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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 sur-dosage (2) (11/18)

10. sur-dosage (2)

상영관 출입구를 향해 고정되어 있던 강현의 시선이 드나드는 사람의 얼굴에 매번 따라붙었다. 그러나 해완의 모습은 어디에도 보이지 않았다.

스크린에서 영화 시작 전 대피로를 알리는 안내문이 나오기 시작하고 상영관 문이 닫힌 듯 입구에서 새어 드는 빛이 스르르 사라졌다.

해완이 자리를 뜬 지 기껏해야 5분밖에 지나지 않았음에도 왠지 느낌이 이상했다. 제 앞에서 그가 아팠던 적은 몇 번 있었지만, 오늘처럼 잘 먹지 못하는 모습을 본 적은 없어서 더 그런 것 같았다.

배탈이라도 났는데 제가 곁에 있으면 안 그래도 부끄러움을 잘 타는 해완을 너무 괴롭히는 일이 될 것 같아 따라가지 않은 게 마음에 걸렸다. 결국 강현은 영화의 오프닝을 무시하고 해완의 짐을 챙겨 상영관을 빠져나왔다.

일단 제일 먼저 상영관 바로 옆에 있는 화장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주말이라 사람이 북적였기에 화장실도 번잡하기는 마찬가지였지만 언뜻 봐도 소변기 쪽에는 해완이 없었다.

양변기가 있는 칸은 딱 하나만 닫혀 있었다. 강현은 그쪽으로 바로 직행해서 문을 두드렸다. 두드리자마자 곧바로 답 노크가 들려왔다.

“해언아. 여기 있어?”

그러나 질문에는 답이 없었다. 강현이 다시 한번 문을 두드리는 순간, 벌컥 문이 열리더니 교복을 입은 남학생 하나가 짜증이 어린 표정으로 나오다가 앞에 바싹 붙어 선 강현의 체격에 흠칫 놀라는 게 보였다.

그저 이상한 기분으로 여겼던 것이 불안감으로 변하는 데는 별다른 시간이 걸리지 않았다. 망설이지 않고 화장실을 빠져나온 강현은 곧바로 윤해언이라는 이름으로 저장되어 있는 해완의 번호에 전화를 걸었다.

허망하게 신호만 갈 뿐, 받는 목소리는 들려오지 않았다.

강현은 신경질적으로 통화 버튼을 한 번 더 누르며 곧바로 약간 떨어져 있는 화장실로 향했다.

그런 식으로 상영관 근처에 있는 남자 화장실 네 개를 모두 뒤지고 바깥으로 빠져나올 때까지 해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그쯤 되니 어떤 생각도 들지 않았다. 강현은 기계적으로 해완에게 전화를 걸며, 뛰다시피 영화관이 있는 층의 모든 화장실을 싹 다 뒤졌다.

그럼에도 해완은 어느 곳에서도 찾을 수 없었다.

점점 눈이 뒤집히기 시작한 강현은 이제 그 층에 있는 가게들을 전부 뒤지기 시작했다. 어디에 있어도 머리 하나가 툭 튀어나올 만큼 키가 큰 남자가 정신이 나간 사람처럼 뛰어다니며 온 사방을 헤집고 다니자 주변 사람들이 흘끔대고 수군대는 게 느껴졌지만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았다.

영화관이 있는 층을 벗어나 아래층까지 뒤지고 있던 어느 순간, 먼발치서 오늘 제 손으로 입혀 나온 것과 같이 브라운 터틀넥을 입은 마른 남자의 뒷모습이 보였다.

강현은 반사적으로 소리치며 그를 향해 내달렸다.

“해완아! 윤해완!”

제가 알아서는 안 되는 해완의 본명을 불렀다는 것도 의식하지 못하고 강현은 남자의 어깨를 다짜고짜 잡아 돌려세웠다.

하지만 놀란 얼굴로 돌아본 남자는 윤해완이 아니었다.

남자의 어깨를 쥔 강현의 손이 떨어지자마자, 남자는 또라이한테 걸렸다는 듯 그를 보더니 제 옆에 있는 일행을 챙겨 빠른 걸음으로 멀어져 갔다.

그럴 만했다. 한겨울의 멀티플렉스 안은 춥지는 않아도 덥다고 할 수도 없었다. 그런데 강현만이 땀에 젖어 일그러진 얼굴로 숨을 헉헉대며 몰아쉬고 있었다.

잠시 공황 상태에 빠진 강현은 주위를 둘러보며 땀에 젖은 자신의 머리를 쥐어뜯었다. 그것만으로 분이 풀리지 않아, 미친 사람처럼 제자리에서 왔다 갔다 하며 욕설까지 중얼거렸다.

제 곁에 있고 싶어서 말도 안 되는 거짓말까지 했으면서 이렇게 사라져 버렸다는 게 말이 안 됐다. 그런 일은 있을 수가 없었다.

40분을 내내 뛰어다녔는데도 아직도 뒤질 곳이 너무나 많았다. 이렇게 좆같이 넓은 곳으로 윤해완을 데려오는 게 아니었다고, 그런 후회가 들어 돌아 버릴 것만 같았다.

제 손 안에, 제 눈 안에, 한 번에 닿을 수 있는 곳에, 그런 곳에 뒀어야만 했다.

그런데 그때, 주머니 안에서 진동 소리가 들렸다.

강현은 바로 핸드폰을 꺼내 들었다. 손이 떨려서 몇 번씩 떨어뜨릴 뻔하며 겨우 확인한 액정에는, 윤해언의 번호가 떠 있었다.

* * *

나 잠깐 병원에 왔어, 강현아.

전화 속에서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린 것처럼 윤해완은 멀티플렉스 바로 옆 건물에 있는 내과 앞에서 한 손에 약봉지를 들고 초조한 기색을 보이며 서 있었다.

강현은 손에 들고 있던 해완의 코트를 움켜쥐며 이를 갈았다. 성큼 걸음을 옮기자 불안하게 흔들리고 있던 해완의 시선이 강현에게 와 닿았고, 그는 입술을 깨물었다.

강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아니,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이런 느낌은 처음이었다. 가슴뿐만이 아니라 손끝 발끝까지 무언가가 뜨겁게 들끓었다. 너무 뜨겁게 끓어올라서, 자칫 잘못하다가는 그대로 터져 버릴 듯 느껴졌다.

그런 강현의 얼굴을 본 해완의 눈이 둥그레졌다. 그는 손에 쥔 약봉지를 꽉 움켜쥐더니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나 많이 찾았지? 미안해, 강현아.”

“…….”

“갑자기 배가 너무 아파서, 병원에 가야겠다는 생각밖에 없었어. 연락 못 해서 미안해.”

강현은 뿌득 소리가 나도록 이를 갈았다. 잇새로 거친 목소리가 새어 나왔다.

“내 전화 왜 안 받았어.”

해완은 시선을 피했다. 거짓말을 할 때 그는 늘 그랬다.

“네가 걱정할까 봐…….”

그러고서 떨리는 목소리로 꺼낸 변명이 고작 그것뿐이었다.

말도 안 되는 거짓말이었다. 병원에 가게 될 정도로 아팠는데, 같이 가게 되면 제가 윤해언이 아닌 것을 들킬까 봐, 그래서 아픈 몸을 이끌고 혼자 병원에 온 게 분명했다.

화가 났다. 무엇에 화가 났는지도 모르면서 머리가 도는 것 같았다. 강현은 입을 열었다. 그리고 제 입에서 꺼낸 말은 한 번도 들어 보지 못한 이상한 목소리를 하고 있었다.

“넌 그게 말이 된다고 생각해?”

