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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해답 (1)

주현이 나서서 괜찮다고 했으니 사사건건 개입하며 쫓아올 줄 알았는데, 도리어 임채하는 조용하기만 했다.

주현은 누적 접속 시간을 다 채운 후에도 혹시나 해서 피시방에 가 봤다. 은근히 기대했던 마음이 미련해지게도, 나란히 앉던 자리에는 처음 보는 사람들이 있었다. 주현은 그대로 피시방을 빠져나왔다.

채하는 뱉은 말을 지키려는 건지 게임에서도 소극적으로 행동했다. 서쪽이 주현을 초대해 공개 방을 개설하더라도, 예전처럼 우연을 가장해 파티에 참여하는 짓은 일절 하지 않았다.

채하가 홀로 마을 광장에 남아있을 때면, 평온 길드원이 우르르 몰려와 채하를 데려갔다. 싫다고 거절할 줄 알던 채하도 고분고분 그들의 뒤를 따라갔다. 주현은 채하의 캐릭터를 지켜보면서, 이게 스스로 원했던 그림인지 고찰하는 시간을 또 한 번 가졌다.

그동안의 일을 반성하려면 적어도 제 옆에서 해야 하는 거 아닌가? 주현은 채하의 캐릭터 뒤통수를 힘껏 노려보았다.

[길드] 꼬꼬아 : 블랙니임

[길드] westone : 잠수이신것 같은데

[길드] 블랙 : 네?

주현은 뒤늦게 정신을 차리며 제 닉네임을 애타게 부르는 길드 채팅을 확인했다. 코쿄아는 요즘 한창 부캐 키우기에 맛을 들였다. 닉네임 꼬꼬아, 직업 성기사. 커다란 검을 등에 메고 있는 캐릭터가 주현의 앞에서 얼쩡거렸다. PvP 랭크전에서 있었던 일 때문에 코쿄아와 함께 있는 게 껄끄러워 한창 피하던 참이었다.

[길드] 꼬꼬아 : 템 좀 물어보려구여 ㅋㅋ

[길드] 블랙 : 저보다는 신사님이 잘 아실텐데

유저마다 중요시하는 부분이 다르니 조언에 따라 맞추는 장비도 천차만별이었다. 누구는 무기를, 누구는 방어구를, 누구는 액세서리를 먼저 맞추라고 말을 한다. 그 안에 명확한 정답은 없었지만 자기 생각과 다르면 쉽게 타인을 탓하곤 했다. 그리하여 주현은 답을 신사에게 미뤘다.

[길드] 꼬꼬아 : 신사님 지금 로그아웃이셔서 ㅠㅠ

[길드] 블랙 : 아..

맨날 로그인 중이어서 오늘도 있을 줄 알았다. 주현은 하는 수 없이 코쿄아의 장비 창을 열어 아이템을 확인했다. 이미 만렙에 도달했으니 음률이든 어둠이든 쓸 만한 장비를 맞출 시기였다.

[길드] 블랙 : 뭐가 궁금하신데요?

[길드] 꼬꼬아 : 악세서리 음률할지 어둠할지 고민이에여 ㅋㅋ

이 정도 수준의 질문은 꼭 주현이 대답할 필요가 없었다. 액세서리는 공용 장비이기에 모든 직업군이 답할 수 있는 질문이었다. 역시나 지켜보던 길드원들이 대화에 끼어들었다.

[길드] westone : 성기사 제대로 키울거면 어둠

[길드] westone : 아니면 음률하세요

[길드] 암흑기사 : 요즘 악세 비싸던데 무기 먼저 하지

[길드] 꼬꼬아 : ㅋㅋㅋ 무기 만들고 있음여 [+12 어둠이 깃든 대검]

[길드] 암흑기사 : 벌써 12강이시네 ㅊㅊ

[길드] 레아 : 와아 빠르시네요

주현은 왁자지껄한 길드 채팅을 뒤로하고 친구 창을 열었다. 평온 길드원을 따라 레이드에 갔을 거로 생각한 채하는 어느덧 로그아웃 상태로 변해 있었다. 레이드가 벌써 끝나진 않았을 테고, 곧장 게임을 종료한 모양이었다.

주현은 언제나 채하와 친해지고 싶었다. 지금 상황이 주현이 그토록 바라던 기회라는 걸 알지만, 그동안 채하에게 당했던 과거를 떠올려 보면 확신이 서지 않았다. 언제고 채하가 돌변하여 똑같은 짓을 반복할지도 모른다. 채하는 그만큼 변덕스러웠으니까.

[길드] 암흑기사 : 블랙님 악세 바꿔서 음률 남는거 있지 않음?

[길드] 꼬꼬아 : 정말여???

주현은 최근 채하 덕분에 강제로 아이템을 바꿔야 했다. 장비 자리에 어둠이 꿰차면서 기존에 착용하던 음률 아이템이 남게 되었다. 거래소에 가져가 판매하는 것도 귀찮은 일이니 인벤토리에는 아직 처리하지 못한 음률 반지 한 개가 자리하고 있었다.

[길드] 블랙 : 아 음률 반지 하나 있어요

[길드] 꼬꼬아 : 블랙님은 부캐 안 키우니까 필요 없으시져?

[길드] 암흑기사 : 블랙님은 성기사만 키움 ㅋㅋㅋ

[길드] 꼬꼬아 : 거래소 음률 반지가 너무 비싸서여 ㅠㅠ

방학 때마다 접었던 유저들이 돌아오니 되팔기가 편리한 액세서리는 유독 가격이 널뛰었다. 판매할 의사가 있던 아이템이었으니 주현은 수락하는 의미로 가격을 제안했다.

[길드] 블랙 : 1억 괜찮으세요?

[길드] 꼬꼬아 : 엥

[길드] 꼬꼬아 : 전 그냥 주시는줄 알았어옄ㅋㅋㅋ

[길드] 암흑기사 : 저도 ㅋㅋㅋ 블랙님 통크신줄

[길드] westone : 악세를 그냥 주실 리가 ㅎㅎ

[길드] 꼬꼬아 : 1억이면 어둠을 사져 ㅋㅋㅋㅋ

[길드] 꼬꼬아 : 블랙님 반지 안 팔린다고 저한테 강매하려고 한 거 아니시져....?

눈살을 찌푸린 주현은 코쿄아의 말을 무시한 채 곧장 거래소로 향했다. 반지를 1억 골드에 올려 두자마자 판매했단 우편과 함께 골드가 인벤토리로 들어왔다. 1억 골드는 바로 판매가 될 정도로 저렴하게 측정된 가격이었다. 주현도 살 의향이 없는 코쿄아에게 구태여 판매를 강요할 생각은 없었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그럼 제가 살래요~

[길드] 블랙 : 방금 거래소에 팔았는데..

[길드] westone : 아 ㅠㅠ

무안해할까 봐 도와주는 건지 정말로 아이템 구매를 원했는지 서쪽이 안타까워하는 사이, 길드 마스터인 신사의 접속 메시지가 떠올랐다.

[SYSTEM] 길드원 신사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꼬꼬아 : 신사님 안녕하세여

[길드] 꼬꼬아 : 이제 성직자 키워야지

[SYSTEM] 길드원 꼬꼬아님이 퇴장하셨습니다.

[SYSTEM] 길드원 코쿄아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코쿄아는 기다렸다는 듯 캐릭터를 바꿨다. 신사가 길드에서 가장 랭킹이 높은 성기사였으니, 신사에게 장비 세팅을 물어볼 줄 알았는데 예상 밖의 행동이었다.

[길드] 코쿄아 : 웨스트님 7인어 가실래요?

[길드] westone : 네

[길드] westone : 블랙님도 초대 주세요

본캐로 돌아온 코쿄아는 인어 레이드 파티를 모으기 시작했다. 딱 봐도 신사가 있을 파티라 안 간다고 할 줄 알았던 서쪽은 단번에 승낙했고, 뒤이어 물귀신 작전으로 주현을 끌어들였다. 서쪽의 심리가 뻔히 보여서 주현이 바람 빠지게 웃고 있을 때였다.

[길드] 코쿄아 : 음

[길드] 코쿄아 : 블랙님은 안돼여 ㅠ 무기 20강만 받아여

얼마나 막강한 파티를 만들려고 하는지 몰라도 거절을 당했다. 무기 바꾼 뒤로 스펙 미달이라고 냉대받는 건 처음이었다.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ㅠㅠ 죄송해요

[귓속말] westone에게 : 제가 얼른 20강을 찍을게요

민망해진 분위기에 서쪽이 귓속말로 사과를 해 왔다. 딱히 누구의 잘못이라고 할 수 없는 상황이었다. 죄책감을 느낀 서쪽이 파티를 나오려고 하길래 주현은 황급히 달래어 보냈다. 서쪽이 포함된 코쿄아의 파티가 무사히 출발하는 걸 확인하고 나서야 숨을 돌릴 수 있었다.

주현은 이따금 코쿄아가 자신을 싫어하는 것 같다고 느끼다가도, 그럴 이유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면 없던 시절, 코쿄아는 채하와 어스름이 나눈 이야기까지 주현에게 전해 주었으니까. 아무래도 채하 일 때문에 신경이 예민해진 듯했다.

어지러운 머리를 애써 정리하고 있는데, 합성 아바타인 [빛의 신관 세트]를 입은 캐릭터의 널찍한 등판이 대뜸 시야를 가렸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검은색으로 무장한 낯익은 커스터마이징이었다. 풍성한 속눈썹을 깜빡이며 새까만 눈동자를 자랑했다. 주현이 마지막으로 보았던 모습보다는 키가 조금 작아지고, 볼살이 통통해졌으며, 전체적으로 어린 티가 났다.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블랙님

이목구비 군데군데를 조금씩 건드려 이전과 차이를 두려고 한 듯싶지만, 커스터마이징을 만든 장본인인 주현이 알아차리지 못할 리가 없었다.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저 성기사 가르쳐주세요

직업 성기사, 레벨 200. 그동안 임채하의 행방이 묘연했던 이유를 비로소 깨달을 수 있었다. 주현이 좋아하는 온갖 것을 끌어모은 채하가 주현의 앞에 나타났다.

이건 알아봐 달라는 걸까. 모른 척 넘어가 달라는 걸까. 밍채에서 조금 어려진 초콜릿아이스크림의 겉모습을 다시 한번 빠르게 훑어보았다. 이전과 달리 눈동자 색도 새까매져서 그런지 한층 더 채하와 비슷한 분위기를 풍겼다.

[ 초콜릿아이스크림님이 블랙님에게 애교를 부립니다. ]

아무래도 숨길 마음이 없는 듯싶은데. 고개를 살랑살랑 흔들며 귀엽게 구는 채하의 캐릭터를 지켜보던 주현은 무심코 웃음을 터뜨렸다.

새로운 직업이 추가되어도, 언제나 성직자를 고르던 게 채하였다. 다른 직업은 절대 키우지 않는 임채하가 성기사를 택했다는 게 주현을 간지럽게 했다. 성기사가 손에 익지 않아서 어려움이 있었을 텐데, 끝내 만렙에 도달해 제 앞에 나타났단 것도 기특했다.

[전체] 블랙 : 뭐가 궁금한데?

초콜릿아이스크림을 채하라고 생각해서 평소처럼 반말이 나갔다. 아차 싶어서 존댓말로 정정하려고 키보드에 손을 얹자, 개의치 않은 기색으로 답하는 채하가 먼저였다.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전부요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성기사 너무 어려워요

[ 초콜릿아이스크림님이 주저앉아 눈물을 흘립니다. ]

공격을 무조건 피하는 수밖에 없는 성직자와 달리 성기사는 제자리에서 대검으로 방어하는 구조이기에 적응하기 더더욱 고단했을 것이다. 제 앞에 나타나겠다는 각오 하나로 끈기 있게 레벨 업을 했을 채하를 상상하면 자꾸만 웃음이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 블랙님이 초콜릿아이스크림님을 포옹합니다. ]

채팅 창에 감정 표현을 입력하자, 주현의 캐릭터가 팔을 뻗어 허공을 안았다. 앉아서 울고 있던 채하는 잽싸게 캐릭터를 일으켜 그 안으로 몸을 쏙 집어넣었다.

《 초콜릿아이스크림님이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

채하는 누그러진 분위기를 알아채고 내친김에 친구 신청까지 걸었다. 채하와 함께 게임을 하지 않겠다는 다짐이 진작에 무너진 주현은 흔쾌히 수락했다.

채하가 정말로 성기사 운용법을 몰라서 찾아온 건 아닐 테지만, 주현은 채하의 장단에 어울려 주기로 했다. 채하와 함께 갈 만한 마땅한 던전을 고민하던 차에 귓속말이 도착했다.

[귓속말] 단공 : 블랙님 일반 레이드도 가시나?

[귓속말] 단공에게 : 네

[귓속말] 단공에게 : 혹시 두 자리 비나요?

[귓속말] 단공 : 넹 길드에 누구 더 있어용?

따지고 보면 채하는 평온 소속이었다. 채하가 성기사를 키운다는 걸 아는 사람은 현재 주현뿐인지, 단공은 아무것도 모르는 눈치였다. 어차피 붙어 다니다 보면 다들 알게 될 테다. 주현은 단공에게 채하의 초대를 부탁했다.

[SYSTEM] 블랙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어스름 : 블랙님 안녕하세요 ^^

[파티] blueberry : 안녕하세요

[파티] 블랙 : 안녕하세요

[파티] 단공 : 블랙님 ㅜ0ㅜ 친구분한테 파티 좀 받으라고 말해주시면 안될까용?

[파티] 단공 : 지금 거절만 7번째예요

[파티] 블랙 : 아

채하에게 설명을 해 준단 걸 깜빡했다. 채하는 단공이 제 정체를 눈치채, 파티 초대를 보내는 줄 오해하고 있을 테였다.

[전체] 블랙 : 파티 받아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네

주현의 말에 채하는 냉큼 단공의 초대를 받고 파티에 입장했다.

[SYSTEM] 초콜릿아이스크림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파티] 단공 : 반가워요 ^_^.......

[파티] blueberry : ㅋㅋㅋㅋㅋㅋㅋ

[파티] 어스름 : 탱만 셋이네요

[파티] 단공 : 어 그럼 어카죠

채하의 직업을 확인한 어스름이 화두를 던졌다. 일반 레이드에서는 탱커가 몬스터의 이목을 끌 수 있었다. 그리하여 탱커가 여럿일 경우에는 조율이 필요했다. 보통은 스펙이 더 좋은 유저가 어그로를 가져가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지만, 주현은 이 기회에 채하의 성기사 플레이를 확인하고 싶었다.

[파티] 블랙 : 단공님만 괜찮으시다면

주현은 키보드를 두드리다가 힐끔 채하의 닉네임을 살폈다. 어떻게 불러야 할지 모를 긴 닉네임에 눈동자가 잠시 흔들렸다.

[파티] 블랙 : 초코가 어그로 먹어도 될까요?

[파티] 블랙 : 성기사 연습 중이라서

[파티] 단공 : 넵넵 당근 가능하죵

[파티] 단공 : 방 만들게여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초코가 애칭이에요?

[ 초콜릿아이스크림님이 블랙님에게 고개 숙여 입을 맞춥니다. ]

대충 부른 이름이었는데 채하의 마음에 든 모양이었다. 주현은 제 캐릭터의 볼이 채하의 캐릭터 입술에 빨려 들어가는 걸 지켜보다가, 단공이 만든 대기실에 입장했다. 채하도 주현을 뒤따라 들어왔다.

