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concentré (1)
제품에 적용 전 향 혼합물
이르게 지는 해 덕에 차 안에 빠르게 차오른 어둠이 무엇보다 다행스럽게 느껴졌다.
운전석에 앉은 강현이 입을 다물고 있는 저를 흘끔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해완은 부러 눈을 감고 자는 척 옆으로 고개를 돌렸다.
무언가에 취한 듯 몽롱하던 정신은 시간이 지날수록 점점 선명해졌고, 스스로의 목소리가 악을 쓰듯 머릿속에서 빙빙 돌았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한 거지?
걷잡을 수 없이 심하게 떨리는 손을 감추기 위해 해완은 두 손을 깍지 끼어 세게 움켜쥐었다 놓았다.
차라리 정말 잠에 들기를 바랐지만 그럴 수 있을 리 없었다. 해완이 자고 있다고 생각해서인지 강현은 아까와 마찬가지로 음악이나 라디오 같은 것조차 틀지 않았다. 정신은 날카롭게 깨어 있는데 눈조차 뜨지 못하고 있자니 시간은 지독히도 더디게 지났다.
도로를 달리고, 멈추고, 다시 달리고, 때로는 들썩이는 차의 움직임 하나하나에 신경이 들쑤셔지는 일을 끝없이 반복하던 어느 순간, 강현이 갑자기 무릎 위에 놓인 해완의 한쪽 손을 쥐었다.
자는 척을 하던 것도 잊고 해완은 튀어 오르듯 놀라며 강현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도심으로 들어선 차는 신호에 걸려 정차해 있었고, 강현의 시선은 그를 향해 있었다.
해완이 지나치게 놀란 것을 뻔히 느꼈을 텐데도 강현은 아무렇지도 않게 물었다.
“아직도 떨고 있네.”
“…….”
“히터 더 올려 줄까?”
제가 지금껏 떨고 있었다는 걸 의식하지 못했던 해완은 당황해 얼굴을 붉혔다. 언제부터 강현이 저를 보고 있었는지는 몰라도 꽤나 전부터 덥혀져 있던 차 안의 공기로 보아 내심 신경을 쓰고 있던 모양이었다.
해완은 두 개의 손이 겹쳐 있는 모양새를 멍하니 내려다보았다. 결코 작은 편이 아닌 해완의 손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강현의 손은 컸다.
애초에 추워서 떨고 있지도 않았고 충분할 정도로 차 안은 후덥지근했지만 강현의 손의 온기는 화상을 입힐 것처럼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리고 그 온기가, 심장을 속부터 갉아먹고 있던 죄책감을 압도했다.
대답을 해야 강현이 의아하게 여기지 않을 것이라 생각하면서도 이상하게 목이 멘 해완은 입을 열었다 다시 다무는 것밖에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신호가 바뀌었고 강현은 해완의 손을 놓고 차를 출발시켰다.
사라진 온기에 찬물을 끼얹듯 정신이 든 해완은 황급히 고개를 돌려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새 그들은 해완의 집이 있는 동네의 도로를 달리고 있었다.
집값이 싼 만큼 거주에 좋은 환경이라고 할 수 없는 동네 거리는 떠들썩한 유흥업소의 번잡스러운 간판으로 가득한 정리되지 않은 풍경만이 가득 차 있었다.
그 낯익음을 느낀 순간, 외부와 유리되어 아름다운 추억 속에 갇힌 것만 같았던 버스 정류장에서의 시간과는 달리 그가 진짜 감당해야 할 현실에 내팽개쳐지는 느낌에 해완의 온몸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그는 강현이 저를 해언으로 생각하도록 속였다.
그것이 해완이 지금 하고 있는 짓이었다.
제가 저지른 짓에 대한 현실감이 갑작스럽게 마음에 지진을 일으켰다. 당장이라도 비명을 지르고 싶은 것을 입 안을 짓씹어 간신히 참아 넘겼다.
다행히도 해완의 집으로 들어가는 골목 앞에 도착하기까지는 5분 남짓밖에 걸리지 않았다. 종잡을 수 없이 제멋대로 날뛰는 마음을 다잡느라 진이 빠져 있던 해완은 강현이 차를 세우기 무섭게 떨리는 손으로 안전벨트를 풀었다.
그런 해완을 향해 강현은 당연하다는 듯 말했다.
“주말에는 일하느라 바쁠 테니까, 월요일에 보는 걸로 해.”
“…….”
“늘 보던 시간에.”
사실상 그들의 ‘계약’은 오늘로서 마지막이었지만 강현은 일말의 거리낌도 없는 말투로 다음을 이야기하고 있었다.
그가 ‘해언’이라고 밝혀진 것이 그들의 앞으로의 시간을 보장하기라도 한 듯이.
자연스러운 상황처럼 느껴지지는 않았지만 이상하리만치 머리가 둔해져, 해완은 기계적으로 고개를 끄덕이고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곧바로 차에서 내렸다.
대로변은 연이어 불을 밝힌 가게들의 조명과 커다란 가로등 덕에 밤답지 않게 밝았으나 굽이져 있는 골목 안은 조금만 들어가도 짙은 어둠이 발밑을 휘감았다.
그 어둠 속을 해완은 반쯤 마비된 마음으로 걸었다. 두서없는 생각들과 제 안에 존재하는지도 몰랐던 욕망들이 수도 없이 튀어 올랐다 사라지는 것을 반복하는 통에 감당할 수 없을 만큼 혼란스러웠다.
지금이라도 강현을 붙잡아 사실을 말해야 한다는 마음에 멈춰 섰다가, 그렇게 말했다간 더 이상 그를 볼 수 없다는 두려움이 다시 등을 떠밀었다. 이런 상황에 저를 놓이게 만든 해언에 대한 의문과 원망스러움이 마음을 어지럽히기 무섭게 강현을 속인 자신을 향한 혐오가 더 큰 해일처럼 덮쳐 왔다.
토할 것처럼 속이 뒤틀린 해완은 그 자리에 멈춰서 눈을 가리고 크게 심호흡을 했다.
“윤해언.”
그런데 그때, 뒤에서 강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잘못된 이름으로 저를 부르는 목소리가 심장을 날카롭게 찔러 해완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하지만 강현은 망설이지 않았다. 들려오는 목소리는 멀었는데 어느새 성큼 해완의 뒤로 다가선 그는 그대로 해완의 어깨를 잡아 돌려세우고는 깊게 껴안고 머리칼에 코를 묻었다.
몸이 굳어 마주 안지도 못하는 해완을 품에 안은 채로 강현은 강하게 중얼거렸다.
“기다릴 만큼 기다리게 했잖아.”
“…….”
“이제 와서 물러설 생각 하지 마.”
강현이 의도한 것은 아니었겠지만, 그 말은 아이러니하게 해완이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곳에 서 있다는 사실을 새삼스럽게 깨닫게 했다.
이미 그는 강현에게 거짓말을 했고, 진실을 언제 털어놓든 그 결과는 같을 것이라는 걸.
금방이라도 터져 나올 듯 뜨겁게 들끓어 오르던 죄책감과 두려움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대신해서 그 자리를 채운 것은 지금 이 순간이 끝나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애달픈 마음뿐이었다.
강현이 안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해완 자신이 아니라 해언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결코 벗어나고 싶지 않은 제 마음이 원망스러워, 해완은 저도 모르게 눈물을 글썽였다.
잠시 해완을 그렇게 안고 있던 강현이 팔을 풀었다. 그의 품에서 벗어나자마자 해완은 붉어진 눈시울을 들킬까 고개를 숙였다.
골목 안 가로등의 희미한 빛이 처음으로 반갑게 여겨졌지만, 강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도 잘 보이지 않았다.
“……월요일에 봐.”
그리고 강현의 나직한 목소리가 들려온 순간 해완은 고개를 끄덕이는 것 말고는 다른 말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 * *
어릴 때 해완에게는 ‘제 것’이라는 개념이 별로 없었다.
그래서 평범한 집의 아이들처럼 주어진 것이 많지 않은 보육원 생활도 별로 불편하다고 느끼지 못했다. 특히 쌍둥이처럼 붙어 다녀 다른 아이들보다 서로의 것을 훨씬 많이 공유해야 했던 해언이라는 존재가 있었음에도 그랬다.
그것은 해언에게도 마찬가지여서, 두 사람은 각자의 물건의 구분을 거의 두지 않고 자랐다. 하지만 해언은 해완처럼 다른 아이들과 나눠 쓰는 것에도 유하게 굴지는 못했다. 해언의 예외는 오로지 해완뿐이었다.
따지고 보면 강현은 처음으로 해완과 해언 둘 다 가지고 싶어 했던 무언가였고, 둘 다 끝내 양보할 수 없었던 무언가였는지도 모른다.
약속한 대로 강현의 작업실 앞에 서서도 해완은 쉽사리 벨을 누르지 못하고 망설였다.
