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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 modificateur (1) (7/18)

6. modificateur (1)

향이 가지는 주요 특징에 변화를 줄 수 있는 원료

지하철역과 학교가 바로 근처에 있는 편의점은 출퇴근 시간이나 등하교 시간에 유난히 붐볐다. 게다가 오늘은 같은 타임에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이 갑작스러운 사정으로 나오지를 못해 두 사람분의 일을 한 번에 처리하느라 정신없이 바쁜 날이었다.

미처 못 끝낸 물류 정리며 손님 상대며 혼이 쏙 빠지게 일한 해완은 아주 잠깐 사람이 빠진 틈을 타 핸드폰을 열었다가, 강현에게서 온 메시지를 보고 얼굴이 환해졌다.

[일 끝날 때 맞춰서 데리러 갈게.]

지난주 크리스마스 이후 3일 만에 보는 것이라, 해완의 얼굴에 어쩔 수 없이 웃음이 피었다.

그때 한 무리의 학생들이 왁자지껄하게 떠들며 편의점 안으로 우르르 몰려 들어왔다. 근방에 있는 중, 고등학교가 끝난 모양이었다. 해완은 정리하던 물품들을 치워 두고 재빨리 카운터 안으로 들어갔다.

학생들이 계산대에 쏟아 두는 간식거리 계산과 요즘 유행하던 캐릭터 빵을 찾아 대는 문의까지 받아 주느라 정신이 없던 와중, 편의점 문에서 나는 딸랑 소리에 해완은 반사적으로 문가를 바라보았다.

강현만큼은 아니어도 키가 큰 남자 한 명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그가 편의점 안으로 발을 들인 순간, 머스크의 부드럽고 파우더리한 느낌과 함께 달콤한 향이 가미된 럼주, 그리고 정체를 알 수 없는 스파이시한 뭔가를 떠올리게 만드는 지극히 도시적이고 세련된 향조의 페로몬 향이 코끝에 감돌았다.

외면할 수 없는 향에 해완뿐만이 아니라 계산대 앞에 서 있던 모든 사람들의 시선이 문을 열고 들어온 남자에게 잡아당기듯이 쏠렸다.

매끈한 실루엣의 연회색 코트를 입은 남자의 시선은 처음부터 계산대를 향해 있었고, 문가를 향해 있던 해완의 눈과 당연히 곧바로 맞닿았다.

그는 해완과 눈이 마주치자마자 그 예민하고 이지적인 얼굴에 씩 미소를 띠었다.

갑작스러운 눈 맞춤에 깜짝 놀란 해완은 재빨리 시선을 피하고 카운터 위에 놓인 물건들의 바코드를 찍기 시작했다.

남자는 천천히 걸음을 옮겨 카운터를 지나갔다. 그러고는 한참이나 북적이는 편의점을 천천히 돌며 물건들을 구경했는데, 왜인지 무엇에도 흥미가 없는 것처럼 보였다.

계산대 앞에 서 있던 줄이 조금씩 줄었다. 아무것도 사지 않는 남자가 신경 쓰여 흘끗 곁눈질을 하자, 저를 보고 있던 남자와 또 눈이 마주쳤다.

해완은 또 바보같이 당황했다. 그가 자기를 쳐다볼 것을 알고 있었다는 듯 남자가 싱긋 웃었기 때문이었다.

이제 고개를 돌리고 있어도 남자가 카운터 쪽을 보고 있음을 알 것 같았다. 저를 보고 있는 건지 뭔지 알 수가 없어 마음이 불편했다. 아는 사람인가 싶었지만 아무리 돌아봐도 기억이 나질 않았고 저런 인상을 쉽게 잊을 수 있을 리도 없었다.

그리고 계산대 앞에 있던 마지막 사람이 문을 열고 나가자, 남자는 그것만을 기다렸다는 듯 해완의 앞으로 뚜벅뚜벅 걸어왔다.

남자가 해완의 앞에 선 순간, 해완은 저도 모르게 긴장해 침을 꿀꺽 삼켰다.

그는 망설이지 않고 입을 열었다.

“혹시 시가 마스터 있나요?”

남자가 요구한 것은 다른 담배들에 비해 고가라 찾는 사람이 별로 없어 진열장이 아닌 카운터 밑에 두는 브랜드였다.

그래서 계산대 쪽을 계속 쳐다봤구나 싶어진 해완은 남자의 시선을 의식한 것이 민망해져 괜히 얼굴을 붉히며 말했다.

“아, 네. 드릴게요.”

해완은 허리를 숙여 담배 한 갑을 꺼내 카운터 위에 올려 두었다.

“칠천 원입니다.”

남자는 지갑에서 카드를 꺼내 내밀었다.

“앞에 있는 카드기에 꽂으시면 됩니다.”

“네?”

어리둥절해 보이는 남자의 얼굴에 해완은 손을 내밀었다.

“카드 이리 주세요. 제가 해 드릴게요.”

카드를 받아 든 해완이 팔을 길게 뻗어 카운터 바깥쪽을 향해 있는 카드 리더기에 꽂자, 남자가 미안한 듯 입을 열었다.

“미안해요. 외국에서 온 지 얼마 안 돼서 좀 낯서네요.”

“아니에요. 그러실 수 있죠.”

계산을 마친 해완은 카드와 담배를 함께 집어 건넸다. 남자는 해완이 건네주는 물건을 받아들며 부드러운 미소와 함께 말했다.

“고마워요. 윤해완 씨.”

남자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에 해완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고개를 들었다.

“제 이름을…… 어떻게…….”

“……저는 서인하라고 합니다.”

그리고 그는, 해완을 똑바로 보며 나긋하게 말했다.

“해언이, 어디에 묻혔는지 알고 싶어서 왔어요.”

순간, 해완의 사고가 정지됐다.

해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제 이름을 서인하라 밝힌 남자의 말끔한 얼굴을 멍하니 보기만 했다.

“윤해완 씨……?”

인하가 의아한 듯 해완의 이름을 부르고서야 간신히 정신이 들었다. 해완은 거칠게 마른세수를 하며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죄, 죄송합니다. 해언이를 이렇게 찾아오신 분이 처음이라 조금 놀라서.”

인하는 이해한다는 듯 고개를 살짝 끄덕이고는 조심스럽게 말했다.

“여기서 이렇게 할 이야기는 아닌 것 같은데, 잠깐 시간 좀 내주실 수 있을까요?”

해완은 시계를 쳐다보았다. 이제 4시를 갓 넘긴 터라 교대까지는 두 시간이 남아 있었다.

“일이 6시에 끝나서 지금 당장은 곤란한데 어떡하죠.”

“그럼 제가 일 끝나실 시간 맞춰서 다시 오면 될 것 같은데……. 괜찮을까요?”

“……네.”

해완의 대답을 들은 인하는 희미한 미소를 한 번 지어 보이고는 짧게 목례를 하고 망설임 없이 돌아서 편의점 문을 향해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얼떨떨한 상태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던 해완은 고개를 홱 치켜들며 급하게 인하의 등을 향해 외쳤다.

“잠깐만요!”

문을 열기 직전이었던 인하가 가벼운 동작으로 뒤를 돌아 해완을 쳐다봤다. 해완은 침을 꿀꺽 삼키고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해언이랑은…… 해언이랑은 어떻게 알던 사이신 거죠?”

인하는 잠시 말이 없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친구였어요. 해언이 미국에 있을 때.”

그는 그 말을 마지막으로 해완을 향해 싱긋 웃더니, 무언가 더 물어볼 새도 없이 편의점 밖으로 나가 버렸다.

혼자 남겨진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해완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 버렸다. 너무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혼란스럽고 아연했다.

해언의 죽음 이후 그를 가장 괴롭혀 왔던 사실 중 하나는 해언의 죽음을 누구에게도 알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그런데 해언의 죽음을 ‘이미’ 알고 있는 인하가 찾아왔다. 그것도 그는 해언이 미국에 있을 때 알던 사이라 했다.

해언이 미국에서 보낸 몇 년은 해완에게 있어선 완전히 수수께끼였고, 앞으로 알 수 있으리라 생각조차 하지 못했던 공백이었으나, 그 시간을 알고 있는 남자가 거짓말처럼 해완의 앞에 나타난 것이다.

게다가, 중요한 사실이 한 가지 더 있었다. 인하는 해언의 향을 풍기는 해완을 보고도 조금도 놀란 기색이 없었다.

그 말은 즉, 페로몬샘 이식 수술에 대해서도 이미 알고 있다는 것이었다.

해언이 병을 진단받은 건 미국에서였으니 시한부라는 걸 알고 있는 것까지는 이해가 됐다. 하지만 해언이 죽은 것은 어떻게 알았는지, 왜 그가 죽고 나서 1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찾아왔는지, 그리고 해언이 죽고 난 다음에 이뤄진 페로몬샘 이식 수술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고 있는 것인지 미심쩍은 점들이 너무나 많았다.

그런데 문득, 해완의 마음을 강하게 조이는 질문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만약 이식 수술에 대해 이야기를 들은 것이 미국에서라면, 해언이는 대체 언제부터 나한테 페로몬샘을 이식할 생각을 하고 있었던 거지?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온갖 의문들이 뇌를 곤죽으로 만드는 것만 같아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해완은 눈을 감고 깊게 심호흡을 했다.

“저기요, 괜찮으세요?”

갑자기 들려온 목소리에 해완은 경기를 일으키듯 놀라며 위를 올려다보았다. 걱정스러운 얼굴을 한 학생 한 명이 카운터를 마디가 희게 서도록 붙든 채 쪼그려 앉아 있는 해완에게 말을 걸고 있었다.

“네, 괜찮아요. 이거 계산해 드릴까요?”

벌떡 몸을 일으킨 해완은 황급히 카운터 위에 올려져 있는 물건을 계산했다. 어차피 인하를 다시 만나기 전까지는 나오지 않을 답이었고, 차라리 몸을 움직이는 편이 도움이 될 것 같았다.

슬슬 다시 손님들이 오가기 시작했고, 해완은 어지러운 머릿속을 외면하며 기계적으로 일에 몰두했다.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지만 6시가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초조해져서 해완은 자꾸만 평소라면 절대 하지 않을 바보 같은 실수들을 하곤 했다.

다행히도 오늘 해완이 혼자 일한다는 걸 아는 편의점 점주가 교대 시간보다 30분 정도 빨리 나와 준 덕에 해완은 물품 정리를 하겠다는 핑계로 카운터에서 나와 물품 창고로 들어가 6시가 되기 전까지 잠시 숨을 고를 수 있었다.

그때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에 메시지 도착을 알리는 소리가 났다. 도착한 메시지를 확인한 해완의 눈이 튀어나올 듯 휘둥그레졌다.

[답이 없네. 지금 작업실에서 출발할까 하는데 괜찮아?]

강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아까 메시지를 받자마자 손님들이 들이닥쳐 나중에 답장해야겠다고 생각하고선 새까맣게 잊어버리고 있었다.

이어서 강현이 지금 작업실에서 출발하면 6시에 맞춰 도착하리란 걸 떠올린 해완의 얼굴이 하얗게 질렸다.

인하도 6시에 맞춰 이곳에 다시 오겠다고 했으니, 그렇게 된다면 강현과 마주칠지도 몰랐다.

두 사람이 마주칠 것을 생각만 해도 심장이 얼어붙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것만은 피해야 했다.

강현과의 약속을 완전히 잊고 있었던 제가 저주스러울 지경이었다. 선약을 한 것은 강현이니 인하와의 약속을 조정하는 게 맞겠지만 지금 해완은 인하에게 연락할 수 있는 수단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해완은 바로 통화 버튼을 눌렀다. 강현은 금방 전화를 받았다.

―응, 해언아.

“강현아, 아직 출발 안 한 거지?”

평소와 달리 조급한 해완의 목소리에 강현이 의아한 듯 물었다.

―그렇긴 한데……. 무슨 일 있어?

“정말 미안한데, 오늘 일이 좀 생겨서 못 만날 것 같아.”

강현은 잠시 말이 없다가, 느리게 물었다.

―갑자기 무슨 일인데?

변명을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해완은 또 말문이 막혔다가, 횡설수설 말을 내뱉었다.

“그게, 그게…… 유준이, 유준이가 또 아프다고 해서……. 같이 병원에 가 줘야 될 것 같아.”

―……지난번처럼 많이 아픈 거야? 그럼 내가 데려다줄 수 있는데.

“아냐! 그렇게 많이 아픈 건 아니고, 그냥 감기 같은 건데, 나 혼자서 챙길 수 있어. 괜히 너한테 옮길 수도 있고.”

스스로 생각해도 빈약하기 짝이 없는 변명이었다. 강현은 또 잠깐 침묵했는데 짧은 사이였지만 타들어 가는 속에 해완은 초조하게 입술을 씹었다.

하지만 곧 강현의 산뜻한 대답이 들려왔다.

―그래, 알겠어. 그럼 우린 내일 볼까?

간신히 마음을 놓은 해완은 고개를 크게 끄덕이며 말했다.

“응. 그렇게 하자.”

강현은 혹시라도 도움이 필요하면 이야기하라는 말을 마지막으로 더 이상 무언가를 묻지 않고 전화를 끊었다. 해완은 벽에 기댄 채 눈을 감고 몇 번 심호흡을 했다. 그 짧은 통화만으로도 손에 잔뜩 땀이 배어 있었다.

한동안 평정을 되찾기 위해 애쓰던 해완이 가늘게 눈을 뜨고 핸드폰으로 시간을 확인했다.

이제 10분 뒤면, 인하가 올 시간이었다.

해완은 점주에게 양해를 구하고 5분 정도 일찍 나와 편의점 문 앞에서 인하를 기다렸다.

정확히 6시가 되었을 때, 편의점 근처 도로에 있는 주차 가능 구역에 고급 그레이 세단 하나가 미끄러져 들어왔다. 해완의 예상대로 인하가 탄 차였다.

능숙하게 주차를 하고 차에서 내린 인하는 해완을 발견하자마자 빠른 걸음으로 가까이 다가와 말을 걸었다.

“미안해요, 시간 맞춰 온다고 온 건데, 기다렸어요?”

해완은 당황해 고개를 황급히 저었다.

“아니요. 제가 일찍 나온 건데요. 뭐.”

인하는 그 예민한 얼굴에 빙긋이 미소를 짓더니 이어 말했다.

“추운데 어디 들어가서 차라도 한잔할까요?”

“네. 그게 좋을 것 같아요.”

“혹시 근처에 자주 가는 곳 있어요? 제가 아는 곳으로 가도 좋은데, 차로 이동해야 돼서 부담스러울까 봐.”

사려 깊은 인하의 말에 긴장이 약간 풀리는 기분이었다. 해완은 유준과 종종 가곤 하는 근방에 있는 작은 카페로 인하를 안내했다.

요즘 유행하는 모던한 인테리어는 아니었으나 따듯한 분위기의 조용한 카페가 마음에 든 듯 인하는 주위를 둘러보았다.

“뭐 마실래요? 내가 살게요.”

“아니에요. 제가 오자고 했으니 제가…….”

인하는 이번에는 꽤나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해완 씨 나보다 어리잖아요. 조금이라도 더 산 내가 당연히 사 줘야죠.”

제 나이를 알고 있는 듯한 인하의 말에 해완은 멈칫했다. 그런 해완의 얼굴을 본 인하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 해언이한테 해완 씨 나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나도 모르게. 올해 스물여덟 맞죠? 난 서른 살이에요.”

기분이 이상해 해완은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멋쩍은지 인하가 말을 덧붙였다.

“처음엔 해완 씨 얘기 할 때마다 해완이, 해완이 하길래 해언이랑 동갑인 줄 알았는데, 알고 보니 아니더라구요. 그래서 기억에 남았어요.”

죽어도 형이라고 부른 적 없던 해언이 떠오른 해완이 작게 웃으며 말했다.

“……해언이 저한테 형이라고 부른 적 한 번도 없어요. 부르라고 할 때마다 성질만 내고.”

“나한테도요! 조금 친해지자마자 바로 말을 놓더라구요. 진작 버릇을 들였어야 되는데, 그쵸?”

친근하게 말하며 웃는 인하의 얼굴에 해완도 무심결에 따라 웃었다.

결국 음료는 인하가 결제한 뒤, 두 사람은 자리를 찾아 앉았다. 인하는 아까 일이 마음에 걸렸는지 자리에 앉자마자 다시 이야기를 꺼냈다.

“아까 좀 당황했죠? 미안해요. 해언이한테 해완 씨 이야기를 하도 많이 들은 바람에…… 꼭 내 친구처럼 느껴져서요. 그런 느낌 뭔지 알죠?”

인하가 민망할까 봐 미소를 짓기는 했지만 해언이 제 이야기를 했다는 것에 마음이 찡해져, 해완은 조금 메어 오는 목을 가다듬고 조용히 물었다.

“해언이가…… 제 얘기를 많이 했어요?”

“네. 과장 좀 보태서 입에 달고 살았어요. 게다가 한집에 살다 보니 다 들어 줄 수밖에 없었거든요.”

한집에 살았다는 말이 해완의 귀에 쏙 박혔다. 저도 모르게 인하의 얼굴을 응시하자, 그가 가볍게 말했다.

“아, 해언이랑 저 같이 살았어요. 미국에 있을 때.”

인하의 목소리는 예사로웠지만 해완은 어떻게 대답해야 할지 몰라 말을 골라야 했다.

외국은 성별을 넘어서 하우스 셰어를 하는 일도 종종 있다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인하의 말에는 그렇게만은 생각할 수 없는 묘한 뉘앙스가 있었다.

해완은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무례하게 들리지 않길 바라며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그럼 혹시…… 해언이랑 사귀던 사이셨어요……?”

그 말에 인하의 눈이 해완을 향했다.

“아뇨, 사귀는 사이 아니었어요.”

“…….”

“뭐, 사실 단순히 친구였다고 말할 수는 없겠네요. 내가 해언이 좋아했거든요.”

인하는 커피를 한 모금 마시고는 느긋한 태도로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더니, 부드러운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해언이, 한국에 오래전부터 좋아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

“지금은 사정이 있어서 못 만나지만…… 잊을 수가 없다고. 그래서 내 마음을 안 받아 줬어요.”

그렇게 말하며, 인하는 해완을 깊게 바라보았다.

해완은 인하의 시선을 의식하지 못했다. 눈을 뜨고는 있지만 조여들어 오는 마음에 무엇도 뇌리에 인식되지가 않았다.

그가 이야기하고 있는 것은, 해언이 잊을 수 없게 마음에 담았다던 사람은 강현이 틀림없었으니까.

그때, 테이블 위에 올라와 있던 해완의 왼손을 인하가 가볍게 감쌌다. 갑작스러운 접촉에 놀란 해완은 반사적으로 손을 뺐다. 그러나 그는 별달리 당황한 기색 없이 차분하게 손을 거두었다.

“얼굴이 너무 창백해 보여서. 괜찮아요?”

“……괜찮아요.”

해완은 몸이 눈에 띄게 떨리고 있음을 의식하고 재빨리 테이블 밑으로 손을 내렸다. 그러자 인하가 나직이 물었다.

“해언이 이야기 하는 거 많이 힘들죠? 누구보다 가족 같은 사이였을 테니.”

테이블 밑으로 내린 양손을 아플 정도로 꽉 움켜쥔 해완은 목을 가다듬고 입을 열었다.

“네. 아직 좀…… 그렇네요.”

해완에게 시간을 주려는 듯 인하는 잠시 입을 다물고 커피만 마셨다. 해완은 시선을 테이블 한구석에 고정시킨 채 카페에 흐르는 부드러운 재즈 선율에 집중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해완이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혹시…… 인하 씨 주변에 해언이에 관해서 알고 계신 분이 또 있나요?”

부드럽게 잔을 내려놓은 인하가 고개를 저었다.

“아뇨. 아마 미국에서 알던 사람 중엔 저만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그럼…… 해언이가 죽은 건 어떻게 아신 거죠? 한국에도 저 말고는 해언이 일에 대해서 아는 사람이 없을 텐데.”

“……두 달 전에 예약 메일을 받았어요. 해언이한테.”

“예약…… 메일이요?”

“네. 제가 이 메일을 받는다면, 자기는 이미 죽었을 거라는 내용의 메일이었어요. 그리고 그게…… 해언이랑 마지막으로 본 다음에 처음으로 받은 연락이었죠.”

해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다. 그런 메일을 받았을 인하의 심정이 상상이 가지 않았다.

“그럼, 해언이가 한국으로 돌아온 다음에 연락을 전혀 하지 않으셨다는 건가요?”

“네. 하지만…… 먼저 연락을 끊었던 건 저였어요. 해언이가 귀국하기 전에 크게 싸웠거든요. 나중에 후회했지만 그 메일을 받기 전까진 연락할 방법이 없었어요.”

“무슨 일로…… 싸우신 건데요?”

그러자 인하는 입을 다물었다가, 짧게 한숨을 내쉰 뒤 대답했다.

“그건 좀 개인적인 일이라……. 미안해요.”

인하의 표현은 절제되어 있었지만 씁쓸한 빛을 완전히 감추지는 못했다. 그래서 해완은 더 이상 묻지 않고 고개를 끄덕였다.

“아무튼, 최대한 빨리 오고 싶었는데 여러 일들이 많아서 이제야 오게 됐어요. 해완 씨 찾는 데도 시간이 좀 걸렸고.”

그러고 보니 저를 어떻게 찾았는지도 궁금했던 해완이 눈을 동그랗게 뜨자, 인하가 조심스럽게 설명했다.

“예전에 해언이가 해완 씨가 어디서 일하는지 알려 준 적이 있어서 그리로 먼저 찾아갔어요. 그런데 관둔 지 오래됐다고 해서…… 해언이랑 해완 씨가 자란 보육원에 연락해서 해언이 친군데 해완 씨를 찾고 싶다고 했더니 개인 연락처 대신 그 편의점 주소를 주더라구요.”

얼마 전 보육원에 보낸 크리스마스 선물을 제가 일하는 편의점에서 부쳤던 터라 이해가 가는 설명이었다.

“그래서 실례인 줄 알면서도 그리로 갈 수밖에 없었어요. 그리고…….”

인하는 쉽게 말을 끝내지 못하고 머뭇거리다, 조심스러운 기색으로 뒷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그 편의점에 들어가자마자 알았어요. 계산대 뒤에 있는 사람이 윤해완 씨라는 거.”

인하의 말이 암시하는 바를 눈치챈 해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당연히 그 공간에 들어오자마자 알았을 것이다. 죽어 없어졌어야 할 해언의 향이, 해완의 몸에서 풍기고 있었으니까.

해완은 눈을 감았다. 침을 삼키는 것조차 버거울 정도로 심장의 박동이 격렬했다.

하지만, 이 자리에서 물어보지 않을 수 없었다. 해완은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페로몬샘 이식 수술에 대해서도…… 해언이가 얘기했나요?”

인하는 그런 해완을 잠시 바라보다가 침착하게 대답했다.

