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전 1. 블루 셀레스트
[길드] 블랙 : 이번에 생각보다 살게 없네요
[길드] westone : 상자 몇 개 사셨어요?
[길드] 블랙 : 100개요
[길드] 단공 : 블랙님 누구보다 즐기고 계신데용?
[길드] 어스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아바타 구성이 별로일 때는 오히려 상자깡을 하는 게 유리했다. 상자깡을 하는 사람들이 없으면 수요만 넘쳐서 아바타 값이 유독 비쌌다. 주현은 채하 것까지 뽑겠다는 마음가짐으로 일단 아바타 상자 100개를 사들였다. 부족하다면 더 구매할 의향이 있었다.
[길드] blueberry : 근데 살거 ㅈㄴ 없긴 함
[길드] blueberry : 골드값도 내려갔던데
게임이 잘 돌아가고 있는지 확인하고 싶을 땐 골드값을 확인하라는 말이 있었다. 혼돈의 설화는 현재 아픈 상태였다.
[길드] westone : 혼설 아프지 말라고 블랙님이 서버비 내주시고 ㅠㅠ
[길드]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SYSTEM] 블랙님이 [환상의 동화 아바타 상자]에서 [환상의 백설 공주 세트 (여)]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블랙님이 [환상의 동화 아바타 상자]에서 [환상의 난쟁이 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길드] westone : 그래도 이번엔 잘 뽑으시네요?
[길드] 레아 : 우와 축하드려요!!!
[길드] 단공 : 블랙님 운 개쩔어용
여자 캐릭터 전용 옷인 백설 공주와 달리 난쟁이 세트는 성별 제한이 없는 공용 아바타였다. 난쟁이를 공용 옷으로 만들었다면, 남자 캐릭터 몫으로 왕자 옷을 내어 줘야 마땅했지만, 혼돈의 설화는 녹록하지 않았다. 남자 캐릭터 옷은 없었다.
더군다나 난쟁이 아바타는 키 작은 캐릭터가 입으면 귀여웠으나 덩치 있는 캐릭터가 입으면 그래픽이 깨져 누더기를 걸친 것처럼 연출이 되었다.
별로 입고 싶은 아바타는 아니었지만, 아바타 도감은 채워야 했으므로 포장을 뜯어 인벤토리에 고이 보관했다. 원하는 아바타를 얻지 못한 주현은 상자 100개를 추가로 구매했다.
[SYSTEM] 블랙님이 [환상의 동화 아바타 상자]에서 [환상의 빨간 모자 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SYSTEM] 블랙님이 [환상의 동화 아바타 상자]에서 [환상의 빨간 모자 세트]를 획득하셨습니다.
[길드] 단공 : 와 저거 개비싸던데
[길드] blueberry : ㅊㅊ
백설 공주에서 남자 캐릭터가 찬밥 신세를 당한 덕분인지, 빨간 모자가 공용 아바타로 나올 수 있었다. 서쪽은 망토를 두른 채 쇼트 수영복을 입어서 하의 실종 패션을 선보였다. 기장이 애매해서 그런지 걸을 때마다 망토가 들치며 수영복이 보였다. 그에 월월월이 진저리를 쳤다.
10개씩 까는 행위를 반복하니 마지막에 가장 가지고 싶어 했던 아바타를 손에 넣었다. 끝까지 얻지 못하면 상자를 추가로 구매하거나 거래소에서 아바타를 살 생각이었는데, 채하 것까지 얻게 되어 다행이었다. 주현은 채하에게 우편으로 아바타 하나를 보낸 후 캐릭터를 끌고 염색 NPC를 찾아갔다. 옆에 앉아 있던 채하도 눈치껏 주현의 캐릭터의 뒤를 쫓았다.
“채하야. 잠시만.”
망토를 조금 더 선명한 붉은색으로 염색한 주현은 일어나 채하와 자리를 바꿨다. 예전에는 염색까지 끝내고 채하에게 아바타를 보냈지만, 이제는 귀속 해제를 해 가면서 번거롭게 굴 필요가 없었다. 바로 옆에 채하가 있었고 비켜 달라고 말 한 번만 건네면 되는 간단한 일이었다.
[SYSTEM] 길드원 잔혹동화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단공 : 동화님 하이용 ^0^
[길드] westone : 얼른 아바타 상자 사세요~
[길드] 레아 : 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월월월 : ㅎㅇㅎㅇ염
[길드] 잔혹동화 : 저 업뎃 보고 달려왔어요 ㅋㅋㅋ
주현도 아바타 상자의 이름을 보자마자 길드원인 잔혹동화를 떠올렸다. 예상대로 ‘동화’에 반응한 잔혹동화는 업데이트 내용을 보자마자 달려왔다.
[길드] 잔혹동화 : 공용 아바타가 많네요
[길드] westone : 백설공주에서 왕자 대신 난쟁이가 됐지만..
[길드] westone : 그 희생으로 망토를 지킬 수 있었어요
[길드] 단공 : ㅋㅋㅋㅋㅋㅋ ㅇㅈ
가장 인기가 많은 아바타는 단연 [환상의 빨간 모자 세트]였다. 모자를 쓴 버전과 벗은 버전으로 나누어졌을뿐더러 두 가지 모두 아바타 세트에 포함되어 있어서 이례적인 구성이었다.
[길드] 잔혹동화 : 전 난쟁이도 갖고 싶어요 ㅋㅋㅋㅋ
[길드] 단공 : 동화님처럼 키 작은 캐릭터는 귀여워용
[길드] blueberry : 단공은 역겹던데
[길드] 단공 : ㅠ0ㅠ
[길드] 단공 : 니가 역겹다고 해서 바로 팔아버렸음
[길드] 월월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탱커 포지션의 직업을 키우는 유저들은 대체로 캐릭터 덩치가 큰 편이었는데, 그걸 고려하더라도 단공은 유독 거대했다. 길드에서 가장 커다란 몸뚱이를 가진 단공에게 난쟁이 복장이 어울리지 않는 건 당연한 일이었다.
난쟁이 옷을 작은 캐릭터 기준으로 만들었는지 옷 그래픽을 뚫고 피부가 드러나는 사태도 일어났다. 주현도 혹시나 해서 캐릭터에게 입혀 봤지만, 쇄골과 어깨 사이가 깨져 있어서 곧바로 인벤토리에 집어넣었다.
[길드] 잔혹동화 : 이거 몇 개 사야 남캐 옷 다 뽑을 수 있을까요???
[길드] 단공 : 전 골드로 샀어용 ㅠ
[길드] westone : 저도요 ㅋㅋㅋ 블랙님한테 물어보셔야
[길드] westone : 블랙님 100개 사셨던데
채팅 창에 제 닉네임이 등장하자 주현은 조절하고 있던 색상 바를 멈춰 놓고 노트북 키패드에 손을 얹었다.
[길드] 밍채 : 저 200개 사서 백설1 난쟁이1 망토2 나왔어요
[길드] westone : ?
[길드] 단공 : ㅆㅂ 뭐야
[길드] 잔혹동화 : .......?????????
[길드] blueberry : 진짜 뭐임?
[길드] 단공 : 이젠 빙의까지 하는건가?
대형 사고였다. 채팅 창에 떠오른 밍채의 닉네임에 일순간 머리가 새하얘졌다. 주현은 어떻게 수습을 해야 할까 궁리하며 일단 채하에게 사과부터 건넸다.
“……미안. 나 진짜 까먹었어.”
얼굴색이 희멀겋게 변해 굳어 있는 주현의 어깨에 채하가 볼을 문지르면서 중얼거렸다.
“저희 같이 사는 거 다들 알겠네요.”
실수를 저지른 건 주현이었으나 너무도 태연한 상대방의 반응에 채하가 벌인 농간이 아닌가 의심이 되었다. 길드 채팅에선 단공이 채하의 정체가 아스모데우스라고 주장하고 있었다. 이대로 가만히 있으면 채하 혼자 벌인 일로 수습이 되겠지만, 어린애 뒤에 숨는 건 비겁한 짓이었다.
“……말해도 돼?”
“네.”
길드원들이 채팅 창에서 뭐라고 떠들든 관심 없는 채하가 고개를 주억거렸다. 주현은 한숨을 삼키며 어디까지 말을 해야 하나 고민에 빠졌다.
[길드] 단공 : 블랙님 말 없으신 게 제일 무서움;;;
[길드] blueberry : ㄹㅇ
[길드] 밍채 : 아..
[길드] westone : 말투 진짜 블랙님 같아요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잔혹동화 : 먹히신듯......
[길드] 밍채 : 염색 대신해준다고
[길드] westone : ?
[길드] westone : 계정 공유하시는 건 알았는데
[길드] 단공 : 아니 뭐임 블랙님 로그아웃 안 하셨잖아요
주현이 출근한 동안, 채하가 장비를 바꿔 놓았던 전적이 있었으니 둘이 계정을 공유하는 사이라는 건 길드원들도 이미 알고 있는 사실이었다. 하물며 캐릭터 대리 육성은 유저들 사이에서 흔히 있는 일이라 새삼스러울 것 없었다.
어느 정도 사정을 아는 길드원들이 혼란에 빠진 건 채팅 창에 둘의 로그인, 로그아웃 표시가 없기 때문이었다. 로그아웃하지 않았는데 주인이 바뀌었으니 놀랄 만도 했다.
[길드] 밍채 : 대학 선후배예요
[길드] 어스름 : 네?
[길드] blueberry : ?
[길드] westone : 헐 진짜요?
[길드] 단공 : 와..........
[길드] 단공 : 블랙님 ㅈㄴ 불쌍하다 현실에서도 민채를 본다니
[길드] westone : 그럼 밍채님 중학생 아니잖아요
[길드] 어스름 : 중학생이요?
[길드] 단공 : 또 뭔 컨셉질을 한거냐 ㅆㅂ
주현도 채하의 진짜 나이를 알게 된 건 아스모데우스 이후였다. 왜 중학생인 척하는 건지 아직도 완전히 이해하진 못했지만, 채하가 나이를 밝히지 않는 데엔 그만한 이유가 있으리라 짐작하여 주현은 말을 아끼면서 살아왔다.
[길드] blueberry : 누가 선배임? 블랙님?
[길드] 밍채 : 네
[길드] westone : 블랙님 저 궁금한 거 있어요
[길드] westone : 밍채님 키 진짜 190이에요??
[길드] 단공 : 에이 구라겠죠
[길드] 밍채 : 네
[길드] 단공 : ?
길드원들의 질문에 답변하면서도 주현은 제 어깨에 기대 있는 채하의 낯빛을 살폈다. 나이를 속이고, 꼬박꼬박 입금자명을 바꿨다는 건 온라인에선 제 얘기를 별로 하고 싶지 않다는 의사인데, 주현 때문에 채하까지 덩달아 끌려 나오게 되었다.
[길드] 잔혹동화 : 헐 키가요?
[길드] 레아 : 우와
[길드] westone : 그때 블랙님이 밍채님 키 작으니까 물어보지 말랬는데
[길드] 어스름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블랙 : ㅠㅠ
채하는 하나도 슬프지 않은 얼굴로 키패드를 두 번 눌러 채팅을 입력했다.
“제가 그렇게 작아 보여요?”
“……네가 나이를 속였잖아.”
