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concentré (2)
유준은 오늘도 늦을 모양이었다.
어둡고 싸늘한 집 안으로 들어서며 해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하루 종일 근육통에 시달린 터라 당장 뜨거운 물로 샤워를 하고 싶은 생각이 간절했지만 온수가 충분히 데워지기에는 시간이 좀 걸릴 것이기에, 해완은 미뤄 두고 나온 설거지를 마치고 나서야 갈아입을 옷을 들고 욕실로 향했다.
크리스마스가 벌써 4일 뒤였다. 보육원에서 크리스마스는 어린이날과 더불어 1년 중 가장 큰 행사에 속했기 때문에, 동생들에게 매년 보내는 선물을 사기 위해 해완은 지난주 내내 심야에 상하차 일을 다녔다. 갑자기 아르바이트를 줄인 탓에 여윳돈이 없어진 까닭이었다.
일이 워낙 고되다 보니 지난 며칠간 파스를 붙이지 않으면 잠을 잘 수 없을 정도로 몸이 쑤시고 아팠지만, 오늘은 강현을 만나야 했기 때문에 그럴 수도 없었다.
물의 온도가 충분히 올라온 듯 욕실에 훈기가 돌기 시작하자 해완은 천천히 옷을 벗었다. 마지막으로 속옷을 벗었을 때, 부인할 수 없게 젖어 있는 그것에 어쩔 수 없이 얼굴이 붉어졌다.
이미 몇 번이나 겪은 일인데도 아직 익숙해지질 않았다.
여성 오메가와 달리 남성 오메가는 알파의 페로몬을 받지 않는 이상 스스로 윤활을 할 수 없었다. 그 말은 곧 페로몬 민감도가 떨어지는 열성인 데다 성관계를 해 본 적이 없는 해완에게는 뒤가 젖는 것 또한 처음 겪는 일이라는 이야기였다.
물론 히트 사이클 때는 알파의 페로몬과 상관없이 몸이 흥분 상태에 들어가게 되지만, 꼼꼼히 억제제를 챙겨 먹는 해완은 히트 사이클 또한 이제껏 한 번도 겪어 본 적이 없었다.
예전 히트 사이클 억제제가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에는 오메가들이 알파와 관계를 맺지 않고 일생을 보낸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로 치부됐었다. 2개월, 혹은 3개월에 한 번씩 오메가에게 찾아오는 히트 사이클은 통제가 불가능한 성적 흥분은 물론이고 기간 동안 알파의 페로몬을 받지 않으면 내장을 찢어 내는 듯한 끔찍한 통증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안전하고 부작용 없는 히트 사이클 억제제가 개발되고 완전히 상용화된 이후 오메가들의 삶은 180도로 달라졌다. 히트 사이클을 겪는 것, 알파와 관계를 맺는 것은 이제 개인의 선택 사항이 되었다.
억제제의 개발은 오메가들에게만 이점을 가져다주지는 않았다. 그것은 알파들에게만 일어나는 각인 현상에 대한 일종의 안전망이기도 했다.
각인은 알파가 히트 사이클 중인 오메가와 관계를 가질 경우 약 15퍼센트의 확률로 발생하는데, 쉽게 말해 알파의 뇌가 각인을 한 오메가의 페로몬에 중독되는 것과 같았다.
그렇게 각인을 한 오메가의 페로몬을 지속적으로 받지 못하면 금단 증상을 겪게 되고, 아주 드문 일이기는 했으나 호르몬 체계 및 신경에 장애가 남을 정도로 심각한 문제가 생기는 임프린트 신드롬이라는 희귀병을 앓게 되는 경우도 있었다.
반드시 상대의 페로몬을 받아야 한다는 점에서 알파의 각인은 오메가의 히트 사이클과 비슷하기도 했다. 하지만 오메가가 알파의 페로몬을 받아야만 하는 것은 히트 사이클 기간뿐인 데다 같은 알파일 필요도 없었지만, 각인을 한 알파의 경우 특정 오메가의 페로몬을 일상생활에서 지속적으로 받아야만 했기 때문에 어찌 보면 리스크는 각인을 하는 알파가 더 큰 편이었다. 때문에 대부분의 알파가 히트 사이클에 대한 묘한 환상을 가지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섣불리 그 시기를 함께 보낼 생각은 하지 못했다.
또한 각인은 남성 오메가가 결혼 상대로는 기피되는 이유 중 하나이기도 했다. 여성 오메가는 히트 사이클 외에도 가임기가 따로 있었지만 남성 오메가는 히트 사이클 때만 임신이 가능하므로 아이를 가지려면 각인의 위험성까지 감수해야 했기 때문이었다.
샤워를 마치고 나온 해완의 핸드폰에서 메시지 도착 알림 소리가 들렸다. 욕실에 들어가기 전 유준에게 보내 놓은 메시지에 대한 답이었다. 시간이 늦었는데 언제 들어오냐고 묻는 해완의 메시지에 유준이 보낸 것이라곤 늦어, 라는 한마디가 다였다.
강현을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털어놓은 뒤 유준은 아직까지도 그에게 묘하게 거리를 두고 있었다.
짧게 한숨을 내쉰 해완은 밤길 조심히 다니라는 답문을 보내 두고는 이부자리를 폈다. 내일은 헬스장과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다녀온 후 보육원에 보낼 선물까지 사러 갈 계획이어서 바쁘게 움직여야 했다.
전등을 끈 뒤 눈을 감자 이사 올 때부터 벽에 걸려 있던 낡아 빠진 뻐꾸기시계의 초침 소리와 얇은 벽 너머로 골목을 지나는 오토바이 엔진 소리가 이상하리만치 선명하게 들렸다.
하필이면 해완의 집 바로 옆에 배달 대행업체가 있어 골목은 밤낮 가릴 것 없이 시끄러웠다. 그러나 소음들은 이미 익숙해진 지 오래였고, 오늘처럼 몸이 피곤한 날이면 거슬릴 새도 없이 잠에 빠져들곤 했다.
그러니 잠이 오지 않는 이유는 그것만은 아니었다. 사실, 강현을 만나고 온 날에는 항상 쉽게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한동안 애써 눈을 감고 있던 해완은 결국 슬그머니 눈꺼풀을 들어 올리며 몸을 뒤척였다.
강현은 오늘 해완을 제 무릎 위에 앉게 했는데, 그렇게 바싹 붙어 앉은 채로 높게 솟은 코가 목덜미를 쓸어내리는 느낌이 아직까지 생생했다.
전에는 몰랐지만 강현은 몸이 찬 편이었다. 온도가 낮은 긴 손가락이 피부를 훑는 느낌이 새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순간 소름이 돋고 바르르 몸이 떨렸다.
순식간에 하반신에 피가 쏠렸다. 말릴 새도 없이 제멋대로 뻗어 나가는 생각에 해완은 고개를 저었다. 사타구니 깊숙한 곳에서 번지는 묘한 흥분을 누르기 위해 다른 쪽으로 생각을 돌리려고 해 봤지만, 하지 않으려 노력할수록 역효과가 났다.
차갑고 단단한 손끝, 강하게 몸을 붙들어 매는 팔뚝, 이상하게 뜨거운 입술, 안개처럼 몸을 휘감는 듯한 깊은 숲, 연기, 가죽, 그리고 아몬드의 향.
이런 자신이 괴로울 정도로 민망해서 해완은 몸을 돌려 엎드려 누워 버렸다. 사람인 이상 그에게도 당연히 성욕이 있었고 자위 또한 물론 해 봤지만 이렇게까지 스스로를 자주 만지고 싶은 욕구를 느낀 적은 처음이었다.
스물여덟 살이나 먹어 놓고 성적인 자극을 처음으로 접한 사춘기 소년으로 돌아간 것처럼 굴고 있다는 생각이 해완을 너무나 창피하게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묵직하게 차오르는 흥분감을 어쩔 수가 없었다.
해완은 객관적으로 자신이 성적인 경험뿐만 아니라 성욕 또한 보통 남자들에 비해서 적은 편이라는 것을 알고 있었다. 타고나기를 담백한 면이 있기도 했지만 페로몬 향과 관련한 장애 때문에 남들이 저를 좀처럼 성적인 대상으로 받아들이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나자 더더욱 그런 욕구가 줄어든 터였다.
그것은 그의 인간관계를 좁게 만드는 점 중 하나이기도 했다. 페로몬을 통해 섹슈얼한 신호를 명백하게 전달 가능한 사회에서 성적으로 폐쇄되어 있는 것은 좀처럼 이해받기 어려웠다.
이러니 해완은 오메가라는 것이 무색하게 뒤로 자극을 받아 본 적도, 받으려고 해 본 적도 없었다. 신체 구조상 남성기를 쥐고 흔드는 행위만으로는 제대로 된 쾌락을 느낄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으면서도, 이상하게 겁이 나고, 거부감이 들었다.
하지만 강현을 만난 이후로는 이야기가 달라졌다.
그의 무릎에 앉아 키스를 받을 때 해완이 느낀 것은 그가 익히 알고 있던 가볍고 짜릿한 쾌감이 아니었다.
좀 더 깊은 곳이, 무언가를 요구하듯 움찔거리고, 젖어 내려가는 감각이었다.
해완은 입술을 강하게 깨물며 앞을 바닥에 깔린 두꺼운 요에 내리눌렀다. 흥분이 가라앉기를 바라고 한 행동이었지만 오히려 그 압박감이 더 자극적으로 느껴졌다.
저도 모르게 허리가 움찔거리고 숨이 거칠어졌다. 머리까지 몽롱해져 바닥에 반쯤 발기한 성기를 느리게 문질렀다. 경험이 없는 몸은 그런 사소한 자극에도 단단하게 굳었다.
한동안 그렇게 허리를 느슨하게 움직이면서도 손은 고집스럽게 베갯잇을 움켜쥐고 있었다. 밑을 직접적으로 만지지 않기 위한 나름의 노력이었지만, 곧 끓어 넘치는 듯한 욕망을 도저히 참을 수가 없게 됐다.
해완은 고개는 여전히 베개에 처박은 채로 몸만 살짝 틀고 잠옷 바지와 속옷을 허벅지까지 내린 뒤 손을 밑으로 내려 성기를 쥐고 흔들기 시작했다.
그러나 흥분을 더욱 가파르게 만드는 것은 제 손이 주는 자극이 아니라 강현과 자신의 벗은 몸이 뒤엉키는 불분명한 머릿속의 이미지였다.
키스할 때 강현의 입에서 흘렀던 낮은 신음을 떠올린 순간 전기에 감전이라도 된 듯 몸이 파르르 떨렸다.
아무도 없는 집 안임에도 해완은 마치 죄라도 범하는 것처럼 베개에 입을 틀어막아 소리를 죽이고 요령 없이 앞을 문지르고 허리를 들썩이기만 했다.
고작 그런 자극만으로도 그는 얼마 버티지도 못하고 악문 잇새로 신음을 흘리며 절정에 달했다.
모로 널브러진 채로 잠시 숨을 골랐다. 벗은 피부 위로 소름이 돋았지만 움직일 수가 없었다.
매번, 강현을 생각하며 자신을 만질 때마다 짧은 흥분이 가시고 그의 마음에 차오르는 것은 뭐라 설명할 수 없는 공허함과 수치심뿐이었다.
눈꼬리 끝에 희미하게 눈물이 고였다 사라졌다. 해완은 더듬거리며 옷을 끌어 올려 입고 욕실로 가 손을 씻은 뒤 자리로 돌아와 눈을 감았다.
아무리 잠이 오지 않아도, 이번에는 절대 눈을 뜨지 않을 생각이었다.
* * *
다음 날 동생들에게 줄 선물을 양손 가득 사서 돌아온 해완은 간만에 기분이 들떴다. 비싼 물건들은 아니었지만 한 명 한 명 챙겨 줄 수 있다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뿌듯했다. 특히 작년 크리스마스는 서울로 올라온 이후 처음으로 아무것도 보내지 못했던 해라서, 그 부채감 때문에 무리를 한 것도 있었다.
예전에는 레스토랑에서 일했다 보니 크리스마스 시즌에 쉬는 건 사실상 불가능했지만 해완은 그래도 이맘때가 되면 항상 혼자서 작은 트리도 만들고 시간을 내서 보육원에 선물을 잔뜩 사 들고 다녀오곤 했다.
개중에는 그런 해완에게 진짜 가족도 아닌데 미련하게 뭘 그리 챙기는 척을 하냐며 타박하는 사람도 있었지만 그는 그때마다 그냥 말없이 웃어넘겨 버렸다. 말주변이 좋지 않기도 했으나 그들은 해완이 무엇을 어떻게 설명해도 그의 마음을 이해할 수 없는 부류의 사람들이기 때문이었다.
그런 사람들은 외로움을 몰랐다. 무언가를 사 들고 돌아갈 곳이 있다는 게 눈물이 나도록 위로가 되는 마음이 어떤 것인지, 조금도 알지 못했다.
그렇게 꼭 빼먹지 않던 해완만의 작은 행사를 작년에 치르지 못한 것은 크리스마스라는 걸 의식조차 하지 못할 정도로 감기에 걸려 심하게 앓았기 때문이었다.
원래 페로몬샘은 이식을 했을 때 면역 거부 반응이 거의 없는 장기였기에 장기 이식 직후에 복용해야 하는 면역 억제제도 3~5개월 내 최소한으로 줄이거나 복용을 중단하는 게 통상적이었다.
하지만 해완은 반년이 넘게 면역 억제제를 먹어야 했고 맞는 제제를 찾는 것만으로도 많은 어려움을 겪었다. 이식 수술 직후 고용량의 면역 억제제를 복용해야 할 때는 부작용인 구토 증상 때문에 밥을 거의 먹지 못해 2개월 만에 살이 5킬로그램이나 빠질 정도였다.
안 그래도 면역력을 떨어뜨리는 억제제를 복용하면서 식사까지 제대로 하지 못하니 면역력이 바닥을 쳤고, 단순한 감기로도 죽다 살아났다 싶을 정도로 고생을 했던 터였다.
오른쪽 어깨가 이상하게 욱신거렸다. 왼손을 올려 수술 부위를 문지르던 해완의 시선이 문득 멀어졌다.
해언과 함께한 재작년 크리스마스의 기억까지 떠오른 탓이었다.
그때 해완은 크리스마스에 해언을 혼자 둘 수가 없어 휴가를 써야 한다고 레스토랑에 말도 안 되는 고집을 부렸었다.
생전 그러는 일이 없던 해완이 막무가내로 나오자 셰프는 마지못해 허락하긴 했지만 그 일을 계기로 눈 밖에 나기 시작했고, 결국 두 달 뒤에 해완은 레스토랑을 그만둘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렇게 간절히 해언과 시간을 보내고 싶었던 것은, 스스로는 절대 인정하고 싶지 않았지만 그것이 해언과의 마지막 크리스마스가 될지도 모른다는 걸 직감하고 있었던 탓인지도 모른다고, 해완은 가끔 씁쓸하게 생각하곤 했다.
어쨌든 그날 해완은 해언과 함께 참 재미있게 놀았었다. 해언이 시한부라는 사실을 안 지 한 달도 되지 않았을 때라 반쯤 제정신이 아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찍부터 나가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고 스케이트까지 타러 갔다.
해언은 병 때문에 이미 체력이 많이 떨어져 있는 상태였기 때문에 스케이트를 타는 내내 해완은 해언이 힘을 쓸 필요가 없도록 손을 잡고 스케이트장 이곳저곳을 뱅뱅 돌고 다녔다.
