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essence absolue (2)
주말이 지나는 사이, 유준은 결국 병이 났다. 미열로 시작된 유준의 열은 일요일 밤에는 39도에 가깝게 치솟았다.
날 때부터 호흡기가 약했던 탓에 어릴 때부터 사소한 감기로도 남들보다 배로 고생하던 유준을 잘 아는 해완은 더럭 겁부터 났다. 그래서 월요일에 헬스장 청소를 다녀오자마자 유준을 끌고 동네 내과에 다녀왔지만, 주사를 맞고 약을 먹어도 상태는 좋아질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집이 얼음장 같으니 당연한 일이라는 생각에 화가 머리끝까지 치민 해완은 없는 시간을 쪼개 같은 동네에 있는 주인의 집에 따지기 위해 찾아갔다. 주인은 의외로 해완을 보자마자 선선히 보일러를 교체해 주겠다고 했는데, 그 시기는 이번 주 목요일에나 가능하다며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알고 보니 집주인은 아무도 없는 틈을 타서 이미 보일러 상태를 살핀 뒤였던 모양이었다. 교체밖에 답이 없다는 걸 알게 되자 아는 업자에게 부탁해 조금이라도 비용을 줄일 심산이었는데 그 업자가 일이 바빠 이번 주 목요일에나 시간이 된다고 하니 그에 맞추기 위해 그동안 해완의 연락을 싹 무시했던 것이었다.
속에서 불이 치밀었지만, 그게 그렇게 마음에 안 들면 월세나 보증금을 올리든가 나가라는 식으로 나오는 집주인의 뻔뻔함 앞에서는 화를 삭이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원래대로라면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끝나고 강현의 작업실로 가야 했지만 혼자 앓고 있을 유준이 걱정되어 견딜 수 없었던 해완은 결국 강현에게 전화를 걸어 유준이 아파서 오늘은 가기 힘들 듯 하다고 사정을 설명했다.
다행히도 강현은 괜찮으니 유준을 잘 돌봐 주고 수요일에 보자고 선선히 말해 주었다.
“오늘 강현이 형 작업실 가는 날 아니야?”
해완이 집에 들어가자 유준이 열에 달뜬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너 걱정돼서 오늘은 빠지겠다고 전화했어.”
“내가 애도 아니고. 혼자 있을 수 있어.”
유준의 괜한 투덜거림을 들은 척도 하지 않은 해완은 체온을 한 번 더 쟀다. 여전히 38도를 훨씬 웃도는 열에 해완은 어두운 얼굴로 입술을 깨물었다.
제가 지나치게 초조해하고 있음을 알았지만, 소중한 사람이 아픈 것을 보는 건 해완에게는 언제나 쉽지 않았다. 더군다나 병으로 해언을 잃은 지 갓 1년밖에 지나지 않은 지금은 더욱 견디기 어렵게 느껴졌다.
게다가 해완이 수술 직후 이런저런 부작용에 시달릴 때 유준도 그를 지극정성으로 간호해 주었었다. 해언의 죽음과 수술에 관해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었던 탓에 도움도 받지 못하고 혼자 앓기만 하고 있던 터라 유준이 아니었으면 그 시기를 넘기기 정말 힘들었을 것이었다.
입맛이 없다는 유준을 달래 가며 직접 끓인 소고기죽과 약까지 시간 맞춰 먹이고 나서도 해완은 밤새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다. 유준의 기침이 너무 심해서이기도 했지만, 잠들었다가 깨어났을 때 유준의 상태가 갑자기 악화되어 있을까 봐 걱정이 돼서 도저히 눈을 감을 수가 없었다.
그것은 해언과의 마지막 몇 개월을 보내며 생긴 강박이었는데, 당시 해완은 밤에 두 시간 이상을 연속해서 자 본 적이 없을 정도였다.
유준을 돌보며 쪽잠을 자는 사이 금세 헬스장에 일을 하러 갈 시간이 됐다. 거의 이틀 동안 제대로 자지 못한 해완은 비몽사몽간에 일을 갔다 돌아와서 다시 죽을 끓여 놓은 뒤 유준에게 먹기 싫어도 꼭 챙겨 먹으라며 신신당부를 하고 편의점으로 출근했다.
틈틈이 전화나 문자로 유준의 상태를 체크했지만, 지하철역 근처에 위치한 편의점은 퇴근 시간에는 그야말로 눈코 뜰 새 없이 바빠 몇 시간 동안은 정신없이 일에만 몰두해야 했다.
한차례 손님이 휩쓸고 간 뒤 다음 타임 아르바이트생과 교대를 하고 바쁜 걸음으로 편의점을 나서면서야 핸드폰을 확인할 수 있었던 해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두 시간 전에 보내 놓은 문자에 아직도 유준의 답이 오지 않은 탓이었다. 마음이 불안해진 해완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지만 역시 받지 않았다.
평소라면 걸어서 10분 정도 걸릴 거리를 뛰어서 5분 만에 돌아온 해완이 문을 열어젖혔을 때 그를 맞이한 건 텅 빈 집 안의 썰렁한 공기뿐이었다.
고작해야 몇 시간 사이에 나아졌을 리도 없는데 아픈 몸을 이끌고 대체 어딜 간 건지 유준은 온데간데없이 사라져 있었다.
당황한 해완은 신발을 거의 던지듯 벗어 놓고 좁아터진 집구석을 휘휘 둘러보았다. 전기장판은 꺼져 있었으나 온기가 남아 있었고 유준이 먹다 남긴 죽 그릇과 약봉지의 흔적도 있는 것으로 봐서 나간 지 오랜 시간이 흐르지는 않은 듯했다.
주머니에서 울리는 진동에 해완은 허겁지겁 핸드폰을 꺼냈다. 그것이 유준에게서 온 메시지임을 알고 안심한 것도 찰나, 내용을 본 그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형, 나 몸이 너무 안 좋아서 응급실 왔어. 이제 수액 맞는 중이야.]
그 밑에는 병원 위치도 적혀 있었는데, 다행히 근방에 있는 종합 병원이었다. 더 생각할 것도 없이 밖으로 달려 나간 해완은 택시를 잡아타고 바로 병원으로 향했다.
10분 정도 걸려 도착한 응급실에는 유난히 사람이 붐볐다. 바쁘게 오가는 사람들 중 누구에게 물어보면 좋을지 몰라 해완은 잠시 입구에서 허둥지둥 주위를 살폈다.
그런데 그때, 그를 부르는 익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윤보리 씨.”
이곳에서 불리리라 생각지도 않은 이름에 해완은 화들짝 놀라며 목소리가 들리는 방향으로 홱 고개를 돌렸다.
그곳에, 강현이 해완을 바라보고 서 있었다.
꿈이라도 꾸고 있나 싶어 해완은 멍청하게 눈만 깜빡였다. 강현이 왜 여기에 있는지 도무지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해완에게 긴 다리로 성큼 다가온 강현은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유준이 안쪽에 있어요. 따라와요.”
그리고 강현은 안내해 주려는 듯 해완의 등에 살짝 손을 댔다. 그 손길에 불에 덴 듯 놀라 걸음을 옮기기 시작하긴 했지만, 여전히 상황을 파악할 수 없었던 해완은 얼떨떨하기만 했다.
응급실 제일 안쪽에 놓인 침대의 커튼을 걷자 잠들어 있는 유준의 모습이 보였다. 해완은 멍하니 유준의 잠든 얼굴을 바라보았다.
“급성 폐렴 초기래요. CT 찍고 항생제 처방 받았고, 입원할 필요까진 없는데 수액은 맞으면 기력 회복에 도움이 된다고 해서 맞고 가겠다고 했어요.”
유준의 상태에 대해 설명해 주는 강현의 목소리가 들렸지만 제대로 귀에 들어오질 않았다. 유준의 얼굴이 그가 마지막으로 봤던 해언의 것만큼 창백하다는 생각만 계속해서 들었다.
“윤보리 씨……?”
강현이 의아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목소리를 듣고서야 정신이 번쩍 든 해완은 허둥지둥 입을 열었다.
“네, 네. 미안해요. 잠깐 딴생각을 하느라. 근데, 어떻게 여기 있는 거예요?”
해완의 질문에 강현은 잠시 그를 바라보는가 싶더니, 엉뚱한 질문을 했다.
“많이 피곤해 보이는데, 잠 못 잤어요?”
그렇게까지 티가 났는지 몰라, 해완은 멋쩍은 듯 건조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그냥 조금이요.”
“그럼 같이 커피 마시러 가요. 자고 있는 사람 옆에서 얘기 나누기도 그렇고, 수액 다 맞으려면 어차피 좀 기다려야 되니까.”
해완은 흘끗 유준의 머리맡에 걸려 있는 링거를 바라보았다. 강현의 말대로 아직 3분의 2 이상 차 있는 수액이 모두 떨어지려면 시간이 좀 걸리겠다 싶었다.
두 사람은 병원 로비에 있는 카페테리아로 향했다. 해완이 자리를 잡고 앉아 있는 사이 커피 두 잔을 받아 돌아온 강현은 해완에게 커피를 건네주고서야 설명을 시작했다.
“마침 윤보리 씨 집 근처를 지나던 길이었는데 유준이 아프다는 말이 생각나더라구요. 그때 술 한잔 하고 연락 한번 못 한 것도 마음에 걸리고 해서 얼굴이나 볼까 하고 잠깐 들렀는데, 숨 쉬는 걸 힘들어하는 게 단순한 감기로는 안 보였어요. 그래서 병원에 데리고 온 거예요.”
유준이 호흡 곤란을 겪었다는 말에 해완은 울컥하는 마음을 감추기 위해 입가를 가렸다. 그런 해완의 표정을 본 강현이 부드럽게 말했다.
“너무 걱정하지 말아요. 그래도 늦지 않게 와서 항생제만 열흘 정도 먹으면 괜찮아질 거래요.”
고개를 끄덕인 해완은 진심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고마워요, 정말. 여강현 씨 아니었으면 큰일 날 뻔했네요.”
그러자 강현은 옅은 미소만 지어 보이고는 차분히 물었다.
“퇴원하고 나면 어디로 갈 거예요? 보일러 고장 났다면서요. 집이 완전 얼음장이던데 그런 데로 아픈 사람 데리고 갈 순 없잖아요.”
강현이 이미 그런 사정까지 알고 있는 것에 해완은 조금 당황했지만, 애써 아무렇지 않은 듯 말했다.
“집주인이 목요일까진 고쳐 주겠다고 했으니까 그 전까진 어디 모텔이라도 가 있어야죠, 뭐.”
“그러지 말고 내 집으로 와요.”
별것 아닌 제안이라는 듯 무심한 목소리였지만, 해완은 바보같이 더듬거리며 되물었다.
“네, 네?”
“우리 집은 남는 방도 많고, 보일러도 잘 돌아가고, 필요하다면 의사 왕진을 받을 수도 있거든요. 그러니까 목요일까진 나랑 같이 있어요. 윤보리 씨랑 유준이 둘 다.”
해완은 뭔가를 답하기도 전에 고개부터 저었다.
“아니에요. 말은 정말 고맙지만 그렇게까지 폐를 끼칠 수는 없어요. 아까 말했다시피 보일러 고칠 때까지 어디 모텔이라도 가 있으면 돼요.”
“면역력 약해져 있는 사람을 불특정 다수가 왔다 갔다 하는 곳으로 데려가는 게 좋은 선택인 것 같아요? 난 아닌 것 같은데.”
틀린 말이라고는 할 수 없어 해완은 순간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러나 곧바로 그래도 강현의 집에 갈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을 굳게 먹은 해완이 다시 입을 열려던 찰나, 강현이 잽싸게 먼저 말을 가로챘다.
“그리고 유준이한테 먼저 물어봤는데 좋다고 했어요. 윤보리 씨가 내 집 오는 거 불편하다고 해서 유준이까지 그렇게 못 하게 할 건 아니죠?”
이미 유준과 이야기된 상황이라는 강현의 말이 해완의 말문을 결정적으로 막히게 했다.
유준이야 당연히 가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들의 주머니 사정으로 봤을 때 갈 수 있는 숙박 시설은 뻔했고 강현의 집은 당연히 비교도 할 수 없게 좋은 환경일 테니까.
스스로의 자존심 때문에 유준의 편의를 희생시키는 게 아닌가 하는 생각에 해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올 거죠?”
흔들리는 해완의 마음에 못을 박듯 강현이 다시 한번 물었다. 해완은 잠시 머뭇거렸지만, 결국 고맙다는 말과 함께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 * *
강현의 집은 서울 중심부의 부촌으로 유명한 동네에 위치한 프라이빗 고급 빌라였다.
시큐리티를 거치지 않으면 들어갈 수도 없는 외부 현관을 지나 개인 세대까지 이동해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집 안 전체에서 풍기는 맑은 플로럴 우디 향이었다.
그와 동시에 높게 짖는 소리, 타닥이는 바쁜 발걸음 소리가 들리더니 잔뜩 흥분한 보리가 헥헥거리며 뛰어왔다. 보리는 가장 먼저 주인인 강현을 정신없이 반기며 충분히 쓰다듬을 받고는, 그래도 한 번 본 해완에게 갔다가 그다음에는 처음 본 사람인 유준의 근처를 호기심 어린 눈으로 맴돌았다.
현관 앞에서 한바탕 보리의 환영 인사를 치르고 따뜻한 느낌의 우드 마감재로 장식된 긴 복도를 지나자 도심임에도 탁 트인 공원 조망의 넓은 거실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차 안에서 내내 병든 닭처럼 꾸벅거리며 졸던 유준까지도 눈이 둥그레질 정도로 훌륭한 집이었다. 커다란 흰색의 가죽 소파나 대리석 탁자, 그 위에 놓인 분재까지 무엇 하나 비싸고 고급스러워 보이지 않는 것이 없었고, 먼지 하나 없이 깨끗했다.
강현은 보리를 일단 거실 한구석에 놓인 울타리 안에 두고는 게스트 룸은 이쪽이라며 해완과 유준을 거실 오른편 복도로 안내했다.
혼자 사는 집이 이렇게 복잡한 구조라는 게 신기하기만 해 해완은 속으로 혀를 내둘렀다. 복도를 따라 내려가며 강현은 간략하게 집 안 구조를 설명해 줬는데, 거실, 키친, 다이닝 룸을 중심으로 강현의 침실인 마스터 룸은 왼편에, 게스트 룸은 오른편에 있는 구조였다.
게스트 룸으로 내려가는 복도에는 넉넉한 서재와 공용 화장실, 팬트리 등이 있었다. 해완의 집보다도 넓은 게스트 룸 안에는 별도의 욕실과 드레스 룸이 구비되어 있어서 거실까지 나올 필요도 없었다.
도대체 혼자 살면서 욕실이 세 개씩이나 있는 게 무슨 소용일까 의문스럽기는 했지만 꼭 드라마나 영화에나 나올 법한 집에 들어와 있는 기분에 감탄이 나오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강현이 푹신하고 두꺼운 침구가 깔린 두 개의 싱글 베드를 가리키며 말했다.
“오늘 밤은 여기서 묵어요.”
해완의 부축을 받아 유준이 침대에 눕자 강현은 해완에게 고갯짓을 해 방 밖으로 데리고 나왔다.
그는 해완과 함께 팬트리로 가서 약과 음료, 간단한 간식들이 어디 있는지 알려 주고 마음껏 먹고 마셔도 된다고 꼼꼼하게 일러 주었다.
“이렇게 신경 써 줘서 정말 고마워요.”
오늘 몇 번이나 말했는지 모를 감사 인사를 해완이 한 번 더 입에 담자, 픽 웃은 강현은 가벼운 어투로 말을 건넸다.
“그렇게 고마우면 나중에 한 번 요리나 해 줘요. 주방에도 이것저것 구비해 놓은 건 많은데 내가 뭘 할 줄 몰라서 한 번도 쓴 적이 없거든요.”
그렇지 않아도 아까 언뜻 지나친 주방이 내내 궁금했던 해완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한 강현의 말에 해완은 약간 얼굴을 붉히며 고개를 주억거렸다.
아픈 유준을 배려한 것인지 강현은 그럼 내일 보자며 짧게 인사를 남기고 자신의 침실을 향해 걸어갔고, 그 뒤를 거실에서 놀고 있던 보리가 졸졸 따라갔다.
다시 게스트 룸으로 돌아온 해완은 문을 닫아야 하나 살짝 고민했지만 남의 집에서 그러는 것도 예의가 아니지 싶어 완전히 닫지 않고 약간의 틈을 뒀다.
푹신하고 따뜻한 침대에서 편안한 얼굴로 잠든 유준을 보자 한결 마음이 놓였다. 훈훈한 공기가 감도는 방에 해완은 겹쳐 입고 있던 니트를 벗어 잘 갠 뒤 의자 위에 올려 두었다.
조심스럽게 침대에 앉은 해완은 손으로 부드러운 침구를 쓸어 보았다. 침대에 누워 잠든 게 언제인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갑작스럽게 몰려오는 피로에 그는 어린아이처럼 손등으로 눈을 비볐다.
강현은 칫솔부터 비누까지 전부 구비해 놓은 새것을 꺼내 줬지만, 어차피 내일모레면 집에 갈 건데 새것을 쓰기가 아깝고 미안하게 느껴져 제가 챙겨 온 세면도구를 꺼내 욕실에서 깨끗이 씻고 나왔다.
유준의 머리맡에 틀어진 가습기와 물, 약 등을 잘 챙겨 뒀는지 확인한 해완은 불을 끄고 침대에 누웠다.
