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8. modificateur (3) (9/18)

8. modificateur (3)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댄 채 한쪽 무릎을 세우고 앉아 있던 강현은 고개를 흘끗 돌려 저를 향해 옆으로 누운 채 잠들어 있는 해완의 얼굴을 눈에 담았다.

원래부터 세상모르게 자는 타입이라는 인상이 있기는 했지만, 어젯밤 안에 들어찬 것을 씻겨 준다는 핑계로 안고 들어간 욕실에서 손장난을 치면서 한 번 더 절정에 달하게 한 게 꽤나 지쳤던 모양인지 그의 잠든 얼굴은 평소보다도 더 고요하게 보였다.

잠시 그 얼굴을 바라보던 강현은 해완의 목 끝까지 덮여 있는 시트를 느리게 끌어 내렸다. 뾰족하게 마른 어깨가 공기 중에 드러나자 해완은 살짝 몸을 떨기는 했지만, 역시 깊게 내려앉은 눈꺼풀은 올라올 줄 몰랐다.

약간 소름이 돋은 하얀 목덜미에는 어제 그의 안에서 사정하며 강현이 깨물고 빨아 댄 자국이 적나라하게 드러나 있었다.

문득 손가락을 올려 그것을 부드럽게 문질렀다. 아무런 이유도, 의미도 없는 행동이었고 왜 이러고 싶은지도 알지 못하면서 그랬다.

강현은 이런 자신이 신기했다. 목적 없이 무언가를 행동한 적이 언제인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질 않았다.

하지만 윤해완을 만난 이후로, 언제부터인가 이런 설명할 수 없고 해석할 수 없는 충동들이 자꾸만 그의 일상에 끼어들어 멋대로 한 부분을 차지하고 있었다.

어제 섹스를 하면서 콘돔을 사용하지 않은 일도 그랬다. 해완의 몸을 범해 얻는 절정보다 더욱 강현을 강렬하게 사로잡은 것은 그에게 어떤 ‘표식’을 남겨야겠다는 거역할 수 없이 거센 충동이었다.

그러나 지금 강현에게 있어 해소되지 않는 의문은 충동에 따른 행동보다 그 목적에 관해서였다.

알파가 오메가의 몸에 직접 사정하는 것은 물론 임신이 가장 큰 목적이겠으나, 강현이 제 인생에서 단 한 순간도 아이를 원해 본 적이 없다는 사실을 차치하고서라도 남성 오메가는 히트 사이클 때가 아니면 불임이나 마찬가지니 어떤 이유에서건 그런 생물학적 욕구가 제가 한 짓의 이유가 될 수는 없을 듯했다.

그렇게 가설들을 하나씩 지워 나가는 사이 답은 하나만이 남았다. 인정하고 싶지 않기보다 믿기 어려워 제일 뒤로 미뤄 두었던 사실이었다.

어찌 보면 답은 명확했다. 남이라고 생각하면 쉬웠다. 스스로가 느끼는 감정이 극히 제한적이고 그것마저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는 만큼 강현은 타인이 느끼는 감정과 그 표현 방식에 대해 오랜 시간을 들여 공부하고 학습해 왔으니까.

그리고 그런 데이터베이스에 따르면, 지금 강현이 한 짓은 독점욕과 질투가 엉망으로 뒤섞인 무언가에 의한 결과물임에 분명했다.

그래, 강현은 ‘윤해완’에게 독점욕을 느꼈다.

어제 윤해완이 저 대신 서인하를 선택한 게 싫었고 다음에도 그럴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심장 깊은 곳을 갉아 내려 서인하에게, 혹은 윤해완 그 자신에게까지, 가장 깊은 곳에 흔적을 남김으로써 너는 내 것이라고 주장하려고 든 것이다.

하지만 지금 가장 혼란스러운 점은 제가 느낀 충동이 윤해언의 향을 향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오로지 윤해언의 향을 위해서였다고 하기엔 해완의 몸 안에 자신의 흔적을 남겨 그 귀중한 향까지 짓뭉개 버리는 것은 말도 안 되는 짓이었으니까.

머리가 엉망진창이었다. 붉게 자국이 남도록 목덜미를 긁어내린 강현은 침대에 다시 누워 해완을 향해 천천히 돌아누웠다.

강현은 해완을 유심히 관찰하며 그의 갸름한 얼굴 외곽부터 길게 뻗은 목덜미, 선명히 솟아오른 쇄골, 그리고 마른 근육이 잡힌 팔뚝을 따라 손가락을 미끄러뜨렸다.

처음 보자마자 예쁘장하게 잘생겼다고 느낄 만한 얼굴이기는 했지만 인상이 강렬할 정도는 아니었다. 그보다 나은 얼굴도 찾으려면 얼마든지 있었을 것이다. 당장 항상 붙어 있었다던 윤해언만 해도 그랬으니까.

하지만 해완은 그저 스쳐 지나가는 것만으로는 알 수 없는 지점들을 가졌다.

긴 속눈썹 사이로 올려다보는 눈길, 도톰한 입술이 그리는 부드러운 곡선, 아주 희미한 웃음에도 볼을 패는 작은 보조개, 마주 보면 떨어졌다가 다시 자취를 훑는 연한 눈동자, 희고 보드라운 탓에 자칫 생기가 없어 보일 수 있는 피부 곳곳을 물들이는 단풍 같은 붉은 자국들.

낯을 가리고 자주 긴장하는 탓에 쉽게도 굳는 표정 속에 숨어 있는 섬세함이, 보면 볼수록 자꾸만 찾고 싶은 부드러운 구석들이, 윤해완에게는 있었다.

해완의 매끄러운 피부 위로 오가던 손가락이 무언가에 걸린 듯 턱 멈춰 섰다.

그가 가진 향 말고도, 도대체 언제부터 이런 것들에 대해서 알게 됐는지 모를 일이었다.

순간 온몸의 신경이 견딜 수 없이 들뜨는 것처럼 느껴져 강현은 거칠게 시트를 걷고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평소라면 러닝을 하러 나갈 시간이었고, 그런 루틴이라도 유지하지 않으면 설명할 수 없는 뭔가가 무너져 버릴 듯한 느낌이 들었다.

운동복을 챙겨 입으러 드레스 룸으로 향하던 강현의 발걸음이 문득 방문 앞에서 멈췄다. 잠에서 깰 때마다 윤해완이 가장 먼저 하던 일이 저를 찾으러 나오는 것이라는 게 생각나서였다.

짙은 눈썹을 못마땅하게 문지른 강현은 협탁으로 걸어가 해완이 볼 수 있도록 짧은 메모를 남기고, 몸을 돌려 방을 빠져나갔다.

* * *

문이 닫히는 둔탁한 소리에 해완은 설핏 잠에서 깨어났다. 갑작스럽게 잠에서 깬 탓인지 제가 어디 있는지 바로 인식하지 못하고 당황스러운 눈으로 주위를 휘휘 둘러보던 그는 이내 강현의 방에 있다는 걸 떠올리고는 마른세수를 했다.

조금만 밝아져도 햇빛이 가득 비쳐 드는 해완의 방과는 달리 강현의 방에는 늘 암막 커튼이 쳐 있어서 가끔은 시간도 장소도 짐작하기가 어려웠다.

일단 침대 밖으로 내려온 해완은 암막 커튼부터 걷었다. 해가 뜬 지 얼마 되지 않은 듯 빛은 설익은 듯 푸르렀고 시간 또한 7시를 갓 넘긴 시각이었다.

몸을 돌린 해완은 당연하다는 듯 비어 있는 강현이 누웠던 옆자리를 쳐다보았다. 그런데 늘 누운 자국 하나 없이 깔끔하게 정리되어 있던 평소와는 달리 잠자리의 흔적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만져 보자 채 가시지 않은 약간의 온기까지 남아 있었다. 매번 누구도 함께인 적 없다는 듯 싸늘하게 식어 있는 침대 위에서만 일어나다가 제가 깨어나기 직전까지 강현이 옆에 누워 있던 걸 알게 된 것만으로도 괜히 마음이 울렁였다.

강현이 거실에 있나 싶어 나가려던 해완의 눈에 협탁 위 놓인 작은 쪽지 하나가 들어왔다.

[잠깐 달리고 올게]

그가 제게 메모를 남겼다는 생경한 일에 그 짧은 문장을 들여다보고 있던 해완의 입가에 배시시 작은 웃음이 피어났다.

안방 욕실에서 세수를 하고 의자에 걸려 있던 옷을 챙겨 입은 해완은 문을 열고 거실로 나왔다. 강현이 없는 집 안에 있는 건 여전히 어색했지만, 그래도 그가 어디 갔는지도 알고 빨리 돌아올 것도 알고 있으므로 전처럼 불안하지는 않았다.

잠시 주위를 둘러본 그는 빛이 새어 들어오고 있는 커튼을 활짝 열었다. 바로 밑에 있는 공원의 나무들이 겨울의 차가운 햇살 아래 줄지어 서 있었고, 멀리는 한강까지 보이는 시원하고 아름다운 풍경이 보였다.

해완은 잠시 넋을 놓고 앙상한 나무들이 겨울바람을 견디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계절이 흘러 풍성한 초록으로 물들면 훨씬 아름다울 광경일 것이다.

그러나 추위가 사그라지고 나무들이 새순을 피울 3월이 되어 해언의 생일이 됐을 때 제가 고백해야 하는 것들 또한 떠올리지 않을 수 없었던 해완의 마음이 빠듯하게 죄어 왔다.

―딩동.

스스로의 내면에 깊이 잠겨 있던 해완의 정신을 요란한 초인종 소리가 깨웠다. 갑작스러운 소리에 어깨를 들썩일 정도로 놀란 해완은 무언가 생각할 겨를도 없이 일단 인터폰 가까이 다가가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어…….”

평소 강현이 지문 인식으로 집을 드나드는 것을 봐 왔었기에 그가 아니리라고 생각은 했으나 인터폰 안에 비치는 서연의 얼굴은 해완을 당황하게 만들었다.

강현이 집에 없는데 제가 멋대로 문을 열어 줘도 되는지부터가 문제였지만 이미 얼굴을 아는 사이에 바깥에 그냥 세워 둘 수도 없는 노릇이지 않나 싶어진 해완은 어쩌지도 못하고 잠시 우왕좌왕했다.

―딩동, 딩동.

안에서 응답이 없자 서연은 급한 성질대로 벨을 연달아서 눌러 대기 시작했다. 해완은 일단 급히 핸드폰을 찾아 들었다. 강현에게 문을 열어 줘도 되냐고 물어봐야 할 것 같았다.

―멍!

그때, 인터폰 스피커 사이로 보리의 짖는 소리가 들려왔다. 출장 이후 보리를 미처 본가에서 데려오지 않았다는 강현의 이야기가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서연이 보리를 이곳까지 직접 데리고 왔다면 약속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해완은 급히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그럼에도 서연을 혼자 마주하는 것은 긴장이 되어서, 해완은 현관 앞에서 짧게 심호흡을 한 뒤 현관문을 조심스레 밀어 열었다.

“멍!”

문을 열자마자 보리가 꼬리를 흔들며 짧게 짖었다. 저를 보며 반가워하는 보리에 가장 먼저 시선을 뺏긴 탓에, 해완은 서연이 혼자가 아니라 고급스러운 슈트 차림에 아주 키가 큰 남자 하나와 함께라는 사실을 조금 늦게야 깨달았다.

해완은 당황한 얼굴로 서연과 그 뒤에 있는 낯선 남자의 얼굴을 번갈아 가며 바라보았다. 서연 또한 갑작스러운 해완의 등장에 당황스러워 보였다. 그녀는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언 씨? 강현이는요?”

“그게, 지금 운동하러 나가고 없어서요. 보리 데리고 오신 거 같아서 일단 문 열었는데…….”

그때, 서연의 뒤에 선 남자가 서연을 향해 입을 열었다.

“누구야, 이 사람?”

남자의 말투에는 누가 봐도 경계심이 가득했다. 해완을 앞에 두고도 서연에게 그가 누구냐 묻는 그의 말투는 마치 저를 존재해서는 안 될 사람같이 생각하는 듯 느껴졌다.

서연은 어딘가 난감해 보이는 몸짓으로 긴 머리를 쓸어 올리며 대답했다.

“아, 이쪽은 윤해언 씨라고…… 강현이 애인이야.”

그 말에, 서연에게만 고정되어 있던 남자의 시선이 해완에게 향했다. 미간을 완전히 찌푸린 채인 그는 해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눈으로 크게 훑어 내렸다.

대놓고 사람을 평가라도 하는 양 뻔뻔한 눈길에 해완은 입술을 깨물고 시선을 피했다. 그런 해완을 눈치챈 서연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쪽은 내 사촌 오빠이자…… 강현이 큰형이에요. 이름은 여강우고.”

서연의 소개를 들은 순간 해완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뜨며 흠칫 남자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생각지도 못한 상황에 머릿속이 희게 비는 것 같았지만, 해완은 침을 꿀꺽 삼키고는 입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처음…… 뵙겠습니다.”

해완이 떨리는 목소리로 건넨 인사에도 불구하고 남자, 아니, 강현의 형은 입을 꾹 다문 채 묘한 표정으로 해완의 얼굴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제 와서 보니 강현과 꼭 닮은, 그 짙고 잘생긴 눈썹을 노골적으로 찡그린 채였다.

그러나 다음 순간, 얼굴에 어려 있던 불쾌감을 순식간에 지워 버린 강우는 매끈한 미소를 띠며 입을 열었다.

“강현이가 누굴 만나는 걸 본 게 처음이라 제가 좀 당황했네요. 불편했다면 미안합니다.”

부드러운 사과에 해완은 급히 손을 내저었다.

“아니에요. 그러실 수 있죠.”

“그런데 이렇게 복도에 계속 서서 얘기해야 되나요? 들어가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옆에서 팔짱을 끼고 입술을 잘근거리고 씹고 있던 서연이 불쑥 끼어들었다.

“오빠도 참, 강현이도 없는데 굳이 들어가서 뭐 하게? 나중에 다시 오면 되지.”

“잠깐 운동 간 거라잖아. 들어가서 기다려도 되죠?”

서연의 말을 단칼에 잘라 버린 강우는 다시 사람 좋은 미소를 지으며 해완에게 물었다.

제집도 아닌데 강현의 가족에게 주인 행세를 하는 꼴이 되어 버렸다는 생각에 민망해진 해완이 급히 몸을 비켜서며 대꾸했다.

“네, 그럼요. 들어오세요.”

“고마워요.”

해완이 비켜선 틈으로 강우는 망설임 없이 걸음을 옮겼다. 그런 강우의 뒤를 따르며 서연은 뭔가 골치 아픈 일이 생겼다는 듯 관자놀이를 문지르고 있었다.

“보리야, 그동안 잘 있었어?”

현관문이 닫히자 해완에게 달려드는 보리의 볼과 머리를 어르며 해완이 다정하게 중얼거렸다. 간만에 본 보리의 어리광을 더 받아 주고 싶었지만 집 안으로 들어간 강우와 서연이 신경 쓰인 해완은 일단 보리를 데리고 현관 복도를 지나 거실로 향했다.

이내 소파에 앉아 있는 서연과 뒷짐을 지고 서서 흥미로운 듯 집 안을 바라보고 있는 강우가 보였다.

해완이 완전히 거실로 들어서자 새카만 두 쌍의 눈이 동시에 그를 향했다. 유달리 까만 머리칼과 눈동자는 집안 내력인 듯, 사촌인 서연과 형제인 강우, 강현 모두 그 부분만큼은 꼭 닮아 있었다.

“저, 잠깐 앉아 계시면 강현이한테 언제 오냐고 전화해 볼게요.”

탁자에 놓아두었던 핸드폰을 집어 들며 해완이 말하자 강우가 고개를 저었다.

“아니에요. 굳이 방해할 필요 없어요. 잠깐 기다리는 게 뭐 일이라고.”

“아, 네.”

“근데 마실 것 좀 줄 수 있어요? 목이 마른데.”

해완이 뭔가를 대꾸하기도 전에 서연이 질색하는 어투로 말했다.

“해언 씨가 무슨 오빠 부하 직원이야? 뭐 그런 걸 시켜?”

“왜, 나보다 여기 자주 오는 것 같은데, 그 정돈 부탁할 수 있잖아.”

강우의 태연한 목소리에 서연이 발끈한 듯 몸을 앞으로 기울였지만 별것 아닌 부탁 가지고 두 사람이 날을 세우는 게 불편해진 해완이 잽싸게 사이에 끼었다.

“저도 뭐 마시려던 참이었어요. 뭐 드릴까요?”

“그냥 시원한 물이면 돼요. 고마워요.”

다음으로 해완이 서연을 바라보자 그녀는 자신은 됐다는 듯 손을 들어 보였다. 그렇지 않아도 잠시 숨을 돌릴 틈이 필요했던 해완은 바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켜 부엌으로 향하며 두 사람에게는 들리지 않게 겨우 답답한 숨을 내쉬었다.

그나마 안면이 있는 서연이 함께인 것이 천만다행이었지만, 이렇게 갑작스럽게, 조금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만나게 된 것이 아직까지도 아찔했다.

게다가 강현과 그의 가족이 어떤 이유로 인해 절대 가까운 사이라고는 할 수 없는 것을 알고 있었기에 제가 어떤 얼굴로 강우를 대해야 할지 난감하기만 했다.

약간 시간을 끌면서 마음을 가라앉힌 해완은 다시 거실로 향했다. 어느새 앉아 있는 강우 앞에 물 잔을 내려 두고 해완 또한 소파에 앉자 내내 근처를 서성이던 보리가 가까이 와서 허벅지에 고개를 올려 두었다.

느릿하게 물을 넘기던 강우의 시선이 그런 보리와 해완의 모습에 달라붙었다.

“여기 자주 왔나 봐요. 보리랑도 많이 친해 보이네.”