주말 동안 해완은 강현의 생각을 하지 않으려 안간힘을 다했다. 몸을 지치게 할 요량으로 고깃집 아르바이트로 모자라 급전이 필요할 때만 하던 상하차 아르바이트까지 다녀왔지만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잠깐씩 기절하듯 잠에 빠질 때면 어김없이 악몽을 꿨다. 모두 같은 것이었는데, 둘이서 함께 놀던 낡은 체육관 창고에서 해언이 무서운 얼굴로 제게 화를 내는 꿈이었다.
하지만 해언이 무슨 말을 하는지는 음소거를 한 것처럼 들리지 않았다.
몇 번이나 손을 올렸다 내렸다 하며 망설이던 해완이 크게 심호흡을 하며 떨리는 손가락으로 벨을 누르려던 찰나, 갑자기 굳게 닫혀 있던 현관문이 열리더니 강현이 불쑥 나타났다.
놀란 해완이 입을 반쯤 벌리자 강현은 현관문에 달린 CCTV를 손으로 가리키며 말했다.
“올 시간이 돼도 안 오길래.”
앞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강현이 뻔히 봤다는 생각에 얼굴이 화끈거렸다. 그런 해완을 본 강현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들어와, 얼른.”
이미 익숙해질 만큼 충분히 드나든 곳인데 괜히 입이 마르고 불편하게 느껴져 해완은 망설이는 발걸음으로 강현의 뒤를 따랐다.
응접실로 들어선 강현은 그가 종종 하던 대로 대리석 탁자 위에 반쯤 걸터앉고 팔짱을 낀 채로 뒤따라 들어오는 해완을 가만히 응시했다.
사람을 꿰뚫어 보는 듯한 그의 시선은 평소에도 익숙해지기 어려웠으나 마음에 심각하게 켕기는 것이 있는 지금은 더욱 견디기가 힘들었다.
어떻게든 이 불편한 정적을 깨고 싶다는 생각에 해완은 입을 열었다. 하지만 도대체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아니, 무슨 말을 해야 하는지에 대한 문제 이전에 말투를 어떻게 해야 할지도 아직 마음을 정하지 못한 상태였다.
그때 갑자기 몸을 일으켜 세운 강현이 성큼 해완의 앞으로 다가왔다. 흠칫 놀란 해완이 물러서기도 전에 그는 손을 뻗어 해완의 볼을 어루만졌다.
“주말에 많이 바빴어? 피곤해 보이네.”
지나치게 거리낌 없는 스킨십에 당황한 해완은 얼굴을 사선으로 돌리고는 뒤로 물러서며 중얼거렸다.
“잠을…… 잠을 좀 못 자서 그래.”
“왜, 아르바이트가 힘들어서?”
절반의 사실에 해완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현이 그런 그를 주의 깊게 바라보다가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안 그래도 너한테 계속 얘기하고 싶었던 건데, 그런 쓸데없는 일들은 그만두는 게 어때?”
“……어?”
“다시 요리하고 싶다고 했잖아. 내가 도와주고 싶어.”
갑작스러운 제안이었지만 그럴 수는 없다는 생각이 곧바로 들어 해완은 거의 반사적으로 대답했다.
“그러지 마. 그럴 필요 없어. 그러려고 여기 너 다시 만나러 온 거 아니야.”
노골적인 거부에 강현의 얼굴이 크게 꿈틀했다. 그는 반항적인 목소리로 대꾸했다.
“그렇게 바로 싫다고 할 필요는 없어. 빚을 지우겠다는 게 아니라 도와주겠다고 하는 거니까.”
“이미 너한테 신세를 너무 많이 졌어. 유준이가 너한테 받은 돈도 아직 하나도 못 돌려줬는데 다른 걸 받을 수는 없어.”
“그 정도는 나한테 아무것도 아니라고 했잖아. 받아도 그만, 안 받아도 그만인 돈이라고.”
“그래, 너한텐 그럴지 몰라도 내가 받아서는 안 되는 돈을 받은 사실이 없어지진 않잖아.”
“그게 왜 받아서는 안 되는 돈인데?”
“내가 책임질 수 없는 돈이니까. 내가 갚을 수 없는 걸 계속해서 받는 건 싫어.”
강현은 짜증이 난 듯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며 신경질적으로 말했다.
“내가 받을 생각도 없는 걸 갚겠다고 우기는 이유가 뭐야? 나한테 더 이상 다가오지 말라고 선이라도 긋고 싶은 거야?”
다소 격렬한 강현의 말투에 해완은 잠시 말을 잃었다. 대체 왜 이 도돌이표 같은 말다툼을 하고 있는지부터가 이해가 안 간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현이 기습하듯이 입을 열었다.
“이제 와서 나한테 이러면 안 돼.”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해완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뭐?”
“네가 윤해언이라는 걸 인정했잖아. 그런데도 이제 와서 내 옆에서 도망가려 하면 안 된다고.”
말다툼 속에서 잊고 있던 현실을 깨닫게 하는 강현의 목소리에 해완은 순간 목이 졸리는 듯한 기분을 느꼈다. 그런 해완을 향해 강현은 고저 없는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넌 날 8년을 기다리게 만들었어. 다시 만나고 나서도 한 달 동안 날 모르는 척했고.”
“…….”
“그런데도 넌 아직까지 어떻게든 나랑 엮일 일을 피하고 싶어 하는 것 같아. 나한테 메일을 보내면서도 너를 찾을 만한 단서는 조금도 주지 않았던 것처럼.”
강현의 얼굴을 쳐다볼 자신이 없어 해완은 눈을 질끈 감고 중얼거렸다.
“난…… 그런 게…….”
“……내가 너한테 부족한 인간이라 그러는 거야?”
생각지도 못한 강현의 말에 해완은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그게…… 그게 무슨 소리야.”
“내가 네 옆에 있을 가치가 없는 인간이라고 생각해서, 네 삶에 끼어들 틈을 주고 싶지 않은 거냐고.”
말도 안 되는 소리라는 생각만이 마음을 꽉 채웠다. 해완은 그런 말을 하는 강현의 얼굴을 저도 모르게 똑바로 바라보았다.
상처받은 기색이 엿보이는 목소리에 비해 강현의 눈은 이상하리만치 고요하게 보였지만, 지금 해완의 마음을 몰아세우는 것은 강현의 말이 아니라 평소 해완 그 자신을 바라보던 스스로의 시각이었다.
해완은 강현에게 가까이 다가서며 정신없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아니야, 강현아. 절대 그런 생각 한 적 없어. 내가…… 내가…….”
거기까지 말한 해완은 화들짝 놀라 입을 다물고 고개를 숙였다.
내가 어떻게, 내가 뭐라고 널 두고 부족하다고 여겨.
그렇게 말할 뻔했지만, 윤해완에게는 몰라도 윤해언에게는 어울리지 않는 말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었다.
숙인 고개 위로 강현의 시선이 쏟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강현이 해완의 팔을 잡고 가까이 당겨 붙어 서게 만들었다.
해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강현을 쳐다보자 그가 즉시 물었다.
“정말 그런 생각 하고 있는 거 아니야?”
두 사람이 서 있는 거리는 지나치게 가까웠다. 평소라면 당황할 법한 상황인데도 강현의 불확실한 목소리에서 느껴지는 듯한 불안을 씻어 주고 싶다는 생각만이 해완의 가슴에 닿았다.
해완은 강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현이 슬며시 미소를 지었다. 두 사람 사이의 팽팽하던 분위기는 어느새 묘한 긴장감으로 바뀌어 있었다.
강현의 숨결이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서 있는 것이 갑자기 해완의 입 안을 바싹 마르게 만들었다. 어쩔 줄 모르고 몸을 움찔거리는 해완의 팔을 더욱 세게 고쳐 쥔 강현이 입을 열었다.
“내가 싫은 게 아니면 보여 줘.”
그 새카만 눈을 바라보는 가운데, 해완은 홀린 듯이 중얼거렸다.
“……어떻게?”
강현은 고개를 숙여서 해완의 귀에 대고 나른하게 속삭였다.
“키스해 줘. 우리가 맨 처음 그랬던 것처럼.”
그 말을 들은 해완은 얼굴을 터질 듯이 붉혔다. 이미 그 버스 정류장에서 한 번 입을 맞추었으나 희미한 감촉만이 기억에 남을 정도로 반쯤 정신이 나간 상태에서 한 것이었다.
하지만 지금은 달랐다. 차라리 둔해지길 바랄 정도로 신경이 곤두서 견딜 수 없을 정도였다.
제 팔을 쥐고 있는 손가락의 압력과 온기, 가까이 다가설수록 후각을 더욱 깊게 자극하는 강현의 페로몬 향, 바싹 붙어 선 그가 슬쩍 움직일 때마다 옷의 천들이 부딪치고 바스락대는 소리, 제 얼굴 위를 여유롭게 유영하는 듯한 길고 까만 속눈썹의 흔들림까지. 그 모든 것들이 해완의 온 감각을 과민하게 자극하고 있었다.
