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essence absolue (1)
(모든 물질의 근원이 되는) 본질 / 순수 향료
그것은 이른 아침 홀로 누구의 발로도 짓밟힌 적 없는 숲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껑충하게 큰 키가 고작인 젊고 여린 나무들의 이파리 위 맺힌 이슬로 피부가 젖는 기분이었고, 완전히 단내를 내기에는 푸르게 설익은 열매들이 숨 쉬는 냄새를 맡는 기분이었다.
해언의 향 안에 잠겨 있다는 건, 그런 것이었다.
해완은 채 잠에서 다 깨어나기도 전에 고개를 돌려 베개에 얼굴을 깊게 묻었다.
밤새 베고 있었던 탓에 스며든 향기가 선명했다. 하지만 기억 속의 것과는 절대 같지 않았다.
페로몬 향은 사람의 피부에서 뿜어져 나오는 순간에만 진짜 향을 맡을 수 있었다. 물건에 배자마자 그 향취는 미묘하게 달라지고 쉽게도 변질됐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자신의 페로몬 향이 어떤지 궁금해했음에도 불구하고 옷이나 침구에 밴 잔향만으론 본질을 절대 파악할 수 없는 이유가 그 때문이었다.
그 말은 곧 해완은 남은 평생 다시는 진짜 해언의 향을 맡을 수 없다는 뜻이기도 했다.
다른 사람들이 제게서 해언의 향을 맡을 수 있는 동안 말이다.
몸을 일으킨 해완은 습관처럼 고여 있던 눈물을 손바닥으로 대충 문질러 닦았다. 자면서도 눈물을 흘릴 수 있다는 것을 해완은 해언이 죽고서야 알았다.
아직 이른 시간이었고 옆에는 언제 들어왔는지 대자로 누워 뻗은 유준이 코를 골며 깊이 잠들어 있었다. 해완은 작게 한숨을 쉬며 유준의 턱 끝까지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 주고는, 제 이부자리를 정리한 뒤 조용히 방 밖으로 나왔다.
난방을 거의 올려 놓지 않은 거실에 맴도는 싸늘한 공기에 해완은 몸을 부르르 떨며 욕실 안으로 들어갔다. 작년에 이사한 낡고 작은 다가구 주택은 유독 웃풍이 심해 창문마다 에어 캡 비닐을 발라도 별다른 소용이 없었다.
그중에도 욕실은 아예 난방이 되지 않았기 때문에 입김이 나올 것만 같이 추웠다. 일단 수도를 틀고 물이 데워지길 기다리며 팔뚝을 손으로 비비던 해완은 물에서 김이 오르기 시작하자 재빨리 옷을 벗고 바로 샤워기에서 흐르는 물을 끼얹었다.
차가워진 살갗은 따뜻한 물이 닿는 곳마다 발갛게 변했다. 특히 오른쪽 목덜미에 난 수술 흉터는 보기 싫을 정도로 붉게 달아오르곤 해서, 저도 모르게 자꾸만 그것에 손이 갔다.
해완의 살이 유독 연한 탓도 있었지만 봉합 부위에 생긴 염증으로 고생까지 하고 나자 흉터는 치료가 필요할 만큼 깊게 졌다. 의사는 레이저 치료를 받기를 권유했으나 1년간을 꼬박 해언의 병 수발을 들고 수술까지 치르고 나니 그런 데 쓸 돈이 남아 있을 리 없었다.
최대한 빠르게 샤워를 하고 옷을 입으며 해완은 이 집이라도 얻을 수 있었던 것에 마음속으로 조용히 감사했다.
해언이 살아 있을 때는 조금 무리를 해서 칠십만 원의 월세를 내면서까지 단열이 잘되는 오피스텔에 살았었지만, 모든 일이 끝나고 난 뒤 해완의 수중에는 새로운 집의 계약금으로 치를 만한 돈마저 남아 있질 않았었다.
보육원 동생인 유준의 정착 지원금 오백만 원이 없었더라면 이 집을 얻을 수조차 없었을 테고, 그것이 해완이 어쩔 수 없이 유준에게 부채감을 느끼는 이유였다.
갈아입을 옷을 가지러 가기 위해 어두운 방 안으로 들어가자 인기척에 눈을 뜬 유준이 잠투정을 하며 입을 열었다.
“뭐 해, 형…… 아직 깜깜한데 부시럭대고 난리야.”
“미안, 깼어? 나갈 준비 하느라고.”
“오늘 쉬는 날이라며 어디 가는데. 친구도 없으니 누구 만나러 가는 것도 아닐 테고.”
서랍에서 꺼낸 검은 니트를 만지작거리며 해완은 잠시 망설였다.
“오늘 해언이 기일이잖아.”
오늘은 해언의 첫 번째 기일이었다.
해언과 함께 숲속을 거니는 아름다운 꿈을 꾼 것도 그 덕인지 몰랐다. 아직 어린 나무들이 가득 찬 아주 푸르고 예쁜 숲이었다.
그리고 오늘 가야 할 곳도 아마 그런 곳일 터였다.
베개에 얼굴을 반쯤 파묻고 있던 유준이 눈을 치켜떴다.
“그래서, 꽃이라도 사 들고 가게?”
일단 해언의 납골당에 다녀올 계획은 맞았기 때문에 해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다음에 가야 할 곳은 굳이 유준에게까지 말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유준은 벌렁 뒤로 돌아누우며 짜증이 섞인 목소리로 투덜거렸다.
“죽기 전에 기어들어 와서 형 돈 다 뜯어먹고 간 새끼 뭐가 좋다고.”
유준이 말을 끝내기 무섭게 해완은 그를 홱 노려보았다. 그제야 유준은 손을 휘적휘적 저으며 제가 실언을 했다는 제스처를 했다.
삽시간에 속이 부글거리며 끓어올라, 그냥 문을 거세게 닫고 방 밖으로 나왔다.
유준은 해언을 싫어했다. 그 이유에는 제 잘못도 있다 싶어 크게 나무란 적은 없지만, 그렇다 해도 유준의 해언을 향한 적대감은 이해할 수 없을 만치 강한 부분이 있었다.
올해 스물한 살인 유준은 스물여덟인 해완과는 일곱 살의 터울이 있음에도 유독 해완을 좋아하고 잘 따랐다. 때문에 유준은 해완에게 있어서도 보육원의 많은 동생들 중 가장 정을 깊게 붙인 상대이기도 했다.
하지만 해언이 항상 해완의 옆에 붙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유준은 왜인지 해언을 꺼렸고, 해언 또한 유준에게 전혀 관심이 없는 것처럼 보였었다.
그 묘한 교착 상태가 갈등으로 폭발한 게 바로 작년의 일이었다.
아무 말도 없이 떠났던 해언이 병색이 완연한 얼굴로 제 곁으로 돌아왔을 때 해완은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다.
도저히 믿기질 않아 해언을 끌고 이런저런 병원을 다니고, 심장 이식 수술 외에는 방법이 없다는 한결같은 진단 결과를 듣고서도 받아들이질 못해 말도 안 되는 대체 요법을 찾아다니기까지 하던 지경이었다.
서울로 올라온 이후로도 꾸준히 유지하던 유준과의 연락에 소홀해진 게 마침 딱 그때였다. 유준은 막 고등학교를 졸업한 참이었고, 만 18세가 넘으면 보육원에는 더 이상 있을 수 없어 여러모로 고민이 많은 시기임을 알면서도 해언 외에 다른 곳에 신경을 쓸 여력이 존재하질 않았다.
그래서 유준이 해완과 같이 살고 싶다며 무작정 서울로 찾아왔을 때, 해완은 당황한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 서 있기만 했다.
평소였으면 당연히, 묻지도 않고 그런 유준을 받아 줬을 것이다.
하지만 해완에게는 해언이 있었다.
몸이 아픈 해언을 돌보기에도 24시간이 모자란데 유준까지 챙기는 건 불가능해 보였다. 게다가 당시 해완과 해언이 살고 있던 오피스텔은 번듯하기는 했지만 10평짜리 원룸에 불과해서 남자 둘이 살기에도 좁은 감이 없지 않아 있었다.
그런 상황에서 해언이 불편해할 수도 있는 유준을 받아 줄 수는 없었다.
하지만 유준은 저를 받아 줄 것이라 한 치의 의심도 하지 않고 온 듯, 해완이 어렵게 같이 살 수 없다고 이야기하자 넘쳐흐르는 배신감을 조금도 감추지 못했었다.
게다가 그 이유가 해언이라는 것을 알자 유준은 더욱 흥분하기 시작했다.
말도 없이 떠나서 형한테 그렇게 상처 주고 이렇게 뻔뻔하게 돌아오는 게 말이 되냐고.
이게 형을 이용하는 게 아니면 대체 뭐냐고.
대체 그 새끼는 미국에 유학까지 갔다면서 어떻게 돈 한 푼 없이 병까지 걸려서 와서는 들러붙을 수가 있냐고.
아픈 해언을 두고 그런 식으로 말하는 것은 당시 해완에게는 받아들일 수 없는 일이었기에 그는 난생처음으로 고함을 지르고 화를 내서 유준을 쫓아내기까지 했었다.
물론 채 반나절이 지나기도 전에 후회가 돼서 견딜 수가 없었던 해완은 유준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지만 유준은 이후로 몇 달간 그의 연락을 받지 않았다.
그리고 유준이 다시 돌아온 건 해언이 죽고 해완이 해언의 페로몬샘의 이식 수술을 받은 지 한 달이 지난 뒤였다.
정신없이 울리는 벨소리에 간신히 문을 열었을 때 수술의 여파로 초췌해진 해완을 마주한 유준은 의아한 표정을 지었다가, 곧 믿을 수 없다는 듯 창백해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았었다.
그것은 해완의 모습 때문이 아니라 해완에게서 풍기는 향 때문이었다.
해완에게서 풍기는 향이 해언의 것이라는 걸,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이 세상 어느 누구도 똑같은 페로몬 향을 가지고 있지 않았다. 비슷한 향들은 많았지만 농도, 지속력, 작은 뉘앙스의 차이까지 모든 향들이 제각각의 개성을 가졌고, 알파 혹은 오메가로 2차 성이 발현한 그 순간부터 페로몬 향은 개개인을 나타내는 강력한 지표가 됐다.
하지만, 해완에게는 향이 없었다.
페로몬샘이 가진 발향 기능의 선천적인 장애였고 이식 수술 이외에는 치료할 방법이 없었다. 그러나 페로몬샘 이식 수술은 지극히 드문 케이스인 데다 기증자의 심장이 멎자마자 이식해야 하는 어려운 수술이기 때문에 공급도 거의 되질 않는다고 했다.
그러니 해완에게 남은 건 향이 없는 오메가로 살아가는 삶을 받아들이는 것뿐이었다.
물론 모질기 그지없는 길이었다. 번듯한 어른임에도 불구하고 페로몬 향을 전혀 풍기지 않는 해완을 모두 말 그대로 괴상하게 느꼈다.
마치 얼굴이 없는 사람을 보는 것처럼, 다들 가까워지기를 망설였다.
검은 니트 터틀넥에 패딩을 입고 목도리까지 두른 뒤에야 해완은 집을 나섰다.
느리게 뜨는 겨울 해에 여태껏 어둑한 골목을 빠르게 벗어나 지하철로 향했다. 역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생각 외로 많은 사람들이 길을 오가는 모습이 보였다.
해언의 납골당까지 가려면 지하철을 한 시간 넘게 타고 가야 돼서 출근 시간을 피하기 위해 일부러 일찍 나왔지만 별다른 도움은 되지 않은 모양이었다.
지하철역 입구 계단을 내려가던 해완의 바로 옆으로 한 남자가 계단을 오르며 지나갔다. 하지만 해완을 스치는 바로 그 순간, 남자는 걸음을 우뚝 멈추더니 뒤를 돌아 그의 뒷모습을 빤히 보았다.
노골적인 행동과 시선이라 모를 수가 없었다. 해완은 향이 조금이라도 덜 새어 나가길 바라며 목도리를 더욱 세게 감고 얼굴을 파묻고 걸음을 재촉했다.
이럴 때마다 해언의 향이 얼마나 사람들을 끌어당기는 것이었는지 새삼스럽게 실감이 났다.
지금도 별다르진 않지만 페로몬샘 이식 수술을 받기 전에도 해완의 인간관계는 협소한 편이었다. 그 좁은 경계선 안에서는 페로몬 향에 대해 딱히 의식할 일이 많지 않았기 때문에 제가 안고 있는 장애에 대해 종종 잊고 사는 것도 가능했다.
그래서일까, 이식 수술 이후 ‘보통’ 사람들이 향을 통해 서로를 어떻게 인식하고 관계를 맺고 싶어 하는지에 대한 경험들을 처음으로 겪고 나서야 해완은 향이 없던 자신이 얼마나 투명 인간 같은 존재였는지를 더욱 절실히 깨닫게 되었다.
새롭게 가지게 된 이 모든 관심과 존재감을 약간이라도 즐길 법하건만 도무지 그럴 수가 없었다. 매혹적인 향에 쉽게도 관심을 가지는 낯선 사람들은 알지 못해도 해완만큼은 이 향이 제 것이 아니라 해언의 것이라는 사실을 잊을 수 없기 때문이었다.
그러므로, 생경한 경험을 할 때마다 아직까지 해완이 느끼는 건 남들을 속이는 것 같은 끝없는 불안감뿐이었다.
내 향을 가지고 살아가 줘. 그게 내 마지막 소원이야.
어느 날 불쑥 해언이 그렇게 말했을 때 해완은 생각도 하지 않고 그럴 수 없다고 답했었다.
해완은 한 번도, 단 한 번도 해언의 향을 가지기를 바랐던 적이 없었다.
그런데도 수술을 하게 된 건 그것이 죽기 전 해언의 마지막 소원이었기 때문이었다.
해언은 집요했다. 며칠을 울고, 화를 내고, 매달리고, 또 울어서 결국 해완에게 알겠다고, 그러니까 제발 울지 말라는 대답을 들어 내고야 말았다.
걸음마다 어김없이 쏠리는 사람들의 눈을 피해 지하철 맨 끝 칸 구석에 앉은 해완은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사람들의 시선을 끄는 건 해언의 향이 강렬해서기도 했지만 해완이 아직 페로몬 조절을 잘하지 못하기 때문이기도 했다. 의사는 반년 정도면 좋아질 것이라 했으나 수술한 지 1년이 가까워졌음에도 감정의 동요에 따라 변하는 향의 농도를 통제하기가 어렵게만 느껴졌다.
하긴, 해완은 모든 게 느렸다. 그에 비하면 해언은 모든 것이 빨랐다. 그런 점 때문에 나이 차이에도 불구하고 모두 그들을 쌍둥이처럼 여겼으니, 어쩌면 그와 해언 사이에는 절묘한 균형점이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지하철을 두 번 갈아타고 버스까지 한 번 환승해야 갈 수 있는 한적한 곳에 위치한 납골당은 가기는 번거로웠지만 해완의 형편에서 부담할 수 있는 곳 중 가장 훌륭한 장소였다.
해언의 유골은 납골당 안 7단에 있었다. 180센티미터의 해완이 약간 손을 뻗어야 닿을 수 있는 위치였는데, 눈높이에 있는 단에 놓아 주고 싶은 마음은 굴뚝같았지만 자금 사정이 그렇게 되지를 않았다.
그래도 단 한 번도 해완보다 커 본 적이 없는 해언이 처음으로 그를 내려다보고 있다는 것을 알면 하늘에서라도 분명 좋아하리란 생각에 작은 미소가 스며들었다.
손을 뻗은 해완은 유리문 너머 사진 속 해언의 밝게 웃고 있는 얼굴을 쓰다듬었다. 삽시간에 목이 메고 눈시울이 붉게 달아올라,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꽤나 오랜만의 방문이었고, 자주 오려고 노력하기는 했지만 지난 1년은 쉽지 않았다.
수술 후 연이은 염증으로 회복도 느렸고, 원래 하던 일을 그만둔 뒤 제대로 된 일을 구하기 어려워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생활을 해야 했다.
무엇보다 그를 괴롭힌 것은 해언을 잃은 슬픔을 혼자 감내해야 했다는 점이었다.
그 누구에게도, 해언의 죽음을 알릴 수 없었던 탓이었다.
‘우리의’ 다다음 생일이 돌아올 때까지 자신의 죽음을 그 누구에게도 알리지 말아 달라는 말은 해언이 살아 있을 때 내건 이상한 요청들 중 하나였다.
해언과 그의 생일은 3월 말이었고, 해언이 작년 11월 초에 눈을 감았으니 1년이 지난 지금도 4개월이 넘는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이유도 말해 주지 않았다. 그저 때가 되면 알게 될 거라고만 했다. 속이 터질 듯 답답해진 나머지 빚이라도 진 것이냐 했지만 해언은 그저 말없이 웃기만 했다.
그래서 해완은 어머니와 같은 보육원 원장님과 선생님들 그 누구에게도 깊고 깊은 슬픔과 상실감을 의지하고 나누지 못한 채 혼자서 이겨 내야만 했다.
게다가 어쩌면, 해완은 두 번 다시 그가 자란 보육원에 돌아가지 못할 수도 있었다.
해언의 죽음을 알리지 못했다는 죄책감 때문만이 아니라 해언의 페로몬샘을 해완이 이식받았다는 사실 때문이었다.
이식 수술을 한다 해도 생면부지의 사람이 아닌 아는 사람, 그것도 가족처럼 가까운 사이에 페로몬샘을 이식하는 경우는 전무했다.
개인의 특징으로 분류되는 페로몬 향의 특성상 그것은 어떻게 보면 누군가의 얼굴을 똑같이 이식하는 일과 같았기 때문이다.
유준과 다시 만났을 때 그가 경악했던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그러니 해완의 선택에 대해 유준은 절대 이해를 하지 못했다. 수술을 반쯤 강요한 해언과 멍청하게 그 뜻을 따른 해완까지 둘 다 돌아 버린 게 분명하다며 욕을 해 댔다.
해언을 향한 욕은 단호하게 막았지만 저를 향한 것에는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가끔은 해완 그 자신마저도 학창 시절 해완을 ‘윤해언 짝퉁’이라고 부르던 아이들이 지금 그를 만난다면 기가 막힌 별명을 지었다고 박수를 칠지도 모른다는 냉소적인 생각을 할 정도였으니까.
그런 일들을 생각하면 마음이 복잡해서, 해언은 그냥 고개를 저어 상념을 털어 냈다.
해언은 항상 머리가 좋고 해완이 볼 수 없는 부분까지 보았다. 지금은 바로 이해할 수 없어도 시간이 지나고 나면 해언의 뜻을 알게 되리라고, 지금은 그냥 그렇게 생각하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 사이에 무슨 일이 있어도 해언은 해완의 이 세상에서 유일한 가족이었다.
한동안 해언의 납골함 앞에서 느긋하게 시간을 보내던 해완은 자리를 뜰 시간이 되자 마지막 인사로 어떤 말을 남겨야 할까 잠시 망설였다. 첫 번째 기일이고 하니 뭔가 특별한 말을 해야 할까 싶어서였다.
하지만 곧 의미 없는 짓이란 걸 깨달았다. 해언이 그의 곁에 있지 않을 때 해완이 하고 싶은 말은 항상 같았다.
“……보고 싶어, 정말, 정말 보고 싶어. 해언아.”
해완은 눈을 감았다. 하얀 얼굴 위로 뜨거운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 * *
다음으로 가야 할 곳은 그가 한 번도 가 본 적 없는 곳이었다.
해완은 주머니에서 해언이 적어 준 쪽지를 꺼냈다. 쪽지에는 해언의 정갈한 필체로 ‘세림 수목원’이라는 장소의 이름과 어떻게 가야 할지가 상세하게 적혀 있었다.
이것이 바로 해언의 마지막 부탁이었다. 네게 줄 선물이 있으니, 제가 죽은 뒤 이 쪽지에 적힌 장소로 오전 11시까지 가 달라는 것 말이다.
역시 전혀 영문을 알 수 없는 부탁이었지만, 해언의 죽음을 알리지 않는 것과 페로몬샘 이식 수술을 받는 것에 비하면 너무나도 쉬운 부탁인 건 사실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삼삼오오 한 곳으로 향하는 사람들의 무리를 따라가니 수목원 입구가 금세 눈앞에 나타났다.
세림 수목원은 어느 기업 재단에서 운영하는 사설 수목원으로 국내에서 보기 어려운 아름다운 식물들이 모여 있기로 유명해 해완도 TV에서 몇 번 본 적이 있었다.
수목원 앞에 도착한 해완은 입구에서 잠깐 머뭇거렸다. 표를 끊어야 수목원 안에 들어갈 수 있는 것 같았지만 쪽지 내용은 그와 달라서였다.
해완은 발걸음을 돌려 쪽지에서 지시한 대로 펜스를 따라 걷다가 작은 쪽문 하나를 발견하고 멈췄다. 처음에는 잠겨 있는 듯 보였는데, 당겨 보니 열려 있었다.
아무리 봐도 관계자만 출입이 가능한 문인 것 같아 들어가기가 영 망설여졌다.
하지만 쪽지에는 명확하게 그 쪽문으로 들어가라고 적혀 있었기에, 주위를 슥 둘러본 해완은 침을 꿀꺽 삼키고 안으로 들어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이어지는 오솔길 끝에 거대한 유리 온실이 보였다. 그리고 그 유리 온실 안으로 가 달라는 것이 해언이 한 부탁이었다.
지난밤 옅게 내린 눈들이 측백나무 위로 부드럽게 쌓인 채였다. 오솔길 바닥도 마찬가지였다. 많지 않은 눈이라 금세 녹아 버릴 법한데도 점점이 찍힌 몇 개의 발자국 외에는 깨끗했다.
해완은 두근거리는 가슴을 안고 천천히 길을 따라 걸었다. 있어서는 안 될 곳에 있는 기분이 사라지질 않아, 온실 문에 손을 대고서도 한동안 머뭇거리고 서 있었다.
그럼에도 해언의 마지막 부탁이라는 것이 용기를 내게 했다.
다행히도 주변에는 누구의 인기척도 느껴지지 않았다. 그는 온실 문을 열고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아무리 따뜻한 햇살이 내리쬐어도 칼처럼 매서운 바람이 부는 겨울의 야외와는 달리, 온실 안의 따뜻한 공기가 해완의 얼은 몸을 훈훈하게 감쌌다.
온실에 들어가서 딱히 무엇을 하라는 말은 없었기 때문에 해완은 잠시 그 자리에 멍하니 서서 식물들로 가득 찬 정원을 둘러보았다. 방금까지 삭막한 겨울 속을 걷다 온 해완의 눈에 비치는 울창한 나무들은 다큐멘터리에서나 본 열대 우림 속 광경과 같았다.
이국적이고 푸른 풍경에 끌려, 해완은 홀린 듯이 걸음을 옮겼다. 코끝에는 깊고 진한 숲 냄새가 감돌았다. 해언의 것과는 확실히 결이 달랐지만 그래도 그런 종류의 향들은 해완의 마음에 어떤 그리움을 스미게 하는 면이 있었다.
그런데 그때, 누군가 해완의 팔을 잡아 강한 힘으로 뒤돌려 세웠다.
해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크게 벌어진 눈으로 저를 돌려세운 까만 마스크를 쓴 장신의 남자를 올려다보았다.
맨 처음 든 생각은 남자가 크다는 것이었다. 그는 180센티미터의 해완이 올려다봐야 할 정도로 키가 컸고, 체격도 말 그대로 두껍다고밖에 말할 수 없었다.
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기가 막히게 빚어 놓은 반듯한 이마에 인상적으로 짙고 까만 눈썹이었다. 그 잘생긴 눈썹 밑에는 기이하게 보일 정도로 새카만 눈동자가 있었다.
그와 동시에, 습한 흙, 그 흙을 파고든 거대한 나무뿌리, 텁텁한 탄 내음, 그리고 안개처럼 희미하게 느껴지는 달콤한 향이 났다.
그 냄새가 해완의 마음을 지금은 잊고 있었던 어느 버스 정류장으로 휘달려 가게 만들었다.
“해언아.”
그리고 남자가 입을 열었을 때.
“이제 증명이 되는 거야? 내가 너한테 했던 말.”
압도적인 체격만큼이나 인상적인 깊고 낮은 목소리로 제게 말을 거는 그 남자는, 해완이 아는 사람이었다.
여강현.
스물의 해완에게 늦된 첫사랑을 겪게 했던 소년이자 열여덟의 해언과 사랑했던 소년.
바로 그 소년이 8년이라는 시간을 훌쩍 뛰어넘어 해완의 눈앞에 서 있었다.
일말의 예측도 못 한 상황에 해완은 그대로 얼어붙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그를 바라만 보았다.
굳어 버린 몸과는 달리 머리는 제멋대로 기억 속의 강현의 모습을 튀어 오르는 불씨처럼 떠올려 냈다.
어두운 곱슬머리, 짙은 눈썹, 잘생긴 이마, 새카만 눈동자, 모든 것이 그대로였다.
그러나 곧, 어떤 사실을 깨달은 해완이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켰다.
어디를 보는지 모르게 연신 방황하던, 초점 없이 망가진 까만 눈동자는 해완의 얼굴에 똑바로 박혀 한 치도 비켜 나가지 않고 있었다.
그는 보고 있었다. 10대 시절과는 다르게.
“해언아?”
그러나 아무 말도 못 하고 서 있는 저를 향해 다시 흘러나온 강현의 목소리에, 해완은 마치 머리 위부터 얼음물을 끼얹은 듯 정신이 번쩍 들었다.
그는 분명히, 해언이라고 했다.
해완은 눈치가 둔한 편이었다. 늘 상황을 빨리 판단하는 법이 없었다. 하지만 이상하게도, 그 짧은 새에 순식간에 퍼즐의 마지막 조각을 두는 것처럼 상황이 맞추어졌다.
10대 시절의 그는 시각 장애가 있었다. 다시 말해 해언의 얼굴은 한 번도 보지 못했다.
해완은 강현을 알았지만 강현은 해완이 누구인지 알지 못했다.
해완에게서는 해언의 향이 났다. 강현은 저를 해언이라고 불렀다.
강현은, 해언의 향이 나는 해완을 해언으로 착각하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열이 솟구쳐 얼굴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해완은 제 팔을 잡고 있는 강현의 팔을 거세게 뿌리쳤다.
강현은 당황한 표정을 지었다. 마스크를 쓴 탓에 얼굴 절반은 보이지 않았지만 꿈틀대는 눈썹이 보이는 표현만으로 감정이 선명했다.
누군가 목을 조르는 듯 말이 제대로 나오질 않았다. 해완은 간신히 말을 뱉었다.
“사람…… 사람 잘못 보셨어요.”
그리고 해완은 있는 힘껏 달려 온실을 빠져나왔다. 뒤에서 저를, 아니, 해언을 부르는 강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멈출 수가 없었다.
오솔길을 달려 쪽문을 빠져나와서도 해완은 계속 달렸다. 심장이 터져 버릴 듯 숨이 차오르고 나서야 간신히 달리는 것을 멈출 수 있었다.
해완은 해언과의 대화를 떠올렸다.
‘내가 죽고 1년 뒤에 꼭 여길 간다고 약속해.’
‘……왜?’
‘너를 위한 선물이 있거든.’
‘뭔데?’
‘그건 아직 비밀이야.’
‘그런 게 어딨어. 치사해.’
‘너도 나한테 비밀 가졌었잖아.’
‘……그 버스 정류장 얘기 하는 거야?’