“…….”

“내가, 내가 지금, 어, 얼마나…….”

강현은 말을 채 다 잇지 못했다. 그런 그를 바라보던 해완의 하얀 얼굴이 일그러지는가 싶더니, 그는 갑자기 덥석 강현의 목을 끌어안았다.

해완은 강현의 땀에 젖은 머리를 쓰다듬으며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미안해, 내가 잘못했어. 다음에는 꼭 연락할게. 응?”

해완의 품에 안기고서야, 강현은 자신이 눈에 보일 만큼 심하게 떨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무언가를 생각하기도 전에 강현은 해완을 부서질 듯 꽉 끌어안았다. 그래도 쉽게 진정이 되질 않아, 해완을 품에 안은 채 벌벌 떨었다.

아, 나는 무서웠던 거구나. 강현은 그제야 그렇게 생각했다.

그것은 얼마 전 느꼈던 공포와 비슷했으나 그때와 비교할 수 없을 정도로 훨씬 선명하고 첨예해서, 그래서 도망칠 수도 없이 강력한 것이었다.

올곧게 저를 담아내는 해완의 연한 눈동자를 다시는 마주 볼 수 없을까 봐, 이 따뜻한 몸을 다시는 품에 안을 수 없을까 봐, 그에게서 알게 된 온기의 냄새를 다시는 맡을 수 없을까 봐.

그게 무서워서, 이렇게 떨고 있는 것이었다.

해완을 앞에 두고야 뚜렷해진 그것이, 강현의 온몸을 꽝꽝 울릴 정도로 격렬하게 소리를 지르고 심장의 지층을 뒤흔들었다.

삶에서 겪어 본 적 없는 감정의 격동에 부들부들 떠는 강현의 귀에 해완은 연신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다시는 혼자 어디 가지 않겠다고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그러나 강현은 그것이 거짓말이라는 걸 알고 있었다.

윤해완은 또 이런 짓을 벌일 것이다. 왜냐면 그게 제 곁에 있을 수 있는 방법이라고 생각하니까.

그래서 대답 대신, 안달이 난 목소리로 미안하다고 속삭이며 연신 등을 쓰다듬고 토닥이는 윤해완의 마른 몸을 부스러질 듯 껴안고 또 껴안았다.

* * *

연약한 수면등 아래 잠들어 있는 해완의 하얀 얼굴을 바라보던 강현은 팔을 길게 뻗어 해완의 손등과 연결된 수액 링거가 걸린 위치를 살짝 조절했다.

반쯤 나가 있던 정신이 돌아오자마자 강현은 곧바로 해완을 응급실로 끌고 가려고 했다. 안 가겠다고 하면 들쳐 업고서라도 갈 생각이었다.

그런 강현의 팔을 붙들고 해완은 온 힘을 다해 변명을 했다. 그냥 가벼운 위경련이었다고, 제가 엄살이 심해 놀랐을 뿐이라며, 약을 먹고 푹 쉬면 괜찮아질 것이라고, 손에 쥔 약봉지까지 흔들어 가며 가지 않겠다고 버텼다.

‘나 괜찮아. 나 정말 괜찮으니까, 집에 가자, 응? 나 집에 가고 싶어. 제발 강현아…….’

숫제 강현에게 애원하고 빌기까지 하는 듯한 그 필사적인 목소리에 마음이 약해졌다. 결국 해완의 손에 들린 것이 의사에게 처방받은 약임을 확인하고서야 강현은 일단 그를 데리고 집으로 왔다.

하지만 그래도 마음이 놓이지 않아서, 집안사람들을 간단히 진료해 주는 왕진 의사를 불렀다. 해완은 그마저도 꺼려 하는 눈치였지만 강현이 미리 일러 놓은 탓에 개인 정보를 묻지 않자 약간 안심하는 것 같았다.

물론 병원에 가서 전문적인 검사를 받지 않는 이상 딱히 큰 의미는 없었다. 단지 해완이 지금 통증에 시달리고 있지 않음을 확인하고, 회복에 도움이 될 수액을 놓아 주고 가는 것이 전부였다.

한 방울씩 해완의 몸속으로 스며들던 수액 팩이 그 바닥을 보일 때까지, 시간이 무상하게 새벽을 향해 달려갈 때까지 강현은 해완의 얼굴을 바라보며 마냥 앉아 있었다.

수액이 완전히 다 들어간 것을 확인한 강현은 아까 의사에게 배운 대로 조심스럽게 링거 바늘을 제거하고는 반창고가 붙여진 손등을 손끝으로 쓰다듬었다.

그렇게 해완의 몸 위에 얹힌 강현의 손끝이 갸름한 얼굴선, 섬세하게 솟은 콧날, 옅은 빛깔의 긴 속눈썹, 그리고 평소와 달리 약간 말라 거칠어진 입술까지 훑고 올라갔다.

그렇게 얼굴 곳곳을 손으로 그리고 나서도 부족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현은 해완의 손을 들어 올려 잠기운으로 힘없이 늘어져 있는 손의 냄새를 손바닥부터 손등,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맡았다.

이어서 한쪽 손으로 해완의 마른 얼굴을 감싸고 머리칼에 코를 바싹 붙여 냄새를 맡은 그는 관자놀이, 뺨, 귀 뒤, 그리고 목과 왼쪽 어깨 사이에 고개를 묻고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해완의 살은 부드럽고 따뜻했다. 이렇게 바싹 붙어 있어야지만 나는 온기의 냄새도 여전했다.

그러나, 시트에 닿아 있던 강현의 손이 강하게 주먹을 쥐었다. 고개를 들어 올린 강현은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보고, 만지고, 냄새를 맡고. 그렇게 감각으로 감정을 대체하는 행동은 그가 평생 동안 해 오던 일이었으나 아무런 소용이 없었다.

아까 해완을 찾을 수 없던 때의 공포가 마음에 끌로 새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선명했다.

그것을 감당하는 법도, 대처하는 법도 알지 못해 강현은 알몸으로 벗겨져 겨울 추위에 던져지기라도 한 사람처럼 온몸을 부르르 떨었다.

그때, 멀티플렉스 안에서 강현의 마음을 뜨겁게 사로잡았던 어떤 생각이 그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런 곳에 데려오는 것이 아니었다고.

제 손 안에, 제 눈 안에, 한 번에 닿을 수 있는 곳에, 그런 곳에 뒀어야만 했다고.

그래, 그래야겠어. 강현은 해완의 얼굴을 바라보며 멍하니 생각했다.

그 간단한 걸 왜 몰랐을까 싶었다. 해완과 비슷한 것이 세상에 없다면, 그를 대체할 수 있는 것이 세상에 없다면, 언제나, 내 손이 닿을 곳에, 내 눈이 닿는 곳에. 이 온기를 느낄 수 있는 곳에 두면 될 일이었다.

그제야 마음이 편해졌다. 의자에서 몸을 일으킨 강현은 조심스럽게 해완의 곁에 가 누웠다. 그의 몸을 품 안에 끌어당겨 가두듯이 안고 잠이 들면서도, 머릿속으로는 계속 그 생각을 되뇌는 채였다.

* * *

얼굴을 어루만지는 감촉이 해완을 잠에서 깨웠다. 달라붙어 버린 듯 무겁게 느껴지는 눈꺼풀을 간신히 들어 올리자, 바싹 붙어 누워 있는 강현의 얼굴이 가장 먼저 눈에 들어왔다.

잠에서 다 깨지 않은 멍한 정신으로도 그의 얼굴이 잠을 이루지 못한 것처럼 까칠해 보인다는 생각을 했다. 해완은 졸린 목소리로 물었다.