밤낮을 가리지 않고 시끄러운 주변 소음에 익숙해져 있던 터라 이곳은 이상할 정도로 조용하고 평안했다. 꼭, 잠들지도 않았는데 꿈을 꾸고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하긴, 이런 생각지도 못한 일이 현실에 일어나는데 꿈과 다를 바 뭐가 있겠냐고, 그렇게 생각하며 해완은 스르르 잠에 들었다.
* * *
누구도 찾지 않는 고등학교 체육관의 허름하고 작은 비품 창고 안에는 더 이상 쓰이지 않는 기구들이나 운동 매트들, 그리고 먼지만이 가득 들어차 있었다.
가방을 대충 매트 위에 던져 놓고 손을 휘휘 저어 공중에 떠도는 먼지를 걷어 낸 해완은 바닥에서 굴러다니는 야구공 하나를 쥐고 역시 먼지가 쌓여 있는 책상 위에 앉았다.
딱히 무엇을 하기 위해 온 것은 아니라, 그는 실밥이 터진 야구공을 반대편 벽에 연신 던지거나 벽 높이 달린 작은 창으로 붉은 노을이 스미는 모양을 구경하거나 하며 멍하니 시간을 달랬다.
2년 전 해언이 교무실에서 열쇠를 슬쩍한 이후 이곳은 문을 부수지 않는 이상 해완과 해언 둘만이 올 수 있는 공간이 된 지 오래였지만, 두 사람이 함께 이곳을 찾은 것은 이미 몇 주 전의 일이었다.
끝내 말 한번 붙여 보지 못한 그 소년을 더는 보러 가지 않게 되고 나서 해완은 해언이 이곳에 놀러 가자고 할 때마다 이런저런 핑계를 붙이며 피해 온 터였다.
하지만 고등학교 졸업식이 다음 주로 다가오자, 이제 이곳에 올 일이 없을 수도 있다는 아쉬움이 해완의 발걸음을 저절로 이끌었다.
대학 진학을 선택하지 않은 해완에게 보육원 선생님들은 진로가 정해질 때까지 있어도 된다고 그를 위로해 주곤 했다.
그러나 작년 만 열여덟 살이 되었을 때 퇴소해야 했던 것을 또래보다 학교를 늦게 들어가 아직 졸업을 하지 않았다는 이유로 미뤄 놓고 또다시 이곳에 안주할 수는 없었다.
그리고 누구에게도 말하지 않은 중요한 이유도 한 가지 있었다.
해완은 혼자 서기를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누구의 그림자 밑에 있는 것도 아닌, 온전한 윤해완 개인으로 무엇을 할 수 있는지 알아내야만 했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해완의 뒤에서, 낡은 문이 삐걱대며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흠칫 놀랐지만 일부러 뒤돌아보지 않았다. 어차피 이곳에 올 수 있는 사람은 한 사람뿐이었으므로.
‘윤해완.’
자박자박 발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해언의 선이 고운 얼굴이 해완의 앞으로 불쑥 들이밀어졌다.
‘그렇게 같이 놀자고 할 때는 튕기더니, 여기서 혼자 뭐 하냐?’
해언은 잠시 투덜거리더니, 마치 해완이 혼자 뭘 하고 있었는지 보기라도 한 듯 바닥 어딘가에 돌아다니는 야구공을 주워 반대편 벽에 툭 던졌다.
너무 오래 붙어 지낸 탓인지 서로의 행동을 읽은 것처럼 굴게 될 때가 있어 가끔은 기분이 이상했다. 숨겨 봤자 의미가 없으리란 생각에 해완은 그냥 솔직하게 입을 열었다.
‘그냥, 이제 여기 올 일도 몇 번 없겠구나 싶어서.’
그러자, 해완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 꽉 차는 좁은 책상 위로 엉덩이를 들이밀고 바싹 붙어 앉은 해언이 부드럽게 물었다.
‘왜, 고등학교 졸업하면 여기 떠나야 되니까?’
해완이 잠자코 고개를 끄덕이자 해언이 기운을 북돋듯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괜찮아. 우리가 어디 있든 넌 내가 도와줄 거니까 걱정하지 마.’
해완이 보육원에서 나가 무엇을 할지 아무것도 생각하고 있지 않은 것처럼 여기는 해언의 말투에 해완은 피식 웃음을 흘렸다. 해언은 그에게 말하지 않는 해완의 생각은 아예 존재하지 않는 듯 취급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래도 앞으로 뭐 할지는 정해야 될 텐데. 뭐 하고 싶은 거 없어?’
괜히 마음이 뒤틀린 해완은 해언이 평소 제일 듣기 싫어하는 이야기를 했다.
‘글쎄, 친부모님이라도 찾아볼까 봐.’
아니나 다를까, 얼굴을 험악하게 찌푸린 해언이 거칠게 말했다.
‘너 내가 그딴 소린 다시 하지 말라 그랬지.’
‘……왜?’
‘너네 부모 둘 다 인간 말종이니까.’
‘…….’
‘난 널 처음 봤을 때를 똑똑히 기억해. 넌 멍청해서 기억도 못 하지만.’
‘…….’
‘그때 니가 어떤 꼴이었는지나 알아? 그 한겨울에, 다 떨어진 여름 내복을 입고 있었어. 신발 한 짝 제대로 안 신긴 애를, 뒷좌석에서 밀어서 그 차가운 땅으로 떨어뜨리고는 그대로 출발해서 가 버렸다고. 꼭 개라도 버리는 것처럼.’
‘…….’
‘그러니까 찾을 생각 하지 마. 그리워하지도 마. 그딴 거 받을 자격도 없는 쓰레기들이니까.’
해언의 모진 목소리에 해완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세 살 때 본 광경도 마치 어제 일처럼 또렷하게 기억하고 있는 해언과는 달리, 다섯 살이었으면 부모의 얼굴이라도 기억을 할 법하건만 해완은 보육원 이전의 기억이 거의 없었다.
그 이유에 대해 ‘어른들’이 뒤에서 어떻게 이야기하는지는 알고 있었다. 그들은 해완이 학대를 받았을 것이라 했다. 어린 시절 또래보다 떨어지던 지적 발달도, 모두 학대의 증거일 것이라고.
그럼에도 해완의 유일한 기억은 조금 다른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몇 살인지는 정확히 알 수 없는 기억의 파편은 따뜻한 어느 봄날의 일이었다. 동물원이었고, TV에서나 보던 코끼리를 눈앞에서 보게 된 흥분이 아주 강렬하게 남아 있었다.
그리고 솜사탕이 있었다.
해완이 먹고 싶다고 조르자, 어느 순간 해완의 손에 쥐어진 그것은 난생처음으로 경험한 황홀한 단맛이었다.
그 달콤한 감각.
그것이 해완이 친부모에 대해 기억하는 유일한 한 가지였다.
해완이 그것을 해언에게 말하자 그는 코웃음을 치며 쓰레기 같은 인간들도 한두 번쯤은 사람 구실을 할 수도 있다며 진짜인지 아닌지도 모를 기억으로 너 자신을 속이려 하지 말라고 했다.
하지만 해완은 해언과 생각이 달랐다.
나를 속이는 일이라도, 제 부모가 저를 증오하고 학대했다고 여기며 사는 것보다 사랑받은 순간도 있었다고 믿으며 살고 싶었다.
삽시간에 목이 메고 눈시울이 뜨거워진 해완은 손바닥으로 눈을 꾹 눌렀다.
그 행동이 무엇을 의미하는지 잘 아는 해언은 얼굴을 굳혔지만, 그래도 해완을 달래려고는 하지 않았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해완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도 내가 보고 싶어 할 수도 있잖아.’
‘아니, 넌 안 그래.’
‘넌 왜 자꾸 말을 그렇게 해?’
‘……내가 뭘?’
‘꼭 내가 니 의견에 다 따라야 되는 것처럼, 내 인생을 왜 니가 정해 주는 것처럼 말하냐고.’
‘다 너 때문이잖아.’
‘…….’
‘네가 이렇게 멍청하고 순진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러겠어?’
해완은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해언이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속삭였다.
‘윤해완, 나 봐.’
‘…….’
‘나 보라고.’
해완이 고개를 들자 해언은 양손으로 해완의 볼을 감싸고 못 박듯이 말했다.
‘내가 하는 건 전부 다 널 위한 거야.’
‘…….’
‘이해하지? 이해하는 거지, 해완아?’
두 사람에게 똑바로 쏟아져 내리는 저녁노을이 그런 말을 하는 해언의 눈을 마치 불타오르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왜인지 해완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해언을 이해할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 * *
어둠 속에서 번쩍 눈을 떴을 때 해완의 온몸은 식은땀으로 가득 젖어 있었다.
꿈의 여운으로 잠시 멍하니 눈만 깜빡이던 해완은 옆에서 들리는 유준의 옅은 기침 소리를 듣고서야 겨우 잠기운에서 벗어났다.
탁자를 더듬어 간접등을 켜고 본 유준의 얼굴은 다행히도 아직 잠든 채였다. 몸을 일으킨 해완은 욕실로 가 축축한 얼굴과 목덜미를 조용히 씻어 냈다.
분명 무슨 나쁜 꿈을 꾼 것 같은데.
하지만 꿈은 이상하게도 쉽게 휘발되어 버리곤 해서, 벌써 생각이 나질 않았다.
욕실에서 나온 해완은 문득 들려온 작은 노크 소리에 흠칫 놀라 걸음을 멈췄다. 살짝 열린 방문 틈 사이로 문 앞에 서 있는 긴 그림자가 보였다.
악몽을 꾸면서 시끄러운 소리라도 냈나? 괜히 당황해 어쩔 줄 모르던 해완은 겨우 정신을 차리고 빠른 걸음으로 다가가 문을 열었다.
게스트 룸 앞 복도 벽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던 강현이 해완을 보고 몸을 똑바로 세우며 물었다.
“잘 쉬고 있나 걱정돼서 보러 왔는데 불이 켜지길래요. 안 자고 있었어요?”
“아뇨. 자다가 잠이 깼어요.”
강현은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왜요, 잠자리가 불편해요?”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좀…… 나쁜 꿈을 꿔서요.”
해완의 말에 강현은 잠시 눈을 굴리는가 싶더니 나직이 말했다.
“잠깐 이리 와 볼래요?”
해완이 머뭇거리자 강현은 그의 손목을 가볍게 잡아챘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해완이 놀란 토끼같이 눈을 동그랗게 떴지만, 강현은 태연한 얼굴로 그를 채근했다.
“얼른요.”
엉겁결에 발걸음을 뗀 해완은 강현에게 아이처럼 손목이 붙들린 채로 거실 복도를 가로질러 강현의 침실이 있다는 방향으로 걸어갔다.
그의 침실이 가까워지는 순간 해완은 저도 모르게 바싹 긴장했지만, 강현은 닫혀 있는 문을 자연스럽게 지나쳐 드레스 룸 옆 또 다른 작은 방으로 향했다.
그 앞에 서고 나서야 강현은 해완의 손목을 놓고 문을 밀어 열었다.
“아…….”
작업실에 있는 것만큼 규모가 크지는 않았지만 방 한가운데 있는 조향대가 바로 눈에 들어왔다. 각종 향료가 섞인 은은한 향기에, 해완은 입을 벌리고 작게 감탄사를 냈다.
“집에서 작업을 할 때는 여기서 하거든요. 들어와요.”
나직한 목소리로 말한 강현은 문을 활짝 열어 놓고 먼저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해완이 조심스레 뒤를 따르는 사이 그는 조향대 앞에 서서 뭔가를 고민하듯 바라보고 있었다.
해완이 가까이 서는 기척을 느낀 강현은 뒤를 돌아보며 말을 건넸다.
“나도 그런 경험이 많아서 아는데, 잠들기 어려울 때 에센셜 오일을 침구에 뿌리면 도움이 돼요.”
그리고 강현은 몇몇 오일병을 골라 익숙한 솜씨로 시향지에 뿌린 후 해완에게 차례로 건네주었다.
“일단 숙면을 취하는 데 좋은 향들로 골라 봤어요. 마음에 드는 걸로 가져가요. 섞어서 뿌려도 좋으니까.”
강현이 건네준 것은 라벤더, 카모마일, 레몬밤, 일랑일랑과 같이 해완에게도 익숙한 잔잔하고 깊은 허브 향들이었다.
색온도가 낮은 따스한 주황빛이 사위를 부드럽게 비추는 가운데, 숨을 들이쉴 때마다 은은한 아로마 향이 폐부 깊숙이 스며들어 마음을 편하게 했다.
그래서인지, 해완은 평소답지 않게 불쑥 강현에게 물었다.
“……여강현 씨는 어떤 향을 쓰는데요?”
해완이 그런 질문을 던질 것은 예상하지 못했던 듯 강현은 잠시 멈칫했다. 그 반응을 보자 저 스스로도 어울리지 않게 굴었다는 생각이 들어 절로 얼굴에 열이 올랐다.
그러나 강현은 곧 빙그레 미소를 짓더니, 등을 돌려 작은 병 하나를 그 커다란 손에 쥐었다.
“나는…… 주로 이걸 뿌려요.”
해완은 강현이 건넨 시향지를 코 밑에 가져다 댔다. 아까 맡았던 은은한 향들과는 다른, 진하고 달콤하면서 어딘가 비에 젖은 풀 같은 느낌의 향취가 후각을 자극했다.
“이게 무슨 향이에요?”
그 정체를 알 듯 말 듯 한 아리송한 향기에 해완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오스만투스예요.”
오스만투스. 강현의 브랜드 네임에 들어 있는 꽃의 이름이었다. 처음에는 그것이 뭔지 몰랐지만, 해완은 이제 그게 은목서를 의미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진한 플로럴 향이어서 잠잘 때는 어울리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나는 좋아하는 향이거든요.”
처음으로 맡아 보는 냄새였지만, 좋아하는 향이라 말하는 강현의 조용한 목소리가 해완의 마음을 끌었다.
“그럼 이걸로…….”
해완이 오스만투스 오일병을 집어 들자 강현이 고개를 숙이고 설핏 미소를 지었다.
“나도 도움을 많이 받은 향이라서, 윤보리 씨도 그랬으면 좋겠네요.”
“원래…… 불면증이 심했어요?”
“불면증이라기보다는, 워낙 감각이 예민하다 보니 아기 때부터 잠을 못 자는 아이였대요. 그래서 어머니까지 몇 년을 제대로 자 본 적이 없다고 하시더라구요.”
“아…… 그래도 향이 도움이 돼서 어머니도 기뻐하셨겠어요.”
“글쎄요. 그랬으면 좋았을 텐데, 어머니가 돌아가신 다음에 알게 된 향이라.”
조향대를 정리하느라 뒤돌아선 강현의 어조는 가벼웠지만 해완은 덜컥 말문이 막혔다.
“미안해요. 괜한 말을 했네요.”
그 말에 몸을 돌린 강현은 해완의 당황한 얼굴을 보고 씁쓸히 미소를 지었다.
“그러지 마요. 어머니가 돌아가신 지 벌써 10년 가까이 돼서, 이 정도 얘기하는 건 아무렇지 않으니까.”
어머니를 잃었을 강현의 나이를 가늠해 본 해완의 가슴이 쓰렸다. 물론 그 자신의 말마따나 강현의 태도에는 별다른 감정의 동요를 찾아보기 어려웠으나 겉으로 드러나지 않는 상처일수록 크기를 가늠할 수 없는 법이었다.
게다가 지금 오렌지빛의 옅은 미등 아래 선 강현의 얼굴은 그 텅 빈 버스 정류장에서 노을을 받고 있던 소년의 외로운 모양을 겹쳐 보이게 해서, 해완은 죄이듯이 아려 오는 가슴께에 저도 모르게 손을 올리고 꼭 움켜쥐었다.
“……그럼 이제 둘 다 자러 갈까요?”
작업대 정리를 마친 강현이 불쑥 말을 뱉고 나서야 정신을 차린 해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리 넓다 한들 집 안에서 돌아다니는 것인데도, 강현은 반쯤 우기다시피 게스트 룸 방문 앞까지 해완을 데려다주었다.
“잘 자요. 그럼.”
“……여강현 씨도요.”
굿 나잇 인사를 한 강현은 그대로 뒤를 돌아 다시 자신의 침실로 돌아갔다. 그 정도로 체격이 있으면 행동이 요란스러울 법한데도 강현의 움직임에는 정적인 면이 있어, 해완은 그 널찍한 등이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질 때까지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다시 방으로 돌아온 해완은 오일병의 뚜껑을 열고 먼저 향을 가볍게 맡아 보았다. 진하고 풍부한, 거짓이 없이 달콤한 꽃의 향기가 났다.
마치 솜사탕 같은.
이상하게 묵직해지는 마음을 애써 떨쳐 낸 해완은 베갯잇 끄트머리에 오일 한 방울을 조심스레 떨궜다. 그러자 강현의 집에서 전체적으로 나는 숲 향과 어우러져 마치 짙은 향을 풍기는 꽃나무가 심겨진 숲속에 서 있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해완은 다시 저를 덮치기 시작한 잠의 기운에 손발을 맡기며, 나른하게 강현의 향수병에 새겨져 있는 그 이름을 떠올렸다.
Osmanthus in the wood. 숲속의 은목서.
흐릿하기만 했던 그 이름이, 어떤 느낌인지 이제야 알 것만 같았다.
* * *
다음 날 잠에서 깨어난 뒤 유준은 완전히는 아니어도 상태가 꽤 좋아졌다. 식욕도 전보다 도는지 죽도 한 그릇을 깨끗이 비우고 약도 잘 챙겨 먹었지만, 심한 졸음도 폐렴 증상 중 하나인지라 눈을 뜨고 있지를 못해 해완은 그가 다시 잠들었음을 확인하고 거실로 나왔다.