[파티] 단공 : 초코님 커마 ㅈㄴ 익숙한데 뭐지???

입장한 자리에 우두커니 서 있던 단공은 제 뒤에서 등장한 채하의 캐릭터에 기시감을 느꼈다. 단공의 채팅에 반응한 블루베리가 가까이 다가와 채하의 캐릭터를 살피기 시작했다.

[파티] blueberry : ?

[파티] blueberry : 김민채 커마인데?

[파티] 단공 : ???????

[파티] 초콜릿아이스크림 : 초코라 부르지 마세요

눈썰미 좋은 블루베리는 금세 채하를 알아봤다. 채하는 평온 길드원이 정체를 밝혀내든 말든 그곳엔 관심이 없었고, 애칭인 초코를 마음대로 부르는 단공에게만 예민했다.

[파티] 단공 : 싸가지 없는 거 보니까 밍채 맞네;;;

[파티] 단공 : 블랙님 얘 뭐예요? 성기사 키운대요?

이럴 때면 채하가 평온 소속이 맞는지 의심스러웠다. 하지만 또, 채팅 한 번만으로 채하임을 확신하는 단공은 어지간히 친한 사이가 아니면 불가능한 일이었다.

[파티] 블랙 : 저도 잘..

[파티] 어스름 : ㅋㅋㅋㅋ 일단 출발하자

[파티] 단공 : 아 김밍채한테 탱 못 맡기는데

단공은 불안에 떨며 게임을 시작했다. 로딩이 끝나고 캐릭터가 맵에 진입하자, 오랜만에 보는 창이 떠올랐다.

[SYSTEM] 초콜릿아이스크림님이 단공님의 추방을 제안합니다.

제게 탱커를 맡기지 못하겠으면 나가라는 의미였다. 주현은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반대 키를 눌렀다. 추방 투표는 속전속결로 진행되어 결과가 나왔다.

[SYSTEM] 단공님의 추방 투표 결과입니다. 찬성 2명, 반대 2명으로 단공님을 추방할 수 없습니다.

[파티] 단공 : 와 ㅆㅂ 추방되는줄

[파티] 어스름 : 그럴까봐 반대했어 ^^

[파티] blueberry : 아쉽다

단공이 감격에 젖어 있는 동안 채하는 대검을 바닥에 질질 끌며 앞으로 나아갔다. 단공은 레이드를 역순으로 갈 계획인지, 이번 보스는 일곱 번째 인어 아그나였다. 악마 레이드를 제외한 일반 레이드에서 가장 강력한 보스인 셈이었다.

주현은 채하의 캐릭터를 불안한 눈빛으로 지켜보았다. 탱커는 몬스터의 어그로를 끌어 다른 파티원에게 원활한 공격 기회를 제공하는 역할이었다. 모든 공격을 맞받아친다면 그다지 아프지 않겠다만, 느릿한 대검의 속도에 채하가 잘 적응했을지가 관건이었다. 지금이라도 말을 철회해야 하나 고민하고 있을 때, 채하의 캐릭터가 호숫가에 발을 들였다.

잔잔하던 호수에 폭포가 솟아오르더니 푸릇한 잔디 위로 물방울이 후두둑 떨어지며 인어 아그나가 등장했다. 채하의 캐릭터가 대검을 하늘 위로 번쩍 들어 바닥에 힘껏 내리꽂았다. 몬스터의 이목을 집중시키는 스킬 ‘함성’이었다. 그에 아그나는 곧바로 고개를 돌려 채하가 있는 곳을 바라보았다. 주현은 채하가 잘하기를 바라면서 응원의 의미로 스킬 ‘기사의 맹세’를 보냈다. 그러자 채하에게서 답이 왔다.

《 기사의 맹세 》

채하가 같은 스킬을 주현에게 선물한 것이다.

[파티] 단공 : 저기요 둘이 뭐하는거임???

[파티] blueberry : 그럼 널 주겠냐?

[파티] blueberry : 단공 꿈 ㅈㄴ 크네

[파티] 단공 : ㅜㅜ 서러워 나도 커플 만들어야지

[파티] 단공 : 길마님 나랑 만날래요?

[파티] 어스름 : 아니 ^^

[파티] 단공 : ㅆㅂ 저런 사람한테도 까이네

[파티] blueberry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려했던 것과 달리 채하의 플레이는 안정적이었다. 성급하게 공격하지 않고, 끝까지 아그나의 행동을 주시하다가 반격을 날렸다. 생각해 보면 초창기 주현이 성기사로 고전할 때, 조언을 주던 게 채하였다. 그런 채하에게 가르침이 필요할 리가 없었다.

손색없이 말끔하게 아그나를 상대하는 채하를 지켜보며 주현은 홀로 벅찬 기분을 느꼈다.

[길드] 코쿄아 : 다들 수고하셨어여

[길드] 코쿄아 : 원님 너무 잘하세여

어느덧 코쿄아의 파티는 레이드를 모두 마쳤는지 수고했단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길드] westone : 원? 저요?

[길드] 코쿄아 : 네넹 ㅋㅋ

[길드] 코쿄아 : 랙님은 레이드 가셨나여?

[길드] westone : 블랙님이요?

[길드] 신사 : 랙?ㅋㅋㅋ 렉 같음

[길드] 암흑기사 : 블랙님 실력이 좀 렉 같긴 하지

[길드] 코쿄아 : 그런 뜻은 아니었는뎈ㅋㅋㅋ

[길드] westone : 블랙님 요즘 엄청 잘하시는데요

[길드] 신사 : 아직은 좀 더 배우셔야...ㅋ

제 캐릭터를 한 번, 채하의 캐릭터를 한 번, 채팅 창을 한 번. 주현의 눈동자는 이곳저곳으로 굴러다니느라 바빴다.

실력에 자부심을 느낀 적은 없으나 그렇다고 썩 못한단 생각도 들지 않는데, 길드원의 평가는 여전히 박하기만 했다. 유일하게 서쪽이 반박하긴 했으나 친한 사이인지라 그렇게 말한다고 믿어 주는 사람은 없었다.

[파티] 어스름 : 밍채 잘하네

[파티] blueberry : ㄹㅇ

[파티] blueberry : 단공 자르고 밍채 탱 써먹는거 어때요?

[파티] 어스름 : 찬성 ^^

[파티] 단공 : ㅆㅂ 제가 몇 년을 탱 섰는데 이렇게 배신 때린다고요?

[파티] 단공 : 블랙님 재앙에 자리 남나요?

[파티] 블랙 : 아뇨..

[파티] 단공 : 히잉 ㅠ

단공은 재앙에 들어오기에 아까운 인재였다. 물론 단공도 진심으로 길드를 옮길 생각은 아니겠다만. 어느새 체력을 모두 잃은 인어 아그나는 손으로 제 목을 조이며 호수 깊은 곳으로 돌아가 버렸다.

* * *

[여보♡] 형 언제 접속해요?

이제 막 컴퓨터 전원을 켠 주현은 밝아진 휴대폰 화면에 떠오른 톡 메시지 알림에 손가락이 멈칫했다. 대화방 상대 중, 저런 이름을 가진 인간은 없었던 거로 기억하는데…… 어쩌다가 임채하가 여보가 되었는지 확인하기 위해 주현은 팔을 뻗어 키보드 앞에 내려 둔 휴대폰을 쥐었다.

뭔가 했더니만 오픈 채팅이었다. 오픈 채팅은 상대방의 대화명을 멋대로 수정할 수 없었다.

성기사로 나타난 채하에게 별말 없이 어울려 줘서 그런지, 눈치 보느라 한동안 조용히 있던 채하가 자신감을 얻은 모양이었다. 채하가 하는 짓을 보면 웃겨서 주현은 이번에도 넘어가기로 했다.

[블랙] 지금

[여보♡] 네

언제나처럼 채하는 대답을 참 잘했다.

캐릭터 선택 창을 지나 밝은 베이지 톤의 채예스 광장이 펼쳐지자 채팅 창에서는 주현을 반기는 길드원들의 인사가 쏟아졌다. 코쿄아는 어김없이 이상한 별명을 주현에게 붙였다.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코쿄아 : 랙님 어서와여

[길드] 신사 : 렉 ㅋㅋ 어서오세요 블랙님

[길드] 월월월 : 블랙님 ㅎㅇㅎㅇ염

[길드] westone : 블랙님

[길드] 블랙 : 이번주 악마 다 갔어요

[길드] westone : ㅠㅠ

서쪽의 제의를 빠르게 차단한 뒤 주현은 채하를 찾아서 캐릭터를 움직였다. 평소 서쪽을 마음에 들어 하던 코쿄아는 기회를 틈타 파티를 제안했다.

[길드] 코쿄아 : 원님 그럼 저랑 7인어 가여 ㅋㅋ

[길드] 레아 : 혹시 저도 따라가도 될까요?!

[길드] 코쿄아 : 무기 20강만 돼엽 ㅎㅎ

[길드] 레아 : 아 ㅠㅠ 네

[길드] 코쿄아 : 더 가실분 계신가여?

[길드] 잔혹동화 : 저요

[길드] 코쿄아 : 힐러는 끝나서여 ㅎ

레아는 주현보다 장비가 별로였으니 코쿄아가 단칼에 거절하는 게 이해가 됐다. 하지만 어둠 20강 무기를 착용한 잔혹동화가 안 된다는 건 의아했다. 잔혹동화의 직업은 연금술사로, 유저가 어떻게 운용하느냐에 따라 포지션은 얼마든지 달라질 수 있었다. 힐러가 다섯 명이면 모를까 겨우 두 명인데 까다롭게 구는 코쿄아가 주현은 미심쩍게 느껴졌다.

[길드] westone : 전 패스요

친한 길드원이 줄줄이 퇴짜를 맞으니 서쪽도 슬쩍 발을 뺐다. 이쯤 되니 서쪽은 통과이고 레아, 잔혹동화, 주현은 자격 미달인 이유가 궁금해졌다.

[길드] 코쿄아 : 원님 바쁘세여???

서쪽이 거부 의사를 내보이자 아쉬웠는지 코쿄아가 채팅으로 치근덕댔다. 서쪽이 먼저 주현에게 악마 레이드를 제안했으니 바쁘다는 핑계는 통하지 않을 터였다. 그리하여 서쪽은 그럴싸한 변명을 만들어냈다.

[길드] westone : 악마 레이드 먼저 가려고요

[길드] 코쿄아 : 담에는 꼭 같이 가여

주현은 평소처럼 친구 창을 열어 초콜릿아이스크림의 위치를 확인했다. 위치가 표시되지 않는 걸 보고 나서야, 초콜릿아이스크림과는 커플이 아니란 걸 기억했다. 이럴 때면 커플 기능 중 하나인 위치 확인이 얼마나 편리했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주현은 채하가 혹시나 거래소에 가 있을까 싶어 상가 쪽으로 방향을 틀었다.

거래소로 가는 길에 보이는 상점마다 들어가 봤지만, 채하의 캐릭터는 머리카락조차 보이지 않았다. 이윽고 거래소 NPC가 있는 곳에 도달했다. 그 앞에는 월월월과 코쿄아가 서 있었다.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에게 : 채하야 너 어디야?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형 마음속이요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에게 : ㅅㅂ

주현은 웃고 있는 입매를 손가락으로 매만지다가 문득 심각성을 느꼈다. 진부한 농담도 채하가 하면 웃기는 지경에 이르렀다. 임채하한테 너무 무른 거 아닌가. 이대로면 머지않아 채하에게 넘어갈 것 같았다. 곰곰이 생각해 보면, 넘어가지 말아야 할 이유도 없었다.

주현이 싫어하는 짓만 골라 하던 녀석이, 이제는 주현이 좋아하는 것들로만 무장한 채로 다녔다. 술자리나 친목 도모 모임에서는 빠져나갈 궁리만 하던 임채하가 주현과는 만나고 싶어서 안달이었다. 과거의 주현이 지켜보았던 채하의 성질머리로는 이렇게 무시당했으면 포기하고 말았을 텐데, 계속 저자세로 나오니까 사람이 정말 달라진 게 아닐까 은근히 기대하게 되었다.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형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저 왔어요

채하의 캐릭터가 뒤에서 불쑥 나타나 생글생글 미소 지었다.

주현은 자신이 언제까지나 채하와의 기억에 갇혀 있지 않은 것처럼, 채하도 변했다는 걸 인정하기로 했다.

[전체] 코쿄아 : 월월님 7인어 가실래여?

생각에 젖어 있던 주현은 채팅 창에 떠오른 말에 곧장 현실로 끌려올 수밖에 없었다. 월월월은 무기가 20강이 아닐뿐더러 직업도 힐러인 음유시인이었다. 길드에 그 어떤 유저보다 자격 미달인 월월월에게 코쿄아가 손을 내밀고 있었다.

“……뭐 하는 놈이지?”

모니터를 본 주현이 어이없어하며 중얼거릴 때였다.

[ 초콜릿아이스크림님이 블랙님에게 고개 숙여 입을 맞춥니다. ]

별안간 채하가 감정 표현을 사용해 입을 맞췄다. 채팅 창에 떠오른 메시지에 월월월과 코쿄아가 나란히 뒤를 돌아보았다.

본인 마음에 드는 유저를 버스 태워 주는 게 게임 문화라지만, 코쿄아는 무슨 꿍꿍이인지 유독 앞뒤가 맞지 않았다. 대화를 더 지켜보고 싶었으나 채하가 감정 표현으로 위치를 알린 탓에 기회는 이미 바람에 흩날려 사라져 버렸다.

[전체] 월월월 : 블랙님?

[전체] 블랙 : 거래소 시세 보려고 왔는데

[전체] 블랙 : 두 분 얘기하고 계셔서요

[전체] 월월월 : ㅋㅋㅋㅋ 시세 보세염

주현이 머쓱한 눈치로 상황을 설명하자, 켕길 게 없는 월월월은 웃으면서 옆으로 자리를 비켜 주기까지 했다. 주현은 아이템 시세 따위 궁금하지 않았지만, NPC에게 다가가 검색하는 척 연기를 해야 했다. 그 옆에서 채하가 얼쩡거리며 시선을 끄는 건 덤이었다.

[전체] 코쿄아 : 랙님 인기 많으시네여 ㅋㅋ

주현은 코쿄아가 민망해할 줄 알았다. 레아와 잔혹동화를 그렇게 내쳤으니, 똑같이 자격 미달인 월월월에게 제안하던 것에 부끄러움을 느껴야 마땅했다. 하지만 코쿄아는 오히려 떳떳한 태도로 여유롭게 장난을 치기까지 했다.

게임에서 만난 사람들은 대부분 대놓고 욕하는 부류였던 터라, 속내 깊은 곳이 음침한 코쿄아는 주현에게 어렵게 느껴졌다.

[전체] 블랙 : 아 네

인기라고 할 거까지야 없었지만, 대꾸는 해야 했으니 대충 긍정했다. 그러자 채하가 조금 더 엉겨 붙으며 감정 표현을 쏟아 냈다. 호시탐탐 제 캐릭터 입술을 노리는 채하의 캐릭터를 보며 헛웃음 짓고 있을 때였다.

