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롤로그
0.
윤해완의 이름은 윤해언의 이름을 따서 지었다.
1.
아이들은 추운 겨울에 발견됐다. 발견됐다기보다 아이들 스스로 발견되어졌다는 표현이 옳았다. 큰 아이는 추위에 얼어 발개진 작은 손으로 보육원의 문을 끝없이 두드렸다. 등에는 그보다 작은 아이를 업고 있었다.
젊은 봉사자 한 명이 다소 늦게까지 남아 있었던 것이 천운이었다. 그렇지 않았다면 열이 펄펄 끓던 작은 아이는 물론이고 제 이름조차 제대로 말하지 못하던 큰 아이도 그대로 동사했을 수도 있었다.
문을 열고 아이들을 발견한 봉사자는 깜짝 놀라 비명을 질렀다. 그 소란스러운 와중 큰 아이는 침착하게 하나의 말만 중얼거렸다. 아기 아파. 많이 아파. 어휘도, 발음도 겉모습에 비해서는 많이 어렸다.
작은 아이의 품에는 쪽지가 하나 있었다.
1996년 3월 23일 출생. 윤해언.
생년월일과 이름이었다. 하지만 큰 아이는 달랐다. 큰 아이에게는 아무런 메시지도 없었다. 게다가 어른들에게 작은 아이가 맡겨지자 입을 다물어 버렸다. 대부분의 질문에 고개를 젓거나 혹은 끄덕이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거나 하는 식으로 대답했다.
이름은? 대답이 없었다.
나이는? 손가락 다섯 개를 펴 보였다.
엄마가 이곳에 두고 갔니? 대답이 없었다.
작은 아이랑 같이? 고개를 저었다.
큰 아이의 대답에 어른들은 잠시 혼란에 빠졌다. 친형제라 생각했는데 우연찮게 같은 날 비슷한 시간에 버려진 아이들인 모양이었다. 인연이라고 할 수도 있었지만 그리 말하기에 아이들의 처지가 너무 불행해서 어른들은 말을 아꼈다.
작은 아이, 해언과 달리 다섯 살이라는 것 이외에 신상에 대해 아무것도 알 수 없었던 큰 아이의 이름은 윤해완으로 정해졌다. 해언과 같은 날에 버려졌으니 그의 이름을 보고 생각나는 대로 지은 것이었다.
생일도 같은 방식으로 정했다. 큰 아이의 나이는 해언보다 두 살 많았지만 생일은 해언의 것을 따 1994년 3월 23일생으로 호적에 올려졌다.
보육원 사람들끼리는 이렇게 공통점을 만들어 형제처럼 자랄 수 있으면 좋지 않겠느냐 했지만, 마음 한편에서는 그렇지 않아도 챙길 아이들이 많은데 이 둘이라도 한 번에 생일 파티를 할 수 있으면 편하리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그것이 윤해완과 윤해언의 시작이었다.
2.
해완과 해언은 보육원 내에서 꼭 하나의 세트처럼 여겨졌다.
어른들이 의도한 대로 해완과 해언은 쌍둥이처럼 모든 것을 함께했다. 잠을 잘 때도 서로의 옆에서만 잤고, 밥을 먹을 때도 서로가 없으면 먹지 않았다.
신기한 것은 해완이 해언보다 엄밀히 두 살이 더 많았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도 그것을 의식하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것은 해완이 또래보다 모든 것이 느렸고, 해언은 또래보다 모든 것이 빨랐기 때문이었다.
해완의 지적 발달 수준은 또래 아이들보다 훨씬 떨어졌다. 어릴 적 학대를 겪은 아이들에게는 흔히 일어나는 증상이었으므로, 굳게 다문 입술 안에 갇힌 과거가 어떤 것인지는 능히 짐작할 수 있었다.
그에 비해 해언은 놀랍도록 모든 것이 빠르고 영민해서, 이렇게 똑똑하고 사랑스러운 아이가 어쩌다 이런 곳으로 오게 됐을까 궁금증을 가지게 하는 존재였다.
해언이 문장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을 때, 해완도 문장으로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해언이 글을 읽게 되었을 때 해완도 비로소 같이 글을 읽게 되었다.
