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 modificateur (2)
편의점 아르바이트를 마친 해완은 바로 집으로 돌아가는 대신 화장품이나 뷰티용품들을 파는 드러그스토어에 들렀다.
화장품이라고는 유준이 사 오는 것을 얻어 쓰는 게 전부였기에 이런 곳에 들어와 본 적이 없는 해완은 조금 쭈뼛거리며 문을 열고 들어섰다.
세일 기간이라 그런지 사람이 붐벼 다행히도 아무도 해완을 의식하지 않았다. 해완은 재빨리 가게 안을 눈으로 스캔한 후 핸드크림을 파는 매대로 바로 향했다.
오늘은 들고 다니면서 강현에게 발라 줄 핸드크림을 살 작정이었다.
매대를 가득 채운 수십 개의 제품들에 눈이 빙글빙글 도는 기분이라 핸드폰으로 미리 검색을 해 온 게 천만다행이었다.
일단 검색해 두었던 보습력이 좋은 제품들부터 찾아 테스트용으로 나온 것들을 하나씩 손등에 발라 보았다.
그러나 어떤 제품을 발라도 향에 예민한 강현이 거슬려하지 않을까 걱정부터 된 나머지 해완은 섣불리 무엇도 집지 못하고 고민에 빠졌다.
“찾으시는 것 있으세요?”
그때, 옆을 지나던 아르바이트생이 상냥하게 말을 걸었다.
“아, 핸드크림을 사려고 하는데, 향이 어떤 게 좋을지 몰라서…….”
“그럼 이런 건 어떠세요? 아로마틱하거나 플로럴한 향들 위주라 고객님 향이랑 잘 어울릴 것 같은데. 고객님들 반응도 정말 좋아요.”
“감사합니다. 살펴볼게요.”
해완이 웃으며 말하자 아르바이트생도 생긋 미소를 짓고는 다른 곳으로 총총 향했다. 매대 아래쪽에 있는 제품들을 확인하려 쪼그려 앉은 해완은 일단 하나하나 어떤 향들이 있는지 살펴보았다.
아르바이트생의 말대로 베티버, 라벤더, 로즈마리, 뮤게, 릴리 등 아로마틱하거나 부드러운 꽃 위주의 향들이 많았다.
그중 하나가 해완의 시선을 잡아끌었다. 흰색 튜브에 담긴 제품을 집어 든 해완은 조심스럽게 내용물을 손등에 짜고는 코끝에 대고 냄새를 맡아 보았다.
익숙한 냄새에 해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그것은 오스만투스, 목서 향이었다.
강현의 집에서 맡았던 만큼 자연스럽고 고급스러운 향은 아니었지만 해완이 느끼기에는 나름대로 재현율이 좋았다. 마음의 결정을 내린 해완은 오스만투스 향 핸드크림과 아까 봐 두었던 무향의 핸드크림을 하나씩 집어 계산대로 향했다.
그날, 쏟아지는 아침 햇살 아래서 손바닥과 손등이 미끄러지고 손가락이 얽히는 느낌이 아직도 생생해, 영 기세가 꺾이지 않는 강추위에도 불구하고 따뜻한 온기가 가슴속에서 넓게 퍼져 갔다.
내일이면 만날 텐데도 연한 그리움이 심장 속에서 꿈틀거렸다.
“……얼른 보고 싶다…….”
해완은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가, 제가 그런 말을 했다는 것에 괜히 볼을 빨갛게 붉히며 목도리 속으로 고개를 푹 숙이고는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향했다.
* * *
이전 만들어 놓았던 향수의 샘플을 가지고 강현은 고객과 간단한 상담을 했다. 그동안 남자는 고객의 옆에 앉아 조용하고 주의 깊은 태도로 강현과 고객이 이야기를 나누는 것을 바라보았다.
이제껏 느낀 바도 그렇고 상담 내용을 봐도 향에 영향을 미칠 만한 생활의 변화는 없어 보였지만, 혹시 모를 상황에 대비해 강현은 고객에게 설문지까지 작성해 주기를 부탁했다. 향의 호불호부터 식성, 생활 습관, 주변인의 향에 대해서까지 묻는 네다섯 장에 달하는 설문지를 받아 든 고객이 질린다는 표정을 지었다.
“이걸 또 적어요? 지난번에 쓴 거 있지 않아요?”
“전에도 말씀드렸다시피 페로몬 향은 고정되어 있는 게 아니라 생활에 따라서 항상 변하는 거라서요. 데이터가 축적되면 축적될수록 이런 번거로운 과정을 생략할 수 있게 되니까, 이번만 부탁드립니다.”
강현의 나직한 설명에 어쩔 수 없이 고개를 끄덕인 고객이 설문지를 들여다보기 시작하자, 남자가 불쑥 입을 열었다.
“페로몬 향에 영향을 미치는 요소가 그렇게 많은지 처음 알았네요. 저는 평소에 그런 걸 잘 느껴 본 적이 없어서.”
호기심이 어린 남자의 말투에 강현이 설명을 시작했다.
“인공적인 향료를 사용해 페로몬 향을 카피하려면 작은 차이가 큰 영향을 미쳐서 예민하게 따져 봐야 하지만 일상생활에서는 알아차리기 힘들 정도의 차이일 때가 많습니다. 그리고 본인의 향이 강하거나 독특한 경우에는 향의 변화에 둔해지는 게 보편적이구요.”
설문지를 작성하고 있던 고객이 갑자기 끼어들었다.
“조향사님 향도 아주 독특하고 진하잖아요. 그런데도 어떻게 그렇게 기가 막히게 다른 사람의 향을 잡아내요?”
고객들과의 대화에서 흔히 나오는 주제에, 강현은 건조하게 말을 이었다.
“저는 후각이 아주 예민한 편이어서요. 다행히도 제 페로몬 향에 큰 영향은 받지 않습니다. 이 일을 하면서 충분히 훈련이 되어 있기도 하구요.”
남자가 다시 부드럽게 말을 받았다.
“많이 힘드셨겠네요. 시각이나 청각이랑은 다르게, 후각은 어떻게 차단할 수 있는 것도 아니었을 텐데.”
어딘지 낯선 반응에 강현은 멈칫했다. 조향사라는 직업 때문인지 강현의 예민한 후각에 대한 이야기가 나올 때면 대부분의 사람은 타고난 재능이라는 것처럼 반응하기 일쑤였다.
그러나 ‘힘들었겠다’는 말부터 내뱉은 사람은 처음이었다. 강현이 시선을 주자 남자는 정말 걱정스러워 보이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강현은 여상하게 미소를 지으며 안전한 대답을 택했다.
“아닙니다. 덕분에 이 일을 하고 있으니 다행인 셈이죠.”
“그러네요. 그 정도로 후각이 뛰어나니 그렇게 완벽한 향수를 만드시는 거겠죠.”
그를 띄워 주려는 듯한 말투에 강현은 형식적인 미소만 또 지어 보였다. 그런 강현의 속을 읽기라도 한 듯 남자가 진심 어린 어조로 말을 덧붙였다.
“괜히 드리는 말씀 아니에요. 조향사님이 제조한 향수를 맡아 보고 이 정도로 완벽하게 구현할 수 있다는 것에 정말 놀랐거든요. 개인적으로 저도 이런저런 곳에 카피 향수 의뢰를 한 적이 있는데, 한 번도 제대로 된 걸 받아 본 적이 없기도 하구요.”
남자의 마지막 말에, 강현이 천천히 대꾸했다.
“그건 아마 향조가 흔하지 않아서도 있을 겁니다.”
“제 페로몬 향이요?”
“네. 럼에 타바코 향조까지 한꺼번에 가지신 분은 많지 않거든요. 탑에 들어가 있는 카네이션 향도 그렇구요.”
“역시 바로 아시네요. 타바코 향은 가까이 붙지 않으면 모르는 사람도 많던데.”
희미한 미소를 지은 강현이 불쑥 물었다.
“담배는 어떤 브랜드를 피우시죠?”
강현의 질문에 남자는 순간 놀란 기색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잠시 강현을 보다가, 믿을 수 없다는 듯 느리게 대답했다.
“보통은 시가 마스터를 피우는데…… 오늘은 가져오지 않았네요.”
강현은 고개를 끄덕이고 가볍게 말했다.
“향이 좋은 담배죠. 잘 어울릴 겁니다.”
그 대답이 남자가 느낀 놀라움을 해소해 주지는 않는 것 같았다. 그는 바로 이어 물었다.
“제가 흡연자인 걸 어떻게 아셨죠? 사실 거의 끊은 거나 다름없고, 며칠 전에, 그것도 한 가치를 반쯤 피운 게 다인데요.”
그래서 브랜드까지는 맞히지 못한 터였지만, 굳이 거기까지 말할 필요는 없겠다 싶어 강현은 간략히 설명했다.
“저 같은 경우에 담배를 태우고 일주일 정도까지는 그 흔적을 맡을 수 있어요. 특히 타바코 향조를 가지신 분들의 경우에는 더 향이 잘 달라붙는 경우가 많구요.”
그 말에, 남자는 물끄러미 강현을 바라보았다.
“그 정도로 후각이 예민하면 사람을 구분하는 데 눈도, 귀도 필요 없겠네요.”
칭찬인지 아닌지 모를 묘한 뉘앙스의 말에 흘끗 남자를 바라보자, 그는 처음으로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강현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사람의 얼굴을 읽는 것은 언제나 강현의 가장 큰 약점이었지만 그의 무표정한 얼굴에는 이유를 알 수 없는 불쾌감이 서려 있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그가 느낀 감상이 전부 착각이라는 듯 남자는 곧바로 예의 그 정중하고 상냥한 표정을 지었다.
“가능하기만 하다면 한국에 있는 동안 조향사님께 꼭 제 카피 향수도 맡기고 싶네요.”
가슴속에 떠오른 거부감 때문에 강현은 바로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불분명한 감정보다는 한 번도 조향해 보지 않은 향에 대한 흥미가 먼저 앞서 나갔다.
“한국에 언제까지 계실지 알려 주시면 스케줄을 가늠해서 연락을 드릴 수도 있습니다.”
“그게, 일정이 정확하지가 않네요. 처리해야 할 일이 있긴 한데 딱히 끝이 정해진 게 아니라.”
“그럴 수 있죠. 업무와 관련된 일이신가요?”
“업무라고 해야 할지, 친구가 맡긴 일이 있어서요.”
점점 쓸데없는 스몰 토크로 변해가는 듯한 대화에 강현은 눈을 내리깔며 심드렁하게 입을 열었다.
“아…… 친구분은 해외에 계신가요?”
남자는 한동안 말이 없다가, 깊은 미소를 머금고는 천천히 말했다.
“아뇨. 죽었어요. 심장병으로.”
강현은 시선을 돌려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는 얼굴에 미소를 띤 채 강현을 그저 응시하고 있었다.
강현에게는 이런 ‘난감한’ 이야기들이 나올 때마다 어떻게 반응해야 할지에 대한 예시들이 이미 몇 가지 존재했지만, 기묘하리만치 건조한 남자의 표정과 태도는 그가 가진 데이터베이스에서 무언가를 섣불리 고르기 어렵게 만들었다.
“뭐? 친구가 죽어? 어떤 친구가?”
그때 고객의 놀란 목소리가 불쑥 이야기에 끼어들었다. 강현에게 고정되어 있는 듯했던 남자의 시선도 거둬졌다.
“미국에 있을 때 친하게 지내던 친구예요. 그 친구가 한국에 연고가 없어서…… 죽기 전에 저한테 부탁한 일들이 몇 가지 있거든요.”
“아휴, 그런 일이 있었구나.”
대화의 말은 고객과 남자에게 넘어갔다. 삽시간에 바뀐 공기의 흐름에 귀찮은 고민을 하지 않아도 되어 다행이다 싶어진 강현은 고객을 향해 말을 걸었다.
“작성은 다 끝내셨나요?”
“네. 여기.”
강현은 설문지를 받아 들며 몸을 일으켰다.
“여기까지 와 주셔서 감사합니다. 최대한 빠르게 완성한 다음에 다시 연락드릴게요.”
강현의 말에 고개를 주억거린 고객이 몸을 일으켰다. 남자 또한 별다른 기색 없이 자리를 뜰 채비를 했다.
그러나 응접실에서 나가기 직전 남자가 느닷없이 말을 걸었다.
“아까 스케줄을 봐 주실 수 있다고 했는데, 혹시 연락처를 남기고 가도 될까요?”
묘하게 종잡을 수 없는 태도가 남자의 일을 맡고 싶은 생각을 이미 없어지게 한 터라, 강현은 적당히 사무적인 말투로 대꾸했다.
“명함 있으시면 받아 두겠습니다.”
“제가 한국에 온 지 얼마 안 된지라 아직 명함이 없어서…… 그냥 적어 드려도 괜찮을까요?”
“그러시죠.”
남자는 품에서 수첩을 꺼내 능숙하게 번호를 적고는 그것을 찢어 강현에게 넘겼다. 그는 고급스러운 미색 종이에 적인 정갈한 글씨체의 번호를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010-94XX-XX35, 서인하.
종이에서 고개를 들자, 서인하라는 남자가 여유로운 태도로 말했다.
“연락 기다리겠습니다, 그럼.”
강현은 기계적으로 미소를 지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그러자 남자는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응접실을 빠져나갔다.
고객과 그, 서인하를 배웅하고 돌아온 강현은 응접실에 남은 두 사람의 향기를 없애기 위해 중정 문을 활짝 열고 환기 시스템까지 돌렸다.
인하의 타바코 향조는 조금 시간을 들인 후에야, 그 자취를 감췄다.
* * *
다음 날 오전, 간만에 고객과의 미팅이 없는 날이라 강현은 홀로 느긋하게 조향 작업에 집중했다.
작업을 어느 정도 마치고 오후가 되자 몸을 일으킨 그는 가지고 있는 원료들의 상태와 재고를 체크했다. 그라스의 구릉 지대에서 채취한 미모사는 강현이 좋아하는 원료였지만 최근 수입이 원활하지 않아 재고가 얼마 남아 있지 않은 상태였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따뜻하고 수수한 플로럴 향을 맡으며 먼저 떠오른 기억은, 화려하게 아름다운 그라스 지방의 풍경이 아니라 윤해완의 손에서 건네진 작은 미모사 한 다발이었다.
그러고 보니 그걸 어디다 뒀는지. 강현은 문득 멍하니 생각했다.
가사를 도와주시는 아주머니가 말려서 적당한 곳에 걸어 두었다는 말을 들은 것 같기는 한데 본 기억이 없는 걸 보니 아마도 잘 쓰지 않는 손님방 같은 곳에 걸어 둔 듯했다.
갑자기 별 게 다 궁금해졌다 싶었지만, 어쨌든 오늘은 윤해완을 만나기로 한 날이어서 나중에 찾아보기로 하고 생각을 접어 머릿속에 넣어 두었다.
시간을 바라보자 어느새 5시가 되어 있었다. 느긋하게 작업실을 정리하고 나가면 윤해완이 일을 마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갈 수 있을 듯싶었다.
그런데 그때 주머니에 넣어 둔 핸드폰의 진동이 울렸다. 발신인을 확인하자 액정에 떠 있는 윤해완, 아니, 윤해언의 이름에 강현은 망설이지 않고 전화를 받았다.
“응, 해언아.”
―강현아, 작업실이야?
“응. 왜?”
―그게 오늘 우리 만나기로 한 거 있잖아…….
윤해완은 말끝을 흐렸다. 익숙한 패턴에, 강현은 탁자를 손톱으로 툭툭 건드렸다.
―내가 오늘 몸이 안 좋아서 그런데, 다음에 만나면 안 될까?
아니나 다를까. 짜증이 난 강현은 눈알을 굴렸다. 그래도 꾹 참고 애써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왜, 어디가 안 좋은데?”
―그냥 좀 몸살이 난 것 같아.
“병원은 갔다 왔어?”
―일 끝나고 가 보려고.
전화만으로는 거짓말인지 아닌지 명확하지가 않아 강현은 잠시 침묵했다. 그러자 수화기 속의 윤해완이 초조하게 말을 이었다.
―자꾸 약속 취소해서 미안해, 강현아. 그래도 오늘은 좀 쉬는 게 좋을 것 같아.
마음의 결정을 내린 강현은 고개를 들고 막힘없이 입을 열었다.
“그래, 그러자. 지금 일하고 있다는 거지? 일 끝나고 꼭 병원 가고. 알았지?”
―알겠어. 고마워. 다시 연락할게.
전화를 끊은 강현은 곧바로 몸을 일으켜 코트를 대충 걸쳐 입었다. 엉망으로 펼쳐 놓은 조향대의 향료병들을 정리하지도 않은 채, 그대로 작업실 밖으로 나가서는 차를 타고 시동을 걸었다.
운전하는 도중에도 불쑥불쑥 짜증이 치미는 것을 강현은 애써 눌러 참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만나서 직접 확인해야겠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꽉 채우고 있었다.
편의점 앞에 주차한 강현은 과잉 반응을 하지 않으려 일단 마음속을 헤집는 감정을 다잡으려 애를 썼다.
그것은 20대 초반의 몇몇 경험 때문이었다. 감정을 세세하게 분류해 대처하지 못하다 보니 엉망으로 쌓여 있던 억눌린 감정들이 사소한 도화선만으로 터져 버리는 일을 이미 몇 번이나 겪은 적이 있었다.
그런데, 그렇게 차 안에 앉아 있는 사이 윤해완이 갑자기 편의점 밖으로 나왔다. 아직 유니폼을 입은 채였는데 편의점 앞 탁자에 있는 쓰레기들을 정리하러 나온 듯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몸이 먼저 움직였다. 강현은 망설임 없이 차 문을 열고 나와 성큼 걸어 탁자를 정리하고 있는 윤해완의 팔뚝을 잡아 거칠게 당겼다.
그렇지 않아도 커다란 눈이 더욱 둥글어진 채 강현을 향했다. 그는 잠시 상황 판단이 안 되는 듯 강현의 얼굴을 올려다보다가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가, 강현아, 여긴 어떻게…….”
강현은 그의 말을 가차 없이 자르고 낮게 물었다.
“얼굴이 왜 이래?”
해완의 왼쪽 광대를 따라, 시퍼렇게 멍이 올라와 있었다.
* * *
갑작스러운 강현의 등장에 크게 당황한 해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얼굴에 든 멍을 감추려 했다. 그러나 그 즉시 강현은 다른 손으로 해완의 턱을 쥐고 강압적으로 돌려 저를 향하게 만들었다.
어설프게 감추려던 시도가 바로 좌절되자 해완은 어쩔 수 없이 볼을 붉혔다. 얼굴에 난 멍으로 시선이 내리꽂혔고, 해완은 우물쭈물 말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보기에만 그렇지 별거 아냐. 내가 원래 멍이 좀 잘 들어서…….”
하지만 강현은 쓸데없는 이야기는 들을 생각도 없다는 듯 단호히 말을 잘랐다.
“누가 이랬어?”
짧게 할 수 있는 이야기는 아니라서 해완은 바로 입을 열지 못했다. 잠깐의 침묵이었는데도 심기가 상한 듯 눈썹을 꿈틀한 강현이 다시 한번 입을 열려는 찰나, 편의점 문이 딸랑 하고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거기 무슨 일 있어요?”
바쁜 시간대라 같이 일을 하고 있던 편의점 사장이었다. 그의 목소리에는 걱정 반, 의아함 반이 섞여 있었는데 강현이 해완을 억지로 붙들어 두는 것처럼 보였던 모양이었다.
그때 해완의 머릿속으로 사장이 강현의 앞에서 제 이름을 부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개같이 스쳐 지나갔다.
그 생각만으로도 온몸의 피가 쏟아지는 듯한 기분이 된 해완은 그때까지 제 턱을 쥐고 있던 강현의 손을 밀치며 황급히 대꾸했다.
“아무것도 아니에요, 사장님. 곧 들어갈게요.”
해완의 말에도 사장은 강현을 미심쩍은 듯 강현을 아래위로 훑어보고는 재차 물었다.
“진짜 괜찮은 거야?”
“네. 정말 괜찮아요. 바로 들어갈게요.”
사장은 돌아서긴 했지만 끝까지 강현을 의심스러운 눈으로 보며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겨우 한시름 놓은 해완이 강현에게 간절히 말했다.
“강현아. 나 일단 일만 마무리하고 나올게. 조금만 있다 다시 얘기하자. 응?”
강현은 무언가 말하고 싶은 듯 입을 열었다가, 아직까지도 사장이 주시하고 있는 편의점 안을 흘끗 넘겨보고는 짧게 고개를 끄덕하고 해완의 팔을 놓아주었다.
해완은 황망하게 탁자 위에 놓인 쓰레기를 집어 들고 편의점 안으로 들어갔다. 숙인 고개 위로 강현이 저를 보고 있는 것을 알았지만 일부러 시선을 피했다.
문을 닫고 나서 흘끗 뒤를 돌아보자 도로가에 주차되어 있는 자신의 차로 돌아가는 강현의 뒷모습이 보였다.
길게 한숨을 내쉬는 해완에게 사장이 께름칙하게 물었다.
“누구야, 저 사람?”
사장의 존재를 잠시 잊고 있었던 해완은 흠칫 놀랐다가, 어물거리며 적당히 대답했다.
“아, 제…… 제 친한 친구예요.”
“그래? 덩치도 커다란 사람이 해완 씨 턱을 막 움켜쥐고 그러길래 뭐 시비라도 거나 했잖아.”
강현의 태도가 조금 거칠긴 했지만, 그런 식으로 보였을 줄 몰라 당황한 해완이 정신없이 손을 내저었다.
“그런 거 아니에요. 제 얼굴에 멍든 거 보고 놀라서 그런 거예요.”
“그럼 다행이구. 친구가 밖에서 기다리고 있는 거야?”
“네. 그래서 말인데…… 저 조금만 일찍 나가도 될까요?”
사장은 흘끗 시계를 보더니 어차피 근무 시간이 20분 정도밖에 남아 있지 않은 것을 보고 그러라며 흔쾌히 허락해 주었다.
해완은 사장에게 감사하다고 이야기하고는 손에 쥐고 있던 쓰레기들을 말끔히 정리하고 창고 안 탈의실로 향했다.
유니폼을 벗은 해완은 벽에 걸린 거울로 얼굴에 든 멍을 유심히 들여다보았다. 고작 한 대 맞았을 뿐인데 생각보다 아파 보였다.