해언이 원래 사람의 시선을 끄는 타입이라는 건 알았지만 새삼스럽게 실감이 됐다. 같은 공간에 있는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씩 자석에 이끌리는 것처럼 해언에게 눈길을 줬다.
그리고 그 시선들은 자연스럽게 그의 손을 잡고 있는 해완에게까지 향했다. 물론 해언을 바라보는 것과 같은 의미는 아니었다. 페로몬 향이 없는 해완은 곧바로 알파나 오메가로 구분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에, 저 둘은 대체 무슨 사이일까 하는 미심쩍은 얼굴로 그를 흘끗 쳐다보고는 했다.
10대 때라면 그런 시선들에 얼굴을 붉히고 어쩔 줄 몰라 했을지도 모르지만 그때는 정말 아무렇지도 않았다. 오히려 저를 그렇게 바라보는 사람들의 마음이 이해됐다.
해완이 봐도 해언은 빛이 났다. 외모도 목소리도 향도 어느 곳 하나 특별하고 아름답지 않은 곳이 없었다. 그런 해언의 옆자리에는 특별한 사람이 있어야 한다고 생각하는 게 당연했다.
해언이 빨리 지치기도 했고 크리스마스 디너는 해완이 직접 만들 예정이었기 때문에 두 사람은 해가 떨어지기 전에 집에 돌아왔다.
해완이 요리를 하는 동안 해언은 크리스마스트리를 꾸몄다. 그렇게 꾸민 반짝이는 트리를 바라보며 함께 저녁을 먹는 동안 해완은 잘 먹지 못하는 해언에게 한 입이라도 더 먹이려 애를 썼다. 그 정성이 통했는지 해언은 제 앞에 놓인 스테이크를 반이나 먹어 치웠다.
아주 즐겁게 보낸 날이었지만 해언의 컨디션 관리를 위해 해완은 최대한 빨리 집을 정리하고 자기 싫다고 투정 부리는 해언을 끌고 10시에 함께 침대에 누웠다. 해언은 우리가 늙은이냐며 크리스마스에 왜 이렇게 일찍 자야 하냐고 투덜거렸지만, 고맙게도 곧 잠이 들었다.
그리고 해완은 조용히 베란다로 나와 소리 죽여 펑펑 울었다.
겉옷도 걸치지 않고 나왔는데 추운지도 몰랐다. 그냥 무릎에 얼굴을 묻고 하염없이 울었다. 해언의 병세가 돌이킬 수 없이 나빠진 다음에는 시도 때도 없이 울었지만 그때까지만 해도 몸을 숨기고 울 정신은 있었다.
해완은 살면서 누구를 원망해 본 적이 없었다. 물론 자신을 버리고 간 부모나, 제 장애나 환경을 가지고 모질게 굴었던 사람들에게 순간적으로 미운 감정을 느끼기는 했으나 잠시뿐이었다. 미워하는 마음을 오래 가지고 있을 성격도 되지 못했고, 나중에 생각해 보면 그런 사람들이 꼭 나쁜 영향을 끼치지만은 않았다고 느껴지기도 했다.
하지만 그날 밤 해완은 모든 것이 원망스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직 스물넷밖에 되지 않은 해언이 마주한 운명이 미웠다. 멋대로 망가져 버린 해언의 심장이 미웠다. 그걸 고쳐 주지 못하는 의사들도 미웠다. 아주 잠깐이라도 제가 해언과 떨어져 살고 싶다고 생각하게 만들도록 해언의 짝퉁이라 놀리던 아이들이 미웠다.
무엇보다 미운 것은, 해언을 살려 줄 능력이 없는 그 자신이었다.
어느 순간, 잠들었다고 생각한 해언이 어깨를 감싸 안았다. 그는 어린아이처럼 우는 해완의 차갑게 식은 팔뚝을 비비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우리 해완이, 이렇게 착해서 나 없으면 어떻게 살지?’
저를 그렇게 생각해 주는 사람은 해언뿐이었지만, 지금의 그를 보면 절대 그렇게 말할 수 없을 것이었다.
스트레스 때문인지 위가 욱신대며 아팠다. 해완은 한 손으로 배를 꾹 누르며 눈을 감았다.
강현을 속인 날 이후로, 해완은 해언의 기억을 꺼내기가 견디기 힘들어졌다. 강현의 옆에 있고 싶어서 해언을 이용하는 주제에 감히 해언을 떠올려도 좋을지 몰랐다.
눈꺼풀 뒤 어둠 사이로 스스로를 위선자라고 몰아붙이는 목소리가 들려왔다.
제가 저지르고 있는 짓 외에도 해언의 생각을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나 많다는 것 또한 해완을 괴롭혔다.
8년 전, 왜 강현에게 해완에 대해 이야기하지 않은 건지, 왜 강현을 만날 자리에 자신을 내보낸 건지, 왜 그 일이 선물이라고 한 건지, 왜 다다음 해 생일이 될 때까지 죽은 것을 말하지 말아 달라고 한 건지…….
그 무엇 하나 제대로 알고 있는 게 없었다. 그저 중요한 피스들이 전부 사라져 버린 거대한 퍼즐 속을 헤매는 기분이었다.
언젠가 강현에게 어떤 힌트를 얻을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지만 이제 그것도 불가능하게 되어 버렸다고, 해완은 자조적으로 생각했다.
3월 23일이 되면, 우리의 생일이 되면, 정답을 얻을 수 있을까?
해완은 경련을 일으키듯 쑤셔 오는 배를 문지르며 한숨을 내쉬었다.
그때 갑자기 현관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튀어 오르듯 놀란 해완이 뒤를 돌아보자 까칠한 얼굴의 유준이 머리를 벅벅 긁으며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보였다.
유준은 방바닥 가득 널려 있는 선물들을 보고 놀란 표정을 지었다.
“이게 다 뭐야?”
“애들 선물.”
그러자 유준이 황당하다는 듯 말했다.
“설마 이걸 나보고 다 들고 가라는 거 아니지?”
유준은 내일 보육원에 내려가 크리스마스까지 보내고 올 예정이었다. 해완은 픽 웃고는 옆에 놓아 둔 택배 박스를 가리켰다.
“니가 이걸 어떻게 다 들고 가. 부피 큰 건 택배로 바로 부칠 거야. 여기 쇼핑백에 든 건 원장 선생님이랑 다른 선생님들 선물인데, 이 정도는 들고 갈 수 있지?”
“형도 참 정성이다, 정성이야.”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털썩 주저앉던 유준이 해완의 얼굴을 보고 멈칫했다.
“형 얼굴이 왜 그렇게 창백해? 땀도 흘리고.”
식은땀까지 흘리고 있었는지 몰랐던 해완은 허둥지둥 움츠리고 있던 허리를 똑바로 폈다.
“그냥 속이 좀 안 좋아서. 잠깐만 여기 있어 봐.”
해완은 몸을 일으켜 방 안으로 들어가 서랍 속에 숨겨 두었던 2주 전에 산 경량 패딩을 꺼내 왔다.
“크리스마스 선물.”
뭐든 선물을 좋아하는 유준은 건네주는 것을 냉큼 받더니, 해완이 따로 정성스레 해 둔 포장 속에 든 경량 패딩을 펼쳐 보며 금세 얼굴이 밝아졌다.
“어? 이거 내가 좋아하는 브랜든데.”
“알아. 그래서 그걸로 산 거야.”
이월 상품이기는 해도 유준이 좋아하는 브랜드를 따로 챙겨 산 보람이 있었다. 별것도 아닌데 어린애처럼 좋아하는 유준을 보자 기분이 좋아진 해완이 따라 웃었다.
그런 해완을 본 유준이 멋쩍게 중얼거렸다.
“난 아무것도 준비 못 했는데…….”
해완은 장난스럽게 유준의 머리를 흩뜨리며 말했다.
“됐어, 임마. 너는 사고 안 치는 게 선물이야.”
해완이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머리를 정리하며 입을 삐죽이던 유준이 불쑥 물었다.
“형은, 크리스마스 여강현이랑 같이 보내는 거야?”
유준의 말을 들은 즉시 해완은 목덜미까지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입을 반쯤 벌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제가 얼마나 비참한 짓을 하고 있는지 아는 상대 앞에서 떳떳해지는 게 이렇게 어렵다는 걸 해완은 처음으로 알았다.
유준은 그런 해완이 답답한 듯 투덜거렸다.
“아무 상관 없는 내 앞에서까지 눈치 볼 거면서, 등신같이 그런 거짓말을 왜 해?”
“…….”
“내가 진짜, 거짓말을 할 만한 인간이 거짓말을 하면 황당하지라도 않지.”
해완이 얼굴을 붉힌 채 여전히 아무 말도 못 하고 있자 푹 한숨을 내쉰 유준은 누그러진 목소리로 말을 돌렸다.
“그래서, 애들 선물은 뭐 샀는데?”
“……어, 일단 애들 좋아하는 보드게임 두 개랑 방에 거는 농구 골대 망가졌대서 그것도 샀어. 지아랑 서현이 좋아하는 캐릭터 쿠션이랑…….”
해완은 포장하고 있던 선물들을 하나하나 들어 보이며 설명을 했다. 유준은 간만에 평소처럼 해완의 말에 하나하나 참견이나 구박을 하기도 하고 선물 중 마음에 드는 것을 저 달라고 떼를 써서 잔소리를 듣기도 했다.
그것만으로도, 그렇게 고맙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 * *
“크리스마스 때 식사는 어떻게 하지? 혹시 가고 싶은 곳 있어?”
마주 앉아 커피를 마시던 강현이 물었다. 내일이 크리스마스이브였다. 따로 생각이 있던 해완은 우물쭈물 중얼거렸다.
“글쎄. 웬만큼 갈 만한 데는 지금 예약하기는 늦었을 텐데.”
“그렇긴 한데, 서연 누나 통하면 지금이라도 예약할 수 있는 곳도 있을 거야.”
강현은 서연에게 당장 연락하려는 듯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마음이 급해진 해완이 툭 말을 내뱉었다.
“내가 요리하면 어떨까?”
“어?”
“한번…… 제대로 요리해 주고 싶었거든. 크리스마스 선물 겸 해서. 장도 내가 다 볼게.”
“……우리 집에서?”
해완은 머뭇거리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의 크리스마스 선물은 해완에게 가장 큰 난제였다. 도통 부족함이 없어 보이는 사람에게 무엇을 선물해야 될지 몰랐다. 그러니 제가 유일하게 할 줄 아는 일에만 생각이 미쳤다.
하지만 선물을 대충 때우려 든다고 생각하지 않을까 겁도 났고, 강현이 유명 다이닝만 다니는 것을 익히 아는 판에 특별한 날 제 요리를 먹고 싶어 할까 걱정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해완이 고개를 끄덕이기 무섭게 강현은 드물게 눈까지 접어 가며 활짝 웃었다.
“나야 너무 좋지.”
강현의 반응에 마음이 놓인 해완의 입가에 겨우 미소가 걸렸다. 제 형편이 여의치 않아 이런 것밖에 해 줄 수 없는 것을 뻔히 알 텐데 기분 좋게 넘어가 주는 강현이 고마웠다.
안심한 해완은 보다 편해진 마음으로 물었다.
“크리스마스트리는 만들었어?”
그러자 강현이 대수롭지 않다는 듯 대답했다.
“아니? 우리 집에 그런 거 없어.”
“원래 크리스마스에 트리 안 만들어?”
그는 당연한 듯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것에 의미를 두지 않는 사람도 많으니 상관은 없었지만 트리 없이 크리스마스를 보낸 적 없는 해완은 조금 아쉬워졌다.
그런 해완의 눈치를 본 강현이 불쑥 물었다.
“하나 살까?”
“아냐. 원래 그런 거 안 하면 짐만 될 텐데 뭐 하러.”
“크리스마스 끝나면 버리면 되지.”
장식까지 다 합치면 한두 푼 하는 것도 아닌데 고민도 없이 시원스럽게 대답하는 강현이 철없어 보여 해완은 픽 웃었다.
“아니면 우리 집에 있는 거 가져가서 내일 같이 만들까? 나도 아직 안 만들었는데.”
“응. 그게 좋겠다. 내일도 낮에는 아르바이트 한다고 했지?”
강현은 이브와 크리스마스 모두 일찍 만나고 싶어 했지만 도저히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뺄 수가 없었다. 해완은 미안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테이블 위에 놓여 있던 티슈로 손장난을 치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그럼 이브 밤에 와서 트리 만들고 자고 가고, 크리스마스에 요리해 주면 되겠네.”
강현의 말을 들은 해완이 고개를 번쩍 쳐들었다.
“자, 자고 가라고?”
“응. 어차피 다음 날 다시 만날 건데 뭐 하러 집에 가. 갈아입을 옷 챙겨서 와.”
강현은 지극히 당연한 일인 것처럼 말했지만 해완의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무언가를 더 생각하기도 전에 말이 튀어나왔다.
“그건, 그건 안 될 것 같아.”
티슈에 머물러 있던 강현의 시선이 해완의 얼굴에 고정됐다. 그는 차분하게 물었다.
“왜?”
“……나 새벽에 헬스장 청소 아르바이트 하는 거 알잖아. 너희 집은 나 일하는 데서 너무 멀어서 안 돼.”
“……크리스마스에 헬스장을 연다고?”
납득이 되지 않는다는 듯 되묻는 목소리가 낮았다. 해완은 제가 무슨 소리를 하는지도 모르고 정신없이 변명을 주워섬겼다.
“그게, 어, 거긴 무조건 365일 다 열거든. 크리스마스니 뭐니 다 챙기면 언제 장사하냐고 사장님이 맨날 그래.”
“내가 새벽에 데려다주고 데리고 와 주면.”
“…….”
“그래도 안 돼?”
해완은 시선을 내린 채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얼굴을 굳히고 짙은 눈썹을 매만졌다. 이제 그것이 심기가 불편할 때 나오는 버릇이라는 걸 잘 알고 있는 해완은 마음이 더욱 무거워졌다.
하지만, 곧 강현의 여상한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어쩔 수 없지. 뭐.”
해완은 슬쩍 고개를 올렸다. 어느새 강현의 얼굴에는 심기가 상한 느낌이 싹 사라져 있었다. 오히려 눈이 마주치자 빙긋 웃기까지 했다.
강현이 갑자기 손을 뻗어 해완의 볼을 만졌다.
“기대 돼. 해언이 너랑 같이 보내는 크리스마스.”
퍽 다정한 목소리였으나 해언의 이름을 듣는 순간 심장에 작고 날카로운 송곳이 꽂히는 것처럼 느껴졌다.
경련이 이는 입술을 억지로 끌어 올렸다. 미소가 어색해 보이지 않을까 퍼뜩 걱정이 들었지만, 눈앞에 있는 강현이 아무렇지 않게 따라 웃어 보여서, 다행히 이상하지 않은 모양이라고 해완은 생각했다.
* * *
약 한 달여 만에 다시 찾은 강현의 집은 기억 속의 그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이상할 정도로 긴장이 됐다.
해완은 어깨에 메고 있는 크리스마스트리에 쓸 장식이 가득 든 더플백 손잡이를 연이어 고쳐 쥐며 강현이 잡아 주고 있는 현관문 안으로 조심스럽게 걸음을 옮겼다.
다행히도 복도에 들어서자마자 코끝을 맴도는 부드러운 플로럴 우디 향이 쿵쾅대며 뛰는 심장을 조금 가라앉혔다.
그런데 내심 뛰어나오길 기대하고 있었던 보리가 보이질 않았다. 의아해하며 거실로 들어선 해완은 역시 집 안에 없는 것 같은 보리에 갸웃거리며 휘휘 고개를 내저었다.