해완은 주머니에서 해언이 준 쪽지를 꺼냈다.
이제야 알 것 같았다. 언제 정했는지는 몰라도 이것은 분명 약속 시간과 장소였다. 아마도 그 대상은 강현이었을 터였다.
다리에 힘이 풀려, 해완은 벽에 기대 쪼그려 앉았다.
해언아.
대체 무슨 생각을 했던 거야.
이상한 탈력감에 휩싸인 해완은 벽을 타고 내린 오후의 햇살이 아스팔트 바닥에 네모난 공간을 만드는 모양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누군가를 추억하기에 8년의 시간은 너무 길지도 몰랐다. 특히 말 한번 걸어 보지 못하고 혼자만의 짝사랑으로 끝난 기억은 더더욱 그래야만 했다.
하지만 해완의 경우에는 조금 사정이 달랐다.
자신이 남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알게 된 건 열다섯 살 때였지만, 남들과 같지 않다는 것을 정말 실감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보육원을 떠나 서울로 올라온 뒤였다.
알파오메가의 세상에서 향내가 나지 않는 오메가는 소리가 나지 않는 오르골 같았다. 그 자리에 존재한다는 것을 볼 수는 있지만 아무도 그 태엽을 감아 볼 생각은 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초라한 짝사랑이 이토록 소중하게 남았는지도 모른다.
물론 매일같이 그리워하고 되새겼던 것은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잊고 지낸 날이 대부분일지라도 너무 지쳐 잠이 오지 않는 밤 문득 떠올리게 되는 그런 기억이었다.
이름도 알지 못했던 남자아이를 왜 그렇게 좋아했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질 않아도, 차마 표현할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어도,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 마음이 차갑게 식고 잊힌 기억이 될 뿐이라 하더라도, 말린 꽃잎처럼 조심스럽게 간직하고 싶은 그런 마음이었다.
갑자기 무거워진 심장의 무게에 해완은 고개를 숙였다.
그때, 숙인 머리 위로 긴 그림자가 졌다. 흠칫 놀라 위를 올려다본 해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거의 튕겨 오르듯 허둥지둥 몸을 일으킨 해완의 앞에 강현이 도망갈 길 없이 바싹 붙었다.
“나랑 숨바꼭질이라도 하고 싶었던 거야?”
머릿속이 하얘진 나머지 해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여기까지 내내 뛰어온 듯 강현은 숨이 가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스크 위로 보이는 눈은 조금의 흔들림 없이 오직 해완의 얼굴에 똑바로 박혀 있었다.
“사, 사람 잘못 봤다고 했잖아요……!”
어떻게든 이 자리를 모면해야 한다는 생각만이 가득 찬 해완은 앵무새같이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도망칠 곳만을 엿봤다.
하지만 두 번은 당하지 않겠다는 듯 강현은 손쉽게 해완의 퇴로를 막아 버렸다. 계속된 부정에 그는 격양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대체 왜 그러는 거야. 오늘 만나자고 한 건 너잖아. 그런데 왜 날 모르는 척하는 거냐고!”
몇 번씩 아니라고 확실히 말했는데도, 강현의 목소리에는 이상하리만치 그가 해언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조금의 의심도 없었다.
벽 때문에 뒤로 물러설 수도 없었던 탓에 해완은 둥그레진 눈으로 강현을 올려다보기만 했다. 해완이 평소 누구를 올려다볼 일이 드물었던 것을 감안하면 압도적으로 느껴질 정도로 키가 큰 강현이 앞을 막아서고 있으니 심장이 쿵쾅거리고 눈앞이 아득한 느낌까지 들었다.
이런 대치 상황에 해완은 언제나 잘 대처해 본 적이 없었다. 거의 공황에 빠진 해완은 바싹 붙어 선 강현의 단단한 가슴을 밀치며 살짝 언성을 높였다.
“당신이 누굴 만나기로 했건, 그건 내가 아니라니까!”
그 말에 기이하리만치 새까만 눈이 위협적으로 번뜩였다.
“네가 윤해언이 아니라고?”
강현은 제 얼굴 아랫부분을 단단히 감싸고 있던 검은 마스크를 턱 밑으로 끌어 내렸다. 군더더기 없이 높게 솟은 콧대와 날렵한 턱선이 드러났다.
그리고 그는, 조금의 망설임 없이 한쪽 손으로는 해완의 어깨를 벽에 밀어붙이고 다른 한쪽 손으로는 해완이 목에 감고 있던 머플러와 터틀넥을 함께 끌어 내려 드러난 목선에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댔다.
겨울바람에 차가워진 코끝이 민감한 살갗에 닿자 해완은 거의 감전된 듯 몸을 파드득 떨며 강현의 어깨를 한 번 더 밀쳐 냈다.
“뭐, 뭐 하는……!”
심하게 당황한 나머지 말을 제대로 끝맺지도 못한 해완에는 아랑곳없이, 강현은 더없이 만족스러운 얼굴로 씩 웃었다.
“너야.”
“…….”
“네가 아닐 리 없어.”
이유를 알 수 없는 맹목적인 확신이었다.
그것에 압도된 해완이 멍하니 강현의 얼굴을 보고 있던 찰나였다.
“잠깐만요, 거기 괜찮으세요?”
어디선가 들려오는 낯선 목소리에 정신이 번뜩 들었다. 허둥지둥 강현의 뒤쪽을 바라보자 가까이 다가오고 있는 경찰 두 명이 보였다.
“아무 일 없는데 왜 그러시죠?”
살짝 돌아선 강현이 먼저 날카로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경찰관들은 강현의 말에 대꾸하지 않고 해완을 똑바로 보며 말했다.
“괜찮으세요? 저분이 억지로 잡고 있는 것 같은데.”
그때까지도 벽에 해완을 고정시키고 있던 강현의 손에 순간 힘이 풀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해완은 강현을 밀치고 뛰다시피 앞으로 걸어 나갔다.
“해언아! 윤해언!”
강현이 당황한 목소리로 해언의 이름을 부르는 것이 들렸지만 해완은 뒤조차 돌아보지 않고 허겁지겁 길가에 주차되어 있던 택시를 탔다.
목적지를 묻는 기사에게 일단 출발해 달라고 연신 부탁한 해완이 마지막으로 본 것은, 마치 버림이라도 받은 듯 허망한 얼굴로 해완이 탄 택시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는 강현과 그 앞을 막고 있는 경찰들의 모습이었다.
* * *
현관문을 열고 집 안으로 들어선 해완은 현관에 그대로 털썩 주저앉았다.
시간은 오후 2시를 가리키고 있었다. 무슨 정신으로 집에 돌아왔는지도 몰랐는데 고작 하루의 반이 지났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방문이 열리는 소리에 흠칫 고개를 돌리자 그제야 잠에서 깼는지 머리에 까치집을 진 유준이 늘어지게 하품을 하며 나오고 있었다.
그는 현관에 멍하니 앉아 있는 해완을 보고 눈을 두어 번 껌뻑거리더니,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얼굴이 뭐 그러냐? 윤해언 귀신이라도 본 것처럼.”
해언의 귀신까지는 아니더라도 충분히 이해할 수 없는 일을 겪었다는 생각에 해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진짜 무슨 일 있었나 보네? 뭔데, 무슨 일인데.”
유준이 걱정스럽게 다시 물었다. 해완은 그를 보며 침을 꿀꺽 삼켰다.
유준이 고민 상담에 적합한 상대라고는 할 수 없었지만, 머리가 너무 엉망진창이어서 어디에든지 얘기를 해야 풀릴 것 같았다.
이야기를 들은 유준이 황당하다는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윤해언이 형한테 무슨 선물이 있으니 오늘 꼭 가라고 한 곳에, 윤해언이 어릴 때 사귄 어떤 남자가 있었다고?”
“……응.”
“그리고 그 남자는 거기서 윤해언을 만나는 걸로 알고 있었고?”
해완이 조용히 고개를 끄덕이자, 유준이 인상을 찡그렸다.
“아니, 그럼 그 남자가 형한테 주는 선물이라는 거야, 뭐야? 그게 말이 돼?”
해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역시 그 뜻을 이해는 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그는 유준과는 달리 작고 어렴풋한 단서 정도는 가지고 있었다.
해언보다 강현을 먼저 알았던 건 해완이었다는 것.
그리고 해언이 강현과 연인이 되고 나서 두 사람의 사이가 묘하게 어색해졌다는 것 말이다.
하지만 그것만은 왠지 유준에게 말하고 싶지 않았다. 다행히도 유준은 그 문제에 집착하지 않고 쉽게 다른 곳으로 넘어갔다.
“근데 그 새낀 뭔데 형이 윤해언 아니라는데 맞다고 우기고 난리를 친 거야?”
“……내 향 때문에 그런 것 같아.”
“뭐 그럴 수야 있겠지만…… 그래도 세상에 비슷한 향이 얼마나 많은데 8년 만에 만난 사람을 자기가 아는 사람이 맞다고 확신하냐고. 게다가 옛날엔 눈도 안 보였다며.”
그것은 해완에게도 수수께끼였기에 역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페로몬 향이 누군가를 식별하는 강력한 수단 중 하나라고 해도 얼굴과 같이 최우선의 수단은 될 수 없었다. 물론 해언의 향이 특별하긴 했지만 비슷한 향을 가진 사람이 없다고는 할 수 없을 터였다.
“아, 이거 암만 생각해도 수상한데……. 왜 윤해언한테 부탁받아서 온 거라고 말 안 했어!”
타박에 가까운 유준의 질문에 당황한 해완은 입만 벙긋거렸다.
“그게…… 너무 당황해서 그 얘기 할 생각을 못 했어.”
“느낌이 안 좋아. 윤해언이 걔 돈 받고 잠수 탔거나 뭐 그런 거 아냐?”
“뭐?”
“무슨 8년 전에, 그것도 멋도 모를 때 사귀었던 애를 지금까지 기다려서 만나러 오냐고. 그게 말이 돼? 돈이 걸렸거나 원한이 있거나 뭐 그런 문제가 아닌 이상.”
황당무계한 말에 해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그에 아랑곳없이 유준은 거의 침을 튀겨 가며 열렬히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그 남자 덩치도 엄청 컸다며. 막 조폭 이런 거 아냐? 그래서 뒷수습할라고 형 그 자리에 보낸 거 아니냐고.”
“말이 되는 소릴 해라, 좀.”
결국 참지 못한 해완이 타박을 했지만 뒤이은 유준의 말은 말문을 막히게 만들었다.
“그럼 뭐냐구. 솔직히 이 상황, 윤해언이 그 남자가 형을 자기로 착각하기를 바란 걸로밖에 안 보이지 않아?”
해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솔직히 말해 해완 또한 그 생각을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해언이 그런 뜻으로 자신을 그리로 보냈으리라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
해완과 해언은 학창 시절을 같이 보냈다. 뿐만 아니라 누구보다 가까운 사이였기에, 아이들이 뒤에서 해완을 ‘윤해언 짝퉁’이라고 부르고 놀렸던 것과 해완이 받은 상처에 대해 가장 잘 아는 사람이 바로 해언이었다.
해언은 단지, 그런 야유들 때문에 해완과의 시간을 포기하고 싶지 않다고 말했었다.
마음을 가다듬은 해완이 단호한 목소리로 유준에게 강하게 말했다.
“……그런 거 아냐. 그러니까 그런 소리 하지 마.”
해언과 관한 이야기에 해완이 저런 얼굴로 말할 때 우겨 봐야 제가 덕 볼 게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유준은 입술을 한 번 삐죽이곤 입을 다물었다.
하지만 그것이 유준이 포기했다는 뜻은 아닌 모양이었다.
그 뒤로 며칠 동안 유준은 그 남자에게 윤해언이 죽었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고 집요하게 설득하려 들었다. 집에서는 물론이고 해완이 한창 일하고 있는 와중에도 문자나 전화로 끈질기게 구는 통에 두 손 두 발 다 들 지경이었다.
유준은 분명히 윤해언한테 뭔가 꿍꿍이속이 있다며, 지금도 살기 팍팍해 죽겠는데 이상한 일에 휘말리기 전에 우리와 아무 관련 없다고 선을 그어 놔야 된다고 주장했지만, 해언이 저에게 그런 해를 끼칠 리 없다고 믿고 있는 해완에게는 마음만 불편하게 만드는 말들일 뿐이었다.
그러다 해완이 그만 좀 하라며 정말 화를 낼 뻔한 어느 날, 유준이 내뱉은 말은 그의 가슴에 무언가를 턱 걸린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아, 그래, 좋아! 형 말대로 윤해언이 아무 뜻 없이 그랬다 쳐. 그럼 그 남자는? 그 남자는 그렇게 기다린 사람이 자길 보자마자 버리고 튀었다고 생각하면서 평생을 살아야 된단 생각은 안 해 봤어?”
그 말을 듣는 순간 간절히 해언의 이름을 부르던 강현의 목소리가 갑자기 귓속에 메아리쳤다.
다시는 놓칠 수 없다는 듯 강하게 고정되어 있던 그 까만 눈동자와, 택시를 타고 사라지는 제게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허망한 얼굴도.
마치 버림받은 아이 같던 그 표정이 생생히 떠오르자 심장이 쿵 발밑으로 떨어지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그곳에 가지 말았어야 했다는 의미 없는 후회가 온몸을 강렬하게 뒤덮었다.
그랬다면 그저 어긋난 약속쯤으로 끝날 수 있었겠지만, 이제 강현에게는 해언이 눈앞에서 저를 모른 척한 최악의 기억이 되어 버렸을 것만 같았다.
삽시간에 부피를 더한 죄책감에 해완은 초조하게 입술 끄트머리를 깨물었다. 마음이 흔들리는 신호를 놓치지 않은 유준이 잽싸게 입을 열었다.
“윤해언이 자기 죽은 거 알리지 말아 달라고 한 것 때문에 그래? 그럼 죽었다고 하지 마. 그냥 멀리 떠났다고 해. 그 사실 알리러 형 보낸 거라고. 그럼 되잖아.”
결국, 해완은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일단 그 식물원에 가자고 한 것은 유준의 생각이었다.
강현에게 해언을 만날 수 없다는 사실을 알려야 한다는 것에는 동의했으나 그러고 나자 강현을 어디서 찾아야 하는지가 또 문제였다.
생각다 못한 유준은 두 사람이 만났던 식물원에 다시 가 보자고 했다. 지푸라기라도 잡는 심정이었지만 딱히 그를 만날 수 있으리라 생각하진 않았다.
하지만 그 온실 앞에, 강현이 있었다.
지난번과는 달리 눈이 금방이라도 내릴 듯 하늘이 흐린 날이었다. 목적 없이 바깥에 서 있기에는 지나치게 매서운 날씨였지만 강현은 마치 누군가를 기다리듯 입구에 서서 멍하니 앞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해완의 숨이 턱 막혔다. 해완이 갑자기 멈춰 서자 유준은 의아한 듯 해완을 봤다. 곧 그의 시선을 따른 유준이 휘파람을 휙 불었다.
“저 사람이야? 와 씨, 존나 크네. 190 넘겠는데?”
“…….”
“아우, 추워. 빨리 얘기하고 가자.”
“……네가 가서 말해.”
해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유준이 인상을 찡그렸다.
“뭐?”
“난, 난 못 하겠어. 그러니까 네가 가서…… 네가 가서 대신 좀 말해 줘.”
유준은 의아한 듯 머리를 긁적이더니, 상관없다는 듯 별다른 망설임 없이 대답했다.
“알았어. 그럼 형이 못 와서 내가 대신 왔다고 할게.”
“내 얘기는 하지 마.”
“어?”
“그냥 내 얘긴 하지 마. 내가 아니라 네가 해언이한테 부탁받은 거고, 그냥, 그냥 지난주 여기서 있었던 얘긴 모른 척해. 알았지?”
떨리는 해완의 목소리에, 유준은 무언가 묻고 싶은 듯 입을 열었지만, 그냥 작게 한숨을 쉬며 알겠다는 듯 손을 휘휘 내저었다.
유준이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자 해완은 오솔길 옆 나무 뒤로 몸을 숨겼다. 유준이 강현에게 가까이 다가서고, 앞에 고정되어 있던 강현의 시선이 유준에게 향하고, 그리고 유준이 무언가를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해완은 그대로 몸을 돌려 걸어 나왔다.
이걸로 됐어. 그렇게 중얼거리는 채였다.
* * *
그날 유준은 새벽 3시가 되어서야 거나하게 취해 집에 들어왔다.
아침 일찍 일을 나가야 하는데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뜬눈으로 그를 기다린 해완이었지만 제대로 걷지도 못하는 상태로 들어온 유준에게 무언가를 묻는 것은 불가능했다.
다음 날, 아르바이트를 마친 해완이 저녁 6시가 되어 집에 들어올 때까지도 유준은 여전히 늘어지게 자고 있었다.
반쯤 먹다 남긴 컵라면 용기가 머리맡에 널브러져 있는 모습을 보고 옅은 한숨을 내쉰 해완은 고춧가루를 듬뿍 넣은 콩나물국을 끓여 유준을 깨웠다.
묻고 싶은 것은 많았지만 비척거리며 상 앞에 앉은 유준의 얼굴이 숙취로 허옇게 떠 있어서, 해완은 일단 그가 밥을 몇 술 떠 넣을 때까지 기다리다 입을 열었다.
“도대체 누구랑 그렇게 술을 마신 거야? 너 요즘 자주 어울리는 그 오토바이 타는 애들?”
죽다 살아난 얼굴로 허겁지겁 뜨거운 콩나물국을 퍼먹던 유준이 갑자기 사레가 들려 캑캑거렸다. 놀란 해완이 황급히 병에 담긴 보리차를 따라 유준에게 건넸다.
“괜찮아? 그러게 천천히 좀 먹지.”
보리차를 꿀떡 넘긴 유준이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그 여강현이란 사람이랑 마셨어.”
생각지도 못한 대답에 반쯤 입을 벌린 해완이 황당한 듯 물었다.
“지금…… 그게 무슨 소리야?”
유준은 수저로 국을 휘적이며 웅얼거렸다.
“아니, 가서 얘기하니까 막 꼬치꼬치 캐물으면서 추워 죽겠는데 놓아주질 않잖아. 그러다가 강현이 형이 따뜻한 데로 가서 얘기하자고 하길래 별생각 없이 따라갔다가 어쩌다 보니…….”
“형? 언제부터 니가 강현이를 형이라고……. 아니, 됐다. 너 어제 새벽에 들어왔잖아. 대체 무슨 얘기를 했길래 그 시간까지 같이 술을 마셔?”
도저히 이해를 할 수 없었던 해완의 끈질긴 질문에 유준이 반항하듯 목소리를 높였다.
“불쌍해서 그랬다, 불쌍해서! 알고 보니까 그 인간, 진짜 개호구더라니까?”
“뭐?”
“그 자리 정말 윤해언을 보고 싶어서 나온 거래. 8년 동안 내내 그리워했다고.”
해완은 유준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이유도 알 수 없이, 심장을 조이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씨, 솔직히 내 입으로 이런 말 하기 존나 오글거리는데, 진심으로 사랑했대나 어쨌대나 그딴 소릴 하잖아.”
그 뒤로도 유준은 강현과 해언에 대해 나눈 대화를 두고 가볍게 주절거렸지만, 왜인지 머리가 흐려진 해완은 아무 말도 없이 그저 입을 다물고만 있었다.
“……윤해언 멀리 가서 이제 못 본다고 아무리 말을 해도 믿으려고 하질 않아서 내가 얼마나 고생했는지 알아? 그니까 같이 술 마셨다고 뭐라고 할 게 아니라 나한테 칭찬을…….”
“……나 일 가야 되겠다.”
말을 뚝 끊은 유준이 시계를 한 번 보고는 의아한 듯 물었다.
“아직 7시밖에 안 됐는데? 형 대리운전 8시부터 하잖아.”
“그냥 오늘은 좀 일찍 가야 돼. 갔다 올게.”
해완은 대충 중얼거리며 목도리를 휘휘 감고 패딩을 한 손에 집어 든 채 허둥지둥 집을 빠져나갔다.
그런 해완의 뒷모습을 멍청하게 바라보던 유준의 시선이 문득 밥상 위로 향했다. 그가 앉아 있던 자리에는 밥과 국이 손도 안 댄 채 거의 그대로 남아 있었다.
“……배가 안 고팠나?”
유준은 어깨를 한 번 으쓱하고는, 해완의 것을 제 국그릇에 부어 넣고 퍼먹기 시작했다.
어두운 골목으로 나온 해완은 패딩을 입지 않고 잠시 걸었다.
1분이라도 겉옷을 입지 않고 걷기에는 터무니없을 만큼 추웠지만, 생각을 정리하는 데는 칼날 같은 추위가 오히려 도움이 됐다.
강현이 8년 내내 해언을 그리워했다는 말을 듣는 찰나, 해완은 어쩔 수 없이 그 버스 정류장에서의 마지막 기억을 떠올렸다.
서로의 손을 붙잡고, 서툴고 조심스럽게 입술을 마주 대던 해언과 강현의 모습 말이다.
그것은 해완이 마지막으로 본 강현의 모습이기도 했고, 제가 강현을 좋아했다는 것을 처음으로 깨달은 순간이기도 했다.
강현을 보기 위해 숨이 턱까지 차도록 자전거 페달을 밟아 달렸던 길들과, 그 길 내내, 아니, 보육원을 출발하는 그때부터 고개를 들던 설렘과, 말조차 걸지 못하고 멀찍이 떨어져서 앞이 보이지 않는 소년을 바라보며 느꼈던, 터질 듯이 격렬하게 뛰던 심장.
그 모든 것이 제가 강현을 사랑했기 때문에 느꼈던 감정이라는 사실을.
하지만 뒤이어 곧바로 찾아온 마음은 그 연약한 풋사랑이 강현에게는 아무 의미도 아니며 어떤 의미가 될 수도 없으리란 현실에서 느낀 상처, 그리고 해언을 향한 미움과 질투였다.
그것을 느낀 즉시 해완은 크게 당황했다. 해언에 대해 어떤 부정적인 감정을 느낀 적은 처음이었고, 제가 마치 다른 사람이 된 것 같기까지 했다.
해완이 먼저 강현을 알았다 한들 한번 전해 보려 한 적도 없는 마음이었으니 해완에게는 그가 제 것이기라도 되는 양 주장할 권리가 없었다.
설사 강현이 제 마음을 알았다 해도, 해언을 두고 그를 좋아할 일은 절대 일어나지 않으리란 걸 뻔히 알면서 못난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스스로가 너무나 싫었다.
그것이 해완이 두 번 다시 그 버스 정류장에 가지 않은 이유였다.
이상하게 눈시울이 뜨거워져 해완은 시린 손으로 눈을 마구 비볐다. 스물여덟 살이나 먹어 놓고도 마치 그 늦된 첫사랑의 순간으로 돌아간 것처럼 굴고 있다는 게 믿기지 않았다.
더불어 이제 세상에 없는 해언을 아주 잠시나마 미워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한 후회가 느껴졌다.
해완은 코를 훌쩍이며 손에 든 옷을 입었다. 기억도 나지 않을 만큼 오래 입은 싸구려 패딩은 얼어붙은 몸을 데우는 데 별다른 도움이 되질 않았다.
덜덜 떨며 걸어 내려가는 길이 그렇게 길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 * *
해완은 그 이후로 유준에게 강현에 대해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유준이 먼저 말을 꺼내고 싶어 할 때도 말을 돌리거나 다른 곳으로 가 버리는 식이었다.
해언의 부탁은 그 수목원에 가 달라는 것까지였고 해완은 그 약속을 지켰다. 그러니 강현을 볼 일은 다시는 없을 터였고 쓸데없는 감정 소모를 할 필요도 없었다.
하지만 해완이 그런 식으로 굴수록 유준은 오히려 입이 간질거려 안달이 난 것처럼 보였다. 그럼에도 해완이 꿋꿋이 그를 무시하자 유준은 똥이 마려운 강아지 같은 얼굴을 하고 있긴 했어도 결국 입을 다물게 되었다.
해완은 진심으로 그것이면 됐다고 생각했다. 8년이나 지난 일에 얽매이기에 삶은 충분히 지치고 피곤했다.
해완의 하루는 새벽 5시부터 시작됐다. 동네에 있는 헬스장에 5시에 출근해 청소와 오픈을 한 뒤 7시에 출근하는 프런트 아르바이트생과 교대를 하고, 10시까지 쪽잠을 잔 뒤 11시에 편의점에 출근해 6시까지 근무를 했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을 먹고 조금 쉰 뒤에는 8시부터 새벽 1시까지 대리운전 일을 했다.
여기까지가 평일의 일과였고, 주말에는 10시부터 7시까지 고깃집에서 서빙과 잡일을 했다. 시급이 높은 대신 손님이 많은 곳이었기 때문에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오히려 평일보다 힘들게 느껴질 때도 있었다.
유일하게 쉬는 날은 수요일뿐이었지만 이마저도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도보나 자전거를 이용하는 배달을 하고는 했다.
이렇게 아등바등 쉴 새 없이 일하는 것은 생활비와 빚 때문도 있었지만, 지금은 철없이 방황하고 있는 유준이 전문대라도 가길 바라 등록금용으로 어떻게든 저축을 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같은 보육원 출신이라는 사실 외에도 정이 고픈 해완에게 그의 곁에 있어 주는 유준은 이미 친동생이나 다를 바 없었다. 더군다나 페로몬샘 이식 수술로 인해 보육원에 연락할 수 없는 상황에서 그는 존재만으로 큰 위로가 되었다.
하지만 해완의 이런 마음을 아는지 모르는지 유준은 배달 아르바이트를 하다 알게 된 질이 나빠 보이는 친구들과 오토바이를 타고 밤새 어울려 다니기 일쑤여서 걱정거리를 더욱 늘리고만 있었다.
고깃집에 유달리 손님이 많았던 토요일이었다. 손끝 하나 까딱이기 싫을 정도로 지친 해완은 피곤할 때면 유난히 욱신대는 수술 부위를 꾹꾹 누르며 집 문을 열었다.
“형 왔어?”
집 안을 가득 채우는 삼겹살 냄새와 활기찬 유준의 목소리를 듣고 해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싱크대 앞에는 이미 작은 상까지 차려져 있었다.
“이게 다 뭐야?”
“요즘 형 기운 없어 보여서 내가 알바비로 특별히 준비했지.”
유준은 애교 있게 해완의 겉옷을 벗겨 주며 손을 씻고 얼른 상 앞에 앉으라고 채근했다. 나이 차이가 꽤 나는 탓에 아직도 어린아이처럼만 보이는 동생이 저를 위해 준비했다는 게 기특해 해완은 얼굴에 번지는 미소를 참지 못했다.
“채소도 샀어? 요즘 채소값 비쌀 텐데.”
각종 쌈 채소까지 올려져 있는 것을 본 해완의 물음에 유준이 넉살 좋게 대답했다.
“당연히 샀지. 형 야채 없으면 고기 많이 못 먹잖아.”
마음 씀씀이가 고마워 해완은 활짝 웃으며 유준의 머리를 마구 쓰다듬었다.
오랜만에 가진 만족스러운 저녁 시간이었다. 유준이 알코올 쓰레기라고 놀릴 정도로 술에 약한 해완이 드물게 소주를 입에 댈 정도였다.
고작 소주 한 잔에 하얀 얼굴이 붉게 달아오른 해완을 보던 유준이 갑자기 툭 입을 열었다.
“강현이 형 말이야.”