해완이 무엇도 하지 못하고 굳어 서 있자 강현은 원망스럽다는 듯 말했다.
“내가 정말 네가 날 싫어한다고 생각하길 바라는 거야?”
당황해 반쯤 벌어져 있던 해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해완은 바싹 긴장해서 삐걱거리는 몸을 간신히 움직였다. 강현이 조금도 고개를 숙여 주려 하지 않았기 때문에, 그는 팔이 붙들린 채로 살짝 발뒤꿈치를 들어 올려 굳게 다문 입술을 강현의 것에 정직하게 가져다 대고 꾹 눌렀다가, 떨어졌다.
키스라고 하기에는 지나치게 시시했겠지만, 누군가와 한 번도 제대로 된 입맞춤을 나눠 본 적이 없는 해완이 할 수 있는 것이라곤 그게 최선이었고 그것만으로도 심장이 가슴을 뚫고 튀어나올 듯 두근거렸다.
역시 그것만으론 부족하다는 듯 강현이 긁히는 듯 낮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건 내가 생각한 게 아닌데.”
강현은 한 손으로는 해완의 허리를 다시 감싸 쥐고 다른 손으로는 턱을 쥐고 들어 올려 놀라 벌어진 입술을 깊게 머금었다. 공격적인 움직임에 놀라 주춤 물러서려는 해완을 강현은 놓치지 않고 더욱 강하게 잡아당겼다.
한 치의 틈도 없이 붙어 서자 신장 차이 때문에 고개가 들리고 반사적으로 입이 더욱 벌어졌다. 강현은 그대로 벌어진 입 사이로 깊게 혀를 밀어 넣었다. 연한 점막과 입 안을 제 것처럼 온통 쓸어내리고 말캉한 혀를 깊게 빨아들이고 깨물었다.
예민한 입술과 입 안에 가해지는 자극에 해완은 작은 신음을 흘렸지만, 제 목구멍에서 그런 소리가 나는지도 모르게 정신이 혼미해져 있었다.
처음으로 겪는 깊은 입맞춤 때문만은 아니었다. 강현에게서 풍기는 향이 기이하리만치 강한 탓도 있었다.
분명 알고 있던 향이었지만 뭔가 달랐다. 깊은 숲속에 동떨어져 있는 듯한 느낌은 같았으나, 좀 더 달콤하고, 어딘가 스파이시하고, 그리고 너무 짙은 나머지 약간은 비릿하게까지 느껴지는, 삽시간에 전신을 뒤덮는 것처럼 강렬한 느낌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배 속 어딘가를 뜨겁게 휘젓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을 때, 해완은 제가 처음으로 흥분한 알파의 페로몬을 받고 있음을 깨달았다.
다리에 힘이 풀릴 것처럼 떨려서 해완은 저도 모르게 강현의 어깨를 움켜쥐었다.
강현이 겨우 해완을 놓아주었을 때 두 사람 다 상반신만 붙어 선 채로 잠시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거친 숨을 가다듬어야 했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강현이 해완의 뒤통수를 감싼 채로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주말 아르바이트만이라도 그만둬.”
나른한 감각에 빠져 있던 해완이 움찔 그의 손을 벗어나려 하자 강현은 손에 힘을 주고 한 번 더 말했다.
“만날 시간이 줄어드는 게 싫어서 그래.”
해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이런 순간까지 생활을 유지하는 것에 대한 문제를 생각하지 않을 수 없는 제 상황이 싫었다.
어디부터 설명해야 할지 몰라 해완은 곤란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현아…….”
하지만 그의 이름을 부르기 무섭게 강현은 해완의 말을 잘라 버렸다.
“날 더는 너한테 구걸하게 만들지 마.”
죄책감을 자극하는 말에, 어쩔 수 없이 마음이 아릿해졌다. 해완은 강현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현은 해완을 몸에서 떨어뜨리고 미소를 짓더니, 잘 선택했다는 듯 팔뚝을 부드럽게 쓰다듬었다.
그는 해완의 눈을 바라보며 다정하게 물었다.
“이번 주말에 데이트할까? 지난번에 했던 것처럼 영화도 보고. 응?”
가게 사정도 있으니 아마 이번 주에 당장 그만둘 수는 없을 것이라고, 그렇게 말해야 마땅했지만, 왜인지 그 순간 굳게 닫혀 있던 작업실의 문과 일방적으로 끊어지던 전화, 그리고 시들어 버린 노란 꽃이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그래, 그러자.”
그렇게 말하자, 만족스럽게 활짝 웃는 강현의 얼굴을 해완은 홀린 듯이 바라보았다.
* * *
강현과의 약속은 일요일이었다. 월요일 이후 강현이 집중해야 할 막바지 작업이 있어 더 이상 작업실에 가지 않았던 터라 6일 만에 보는 것이었다.
아르바이트를 정리해야 했던 해완에게는 차라리 잘된 일이었다. 이번 주까지는 일해 주기로 했기에 오늘 대신 일해 줄 대타를 구하느라 수요일 아르바이트생과 스케줄을 바꿔야 했기 때문이었다.
갑자기 그만두겠다는 통보를 한 것에 화가 난 사장에게 들은 쓴소리를 떠올린 해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거기에 더해 그동안 고깃집 아르바이트로 벌던 수입을 어떻게 메꿔야 할지도 고민이 됐는데, 아무래도 강현과 만나는 시간을 최우선으로 두고 비는 시간마다 구할 수 있는 건설 현장이나 상하차 아르바이트 같은 일용직을 적극적으로 나가야 할 듯싶었다.
사실 그런 일들은 체력을 많이 요하는 탓에 이런저런 부작용을 겪었던 수술 이후에는 하고 싶어도 하지 못했던 일들이지만 이제는 1년 가까이 지났으니 괜찮을 것 같았다.
물론 강현이 말했던 일을 그만두라는 말은 이런 의미가 아니었을 터였다. 그러나 그의 돈을 더 이상 받을 수는 없었다.
그런 생각에 빠져 있던 탓에, 나갈 준비를 하고 있던 저를 유준이 유심히 보고 있었다는 것을 해완은 새로 산 코트를 입고 뒤돌아서고 나서야 알았다.
“뭘 그렇게 번지르르하게 입고 가? 어차피 가서 고기나 구울 거면서.”
유준의 미심쩍은 목소리에 해완은 어쩔 수 없이 얼굴이 빨개졌다.
고깃집을 그만뒀다는 것은 아직 유준에게 말하지 않았다. 그것을 말했다가는 제가 저지른 일의 전부를 말해야 할 게 뻔했기 때문이었다.
“간만에 새 옷 샀는데 좀 입는 게 어때서.”
마땅한 변명도 생각나지 않아 애써 농담조로 말했지만 유준은 제가 바라는 대답은 그게 아니라는 듯 못마땅한 얼굴만 했다.
강현과 연구소를 다녀왔던 지난주 금요일, 유준은 집에 돌아온 해완의 얼굴을 보자마자 무슨 일이냐며, 여강현 그 자식이 무슨 짓이라도 한 거냐고 캐물으려 들었다.
해완은 당연히 그냥 피곤한 것이라는 말로 피하려 했지만 유준은 지금 형 얼굴이나 보라고, 100미터 밖에서 봐도 무슨 일 있는 사람의 얼굴이라며 집요하게 굴었다.
어떻게든 그날은 묵비권을 행사해서 넘어갈 수 있었으나 그 이후부터 유준은 해완의 일거수일투족에 의심스러운 눈빛을 거두지 못하고 있었다.
해완이 입을 열지 않을 것임을 알자 유준은 전략을 바꿨다.
“그래? 그럼 오늘 일 끝나고 뭐 맛있는 거라도 먹으러 갈까? 옷도 차려입었는데. 내가 형 알바 끝나는 시간에 맞춰서 갈게.”
“안 돼, 그건.”
당황한 해완의 즉답에 유준은 딱 걸렸다는 듯 눈을 가늘게 떴다.
“왜 안 되는데? 뭐 약속이라도 있어?”
“무, 무슨 약속이야. 그런 거 없어. 그냥, 그냥 일 끝나고 회식이 있어서.”
제가 생각해도 되도 않는 변명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유준은 숨길 생각도 하지 않고 크게 코웃음을 치며 말했다.
“그걸 뻥이라고 치는 거야? 진짜 내가 본 사람 중에 제일 거짓말 못하는 인간이 형이다.”
그러나 그 말을 듣는 순간 해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제가 지금 어떤 거짓말을 하고 있는지 안다면 저런 말은 못 할 것이라는 생각이 날카롭게 마음을 찔러서였다.
“아니, 강현이 형이랑 그 지방까지 갔다 온 날에 무슨 시체처럼 허연 얼굴로 들어와 놓고 무슨 일 있었는지 입을 딱 다물고 있으니 내가 걱정 안 하게 생겼어? 뭔 말을 안 해 줄 거면 속 들여다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질 말든지…….”