“보리는 어디 갔어?”
강현은 거실 한구석에 분리된 크리스마스트리 조각들을 내려놓으며 아무렇지 않게 대답했다.
“훈련소에 맡겨 뒀어. 내일까지.”
“왜?”
“오늘내일은 둘이 보내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제가 보리를 꺼린다고 생각했던 걸까? 지난번 보리와 놀아 줄 때 서툴기 그지없었던 자신의 모습이 떠올라 해완은 괜히 가슴이 뜨끔했다.
순하고 귀여운 보리를 보고 싶었던 마음도 있었지만 오늘같이 특별한 날 주인과 함께 보내지 못하고 훈련소에 있을 보리를 생각하니 괜히 안쓰러웠다.
“그럴 필요까진 없었는데. 보리도 오늘 같은 날 너랑 보내고 싶었을 거고.”
해완의 말에 트리를 이리저리 끼워 보고 있던 강현이 문득 그를 바라보았다.
“그게 무슨 소리야?”
“어?”
“보리는 개잖아. 그런 생각 못 해. 크리스마스가 뭔지도 모르고.”
얼핏 들으면 타박이라도 주는 듯한 말투에 해완은 주춤했지만 저를 보는 강현의 표정에는 순수한 의아함만이 고스란히 떠올라 있었다.
그것은 어쩐지 어린아이의 것처럼 느껴져서, 해완은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건 그렇지만…… 강아지들은 주인이 기분 좋고 행복한 건 엄청 잘 알잖아. 그래서 걔네들도 이런 기념일에 신나한다고 들었어.”
그럴 수 있겠다는 듯 흠, 하고 고개를 작게 끄덕인 강현은 트리를 끼워 완성시키는 일로 다시 돌아갔다.
“보리도 그랬을 텐데, 못 느꼈어?”
강현은 해완을 바라보지 않고 성의 없이 대답했다.
“글쎄. 개들이 그런 걸 느끼나? 난 잘 모르겠는데.”
지극히 무심한 말투에 해완은 멈칫했다. 보리와의 교감에 관심이 없는 듯한 강현의 말은 그를 지극정성인 주인으로 여기고 있던 해완의 기분을 이상하게 만들었다.
순간 조용해진 해완을 강현이 흘끗 곁눈질한 것이 그때였다. 그는 갑자기 장난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내 생각엔, 네가 보리 친구라서 나보다 보리 감정을 더 잘 아는 것 같아.”
익숙한 놀림에도 해완은 살짝 볼을 붉히며 대꾸했다.
“내가 무슨 강아지도 아니고, 왜 보리 친구야?”
볼멘소리에 강현은 갑자기 성큼성큼 앞으로 다가왔다. 그러더니 허리를 숙이고 시선까지 낮춰 가며 해완의 얼굴을 빤히 바라보는 통에 해완은 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을 느꼈다.
해완의 눈동자가 어지럽게 방황하는 것을 눈치챈 강현이 씩 웃었다.
“닮으면 친구 아냐? 다시 봐도 이렇게 똑 닮았는데.”
“……나랑 보리랑 닮았다고 하는 사람 너밖에 없어.”
“서연 누나도 닮았다고 했다니까. 유준이도 보리 제대로 봤으면 닮았다고 했을걸?”
서연에 유준까지 끌어들이는 강현에 해완은 뭐라 대꾸하지 못하고 입만 벙긋거렸다. 그러자 고개를 깊게 내린 강현이 해완의 왼쪽 귓가에 대고 낮게 중얼거렸다.
“보리가 좋은 건 알겠는데, 오늘이랑 내일은 나한테만 집중해.”
귀에 꽂히는 듯한 낮은 목소리에 해완이 움찔하는 순간 강현은 해완의 오른손을 한 번 깊게 감싸듯 쥐고는 아직까지 그의 손에 들려 있던 더플백 손잡이를 뺏어 들고서야 허리를 곧게 세웠다.
해완은 강현의 숨결이 와 닿았던 왼쪽 귀를 자기도 모르게 문질렀다. 그런 해완에 아랑곳없이 강현이 활기차게 말했다.
“여기 든 게 트리 장식이야? 열어 봐도 돼?”
“어, 응.”
강현은 해완의 발치에 어린애처럼 주저앉아 더플백을 열었다. 커다란 가방 안 가득 담긴 장식들을 보자 눈이 잠시 휘둥그레진 그는 살짝 웃음기가 섞인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크리스마스에 진심이라더니, 진짜였네.”
조금 멋쩍어진 해완은 목뒤만 문질렀다. 처음에는 탁자 위에나 올라갈 법한 작은 트리를 두는 것이 고작이었지만 매년 조금씩 모은다는 게 어느새 이만큼이 되어 버렸다.
해완의 키와 비슷한 정도로 큰 크리스마스트리는 마저 조립하고 접혀져 있는 가지를 활짝 펴는 일만 해도 시간이 의외로 꽤 걸렸다. 그래서 전구를 감고 장식들을 다는 건 저녁을 배달 시켜 먹은 다음에 하기로 했다.
“뭐 먹을까? 치킨 먹을래?”
붙어 앉아 배달 애플리케이션을 들여다보는 중 강현의 입에서 나온 치킨이라는 단어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눈을 동그랗게 뜨고 바라보았다.
“왜 그렇게 봐? 치킨 먹기 싫어?”
“아니…… 너도 치킨을 먹는구나 해서.”
“그럼 뭐 난 곧 죽어도 파인 다이닝 같은 데서만 밥 먹는 줄 알았어?”
“응. 그런 줄 알았어.”
뻔뻔한 대답에 강현은 픽 웃으며 해완의 이마에 살짝 이마를 콩 박더니, 치킨을 마저 주문했다.
저녁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배달은 빠르게 왔다. 둘 다 배가 고팠던 터라 기가 막히게 고소한 냄새가 나는 후라이드 한 마리와 달달하고 매콤한 양념치킨 한 마리, 그리고 함께 시킨 치즈볼과 감자튀김 등을 어릴 때 좋아하던 만화 영화나 게임 같은 시답잖은 이야기를 나누며 빠르게 해치웠다.
해완에게는 꼭 드라마나 영화의 세트장처럼 느껴지는 강현의 집은 여전히 현실감이 없었지만, 익숙한 음식을 앞에 두고 이야기를 나누는 것만으로도 작업실과 밖에서는 볼 수 없던 강현의 일면을 본 것 같아 해완은 가슴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올랐다.
깨끗이 비운 치킨 박스를 대강 정리해 두고 본격적으로 트리를 꾸미기 위해 자리에 앉으려는데, 옷을 갈아입겠다며 방으로 들어갔다 나온 강현이 불쑥 무언가를 해완에게 건넸다.
“이게…… 뭐야?”
“내 옷 사러 갔다가 그냥 네 생각 나서 샀어. 열어 봐.”
다짜고짜 건네진 커다란 쇼핑백 안에는 고급스러운 카멜색 코트 한 벌이 들어 있었다.
당황한 해완이 강현을 올려다보자 그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지난번에 입은 코트 보니 밝은 색이 잘 어울리는데 어두운 색만 입는 거 같길래…… 비슷한 색감으로 골라 봤는데, 마음에 들어?”
해완은 선뜻 대답하지 못하고 머뭇댔다. 코트는 처음 보는 브랜드 같았지만 강현이 입는 것이라면 말도 안 되게 비싼 것임에 분명했다. 예전 강현이 해완에게 빌려줬었던 코트의 가격이 천만 원이 넘는다는 유준의 말까지 불쑥 떠오르는 바람에 등에 식은땀이 흐를 지경이었다.
제게 어울리지도 않을 물건을 받고 싶지 않았지만, 아마 이것이 크리스마스 선물이리란 생각이 들자 어떤 말도 섣불리 입 밖으로 나오지가 않았다.
그런 해완의 속마음을 눈치라도 챈 듯 강현이 입을 열었다.
“그렇게 비싼 거 아니니까 부담 가질 필요 없어.”
제 자격지심 때문에 강현의 입으로 그런 말을 하게 했다는 것에 미안해진 해완은 입술을 가만히 깨물었다가 애써 밝게 대답했다.
“나 이거 입어 봐도 돼?”
“당연하지.”
활짝 미소를 지은 강현은 해완을 드레스 룸 앞에 있는 전신 거울 앞에 세우고 마치 어린아이에게 해 주듯 직접 옷을 입혀 주기까지 했다.
고급스러운 윤기가 자르르 흐르는 카멜색의 코트는 하얀 해완의 피부와 보기 좋게 어울렸다. 사이즈 또한 키에 비해서 마른 편인 해완에게 맞추기라도 한 것처럼 잘 맞았다.
“너무 마음에 들어. 고마워, 강현아. 맨날 입고 다닐게.”
해완의 진심 어린 말에 강현은 그의 볼에 가볍게 입 맞추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잘 어울릴 줄 알았어. 다음엔 같이 가서 고르자.”
저를 생각해 주는 강현의 다정한 마음이 뭉클해 해완은 가만히 고개를 끄덕였다.
물질적으로는 무슨 수를 써도 강현이 제게 주는 만큼은 줄 수 없을 것이라는 현실에 자꾸만 위축되려는 마음을 외면하려 그는 부러 밝게 말했다.
“내일 뭐 특별히 먹고 싶은 거 있어? 일단 메뉴 생각해 놓긴 했는데…….”
해완의 조심스러운 말에 강현은 미소 띤 얼굴로 고개 저었다.
“아니. 네가 해 주는 거면 다 좋아.”
“그럼 내가 내일 다시 올 때 알아서 장 봐서 올게.”
그러자 강현은 잠시 고개를 갸웃했다.
“장을 혼자 보러 가게? 같이 가는 게 낫지 않겠어?”
혼자서 찬찬히 요리 재료를 고르고 싶은 마음이 있던 해완은 손사래를 쳤다.
“아냐. 어차피 여기 오는 길에 어디서 장 볼지도 생각해 놨고, 재료 고르는 데 좀 오래 걸릴 수도 있어서.”
“그럼 내 카드 줄까?”
“뭐?”
“오늘 너 집에 가기 전에 내 카드 줄게. 그거 가지고 내일 장 봐 오면 되겠다.”
이해할 수 없는 강현의 말에 해완은 살짝 이맛살을 찌푸렸다.
“네 카드는 왜……? 이번에는 내가 크리스마스 선물로 요리해 주는 거라고 했잖아.”
“그래. 요리는 네가 해 줘. 재료만 내가 산다고.”
강현의 천연덕스러운 말투에 멈칫한 해완은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았다. 저를 배려해서 그러는 것은 알았지만, 저 또한 강현에게 뭐라도 해 주고 싶은 마음이 가득하다는 걸 알아줄 수는 없을까 하는 생각에서였다.
“이 정도는 나도 살 수 있어, 강현아. 그러니까 내가 사게 해 줘.”
그러자 강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조용히 말했다.
“난 동생한테 뭐 안 얻어먹는데.”
“어?”
“너 나보다 한 살 어리잖아.”
순간, 해완은 불이 붙듯이 전신의 열이 삽시간에 얼굴로 쏠리는 것을 느꼈다.
강현의 말이 맞았다. 해언은 강현보다 한 살이 어렸다. 하지만 해완은 아니었다. 해완은 해언보다 두 살이 많았고, 강현보다는 한 살이 많았다.
멍청하게 잠시 잊고 있었던, 강현이 지금 대하고 있는 사람은 해완이 아니라는 냉정한 현실이 심장을 강하게 후려갈겼다.
주체하지 못할 감정에 입 안이 바싹 마르고 목구멍에서 쇠 맛이 올라오는 것처럼 느껴졌다. 아마 지금쯤 얼굴도 괴상할 정도로 붉어져 있을 게 뻔했다.
이상하게 생각할 거야, 해완은 무슨 말이든 하려고 안간힘을 썼지만 바로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바보처럼 입술만 몇 번 벙긋거렸다.
“그리고 이거 크리스마스 선물 아니야.”
고맙게도, 강현은 그런 해완의 동요를 눈치채지 못한 듯 태연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그냥 네 생각 나서 산 거라고 했잖아. 내가 주고 싶은 크리스마스 선물은 따로 있어.”
해완은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 정도로 주먹을 세게 쥐었다. 어떻게든 화제를 돌리고 싶은 마음에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이고 간신히 목소리를 내뱉었다.
“……뭔데……?”
이번에는 강현이 잠시 말이 없었다. 침묵이 길어지자 해완은 저도 모르게 바닥을 헤매던 시선을 올려 강현을 바라보았다.
뭔가를 가늠하듯 해완을 응시하고 있던 강현은 그때를 놓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그때 나한테 돌려줬던 돈, 유준이가 네 빚 갚겠다고 받아 간 돈이지?”
강현의 입에서 나온 말에, 해완의 입술이 반쯤 벌어졌다.
유준은 강현에게 돈을 받아 온 경위에 대해 ‘해언’이 살기 어렵다고만 했지, 구체적으로 빚을 졌다고는 말하지 않았다고 했다. 강현도 딱히 유준이 무슨 핑계를 대고 그 돈을 빌려 갔는지는 구체적으로 이야기한 적이 없었다.
머리 여기저기서 생각들이 미친 듯이 튀어 오르기 시작했다.
내가 빚이 있는 걸 어떻게 알고 있는 걸까? 유준이가 술에 취해서 이야기를 해 놓고 기억하지 못한 걸까? 그럼 유준이는 어디까지 이야기를 한 걸까? 그 빚이 왜 생겼는지 이야기했을까? 병원비 때문이라고? 어디가 아팠기 때문이라고, 그렇게 얘기한 건 아닐까?
그게 페로몬샘 이식 수술 때문에 생긴 빚이라고, 어떤 단서라도 흘리지는 않았을까?
반쯤 패닉 상태에 빠져 눈만 깜빡이는 해완은 아랑곳없이 강현이 낮게 말했다.
“네 빚, 내가 갚아 주고 싶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해완은 잠시 강현의 얼굴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강현은 그런 해완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며 조심스럽게 말을 이었다.
“왜 빚을 졌는지는 모르지만 알고 싶지도 않고 물어볼 생각도 없어. 그냥 내가 해결해 줄 수 있게 해 줘.”
그 말을 듣는 순간 해완은 무의식중에 멈추고 있던 숨을 짧게 내뱉었다. 굳어 있던 몸에 겨우 피가 도는 것 같아, 떨리는 손을 들어 얼굴을 거칠게 문질렀다.
강현은 아직 알지 못했다. 그 빚이 왜 생겼는지, 해완이 받은 것이 어떤 수술인지.
그러나 약한 공황에서 벗어나기 무섭게 강현이 말하고자 했던 요지가 가슴에 돌이라도 얹힌 듯 느끼게 만들었다. 해완은 모래를 씹기라도 한 듯 까끌한 혀를 간신히 움직여 대꾸했다.
“아니, 아니야. 너한테 내 빚을 갚게 할 수는 없어.”
강현은 즉시 짧게 한숨을 쉬었다. 어지간히 못마땅한 듯 잘생긴 눈썹 사이의 미간도 노골적으로 좁아진 게 보였다.
“오늘 같은 날까지 꼭 이래야 돼?”
바로 몇 주 전에도 엇비슷한 논쟁을 했던 것을 떠올린 해완은 선뜻 할 말을 찾지 못했다. 틈을 놓치지 않고 강현은 다소 말이 선 말투로 재차 입을 열었다.
“이유 없이 해 주겠다는 것도 아니고 크리스마스 선물이라고 했잖아. 그냥 기분 좋게 받을 수는 없는 거야?”
“…….”
