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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 sur-dosage (1) (10/18)

9. sur-dosage (1)

과잉 투여, 과도한 원료 사용

아침에 먹은 음식을 다 토해 내고도 자꾸만 욕지기가 치밀어 올라, 해완은 쉽사리 편의점 화장실을 떠나지 못하고 몇 번이나 구역질을 했다.

결국 위액까지 다 토해 내고 나서야 간신히 비틀거리며 몸을 세울 수 있었다. 진이 빠져 부들거리는 손으로 입을 헹구고 세수까지 하고 나서 고개를 들자, 거울 속 비친 얼굴이 유령처럼 창백했다.

면역 억제제를 재복용하기 시작한 것도, 강현이 떠난 것도 사흘째가 되고 있었다.

면역 억제제는 제제의 종류별로 구토, 두통, 빈혈, 감염, 열감, 혈소판 감소증 등 다양한 부작용이 있고 어떤 증상이 발현되느냐도 사람마다 천차만별이었지만, 무슨 면역 억제제를 먹든 해완이 매번 고생했던 것이 위장 장애였다.

그나마 부작용이 가장 강하게 나타나는 적응 기간 때 강현이 멀리 떨어져 있는 사실이 작은 위안처럼 느껴졌다.

해완은 그가 없는 동안은 얼마든지 시달려도 좋으니, 강현이 돌아올 때까지는 조금이라도 적응이 되어 있기를 속으로 간절히 기도하고 또 기도했다.

“형, 또 화장실 다녀오신 거예요?”

편의점으로 다시 돌아오자 혼자 손님 응대를 하고 있던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짜증 어린 목소리로 물었다. 처음에는 어디 아픈가 싶었던 모양이지만 하루에 몇 번씩 사라지는 일이 며칠째 이어지자 꼭 농땡이라도 부리는 듯 느껴졌던 모양이었다.

이해가 가지 않는 것도 아니라, 미안해진 해완이 말했다.

“미안해요. 요즘 계속 속이 안 좋아서. 대신 오늘 창고 정리는 내가 다 할게요.”

창고 정리는 일과 중 틈틈이 해야 했기 때문에 해완은 손님이 줄어들 때마다 바로바로 창고로 향했다. 이미 숙달된 일이라 금방 끝낼 법한데도 먹은 게 없어서인지 힘을 쓸 때마다 자꾸 어지러워지는 바람에 평소보다도 더 오랜 시간을 들여서 일을 해야만 했다.

오후가 되어 살짝 속이 편안해지자마자 해완은 파우치에 든 호박죽 하나를 계산한 뒤 가게가 비는 틈마다 조금씩 빨아 먹었다. 한두 모금 정도까진 괜찮나 싶더니 반 정도 먹었을 무렵부터 아니나 다를까 속이 메스꺼워지기 시작했다. 하지만 당장 게워 낼 정도는 아니라 조금씩 헛구역질을 하면서도 죽기 살기로 먹었다.

이렇게라도 먹지 않으면 더욱 먹을 수 없게 된다는 것을, 그는 이미 경험으로 충분히 알고 있었다.

너무나 길게 느껴졌던 일곱 시간의 근무를 마치고 들어온 집 안은 싸늘하기 그지없었다. 눕고 싶다는 생각만 종일 간절했던지라 해완은 찬 바닥에도 아랑곳없이 그대로 신발만 벗고 현관 근처에 모로 누워 잠시 숨을 골랐다.

방바닥이 얼음장처럼 찼음에도 불구하고 평생 누워 있으라면 누워 있을 수 있을 것 같았지만 저녁 약을 복용하려면 식사를 해야 해서 온 힘을 다해 억지로 몸을 일으켰다.

약을 먹고 바로 잠들어 버리면 운 좋게 구토감을 느끼지 않을 수도 있기 때문에 해완은 먼저 몸을 씻고 잘 준비를 마친 뒤에야 흰죽을 묽게 끓였다. 얼마 전 장을 봐 온 터라 다른 음식을 해 먹을 재료도 충분히 있었으나 구토에 뒤따르는 식욕 부진 때문에 이거라도 제대로 넘길 수 있으면 다행이겠다 싶었다.

예상대로 묽게 끓인 흰죽마저 제대로 넘어가질 않아 한 그릇도 간신히 비운 해완은 평소 성격답지 않게 설거지거리도 물에 담가만 두고 바로 약봉지를 뜯었다.

해완은 손바닥 위에 올려 둔 네댓 개의 작은 알약들을 잠시 머뭇거리며 보았다. 예전에 부작용으로 지독하게 시달리던 때, 이 작은 알약들을 넘기는 것조차 반사적으로 몸에서 거부해 버리던 일이 생각이 난 탓이었다.

그래도 반드시, 무슨 일이 있어도 먹어야만 하기에 최대한 깊게 심호흡을 하고 약을 입에 털어 넣으려 손을 들었다.

하지만 문득 들려온 핸드폰 진동 소리가 해완의 손을 멈췄다. 해완은 한 손에 약을 든 채로 싱크대 위에 올려놓은 핸드폰 화면을 확인했다.

강현에게서 온 전화임을 알리며 빛나는 화면에, 해완의 입가에 설핏 미소가 비쳤다. 그는 알약들을 일단 싱크대 위에 쏟아 두고 전화를 받으며 그 밑에 무릎을 세우고 앉았다.

“여보세요?”

―응, 나야. 퇴근했어?

시차에도 불구하고 며칠째 강현은 해완이 퇴근하는 시간에 맞춰 항상 전화 혹은 영상 통화를 걸어 주고 있었다. 가슴속에서 몽글거리며 피어오르는 따듯함에 해완은 둥근 미소를 지으며 답했다.

“응, 퇴근했지. 너는 일하고 있어?”

―점심시간이라, 회사 사람들이랑 같이 식사했어. 넌 저녁 먹었어?

“……어, 방금 먹었어.”

―뭐 먹었어? 맛있는 거 먹었어야 되는데.

다정한 질문에 예상치 못하게 목이 메었다. 당황한 해완은 손가락으로 코를 마구 비비며 울컥한 감정을 꿀꺽 삼키고 애써 태연하게 대답했다.

“음, 김치찌개 끓여 둔 거랑, 계란 부쳐서 먹었어. 맛있었어.”

―혼자?

“응. 유준이는 오늘도 늦게 들어올 것 같아.”

수화기 속 강현이 못마땅한 듯 혀를 차는 소리가 들렸다. 출장 가기 전 쓸데없는 소리를 해서 괜히 신경이 쓰이게 한 것 같아 미안해진 해완이 입을 열었다.

“유준이 신경 쓰지 마. 지난번 그런 일도 있었는데 알아서 잘하겠지.”

―난 유준이 신경 안 써. 네가 유준이 신경 쓰는 게 신경 쓰이는 거야.

“그게 뭐야.”

강현의 목소리는 자못 진지했지만, 왠지 말장난 같아 해완이 픽 웃음을 터트렸다.

그 뒤로 20여 분 정도 서로의 일상생활에 대해 더 통화를 했다. 물론 주로 파리에 대한 이야기였는데, 음식을 좋아하는 해완에게 프랑스는 항상 가 보고 싶던 나라였기 때문에 강현의 이야기를 듣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기분 좋게 쿵쿵거렸다.

그것을 모를 리 없는 강현은 통화의 말미에 부드러운 목소리로 말했다.

―다음에 꼭 같이 오자.

해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희미하게 미소 지으며 조용히 답했다.

“……그래.”

전화를 끊고 나서 괜히 글썽해진 눈을 무시하고 바로 몸을 일으킨 해완은 싱크대에 늘어놓은 알약을 다시 꼼꼼히 손에 모았다.

이번에는 망설이지 않고 전부 한 번에 입 안에 털어 넣었다. 목구멍에 달라붙어 내려가지 않는 그것들을 몇 번이고 가슴을 쳐 가며, 억지로 삼켰다.