주현이 상상했던 밍채는 작은 키의 조금 만만하게 생긴 중학생 남자아이였다. 이렇게 커다란 임채하가 아니라.
[길드] 어스름 : 아는 사람이랑 커플하기 힘든데...^^
[길드] westone : 경험담이에요? ㅋㅋㅋ
[길드] 어스름 : ^^
[길드] 단공 : 블랙님 블랙님
[길드] 밍채 : 네
[길드] 단공 : 밍채 못생겼죠?
단공은 그러길 바라는 사람처럼 물었다. 주현은 또 한 번 시선을 내려 채하의 이목구비를 샅샅이 훑었다. 본래도 취향이었던 얼굴이 이제는 애정이 담겨 더욱 곱상해 보였다. 주현은 채하를 자랑하고 싶은 마음과 단공을 골려 주고 싶은 짓궂은 마음을 반씩 담았다.
[길드] 밍채 : 보시면 단공님 반할지도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blueberry : ㅋㅋㅋㅋㅋㅋ미치겠다
[길드] 단공 : 우웩 ㅠ ㅆㅂ 밍채가 대신 친거라고 말해주세용 ㅠ0ㅠ
[길드] blueberry : 민채가 친거면 플러팅 아니냐고 ㅋㅋㅋㅋ
[길드] westone : 블랙님 거울 볼 때랑 밍채님이랑 어느쪽이 더 잘생겼어요?
[길드] 레아 : 엌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단공 : 당근 거울이졍ㅋ
[길드] 단공 : 블랙님 배우처럼 생겼다면서요
[길드] 밍채 : 밍채요..
[길드] 단공 : 블랙님 저희 현실에서 안 볼 사이라고 이렇게 막 거짓말하시면 곤란해용 ㅠ 밍채한테 협박당하고 있는 건 아니시죵???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단공이 주현의 말을 믿지 못하고 자꾸만 의심하는 것도 공감이 갔다. 텍스트로 전해지는 말에는 한계가 있었다. 채하는 그동안 이름도, 나이도 길드원에게 밝히지 않았으니 한 번에 풀리는 정보에는 더더욱 신빙성이 없었다.
[길드] 레아 : 두분 선후배라는거 신기해요!!!
[길드] westone : 맨날 같이 로그인 로그아웃하시길래
[길드] westone : 진짜 사랑을 하고 있단 건 알았는데
[길드] 밍채 : ㅅㅂ
[길드] 단공 : 와 밍채 닉으로 욕하는거 첨봐요
[길드] westone : 왠지 블랙님한테 뭔말하면 밍채님한테 바로 귓속말이 왔어요 ㅋㅋㅋ
[길드] 단공 : 아 ㅆㅂ 저도 느낌 ㅠ
길드원들이 말하는 걸 찬찬히 읽어 보니 언젠가는 들킬 문제였다. 채하가 주현의 화면을 엿보고 유저들에게 귓속말을 날린 게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었으니 다들 티는 못 내고 가슴 한구석에 의문을 가진 채로 살아갔다.
[길드] blueberry : 밍채 이름 진짜 민채예요?
[길드] 단공 : 어 나도 궁금
[길드] westone : 아니었어요?
[길드] 단공 : 밍채가 골드 사갈때마다 입금자명 밍채여서
[길드] 단공 : 블베가 본명 김민채 아니냐고 드립치면서 시작된거예용 ㅋㅋ
주현도 겪은 기억이 있었다. 채하가 블랙이 주현임을 알아보게 되었던 순간이기도 했다.
[길드] blueberry : 난 근데 대학생인것도 지금 알았음
[길드] 단공 : 나돈데
[길드] 어스름 : 난 군대 다녀온것만 알아 ^^
[길드] westone : 와 진짜 신비주의셨네요
주현은 이럴 때면 기분이 묘해졌다. 온라인과 오프라인의 세계를 명확하게 구분해 놓은 녀석이, 어쩌다가 제 앞에 나타나게 되었을까.
돌이켜 생각해 보면 주현에게도 채하의 존재는 변덕이었다. 유저들과 연락을 한 건 아이템이나 골드 거래를 할 때뿐이었다. 길드원 중에서도 주현의 이름을 아는 건 서쪽과 채하밖에 없었다. 게임에서 더 오래 알고 지냈던 서쪽보다 먼저 사적인 연락을 하게 된 건 채하였다.
“……이렇게 말해도 되나.”
“전 형이 제 얘기 하는 거 좋아요.”
주절주절 말을 늘어놓다 보니까 뒤늦게 걱정이 들었다. 심각한 얼굴이 된 주현에게 채하가 안심하라는 듯 말했다.
[길드] westone : 그럼 블랙님은 원래 밍채님이랑 친하셨어요?
[길드] 단공 : 블랙님 같은 정상인이 밍채랑 친했을리가
[길드] 어스름 : 잘못 걸리신거죠 ^^
[길드] 월월월 : 다들 부정적이시네염 ㅋㅋㅋㅋㅋㅋ
학교에서 주현이 채하와 마주쳤던 건 2학년 2학기 교양 수업이 전부였다. 그마저도 채하가 밥 사 주겠다는 제안을 매몰차게 거절하면서 사이가 서먹해졌다. 이후 채하는 군대에 들어갔고 주현은 그대로 학교를 졸업해 완전히 접점이 사라져 버렸다.
친했냐는 질문에 돌아올 답은 ‘아니다’였지만, 이미 지나간 과거였고 길드원들에게 그때의 일을 구구절절 설명해야 할 이유도 없었다.
[길드] 밍채 : 친했어요
[길드] westone : 헐 진짜요?
[길드] westone : 그럼 아바타 쿠폰 그것도 밍채님이에요?
[길드] 밍채 : 아 네
그때는 채하가 성기사를 키우고 있다고 오해했으나 채하에게 받은 아바타 쿠폰인 건 맞았다.
[길드] westone : 후배 성기사라고 하지 않으셨어요?
[길드] 밍채 : ㅎ
[길드] blueberry : 입만 열면 구라 쳤나보네요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밍채 : 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레아 : 아는 사람이랑 같은 게임하는 거 진짜 신기해요!!!
[길드] 단공 : 그게 민채라면 끔찍함 ㅠ-ㅠ
[길드] blueberry : 민채도 너랑 현실에서 만나면 끔찍해
게임을 오래 하다 보면 유저들과 한 번쯤 만날 수도 있을 테지만, 주현과는 거리가 먼 일이었다. 재앙 길드 단톡방에 들어가지 않았기도 하고, 친한 서쪽이나 월월월과도 게임 외에는 연락해 본 적이 없었다.
만날 리 없다고 믿던 밍채가 제 앞에 나타났을 때 주현은 머리가 어지러웠다. 밍채의 정체가 중학생이 아니라 대학교 후배인 임채하라는 점이 더욱 충격을 안겨 주었다. 상상해 본 적 없던 일이 눈앞에서 일어나니 판단력이 흐려지고, 다가오는 채하에게 속수무책으로 휘둘렸다. 하지만 그건 다 채하가 함께 게임을 했던 밍채이기에 가능했다.
현실에서 서로를 마주한 순간, 알 수 없는 감정에 비로소 이름을 붙일 수 있었다.
“형은 끔찍했어요?”
“……글쎄. 너는?”
주현은 채하도 아마 자신과 비슷한 반응을 보였을 것이라고 짐작했다. 인정 없어 보이는 녀석이 어쩌다가 저에게 꽂혀서 졸졸 따라왔는지는 아직도 정확한 이유를 알지 못했지만. 아마 주현이 느꼈던 것처럼 다른 사람에게 내어 주고 싶지 않고, 이대로 놓치고 싶지 않아서였으리라.
“신기했어요.”
먼저 정체를 알게 된 게 채하였으니, 채하 나름의 고충이 있었을 테다.
“저는 형이랑 계속 게임 하고 싶었는데…… 이름을 알고 나니까 아무래도 형이 도망갈 것 같아서.”
본인도 지은 죄가 있단 걸 자각했단 게 신기했다.
“일단 잡아야겠다고 생각했어요.”
당시의 채하는 본인이 어떤 감정인지 자각하지 못한 채 막무가내로 행동했다. 주현은 얘가 나를 좋아하나 싶어서 질문을 던졌는데, 그런 것 같다는 답이 돌아와서 얼마나 황당했는지 모른다. 간혹 주현은 그 순간을 떠올리며 그때 채하에게 다른 질문을 꺼냈다면 둘의 사이가 어떻게 흘러갔을지 궁금했다.
스스로 확신을 내리고 알맞게 길을 찾아왔을지, 아니면 아직도 빙빙 돌면서 미아인 채로 남았을지.
* * *
여름 방학이 끝나고 새 학기가 시작되었다. 혼돈의 설화 업데이트 날짜에 맞춰서 공강을 만들던 채하도 이번만큼은 실패하고 말았다. 주현이 매번 연차를 수요일에 쓰는 탓에, 함께 휴일을 맞추려고 한 채하의 계획은 그대로 물 건너가 버렸다. 그래도 수요일에는 수업이 하나밖에 없는 덕분에 채하는 주현이 늦잠을 자면 깨어나기 전에 집으로 돌아오곤 했다.
여름 방학에 맞춰 <태만의 벨페고르> 레이드를 업데이트하고 한동안 숨죽이고 있던 혼돈의 설화는 새 학기가 시작되는 동시에 새로운 직업인 인형술사의 티저 영상을 공개했다.
수호자 때처럼 사전 퀘스트를 위해 주현은 캐릭터를 끌고 던전으로 향했다. 수호자의 숲에 있던 수호자와 달리 인형술사는 공동묘지 던전을 차례차례 클리어하여야만 만날 수 있었다.
저렙 던전이어서 클리어에 어려움은 없었지만, 던전 개수가 많은 탓에 무척 귀찮았다. 일곱 번째 던전의 보스까지 무찌르고 나니 으스스한 묘지에서 인형술사가 모습을 드러냈다. 파리한 몸에서 유일하게 빛나는 진한 파란색 눈동자가 화면을 응시했다.
【 우리는 당신의 힘이 필요해요. 】
[NPC] 인형술사 : 응? 멋진 인형이잖아.
【 멋진 인형이요? 여긴 저희밖에 없는데……. 】
인형술사의 말을 이해하지 못한 주현의 캐릭터가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NPC] 인형술사 : 내 힘이 필요하다고 했지. 그렇다면…….
【 ……. 】
[NPC] 인형술사 : 나도 널 빌리겠어.
그대로 캐릭터가 죽었다. 선택지를 고른 것도 아닌데 죽은 캐릭터가 의아해 채하의 화면을 살피자 상황이 별반 다르지 않았다. 채하의 캐릭터도 숨이 끊긴 채 땅에 쓰러져 있었다.
“……뭐야, 이건 또.”
제멋대로 굴던 수호자도 황당했지만, 다짜고짜 사람을 죽이는 인형술사도 만만치 않았다. 인형술사는 까르륵 웃음을 터뜨리더니 손가락을 움직여 캐릭터를 일으켰다. 화면이 암전되었다가 다시 빛이 돌아오며 시점이 바뀌었다. 인형술사의 등이 보였다.
“캐릭터가 무기예요.”