듣기를 피해 왔던 이름에 해완은 멈칫했다. 하지만 모처럼 기분 좋은 저녁에 유준에게 타박을 주고 싶지 않아 그저 잠자코 쌈에 싼 고기를 입에 넣었다.
“옷이며 구두며 부티가 줄줄 흘렀던 거 알아? 특히 시계 말인데, 그거 진짜 졸라게 비싼 거더라. 난 몇천만 원 하는 시계가 세상에서 제일 비싼 건 줄 알았는데 강현이 형이 찬 거 보고 아니란 거 처음 알았잖아. 진짜 말 그대로 억 소리 나더라니까.”
예상하지 못한 대화의 방향에 마음이 불편해진 해완의 얼굴이 굳었다. 유준은 아랑곳없이 빠르게 말을 이었다.
“알고 보니까 우리 갔던 그 식물원도 그 형 집안 거더라고.”
“어?”
저도 모르게 해완이 보인 반응에 유준이 부리나케 대답했다.
“그 식물원, 서경재단이라는 데서 만든 덴데, 그 재단이 서경산업 거래. 형도 알지? 화장품이랑, 샴푸랑, 치약 같은 거 만드는 대기업. 지금 우리가 쓰는 샴푸도 거기 거잖아.”
문득 스쳐 지나가는 기억에 해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그러고 보니 강현이 부유한 집의 자식이라는 식의 이야기를 예전에 해언이 했었던 것 같은 기억이 났다.
하지만 지금까지 까맣게 잊고 있던 사실이었고, 왜 그런 이야기를 해야 하는지 이해가 되질 않았다.
“유준아. 그런 얘길 지금 왜 하는 거야?”
해완의 의아한 말투에, 유준이 그를 똑바로 바라보며 말했다.
“세상이 너무 불공평하잖아. 누구는 8년 전에 만난 인간을 아직까지 사랑한다느니 어쩌느니 드라마에나 나올 법한 소리나 지껄이는 또라인데, 집안 잘 타고나서…….”
“김유준.”
해완은 부러 수저를 탁 소리가 나도록 세게 내려놓으며 유준의 말을 끊었다.
“나 그런 얘기 별로 듣고 싶지 않아. 더 이상 그 사람한테 관심도 없고.”
“……형은 빚이 천오백이나 생긴 거 억울하지 않아?”
“뭐?”
“그거, 형이 지고 싶어서 진 빚 아니잖아. 윤해언 그 개자식이 강요한 수술 때문에 그런 거지.”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대화의 흐름에 해완은 입을 떡 벌렸다.
서울로 올라와 조금도 쉬지 않고 착실하게 일해 온 덕에 해완은 삼천에 가까운 저축을 가지고 있었지만 직장까지 그만두고 해언이 세상을 떠날 때까지 병 수발을 들고 나자 그 돈은 거의 남아 있질 않았다.
그런 상황에서 비보험인 탓에 수술 비용만 천만 원에 육박하던 페로몬샘 이식 수술을 받으려면 빚을 지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하지만 그것 또한 자신의 선택이었고, 유준이 항상 과하게 해언을 욕하는 데 이골이 난 해완은 화가 나 쏘아붙였다.
“해언이에 대해서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그 수술, 내가 하고 싶어서 한 거라고 몇 번이나 말해야 돼.”
화가 난 해완의 목소리에 유준은 입술을 한 번 깨물더니, 상 밑으로 손을 넣어 꺼낸 흰 봉투 한 장을 슥 내밀었다.
얼떨결에 받아 든 해완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이게…… 뭐야?”
“……열어 보면 알아.”
흰 봉투를 열어 안의 내용물을 본 해완의 눈이, 그야말로 튀어나올 듯 크게 벌어졌다.
그것은, 천오백만 원이라는 금액이 적힌 수표였다.
수표를 쥔 손이 파르르 떨렸다. 고개를 번쩍 들자, 유준이 죄인 같은 얼굴로 고개를 숙인 채 해완의 눈을 피하고 있었다.
“너, 이거, 이거 어디서 났어?”
“……형 돈 필요하다고 하니까 거리낌도 없이 줬어. 무슨, 무슨 푼돈이라도 되는 것처럼…….”
해완은 수표를 바닥에 집어 던지고 버럭 소리를 질렀다.
“너 대체 무슨 짓 하고 온 거야!”
유준은 이판사판이라는 얼굴로 눈을 질끈 감고 말했다.
“여강현한테…… 형 윤해언 맞다고 했어.”
해완은 한동안 말을 잊은 채 유준을 바라보았다.
“……뭐?”
“형이 윤해언 맞고, 사는 게 힘들어서 모르는 척하는 거라고 하니까 그 돈 줬다고.”
굳게 다문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너무나 아연한 상황에 화조차 나질 않았다.
그러나 해완의 침묵이 보잘것없는 말 한마디보다 더욱 가시방석 같았던 모양이었는지, 유준은 시키지도 않은 변명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처, 처음엔 그냥 장난이었어. 형이 윤해언이 아니라는 걸 하도 안 믿으려고 하길래 이런 말이라도 하면 떨어져 나갈까 싶어서. 근데 말 꺼내자마자 얼마가 필요하냐고 하잖아. 그래서 그냥 장난으로, 진짜 장난으로 말한 건데…… 망설이지도 않고 그 자리에서 내 계좌로 바로 돈을 쏴 주길래…….”
해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그래서, 넌 그걸 좋다고 받아 왔고?”
“어? 뭐, 좋다고 받은 건 아니고…….”
“너 등신이야?”
좀처럼 험한 말을 쓰는 법이 없는 해완의 입에서 튀어나온 욕설에 유준이 흠칫했다.
“이게 무슨 돈인 줄 알고 받아 와. 세상에 어떤 멍청한 새끼가 천오백만 원을 뭣도 모르는 인간한테 아무 대가 없이 주냐고.”
서늘한 목소리에 침을 꿀꺽 삼킨 유준은 허둥지둥 말을 덧붙였다.
“아까 말했잖아. 여강현 재벌이라, 그 정도 돈은 아무것도 아니라니까? 그리고, 그리고 그건 지 혼자 형을 윤해언이라고 착각해서…….”
“나는 해언이가 아니잖아!”
해완이 목에 핏대를 세우며 악을 썼다.
하지만 유준이 입을 다문 것은, 그가 언성을 높여서가 아니라 눈시울을 새빨갛게 붉히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완은 고개를 숙여 손바닥으로 두 눈을 감쌌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간신히 말을 이었다.
“그러니까 그건, 우리한테 준 돈이 아니라고…….”
방 안에는 무거운 침묵이 감돌았다. 해완은 눈앞이 번쩍거릴 정도로 눈가를 짓누르며 심호흡을 했다.
잠시 후, 마음을 가라앉힌 해완이 지친 얼굴로 고개를 들었다.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던 유준은 그런 해완과 눈이 마주치자 흠칫 놀라 시선을 내렸다.
풀이 죽어 있는 유준의 얼굴은 유독 어려 보였다. 그 얼굴을 보자 어쩔 수 없이 화가 사그라졌다.
스물한 살인 유준은 평범한 집에 태어났다면 아직 부모 품 안에 있고도 남을 나이였다.
누구는 상황이 다르지 않냐고 할지도 모를 일이지만, 태어날 때 버려졌다고 해서 남들보다 홀로 서기가 손쉬울 수는 없었다. 그 누구보다 해완이 잘 알았다. 그렇기에 유준이 종종 저지르는 철없는 짓에 대한 울분은 그리도 손쉽게 씻겨 버리곤 했다.
해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돌려줘야 돼. 이 돈.”
유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형. 그러지 말고 내 말 좀 들어 봐. 내, 내가 인터넷에서 찾아봤는데, 자기가 자진해서 계좌 이체 해 준 거면 다시 못 가져간대. 그리고 내가 증거도 남겨 놨어. 이거 어제 문자 한 건데…….”
“너 그 사람이랑 따로 연락도 해?”
날카로운 목소리에 유준이 얼어붙었다. 입만 벙긋대는 유준을 보던 해완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지금 바로 문자 보내. 돈 돌려준다고.”
이 지경에도 유준은 뭔가 항변하고 싶은 듯 보였지만, 해완의 무섭게 굳은 얼굴에 결국 입을 다물고 문자를 보내기 시작했다.
해완은 눈을 질끈 감았다. 해야 할 말인 것을 알면서도 좀처럼 목구멍에서 넘어오질 않았다.
결국, 몇 번이고 시도한 끝에야 간신히 말을 뱉어 낼 수 있었다.
“그리고…… 내가 간다고 해.”
그 말에 유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그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얼굴로 정신없이 손을 내저었다.
“그, 그럴 필요 없어. 형 그 사람 만나기 싫잖아. 내가 진짜…….”
“네 말 못 믿어. 내가 직접 돌려주고…….”
해완은 마른 입술을 핥았다. 왜인지 자신의 입에서 나온 말이 멀리서 들려오는 것처럼 들렸다.
“그리고, 내가 해언이가 아니란 걸 확실하게 말하고 와야겠어.”
* * *
다시는 이곳에 올 일이 없을 줄 알았는데.
강현과 처음 마주친 온실 앞에 선 해완은 땀이 밴 손바닥을 바지에 문질러 닦고는, 메고 있던 크로스 백 안에서 흰 봉투를 꺼내 한 번 더 금액을 확인했다.
봉투 안에는 천칠백오십만 원이 들어 있었다. 빚을 갚으랍시고 유준이 내민 금액 천오백, 그리고 유준이 따로 빼돌렸다가 쓰다 남은 금액이 백, 해완의 적금을 깬 금액이 백오십이었다.
강현과의 약속을 잡아 놓고도 유준은 내내 해완에게 자기가 가도 된다며 다시 생각해 보라고 매달렸다. 저를 강현과 만나게 하고 싶지 않은 게 분명한 기색이 아무래도 수상해서 붙잡아 놓고 다시 캐묻자, 유준은 결국 강현에게 받은 금액이 사실 이천만 원이며, 나머지 오백은 자신이 따로 챙겼다고 털어놓았다.
겁도 없이 사백만 원을 노는 데 썼다는 것이다. 그것도 일주일 만에.
화를 낼 기력도 없어 해완은 일단 나중에 이야기하자고 하고 일단 돈을 있는 대로 끌어모았다. 그래도 아직 이백오십이 부족했다. 아직 강현을 만나지도 않았는데 모자란 돈을 들고 서 있는 것만으로 얼굴이 붉게 달아올랐다.
차라리 잘된 거야, 해완은 그렇게 생각하려 애쓰며 마음을 다잡았다.
애초에 그 자리에 유준을 보내서는 안 됐었다. 게다가 처음 만났을 때 제가 다짜고짜 도망쳐 버린 것이 강현의 의심을 부채질했으리란 걸 모른 척할 수는 없었다.
차라리 이번 기회에, 얼굴을 똑바로 보고 자신은 해언이 아니라고 확실히 말하는 게 강현에 대한 최소한의 예의일 것이다.
온실 안으로 들어서자 후끈한 공기가 얼어붙어 있던 손끝에 찌릿찌릿한 감각이 들게 만들었다.
해완은 사람의 흔적이 느껴지지 않는 온실 안을 머뭇거리며 걸었다. 그러고 보니 지난번에도 그랬다. SNS에서 유명세를 탄 곳인지라 수목원 입구에는 항상 사람이 많아 보였는데, 이 온실 안에서는 사람을 본 적이 없었다.
강현을 제외하고는.
“왔어?”
뒤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해완은 화들짝 놀라며 뒤를 돌아보았다. 언제 온 것인지 꽤 가깝게 서 있는 강현이 미소를 지으며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해완은 저도 모르게 메고 있던 크로스 백 끈을 꾹 쥐었다. 아직도 자신을 이렇게 내려다볼 수 있는 사람 앞에 있는 게 영 어색했다.
“아, 안녕하세요…….”
해완이 소심하게 인사하자, 강현이 고개를 갸웃하며 말했다.
“나랑 처음 만나는 척하는 거, 아직 안 끝난 거야?”
해완은 침을 꿀꺽 삼켰다. 연습까지 하고 왔는데도 긴장이 되어 견딜 수가 없었다.
“처음 만나는 거 맞아요. 난 윤해언이 아니니까.”
“유준이 말은 아니라던데.”
“그건, 그건 그 녀석이 철이 없어서 장난친 거예요. 제가 사과드릴게요. 그리고 여기 주신 돈도 가져왔어요.”
해완이 허겁지겁 봉투를 꺼내자 강현의 얼굴에 감돌던 느긋한 미소가 삽시간에 자취를 감췄다. 그는 짜증이 난 기색을 숨기지 않고 짙은 눈썹을 긁으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 돈은 너한테 준 거야. 도와주고 싶어서.”
“내가 아니라 윤해언한테 준 거잖아요. 난 윤해언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말해요.”
“그럼 여긴 어떻게 온 건데?”
“네?”
강현은 뒤에 있는 턱에 걸터앉으며 느긋하게 말했다.
“여긴 아무나 들어올 수 있는 곳이 아니야. 희귀 식물들을 연구하는 곳이라 일반인한테는 개방이 안 돼. 네가 들어온 그 쪽문도 관계자가 아니면 드나들 수 없게 평소에는 잠겨 있어.”
“하지만…….”
“네가 들어올 때는 열려 있었다고? 당연하지. 네가 올 수 있게 열어 놓은 거니까. 그리고 그 시간에 그 쪽문이 열려 있을 거라는 건 내가 해언이한테만 말한 거고. 다른 관계자들은 그 시간에 여기 오지 못하게 미리 이야기해 뒀었어. 그러니까 그 시간에 이 안에 있을 수 있는 건, 윤해언 너랑 나, 둘밖에 없어.”
사람이 없는 것을 묘하게는 여겼지만 아무나 들어올 수 없는 곳이라고는 차마 생각지 못했던 해완의 입이 벌어졌다. 강현은 막힘없이 말을 이었다.
“그리고 네가 날 처음 봤다는 것도 말이 안 돼.”
“…….”
“넌 날 보고 도망쳤잖아. 필사적으로. 보통 사람들은 처음 보는 사람을 보고 그렇게 안 해. 그럴 이유가 있지 않으면 말이야.”
해언의 친구일 뿐 강현과는 일면식도 없다는 주장을 고수하려 했던 계획마저 무너졌음을 안 해완의 얼굴이 새빨개졌다.
“거기에 더해 네가 윤해언이 맞다고 보장한 사람도 있어. 이런데도 내가 널 윤해언이 아니라고 믿어야 될 이유가 있나?”
생각보다 더 집요한 추궁에 등 뒤에서 식은땀이 흘렀다.
“여길 어떻게 오면 되는지는…… 해언이한테 들었어요. 난 해언이 친구거든요. 나한테 그 시간에 여길 가 달라고 부탁을 해서 온 것뿐이에요.”
“…….”
“그리고…… 그리고 당신을 보고 놀란 건…… 거기서 사람을 볼 거라고 생각 못 해서 그런 거예요.”
빈약한 변명이었지만 어쩔 수 없었다. 해완은 이런 임기응변에 능숙해 본 적이 없었다.
“그래? 왜? 왜 자기가 오는 대신 널 보낸 건데?”
“그건…….”
해완은 바로 대답하지 못했다. 해언은 이런 일을 벌인 이유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았다. 스스로도 모르는 답을 낼 수는 없었다.
그렇다면 사실 그대로 해언이 죽었기 때문에 알 수 없다고 말하는 방법밖에 없었겠지만, 그것을 알리지 말아 달라는 부탁을 차치하고서도 해언의 죽음을 입에 담으며 무너지지 않고 말할 자신이 해완에게는 아직 없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인가? 그럼 다른 질문을 할게.”
“…….”
“누군데, 너?”
강현의 질문에 어지럽게 방황하던 해완의 눈이 반사적으로 그를 향했다.
“윤해언도 아닌데 나랑 윤해언 사이의 일을 알고 있고, 윤해언은 아닌데 윤해언의 향을 풍기는 너는 누구냐고.”
그 단순한 질문이, 마치 심장을 얼음송곳으로 찌른 것처럼 온몸을 마비시켰다.
설명하고 싶었다.
하지만 그가 누구인지를 설명하려면 해언의 존재를 뺄 수가 없었다.
학창 시절 들었던 윤해언 짝퉁이라는 놀림이 해완의 가슴을 가장 아프게 했던 이유는 스스로도 그 사실을 부정할 수 없다는 점이었다.
해언의 이름을 따서 지은 이름과, 해언의 생일을 따라 생긴 생일과, 해언의 페로몬샘을 이식받아서 생긴 향.
해언은 해완이 없어도 존재할 수 있었지만, 해완은 해언이 없이는 존재할 수 없었다.
그리고 그것이, 8년 전 해완이 강현에게 말 한마디 건네 보지 못한 이유였다.
처음 해완이 강현에게 호기심을 가지게 된 건 그가 존재하지 않는 자신의 향을 맡았다고 생각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조금 시간이 흐르자 어쩌면 강현이 맡은 것은 제 몸에 밴 해언의 향의 흔적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해언의 향은 아주 강하고 진했으니, 차라리 그편이 말이 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그럼에도 강현이 해완의 향을 맡았다고 생각하고 싶었다. 누군가에게 자신도 특별한 존재가 될 수 있다고 믿고 싶었다.
그래서 말을 걸 수 없었다. 말을 걸었다가, 강현이 맡은 향이 사실 해언의 것이라는 사실을 알게 될까 봐.
해완은 이를 악물었다. 적어도 강현에게만은 그런 식으로 기억되고 싶지 않았다.
“나는 아무도 아니에요.”
차라리, 자신을 모르는 사람으로 기억해 주길 바랐다.
“당신이…… 알 필요 없는 사람이라구요.”
강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표정을 알 수 없는 새카만 눈을 한번 깜빡하지도 않고 해완을 보고 있을 뿐이었다.
속까지 해부하는 듯한 시선에 견디다 못한 해완이 고개를 푹 숙이려던 찰나, 강현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해언이가 왜 너한테 나와 만나기로 한 장소를 알려 줬는지도 말 못 하고, 네가 누군지도 말을 못 하고.”
“…….”
“사는 게 어려워서 나를 모르는 척하는 거라는 그 삼류 드라마 같은 스토리를 꼭 믿은 건 아니지만, 그게 더 신뢰가 갈 줄은 몰랐네.”
해언이 아니라는 제 말을 귓등으로도 듣지 않는 대답에 속이 터질 듯 답답해진 해완이 왈칵 언성을 높였다.
“내가 윤해언이 아니라잖아요. 내가 아니라는데 대체 왜 당신을 설득해야 되는지 모르겠어요.”
“…….”
“내 향 때문에 그러나 본데, 내가 해언이랑 향이 비슷한 건 알겠어요. 그런 얘기도 평소에 자주 들었구요. 하지만 세상에 비슷한 향은 얼마든지 있어요. 그리고…… 그리고 여강현 씨 해언이 본 지 8년이나 지났잖아요. 당신이 기억하는 게 정확하지 않을 수 있다구요.”
그 말에, 여태껏 완고한 무표정을 유지하던 강현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꿈틀했다.
그는 비스듬히 서 있던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우더니 긴 다리로 성큼 해완에게 다가왔다. 해완은 움찔 뒤로 물러섰지만 강현이 더 빨랐다. 그는 강한 악력으로 해완의 손목을 잡아 쥐더니 바싹 끌어당겨 손목에 코를 묻었다.
“왜, 왜 이래요!”
놀란 해완이 뿌리치려 들었지만 강현은 제가 만족하기 전까지는 안 된다는 듯 해완의 손목을 더욱 세게 죄었다.
결국 강현이 그를 놓아주었을 때, 해완의 손목에는 붉은 자국이 고스란히 남은 채였다.
해완은 벌겋게 달아오른 손목을 쥐고 정신없이 뒤로 물러섰다. 강현이 낮고 짙은 목소리로 말했다.
“난 절대 틀리지 않아. 이런 향을 가진 사람은, 너밖에 없어.”
“…….”
“그래도 네가 윤해언이 아니야?”
도대체 어떻게. 해완은 피가 비치도록 입술을 깨물었다. 첫 만남 때부터 생각했지만 해언의 향에 관한 강현의 확신은 너무나 확고하다는 점에서 이해할 수 없는 구석이 있었다.
그러나, 해언의 죽음과 페로몬샘 이식 수술에 대해서 설명할 수 없는 이상 앵무새처럼 보일지라도 같은 말만 되풀이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에요.”
“…….”
“난 윤해언이 아니라고.”
해완은 강현의 앞으로 다가가 그의 가슴으로 봉투를 짓이기듯 내밀었다.
“그러니까…… 이거 다시 받으세요.”
강현은 그런 해완을 내려다볼 뿐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지만, 해완이 이를 악물고 그의 시선을 피하지 않자 결국 느린 동작으로 봉투를 받았다.
강현의 손에 봉투가 넘어가자마자 뒤로 물러선 해완은 스트레스를 받을 때의 버릇대로 눈 앞머리를 꾹꾹 누르며 빠르게 중얼거렸다.
“이천만 원 주신 것 중에 이백오십만 원 모자랄 거예요. 죄송해요. 하지만 조금만 시간을 주시면 꼭 되돌려 드릴게요.”
그 말에 강현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그는 무성의한 태도로 봉투를 열어 수표를 꺼내 금액을 확인하더니 묘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그 미소에 의아해지려는 찰나 강현이 입을 열었다.
“뭔가 잘못 알고 있는 것 같은데, 내가 준 건 사천이야.”
금액을 듣는 순간 저도 모르게 입이 반쯤 벌어졌다. 입술을 몇 번이나 벙긋대고 나서야 간신히 소리를 내어 되물을 수 있었다.
“지금…… 뭐라고…….”
불가능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잘못 들었기를 바랐지만, 그런 바보 같은 희망이 무색하게 강현은 의심의 여지 없이 명확하게 대답했다.
“내가 김유준한테 준 건 사천만 원이라고.”
사천만 원.
누군가에게 한 번에 받을 수 있으리라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금액이었다. 뒤통수를 몽둥이로 세게 얻어맞은 듯한 기분에 해완은 멍하니 서 있기만 했다.
그런 해완의 얼굴을 보며 강현은 느긋하게 자세를 바꿨다.
“내가 너한테 준 돈은 모두 네가 윤해언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어.”
“…….”
“하지만 네가 윤해언이 아니고, 김유준이 내가 널 윤해언이라고 생각하게 만들어서 나한테 돈을 받아 간 거라면, 이건 충분히 사기죄가 될 수 있어 보이네.”
그 말을 듣자, 해완의 입에서 반사적으로 말이 튀어나왔다.
“돌려, 돌려줄게요. 유준이가 갖고 있을 거예요.”
해완은 제가 무슨 이야기를 하는지 제대로 생각하지도 않고 횡설수설 말을 이어 나갔다.
“유준이 걔 스물한 살밖에 안 먹었어요. 그렇게 큰 돈 어디다 쓸 줄도 모르는 애예요.”
“없을 거야. 합의금으로 쓴다고 했거든.”
“합의금……?”
“그래. 오토바이 타고 다니다 사고 낸 모양이던데. 내가 직접 확인도 해 봤어.”
몰랐다. 아무것도 몰랐다. 당황스러움을 넘어서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할 지경이었다.
돌려준 천칠백오십만 원을 제외하고도, 강현에게 갚아야 할 돈은 이천이백오십만 원이 남아 있는 것이었다.
처음에 모자란다고 생각했던 이백오십만 원이라는 금액도 지금의 해완에게는 큰돈이었다. 해언의 죽음과 수술 회복 기간까지 더해 해완이 일을 다시 시작한 게 아직 1년이 되지 않았고,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월세, 식비, 기타 생활비, 그리고 대출 원금 및 이자까지 갚는 가운데 백오십의 적금을 만드는 것만도 꼬박 8개월이 걸렸다.
그런데 이천이백오십만 원이라니.
대체 언제쯤 갚을 수 있을지 가늠이 되지 않을 정도로 막막하게 느껴졌다.
그럼에도 아무 말도 없이 서 있을 수만은 없어, 해완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 간신히 입을 열었다.
“갚을게요. 갚을, 갚을 테니까, 조금만 시간을…….”
“어떻게?”
강현은 단번에 해완의 말을 잘랐다. 그의 어투는 직설적이지만 비꼬는 기색은 없었다.
“고작 이백을 못 들고 왔으면서 이천만 원을 갚을 수 있다는 건 믿기 힘든데.”
어떻게 봐도 틀리지 않은 말이라, 모멸감조차 들질 않았다.
해완은 시선을 내리고 침묵했다. 강현은 그런 해완을 향해 천천히 말했다.
“나한테 그 정도 돈이 별거 아니란 거는 알고 왔을 거라고 생각해.”
“…….”
“하지만 비겁해져야겠어.”
그리고 강현은 입을 다물었다. 해완은 묘하게도 강현의 침묵이 저를 보기를 요구하고 있다는 걸 알아차렸다.
해완이 고개를 들자, 처음부터 움직인 적 없던 강렬한 시선이 그의 눈을 사로잡았다.
“윤해언이 아니어도 좋으니까 나랑 한 달만 만나.”
무슨 말인지 바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해완은 멍청하게 눈만 깜빡였다. 강현은 그런 해완을 향해 뚜렷하고 선명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때까지는 너를 윤해언이라고 생각 안 할게. 네가 나랑 처음 보는 사람이 되고 싶다면, 그렇게 해 줄게.”
“…….”
“그렇게 딱 한 달만 만나고, 그래도 네가 윤해언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면.”
강현은 한 템포 침묵했다. 하지만 뒷말에 망설임은 없었다.
“그땐 돈도, 윤해언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깔끔하게 보내 줄게.”
싫다고 말해야 했다.
네가 아무리 그렇게 믿고 싶어도 나는 윤해언이 아니라고, 그 돈은 어떻게든 갚아 주겠다고.
하지만 도저히 말할 수 없었다.
물론 첫 번째는 현실적인 이유였다. 강현의 말은 언뜻 해완에게 제의를 고려해 달라 청하는 것처럼 들렸지만 사실상 통보였다. 해완이 돈을 갚을 테니 그러지 않겠다고 해 봤자 유준을 경찰에 신고하지 않고 가만두리라는 보장이 없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그 자신의 지독한 이기심 때문이었다.
해언이 아무리 제 죽음을 알리지 말아 달라고 부탁했다 한들 정말 이 상황을 피하고 싶다면 모든 사실을 솔직하게 말하는 게 마땅했다.
그럼에도 강현에게 해언의 향을 이식받았다는 것만은 말하고 싶지 않았다.
윤해언 짝퉁. 아류. 모조품.
학창 시절 그를 놀리던 목소리들이 머릿속에서 맴맴 돌았다.
그런 스스로가 초라하고 싫어, 해완은 도리어 독한 어투로 말을 토했다.
“……후회하지 마요. 난 분명히 내가 윤해언이 아니라고 말했으니까.”
그 말에 강현은 여유로운 태도로 어깨만 한 번 으쓱할 뿐이었다.
잠시 후, 해완의 번호를 받아 내고 나서 바로 통화 버튼을 눌러 맞는 번호인지 확인까지 한 강현이 씩 웃으며 기분 좋게 말했다.
“그럼 다시 연락할게.”
그리고 강현은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아 온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도대체 왜 이렇게까지 하는 거예요?”
강현을 다시 만난 내내 마음을 떠나지 않던 의문이, 말릴 새도 없이 튀어나왔다.
그 말에 강현이 멈춰서 뒤를 돌았다. 그는 해완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그건 내가 묻고 싶은 말이야.”
* * *
해완이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거실에 앉아 초조하게 손톱을 물어뜯고 있던 유준이 벌떡 몸을 일으켰다.