“너한테 좋은 일을 하려는 건데, 왜 매번 구걸하듯이 굴어야 되는지 이해가 안 돼.”
머리가 복잡했다. 호의를 호의로 받아들이지 못하는 저를 책망하는 강현의 목소리에 깊은 죄책감이 들다가도, 부담스러워하는 것을 뻔히 알면서도 자꾸만 이런 문제를 끌어들이는 그에 대해 야속하기도 한 마음이 불쑥 솟기도 했다.
두 사람이 걷고 있는 평행선의 거리를 어떻게 좁혀야 할지 몰라 해완이 고민하는 사이, 성큼 가까이 다가선 강현이 해완의 턱을 쥐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란 해완은 아랑곳없이 강현은 그의 턱을 들어 올려 시선을 맞춘 뒤 깊게 속삭였다.
“어떻게 해야 될지 모르겠으면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해.”
“…….”
“다 널 위한 거니까.”
순간, 언젠가 노을 진 허름한 창고 안에서 들었던 해언의 목소리가, 해완의 머릿속을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내가 하는 건 전부 다 널 위한 거야. 이해하는 거지? 해완아.’
뜬금없이 떠오른 기억에 설명할 수 없을 정도로 강한 거부감이 들었다. 해완은 저도 모르게 제 턱을 쥐고 있는 강현의 팔을 쳐 내며 뒤로 한 발자국 물러섰다.
그와 동시에, 마치 오래도록 억눌렀던 뭔가가 터져 나오는 것처럼 갑자기 말이 튀어 나갔다.
“이건 날 위한 일이 아니야. 내가, 내가 뭘 바라는지랑 상관없이 네가 해 주고 싶은 걸 강요하는 건 날 위한 일이 아니라고.”
격렬한 어투에 심기가 상한 듯 강현의 짙은 눈썹이 크게 꿈틀했다. 그럼에도 이상한 흥분에 사로잡혀 있던 해완은 남은 말을 하기 위해 입을 열었지만, 강현의 고집스러운 목소리가 먼저 공간을 갈랐다.
“아니, 널 위한 일 맞아. 나중에 네가 후회하지 않게 해 주려는 거니까.”
강현의 말이 바로 이해가 되지 않아 해완은 인상을 찡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내가 네 돈을 받지 않은 걸 나중에 후회할 거라는 거야?”
“그래.”
의아할 정도로 확신에 찬 목소리에, 해완은 잠시 말을 잃었다가 겨우 입을 열었다.
“대체 왜…… 왜 그렇게 생각하는데?”
강현은 대답을 하지도 않고 해완을 보기만 했다. 그 질문에 답해야 될 사람은 자신이 아니라 해완이라고, 네 현실을 생각해 보라고 말하는 것처럼.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뭔가가 불쑥 치밀어 올라, 해완은 입술을 조금 떨었다.
굳이 강현처럼 많은 것을 가진 사람이 아니더라도 자신의 현실이 초라해 보이리란 사실을 해완은 잘 알고 있었다. 한번 안정적인 삶을 가져 보았기에 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완은 항상, 지금의 상황이 아무리 보잘것없어도 그것으로 미래까지 재단하지는 않으려고 죽기 살기로 발버둥을 쳐 왔다.
그래서 아직 오지도 않은 날의 해완의 마음까지 단정 지어 버리는 강현의 말이 크게 상처가 됐다. 저를 그렇게 생각하지 않았으면 하는 단 한 사람이 강현이었기에, 더 아프게 느껴졌다.
해완은 강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후회 안 해.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해완이 좀처럼 쓰지 않는 독한 말투였음에도 강현은 믿을 수 없다는 것처럼 그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아까부터 계속해서 잔인하리만치 자존심을 뭉개는 그의 침묵에 울컥한 해완이 이를 악물고 말했다.
“유준이한테 준 돈도 꼭 돌려줄 거야.”
“…….”
“우리가 다시 못 보게 되는 날이 온다고 해도.”
역시 대답은 바로 돌아오지 않았다. 어둠이 깊어 표정을 쉽게 알 수 없는 그 새카만 눈이, 처음으로 답답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갑자기 강현이 입을 열었다.
“그래. 알겠어.”
그의 목소리는 산뜻했다. 마치 이 대화에 어떤 미련도 없다는 듯이.
갑작스러운 분위기의 변화에 멍해진 해완을 두고 강현이 툭 말을 던졌다.
“트리나 마저 끝내자. 너무 늦기 전에 너 집에 가야 되잖아.”
강현은 해완을 향해 비스듬히 웃어 보이곤 그를 지나쳐 거실로 나갔다. 갑작스러운 그의 감정 변화를 도무지 종잡을 수가 없어 멍하니 서 있던 해완은 잠시 후 드레스 룸을 나섰다.
강현은 커다란 트리 앞에서 전구를 두르고 있었는데, 해완이 주춤대며 옆에 섰는데도 쳐다보지도 않고 하던 일에만 여념이 없었다.
조금 헷갈리기는 했지만 역시 화가 난 것이 분명했다. 결국 해완 또한 선뜻 말을 걸지 못하고 전구가 지나간 흔적을 따라 조용히 오너먼트들을 걸기 시작했다.
크리스마스트리에 전혀 흥미가 없다는 사람치고 강현은 망설임 없이 작업을 해 나갔다. 두 사람 다 입을 다문 가운데 트리나 오너먼트들에서 나는 부스럭대는 소리 말고 공기는 고요했다. 집이 커서 그런지 더 숨 막히게 느껴지는 침묵이었다.
견디다 못한 해완이 흘끗 곁눈질을 할 때마다 강현의 얼굴은 어김없이 무표정하게 굳어 있었다.
매년 트리를 꾸밀 때마다 질리지도 않고 기분이 좋아지던 해완이었지만 지금만큼은 아니었다. 특히 오늘은 그 어떤 크리스마스이브보다 해완의 가슴을 부풀게 만든 날이었다는 걸 생각하면 더욱 그랬다.
이런 걸 바란 게 아니었는데.
아까 강현과 논쟁을 할 때보다, 말 한마디 없이 트리를 꾸미는 지금이 더 마음이 아파 해완은 자꾸만 찡해지려는 코끝을 간신히 참았다.
“이 정도면 되겠지?”
침묵의 시간이 지나고 오너먼트가 든 가방 속이 바닥을 드러낼 무렵, 평소와 다름없는 목소리로 강현이 물었다. 해완은 잠겨 있던 목을 허둥지둥 가다듬었다.
“응. 이 정도면 될 것 같아.”
잠시 망설이던 해완은 말을 덧붙였다.
“전구도 한번 켜 볼까?”
거기까진 필요 없지 않냐고, 그렇게 말할까 봐 걱정했는데 강현은 의외로 쉽게 고개를 끄덕였다.
거실의 조도를 낮춘 뒤 트리에 가득 두른 알전구의 전원을 켜자 옅은 어둠 속에서 트리가 환하게 빛을 발했다. 그것을 강현의 옆에서 무릎을 세우고 앉은 채 보았다.
기분이 가라앉아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완은 금세 그 반짝임에 빠져들었다. 처음으로 트리의 불을 밝히는 것은 보잘것없는 그의 일상에서 제일 사랑하는 순간 중 하나였기 때문에 어쩔 수 없었다.
“마음에 들어?”
옆에서 들려온 낮은 목소리에 흠칫 놀란 해완이 고개를 돌리자 언제부터였는지 몰라도 저를 빤히 보고 있던 강현의 눈과 시선이 맞닿았다.
잔뜩 위축되어 있던 마음에 강현의 짧은 말 한마디가 그렇게 반갑게 느껴질 수가 없었다. 트리를 꾸미는 내내 서로 마음이 상한 채로 하루를 끝내게 될까 봐 안절부절못하고 속상해했던 해완은 목소리를 높여 짐짓 밝게 대답했다.
“응. 너무 마음에 들어. 넌?”
그러자 눈을 돌려 트리를 바라본 강현이 말했다.
“괜찮네. 이런 걸 내 손으로 만들어 본 건 진짜 오랜만이지만.”
“예전에는…… 트리도 만들고 그랬어?”
“응. 할아버지가 그런 걸 중요하게 생각하시는 분이어서, 크리스마스 때마다 온 가족이 모여서 난리였지. 오늘도 그랬을걸.”
혼자 살게 된 이후로는 가족들과 크리스마스를 함께 보내 본 적이 없다고. 강현이 분명 그렇게 말한 것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는 해완은 저도 모르게 눈살을 찌푸리며 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오늘 가족들이 다 모였을 거라는 거야?”
“아마도.”
강현의 태도는 무덤덤하기 짝이 없었지만 이상하게 가슴이 따끔한 나머지 해완은 바로 대답을 할 수가 없었다.
아무리 해완이 친부모나 형제를 가져 본 적 없어도 세상에는 그림 같은 가족만 있는 것이 아니라는 사실 정도는 당연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굳이 피를 나누지 않았더라도, 아무리 어색한 사이라도 곁에 있는 이에게는 어쩔 수 없이 작은 희망을 품게 되는 것이 사람인 법이었다.
그러니 가족이라는 존재에 일말의 기대도 없어 보이는 강현의 태도를 볼 때마다, 그런 비정상적인 체념을 하게 될 때까지 그가 얼마나 많은 좌절과 포기를 겪었을지에 대한 생각을 멈출 수가 없었다.
마음에 분이 차올라, 해완은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왜 너희 가족들은 너만 두고 모이는 건데?”
그렇게 말하는 목소리는 스스로 가진 의도보다 성이 난 것처럼 들렸다.
괜스레 트리의 오너먼트를 만지작대던 강현의 시선이 비스듬히 해완을 향했다. 그는 갑자기 얼굴을 붉히고 있는 해완을 보더니 아리송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 게 왜 궁금해?”
정말 어리둥절한 듯한 목소리에, 해완은 고개를 돌리며 낮게 중얼거렸다.
“그냥, 너만 두고 그러는 게 싫어.”
“그럴 거 없어. 어차피 나한테도 불편한 자리니까.”
“…….”
“그 사람들은 날 무서워하거든.”
해완은 다시 강현을 바라보며 물었다.
“……왜?”
그러자 강현은 고개를 미묘하게 기울이며 입을 다물었다. 트리가 발하는 빛을 향해 있는 오른쪽 얼굴과 어둠을 향한 왼쪽 얼굴이, 가면을 쓴 것처럼 선명하게 갈렸다.
그는 무언가를 가늠하듯이 해완을 한참 눈에 담다가, 입술을 떼고 느릿하게 말했다.
“엄마 장례식 때 내가 울지 않았으니까.”
“…….”
“눈물이 나지 않았거든. 조금도.”
그런 말을 하는 강현의 목소리는 뜻을 알 수 없게 담담해 보였다. 속을 읽을 수 없게 고요하기만 한 새카만 눈동자도 여전했다.
아예 낯설지는 않았다. 그것은 종종 해완을 지극히 혼란스럽게 만들었던 종류의 무감각함이었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지금의 해완에게는 그 기묘한 무감각함이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깨달음을 주는 것 같았다.
남들이 이해할 수 없는 반응을 하는 것에 대해, 해완은 이미 잘 알고 있었다.
저를 학대하고 버린 것이 분명하다는 부모에 대해 해완이 가진 기억이라곤 그들이 사 준 솜사탕뿐이었으니까.
부모에게 버림받았다는 같은 상처를 가지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원망할 거리는 모두 잊고 달콤했던 순간만을 기억하는 해완을 해언은 답답해서 어쩔 줄 몰라 했다.
다른 사람을 바꿀 수 없다면, 결국 자신을 바꿀 수밖에 없다는 걸 해언은 이해하지 못했다.
그리고 강현 또한 마찬가지일지 몰랐다. 해완은 이해할 수 없어도, 모든 일에 무감각해지는 것이, 어쩌면 강현이 상처를 대하는 방식일지도 몰랐다.
그런 생각에 멍해져 있는 사이, 강현이 문득 미간을 찌푸렸다. 커다란 손이 해완의 눈 밑을 스쳐 지나갔다.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닦아 내며 그는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왜 우는 거야?”
대답을 할 수가 없어서 고개만 푹 숙였다. 강현은 그런 해완을 이상하게 쳐다보다가, 답답한 듯 재차 물었다.
“너도 내가 무서워서 그래?”
해완은 이를 악물고 고개를 저었다. 조금도 무섭지 않았다. 안쓰럽고 불쌍했다. 엄마를 잃고 눈이 보이지 않는 강현을 그 마을로 홀로 보내고 혼자가 익숙해지게 만든 그의 가족들이 미웠다.
그와 동시에, 마치 머리 위에서 얼음물이 쏟아진 것처럼 그 외로운 소년의 곁을 유일하게 지켜 줬을 해언이 그에게 어떤 의미로 남았을지에 대한 선명한 지각이 싸늘하게 스쳐 지나갔다.
해완이 이제껏 온 힘을 다해 외면하려고 했던 죄책감이, 숨을 쉴 수 없을 정도로 가슴을 빠듯하게 조였다.
나는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내가 지금, 강현이한테 무슨 짓을 하고 있는 거지?
해완은 무릎에 묻었던 고개를 들었다. 가득 고인 눈물로 흐려진 눈을 돌려 트리를 바라보았다.
제 손으로 꾸민 트리가 어둠을 몰아내지는 못할지라도 한구석을 밝혀 주는 게 좋았다. 어릴 적 부모에게 버림받고 기억하지도 못하는 학대를 당했을지라도 보육원 식구들을, 그리고 해언을 만난 것처럼 인생의 한구석을 밝히는 빛은 언제나 존재하리라고 그렇게 말해 주는 것 같았다.
하지만 오늘 본 트리의 빛만큼 아름다운 것은 다신 볼 수 없으리라고, 해완은 속으로 자기도 모르게 되뇌었다.
아무리 허름한 곳이라도 트리는 항상 따뜻하게 빛났고 앞으로도 빛나겠지만, 8년이라는 시간을 넘어 그가 유일하게 가슴에 담았던 소년의 옆에서 보는 크리스마스트리가 있는 풍경보다 아름다운 것은 존재할 것 같지 않았다.
그러니까 이제 됐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럴 자격도 없는 주제에, 이미 너무 과분한 것을 받았다고.
더 늦기 전에, 더 상처를 주기 전에 지금 끝내야 한다고.
그렇게 생각한 순간 피가 빠르게 전신을 도는 것처럼 느껴졌다. 심장이 거세게 뜀과 동시에 소름이 오싹 돋아 해완은 반사적으로 제 팔로 몸을 감싸고 부르르 떨었다.
지금이 아니면 말할 수 없을지 모른다는 강한 충동에 사로잡혀, 해완은 어린아이처럼 손등으로 눈물을 닦으며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나, 나 너한테 꼭 해야 될 이야기가 있어.”
강현의 눈썹이 작게 꿈틀하는 것이 느껴졌다. 사시나무 떨듯이 떨면서도 해완은 안간힘을 다해 말을 이어 나갔다.
“내가 너한테 큰 잘못을 했어. 내가, 내가 너한테 거짓…….”
하지만, 해완은 끝내 말을 끝내지 못했다.
강현은 그대로 해완에게 입을 맞췄다.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거칠게 입술을 빨고 씹었다. 도망가려 할수록 밀어붙여지는 몸에 해완은 그대로 뒤로 쓰러졌다.
“자, 잠깐, 가, 강현아, 잠시만…….”
강현에게 깔려 바닥에 누운 채로 해완은 고개를 돌리며 그의 입술을 피했다. 하지만 강현은 끈질기고 집요하게 해완의 입술을 삼키려 들었다. 반쯤 패닉 상태에 빠진 해완은 바싹 맞닿은 단단한 가슴을 밀치고 밑에서 벗어나기 위해 버둥거렸지만 강현은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오히려 더 강하게 그를 짓눌렀다.