“강현아, 언제 일어났어?”

강현은 답이 없었다. 그저 묵묵히 해완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 진득한 시선을 받아 내는 사이 서서히 정신이 맑아졌다.

잠기운을 헤치고 어제 있었던 일이 번뜩 떠오른 순간, 해완은 망연히 마른 입술을 혀로 축였다.

“몸은?”

강현이 무덤덤하니 짧게 물었다. 해완은 어물대며 대답했다.

“괜찮아. 이제 하나도 안 아파.”

“죽 갖다줄게, 조금 더 누워 있어. 그거 먹고 약 먹자.”

해완이 뭔가를 더 말하기도 전에 강현은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저벅저벅 걸어 나가 버렸다.

눈을 뜨면 집요하게 캐묻고 화를 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침착해 보이는 강현의 태도가 마음을 더 불안하게 해, 해완은 큰 한숨을 내쉬었다.

어제 층계참에서 쓰러진 후 다행히도 몇 분 지나지 않아 해완은 정신을 차렸다. 눈을 떠 보니 얼음장처럼 차가운 바닥에 얼굴을 대고 모로 누워 있었는데, 몸 이곳저곳이 욱신거리기는 했지만 벽에 기대어 미끄러지듯 쓰러진 덕에 크게 다친 곳은 없었던 게 천운이었다.

쓰러지기 직전만큼은 아니었으나 복부 통증은 여전해서, 해완은 바로 몸을 일으키지 못하고 몸을 웅크린 채로 배를 온 힘을 다해 짓누르며 숨을 헐떡였다.

그런 해완의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 진동 소리가 울리기 시작했다.

처음에는 무시했지만 끊임없이 울리고, 또 울리는 핸드폰 진동에 그것을 꺼내 들었을 때 액정에 뜬 강현의 이름을 보자 정신이 번쩍 들었다.

지금 이런 모습으로 강현과 마주칠 수는 없었다. 해완은 계단 손잡이를 잡고 안간힘을 다해 몸을 일으켜 세웠다. 덮쳐 오는 어지럼증에 연신 비틀거리면서도 끝내 일어선 그는 손잡이를 붙들고 한 계단, 한 계단씩 천천히 내려가기 시작했다.

그러는 사이, 조금씩이기는 하지만 통증 간격이 길어지는 것이 느껴졌다. 영화관에서 한 층을 내려오고 나서야 비상계단을 열고 밖으로 나선 해완은 바로 옆에 있는 엘리베이터를 잡아 무작정 탔다.

밑으로 내려가던 엘리베이터는 4층에 멈춰 문이 열렸다. 이 건물의 보안 요원인 듯 정장을 입고 명찰을 단 남자 두 명이 안으로 들어섰는데, 그들은 새파란 얼굴을 한 채 식은땀을 뚝뚝 흘리며 벽에 기대어 서 있는 해완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저기, 손님. 혹시 괜찮으십니까?”

아무래도 그냥 지나칠 수 없었는지 남자 중 한 명이 해완에게 말을 걸었다. 해완은 쉰 목소리로 간신히 입을 열어 물었다.

“이 근처에…… 가까운 병원 좀 알려 주세요.”

그들은 많이 힘들면 119를 불러 주겠다 했지만, 해완은 한사코 병원의 위치만 알려 달라고 말했다. 운이 좋게도 토요일에도 운영하는 내과가 바로 근처에 있었고, 곧바로 그리로 향해 진경제 주사를 맞고 나서야 완전히 통증이 가라앉았다.

그러고 나서 마주한 강현의 얼굴을 떠올린 해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꼭 깨물었다.

그런 얼굴을 한 강현을 보는 것은 처음이었다.

부모를 영영 잃어버리기라도 한 어린아이처럼, 숨길 수도 없는 불안과 공포를 온 얼굴에 다 내보인 그런 참담한 얼굴이었다.

해완은 조이듯이 아려 오는 심장 위에 손을 얹었다. 제가 강현에게 그런 표정을 짓게 만들었다는 게 가슴이 너무 아팠다.

그러나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왜 아픈 것인지 설명을 할 수도 없고 함께 병원을 갈 수도 없을뿐더러 면역 억제제 복용을 중단하는 것도 불가능했다.

끝이 없는 늪에 빠진 기분이었다. 이대로 기능이 더 떨어지면 페로몬샘을 재이식해야 한다는 의사의 말까지 뇌리에 스친 나머지 해완은 괴롭게 머리를 움켜쥐었다.

그때, 문이 열리는 소리에 흠칫 고개를 들자 죽 그릇이 올려진 쟁반을 들고 있는 강현과 눈이 마주쳤다. 해완이 잠에서 깨어난 이후 내내 무표정하던 얼굴에 걱정스러운 빛이 떠올랐다.

“왜 그래, 어디 또 아파?”

“아니, 괜찮아.”

해완이 황급히 고개를 내저었는데도 강현은 여전히 의심의 기색을 얼굴에 띤 채 일단 해완의 무릎 위에 쟁반을 내려놓았다.

쟁반 위에는 깔끔한 흰죽과 절임 반찬 약간, 그리고 물 한 컵이 올라와 있었다. 강현은 해완의 손에 직접 수저를 쥐여 주며 나직하게 말했다.

“집에서 만든 음식 먹는 게 좋을 것 같아서 일 도와주러 오시는 이모님한테 급하게 부탁드렸어. 전복이랑 한우 들어간 것도 만들어 주셨으니까 일단 이거 먹어 보고 속 괜찮으면 먹고 싶은 거 또 데워 줄게.”

해완이 죽을 얕게 뜨자 강현은 그 위에 반찬을 직접 올려 주기까지 했다. 수저를 입에 넣으니 밍밍하지만 고소한 흰죽의 맛과 깔끔하고 짭짤한 절임 반찬의 맛이 입 안에 퍼졌다.

강현도 이따금씩 해완의 시중을 들어 줄 뿐 별다른 말을 하지 않아서, 해완은 내내 시선을 내리고 죽 한 그릇을 천천히 비웠다.

해언의 페로몬샘을 망치고 있는 것도, 그 때문에 몸이 아픈 것도 전부 제 잘못인데, 너무 과분한 대접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고개를 차마 들 수가 없었다.

어제 처방 받은 약을 해완이 삼키는 걸 확인하고서야 강현은 입을 열었다.

“오늘 일요일이라 병원에 가려면 큰 병원 가는 수밖에 없는데, 그건 싫다고 할 거지?”

강현의 말이 끝나기도 전에 해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화를 낼 것을 각오하고 한 행동이었는데 강현은 그냥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다른 말을 꺼냈다.

“내일이라도 병원에 가서 한 번 더 제대로 검사 받으면 좋겠는데, 내가 일이 있어서 같이 못 갈 것 같은데 괜찮겠어?”

이보다 더 좋을 수 없는 제안이었다. 해완은 강현이 말을 물릴까 무섭다는 듯 허겁지겁 대답했다.

“응, 당연하지. 나 혼자 갔다 와도 되니까 걱정하지 마.”

“혼자 가는 건 안 돼. 유준이랑 같이 가.”

그건 또 그다지 달갑지 않은 제안이라 멈칫했으나 강현은 아랑곳없이 말을 끝맺었다.

“그리고 내 카드 가지고 가서 그걸로 결제해. 제대로 병원 갔는지 확인해야겠어.”

유준을 감시인으로 삼고 카드 결제 문자까지 받아서 해완이 정말 병원에 갔는지 두 번 확인할 심산인 모양이었다.