* * *

면역 억제제를 먹은 지 닷새째, 다행히도 직접적인 구토는 많이 줄었지만 속이 메스껍고 식욕 부진이 심한 탓에 제대로 먹지 못하는 건 마찬가지라 해완은 여전히 기운이 없었다.

계속해서 구토가 일면 구토 억제제라도 처방받아서 먹어야 될 판이었기 때문에 그나마 토하고 싶지 않은 게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며 잠시 창고 벽에 기대어 어지럼증을 가라앉히고 있는데, 등 뒤에서 아르바이트생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저기, 누가 찾아왔는데요.”

강현도 없는데 누가 찾아왔다는 걸까. 이마에 배어든 식은땀을 닦으며 창고 밖으로 나오던 해완은 계산대 근처에 서 있는 인하를 보고 멈칫했다.

강현과 만났다는 이야기를 하러 저를 찾아온 이후로 처음 보는 것이니 꽤 오랜만이라 느껴졌지만, 반갑지는 않아 해완은 어두운 얼굴로 그를 향해 걸어갔다.

“……안녕하세요.”

인하는 해완의 얼굴을 가까이서 보자마자 얼굴에 걱정스러운 빛을 띠었다.

“안색이 안 좋네요. 어디 아파요?”

“……아뇨. 그냥 요즘 잠을 잘 못 자서. 무슨 일이세요?”

“얘기 못 한 지 오래된 것 같아서요. 같이 저녁이라도 할까 하고.”

“저 약속이 있어서 오늘은 안 될 것 같아요. 죄송해요.”

퇴근 시간은 20여 분 남짓 남아 있었지만 해완은 자못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그 말에 인하는 미소를 머금으며 비스듬히 고개를 숙였다.

“누구랑? 여강현 씨는 외국 가 있잖아요.”

해완은 저도 모르게 눈을 크게 떴다.

“그걸 어떻게…….”

“서연 씨한테 들었어요. 알죠? 여강현 씨 사촌 누나.”

인하가 서연까지 알고 있다는 것에 해완은 잠시 할 말을 잃었다. 그는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느긋하게 말했다.

“아마 윤해완 씨도 나한테 할 말 있을 것 같은데. 이왕이면 여강현 씨 없을 때 하는 게 좋지 않겠어요?”

정곡을 찌르는 인하의 말에, 해완은 입술 한구석을 가만히 깨물었다.

굳이 강현을 만나 오해하도록 말한 일에 대해 인하에게 왜 그랬느냐 한 번쯤은 물어야겠다는 생각을 마음에 두고 있었던 건 사실이기 때문이었다.

“……20분 뒤에 일 마치는데 잠깐 기다리실래요?”

“그럼요. 이 앞에서 봐요.”

시원하게 대답한 인하는 더는 아무것도 묻지 않고 깔끔하게 뒤돌아 문을 열고 나갔다.

20분 뒤, 일을 마무리하고 유니폼을 갈아입은 뒤 편의점을 나서자 인하가 도로가에 주차해 놓은 차 앞에 서 있는 게 보였다.

“뭐 먹으러 갈래요? 맛있는 거 사 줄게요.”

인하는 해완을 보자마자 웃으며 그렇게 말했지만, 그와 함께 식사할 마음의 여유도 없었을뿐더러 여전히 속이 엉망이었기 때문에 해완은 고개를 가로저었다.

“저 속이 좀 불편해서요. 그냥 차 한잔 했으면 해요.”

다행히도 인하는 유달리 창백한 해완의 얼굴을 물끄러미 보더니 별다른 말 없이 수긍해 주었다.

“알겠어요. 지난번 갔던 카페로 갈까요, 그럼?”

강현과 셋이 마주쳤던 날 갔던 카페를 이야기하는 모양이었다. 그날의 상황을 생각하면 썩 가고 싶지 않은 곳이었으나 확실히 카페인이 들어간 음료나 단것을 먹을 수 있을 것 같지는 않아서 해완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인하의 차로 잠시 달려 카페에 도착한 두 사람은 역시 안쪽에 있는 작은 내실로 안내받았다.

자리에 앉아 차를 주문하고 난 뒤 인하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나랑 만난 것 때문에 여강현 씨가 많이 화냈어요?”

생각보다 빠르고 직접적으로 던져진 인하의 질문에 해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어색한 목소리로 답했다.

“그런 거 아니에요. 하지만…… 왜 굳이 강현이가 오해할 만한 이야기를 하시는 건지 궁금해요.”

“오해할 만한 얘기라니?”

“해언이랑 같이 살았다고 하셨다면서요.”

“그게 왜 오해할 만한 이야기죠? 여강현 씨가 해언이와 내 관계를 물어봤고, 그래서 난 솔직히 대답해 준 것뿐인데요.”

해완은 눈을 감았다. 하고 싶은 말을 억지로 뱉어야 하는 바람에 악문 잇새로 거친 목소리가 튀어나왔다.

“……강현이가 지금 절 해언이라고 생각하고 있는 거 아시잖아요.”

“알아요. 근데 여강현 씨가 물어보는 해언이가 윤해완 씨를 의미하는 건지, 진짜 해언이를 의미하는 건지 구분이 안 돼서요.”

인하의 입에서 나온 ‘진짜’ 해언이라는 말이 가슴을 얼음송곳으로 쑤시는 것 같았다. 들불같이 번지는 수치심에 해완은 더 말을 잇지 못하고 붉어진 얼굴로 고개를 숙였다.

그런 해완을 바라보던 인하가 나직한 목소리로 물었다.

“해완 씨는, 여강현 씨 어디가 좋은 거예요?”

인하의 목소리에는 단순한 호기심이라고만은 볼 수 없는 무언가가 배어 있어서 해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들어 인하와 시선을 맞췄다.

“그게 서인하 씨한테 왜 중요한데요?”

“들은 이야기가 있거든요. 그 사람에 대해서.”

“…….”

“그다지 괜찮은 사람으로는 들리지 않던데. 가족들이랑 사이도 안 좋고, 친하게 지낸다고 말할 만한 사람도 한 명도 없구요.”

“…….”

“그것만이 아니에요. 전에 서연 씨 친구분을 한 번 만났는데, 여강현 씨가 자기를 가지고 놀았다고 하더라구요. 깊은 마음이 있는 것처럼 굴다가, 아무 이유 없이 싸늘하게 굴면서 상처를 주는데, 알고 보니 그런 식으로 당한 사람이 한두 명이 아니라고.”

마치 준비라도 한 듯 막힘없이 흘러나오는 강현에 대한 이야기에, 말문이 막힌 해완이 눈만 깜빡였다. 인하는 그런 해완을 똑바로 바라보며 진지하게 말했다.

“스킨십을 하는 관계까지 간 건 아니라니까 별거 아닌 것처럼 들릴지 몰라도, 어쨌든 다른 사람 마음 가지고 노는 사람이 좋은 사람일 리 없잖아요. 안 그래요?”

아니라고 말하려고 입을 연 순간, 해완의 뇌리에 문득 강현이 그 버스 정류장에 자신을 데리고 가기 전 무섭도록 냉정하게 굴었던 일이 스쳐 지나갔다.

무심코 떠올린 기억에 해완의 눈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마음을 가다듬은 해완은 인하의 말에 휩쓸리듯 그런 생각을 한 자신을 밀어 내는 것처럼 오히려 소리 높여 말했다.

“그런 건 다 소문일 뿐이잖아요. 강현이를 겪어 본 적도 없으면서 함부로 말하지 마세요.”

“직접 봐도 느낌이 좋지 않았다면요?”

“…….”

“기껏해야 두세 번 본 게 다이긴 하지만, 그래도 나 사람 꽤 잘 봐요. 내가 보기에 여강현 씨 믿을 만한 사람 아니에요. 적어도 해완 씨보다는 분명히 잘 보니까, 믿어도 돼요.”

무작정 강현을 깎아내리는 인하의 확신에 찬 말투가 해완의 성질을 드물게 돋웠다.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해완은 의심으로만 담아 두었던 말을 격렬한 목소리로 뱉었다.