채하는 덤덤하게 답하며 캐릭터를 끌고 묘지 주변 몬스터를 해치우고 있었다. 주현이 다시 화면으로 시선을 돌리자, 스멀스멀 죽었던 고스트들이 살아나는 중이었다. 제 캐릭터로 싸우는 건 어려울 것 없었지만, 캐릭터가 ‘무기’가 되는 건 처음이었다. 억지로 일으켜져 걷고 있는 캐릭터는 어딘가 기이해 보였다.
[길드] 통망통 : 사전퀘 던전 왜케 길어여 ㅠ
[길드] westone : 엥 짧지 않아요?
[길드] blueberry : 나도 짧던데
[길드] 단공 : 짧은데???
캐릭터를 무기 삼는 터라 기존의 세세한 스킬 사용까진 불가능했지만, 공격력의 영향을 받는지 휘두르는 기본 공격만으로도 엄청난 대미지를 가했다. 검날에 스친 몬스터들이 줄줄이 쓰러지며 순식간에 길이 트였다.
[길드] westone : 아 통망통님 보급 입으셔서 그런것 같아요
[길드] 통망통 : ㅠㅠ
[길드] 단공 : 장비 좀 사라
[길드] 통망통 : 사줄거임?
[길드] 단공 : ㅆㅂ 내가 왜
[길드] 어스름 : 그렇게 바라던 커플하면 되겠네 ^^
[길드] 단공 : 저도 사람 가려가면서 사귀는데요 ㅡㅡ
본인의 캐릭터 능력치가 그대로 적용되는 탓에 보급 장비를 입은 통망통은 던전에서 고전하고 있는 모양이었다. 누구보다 좋은 장비를 입은 채하는 빛 기둥으로 고스트들을 쓸어 버리고 유유히 던전을 빠져나갔다.
장비를 새로 맞춘다고 변덕을 부린 탓에 랭킹이 잠깐 주춤했지만, 채하는 그 후 1개월 만에 강화를 모두 끝내고 성직자 1위 자리를 탈환했다. 지켜보던 단공과 블루베리는 독하다고 혀를 찼다.
[길드] 월월월 : 인형술사가 아니라 시체술사인데염 ㅋㅋㅋㅋㅋㅋ
[길드] 단공 : 실제로 죽은 파티원 시체로 싸우던데
[길드] 레아 : 허얼
[길드] westone : 블랙님 조심하셔야겠는데요
[길드] 블랙 : ㅅㅂ
[길드] 블랙 : 근데 밍채 신캐 안 키워요
[길드] westone : 아 ㅋㅋㅋㅋ 그러네요
만약 던전에서 주현이 죽는다면 재빨리 시체를 선점하러 달려올 사람은 뻔했다. 다만 채하는 성직자 외 캐릭터는 키우지 않으니 이번에도 인형술사 육성은 하지 않을 테다. 채하의 캐릭터 선택 창 한 자리에 성기사가 있단 게 아직도 종종 낯설고 간지럽게 느껴졌다.
인형술사 사전 퀘스트는 지난번과 비교했을 때, 비교적 간단하여 주현은 금방 끝낼 수 있었다. 수호자 때는 퀘스트 아이템을 얻지 못해서 던전만 서른 번을 돌았었다.
“너 수호자 때 왜 도와줬어? 서른 번이면 진짜 귀찮았을 텐데.”
서른 번째에 간신히 아이템을 얻던 주현과 달리 채하는 한 번 만에 획득했었다. 아이템을 얻지 못해서 재도전을 반복하자, 미안해진 주현이 혼자서 하겠다고 말을 꺼냈지만, 채하는 레디나 하라는 답을 돌려줬었다.
게임 친구 사이에 던전 몇 판 돌아 주는 건 어려운 일이 아니었으나 서른 번은 ‘몇 판’이라고 말할 수 없을 만큼 거대한 숫자였다. 게다가 채하는 사람을 쉽게 도와줄 만큼 호의적인 인간도 아니었다.
“……몰라요.”
그때를 회상하는지 잠시 멈칫했던 채하가 어렵게 뱉어 낸 말에 주현은 가볍게 웃었다. 늘 그랬던 것처럼 끌리는 대로 살았겠거니 싶었다.
* * *
2주가 지나고 수호자 업데이트가 다가왔다. 안타깝게도 주현은 연차 사용에 실패했다. 닉네임은 몇 주 전부터 머리를 굴려 가며 고심했으나 뭐가 남아 있을지 몰라서 일하는 내내 또 고민에 빠졌다.
“채하야.”
건물에서 나온 주현은 제 앞에 서 있는 익숙한 차량에 다가가 조수석 문을 열고 인사했다. 차가 많은 곳이라 데리러 온다고 퇴근 시간이 단축되진 않지만, 얼굴을 더 빨리 보는 데에 만족했다. 한 번은 차 밀리니 데리러 오지 않아도 된다고 말을 했다가 채하가 잔뜩 서운해하는 탓에 풀어 주느라 고비를 겪었다.
“오늘 뭐 했어?”
“형 기다렸어요.”
조수석에 올라타자 불쑥 다가온 채하가 안전벨트를 끌어왔다. 혼자서도 충분히 할 수 있는 일인데도 채하는 구태여 해 주려고 하는 경향이 있었다. 채하의 성향이겠거니 하며 주현도 그렇게 하도록 내버려 뒀다.
자취방으로 향하는 동안, 주현은 핸들을 쥔 채하의 손에 시선을 두었다. 약지에서 빛나는 반지는 언제 봐도 만족스러웠다.
“아, 채하야. 우리 포장해서 가자.”
“네.”
손가락을 한참 구경하던 주현이 불현듯 정신 차리며 차창 너머 음식점을 가리켰다. 집에 머무르는 시간이 원래도 짧은데, 이젠 채하의 집까지 오가니 자취방을 장시간 비워 두는 일이 잦아서 음식을 자주 사 먹는 편이었다.
깔끔하게 포장된 도시락이 담긴 봉투를 들고 자취방으로 돌아온 주현은 아른거리는 게임을 뒤로한 채 식사부터 시작했다. 혼자 있을 때는 끼니를 대충 때웠으나 채하와 함께 지내니 꼬박꼬박 챙겨 먹게 되었다.
“학교에서 무슨 일 없었어?”
“네.”
주현은 도시락 뚜껑을 열면서 채하에게 질문을 던져 봤으나 돌아오는 답은 시원치 않았다. 채하를 잘 몰랐던 시절에는 대화하기 싫은가 고민했겠지만, 이제는 정말로 아무 일 없어서 뱉는 솔직한 대답이란 걸 알았다. 채하는 귀찮아하는 성격과 어울리지 않게 주변에 사람이 득실거렸으나 정작 채하가 들려주는 이야기를 들어 보면 삶은 단조롭기만 했다.
오히려 게임에서 소란을 몰고 다니는 탓에 그쪽이 더 시끌벅적한 편이었다.
“형은요?”
“나는…… 너랑 톡 하고, 업데이트 내용 확인하고 이러면서 월급 훔쳤지.”
주현은 가지런하게 정렬된 김밥을 제 입에 하나 넣고, 앞에 있는 채하에게 내밀었다. 채하가 냉큼 받아먹고 둘 다 오물오물 씹느라 말이 없어졌다. 다시 김밥 하나를 집어 드는데 열렬하게 꽂히는 시선이 신경 쓰인 주현은 젓가락을 채하에게 돌렸다. 그러면 채하의 젓가락은 주현을 향했다.
마음껏 집어 먹으라는 의미로 도시락을 채하에게 밀어 준 후 주현은 냉장고에서 생수병을 꺼내 들고 자리로 돌아왔다. 머그잔에 물을 따라 채하의 앞에 놓자, 채하가 젓가락을 들이밀었다. 입을 우물거리면서 이게 뭐 하는 짓인가 짧게 고민하다가 어차피 둘밖에 없는 공간인데 뭐 어떻나 싶었다. 주현은 제 입에 하나 넣고 채하에게 하나 먹여 주는 식으로 식사를 마무리 지었다.
식사를 끝낸 둘은 비워진 용기를 정리하고 나서 나란히 컴퓨터 앞으로 향했다. 주현은 결국 책상을 하나 더 구매해 컴퓨터 옆에 놓았다. 그 탓에 집이 비좁아졌지만, 채하가 자주 놀러 오니 그 정도의 투자는 당연했다. 새로운 책상에는 혼돈의 설화 업데이트가 끝난 채하의 노트북이 놓여 있었다.
“형, 닉네임 뭐 할 거예요?”
“……음. 뭐가 비었는지 봐야지.”
밥 먹는 동안 업데이트를 해 놓은 덕에 주현은 곧바로 게임에 접속할 수 있었다. 하고 싶은 닉네임은 웬만해서 이미 선점한 유저가 있기에 대충 입력해 보고 통과되는 닉네임을 가져갈 생각이었다. 예전에는 부캐도 예쁜 닉네임을 주겠다고 닉네임을 사 오곤 했었는데, 부캐는 수납 용도에 지나지 않아 그것도 한때의 일이었다.
“저 커스터마이징 형처럼 해 주세요.”
커스터마이징 창을 켜 놓은 채하가 의자를 비키며 요구했다. 주현은 이 말을 언젠가 한 번 들었던 기억이 있었다. 커플 하기 싫었던 주현이 채하의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을 트집 잡고, 채하가 기꺼이 바꾸겠다고 응했던 날이었다. 그때는 제 얼굴로 무슨 짓을 할지 몰라서 오히려 반대의 이미지를 만들었었다.
“……내 얼굴?”
“네.”
“……네 얼굴이 낫지 않아?”
“그건 형 커마 할 건데.”
“……그렇구나.”
주현도 모르는 사이에 제 커스터마이징이 정해졌다. 주현은 채하가 고른 성직자의 얼굴을 마우스로 고치며 묘한 기분을 느꼈다. 예전 같았으면 절대 만들어 주지 않았을 텐데, 채하가 허튼짓하지 않을 거란 걸 알아서 그런지 순순히 의견에 따랐다. 또 채하가 키우는 캐릭터는 웬만해서 죽지 않으니, 오히려 주현에게 얼굴을 바쳐야 하는 채하가 손해였다.
“형, 눈 안 이래요.”
“…….”
채하는 바라는 것도 많았다. 완성했다고 말한 뒤 자리에서 일어나려고 하자 채하가 팔을 붙잡고 휴대폰 화면을 내밀었다. 그곳엔 어색하게 웃는 주현이 있었다.
“입술 모양이 달라요.”
“아냐. 똑같아.”
“얜 웃는 게 부자연스러워요.”
“……난 인간이고 쟨 그래픽이니까.”
채하가 마음에 들어 하지 않는 티를 팍팍 내니 주현은 하는 수 없이 다시 마우스를 움직였다. 제 사진을 보면서 제 얼굴을 만들어내야 한다는 건, 자기애가 없는 주현에게는 곤욕이었다.
“이제 못해. 그냥 써.”
“네.”
또 고쳐 달라고 할까 봐 으름장을 놓자 채하도 만족했는지 얌전히 자리에 앉았다. 옆 의자로 옮겨 간 주현은 그제야 제 캐릭터 얼굴을 수정하기 시작했다. 마우스로 얼굴 곳곳을 만지작대다가 힐끔 채하를 엿보는데 그대로 눈이 마주쳤다.
“형, 그런데요.”
“어, 왜?”