하지만 강현이 제게 카메라를 붙인다고 해도 함께 가는 것보다는 나을 듯싶었다. 해완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응. 그럴게.”

“그리고 한 가지 더 있어.”

“뭔데?”

“너 몸 완전히 괜찮아질 때까지, 우리 집에 와 있어.”

너무나 갑작스러운 제안에 해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입만 반쯤 벌렸다.

“……갑자기 그게 무슨 소리야?”

“너희 집 아픈 사람이 있을 만한 환경 아니야. 우리 집에서 지내는 게 나아.”

“나…… 나 그렇게 많이 아픈 거 아니야. 위경련 이런 거야 그냥 어쩌다 한번 생길 수 있는 거 알잖아.”

“기절할 정도로 아팠던 게 어쩌다 한번 아픈 거라고?”

강현의 말에 해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강현은 손을 뻗어 해완의 이마 한구석을 엄지손가락으로 쓸었다. 부드러운 손길이었음에도 느껴지는 옅은 통증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몸을 움찔했다.

“멍들었어, 여기.”

“…….”

“의사 선생님이 넘어지면서 부딪쳐서 생긴 멍 같다고 하시더라.”

얼굴에 멍이 들었는지도 몰랐던 해완은 당황한 나머지 강현의 손에서 피하듯이 얼굴을 돌리며 작게 변명을 중얼거렸다.

“기절한 것까진 아니었어. 어지러워서 중심을 잃은 거야.”

그러나, 제 귀로 들어도 설득력이 없었다. 강현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가만히 해완의 손을 감싸고 힘을 주었다. 숙인 고개 위로 시선이 쏟아졌는데, 해완이 저를 볼 때까지 기다리고 있음을 눈치챈 해완은 결국 어쩔 수 없이 다시 강현과 눈을 맞췄다.

강현은 해완의 눈을 바라보며, 천천히 같은 말을 반복했다.

“우리 집으로 들어와.”

그 목소리에는 절대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한 힘이 있었다.

해완은 다시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어제 그 불안한 얼굴을 떠올리면, 그냥 뜻을 들어주고 싶었다.

하지만 짧은 기간이라도 강현과 함께 살기에는 마음에 걸리는 것이 너무나 많았다. 게다가 강현이 앞에 붙인 단서인 ‘몸이 괜찮아질’ 때를 해완도 장담할 수 없다는 게 가장 큰 문제로 느껴졌다.

결국 마음을 다잡은 해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그건 안 돼, 강현아.”

“…….”

“나도 내 일이 있고…… 유준이도 그냥 혼자 둘 수는…….”

“유준이는 내가 따로 집 구해 주면 되잖아.”

“…….”

“필요하면 생활비도 얼마든지 줄 수 있어.”

해완은 강현을 보며 입을 굳게 다물고 고개를 천천히 가로저었다.

내내 평온을 가장하던 강현의 턱에 날카롭게 근육이 섰다. 그는 해완의 손을 아플 정도로 움켜쥐더니, 거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병원도 싫다, 내가 보는 곳에 있으라는 것도 싫다.”

“…….”

“내가 널 대체 어떻게 하면 되는 건데.”

속 시원하게 대답해 줄 수 있으면 좋으련만 해완도 답을 몰랐다. 그저 해완이 아는 거라곤 해언의 생일이 올 때까지만이라도 더도 말고 덜도 말고 지금만큼만 곁에 있어 줬으면 하는 것뿐이었다.

해완은 손을 뻗어 강현의 목덜미를 와락 끌어안았다. 안기지 않으려는 듯 바싹 긴장한 너른 어깨를 몇 번이고 당겨 안았더니, 겨우 품 안에 기대오는 게 느껴졌다.

한동안 그렇게 끌어안고 있는데 강현이 불쑥 입을 열었다.

“만약에 유준이가 독립해서 나가면, 그럼 그땐 나랑 살 거야?”

제가 안고 있는 모든 문제들을 지나치게 단순화시키는 강현의 질문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씁쓸한 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강현은 포기하지 않았다. 해완의 등을 꾹 눌러 제 품 안에 고정시키며 다시 되물었다.

“그럴 거야? 너 혼자 남게 되면, 그럼 그땐 내 곁으로 올 거야?”

제 등을 누르는 강현의 손의 압박처럼, 혼자 남게 된다는 강현의 말이 마음을 내리누른 해완의 몸이 가늘게 떨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강현이 집요한 목소리로 한 번 더 물었다.

“응?”

결국 해완은 강현의 어깨에 고개를 묻은 채 작게 끄덕일 수밖에 없었다.

다음 날, 해완은 편의점 사장에게 몸이 많이 아파 오후에 출근해야 할 것 같다며 양해를 구하고 아침 일찍 내시경이 가능한 내과 병원으로 향했다.

이른 시간임에도 불구하고 유준은 웬일로 약속한 시간에 맞춰 병원 앞에 서 있었다. 해완을 데려다주기 위해 온 강현은 그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유준과 인사를 하겠다며 차에서 내렸다.

유준은 해완의 옆에 서 있는 강현을 보고는 조금 움찔하더니 두 사람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강현은 그런 유준을 향해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 유준아. 오랜만이네.”

“……네, 형. 안녕하세요.”

유준은 자신의 한쪽 팔을 쓰다듬으며 소심하게 인사를 했다. 작년 말 집 앞에서 잠깐 마주친 때 말고는 유준은 강현을 처음 보는 것일 터였다.

여전히 불편한 기색이 역력한 유준을 보는 해완의 심경도 복잡해졌다. 다행히도 강현은 유준을 향해 한 번 씩 웃어 보이고는 해완의 어깨를 감싸며 다정하게 속삭였다.

“나 갈게. 검사 잘 하고, 이따 전화할게.”

“응. 그럴게.”

강현은 해완의 볼에 살짝 입을 맞추고는 긴 다리로 휘적휘적 걸어 자신의 차로 사라졌다. 차가운 겨울 공기 중으로 희뿌연 연기를 뿜어내며 강현의 차가 완전히 시야에서 사라지고 나서야 돌아서자, 유준이 뒷머리를 만지며 머쓱한 얼굴을 하고 있었다.

“형 아픈 데는 좀 괜찮은 거야?”

그러고 보니 유준의 얼굴을 제대로 본 지도 벌써 며칠이나 된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최근 유준은 항상 해완이 잠들었을 때 집에 들어왔고 그가 일어날 때는 자고 있다가 퇴근하고 나서는 집에 없었기 때문에 이야기를 나눌 틈도 거의 없었다.

“난 괜찮아. 근데 너 요즘 얼굴 보기 너무 힘든 거 아냐?”

그 말에 유준이 입을 삐죽이며 대답했다.

“무슨, 자기는 맨날 강현이 형네 집에서 자고 오면서.”

이제 쉽게 받아넘길 만한 말인데도 어김없이 얼굴을 붉힌 해완은 괜히 유준의 등을 툭 치며 병원 안으로 걸어 들어갔다.

수면 내시경 후 바로 검사 결과를 듣는 자리에는 유준이 동석했다. 유준이 옆에 있는 한 면역 억제제에 대해 말할 생각이 없었기 때문에 반쪽짜리 검사 결과일 터였으나 어차피 강현에게 보여 주기 위한 자리라 큰 상관은 없었다.

역시 검사 결과로는 큰 문제는 없었다. 의사는 다만 초기 위궤양 증상이 보이니 스트레스와 식습관을 주의하라고 하고는 약을 처방해 주었다.

저를 위해 거의 두 시간을 꼬박 기다려 준 유준이 고마워서 해완은 고기를 사 주겠다고 했지만, 유준은 그런 걸 먹고 속이 편하겠냐며 해완이 껄끄럽지 않게 먹을 수 있을 만한 백반집을 골랐다.