답답하다는 듯 주절거리는 유준의 말에 아랑곳없이 해완은 고개를 숙이고 말했다.
“……갔다 올게.”
유준이 뭔가를 더 떠들기 전에 도망치듯이 집을 빠져나온 해완은 간절히 생각을 지우고 싶어 땅을 보고 빠르게 걷는 것에만 집중했다.
유준에게 아무 말도 하지 못했던 건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이 부끄러워서기도 했지만, 대체 앞으로 어떻게 할 생각이냐는 물음을 듣는 게 두려워서이기도 했다.
그 말을 들으면, 지금 해완이 애써 외면하고 있는 앞으로 벌어질 일들에 대한 생각을 도저히 피해 갈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물론 아무리 현실을 회피한다 한들 이 상태가 오래 지속되지 않을 것임은 불 보듯 뻔했다. 유준이 말했듯 해완은 거짓말에 소질이 없었다. 강현이 그를 해언이라고 진짜 믿은 것이 스스로도 놀라울 정도였다.
게다가 해완과 해언은 1부터 100까지 모든 것이 달랐다. 그의 몸에 밴 냄새나, 함께 쓰는 물건들 때문에 해완을 해언이라고 착각할 수는 있어도, 아이들이 결국 그를 짝퉁이라고 놀렸던 것은 이유가 있었으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난생처음 겪는 낯설고 생경한 이 욕망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알 수 없어 아득하기만 했다.
누군가 심장을 족쇄로 얽매여 죄듯이 아파 왔다. 해완은 모든 생각을 시린 바람에 털어 내려는 듯 고개를 세게 흔들었다. 너무나 어리석은 짓이란 걸 알면서도, 지금 이 길만큼은 그런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다.
단지, 지금은…….
해완은 천천히 걸음을 멈춰 섰다.
그의 시야에, 언젠가 건네주지 못했던 노란 꽃이 걸린 탓이었다.
* * *
약속 장소는 번화가에 있는 어느 영화관 앞이었다.
해완은 멀찍이 서 있는 강현의 모습을 발견하고는 걸음을 멈췄다. 샛노란 미모사 꽃다발을 쥔 손에 괜히 쥐가 나는 것만 같아 그는 어쩔 줄 모르고 양손을 번갈아 가며 주먹을 쥐었다 펴기를 반복했다.
이전보다 더 큰 크기로, 해완답지 않게 말참견까지 해 가며 싱싱해 보이는 것으로 줄기 하나하나 꼼꼼하게 골라 받은 꽃다발이었다. 그러나 막상 강현을 앞에 두고 보니 구석진 곳에서 꺾어진 잔꽃의 고개나 대중교통 안에서 어쩔 수 없이 구깃해진 포장지 끄트머리 같은 부분들만 결벽증 환자처럼 눈에 띄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빨리 주고 싶은 마음에 걸음을 재촉하게 만들었던 어린애 같은 흥분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생각지도 못했던 온갖 걱정들로 심장이 제멋대로 쿵쾅거렸다.
꽃을 마음에 들어 하지 않으면 어쩌지?
들고 다니는 걸 귀찮게 여기지는 않을까?
아니, 그보다 갑자기 왜 선물을 주냐고 하면 뭐라고 대답하지?
그런 생각들에 골몰하느라 망부석처럼 서 있던 해완은 강현이 손목에 찬 시계를 들여다보며 시간을 확인하는 모습을 보고서야 정신이 번쩍 들어 허둥지둥 걸음을 옮겼다.
가까워지는 해완을 발견한 강현은 마스크를 내리며 설핏 미소를 지었다가, 그가 완전히 제 앞에 서자 걱정스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뛰어왔어? 얼굴이 빨가네.”
“아니, 그런…… 그런 건 아닌데…….”
잔뜩 붉어진 얼굴을 강현에게 지적받자 더욱 당황한 해완은 이제는 귀 끝까지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런 해완에는 아랑곳없이 강현은 의아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건 웬 꽃이야?”
이제는 목덜미에 식은땀까지 흐르는 것 같았지만, 그래도 강현이 먼저 말을 꺼내 준 것이 고맙게 여겨져 해완은 눈을 질끈 감고 꽃을 내밀었다.
“……너 주려고 샀어.”
하지만 강현은 바로 그것을 받지 않고, 어리둥절하게 눈을 느리게 깜박이더니 물었다.
“나한테? 왜?”
어느 정도 예상을 하긴 했던 질문이긴 했지만 당황스럽지 않은 것은 아니라, 해완은 조금 버벅이며 천천히 말을 이었다.
“전에 그라스에 갔을 때 얘기해 준 적 있잖아. 거기서 나는 미모사 향을 좋아한다고. 요즘같이 추운 날이면 항상 생각이 난다고.”
“…….”
“그래서…… 좋아할 것 같아서…… 그래서 선물해 주고 싶었어.”
그 말을 들은 강현의 얼굴은 묘했다. 그는 어떻게 반응해야 좋을지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잠시 해완의 손에 쥐어진 꽃을 내려다보기만 했다.
물리적인 시간으로만 따지자면 고작 몇 초 정도의 차이였겠지만 강현의 반응에 신경이 곤두서 있던 해완에게는 몇 시간처럼 느껴질 지경이었다.
꽃을 내민 손이 파르르 떨렸다. 해완은 붉어진 얼굴로 횡설수설하기 시작했다.
“내가 오버한 거면 안 받아도 괜찮아. 들고 다니기 귀찮으면 내가 들고…….”
그때 강현이 거두어지려는 해완의 손목을 턱 잡았다. 그는 떨리는 해완의 손에서 꽃다발을 뺏어 들더니 화사한 꽃에 가볍게 코를 묻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리고 그는 해완의 눈을 바라보며 나직이 말했다.
“그걸 기억하고 있을지 몰라서 놀랐어. 별생각 없이 한 얘기였는데.”
네가 한 얘기는 전부 다 기억한다고. 그렇게 말하려다 갑자기 수줍어진 해완은 입을 다물고 살짝 고개를 숙였다. 그러자 꽃을 한 품에 안은 강현이 다른 손으로 해완의 어깨를 살짝 감싸 끌어안으며 다정하게 중얼거렸다.
“향이 너무 좋다. 정말 고마워.”
겨울바람을 머금어 버석한 코트 위로 짙게 섞인 강현의 향이 느껴졌다. 심장이 터질 듯이 쿵쾅댔다. 강현에게도 소리가 들릴 것만 같아 어쩔 수 없이 몸이 자꾸만 움찔거렸다.
하지만 벗어날 생각은 없이, 해완은 그저 작게 중얼거렸다.
“……말려서 벽에 걸어 놔도 예쁠 거야.”
“그래? 그럼 잘 말려서 보관해야겠다. 처음으로 너한테 받은 선물이니까.”
“응.”
“그럼 들어갈까? 영화 시간 얼마 안 남았는데.”
해완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현은 씩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해완의 어깨를 안고 있던 팔을 풀고 걸음을 옮겼다.
오늘 영화는 강현이 미리 예매한 로맨틱 코미디였다. 강현이 보고 싶다고 한 것 중 하나였는데 이전 로맨스 장르를 좋아한다고 했던 말이 떠올라 해완은 혼자 바보처럼 씩 웃었었다.
간식거리까지 사 들고 자리를 찾아 앉았을 때는 아직 광고 상영이 한창이었다. 함께 영화관에 온 것이 처음도 아닌데 괜히 긴장이 된 해완은 좀처럼 몸을 가만히 두질 못했다. 반면 강현은 아무 생각 없이 평온해 보여서, 혼자 안절부절못하던 해완이 어색하게 말을 걸었다.
“이 영화는 전부터 보고 싶었던 거야?”
그러자 무표정하게 광고를 보고 있던 강현이 해완을 향해 고개를 돌리곤 말했다.
“아니. 그런 거 아닌데.”
“그럼…… 이 영화는 왜 보자고 한 거야?”
“네가 이거 보고는 안 울 것 같아서.”
해완은 순간 강현의 말을 이해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지난번 함께 본 영화에서 해완이 눈물을 흘린 일을 언급하고 있다는 걸 인지하고는 볼이 살짝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그 영화 보고 운 게 그렇게 이상했어?”
“그렇다기보단…… 아무도 울었다는 사람 없길래.”
“친구 중에 그 영화 본 사람이 많았어?”
“그런 건 아니고. 그냥 찾아봤어. 보통 사람들도 너처럼 눈물이 나나 궁금했거든.”
멋쩍어진 해완은 마른 손으로 목뒤를 쓰다듬었다. 그러다 문득 제게 왜 울었냐고 캐묻던 강현의 말과, 읽을 수 없었기에 유독 마음속에 남았던 그의 얼굴이 생각이 났다.