“처음으로 심장에 심각한 이상이 있다는 진단을 받자마자 그러더군요. 자기가 죽으면 해완 씨에게 페로몬샘을 이식하고 싶다고.”

“처음으로 진단을 받자마자 그랬다구요?”

“네.”

해완은 드물게 흥분해 목소리를 높였다.

“아프면, 아프면 나을 생각부터 해야지, 대체 왜 그런 이야길 먼저 한 건데요?”

그런 해완을 잠시 바라보던 인하가 조용히 말했다.

“글쎄요. 그건 저도 잘 모르겠네요.”

눈시울이 삽시간에 뜨거워져, 해완은 고개를 푹 숙이고 두 눈을 손으로 감쌌다.

해언이 치료보다 죽음을 먼저 생각했다는 인하의 말이 마음에 날카로운 대못으로 박혔다.

그가 페로몬샘 이식 수술에 대해서 해완에게 이야기했던 것은 함께 살게 된 지 반년이 넘은 뒤였고, 의사로부터 더 이상의 치료는 의미가 없을 수 있다는 최악의 이야기까지 들은 후였다. 그래서 해완은 해언이 그때서야 죽음 이후의 일을 생각했다고 여기고 있었다.

그러나 이렇게나 처음부터, 모든 것을 포기한 사람처럼 제게 페로몬샘을 주려는 생각을 하고 있었는지는 몰랐다.

참으려고 해도 참아지지 않는 눈물이 뚝뚝 떨어져 내렸다. 가늘게 들썩이는 어깨를 인하는 고맙게도 모른 척해 주었다.

간신히 감정을 추스른 해완이 새빨개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을 때, 인하가 갑작스럽게 질문을 던졌다.

“페로몬샘 이식 수술, 혹시 해완 씨도 바란 건가요?”

질문의 의도를 몰라 해완은 인하의 눈을 응시했지만 그의 얼굴은 별다른 뜻 없이 담담하게만 보였다.

하지만 쉽게 대답할 수는 없는 문제였다. 분명 해언의 강요로 시작한 일은 맞았지만 최종 결정을 내린 사람은 결국 해완이었다.

그러니, 해언의 마지막 소원이었다는 식으로 운운하는 것이 비겁하게 느껴져 해완은 침묵을 유지했다.

인하는 그런 해완의 얼굴을 찬찬히 살피더니 먼저 입을 열었다.

“역시 아닌 거 같네요. 그럴 거 같았어요.”

“……왜 그런 걸 물어보시는 거죠?”

그러자 인하가 건조한 목소리로 답했다.

“해언이가 나한테 처음 그 이야기를 했을 때 진지하게 생각하진 않았어요. 그냥 울컥하는 마음에 하는 얘긴가 했죠. 나보다 더 잘 알겠지만, 페로몬샘 이식 수술이라는 게 보통 아는 사이에서 이뤄지진 않잖아요. 많은 사람들이 혼란을 겪게 되니까.”

지금 해완의 처지를 생각하면 인하의 말은 잔인한 면모가 있었지만 이미 충분히 지쳐 있던 해완은 조용히 듣기만 했다.

“하지만 나중에 진심이라는 걸 알고 말렸어요. 해완 씨도 바라지 않을 거라구요. 하지만 무슨 말을 해도 뜻을 꺾지를 않더군요.”

“…….”

“하지만 이렇게 해완 씨를 만나고 보니…… 해언이 마음이 좀 이해가 될 것 같아요. 소중한 사람이 내 일부분을 간직해 준다는 게 얼마나 큰 위로가 되었을까 싶구요. 아마 해완 씨도 그래서 어려운 결정 한 거라고 생각해요.”

인하의 사려 깊은 이야기에 마음 한구석이 쓰렸다. 강현과의 일이 없었다면 해언의 죽음 이후 해완 혼자 감당해야 했던 버거운 감정의 짐을 보살피는 듯한 인하의 태도가 온전히 고맙기만 했겠지만, 지금 제가 저지르고 있는 짓을 생각하면 그런 위로를 받는 것이 견딜 수 없을 정도로 염치없게 느껴졌다.

해완은 치밀어 오르는 온갖 사념들을 꾸역꾸역 밀어 넣고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씀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인하는 부드럽게 미소를 짓더니, 시간을 확인하고 아쉬운 기색을 보였다.

“일정이 있어서 지금 가 봐야 될 것 같은데, 어떡하죠?”

해완은 숙이고 있던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직 듣고 싶은 이야기가 잔뜩 남아 있던 터였다. 그러나 원래 인하가 찾아왔던 것이 두 시간 전이었음을 떠올리자 아쉬움을 애써 삼킬 수밖에 없었다.

“그럼 가시기 전에 납골당 주소 알려 드릴게요.”

그 말에 인하는 조금 머뭇거리다 조심스럽게 이야기했다.

“그래도 좋지만…… 혹시, 해언이 보러 갈 때 같이 가 주지 않을래요?”

“……네?”

“같이 가면 해언이도 더 기뻐할 것 같아서요.”

해언의 납골당에 누군가 함께 간다는 것이 왠지 기분이 묘해 해완은 선뜻 대답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간 홀로 버텨야 했던 해언을 잃은 슬픔을 나눌 수 있는 사람이 생긴 데 대한 기꺼운 마음을 부정할 수는 없었다.

결국 해완은 조용히 고개를 주억거렸다.

“그럴게요. 저도 못 간 지 몇 달이나 돼서, 잘됐네요.”

“고마워요.”

“납골당에는 언제 가실 생각이세요?”

“잠깐만요.”

일정을 확인하려는 듯 핸드폰을 들여다본 인하가 말했다.

“31일에 시간이 될 것 같아요. 괜찮아요?”

“어…….”

해완은 망설였다. 아무래도 올해의 마지막 날이니 강현을 보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의 망설임을 눈치챈 인하가 조용히 말을 덧붙였다.

“이미 많이 늦었는데…… 가능하면 올해가 가기 전에 꼭 보고 싶어서요.”

늦게야 해언의 죽음을 알았을 인하의 마음이 이해가 가지 않는 것은 아니라 해완은 잠시 고민했다. 게다가 아직 강현과는 약속을 잡지도 않았고, 설사 만나자고 해도 오전에 다녀오면 괜찮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다.

“네, 그렇게 해요. 근데 오전에 가야 할 것 같은데, 괜찮으세요?”

“좋아요.”

31일 아침 9시쯤 이 근처에서 만나기로 약속을 잡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카페 문 앞에서 인사를 하고 돌아서려는 해완을 인하가 불렀다.

“잠깐만요, 해완 씨.”

해완이 돌아서자, 인하가 씩 웃으며 손에 쥔 핸드폰을 흔들었다.

“혹시 모르니 연락할 수단은 있어야죠.”

번호조차 교환하지 않았다는 걸 미처 생각하지 못했던 해완이 허둥지둥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인하는 해완에게 번호를 묻고는 전화를 걸어 그의 핸드폰에 제 번호도 뜨도록 했다.

그 자리에서 번호 저장까지 마친 인하는 문득 해완에게까지 소리가 들릴 정도로 작게 웃음을 터트렸다. 해완이 의아한 기색으로 보자, 그는 목뒤를 문지르며 멋쩍은 듯 말했다.

“그게……. 내가 해완 씨랑 번호 교환한 거 알면 해언이가 화냈을 거란 생각이 들어서요.”

“네?”

“입버릇처럼 그랬거든요. 해완 씨한테는 무조건 좋은 사람을 만나게 할 거라고. 그래서 장난으로 나는 어떠냐고 했더니 질색을 하고 싫어하더라구요.”

해언이 왜 그런 이야기를 했을까 싶어 민망해진 해완은 입만 벙긋거렸다. 다행히도 인하는 해완의 대답을 기다리지 않고 빙긋이 웃으며 작별 인사를 했다.

“그럼 31일에 봐요. 연락할게요.”

“……네. 조심히 가세요.”

인하는 망설임 없이 뒤돌아서 긴 다리로 저벅저벅 걸어갔다. 마치 예정된 것처럼 해언에 대해 아는 사람을 만난 일이 갑자기 현실감이 없게 느껴져, 해완은 소란스러운 밤거리 안에서 인하가 사라진 자리를 잠시 멍하니 바라보고 서 있었다.

* * *

수영을 하고 돌아와 중문을 열자 달려온 보리가 요란스럽게 강현을 반기며 현관을 맴돌았다. 오늘은 세 번이나 산책을 하고 왔는데도 또 나가고 싶은 모양이었다.

강현은 그런 보리에게 간식 하나를 던져 주고 아일랜드 식탁 앞 스툴에 털썩 주저앉아 물을 마시며 희미한 염소 냄새가 밴 젖은 머리를 손으로 쓸어 넘겼다.

온갖 페로몬 냄새가 가득한 샤워장에 오래 머무르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물로만 대충 몸을 헹구고 왔기에 원래대로라면 집에 오자마자 씻을 생각이었다.

그런데 왜일까. 머리며 가슴 어딘가가 불편한 기분이 가시질 않았다. 그래서 강현은 욕실로 직행하는 대신 잠시 생각에 잠겼다.

갈증 때문인가 싶었지만 수분 보충을 해도 똑같은 걸 보니 그게 원인이 아닌 모양이었다.

사실 이 느낌은 초저녁부터 있었다. 요 근래 이래저래 일이 바빠 운동을 못 해 몸이 찌뿌둥한 모양이라고 여겨 보리와 공원을 실컷 뛰고 온 뒤 수영장까지 다녀왔지만, 그럼에도 답답하고 뻐근한 느낌이 해소되지 않는 것이 의아하게 여겨졌다.

강현은 천천히 오늘 하루를 되짚어 보았다. 아침에 일어나 보리를 산책시킨 뒤 샤워를 하고 바로 작업실에 갔다. 오전에는 새로운 고객과의 미팅이 하나 있었고, 오후에는 수입해 받은 월하향, 재스민, 로즈 앱솔루트 등의 원료 체크를 했다. 그리고 조향 작업을 하다가, 또…….

아, 그래.

그가 강현을 바람맞혔다.

그것도 거짓말을 하면서.

통화를 할 때는 별다른 생각이 들지 않았지만 아무래도 마음에 걸렸던 모양이었다.

보통 사람이라면 고민조차 필요 없는 일이겠으나, 감정으로 인해 생기는 신체적 표현을 그 원인과 직결시키지 못하는 것이 감정 표현 불능증을 앓고 있는 사람들이 일상에서 겪는 가장 큰 불편함이었고 강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강현은 불만족스럽게 식탁 위에 올려 둔 핸드폰 화면을 툭툭 손끝으로 쳤다.

이전에도 유준이 아프다는 이유로 강현과 정한 약속을 취소한 적이 있었지만 이번에는 그 이유에 대해 거짓말을 했다는 것이 달랐다.

그는 거짓말을 정말 못했다. 거짓말을 할 때면 강현의 눈을 쳐다보지 못했고 반드시 말을 더듬거나 얼굴을 붉혔다. 아까 통화를 할 때도 어찌나 목소리가 떨리던지 어쩔 줄 몰라 하는 표정이 눈에 훤히 보일 정도였다.

그가 정말 해언이 아니라는 걸 강현이 먼저 알게 되지 않았더라도 속일 수 있었을까 미심쩍은 수준이었다.

이유를 알았는데도 속이 답답한 기분이 여전했다.

거짓말도 못하면서 왜 거짓말을 하지, 그런 생각에 불쑥 짜증이 치밀었다.

하지만 곧, 꽤나 자가당착인 생각이다 싶었다. 그가 제게 하고 있는 가장 큰 거짓말은 용인하고 있으면서, 아니, 그러길 바랐고 그렇게 하도록 이끌었다고 해도 틀린 말이 아닌데도 왜 이런 작은 거짓말에 이상한 느낌이 드는지 몰랐다.

강현은 조금 더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그러고 보니 알 것 같았다. 며칠 전부터 쌓여 오던 그에 대한 불만이 고작 이런 사소한 일에도 짜증이 나게 만든 듯했다.

그가 예상치 못하게 행동하는 것이 강현은 싫었다.

트리를 만들기 위해 그가 강현의 집에 왔던 크리스마스이브 날부터가 시작이었다. 그날 그는 강현과 빚을 갚아 주는 문제로 논쟁을 했는데 그게 꽤 기분을 상하게 만들었다.

유준과의 일로 돈 문제에 민감하다는 것은 알았지만 이미 저와 만나고 있는 상황이니 그렇게 반발하리라곤 생각하지 못했다. 그래도 혹시 몰라 크리스마스 선물이라는 핑계까지 들이댔는데도 하나도 소용이 없었다.

문제는 강현이 정말 좋은 의도에서 한 말이라는 것이었다. 제가 그와의 만남에서 얻어 가는 것이 있듯, 그도 저와의 만남에서 얻어 가는 것이 있으면 했다. 게다가 지금까지 강현이 만난 사람들 중 그런 호의를(물론 빚을 갚아 주겠다는 식은 아니었지만) 싫어한 사람은 한 사람도 없었다.

그런데도 그는 자신의 제안을 거의 질색하듯이 거절했다. 괜히 골이 난 강현은 일부러 입을 다물었고 그 또한 별말을 하지 않는 통에 트리는 침묵 속에서 만들었다.

하지만 거기까지는 괜찮았다. 중요한 것은, 그다음부터였다.

그와 나눈 대화, 그가 보인 반응, 그리고 제가 한 말까지도.

그 모든 것이 강현의 예상을 벗어난 일들이었다.

제 어머니가 저를 구하다 죽었다는 이야기를 강현은 호감을 사고 싶은 사람들에게 종종 하곤 했지만 거기까지였다. 그렇게 죽은 어머니의 장례식에서 눈물을 한 방울도 흘리지 않았다는 뒷이야기는 누구에게도 이야기하지 않았다.

그게 얼마나 이해받을 수 없는 짓인지 가족들의 반응에서 뼈저리게 학습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가 가족들이 왜 그를 꺼리게 되었는지 물었을 때,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입에서 그 이야기가 툭 튀어나왔다.

그러자 그는 강현의 앞에서 서럽게 눈물을 흘렸다.

눈물은 복잡했다. 사람들은 감당할 수 없을 만큼 수많은 이유로 울었다. 아파서, 화가 나서, 분해서, 서운해서, 슬퍼서, 안쓰러워서, 불쌍해서, 그리고 언젠가 그가 말했듯 기쁘고 벅차서 울기도 한다고 했다.

그래서 강현은 사람들이 제 앞에서 우는 게 너무나 싫었다. 눈물은 강현에겐 너무나 갈래가 많은 미로였고, 되도록 피하고 싶은 문제에 지나지 않았다.

그런데 그의 눈물만이, 그의 우는 얼굴만은 싫다기보다 혼란스럽게 느껴졌다.

무서워서 그러느냐 물으니 그것도 아니라고 했다. 이상했다. 자기 좋자고 해 주는 일은 그렇게 싫어하더니, 저를 꺼리는지 보려고 한 말에는 눈물을 흘렸다.

거기까지 떠올린 순간 강현은 멈칫했다.

그가 이 말에 어떻게 반응하는지 보고 싶어서 한 말이었나?

그럼 나는 대체 무슨 반응을 원했던 거지?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지금 중요한 것은 그가 하는 행동에 대한 것이지, 제 생각 따위는 딱히 중요하지 않았다.

그다음은 위험했다. 그는 붉어진 눈으로 강현을 바라보며 제가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말하고 싶어 했다.

머릿속에 경계경보가 울렸다. 아직은 아니라는, 아직은 모자라고 부족하다는 그 생각밖에 들지 않았다.

다행히도 강현은 그가 제가 원하지 않는 방향으로 움직일 때 키를 바꾸는 방법 하나를 알고 있었다.

그것은 바로 죄책감을 자극하는 것이었다.

자신이 윤해언이라 속이고 있다고 생각하는 데서 오는 죄책감 말고도 그는 저를 혼자 뒀다거나, 외롭게 했다거나 하는 말을 들먹일 때마다 쉽게 넘어갔다. 8년 동안 강현을 기다리게 한 것은 해언이 한 짓이지 자신이 한 짓이 아님에도 그랬다.

이번에도 마찬가지였다.

강현이 그러지 말라고 하자, 그는 강현이 바라는 대로 입을 다물어 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대로 자신의 몸까지 허락했다.

순식간에 아랫배가 묵직해져 강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자신의 밑에서 퍽퍽 흔들리던 하얀 몸과 빠듯한 뒤를 생각하는 것만으로도 앞이 부풀어 올랐다.

솔직히 그 밤의 일을 하나하나 다 기억하는 건 아니었다. 처음으로 접하는 오메가의 몸에 이렇게까지 흥분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흥분한 탓인지 머릿속에 안개가 끼어 버린 듯 이성이 흐려졌었다. 온몸의 피가 역류하는 기분이었고, 조금의 여유도 없이 돌아 버리게 안달이 나서 자제력이 거의 끊어진 상태였다.

그래서 그랬을까, 그는 좀 아파하는 것 같았다.

아니, 꽤 많이 아파했다.

대부분의 오메가들이 관계를 할 때 그렇게 아파하나? 강현은 내심 갸웃했다. 하지만 제가 경험이 없다는 사실을 털어놓았음에도 어떻게 해야 할지 말해 달라고 할 때 하고 싶은 대로 전부 하라고 말한 것은 그였다. 강현은 그걸 제가 어떻게 하든 다 익숙하게 버틸 수 있다는 뜻으로 알아들었다.

어쨌든, 있는 대로 단단해진 앞섶에 한숨이 절로 나왔다. 오늘 만나지 못한 것이 더욱 짜증이 났다.

강현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 후드 티를 벗어 던지며 욕실로 향했다. 샤워를 하며 욕구를 대충 해결할 요량이었다.

충분히 시간을 들인 긴 샤워가 끝나고, 욕실에서 나오자마자 강현은 핸드폰을 먼저 확인했다. 그리고 아직까지도 아무런 연락이 없음을 확인한 강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소심한 그라면 보통 이렇게 약속을 깨고 나면 강현의 기분을 살필 법한데 그런 것도 없었다. 한번 행동이 이상하다고 생각하자 이런 사소한 일들마저 싹 거슬리게 느껴졌다.

좋아하는 것도, 싫어하는 것도, 서운해하거나 마음에 드는 것도, 모든 감정을 전시하듯 드러내는 알기 쉬운 인간이라 그가 좋다고 생각했는데, 아무래도 강현의 생각이 조금 틀린 모양이었다.

머리를 말리는 것도 잊은 채 잠시 멍하니 앉아 있던 강현의 머릿속에 무언가가 스쳐 지나갔다.

그것은, 그가 해언이 아님을 알았을 때 얻어 낸 뒷조사 자료들이었다.

어쩌면 그의 신상에 대해 아는 것이 너무나 없어 이렇게 혼란스럽게 느껴지는지 몰랐다.

물론 아무것도 모른다고 할 수는 없었지만 그가 해언의 탈을 쓰고 있는 이상 진짜인지 알 수 없다는 게 문제였다.

그렇게 생각하자 갑자기 몸이 달았다. 그의 나이도, 출신도, 어린 시절도, 아무것도 모른다는 게 기분이 나쁘게 느껴졌다.

하다못해 이름까지도.

강현은 몸을 일으켜 서재로 향했다. 책상 옆 첫 번째 서랍을 열자 대충 훑어보고 처박아 둔 서류철 하나가 눈에 띄었다.

그가 윤해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제대로 확인하는 것 외에는 별달리 바라는 게 없었기 때문에 자료들은 몇 장 되지 않았다.

서류철을 열자, 가장 먼저 보인 것은 사진 하나와 ‘가람보육원’이라고 적힌 원생 인적 서류의 복사본이었다.

보육원 서류 맨 위에는 윤해언의 이름과 1996년 3월 23일이라는 출생연월일이 가장 먼저 적혀 있었다.

강현은 클립에 끼워진 윤해언의 사진을 꺼내 찬찬히 훑어보았다. 그것은 고등학교 졸업 사진처럼 보였는데 좀처럼 잘 나오기 힘들다는 졸업 사진에서도 윤해언의 외모는 특출나 보였다.

군더더기 하나 없는 계란형의 얼굴 안, 하나하나 공들여 빚은 듯한 이목구비가 조화로웠다. 시원하고 곱상한 눈매에 쭉 뻗은 콧날이 섬세하면서도 첫눈에 어느 성으로 단정 지을 수 없는 중성적인 묘한 분위기마저 풍기게 했다.

제가 만났던 것이 이런 얼굴이었구나. 강현은 무감각한 머리로 그런 생각을 했다.

해언의 머리칼과 눈 색은 오묘하게 옅은 밀밭색이었다. 그것을 본 순간 강현은 그를 떠올렸다.

그 또한, 강현이 보리를 떠올렸을 만큼 옅은 머리칼과 홍채 색을 가지고 있었다.

갑자기 조급해진 마음으로 강현은 해언의 사진과 서류를 뒤로 넘겼다.

그곳에, 그의 이름이 있었다.

윤해완.

그 석 자의 이름을 입 안에서 작게 불러 보았다.

희미하게 남아 있던 인상대로 역시 해언의 이름과 비슷했다. 마치 형제들이 쓰는 돌림자라도 되는 것 같았다.

다음으로 이름 옆에 적힌 생년을 본 강현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살짝 찌푸렸다.

1994년 3월 23일.

생년은 달랐지만, 생일은 앞에서 봤던 윤해언의 생일과 같았다.

이름도 비슷하고, 생일도 같고, 게다가 서류 밑 부분을 보니 보육원에 들어온 입소일마저 같았다.

이런 우연이 있구나 싶은 동시에 진짜 형제가 아닐까 하는 생각마저 들었지만, 그렇다 하기에는 풍기는 느낌이 워낙 다르기도 하고 그가 자신과 해언의 관계에 대해 했던 말이 거짓으로 보인 적은 없었다.

그러고 보니 1994년생이면 강현보다 한 살이 많았다. 강현은 무의식중에 헛웃음을 쳤다. 해언과 친구라 하기에 저보다 한 살이 어리거나 동갑일 것으로 여기고 있던 탓이었다. 고작 한 살 차이기는 하지만 인상 자체가 워낙 순진해 나이가 많은 줄은 생각도 하지 못했다.

그래서 그런 반응을 보였었나.

문득 크리스마스이브 날의 기억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강현이 나이를 들먹였을 때 그는 크게 당황해 불쌍할 정도로 얼굴을 붉히기까지 했다.

강현은 클립에 끼워져 있던 그, 아니, 윤해완의 사진을 들여다보았다.

그것은 해언의 것과 같이 고등학교 졸업 사진이었고 같은 교복을 입고 있었다. 쏟아질 듯 커다란 눈에 모난 데 없이 단정한 생김새가 그대로기는 했으나 사진을 찍는 게 익숙하지 않은지 어색한 표정을 한 탓에 강현이 알고 있는 그와는 어딘지 다르게 보였다.

좀 더 자세히 보기 위해 서류를 서류철에서 꺼내는 순간 서너 장의 사진 복사본이 팔랑이며 바닥으로 쏟아졌다.