편의점에는 1시까지 가겠다고 말을 해 뒀기 때문에 점심을 먹고도 조금 시간이 남았다. 유준은 후식으로 제가 좋아하는 초코 음료를 사 달라고 해완을 졸랐다. 아직까지도 단것만 찾아 대는 유준이 귀여워 픽 웃음을 터트린 해완은 근처에 있는 프랜차이즈 커피숍으로 들어갔다.

카운터에서 주문을 한 뒤 음료까지 받아 자리로 돌아오는데 유준이 누군가와 통화를 하고 있는 것이 보였다. 그는 가까워지는 해완을 흘끗 보더니 갑자기 전화를 끊었다.

“누구랑 통화했어?”

평소라면 굳이 캐묻지는 않았겠지만 저를 보고 급하게 전화를 끊은 게 분명해서 해완이 조심스레 물었다. 그러자 유준은 조금 머뭇거리더니 대답했다.

“강현이 형이 형 괜찮냐고 전화해서.”

“……뭐라고 했는데?”

“뭐라고 하긴 뭘 뭐라고 해. 의사가 말한 대로 말해 줬지. 위궤양 초기 같으니까 식습관이랑 스트레스 조심하라고 했다고.”

별다른 내용은 없어서 해완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하여튼 극성이야, 볼멘소리를 중얼거린 유준은 냉큼 제가 마실 초코 음료를 입에 가져다 댔다.

그러다 문득, 유준에게 강현의 번호를 차단하라고 시켰던 것 같은 기억이 떠올랐다. 그런데 어떻게 전화를 했나 싶어 해완은 눈살을 찌푸렸다.

“근데 너 강현이 번호 차단하지 않았어?”

그 말에 유준은 입에 있던 초코 음료를 꿀떡 넘기더니, 약간 사레가 들린 듯 헛기침을 하며 손을 내저었다.

“아니, 앞으로 한 번만 더 그러면 차단시킬 거라고 했지. 차단하라고는 안 했잖아.”

해완은 제 기억과 다른 말을 하는 유준을 의심스러운 눈초리로 봤지만 이내 떠오른 어떤 생각에 자신이 없어졌다.

이것도 내가 잘못 기억하고 있는 걸지도 모르잖아.

시선을 내린 해완은 자신의 앞에 놓인 차의 티백을 하릴없이 휘저었다. 물을 수 있는 이는 유준뿐이라는 걸 알면서도, 마치 목소리를 잃어버린 사람처럼 쉽게 말을 꺼낼 수가 없었다.

“유준아, 혹시…….”

해완은 용기를 내어 입을 열었다. 음료를 마시던 유준이 흘끗 쳐다보았다.

“해언이가 갑자기 보육원 떠나기 전에, 무슨 일 있었는지 기억해?”

유준은 잠시 눈을 끔뻑이며 해완을 보다가 아무렇지 않은 듯 대꾸했다.

“형보다 윤해언에 대해서 잘 아는 사람이 어딨다고 그걸 나한테 물어봐? 마지막으로 본 사람도 형이잖아.”

“나 사실…… 그 전의 기억이 잘 안 나.”

“뭐?”

“해언이가 떠나던 날은 기억이 나는데, 그 전 며칠간의 기억이 거의 없어.”

그 말에 유준이 손에 들고 있던 음료 컵을 탁자에 스르르 내려놓더니 얼떨떨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말 아무것도 기억이 안 나? 형 그때 왜 아팠는지도?”

해언과는 상관이 없어 보이는 아팠던 이야기를 꺼내는 유준에, 해완은 어리둥절한 채로 고개를 끄덕였다.

유준은 한동안 말이 없었다. 그러면서도 해완의 얼굴을 한참 보았는데 왜인지 무언가를 말하기가 불안하고 두렵기까지 한 것처럼 보였다.

평소답지 않은 태도에 기분이 이상해진 해완이 입을 열려던 때, 유준이 시선을 내린 채 갑자기 말을 꺼냈다.

“그때 윤해언이…… 형 심하게 때렸잖아. 그래서 앓아누웠던 거잖아.”

유준의 입에서 어렵게 나온 말을 듣자마자, 해완의 사고와 몸이 말 그대로 정지했다.

해언이 자신을 때렸다니. 무슨 말인지 도무지 이해가 가질 않았다. 이해하려 하는 시도조차 할 수가 없어 해완은 바보처럼 되물었다.

“……뭐? 너 지금 뭐라고 했어?”

그러자 테이블을 보며 손톱을 잡아 뜯고 있던 유준이 고개를 번쩍 들었다. 아까의 태도와는 다르게, 그는 망설이지 않았다.

“윤해언이 형 때렸다고. 물론 형은 그때 그 새끼 감싸 주느라 아무한테도 말 안 했지만, 난 내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단 말이야.”

아니야. 아닐 거야. 해완은 자기도 모르게 고개를 저었다. 그런 해완의 반응을 보자마자, 유준은 그럴 줄 알았다는 듯 얼굴을 일그러뜨렸다.

그런데 그 순간, 갑자기 머릿속에서 어떤 목소리가 들렸다.

‘네가 자꾸 이러니까 내가 그 새끼를 못 놔주는 거잖아.’

눈앞이 번쩍하는 듯한 고통이 머리를 거칠게 횡단했다. 갑자기 치미는 토기에, 해완은 입을 틀어막으며 허리를 숙였다.

“……형? 왜 그래, 괜찮아?”

유준이 당황한 목소리로 물었다. 토할 것 같다고, 해완이 간신히 중얼거리자 저를 급하게 부축해 일으켜 세우는 손길이 느껴졌다.

유준은 해완을 끌고 매장 내 있는 화장실로 데려갔다. 그곳에서 해완은 점심때 먹은 모든 것을 게워 냈다.

해완의 등을 두드려 주고 일으켜 세워 주기까지 한 유준은 해완이 세면대에서 입을 헹구고 나자 안절부절못하며 물었다.

“강현이 형한테 전화해 줄까?”

“안 돼. 절대 하지 마.”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한 해완이 허리를 똑바로 펴고 거울에 비친 제 모습을 보았다. 늘 보던 얼굴인데도 이유도 알 수 없이 낯설게만 보였다.

거울 속 제 얼굴을 하염없이 보는 해완에게 유준이 불안한 듯 말을 걸었다.

“형 아직 몸이 많이 아픈가 봐. 오늘 편의점 알바는 내가 해 줄 테니까 집에 가서 쉬어. 응?”

고개를 끄덕인 해완은 조금 비틀거리며 걸음을 옮겼다. 그 뒤를 유준이 바싹 따라붙어 걸었다.

제 등에 얹혀 있는 유준의 따뜻한 손길을 느끼며, 해완은 멍하니 아직 하다 만 이야기가 남았는데, 하는 생각을 했다.

그러나 그것이 무엇인지, 이상하리만치 희미하게 느껴졌다.

* * *

집에 마련해 놓은 조향대에서 조향 작업을 하고 있던 강현은 웅 하고 짧게 울리는 진동 소리에 흘끔 핸드폰을 들여다보았다.

강우에게서 온 수 통의 부재중 전화는 모두 무시하고 낮에 보낸 돈에 대한 감사 인사가 담긴 유준에게서 온 메시지를 확인한 강현은 그간 주고받은 메시지들을 위로 쭉 올려 훑어보았다.

해완이 다치고 만났을 때 삼백만 원을 건네고, 그것으로 끝나지 않으리라는 강현의 예상은 역시 빗나가지 않았다.