보리의 부드럽고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는 일에 잠시 정신을 뺏겼던 해완이 머쓱하게 대답했다.

“그렇게 많이 온 건 아닌데 보리가 사람을 좋아해서 빨리 친해진 것 같아요.”

해완의 수줍은 목소리에 강우가 맞장구를 치듯이 말했다.

“그건 그래요. 강현이가 키웠던 보더콜리들 중에 지금 보리만큼 사람 좋아하는 친구는 하나도 없었거든요.”

“아, 강현이가 보리 전에도 다른 보더콜리를 키웠었던 건가요? 몰랐어요.”

순진한 물음에, 강우는 잠시 멈칫했다가 얼굴에 묘한 미소를 띠었다.

“강현이한테 지금 키우는 보리가 몇 번째 보리냐고 물어본 적 없어요?”

몇 번째 보리.

몇 번째 강아지도 아니고 몇 번째 보리냐니.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해완은 어리둥절하게 되물었다.

“네?”

해완의 아리송한 표정에, 강우의 얼굴에 왠지 모를 즐거운 기색이 떠올랐다. 그가 다시 뭔가를 말하기 위해 입을 여는 순간 서연이 갑자기 말을 걸었다.

“해언 씨, 미안한데 내가 좀 빨리 가야 될 것 같아서요. 전화까진 할 필요 없어도 강현이한테 문자는 하나 보내 볼래요? 걔 한번 뛰기 시작하면 한 시간 넘길 때도 있어서.”

“아, 네. 그럴게요.”

서연이 대화의 맥을 끊자 강우는 해완을 향해 기울이고 있던 몸을 소파 등에 깊숙이 기댔지만, 시선만은 고개를 숙인 채 문자를 보내고 있는 해완에게서 떨어뜨리지 않은 채였다.

[강현아, 지금 집에 너희 가족분들 와 계시는데 언제 돌아와?]

그렇게 메시지를 쓰고 전송 버튼을 누르려는데, 문득 도어 록이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해완과 강우, 서연, 그리고 보리의 시선까지 모두 현관 쪽으로 향했다.

문이 닫히고 강현이 들어오는 발소리가 들리기 무섭게 보리가 총알같이 튀어 나갔다. 닫혀 있는 중문에 두 발을 올리고 서서 짖는 보리의 모습을 창으로 본 강현의 실루엣이 멈칫하는가 싶더니, 곧 그는 중문을 확 열어젖혔다.

며칠 만에 본 주인에게 좋아서 달려드는 보리를 상대하느라 강현은 해완을 제외한 두 사람의 존재를 바로 인식하지 못했다.

이내 강현은 고개를 들고 해완의 옆에 서 있는 서연을 빠르게 확인했다. 마침내 그의 시선이 강우에게까지 향한 찰나, 약간의 의아함만이 비치던 얼굴에 서리는 노골적인 불쾌감을 해완은 놓치지 않고 보았다.

보리를 향해 허리를 굽히고 있던 강현이 천천히 몸을 일으키자 소파에 앉아 있던 강우 또한 몸을 일으켰다.

“강현아, 오랜만이네.”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저를 보고 있는 강현을 향해서 강우가 친근하게 말을 붙였다. 꽤 오래 달리고 온 듯 이 추운 날씨에도 불구하고 머리가 땀에 젖어 있던 강현은 이마에 붙어 있는 머리칼을 거칠게 쓸어 넘기며 무뚝뚝하게 대답했다.

“여기까지 무슨 일이야?”

“무슨 일이냐니. 형제간에 얼굴 보고 싶으면 올 수도 있는 거지.”

강우의 목소리에는 해완조차 알 수 있을 만큼 비아냥대는 뉘앙스가 있었고, 강현 또한 대꾸를 하지 않고 그를 똑바로 쏘아보기만 했다. 그러자 강우는 픽 웃음을 터트렸다.

“나라고 오고 싶어서 온 거 아니니까 표정 좀 풀어. 네가 하도 연락이 안 돼서 어쩔 수 없이 온 거니까.”

이제야 무슨 일인지 짐작이 간다는 듯 강현의 눈이 번뜩했다.

“파리 출장 건이라면 난 안 간다고 했잖아.”

“난 다시 생각해 보라고 했고.”

“좋아. 다시 생각해 봤는데, 난 안 가.”

옅은 미소를 띠고 있던 강우의 얼굴에 끝내 짜증스러운 기색이 확 드러났다. 신경질적으로 쯧, 하는 소리를 낸 그는 갑자기 해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렇게 내 말 듣지도 않고 잘라 버리면 형이 민망해지잖아. 네 애인분도 처음 뵙는 자린데. 안 그래요, 해언 씨?”

둘 사이의 냉랭한 기류가 멋대로 문을 열어 준 제 잘못인 것 같아 그렇지 않아도 가시방석 같던 해완은 갑자기 저를 들먹이는 강우에 흠칫 놀라 시선을 올렸다.

강현의 눈이 그런 해완을 흘끗 향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우가 입을 열었다.

“여기서 서로 날 세워서 해언 씨 불편하게 하지 말고, 잠깐 조용한 데서 얘기 좀 할래?”

강현은 일순 침묵했으나 이내 턱으로 흘끗 서재 방향을 가리키더니 망설이지 않고 걸음을 옮겼고, 강우 또한 그 뒤를 따랐다.

두 사람이 서재로 사라지고 문이 닫히는 소리가 날 때까지 해완은 불안한 시선을 거두지 못했다. 그런 해완을 향해 내내 소파에 앉아 팔짱을 끼고 있던 서연이 말을 걸었다.

“둘이 애들도 아니고 치고 박지는 않을 테니 걱정 마요.”

그래도 해완이 안절부절못하는 얼굴을 하고 있자 서연이 픽 웃으며 덧붙였다.

“저기, 드라마에나 나오는 권력 다툼 하는 막장 재벌 집안 그런 거 상상하는 건 아니죠? 우리 집안 그렇게…….”

“아뇨, 그런 거 아니에요.”

자못 단호한 목소리에 서연은 주춤 입을 다물었다. 서연이 농담으로 해완의 기분을 풀어 주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맞춰서 미소 지어 줄 수가 없었다.

강현의 가족들에 대해 제가 알고 있는 것은 극히 일부분에 지나지 않으리란 걸 해완이라고 모르지는 않았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무감각한 얼굴로 가족들이 저를 두려워한다고 이야기하던 건조한 목소리와, 해가 넘어가던 날 본가에 다녀오고 난 뒤 붉은 생채기로 뒤덮여 있던 팔의 이미지를 도저히 잊을 수가 없었다.

입술을 꾹 깨문 해완은 서연을 똑바로 바라보며 입을 열었다.

“그냥…… 서연 씨 말고 다른 가족분들이 강현이만 소외시키는 것 같은 기분이 들어서요.”

그 정도로 직설적인 말을 들으리라 생각하지 못했는지 서연은 눈을 깜빡였다. 그녀는 잠시 뭔가를 생각하다가 해완을 향해 몸까지 기울이고 조심스레 물었다.

“강현이한테 무슨 이야기 들었어요?”

“네.”

“무슨 얘긴데요?”

해완은 순간 말해도 될까 고민했다. 그러나 그동안 봐 온 강현과 서연이 서로를 대하는 태도와 강현과 강우가 서로를 대하는 태도의 차이점이 결심을 굳히게 했다.

“강현이 어머니가 어떻게 돌아가셨는지에 대해서요.”

사려 깊은 표정을 하고 있던 서연의 얼굴에서 표정이 사라졌다. 갑작스러운 변화에 해완이 멈칫하자, 서연은 다시 팔짱을 끼고 앉더니 지루하다는 듯 대답했다.

“뭐라고 하던가요? 어머니가 자기를 구하다가 돌아가셨다고?”

강현의 아픔을 대하는 서연의 성의 없는 말투가 해완의 마음에 불을 붙였다. 해완은 화가 난 목소리로 곧바로 받아쳤다.

“네. 그리고 그걸 강현이 탓으로 돌리고, 어머니 장례식 때 울지 못했다는 이유로 자길 무서워한다고 하더군요.”

해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제 손톱을 들여다보고 있던 서연의 시선이 홱 해완을 향했다.

“강현이가…… 그런 얘길 했어요? 가족들이 자길 무서워한다고?”

“네.”

해완이 망설임 없이 대꾸하자 서연은 당황한 얼굴로 손을 올려 자신의 입을 가렸다. 또다시 변한 서연의 태도를 종잡을 수 없었지만, 여전히 감정이 고조되어 있던 해완은 말을 이었다.

“저는 이해가 안 가요. 사람마다 상처를 대하는 방법은 다른 거잖아요. 그런데, 그런데 고작 울지 못했다는 이유로, 제일 상처받았을 강현이를 그렇게 대해도 되는 건가요?”

격렬한 말투에 서연의 시선이 해완을 향했다. 그리고 그녀는 해완이 이미 몇 번 겪은 바 있는, 강현과 해완 사이의 뭔가를 가늠하고 싶어 하는 시선으로 그를 바라보았다.

“강현이가 숙모 장례식에서 보인 반응 때문에 가족들이 그 애를 그렇게 대하게 된 건 아니에요. 오해가 쌓이고 쌓여서…… 그렇게 된 거지.”

서연의 부드러운 목소리에 한풀 누그러진 해완이 머뭇거리며 물었다.

“오해요? 무슨 오해인데요?”

“지금 내가 그걸 말해 주긴 곤란해요. 하지만…… 나는 강현이가 그랬을 거라고 생각 안 해요.”

강현이 무언가를 했다는 듯한 뉘앙스에 궁금증을 견디지 못한 해완이 다시 입을 열려던 순간, 서재 문이 열리는 소리와 함께 방을 나서는 인기척이 들렸다.

강우가 빠른 걸음으로 먼저 모습을 드러냈고, 그 뒤를 강현이 따랐다. 강우는 단정하던 아까와는 달리 흐트러진 재킷에 얼굴이 달아올라 있었으나 강현의 표정은 처음보다도 여유로워 보였다.

“가자, 서연아.”

거친 강우의 목소리에 땅이 꺼져라 한숨을 내쉰 서연이 외투를 집어 들며 몸을 일으켰다. 잠시 멍해져 있던 해완도 나가는 두 사람을 배웅하기 위해 급히 일어나 걸음을 옮겼다.

중문을 지나 현관까지 따라가려는 해완을 강현이 턱 붙들었다. 해완이 반사적으로 강현을 바라보자, 그는 시선을 강우에게 고정시킨 채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출장 일정 잡히면 말해 줘, 형. 나도 준비해야 되니까.”

강우가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뭔가 울컥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가 멈칫 입을 다물더니, 갑자기 해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강우는 해완을 똑바로 바라보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만나서 반가웠어요, 해언 씨.”

“……저도 만나 뵙게 돼서 반가웠습니다.”

“참, 아까 내가 강현이한테 물어보라고 한 거, 꼭 한번 물어봐요. 재밌을 테니까.”

그 말에, 당황한 듯 해완을 본 서연은 강우의 팔뚝을 잡고 나가자는 듯 채근했다. 강우는 더 이상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두 사람이 현관으로 채 나가기도 전에 강현이 중문을 닫았다. 뒤돌아서 해완을 바라본 강현이, 나직하게 물었다.

“형이 너한테 무슨 얘기 했어?”

그 질문을 듣는 순간 해완의 머릿속에 강우의 의뭉스러운 목소리가 스쳐 지나갔다.

‘지금 키우는 보리가 몇 번째 보리냐고 물어본 적 없어요?’

해완은 대답을 망설였다. 무슨 의미인지 제대로 이해할 수도 없었을뿐더러 썩 의도가 좋은 질문으로 들리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결국 해완은 머뭇거리며 일단 고개를 저었다.

“아니, 특별한 건 없었는데, 무슨 말씀이신지 잘 모르겠네.”

그럼에도 강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잠시 해완을 빤히 바라보았다. 표정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지만, 그가 방어적으로 변했을 때 어떻게 구는지 이제 해완은 잘 알고 있었다.

제 섣부른 행동으로 강현의 마음을 상하게 했다는 생각에 기분이 가라앉은 해완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미안해, 강현아. 마음대로 문을 열어 주는 게 아니었는데.”

풀이 죽은 해완의 얼굴을 본 강현의 눈매가 문득 부드러워졌다. 그는 핏줄이 선 손으로 흐트러진 머리를 쓸어 올리며 중얼거렸다.

“너 때문 아니니까 그러지 마. 어차피 한 번은 만나야 됐을 거야.”

“……출장 때문에?”

아까 강우와의 언쟁을 들으며 신경 쓰였던 이야기를 조심스레 묻자, 강현은 건조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형이 우리나라에 런칭하고 싶어서 오랫동안 공들여 온 니치 향수 하우스가 있거든. 거기 대표 조향사랑 내가 안면이 있는 사이라, 그래서 데려가고 싶어 하는 거야.”

“그래서 여기까지 오신 거야?”

“그래. 출장이 2주 뒤라 마음이 급했나 봐. 귀찮은 일에 엮이긴 싫었지만…….”

강현은 피곤한 듯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가기로 결정하기는 했으나 마음이 내킨 선택은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얼마나 가는데?”

“아마도 열흘쯤.”

“아…….”

지난번 지방 출장처럼 삼사 일 정도로 여겼던 해완의 생각보다 훨씬 긴 기간에, 그는 저도 모르게 입을 벌리고 서운한 한숨을 흘렸다.

하긴, 주워듣기로 파리는 가는 데만 비행기로 열두 시간이 걸린다고 했다. 사는 게 바빠 비행기 한번 타 본 적이 없는 해완에게는 새삼 강현이 멀고 먼 곳으로 가 버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해완은 걸음을 옮겼다. 바로 앞에 서자 강현이 의아한 듯 그를 내려다보는 시선을 무시하고 허리를 껴안고 몸을 기댔다.

이제 이 정도의 포옹이야 서로에게 익숙한 일이었지만, 어리광 부리듯 그의 어깨에 이마를 비비는 해완을 본 강현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뭐야, 이건?”

해완은 여전히 강현의 어깨에 얼굴을 묻은 채 웅얼거렸다.

“멀리 간다니까 벌써 서운해서…….”

어깨에 기대느라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는 탓에 드러난 하얀 뒷덜미가 붉게 달아올랐다. 강현이 손을 들어 올려 해완의 뒷덜미를 감싸는 것이 느껴졌다.

“같이 갈래?”

귓가에 속삭여진 낮은 목소리에 해완은 고개를 들어 강현과 눈을 맞추었다. 그는 진지한 얼굴로 해완을 바라보고 있었다.

순간, 해완은 반사적으로 머릿속에 한 번도 발 디뎌 본 적 없는 낯선 외국 땅을 강현과 손을 잡고 걷는 그림을 그렸다.

그러나 곧바로 마음을 침범하는 죄책감에 그는 애써 그 풍경을 마음에서 지워 버렸다. 해언이라 속이고 있는 지금은 당연히 불가능한 일이었을뿐더러 언젠가 그런 순간이 오기를 꿈꾸는 것조차 몰염치하게 느껴졌다.

해완은 떨리는 입가를 애써 끌어 올리며 웃어 보였다. 강현의 한쪽 볼에 손을 얹고 어루만지며 나지막하게 속삭였다.

“……나중에.”

뭐라고 싫은 소리를 할 줄 알았는데 의외로 강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창가에서 쏟아지는 햇빛을 받은 덕에 더욱 밝게 빛나는 해완의 머리칼을 조금 어루만지다가, 고개를 숙여 입을 맞췄다.

해완은 두 팔을 들어 올려 강현의 목덜미를 감쌌다. 늘 몸속 깊은 곳을 들끓게 하는 듯했던 보통의 입맞춤과는 달리 여유롭고 느긋하게, 서로의 입술을 맛보고 혀를 섞었다.

따뜻한 물에 온몸이 잠기는 것 같은 부드러운 키스에 빠져들고 있던 그때, 문득 다리에 동그랗고 단단한 무언가가 부딪쳐 오는 느낌에 해완은 번뜩 눈을 떴다. 흠칫 놀라 떨어진 두 사람의 입술 사이로 길게 이어진 은색 실이 빛났다 사라졌다.

강현과 해완은 동시에 고개를 내렸다. 바싹 붙어 있는 두 사람 사이에 저도 끼어들고 싶다는 듯 머리를 들이밀고 맴돌고 있던 보리가 낑낑대며 고개를 들었다.

눈이 마주치자마자 보리는 바로 드러누워 배를 드러내며 애교를 부렸다. 눈동자가 반짝이는 귀여운 얼굴에 해완이 웃음을 터트리며 강현에게서 떨어지려 하자 그는 해완의 허리를 안고 있던 팔에 힘을 주었다.

해완은 강현의 팔을 찰싹 때리며 웃음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보리가 만져 달래잖아.”

가벼운 타박에 입술을 조금 삐죽거린 강현의 팔에 힘이 풀렸다. 그의 손아귀에서 풀려나자마자 해완은 바로 몸을 낮춰 바닥에 뒹굴뒹굴 하는 보리의 배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강현은 그런 보리를 쳐다보지도 않고 해완의 옆을 지나쳐 거실로 향했다. 해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멈추고 입을 열었다.

“보리 안 쓰다듬어 줘?”

그 말에 강현이 반쯤 뒤를 돌았다. 그는 흘끗 해완과 배를 보이고 누운 보리를 훑어보더니, 가벼운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쓰다듬어 주고 있잖아.”

“그래도…….”

그래도 며칠 만에 봤는데, 주인에게 쓰다듬어지는 걸 더 원할 거라고.

그렇게 말하려고 했는데, 왜인지 이상하게 말이 나오질 않았다.

갑자기 말을 멈추자 강현이 의아한 듯 쳐다봤다. 해완은 어색하게 미소 지었다.

“……아무것도 아냐.”

