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4. animale (5/18)

4. animale

동물성 향의 계열. 관능적이고 오묘하나, 때로는 역하게 느껴지기도 한다.

동물 병원 문 앞에는 일주일 뒤로 다가온 크리스마스를 의식하듯 호랑가시나무 리스가 달려 있었다.

붉고 푸른 그것을 무감하게 스쳐 지나가며 강현은 깜빡 잊고 있던 크리스마스 선물을 사야 한다는 숙제를 머리로 되뇌었다.

강현에게 하루란 그저 흘러가는 시간일 뿐이고 연말이나 크리스마스처럼 사람들이 이상하리만치 흥분하는 날들을 의식해 본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가끔은 이렇게 무의미해 보이는 요란스러움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는 생각이 들기는 했다.

보리의 목줄을 쥐고 카운터로 다가서자 직원은 예약을 했느냐 묻고는 이번이 초진임을 알자 설문지를 내밀며 기록을 부탁했다.

강아지의 종, 나이, 평소 먹는 사료 같은 기초적인 정보들을 묻는 설문지에 별다른 어려움 없이 빠르게 기입을 마친 그는 발치에 앉은 보리가 너무 예쁘고 얌전하다는 직원의 칭찬에 형식적인 미소를 지었다.

첫 만남에 흔히 나오는 이런 아이스 브레이킹은 아무리 겪어도 귀찮기 짝이 없었으나 ‘이전’의 보리가 다니던 동물 병원을 더는 다니기 불편해진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처음 오는 곳인데도 경계도 없이 헥헥대며 주위를 둘러보던 보리는 의자에 앉은 강현의 허벅지 위로 얼굴을 턱 얹어 놓았다.

보더콜리는 영리한 만큼 예민하기로 유명한 종이었고 그간 그가 키웠던 보더콜리들도 모두 그런 성격적 특성을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의 보리는 알던 것과는 영 다르게 바보 같을 만큼 순하고 경계심이 없었다.

확실히 키우기는 편했지만 이전의 보리들과 다르게 느껴지는 낯설음이 강현에게는 딱히 달갑게 느껴지진 않았다.

그간 강현의 삶을 거쳐 간 개들은 총 네 마리가 있었다.

모두 레몬 보더콜리였고 모두 보리라는 이름으로 불렀는데, 강현이 태어나기 전부터 그 집에 있었던 첫 번째 보리 외에는 다 그가 택해서 데려와 같은 이름을 붙여 기른 것이었다.

매번 같은 종의 강아지를 데려와서 같은 이름을 붙이고 기르는 일이 남들의 눈에는 기괴해 보일 수 있다는 걸 알긴 했지만, 그의 입장에서는 딱히 이상해 보이고 싶은 것도 아니고 어떤 악의를 가지고 있지도 않았다.

항상 같은 종을 기르는 것은 이미 보더콜리의 특성에 대해 잘 알고 있어 기르는 데 수월하기 때문이며, 같은 이름을 붙이는 건 새로운 이름을 찾는 데 공을 들여야 할 이유가 없기 때문이었다.

이름을 붙이고 싶어 하는 것은 사람일 뿐, 개들은 그것을 요구하지 않는 법이었다.

그래서 강현은 이전의 보리가 암으로 죽은 이후 같은 이름을 붙인 레몬 보더콜리 강아지를 데리고 병원에 갔을 때 직원들의 이상한 시선을 처음에는 알아차리지 못했다.

‘이전’ 보리가 연명 치료가 불가능한 말기 암으로 고통에 시달리던 당시, 조심스럽게 권유받은 안락사 제의를 강현이 그 자리에서 수락하자 의사는 오히려 제가 당황한 얼굴을 했었다. 그러고는 조금 더 생각해 보라며 그를 돌려보내려 들기까지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무슨 소용인지를 몰랐다.

어차피 죽음을 앞두고 있는 개였고, 고통을 줄여 주기 위해 안락사를 하는 것이라면 고통받는 나날을 며칠 더 늘려야 하는 이유를 찾을 수 없었다.

때문에 강현은 굳이 뜻을 굽히지 않고 그날 보리를 안락사 시켰다. 시체도 동물 병원에서 바로 화장했다. 그리고 이틀 뒤에는 새로운 보리를 데리러 갔다.

개를 기르는 것은 강현의 삶에서 이미 관성과도 같았기 때문에 그것이 없는 삶에 익숙해지고 싶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그런 연속된 행동들이 직원들에게는 저를 꺼림칙한 사람으로 보이게 만들었던 모양이었다.

그 모든 과정이 강현의 입장에서는 지극히 합리적인 일이었기에 직원들이 저를 보는 눈이 달라졌음을 깨달았을 때는 조금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강현은 개를 절대 학대하지 않았고, 항상 최고의 환경을 제공해 주려 노력했으며 병에 걸린 것을 안 이후에는 치료에 돈을 아낀 적도 없었다.

다만 그는 개를 사랑한다는 감정을 느껴 본 적이 없을 뿐이다.

혹은, 개를 사랑한다고 느꼈으나 그렇게 해석하지 못했을 수도 있을 것이다.

감정이 개입되지 않으면 최대한의 효율을 생각하게 된다. 하지만 세상에는 강현이 이해할 수 없게 비효율적인 판단을 내리는 사람들이 더욱 많아 보였다. 물론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다. 효율적이고 합리적인 사고보다 감정적인 사고를 가지고 살아가는 사람이 대다수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런 ‘보통’ 사람들이 당연한 듯이 살고 있는 세상과 강현의 사이에는, 절대 넘을 수 없을 것처럼 불투명하고 두꺼운 벽이 있었다.

* * *

‘사람 거죽만 뒤집어쓰고 있으면 뭘 해.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지.’

그 말을 외할아버지의 입에서 처음 들었던 것은 강현이 일곱 살 때의 일이었다.

그것은 첫 번째 보리가 죽은 날이기도 했다. 부주의한 정원사가 쥐약을 아무 곳에나 둔 탓에 벌어진 사고였는데, 그 시체를 처음으로 발견한 어린 강현이 가장 먼저 한 일은 엄마의 화장대 위에 있는 향수 한 통을 전부 그 위에 쏟아부은 것이었다.

나중에서야 그것을 발견한 어른들은 강현을 붙들고 심각한 얼굴로 왜 그랬느냐 물었다. 향수를 멋대로 쓴 데 화가 났다고 생각한 강현은 자신이 한 행동에 대한 당위성을 설명하려 애썼다. 보리한테 좋지 못한 냄새가 나서, 그게 안 났으면 해서 향수를 뿌려 준 것이라고.

하지만 가족들은 엉뚱한 소리를 했다. 보리가 죽은 것을 알고 있었냐고 물었고, 그것을 보았을 때 놀라지 않았냐고 물었고, 이제는 슬프지 않냐고 물었다. 그 무엇도 해당하는 바가 없었기 때문에 강현은 그냥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그러자, 그런 강현을 보던 할아버지가 혀를 차며 내뱉은 말이 저것이었다.

강현은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정확하게 이해하지 못했다. 일단 ‘거죽’이라는 말이 무슨 말인지 몰랐고, 사람 노릇이란 게 무엇을 의미하는지도 몰랐다.

그리고 엄마는 그런 강현의 옆에서, 그의 작은 손을 힘주어 꽉 부여잡고 있었다.

며칠이 지난 뒤 엄마는 강현에게 또 다른 강아지를 데리고 올 것이라 했다. 이번에는 어떤 강아지를 키울지 강현이 직접 고르게 해 주겠다고도 했다.

강아지를 데리러 가는 길에는 좀처럼 얼굴을 보기 힘든 아버지도 따라왔다. 강현은 ‘원래’ 보리와 똑같은 레몬 보더콜리를 골랐는데, 그것을 보자 어머니는 이유를 알 수 없이 활짝 미소 지어 보였다.

어른들도 저만큼이나 다시 익숙해지는 게 귀찮은 모양이라고, 강현은 그렇게 생각했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뒷좌석에서 어렴풋이 잠이 들었던 강현은 대화 소리에 문득 눈을 떴다. 아직 잠에서 완전히 깨지 못했고 흔들리는 차의 움직임이 몸을 나른하게 만들었기 때문에 강현은 눈을 반만 뜬 채로 멍하니 어른들의 대화를 들었다.

‘당신은 정말 쟤가 보리가 그리워서 같은 종을 골랐다고 생각해?’

‘그럴 수도 있고 아닐 수도 있지. 내 맘대로 단정 지어서 생각하고 싶지 않아.’

‘글쎄, 난 아닐 것 같은데.’

‘왜 아닐 것 같은데?’

‘보리 죽은 뒤 반응 못 봤어? 소름 끼칠 지경이었다고.’

‘정서적 문제 있는 거 몰랐던 거 아니잖아.’

‘치료받기 시작한 지 벌써 2년이 넘어가. 근데 달라진 게 없잖아.’

‘…….’

‘……만약 그때 뇌에 무슨 문제가 생긴 거라면…….’

그러자 엄마는 격렬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내 탓이라고 말하고 싶은 거야?’

아버지는 옅은 한숨을 내쉴 뿐, 별다른 대꾸를 하지 않았다. 차 안은 곧 조용해졌다. 강현은 다시 스르르 잠에 들었다.