유준은 자잘하게 강현에게 돈을 부탁했다. 십만 원, 이십만 원, 삼십만 원. 더 많이 받아 갔으면 좋겠는데 때마다 요구하는 것이 그 정도라, 모든 걸 다 합쳐도 사백 정도밖에 되지 않았다.

그래서 강현은 해완을 위해서라는 핑계로 이따금씩 유준에게 돈을 좀 더 얹어 주고는 했다. 그렇게 해서 한 달이 좀 넘는 기간 동안 준 돈이 육백 정도 됐는데, 그에게야 푼돈에 지나지 않는 금액이었지만 유준이 빌려 간 돈에 대해 이해할 수 없으리만치 민감하게 반응하는 해완에게는 아닐 터였다.

방해로만 여겨졌던 해완의 그런 성격이 도움이 될 수도 있을 것 같아 강현은 입가를 슬슬 문질렀다.

강현은 유준의 번호 옆 통화 버튼을 눌렀다. 유준은 왜인지 살짝 목소리를 죽인 채 전화를 받았다.

―네, 강현이 형.

“응, 유준아. 어디야?”

―아, 저 집이에요.

최근 유준이 밖으로 돌고 있던 것을 강현 또한 알고 있었기에 의외의 대답이라는 생각이 들던 순간, 유준이 머뭇거리며 보충 설명을 했다.

―그, 형이 좀 몸이 안 좋아서요.

형, 이름을 붙이지 않은 호칭이었지만 누군지는 쉽게 알 수 있었다. 조향대 위를 한가로이 노닐던 손가락이 뚝 멈췄다.

“왜, 어떤데?”

―아까 낮에 갑자기 또 한 번 토했거든요. 그래서 제가 옆에 있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그랬어? 자꾸 아파서 큰일이네. 지금은 괜찮아?”

―네. 저녁도 잘 먹고 지금은 자고 있어요.

왜 빨리 말하지 않았느냐고 곧바로 소리를 높일 뻔한 것을 간신히 눌러 참았다. 눈썹 위를 긴 손가락으로 문지르며 강현은 애써 여상하게 답했다.

“그래, 유준아. 보낸 돈으로 해완이 좀 잘 챙겨 줘. 부담 갖지 말고.”

―네, 항상 감사해요, 형.

“아냐. 그게 뭐라고. 그럼 끊을게.”

―저기, 강현이 형.

당장 전화를 끊으려는 걸 불러 세운 유준은 또 뜸을 들였다. 다시 치미는 성질을 강현은 검지를 잘근잘근 씹으며 참았다.

―그, 있잖아요. 우리 형 진짜 착한 사람이거든요. 그러니까…… 나중에 혹시 무슨 잘못을 했다고 해도, 한 번쯤은 이해해 주세요.

해완이 자신을 해언이라 속이고 있는 일에 대해 이야기하는 것일까 싶어, 강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

정말 해완의 편을 들고 싶었으면 이런 말을 안 하는 게 낫지 않나 싶은 생각이 먼저 들었으나, 선의에서 한 말이라는 정도는 알았다.

알면 알수록 유준은 은근히 순진한 면이 있어서, 해완을 ‘형’이라고만 부르는 것도 그를 해언이라 부르기 어려워서 그런다는 걸 강현은 눈치채고 있었다.

왜 그런 말을 하는 거냐고 캐묻는 척이라도 해 볼까 하고 괜히 심술궂은 마음이 들었지만, 그런 유준의 순진함이 꽤 유용하다는 사실을 떠올린 강현은 생각을 뒤로 밀어 두었다.

“뜬금없긴. 걱정하지 마. 해언이 착한 사람인 거, 누구보다 내가 잘 아니까.”

태연한 대답에 유준은 그쵸, 하고 민망하게 웃더니 이내 안부 인사를 건네고 전화를 끊었다.

핸드폰을 조향대 위에 올려놓은 강현은 등을 길게 의자에 기댄 채 피곤한 눈을 감았다.

그러나 감은 눈 사이로 그 골방에 누워 있는 해완의 모습이 스치는 바람에, 가슴이 빠듯하게 답답해진 강현은 결국 몸을 일으켜 좁은 작업실 안을 초조하게 맴돌았다.

유준은 그에게 해완이 스트레스성 위궤양 진단을 받았다고 말했다. 무엇에 그리도 스트레스를 받고 있는지야 보지 않아도 뻔했다. 매번 강현의 앞에 설 때마다 외줄 타기를 하는 것처럼 느끼고 있을 테니 몸이 버틸 리가 없었다.

마음에 걸리는 것은 해완의 몸 상태뿐만이 아니었다. 수상쩍게 그와 해완의 곁을 맴도는 서인하와, 그를 불러들인 윤해언의 의도도 강현의 신경을 내내 곤두서게 만들었다.

강현은 지금 해완과의 관계가 교착 상태에 빠져 있음을 알았다. 두 사람 다 앞으로 나아갈 수도, 뒤로 물러설 수도 없는 형국이었다. 처음에는 그런 교착 상태가 기꺼웠지만 이젠 아니었다. 하지만 그것을 강현이 나서 섣불리 건드릴 수도 없었다.

아무리 생각해도 어떻게든 윤해완의 입으로 진실을 털어놓게 해야 한다는 생각만 들었다.

우연을 가장해 해완의 진짜 정체를 알아낸 것처럼 갈 수도 있겠지만 그의 반응이 짐작되지를 않았다. 양심의 가책을 받으며 가뜩이나 팽팽하게 당겨져 있을 해완의 신경 줄이 버텨 낼 수 있을까 의문스럽기도 했다.

저에 대한 신뢰감을 심어 주고, 진실을 말해도 상황이 엉망이 되지 않으리라는 암시를 줘서 사실을 털어놓게 만든 후, 강현이 할 일은 그런 해완을 용서해 주는 것이었다.

그것만이 두 사람의 관계를 무너뜨리지 않고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었다.

그러려면 해완을 아주 가까이 둬야만 했다. 제게 온전히 기댈 수 있다는 것을 확실히 보여 줘야 했다. 강현이 그에게 얼마나 큰 도움이 될지, 그가 해완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 줄 수 있을지, 그리고.

그리고 해완이 강현의 인생을 어떻게 바꿔 줄 수 있는지, 그것을 보여 줘야만 했다.

강현은 눈을 깊게 감았다 뜨고는 핸드폰을 손에 쥐고 작업실 밖으로 나왔다. 거실에 엎드려 있던 보리가 강현의 기척을 눈치채고는 타닥타닥 걸어왔다.

만져 달라는 듯 꼬리를 흔드는 보리 앞에 한쪽 무릎을 꿇은 강현은 원하는 대로 얼굴을 얼러 주다가, 문득 보리의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보리를 사람이라도 되는 것처럼 자주 말하곤 하는 해완의 목소리가 갑자기 떠오른 탓이었다.

명령 이외에는 다른 말을 해 본 적이 거의 없음에도 불구하고 강현은 충동적으로 보리에게 말을 걸었다.

“……너도 해완이랑 같이 살고 싶지?”

그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리가 짧게 짖었다. 하지만 여전히 무슨 말인지 해석할 수는 없어, 강현은 그냥 보리의 머리를 한 번 더 쓰다듬어 주고는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 * *

해완은 결국 새벽에 하던 헬스장 청소 아르바이트는 그만두기로 했다. 강현이 집요하게 종용한 탓도 있었지만 최근 밤마다 미열이 나고 체력이 많이 떨어져서 도저히 편의점 아르바이트와 함께 병행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이것 또한 면역 억제제의 부작용 중 하나였지만 적어도 겉으로 티가 많이 나지 않는다는 점이 그나마 위안이 됐다.