이럴 줄 알았으면 연고라도 바르고 나올걸. 그런 후회를 했지만 너무 갑작스럽게 일어난 일에 차마 그럴 생각을 하질 못했다.
어젯밤, 핸드크림을 사고 집으로 돌아오던 해완은 집 앞 골목에 서 있는 남자 세 명을 보았다.
처음에는 그저 잡담을 하고 있는가 싶었지만 몸집이 작은 남자 한 명을 사이에 두고 나머지 둘이 위협하듯 둘러싸 있는 게 분위기가 뭔가 심상치 않아 보였다.
아니나 다를까 모자를 쓰고 있던 남자 하나가 중간에 있던 남자의 멱살을 쥐고 뒷벽에 거칠게 밀치는 것이 보였다.
그때 가로등 빛이 멱살을 잡힌 남자의 얼굴을 희미하게 비추었고, 그것이 유준임을 안 해완은 곧바로 앞으로 달려 나갔다.
“유준아!”
해완의 목소리에 세 사람 다 멈칫 그를 바라보았다. 유준의 멱살을 쥐고 있던 모자 쓴 남자의 손이 스르르 풀렸다.
“지금 여기서 뭐 하는 거야? 이 사람들은 누구고?”
가까이 다가선 해완은 저도 모르게 남자들과 유준의 사이를 끼어들며 섰다. 남자 둘은 자기들끼리 보고 픽 웃더니 유준에게 물었다.
“뭐야, 씨발. 너 아는 새끼야?”
유준은 어쩔 줄 모르고 남자와 해완의 얼굴을 번갈아 보다가 작은 목소리로 해완보다 남자들을 위한 답을 먼저 했다.
“그냥, 그냥 좀 아는 형이야.”
그냥 아는 형? 해완이 인상을 찌푸리며 유준을 돌아보자 유준은 재빨리 시선을 피했다. 그때 모자 쓴 남자 옆에 있던 남자가 뭔가 떠올랐다는 듯 박수를 딱 치더니 입을 열었다.
“잠깐, 여기 니네 집 앞이잖아. 그럼 너랑 같이 살고 있다는 그 형 아냐? 둘 다 부모가 버려 가지고 같은 고아원에서 자랐던가 뭔가 하는?”
해완은 모욕적인 말투에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무슨 일인지 몰라도 대화를 이어 나갈 가치가 없다고 판단한 그는 유준의 어깨를 감싸며 강하게 말했다.
“뭔 얘긴지 몰라도 중요한 것 같지도 않은데 나중에 하시죠. 들어가자. 유준아.”
유준을 끌고 집 안으로 들어가려던 해완의 앞을 남자들이 막아섰다. 모자 쓴 남자는 빈정대며 해완에게 손짓을 했다.
“우리 얘기 아직 안 끝났는데요. 그냥 좀 아는 형은 집에 들어가 계시죠.”
“그, 그래. 나 금방 들어갈 테니까 형 먼저 집에 들어가 있어.”
유준마저 남자들의 편을 들었지만 그런 말을 듣고 들어갈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해완은 조금도 물러서지 않고 말했다.
“진짜 대화가 하고 싶은 거면 애 협박하듯이 굴지 말고 밝을 때 다시 찾아와요.”
해완은 다소 거칠게 어깨로 남자들을 밀쳐 내며 유준의 팔을 쥐고 대문 안으로 들어가려 했다.
그때, 모자를 쓴 남자가 짜증이 난 듯 해완의 손에 끌려가던 유준의 뒷덜미를 거칠게 낚아챘다. 해완이 유준의 팔을 놓쳤고, 홱 잡아끌린 목덜미에 목이 졸린 유준이 캑캑거렸다.
열이 확 오른 해완이 한 발짝 앞으로 나서자 다른 남자가 그의 앞을 가로막았다. 모자를 쓴 남자가 짜증스럽게 말을 내뱉었다.
“야, 니가 잘못해서 우리가 이러는 거잖아. 왜 설명을 제대로 안 해 가지고 우리만 나쁜 사람 만들어?”
그는 유준의 고개가 앞으로 휙 쏠릴 정도로 뒤통수를 강하게 내리쳤다.
그리고 그것을 보는 순간, 해완의 머릿속에서 무언가 뚝 끊기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해완은 앞을 막은 남자를 지나 모자를 쓴 남자에게 뒷덜미가 잡혀 있던 유준을 제 뒤로 잡아끈 뒤 그의 가슴팍을 거의 들이받듯이 거세게 밀쳤다.
갑작스러운 해완의 행동에 허가 찔린 남자는 그대로 중심을 잃으며 뒷벽에 강하게 부딪치더니 주저앉았다.
심장이 가슴팍으로 터져 나올 것처럼 쿵쿵 뛰었고, 귓속에서는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다. 말로 설명할 수 없는 갑작스러운 분노에 사로잡혀 해완은 거칠게 숨을 몰아쉬었다.
뒷머리를 자못 세게 박은 남자는 잠시 정신을 못 차리다 고개를 홱 들었다.
“아, 이 개새끼가!”
몸을 일으킨 남자가 그대로 해완에게 달려들어 주먹을 날렸다. 왜인지 둔해져 있던 해완은 피하지도 못하고 그대로 얼굴을 맞고 바닥에 쓰러졌다.
남자는 해완에게 발길질까지 하려 했지만 그때 유준이 달려들어 막았다. 소란이 커지자 창문 사이로 고개를 내미는 사람들이 생겼고 그것을 의식한 듯 다른 남자도 모자를 쓴 남자를 말리기 시작했다.
“야, 야! 그만해!”
남자는 겨우 뒤로 물러서긴 했지만 씩씩대며 제 뒷머리를 만졌다.
“씨발, 이거 혹 존나 나겠네. 너 지금은 내가 참는데 내 눈에 또 띄면 진짜 뒤진다. 그리고 김유준, 넌 나중에 보자.”
남자들은 골목을 떠나면서까지 끝까지 욕설을 해 댔다.
그때까지도 해완은 그저 멍하니 앉아 있었다. 마치 몸이 마비되기라도 한 것처럼 손끝 하나 까딱할 수가 없었다. 골목이 떠나가라 욕설을 외치는 남자들의 목소리도 마치 물속에서 들리는 듯 멀게만 느껴졌다.
“혀, 형, 괜찮아?”
남자들의 모습이 보이지 않게 되자 유준이 벌벌 떨며 무릎을 꿇고 해완의 맞은 얼굴을 만졌고, 그 손길을 받고서야 정신이 들었다.
그게 얼굴에 멍이 들게 된 사건의 전말이었다. 해완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 강현을 피하고 싶었던 것은 그를 걱정시키고 싶지 않아서이기도 하지만, 멍이 든 경위에 대해 이야기하면 유준을 더욱 좋지 않게 볼까 마음이 쓰여서이기도 했다.
이렇게 대놓고 멍이 들지만 않았어도 어디 부딪쳤다고 적당히 변명이라도 할 수 있었을 텐데. 피부가 희고 살이 연한 탓에 멍이 잘 올라오는 제 체질을 원망하며 해완은 옷을 갈아입었다.
편의점 밖으로 나오자 강현은 보란 듯이 차 운전석 창문을 열고 해완에게 시선을 고정시켰다.
몇 발자국 되지도 않는 거리를 해완은 최대한 느리게 걸으며 강현에게 어디까지 말해야 할지 열심히 머리를 굴렸다.
“이제 설명해 봐.”
차에 타자마자 강현이 무뚝뚝하게 물었다. 해완은 애매모호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그게, 어제 어떤 사람들이랑 시비가 좀 붙었어.”
“시비? 윤해언, 네가?”
그야말로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한 강현의 목소리에 해완이 소심하게 대답했다.
“왜? 나도 화나는 일 있으면 사람들이랑 싸우고 그래.”
바로 반박할 것처럼 강현은 입을 열었지만, 쓸데없는 데 시간 낭비를 하고 싶지 않다는 듯 짧게 말했다.
“그래, 그렇다 치자. 대체 왜 시비가 붙은 건데?”
해완이 제일 말하고 싶지 않았던 것이 이 부분이었다. 하지만 강현의 눈을 보니 솔직하게 말하지 않으면 도저히 넘어갈 수 없을 듯했다. 결국 해완은 어쩔 수 없이 작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제 누가 유준이를 때리는 걸 봐서…… 그걸 말리다가 그렇게 됐어.”
생각지 못한 말인지 강현은 미간을 좁혔다.
“뭐? 누가 그랬는데?”
“유준이가 옛날에 잠깐 같이 어울리던 질 나쁜 놈들인 거 같은데, 아직 제대로 얘길 못 해 봤어.”
해완의 평소 성격대로라면 집으로 들어오자마자 유준을 붙잡아 앉혀 두고서 캐물었겠지만 어제는 이상하게 머리가 멍해서 유준과 대화를 나눌 정신이 되질 못했다.
강현은 뭔가를 가늠하듯 긴 손가락으로 눈썹 위를 문질렀다. 괜히 마음이 불편해진 해완이 유준을 위한 변명을 주워섬겼다.
“유준이 너무 안 좋게 생각하지 마. 유준이가 안 그래 보여도 애가 물러서 사람들을 잘 못 끊어 내서 그래. 처음 서울 올라왔을 때 내가 잘 챙겼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한 탓도 있고.”
강현은 묻지도 않았는데 그런 말을 하는 해완을 이해할 수 없다는 듯 빤히 바라보다가 느리게 말했다.
“그게 나한테 거짓말한 이유야? 내가 유준이 나쁘게 생각할까 봐?”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해완은 어물거렸다.
“거짓말 아냐……. 맞은 거 얘기 안 한 건 미안하지만, 몸살 기운 있어서 좀 쉬려고 했던 건 진짜야.”
이런 식으로 트러블을 겪은 게 처음이라 몸이 놀랐는지 컨디션이 안 좋은 것만은 사실이라, 해완은 진심을 담아 중얼거렸다.
그 말에, 강현의 눈이 살짝 부드러워졌다. 그는 손을 올려 해완의 멍이 든 얼굴을 살살 어루만졌다.
커다랗고 시원한 손이 얼굴을 쓰다듬는 느낌이 좋아 해완은 저도 모르게 눈을 살짝 감았다.
그렇게 해완의 얼굴 이곳저곳을 쓸던 강현은 말도 없이 손을 뗐다. 해완이 눈을 뜨자 그가 무뚝뚝하게 말했다.
“안전벨트 매.”
해완이 약간 어리둥절한 채로 안전벨트를 매자 강현이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 가는 거야?”
강현은 해완을 쳐다보지도 않고 대꾸했다.
“병원.”
“뭐? 이 정도 멍든 거 가지고 병원 가는 사람이 어딨어.”
신호에 차를 정차시킨 강현이 해완의 당황한 목소리에 돌아보았다.
“너 지금 열 있잖아. 몰랐어?”
해완은 반사적으로 제 이마에 손을 가져다 댔다. 눈이 이상하게 뜨끈하고 몸이 나른하다 했더니 정말 열이 좀 나는 모양이었다.
전혀 몰랐다는 얼굴에 강현의 입에서 한숨이 샜다.
“가끔 보면 넌 예민한 건지 둔한 건지 모르겠어.”
곧 신호가 바뀌었다. 강현은 차를 출발시키며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다른 사람 일은 다 아는 것처럼 굴면서, 정작 너 자신은 잘 모르는 거 같거든.”
어찌 대꾸해야 할지 몰라 해완은 눈만 깜박였다. 하지만 대답을 요구한 것은 아닌 듯 강현은 말없이 차를 몰았다.
해완은 카시트에 몸을 묻었다. 왜인지 강현의 말이, 마음에 깊숙이 남았다.
강현은 근처에 각종 병원들이 모여 있는 적당한 건물로 차를 몰았다. 우습게도 열이 있다고 듣고 나서야 왠지 몸이 무겁게 느껴져서, 해완은 뜨끈한 눈을 끔뻑이며 얌전히 강현이 가는 데로 따랐다.
4층에 위치한 내과에는 다행히도 손님이 거의 없었다. 카운터에 앉아 있던 간호사가 친절히 말을 걸었다.
“어디가 아파서 오셨어요?”
“열이랑 몸살 기운이 좀 있어서요.”
해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강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마치 어린애가 된 것 같아 살짝 창피했지만, 그게 또 나쁜 기분은 아니라 해완은 얼굴만 조금 붉히고 가만히 있었다.
“기침이나 가래, 콧물 증상은요?”
“그런 건 없는 것 같은데요. 감기 말고 다른 데 아픈 데는 없는지 검사는 어떻게 하죠?”
“그럼 전반적인 피 검사를 해 드릴 수 있는데 해 드릴까요?”
“네, 그렇게 해 주세요.”
“저희 병원에 처음 진료받으러 오신 건가요? 그럼 여기 양식 좀 적어 주세요.”
강현은 간호사가 준 종이를 해완의 앞으로 슥 밀었다. 아픈 사람을 강현으로 생각한 모양인지 어리둥절한 표정을 했다가 사정을 알겠다는 듯 미묘하게 입꼬리를 올리는 간호사의 표정을 본 해완은 볼이 더욱 빨개져 고개를 숙였지만 강현은 태연하기만 했다.
그러나, 제게 내밀어진 종이를 보는 순간 해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종이에는 이름, 주민 번호와 같은 인적 사항을 적도록 되어 있었다. 병원에 한두 번 온 것도 아닌데 어떻게 이런 절차가 있다는 걸 잊을 수 있는지 몰랐다.
눈앞이 캄캄해진 기분으로 해완은 종이를 내려다보기만 했다. 제 발로 기어들어 온 덫 같은 상황에 심장이 너무 거세게 뛰는 바람에 가슴 밖으로 튀어나올 듯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옆에 서 있던 강현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너 그거 적는 사이 잠깐 화장실 좀 다녀와도 되지?”
해완은 홱 고개를 돌려 강현을 바라보고는 있는 대로 힘껏 고개를 끄덕였다.
“으, 으응. 그럼, 당연하지. 천천히 다녀와.”
강현은 미소를 지으며 해완의 뒷머리를 살짝 쓰다듬고는 몸을 돌려 성큼성큼 병원 밖으로 걸어 나갔다.
겨우 안도의 한숨을 내쉰 해완은 아직까지도 떨리고 있는 손으로 양식을 빠르게 적어 내려갔다.
“윤해완 님, 맞으시죠?”
인적 사항을 입력한 간호사가 확인차 되묻자, 해완이 빠르게 입을 열었다.
“네, 네. 맞아요. 근데 부탁드리고 싶은 게 하나 있는데요.”
“말씀하세요.”
“지금부터 제 이름 부르지 마시고 환자분, 이라고만 해 주실 수 있을까요?”
“네?”
“저한테 정말 너무 중요한 일이라서요. 제발…… 꼭 좀 부탁드려요.”
해완의 너무도 간절한 목소리에 간호사는 영문을 모를 얼굴을 하고서도 고개를 끄덕여 주었다.
“아, 네. 그렇게 해 드릴게요. 곧 들어가실 수 있으니까 잠깐만 앉아서 기다리세요.”
“정말 감사합니다.”
해완은 고개까지 꾸벅 숙여 보이고는 카운터에서 가까운 자리에 앉았다. 혹시 간호사가 깜빡하고 이름을 부르면 다 부르기 전에 벌떡 일어서기라도 할 요량이었다.
그때 병원 문이 열리며 강현이 다시 안으로 들어왔다. 강현은 마치 해완을 보고 있기라도 했던 듯 그가 앉아 있는 곳으로 곧바로 다가왔다.
해완의 옆에 앉은 강현은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많이 기다리래?”
“어? 아, 아니. 조금만 기다, 기다리면 된대.”
바싹 긴장하고 있던 해완은 바보처럼 말을 더듬었지만, 강현은 별다른 반응 없이 의자에 깊숙이 등을 대고 앉았다.
그때 진료실 문을 열고 나온 간호사가 해완을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윤해……!”
하지만 순간 새파래진 해완의 얼굴을 보고서야 그의 부탁이 생각났는지 멈칫한 간호사가 끝을 얼버무리며 다시 말했다.
“……어, 환자분. 지금 진료실로 들어오세요.”
해언과 이름이 거의 비슷한 것이, 이렇게 다행으로 느껴질 수가 없었다.
강현의 옆에 더 앉아 있다가는 공황 상태에 빠질 것만 같아 해완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강현이 부드럽게 그의 손끝을 잡아챘다.
“같이 들어갈까?”
해완은 강현의 손을 거의 뿌리치다시피 하며 급하게 말했다.
“아니! 나 혼자 들어갈 수 있어.”
끝까지 같이 들어가겠다고 하면 어쩌나 했는데 의외로 강현은 고개를 한 번 까딱하는 정도로 쉽게 물러났다. 해완은 그가 다시 말을 걸지 못하게 뒤도 돌아보지 않고 빠르게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어디가 불편해서 오셨어요?”
의사의 통상적인 질문에 해완은 몸살기가 있다고 짧게 설명했지만, 솔직히 지금 등에서 식은땀이 죽죽 흐르고 눈앞이 도는 기분이 드는 게 열 때문인지 제가 처한 상황 때문인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특별히 증상이 심하거나 감기에 걸리거나 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몸살 약을 처방받고 검사를 위한 채혈을 하는 정도로 진료는 빨리 끝났다. 의사는 수액을 맞고 가라고 권유했지만 빨리 병원에서 빠져나가고 싶은 생각밖에 없던 터라 극구 거부했다.
다음 관문은 계산과 처방전을 받는 것이었다. 하지만 다행히도 간호사는 이번에는 해완의 부탁을 잊지 않았는지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고 처방전만 발급해 건네주며, 피 검사 결과는 다음 주 중 유선상으로 따로 안내가 갈 거라고 알려 주었다.
처방전에 적힌 이름이 보이지 않게 잘 접어 든 해완은 병원 문밖을 나오고서야 한시름을 놓고 작은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뒤도 돌아보지 않고 엘리베이터로 향하는 해완의 손목을 강현이 덜컥 잡았다.
“약 받아서 가야지. 약국 저쪽이야.”
“어? 나, 그게…….”
“우리 저녁 먹으러 갈 데 전화해서 예약 좀 할 테니까, 넌 먼저 가서 약 받고 있어.”
약은 따로 받겠다고 또 어떻게 변명해야 할지 머리가 엉망이던 해완을 향해 강현이 여상하게 말했다.
신기하게 잘 풀리는 상황에 해완은 또 어린애처럼 크게 고개를 끄덕였다.
“어, 응. 그럴게.”
해완은 빠른 걸음으로 약국으로 향했다. 약을 조제하는 중간에도 강현이 들어올까 봐 흘끔거리며 뒤를 돌아보았지만, 그는 멀찍이 떨어진 복도에서 계속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었다.
약을 받고서야 긴장이 풀려 손발의 힘이 쭉 빠진 채 잠시 숨을 고른 해완은 이름과 나이가 적힌 약 봉투가 보이지 않도록 코트 주머니에 깊숙이 잘 쑤셔 넣은 다음에야 강현을 향해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해완이 가까이 다가서자, 그제야 통화가 끝난 듯 핸드폰을 내린 강현이 미안한 듯 말했다.
“미안, 고객한테 전화가 와서 통화가 길어졌네. 이제 밥 먹으러 갈까? 너 기력 떨어진 거 같아서 장어구잇집 예약했는데, 괜찮지?”
강현은 그렇게 말하며 흐트러져 있는 해완의 코트 깃을 매만져 주었다.
너무나 자상한 손길에, 아까와는 조금 다른 의미로 심장이 떨어지는 기분이 들었다. 갑자기 울음을 터트릴 것만 같아 해완은 입술을 꾹 깨물고 끄덕였다.
“가자, 그럼.”
강현은 해완의 어깨를 감싸고 엘리베이터를 향해 걸음을 옮겼다.
해완은 걸음을 옮기는 내내 얼굴을 숙이고 있었다. 강현에게 한 거짓말을 숨겨 보겠다고 동동거리고 안절부절못한 자신의 모습이 너무나 추하게 느껴져 고개를 들 수가 없던 탓이었다.
고급스러운 장어구잇집에 가서도 해완은 음식을 거의 먹지 못했다. 아무리 잊으려고 노력해 봐도 오늘처럼 제가 하고 있는 짓을 새삼스레 깨닫게 되는 일이 생길 때면 스스로에 대한 경멸이 가슴에 얹혀 아무것도 넘어가질 않았다. 강현이 걱정스러워하는 걸 뻔히 알면서도 도저히 입 안에 있는 것을 씹어 삼킬 수가 없었다.
결국 시킨 음식의 반도 먹지 못하고 두 사람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강현이 운전하는 동안 해완은 자는 척 눈을 감고 있었지만 내내 온몸이 저릿대는 듯한 기분만 들었다.
“집에 가서 약 먹고 푹 쉬어. 알겠지?”
해완의 집 앞 골목에 차를 세운 강현이 부드럽게 말했다.
“응. 오늘 고마웠어. 집에 조심해서 들어가.”
강현의 눈을 쳐다보지도 않은 채로 대답한 해완이 차에서 내리려던 순간 강현이 팔을 붙들었다.
해완이 놀라 뒤돌아보자, 강현이 투정 부리듯 말했다.
“키스는 해 주고 가야지.”
그리고 강현은 해완의 볼을 두 손으로 감싸 잡아끌어 입을 맞췄다. 해완은 반사적으로 제 볼을 감싼 강현의 한쪽 손을 덮어 쥐었다.
아픈 것을 의식해서인지 강현은 짧고 가볍게 키스한 후 떨어지려 했지만, 해완은 저도 모르게 제가 쥐고 있던 강현의 손을 얼굴에서 떨어지지 못하게 했다.
한쪽 얼굴을 완전히 덮을 정도로 큰, 건조하고 시원한 손에 볼을 잠시 기대고 있던 해완이 천천히 눈을 떴다.
“……나 너한테 줄 거 있어.”
갑작스러운 해완의 말에 강현이 궁금한 듯 고개를 기울였다. 해완은 코트 주머니에 내내 들어 있던 목서 향의 핸드크림을 꺼냈다. 아침에는 강현을 만날지 말지 긴가민가하던 터라 일단 챙겨 왔던 것이었다.
그것을 강현에게 가지고 다니라고 줄까 하다가, 해완은 생각을 바꿔 말했다.
“손 줘 봐.”