강현은 허리를 숙여 사진들을 주워 들었다. 첫 번째 사진은 다양한 연령대의 아이들이 섞여 있는 것으로 보아 아마도 보육원에서 찍은 단체 사진인 듯했다.

지난번에는 정말 대충 보고 넘겼던 탓에 마치 처음 보는 듯 새로웠지만, 강현의 눈에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윤해완의 얼굴이었다.

보육원의 다른 아이들에 비해 키가 껑충하게 큰 탓인지 그는 제일 구석에 서 있었는데, 그보다 작은 윤해언이 가슴팍에 비스듬히 기대서 있는 것이 보였다.

멀리서 찍은 탓에 얼굴이 잘 보이지 않아 강현은 흥미를 갖지 않고 다음 장으로 넘겼다.

그 뒤로 보이는 모든 사진은 다 비슷했다. 윤해언과 윤해완이 어김없이 붙어 선 것이 언뜻 눈에 띄기는 했으나, 친하게 지냈다는 말을 이미 들었던 터라 별다른 주목을 하지 않고 계속해서 사진을 넘겼다.

그런데, 윤해언과 윤해완이 단둘이 찍혀 있는 마지막 사진에서 강현의 손이 멈췄다.

해언은 해완의 등에 업혀 있었고 두 사람 다 더없이 밝은 얼굴로 웃고 있었다. 처음에는 윤해언의 그림같이 완벽한 미소에 눈이 먼저 갔으나 결국 시선이 더욱 오래 머문 것은 윤해완의 웃는 얼굴이었다.

아마도 여름이었을까. 뜨거운 해가 작렬하는 가운데 울창한 녹음 아래 선 해완의 동그란 이마에 약간 땀에 젖은 가느다란 머리칼이 달라붙어 있었다. 솜사탕처럼 하얗고 부드러운 피부와 도톰한 입술이 약간 불그스름하게 달아올라 표정이 풍부한 갈색 눈의 색채를 더하는 것같이 환하게 빛났다.

이상했다. 그저 사진을 보는 것뿐인데 그해 여름의 냄새를 알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현은 말없이 윤해완의 웃는 얼굴을 바라보았다. 아까 어색한 표정을 하고 찍은 졸업 사진보다 그에게는 이 얼굴이 훨씬 익숙했다.

느끼는 대로, 마음이 가는 대로, 울고, 웃고, 감추지 못하게 넘쳐흐르는 감정들.

아마도 강현에게는 존재하지 않는 것들이었다.

문을 닫아 놓은 탓인지 고여 있는 공기가 답답해 강현은 신경질적으로 사진과 서류철을 팽개쳐 놓고 거실로 나와 창문을 열어젖혔다.

싸늘한 겨울바람의 건조하고 비릿한 냄새를 맡으며 강현은 정말 해야 될 생각에 집중했다.

사진으로 보아 자신과 윤해언이 친한 친구였다던 윤해완의 말은 분명한 사실인 듯했다. 해완이 했던 말들을 되짚어 보면 꼭 저를 진짜 알았던 것 같은 느낌이 들 때가 있었는데, 전부 해언에게 들었다고 가정하니 납득이 갔다.

그렇다면 윤해언은?

해언은 언변이 좋았다. 별거 아닌 이야기도 재미있게, 그리고 인상 깊게 하는 재주가 있었다.

유준도 그래서 기억을 했다. 아니, 솔직히 말해 유준은 해언이 이야기했던 보육원 아이들 중 유독 기억에 남았던 인물 중 하나였다.

왜냐하면, 남의 감정에 둔감한 강현이 들어도 해언이 유준을 좋아하지 않는다는 게 분명했기 때문이었다.

8년 전에는 고작해야 초등학생에 불과했을 유준을 왜 그리 싫어했을까? 이제 와 생각하니 그것도 묘한 점 중에 하나였다.

그래서 유준이 해언의 심부름을 왔답시고 자신의 앞에 나타났을 때 처음에는 좀 의아하게 생각했다. 돈을 준 것도 당연히 유준의 말을 믿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그저 강현에게는 ‘그’를 다시 만날 명분이 필요했을 뿐이었다.

유준은 다행히 움직이기 쉬운 말이었다. 그를 데리고 간 바의 오너에게 부탁해 저와는 달리 도수가 높은 술만 먹이면서 취하게 만들자 손쉽게 강현의 수에 넘어왔다.

물론 유준이 윤해완을 윤해언이 맞는다고 하는 바람에 속아 넘어가게 된 것은 예상하지 못했지만 결과가 나쁘지 않았으니 오히려 고마운 일이었다.

그런 생각들을 하며 강현은 아주 주의 깊게 기억을 되짚어 보았다.

아무리 기억을 돌려 봐도 해언이 했던 수많은 이야기 중 윤해완으로 추정되는 인물에 대한 이야기는 없었다.

왜, 윤해완에 대해서는 한마디도 하지 않았을까.

페로몬샘 이식 수술을 해 줄 정도로 중요한 사람이었음에도 불구하고.

전에는 별다르게 생각하지 않았던 그것이 새삼스럽게 이상하게 느껴졌다.

처음의 의도와는 달리 당장 답을 얻을 수 없는 질문들만 잔뜩 늘어났음을 깨달은 강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는 이미 지나 버린 일에 관심을 둔 적이 없었다. 누군가를 만나도 그 사람이 어떤 역사를 가지고 있는지에 대해서 조금도 궁금하지 않았다.

왜냐하면 그 누구라 할지라도, 서로의 삶의 궤적이 깊게 엉킬 만한 관계를 쌓아 나갈 흥미도 욕구도 생기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윤해완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두 사람의 관계는 어차피 타이머가 정해진 시한폭탄이나 다름없었다.

서로에게 속고 서로를 속이는 관계가 된 것이 차라리 기꺼웠다. 귀찮은 과정을 거치지 않아도 진실이 드러나기만 하면 쉽게 끝낼 수 있을 것 같았으므로.

하지만 왠지, 윤해완과 윤해언에 대해서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찜찜한 구석이 있었다.

어쩌면 조금 더 알아보는 게 좋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과 함께, 강현은 찬 겨울바람이 새어들어 오는 창문을 닫았다.

* * *

인하를 만난 다음 날 편의점 아르바이트가 끝나는 시간에 맞춰 찾아온 강현은 해완의 동네에서 조금 멀리 떨어진 모 5성급 호텔 안 프렌치 레스토랑으로 그를 데리고 갔다.

강현을 만나자마자 어제 그를 바람맞힌 것에 대해 사과했지만 그는 사람 좋게 웃어 보이고는 괜찮다고만 했다. 그럼에도 거짓말을 했다는 데 양심에 찔려 먼저 연락조차 하지 못했던 해완은 식사를 하는 내내 강현의 눈치를 봤다.

식사를 마친 뒤 엘리베이터를 타고 문이 닫힌 순간, 강현이 갑자기 뒤에서 해완을 끌어안아 왔다.

그는 해완을 강하게 끌어안은 채 귀에 대고 투정을 부리듯 낮게 속삭였다.

“난 어제 너 보고 싶었는데, 넌 나 안 보고 싶었어?”

간지러운 말에 해완은 얼굴이 새빨개졌다가,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

강현은 고개를 더욱 깊게 숙여 해완의 목덜미에 코를 묻고 숨을 들이마셨다. 곧, 목선에 와 닿는 축축한 입술을 느낀 해완은 튀어 오르듯 놀라며 제 가슴팍을 감싸고 있는 강현의 단단한 팔뚝을 움켜쥐었다.

해완이 놀란 것을 뻔히 알면서도 강현은 목선에 그치지 않고 예민한 귓불까지 빨아 올렸다. 의도가 분명한 접촉에 해완은 안절부절못하며 강현의 팔뚝을 잡아당겼다.

“가, 강현아, 잠깐, 여긴 너무…….”

해완은 저를 옭아매고 있는 강현의 팔을 밀어 내려 했지만 그는 그런 해완의 손을 잡아떼려는 듯 다른 손으로 해완의 손을 덥석 잡았다.

그런데, 강현이 해완의 손 안으로 네모난 무언가를 쥐여 주는 것이 느껴졌다.

뒤에서 해완을 강하게 끌어안고 있던 강현의 몸이 느슨해졌다. 해완은 의아하게 강현이 제 손에 쥐여 준 것을 보았다.

그것은 이 호텔 객실의 카드 키였다.

“……이러려고 여기까지 온 거였어?”

해완이 투정과 설렘이 반반씩 섞인 목소리로 묻자 강현이 씩 웃으며 뻔뻔하게 말했다.

“응. 기다리느라 죽는 줄 알았네.”

해완은 어쩌지도 못하고 고개 숙여 웃었다.

그때 엘리베이터가 멈춰 섰다. 이제 보니 엘리베이터 버튼도 1층이 아니라 객실로 가는 엘리베이터로 갈아탈 수 있는 중간층으로 눌러져 있었던 모양이었다.

이곳에 자주 와 본 모양인지 익숙하게 길을 찾아가는 강현의 뒤를 해완이 바싹 붙어 따랐다.

두꺼운 카펫이 깔린 덕에 발소리조차 나지 않는 조용한 호텔 복도에서는 파우더리하고 고급스러운 향이 났다. 초고층에 위치한 객실의 문을 열고 들어서자 전면 창을 통해 시원하게 비치는 도시의 야경에 절로 감탄이 나왔다.

저도 모르게 주위를 두리번거리며 안으로 들어가던 해완이 창 앞 탁자에 세팅되어 있는 샴페인과 각종 스낵들을 보고 멈칫했다.

강현은 멈춰 선 해완을 향해 조심스럽게 물었다.

“술 못하는 거 알지만, 같이 한잔하면 좋을 것 같아서……. 괜찮아?”

“……응, 고마워.”

술을 잘 마시지 못한다는 제 말을 기억한 강현에 가슴이 울렁거려 해완은 강현의 손을 잡고 그의 어깨에 살짝 이마를 부딪쳤다가 떼었다.

술에는 전혀 흥미가 없어도 레스토랑에서 일한 덕분에 와인이나 샴페인에 대해 어느 정도의 지식은 있는 해완이었지만, 탁자 위에 놓인 샴페인은 굳이 그런 지식이 없어도 알 만할 정도로 유명한 것이었다.

두 사람은 서로를 보는 대신 의자를 붙이고 나란히 앉아 조용히 야경을 보며 첫 잔을 마셨다. 부드러운 꽃 향과 신선한 아로마 향의 끝에 달콤함이 감도는 가운데, 도심의 어둠을 밝히며 지나가는 차들의 반짝이는 헤드라이트만큼이나 톡톡 튀는 탄산이 입 안을 기분 좋게 자극했다.

어느새 한 잔을 비운 해완의 잔을 흘끗 본 강현이 다시 술을 따랐다. 해완은 저도 모르게 두 번째 잔까지 금세 비웠다.

몸이 따뜻해지고 배 속 깊은 곳에서 열이 올랐다. 금세 치솟은 취기 때문에 눈앞이 조금 휘청거리자 야경이 더욱 환상적으로 느껴졌다.

너무나 기분이 좋아, 해완은 옆에 있는 강현의 팔을 붙잡고 어깨에 기댔다.

“근데 오늘 무슨 날이야?”

“왜?”

“네가 이렇게 나한테 잘해 주니까…….”

해완이 작게 중얼거리자 그의 머리칼에 살짝 입을 맞춘 강현이 다정하게 말했다.

“잘해 줘야지. 내가 해언이 너랑 이렇게 있을 수 있길 얼마나 기다렸는데.”

기분 좋게 일렁이던 모든 것이 갑자기 얼어붙고, 순식간에 속에서 쓴물이 치솟았다.

치미는 씁쓸함을 부정하듯 해완은 그대로 고개를 들고 강현의 목에 매달리며 깊게 입을 맞췄다. 강현은 놀란 듯 잠시 멈칫했다가, 곧바로 해완의 몸을 감싸 안으며 입맞춤에 응해 왔다.

강현의 입에 남은 샴페인 향이 아찔하게 좋아, 시간이 가는 줄 모르고 키스했다.

그러나 강현이 해완의 입술에서 떨어져 그의 목덜미를 빨고 옷 속으로 손을 집어넣는 순간, 해완은 그를 밀쳐 내며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나, 나 잠깐 화장실 좀…….”

강현은 저에게서 떨어지려는 해완의 팔을 움켜쥐며 으르렁댔지만, 해완이 의자에서 떨어질 듯 버둥대는 탓에 어쩔 수 없이 그를 놓아주었다.

“금방 올게.”

해완은 벌떡 일어서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강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홀로 남겨져 해완을 기다리는 내내 강현은 불만족스럽게 탁자를 손끝으로 툭툭 두드렸다. 화려한 야경도 눈에 들어오지 않고 지루하기만 했다.

대체 언제 나오는 거지?

문득,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방음이 잘된다고 해도 욕실 안이 지나치게 조용했다. 10분이 지나도 나오지 않기에 샤워라도 하고 있나 싶었지만 물소리가 나질 않았다.

강현은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욕실 문은 심지어 제대로 닫혀 있지도 않았다.

그렇게 들어간 욕실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의아한 얼굴로 주위를 둘러보았지만 순간 이동이라도 한 것인지 윤해완은 보이질 않았다.

그러나 곧, 강현의 눈에 욕조 안에 웅크리고 있는 윤해완의 모습이 들어왔다.

쓰러지기라도 했나 싶어 크게 흠칫한 그는 허겁지겁 다가가 그 앞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해언아?”

하지만 순조롭게 오르내리는 어깨와 평화로운 얼굴을 가까이서 본 순간, 강현은 그가 의식을 잃은 것이 아니라 잠을 자고 있음을 알았다.

그것도 술에 취해서.

황당해진 강현은 주위를 살폈다. 처음 욕실에 들어간 목적은 씻는 것이었는지 칫솔 세트가 뜯어져 있고 얼굴과 앞머리도 젖어 있는 게 보였다.

세수를 하긴 한 모양인지 물이 묻은 흰 얼굴이 어린아이처럼 말갛고 뽀얬다.

남의 속도 모르고 깊게 잠든 얼굴을 다시 보자 갑자기 웃음이 나왔다. 윤해완이 잠든 욕조 턱에 얹은 손등에 이마를 대고 강현은 큭큭 대며 한참을 웃었다.

“……쉽지 않네.”

작게 중얼거린 강현은 손을 욕조 안으로 내려 그의 얼굴선을 따라 쓸어 올리며 그렸다.

손끝으로 윤해완의 얼굴을 기억하는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 * *

“……언아, 해언아…….”

해완은 누군가 해언을 부르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새벽부터 누가 자꾸 해언이를 부르는지 몰랐다. 비몽사몽간에 손을 내젓는데, 잠기운이 흐려 놓은 의식 안으로 문득 어떤 생각 하나가 파고들었다.

해언이는 이제 없잖아.

전신에 찬물을 쏟아붓듯 한순간에 잠이 깬 해완은 화들짝 놀라며 눈을 번쩍 떴다. 격한 반응에 해언의 이름을 부르며 해완의 잠을 깨우고 있던 강현이 어깨에 올려 두었던 손을 거두며 미안한 듯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놀라면서 깨. 나쁜 꿈 꿨어?”

“미안, 그런 거 아냐.”

해완은 허둥지둥 변명을 주워 삼키며 상체를 일으켰다. 어찌나 깊이 잤는지 깨어나고 나서도 머리가 어질어질해 정신없이 주위를 둘러보았다.

제집도, 강현의 집도 아닌 낯선 호텔방의 풍경에 잠시 멍해졌지만 이내 어젯밤의 기억이 빠르게 필름을 돌리듯 스쳐 지나갔다.

이 호텔에 있는 프렌치 레스토랑에 갔고, 엘리베이터에서 강현이 키를 줬고, 함께 야경을 보면서 샴페인을 마시다가, 그리고…….

다음의 일을 떠올린 해완의 얼굴이 확 붉어졌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현이 장난기 섞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꼭 화장실에서 자야 되는 게 술버릇은 아니지? 그러면 앞으로 밖에서 술 마시긴 좀 곤란할 것 같아서.”

이제 목덜미까지 빨개진 해완이 머리를 마구 헝클어트리며 웅얼거렸다.

“자는 게 술버릇인 건 맞는데…… 나도 내가 그렇게 취했는지 몰랐으니까 그만 놀려…….”

정말이었다. 강현과 키스를 나누고 옷 속으로 손이 들어오자 씻어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고, 그를 밀치고 일어나 욕실로 걸어가는 사이 갑자기 확 술이 올랐다. 세면대 앞에 섰을 때는 이미 눈앞이 빙빙 돌던 상태라 해완은 고양이 세수를 마치고 욕조 턱에 기대 바닥에 주저앉은 채로 이를 닦았다.

그렇게 어찌어찌 양치는 끝냈으나 온몸이 뜨끈하고 나른해 자고 싶다는 생각밖에 들질 않았다. 밖에서 강현이 기다리고 있다는 의식이 있긴 했는데, 오히려 그 생각이 화근이 되어 이상하리만치 아늑해 보이는 욕조 안에서 10분만 자고 멀쩡한 정신으로 나가면 되겠다는 말도 안 되는 결론을 내려 버린 것이다.

그렇게 해완은 욕조 안으로 기어들어 가 몸을 웅크리고 누웠고, 그다음은 기억이 없었다.

고작 샴페인 두 잔에 주사를 부린 게 창피하기도 했지만 신경 써서 여기까지 데려와 준 강현에게 미안했다. 불타는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해완이 손가락 사이로 강현을 흘끗 훔쳐보며 소심한 사과를 중얼거렸다.

“혼자 자 버려서 정말 미안해. 강현아.”

강현은 해완의 손목을 쥐고 부드럽게 당겨 얼굴을 드러나게 만들고는 물었다.

“정말 주사가 잠드는 거야?”

“……응.”

“나랑 자기 싫어서 도망간 건 아니고?”

“뭐? 그게 무슨 소리야?”

진담인지 농담인지 순간 구분이 되지 않은 해완이 의아하게 물었다. 그러나 강현은 장난기 하나 없는 얼굴로 그를 빤히 바라보고만 있었다.

“아냐. 그런 거 진짜 아냐.”

너무 당황한 나머지 고개를 크게 저어가며 부정하자, 강현이 해완의 손목 안쪽을 엄지손가락으로 슬슬 문지르며 중얼거렸다.

“정말? 지난번에 네가 힘들어하는데도 내가 자제를 못 한 것 같아서…… 계속 마음에 걸렸거든.”

문득 스치는 깨달음에 해완은 입을 반쯤 벌렸다. 호텔 예약에 샴페인까지 준비한 것을 갑작스럽게만 여겼는데 이유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날 밤을 강현이 나쁘게 마음에 두는 게 싫어 그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정말 그런 거 아냐. 그때…… 나도 정말 좋았어. 내가 힘들어 보였다면 그건 그냥…….”

나도 처음이라 그랬다고.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할 뻔했지만, 그럴 수 없다는 것을 간신히 떠올리고 말을 뚝 멈췄다.

해완이 갑자기 멍해져 있자 강현이 부드럽게 되물었다.

“그냥?”

해완은 고개를 숙이고 작게 중얼거렸다.

“그냥, 그냥…… 오랜만이어서……. 나도 당황했나 봐.”

강현이 해완의 숙인 고개를 보며 나직이 물었다.

“나 다시 만나기 전에 오랫동안 남자랑 안 자서 그랬던 거야?”

차마 강현의 얼굴을 볼 수가 없어 해완은 고개만 끄덕였다. 강현은 그런 해완의 턱을 쥐고 들어 올린 뒤 얼굴을 바싹 붙인 채 속삭였다.

“……그럼 안심해도 되는 거네?”

강현은 해완의 대답을 듣지도 않고 입을 맞췄다. 대답이 되길 바라며, 해완은 눈을 감았다.

잠시 농밀한 키스를 주고받은 끝에 강현이 먼저 입술을 떼어 냈다. 생각보다 짧은 입맞춤에 해완이 아쉬운 눈으로 강현을 바라보자, 그는 해완의 코끝을 검지로 툭 건드리며 씩 웃었다.

“너 아르바이트 가야지. 씻고 나와. 데려다줄게.”

헬스장 청소 아르바이트 자체를 새까맣게 잊고 있었던 해완은 눈을 크게 떴다. 시계를 보니 새벽 4시 20분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그제야 해완은 강현이 새벽같이 자신을 깨운 이유가 일에 늦지 않게 하기 위해서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미 씻고 나온 듯했던 강현은 옷을 챙겨 입으려는 듯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지만, 뜨거운 무언가가 가슴속에서 울컥 치미는 느낌에 해완은 입술을 가만히 깨물었다.

이렇게 좋고 비싼 호텔에 데리고 와 준 것보다 지금 강현이 저를 깨워 준 것이 더 고맙다고 하면 누군가는 그를 미쳤다고 할지도 모르겠지만, 어쩔 수 없었다.

강현이 해완이 하는 일을 못마땅해하는 티를 낼 때마다 그것은 어쩔 수 없이 상처가 됐다. 누군가 보기에는 보잘것없는 일일 수 있겠지만 저 자신을 떳떳하게 먹이고 입히고 살아가게 한다는 점에서 해완에게는 너무나 중요한 일이기에 그랬다.

해완은 잠시 강현의 널찍한 등을 바라보았다. 그저 그것만으로 가슴이 터질 것처럼 좋아서, 조금은 무서운 마음을 안은 채였다.

* * *

“31일 말인데, 그날 유준이랑 집에 같이 있는 거지?”

해완이 일하는 헬스장 앞에 차를 세운 강현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어? 그건 왜?”

그날 만나자고 하려는 걸까.

인하와 해언의 납골당에 가기로 한 탓에 오전에는 만날 수 없는 것에 대해 아직 제대로 된 핑계를 생각해 내지 못한 해완은 조금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날 못 만날 것 같은데…… 혹시 너 혼자 보내야 하나 싶어서.”

그러나 먼저 만나기 어렵겠다고 하는 강현의 말에 해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랬구나. 유준이랑 같이 있을 거니까 내 걱정은 하지 마. 근데 무슨 일 있어?”

“아, 원래 말일이랑 설에는 본가에 무조건 가 봐야 되거든.”

가족들에 대한 강현의 말을 마음에 담아 두고 있던 해완은 멈칫했다.

“괜찮겠어……?”

조심스러운 질문에 강현은 픽 웃으며 답했다.

“당연히 괜찮지. 집에 가면 내가 잡아먹히기라도 할까 봐?”

“그런 건 아닌데…….”

태연한 강현의 태도가 해완의 마음을 더 쓰이게 만들었지만, 괜한 상처를 들쑤시는 것일까 섣불리 더 말을 꺼내지는 못했다. 그러자 강현이 해완의 볼에 쪽 입을 맞추고 장난스럽게 말했다.

“왜, 내가 너 안 보고 가족들 보러 가서 서운해?”

해완은 강현의 가슴을 가볍게 툭 치며 투덜거렸다.