해완은 제 나이에 초등학교에 입학하지 못했고, 해언은 나이보다 빨리 초등학교에 입학했다. 결국 아홉 살의 해완과 일곱 살의 해언은 같은 시기에 초등학교에 입학해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내내 같은 학년으로 다녔다.
해완과 해언은 학교에서도 한 몸처럼 붙어 다녔다.
그리고 해완이 처음으로 얻은 별명은 ‘윤해언 짝퉁’이었다.
3.
해완이 자신의 장애를 알게 된 것은 열다섯 살 때였다.
모든 사람이 10대 초반에 이차 성징이 나타남과 동시에 알파, 혹은 오메가로 발현하게 됨에도 불구하고 해완은 열다섯 살이 될 때까지 아무런 기미가 없었다.
그 말은, 또래 아이들 중 아무런 향이 없는 것은 오직 해완뿐이라는 소리였다.
알파오메가로 발현한 그 순간부터 페로몬 향은 개개인을 식별하는 강력한 지표가 됐다. 얼굴, 체격, 목소리, 혹은 고유의 버릇과 같이 향은 누군가를 구분하고 정의 내리고 기억하는 중요한 단서 중 하나가 되는 법이었다.
물론 아직까지 향을 가지지 못한 해완에게는 해당되지 않는 이야기였다.
그리고 발현이 너무 늦어지는 것을 걱정한 보육원 원장님의 손에 이끌려 병원에 갔을 때 내려진 진단은 예상보다도 훨씬 좋지 못했다.
해완은 이미 이삼 년 전, 열성 오메가로 발현한 것으로 보인다고 했다.
향이 나지 않는 것은 선천적으로 가지고 태어난 페로몬샘의 장애이며, 이식 수술 이외에는 어떤 약이나 치료법으로도 해결할 수 없다고 했다.
결론적으로, 해완은 평생 향이 없는 오메가로 살아가야 한다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는 해완과 보육원 원장님의 옆에는 해언도 앉아 있었다.
열세 살의 해언은 지난달에 우성 오메가로 발현했다. 누구나 뒤를 돌아볼 수밖에 없는, 깨끗한 숲속의 아침을 떠올리게 하는 아름다운 향과 함께였다.
해언이 떨고 있는 해완의 손을 꼭 쥐었다. 나중에 해완이 혼자 남겨졌을 때, 그 손에는 해언의 향이 마치 제 것처럼 짙게 배어 있었다.
4.
함께 있을 때 해언은 버릇처럼 해완의 몸을 만졌다. 걸을 때도 늘 손을 잡고 걸었고, 저보다 키가 큰 해완에게 업어 달라고 조르거나 목에 매달리는 것도 예사였다.
그럴 때마다 해언의 향이, 해완의 온몸에 달라붙었다.
학교 안에서 해언을 모르는 사람은 없었다. 손에 꼽히는 수재에 외모까지 더없이 출중하니 그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향.
모두가 그보다 더 좋은 향은 맡아 본 적이 없다고 입을 모아서 이야기했다.
그러니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해언은 완벽한 존재처럼 보였다.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불우한 과거조차 철없는 아이들의 시선에서는 색다른 매력으로 느껴지기까지 할 지경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아이들은 해언의 향이 온몸에 밴 해완을 해언으로 착각하기 일쑤였다.
해완이 뒤에서 말을 걸거나 할 때, 얼굴을 보기 전 향을 먼저 맡은 아이들은 해언인 줄 알고 돌아보았다가 해완이라는 것을 알면 짜증이 어린 표정을 지었다.
하지만 해완은 성격적으로 둔한 면이 있어서 아이들이 왜 말을 거는 것만으로 제게 싫은 티를 내는지 처음에는 잘 알지 못했다.
그러던 어느 날, 떨어진 물건을 주워 주기 위해 어떤 알파 소년의 어깨를 툭 건드렸을 때, 화색을 띤 얼굴로 돌아보던 그는 해완의 얼굴을 보자마자 인상을 확 찡그리며 말했다.
아, 씨발. 해언인 줄 알았더니 짝퉁이네.
주변에서 아이들이 킥킥대며 웃음을 터트렸고, 해완은 얼굴이 불타오르는 것 같은 수치심을 느꼈다.
해완은 그때야, 이제까지 저를 돌아봤던 아이들이 그를 해언으로 착각했었기 때문에 그런 표정을 지었다는 것을 알았다.