“해언이가 사랑한 사람이 강현이어서 그러는 거예요?”

“뭐라구요?”

“그래서 질투가 나서, 그렇게 강현이를 깎아내리고 싶어 하는 거 아니냐구요.”

그 말에, 인하는 반쯤 입을 벌린 채 해완을 바라보았다. 해완이 처음 보는, 노골적으로 당황스러워하는 얼굴이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뿐, 그는 갑자기 크게 소리 내어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더니 세상에서 제일 재미있는 농담이라도 들었다는 듯 가득 미소를 띤 얼굴로 물었다.

“아, 해완 씨도 참. 대체 왜 그런 생각을 했어요?”

생각지도 못한 반응에 당황한 해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가만히 있었다. 그런 해완을 보는 인하의 얼굴에 어린 웃음기는 어느새 거짓말처럼 사그라졌다.

이내 그는 해완을 향해 몸을 살짝 기울인 채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정말 그런 거 아니에요.”

“…….”

“차라리 그런 거였다면 나한테나 해완 씨한테나 훨씬 쉬웠을 텐데.”

항상 안개 속을 헤매는 듯 아리송하게 구는 인하의 말에 답답해진 해완이 물었다.

“쉬웠을 거라뇨? 그게 무슨 뜻이에요?”

그러나, 인하는 태도를 바꿔 의자에 등을 기대고 앉더니 냉정하게 해완의 말을 잘라 버렸다.

“아뇨. 이젠 내가 다시 질문할 차례예요.”

“하지만…….”

“왜 여강현 씨 앞에서 해언이인 척하고 있는 거예요?”

누군가 목에 올가미를 걸고 죄기라도 한 것처럼 해완은 입을 반쯤 벌린 채 그대로 굳어 버렸다.

“아무리 페로몬샘 이식을 받았다고 해도 그렇지, 해언이인 척하는 건 너무 이상하잖아요. 안 그래요?”

“저, 저는…….”

“어릴 때 매일 같이 붙어 다니면서 비교도 많이 당했다고 들었는데, 윤해완 씨야말로 해언이를 질투했던 거 아니에요? 그래서 그 애 삶을 뺏어 보고 싶었어요?”

변명할 새도 주지 않겠다는 듯 가차 없이 몰아붙이는 인하의 말에 얼어붙은 해완은 간신히 고개를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 아니에요. 그건, 그런 건, 정말 아니…….”

제가 강현의 옆에 있기에는 터무니없이 부족해서, 진짜 자신의 모습으로 설 용기를 가지지 못한 나약하고 비겁한 인간이라서, 그 어떤 이유라도 좋았다. 하지만 지금 인하의 입에서 나오는 그런 이유들은 아니었다. 그 어떤 이유를 다 가져다 붙여도, 그것만큼은 아니었다.

그런데 그때, 인하가 해완의 한쪽 팔뚝을 움켜쥐고 저를 향해 강하게 잡아당겼다. 그는 충격 받은 눈으로 저를 바라보는 해완의 귓가에 입을 붙이고 서늘한 목소리로 속삭였다.

“해언이의 대용품이 되고 싶은 거라면, 여강현이 아니라 나랑 자는 게 더 맞지 않나? 해언이 향이랑 내 향, 보기보다 꽤 잘 어울리거든요.”

그 말을 듣는 해완의 입술이 눈에 보이도록 덜덜 떨렸다. 해완은 불에 닿은 것처럼 온 힘을 다해 제 팔뚝을 쥔 인하의 손을 뿌리치고 자리에서 일어나려 했다.

하지만 인하는 멈추지 않았다. 그는 해완의 손목을 붙잡아 다시 주저앉힌 다음, 잔인하리만치 집요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물었다.

“해언이가 페로몬샘 이식을 해 주겠다고 했을 때, 정말 싫다고 생각했어요? 솔직히 말해서 빨리 죽었으면 좋겠다고, 그런 생각 했던 거 아니냐고.”

그 말이 마지막 지푸라기였다. 귓속에서 이명이 울릴 정도로 가슴 깊은 곳에서 뜨거운 불이 치솟아 올랐고, 해완은 양 주먹으로 탁자를 거세게 내리치며 소리를 높였다.

“아니야!”

갑작스러운 거친 행동에 인하는 묘한 미소를 띤 채 입을 다물었다.

너무나 아파서 제대로 떠올릴 수도 없던 해언이 눈을 감던 순간이 해완의 마음에 고통스럽게 휘몰아쳤다.

아무리 보듬으려 애를 써도 식어만 가던 차가운 얼굴과, 아무리 담아 두려 애를 써도 부질없이 희미해지던 그 향이.

삽시간에 눈을 새빨갛게 붉힌 해완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면서 말을 쏟아 냈다.

“당신이 뭘 안다고 그딴 소릴 해. 당신이 뭔데, 당신이 뭐라고 나한테 해언이가 죽길 바란 거 아니냐는 소릴 지껄여. 당신이, 당신이 뭘 안다고…….”

감정이 주체가 되질 않았다. 해완은 몸을 웅크리고 얼굴을 두 손으로 가린 채 순간적으로 꺽꺽대는 울음을 토해 냈다.

그것도 잠시뿐, 더는 이 자리에 있을 수 없다는 생각에 해완은 비틀거리며 일어나 그곳을 벗어나려 했다. 하지만 그보다 먼저 자리에서 일어난 인하가 해완의 팔을 붙들고 벽에 밀쳐 고정시켰다.

“아직 안 끝났어요.”

“이거 놔!”

해완은 인하의 팔을 뿌리치려 안간힘을 썼지만 지금 같은 몸 상태로는 역부족이었다. 인하는 강하게 해완의 몸을 붙든 채 태연한 얼굴로 입을 열었다.

“해언이가 왜 여강현 씨를 당신과 만나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그건 자기가 9년 전에 한 행동을 윤해완 씨가 이해하길 바라서 만나게 한 거예요.”

해완은 저도 모르게 저항을 멈추고 눈물 젖은 눈으로 인하를 바라보았다. 그는 느슨한 미소와 함께 천천히 말을 끝맺었다.

“이건 오늘 내가 해완 씨한테 무례하게 군 대신 주는 힌트예요. 해언이가 왜 그랬는지, 포기하지 말고 잘 기억해 봐요.”

해완의 팔뚝을 쥔 인하의 손의 힘이 풀리자마자 해완은 그의 가슴팍을 거세게 밀쳤다. 뒤로 퍽 밀려난 인하가 손을 뒤로 뻗어 테이블을 짚고 중심을 잡았다.

해완은 거친 숨을 몰아쉬며 입을 열었다.

“다시는…… 다신 날 찾아오지 마요.”

그러자 인하는 미소까지 지으며 나긋하게 말했다.

“아뇨. 보게 될 거예요. 기억하죠? 해완 씨 약점 내가 잡고 있는 거.”

새빨개진 눈으로 인하를 노려보던 해완은 그대로 뒤를 돌아 정신없이 그곳을 빠져나왔다. 그런 그의 뒤에서, 인하는 여유롭게 손을 흔들고 있었다.

* * *

응답이 없는 신호가 끝까지 흘러가고 끝내 전화를 받을 수 없다는 안내 멘트가 나오고서야 강현은 핸드폰을 귀에서 내려 해완에게 건 전화를 끊었다.

해완은 이미 퇴근을 하고도 남았을 시간이었지만, 평소보다 약간 늦게 건 전화인지라 다른 일을 하고 있을 가능성이 있어 10여 분 뒤에 다시 전화를 하기로 결정했다.

강현은 호텔 소파에 느긋하게 기대어 앉아, 오늘 받은 사진 한 장을 한 번 더 크게 확대해보았다.

여럿이서 식사를 하다 찍은 사진으로 보이는 사진의 한구석, 서인하와 윤해언이 붙어 앉아 환하게 웃고 있었다.