한 시간을 넘게 보리와 오전 산책을 하고 돌아온 강현은(매일의 루틴이라고 했다) 씻고 있는 모양인지 보리가 혼자 거실에서 장난감을 가지고 놀고 있었다. 보리는 해완을 보자마자 냉큼 가까이 와 만져 달라는 듯 꼬리를 흔들었다.
방금 산책을 하고 와서인지 유달리 웃는 얼굴을 하고 있는 것 같아서, 함께 기분이 좋아진 해완은 보리의 목덜미를 두 손으로 마구 어르고 쓰다듬었다.
“유준이는 또 잠들었어요?”
그때 샤워를 마친 강현이 침실에서 걸어 나오며 물었다. 가볍게 젖어 있는 머리에 얇은 후드 티와 스웨트 팬츠를 입고 있었는데, 저렇게 자연스러운 모습을 보는 게 처음이라 이상하게 입이 말랐다.
“네. 그래도 기침도 많이 줄고 좋아졌어요. 다 여강현 씨 덕분이에요. 정말 고마워요.”
해완의 대답에 씩 웃은 강현이 장난스럽게 말했다.
“그럼 오늘 밥 한 끼 얻어먹을 수 있는 거예요?”
어젯밤 했던 강현의 말이 진심이었는지 몰랐던 해완은 당황해 얼굴을 조금 붉혔다.
“……내가 주방 쓰는 게 괜찮다면요.”
“당연히 괜찮죠. 있는 거 전부, 마음껏 써도 돼요.”
그리고 강현은 해완의 등을 떠밀다시피 주방으로 안내했다. 안 그래도 이런 고급 주택의 주방은 어떨지 내내 궁금했던 터라 해완은 홀린 듯이 안쪽으로 들어갔다.
언뜻 기웃거리기만 해도 최고급 제품으로만 구성되어 있는 것이 분명해 보여 해완은 속으로 감탄사를 내뱉었다.
안쪽 벽면을 따라 널찍하게 설치되어 있는 화이트 대리석으로 마감된 싱크대와 조리대, 찬장 및 글래스장 등은 해완도 이름이나 한번 들어 본 하이엔드급 이탈리아제 주방 전문 맞춤 가구였고, 냉장고나 오븐 등의 가전제품들도 전부 고가의 외제 브랜드였다.
커트러리나 식기도 모두 마찬가지였다. 프라이팬이나 냄비 같은 조리 도구도 비록 사용감은 없었지만 원가 자체가 높은 구리 팬으로 사이즈, 종류별로 구비되어 있었다.
“요리도 안 한다면서 프라이팬은 종류별로 있네요?”
해완의 말에 강현은 의아한 듯 물었다.
“프라이팬에도 종류가 있어요?”
픽 웃음을 터트린 해완은 가볍게 설명했다.
“이렇게 옆면이 낮고 위로 갈수록 퍼지는 프라이팬은 스킬렛이라고 하고, 벽이 일자로 올라가는 건 소테 팬이라고 해요. 그리고 이 깊고 둥근 벽을 가진 건 소투스구요.”
이렇게 요리할 만한 주방에 온 것이 오랜만이라 조금 목소리가 들뜬 해완을 강현은 옅은 미소를 띠고 바라보았다.
메뉴는 알리오올리오로 정했다. 강현이 집에서 요리를 하지 않는 탓에 마땅한 재료가 별로 없기도 했으나 거의 2년 만에 칼을 잡는 터라 조금 걱정이 되어서이기도 했다. 그래도 비교적 조리법이 간단한 알리오올리오는 집에서도 몇 번 해 먹은 적이 있어 무리 없이 할 수 있을 것 같았다.
강현의 입맛이 얼마나 고급인지 알기에 어쩔 수 없이 긴장이 됐지만 그는 정말 맛있게 끝까지 접시를 비웠다. 정말 오랜만에 느끼는 마음이 뿌듯하게 벅차오르는 감각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자꾸만 올라가는 입꼬리를 애써 눌러 내려야 했다.
“이대로 실력 썩히는 건 너무 아까운데, 다시 요리할 생각은 없는 거예요?”
포크를 내려놓은 강현이 해완에게 물었다. 반쯤 아부를 섞어 기분 좋게 물어볼 수 있는 질문이었으나 그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조심스러운 기색이 있었다.
지금까지 저에 대해 말하는 것을 피해 왔던 걸 생각하면 충분히 이해할 만한 태도라는 생각에 미안한 기분이 든 해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하고 싶어요. 인생에서 처음으로…… 내가 뭔가를 할 수 있는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된 게 레스토랑에서 일하기 시작한 다음부터거든요.”
“…….”
“하지만 지금은 그럴 사정이 안 되니까요.”
애써 아무렇지 않은 어조로 말을 끝맺었음에도 강현은 약간 표정을 흐렸다. 분위기를 망친 것 같아 머쓱해진 해완은 괜히 분주하게 테이블을 정리하며 식사를 마무리 지었다.
강현의 일상을 방해하고 싶지 않아 해완은 바로 방으로 돌아가려 했지만 그는 그러지 말고 보리와 놀아 달라며 해완을 붙잡았다. 폐렴도 전염의 위험성이 있어 환자와 밀폐된 장소에 오래 있는 건 좋지 않다는 의사의 권유도 또 다른 이유였다.
활동량이 많기로 유명한 보더콜리답게 오전에 긴 시간 산책을 하고 와서도 조금도 지친 기색이 없는 보리는 해완이 장난감을 들고 다가서자 신이 나서 어쩔 줄 몰라 했다.
어떻게 놀아 줘야 할지 몰라 해완이 조금 망설이자 강현은 익숙한 손길로 이런저런 시범을 보여 주었다. 아주 어릴 때부터 지금까지 지속적으로 전문적인 교육을 받고 있다는 보리는 훈련이 잘되어 있어서 초보자인 해완도 금세 보리를 다루는 것에 익숙해지기는 했다.
도통 에너지가 줄어들 줄 모르는 보리와 놀이로 씨름하는 데 한참 정신이 팔려 있던 해완이 문득 고개를 들었을 때, 책을 읽고 있는 줄 알았던 강현은 그런 해완을 보며 웃고 있었다.
“내가 뭐…… 이상한 거 했어요?”
해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강현은 살짝 고개를 저으며 말했다.
“아뇨, 그냥…… 윤보리 씨는 참 뭐든지 열심히 한다 싶어서.”
그의 목소리는 놀리는 기색은 전혀 없이 사뭇 다정했다. 괜히 얼굴이 붉어진 해완은 몇 번 목을 가다듬고는 주제를 돌렸다.
“이렇게 넓은 집에 혼자 살면 외롭지 않아요?”
해완의 질문에 강현은 생각해 보지 못했다는 듯 답했다.
“글쎄요. 스무 살이 되자마자 혼자 살아서, 이젠 이게 더 익숙하거든요.”
갓 미성년을 벗어나자마자 혼자 살았다는 말에 해완은 살짝 눈가를 찡그렸다.
강현이 그 해안 마을을 떠났던 것은 스무 살이 된 직후였다. 그러니 서울로 올라가자마자 혼자 살았다는 뜻이 됐다.
게다가 그때의 강현은 시각 장애를 가지고 있었다. 정확히 언제 어떻게 치료가 되었는지는 몰라도, 아무리 돈이 많다고 해도 혼자 살 만한 조건으로는 도저히 보이질 않았다.
순간, 어젯밤 강현이 공유했던 어머니의 죽음이 머릿속을 빠르게 스쳐 지나갔다.
어머니가 돌아가셔서, 강현의 곁에 있어 줄 사람이 없었던 걸까?
아무도 오지 않고 찾지 않는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멍하니 혼자만의 어둠을 응시하던 소년의 모습이, 마음을 견딜 수 없이 저리게 만들었다.
“유준이한테는 왜 그렇게 잘해 주는 거예요?”
점점 깊어지는 상념 속으로 강현의 목소리가 불쑥 끼어들었다. 흠칫 놀란 해완이 멍하니 되물었다.
“네?”
“어제 보니까 정말 많이 아끼는 것 같아서요. 꼭 친동생처럼.”
그런 말을 하는 강현의 얼굴은 해완의 기억 속 혼자 남겨진 어린 강현의 모습과는 달리 지극히 태연하기만 했다.
제가 그에 대해 알고 있는 건 극히 일부분일 뿐인데도 멋대로 감상에 젖은 것이 문득 부끄러워진 해완은 허벅지에 턱을 얹고 엎드려 있는 보리를 쓰다듬으며 답했다.
“유준이는 제 친동생이나 마찬가지예요. 같이 자랐거든요.”
그 말에 강현은 잠시 말이 없더니, 갑자기 툭 질문을 던졌다.
“그럼, 윤보리 씨도 그 보육원 출신인가?”
보리의 목덜미를 쓰다듬던 해완의 손이 뚝 멎었다. 해완이 눈을 크게 뜨고 강현을 바라보자, 그는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말을 이어 나갔다.
“그날 유준이가 나한테 당신이 윤해언이라고 말했을 때, 자기는 해언이랑 같은 보육원 출신이라고 했었어요. 그런데 윤보리 씨가 유준이와 같이 자랐다면 당신도 그 보육원 출신일 거고, 해언이도 거기서 안 거겠네요. 맞죠?”
저에 대해서 가장 큰 단서를 강현이 알고 있다는 사실에 머릿속이 아득해졌다.
하지만 거짓말을 하거나 묵비권을 행사하는 것은 지금에 와서는 무의미해 보였고, 이렇게 강현의 집 안에서 그의 도움을 받으며 그러고 싶지도 않았다.
해완은 자신의 대답을 기다리는 강현을 향해 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더 이야기하자면 그때 유준이 이야기를 바로 믿었던 건 내가 바보라서가 아니에요. 해언이한테 유준이에 대해서 이야기를 들었던 게 생각나서 그런 거지.”
강현의 말은 조금 의외여서 해완은 저도 모르게 되물었다.
“해언이가…… 유준이 얘길 했어요?”
“네. 유준이 말고도 자기 주변 사람 이야기들을 종종 했어요. 학교 친구들, 보육원 동생들, 선생님들, 그리고 서울에서 만나는 사람들…….”
분명 자신의 이야기도 했을 것이다. 처음부터 그러기 위해 강현에게 말을 붙이려 했던 해언이었으니. 게다가 당시 해완과 해언은 서로를 떼어 놓고는 일상을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거의 붙어 다니던 터였다.
어쩌면 진작 자신이 누군지 알고 있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 온몸에 식은땀이 밴 해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하지만, 강현의 입에서 나온 말은 그의 예상과 전혀 다른 것이었다.
“그런데 당신으로 추측될 만한 사람의 이야기는 한 번도 들은 적이 없어요.”
뭐? 이해할 수 없는 이야기에 해완은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그런 해완의 얼굴을 본 강현은 잠시 멈칫했지만 다시 천천히 말을 이었다.
“이상하지 않아요? 윤보리 씨가 지금까지 한 이야기만 들으면 해언이랑 누구보다 친한 친구였던 거 같은데 말이에요.”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벙긋대던 해완은 간신히 말을 뱉었다.
“여강현 씨가…… 기억하지 못하는 걸 수도 있잖아요.”
“그냥 보육원에 시끄러운 동생이 있다고 한 유준이에 대해서도 기억하는데, 당신처럼 중요한 친구 이야기를 설마 기억 못 할까 봐요.”
“…….”
“8년 전뿐만이 아니에요. 우리가 그동안 주고받았던 이메일에서도 당신 이야기는 한마디도 들은 적 없어요. 나랑 만나는 자리에 당신을 내보냈는데도 불구하고.”
“이메일이요?”
“…….”
“이메일이라니, 그게 무슨 소리예요?”
해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그 말에 강현은 뜻을 가늠하기 어렵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그러더니 짧게 한숨을 쉬고 어쩔 수 없다는 듯 대꾸했다.
“내가 서울로 올라오면서 헤어지고 난 뒤에 해언이가 나한테 종종 이메일을 썼었어요. 내가 답장을 해도 다시 답장을 하는 일은 거의 없었지만, 1년에 두어 번쯤.”
“…….”
“우리가 그 수목원에서 만나기로 한 약속도 그렇게 정한 거고.”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들에 몸이 떨렸다. 그것을 보이지 않기 위해 해완은 보리의 몸에서 손을 내려 주먹을 쥐었다.
해언은 8년 전 강현에게 해완의 존재에 대해서 말해 준 적이 한 번도 없었다.
그리고 죽기 전 해완에게 돌아와서도, 강현과 계속 연락하고 있었으면서 그런 사실을 해완에게 한 번도 말해 준 적이 없었다.
그저 여강현이라는 사람을, 완전히 잊어버린 것처럼 굴었다.
‘그럼 아직까지 말 한번 못 해 본 거야?’
‘……응.’
‘왜?’
‘……그냥…….’
‘그럼 이렇게 하면 어떨까? 내가 가서 쟤랑 친해지고 너도 소개해 줄게.’
‘…….’
‘괜찮지?’
‘……응.’
잊어버린 적 없던 대화의 한 조각이, 머릿속을 멋대로 돌아다녔다. 그와 동시에 설명할 수 없는 격렬한 감정이 마음 곳곳에서 솟구쳤다.
해완은 지금껏 해언이 적어도 자신의 존재에 대해 강현에게 말은 해 줬을 거라고 굳게 믿고 있었다.
왜냐면 그러기로 약속했으니까. 강현에게 말 한마디 걸지 못하고 바라만 보던 답답한 자신을 대신해 먼저 친구가 된 후 소개해 주기로 했던 것이었으니까.
하지만 사람의 마음이 생각대로만 움직이는 것은 아니므로, 그러다가 해언이 강현을 좋아하게 된 것에 대해, 강현 또한 해언을 좋아하게 된 것에 대해, 그래서 끝내 해언이 강현을 소개해 주지 않은 것에 대해 제가 원망을 할 자격은 없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언이 처음부터 해완을 강현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면.
의도적으로 그를 배제하고, 차단해서 강현과 알아 갈 수 있는 기회를 빼앗아 간 것이라면.
그게 미안해서 이제 와서 이런 말도 안 되는 방법으로 강현을 해완에게 돌려주겠다 생각한 것이라면.
그렇다면 스멀거리며 고개를 드는 이 배신감을 어떻게 해야 좋을지 몰랐다.
“윤보리 씨?”
해완이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가를 가린 채 바닥만 쳐다보고 있자 강현의 의아한 목소리로 그를 불렀다.
하지만 스스로의 마음속으로 멀어져 가던 해완을 멈춰 세운 것은 강현의 목소리가 아니라 그의 바지 안에서 울리는 핸드폰 벨 소리였다.
해완의 허벅지에 턱을 올려 둔 채 거의 잠들락 말락 했던 보리가 갑작스러운 벨 소리에 깜짝 놀라 몸을 일으키며 짖어 댔고, 해완도 정신이 번쩍 들었다.
강현은 몸을 일으켜 놀란 보리를 진정시키며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윤보리 씨,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완은 핸드폰을 꺼내 발신자를 확인하고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며 강현의 말을 끊었다.
“잠깐 전화 좀 받고 올게요.”
강현의 눈에 가득한 의아한 기색을 무시하고 해완은 빠르게 걸음을 옮겨 게스트 룸으로 향했다. 일단 생각을 차단한 그는 전화를 받으며 방 안으로 들어가 문을 닫았다.
“네, 아저씨.”
―어, 해완 씨. 그 수리하는 사람이 오늘 시간이 된다 그래서 지금 고쳐 놨으니까 와서 확인해 봐. 집이 좀 드러워졌긴 한데 이제 난방이고 온수고 아주 잘 돌아가니까.
“……네. 바로 갈게요.”
전화를 끊은 해완은 지끈거리는 머리를 문질렀다. 지금은 도저히 강현을 멀쩡한 얼굴로 볼 자신이 없어, 차라리 잘됐다 싶었다.
해완은 잠들어 있는 유준을 조심스럽게 흔들어 깨운 뒤 집으로 돌아가게 옷을 챙겨 입으라고 말했다. 유준은 비몽사몽간에 내일 돌아가는 것 아니냐며 투덜거렸지만, 해완의 어두운 얼굴을 보자 알았다는 듯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해완이 방에서 걸어 나오자 보리와 가볍게 터그 놀이를 해 주고 있던 강현이 고개를 들었다. 그가 무엇을 묻기도 전에 해완은 선수라도 치듯 빠르게 말을 쏟아 냈다.
“집주인 아저씨였는데…… 보일러 수리 끝났대요. 이제 난방이랑 온수 둘 다 잘된다고 하니까 집에 가 봐야겠어요.”
“……내일 가도 괜찮은 거 알잖아요.”
“아니에요. 내일 아침엔 일찍 일도 가야 되고 가서 청소도 해야 될 것 같아서요.”
강현은 잠시 해완의 얼굴을 뜯어보는가 싶더니, 천천히 말했다.
“그래요, 그럼. 택시 불러 줄게요.”
강현이 지하 주차장으로 부른 택시를 타고 그 집을 빠져나가며 유준은 아파서 제대로 구경도 못 했다며 아쉬운 듯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았다.
하지만 해완은 뒤돌아보지 않았다. 그저, 집에 할 일이 있어 다행이라는 생각만 들었다.
* * *
그것은 이른 아침 홀로 누구의 발로도 짓밟힌 적 없는 숲속을 걷는 기분이었다.
껑충하게 큰 키가 고작인 젊고 여린 나무들의 이파리 위 맺힌 이슬로 피부가 젖는 기분이었고, 완전히 단내를 내기에는 푸르게 설익은 열매들이 숨 쉬는 냄새를 맡는 기분이었다.
아마 보통의 사람들이 맡을 수 있는 것은, 여기까지였을 것이다.