5.
해언아. 조금만 떨어져서 걸어가면 안 돼?
왜?
네 냄새가 내 몸에 배서, 애들이 자꾸 나를 너로 착각해.
해언은 우뚝 멈춰 서서, 해완을 향해 고개를 갸웃하며 물었다.
그러면 왜 안 되는데?
정말 모르겠다는 듯한 해언의 물음에, 해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6.
윤해언 짝퉁이라는 별명은 고등학교를 졸업할 때까지 사라지지 않았다.
7.
그 소년을 만난 것은 스무 살의 초가을이었다.
해완과 해언이 모두 고등학교 3학년 때의 일이었다. 그즈음 해언은 어느 기업에서 운영하는 영재 프로그램에 선발된 까닭에 매주 서울로 갈 일이 생겨 해완을 혼자 두는 일이 잦았다.
스무 살이 넘은 해완은 엄밀히 말하면 성인이었지만 늦게 입학한 탓에 고등학교를 졸업하지도 못했고 이 외진 마을에서 별달리 할 일도 없었기 때문에 여유 시간이 생기면 마을 이곳저곳을 자전거를 타고 돌아다니는 것을 유일한 즐거움으로 삼고 있었다.
해안가에 위치한 마을은 근방의 대기업 공장이 이전을 선언하며 천천히 쇠락의 길을 걸었다. 사람들이 북적이던 시절에는 마을 구석구석까지 버스 정류장이 위치해 있었지만, 인구가 줄고 수요가 감소하자 노선이 폐지되는 정류장들이 점점 많아지게 되었다.
소년은 그렇게 폐지된, 바다가 보이는 정류장 중 하나에 앉아 있었다.
저기 버스 안 서는데.
해안가 도로를 따라 자전거를 타고 달리던 해완은 그렇게 생각하며 곁눈으로만 소년을 보고 지나쳤다.
어차피 버스가 오지 않으면, 알아차리고 갈 것이라는 생각에서였다.
하지만 두어 시간이 흐르고 다시 보육원으로 가기 위해 길을 되돌아오던 해완의 눈에 여전히 그 자리에 앉아 있는 소년이 보였다.
해완은 도로 건너편에 멈춰 그를 바라보았다. 제 또래처럼 보였지만, 낯선 얼굴이었다. 외지인이면 노선이 폐지됐다는 걸 모를 법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말해 줘야겠다 싶었지만 망설여졌다. 해언의 짝퉁이라는 소리를 들은 이후로 해완은 누군가에게 말을 거는 것이 조금 무서워졌다.
그럼에도 학교에서 본 적 없는 얼굴이라는 것이 해완에게 작은 용기를 주었다.
해완은 자전거를 끌고 도로를 건너 소년의 앞에 서서 입을 열었다.
저기.
…….
여기 이제 버스 안 서는데.
소년이 고개를 들었다. 마주친 것은 지독하리만치 새까만 눈동자였다.
하지만 그것은 곧 해완을 비껴 나갔고, 소년은 알 수 없는 시선으로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더니 입을 열었다.
여기가 버스 정류장이야?
…….
몰랐네.
그때야 해완은 초점이 없는 소년의 눈동자와, 그 옆에 놓인 시각 장애인용 하얀 스틱을 보았다.
소년은 낮고 묵직한 목소리로 천천히 중얼거렸다.
그냥 쉬고 있는 거야.
괜한 오지랖을 떨었다는 생각에 해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원체 말주변도 없는 데다 당황하면 말을 더듬기 일쑤여서 해완은 두서없이 말을 주워섬겼다.
그랬구나. 미안. 그럼 쉬다 가.
정신없이 자전거에 올라타 속도를 내며 달리던 중 뭔가 문득 허전하게 느껴졌다. 급히 멈춰 선 채 주머니를 더듬는데, 그 안에 있어야 할 해언이 선물해 준 손목시계가 사라져 있었다.
비싼 것은 전혀 아니었지만 해언에게서 처음으로 받은 선물이었고 해완이 가진 가장 소중한 물건이었다. 끈이 망가져 수리를 맡겼어야 하는데 항상 몸에 지니고 다니던 물건이었던지라 떨어뜨려 놓고 싶지 않아 주머니에 넣고 나온 것이 화근이었다.