강아지를 데려온 다음 날이었다. 엄마가 그에게 강아지를 고르게 한 것 때문에 화가 난 형과 누나가 강현을 투명 인간 취급하고 있었기에 강현은 혼자 강아지와 놀고 있었다.

하지만 그 사정을 모르는 사촌 누나 서연은 새로운 강아지를 보자 눈을 빛내며 강현에게 다가와 말을 걸었다.

‘와, 못 보던 강아지네? 니가 키우는 거야?’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서연은 신이 나 물었다.

‘이름이 뭔데?’

‘보리.’

무심한 목소리에 서연은 멈칫했다.

‘그거 죽은 강아지 이름 아냐?’

‘응.’

‘근데 왜 이름을 그렇게 지었어?’

‘외우기 싫으니까.’

‘뭐?’

‘다른 이름을 지으면 다시 외워야 되잖아.’

그 말에 서연은 강아지를 쓰다듬던 손을 떼어 냈다. 갑자기 왜 그러는지 몰라 강현은 눈을 깜빡이며 서연을 쳐다봤다.

그런 강현을 향해 서연은 인상을 크게 찡그리며 말했다.

‘너, 할아버지 말대로 진짜 머리가 이상하구나?’

그리고 서연은 도망가 버렸는데, 강현은 한동안 서연이 사라진 자리를 바라보다가 어깨를 으쓱하고 다시 새로운 보리를 쓰다듬고 놀았다.

* * *

그날 밤 잠자리를 봐주는 엄마에게 강현은 불쑥 질문을 던졌다.

‘엄마. 거죽이 뭐야?’

‘응? 그건 어떤 물건이나 동물의 겉모습을 얘기하는 거야.’

‘그럼 사람 노릇은 뭐야?’

‘……갑자기 왜 그런 걸 물어봐?’

‘전에 할아버지가 나한테 그랬잖아. 사람 거죽을 써도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라고.’

‘그건…… 강현이가 나중에 착하고 좋은 사람이 되라는 뜻으로 하신 말씀이야.’

‘왜 그런 말을 나한테 했는데? 보리가 죽었는데 안 슬퍼해서?’

그러자 엄마는 이불을 덮어 주던 손을 멈칫하더니,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지금은 강현도 엄마의 이 얼굴을 알고 있었다. 병원에서 ‘선생님’을 만나게 된 이후로 엄마가 자주 하는 얼굴이었다.

엄마는 어딘지 모를 곳을 멍하니 바라보기만 했다. 강현은 잠시 대답을 기다렸지만 사실 그렇게 궁금했던 것도 아니었을뿐더러 곧 잠이 오기 시작했다.

그런데 그때, 엄마가 불쑥 강현에게 말을 걸었다.

‘강현아. 엄마하고 앞으로 비밀 놀이 하나 할까?’

강현은 졸린 목소리로 되물었다.

‘무슨 놀이?’

‘다른 사람의 표정을 따라 하는 놀이야. 다른 사람들을 잘 쳐다보고 있다가, 그 사람이 웃으면 너도 따라 웃고, 그 사람이 슬퍼하면 너도 따라 슬픈 표정을 짓는 거야. 그리고 엄마랑 강현이 중에 다른 사람의 얼굴을 더 잘 따라 한 사람이 이기는 거지.’

딱히 재미있는 놀이라는 생각은 들지 않았기 때문에 강현은 별 대답을 하지 않고 무거워진 눈만 비볐다.

‘대답해, 강현아. 할 거지?’

하지만 엄마는 포기하지 않았다. 잠이 들려 하는 강현의 팔을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세게 쥐는 통에 강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엄마를 바라보았다.

연한 미등 아래 그림자가 진 엄마의 얼굴은 절반은 어둡고 절반은 밝았는데, 그것은 강현이 지금보다 더 어릴 때 그를 혼자 두고 닫히는 문 속에서 봤던 그것과 닮아 있어서 강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그리고 강현의 생각과는 다르게 엄마와의 비밀 놀이는 꽤 재미있었다. 놀이가 재미있었다기보다 그 이후에 주어지는 보상이 좋았다. 강현이 스스로는 그렇게 느끼지 못해도 주위 사람들과 비슷한 표정을 짓거나 말을 하면 엄마는 강현이 가지고 싶은 것을 사 주거나 늦게까지 놀도록 내버려 두곤 했다.

그리고 이 놀이를 어느 정도 잘하게 된 다음부터는 강현이 그토록 가기 싫던 병원에도 더 이상 갈 필요가 없어졌다.

시간이 흐르고 나이를 먹어, 보상을 줄 사람이 사라진 이후에도 강현은 혼자만의 게임을 계속할 수밖에 없었다.

왜냐하면 그것이, 할아버지가 말한 ‘사람 노릇’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 * *

그 말을 다시 들은 것은 열아홉 살의 봄, 엄마의 장례식 때였다.

과속하던 차가 빗길에 미끄러진 탓에 일어난 교통사고였는데, 조수석에 타고 있던 강현은 살아남았지만 엄마는 그러지 못했다.

죽기에는 젊은 나이였고, 갑작스러운 비극에 장례식장은 내내 슬픔에 잠긴 사람들로 시끄럽고 번잡했다.

그 속에서, 눈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이는 오로지 강현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런 강현을 보고 처음에는 이상한 표정을 지었다가, 나중에는 충격이 컸던 모양이라고 혀를 찼다.

하지만 그것도 얼마 가지 않았다. 충격을 받은 아이라기에 강현은 지나치게 평온했고 차분했다. 그것은 엄마를 잃은 충격에 발버둥을 치며 눈물을 흘리고 오열하는 형과 누나와 비교되어 더욱 기묘하게 보였다.

어쩌면 강현이 어린 시절부터 ‘이상했다’라는 사실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고, 어쩌면 사고 직전 엄마가 그 때문에 이성을 잃을 정도로 화를 냈던 것을 알고 있었기 때문일 수도 있지만 말이다.

그리고 그런 강현의 존재 자체가 거슬린 듯 쳐다보지도 않던 할아버지가 그를 씹어 먹듯이 노려보며 그 말을 내뱉은 것은 엄마의 화장터에서였다.

‘사람 거죽만 뒤집어쓰고 있으면 뭘 해.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지.’

어린 시절 들었던 그 말 그대로였지만, 아무런 감흥이 없었던 그때와는 달리 그것은 당시의 강현에게 뒤통수를 몽둥이로 내리친 듯한 강렬한 충격을 주었다.

왜냐하면 그제야 겨우 그것을 이해할 수 있게 되었기 때문이었다.

할아버지의 그 말은 강현이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라는 뜻이었다.

아무리 겉이 사람처럼 생겨 봤자, 다른 사람들이 느끼는 감정을 알지도 못하고 느끼지도 못하는 강현은 겉모습만 인간 거죽을 뒤집어쓴 가짜라는 뜻이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갑자기 온몸에서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강현은 멍하니 정장 위로 드러난 손등을 긁었다.

나중에는 온몸을 다 심하게 긁어서, 재킷 속 와이셔츠가 피로 물들 정도였다.

그리고 눈이 보이지 않게 된 것은 장례식 이후 2주가 지난 다음이었다.

* * *

처음에는 사고의 후유증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안과부터 뇌신경과까지 돌아다니며 온갖 검사를 다 받아 봐도 신체적 이상은 찾을 수가 없었다.

끝내 심리적인 문제라는 사실이 밝혀진 것은 잃어버린 시각 대신 후각이 극도로 예민해진 강현이 주변의 사람들을 견디지 못해 난폭하게 군 탓에 정신과 병동에 보내진 다음의 일이었다.

그곳에서 강현은 시력 상실이 심리적 원인에 의해 감각 이상을 불러오는 전환 장애라는 진단을 받았다. 어린 시절부터 강현이 불쑥 느끼곤 하던 극심한 소양증 또한 아토피나 알레르기가 아니라 역시 심리적 요인으로 인한 신체화 장애의 일종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그 모든 신체화 장애 증상과 전환 장애는 강현이 어린 시절부터 앓고 있던 심리적인 억압 때문일 것이라고 했다.

극심한 감정 표현 불능증.

지루하고 애매한 설명을 늘어놓은 끝에 겨우 들이밀어진 답이 그랬다.

처음 들어 보는 말이었고 강현이 어린 시절 전전하던 심리 상담소에서도 받아 본 적 없는 진단이었다.

그런 강현에게 의사는 ‘감정 표현 불능증’은 감정을 느끼지 못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해석하지 못하는 상태라고 간단히 설명했다. 어린 시절의 충격적인 경험, 혹은 뇌손상 등에 의하여 느끼는 감정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그것을 겉으로 표현할 수도 없기에 이러한 감정의 억압이 신체화 장애의 주요 요인 중 하나가 되기도 하는 것이었다.

그 모든 이야기를 강현은 둔하디둔한 마음으로 들었다. 인지하지도 못하는 감정이 몸속에서 날뛰며 그를 괴롭히고 있다는 게 그저 이상하다는 생각만 들었다.

상담과 약물 치료를 병행했지만 강현의 시력은 꼬박 1년이 지나고서야 돌아왔다. 처음에는 때에 따라 시력이 돌아올 때도 있었지만 의사의 권유로 ‘그’ 마을에 요양하러 가게 됐을 때는 주위 사물의 형체를 분간할 수 없을 정도로 흐리게만 보였다.