그래도 최근에는 구토 증상은 거의 사라져서 다행이었다. 게다가 얼마 전 병원에서 페로몬샘 기능 수치와 혈액 중 면역 억제제 농도가 현상 유지 중이니 일단 지금의 복용량을 유지해 보자는 검사 결과까지 들은 터라, 해완은 아주 작게나마 한시름을 놓을 수 있었다.

물론 아픈 속은 여전해서 주치의는 많이 힘들면 다른 제제를 사용해 보는 것이 어떻겠냐 권유했었다. 하지만 예측하지 못하는 부작용을 겪는 게 더욱 겁이 나 해완은 괜찮다며 버텨 보겠다고 말했다.

음식을 먹는 것을 낙으로 삼았던 전과는 달리 여전히 하루의 한 끼는 죽으로 때우는 신세였지만 그래도 모든 일이 나쁘지는 않았다. 퇴근 후 편의점 문을 밀고 나오자 어김없이 문 앞에서 기다리고 있는 강현의 얼굴을 보고 해완은 활짝 미소를 지었다.

“강현아, 뭘 들고 온 거야?”

어딜 가나 차를 끌고 다니다 보니 늘 두 손이 가벼운 강현이었는데, 오늘은 양손 가득 쇼핑백을 들고 있기에 어리둥절해진 해완이 물었다.

“이모님께 부탁해서 죽이랑 반찬 좀 싸 왔어. 너 집에 두고 아침에도 챙겨 먹고 하면 좋을 것 같아서.”

“진짜? 고마워서 어떡하지.”

“오늘은 너희 집에 가서 이걸로 저녁 먹자. 어차피 가져다 놔야 되기도 하니까.”

뒤이어 들려온 강현의 말에 해완은 머뭇거렸다. 강현이 해완의 집에 들른 게 이제 한두 번도 아니지만, 얼마 전 강현이 아픈 사람이 머물 곳이 아니라고 했던 말이 마음에 남아 있어서였다.

“왜, 싫어?”

해완이 대답을 주저하자 강현이 조심스럽게 물었다. 괜한 자격지심을 가지기라도 한 것처럼 보일까 마음이 뜨끔했던 해완은 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아냐. 괜찮아. 우리 집으로 가자.”

그러자 강현은 작게 미소를 짓고는, 짐을 한 손으로 모두 옮겨 들고 잡으라는 듯 반대쪽 손을 내밀었다.

“이리 줘. 하나는 내가 들게.”

손이 큰 강현에게조차 한 손에 들기에는 조금 버거워 보여 해완이 손을 내밀었지만 강현은 그 손을 피하며 말했다.

“넌 들 거 따로 있잖아.”

“뭐?”

“나.”

그러면서 뻔뻔하게 손을 내밀기에, 어쩔 수 없이 해완은 피식 웃으며 손을 마주 잡았다.

“널 한 손으로 어떻게 들고 가. 이렇게 큰데.”

“그럼 업힐까?”

강현은 장난스럽게 해완의 등에 업히려는 시늉을 했다. 해완이 짐짓 진짜 업으려는 듯 양 손목을 붙들자, 강현이 잽싸게 뒤로 물러섰다.

“안 되겠다. 너 부러질 거 같아서.”

“너 지난번부터 자꾸 나 무시하는데, 나 누구든지 되게 잘 업어 줘. 보육원에서 동생들도 다 내가 업어 키웠어.”

“네가?”

“응. 내가 제일 빨리 키가 컸거든. 그래서…… 동생들 많이 업어 줬었어.”

학습적으로 발달이 늦었던 데 비해 해완은 의외로 키가 빨리 컸다. 보육원에 입소한 지 2년이 지나 일곱 살이 됐을 때 이미 아홉 살 아이들만큼 컸기 때문에, 보육원 선생님들이 그를 업으려면 힘에 부쳐 하는 게 보여 그때부터 해완은 누구에게 업어 달라는 소리를 잘 하지 않았다.

대신 해완은 동생들을 많이 업어 줬다. 누군가를 업어 주면 몸이 바싹 맞닿으며 따뜻한 온기가 등에 퍼져 가서, 기분이 좋고 마음이 따뜻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해완이 누구보다도 많이 업어 준 것은 해언이었다. 처음 만났던 세 살 때부터, 그 짧은 생이 끝난 스물여섯 살 때까지 해완은 셀 수도 없이 많이 해언을 업어 줬었다.

아직도 해언을 업었을 때 느끼던 등의 온기가 생생해, 해완은 문득 숨이 가팔라졌다.

“그럼 이제부터 내가 너 많이 업어 주면 되겠다.”

그때, 옆에서 강현의 나지막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해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강현을 바라보았다.

강현은 개구진 표정으로 해완을 향해 씩 웃으며 설명을 덧붙였다.

“키가 커서 동생들 많이 업어 줬다며. 내가 너보다 키가 크니까, 이제 내가 널 업어 줘야지.”

“……그게 뭐야.”

불현듯 코끝이 찡해져 고개를 돌린 해완은 괜한 볼멘소리를 하며 쥐고 있던 강현의 손을 흔들었다.

손이 어찌나 큰지, 그렇게 흔들어도 조금도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지가 않았다.

항상 보일러를 꺼 두고 가는 탓에 집 안은 여지없이 싸늘했다. 언제 가도 적정 온도로 맞춰져 있는 강현의 집과는 비교할 수 없는 것이 너무나 당연하지만 그래도 저도 모르게 눈치가 보였다.

하지만 해완이 보일러를 올리는 동안 강현은 별다른 말 없이 쇼핑백에 들어 있던 음식 용기들을 차곡차곡 꺼내 정리할 준비를 했다.

딱 봐도 엄청난 양에 해완이 걱정스러운 빛을 얼굴에 띠었다.

“이렇게 많이 해 주신 거야? 이모님 힘드셨을 텐데.”

“안 그래도 감사하다고 말씀드리고 수고비도 넉넉히 드렸어.”

“그랬어?”

“그리고 나한테 웬일로 이런 부탁을 하냐고, 지금 애인이 그렇게 좋으냐고, 웃으면서 말씀하시던데.”

강현의 목소리는 여상하기 그지없었지만 또 얼굴이 빨개진 해완은 괜한 헛기침을 하며 음식을 냉장고에 넣는 것을 돕기 시작했다.

야채죽, 전복죽, 인삼닭죽, 소고기죽, 각 그릇에 적혀진 이름은 간결했지만 살짝 뚜껑을 열어 본 것만으로도 재료가 한두 가지가 들어간 게 아님을 알 수 있었다. 그 외에도 각종 마른반찬과 불고기, 간장제육볶음, 미역국, 황탯국 같은 음식들이 얼려 뒀다 먹을 수 있도록 소분되어 있기까지 했다.

해완이 야채죽을 먹겠다고 하자 강현은 저도 함께 먹겠다고 했다. 하지만 최근 강현이 저를 만날 때마다 배에 차지도 않을 죽만 함께 먹어야 했던 게 마음에 걸려 해완은 그에게 밥을 먹으라고 우겼다.

다행히도 밥은 아침에 해 둔 것이 있었다. 해완이 간단히 황탯국을 데우고 불고기를 볶아 내는 사이 강현은 마른반찬들을 그릇에 차곡차곡 담아냈다.

그렇게 상에 차려 내니 밖에서 먹는 것처럼 그럴듯한 식사가 됐다. 강현의 집 가사를 도와주시는 이모님의 음식 솜씨를 이미 아는 해완은 수저를 들기도 전에 군침부터 돌았다.