그때 강현이 묘한 얼굴을 했던 이유에 대해 해완은 나름대로 그 영화의 줄거리가 해언과 강현 사이의 일을 떠올리게 한 탓이리라 생각해 왔지만, 지금의 강현은 조금도 그런 기억에 얽매여 있는 것처럼 느껴지지 않았다.
망설이던 해완은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물었다.
“그 영화 보고…… 뭐 생각나는 거 없었어?”
“……뭐가?”
“그냥…… 너도 그때 재밌게 봤다고 했었잖아. 그래서.”
그 말에 강현은 잠시 말이 없다가 싱긋 웃으며 가볍게 말했다.
“왜, 넌 뭔가 떠오르는 게 있었어?”
되돌아온 질문은 해완의 말문을 막히게 했다. 그는 시선을 피하며 중얼거렸다.
“아니, 딱히 그런 건 아니고.”
“그럼 나도 그래.”
“…….”
“나도 네가 생각한 거랑 비슷하게 느꼈다고 했잖아.”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해완은 입을 다물었다. 강현도 다시 스크린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다행히도 얼마 지나지 않아 영화가 시작했다. 그리고 해완은 강현이 말한 ‘네가 울지 않을 것 같아서’의 말뜻을 금세 이해했다. 영화는 아주 가볍고 산뜻해서, 사소한 일에도 감정을 쏟는 해완도 정말 별다른 생각 없이 볼 수 있었다.
하지만 솔직히 잘 만든 영화는 아니었기 때문에 중간쯤부터 지루해지기 시작한 해완은 곁눈질로 슬쩍 강현을 쳐다보았다. 강현도 마찬가지인지 타이밍 좋게 늘어지게 하품을 하는 것이 보여, 해완은 속으로 웃음을 삼켰다.
그런데 강현의 시선이 불현듯 해완을 향했다. 해완은 눈이 마주치기 무섭게 홱 고개를 돌렸지만 그의 눈이 여전히 제 옆얼굴을 향해 있는 것을 모를 수는 없었다.
강현이 옆으로 고개를 기울였다. 그는 바싹 긴장해 있는 해완의 귀에 대고 속삭였다.
“……영화 재밌어?”
남들에게 들릴까 볼륨을 한껏 낮춰 말한 탓에 평소에도 저음인 강현의 목소리는 귓속으로 스며들 것처럼 유달리 깊고 낮게 들렸다.
침을 꿀꺽 삼킨 해완이 고개를 가로젓자 강현은 기다렸다는 듯 다시 속삭였다.
“나갈까?”
옆으로 살짝 고개를 돌리자 강현이 호소하듯 눈을 크게 떴다. 어쩔 수 없이 옅게 미소를 지은 해완이 고개를 끄덕이자 그는 기다렸다는 듯 무릎 위에 놓은 꽃다발부터 집어 들었다.
조금이라도 시야 방해를 덜 하기 위해 온몸을 옹송그린 뒤 종종걸음으로 겨우 영화관을 빠져나오자마자 강현은 이제야 살겠다는 듯 기지개를 켜고 고개를 이리저리 돌렸다. 지루했던 기색을 숨길 생각도 없는 모습에 해완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로맨스 영화 좋아한다더니, 그래도 끝까지 봐 줘야 되는 거 아냐?”
그 말에 강현은 해완을 흘끗 보고는 마찬가지로 가볍게 대답했다.
“좋아한다고 안 했는데. 배울 게 많다고 했지.”
해완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이런 영화를 보고 뭘 배우는 건데?”
그러자 강현이 툭 떨어져 있던 해완의 손을 깍지 끼어 잡고는 장난스럽게 말했다.
“글쎄, 이런 거?”
뻔뻔한 목소리에 해완은 또 귀가 뜨겁게 달아오르는 걸 느꼈다. 그런 해완에는 아랑곳없이 강현이 밝게 말했다.
“그럼 밥 먹으러 갈까? 네가 좋아할 만한 데 예약해 놨는데.”
해완이 고개를 끄덕이자, 강현은 깍지 낀 손에 힘을 주며 씩 웃고 걸음을 옮겼다.
워낙 손가락이 긴 탓인지, 그의 손에 완전히 얽어매어진 것처럼 느껴졌다.
강현이 해완을 데려간 곳은 스시 오마카세집이었다. 일본에서 이름난 셰프를 한국 호텔에서 초빙했고, 그 호텔에서 나온 셰프가 다시 한국에 업장을 낸 곳이라고 했는데 예약만으로도 쉽지 않은 곳처럼 보였다.
강현은 반주를 하고 싶으면 사케를 시켜도 괜찮다고 했지만 술을 거의 하지 못하는 해완이 거절하자 자신도 아무것도 주문하지 않고 메뉴판을 돌려보냈다.
“너는 아무것도 안 마셔? 아, 운전해야 돼서 그런가.”
해완이 묻자, 강현이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그런 것도 있지만, 나도 원래 술 잘 못해. 거의 안 마시기도 하고.”
이전 강현과 술을 마시고 거의 필름이 끊길 정도로 취해서 돌아온 유준이 생각난 해완이 멈칫했다.
하지만 유준은 취하면 취할수록 더 술을 마시려 드는 주사가 있었기 때문에, 강현이 장단을 맞춰 주지 않아도 혼자서 술을 들이켜고도 남았으리란 생각이 들어 해완은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애피타이저로 나온 전복과 내장 소스, 사시미 몇 점부터 시작해 메인인 스시, 도미구이, 카이센동 같은 가벼운 요리들과 후식까지 즐기고 나자 몇 시간이 훌쩍 흘러 있었다.
가게를 나온 뒤 강현은 해완을 역시 집 근처까지 태워다 주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이전과는 달리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며 기어코 함께 차에서 내려 걷기 시작했다.
두 사람은 별다른 말 없이 어두운 골목을 걸었다. 이미 질리도록 오간 길이었지만 그의 손을 잡고 집까지 향하는 골목을 걷는 것은 현실과 환상, 정확히 그 사이를 걷고 있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었다.
몸과 영혼이 부유하는 듯한 기분에 불안해진 해완이 저도 모르게 손에 힘을 주자, 강현이 응하듯이 강하게 맞잡아 왔다.
해완의 집 문 앞에 선 강현이 부드럽게 말했다.
“꽃 정말 고마워. 집에 가서 잘 말려 놓을게.”
왠지 멋쩍어진 해완이 얼굴을 쓰다듬으며 대꾸했다.
“말린 거 나중에 리스로 만들어도 좋을 것 같아. 크리스마스에 다른 리스들이랑 걸어 놔도 예쁘겠다.”
“리스? 그런 거 만들어 봤어?”
“크리스마스 때면. 보육원 원장님이 그런 거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었거든.”
해완이 자란 보육원은 아이들에게 종교를 강요하는 곳은 아니었지만 기독교적 성향이 강해 크리스마스는 두말할 것 없이 1년 중 가장 큰 행사였었다.
다 같이 트리를 꾸미고 선물을 기대하며 잠들던 어린 시절을 떠올린 해완이 무심결에 연한 미소를 지었다.
그런 해완을 보던 강현이 갑자기 고개를 숙이더니, 그의 귀에 대고 작게 속삭였다.
“그럼, 네가 크리스마스에 우리 집에 와서 만들어 주면 되겠다.”
그 말을 들은 해완은 다시 얼굴이 화끈 달아오르는 것을 느꼈다. 이미 강현의 집에 다녀간 적이 있지만, 그때는 유준과 함께였었고 아무 사이도 아니었을 때였으니까.
괜히 입 안이 바싹 말라 어쩔 줄 모르던 해완은 바보 같은 말을 내뱉고 말았다.
“그, 크리스마스엔 가족들이랑 보내야 되지 않아? 가, 갑자기 다른 사람이랑 보내면 서운해하시지 않을까?”
그러자 강현은 옅은 가로등 불빛에도 보일 정도로 미간을 찡그리더니 툭 내뱉었다.
“어차피 같이 보낸 적 없어.”
“어?”
“혼자 산 이후로 한 번도 가족들이랑 크리스마스 같이 보낸 적 없다고.”
해완은 강현의 새카만 눈을 바라보았다. 강현의 목소리에도, 얼굴에도, 평소와 다른 기색은 전혀 없었지만 그 지나친 덤덤함이 오히려 가슴을 세게 내리쳤다.
어쩌면 강현에게도 차마 말하지 못한 이야기가 많을지 모른다고. 그런 생각에 심장이 조여 오는 것처럼 아파 왔다.
해완은 손을 올려 강현의 한쪽 뺨을 감싸고, 부드럽게 말했다.
“……그러면…… 같이 보내도 문제없겠네.”
해완의 손 밑에 놓인 얼굴이 알 듯 모를 듯 미소 짓는 것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강현은 고개를 깊게 숙여 그대로 입을 맞췄다.
지난번 작업실에서와는 다른 사뭇 부드러운 키스였다.