그렇게 시각을 잃은 동안 강현은 더욱 후각에 집착하게 됐다. 아이러니하게도, 감정을 해석할 수 없다는 걸 알게 된 이후 더욱 그것에 의지할 수밖에 없었다.

감정은 색채처럼 미묘하고 앞을 알 수 없는 수많은 갈래를 가지고 있었지만 감각의 호불호는 명암과도 같이 뚜렷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윤해언은, 강현의 인생을 통틀어서 그의 감각에 위배되지 않는 유일한 사람이었다.

해언은 마치 하늘에서 뚝 떨어지기라도 한 것처럼 어느 날 갑자기 강현의 앞에 불쑥 나타났다.

잃어버린 시각을 차치하고도 주변의 모든 일들이 장벽 너머에서 마주하는 듯 흐릿하게만 느껴지던 시기였음에도, 강현은 해언을 처음 마주했을 때 그의 페로몬 향이 주었던 충격만은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맑고 투명하다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는,

무엇으로도 해칠 수 없을 것만 같이 정교하고 완벽한 균형의 향.

이제껏 만나 본 적도 없었고, 앞으로 다시 만날 수 있으리라 확신할 수도 없는 그런 향이었다.

그 향에 완전히 넋을 놓고 있느라 해언이 의아한 목소리로 내 말이 들리는 거냐고 몇 번이고 반복해 묻고 나서야 간신히 대꾸를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강현이 그들의 첫 만남에 대해 기억하는 것은 그게 전부였고, 이후 이어진 서너 번의 만남에서도 그는 해언의 이야기를 듣기보다는 그 향을 맡고 외우는 일에만 온통 정신이 팔려 있었다.

그런 강현이 절대 좋은 대화 상대일 리 없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언은 알 수 없는 이유로 그를 꾸준히 찾아와 이런저런 이야기들을 늘어놓곤 했다.

해언과의 만남이 제법 익숙해진 무렵에는 마을에서 외따로 떨어진 이곳까지 어떻게 오게 됐느냐 물어보기도 했지만 그는 웃기만 할 뿐 끝내 제대로 된 대답을 해 주지 않았었다.

물론 해언이 어떻게 제 앞에 나타났는지 따위가 중요하지는 않았다.

중요한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순간에 나타난 그 소년이, 어쩌면 강현의 인생에서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는 괴상한 직감이 들기 시작했다는 사실이었다.

감정 인지 능력에 문제가 있다는 것을 알게 되고 눈까지 보이지 않아 후각이 타인을 인식하는 유일한 방법이 되자 강현은 대부분의 사람들의 냄새를, 좀 더 정확히 말하면 페로몬 향이 균형을 잃고 무너져 내리는 방식을 견딜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페로몬 향은 복합적인 향들의 집합체였다. 일순 절묘하게 섞여 있는 듯했던 그것들이 갖가지 요인들에 의해 한순간에 그 균형점을 잃고 역겹고 낯선 향으로 돌변하는 것은 남들보다 몇 배로 예민한 감각을 가진 그를 거의 미치게 만들었다.

매일 매시 매초를 구역질을 치밀게 만드는 향을 가진 사람들에 가득 둘러싸여 제정신일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나 오직 해언의 향만이 달랐다.

그 고요하고 단단하게 균형 잡힌 향 안에서, 강현은 그의 인생에서 처음으로 자신의 칼날같이 예민한 감각이 목을 졸라 오지 않는, 안전한 장소를 찾은 것처럼 느꼈다.

이제껏 강현은 무언가를 가지고 싶다는 생각을 해 본 적이 없었다. 물질적으로는 지나치게 풍요로운 환경 속에서 살았고 심리적으로는, 강현의 상태에 대해 의사들이 어떻게 지껄여 대건 저 스스로는 사람 간의 관계에 대한 필요를 느껴 본 적이 없다는 것만이 그가 인지하는 사실이었다.

그런데 난생처음으로, 어떻게든 무슨 수를 써서라도 가지고 싶은 것이 생긴 듯한 기분이 들었다.

해언의 향이 아닌 그의 이야기들이 귀에 들어오기 시작한 시점도 그즈음이었다.

해언은 강현보다 한 살이 어린 열여덟이었고, 근방에 있는 고등학교를 다니고 있었으며, 부모가 없이 보육원에서 자랐다.

보육원에는 50여 명의 아이들이 있었는데 그가 가장 나이가 많다고 했다.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아도 해언은 잘도 떠들어 댔기 때문에 강현은 대부분의 시간을 그의 이야기를 듣기만 했다.

그러나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어도 해언이 ‘진짜’ 자신에 대한 사실들은 교묘하게 피하거나 조금씩 거짓을 섞어 말했음을 깨달은 건 한참이 지난 뒤의 일이었다.

그게 강현이 해언을 8년간이나 찾지 못하고 그에게 일방적으로 휘둘린 이유였다.

어쩔 수 없는 일이기는 했다. 그때는 여러모로 순진하기도 했고, 해언의 이야기를 듣고 기계적으로 뇌리에 되새기면서도 강현의 머릿속을 맴돌던 생각은 하나뿐이었기 때문이었다.

차라리 네가, 물건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만족할 때까지 혹은 그 대체품을 찾을 때까지 내 마음대로 쥐고 가둘 수 있는 물건이었다면 좋았을 텐데.

지독히도 희미한 세상 안에서 해언이 종알거리는 내내, 그런 생각만 하곤 했다.

* * *

그가 고개를 숙이는 순간, 목덜미에 고여 있던 향이 공기에 농도를 더했다.

응접실 안으로 들어오던 강현은 걸음을 멈추고 문 옆에 길게 기대어 선 채, 눈앞에 있는 하얀 뒷덜미를 바라보았다.

오늘 그는 처음 보는 연한 하늘색의 니트를 입고 있었다. 그동안은 겨울 추위를 의식해서인지 대부분 두껍고 둔해 보이는 터틀넥을 입고 다녔던 터라 목선이 드러나는 차림을 보는 건 아마 처음이지 싶었다.

그가 그동안 무엇을 입고 다녔는지 기억하고 있는 것은 강현이 특별히 옷차림에 예민해서가 아니라, 다른 사람들의 감정 표현에 둔감한 만큼 외적인 부분을 관찰하는 게 오랜 습관이 되어 있기 때문이었다.

특히 옷차림은 상대가 이 자리를, 그리고 서로 간의 관계를 어떻게 생각하는지 판단할 수 있는 좋은 기준점이 되곤 했다.

그런 생각들을 하고 있는 찰나에 그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들었다. 살짝 몸을 트는가 싶더니 연한 갈색의 눈동자가 강현을 향했다.

“왜 거기 서 있어, 와서 앉지.”

목소리는 짐짓 태연했지만 동그란 귓바퀴가 붉었다. 아마 제가 말없이 보고 있는 것이 민망했던 모양이었다. 강현은 걸음을 옮겨 그의 앞에 자리를 잡고 앉으며 입을 열었다.

“그냥. 네가 여기 있는 게 좋아서.”

곧 창백한 볼까지도 발갛게 달아올랐다. 선뜻 대답을 찾기 힘든지 그는 입술을 작게 오물거리며 목덜미만 하릴없이 쓰다듬었다.

딱히 대답을 원한 것은 아니라 강현은 슬며시 미소만 지었다. 강현이 보이는 대부분의 미소는 어떤 의도를 가지고 있었지만, 지금은 정말 진심으로 기분이 좋았다.

그는 여태껏 강현이 본 그 누구보다도 쉽게 얼굴을 붉혔다. 당황하거나, 창피하거나, 화가 나거나, 어쨌든 감정의 동요가 있을 때면 어김없었다. 마치 감정의 상태를 나타내는 신호등을 보고 있기라도 한 것 같았다.

쉬워도 너무 쉬워.

8년을 그 고생을 하고 나서, 막상 시험을 앞에 두고 보니 초등학생이나 풀 법한 수학 문제를 마주한 느낌이었다.

그 마을을 떠난 이후 꾸준히 받은 상담과 치료를 통해 전환 장애로 겪은 시력 저하는 물론 마비된 것이나 다름없던 감정 인지 능력도 비교할 수 없을 만큼 좋아졌던 터였다. 애초에 정상적인 생활이 가능했다가 어머니의 죽음을 계기로 크게 악화됐던 것이었기 때문에 그 전으로 돌아가는 일이 어렵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강현이 이해할 수 없는 감정의 영역은 크고 넓었다. 열아홉 살의 그에게 처음으로 감정 표현 불능증, 알렉시티미아(Alexithymia)라는 진단을 내린 의사는 너무 어릴 때부터 감정이 억압된 나머지 감정 발화 자체가 둔화되었을 가능성이 크다고 했다.

실제로 서울에 올라와 다시 심리 검사를 했을 때 강현의 공감 능력 및 정서적 각성 정도는 흔히 사이코패스, 소시오패스로 부르는 반사회적 성격 장애 환자들과 비슷한 수준이라고 했다. 다만 폭력적인 충동을 느낀 적이 드물고 15세 이전에 품행 장애 진단을 받은 적이 없기 때문에 그런 성격 장애로 볼 수는 없다고 선을 그었었다.