그러자 빙긋이 웃은 강현은 다시 뒤를 돌아 걸어가 소파에 털썩 주저앉더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배고프다. 뭐라도 시켜 먹을까?”

“응. 난 아무거나……. 다 좋아.”

해완의 손이 멈춘 채 있자 보리가 불만족스러운 듯 낑낑댔다. 해완은 따뜻한 햇살 아래 핸드폰을 들여다보는 강현의 잘생긴 옆모습에서 애써 시선을 돌려 다시 보리를 쓰다듬기 시작했다.

잘 관리된 부드럽고 윤기 어린 털이 해완의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가운데, 보리의 배는 마냥 따뜻하고 말랑했다. 고작 배를 쓰다듬어 줄 뿐인데도 보리는 세상에서 제일 행복한 것처럼 보였다. 해완에게도 과분하리만치 평화로운 시간임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상하게 마음 한구석이 무거운 듯한 기분이 들었다.

* * *

해완을 집까지 데려다주고 돌아온 강현에게 보리가 꼬리를 치며 가까이 다가왔다. 동그란 머리를 쓰다듬어 준 강현은 저를 보채듯 따라다니는 보리를 무시하고 작업실로 먼저 들어갔다.

보리를 며칠이나 떨어뜨리고 데려온 터라 평소였다면 아무리 늦어도 산책을 데리고 나갔겠지만, 당장 2주 뒤에 출장이 잡힌 이상 마음이 급했다. 비행편이나 숙박, 기타 일정 같은 것들이야 비서실에서 처리할 일이라 신경 쓸 일이 없었으나 미팅을 해야 하는 하우스의 향수들에 대해서는 알아 둘 필요성이 있었다.

강현은 전 세계 수많은 하우스들의 향수들을 수집해 놓은 캐비닛에서 이번 파리 출장을 가서 미팅하게 될 하우스의 향수들을 골라냈다. 취향상 그렇게 좋아하는 하우스가 아니어서 눈여겨본 적이 없었는데 의외로 라인업이 꽤 길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한 달 반 전 강우가 처음으로 출장 제안을 했을 때 승낙하는 것이 나았을지도 몰랐겠지만, 어제 그 짜증 나는 방문이 아니었다면 절대 갈 생각을 하지 않았을 터였다.

강우는 서경 그룹의 사업 중 외국 하이엔드 브랜드 수입 및 브랜딩을 담당하고 있었으나 최근 몇 년간 그가 주도해 고가의 개런티를 주고 들여온 명품 화장품 라인이 실패를 거듭하고 있었다.

그런 결과는 강우가 경영적 능력은 있으나 화장품 산업에 필요한 ‘감각’이 부족하다는 내외부의 평가와 정확히 일치하는 것이었기에 꽤 타격이 컸으리라 강현 또한 짐작하고 있었다.

그러나 회사 경영 승계에 별다른 흥미가 없는 강현의 입장에서는 강우의 발등에 불이 떨어지건 말건 저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일일뿐더러, 해완의 앞에서 소란을 일으키고 싶지 않아 서재로 들어온 것뿐인지라 애초부터 그의 부탁을 들어줄 생각은 조금도 없었다.

우습게도 강우는 강현을 구슬려 설득할 수 있다고 여겼던 모양인지 처음부터 끝까지 저를 무시하는 태도에 점점 분이 치밀어 오르는 것 같았다.

결국 강현이 다시 한번 그의 권유를 확실히 거절한 순간, 강우는 폭발해 버린 듯 거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너 같은 사이코패스 새끼한테 뭘 기대한 내가 등신이지.’

사이코패스 새끼.

꽤나 원색적인 비난이었지만 별다른 생각은 들지 않았다. 어릴 적부터 그의 형과 누나가 꽤나 자주 반복하던 레퍼토리였는데, 그걸 아직까지 되풀이하고 있다는 생각에 오히려 웃음이 나올 지경이었다.

‘그러게 형도 참, 내가 어떤 새낀지 잘 알면서 왜 그랬어.’

강현의 웃음기 어린 목소리에 강우의 얼굴이 시뻘겋게 달아올랐다. 그는 이를 한 번 갈고는 단정히 매여 있던 넥타이 매듭을 끌러 내리며 말했다.

‘생각 같아선 너 같은 새끼 당장이라도 정신 병원에 처넣고 싶은데, 어머니가 너한테 끝까지 희망을 걸고 있던 게 불쌍해서, 내 맘대로 그게 안 되네.’

강현은 살짝 고개를 들어 시선을 내리고,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어머니가 나한테만 신경 쓰느라 관심 못 받았다고 징징대는 건 언제쯤 그만둘 거야?’

‘뭐?’

‘근데 그런 소린 내가 아니고 어머니 무덤에 가서 하는 게 낫지 않을까? 어차피 나한테 말해도 소용없는 거 알잖아.’

‘이 미친 새끼가!’

강우는 강현의 멱살이라도 쥘 듯 걸음을 내딛다 멈춰 섰다. 갑자기 차분해진 그는 뭔가를 잠시 생각하더니 턱짓으로 밖을 가리키며 말했다.

‘밖에 있는 니 애인, 윤해언 씨라고 했나?’

그 말에, 무심하게 떠돌던 강현의 시선이 반사적으로 강우를 향했다. 그 시선을 놓치지 않은 강우가 말을 이었다.

‘착한 사람 같던데. 마음도 꽤나 약해 보이고.’

‘…….’

‘근데 너에 대해서 잘 모르는 거 같더라고. 이를테면, 똑같은 보더콜리들을 데려와서 걔네가 죽자마자 똑같은 이름을 붙이고 키우는 것 같은, 그런 비정상적인 행동들 말이야.’

‘…….’

‘또…… 너 때문에 어머니가 돌아가시고, 그 장례식에서도 눈물 한 방울 안 흘린 걸 알면, 널 뭐라고 생각할까?’

그 말을 들은 순간 책상에 반쯤 걸터앉아 있던 강현은 몸을 일으켜 강우에게 다가갔다. 키가 큰 것은 집안 내력이었으나, 그래도 강현의 키와 체격은 강우를 약간 내려다볼 수 있을 만큼 더 컸다.

강우는 반사적으로 몸을 움찔했지만 이내 몸을 똑바로 펴고 섰다. 강현은 강우를 내려다보며 천천히 말했다.

‘형이 뭐라고 우기든, 어머니가 돌아가신 건 사고였어.’

‘글쎄, 너 같은 사이코패스 새끼랑 단둘이 나가서 그런 일이 생겼는데, 경찰 조사 결과가 뭐로 나왔든 그걸 우리가 믿기 힘든 건 당연하잖아.’

강우의 말은 강현이 어머니를 죽인 것이나 다름없다고,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이 집안에 저만이 아니라는 사실을 암시하고 있었다.

강현은 말없이 그런 형을 바라보다가 고개를 숙여 낮게 중얼거렸다.

‘그래서 내가 꺼져 줬잖아. 그 화목한 집안에서.’

‘…….’

‘그러니까 형도 내 인생에 끼어들 생각 하지 말고 꺼져.’

강우에게서 시선을 떼지 않고 천천히 몸을 똑바로 편 강현은 그대로 문으로 향했다. 문을 열기 위해 손잡이를 돌리는 순간, 등 뒤에서 강우의 목소리가 들렸다.

‘이번만이야.’

‘…….’

‘이번만 도와주면, 네 인생에 안 끼어들겠다고 약속할게.’

강현은 느리게 뒤를 돌아보았다. 팽팽한 긴장 속에 긴 침묵이 흘렀으나, 왜인지 그는 강우에게 고개를 끄덕여 주고야 말았다.

짜증이 섞인 한숨을 내뱉은 그는 책상 위에 줄줄이 놓인 향수병들을 무시하고 몸을 일으켜 향수 보관함으로 향했다. 그리고 그 안에서 몇 번이나 반복하고 또 반복해 만들었던 작은 향수 하나를 꺼내 들었다.

그것은 윤해언의 향이었다.

시향지에 익숙하게 향수를 뿌리고 코 밑에 가져다 대자, 너무도 익숙한, 그리고 그의 인생에서 가장 완벽한 향이 비강 깊숙이 스며들었다.

그런데 이상했다. 이전과 같은 충족감이, 더 이상 들지가 않았다.

입술을 깨문 강현은 신경질적으로 시향지를 쓰레기통에 버리고는 초조하게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아까 해완을 바싹 안고 있으며 맡았던 냄새가 코끝을 떠나지 않는 탓이었다.

페로몬 향을 이야기하는 것이 아니었다. 페로몬샘을 비껴 지나간 몸 곳곳에서 나는 냄새들, 따뜻한 살갗에 코를 아주 바싹 붙이고 있어야만 나는, 지금까지 강현이 단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그런 것이었다.

온기에도 냄새가 있다면 그런 향이 나리라고, 문득 그런 생각이 들었다.

책상에 반쯤 걸터앉은 강현은 희미한 오렌지빛 조명을 한참이고 노려보았다.

강우의 출장 제안을 기어코 거절하려 들었던 것은 그것을 통해 얻을 이익이 분명하지 않기도 했지만, 또 다른 이유가 하나 더 있었다.

그것은 사실, 윤해완을 두고 멀리 가기가 불안하게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그와 동시에 머릿속을 스쳐 가는 한 남자의 인영에 강현은 초조하게 손톱을 씹었다.

서인하.

지난번, 윤해완을 두고 서인하는 아주 태연한 태도로 그를 해언이라 불렀다.

그 말은 곧 서인하는 윤해언과 윤해완 두 사람을 모두 알고 있는 데다 해완이 저를 해언이라 속인 것까지 알고 있는 남자라는 뜻이었다.

그런 남자가 마치 계획이라도 한 듯 제 앞에 나타난 것도 찝찝하기 이를 데 없었지만, 그가 망설이지도 않고 해완의 거짓말에 바로 동참했다는 사실이 시간이 흐르면 흐를수록 강현을 더욱 불쾌하게 만들었다.

유준이야 해완과 인연도 깊은 사이고 저와도 얽힌 일이 있으니 해완이 하고 있는 거짓말을 눈감아 주는 것이 이해가 갔으나, 해완의 말에 의하면 고작 ‘아는 형’인 서인하가 왜, 자기가 뭐라도 되는 양 그런 일에 동조했는지 짐작이 가질 않았다.

해완에게 물어봐야 제대로 된 답을 얻을 수 없으리란 건 이미 알고 있었기에 그를 굳이 괴롭히지는 않았다.

그러나 사포처럼 마음을 긁어내리는 이 불안감과 의문을 어떻게든 해결할 방법을 찾아야만 했다.

곧바로 작업실을 나온 강현은 업무용으로 쓰는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저장되어 있는 고객 명부를 눈으로 훑은 그는 목적한 번호를 빠르게 누르고 통화 키를 눌렀다.

―네, 여보세요.

이내 수화기 너머로 인하의 목소리가 들린 순간, 강현은 크게 숨을 들이쉬었다.

* * *

“이렇게 금방 다시 뵐 수 있을 거라곤 생각 못 했는데, 연락 주셔서 기쁘네요.”

고작 일주일 만에 다시 보는 것임에도 불구하고 인하는 마치 오랜 친구를 간만에 만나기라도 한 듯 다감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제가 맡기로 한 일인데 빨리 연락을 드리는 게 당연하죠. 그럼 이쪽으로 오시죠.”

강현은 그에 맞춰 희미한 미소를 짓고는 인하를 응접실로 안내했다.

뒤를 따르는 남자에게서는 여전히 신기하리만치 잘 조율된 세련된 향이 풍겼다. 페로몬샘이 위치한 목덜미를 드러내기 쉬운 복장으로 와 달라는 강현의 요청을 반영한 것인지 깔끔한 세미 정장을 갖춰 입었던 지난 두 번의 만남과는 달리 셔츠에 카디건만을 걸친 캐주얼한 차림이었다.

“보내 주신 사전 설문지에 최선을 다해서 답하긴 했는데, 부족한 점이 없었는지는 모르겠어요.”

자리에 마주 앉자 인하는 먼저 가볍게 말을 건넸다. 짐짓 걱정스러운 그 말이 그저 형식적인 것에 불과하다는 걸 안 강현은 망설임 없이 대꾸했다.

“대부분 잘 써 주셨어요. 그리고 앞으로의 조향 과정에서도 저와 충분히 이야기를 나누게 되실 테니까 걱정하실 필요는 없습니다.”

조향을 하기 전 고객의 기본적인 생활 환경을 파악하기 위해 요청하는 사전 설문지에 대해 어려움을 표하는 고객들이 적지 않았고, 그런 고객들의 경우에는 설문지를 작성해서 보내 준다 하더라도 강현이 다시 체크해야 하는 경우가 많았다.

하지만 인하가 작성해 보낸 설문지의 답변은 그야말로 군더더기가 없었다. 망설임이 보이지 않는 깔끔한 문장들은 인하가 자신에게 가지고 있는 확신을 뚜렷이 드러냈다.

그래서 그 질문의 답변만이 유독 눈에 띄었다. 강현은 잠시 뜸을 들이다 말문을 열었다.

“다만, 좋아하는 향에 대해서는 답변란을 비워 두셨던데 혹시 무슨 특별한 이유가 있으신가요?”

강현의 질문에 인하는 전혀 그렇지 않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아뇨. 그냥 제가 향을 묘사하는 데 서툴러서, 조향사님 안내를 받으며 직접 말씀드리는 편이 낫겠다 싶더군요.”

그 답변만을 비워 둔 데 별다른 생각이 없었다고 답하는 인하의 거의 순진하기까지 한 얼굴에 강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사람은 직접 만나 봐야 알게 된다고. 그런 이야기를 대부분의 이가 믿고 있는 것을 알고는 있었지만 강현은 아니었다. 그에게는 사람을 직접 대면했을 때 얻게 되는 감정적인 정보들보다 종이 속 객관적인 문장이 누군가를 알게 하는 데 훨씬 큰 도움을 주었다.

건조한 글씨를 앞에 두고 있을 때는 명확히 보이던 의도성이 가늠하기 어려워진 것에 치밀어 오르는 불쾌감을 강현은 일단 꾹 눌러 내렸다.

“알겠습니다. 그럼 이 부분에 대해서는 이따 다시 얘기하는 걸로 하죠.”

이후 강현은 인하와 태블릿 PC 안 인하의 설문지를 들여다보며 사소한 부분들에 대해 잠시 이야기를 나누었다.

대부분이 그저 적혀진 내용들을 확인하는 종류였지만, 그것은 짧더라도 페로몬 향을 직접 맡아야 하는 다음 과정을 위해 거치는 겉치레적인 것이었다.

페로몬향은 몸을 타고 흐르며 조금씩 변질되기 때문에 제대로 된 노트의 파악을 위해서는 최대한 페로몬샘 가까운 곳에서 향을 맡고 관능 4)하는 과정이 반드시 필요했다.

누군가에게 자신의 냄새를 가까이 맡게 한다는 것은 꽤나 개인적인 경험이었다. 때문에 이렇게 가볍게라도 경계와 긴장을 푸는 시간이 없으면 페로몬향이 감정에 동요되어 변할 수밖에 없다는 것을 충분히 알고 있었다.

그러나 인하는 애초부터 긴장한 기색을 거의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강현은 평소보다 훨씬 빨리 다음 스텝으로 넘어가기로 결정했다.

“사전에 미리 안내드린 대로 이제 제가 서인하 씨의 페로몬 향을 직접 관능하는 과정을 거칠 겁니다. 페로몬샘이 위치한 오른쪽 목덜미와 양쪽 손목, 그리고 손가락 끝의 향을 맡게 될 건데, 괜찮으신가요?”

“그럼요. 단추를 좀 풀까요?”

강현이 고개를 끄덕이자 인하는 카디건을 벗고 제가 입은 셔츠의 목 부근의 단추를 좀 더 끌러 내어 목덜미가 완전히 드러나게 만들었다.

“제가 서인하 씨 뒤로 가서 페로몬샘에서 나는 향을 맡을 건데, 일단 일어서 주시면 감사하겠습니다.”

인하는 선뜻 몸을 일으켰다. 그러고는 강현이 그의 뒤로 가서 서자 자신의 목덜미가 잘 드러나 보일 수 있도록 고개를 살짝 옆으로 기울이기까지 했다.

190이 넘어가는 강현은 대부분의 사람과 크게 신장 차이가 났기에 이런 경우 항상 몸 자체를 꽤 숙여야 했지만, 인하는 그와 별다른 차이가 없이 드물게 키가 컸다.

강현은 살이 닿지 않을 정도로, 그러나 코가 최대한 페로몬샘과 가까운 곳에 위치할 수 있게 고개를 내렸다.

일전에 대략적으로 파악해 뒀던 바와 같이 가장 먼저 느껴진 것은 탑에 존재하는 핑크 페퍼, 카네이션, 클로버가 조합된 스파이시한 향조였지만 그에 더해 베르가모트와 같은 시트러스한 느낌 또한 존재하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뒤로는 초콜릿, 말린 베리류의 달짝지근함이 덧입혀진 럼의 냄새와 동시에 약한 시나몬 향조가 자취를 남겼다.

강현은 잠시 고개를 들었다가 다시 깊게 인하의 페로몬 향을 들이마셨다. 이미 읽어 낸 향조들 너머에 있는 것에 집중하자, 스키니한 바닐라 향과 앰버그라스가 섞인 달면서도 묵직한 향이 낮게 깔렸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타바코가 있었다.

강현은 천천히 고개를 들었다. 해완의 몸에서 나던 향을 맡았을 때의 불쾌감이, 질리지도 않고 뇌리를 스쳐 갔다.

“이제 손목과 손끝의 향만 맡으면 될 것 같습니다.”