뒤돌아서 걸어가는 강현의 뒷모습으로 모자라 그의 그림자마저 완전히 사라졌다고 느껴질 때까지, 해완은 그 자리에 선 채 아쉬운 듯 눈으로 강현의 뒤를 따르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그때였다.
“와 씨, 지금 내 눈으로 본 거 실화야?”
등 뒤에서 들려온 놀람과 웃음기가 섞인 유준의 목소리에 해완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모든 것이 어긋나 삐걱대듯이 느껴지는 몸을 간신히 움직여 뒤돌자 대문 앞에 선 채 눈을 동그랗게 뜬 유준이 해완을 보며 잔뜩 흥분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해완은 어쩔 줄 모르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런 해완의 반응을 그저 당황한 것으로 해석한 유준은 믿을 수 없다는 듯 정신없이 떠들기 시작했다.
“형, 지금 강현이 형이랑…… 그러니까 키스한 거 맞지? 와, 내가 물어볼 땐 그렇게 썸 타는 거 아니라고 하더니만.”
유준의 목소리가 높아지자 문득 강현이 들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해완의 머리를 몽둥이로 내리치는 것처럼 느껴졌다.
“얌전한 고양이가 부뚜막에 먼저 올라간다더니, 세상에 믿을 사람 하나 없…….”
해완이 거칠게 유준의 팔을 잡고 끌어당기자 유준이 말을 뚝 멈췄다.
“왜 이래?”
“집에, 집에 들어가서 얘기하자. 들어가서 얘기해 줄 테니까…….”
투덜거리는 유준을 끌고 간신히 집에 들어온 해완은 문을 단단히 닫고 그 자리에 멈춰 섰다. 유준에게 들켰다는 사실에 몸이 얼어붙어 신발을 벗고 집으로 들어가야 한다는 것조차 생각이 나질 않았다.
그런 해완의 반응을 보지 못한 유준은 집으로 들어가며 저만의 생각에 빠져 계속 제멋대로 주절거렸다.
“내가 분명 지난주에 무슨 일 있는 게 확실하다 했어. 아, 혹시 그때가 돼서야 형이 윤해언 아니란 거 강현이 형이 진짜로 깨달은 거야? 그래서 그런 얼굴로 들어왔다가…….”
그러나, 현관문 앞에서 집으로 들어올 생각도 하지 못하고 굳어 있는 해완의 새하얀 얼굴을 본 유준이 뚝 말을 멈췄다.
“뭐야, 지금 이 분위기? 왜 그런 얼굴을 하고 있어.”
대답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무슨 말도 할 수가 없어, 해완은 죄를 지은 사람처럼 시선을 돌리며 고개를 푹 숙였다.
“형…… 강현이 형한테 사실대로 얘기한 거 맞지?”
“…….”
“강현이 형이…… 형 윤해언 아니란 거 지금은 알고 있는 거 맞지?”
차마 유준의 얼굴을 똑바로 볼 수가 없어, 해완은 두 눈을 질끈 감았다. 그러자 유준이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목소리로 재차 물어 왔다.
“뭐야, 그 얼굴? 형, 설마, 윤해언인 척하면서 강현이 형이랑 사귀기라도 하는 건 아니지?”
해완은 침묵했다. 수긍이나 다름없는 그것에 유준은 입을 떡 벌리더니, 도저히 믿을 수 없다는 듯 빠르게 말을 내뱉기 시작했다.
“형 머리가 어떻게 된 거 아냐? 내가, 내가 둘이 잘됐으면 좋겠다고 한 건 맞지만 이건 아니잖아!”
그럼에도 돌아오는 대답이 없자 답답해 미치겠다는 듯 그의 앞으로 성큼 다가온 유준이 해완의 팔을 붙들고 흔들며 고함을 쳤다.
“말 좀 해 봐!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어?”
그 날카로운 목소리가, 반쯤 패닉 상태에 빠져 있던 해완의 정신을 간신히 깨웠다. 고개를 홱 들어 올린 해완은 유준의 팔을 강하게 붙잡고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해언이, 해언이 다음 생일 때까지만 비밀로 해 줘.”
“뭐?”
“어차피 그때까진 해언이 죽은 거 얘기 못 하는 거 알잖아. 그때가 되면 내가 다…… 내가 다 사실대로 말할게. 원장 선생님이랑, 애들이랑, 그리고, 그리고 강현이한테도……. 그러니까 그때까지만 비밀로 해 줘. 응? 유준아, 제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말을 잇지 못하던 유준은 제 몸을 붙잡은 해완의 손을 뿌리치며 소리를 높였다.
“윤해언만 미친 줄 알았더니, 형도 진짜 미친 거 아냐? 아님, 뭐 드라마에서 나오던 그런 거야? 윤해언 페로몬샘 이식하더니, 이젠 걔가 좋아하던 사람까지 좋아졌어?”
그리고 유준의 입에서 나온 해언의 이름이 해완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해완은 유준의 어깨를 밀치며 거칠게 소리쳤다.
“해언이보다 내가 먼저였어!”
갑작스러운 해완의 폭발에 아연해진 유준이 입을 다물었다. 그럼에도 해완은 악을 쓰듯이 계속해서 말을 토해 냈다.
“내가 먼저 만났어. 내가 먼저 좋아했어. 해언이한테 그 애를 만나게 해 준 것도 나였어. 내가 먼저였어, 내가 먼저였다고. 그런데, 그런데 왜…….”
터진 둑을 무너뜨리고 흐르는 물살이 무엇보다 거센 것처럼, 오랫동안 마음에 갇혀 있다 터져 나온 말들은 스스로의 의지와 상관없이 마구 흘러내렸다.
하지만 스스로의 목소리로 내뱉는 말을 들으면 들을수록 날것의 모습을 드러내는 것은 추한 변명으로 장식된 초라한 마음뿐이었다.
그것을 깨닫고 나자 목을 졸린 듯 어떤 말도 할 수 없었다. 유준도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해완을 그저 바라만 보고 있었다.
좁고 낡은 집 안에 숨 막히도록 무거운 침묵이 가득 차올랐다. 그 무게에 짓눌리듯이 해완은 얼음장처럼 차가운 현관에 그대로 주저앉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얼굴을 감싼 채 눈을 짓누르자 번개가 치듯이 날카로운 빛의 잔상들이 떠돌았다. 그것을 가르고 유준의 침울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때 싸운 것도 혹시 그래서야?”
얼굴을 가린 손을 내린 해완이 멍하니 유준을 올려다보자, 유준은 사실 확인을 하듯이 한 글자 한 글자 힘을 주어 다시 말했다.
“옛날에…… 윤해언이랑 형이랑 엄청 크게 싸웠던 거. 그래서냐고.”
해완은 멈칫했다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그걸…… 네가 어떻게 알아?”
두 사람이 크게 싸웠던 일이 있었던 것은 맞지만 보육원 안에서 있었던 일도 아닐뿐더러 해완은 그 일을 그 누구에게도 말한 적이 없었다.
유준은 뭔가 갈등하는 눈빛으로 해완을 응시하다가, 거칠게 내뱉었다.
“어떻게 알긴 뭘 어떻게 알아. 그러고 나서 죽겠다고 며칠 앓아누워 놓고는.”
이해할 수 없는 유준의 말에, 해완의 머리가 엉망으로 뒤엉켰다.
보육원에 있을 당시 유준이 기억할 정도로 해완이 아팠던 적은 단 한 번이었다. 하지만 그것은 해언이 보육원을 떠나 유학을 간 이후의 일이었고, 제게 말 한마디 없어 떠난 데 충격을 받아 앓아누운 것이므로 유준의 말과는 조금 상황이 맞지 않았다.
격렬한 스트레스 탓인지, 갑작스럽게 날카로운 편두통이 찾아왔다. 머리를 종횡하는 뜨거운 고통에 해완은 눈 앞머리를 꾹꾹 누르며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유준이 신발을 거칠게 구겨 신는 것이 느껴졌고, 해완은 간신히 눈을 뜨고 그를 바라보았다.
유준은 해완을 바라보지도 않고 퉁명스럽게 말했다.
“비켜. 바람 좀 쐬고 와야 될 것 같으니까.”
해완은 주춤거리며 몸을 일으켜 유준이 문을 열 수 있도록 자리를 비켜섰다. 유준은 문을 열고 나가기 전에 해완을 향해 무겁게 말했다.
“……내가 여강현한테 먼저 말할 일은 없을 거야. 어쨌든 일이 이렇게 된 데…… 내 잘못도 있는 거 아니까.”
그 말에 해완이 번쩍 고개를 들어 유준을 바라보자, 유준은 시선을 돌리며 중얼거렸다.
“그래도 형이 이런 식으로 여강현이랑 관계 지속하는 거 찬성한다는 건 아니야.”
“…….”
“그리고 솔직히 내가 보기엔 윤해언이고 형이고…… 이 일에 얽힌 인간들 다 제정신 아니고.”
그 날카로운 말이 심장을 헤집었다. 해완은 아무 대꾸도 할 수 없었다.