커다란 몸에 짓눌린 채 손목마저 붙잡혀 꼼짝할 수 없게 되자, 해완은 맥없이 소리만 높였다.
“강현아, 잠깐, 이러지 마, 너한테 꼭 해야 될 얘기가 있어. 잠깐 내 말 좀…….”
“하지 마.”
“…….”
“말하지 마.”
강압적인 어조에 해완은 멈칫했다. 강현은 그의 손목을 내리누른 채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한 글자 한 글자를 해완의 가슴에 끌로 두들겨 새겨 넣듯이 말했다.
“날 떠나려고 하는 거라면 그게 어떤 말이든.”
“…….”
“절대 하지 마.”
조금의 망설임도 없는 낮고 짙은 목소리에 해완은 눈조차 깜빡이지 못했다. 홀리기라도 한 것처럼 그 어두운 눈에서 시선을 뗄 수가 없었다.
강현은 천천히 몸을 낮췄다. 얼굴이 가까워지며 날카로운 코끝이 스쳤다. 강현은 얌전해진 해완의 입술에 입술을 맞댄 채 가만히 속삭였다.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적어도 지금은 아니야.
강현의 그 말이, 주문처럼 해완의 몸과 마음을 깊게 옭아매는 것처럼 느껴졌다.
그와 동시에 해완은 모든 저항을 멈췄다. 제 밑에 깔려 있는 해완의 온몸이 느슨해짐을 느낀 강현은 곧바로 그의 입술부터 집어삼켰다. 해완이 더 이상 벗어나려고 하지 않는데도 까딱할 수 없게 온몸을 내리누른 채였다.
강현은 굶주린 사람처럼 해완의 입술과 혀를 물고 빨았다. 마치 먹이를 잡은 포식 동물처럼 그의 손목을 꽉 잡아 쥔 채로 연한 입 안을 마음껏 헤집고 맛봤다. 입술이 금세 아리고 얼얼해졌지만 해완은 그냥 강현이 하고 싶은 대로 하도록 두었다. 그렇게 해 주고 싶었다.
그와 동시에, 믿기지 않게 크고 단단하게 부풀어 오른 강현의 중심이 다리 사이에 와 닿는 감촉이 선명하게 느껴졌다.
같은 것을 느꼈는지 눈을 가늘게 뜬 강현이 입술을 살짝 떼고 허리를 느리게 흔들었다.
“아……!”
해완은 저도 모르게 허리를 튕기며 작게 신음했다. 성기를 압박하고 문지르는 행위는 해완이 자위할 때 자주 쓰는 방법이었지만, 스스로 상황을 통제할 수 없는 지금은 겪어 보지 못한 것처럼 아찔하기만 했다.
강현은 곧바로 다시 키스하며 이번에는 좀 더 강하게 앞섶을 아래로 내리누르며 움직였다. 몸이 자꾸만 제멋대로 튀어서, 맞닿은 입 속으로 연신 신음을 흘렸다. 잔뜩 흥분한 강현이 해완의 손목을 부서질 듯 강하게 붙든 압박감마저 자극으로 느껴질 정도였다.
숨을 제대로 쉴 수가 없어 해완은 연신 숨을 헐떡였다. 거친 키스에 저보다 훨씬 체격이 큰 강현의 몸에 깔려 있으니 호흡이 버거울 만도 했지만, 오로지 그것만이 숨을 쉬기 어려운 이유는 아니었다.
지독하리만치 농염한 강현의 페로몬이, 산소 대신 폐부를 온통 채우고 있었다.
하지만 이상했다. 그 향은 해완이 지금까지 알던 것과 전혀 달랐다. 평소 코끝을 기분 좋게 맴돌던 향내와는 달리 실제로 농도를 가진 것처럼 해완의 온몸 깊숙이 파고들어 전신의 신경을 날카롭게 일깨우고 있었다.
해완은 입을 벌린 채 고개를 뒤로 젖혔다. 강현의 몸에, 그리고 그의 페로몬에 휩싸여 옷을 입은 채로 성기를 비비는 것만으로도 기분이 너무 좋았다.
강현 또한 흥분에 못 이긴 듯 물에 빠진 사람처럼 숨을 거칠고 급하게 몰아쉬었다. 그는 해완의 손목을 쥐고 있던 손을 부드러운 갈색 머리칼로 옮겨 움켜쥐고 목덜미에 얼굴을 묻고는 있는 힘을 다해 허리를 움직였다.
그런데 그때, 강현이 해완의 귀에 대고 신음 섞인 이름을 뱉었다.
“해언아…….”
그것을 듣는 순간 해완은 굳게 감겨 있던 눈을 부릅떴다. 안개 속을 헤매는 듯 몽롱했던 정신을 그 이름이 칼로 베어 낸 것만 같이 느껴졌다.
해완은 강현의 움직임에 흔들리며 멍하니 눈을 깜빡였다. 밑에 가해지는 자극도, 페로몬 향도 그대로였지만 마취라도 된 것처럼 갑자기 아무것도 느낄 수가 없었다.
강현에게 처음으로 안기면서, 해언의 이름으로 불리는 것.
이것이 바로 해완이 끔찍하게 두려워하던, 어떻게든 피하고 싶던 순간 중 하나였으니까.
스스로의 열기에 취한 강현은 얼어붙은 해완을 알아채지 못한 채 정신없이 속삭였다.
“가지 마…… 나랑 같이 있어 줘.”
그럼에도, 아까 강현의 말을 들은 이후부터 그 간절한 목소리에 아니라고 말할 힘은 해완에게는 조금도 남아 있지 않았다.
허공을 향한 눈에서 한 줄기 눈물이 흘러내렸다. 해완은 강현이 자신의 눈물을 보지 못하도록 목을 꼭 끌어안고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작은 움직임이었지만 그것만으로 충분하다는 듯 거친 숨을 내뱉은 강현이 상체를 일으킴과 동시에 해완의 팔을 잡아당겨 엉덩이를 받쳐 들고 안아 완전히 일어섰다.
해완은 깜짝 놀라 반사적으로 강현에게 매달렸다. 아무리 체격 차가 난다 한들 해완 또한 180센티미터의 성인 남자인데도 힘든 기색조차 없이 강현은 그대로 제 침실로 향했다.
강현의 침실은 옅은 조명만이 켜진 채 어둡고 서늘했다. 그리고 해완은 곧바로, 그의 침실 공기에 맴도는 해언의 향을 예민하게 알아차렸다.
그토록 그리워하던 향임에도 불구하고 이 순간만큼은 견디기 어려워 해완은 강현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그러나 강현은 조금 더 그의 향을 맡을 여유를 주지 않고 해완을 침실 중앙에 위치한 커다란 침대 위에 다소 거칠게 내린 채 망설임 없이 몸을 떼어 내고 제 셔츠를 벗어 던졌다.
강현의 벗은 몸은 아름다웠다. 보기 드문 장신인 키만큼이나 뼈대가 굵어 넓은 어깨에 두꺼운 흉통이 도드라졌지만 과하지 않게 적당한 근육이 조각한 듯 올바르게 붙어 있었다.
이 모든 것이 지독히도 현실감이 없어 해완은 강현이 눕혀 놓은 대로 멍하니 그의 움직임만 눈으로 좇았다.
그러나 침대 위로 완전히 올라온 강현이 침대 옆 조명의 조도를 올리려는 듯 손을 뻗는 찰나 해완은 허둥지둥 손을 뻗어 막았다.
“이렇게 하자. 이 정도가 좋아.”
못마땅한지 강현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지만, 그는 곧 별거 아니라는 듯 해완에게 잡힌 손을 얌전히 밑으로 내렸다. 그러고는 누워 있던 해완이 상체를 일으키고 허벅지를 세워 무릎을 꿇을 때까지 팔을 잡아당겼다.
그렇게 해완과 마주 보게 되자 강현은 해완의 니트 밑단을 잡고 천천히 위로 올려 옷을 벗겼다.
고작 상의를 벗은 것만으로도 도망치고 싶게 부끄러웠다. 그런 마음을 읽기라도 한 듯 강현은 해완의 바지춤에 손가락만 건 채로 다시 키스했다.
부드럽고 서늘한 살갗과 살갗이 온전히 맞붙는 느낌에 다시 하반신에 뜨겁게 열이 올랐다. 강현의 앞은 조금도 기세가 죽지 않아 보였지만, 그는 이번에는 한결 참을성 있고 부드럽게 입을 맞췄다.
입술을 떼어 낸 강현은 해완의 가슴을 밀어 다시 눕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제 바지와 드로어즈를 벗어 바닥으로 툭 내려놓았다. 타오르는 얼굴에 해완은 고개를 돌려 버렸다. 어둠 속에서 흘끗 시선을 준 것만으로도, 그의 성기는 이제껏 본 적이 없을 정도로 두껍고 길게 보였다.
갑작스레 발목을 잡는 감촉에 해완은 덫에 걸린 초식 동물이라도 된 것처럼 크게 놀랐다. 그의 발목을 잡고 의도적으로 자신에게 바싹 당긴 강현은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해완의 바지 버클로 바로 손을 내밀었다. 버클을 풀고 바지를 벗기려는 강현에게 해완은 저도 모르게 애원하듯 말했다.
“강현아, 잠깐만…….”
그러나 봐줄 생각은 없었던 듯, 강현은 해완의 바지와 속옷을 한꺼번에 쥐고 단번에 끌어 내려 벗겼다. 벗겨진 하반신에 와 닿는 서늘한 공기에 해완은 경련을 일으키듯 몸을 파르르 떨었다. 아까 험핑을 하며 애액이 흘러 젖은 밑부분 때문에 더욱 싸늘하게 느껴졌다.
부끄러웠다. 부끄러워서 죽을 것 같았다. 오메가로 발현한 이후 다른 사람 앞에서 이렇게 알몸이 된 건 처음이었다. 여러 명이 욕실을 함께 써야 하는 보육원에 살았지만, 제게 향이 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된 이후 옷에서 나는 섬유 유연제의 향이라도 없으면 장애가 더욱 두드러질까 무서워 해완은 샤워도 아주 이른 아침이나 늦은 밤에 혼자 하는 버릇을 들였었다.
그런데 이렇게, 마음의 준비도 되지 않았는데 강현의 앞에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고 온몸이 노출된 채 누워 있는 게 감당이 되질 않았다.
얼굴에 터질 것처럼 오른 열 때문에 눈물까지 고였다. 그나마 방이 어두운 것이 다행이었다. 이렇게 어둡지 않았다면 견디지 못하고 도망쳤을지도 몰랐다.
순간 강현의 커다란 손이 다짜고짜 오므리고 있던 해완의 다리를 힘을 주어 벌렸다. 그리고 그는 손을 깊게 넣어 해완의 젖어 있는 뒷구멍을 만졌다.
해완은 거의 튀어 오르듯이 놀라며 정신없이 몸을 뒤로 물렸다. 과한 반응에 강현도 깜짝 놀라 그 까만 눈을 크게 뜬 채 해완을 바라보았다. 거의 제정신이 아니었던 해완은 횡설수설 변명을 했다.
“가, 갑자기, 그렇게 만지면 어떡해……!”
그러자 강현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찡그리더니 되물었다.
“다른 남자들은 어떻게 해 줬는데?”
“뭐……?”
“다른 남자들이랑 잘 때는, 어떻게 해 줬냐고.”
이해가 가지 않는 강현의 말에 해완은 굳어 있다가,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그게 무슨…….”
해완의 얼떨떨한 목소리에 강현은 잠시 말이 없다가 머리를 쓸어 올리며 낮게 말했다.
“말했잖아. 네가 아니면 다른 사람의 향은 역겨워서 견딜 수 없었다고.”
그렇게만 말하고 강현은 답은 네가 찾으라는 듯 해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리고 바로 온 어떤 깨달음에 해완은 바보같이 입을 반쯤 벌리며 숨을 몰아쉬었다.
강현도 누군가와 관계를 가진 경험이 없다고, 그는 그렇게 이야기하고 있었다.
뭐라 대답해야 할지 몰라 해완은 입만 몇 번 벙긋거렸다. 저처럼 결함이 있는 사람이라면 모를까 강현처럼 매력적인 알파가 경험이 없을 것이라 상상도 하지 못했다. 사실은 떠올리는 것만으로 마음이 따끔해 깊이 생각해 본 적도 없었다.
그러나, 해완에게 상처를 주었던 타인의 편견과 제가 똑같은 생각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자 심장이 서늘해졌다.
해완은 급하게 말하려 했다. 괜찮다고, 그런 건 중요하지 않다고, 나도 그렇다고 그렇게 말하려던 찰나,
“네가 다른 남자들이랑 잔 거 알아.”
강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해완은 한 번 더 굳어 버렸다. 강현은 어둠 속에서 천천히 말했다.
“8년 전에 이미 얘기했잖아. 나랑 만나지 않는 동안에도 그랬을 거고. 이해해. 그게 당연한 거고.”
“…….”
“그러니까 말해도 돼. 어떻게 해 주는 게 좋은지.”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약한 실소를 흘렸다. 어떻게 또 잊어버릴 수가 있는지 기가 막힐 정도였다.
이 자리에, 강현이 함께 있는 사람은 해완이 아니라 해언이라는 것을.
그가 8년 동안이나 기다린 첫사랑이라는 것을.
토할 것처럼 거세게 뛰던 심장이 사라져 버린 듯 조용해졌다. 비참하거나, 슬프다거나 하는 그런 감정도 전혀 들지 않았다. 해완에게는 그런 느낌을 가질 자격도 없었다.
해언의 이름을 뒤집어쓰고 그렇게 해서라도 강현을 제 옆에 두고자 했던 것은 해완 그 자신이었으면서, 이런 순간 제 이름으로 불리기를 원하는 것은 말도 안 되는 기만이었다.
손을 뻗어 강현의 볼을 감쌌다. 그리고 조용히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해완의 행동에 손안에 놓인 강현의 얼굴이 살짝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강현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싼 채 해완은 아주 조용히 속삭였다.
“그냥, 네가 하고 싶은 대로 하면 돼.”
“…….”
“네가 하고 싶은 거 전부, 나한테 다 해도 돼.”
그 말이 신호라도 된 것처럼 강현이 해완에게 깊게 키스하며 몸을 짓눌러 눕혔다.
실오라기 하나 걸치지 않은 나신이 한 치의 틈도 없이 바싹 붙었다. 그럴 리 없는데도 맞닿은 몸 구석구석이 불붙은 듯 뜨겁게 느껴져 해완은 끙끙대며 몸을 뒤쳤다.
해완의 아랫입술을 한 번 아프게 깨물고서 떨어진 강현은 턱선을 베어 물며 귓가로 이동했다. 날카롭고 서늘한 코끝을 페로몬 향이 짙게 풍기는 목선에 문지르며 깊게 숨을 들이쉬고는 도톰한 귓불을 빨고 귓가와 목덜미의 연한 피부를 입술로 살살 달래다가 힘을 주어 빨고 깨물었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해완은 비음이 섞인 숨을 뱉으며 몸을 파르르 떨었다. 민감한 반응에 강현도 고무된 듯 숨이 거칠어졌다. 그는 해완의 목덜미와 귀를 입술로 계속해서 애무하며 곧바로 손을 다리 사이로 미끄러뜨렸다.
“아!”
힘을 주어 성기를 움켜쥐는 커다란 손에 해완은 허리를 크게 튕기며 반사적으로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강현의 두꺼운 몸을 사이에 두고는 불가능한 일이었다.