[전체] 코쿄아 : 랙님은 커플 자주 바뀌시네여

[전체] 코쿄아 : 어디서 만나는 거예여???

코쿄아가 주현과 채하의 캐릭터 주변을 빙글빙글 돌며 관찰하다가 질문을 던졌다. 답을 바랐던 건 아닌지 또다시 혼자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전체] 코쿄아 : 아 아직 커플 밍채님이구나..

주현은 확신할 수 있었다. 코쿄아는 초콜릿아이스크림의 정체가 채하라는 걸 모른다. 평온에서 채하는 성직자 외 다른 직업을 단 한 번도 선택한 적이 없기에, 코쿄아는 오해할 수밖에 없는 상황이었다.

그런 코쿄아가 이 자리에서 밍채를 언급하는 건, 주현을 곤란하게 만들기 위해서였다.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형 저 두고 밍채랑 바람피우는 건 봐줄게요

주현이 코쿄아의 의도를 파악하려 머리를 굴리는 와중에도 채하는 헛소리를 지껄였다.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에게 : 너 말하지 말아봐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네

주현의 부탁에 채하는 이유를 물어보지도 않고 알겠다고 답했다. 이럴 때면 채하가 말을 잘 들어서 다행이었다.

[전체] 블랙 : 광장에서요

초콜릿아이스크림으로 온 채하와 마주친 게 채예스 광장이었으니 마냥 거짓말은 아니었다. 코쿄아가 모든 걸 내보이지 않는 만큼 주현도 교묘하게 답을 피해 갔다.

[전체] 코쿄아 : 아 ㅋㅋㅋ

[전체] 코쿄아 : 전 이제 성기사 키우러 가야겠어여

[SYSTEM] 길드원 코쿄아님이 퇴장하셨습니다.

[전체] 월월월 : ?????

더는 할 얘기가 없는지 코쿄아는 서둘러 자리를 벗어났다. 지켜보던 월월월은 어리둥절하기만 했다. 코쿄아가 사라지자 채하는 다시 주현의 캐릭터를 향해 애교를 부려댔다.

[귓속말] 월월월 : 저분이 밍채님 아니에염???

[귓속말] 월월월에게 : 맞는데.. 비밀로 해주세요

[귓속말] 월월월 : ㅋㅋㅋㅋㅋ 넴

이 자리에 서쪽은 없지만, 서쪽도 초콜릿아이스크림을 보았다면 금방 채하라는 걸 알아봤을 테다. 주현이 어리광을 받아 주는 유일한 사람이 채하였으니까. 채하가 아무리 성직자만 키운다고 하더라도, 한 번쯤은 의심해 볼 법한데 코쿄아의 사고는 이상한 곳으로 튀었다.

[SYSTEM] 길드원 꼬꼬아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신사 : 꼬꼬댁ㅋㅋ

[길드] 꼬꼬아 : 닭 아니에여 ㅋㅋㅋ

[길드] 꼬꼬아 : 성기사 제대로 키워볼건데

[길드] 꼬꼬아 : 닉 살까여?

[길드] 암흑기사 : 사고 싶은거 있음?

[길드] 꼬꼬아 : 모르겠어여 ㅋㅋㅋ 혼설 닉 비싼가여?

[길드] 신사 : 블랙님 닉이 30이던데

[길드] 신사 : 난 닉 사는거 비추 ㅋㅋ 그 돈 스펙에 투자함

주현은 닉네임에 투자한 30만 원을 단 한 번도 아깝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의미 있는 두 글자 닉네임은 10만 원을 훌쩍 넘는 경우가 흔했다. 이 정도면 싸게 구한 편이었다. 상대가 닉네임을 판매할 의사가 있어야 구매할 수 있는 구조였으니, 닉네임 구매에는 운도 따라야 했다. 주현은 당시 블랙 닉네임을 사용하던 유저가 게임을 접으면서 타이밍 좋게 닉네임을 받아갔다.

[길드] 꼬꼬아 : 30이여.......????????

[길드] 꼬꼬아 : 랙님 돈 진짜 많으신가보네여

[길드] 꼬꼬아 : 블랙 30 주고 살 닉은 아니지 않아여?

[길드] 레아 : 블랙님은 만족하시는데요?!

[길드] 꼬꼬아 : 랙님 돈 아까워서 그래여 ㅋㅋ

예전 같았으면 자신이 예민한 탓이라고 넘겨 버렸을 텐데, 지금은 코쿄아가 일부러 자극한다고 확신했다. 저런다고 뭘 얻어가는 건지, 코쿄아의 의중을 알 수 없었다. 불필요한 말다툼을 벌이고 싶지 않아서 애써 채팅 창에서 시선을 떼려고 하는데, 코쿄아가 또다시 주현을 언급했다.

[길드] 꼬꼬아 : 랙님

[길드] 꼬꼬아 : 저 신사님한테 성기사 배울건데

[길드] 꼬꼬아 : 랙님이랑 그분도 같이 가실래여???

[길드] 신사 : 그분?

[길드] 꼬꼬아 : 성기사 뉴비? 같아여

[길드] 신사 : ㅋㅋ

[길드] 신사 : 두분 다 오세요

[길드] 꼬꼬아 : 제가 파티 만들게여

코쿄아가 성기사 캐릭터로 접속해 대화를 이어 가는 동안, 주현은 대답 한번 한 적 없지만 얼떨결에 파티에 끌려가게 되었다. 또 어떤 말로 신경을 긁어 놓을지 몰라서 주현은 파티 초대를 거절했다. 괜히 시간 들여서 힘을 빼고 싶지 않았다.

[길드] 꼬꼬아 : 랙님 왜 거절하세여 ㅠㅠ

[길드] 꼬꼬아 : 지인분은 파티에서 랙님 기다려요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에게 : 너 파티 받았어?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네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에게 : 왜?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초대가 와서요

웃긴 녀석이었다. 단공의 초대는 몇 번이고 거절해 놓고, 코쿄아의 초대는 단번에 수락하다니. 주현은 하는 수 없이 언제 터질지 모르는 폭탄이 세 개나 있는 파티에 합류하게 되었다.

[파티] 신사 : 초콜릿님 기본은 하시나?

[파티] 초콜릿아이스크림 : 네

신사의 말을 무시할 줄 알았는데 채하가 냉큼 대답했다. 채하가 신사에게 너보다 잘한다고 대놓고 말을 할까 봐 마음을 졸이고 있을 때였다. 채하는 신사를 골리는 말이 아닌 색다른 선택지를 골랐다.

[파티] 초콜릿아이스크림 : 블랙님이 잘 가르쳐주셔서요

채하가 혼돈의 설화에서 가장 싫어하는 인간이 신사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었다. 왜 코쿄아의 초대를 받았을까, 왜 신사가 있는 걸 보고도 파티를 탈퇴하지 않았을까. 채하가 파티에 합류한 의도를 궁리하던 주현은 답을 찾아낼 수 있었다.

[파티] 신사 : 블랙님을 제가 가르쳤는데 ㅋㅋ

[파티] 초콜릿아이스크림 : 원래 잘했는데요

[파티] 신사 : 초창기 블랙님을 보셨어야 함....ㅋㅋ

[파티] 초콜릿아이스크림 : 봤는데요

[파티] 꼬꼬아 : 랙님이 그렇게 실력이 좋아여???

[파티] 초콜릿아이스크림 : 네

[파티] 꼬꼬아 : 초콜릿님 그럼 저랑 대련하실?

채하는 어느 하나 놓치지 않고 모든 말을 받아쳤다. 주현을 모욕하는 사람들을 절대 내버려 둘 수 없는 것처럼 굴었다.

채하는 코쿄아가 먼저 대련을 제안하기만을 기다렸을 것이다. 먼저 시비를 걸면 주현이 좋아하지 않을 테니까. 코쿄아를 도발해 합당하게 싸울 기회를 만들어 냈다.

그 성질머리를 꾹 참고 있었다니. 주현은 심장이 바짝 조이는 느낌이 들었다.

[파티] 블랙 : 아뇨

[파티] 블랙 : 초콜릿이 성기사 키운 지 얼마 안 돼서요

[파티] 꼬꼬아 : 아 ㅋㅋㅋ 봐드릴게여 ㅎㅎ

[파티] 꼬꼬아 : 저도 성기사한지 얼마 안됐어여 ㅎ

[파티] 초콜릿아이스크림 : 해요

[파티] 블랙 : 초콜릿아

[파티] 꼬꼬아 : 초콜릿님은 한다는데여 ㅋㅋㅋ

[파티] 초콜릿아이스크림 : 어차피 제가 이길 건데

[파티] 신사 : ㅋㅋ

[파티] 블랙 : 초콜릿아..

주현이 애타게 불러도 채하는 묵묵부답이었다. 꼬박꼬박 대답을 잘하던 과거의 채하는 어디로 간 건지. 정말로 둘이 대련이라도 할까 봐 가슴이 조마조마했다.

코쿄아의 무기는 어둠이었고, 채하는 보급 장비였다. 대련에는 공격 속도와 치명타 저항 수치가 반영되기 때문에 채하가 불리할 터였다.

[파티] 신사 : 블랙님은 불안하신가봄

[파티] 신사 : 자신이 없으신가?

[파티] 블랙 : 이제 막 배우기 시작했다니까요

[파티] 블랙 : 그치 초코야

[파티] 초콜릿아이스크림 : 네

“뭐야.”

방금까지는 부르는 걸 모조리 무시하더니 이제는 또 호응을 해 줬다.

[파티] 꼬꼬아 : 초코님 할거예여?

[파티] 초콜릿아이스크림 : 초코라고 부르지 마세요

주현은 기가 막혀서 키보드에 올려 둔 손가락이 파르르 떨렸다. 초코가 아니라 초콜릿이라고 불러서, 채하가 내내 대답하지 않던 거였다. 정말 채하의 머릿속은 예측할 수도, 따라갈 수도 없었다.

[파티] 꼬꼬아 : 그럼 초아님?

코쿄아는 길드원들에게 하던 것처럼 괴상한 별명을 만들어 냈다. 채하는 그런 코쿄아가 한심한지 대꾸조차 해 주지 않았다.

[파티] 블랙 : 해요

마음을 바꾼 주현이 채하를 대신해 답했다. 만약 채하가 지더라도, 주현이 코쿄아에게 조롱 좀 받으면 되는 일이었다. 그건 일상 같은 일이라 이제 와서 불편하게 느껴질 것도 없었다.

[길드] 꼬꼬아 : 대련 구경 오실분 있으세여???

[길드] westone : 누구랑 해요?

[길드] 꼬꼬아 : 블랙님 제자여 ㅋㅋ

[길드] westone : 블랙님이 제자가 있어요..?

아직 초콜릿아이스크림을 본 적 없는 서쪽은 금시초문이란 반응이었다.

파티를 해체한 코쿄아가 다시 방을 개설하고 객석으로 길드원을 차례차례 초대했다. 왜 이렇게 대련에 집착을 하나 했더니, 길드원이 보는 앞에서 망신을 주고 싶었던 모양이다. 코쿄아의 바람대로 채하가 순순히 져 줄지는 모르겠다만.

[전체] westone : 두분 왜 대련하는 거예요?

[전체] 꼬꼬아 : 신사님하고 블랙님 중에 누가 더 잘 가르치는지? 확인하려구여 ㅋㅋ

[귓속말] westone : 당연히 블랙님 아니에요?

서쪽은 코쿄아를 친구로 여길지 몰라도, 여전히 신사를 싫어했다. 코쿄아의 말이 끝나기 무섭게 도착한 귓속말에 주현은 시원하게 웃었다.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그런데 제자가 있었어요?

[귓속말] westone에게 : 제자 아니에요

[귓속말] westone : ??

[귓속말] westone : 아 ㅋㅋㅋㅋㅋ

서쪽도 뒤늦게 초콜릿아이스크림의 커스터마이징을 확인했는지 상황 파악을 끝마쳤다.

[귓속말] westone : 밍채님 성기사도 키우시네요?

채하의 성직자 사랑이야 직업 수호자 업데이트 때도 이어졌으니 서쪽도 잘 알고 있었다.

[전체] westone : 초콜릿님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네

주현과 대화하던 서쪽은 느닷없이 전체 채팅으로 채하를 불러세웠다.

[전체] westone : 이젠 아이스크림 좋아하세요?

그리고 알 수 없는 질문을 던졌다.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원래 좋아했어요

[전체] 꼬꼬아 : 원님 초아님이랑 아는 사이예요?

아이스크림을 싫어한다고 했었나. 아마도 서쪽이 한창 아이스크림을 사 주겠다고 난리를 피웠을 시기의 일인 듯했다. 저를 놀리는 게 명백한 질문인데도 채하는 성실히 답변했다. 그에 코쿄아는 힌트를 얻을 수 있었다.

[전체] 암흑기사 : 언제 시작함?

[전체] 꼬꼬아 : 지금이여

객석에서 기다리던 암흑기사가 재촉하자 방장인 코쿄아가 대련을 시작했다. 경기장 양 끝에 서 있던 둘은 카운트다운이 끝나자마자 서로에게 성큼성큼 다가갔다. 선공은 코쿄아의 몫이었다. 바람을 가르고 휘둘러지던 검날이 채하의 캐릭터가 쥔 대검에 묵직하게 부딪혔다.

[전체] 레아 : 두분 다 고수 같아요!!!

경기를 흥미진진하게 지켜보던 레아가 해맑게 감탄했다. 겉모습은 둘 다 멀쩡했으니 레아의 눈에는 그렇게 보일지 몰라도, 암흑으로 무장한 채하의 옷차림 뒤에 숨은 보급 장비를 아는 주현은 숨도 제대로 쉬지 못하고 채하의 검날을 뚫어지게 응시했다.

채하가 방어에 성공했다. 반격을 날릴 줄 알던 채하는 대뜸 동작을 끊어 버렸다. 연계 공격보다는 반격 대미지가 더 나을 텐데. 채하의 판단에 주현이 미간을 찌푸릴 때였다.

[ 초콜릿아이스크림님이 블랙님에게 애교를 부립니다. ]

감정 표현을 끝낸 채하의 캐릭터는 또다시 코쿄아의 검을 완벽히 막아 냈다. 긴장이 맥없이 풀려 버렸다. 임채하를 상대로 걱정이라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여유롭게 감정 표현 따위를 객석으로 날리는 채하가 코쿄아에게는 얼마나 얄미워 보일까.

[귓속말] westone : 화해하셨나요?

[ 초콜릿아이스크림님이 블랙님에게 사랑을 고백합니다. ]

[귓속말] westone : 하셨겠네요..

귓속말을 통해 질문하던 서쪽은 홀로 결론을 내렸다.

공격을 모두 막아 내는 것도 코쿄아 입장에선 열 받는 일인데 중간에 감정 표현까지 섞어 가며 느긋하게 싸우니 어느 때보다 채하가 재수 없게 느껴질 테다. 유치하다고 질색해야 할 상황에 주현은 실실 웃고 있었다.

이렇게 채하가 타인에게 적개심을 보일 때면, 주현은 과거의 기억에 젖어 들게 되었다. 한때 일부러 아메리카노를 가져다주던 녀석이, 이제는 주현을 대변하여 코쿄아를 상대하고 있었다.