하지만 강현만이 느낄 수 있는 건 그 너머에 있었다.
조금 더 집중해서, 그 숲의 저편을 들여다보면 희미한 꽃의 자취가 풍겼다.
남다른 후각을 가진 강현조차 아주 집중하지 않으면 그 흔적을 잡아내기 어려운 것이었다.
그것은 은목서였다.
여름의 끝물, 가을이 시작될 무렵 희미한 봉우리를 틔우기 시작하는 작은 흰색 꽃.
이곳에서 만나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한 그 신선한 의외성이, 바로 강현이 해언의 향을 잊지 못하게 하는 이유 중에 하나였다.
낡은 편지를 코끝에 대고 눈을 감고 있던 강현의 속눈썹이 무겁게 들려 올라갔다.
그것은 잠시 머물렀던 그 해안 마을을 떠날 때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해언에게서 받은 편지였고, 앞을 볼 수 없었던 탓에 받은 지 1년이 지나서야 읽을 수 있던 글이었다.
누군가에게 읽어 달라고 할 수도 있었겠지만, 그런 일을 부탁할 만한 사람이 그때 강현의 곁에는 존재하지 않았다.
강현은 낡은 종이에서 풍기는 향을 한 번 더 들이쉬었다. 편지를 준 사람의 손목에서 배었을 향은 날아간 지 오래였지만 조향을 배우기 시작한 이후 향을 잃어버리는 것에 대한 두려움은 더는 문제가 되지 않았다.
게다가 ‘그’가 곁에 있는 지금은, 더더욱 아무런 상관도 없을 일이었다.
혼자 있는 지금도 ‘그’를 뭐라 불러야 좋을지 몰라, 강현의 입에서 자조적인 웃음이 새어 나왔다.
자신의 감각을 한 번도 의심한 적은 없었지만 ‘그’와 시간을 보내면 보낼수록 머릿속의 정보와 본능이 격렬하게 충돌해 강현을 지극히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그러나 불투명하기 그지없는 세상을 살아가며 그가 의지해 온 단 하나의 진실은, 사람은 거짓말을 할 수 있지만 향은 거짓말을 할 수 없다는 것이었다.
게다가 어차피 해언은 단 한 번도 강현에게 이해할 수 있는 존재였던 적이 없었다.
그가 제게 준 이 편지처럼.
[난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걸 진심으로 믿어 본 적이 없어.]
[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나보낼 수가 없었어.]
해언의 동그란 글씨체를 무표정한 얼굴로 바라보던 강현은 조심스럽게 편지를 다시 잘 갈무리해서 넣고는, 소파에 몸을 깊게 묻고 앉아 자신이 이메일과 관련한 이야기를 했을 때 ‘그’가 짓던 표정을 떠올렸다.
원래 홍채 색이 옅긴 했지만 강현의 이야기를 믿을 수 없다는 듯 크게 뜨여진 눈동자는 속이 다 들여다보일 듯 투명하게 보였다.
정말 그 이메일과 관련한 사실을 난생처음 듣는 것처럼 말이다.
짜증이 솟구쳐 올라 강현은 신경질적으로 이마를 문질렀다.
그가 정말 윤해언이라면, 연기를 기가 막히게 잘하거나, 아니면 기억 상실이라도 걸렸다는 이유가 있어야 설명이 될 법한 얼굴이었다.
하지만 사람의 표정을 읽는 것이 그의 특기가 아니라는 게 첫 번째 문제였고, 해언과 이런 식의 게임을 한 게 처음이 아니라는 것이 두 번째 문제였다.
해언이 그를 속이려 든 것은 여러 번이었다.
만나기로 약속해 놓고 나오지 않은 적도 있었고, 강현에게 엉뚱한 사람을 보내 해언인 척 연기를 시키기도 했다.
별달리 화가 나지는 않았다. 어차피 강현에게는 별다른 선택지가 없음을 잘 알고 있었으니까.
게다가 강현은 그런 얕은 속임수에 속지 않았다. 그가 향을 맡을 수 있는 이상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그것이 자신이 해언이 아니라고 말하는 ‘그’의 말을 믿지 않은 이유였다.
그때 현관 벨이 울렸다. 강현이 인터폰으로 문을 열자 그가 몇 년째 가사를 맡기고 있는 중년의 도우미 아주머니가 바쁘게 안으로 들어왔다.
강현은 먼저 부드럽게 말을 건넸다.
“오시는 날도 아닌데 와 주셔서 감사해요.”
“마침 또 딱 시간이 비어서요. 근데 왜 오늘 부른 거예요?”
“손님이 왔다 가서 청소를 좀 해야 할 것 같아서요.”
“손님? 손님이 웬일로? 여기서 일한 지 몇 년인데 강현 씨네 손님 온 걸 처음 보네.”
아주머니의 호들갑에 강현은 그냥 연하게 웃었다. 아무나와 사생활을 나누고 싶은 생각은 추호도 없었지만, 본가에 말이 들어갈 만한 업체를 피해 사람을 부르려면 그런 서비스적인 면까지 완벽히 충족시키기에는 약간의 어려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아주머니와 함께 게스트 룸으로 향한 강현이 말했다.
“그 왼쪽에 있는 침대 시트랑 이불 전부 다 버려 주세요. 매트리스만 남기고, 전부 다요.”
강현의 말에 아주머니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뭐? 이거 다 구스 이불 아니야? 엄청 비쌀 텐데.”
“그렇긴 한데, 싫은 냄새가 배어서요.”
강현의 말에 아주머니는 베개를 들어 냄새를 킁킁 맡았다.
“냄새는 무슨 냄새, 좋기만 하구만! 그리고 무슨 냄새가 나도 빨면 싹 없어져요. 거의 쓰지도 않은 이 아까운 걸 왜 버리고 그래요.”
아주머니의 안타까운 목소리에도 강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았다. 그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띤 채 바라보기만 했다.
공기를 무겁게 만드는 것을 망설이지 않는 의도된 침묵에 마음이 불편해진 아주머니는 큼큼 목을 가다듬더니 물었다.
“여, 여기 오른쪽 침대에 있는 것도 버려 줘요?”
강현은 잠시 그것을 바라보다가 조용히 말했다.
“……아뇨. 거기 있는 건 괜찮아요.”
* * *
강현의 집을 떠난 이후 금요일인 오늘까지 이틀 내내 해완은 해언이 왜 이런 일을 벌였는지에 대한 상념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렴풋한 추측 말고는 그 무엇도 확실하지 않았던 때보다 실마리 같은 단서를 붙든 지금이 더 답답했다. 아무리 고민을 해도 해언의 진심 어린 속내를 알 길이 없기에 더욱 그랬다.
그러나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자신에게 강현에 대해 말하지 않은 것까지는 어떻게든 납득할 수도 있어 보였다. 만약 해언이 해완의 첫사랑인 강현을 뺏었다고 여겨 그를 다시 만나게 함으로써 보상해 주고 싶다고 생각했다면 해언의 입장에서는 말없이 만나게 하는 게 이치에 맞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몰랐다.
왜냐면 해완은 해언이 솔직하게 말했다 한들 강현을 절대 만나지 않았을 것이기 때문이다.
특히 해언이 그 일에 대해 죄책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알았으면 말이다. 그것만큼은 분명했다.
저에 대한 것이야 그렇게 억지로라도 이해해 볼 수 있었지만 문제는 강현이었다.
아무리 어린 시절의 연인이라 한들 어쨌든 강현도 해언이 좋아한 사람이었다. 게다가 8년이나 해언을 잊지 못했다는 강현을 이런 식으로 오해하게 만들어 일에 말려들게 할 이유를 도저히 알 수가 없었다.
마치 강현의 의사는 하나도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강현의 작업실로 가기 위해 길을 나선 해완은 깊게 한숨을 내쉬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꽉 막힌 속이 풀릴 일은 없었다.
그런데 버스를 타고 가는 중 강현에게 전화가 왔다. 10여 분 뒤면 작업실에 도착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 굳이 전화를 할 이유가 생각나지 않아 해완은 일단 곧바로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윤보리 씨. 혹시 지금 작업실로 가고 있어요?
“네. 10분쯤 뒤에 도착하는데 왜요?”
―외부 미팅이 있어서 밖에 나왔는데 생각보다 일이 늦어졌어요. 40분 뒤에나 도착할 것 같은데 비밀번호 알려 줄 테니까 안에 들어가 있어요.
“아, 네, 그럴게요.”
―그리고…….
강현은 갑자기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전에 본 내 사촌 누나 기억해요?
“네.”
―원래 오늘 작업 맡긴 디퓨저를 찾아가기로 했는데 이미 작업실에 거의 도착했대요. 나 올 때까지 못 기다리겠다고 하니까 윤보리 씨가 먼저 짐 옮기는 것 좀 도와줘요. 어디 있는지 알죠?
걱정하지 말라고 대답하고 전화를 끊긴 했지만 괜히 긴장이 된 해완은 목뒤를 문질렀다.
버스에서 내려 빠른 걸음으로 작업실로 향하자 작업실 문을 거의 가로막듯이 앞에 주차되어 있는 고급 세단이 보였다.
이름이, 최서연이라고 했나.
알아보지 못하면 실례가 될 듯해 머릿속으로 얼굴과 이름을 되뇌어 보긴 했지만, 서연 또한 강현처럼 눈에 띄는 미인인지라 그러지 못할 일은 없을 것 같았다.
해완이 닫혀 있는 작업실 문 앞에 도착하기 무섭게 서연이 차에서 내렸다. 해완은 어색하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잠깐만 기다리시면 얼른 문 열어 드릴게요.”
해완이 도어 록 비밀번호를 누르기 시작하자, 서연이 어이없다는 듯 물었다.
“비밀번호 알고 있어요?”
“네. 여강현 씨가 알려 줘서…….”
“내가 알려 달랄 땐 알려 주지도 않더니. 왜 그쪽한테는 알려 줬지?”
“글쎄요, 제가 직원이니까……?”
머뭇대다 뱉은 어설픈 대답에 서연은 코웃음을 쳤다. 벌써 진땀이 흐르는 기분에 해완은 속으로 한숨을 내쉬었다.
건물 안으로 들어가 주차장 문을 열어 주고 돌아다니며 조명을 켜는 사이 주차를 마친 서연이 응접실로 걸어 들어왔다.
해완은 서연에게 잠깐 앉아 있으라고 이르고 향료 보관실로 향했다. 그러나 지난주 강현과 함께 포장한 뒤 보관실 한구석에 쌓아 둔 백여 개의 박스를 보자 아차 싶은 생각이 들었다.
서연은 서경산업에 속한 화장품 관련 계열사의 전무직을 맡고 있다고 했다. 디퓨저는 그녀가 리드하여 새로 론칭하게 된 모 수입 고급 화장품 라인 행사에서 VVIP들 선물용으로 필요한 것이었는데, 디퓨저 자체의 박스나 용기는 모두 강현의 브랜드 것이었지만 쇼핑백만큼은 따로 이것에 담아 달라고 주문해서 보내 준 터였다.
그런데 박스만 포장하고 미처 쇼핑백에 넣어 두지 못한 것이다. 난감한 상황이었으나 그렇다고 서연을 계속 기다리게 할 수는 없어 해완은 일단 밀차에 박스와 쇼핑백 모두를 옮겨 싣고 다시 응접실로 향했다.
“시간이 없어서 쇼핑백에 못 옮겨 담았어요. 금방 해 드릴게요.”
“그럼 나는 뭐 하라구. 그냥 기다리라구요?”
앙칼진 말에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해완은 입만 벙긋거렸다. 그런 해완의 얼굴을 본 서연이 풋 웃음을 터트렸다.
“지난번부터 생각한 건데 되게 잘 당황하네. 놀리기 좋단 말 자주 듣지 않아요?”
“……아닌데요…….”
해완의 소심한 중얼거림은 들은 척도 하지 않은 서연이 시원스럽게 대답했다.
“같이 해요. 둘이 하는 게 손이 빠르니까.”
그리고 서연은 바닥에 털썩 주저앉아 박스를 쇼핑백에 넣고 손잡이를 리본으로 묶기 시작했다. 생각보다 털털한 그녀의 태도에 제가 약간 편견을 가졌던 것 같아 미안해진 해완은 잠자코 옆에 앉아 같이 작업을 하기 시작했다.
서연이 흥미로운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진짜 이름이 윤보리예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해완은 애써 목을 가다듬고는 대답했다.
“아니에요. 그냥 여강현 씨가 멋대로 붙인 별명이에요.”
그 말에 서연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크게 말했다.
“그래, 어쩐지 사람 이름치곤 너무 이상하다 했어요.”
사람 이름이어도 나름 귀여운 것 같은데. 해완은 속으로 생각했지만 말이 길어질 게 무서워 소리 내어 말하지는 않았다.
그런데, 서연이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또 개로 모자라 사람까지 수집하나 했네.”
저에게 한 말인지 혼잣말인지 구분이 되지 않아 해완은 잠시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아, 근데 혹시 우리 어디서 만난 적 있어요?”
해완의 말을 자르고 서연은 다시 질문을 던졌다. 성격이 급하다는 것은 강현에게 전해 들은 바 있지만 도무지 정신을 차릴 수가 없어 해완은 더듬거리며 대답했다.
“아뇨. 아닌 것 같은데…….”
“진짜? 진짜 아니에요?”
“제 기억이 맞다면요. 왜…… 그러시는데요?”
그 말에 서연은 해완의 얼굴을 빤히 보더니, 눈을 가늘게 뜨며 미심쩍게 말했다.
“분명히 어디서 맡아 본 향이거든.”
해완은 입을 반쯤 벌렸다. 그런 해언은 아랑곳없이 서연은 속사포처럼 말을 내뱉었다.
“강현이만큼은 아니어도 나도 후각이 예민하거든요. 그쪽처럼 좋은 향을 잊어버리진 않을 텐데, 도대체 어디서 맡은 건지 기억이 안 나네.”
서연도 해언을 만난 적이 있는 것일까 하는 생각이 삽시간에 머릿속에 가득 찼다. 손에 땀이 배고 심장이 쿵쿵 뛰었다.
그런데 그때, 현관이 열리는 소리에 해완과 서연은 동시에 뒤를 돌아보았다. 평소와 다른 쿵쿵거리는 빠른 발걸음 소리와 함께 강현이 불쑥 응접실로 고개를 내밀었다.
강현은 서연에게 인사를 하기도 전에 해완의 얼굴을 보더니, 인상을 찡그리며 말했다.
“누나 그새 무슨 짓 했어?”
“내가 뭔 짓을 해?”
“윤보리 씨 얼굴 보면 무슨 짓 한 거 같은데.”
해완은 허둥지둥 손을 내저으며 말을 주워섬겼다.
“아니에요. 제가 그냥 얼굴이 잘 빨개져요. 아무 이유 없이.”
서연은 무언가 더 말하고 싶은 눈치였지만 강현은 칼같이 말을 자르며 빨리 상품이나 가지고 가라고 압박을 넣었다. 다행히 많은 양은 아니었던지라 세 사람의 손이 달라붙자 포장은 금방 끝났다.
완벽하게 포장된 디퓨저들을 서연의 차 트렁크에 모두 안전하게 싣는 것까지 끝마치고 난 뒤였다. 서연이 갑자기 손뼉을 치며 말했다.
“아! 생각났다. 윤보리 씨 향 어디서 맡았는지.”
해완은 저도 모르게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가 어떻게 반응할 새도 없이 서연은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강현이 방에서 나는 거랑 똑같은 냄새네.”
그러나, 전혀 생각지 못한 대답에 해완은 멍해졌다. 대신에 강현의 얼굴이 흔들렸다. 그는 황급히 서연의 어깨를 떠밀며 말했다.
“쓸데없는 소리 하지 말고 빨리 가.”
“왜? 니가 페로몬 향수 만드는 게 비밀도 아니잖아.”
드물게 당황한 것 같은 강현의 태도에도 불구하고 해완은 방금 깨달은 사실만 멍하니 머릿속에서 되뇌고 있었다.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강현이 해언의 향을 카피해서 향수를 만들었을 수도 있다고.
서연의 차가 건물을 완전히 빠져나가고 난 뒤, 뒤돌아선 강현은 저를 똑바로 보고 있는 해완을 보고 멈칫했다.
말을 고르기도 전에 제멋대로 입이 먼저 열렸다.
“해언이 향수도 만든 거예요?”
그 목소리는 이상하리만치 절박하게 들렸다. 강현은 그런 해완을 보다가 조용히 답했다.
“그래요.”
그 나직한 고백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었다.
이제 영원히 느낄 수 없으리라 생각했던 해언의 향을, 다시 만날 수 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런 해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강현이 입을 열었다.
“맡아 보고 싶어요?”
해완은 홀린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것 이외에 다른 선택지는 존재할 수가 없었다.
그러자 그런 해완을 향해 빙긋이 웃은 강현이 말했다.
“따라와요.”
강현이 해완을 이끌고 간 곳은 향료들이 가득한 퍼퓸 오르간이 있는 그의 작업실이었다.
아무래도 예민한 물질들이 많은 곳이라 강현이 공간을 소개해 주던 첫날 이외에 이 방에는 들어와 본 적이 없어 해완은 조금은 어색한 기분을 느꼈다.
작업실 모퉁이에 있는 원목 캐비닛을 연 강현은 두 개의 작은 향수병을 꺼냈다. 그는 그중 하나를 골라 세로로 길게 접은 시향지의 접힌 부분을 중심으로 가볍게 뿌렸다.
강현은 그 자리에서 팔을 길게 뻗어 그것을 해완에게 내밀며 말했다.
“맡아 봐요.”