강현은 한쪽 팔로 제 몸을 지탱하고 집요하게 해완의 반응을 살피며 이제 완전히 발기해 끄트머리에서 액을 뚝뚝 흘리는 성기를 쥐고 위아래로 거칠게 문질렀다. 강약 조절 없이 기둥을 쓰다듬고 귀두까지 사정없이 문지르는 바람에 해완은 몸을 뒤치며 거의 자지러졌다.
“응! 그, 그만, 가, 갈 것……!”
해완이 금방이라도 사정할 것처럼 목소리를 높이자 그제야 강현은 손을 떼었다. 한 번도 남의 손길이 닿아 본 적 없는 몸에는 견디기 힘든 자극이었고, 몸이 제멋대로 잘게 떨렸다.
색이 연하고 부드러워 보이는 음모 사이로 단단하게 솟아오른 해완의 분홍빛 성기가 납작한 아랫배 위로 착 올라붙었다. 번들거리는 성기가 하얀 피부까지 젖게 하는 것을 보며 붉어진 입술을 핥은 강현은 젖은 손을 내려 제 좆을 몇 번 문지르는가 싶더니, 망설임 없이 손을 벌어진 다리 사이로 깊숙이 밀어 넣어 곧바로 회음부부터 구멍까지 손으로 문지르기 시작했다.
“아, 아!”
숨을 돌릴 틈도 없이 가해지는 자극에 해완은 고개를 뒤로 젖히며 크게 신음했다.
그런데 문득, 얼굴을 보고 할 수는 없다는 생각이 들었다. 능숙한 척은 하지 못해도 낯선 티는 내지 말아야 했다. 하지만 얼굴을 보이고서는 도저히 감출 자신이 없었다.
그러한 생각이 삽시간에 강박처럼 뇌를 사로잡았다. 해완은 자꾸만 다리 사이로 파고드는 강현의 손을 떼어 내기 위해 발버둥을 쳤다.
강현이 순간 멈칫하자, 해완은 몸을 뒤로 물리려 애쓰며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엎드려서 할래, 엎드려서 하고 싶어.”
그 말에 그는 살짝 눈썹을 찡그렸다가 별거 아니라는 듯 대답했다.
“그래. 그렇게 해.”
강현은 해완이 자세를 바꿀 수 있도록 그의 다리 사이에서 몸을 뒤로 뺐다. 혹시라도 마음이 바뀔까 싶어 해완은 곧바로 몸을 뒤집어 엎드려 누웠다.
해완은 부들부들 떨리는 두 손으로 베개 끝을 꼭 움켜쥐고 고개까지 파묻었다. 그때 강현이 갑자기 골반을 쥐고 강하게 잡아당겼다. 깜짝 놀란 해완이 둥그레진 눈으로 홱 뒤를 돌아보자, 어스름한 빛 안에서 무표정한 얼굴을 한 그가 낮게 중얼거렸다.
“……그렇게 바싹 엎드리면 내가 움직이기 힘들 것 같아서.”
강현은 해완이 상체를 낮추고 엉덩이를 위로 올린 자세가 될 때까지 망설임 없이 잡아당기고는 무릎으로 모아진 다리 사이를 갈라 벌리게 했다.
뒤가 지나치게 노출되는 듯한 느낌에 해완은 낑낑대며 몸을 앞으로 빼려 했지만, 강현은 해완의 엉덩이를 억세게 움켜쥐어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러고는 해완의 엉덩이를 꽉 쥐고 엄지손가락으로 볼기를 잡아당겨 깊숙한 틈이 훤히 보이게 만들었다.
강현이 무엇을 하고 있는지 느낀 순간 해완은 기겁하며 손을 뒤로 뻗으며 외쳤다.
“하, 하지, 하지 마!”
스스로도 한번 만져 보거나 들여다본 적 없는 부분이 강현의 눈앞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폭발적으로 차오르는 수치심에 머리가 터질 것같이 무겁고 귓속에는 날카로운 이명이 가득 울릴 정도였다.
그러나, 아랑곳없이 해완의 저항을 손쉽게 틀어막은 강현이 낮게 중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구멍이 예쁘네. 한 번도 안 써 본 것 같아.”
흥분으로 숨을 헐떡이면서도 이상하리만치 흥미롭게 느껴지는 말투였다.
굳게 다물려 있는 구멍으로 곧바로 강현의 손가락이 밀려 들어왔다. 반사적으로 소리를 지를 뻔한 걸 해완은 베개에 얼굴을 묻어 간신히 삼켰다.
침입을 거절하는 것처럼 빠듯하게 물려 있는 구멍을 억지로 밀어 연 손가락이 천천히, 천천히 안으로 들어왔다가 밖으로 빠져나가는 것을 반복했다.
아팠다. 원래 손가락만 넣어도 이렇게 아픈 건지, 강현의 손가락이 유난히 길고 마디가 두꺼운 탓인지 알 수가 없었다.
“아, 아…….”
해완은 끙끙 앓으며 하릴없이 베개에 이마를 비볐다. 강현이 곤란한 듯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손가락 하나만으로도 너무 좁은데. 끝까지 넣을 수 있을지 모르겠어.”
말은 그렇게 하면서도, 갑자기 손가락을 빼낸 강현은 이번에는 두 개의 손가락을 강제로 밀어 넣었다.
이번에도 비명을 지를 뻔한 것을 피가 비치도록 입술을 깨물어 삼켰다. 아픔은 전혀 가시지 않았지만 등허리에 이따금씩 와 닿는 입술과 몸을 쓰다듬는 손길이 자못 부드러워서 간신히 견뎠다.
처음인 것치고 강현은 제법 참을성 있게 해완의 뒤를 풀어 주려 했다. 그러나 곧, 제 손가락이 구멍을 벌리고 드나드는 모양에 자극을 참기가 어려운지 엎드려 있는 해완에게도 들릴 정도로 거친 숨을 내쉬거나 제 성기를 문지르며 얕은 신음을 뱉기도 했다.
손가락이 아무리 드나들어도 이물감은 여전했지만, 약간 시간이 흐르자 해완의 배 속 깊은 곳에서도 무언가 지글거리며 끓는 듯한 야릇한 느낌이 들기 시작했다.
그리고 강현의 손가락이 내벽 어딘가를 긁는 찰나, 해완은 저도 모르게 몸을 바싹 긴장시키며 새된 신음을 뱉었다.
“으응! 아!”
해완의 몸속을 쑤시던 강현의 손가락의 움직임이 멈췄다. 스스로의 신음을 듣고 깜짝 놀란 해완은 시트를 쥔 손을 옮겨 제 입을 틀어막았다.
순간, 뒤를 꽉 메우고 있던 강현의 손가락들이 단번에 빠졌다. 허전함에 몸을 떨기 무섭게 강현은 해완을 깔고 엎드린 채 그의 귀에 대고 으르렁대며 속삭였다.
“……더는 못 참겠어.”
그 말이 무슨 뜻인지 이해하기도 전에 몸을 일으킨 강현이 다시 한번 해완의 골반을 강하게 잡아당겨 팔뚝과 무릎으로 몸을 지탱하며 엎드리도록 만들었다.
얼굴 옆으로 무언가 툭 떨어졌다. 머리가 온통 흐릿한 와중에도 해완은 그것이 콘돔 포장지임을 깨달았다.
그리고 강현은, 한계까지 발기해 있던 좆을 그대로 해완의 뒤에 삽입하기 시작했다.
해완은 두 눈을 꽉 감고 입을 크게 벌리며 소리가 되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세 개, 혹은 네 개나 되는 손가락들이 이미 드나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강현의 좆은 입구를 찢어 버릴 것처럼 크고 두껍게 느껴졌다.
“윽, 힘 좀, 빼 봐. 응?”
강현 또한 버거운지 쉽게 움직이지 못하고 해완의 등허리를 문지르며 힘을 빼도록 달래려 애썼지만,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벼락이라도 맞은 듯 온몸이 벌벌 떨렸다. 생리적인 눈물이 가득 고였지만 의식조차 못 했다. 도저히 들어갈 것 같지 않아 해완은 고개를 마구 저으며 강현에게 애원했다.
“아, 안 돼, 안 들어, 안 들어가…….”
하지만 강현은 그 희미한 애원을 들어주지 않았다. 해완의 엉덩이를 멍이 남을 정도로 꽉 움켜쥔 그는 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조금씩 제 물건을 좁은 틈에 끝까지 밀어 넣었다.
“으응, 아파, 아파아……. 흑……흐윽…….”
결국 해완은 울음을 터트렸다. 이미 가득 찬 것 같은데, 더는 들어올 수 없을 것 같은데 자꾸만 무언가가 밀려 들어왔다. 배 속이 통째로 꿰뚫리는 듯한 느낌에 해완은 헛구역질까지 했다. 발기해 쿠퍼액까지 흘리고 있던 성기는 고통 때문에 부드러워진 지 오래였다.
겨우겨우 뿌리까지 밀어 넣었지만 강현도 쉽게 움직이지 못했다. 그는 몸을 낮춰 해완의 귓가와 어깻죽지에 입을 맞추고 등허리와 마른 배를 쓰다듬어 주며 달래려고 애썼다.
그 부드러운 제스처에 해완의 울음이 잦아든 것을 느낀 순간, 강현은 다시 몸을 세워 해완의 골반을 움켜쥐고 허리를 앞뒤로 움직이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조심스러웠으나 곧 움직임이 거칠어졌다. 사정없이 부딪치는 단단한 허벅지에 퍽퍽 앞으로 밀리는 몸을 시트를 쥐고 간신히 버텼다.
으윽, 헉, 강현의 짐승 같은 숨소리가 점점 높아졌다. 해완 또한 벌어진 입에서 신음을 흘리고 있기는 했지만, 쾌감이라기보다는 뒤에서 오는 지독한 압박감과 쓰린 고통 탓이라고 해야 옳았다.
머리가 엉망진창이었다. 지독한 안개가 낀 것처럼 주변이 온통 흐렸는데, 두꺼운 허벅지와 엉덩이가 철썩이며 맞붙는 느낌이 그나마 간신히 정신을 붙들게 만들었다.
구멍에서 흐른 애액이 마찰에 질척이는 소리가 들렸다. 거칠디거친 두 사람의 숨소리가 적막한 침실을 가득 메웠다. 한계까지 벌어진 구멍에 드나드는 성기의 움직임이 무섭도록 선명하게 느껴졌다.
순간, 제가 강현에게 범해지고 있다는 사실이, 온몸으로 다가왔다.
아까 손가락으로 쑤셔질 때 느꼈던 야릇한 느낌이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깊은 곳에서 갑자기 고개를 쳐들었다. 지금까지 살며 해완이 느꼈던 얕은 쾌감과는 다른 종류의 것이었지만, 경험이 없는 그로서는 보다 익숙한 것을 찾아 자기도 모르게 손이 앞으로 갔다.
해완은 더듬거리며 내린 손으로 제 성기를 쥐고 흔들었다. 완전히 부드러워졌던 그것은 고통과 쾌감의 사이에서 반쯤 단단해져 있었다. 강현이 너무 강하게 부딪치며 몸을 흔들어 대는 통에 몇 번이고 성기를 놓치면서도 필사적으로 쥐고 문질러 어떻게든 쾌감을 찾아보려 했다.
그런데 갑자기, 제 성기를 쥐고 있던 해완의 손목이 거칠게 잡아 치워졌다.
깜짝 놀라 힉, 하고 숨을 내뱉기 무섭게 강현이 제 물건을 삽입한 채로 해완의 몸을 잡아 돌렸다. 그러곤 다리를 넓게 벌려 사이에 자리 잡고 두 손을 머리 위로 옮겨 한꺼번에 붙들었다.
해완의 튀어나올 듯 둥그레진 눈이 강현의 것과 똑바로 마주쳤다. 평소 뜻을 알 수 없던 그 어두운 눈동자가 활활 불타고 있었다.
그 까만 눈 안에 담겨 있는 것은 오로지 해완뿐이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전신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땀에 젖어 뿌리까지 새카매진 구불거리는 머리칼에서 땀이 뚝 떨어졌다. 강현은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못 느끼고 있잖아.”
강현의 말에 해완은 아무 대꾸도 하지 못하고 입만 몇 번 벙긋거렸다. 그 반응을 긍정으로 받아들였는지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간 강현이 해완을 품에 가두듯이 몸을 바싹 낮췄다.
하지만 해완의 몸을 정말 움직이지 못하게 만든 것은 손목을 움켜쥔 강현의 악력이 아니라 주체할 수 없는 욕망과 흥분이 엉망으로 뒤섞인 그의 눈빛이었다.
그 눈빛이 온전히 저를 향하고 있다고 생각한 순간 갑자기 하반신 전체가 뭉근하게 뻐근하고 욱신거렸다. 해완은 저도 모르게 숨을 헐떡였다.
그때, 강현이 갑자기 허리를 높게 올려 깊게 쑤셔 박혀 있던 좆을 아슬아슬하게 끝까지 꺼냈다가 단번에 뿌리까지 처박았다.
“아윽! 응!”
마찰로 부어오른 구멍을 크게 벌리고 들어오는 물건에 해완은 고개를 뒤로 쳐들며 비명과도 같은 신음을 흘렸다.
강현은 해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같은 동작을 몇 번 반복했다. 좆이 입구까지 나왔다가 배 속으로 파고들 때마다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손끝 발끝까지 짜릿해 해완은 잡혀 있는 손과 팔을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뒤틀어 댔다. 그러자 강현은 굳게 잡고 있던 손목을 놓아주고 대신해서 양손을 깍지 껴서 잡았다.
그 상태로 강현은 해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닿을 수 있으리라 생각도 해 본 적 없는 깊은 곳까지 끊임없이 밀려 들어왔다.
강현의 몸통을 사이에 둔 다리가 활짝 벌어져 힘없이 퍽퍽 흔들렸다. 해완은 입을 다물 생각도 하지 못하고 강현의 눈을 바라보며 헐떡거렸다. 벌어진 입에서 침이 흘러내리고 연신 새된 신음이 흘러나왔지만 의식조차 하지 못했다.
순간 해완은 모든 것을 잊어버렸다. 제 안에 자꾸만 밀려 들어오는 강현의 몸과 닿아 있는 온기, 그리고 저를 온전히 담고 있는 그 까만 눈동자만이 세상에서 제일 중요한 일인 것만 같았다.
그렇게 모든 것을 잊고 비워 둔 자리에, 적어도 강현과 닿아 있는 몸만은, 그가 안고 있는 것만은 진짜라는 괴상한 안도감이 넘칠 듯이 차올랐다.
해완은 입을 열었다. 치받아 오는 강현의 몸에 거세게 흔들리느라 숨조차 제대로 쉴 수 없으면서도, 단어 하나조차 내뱉기 어려워 연신 말을 더듬으면서도 하지 않을 수 없었다.
“기분, 좋아? 내, 모, 몸, 기분 좋아?”
그러자 강현의 험한 움직임이 문득 고요해졌다. 그는 잠시 해완의 눈을 바라보다가 몸을 깊게 낮춰 귓가에 대고 그르렁대듯이 속삭였다.
“좋아, 미칠 것처럼, 좋아.”
그 대답에 마음이 뿌듯하게 차올라, 해완은 저도 모르게 활짝 웃었다. 그러자 강현은 해완의 오른쪽 목덜미에 고개를 완전히 파묻은 채 다시 허리를 거칠게 놀리기 시작했다.
