길드] 잔혹동화 : 제가 받았어요

[길드] 암흑기사 : 누가 받았는지가 왜 중요함?

어느새 양궁달인은 만렙이 되었고, 신사가 기념해 일반 길드원으로 등급을 승급해 주었다. 양궁달인은 때를 기다렸는지 길드 창고에서 일반 길드원이 가져갈 수 있는 아이템을 모조리 챙겨서 달아나 버렸다. 포션과 강화된 저렙 장비, 골드 몇 푼이었지만 길드 창고가 털렸단 것만으로 신사는 굉장히 불쾌해했다.

[길드] 신사 : 하....

[길드] 신사 : 당분간 길드 가입 막습니다

길드 창고 털이범은 방심할 때마다 나타나 존재감을 드러냈다.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다고 안 털리는 건 아니라서 순전히 운에 맡겨야 하는 일이긴 했다. 양궁달인이 범행을 저지르기 전에 낌새를 눈치챈 밍채가 마냥 신기할 뿐이었다.

[귓속말] 컬러수집가에게 : 우리 길드 창고 털렸어

[귓속말] 컬러수집가 : 그 185요?

양궁달인이란 닉네임이 버젓이 있는데 밍채는 놈을 185cm라고 불렀다. 밍채의 키가 작을지도 모른다는 가정에 한 발짝 더 가까워졌다.

[귓속말] 컬러수집가에게 : 길창털이범인거 어떻게 알았어?

[귓속말] 컬러수집가에게 : 티 안 나던데

[귓속말] 컬러수집가 : 길드 창고 털려면 버리는 캐릭터니까 골드 안 쓸 테고

[귓속말] 컬러수집가 : 부실한 장비에 개연성 만들려면 뉴비인 척 하겠죠

아이템을 도둑맞아 텅텅 비어 있을 평온의 길드 창고가 머릿속에 그려졌다. 길드 마스터인 어스름이 꽤 고생했을 텐데, 처음으로 그가 불쌍해 보였다.

신사는 그날 저녁 사사게에 양궁달인을 길드 창고 털이범이라고 고발했다. 안타깝게도 그사이 양궁달인은 다른 길드에 가입해 창고를 털었는지 피해자가 한 명 더 나왔다. 길드 탈퇴 후에는 24시간 가입 불가 페널티가 존재하는데, 그 시간을 기다렸다가 부리나케 다른 길드에 가입했다니. 어떤 면에선 참 부지런한 놈이었다.

<2권에서 계속>

* 각주 모음

[1] 게임을 고의로 패배하는 행위.

[2] 주로 온라인 게임에서, 기술을 다시 사용하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

[3] 플레이어의 실력이나 캐릭터의 성능 등을 나타내는 지표.

[4] 능력치나 스킬의 효과를 저하시키는 버프. 보통 적에게 사용한다.

[5] 날로 먹는다의 줄임말로 팀이나 파티 등에 기여를 하지 않고 아이템 등을 습득하는 행위를 뜻한다.

[6] 딜 내기. 던전 클리어 시 정산되는 개인의 기여도로 승부를 가림.

[7] 잠수 쩔의 줄임말. 가만히 있다가 클리어할 때 보상만 먹는 행위.

[8] 일정 범위에 시전하는 스킬.

[9] 공짜 쩔의 줄임말. 대가를 받지 않고 재능 기부차 던전을 돌아준다.

[10] 소매치기의 반대 의미로 쓰이는 말. 온라인 게임을 처음 시작한 이용자에게 상대방의 동의를 구하지 않고 게임 아이템 등을 퍼 주는 행위.

[11] 딜 자부심.

[12] 랭크 티어를 올리기 위해 아이디 소유주와 다른 사람이 대신 게임을 하는 악질적인 전략.

[13] 몬스터를 잡을 때 일정 행동을 취해야 넘어갈 수 있는 것을 뜻하는 말.

[14] 소수 인원 파티.

[15] 공격에 맞지 않은 상태.

[16] 효율적인 공격 순서.

[17] 단계를 의미한다. 보통 보스 등이 여러 단계로 나눠져 있는 경우 각각의 단계를 n번째 페이즈라고 부른다.

[18] ‘리트라이(retry)’의 준말. 주로 게임에서, 여럿이 모여 파티 사냥을 할 때, 보스 몬스터나 네임드를 잡는 것에 실패하였을 경우, 처음부터 다시 사냥하는 행위.

[19] 공격력 증가.

[20] 고의로 아군을 방해함.

[21] 경험 없이 무작정 도전함.

[22] 강제 퇴장의 줄임말. 게임에서 주로 방장이 마음에 들지 않은 멤버를 추방할 때 사용.

[23] 겹쳐진 대미지.

[24] 업데이트가 없다.

[25] 직접 작업.

[26] 대량의 아이템 상자를 한 번에 까는 행위.

[27] 기만 혹은 자랑을 한다.

[28] 공개 파티.

[29] 지도. 미니맵, 월드맵 등 다양한 맵이 존재한다. 가끔은 캐릭터나 NPC의 위치를 표시해 주기도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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