[전체] 꼬꼬아 : 키 설정 잘못해서 실수했네여 ㅠ

채하의 대검이 코쿄아의 정수리를 가르고, 체력을 모두 잃은 코쿄아는 시체가 되어 경기장 구석으로 밀려났다. 신사의 제자 아니랄까 봐, 고리타분한 변명에 주현은 혀를 찼다. 패배를 인정하지 못하고 구질구질하게 구는 게 아주 똑같았다.

[전체] 신사 : 초콜릿님 밍채님인가?ㅋㅋ

[전체] 꼬꼬아 : 그래여???

[전체] 꼬꼬아 : 그럼 지는게 맞네여 ㅋㅋㅋ

경기를 쭉 지켜본 신사는 감정 표현 때문인지 초콜릿아이스크림의 정체가 채하라는 추리를 해냈다. 그 말에 키 설정 탓을 하던 코쿄아가 단번에 태도를 바꿨다. 이럴 때면 코쿄아가 왜 어스름과 채하가 나눈 말을 제게 전해 줬는지, 주현은 더더욱 의도를 예측할 수 없었다.

[전체] 신사 : 블랙님

[전체] 블랙 : 네

채하가 가져온 승리에 제 일처럼 뿌듯해하고 있자, 신사가 주현을 불렀다.

[전체] 신사 : 저랑 대련해볼래요?

[전체] 암흑기사 : ㅋㅋㅋㅋㅋㅋㅋ 너무하네 블랙님 실력 알면서

코쿄아가 채하에게 졌으니, 신사가 승리를 따내 자존심이라도 챙겨 보겠단 궁리인 듯했다. 주현은 질 게 뻔한 싸움에 덤벼드는 취미 따위 없었다. 냉큼 거절하려고 하는데 채하와 코쿄아가 객석으로 캐릭터를 이동시켜 자리를 비켜 주었다.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이건 기회예요

신사는 경기장 안에 제 캐릭터를 집어넣고 주현이 들어오기만을 기다렸다.

주현은 이 싸움이 내키지 않았다. 신사와 코쿄아는 원래도 주현을 얕잡아 봤으니, 주현이 진다고 손해를 볼 건 없었다. 하지만 채하는 달랐다. 제 승패 때문에 채하가 낸 성과가 폄하될 걸 생각하면 야유를 받더라도 대련을 피하고 싶었다.

[전체] 신사 : 블랙님 안할거임?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형이 이겨요

주현이 어떤 걱정을 하는지 뻔히 예상한 채하가 귓속말을 통해 응원을 보내왔다.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형 저는 못 따라다니게 하려고 이 악물고 죽였으면서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에게 : ㅅㅂ 내가 언제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쟤는 왜 봐줘요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서운해요

주현은 한숨을 삼키며 캐릭터를 경기장에 입장시켰다. 방장인 코쿄아가 게임을 시작했는지 화면 한가운데에 카운트다운이 떠올랐다.

‘어떻게 하면 신사를 이길 수 있을까.’

시시로와의 대련처럼 조건이 걸린 내기가 아닌데도, 그때보다 더한 긴장감에 마우스를 붙든 손이 무거웠다. 숫자가 화면에서 사라지자 주현은 캐릭터를 앞으로 움직였다. 반대편에서 신사가 부리나케 달려오고 있었다.

신사가 공격 범위 안에 들어온 순간, 주현은 캐릭터를 멈췄다. 마우스를 클릭하여 대검을 휘두르자 신사가 재빨리 검날을 세워 방어 자세를 취했다. 주현은 스페이스 바를 눌러 공격 동작을 끊어 버렸다. 방어에 성공하지 못하면 반격 또한 할 수 없었다.

신사의 검이 내려가는 타이밍에 맞춰서 스킬을 눌렀다. 주현의 캐릭터가 신사에게 어깨를 부딪쳤고, 그대로 몸을 들이받은 신사는 뒤로 밀려나며 자세가 엉망이 되었다.

‘이렇게 쉽다고?’

신사가 봐주는 게 아닐까, 마음 한편에 의심이 피어올랐다. 어쨌든 승리를 해야 했으므로 다양한 방법으로 신사를 쉴 틈 없이 두들겨 팼다. 신사가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켜 반격이라도 할까 봐 내내 불안에 떨었는데, 시체가 되어 뒤로 자빠지는 순간까지 역전당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이겼다고?”

온갖 공격을 퍼부으니 얼떨결에 신사를 이겼다. 객석에 수많은 증인이 있었지만, 혹시 몰라 스크린 샷도 찍어 두었다. 승리 표시가 뜬 화면을 한 번 찍고, 객석에 앉아 있는 채하가 보이도록 마우스로 방향을 돌릴 때였다. 방장인 코쿄아가 방을 터뜨렸는지 주현은 상가로 돌아왔다.

“……아.”

채하와도 한 장 찍고 싶었는데, 코쿄아 때문에 물 건너가 버렸다. 주현이 탄식하는 동안 신사는 길드 채팅으로 코쿄아와 똑같은 변명을 늘어놓고 있었다.

[길드] 신사 : 키보드가 고장 났는지 키가 안 먹혔음 ㅋㅋ

[귓속말]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귓속말] westone : 와 진짜..

서쪽은 신사의 뻔뻔함에 경탄했다. 주현의 생각은 달랐다. 조금 전 신사의 플레이를 떠올려보면, 정말로 키가 고장 났을 수도 있었다. 키가 고장 난 수준의 실력이었다는 말이다. 주현은 신사의 키보드가 고장이 난 게 맞길 바라며 채하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에게 : 채하야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에게 : 아이스크림 사줄게 나올래?

한심하게 여기던 멘트를 임채하에게 써먹는 순간이 올 줄은 몰랐다.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네

채하에게서 온 답을 확인한 주현은 옷걸이에 걸어 두었던 패딩을 꺼내 주섬주섬 챙겨입었다. 나갈 채비를 마치고 마지막으로 채팅 창을 확인하는데 신사와 코쿄아가 채하에 대해 떠들고 있었다. 제 얘기면 몰라도, 채하의 얘기는 그냥 지나칠 수 없었다. 주현은 다시 의자에 털썩 앉아 마우스를 붙잡았다.

[길드] 신사 : 밍채님은 갑자기 성기사 키우네 ㅋㅋ 성직자 질리셨나?

[길드] 꼬꼬아 : 저 초아님이 밍채님인지 진짜 몰랐어옄ㅋㅋ 평온에서 부캐 키우실때는 다 성직자던뎅

[길드] 신사 : 닉네임이 초콜릿아이스크림........ㅋ

[길드] 꼬꼬아 : 닉이 너무 밍채님 안 같아여

그렇겠지. 채하는 원래 제 이름을 비틀어서 만드는데, 초콜릿아이스크림이나 컬러수집가는 주현의 영향을 받아서 지은 닉네임이었다.

[길드] 신사 : 좀 많이 유치..ㅋㅋㅋ

[길드] 레아 : 밍채님 나이에 잘 어울리는데요?!

[길드] 신사 : 밍채님이 몇 살인데요?

[길드] 꼬꼬아 : 저도 궁금

[길드] 블랙 : 중2요

중학교를 진작에 졸업한 대학생이었지만, 신사는 진실을 알 길이 없었다. 이기려고 아득바득하던 게 구차해 보이게끔 주현은 거짓말을 택했다.

[길드] 신사 : 랭킹이 저런데 중2? ㅋㅋㅋ 그걸 믿어요?

[길드] 블랙 : 네

[길드] westone : 밍채님 중2 맞는데요??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 진짜 중2예염

[길드] 신사 : ?

채하가 컨셉질에 진심이었던 덕에, 그동안 채하와 파티를 함께 다녔던 길드원들이 편을 들어줬다. 주현은 혼란스러워하는 신사를 내버려 두고 자리에서 일어났다.

* * *

임채하는 지금 삐쳤다.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어떻게 아이스크림만 주고 갈 수가 있어요?

채하와 만난 곳은, 지난여름 3년 만에 재회했던 인근 편의점이었다. 편의점에 들어가 아이스크림을 종류별로 쓸어 담고 결제까지 마친 주현은 채하가 오길 기다렸다가 잽싸게 봉투를 품에 밀어 넣고 등을 돌렸다. 직전 보였던 얼빠진 얼굴에 집으로 돌아오는 동안 혼자 피식거렸다.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에게 : 밖에서 먹으면 감기 걸려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에게 : 춥잖아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집도 추워요

말은 저렇게 해도, 부루퉁한 얼굴로 아이스크림을 베어 먹고 있을 게 훤했다.

자신을 위해 나서 준 게 고마워서 아이스크림을 사 주겠다고 한 건데, 패딩을 팔에 꿰어 입고 나니 계절이 겨울이란 걸 상기했다. 날이 어두워지니 아이스크림 전문점은 모두 문을 닫아 버려서 갈 곳이라곤 24시간 운영하는 편의점이 전부였다.

말을 철회하기엔 채하가 너무 기대하고 있는 눈치라서 어쩔 수가 없었다.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에게 : 다음에 또 사주면 되지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언제요?

채하와 만나기 싫어서 약속 잡는 걸 피했던 게 엊그제 같은데, 주현은 채하에게 여지를 남기고 있었다.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에게 : 네가 먹고 싶을 때

* * *

[SYSTEM] 길드원 블랙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westone : 블랙님

[길드] 블랙 : 악마 다 갔잖아요

[길드] westone : 일반 레이드예요 ㅎㅎ

[길드] 블랙 : ㅅㅂ

[길드]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레아 : 서쪽님이 블랙님 오면 갈거라고 하셨어요

[길드] 블랙 : 제가 언제 오는 줄 알고요

[길드] westone : 아 뻔하죠 ㅋ

[길드] 잔혹동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주말 아침이라 그런지 길드 접속 인원은 평소 부지런하게 게임을 하던 유저들이었다. 친구 창을 확인하자 채하는 아직 일어나지 않았는지 로그아웃 상태였다. 주현은 서쪽의 초대를 받고 파티에 입장했다. 서쪽의 말에 웃으며 반응했던 레아와 잔혹동화가 파티에 속해 있었다.

[길드] 코쿄아 : 어디가여?

일반 레이드 최대 인원은 다섯 명. 현재 인원은 네 명. 마침 한 자리가 비었지만, 파티원 중 무려 세 명이 코쿄아가 싫어하는 유저였으니 그런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듯했다. 주현이 그렇게 안심하며 찌뿌둥한 어깨와 손목을 풀고 있을 때였다.

[길드] westone : 7인어 먼저 가고 시간 남으면 다른 것도 가려고요

[길드] westone : 밍채님 오시면 블랙님 돌려 드려야 해서 ㅋㅋ

[길드] 블랙 : ㅅㅂ

[길드]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코쿄아 : 자리 남아여?

[길드] 코쿄아 : 저 갈래여

천장을 향해 팔을 뻗던 주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본인이 조건 따져 가면서 사람들을 거절했던 건 까맣게 잊었는지 같이 가겠다고 말을 꺼내는 모습이 뻔뻔스러웠다. 정말 함께 가는 걸까 싶어서 채팅 창에서 눈을 떼지 못하고 있는데, 코쿄아가 별안간 사라져 버렸다.

[SYSTEM] 길드원 코쿄아님이 퇴장하셨습니다.

[파티] westone : 팅기셨나?

파티장인 서쪽이 어리둥절해하고 있자, 코쿄아가 빠르게 복귀했다.

[SYSTEM] 길드원 꼬꼬아님이 입장하셨습니다.

성기사 부캐인 꼬꼬아로.

레아의 스태프가 16강, 주현의 대검이 18강이었다. 코쿄아의 무기는 이전보다 한 단계 오른 13강으로 파티원 중 가장 장비가 안 좋았다. 무기만 어둠이었고 방어구는 전부 보급 장비로, 보스에게 몇 대 얻어맞으면 바로 체력이 녹아 버릴 테다.

[SYSTEM] 꼬꼬아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이제 와서 안 된다고 하기에도 어려운 상황이었다. 코쿄아가 서쪽의 초대를 받고 파티에 입장했다.

길드의 장점은 길드 전용 버프를 누릴 수 있는 것, 레이드에서 실수하더라도 별말 없이 넘어가는 것 등이었다. 단점은 이외의 나머지였다. 주현은 오늘도 친목 길드의 단점을 하나 더 알아가게 되었다.

[파티] 꼬꼬아 : 안녕하세여

[파티] 잔혹동화 : 안녕하세요

[파티] 꼬꼬아 : 우왘ㅋㅋ 이 파티는 여자가 더 많네여?

[파티] westone : ?

코쿄아의 말대로 파티에는 남자보다 여자가 더 많았다. 레아, 서쪽, 잔혹동화까지 총 세 명. 하지만 이건 주현의 기준에서 보았을 때의 답이었다. 코쿄아는 서쪽이 여자란 걸 몰라야 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ㄴㄴㄴㄴㄴㄴ

[귓속말] westone에게 : 잠시만요

[귓속말] westone : 네??

황급히 서쪽을 말리자, 서쪽은 당황스러워하면서도 일단은 주현을 믿고 채팅을 멈췄다.

[파티] 꼬꼬아 : 곧 발렌타인데이인데 여친한테 뭐 사줄지 고민이에여 ㅠㅠ

[파티] 레아 : 여자친구가 갖고 싶다고 말한 건 없나요?!

[파티] 블랙 : 현금이요

[파티] 꼬꼬아 : 랙님 현금 좋아하시는구나 ㅋㅋㅋ

[파티] 꼬꼬아 : 랙님은 기념일 때도 현금 받아여???

[파티] 블랙 : 네

[파티] 꼬꼬아 : 랙님 너무 속물 같아옄ㅋㅋ

[파티] 꼬꼬아 : 랙님은 남친한테 뭐 줘여? 똑같이 현금?

[귓속말] westone : ????????

[귓속말] westone에게 : 그래서 제가 기다리라고 한 거예요..

[귓속말] westone : ㅁㅊ 이게 뭐예요?????????

주현은 길었던 수수께끼의 해답을 드디어 알아낼 수 있었다. 코쿄아가 견제하던 레아, 잔혹동화, 주현은 공통점이 하나 있었다. 코쿄아가 여성 유저라고 인식하고 있다는 것.

[파티] 블랙 : 남친이 없어서요

순간 남친 타령하는 채하가 떠올랐지만, 정신을 차리고 마저 키보드를 두드렸다. 질문에 대답했다가 스크린 샷이라도 찍혀서 넷카마라고 오해받으면 곤란했다. 주현은 진실과 거짓을 적절히 섞어 코쿄아를 교란했다.

[파티] 꼬꼬아 : 그럼 기념일 선물 받았단 건 머예여 ㅋㅋㅋㅋ

[파티] 꼬꼬아 : 겜에서 받은거예여?

[파티] westone : 방 만들었어요

상황이 어떻게 돌아가는지 계산을 끝낸 서쪽이 코쿄아의 말을 끊어 버렸다.

주현은 대기실에 입장하면서 이 일을 어떻게 헤쳐 나가야 할지 고민해 봤지만 특별한 해결책이 떠오르지 않았다. 코쿄아의 오해를 풀어 주면 주현은 빠져나갈 수 있을지 몰라도 그건 명쾌한 방법이라고 할 수 없었다. 남은 레아와 잔혹동화는 여전히 코쿄아가 있는 파티엔 들어갈 수 없을 테고, 그건 길드의 여성 유저라면 누구든 겪을 수 있는 일이었다.