아무튼 그런 지루한 과정들을 거쳐 강현에게는 이제 평범한 인간관계 정도는 남들보다 피곤하기는 할지언정 필요하다면 얼마든지 만들 수 있는 것이 되었다.

물론, 조금 더 깊은 것 또한 말이다.

강현은 객관적으로 자신이 ‘매력적인’ 상대라는 사실을 잘 알고 있었다. 겉으로 보이는 외모뿐 아니라 집안이나 재력도 많은 도움이 됐다. 조향사라는 직업 또한 흔하지 않은 덕분에 일에 대해 말하는 것만으로도 쉽게 관심의 대상이 될 수 있었다.

또한 강현은 알파 중에서도 우성이었다. 우성과 열성을 나누는 기준은 페로몬의 농도와 그를 느끼는 민감도의 차이일 뿐이었지만, 우성은 절대적인 수 자체도 적을 뿐 아니라 강력한 성적 신호인 페로몬의 농도는 이성 간의 관계에서 어떻게든 게임을 바꾸는 말이 될 수밖에 없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강현이 타인과의 관계에서 용납할 수 있었던 선은 서연의 동창이었던 오메가의 경우처럼 몇 번의 가벼운 만남 정도가 고작이었다.

왜냐하면 그가 속일 수 없었던 것은 상대방이 아니라 그 자신의 감각이었기 때문이었다.

어쩌면 그가 아니어도 괜찮을지 모른다고.

해언과 떨어져 있는 8년 동안 몇 번 정도는 그런 헛된 희망을 가졌었지만, 조향사 일을 하며 아무리 수많은 사람들의 향을 분석해 봐도 강현의 감각을 긁어 대지 않는 향을 가진 사람은 찾을 수가 없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행동을 결정하는 데 감정이 결정적인 역할을 차지하겠지만, 강현은 달랐다. 그의 삶에서 가장 강력한 키는 감정이 아니라 감각이었다.

문제는 감각에는 다른 선택이 없다는 것이었다. 굶주리면 밥을 먹고, 몸이 얼면 따뜻한 곳을 찾고, 통증을 느끼면 치료를 해야 하는 것처럼 반드시 만족시키지 않으면 죽을 듯이 느껴졌다.

그래서 해언을 포기할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조심스러운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테이블 한구석에 고정되어 있던 눈을 올리자 저를 보고 있는 그의 얼굴과 옆에 나란히 놓인 라벨이 붙여진 공병들이 보였다.

딱히 필요하지 않더라도 일을 도와 달라는 것이 그를 이곳에 부를 만한 제일 쉬운 핑계였기 때문에 강현은 제가 할 일을 모아 뒀다가 그에게 시키고는 했다.

“미안, 새로 조향하고 있는 향수가 잘 안 풀려서, 그거 생각하느라고.”

“요즘 잠 잘 못 잤다는 게 그거 때문이야?”

대충 둘러댄 말이었는데 그는 자못 걱정스러운 말투였다. 더 이상 변명을 생각해 내기 귀찮아진 강현이 그저 웃고 말자 입술을 깨문 그는 머뭇거리며 조심스레 손을 내밀었다.

“잠을 잘 자야 되는데. 피곤해 보여.”

길고 가느다란 손가락이 이마에 닿아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올렸다. 간지러울 정도로 조심스러운 손가락이 떠나기 전에 강현이 덥석 움켜쥐자 그는 흠칫 놀라 몸을 굳혔다.

강현은 그대로 손을 끌어당겨 손바닥에 코를 묻었다. 요즘 강현의 가장 큰 관심사는 그의 몸 구석구석에서 페로몬 향이 어떻게 다르게 느껴지는지였다. 페로몬 향은 페로몬샘이 위치한 목덜미에서 가장 정확하고 순수한 향을 맡을 수 있었지만, 그것이 몸을 타고 사지 말단으로 갈수록 조금씩 다른 향조를 띠게 되는 법이었다.

이론상으로는 그랬지만, 지나치게 개인적인 방법인 나머지 이런 식으로 향을 맡을 기회는 그리 많지 않았다.

실제로 예민한 손바닥에 차가운 코끝과 입술이 닿는 느낌에 그가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손목까지 천천히 코끝을 끌며 맥박을 따라 흐르는 향을 맡았다. 목덜미에서 맡을 수 있는 진득한 것보다 한결 더 가볍고 바람같이 산뜻해진 향이 강현의 코를 기분 좋게 간질였다.

그렇게 움직이지 않고 강현이 하고 싶은 대로 두던 그의 손목에는 금세 붉은 자국이 들었다.

이리도 자국이 남기 쉬운 피부이니, 감정이 그 흔적을 남기기도 쉬운 모양이었다.

해언과 떨어져 지내며 강현은 그가 윤해언이라는 사람에 대해 거의 알지 못했다는 사실을 절실히 깨달았지만, 적어도 해언은 이런 제멋대로의 행동을 쉽게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것만은 확신할 수 있었다.

눈앞에 있는, 윤해언의 향을 가지고 있는 그와는 다르게 말이다.

처음에는 그가 해언이 아니라는 것을 정말 몰랐다. 제 후각을 지나치게 과신한 탓이었다. 냄새가 저를 속일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해 본 적이 없었는데, 일이 정말 그렇게 풀릴 줄은 상상하지 못했다.

하지만 그가 정말 윤해언이 아니라는 걸 깨달은 것도 결국에는 향 때문이기는 했다.

그동안 강현이 만들어 왔던 해언의 향의 일부를 그에게 맡게 해 준 날, 그가 보인 과한 반응이 의심의 단초가 됐다.

그날 집으로 돌아온 강현은 몇 년 동안 꾸준히 조향했던 해언의 향을 모방한 향수들을 모두 꺼내 비교해 보았고, 충격적인 사실 하나를 인지했다.

목서 향.

존재하는 듯 존재하지 않았던, 그 기묘한 목서 향이 지금의 ‘해언’에게 나는 향에는 노트 중 하나로 명확히 존재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길로 해언이 자란 보육원의 조사를 부탁했다. 답은 채 하루가 지나지 않아 나왔다.

해언과 같은 해에 입소해, 같은 해에 보육원을 떠난 소년.

해언이 한 번도 입에 담지 않은 소년이 바로 그였다.

강현은 그때 받았던 기록물 속의 해언과 그의 사진을 멍하니 되새겨 보았다.

그러고 보니 이름이 뭐였더라? 분명 그 사진 아래 적혀져 있었는데.

한 번 보고 치워 버린 데다 별다른 특징이 없던 이름인지라 가물거렸다. ‘윤해언’과 비슷한 이름이었던 것 같다는 인상만 남아 있었다.

잘 기억이 나지 않았지만, 상관없었다. 왜냐하면…….

“해언아.”

강현이 그렇게 부르자, 동그래진 눈이 홱 저를 향했다.

그리도 쉽게 붉어지던 얼굴이 창백했다. 마른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시선을 피해 갑자기 내려앉은 속눈썹이 불안하게 흔들렸다.

“……응…….”

곧 기다리던 대답이 들려왔다. 유순하게 돌아온 대답만으로 만족스러워진 강현은 슬며시 테이블 위에 놓인 손을 다시 쥐었다.

길고 가는 손가락에 비해 손바닥은 의외로 단단했다. 하긴, 예전에 했다던 요리나 지금 한다는 잡일들이나 다 손을 많이 쓰는 일들이니까, 그런 생각을 하며 엄지손가락으로 손바닥을 느리게 문지르자 얌전히 잡혀 있던 손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공기가 묘하게 무거워졌다. 손바닥에 머물던 엄지손가락을 손목까지 깊게 밀고 올라가자 그는 흠칫 주먹을 쥐며 손을 잡아 빼려 들었다.

희미하게 맴돌던 목서 향이, 확실하게 진해졌다.

손이 민감하구나.

속으로 웃음을 삼킨 강현은 고개를 비스듬히 숙이며 눈을 치켜떴다. 아니나 다를까 결 좋은 머리칼 사이로 드러난 귓바퀴가 터질 듯 새빨개져 있었다.

“이쪽으로 와 봐.”

입을 열자 두 사람 사이에 놓인 테이블 어딘가를 불안하게 헤매고 있던 눈동자가 살며시 강현을 향했다.

“왜, 왜……?”

침을 꿀꺽 삼키더니 고작 한다는 소리가 저랬다. 정말 몰라서 묻는 건가 싶었지만 그런 말을 하는 얼굴이 자못 나이답지 않게 순진해서, 강현은 잠시 고민하다가 적당한 말을 골랐다.

“안아 주고 싶어서.”

왜인지 그에게는 항상 이런 부드러운 말이 더욱 호소력을 가지는 듯했다. 아니나 다를까 잠시 꼼지락대던 그는 조심스레 몸을 일으켜 테이블을 돌아 앞에 섰는데, 손을 뻗어야 닿을 만큼 거리를 둔 곳이었다.

어색하거나 수줍어서 그런 것이라는 건 인지할 수 있었지만 솔직히 말해 강현에게는 그다지 이해되지 않는 짓 중에 하나였다.

페로몬 향의 확실한 이점은 굳이 입으로 꺼내지 않아도 상대방에게 전달할 수 있는 정보가 있다는 것이다. 물론 그 정보는 성적인 신호였다.