돈 좀 있다 하는 사람들이 모이는 바닥이 어차피 거기서 거기인지라, 인하가 별다른 어려움 없이 서연과 강현에게 접근한 것처럼 강현 또한 서인하와의 연결 고리를 쉽게 찾아낼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가 미국에서 함께 살았다던 남자에 대한 정보 또한 말이다.

해언이 보육원을 나오자마자 미국으로 떠난 것은 이번에 처음 알게 된 사실이었다. 이전 강현이 조사했던 보육원 주변 인물들은 그 사실을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었는데, 그것이 9년간 윤해언을 찾을 수 없었던 이유였던 모양이었다.

심기가 불편할 때 하는 버릇대로 강현은 사진 속 인하와 해언의 얼굴을 보며 긴 손가락으로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서인하가 말한 ‘윤해언’이 해완이 아니라는 사실에서 느낀 안도감과,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자신, 그리고 윤해완에게 접근한 의도에 대한 불쾌감이 우위를 가릴 수 없을 정도로 비등하게 다투고 있던 탓이었다.

물론 가장 먼저 든 생각은, 그 남자가 맨 처음 강현과 같은 동기로 움직였다는 것이었다.

윤해완에게서 윤해언의 흔적을 찾는 것 말이다.

생각만으로도 짙게 치미는 트적지근함에 강현은 인하와 나눴던 대화들을 지난 며칠간 꼼꼼히 복기해 보았다. 언변이 좋은 스타일이라 꽤 많은 대화를 나눴음에도 불구하고 기억에 남는 말은 별로 없었지만, 번뜩 떠오르는 게 하나 있기는 했다.

‘업무라고 해야 할지, 친구가 맡긴 일이 있어서요.’

‘아뇨. 죽었어요. 심장병으로.’

그것은 인하가 제 앞에서 두 번이나 언급했던, 그 죽었다던 ‘소중한’ 친구가 맡긴 일에 관한 것이었다.

당시에는 그런 사적인 이야기를 왜 자꾸 처음 보는 자신에게 연이어 이야기하는 건지 이해가 안 됐지만, 이제 강현은 인하의 의도에 대해 확신에 가까운 추측을 가지고 있었다.

강현이 알아채기를 바랐던 것이다. 그 ‘친구’가 윤해언이라는 것을. 그리고 윤해언의 부탁은 강현, 혹은 해완과 관련이 있음이 분명했다.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모든 일이 의문투성이였다. 불과 몇 달 전, 해언의 향을 가진 해완을 만나고 일이 잘 풀리는 듯 느껴졌던 때가 먼 옛날로만 느껴졌다.

마음을 복잡하게 하는 의문들에 단순히 답을 추구하기는 쉬웠다. 이미 죽은 윤해언은 어쩔 수 없다 치더라도 해완이나 서인하를 붙잡고 물어보면 될 일이었다.

하지만 지금의 상황을 망치지 않고 답을 얻어 내는 방법은 좀처럼 보이지 않았다. 아니, 지금의 상황을 망치고 싶지 않아서 답을 얻어 내고 싶은 것이기에 더욱 어려웠다.

두통으로 지끈 아리는 눈가를 신경질적으로 누르며 강현은 깊은 한숨을 쉬었다.

가진 것을 전부 잃을 준비가 되어 있을 때는 모든 것이 쉬웠는데, 오로지 단 하나를 가지고 싶어지니 모든 일이 어려워졌다는 사실이 답답하기 그지없었다.

예전 강현은 진짜 윤해완에 대해서 알고도 그가 하는 서투른 거짓말에 속은 척 구는 데 양심의 가책을 느낀 적이 없었다.

오히려 잘됐다고 생각했다. 나중에 그 향에 흥미를 잃어도, 그를 쉽게 내칠 키 하나를 쥐었다 싶어서.

지금은 그때와는 조금 다르긴 했다. 제가 그를 해언이라고 부를 때 어김없이 당황해하는 그 얼굴이 안쓰러워, 다른 방법도 없는데 그를 해언이라고 부르는 것조차 망설여졌다.

그럼에도 강현은 제 입으로 그가 윤해언이 아닌 윤해완이라는 진실을 알고 있다는 걸 털어놓을 생각만큼은 조금도 가지고 있지 않았다.

그 이유는 이전과는 정반대의 방향을 향했다. 윤해완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믿고 있는 그 사실이, 해완을 제 곁에 붙들어 맬 수 있게 도와줄 것이라고 계산했기 때문이었다.

‘내가 널 이렇게 망쳐 놨다는 죄책감만 없었어도, 진작에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났을 텐데.’

꽤 오랫동안 잊고 있던 어머니의 목소리가, 간만에 머릿속에서 들려왔다.

훼손된 사람의 곁에 누군가를 두기 위해서는 깊은 죄책감이 가장 강력한 방법이 될 수 있다고. 그것이 강현이 인생에서 제 어머니에게서 배운 유일한 교훈이었다.

해완이 자신을 속이고 있다고 생각할 때마다, 그 때문에 강현에게 하는 작은 거짓말들이 하나하나 쌓여 갈 때마다, 그 거짓말이 강현을 상처 입혔다고 생각할 때마다, 해완이 느끼는 죄책감들은 그의 발목에 하나하나 쌓여 제 옆에서 도망가지 못하게 만들 것이다.

강현은 그 어둑한 집에서 해완의 손이 닿았던 자신의 상처를 손으로 쓸어 보았다. 하염없이 젖어 들어가던 눈동자의 선명한 기억을 떠올리기 위해서였다.

그런 윤해완에게는, 그 별것 아닌 상처들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아프게 바라보는 윤해완에게만큼은 겁박하는 것보다 스스로의 마음에 짐을 지워 주저앉히는 쪽이 가장 좋은 방법이 되리란 확신이 들었다.

순간, 설명할 수 없는 충동에 이끌린 강현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 통화 버튼을 급하게 눌렀다. 이번에는 채 두세 번도 신호가 가지 않고 목소리가 들려왔다.

―여보세요?

멀리 떨어져 있어서인지 해완의 목소리는 조금 가라앉은 듯 들렸다.

“응, 나야. 뭐 하고 있었어?”

―나 퇴근하고 집에 있었지. 너는?

여전히 어둡게 들리는 목소리는 평소와 확연히 달라서, 강현은 살짝 인상을 찡그렸다가 물었다.

“무슨 일 있어? 목소리가 좀 안 좋은 거 같은데.”

잠시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조금 밝아진 목소리가 되돌아왔다.

―아니, 아무 일도 없어. 아, 오늘 일이 바빠서 좀 피곤해서 그런가? 넌 지금 어디야? 아직 일하고 있어? 점심은 먹었구?

말을 돌리기 위한 질문 공세임에 분명해서, 해완의 상태에 대해 더 캐물으려던 강현은 그냥 입을 다물고 다정히 대답했다.

“응, 나 지금 잠깐 호텔에 쉬러 들어왔어. 이따 5시쯤 또 나가 봐야 할 것 같아…….”

해완의 말이 거짓말이어도 상관없었다.

오히려, 아무리 작은 것이라도 그 모든 게 해완의 마음에 차곡차곡 쌓이기를, 강현은 진심으로 바랐다.

* * *

강현이 돌아오는 날, 도저히 일이 손에 잡히질 않아 해완은 1분이 멀다 하고 시계만 바라보았다.

그런 해완을 눈치챈 사장이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퇴근하고 데이트라도 하냐며 타박을 했다. 해완이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얼굴만 붉히자 호탕하게 웃음을 터트린 사장은 손님도 없는 날이고 하니 특별히 해완이 20분 정도 빨리 나가는 것을 허락해 주었다.

10분 전 강현에게 비행기에서 내렸다는 연락은 받은 상태라 해완은 들뜬 마음으로 행동을 서둘렀다. 집에 먼저 들를 것이라고 했기 때문에 해완도 강현의 집으로 곧바로 향할 예정이었다.