“혀…… 형 왔어……?”
해완은 대답하지 않았다. 신발조차 벗지 않고 현관에 선 그대로 유준을 응시하기만 했다. 그 침묵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곧바로 인지한 유준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형…… 내가 잘못했어…….”
“…….”
“나도 그 돈까지 받을 생각은 없었어. 근데, 근데 술을 너무 많이 마셔서 미쳤었나 봐. 어떻게 된 건지 기억도 잘 안 나는데, 다음 날 계좌 보고 나서야 강현이 형이 그 돈까지 준 거 알았어.”
“…….”
“그래도 돌려주려고 했어. 진짜야. 근데…… 합의금 안 주면 감옥 갈 수도 있다 그래서…… 그래서 너무 무서워서…….”
어느새 울먹이기 시작한 유준은 어린애처럼 주먹으로 눈물을 닦았다. 그런 유준을 향해 해완이 조용히 말했다.
“사고 낸 거 왜 말 안 했어.”
“…….”
“말이라도, 나한테 말이라도 했으면…… 어떻게 방법 찾아볼 수도 있었잖아.”
내내 해완의 눈을 쳐다보지도 못하던 유준이 슬쩍 고개를 들더니,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 아니어도 형 힘든 거 아는데 어떻게 말해…….”
예상대로의 대답이었고, 해완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강현에게 유준이 받은 금액에 대해 들었을 때 가장 처음 차오른 감정은 이성적인 사고를 할 수 없을 정도의 당혹감이었다. 그리고 강현의 제안을 하는 수 없이 수락하고 나서는 이런 상황에 저를 휘말리게 만든 것에 대해 머리에 뜨끈하게 열이 오를 정도로 화가 났다.
하지만, 버스와 지하철을 번갈아 타며 집으로 돌아오는 사이 화는 쉽게도 사그라져 버렸다. 화를 내는 것도 능력이라고 한다면 해완이 그런 면에서 타고나지 못했음은 확실했으니까.
그렇게 울화가 잠깐 타올랐다 사그라진 자리에는 죄책감이 쉽게도 자리를 잡았다. 그것은 유준이 행동의 변화를 보이기 시작한 시점이 뚜렷하다는 데서 생긴 것이었다.
해언을 위해 유준을 내치기 전까지 유준은 쉽게 투덜대거나 어리광이 심한 면이 있긴 했어도 비행을 저지르는 일과는 거리가 멀었다. 이따금씩 험하게 내뱉는 말들도 실은 소심한 내면을 감추기 위해서라는 걸 해완은 잘 알고 있었다.
해언에 이어서 또 한 번 누군가를 보호하는 데 실패했다는 비참한 감정이 마음을 꽉 채웠다.
목이 메고 머리가 아팠다. 이것으로 끝낼 수 없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지금은 말 한마디 더 할 기력조차 없었다.
해완은 마른 입술을 한 번 훑고는 간신히 입을 열었다.
“이번이 마지막이야.”
“…….”
“한 번만 더 이런 짓 하면…… 나 너 두 번 다시 안 봐.”
그 말에 유준은 눈물이 그렁그렁한 채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였다. 해완은 말없이 신발을 벗고 유준을 지나쳐 방 안으로 들어가 외투를 벗어 벽걸이에 잘 걸어 두었다.
유준이 저를 따라 들어온 것을 알았지만 무시하고 서랍에서 속옷과 갈아입을 옷을 꺼냈다. 오늘은 더 이상 아무 생각 말고 그저 씻고 자고 싶었다.
그런 속을 모르는 유준이 초조하게 물었다.
“여강현이…… 그 돈 돌려 달라고 그래……?”
해완은 그냥 고개만 가로젓고 방 밖으로 나갔다. 뒤를 바싹 따라붙은 유준이 안절부절못하며 계속해서 물었다.
“아니야? 그럼 그냥 안 줘도 된다 그랬어? 아무 조건 없이?”
대답하지 않고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으려는데, 유준이 문을 턱 힘주어 잡았다.
“왜 아무 말도 안 해? 진짜 여강현이 그 돈 대신해서 형한테 뭐 해 달라고 했어?”
“…….”
“왜, 뭐 어쩌자고 한 건데, 어?”
그것이야말로 해완이 제일 알고 싶은 것이었다. 해완은 독하게 중얼거렸다.
“이제 와서 그게 뭐가 중요해.”
어버버대는 유준의 손을 팽개치고 문을 꽝 소리 나게 닫았다. 해완은 물이 데워지기에는 아직 턱없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옷을 벗자마자 샤워기를 머리 위로 올렸다. 찬물이 쏟아지자 머리가 쨍하게 울리고 심장이 멎을 듯 몸이 조여 왔다.
뼈까지 얼리는 냉기를 견디자 천천히 온수가 쏟아지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줄기가 몸의 떨림을 가라앉히고 나서야 해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어떤 모진 순간이든 지나가기 마련이었다.
온수에 몸을 맡길 새도 없이 해완은 코를 훌쩍이며 몸을 문질러 닦았다.
* * *
강현과의 다음 만남은 꼭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해완이 유일하게 쉬는 수요일이었다. 만나기로 약속한 카페에 들어서자 긴 다리를 테이블 바깥으로 내놓고 팔짱을 낀 채 비스듬히 앉아 있는 강현의 모습이 보였다.
그는 처음 봤을 때처럼 얼굴에 까만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그것이 얼굴의 반절을 가리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불만족스러운 기색이 역력했다.
해완이 앞에 서자 강현은 삐딱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귀한 얼굴 드디어 뵙네요. 그동안 잘 지내셨습니까?”
지나치게 정중한 말투에는 비꼬는 기색이 역력했다. 해완이 존댓말을 써 달라고 요청한 이후 강현은 내내 이런 식이었다. 그는 속으로 한숨을 내쉬며 자리에 앉았다.
지난 일주일 동안 했던 강현과의 연락은 지루한 실랑이의 연속이었다.
첫째는 말투에 관한 것이었다. 강현은 익숙하게 반말을 쓰려 했지만 해완은 처음 보는 사람으로 대해 주겠다고 하지 않았냐며 존댓말을 쓰기를 고집했다.
강현이 저에게 무엇을 바라는지 몰라도 해완은 절대 이 관계를 한 달 이상 지속해서는 안 된다는 결심을 확고하게 세웠다. 존댓말도 그것을 위한 규칙 중 하나였다. 반말을 쓰게 되면 서로를 친근하게 대하게 되고, 쓸데없이 마음의 거리를 좁힐 수도 있었다.
거기까지는 강현이 어쩔 수 없이 지고 넘어가 주는 듯 보였지만, 만나는 시간에 관해서는 좀처럼 의견의 격차를 줄일 수가 없었다.
해완은 자신이 쉬는 날이 수요일이 유일하니 그때 밥이나 한 끼 먹는 것이 가장 타당한 만남이라고 우겼지만 강현은 그렇게 하면 딱 네 번밖에 만나지 못하는 꼴이 아니냐며 고작 네 번으로 뭘 할 수 있겠냐고 짜증을 냈다.
사실 스스로 생각해도 염치없는 짓이긴 했다. 이천만 원이라는 돈 대신 한 달을 만나기로 한 것인데(저와의 만남이 그만큼의 가치가 있는지는 의문이지만) 고작 네 번을 만나고 끝내자고 하면 당연히 짜증이 날 법했다.
하지만 빚은 빚이고 먹고사는 것은 먹고사는 것이기 때문에 시간이 나지 않는 건 어쩔 수 없었다.
이것이 해완이 세운 두 번째 규칙이었다. 강현과의 만남이 제 일상에 다른 영향을 미치게 하지 않는 것 말이다.
지난밤 통화에서 해완의 스케줄을 들은 강현은 단박에 제가 그 돈을, 아니, 두 배 세 배를 줄 테니 일을 관두고 빈 시간에 저와 만나자고 제안했지만 해완은 말이 끝나기 무섭게 거절해 버렸다.
그것이 바로, 지금 강현이 열받은 얼굴로 그의 앞에 앉아 있는 이유였다.
“도대체 왜 일을 못 그만두겠다는 겁니까? 내 돈은 받기 싫다 뭐 그런 겁니까?”
허울 좋은 안부 인사는 집어치운 강현이 퉁명스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괜한 다툼을 좋아하지 않는 해완이지만, 이 문제에 관해서만은 그에게도 할 말이 있었다.
“아뇨, 저도 받고 싶어요. 쉬운 돈이니까.”
의외의 대답이었는지 강현이 멈칫했다.
“하지만 한 달 동안 받을 쉬운 돈보다 생활의 안정성이 나한테는 더 중요해요.”
해완은 숨을 한 번 들이켜고, 준비해 온 말을 빠르게 뱉었다.
“한 달 뒤에 여강현 씨랑 더 만날 일 없게 되면 어차피 새 아르바이트 구해야 될 텐데, 여강현 씨는 안 해 봐서 모르겠지만 요즘 아르바이트 구하기 쉽지 않아요. 그리고 지금 일하고 있는 곳들은 사장님도 좋고, 일 강도에 비해서 시급도 나쁘지 않고, 괜찮은 자리라구요. 그러니까 놓치기 싫어요.”
그 말에 강현은 볼멘소리를 냈다.
“한 달 뒤에 안 볼 거라고 누가 그래요?”
해완이 대답을 하지 않고 입을 꾹 다물자, 숨길 생각도 없이 대놓고 한숨을 내쉰 강현이 말했다.
“그럼 저녁에 대리운전이라도 하지 마요. 그건 쉬었다 해도 상관없는 거잖아. 그 시간에 나 만나면 그 대신 남의 운전 해 주고 버는 돈만큼 줄게요. 됐죠?”
그 정도는 받아들일 만했다. 해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럼 무슨 일 하면 되는데요?”
“일이요?”
“네. 제가 지금 하는 일 대신 여강현 씨가 나 고용하겠다고 한 거잖아요.”
“일을 꼭 시켜야 돼요? 그냥 돈 줄게요. 그럼 되잖아.”
해완은 단호하게 말했다.
“그건 싫어요. 그럴 거면 그냥 지금 하는 일 할래요.”
강현은 어이가 없다는 듯 입을 다물었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보통 사람들은 그냥 돈 준다 그러면 엄청 좋아하지 않나? 그리고 아까 쉬운 돈 좋아한다며.”
“쉬운 돈은 좋지만 공돈은 싫어요.”
“그게 뭐가 다른데요? 돈이 다 돈이지.”
강현의 이해할 수 없다는 목소리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속으로 헛웃음을 지었다.
그래, 강현 같은 사람은 모를 것이다. 돈을 그저 통장 혹은 명세서에 찍힌 숫자로만 흘끗 보고 넘어갈 수 있는 삶을 사는 사람일 테니까.
하지만 해완은 달랐다. 손에 쥐어지는 모든 돈에는 용도가 있었고 그 중요성에 따라 우선순위를 매겨야만 했다. 월세, 생활비, 식비처럼 당장 필수로 써야 하는 돈 이외에도 쓰고 나서 후회하지 않을 돈일지도 생각해야 했다.
이것은 나가는 돈 말고도 들어오는 돈에도 동일해서, 떳떳하게 벌어 온전히 제 것으로 주장할 수 있는 돈과 아닌 돈에는 분명한 차이가 있었다.
세상에 그냥 주어지는 돈은 없다는 것은 해완이 의지할 곳 없이 서울로 올라와 견뎌야 했던 8년 동안 뼈저리게 배운 교훈이었다.
그런 것들을 일일이 설명할 수는 없어, 해완은 그저 조용히 말했다.
“쉬운 돈은 나중에 변명이라도 할 수 있는 돈인 거고, 공돈은 그럴 변명조차 없는 거니까 싫어요.”
강현은 여전히 납득할 수 없다는 얼굴이었지만 마지못해 말했다.
“알았어요. 편의점 일 끝나면 내 가게로 와서 청소도 하고, 잡일도 좀 도와요. 월급은 당신이 지금 얼마를 받든 무조건 세 배. 됐어요?”
강현의 입에서 나온 ‘가게’라는 단어가 의외여서, 해완은 대답을 하기 전에 잠시 멈칫했다.
“뭘…… 파는 가게인데요?”
해완의 호기심 어린 목소리에 강현은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그건 와 보면 알아요.”
아리송한 대답에 해완은 눈을 깜빡였다.
유준에게 듣기로 강현은 분명 화장품을 비롯한 각종 생활용품을 만드는 대기업으로 유명한 서경산업의 자제라고 했다.
그런 사람과 알고 지내기는커녕 스쳐 지나가면서도 본 적이 없는 해완으로서는 재벌 3세에 대해 가진 이미지라곤 드라마나 영화에 나오는 것이 다였던지라, 어리디어린 나이에 하늘에서 뚝 떨어져 전무님이나 이사님이라고 불리는 낙하산 같은 존재밖에 떠오르질 않았다.
그마저도 요즘은 일에 바빠 제대로 TV를 볼 시간이 없었기 때문에 해완의 머릿속을 헤집는 장면은 이른 아침 식당에서 본 자극적인 아침 드라마뿐이었다.
못된 짓을 하고는 김치, 혹은 스파게티로 후려 맞던 잘생긴 개차반 재벌 3세들의 모습을 강현에게 대입해서 상상하고 있던 해완은 저를 연신 부르는 낮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 시선을 올렸다.
해완과 눈이 마주치자 강현은 짙은 눈썹을 찌푸리며 말했다.
“사람이 부르는데 대답도 안 하고.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요?”
“아, 아무것도 아니에요.”
강현이 제 속을 들여다볼 수 있을 리도 없는데 해완은 볼을 발갛게 붉혔다.
“그래서 괜찮은 겁니까? 돈 많이 준다고 또 뭐라고 할 건 아니죠?”
강현의 말은 해완의 얼굴을 더욱 뜨겁게 만들었다.
사실 이미 그에게 큰 신세를 진 데다가 지금 버는 돈의 세 배를 받는 게 말도 안 된다는 생각이 드는 것은 맞았다.
그러나 구질구질하게 굴면 굴수록 강현이 저에게 빨리 질리지 않을까 싶어 해완은 마른 목을 가다듬으며 애써 말했다.
“아니요. 쉬운 돈 좋아한다고 했잖아요.”
해완은 괜히 고개를 숙이고, 앞에 놓인 식은 커피 잔을 만지작댔다.
그런데 왠지, 강현은 아무 말이 없었다.
정말 저에게 질려 버렸나.
그런 생각이 들어 해완이 빼꼼 고개를 들었더니, 무표정하게 저를 보고 있는 강현의 새카만 눈과 곧바로 마주쳤다.
눈이 마주치고도 강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해완을 뚫어져라 보기만 했다. 심지어 눈을 한번 깜빡이지도 않는 것 같아 더욱 당황스러웠다.
저런 식으로 사람을 보는 게 버릇인가. 해완이 안절부절못하던 찰나 강현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보리로 하죠.”
전혀 이해할 수 없는 소리에, 해완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뭐를요?”
“내가 부를 당신 가명이요. 윤보리 씨라고 부를게요.”
“그게 뭐예요.”
해완의 못마땅한 목소리에 강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윤해언도 아니라면서 이름도 알려 주기 싫다고 했잖아요. 그럼 내 마음대로 부르는 수밖에 없지 않나?”
“굳이 이름으로 부를 필요 없잖아요. 그쪽이든, 당신이든, 야라고 하든, 아무렇게나 부르면 되지.”
“그건 싫어요. 정 없어서.”
대화를 하는 내내 싫다는 말은 해완의 몫이었는데, 그에 대한 복수라도 하듯 강현의 말투는 단호했다. 말문이 막힌 해완은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그래도 그런 이름이 어딨어요. 사람 이름 같지도 않은데.”
“밀밭 같아서요.”
“네?”
“당신 머리색이요. 꼭 밀밭 같다고. 근데 밀이라고 부르긴 좀 어색하니까 비슷한 곡식류로, 보리. 됐죠?”
밀이나 보리나 그게 그거 아닌가.
딱히 도움이 될 것 같진 않아 하고 싶은 말을 꿀떡 삼켜 버린 해완은 대신 손을 올려 제 머리를 만지작댔다. 해완은 하얀 얼굴만큼 머리색도, 홍채 색도 옅었는데 학창 시절에는 염색한 것으로 오해를 받을 때도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내가 아는 윤해언도 자기 머리색이 밝은 갈색이라고 했는데.”
강현의 말에 해완의 손이 천천히 밑으로 툭 떨어졌다.
그것은 해언도 마찬가지였다.
키도, 체격도, 얼굴 생김새도 크게 닮은 점이 없었는데, 공통적으로 색소가 부족해 보이는 것이 둘을 쌍둥이처럼 느끼게 만드는 큰 요소 중의 하나였다.
“우연의 일치치고는 참 이상한 게 많아. 안 그래요?”
강현의 말에는 뼈가 있었지만, 해완은 목소리를 쥐어짜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그러네요.”
그 말에 강현은 잠시 말이 없더니, 갑자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해완이 올려다보자 강현은 그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아무튼, 다음 주부터 나와요. 위치는 보내 줄게요.”
툭 도드라진 눈썹뼈 탓에 어떤 눈을 하고 있는지 잘 보이지가 않았다. 그 말을 마지막으로 강현은 또 해완을 그대로 남겨 두고 자리를 휙 빠져나가 버렸다.
땀이 배어 나와, 해완은 목뒤를 문질러 닦았다.
* * *
강현이 보내 준 가게의 위치는 번화가와는 한참 동떨어진 어느 부촌 한가운데였다.
버스 정류장이나 지하철역에서도 먼 언덕배기에 위치한 곳이라 해완은 연신 핸드폰 지도 애플리케이션을 들여다보며 걸어야 했다.
주위는 가끔씩 오가는 차들을 제외하고는 한산하고 고요했다. 돈 있는 사람들이 무슨 생각을 하고 사는지는 몰라도 무언가를 팔기에는 영 맞지 않는 곳 같았다.
게다가 강현은 상호명을 알려 주지 않고 주소만 가르쳐 줬는데, 업체 등록을 하지 않았는지 검색을 해 봐도 어떤 정보도 찾을 수가 없었던 터라 해완은 그의 ‘가게’에 대한 궁금증이 점점 커져가기만 했다.
아마도 저기인가 보다.
애플리케이션 안 목적지가 건너편에 있는 흰 외벽의 건물을 가리키는 것을 본 해완은 잠시 그 자리에서 어색하게 매무새를 다듬었다.
강현이 대단한 일을 시킬 거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만약 손님이 드나드는 곳이라면 후줄근하게 보여서는 안 될 듯해서 몇 개 있지도 않은 옷을 가지고 어젯밤 내내 고민을 했다. 제가 어떻게 입고 오든 이런 곳을 찾는 사람들의 눈을 만족시킬 일은 없을 것을 알면서도 긴장이 되는 건 어쩔 수 없었다.
길을 건너 건물 앞에 도착한 그는 굳게 닫혀 있는 심플한 검정 현관 앞에 멈춰 섰다. 하얗고 거친 질감의 벽으로 마무리된 층고가 높은 단층 건물은 간판은 물론이고 출입구에 위치한 불투명한 유리블록 말고는 창문 하나조차 없어 도무지 외부인의 출입을 환영하는 것처럼 보이질 않았다.
해완은 조심스레 문손잡이를 당겼다가, 잠겨 있는 문에 멈칫했다. 아직 오후 3시가 채 되지 않은 시각이라 영업시간이 아니라고 할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정말 이런 곳이 가게인 게 맞을까? 잘못 찾아온 게 아닐까? 그런 생각에 우왕좌왕하다가 머뭇거리며 현관문 옆의 벨을 눌렀다.
그리고 벨을 누르기 무섭게, 문은 탁 소리를 내며 열렸다.
현관 복도를 지나 안으로 들어서자 바로 보인 것은 통창으로 둘러싸인 디귿자 형 복도와 나무 한 그루가 심긴 지극히 고급스럽고 아름다운 중정이었다.
중정 안에 내리쬐는 겨울 오후의 햇살이 나무를 지나 복도까지 비추는 모양을, 해완은 반쯤 감탄이 섞인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다음은 냄새였다. 뭐라 형용할 수 없이 기분 좋은 향기가 건물 전체에 감돌고 있었다.
“시간 맞춰 왔네요.”
잠시 넋을 놓고 서 있던 해완은 왼쪽에서 들린 깊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언제 나타났는지 목선이 드러나는 블랙 니트를 입은 강현이 벽에 기대어 선 채 해완을 향해 빙긋 웃고 있었다.
“이쪽으로 와요.”
여전히 아무런 정보도 없이 낯선 곳에 서 있는 긴장을 떨칠 수 없었던 해완은 쭈뼛거리며 강현의 뒤를 따랐다.
복도를 끼고 오른쪽으로 돌아서자 드러난 공간은 중정을 향해 난 통창 이외에는 막혀 있었지만 천장이 높고 우아한 화이트 톤으로 통일감이 있게 구성되어 답답한 느낌은 전혀 없었다.
대리석 타일로 이루어진 벽과 바닥을 천장에 달린 볼륨감 있고 세련된 원형의 조명이 비췄다. 전체적인 분위기에 맞게 골드 프레임으로 마감한 대리석 탁자가 한가운데 놓여 있었는데, 그 위에 놓인 보관 랙 안에 위치한 수십여 개의 작은 병들이 유달리 눈에 띄었다.
“뭐 마실 거라도 줄까요?”
“아뇨, 괜찮아요.”
“그래요? 그럼 편하게 앉아요.”
해완은 머뭇거리며 자리에 앉았다. 들어온 지 수분이 지났는데도 아직도 이곳이 무슨 ‘가게’인지 짐작조차 가질 않았다. 탁자 위에 놓인 작은 병들이 단서가 될 것 같아 절로 눈이 갔지만, 겉으로 봐서는 무엇이 들었는지조차 알 수가 없었다.
“향료예요, 그거.”
해완의 시선을 눈치챈 강현의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향료……요?”
의자 등받이에 기대어 앉아 있던 강현은 몸을 살짝 앞으로 기울였다. 체격이 그 정도로 크면 작은 동작 하나마저 요란스러울 법한데도, 그는 그런 느낌이 전혀 없이 공기를 느리게 밀어 내듯 움직여서 묘하게 시선이 갔다.
“조향사거든요. 내가 하는 일.”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직업에, 해완은 입을 반쯤 벌렸다.
“여긴…… 가게라고 했지만 내 작업실이라고 하는 게 더 맞겠네요.”
“…….”
“난 주문 제작 향수를 만드는 조향사예요. 가끔 새로운 향을 만들기도 하지만, 보통은 사람들의 페로몬 향을 완벽하게 카피한 향수를 만들죠.”
머리를 맴도는 장면들에, 해완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했다. 그런 속을 들여다보기라도 한 듯 강현은 씩 웃으며 그 까만 눈을 해완에게 집요하게 고정시키고 있었다.
“말해 두겠는데, 나 이 일 꽤 잘해요.”
그리고 그는, 자신의 높게 뻗은 코를 툭툭 두드리며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타고났거든.”
해완은 침을 꿀꺽 삼키고 강현의 시선을 피해 고개를 내렸다.
‘난 절대 틀리지 않아. 이런 향을 가진 사람은, 너밖에 없어.’
납득할 수 없었던 그 확신이 어디에서 비롯됐는지,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그때 느닷없이 몸을 일으킨 강현이 해완의 옆으로 성큼 다가왔다. 둥그레진 눈으로 그를 올려다보는 해완을 향해 그는 설핏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따라와요. 다른 곳도 보여 줄게요.”
허둥지둥 몸을 일으킨 해완은 이번에는 중정 왼편의 공간으로 향하는 강현의 뒤를 따랐다.
방금까지 있던 오픈된 공간과는 달리 문이 달린 방 두 개가 먼저 보였다. 강현은 그중 안쪽에 있는 문을 열어 슬쩍 밀었다.
“방금 거긴 고객들과 상담하는 곳이고, 작업은 거의 여기서 해요.”
강현이 굳이 안에 들어가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해완 또한 열린 문 틈을 통해서만 안을 엿보았다.
작업실 안은 벽 높은 곳에 위치한 가로가 긴 직사각형 모양의 창문 외에는 꽉 막혀 어둡고 서늘해 보였다.
그리고 해완의 시선을 바로 잡아끈 것은 거대한 원목 데스크였다. 그것은 특수 제작 한 것으로 보이는 5단짜리 랙으로 완전히 둘러싸여 있었는데, 그 랙 안에는 아까 해완이 응접실에서 봤던 작은 향료병들이 빼곡히 들어차 있었다.
응접실에서 보았던 게 이삼십 병 정도 같았다면, 이곳에 있는 것들은 오백 병은 족히 넘을 듯했다.
해완의 시선을 느낀 강현이 가볍게 입을 열었다.
“내가 작업하는 조향대예요. 퍼퓸 오르간이라고도 하고요.”
“향수 만드는 데 저걸 다 쓰는 거예요?”
생경한 광경에 놀란 해완이 저도 모르게 묻자, 강현이 별다를 것 없다는 듯 대답했다.
“네. 페로몬 향이란 게 워낙 복잡하다 보니, 조합이 얼마나 나올지 알 수가 없거든요.”
해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 사실은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다.
서울로 올라와 자신이 가진 장애가 사람들에게 어떻게 받아들여지는지를 실감하게 된 이후 한때는 인공적인 향을 이용해 그것을 감추어 보려 했던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만들어진 것으로 페로몬 향의 복잡다단한 특성을 완벽히 흉내 내기는 거의 불가능했다. 게다가 시중에서 구할 수 있는 향수는 본인의 향을 강조하거나 레이어드하여 색다른 느낌을 주는 용도가 대부분이었기 때문에, 향이 없는 그가 향수를 뿌려 봤자 어딘가 어색하고 단조로운 느낌밖에 줄 수가 없었다.
이제는 과거에 그쳐야 할 일이었음에도 불구하고 괜히 입 안이 썼다.
그 느낌을 지우고자 해완은 강현의 데스크를 관찰하는 것에 집중했다. 압도적인 양의 향료병들을 제외하고 데스크 위에 놓인 것은 전자저울과 비커, 정체를 알 수 없는 약병들, 그리고 스포이트 등이었다.
‘보통은 사람들의 페로몬 향을 완벽하게 카피한 향수를 만들죠.’
해완은 아까 들었던 강현의 말을 떠올려 보았다. 그런 향수가 존재한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일반적으로 유통되지도 않을뿐더러, 병당 백만 원을 넘어설 정도의 고가라고 들었던 탓에 구해 볼 생각조차 할 수 없었기 때문에 이런저런 호기심이 일었다.
“저…….”
해완이 조심스레 입을 열자, 강현이 흘끗 그를 내려다보았다.
“페로몬 향수를 만드는 데 보통 얼마나 걸려요……?”
“글쎄요. 때에 따라 다르지만, 최소 한 달 정도?”
“아…… 역시 오래 걸리네요.”
“페로몬 향은 생각보다 훨씬 까다롭거든요. 수많은 조건에 따라서 시시때때로 달라지고요.”
“어떤 조건들인데요?”
“너무 많아서 다 설명하긴 힘들지만…… 보통 가장 크게 영향을 미치는 건 체온, 감정, 자주 접촉하는 사람, 그리고 성적인 흥분 정도 되겠네요.”
강현의 입에서 나온 마지막 단어에 해완은 얼굴을 살짝 붉혔다. 삶의 대부분을 페로몬 향 없이 살아온 해완에게는 특히 익숙하지 않은 주제 중 하나였기 때문이었다.