보통 이런 일은 길드 마스터에게 얘기하고, 길드 마스터가 해당 유저에게 경고를 하면서 어느 정도 해결이 된다. 재앙은 길드 마스터가 글러 먹은 탓에 무작정 코쿄아의 편을 들며 적반하장으로 나올 가능성을 무시 못 했다. 코쿄아가 못살게 구는 유저 중에는 운영진인 잔혹동화도 있었다.

만약 신사가 주현의 편을 들어준다고 하더라도 기분이 찝찝할 듯싶었다.

코쿄아가 주현을 여자라고 착각하는 데에는 신사의 지분이 있을 게 분명했다. 코쿄아는 재앙에 들어오기 전까지는 주현을 마음에 들어 했다. 어스름과 채하의 얘기를 전해 줄 정도로. 단번에 태도를 바꾼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을 테다. 주현은 그게 신사라고 확신할 수 있었다.

[파티] westone : 키몬부터 순서대로 갈게요

[파티] 레아 : 네!!!!!

악마 레이드처럼 일곱 마리의 보스로 이루어진 인어 레이드. 파티원은 첫 번째 인어인 키몬의 호수에 입장했다. 차가운 계절을 이기지 못하고 꽁꽁 얼어붙은 호수가 화면에 펼쳐졌다. 서쪽이 다가가자 금이 가기 시작하더니 물줄기가 솟아오르며 인어 키몬이 모습을 드러냈다.

《 함성 : 몬스터의 이목을 집중시킵니다. 》

대검을 빼 든 주현의 캐릭터가 손을 하늘 높이 번쩍 들었다. 레아는 스태프를 휘둘러 정령의 힘을 모았고, 서쪽은 포탄을 펑펑 쏘며 앞으로 나아갔다. 잔혹동화는 마법 가방을 뒤적이며 버프를 고르고 있었다.

서쪽과 함께 키몬을 공격하고 있어야 할 코쿄아가 보이지 않았다.

‘어디로 갔지?’

스킬 동작이 끝나길 기다리며 마우스를 돌릴 때였다. 한참 뒤에서 똑같이 대검을 머리 위로 들고 있는 코쿄아의 캐릭터를 찾아냈다.

“……하.”

첫 번째 레이드부터 이렇게 삐꺽거리면 남은 여섯 개의 레이드는 골치 아플 미래가 뻔했다. 주현은 이마를 짚으며 무거운 눈꺼풀을 느릿하게 깜빡였다.

이와 비슷한 일을 겪은 기억이 있었다. 제 편 안 들어줬다고 채하가 한창 삐쳐서는 혼돈의 설화를 접속하지 않던 시기였다. 랜덤 매칭에서 만났던 딜량감별사라는 놈이 고의로 같은 스킬을 사용해 몬스터의 어그로를 빼앗으려고 했었다. 탱커들의 스펙이 비슷하거나, 이 정도면 뺏을 수 있겠다 싶어서 상대방을 만만하게 보았을 때 자주 일어나는 일이었다. 실수였으면 이해라도 했을 텐데, 주현보다도 게임을 오래 한 코쿄아가 그걸 모를 리가 없었다.

주현이 아무리 실력이 형편없어도 18강 무기를 들고 13강한테 지는 건 불가능했다. 생각할수록 어이가 없어서 헛웃음이 닫힌 입술을 비집고 나왔다.

[귓속말] westone : 전 봤어요

[귓속말] westone : 정상인인 줄 알았는데 신사2였다니

서쪽은 귓속말을 보내는 와중에도 키몬을 향해 포탄을 화려하게 발사하고 있었다. 시야는 또 어찌나 넓은지 뒤에서 함께 ‘함성’ 스킬을 사용하는 주현과 코쿄아를 발견한 모양이었다.

[귓속말] westone : 이거 끝나고 파티 터뜨릴까요?

[귓속말] westone에게 : 괜찮아요

길드원으로 구성되어 있다고 해도 중간에 파티를 터뜨리는 건 비매너였다. 키몬을 잡은 상태면 레이드 하나가 비게 되니 다른 파티에 합류하기 곤란했다.

강화 단계가 다섯 개나 낮은 코쿄아가 ‘함성’ 스킬을 사용한다고 달라질 건 없었다. 코쿄아가 거슬리게 구는 건 같은 탱커인 주현만 참으면 되는 일이었다.

주현은 그렇게 마지막 인어인 아그나까지 코쿄아가 빠짐없이 ‘함성’ 스킬을 사용하는 걸 지켜보아야 했다. 정면승부로는 어그로를 못 뺏으니 주현의 캐릭터가 쉬어 가는 구간마다 보스를 때려 얌체같이 굴었다.

아그나가 스스로 목을 조이며 호수 깊은 곳으로 잠들 때, 다시는 코쿄아와 같은 파티에 가지 않겠다고 다짐했다. 이따금 튀는 어그로에 다른 파티원도 함께 고생했다. 아마 다들 같은 생각을 하고 있을 테였다.

[SYSTEM] 꼬꼬아님이 [아그나의 목소리]를 획득하셨습니다.

[파티] 꼬꼬아 : 앜ㅋㅋㅋㅋㅋ 따라오길 잘했다

[파티] 레아 : 축하드려요!!!

주현은 물욕이 크지 않았다. 좋은 아이템 먹어서 벌 골드야 캐시 충전해서 모으면 되는 일이었다. 하지만 이번만큼은 불평을 쏟아 낼 수밖에 없었다. 레이드 내내 보스는 안 잡고 시비만 걸어온 코쿄아가 홀로 비싼 아이템을 가져간다니. 혼돈의 설화 아이템 획득 방법에는 개편이 필요했다. 불가능하단 걸 알지만, 한껏 억울해진 주현은 사고가 무너져 신경 쓸 겨를이 없었다.

[파티] westone : 고생하셨어요

[SYSTEM] 파티장의 권한으로 파티가 해체됩니다.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쟤 뭐예요?

보상 지급이 끝나고 잽싸게 파티를 깬 서쪽은 광장으로 돌아오자마자 주현에게 귓속말을 보냈다. 레이드 중에도 묻고 싶은 게 많았을 텐데 용케도 잘 참아냈다.

[귓속말] westone에게 : 저도 잘은 몰라요

[귓속말] westone : 와.. 뭐 저런 게 다 있대요 ㅋㅋ

게임에서 스펙 따져 파티를 만드는 사람은 한둘이 아니므로, 코쿄아가 특정 유저만을 배척시킨단 인식을 하기가 힘들었다. 코쿄아 본인의 장비가 좋기에 더더욱 그랬다. 랭킹이 높으니 비슷한 사람과 파티를 꾸리고 싶단 코쿄아의 의견이 쉽게 동의를 받는다.

또 코쿄아는 은근히 시비를 걸어서 당사자가 아니면 미묘한 분위기를 느끼기 어려웠다.

여자 친구도 있는 인간이 게임에서는 왜 이러고 다니는 걸까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길드] 꼬꼬아 : [+16 어둠이 깃든 대검]

[길드] 꼬꼬아 : 저 스트레이트로 3단계 올렸어옄ㅋㅋㅋㅋ

[길드] 레아 : 우와

13강이었던 코쿄아의 대검이 16강이 되어 나타났다. 모든 건 운이란 걸 잘 알지만, 골드를 탈탈 털어서 강화하던 과거가 주마등처럼 눈앞을 스쳐 지나갔다.

[귓속말] westone에게 : 저 접을게요

[귓속말] westone : 안 돼요 저희 칠순까지 혼설하기로 했잖아요

[귓속말] westone에게 : ㅅㅂ 제가 언제요

[귓속말] westone : 블랙님 접으면 서버비 누가 내요 ㅠㅠ

[귓속말] westone에게 : ㅅㅂ

* * *

혼돈의 설화 유저들이 달고 사는 말이 있다. 그건 주현이 뱉었던 ‘접는다’였다. 진짜로 접는 유저들은 조용히 아이템을 팔고 사라지지, 오늘은 정말 접는다고 염불을 외우고 있지 않다. 주현도 마찬가지였다.

코쿄아 때문에 화가 난다고 게임을 접으면 주현만 손해였다. 머리 식히고 돌아왔을 때 혼돈의 설화가 서버를 종료해 버릴지도 모른다. 언제 섭종할 지 모르는 게임을 하는 주현으로선 하루라도 더 혼돈의 설화를 즐겨야 했다.

“……아.”

조금만 방심하면 코앞까지 다가온 몬스터가 뺨을 때리고 달아났다. 주신 리라의 초상화가 그려진 버프 아이콘이 화면에서 사라지고 주현은 또다시 좌절에 빠졌다.

주현은 기분 전환으로 성직자 부캐를 키우기로 했다. 초창기 채하처럼 최대한 기본 커스터마이징을 유지하고 이목구비만 조금씩 건드렸다. 머리카락과 눈동자 색을 바꾸지 않아서 그런지 멀리서도 성직자임을 쉽게 알아볼 수 있었다.

닉네임은 아메싫어로 지었다. 채하의 성기사 부캐인 초콜릿아이스크림과 커플 할 겸, 억지로 아메리카노 먹이던 과거를 상기시켜 양심의 가책을 느끼라는 의미였다. 뻔뻔한 채하 성격상 닉네임을 보더라도 죄책감 따위 모르고 덤덤할 가능성이 더 컸다.

“아, 그만 좀 때려.”

모니터 화면 속 몬스터에게 짜증 낸다고 덜 맞는 건 아니다만, 대미지를 받고 버프를 잃을 때마다 반사적으로 큰소리를 내게 되었다.

성직자 캐릭터를 만들고 처음 던전에 들어갈 때만 해도 생각보다 괜찮단 반응이었다. 느릿하게 공격하는 성기사와 달리 마나만 풍족하면 연속 공격이 가능했고, 무기가 가벼운 덕분에 캐릭터의 움직임 역시 재빨랐다.

문제는 레벨 업과 함께 던전이 어려워지고, 몬스터의 행동이 점점 똑똑해지면서 일어났다. 성직자 성능에 ‘괜찮다’ 소리를 할 수 있던 건, 주신 리라가 선물한 기본 버프를 유지했을 때의 일이었다. 한 번이라도 대미지를 받아 버프를 잃어버리면 던전 클리어가 배로 느려졌다. 그럴 땐 게임을 할 맛이 뚝 떨어져서 재도전할까 싶다가도, 또 버프를 잃으면 시간을 버리는 것이니 꾹 참고 묵묵히 몬스터를 사냥했다.

그러던 중 채하에게서 톡이 왔다.

[여보♡] 형

[여보♡] 오늘 혼설 안 해요?

[블랙] 좀 질려서

[블랙] 당분간은 쉬려고

질려서 쉰다는 주현은 지금도 캐릭터 레벨 업에 몰두하고 있었다.

본캐인 블랙에 접속하지 않는 이유는 오로지 코쿄아 때문이었지만, 채하에게 일러바치기엔 유치했다. 또 코쿄아가 벌이는 일은 본인이 아니라고 잡아떼면 끝이라서 누가 해결해 줄 수 있는 게 아니었다. 코쿄아는 이제 재앙 소속이니 채하가 끼어들 명분이 없기도 하고, 길드 일에 채하가 엮이는 건 그만했으면 싶었다. 길드 마스터라는 놈이 또 은근슬쩍 채하를 욕하는 분위기를 생성할 게 뻔했다.

[여보♡] 저도 접을래요

그럼 서버비는 누가 내. 주현은 어느샌가 서쪽과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

채하가 그랬던 것처럼 만렙을 달성하고 나타나 놀라게 해 주고 싶었는데, 채하가 단숨에 게임을 접겠다고 선언할 줄은 몰랐다.

[블랙] 왜 접어

[여보♡] 형이 접는다면서요

[블랙] 아니 내가 언제 그랬어

[블랙] 당분간 쉰다고 했잖아

[여보♡] 안 돌아오면 접는 거잖아요

[여보♡] ㅠㅠ

이모티콘을 잘 쓰지도 않는 녀석이 우는 척까지 해 가면서 애처롭게 굴었다. 그동안 키운 캐릭터가 아깝지도 않나? 장비야 거래소에 가져다 팔면 돈이 좀 나오긴 하겠다만 미련 하나 없는 태도로 곧장 접겠단 결론을 내린 임채하를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또 채하가 그런 결정을 내린 이유가 저 때문이란 점이 기분을 묘하게 만들었다. 주현은 얼떨결에 채하가 자신에게 느끼는 감정이 게임에 국한되지 않는단 걸 확인하게 되었다.

[블랙] 요즘 계속 집에만 있어서 밖 좀 나가려고

채하가 계속 대화방에 들어와 메시지를 읽고 있으니 1 표시는 진작에 사라졌지만, 답장은 오래도록 오지 않았다. 밖을 나간다는 게 할 말을 잃게 하는 대답이었을까. 채하에게 게임 중독자처럼 비쳤나 싶어서 스스로 돌아보는 시간을 가졌다.

[임채하] (사진)

“뭐야.”

줄곧 오픈 채팅에서 대화하다가 별안간 자리를 옮겼다. 주현은 알림을 눌러 일반 대화방으로 채하를 따라갔다. 그곳엔 볼이 통통하게 오른 다섯 살 정도 되어 보이는 어린 채하가 주현을 기다리고 있었다.

“뭐야?”

공원 벤치에 앉아 있는 어린 채하는 무척 얌전했다. 사진 속 짧은 팔과 다리가 훗날 쭉쭉 뻗을 걸 알아서 그런지 사진 위로 지금의 모습이 겹쳐졌다.

[임채하] (사진)

다음으론 교복을 입은 채하였다. 교복 재킷과 조끼가 새까매서 그런지 피부가 더욱 하얘 보였다. 얼굴에 큰 차이가 없는 걸 보아 고등학생 때로 추정이 되었다. 어쩌다가 얻어걸린 사진인지 채하의 시선은 다른 곳을 응시하고 있었다.

[임채하] 형 저랑 놀이공원 가면

[임채하] 동물 머리띠 쓴 거 볼 수 있어요

다른 사람이 했으면 농담으로 웃어넘겼을 말이 임채하가 하니까 설득력 있게 느껴졌다. 제 얼굴을 마음에 들어 한단 걸 알고 적절히 써먹는 임채하를 보며 내심 감탄했다. 이래서 경영학과인가?

[윤주현] 놀이공원이 가고 싶어?

그런 걸 좋아했나. 주현은 채하가 싫어하는 건 잘 알아도, 좋아하는 것들에 대해선 들은 기억이 없었다.

[임채하] 형이랑 가고 싶어요

[윤주현] 그래 그럼 시간 내볼게

원래 휴일은 오로지 혼돈의 설화에게 바쳤지만, 채하를 위해서 하루쯤은 내어 줄 수 있었다. 게임이야 미리미리 돌아서 할 일을 끝내 놓으면 되는 거였다. 주현은 휴대폰을 붙들고 잠시 고민하다가 다시 손가락을 움직였다.

[윤주현] 그런데

[임채하] 네

[윤주현] 사진 저장해도 돼?

남의 사진 저장하고 싶다고 하면 많이 이상해 보이나. 다른 사람들은 흔쾌히 허락할 일에 채하는 장벽이 높으니 그게 아니더라도 거절할 가능성이 농후했다.

[임채하] 네

채하는 주현에게만 관대했으니 예상을 깨고 허락이 떨어졌다.