옷을 갈아입는 시간도 아까워 유니폼만 벗어 두고 겉옷은 손에 든 채 허둥지둥 편의점 문을 열고 나오던 해완의 손목을 누군가 홱 잡아 돌려세웠다.

깜짝 놀란 해완이 정신을 차리기도 전에 와락 안긴 단단한 품 안에서 달고 짙고 무거운 숲의 향기가 풍겼다.

그 익숙한 향을 인식하자마자 심장이 열렬히 뛰기 시작했다. 해완은 저를 다짜고짜 끌어안은 강현의 몸을 와락 마주 안았다.

강현은 해완이 겉옷을 손에 들고 있는 것을 알고는, 제 코트를 열어 그 안으로 더 끌어들이며 타박하듯 중얼거렸다.

“날이 이렇게 추운데 옷도 제대로 안 입고 다니면 어떡해?”

해완은 살짝 고개를 들어 강현을 올려다보며 입가가 아릴 정도로 활짝 웃었다.

“강현아, 너 어떻게 여깄어? 아까 비행기에서 내렸다며.”

강현은 해완의 이마에 제 이마를 살짝 꿍 맞대며 장난기 어린 목소리로 말했다.

“너 놀라게 해 주고 싶어서 뻥친 거야. 한 시간 전에 내렸어.”

장난에 속았다는 사실에도 조금도 뾰족해지지 않는 기분에, 해완은 또 바보같이 웃으며 강현의 어깨에 머리를 기댔다.

그런데 제 몸을 안고 있던 강현이 문득 손을 올려 이곳저곳을 더듬는 것이 느껴졌다. 아무리 오랜만에 봤다고 해도 사람들 다 보는 데서 뭐 하는 거지, 민망해진 해완이 뭐라고 한마디 하며 몸을 떼어 내려는 순간, 제게서 떨어지지 못하도록 팔에 힘을 준 강현이 의아한 듯 물었다.

“살 빠졌어?”

생각보다 기민한 강현의 질문에 해완의 입이 바싹 말랐다. 면역 억제제를 복용한 지 일주일이 넘어가자 구토가 많이 잦아들었고, 몸무게도 생각보다 많이 줄지 않은 덕에 괜찮으리라 생각했는데 강현이 후각뿐 아니라 손끝 감각도 예민하다는 것을 간과해서는 안 됐던 모양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겉옷이라도 입고 나오는 건데. 속으로 작은 후회를 중얼거린 해완이 침을 꿀꺽 삼키고 고개를 저었다.

“안 빠졌어.”

“빠진 거 같은데.”

“아냐. 오랜만에 봐서 네가 헷갈리는 거야.”

무작정 우기자 강현도 별도리가 없는지 고개를 끄덕였다. 대신 그는 다정하게 물었다.

“배고프겠다. 밥 먹으러 가자. 뭐 먹고 싶어?”

가장 피하고 싶던 질문이 또 한 번 닥쳐오자 해완은 살짝 입술을 깨물었다.

대답 대신 해완은 강현의 품에 더욱 깊숙이 안기며, 작게 웅얼거렸다.

“……고 싶어.”

강현의 어깨에 입을 묻고 중얼거리는 해완에게, 잘 알아듣지 못한 강현이 고개를 깊숙이 숙이며 되물었다.

“응?”

“……너랑 같이 집에 가고 싶어.”

그 말을 들은 강현이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다. 그때를 놓치지 않고 고개를 든 해완은 강현의 귀 아래 턱밑에 부드럽게 입을 맞추고 고개를 내렸다.

해완의 몸을 안고 있던 팔에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해완을 몸에서 떼어 내고 손목을 움켜쥔 채 성큼성큼 편의점 앞에 주차된 차로 걸음을 옮겼다.

강현은 조수석 문을 열고는 짧게 말했다.

“타.”

그렇게 해완을 차에 태운 강현은 운전석에 타더니 한마디 말도 없이 차를 출발시켰다.

조금 위축된 해완은 힐끔거리며 강현의 옆모습을 훔쳐보았다. 그 짧은 입맞춤도 머릿속에서 몇 번이나 시뮬레이션을 하고 나서야 용기가 났던 행동이었는데, 생각보다 무뚝뚝한 강현의 반응에 어찌해야 할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그때, 빨간 신호에 멈춘 강현이 답답한 듯 악문 잇새로 낮게 중얼거렸다.

“자꾸 훔쳐보지 마.”

“어?”

“안 그래도 참고 있으니까.”

순간, 운전석에 앉은 강현의 앞이 외면할 수 없을 정도로 불룩해진 것을 눈에 담은 해완은 삽시간에 목덜미까지 얼굴을 새빨갛게 붉혔다.

그런 해완을 흘끗 본 강현은 욕설까지 작게 입에서 굴리고는 신호가 바뀌자마자 차를 급하게 출발시켰다.

* * *

주차장에서 내리는 순간부터 높아지는 긴장감에, 집까지 어떻게 올라갔는지도 몰랐다. 현관문이 닫히자마자 강현은 해완을 붙들고 키스부터 퍼부었다.

정신없이 옷이 벗겨지고 소파에서 먼저 엉망으로 뒤엉키고 난 뒤, 강현은 몸이 식기도 전에 해완을 침대로 안아 옮겨서 곧바로 한 번 더 범했다.

완전히 지쳐 늘어져 버린 해완과는 달리 강현은 땀과 체액에 젖은 해완의 피부에 입을 맞추고 빨아들이는 것에 여념이 없었다.

전에는 잘 몰랐지만 이제 강현이 뭘 하고 있는지 아는 해완은 강현의 뒤통수에 손을 얹은 채 나른하게 그가 하는 양을 지켜보고 있었다.

꼼꼼히 입을 맞추며 내려가다가, 해완의 마른 배에 입술을 멈춘 강현이 고개를 들더니 불만족스럽게 중얼거렸다.

“역시 살 빠진 거 맞는 거 같은데.”

“아니야. 안 빠졌어.”

끝까지 우기는 해완에 강현은 한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켰다.

“열흘이나 집을 비워서 딱히 먹을 게 없을 거 같은데, 씻고 잠깐 나가서 밥 먹고 올까?”

심장이 덜컥 내려앉은 해완은 얼른 고개를 저었다.

“나 너무 피곤한데…….”

“아직 별로 늦지도 않았는데 뭐가 피곤해?”

“……네가 지치게 했잖아.”

그 말에 강현은 할 말이 없는지 잠시 입을 다물었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눈까지 비비며 졸린 척을 했지만 강현은 엄한 얼굴을 했다.

“저녁 안 먹었잖아. 배달이라도 시켜 줄게, 그럼.”

“배달시키면 또 기다리고 소화될 때까지 못 자잖아.”

“그래도…….”

“내일 쉬는 날이잖아. 지금은 그냥 간단히 먹고, 내일 맛있는 거 사 줘. 응?”

해완은 강현의 손에 깍지를 끼며 응석이 섞인 말투로 말했다. 해완의 물기 어린 눈을 바라보던 강현이 땀에 젖은 머리를 쓸어 올리며 어쩔 수 없다는 듯 짧게 한숨을 쉬었다.

집에 먹을 게 없다는 것은 역시나 강현의 기준으로, 종류별로 다양하게 쌓여 있는 레토르트 음식을 본 해완은 속으로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강현은 인스턴트 피자를, 해완은 야채죽을 골라 간단하게 한 끼 해결을 했다.

강현이 침대 시트를 갈러 간 사이 해완은 재빨리 저녁분의 면역 억제제를 물과 함께 넘겼다. 약을 먹은 것만으로도 신경이 곤두서 쿵쿵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해완은 가만히 가슴 위를 내리눌렀다.

해완의 경우 저녁 약이 부작용이 더 심하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었기 때문에, 구토가 많이 잦아들었다 해도 아직까지는 밖에서 강현과 함께 식사를 하고 싶지 않았다.