해완은 떨리는 손으로 강현이 내민 시향지를 받아 들었다. 공기 중에 반사된 잔향을 맡는 것만으로도, 죽을 것처럼 심장이 쿵쿵 뛰었다.
강현은 조금 뒤로 물러나 벽에 기대 팔짱을 끼고 비스듬히 섰다. 마치 그를 관찰이라도 하는 듯한 태도였다.
그러나 손에 들린 시향지에만 온 신경이 쏠려 있던 해완은 강현의 그런 시선을 전혀 눈치채지 못했다.
언젠가 들었던 강현의 말처럼, 눈을 꼭 감고 향이 스민 시향지를 코 밑에 가져다 댄 순간, 해완의 마음에 진한 기억들이 번져 갔다.
해언의 형질이 처음으로 발현했던 아침, 그의 향에 이끌려 잠에서 깨어났을 때 해완의 눈에 들어왔던 열세 살 소년의 하얗고 여린 목덜미.
항상 해완을 만지지 않고는 견디지 못했던 부드러운 손바닥, 장난스럽게 등에 매달릴 때의 체온과 웃음소리, 그러고 나면 마치 제 것이라도 되는 양 해완의 몸에 짙게 배어났던 해언의 잔향.
그리고 해완이 아주 오랫동안 놓아주지 못했던, 차게 식어 가던 손등에서 생과 함께 사그라지던 그 애타는 향기까지.
물에 빠진 사람처럼 숨이 가빴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 같아 해완은 피가 날 정도로 입 안을 짓씹었다.
얼마간의 시간이 흐른 뒤 해완은 천천히 눈을 떴다. 아무 말 없이 해완을 지켜보고만 있던 강현이 나지막하게 물었다.
“어땠어요? 당신이 아는 것과 같은 향이에요?”
눈시울이 젖어 있을까 겁이 난 해완은 손바닥으로 눈가를 문지르며 답했다.
“……네, 같아요. 똑같아요.”
그 말에, 강현은 뜬금없는 질문을 했다.
“사람의 후각 수용체가 몇 개나 되는지 알아요?”
“네? 어, 아뇨.”
해완의 어리둥절한 대답에 픽 미소를 지은 강현은 제가 두 번째로 꺼낸 향수병의 뚜껑을 열고 새로운 시향지에 뿌리며 말을 이어 나갔다.
“390종 정도예요. 그런데 사람마다 이 수용체가 30퍼센트까지도 다를 수 있다고 하더군요. 그러니까 우리가 같은 냄새를 맡아도 느껴지는 바는 전혀 다를 수 있다는 거죠.”
강현은 비스듬히 서 있던 몸을 똑바로 일으켜 세운 뒤 해완의 곁으로 다가왔다. 빛과 온도에 민감한 향료들 때문에 작업실 안은 어둡고 서늘했다. 그 탓에 저보다 큰 강현의 얼굴이 어떤 표정을 하고 있는지 잘 보이지 않아 해완은 눈을 깜빡였다.
“그리고 나는, 대부분의 사람들보다 훨씬 복잡한 냄새를 맡아요.”
“…….”
“이것도 맡아 봐요.”
강현은 자신이 새로 뿌린 시향지를 내밀었다. 영문을 모르고 받아 든 해완은 다시 눈을 감고 그것을 코 밑에 가져다 댔다.
처음 해완의 머릿속에 든 생각은, 이것 또한 해언의 향이 아닌가 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해완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정확히 설명할 수 없지만, 뭔가 달랐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현이 물었다.
“다르게 느껴져요?”
“……네.”
대답을 하기는 했으나 확신이 없어, 해완은 한 번 더 향을 가볍게 들이마셨다. 곰곰이 느껴 보니 처음 맡았던 것보다 좀 더 달큼한 향취가 있는 것 같아, 해완은 신중하게 말했다.
“뭔가…… 꽃 냄새 같은 게 더 나는 것 같아요.”
강현은 집요하게 물었다.
“무슨 꽃?”
“……잘 모르겠어요.”
“잘 생각해 봐요. 맡아 본 적 있을 거니까.”
그때 문득, 지난밤의 기억이 툭 새어 나왔다.
강현의 집에서 나던 우드 냄새, 그리고 그가 가져다줬던, 달콤한 꽃냄새가 나는 작은 오일병.
“오스만투스……?”
그러자 강현은 만족스러운 얼굴로 씩 웃었다.
“맞아요. 그 향수는 해언이 향 중에서 내가 좋아하는 부분을 조금 더 강조해서 조향한 거예요. 대부분의 사람들은 맡지 못했을 테지만.”
“아…….”
“내가 열아홉 살 때 사고 때문에 시력을 잃었던 거 알고 있죠?”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해완은 멈칫했지만,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한 가지 감각이 마비되면 다른 감각이 발달한다는 말이 있잖아요. 나 같은 경우에는 그게 후각이었어요. 원래도 굉장히 예민한 편이었지만 눈이 보이지 않게 된 이후로는 지나치게 과민해져서…… 도저히 자극이 많은 도시에선 견딜 수가 없었어요. 그게 내가 그 마을에 갔던 이유예요. 그리고 윤보리 씨도 알다시피, 거기서 해언이를 만났고.”
그 무렵의 일을 강현의 입에서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가슴이 아릿해진 해완은 시선을 내리고 애꿎은 시향지만 만지작거렸다.
“근데, 해언이 향에는 아주 특이한 점이 하나 있었어요. 그게 뭔지 알아요?”
“……아뇨.”
강현은 해완의 손에 들린 시향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 목서 향이요.”
“…….”
“분명히 났었는데 없어지고, 내가 착각했나 싶으면 다음에 만날 때는 또 그 냄새가 나고. 꼭 향이 나랑 숨바꼭질을 하는 것 같았어요. 워낙 들쑥날쑥하니 자주 만나는 누군가의 향이 옮은 건가 하고 생각도 해 봤는데…….”
“…….”
“그런데, 그렇게 희미한 향을 가진 사람이 있을 것 같지는 않았어요.”
그 말이, 마치 그물에 걸린 것처럼 해완의 마음을 강하게 잡아끌었다.
동시에 흰 지팡이를 쥐고 있던 소년이 해완이 떨어뜨리고 간 가죽 시계의 냄새를 주의 깊게 맡고 있던 장면이 생생하게 스쳐 지나갔다.
‘너랑 냄새가 같아.’
그리고 소년은, 그렇게 말했었다.
“그래서 내가 뭔가 착각하고 있는 줄 알았어요. 근데 이렇게 다시 만나고 나니까…….”
그때 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린 강현의 모습이 지금의 강현의 목소리와 겹쳐졌다. 해완은 멍하니 그를 바라보았다.
해완과 눈이 마주치자, 강현은 느긋하게 말을 마무리 지었다.
“당신한테서 나는 향이 맞더라구.”
“…….”
“떨어져 있을 때는 워낙 옅어서 잘 모르겠지만, 이렇게 가까이 붙어 설 때마다…….”
“…….”
“확실히 은목서 향기가 나.”
갑자기 심한 현기증이 덮쳐 왔고, 해완은 비틀거리며 제 앞에 선 강현을 피해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섰다.
“윤보리 씨?”
강현은 당황한 목소리로 그의 이름을 부르며 부축해 주려는 듯 손을 뻗어 팔뚝을 만졌지만, 경기를 하듯 그의 손을 떨쳐 낸 해완이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잠깐, 잠깐 화장실 좀 다녀올게요.”
해완은 강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정신없이 뒤를 돌았다. 거의 달리다시피 화장실을 찾아 들어간 그는 그대로 문을 잠그고 털썩 주저앉아 입을 틀어막았다.
페로몬샘 이식 수술 당시, 주치의는 페로몬샘을 이식받게 되면 기본적으로 기증자의 생전 향과 같은 것을 가지게 되나 아주 드물게는 이식인의 향기가 섞여 발향되는 케이스도 있다고 했다.
물론 해완은 저에게는 일어나지 않을 일이라 생각했다. 왜냐면 그에게는 해언의 향과 섞일 향 자체가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하지만 해완의 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너무도 옅어 평범한 사람의 후각으로는 맡을 수 없는 것이었다면.
항상 붙어 다녔던 탓에 남들이 착각할 정도로 해언의 향이 온몸에 배었던 해완처럼, 겉으로 알아차릴 수는 없더라도, 해언의 몸에도 해완의 향이 배었던 것이라면.
그렇다면 정말 강현이 맡았다는 그 오스만투스 향이 정말 해완의 것인지도 몰랐다.
그래서 이제는 강현이 확실히 그 향을 맡을 수 있다고 말하는지도 몰랐다.
고작 그런 생각만으로도 심장이 터져 버릴 듯 거세게 뛰어, 강현과 도저히 한 방에 있을 수가 없었다.
그러나 모든 것은 추측에 불과했다. 그게 진짜라 한들 이미 해언의 페로몬샘을 이식받은 이상 해완이 원래 가졌을지도 모를 향과 해언의 향을 분리하는 것은 불가능했으니 말이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해완은 두 눈을 꾹 눌렀다. 감은 눈 너머로, 차마 가까이 다가서지도 못한 채 멀찍이서 강현을 바라보기만 하던 어린 시절의 자신의 모습이 선명하게 그려졌다.
그때 말을 걸었더라면, 적어도 진실은 알 수 있었을 텐데.
그때 말을 걸었더라면, 지금처럼 제 이름조차 알릴 수 없는 관계가 아니라 어쩌면 친구라도 되어 볼 수 있었을 텐데.
제가 느끼는 것이 사랑인지도 모르고 무의미한 두려움을 이기지 못했던 8년 전의 그가 너무나 바보 같고 멍청해서, 해완은 간신히 울음을 삼켰다.
* * *
해완이 화장실에서 돌아왔을 때 강현은 묘한 얼굴을 하고 있기는 했지만 왜인지 아무것도 묻지 않았다.
물론 제가 보인 비이성적인 감정의 동요를 설명할 자신이 없었던 해완 또한 모르는 척 입을 다무는 것 말고 별달리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뻔히 감추고 있는 것이 있는데 묻지 못하고 답하지 못하는 시간은 불편하기 짝이 없었다.
그래서인지 강현은 해완이 할 일이 없으면 집에 가도 되냐고 물었을 때 평소와 달리 붙들지도 않고 그러라고 답했다.
그런데 해완을 배웅해 주러 현관까지 따라 나온 강현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이제 일주일 남았네요.”
“……네?”
“윤보리 씨가 나한테 주기로 한 시간이요. 한 달만 만나기로 했는데, 오늘이 3주째잖아요.”
언제 시간이 그렇게 흘렀는지 몰랐다. 이상하게 충격을 받은 해완은 눈만 멍청하게 깜빡이며 강현을 보고 서 있었다.
그런 해완을 앞에 두고, 강현은 차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만약 당신이 윤해언이 아닌 걸 알게 돼도, 약속은 지킬 거니까 걱정하지 말라고 말하고 싶었어요.”
“…….”
“그럼 조심히 가요.”
마지막 인사와 함께 강현은 망설임 없이 뒤를 돌았다.
약속.
닫히는 문 사이로 사라지는 그 너른 어깨를 보며, 해완은 멍하니 언젠가 들었던 강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딱 한 달만 만나고, 그래도 네가 윤해언이 아니라고 이야기한다면, 그땐 돈도, 윤해언에 대해서도 아무것도 묻지 않고 깔끔하게 보내 줄게.’
처음부터 열린 적 없었다는 듯 굳게 닫힌 문을 앞에 두고, 해완은 한참을 움직이지 못하고 그대로 서 있었다.
* * *
강현의 작업실에 다녀온 금요일 이후, 해완은 내내 반쯤 얼이 빠져 있었다.
아르바이트를 가서 얼토당토않은 실수를 하거나, 부르는 것도 듣지 못하고 넋을 놓고 있거나 해서 제 폐렴 바이러스가 옮은 거 아니냐며 유준이 걱정을 할 정도였다.
고깃집 아르바이트를 마치고 마트에 장을 보러 와서도 멍해 있던 해완은 누군가 등을 툭 치고 지나가고 나서야 겨우 정신을 차리고 손에 들고 있던 생닭을 장바구니에 넣었다. 하루 종일 앉지도 못하고 고기 냄새가 풍기는 곳에서 일을 하다 보면 육류는 쳐다보고 싶지도 않았지만 아직도 기침을 콜록대는 유준을 생각하면 닭백숙이라도 해 먹여야 할 것 같아서였다.
마침 아르바이트비가 들어온 날이라 유준이 좋아하는 몇몇 간식거리까지 사서 집으로 돌아오던 해완의 시선이 문득 남성복 상설 할인 매장에 멈췄다.
원래부터 50프로에 육박하는 할인율을 대문짝만하게 벽에 붙여 두는 곳이었지만 12월인 지금은 연말 세일까지 더해 80프로까지 파격 할인을 한다는 현수막이 걸려 있었다.
그러고 보니 크리스마스가 3주 뒤였다.
조금 망설이던 해완은 구경이나 하자는 심경으로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어차피 강현에게 돌려줄 돈에 보태기 위해 적금을 해약한 이후 아직 새로 들지 않아서, 다음 달부터 적금을 다시 시작한다 치면 원래 저축하던 돈만큼은 크리스마스 선물 겸 써도 될 듯싶었다.
대체 옷을 산 게 언제인지 까마득했다. 최근 1년은 그러지 않은 게 확실했고 해언과 함께 있을 때는 그럴 정신이 있었을 리 없으니 아마 2년은 됐을 터였다.
굳이 궁상을 떨고 싶었던 건 아니지만 생활이 녹록지 않은 상황에서 생필품이 아닌 것에 돈을 쓸 만한 마음의 여유가 생기지를 않았었다.
해완을 보고 살갑게 먼저 인사를 건네며 다가오는 어머니뻘의 주인아주머니에게 마주 인사를 한 그는 주위를 슬쩍 둘러보았다.
그런 해완의 눈에 마네킹 하나가 눈에 띄었다. 마네킹에는 깔끔한 디자인의 베이지색 코트가 입혀져 있었는데, 얼굴이 맑은 해완에게는 어두운 색 옷보다 이런 따뜻하고 밝은 색이 더 잘 어울린다고 했던 해언의 말이 떠올라서였다.
하지만 추워질 날만 남은 이제 와서 코트를 사기에는 조금 늦었을 터였다. 게다가 왔다 갔다 하는 곳이라곤 새벽에 헬스장, 낮에 편의점, 주말엔 고깃집뿐이니 이런 코트를 사서 어디에 쓸까 싶기도 했다.
강현의 작업실에선, 패딩보다 이런 옷이 더 어울리겠지만 말이다.
순간 해완은 가슴속 깊은 곳에서 확 치솟는 열을 느꼈다. 그때 뒤에서 해완을 예의주시하고 있던 주인아주머니가 불쑥 옆으로 다가왔다.
“그게 맘에 들면 한번 입어 봐요.”
아주머니는 해완이 뭐라 대꾸하기도 전에 빠르게 마네킹의 팔을 떼어 내고 코트를 벗겨 낸 후 해완에게 내밀었다. 번거롭게 팔까지 떼어 냈는데 입지 않겠다고 할 수가 없어 해완은 얼떨결에 그것을 받아 들고 거울 앞까지 끌려갔다.
해완이 입고 있던 패딩을 벗고 코트를 입자 아주머니가 깃을 정리해 주며 호들갑스럽게 칭찬을 했다.
“암만 오메가라 그래도 남자가 뭔 얼굴이 이렇게 뽀얗나 했는데 이런 색을 입으니까 너무 잘 어울린다. 인기 많겠어요. 키도 크고 향도 너무 좋고.”
어차피 동네 장사라 모두에게 친근하게 구는 것은 알지만 이런 칭찬에 익숙하지 않은 해완은 조금 더듬거리며 감사하다고 말했다.
다시 옷을 벗은 해완은 슬쩍 가격표를 확인했다. 재작년 상품으로 원래 가격은 삼십만 원이 넘었지만 80프로 할인해서 육만 원 정도였다.
그럼에도 망설이는 것을 본 아주머니가 곰살궂게 말했다.
“DP 되어 있던 상품이니까 오천 원 더 빼 줄게. 그거 오만 원 대에 가져가면 거저예요. 거저.”
그 말에 해완은 다시 한번 옷을 입고 거울을 바라보았다. 제 눈으로 봐도 원래 입고 있던 칙칙한 색의 패딩보다 훨씬 얼굴이 살아 보였다.
결국 해완은 코트와 유준에게 줄 칠만 원짜리 경량 패딩을 사서 매장을 나왔다. 그냥 옷을 샀을 뿐인데 괜히 들떠 오르는 듯 기분이 이상했다.
그런데 갑자기 강현에게 그렇게 큰 신세를 졌는데 저와 유준에게만 돈을 쓴 것이 염치가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점점 차가워지는 바람에도 해완은 더 이상 걸음을 옮기지 못하고 멈춰 섰다. 강현을 보러 가는 날은 내일이므로 무언가를 살 시간은 지금밖에 없었다.
하지만 도대체 강현에게 뭘 줘야 할지 몰랐다. 솔직히 제가 가진 전 재산을 다 털어도 강현이 필요할 만한 물건을 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차나 간식류 정도라면 누구에게 줘도 무난하겠지만, 너무 쉬운 선물처럼 느껴지는 게 또 문제였다.
돈은 많이 들일 수 없어도 최소한 상대를 위한 선물을 주고 싶어, 해완은 강현이 평소에 하던 말이나 좋아하는 것들을 떠올리려고 애썼다.
그때 해완의 머릿속에 탁 하고 전구가 켜졌다.