입술이 조금 더 도톰해야 할 것 같아서 위로 당기는 중이었다.
“형 본캐 커마는 예쁜 것보단 잘생긴 편 아니에요?”
“……어, 그렇지.”
주현은 떨떠름하게 미소 지으며 대충 고개를 끄덕이고 바쁜 척 모니터 화면으로 시선을 돌렸다.
“왜 그렇게 했어요?”
“그땐 그게 취향이었어.”
“……음.”
주현이 그렇다고 우기니 채하도 마지못해 그러려니 하고 넘어갔다. 주현은 예나 지금이나 채하처럼 곱상하게 생긴 이목구비를 선호했지만, 그때의 커스터마이징에는 그만한 이유가 있었다. 제 취향처럼 만들면 자꾸만 채하가 생각나서, 캐릭터 보면서 열이 받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노선을 바꾸게 되었다.
너 때문에 열 받아서 이렇게 만들었다고 할 순 없으니 주현은 말을 아꼈다.
커스터마이징을 마친 주현은 미리 생각해 두었던 몇 가지 닉네임을 입력했다. 다 중복된 닉네임이라고 뜨는 바람에 머리를 쥐어짜서 떠올린 색상이 새로운 캐릭터의 닉네임이 되었다. 피치퍼프. 이름 그대로 복숭아의 느낌이 나는 색이었다.
주현은 평온에 가입 신청을 해 두고 캐릭터를 변경했다. 레벨 업에 유용한 아이템이 있는지 확인하기 위해서였다. 주현은 정말 오랜만에 카민에 접속했다. 타오르는 것처럼 선명한 붉은색의 캐릭터가 주현을 반갑게 맞이했다. 닉네임 위에는 아직도 재앙의 이름이 자리하고 있었다.
“……뭐야.”
주현이 중얼거리며 상황을 확인하기 위해 길드 창에 들어가자, 길드 인원 아래 불이 들어온 버튼에 시선을 빼앗겼다. 길드 위임받기. 주현이 재앙이었던 시절, 신사가 꼬박꼬박 접속하는 탓에 단 한 번도 활성화된 걸 본 적 없던 버튼이었다.
“받아요.”
머뭇거리는 주현을 대신해 채하가 마우스를 끌어와 길드 위임받기 버튼을 클릭했다. 주현은 단숨에 재앙 길드를 손에 넣게 되었다.
“……뭐지?”
“미접속 30일 넘으면 길마 뺏을 수 있어요.”
코쿄아는 진작에 재앙 길드를 떠났다. 머리에 재앙을 단 상태로는 파티 참여가 어려우니 신사와의 우정을 뒤로하고 잽싸게 탈출한 것이다. 재앙에서 벗어난다고 사사게 이력이 사라지는 게 아니니 내친김에 닉네임도 바꿨다. 그걸 발견한 블루베리는 코쿄아의 새로운 닉네임을 사사게에 박제했다.
코쿄아가 그렇게 떠나 버린 게 충격이었는지 신사의 미접속은 오늘로 43일째였다. 길드 마스터 미접속이 15일을 넘어가면 운영진이, 30일을 넘어가면 모든 길드원이 길드 마스터 자리를 위임받을 수 있었다. 주현은 길드 소식을 꼼꼼히 살폈다. 그곳에는 탈퇴한 길드원과 추방된 길드원의 기록이 남아 있었다.
“내 부캐인지 몰랐나 보다.”
본캐인 블랙이 재앙을 탈퇴한 날, 신사는 주현의 부캐인 블루셀레스트를 추방했다. 주현은 원래 부캐를 잘 안 키우기도 하고, 카민은 생소한 이름이니 신사가 모르고 넘어가 버려 생긴 일이었다.
서쪽에게 귓속말을 보내려 했으나 로그아웃 중이라는 시스템 메시지가 돌아왔다.
“서쪽 님 닉네임 뭐야?”
“제 닉네임은 안 궁금해요?”
“너무 궁금하지.”
주현은 채하의 장단에 맞춰 주며 잔혹동화에게 귓속말을 시도했다. 다행히 이쪽은 본캐에 접속 중인지 곧바로 답이 돌아왔다.
[귓속말] 잔혹동화에게 : 잔혹동화님 저 블랙인데
[귓속말] 잔혹동화 : 네네
[귓속말] 잔혹동화에게 : 제가 지금 재앙 길드 뺏었거든요
[귓속말] 잔혹동화 : 네????
[귓속말] 잔혹동화에게 : 서쪽님한테 드리려고 하는데 잔혹동화님 괜찮은지 여쭙고 싶어서요
[귓속말] 잔혹동화 : 당연하죠 ㅋㅋㅋㅋ 길포만 따지면 서쪽님이 받아가는게 맞죠
길드 포인트를 가장 많이 모은 게 서쪽이었지만, 잔혹동화가 한때 재앙의 운영진이었으니 미리 양해를 구했다. 흔쾌히 승낙하는 잔혹동화에 주현도 마음이 놓였다.
“서쪽 님 닉네임 뭐야?”
“west two요.”
채하에게 다시 물으니 이번에는 고분고분히 닉네임을 넘겼다. 수호자 때는 방향을 바꾸더니 인형술사는 숫자가 늘었다.
[귓속말] westtwo에게 : 서쪽님 남는 부캐로 오세요 재앙 드릴게요
[귓속말] westtwo : ?????????? 뭐예요
[귓속말] westtwo에게 : 신사가 카민이 제 부캐인거 몰랐는지 안 잘라서
[귓속말] westtwo에게 : 장기 미접속으로 길마 뺏었어요
[귓속말] westtwo : ㅁㅊ 당장 갑니다
조금 기다리자 주현의 앞에 southone이 나타났다. 서쪽의 부캐가 그러하듯 상의는 없었으며 하의는 꽃이 그려진 반바지인지 팬티인지 정체를 알 수 없는 옷이었다. southone의 직업은 성직자였다. 단정하게 옷을 잘 입고 다니는 채하의 캐릭터를 보다가 벌거벗은 서쪽을 만나니 같은 성직자란 걸 믿을 수가 없었다.
[전체] southone : 와 진짜 블랙님 대박이에요
[전체] 카민 : ㅋㅋㅋㅋ 길마 드릴게요
[전체] southone : 제가 사랑하는거 아시죠?
[전체] southone : 아니 밍채님..ㅋㅋㅋㅋㅋ 그런 뜻이 아니라요
서쪽은 들뜬 마음에 무심코 사랑 고백했다가 채하에게 뭔가를 받았는지 해명을 늘어놓았다. 혼돈의 설화는 가입 직후에도 바로 권한을 넘길 수 있었다. 길드 마스터를 서쪽에게 양도하자, 주현의 등급이 운영진으로 하락했다.
길드 마스터가 된 서쪽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신사의 캐릭터를 모두 추방하는 것이었다. 그 모습을 지켜보면서 어째 주신 리라의 석상 목을 베던 루시퍼가 떠올랐다. 신사의 모든 캐릭터가 쫓겨나고, 주현은 남은 길드원의 닉네임을 눈으로 훑었다. 보통 장기 미접속의 유저들을 추방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재앙은 새로운 길드원을 유지하기 힘든 상황이어서 신사가 그대로 내버려 둔 모양이었다. 주현의 부캐인 카민도 그렇게 살아남았다.
[전체] 먕먕먕 : 와 진짜네염 ㅋㅋㅋㅋ
체구가 자그마한 여자 캐릭터가 다가와 주현과 서쪽의 캐릭터를 살폈다. 닉네임과 외형을 보아하니 월월월이었다. 서쪽과 나란히 머리 위에 재앙 길드를 달고 있는 게 신기한지 잔혹동화까지 구경하러 찾아왔다.
[전체] 잔혹동화 : 전 이제 맘 편히 잘수있어요 ㅠㅠ
[전체] 먕먕먕 : 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southone : 블랙님이 정의구현하셨어요
[전체] 카민 : 왜 안 잘랐을까요 이거 나름대로 접속 많이 했는데
[전체] southone : 그땐 블랙님 남자라고 생각해서 관심 없었으니까요 ㅋ
[전체] 카민 : ㅅㅂ 전 언제나 남자였어요
[전체] 잔혹동화 : ㅋㅋㅋㅋㅋㅋㅋ
서쪽에게 무사히 길드를 양도한 주현은 다시 캐릭터를 변경했다. 수호자 업데이트 때 만들었던 블루셀레스트였다. 그나마 자주 들어가는 부캐였으니 평온에 가입 신청을 넣어 둔 후, 인벤토리를 빠르게 살폈다.
[SYSTEM] 길드원 블루셀레스트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블루밸 : 블랙님 재앙 먹었다면서요
[길드] westtwo : ㅋㅋㅋㅋㅋㅋ 그것도 수납용 부캐로
[길드] 블루셀레스트 : ㅎ
“채하야. 너 길드 가입 안 했어?”
“지금 하려고요.”
접속 중인 길드원 목록을 살폈지만, 채하처럼 보이는 이름이 없어서 물으니 채하는 그제야 가입 신청을 넣었다. 이번엔 또 어떤 기막힌 닉네임을 가져왔을까 기다리던 때였다.
[SYSTEM] 길드원 윤채하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단공사 : 머임
[길드] 단공사 : 저거 밍채 부캐임?
[길드] 블루밸 : 왜 세글자 했대
[길드] 레아술사 : 이름 예뻐요!!!
인형술사와 어울리게 적당히 융합한 닉네임 사이에서 채하만이 번듯한 이름으로 등장했다.
[길드] 단공사 : 본명임?
[길드] 블루밸 : 설마 닉네임을 본명으로 할리가
[길드] westtwo : 블랙님 말이 없으신데 ㅋㅋㅋㅋㅋ
[길드] westtwo : 전 뭔지 알것 같아요
[길드] 단공사 : ???????
주현의 본명을 아는 서쪽만이 의도를 눈치채고 여유롭게 깔깔댔다. 재앙 길드를 서쪽에게 넘겨준다고 정신없던 사이에 벌어진 일이었다. 남의 성을 멋대로 훔쳐 간 닉네임을 복잡한 눈으로 응시했다.
서양 국가 몇몇이 결혼하면 이름의 성을 바꾼다지만, 한국인인 채하가 왜 그러고 있는지 이유를 알 수 없었다.
“……윤채하가 뭐야.”
“닉네임이요.”
중얼거리는 주현에게 채하가 덤덤한 얼굴로 대꾸했다. 그걸 지금 몰라서 묻나. 거래할 때 입금자명을 꼬박꼬박 바꿔 가며 본명을 숨기던 녀석이 왜 갑작스럽게 변덕을 부린 건지 이해하기 힘들었다.
[길드] 리라의마네킹 : 님들 저 궁금한게 있는데요
[길드] 리라의마네킹 : 블루셀레스트님이랑 블루밸님 커플이에요?
[길드] 단공사 : ?
[길드] 윤채하 : 제건데요
[길드] 스트로밸 : 아ㅣㄴ닌데요??????
[길드] 리라의마네킹 : ???
[길드] 블루밸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느닷없이 채팅 창에 날아온 질문에 주현이 마우스를 미끄러뜨리며 리라의마네킹의 정보 창을 열었다. 보급 장비를 착용한 걸 보아 신규나 복귀 유저로 추정되었다. 닉네임에 ‘블루’가 들어간다고 오해를 받다니 황당한 일이었다. 블루셀레스트의 커플 자리에는 컬러수집가가 당당히 자리하고 있었다. 마찬가지로 블루밸의 커플은 스트로밸이었다.