“내가 무슨 어린앤 줄 알아.”

“술도 마실 줄 아는데 어린애는 아니지. 물론 샴페인 두 잔 마시고 욕조에서 기절하는 게 어른이 할 일은 아닌 것 같긴 하지만.”

“그만 놀려, 좀.”

해완은 짓궂게 구는 강현의 입술을 엄지와 검지로 살짝 세게 잡았다 놓았다. 강현은 키득거리며 웃다가 입을 열었다.

“연락할 테니까 집에 얌전히 있어. 알았지?”

강현의 말에 해완은 순간 머뭇거렸다. 31일에 약속이 있다는 것 정도는 말하고 싶었다. 하지만 인하의 존재를 도저히 설명할 방법이 없었으므로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응.”

“새해에 봐.”

그의 목소리는 퍽 다정했지만, 강현에게 또 감추는 것이 생겼다는 생각에 마음이 무거워진 해완은 애써 웃음을 지으며 차에서 내렸다.

* * *

한 해를 마무리 짓는 날이라 그런지 납골당에는 그리운 이를 찾은 사람이 많았다.

늘 혼자 찾아야 했던 이곳에 누군가 함께 서 있다는 것에 설명할 수 없이 기분이 묘해, 해완은 옆에 선 인하를 흘끗 올려다보았다.

해언의 납골함의 위치는 해완에게는 살짝 올려다보아야 시선이 닿는 높이였지만 그보다 키가 큰 인하에게는 딱 눈높이에 맞았다. 그는 한동안 알 수 없는 표정으로, 납골함 앞에 놓인 해언의 웃는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기만 했다.

“……이 사진은 언제 찍은 거예요?”

그때 인하가 갑작스럽게 입을 열었다. 해완의 시선이 그의 손끝을 향하자 두 사람의 마지막 크리스마스 날 함께 찍었던 스티커 사진이 눈에 띄었다.

그날의 기억을 떠올리자 와락 터져 버릴 것처럼 북받치는 감정을 간신히 삼킨 해완이 애써 태연하게 입을 열었다.

“어, 그게, 재작년 크리스마스예요.”

“재밌었나 봐요. 두 사람 다 웃는 얼굴이 너무 보기 좋네요.”

해완이 고개를 돌리자 옅은 웃음을 띠고 있는 인하가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인하의 평온한 태도가 이상하게 위로가 되어, 해완도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네. 진짜 행복했어요. 오랜만에 둘이 나가서 엄청 신나게 놀았거든요. 영화도 보고, 쇼핑도 하고, 스케이트도 타고.”

“스케이트요? 윤해언이 스케이트를 탔어요?”

“네. 왜요?”

“치사해서요. 뉴욕에서 그렇게 한 번만 타자고 애원했는데 들은 척도 안 했거든요.”

해언의 미국 생활에 대한 이야기에 해완은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뉴욕이요……? 해언이랑 뉴욕에서 사셨어요?”

“아, 아뇨. 원래 집은 캘리포니아에 있었는데 겨울에 둘이 같이 여행 갔을 때 얘기예요.”

인하는 별생각 없이 하는 말 같았지만 여행이라는 말이 해완을 멈칫하게 만들었다.

지난번 짧은 대화에서 해언과의 관계에 대해 인하는 저 혼자만 감정을 가지고 있었던 것처럼 이야기했지만, 그가 흘리는 말들을 들어 보면 도저히 단순한 친구로만은 들리지 않아서였다.

그럼에도 해언이 인하에 대해 일언반구도 하지 않은 게 영 마음에 걸려, 해완은 궁금증을 참지 못하고 조심스레 입을 열었다.

“저기, 여쭤보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뭔데요?”

“이런 질문 드리는 게 실례일지도 모르겠지만…… 해언이랑 정말 단순히 친구셨던 건가요?”

그 말에 인하는 입을 다물었다가, 재미있는 질문이라는 듯 물었다.

“해언이랑 나랑 섹스를 했냐고 묻는 거예요?”

다소 핀트가 어긋난 인하의 되물음에 당황한 해완은 고개를 내저으려 했다.

“네? 저는 그냥…….”

“네, 같이 자는 사이였어요. 처음 만났을 때부터.”

그렇게 직설적인 대답을 들을 줄 몰랐던 해완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붉혔다. 그런 해완의 얼굴을 보고 작게 웃음을 터트린 인하가 말했다.

“뭘 그렇게 얼굴을 붉히고 그래요. 되게 순진한가 보네, 윤해완 씨.”

“…….”

“해언이가 왜 그렇게 싸고돌았는지 알겠어.”

그 말에서 느껴지는 묘한 뉘앙스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렸다.

강현에게는 전혀 하지 않은 자신의 이야기를, 인하에게는 싸고돈다는 소리를 들을 정도로 많이 했다는 것에 아리송하기도 하면서도 설명하기 힘든 묘한 기분이 들었다.

해완에게 있어 해언은 저를 세상에서 잘 아는 사람 중에 하나였지만, 반대로 해언은 해완이 영원히 이해할 수 없는 부분을 늘 가지고 있었다는 사실을 재확인시켜 주는 것만 같아서 괜히 씁쓸해진 그는 툭 입을 열었다.

“해언이는 제 친동생이나 마찬가지라, 그런 얘기 듣기가 좀 어색한 것뿐이에요.”

저도 모르게 튀어나온 방어적인 말투에, 인하는 방긋 미소를 짓더니 묘하게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수 있겠네요. 기분 나빴으면 미안해요.”

인하는 다시 해언의 납골함을 응시했다. 잠시 침묵이 감돌았다. 어딘가 무거워진 공기를 느낀 해완은 목뒤를 손으로 쓸었다.

그러나, 해완이 정말 불편해지기 전에 인하는 가벼운 목소리로 말을 건넸다.

“여긴 그동안 해완 씨 혼자 돌본 거예요?”

“……네.”

해완은 약간 머뭇거리다 대답했다. 한 달 넘게 납골당을 찾지 못한 것 때문에 해언에게 소홀해 보였을까 내심 마음에 걸렸던 탓이었다.

하지만 시선을 돌린 인하는 그런 눈치는 전혀 없이 다정한 미소만 지어 보였다.

“여길 보기만 해도 알겠어요. 해완 씨가 해언이를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아꼈을지.”

누구에게 알아 달라고 말할 수도 없던 지점을 정확히 보듬어 주는 인하의 말에 해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해언의 유골을 이 납골당에 안치하고 나서 해완은 납골함을 꾸미는 것에 유난히 신경을 썼었다. 이식 수술을 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라 성치도 않은 몸으로 일주일에도 두세 번씩 왕복 몇 시간이 걸리는 길을 다니고 있으니 유준이 성질을 낼 정도였지만, 그래도 해언이 놓인 곳이 외롭게 보이는 게 죽기보다 싫었다.

죽은 이에게는 무의미하다는 걸, 기껏해야 자기만족에 불과한 일이라는 걸 모르지는 않았다. 그래도 해언의 죽음에 대한 슬픔을 누구와도 나누지 못하는 상황에서는 해언이 생전에 좋아하던 것이나 사진을 통해 추억들을 되새기고 그의 납골함 곁에 선물하는 것만이 스스로를 위로하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것을 알아주는 사람이 생긴 것에 새삼스레 마음이 찡해져, 해완은 말없이 손가락만 만지작거렸다.

두 사람은 한동안 조용히 해언의 납골함을 바라보기만 했다. 하지만 직전처럼 불편한 느낌은 조금도 없었다. 그저 서로가 공유하는 나직한 슬픔만이 주위에 떠돌았다.

어느 순간, 인하가 불쑥 입을 열었다.

“전에 해언이가 귀국하기 전에 크게 싸웠다고 한 거 기억나요?”

“……네.”

“그거, 날 떠나서 윤해완 씨한테 돌아가겠다고 해서 싸운 거예요.”

해완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인하는 말을 이어 나갔다.

“살 수 있는 확률이 낮다고 해도, 할 수 있는 데까지 같이 있고 싶었어요. 그럴 자신도 있었구요. 하지만 시한부 판정을 받자마자 한국으로 돌아가겠다고 하더군요. 그래서 배신감을 느꼈어요. 서로의 감정이 완전히 같지 않다는 건 알고 있었지만, 적어도 그렇게 망설이지도 않고 날 떠나겠다고 할 줄은 몰랐거든요.”

인하는 뚝 말을 멈췄다. 무언가 갈등하듯 망설이던 것도 잠시, 그는 단호하게 입을 열었다.

“그 배신감이 너무 커서, 해언이가 다른 사람 곁에선 불행하길 바랐어요. 그게 메일을 받기 전까지 해언이를 찾지 않았던 진짜 이유예요.”

인하의 목소리는 모질었다. 그러나 해언을 향했던 날이 지금은 그 스스로를 향해 있으리라고, 왠지 모르게 그런 생각이 들었다.

삽시간에 뜨거워지는 눈시울에 해완은 빠르게 눈을 깜빡였다. 그는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저도 원망했었어요. 해언이가 처음 저를 떠났을 때.”

숙인 고개 위로 고집스럽게 정면을 향해 있던 인하의 시선이 향하는 것이 느껴졌다. 해완은 주먹을 꽉 쥐고 처음으로 속에 있던 말을 쏟아 냈다.

“정말 아무런 예고도 없이, 하다못해 작별 인사도 안 하고 가 버렸거든요. 그리고 5년을 연락 한번 못 받았어요. 꼭 버림받은 것 같았죠. 그래서 나도 해언이가 미웠어요. 미국에서 잘 지내고 있지 않았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할 때도 있었어요. 인하 씨처럼요.”

“…….”

“그래서…… 해언이가 죽고 난 직후에는 많이 힘들었어요. 잠깐이라도 그 애를 미워한 나 자신이 너무 싫었거든요.”

해완은 두 눈에 가득 고인 눈물을 손바닥으로 거칠게 쓸어 냈다.

“그런데 이젠 알겠어요. 그건 해언이를 미워한 게 아니라 너무 그리워서 그랬던 거라고. 어떤 감정이 너무 커지면 그 형태를 알아보기 힘들 수도 있다는 걸요.”

“…….”

“그러니까…… 인하 씨도 너무 힘들어하시지 않았으면 좋겠어요.”

해완이 붉어진 눈을 치뜨며 인하를 바라본 순간, 저를 내내 내려다보고 있었던 인하의 눈동자가 곧장 맞닿아 왔다. 관찰이라도 하듯 집요하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움찔했다.

찰나였지만, 그것은 어딘지 모르게 시리게 느껴지는 구석이 있었다.

하지만 인하의 섬세한 입매는 순식간에 둥근 모양을 만들어 냈다. 그는 나직하고 슬픈 목소리로 낮게 중얼거렸다.

“……고마워요.”

다시 느리게 해언에게 시선을 돌린 인하는 코트 주머니에 찔러 두었던 손을 들어 납골함이 들어 있는 창에 툭 가져다 댔다.

그 단정한 손가락이 매끈한 유리 안 해언의 고운 얼굴 위로 미끄러지는 모양을, 해완은 멍하니 바라보았다.

납골당을 나온 것은 정오가 된 시간이었다. 머리 위로 쏟아지는 햇빛을 받으며 두 사람은 인하의 차를 주차한 주차장까지 천천히 걸었다.

12월치고 드물게 따뜻한 날이었지만, 인하에게 하고 싶었던 이야기가 따로 있던 해완은 조금 긴장한 채로 걸음을 옮겼다.

“이제 어디로 가요? 집으로 바래다주면 돼요?”

차 앞에 선 인하가 물었다. 머뭇거리던 해완이 급하게 말했다.

“저기, 점심 식사라도 같이하지 않으실래요?”

인하는 순간 멈칫했다. 해완은 집에서부터 준비했던 말을 빠르게 쏟아 냈다.

“갑자기 이런 말 해서 부담스러우실 수도 있지만, 저 해언이 미국에서 어떻게 지냈는지에 대해서 거의 아는 게 없거든요. 그래서 인하 씨한테 듣고 싶은 이야기가 너무 많아요. 대신 제가 밥 살게요.”

해완답지 않은 빠른 말투에 인하는 살짝 고개를 내리고 가볍게 웃는가 싶더니, 이내 해완과 똑바로 시선을 맞추고 다정히 대꾸했다.

“내가 먼저 그러자고 하고 싶었던 건데 먼저 말해 줘서 고마워요.”

괜히 긴장하고 있었던 해완의 얼굴이 밝아졌다.

“근데 미안해서 어떡하죠? 오늘 점심은 시간이 좀 어려워서.”

“아…….”

가능하면 시간이 온전히 비는 오늘 대화를 나누고 싶었던 해완은 조금 풀이 죽었다. 그러자 곧바로 인하가 다시 말했다.

“대신 저녁은 어때요? 볼일 보고 나서 6시쯤 다시 만날 수 있을 것 같은데.”

“저녁……이요?”

“약속 있어요? 아, 연말이고 하니까 약속 있겠구나.”

“아뇨, 그런 건 아닌데…….”

해완은 조금 망설였다. 강현은 만나지 못해도 저녁은 당연히 유준과 함께 외식이라도 할 생각이었기 때문이었다. 딱히 특별한 걸 먹지 않더라도 올해의 마지막 날인데 혼자 밥을 먹게 하고 싶지는 않았다.

해완의 침묵이 길어지자 인하가 얼굴에 의아한 빛을 띠었다. 그는 급하게 말을 이었다.

“같이 사는 동생이 있는데 오늘 같은 날 혼자 밥 먹을 게 마음에 걸려서요.”

“동생이요?”

“네. 아, 같은 보육원에서 자란 친구예요.”

“그럼 해언이랑도 아는 사이 아니에요?”

“네. 그렇죠.”

그러자 인하가 망설임 없이 말했다.

“그럼 같이 먹으면 되겠네요. 여기도 같이 왔으면 좋았을 걸, 말하지 그랬어요.”

할 수 있을 법한 생각이었지만, 유준이 해언을 그다지 좋아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지 못하는 인하의 말에 곤란해진 해완은 말문이 막혔다.

해완은 난감하게 뒷머리를 쓸다가 조심스레 말했다.

“그게…… 해언이랑 유준이가 친하게 지냈다고 말하긴 어려워서요.”

해완이 무심코 내뱉은 이름에 인하는 눈을 가늘게 뜨고 물었다.

“유준이요? 혹시 같이 사는 동생 이름이 김유준이에요?”

“네. 어떻게 아세요?”

해완의 어리둥절한 물음에 인하는 웃으며 말했다.

“해언이가 보육원 동생들에 대해서 몇 번 얘기한 적 있거든요. 유준 씨를 포함해서요.”

“그래요?”

“네. 그때 해언이 얘길 생각하면, 안 친했다는 게 이해가 되네요.”

인하의 말투는 지극히 가벼웠으나 해언이 유준과 보육원 동생들에 대해 부정적으로 말했다는 명백한 뉘앙스를 느낀 해완은 당황할 수밖에 없었다.

해언이 유준과 친하지 않았다는 것은 알지만, 생판 모르는 사람에게 부정적으로 이야기할 만큼 나쁜 감정을 품고 있다고 생각하지는 않았다. 게다가 해완이 기억하는 해언은 어떤 누구라도 뒤에서 나쁜 이야기를 할 만한 사람이 아니었다.

왠지 모르게 마음이 불편해진 해완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유준이랑 나이 차이가 많이 나서 친해질 기회가 없어서 그런 걸 거예요. 저야 뭐 항상 보육원에 있으니까 친해질 수 있었지만 해언이는 여기저기 찾는 사람도 많고 주말마다 서울까지 다니느라 항상 바쁘기도 했구요.”

해완의 말에 인하는 느긋하게 말했다.

“그럴 수 있죠. 주변에 나이 차이 많이 나는 형제들 보면 그런 경우 많더라구요.”

왠지 모르게 해언을 변호하고 싶은 마음에, 해완은 열심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도 유준 씨 불러서 같이 밥 먹었으면 좋겠어요. 안 그래도 오늘 저녁 같이할 사람 없어서 조금 쓸쓸했는데, 여럿이서 같이 먹으면 좋을 것 같기도 하구요. 해언이에 대한 얘기는 우리 언제든지 또 만나서 할 수 있는 거니까.”

내심 오늘의 만남이 마지막이 되지 않을까 생각하고 있었던 해완은 다음을 자연스럽게 기약하는 듯한 인하의 말에 순간 멈칫했다.

“그럼 일단 해완 씨 집까지 데려다주고, 6시까지 다시 그쪽에서 만나요. 괜찮죠?”

그러나, 해완이 뭔가를 더 생각하기도 전에 인하가 시원스럽게 말을 끝맺었다.

“……네. 좋아요.”

해완의 대답을 들은 인하가 환하게 웃었다. 그의 웃는 얼굴을 본 해완은 마주 웃을 수밖에 없었다.

* * *

“서인하 씨 앞에서 평소처럼 말하면 안 되는 거 알지?”

“알았다고 몇 번을 말해.”

“해언이 이름도 함부로 부르지 말고 꼭 형이라고 부르고.”

“알았다니까! 하여튼 잔소리는.”

불퉁하게 입술을 내민 채 투덜거리는 유준의 앞에서 다시 골치가 아파진 해완은 눈 앞머리를 꾹꾹 눌렀다.

인하와의 저녁 약속에 대해 이야기를 꺼내자 유준은 윤해언과 관련된 사람은 더는 만나고 싶지 않다고 질색을 했다. 차라리 집에서 라면이나 먹겠다는 것을 어르고 달래 이 자리까지 데리고 나오기는 했지만 여전히 표정이 뚱해 있어, 자못 말실수라도 할까 걱정이 사라지질 않았다.

그때 유준이 불쑥 질문을 던졌다.

“그 서인하라는 사람, 윤해언이 미국에 있을 때 같이 살았던 사람이라고?”

“응.”

“그럼 윤해언 미국에서 대체 뭘 하고 산 건지 물어봤어?”

“……아니, 아직.”

해완의 대답에 유준은 답답한 듯 가슴을 쳤다.

“아직까지 안 물어보고 뭐 했어? 대체 미국에서 뭘 하고 살았길래 거기까지 가 놓고 돈 한 푼 없이 형한테 빌붙으러 돌아온 거냐고 캐물었어야지! 내가 형이었으면 그것부터 제일 먼저 물어봤다.”

해완은 대답 대신 짧게 한숨을 내쉬었다. 안개에 싸여 있는 듯한 해언의 미국 생활에 대해 누구보다 알고 싶은 사람이 바로 해완이었다. 하지만 해언이 한국에 돌아왔을 때의 상황이나 그가 남긴 이상한 부탁들에 대해 인하와 어디까지 공유해야 되는지 도통 감이 잡히지 않는다는 것이 문제였다.

더군다나 해언이 남긴 부탁들에 강현이 관련되어 있다는 것을 생각하면 더더욱 그랬다.

‘해언이, 한국에 오래전부터 좋아한 사람이 있다고 하더라구요.’

불현듯, 인하와 처음 만난 날 그에게 들었던 말이 무겁게 마음에 내려앉았다. 돌덩이가 얹힌 듯 가슴이 답답해진 해완은 심장 근처를 문지르며 유준에게 나직이 말했다.

“안 그래도 오늘 물어보려고 했어. 그러니까 혹시라도 입 댈 생각 하지 마. 내가 알아서 할 테니까.”

속내를 간파당한 유준은 괜히 입을 삐죽였다. 그때, 가까이 다가오는 인하의 차를 발견한 해완이 멈칫했다. 유준도 그의 시선을 따라 뒤를 돌아보았다.

인하 또한 두 사람을 발견한 듯 차는 도로가에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멈춰 섰다. 고가의 외제 차임을 금방 알아본 유준이 혀를 내두르며 중얼거렸다.

“윤해언은 참 재주도 좋다. 강현이 형도 그렇고 어떻게 돈 있는 인간들만 쏙쏙 골라서 만나냐.”

해완이 유준을 향해 대놓고 인상을 찡그리자, 유준은 못 본 척 시선을 돌리며 딴청을 했다. 그사이 차에서 내린 인하가 성큼성큼 걸어 두 사람의 바로 앞까지 다가왔다.

그는 해완과 가볍게 눈인사를 하고는 씩 웃으며 유준에게 먼저 악수를 청했다.

“김유준 씨죠? 안녕하세요. 서인하라고 합니다.”

“아, 네. 안녕하세요.”

살가운 인사에 유준은 멋쩍은 듯 뒤통수를 문지르며 인하가 내민 손을 잡고 흔들었다.

“오늘 해완 씨랑 두 분이 식사하기로 하신 것 같던데, 갑자기 끼어들어서 죄송해요. 대신 제가 맛있는 밥 살게요. 혹시 소고기 괜찮아요?”

제가 저녁을 살 생각이었던 해완은 당황해 입을 벙긋거렸다. 하지만 유준은 눈을 반짝이더니 반색을 하며 대꾸를 했다.

“네! 완전 좋아요!”

“다행이다. 근처에 제가 아는 곳이 있는데 차로 조금 이동해야 되거든요. 배고플 텐데 얼른 가요.”

언제 툴툴거렸냐는 듯 금세 기분이 좋아져 인하를 졸졸 따라가는 유준의 등을 해완은 잠시 황당한 듯 바라보았지만, 결국 두 사람의 뒤를 따를 수밖에 없었다.

인하의 차를 타고 10분 정도 걸려 이동한 곳은 한우로 이름이 나 있는 노포였다. 항상 줄이 길게 늘어서 있던 곳이라 올 엄두를 내지 못했던 곳인데 어떻게 예약을 해 뒀는지 자리까지 이미 마련되어 있었다.

고기 부위별로 익숙하게 주문을 마친 인하가 해완과 유준을 돌아보며 물었다.

“괜찮으면 술도 한잔할까요?”

유준은 신이 나서 고개를 끄덕였지만 해완은 반사적으로 움찔했다. 그러자 인하가 깜빡했다는 듯 입을 열었다.

“아, 해완 씨 술 못하죠? 그럼 음료수 시켜 줄까요? 콜라랑 사이다 중에 뭐가 더 좋아요?”

“……아, 아뇨. 저 그냥 물이면 돼요. 근데 저 술 못 마시는 건 어떻게…….”

해완의 말에 인하는 미처 생각지 못했다는 듯 멈칫하더니, 난감하게 웃었다.

“그 얘기도 해언이한테 자주 들어서……. 미안해요. 제가 또 아는 척했네요.”

머쓱해진 해완은 뒷머리를 문지르며 말했다.

“해언이가 그런 얘기까지 했어요?”

“네. 고등학생 때 둘이 처음으로 같이 술 마시는데, 소주 한잔 마시고는 거의 기절해 버리는 바람에 해언이가 엄청 당황했었다고.”

생각지 못한 이야기를 꺼내는 인하의 말에 당황한 해완의 얼굴이 달아올랐다.