“그럼, 가격은 얼마 정도 받는 거예요?”
주제를 돌리고자 물은 것이지만 돈 이야기를 하는 게 또 겸연쩍어 달아오른 얼굴이 식지를 않았다. 하지만 강현은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원료나 여러 사안에 따라서 달라지긴 하지만, 첫 조향은 기본적으로 삼천만 원부터 시작하고, 그다음부턴 병당 이백이에요.”
해완의 얼이 빠진 표정을 보고 강현은 웃음을 터트렸다.
“말도 안 되는 가격 같아요?”
반사적으로 그런 생각이 떠오르기는 했지만, 그의 직업을 무시하는 것처럼 들릴까 해완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우물쭈물댔다.
“아까 말했다시피 페로몬 향의 특성은 워낙 복잡하고 까다로워서, 대부분의 사람을 납득시킬 만한 향을 조향하는 건 아주 어려운 일이에요.”
“…….”
“그런데도 나한테 일을 맡기는 사람이 있는 건, 아무도 나보다 잘하지 못해서고.”
어찌 보면 오만하게 들릴 수도 있는 말이었으나 강현의 태도에는 자신의 일에 대한 자신감 말고 다른 것은 엿보이지 않게 담백했다.
이런 곳에서 제가 무슨 일을 할 수 있는지 도무지 떠오르질 않아 해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청소 정도야 할 수 있겠지만 가격을 듣고 나니 강현의 작업물을 망쳐 버릴까 무서워서 어디 손이나 댈까 싶었다.
“그래서, 윤보리 씨가 해야 되는 일 말인데요.”
해완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강현이 입을 열었다.
“디퓨저나 석고 방향제 같은 상품들 주문이 들어오면 병에 라벨을 붙이거나 포장하는 일 같은 걸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가끔 필요하면 배달도 하고.”
손이 여문 편이어서 단순 작업에는 자신이 있었다. 안심한 해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현은 해완을 작업실 옆에 있는 방으로 데리고 갔다. 그곳은 창 하나 없이 어둡고 매우 서늘했는데, 해외에서 수입한 고가의 천연 원료 에센스가 담긴 알루미늄병들이 놓인 선반이 줄지어 있었다.
그 옆에는 향수병들과 포장 박스들이 가득 차 있는 보관함도 있었다. 전부 소량만을 주문 제작 해 받아 오는 제품들로, 때로 그것을 픽업하러 가야 되는 일도 있을 것이라 했다.
포장재는 블랙 컬러의 하드커버 박스였는데, 뚜껑을 열면 앞면이 앞으로 쏟아지는 구조로 정면은 기하학적인 무늬와 우아한 영문이 금박으로 장식되어 있는 것이 척 보기에도 고급스럽기 그지없었다.
강현은 이어서 해완이 볼 수 있게 빈 병 하나를 꺼내 건네주었다. 향수는 50밀리리터만 제작한다고 했다. 매끈한 직사각형의 향수병은 우아한 광택이 나는 둥글고 검은 뚜껑으로 덮여 있고, 정면에는 포장재와 같이 검은 라벨지에 영문이 금빛 글씨로 인쇄되어 있었다.
[Osmanthus in the wood]
해완은 속으로 인쇄된 글씨를 읽었다. 다른 건 알겠는데 오스만투스가 무엇인지 알 수가 없었다.
향수병을 쥔 손가락에서 느껴지는 감촉에 해완은 조심스럽게 병을 옆으로 돌려보았다. 옆면에는 나뭇가지에 모여 핀 작은 꽃들의 모습이 지극히 섬세하게 아로새겨져 있었다.
“이건…… 무슨 꽃이에요?”
해완이 묻자, 강현은 조용히 대답했다.
“오스만투스예요. 사실 목서 향 전체를 뜻하는 말이지만, 은목서를 생각하며 넣었어요.”
“…….”
“그리고 그게 내 브랜드 이름이구요.”
오스만투스가 꽃 이름인 모양이었다. 해완은 병을 제자리에 돌려놓으며 입 안으로 그것을 굴려 보았다.
숲속의 은목서.
은목서라는 꽃을 보거나 향을 맡아 본 적은 없지만, 이름을 듣는 것만으로 고요한 숲속에서 꽃나무를 바라보는 듯한 착각이 드는 듯 느껴졌다.
“디퓨저는 어떤 향이에요?”
“그건 아직 생각 중이에요. 해 본 적 없는 일이라.”
해완이 의아하게 보자 강현이 이어 말했다.
“만들어 달라고 요청을 많이 받았었는데…… 일 키우기 싫어서 할 생각이 없었거든요. 라벨부터 포장까지 내 상품은 내가 일일이 손을 대야 직성이 풀려서요.”
“그런데 왜 갑자기 디퓨저를 만들기로 한 거예요……?”
그러자 강현은 당연한 듯이 말했다.
“일 시켜 달라면서요.”
강현이 저 하나 때문에 쓸데없는 일을 벌이고 있다는 생각에 해완이 눈을 동그랗게 떴다.
“윤보리 씨 아니었으면 안 했을 거니까, 내가 주는 돈은 자기가 버는 거라고 생각해요.”
강현은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말을 끝냈다. 해완은 난감한 듯 괜히 목뒤만 쓰다듬었다.
그런 해완에 아랑곳없이 창고의 문을 닫은 강현은 다시 응접실로 걸어 나가며 말을 이었다.
“뭐 그것 말고도 윤보리 씨가 도와줄 일 많을 거예요. 내가 손이 느린 편이라, 이런 단순한 일들에 시간을 많이 뺏기거든요. 게다가 싫은 냄새를 가진 사람이 내 작업 건드리는 게 용납이 안 되는 스타일이라.”
해완은 강현의 널찍한 등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냄새가…… 싫은데요?”
그러자 강현이 걸음을 멈췄다. 해의 방향이 바뀐 탓에 그가 서 있는 중정 복도의 일부만이 햇살이 들었고, 강현의 얼굴 또한 반 정도만이 양지에 드러나 있었다.
그는 지극히 가벼운 어조로, 별일 아니라는 듯 읊조렸다.
“사람이 가진 냄새는 거의 대부분, 다.”
예상하지 못한 대답에 해완은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한순간, 강현의 무표정한 낯빛이 웃는 얼굴로 바뀌었다.
“농담이에요. 향에 너무 예민하다 보니 힘들 때가 많은 건 사실이지만. 평소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것도 그래서예요. 여긴 내가 좋아하는 향만 있는 안전지대라서, 더 민감해지는 면도 있구요.”
아, 해완은 입을 벌리고 멍청한 소리를 냈다. 그러고 보니 강현과의 몇 안 되는 만남 중 절반 이상을 마스크를 쓰고 있던 게 떠올랐다.
“그럼 우리 밥 먹으러 갈까요?”
“갑자기요?”
“네. 회식해야죠. 보통 사람들은 첫 출근 하면 다 그렇게 하잖아요. 맞죠?”
강현은 활기차게 그런 말을 하며 해완을 보며 씩 웃었다.
하긴, 재벌 3세로 태어나 회식이란 걸 해 보기나 했을까. 세상 물정 모른다 싶은 말이었지만 그 얼굴이 지극히 해맑아서, 해완은 얼떨떨한 기분으로 어느새 강현의 뒤를 따르고 있었다.
* * *
강현이 해완을 데리고 간 곳은 청담동에 위치한 퓨전 한식 파인 다이닝이었다.
유명 식당 정보 안내서에서 높은 점수를 받은 것으로 유명해 익히 알고 있는 곳이었으나 제대로 직장에 다니던 시기에도 디너가 이십만 원에 육박하는 높은 가격대 때문에 섣불리 올 생각을 하지 못했던 터라, 해완은 들뜨는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연신 주위를 두리번거렸다.
한때는 공부 삼아 없는 돈이라도 모아서 이런 파인 다이닝들을 찾아다니곤 했지만 지금은 아득히 먼 과거의 일처럼 느껴졌다.
웰컴 디시가 나올 때부터 플레이팅을 주의 깊게 보고 조금씩 맛을 음미하는 해완을 흥미롭게 바라보던 강현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먹는 거 좋아해요? 되게 행복해 보이네.”
그 말을 듣자마자 해완은 목덜미까지 얼굴을 붉혔다. 어린애처럼 흥분을 감추지 못했다는 생각이 든 탓이었다. 그러자 강현이 황급히 말을 붙였다.
“놀리려고 그런 거 아니에요. 맛 음미하는 거나 그런 게 익숙해 보이길래 이런 데 자주 다녔나 궁금해서.”
말해도 될까. 땀이 배어나는 느낌에 해완은 목덜미를 문질렀다. 강현에게 자신을 찾을 만한 어떤 단서를 주고 싶진 않았다.
하지만 상관없을 듯했다. 어차피 원래 하던 일로 돌아갈 길은 쉽게 보일 것 같지 않았으므로.
해완은 무릎 위로 놓인 테이블보를 만지작거리며 조용히 대답했다.
“원래…… 요리를 했었거든요. 그래서 일 그만두기 전까진 공부 삼아 조금씩 다니고 그랬어요.”
처음으로 자신에 대해 말하는 해완에 강현의 눈썹이 흥미로운 듯 꿈틀했다.
“요리요? 어떤 거? 한식? 일식? 프렌치?”
“그냥 작은 프렌치 레스토랑에서요. 말해도 잘 모를 거예요.”
적당히 말을 흐렸음에도 강현은 아직도 묻고 싶은 것이 많은 눈치였지만, 고맙게도 때맞춰 다음 플레이트가 나왔고 두 사람은 잠시 조용히 음식에 집중했다.
남들보다 1년 늦게 학교에 들어간 탓에 스물한 살이 되고서야 고등학교를 졸업한 해완은 더는 보육원에 있을 수 없었기 때문에 정착 지원금과 원장 선생님의 도움을 받아 작은 자취방을 얻어 서울로 올라왔다.
낯설디낯선 환경에서 1년간은 아르바이트를 전전하며 어영부영 시간을 보냈지만, 스물두 살이 되자마자 취업한 작은 프렌치 레스토랑에서 겨우 자신의 길을 찾은 듯 느껴졌었다.
결과물이 바로 보일 수 있는 무언가를 만들어 내는 게 좋았다. 그것으로 다른 사람에게 기쁨을 줄 수 있다는 것도.
게다가 손이 여물고 요령 하나 피우는 법 없이 성실하기 그지없는 해완은 셰프의 눈에 쉽게 들었다. 물론 폐쇄적이고 군기가 강한 주방에서 일하는 것은 성격이 순한 그에게 절대 쉽지만은 않았다. 그럼에도 묵묵히 끈기 있게 버텨 내는 가운데 몇 년이 흘렀고,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제법 고참이 되어 있었다.
그렇게 일을 시작한 지 5년이 될 무렵 작은 규모로 시작한 레스토랑은 조금씩 입소문이 나다가 제법 유명세를 타게 되었다.
셰프가 해완에게 대학을 가기를 권한 게 바로 그때였다. 언젠가 2호점을 낼 것을 염두에 두고 있는데, 그렇게 되면 해완에게 중요한 자리를 맡기고 싶다고 했다. 그러니 요리나 레스토랑 경영에 대해 전문적으로 배워 두면 큰 도움이 될 것이라고도 말했다.
처음 해완은 그 제안에 많이 당황했다. 공부가 제게 맞는 길이라고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기 때문이었다. 학창 시절 유달리 머리가 비상한 해언이 항상 옆에 붙어 있었기에 더더욱 그랬다.
하지만 아무리 대학이라 한들 요리에 대해 배우는 것은 일반 공부와는 다를 것이기에 도전하고 싶은 강한 욕심이 생겼다. 그렇게 재직자 전형이 있는 조리학과를 지원해 합격 발표를 들었던 날, 해완은 너무 신이 난 나머지 혼자 펄쩍펄쩍 뛰기까지 했다.
재직자 전형은 일반 대학과는 달라 실제 대학교에 가는 수업은 일주일에 한 번 남짓이었고 나머지는 모두 과제와 온라인 강의를 통한 커리큘럼이었지만, 처음 캠퍼스로 들어섰을 때의 설렘과 떨림은 아직도 생생히 기억하고 있었다.
그리고, 병색이 완연한 해언이 돌아온 것이 대학 1학년을 막 마쳤을 때였다.
하루에 열다섯 시간씩 일해야 하는 레스토랑과 더불어 대학까지 다니면서 해언을 돌보기는 불가능했다.
때문에 모두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일을 그만뒀다. 학교는 일단 휴학했으나 해언의 죽음과 수술까지 겪고 나자 복학 기간을 놓쳐 제적이 된 상태였다.
그래도 괜찮았다. 요리는 학교에 다니지 않아도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므로.
하지만 정말 해완의 발목을 잡은 것은 페로몬샘 이식 수술 뒤에 겪은 변화였다.
해완의 장애는 사람을 대하는 대부분의 직업에서 선호되지 않았지만 주방은 달랐다. 음식의 맛과 향을 예민하게 판가름해야 하는 요리사라는 직업에서 강한 향은 오히려 단점이 되었기에 업계에 종사하는 사람들은 향내가 약한 경우가 많았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해언의 페로몬샘을 이식하고 그가 만지는 물건에도 향이 남을 정도로 페로몬 향이 진해지자 대부분의 레스토랑에서 그를 꺼려 했다. 다른 요리사들의 후각에 영향을 미쳐 음식 퀄리티에 문제가 생길 수 있다는 것이 그 이유였다.
결국 해완이 먹고살기 위해서는 처음 서울로 올라왔을 때처럼 아르바이트에 매달리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었다.
아무리 작더라도 언젠가 자신의 가게를 여는 게 꿈이었고, 혼자 주방에서 일한다면 큰 문제가 되지 않을 수도 있었겠지만 제대로 된 직업조차 없이 빚에 허덕이는 지금으로서는 솔직히 앞길이 전혀 보이질 않았다.
그런 상념들에 잠겨 있던 해완의 정신을 문득 강현의 목소리가 불러 세웠다.
“일은 왜 그만둔 거예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당황한 해완은 잠시 머뭇거리다 버벅대며 말했다.
“그게, 몸이 좀 안 좋아서요.”
강현의 표정이 선명하게 흐려졌다. 그 얼굴에 마음이 뜨끔하기 무섭게 그는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한 번 더 물었다.
“어디가 아팠는데요?”
퍽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괜한 말을 했다는 생각이 머릿속에 꽉 차올랐다. 그리고 그런 상념이 해완을 당황하게 만들수록 적당한 변명조차 생각나질 않아 그는 고개를 숙이고 어물거리며 중얼거렸다.
“……그냥 조금 아팠어요.”
제가 들어도 성의 없는 대답의 연속이었고 이래서야 대화가 잘 이어질 리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강현이 보일 듯 말 듯 하게 한숨을 내쉬는 것이 느껴졌다.
거짓말이라도 할 걸, 바보같이.
간만에 맛보는 맛있는 음식을 앞에 두고도 체할 듯이 느껴져 해완은 시선을 내리고 입술만 깨물었다.
그런 해완을 관찰하듯 보던 강현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내 이름은 여강현이고, 나이는 스물일곱이에요. 뭐, 직업은 알다시피 조향사고. 대학에선 화학을 전공했는데, 그것도 조향에 도움이 될 것 같아서 선택한 거예요. 어릴 때부터 후각이 워낙 민감하다 보니 온갖 향 나는 제품들을 옆에 두고 살았거든요. 그러다 보니까 자연스럽게 조향에 관심을 갖게 됐어요.”
새삼스러운 자기소개에 해완이 어리둥절하게 보자, 강현이 천연덕스럽게 씩 웃으며 말했다.
“윤보리 씨가 말 못 하는 게 많으니 내 얘기라도 할까 싶어서. 괜찮죠?”
그 한마디가 어색한 분위기를 부드럽게 풀었다. 고마운 마음이 들어, 해완은 어쩔 수 없이 미소를 지었다.
이어지는 저녁 식사 내내 강현은 해완이 민감하게 여길 만한 질문들은 더 묻지 않고 이야기를 이끌어 나갔다. 알고 보니 그는 말솜씨가 참 좋아서, 말을 조심하기로 단단히 마음먹고 있던 해완조차 저도 모르게 대꾸를 건넬 정도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 강현은 해완에게 집까지 데려다주겠다고 했지만 그가 한사코 거절하자 결국 해완의 동네까지 곧장 갈 수 있는 지하철역 앞에 내려 주는 것으로 타협을 봤다.
강현의 차는 해완이 영화에서나 본 고가의 외제 스포츠카였다. 지하철역까지는 채 10분이 걸리지 않는 거리였지만 한번 만져 볼 수 있을 것이라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차에 자신이 타고 있는 게 어색하게 느껴졌다.
“그럼, 금요일 저녁에 보는 거죠?”
역 앞에 도착해 해완이 안전벨트를 푸는 사이 강현이 물었다. 오늘처럼 수요일은 이른 오후부터, 다른 요일은 편의점 일을 끝내고 강현의 작업실에 가는 것으로 되어 있었다.
“네. 오늘 저녁 감사했어요. 가 보고 싶었던 곳인데, 덕분에 정말 맛있게 먹었어요.”
“그래요? 다음에도 데리고 가야겠네. 거기 말고도 맛있는 데 많이 알거든요.”
강현은 기분 좋게 대답했지만 해완은 무언가 가슴에 덜컥 걸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몇십만 원쯤 하는 저녁 식사야 강현에게는 아무것도 아니겠지만 문제는 그가 돈을 쓰는 상대가 틀렸다는 사실에 있었다.
물론 강현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모든 진실을 아는 해완으로서는 여전히 있어서는 안 될 자리에 있는 듯한 불편함을 견디기가 힘들었다.
“그러실 필요 없어요.”
견디지 못하고 툭 튀어나온 말에 강현이 얼굴을 굳혔다. 해완은 애써 가벼운 어조로 말을 이었다.
“한 달 뒤에 내가 윤해언이 아니란 걸 알고 나면, 돈 아깝게 느껴질걸요?”
농담으로 넘겨 보려 한 것이었지만 마음처럼 되지는 않은 듯, 강현의 굳은 얼굴은 풀릴 생각을 하지 않았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강현은 긴 손가락으로 얼굴을 쓰다듬으며 느리게 말했다.
“윤보리 씨는 어떨지 몰라도 난 사람들 말은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 안 해요. 입으로 거짓말을 뱉는 건 너무 쉽잖아요.”
“…….”
“하지만 일단 장단을 맞춰 주기로 했으니까, 한 달 동안은 최선을 다할게. 그래야지 내가 너한테 한 말도 증명할 수 있을 테니까.”
해완은 저도 모르게 강현을 바라보았다. 그는 또다시 해완을 완전히 해언으로 단정 짓듯이 말했지만, 해완의 신경을 잡아끈 것은 어투보다 강현의 말에서 느낀 기시감이었다.
곧이어 그 말을 어디서 들었는지 떠올랐다.
‘이제 증명이 되는 거야? 내가 너한테 했던 말.’
그 수목원에서 처음 만난 날 강현이 했던 말이었다.
대꾸할 말이 없어 해완은 입술만 깨물었다.
대체 강현이 8년 동안이나 품어 온, 해언에게 그토록 증명해야 할 말이 무엇인지 일말의 짐작조차 되지 않았다. 해언이 해완의 곁으로 다시 돌아온 이후, 그는 강현에 대해서 어떤 말도 해 주지 않았으니까.
그게 무엇인지라도 알면 강현이 저를 그냥 놓아줄 방법을 알 수 있을까?
이 모든 상황이 답답해 미칠 것 같았다. 하지만 해언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고, 강현에게 그것을 묻기에는 제게 그럴 자격이 없음을 알고 있었다.
“……저 가 볼게요.”
해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차에서 내렸다. 아무리 숨을 크게 몰아쉬어도, 심장 위에 무언가 턱 얹힌 듯한 느낌은 사라지질 않았다.
* * *
어젯밤 내내 잠을 설친 바람에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다. 헬스장 청소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집에 돌아오던 해완은 피곤한 탓에 욱신대는 수술 부위를 문지르며 현관문을 열었다.
“형 왔어? 밥 먹게 얼른 와서 앉아.”
현관문을 열자 작은 싱크대 앞에 서 있던 유준이 살갑게 말을 걸었다. 참기름을 둘렀는지 시큼하면서도 고소한 김치볶음밥 냄새가 코를 찔렀다.
아직 오전 7시 정도였던 터라 해완은 몰라도 유준에게는 꼭두새벽이나 다름없는 시간이었다. 그럼에도 그가 돌아올 시간에 맞춰 아침밥을 대령하는 속이 뻔히 보여 해완은 목도리 속으로 얼굴을 묻고 피식 웃었다.
강현과의 사건이 있고 난 뒤 해완은 유준을 완전히 투명 인간 취급했다. 그가 오래 화를 낼 만한 성격이 못 되는 것을 알고 있는 유준은 처음엔 대수롭지 않게 여기는 듯했지만, 그런 침묵 치료가 길어지자 최근에는 꼬박꼬박 자정 전에 들어오며 해완의 눈치를 살살 보는 게 느껴질 정도였다.
결국 유준을 붙잡아 앉혀 놓고 배달 일 외에 함부로 오토바이를 타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강현의 핸드폰 번호를 연락처에서 차단하는 것까지 눈으로 확인하고 나서야 해완은 유준에게 다시 말을 걸기 시작했다.
물론 유준의 말을 완전히 믿지는 않았으나 적어도 교훈을 얻고 앞으로 조금은 조심하기를 바랄 뿐이었다.
“왜 이렇게 못 먹어? 맛이 이상해?”
밥을 빨리 비우지 못하고 미적거리는 해완을 본 유준이 인상을 살짝 찡그리자, 해완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 맛있어. 맛있는데, 잠을 좀 못 자서 잘 안 넘어가네. 미안.”
“잠은 왜 또 못 잤는데?”
밥을 한 술 크게 입에 떠 넣으며 묻는 유준의 목소리는 별다른 의도 없이 태평했지만, 해완은 쉽게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8년 전, 강현에게 말 한마디 걸지 못하던 해완을 대신해 해언이 그와 친구가 되어 보겠다고 나선 뒤 해완과 해언은 강현에 대해 꽤 많은 시간을 이야기하며 보냈었다.
그의 이름과 나이뿐만 아니라 해안이 바로 보이는 언덕에 위치한 아름다운 저택이 강현의 집안에서 지은 별장이었으며 강현은 요양차 잠시 머물러 왔을 뿐이라는 것도 모두 해언에게서 들은 사실이었다.
그런데 그런 겉치레적인 사실들 외에 다른 것들은 이상하리만치 기억이 잘 나질 않았다. 해언과 강현에 대해 이야기를 하며 보낸 시간들은 꽤 많이 인상에 남아 있었지만, 음소거가 된 동영상처럼 그 내용은 잊혀진 상태였다.
하긴, 해완은 기억력이 좋아 본 적이 없었다. 어릴 때는 하도 이것저것 잘 빼먹고 다니는 통에 보육원 선생님들은 해완의 학교 준비물까지 모두 해언에게 챙겨 들려 보낼 정도였으니까.
“유준아. 너 혹시, 그날 강현이랑 해언이에 대해서 했던 말 중에 나한테 말했던 거 말고 기억나는 거 없어?”
유준은 입 안 가득 밀어 넣은 김치볶음밥을 씹다가 고개를 갸웃했다.
“글쎄, 처음에 말했던 거 말고는 잘……. 그날 나 완전 취해서 맛 갔던 거 알잖아.”
“그러니까 누가 술을 그렇게 많이 마시래?”
“씨, 몰라. 그렇게 많이 마신 것 같진 않은데 술이 독한 건지 뭔지 이상하게 빨리 취해서……. 그렇게 비싼 술을 먹어 본 적이 있어야지 알지.”
해완은 속으로 작은 한숨을 삼켰다. 그러자 유준은 수저를 내려놓더니, 자못 조심스럽게 물었다.
“왜 그래? 강현이 형이 형한테 윤해언에 대해서 뭐 이상한 소리 해?”
“그런 건 아닌데…… 아직도 날 해언이라고 생각하니까.”
“내가 가서 다시 말할까? 그냥 헛소리한 거라고?”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넌 다신 그 사람 만날 생각 하지 마.”
망설임도 없이 단박에 말끝을 잘라 버린 해완의 태도에 유준은 머쓱해 보였지만, 아직까지도 강현이 유준을 사기죄로 경찰에 신고할까 봐 마음이 놓이지 않고 있던 터라 유준을 괜히 그의 눈앞에 나타나게 만들고 싶지 않았다.
엉망으로 꼬여 버린 실타래 같은 상황을 수습할 방법이 캄캄하기만 해 해완은 한숨만 내쉬었다.
강현은 조향사였다. 그것도 뛰어난 재능을 가진. 그 말은 곧 해완의 향이 해언의 향과 같다는 사실을 속일 수 없으리란 걸 뜻했다.
그렇다면 해완 그 스스로가 가진 콤플렉스가 어떻든 모든 진실을 털어놓는 것만이 강현의 오해를 풀 유일한 방법일 터였다.
하지만 섣불리 그렇게 말했다가 분노한 강현이 유준에게 해를 끼칠까 봐 걱정도 됐고, 내년 생일이 돌아올 때까지 자신의 죽음에 대해 누구에게도 말하지 말아 달라는 해언의 부탁이 영 마음에 걸렸다.
일전 해언이 강현에게 돈을 빌렸을지도 모른다느니 어쩌느니 했던 유준의 말을 한 귀로 듣고 흘려버리긴 했지만, 사실 해완 또한 그런 이해할 수 없는 부탁이 법적, 혹은 금전적으로 어떤 심각한 문제가 얽힌 탓은 아닐까 하는 걱정을 하지 않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해언이 곁에 없었던 시간들에 대한 어떤 단서라도 있다면, 왜 그런 부탁들을 했는지 짐작이라도 할 수 있었을까.
그런 생각이 든 해완은 저도 모르게 한숨을 폭 내쉬었다.
해언은 어느 곳에 가도 손에 꼽히는 수재였다. 1년에 단 세 명만을 선발해 운영하는 어느 대기업의 장학 재단 프로그램에 뽑혀 졸업 후 해당 기업의 연구소에 입사하는 조건으로 전액 지원을 받아 미국 유학을 갈 정도였으니까.
하지만 해언은 한국을 떠나자마자 보육원과 관련한 모든 사람들과 연락을 싹 끊어 버렸기에 이후 행방에 대해서는 누구도 알지 못했다.
그런 갑작스런 연락 두절은 해완을 꽤 오랜 시간 괴롭혔다. 그가 할 수 있는 일이라곤 해언은 영민하고 누구에게나 사랑받는 존재이니 어디에 있든 행복하게 잘 살고 있으리란 생각으로 애써 마음을 달래는 것뿐이었다.
그러나 고작 옷 몇 벌만이 든 작은 여행 가방을 들고 해완의 삶으로 불쑥 돌아온 해언은 그가 바라 마지않던 모습과는 정반대의 것을 하고 있었다.
당시에는 ‘앞으로’ 해언과 보낼 수 있는 시간 말고 그 외의 일은 무엇도 중요하게 느껴지지 않았기 때문에 해언이 미국에서의 시간에 대해 말하기를 꺼려 하자 묻는 것을 그만둬 버렸지만, 모든 진실이 영원히 수수께끼에 묻힌 지금에 오자 크고 작은 후회들이 어쩔 수 없이 몽글거리며 솟아났다.
더 이상 밥을 넘기지 못하고 수저를 내려놓은 해완을 본 유준이 작게 투덜거렸다.