[길드] 단공사 : 남들이 해명하는거 개웃기네 ㅋㅋㅋㅋㅋㅋ
[길드] westtwo : 블루밸님은 스트로밸님이랑 커플이고
[길드] 리라의마네킹 : 아?
[길드] westtwo : 블루셀레스트님은 저기.. 윤채하님
서쪽은 어쩌다가 알게 된 채하의 진짜 본명을 부르기 껄끄러웠는지 앞에 마침표가 두 개나 붙었다.
[길드] 리라의마네킹 : 죄송해옄ㅋㅋㅋㅋㅋㅋㅋㅋ 진짜 몰랏어요
[길드] 단공사 : 둘다 블루라서 커플 같긴 함 ㅋㅋㅋ
[길드] 단공사 : ㅆㅂ 대련걸지마
“형, 왜 블루예요?”
단공에게 보낸 대련 신청을 거절당한 채하가 주현 쪽으로 고개를 돌리며 대뜸 물어왔다. 널린 색 중에 왜 하필이면 블루를 택했냐는 추궁에 주현은 어이가 없어졌다. 무려 빛의 삼원색 중 하나인 블루였다.
“레드 안 하고 카민 했잖아요.”
“레드는 먹으려면 돈 주고 사야 해……. 그리고 블루 아니라 블루 셀레스트야.”
“둘 다 블루잖아요.”
“……어차피 블루 셀레스트 너 생각하면서 지었는데 다른 사람이랑 닉네임 비슷한 게 뭐가 문제야.”
어느새 어깨에 들러붙어 있는 채하의 머리카락을 헤집으며 말했다. 그 손길이 좋은지 고개는 얌전히 있었지만, 불량한 눈동자와 뒤틀린 입술은 주현에게 반박했다.
“형 그때 저 싫어했잖아요.”
“……뭔 소리야. 내가 언제. 네가 날 싫어했겠지.”
재미없으면 사람 버리겠다고 한 녀석이 섭섭한 척 구니까 황당했다.
“닉네임도 안 알려 주고.”
당시 닉네임을 알려 주지 않은 건 채하도 똑같았다. 더불어 정체까지 숨기고 집착하며 쫓아와서 사람을 놀라게 만들지 않았나. 제가 했던 짓은 몽땅 잊고 서운하다고 투덜거리는 채하를 내려다보며 주현은 헛웃음을 삼켰다.
“그럼 믿지 말든가.”
채하와 함께 있으면 똑같이 유치해지곤 했다. 주현은 또다시 캐릭터를 바꿨다. 캐릭터 선택 창에 있는 모든 부캐의 인벤토리를 훑고 마지막으로 새롭게 만들었던 피치퍼프에게 돌아갔다.
접속과 동시에 핑크빛 창이 화면으로 날아왔다.
《 윤채하님이 피치퍼프님에게 교제를 신청하셨습니다. 》
제 성을 훔친 깜찍한 이름에 주현은 망설임 없이 수락을 눌렀다. 머리 위로 꽃가루가 흩날리며 둘의 교제 소식을 알렸다.
한때 주현에게 커플 기능은 굳이 할 필요성이 없는, 있으나 마나 한 존재였다. 그래서 채하를 만나기 전까지 커플 자리가 공란이기도 했다. 나중에는 커플 기능에 익숙해져 채하의 위치를 확인하지 못할 때마다 얼마나 속이 답답했는지 모른다. 새로운 캐릭터를 육성할 때마다 커플 자리는 채하의 몫이 되었다.
[길드] 잔혹동화 : 안녕하세요
[길드] 피치퍼프 : 안녕하세요
[길드] 블루밸 : 신입?
[길드] westtwo : 블랙님 같은데
[길드] 피치퍼프 : 어떻게 아셨어요
[길드] westtwo : 오자마자 밍채님이랑 광장에서 커플하고 계셨잖아요
[길드] 피치퍼프 : ㅅㅂ
마우스를 돌리며 주변을 살피자 미처 보지 못한 뒤편에서 서쪽이 상의를 벗은 채로 서 있었다. 혹시 몰라 거리를 두고 있던 서쪽은 확답을 얻자 주현의 캐릭터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왔다.
[전체] westtwo : 두분 커마 바꾸셨네요
[전체] 피치퍼프 : 아 네 괜찮나요?
주현이 채팅 창에 ‘/웃음’을 입력하자 채하를 닮은 얼굴이 눈을 접으며 수줍게 미소 지었다.
[전체] westtwo : 네 그런데요 블랙님
[전체] westtwo : 밍채님 같으니까 저 보고 웃지 말아주세요
[전체] 피치퍼프 : ㅅㅂ
[전체] 먕먕먕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얻어걸린 거지만 주현의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은 채하 같은 게 아니라 채하가 맞았다. 서쪽과 전체 채팅으로 대화를 나눈 탓에 채팅 창을 보고 사람들이 몰려들기 시작했다. 바뀐 커스터마이징을 구경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채하는 주현의 캐릭터에게 서슴없이 감정 표현을 사용하고 있었다.
제 얼굴을 닮은 캐릭터가 들러붙으며 애교를 부리는 걸 보고 있자니 주현은 속이 안 좋았다.
[ 피치퍼프님이 윤채하님에게 고개 숙여 입을 맞춥니다. ]
차라리 이편이 낫다 싶어서 감정 표현을 사용하자, 채하가 캐릭터의 움직임을 멈추고 얌전히 입맞춤을 받았다.
[전체] westtwo : 사랑하면 닮는다더니
[전체] 레아술사 : 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레아술사 : 닉네임 피치퍼프인데 엄청 까매요
주현은 보통 닉네임과 캐릭터 머리카락, 눈동자 색을 맞추는 편이지만 이번만큼은 달랐다.
[전체] 피치퍼프 : 얼굴이 복숭아예요
[전체] westtwo : 지금 밍채님이 복숭아 닮았다는거예요??
[ 윤채하님이 피치퍼프님에게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춥니다. ]
[전체] 레아술사 : 블랙님이 키가 더 크시네요?!
주현은 현실 채하의 모습을 반영하여 캐릭터를 최대 키로 설정했는데, 채하도 마찬가지인지 둘이 나란히 서 있으면 확연히 차이가 났다.
[전체] 피치퍼프 : 네 ㅎ 공기가 맑네요
[전체] westtwo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전체] westtwo : 전 언제나 맑았는데 ^^
서쪽은 캐릭터를 늘 최대 키로 만드는 탓에 홀로 장승처럼 솟아 있는 경우가 많았다. 함께 게임을 하는 레아와 월월월의 덩치가 왜소하여 더욱 돋보였다.
[ 윤채하님이 피치퍼프님을 포옹합니다. ]
[전체] 윤채하 : 전 작은게 좋아요
[전체] 단공사 : 우웩 ㅆㅂ
[전체] westtwo : ?
별안간 채하가 감정 표현을 이용하여 주현의 캐릭터를 껴안았다. 키 차이 때문에 주현의 캐릭터에 매달린 것처럼 모습이 그려졌다. 뒤늦게 광장으로 온 단공은 오자마자 본 애정행각에 구토하는 듯한 반응을 보이며 캐릭터 방향을 틀었다.
[전체] westtwo : 아 저 뭔지 알았어요
[전체] 피치퍼프 : 네?
[전체] westtwo : 말하면 근데 단공님 더 토하실것 같은데 ㅋㅋㅋㅋㅋ
[전체] 단공사 : 뭔데용?
[전체] 피치퍼프 : ??
주현은 서쪽이 무슨 말을 하려는지 예상조차 가지 않았다. 채하는 사람들의 대화에는 관심을 두지 않은 채 요란하게 아바타를 갈아입고 있었다.
[전체] westtwo : 두분 서로 키 바꾸신거 아니에요?
[전체] 단공사 : 와 진짜
[전체] 단공사 : 토나옴요 ㅠ
[전체] 단공사 : 두분 진짜 무슨 사이예요
[전체] 블루밸 : 알아서 뭐하게
마침 던전을 끝마치고 나타난 블루베리와 스트로베리가 다가왔다.
[전체] 단공사 : 내가 블랙님을 조금 더 빨리 만났다면
[전체] 윤채하 : 말 같지도 않은 소리 좀 하지 마세요
[전체] 블루밸 : 그래도 니 자리는 아닐듯
[전체] 단공사 : 저기가 내 자
[전체] 단공사 : ?
[전체] westtwo : ㅋㅋㅋㅋㅋㅋㅋ
단공과 먼저 만났더라도 주현은 그와 커플이 될 일이 없었다. 원래 커플 시스템에 관심이 없기도 했고, 함께 시간을 맞춰서 게임을 하는 건 평소 주현의 플레이 방식과는 거리가 멀었다. 채하와 커플이 된 가장 큰 이유는 협박을 받아서인데…… 단공이 타인을 협박할 성격이 아니거니와 단공 같은 지성인이 협박을 해 봤자였다. 주현을 휘두를 수 있는 건 보통의 인간들과 다른 사고를 하는 채하만이 가능했다.
단공이 놀리려는 의도로 일부러 치근덕댈 때마다 채하는 부지런하게도 매번 발끈했다. 주현은 채하에게 파티 초대를 보내고 대기실을 생성했다. 슬슬 하루가 끝나가는데 레벨 1로 남을 수는 없었다.
[길드] westtwo : 블랙님 도망가셨네요 ㅋㅋㅋㅋㅋ
[길드] 피치퍼프 : 도망이라뇨;; 렙업하러 가는 거예요
[길드] 블루밸 : 현명한 선택이에요
* * *
[길드] westtwo : 블랙님 블랙님
[길드] westtwo : 기다렸어요 루시퍼 가요
[길드] 피치퍼프 : ㅅㅂ
[길드] 단공사 : 지독하시네...
[길드] westtwo : 단공님도 가셔야 하는데요?
루시퍼 퀘스트가 열리자마자 서쪽이 나타나 주현을 찾았다. 주현은 말없이 조용히 육성하는 편이라 자세한 퀘스트 과정은 옆에 앉은 채하만이 확인할 수 있었다. 서쪽은 레벨로 퀘스트 진도를 유추했는지 정확했다.
[길드] 피치퍼프 : 루시퍼 안 가셨어요?
[길드] 단공사 : 전 갔음요
[SYSTEM] 길드원 westtwo님이 퇴장하셨습니다.
[SYSTEM] 길드원 westone님이 입장하셨습니다.
[길드] westone : 캐릭 바꿔오세요
[길드] 피치퍼프 : ㅅㅂ
[길드] 단공사 : ㅋㅋㅋㅋㅋㅋ
주현이 현생에 시달릴 때 서쪽은 이번에도 가장 먼저 만렙을 달성하여 westtwo를 졸업시켰다. 서쪽이 사람을 모으는 동안 채하는 강화 창을 열어 유유히 무기의 단계를 올리고 있었다. 무기는 능력치 상승 폭이 가장 큰 대신에 게임을 접을 때 골드 회수가 힘들었다. 채하는 어차피 게임을 접을 일도 없고, 투자한 골드를 아까워하지도 않으니 괜찮은 선택이었다.