건조하게 말한 강현이 걸음을 옮겨 자리로 돌아가는 동안 인하는 제 옷매무새를 정리하고 의자에 앉았다. 그는 인하에게 손을 앞으로 내밀게 하고는 그의 맥박이 뛸 때마다 나는 냄새와 손끝에 남는 향의 자취를 가볍게 훑었다.

지난번과는 달리 손끝에서 강하게 시가를 베이스로 한 담배 향이 풍겼다. 강현은 태블릿 PC에 캐치한 노트들을 빠르게 필기하며 물었다.

“흡연량이 좀 느셨나요? 피우시는 담배 향이 지난번보다 좀 강하게 나는데.”

“아, 네. 조금요. 그런 것까지 느껴지시나요?”

“담배 같은 경우는 아무래도 흔적이 길게 남다 보니, 좀 더 민감하게 느껴지곤 합니다.”

그 말에 아, 하고 감탄에 가까운 소리를 내뱉은 인하가 놀랍다는 듯 말을 건넸다.

“조향사님이 느끼시는 세계가 정말 궁금하네요. 전 제가 좋아하는 향 하나 묘사하는 것도 어렵게 느껴지던데.”

강현은 손을 멈췄다. 시선을 올리자 인하의 여유로운 웃음이 보였다. 펜을 완전히 내려놓고 몸을 똑바로 편 강현이 느릿하게 말했다.

“말이 나와서 말인데, 이제 좋아하는 향에 대해서 대략적으로라도 한번 설명해 보시는 건 어떨까요. 그 향을 맡을 때 어떤 느낌을 받았는지 말씀해 주시면 제가 파악할 수 있으니까요.”

그 말에 인하는 잠시 뜸을 들이더니, 불쑥 입을 열었다.

“글쎄요. 숲을 걷는 느낌이 나는 향이라고 해야 할까요. 그렇다고 해서 울창하거나, 커다란 나무들이 있는 그런 숲은 아니고, 이파리가 아주 여린…… 그런 숲속이요.”

너무도 익숙한 묘사에 강현은 비스듬히 인하를 바라보았다. 인하 또한 그런 강현의 눈을 피하지 않고 마주했다.

마치 뭔가를 가늠하는 듯한 시선에, 그 질문만을 빈칸으로 비워 둔 인하의 의도가 겨우 선명하게 보였다.

서인하가 묘사한 것은, 분명, 윤해언, 혹은 윤해완의 향이었다. 저를 자극하고 싶었든 뭐든, 제 앞에서 그 이야기를 직접 꺼내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이쯤 되니 그가 윤해완의 말대로 그저 ‘아는 형’일 리는 없다는 확신이 들었다. 강현은 차분한 태도로 말했다.

“향 묘사에 서투르지 않으신 것 같은데요. 머릿속에 향이 그려지는 좋은 표현이에요.”

“그런가요? 뭔가, 너무 추상적인 느낌이 아닌가 싶어서요.”

“원래 향을 인지하는 정도는 사람마다 편차가 큽니다. 그래서 추상적이 될 수밖에 없어요.”

“그렇군요.”

고개를 끄덕이는 인하를 향해 강현이 불쑥 물었다.

“그래서 해언이와 친하게 지내시는 건가요? 본인이 좋아하는 향과 해언이의 향이 비슷해서.”

갑작스러운 질문이 허를 찔렀던 듯 인하의 얼굴이 잠시 흔들렸다. 하지만 곧 평정을 되찾은 인하는 여상하게 대답했다.

“네, 그러고 보니 그런 점도 없지 않아 있겠네요.”

그가 말하는 ‘해언’은 진짜 윤해언일까, 아니면 윤해완일까.

저도 모르게 떠올린 의문에 강현은 테이블 밑으로 내린 주먹을 강하게 쥐었다. 당장 답을 얻어 내야만 한다는 충동에 이끌린 그는 다시 입을 열었다.

“처음부터 저한테 그렇게 말씀하셨으면 좋았을 텐데요.”

“아무래도 애인분 앞에서 제가 해언이 향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건 실례인 것 같아서요.”

“괜찮습니다. 해언이 향이야 워낙 사람들 관심을 잡아끄는 향이니까요.”

“그쵸. 조향사시니까 더욱 실감하시겠네요.”

강현은 동의하는 대신 미소를 지었다. 인하 또한 그를 따라 웃었지만, 말로 설명할 수 없는 신경질적인 분위기가 공기를 명확히 휘감고 있었다.

“그런데, 해언이랑은 어떻게 만나게 되셨는지 궁금하네요. 외국에 오래 계셨다면서.”

“아, 해언이가 말씀을 안 드렸나요?”

진심으로 의아한 듯한 인하의 물음에 강현이 느긋하게 말했다.

“네. 그냥…… 어쩌다 가끔 보는 형이라고 하더군요.”

“그래요?”

“궁금해서요. 간만에 오신 한국행에, 처리해야 할 일도 많아 보이시는데, 왜 굳이 가까운 사이도 아닌 것 같은 해언이를 만나러 오신 건지.”

애써 다듬은 말투임에도 감출 수 없는 신경질이 여실히 묻어났다. 그것을 예리하게 인지한 인하가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글쎄요. 해언이가 그렇게 말하다니 조금 섭섭한데요. 그래도 같이 산 시간이 있는데.”

순간, 강현의 얼굴에 감돌고 있던 희미한 미소가 어디론가 빨려 들어갔다. 그 얼굴을 본 인하가 태연자약하게 말을 덧붙였다.

“아, 이런 얘길 하면 해언이가 좀 곤란해지려나. 그래도 다 오래전 일이니까요.”

내용과는 달리 의도적으로 그런 말을 했다는 것을 감출 생각조차 없는 태도였다.

삽시간에 혈관을 타고 흐르는 뜨거운 열을 참아 내기 위해 강현은 잠시 시선을 내렸다. 찰나였음에도 온갖 추측들이 몇 번씩 반복해서 빠르게 조립되었다가 흩어졌다.

지금까지 서인하가 말한 대상은 ‘진짜’ 윤해언에 가깝게 느껴지긴 했다. 하지만 그가 윤해언과 가까운 사이였다면, 왜 해완의 거짓말을 용인해 주고 있는지는 설명이 되지 않았다.

어쩌면, 그가 같이 살았다던 사람이 윤해언이 아닌 윤해완인 거라면.

그런 관계였다면 윤해완의 허물을 덮어 주고 자신을 찾아와 도발하듯이 구는 것도 설명이 될지도 모른다.

거기까지 떠올리자 강현의 관자놀이에 핏줄이 섰다. 일주일 전 세 사람이 마주친 날, 윤해완이 저 대신 서인하를 선택한 순간 끓어오르던 무언가가 그때보다 더욱 강하게 온몸을 꽝꽝 울리는 것처럼 느껴졌다.

서인하가 말하는 ‘해언’이 누구를 말하는 것인지 어떻게든 확인해야 했다. 격렬한 충동에 휩싸여 강현은 입을 열었다.

그런데 불현듯, 낙뢰같이 머리에 꽂혀 든 어떤 생각이 강현의 목을 움켜쥐었다.

지금 이 자리에서 섣부르게 굴었다가는 자신이 윤해완의 진짜 정체를 애초부터 알고 있었다는 사실을 인하가 눈치챌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동시에, 서인하가 알게 되면 윤해완도 알게 되리라는 두려움이 불쑥 솟아올랐다.

그렇게 할 수는 없다는 생각만이 머릿속을 꽉 채웠다. 수많은 감정을 억지로 쑤셔 담듯 목울대를 꿀꺽 움직인 강현이 쉰 목소리로 말을 내뱉었다.

“오늘은 이쯤이면 될 것 같습니다. 나중에 다시 연락드리죠.”

강현이 말을 돌리자 인하 또한 더 이상 어떤 이야기를 꺼내려 들지 않았다.

늘 해 오던 것이었으므로 한번 고비를 넘기고 나자 생각을 지우기는 쉬웠다. 강현은 기계적으로 앞으로의 일정에 대해서 설명을 해 주고 몸을 일으켰다.

“그럼 추후에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네, 감사합니다. 다음에 또 뵙죠.”

작업실 현관을 나서려던 인하가 멈칫 뒤를 돌았다.

“아무래도 사실대로 말씀드려야 될 것 같은데…… 제가 정말 좋아하는 향은, 해언이 몸에 남은 제 타바코 향이에요.”

“…….”

“근데 여강현 씨가 질투가 심한 타입인 것 같아서…… 그렇게는 못 쓰겠더군요.”

감출 생각도 없이, 인하의 목소리에는 분명 그를 도발하는 뉘앙스가 담겨 있었다. 강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인하를 못 박듯이 노려보았다.

그에 아랑곳하지도 않고 빙그레 웃어 보인 인하가 고개를 살짝 숙여 보였다.

“그럼.”

인하가 망설임 없이 등을 돌려 완전히 작업실을 빠져나간 이후로도 강현은 한동안 그 자리에 그대로 서 있었다.

아주 작은 움직임만으로도, 스스로 설명할 수 없는 감정들이 어떤 방식으로든 터져 버릴 것만 같이 느껴졌기 때문이었다.

* * *

퇴근을 위해 편의점 문을 나서자마자 스며드는 싸늘한 공기에 해완은 몸을 부르르 떨며 검은빛의 목도리를 단단히 여몄다.

앙상한 나뭇가지들이 겨울의 어둠을 지고 있는 풍경을 멍하니 바라보며 걷던 해완의 등 뒤에서 자동차 클랙슨 소리가 울렸다.

깜짝 놀란 해완이 뒤를 돌아보자 전조등을 켠 회색 세단이 미끄러지듯 부드럽게 곁으로 다가왔다. 그것이 인하의 차임을 이내 눈치챈 해완은 어쩔 수 없이 표정을 굳혔다.

해완의 바로 옆에 차를 정차한 인하가 운전석에서 내렸다. 해완이 먼저 살짝 목례로 인사를 건네자 밝게 웃어 보인 그는 가까이 다가오며 살갑게 말을 걸었다.

“이제 퇴근해요, 해완 씨?”

“네. 여긴 어쩐 일이세요?”

“잠깐 시간 좀 내줄 수 있어요? 할 얘기가 있는데.”

해완은 할 말을 찾지 못하고 머뭇했다. 약속이 있다고 거짓말이라도 해야겠다는 생각이 든 것은 그다음이었지만, 찰나의 기색이라도 주저하는 빛을 기민하게 잡아낸 인하가 고개를 갸웃하며 먼저 입을 열었다.

“나랑 만난 게 곤란하다는 얼굴이네요.”

“너무 갑자기 찾아오셔서……. 저도 제 일정이 있으니까요.”

“나도 약속을 잡고 오고 싶었는데, 어제 전화를 안 받길래요.”

“……일하느라 못 봤어요. 죄송해요.”

해완은 인하의 시선을 피하며 작게 중얼거렸다. 일하느라 못 봤다는 말 자체는 사실이었지만 전화를 다시 하지 않은 것은 의도적이었고 그것을 인하가 모를 일은 없어 보였다.

눈치가 빠른 사람이니 이쯤에서 물러나 줬으면 하고 속으로 간절히 바랐다. 그러나 인하는 그럴 생각은 없는 모양인지 단도직입적으로 다시 물었다.

“여강현 씨한테 거짓말하고 있는 거, 나한테 들켜서 날 피하는 거예요?”

정곡을 찌르는 말에 해완은 또 말문이 막혔다. 얼굴에 화끈 열이 오르는 것까지 느껴졌지만 애써 마음을 가라앉히고 침착히 답했다.

“……네.”

“…….”

“제가…… 앞으로 어떤 얼굴로 서인하 씨를 봐야 될지 모르겠어요. 죄송합니다.”

해완의 말에 인하는 웃음을 머금은 얼굴로 잠시 고개를 숙이더니, 어린애를 대하듯 다정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러면 더 내 연락 피하면 안 되는 거 아닌가? 내가 윤해완 씨 약점 잡고 있는 건데.”

해완은 살짝 숙이고 있던 고개를 저도 모르게 휙 치켜들었다. 생각지 못한 말에 입술마저 파르르 떨렸다. 마치 겁에 질린 사슴 같은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을 본 인하가 바람이 새듯 피식 웃음을 터트렸다.

“농담인데 뭘 그렇게 놀라고 그래요.”

“…….”

“내가 윤해완 씨한테 되게 평가를 낮게 받고 있는 모양이네. 그런 얼굴을 하는 걸 보니.”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라 해완은 자꾸만 땀이 배는 손을 쥐었다 폈다 하는 것만 반복했다. 인하를 믿기에는 그에 대해서 너무 몰랐고, 아무 일도 없었던 듯 굴기에는 해완이 도저히 그만큼 뻔뻔해질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아무튼, 오늘은 진짜 할 말 있어서 왔어요. 차라도 마시면서 천천히 할까 했는데 할 말만 하고 돌아가는 게 좋을 것 같네요.”

“하실 말씀이란 게…… 뭔데요?”

“나, 오늘 여강현 씨 만나고 왔어요.”

“네? 왜요?”

반사적으로 목소리를 높인 해완은 흠칫 입을 다물었다. 인하는 길고 섬세한 손가락으로 입매를 어루만지며 가볍게 대꾸했다.

“여강현 씨한테 내 페로몬 향수 조향을 맡기고 싶었거든요. 알아보니 예약이 꽉 차 있어서 어려울 것 같았는데, 갑자기 며칠 전에 작업이 가능하겠다고 연락을 주더군요.”

정말 그뿐이라는 듯 인하의 목소리는 태연했다. 하지만 그럴 리 없다는 직감이 들었다. 해완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해언이가 자주 이야기했었다고, 강현이를 알고 있느냐고 저한테 물어보셨었잖아요.”

그 말 뒤에 숨겨져 있는 질문을 인하는 역시 놓치지 않았는지 슬쩍 미소를 지었다.

“그랬었죠. 그리고 그때 윤해완 씨는 말을 흐렸었고.”

“…….”

“그래서 내 나름대로 방법을 찾아본 거예요. 뭐 나쁜 짓을 한 건 아니잖아요?”

“강현이를…… 왜 만나고 싶으셨던 건데요?”

그 말에 인하는 당연하다는 듯 대답했다.

“만나 보고 싶었거든요.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서요. 윤해완 씨가 궁금했던 것처럼.”

이야기의 중심을 교묘하게 비켜 가는 인하의 화법이 그렇지 않아도 예민해져 있는 신경을 긁었다. 해완은 울컥 말을 뱉었다.

“그래서, 어떤 사람인지 좀 알게 되셨나요?”

“그럴 리가요. 이제 겨우 한두 번 만났는걸요.”

“…….”

“아, 근데 한 가지는 확실하게 알겠더라구요.”

인하는 잠시 입을 다물더니, 해완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말했다.

“본질적으로 비슷한 사람들이더군요. 해언이랑 여강현 씨.”

인하의 말은 뜻을 알 수 없게 모호했으나, 이상하게 해완의 가슴을 서늘하게 가로질러 갔다.

잠시 멍해진 해완의 얼굴을 보며 인하는 예상하지 못했다는 듯 눈을 살짝 치켜떴다. 그러나 해완이 그게 무슨 뜻이냐고 물어보기 전에 인하가 먼저 입을 열었다.

“어쨌든 여강현 씨 만나고 왔다는 이야기를 해 주고 싶었어요. 나중에 알면 놀랄 것 같아서. 그게 다예요.”

“…….”

“날이 추운데 너무 오래 세워 뒀네요. 이만 헤어질까요?”

강현과 해언이 비슷한 사람이라는 게 무슨 뜻이냐고, 오늘 강현과 무슨 이야기를 했느냐고 캐묻고 싶었지만 무엇이든 답해 줄 것 같은 상냥한 겉모습과는 달리 인하에게서 원하는 답을 얻어 내기는 쉽지 않은 일이라는 걸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한 해완은 말을 삼키고 입술을 깨물었다.

“조심히 들어가세요.”

그에게 더 휘말리고 싶지 않아 고개를 꾸벅 숙여 보인 해완은 대답조차 듣지 않고 뒤를 돌았다.

“아 참, 해완 씨.”

불러 세우는 목소리에 멈칫 해완이 다시 뒤를 돌았을 때, 인하가 미소를 띤 얼굴로 말했다.

“내 연락 너무 피하고 그러지 말아요. 어차피 해언이 생일이 지나면 미국으로 돌아갈 거니까, 한국에 있을 날도 얼마 안 남았어요.”

해완에게도 일종의 데드라인이나 다름없는 해언의 생일을 언급하는 인하의 말이 그의 심장을 덜컥 내려앉게 했다. 해완은 급하게 입을 열었다.

“왜, 왜 해언이 생일까지 계시는 건데요?”

“해언이가 나한테 맡긴 중요한 일이 하나 있거든요.”

“그게 뭔데요?”

다급한 해완의 목소리에, 인하는 잠시 말을 멈췄다가 나직하게 말했다.

“그때가 되면 윤해완 씨도 알게 될 거니까 걱정 말아요.”

“네? 잠깐……!”

저를 붙들려는 해완은 아랑곳없이 인하는 그대로 차에 올라타 버렸다. 차가운 겨울 공기 안에 뿌연 연기를 내뿜으며 도로 속으로 멀어지는 차를, 해완은 허망하게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해완을 집으로 데려다주기 위해 운전을 하고 있는 강현의 얼굴은 별다른 기색 없이 평온하게만 보였다.

새로 오픈한 괜찮은 프렌치 레스토랑을 서연이 소개해 줬다며 간만에 밖에서 데이트를 한 날이었다. 어제 인하와 나눈 대화 때문에 해완은 저녁을 먹는 내내 강현의 눈치를 보고 있었으나, 그는 딱히 기분이 상해 보이지도 않았고 해완에게 할 말이 있는 것 같지도 않았다.

하지만 도무지 마음을 놓을 수가 없었다. 인하는 강현과의 만남이 별일 아니란 듯 이야기했지만 어떤 트러블이 있었던 게 아니라면 굳이 저를 찾아와 그 이야기를 꺼내지 않았으리라는 의심이 속을 긁어내리고 있는 탓이었다.