“진짜 윤해언 그 새끼만 아니면 애초부터 이런 일도 없었을 텐데.”
“김유준.”
해완은 날카롭게 말했다.
“지금 일 이렇게 된 거에 대해서 네가 해언이 탓할 자격이 있다고 생각해?”
해완의 일침에 유준은 깨갱 입을 다물었지만 그럼에도 불만스럽게 삐죽이는 입은 멈추지 못했다.
도대체 왜 그렇게 해언이를 싫어하는 거냐고.
그렇게 물으려 했지만 이제 와서 소용없는 짓이라는 생각이 든 해완은 몇 번을 쉬었는지 모를 깊은 한숨만 내쉴 수밖에 없었다.
* * *
“오늘은 이 병들에 라벨링을 하는 걸 도와줬으면 좋겠어요.”
강현을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할지 몰라 체할 것 같은 기분으로 작업실에 들어선 해완의 마음에는 아랑곳없이 그는 아무렇지도 않은 기색으로 시원스럽게 말했다.
응접실 안 대리석 테이블 위에는 수십 개의 작은 향료병들이 칸칸이 나누어진 박스에 담겨 있었는데, 그 옆에는 향료 이름이 인쇄된 A4 사이즈의 라벨지 몇 장과 커터 칼이 있었다.
“병에 붙일 라벨지를 순서대로 커팅해서 나한테 건네주면 내가 향을 확인하고 병에 붙일게요. 내가 다시 병을 건네주면 라벨을 확인하고 뚜껑 위에 동일한 넘버의 스티커를 붙여 줘요. 뚜껑에도 향취가 배어서 다른 향료의 뚜껑을 닫으면 곤란할 때가 있거든요.”
강현은 테이블 맞은편에 해완을 앉게 하고는 해야 할 일에 대해서 간단히 설명했다. 어렵지 않은 일에 안심한 해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 없이 일을 시작했다. 그러나 손이 느리다는 말이 정말이었는지, 제가 하는 일에 비해서 해완이 하는 일의 진척 속도가 훨씬 빠르자 강현이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손이 빠르네요. 다음에는 향료 소분할 때도 부탁 좀 해야겠어요.”
멋쩍은 목소리에 해완은 부러 다른 쪽으로 말을 돌렸다.
“이걸 다 직접 소분한 거예요?”
“네. 원료 자체는 벌크로 들여오는 데다, 가루, 고체, 액상처럼 형태가 다양해서 필요한 만큼 직접 용매에 녹여서 만들어 둬야 하거든요.”
탁상 위에 놓인 무수한 병들을 본 해완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여긴…… 향료가 몇 개나 있는 거예요?”
“지금 가지고 있는 건 500종 정도예요.”
“그렇게 많이요?”
해완의 눈이 절로 동그래졌고, 강현은 그를 흘끗 올려다보고는 씩 웃었다.
“이것도 극히 일부분이에요. 천연 향료, 합성 향료 모두 포함해서 단순히 종수로만 따지면 8천 종이 넘는 향이 있다고 하니까요. 물론 그중에서 채취가 금지되거나, 알레르기 유발 같은 이유로 사용이 금지된 향료들도 있어서 사람에게 쓰일 수 있는 건 몹시 제한적이지만요.”
그 말을 시작으로 강현은 향료에 대해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강현이 사용하는 모든 향료들은 세계 각국에서 들여오는 것으로 모두 강현이 직접 가서 제조 과정과 퀄리티를 따져 보고 선별한 모양이었다.
토스카나의 아이리스, 튀르키예의 장미, 모로코에 있는 오크모스 저장소까지 돌아다니며 단순히 완제품만 구한 게 아니라 그 원료의 채취 과정까지 살핀 강현의 경험은 해완의 세상에서는 상상도 하기 힘든 종류의 것이었다.
어느샌가 해완은 바쁘게 라벨지를 자르던 손의 움직임도 멈추고 강현의 이야기에 푹 빠져 있었다.
강현의 목소리는 체격만큼이나 낮고 울림이 있고 단단했다. 인위적으로 만들어 놓은 중정 말고는 외부와 유리되어 있는 작업실에서 그것은 마치 바깥을 향한 유일한 창처럼 느껴졌다.
문득, 병에 붙일 라벨지가 넘어오지 않는 것을 느낀 강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 눈과 시선이 마주치고서야 번뜩 정신이 든 해완은 허둥지둥 다시 라벨지를 자르기 시작했다.
그런데 강현의 미안한 목소리가 들렸다.
“너무 지루한 얘기만 했죠. 미안해요, 윤보리 씨는 별 관심 없는 이야기일 텐데.”
당황한 해완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니에요. 하나도 안 지루했는데.”
“그래요? 보통 사람들은 일방적으로 얘기 듣는 거 싫어하지 않나.”
해완은 눈을 깜빡였다. 그러고 보니 강현은 ‘보통 사람들은’이라는 단어로 시작하는 말을 자주 하는 것 같았다. 남들의 눈치를 보는 타입처럼 보이지도 않는데 그런 말을 하는 것이 왠지 신경이 쓰여, 해완은 조심스럽게 말을 골랐다.
“아니에요. 전…… 다른 사람들 이야기 듣는 게 좋거든요. 여강현 씨는 말도 재밌게 하고, 그리고…… 모, 목소리도 좋아서…… 재밌게 들었어요.”
그 말에, 강현이 빙긋이 웃었다. 괜히 볼이 화끈거려 해완은 시선을 내렸다.
“그래도 윤보리 씨 얘기도 좀 해 봐요. 비밀이 많은 사람인 건 알지만, 쉬는 날에는 뭐 하는지, 어떤 취미가 있는지. 그런 얘기 정도 해 줄 순 있잖아요.”
누구나 흔히 하는, 너무나 쉬운 질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완은 머뭇거릴 수밖에 없었다.
생계에 찌들어 살다 간신히 쉬는 시간이 나면 자거나 핸드폰으로 동영상을 보는 것이 다인 지금의 해완의 삶은 강현에게 말할 수 있을 만한 게 없었다.
어린 시절에는 자전거를 타고 이곳저곳 돌아다니기를 좋아했고, 요리를 할 때는 맛있는 음식을 먹으러 다니는 것을 일이자 취미로 삼곤 했지만 지금은 그마저도 아득히 먼 일로만 느껴져 저를 억지로 꾸며 내는 것 같아 싫었다.
사는 게 지쳐 그런 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는데, 자신이 갑자기 초라하고 재미없는 사람으로 느껴졌다. 스스로의 못난 마음을 밀어 내듯이 해완은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딱히 취미는 없고, 쉬는 날엔…… 거의 자는 것 같아요. 알겠지만 일이 바빠서요.”
강현은 잠시 그런 해완을 보더니, 느닷없이 말했다.
“그럼, 취미로 조향에는 관심 없어요?”
“……네?”
“원래 요리했다고 했잖아요. 그럼 당연히 후각도 좋을 거고 잘할 것 같아서요.”
“아…….”
“말 나온 김에 한번 테스트나 해 볼까요?”
갑작스러운 제안에 해완이 쉽게 대답을 하지 못하는 사이 강현은 갑자기 몸을 일으키더니 해완에게도 일어서라는 듯 손짓을 했다.
“테스트라니 무슨…….”
엉거주춤 몸을 일으킨 해완이 의아하게 묻자, 강현은 테이블 위에 걸터앉으며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조향에서 가장 중요한 것 중에 하나는 향을 분석하고 내가 표현할 수 있는 언어로 기억하는 거예요. 한번 가볍게 해 보자구요.”
“그치만…… 전 향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데요.”
“향에 대해서 아는 게 아무것도 없는 사람은 없어요. 우린 모두 페로몬 향을 맡으면서 살잖아요. 그 향이 나한테 좋은지 안 좋은지, 언제나 분석하고 있고요.”
아니라고 할 수 없어 해완은 입을 다물었다. 사람의 페로몬 향은 복합적인 것이라 어떤 경향성은 있어도 하나의 향으로 정해 말하기가 어려웠다. 때문에 누군가의 향에 대해 말할 때는 단어로 단정 지어 말하기보다 다양한 풍경으로 묘사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른 아침 어린나무들이 가득한 숲속을 걷는 듯한 느낌을 주는 해언의 향처럼 말이다.
“내 향으로 한번 해 보죠.”
뭐? 강현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든 해완이 그를 바라봤다.
당황한 해완에는 아랑곳없이 강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그가 입고 있던 느슨한 진회색 터틀넥의 목 부분을 한 손으로 잡아 늘어뜨려 향이 가장 강하게 풍기는 오른쪽 목덜미를 드러냈다.
그럼에도 해완이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 않자, 강현이 이해할 수 없다는 얼굴로 말했다.
“그렇게 서 있지 말고 가까이 와요. 그래야지 제대로 향을 맡죠.”
일말의 망설임도 없는 강현의 목소리에 휘말린 해완이 주춤거리며 가까이 다가섰다. 그러자 강현은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곧게 날이 선 콧대가 도드라져 보임과 동시에 드물 정도로 길게 뻗은 목에 강한 목빗근이 섰다.
강현의 시선이 완전히 저를 벗어나자 긴장이 조금 풀렸다. 살짝 숨을 들이쉰 것만으로 강현의 페로몬 향이 깊게 느껴졌다. 처음 만났을 때부터 생각했지만, 그의 페로몬 향은 농밀했다. 굳이 이렇게 다가서지 않아도, 아마 모두가 강렬하게 인식할 만할 종류의 것이리라.
“눈 감아요.”
“네?”
해완이 어리둥절하게 묻자, 강현은 여전히 시선을 옆으로 둔 채로 대답했다.
“후각에 집중하려면 다른 감각은 차단하는 게 좋아요. 확실한 경험상 하는 말이니까, 믿어도 돼요.”
그것은 흐릿한 눈을 하고 앉아 있던 소년을 떠올리게 하는 말이었다.
어쩔 수 없이 먹먹해진 해완은 더 이상 토를 달지 않고 눈을 감았다.
“가장 먼저 뭐가 떠올라요?”
어둠 속에서 강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리고 해완은, 해언의 향을 맡을 때마다 생각했던 것처럼 어떤 숲을 떠올렸다.
하지만 그 풍경은 해언의 것과는, 절대 같지 않았다.
“숲…… 냄새?”
해완이 애매하게 대답하자, 강현은 차분하게 질문을 던졌다.
“어떤 숲? 건조해요?”
“아뇨…… 뭔가…… 비에 젖은 듯한.”
“맑고 푸른 숲이에요? 아니면 이끼가 낀 것 같은 짙은 초록?”
시각적 이미지를 요구하는 강현의 말에 해완은 더욱 깊게 눈을 감았다.
단단한 바위의 표면마저 짙은 초록빛의 이끼들이 가리고 선 숲속, 거대하고 울창하게 자란 두꺼운 줄기의 나무들이 하늘을 덮고, 그 틈새로 간신히 새어 든 한 줄기 햇빛이 발밑에 떨어지는 풍경이 떠올랐다.
“짙은 초록이요. 젖은 흙에 뿌리를 내린 아주 큰 나무들이…… 흠뻑 젖어서 얽혀 있는 것 같아요.”
“……잘했어요.”
칭찬에 얼굴을 살짝 붉힌 해완이 눈을 뜨며 몸을 뒤로 무르자 강현이 그를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내 페로몬 향에는 우디 혹은 시프레 계열이 많다는 이야기를 들었거든요. 젖은 흙, 나뭇잎, 꽃잎의 느낌이랑 오크모스 같은 향이요.”
해완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현이 목깃을 다시 내리고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그럼 다시 해 보죠.”
조금 자신감을 얻은 해완은 다시 눈을 감고 고개를 기울였다. 강현은 가이드를 주듯 느긋하게 말했다.
“이번엔 낯선 걸 찾으려고 해 봐요.”
“……연기 냄새 같은 게 있는 것 같아요.”
“맞아요. 스모키한 향조도 있어요. 또?”
이번에 해완은 한참 머뭇거린 다음에야 대답했다.
“가죽……?”
“좋아요. 하나만 더 찾아볼래요?”
“잘 모르겠어요…….”
“좀 더 집중해서, 잘 맡아 봐요.”
요구하는 목소리에 해완은 더욱 깊게 그의 향을 들이마시려 애썼다.
“……체리……?”
그때, 바로 옆에서 속삭여지는 낮고 짙은 목소리가 해완의 귀를 깊숙이 파고들었다.
“……민감하네.”
거의 튀어 오르듯 놀란 해완은 귀를 움켜쥔 채 뒤로 물러섰다.
귓가에 입을 맞출 듯 해완을 향해 고개를 돌리고 있던 강현이 태연하게 미소를 지었다.
“사실 정확히 말하면 아몬드예요. 보통 사람들은 열을 가해 볶아져 나온 아몬드가 익숙해서 고소한 느낌을 떠올리곤 하지만, 사실 생아몬드는 체리와 흡사한 향을 가지고 있거든요.”
“…….”
“자기 향내가 강한 사람들은 다른 사람들 향을 잘 인지하지 못하는 경우가 많은데, 후각이 좋네요.”
심장이 가슴을 뚫고 나올 듯이 격렬하게 뛰어, 바깥에 소리가 들릴까 무서울 정도였다. 얼굴이 터질 듯이 붉어져 있으리란 생각에 해완은 고개를 들지도 못하고 애꿎은 귀만 문질렀다.
“벌써 시간이 이렇게 됐네요. 나머지는 다음에 와서 할까요?”
시계를 흘끗 본 강현이 비스듬하게 걸터앉아 있던 몸을 바로 세우며 말했다.
대답도 듣지 않고 탁자 위에 늘어져 있던 병들을 갈무리하기 시작한 강현은 무슨 일이라도 있었냐는 듯 평온하기만 한 얼굴을 하고 있어서, 해완은 발갛게 물든 뺨을 어쩌지도 못한 채 허둥지둥 그를 도와 정리를 마무리 지었다.
날이 추우니 집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강현의 제안을 한사코 거절한 해완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작업실 밖으로 나와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겨울밤의 공기는 제멋대로 달아오른 얼굴을 순식간에 차게 식힐 수 있을 정도로 싸늘했다. 그러나 정류장까지 가는 길목마다 마주치는 사람들의 시선이 제게 자꾸만 쏠리는 통에 그마저도 마음처럼 되질 않았다.
사람들이 저를 쳐다보는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지금 해완의 마음에서 일렁이는 감정의 동요가 향을 더욱 짙게 만들고 있음이 분명했다.
집으로 돌아가는 버스는 다행히도 승객이 적었다. 해완은 목도리를 턱 밑까지 추켜올리며 맨 뒷좌석으로 향했다. 빈자리가 많아도 남들이 찾아 앉기 번거로운 곳부터 앉는 습관이 있어서이기도 했지만, 이식 수술 후 짙은 향내 때문에 주목을 받는 일이 왕왕 생기자 사람들의 눈을 피하고 싶은 의도가 생겼기 때문이기도 했다.
버스가 출발하자 해완은 뒷좌석 창문을 살짝 밀어 열었다. 좁은 틈이었지만 정신없이 밀려드는 시린 공기를 폐부 깊숙이 들이마셨다.
그럼에도 엉망으로 꼬여 있는 속은 좀처럼 풀릴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지나치게 가까이 다가와 있던, 한 획으로 그린 듯 수려하게 떨어지던 옆모습, 길게 뻗은 목과 옷을 끌어 내리던 단단하면서 섬세한 손가락, 귓가에 속삭여지던 선명한 목소리. 그 모든 것이 정리될 새도 없이 마음을 자꾸만 흐트러트렸다.
강현의 숨이 닿았던 귓가가 뜨거워지는 느낌이 들어, 해완은 이마를 서늘한 창에 붙이고 눈을 감았다.
스물여덟 살이나 먹은 주제에 가까이 다가섰다는 이유만으로 이리도 당황하는 것은 누가 봐도 우스웠을 테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해완은 그런 일에는 전혀 면역이 없었으니까.
‘관계’를 발전시키는 데 있어 페로몬이 강력한 기준이 되는 알파오메가 사회에서 향을 느낄 수 없는 장애를 가진 해완이 이성적인 상대로 받아들여지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었다.
물론 페로몬 기능 장애가 해완이 28년 동안 한 번도 누군가와 연인 관계로 발전해 본 적이 없는 것에 대한 완벽한 변명이 되지는 못할 터였다. 그러나 타고나길 내성적이고 수줍음을 많이 타는 그는 사람들이 제게 가지는 편견을 이기고 매력을 어필할 만한 성격도 되질 못했다.
그리고, 아무리 부정하고 싶어도 부정할 수 없는 사실도 있었다.
강현이 누구의 시선이라도 잡아챌 수 있는 매력적인 알파라는 사실 말이다.
위압감이 들 만한 장신임에도 잘 다듬어진 두껍지만 둔중하지 않은 체형과, 창백한 피부 위 묵으로 그려 낸 듯 긴 호선을 지닌 섬세한 눈매에 유달리 시커먼 눈동자가 주는 불균형은 강현을 좀처럼 잊을 수 없는 인상으로 만들었다.
그리고 그 페로몬 향.
그것은 한번 발을 디디면 다신 뒤를 돌아보고 싶지 않을 짙은 숲속의 냄새였다.
해언의 향과 나란히 두면 같은 태고의 나무에서 태어난 듯 느껴질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강현이 왜 그렇게 해언의 향을 잊지 못하는지 알 것 같다는 생각마저 들었다.
해일에 내던져진 것처럼 울렁이는 마음은 좀처럼 가라앉지 않았다. 강현의 존재가 일상을 망치게 두지 않겠다고 생각한 스스로를 우습게 만드는 꼴이라는 생각이 들어, 해완은 입술을 꾹 깨물고 양손으로 볼을 두어 번 짝짝 소리가 나도록 내리쳤다.
스며드는 겨울바람에 금세 언 볼이 베일 듯 따가웠으나 말도 안 되는 감정의 동요를 싹 몰아내기에는 부족하기만 했다.
버스에서 내내 찬 바람을 맞으며 온 탓인지 집으로 돌아오는 길은 유달리 춥게 느껴졌다. 몸을 부르르 떨며 현관문을 연 해완은 홀딱 젖어서는 허리에 수건 하나만을 두른 채 가스레인지 앞에서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유준을 보고 눈을 동그랗게 떴다.
“너 지금 뭐 하는 거야?”
해완의 어리둥절한 물음에 울상을 한 유준이 마구 투덜거렸다.
“또 뜨거운 물이 안 나오잖아! 샴푸칠 다 해 놨는데 헹구지도 못하고 이게 뭐야!”
그제야 해완은 유준이 냄비에 물을 받아 끓이고 있는 중이었음을 알았다. 며칠 전부터 내내 보일러가 말썽이었는데 또 온수 배관에 문제가 생긴 모양이었다.
겨울날 난방조차 되지 않는 화장실에서 찬물을 끼얹으면 거의 심장이 멎는 것처럼 느껴진다는 걸 잘 아는 해완은 유준에게 담요부터 둘러 주고 물이 끓자마자 일단 몸부터 데우라며 화장실로 들여보낸 뒤 급하게 다른 냄비를 꺼내 물을 담고 가스 불을 켰다.
화장실 안에서 유준이 연신 재채기를 하는 소리가 들렸고, 안 그래도 호흡기가 약한 유준이 감기라도 걸리면 어쩌나 하는 걱정이 스멀거리며 올라왔다.
최근 재개발 열풍이 불며 이 주택을 파는 것에만 정신이 팔려 있는 주인은 집에 어떤 하자가 생겨도 좀처럼 돈을 들이고 싶어 하지 않았다. 그것이 해완이 일주일 전부터 하루에 한 번씩 보일러 이야기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이 핑계 저 핑계를 대며 한번 보러 오지도 않은 이유였다.
목욕이야 목욕탕에 가서 하면 되니 온수가 나오지 않는 정도야 괜찮지만, 보일러가 완전히 망가져 난방조차 되지 않으면 안 그래도 웃풍이 부는 이 집에서 겨우내 버틸 수 없을 것 같아 자꾸만 한숨이 나왔다. 그렇게 되면 근처에 모텔이나 여관방을 잡는 게 차라리 현명할지도 모를 일이었다.
“형! 물 아직 다 안 끓었어?”
유준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들어 냄비를 들고 화장실로 들어간 해완은 큰 고무 대야에 담긴 찬물에 끓는 물을 섞어 온도를 적당히 맞추고 벌벌 떨고 있는 유준의 머리에 다짜고짜 한 바가지 끼얹었다. 눈에 비누 거품이 들어갔다며 칭얼대는 유준의 찡그린 얼굴은 그의 기억 안에 있는 대여섯 살 꼬마와 별다를 게 없어 해완은 씩 웃으며 유준의 머리를 마구 흩트려 주고는 밖으로 나왔다.
다시 강현의 생각이 든 것은 정신없이 물을 끓여 가며 유준과 해완 둘 다 겨우 몸을 씻고 잠자리에 누운 다음이었다.
아무리 청소해도 퀴퀴한 냄새가 나는, 이 허름하고 작은 방 한편에 몸을 누이고 나니, 강현의 아름다운 중정이 있는 비현실적인 작업실 안에서 생기는 일들은 그저 멀게만 느껴졌다.
그 안에서 일어나는 일은 절대 이곳까지 따라올 수 없는 것을, 뭐 그리 바보처럼 어쩔 줄 몰라 했을까.
그런 생각이 들어, 해완은 저도 모르게 어둠을 향해 작은 웃음을 흘리고 조용히 눈을 감았다.
* * *
“왜요, 이상해요?”
시향지에 뿌린 향료의 냄새를 맡은 해완의 얼굴을 본 강현이 웃음을 터트리며 말했다.
“……꼭 배설물 냄새 같은데…….”
해완은 강현이 건네준 시향지를 탁자 위에 내려 두며 코를 문질렀다. 강현은 시향지에 뿌린 향료병을 원래 자리로 돌려놓으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시벳 향이에요. 영묘향이라고도 하는데, 사향고양이의 생식선에서 나오는 분비물을 용해시켜서 만들어요. 이대로 맡으면 역한 냄새지만 섞이는 향과 농도를 어떻게 조절하느냐에 따라서 느낌이 완전히 달라지거든요. 베이스 노트로 사용하면 고정력이 좋아서 향의 지속력도 높여 주고요.”
강현의 설명에도 이런 냄새를 사용해서 향수를 만드는 게 잘 상상이 가질 않아 해완은 고개를 갸웃거렸다.
강현의 작업실에 일을 도우러 다닌 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나갔다. 해완을 소스라치게 놀라게 만들었던 그날 이후 바싹 긴장해 있던 것을 눈치채기라도 했는지 강현은 정말 함께 일하는 동료라도 된 것처럼 적당한 거리를 유지하고 있었다.
그러나 조향에 취미를 붙여 보지 않겠냐는 말은 진심이었던 듯 강현은 해완에게 향료나 조향하는 법에 대해서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해 주곤 해서, 어느새 해완은 강현의 작업실로 향할 때마다 그가 무슨 이야기를 해 줄지 저도 모르게 기대를 하게 됐다.
다양한 향료들에 대해 알게 되고 그것을 세분화할 수 있게 되면 될수록 지나가는 사람들의 페로몬 향도 전과는 다르게 느껴졌다. 언젠가 들었던 강현의 말마따나, 일상생활에서 접하는 모든 향들이 새로운 취미가 될 수 있는 것 같기도 했다.
그런 생각에, 해완은 인상을 찡그리면서도 시향지에 뿌려진 시벳 향을 한 번 더 맡아 보았다. 문득 강현이 조용해졌음을 깨달은 해완이 그를 바라보자, 강현은 연한 미소를 띤 채 해완을 흥미로운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유를 알 수 없는 시선에 해완이 왜냐고 묻기도 전에 강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윤보리 씨는 사람 얘길 참 잘 들어 주는 것 같아요.”
강현은 이런 식으로 갑작스럽게 칭찬을 자주 하곤 했다.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해완은 멋쩍은 듯 작게 중얼거렸다.
“아…… 전 말주변이 별로 없어서, 얘기를 하는 것보다 듣는 게 마음 편하거든요.”
“그것도 큰 능력 같은데. 내가 무슨 이야기를 하건,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이야기를 하는 것처럼 느끼게 만드는 거.”
그리고 강현은 별것 아니라는 듯 무심하게 말했다.
“그때 취미가 없다고 했었나요? 당신한테 취미가 있다면 다른 사람들을 기분 좋아지게 하는 게 취미일 거예요.”
말수가 적은 데 대해 이런 식으로 칭찬을 들어 본 건 처음이어서, 해완은 어쩔 수 없이 얼굴에 뜨겁게 열이 올랐다.
꼴사납게 귀까지 빨개져 있을 게 분명해 망가진 보일러나 연락 없는 집주인같이 우울한 것으로 애써 생각을 돌려 보려 해 봤지만, 입가에 둥근 미소를 짓고 있는 강현을 바로 앞에 두고는 잘 되질 않았다.
“그런 의미로, 이번 주말에 나랑 놀아 주지 않을래요?”
“……네?”
“나, 친구 별로 없거든요. 보아하니 윤보리 씨도 별로 없는 것 같으니까 친구 없는 사람들끼리 같이 놀자구요.”
해완은 눈만 껌뻑이다가 시선을 내리고 말했다.
“주말에도 일하는 거 알잖아요.”
“그날은 고깃집 알바 하나밖에 안 하잖아요. 저녁에 만나면 되죠.”
“미안해요. 일이 힘들어서 끝나고 나면 많이 피곤해서 좀 힘들 것 같아요.”
“그럼 저녁이라도 같이 먹어요. 맛있는 거 사 줄게요.”
“아니요. 안 그러는 게 좋을 것 같아요.”
저도 모르게 강해진 해완의 어투에, 강현의 얼굴에 걸려 있던 미소가 천천히 잦아들었다. 그는 얼굴을 굳히고 짙은 눈썹을 매만졌는데, 심기가 불편할 때 나오는 버릇인 모양이었다.
“왜요?”
강현은 나지막하게 물었다. 해완은 목을 가다듬고 애써 입을 열었다.
“그냥…… 만나는 건 여기서만 했으면 좋겠어요.”
제가 요구할 처지가 아니라는 것도 뻔뻔하다는 것도 알았다.
그럼에도, 지난밤 생각했던 대로 강현과의 모든 일은 이 안에 가둬 놓은 채 둬야만 한다는 강한 필요성이 해완을 압박하고 있었다.
그 말에 강현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평온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윤보리 씨가 바라는 거고 내가 바라는 건 따로 있는데.”
“…….”
“근데, 내가 바라는 걸 하자니 돈을 미끼로 강요하는 개새끼가 되는 것 같고, 결국 내가 할 수 있는 건 아무것도 없네요. 그렇죠?”
목소리와는 달리 내용에는 날이 서 있었다. 해완은 아무 말 없이 입술을 깨물었다.
해완이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있는 사이 무거운 침묵이 흘렀다. 흘끗 올려다본 강현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없어 더욱 난처하게만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현관문 벨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란 해완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현관을 향했다. 같은 방향으로 눈을 돌린 강현 역시 이 시간에 찾아올 사람에 대해 어떤 단서도 없어 보였다.
그러나 곧, 문득 뭔가 생각난 듯 핸드폰을 확인한 강현은 난감한 얼굴로 인상을 찡그렸다.
“미안해요. 잠깐만요.”
짧은 사이도 기다리지 못하고 현관 벨이 연신 울리자 몸을 일으킨 강현은 해완이 뭐라 답할 새도 없이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벨소리가 멈추고 고요한 적막이 차오른 것도 잠시, 누군가 건물 안으로 들어온 듯 낯선 목소리가 점점 가까워지기 시작했다.