더군다나 부캐가 가지고 있던 액세서리를 뺏어온 탓에 부족한 건 방어구가 전부였다. 채하의 새로운 캐릭터는 벌써 랭킹이 표기되었다.
[파티] 단공 : 머임? 이거
[파티]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서쪽처럼 캐릭터를 바꿔 온 단공은 대기실에 입장하고 마주친 두 덩어리에 뒷걸음질을 쳤다. 주현은 본캐에서 [환상의 빨간 모자 세트]를 옮겨 와 모자를 벗은 버전으로 입혀 놓았다. 머리가 휑하길래 거래소를 둘러보다가 이번에 출시된 아바타 중 하나인 [환상의 늑대 세트]를 발견했다. 늑대 옷은 미리 보기로도 꼬질꼬질한 게 느껴져 난쟁이보다 더 하찮았다. 쓸 만한 부위라곤 늑대 귀와 꼬리가 전부이지만, 그것만으로 다른 아바타와 가격이 맞먹었다.
1억 골드 리본을 두고 고민했던 게 무색하게 배로 비싼 늑대 아바타를 결제하는 손은 망설임이 없었다. 캐릭터 커스터마이징이 무려 채하를 닮았는데, 뭔들 못 해 주겠나. 원래도 귀여웠지만, 늑대 귀와 꼬리를 달고 배로 깜찍해진 주현의 캐릭터가 단공을 바라보며 생글생글 미소 지었다.
[파티] 단공 : 블랙님 제쪽 보고 웃지 말아주세요
[파티] 단공 : 블랙님인건 알지만 뭔가 불쾌해용...ㅠ-ㅠ
[파티] westone : ㅋㅋㅋ 저도 그랬어요
[ 윤채하님이 피치퍼프님에게 까치발을 들어 입을 맞춥니다. ]
[파티] 단공 : 내가 경직노예하는데 이런걸 봐야한다고?
[파티] 윤채하 : 그럼 나가요
[파티] 단공 : ㅆㅂ 서럽당 ㅠ0ㅠ
[파티] blueberry : 울 시간에 나가
[ 단공님이 바닥에 앉습니다. ]
블루베리와 채하는 단공과 오래 알고 지낸 사이라서 그런지 뱉는 말이 하나같이 야박했다. 나가라는 재촉에 단공은 바닥에 철퍼덕 주저앉아 팔짱을 꼈다. 블루베리는 그 앞으로 제 캐릭터를 끌고 가 거침없이 발길질해댔다.
[파티] westone : 공방으로 돌릴게요
[파티] 피치퍼프 : ?
[파티] 단공 : 엥 왜용?
루시퍼 던전에 갈 수 있는 길드원을 몽땅 끌어모아 파티원은 총 일곱 명이었다. 소수팟을 좋아하는 서쪽에게는 과분한 인원수였다.
[파티] westone : 아 시간이 없어서요
[파티] strawberry : 7명이면 오래 안 걸릴텐데
[파티] westone : 7악마 다 갈거예요
[파티] 피치퍼프 : ?
[파티] 단공 : 지독하시네
[파티] strawberry : 그걸 어떻게 다 가요 ㅠㅠ
[파티] blueberry : 니가 열심히 하면 금방 깸
[파티] westone : 역시 블베님 ㅎㅎ
[파티] 피치퍼프 : 저 7악마 컷 안 되는데요..
[파티] 레아술사 : 저도 부캐예요...!!!
사전 이벤트 보상 장비가 기본 보급보다는 낫다지만, 악마 레이드 입장에는 무리가 있었다.
[파티] westone : 공컷 안 걸 거예요
[파티] 단공 : 맞아용 ㄱㅊㄱㅊ
[SYSTEM] 윤채하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SYSTEM] 길드원 윤채하님이 퇴장하셨습니다.
[파티] 단공 : 머임? 쟤는 어디가
[파티] westone : 블랙님 때문이에요
[파티] 피치퍼프 : 아니..
“너 어디 가?”
“부캐 좀 보려고요.”
갑자기 파티를 탈퇴하고 사라진 채하가 의아하여 옆을 돌아보자, 채하는 대답한 대로 부캐인 채채를 뒤적거리고 있었다.
[파티] 피치퍼프 : 부캐 잠깐 보러 갔대요
[파티] 단공 : 이대로 출발합시다 ㄱㄱ
이대로 얹혀 가는 건 너무 민폐가 아닌가 싶어서 탈퇴를 고민하고 있을 때였다. 우편함 아이콘에 빛이 들어왔다.
보낸 사람 : 채채 (성직자)
우편 제목 : ♡
첨부된 아이템 : [+20 어둠이 깃든 교만의 귀고리], [+20 어둠이 깃든 인색의 귀고리], [+20 어둠이 깃든 시기의 목걸이], [+20 어둠이 깃든 분노의 반지], [+20 어둠이 깃든 음욕의 반지], [+20 어둠이 깃든 식탐의 벨트], [+20 어둠이 깃든 태만의 팔찌]
언제나 마침표 하나를 찍던 우편 제목에는 보기만 해도 마음을 간지럽게 만드는 하트가 그려져 있었다. 스크린 샷을 저장하며 첨부된 아이템을 읽던 주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반송 버튼을 누르려고 하자, 손등 위로 차가운 살갗이 덮이며 마우스를 다른 곳으로 끌고 갔다.
순식간에 수락을 누른 탓에 인벤토리로 액세서리가 들어왔다. 주현은 황당함을 감추지 못한 채 채하를 흘겨봤다.
“이건 아니지.”
“어차피 액세서리는 귀속 안 돼요.”
“횟수가 차감되잖아…….”
액세서리는 비교적 거래가 자유로운 편이었다. 강화에 실패했을 시 영구 귀속되는 무기, 방어구와 다르게 액세서리는 귀속 해제 아이템을 사용하면 거래할 수 있었다. 다만 거래 가능 횟수가 정해져 있으며, 횟수가 모두 차감되면 영구 귀속이 된다. 횟수를 늘리려면 거래 횟수 증가 아이템이 필요한데, 대규모 업데이트 때나 얻을 수 있는 탓에 희귀했다.
“부캐 안 키워서 놀고 있던 템이에요.”
이미 우편을 수락해 버렸으니 거래 가능 횟수가 차감된 상태였다. 주현은 채하의 말을 위안 삼으며 액세서리를 차근차근 착용했다. 제작자의 닉네임이 밍채로 표시되어 있어서 그것 하나는 정말 마음에 들었다. 주현과 제작자 이름을 통일하겠답시고 아이템을 새로 맞추기 전 사용하던 액세서리가 섞여 있었다.
[길드] 윤채하 : 저 초대 주세요
다시 부캐로 돌아온 채하는 서쪽의 초대를 받고 파티에 합류했다.
[파티] blueberry : 그래서 블랙님 안 가세요?
[파티] 단공 : 엥 당근 가야지
[파티] 윤채하 : 가요
[파티] westone : 악세 풀세팅 하셨네요 ㅎㅎ
채하에게 액세서리를 건네받았단 걸 가장 먼저 눈치챈 건 서쪽이었다.
[길드] 리라의마네킹 : west님 혹시 출발하셨나요? ㅠㅠ
대기실에서 사람을 기다리며 대화하는 사이, 가엾은 뉴비가 서쪽을 불렀다.
[길드] westone : 아뇨 저희 대기실이에요 ㅎㅎ
[SYSTEM] 리라의마네킹님이 파티에 합류하였습니다.
[길드] 먕먕먕 : 도망가세염 ㄷㄷ
[길드] 단공 : 월월님 왜케 잘알아요?
[길드] 피치퍼프 : 경험담이셔서..
[길드] 단공 : 블랙님은 알고도 안 도망가시네
[길드] 먕먕먕 : 못 도망가신거예염;;
[길드] 레아술사 : 처음부터 블랙님 노린 파티였어요 ㅋㅋㅋㅋㅋ
[길드] 단공 : 블랙님 탱도 아닌데?
[길드] 피치퍼프 : 서쪽님은 그냥 아는 사람하고 소수팟이 하고 싶은 거예요
[길드] 단공 : ?
[길드] westone : 혼자 잡으면 재미없잖아요 ^^~
컨트롤에 자신 있어 하는 유저들 대다수는 솔로 클리어에 도전하지만, 서쪽은 최소가 듀오 클리어였다. 혼자 잡으면 심심해서 힘이 안 난다는 이유였다. 사람들이 클리어 실패를 염두에 두고 사람을 영입할 때, 서쪽은 말동무용 유저를 구했다.
길드 채팅으로 바쁘게 대화를 나누는 동안, 파티 최대 인원을 달성하여 던전으로 출정했다. 본캐를 들고 온 길드원들의 스펙이 워낙 좋아서 레이드 클리어는 금방이었다. 세 번째 레이드인 레비아탄까지는 서쪽이 파티원을 다독여 가며 이끈 덕분에 탈 없이 끝났지만, 이후 레이드는 클리어할 때마다 파티를 떠나는 낙오자가 생겼다.
[길드] 레아술사 : 전 이만 자러 갈게요...!!!
[길드] westone : ㅠㅠ 레아님 내일 봬요
[길드] 단공 : 고생하셨어용
[SYSTEM] 레아술사님이 파티를 탈퇴하셨습니다.
서쪽은 다시 파티원을 구해 던전으로 출발했다.
[파티] 죽자살자 : ㅋㅋ
새롭게 구한 파티원에게서 수상함을 느낀 건 사탄이 나무를 흔들어 열매를 떨어뜨릴 때였다. 주현이 제 앞에 놓인 빨간 열매를 주워 먹으려던 순간에 맞은편에서 달려오던 죽자살자와 눈이 마주쳤다. 거리상 제 열매가 맞아서 가져갔을 뿐인데, 죽자살자는 열매를 양보해 준 사람처럼 굴었다.
죽자살자와의 불편한 게임은 이후에도 계속되었다. 아스모데우스에서 주현이 잡혀가자 구해 줄 테니 걱정하지 말라고 자신만만하게 채팅을 쳤지만 결국 볼에 입맞춤을 선사하는 건 채하의 몫이 되었다. 벨제불에선 주현이 보스를 상대하면 일부러 식기를 던져 어그로를 빼앗아 갔다.
일곱 번째 악마, 벨페고르 레이드를 앞두고 인원 보충을 위해 잠시 대기했다.
[길드] westone : 신사 부캔가?
[길드] 피치퍼프 : ㅅㅂ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 근데 딸기님한테도 친절한거 보면 그냥 여미새[2]네요
[길드] strawberry : 전 남잔데요 ㅠㅠㅠㅠㅠㅠ
[길드] westone : 음.. 그렇다면 게이?
[길드] strawberry : ㅠㅠㅠㅠㅠㅠㅠㅠㅠㅠ 전 누나만 좋아요
[길드] 단공 : ㅆㅂ 토나와서 잠이 확깨네
[길드] blueberry : ㅋㅋㅋㅋㅋㅋ
주현과 스트로베리에게만 유독 말을 거는 죽자살자에 길드원들도 의아함을 느꼈다. 커다란 몸이 팔을 끌어안으며 매달리자 주현은 그곳으로 시선을 옮겼다.
“전 형만 좋아요.”