그 말을 듣자 강현이 뭔지 알겠다는 듯 피식 웃었다. 해완은 핸드크림을 손에 짠 뒤 전에 그랬던 것처럼 강현의 손을 덮었다.
제대로 펴서 바르기도 전에 예민하게 향을 캐치한 강현의 눈썹이 꿈틀했다.
“은목서 향이네.”
강현이 나직하게 말했다. 해완은 그저 고개를 끄덕이고 나서, 강현의 손에 크림을 바르는 일에만 집중했다.
은은하게 달콤한 꽃향기가 퍼져 갔다. 크림을 다 펴 바르고도 한동안 강현의 손을 쥐고 있던 해완은 그의 손을 끌어당겨 손등에 입을 맞추고서야 놓아주었다.
“……다 했다.”
왜인지 목이 메어서, 목소리가 이상하게 들렸다.
그럼에도 강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예의 그 검은 눈으로 해완을 빤히 쳐다보고만 있었다.
“갈게.”
해완은 차에서 내렸다. 강현은 이번에는 그를 붙들지 않았다.
* * *
오늘의 마지막 배달을 마친 유준은 약국이 문을 닫을까 뛰다시피 걸음을 재촉했다.
다행히도 멀찍이 보이는 약국의 간판이 아직 환하게 빛나고 있는 것을 본 그는 겨우 숨을 돌리고 조금 천천히 걷기 시작했다.
해완은 항상 유준이 일어나기 전 일을 나가기 때문에 정확히 오늘 상태가 어떤지는 보지 못했지만 굳이 보지 않아도 뻔한 일이라 연고라도 사다 줘야 죄책감이 좀 덜할 듯 싶었다.
저녁 시간인데도 약국 안에는 이미 손님이 가득했다. 어쩔 수 없이 구석으로 비켜선 유준은 사람들이 빠지길 기다리며 괜히 손거스러미만 만지작거렸다.
그렇게 하릴없는 시간을 보내자니, 어젯밤 일어난 일에 대한 자책이 머리 한구석에 달라붙어 떨어지질 않았다.
2년 전, 그 양아치 새끼들을 믿고 순진하게 오백만 원이라는 돈을 빌린 일을 후회하고 또 후회했지만 그 새끼들의 손아귀에서 도대체 어떻게 빠져나가야 될지 아득하기만 할 뿐이었다.
이어서 저를 위해 나서던 해완의 모습을 떠올린 유준은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쉬었다.
제가 아무리 사고를 쳐도 화도 제대로 한번 낸 적 없는 사람이 위협받는 유준의 모습을 보고 달려들어 그 새끼들과 몸싸움까지 했지만, 뭐 그것까지는 그렇게 놀랍지 않았다.
해완은 언제나 제 바운더리 안에 있는 사람들한테는 지극히 헌신적이었고, 그게 유준이 해완을 진심으로 좋아하고 따르는 이유였으니까.
하지만 유준을 기겁하게 한 건 모든 상황이 종료된 다음의 해완의 모습이었다.
그 양아치 새끼들이 골목이 떠나가라 욕설을 퍼부으며 떠나는데도 주저앉아 있던 상태 그대로 손끝 하나 까딱하지 않던 해완은 그 뒤 몇 분간 유준이 아무리 이름을 불러도 대답을 하질 않았다.
마치 건전지가 빠진 인형이라도 된 듯, 혼이 완전히 나가 버린 것 같았다.
머리라도 다쳤나, 119라도 불러야 되는 건 아닌가 하고 와락 겁이 난 유준이 해완의 어깨를 잡고 흔들던 어느 순간 번뜩 눈에 빛이 돌아온 그는 아무렇지도 않게 넌 괜찮냐고, 어디 다친 데 없냐고 되레 물어 왔었다.
마치 방금까지 유준의 말을 완전히 무시했음을 스스로는 전혀 의식하지 못한 것처럼 말이다.
그리고 유준은 이런 이상한 해완의 모습을 이전에도 한 번 본 적이 있었다.
그것은 9년 전 겨울, 윤해언이 떠나기 바로 며칠 전 그날이었다.
머리를 벅벅 긁은 유준은 약국 안이 어느 정도 한산해졌음을 확인하고 카운터로 다가가 약사에게 물었다.
“멍든 데 바르는 연고 있어요?”
“네, 잠시만요.”
약사가 약을 찾는 사이 느껴지는 진동에 유준은 주머니에 넣어 두었던 핸드폰을 꺼냈다. 액정에는 모르는 번호가 떠 있었다. 고개를 갸웃한 유준은 일단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유준아.
그리고 핸드폰에서 들려오는 목소리에 유준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나야. 여강현. 그동안 잘 지냈어?
지난번 해완이 강제로 번호를 차단하게 만든 이후로 처음 받는 강현의 전화였다. 당황한 유준은 다시 한번 액정을 확인했다. 저장되지 않은 번호가 맞았다.
“어, 가, 강현이 형. 근데 이거 형 전화예요?”
―아, 일할 때 쓰는 번혼데. 원래 번호로 너한테 전화하면 뭔가 오류가 생겼는지 통화가 안 되길래.
씨발, 좆 됐다. 입술을 깨문 유준은 일단 발뺌하기로 결심했다.
“그, 그래요? 왜 그럴까, 이유를 전혀 모르겠네. 근데 무슨 일이세요?”
―다른 건 아니고. 오늘 보니까 해언이가 다쳐서 왔는데 이유를 제대로 말 안 해 주길래, 너는 혹시 뭐 아는 게 있나 궁금해서 전화했어.
“네? 어, 그게…….”
―약은 다 샀어? 뭐라도 마시면서 얘기하면 좋을 것 같은데.
그 말에 기겁한 유준이 뒤를 홱 도는 순간, 약국 창 너머에 서서 유준을 바라보고 있던 강현이 핸드폰을 한 번 흔들어 보이고는 문을 열고 들어왔다.
“혀, 형…… 여긴 무슨 일이에요?”
전혀 생각지도, 반갑지도 않은 만남에 유준이 어쩔 줄 몰라 하며 묻자, 강현은 유준의 앞에 놓인 연고를 흘끗 바라보았다.
“해언이 멍든 데 줄 약이라도 살까 했는데…… 이미 네가 산 것 같네.”
그리고 강현은 유준을 향해 빙긋이 미소 지으며 부드럽게 말했다.
“우리 잠깐 얘기 좀 할까?”
* * *
강현과 근처에 있는 카페로 자리를 옮긴 유준은 카운터에서 음료를 받아 들고 있는 그를 흘끔대며 쳐다보았다.
강현은 약국에선 나온 후 내내 얼굴의 반을 가리는 마스크를 쓰고 있었는데, 새카만 눈동자에 속눈썹까지 짙고 긴 그는 눈만 드러나 있어도 강렬하게 시선을 잡아끄는 면이 있었다.
강현이 그 긴 다리로 성큼성큼 걸어 가까이 오면 올수록 이상하게 초조해져 유준은 손에 배어난 땀을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위압적일 정도로 키가 큰 것도,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으면 사람이 싸늘해 보이는 것도 이미 알고 있었는데 오늘따라 왜 이렇게 기가 죽는지 모를 일이었다.
“코코아, 맞지?”
강현은 자못 자상한 목소리로 말하며 음료를 건네주었지만 유준은 괜히 허둥지둥하며 음료를 받았다.
“고맙습니다.”
그러고 그는 한참을 말이 없었다. 마스크를 벗지도 않고 소파에 등을 깊게 기대고 앉은 채 속을 알 수 없는 눈으로 유준을 바라보기만 했다.
침묵을 참다못한 유준이 결국 먼저 말을 꺼냈다.
“그래서…… 무, 무슨 얘기를 듣고 싶으신 건데요……?”
강현은 그제야 몸을 바로 세우고는 여유롭게 마스크를 벗었다. 그 조각 같은 얼굴은 몇 달 전 유준과 함께 술을 마실 때와 다를 바 없었지만, 맨정신으로 이렇게 오래 마주하는 게 처음이라 그런지 묘하게 낯설게 느껴졌다.
이윽고 강현은 유준을 똑바로 바라보며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뭘 도와주면 되는지 알고 싶어.”
생각지도 못한 말에 유준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그런 유준을 향해 강현은 별다른 동요 없이 말을 이어 갔다.
“해언이가 너랑 어울리는 질 나쁜 놈들이랑 시비가 붙어서 맞은 거라고 하던데, 그 새끼들이 너한테 그러는 거, 돈 문제 같은데 내 생각이 맞아?”
유준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입술만 질겅거리며 씹었다. 그 침묵이 충분한 대답이 되었는지, 그는 참을성 있는 태도로 재차 물었다.
“내가 도와줄 수 있는 거 알잖아. 필요한 게 얼만지 말해 봐.”
도와 달라는 말이 목구멍까지 치미는 것을 유준은 간신히 참았다.
일전 강현에게 돈을 받았을 때 해완이 또 이런 짓을 했다간 다시는 보지 않겠다고 말할 정도로 무섭게 화를 내기도 했지만, 그가 이런 괴상한 관계에 얽혀 들기 시작한 게 제 거짓말 때문이라는 걸 내심 찜찜해하고 있었던 탓이기도 했다.
유준은 눈을 질끈 감고 빠르게 말을 내뱉었다.
“아니에요. 형 돈 못 받아요. 지금 이렇게 만나고 있는 것도 해…… 해언이 형이 알면 진짜 난리날 거예요. 그러니까 그렇겐 못 해요.”
그 말에 강현은 입가를 긴 손가락으로 한 번 쓸더니, 느릿하게 말했다.
“해언이가 이 일을 왜 알아야 되는데?”
“네?”
“내가 처음 너한테 그런 호의를 보였던 건 해언이 때문인 게 맞지만, 오늘은 내가 그냥 널 도와주고 싶은 거야.”
“…….”
“이건 유준이 너와 나 사이의 일이고, 네가 어떤 결정을 하든 우리 사이에서 마무리될 일이니까, 네가 거절한다고 해도 난 오늘 우리 만난 거 해언이한테 말하지 않을 거야.”
유준이 그래도 대답을 망설이자, 강현은 그를 향해 몸을 깊게 숙이며 시선을 맞췄다.
“유준아, 어렵게 생각하지 마. 네가 달라고 한 것도 아니고 내가 먼저 도움을 주겠다고 한 거잖아. 정말 만에 하나, 해언이가 이 일 알게 된다고 해도 네 잘못이라고 하진 못할 거야.”
“…….”
“필요한 게 얼마야?”
유준은 고개를 내렸다. 그는 아까부터 연신 잡아 뜯고 있던 옷깃을 내려다보며 작게 중얼거렸다.
“사…… 삼백…….”
끝을 맺지 못하고 사그라지는 말에 강현이 몸을 더욱 기울이며 되물었다.
“응?”
“삼백만…… 삼백만 원 정도면 될 것 같아요…….”
소심한 목소리에 강현은 싱긋 웃고는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그래. 지금 바로 보내 줄게.”
핸드폰을 잠시 들여다보던 강현이 난감한 표정을 지으며 유준을 바라보았다.
“유준아. 지금 은행 앱이 이상한지 로그인이 안 되네. 계좌 번호랑 금액 좀 문자로 보내 줄래? 되는 대로 보내 줄게.”
“아, 네.”
유준은 강현에게 문자를 보냈다. 강현은 사뭇 미안한 목소리로 애플리케이션이 정상화되는 대로 바로 보내 주겠다며 한 번 더 약속했다.
그러고서 그는 방금 나눴던 대화가 없었던 것처럼 시답잖은 근황들을 묻기 시작했지만, 유준이 안절부절못하고 있는 걸 눈치채고는 선뜻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집 앞까지 데려다주겠다는 걸 극구 만류한 유준은 강현이 탄 차가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겨우 크게 심호흡을 했다.
멀지 않은 거리임에도 돌아가는 길이 길었다. 강현에게 돈을 받은 걸 들키기라도 하면 해완이 보일 반응이 감당이 되지 않을 것 같아 발걸음이 그렇게 무거울 수가 없었다.
게다가 강현에게 맨 처음 돈을 받았을 때도 그랬지만, 호구같이 돈을 쓰고 있는 사람은 분명 강현임에도 불구하고 왠지 그에게 휘말린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칼바람을 피하기 위해 주머니 속에 집어넣고 있던 유준의 손에 핸드폰 진동이 닿았다. 강현에게서 온 메시지였다.
[부탁한 돈 보냈어. 확인해 봐.]
잔고를 확인한 유준의 눈이 둥그렇게 커졌다. 제가 말한 삼백만 원보다 백만 원이 더 많은 사백만 원이 입금되어 있었다.
어안이 벙벙해진 찰나 강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유준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응, 유준아. 확인해 봤어?
“그게, 확인은 했는데…… 제가 말씀드린 것보다 더 들어온 거 같아서…….”
―아, 그거 일부러 더 보낸 거야. 부탁할 게 좀 있어서.
“네?”
―사실 오늘 해언이 몸이 좀 안 좋아서 병원 갔다 왔거든. 몸살이라는데, 당분간 먹을 것 좀 잘 챙겨 먹였으면 해서. 부탁 좀 할게.
좀처럼 잔병치레를 하지 않는 해완이 아프다는 이야기에 꼭 제 탓인 것만 같아 유준은 다시 표정이 어두워졌다가, 머뭇대며 입을 열었다.
“네, 그럴게요. 정말…… 정말 감사해요, 형.”
―감사하긴, 내가 더 고맙지. 부담 같은 거 전혀 갖지 말고, 앞으로도 어려운 일 있으면 나한테 먼저 말해. 알겠지?
수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강현의 목소리는 자못 든든했다. 괜히 마음이 울컥해, 유준은 코를 손등으로 문지르고는 몇 번이나 고맙다는 말을 되풀이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강현이 여분으로 준 백만 원은 전부 해완에게 쓰겠다고 속으로 다짐한 유준은 한결 가벼운 마음으로 해완이 있을 집 안으로 들어왔다.
최소한만 난방을 올리던 평소와는 달리 집 안 전체가 후끈했다. 잠시 어리둥절해졌지만 약봉지와 물컵을 옆에 둔 채 방 안에서 깊이 잠들어 있는 해완을 보고서야 강현이 올려놓고 나간 모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해완의 하얀 얼굴에 든 시퍼런 자국을 보고 유준은 움찔했다. 아침까지만 해도 저 지경은 아니었는데 멍이 더 올라온 모양이었다.
강현이 저를 보고 냅다 쫓아온 게 당연하다 싶어, 그는 시무룩한 채 일단 씻으러 욕실로 들어갔다.
나름 조심스럽게 움직인다고 움직였지만 천성이 덜렁대는 유준이 제법 큰 소리를 내며 돌아다니는데도 해완은 깨지 않았다.
방으로 다시 돌아온 유준은 아까 약국에서 산 연고를 꺼내 멍이 들어 있는 해완의 얼굴에 살살 펴 발랐다.
누가 갑자기 제 얼굴을 만지면 움찔하기라도 할 법한데 해완의 잠든 얼굴은 미동 한번 없이 평온해 보였다. 약 기운 때문인가 싶다가도, 해완이 보육원서부터 세상모르고 자는 타입이라는 것을 떠올린 유준이 피식 웃었다.
보육원에서는 나이대별로 나눠서 방을 함께 사용했다. 보통은 4인 1실이었지만, 우연찮게도 해완이 고등학교를 다니던 시점에는 해완과 해언을 제외하면 대부분이 초등학생이었기 때문에 해완과 해언은 둘이서 보육원에서 가장 작은 방을 썼다.
또래 친구들이 많았지만 유준이 제일 좋아하는 사람은 누가 뭐래도 해완이었다. 보육원에 있는 누구보다도 키가 큰 것도 멋있었고, 유준이 떼를 쓰거나 억지를 부려도 항상 웃는 얼굴로 재미있게 놀아 줬었으니까.
그래서 유준은 해완과 함께 방을 쓰고 싶었다. 하지만 해언이 문제였다. 유준이 해완에게 같이 방을 쓰면 안 되냐고 물어볼 때마다 해완은 난감한 얼굴로 나는 괜찮은데 해언이가 잠귀가 워낙 밝아서, 라며 말끝을 흐리곤 했다.
평소에는 제 말을 안 들어주는 법이 없는 해완이 그런 식으로 몇 번이나 거절을 하자 유준은 성이 났다.
그래서 나름대로 생각해 낸 방법이 한밤중에 몰래 해완과 해언의 방으로 들어가서 두 사람의 잠을 깨우지 않고 아침까지 버티면 제가 같이 방을 써도 괜찮을 만큼 조용하다고 증명할 수 있지 않을까 하는 거였다.
지금 생각하면 초등학생의 머릿속에서나 나올 법한 생각이긴 하지만 그때는 나름대로 얼마나 진지했는지 몰랐다.
어느 금요일 밤, 모두가 잠이 들어 어둡고 고요한 보육원 복도로 베개를 들고나온 유준은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살금살금 해완과 해언의 방 앞으로 걸어갔다.
해언이 잠귀가 밝다는 말이 머릿속에서 빙빙 맴돌아, 유준은 평소답지 않게 놀라운 참을성을 가지고 조용히 손잡이를 밀어 살짝 열었다.
순간 유준이 가장 먼저 느낀 것은 아찔할 정도로 황홀한 해언의 페로몬 향기였다. 해완은 향이 없는 장애가 있었고 대부분의 아이들은 발현 전이었기 때문에 이 정도로 강렬한 향기를 맡을 수 있는 건 해언이 곁에 있을 때뿐이었다.
그다음으로 눈에 들어온 것은 창에서 비쳐 드는 달빛이 어스름하게 비춰 주는 해완과 해언의 잠든 모습이었다.
해완은 똑바로 누워 해언이 누워 있는 방향으로 살짝 고개를 돌린 채 평온하게 잠든 채였다. 해언은 그런 해완의 옆에 완전히 달라붙어 누워 있었는데, 얼굴을 해완의 한쪽 어깨에 거의 파묻다시피 하고 한쪽 손으로는 해완의 뒷머리를 감싸 쥐고 있었다.
이상할 정도로 달이 밝은 초여름 밤, 정말 쌍둥이로 태어나기라도 한 듯이 엉겨 붙어 잠들어 있는 해완과 해언의 위로 은색의 달빛이 쏟아져 내리고 있었다.
그날 밤의 모습이 아직까지 눈앞에 그려지듯 생생한 연유는 어린 눈으로 보기에도 그 두 사람의 잠든 모습이 어딘가 묘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때, 등을 돌리고 누워 있던 해언의 가냘픈 어깨가 움찔했다. 갑작스레 몸을 홱 돌린 그의 시선이 문틈으로 자신들을 들여다보고 있는 유준에게 곧바로 향했다.
언제 잠들어 있었냐는 듯 잠기운이 싹 가신 얼굴을 한 해언은 잠들어 있는 해완을 가리듯이 몸을 일으켜 앉아 유준을 무표정한 얼굴로 노려보았다.
해완처럼 보육원 아이들과 살갑게 지내지는 않았지만 그래도 늘 옅은 미소를 띠고 있던 해언이었기에 그 얼굴은 차갑다 못해 싸늘하게까지 보였다.
처음 보는 해언의 모습에 놀란 것과 동시에 제 계획이 모두 어그러졌다는 생각에 크게 당황한 유준은 그대로 등을 돌려 자신의 방으로 도망쳐 버렸다.
하지만 등 뒤에서 문이 닫히는 소리와, 저를 노려보는 해언의 얼음같이 찬 눈빛만큼은 아직까지도 유준의 뇌리에 선명하게 박혀 있었다.
아마도 그날부터였을 것이다. 그저 예의 바른 태도로 적당히 거리를 두던 해언이, 제가 유준을 ‘거슬려 한다’는 점을 교묘하게 알려 주기 시작한 게.
유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해완의 볼을 문지르던 손가락을 떼어 냈다. 해완은 꿈이라도 꾸는 듯 입을 약간 오물거리긴 했지만, 깨는 기색은 조금도 없이 잘도 잤다.
“진짜 하나도 안 닮았는데…….”
그런 해완의 얼굴을 내려다보던 유준이 저도 모르게 작게 중얼거렸다. 늘 한 몸처럼 붙어 다녔던 탓에 보육원이나 동네에서는 해완과 해언을 진짜 피라도 나눈 것처럼 취급하곤 했지만 따지고 보면 두 사람은 머리칼과 홍채 색을 제외하고는 닮은 점이라고는 하나도 없었다.
아니, 오히려 정반대에 서 있는 사람들이라고 해야 맞을 것이다. 적어도 두 사람과 함께 자란 유준이 느끼기에는 그랬다.
그래서 강현이 해완을 해언으로 착각하고 있는 지금의 상황이 더욱 아이러니하게 느껴졌다.
물론 강현이 향에 얼마나 민감한지도 알고 있고 해언과 만났을 당시 눈이 보이지 않았다는 것도 알고 있으니 첫 만남에서 착각한 정도는 이상하게 생각하지 않았었다.
그러나. 문득 머릿속을 스치는 생각에 유준은 연고 뚜껑을 닫던 손을 멍하니 내려놓았다.
이렇게 몇 달을 함께 보내고 나서도, 해완과 해언이 다른 사람이라는 걸 정말 모를 수가 있을까?
설명하기 어려운 서늘함이 가슴속을 빠르게 휩쓸었으나 괜히 머리가 복잡해지는 게 싫어 유준은 뒷머리를 벅벅 거칠게 긁으며 생각을 떨쳐 냈다.
무엇보다도 만에 하나 해완이 해언이 아니라는 것을 알고 있다면 아무 상관 없는 저에게까지 이렇게 잘해 줄 리가 없었다.
물론 모든 사실이 밝혀졌을 때 겪어야 할 뒷감당이 걱정이 되지 않는 건 아니었다. 하지만 해완이 자신은 해언이 아니라고 극구 부정했었다는 것만큼은 확실하기에, 지금의 이상한 상황이 자신과 해완의 잘못 때문만은 아니라는 생각이 드는 건 어쩔 수가 없었다.
유준은 오늘 몇 번이나 쉬었는지 모를 한숨을 다시 내쉬며 이부자리를 펴고 해완의 옆에 벌렁 드러누웠다.
그러고 보니 그렇게 질색을 하던 제가 해완과 같은 방을 쓰고 있는 것을 윤해언이 보면 뭐라고 할까 하는 생각이 들어 유준은 피식 헛웃음을 지었다.
눈을 감자 옆에 있는 해완에게서 풍기는 윤해언의 향이 코끝을 간지럽혔다.