* * *

주현은 채하의 심정을 체험하고 있었다.

[파티] 남캐안키움 : 딜할 시간에 힐 좀 주셈 ㅎㅎ;;

[파티] 아메싫어 : 제가 안 때리면 보스 체력이 안 까여서요

길드원들과 파티 꾸려서 갔을 땐 5분 만에 깨는 레이드가, 20분째 고전하고 있었다. 주현도 처음에는 마나를 버프에 쏟아부었다. 버프를 받았으면 파티원들이 열심히 일해야 하는데, 버프가 무색하게 체력을 깎는 속도에는 진전이 없었다. 이럴 바에 공격이나 해 볼까 싶어서 빛 기둥을 사용하자 그제야 메아의 체력에 균열이 생겼다.

힐러라고 힐만 하는 건 미련한 짓이었다. 그렇다면 공격 스킬은 왜 있겠는가. 마나를 어떻게 배분하느냐에 따라서 플레이가 달라지고, 채하는 공격 쪽에 마나를 모두 소모하는 편이었다. 주현은 채하가 왜 그런 선택을 했는지 비로소 깨달았다.

파티에서 내가 가장 센데 힐이나 하고 있어야 한다니. 주현이 고른 건 직업이지, 파티원이 아니었다. 미래가 보이지 않는 파티에서 무력하게 힐만 하고 있기 억울했다. 힐러로 딜을 하는 건 모두를 위한 선택이었다고 당당히 말할 수 있었다. 얼른 클리어하여 던전에서 벗어나고 싶다는 집념만으로 메아의 공격을 요리조리 피했다.

답답한 상황에서도 얌전하게 힐만 하는 파티원들이 대단한 거지, 나서서 공격하는 힐러가 이상한 건 아니었다. 채하는 상황 따지지 않고 처음부터 딜하는 힐러였지만, 앞길이 험난한 파티 탓에 순서를 따질 정신이 없는 주현은 전적으로 채하의 편을 들었다.

[파티] 남캐안키움 : 내가 잡을테니까 힐 달라구용 ^.^;;

[파티] 아메싫어 : 20분 넘게 못 잡고 있는데요

[파티] 남캐안키움 : 나머지 딜이 쓰레기인걸 내탓하네;ㅋㅋ

<인형의 집> 메아는 뉴비들이 접하는 첫 번째 레이드였다. 가끔 뉴비들을 버스 태워 주려고 하는 고인물 몇몇을 제외하고는 랜덤 매칭에서 제대로 된 파티원을 만나기가 힘들었다. 주현도 그 점을 알고 있고, 딜이 약한 파티원을 탓할 생각은 없었다.

[파티] 아메싫어 : 빨리 깨고 나가자는 말이잖아요

몇십 분째 진전이 없으면 뜻을 굽힐 줄 알아야 하는데, 남캐안키움은 자꾸만 포지션을 운운하고 있었다. 랭킹 1위 힐러를 만나도 힐만 시킬 정도로 비효율적이고 고집 센 놈이었다.

[파티] 혼돈의포병 : 성직자님 그냥 딜하세요

[파티] 혼돈의포병 : 전 포션 먹을게요

[파티] 남캐안키움 : 성직자 골랐으면 힐이나 처하지 ㅎㅎ 힐러로 버스는 다 받아놓고 딜하겠다고 설치네 ㅎㅎ

[파티] 혼돈의포병 : 싸우지 좀 마세요 ㅠㅠㅠ

조금 전까지만 해도 내내 홀로 던전을 클리어했는데, 주현은 첫 번째 레이드에서부터 버스충 취급을 받았다. 정말로 버스를 탔으면 억울하지라도 않지. 무시하고 게임에 집중하려다가 문득 채하였으면 어떻게 반응을 했을까 궁금해졌다. 실력이 어쨌든 힐러가 딜에 전념하는 건 논란의 소지가 있었고, 채하는 늘 화두에 올랐다.

[파티] 아메싫어 : 딜러면 딜을 좀 하세요 ㅎㅎ 그 딜로 보스는 어떻게 잡아서 렙업한 건지 모르겠네

[파티] 남캐안키움 : 너 본캐 까

[파티] 아메싫어 : 싫은데

[파티] 혼돈의포병 : 왜 싸워여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파티] 아메싫어 : 이건 깨드릴게요 걱정마세요

[파티] 혼돈의포병 : 넿ㅎㅎㅎㅎㅎㅎ

싸우다가 한 명이 퇴장이라도 할까 봐 불안에 떨던 혼돈의포병은 그제야 안심했다. 채하가 어떻게 대응했을지 어렴풋하게 상상해 보면, 채하는 상대방보다 자신이 딜러 역할을 하는 게 효율이 높다는 걸 실력으로 증명했을 것 같았다.

이제야 막 성직자를 시작한 주현에게는 어려운 방법이었지만, 딜러의 탈을 쓰고 메아를 간지럽히고 있는 남캐안키움 정도는 이길 듯싶었다.

[파티] 남캐안키움 : 본캐 닉까라고 ㅆ1발

[파티] 아메싫어 : 이게 본캐임

[파티] 남캐안키움 : 니 업적 점수를 봐

[파티] 아메싫어 : 본캔데?

공통 업적은 같은 아이디 캐릭터에게 자동으로 공유되어 부캐를 키우더라도 높은 점수에서 출발하게 된다. 일정 스펙을 도달하면 웬만큼 업적 점수가 높아서 부캐 육성 시 뉴비 코스프레가 불가능했다.

[파티] 혼돈의포병 : 아 드디어 깻다 ㅠㅠㅠㅠㅠㅠㅠㅠ

[파티] poiuyt : 와 드디어.......

[파티] 남캐안키움 : 대련 받아 개1새1끼야

[파티] 아메싫어 : 싫은데?

[파티] 남캐안키움 : 그 업적점수로 게임 그렇게 하면 안 쪽팔리냐?

[파티] 아메싫어 : 너도 그 점수로 그렇게 게임하는데 뭐..

대련으로 깔끔하게 승부를 보는 수도 있겠다만 남캐안키움을 가장 화나게 하는 방법은 약을 올리고 튀는 거였다. 인벤토리로 보상이 지급된 걸 확인하자마자 주현은 던전을 빠져나왔다. 끈질기게 대련을 걸면서 쫓아올 줄 알았던 남캐안키움은 다음 레이드로 향했는지 조용하기만 했다.

현실의 불만을 게임에 쏟아 내는 부류가 있는데 남캐안키움이 그런 경우인 모양이었다. 다음 퀘스트를 받고 레이드에 입장하자 다행히 남캐안키움과 같은 파티는 피해 갔다. 이전 파티에서 함께했던 나머지 유저를 또다시 만났다. 내심 반가워하며 힘을 합쳐 레이드를 클리어하고 그다음 레이드에 진입했을 때, 남캐안키움과 재회하게 되었다.

[파티] 남캐안키움 : 버스 ㄱㅅ요

버스충이라고 사람 몰아갈 땐 언제고 버스 감사요 같은 채팅이나 치고 있었다. 하위 레이드 랜덤 매칭에 버스를 태워 줄 만한 유저가 존재하나. 건조한 눈으로 대기실을 훑다가 익숙한 커스터마이징을 발견했다.

새하얀 판금 갑옷을 입은 평온 길드의 단공이었다.

[파티] 단공 : 출발할게용

혹시나 한 마음에 다시 한번 대기실을 훑었지만, 채하로 추정되는 유저는 보이지 않았다. 하긴 채하가 길드원과 붙어 다니는 모습은 상상이 안 갔다.

가장 먼저 입장하여 파티장이 된 단공이 게임을 시작했다. 짤막한 로딩을 마치고 맵에 입장한 파티원들은 나란히 폭신한 구름을 밟았다. 세 번째 레이드는 구름 위에서 전투가 이루어지는 <구름 정원>이었다. 주신 리라의 명을 받아 구름 정원을 지키던 라펠은 마족과의 싸움에서 패배하고 그들에게 세뇌를 당하게 된다. 그런 라펠을 처치하여 원상태로 돌려놓는 게 퀘스트 내용이었다.

《 치유의 가호 》 《 주신 리라의 은총 》

단공이 망치로 바닥을 내리찍어 충격을 주는 걸 확인하고 차근차근 힐과 버프 스킬을 사용했다. 단공에게는 마나가 아깝지 않았다. 애초에 단공 정도 되면은 하위 던전에서는 어떤 상황에서든 보스를 손쉽게 처치하기 때문에 걱정할 필요가 없었다.

또 단공의 직업은 대장장이로 포지션이 탱커였다. 어그로를 혼자 다 먹어 주는 덕분에 파티원이 아파할 틈이 없었다. 라펠의 모든 공격을 맞받아치는 단공을 보며 주현은 감동에 물들어 있었다. 혼돈의 설화에서 탱커는 할 일이 많았지만, 그 모든 걸 해냈을 때 가장 멋있는 포지션이었다.

라펠의 거대한 낫과 단공의 망치가 부딪치며 나는 마찰음을 배경음악 삼아서 주현도 스킬을 눌러 힘을 보탰다. 단공이 워낙에 잘해 주는 탓에 손가락과 마음이 여유로웠다.

[파티] 남캐안키움 : 대장장이 개못하네

“또 시작했네.”

누구 덕분에 본인의 캐릭터가 건강하게 살아있는지도 모르다니. 어지간히 눈치가 없고 자신감만 넘치는 놈이었다.

[파티] 단공 : ㅠ_ㅠ

단공은 능글맞은 성격대로 키보드 싸움 대신 상대에게 져 주는 쪽을 택했다.

[파티] 아메싫어 : 잘하는데요?

[ 단공님이 감사 인사를 전합니다! ]

주현이 나서서 편을 들어주자 단공이 재빠르게 감사 인사를 보냈다.

단공은 괜찮을지 몰라도 주현은 그냥 넘어갈 수 없었다. 제가 받는 악평에는 비교적 무던했지만, 타인에게 벌어지는 일은 외면하기가 어려웠다. <인형의 집> 메아를 처치하면서 있었던 일만 해도 그랬다. 플레이로 욕먹는 거야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하지만 올바른 판단이었는데도 받는 비난에, 같은 직업을 키우는 채하도 언젠가 이런 일을 겪었을 것 같아서 참기가 힘들었다.

이유 없이 시비 거는 놈은 어떻게든 박멸시켜야 했다. 단공과 주현처럼 시비에 익숙한 유저들은 적당히 넘어가겠지만 뉴비들은 쉽게 상처를 받고 게임을 접게 될 수도 있었다.

[파티] 남캐안키움 : ㅈㄴ 못하는데

[파티] 남캐안키움 : 템이 아깝다

[파티] 아메싫어 : 잘하는데?

[파티] 남캐안키움 : 아 ㅆ1발 너 아까 걔지

[파티] 아메싫어 : 님 실력이었으면 진작에 죽어야 했는데 단공님 덕분에 지금까지 살아있는거임 ㅎㅎ 감사하게 여기고 조용히 게임하세요 ㅎㅎ

내심 유치하단 생각이 들었으나 원래 똑같이 해 줘야 정신 차리는 법이었다. 사사게 올라가더라도 상관없었다. 어차피 길드 가입 없이 혼자 생활할 캐릭터였다. 채하와 커플을 할 예정이긴 하나, 채하는 이미 화려한 사사게 이력을 보유하고 있는데 이 정도는 이해해 주지 않을까 싶었다.

[파티] 남캐안키움 : 니들 둘이 친구지?

[파티] 단공 : 아메님 제가 헤어지자고 했잖아용

[파티] 남캐안키움 : 아 ㅋ 너 본캐 평온이네

단공은 분위기를 풀어보려고 장단에 맞춰 준 건데, 남캐안키움이 말을 곧이곧대로 믿는 덕분에 주현은 졸지에 평온 길드 소속이 되었다.

[파티] 단공 : ㅋㅋㅋ 아메님 평온 오실래요???

[파티] 남캐안키움 : ㅆㅂ 한패 맞네

[파티] 혼돈의포병 : 싸우지마세요 ㅠㅠㅠㅠㅠㅠ

[파티] 아메싫어 : 깨드릴게요

[파티] 혼돈의포병 : 넿ㅎㅎㅎ

혼돈의포병은 또 누군가 탈주하여 클리어에 어려움이 생길까 봐 걱정하고 있었다. 고스펙 유저인 단공이 있는 이상, 한두 명이 없더라도 무사히 레이드 클리어가 가능했다. 사냥꾼인 남캐안키움이 단 한 번도 헤드샷[3]을 쏘지 못하고, 혼돈의포병이 허공에 포탄을 터뜨려도, 단공의 공격은 정확하게 라펠에게 먹히고 있었다. 주현은 라펠과 거리를 벌린 채 간간이 빛 기둥을 날렸다.

붉게 물들어 있던 라펠의 눈동자가 원래 색인 푸른빛으로 돌아가며 레이드 클리어를 알렸다. 단공의 활약 덕분에 쾌적하게 레이드를 마무리할 수 있었다. 채하가 있었으면 어땠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주현을 버스충 취급하려면 채하 정도는 되어야 했다.

[귓속말] 단공 : 아메님

던전을 벗어나자 자동으로 파티 탈퇴가 되었다. 운 좋으면 다음 레이드에서도 단공을 보겠거니 했는데, 예상치 못한 일이 일어났다. 단공으로부터 귓속말이 왔다.

[귓속말] 단공에게 : 네

[귓속말] 단공 : 진짜로 평온 오실래용?ㅎㅎ

[귓속말] 단공에게 : 괜찮아요 ㅎㅎ

[귓속말] 단공 : 아잉 ㅠㅠ 저희 만렙길드라 버프 다 있어용

[귓속말] 단공 : 길드원도 대부분 착해요

단공은 차마 모두가 착하다고 하지 못했다. 주현도 단공이 왜 대부분이란 말을 택했는지 잘 알았다. 장난으로도 착하다고 칭찬할 수 없는 녀석이 평온에 있었다.

[귓속말] 단공에게 : 본캐가 길드 있어서요

[귓속말] 단공 : 아아 그럼 어쩔수없죠 ㅜ_ㅜ

[귓속말] 단공 : 본캐 길드 어딘지 물어봐도 되나용?

재앙 길드의 규모는 작지 않으니 길드명을 밝히더라도 단공이 주현의 본캐 닉네임을 특정할 수 없었다. 하지만 길드명을 말하는 순간, 제 얘기가 나올 것이고 단공을 앞에 두고 모른 체하기가 멋쩍었다. 주현은 차라리 침묵을 택했다.

[귓속말] 단공 : 혹시 제가 싫어서........

[귓속말] 단공에게 : 아뇨 진짜로 길드 있는데

[귓속말] 단공에게 : 지금 사정이 있어서요

[귓속말] 단공 : 그럼 커플하실래용?

“뭐가 마음에 든 거지.”

채하가 알면 난리를 칠 얘기를 귓속말로 은밀히 나누고 있자니 양심이 아팠다.

랜덤 매칭은 이상한 유저를 만날 확률이 높은 거지, 그런 유저들만 모여 있는 공간은 아니었다. 주현과 비슷한 실력의 유저는 널린 편이었고, 특별히 다른 점이라곤 조금 전 상황에서 단공의 편을 들어줬단 것밖에 없었다.

[귓속말] 단공에게 : 커플도 있어서요..