해완은 거의 패닉 상태에 빠져 자전거를 타고 달린 길을 되짚어 갔다.
그리고 그 버스 정류장에 다시 도착했을 때, 해완의 손목시계는 버스 정류장 표지판 앞에 서 있는 소년의 손에 있었다.
어…….
해완이 작은 소리를 내자, 소년이 그에게 천천히 다가왔다.
해완은 이미 180센티미터에 가까울 정도로 키가 큰 편이어서 좀처럼 누구를 올려다볼 일이 없었는데 소년은 해완보다도 한참 컸다.
이거 네 거지?
소년은 신중하게 시곗줄의 냄새를 맡더니, 해완에게 가까이 다가서 살짝 고개를 숙였다.
너랑 냄새가 같아.
소년은 멍하니 저를 보는 해완에게 시계를 쥐여 주고는, 뒤돌아서 걸어가기 시작했다.
탁, 탁, 소년의 걸음마다 지팡이가 땅을 치는 소리가 울렸다.
그 소리가 사라질 때까지 해완은 그 자리에서 얼어붙은 듯 움직이지 못했다.
누구도, 해완의 향을 맡을 수 있다고 말한 적 없었다.
오늘은 해언이 해완을 만지지 않았으니, 그가 맡은 것은 해언의 향도 아닐 터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8.
15년 만에 처음으로, 해완은 해언에게 비밀이 생겼다.
9.
해언이 옆자리를 비울 때마다, 해완은 자석처럼 버스 정류장으로 다시 돌아갔다.
버스 정류장 위에는 제멋대로 자란 거목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었다. 가을은 깊어 가고 있었지만 해가 내리쬐는 해안가의 도로는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부는 탓에 한낮에는 습하고 더웠다.
그 그늘 밑에 소년은 있을 때도 있고, 없을 때도 있었다.
소년이 있을 때면, 그는 항상 등을 곧게 펴고 앉은 채 접힌 지팡이를 오른손 옆에 내버려 둔 채였다.
해완은 늘 버스 정류장 도로 건너편에 서서 그를 바라보곤 했다.
처음에 해완은 일차선 도로를 사이에 두고도 소년의 정면에 서지도 못했다. 소년이 보지 못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혹시나 하는 생각에서였다.
비로소 소년의 정면에 서서 그를 똑바로 바라볼 수 있게 된 것은 낙엽이 하나둘 떨어지기 시작한 이후부터였다.
소년의 머리는 검고 약간 곱슬거렸다. 이마 위로 흐트러진 그것이 이따금씩 바람에 휘날릴 때마다 가려져 있던 매끈한 이마와 짙은 눈썹이 드러났다.
해완은 소년의 이마가 보이는 게 좋았다. 깎아내린 듯한 하얀 이마는 짙은 눈썹과 새까만 눈동자를 돋보이게 만들었다.
소년은 심심하지도 않은지 몇 시간이고 쉽게도 그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해완 역시 그런 소년을 몇 시간이고 바라보았다. 아무리 바라보고 또 바라봐도 질리지 않는 얼굴이 있다는 것을 해완은 그를 통해 처음 알았다.
그렇게 바라만 보면서도, 해완은 소년에게 말을 걸 생각은 하지 못했다.
키만 멀대같이 컸지 해완의 마음은 다른 아이들보다 늦됐다. 또래 아이들이 장난 같은, 혹은 나름대로 진지한 첫사랑을 가지고도 남았을 나이에도 한 번도 누군가를 그런 식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름마저 모르는 소년처럼 그를 향한 마음의 이름도 알 수가 없어서 혼란스러웠다.
말을 거는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도 온몸에 땀이 배고 가슴이 떨려 가까이 다가갈 수조차 없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소년을 만나지 않을 때에는 그에게 말을 거는 꿈을 꿨다.
10.
어느 주말, 1박 2일의 일정으로 서울로 올라간 해언이 전화를 걸었다.
오늘은 뭐 했어?
자전거 탔어.
또? 그렇게 맨날 돌아다니니까 피부가 다 빨개지지.