윤해언이라는 사람에 대한 호불호를 제외한 그 향기만큼은 유준이 지금껏 인생에서 맡아 본 어떤 사람의 것보다도 아름답다는 점만큼은 인정할 수밖에 없었다.
그래도 그런 수술은 하는 것이 아니었다고, 유준은 잠에 빠져드는 와중에도 어렴풋하게 생각했다.
* * *
핸드폰에서 메시지 도착 알림이 울렸다. 재빨리 손을 뻗어 핸드폰을 확인한 강현은 그것이 김유준에게서 온 메시지임을 확인하자 흥미 없는 얼굴로 빠르게 화면을 훑어 내렸다.
돈을 빌려줘서 고맙다는 내용이 담긴 의미 없는 메시지들을 대충 읽은 그는 곧바로 메시지들을 삭제했다. 쓸데없이 긴 말을 나눠서 보낸 통에 하나씩 눌러 지우는 게 귀찮았지만, 나중에 쓸데가 있을 것 같아 받아 둔 부분을 지워서는 곤란했다.
핸드폰을 탁자 위에 올려 둔 강현은 소파 깊숙이 등을 기대고 멍하니 천장을 바라보았다.
여전히 자고 있는 건지, 윤해완에게서는 연락이 없었다.
하긴, 몸살 기운에 약까지 먹은 탓인지 그는 그 좁아터진 집에서 제가 나가는 소리도 듣지 못할 만큼 금세 깊은 잠에 빠져들어 있었다.
강현은 무심결에 손을 들어 제 얼굴을 가볍게 쓸었다. 그러나 그가 맡기를 기대한 향은 어디론가 사라지고 조잡한 잔향만이 코끝을 스쳐 가 절로 인상이 찡그려졌다.
잔향이 이렇게까지 다를 수 있나 싶었지만 싸구려 원료를 사용한 공산품에 무의미한 기대를 다 한다 싶어 손을 툭 내리고 눈을 감았다.
때로는 직접 맡는 것보다 이렇게 스스로의 기억을 되살리는 편이 더 나을 때도 있었다.
눈을 가린 어둠 뒤로 문득, 아마 차 안에서 맡은 냄새가 거슬리지 않았던 이유는 해완의 페로몬 향 덕분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모두가 제각각의 페로몬 향을 가지고 있는 이상, 향료 제품들을 고를 때는 제 향과 어울리는 것으로 신중히 고르지 않으면 안 되는 법이었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향과 뒤섞여 이도 저도 아니게 되어 버릴 수 있었으니까.
윤해완, 아니, 윤해언의 향은 이슬에 살짝 젖은 어린 숲을 저절로 연상시키는 그리너리하고 아로마틱한 향조로 구성되어 있었다. 군더더기 없이 이렇게 선명한 이미지를 그려 낼 수 있는 향조로만 구성된 페로몬 향은 극히 드물었고, 그것이 대부분의 사람에게 윤해언의 향을 잊을 수 없게 하는 가장 큰 이유였을 터이다.
하지만 강현에게는 그의 향에 이끌린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은목서.
윤해언의 페로몬 향이 가진 노트들 중, 유일한 플로럴 향조였다.
그 향의 자취를 느낄 때면, 누구도 발을 들여 본 적 없는 새뜻하고 푸른 숲 안 깊숙이 숨겨진, 하얗고 작은 꽃나무를 찾은 듯한 기분이 들었다.
우스운 것은, 그가 아니었다면 강현이 발을 들여놓을 일조차 없었을 그 낡고 허름한 방 안에 잠들어 있던 윤해완의 하얀 얼굴이 그 흰 꽃송이와 제법 어울린다는 생각이 들었다는 것이다.
깊게 감고 있던 눈을 스르륵 뜬 강현의 머릿속에 불현듯 어떤 의문 하나가 스쳤다.
원래 윤해완의 향은, 어떤 것이었지?
그러고 보니 강현은 왜 그가 이식 수술을 받았는지 알지 못했다. 페로몬샘에 어떤 문제가 있었으리란 것 정도야 짐작할 수 있지만 정확한 이유는 알아보려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강현은 몸을 일으켜 서재로 향했다. 잠금이 가능한 첫 번째 책상 서랍에 들어 있는 윤해완의 신상에 관련한 서류를 들고 서재 내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그는 이미 익히 알고 있는 내용을 눈으로 가볍게 훑었다.
조사를 의뢰할 당시에는 신상 확인만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이름, 나이, 학교 등의 기본 정보를 제외하면 이렇다 할 내용은 역시 존재하지 않았다.
다음으로 해완과 해언이 함께 찍은 사진을 보는 순간, 전에는 미처 느끼지 못한 위화감에 강현의 손이 멈칫했다.
무슨 이유인지 몰라도 해언이 해완의 존재를 강현에게 말하지 않았지만, 두 사람은 분명 가까운 사이임에 분명했다. 거리감이 거의 없다시피 한 사진들 속의 모습만 봐도 그랬다.
그랬다면, 윤해언에게도 윤해완의 향이 배었어야 마땅하지 않았을까?
그리고 그런 질문을 떠올린 찰나 강현의 머릿속을 맴도는 모습은 오직 하나뿐이었다.
뒤돌아서면 사라진 것 같다가도 찬찬히 들여다보면 언제나 그 자리에 있었던 그 희고 연약한 은목서꽃 말이다.
갑자기 심장이 꽉 죄는 듯한 기분에 강현은 입술을 뜯으며 서재 안을 잰걸음으로 왔다 갔다 했다.
왜 그런 생각이, 강현의 마음을 잡아끌었던 그 목서 향이 윤해완의 것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그를 이렇게 초조하게 만드는지 모를 일이었다.
하지만 이내 말도 안 되는 추측이라는 판단이 다시 빨라지던 심장의 고동을 차분히 가라앉혔다.
만약 그 향이 윤해완의 것이라면 그의 페로몬샘을 제거하고 윤해언의 페로몬샘을 이식받은 지금은 존재하지 않아야 하는 게 아닐까?
확연히 강해진 목서 향이 윤해완이 윤해언이 아니라는 걸 눈치채게 한 결정적 이유였기는 하지만, 그것은 아마도 수술로 인한 일종의 ― 어쩌면 좋은 방향으로의 ― 변질일 거라고 여기고 있던 터였다.
생각만으로는 도저히 나오지 않을 답에 짜증이 난 강현은 방 한가운데 멈춰 서 긴 손가락으로 이마 부근을 거칠게 문질렀다.
단서를 얻으려면 얼마든지 얻을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왠지 내키지 않던 일이, 오늘만큼은 강하게 구미가 당겼다.
다시 서랍을 연 강현은 명함집 구석에 쑤셔 박아 두었던 조잡한 흥신소 명함 하나를 꺼냈다.
맨 처음 일을 맡겼을 때 강현이 최소한의 정보 외에 다른 것은 요구하지 않자 흥신소의 사장은 정보원은 이미 확보되어 있으니 더 필요한 사항이 있으면 연락을 달라고 묻지도 않은 이야기를 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쉽게 손이 가지 않았던 이유는 아마 제가 윤해완이라는 ‘사람’에게 점점 더 많은 시간과 신경을 쓰고 있다는 걸 의식해서일 터였다.
오늘만 해도 그랬다. 저를 속이는지 아닌지를 확인하러 갔으면서도, 그것보다 강현을 더 조급하게 만들었던 건 그의 얼굴에 난 멍 자국과 누가 그를 그렇게 만들었는지에 대해서였다.
탁자 위에 올려 둔 명함을 손가락 끝으로 툭툭 건드리며 강현은 곰곰이 생각에 잠겼다.
그는 어릴 적부터 싫은 것과 낯선 것을 잘 구분하지 못했다. 때문에 지금 자신의 마음속에서 일고 있는 누군가에 대해 더 알고 싶다는 감정에서 오는 거북함이 낯설음에서 오는 것인지, 아니면 정말 싫은 것인지 모호하게만 느껴졌다.
그러나 몇 초가 채 지나기가 무섭게 지금의 이 감정은 싫은 것이 아니라 그저 낯선 것일 뿐이라는 결론이 났다.
누군가를 더 알고 싶다고 느낀 일은 전에 존재하지 않았으므로.
그것을 떠올린 순간 이상하게 심장이 뻐근해 강현은 손바닥의 불룩한 부분으로 가슴 위를 둥글게 문질렀다.
뭔가 변해 가고 있는 것은 확실한데 그게 좋은 일인지 나쁜 일인지 판단이 잘 서질 않았다.
잠시 고민하던 강현은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늘 그래 왔듯이, 바로 답을 낼 수 없는 생각은 머리 저편으로 밀어 내 버렸다.
어쨌든, 무엇이든 알아내기 위해서는 더 많은 정보가 필요할 것 같았다.
강현은 흥신소 명함을 보고 핸드폰 번호를 눌렀다. 수신음이 가기가 무섭게 전화를 받는 소리가 들렸다.
* * *
코끝을 맴도는 음식 냄새가 해완의 잠을 깨웠다. 얼마나 오래 잤는지 눈을 뜨고 나서도 비몽사몽 졸린 눈으로 천장을 바라보던 해완은 간신히 이불을 젖히고 방 밖으로 걸어 나왔다.
“형, 이제 일어났어?”
싱크대 앞에서 아침상을 차리고 있던 유준이 살가운 목소리로 인사했다. 아침상을 보고도 눈을 껌뻑이던 해완은 갑자기 화들짝 놀라며 시계를 쳐다보았다.
그런 해완의 반응을 본 유준이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헬스장 알바는 내가 대타 뛰고 왔으니까 걱정하지 마.”
무단으로 아르바이트를 빠졌다는 생각에 심장이 철렁 내려앉는 듯했던 해완은 간신히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 해완의 손을 유준이 잡아끌었다.
“얼른 와서 밥 먹어.”
얼떨결에 아침 밥상 앞에 앉고 나서야 정신이 든 해완은 어리둥절한 표정으로 물었다.
“……너 오늘 내 알바도 갔다 오고 아침밥까지 차린 거야?”
“참 내, 보면 몰라?”
믿기지 않는다는 목소리에 유준이 괜히 투덜거렸다. 하지만 사고를 치고 해완의 눈치를 보는 유준의 패턴을 봤을 때 지난밤 일 때문이리란 생각이 들자, 해완은 칭찬을 해 주는 대신 말을 고르느라 입을 다물었다.
그런 해완의 의중을 귀신같이 알아챈 유준이 밥을 숟가락으로 헤집으며 웅얼거렸다.
“나 때문에 다쳐서 미안해, 형.”
풀이 죽은 유준의 목소리에 해완은 걱정스러운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건 괜찮아. 괜찮은데…… 그 사람들이 너한테 왜 그런 거야? 설마, 무슨 심각한 문제에 얽히거나 그런 거라면…….”
그 말에 번쩍 고개를 든 유준이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냐, 형. 그냥 전에…… 같이 몇 번 논 질 나쁜 새끼들인데, 내가 뒤에서 걔네 욕을 했다고 오해 같은 게 생겨서……. 근데 이제 오해 다 풀었어. 그리고 형 때린 거 경찰에 고소한다고 하니까 미안하다고 싹싹 빌기까지 했다니까.”
믿어도 될지 쉽사리 판단이 서질 않아 해완은 아무 대답도 하지 않고 조용히 유준을 바라보았다. 그러자 유준이 한 번 더 간절히 말했다.
“걱정하지 마, 형. 이제 진짜…… 진짜 문제 생길 일 없어.”
자못 진심 어린 말투에, 어쩔 수 없이 가늘게 한숨을 내쉰 해완이 진지하게 물었다.
“알았어. 이제 그 새끼들이랑 안 어울려 다닐 거지?”
그 말에 유준은 잠시 멈칫했다가, 이내 특유의 과장된 태도로 목소리를 높여 대답했다.
“당연하지. 내가 미쳤어? 그딴 새끼들이랑 또 어울리게?”
그제야 해완은 겨우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유준의 뒤통수를 장난스럽게 툭 치며 물었다.
“대체 왜 처음부터 그런 생각은 못 하는 건데?”
아프게 치지도 않았는데 유준은 입술을 삐죽이며 투정 부리듯 말했다.
“처음부터 다 맞는 길만 선택하는 인간이 어딨어?”
“하여튼 말은…….”
웃는 얼굴로 고개를 절레절레 저은 해완이 수저를 들자 유준도 따라 수저를 들었다. 하지만 유준은 그보다 먼저 밥을 입에 떠 넣는 해완을 향해 걱정스럽게 물었다.
“형, 근데 몸은 진짜 괜찮은 거야?”
해완은 멈칫 유준을 봤다. 이제 열도 내린 것 같은데 제가 아픈 걸 어떻게 알았나 했다가, 옆에 놓인 약봉지를 봤구나 싶어 여상하게 대답했다.
“아, 그냥 조금 몸살기 있었던 거야. 약 먹으니까 괜찮아졌어.”
그러자 유준은 눈가를 찌푸리며 물었다.
“아니, 그거 말고. 머리, 머리 괜찮냐고.”
“뭐?”
이해할 수 없는 질문에 해완이 되묻자 유준이 머리를 흩트리며 부연 설명을 했다.
“그 새끼들한테 맞고 나서 형 몇 분 동안이나 완전 넋을 놓고 있었잖아. 아무리 말 걸어도 안 들리는 것처럼 멍하니 앉아 있기만 해서, 뇌진탕이라도 온 거 아닌가 하고 나 엄청 놀랐단 말이야.”
해완은 눈만 껌뻑였다. 분명히 그랬던 듯도 했지만 그가 느끼기엔 아주 잠깐이었고 유준이 자신의 이름을 불렀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내가 그랬다고……?”
“그래. 기억 안 나?”
약간 당황한 해완이 잠시 입을 다물고 있자 유준의 안색이 어두워졌다.
“형 다시 병원 가 봐야 되는 거 아니야? 뭐 CT 같은 거 찍든지.”
해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머리를 다쳤다고 하기에는 전혀 아무런 증상이 없었다.
남자가 유준을 때리는 것을 봤을 때 몸을 잠식하던 터져 버릴 듯한 감정을 선명히 떠올린 해완은 아마 너무 흥분한 탓일 거라는 결론을 내리고 입을 열었다.
“아냐. 그때 좀 놀라서 그랬나 봐. 머리를 다치거나 그랬으면 벌써 다른 증상 나타났겠지. 괜찮을 거야.”
“그럼 그 뒤로 머리 아프거나 뭐 그런 건 없는 거야?”
“전혀 없어. 그러니까 걱정하지 마.”
그 말을 끝으로 해완은 다시 밥을 먹기 시작했고, 유준도 그제야 음식을 입에 넣었다.
저를 다치게 한 게 어지간히 미안했던 모양인지, 식사를 마치고 제가 설거지까지 하겠다고 나서는 유준에게 떠밀린 해완은 편의점 출근 전까지 조금 더 쉬기 위해 방으로 들어왔다.
이부자리를 정리하던 중 베개 옆에 놓인 약봉지를 본 해완의 손이 멈칫했다. 그러고 보니 어제 강현이 돌아가는 길도 배웅해 주지 못하고 잠이 들어 버렸다는 게 뒤늦게 떠올랐다.
오늘과 내일은 강현이 일이 바빠 만나지 못하기로 되어 있어, 해완은 조금 망설이다가 강현에게 전화를 걸었다.
―응, 해언아. 몸은 좀 어때?
강현은 금세 다정한 목소리로 전화를 받았다.
“이제 완전히 괜찮아졌어. 어디야?”
―보리 유치원 데려다주고 작업실 가는 중이야. 너는?
요즘은 강아지들이 매일 가는 유치원도 있다는 것을 해완은 강현을 만나고서야 알았다. 강현과 보리가 함께 유치원을 간다는 사실이 귀여워 해완은 저도 모르게 미소를 지었다.
“아직 집이야. 유준이가 아침 해 줘서, 밥 먹고 좀 쉬고 있어.”
―유준이가 아침을 해 줬다고?
“가끔씩 이런 기특한 짓도 해. 문제는 사고 치고 나서야 이런다는 거지만.”
해완의 말에 바람이 새듯 헛웃음을 터트린 강현이 걱정스럽게 물었다.
―오늘 편의점 일 갈 거야? 좀 쉬는 게 좋지 않겠어?
“아냐, 나 이제 열도 하나도 안 나고 어제 푹 자서 컨디션도 엄청 좋아.”
눈앞에 강현이 있는 것도 아닌데 해완은 고개까지 저어 가며 대답했다. 수화기 너머로 강현이 낮게 웃는 소리가 들렸다.
그 무겁고 고요한 웃음소리에, 해완은 불쑥 입을 열었다.
“……보고 싶다.”
그런 말을 제가 먼저 한 것은 처음이라 해완은 혼자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수화기 너머에 강현은 잠시 말이 없다가, 나직하게 대꾸했다.
―나도.
짧은 호응에도 심장이 터질 듯이 두근거렸다. 두 사람은 잠시 아무 말 없이 전화기를 붙들고 서로의 숨소리를 들었다.
잠시 후 강현이 다정하게 말했다.
―출장 갔다 와서 바로 보러 갈게. 밥 잘 챙겨 먹고 있어.
“……응. 다녀와서 봐.”
전화를 끊고도 가슴이 떨려, 해완은 무릎을 모아 쥐고 한동안 멍하니 앉아 있었다.
* * *
늦은 오후였다. 평소대로라면 앉을 틈 없이 바빴겠지만 이번 주부터 정신없이 손님이 몰리는 점심 이후 타임에 일할 사람을 한 명 더 뽑은 덕에 겨우 여유가 생긴 해완은 동료 아르바이트생에게 카운터를 맡기고 물류 창고 안으로 들어왔다.
아직도 몸살기가 남아 있었던 모양인지 관절 이곳저곳이 아린 기분이 들었다. 피곤할 때면 으레 쑤시곤 하던 오른쪽 어깨 수술 부위도 욱신거렸다. 해완은 가볍게 상체 스트레칭을 하며 뻐근함을 떨쳐 내려 애썼다.
그때 편의점 유니폼 조끼에 넣어 둔 핸드폰에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핸드폰을 꺼내 들자 모르는 번호에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여보세요?”
―네, 윤해완 님 되시죠? 여기 어제 내원하셨던 한마음병원인데요. 피 검사 결과 때문에 전화드렸거든요. 통화 괜찮으신가요?
마침 쉬는 중이어서 다행이었다. 해완은 재빨리 말했다.
“아, 네, 안녕하세요. 통화 괜찮으니 말씀하세요.”
―다른 결과는 괜찮으신데 염증 수치가 높으시거든요. 수치만으로는 문제가 어디 있는지 정확히 알 수 없어서 내원하셔서 진료 한 번 더 받아 보시는 게 좋겠다고 저희 선생님께서 그러시는데, 예약 잡아 드릴까요?
간호사의 간략한 설명에도 해완은 아무 대답을 하지 못했다. 염증 수치가 높다는 말만 머릿속을 빙빙 맴돌았다.
―여보세요? 윤해완 님?
대답이 없자 의아해진 간호사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린 해완이 황급히 대답했다.
“……예약은 괜찮아요. 제가 따로 다니는 병원이 있어서, 그쪽으로 가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아, 그러시군요. 그래도 검사지 받으러 한번 병원에 오세요.
“네. 알겠습니다. 전화 주셔서 감사합니다.”
이상한 불안감에, 해완은 전화를 끊자마자 캘린더를 확인했다. 마침 수술 후 정기 검진이 3주 뒤로 다가와 있었다.
3주 뒤. 멀게도 가깝게도 느껴지는 일정에 해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예전이라면 그저 몸이 피곤했나 보다 하고 별생각 없이 넘길 수도 있었겠지만, 페로몬샘 이식 수술 후 면역 억제제를 먹으며 각종 염증으로 큰 고생을 한 이후로는 그저 가볍게 여길 수만은 없는 이야기였다.
게다가 전날 밤 제가 몇 분 동안이나 넋이 나간 사람처럼 멍하니 있었다는 유준의 말도 마음에 걸렸다.
해완은 일단 이식 수술을 받은 대학 병원의 전화번호를 찾아 연락처를 스크롤했다.
통화 버튼을 누를까 말까 고민하던 순간, 문이 벌컥 열리더니 동료 아르바이트생이 불쑥 고개를 들이밀었다.
“형, 저 화장실 좀요.”
“아, 네. 나갈게요.”
해완은 몸을 일으켰다. 카운터 뒤에 서자마자 손님 몇몇이 떼를 지어 들어오는 통에, 해완은 애써 별일 없을 거라는 말을 속으로 되뇌며 핸드폰을 주머니 안에 넣었다.
일을 마치고 난 뒤 해완은 저녁을 먹기 위해 일부러 유준을 불러 근처에 있는 삼계탕집으로 향했다. 그가 먼저 나서서 외식을 하자고 하는 일은 드물었지만 먹는 것으로라도 몸보신을 좀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신이 나서 나온 유준은 해완이 잠깐 화장실을 간 사이에 계산까지 해 놔서 그를 놀라게 했다. 농담 반 진담 반을 섞어 네가 돈이 어디서 나서 계산을 했냐고 하자, 형한테 이 정도 쓸 돈은 있다는 둥, 앞으로 밥을 많이 사 줄 테니 나오기만 하라는 둥 괜한 허세를 부려 해완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해완이 아직 몸살기가 남아 있는 것 같다고 하자 유준은 그럴 때는 찜질방을 가서 땀을 한번 쭉 빼야 된다고 주장했다. 대중목욕탕을 한 번도 가 본 적이 없는 해완은 머뭇댔지만 유준의 기세에 이끌려 동네에 있는 찜질방에 처음으로 가게 됐다.
찜질방 비용도 제가 내겠다는 걸 해완이 극구 만류하자 유준이 꼭 죄라도 지은 듯한 얼굴을 하는 통에 그에게 너무 눈치를 줬나 하고 해완은 괜히 마음이 쓰였다.
처음으로 간 찜질방은 예상외로 재미있었다. 규모가 꽤 큰 곳이라 여러 먹을거리뿐 아니라 게임기나 만화책처럼 시간을 보낼 것도 꽤 많아서, 찜질을 하다가 출출해지면 게임으로 내기를 해서 진 사람이 간식거리를 사기도 하는 둥 시간 가는 줄 모르고 놀았다.