그래서인지 해완은 강현이 제집과는 다른 방향으로 운전하고 있는 것을 조금 늦게 알아차렸다. 잠시 주위를 두리번거린 해완이 아리송하게 물었다.

“강현아, 지금 너희 집 가는 거야?”

“내일 주말이잖아. 오늘 우리 집에서 자고 가라고.”

강현은 여상한 목소리로 답했다. 레스토랑에서 나올 때 아무 말이 없었기 때문에 다소 갑작스럽기는 했지만 그의 집에서 묵고 가는 것이야 이제 특별한 일이라고는 할 수 없어서 해완은 잠자코 고개를 돌리고 빠르게 스쳐 지나가는 바깥 풍경을 눈에 담았다.

강현의 집으로 들어서자 보리가 익숙하게 해완을 반겼다. 한참을 놀아 주고 나자 보리는 졸린 듯 거실 한구석에 있는 자신의 집에 들어가서 잠이 들었다.

“영화라도 볼까?”

자기에는 이른 시간이었기 때문에 강현이 가벼운 목소리로 물었다. 하지만 마음에 얹힌 생각이 사라지지 않았던 해완은 강현의 손을 잡고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 어제 서인하…… 아니, 인하 형 만났어.”

순간, 해완을 다정히 바라보던 강현의 얼굴이 감출 수 없이 굳는 것이 느껴졌다. 해완은 허둥지둥 말을 이었다.

“일부러 만난 거 아니야. 일 끝나고 집에 가는데 편의점 앞으로 찾아와서 아주 잠깐 얘기 나눴어.”

“……무슨 얘길 했는데?”

그렇게 말하는 강현의 목소리는 평소와 다를 바 없이 평온했지만 그의 손을 쥔 손가락 하나하나에 미묘하게 힘이 들어가는 것이 여실히 느껴졌다.

“네가…… 인하 형 페로몬 향수 조향을 맡기로 했다고 하던데.”

“…….”

“그래서 어제 만났다고. 다른 얘기는 없이 그 얘기만 했어.”

“…….”

“무슨 일 있었던 건 아니지?”

강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가면같이 매끄러운 얼굴로 무언가를 살피듯 찬찬히 해완의 표정을 훑어 내리기만 했다.

그러나 잠시 후, 강현의 입술이 둥글게 말려 올라갔다. 그는 한쪽 손을 올려 해완의 흐트러진 머리칼을 쓸어 넘겨 주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일 때문에 만난 거야. 별다른 일 없었어.”

“아…….”

그러자 강현이 갑자기 리모컨을 집어 들며 활달한 목소리로 말했다.

“영화는 뭐 볼까?”

“어? 그게…….”

갑작스러운 화제의 변화에 해완은 잠시 어리둥절해졌지만, 강현이 괜찮다는데 굳이 인하의 이야기를 끌어내는 것도 마뜩지 않아 잠자코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이번에 해완더러 영화를 고르게 했다. 강현에게는 미안한 일이지만 솔직히 말해 해완은 로맨스보다는 액션이나 모험 영화 같은 것을 훨씬 선호하는 편이라, 이전부터 재밌게 봤던 액션 프랜차이즈 영화 중 보지 못했던 가장 최근작을 골라 재생시켰다.

영화가 시작되자 강현은 해완의 어깨를 끌어당겨 제 품에 기대게 만들었다. 원래 좋아하던 시리즈였던 터라 얼마 지나지도 않아 해완은 금방 영화에 빠져들었다.

그런데, 단순히 제 어깨를 감싸고 있던 강현의 손이 어느 순간 예민한 해완의 귓가를 지분거리기 시작했다.

조금 간지러웠지만 영화를 보고 싶었던 해완은 애써 그것을 무시하고 있었는데, 그렇게 올라간 손이 입술을 문지르기 시작하자 저도 모르게 고개를 돌려 강현을 보았다.

하지만 강현의 시선은 일부러 그런 것이 아니라는 듯 TV 화면에 고정되어 있었다. 손가락 또한 입술에서 떨어져 나간 탓에 해완은 별다른 말을 하지 못하고 다시 영화로 시선을 돌렸다.

그리고 몇 분이 채 흐르기 무섭게, 강현의 손이 거듭 밑으로 내려가기 시작했다.

강현은 해완을 더욱 제 품 안으로 잡아당기며 가슴께로 손을 옮겼다. 느슨한 니트 위를 맴돌듯 쓰다듬던 그는 어느새 해완의 유두 위를 노골적으로 문질러 댔다.

“어…….”

성감대를 직접적으로 자극하는 손길에 해완은 당황한 듯 몸을 뒤로 빼려 들었지만 이미 반쯤 기대고 있었던 터라 오히려 더욱 품에 파고드는 꼴이 되었다.

그러자 강현은 고개를 숙여 해완의 목덜미를 입술로 애무하기 시작했다. 그는 예민한 목선을 따라 입을 맞추며 턱까지 올라가는 것과 동시에 옷 속으로 손을 넣어 봉긋 솟은 유두를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고 살짝 꼬집기까지 했다.

더는 영화를 볼 정신이 없었다. 해완은 고개를 옆으로 젖힌 채 눈을 감고 작게 숨을 할딱였다. 강현은 해완의 허리를 잡아당겨 그가 소파에 완전히 눕도록 유도하고는 부드러운 귓불과 그 뒤 오목한 부분까지 머금고 강하게 빨아들이는 짓을 반복했다.

살짝 몸을 일으킨 강현은 해완의 니트 끝을 잡고 그것을 위로 밀어 올려 벗기려 했다. 그러나 보리가 거실 한구석에서 잠들어 있는 것을 의식한 해완이 강현의 손목을 잡아 막았다.

“방으로 들어가서 하자. 응?”

강현은 해완의 시선을 따라 보리를 흘끗 보더니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여기선 아래에 손 안 대.”

“…….”

“그러니까 가만히 있어.”

그리고 강현은 다소 강압적으로 제 손목에 얹힌 해완의 손을 잡아 치우며 니트를 벗겨 소파 밑으로 떨어뜨렸다.

얼굴에 가까워지는 강현의 입술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살짝 벌렸지만, 그는 키스하지 않고 해완의 턱 끝을 살짝 깨물고 바로 쇄골에 입을 맞췄다.

그로부터 꽤 오랜 시간 동안, 강현은 해완의 살갗 곳곳을 맛보는 것에 공을 들였다. 마치 그가 사탕이라도 된 것처럼 핥고 깨물고 아플 정도로 빨아들이기를 반복하고 또 반복했다.

이런 식의 애무는 또 처음이라 어찌 반응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결국 해완은 강현의 뒷머리에 손을 가볍게 얹은 채 강현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물론 간지럽거나 깨물린 피부가 쓰려서 움찔거리는 것만으로도 강현이 바로 몸을 내리눌렀기 때문에, 조금이라도 몸을 빼거나 집요한 입술에서 떨어질 수도 없는 노릇이긴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자극이 더해지면 더해질수록 자기도 모르게 신음이 자꾸 새어 나오는 바람에 해완은 손등으로 자신의 입을 틀어막은 채 어쩔 도리 없이 끙끙댔다.

신음을 눌러 삼키는 해완의 모습을 본 강현은 그제야 상체를 완전히 일으키더니 해완의 팔을 잡아당겨 안아 올리고 소파에서 몸을 일으켜 침실로 걸어갔다.

벌써 몇 번이나 이렇게 안겨 들어갔는지. 해완은 강현의 단단한 어깨에 고개를 묻고 괜히 열이 오르는 볼을 숨기려 애썼다.

침대 위에 해완을 내려놓은 강현은 먼저 자신의 옷을 전부 벗었다. 가만히 앉아 있는 것도 왠지 민망해 해완도 자신의 손으로 바지와 속옷을 벗기 시작했다.

오렌지빛의 조명이 강현의 완벽하게 잘 다듬어진 나신을 타고 흘러내리는 모양을 보는 순간 새삼스럽게 심장이 두근거렸다. 강현이 침대 위로 올라와 벗은 피부가 닿자 해완은 떨리는 손을 뻗어 강현의 볼을 감싸고 입을 맞추려 했다.

그런데 그때, 강현은 해완의 입술이 가까워지지 못하도록 갑자기 사선으로 고개를 비켜 버렸다.

예상치 못한 노골적인 거부에 당황한 해완이 멈칫 눈을 깜빡였다. 그에 아랑곳없이 강현은 해완의 가슴을 밀어 침대에 눕게 하더니 다리를 밀어 벌리게 하고 그 사이에 자리를 잡았다.

그리고 강현은 해완의 허벅지를 강하게 움켜쥔 채 구멍에 성기를 맞추고 한마디 말도 없이 곧바로 밀어 넣기 시작했다.

“아윽……!”

소파에서의 애무로 젖어 있기는 했지만 일방적인 삽입에 해완은 인상을 찡그리며 아픈 신음을 뱉었다. 그러나 강현은 시선을 밑으로 내린 채 그저 두꺼운 좆이 타이트한 구멍 사이로 사라지는 모습만 집요하게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이미 충분히 흥분해 있던 상태였음에도 불구하고 강현의 태도가 평소와 다르다는 것을 느끼자마자 해완의 몸은 바싹 굳어 버렸다.

그것을 고스란히 느꼈는지 강현의 미간이 찡그려졌다. 그러나 그는 서두르지는 않았다. 해완이 긴장할 때면 늘 그랬듯 해완의 성기를 잡고 문질러 주며 참을성 있게 거친 음모가 엉덩이에 닿을 때까지 허리를 앞으로 밀었다.

아랫배 깊은 곳에서 올라오는 쾌감과 혼란스러운 마음 사이에서 해완은 어쩌지도 못하고 숨만 헐떡였다.

뿌리까지 다 밀어 넣은 강현이 숨을 크게 몰아쉬더니 해완의 얼굴 양옆에 팔뚝을 대고 몸을 낮춰 엎드렸다. 해완은 한 번 더 강현에게 키스를 하려 해 봤지만 이번에도 강현은 해완의 입술을 무시하고 그의 얼굴 옆에 고개를 묻은 채 거세게 허리를 움직였다.

강현이 두 번이나 키스를 피했다는 사실에 이상하게 코끝이 찡해져서, 해완은 팔을 들어 강현의 어깨를 꼭 감싸 안고 매달리며 흔들렸다. 그렇게 느껴지는 온기로 서운한 마음을 위로할 생각이었다.

그런데 그때 해완의 팔을 떨쳐 내며 몸을 일으킨 강현이 해완의 몸에서 단번에 빠져나왔다. 그는 해완의 허리를 잡고 엎드리게 만들고는 강하게 당겨 손과 무릎으로 버티는 자세를 취하게 하더니 그대로 뒤에서부터 곧바로 삽입했다.

“아, 처, 천천히……!”

해완의 입에서 자기도 모르게 새어 나온 떨리는 목소리에도 강현은 거의 단번에 뿌리까지 성기를 밀어 넣고는 숨을 고를 새도 주지 않고 바로 박아 대기 시작했다.

이런 자세는 강현과 처음으로 관계를 가졌을 때 이후로 해 본 적이 없었다. 오로지 아프기만 했던 그때와는 달리 지금은 쑤셔 박히는 좆이 강한 쾌감 또한 불러일으켰다.

하지만, 사정없이 박아 대는 움직임에 고통과 쾌감이 섞여 정신이 흐려지는 와중에도 해완은 뭔가 잘못됐다는 생각을 지울 수가 없었다.

그럼에도 버티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이 없어, 목 깊은 곳에서 흐느끼듯이 올라오는 신음을 해완은 시트에 얼굴을 비비며 간신히 참아 냈다. 살갗과 살갗이 부딪치며 나는 철썩이는 소리가 침실 안을 요란하게 울렸다.

그런데 갑자기 몸이 위로 홱 들렸다. 깜짝 놀란 해완이 힉, 하고 숨을 뱉었다.

거칠게 해완의 몸을 끌어 올린 강현은 그의 허리와 가슴을 감싸 안고 무릎을 세우고 앉게 만들더니 꼿꼿하게 서 선액을 흘리고 있던 해완의 좆을 손에 쥐고 거칠게 흔들며 허리까지 거세게 쳐올리기 시작했다.

“아! 흐읏! 아!”

앞뒤로 오는 강렬한 자극에 해완은 고개를 뒤로 휙 젖히며 높은 신음을 뱉었다. 저도 모르게 앞으로 빼려는 몸을 강압적으로 끌어안아 버티게 만든 강현은 해완의 목덜미와 어깨 사이에 입술을 깊게 묻고 퍽퍽 소리가 날 정도로 마른 몸을 쳐올렸다.

“으응! 아, 안 돼, 아, 아아!”

앞과 뒤를 동시에 자극하는 쾌감이 숫제 고통처럼 느껴져서, 해완은 제 허리를 옭아맨 강현의 팔을 떼어 내려 애쓰며 비명같이 신음했다.

그러나 강현은 꿈쩍도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완의 목덜미를 물어뜯는 것처럼 깨물며 무엇 하나 멈출 생각이 없어 보였다.

결국 해완은 전기에 감전된 것처럼 경련을 일으키며 강현의 손 안에서 절정에 달했다. 강하게 수축하는 해완의 몸에 욕설을 내뱉은 강현은 해완의 등을 밀어 엎드리게 만든 뒤 목덜미를 처박듯이 쥐고 몇 번 더 박아 대고는 해완의 깊숙한 곳에 그대로 사정했다.

사정을 하고도 구멍 안에 있는 성기가 여전히 단단하게 꿈틀대는 것이 버거워, 해완은 전에 없이 몸을 심하게 벌벌 떨었다.

숨을 고르려 해 봤지만 거친 섹스에 몸이 잘 진정되지 않았다. 그럼에도 강현이 구멍에서 좆을 빼 주질 않아 해완은 할딱이며 입을 열었다.

“강현아, 이제 그만…….”

그때 강현이 해완의 골반을 다시 고쳐 쥐는 것이 느껴졌다. 슬쩍 뒤로 밀려나는 성기에 멍한 머리로 이제 빼려나 보다, 라고 생각한 순간, 강현은 그대로 힘을 주어 다시 뿌리까지 밀어 넣었다.

“응, 아!”

해완은 양손에 시트를 구겨 잡으며 반사적으로 신음했다. 오르가슴 직후 극도로 민감해져 있는 내벽에는 너무 큰 자극이라 몸이 감전이라도 된 듯 앞으로 확 튀었지만 강현이 골반을 단단히 잡고 있는 바람에 움직일 수가 없었다.

“응, 그만, 그마안…….”

손을 뒤로 뻗은 해완은 강현의 단단한 허벅지를 밀어 내려 허우적댔으나 무의미한 노력이었다. 오히려 그 힘없는 몸짓이 그를 더욱 자극하기라도 한 것처럼 강현은 해완의 골반을 더욱 강하게 움켜쥐고 이전처럼 퍽퍽 쳐 대기 시작했다.

“아, 아파!”

이제는 고통이 앞서는 자극에 해완은 마구 몸을 뒤틀었다. 도대체 강현이 왜 이러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그를 더욱 괴롭게 했고, 그는 울먹이며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제발, 제발 그만해, 싫어, 이거 싫어…….”

그런데 해완이 ‘싫다’는 말을 입에서 뱉자마자 강현은 움직임을 뚝 멈췄다.

겨우 멈춘 자극에, 해완은 반사적으로 어떻게든 버거운 좆을 제 구멍에서 빼내려 몸을 비틀며 무릎으로 앞으로 기기 시작했다. 그런 해완의 목을 강현이 처박듯이 매트리스에 내리누른 것이 바로 그다음이었다.

강현은 전신을 사용해 해완의 몸을 엎드려 눌렀다. 내외부에서 가해지는 견디기 힘든 압박감에 해완이 정신없이 고개를 도리질 치며 아프다고 소리치려던 순간.

“왜, 그 남자가 했던 것만큼 내가 널 만족 못 시켜 줬어?”

이 침대 위에서 처음으로 입을 연 강현의 끓어오르는 목소리가 들려왔고, 해완은 그대로 굳어 버렸다.

“무슨, 무슨 소리야, 그게?”

해완은 정신없이 대답했다. 그러자 강현은 해완의 귓가에 대고 으르렁대며 중얼거렸다.

“그래서 계속 만났던 거야? 같이 살기까지 했던 그 남자 좆이 그리워서? 진작 말을 하지 그랬어. 그런 줄 알았더라면 내가 더 많이 노력했을 텐데.”

“그게 무슨……. 그런 거 정말 아니야. 네가 뭔가 오해를 한 거야.”

갑작스럽게 쏟아지는 모멸적인 말들에 온몸이 차게 식은 해완은 강현이 보지 못하는 것을 알면서도 고개를 저었다. 어떻게든 이야기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몸을 일으키려고 했지만 강현은 해완의 몸부림을 무시하고 다시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아, 아아! 아윽! 으읍!”

몸이 짓눌린 채 내벽에 마구 내리꽂히는 성기에 쾌감보다는 고통이 앞서기 시작한 나머지 해완은 젖은 신음을 흘리며 시트에 얼굴을 묻었다.

어느새 눈에서 흘러내리기 시작한 눈물이 시트에 젖은 자국을 남겼다. 제 의사를 넘어선 관계를 지속하고 있다는 사실보다 방금 들은 강현의 말이 더욱 아파 해완은 이를 악물고 빨리 모든 게 끝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런데, 어딘가 이상했다. 강현이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이미 버거우리만치 안을 꽉 채우고 있던 좆이 조금씩 부푸는 것처럼 느껴졌다.

있을 수 없는 감각에 뭔가 잘못된 게 분명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락 겁이 난 해완은 반쯤 공황 상태에 빠져 손을 뒤로 뻗어 강현의 몸을 마구 밀치고 때리며 횡설수설 애원하기 시작했다.