그에게서 나는 목서 향이 짙어진 것처럼 말이다.

겪어 보지 못한 상황에 대해 유달리 쑥스러움을 많이 타는 사람이 있다는 건 이해하고 있지만 그는 2차 성이 발현 전인 어린아이도 아니고 성인이었다. 제가 아니어도 이미 다른 알파들과 충분히 이런 상황에 놓였어야만 했다.

물론 강현은 다른 사람이 자신을 만지게 둔 적이 없지만, 그는 자신이 얼마나 예외적인 경우인지 그간의 경험들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왜 이런 줄다리기를 해야 하는지 생각하기조차 귀찮아진 강현은 손을 뻗어 그의 팔뚝을 쥐고 앞으로 당겼다. 비틀 앞으로 끌려오는 것을 곧바로 허리를 잡아채 무릎 위에 앉혔다.

“자, 잠깐…….”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빼려 들기에 움직이지 못하게 강하게 힘을 주자 그는 결국 순순히 강현의 팔 안에 갇혔다.

“무거울 텐데…….”

잠깐 꼼지락대나 싶더니 작게 흘러나온 말에 강현은 피식 웃었다.

“나보다 한참 작으면서 무슨 소리야?”

그 말에 그는 어이가 없다는 듯 작게 웃었다.

“네가 너무 커서 그렇지. 나도 키 큰 편이야.”

맞는 말이긴 했다. 2차 성 발현은 성장에도 영향을 미치기 때문에 오메가 남성들은 알파 남성에 비해 키나 체격이 작은 경우가 많다는 것을 감안하면 더욱 그랬다.

“그래, 키는 크다 쳐. 근데 넌 너무 말랐잖아.”

강현의 말에 그는 머쓱한 듯 몸을 뒤척였다.

“요 몇 년 새 살이 많이 빠진 거지 예전에는 이 정도까진 아니었어.”

“왜 살이 많이 빠졌는데?”

“……그냥 이곳저곳 아팠어.”

그는 시선을 피하며 입술을 깨물었다. 곤란한 질문이 나올 때마다 하는 버릇이었다. 반쯤 답을 알고 있었던 강현은 여상하게 말을 돌렸다.

“많이 아팠었나 보네.”

“…….”

“이제 다시 찌우면 되지, 뭐. 맛있는 거 많이 먹고.”

눈을 내리깐 채로 그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반사적으로 그의 오른쪽 목덜미를 바라본 강현은 순간 멈칫했다. 페로몬샘 쪽에 위치한 붉은 흉터가 눈에 띄어서였다.

혹시 이것 때문이었나. 항상 터틀넥을 입고 다니는 것이 단순히 추위 때문이라고 생각했었지만, 이 흉터를 가리기 위한 목적도 있는가 싶었다.

페로몬샘 이식 수술로 인해 생긴 흉터 말이다.

강현은 고개를 숙여 그의 목덜미에 이마를 기댔다. 키가 아주 작지 않은 탓에 쉽게 목덜미에 고개를 가져다 댈 수 있는 것이 좋았다.

어느 순간, 그가 자신의 머리칼을 쓰다듬는 것이 느껴졌다. 닳기라도 할까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처음 그가 진짜 해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는 지극히 혼란스러웠다. 기억 속의 해언과 하는 행동이 지나치게 다르다 느끼기는 했지만 이렇게 비슷한 향을 가진 두 사람이 존재할 수 있으리라고는 생각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하지만 그가 몇 년을 일해 온 레스토랑을 그만둔 다음의 행적을 조사하고서야 의문이 풀렸다. 본질적으로 강현은 틀리지 않았다. 그 두 개는 결국 같은 향이었으니까.

페로몬샘 이식 수술.

기증자에 대한 정보는 적혀 있지 않았지만 말하지 않아도 당연한 일이었다. 윤해언의 페로몬샘을, 그가 이식받은 것이다.

그리고 그런 결론에 따라오는 또 다른 중요한 사실이 있었다.

해언이는 죽었구나.

그것을 깨닫고 나서 강현은 그가 오랫동안 간직해 오던 해언의 편지를 다시 한번 꺼내 보았다.

길지 않은 편지였지만 그중에서도 한 줄만이 유달리 눈에 와 박혔다.

[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나보낼 수가 없었어.]

결국 그 말이 맞았다는 것에, 기묘하게 가슴이 꿈틀거렸다.

* * *

강현은 해언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정상적으로 학교를 다녔다면 고등학교를 졸업했을 1월 중순이었고 가혹하리만치 추운 날이었다.

또 그가 처음으로 해언이 있는 곳으로 찾아갔던 날이기도 했다.

서울에 있는 본가에서 일주일을 넘게 지내다 온 뒤였다. 검사니 뭐니 하는 핑계로 불러들였지만 사실 강현의 심리 상태와 전환 장애로 인한 시력 상실이 크게 호전되었다는 주치의의 진단을 확인하려는 목적이 분명했다.

확실히 그 마을에 내려갈 당시는 눈에 불투명 유리를 씌워 버린 듯이 온통 뿌옇기만 하던 게 차차 좋아져 적어도 눈앞에 놓인 것이 사람인지 아닌지는 구분할 수 있게 된 상태기는 했다. 물론 사람의 얼굴을 알아보고 인식하는 것은 또 다른 문제였지만 말이다.

강현의 건강이 호전되었음을 확인한 본가에서는 이제 서울로 돌아와 미뤄 둔 학업과 대입 준비를 빨리 시작하기를 바라는 뜻을 노골적으로 내비쳤으나 그럴 생각은 전혀 없었다.

해언과 보내는 순간만이 거친 파도처럼 날뛰어 대는 감각들이 고요해지는 시간이었다. 그것을 그렇게 빨리 잃을 수는 없었다.

마을로 돌아오자마자 강현은 바로 그 버스 정류장으로 향했다. 딱히 약속을 정하고 만나지는 않았지만 보통 4시 즈음 해언이 그 버스 정류장으로 찾아오고 그러지 못할 일이 있으면 서로에게 알려 주는 게 암묵적인 규칙이었다.

지난 일주일은 본가에 있을 것이라는 걸 미리 말해 둔 터였고, 오늘 돌아오는 걸 아니 당연히 해언이 찾아오리라 생각했다.

해안가의 겨울바람은 칼에 베이는 듯 싸늘했다. 하지만 어차피 별장에 있는 온실로 자리를 옮겨 시간을 보낼 생각이었기에 아랑곳하지 않았다. 왜인지 해언은 강현의 집 안에 있는 다른 고용인들과 마주치기를 꺼려 해서 겨울이 되고서는 둘은 그곳에서 시간을 보내곤 했다.

얼마 전 첫눈이 오고 해언이 그에게 입을 맞췄던 그날을 제외하고는 말이다.

‘키스해 본 적 있어?’

뜬금없이 해언이 그렇게 물었을 때 강현은 순간 머뭇거렸다.

누군가와 입 맞춰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부끄러워서가 아니라 그런 욕구를 느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이 어떻게 받아들여질지 몰라서였다.

페로몬이라는 것이 존재하지 않는다면 모를까 알파나 오메가에게 섹스란 발현된 이후 일생 동안 반드시 충족되어야 하는 필수적이고 자연스러운 욕구에서 따르는 행위였다.

당연히 강현에게도 그런 욕구 자체는 존재했다. 다만 그가 절대 하고 싶지 않았던 것은 역겨운 향을 풍기는 사람들과 몸을 깊게 접촉하는 일 자체였다.

물론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그래서 잠시 솔직하게 이야기해야 할까 고민이 됐지만, 해언은 가끔 강현이 무슨 이야기를 하건 뭐든 대수롭지 않다는 듯 받아넘기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괜찮을 것 같았다.

‘아니.’

‘그렇구나.’

아니나 다를까 해언은 별다를 것 없다는 목소리로 받아넘겼다. 하지만 그다음에 들려온 말은 전혀 예상하지 못한 것이었다.

‘그럼 나랑 하자.’

순식간에 거리를 좁힌 짙은 향기를 느낀 순간, 대답조차 듣지 않고 해언은 그대로 강현에게 입을 맞췄다.

맞닿은 입술은 부드럽고 겨울바람에 싸늘하게 식어 약간은 건조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곧, 예민한 점막에 가해지는 자극과 함께 온몸을 감싸는 페로몬 향이 배 속에 순식간에 불을 댕기는 듯 느껴졌다.

난생처음 겪는 황홀한 감각에, 해언이 고개를 떨어뜨렸을 때 강현은 무의식중에 그의 입술을 따라 움직일 정도였다. 하지만 해언은 고개를 돌려 강현의 입술을 피했다.

‘이제 그만 갈까?’

왜인지 후련하게 들리는 목소리였다. 뿌연 시야 안에서 뭉텅이로 보이는 형체를 멍하니 바라보다가, 강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어 물었다.

‘왜…… 그런 거야?’

그 말에 해언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가벼운 어조로 말했다.

‘내가 널 좋아하니까.’

강현의 눈가가 움찔 떨렸다. 누군가의 고백을 듣는 것이 처음은 아니었지만 해언은 늘 잡힐 듯 말 듯 하게 구는 면이 있어서 이렇게 직접적으로 감정을 이야기한 것은 처음이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를 진짜 놀라게 한 해언의 말은 그다음이었다.