해완이 처음으로 술을 마셔 본 것은 고등학교 2학년 때의 봄이었다. 둘만이 갈 수 있던 그 체육 창고 안에서의 일이었다. 술은 해언이 구해 왔다. 그 좁은 마을 안에서 술을 샀다면 뭘 어떻게 해도 금세 원장 선생님 귀에 들어갔겠지만, 서울을 오가던 해언에게는 별달리 어려운 일이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그렇게 처음으로 마신 술의 결과는, 인하가 말한 대로 처참했다. 처음으로 손에 쥔 소주에서 풍기는 진한 알코올 냄새에 저도 모르게 인상을 잔뜩 찡그린 해완을 두고 해언이 놀려 대는 통에 울컥해 원샷을 해 버린 게 화근이었다.

목구멍을 타고 흐르는 화한 느낌과 반대로 코로 솟구치는 듯한 알코올 냄새, 그리고 혀끝에 남던 그 이상한 단맛을 마지막으로, 뭔가 눈앞이 빙글빙글 돈다 싶더니 해완은 금방 필름이 끊겨 버렸다.

처음으로 마신 술자리의 기억은 그렇게 허무하게 끝나 버렸지만, 둘은 그 뒤로도 종종 그 체육 창고 안에서 술을 마셨다. 해언은 해완이 너무 술을 못해서 재미없다며 투덜거리긴 했지만 왜인지 해완 이외에 다른 사람과는 절대 술을 마시지 않았다.

해완에게 있어서도, 누구도 오지 않는 해완과 해언 둘만의 안전지대에서 가지는 일탈은 그에게 일상에서는 가질 수 없는 짜릿한 기쁨을 주었었다.

해완이 잠시 추억에 잠겨 있는 사이, 옆자리에 앉은 유준이 해완의 어깨를 주먹으로 퍽 치며 배신감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뭐야, 형. 술 처음 마신 게 서울 와서라며! 나한테 학교 다닐 때 술 마시지 말라고 그렇게 잔소리를 해 놓고!”

유준을 위한답시고 했던 뻥이 이렇게 드러날 줄 몰랐던 해완은 꿀 먹은 벙어리가 돼서 얼굴만 붉혔다. 그런 두 사람을 본 인하가 씩 웃더니 뻔뻔하게 입을 열었다.

“그렇게 말했어요? 내가 듣기론 그 뒤로도 꽤 많이 술자리를 가졌다고 들었는데.”

“아, 이 형 완전 뻥쟁이였네. 인하 형, 또 다른 들은 얘기 없어요?”

매일 잔소리만 듣다가 해완의 약점을 잡은 것이 신이 났는지 유준이 인하를 향해 물었다. 얼떨결에 대화의 타깃이 된 해완이 어버버하는 사이 인하와 유준은 둘이 술을 주거니 받거니 하며 세상 친한 듯 이야기를 나누기 시작했다.

해완이 했던 걱정과는 달리, 인하와 유준은 꽤 죽이 잘 맞았다. 주로 인하가 듣거나 유준이 보았던 해완과 해언의 어린 시절의 일이 대화의 주제가 되기는 했지만, 그것으로 분위기가 화기애애해질 수 있다면 고마운 일이었다.

대화의 사이사이 해완은 조심스럽게 해언의 미국 생활에 대해서도 물었다. 인하는 조금의 거리낌도 없이 질문에 답해 주었는데, 그의 말로는 해언은 적응에 어려움을 겪은 적도 없고 학교 성적이며 교우 관계며 어떤 문제도 없이 잘 지낸 것처럼 들렸다.

그런 인하의 말은 해완에게 일종의 혼란만 안겼다. 해언이 무일푼으로 미국에서 돌아온 것으로 모자라 그 이유에 대해 입을 다물고 있었던 것에 대해 해완은 해언이 미국에서 말할 수 없을 정도의 어떤 안 좋은 일을 겪었던 게 아닐까 하는 걱정 어린 추측을 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와 가장 가까이 지냈다는 인하의 이야기에서는 그런 단서를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어쨌든 잡다한 이야기를 나누는 가운데 시간은 빠르게 흘러갔다. 나오는 고기마다 전부 입에서 살살 녹게 맛있었고, 사이드로 시킨 된장찌개와 볶음밥까지 먹으니 배가 터져 버릴 듯했다.

식사를 마친 뒤에도 인하와 유준 사이에서는 술이 연신 오갔다. 엉겁결에 소주 반 잔 정도를 마신 해완도 볼이 발긋하게 달아올랐다.

“근데요, 인하 형. 윤해…… 아니, 해언이 형이 내 이야기도 했다고 했잖아요. 뭔 얘기 했어요?”

슬슬 발음이 꼬이기 시작한 유준의 말에 당황한 해완이 고개를 홱 돌렸지만, 인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유준 씨는 그게 왜 궁금해요?”

“분명 나에 대해서 좋은 말 안 했을 거니까 궁금하죠. 해언이 형은 날 엄청 싫어했거든요.”

“유준아. 그만해.”

해완이 유준을 말리려 했지만, 인하는 픽 웃더니 부드럽게 받아넘겼다.

“뭐, 솔직히 말해서 좀 투덜거리긴 했어요. 근데 해언이 알잖아요. 엄청 까다로운 거. 걔 눈에는 아무도 완벽하게 차는 사람 없을걸요. 나도 그랬고.”

그러자 유준이 반색을 하며 손뼉을 쳤다.

“맞아요. 이 형이 제대로 잘 아네. 해완이 형은 아직까지도 그걸 몰라. 윤해언이 그 보육원에서 정말 좋아하는 사람은 자기밖에 없었다는 거.”

유준을 제지하려던 해완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유준은 몸을 흔들면서 열변을 토했다.

“그래, 뭐 그거까진 이해해. 윤해언 잘났잖아. 그렇게 잘났으니 나머지 보육원 애들은 우스워 보일 수도 있지. 근데 내가 진짜 이해가 안 가는 게 뭔지 알아요? 적어도 해완이 형은, 해완이 형만은 그렇게 좋아해 놓고, 왜 마지막에 찾아와선 괴롭히고만 갔는지에 대해서예요.”

“김유준!”

더 이상 들을 수 없었던 해완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유준의 흔들리는 시선이 해완을 향하자, 해완은 단호하게 유준의 어깨를 밀어 내며 말했다.

“너 취했어. 가서 세수라도 하고 와.”

유준은 억울한 듯 뭐라 더 말하고 싶은 얼굴을 했지만, 해완의 딱딱하게 굳은 표정을 보고는 입을 삐죽이고 비틀거리며 자리에서 일어서 화장실로 향했다.

두 사람만 남겨지는 순간, 뜻을 알 수 없는 얼굴로 조용히 앉아 있던 인하가 불쑥 말을 꺼냈다.

“해언이가 마지막에 해완 씨를 괴롭혔다는 게 무슨 말이에요?”

해완은 반사적으로 인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가, 곧바로 눈을 내리깔았다.

아직까지도 말해도 될지 망설여졌지만 직접적으로 묻지 않고는 무엇도 해결되지 않을 것 같았다. 잠시 고민하던 해완은 입을 열었다.

“해언이가 절대 절 괴롭히진 않았어요. 그건 유준이가 잘못 말한 거예요. 하지만…….”

어쩌면 해언의 치부를 드러내는 걸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해완은 망설였다. 그러나 인하는 채근이라도 하듯 고개를 기울이며 그를 보았다. 해완은 침을 한 번 삼키고 어렵게 말을 이어 나갔다.

“하지만 해언이가 저한테 찾아왔을 때, 가진 게 아무것도 없는 상태였어요. 유준이가 불편해하는 건…… 그 점에 대해서예요.”

“……가진 게 아무것도 없었다는 게 돈에 대해서 말하는 건가요?”

“……네.”

“그럼…… 해언이가 해완 씨 곁에 있는 동안 생활비며 치료 비용이며, 사후에 이식 수술 비용까지 전부 해완 씨가 다 부담했다는 거예요?”

해완은 고개를 끄덕이며 인하를 보았다. 그는 뭔가 생각하는 듯 시선을 내리깔았지만 의도적으로 컨트롤을 하고 있는 것인지 얼굴에 감정이 비쳐 보이지는 않았다.

해완은 어쩔 수 없이 한 번 더 질문을 던졌다.

“혹시…… 해언이가 미국에서 떠나기 전에 생활이 어려워질 만한 무슨 일이라도 있었나요?”

인하는 단호하게 즉시 대답했다.

“아뇨. 저랑 헤어질 때까지만 해도 그런 문제 같은 건 전혀 없었어요. 경제적 문제라면 내가 그렇게 놔두지도 않았을 거구요.”

결국 인하조차 확실한 답은 모르는 모양이었다. 해완은 옅은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해완을 본 인하가 조용히 말했다.

“저랑 헤어진 다음에 무슨 일이 생겼을 수도 있긴 하지만, 그건 지금은 알 수 없는 일이니…… 아무튼 제가 한번 알아볼게요.”

“……네. 감사합니다.”

두 사람은 한동안 각자의 생각에 잠겨 있었다. 누군가와 말없이 앉아 있는 것을 불편해하는 해완이었지만, 풀리지는 않고 커져만 가는 의문에 정신이 팔려 조금도 신경이 쓰이지 않을 정도였다.

그런데 문득, 인하가 입을 열었다.

“근데 해완 씨. 뭐 좀 하나 물어봐도 돼요?”

멍하니 생각에 빠져 있던 해완이 흠칫 놀라 반사적으로 되물었다.

“네, 뭔데요?”

그는 유독 깊은 시선으로 해완을 바라보는가 싶더니, 느긋하게 입을 열어 물었다.

“혹시, 여강현이란 사람 알아요?”

인하의 입에서 나온 강현의 이름에, 해완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주변 공간에 가득 차 있던 온갖 소음들이 순식간에 표백됐다. 그를 대신해 날카로운 이명이 귓속에서 가득 울렸다.

해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간신히 더듬거리며 말했다.

“지금, 지금 뭐라고…….”

주위가 시끄러워 제대로 듣지 못했다고 생각한 탓인지, 해완의 과민한 반응을 의식하지 못한 것처럼 인하는 여상하게 대답했다.

“여강현이요. 그 마을을 떠나기 전 해완 씨랑 같이 알던 친구라고 해언이가 자주 얘기했었거든요. 보육원 사람이 아닌 누군가를 얘기한 건 그 사람뿐이어서…… 기억에 많이 남더라구요.”

모른다고 하고 싶다는 생각이 제일 먼저 들었다. 그러나 해언이 같이 아는 친구라고 이야기한 이상 거짓말을 하는 것은 의미가 없을 터였다.

해완은 떨리는 손을 무릎 위로 내려 주먹을 꽉 쥐었다. 타들어 가는 듯한 입술을 혀로 한 번 축이고 시선을 내린 채 입을 열었다.

“……네. 아, 알긴 아는데…….”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탓에 해완은 흥미로운 표정을 한 인하가 그를 향해 몸을 기울이는 것을 미처 의식하지 못했다.

“그래요? 그럼 혹시…….”

바로 그때, 뒤에서 뭔가가 넘어지는 듯 들려온 커다란 우당탕 소리에 해 완은 소스라치듯 놀라며 고개를 홱 돌렸다. 해완에게 고정되어 있던 인하의 시선도 흠칫 소리의 근원을 향했다.

그곳에 넘어져 있는 것은 유준이었다. 비틀거리며 걷다가 테이블 아래에 있는 쓰레기통에 발이 걸린 듯 쓰레기들이 바닥에 흩뿌려져 있었다.

해완은 반사적으로 벌떡 몸을 일으켜 황급히 유준에게 다가갔다.

“유준아, 괜찮아?”

“아 씨, 엉덩이 아파아…….”

유준은 엉덩방아를 찧은 엉덩이가 아픈 듯 투덜대긴 했지만 다친 곳은 없어 보였다. 넘어지고 나서도 정신을 못 차렸는지 눈이 풀려 있는 게 생각보다 많이 취했었던 모양이었다.

한숨을 내쉰 해완이 유준의 발에 걸려 있던 쓰레기통을 일단 빼내는 사이 종업원이 다가왔다. 다친 곳이 없냐고 묻는 종업원을 도와 바닥에 널브러진 쓰레기들을 주워 담고서야 유준의 팔을 잡아 일으켜 세웠다.

그렇게 몸을 일으키는 중 유준이 다시 한번 크게 비틀거렸다. 몸집이 작은 유준을 부축하는 것이 평소라면 무리는 없었겠지만, 유준이 해완에게 완전히 무게를 싣고 있던 탓에 갑자기 균형을 잃은 해완은 허우적대며 휘청댔다.

순간적으로 넘어지겠다고 생각했지만, 그런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해완의 등을 누군가 단단하게 받쳐 준 탓이었다.

머스크, 럼, 시나몬, 그리고…….

해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살짝 들어 어느새 가까이 다가와 바로 뒤에서 저를 받쳐 주고 있던 인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인하는 미소를 지으며 나직이 말했다.

“조심해요. 같이 넘어지지 말고.”

그렇게 말하면서도, 그는 술 취한 유준을 부축해 줄 생각은 하지 않고 대신 해완의 양팔을 강하게 붙들고 있었다.

“……감사합니다.”

지나치게 가까운 거리가 불편해진 해완은 아직까지 흐물거리며 서 있는 유준을 추슬러 안는 척 인하의 품에서 벗어났다.

인하는 자연스럽게 뒤로 물러섰지만 하고 싶은 말이 있는 듯 해완을 빤히 바라보았다.

그 눈과 다시 마주친 순간, 유준이 벌인 소동 탓에 잠시 깜빡하고 있던 아까의 대화를 떠올린 해완의 몸에 소름이 쫙 돋았다.

그때 인하가 입을 열었다. 해완은 바싹 긴장했다.

“유준 씨가 그렇게 취했는지 몰랐네요. 이제 갈까요?”

그러나, 방금 전까지의 대화를 잊은 듯 자리를 파할 것을 제의하는 인하의 말에 해완은 대놓고 안도의 한숨을 내쉴 뻔한 걸 겨우 참았다.

“네, 그래야 될 것 같아요.”

“그럼 추우니까 천천히 나와요. 앞에서 대리 부르고 있을게요.”

그 말을 끝으로 인하는 먼저 계산을 하려는 듯 계산대로 향했다. 인하의 등 뒤를 향해 유준이 삿대질을 하며 웅얼거리는 소리가 들렸다.

“왜 벌써 나가아……. 우리 2차 가야지, 2차…….”

평소라면 잔소리를 잔뜩 했을 술 취한 유준이 도움이 될 때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해완은 바람 빠지듯 피식 웃었다.

어차피 대리가 오려면 시간이 좀 걸릴 테니 해완은 일단 유준에게 물을 몇 잔 먹여서 조금이라도 정신이 들게 한 뒤 가게 앞으로 나왔다.

하지만 가게 앞에 있어야 할 인하가 보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가며 텅 빈 거리를 둘러보던 해완의 시선의 끝에, 가게에서 약간 떨어진 대로변 쪽 가로등 밑에서 담배를 피우고 있는 인하의 모습이 걸렸다.

막 불을 켠 듯 손끝에 걸린 담배는 길었다. 선이 예민한 옆얼굴에서 뿜어져 나오는 연기가 가로등 불빛을 타고 일렁이며 공기 중으로 흩어졌다. 붉은 담뱃불이 어둠 속에서 희미하게 빛나는 가운데, 그는 천천히 여유 있게 담배를 태웠다.

그런 인하를 보며, 해완은 순간적으로 담배였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인하가 처음 편의점에 들어섰을 때 느꼈던 바로 정체를 알 수 없던 건조한 냄새, 그리고 아까 바싹 붙어 섰을 때 느꼈던 향조의 데자뷔 말이다.

정확히 말하면 타바코 향조로, 강현의 작업실에서 한번 맡아 본 기억이 있었는데 담뱃잎 자체를 말린 향이라 일반적인 담배 냄새와는 많은 차이가 있긴 했다.

그때, 시선을 느끼기라도 한 듯 인하가 슥 고개를 돌려 해완을 바라보았다. 훔쳐보다가 걸리기라도 한 것 같아 민망해진 해완이 화들짝 눈길을 돌렸다.

그는 한 손에 쥐고 있던 휴대용 재떨이에 담배를 쑤셔 끄고는, 연기를 털어 내려는 듯 손으로 가볍게 공기를 휘저으며 해완의 곁으로 다가왔다.

“미안해요. 나온 줄 몰랐네.”

“아니에요. 바로 방금 나왔어요.”

그러자 인하가 어느새 가게 계단에 앉아 있는 유준에게 물었다.

“유준 씨 괜찮아요?”

“아뇨. 눈앞이 해롱해롱해요.”

아직까지도 혀가 꼬여 있는 유준의 대답에 인하가 시원스럽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말했다.

“대리 기사님은 한 5분 뒤면 도착할 것 같아요. 조금만 기다려요. 데려다줄게요.”

“……감사합니다.”

세 사람은 잠시 말없이 대리 기사가 오기를 기다렸다. 유준이 앉아서 무릎에 고개를 묻고 있는 탓에 인하와 단둘이 서 있는 것만 같아 유독 침묵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솔직히 말해 이러다 아까 하다 만 대화가 나올까 불안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안절부절못하던 해완은 결국 불쑥 말을 내뱉었다.

“담배는 자주 피우세요?”

인하는 흠칫한 듯 대꾸했다.

“아, 아뇨. 사실 거의 끊어서 한 달에 한 번도 피울까 말깐데, 술 마실 땐 어쩔 수 없이 생각이 나서. 혹시 담배 냄새 불편해하는 거면 미안해요.”

해완은 황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뇨. 그냥, 그게 뭐랄까, 인하 씨한테는 잘 어울려서요.”

“네?”

“그, 페로몬 향에…… 타바코 느낌이 있는 것 같아서요…….”

괜히 아는 척하는 느낌에 멋쩍어진 해완은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을 끝맺었지만, 인하는 조금 놀란 듯한 얼굴을 했다.

“알아채는 사람 별로 없던데. 향에 민감하네요.”

“별로 그런 건 아닌데…….”

“그렇지 않긴요. 해언이는 끝까지 그걸 몰랐어요. 워낙 자기 향이 진해서 그런가. 알고 있죠? 자기 향이 강하면 남의 향에 좀 둔감해지는 거.”

인하의 말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연하게 웃었다.

“네. 해언이가 만지는 것마다 다 해언이 향이 옮을 정도였으니까…… 그럴 만하죠.”

“해완 씨도 그랬다면서요.”

“……네?”

“해완 씨한테도, 늘 해언이 향이 났다고 하던데.”

해완은 순간 입을 다물었다. 인하는 비스듬히 고개를 돌리고 해완을 바라보며 느긋하게 말했다.

“그래서 해완 씨가 꼭 자기 것 같을 때도 있었대요. 해언이가.”

어떤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해완은 가만히 눈만 깜빡였다.

그때 한 번 더 싱긋 미소를 지은 인하가 문득 핸드폰을 보더니 전화를 받으며 앞으로 걸어 나갔다.

“네, 기사님. 저희 지금 여기 가게 바로 앞에 있습니다.”

종종대는 걸음으로 급하게 다가온 대리 기사는 인하와 인사를 나눈 뒤 자동차 키를 받아 들고 가게 앞에 주차되어 있던 인하의 차 운전석에 탔다.

뒷좌석 문을 연 인하가 해완과 유준을 향해 말했다.

“추운데 얼른 타요.”

왜인지 멍해져 있던 해완은 겨우 정신이 들었다. 해완의 다리에 기대어 꾸벅꾸벅 졸고 있던 유준을 일으켜 세운 그는 이상한 기분을 뒤로하고 인하의 차로 향했다.

대리 기사를 의식한 탓인지 차 안에서 인하는 드물게 말이 없었다. 해완 또한 간만의 외식으로 조금 피곤해져 있어서, 유준의 머리를 어깨에 기대 놓은 채로 창밖으로 스쳐 지나가는 야경을 잠자코 바라보았다.

애초부터 먼 거리가 아니었기 때문에 해완의 동네에는 금방 도착했다. 그럴 필요까진 없는데도 인하는 굳이 차에서 내려 해완과 유준이 내리는 것을 도왔다.

“정말 집 앞까지 안 데려다줘도 괜찮겠어요?”

“아니에요. 정말 코앞이라 괜찮아요. 유준이도 술 좀 깬 거 같고.”

인하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해완은 이제 제법 멀쩡하게 서 있는 유준의 팔을 툭 치며 대답했다. 그러자 유준은 머쓱한 듯 코끝을 손가락으로 훔치며 딴청을 했다.

“그래요.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요.”

“네. 오늘 정말 감사했어요. 식사도 너무 맛있었구요.”

“그 정도야 아무것도 아닌데요, 뭐.”

“그럼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래요. 유준 씨도 잘 들어가요.”

“네, 오늘 고기 잘 먹었습니다.”

꾸벅 인사를 한 해완과 유준이 돌아서려는 때, 인하가 말을 꺼냈다.

“다시 연락할게요.”

“…….”

“해언이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고 나서요.”

그 대답에 아니라고 할 수는 없었다. 해완은 조심스럽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인하는 마주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돌아섰다. 인하가 올라탄 차는 빠르게 빈 도로를 따라 사라졌다.

멀어지는 인하의 차를 저도 모르게 바라보고 있던 해완은 고개를 돌리다 저를 호기심 어린 시선으로 보고 있던 유준과 눈이 마주치고는 움찔했다.

“윤해언에 대해서 무슨 상황을 알아본다는 거야?”

아직도 발음이 좀 엉성하긴 했지만, 술이 깨기는 깬 모양이었다.

“……추우니까 가면서 얘기하자.”

해완은 골목 안으로 걸음을 옮기며 유준이 화장실에 간 사이에 인하와 나누었던 대화에 대해 짧게 설명해 주었다. 유준이 진절머리가 난다는 듯 몸을 과장되게 부르르 떨었다.

“진짜 윤해언은 어떻게 걔에 대해서 주변에 제대로 아는 인간이 하나도 없냐. 징그럽다, 징그러워.”

해언을 향한 유준의 투덜거림은 익숙했지만, 술자리에서 유준이 했던 말이 불쑥 떠오르자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던 평소와는 달리 무시할 수 없게 무겁게 느껴졌다.

해완은 걸음을 스륵 멈췄다. 무심코 앞서 나가던 유준도 툭 걸음을 멈추고는 의아한 듯 뒤돌아보았다.

“유준아, 근데 아까 서인하 씨한테 한 얘기 있잖아. 해언이가…… 나 말고 보육원 애들을 다 싫어했다고 한 거.”

해완의 말을 듣자마자 유준은 눈을 굴리며 대놓고 푹 한숨을 내쉬었다. 그 이야기를 하고 싶지 않다는 노골적인 표시였지만 해완은 꿋꿋이 말을 이었다.

“난 네가 왜 그런 생각을 했는지 모르겠어. 해언이 그런 애 아니란 거 알잖아.”

유준은 입을 꾹 다물었다. 해완은 부드럽게 말하려고 노력하며 말을 이어 나갔다.