예전 강현은 그라스라는 도시에 대한 이야기를 한 적이 있었다. 장미, 재스민 등의 꽃과 각종 허브들의 향이 진동하는 향수의 도시라 불리는 그곳에서, 자신이 제일 좋아하는 향은 미모사의 것이라고 말이다.
미모사는 허브 느낌을 바탕으로 남성 향수에 많이 사용되는 푸제르 노트와 따뜻하고 수수한 느낌의 플로럴 노트를 둘 다 가지고 있는데, 그에게는 그 싱그럽고 풍성한 느낌이 여름을 떠올리게 만들어 요즘처럼 추운 겨울에는 유독 생각이 난다고 했었다.
마침 해언의 납골당에 갈 때 들르곤 했던 꽃집이 근방에 있었다. 주인에게 혹시 미모사가 있느냐고 묻자 지금은 다 팔려서 없지만 내일 새벽에 다시 들어온다고 했다.
어차피 조금이라도 싱싱한 것을 가져가고 싶어 내일 다시 찾아올 생각이었기에 다행인 일이었다. 일이 뜻대로 풀려 가는 느낌에 기분이 좋아진 해완은 기분 좋게 예약을 하고 꽃집을 걸어 나왔다.
그에게 무언가를 건넨다는 생각만으로도, 이상하게 가슴이 쿵쿵 뛰었다.
* * *
다음 날 해완은 뒤 타임 아르바이트생에게 부탁해 30분 정도 일찍 편의점을 나왔다. 평소에는 편의점에서 바로 강현의 작업실로 갔지만 집에 들러 옷도 갈아입고 꽃도 찾아서 가려면 시간이 필요할 것 같아서였다.
오랜만에 코트를 입으니 괜히 어색해서 머리를 만지는 데 또 시간을 보낸 해완은 결국 계획보다 더 바쁘게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꽃집에 가자 꽃다발은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품에 안는 것만으로 달콤한 향기가 훅 퍼져서 해완의 입가에 둥근 미소가 걸렸다.
꽃집 주인은 대충 패딩을 입고 있던 어제와 달리 한결 말쑥한 모습의 해완을 보더니 웃으며 말을 걸었다.
“애인분한테 주는 선물이신가 봐요.”
그 말을 들은 해완은 삽시간에 얼굴을 붉히며 손을 내저었다.
“아, 아니, 그런 거 아니에요. 그냥 좋은, 아니, 고마운 사람이 있어서.”
바보같이 당황해서 혀까지 꼬이니 빨개진 얼굴이 식지를 않았다. 여전히 귀 끝까지 빨갛게 달아오른 채 꽃집을 나온 해완은 버스를 탔다.
자리에 앉은 해완은 꽃이 망가지지 않게 조심스럽게 무릎에 두고 아랫부분을 꼭 쥐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버스가 출발하는 순간부터 심장이 거세게 뛰기 시작해, 옆에 누군가 앉아 있다면 그 소리를 들을 수 있을 것 같을 정도였다.
도대체 의지대로 뛰지 않는 심장에 해완은 안절부절못하며 꽃에 집중하려 애썼다.
사랑스럽고 자그마한 솜뭉치 같은 꽃들이 긴 줄기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미모사 꽃은 겨울이라 그런지 그 선명한 노란빛이 더욱 화사하게 보였다.
시드는 걸 보는 게 왠지 마음이 아파 해완은 생화를 사 본 일이 거의 없었지만, 꽃집 주인이 말하길 미모사는 적당한 때 거꾸로 걸어 두고 잘 말리면 드라이플라워로도 오래 장식해 둘 수도 있다고 했다. 이제 곧 크리스마스니 리스로 만들어 벽에 걸면 아주 예쁠 것이라고.
그러다 문득, 무언가를 깨달은 해완의 시선이 희미해졌다.
크리스마스는커녕, 이 꽃이 벽에 걸린 모습을 볼 일은 영원히 없으리라고.
해완에게 남은 시간은 고작 일주일이 전부라는 것을 말이다.
미친 듯이 뛰던 심장의 고동은 어느새 가라앉았다. 하지만 마음에 무거운 돌을 올려놓은 듯 뻐근해서, 해완은 저도 모르게 심장이 있는 부근을 손바닥으로 문질렀다.
버스에서 내려 강현의 작업실로 향하는 길, 깊어 가는 밤에 추워진 해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12월의 한기를 막기에 코트는 역시 조금 얇았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추위보다도 꽃이 상할까 걱정이 돼서 최대한 빠르게 걸음을 옮겼다.
작업실 건물 앞에 도착한 해완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벨을 눌렀다.
그런데, 안에서는 아무 대답이 없었다.
평소라면 CCTV라도 보고 있는 것처럼 해완이 벨을 누르기 무섭게 열리던 문이었기에 어리둥절해진 해완은 다시 한번 조심스럽게 벨을 눌렀다.
역시나 아무 대답이 없었다.
해완은 그 자리에 서서 잠시 어쩔 줄 모르다가 결국 핸드폰을 꺼내 강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다행히도 그는 금방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강현의 무심한 목소리에 저를 뭐라고 칭해야 할지 몰라, 해완은 잠시 머뭇거렸다.
“어…… 저, 전데요.”
―네, 윤보리 씨.
“저 지금 작업실 앞인데…… 혹시 안에 안 계시나요?”
―아, 미안해서 어쩌죠? 내가 이번 주에 해외로 출장을 가는데 미리 말해 준다는 걸 깜빡했네요. 정말 미안해요.
해완은 눈을 깜빡였다. 괜한 헛걸음을 했다는 것보다도 먼저 떠오른 물음이 마음을 죄었다.
“그럼…… 이번 주에는 못 보는 거예요?”
―그런 건 아니고요. 다시 연락할게요. 그때까지 작업실 안 가도 돼요.
전화가 끊어진 뒤, 괜히 코끝이 찡해진 해완은 손으로 얼굴을 문지르고 쓰다듬었다. 돌아선 그는 꽃이 바람에 상하지 않게 소중히 안고, 심장 고동을 그곳에 둔 채로 방금 걸어온 길을 되밟았다.
* * *
강현에게서는 목요일이 지나갈 때까지 아무런 연락이 없었다.
금요일 아침에는 눈을 뜨자마자 기분이 우울했다. 잠을 자는 것이 스트레스 해소법이라 아침에 기분이 좋지 않은 적이 거의 없었는데 이상한 일이었다.
무거운 몸을 끌고 헬스장 청소를 갔다가 돌아온 해완은 집안일이라도 했을 평소와 달리 그냥 이불 속에 파묻혔다.
하루 종일 자고 싶은 마음뿐이었으나 쉴 수 있는 시간은 두어 시간뿐이었다.
이제는 잘 돌아가는 보일러를 올려 두고 이불 속에 누워 있긴 했지만 잠이 오지 않아, 해완은 그냥 멍하니 벽지의 무늬를 세며 시간을 보냈다.
그런데 그때, 베개 옆에 둔 뒤집어 둔 핸드폰이 징 하고 울렸다.
흠칫 놀란 해완은 핸드폰을 바라보았다. 문자일까 싶었지만 전화였는지 핸드폰은 연이어서 끈질기게 울렸다.
왠지 모르게 한참을 망설인 해완은 전화가 끊기기 전에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액정에는 강현의 이름이 선명하게 떠 있었다.
“여보……세요?”
―나예요, 여강현.
“……네.”
―나 지금 윤보리 씨 집 근처에 있어요. 잠깐 나와요.
뭐? 해완이 무언가를 되묻기도 전에 전화는 툭 끊겼다. 당황한 그는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저도 모르게 거울을 보니 어제 제대로 말리지 않고 잔 탓에 머리가 엉망이었다.
중요한 것도 아닌데, 해완은 벗어 두었던 양말을 한 손으로 신고 한 손으로는 머리를 빗으며 가라앉히려 애썼다.
겉옷을 입기 위해 몸을 일으킨 해완의 눈에 불현듯, 지난주에 산 코트가 보였다.
강현의 작업실에 헛걸음한 이후 한 번도 입지 않은 것이었다.
해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유는 알 수 없지만, 그것을 보자 괜히 허둥지둥하던 마음이 정리가 됐다.
늘 입던 검은 패딩을 꺼내 입고 나온 해완은 대로변을 향해 걸었다. 같이 영화를 봤던 날 그를 내려 줬던 곳에 강현의 차가 주차되어 있는 게 보였다.
해완이 오는 것을 살피고 있었던 모양인지 강현은 바로 차에서 내렸다. 해완은 약간 거리를 두고 멈춰 서서 어색하게 물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에요……?”
강현은 해완을 바람맞힌 적이 없었다는 듯, 며칠 동안 이유도 없이 연락하지 않은 것이 아무렇지 않다는 듯, 그저 자연스럽게 말했다.
“오늘 윤보리 씨랑 조금 멀리 가고 싶은데 시간 좀 내 줄 수 있어요?”
“멀리라니…… 어딜 얘기하는 거예요?”
“서경산업에서 운영하는 향료 연구소에 다녀오려고 해요. 우리나라 자생 식물 향료 추출을 연구하는 곳인데, 같이 가면 좋을 것 같은데.”
“그게 어디 있는데요?”
“당진이요. 오늘 내로 데려다줄 거니까 걱정은 하지 말고.”
해완의 눈이 크게 흔들렸다.
그곳은, 해완이 어릴 적 살던 해안 마을과 30분 정도 거리에 떨어져 있는 곳이었다.
그러나 과민 반응일 뿐이라고 애써 마음을 달랜 해완이 입을 열었다.
“나 오늘도 일해야 되는 거 알잖아요.”
강현은 어깨만 으쓱했다. 모든 것이 그저 해완의 선택이라는 듯이. 왠지 모르게 속에서 불이 치민 해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내가 안 간다고 하면요?”
해완의 울컥한 목소리에는 아랑곳없이, 강현은 무심하게 말했다.
“글쎄요.”
“…….”
“그럼 마지막 인사를 해야 되나?”
그 말을 듣자 이상하게 꼬이기 시작하던 마음이 힘을 놓고 탁 풀렸다. 강현은 그런 해완을 속을 알 수 없는 검은 눈으로 똑바로 바라보고 있었다.
왜 이렇게 됐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분명 강현에게 시간을 준 사람은 해완이었는데,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줄어드는 모래시계를 쥐고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 것은 해완 그 자신이 되어 있었다.
하지만, 다른 대답을 할 수는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결국 해완은 시선을 돌린 채 작게 중얼거렸다.
“……옷만…… 갈아입고 올게요.”
그 말에 강현이 다시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마치 모든 걸 알고 있었다는 것처럼.
* * *
강현이 말한 연구소까지는 차로 약 두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였다.
조수석에 앉아 있던 해완은 무표정한 얼굴로 운전을 하고 있는 강현을 흘끗 쳐다보았다. 말주변이 없는 해완을 대신해 대화를 이끌어 나가던 평소와 달리 그는 조용했다.
공기가 무겁게 고인 듯한 느낌에 무릎에 얹어 두었던 패딩 소매만 하릴없이 만지작거리던 해완은 가라앉은 목을 가다듬고 애써 입을 열었다.
“출장은 잘 다녀왔어요?”
그 말에 강현은 시선을 앞에 고정시킨 채로 별것 아니라는 듯 답했다.
“아, 그거 갑자기 갈 필요가 없게 돼서, 그냥 한국에 있었어요.”
태연한 목소리에 해완은 조금 얼빠진 듯한 기분이 됐다. 사정이 어떻게 됐든 약속을 어겼으니 미안해할 만도 한데 강현에게는 전혀 그런 기색이 없어서였다.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상해, 해완은 대답 없이 창밖으로 고개를 돌렸다.
강현도 딱히 무언가를 말하려 들지 않았기 때문에 연구소로 향하는 길 내내 차 안에는 침묵만이 감돌았다. 어색한 정적에 음악이나 라디오라도 틀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지만 강현은 그마저도 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이해할 수 없는 상황에 치밀어 오르는 한숨을 해완은 간신히 눌러 삼켰다.
연락도 없이 바람을 맞히고 며칠 동안 연락까지 뚝 끊었다가 갑자기 나타나서는 먼 길을 가자고 한 것도 황당한데, 마치 처음 보는 사람인 양 낯선 태도로 구는 것에 안절부절못하게 되는 게 싫었다.
하지만 무엇보다도 싫은 것은, 강현의 제멋대로인 태도에도 함께 가지 않겠다고 말할 수 없었던 해완 그 자신의 마음이었다.
끝나지 않을 것처럼 느껴지던 침묵의 시간이 흐르고 연구소에 도착한 뒤 차에서 내리고 나서야 해완은 크게 심호흡을 했다.
“팀장님, 안녕하세요. 오시는 데 불편하진 않으셨어요?”
그때 들려온 목소리에 해완은 흠칫 옆을 돌아보았다. 목에 ID카드를 건 직원 둘이 기다리고 있었던 듯 바쁘게 다가오는 모습이 보였다.
그런 두 사람을 향해 강현 또한 익숙하게 인사를 건넸다.
“아, 안녕하세요. 장 책임님. 이 선임님.”
웃는 낯으로 다가오던 직원들은 강현 옆에 서 있는 해완을 발견하고는 아리송한 얼굴로 물었다.
“그런데 이분은……?”
어리둥절한 목소리에 괜히 민망해진 해완은 얼굴을 살짝 붉혔지만 강현은 그제야 해완의 존재를 인식한 것처럼 가벼운 어조로 입을 열었다.
“아, 윤보리 씨라고, 저랑 같이 일하는 분이에요. 함께 보면 좋을 것 같아서 데리고 왔어요. 이제 갈까요?”
지나치게 심플한 설명에 직원들은 여전히 석연찮아 보였다. 그러나 강현이 워낙 단호하게 끝을 맺은 덕에 해완과 가볍게 인사만 주고받고 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연구소는 공장처럼 보이는 넓은 컨테이너와 회색 외벽의 작은 2층짜리 건물 두 동으로 이루어져 있었다. 강현과 직원들은 자연스럽게 컨테이너 쪽으로 향했고, 길을 전혀 알지 못하는 해완은 허둥지둥 그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컨테이너에 가까워질수록 외면할 수 없는 꽃 냄새가 훅 풍기는가 싶더니 문을 열고 들어서자마자 현기증이 일 정도로 강렬하고 짙은 향기가 해완의 전신을 덮쳐 왔다.
예전 강현에게 향료 원료 추출 과정에 대해 들은 적이 있어 안에 줄지어서 가득 차 있는 은색 기계들이 증류기라는 것 정도는 알 수 있었다.
잠시 넋을 놓고 주위를 둘러보던 해완은 세 사람이 멀어지는 것을 보고 다시 황급히 발을 움직였다.
그런 해완에는 아랑곳없이 강현은 직원들과 이야기를 나누느라 여념이 없었다. 그러자 직원 둘은 묘한 표정으로 눈짓을 주고받더니, 어느 순간 사원급으로 보이는 젊은 직원 하나가 슬쩍 뒤로 빠져 해완에게 말을 건넸다.
“조향사세요? 팀장님이랑 같이 일을 하신다는 걸 보니.”
뭐라 대답해야 좋을지 몰라 잠시 멈칫했던 해완은 솔직하게 대꾸했다.
“아뇨. 저는 그냥…… 여강현 씨 작업실에서 잡일 도와드리고 있어요.”
“아…… 그러시구나.”
예상외의 대답이었는지 직원은 어색한 얼굴로 미소를 지었다. 저를 어찌 대해야 좋을지 애매해하는 속이 뻔히 보여 해완은 애써 말을 이어 나갔다.
“저 이런 곳에 온 게 처음이라…… 저게 증류기 맞나요?”
해완의 질문에 직원은 반갑게 시설들에 대해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증류법은 말 그대로 물이나 용매에 원재료를 넣고 끓여 에센셜 오일을 증발시킨 후 다시 냉각시켜 향료를 얻어 내는 것으로 은색 기계들은 해완이 생각한 대로 증류기와 냉각기 등이 맞았다.
강현은 내내 해완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 굴었지만 다행히도 직원의 이런저런 이야기를 듣는 가운데 시간은 금방 지나갔다. 공장에서는 서경산업 내 화장품 및 향수 브랜드의 제조 공정에서 필요한 원료를 일부분 담당하고 있고 연구소에서는 그에 쓰이는 새로운 향들을 개발하고 있다고 했다.
그들이 강현을 ‘팀장님’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2년 전에 함께한 제품 개발 프로젝트에서 꾸려진 태스크 포스 팀의 팀장을 맡았기 때문인 모양이었다. 정규직으로 출근하거나 하지는 않지만 지금도 조향 관련해서는 책임 자문 역을 맡고 있다는 것도 해완은 그에게 처음 들어 알았다.
그리고 강현이 조향한 향으로 출시된 샴푸의 제품명을 들은 해완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떴다. 그것은 저렴한 가격에 보기 드문 고급스러운 향으로 대히트를 친 샴푸였고, 지금 해완이 쓰고 있는 것이기도 했다.
“그걸 여강현 씨가 조향한 거예요?”
해완의 놀란 목소리에 직원은 의외라는 듯 대답했다.
“모르셨어요? 저는 당연히 아시는 줄 알았는데.”
알지도 못하는 새에 강현이 만든 향을 쓰고 있었다는 사실에 기분이 이상해진 해완은 입을 다물었다.
언젠가 강현에게 저에 대해서 아무것도 모르지 않느냐고 했던 적이 있었지만, 해완 그 자신도 강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사실상 거의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공장을 빠져나와 옆에 있던 회색 건물로 들어가자 그곳은 또 사뭇 분위기가 달랐다. 안에 오가는 사람들 대부분이 흰 가운을 입고 있어서 이곳을 왜 연구소라고 하는지 알 것 같았다.