“가, 강현, 강현아, 나 몸이 이상해. 잠깐…….!”

그때, 짐승같이 거친 신음을 뱉은 강현이 그대로 쓰러지듯 엎어지더니, 삽입한 채로 해완의 몸을 끌어안고 옆으로 돌아누웠다.

순간, 해완은 깊숙이 박힌 성기가 확연히 부풀어 오르는 믿을 수 없는 느낌에 눈을 크게 뜨며 입을 크게 벌렸다.

“아, 아아…….”

강현의 좆을 받아들일 때마다 더 이상 벌어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해 본 적도 없는 구멍이 한계치까지 늘어나는 것이 느껴졌다. 비명을 지르려고 입을 열었지만 바람이 새는 소리 말고는 어떤 소리도 나오질 않아 해완은 강현의 품 안에서 도리 없이 부들부들 떨기만 했다.

그러나 다음 순간, 뒤가 엉망으로 찢어질 것 같은 공포가 해완을 급작스레 사로잡았다.

“빼……. 빼 줘! 이거 빼 줘, 아파, 아파아…….”

해완은 급기야 울음을 터트리며 몸부림쳤지만 강현은 아랑곳없이 온몸으로 그를 내리누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아픔에 못 이겨 손가락 가득 시트를 움켜쥐고 있던 해완의 손을 거칠게 잡아채 납작한 아랫배 위로 불룩 솟아 있는 무언가에 가져다 대더니 쉰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말해 봐. 그 새끼가 널 이렇게 깊게 쑤셔 박아 준 적 있어? 널 이렇게 노팅해 준 적 있냐고.”

노팅. 온통 흐려져 버린 정신에 그 단어가 간신히 박혀 들어왔다.

크게 열린 눈에서 생리적인 눈물이 줄줄 흘러내렸지만, 해완의 뒤에 고개를 묻고 있는 강현은 그것을 알지 못했다.

노팅이 지속되는 10여 분간 강현은 해완의 목뒤를 깨물고 빨아 올리는 짓을 하거나, 납작한 아랫배에 불룩 튀어나온 곳을 아플 정도로 힘을 줘서 손으로 눌러 대곤 했다.

그동안 해완은 저항을 멈추고, 그저 죽은 사람처럼 가만히 강현에게 안겨만 있었다.

구멍을 찢을 것처럼 벌려 놓았던 성기가 겨우 원래대로 가라앉은 후 해완의 몸에서 빠져나간 강현은 이전에도 그랬듯 해완의 한쪽 다리를 잡아 벌리고 그 사이를 반쯤 풀린 눈으로 들여다보았다.

그때까지도 해완은 강현이 제 몸을 마음대로 하게 두다가, 그가 다리를 놓아주자 느릿하게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문질러 닦고는 부들거리는 몸을 일으켜 바로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뎠다.

한마디 말도 없이 침대 밖으로 나가려는 움직임에 강현이 그의 팔을 잡은 순간, 해완은 팔을 크게 휘둘러 그 손을 떨치고 퍽 소리가 나도록 강현의 가슴을 밀쳐 냈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뒤로 밀쳐진 강현은 손을 뒤로 뻗어 간신히 균형을 잡았다. 그런 강현을 새빨갛게 달아오른 눈으로 노려보며, 해완이 악문 잇새로 말했다.

“하지 말라고…… 하지 말라고 했잖아.”

강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런 해완을 흐트러진 머리칼 사이로 건조하게 바라보았다. 가슴 깊은 곳에서 치밀어 오르는 울음을 참아 내려 입술을 꽉 깨문 해완은 다리 사이로 흘러내리는 액체를 느끼며 속옷과 바지를 챙겨 입고 방문을 나섰다.

해완이 문을 벌컥 열고 나오는 소리에 잠에서 깼는지 보리가 부스스한 얼굴로 다가왔다. 그러나 낑낑대며 제 곁을 맴도는 보리를 무시한 해완은 거실 소파 밑에 떨어져 있는 니트를 입고 코트와 가방을 움켜쥔 채 그대로 현관으로 걸어갔다.

그때까지도 강현은 방문 밖으로 나올 생각도 하지 않고 있었다.

다행히 해완이 현관 밖으로 나오자마자 엘리베이터 문은 곧바로 열렸다. 재빨리 안에 탄 해완은 닫힘 버튼을 미친 듯이 연속해서 눌렀다.

지독히도 길게 열려 있는 듯 느껴졌던 문이 닫히고 온전히 그 안에 혼자 남겨진 순간, 간신히 고여 있던 눈물이 후드득 아래로 쏟아져 내렸다.

이미 대중교통이 끊긴 늦은 시간이라 택시를 잡아야 할 터였으나 그런 생각조차 하지 못하고 해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면서 내내 차가운 밤길을 걸었다.

조금도 준비되지 않은 상황에서 겪은 무리한 노팅 때문에 하반신이 온통 쓰리고 아팠지만 그것 때문에 울고 있지는 않았다. 지금 해완이 울고 있는 것은, 강현이 제게 한 행동이 순수한 애정에서 비롯된 게 아니라는 데서 느낀 모멸감이었다.

그리고 강현이 제게 그런 짓을 한 건 인하와의 만남 때문일 것이라는 직감이 들었다. 인하가 강현에게 해언과 같이 살았다는 이야기를 했고, 그게 강현을 자극해서 그렇게 거칠게 굴었으리라고 말이다.

억울했다. 내가 안긴 사람은 너뿐이라고, 다른 사람과는 노팅은커녕 입맞춤조차 해 본 적 없다고, 그러니 그런 이유로 날 이렇게 대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고 싶었다.

아니, 아니었다.

다른 사람은 이렇게 사랑해 본 적조차 없다고, 그렇게 말해야 했다.

그러나, 거기까지 떠올린 해완은 걸음을 멈췄다.

그런 말은 아무런 의미도 없을 터였다.

왜냐하면 강현이 질투한 ‘진짜’ 대상은 제가 아닌 해언이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결국 저 자신을 옳지 못한 이유로 함부로 대해지도록 전락시킨 것은 결국 스스로가 저지른 잘못의 결과나 다름없었다.

“흑, 흐윽…….”

아무도 없는 길가에서도 소리 내어 울지 못하던 해완의 입가에서 억눌린 흐느낌 소리가 끝내 새어 나왔다.

해완은 얼굴을 가린 채 끅끅대며 울었다. 가슴이 너무 아파서, 눈물이 멈추지를 않았다.

* * *

해완이 그의 집을 떠나고 한참이 지날 때까지 강현은 침대 위에서 동상처럼 멍하니 굳어 앉아 있었다.

서인하와 만났던 자리에서 느꼈던 분노를, 모두 잊었다 생각했었다. 그때까지 강현에게 감정이란 그런 것이었다. 대부분의 것은 견고하게 굳은살이 앉은 마음의 표면 위로 오르지도 못했고, 설사 솟아오른다고 하더라도 불에 물을 끼얹듯이 금세 그 기세를 잃어버리고 초라하게 사라져 버렸다.

그런데 해완의 입에서 인하의 이야기를 듣는 순간, 사라졌다고 생각한 분노가 급격하게 치솟아 올랐다. 대체 어디에 숨어 있는지도 몰랐기에 너무나 놀라고 당황스러운 나머지 어떻게든 그것을 내리눌러야 한다는 심한 강박이 순식간에 그를 지배했다.

방법이야 이미 알고 있었다. 전에 비슷한 일이 이미 있었으므로, 윤해완을 샅샅이 안고 지칠 때까지 범해서 그의 안에 꽉 들어차도록 제 흔적을 남기면, 모두 가라앉을 것이라고 생각했다.

하지만 그런 생각은 하나도 들어맞지를 않았다.

해완은 늘 그렇듯이, 강현이 하자는 대로 순종적으로 자신을 열어 보였다. 힘들고 버거워하면서도 그의 손길을 거부하는 일은 없었다.

그런데도 부족했다. 그런데도 제 것 같지가 않았다. 이미 해완은 제게 모든 걸 다 준 것 같은데, 대체 이 이상 그에게 뭘 더 요구해야 될지 모른다는 게 강현을 더욱 미치게 만들었다.

그래서 윤해완이 내뱉은 싫다, 라는 말이 눈을 반쯤 돌게 했는지도 모른다.

그의 인생에서 이제껏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감정의 해일이 강현을 덮쳤다. 금방이라도 숨이 차서 죽어 버릴 것만 같은 느낌에 휩싸여 말과 마음 그 무엇도 통제를 할 수가 없었다.

이런 식으로 폭발한 경험이 아예 없지는 않았다. 실패한 화학 실험처럼 분류가 되지 못하고 뒤섞인 감정들은 흔히 걸맞지 않은 분노의 형태로 제멋대로 표출되기 마련이었으니까.

문제는, 그를 폭발하게 만든 그 격류 이후에 느낀 감정이 이전과는 다르다는 것이었다.

그 결과가 어땠든지 간에 그런 식으로 한번 감정의 해소를 하고 나면 강현은 허탈함과 비슷한 무감각함을 느꼈다. 그것은 어떻게 보면 일종의 안정감과도 가까웠다.

그러나 저를 밀쳐 내는 해완의 떨리는 손을 느낀 순간, 새하얗게 질려 눈물에 젖은 얼굴에 서린 배신감을 읽은 순간 강현은 평소의 둔하고 흐리기만 한 감정 대신 이전에는 겪어 보지 못한 시리도록 선명한 어떤 감정의 형태가 마음을 싸늘하게 스치는 것을 느꼈다.

강현이 이성을 잃게 만들었던 것은 서인하에 대한 질투도, 윤해완에 대한 독점욕도 아니었다.

그것은 공포였다. 윤해완을, 누군가에게 빼앗길지도 모른다는 공포.

두려움은 강현이 느낄 수 있는 몇 안 되는 확실한 감정이었다. 그러나 지금 느끼는 것은 그가 생각조차 해 보지 않은 시초에서 솟아났기에, 낯설고 혼란스러워 어쩔 줄 몰랐다.

이 감정을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몰라 강현은 천천히 허리를 수그렸다. 온몸을 옹송그린 채 두 손으로 머리칼을 쥐어뜯다가, 손을 밑으로 내려 목덜미와 가슴팍을 힘을 주어 한참을 긁고 생채기를 냈다.

아무리 그렇게 긁어내도, 피부 밑에서 벌레가 기어가는 듯한 지독한 가려움은 좀처럼 사라지지 않았다.

* * *

미련하게 추운 길을 오래 걸어서 그랬는지 다음 날 해완은 결국 병이 났다. 가벼운 몸살이었던 지난번과는 달리 목구멍이 불타는 듯 아프고 기침이 심한 것이 감기에 걸린 모양이었다.

그나마 일을 할 필요가 없는 주말이었기에 오래전 사 둔 종합 감기약을 먹고 이불 아래서 하루 종일 잠을 잘 수 있었다. 유준은 친구 집에서 자고 오겠다며 주말 내내 들어오지 않았는데, 최근 들어 다시 밖으로 나돌기 시작한 유준을 걱정하던 해완이었지만 오늘만큼은 병을 옮길 걱정을 하지 않아도 돼서 다행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일요일 오후가 되어서야 간신히 열이 떨어진 해완은 비척이며 몸을 일으켜 화장실 안으로 들어갔다. 아직 성치 않은 몸으로 이가 부딪칠 정도로 추운 욕실에서 샤워를 하는 게 썩 좋은 생각은 아닐 것이나, 토요일 새벽 집에 들어왔을 때는 너무나 지쳐 강현이 남긴 흔적만 닦아 내는 게 고작이었기에 앓느라 흘린 땀으로 끈적이는 몸이 불쾌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

온수를 틀어 두고 옷을 벗은 해완은 무심코 거울을 봤다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벗은 나신을, 붉은 꽃잎 같은 울혈들이 엉망으로 물들이고 있어서였다.

지난밤에는 강현이 뭘 하고 있는지도 제대로 몰랐던 터라 더욱 당황스러워, 해완은 추위도 잊고 상반신 곳곳에 남은 자국들을 손으로 문질렀다.

손이 스치는 곳곳마다 그 위를 집요하게 빨아들이던 강현의 입술 감촉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싸늘한 공기에 몸이 덜덜 떨려 올 때까지 잠시 넋을 놓고 있던 해완은 생각을 지우기 위해 따듯한 온수를 얼른 몸 위에 끼얹고 씻기 시작했다.

빨리 나으려면 뭔가를 먹어야겠다는 의식은 있었지만 집에 먹을거리가 하나도 없었다. 그러나 장을 보기에는 샤워를 채 마치기도 전에 으슬으슬하게 느껴지는 몸에 다시 이불 속으로 들어갈 수밖에 없었다.

처음에는 무심코 오른쪽으로 누웠지만 수술을 받은 부위가 욱신거리는 바람에 해완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며 반대로 돌아눕고는 목덜미를 주물렀다.

원래 몸이 약했던 해언과는 달리 어릴 때부터 잔병치레라고는 모르고 컸는데, 지금은 약골같이 겨울에 감기를 달고 사는구나 하는 씁쓸한 상념이 들었다.

문득 아차 싶어진 해완은 핸드폰을 들어 캘린더를 확인했다. 깜빡 잊고 있었는데 이식 수술 경과를 살피는 정기 검사가 벌써 다음 주 화요일로 다가와 있었다.

의사에게 검사 결과를 듣는 진료일은 3일 뒤 금요일이었는데, 결과에 대한 걱정보다도 강현이 파리로 출장을 가기 이틀 전이구나 하는 생각이 반사적으로 따라붙은 해완은 핸드폰을 내려 두고 답답한 한숨을 내쉬었다.

오늘만큼은 되도록 강현과 관련된 생각을 하고 싶지 않았는데. 이제는 강현과 아무 상관 없는 일에도 그의 자취가 따라붙는구나 싶어 마음이 아려진 탓이었다.

돌아가는 길에 한 번, 그리고 어제 앓고 있을 때 한 번 걸려온 전화를 해완은 모두 받지 않았고, 그 뒤로 강현에게서 다른 연락은 없었다.

그 버스 정류장에서 강현이 자신을 해언이라고 믿게 만든 이후 매일을 가시밭길을 걷는 기분으로 지냈지만 어제 겪은 일은 해완을 전에 없이 혼란스럽게 만들었다.

강압적인 관계에서 받은 상처도 상처였지만, 무엇보다 해완에게 괴롭게 다가왔던 것은 잘못된 분풀이를 받는 물건 같은 취급에도 불구하고 강현에게 이해받고 싶은 그 자신이었다.

강현이 저에 대해 오해를 가지고 있는 것만으로도 이렇게 아픈데, 나중에 진실이 밝혀지고 그가 해완에게 가지게 될지도 모르는 증오의 크기를 어떻게 감당해야 할지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더는 묻지 않을 거야.’

‘네가 윤해언이 아니라면, 지금 아니라고 말해.’

‘그러면 네가 바란 대로 두 번 다시 네 앞에 나타나지 않을 거고, 아니면…….’

그 버스 정류장에서 강현이 그렇게 말했을 때, 해완은 피를 토하는 마음으로 강현의 곁에 있을 수 있는 아주 약간의 시간만 더 가지고 싶다고 생각했었다.

그 기억 하나면, 나중에 영영 강현을 보지 못하게 된다고 해도 괜찮을 것이라고.

그렇게 자신을 속여 왔었다.

하지만 해완이 강현의 곁에 있는 내내 바랐던 것은 그게 아니라는 걸 어제야 깨달은 것이다.

아무리 그가 자신을 해언이라고 오해하고 있다고 해도, 그렇게 함께 지내는 시간 가운데 강현이 진짜 윤해완이라는 사람에 대해 작은 애정이라도 가져 줄지 모른다고.

그래서, 어쩌면 모든 사실을 말해도 저를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고.

사랑까지는 아니더라도, 진짜 해완의 이름을 부르고 인사 한 번쯤은 건네줄지 모른다고.

그런 이기적인 생각에서였다.

사랑이 죄책감을 앞서 깊어질 것이란 걸, 왜 미처 생각하지 못했을까.

낡고 지저분한 벽지 어딘가를 헤매고 있던 해완의 눈에서 소리 없는 눈물이 한 방울 흘러 내렸다. 해완은 뚝뚝 떨어지는 눈물을 무시한 채 몸을 작게, 작게 웅크렸다.

이미 충분히 익숙해질 만큼 드나든 곳임에도 불구하고, 온갖 사람들이 정신없이 오가는 대학 병원은 내원할 때마다 낯선 곳에 뚝 떨어진 듯한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검사 시간이 오전이었기 때문에 편의점에는 양해를 구하고 유준을 대타로 보내 놓은 터였다. 접수를 하고 피를 뽑은 뒤 CT도 찍어야 했던 터라 오갈 곳이 많아 해완은 바쁘게 움직였다. 상담에 비해서 검사는 그나마 기다리는 시간이 딜레이 되는 일은 많지 않아 다행이었지만, 아직 컨디션이 좋지 않은 데다 피 검사 때문에 어제저녁부터 내내 굶었던지라 빨리 끝내고 뭐라도 먹으러 가고 싶었다.

다행히 검사는 예상한 시간보다도 빨리 끝나, 병원 문을 나서자 시간은 겨우 낮 12시 즈음이 되어 있었다.

길을 건너기 위해 신호등 앞에 멈춰 선 해완은 싸늘한 공기를 깊게 들이마시며 하늘을 잠시 올려다보았다.

평일 낮에 여유로운 시간을 보낸 것이 언제쯤이었는지 기억도 나질 않았다. 레스토랑에서 일을 할 때는 물론이고 해언이 곁에 있을 때, 그리고 수술을 받은 이후에도 늘 아등바등 해야 할 일에 치여서 바빴으니까.