해언의 타박에 해완은 멋쩍게 웃기만 했다. 소년이 앉아 있는 정류장 벤치를 제외하면 도로에는 해를 피할 곳이 없어서, 몇 시간 동안 해가 내리쬐는 도로에 서 있노라면 희고 연한 해완의 피부는 쉽게도 화상을 입었다.
지겹지도 않아?
어?
그 마을 뭐 볼 거 있다고 그렇게 돌아다녀.
해언의 질문에 해완은 순간 말문이 막혔다.
이상하게도 그때야 해완은 소년에 대해 해언에게 말하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았다.
해완과 해언은 한 세트와 같았다. 한배에서 태어나지도 않았는데 쌍둥이 같다고, 모두들 입을 모아 그렇게 말했다.
해완이 가진 모든 것은 해언의 것이었다. 방, 옷, 모자, 가방, 노트, 책과 같은 단순한 물건들뿐만 아니라 해완의 기억, 생각, 경험과 같은 것들까지 그 모든 곳에 해언이 있었다.
싫다는 생각은 한 번도 해 본 적 없었다. 정확히 말하면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해언과 모든 것을 나누는 게 숨 쉬는 것처럼 자연스럽기만 했다.
하지만 소년은 해완만의 것이었다. 해언에게 알려 주고 싶지 않았다.
그런 생각에, 핸드폰을 움켜쥔 손에 희게 마디가 섰다.
해완아. 내 말 들려?
해완이 대답하지 않자 해언이 이상하다는 듯 해완의 이름을 불렀다. 지금 대답하지 않으면 안 될 것 같아 해완은 쥐어짜듯이 목소리를 냈다.
……그냥.
뭐가 그냥이야?
그냥…… 자전거 타는 게 재밌어서 그렇다고.
해완의 대답에 해언은 실없는 소리를 한다는 듯 소리 내어 웃었다.
그날 해완은 잠을 한숨도 이루지 못했다. 불면은 그 뒤로도 며칠 동안 이어졌다. 처음으로 느껴 본 감정에 대한 혼란스러운 마음이 밤을 온통 휘저어 놓은 까닭이었다.
보통 사람이었으면 쉽게도 알아차릴 마음이었지만 불행히도 해완은 그렇지 못했다. 며칠 동안 생각하고 또 생각해서, 해언이나 선생님들에게 정신을 얻다 팔고 다니는 거냐고 몇 번씩 핀잔을 듣기까지 했다.
그러던 어느 밤, 해완은 어떻게 다뤄야 할지 몰라 그 자리에 방치해 두었던 마음의 정체를 문득 깨닫게 되었다.
해완은 소년이 좋았다. 그것은 이제껏 그 누구를 좋아했던 방식과도 달랐다.
그리고 무서웠다. 태양처럼 밝은 해언에게, 소년마저 해바라기와 같이 딸려 가 버릴까 봐.
해완은 고개를 돌려 자신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잠든 해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해언은 예뻤다. 길고 옅은 속눈썹이 내려앉은 얼굴은 미등 아래 천사처럼 보였다.
해언이도 이런 생각을 했을까?
나에게도 보여 주고 싶지 않은, 누군가를 가져 본 적이 있을까?
하지만 나처럼 무섭지는 않았을 거야.
해언이 대신 나를 바라볼 사람은 아무도 없을 테니까.
그렇게 생각하자 왠지 슬퍼졌다. 자신의 마음에 낯설디낯선 욕망이 천천히 스미는 것을, 해완은 놀랍고 신비롭고, 그리고 슬픈 눈으로 바라보았다.
다음 주 해언이 자리를 비우자 해완은 또 그 정류장에 찾아가 소년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차도, 사람도 오가지 않는 일차선 도로를 사이에 둔 채였다.
그것만으로도 좋았다.
11.
해완은 한 번도 해언에게 뭔가를 숨기는 것에 성공해 본 적이 없었다.
오늘은 서울 몇 시에 가?
왜, 서운해?
아니거든.
우리 해완이 그동안 나 없어서 심심했어?
쪼끄만 게 진짜, 형이라고 안 부를래?
나 오늘 서울 안 가도 돼. 뭐 하고 놀까?
해완은 순간 머뭇거리는 실수를 저질렀다. 찰나였지만 해언의 표정이 얼음같이 굳었다.
야, 윤해완.
어?
너 나한테 말 안 한 거 있지.