문이 거세게 닫히는 소리가 났다. 혼자 남겨진 해완은 두 무릎 사이로 깊게 고개를 묻었다.
* * *
강현의 일상에는 반드시 지켜야 할 루틴이 몇 가지 있었다.
그 리스트 중 손에 꼽히도록 중요한 게 아침, 저녁 두 번 보리와 함께 운동을 나가는 것이었다. 피치 못할 사정 때문에 저녁 운동은 지키지 못한 적도 왕왕 있었지만 아침 운동은 아무리 피곤해도 반드시 나가곤 했다.
관심이 없는 탓에 강현이 쉽게 잊곤 하는 많은 일들 중 무언가를 ‘돌보는 일’은 일상의 루틴으로 만들어야 안전하다는 걸, 그는 몇 번의 실수를 반복하고서야 겨우 배울 수 있었다.
오늘은 의뢰인이 완성품을 찾으러 오는 날이었고, 이런 날이면 으레 예민해지기 일쑤였음에도 불구하고 강현이 굳이 보리를 데리고 아침 운동을 다녀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었다.
보리의 발을 씻겨 내보내고 샤워까지 마치고 나왔을 즈음 도우미 아주머니의 도착을 알리는 벨소리가 들렸다.
문을 열어 주고 살갑게 인사까지 마친 강현이 옷까지 완전히 차려입고 작업실로 가기 위해 거실로 나왔을 때, 소파 근처에 서 있던 아주머니가 갑자기 말을 걸었다.
“여기 예쁜 꽃이 있는데, 이거 어떻게 할까요?”
아주머니의 손에는 노란 미모사 꽃다발이 있었다. 어제 저걸 받아 왔다는 게 그제야 생각난 강현은 아무렇게나 말했다.
“아, 깜빡했네. 그거 적당한 데 좀 거꾸로 걸어 두실래요? 말려야 돼서요.”
그러자 아주머니가 안타까운 듯 말했다.
“바로 말리게? 아직 향도 좋고 싱싱한데 조금만 더 꽂아 놨다 말리지 그래요. 내가 이쁘게 꽂아 둘게.”
“아뇨, 그냥 말려 주세요.”
강현은 현관문으로 향하며 뒤도 돌아보지 않고 중얼거렸다.
“어차피 시들 거니까.”
* * *
페로몬 향이 한 가지로 정의될 수 없는 이유는, 무엇보다 갖가지 요소에 수시로 영향을 받는 불안정성 때문일 것이다.
체온, 감정, 자주 접촉하는 사람, 성적 흥분 등 페로몬 향을 변화시키는 요소는 너무나도 많았고, 그 모든 요인을 통제하지 않는 한 일정한 향을 내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더군다나 사람마다 맡을 수 있는 향의 범위와 인지는 제각각이었다. 동일한 향을 두고도 누구는 달게 느끼고 누구는 역하게 느끼기도 하는 등 천차만별의 의견을 만들어 내는 게 사람의 후각이었다.
한마디로 ‘페로몬 향을 완벽하게 카피하는 향수’는 사실상 존재할 수 없었다.
그러나 강현에게 카피 향수의 제작을 의뢰한 고객들은 받아 든 결과물이 완벽하기라도 한 것처럼 감격을 금치 못했다. 스스로의 향을 맡는 행위는 불가능하기 때문에 그들이 제 페로몬 향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라곤 사용하는 물건들에 남은 잔향이나 타인들이 말해 주는 어렴풋한 인상밖에 없으면서도 그랬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강현이 말도 안 되는 것을 내밀었다는 이야기는 아니다.
페로몬 향에 포함된 최대한 많은 노트들을 찾아내고, 그것의 올바른 조합과 비율을 위한 포뮬러 1)를 만들어 누구나 보편적으로 비슷한 감상을 가질 수 있는 어코드 2)를 조향하는 것은 조향사의 재능의 영역이었고, 그것만큼은 그 누구보다 잘할 자신이 있었으니까.
다만 고객들에게 이 인공적으로 만들어진 향수가 제 향의 모든 부분과 일치한다고 ‘착각하게’ 만드는 키포인트는, 그들이 좋아하는, 혹은 남들에게 인상을 주고 싶은 노트를 더욱 강조하는 것이었다.
왜냐하면 사람들은 진실된 향을 알고 싶어서 그를 찾아오는 게 아니었기 때문이었다.
누군가는 자신의 향이 아름답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서였고, 누군가는 터무니없는 사치품을 통해 재력을 보이고 싶어 했으며, 또 다른 누군가는 제 향이 역하지 않다는 것을 확인받고 싶어서 찾아오기도 했다.
때문에 강현은 의뢰를 받으면 고객과의 인터뷰에 꽤나 많은 시간을 들였다. 어떤 향을 좋아하고 싫어하는지, 하루 일과는 어떻게 되고 어떤 공간에서 지내며 자주 만나는 사람은 누구인지, 만났을 때 호감을 느끼는 상대는 어떤 타입인지, 싫어하는 사람은 어떤 타입인지, 등등…….
그 외에도, 고객의 인간관계에서 중요하게 꼽히는 사람들의 인터뷰를 하는 일도 필수적이었다.
그렇게 해서 얻어 낸 정보로 만들어 둔 어코드에 노트를 가미해 그 사람이 ‘원하는’ 향이 되도록 적절한 균형점을 찾아 주고 나면 누구도 그것이 자신의 향과 다르다고 말하지 않았다.
강현이 느끼기에는 전혀 다른 냄새일지라도 말이다.
그러나 단 한 가지 확신할 수 있는 건 그 어떤 이라도 강현이 살고 있는 세상에서 자신의 냄새를 맡고 싶어 하지 않으리라는 것이었다.
어쨌든 사람들은 추한 진실보다 보기 좋은 거짓을 훨씬 선호하는 법이었다.
강현은 그것을, 아주 오랜 세월 동안 다양한 경험을 통해서 배웠다.
오후에는 강현이 두 달 동안 제작한 향수의 최종본을 고객에게 전달하기 위한 미팅이 있었다.
보틀부터 포장 박스의 라벨링까지 모두 주문 제작을 해 받기 때문에 이미 완성품은 포장을 전부 끝마쳐 놓은 상태였지만, 마지막 확인차 남겨 두었던 향수 용액을 시향지에 뿌려 흔들자 여린 머스크를 바탕으로 한 사과와 배의 프루티함이 더해진 톡 쏘면서도 상큼한 향조가 작업실 공기를 물들이는 것이 느껴졌다.
이 향수의 주인인 고객은 서연의 대학 동창으로 모 미디어 기업 총수의 차녀였으며, 그리고 오메가였다.
서양화를 전공하고 유학을 다녀와 현재는 유화 개인전을 준비 중이라고 했는데, 강현은 아마 그만이 맡을 수 있었을 아주 희미한 기름 냄새가 그래서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첫인상은 나쁘지 않았다. 머스크와 프루티 노트가 꽤 괜찮은 조화를 이루고 있었고, 유화 작업을 하는 탓에 몸에 밴 옅은 석유 향이 적당한 개성까지 부여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그녀가 아주 쉽게 당황하는 경향이 있다는 것을 안 다음부터 생겼다.
사람의 감정은 페로몬 향을 망가뜨리는 가장 큰 요인이었다. 특히 불안하거나 당황하거나 공포스러운 상황에 맞닥뜨렸을 때 나는 향들은 애니멀릭, 즉 사향이나 시벳, 카스토레움 3) 같은 동물성 노트인 경우가 많았다.
이전 강현이 제 입으로 말한 적이 있듯 사향노루, 사향고양이 같은 동물에게서 추출하는 동물성 향료는 인분이나 동물 우리 냄새처럼 비릿하고 역하게 느껴질 수 있지만 향수에 그것을 쓸 때면 안정감과 개성을 부여하는 중요한 역할을 했다.
또한 그렇기에 향의 균형을 쉽게 해칠 수 있어 사용에 세심한 주의를 필요로 하는 향료들이기도 했다.
하지만 인간의 페로몬 향은 인위적으로 조절할 수 없는 법이었고 그녀도 마찬가지였다. 당황해 얼굴을 붉힐 때마다 과일 향조 밑에 깔려 있던 부드러운 사향이 순간적으로 진해지며 향의 균형을 무너뜨렸다.
평범한 사람이라면 인식조차 하지 못할 일이겠지만 불행히도 강현에게는 역겹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도 얼굴을 붉히는 오메가라는 점에서, 그녀는 누군가를 생각나게 하는 면모가 있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문득 몸이 무겁고 거북한 감이 들었다.
몸을 일으켜 작업실에서 나온 강현은 복도에 서서 중정 안에 심긴 나무를 바라보며 뻣뻣한 어깨와 목덜미를 가볍게 주무르고 스트레칭을 했다.