해언은 아주 중요한 말을 하는 것처럼 강현의 귓가를 향해 몸을 기울이고 낮게 속삭였다.

‘그리고…… 너도 날 좋아하잖아.’

그런 말을 듣는 것은 처음이었다.

마치 그가 진짜 감정이라는 것을 가진 사람이라도 되는 듯이.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강현이 멍하게 있는 사이, 해언이 한 번 더 되물었다.

‘그치?’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아니라고 답했다가는 다시 그와 입을 맞출 수 없을까 걱정이 됐던 탓이었다.

입술이 맞닿을 정도로 가까이서 느끼는 해언의 페로몬 향은 강현의 온몸을 저릿하게 만들었다. 촉각과 후각이 동시에 만족되는 그 짜릿한 감각을 다시 느끼고 싶다는 욕구에 강현은 살짝 젖어 있는 입술을 핥았다.

제대로 보이지는 않았지만, 눈앞의 해언이 웃고 있는 듯한 착각이 들었었다.

그런 생각에 멍하니 잠겨 있던 강현은 싸늘하게 식은 얼굴을 느끼고 손목에 채워진 시계의 버튼을 눌렀다. 딱딱한 기계 음성이 4시 35분을 알렸다.

해언이 평소에 그렇게 늦은 적이 없어 조금 당황스러웠지만 그래도 강현은 그 자리에 서서 한 시간여를 더 기다렸다.

해언은 그날 결국 오지 않았다.

하루 정도는 사정이 생길 수도 있다고 생각했지만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해언은 버스 정류장에 오지 않았다.

해언이 오지 않는 사이 본가에서는 강제로라도 강현을 불러들일 기세가 됐다. 그렇게 열흘이 다 되어 갈 무렵 결국 그를 찾아가 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그때서야 강현은 자신이 해언이 산다는 보육원의 이름조차 모른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렇게 많은 이야기를 들었는데 해언이 그런 것을 한 번도 말해 주지 않았다는 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물론 근방에 있는 보육원이야 뻔했기 때문에 어딘지는 금방 찾을 수 있었다. 하지만 지금 강현의 시야로서는 그곳까지 가는 데 반드시 고용인의 도움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자신이 누군가와 함께 나타나면 해언이 싫어할 것 같았고, 집안과 관련된 사람에게 해언과 만나는 모습을 보여 주고 싶지도 않았기 때문에 혼자 가기 위해 길을 익히는 것에 좀 시간이 걸렸다.

그래서 해언을 만나러 간 것은 그로부터 이틀이 지난 뒤였다.

저녁 시간이라 그런지 보육원 문은 닫혀 있었다. 벨을 찾아 더듬거리던 찰나, 뒤에서 익숙한 향기가 풍겨 왔다.

강현은 곧바로 뒤를 돌아섰다. 그렇지 않아도 흐릿한 시야가 사위가 어둑해진 나머지 더욱 잘 보이지 않았다.

‘해언아.’

잠시간의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하지만 그 목소리는 항상 평온하던 평소와 다르게 날카롭게 들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강현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렸다.

향이, 뭔가 달랐다.

강현의 후각으로도 집중해야 간신히 느낄 수 있었던 그 ‘목서’ 향이 이상하리만치 강렬하게 느껴졌다.

‘여긴 어떻게 알고 찾아온 거야?’

어딘지 낯설게 느껴지는 향에 강현이 잠시 넋을 놓고 있자 해언이 낮게 되물었다.

‘네가…… 날 만나러 안 왔잖아.’

강현은 해언의 대답을 기다렸지만, 그는 짧게 한숨만을 내쉴 뿐 더 이상의 말이 없었다.

‘그동안 왜 버스 정류장에 안 왔어?’

‘바빴어.’

‘언제 안 바빠지는데?’

‘글쎄, 잘 모르겠네.’

대답에는 일말의 성의도 없었다. 말이 없는 강현을 대신해서 대부분의 대화를 적극적으로 주도하던 평소의 해언과는 너무나 다른 태도였다.

아무리 타인의 감정에 둔감한 강현이라도, 이쯤 되면 해언이 제게 보이고 있는 묘한 적의를 알아채지 못할 수가 없었다.

어색한 침묵이 차오른 사이에도 겨울의 밤은 빠르게 깊어 갔다. 어둠이 짙어질수록 제한되는 시야에 초조해지기 시작한 강현은 애써 말을 이었다.

‘……그럼 언제 만날 수 있는데?’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하네.’

‘뭐?’

‘내가 널 만나야 되는 게 당연하다는 듯이 얘기한다고.’

‘…….’

‘갑자기 그런 생각이 들었어. 내가 왜 널 만나고 있는지. 근데 잘 모르겠더라. 어쩌면 그 이유가 사라졌을 수도 있고.’

마치 준비라도 한 것처럼, 해언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니까 네가 설명해 봐. 내가 널 만나야 되는 이유.’

강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을 깜빡였다.

질문을 받는 것은 항상 싫었다. 대부분의 사람이 아무 생각 없이 던지는 질문들 중 강현이 정말 대답할 수 있는 것은 그리 많지 않았으니까.

물론 그런 질문들은 대부분 개성이 없었기 때문에 강현은 몇 가지 대답을 준비해 두었다가 상대의 성격이나 기분, 혹은 좋은 관계를 유지해야 할 사람인지 아닌지에 맞춰 적당히 대답하곤 했었다.

그러나 지금의 강현에게는 미처 전략을 준비할 틈이 없었다.

평소 해언은 무엇을 물어봤을 때 그가 대답하고 싶지 않은 기색을 살짝만 내비쳐도 바로 화제를 돌려 줬던 터라 강현은 해언의 이야기를 듣는 일에만 익숙해져 있었다.

마치 다른 사람 같은 해언의 태도는 그를 당황하게 했고, 눈이 보이지 않으니 얼굴을 관찰해 대답을 고를 수도 없었다. 감정의 영향을 받는 페로몬 향으로 심리 상태를 짐작할 수도 있겠지만, 특이하게도 해언은 평소에도 다른 사람과 달리 향만으로 감정의 변화를 알아차리기 아주 힘든 편이었다.

강현은 필사적으로 과거에 받았던 질문들을 되짚기 시작했다. 무언가 도움이 될 것이 하나쯤은 있을 터였다.

‘어떤 장난감이 제일 좋니? 그걸 가지고 놀 때 행복하니?’

‘날씨가 정말 아름다운 날인데, 어떤 감정이 드는지 말해 볼래?’

‘강아지를 좋아하니?’

‘네가 키우는 강아지를 쓰다듬을 때면 어떤 느낌이 드니?’

‘강아지가 죽고 나서 슬펐어?’

‘슬프지 않았다면 어떤 점에서 그랬을까?’

‘네가 데려온 많은 강아지들 중에서 애정을 가졌던 아이는 정말 한 마리도 없었을까?’

‘누군가의 곁에 있고 싶다고 생각해 본 적이 있니?’

그런데 갑자기 이상한 일이 생겼다.

지나간 일들일 뿐인데,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마음이 엉망으로 뒤엉키기 시작했다.

‘지금 네 곁에 있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생각해?’

‘그 사람들의 필요성이 아니라 어떤 감정을 가지고 있는지 말해 볼래?’

‘그 사람들의 감정에 대해서 생각해 본 적은 있니?’

‘그런 것에 대해서 관심이라도 가져 본 적이 있어?’

‘너를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어?’

‘네 곁에 있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고 있어?’

‘아니면 엄마를 벌주기라도 하는 거니?’

불편한 마음이 벌레로 변해 피부 속을 기어 다니는 것처럼 간지러워져 강현은 거칠게 목덜미를 긁었다.

깜깜해진 눈앞만큼이나 막다른 골목에 서 있는 듯한 기분이 들던 그때, 머릿속 어딘가에서 불쑥 솟아오른 가느다란 목소리가 작게 속삭였다.

‘비밀 놀이를 하는 거야.’

‘다른 사람들을 따라 하는 놀이야. 다른 사람들을 잘 쳐다보고 있다가, 그 사람이 웃으면 따라 웃고, 그 사람이 슬퍼하면 슬픈 표정을 짓는 거야.’

그래, 그게 답이었다.

그렇게 해야지 사람 거죽을 쓴 것처럼이라도 보일 테니까.

강현은 천천히 입을 열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려 애썼다. 어떤 톤으로, 어떤 어조로, 어떤 목소리로 그렇게 말했는지 같게 말하려 애썼다.

‘내가…….’

‘…….’

‘내가 널 좋아하니까.’

강현은 앵무새처럼 언젠가 들었던 해언의 말을 따라 했다.

해언은 아무 말도 없었다. 1분일지도, 10분일지도, 어쩌면 한 시간인지도 모를 시간이 지나갔다.

눈앞은 이제 완전한 어둠이었다. 시각이 제한되자 강현은 무의식중에 후각에 집중하려 애썼다. 해언이 눈앞에 서 있는 건 알 수 있었지만 그의 향은 죽은 것처럼 고요했다.

목서 향은 어느새 사라져 있었다. 마치 어디선가 실수로 묻혀 오기라도 한 것처럼.

그리고 다음 순간, 강현의 귀로 해언의 웃음소리가 들렸다.