즐거운 시간을 보내는 동안에도 해완은 이따금씩 강현과 이곳에 같이 있는 모습을 상상하는 것을 멈출 수가 없었다. 냄새에 민감한 강현이 땀을 흘릴 수밖에 없는 이곳을 좋아할 것 같지는 않았지만 그 큰 체구로 촌스러운 찜질방 옷을 입고 목침을 베고 누워서 물통에 든 식혜를 마시는 모습을 상상만 해도 괜히 웃음이 나왔다.
그렇게 땀을 쭉 빼고 간만에 추운 곳에서 떨지 않고 목욕까지 마치고 나서 집으로 돌아온 뒤에는 받아 둔 약을 먹고 곯아떨어져서 꿈조차 꾸지 않고 깊이 잤다.
* * *
다음 날 일어난 해완은 정말 몸이 한결 가벼워진 것을 느꼈다. 역시 단순한 몸살이었던 모양이다 싶어 안심이 된 그는 가벼운 발걸음으로 일을 하러 갔다.
정신없는 오전 타임이 지나고 손님이 없는 틈을 타 카운터 뒤편에 있는 선반 정리를 하던 해완의 뒤에서 목소리가 들렸다.
“시가 마스터 있나요?”
익숙한 목소리에 해완은 뒤를 홱 돌아보았다. 인하가 빙긋이 웃으며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어? 서인하 씨…….”
갑작스러운 인하의 등장에 놀란 해완은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며 눈을 동그랗게 떴다.
해완의 얼굴에 든 멍을 본 인하는 잠시 멈칫했지만 곧 아무렇지도 않게 장난기를 섞어 짐짓 서운한 듯 말했다.
“너무 놀라는 거 아니에요? 못 올 데라도 온 것 같네.”
당황한 해완은 손을 내저으며 대꾸했다.
“아니, 그게, 이렇게 갑자기 오실 줄 몰라서…….”
“근처 지나는 길에 잠깐 들렀어요. 우리 약속한 일도 있고 해서.”
인하의 말에 해완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인하와의 마지막 만남에서 들었던 말이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다시 연락할게요. 해언이 상황에 대해서 알아보고 나서요.’
“해언이에 대해서 무슨 얘기라도 들으신 건가요?”
“뭐, 일단 알아보긴 했는데……. 그런데 나 담배 안 줘요?”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인하 쪽으로 기울이고 있던 해완은 인하의 느긋한 목소리에 흠칫 뒤로 물러나곤 카운터 밑에서 그가 피우는 시가 마스터를 찾았다.
담배를 카운터 위에 올려놓자 인하는 품에서 지갑을 꺼냈다. 해완이 괜히 우왕좌왕하며 바코드를 찍는 사이 인하가 부드럽게 말했다.
“일 끝나고 시간 괜찮아요? 저녁 먹으면서 얘기하면 좋을 것 같은데.”
해완은 선뜻 대답을 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마침 강현과 만나지 않는 날이었으니 기가 막힌 타이밍이었지만, 지난번 강현에게 ‘타바코 향을 가진 알파’에 대해서 추궁을 당한 이후로 인하와 만나는 게 양심에 찔릴 일을 하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완이 대답을 하지 않자 인하의 표정이 흐려졌다.
“왜요? 오늘 곤란해요?”
잠시 고민하던 해완은 결국 고개를 저었다.
“……아뇨. 괜찮아요. 일 끝나고 볼까요, 그럼?”
전에는 인하와 만난 직후 강현을 만났었던 데다, 그때 인하가 제 몸을 만졌던 탓에 향이 깊게 배었던 것 같아 오늘은 거리를 두고 조심하면 괜찮지 않을까 싶었다.
“네. 끝나고 데리러 올게요.”
해완이 고개를 끄덕이자 인하가 계산을 해 달라는 듯 카드를 살짝 들어 보였다.
“그럼 계산해 줄래요? 나 이제 어디다 카드 꽂아야 되는지 알거든요.”
인하가 처음 이 편의점에 찾아온 날, 카드 리더기에 카드 꽂는 걸 낯설어했던 것을 떠올린 해완은 그의 자못 뿌듯한 말투에 저도 모르게 살짝 웃음을 터트렸다. 그런 해완을 보며 인하도 얼굴에 웃음을 띠었다.
“……그럼 이따 봐요.”
인하는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하고는 담배를 집어 들고 편의점 밖으로 걸어 나갔다. 괜히 복잡해지는 머릿속 생각들을 지우기 위해, 해완은 아까 하다 말았던 선반 정리에 다시 몰두하기 시작했다.
* * *
일전에도 그랬듯이 해완이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정확하게 데리러 온 인하는 이번에는 그를 룸이 있는 조용한 일식집으로 데리고 갔다.
당장이라도 해언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묻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으나 인하는 식사를 하는 내내 묘하게 그 화제를 피해 갔다. 물론 말주변이 좋은 인하는 해완의 얼굴에 난 멍의 경위까지 자연스럽게 이끌어 내며 별다른 어려움 없이 대화를 이어 갔지만, 신경이 온통 한쪽에 쏠려 있던 해완에게는 약간 답답하게 느껴지는 시간이었다.
다행히도 그런 답답함은 머지않아 풀렸다. 인하가 식사가 끝나자마자 해언에 대해 선뜻 먼저 말을 꺼냈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해완 씨가 전에 궁금해했던 거 말인데요. 해언이가 미국을 떠나기 직전 상황에 대해서.”
해완은 침을 꿀꺽 삼키며 인하를 바라보았다. 인하는 사무적인 어투로 말했다.
“주변에 수소문해 봤는데 역시 어떤 재정적인 어려움을 겪었다는 이야기는 없었어요. 해언이가 출국하기 전에 마지막으로 만났다는 친구도 만나 봤지만 건강이 좋지 않아 보이는 것 외에 다른 문제는 없어 보였고, 살던 집도 그대로였다고 했구요.”
그리고 인하는 잠시 조용해졌다. 알아낸 소식이 거기까진가 싶어 해완은 눈을 깜빡이며 시선을 내렸다.
해언이 어려움을 겪지 않았다는 건 좋은 소식이었지만 해완이 가지고 있는 의문에 답이 되지 않는 것은 마찬가지였기에 뭐라 설명할 수 없는 복잡한 기분이 들었다.
그런데 그때, 인하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다음 들려온 말은 해완을 멍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미국 은행에 아직 남아 있는 해언이 계좌를 하나 찾았어요. 그 안에 돈도 좀 남아 있었는데, 지금 환율로 보면 천만 원 정도 될 거예요.”
천만 원.
마냥 큰돈은 아니었지만, 당시 두 사람에게는 큰 도움이 됐을 금액이었다.
그 돈을 가지고 싶어서가 아니라, 대체 왜 그 돈을 미국에 그대로 두고 왔는지 알 수가 없어 해완은 아리송한 얼굴로 눈만 껌뻑였다.
그런 해완을 향해 인하가 건조한 목소리로 말했다.
“사망 사실을 소명하면 해완 씨가 받아 올 수도 있을 것 같은데, 내가 도와줄까요?”
해완은 두 손을 들어 마른세수를 하고는,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아뇨, 지금 그런 얘길 하기보다…… 대체 왜 그 돈을 그대로 두고 왔을까요? 혹시, 누가 그 돈을 못 가져가게 막은 거 아닐까요?”
“글쎄요. 그럴 확률은 낮을 것 같고, 나는 해언이가 그 돈을 일부러 안 가져갔다고 봐요. 무슨 생각인지는 정확히 몰라도.”
“사, 사기를 당했다거나, 누구한테 잘못 이용당했다거나, 그런 거일 수도 있잖아요.”
해완의 걱정 어린 목소리에 느긋하게 차로 목을 축이던 인하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해언이가요? 그럴 리가요. 걔가 남들을 이용했으면 이용했지.”
“……네?”
“해언이 알잖아요. 무서울 만큼 똑똑하고 이기적인 애라서, 필요한 게 있으면 누구든 이용하는 데 거침없는 거.”
싸늘하리만치 냉정한 평가에, 해완은 그대로 말문이 막혔다가 조금 목소리를 떨며 물었다.
“그게 무슨……. 저는 한 번도 해언이에 대해서 그렇게 생각해 본 적 없어요.”
“…….”
“해언이를 좋아했다면서…… 왜 그런 식으로 얘기하는 거예요?”
그러자 인하는 뜻을 알 수 없는 웃음을 짓더니, 나직한 목소리로 말했다.
“난 사랑한다고 해서 특별히 콩깍지 같은 게 씌는 사람은 아니거든요.”
“…….”
“아, 해완 씨는 그런 타입인가? 사랑하면 단점 같은 게 전부 안 보이는 사람.”
다시 해완을 향한 인하의 시선은 관찰이라도 하듯 흥미로워서, 괜히 울컥한 해완은 눈을 테이블 바깥쪽으로 내리고 입술을 짓씹었다.
그런 해완의 반응을 본 인하가 거듭 입을 열었다.
“해완 씨가 지금 사귀고 있는 사람도 그런 점을 좋아할 것 같아서 물은 건데, 내가 무례했나 보네요.”
해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홱 치켜들고 인하를 응시했다. 해완의 과한 반응에도 인하는 별다른 동요 없이 그를 마주 보기만 했다.
“그건, 어떻게…….”
“다르니까요. 내가 알던 해언이 냄새랑.”
“…….”
“물론 그런 경우에 생길 수 있는, 아주 미묘한 차이지만.”
인하가 뭘 이야기하는 것인지 눈치챈 해완은 삽시간에 목 끝까지 새빨갛게 붉어졌다.
그는 누군가와 관계를 가지고 난 뒤 믹스되는 페로몬 향의 변화에 대해서 이야기하고 있었다.
차마 인하와 눈을 맞출 수가 없어 해완은 다시 시선을 내렸다. 인하도 더 이상 어떤 말을 꺼내지 않았다.
불편한 침묵이 감도는 사이를 비집고 인하가 불쑥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해완 씨를 만나면 좋아요.”
“…….”
“어쩔 수 없이 그리운 느낌이 들거든요.”
해완은 그제야 고개를 들어 인하를 다시 바라보았다. 그는 유려한 미소를 지어 보이고는, 다정하게 물었다.
“그럼, 갈까요?”
* * *
안내를 받아 들어간 지하 술집의 룸은 조용하지만 퀴퀴한 냄새가 났다.
사람의 눈에 띄지 않는 곳을 잡으라고 했더니 기껏 이런 데였나. 조금 짜증이 난 강현은 쓰고 있던 마스크 안에 평소 가지고 다니는 아로마 오일을 소량 발라 숨을 깊게 들이쉬었다.
새로운 제품 출시가 얼마 남지 않아 당진에 있는 향료 연구소에 이틀 동안 출장을 다녀온 터였다. 집이 아닌 다른 곳에 묵는 것이 마땅치는 않지만, 일정이 빠듯이 잡혀 있어 어쩔 수 없는 선택이었다.
그리고 오늘 아침, 강현은 일을 맡겼던 흥신소 사장에게 일단 보육원에서 받은 자료들은 먼저 줄 수 있겠다는 연락을 받았다. 강현이 자료가 확보되는 대로 바로바로 보내 달라고 했기 때문이었다.
급한 일도 아닌데 조급하게 구는 제가 어처구니가 없어 조금 헛웃음을 친 그는 긴 운전으로 피곤한 목뒤를 조금 주물렀다.
그때 문이 열리며 중년의 남자 하나가 옆구리에 서류 봉투 하나를 끼고 룸 안으로 들어섰다. 흥신소 사장이었다. 이전에는 우편을 통해 자료를 받았기 때문에 얼굴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지만 강현은 쓸데없는 인사치레는 대충 생략하고 바로 본론으로 들어가기를 원했다.
남자도 그편이 편한지 익숙하게 몇몇 자료들을 꺼내 테이블 위에 늘어놓기 시작했다. 그가 가지고 있는 ‘정보원’에게서 들었다는 인터뷰 녹취와 사진 따위였는데 이번에는 그 수가 제법 많았다.
강현이 사진들을 훑어보는 사이 남자는 먼저 알아봐 달라 요청했던 것 위주로 간략하게 설명을 하기 시작했다.
“말씀하신 대로 윤해완 씨와 윤해언 씨 두 사람이 내내 같은 학년으로 학교를 다녔던 게 맞고요. 윤해완 씨가 어릴 때 발달이 많이 늦어서 아홉 살이 돼서야 초등학교를 들어갔고 윤해언 씨는 1년 일찍 들어가서 그렇게 다닐 수 있었다고 합니다.”
윤해완과 윤해언이 두 살 차이가 남에도 졸업 연도가 같은 것에 대한 의문은 풀렸지만, 생각지 못한 말에 강현은 눈살을 찌푸리며 되물었다.
“발달이 많이 늦었다구요?”
“네.”
남자는 더 자세한 설명 대신 다른 파일 안에서 작은 봉투를 하나 꺼내 강현에게 내밀었다.
봉투 입구를 먼저 들여다보자 역시 사진 몇 장이 들어 있었다. 왜 굳이 이 사진만 따로 분류해 놓았는지 의구심을 가진 채 사진을 꺼내는 도중, 남자가 급하게 말을 덧붙였다.
“참고로 그건 윤해완 씨도 모르는 사진이랍니다.”
남자를 흘끗 본 뒤 사진을 꺼내 든 강현의 손이 멈칫했다. 아마도 네다섯 살쯤 되어 보이는, 아주 어린 해완의 사진이 그 안에 있었다.
목이 늘어나고 색이 바랜 허름한 내복을 입고 있는 어린아이는 눈썹 바로 위까지 길게 자란 더벅머리를 하고 약간 겁에 질린 듯한 얼굴로 카메라를 쳐다보고 있었다.
유달리 커다랗고 동그란 눈에 강아지를 연상시키는 순진한 얼굴이 지금과 별다를 것이 없다는 생각에, 저도 모르게 입꼬리가 미묘하게 둥글어졌다.
그러나 사진을 다음 장으로 넘긴 즉시 그 희미한 미소는 순식간에 표백됐다.
같은 날, 같은 시간에 찍은 사진이었으나 사진 속 어린 해완이 속옷 한 장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다는 점이 달랐다.
낡은 내복으로 가려져 있던 그 앙상하고 여린 몸은 엉망으로 망가져 있었다.
부러질 듯 마른 팔다리 곳곳에 빼곡한 검푸른 멍들부터, 어떤 연유로 생겼는지 알 수도 없는 불그스름한 생채기, 복부에서 옆구리까지 걸쳐 보라색과 누런색이 지저분하게 뒤섞인 커다랗게 멍든 자국까지.
어린 얼굴을 제외한 전신이, 잔인하게 맞고 학대당한 흔적으로 가득했다.
그대로 굳은 듯 멈춰 있던 강현은 아주 느린 동작으로 테이블 위에 사진을 내려놓고는, 남자를 바라보았다.
“그게 발달이 늦어진 원인인 것 같다고 하더군요.”
“…….”
“버려진 날 찍은 사진이라고 하는데, 학대의 여파인지 부모의 신상부터 자기 이름 같은 건 아무 얘기도 하지 않았다고 합니다. 그래서 이름도 그날 같이 보육원에 들어온 윤해언의 이름을 따서 지은 거라고 했습니다. 그 사진은 혹시 친부모가 찾아와 친권을 요구할까 봐 찍어 둔 거구요.”
강현은 탁자 위에 내려 둔 사진으로 다시 시선을 떨궜다. 그는 작고 마른, 겁먹은 얼굴에 시선을 고정시킨 채 기계적으로 말했다.
“윤해완이 이 사진을 모르고 있다는 건 무슨 말이죠? 이런 일을 기억하지 못할 만한 나이는 아닌 것 같은데.”
“아, 그게 나중에는 어린 시절에 대해서 전혀 기억을 못 하게 됐답니다.”
강현이 한 번 더 남자를 바라보자 그는 줄줄 설명을 늘어놓기 시작했다.
“처음 보육원에 왔을 때는 그냥 말하고 싶지 않은 거라고만 생각했는데, 나이를 먹으면 먹을수록 보육원 이전의 기억은 전부 잊어버린 것처럼 보이더랍니다. 자신이 버려졌던 상황까지도요.”
“……그럼 병원 같은 데라도 데려갔어야 되는 거 아닙니까?”
“뭐, 애들 하나하나 다 챙기기엔 보육원 사정이란 게 빤해서……. 감당하기 힘든 충격적인 사건에 대한 자기방어적인 증상이지 싶은데, 그 기억이란 게 가지고 있어 봤자 좋을 일도 없어 보이는 데다 괜한 상처 건드려서 뭐 하겠냐고 생각했던 모양이더라구요…….”
남자는 무언가를 계속 떠들어 댔지만, 그 이상은 강현의 귀에 들리지 않았다.
사진 속 엉망으로 학대받은 어린 해완의 눈이 마치 저를 쳐다보고 있는 것과 같은 착각이 드는 동시에, 몸속에서 벌레가 기어 다니는 듯한, 끔찍한 기분만이 강현을 지배하고 있었다.
* * *
강현은 어릴 적 자신이 얼마나 지독한 아이였는지 익히 들어 알고 있었다.
지나치리만치 과민하게 타고난 감각 때문에 낯선 것에서 오는 자극을 고통으로 받아들인 탓이었는데, 불행히도 어린아이의 곁에는 익숙한 것보다 낯선 것이 훨씬 많기 마련이었다.
때문에 어린 강현은 밤낮을 가리지 않고 하루 종일 악을 쓰며 울었다. 목소리가 나오지 않을 때까지 울다가 잠이 들고 나서도 눈물을 주룩주룩 흘리는 통에 그를 돌봐 주던 모든 사람들이 치를 떨고 혀를 내두를 지경이었다고 했다.
아마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어머니가 그를 옷장 안에 가두기 시작한 것은.
어린 강현이 울기 시작하면 어머니는 처음에는 달래려고 애썼다가 나중에는 화를 내기 시작했고, 끝내는 강현과 똑같이 울음을 터트리곤 했다.
그래도 강현이 울음을 그치지 않으면 그녀는 눈을 번뜩이며 드레스 룸 가장 안쪽에 있는 옷장 안에 그를 밀어 넣어 놓고는, 문을 굳게 닫기 전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곤 했다.
잠깐만, 잠깐만 쉴 시간이 필요해. 네가 너무 울어서 미칠 것 같아서 그래. 잠깐이면 돼.
처음에는 그 말대로 정말 잠깐이었을지 모르지만, 강현이 기억이 나기 시작한 시점에 그 ‘잠깐’은 이미 한 시간여가 되어 있었고, 어느새 그 어둠 속에서 악을 쓰고 울면서 옷장 문을 두드리고 흔들다가 지쳐 잠드는 일에 익숙해지게 되었다.
한 달에 한 번 일어날까 말까 하던 그런 일이 일주일에 한 번으로 잦아지고, 끝내 하루에 한 번은 옷장 안에 그를 가두곤 하던 어느 날, 집을 나간 어머니는 오래도록 돌아오지 않았다.
평소와 달리 잠에 들었다 깨어나도 여전히 어둠 속에 있음을 깨달았을 때, 어린 소년은 발작을 일으키듯이 자지러지게 울었다. 그렇게 울다가 다시 잠에 들고, 깨어나서 또 울다가 잠에 들기를 반복하던 어느 순간, 강현은 문득 모든 것을 그만두고 조용히 누워 있게 되었다.
이곳에 누워 있으면 희미한 제 실루엣 외에는 아무것도 보이질 않았다.
이곳에 누워 있으면 제 숨소리 외에 다른 것은 들리질 않았다.
이곳에 누워 있으면 강현이 가장 싫어하는, 그 수많은 역한 냄새들을 맡을 필요가 없었다.
모든 자극이 차단된 그 어둠 안에서 신기하리만치 마음이 비워지는 감각을, 강현은 아직까지도 선명하게 기억하고 있었다.
그렇게 굳게 닫혀 있던 옷장 문은 사흘이 지나고서야 열렸다. 행방불명이었던 어머니가 지방의 한 호텔에서 음독자살 시도를 하다가 발견된 이후에야 그녀가 어린 강현을 데리고 가출한 것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사람들이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그 옷장에서 나온 이후, 강현은 거짓말처럼 울지 않게 되었다.
예민한 감각은 그대로였지만 그 감각이 자극하던 무언가가 어둠에 녹슬어서 멈춰 버린 것만 같이 느껴졌다.
아이러니한 사실은 어린 강현의 지독한 울음에 진절머리를 치던 모든 사람들이 그가 겨우 울지 않게 되고 나서야 왜 울지 않느냐 지겹게 묻기 시작했다는 것이었다.
스스로도 답할 수 없는 질문의 답을 찾기 위해 어린 강현은 오래도록 치료를 받아야만 했다. 보는 눈이 수도 없이 많은 집안이기 때문에, 모든 과정은 이해관계가 성립된 병원과 의사와 상담가를 통해서만 이루어졌다.
그들은 하나같이 강현의 상태가 지극히 당연하다 말했다. 트라우마틱한 사건을 겪은 직후에 보일 수 있는 정당한 반응이라고, 자신을 보호하기 위한 심리적 기제일 것이라 진단을 내렸다. 이런 상흔은 쉽사리 사라지지 않으므로, 아이에게는 시간이, 부모에게는 인내심이 필요하다는 말만 되풀이했다.
그리고 그 지루한 시간 동안 어머니는 단 한 순간도 빼놓지 않고 어린 강현의 곁에 있었다. 중증의 산후 우울증과 가혹하리만치 예민한 아이, 무심한 남편이나 집안사람들에게서 벗어나고 싶어 스스로의 삶을 포기하려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 행동이 어린 아들을 죽일 뻔했다는 사실은 그녀를 180도로 변하게 만들었다.
그날 이후 어머니는 강현에게 한 번도 화를 낸 적이 없었다. 그가 하는 요구는 모두 들어주고, 무조건적으로 그의 편이 되어 주고, ‘정상’으로 보일 수 있는 방법을 가르쳐 주었으며 이대로 변하지 않아도 너를 영원히 사랑할 것이라고 그를 격려하고 응원해 주었다.
그런 어머니의 곁에서 강현은 생각했다.
이제부터 저는, 무언가 잃어버린 채로 사는 것이 당연한 일인가 보다 하고.
왜냐하면, 그 헌신적인 태도에도 불구하고, 어머니는 그녀가 죽는 그날까지 강현이 왜 울지 않게 되었는지에 대해서는 절대 물어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 * *
사흘 만에 본 윤해완은 몸살을 앓은 탓인지 묘하게 핼쑥해 보였다.