“그래. 네가 그렇게 느낄 계기가 있었을지도 모르지. 근데 왜 나한텐 한 번도 그런 얘기 안 한 거야?”

마치 혼나고 있는 어린아이처럼 괜한 땅바닥만 발로 툭툭 차고 있던 유준이 반항적인 시선으로 해완을 홱 바라보았다.

“형한테는 그런 얘기 해 봤자 소용없으니까.”

“뭐?”

“형은 옛날부터 그 인간에 대해서는 형이 듣고 싶은 얘기만 듣잖아. 싫은 얘기 하면 맨날 기억 안 나는 척하고.”

유준의 말이 도통 이해가 되지 않아 해완은 곧바로 대답을 하지 못했다.

“그게 무슨…….”

“해언아.”

그때 뒤에서 들려오는 낮고 깊은 목소리에, 해완은 숨을 헉 들이켰다. 해완의 등 뒤를 향하고 있던 유준의 눈도 튀어나올 듯 커졌다.

이미 누구인지 알고 있으면서도 설마, 하는 마음으로 해완은 뒤를 돌아보았다.

두 사람에게선 약간 떨어진 골목 어귀에서, 강현이 긴 그림자를 늘어뜨린 채 그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시선이 마주치자 강현은 긴 다리로 성큼 걸어 해완에게 다가오기 시작했다. 반가움보다 당황스러움에 먼저 압도된 해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그러나 곧, 불쑥 떠오른 생각이 온몸의 피가 단번에 쏟아져 내리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었다.

유준이와 하던 이야기를 들은 건 아닐까?

강현이 그를 부른 것은 두 사람에게서 좀 떨어진 곳이었지만, 늦은 밤 고요한 골목은 작은 소리도 크게 울리게 만드는 법이었다.

만약 들었다면, 그랬다면…….

소름이 오싹 끼쳐, 해완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옆에 선 유준도 안절부절못하며 해완과 강현을 번갈아 가며 흘끗거렸다.

그러나, 금세 앞에 선 강현은 두 사람 사이에 감도는 긴장감은 눈치채지 못한 듯 유준에게 먼저 말을 걸었다.

“유준아, 오랜만이야. 그동안 잘 지냈어?”

“저야 늘 잘 지내죠. 형은 잘 지내셨어요?”

유준은 눈치를 보면서도 용케 평소와 다른 기색 없이 강현의 말에 대답했다. 이윽고 강현의 시선은 느리게 해완을 향했다.

그는 자못 다정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유준이랑 재밌게 놀았나 보네. 술도 마시고.”

술 냄새가 나나 싶어 해완은 반사적으로 제 입을 가렸다가, 당황해 중얼거렸다.

“나 반 잔밖에 안 마셨는데…….”

강현은 픽 웃더니 유준을 향해 턱짓을 해 보였다.

“나머진 유준이가 다 마셨겠네, 그럼.”

해완이 느끼기에도 술 냄새가 나고 있던 유준은 민망한 듯 머리를 긁적였다.

가볍고 시답잖은 대화에, 유준과 나누던 이야기를 듣지 못한 모양이라는 확신이 든 해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해완은 목을 가다듬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강현아. 여긴 어떻게 온 거야? 오늘 본가에서 자고 오는 거 아니었어?”

그러자 해완을 향해 몸을 살짝 숙인 강현이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그러려고 했는데, 아무래도 보고 싶어서.”

간지러운 말에 해완은 얼굴을 발갛게 붉혔다. 밤의 어둠 속에서 얼굴빛이 드러날 리 없었을 텐데도 강현은 해완의 반응이 뻔히 보인다는 듯 싱글싱글 웃으며 몸을 바로 세웠다.

“우리 집에 가자. 새해 될 때 같이 샴페인이라도 따면 좋잖아.”

강현의 말에 해완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유준을 향했다. 그 시선을 바로 캐치한 유준이 말을 꺼냈다.

“어, 그럼 난 들어가 볼게. 둘이 재밌게 놀아.”

강현이 미안한 듯한 목소리로 말을 받았다.

“갑자기 해언이 데려가서 미안해, 유준아. 다음에 같이 밥이라도 먹자.”

“아니에요! 전 하나도 신경 쓰실 필요 없어요. 그럼 다음에 봬요.”

유준은 손사래를 치며 말하더니, 강현에게 꾸벅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잽싸게 열린 대문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저만 놓고 가겠다는데 투덜거림 한번 없이 바로 빠지는 것은 유준답지 않은 행동이었지만, 해완을 해언으로서 대하는 강현과의 만남은 처음이라 당혹스러워 그러는 걸 모를 수가 없었다.

어쩔 수 없는 수치심에 해완은 유준의 뒷모습을 보지 못하고 손만 만지작거렸다.

유준이 완전히 집 안에 들어가고 나서 강현이 물었다.

“갈까?”

해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강현이 해완의 어깨를 한 팔로 휘감고는 머리칼에 입을 맞추려는 듯 고개를 내렸다.

그런데 입술이 와 닿는 순간, 왜인지 강현이 멈칫했다. 가까이 붙어서 있던 탓에 예민하게 그 기색을 느낀 해완은 몸을 옆으로 빼며 입을 열었다.

“몸에서 고기 냄새 많이 나지?”

“아니, 그건 괜찮은데.”

멀어지려는 해완의 몸을 힘주어 잡은 강현은 미소 띤 얼굴로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담배 냄새 같은 게 좀 배었네.”

담배를 피우던 인하의 모습이 머릿속에서 번뜩 떠오른 해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인하와 같이 있는 모습을 본 건 아닐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지만, 유준과의 대화를 듣지 못했을 타이밍에 왔다면 그런 모습을 봤을 리도 없었다.

그래도 마음이 뜨끔해진 해완은 시선을 내리고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그게, 고깃집 앞이 흡연 구역이라 담배를 피우는 사람이 많더라고. 그래서 들어갔다 나왔다 할 때 좀 배었나 봐.”

실제로 고깃집에 들어갈 때는 앞에서 담배를 피우던 사람이 많아 연기를 헤치고 들어갔어야 했기 때문에 거짓말은 아니었다.

게다가 인하는 멀찍이서 담배를 피웠고, 해완에게 다가오기 전에 불을 완전히 껐기 때문에 인하에게서 옮은 냄새라기보다는 그쪽이 가능성이 높아 보였다.

해완의 말에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고는 상냥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러게. 집에 가자마자 씻는 게 좋겠다.”

강현은 그대로 해완의 어깨를 감싸 안고는 차를 주차해 둔 골목 앞까지 걸음을 옮겼다. 그의 팔에 휘감긴 채로 해완은 아까 들었던 인하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다시 연락할게요. 해언이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고 나서요.’

베일에 가려져 있는 듯한 해언의 과거에 대해 알아야 된다는 욕구에 무작정 고개를 끄덕이긴 했어도, 그와 만날 때마다 강현에게 숨겨야 할 일이 늘어나리란 생각을 미처 하지 못했던 스스로가 너무나 어리석게 느껴졌다.

자신의 존재 자체를 속이고 만나는 관계일지라도, 오히려 그렇기에 다른 것들은 최대한 강현에게 거짓 없이 대하자고 생각했다. 아주 사소한 것들일지라도 거짓을 자꾸만 더해 가는 일을 조금이라도 피하고 싶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모순적이고 기만적인 생각이었는지 새삼스럽게 깨달은 해완의 마음이 지독하게 아릿해졌다.

가슴 깊은 곳에서 독처럼 솟아오르는 한숨을, 억지로 입술을 깨물어 삼켰다.

* * *

강현의 집 문을 열고 어렴풋이 들리는 멍멍 짖는 소리에 해완의 얼굴이 밝아졌다. 아니나 다를까 중문을 열자마자 꼬리를 흔들며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리의 모습이 보였다.

주인인 강현에게 먼저 쓰다듬을 받은 보리는 정신없이 해완의 냄새를 맡으며 그를 반겼다. 해완은 몸을 낮춰 보리의 머리를 쓰다듬고 얼렀다.

“보리야, 그동안 잘 지냈어?”

해완의 물음에 보리는 월! 하고 짖었다. 그게 꼭 대답을 하는 것처럼 들려 해완은 저도 모르게 환하게 웃었다.

강현은 그런 해완과 보리를 보고 씩 웃더니 먼저 거실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강현의 뒤를 따라 자연스럽게 거실로 시선을 옮긴 해완이 약간 멈칫했다.

함께 꾸몄던 크리스마스트리가 흔적도 없이 치워져 있었다.

“트리…… 벌써 치웠어?”

뒤를 돌아본 강현이 해완을 보고 무심하게 말했다.

“응. 크리스마스 지났잖아. 아, 네가 가져온 오너먼트들은 따로 정리해 뒀으니까 내일 집에 갈 때 가져가면 돼.”

강현의 말대로 크리스마스가 지났으니 트리를 치우는 것은 당연한 일이지만, 이브 날 설치했으니 실질적으로 일주일도 거실에 트리를 두지 않았음을 생각하자 해완은 괜히 섭섭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너무나 산뜻한 강현의 태도가 제가 사소한 일에 서운함을 가지는 것처럼 느끼게 만들어, 그는 애써 마음을 추슬렀다.

“응. 그럴게.”

해완이 보리를 두고 몸을 일으키자마자 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지금 들어가서 씻을래? 갈아입을 옷은 내가 챙겨 줄게.”

강현의 말에 해완의 얼굴이 붉어졌다. 집에 완전히 들어서기도 전에 씻으라고 할 정도로 냄새가 났나 싶어서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탈취제라도 뿌리고 올걸. 해완이 발갛게 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자 강현이 싱긋 웃었다.

“그럼 천천히 씻고 나와.”

한 번 더 고개를 끄덕인 해완은 강현의 집에 욕실이 여러 개라는 것을 떠올리고 어디로 가야 할지 잠깐 고민하다가 그래도 익숙한 강현의 침실 안 욕실로 발걸음을 옮겼다.

지난번 이 방에 들어왔을 때는 뭔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강현의 손에 옷이 벗겨졌던 터라, 이번에는 스스로 옷을 벗고 있자니 조금 민망한 기분이 들었다.

별 걸 다 의식한다 싶어 괜히 민망해진 그는 잽싸게 옷을 벗고 잘 개켜서 욕실 앞에 있는 화장대 위에 올려 두고는 안으로 들어갔다.

샤워기 밑에 선 해완은 간만에 느긋하게 몸을 씻었다. 원래 남자치고 길게 씻는 편이었지만 지금 살고 있는 집은 욕실이 워낙 냉골이라 씻는 시간을 어쩔 수 없이 최대한 단축할 수밖에 없었던 터라 훈훈한 온기가 감도는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게 기분이 좋았다.

강현이 쓰는 보디 워시와 헤어 제품들은 해완이 들어 보지 못한 브랜드의 같은 라인이었는데 상큼하면서도 세련된 시트러스가 섞인 우디 향이 났다.

강현의 시프레한 느낌의 페로몬 향과는 느낌이 많이 달랐지만 오히려 그것이 강현의 묵직한 우디를 중화시켜 주리란 느낌에 감탄이 나올 듯 잘 어울리는 향이었다.

이렇게나 향에 민감한 강현이 제 몸에 밴 고기 냄새며 담배 냄새 같은 이상한 냄새를 맡았을 것을 생각하자 확 열이 올라, 해완은 평소보다도 훨씬 더 꼼꼼하게 구석구석 몸을 씻었다.

샤워를 마치고 얼굴이 말갛게 핀 그가 문을 열고 나왔을 때 화장대 위에는 원래 입고 왔던 옷 대신 새 속옷 한 벌과 반팔, 반바지가 놓여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속옷과 티셔츠를 먼저 입었지만 거울을 본 해완은 멈칫할 수밖에 없었다. 해완이 마르긴 했어도 키가 커서 어깨 골격이 없는 편은 아니었는데도, 그 옷은 봉제선이 한참 밑에 있을 정도로 어깨 부분이 컸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짙고 젖은 우디 향에 섞인 아몬드의 단 향취 같은 것들이 옷에 희미하게 배어 있었다.

강현이 제 옷을 줬다는 사실에 왠지 마음이 간질거려서, 해완은 저도 모르게 티셔츠의 목 부근을 살짝 끌어 올리고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반바지까지 입고 머리를 대충 말린 뒤 방 밖으로 나오자 루즈한 검정 긴팔 티를 입고 거실 소파에 앉아 태블릿 PC로 무언가 읽고 있는 강현의 모습이 보였다. 보리는 거실 구석에 위치한 제 전용 방석에 누워 선잠을 자고 있었다.

강현 또한 씻고 나온 듯, 젖은 머리가 평소보다도 좀 더 곱슬곱슬했다. 해완이 가까이 다가서자 태블릿 PC를 옆에 내려놓은 강현이 그의 허리를 두 팔로 감싸 제 앞에 서게 만들고는 물었다.

“안 추워? 긴팔로 줄까 했는데 너무 크지 않을까 싶어서.”

마치 어린아이를 대하는 듯한 말투에 해완은 괜히 목덜미를 쓰다듬었다.

“괜찮아. 집이 따뜻해서 하나도 안 추워.”

“다행이다. 앉아 있어. 샴페인이랑 안주거리 좀 가지고 올게.”

강현은 그 말을 마지막으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하려 했다.

“나도 도와줄게.”

앉아 있기도 뭐해 해완은 강현의 뒤를 따라 부엌으로 갔다. 아일랜드 식탁 위에는 이미 치즈와 올리브, 수제 햄 같은 것들로 구성된 플래터가 마련되어 있었다.

“이건 언제 산 거야?”

“너 씻는 사이에 배달 시켰어.”

제가 오래 씻긴 했나 보다 싶어진 해완이 머리를 살짝 긁적였다. 그때 강현이 냉장고에서 무언가를 꺼내 불쑥 해완에게 내밀었다.

“이건 네 거.”

얼떨결에 받아 든 해완은 제 손에 들린 것을 확인하고는 입술을 삐죽였다.

“어린이용 샴페인이잖아, 이거.”

진짜 샴페인 한 병을 꺼내 든 강현이 해완에게 몸을 숙이더니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오늘 밤은 절대 먼저 잠들게 안 할 거거든.”

강현이 의미하는 바를 모를 수 없어 해완은 얼굴이 빨개졌다. 모른 척 싱글거리며 샴페인을 아일랜드 식탁 위에 올려 둔 강현이 샴페인 잔까지 꺼내려는 듯 상부장으로 손을 뻗었다.

잔은 장신인 강현도 간신히 손이 닿을 찬장 제일 위쪽에 놓여 있어 그는 오른손을 길게 쭉 뻗었다. 헐렁한 소매가 밑으로 내려가며 드러난 손목을 해완은 무심코 눈에 담았다.

그 손목 안쪽은, 무언가로 잔뜩 긁어 놓은 듯 울긋불긋한 생채기들이 가득했다.

해완은 살짝 눈살을 찌푸렸다. 강현은 그런 해완의 시선을 눈치채지 못한 듯 잔 두 개와 아일랜드 식탁 위에 놓아둔 샴페인 한 병, 그리고 플래터까지 양손에 들고 거실로 향해 가려다 멈춰 서 있는 그를 향해 말했다.

“안 오고 뭐 해?”

강현의 손목에 난 상처에 정신이 팔려 있던 해완은 어린이용 샴페인을 손에 들고는 허둥지둥 뒤를 따랐다.

아직 자정까지는 30분 정도 시간이 남아 있어, 다시 몸을 일으킨 강현은 아이스 버킷에 얼음을 가득 담아 가지고 와 샴페인을 넣어 두었다.

강현이 일을 마무리하고 완전히 자리에 앉자 해완은 걱정스레 입을 열었다.

“아까 보니까 손목 다친 것 같은데, 어쩌다 그랬어?”

순간, 해완에게 시선을 돌린 강현이 여상하게 답했다.

“다친 적 없는데 무슨 소리야?”

그의 목소리는 정말 금시초문이라는 듯 들렸다. 해완은 뭐라 더 물어보려다 그냥 손을 뻗어 강현의 오른 손목을 잡고 당겼다.

강현은 조금 움찔하기는 했지만 순순히 손목을 내어 주었다. 그의 손목을 제 바로 앞까지 끌어당긴 해완은 소매를 팔꿈치 밑까지 밀어 올렸다.

제대로 드러난 상처의 모습에, 저도 모르게 인상이 잔뜩 찌푸려졌다.

아까 해완이 봤던 것보다 상처는 더 심했다. 붉은 펜으로 죽죽 그어 놓기라도 한 듯 붉게 부어오른 생채기가 팔뚝 중간까지 가득했다.

보육원의 많은 어린아이들 틈에서 자란 그는 그것이 다른 무엇이 아니라 손톱으로 긁어 놓은 상처라는 것을 금방 알았다.

해완은 찡그린 얼굴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강현은 해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입을 열었다.

“그거 보고 얘기한 거였어? 다친 게 아니고 긁은 거야. 간지러워서.”

긁은 흉터이리란 해완의 생각은 맞았지만, 지나치리만큼 무심해 보이는 강현의 태도가 가슴을 이상하게 불안하게 만들었다.

해완은 조용히 말했다.

“네가 직접 이렇게 심하게 긁은 거라고?”

강현은 잠시 눈조차 깜빡이지 않고 해완을 보더니 아무렇지도 않게 대답했다.

“응. 어릴 때부터 아토피가 있었거든.”

강현에게서는 무언가를 숨기고 싶은 기색도, 당황한 티도 조금도 나지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완이 그것을 그냥 넘길 수 없었던 것은 이전 강현이 겪었던 신체화 장애에 대한 생각 때문이었다.

강현에게 그 이야기를 들은 이후로 해완은 한동안 신체화 장애 증상에 대해 열심히 찾아봤었다.

그가 이야기했던 대로 심리적 원인으로 인해 운동이나 감각 기능에 이상 증세가 나타나는 것이 맞았지만, 강현이 겪은 시력 상실 외에도 몸에 나타나는 증상은 매우 다양한 듯했다.

걸음걸이나 팔다리의 마비 및 경련 같은 운동 기능 이상부터, 시각, 청각, 촉각, 후각같이 신체의 어떤 감각이 지나치게 예민해지거나 없어지는 증상도 포함되어 있었다.

그중에 하나가 소양증이었던 것이 기억에 남았다.

게다가 신체화 장애는 스트레스성 상황에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고 했다.

강현의 시력 상실이 어머니의 죽음과 연관되어 있는 데다 가족과의 관계가 좋지 않다는 걸 떠올린 해완은 하필 가족을 만나고 온 오늘, 그가 이런 상처를 입은 것을 도저히 넘길 수 없게 느껴졌다.

“아토피라고? 다른 때는 너 그러는 거 못 봤는데.”

해완의 끈질긴 물음에 짧게 한숨을 내쉰 강현이 상의 한쪽을 가슴 밑까지 걷어 올렸다.

“흉터 보여? 어릴 때는 지금보다 더 심했어.”

전에 강현의 나신을 봤을 때는 어둡고 정신이 하나도 없어서 몰랐는데, 이제 보니 그의 단단한 몸에는 하얗거나 혹은 갈색으로 변색된 얽은 흉터들이 드문드문 있었다.

그럼에도 믿기지 않아 해완은 손을 뻗어 흉이 있는 옆구리를 살살 만져 보았다.

아주 오래된 흉터는 맞는 것 같았지만, 아토피 증상이 주로 피부가 접히는 관절 쪽에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는 사실 또한 알고 있던 해완은 강현의 팔꿈치 안쪽은 깨끗했던 게 영 의심스러웠다.

그런 해완을 가만히 바라보던 강현이 불쑥 장난스러운 어투로 말했다.

“날 벗기고 싶은 거면 제대로 벗겨 줬으면 좋겠는데.”

뜬금없는 말에 얼굴을 확 붉힌 해완이 어루만지고 있던 강현의 몸에서 급하게 손을 뗐다.

“그, 그런 거 아니야.”

“그런 게 아니라고? 자꾸 옷을 들추고 간지럽게 만지길래 날 흥분시키려는 건 줄 알았는데.”

제가 하던 행동에 대해 틀린 묘사는 아니었지만 완전히 의도를 왜곡하는 말에 해완은 입을 떡 벌렸다.

“네가 이상하게 생각한 거지. 난 그런 의도 아니었어.”

그러자 뻔뻔한 태도로 소파에 깊게 앉아 있던 강현이 홱 몸을 곧추세우더니, 해완의 손을 잡고 강하게 끌어당겼다.

그는 몸이 바싹 붙은 해완의 귀에 대고 숨을 불어넣듯 속삭였다.

“……그런 의도 아니었어도 이미 흥분했는데, 어떡하지?”

강현은 쥐고 있던 해완의 손을 제 중심에 놓았다. 잔뜩 단단해진 그것에 왠지 배 속이 짜릿해진 해완은 입술을 바르르 떨었다.

그러자 강현이 쥐고 있던 손목을 좀 더 강하게 당겨 해완이 제 무릎 위에 올라타게 만들었다.

강현은 금방이라도 키스할 듯 고개를 가까이 가져다 댔다. 해완은 반사적으로 입술을 살짝 벌렸지만, 강현의 입술은 놀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아주 잠깐 스치곤 멀어져 버렸다.

애가 탄 해완이 떨어지는 입술을 따라갔지만 고개를 뒤로 돌려 피한 강현은 코끝으로 천천히 해완의 옆얼굴을 그리며 훑어 내려갔다.

차갑고 날카로운 코끝이 아주 천천히 목덜미를 따라 내려가다가, 페로몬샘이 위치한 목과 어깨 사이 오목한 부분에 머물러 깊게 냄새를 맡았다.

문득, 강현은 갑자기 해완을 자기 몸에서 떨어뜨려 놓고 빤히 바라보았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를 바라보기만 하는 시선의 뜻을 알 수 없었던 해완이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왜 그래……?”

강현의 입술 끝이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아직도 나서. 담배 냄새.”

당황한 해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손이며 팔뚝의 냄새를 킁킁 맡았다.

하지만 해완의 코에는 아무리 맡아도 보디 워시 냄새와 그의 옷에 희미하게 밴 강현의 페로몬 향밖에 느껴지질 않았다.

그새를 놓치지 않고 강현이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뭘 하다가 그렇게 밴 거야?”

질책하는 듯한 물음에 더욱 당황한 해완이 어물거리며 답했다.

“어? 글쎄, 그게, 아까 말했던 대로 가게 앞에 담배 피우는 사람이 많긴 했는데, 그래도 그쪽에 오래 있던 것도 아니고…….”

“아닌데.”

횡설수설하는 대답을 단박에 자르는 말에 해완은 멈칫했다.

강현은 여전히 미소를 띤 얼굴로, 그의 얼굴에 눈을 고정시키고 나직이 말했다.

“아니잖아.”

도저히 영문을 몰라 해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강현은 학생에게 시험 문제의 정답이라도 가르쳐 주듯 자상하게 말을 꺼냈다.

“알파 냄새잖아, 이거.”