강현과 함께 걷던 직원이 그들을 안내한 곳은 어느 회의실 앞이었다. 그 안에는 이미 몇몇 사람들이 회의를 준비하며 분주하게 오가는 게 보였다.
들어가기 직전, 강현이 불쑥 뒤를 돌아보며 몇십 분 만에 처음으로 해완에게 말을 걸었다.
“윤보리 씨는 여기서 기다릴래요? 중요한 회의라서.”
사정을 모르는 해완은 고개를 끄덕였지만, 지금까지 해완의 대화 상대가 되어 주었던 직원이 걱정스러운 듯 중얼거렸다.
“여기서 기다리시기엔 몇 시간은 걸릴 텐데…….”
그저 약간의 우려가 담긴 말이었지만 똑바로 직원을 바라본 강현이 낮은 목소리로 말했다.
“그렇다고 외부인을 회의에 참여하게 할 수는 없잖아요. 안 그래요?”
확실히 선을 긋는 목소리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멍하니 강현을 봤다.
“아, 저는 그런 뜻이 아니라…….”
당황한 직원이 쩔쩔매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고, 저 때문에 그가 난감해하는 것을 볼 수 없었던 해완이 급하게 말을 이었다.
“저 괜찮아요. 여기서 기다릴게요.”
그 말에 강현은 고개를 한 번 끄덕하고는 배려 없는 태도로 회의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직원은 미안한 듯 해완에게 눈짓을 하고 급하게 따라 들어가 회의실 문을 닫았다.
홀로 남겨진 해완은 잠시 어쩔 줄 모르고 있다가 맞은편 복도에 놓인 의자에 조심스럽게 앉았다.
회의실 벽에 길게 난 창을 통해 강현의 모습이 보였지만 눈이 마주칠까 무서워 해완은 핸드폰을 꺼내며 한숨을 쉬었다.
시간은 지루하게 흘러갔다. 직원의 말대로 한 시간이 훌쩍 넘을 때까지 회의는 끝날 기미를 보이지 않았다.
이따금씩 복도를 지나가는 연구원들은 ID카드조차 걸고 있지 않은 해완을 이상하게 봤다. 그럴 때마다 민망하기 짝이 없어 해완은 시선을 애써 핸드폰 화면에 고정시켰지만 평소에 딱히 핸드폰을 자주 만지지 않아서 그나마도 뭘 해야 할지 모르게 되었다.
결국 해완은 편의점 대타를 맡긴 유준에게 일은 잘하고 있냐고 메시지를 보내기로 했다. 유준도 편의점 아르바이트 경험이 많기 때문에 크게 걱정하지는 않았지만 제대로 상황 설명도 해 주지 않고 나온 것이 영 마음에 걸렸던 터였다.
마침 손님이 없을 시간이라 답장은 금방 왔다.
[아침에 졸라 바빴다가 지금 좀 한가함]
[오늘 일당은 다 나 주는 거지?]
해완은 피식 웃으며 재빨리 답장을 보냈다.
[당연하지. 너 먹고 싶은 것도 사줄게]
[ㅇㅋ 근데 거기까지 가서 뭐함?]
유준의 질문에 잠시 망설이던 해완은 천천히 핸드폰 자판을 두드렸다.
[그냥 공장 같은데 둘러봤어. 지금은 여강현씨가 회의 중이라 기다리는 중]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유준에게서 전화가 왔다. 다행히도 복도에는 오가는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회의를 방해할까 싶어 해완은 한쪽 손으로 입가를 가린 것으로 모자라 목소리까지 낮추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무슨 회의를 하는데 거기까지 끌고 가서 형을 기다리게 해?
정곡을 찌르는 유준의 말에 당황한 해완은 머뭇머뭇 거짓말을 했다.
“그냥 중요한 일인가 봐. 기다린 지 얼마 안 돼서 괜찮아. 오늘 아침에 손님 많았어?”
그러자 유준은 전 타임 아르바이트생이 재고를 제대로 안 채우고 갔다는 둥, 담배 이름 하나 제대로 말 못 하는 진상이 많다는 둥 수다를 떨기 시작했다.
유준의 목소리를 듣자 초대받지 않은 손님 같은 느낌에 위축되어 있던 마음이 조금 놓이는 느낌에 해완은 겨우 편한 미소를 지었다.
하지만, 대화의 말미에 유준이 주저하며 내뱉은 말에 해완은 다시 얼굴을 굳힐 수밖에 없었다.
―근데…… 진짜 거기까지 가서 그냥 올 거야? 알바는 내일도 내가 대타 뛰어 줄 수 있어.
“…….”
―알잖아. 원장 선생님이 형 많이 보고 싶어 하셔. 애들도 형 언제 오냐고 물어보고.
가슴 깊은 곳에서 울컥 치미는 감정에 해완은 대답을 하지 못하고 입술만 깨물었다.
아무리 바빠도 최소 한 달에 한 번씩은 반드시 들르곤 했던 보육원에 가지 못한 것이 벌써 1년 반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원장 선생님은 해완에게 어머니와 비슷한 존재였다. 해완도 그런 선생님이 몹시 그리웠지만 해언의 죽음과 이식 수술에 대해 감추고 있다는 사실 때문에 마음이 불편해 연락조차 제대로 하지 못한 것이 오래였다.
눈시울이 뜨거워져, 해완은 눈 앞머리를 꾹꾹 누르며 희미하게 중얼거렸다.
“알아, 아는데…… 해언이 생일 때까지는 안 되는 거 알잖아.”
그 말에 유준이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수화기 너머로 진한 침묵이 차올랐고, 답답한 마음에 시선을 돌리던 해완은 회의실 창 너머로 저를 빤히 보고 있는 강현의 새카만 눈과 마주치고는 거의 튀어 오르듯 화들짝 놀랐다.
그러자 느리게 시선을 돌린 강현이 사람들에게 무언가를 말했고, 곧 몸을 일으킨 사람들이 주섬주섬 자료들을 챙기기 시작하는 것이 보였다.
회의가 끝났음을 눈치챈 해완은 황급히 유준과의 통화를 마무리 지었다. 전화를 끊자마자 가장 먼저 회의실에서 나온 강현이 해완을 내려다보며 물었다.
“누구랑 통화했어요?”
묘하게 못마땅한 목소리에, 해완은 머뭇거리며 답했다.
“……유준이랑요.”
강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해완을 보기만 했다. 그 시선이 점점 불편해질 무렵 사람들이 우르르 회의실에서 빠져나와 강현의 주변에 섰다.
해완도 엉거주춤 몸을 일으켰다. 연구소 입구부터 강현을 에스코트한 직원이 입을 열었다.
“팀장님, 오늘 저희랑 점심 식사 같이하시나요? 자리 준비하긴 했는데…….”
그는 말끝을 흐리며 구석에 서 있는 해완을 흘끗 보았다. 그러자 그곳에 서 있던 모든 사람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해완을 향했고, 당황한 해완은 얼굴이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 해완의 심정을 아는지 모르는지 강현은 시원스럽게 답했다.
“그럼요, 같이해야죠. 어디로 가면 되죠?”
그 말에 직원은 근방에 있는 어느 일식집에 대해 말했는데 모두 익히 아는 곳인 모양이었다.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직원들은 자료만 정리하고 오겠다고 하고는 일제히 흩어졌다.
사람들이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숨이 트인 듯한 기분이 든 해완은 강현에게 조심스럽게 물었다.
“저는 따로 밥 먹을게요. 몇 시까지 만날까요?”
유준과의 통화 때문에 마음이 아리기도 했고 낯선 직원들끼리 하는 점심 회식에 끼고 싶지 않아 물은 것이었는데, 강현은 무슨 소리를 하냐는 듯 해완을 봤다.
“같이 가야지 무슨 소리예요.”
“하지만…….”
그의 생각 따위는 중요치도 않다는 말투에 답답해진 해완이 다시 입을 열었지만, 강현은 해완의 말을 멋대로 잘라 버리고 강압적으로 말했다.
“오늘 당신이 쓴 시간도 일당으로 계산해서 줄 거니까 걱정하지 말아요. 나 때문에 여기까지 온 건데 따로 돈 쓰면 안 되지.”
일당.
망설임조차 없는 그의 말이, 왜인지 가슴을 세게 후려쳤다.
그 말을 듣고 나자 오늘 내내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던 강현의 태도가 어렴풋이 이해가 돼서, 해완은 눈만 몇 번 깜빡이다가 그냥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일식집까지는 도보로 10분 거리였다. 함께 가는 직원들은 열 명 남짓으로 불어 있었는데, 자기들 사이에서 무슨 말이 돈 모양인지 다들 해완을 보고 호기심이 어린 얼굴을 했다. 그러나 강현은 딱히 해완을 소개해 주지 않아서 다들 그에게 어색한 인사를 몇 번 건넨 것 말고는 별다른 말을 걸려고 들지 않았다.
식당에 도착해서는 다들 자연스럽게 자리를 만들었기 때문에 해완은 강현 바로 옆 구석진 자리에 앉을 수밖에 없었다.
같은 테이블에 앉은 사람들은 다들 나이가 좀 있어 보였는데, 해완에 대해 묻기는 했으나 강현이 함께 일하는 사람이라 짤막하게 소개를 하는 데서 그쳐 버리자 곧 해완을 대화에서 쉽게 배제해 버렸다.
이른 시간이라 술은 없었지만 나름대로 떠들썩한 자리에서 해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제가 알지 못하는 이야기들이 오가는 자리에서 홀로 고립되어 앉아 있자니, 느끼고 있었지만 그렇게 믿고 싶지 않았던 사실을 더는 외면할 수가 없었다.
오늘 강현이 내내, 해완에게 선을 긋듯이 행동했다는 것을 말이다.
아니, 오늘뿐만이 아니었다.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던 며칠의 시간이 모두 그 신호였던 모양이었다.
그가 스스로의 입으로 말했던 대로 해완은 그저 일을 도와주는 사람이고, 함께하는 시간은 돈으로 산 것뿐이고, 그래서 남들에게 제대로 소개해 줄 가치조차 없는 사람이라고 알려 주고 싶다는 것처럼.
그리고 강현이 그렇게 구는 이유는 딱 하나뿐이었다.
강현은 이제, 그가 해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인정한 것이다.
그것 말고는 갑작스럽게 달라진 태도를 설명할 길이 없었다.
그런 생각이 들자 해완은 반사적으로 강현과의 마지막 만남에서 있었던 일을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다.
강현이 제가 만든 해언의 향을 맡게 해 준 뒤 해완이 보인 과민 반응을 당연히 이상하게 받아들였을 거란 걸 이제야 깨달은 게 믿기지 않았다.
그러나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제가 보인 반응을 강현이 어떻게 느낄지 생각조차 할 수 없을 만큼, 어쩌면 강현이 제 향을 맡았을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압도되어 있었으니까.
바보같이 들떠 주제에 맞지도 않는 새 옷과 건네주지도 못할 꽃을 샀을 정도로 말이다.
가슴이 꽉 막힌 듯 도통 넘길 수가 없어 제 앞으로 나온 음식에도 거의 손도 대지 않은 해완은 사선으로 고개를 돌려 옆에 앉은 저를 반쯤 등지고 있는 강현의 등을 바라보았다.
다시는 제대로 돌아봐 주지 않을 그 너른 등을 보는 내내 심장에 바늘을 꽂는 것처럼 따끔거렸다.
이상하게도 해완은 이제껏 누군가를 욕망한다는 감정을 크게 느껴 본 적이 없었다.
지금은 강현에게 가졌던 마음이 사랑인지도 몰랐던 때만큼 순진하지도 않았고, 언제나 사람의 온기에 목말라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누군가를 이성적인 관심을 가지고 보게 되는 일은 극히 드물었다.
하지만 이제 와서 돌이켜 보니 어쩌면 그것은 자신이 가진 장애에 적응하기 위한 체념의 말로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새삼스레 들었다.
그렇지 않고서야 이렇게 온 마음에서 강현의 모습이 떠나지 않을 리가 없었으니까.
그것은 8년 전 어린 해완이 사랑했던 소년의 모습이기도 했고, 지금 어른이 된 해완의 심장을 자꾸만 덜컥 내려앉게 만드는 성숙한 남자의 모습이기도 했다.
흐릿한 검은 눈을 하고 누구도 찾지 않는 버스 정류장에 홀로 앉아 있던 소년과 그를 꿰뚫어 버릴 듯한 시선으로 집요하게 바라보며 여유로운 미소를 짓는 남자는 어찌 보면 다른 사람처럼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 둘의 공통점은 첫 번째로 해완이 이제껏 본 사람 중 가장 아름다운 알파라는 것이었고, 두 번째로는 해완이 진실되게 말을 걸어 본 적이 없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 * *
한 시간을 훌쩍 넘긴 점심 식사가 끝나고 다들 주섬주섬 짐을 챙길 때가 되어서야 강현의 시선이 흘끗 해완을 향했다. 그는 해완이 음식에 거의 손도 대지 않은 것을 뻔히 보고서도 무엇 하나 묻지 않고 몸을 휙 일으켜 다른 사람들의 뒤를 따랐다.
기분이 나쁘거나 놀랍지는 않았다. 강현이 의도적으로 저를 무시하고 있음을 이미 확신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회사로 돌아가는 길에 해완은 일부러 무리들과 떨어져 천천히 걸었다. 그런 해완이 신경 쓰였는지 공장에서부터 몇 마디 말을 나누었던 젊은 직원이 걸음을 늦춰 옆에 섰지만, 건네는 말에 해완이 별다른 호응을 보이지 않자 지루한 표정을 짓는가 싶더니 곧바로 다시 무리 속으로 섞여 버렸다.
다른 직원들이 저에 대해 이상하게 생각하고 있는 게 빤한 상황에서 해완에게 말을 걸어 준 것은 나름의 호의라는 걸 알았음에도 도저히 대화를 나눌 마음이 생기질 않았다.
해완도 사람이었다. 낯선 곳으로 끌려와서 다짜고짜 무시를 당하면서도 그 모든 일이 괜찮은 척 웃으며 대화를 나눌 수는 없었다.
다시 연구소 안으로 들어갈 생각은 없었기 때문에 해완은 주차장 옆쯤에서 스르륵 멈춰 섰다. 강현이 회사 사람들과 함께 건물 안으로 들어간다면 그냥 고속버스를 타고 바로 서울로 갈 작정이었다.
어쩌면 이것이 강현과의 마지막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심장을 쥐어짜는 것 같았지만, 무시당하는 것을 떠나 정말 모진 말을 듣기 전에 이대로 끝내고 싶은 충동이 더욱 강렬하게 마음을 뒤덮고 있었다.
그러나 제 뒷모습을 바라보고 선 해완을 눈치라도 챈 듯 강현은 어느 순간 걸음을 멈췄다.
그는 함께 걸음을 멈춘 회사 사람들에게 몇 마디 말을 했고, 그 말을 들은 회사 사람들은 다소 의아해 보이기는 했지만 강현에게 저마다 인사를 건네는 것이 보였다.
회사 사람들이 건물 안으로 들어가기도 전에 휙 뒤를 돌아선 강현은 망설이지도 않고 해완을 향해 성큼성큼 걸음을 옮겼다.
강현은 멍하니 저를 보고 선 해완을 향해 지극히 태연한 얼굴로 말했다.
“오늘 재밌었는지 모르겠네요. 이제 서울로 돌아갈까요?”
어처구니가 없어진 해완은 반사적으로 자조적인 웃음을 흘렸다. 내내 자신을 무시해 놓고 아무 일도 없었다는 듯 구는 강현의 태도가 마음에 불을 댕기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완으로서는 드물게, 뒷일을 생각하기도 전에 먼저 말이 튀어나왔다.
“지금 뭐 하자는 거예요?”
“뭐가요?”
“할 말이 있으면 서울에서 하면 되지, 여기까지 끌고 와서 왜 이러는 건데요.”
“내가 뭘 어쨌다는 건지 모르겠는데.”
“지금 계속 날 무시하고 있잖아요. 아니라고 할 생각 하지 마요. 내가 당신이 생각하는 것처럼 멍청하진 않으니까.”
그 말에 강현은 잠시 입을 다물더니 고작 한다는 말이 이랬다.
“오늘 윤보리 씨 좀 못 챙겨 줬다고 이래요? 일하느라 바쁜 거 뻔히 봤잖아요.”
해완이 왜 화가 났는지 전혀 모르겠다는 듯한 뻔뻔한 목소리에, 이 정도로 화가 난 게 언제였는지 기억도 나지 않을 정도로 머리에 뜨겁게 열이 올랐다.
해완은 격렬한 어조로 소리를 높였다.
“내가 오늘 일만 가지고 이러는 줄 알아요? 월요일 일도 그래요. 오지 말라고 미리 연락하면 되는 걸 사람을 거기까지 헛걸음하게 해 놓고, 그 뒤로도 문자 하나 없었잖아요.”
너무 흥분해 입술까지 파르르 떨리는 와중에도, 해완은 제가 왜 이미 지난 일까지 끌어들이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이쯤 되니 제 의지와는 상관없이 제멋대로 말이 쏟아져 내렸다.
지난 일주일 동안 내내 해완의 마음을 괴롭혔던 이미지들이 엉망으로 뒤엉켰다.
필요도 없는데 샀던 새로운 코트, 예쁘게 포장된 채 제 손에 쥐어졌던 노랗고 자그마한 꽃들, 겨울바람을 피해 가린 품속에서 진하게 배어나던 향기, 그것을 다시 집으로 가져오고, 꽃병 하나 없이 뚝 반을 자른 페트병에 꽂혀 시들어 가던 모습.
하루 종일 해완을 무시하고 지금 이 순간마저도 무심한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는 강현의 눈보다, 그 시든 꽃의 기억이 해완의 마음을 더욱 짓이기는 것 같았다.