작업실에서 보는 건 퍽 오랜만으로 느껴졌다. 건너편에 앉은 그는 눈을 내리깐 채 섬세한 손길로 포장재에 디퓨저를 넣고 리본을 묶은 다음, 보기 좋게 끝을 잘라 내는 작업을 반복했다.
벌써 이 작업실에 드나든 지 몇 달이 되었는데도 그는 별달리 해야 할 일이 없으면 항상 불편하고 어색해 보였다. 그러다 강현이 무언가를 부탁할 때면, 마치 제가 이곳에 있어야 할 이유를 간신히 찾은 것처럼 안심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이곤 했다.
아까부터 일을 하는 시늉만 하고 있던 강현은 그마저 집어치우고 의자에 등을 깊숙이 기대앉아 윤해완을 관찰하기 시작했다.
별것도 아닌 일을 하고 있음에도 해완의 얼굴은 꽤나 진지했다. 사실 매사에 그랬다. 강현이 제 입에서 나왔는지 기억하지도 못할 말들도 귀를 쫑긋 세우고 있기라도 한 것처럼 하나하나 열심히 들었다.
그가 느닷없이 제게 선물했던 미모사도 마찬가지였다. 세계 각지에 있는 향료 원료들을 구하느라 강현이 다닌 나라들은 수도 없었고, 물론 기억에 남은 지역들도 있었지만 그것들은 대부분 일에 관한 인상에 불과했다.
하지만 그런 이야기를 너무 건조하게 하는 것이 저를 어떻게 보이게 하는지도 이해하고 있었기 때문에 강현은 적당히 남이 좋아할 만한 감상을 섞어서 말하곤 했다. 모스 향을 맡을 때면 무성한 나무 속 새어 들어오는 빛의 이미지가 떠오른다거나, 그라스 이야기를 할 때면 겨울에 항상 그리워지곤 한다는 식이었는데, 윤해완은 그렇게 스쳐 지나듯이 한 이야기를 기억하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정작 기억해야 할 것은 잊어버린 주제에, 그런 잡다한 말을 기억하는 게 묘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때 눈꺼풀 뒤쪽을 칼로 얕게 훑는 듯한 두통이 스쳐 지나갔다. 저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린 강현은 손을 들어 올려 눈가와 관자놀이를 가볍게 문질렀다.
“머리 아파?”
앞에 앉은 해완이 눈을 동그랗게 뜨고 저를 바라보고 있었다.
“……응. 조금.”
“내가 좀 주물러 줄까?”
하얀 얼굴에 걱정스러운 기색을 띤 해완이 물었다. 그저 스쳐 지나가는 통증에 불과했지만 됐다고 할 마음은 들지 않아 슬쩍 고개를 끄덕이자 몸을 일으킨 그가 가까이 다가와 탁자에 반쯤 걸터앉더니 양손을 들어 강현의 관자놀이를 부드럽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가까이 다가선 해완의 품에서 풍기는 향에 감싸이는 기분에, 강현은 눈을 감았다.
윤해완의 어린 시절의 사진을 받았던 3일 전에 이어 어제는 초등학교,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의 사진을 받았다. 보육원에서 찍은 사진, 수학여행, 졸업 사진 같은 것들이었는데, 신기하리만치 모든 사진에서 윤해완은 윤해언과 함께 붙어 서 있었다.
보육원에서 받은 사진이야 이해할 만했지만 학교에서 찍은 사진마저도 모두 그랬다. 주로 인간관계에 대해 상세히 조사해 달라는 부탁을 한 덕에, 간략하게 붙어서 온 윤해완의 학창 시절에 대한 코멘트는 그 위주로 이루어져 있었다.
학교를 1년 늦게 들어간 데다 발달까지 늦은 탓이었는지 윤해완은 어린 시절부터 교우 관계에 어려움을 겪었다고 했다.
그리고 윤해완이 열다섯 살이 되던 해, 페로몬의 향이 존재하지 않는 선천적인 페로몬샘 장애를 진단받았다는 사실 또한 적혀 있었다.
강현은 그동안 해완이 어떤 연유로 해언의 페로몬샘을 이식받게 되었는지 정확한 이유는 모르고 있었다. 불가피한 경우가 아니면 이식 수술이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정도는 알았지만 후천적 사고 때문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해완이 향을 가질 수 없는 선천적인 장애를 가지고 태어났다면…….
그 은목서 향 또한 윤해완의 향이 아닐 가능성이 높았고, 그것을 생각한 순간 왜인지 입맛이 쓰게 느껴졌다.
업자가 보낸 글에는 동창생으로 보이는 몇몇의 이야기도 간략하게 들어 있었는데, 그들이 해완에 대해 가장 먼저 떠올린 것은 ‘그 향이 안 나는 장애가 있던 애’였고, 그다음은 ‘항상 윤해언이랑 붙어 다니던 조용한 애’였다.
향이 없어서인지 몸에서 해언의 냄새가 항상 나서, 뒤에서 윤해언 짝퉁이라고 부르며 놀리는 짓궂은 애들도 있었다고.
윤해완의 이름은 기억하지 못하면서 윤해언의 이름을 선명하게 기억하는 그들이 떠올린 것이라곤 그 정도가 고작이었다.
이쯤 되니 강현은 제가 가지고 있던 여러 의문들 중 하나쯤은 확실한 답을 얻을 수 있었다.
단순히 같은 보육원에서 살았을 뿐 아니라 학교까지 쭉 함께 다녔고, 그 두 사람을 함께 아는 사람들의 기억에 언제나 붙어 있었던 윤해완과 윤해언.
모든 생활을 함께했을 해완의 존재에 대해 윤해언은 강현에게 제 이야기를 할 때마다 때로는 편집하고 때로는 거짓말까지 해 가며 언급을 철저히 피해 왔었다.
윤해언은, 윤해완을 강현에게서 숨겨 놨던 것이다.
도대체 왜? 어떤 목적으로? 왜 하필 자신에게서만?
물론 그것은 아직 풀리지 않는 의문이었다.
윤해언과 윤해완의 관계에 대한 의문이 머릿속을 온통 헤집는 느낌이 들어, 순간 견디기 힘든 짜증이 치솟아 올랐다.
강현은 손을 올려 윤해완의 손목을 덥석 움켜쥐고 눈을 떴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놀랐는지 윤해완의 몸이 흠칫 떠는 게 느껴졌다.
“이제 그만할까?”
저를 올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 말도 하지 않는 강현에 해완이 어색하게 물었다. 강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해완의 눈이 불편하게 방황하는 것을 알면서도 오직 하나의 격렬한 충동만이 가슴에 들끓고 있었다.
지금 당장 윤해언에 대해서 말해 보라고 하면 뭐라고 할까?
윤해언은 이미 죽어 없으니 답을 낼 수 없는 문제지만, 그 모든 정답을 아는 또 다른 사람이 눈앞에 있으니 말이다.
이상하게도, 그 질문은 마치 가시처럼 목에 걸려 나오지를 않았다.
해완의 커다란 눈동자를 바라보던 강현의 입에서, 줄곧 마음에 얹혀 있던 또 다른 질문이 불쑥 튀어나왔다.
“혹시 친부모에 대해서 기억나는 거 있어?”
하지만 윤해언에 대해서 묻는 것만큼이나 그 질문은 윤해완을 당황하게 한 것 같았다. 삽시간에 얼굴을 붉힌 그는 입술만 벙긋거리다가, 간신히 말을 내뱉었다.
“갑자기…… 그건 왜?”
“그냥. 네가 친부모를 찾고 싶어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불쑥 들더라고. 그럼 내가 도와줄 수도 있으니까.”
어지럽게 떠돌던 해완의 눈동자가 바닥 한구석으로 향했다. 그는 작은 목소리로 되물었다.
“내가 그런 얘기 한 번도 한 적 없었나……?”
강현이 해언과 나눴을 대화를 의식하는 듯했다. 실제로 해언은 자신의 친부모에 대한 언급을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그는 천연덕스럽게 대답했다.
“응, 안 했어. 그런 얘기 꺼내는 거 싫어했잖아.”
그 말에 묘한 기색이 해완의 얼굴에 스쳤다. 그는 시선을 내린 채 어색하게 말했다.
“어, 맞아, 그랬지.”
“…….”
“그러니까…… 나는 보육원 이전의 기억이 거의 없어. 부모님은 누군지, 내가 어떻게 어디서 살았는지…… 그런 게 하나도 기억이 안 나.”
보육원 이전의 기억이 전무하다는 그가 알고 있는 사실과는 달리 ‘거의 없다’는 말에 강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천천히 물었다.
“그럼 기억하는 건 뭔데?”
해완은 망설이듯 입술을 깨물었다. 투명하게 감정이 비치는 그 얼굴은 무언가에 겁이라도 먹은 것처럼 보였다.
그 얼굴이 강현이 사진으로 봤던 어린 해완의 것과 그대로 겹쳐졌다.
왜인지, 갑자기 불에 타듯 속이 쓰렸다. 돌연히 찾아온 고통에 강현은 저도 모르게 굳이 대답할 필요 없다고 말하기 위해 입을 열었다.
“……동물원에 데리고 가 줬었던 것 같아.”
그런데 그때, 해완의 목소리가 들렸다.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강현은 멍하니 해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해완의 시선은 어딘지 알 수 없는 곳에 고정되어 있었는데, 겁에 질렸던 흔적은 어디론가 사라져 있었다.
“코끼리를 실제로 처음 봤었는데 정말 신기했어. 그 전에는 TV에서 본 게 다였거든. 그리고…… 그때 솜사탕도 처음으로 먹어 봤던 것 같아.”
“…….”
“그게 얼마나 달콤하던지…… 아직도 그 단맛이 생생해. 거짓말 같겠지만, 진짜야.”
그런 말을 하는 해완의 입가에는, 아주 옅은 미소까지 떠올라 있었다.
생각과는 너무나 다른 이야기에 강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저 사진 속에서 봤던, 엉망으로 멍들어 있던 작고 마른 몸과 순진하고 커다란 눈동자가 엉망으로 뒤섞여 가슴을 텅텅 쳐 대는 것만 같았다.
강현은 거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게 정말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해?”
그 질문은 생각한 것보다도 훨씬 가혹하게 들렸고, 삽시간에 적막이 차올랐다.
이내, 해완은 온기가 달아난 얼굴로 강현을 응시했다. 그는 배신이라도 당한 듯한 표정으로 강현을 바라보다가, 울컥한 듯 입을 열었다.
“왜? 너도 내 기억이 거짓말 같아? 어차피 버릴 애를 동물원에 데려가 줬을 리가 없다고, 그렇게 생각해서 그래?”
드물게 분에 찬 해완의 목소리는, 스스로의 생각이라기보다 언젠가 들은 말을 되풀이하는 것처럼 들렸다.
그래, 그 말이 맞았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윤해완은 기억하지 못해도 그 부모가 얼마나 쓰레기 같은 인간인지 저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강현은 입을 열었다. 그렇다고 말해 주려 했다. 네가 가진 기억이 진짜일 리 없다고, 그렇게 좋은 기억으로 남기는 것은 네 부모라는 인간들이 받을 자격이 없는 일이라고. 그런데…….
그런데, 저를 보는 해완의 얼굴에 대고 그 말을 할 수가 없었다.
오랜 기간 상담을 받은 의사에게 그런 말을 들은 적이 있었다. 때로는 살기 위해서 자신의 일부분을 깎아 내는 사람들이 있다고, 지금 강현이 겪고 있는 일도 마찬가지일 거라고 말이다.
이해하지도 못했고 이해할 마음도 없이 무감정하게 들었던 그 말이 갑자기 뒤통수를 세게 내리치는 것 같았다.
어쩌면 윤해완은 마치 제가 겪었던 일처럼, 살기 위해 자신의 기억을 깎아 낸 것인지도 모른다고,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런 자신이 당황스럽고 혼란스러워, 강현은 흔들리는 눈으로 해완의 눈동자를 그저 마주 보기만 했다.
그런 강현의 눈을 마주한 해완의 희게 굳은 얼굴에 강현이 해석하지 못할 수많은 감정이 스쳐 지나갔다.
이내 시선을 비스듬히 내린 해완이 조용히 말했다.
“……오늘은 이만 집에 가 봐야겠다.”
강현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해완은 말없이 코트를 챙겨 입었다. 여느 때와 같이 해완을 차로 집 앞까지 데려다줬지만 두 사람 사이에는 내내 어색한 침묵이 감돌았다.
평소라면 의식조차 하지 않았을 침묵이 유달리 숨이 막혀, 강현은 해완이 제 차에서 내려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깊게 숨을 들이쉴 수 있었다.
간만에 겨울비가 쏟아지는 날이어서인지 편의점에는 손님이 없었다.
한가한 틈을 타 창고 안 정리를 하던 해완은 오늘따라 유달리 아린 통증이 올라오는 오른쪽 목덜미와 어깨를 힘을 주어 문질렀다.
잠을 잘 자지 못해서인지 컨디션이 나빴다. 밤새 뒤척이다 간신히 선잠이 들어 청소 일도 지각할 뻔했는데, 알람 소리를 듣고 잠에서 깬 유준이 짜증을 내며 해완을 흔들어 깨우고서야 간신히 몸을 일으킬 수 있었다.
다시 카운터로 돌아온 해완은 별다른 알림이 없는 핸드폰 화면을 보며 얼굴을 시무룩하게 굳혔다. 그러나 강현에게 먼저 연락하기에는 섣불리 손가락이 움직여지질 않았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탓에 앞으로 쏟아진 머리를 가볍게 쓸어 넘기며 해완은 질리지도 않고 또 한숨을 내쉬었다.
어젯밤 친부모에 대해 기억하는 것이 있냐는 강현의 갑작스러운 질문은 해완을 크게 당황하게 만들었었다.
그가 그런 질문을 던질 거라 생각해 본 적이 없어서이기도 했지만 해완이 친부모에 대해 가지고 있던 유일한 기억에 대해 과거 해언이 보였던 가혹한 반응 때문이기도 했다.
해완이라고 모르지 않았다. 그 매서운 한겨울에 내던지듯 자식을 버리고 간 친부모가 좋은 사람일 리 없다는 것을, 소리 내어 말해 본 적은 없어도 삭제한 듯 사라져 버린 기억과 어릴 때 겪었던 발달 지연이 제가 학대를 받았던 증거일 거라 내심 인정하고 있었다.
하지만 해완이 가지고 싶었던 것은 좋은 부모가 아니었다. 그가 가지고 싶었던 것은 고작해야 한 조각의 기억이었다.
한순간의 변덕에 불과할지라도, 사랑받은 적이 있다는 그런 기억의 조각.
해언은 그런 해완의 마음을 이해하려고도 하지 않았다. 네가 몰라서 그러는 거라며, 때로는 짜증을 때로는 화까지 내면서 해완의 생각을 바꾸려고만 들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는 사이 해완은 해언뿐만 아니라 누구에게도 자신의 유일한 기억을 꺼내지 않게 되었다. 해언이 곁을 떠나고 나서도 그랬다.
하지만 해언의 의도대로 부모를 미워하게 돼서는 아니었다. 해언의 모진 말들은 해완에게 진짜인지 가짜인지 모를 기억에 매달리는 저에 대한 초라함을 깨닫게 만들 뿐이었다.
아마 그래서였을 것이다. 강현에게만큼은, 그 기억에 대해 이해받고 싶다고 생각한 것은.
‘그게 정말 진짜 있었던 일이라고 생각해?’
하지만 그렇게 묻는 강현의 냉정한 얼굴은 왜인지 해언의 것과 꼭 닮게 보였다.
순간, 해완의 마음에 들불처럼 수치심이 번졌고, 불필요하리만치 날이 선 대답을 내뱉어 버리고 말았다.
보통 누구에게 기분이 상해도 뒤돌아서기 무섭게 화가 풀리곤 하는 해완이었지만 어제는 강현이 집에 데려다줄 때까지도 마음이 가라앉질 않았다. 강현도 그런 제 태도에 화가 난 모양인지 아무 말도 하지 않아서, 냉골 같은 분위기를 풀지도 못하고 그대로 헤어져 버렸다.
그런데 이상한 점은, 강현의 말에 받은 따끔한 상처가 시간이 지나 흐려질수록 저를 바라보던 강현의 눈이 점점 선명하게 떠올랐다는 것이다.
스스로의 감정에 취해 바로 받아들이지 못했던 강현의 눈동자는 이제껏 해완이 보지 못한 어떤 낯선 감정을 담고 있는 것만 같이 느껴졌었다.
해완은 괜히 시큰해지는 눈시울을 손을 들어 꾹꾹 눌러 냈다. 강현에게 괜한 화풀이를 했다는 자책이 자꾸만 커져 마음이 괴로웠다.
더는 망설이지 않고 강현의 번호를 찾아 통화 버튼을 눌렀다. 그러나 뚜르르 소리를 내는 연결음이 흐르고 또 흐르다 고객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멘트가 나올 때까지 강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전화했는데 바쁜가 보네. 이거 보면 전화해 줘.]
메시지를 보내는데 그친 해완은 잔뜩 어두워진 얼굴로 핸드폰을 내려 두었다. 한동안 매끈한 화면을 노려보았지만 답장이 올 기미는 보이지 않았다.
입술을 깨문 해완은 머릿속으로 어제 강현에게 들은 그의 오늘 일정에 대해 떠올렸다 6시 즈음 서연이 완성된 디퓨저를 찾으러 올 것 같다는 이야기를 들은 게 기억이 났다.
그래, 연락이 오지 않으면 내가 찾아가면 되지.
해완은 초조하게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했다. 아직 12시밖에 되지 않은 것에 긴 한숨이 나왔다. 손님이라도 밀어닥치면 다른 생각을 하지 않아도 될 텐데, 무섭게 쏟아지는 비로 봐서 뜻대로 되지는 않을 듯했다.
정말이지 긴 하루가 될 것 같은 예감이 들었다.
* * *
―왜 대답이 없어? 강현아, 여강현!
수화기 속에서 서연이 목소리를 높이자 흠칫 정신이 든 강현이 눈가를 손으로 쓸어내렸다.
“미안. 뭐라고 했지?”
―지금 물건 받으러 출발해도 되냐구.
그래, 서연이 맡긴 디퓨저 이야기를 하는 중이었었다. 서연과의 대화가 피곤해진 강현은 인상을 찡그리며 낮게 대답했다.
“응. 괜찮아.”
―너 오늘 좀 이상하다? 무슨 일 있어?
“아니. 아무 일도 없어. 그럼 이따 봐.”
바로 전화를 끊으려는 듯한 강현의 태도에 서연이 급하게 말끝을 잡아챘다.
―참, 나 누구랑 같이 가도 되지?
“뭐?”
―너한테 향수 의뢰하고 싶어 하는 사람인데, 네 작업실도 간 적 있고 명함도 주고받았다고 하던데? 근데 네가 연락 주기로 해 놓고 깜깜무소식이라고 하길래, 내가 먼저 같이 가자고 했는데, 괜찮지?
순간, 언뜻 떠오르는 기억에 강현은 잠깐 말을 멈췄다가 되물었다.
“그 사람 이름이 뭔데?”
―서인하 씨.
이름을 듣기가 무섭게 스파이시하면서도 묵직하고 세련된 느낌의 향이 기억 속에서 피어났다.
한번 스치고 지나갈 사람은 헤어지기 무섭게 기억 속에서 지워 버리곤 하는 강현이지만 그는 꽤나 향이 인상적이었던 남자였고, 조향을 해 보고 싶을 만큼 흥미를 끌기도 했었다.
그럼에도 강현은 무감각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아아, 그 사람이랑은 어떻게 아는 사인데?”
―로펌 지서 서현종 대표 알지? 서 대표 막내아들이야. 외국에 오래 있다가 잠깐 한국에 들어왔다고 하더라고. 너 바쁘면 완성품은 언제 받아도 상관없대. 다만 한국 떠나기 전에 향수는 맡기고 싶다고 하더라고.
법무 법인 지서는 한국에서 가장 규모가 크고 유명한 로펌이었다. 서경 그룹과도 협력 관계에 있었기 때문에 강현 또한 서현종 대표와 가벼운 안면이 있었다.
집안과의 관계도, 서연의 면도 있는 데다 향에도 흥미가 있으니 의뢰를 받아들이는 게 합리적일 것이다.
그러나 지금 강현을 망설이게 하는 것은, 서인하라는 남자의 드문 타바코 향이 불러일으킨 모종의 불쾌감 때문이었다.
해완의 얼굴이 어른거리며 떠오른 찰나 마음속에서 해석할 수 없이 낯선 감정이 울컥대며 솟아올랐다.
더 이상은 이런 식으로 흔들릴 수가 없었다. 감당할 수 없는 감정을 밀어 내듯이 대놓고 인상을 쓴 강현은 피곤한 눈 앞머리를 검지와 엄지로 꾹 누르며 신경질적으로 대답했다.
“알았어. 그럼 그 사람이랑 같이 오는 걸로 알고 있을게.”
서연과 통화를 마치고 나서 강현은 탁자에 길게 기댄 채 머리를 흩뜨렸다. 핸드폰에는 확인하지 않은 메시지 세 통을 알리는 알림이 반짝이고 있었다.
모두 해완에게서 온 메시지였는데, 오늘 그에게서는 두 번의 전화와 세 번의 메시지가 왔지만 전부 무시해 버린 터였다.
받지 않고 싶어서도 아니고, 어제 냉랭하게 헤어진 것에 화가 난 것도 아니었다. 솔직히 말해 지금 강현은 자신이 겪고 있는 상태에 대해 뭐라고 설명해야 할지 몰랐다.
그저 느끼는 것이라곤 풍랑이 이는 바다에 갑자기 내던져진 것 같다는 생각뿐이었다.
아니, 어쩌면 그가 살던 비정상적으로 고요한 바다에 처음으로 일어난 폭풍인지도 몰랐다.
문득 강현은 제가 소매를 걷어붙인 팔뚝을 손톱으로 긁고 있음을 깨달았다. 어제부터 내내 정신을 차려 보면 긁고 있어서 드러난 피부가 벌써 붉었다.
그는 시계를 흘끗 쳐다보았다. 서연이 회사에서 출발한다고 했으니 30분이면 족히 도착할 것이었다. 게다가 계획에 없던 일을 맡을 수도 있으니 대충 준비도 해 놔야 했다.