강현과 만나게 된 이후 일을 줄여 생긴 여유 시간에도 항상 강현을 만났기 때문에 이렇게 혼자 있는 것은 정말 오랜만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괜히 마음이 아려서 해완은 신호등 불빛이 초록불로 바뀌자마자 바쁘게 걸음을 옮겼다. 원래 오늘 하루는 유준에게 온전히 아르바이트를 맡길 생각이었지만, 그냥 제가 가서 일을 하는 편이 나을 듯싶었다.

버스를 타면 해완이 사는 동네까지는 30분 정도가 걸렸다. 곧바로 편의점으로 갈까 생각도 해 봤지만, 아무래도 집에서 빈속을 채우고 가야겠다는 생각이 든 해완은 정류장에서 내려 터벅터벅 좁은 골목 안으로 향했다.

그때, 누군가 뒤에서 해완의 어깨에 손을 얹었다. 소스라치게 놀란 해완이 뒤를 돈 순간, 제 뒤에 서 있는 강현의 얼굴이 눈에 들어왔다.

이 자리에서 오래 기다리기라도 했는지 강현의 귀가 붉었다. 갑작스러운 강현의 등장에 놀라 잠시 그를 바라보기만 하던 해완은 그때까지도 강현의 손이 어깨에 얹혀 있는 것을 의식하고 슬쩍 뒤로 물러섰다.

작지만 명백한 거부의 몸짓에 강현의 얼굴이 딱딱하게 굳었다. 그러면서도 집요하게 따라붙는 눈을 피해 시선을 내리깐 해완이 작게 중얼거렸다.

“여기서 뭐 하는 거야?”

“……널 기다렸어.”

“…….”

“처음에 먼저 편의점에 갔는데 그곳에 네가 없어서……. 유준이는 네가 어딜 갔는지 자기도 모른다고만 하고, 그래서 여기서 기다린 거야.”

“전화 먼저 하지 그랬어, 그럼.”

“안 받았잖아, 네가.”

“…….”

“두 번이나.”

제 탓이라도 하는 것 같은 말에 쓴웃음이 나왔다. 속에서 끓어오르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심호흡을 한 해완은 여전히 강현의 얼굴을 외면한 채 딱딱하게 말했다.

“그래서, 날 기다려서 뭘 하려고 했는데?”

단순한 질문이었음에도 강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침묵이 지배하는 시간은 고작 몇 초의 간격도 지옥같이 길게 느껴졌다. 햇살은 좋았으나 유달리 바람이 차가운 날이라 바람이 얼굴에 스칠 때마다 칼에 베이는 듯 따가웠고, 오랜 시간 아무것도 먹지 못한 속은 바늘로 찔리는 것처럼 계속 따끔거렸다.

강현과 함께 있으며 제발 그가 먼저 가 주기를 바란 것은 처음이었다. 하루의 절반도 지나지 않았는데 너무나 지친다는 생각에 해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그런데 문득, 강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모르겠어.”

그리고 그것은 왠지, 꼭 어린아이가 말하는 듯 들렸다.

고집스럽게 바닥을 응시하던 해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그런 말을 하는 강현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뭘 해야 되는지 모르겠는데…… 그냥 널 만나야겠다는 생각만 들었어.”

별것 아닌 말이었다. 누군가 들으면 아무 의미가 없는 말이라고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런데 그런 말을 하는 강현의 얼굴이 너무 괴롭게 일그러져 있어서, 그리고 그 일그러진 얼굴이 이유도 알 수 없게 깨질 듯 연약하게 보여서, 해완은 말문을 잃은 채 언젠가부터 어둡다기보다 투명하게 느끼기 시작한 까만 눈동자를 바라보았다.

그때 문득, 강현의 턱선 밑에 죽죽 그어진 붉은 줄이 해완의 눈에 들어왔다.

그와 동시에 뇌리를 스쳐 지나가는 기억의 조각에 인상이 절로 찡그려졌다. 한번 망설이지도 않고 성큼 앞으로 발을 내디딘 해완은 강현의 터틀넥 끄트머리를 잡고 아래로 쭉 끌어 내렸다.

난데없는 행동에 강현은 당황한 듯 뒤로 물러서려 했지만 이미 그의 목덜미에 긁어내린 흔적이 분명히 남은 것을 확인한 해완은 입술 한쪽을 강하게 깨물었다.

해완은 그대로 강현의 손을 잡고 삐걱대는 낡은 철문을 열고 자신의 집으로 걸어 들어갔다. 영문을 알 수 없는지 잡혀 있는 손목에 어린 긴장이 느껴졌지만 아랑곳하지 않았다.

집 현관문을 열고 강현을 밀어 넣은 해완은 막무가내로 강현의 코트를 벗기고 곧바로 상의의 소매에 손을 댔다.

“잠깐……!”

코트를 벗길 때까지만 해도 얼떨떨하게 해완이 하는 대로 두던 강현은 해완이 자신의 팔뚝을 보려 하자 그의 손목을 잡으며 막으려 들었다. 그렇게 가벼운 실랑이 끝에 두 사람은 엉기듯이 현관에 털썩 주저앉기까지 했는데, 그 와중에도 해완은 끝내 강현의 한쪽 소매를 팔뚝까지 길게 밀어 올리고야 말았다.

예상한 대로 단단한 팔뚝에 스스로 긁어내린 붉은 생채기가 가득했다. 잠시 그것을 바라보던 해완은 다른 쪽 팔뚝까지 걷어 올려 확인한 뒤 니트를 이리저리 잡아 내리며 강현의 목덜미와 쇄골 부근도 심하게 긁은 상처들로 엉망인 걸 눈에 담았다.

거실에는 햇볕이 거의 들지 않아 현관문 불투명 유리에서 스며드는 희미한 빛이 전부였지만, 그럼에도 해완의 눈가에 스며든 붉은 기운이 선명했다.

그런 해완을 향해 강현이 필사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가려워서…… 가려워서 그런 거야.”

“…….”

“정말이야.”

해완은 눈물이 글썽한 채 강현의 가슴팍에 손을 올리고 고개를 끄덕였다.

해언이 보낸 그 수목원에서 9년 만에 강현을 다시 보았을 때, 해완은 그가 아주 많이 달라졌다고 생각했었다.

외모나 향, 혹은 그가 시력을 되찾았다는 사실이 그렇게 여기게 만들지는 않았다. 다시 만난 강현에게서는 해완의 첫사랑이었던 그 소년이 지니고 있던 지독한 외로움이 조금도 엿보이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게 얼마나 잘못된 생각이었는지, 지금 해완은 너무나 뼈저리게 느꼈다.

그 소년은 아직도 그 자리에 앉아 있는 것이다.

누구도 찾아오지 않는 그 벤치에서, 희뿌연 세상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지금의 강현 그 자신도, 들여다볼 생각을 하지 않는 그곳에서 혼자.

해완의 고운 얼굴선을 타고 길게 눈물이 흘러내렸다. 강현이 손을 들어 그것을 닦아 내며 물었다.

“내가 싫어서 우는 거야?”

“뭐?”

“내가 어제 너한테 그렇게 해서…… 그래서 내가 싫어져서 우는 거야?”

아니었다.

자기 자신, 혹은 다른 사람을 상처 입히는 방식으로밖에 감정을 표현할 수 없는, 스스로의 외로움을 보듬을 줄 모르는 네가 불쌍하고 가여워서, 그래서 우는 것이었다.

하지만, 해완은 말 대신 팔을 들어 강현의 목덜미를 강하게 끌어안았다. 어찌해야 될지 모르겠다는 듯 강현은 팔을 어정쩡하게 두었다.

“안 미워.”

“…….”

“안 싫어.”

“…….”

“절대로…… 안 그럴 거야.”

곱슬진 머리칼을 쓰다듬으며 해완이 다정하게 속삭이자, 그제야 강현은 머뭇거리며 해완의 허리를 마주 안아 왔다.

한동안 젖은 눈으로 강현의 어깨에 고개를 묻고 있던 해완이 고개를 들어 강현과 시선을 맞췄다.

강현의 상처만 감싸 안을 수는 없었다. 다친 자신의 마음도 위로를 받아야 했다. 그리고 그것을 위한 아주 단순한 방법은 얼마든지 가르쳐 줄 수 있었다.

“난 네가 여기 왜 왔는지 알아.”

“…….”

“나한테 미안하다고 하려고…… 그래서 온 거야.”

“…….”

“미안하다고 해. 나한테.”

해완은 강현의 볼을 어루만지며 자상하게 말했다. 강현은 그런 해완을 바라보며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말을 처음 배우는 아이처럼 그를 따라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미안……해.”

“잘못했다고, 다신 안 그러겠다고 해.”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그럼 됐어.”

“…….”

“용서해 줄게.”

정말 그것만으로 충분했다. 해완은 다시 강현을 꼭 안아 주었다. 그리고 강현은 그런 해완의 존재를 확인하듯이 몇 번이고 더듬어 안고 또 안았다.

강현의 품에 안겨 해완은 그 너머에 있는 낡고 허름한 집을 연약한 햇살이 비추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강현에게 말하고 싶었다.

언젠가 자신이 미안하다고, 잘못했다고, 용서해 달라고 말했을 때, 한 번쯤은 이 순간을 떠올려 줄 수는 없겠느냐고.

그렇게 해서라도 용서받을 구석 하나쯤은 남겨 두고 싶은 간절한 마음이 있었다.

하지만 그것이 얼마나 이기적인 부탁인지를 너무나 잘 알기에, 더 이상 쌓일 곳 없는 덩어리를 꾹꾹 밀어 넣은 해완은 조용히 그의 어깨에 고개를 묻었다.

* * *

몇 시간째 강현은 옆에 누워 잠든 해완의 얼굴을 바라보고 있었다.

오늘 하루 내내 약이라도 취한 것처럼 기분이 이상했다. 지난 며칠간 제대로 잠을 이루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아무리 애를 써도 잠들 수가 없었고, 심장이 멋대로 뛰었다가 가라앉았다 하기를 반복했다.

이제는 어렴풋하게나마 그 이유를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현은 호기심 가득한 어린애처럼 손을 뻗어 얼굴 옆에 놓여 있는 해완의 손을 어루만졌다. 눈으로, 피부로, 입으로, 이미 충분히 맛보고 경험했음에도 마치 처음 만지기라도 한 듯 가슴이 울렁거렸다.

강현은 반쯤 경이로운 시선으로, 해완의 곁에 있을 때마다 자신의 마음에 치는 감정의 너울을 가만히 받아들였다.

뭔가를 가지고 싶어 하는 것은 지극히 단순한 욕망이었다. 강현도 당연히 그런 욕망을 느꼈다. 좋은 옷, 좋은 음식, 좋은 집, 좋은 차가 가지고 싶은 건 물론이고, 일을 할 때 쓸 좋은 원료도 가지고 싶었으며, 어린 시절부터 쭉 키워 온 보더콜리도 가지고 싶었다.

다만 강현은 제가 가진 무언가를 잃어버리고 싶지 않다는 생각을 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왜냐하면 이제껏 강현이 가지고 싶어 했던 모든 것은 또 다른 좋은 집으로, 또 다른 좋은 차로, 그리고 또 다른 보더콜리로 대체해서 영원히 가질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윤해완은 아니었다.

그와 비슷한 것은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제 곁에 있고 싶다는 이유 하나만으로 스스로를 괴롭히는 것이 분명한 거짓말을 하고, 긁어내린 생채기에 불과한 남의 상처 하나를 지나치지 못해 눈물을 글썽이고, 잔인한 학대는 다 잊어버리고 꿈같은 기억 한 조각만 소중하게 간직하고서는, 아무리 잘못해도 미안하단 말 하나에 바보같이 웃으며 용서해 버리는.

그런 윤해완과 비슷한 게 강현의 세상에 또 나타날 리가 없었다.

강현은 조금 더 몸을 움직여 해완과 가까이 누웠다. 잠든 해완에게서 규칙적으로 흘러나오는 따뜻하고 옅은 숨결이, 그 안에 담긴 해완의 향기가 강현의 코끝을 간질였다.

페로몬 향이 아니었다. 이렇게 가까이 누워 있을 때만 느낄 수 있는, 강현조차도 어떻게 설명할 수 없는 윤해완만이 가진 온기의 향기였다.

그렇게 누운 채 강현은 9년 전 윤해언과 만났을 때 처음으로 가져 본 의문을 자신에게 또 한 번 던져 보았다.

이게 사랑일까?

나도 그런 감정을 느낄 수 있는 존재인가?

그때와 같이, 답은 여전히 알 수 없었다.

하지만 윤해언과 만날 때 느꼈던 것과는 전혀 다르게 해완의 곁에 있는 지금은 이해할 수 없으리만치 강한 확신이 한 가지 들었다.

지금 당장은 아니더라도, 해완이 가르쳐 줄 것이다.

오늘 해완에게 용서받기 위해 어떻게 하면 되는지 가르쳐 준 것처럼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 마음이 편안해지고 눈꺼풀이 무거워져, 강현은 해완의 온기의 향을 맡으며 천천히, 아주 천천히 잠에 빠져들었다.

* * *

어젯밤 암막 커튼을 깜빡 치지 않고 잔 탓인지, 해완은 강현의 침실에서 햇살을 받으며 깨어났다.

잠에서 채 벗어나지 못한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며 푹신한 베개에 볼을 비볐다. 아직 감기가 다 낫지 않은 탓에 밭은기침을 하며 눈을 뜨는데, 허리께에 왠지 모를 무게감이 느껴졌다.

멍한 눈으로 밑을 내려다보자 제 허리를 감싸 안은 단단한 팔이 보였다. 갑자기 잠이 확 달아난 해완이 말똥해진 눈으로 뒤를 살짝 돌아보았다.

강현이, 등 뒤에서 해완을 꼭 껴안은 채 잠들어 있었다.

이렇게 함께 침대에서 깨어난 건 처음이었다. 그것만으로 심장이 터질 듯 두근거려서 해완은 제 가슴 부근을 꼭 움켜쥐었다.

그런데 그때 해완의 등을 단단하게 받치고 있던 몸이 움찔거리는 게 느껴졌다. 조심스럽게 뒤돌아 눕자 강현이 무거운 눈꺼풀을 깜빡이는 것이 보였다.

잠에 취한 채 두 눈을 끔뻑이는 강현의 무방비한 얼굴은 평소답지 않게 소년같이 보였다. 이상하게 마음이 뭉클해져, 해완은 강현의 볼에 손을 올리고 부드럽게 속삭였다.

“잘 잤어……?”

강현은 잠을 자고 일어나면 유달리 하얗게 보이는 해완의 얼굴을 보다가 물었다.

“응. 몸은 좀 어때?”

“괜찮아.”

그럼에도 강현은 의심이 사라지지 않은 눈으로 해완을 한 번 더 유심히 바라보았다. 정말 컨디션이 좋았기 때문에 해완은 걱정할 것 없다는 듯 눈을 동그랗게 뜨고 강현을 마주 봤지만, 야속한 목은 해완의 바람을 들어주지 않고 이내 간질거리기 시작했다.

결국 참다못한 해완이 작게 기침을 하자 강현이 몸을 일으키며 말했다.

“물 좀 갖다줄게.”

강현을 이렇게 빨리 침대에서 내보내고 싶지 않아, 해완은 자기도 모르게 몸을 일으키려는 강현의 팔뚝을 강하게 잡아당겼다. 얼떨결에 다시 침대에 털썩 누운 강현이 어리둥절하게 해완을 바라보았다.

간지러운 말을 하는 것에 새삼스럽게 열이 올라, 해완은 얼굴을 붉힌 채 작게 중얼거렸다.

“조금 더 같이 누워 있고 싶어…….”

그러자 강현이 고개를 숙인 채 슬며시 웃었다. 그는 한쪽 팔로 상체를 지탱한 채 다른 팔로 검은 곱슬머리를 쓸어 올리더니, 해완에게 입을 맞추려는 듯 가까이 다가왔다.

그러나 강현에게 감기를 옮길까 봐 입술이 닿기 전 해완은 고개를 돌렸다. 멈칫한 강현이 대놓고 미간 사이를 찌푸리기에, 해완이 급하게 입을 열었다.

“감기 옮으면 어떡해.”

“절대 안 옮아. 그러니까 피하지 마.”

단호하게 말한 강현이 다시 한번 입술을 가까이 떨어뜨렸다. 그런데 문득 스쳐 지나가는 지난밤의 기억에, 해완은 괜히 반대쪽으로 고개를 또 돌렸다.

잠시 고개를 돌리고 있다 슬쩍 위를 올려다보자, 이번에는 강현이 안달이 나 원망스럽기까지 한 것 같은 얼굴을 하고 있었다.

“안 옮는다니까, 자꾸 왜 그래?”

“그래서 피한 거 아니야.”

“그럼 왜 피하는데?”

“……너도 내가 키스하려는 거 피했잖아.”

“…….”

“그래도 이제 쌤쌤이야.”

반쯤 장난으로 한 말이었는데, 강현은 눈을 내리깐 채 말이 없었다.

괜한 말을 했다 싶어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해완이 입을 열려는 순간, 강현이 해완의 눈을 바라보며 낮게 말했다.

“미안해.”

그리고 강현은 아주 부드럽게 해완의 입술을 머금었다 떨어졌다. 입술이 맞닿아 있는 상태로 코끝을 비비며 강현이 다시 한번 사과했다.

“잘못했어. 다신 안 그럴게.”

닿아 있는 입술에서 전해지는 낮은 울림에, 해완은 으응, 하고 대답하며 강현이 좀 더 깊게 키스할 수 있도록 입술을 벌렸다.

어제는 해완의 컨디션이 좋지 않아 관계를 가지지 않았기 때문에 둘 다 몸이 달아 있던 터라 키스는 금세 농밀해졌다.