오늘은 어떻게 무사히 넘기겠다 싶었지만 앞으로 어떻게 해야 할지 아득해지는 기분에 해완은 입술 끝을 초조하게 씹었다.

그때 강현이 침실 밖으로 나왔다. 가까이 다가온 그는 해완의 손을 잡았다.

“침대 정리 다 했어. 가서 자자.”

몇 발짝 되지도 않는 거리를 마중 나온 것 같은 강현의 태도에 해완은 멋쩍게 웃으며 말했다.

“……안에서 부르지 그랬어. 내가 애기도 아니고.”

그 말에 걸음을 멈춘 강현이 해완을 빤히 봤다. 그는 해완의 머리칼에 입을 맞추더니 장난스럽게 중얼거렸다.

“우리 보리. 내가 데리러 와야지.”

머리에 맞닿은 강현의 입술을 밀어 낸 해완이 인상을 찡그렸다.

“왜 또 나보고 보리래?”

“네 별명이잖아. 뭘 새삼스럽게.”

“진짜 보리는 어떡하라구.”

“걔보다 네가 먼저 태어났으니까, 걔는 이제부터 보리 투라고 부르지 뭐.”

“말이 되는 소릴 해.”

투닥대며 침실로 들어온 두 사람은 침대 위에 나란히 누웠다. 해완이 평소 버릇대로 강현을 등지고 눕자, 강현이 등 뒤에서 그를 꼭 껴안았다.

등 뒤에서 전해져 오는 온기에 마음이 뭉클했다. 그와 동시에 울고 싶기도 한 기분이 들어, 해완은 눈을 꾹 내리감았다.

약 기운이 돌기 시작했는지 어둠 사이로 메스꺼움이 덮쳐 왔다. 제발 오늘 밤만은 잘 넘기기를 바라며, 해완은 강현이 눈치채지 못하도록 손등으로 입을 꾹 막고 잠을 청했다.

* * *

깊이 잠들었던 해완은 이불이 들썩이는 감촉에 불현듯 잠에서 깼다. 스르르 눈을 뜨자 눈앞에 보이는 것은, 말간 얼굴을 한 해언이었다.

오랜만에 보네. 해완은 잠에 취한 머리로 생각했다. 왜 그런 기분이 들까 잠시 의문스러웠지만, 아마도 요즘 해언이 입시 준비로 바빠 서울을 오가느라 보육원에 들어오지 않는 날이 많았기 때문인 듯했다.

아니면 몸이 많이 아파 그런지도 모른다. 자라면서 자주 아픈 것은 해언의 몫이었는데, 이상하게 요 며칠 해완은 무슨 병인지도 모르게 끙끙 앓았다.

해언이 옆에서 간호해 주지 않은 건 좀 서운했지만, 그가 며칠이나 곁에 없어서 병이 옮지는 않을 것 같아 다행이라고, 해완은 멍하니 생각했다.

‘……해언아, 이제 들어온 거야?’

해완은 졸린 눈을 끔뻑이며 멍하니 물었다. 단순한 질문이었는데도 해언은 생각지도 못한 말을 들은 것처럼 잠시 움찔하더니, 작게 대답했다.

‘……응.’

‘손이 얼음장 같네. 추운데 이렇게 늦게 다니니까 그렇지.’

해완은 이불 속 자신의 손에 닿아 있던 해언의 차가운 손을 잡아 쥐었다. 가느다란 손이 얼어붙은 게 안쓰러워 졸린 와중에도 양손으로 쥐고 따뜻하게 해 주려 애썼다.

그런 해완의 얼굴을 해언은 내내 못이 박힌 듯 바라보고 있었는데, 평소와 달리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표정에 해완은 약간 어리둥절해졌다.

‘해언아,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해언은 여전히 대답이 없었다. 그저 인형 같은 얼굴로 눈을 크게 뜨고 해완을 바라보기만 했다. 마음이 조급해진 해완은 다시 한번 되물었다.

‘왜 말을 안 해, 서울에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서울?’

‘서울 갔다 온 거 아니야? 너 요 며칠 동안 보육원에 안 들어왔잖아.’

그 말에, 제가 쥐고 있던 해언의 손에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가는 게 느껴졌다. 자기도 모르게 인상을 찡그린 해완이 시선을 내렸다가 다시 올렸을 때, 대리석같이 차고 희게 굳어 있던 해언이 느리게, 아주 느리게 미소를 짓는 것이 보였다.

‘……응. 맞아. 서울, 서울 갔다 왔지.’

앵무새처럼 해완의 말을 반복한 해언은 더욱 크게 미소를 짓고는, 손을 들어 올려 해완의 열이 오른 얼굴을 상냥하게 보듬고 머리칼을 쓸어 넘겼다.

그 손길이 너무 다정해서, 대답을 들어야 한다는 것도 잊고 해완의 눈꺼풀이 점점 내려앉던 찰나, 해언이 불현듯 입을 열었다.

‘해완아.’

‘응?’

‘날 미워한다고 말해 봐.’

‘…….’

‘날 싫어한다고 말해 봐.’

뜬금없는 해언의 말에, 해완은 졸린 눈을 억지로 크게 떴다. 왜 그런 질문을 하는지 이유는 알 수 없었지만 이상한 불안감이 마음 한구석에서 피어오른 해완은 어린애처럼 고개를 저으며 딴소리를 했다.

‘안 미워.’

‘…….’

‘안 싫어.’

그러자 해언은 눈을 두세 번 깜빡이다가 해완의 가슴팍에 얼굴을 묻어 숨겨 버렸다.

숨을 쉴 때마다 짙게 풍기는 해언의 아름다운 향을 맡으며, 해완은 이런 비슷한 대화를 누군가와 함께 나눴던 것만 같은 데자뷔에 사로잡혔다.

아, 그래.

강현이랑 이런 비슷한 얘기를 했었잖아.

강현이. 강현이는 어디 갔지? 해완은 고개를 휘휘 저어 옆에서 잠들었던 강현을 찾았다.

그런데 그때, 가슴팍에 얼굴을 묻은 해언의 조용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넌 날 절대 미워하지 않을 작정이구나.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치?’

이해할 수 없는 말에 해언의 얼굴을 보기 위해 고개를 숙였는데, 그곳에는 아무것도 존재하지 않는 짙은 어둠만이 있었다.

해완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분명 보육원의 따뜻한 방에 누워서, 아니, 분명 강현의 아름다운 집에서, 그의 품에 안겨서 잠들어 있었는데, 어딘지 모를 어둠 속에 혼자 남아 있었다.

겁에 질려 새까만 주위를 둘러보던 해완은 목이 터져라 이름을 불렀다. 해언의 이름을 불렀다가, 강현의 이름을 불렀다가, 두 사람의 이름을 번갈아 부르기도 했다.

하지만, 그 누구도 대답하는 사람은 없었다.

* * *

해완은 날카로운 숨을 들이켜며 잠에서 깨어났다.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손과 가슴팍에서 식은땀이 배어드는 것이 느껴졌다. 해완은 잠시 눈을 깜빡일 생각도 하지 못하고 등 뒤에서 평온하게 숨을 쉬고 있는 강현의 숨소리에 집중하며 마음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뿐, 곧 익숙한 구토감이 치밀어 올랐다.

해완은 입을 틀어막은 채 최대한 조심히 강현의 품에서 빠져나왔다. 장거리 비행으로 인해 피곤한 탓이었는지 다행히도 강현은 조금 몸을 움찔거렸을 뿐 잠에서 깨지는 않았다.

비틀거리는 발걸음으로 방을 나온 해완은 거실 화장실로 달려가다시피 해 변기에 고개를 묻고 아직 다 소화되지도 않은 얼마 안 되는 죽을 토해 냈다.

구역질이 채 가라앉기도 전에 몸을 일으킨 해완은 변기 물을 내리고 곧바로 얼굴을 씻고 입을 헹궜다. 강현이 들어오기라도 할까 뒤를 연신 흘끔거리던 그는 여전히 집 안이 고요하자 세면대 위에 팔뚝을 기대고 깊게 허리를 숙였다.