손님이 온 자리에 제가 있어서는 안 될 것 같아 해완은 몸을 일으키고 짐을 챙기기 시작했다. 하지만 해완이 겉옷을 다 챙겨 입기도 전에 어떤 젊은 여자 한 명이 목소리를 높이며 응접실 안으로 불쑥 들어왔다.
“아니, 대체 왜 들어오지 말라고…….”
길고 찰랑이는 까만 머리를 휘날리며 들어온 여자는 창백한 얼굴에 목탄으로 그려 낸 듯 뚜렷한 이목구비를 가진 미인이었고, 어딘가 강현을 닮아 있었다.
여자는 해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화려한 얼굴에 노골적으로 놀란 표정을 띠었다. 짙은 눈썹이 꿈틀한 것과 동시에 그녀는 호기심이 가득 어린 말투로 입을 열었다.
“누구세요?”
저를 어떻게 소개해야 할지 몰라 해완은 머뭇거렸다.
“저는, 그게…….”
“내 친구야.”
다행히도 강현의 목소리가 난감한 질문에서 해완을 구해 주었다. 구세주를 만난 듯 반사적으로 강현을 향한 해완의 눈이 그의 뒤를 따라 들어오고 있는 생물체를 보고 둥그렇게 변했다.
그것은 아주 야무지게 생긴 보더콜리였다. 금빛에 가까운 갈색과 흰색이 섞인 장모에 영리하기 그지없어 보이는 까만 눈을 가진 보더콜리는 강현이 옆에 앉으라는 지시를 내리자 곧바로 자리에 앉아 혀를 반쯤 빼물고 고개를 갸웃거리며 해완을 바라보았다.
“친구? 네가 언제부터 친구가 있었는데?”
의아하기 그지없다는 듯 높아진 여자의 목소리에 강아지의 반짝이는 눈동자에 홀려 있던 해완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슬쩍 강현을 바라보자, 그는 별거 아니라는 듯 무성의한 태도로 대꾸했다.
“꼭 누나한테 허락이라도 맡고 친구 사귀어야 되는 것처럼 말하네.”
강현이 그녀를 ‘누나’라고 부르는 것을 들은 해완의 귀가 쫑긋했다. 가까운 사이에도 누나라고 부를 수야 있겠지만, 지나치게 허물없는 말투와 더불어 누가 봐도 비슷한 분위기를 가진 두 사람이기에 내심 혈연일 것이라는 확신이 들었다.
여자는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지금까지 니가 살아온 삶이나 되돌아보고 그런 소릴 해.”
그리고 그녀는 홱 눈을 돌려 해완을 바라보았다. 평가라도 하는 듯 빠르게 오르내리는 시선에 당황한 해완은 저도 모르게 사선으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해완의 반응을 본 여자의 입가에 이것 보라는 듯 비스듬한 미소가 떠올랐다. 다시 강현에게 시선을 향한 그녀가 장난기 어린 말투로 물었다.
“잠깐, 그래서 보리 데려가는 것도 잊어버리고 니 ‘친구’랑 놀고 있었던 거야?”
보리? 여자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해완은 번쩍 고개를 쳐들고 강현을 바라보았다.
“노느라 잊어버린 게 아니라 일이 바빴어. 그렇다고 해서 여기로 데려올 건 없잖아.”
“보리도 보리지만 내가 맡긴 거 체크하러 온 거야. 중요 클라이언트들한테 보낼 선물이라 절대 늦으면 안 돼.”
“디퓨저 얘기라면 다음 주 금요일까지 준다고 했잖아. 여기 윤보리 씨도 도와주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순간, 여자의 한쪽 눈썹이 높게 튀었다.
“뭐? 보리? 그쪽 이름이 보리예요? 여기 우리 보리랑 똑같은?”
보더콜리 보리를 손가락질까지 하며 묻는 여자의 황당한 목소리에 이미 벌겋게 달아오르기 시작하고 있던 해완의 얼굴은 숫제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변했다.
그런 해완을 본 강현이 급하게 말끝을 잡아챘다.
“왜, 이름이 보리면 안 된다는 법이라도 있어?”
강현의 타박하는 말투에도 여자는 인상을 찌푸리며 중얼거렸다.
“아니, 그런 건 아니지만……. 그래도, 좀 이상하잖아.”
“그만해. 사람 무안하게 왜 그래?”
저에 대한 이야기임에도 끼어들 틈이 없는 대화에 해완은 붉어진 얼굴로 입술만 깨물었다. 그런 해완을 바라보던 여자의 입이 다시 열리려는 찰나, 앞으로 나선 강현이 잽싸게 말을 가로막았다.
“늦었는데 이제 그만 가지?”
“지금 나 쫓아내는 거야?”
“어, 맞아. 쫓아내는 거야.”
강현은 그녀의 어깨를 감싸 안고 반쯤 강제로 응접실 바깥으로 데리고 나갔다. 폭풍이 휘몰아치듯 순식간에 종료된 상황에 홀로 남겨진 해완은 얼떨떨한 기분이었다.
그러나 곧, ‘홀로’ 남지 않았다는 것을 깨달은 해완의 시선이 아래로 향했다. 보더콜리, 아니, 보리는 아주 얌전히 그 자리에 엎드려 있었다.
해완은 동물을 좋아했다. 산타 할아버지가 있다고 믿었던 순진한 어린 시절에는 매일같이 이번 크리스마스부터는 강아지를 키우게 해 달라고 소원을 빌 정도였다.
하지만 산타는 끝내 그 선물만큼은 주지 않았다. 그것이 원망스러워 눈물까지 글썽인 적이 있었지만, 그게 얼마나 어려운 소원이었는지 나이를 먹으며 자연스럽게 깨닫게 되었다. 부모를 잃은 20여 명의 아이들이 관심과 애정에 허덕이며 우글거리는 공간에서 동물까지 키우는 것은 불가능에 가까운 일이라는 걸 말이다.
해완은 쪼그려 앉으며 보리와 시선을 맞추었다. 다행히도 그가 마음에 드는지, 호기심에 가득 찬 반짝이는 눈과 마주치자마자 꼬리가 열렬하게 흔들렸다.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목덜미를 쓰다듬어 주고 싶어서 손이 근질거렸다. 하지만 해완이 즐겨 보는 동물 관련 프로그램에서 봤던 내용이 그를 멈칫하게 만들었다.
해완은 보리를 다짜고짜 만지는 대신 냄새를 맡을 수 있도록 조심스럽게 손을 내밀었다. 보리는 그 자리에서 움직이지는 않았지만 코를 킁킁거리며 적극적으로 해완의 손의 냄새를 맡았다.
촉촉한 코가 손등을 스칠 때마다, 보리가 맡고 있는 냄새가 자신의 것인지 해언의 것인지 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아지를 받지 못해 울먹이는 열 살의 해완을 앞에 두고 여덟 살의 해언은 산타는 필요 없다며 어른이 되면 자신이 해완에게 강아지를 사 줄 테니 함께 기르자며 큰소리를 쳤었다.
이제 와 생각해 보면, 해언은 산타가 없다는 것을 그때부터 알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질리지도 않고 스미는 눈물을 삼키기 위해 해완은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조금 용기를 내어 손을 턱 밑에 가져다 댔는데도 보리는 즐겁게 헥헥거릴 뿐 별다른 거부 반응은 보이지 않았다.
네가 해언이와 내 냄새를 둘 다 맡을 수 있으면 좋겠어.
그러면 어릴 때의 바람대로, 해언이와 강아지를 같이 기르는 것처럼 느낄 수 있잖아.
그런 생각이 들어, 해완은 연한 미소를 지으며 보리의 턱밑을 조심스럽게 간질였다.
“낯선 사람한테도 전혀 적대심이 없는 걸 보니, 훈련한 보람이 없네요.”
예상치 못하게 들려온 강현의 목소리에, 해완은 흠칫 놀라며 손을 뒤로 물렀다. 해완의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보리도 깜짝 놀란 듯 몸을 벌떡 일으켰지만 다가선 강현이 머리를 쓰다듬으며 진정시키자 금세 얌전하게 그의 옆을 지키고 앉았다.
해완은 땀이 배어 나온 손바닥을 청바지에 문질러 닦으며 황급히 말했다.
“미안해요, 맘대로 만지면 안 되는 건데.”
강현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보리의 갸름한 얼굴을 어르기 시작했다.
“어릴 때는 그냥 낯을 안 가리는구나 싶었는데, 나이를 먹어도 사람을 지나치게 좋아하더라구요. 개가 너무 경계심이 없어도 좋지 않은 것 같아 따로 훈련을 시켰는데도 타고난 성격은 어쩔 수 없나 봐요.”
그러더니 강현은 보리의 주둥이를 양손으로 잡고 눈을 맞추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아니면 윤보리 씨가 첫눈에 맘에 든 건가? 그래, 보리야?”
그 말을 듣자 해완의 얼굴이 다시 달아올랐다.
“……내 머리가 밀밭 같아서 그렇게 부르겠다고 했잖아요.”
강현은 순진한 척 눈을 깜빡이며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래서 윤보리라고 부르는 거 맞는데.”
“여기 보리 이름을 따서 날 부르는 게 아니라고요?”
“내가 왜 보리 이름을 따서 윤보리 씨를 부른다고 생각해요? 당신이 보리랑 닮아서?”
해완은 말문이 턱 막혔다. 강현은 제가 양손에 쥐고 있던 보리의 얼굴과 해완의 얼굴을 짐짓 심각하게 번갈아 보더니, 보란 듯이 보리의 고개를 해완 쪽으로 돌리게 했다.
“안 닮았는데. 이것 봐요. 윤보리 씨보다 우리 보리가 훨씬 야무지게 생겼잖아요.”
뻔뻔하기 그지없는 말투에 어이가 없어진 해완이 입만 벙긋거리는 사이, 강현은 갑자기 대단한 발견이라도 했다는 듯 무릎을 탁 쳤다.
“아, 미안해요. 닮긴 했네요. 근데, 지금 말고 옛날 보리랑 닮았어요. 태어난 지 83일쯤에 처음 데려왔을 때.”
“……그걸 지금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붉으락푸르락한 얼굴로 어쩔 줄 모르던 해완이 간신히 입을 열자, 강현이 장난스러운 눈으로 말했다.
“개랑 닮았다고 해서 화났어요? 보는 사람마다 보리 예쁘고 귀엽다고 하던데 그렇게 기분 나쁠 일인가.”
“그런 게 아니라, 여강현 씨가 나한테 자꾸 장난치니까 그런 거잖아요.”
“장난친 거 아니에요. 윤보리 씨 보고 밀밭이 생각난 것도 맞고, 보리가 생각난 것도 맞아요. 봐요, 보리 털색도 밀밭색이잖아요. 물론 두 번째 이유를 생략한 건 맞지만 말 안 한 게 죄는 아니잖아요.”
하여튼 말 하나는 청산유수였다. 해완은 더는 타박할 말을 찾지 못하고 입을 일자로 꾹 다물었다. 강현은 몸을 일으키며 웃음기 어린 말투로 물었다.
“개 좋아하는 것 같은데, 키워 본 적 있어요?”
“좋아하는 건 맞는데…… 키워 본 적은 없어요.”
“그럼 우리 보리랑 친하게 지내면 되겠네요.”
강현은 보리를 해완 쪽으로 가까이 이끌며 다가서도록 격려했다. 주인의 허락을 받자 보리는 좀 더 적극적인 태도로 해완의 손과 발의 냄새를 맡으며 꼬리를 흔들었고, 해완은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몸을 낮춰 보리를 양손으로 마음껏 쓰다듬었다.
“보리도 윤보리 씨가 좋은 모양이네요. 역시 동질감이 느껴져서 그런가 봐요.”
“이제 그만 좀 놀려요.”
해완의 불퉁한 목소리에 강현이 피식 웃음을 터트리며 벽에 비스듬히 기대어 섰다.
“장난 아니에요. 서연 누나 대신 가끔 돌봐 줘도 좋을 것 같은데.”
“아까 그분 얘기하는 거예요?”
“아, 네. 사촌 누나예요. 내가 바쁠 때마다 가끔 보리를 돌봐 주거든요. 누나네 집은 정원이 넓어서 보리가 좋아하기도 하구요.”
“……우리 집엔 정원이 없어서 보리가 안 좋아할 것 같은데요.”
약간 낑낑대는 보리의 턱과 이마를 정신없이 간질이며 해완이 중얼거리자 강현이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그건 문제가 안 돼요. 내 집에 와서 봐 주면 되니까.”
연신 보리를 쓰다듬던 해완의 손이 덜컥 굳었다. 침을 꿀꺽 삼킨 해완은 애써 태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가 그쪽 집에서 무슨 짓을 할 줄 알고 그런 말을 해요.”
해완의 말을 농담으로 받아들였는지 강현은 가볍게 대답했다.
“왜요, 내 집에서 도둑질이라도 하게요?”
“그럴 수도 있죠. 여강현 씨는 내가 진짜 어떤 사람인지 아무것도 모르잖아요.”
강현은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내려앉은 침묵에 목뒤가 한없이 무겁게 느껴졌다. 해완은 애써 보리의 동그란 이마에 눈을 고정시킨 채 불편함을 삼키려 애썼다.
“맞는 말이지만, 나쁜 짓을 할 만한 사람은 아니란 걸 알죠. 그런 사람이 본인이 빌리지도 않은 돈을 책임지겠답시고 억지로 이 자리에 있진 않을 테니까.”
차분한 목소리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시선을 올렸다.
“알아요. 윤보리 씨 입장에선 한 달 뒤에 우리 만남이 끝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것도, 나랑 개인적인 시간을 갖고 싶지 않다는 것도요. 그냥 그것도 일이라고 생각해요. 어차피 돌봐 줄 사람을 돈을 주고 부를 때도 많거든요.”
그런 말을 하는 강현의 얼굴에는 별다른 표정이 드러나 있지 않았지만, 제가 당치도 않는 피해자 행세를 하고 있다는 생각에 삽시간에 마음이 불편해졌다.
유준이 빌린 돈이 아니었다면 이 자리에 있지 않았을 것은 분명했으나 사실 강현이 해완에게 잘못한 일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가 저를 해언이라고 오해할 만한 사정이 분명히 있었고, 이기적인 이유로 그것에 대해 충분히 해명하지 않은 것은 해완 자신이었으니까.
그럼에도 강현은 유준을 용서해 주고 나름대로 해완의 입장을 배려해 줬을 뿐 아니라 금전적인 것이든 무엇이든 저와 보내는 시간에 대한 보상을 해 주려고 애쓰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강현에게 그 스스로를 나쁜 사람처럼 느끼게 만들었다는 죄책감이 심장을 꾹 내리눌렀다.
해완은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고 강현을 바라보았다. 먹처럼 새카만 눈이 해완을 향했다.
“하기 싫은 일 하는 거 아니에요. 유준이 일 넘어가 준 것도, 나한테 과분한 일자리를 준 것도, 친절하게 대해 주는 것도, 전부 다 진심으로 고맙게 생각해요.”
“…….”
“그래서…… 그래서 더 여강현 씨를 더 오해하게 하고 싶지 않은 것뿐이에요.”
“무슨 오해요?”
“…….”
“당신이 윤해언이 아니라는 거?”
비스듬한 시선으로 해완을 내려다보는 강현의 얼굴은 매끄러운 가면을 쓴 것처럼 표정이 없어, 해완은 순간 목이 턱 막히는 느낌이 들었다.
그때, 일자로 다물려 있던 강현의 입술이 연한 호선을 그렸다. 거짓말처럼 싹 물러간 차가운 분위기에 해완은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강현은 그런 해완을 향해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면, 이번 주말에 같이 영화 보는 걸로 해요.”
“……왜 이야기가 그렇게 되는 건데요?”
“내 오해를 풀고 싶은 거 아니었어요? 당신이 해언이가 아니라는 걸 알아 갈 시간이 있어야 오해를 풀죠.”
틀린 말은 아니라 할 말이 없어진 해완은 애꿎은 머리만 헝클어트렸다. 거기다 강현의 제안을 두 번씩이나 거절하는 것도 마음에 걸려 말이 나오질 않았다.
해완의 난감함을 읽기라도 한 듯 강현은 단호하게 덧붙였다.
“윤보리 씨가 지금 날 거절해도 내가 다시 물어볼 거 알잖아요.”
결국 해완은 마지못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의 얼굴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크게 떠올랐다. 그는 무언가 더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으나 마침 주머니에서 울리는 핸드폰 진동 소리에 멈칫했다.
핸드폰을 꺼내 전화가 온 것을 확인한 강현이 양해를 구했다.
“향료 납품 업체네요.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구체적인 약속은 그다음에 정해요.”
해완이 다시 고개를 끄덕이자 강현은 전화를 받으며 향료 보관실 쪽으로 사라졌다.
완전히 말려든 기분에, 혼자 남은 해완은 고개를 푹 숙이며 크게 한숨을 내쉬었다. 요란한 한숨 소리에 보리는 무슨 일이냐는 듯 월! 하고 짖었다.
복잡한 기분을 떨쳐 내고 싶어 보리의 동그란 이마를 쓰다듬던 해완은 짐짓 밝게 입을 열었다.
“네 이름을 빌려 써서 미안해, 보리야. 사정이 있어서 그러는 거니까, 조금만 이해해 줘.”
보리는 해완의 말을 이해라도 하는 듯 기분 좋은 얼굴로 헥헥거렸다. 그런 보리의 턱과 목덜미를 연신 간질이던 해완이 주위를 슥 둘러보고 목소리를 낮춰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대신…… 너한테만 내 이름을 알려 줄게. 아무한테도 말하면 안 돼?”
“…….”
“나는 윤해완이라고 해.”
평생을 써 온 이름인데도, 이상하게 낯설게 들렸다.
해완은 보리의 부드러운 털에 이마를 문지르며, 마음에 새기듯 한 번 더, 속삭였다.
“내 이름은…… 윤해완이야.”
* * *
핸드폰 시계를 한 번 확인한 해완은 거의 달리다시피 강현과 만나기로 한 초대형 멀티플렉스 광장으로 향했다. 주말에 해완이 일하는 고깃집과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으나 몸에 밴 고기 냄새를 찬 바람에 조금이라도 날려 버리고 싶어 한 정거장 일찍 내려 걸어온 탓에 약속 시간이 아슬아슬했다.
냄새에 유독 민감한 강현과 만나는 자리가 하루 종일 고기 굽는 연기가 자욱한 곳에서 보내다 온 이후라는 게 영 마음에 걸렸다. 옷은 미리 집에서 챙겨 온 것으로 갈아입기는 했지만 살갗이나 머리칼에 냄새가 배었을까 하는 걱정을 지우지 못하고 걷던 해완의 바쁜 발걸음이 스르르 멈췄다.
멀찍이 기둥에 기대선 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강현을 발견한 탓이었다.
주말이라 사람들이 가득 찬 광장임에도 불구하고 남들보다 머리 하나가 불쑥 솟아 있는 강현은 단번에 눈에 띄었다.
곱슬기가 있는 머리를 이마 위로 깔끔히 올려 정리한 그는 짙은 회색 코트에 버건디빛 터틀넥 스웨터를 입고 얼굴에는 까만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키가 워낙 크다 보니 꼭 화보에서 튀어나온 모델 같아 지나가는 사람마다 꼭 한 번씩 흘끗 쳐다보고 걸어갈 정도였다.
향에 민감해서 밖에 나갈 때는 마스크를 쓰고 다닌다는 강현의 말을 떠올린 해완은 자기도 모르게 킁킁 손등의 냄새를 맡았다.
손만큼은 틈틈이 계속 씻은 덕에 제가 맡기에는 바람 냄새 말고 아무것도 나질 않았지만, 강현의 후각이 남들보다 훨씬 뛰어난 것을 아는 이상 안심할 수가 없었다.
그때, 해완의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강현이 고개를 들었다. 아직 마음의 준비가 되지 않은 해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츠렸지만 해완 역시 작은 키가 아니었기에 강현은 그를 바로 발견했다.
마스크로 가린 입가는 보이지 않았으나 미소를 지은 듯 길고 나른한 눈매가 부드럽게 휘어졌다. 해완은 머쓱하게 내키지 않는 발걸음을 옮겼다.
“언제 왔어요?”
“한 5분 전에요. 오늘 일은 잘했어요?”
“그렇죠, 뭐.”
“배고프겠다. 밥 먹으러 갈까요? 중식 괜찮죠?”
해완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현은 주저 없이 맛있는 곳을 안다며 그를 이끌었다. 알고 보니 멀티플렉스와 연결되어 있는 호텔 안의 중식당을 예약해 둔 모양이었다.
식당으로 향하는 동안 여전히 고기 냄새가 날까 봐 신경이 쓰였던 해완은 강현과 약간의 거리를 유지하며 걸었다. 강현은 해완에게 몇 번 말을 건넸지만 인파가 하도 북적이는 통에 사람들이 두 사람 사이의 틈을 비집고 지나가는 일이 연이어 일어나자 결국 우뚝 멈춰 서더니 답답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그렇게 떨어져서 걷는 거예요? 사람도 많은데.”
해완은 조금 우물쭈물하다, 어쩔 수 없이 입을 열었다.
“그게, 이상한 냄새가 날까 봐 그래요.”
“…….”
“하루 종일 고기 냄새가 꽉 찬 곳에서 일하면 어쩔 수 없이 냄새가 배거든요.”
짙은 눈썹이 꿈틀하는가 싶더니, 강현은 갑자기 해완의 팔을 쥐고 제 가까이 끌어당겼다. 당황할 새도 없이 해완이 딸려 가자마자 저들끼리 장난을 치느라 앞도 보지 않고 서로를 밀쳐 대던 한 무리의 고등학생들이 요란한 소리를 내며 지나갔다.
자칫 부딪칠 뻔한 걸 구해 준 것이겠지만, 거의 강현의 가슴팍에 붙어 서 있음을 깨달은 해완은 화들짝 놀라 몇 발짝 뒤로 물러서려 했다.
하지만, 제 팔을 쥔 강현의 단단한 손에 멀어질 수가 없었다.
“쓸데없는 걱정 하지 말고 가까이 걸어요. 좋기만 하니까.”
무심한 목소리로 말하며 강현은 해완의 팔을 툭 놓아주었다. 주어가 없는 모호한 말이었으나 그가 무엇에 답한 것인지 깨달은 해완의 얼굴이 붉어졌다.
“가죠. 영화까지 보려면 시간 빠듯한데.”
해완은 괜히 머리만 쓰다듬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시 걷는 내내 연신 강현의 팔과 어깨가 해완의 몸에 툭툭 스쳤는데, 그렇게 닿는 부위가 이상하게 찌릿대는 것처럼 느껴졌다.
호텔 고층에 위치한 중식당에 도착한 두 사람은 야경이 보이는 안쪽 테이블로 안내받았다. 굳이 따지자면 기름진 음식을 좋아하지 않아 중식을 딱히 선호하지는 않았음에도 음식은 모두 감탄이 나올 정도로 맛있었다. 하지만 단품 몇 가지만으로도 손쉽게 몇십이 넘어가는 식사 가격에 마음이 불편해지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볼 영화는 만나서 정하기로 했기 때문에 식당에서 나온 두 사람은 일단 영화관으로 향했다. 영화관에 도착해 키오스크 앞에 선 해완은 티켓값은 자신이 결제하겠다 우겼다. 고작해야 이만 오천 원 남짓한 티켓을 사 봐야 기분 내기 말고는 별 의미 없겠지만 그것이라도 해야 조금이나마 속이 편할 듯했다.
강현은 자신이 놀자고 했으니 자신이 사야 한다고 인상을 찡그렸지만, 해완이 단호하게 굴자 마지못해 그러라고 답했다.
“어떤 영화 보고 싶어요?”
여전히 마뜩지 않아 보이는 강현의 주의를 돌리기 위해 해완이 재빨리 물었다.
“글쎄요, 영화는 대부분 집에서 봐서 신작들을 챙겨 보진 않거든요.”
박스 오피스 순위별로 나열된 예매 가능 목록을 보며 키오스크 화면을 스크롤하던 해완이 강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어떤 장르를 많이 보는데요?”
강현은 망설임도 없이 곧바로 답했다.
“로맨스, 멜로, 뭐 그런 거.”
액션이나 스릴러 같은 대답을 기대하고 있던 해완은 의아한 얼굴로 고개를 살짝 갸웃했다. 그런 해완을 흘끗 본 강현이 되물었다.
“왜요? 안 어울려요?”
“……네.”
솔직한 대답에 강현이 고개를 숙이며 픽 웃음을 터트렸다. 저런 식으로 웃는 걸 보는 건 처음이었는데, 새카만 눈동자에 뚜렷한 삼백안을 가진 탓에 조금만 표정을 굳히고 있어도 싸늘하기 그지없는 얼굴에 금세 소년 같은 기운이 감도는 게 신기했다.
해완이 그를 멍하니 응시하는 것을 느낀 강현이 눈을 살짝 치켜떠 그를 바라보았다. 삽시간에 얼굴이 달아올라 급히 고개를 돌린 해완은 허둥지둥 말을 꺼냈다.
“왜…… 왜 로맨스를 좋아하는데요?”
“배울 게 많아서요.”
“……어떤 걸요……?”
해완의 물음에 강현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짓더니 갑자기 키오스크 화면을 짚으며 말했다.
“이거 볼까요?”
강현이 가리킨 화면 속 영화는 포스터만 봐서는 발랄한 분위기의 로맨틱 코미디처럼 보였다. 그다지 인기 있는 영화는 아닌지 스크롤을 한참 내리고서야 있는 것이었는데 어떻게 발견했는지 모를 일이었다.
정말 이런 영화들을 좋아하긴 하나 보네, 그런 생각이 들어 해완은 슬며시 비집고 나오려는 미소를 숨기기 위해 고개를 숙였다.
외모만으로 편견을 가져서는 안 되겠지만, 남다른 체격에 잘 깎아 낸 듯한 얼굴선까지 그야말로 알파메일의 화신처럼 생겨서는 멜로나 로맨스 영화를 좋아한다는 게 의외의 면모라 신선하기도 하고 조금 귀엽게도 느껴졌다.
영화는 40분 뒤에 시작이라 조금 시간이 뜬 두 사람은 일단 근처에 있는 카페로 향했다. 강현이 커피를 주문하는 사이 해완은 화장실을 다녀오겠다며 자리를 떴다.
손을 씻으며 거울을 보자 볼이 살짝 발갛게 달아올라 있는 것이 보였다. 이렇게 평범하게 나와 노는 시간이 너무나 오랜만이라, 마음이 들뜬 탓이었다.
강현 앞에서 내내 이런 얼굴을 하고 있었을까 봐 민망해진 해완은 찬물에 젖어 차가워진 손등으로 연신 볼을 만졌다. 열을 식히는 데 얼마나 정신이 팔려 있었는지 화장실을 나오다가 어떤 남자와 어깨까지 툭 부딪치는 바람에 허둥지둥 사과까지 해야 했다.
“저기요. 저기, 잠깐만요!”
그런데 카페 입구로 다시 들어서려던 무렵 뒤에서 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어리둥절해진 해완이 뒤를 돌아보자, 어떤 남자가 빠른 걸음으로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아까 화장실에서 부딪친 사람인데요.”
내가 사과를 제대로 안 했나? 당황한 해완이 눈을 깜빡이자, 남자가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게, 혹시 만나는 분 없으시면 번호 좀 받을 수 있을까 해서요.”