순간, 머리를 관통하는 깨달음에 해완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강현이 이제껏 이야기하던 것은 ‘진짜’ 담배 냄새가 아니었다.

그는 인하의 페로몬 향에 있던 타바코 향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던 것이었다.

해완이 아무 말도 못 하고 있는 것을 본 강현이 물었다.

“오늘 유준이 말고 또 누구 만났어?”

강현의 목소리에는 따지는 듯한 기색은 전혀 없었지만, 제가 만난 사람이 정말 누구인지 말할 수 없는 해완은 입 안이 바싹바싹 말라붙었다.

그러나 어쩔 도리가 없었다. 해완은 결국 눈을 질끈 감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누군데?”

“……예, 옛날에 잠깐 알던 형인데…… 외국에 좀 오래 나가 있어서 오랫동안 못 보다 만나게 된 거라…….”

어린아이처럼 더듬더듬 급하게 마련한 변명을 주워섬기던 해완은 손을 내저었다.

“그래도 둘이 만난 거 아니야. 유준이랑 셋이 만났어. 자리 파할 때까지.”

강현은 눈을 깜빡이며 해완을 보다가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나는 요즘 네 기분 상할까 봐 오메가들이랑은 말도 안 섞는데…….”

“…….”

“너는 알파랑 만나고 와서 나한테 감추려고 한 거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었다. 해완은 쩔쩔매며 간신히 말을 이었다.

“미안해, 강현아. 내가 생각이 짧았어. 기분 나쁜 게 당연해.”

강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굳은 얼굴로 그 새카만 눈을 깜빡이며 해완을 보기만 했다. 화가 많이 난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어 해완은 더욱 어쩔 줄 몰랐다.

빨리 그의 기분을 풀어 주고 싶어 조급해지는 기분에 해완은 강현의 어깨에 올려 두었던 손을 가만두지 못하고 이리저리 옮기다가,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내가, 내가 뭐 해 주면 기분이 풀릴까?”

그 말이 문을 여는 키라도 된 것처럼, 강현의 속을 알 수 없게 굳어 있던 얼굴이 살짝 살아났다.

“……글쎄.”

그가 입을 연 것이 반가워 해완은 귀를 쫑긋 세웠다. 강현은 소파에 몸을 깊게 기대앉고는, 나른하게 말했다.

“일단 키스부터 해 봐.”

해완은 잠시 머뭇거리다가 강현을 향해 기대듯이 몸을 숙였다. 한쪽 손은 소파 헤드를 잡고, 한쪽 손은 강현의 가슴에 올려놓은 채 입술을 가져다 댔다.

그 상태로 강현의 아랫입술을 머금고 가볍게 빨았지만 그는 입을 벌려 주지도 않았다. 언제나 강현에게 덮쳐지듯 키스를 당하는 입장이었던 해완은 목석같이 가만히 있는 강현에게 어찌해야 할지 몰라 각도를 바꿔 가며 입술만 몇 번 머금고 빠는 것을 반복했다.

그럼에도 강현은 한동안 아무런 반응을 해 주지 않았다. 등에 식은땀이 날 정도로 위축된 그는 입술을 떼고 몸을 일으켜 세우려 했다.

그러나, 맞닿은 가슴팍이 채 떨어지기도 전에 등을 내리누른 강현이 낮게 말했다.

“그만하라고 안 했는데.”

얼굴이 발개진 채 입술을 꾹 깨문 해완은 다시 강현에게 입을 맞췄다. 굳게 다물려 있던 입술이 이번에는 살짝 열렸다. 조금이라도 주저했다간 아까처럼 닫혀 버릴까 봐 조급해진 바람에 두 번 생각하지도 않고 벌어진 입술 틈 사이로 혀를 밀어 넣었다.

해완은 강현이 저에게 하던 대로 그의 혀를 찾아 예민한 점막을 훑었다. 하지만 해완이 본격적으로 혀를 섞으려 할 때마다 강현은 살짝 그것을 엮었다가 도망치듯 떨어지기를 계속했다.

줄듯 말듯 애를 태우는 행동에 안달이 난 해완은 강현의 가슴팍을 내리누르며 몸을 밀착했다. 허벅지와 무릎 사이에 앉아 있던 엉덩이가 위로 이동하자 고간부터 한쪽 허벅지 위에 단단하게 굳어 솟아 있던 강현의 물건이 다리 사이로 고스란히 느껴졌다.

해완은 저도 모르게 숨을 들이켜며 회음부에 닿은 성기를 내리누르고 허리를 살짝 밀고 당겼다. 성기에 가해지는 압박에 강현 또한 입 안으로 옅은 신음을 흘렸다.

해완이 할딱이며 허리를 한 번 더 움직이자 어설프게 맞닿아 있던 입술을 콱 깨문 강현은 한 손으로 해완의 목덜미를 붙들고 입 안으로 혀를 밀어 넣었다. 한없이 느긋하기만 하던 아까의 여유로움은 삽시간에 휘발되어 버린 듯 그는 급하고 거칠게 해완의 입 안을 범했다.

불붙는 듯한 흥분에 감싸인 두 사람은 정신없이 키스에 몰두했다. 강현의 커다란 손이 해완의 옷을 밀어 올리고 등을 쓰다듬었고, 갑자기 찬 공기에 노출된 해완의 피부에 빠르게 소름이 돋았다.

그런데 순간, 드러나 있는 허리 부근에 와 닿는 축축하고 말랑한 무언가에 해완은 말 그대로 튀어 오르듯 놀라며 뒤를 홱 돌아보았다. 품 안에 있던 해완이 기겁하는 것에 놀라 눈을 부릅뜬 강현의 시선 또한 빠르게 뒤를 향했다.

“멍!”

두 사람의 시선이 뒤를 향함과 동시에, 보리가 멍, 하고 짖었다. 보리는 갑작스러운 해완의 격한 반응에 놀란 듯 당황한 표정을 하고 꼬리를 만 채 서 있었다.

제 허리에 닿은 축축하고 말랑한 감촉이 보리의 코였던 모양이었다. 보리가 이 자리에 있던 것을 그야말로 새까맣게 잊고 있었다는 사실을 떠올린 해완은 귀 끝부터 목덜미까지 터질 듯이 새빨개졌다.

그때, 고개를 돌린 탓에 선명하게 드러난 해완의 목빗근에 강현이 입술을 가져다 대고 가볍게 빨았다. 성감대를 자극하는 행동에 소스라치게 놀란 해완이 강현을 강하게 밀어 내는 순간 중심을 잃고 뒤로 떨어질 뻔한 것을 강현이 간신히 잡아챘다.

“대체 뭐 하는 거야? 분위기 다 깨지게.”

기겁하여 넘어지기까지 할 뻔한 나머지 정신이 하나도 없는 해완에게 강현이 황당한 듯 말했다. 제가 해야 될 말을 뺏겼다는 생각에 해완이 발끈했다.

“너야말로 뭐 하는 거야? 보리가 보잖아!”

“그래서? 쟤가 사람도 아니고 그게 뭐가 문젠데.”

가끔씩 강현이 지나치게 무감하게 구는 것은 이미 몇 번 본 바가 있지만 보리의 순진무구한 눈동자를 보고도 어떻게 저런 소리가 나올 수 있는지 몰랐다. 더는 생각하지 않고 해완은 단호하게 말했다.

“방으로 가. 방으로 안 갈 거면 나 안 해.”

해완의 말에 강현은 귀찮아 죽겠다는 듯 눈을 치켜떴지만, 해완은 지지 않고 똑같이 노려보았다. 아니라고 했다가는 바로 몸을 일으켜 세울 기세에 강현은 결국 못마땅한 듯 쯧, 하고 혀를 차면서도 해완을 안은 채 번쩍 몸을 일으켰다.

그는 해완을 안고 침실로 걸어가며 귓가에 대고 으르렁댔다.

“오늘 네 말 들어주는 건 여기까지야.”

침실 안으로 들어와 혹시라도 모를 방해를 받지 않게 발로 문을 완전히 닫은 강현은 침대 위에 해완을 던지듯이 내려놓았다.

해완이 몸을 세워 앉자 강현은 침대 위로 올라와서 무릎을 꿇고 앉아 시선을 맞췄다. 방 안은 오렌지빛의 간접 조명만이 켜진 채였지만 이전처럼 어둡지는 않아, 턱을 약간 치켜올린 채 저를 거만하게 보고 있는 강현의 표정이 선명하게 보였다.

이전처럼 바로 달려들 줄 알았는데, 강현은 아까 키스를 하도록 시킬 때처럼 아무 행동도 하지 않고 그를 바라보기만 했다.

까맣고 윤기가 흐르는 곱슬머리가 잘생긴 이마 위로 흐트러져 있었다. 짙은 눈썹 아래 뜻을 알 수 없는 검은 눈으로 강현은 잡아먹을 듯이 해완을 응시했다.

그 시선만으로도, 보리의 생각지 못한 난입으로 슬쩍 흐트러졌던 흥분감이 뿌듯하게 차올랐다. 입술이 바싹 말라 해완은 혀를 내어 그것을 핥으며 눈을 깜박였다.

그러자 강현이 느닷없이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네가 벗겨 봐.”

강현의 말에 살짝 입술을 깨문 해완은 무릎으로 기어 강현에게 가까이 다가섰다. 상의 밑 부분을 잡고 위로 끌어 올리자 그는 순순히 팔을 들어 옷을 벗길 수 있도록 협조했다.

해완이 손에 쥔 강현의 옷을 침대 밖으로 떨어뜨리자 이번에는 강현이 해완의 상의를 위로 끌어 올려 벗겼다.

제 옷이 벗겨진 후에도 강현의 몸에서 시선을 떼지 못하던 해완은 저도 모르게 손을 올려 그의 가슴팍에 가져다 댔다. 갑작스러운 터치에 강현은 살짝 움찔하기는 했지만 해완이 그의 몸을 만지는 대로 두었다.

해완은 아주 조심스럽게 강현의 몸을 쓰다듬었다. 손 밑으로 살짝 소름이 돋아 있는 단단하고 부드러운 피부가 느껴졌다. 강현의 손은 항상 차가운 편이었는데, 심장 부근은 이상하리만치 따뜻하게 느껴졌다.

강현의 상체를 옆구리까지 쓸어내린 해완이 눈을 맞추자 강현이 고개를 살짝 아래로 까딱했다. 그 단순한 제스처만으로도 뜻을 알아챈 해완이 강현의 바지 허릿단을 잡고 허벅지 밑으로 내리자, 나머지는 강현이 벗었다.

강현은 이번에도 똑같이 해완의 반바지를 벗겼다. 이번에 그는 어떤 지시도 내리지 않았지만, 해완의 손은 자연스럽게 그의 드로어즈로 향했다.

이상하게 긴장이 되어, 해완은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애써 강현의 속옷을 벗겼다. 잡아 두고 있던 직물이 사라지자마자 뻣뻣하게 발기한 거대한 성기가 튕겨져 앞으로 솟아 나왔다.

저게 제 안에 들어갔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아 해완은 침을 꿀꺽 삼켰다. 그때 강현이 낮게 속삭였다.

“만져 봐.”

마치 홀린 것처럼, 해완은 손을 밑으로 내려 강현의 성기를 쥐었다. 지난번 첫 섹스에서 강현은 해완이 스스로의 손으로 무엇도 하지 못하게 만들었었기 때문에, 제 것 말고 남의 물건을 만지는 행위 자체가 그의 인생에서는 처음이었다.

같은 남자의 성기임에도 손가락이 긴 해완이 버겁게 쥘 정도로 두껍고 묵직한 좆은 저 자신의 것과는 완전히 다르게 느껴졌다. 핏줄이 흉흉하게 선 성기의 뜨거운 맥동을 손바닥으로 느끼는 것만으로 이상하게 흥분이 되어 몸이 덜덜 떨렸다.

“하…….”

해완이 천천히 물건을 문지르자 강현은 해완의 어깨로 고개를 내리고는 뜨겁고 젖은 숨을 내쉬었다.

해완의 상체를 끌어안은 강현은 그가 손을 움직일 때마다 몸 곳곳을 아프게 쥐거나 목덜미 같은 곳을 살짝 깨물고 빨았다. 자극을 이기지 못해 나오는 강현의 낮은 신음 소리가 들릴 때마다 해완 또한 거칠게 숨을 헐떡였다.

그때까지 강현이 벗겨 주지 않은 속옷이 답답하게 느껴져서 끙끙대던 해완은 그가 예민한 귓불을 빨았을 때 결국 견디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나도 만져 줘, 강현아…….”

그러자 강현이 흥분으로 얼룩진 눈을 들어 해완을 응시했다. 그는 잔뜩 흥분해 달아오른 상태에서도 해완이 먼저 요구한 것이 만족스럽다는 듯 비죽이 웃더니, 곧바로 해완의 가슴을 가볍게 밀어 침대에 완전히 눕히고는 망설임 없이 속옷을 당겨 벗겼다.

강현은 벗긴 속옷을 바로 떨어뜨리지 않고 유심히 살폈다. 그가 무엇을 하고 있는지 알아챈 해완은 삽시간에 온몸이 불타오르듯 빨개졌다.

해완이 입고 있던 속옷이 성기에서 나온 프리컴과 뒤에서 나온 애액으로 잔뜩 젖은 것을 살피고서야 침대 밑으로 그것을 던진 강현이 짓궂게 말했다.

“미안해라. 이렇게 젖은 줄도 모르고.”

미칠 것같이 부끄러워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해완이 원망스럽게 중얼거렸다.

“너 미워…….”

웃으며 해완의 손을 치운 강현은 고개를 내려 입술에 대고 중얼거렸다.

“이 정도 가지고 미워하면 안 되는데, 어떡하지.”

강현은 그대로 해완에게 입을 맞췄다. 깊고 난잡하게 섞이는 혀와 몸 이곳저곳을 오가는 커다란 손에 턱밑으로 흐르는 타액조차 느끼지 못했다.

입술을 뗀 강현은 그대로 해완의 온몸을 애무하기 시작했다. 이미 닿은 적이 있는 귀 뒤쪽과 목덜미 같은 성감대 이외에도, 마치 해완이 요리 재료라도 된 것처럼 온몸을 입술로 맛이라도 볼 생각인 것 같았다.

“으응!”

입술, 턱선, 목덜미, 쇄골을 타고 내려가는 입술만으로도 정신이 나갈 듯했던 해완은 그가 유두를 슬쩍 빨았을 때 전기라도 감전된 듯 허리를 튕기며 신음했다.

고작 애무만으로 나온 제 반응에 놀란 해완은 저도 모르게 손으로 입을 턱 막았다. 그런 해완을 눈을 치켜떠 본 강현은 좀 더 깊게 한쪽 유두를 빠는 것과 동시에 다른 쪽은 손가락으로 슬슬 문지르거나 당기며 자극했다.

해완은 어쩔 줄 모르고 가슴팍에 있는 강현의 머리를 세게 움켜쥐었다. 그러자 고개를 든 강현이 이상하다는 듯 입을 열었다.

“왜 그렇게 당황해? 다른 때는 여기 애무받은 적 없어?”

또다. 해완이 경험이 없었던 것을 아무리 알지 못한다고 해도 존재하지도 않는 다른 남자를 자꾸만 언급하는 강현이 원망스러워, 해완은 마구 고개를 휘저었다.

그러자 강현은 전혀 악의가 없는 얼굴로 고개를 갸웃했다.

“그래? 이상하네. 이렇게 좋아하는데…….”

그 말과 함께 그는 한 번 더 유두에 입술을 가져다 댔다. 이번에는 아까보다 좀 더 강하게 유두를 빨고 깨무는 자극에 해완은 고개를 위로 젖히고 헐떡였다.

양쪽 가슴 모두 아릴 정도가 되어서야 입술을 뗀 강현은 남은 피부에도 꼼꼼하게 입을 맞추며 아래로 내려갔다.

다짜고짜 손가락을 쑤셔 넣었던 이전과는 달리 강현은 허벅지 안쪽 깊은 곳에 입을 몇 번이나 맞추고 쓰다듬어 해완의 긴장을 풀고는, 긴 애무로 인해 푹 젖어 있는 입구를 엄지손가락으로 조심스레 문지르고 슬쩍 눌러 민감한 주름을 자극하는 행동을 반복했다.

간지럽고 부드러운, 그러나 스스로의 힘으로는 닿을 수 없는 배 속 깊은 곳을 긁어내리는 것과 같은 자극에 해완이 여린 신음을 뱉었다. 그 소리가 신호라도 된 것처럼 강현이 검지 끝을 부드럽게 밀어 넣었다.

저도 모르게 허리를 튕기기는 했지만 손가락은 별다른 저항 없이 입구를 벌리고 들어갔다. 그는 해완이 놀라지 않도록 느리게 손가락을 밀었다 빼내는 것과 동시에 돌려 가며 내벽을 자극하기를 반복하면서, 천천히 손가락 숫자를 늘려 가며 뒤를 풀었다.

따뜻한 물에 깊게 잠기는 듯 온몸을 잠식하는 쾌감에 해완은 속절없이 신음을 뱉었다. 애액이 강현의 손을 타고 흐를 정도로 뚝뚝 흐르고, 발개진 몸을 하릴없이 뒤틀면서도 허리는 강현의 손가락을 따라 무의식중에 흔들렸다.

어느 순간부터인가 턱에 근육이 설 정도로 이를 악물고 있던 강현은 그제야 손가락을 빼냈다. 안을 그득 채우고 있던 손가락들이 빠지자 구멍이 움찔거리며 수축하는 것이 선명하게 느껴져, 해완은 흐려진 정신으로도 다리를 오므리고 압박으로 자극을 찾으려 했다.

그런 해완을 보며 거친 숨을 내쉬던 강현은 아까부터 프리컴이 흐르던 좆에 콘돔을 씌우고는 해완의 애액이 묻은 손으로 그것을 한 번 문질렀다.

강현은 해완의 다리를 넓게 벌리고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몸을 바싹 낮춘 채 해완에게 부드럽고 다정하게 입을 맞췄다.

그는 해완에게 키스하며 허리를 밀어 올렸다. 퍼부어지는 쾌감으로 몽롱한 가운데서도 움찔거리는 구멍에 뭉툭한 좆 끝이 맞닿는 것이 느껴졌다.

좁은 곳을 쑤시고 들어오는 압박감에 몸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꽤나 공을 들여 풀었음에도 불구하고, 뒤가 워낙 빠듯한 탓인지 삽입은 여전히 쉽지 않았다.

“응, 으윽…….”

해완의 입에서 고통과 쾌감을 아슬아슬하게 줄타기 하는 신음이 새어 나왔다. 강현 또한 버거운 듯 맞닿아 있던 입술을 떼고 거친 숨을 뱉더니, 손을 내려 아랫배에 맞붙어 있던 해완의 성기를 쥐고는 문지르기 시작했다.

앞에 가해지는 쾌감에 정신이 쏠려 약간 물러진 구멍으로 강현은 참을성 있게 밀고 들어갔다.

마침내 뿌리까지 깊게 삽입된 순간, 숨을 크게 몰아쉰 강현은 해완의 눈을 바라보았다. 해완도 눈을 마주 보았다. 서로의 눈을 바라보며 강현은 천천히 허리를 움직였다.

두껍고 긴 강현의 좆이 해완의 몸에 길이라도 내듯 밀려 올라갔다 나갈 때마다, 뿌리까지 쑤셔지며 연한 입구에 거친 음모가 비벼질 때마다 아찔하게 덮치는 쾌감이 선이 고운 얼굴에 음란할 정도로 고스란히 드러났다.

그러자 더는 참기 힘들다는 듯 이를 뿌득 갈아 낸 강현이 해완의 허벅지를 가슴팍까지 밀어 올려붙이더니 하체를 더욱 세게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아! 흐응!”

이상했다. 무게를 실어 배 속 깊은 곳까지 박아 대는 움직임에 아파야 하는데, 분명 아파야 하는데 그보다 더 큰 쾌감이 전신을 벼락처럼 덮쳐 해완은 소리를 지르듯이 신음을 뱉으며 몸을 뒤틀었다.

허리가 제멋대로 튀었다. 좋았다. 너무나 좋았다. 이렇게 좋은 것을 이제껏 모르고 살았다는 것이 억울할 정도로, 좋다는 말 말고는 표현할 길이 없었다.

그때, 마찬가지로 그르렁대는 신음을 뱉고 있던 강현은 몸을 낮춰 해완의 입술을 게걸스럽게 빨다가 아프게 깨물며 물었다.

“흡, 좋아? 응?”

해완은 고개를 정신없이 끄덕이며, 앵무새처럼 강현의 말을 반복했다.

“으응, 좋아, 좋아, 너무 좋아…….”

씨발. 울음 섞인 해완의 목소리에 강현이 쇳소리 나는 욕설을 중얼거렸다.

이제는 퍽퍽 소리가 날 만큼 강하게 부딪치는 살갗에 어쩔 줄 모르고 시트를 엉망으로 헤집던 해완의 손이 강현의 목덜미를 부서져라 움켜쥐었다. 그러자 강현도 그의 머리를 감싸고 이마를 맞대었다.

“아아! 흐윽!”

온몸이 바싹 맞닿은 채로 거세게 몇 번 더 박히는 감각에 해완은 경련하듯 숨을 몇 번 짧게 들이켜는가 싶더니 소리도 내지 못하고 가 버렸다. 맞닿은 배 사이로 해완의 성기가 경련하며 울컥 정액을 토해 냈다.

“윽…….”

오르가슴의 여파로 망가진 인형처럼 온몸의 힘이 풀린 해완의 몸을 붙들고 퍽퍽 쳐올리던 강현도 해완의 귓가에 굵고 거친 신음 소리와 뜨거운 숨을 쏟아 내며 절정에 달했다.

* * *

해완은 채 잠에서 깨어나기도 전에 손을 뻗어 옆자리를 먼저 더듬었다.

그러나 찾고 있던 온기는 손에 와 닿지 않았다. 완전히 눈을 뜬 해완은 아니나 다를까 이미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는 옆자리를 보고 가늘게 한숨을 내쉬었다.

협탁 위에 둔 핸드폰을 확인하자 아직 7시 20분 정도밖에 되지 않은 시간이었다.

어제는 여러모로 피곤한 하루였고, 오늘은 간만의 휴일이니 좀 더 늦잠을 자도 될 법했으나 강현의 침대는 혼자 누워 있기에는 너무 크게만 느껴져서 쑤시는 몸을 억지로 일으켜 앉았다.

어젯밤 벗어 둔 옷은 역시 온데간데없었다. 그래도 한 번 경험이 있다고 당황스럽지는 않았다. 욕실에 걸려 있을 가운을 찾아 입기 위해 침대 밖으로 나와 선 해완은 역시나 아리고 쑤시는 다리 사이에 인상이 절로 찡그렸다.

대체 몇 번이나 해야 안 아프게 되는 걸까? 그런 생각을 하며 아픔을 참고 가운을 찾아 입은 그는 약간 절뚝이는 채로 방문을 열고 나왔다.