“그날, 그날 당신을 못 볼 줄 알았다면 난…….”
알았으면, 당신이 좋아하는 얼굴이 보고 싶어서 괜한 꽃을 지게 만들지도 않았을 거라고.
그 생각을 한 순간, 벼락처럼 전신을 관통하는 깨달음에 해완은 말을 뚝 멈췄다.
해완이 화가 난 것은 강현이 자신을 대한 태도 때문이 아니었다.
그는 자신이 가진 마음 때문에 화가 난 것이었다.
곰팡이 진 벽지에 어울릴 리가 없어 차마 말려서 간직할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그대로 버릴 수밖에 없었던 고운 꽃이, 꼭 강현을 향한 자신의 마음 같아서.
그게 그렇게 서러워서, 화가 났던 것이었다.
해완은 강현이 좋았다.
죽은 줄 알았던 마음이 숨을 죽이고 있다가 고개를 든 것인지, 아니면 강현을 다시 만나는 동안 새롭게 피어난 것인지, 혹은 그 둘 다인지, 그런 것은 알 수 없었다.
그렇게 피하고 싶었음에도 결국 다시 한번 강현을 사랑하게 됐다는 사실이 너무 강하게 가슴을 후려쳐, 해완은 강현이 자신의 말을 기다리고 있다는 사실도 잊고 그저 꼼짝없이 굳어 서 있었다.
그때 문득, 하얗게 굳어 버린 얼굴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있는 해완을 향해 강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윤보리 씨 말이 맞아요.”
“…….”
“월요일에 바람맞힌 것도, 그동안 연락 안 한 것도, 오늘 내내 당신 무시한 것도, 다 일부러 그런 거예요.”
오늘 처음으로 감정이 담긴 것처럼 보이는 목소리에 해완은 간신히 시선을 올렸다.
“……왜요?”
“…….”
“이제 내가…… 정말 해언이가 아니라는 걸 깨달았으니까?”
그 말에 강현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처음에 가졌던 확신이 사라진 건 사실이에요. 당신이 내가 기다린 윤해언인지 아닌지, 이제는 정말 잘 모르겠어.”
“…….”
“하지만 한 가지는 확실히 알겠어요. 윤보리 씨가 나한테 뭔가를 감추고 있다는 걸.”
“…….”
“당신이 윤해언이든 아니든, 내가 알아야 되는 뭔가를 당신이 알고 있는데 그걸 나한테 말해 주지 않고 있는 것 같아.”
지금 두 사람의 관계의 본질을 정확하게 꿰뚫고 있는 강현의 말에 순간 아찔한 현기증이 일었다.
불현듯 페로몬샘을 이식한 오른쪽 어깨가 지독하게 쑤셔왔다. 하지만 차마 손조차 올리지 못한 해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인 채 두 눈을 손바닥으로 꾹꾹 눌렀다.
겨우 고개를 들었을 때 강현은 한번 시선을 돌린 적 없다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해완이 무언가를 말하기도 전에 강현은 명령이라도 내리듯 짧게 말했다.
“차에 타요.”
그는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저벅저벅 걸어 자신의 차로 향했다. 올가미에 매여 끌려가는 동물처럼, 해완은 그 등을 따라 비틀거리는 걸음을 옮길 수밖에 없었다.
* * *
강현이 운전하는 차 안은 이곳으로 올 때와 다름없이 침묵으로 가득 차 있었다.
하지만 상관없었다. 그 침묵이 의식되지도 않을 만큼 해완은 완전히 진이 빠져 있었다.
지고 있는 마음이 너무 무거워 끝없이 가라앉는 기분이었다.
오늘 강현의 행동은 해완이 해언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 깨달았을 때 그가 얼마나 차갑게 돌변할 수 있는지 새삼스럽게 확인시켜 준 것처럼 느껴졌다.
모든 진실을 말하고 나면, 아마 두 번 다시는 볼 수 없을 것이다.
윤해언이 아닌 윤해완이라는 사람이 그에게 가진 마음 따위는 일말의 가치도 없을 것이므로.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언은 죽었고 자신이 풍기는 향은 해언의 페로몬샘을 이식받은 데 불과하다는 것을, 솔직히 말해 주지 못해서 정말 미안하다고 해야 한다는 것을 알았지만, 서울에 가는 동안만이라도 마음의 준비를 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스스로의 마음에 내리는 사형 선고에 약간의 여유를 주는 정도는 용서받을 수 있기를 바랐다.
자꾸만 눈앞이 흐려져 해완은 창을 향해 불편하리만치 몸을 옆으로 돌리고 눈을 빠르게 깜빡였다.
그래서 강현이 향하는 곳이 서울이 아니란 걸, 해완은 뒤늦게서야 깨달았다.
창밖의 풍경이 눈에 스쳐 가도록 두던 해완은 문득 소스라치게 놀라 운전석에 앉은 강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해완이 저를 보고 있음을 모를 리가 없으면서도 강현은 묵묵히 운전만 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의미 없는 물음이라는 걸 알면서도 해완은 입을 열었다. 목소리가 심하게 떨려 나왔으나 익히 예상하고 있었던 듯 강현은 해완을 바라보지도 않고 말했다.
“어디 가는지 당신도 알잖아요.”
당연히 알고 있었다. 현실 속에서 언젠가 사라진다 하더라도, 영원히 그의 기억 속에 머물 장소 중 하나였으므로.
제멋대로 자란 거목이 짙은 그늘을 드리우고 있는, 소금기를 머금은 바람이 부는 그곳.
누군가 머물러야 할 의미를 잃은 폐쇄된 버스 정류장.
그의 첫사랑이었던 소년이 앉아 있었던 바로 그 버스 정류장이었다.
해완이 무슨 말을 하든 강현이 차를 돌리게 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은 순간 온몸이 떨리기 시작했다.
어쩌면 처음부터 강현이 이 버스 정류장에 자신을 데리고 갈 작정이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자, 덫에 걸려 버린 듯 느껴지기까지 했다.
차가 멈추고 강현이 엔진의 시동을 끌 때까지도 해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차마 바깥을 바라볼 생각도 하지 못하고 있었다.
그런 해완에는 아랑곳없이, 강현은 간단명료하게 말했다.
“내려요.”
그는 그 말을 끝으로 먼저 차에서 내렸다.
해완은 손톱이 파고든 자국이 남을 정도로 무릎 위에 얹혀 있던 손을 강하게 쥐었다. 심호흡까지 몇 번 크게 하고 나서야 겨우 강현을 마주 볼 용기가 생겨, 천천히 몸을 돌려 문을 열고 차에서 내렸다.
가장 먼저 눈에 띈 것은 겨울을 나기 위해 잎을 떨구고 앙상한 가지를 드러낸 채로 삭풍을 가르고 있는 기억 속의 거목이었다.
버스 정류장이라 부르기 무색하게 이정표는 철거한 것인지 더 이상 보이지 않았다. 이제는 낡아 빠진 나무 벤치만이 기억 속 그대로 쓸쓸히 자리를 지키고 있었다.
그리고 그 벤치를 바라보고 선 강현의 너른 등이 있었다.
그저 낡은 추억으로 그치리라 믿었던 풍경이 생생히 되살아나는 기분에 아찔해진 해완은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런 해완의 귀로 강현의 깊은 목소리가 들렸다.
“해언이는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믿지 않았어요. 자기 향에만 집착한다고 생각했지.”
놀란 해완의 시선이 강현을 휙 향했다. 그러자 천천히 고개를 돌린 강현이 느리게 말했다.
“왜냐면 난…… 대부분의 사람들의 냄새가 역겨워서 견딜 수가 없거든요.”
언젠가 농담처럼 스쳐 들었던 강현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헤집었다.
‘어떤 냄새가…… 싫은데요?’
‘사람이 가진 냄새는 거의 대부분, 다.’
당황한 해완의 옆에서 강현은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아무도 날 이해하지 못했어요. 감각이 예민한 게 아니라 조현병이 있어서 환취를 맡는 거니, 정신과 치료를 받아야 된다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었죠. 어쩌면 나도 그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해언이를 만나기 전까진. 그렇게 완벽한 향을 가진 사람은 처음이었고, 오직 그 향 안에서만, 안전하다고 느꼈어요.”
“…….”
“그래서…… 다시 만나면 증명하겠다고 했어요. 내가 널 기다리고 보고 싶어 한 건 향 때문만이 아니라는 걸. 당신을 무리하게 붙잡아 둔 것도 그래서예요. 나를 믿지 못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는 거라고 생각했으니까.”
무슨 답을 해야 할지 몰라 해완은 멍하니 눈만 깜빡였다. 강현은 그런 해완에게서 시선을 돌려 벤치로 걸어가더니 풀썩 자리에 앉았다.
그는 소년 시절처럼 등을 곧게 펴고 앉은 채 물었다.
“여기 와 본 적 있어요?”
해완은 순간 머뭇거렸다. 하지만 강현은 굳이 대답을 강요하지 않았다.
“이 마을에 있을 때 자주 여기 앉아 있곤 했어요. 집에서 나와 봤자 눈이 보이질 않으니 멀리 갈 수가 없어서, 가장 가까운 앉을 곳이 여기였거든요.”
“…….”
“내가 왜 그때 눈이 보이지 않았었는지 알아요?”
강현의 표정은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지 알 수 없게 평온했다. 갑작스러운 질문에 해완은 천천히 고개를 가로저었다.
“전환 장애, 또는 신체화 장애라고도 해요. 심리적 원인이 운동이나 감각 기능에 이상 증세를 나타내는 증상을 의미하죠.”
“…….”
“내 눈도, 어머니가 나를 구하려다 돌아가신 이후 어느 날 갑자기 보이지 않게 됐어요.”
생각지도 못했던 사실에, 머리 위에서 얼음물을 쏟아부은 듯 전신이 싸늘하게 굳은 해완의 입이 저절로 반쯤 벌어졌다.
그러나 하얗게 질린 얼굴로 저를 응시하는 해완을 앞에 두고도 강현의 태도는 여상하기 그지없었다.
“내가 이곳으로 보내진 이후 아무도 날 찾지 않았어요. 아버지가 어머니의 죽음을 내 탓이라고 생각했으니까.”
“…….”
“갑자기 눈이 멀고 하루 종일 어둠 속에 앉아 있어도 지겨운 줄 몰랐어요. 왜냐면 이곳에 있는 내내 난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았고, 나 스스로도 나를 느낄 수가 없었거든요.”
강현의 목소리는 지극히 덤덤했지만, 그것이 불러일으키는 기억에 해완은 마음이 찢어지는 듯한 통증을 느꼈다.
돌보는 사람 하나 없이 폐쇄된 버스 정류장에 하염없이 앉아 있던 황량한 소년의 얼굴.
말 한번 걸어 보지도 못하면서 그저 옆에 있기를 바라게 만들었던 그 외로운 모습.
잊을 수 없던 선명한 기억이 해일처럼 마음을 덮쳤다. 견딜 수 없을 정도로 눈이 아리고 목이 메어, 해완은 안간힘을 다해 입 안을 짓씹었다.
겨울의 해는 지나치게 짧았다. 겨울 바다 위로 흩뿌려지는 노을은 아직 희미했지만, 눈물이 가득 고인 탓에 뿌옇게 변한 세상은 온통 붉어 보였다.
그때, 강현의 목소리가 다시 해완의 귀를 파고들었다.
“이리 와요.”
흠칫 놀란 해완이 강현을 바라보자, 그는 부드럽게 한 번 더 말했다.
“이리 와서 내 옆에 앉아요.”
그제야 해완은 자신이 강현과 도로 하나를 사이에 두고 서 있음을 깨달았다.
마치 8년 전처럼 말이다.
하지만 그때와 다른 점은, 지금은 강현이 해완이 그 자리에 존재한다는 것을 알고 있고, 그리고 그가 가까이 오기를 바라고 있다는 것이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이 발이 먼저 움직였다. 고작 몇 발자국 만에 해완은 강현의 옆에 섰다. 8년이 걸렸다는 사실이 어처구니없을 정도로 짧은 거리였다.
해완이 벤치에 앉을 때까지 강현은 집요하게 그의 동작 하나하나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서로의 눈을 바라보게 되었을 때, 순간 해완은 그 옛날로 다시 되돌아간 듯한 기묘한 데자뷔를 느꼈다.
토할 것처럼 심장이 두근거렸다. 무엇이든 말해야 한다는 강렬한 충동이 전신을 휘감았다.
너는 나한테 무엇인지도 모르고 발견한 보물과도 같았다고.
그게 사랑이라는 걸 너무 늦게 알아서 미안하다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지랑이처럼 솟아오른 괴상한 용기에 휩싸여 해완은 벌벌 떨리는 입술을 안간힘을 다해 열었다.
그러나 그때, 강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그리고 해언이가 내 앞에 나타났어요.”
강현의 입에서 나온 해언의 이름이 해완의 심장을 강하게 후려갈겼다.
순식간에 머리가 희게 표백됐다. 자신이 하려던 말을 모두 잊은 채 해완은 멍하니 강현을 바라보았다. 그런 해완을 강현은 새카만 눈으로 벌거벗기듯 응시하며 선명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 애가 나를 발견하고, 나한테 인사를 하고, 말을 걸고, 함께해 주고 나서야 난 진짜 사람이 된 것 같은 기분을 느꼈어요. 그게 내가 해언이를 기다린 이유예요.”
절절한 고백에 가까운 말에도 불구하고 강현의 목소리에는 어딘지 모르게 냉정한 기운이 있었지만, 그런 것을 느끼지도 못할 정도로 해완은 반쯤 마비되어 있었다.
지금 이 순간 해완이 느끼는 건 오직 강현을 만난 이후 끈질기게 반복했던 후회뿐이었다.
강현을 먼저 발견한 것은 해완이었다.
그런데도 그를 내내 어둠 속에 놔두었던 일분일초가 후회스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첫사랑의 소년과 겨우 마주 보고 앉게 된 지금 해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그를 떠나보내는 것 말고 아무것도 없다는 것도.
또 한 번 울컥 눈가가 뜨거워져 해완은 고개를 숙였다. 강현은 그 틈을 노리기라도 한 것처럼 애원하듯이 말했다.
“말해요, 나한테 할 말 있잖아.”
해완은 눈물이 고인 눈을 들어 강현을 바라보았다. 흐려진 시야 너머로 강현의 얼굴은 잘 보이지 않았지만, 그가 입고 있는 까만 코트의 실루엣이 문득 가슴에 박혔다.
그리고 해완은 그제야 이 벤치에 앉아 강현을 마주 보았을 때 자신이 느낀 데자뷔의 정체를 깨달았다.
그것은 꿈이었다.
8년 전, 그가 마지막으로 강현을 봤던 날 이후, 이렇게 강현과 벤치에 마주 앉아 그와 입 맞추는 꿈을 몇 번이고 꿨었던 것이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너는 그때, 까만 코트를 입고 있었어.”
강현은 멍한 표정을 지었다.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견디지 못하고 흘러내렸다. 해완은 넋이 나간 사람처럼 계속해서 속삭였다.
“그런 옷을 입은 너를 처음 봤었는데, 괜히 안심이 됐었어. 왜냐면…… 넌 내가 보기에 항상 옷을 춥게 입고 다녔었거든.”
“…….”
“그리고 눈이 내렸었잖아.”
“…….”
“어깨 위로 하얀 눈이 쌓여서…… 그게 참 예뻤어.”
그리고 강현은 해언의 손을 쥐었고, 두 소년은 그대로 입을 맞췄다.
해완이 본 것은 거기까지였다. 그의 존재는 해언과 강현 사이에서 불청객이자 이물질에 불과했으니까. 그걸 깨닫고서도 다시 이 버스 정류장에 올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럼에도 꿈꾸는 걸 멈출 수 없었다. 꿈속에서 해완은 항상 이 자리에 앉아 있었다. 하지만 그렇게 꾸는 꿈은 해완을 항상 비참하게 만들었다.
왜냐하면, 해완은 그 자신이 아니라 항상 해언이 되어 강현과 입 맞추는 꿈을 꾸었기 때문이었다.
물론 그것은 꿈이고, 지금은 현실이었지만 해언을 대신해서 강현의 옆에 앉아 있다는 점에서는 잔인하게 닮아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고작 꿈만으로도 비참함을 느꼈던 주제에, 그와 비슷한 상황이 현실에 닥친 지금은 강현이 저를 사랑해 줄 수만 있다면 평생 해언의 대신으로 살아도 좋을 것 같았다.
주체할 수 없이 뚝뚝 흘러내리는 눈물을 해완은 손바닥으로 닦아 냈다. 강현이 혼란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넌 대체 누구야?”
흐느낌을 삼키기 위해 해완은 깊게 심호흡을 했다.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난…….”
그 말을 가로막듯, 강현이 강하게 말했다.
“더는 묻지 않을 거야.”
“…….”
“네가 윤해언이 아니라면, 지금 아니라고 말해.”
“…….”
“그러면 네가 바란 대로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고, 아니면…….”
해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침묵뿐이었다. 아니라고 대답했다가는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었으므로.
해완은 시선을 사선으로 돌리고 깊게 고개를 숙였다. 그런 해완의 뺨을 커다란 손이 감싸 들어 올렸다.
강현은 그대로 해완의 입술에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마치 소년 시절의 꾸었던 꿈속에 들어오기라도 한 것처럼.
짧은 입맞춤 후에 입술을 뗀 강현은 해완의 이마에 제 이마를 맞대고, 엄지손가락으로 볼을 어루만지며 속삭였다.
“보고 싶었어. 해언아.”
그것은 처음이 되어서는 안 되는 첫 키스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