그런 말을 하는 남자는 알파였다. 차가운 손으로 겨우 식힌 열이 무색하게 해완의 얼굴이 다시 귀 끝까지 달아올랐다.
고작 번호를 물어보는 것만으로 속이 뒤집어지듯 당황할 필요는 없겠지만, 이전까지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다가 향을 가지게 된 이후 갑작스럽게 생기는 생경한 경험들에 적응하기는 해완에겐 좀처럼 쉽지 않았다.
해완은 목을 가다듬고 간신히 입을 열었다.
“어…… 죄송합니다. 일행이 있어서요.”
남자의 눈도 제대로 마주치지 못하고 빠르게 말한 해완은 고개를 꾸벅 숙이고 바로 뒤를 돌았다. 하지만 남자는 해완의 팔을 붙잡고 끈질기게 굴었다.
“지금 시간 안 되시면 번호만 주시면 안 돼요? 정말 제가 너무 마음에 들어서 그래요.”
무례하다고 느낄 정도로 세게 잡힌 팔에, 해완은 조금 힘을 줘서 남자의 손아귀에서 팔을 잡아 빼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나 해완이 어떤 말을 꺼내기도 전에, 갑자기 긴 그림자가 불쑥 다가섰다. 강현이었다.
“무슨 일이에요?”
해완의 앞으로 살짝 나선 강현이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갑작스러운 등장에 심장이 크게 뛴 해완은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이분이 뭘 물어보셔서.”
하지만 강현은 해완의 말에 대답하지 않았다. 아니, 해완을 바라보지도 않았다. 강현의 눈은 해완을 따라온 남자에게만 못 박혀 있었다.
남자가 당황한 듯 해완과 강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강현은 그런 그를 내려다보듯 응시하며 다시 한번 물었다.
“무슨 일이냐고 묻잖아요.”
남자의 눈높이가 해완보다 살짝 높았으니 그도 180은 넘는 키였겠지만, 강현의 앞에서는 꼼짝없이 올려다봐야 하는 꼴이었다.
결국 남자는 우물쭈물 죄송하다고 중얼거리더니 빠른 걸음으로 어디론가 사라져 버렸다.
남자가 완전히 사라질 때까지 그의 뒷모습에서 시선을 떼지 않던 강현의 눈이 느리게 해완을 향했다.
이상했다. 아무 짓도 하지 않았는데 나쁜 짓이라도 한 것처럼 가슴이 쿵 내려앉아서, 해완은 강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시선을 돌렸다.
“벗는 게 좋을 것 같아요.”
그러나, 뒤이어 들려온 이해할 수 없는 강현의 말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그를 바라보았다.
“네?”
“그 겉옷이요. 이제 보니 이상한 냄새가 밴 게 맞네요. 벗었으면 좋겠어요.”
얼굴이 화끈 달아올랐다. 패딩은 이것 하나뿐이라 니트나 바지처럼 갈아입고 올 수가 없었으나 직원 탈의실 안에 걸어 두어서 괜찮은 줄 알았다.
해완은 거의 더듬거리며 말했다.
“하지만…… 아까는 괜찮다고…….”
“패딩은 안에 들어 있는 충전재가 냄새를 머금고 있다가 나중에 뿜어내는 경우가 많아서 그래요. 미안해요. 내가 냄새에 민감한 거 알잖아요.”
당혹스러워 목덜미에 식은땀이 날 정도였다. 무언가 말하려 입을 열었지만 딱히 할 말도 생각나지 않아, 해완은 그냥 조용히 패딩 지퍼를 내리고 옷을 벗어 손에 들었다.
그러자 강현은 해완의 손에 들린 패딩을 낚아채고는 말했다.
“그러고 있으면 춥겠네요. 따라와요.”
그는 다른 손으로 해완의 손목을 붙들고 성큼성큼 걸었다. 도대체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머리가 하얘진 해완은 얼떨결에 강현의 뒤를 따랐다.
강현이 그를 끌고 카페 바로 옆에 있는 모 남성복 브랜드 옷가게에 들어서고 나서야 정신이 든 해완이 우뚝 멈춰 서며 말했다.
“뭐 하는 거예요? 난 옷 같은 거 필요 없어요.”
“알아요. 여긴 내 옷 사러 온 거니까.”
“네?”
해완을 바라보지도 않고 무심하게 말한 그는 대충 주위를 휘휘 둘러보더니, 직원을 불러 마네킹에 걸려 있는 블랙 롱 코트 하나를 가리키며 제게 맞는 것을 가져다 달라고 했다.
점원이 사이즈를 골라 가져다주자 강현은 입고 있던 회색 코트를 벗어 다짜고짜 해완의 품에 안겼다. 그러고는 어깨와 품이 맞는지만 대충 확인하더니 지금 바로 입고 가겠다며 계산대로 곧장 향하기에, 해완은 대체 무슨 변덕일까 하는 생각을 하며 뒤를 따라갔다.
“이것 좀 쇼핑백에 넣어 주세요.”
팔십만 원이 넘는 옷을 일말의 고민도 없이 결제한 강현이 아까 해완이 벗어 넘겼던 패딩을 점원에게 건네며 말했다. 해완은 제 손에 들려 있는 강현의 회색 코트도 함께 넣어 달라 부탁하기 위해 직원에게 말을 걸려 했다.
그때 강현의 손이 해완을 막아섰다.
“그건, 윤보리 씨가 입어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행동에 해완은 인상을 찡그렸다.
“내가…… 왜요?”
“나 때문에 윤보리 씨 패딩 벗은 거잖아요. 그렇다고 내가 옷 사 준다고 하면 아까처럼 싫어할 게 뻔하니까, 내 옷 입고 있다가 집에 갈 때 돌려 달라구요.”
그럼 새 옷을 입으라고 주면 되지 왜 제가 입던 옷을 벗어서 주는지 모를 일이었다. 그러나 해완이 뭐라 따질 새도 없이 강현은 해완의 손에 들린 제 옷을 다시 뺏어 들더니, 어린아이에게 옷을 입히듯 해완의 등 뒤에 가져다 대고 말했다.
“뭐 해요? 팔 끼워 넣어요.”
“하, 하지만…….”
“영화 시간 얼마 안 남았어요. 얼른요.”
결국 해완은 강현을 이해하는 것을 포기하고 그냥 시키는 대로 얌전히 옷을 입었다. 강현의 코트는 가볍고 따뜻했지만, 어깨며 소매며 품이며 어디 하나 크지 않은 부분이 없어 우스꽝스러워 보일 것만 같았다.
하지만 그와 동시에, 그의 코트에 물씬 배어 있는 강현의 향이 마음을 조금 울렁이게 만들었다.
강현은 제 옷을 입은 해완을 가만히 보다가, 둥글게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잘 어울리네요.”
이상하리만치 기분이 좋아 보이는 얼굴에 해완은 머쓱하게 머리만 쓰다듬었다.
생각지 못한 해프닝에 커피는 제대로 마시지도 못하고 두 사람은 바로 영화관 안으로 향했다.
정말 오랜만에 보는 영화였지만 상영관 불이 꺼지고 영화가 시작된 이후에도 해완은 좀처럼 집중할 수가 없었다.
상영관 안이 생각보다 따뜻해서 체온이 조금 올랐는데, 그래서인지 코트에서 풍기는 강현의 냄새가 더욱 짙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벗고 싶지는 않아, 해완은 그저 의자 안으로 몸을 더욱 깊숙이 묻기만 했다.
다행히도 영화가 진행될수록 잡생각은 서서히 잊혀졌다. 영화는 어릴 적 우연한 사고로 인연을 맺었다 헤어진 주인공들이 성인이 되어 만나 오해를 하고 어긋났다가 다시 이어지는 내용이었는데, 포스터를 보고 예상했던 것만큼 발랄하지만은 않아서 쉽게도 감정 이입을 하는 해완은 몇 번이고 울컥하는 감정을 참느라 애써야 했다.
다행히도 로맨틱 코미디답게 끝은 깔끔한 해피 엔딩이었다. 하지만 주인공들의 행복한 모습이 오히려 눈물샘을 자극해서 눈물을 찔끔 흘리고 말았다.
해완에게는 아프거나 괴로운 일을 겪을 때보다 기쁘거나 마음이 벅찰 때 더욱 울고 싶어지는 이상한 버릇이 있어 난감할 때가 많았다.
운 것을 티 내고 싶지 않아 해완은 영화관에서 나와 밝은 곳으로 들어서자마자 연신 얼굴을 만지며 눈가를 가리려 했다. 그러나 불행히도 그런 행동이 더욱 강현의 시선을 끌었는지, 그는 해완에게 곧바로 물었다.
“울었어요?”
머쓱해진 해완은 이미 발개져 있는 눈가를 비비며 허둥지둥 말을 주워섬겼다.
“안 울었어요. 그러니까, 그게…… 눈을 비벼서 그렇게 보이는 거예요.”
어설픈 변명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강현이 되물었다.
“슬픈 영화도 아닌데 왜 울었어요?”
“네?”
“둘이 행복하게 됐잖아요. 그런데 왜 우냐구.”
강현의 목소리는 정말 궁금한 것처럼 들렸다. 놀리는 기색이 전혀 없이 얼굴 또한 사뭇 진지해, 해완은 조금 어리둥절하게 답했다.
“그냥…… 주인공들이 행복해지니까 마음이 벅차서요.”
그 말에 강현의 표정이 알 듯 모를 듯 하게 꿈틀했다. 미묘한 침묵이 잠시 차오르는가 싶더니 강현은 씩 미소 지으며 말했다.
“그랬구나. 이제 집에 갈까요?”
갑작스럽게 화제를 전환한 강현은 해완을 집 근처까지 바래다주겠다고 했다. 이미 12시가 넘은 시간이라 중간에 대중교통이 끊길 것 같았으므로 해완은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주차장으로 내려가는 엘리베이터 안은 조용했다. 해완은 강현의 옆모습을 흘끗 훔쳐보았다. 그의 얼굴은 평온했지만, 아까 영화에 대한 감상을 나눈 후 강현의 말이 없어졌다는 인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강현의 차를 향해 걸으며 해완은 영화 내용에 대해 다시 생각해 보았다. 어릴 때의 인연. 오랜 시간이 흐른 뒤 어른이 돼서 만나, 오해로 인해 다투게 되는 주인공들.
해완은 저도 모르게 스르르 걸음을 멈췄다. 그것은, 꼭 해언과 강현의 이야기 같았다.
몇 걸음 앞서 나가던 강현은 해완이 멈춘 것을 깨닫고 뒤를 돌았다. 해완이 물끄러미 저를 바라만 보자 강현이 의아하게 물었다.
“왜 그래요?”
“아까…… 영화 말인데요.”
“영화요?”
“여강현 씨 감상은 못 들은 거 같아서…… 어땠어요?”
짧은 사이였으나, 또다시 미묘한 침묵이 차올랐다. 희게 무표정한 그의 얼굴에서는 어떤 생각도 읽을 수 없었다.
그러나 얼어붙어 버린 순간을 부수듯 강현은 미소를 지었다.
“나도 벅찼어요. 윤보리 씨가 느낀 것처럼.”
그런 말을 하는 강현의 목소리가 너무 깔끔해서, 해완은 다른 질문은 하지 못하고 그냥 잠자코 강현의 뒤를 따랐다.
하지만 무언가 어긋나 보였던 그의 얼굴은 왠지 모르게 가슴에 남았다.
주차되어 있는 강현의 차는 지난번 봤던 스포츠카가 아닌 외제 대형 세단이었다. 해완이 순간적으로 의아한 표정을 지은 걸 보았는지 강현은 자신의 ‘차 중’ 한 대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앞서 본 두 대 이외에도 또 다른 차를 가지고 있음을 뜻하는 강현의 말에 해완은 속으로 헛웃음을 지을 수밖에 없었다.
안전벨트를 매고 있는 해완에게 강현이 데려다주겠다며 느닷없이 주소를 물었다. 고개를 든 해완은 얼떨결에 집 주소를 말했다.
“고마워요.”
빙긋이 미소를 지은 강현이 내비게이션에 제 집 주소를 찍는 모습을 보고서야 해완은 아차 정신이 들었다.
지난번처럼 지하철역에 내려 달라고 하면 될 것을, 오늘 함께 외출이라도 했다고 마음이 느슨해지기라도 했는지 냉큼 집 주소를 뱉은 스스로가 바보같이 느껴져, 해완은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사선으로 돌렸다.
게다가 이 차로는 좁은 골목 안에 있는 해완의 집 앞까지는 갈 수 없을 게 뻔했다. 물론 강현은 그런 사정은 모르는 듯 별말 없이 차를 몰았다. 해완은 적당한 곳에서 세워 달라고 말해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메모를 했다.
“여기서 세워 주면 될 것 같아요.”
짧은 드라이브 이후 집으로 이어지는 골목길이 있는 대로변에 세워 달라는 해완의 말을 들은 강현은 어리둥절한 얼굴을 했다. 하지만 해완이 차가 들어갈 수 없는 좁고 비탈이 심한 골목길을 가리키자 그제야 왜 이곳에 세워 달라고 했는지 이해한 듯 입을 다물었다.
그 얼굴을 보자 강현이 이런 허름한 동네에 와 보기나 했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제가 이곳에 산다는 게 부끄럽지는 않아, 해완은 별달리 당황하지 않고 조용히 데려다줘서 고맙다는 인사를 건넸다.
그건 해완이 그렇게 하기로 ‘정한’ 것이었다. 유준이 저를 빌미로 강현을 속여서 돈을 빌리고 그 돈을 제대로 돌려주지 못한 것은 해완을 부끄럽게 했지만, 자신의 선택과 관계없이 처음부터 받고 태어나지 못한 것에 대해서 부끄러워하고 싶지는 않았다.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강현을 굳이 마다하고 골목길로 들어서 걷던 해완은 문득 깨달은 사실에 화들짝 놀라 걸음을 멈췄다.
해완은 강현의 코트를 아직까지도 입고 있었다.
바로 뒤로 돌아선 그는 빠른 걸음으로 대로변으로 향하며 강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네, 윤보리 씨.
강현은 거의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해완은 다급하게 말했다.
“코트 돌려줘야 되는데 깜빡했어요. 멀리 안 갔으면 여기 잠깐 다시 올 수 있어요?”
―아, 괜찮으니까 입고 가요. 처음부터 윤보리 씨가 내 옷을 입고 있기를 바라서 준 거니까.
해완은 인상을 찡그렸다.
“그게 무슨…….”
―페로몬 향이 감정에 따라 좌우된다고 말한 거 기억나요?
강현의 작업실에 갔을 때 들었던 말을 떠올린 해완은 떨떠름한 목소리로 답했다.
“……네. 근데 그게 왜…….”
―윤보리 씨는 당황할 때 향이 특히 달아져요.
여전히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해완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그런 해완에는 상관없이, 강현은 느긋한 목소리로 말을 끝냈다.
―그러니까 아무 사람 앞에서나 당황하지 말아요.
그 말을 끝으로 가벼운 인사와 함께 전화는 끊어졌다. 수수께끼같이 느껴지는 강현의 말에 해완은 잠시 강현의 번호가 떠 있는 핸드폰만 바라보고 서 있을 수밖에 없었다.
* * *
문을 열자 유준이 패딩에 이불까지 덮고 거실에 둔 전기장판 위에 드러누워 있는 게 보였다. 연신 코를 훌쩍이고 기침을 하면서 핸드폰 게임을 하고 있던 유준은 무성의하게 손만 들어 인사를 하는가 싶더니, 해완이 나갈 때와 다른 옷을 입은 것을 깨닫고는 핸드폰을 내리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뭐야? 처음 보는 옷인데? 샀어?”
“아니, 그냥 누가 빌려줬어.”
“누구? 강현이 형?”
어차피 숨기지 못할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해완은 그냥 입을 다물었다. 흥미에 가득 찬 얼굴로 몸을 벌떡 일으킨 유준이 해완에게 다가와 소매를 쓸어내리며 감탄사를 내뱉었다.
“와 씨, 촉감 졸라 좋아. 보나 마나 개 비싸겠지?”
해완이 대꾸 없이 방으로 들어가자 뒤를 졸졸 따라온 유준이 물었다.
“나 이거 한 번만 입어 보면 안 돼?”
“안 돼. 어차피 너한테는 맞지도 않을 게 뻔한데 뭘.”
해완에게도 한참 오버핏인 코트가 그보다 체격이 가늘고 키가 작은 유준에게 맞을 리 없었다. 입을 삐죽이던 유준은 해완이 코트를 벗어 벽에 걸린 옷걸이에 걸자마자 브랜드와 소재 태그를 먼저 확인하기 시작했다.
겉옷을 벗자마자 느껴지는 싸늘한 공기에 해완은 몸을 부르르 떨며 급한 대로 초겨울용 경량 패딩을 찾아 입었다.
깊은 한숨이 차올랐지만 유준에게 걱정하는 티를 내고 싶지 않아 해완은 꾹 참아 삼켰다.
온수 문제만 있던 보일러는 결국 어제 아침부터 난방 기능까지 맛이 가기 시작했다. 설정 온도를 50도로 맞춰 놔도 바닥만 미묘하게 뜨끈해진다 뿐이지 공기까지 데우기에는 역부족이라 집 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해완이 염려한 대로 며칠 전부터 감기 기운을 보이기 시작한 유준의 상태는 어제부터 심한 기침으로 바뀌기 시작했다.
몇 번이나 부재중 전화와 문자를 남겼는데도 집주인은 답이 없었다. 내일 아침까지 연락이 없으면 주인의 집까지 찾아가고 말겠다고 결심하던 찰나,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유준이 갑자기 소리를 질렀다.
“미친, 이 코트 천이백만 원짜리래!”
그 말에 해완은 눈을 튀어나올 듯 크게 뜨며 코트를 홱 쳐다보았다. 고가일 것이야 알았지만 천만 원이 넘어가는 옷이 존재할 것이라 생각조차 해 본 적 없었다.
“형, 우리 이거 팔자. 이거 팔면 이 거지 같은 집 버리고 다른 데로 이사도 가겠다!”
유준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이 든 해완이 모나게 눈을 뜨며 말했다.
“너 이상한 생각 하기만 해 봐.”
유준은 제가 만지고 있던 코트의 소매 부분을 팽개치며 투덜거렸다.
“농담이야, 농담! 하여튼 뭔 말을 못 해요.”
겨우 관심을 끄게 만들었나 싶었더니, 유준은 호기심을 떨치지 못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근데, 형한테 옷은 왜 빌려준 거야?”
“그게…… 알바 하고 바로 갔더니 패딩에 이상한 냄새가 뱄었나 봐. 그래서 대신 이거 입고 있으라고 줬어.”
유준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그럼 강현이 형은 뭘 입고?”
“그 자리에서 새 옷 사서 입던데.”
“아니, 그럼 형한테 새 옷 입으라고 주면 되지 왜 자기가 입던 걸 줘?”
그라고 무슨 생각이었는지 알 턱이 없었기에 해완은 그저 어깨만 으쓱했다. 하지만 유준은 끈질기게 전후 상황을 캐물었고, 결국 해완은 자신을 따라왔던 어떤 남자의 일부터 강현이 저를 옷 가게로 끌고 들어갈 때까지의 대략적인 이야기를 들려줄 수밖에 없었다.
“……형은 눈치가 없는 거야, 아님 모른 척하는 거야?”
“뭘?”
어리둥절한 해완의 목소리에 유준은 답답하다는 듯 가슴을 쳤다.
“아…… 모솔은 진짜 답이 없다. 이거 누가 봐도 형한테 자기 향 믹싱한 거잖아, 이 바보야!”
유준의 입에서 튀어나온 단어를 들은 해완은 더듬거리며 말했다.
“뭐, 뭐? 그런 거 아니야.”
“아니긴 뭐가 아니야. 처음에는 이상한 냄새 안 났다고 했다가, 그 남자가 쫓아오고 나서 갑자기 말 바꾼 거라며. 그리고 천만 원짜리 옷 입고 다니는 인간이 고작 몇십만 원짜리 코트 사 입으면서까지 형한테 지 알파 향 풀풀 풍기는 옷을 입힌 이유가 뭐겠어?”
생각지도 않았던 유준의 이야기에 해완은 입만 반쯤 벌린 채로 잠시 말을 잊었다.
일반적인 향과는 달리 페로몬 향은 그 자체가 성적인 표시였기 때문에, 쓸데없는 이성의 접근을 막기 위해 연인의 향이 배어 있는 물건을 지니거나 옷을 입어 서로의 향을 ‘믹싱’하는 것은 알파오메가 사회에서 굉장히 보편적인 애정 표현이었다.
그리고 당연히, 연애 경험이 없는 해완은 그런 것을 드라마나 영화에서나 봤지 실생활에서 경험해 본 적이 없었다.
‘윤보리 씨는 당황할 때 향이 특히 달아져요.’
‘그러니까 아무 사람 앞에서나 당황하지 말아요.’
집에 들어오기 전 강현과의 통화까지 떠올린 해완의 얼굴이 터질 듯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붉어진 얼굴로 입만 벙긋거리는 해완을 본 유준이 눈을 반짝거렸다.
“죽어도 가서 일만 해 주는 거라더니, 실컷 썸 타고 있었구만? 하여튼 내가 수상쩍다 했어.”
“그런…… 그런 거 아니야. 말도 안 되는 소리 좀 하지 마.”
입 안이 바싹 마르고 심장이 쿵쿵 뛰어서, 해완은 앵무새처럼 같은 말만 중얼거렸다. 유준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코웃음을 쳤다.
“말도 안 되긴 뭐가 안 돼. 오늘도 봐. 좋은 데 가서 밥 먹고 같이 영화 보면 그게 데이트지 뭐 다른 게 데이트야? 그리고 데이트하는 사이가 썸 타는 사이 아니면 뭔데.”
해완이 발개진 얼굴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자 신이 난 유준의 목소리가 점점 커졌다.
“처음엔 윤해언 그 인간이 무슨 꿍꿍이속인가 했는데, 일이 이렇게 되네?”
그러나 유준의 입에서 나온 해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삽시간에 피가 식는 것처럼 느껴졌다.
“형, 강현이 형 무조건 잡아. 내가 보기에 이미 반쯤 넘어온 것 같으니까 무슨 일이 있어도 꼭 잡아야 돼. 이건 진짜 로또보다 더 대박이라니까.”
해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멍하니 바닥만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준이 답답한 듯 칭얼거렸다.
“아, 왜 아무 말이 없어?”
해완은 고개를 들고 유준의 눈을 바라보며 조용히 말했다.
“여강현 씨…… 내가 좋아서 그러는 거 아니야. 향 때문에 나를 해언이라고 오해하고 있어서 그렇지.”
“…….”
“그러니까…… 그런 일 없을 거야. 그래서도 안 되고.”
“그게 왜 윤해언 향인데?”
반항적으로 튀어나온 유준의 대답에, 해완은 드물게 표정을 굳히며 물었다.
“뭐?”
“난 왜 아직까지도 형이 형한테서 나는 향을 윤해언 거라고 생각하는지 모르겠어. 자기 페로몬샘 형한테 이식하고 싶어 한 건 윤해언이잖아. 그리고…….”
유준은 어떻게 끝내야 할지 모르겠다는 듯 잠시 머뭇거렸다.
“그리고…… 이제 해언이 형은 이 세상에 없잖아.”
유준답지 않은 조심스러운 말투로 끝을 맺었음에도 어쩔 수 없이 무언가 울컥 치밀어 올라, 해완은 저도 모르게 거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뭐라고 이야기하면 되는데?”
“…….”
“네가 8년 동안 기다린 윤해언은 이제 이 세상에 없지만 대신해서 그 향을 가지게 된 사람이 있으니 이제 나를 좋아하면 된다고 말할까?”
정곡을 찌르는 해완의 지적에 유준은 말문이 막힌 듯 입술만 벙긋거렸다.
“……나 씻고 올게.”
갑자기 어색해진 분위기에 빠르게 말을 뱉은 해완은 몸을 벌떡 일으켜 화장실로 들어가 문을 닫고 벽에 기대어 선 채 눈을 감았다.
난방이 되지 않는 벽에서 흐르는 냉기에 목덜미에 오싹 소름이 돋았지만, 해완이 방금 스스로의 입으로 뱉은 말보다 더욱 현실을 느끼게 하는 것은 없었다.
정말 저를 향한 게 아니라는 걸 알면서도 강현과 보낸 시간에 대해, 그가 저에게 하는 행동들에 대해 설레고 가슴이 뛰어 견딜 수 없었던 모든 순간들이 너무나 부끄럽게 느껴졌다.
한 달 뒤면 끝이라고 말하면서도 실은 강현이 저를 해언이라고 오해하고 있는 이 시간을 어쩔 수 없이 행복하게 느끼는 모순점에 대해서도 말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게 그렇게 나쁜 거냐고 스스로를 변호하는 마음의 조각 또한 있었다.
강현은 해완이 이제까지 본 중에 가장 멋있고 매력적인 알파였고, 그리고 첫사랑이었다. 말 한마디 걸지 않고도 쉽게도 사랑에 빠졌던 그를 앞에 두고 대체 어떻게 해야 심장을 굳힐 수 있는지 아득하기만 했다.
마음속에 폭풍이 휘몰아쳤다. 해완은 눈을 꼭 감고 스스로에게 최면을 걸듯 읊조리고 또 읊조렸다.
만약 그런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혼자만의 것으로 남겨 두면 괜찮을 거야.
이미 한 번 겪어 본 거니까, 다시 하는 게 그렇게 어렵지는 않을 거야.
어쩔 수 없이 저릿해져 오는 가슴을 해완은 가만히 손으로 문질렀다.
* * *
화장실에서 시간을 보내며 마음을 가라앉히고 나오자 유준은 전기장판을 끌고 방 안으로 들어가 잠들어 있었다.
조용히 방에 들어간 해완은 자면서도 기침을 콜록대는 유준의 이불을 목 끝까지 덮어 주고 손등으로 조심스럽게 이마를 만져 보았다. 열이 나는 것 같지는 않았지만 약간 따끈하긴 해서 걱정이 차올랐다.
건조한 방의 습도를 조금이라도 올리기 위해 수건을 적셔 방에 걸어 두던 해완의 손이 스르르 멈췄다. 벽에 걸어 둔 강현의 코트가 눈에 들어온 탓이었다.
코트 가까이 다가서니 아직도 강현의 향이 선명하게 났다. 몇 시간이 지났는데도 이렇게 향이 진하게 나는 것이 신기해, 해완은 코트를 이리저리 만져 보았다.
그때 속주머니에 무언가 들어 있는 게 느껴졌다. 조심스레 손을 넣어 그것을 꺼낸 해완의 입가에 슬며시 미소가 번졌다.
그것은 작은 샤쉐였다. 당연히 강현의 향을 모방해서 만든 것이었는데, 의도적이었는지는 몰라도 강현의 향에서 집중해서 맡아야 느낄 수 있는 아몬드 향조가 평소보다 조금 더 강조된 듯 느껴졌다.
‘……민감하네.’
언젠가 들었던 강현의 목소리가 다시 들리는 것 같은 기분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귓가에 손을 올렸다.
이상한 욕심이, 가슴속에서 뜨겁게 들끓었다.
해완은 반쯤 충동적으로 샤쉐를 코트 속주머니에 돌려 두는 대신 서랍을 열고 중요한 일이 있을 때나 입는 아끼는 옷 안에 끼워 넣었다.
이 정도의 작은 조각만큼은, 저에게 건네는 작은 위로로 두어도 괜찮으리란 생각이 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