옆으로 누워 있던 강현은 본능적으로 해완의 몸을 덮고 있던 시트를 젖히고 그 위로 올라탔다가, 해완이 부르르 몸을 떨자 흠칫 놀라더니 젖혀진 시트를 다시 끌어당겨 두 사람의 몸을 덮었다.

그렇게 덮여진 상태에서는 움직이기가 좀 불편해서 관계는 그간 두 사람이 했던 어떤 행위보다 단순하고 느슨했다. 둘 다 잠시라도 입술이 떨어지는 게 싫었기 때문에 할 수 있는 애무라고는 딱 붙어 다리를 엮은 채 프리컴으로 질척하게 젖은 성기를 맞대고 문지르는 것뿐이었다.

그것만으로도 몇 번이고 사정해 버릴 뻔하자, 해완은 강현에게 빨리 넣어 달라고 울먹이며 졸라 댔다. 결국 강현이 아주 천천히 해완의 안에 들어선 이후 두 사람은 온몸으로 껴안은 채 느리게 함께 흔들리는 것을 반복하다가, 서로의 입 안에 거친 숨과 신음을 쏟아 내며 함께 절정에 달했다.

강현은 그의 얼굴과 턱선을 따라 연이어서 입을 맞추고 또 맞췄다. 온몸이 땀과 체액으로 끈적였지만 두 사람만이 존재하는 듯한 이곳에서 벗어나고 싶지 않아서, 해완은 강현의 가슴팍에 고개를 묻고 그를 꽉 껴안았다.

잠시 후, 일을 나가기 위해 씻어야 한다는 생각에 해완은 아쉬운 눈을 하고 고개를 들었다. 말도 하지 않았는데 강현은 해완의 의중을 눈치챈 듯 그를 팔로 꽉 껴안더니 물었다.

“오늘은 그냥 나랑 있으면 안 돼?”

“어?”

“나 출장 가면 열흘 동안 또 떨어져 있어야 되잖아.”

문득 일요일 오후에 강현이 파리로 출국한다는 사실을 떠올린 해완은 저도 모르게 시무룩한 표정을 지었다.

당연히 그러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검사를 받은 어제 그리고 검진 결과를 듣기 위해 금요일까지 일을 빠져야 하다 보니 오늘만큼은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대답 대신 미안한 눈으로 올려다보자 어쩔 수 없다는 듯 해완의 몸을 얽매고 있던 강현의 팔의 힘이 풀렸고, 해완은 침대 밖으로 아쉬운 발걸음을 옮겼다.

강현은 편의점 앞까지 해완을 데려다주고 끝나면 바로 데리러 오겠노라고 약속했다. 강현의 차가 시야에서 완전히 보이지 않을 때까지 시선을 떼지 못하던 해완이 편의점 안으로 들어가자, 창고에서 나오던 사장이 해완에게 인사를 건넸다.

“해완 씨 왔네. 어제 병원은 잘 갔다 왔어?”

“……아, 네. 덕분에요. 항상 사정 이해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괜찮아. 다른 것도 아니고 병원엔 꼭 가야지. 금요일에 결과 들으러 간다고 했지?”

“네.”

“결과는 괜찮을 것 같구?”

사람 좋은 사장의 목소리에는 염려가 어려 있었지만, 오히려 그 질문이 불안감을 엄습하게 해 해완은 잠시 대답하지 못하고 멈칫했다가 급하게 입을 열었다.

“네. 괜찮을 거예요.”

스스로에게 최면이라도 걸듯, 과하게 밝은 목소리였다.

* * *

검사 결과를 듣기 위해 기다리는 시간은 언제나 괜히 긴장이 됐다.

진료실 앞 좁아터진 복도에서 앉지도 못하고 서성이기를 꼬박 20여 분이 지나서야 겨우 해완의 이름이 불렸다. 해완은 조심스럽게 노크를 한 뒤 이식 수술 담당 의사가 있는 진료실 안으로 들어갔다.

“안녕하세요, 선생님.”

책상 위 모니터를 유심히 들여다보고 있던 중년의 의사가 해완을 보고 아주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가 다시 모니터로 시선을 돌리며 물었다.

“윤해완 씨. 6개월 만이네요. 그동안 몸은 좀 어땠어요?”

“별 이상 없이 괜찮았어요.”

“수술 부위에 불편함을 느낀 적은요? 특히 통증이나 열감 같은 거.”

“어, 피곤할 때마다 좀 욱신댄 적은 있었어요.”

“수술 부위에 통증이 생기면 내원하라는 안내를 받지 않았어요?”

“아, 그게, 병원에 가야겠다 싶을 정도로 심했던 적은 한 번도 없어서…….”

의사는 모니터에서 시선을 떼지 않은 채 고개만 작게 까딱했다. 언뜻 보면 매정하게까지 보이는 태도였지만, 원체 효율적인 성격이라 별문제가 없으면 최대한 빠르게 정리하고 환자를 보내는 의사임을 알기에 해완은 마음을 가다듬으려 했다.

그런데 오늘은 웬일인지 침묵이 길었다. 해완이 읽을 수 없는 CT 사진과 결과지를 책상 위 모니터 두 대에 동시에 띄워 놓고 몇 번이고 번갈아 보던 의사가 문득 흠, 하는 소리를 냈다.

이쯤 되니 뭔가 이상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까 전과는 달리 급격하게 커져 가는 불안감에 해완은 땀이 배어나는 손을 서툴게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이윽고, 의사가 피곤한 눈을 해완에게 돌리며 사무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윤해완 씨. 피 검사 수치가 많이 안 좋아요. CT상으로 봤을 때 이식받은 페로몬샘이 정상 크기보다 부어 있는 것도 보이구요. 조직 검사도 해 봐야 하겠지만 아무래도 이식 후 만성 거부 반응이 진행되고 있는 게 분명해 보여요.”

이식 후 만성 거부 반응.

장기 이식 이후 수개월이 지나 발생하는 거부 반응으로, 서서히 이식 장기의 기능이 떨어져 끝내 그 기능이 완전히 마비되는 것을 의미했다.

이미 충분히 알고 있는 단어임에도 불구하고 해완은 난생처음 그 말을 들은 사람처럼 되물었다.

“……네?”

“일단 면역 억제제를 다시 써 보기는 하겠지만, 우리 환자분 같은 경우에는 이식 초기에도 염증 수치가 높았고 면역 억제제 부작용도 컸던 케이스라 좋은 결과를 마냥 장담할 수는 없을 것 같아요.”

“…….”

“그런 경우에는 지금 이식받은 장기는 제거하고 다른 기증자의 것으로 재이식을 하는 것까지 염두에 둬야 합니다.”

“안 돼요, 선생님.”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튀어나온 단호한 말투에 의사는 잠시 말을 멈췄다. 해완은 격렬하게 고개까지 저어 가며 부정했다.

“재이식은 안 돼요. 절대 안 돼요.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 안 받을 거예요.”

“윤해완 씨. 단순히 페로몬샘의 기능이 떨어지는 것만이 문제가 아니에요. 페로몬은 다른 사람에게만 영향을 미치는 게 아니라 환자분 스스로의 체내 호르몬을 조절하는 데도 영향을 끼쳐요. 페로몬샘 기능이 마비되면 히트 사이클도 지금의 억제제로 조절이 안 될 수도 있어요.”

해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하얗게 비어서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런 해완을 바라보던 의사가 달래듯이 조금 더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만성 거부 반응이 생겨도 최대한 기능이 천천히 떨어지도록 노력은 해 볼 수 있으니까요. 일단 면역 억제제 복용부터 다시 시작하고 그 뒤에 다시 얘기하죠.”

“……네.”

“약은 절대 빼먹지 말고 용량과 시간을 지켜서 꾸준히 먹어야 합니다. 몸에 무리 가는 일이나 스트레스는 당분간은 무조건 피하시구요.”

의사가 무슨 말을 하든 머릿속에 제대로 들어오질 않아, 해완은 무작정 고개만 끄덕였다.

진료실을 나와 간호사를 통해 조직 검사 일정을 정한 뒤 이틀 뒤부터 복용하기로 한 면역 억제제의 처방전을 받고 약국에 가서 일주일 분의 약을 받아 왔다. 이미 부작용으로 고생을 한 경험이 있기 때문에 일주일 동안 복용한 뒤 해완의 몸 상태에 맞춰 용량과 제제를 조절하기 위해서라고 했다.

그 모든 일을 기계적으로 해치우고 나서 병원 문을 나서는 순간, 다리에 힘이 풀린 해완은 벽을 잡고 스르륵 주저앉았다.

머플러에 얼굴을 깊게 묻자 그리운 향이 코끝을 맴돌았다. 기억과 완전히 같지는 않아도 그것은 해언의 향이었다. 아무리 제 몸에서 배어났다 한들 해언의 것이었고, 해언이 해완에게 유일하게 남긴 것이기도 했다.

그리고, 그것은 해완이 강현의 곁에 머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기도 했다.

‘지금 이식받은 장기는 제거하고 다른 기증자의 것으로 재이식을 하는 것까지 염두에 둬야 합니다.’

진료실 안에서 들었던 의사의 목소리가 다시 머릿속에 떠오른 순간 몸까지 벌벌 떨려 와, 해완은 벽에 기대어 쪼그려 앉은 채 두 팔로 떨리는 몸을 감쌌다.

재이식이라니. 그럴 수는 없었다. 무슨 일이 있어도 그렇게 할 수는 없었다.

만약 해완의 몸이 엉망이 된다고 해도, 그런 일을 허락하지는 않을 것이었다.

스스로에게 다짐이라도 하듯 해완은 잘게 고개를 저었다. 안 돼, 절대 안 돼, 안 그럴 거야. 수없이 그렇게 되뇌고 또 되뇌며, 간신히 마음을 진정시켰다.

* * *

강현의 출국 하루 전 해완은 재료를 가득 사 가지고 와서 본격적으로 강현에게 요리를 해 주었다.

강현과 보리는 바쁘게 움직이는 해완의 곁에서 내내 얼쩡거렸는데, 강현은 도와주겠다고 나서기는 했으나 손끝이 여물지 않아 미덥지 않았고 보리는 귀여움 말고는 솔직히 방해가 되었기 때문에 해완은 둘 다 결국 부엌 밖으로 내쫓고 말았다.

보리를 위한 특식까지 준비하느라 시간이 약간 걸리기는 했지만 그만큼의 보람이 있었다. 제가 만든 음식을 잘 먹는 강현과 보리를 보니 터질 것처럼 마음이 부풀어 올라, 해완은 자신의 식사보다 강현이 먹는 모습을 보는 데 정신이 더욱 팔려 있었다.

저녁을 먹은 뒤에는 보리를 데리고 함께 산책을 하러 갔다. 아침에도 산책을 다녀오고 유치원에서도 신나게 놀다 왔다고 했는데도 강현과 해완이 번갈아 가며 지칠 정도로 뛰어놀아 주고 나서야 보리는 간신히 집에 돌아갈 마음이 드는 듯했다.

보리와 함께 뛰어노느라 배었던 땀이 식으며 내려가는 체온에 해완이 몸을 살짝 떨었다. 그것을 기민하게 눈치챈 강현이 보리의 목줄을 해완에게 넘기고 팔을 뻗어 그의 어깨를 가득 감싸 안았다.

밤의 공원은 지나칠 정도로 평화로웠다. 딱 붙어선 채 강현의 체온을 느끼며 천천히 걷던 해완이 조용히 물었다.

“출장 간 동안 보리는 어떻게 할 거야? 또 본가에 맡기는 거야?”

그 말에 강현은 해완을 흘끗 내려다보더니 입을 열었다.

“그럴까 했는데, 생각이 좀 바뀌었어.”

“어떻게?”

“나 출장 가 있는 동안, 네가 우리 집에 머물면서 보리 봐주면 좋을 것 같아.”

갑작스러운 제안에 해완이 눈만 깜빡이자, 강현이 설득하듯 다시 입을 열었다.

“보리도 너랑 같이 이 집에 있는 걸 더 좋아할 거야. 나도 네가 우리 집에 와 있으면 더 안심이고.”

강현의 목소리에는 진심이 어려 있었지만 해완은 대답하지 못하고 망설였다. 사실 답은 정해져 있었으나 마음을 상하게 하지 않고 어떻게 거절해야 할지를 몰랐다.

그러나 마냥 입을 다물고 있을 수도 없는 법이어서 해완은 어렵게 말을 꺼냈다.

“미안한데…… 그건 좀 어려울 것 같아.”

강현은 걸음을 뚝 멈췄다. 해완이 그를 올려다보자, 시선을 맞춘 강현이 낮게 말했다.

“왜?”

“그러니까…… 여기 있으면 새벽에 일 나가기 힘들잖아.”

“내 차 중에 맘에 드는 거 하나 골라서 타고 다녀.”

망설임도 없는 대답에 해완은 잠시 어리벙벙해졌지만 침착하게 다음 말을 했다.

“그리고 유준이도 열흘씩이나 혼자 두기 신경 쓰여서 그래. 안 그래도 요즘 자꾸 집에 안 들어오고 연락도 잘 안 받고 하거든. 나 집에 없으면 더 밖에 나돌 것 같아서 걱정돼.”

그 말에 강현이 작게 한숨을 내쉬었다. 이 정도면 됐다 싶어진 해완이 집에 돌아가자고 하려던 순간, 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럼 유준이도 데리고 와서 여기 있어.”

“뭐? 농담하는 거지?”

해완은 저도 모르게 피식 웃으며 대꾸했다. 하지만 강현은 진심이라는 듯 무표정한 얼굴로 한쪽 눈썹만 치켜올려 보였다.

결국 해완은 답답한 속을 감추며 애써 차분하게 말했다.

“……그것도 안 돼.”

“왜?”

“이런 데 와서 열흘이나 있으면…… 원래 있어야 할 곳에 돌아가고 싶지 않게 느껴질 거야. 그러니까…… 그건 안 돼.”

강현은 잠시 답이 없었다. 해완이 흘끗 눈치를 보자 그는 시선을 돌리며 짧게 말했다.

“……가자.”

연이은 거절에 기분이 상했는지 딱딱해진 말투에 해완은 조금 풀이 죽었다. 당분간 떨어져 있어야 하는 때 정말 싸우고 싶지 않았지만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그래도 집에 도착할 때까지 강현이 해완의 어깨를 감싼 손을 풀지 않았다는 것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집에 들어온 이후 강현은 제가 보리의 발을 씻길 테니 해완보고 씻고 나오라고 하며 보리를 데리고 거실에 있는 욕실로 들어가 버렸다.

침실에 있는 욕실에서 씻으라는 의미였겠지만, 해완은 잠시 거실 한가운데 우두커니 서 있었다.

곧 거실 쪽 욕실 문이 열리더니 보리가 종종거리며 걸어 나온 뒤 다시 닫혔다. 해완은 꼬리를 흔들며 제게 다가오는 보리의 머리를 한 번 쓰다듬어 주고는 조심스레 문을 열고 들어갔다.

욕실 안쪽에 위치한 샤워 부스 안에서 요란한 물소리가 들렸다. 물을 뜨겁게 틀어 놨는지 금세 차오른 수증기가 샤워 부스를 불투명하게 만들어 놨음에도 불구하고 해완의 페로몬 향을 맡은 강현의 실루엣이 멈칫하는 게 희미하게 보였다.

해완은 망설이지 않고 옷을 전부 벗은 뒤 샤워 부스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장신의 남자 두 사람이 함께 씻어도 충분할 만큼 안은 널찍했다. 뜨거운 물로 몸을 적시고 있던 강현은 뒤를 흘끗 돌아보기만 했을 뿐 다른 반응을 하지 않았다.

조심스레 다가간 해완은 물로 젖은 강현의 매끈한 등을 껴안으며 시무룩하게 중얼거렸다.

“화내지 마, 강현아…….”

“…….”

“싸우고 떨어져 있기 싫단 말이야…….”

강현은 뒤를 돌아보지 않았지만, 그의 페로몬 향이 급속도로 아찔하게 짙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순간, 뒤를 돈 강현이 해완의 허리를 휘어잡고 깊게 키스했다. 발기한 성기가 바싹 맞부딪치는 느낌에 해완은 강현의 입술 안에서 작게 신음했다.

해완을 욕실 벽에 기대어 세워 둔 채 강현은 뒤에서 그를 안았다. 서 있는 채로 범해지는 것이 처음이라 해완이 버겁게 숨을 헐떡일 때마다 강현은 다정하게 키스하고 깍지 끼어 잡은 손에 힘을 주었다.

뜨거운 물을 맞으며 섹스를 한 바람에 평소보다도 더욱 체온이 올라, 해완은 약간 몽롱해진 상태로 강현이 제 몸 구석구석에 남은 정사의 흔적을 씻겨 주고 닦아 줄 수 있게 두었다.

지나치게 길었던 샤워를 마친 뒤, 두 사람은 침실 안으로 들어와 나란히 침대에 누웠다. 강현은 좀 더 이야기를 하고 싶은 눈치였으나 해완이 이미 비몽사몽해진 걸 알고는 수면등을 켜 두고 모로 누운 해완의 등을 꼭 껴안고 누웠다.

깜빡 잠이 들었던 해완은 강현이 등을 껴안는 감촉에 스르르 눈을 떴다. 한 치의 틈도 없이 그를 꽉 끌어안은 강현은 그의 목덜미에 깊숙이 고개를 묻고 다시는 놓치고 싶지 않은 것처럼 해완의 향을 깊이 들이마셨다.

아, 틀렸구나. 안개 속을 헤매는 것처럼 머리가 멍한 와중에도 해완은 제 생각을 고쳤다.

강현이 맡고 있는 것은 그의 향이 아니었다.

그것은 해완의 몸이 죽이고 있는, 해언의 향이었다.

강현의 따뜻한 품에 안긴 채로 해완은 어둠을 번히 바라보았다. 감히 소리를 낼 수도 없는 눈물이 조용히 흘러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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