목구멍이 막힌 듯이,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넌 그러면 안 돼.
망설이는 해완에게 해언이 툭 입을 열었다. 해완이 반사적으로 해언을 바라보았을 때, 해언은 상처받은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얼굴로 해완을 향해 말했다.
넌 나한테 비밀 가지면 안 된다고.
해완은 해언을 그 버스 정류장으로 데려갈 수밖에 없었다.
12.
그럼 아직까지 말 한번 못 해 본 거야?
……응.
왜?
……그냥…….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내가 가서 쟤랑 친해지고 너도 소개해 줄게.
…….
괜찮지?
……응.
13.
소년의 이름이 여강현이라는 것을, 해완은 해언에게서 듣고 알았다.
강현이 항상 그 정류장에 앉아 있던 이유는 바닷바람을 타고 흐르는 옅은 목서 향이 좋았기 때문이라는 것도, 열아홉 살이라 해완보다 한 살이 어리다는 것도, 건강이 안 좋아서 잠깐 요양하러 왔다는 것도, 시각 장애는 선천적인 것이 아니라 우연한 사고로 생겼다는 것도 해언에게 들었다.
그 뒤로도 해완이 강현에 대해 알게 된 모든 것은 전부 해언에게 들은 것이었다.
14.
짧은 가을은 무상하게 지나가고 겉옷이 두꺼워지는 겨울이 왔다.
해언은 오랜만에 서울로 갔다. 피할 수 없는 일정이라고 했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해완의 가슴이 미친 듯이 두근거렸다.
해언과 소년이 친구가 된 이후로 해완은 버스 정류장에 갈 기회를 찾지 못했다.
학교가 끝나자마자 해완은 자전거를 타고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바람이 제법 매서워져 있을 때라 그것을 가르고 달리자니 핸들을 잡은 손과 볼이 에이듯이 따가웠으나 페달을 밟는 발을 느리게 할 길이 없었다.
하지만, 버스 정류장이 보이는 순간 해완은 그대로 멈춰 설 수밖에 없었다.
그곳에는 서울에 갔어야 할 해언이 있었고, 그리고 옆에는 강현이 앉아 있었다.
그리고 두 소년은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있었다.
아마도 첫 키스일 것이었다.
15.
이후 해언이 서울에 갔을 때도 해완은 다시는 그곳에 가지 않았다.
해언은 끝내 강현을 해완에게 소개해 주지 않았다.
16.
고등학교를 막 졸업한 어느 겨울, 해완은 해언과 크게 싸웠다.
싸운 것 자체가 처음이었고 그렇게 크게 싸운 것도 처음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해완은 훗날 해언과 왜 그렇게 크게 싸웠는지 기억해 내지 못했다.
17.
또다시 어느 날 아침, 해언은 해완의 곁에서 떠나 버렸다.
해완은 그것을 해언이 떠나고서야 알았다. 어느 재단의 후원을 받아 유학을 가기로 정해진 모양이었는데, 보육원 원장님을 제외하고는 누구에게도 그것을 알리지 않고 떠나 버렸다.
다른 사람도 아닌 해완이 그 사실을 모르고 있었다는 것이 원장조차도 당황스러워 보였지만, 해언은 그 무엇에 관해서도 해완에게 말한 적이 없었다.
해완은 몇 날 며칠을 울었다. 보육원 원장님은 울고 있는 해완에게 곧 연락이 올 것이라며 달랬으나 해언은 끝내 아무에게도 연락을 하지 않고 말 그대로 사라져 버렸다.
해언이 떠나 버린 슬픔도 깊었지만, 해언 없이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18.
해언이 다시 돌아온 것은 해완이 스물여섯이던 초겨울이었다. 무어라 부정할 수 없이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한 채였다.
해언은 부서질 것같이 마른, 그러나 병적으로 아름다운 얼굴로 해완에게 웃으며 말했다.
해완아, 나 심장이 완전히 고장 났대. 길어야 6개월이래.
…….
그러니까 말없이 떠난 거 용서해 줄 거지?
해완은 해언의 여린 몸을 껴안고, 아주 오랫동안 흐느끼며 울었다.
19.
길어야 6개월이라는 의사의 말과는 달리, 해언은 딱 1년을 더 살았다.