눈을 질끈 감은 해완은 강현의 목덜미를 매달리듯 껴안았다. 얼굴을 볼 수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아까 뒤에서 엉덩이만을 든 채로 박힐 때와는 느낌이 전혀 달랐다.
땀에 젖은 몸이 바싹 붙어 태생부터 하나였던 것처럼 함께 움직였다. 짙은 페로몬 향이 숨을 쉴 때마다 따라붙었다. 맞닿은 피부에서 나누어지는 열기가, 그들을 둘러싼 공간이 흐려지고 서로의 몸에서만 찾을 수 있는 자극이, 그렇게 세상에 둘만 존재하는 듯한 벅찬 고립감이, 그 모든 것이 압도적이어서 미쳐 버릴 것 같았다.
“아, 아아, 으응, 흑, 응!”
난생처음 겪는 충격과도 같은 쾌감에 해완은 울음인지 신음인지 모를 소리를 강현의 귀에 쏟아 냈다. 그 신음 소리를 듣자 강현은 날카롭게 숨을 들이켜더니 고삐가 풀린 듯 사정을 봐주지 않고 미친 듯이 허리를 위로 쳐올렸다.
해완은 깍지 껴 잡고 있는 강현의 손이 유일한 구명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연신 더듬어 잡고 또 잡으며 신음하고 몸을 뒤트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아아!”
그렇게 정신없이 흔들리던 어느 순간, 눈앞이 새하얗게 변했다. 깜빡여 봐도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해완은 그대로 앞을 만지지도 않고 절정에 달했다.
강현의 성기를 이미 빠듯하게 물고 있던 구멍이 거의 끊어 낼 듯 격렬하게 수축했다. 강한 압박감에 강현도 더 버티지 못했다. 딱 한 번 더 처박은 것만으로 강현은 발작이라도 일으키듯 거친 숨을 들이켜고 경련을 일으키며 울컥 사정했다.
겹쳐진 몸이 누구라 할 것 없이 벌벌 떨렸다. 처음으로 겪은 강렬한 오르가슴에 두 사람 다 바로 움직이지 못했다. 그러나 해완의 몸을 완전히 깔아뭉갠 것을 의식하고 간신히 몸을 일으킨 강현이 떨리는 손으로 콘돔을 처리하고 옆으로 털썩 누웠다.
그렇지 않아도 약간 숨을 쉬기 어려웠던 해완은 강현의 뜨거운 몸이 주고 있던 압박이 사라지자 숨을 몰아쉬며 눈을 감았다.
잠시 후, 갑자기 축축한 무언가가 몸에 와 닿는 느낌에 해완은 깜짝 놀라 눈을 번쩍 떴다.
“쉬, 그냥 자도 돼.”
물수건을 손에 든 강현이 낮게 말했다. 그는 해완의 몸을 닦아 주고 있었는데, 샤워도 하고 왔는지 가운을 입은 채 젖은 머리를 뒤로 넘긴 상태였다.
잠깐 눈을 감았다고 생각한 것이 잠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해완이 가물거리는 눈으로 마냥 보기만 하자, 강현은 말없이 들고 있던 물수건으로 그의 몸을 거듭 닦아 주기 시작했다. 따뜻한 물수건이 피부를 부드럽게 오가는 느낌에 다시 잠이 몰려왔다.
하지만, 꼭 해야 할 말이 있었다. 해완은 야속하게 자꾸만 내려앉는 눈꺼풀을 어떻게든 떠 보려고 안간힘을 쓰며 웅얼거렸다.
“강현아……. 아까 내가 한 말…….”
강현이 그의 말을 뚝 끊었다.
“아무것도 안 물어볼 거야.”
“…….”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할 필요 없어.”
알았지? 그렇게 되물으며 강현이 해완을 향해 웃어 보였다. 달콤한 말과 표정에 휩싸여, 해완은 어린아이처럼 안심한 채로 눈을 감았다.
* * *
해완은 휑하니 비어 있는 침대에서 혼자 눈을 떴다.
암막 커튼이 쳐진 침실 안은 시간조차 짐작할 수 없어 허둥지둥 몸을 일으켰다. 잘 정돈되어 있는 옆자리는 비워진 지 오래인 듯 싸늘했다.
문득 불안해진 해완은 침대 밖으로 나가려다 제가 무엇도 입고 있지 않음을 깨닫고 멈칫했다. 몸을 덮은 시트를 어설프게 쥔 채로 바닥을 살펴보았지만 어젯밤 강현이 벗겨 낸 옷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어쩔 줄 모르고 주위만 휘휘 둘러보던 해완의 눈에 방 안 욕실 문에 걸린 샤워 가운이 들어왔다.
일단 저걸 입는 것 말고는 방법이 없을 듯했다. 조심스럽게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딛고 몸을 일으키려던 찰나, 하반신에 느껴지는 통증에 해완은 휘청하며 엉거주춤한 상태로 간신히 섰다.
어제 혹사당한 허리와 허벅지 근육이 비명을 질렀다. 내내 무리한 각도로 벌어져 있던 고관절도 욱신거렸다.
그러나 무엇보다 그를 당황스럽게 만든 것은 처음으로 남자를 받아 본 구멍에서 느껴지는 날카롭고 화끈한 쓰림이었다.
그래도 이 방 안에 벌거벗은 채 하염없이 서 있을 수는 없어, 해완은 다리를 억지로 끌고 걸어가 샤워 가운을 입고 조심스럽게 방문을 열어 거실로 나왔다.
햇볕이 가득 비춰 드는 거실에 눈이 부셔진 그는 인상을 찡그리며 잠시 멈춰 섰다.
“일어났어?”
어디선가 목소리가 들려왔다. 화들짝 놀란 해완이 고개를 돌리자 아일랜드 식탁 앞에 앉아 있는 강현이 보였다.
커피를 마시고 있었던 듯 잔을 앞에 둔 강현은 이미 말쑥하게 차려입은 상태였다. 순간 막 자다 나와 엉망일 제 꼴을 의식한 해완은 확 얼굴을 붉혔다.
그런 해완의 마음을 읽은 듯 강현이 입을 열었다.
“네 옷은 지금 세탁하고 있어. 그동안 씻고 싶으면 씻어도 돼. 침실 욕실에 칫솔이랑 가져다 놨어.”
강현의 목소리는 평온했지만, 괜히 그의 얼굴을 바라볼 수가 없어 작게 고맙다고 중얼거리곤 허둥지둥 방 안으로 돌아왔다.
안 그래도 어제 씻고 자지 못한 게 신경 쓰였던 터라 해완은 곧바로 침실 안 욕실로 향했다. 뜨거운 물 밑에 서자 잔뜩 성이 나 있던 근육이 조금은 풀어지는 기분이라 더욱 다행인 일이었다.
몸을 다 씻고도 머뭇대던 그는 조심스럽게 손가락을 뒤로 미끄러뜨렸다. 슬쩍 만진 것만으로도 손끝에 부어오른 입구가 느껴졌다. 쓰린 아픔보다도 어젯밤 강현의 물건이 제 속을 드나들었다는 생각에 한 번 더 얼굴에 열이 올랐다. 화끈거리는 얼굴을 식히기 위해 차가운 대리석 벽에 이마를 기대고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머리의 물기를 수건으로 대충 털어 낸 뒤 다시 샤워 가운을 입고 거실로 나오자, 강현은 이번에는 아일랜드 식탁 앞에 비스듬히 기대어 선 채 태블릿 PC로 무언가를 보고 있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든 강현은 아무 말도 없이 그를 빤히 바라봤다. 그 시선을 의식한 해완은 온몸이 삐걱대는 기분이 들어 저도 모르게 멈춰 서 버렸다.
강현은 그런 해완을 조금 더 바라보다가, 낮게 말했다.
“왜 그러고 서 있어. 이리 가까이 와.”
해완은 입술을 깨물고 천천히 한 발짝씩 옮겼다. 다리 사이나 근육이 아파서이기도 했지만, 고작 하룻밤 만에 세상이 뒤바뀐 것처럼 느껴지는 저와는 달리 강현이 너무 아무렇지도 않아 보여서 이상하게 가슴이 욱신거렸다.
그러나 곧 멍청하게 굴고 있는 건 자신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아무리 첫 경험이라 한들 저나 강현이나 사춘기 10대 소년인 것도 아니지 않은가.
게다가 냉정하게 말해, 강현은 해완이 처음이었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쓰린 속을 애써 삼키며 강현의 앞에 섰다. 눈은 사선으로 내리깐 채였는데, 강현의 커다란 손이 해완의 볼을 감싸 제게 눈을 맞추게 만들었다.
“몸은 괜찮아?”
사뭇 다정한 물음에, 굳어 있던 마음이 사르르 풀렸다. 그런 스스로가 어처구니가 없었지만 제 마음이 멋대로 움직이는 것에야 방법이 없었다.
“……응, 괜찮아.”
그러자 강현이 해완을 향해 씩 웃어 보였다. 그 웃는 얼굴을 보는 순간, 위축되어 있다 느슨해진 마음속으로 넘칠 듯이 애정이 차올랐다.
해완은 충동적으로 강현에게 가까이 다가서 그를 껴안았다. 강현 또한 곧 팔을 들어 해완의 등을 감싸 안았다.
넓은 어깨에 잠시 고개를 묻고 있다가 얼굴을 살짝 옆으로 트니 강현의 오른쪽 목덜미에서 나는 페로몬 향이 강렬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문득, 코에 와 닿는 향이 뭔가 다르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주, 아주 미세하고 작은 차이였다. 이렇게 가까이 붙어 있지 않았으면 눈치챌 수 없는 그런 것이었다. 그냥 어떤 ‘느낌’, 혹은 ‘뉘앙스’라고 말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는데, 해완이 알던 강현의 향보다 묘하게 가볍고 섬세한 무언가가 스며든 것만 같았다.
해완은 강현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는 무심결에 킁킁댔다.
“지금 내 냄새 맡는 거야?”
강현이 웃음기 섞인 목소리로 물었다. 민망해진 해완은 반사적으로 몸을 뒤로 물렀지만 허리에 강하게 감긴 팔 때문에 가슴팍만 뒤로 빼는 게 고작이었다.
“그게, 뭔가 좀 다른 거 같아서…….”
해완이 작게 중얼거리자 강현이 고개를 숙이고 픽 웃음을 터트렸다.
“당연하지.”
그리고 그는 해완의 귓가에 대고 깊게 속삭였다.
“내가…… 어젯밤 네 안에 있었잖아.”
강현의 말이 머릿속에 입력된 순간 해완은 또 터질 듯이 얼굴을 붉혔다.
몸을 섞고 나서 페로몬 향이 믹싱되는 것은 지극히 당연한 일이었다. 그래도 어쩔 수 없었다. 이 또한 해완이 알고는 있었지만, 경험해 본 적이 없어 좀처럼 머릿속에 떠오르지 않는 종류의 지식이었다.
그런 생각에 잠시 빠져 있던 해완은 강현의 시선이 제 얼굴에 못박혀 있는 것을 깨닫고는 흠칫 눈을 깜빡였다.
평소였다면 집요한 시선에 쉽게 수줍어했을 테지만, 강현의 주위를 감도는 묘한 분위기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그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 보았다.
조각같이 잘생긴 얼굴도, 쉽게 기분을 드러내 주곤 하던 짙은 눈썹도 그대로였지만 해완의 얼굴 이곳저곳을 유영하는 그 새카맣고 매끄러운 눈동자는 이상하리만치 멀게 느껴졌다.
마치 강현 그 스스로도 알 수 없는 곳을 떠돌고 있는 것만 같았다.
설명할 수 없는 불안감이 마음을 침범했다.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느냐고, 그렇게 물으려던 찰나, 강현이 예고 없이 해완에게 입을 맞췄다.
갑작스러운 키스에 해완은 흡 숨을 들이켰다. 강현은 키스하면서 해완의 몸을 아일랜드 식탁 쪽으로 돌려세우더니, 그대로 엉덩이를 받쳐 들고 안아 올려 식탁에 앉혔다.
한동안 깊게 혀를 섞던 강현은 해완의 목에 키스하며 느슨하게 걸쳐져 있는 샤워 가운의 왼쪽 어깨를 밑으로 쭉 내렸다. 깜짝 놀란 해완이 반사적으로 내려간 가운을 올리려 해 봤지만 그에 아랑곳없이 강현은 몸을 낮춰 노출된 연한 유두를 혀로 핥았다.
“아!”
그곳은 어젯밤 만져진 적이 없었다. 오싹한 느낌에 해완은 몸을 파르르 떨었다. 그러자 미묘하게 미소를 지은 강현이 해완의 팔뚝을 잡아 고정시키고 입 안으로 유두를 빨아들였다.
아래로 삽시간에 피가 쏠려서 몸이 반사적으로 움찔거렸다. 그러나 강현이 유두를 빨며 다리 사이로 손을 넣으려던 찰나 정신이 번쩍 든 해완은 다소 거칠게 강현의 머리를 밀어 냈다.
지금도 충분히 쓰리고 아픈데, 당장 강현의 물건을 받을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강현이 인상을 찡그리며 올려다보았다. 해완은 정신없이 변명을 주워섬겼다.
“나…… 나 지금 몸이 좀 아파서, 조금만 이따가 하자, 응?”
해완의 곤란한 목소리에 강현이 멈칫했다.
“……어제 내가 아프게 해서 그래?”
“그게…….”
그렇다고 하면 강현의 마음이 상할까 해완은 잠시 머뭇거렸다. 그러자 강현이 해완의 볼을 엄지손가락으로 쓰다듬으며 미안한 기색으로 말했다.
“미안해. 널 아프게 만들었는지 몰랐어. 내가 서툴러서…….”
그런 말을 하며 강현은 완전히 해완의 다리 사이에 섰다. 벌어진 다리에 불안해진 해완이 다리를 오므리려 했지만 무릎에 손을 댄 강현이 힘을 주어 막았다.
그는 해완의 볼에 다정히 입을 맞추더니 귓가에 속삭였다.
“그러니까, 이번엔 더 잘해 볼게.”
그리고 강현은 해완에게 다시 깊게 키스하며 가운을 완전히 풀어 내렸다. 강현이 멈출 생각이 없다는 것을 안 해완은 침대로 가자고 애원했지만 그것도 들어주지 않았다.
결국 햇볕이 가득 비춰 드는 아일랜드 식탁 위에서 다리를 활짝 벌리고 앉아 강현에게 한 번 더 안겼다. 피하려 했던 게 무색하게 해완은 쉽게 느꼈다. 강현이 이번에 정말 더 잘해서인지, 이 자세로는 강현에게 마음껏 키스할 수 있어서인지, 그저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 * *
해완은 이유도 없이 화들짝 놀라며 잠에서 깨어났다. 역시나 옆자리는 비어 있었다.
부엌에서 섹스를 하고, 기진맥진해서 꾸벅대는 해완을 강현이 침대까지 안아다 준 기억은 났다.
시트 속의 몸은 역시나 알몸이었지만 이번에는 다행히도 탁자 위에 정갈하게 개어져 놓여 있는 옷이 보였다. 속옷도 맨 위에 잘 놓여 있었는데, 강현이 제 것을 직접 세탁했다는 사실이 괜히 민망했다.
문득, 해완의 머릿속에 오늘이 크리스마스라는 사실이 번개같이 스쳐 지나갔다.
해완은 눈을 동그랗게 뜨고는 허겁지겁 옷을 입기 시작했다. 강현에게 크리스마스 선물로 요리를 해 주기로 했는데 내내 잠만 잤다니 믿을 수가 없었다.