방금까지 꾼 꿈이 지나치리만치 선명해서 팔뚝에 오싹 소름이 돋았다.

어찌 보면 당연했다. 그 어둠 속에 빠지기 전까지, 해언과 나눈 대화는 실제 해완이 가지고 있는 기억과 같았으니까.

며칠 전 인하와 만난 이후 해완은 오늘과 같은 꿈을 연속해서 꾸고 있었다.

그 길이도, 형태도 조금씩은 달랐지만, 모두 고등학교 졸업식 이후 해언이 말없이 미국으로 떠나기 전 마지막으로 함께 지냈던 밤의 기억이라는 것만은 같았다.

‘해언이가 왜 여강현 씨를 당신과 만나게 했는지 궁금하지 않아요? 자기가 9년 전에 한 행동을 이해하길 바라서 만나게 한 거예요.’

9년 전 해언이 해완을 강현과 일부러 만나지 못하게 한 것은 이미 알고 있었지만, 인하의 그 말은 그간 해완이 생각하지 못한 다른 이유가 있는 듯 들렸다.

그것만이 아니었다. 인하가 한 그다음 말이 이상하게 해완의 가슴에 사포처럼 걸려 있었다.

‘해언이가 왜 그랬을지, 포기하지 말고 잘 떠올려 봐요.’

그는 해완이 마치 이미 답을 알고 있다는 것처럼, 생각해 보라는 것도 아니고 떠올려 보라고 말했다.

그 카페를 정신없이 뛰쳐나온 이후 해완은 내내 강박적으로 제 머릿속에 쓸 만한 기억이 있는지 샅샅이 뒤져 보았지만, 도저히 답으로 느껴질 만한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아니, 기억을 찾을 수 없다기보다는 그가 기억하고 있는 것이 너무 적었다.

강현을 처음 본 순간이나 해완이 혼자 그를 보러 다니던 때의 기억은 선명했는데, 이상하리만치 해언과 함께 강현의 이야기를 나눴던 시간들은 제대로 기억나는 게 얼마 없었다.

해완은 감싸고 있던 머리를 괴롭게 쥐었다. 제 머릿속에 있는 기억의 형태가 뭔가 이상하다는 걸, 이제야 깨달은 게 믿기지 않아서였다.

해언과 강현에 대한 이야기를 나눈 기억이 희미한 것까지는 괜찮았다. 원래부터 해완은 그렇게 기억력이 좋은 편은 아니었으니까.

하지만 해언과의 마지막 날은 그렇게 선명하게 기억하면서 그 밤 이전 며칠간의 기억은 아무리 떠올리려 애를 써도 생각이 나질 않았다. 연속된 필름의 중간이 잘려 나가 버린 것처럼, 그날 이전에 느꼈던 감정이나 생각들도 이해할 수 없을 만큼 뚝 끊겨 있었다.

자신의 기억에 분명히 무슨 문제가 있었다.

어린 시절의 기억을 모두 지워 버린 것처럼 말이다.

이 상황에 어울리지 않게, 자조적인 웃음이 입에서 픽 새어 나왔다. 지난 9년 동안 저한테 그런 문제가 있다는 사실을 몰랐다는 사실이 믿기지 않았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불현듯 어떤 의문이 들었다.

정말 몰랐던 게 아니라, 그저 모르고 싶었던 것 아닐까?

스르르 세면대 밑에 주저앉은 해완은 머리를 움켜쥔 채로 무릎 사이에 고개를 묻었다. 좀처럼 잠재울 수 없는 불안감이 끝도 없이 전신에 퍼져 갔다.

* * *

해완은 이른 아침 두어 시간가량의 선잠에서 깨어났다. 어젯밤 그렇게 토하고 나서 거의 잠을 이루지 못했기에 눈이 더할 나위 없이 무거웠지만 조심스럽게 강현의 품에서 벗어나 거실로 나왔다.

시계를 보자 아침 7시가 조금 안 된 시각이었다. 아침 약을 먹기에 조금 이르기는 했지만 강현이 깨기 전에 약을 먹고 싶었던 해완은 부엌에 있는 시리얼을 속에 대충 우겨 넣고는 아침 약을 먹었다.

시리얼이 속에 받지 않아서인지 평소보다 빠르게 울렁거려서, 해완은 욕실 문을 잠그고 거실 화장실에 틀어박혔다. 강현이 문을 두드리면 씻고 있다고 변명할 요량으로 샤워기 물까지 틀어 놓은 채였다.

다행히도 울렁거림은 머지않아 견딜 수 있을 만한 수준으로 괜찮아졌다. 물을 틀어 놓은 김에 간단하게 샤워를 마치고 문을 연 해완은 그 앞에 등을 기대고 서 있는 강현을 보고 화들짝 놀라 멈춰 섰다.

“여기서 뭐 해?”

얼떨떨한 해완의 목소리에, 강현이 대놓고 인상을 찌푸리고 작게 웅얼거렸다.

“깼는데 네가 없잖아.”

“…….”

“문까지 잠가 두고.”

매일 잠에서 깰 때마다 옆에 없었던 것은 강현이었는데, 제가 하루 조금 일찍 자리를 비웠다고 불만이 가득한 목소리로 말하는 강현이 새삼스러워 해완은 저도 모르게 푸스스 웃음을 터트렸다.

그러자 강현이 무슨 뜻이냐는 듯 한쪽 눈썹을 들어 올렸다. 잠에서 덜 깬 그 불퉁한 얼굴이 귀여워 보여, 해완은 가까이 가서 강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미안, 그냥 잠이 일찍 깨서.”

부드러운 사과에 누그러진 듯 강현은 몸을 구기다시피 해 해완을 마주 안았다.

“아침도 이미 먹은 거 같던데, 배고파서 일찍 깬 거야?”

꼭 그런 것은 아니었지만, 해완은 그냥 강현을 안은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거봐. 어제 내가 제대로 먹고 자자고 했잖아.”

“그러게, 그럴 걸 그랬나 봐.”

“점심에는 맛있는 거 먹으러 가자.”

어제 해완에게 밥을 제대로 먹이지 못한 게 어지간히 마음에 걸린 모양이었다. 여전히 바깥에서 밥을 먹는 것이 껄끄러웠지만, 딱히 거절할 말을 찾지 못한 해완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뭐 먹고 싶어? 가고 싶은 데 있어?”

강현의 자상한 물음에 잠시 고민하던 해완은 예전 강현과 한 번 가 본 적 있던 비건 레스토랑 이름을 댔다. 고기나 생선류보다는 속이 편하게 느껴졌던 기억이 나서였다.

“나간 김에 영화도 보고 오는 게 어때?”

레스토랑 근처에 있는 멀티플렉스가 떠오른 듯 강현이 말했다. 저도 모르게 길게 하품을 하고 있던 해완은 급히 입을 다물고 고개를 끄덕였다. 면역 억제제를 먹기 시작한 이후로 체력이 많이 떨어지는 바람에 좀 피곤하긴 했지만 내일도 일요일이니 오늘은 조금 무리해도 괜찮을 것 같았다.

나갈 준비를 위해 어제 멋대로 벗어 던진 옷을 찾으려 하는데, 강현이 불쑥 물었다.

“다른 옷 꺼내 줄까?”

살짝 얼굴을 붉힌 해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드레스 룸으로 걸음을 옮겼다.

강현의 집에서 자고 가는 날이 많아지면서 강현은 이곳에 두고 입으라며 제멋대로 옷 몇 벌을 사서 안겼었다. 해완의 기준에서는 부담스러울 정도로 비싼 옷들이었지만, 어차피 그것들을 입을 일이라고는 강현과 데이트할 때뿐이었고 제가 받지 않았다가는 그냥 쓰레기통에 버려지고도 남으리란 걸 잘 알았기에 받아들일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드레스 룸에서 강현이 들고나온 것은 해완의 옷이 아니었다. 베이지색 면바지는 해완이 입을 만한 사이즈가 맞았으나, 브라운 계열의 캐시미어 터틀넥은 강현이 입던 것이 분명했다.