늦게 뜨는 겨울의 해 때문에 거실은 커튼이 쳐져 있지 않았음에도 불구하고 어두침침했다.

그러나 해완을 멈춰 서게 한 것은 어둠이 아니라 집 안을 가득 채운 정적이었다.

집이 워낙 크니 다른 방에 있는 걸까 싶다가도 지나치게 고요한 집 안에서는 저 말고 다른 사람의 기척을 조금도 찾을 수가 없었다.

거실까지 완전히 걸어 나왔는데도 역시 강현도, 보리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이 집에 혼자 남은 것은 또 처음이라 해완은 어린아이처럼 어쩔 줄 모르고 고개를 휘휘 저어 가며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때, 거실 중문이 드르륵 열리는 소리에 해완은 흠칫 놀라며 고개를 돌렸다. 운동복을 입은 강현이 헥헥거리는 보리의 목줄을 잡고 집 안으로 들어오고 있었다.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산책을 다녀온 모양이었다. 그는 거실 한가운데에 서 있는 해완을 보고 씩 웃음을 지었다.

“일찍 일어났네. 더 잘 줄 알았는데.”

그제야 아침 7시 전 보리의 산책을 시키는 것이 매일의 루틴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기억이 난 해완은 겨우 안심을 한 채 고개를 끄덕였다.

“보리 발만 씻기고 금방 올게.”

태연하게 말한 강현은 보리를 이끌고 거실에 있는 욕실로 갔다. 왠지 앉을 기분이 아니었던 해완은 멍하니 서서 강현을 기다렸다.

잠시 후, 욕실 문과 열리는 동시에 보리가 꼬리를 흔들며 해완에게 다가왔다. 산책을 하고 와서인지 기분이 좋아 보이는 보리의 얼굴을 몸을 낮춰 쓰다듬는 사이, 강현 또한 해완에게 가까이 다가왔다.

그는 팔소매를 걷어붙이고 있었는데, 그 덕에 바로 드러나 보이는 붉은 자국에 해완은 반사적으로 얼굴을 굳혔다.

생채기는 어젯밤처럼 성난 붉은색은 아니었지만 여전히 약간 부풀어 있는 것이 흉이 질 듯 보였다.

어제 본가에 가서 무슨 일이 있었던 건 아닌지 더 물었어야 했는데 강현의 페이스에 완전히 말려 버렸다는 생각이 들어 한숨이 나올 뻔한 것을 참아 삼킨 해완이 몸을 일으키며 부드럽게 말했다.

“집에 구급상자 같은 거 있지? 어딨어?”

“팬트리 안에 있긴 한데, 왜? 어디 다쳤어?”

“나 말고 너. 팔에 연고 발라 줄게.”

상처의 존재 자체를 잊고 있었던 듯 흘끗 제 팔을 바라본 강현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듯 말했다.

“또 그 얘기야? 그냥 긁은 거라 괜찮다니까.”

“그냥 놔두면 흉 질 거야. 그건 내가 싫어.”

자못 단호한 말투에 강현이 멈칫한 사이, 해완은 강현이 더 말을 얹기 전에 바로 몸을 돌려 팬트리로 향했다.

구급상자는 다행히도 팬트리로 들어서자마자 보이는 곳에 있었다. 그 안에 있는 연고를 챙기던 해완의 시선이 문 옆에 생활용품들을 모아 놓은 선반까지 향했다.

해완이 팬트리 밖으로 나왔을 때 강현은 소파 밑에 앉아 보리를 안고 간식을 주고 있었다. 연고를 들고 옆에 가 앉자 강현은 어딘가 못마땅해 보이는 얼굴로 해완을 바라보았다.

해완은 아랑곳없이 손을 내밀며 강현에게 말했다.

“손.”

하지만 해완의 손에 올라온 것은 강현의 길쭉한 손가락이 아니라 보리의 부드러운 발바닥이었다.

순간 웃음이 터질 뻔했지만, 겨우 꾹 참은 해완이 짐짓 무섭게 인상을 찡그렸다.

그러자 제 팔을 내미는 대신 뒤에서 보리의 발을 쥐고 해완의 손바닥에 올려놓았던 강현이 한숨을 쉬고는 양쪽 팔을 내밀었다.

어느새 완연히 뜬 아침 해가 내뿜는 햇빛이 가득 차오르는 거실 안에서 해완은 강현의 팔에 난 상처에 꼼꼼히 연고를 발랐다. 그냥 올려 두기만 하는 것이 아니라 흡수가 잘되도록 문질러 주는 일도 빼먹지 않았다.

두 사람 사이에 편안한 침묵이 차오르자, 보리가 작은 머리를 강현의 허벅지 위에 올리고 눈을 감았다.

“다 했다.”

생채기 하나라도 놓칠세라 몇 번이나 확인을 마친 해완이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러자 강현이 부루퉁하게 팔을 바로 잡아 빼려는 것을 잽싸게 다시 움켜쥐었다.

“아직 안 끝났어.”

해완은 아까 팬트리에서 집어 온 보디로션을 꺼내 열어 듬뿍 짠 다음에 강현의 손을 모으고 그 위에 덮었다.

“뭐 하는 거야?”

정말 영문을 모르겠다는 강현의 목소리에 해완은 조용히 입을 열었다.

“피부가 건조하면 자꾸 간지러울 수 있으니까, 로션 발라 주는 거야.”

“…….”

“앞으로…… 간지러워서 긁고 싶어지면 그냥 나한테 말해. 그럼 내가 로션 발라 줄게. 알았지?”

그 말에 강현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지만, 손을 빼려 들지는 않았다. 그래서 해완은 강현의 손등부터 손바닥, 그리고 손가락 사이까지 충분히 시간을 가지고 로션을 문질러 발랐다.

그와 동시에 해완의 머릿속에는 보육원에서 봤던 몇몇 아이들의 모습이 떠돌고 있었다.

보육원에 들어온 지 얼마 되지 않은 아이들은 아픈 경우가 많았다.

아니, 정말 아팠다기보다는 아픈 것처럼 보여 보살핌을 받으며 갑작스럽게 잃어버린 부모의 애정과 엇비슷한 무언가를 조금이라도 찾아보고 싶은 아이들이 많았다는 게 옳을 것이다.

물론 지금 강현에게 그런 아이들의 모습을 겹쳐 보는 건 괜한 과민 반응일지 몰랐다. 그런데도 그냥 넘어갈 수 없는 것은 강현의 문제가 아니라 언제나 애정을 고파하며 자란 해완 그 자신의 문제일지도 몰랐다.

그러나, 아무리 작은 상처라도, 제가 돌봐 줄 수 있는 것은 다 해 주고 싶었다.

해완의 연한 머리칼이 햇볕에 더욱 밝게 빛나는 모양을 바라보던 강현이 불쑥 물었다.

“아까 좀 이상하게 걷던데.”

“응?”

“팬트리 갔다 올 때 좀 절뚝거렸잖아. 발목이라도 아픈 거야?”

해완은 얼굴이 새빨개졌다. 다리 사이가 아파 그렇게 걸었던 모양이지만, 제 걸음걸이를 의식조차 하지 못했던 탓이었다.

“……그렇게 안 걸었어. 네가 잘못 본 거야.”

고개를 숙이고 우물쭈물거리는 해완의 태도를 강현은 놓치지 않았다.

“아냐. 너 그렇게 걸었어. 어디가 아파서 그러는데?”

“…….”

“왜 대답 안 해? 넌 내 긁힌 상처 하나에 이렇게 난리를 피우면서, 나는 상관하지 말라 이거야?”

강현의 부루퉁한 목소리에 해완은 결국 웅얼거리며 대꾸했다.

“어젯밤 때문이잖아.”

“뭐?”

“너랑 자고 나면 다리 사이가…… 아프단 말이야.”

할 것 못 할 것 다 한 주제에 왜 이리도 민망한지 몰랐다. 쏟아지는 아침 햇살의 탓으로 돌린 해완이 숙인 머리통을 향해 강현이 말했다.

“내가 어제 또 뭐 잘못했어?”

데자뷔를 일으키는 질문에 해완이 번쩍 고개를 들자 강현이 진지한 표정으로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미안해진 해완이 고개를 내저으려던 찰나,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아님 원래 그렇게 할 때마다 아파? 다른 오메가들은 그 정도까지는 아니라던데.”

“……누가 그런 소릴 했는데?”

“서연 누나가.”

“뭐? 너희 누나한테 그런 걸 물어봤어? 대체 왜 그랬어!”

“그런 얘기 할 만큼 친한 알파는 서연 누나밖에 없어.”

“아, 아무리 그래도 그렇지, 그런 얘길 누나한테 하면 어떡해!”

저도 모르게 목소리를 높인 해완에 강현은 억울하다는 듯 되받아쳤다.

“그럼 어떻게 하라는 거야. 너는 아프다고 하고, 어디 가서 연습하고 올 수도 없고.”

틀린 말은 아니라 해완은 말문이 막혔다. 해완이 말을 잇지 못하는 사이 강현은 볼멘소리로 투덜거렸다.

“너 기분 좋게 해 주려고 어제 내가 얼마나 참고 또 참은 건지 알아?”

“…….”

“그래도 아프다고 하면 대체 뭘 어떻게…….”

순간, 크게 웃음을 터트려 버린 해완에 강현은 말을 뚝 멈췄다. 해완은 로션을 바르고 있던 강현의 손을 쥔 채로 고개도 들지 못하고 한참을 웃었다.

겨우 웃음을 멈춘 해완이 고개를 들어 강현을 바라보자, 그는 도무지 해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이 이맛살을 찌푸리고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아프게 하기 싫어서 강현이 그런 것을 알아보고 다녔다는 사실이 너무 좋았다.

저를 기분 좋게 해 주려고 참고 또 참았다는 그 말에 온몸이 녹아내릴 것만 같았다.

그 심술이 난 어린아이 같은 얼굴이, 너무 사랑스러워서 심장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았다.

그와 동시에 가슴이 찢어질 듯 아렸다.

서투른 첫 연애를 함께하고 있다는 사실이 벅차고 또 벅차면서도, 제가 저지르고 있는 잘못의 무게가 무거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이기적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언젠가 혼자 남겨질 때를 위해 지금의 강현을 남겨 놔야 한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꽉 채워 해완은 그의 얼굴 생김새 하나하나를 온 힘을 다해 눈으로 따라 그려 냈다.

그런데, 그렇게 담아 내고 있던 강현의 얼굴이 일순 흐려졌다.

“해언아.”

“……응?”

“너…… 우는 거야……?”

눈앞의 그의 얼굴이 조금 일렁인다 생각했더니 눈물이 고인 모양이었다. 아니라고 말하려고 했는데,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몸이 먼저 움직였다.

해완은 강현을 와락 끌어안았다. 이해할 수 없는 행동의 연속에 품 안의 몸이 어색하게 굳는 것이 느껴졌지만 아랑곳없이 숨이 막힐 정도로 꼭 끌어안았다.

조금이라도 더 기억하고 싶어서, 맞닿은 몸 구석구석에 닿은 감촉과, 손가락 사이로 흘러내리는 머릿결의 느낌과, 강현의 짙고 푸른 페로몬 향을 마음에 붙들어 두려 애썼다.

필사적으로 매달리는 해완에, 강현이 답답하다는 듯이 물었다.

“왜 그래. 응?”

해완은 연약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좋아서.”

“…….”

“너무 좋아서.”

그 말에 강현은 잠시 대답이 없었지만, 어느 순간 해완의 몸을 마주 끌어안았다.

마치 처음부터 한 몸으로 태어난 것처럼, 쏟아지는 아침 햇살 속에서 그렇게 끌어안고 있었다.

* * *

장미, 머스크, 샌들우드, 희미한 베르가모트, 그리고 카스토레움.

그것이 잠시 후 방문할 예약 고객이었다.

기록상으로 보면 작년 봄 강현에게 처음으로 향수를 의뢰한 이후 벌써 세 번째 재주문을 하는 고객이었지만, 이름과 향수 넘버만 보고는 여자인지 남자인지조차 기억나질 않았다.

작업 노트를 열어 보는 방법도 있었지만 그보다는 향을 통해 기억을 되살리는 게 훨씬 빠를 것이다. 몸을 일으킨 강현은 작업실로 걸어가 조향대 옆에 있는 특수 제작 한 향수 보관함을 열었다.

제작 번호별로 정렬되어 있는 그간 제작한 향수들 중 이번 고객의 것을 꺼내 시향지에 뿌리는 순간, 가을이 막 시작되던 시기 그의 작업실을 찾았던 우아하지만 활기찬 분위기를 가진 중년 여성의 이미지가 스쳐 지나갔다.

곧이어 개인 사업을 하며 1년의 절반 이상을 외국에 머무는 고객이라 시간을 맞추기 어려워 몇 번이나 전화를 걸어왔던 사실도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고객은 이미 향수의 포뮬러는 나와 있으니 그냥 제조만 해서 보내 달라고 졸라 댔지만 강현은 단호히 거절했다.

조향을 처음으로 의뢰하든 두 번 세 번 다시 의뢰하든 그에게 일을 맡기려면 제조 전 반드시 한 번은 그의 작업실을 방문해야 하는 것이 원칙이었다.

그를 따르지 않는 고객은 의뢰를 받지 않을 정도로 무조건적인 원칙을 고집하는 건 그렇게 하지 않고서는 브랜드 퀄리티를 유지할 수가 없기 때문이었다.

페로몬 향은 절대 고정된 것이 아니었다. 생활이 바뀌면 페로몬 향도 바뀌게 되므로 한번 만든 포뮬러를 만능으로 사용할 수는 없었다.

그중에서도 향에 가장 큰 영향을 미치는 것은 ‘가까운 사람’이 바뀌는 일이었다. 알파오메가의 세상에서 모든 사람은 서로가 서로에게 페로몬 향의 흔적을 남길 수밖에 없으니까.

향수의 자취를 지우기 위해 깨끗이 손을 씻고 나자 손 구석구석이 유난히 말라 건조한 느낌이 들었다. 냄새에 워낙 민감하다 보니 하루에도 수십 번 손을 씻는지라 지극히 익숙한 버석거림인데도, 왠지 오늘만큼은 거슬리게 느껴졌다.

강현은 저도 모르게 제 손바닥을 바라보며, 그것을 부드럽게 오가던 하얗고 마디가 가는 손가락의 감촉을 떠올렸다.

대부분의 사람은 제가 인식하는 모든 향조들을 단순히 ‘맡는다’로 뭉뚱그려 느끼지만 정확히 분류하자면 페로몬 향은 후각을 통해서 맡는 것이 아니라 비강 깊숙한 곳에 있는 서골비 기관을 통해 지각하는 화학 신호였다.

바로 그것이, 윤해완이 자신의 몸에 남은 타바코 향조를 빨리 눈치채지 못한 이유였다.

알파오메가의 우성과 열성을 나누는 기준은 단순했다. 페로몬의 농도, 그리고 민감도이다. 우성에 가까울수록 페로몬에 민감하게 반응할 뿐 아니라 농도가 짙어 상대방에게 성적으로 강력한 영향을 미치기 마련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성관계라는 특수한 상황에서야 명확히 드러나는 것이기 때문에 일반적인 사람들은 페로몬 향의 강렬함만을 가지고 우성인지 열성인지 단정 짓고 싶어 했다.

하지만 페로몬의 농도가 향에 미치는 영향은 발향력이 아니라 지속력이라는 걸 대부분의 사람은 알지 못했다.

물론 조향을 공부하기 전에는 강현도 이런 개념들을 가지고 있지 않았기에 상대방이 우성인지 열성인지 정확히 가늠하지 못했다. 윤해언의 향은 정확히 기억하고 있었지만 그가 우성인지 열성인지 모호해했던 것도 그 때문이었다.

하지만 지금 강현은 윤해완이 열성 오메가라는 것을, 향뿐만이 아니라 조금 다른 방법으로도 아주 명확히 알고 있었다.

해언의 페로몬샘을 이식받은 그는 첫 향은 강렬하지만 페로몬 농도가 옅어서 누군가에게 짙게 향을 묻히거나 오래 남기지는 못했다.

다른 사람의 흔적이 길게 남았던 이유도 그래서일 것이다.

그는 버석한 손끝을 신경질적으로 문지르며, 향이 그렇게 씻기지 않을 정도면 아마도 우성 알파였으리라 생각했다.

이미 한번 고민해서 결론을 냈으므로, 강현은 제가 기분이 나쁘다는 것을, 그리고 그 이유가 윤해완이 또 예상외의 행동을 했기 때문이라는 것을 알았다.

아니, 엄밀히 말해 예상외의 행동은 아닐지도 모른다. 윤해완은 유준 말고 다른 사람, 그것도 알파를 만났다는 사실에 대해 거짓말을 했는데, 지금 그가 자신의 정체를 ‘숨기고’ 있다고 생각하는 것을 감안하면 얼마든지 할 수 있는 행동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아는 형을 만났다고 하는 윤해완의 말을 더 이상 따지고 들지는 않았다.

애초부터 그의 입으로 진실을 듣고 싶은 귀찮은 생각 따위는 없었다. 어차피 윤해완은 제 신상과 관련한 일은 강현에게 솔직히 말할 수 없을 테니 괜한 일에 시간 낭비 할 정도로 멍청하진 않았다.

알고 싶은 게 있다면, 다른 방법을 사용하면 된다.

그런데도, 희미하나 끈적하게 붙어 떨어지지 않던 낯선 향조의 존재감을 떠올린 순간 강현의 턱에 날카롭게 근육이 섰다.

강현이 윤해완이 마음에 들었던 또 다른 점 중 하나는 그의 주변에 사람이 별로 없다는 것이었다. 이런저런 아르바이트를 하고 있으니 스쳐 지나가는 사람이야 많았지만 그뿐이었다. 물론 함께 살고 있는 유준의 페로몬 향은 언제나 소량 배어 있었지만, 어차피 같은 오메가인 데다 프루티한 계열의 산뜻한 느낌인지라 해완의 향에 크게 거슬릴 만큼 영향을 주진 않았었다.

하지만 어제 맡은 향조는 완전히 이질적이었다. 외면할 수 없을 만큼 말이다.

아직까지 기분이 나쁜 것은 그 때문일 터였다. 윤해언의 완전한 향을 해치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

불쾌감을 지우고 싶어 손가락으로 이마를 문지르던 강현의 귀에 초인종 소리가 들렸다.

흘끗 인터폰을 바라보니 익숙한 얼굴의 여성이 현관 앞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강현은 대충 열림 버튼을 누르고 고객을 맞이하기 위해 건물 출입문 쪽으로 향했다.

“어서 오…….”

그러나, 출입문을 열고 들어선 고객과 마주한 순간 강현은 인상을 살짝 찡그렸다.

고객은 혼자가 아니었다. 어떤 젊은 남자와 함께였다.

의뢰인과 함께 오는 단순한 방문객도 철저히 사전에 관리하는 강현의 굳은 얼굴을 본 고객이 황급히 말을 꺼냈다.

“참, 누구랑 같이 온다고 미리 말 못 해서 미안해요. 이쪽은 내 사촌 조카인데 조향사님께 예전부터 향수를 의뢰하고 싶었다고 해서요. 원래 예약한 인원만 미팅 가능한 건 알지만 우리 조카가 외국에 살다가 오랜만에 한국에 온 거라 오늘 아니면 기회가 안 될 것 같아서 데려왔어요.”

강현은 일단 대답을 하지 않고 남자를 흘끗 바라보았다. 강현이 불쾌한 티를 감추지 않았음에도 시선이 스치자마자 남자는 사람 좋게 씩 미소를 지었다.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흠잡을 데 없이 말끔하게 세미 정장을 차려입은 그는 강현이 보기에도 제법 장신이었다. 단정하고 잘 다듬어진 인상의 보기 드문 미남이기도 했는데, 무표정일 때는 지극히 예민한 느낌일 것 같았지만 지금 강현을 보는 얼굴에는 연한 미소를 띠고 있어 부드럽고 섬세한 이미지를 풍겼다.

물론, 그런 외적인 부분은 강현에게 별달리 중요하지 않았다.

남자를 마주했을 때 처음으로 느낀 것은 핑크 페퍼, 클로버와 카네이션 향이 혼합된 스파이시하면서도 도시적인 향조였다.

그다음에는 통카빈, 바닐라, 말린 과일들이 섞인 묵직한 럼이었다. 마치 겉모습과 함께 빚어낸 듯 세련된 느낌의 그의 향은 순간적으로 모든 향조를 다 잡아낼 수 없을 만큼 독특해서, 강현은 저도 모르게 남자를 주시했다.

갑작스럽게 찾아온 낯선 사람에 대한 불쾌감보다 지금까지 맡아 보지 못한 조합에 대한 흥미가 강현의 마음을 더욱 자극했다.

그때 남자가 타이밍 좋게 입을 열었다.

“예약하지도 않고 이렇게 갑자기 찾아와서 죄송합니다. 하지만 한국에 있을 때 꼭 한번 작업하시는 걸 보고 싶어서요. 조용히 구경만 하겠습니다. 들어가도 괜찮을까요?”

남자의 말투는 정중하고 목소리는 부드러웠다. 결국 강현은 굳은 얼굴을 풀고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네, 그러시죠.”

다음으로 강현은 불편해 보이는 고객을 향해 사과의 말을 건넸다.

“무안하게 해 드릴 생각은 아니었는데 죄송합니다. 갑자기 오신 손님에 잠깐 당황해서요. 이해 부탁드리겠습니다.”

강현의 말에 겨우 표정을 편 고객이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이 몸을 비키며 손짓을 하자 고객과 남자가 신발을 벗고 안으로 들어왔다. 고객은 익숙하게 응접실로 향했다.

그런데 그 뒤를 남자가 따르며 강현을 바싹 스쳐 지나가는 순간, 후각을 자극하는 어떤 향에 강현은 멈칫했다.

그것은 타바코 잎의 향조였다.

윤해완의 몸에 남아 있던 것과 같이.

강현은 반사적으로 남자를 따라 고개를 돌렸다. 그러자 그 시선을 의식한 남자가 강현을 슥 뒤돌아보더니, 가볍게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그대로 응접실로 사라졌다.

그 뒷모습을 보며 강현은 이전에 들은 해완의 말과 방금 들은 고객의 말을 번갈아 가며 떠올렸다.

‘옛날에 잠깐 알던 형인데…… 외국에 좀 오래 나가 있어서 오랫동안 못 보다…….’

‘……우리 조카가 외국에 살다가 오랜만에 한국에 온 거라…….’

외국에 오래 살다 온, 드문 타바코 향의 향조를 가진 알파.

그 둘이 같은 사람일 확률이 있을까?

그러나 곧, 그 둘을 동일인으로 여기는 건 과민 반응이 아닌가 싶었다. 윤해완의 몸에 남은 그 향을 머리에서 떨치지 못하는 스스로가 짜증이 나서 강현은 머리를 거칠게 쓸어 올리며 남자가 있는 응접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에도, 이상한 우연이라는 생각에 기묘한 기분이 드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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