예전 같았으면 죽자살자를 끌고 대련장에 갔을 채하는 무슨 일인지 조용하기만 했다. 얼굴이 조금 가라앉아 보이는 게 신경이 쓰였지만, 기분 탓이려니 가볍게 넘겼다. 주현은 스트로베리의 말을 따라 하며 귀엽게 구는 채하의 볼을 손등으로 가볍게 문질렀다.
“안 졸려?”
주말을 앞둔 금요일. 피곤한 건 주현도 마찬가지였지만, 다음 날이 토요일이기도 하고 레이드는 서쪽이 제안할 때 도움을 받는 게 여러모로 편안해 눈에 힘을 주고 버티고 있었다. 처음에는 꼬박꼬박 타이밍에 맞추어 경직 스킬을 사용하던 단공도 졸린지 이전 판에는 실수하여 죄송하다는 말을 채팅 창에 한가득 늘어놓았다.
“네. 형은 졸려요?”
“…아니. 난 너 졸릴까 봐.”
같은 취미를 가졌다는 건, 한 명이 손해 볼 것 없이 함께 시간을 보낼 수 있다는 의미였다. 한때 주현이 극진히 보살폈던 중학교 2학년은 이제는 애인이 되어 제 손에 얼굴을 비비적거리고 있었다.
[파티] westone : 출발할게요
이윽고 최대 인원을 달성하여 파티장인 서쪽이 출발했다.
로딩을 지나 던전에 입장하고 가장 기운이 좋은 서쪽이 포탄을 펑펑 터뜨리며 앞으로 나아갔다. 일곱 번째 악마, <태만의 벨페고르>의 레이드 장소는 혼돈의 설화 유저라면 절대 모를 수가 없는 채예스 광장이었다.
《 빛의 희생 》
레이드 시작과 동시에 캐릭터 위로 얇은 방어막이 씌워졌다.
[파티] 죽자살자 : 초행님들 바닥 조심해요
나태를 담당하는 벨페고르의 특성을 고려하여 만들어진 일곱 번째 악마 레이드는 부지런해야만 살아남을 수 있었다. 유저들은 보호석을 지닌 상태로 던전에 입장하게 되는데, 대미지를 받으면 바로 보호석을 뱉어 낸다. 보호석이 없을시, 일정 시간마다 채예스 광장을 덮치는 강풍에 휘말려 갈라진 바닥으로 떨어지게 되었다.
전투가 시작되자 벨페고르는 나무 지팡이를 느긋하게 휘둘렀다. 휘두른 궤적을 따라 벽돌 바닥이 번쩍 빛이 나더니 그 위에 서 있던 스트로베리를 밀어냈다. 공격에 맞은 스트로베리가 보호석을 토해 내자, 때마침 바람이 불었다.
[파티] 죽자살자 : 에고 ㅠ 조심조심
다행히 곧바로 보호석을 주워 먹은 덕분에 처음부터 죽는 대참사는 일어나지 않았다. 벨페고르가 스트로베리에게 관심을 두자, 파티원들은 기회를 틈타 공격을 쏟아부었다. 길드원 중 가장 장비가 좋지 않은 주현은 뒤에서 소심하게 툭툭 벨페고르를 향해 공격을 던졌다. 채하가 준 액세서리 덕분에 능력치가 많이 올랐지만 아픈 건 마찬가지였다.
무기 아바타를 착용하여 늑대의 모습을 한 인형이 벨페고르의 등을 머리로 내리쳤다. 채하를 닮은 캐릭터는 여전히 빨간 모자 아바타를 입고 있었다. 채하도 주현을 따라 캐릭터에 같은 아바타를 입히고 머리에는 정성스럽게 토끼 귀를 달아 주었다. 거래소 시세가 무려 2억 골드인 값비싼 토끼 귀였지만, 볼 때마다 속이 울렁거려 주현은 그곳에 눈을 두지 않기로 했다.
서쪽은 벗은 데다가, 주현과 채하는 동물 귀를 달고 있어서인지 한 번은 지나가던 유저에게 역겹다는 말을 들었다. 그에 서쪽은 기분이 좋은지 호탕하게 웃었고, 주현은 채하가 어떠한 행동을 취하기 전에 손목을 빠르게 붙들었다. 이후 또 다른 유저에게 게이 같다는 말을 들었다. 그때 채하는 도리어 좋아하는 반응을 보였다. 주현은 변덕스러운 채하의 대응에 공감할 수 없었다.
‘귀찮아’가 말버릇인 벨페고르는 태만을 상징하는 악마답게 행동이 게을렀다. 오른쪽으로 지팡이를 휘둘렀다가, 왼쪽으로 한 번 더 획을 그었다. 양쪽 바닥에서 빛이 뿜어져 나오며 순식간에 캐릭터를 덮쳤다.
성기사와 다르게 별다른 방어 기술이 없는 인형술사는 캐릭터를 움직여서 공격을 회피해야만 했다.
[길드] 단공 : ㅈㄴ 졸립다
[길드] 단공 : 님들 안 졸림?
단공은 망치로 벨페고르의 공격을 완벽히 막아 내며 여유롭게 길드 채팅으로 말을 걸어왔다.
[길드] westone : 이거 끝나면 놓아드릴게요
[길드] 단공 : ㅋㅋㅋ 뭐가 더 있어용?
[길드] westone : ^^~
[길드] 먕먕먕 : ;;;;;;;;
[길드] westone : 파티초대도 안 받았으면서 ㅡㅡ
[길드] 먕먕먕 : 파티에 이미 참여중이었다구염 ㅠㅠ
[길드] strawberry : 저 이렇게 오래 게임한적 처음이에요
[길드] westone : 헐 블랙님 잠수시간이 더 길듯요
[길드] 피치퍼프 : ㅅㅂ
한때 주현은 접속 시간 채우겠다고 캐릭터를 광장에 세워 두기만 했었다. 스펙 좋은 본캐를 두고도 레이드를 가지 않던 시절이 있었다. 지금은 부캐로도 악마 레이드를 격파하고 있지만.
[파티] 죽자살자 : 피치님 커마 이쁘네요
[파티] 죽자살자 : 친구 가능?
[파티] 죽자살자 : 게임 내가 알려줄게요
<태만의 벨페고르>는 현존하는 레이드 중 가장 마지막 단계였다. 벨페고르 레이드에 입장하는 유저 중 뉴비는 없다고 보아도 될 정도로 드물었다. 특히 주현처럼 액세서리로 능력치를 맞춰 놓았으면 본캐가 따로 있는 경우가 많았다. 오래간만에 당하는 뉴비 취급에 어처구니가 없던 주현은 혀를 찼다.
[길드] 단공 : 이건 민채랑 블랙님 둘중 누구를 향한 고백이냐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strawberry : 저 사람은 랭킹도 높은데 왜 저래요????
[길드] blueberry : 그게 본인 인생 최고 업적이라 그래
[길드] blueberry : 랭킹 높으면 그게 지 매력인줄 알아
죽자살자의 직업은 암살자로 랭킹은 128위였다. 랭킹이 높을수록 닉네임을 기억하기 쉬운 탓에 더욱 조심하여 활동하는 유저들이 있지만, 그와 반대인 유저들도 상당했다. 그중 하나가 신사였고, 지금 신사와 비슷한 유형의 인간을 또 만났다.
슬쩍 눈알을 굴려 채하를 살피자 역시나 턱에 살짝 힘이 들어가 부루퉁해진 얼굴이었다.
“야, 이건 내가 기분 나빠야지.”
“‘야’라고 하지 마요.”
“……채하야.”
“네.”
주현의 캐릭터는 채하의 얼굴을 참고했으니 죽자살자의 말에 기분이 나빠야 하는 건 주현이었다. 하지만 채하가 되레 성을 냈다.
“캐릭터 주인은 형이에요.”
“…….”
순 억지였다. 죽자살자가 호감을 느낀 건 채하의 얼굴이었고, 주현은 파티 채팅을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았으니 캐릭터를 플레이하는 본체는 관련이 없는 거나 마찬가지였다.
“거울이나 봐.”
주현은 채하의 뺨을 콕 찌르고 다시 화면으로 눈을 옮겼다. 어차피 이번 레이드가 끝나면 죽자살자와도 안녕이었으니 구태여 힘을 뺄 이유가 없었다. 채하는 손등으로 볼을 문지르며 못마땅한 얼굴을 내보였다.
[길드] 단공 : 블랙님 근데 본캐로 오셔도 되지 않아용?
[길드] 단공 : 부캐 안 키우시지 않나???
[길드] 피치퍼프 : 네 적당히 키울 생각이었는데..
[길드] 피치퍼프 : 서쪽님도 그렇고.. 밍채도 그렇고.. 그렇게 됐네요
[길드] 단공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정신을 차리고 보니 이미 레이드는 시작했고, 루시퍼부터 벨페고르까지 기나긴 여정을 수행하게 되었다.
벨페고르와의 안전거리를 확보한 후 채팅을 쳤지만, 벨페고르는 주현의 캐릭터에게 다가와 지팡이를 휘둘렀다. 바닥에서 새어 나온 빛에 맞고 캐릭터가 뒤로 자빠지며 보호석을 뱉어 냈다. 넘어진 자리에서 또 한 번 빛이 뿜어져 나오며 캐릭터가 또다시 밀려났다.
[파티] 죽자살자 : 귀엽 ㅋㅋ
떨어진 곳에서 벨페고르를 상대하던 죽자살자는 어느새 주현의 앞을 얼쩡거리고 있었다. 벨페고르의 어그로가 왜 넘어왔나 했더니 죽자살자의 짓이었다. 암살자는 먼 거리를 쉽고 빠르게 이동할 수 있는 직업이었다.
[길드] westone : 쟤 왜 저런대요
[길드] 단공 : ???
[길드] 단공 : 저 못 봤어용 ㅠ
캐릭터를 일으키고 떨어진 보호석을 찾아서 마우스를 돌리던 차에 바람이 불었다. 다가오는 돌풍과 보호석의 거리를 계산해 봤으나 역부족이었다.
[파티] 죽자살자 : 이거 먹어요
이대로 죽어야 하나 고민에 빠져 있던 주현의 시야에 보호석이 나타났다. 간혹 필요로 보호석을 양보하는 때도 있긴 하지만, 랭킹도 뜨지 않는 주현에게 죽자살자가 보호석을 넘겨줄 이유가 없었다. 본캐 플레이 중에도 받아 본 적 없는 호의에 주현은 속이 꺼림칙해졌다.
[파티] 죽자살자 : 에휴 ㅋ
멀뚱멀뚱 서 있자 답답했는지 죽자살자가 뱉었던 보호석을 도로 삼키려 다가갔으나 때는 이미 늦었다. 둘은 나란히 바람에 휩쓸리더니 갈라진 바닥 사이로 떨어져 죽어 버렸다. 채하의 얼굴을 한 캐릭터라 그런지 허무하게 죽은 게 어느 때보다 민망하고 미안했다.
채하는 주현이 나타날 위치에 맞춰서 부활 스킬을 사용했다. 예상대로 망토를 입은 청초한 남자가 허공에서 툭 떨어졌다. 그 위로 복면을 쓴 캐릭터가 몸을 겹쳤다.