순간적으로 강현은 해언의 기분이 좋아졌다고 생각했다. 웃음은 일반적으로 긍정적인 반응을 나타내는 신호였으니까.

하지만 그 웃음소리가 지나치다 싶을 만큼 길게 이어지고, 멈추지 못해 헐떡거리기까지 하는 것을 듣고 나서야 강현은 이것이 정상적인 웃음이 아님을 알았다.

왼쪽 뺨에, 얼음장 같은 가냘픈 손이 갑자기 와 닿았다.

강현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아무리 후각이 뛰어나도 눈이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 이런 갑작스러운 접촉은 그를 질겁하게 만들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해언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더욱 깊숙이 다가와 선 채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강현아. 지금 네가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나 알아?’

‘…….’

‘너조차도 그 말을 못 믿겠다는 얼굴을 하고 있어.’

해언의 차가운 손이 목덜미로 미끄러져 내려갔다. 그는 강현의 뒷덜미를 강하게 쥐고 고개를 자신에게로 끌어 내린 후 낮게 속삭였다.

‘안됐네. 눈이라도 보였으면 날 좀 더 잘 따라 할 수 있었을 텐데. 그치?’

머리 위에서 얼음물을 쏟아부은 듯 순식간에 발끝까지 서늘한 냉기가 퍼졌다. 강현은 간신히 입을 열었다.

‘……뭐?’

‘너 지금 내가 전에 했던 말 따라 한 거잖아. 니가 평소에 그러는 것처럼.’

전부 알고 있었어?

강현은 멍청하게 입만 몇 번 벙긋거렸다. 목뒤를 움켜쥐고 있는 가느다란 손에 점점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손톱이 살을 파고들어, 생채기를 내기 시작했다.

‘내가 모르는 줄 알았어? 네가 내 말을 따라 하는 거.’

‘…….’

‘너한테 뭔가 문제가 있다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냐고.’

‘…….’

‘누군가는 속을지 몰라도, 나는 아니야.’

머릿속에서 이명이 울렸다.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강현은 제 몸에 닿아 있는 해언의 손목을 강하게 잡아 뜯어 낚아챘다.

부서질 듯 꽉 잡았는데도, 해언은 흔들림 없는 목소리로 나직이 말했다.

‘아니라고 말하고 싶으면 나한테 증명해 봐.’

순간, 온몸의 힘이 쭉 풀렸다.

해언의 그 말은, 엄마가 죽은 날 그에게 절규하며 외치던 것과 그대로 닮아 있었다.

* * *

그 일이 있은 뒤에도 강현은 다시 보육원에 찾아갔다.

하지만 해언은 보육원에 없었다. 단순히 외출한 게 아니라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라 했다. 누구에게도 알리지 않고, 멀리 떠나 버렸다고.

그러나 적어도 해언은 강현의 앞에 편지 한 장을 남겨 두고 갔다.

해언이 없는 그 마을에 더 이상 있을 이유가 없었으므로 강현은 서울로 올라왔다. 약물 치료를 병행한 상담을 집중적으로 받으며 시력은 빠르게 좋아졌다.

눈이 글자를 분간할 수 있을 정도로 좋아졌을 때 강현은 비로소 해언의 편지를 열었다.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그 차갑고 냉정한 목소리와는 달리, 그 편지 안의 해언은 평소 강현이 알던 다정하고 따뜻하고 솔직하던 그 모습 그대로였다.

편지에는 해언이 미래를 위해 그 마을을 떠날 수밖에 없었다는 것과 두 사람이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싸늘하게 군 일은 개인적인 문제로 인한 화풀이였기에 미안하다는 사과가 적혀 있었다. 그날 강현을 만나기 전 있었던 일은 당장 말하기는 어렵지만 언젠가 말할 날이 있을 것이며, 강현과 함께 지낸 시간은 제게 진심으로 소중한 기억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그다음, 해언이 어째서 강현에게 아무 말도 없이 그 마을을 떠났는지에 대해서였다.

* * *

우리가 그렇게 긴 대화를 나누는 동안 넌 나에 대해서 한 번도 물어본 적이 없었어.

내 눈이 어떤 빛을 띠고 있는지, 내가 좋아하는 건 뭐고 싫어하는 건 뭔지, 내 가장 친한 친구의 이름이 뭔지, 내가 누구와 함께 있을 때 가장 행복한지…….

너는 내가 말해 주는 것 이외에 다른 것들은 하나도 궁금해하지 않았잖아.

그래서 난 네가 날 좋아한다는 걸 진심으로 믿어 본 적이 없어.

그러기를 바랐기 때문에 그렇게 말했을 뿐이지.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를 정말 괴롭게 하는 건, 네가 날 만나러 왔던 그 마지막 밤 때문이야.

네가 당황스러웠을 거 알아. 내가 못되게 군 것도 알아.

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나보낼 수가 없었어.

그런 생각만으로도 마음이 너무 아팠어. 그냥 견디기에는 너무 고통스러웠어.

그런데도, 그날 이후 바보 같은 생각 하나가 머릿속에서 떨쳐지지를 않더라.

네가 나를 진심으로 좋아할지도 모른다고.

그냥 너 자신도 알아차리지 못했을지도 모른다고 말이야.

넌 항상 네 감정에 둔한 면이 있었잖아.

그러니까 강현아.

나는 네가 날 기다려 줬으면 좋겠어.

그러기를 바라는 것도, 강요하는 것도 아니야.

다만 네가 날 기다린다면 난 언젠가 너한테 다시 돌아올 거야.

그리고 우리가 다시 만난다면 내 생각이 틀렸다는 걸 증명해 줬으면 좋겠어.

네가 지금 나한테 보답해 주지 못한 마음을 그때 돌려줬으면 좋겠어.

다시 연락할게.

해언.

* * *

인간은 감각을 통해 인지하는 정보의 70퍼센트 이상을 눈을 통해 받아들인다. 그래서 다른 동물들과 달리 인간은 시각을 제일 중요한 감각적 도구로 삼지만, 시각을 잃은 강현을 가장 괴롭혔던 것은 보이지 않는다는 사실 자체보다 그것을 보상하듯 더욱 예민해진 후각이었다.

그러나 본가를 떠나 그 마을에서 고립된 생활을 하게 되자 강현은 제 시력 상실을 비교적 덤덤히 받아들이게 되었다. 눈이 보이건, 보이지 않건, 사람들 속에서 평범한 척 살아가기에는 제가 ‘볼 수 없는’ 것들이 너무나 많다는 걸 이미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활기찬. 신나는. 긴장한. 겁먹은. 평화로운. 침착한. 싫어하는. 증오하는. 실망한. 공허한. 귀찮은. 무감각한. 우울한. 무기력한. 불안한. 불편한. 사랑. 애증. 탐욕. 애착. 질투. 기뻐서 흘리는 눈물. 벅차서 흘리는 눈물. 화가 나서 흘리는 눈물. 슬퍼서 흘리는 눈물. 기뻐서 웃는 웃음. 웃겨서 웃는 웃음. 공포에 질려 웃는 웃음. 긴장해서 웃는 웃음. 외로운. 무력함…….

셀 수 없이 많고 겹겹이 복잡한 감정들의 층위에서 강현이 읽고 느낄 수 있는 부분은 지극히 제한되어 있었다.

그래서 해언이 저를 기다리라고 말한 편지를 읽은 순간 생각했던 것이다.

어쩌면 이것이 다들 그렇게 떠들어 대던 사랑일지도 모른다고.

자신은 보지 못해도, 해언의 눈에는 보였을지도 모른다고.

아마도 해언을 다시 만나게 되면, 알게 될 것이라고.

그것이 8년 동안 이어진 해언과의 지루한 줄다리기의 시작이었다.

* * *

불룩 튀어나온 흉터를 손끝으로 쓸어내리자 얌전히 무릎 위에 앉아 있던 몸이 흠칫 위로 튀었다. 강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니트 목덜미를 손가락으로 살짝 끌어 내리고 코를 묻었다.

도망가고 싶은 듯 움찔거리는 허리를 꽉 끌어안자 강현의 뒷머리에 닿아 있던 손이 어정쩡하게 공중에 떴다. 너무 바싹 붙어 있는 탓에 근육이 긴장된 것이 고스란히 느껴졌다.

긴장이 선명함에도 불구하고, 그의 향은 여전히 깨끗하고 아름다웠다.

아니, 윤해언의 향이라고 해야 하나.

물론 아무래도 상관없었다. 솔직히 말해 강현은 제 무릎 위에 앉아 있는 남자가 꽤 마음에 들었기 때문이었다.

심장에 무언가가 얹힌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던 때도 있었지만, 지금에 와서는 몇 년을 절절맨 게 무색할 정도로 윤해언의 죽음에 대해서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다.

지난 8년간 해언은 객관적으로 봐도 꽤나 멋대로 굴었다. 만나자고 해 놓고 바람을 맞힌 일만 다섯 번이 넘었다. 그럼에도 해언은 연락을 끊지는 않았다. 잊혀질까 싶으면 메일을 보내고, 자신에 대한 힌트를 주고, 강현에게 언젠가 만날 수 있다는 희망을 가지게 했다.

남들이 보기에 괴상한 관계라는 것은 알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어차피 강현 그 자신조차 저를 이해하지 못하는데 남들의 이해를 구할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적어도 강현이 확실히 알고 있는 사실은 해언을 다시 만나고 싶다는 것이었다.