“강현아. 이거 내 옷 아닌 거 같은데……?”

해완의 어리둥절한 물음에 강현은 눈 한번 깜빡이지 않고 대답했다.

“알아.”

여전히 강현이 사이즈도 맞지 않을 제 옷을 가져다주는 이유를 몰라 다시 되물으려던 해완은, 예전 두 사람이 처음으로 영화를 보러 갔을 때 강현이 제 코트를 억지로 입혀 향을 믹싱하던 기억을 떠올리고 살짝 얼굴을 붉혔다.

그런 해완을 보던 강현이 희미한 미소를 띠었다. 그 얼굴을 보자 더욱 볼이 뜨거워지는 것 같아 드레스 룸으로 자리를 옮겨 옷을 갈아입으려던 해완의 손목을 강현이 덜컥 잡았다.

“……내가 입혀 줄게.”

나직하게 속삭인 강현은 대답도 듣지 않고 해완이 입고 있던 파자마 단추를 툭툭 풀어 내렸다. 상의를 입혀 주는 것까지는 괜찮았지만, 마치 어린아이라도 되는 듯 바지까지 입혀 주겠다는 것까진 견디지 못한 해완이 강현의 손을 잡았다.

“바, 바지는 내가 입을게.”

그러나 강현은 해완의 손을 잡아 치우고는 막무가내로 바지를 밑으로 끌어 내렸다. 집 안 공기가 워낙 훈훈해 추운 느낌은 전혀 없었지만, 어린애처럼 대해지는 민망함에 오소소 소름이 돋았다.

그런 해완은 아랑곳없이 강현은 그의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아 면바지를 내밀며 말했다.

“왼쪽 발.”

해완은 얼굴이 새빨개진 채 강현의 어깨를 잡고 그의 지시에 따라 바지에 한쪽씩 다리를 넣었다. 바지를 끌어 올린 강현은 지퍼를 채우고 벨트까지 꼼꼼히 매 주었다.

마지막으로 해완을 소파에 앉혀 두고 마른 발에 푹신한 양말까지 꼼꼼히 신긴 강현이 그제야 만족스러운 듯 빙그레 웃었다.

“예쁘다.”

해완은 입을 삐죽이면서도 제 몸에는 살짝 큰 강현의 터틀넥에 고개를 묻었다. 강현의 묵직한 페로몬 향이, 코끝을 기분 좋게 간질였다.

* * *

“오늘 좀 잘 못 먹는 거 같은데, 음식이 입에 안 맞아?”

저도 모르게 음식을 깨작이고 있던 해완은 강현의 말에 화들짝 놀라 고개를 들었다.

“아니, 맛있어. 맛있는데…… 그냥 배가 좀 아파서.”

어차피 전처럼 먹을 수 없는 것은 어쩔 수 없는 일이라, 해완은 반쯤 솔직한 이야기를 했다. 그 말에 강현은 수저까지 내려놓으며 진지하게 물었다.

“왜, 많이 안 좋아?”

“아냐, 그런 거 아니고. 그냥 아침에 시리얼 먹은 게 좀 별로였나 봐.”

그 말에도 그는 의심을 거두지 않은 표정으로 유심히 해완의 얼굴을 봤다. 해완은 짐짓 모른 척 시선을 내린 채 앞에 놓인 음식을 한입 가득히 입에 떠 넣었다.

어떻게든 최선을 다한 덕에 앞에 놓인 접시의 3분의 2 정도는 비울 수 있었다. 면역 억제제를 먹기 시작한 이후로 가장 많은 양의 음식을 먹은 것이었지만, 사정을 모르는 강현은 여전히 약간 걱정스러운 얼굴을 했다.

영화는 집에서 나오기 전에 미리 예매해 뒀기 때문에 두 사람은 식사를 마치고 곧바로 극장으로 향했다.

평소라면 주전부리를 좋아하는 해완을 위해서 팝콘이나 이런저런 간식거리를 사서 들어갔겠지만 아까 해완의 말을 의식한 탓인지 강현은 딱히 간식에 대해서 먼저 묻지 않았다.

그런데, 영화 시간을 기다리며 서 있던 해완의 속이 조금씩 뒤틀려 오기 시작했다. 해완은 강현이 상영관 위치를 확인하고 있는 틈을 타 살짝 인상을 쓰며 배를 꾹꾹 문질렀다.

아마 강현의 앞에서 무언가를 먹는 것에 너무 긴장한 탓인 듯했다. 그래도 아침 약을 먹고 상태가 나쁘지 않아서 괜찮을 줄 알았는데, 하필 이런 자리에서 아파 오는 속이 원망스러웠다.

그때 상영관 위치를 확인한 강현이 가까이 다가왔다. 해완은 자기도 모르게 굽히고 있던 허리를 펴고 배를 문지르고 있던 손을 재빨리 주머니에 넣었다.

“아직 10분 정도 남았는데, 이 앞에 앉아 있을까?”

“아니. 그냥 지금 들어가자. 근처에 사람도 많은데.”

다행히 강현은 별다른 생각 없이 해완의 말에 수긍했다. 일단 영화관 안에만 들어가면 조명도 어둡고 하니 이 정도의 통증 정도는 강현에게 들키지 않을 수 있을 것 같아, 해완은 속으로 살짝 안도의 한숨을 내쉬었다.

하지만, 그것이 큰 오판이었음을 깨달은 것은 얼마 지나지 않아서였다.

자리에 앉자마자 이어지는 배 속이 제멋대로 꼬여 드는 고통에 해완은 이를 악물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등에서 식은땀이 흐르고, 토기가 급격하게 치밀어 올랐다.

영화가 시작하기까지는 5분 정도가 남아 있었다. 결국 해완은 잠시 통증이 물러난 틈을 타서 강현을 향해 급하게 입을 열었다.

“강현아, 나 얼른 화장실 좀 다녀올게.”

그 말에 강현은 해완을 바라보긴 했으나, 마침 영화 예고편이 나오고 있던 스크린에서 비쳐 드는 현란한 빛에 창백한 얼굴까지는 눈치채지 못한 듯 고개를 끄덕였다.

해완은 좌석을 찾아 계단을 오르는 사람들 사이를 정신없이 비집고 아래로 내려갔다. 처음에는 속이 뒤집히는 토기를 해결하는 것이 가장 급하게 느껴졌지만 움직이면 움직일수록 무언가가 위장을 쥐고 사정없이 뒤틀어대는 고통이 눈앞이 희미해질 정도로 엄습해 왔다.

상영관을 나서는 것만으로도 숨이 턱까지 찬 해완은 허리를 반쯤 굽히고 벽에 기대어 서 피가 나도록 입술을 짓씹었다.

화장실은 다행히도 바로 상영관 옆에 있었으나, 거기 가서는 안 될 것 같다는 예감이 해완의 머리를 지배했다.

해완은 식은땀을 뚝뚝 흘리면서도 고개를 저어 가며 몸을 숨길 곳을 찾았다. 조금 떨어진 곳에 비상계단으로 들어가는 문이 눈에 띄었다.

위장을 쥐어짜는 고통에 신음하지 않기 위해 해완은 뿌득 소리가 날 정도로 이를 꽉 악물고 벽에 기대어 걸음을 옮겼다.

눈앞이 자꾸만 빙빙 돌고 의식이 깜빡였다. 몇 발자국 되지도 않는 거리인데도 천 리처럼 길게 느껴졌다. 하지만 지금 쓰러질 수는 없었다. 사람들이 오가는 곳에서 쓰러지면 병원에 실려 갈 것이고, 그러면 모든 게 끝장이었다.

겨우 손에 잡힌 계단 문손잡이를 해완은 온 힘을 다해 잡고 밀어 열었다. 등 뒤에서 문이 거칠게 닫히는 소리와 함께, 해완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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