괜히 울렁거리는 속을 내리누르며 강현은 소매를 내려 생채기가 난 피부를 가렸다.
* * *
서연과 함께 들어온 남자, 아니, 서인하는 낯선 공간에 들어서는 느낌이 전혀 없었다.
이미 한 번 방문한 적이 있어서 그렇다기보다는 천성이 그런 남자인 모양이었다. 어느 장소든 어느 집단이든 어색함 없이 제 자리라도 되는 양 자연스럽게 어울리는 사람 말이다.
쉽게 흔들리거나 긴장하지 않는 안정된 성격이 저 개성 강한 조합의 노트들을 균형적으로 유지시켜 주는 것이리라. 그런 생각이 들었다.
이미 얼굴을 본 사이이기도 하고 중간에 서연까지 끼어 있다 보니 분위기는 처음보다는 화기애애했다. 하지만 곧 지루해진 강현이 입을 열었다.
“이야기를 들으셔서 아시겠지만 저는 보통 조향사들보다도 훨씬 많은 사전 조사를 거칩니다. 서인하 씨한테 드리는 질문이나 요구 사항들 외에 주변분들한테도 이야기를 들어야 할 수 있는데, 괜찮으세요?”
“네, 그럼요. 필요하신 부분이 있으면 얼마든지 말씀해 주세요.”
“나한테도 필요하면 얘기해. 성심성의껏 대답해 줄게.”
서연이 장난스럽게 끼어들었다. 만난 지 오래되지도 않았을 텐데 꽤나 친해진 것 같은 두 사람이었지만 인하와 서연은 누구에게나 호감 가는 사람으로 보인다는 점에서 비슷한 면모가 있어 이해가 되지 않는 것은 아니었다.
“그러고 보니 일정은 어느 정도 정해지셨나요? 지난번엔 정확하지 않다고 하셨던 것 같은데.”
강현의 물음에 인하는 미안한 표정을 했다.
“그게 아직도 확실하진 않습니다만, 적어도 3월 말까지는 확실히 한국에 있을 겁니다. 친구가 맡긴 일이 3월 말이면 끝나기는 해서요.”
인하의 말은 지난번 그가 친구가 부탁한 일을 처리하기 위해 한국에 돌아왔다는 언급을 설핏 떠올리게 했다.
그 친구가 죽었다는 것까지도.
굳이 그런 이야기를 또 꺼내는 것이 이해가 되진 않았지만, 서연의 앞에서 아는 척을 하기에도 적절하지 않아 보여 강현은 그저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나 아니나 다를까 서연이 호기심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친구요? 무슨 친구가 부탁을 했는데 한국까지 들어와요?”
“저한테는 정말 소중한 친구여서요. 지금 이 세상에 없기도 하구요.”
인하의 목소리는 여상했으나 서연은 난감한 듯 얼굴을 흐렸다.
“미안해요. 괜한 걸 물었네. 바쁜데 잡아 두는 건 아니죠?”
“아니에요. 저한테는 별로 어려운 일이 아니라서.”
그 뒤로 이어지는 잡다한 이야기를 강현은 무심하게 흘려들었다. 어젯밤 잠을 거의 자지 못해 피곤했고, 이 자리에 흥미가 떨어지면 떨어질수록 피부 속에서 올라오는 것 같은 가려움증이 더해져서 점점 짜증이 났다.
다행스럽게도 두 사람은 곧 몸을 일으켰다. 인하와의 첫 미팅은 각자의 스케줄을 조정한 뒤 전화로 다시 논의하기로 했다.
이번에 서연이 맡긴 디퓨저의 물량이 꽤 많은 데다 비가 쏟아지고 있어서 인하의 손까지 빌려 서연의 차로 물건들을 옮겼다.
강현의 작업실 앞에서 서연의 차가 떠나는 것을 본 인하가 사람 좋은 얼굴로 강현에게 인사를 건넸다.
“제가 무리해서 부탁드린 건 아닌가 걱정했는데, 이렇게 의뢰 받아 주셔서 감사합니다.”
“아닙니다. 연락을 일찍 못 드려서 제가 죄송하죠. 그럼 다음에…….”
지루한 인사를 주고받던 강현의 시선 안에, 갑자기 익숙한 얼굴이 들어왔다. 강현은 저도 모르게 말을 뚝 멈췄다.
순간적으로 강현은 인하가 앞에 있다는 것을 잊고 그의 이름을 소리 내어 불렀다.
“해언아……?”
우산을 쓰고 있긴 했지만 비를 완전히 막아 주기는 역부족이었던 듯 윤해완의 어깨는 온통 젖어 있었다. 한겨울에 빗줄기를 뚫고 걸어오느라 그랬는지 약간 희게 질린 얼굴로 해완은 강현을 보며 수줍은 듯 웃었다.
그러나 다음 순간, 해완의 얼굴에 떠올라 있던 미소가 무언가에 빨려 들어가듯이 순식간에 사라져 버렸다.
엄청난 충격이라도 받은 듯 연한 갈색의 눈동자가 튀어나올 듯 커졌다. 추위에 시달린 얼굴보다 한층 더 핏기를 잃어버린 입술이 멀리서도 보일 만큼 심하게 떨렸다.
그리고 어떤 사실을 깨달은 강현은 천천히 시선을 내렸다.
저를 바라보고 서 있던 인하가 어느 시점부터인가 등을 완전히 돌려 해완을 쳐다보고 있었다.
그리고 윤해완의 시선은, 정확히 서인하의 얼굴에 꽂혀 있었다.
* * *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온몸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렸다. 끝이 없는 구멍 속으로 추락하는 듯한 아찔한 기분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았다 떴다.
다시 눈을 떴을 때, 쏟아지는 빗줄기 사이로 저를 의아한 얼굴로 바라보고 있는 강현과, 그리고 그 앞에 서 있는 인하의 얼굴이 보였다.
강현이 저를 보고, 그리고 해언의 이름을 불렀을 때 홱 뒤돌아선 인하의 얼굴에는 해완이 그를 알게 된 후 처음 보는 혼란이 감추지도 못하고 드러나 있었다.
해완이 그 자리에서 굳어 버린 채 움직이지 못하고 있자 묘한 기류를 느낀 듯 강현이 인하를 지나쳐 성큼성큼 해완의 곁으로 다가왔다.
“해언아. 왜 그래. 괜찮아?”
바로 앞까지 다가선 강현이 나지막하게 물으며 해완의 한쪽 팔뚝을 강하게 쥐었다.
하지만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오로지 해완을 사로잡고 있는 것은 강현의 뒤에서 미동 한번 없이 저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인하의 속내를 알 수 없는 얼굴과 이제는 정말 다 끝났다고 외치고 있는 머릿속의 메아리뿐이었다.
스스로가 저지른 일의 대가를 치르는 것뿐인데도 겁이 났다. 미칠 듯이 겁이 나서, 지금 당장이라도 모든 걸 뒤로하고 도망치고 싶었으나 깊은 구덩이에 빠져 버린 듯 바싹 긴장한 몸은 눈을 깜빡이는 것 말고는 무엇도 허락하지 않았다.
전신을 죄어 오는 두려움이 너무나 아찔해서, 저도 모르게 고개를 푹 숙인 그 순간…….
“해언아. 너 괜찮아?”
인하의 목소리가 해완의 귀를 파고들었다.
해완은 창백한 얼굴을 반사적으로 번쩍 치켜들었다. 어느새 강현의 옆에 와 선 인하가 걱정스러운 얼굴로 해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인하가 해완을 해언이라 부르자 강현은 감출 생각도 없이 인상을 강하게 찌푸리더니, 여전히 해완의 팔을 쥔 채 인하를 향해 입을 열었다.
“해언이랑…… 아는 사이십니까?”
인하는 해완의 얼굴에 머무르던 시선을 태연하게 강현에게 옮겼다.
“네. 예전부터 친한 형 동생으로 알고 지내던 사인데, 조향사님이랑도 아는 사인지는 몰랐네요.”
상황 파악이 되지 않은 해완은 그저 멍하니 인하의 얼굴을 응시하기만 했다. 강현은 그런 해완을 유심히 바라보더니 무언가를 확인하듯 다시 인하에게 눈을 돌렸다.
하지만 인하는 조금의 동요도 없이 느긋하게 말을 이었다.
“마침 해언이랑 오늘 저녁 같이하기로 했는데 여기서 만나다니…… 이런 우연도 다 있네요. 그치, 해언아?”
존재하지도 않는 약속을 되묻는 인하의 말에 해완은 뭐라 답해야 할지 몰라 입술만 몇 번 벙긋거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현이 낮게 물었다.
“……정말이야?”
선택의 여지가 없었다. 해완은 시선을 바닥으로 내린 채로 떨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뭔가 더 물어야 마땅한 상황인 것 같은데 뭐라 묻지도 않았다. 그저 해완의 팔을 잡은 손에만 아플 정도로 힘을 주었다.
잠시 후, 그는 인하에게 시선을 돌리더니 거칠게 말했다.
“……오늘은 해언이 몸이 별로 안 좋아 보이니 저녁은 다음에 하시죠.”
당황한 해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들어 강현과 인하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쳐다보았다. 강현은 전반적으로 무표정했지만 살짝 내려앉은 양 눈썹이 불편한 심기를 드러내 주고 있었다.
인하는 그런 강현을 향해 아무것도 모르는 듯이 염려스러운 목소리로 대꾸했다.
“안 그래도 얼굴이 안 좋아 보여서 걱정스럽긴 했는데…….”
그때, 인하가 해완과 눈을 맞췄다. 그의 매끈한 얼굴에, 순간 해완만이 볼 수 있는 미소가 비쳤다.
“그래도, 해언이가 어떻게 하고 싶은지는 들어 봐야 하지 않을까요?”
그 말에 강현은 한 번 더 해완의 팔을 강하게 쥐고는, 해완을 향해 흘끗 시선을 내렸다.
강현과 인하의 시선이 한꺼번에 해완을 향하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 입 밖으로 튀어나올 것만 같이 느껴졌다.
여전히 반쯤 패닉 상태에 빠져 있는 터라 제대로 머리가 돌아가진 않았지만 어떻게든 이 자리를 벗어나야 한다는 충동만이 해완을 강력하게 지배했다.
뭔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해완은 강현이 잡고 있던 팔을 세게 잡아 뺐다. 그러곤 본능적으로 한 발자국 뒷걸음질 치며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오늘은 인하…… 인하 형이랑 먼저 약속한 거니까 그것부터 지켜야 할 것 같아.”
그 말에, 강현의 눈썹이 꿈틀함과 동시에 턱에 날카롭게 근육이 섰다. 인하는 아랑곳없이 해완을 향해 다정하게 말했다.
“그럴래? 아, 근데, 지금 여강현 씨 만나러 온 거면 내가 좀 기다릴게.”
“아니, 아니에요. 가, 강현이랑은 또 만나면 되니까요…….”
그 말을 하면서도 해완은 강현을 차마 바라보지 못했다. 바보같이 발끝 어딘가만 바라보고 있는 사이, 해완의 바로 옆에 선 인하가 강현을 향해 말하는 소리가 들렸다.
“해언이는 걱정 마세요. 제가 맛있는 거 먹이고, 집에 잘 데려다줄 테니까.”
그제야 해완은 간신히 고개를 들어 강현의 얼굴을 쳐다보았다. 그의 시선은 한 번도 떠난 적 없다는 듯이 해완에게 못 박혀 있었는데, 슬쩍 본 것만으로도 차갑게 굳어 있음을 알 수 있었다.
강현은 인하의 말에 대꾸하지 않았다. 그는 해완과 눈을 맞추고는 무감정한 목소리로 천천히 말했다.
“……연락할게.”
그리고 바로 뒤돌아선 강현은 망설임 없이 걸어 작업실 안으로 들어가 버렸다. 강현이 멀어지는 순간 온몸을 옥죄고 있던 날 선 긴장이 삽시간에 풀린 탓에 슬쩍 비틀거리는 해완의 팔을 인하가 재빠르게 잡아챘다.
“괜찮아요, 해완 씨?”
인하가 침착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완은 멍하니 인하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제가 벌이고 있는 짓을 눈앞에서 보고도 아무런 동요가 없는 인하가 믿기지를 않았다.
“일단 차에 타요. 가면서 이야기하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해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지만 인하는 애초에 그의 대답을 들을 생각도 없었던 듯 팔을 쥔 채로 강현의 작업실 바로 앞에 주차되어 있던 자신의 차로 향했다.
인하는 아직까지도 뻣뻣하게 굳어 있는 해완을 반쯤 밀어 넣듯이 조수석에 태웠다. 이어서 운전석에 탄 그는 시동을 걸고 가장 먼저 히터를 세게 틀더니, 해완의 백지장 같은 얼굴을 흘끗 보고는 나지막하게 중얼거렸다.
“뭘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으니…… 따뜻한 거나 마시러 가요.”
인하는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강현의 앞에서는 음소거 된 것처럼 들리지 않던, 거센 빗방울이 차 지붕을 때리는 소리가 선명하리만치 날카롭게 들렸다.
인하가 해완을 데리고 간 곳은 10여 분을 달린 끝에 도착한, 한적하고 조용한 단독 주택을 통째로 개조한 카페였다. 원래 알던 사이인 듯 인하와 반갑게 인사를 주고받은 카페 주인은 두 사람을 카페 안쪽에 있는 조용한 내실로 안내했다.
“아는 분이 하시는 곳인데, 차 종류는 다 괜찮거든요. 그래서 그냥 내가 알아서 시켰어요. 괜찮죠?”
카페 안은 꽤나 따뜻했음에도 불구하고 몸의 떨림이 좀처럼 가라앉질 않아서 해완은 간신히 고개를 작게 끄덕였다.
잠시 후, 탁자 위에 허브티와 커피가 각각 앞에 놓였다. 빗방울이 유리창을 두드리는 소리와 인하가 커피를 마시느라 잔을 들었다 놓는 달각거림만이 고요한 공간을 메웠다.
결국 견디다 못한 해완이 울컥 입을 떼었다.
“왜 아무것도 안 물어봐요?”
그 말에 창밖을 바라보고 있던 인하가 해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그는 들고 있던 잔을 탁자 위에 내려놓더니, 나직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바로 뭘 물어봤다간 기절할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어서, 머릿속으로 생각을 좀 정리하고 있었어요.”
“…….”
“해완 씨와 여강현 씨를 만나게 한 거, 해언이가 그런 건가요?”
인하의 예상치 못한 물음에 해완은 눈을 커다랗게 떴다.
“그걸…… 그걸 어떻게…….”
“진단받고 나서 한국에 가서 하고 싶은 일들에 대해서 이야기한 적이 있어요. 그중에 해완 씨를 여강현 씨랑 만나게 해야겠다는 것도 있었구요.”
“네? 대체 왜…… 대체 왜 그러고 싶어 했는데요?”
방금 전까지 긴장하고 있던 것도 잊은 듯한 해완의 물음에, 인하는 잠시 그를 바라보다가 차분하게 대답했다.
“해완 씨가 처음으로 가지고 싶어 하던 걸 빼앗은 거라, 돌려주고 싶다고. 나한테 그러던데요.”
다시 사지의 힘이 쭉 빠지는 듯한 느낌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인하를 향해 앞으로 기울이고 있던 몸을 축 늘어뜨렸다.
강현이 해언의 입에서 자신에 대해 말하는 걸 한 번도 들은 적 없다고 했을 때, 가졌던 의문이 맞아떨어졌다는 생각에 탈력감이 치솟아 올랐다.
해언은 처음부터 해완을 강현에게 알릴 생각이 없었다고.
강현과 알아 갈 수 있는 기회를 의도적으로 빼앗아, 그를 배제하고 차단한 것이라고 말이다.
그래서 강현과 긴 시간을 만나지 않고, 죽은 뒤에야 저를 강현과 만나게 한 것일까?
강현을 사랑하는 마음과 저에 대한 죄책감 사이에서 선택을 하지 못해서. 그래서 그런 것일까?
완전하지는 않으나 어느 정도 퍼즐이 맞춰지는 듯한 기분에, 해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몸을 옹송그렸다.
할 수만 있다면 왜 그런 바보 같은 짓을 했느냐고 해언에게 소리쳐 묻고 싶었다. 왜 이렇게 긴 시간을 돌아갔느냐고, 강현이 너를 그토록 오래 기다리게 만들었냐고 원망하고 싶었다.
하지만 지금 해완의 목을 가장 강하게 죄는 생각은 그에게는 그럴 자격이 없다는 것이었다.
강현을 사랑한다는, 그의 곁에 조금이라도 더 있고 싶다는 지극히 이기적인 이유로 해언과 강현 두 사람 모두를 기만하고 있는 게 바로 제가 지금 하고 있는 짓이었다.
그런 주제에 이미 이 세상에 없는 해언이 철없던 어린 시절에 한 일에 대해 상처를 받아서는 안 됐다. 더한 짓을 하고 있는 주제에 감히 그런 감정을 품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일이었다.
“그런데, 당신이 윤해언이라고 평생 여강현 씨를 속일 생각은 아니죠?”
어둠을 뚫고 들려온 인하의 목소리에 해완은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는 입술을 벌벌 떨며 미친 사람처럼 고개를 가로저었다.
“아니에요, 안 그럴 거예요. 해언, 해언이 생일까지만……. 그때가 되면 해언이가 이 세상에 없는 걸 말할 수 있으니까……. 그러니까…….”
횡설수설하는 해완을 바라보던 인하가 가볍게 손을 들어 그의 말을 막았다.
“그럼 됐어요. 왜 여강현 씨를 그렇게 속이게 됐는지 지금 당장 나한테 다 이야기할 필요도 없구요.”
“…….”
“하나 확실히 말해 주고 싶은 건 내가 나서서 여강현 씨한테 진실을 얘기할 생각은 없단 거예요. 그러니까 그 점은 안심해도 돼요.”
“……네?”
“솔직히 말해서 세 사람 사이 일이고, 내가 끼어들어서 좋을 일은 없을 것 같아서요. 해완 씨가 그런 거짓말을 오래 할 수 있는 사람처럼 보이지도 않고.”
해완은 인하를 바라보며 느리게 눈만 깜빡이다가 죄인이라도 된 듯 시선을 내렸다.
복잡한 감정이 마음속에서 폭풍처럼 휘몰아쳤다. 자신의 거짓말이 바로 탄로 나지 않으리란 깊은 안도감과, 이 무거운 죄책감과 자괴감의 고리를 타의에 의해서라도 끊을 수 있는 기회를 잃어버렸다는 기묘한 좌절감이 해완의 정신을 온통 휘저어 놓고 있었다.
인하는 갑자기 멍해진 해완을 두고도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잠시 창밖을 바라보았다.
어느 순간, 인하의 입꼬리가 비죽 위로 올라가는가 싶더니, 그는 소리 내어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흠칫 놀란 해완이 인하를 바라보았다. 그 눈 안에 담긴 의문을 읽어 내린 인하가 미소를 머금은 얼굴로 입을 열었다.
“그게…… 해언이 얘기만 들었을 때는 당신이 천사라도 되는 줄 알았는데.”
“…….”
“그냥 보통 사람이었네, 해서요.”
불이 붙은 것처럼 느껴질 정도로 얼굴에 화끈 열이 올랐다.
해완은 다시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 인하는 매끈한 손가락으로 턱을 받친 채, 무심한 시선을 창밖으로 돌렸다.
잠시 시간이 지난 후, 인하가 입을 열었다.
“그럼 이제 갈까요? 집까지 데려다줄게요.”
해완은 여전히 시선을 내린 채로 조용히 인하의 뒤를 따랐다. 스스로를 향한 수치심을 참는 것 이외에는 그 무엇도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인하의 차에서 내렸을 때, 거세게 내리던 폭우는 그것이 만든 물웅덩이에 둥근 호선을 만들며 똑똑 떨어지는 정도의 작은 비로 어느덧 잦아들어 있었다.
익숙하지만 여전히 어두운 골목길 어귀를 해완은 아무 생각도 하지 않고 걸었다. 손끝 발끝까지 무력감이 가득 차올라 마치 이 세상에서 지워지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그러나, 집 앞에 서 있는 낯익은 긴 실루엣을 보고 해완은 스르르 멈춰 섰다. 벽에 기대어 서 있던 강현은 해완을 향해 느리게 고개를 돌리더니, 무덤덤한 목소리로 말했다.
“빨리 왔네.”
* * *
반나절 문을 닫아 놓았을 뿐인데, 집 안에 고인 공기가 벌써 답답하게 느껴졌다.
탑층에 위치한 자신의 빌라 거실의 문을 활짝 열어젖힌 인하는 추위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테라스로 나가 담뱃불을 켰다.
흔히 그렇듯이 어린 치기로 시작한 담배였지만 인하에게는 그 양을 조절하기가 그다지 어렵지 않았다. 그런 이야기를 하면 미친놈을 보듯이 바라보는 사람들도 많았지만, 오히려 그로서는 담배 말고도 즐길 만한 게 넘쳐나는데 왜 몸에도 좋지 않은 것에 매달리는지가 더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러나 해언의 가느다란 손가락이 제 담배를 채어 가는 모습이 오늘같이 선명하게 그려질 때면, 담배를 피우는 게 아니었다는 후회가 들곤 했다.
인하에게는 인생이, 사람들이 참 쉬웠다. 어딜 가도 빠지지 않을 여러 조건들 덕도 있지만 사람을 꿰뚫어 보는 능력을 타고난 탓이었다.
좋은 인간과 나쁜 인간을 가늠할 수 있는 눈이 있으니 지뢰를 밟을 일이 없었다. 인생이 너무 쉬우면 삶이 지루해진다는 사람도 있지만 인하에게는 아니었다. 마음먹은 대로 되니 화낼 일도 없이 그저 삶이 즐겁기만 했다.
그랬던 인하가 난생처음 만난 부비 트랩과도 같은 존재가 바로 윤해언이었다.
타고난 외모와 천재성, 그리고 기묘한 매력으로 가려 둔, 때로는 폭탄 같은 예측 불가능성이 인하를 해언에게 자석처럼 이끌었다.
다만 해언의 행동의 방향성을 짐작할 수 없었던 것은 그가 어떤 목적을 가지고 행동하는 게 아니기 때문이었다. 해언에게는 그때그때 해야 할 일만이 있을 뿐 인생의 모든 일이 충동적인 것처럼 보였다.
오로지 단 한 가지만 빼고.