근육이 뭉치고 목뒤가 당기듯 오는 두통은 긴장과 불안에서 오는 증상이라는 걸 강현은 이제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오늘 유달리 몸이 뻐근한 것은 고객에게 완성품을 공개해야 하는 데서 오는 부담 때문만은 아닐 터였다.
그를 만나고 오는 날이면 강현은 항상 평소보다 더한 피곤함을 느꼈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긴 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무의식적으로 하는 일이겠지만 그는 상대방의 행동이나 반응 하나하나에 신경을 곤두세우고 있지 않으면 쉬운 신호마저 놓쳐 버리는 경우가 많았다.
게다가 강현이 아무리 많은 준비를 하고 가도 늘 예상외의 상황은 존재했다.
처음으로 함께 영화를 봤을 때가 그랬다. 그 자리에서 고른 영화처럼 보였겠지만, 사실 그것은 상영작들의 줄거리와 보편적인 감상 따위를 사전에 찾아본 뒤 가장 무난하고 가벼운 영화로 고심해 골라 둔 것이었다.
강현에게 영화는 함께 시간을 보내기 위한 핑계에 불과했다. 때문에 감상이 여러 갈래로 갈라지는 것이나, 아주 슬프거나 잔인한 것처럼 복잡한 감정적 동요를 일으킬 만한 영화들은 질색이었다.
그래서 그때 눈물을 흘린 그의 반응은 강현을 당황하게 만들었었다. 벅차서 눈물을 흘렸다는 이상한 감각 자체를 이해하기는 힘들었지만 대처 방법이 없지는 않았다.
그런 경우에 강현은 항상 상대방의 의견을 묻고, 자신도 그렇게 생각한다고 말하곤 했다. 사람들은 의외로 타인의 의견에 관심이 없어서, 자신의 생각에 동조해 주는 것만으로 바로 만족해 버리곤 했기 때문이었다.
물론 이런 방법이 항상 먹혀 들어가는 것은 아니었다. 당장 윤해언의 경우만 봐도 그랬다.
그때 갑자기, 현관 벨이 울리는 소리가 들렸다.
상념에서 깨어난 강현은 시간을 확인했다. 고객과 약속된 시간은 아직 10여 분가량이 남아 있었는데, 조금 빨리 도착한 모양이었다.
* * *
눈을 감고 시향지에 뿌려진 향을 깊게 들이마신 고객의 입가에 만족스러운 미소가 감돌았다.
강현이 느끼기에 그것은 그녀가 지극히 평온한 상태일 때의 향과 가까웠다. 의뢰를 맡기는 사람들 중 무의식적으로 자신의 콤플렉스를 커버하는 향을 고르는 이들도 있었는데, 이번 고객 또한 아마도 쉽게 당황하거나 수줍어하는 성향을 고치고 싶어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했다.
천천히 눈을 뜬 그녀는 앞에 마주 앉아 있는 강현을 향해 약간 흥분한 듯 들뜬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너무 좋네요. 제 옷에 배는 잔향으로 상상했던 것보다 훨씬 좋아요.”
그리고 그녀는 갑자기 얼굴을 살짝 굳히더니 수줍은 듯 말을 덧붙였다.
“……제 향 가지고 이런 얘기 하는 것도 좀 이상하지만요.”
강현은 부드럽게 웃으며 대답했다.
“아니에요. 자신의 진짜 페로몬 향을 맡는 건 불가능하더라도 본능적으로 그 향이나 비슷한 것에 끌린다는 연구 결과도 있거든요.”
“아…….”
강현은 곧바로 몸을 일으키며 산뜻하게 말했다.
“만족하셨다니 다행이에요. 의뢰해 주셔서 정말 감사합니다.”
강현이 느끼기에도 조금은 갑작스러운 인사일 듯했으나 곧 약속이 있어 어쩔 수 없었다. 고객은 순간 멈칫했지만, 머뭇거리며 의자에서 몸을 일으켰다.
고객을 배웅하기 위해 현관 앞까지 따라 나가는 도중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흘끔거리는 시선이 강현에게 따라붙는 것이 느껴졌다.
강현은 개의치 않았다. 당장 할 수 없는 말이라면 별로 중요하지 않은 일이겠거니 하는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강현이 문을 열고 진짜 마지막 인사를 하려던 때, 고객은 떨리는 목소리로 느닷없이 말을 걸었다.
“지난주에 나한테 했던 얘기…… 듣고 계속 마음이 아팠어요.”
“네?”
“그게…… 어머니가 강현 씨 구하다가 돌아가셨다는 거요.”
“아.”
감정 없는 강현의 대답에, 고객의 얼굴이 당황한 듯 달아올랐다.
“혹시…… 다음에 또 어머니 생각나거나 하면 나한테 연락해요. 언제든지 이야기 들어 줄게요.”
그럼에도 고객은 마지막 말을 덧붙였다. 꽤 인상적이었으나, 강현의 머릿속에 드는 생각은 그녀의 머스크 향이 강해지고 있다는 것뿐이었다.
이 냄새를 더 맡고 싶지는 않았기 때문에, 강현은 망설임도 없이 입을 열었다.
“내가 왜요?”
“……네?”
강현은 고객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느리고 선명하게 말했다.
“내가 왜 당신한테 연락을 해야 하냐구요.”
순간, 고객의 얼굴은 정말 터져 버릴 것처럼 새빨갛게 붉어졌다. 그리고 아니나 다를까 머스크 향도 역할 정도로 진해져 배설물 냄새를 풍겼다.
입술을 꾹 깨문 그녀는 한마디 인사도 없이 그대로 뛰쳐나가 버렸다.
마지막인데 좀 무례하지 않나 싶긴 했지만, 그보다 빨리 나가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먼저 들었다.
* * *
약속 장소로 가는 길, 신호 대기를 하던 도중 전화 수신을 알리며 핸드폰이 진동했다.
흘끗 전화기를 보자 액정에 떠 있는 서연의 이름이 보였다.
“여보세…….”
―이 사이코 새끼야, 너 이서한테 무슨 짓 한 거야!
전화를 받자마자 터져 나온 고함에 강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되물었다.
“내가 뭘?”
―잔뜩 호감 있는 척해 놓고 있는 대로 무안 주고 내쫓았다며!
“나 그런 적 없어.”
―장난해, 지금? 같이 밥 먹고, 같이 영화 보고 남들한테 하기 어려운 속 얘기 하는 거 그거 다 상대방한테 호감이 있다는 신호란 거 알잖아!
“밥이야 배고파서 같이 먹은 거고, 영화는 그쪽에서 같이 보자고 했어. 그리고 남들한테 하기 어려운 속 얘기는 뭘 얘기하는 건지 모르겠는데.”
그 말에 서연은 갑자기 말을 뚝 끊더니, 잠시 침묵을 지킨 후에야 다시 입을 열었다.
―너…… 이서한테 숙모 얘기 했다며. 아니야?
“아, 그 얘기?”
―…….
“하긴 했는데, 그게 왜?”
그 말에 서연이 갑자기 또 조용해졌다. 지나치게 감정 표현이 큰 서연은 가끔 감당하기 힘들었기 때문에 입을 다물어 준 것은 좋았지만, 강현이 느끼기에 하고 싶은 말은 다 하고 사는 듯한 서연이 왜 그의 어머니가 관련된 얘기만은 이렇게 어려워하는지는 여전히 수수께끼였다.
―아무튼, 너 오늘 나 좀 봐.
“안 돼. 약속 있어.”
―약속 같은 소리 하고 있네. 만날 친구도 없는 게 무슨 약속이야?
“친구 있어. 지난번 윤보리 씨 만난 거 기억 안 나?”
―뭐? 그, 니 작업실에서 아르바이트 한다던 사람 얘기하는 거야?
“응.”
―그 사람을 밖에서 만나?
“응.”
―……그래, 친구든 뭐든, 너 그 이름으로 사람 부르는 거 좀 악취민 거 알지?
“뭐, 보리라고 부르는 거? 누나도 보리 닮았다는 거 인정했잖아. 그리고 그냥 별명일 뿐인데 왜 그렇게 예민하게 굴어?”
그 말에 서연은 질렸다는 듯 말했다.
―니가 말하는 보리가 대체 몇 번째 보린데?
그 말에 강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그게 중요해?”
서연은 다시 조용해졌다. 이럴 거면 왜 전화를 하는지 몰랐다. 수화기 너머로 서연의 옅은 한숨 소리가 들렸다.
―그래서, 그 사람 본명은 뭐야?
그때 멀찍이 서 있는 인영을 발견한 강현은 성의 없이 대답했다.
“……글쎄. 나도 어느 이름을 알려 줘야 될지 몰라서.”
―그건 또 뭔 소리야?
“끊을게. 약속 장소 다 왔어.”
서연의 대답도 듣지 않고 전화를 끊어 버린 강현은 차를 잠시 정차시킨 뒤 창문을 내리고 목소리를 높였다.
“해언아.”
그러자 ‘그’는, 아마도 윤해언이 하지 않을 방식으로, 강현을 보고 활짝 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