[귓속말] 단공 : ㅠ_ㅠ

진짠데 뭐 하나 밝힐 수 있는 게 없으니 단공을 상대로 거짓말을 하는 모양새가 되었다. 그렇다고 해도 아직 채하를 못 만났는데 단공에게 먼저 정체를 알려 줄 순 없었다. 적당히 달래서 보내야겠다고 마음을 먹었을 때였다.

[귓속말] 단공 : 그런데요 아메님

[귓속말] 단공에게 : 네

[귓속말] 단공 : 저희 길마님이 아메님 찾아요

[귓속말] 단공에게 : 네?

주현이 부캐를 키우고 있다는 걸 채하도 모르는데, 어스름이 알고 있을 리가 없었다. 단공이 길드 가입 때문에 제 얘기라도 꺼냈나 적당한 이유를 추측했다.

[귓속말] 단공 : 저희 사사게 올라갔어용...ㅎ

[귓속말] 단공에게 : 네?

‘제 무덤을 이렇게 파네.’

사사게에 올라간 닉네임을 막무가내로 차단부터 하는 인간들도 있지만, 대다수는 글을 읽고 누구의 잘못인지 판가름을 한다. 탱커 역할을 열심히 수행하던 단공에게 먼저 시비를 건 녀석이 무슨 자신감으로 사사게에 글을 올린 걸까.

코쿄아를 피해서 조용히 키우려고 했건만 아무래도 물 건너간 듯싶었다. 이젠 코쿄아가 아니라 신사 때문에라도 지금 캐릭터로는 재앙에 들어갈 수 없었다. 신사는 길드원의 잘못이든 아니든 사사게에 길드명이 언급되는 걸 죽도록 싫어했다.

예전 같았으면 사사게에 닉네임이 올라가는 것을 무서워했을 텐데, 지금은 어떤 고난과 역경이 닥쳐와도 함께해 줄 채하가 있으니 두려울 게 없었다. 주현은 피곤한 눈을 꾹꾹 지압하며 사사게를 확인했다.

[비매너] 메아, 라펠 랜매 비매너 <평온> 단공, 아메싫어

작성자 : 여캐만키움 | 댓글 : 6개 | 조회수 : 301

1. 인형의집 메아

아메싫어가 성직자인데 힐은 안 하고 딜만 함

힐해달라고 요청하니까 갑자기 패드립침

너무 어이없어서 스샷은 없음

2. 구름정원 라펠

단공이 스펙 제일 높은 파티였음

설렁설렁 너튭딜하길래 제대로 하라고 지적하니까

갑자기 아메싫어가 단공편 들어주면서 패드립 박음

아메싫어 업적 보니까 부캐던데 본캐 평온길드로 추정됨

* * *

[댓글]

* * *

- 스샷은?

* * *

- 차단목록 ㄱㅅ

* * *

- 어스름 : 평온 길마입니다. 일단 아메싫어님은 저희 길드원이 아닙니다. 그리고 사사게에 글을 작성할 땐 꼭 스크린샷을 첨부해주세요 ^^

* * *

↳ blueberry : ㅋㅋㅋㅋㅋㅋ

* * *

↳ 여캐만키움 : 어스름님아 님은 무슨 일 있을 때마다 스샷찍어노음?

* * *

↳ 어스름 : 네 ^^

스크린 샷도 없이 뻔뻔하게 헛소리를 적어 놓은 남캐안키움도 놀랍지만 그걸 믿고 둘을 차단하겠단 유저의 반응이 더욱 기가 막혔다. 차단 목록 감사하단 댓글이 달려도 주현에겐 타격이 없었다. 가장 인구수 적은 게 탱커였고, 그다음이 힐러, 넘쳐나는 게 딜러였다.

본캐부터 부캐까지 다양하게 차단당했을 채하도 파티를 잘 구하고 다녔다.

[귓속말] 단공에게 : 사사게 확인했어요

[귓속말] 단공에게 : 어스름님 어디 계시는데요?

[귓속말] 단공 : 와 우리 길마님 닉넴도 아세요?

모르는 척해야 한단 걸 깜빡했다. 주현은 황급히 횡설수설 변명을 쏟아 냈다.

[귓속말] 단공에게 : 댓글에서 봤어요

[귓속말] 단공 : ㅋㅋㅋㅋ 저희 길드가 사사게 갈 일이 많아서

[귓속말] 단공 : 길마님이 사사게를 자주 보세요

누구 때문에 사사게에 갈 일이 많고, 뭐 때문에 어스름이 사사게를 정독하는지 뻔했다. 지금도 주현이 복귀하기만을 기다리고 있을 녀석의 부루퉁한 얼굴이 모니터 위로 그려졌다.

[귓속말] 단공 : 7채널로 오세용

[귓속말] 단공에게 : 네

평온과 함께 파티를 꾸릴 때 외엔 갈 일이 없는 채널이었다. 보통은 채하가 주현이 있는 4채널로 오니, 주현은 채널을 이동할 이유가 없었다. 7채널은 4채널과 똑같은 풍경이었으나, 광장에 서 있는 유저들이 달랐다.

[전체] 어스름 : 안녕하세요 ^^

오늘따라 지쳐 보이는 어스름이 웃으며 인사했다.

[전체] 아메싫어 : 안녕하세요

[전체] 어스름 : 많이 놀라셨죠?

[전체] 어스름 : 사사게에 해명글은 제가 올릴거라 아메싫어님은 가만히 계셔도 됩니다 ^^ 걱정하지 마세요

[전체] 아메싫어 : 감사합니다

[ 아메싫어님이 어스름님에게 절을 합니다. ]

[전체] 어스름 : 길마가 원래 하는 일이에요 ^^

어스름이 저렇게 당연하다는 듯이 말할 때마다 주현은 한없이 서글퍼졌다. 재앙의 길드 마스터는 일이 터지면 꼬리 자를 생각밖에 없는데, 어스름은 어떻게든 길드원을 품으려 애를 쓰고 있었다.

길드원이 문제를 일으켰을 때, 상황에 따라 길드 마스터가 개입해야 하는 건 맞았다. 하지만 어스름이 평온 소속이 아닌 주현까지 보호할 이유는 없었다. 이유 불문하고 사사게에 닉네임이 올랐단 것만으로 추방하는 길드가 많아서 그런지 그 사이에서 어스름의 심성이 돋보였다.

광장 한가운데에서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 블루베리가 다가왔다.

[전체] blueberry : 사사게스타 ㅎㅇ

[전체] 단공 : 나 억울함 ㅠ_ㅠ

[전체] blueberry : 근데 걘 왜 아메님 패드립쳤다고 몰아가요?

[전체] 아메싫어 : 모르겠어요........

당해 보기만 했지, 한 번도 뱉어 본 적 없는 말이었다.

[전체] 단공 : 아메님은 나 감싸주다가 같이 올라간듯 ㅠ

[전체] blueberry : 단공이 쓰레기네

[전체] 단공 : 아메님 제가 책임질게요

[전체] 아메싫어 : 아뇨..

[전체] 단공 : ㅠ_ㅠ 서럽다

[전체] blueberry : ㅋㅋㅋㅋㅋ 거절만 몇 번째임

평온 길드는 재앙보다 길드 인원이 적어서 그런지 광장이 한산했다. 천천히 광장을 훑던 주현은 이상한 점을 발견했다. 제복을 입은 어스름의 견장 너머로 지금 상황에 있어선 안 될 녀석의 실루엣이 흐릿하게 보이기 시작했다.

[전체] 단공 : 머임 밍채 나 걱정돼서 옴?

[전체] blueberry : 블랙님 요즘 접속 안 해서 7채에 있는거임

[전체] 단공 : 아......ㅋ

[전체] 아메싫어 : 전 이제 가봐도 될까요

[전체] 어스름 : 네 고생하셨어요

[전체] 아메싫어 : 아니에요 대신 글 써주신다니 감사합니다

채하처럼 만렙을 달성하고 멋지게 등장하고 싶었다. 만렙인 200까지 고작 5레벨 남은 195였다. 서둘러 대화를 마무리 짓는데, 상가로 향하려던 채하가 별안간 방향을 틀었다.

아메싫어는 채하 보라고 지은 닉네임이었으나, 닉네임만 보고 사람을 알아보기는 쉽지 않았다. 큼직한 보폭으로 다가오는 채하의 용건은 평온 길드원에게 있을 것이라고 여겼다. 채하가 걸음을 멈춘 곳은 평온 길드원이 아니라 주현의 캐릭터 앞이었다.

[전체] 단공 : 뭐야 내 쟈기한테 관심 ㄴ;

캐릭터를 샅샅이 뜯어보는지 말이 없는 채하를 단공이 새침하게 경계했다.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형

[전체] 단공 : ?

[전체] blueberry : 단공아 널 부르는 건 아닐거야

[전체] 단공 : 그치 길마님이겠지 ㅠ_ㅠ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제가 질려요?

[전체] 단공 : ???????

[전체] 단공 : 뭐야 길마님 밍채랑 사겨요?

[전체] 어스름 : 그럴리가 ^^

[전체] blueberry : 뭐야 무서워...

길드원들이 경악하는 반응을 보이는 와중에도 채하는 말을 이어갔다.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왜 부캐 키우고 있어요

[전체] 단공 : ??????????

[전체] 단공 : 설마 블랙님...........?

[전체] 아메싫어 : 네..

[전체] blueberry : 와 밍채는 이걸 어케 알아봄?

[전체] 아메싫어 : 그러게요..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아바타 업적 점수가 똑같아요

[전체] 어스름 : ?

[전체] blueberry : 영원한 비밀은 없구나

[전체] 아메싫어 : ㅅㅂ

아바타 수집 점수는 해당 캐릭터가 보유한 아바타만 집계되지만, 업적은 공유되기에 본캐와 부캐의 점수가 똑같았다. 채하처럼 아바타에 관심이 없으면 업적 점수가 낮아 사람을 특정할 수 없지만, 주현의 경우엔 이야기가 달라졌다.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합성아바타 업적 진행 상태랑

[전체] blueberry : 그건 특정될만하지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형 닉네임도 그렇고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채팅 말투도 형 같았어요

[전체] 어스름 : 블랙님 잘못 걸리신듯 ^^

[전체] blueberry : 커플 아니었으면 신고감임

[전체] 단공 : 하..... 운명이라고 믿었는데 블랙님이라니

[전체] 단공 : ㅆㅂ 대련걸지마

합성 아바타는 채하가 아니었다면 진행 상태가 0%로 남았을 업적이었다. 채하에게 넙죽 받았던 아바타가 의도치 않게 발목을 잡는 날이 오게 되었다. 어차피 밝힐 정체였지만 이렇게 들키니 허무하기도 하고, 한편으론 알아본 채하가 대단했다.

주현은 채하가 컬러수집가로 왔을 때 못 알아보고 꼼짝없이 휘둘렸는데 말이다.

《 초콜릿아이스크림님이 친구를 신청하셨습니다. 》

[전체] 단공 : 민채 어디감?

[전체] blueberry : ?

[전체] 어스름 : ?

친구 신청을 수락하자마자 채하의 캐릭터가 광장에서 사라졌다. 습관처럼 친구 창을 열어 위치를 확인해 봤으나 커플이 아닌 터라 채하의 행방을 알 수 없었다. 주현은 부리나케 캐시샵에서 커플링을 구매했다.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에게 : 채하야 어디야?

[귓속말] 초콜릿아이스크림 : 다시 광장으로 갈게요

광장에 서 있던 캐릭터가 단번에 사라지는 방법으론 게임을 종료하는 것, 레이드에 참여하는 것 등이 있었다. 로그인 중이니 첫 번째는 당연히 아니겠고, 채하가 주현을 두고 레이드에 갔을 리도 없었다. 주현은 어리둥절한 채로 채하를 기다리다가, 채하의 캐릭터가 나타나는 순간 커플 신청을 보냈다.

이번으로써 세 번째 보는 분홍 꽃가루가 머리 위로 흩날렸다.

[전체] 어스름 : 음 밍채야?

[전체] 어스름 : 그새 대련을 하고 왔구나 ^^

[전체] 단공 : ㅆㅂ 어디 갔나 했네

[전체] 아메싫어 : ?

[ 초콜릿아이스크림님이 아메싫어님에게 고개 숙여 입을 맞춥니다. ]

[전체] 아메싫어 : 대련이요?

[전체] 어스름 : 사사게에 또 글이 올라와서...^^

주현은 손바닥으로 이마를 짚으며 다시 사사게에 들어갔다. 남캐안키움이 추가로 글을 올려 두었다. 초콜릿아이스크림이 무작정 대련을 걸었고, 초콜릿아이스크림이 아메싫어의 본캐이거나 평온 길드의 보복일 것으로 추측하며 분노했다.

두 가지 가정 모두 오답이었다. 주현은 평온 소속이 아니었고, 채하는 단공에게는 관심이 전혀 없으며 오로지 주현을 위해서 대련을 걸었다.

[전체] 단공 : 근데 블랙님 왜 길드 안 알려주신 거예용?

[전체] 단공 : 이상한 길드 소속인줄 알았어요 ㅋㅋㅋ

주현은 단공이 장난으로 던진 말에 웃을 수 없었다. 재앙은 이상한 길드가 맞았다. 그것과 별개로 주현이 재앙 길드임을 속인 이유는 신사와 코쿄아의 탓이 아니었다.

[전체] 아메싫어 : 밍채 놀래켜주려고 한 거였는데..

[ 초콜릿아이스크림님이 아메싫어님에게 고개 숙여 입을 맞춥니다. ]

왜 부캐를 키우고 있었는지 이유를 토해 내자, 오해가 풀린 채하가 대뜸 캐릭터 감정 표현을 이용하여 입술을 갈겼다. 이렇게 귀엽게 구는데, 질린다니.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전체] 단공 : ㅋㅋㅋㅋ 사사게 때문에 망했네요

[전체] blueberry : 단공탓임

[전체] 단공 : ㅠ_ㅠ

[전체] 단공 : 그래도 블랙님이라고 하니까 이해는 가네요

[전체] 단공 : 역시 탱 마음 알아주는건 탱밖에 없음 ㅠ

[전체] 아메싫어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초콜릿아이스크림 : 말 같지도 않은 공통점 찾지 마세요

[전체] 단공 : ㅆㅂ 어 그래

[전체] blueberry : 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아메싫어 : 죄송합니다..

* * *

사사게 일은 조용하게 지나갔다. 단공과 주현을 비매너로 몰아가던 남캐안키움은 끝까지 스크린 샷을 제시하지 못했고, 글은 신빙성이 없다는 여론에 휩쓸려 묻혔다.

주현은 아직도 본캐 접속이 드문드문했다. 간혹 본캐로 들어가면 마주친 길드원들이 요즘 왜 이렇게 접속이 뜸하냐고 말을 걸어왔다. 주현은 그에 바쁘다는 핑계를 댔다.

이럴 때면 문득 게임 친구였던 채하와 현실에서 엮였단 게 실감이 났다. 채하에겐 바쁘다는 변명으로 때울 수가 없었다. 금방 들통이 날 테니까.

그렇게 시간이 지나 대학교 개강을 앞둔 2월의 마지막 날. 주현은 채하와 함께 놀이공원으로 향했다.