[길드] 단공 : ㅆㅂ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 아
[길드] blueberry : ㅁ친 ㅋㅋㅋㅋㅋㅋㅋ
살아난 건 주현의 위에 있던 암살자였다. 채하도 당황했는지 취소할 생각도 못 하고 얼빠진 채로 화면을 응시했다.
[파티] 죽자살자 : ㄱㅅ
[길드] 단공 : 밍채 철들었네 ㅋㅋㅋ
깊은 한숨을 삼킨 채하는 서둘러 부활 아이템을 사용했다.
[파티] 죽자살자 : 부활템 왜 씀?
[파티] 죽자살자 : 횟수아까워요 걍ㄱ
남의 부활 뺏어서 살아난 사람치고 뱉는 말이 뻔뻔스러웠다. 파티에 힐러라곤 채하 하나였고, 부활 아이템으로 주현을 살리게 되면 남은 부활 횟수는 한 번이었다. 죽자살자가 부활로 민감하게 구는 이유도 공감이 가 주현은 잠자코 있었다. 채하는 언제나 그랬듯 들은 체 만 체하고 주현을 살렸다.
주현이 살아난 걸 확인한 채하는 용건이 끝났는지 휙 등을 돌렸다. 왠지 매정해 보이는 모습에 마음이 상한 것도 잠시였다.
[길드] westone : 암살자는 가짜비매너였네요
[길드] blueberry : ㅋㅋㅋㅋㅋㅋㅋ
암살자를 향해 성큼성큼 걸어간 채하는 캐릭터를 겹친 후, 벨페고르를 향해 거침없이 빛 기둥을 날렸다. 정수리를 꿰뚫는 선명한 빛에 벨페고르는 잠시 휘청하더니 성난 얼굴로 채하가 있는 곳을 노려봤다. 놀랍게도 벨페고르의 지팡이가 가리킨 건 채하가 아니라 죽자살자였다.
[길드] strawberry : 판정 왜 저래요???
[길드] westone : 혼설이 갓겜이라..^^~
상대방에게 어그로를 넘기는 것에 특화된 직업은 성직자가 아니라 암살자였다. 죽자살자는 채하의 뒤로 이동한 후 벨페고르에게 단검을 던졌다. 다시 모습을 감춰 사라진 죽자살자는 벨페고르의 등 뒤에서 나타났다. 뒤에 죽자살자가 있다는 걸 모르는 벨페고르는 채하를 향해 지팡이를 휘둘렀다.
[파티] 멸군 : 님들 머하셈...?
[길드] strawberry : 이래도 되는거예요???
[길드] westone : 오히려 어그로가 덜 튀어서 ㅋㅋㅋ 좋은데요..?
벨페고르의 어그로를 주고받는 건 채하와 죽자살자 단둘이었다. 죽자살자가 이따금 사라지긴 했으나 어차피 나타나는 곳이라곤 벨페고르의 뒤였으니 행동반경은 좁은 편이었다. 벨페고르를 꽉 붙들고 있는 둘 덕분에 남은 파티원은 편하게 공격할 수 있었다.
[파티] 죽자살자 : 아 개빡치네 ㅋㅋ
질기도록 서로에게 어그로를 밀어내던 승부에서 승기를 쥔 건 채하였다. 벨페고르에게 공격을 맞은 죽자살자가 보호석을 뱉자, 때마침 비바람이 불며 그대로 쓸려 내려갔다.
[파티] 죽자살자 : 운빨ㅋ
[길드] blueberry : 징글징글하다
죽자살자는 억지를 부리며 승부를 인정하지 못했다. 결코, 운으로 판가름 난 승부가 아니었다. 채하는 평소에도 바람 부는 시간을 체크하며 전투에 임했다. 벨페고르가 돌풍을 일으킬 때면 제자리에 붙박이듯 서 있어서 프리딜 타임이 주어지기 때문이었다.
[파티] 죽자살자 : 부활좀요
[파티] 윤채하 : 부활횟수 아까운데 살리지 마요
[파티] 죽자살자 : ㅋㅋㅋ; 누가할소리를
채하의 만류에도 죽자살자를 살리기 위해 다가오는 유저가 있었다. 한 사람이라도 더 살아야 레이드 클리어 시간을 단축할 수 있으니 이해 못 하는 건 아니었다. 주현은 힐끔 채하의 안색을 살폈다. 채하는 생각에 잠겼는지 얼굴이 고요하기만 했다.
주현은 웃음을 삼키며 다시 화면으로 고개를 돌렸다. 언젠가부터 채하는 일을 치기 전에 합당한 명분을 만들어 놓았다. 불같은 성격은 여전했으나, 그래도 자신을 생각하여 한 발 정도는 양보하는 모습이 주현은 좋았다.
별안간 팔을 뻗은 채하가 주현의 앞에 놓인 키패드를 꾹 눌렀다. 채하가 나름의 배려를 한다고 생각하던 주현의 믿음은 그렇게 한순간에 깨져 버렸다.
《 죽음의 꼭두각시 : 2분간 죽은 파티원의 몸을 빌려 싸웁니다. 》
쓰러져 있던 죽자살자가 다리를 절뚝이며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
“형, 얼른 복수해 주세요.”
사고를 친 채하는 태연하게 복수 타령이나 하고 있었다.
[길드] blueberry : ㅋㅋ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단공 : 블랙님 빡치셧나보다 ㅠ0ㅠ
[길드] westone : 블랙님 인성이..?
[길드] 피치퍼프 : 아니.. 저 아니에요
[길드] 피치퍼프 : 밍채가 한건데
[길드] blueberry : ㅁ친놈ㅋㅋㅋㅋ
[길드] westone : 이시간에요?
[길드] 단공 : 합숙까지 하시네.....
‘죽음의 꼭두각시’는 이름대로 죽은 파티원의 몸을 무기로 삼아 싸우는 스킬이었다. 부활 제한이 없는 일반 레이드에서는 활성화되지 않아, 현재는 악마 레이드에서만 가능했다. 보통은 힐러가 부활 스킬을 쓸 수 없고, 부활 아이템 횟수가 모두 차감되었을 때 이용하는 스킬이었지만, 채하는 죽자살자의 부활을 막기 위해서 주현의 스킬을 강탈하듯 사용했다.
‘죽음의 꼭두각시’ 대상 유저는 부활할 수 없기 때문이었다.
주현은 예고 없이 벌어진 일에 잠시 당황했지만, 일단 물은 엎질러졌으니 손에 들어온 무기를 적절히 써먹어 보기로 했다. 채하의 얼굴을 한 제 캐릭터에게 치근덕거리던 게 마음에 들지 않던 참이었다.
축 늘어진 죽자살자의 시체는 주현의 마우스 클릭 속도를 따라서 벨페고르에게 단검을 휘둘렀다. 싫다고 할 줄 알았던 주현이 거침없이 공격을 퍼부으며 죽자살자의 시체를 농락하자, 신이 난 채하의 캐릭터가 제자리에서 펄쩍 뛰며 응원을 보내왔다. 주현은 어정쩡하게 웃었다. 채하의 캐릭터가 제 얼굴이란 게 가장 큰 흠이었다.
[ 윤채하님이 응원합니다. ]
[길드] westone : 블랙님이 더 미쳤는데요 ㅋㅋㅋㅋㅋㅋㅋ
[길드] 단공 : 길마님 접속 중인가? 사사게 대비하셔야 할듯
[길드] blueberry : 로그아웃한지 얼마 안 됐는데
[길드] strawberry : 두분은 진짜로 사귀는 거예요???
[길드] 단공 : 당연히 컨셉이지
[길드] 단공 : 묻지마; 별로 알고싶지않음
[길드] westone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우여곡절 끝에 벨페고르를 물리치고 엔딩 컷신을 볼 수 있었다. 그간의 악마 레이드와 달리 컷신에서는 주신 리라가 등장했다. 리라는 고맙다는 말을 남기고 곧바로 사라져 버렸지만, 짧은 등장만으로 유저들 사이에선 화제가 되었다.
[파티] westone : 고생하셨어요 ^^~
[SYSTEM] 파티장의 권한으로 파티가 해체됩니다.
[길드] westone : 사사게 올라갈까요?
[길드] blueberry : 밍채한테 개처발린거라 안 올릴듯요
[길드] 단공 : ㅋㅋㅋㅋㅋㅋㅋㅋ 자존심은 지켜야지
블루베리의 말대로 죽자살자와의 일은 조용히 지나갔다. 대신 다른 일로 사사게가 시끄러웠다. 새로운 직업인 인형술사가 업데이트된 지 이 주. 그 말은 즉, 재앙 길드를 빼앗은 지도 이주가 되었다는 뜻이다.
[비매너] 길드 강탈 (westone)
작성자 : 신사 | 댓글 : 10개 | 조회수 : 301
안녕하세요. 저는 재앙 길드 마스터 신사입니다.
개인적인 일로 한동안 게임에 접속하지 못했습니다.
오랜만에 오니 길드 마스터 자리는 뺏겼고 제 캐릭터는 모두 추방이 되어있었습니다.
현재 재앙의 길드 마스터는 southone이고 한때 재앙 길드원이었던 westone의 부캐입니다. 분명히 캐릭터를 모두 추방했는데 길드를 어떻게 뺏었는지 의아합니다. 불법적인 방법을 사용했는지 확인을 위해 고객센터에 문의한 상태입니다.
westone님 지금 길드를 돌려주신다면 저도 여기까지만 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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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댓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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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가 미접해서 뺏겨놓고 왜 저러는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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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사 : 길드원이 가져갔으면 이해라도 합니다만... westone님은 길드 잘린지 한참됐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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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앙 검색해보니까 아직도 길드원 꽤 있네 길드원 남겨두고 미접속 오래했으면 뺏기는게 당연하지 ㅋㅋㅋ 말하는거 보니까 잘 뺏겼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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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길드원을 다 잘랐어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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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해킹해서 뺏은거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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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남은길드원이 뺏고 westone 저 사람 준듯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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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휴 ㅋㅋ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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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ㅈㄴ웃기다 추방당하더니 이제는 길드뺏김 ㅋㅋㅋㅋㅋ씨발ㅋ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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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사람 뭐했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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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재앙 검색하면 나옴
[길드] westone : 아 ㅋ 신사 복귀했네요 ㅋㅋㅋㅋㅋㅋㅋ
[길드] 잔혹동화 : 헐 서쪽님한테 뭐라하나요?
[길드] westone : 지가 뭐라고 하면 어쩔거예요 ㅋㅋㅋ 길드는 이미 먹었는데
[길드] 잔혹동화 : 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ㅋ
있는 기능을 이용하여 길드를 정당하게 양도받은 것이라 사사게 유저들의 여론은 역시나 서쪽의 편이었다. 또 서쪽이 댓글을 통해 재앙 시절 길드 포인트를 인증하자, 진작 뺏었어야 한다는 의견도 나왔다.
일이 잘 풀린 듯하여 주현은 홀가분한 마음으로 키보드에서 손을 뗐다. 까만색이던 키보드는 어느새 파랗게 물들어 있었다. 며칠 전, 배송 온 키보드였다. 널 생각하며 닉네임을 지었다는 말을 믿지 않았으면서, 이후 채하는 파란색이 제 고유색인 것처럼 굴었다.
채하가 파란색 물건을 사들이는 데에 흥미를 붙인 탓에, 집은 바다가 되어 가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