다행히 아직 밖이 밝은 걸 보아 5시 전인 듯했다. 지금 당장 장을 보러 다녀오면 조금 늦은 저녁이 될지언정 아슬아슬하게 끼니에 맞출 수 있을 것 같았다. 여전히 이곳저곳이 쑤시고 아팠지만 해완은 아픔을 참고 행동을 서둘렀다.
방 밖으로 나오자 소파에 앉아 있는 까만 머리칼이 보였다. 설핏 강현이라고 생각한 해완이 그의 이름을 부르려던 찰나,
“윤보리 씨?”
가느다란 목소리가 들렸다. 해완은 그대로 얼은 듯 멈춰 서 버렸다.
소파에 앉아 있던 서연이, 그 새카만 눈을 크게 뜨고 해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서연은 그녀답지 않게 더듬거리며 말했다.
“윤보리 씨 지금…… 강현이 방에서 자다 나온 거예요?”
황당한 빛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는 서연의 표현력이 풍부한 얼굴에 입이 바싹 말라붙었다. 해완은 쉽게 대꾸하지 못하고 입술만 몇 번 달싹였다.
그때 옆으로 다가서는 인기척에 해완은 흠칫 놀라 고개를 돌렸다. 한 손에 음료수를 든 강현이 자연스럽게 해완의 허리를 감싸 안으며 말했다.
“깼어?”
해완은 강현의 한쪽 팔에 안긴 채로 어쩔 줄 모르고 서연과 강현을 번갈아 쳐다보았다. 서연의 얼굴은 이제 당황스러움을 넘어서 거의 경악스럽게 보였는데, 그 자리에 있던 세 사람 중 오로지 강현만이 아무렇지도 않게 태연했다.
“아, 너 자고 있는 사이에 서연 누나가 와서. 가서 소파에 앉아. 뭐 마실 것도 갖다줄까?”
해완의 시선이 서연에 머물러 있는 걸 보고 여상하게 말한 강현은 손에 들고 있는 음료수를 흔들어 보였다.
“……아니…… 난 괜찮아.”
우물쭈물 대답하자 강현은 여전히 해완의 허리에 손을 감은 채로 소파로 걸음을 옮겼다. 얼떨결에 따라 걷기는 했지만 어떤 얼굴로 서연을 봐야 할지 몰라 딱 죽을 맛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소파에 앉자마자 서연은 바로 기가 찬 목소리로 말했다.
“……그래서, 이게 내가 한 달 전부터 말한 약속을 못 지키겠다는 이유야?”
약속? 눈을 바닥에 내리고 있던 해완은 슬쩍 고개를 들어 눈치를 봤다. 강현은 역시나 태연하게 말했다.
“응.”
“그럼 진작에 말해 주든가! 어제라도 말했으면 같이 갈 다른 사람 찾았지!”
“잊어버렸어.”
사정은 잘 몰라도 잘못을 한 쪽은 강현인 것 같은데 지나치게 뻔뻔한 태도였다. 서연은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 입을 딱 벌렸다가, 고개를 절레절레 저으며 이마를 짚었다.
“……됐다. 내가 너 같은 또라이 새끼한테 뭘 바라니.”
중간에서 안절부절못하던 해완은 강현에게 작게 물었다.
“오늘 약속 있었어? 왜 아무 말도 안 했어.”
강현은 해완을 흘끗 보고는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별거 아냐. 얼마 전에 새로 오픈한 파인 다이닝이 하나 있는데, 누나가 거기 가 보자고 해서.”
팔걸이에 기대고 있던 서연이 발끈한 듯 몸을 바로 세웠다.
“야! 거기가 오늘 같은 날 예약하기 얼마나 힘든지 알아? 이게 기껏 지 생각 해서 가자고 했더니, 진짜!”
흥분해 목소리를 높이던 서연은 또 드라마틱하게 손을 내저으며 내가 말을 말지, 하고 씩씩댔다. 강현은 태연하기만 한데 그런 서연을 보는 해완만 괜히 정신이 쏙 빠지는 듯한 기분이었다. 사촌이라기보다는 친남매가 어울릴 정도로 겉모습은 참 닮았는데 속은 저렇게 정반대일 수도 있나 하는 생각도 들었다.
질린다는 듯 강현에게 홱 몸을 돌려 앉은 서연은 갑자기 해완에게 눈을 돌렸다. 노골적으로 쏟아지는 시선에 해완은 초조하게 입술을 깨물었다.
서연은 알쏭달쏭해하는 듯한 말투로 물었다.
“그래서, 이제 윤보리 씨 진짜 이름 물어봐도 되는 거예요?”
갑작스러운 질문에 해완은 눈을 깜빡이다가, 강현과 서연을 번갈아 봤다.
“저는…… 전 그러니까…….”
해완은 머뭇거렸다. 그러고 보니, 제 입으로 윤해언이라고 말해야 하는 것은 처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을 깨달은 순간 왠지 숨이 막혔다. 입 안에 모래가 가득 들어찬 것 같이, 도저히 입이 떨어지질 않았다.
“해언이야. 윤해언.”
그때, 강현이 해완을 대신해 입을 열었다. 서연은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대꾸했다.
“난 또 보리보다 더 이상한 이름인가 했네. 이름 예쁜데 뭘 그렇게 부끄러워해요?”
해완은 시선을 내리깐 채 고개를 끄덕였다. 해완도 그렇게 생각했다. 해언의 이름은 성과 이름 모두 둥근 느낌이라 흔하지 않게 예뻤다. 그래서 보육원 선생님들도 해언의 이름을 따서 해완의 이름을 지은 것이라 했다.
그래서 해완은 자신의 이름도 사랑했다. 누군가는 그 이름 때문에 해완의 가치를 깎아내린 적도 있지만, 가족끼리는 비슷한 이름을 짓는 것처럼 해완이 해언의 유일한 가족이 될 수 있고 해언이 해완의 유일한 가족이 되어 주는 것 같아 두 사람의 이름이 함께 불릴 때면 가슴이 뿌듯하기까지 했다.
하지만 지금 해언의 이름으로 불리며 해완이 느끼는 것은 공허함뿐이었다.
“그래서, 지금 윤보리, 아니, 윤해언 씨랑 둘이 사귀는 거야?”
서연의 직설적인 물음에 해완은 흠칫 정신을 차렸다. 강현은 곧바로 고개를 끄덕이며 대답했다.
“응.”
잠시도 망설이지 않는 강현의 대답에 서연은 묘한 얼굴을 했다. 그녀는 잠시 침묵하다가, 무언가 더 묻고 싶은 듯 입을 벌렸지만 이내 다시 다물어 버렸다. 쉽게도 흥분하던 아까와는 딴판인 모습이었다.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서연은 갑자기 분위기를 바꿔 밝게 말했다.
“재수 없게 커플 사이에 끼어들 수도 없고, 오늘 예약한 파인 다이닝은 둘이 갈래?”
서연의 말에 해완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서연이 예약하기 어렵다 할 정도면 분명 퀄리티가 높은 식당일 터였고, 평소라면 더없이 감사하게 받아들였겠지만 이번에는 상황이 달랐다.
오늘은 크리스마스였다. 다른 날은 몰라도 오늘만큼은 강현에게 직접 요리를 해 주고 싶었다. 제가 해 줄 수 있는 몇 안 되는 것 중에 하나가 그것뿐이라는 생각이 있어서 더욱 그랬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제가 서연에게 거절할 입장은 아니라는 게 문제였다. 해완은 저랑 한 약속을 기억해 주길 바라며 강현을 바라봤다.
그러나, 강현은 해완을 한번 바라보지도 않고 바로 대답했다.
“그럴 수 있으면 나야 좋지.”
요리해 주겠다고 한 것을 완전히 잊어버린 걸까. 해완은 멍해졌다. 강현의 즉답에 서연이 또 황당하다는 듯 물었다.
“너 내가 이렇게 말하길 기다렸지?”
“그런 거 아닌데.”
역시 무심한 대답에 한 번 더 이마를 짚은 서연이 해완을 향해 말했다.
“다이크라고 세 달 전에 새로 연 파인 다이닝인데 외국 유명 셰프가 한국에 처음으로 낸 가게라 요즘 엄청 핫한 데예요. 가서 후회하진 않을 거예요.”
서연의 배려에도 불구하고 서운한 생각이 드는 옹졸한 스스로가 부끄러워져 해완은 섭섭한 마음을 감추고 애써 밝게 말했다.
“그렇게까지 안 해 주셔도 되는데……. 정말 감사합니다.”
해완의 감사 인사에 서연은 처음으로 밝게 미소 지어 보이고는, 더 시간 끌기 싫다는 듯 몸을 일으켰다.
소파에 앉은 채 손만 휘휘 저어 보이는 강현을 억지로 일으켜 현관까지 서연을 배웅하게 했으나 그는 곧 저도 나갈 준비를 해야겠다며 신발을 신는 서연을 두고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서연은 그런 강현의 뒷모습을 향해 욕을 했지만 정말 마음이 상한 것 같지는 않아 해완은 무의식중에 진짜 가족들은 모두 다 이런가 하는 생각을 했다.
그와 동시에, 어젯밤 강현이 가족들에 대해 했던 말이 떠올랐다. 서연만 보면 그렇게 매정한 가족들은 아닐 것 같은데, 그의 말은 전혀 다른 뜻을 표하고 있어 약간 혼란스럽다는 생각이 들었다.
높은 부츠를 신고 몸을 일으킨 서연은 현관을 향해 걸음을 옮기려다, 그때까지 자리를 지키고 있던 해완에게 할 말이 있다는 듯 몸을 돌렸다.
“저기, 오해할까 봐 말해 두는 건데, 나 막 크리스마스 이런 날에 쟤랑 데이트하고 싶어 하는 그런 징그러운 누나 아니에요.”
무슨 말을 할까 긴장하던 해완은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어 버리고 말았다.
“그런 생각 안 해요. 걱정하지 마세요.”
그러자 서연도 미소를 지으며 말을 덧붙였다.
“이런 날 혼자 있을 게 신경 쓰여서 만나자고 한 거예요. 수상하다 생각은 했지만 윤해언 씨랑 사귀고 있는지도 정말 몰랐고.”
그런데, 강현이 혼자일 것이 너무나 당연하다는 듯한 서연의 말이 해완의 가슴에 걸렸다. 과민 반응이라 할 수도 있겠지만 강현의 말이 마음에 남아 있던 해완에게는 쉽게 넘어가지지 않았다.
“……다음에 또 봐요.”
“네. 조심히 가세요.”
그러고도 서연은 잠시 해완의 얼굴을 가만히 봤다. 의문과 호기심이 가득 차 있는 듯한 얼굴에 해완은 멍해졌다. 뭔가를 다시 묻기도 전에, 그녀는 등을 돌려 문을 열고 나가 버렸다.
* * *
크리스마스는 저물어 가는 모습마저 아름다웠다.
서연의 말대로 분위기며 맛이며 모두 더할 것 없이 훌륭한 저녁을 먹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 강현의 차창 밖으로 빠르게 흐르는 야경을 보며 해완은 지난 이틀을 되새겨 보았다.
그야말로 그의 인생에서 존재하리라 상상조차 해 본 적 없는 풍경의 크리스마스였다.
하지만 이 모든 것을 강현에게 받기만 했다는 생각에 절로 얼굴이 어두워졌다.
그사이, 강현의 차가 해완의 집 골목길 앞에 멈춰 섰다. 강현이 기분 좋은 얼굴로 말했다.
“조심히 들어가.”
“응. 데려다줘서 고마워.”
잠시 망설이던 해완은 눈을 내리깔고 조용히 말했다.
“나는 오늘 너한테 아무것도 못 해 줬네.”
“…….”
“정말 미안해.”
해완의 시무룩한 목소리에 강현이 멈칫했다.
“……요리 못 해 줘서 그래?”
강현이 그것을 완전히 잊고 있었다 생각했던 해완이 고개를 돌려 강현을 봤다. 제 생각이 맞았다는 걸 확인한 강현이 입을 열었다.
“잘해 주려고 그런 거야.”
“…….”
“너 아프다고 했잖아. 요리하면 힘들까 봐 그랬어.”
그것은 이브 날에 해완의 빚을 갚아 주겠다고 하던 강현의 말과 같이 일방적인 구석이 있어 해완은 따끔한 마음으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도심의 밤에는 진정한 어둠이 없어서 강현의 찌푸린 얼굴이 선명하게 보였다. 그런데 왜일까,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나쁜 의도로 그러는 것이 아니라 몰라서 그런다는 묘한 확신이 가슴속에 꽉 차올랐다.
이상하게 마음이 애틋해져, 강현의 뺨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알아, 아는데…… 나도 너한테 잘해 주고 싶어서 그래.”
“…….”
“내가 할 수 있는 건…… 너한테 전부 다 해 주고 싶어.”
강현은 수수께끼를 대하는 듯한 얼굴로 해완을 보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해완은 강현의 얼굴을 살짝 잡아당겨 부드럽게 키스했다. 강현은 왜인지 평소처럼 제가 주도권을 잡으려 하지 않고 얌전히 그의 키스를 받았다.
“……갈게.”
해완은 차에서 내려 어둡고 좁은 골목길을 혼자 걸었다.
이전부터 강현과 만나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은 언제나 해완에게 이상한 느낌이 들게 만들었다. 강현이라는 존재와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해완에게는 꼭 환상 같았고, 그것과 정반대의 모습을 하고 있는 현실로 걸어 들어가는 길이니 어찌 보면 당연한 일인지도 몰랐다.
그런데 오늘은 이상했다. 모든 감정이 표백되어 버린 것처럼 마음이 평온하고 덤덤했다.
그것은 어젯밤, 강현을 제 몸 안에 들인 순간부터 시작된 변화였다.
강현에게 제가 해언이라고 믿게 한 그날부터 해완의 마음속에서는 내내 치열한 폭풍이 불고 있었다. 제가 한 거짓말에 대한 죄책감, 강현, 그리고 해언에 대한 미안함, 진실이 드러났을 때에 대한 두려움, 해언의 향을 뒤집어쓰고, 자처해서 해언의 행세를 하고 있는 것에서 오는 자괴감, 그럼에도 조금이라도 강현의 곁에 더 있고 싶어 어쩔 수 없었다고 말하고 싶은 추한 자기변명까지.
그 모든 것이 일으키는 폭풍이 마음을 찢을 듯 괴롭게 만들어서, 당장이라도 고백해 버리고 싶은 순간도 있었다.
하지만 강현의 품에 안겨 해언의 이름으로 불리면서까지 몸이 맞닿는 것만은 진짜라고 여기고 싶은 저를 보며 해완은 저 스스로 놓은 덫에 벗어날 수 없이 깊게 빠져 버렸음을 깨달았다.
쾌감으로 흐릿해진 강현의 새카만 눈이 제 눈과 똑바로 연결된 순간은 누구의 이름도 필요 없었다. 피부에서 온기를 찾는 단순한 욕구를 떠나 그를 이렇게 만족시킬 수 있는 게 그 스스로의 몸이라는 것에서 해완은 이전까지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격렬한 애정과 날것의 욕망을 느꼈다.
집을 코앞에 두고도 걸음을 멈춰 선 해완은 떨리는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스스로에게 하고 싶었던 어떤 변명도 소용없이 인정할 수 있는 것이라곤 오직 하나뿐이라는 걸 깨달은 탓이었다.
제가 하는 짓이 아무리 추해도 상관없었다.
그에게 주어진 짧은 유예 동안 할 수 있는 것은 다 할 것이다.
그 뒤에 어떤 벌을 받고, 어떤 괴로움을 겪든 그것은 그때 가서 감당하겠노라고.
지금 해완이 할 수 있는 생각이라곤, 그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