그가 모르는 것은 ‘왜’ 다시 해언을 만나고 싶은지에 대해서였다.

필요는 욕구의 영역이다. 욕구는 필요가 채워지면 끝난다. 하지만 필요에 ‘왜’가 붙는 순간 그것은 감정의 영역으로 넘어간다.

감정 표현 불능증, 알렉시티미아는 엄밀히 말해 정신 장애로 분류되지는 않았다. 그 증상이 강현처럼 극심한 경우는 극히 드물다고 했지만, 그것은 성격적, 혹은 심리적인 특성에 가까웠고, 애초에 타인의 감정에 대한 공감 능력이 거세되어 태어난 것으로 알려져 있는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들과의 다른 점이라고 했다.

아마도 그래서일 것이다. 다른 사람과 달리 자신이 제대로 인지하지 못하는 영역이 있음에 내내 불안하고 두려워하며 살아왔던 것은.

그래서 윤해언을 만나고 싶은 욕구에 대해 답을 내야만 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에 대해서 알아야만 했다.

해언이 말한 대로 그가 해언을 사랑해서 만나고 싶은 것일까?

아니면 그가 받아들일 수 있는 유일한 인간의 향이 윤해언의 것이기 때문일까?

그는 윤해언을 알고 싶은 것일까, 윤해언의 향을 알고 싶은 것일까.

많은 시간을 고민해 봤지만, 혼자서는 도저히 답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해언은 그에게, 그 자신의 죽음으로써 답을 줬다.

강현이 원했던 건 ‘윤해언’ 그 자체가 아니었다.

그러니 해언의 향을 가진 대체품의 존재가 강현을 안도하게 만든 것이었을 테니까.

그가 정말 윤해언이었다면 일이 참 편하게 돌아갔을 텐데.

끝내 그가 해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았을 때, 번뜩 그런 생각을 떠올리기까지 했다.

그는 해언과 똑같은 향을 가지고 있었고, ‘진짜’ 윤해언보다 훨씬 쉽게 휘두를 수 있어 보였기 때문에 잘못 짚었다는 게 꽤나 아쉬웠다.

하지만 공장까지 끌고 내려가서 싸늘하게 군 건 그 때문만은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강현 또한 궁지에 몰려 있었다. 그와 약속한 기한은 마감이 눈앞이었고, 8년 동안 윤해언을 사랑해온 듯 꾸민 페르소나를 깨트리지 않고 그를 어떻게 옆에 둬야 할지 난감했다.

그 시점에서 강현은 이미 그가 저에게 호감을 가지고 있다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는 사람이 누군가를 좋아할 때 하는 행동의 표본같이 구는 사람이었다. 가까이 다가서면 바싹 긴장하고, 작게 스치는 피부만으로도 얼굴을 붉히고, 눈을 마주 보지는 못하면서도 강현이 저를 바라보고 있지 않다고 생각할 때 항상 시선이 따라붙곤 했다. 그 정도는 강현이 익숙하게 눈치챌 수 있는 것들이었다.

하지만 그게 어느 정도의 호감인지는 확신할 수가 없었다. 그래서 부러 그를 멋대로 대하고 차갑게 굴었다. 사람은 쥐고 있다고 생각했던 무언가를 빼앗기는 순간, 진짜 속내를 드러내는 법이었다.

물론 그 뒤에 벌어진 건 정말 예상하지 못한 일이었다.

네가 윤해언이 아니면 다시 만나지 않겠다고 하자, 그는 마치 자신이 윤해언이라도 된 듯이 굴기 시작했던 것이다.

어떻게 이렇게 일이 잘 풀릴 수 있는지 믿기 힘들 정도였다.

그의 목덜미에 대고 있던 코끝을 목선을 따라 천천히 끌고 올라갔다. 후각이 예민한 강현에게는 지나칠 만큼 진한 향기에 눈앞이 어지러울 지경이었다. 향이 고이는 귀 뒤 오목한 곳에 살짝 입을 맞추자 에센스를 입 안으로 들이마시는 듯한 느낌과 동시에 순식간에 짙어지는 페로몬 농도에 아랫배가 묵직하게 뻐근해졌다.

강현은 저도 모르게 낮게 신음하며 손에 쥔 허리를 거세게 움켜쥐었다. 제 위에 올라탄 허벅지 근육이 파르르 떨리며 조여 오는 감각까지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한쪽 손을 올려 그의 턱을 가볍게 쥐고 벌어진 입술에 그대로 키스했다. 처음에는 안쓰러울 정도로 바싹 굳어 있던 입술이 이제 자연스럽게 강현의 것을 받아들였다.

강렬한 충동에 휩싸여 입술을 빨고 혀를 섞었다. 이미 키스 정도는 여러 사람과 해 본 적이 있었지만, 이렇게 미치게 좋았던 적은 단 한 번도 없었다.

페로몬 향이 성적인 목적임을 알았으나 이런 식으로 느껴지지도 않았다. 상대방의 향이 그가 바라지 않는 방향으로 변하는 것을 느끼자마자 역겨움이 흥분을 식혀 버렸다.

하지만 ‘그’와는 달랐다. 단 한 순간도 거슬리지 않았다. 그저 좋다는 생각만이 들었다. 모든 감각을 동시에 만족시키는 이런 경험은 말 그대로 처음이었다. 더 알고 싶어서 안달이 났고, 그를 저에게 완전히 열게 만들어 이제껏 겪어 보지 못한 모든 감각을 다 느끼고 싶었다.

강압적인 키스에 숨이 차는지 고개를 돌리려는 걸 몇 번이고 억지로 붙잡아 욕구를 어느 정도 채우고 나서야 강현은 간신히 입술을 떼어 냈다.

부족했지만, 단번에 모든 것을 다 맛보고 싶지는 않았다.

강현은 붉어지고 부어오른 그의 입술을 가만히 쓸었다. 하고 싶었다기보다 그가 이런 제스처를 좋아한다는 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아니나 다를까 가쁜 호흡에 바싹 긴장해 있던 몸이 느슨하게 풀리는 것이 느껴졌다.

“……강현아.”

그때 문득, 연약한 목소리가 들렸다.

“응?”

번뜩 정신이 들어 그를 바라보자 어딘가 물기가 어린 커다란 눈동자가 제 눈을 향해 있었다. 이렇게 가까이 있을 때면 그는 보통 시선을 어디에 둘지 몰라 했는데 드문 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만약에…… 그 버스 정류장에서 내가 끝까지 윤해언이 아니라고 했다면.”

“…….”

“그러면 우리 정말 다시 볼 수 없었을까?”

이제 와서 왜 저런 질문을 하는지 몰랐다. 의도를 짐작해 보려 그 버스 정류장에서 그가 했던 말들을 머릿속으로 되짚어 보았다.

너는 그때 까만 코트를 입고 있었다고. 항상 옷을 춥게 입고 다녀서, 그런 옷을 입은 너를 보고 괜히 안심이 됐었다고. 그리고 눈이 내렸고, 어깨 위로 쌓인 눈이 참 예뻤었다고.

뭐 그런 것들이었다.

문득, 그날 눈이 내린 것을 어떻게 알았을까 싶은 생각이 들었다.

잠시 갸웃했지만 별달리 중요한 문제는 아닌 듯했다. 윤해언의 친구였던 것은 분명한 듯하니 해언에게 들었을 게 뻔했다.

그럼 솔직히 털어놓고 싶어지기라도 한 걸까.

그것이야말로 그가 지금 가장 바라지 않는 것이었기에, 강현은 그의 팔뚝을 강하게 쥐고 낮게 속삭였다.

“응. 그랬을 거야.”

“…….”

“아니면 우리가 만날 이유가 없잖아. 그치?”

순간, 그 갈색 눈에 빛이 꺼지는 듯한 이상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그것은 곧 미끄러지듯 아래를 향해 스스로를 감춰 버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현은 그의 마음에 아로새기듯 되물었다.

“너도 그렇게 생각하지?”

그는 굳은 듯이 움직이지 않았지만, 곧 보일 듯 말 듯 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다정히 굴고 잘해 줄 것이다.

그 유순한 몸짓을 보며 강현은 마음속으로 다시 한번 되새겼다.

바란다면 최선을 다해서 다정하게 대해 주고, 지금까지 그의 삶에서 생각조차 할 수 없었던 금전적인 도움을 주고, 제가 그를 사랑하는 것처럼 느끼게 해 줄 것이다.

적어도 강현이 그의 향에 대해서 모든 걸 다 경험하고 알아낼 때까지는 말이다.

누군가는 그것을 기만이라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강현의 세상에서는 진짜 자신의 향보다 꾸며진 향을 제 것으로 믿고 싶은 사람들처럼 진실보다 보기 좋은 거짓이 더욱 이로울 때가 많았다.

게다가 눈앞에 있는 그라고 해서 무죄인 것은 아니었다.

어차피 그도 저에게 거짓말을 하지 않았던가?

강현은 그의 목덜미에 손을 올려 쓰다듬다가 점점 힘을 주어 쥐었다. 하얀 목덜미에 곧 붉은 손자국이 남았다.

첫눈을 밟은 것 같은 느낌이 들어, 이상하게 만족스러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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