전날에 채하로부터 무슨 옷을 입을지 묻는 톡 메시지가 왔다. 의도가 뻔히 읽히는 질문에 주현은 싱겁게 웃다가 순순히 답을 내어 주었다. 다음 날, 자취방 근처 큰 도로까지 차를 끌고 온 채하는 주현과 유사한 옷차림이었다. 검은 맨투맨 티셔츠에 검은 면바지. 채하가 따라 입더라도 남들이 보았을 때 우연이라 여길 수 있는 무난한 조합이었다.

채하가 차에서 내리려고 하길래 주현은 황급히 손을 젓고 조수석에 올라탔다.

“차가 있어?”

“귀찮아서 잘 안 끌고 다녀요.”

집이 어지간히 잘 산단 건 진작 알았으니 새삼스러울 건 없었다. 주현은 본가에 있을 부모님의 자동차를 떠올리다가 고개를 저었다. 힘들어 죽겠는데 출퇴근 길마다 운전할 기력이 있을 리가 없었다. 가지고 와 봤자 짐만 될 테다.

그렇게 홀로 결정을 내리면서 안전벨트를 끌어오는데, 계속 빤히 쳐다보고 있었는지 채하와 시선이 마주쳤다.

“……왜?”

“……아니에요.”

주현은 고개를 갸웃하다가 다시 정면을 응시했다. 차가 매끄럽게 출발하고, 주현은 핸들을 쥔 채하의 손등을 힐끔 보다가 말을 걸었다.

“놀이기구 잘 타?”

“아뇨.”

잘 타게 생기진 않았다만 그렇다고 무서워할 것 같지도 않았는데. 예상치 못한 곳에서 연약한 모습을 보이는 게 의외였다. 놀이기구를 타지 않겠다고 우겼을 어린 시절을 상상하니 입꼬리가 솟았다.

이쯤 되니 놀이기구를 못 타는데 놀이공원을 가자고 한 채하의 의도가 궁금해졌다.

“못 타?”

“네. 저 무서워서 형이 손잡아 줘야 해요.”

“…….”

채하를 걱정했던 마음이 돌연 허무해졌다. 무서워서 손을 잡아 주긴 무슨. 타는 내내 눈 한 번 깜빡 안 하고 덤덤할 채하의 모습이 머릿속에 그려졌다.

헛웃음 짓는 주현을 곁눈질한 채하는 화제를 돌렸다.

“형, 안 간다고 할 줄 알았어요.”

“왜?”

주현은 집에 있는 걸 좋아하긴 하나, 집에만 틀어박혀서 사는 건 아니었다. 시간 내어 가끔 경찬을 만나기도 했다. 주현이 고개를 옆으로 틀어 채하를 바라봤다. 채하는 전방을 주시한 채 말을 이었다.

“형, 혼설 아니면 밖에 안 나오잖아요.”

“……그 정돈 아니다.”

밖에서 채하와 마주쳤던 일 대부분은 혼돈의 설화와 연관이 있었지만, 아닌 것들도 분명히 있었다. 고깃집이나, 채하가 밥 사 주겠다고 안달이어서 한 번 만났던 것 등.

“결국에는 형 친구, 그 사람도 혼설로 끌고 왔잖아요. 계속 혼설 한다고 할까 봐 고민이었는데.”

경찬은 알고 있을까. 친하다고 여기는 임채하가 본인을 ‘선배님’이 아닌 ‘그 사람’이라고 부른다는 것을. 주현도 몇 달 전까지는 똑같이 ‘그 사람’으로 불렸을 것이다. 그랬던 주현이 이제는 누구도 타지 않았을 채하의 차 조수석에 앉아 있었다.

“그래서 죽인 거야?”

“네.”

주현의 물음에 채하가 냉큼 대답했다.

그때는 채하가 경찬을 왜 죽였는지 이유가 전혀 예상이 안 갔는데, 이제야 그날의 진실을 알 수 있었다. 경쟁자를 없애 버린 거였다. 모르고 죽였을 줄 알았는데, 알고 죽였다니. 그게 더 채하다웠다. 게임에서 고의로 선배를 죽이고 당당한 채하를 보면서 사람이 참 한결같단 걸 실감했다.

“다시 오면 또 죽일 거예요. 오지 말라고 전해 주세요.”

진심인지 채하의 눈빛이 잠시 흉흉했다. 주현은 떨떠름한 어투로 물었다.

“……네가 전할 생각은 없고?”

“형, 저랑 만나는 거 그 사람이 알아도 돼요?”

채하는 여러모로 어디 내놓기 걱정되는 면이 있었다.

자신을 죽였던 밍채가 채하라는 걸 경찬이 알게 되면 어떤 일이 일어날까. 경찬이 워낙에 아끼던 후배였으니 너그럽게 봐줄 수도 있고, 어떻게 자기를 죽일 수 있느냐며 억울해할 수도 있고, 멱살을 잡고 싸울 가능성도 있었다. 될 수 있으면 마지막은 아니길 바랐다. 왠지 경찬이 질 것 같았다.

영양가 없는 대화를 나누다 보니 어느새 놀이공원에 도착했다. 주차를 끝내고 나와 미리 사 두었던 표를 휴대폰으로 제시하고 입장했다. 중학생 때 이후로 처음 와 보는 놀이공원에 주현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형.”

바쁘게 눈알을 굴리던 주현은 위에서 울리는 목소리에 고개를 들었다. 채하가 앞에 놓인 기념품점을 눈짓으로 가리켰다. 진열대에 걸린 다양한 머리띠에 주현의 심장이 빠르게 뛰기 시작했다. 성큼성큼 앞으로 걸어간 주현은 숨을 죽인 채 진열대를 훑었다.

이 순간만큼은 혼돈의 설화가 뒷전이었다. 얼마든지 꾸밀 수 있는 인간이 앞에 있는데 게임 캐릭터가 대수인가 싶었다.

토끼 머리띠부터 집어서 뒤를 돌아 채하의 얼굴에 겹쳐 보았다. 귀엽다. 다음은 고양이였다. 이것도 귀여웠다. 다시 넣고 이번에는 여우 귀를 꺼냈다. 마찬가지로 귀엽다.

주현이 오만 가지 머리띠를 들었다가 놓았다가 반복할 때 채하는 옆에서 얌전히 기다렸다. 마지막 동물 머리띠인 쥐까지 확인을 끝낸 주현은 옆으로 손을 뻗다가 힐끔 채하의 눈치를 한 번 보았다. 씌워 보고 싶은데 싫다고 반응할까 봐 두려웠다. 애초에 채하가 제안했던 건 ‘동물’ 머리띠였다. 주현은 굳게 마음을 먹고 채하를 불렀다.

“채하야.”

빨간 배경에 하얀 물방울무늬가 그려진 커다란 리본을 내밀자, 채하가 몸을 숙여 주현에게 높이를 맞췄다. 훅 다가온 얼굴에 잠시 당황했다가 놀란 표정을 갈무리하고 조심스레 머리띠를 씌워 줬다. 흐트러진 앞머리까지 정리해 주고 나니 채하가 다시 몸을 일으켰다.

“카민이 붉은색이더라고요.”

“어, 맞아.”

카민은 채하와 게임에서 처음 마주쳤던 날, 주현이 플레이하고 있던 캐릭터의 닉네임이었다. 채하도 당시 부캐였던 채채였다.

아메싫어를 제외하면 주현은 캐릭터 닉네임이 전부 색의 이름이었다. 리본 머리띠를 만지며 읊조리는 채하를 바라보며 주현은 가볍게 웃었다. 닉네임 뜻이 궁금해서 검색이라도 해 본 모양이다.

“계산하자.”

“형은요.”

계산대로 향하려던 발걸음이 채하의 몸에 가로막혔다. 길을 막은 채하는 주현이 가져다준 머리띠 옆에 있던 까만 리본 머리띠를 집어 들었다. 주현은 쭈뼛쭈뼛한 기색으로 어색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좀…….”

주현은 남을 꾸미는 것을 좋아했지, 본인을 꾸미는 취미는 없었다. 남자 동기 대다수가 당장 랩 하러 갈 것 같은 차림새로 등장해도 주현은 졸업할 때까지 유행에 휩쓸리지 않았다. 평생을 무난하게 살아온 주현의 앞에 검은 리본 머리띠가 내밀어졌다.

“형이 좋아하는 검은색이에요.”

“같이 쓰고 다니면 이상해 보이지 않을까?”

채하에게 머리띠를 씌워 줄 때부터 수상하단 눈빛을 충분히 받아 왔지만, 채하의 얼굴을 확인하느라 바빴던 주현은 모르고 있었다.

“형은 제가 부끄러워요?”

“아니야. 내가 잘못했어.”

여기서 한 번 더 거절했다간 어떤 말을 쏟아 낼지 모른다. 시한폭탄을 앞에 둔 주현은 고분고분히 머리띠를 향해 팔을 뻗었다. 하지만 머리띠를 들고 있던 손을 말없이 옮겨 버리는 채하 때문에 헛손질을 해 버렸다.

민망함을 감추지 못하고 입술을 꿈틀댔다. 머쓱한 반응을 보이면서도 시선은 채하의 손을 쫓았다. 창백하도록 하얀 손이 주현의 머리카락을 건드렸다. 피부에 닿는 것도 아닌데 괜히 간지러웠다. 게임 캐릭터에게도 달아 본 적 없던 커다란 리본이 주현의 머리 위에 자리했다.

생일 때 고깔모자를 쓴 것도 손으로 꼽힐 정도인데, 거대한 리본이라니. 주현은 질린 얼굴로 머리 위 리본을 만지작거리다가 체념했다. 그래도 채하에게 똑같이 리본 머리띠를 씌웠으니 이 정도면 괜찮은 거래였다. 합성 아바타를 받고 올라간 업적 퍼센티지가 채하가 주현을 알아볼 수 있던 징표가 된 것처럼, 얻는 게 있다면 잃는 것도 있는 법이었다.

“형, 저희 사진 찍어요.”

머리띠 계산을 마치고 기념품점을 나오자 채하가 놀이기구를 배경 삼아 셀카 모드의 휴대폰을 들이댔다.

“아, 나는 좀.”

주현이 옆으로 한 발짝 물러나자 곧장 채하의 시선이 쫓아왔다.

“형, 제가 부끄러워요?”

“……아니, 그런 거 아니라니까.”

원래도 사진 찍는 걸 좋아하지 않았다. 동기들이 포트폴리오에 본인 사진을 넣을 때 주현은 꿋꿋하게 글자로만 프로필을 채워 넣었다. 그에 경찬이 잘난 얼굴 뒀다가 뭐하냐고 타박했던 기억이 있다. 이력서에도 사진이 들어가는데 포트폴리오에까지 사진을 넣는 건 좀 부담스럽지 않나? 물론 주현이 채하의 얼굴이었다면 포트폴리오 처음과 끝에 한 장씩 사진을 장식해 두었을 것이다.

“네가 너무…… 그러니까.”

“제가 뭘요?”

“얼굴이 비교될 것 같은데.”

“…….”

한 프레임에 함께 담기는 게 부담스러운 얼굴이 있었다. 주현에게 채하가 그랬다. 빨간 리본을 머리에 단 귀여운 얼굴이 말을 잃고 주현을 빤히 응시했다.

“와, 씨. 키 더럽게 크네.”

둘은 그렇게 대치하듯 서서 서로를 마주 봤다. 그 침묵은 지나가던 남자 무리가 감탄처럼 뱉은 말로 인해 깨져 버렸다. 웃음이 터진 주현이 눈을 접으며 채하에게 장난스럽게 말을 던졌다.

“들었지?”

무리가 채하의 뒤편으로 지나가서 차라리 다행이었다. 얼굴까지 봤다면 채하는 제대로 욕을 들어 먹었을 테다. 저렇게 생겼는데 잘난 걸 모르다니. 어릴 적 사진을 보내면서 사람 꾀던 임채하는 어디로 갔나 싶었다.

“형이 제 얼굴 좋아하는 건 알아요.”

“……흡.”

태연한 얼굴로 뻔뻔스럽게 뱉는 말에 주현은 급하게 숨을 삼켰다. 채하가 팔을 뻗어 주현의 머리 위에 얹힌 리본을 만지작거렸다. 그 손길에 끝이 구겨져 있던 리본이 금세 반듯해졌다.

“형 잘생겼는데, 비교된다고 하니까…….”

주현은 임채하가 단단히 저에게 빠졌단 걸 실감했다. 한 번도 느껴 본 적 없을 감상을 억지로 지어내어 말하는 채하가 기특해서라도 주현은 사진 촬영에 응하기로 했다. 다시 채하에게 붙어 서자, 채하가 몸을 숙여 주현의 어깨에 턱을 기댔다.

“형, 웃어요.”

주현의 입술이 바들바들 떨렸다. 네가 그러고 있는데 잘도 웃음이 나겠다. 휴대폰 화면에 나오는 채하의 입꼬리를 따라 웃어 보려고 해도 결과물은 어색하기만 했다. 기다려 줄 여유가 없는지 촬영이 시작되었다.

“야.”

황당해하는 얼굴이 그대로 찍혔다. 그에 채하가 웃으면서 목덜미에 머리카락을 비비적거렸다. 화들짝 놀라서 떨어지려던 게 그다음 사진에 담겼다. 찰칵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사진 촬영을 막으려고 팔을 뻗던 것과 마지못해 채하 옆에서 얌전히 웃는 것까지.

멋대로 지우지 않겠다고 채하와 약속을 하고 휴대폰에 찍힌 사진을 확인했다. 채하의 미소를 보면 늘 서늘하다는 느낌을 받았었는데, 지금은 그렇지 않았다. 똑같이 눈을 접어 웃고 있는 말간 얼굴을 보니 목이 간지러웠다.

“채하야. 너는…… 내가 좋아?”

“네.”

주현은 찍은 사진을 손가락으로 하나씩 손가락으로 넘기고 있었고, 채하는 그 뒤에 서 있었다. 뒤편에서 기다렸다는 듯이 울리는 나지막한 대답에 주현은 웃음기 가득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그리 확신을 해?”

주현도 채하와 함께하는 건 즐거웠다. 덕분에 많이 웃었고, 곤란했던 일들도 채하의 도움을 받아서 원활히 해결할 수 있었다. 주현이 채하에게 준 것보다, 채하에게 받은 것이 더 많았다.

호불호를 따지자면 채하는 호에 가까웠지만, 주현은 어설픈 마음으로 채하를 만나고 싶지 않았다. 갈팡질팡하는 주현과 다르게 굳은 확신을 내리는 채하가 마냥 신기했다.

“저는 사람을 좋아해 본 적이 없어서요.”

“……어, 그래 보인다.”

저 성격에 누군가를 좋아한 과거가 있다면 그것대로 섬뜩하게 느껴질 듯했다. 어쩌다가 저런 녀석과 엮이게 된 건지, 주현은 기억을 더듬어 보다가 질문을 던졌다.

“그럼 내가 처음이야?”

“네, 형은요?”

“…….”

주현은 얼굴에서 웃음기를 지우고 잠시 침묵했다.

“형?”

“우리 뭐 탈까?”

곳곳에 있는 큼지막한 놀이기구를 훑으며 화제를 돌렸다.

<4권에서 계속>

* 각주 모음

[1] 게임에서 양측이 동일한 조건으로 겨루는 걸 칭하는 용어.

[2] 상대방과 동시에 공격하는 것.

[3] 머리를 맞히는 것. 보통 머리의 판정 대미지가 더 높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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