어쨌든, 해언과 점점 관계가 깊어지며 알게 된 사실 하나는, 해언에 대해서 파악하지 못한 것이 인하의 잘못이 아니라는 점이었다.
윤해언이란 인간은 애초부터 모순덩어리였다.
문제는 해언 스스로도 그걸 알면서도 뭘 어찌해 보려는 의지조차 없었다는 것이었다.
그런 해언이 가지고 있는 가장 큰 모순의 중심축에 서 있는 인간이 바로 윤해완, 그리고 여강현이었다.
순간, 뇌리에 윤해완의 새파랗게 질린 얼굴이 스쳐 지나갔다.
해완이 강현에게 저를 윤해언이라고 속이고 있다는 사실을 처음 알았을 때는 인하조차 조금 당황하긴 했지만, 거짓말을 들켰다는 사실에 눈 한번 마주치지 못하던 그 순진한 눈동자와 사정없이 떨리던 목소리를 듣고 나자 분명 ‘오직’ 윤해완의 의도대로 흘러간 일이 아닐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리고, 그 얼굴을 보면서도 정말 속을 수 있는가는 또 다른 문제가 될 것이다.
담배를 손가락 사이에 끼우기만 한 채 타들어 가는 모양을 바라보던 인하가 느슨한 미소를 띤 채 중얼거렸다.
“이렇게 엉망으로 해 놨으니, 이제 좀 만족하려나.”
인하는 담배를 폐부 깊숙이 빨았다가 어두운 밤하늘로 내쉬었다. 하얀 연기가 흩뿌려지듯이 높이 올라가, 마치 유령처럼 어둠 속으로 자취를 감췄다.
* * *
강현은 해완을 자신의 차에 태우고는 아무런 말도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해완은 초조한 기분에 손끝을 만지작거리며 운전석에 앉은 강현의 날카로운 옆얼굴을 흘끗 바라보았다.
“지금…… 어디 가는 거야?”
“우리 집에.”
강현은 의외로 불편한 기색 없이 평범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하지만 먼저 말을 걸고 싶어 보이진 않아서, 해완은 그저 약간 고개를 숙이고 차 안에 흐르는 침묵을 애써 견뎠다.
주차장, 엘리베이터, 그리고 집 안에 들어설 때까지도 강현은 무언가를 묻지도 화를 내지도 않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보였다. 하지만 현관문이 닫히고 강현과 단둘이 남겨지자 해완의 심장이 미칠 듯이 빠르게 뛰었다.
이상하리만치 적막한 집 안에 해완은 외투를 벗고 있는 강현에게 조심스레 물었다.
“……보리는?”
“본가에 잠시 맡겨 놨어. 출장 때문에.”
지방으로 출장을 갔다 온 건 며칠 전 일인데도 아직 보리를 데려오지 않은 게 조금 의아하게 느껴졌지만, 내심 보리의 존재가 분위기를 부드럽게 만들어 주기를 바라고 있었던 자신의 마음 탓인 것도 같아 해완은 생각을 툭 지워 냈다.
해완이 현관 앞쪽에서 머뭇거리고 있는 사이 강현은 외투를 걸어 두고 소파에 앉았다.
“거기서 뭐 해. 이쪽으로 와.”
그가 물어볼 것이 두려워서 해완은 내키지 않는 걸음으로 다가갔다. 외투조차 벗지 않고 엉거주춤 옆에 앉자 강현이 피식 웃었다.
“왜 그렇게 불편하게 있어. 오랜만에 왔다고 또 어색해서 그러는 거야?”
자못 다정한 물음에 강현이 화가 났으리라 여긴 제 생각이 틀렸나 싶어진 해완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까 내가 너 두고 간 것 때문에, 화났을까 봐 걱정돼서…….”
강현은 잠시 입을 다무는가 싶더니, 손을 뻗어 해완의 머리칼을 만지작거리며 대답했다.
“나 그거 가지고 화 안 났어. 그 사람이랑 먼저 약속한 거라고 했잖아.”
바싹 긴장하고 있던 것이 무색한 강현의 말에, 해완은 눈을 깜빡이며 그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강현은 곧이어 제 손가락에 감긴 해완의 머리칼을 바라보며 건조하게 말했다.
“내가 정말 화난 건, 네가 이번에도 나한테 말 안 하고 그 남잘 만나려고 했다는 거야.”
그 말을 듣는 순간 해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심장이 내려앉는 소리라도 들린 것처럼 강현이 시선을 옮겨 해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았다.
“그건, 그러니까…….”
“그 남자랑은 어떻게 아는 사이야? 듣기로 외국에 오래 있었다고 하던데.”
“……혀, 형이 외국에 가기 전에…… 아는 사람한테 소개받아서, 그래서 알게 됐어.”
해완은 시선을 강현의 가슴팍 어딘가에 고정시키고 떨리는 목소리로 대답했다. 소개를 받은 것은 아니지만, 어쨌든 해언을 사이에 두고 알게 된 사이니 아예 거짓말은 아니었다.
“많이 친했나 봐? 외국에 있었으면 연락도 제대로 못 했을 텐데 아직까지 만날 정도면.”
“그런 건 아닌데…… 오랜만에 연락이 오니까 바, 반가워서…….”
“그 사람한테 그럴 가치가 있어?”
“가치……라니?”
“날 속이면서 만나야 될, 가치가 있냐고.”
강현의 싸늘한 목소리에 해완은 고개를 번쩍 들었다.
“속이려고 한 거 아니야. 그냥 갑자기 약속이 잡혀서, 말할 타이밍을…….”
“그럼, 아까 내 작업실에 온 거 그거 말하려고 온 거야?”
그럴 목적은 아니었지만, 선택의 여지가 없었으므로 해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으리만치 서늘하게 식어 있던 강현의 까만 눈이 언뜻 부드러워졌다.
“그랬구나. 그럼 됐어.”
해완의 볼로 손을 옮긴 강현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대신 이제 그 남자 두 번 다시 만나지 마.”
“어?”
화가 났나 싶다가도 평온하고, 싸늘하다가도 금세 다정해지는 강현의 감정 변화에 갈피를 잡지 못하던 해완이 바보처럼 되물었다. 그러자 강현은 어린아이를 가르치듯 자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네가 자꾸 거짓말을 할 때마다 내가 얼마나 속상한지 알아?”
가슴이 턱 막히는 기분에 해완은 입술만 몇 번 벙긋거렸다. 해완이 인하를 만나는 것에 대해 미리 말을 하지 않은 건 맞았지만, 엄밀히 말해 그를 속인 게 아님에도 자꾸만 일부러 거짓말을 한 것처럼 말하는 강현에게 언뜻 억울한 기분이 들었다.
그러나, 인하와의 만남에 대해 말할 수 없었던 본질적인 이유가 제가 해언이라 강현을 속이고 있기 때문이라는 데에 생각이 미친 순간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뭔가 말하려는 듯 입을 열었던 해완이 다시 고개를 숙이자, 강현은 해완의 볼을 만지고 있던 손에 힘을 주어 얼굴을 들어 올렸다.
“날 속상하게 하면서까지 그 남자 만나고 싶은 거 아니잖아. 그치?”
그렇게 말하며 해완을 바라보는 강현의 눈은 집요했다. 결국 해완은 강현의 손 안에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억울했던 마음은 자신이 한 일을 되돌아볼수록 순식간에 사그라졌다. 그 자리를 대신해 차오르는 죄책감이 숨통을 짓누르는 듯해 답답해진 해완은 입술을 벌리고 숨을 가쁘게 내쉬었다.
그런데 그때, 강현의 입술이 살짝 벌어진 해완의 것을 파고들었다.
갑작스러운 입맞춤에 당황한 해완의 몸이 경직됐다. 거칠게 입술을 빨고 혀를 밀어 넣어 멋대로 입 안을 짙게 훑는 일방적인 키스에 해완은 반사적으로 강현의 가슴팍에 손을 대어 밀어 내려 했다.
순간, 강현은 해완의 몸에 강하게 무게를 실어 해완을 뒤로 털썩 눕게 만들었다. 제 가슴팍에 와 닿아 있던 해완의 양쪽 손목을 머리맡으로 옮겨 붙든 강현은 두꺼운 허벅지로 해완의 다리를 가르고 그 사이를 힘을 주어 압박했다.
“응……! 자, 잠…….”
노골적으로 흥분시키려는 몸짓에 당황한 해완은 그만두라고 말하고 싶었지만 집요하게 따르는 입술에 그마저도 쉽지 않았다. 강현은 여전히 한쪽 손으로 해완의 손목을 붙든 채로 다른 손을 내려 그의 바지 버클을 풀기 시작했다.
“강현아, 잠깐만……!”
강현의 입술이 예민한 귓가를 괴롭히는 사이 해완이 버둥거리며 말하자 강현이 어두운 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너한테서 안 좋은 냄새가 나서 그래.”
다소 뜬금없이 들리는 말에 잠깐 의아해졌다가, 강현이 인하의 타바코 향에 민감하게 굴었던 예전 일이 번뜩 머리를 스쳐 지나간 해완의 얼굴이 붉어졌다.
해완은 강현이 짓누르고 있는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말했다.
“미안해. 빨리 가서 씻고 올…….”
하지만 강현은 다시 해완의 어깨를 강하게 눌러 눕혔다. 해완을 향해 고개를 숙이고 있는 탓에 새카만 머리칼이 이마에서 떨어져 얼굴에 그늘이 졌다.
그는 해완의 눈을 바라보며 젖은 입술을 핥더니, 쉰 듯한 목소리로 말했다.
“그럴 필요 없어.”
“…….”
“내 향으로 짓뭉개 버리는 편이 더 빠르니까.”
그리고 강현은 곧바로 해완에게 다시 입을 맞췄다. 강현의 농밀한 페로몬 향이 전신을 감싸는 것만으로도 옅은 쾌감이 들어 해완은 파르르 몸을 떨었다.
강현은 그대로 해완이 입고 있던 터틀넥을 잡고 턱 끝까지 밀어 올렸다. 그러더니 고개를 내려 옅은 유두를 입에 넣고 가볍게 빨았다.
아직 애무에 익숙하지 않은 곳에서 오는 자극에 해완은 자기도 모르게 눈을 질끈 감으며 고개를 옆으로 돌렸다. 만지지 않은 곳까지 빳빳하게 솟아오른 것을 흘끗 본 그는 손을 올려 주위를 간지럽게 슬슬 문지르다가 힘을 주어 꼬집는 짓을 반복했다.
“아……!”
더해지는 쾌감에 밭은 숨을 내뱉으며 해완이 몸을 움찔거리자 허리를 일으킨 강현은 해완의 터틀넥을 완전히 벗겨 던지고 청바지도 밑으로 끌어 내려 벗겨 버렸다.
속옷 하나만 입은 채 맨피부가 공기 중에 드러나자 오싹 소름이 돋았다. 강현은 커다란 손으로 해완의 쇄골부터 아랫배까지 거침없이 훑어 내리고는 몸을 뒤로 빼고 천천히 허리를 숙여 속옷 위로 솟아오른 윤곽에 망설임 없이 입을 가져다 댔다.
“응!”
얇은 천을 사이에 두고 뜨겁고 축축한 혀가 와 닿는 생경한 감촉에 해완은 입을 틀어막으며 허리를 튕겼다. 그러자 강현은 보일 듯 말 듯 한 미소를 짓더니, 속옷을 허벅지까지 끌어 내리고 발기한 분홍빛 성기의 기둥을 손으로 잡고 그 끝을 입 안으로 집어넣었다.
“아, 아……!”
해완은 고개를 뒤로 젖히고 신음했다. 입으로 애무받는 것은 처음이었고,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아찔한 쾌감이 순식간에 배 속을 찌르듯이 파고들었다.
스스로의 의지와 무관하게 튀어 오르는 해완의 허리를 강하게 내리누른 강현은 좀 더 적극적으로 입에 넣은 성기를 빨고 핥았다. 성기에 직접적으로 가해지는 자극에 금방이라도 사정을 해 버릴 것만 같던 순간, 싫다는 생각이 해완의 머릿속을 꽉 채웠다.
해완은 고개를 도리질하고 강현의 머리를 밀어 내면서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시, 싫어, 이렇게 가기 싫어…….”
다급한 목소리에 강현은 그제야 고개를 들었다. 그는 흐트러진 머리칼을 한 손으로 쓸어 올리더니 거친 목소리로 물었다.
“……어떻게 가고 싶은데?”
해완은 숨을 헐떡이며 강현을 내려다보았다. 자위만 하던 때에는 몰랐던 쾌감을 이제 해완은 잘 알았다. 짙은 애무를 받다 멈춘 성기보다도, 배 속 깊은 곳이 간지럽고 움찔거리는 구멍에서 필요로 하는 욕구가 더욱 강했다.
그럼에도 이런 말을 제 입으로 내뱉는 것이 너무 부끄러워, 해완은 팔로 눈을 가리고 울먹이며 중얼거렸다.
“넣어서, 넣어서 가고 싶어…….”
그 말에 강현의 입가에 만족한 듯한 미소가 떠올랐다. 그는 느리게 슬랙스의 버클을 풀더니 속옷과 함께 허벅지까지 끌어 내렸다. 그러고는 해완의 팔을 강하게 잡아당겨 몸을 일으키게 만들어 제 다리 위로 끌어당겼다.
해완이 얼결에 허벅지 위에 앉자 강현은 소파에 등을 깊숙이 기대고 아무 말 없이 그의 눈을 바라보았다.
아까까지는 정신이 없어서 의식하지 못했지만 제가 실오라기 걸치지 않은 알몸인 데 비해 강현은 바지조차 제대로 벗지 않은 것에 해완은 괜히 민망해졌다.
상의를 벗기기 위해 어색하게 내민 해완의 손을 강현이 강하게 붙들었다. 그는 해완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손을 이끌어 자신의 터질 듯 발기한 좆에 가져다 댔다.
강현은 몸을 숙여, 해완의 귀에 대고 낮게 속삭였다.
“네가 직접 넣어 봐.”
해완의 얼굴이 터질 듯이 새빨갛게 달아올랐다. 강현은 다시 느긋하게 소파에 몸을 기댔다.
해완은 강현의 물건을 한 손에 쥔 채로 우왕좌왕했다. 이때까지 잠자리에서 처음 삽입할 때만큼은 항상 고통스러웠기에 저 스스로 그 물건을 넣는다는 것이 상상이 가질 않았다.
“강현아…….”
어쩔 줄 몰라 하던 해완은 애원이라도 하듯 강현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는 빙긋이 미소만 짓고 있을 뿐 도와줄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해완은 심호흡을 하며 허벅지를 들어 올려 제 뒷구멍에 강현의 성기 끝을 가져다 댔다. 뭉툭한 끝이 주름진 구멍에 닿자 반사적으로 내벽이 수축하는 것이 느껴졌다. 입술을 깨문 그는 시험 삼아 아주 살짝 허리를 내렸다.
“윽…….”
푹 젖고 좁은 구멍이 와 닿은 순간 여유롭던 강현의 입에서 낮은 신음이 툭 흘러나왔다. 그 쾌감으로 찡그려진 짙은 눈썹이 이상하게 불을 댕겼다. 해완은 강현의 목덜미를 꼭 끌어안고 그의 페로몬 향을 깊게 들이마시고는 조금씩 허리를 아래로 내렸다.
타이트하게 맞물려 있던 구멍을 억지로 벌리고 들어가는 두꺼운 귀두에 허벅지가 부들거리며 떨렸다. 너무 빠듯하게 조여 아픈지 인상을 찡그린 강현은 그제야 손을 들어 해완의 몸 이곳저곳을 부드럽게 쓰다듬고 애무하며 긴장을 풀게 도왔다.
천천히 허리를 내리는 단순한 움직임만으로도 이마에서 땀이 뚝뚝 흘렀다. 첫 삽입은 여전히 아프긴 했지만 제가 템포를 조절할 수 있다는 점에서는 고통을 견디기 수월한 것도 같았다.
“하아…….”
해완이 조금씩 내려앉을 때마다 강현은 떨리는 이마를 해완의 목덜미에 비비거나 거친 숨을 내쉬었다. 제 움직임에 강현이 노골적으로 흥분을 비치는 것이 묘한 열기를 불러일으켜, 해완은 느리지만 멈추지 않고 강현의 좆을 제 구멍 속으로 밀어 넣었다.
하지만 이내, 그 굵고 긴 성기가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자세 때문인지 평소보다도 더욱 깊숙이 배 속을 채우는 것처럼 느껴졌다.
몽둥이에 꿰뚫리는 듯한 기분에 더럭 겁이 난 해완은 힘에 부친 허벅지가 덜덜 떨려 옴에도 불구하고 어느 순간 엉거주춤한 자세로 멈춰 버렸다.
“뭐 하는…… 거야?”
해완이 움직이지 않자 관자놀이에 핏대가 도드라질 정도로 이를 악물고 있던 강현이 견디기 힘들다는 듯 물었다. 해완은 눈시울이 붉어진 채로 횡설수설 중얼거렸다.
“이거, 이거 이상해. 너무 깊…… 깊게 들어가서……. 안 할, 안 할래.”
그렇게 말하자 정말 넣지 못할 것만 같아서, 해완은 강현의 이마에 이마를 맞댄 채로 어린애처럼 도리질을 치며 허리를 일으켜 세우려 했다. 하지만 그 순간, 이를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간 강현이 해완의 허리를 강하게 끌어내려 주저앉혔다.
“히익!”
구멍이 강제로 좆을 뿌리까지 삼키고 주저앉자마자, 배 속 깊은 곳이 완전히 쑤셔지는 느낌에 해완은 울음과도 같은 신음을 뱉었다. 민감한 주름을 거친 음모가 자극하는 감각에 몸이 절로 잘게 떨렸다.
강현의 단단한 배에 맞닿은 해완의 분홍빛 성기에서 선액이 뚝뚝 떨어졌다. 해완이 몸을 움찔거리자 이를 악문 듯 강현의 관자놀이가 불쑥 솟아올랐다.
강현은 어서 움직이라는 듯 해완의 허리를 잡은 손에 아플 정도로 힘을 줬지만, 그래서라기보다 두꺼운 성기가 몸속 깊은 곳을 파고드는 느낌이 무서워서 해완은 허리를 몇 번 들썩였다. 별것 아닌 움직임에도 숨이 가빠 젖은 입술을 반쯤 벌리고 끊임없이 할딱이는 채였다.
“아응!”
그리고 불규칙한 움직임이 우연히 내벽의 깊은 곳을 자극한 찰나 해완은 고개를 뒤로 홱 젖히며 신음했다. 해완의 마른 허리를 감싼 강현의 팔에도 선명한 힘줄이 섰다.
강렬한 자극에 머릿속이 희게 표백된 해완은 이번에는 망설임 없이 몸을 반쯤 일으켰다가 깊게 주저앉았다.
그때, 앉아만 있던 강현이 해완의 움직임에 맞춰 허리를 쳐올렸다. 순간 온몸을 벼락같이 덮친 자극에 해완은 앓듯이 강현의 이름을 불렀다.
“흑, 가, 강현, 강현아…….”
제 이름을 부르는 해완의 목소리에 강현의 눈이 반쯤 돌았다. 강현은 해완의 등을 강하게 감싸고 해완이 맞춰 움직일 수도 없게 세게 허리를 쳐올렸다.
이런 자세로 박히고 있으니 쾌감이 몰아칠 때마다 애액이 왈칵 쏟아지는 느낌이 선명했다. 무리한 자세에 허벅지가 불타는 듯했지만 그보다 사정없이 몰아치는 쾌감이 소름 끼치게 좋아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그것만으로는 부족한 모양인지 강현은 삽입한 채로 단번에 해완의 몸을 들어 올려 소파 위에 눕혔다. 그리고 그는 해완의 양팔을 완전히 밀어 올려 교차해서 고정시키고 좆을 거의 끄트머리까지 뺐다가 한쪽 무릎을 세우고 강하게 뿌리까지 밀어 넣었다.
“아아! 응!”
정확히 꽂혀 들어오듯 깊은 곳을 자극하는 쾌감에 해완은 교성을 내뱉었다. 해완의 좆에서 흐르는 프리컴이 옷을 엉망으로 만들고 있음에도 강현은 아랑곳하지 않고 몸을 바싹 붙여 박으며 해완의 귀에 대고 거칠게 속삭였다.
“네 안에 싸고 싶어. 그래도 돼? 응?”
강현이 무언가 허락을 구하고 있는 것은 알았지만 쾌감에 압도된 채로는 그게 무슨 뜻인지 제대로 이해가 가질 않아서, 해완은 흐느끼듯 신음하며 그냥 무작정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현은 해완에게 깊게 입 맞추며 그의 허리 위로 솟은 마른 다리가 퍽퍽 흔들리도록 거세게 추삽질을 했다.
“아아! 흑! 으응!”
어느 순간, 해완은 그대로 비명 같은 신음을 내지르며 사정해 버렸다. 강렬한 오르가슴에 눈앞이 새하얗게 변하고 검은 점이 춤추듯이 튀었다. 강현이 절정에 달하며 어깨를 강하게 깨무는 통증조차, 알파의 정액이 처음으로 울컥대며 제 뒤를 채우는 것조차 희미하게만 느껴질 정도였다.
따뜻한 물에 잠긴 듯한 나른한 피로감에 옅은 잠에 빠져들락 말락 하던 해완은 한쪽 다리가 홱 들리는 감촉에 눈을 번쩍 떴다. 어느새 몸을 일으킨 강현이 해완의 한쪽 발목을 잡아 넓게 벌리고 무표정한 얼굴로 다리 사이를 쳐다보고 있었다.
자신의 구멍에서 흘러내리는 애액과는 다른 액체의 뜨거움을 느낀 그때야 해완은 번뜩 정신이 들었다. 콘돔 없이 한 것은 처음이었는데, 그걸 제 손으로 강현의 성기를 뒤에 넣을 때까지 의식하지도 못했다는 생각에 당황스러움이 빠르게 차올랐다.
그때, 해완의 시선을 의식한 강현이 눈을 맞춰 왔다. 나른함이 감도는 그 짙은 눈동자에는 보기 드문 만족감이 감돌고 있었다. 강현은 해완의 발목에 다정히 입을 맞추며 입을 열었다.
“……이제 내 냄새만 나네.”
숨길 생각도 없이 기쁜 얼굴로 웃으며, 강현은 그대로 몸을 낮춰 해완에게 키스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