해완은 해언의 병 수발을 하기 위해 모든 것을 바쳤다. 다니던 일도 그만두고 간신히 모아 둔 돈을 물처럼 써 가며 좋다는 것은 다 구해다 먹였다.
이식 수술이 아니면 방법이 없다고 했지만, 믿고 싶지 않았다.
해언을 어두운 방 안에 누워 있게만 할 수 없어서 차까지 샀다. 차로 갈 수 없는 곳은 업고 갔다. 해언은 언제나 해완보다 체격이 작았다. 살이 내린 지금은 더욱 업기 쉬웠는데, 그게 그렇게 화가 나고 마음이 에일 수가 없었다.
해완이 해언을 업기 위해 등을 내밀자, 해언이 푸스스 웃으며 말했다.
꼭 우리 처음 만났을 때 같네.
응?
내가 보육원 문 앞에 쭈그리고 앉아 있었는데, 갑자기 네가 나타났어. 내 팔을 막 잡아끌었는데 너무 추워서 꼼짝도 할 수가 없었어. 그러니까 네가 갑자기 날 업어 주려고 하는 거야. 제대로 업지도 못해서 거의 질질 끌고 가는 것 같았지만, 아무튼.
해완은 입을 다물었다. 목이 메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해언은 작게 중얼거렸다.
너를 만나서 좋았어.
…….
버려진 날이 아니라, 우리가 만난 날이 될 수 있었잖아.
소리 내어 악을 쓰고 울고 싶은 것을 이를 악물고 참았다.
끓어오르는 흐느낌을 전부 삼켰다고 생각했는데, 등에 올라탄 해언이 손을 내밀어 해완의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을 가만히 닦아 냈다.
20.
해완의 등에 업혀 있던 해언이 힘없는 목소리로 물었다.
이러는 거 싫지 않아?
응?
너 예전에 내 향이 너한테 배는 거 싫어했잖아.
……그런 거 아냐.
진짜?
응. 좋아. 너무 좋아.
진짜로?
응.
21.
아까 의사한테 말했던 거 무슨 소리야? 나한테 네 페로몬샘을 이식하고 싶다니.
내가 너한테 해 줄 수 있는 게 이것밖에 없어.
싫어. 말도 안 되는 소리 하지 마. 그리고 넌 안 죽어.
나 죽을 거야, 해완아.
……
내 마지막 소원이야.
…….
네가 내 향을 가지고 살아 줬으면 좋겠어.
22.
해언의 심장이 멎은 뒤 해완은 바로 그의 페로몬샘을 이식받았다.
27년 만에 처음으로, 해완은 향을 가진 ‘정상인’이 되었다.
23.
해언에 대한 모든 것이 그리웠지만, 가장 그리운 것 중 하나는 그의 향내였다.
자신의 페로몬 향을 온전히 맡을 수 있는 방법은 없었다. 그 말은 즉, 해언의 페로몬샘을 이식받아 그의 향을 가지게 된 해완은 다시는 해언의 향을 맡을 수 없다는 것이었다.
아이러니했다. 남들은 해완에게서 해언의 향을 맡을 수 있었지만, 그를 가장 그리워할 해완에게만은 불가능한 일이 되어 버렸다는 것이.
멍이 들 때까지 가슴을 치고, 목이 찢어질 것처럼 소리 내어 울어도, 되돌릴 수는 없었다.
24.
내가 죽고 1년 뒤에 꼭 여길 간다고 약속해.
……왜?
너를 위한 선물이 있거든.
뭔데?
그건 아직 비밀이야.
그런 게 어딨어. 치사해.
너도 나한테 비밀 가졌었잖아.
해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버스 정류장 얘기 하는 거야?
그 말에, 해언은 옅게 웃기만 했다.
25.
저를 돌려세운 장신의 남자를 보며 해완은 말 그대로 얼어붙었다.
그런 해완에는 아랑곳없이, 해완의 기억 속의 소년은 새까만 눈을 해완에게 못 박힌 듯 고정시킨 채 말했다.
이제 증명이 되는 거야? 내가 너한테 했던 말.
……해언아.
여강현.
8년 전, 해완의 늦된 첫사랑의 상대이자, 해언과 사랑했던 소년.
그런 그가 해언의 향을 가진 해완을 해언으로 착각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