강현의 집과는 비교할 수조차 없는 좁고 허름하고 낡은 집이었지만, 그와 마주 앉아 도란도란 이야기를 하며 식사를 하고 있는 것 자체에 질리지도 않고 가슴이 떨렸다.

“이것도 먹어.”

“내가 먹을 수 있는데…….”

저는 먹는 둥 마는 둥 하며 자꾸만 자신의 수저 위에 반찬을 올려 주는 강현에 해완이 머쓱하게 입을 열었다.

“내가 이렇게 챙기는 게 싫으면 아프질 말든가. 속상하게.”

언뜻 들으면 타박하는 것 같았지만 그런 말을 하는 강현의 얼굴과 표정이 너무 다정해서 가슴이 욱신 아리게 느껴진 해완은 고개를 푹 숙였다.

몸이 고생하는 와중에도 강현이 이렇게 저를 걱정하고 아껴 주는 것이 어쩔 수 없이 벅차게 느껴지는 스스로가 당황스러워서였다.

강현은 그런 해완의 볼을 슬쩍 만져 고개를 들게 만들더니,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빨리 나아, 알았지?”

제가 아픈 이유에 대해서, 그리고 그것을 강현에게 숨길 수밖에 없는 이유에 대해 뻔히 알면서도 그의 다정함에 매달리고 또 매달려 언젠가 그를 잃었을 때 기억할 거리를 만들고 싶어 하는 제 어리석음을 알면서도, 해완은 마치 중독이라도 된 것처럼 강현이 주는 온기를 따라 고개를 끄덕였다.

식사를 마치고 나서는 강현이 설거지를 하겠다고 나섰지만, 해완에게도 불편한 이 작은 싱크대를 그 큰 키로 감당하지도 못할 것 같아 해완은 그에게 보리차 한 잔을 따라 주고는 억지로 바닥에 앉혀 놓았다.

최대한 빠르게 설거지를 마치고 뒤돌아선 순간, 살짝 미소를 띤 채 저를 뚫어져라 보고 있는 강현의 시선과 마주친 해완은 불현듯 멈칫했다.

이 좁은 집 안에서 달리 시선 둘 곳도 없는 걸 뻔히 알면서도 해완은 괜히 타박을 했다.

“뭘 그렇게 쳐다봐?”

그러자 강현은 그렇게 묻기를 기다리기라도 했다는 듯 즉답했다.

“다람쥐 같아서. 뽈뽈대면서 움직이는 게.”

“보더콜리로 모자라서 이젠 다람쥐야?”

“아기 보더콜리는 생긴 게 닮은 거고, 다람쥐는 하는 짓이 비슷한 거고.”

굳이 보더콜리 앞에 ‘아기’라는 말을 붙이는 강현의 뻔뻔함에 해완은 또 얼굴에 열이 오르는 것이 느껴졌다. 다 큰 성인 남자에게 잘도 낯간지러운 별명을 붙이는구나 싶어서였다.

해완의 하얀 얼굴에 어김없이 핀 단풍을 본 강현은 고개를 숙이고 슬쩍 미소를 짓더니, 그의 손목을 잡아 휙 바닥으로 끌어 내려 앉혔다.

“우리 집보다 여기가 더 좋은 점이 하나 있어.”

“……뭔데?”

“네가 뭘 하든 계속 내 눈 안에 있는 거.”

해완의 이마에 자신의 이마를 맞대고 작게 속삭인 강현은, 그대로 해완에게 입을 맞췄다.

입술을 가르고 밀려 들어온 혀가 민감한 점막을 제멋대로 휘저었다. 거친 키스에 숨을 쉬고 싶어 고개를 숙이려 들 때마다 강현은 집요하게 해완의 턱을 붙들고 벌을 주듯이 입술을 깨물며 그 입 안을 맛보는 것을 멈추지 않았다.

해완이 쓰러진 이후 며칠간 강현은 이런 식의 키스를 거의 하지 않았기 때문에 아랫배가 금세 욱신거리기 시작한 해완은 저도 모르게 강현의 어깨를 손에 쥐고 끙끙거렸다.

그런 반응에 응답이라도 하듯, 강현은 해완의 상의 속에 커다란 손을 밀어 넣었다. 점점 번지는 성감에 몽롱해지기 시작하던 해완의 정신이 번쩍 들었다.

“유, 유준이 오면 어떡해.”

해완은 강현의 어깨를 밀어 내며 고개를 돌렸지만, 그러기 무섭게 따라붙은 강현이 키스를 하는 사이사이 중얼거렸다.

“요즘, 늦게, 온다며.”

“그래도…….”

“끝까지, 안 할 테니까, 걱정 마.”

끝까지 안 한다는 건 어디까지 하겠다는 말인지 몰랐다. 해완을 뒤로 눕히려는 듯 몸을 기대 오는 강현을 피해 버둥거렸지만 소용이 없었다. 강현은 해완의 민감한 귓불과 그 뒤를 물고 빨고 핥으며 해완의 발가락이 곱아지게 만들었다.

“그, 그럼 방에 들어가서 하자. 응?”

그 말에 강현은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숨을 쉬더니 해완의 손을 잡고 몸을 일으켰다.

끼익 소리를 내며 낡은 방문이 닫히자마자 강현은 다시 달려들어 입을 맞추며 해완을 바닥에 눕히려 들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어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왜?”

“너 이대로 하면 아플 거 같아서.”

몸을 일으킨 강현은 방구석에 놓인 잘 개어진 두 채의 이불 중 해완이 쓰는 이불을 집어 들고 와 바닥에 잘 펴기 시작했다.

반쯤 답을 알면서도 해완은 괜히 입을 열었다.

“그게 내 건지 어떻게 알았어?”

강현은 해완을 흘낏 보더니 그의 손을 잡고 이불 한가운데 끌어 앉혔다. 그러고는 해완의 목선을 따라 혀를 끌고 내려가더니 왼쪽 어깨와 목덜미 사이에 고개를 깊숙이 묻었다.

또다. 해완은 뜨거워지는 숨을 뱉으며 멍하니 생각했다. 예전 해완의 냄새를 맡을 때 강현은 항상 페로몬샘이 있는 오른쪽 목덜미를 찾았는데, 최근에는 왜인지 몰라도 항상 왼쪽 목덜미에 집요하게 고개를 묻곤 했다.

이내 고개를 든 강현이 해완의 귓가에 숨을 불어넣듯 낮게 속삭였다.

“너랑 냄새가 같아.”

9년 전, 해완의 시계를 찾아 주던 때와 정확히 같은 말을 하는 강현의 목소리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멈칫했다.

강현은 알지 못하는 혼자만의 기억을 껴안고 있는 것이 가슴이 뭉클하기도 하고 아리기도 했다.

언젠가 말해 줄 수 있을까? 그런 생각에 괜히 눈시울이 시큰해진 해완은 강현의 볼을 보듬다가 그대로 입을 맞췄다.

한동안 깊게 키스하던 강현은 천천히 해완의 다리 쪽으로 내려가다 무릎을 꿇고 앉은 채로 해완의 바지와 속옷을 벗겼다. 갑자기 맨살이 드러난 하체에 해완이 몸을 부르르 떨자 그는 해완의 한쪽 다리를 어깨 위에 걸치고는 다리 안쪽에 쪽쪽 입을 맞췄다.

그대로 몸을 낮춘 강현은, 발기해 올라붙어 있는 해완의 성기를 쥐고 뿌리 쪽을 쓰다듬다가 끝을 입 안에 넣었다.

“읏, 으응…….”

강현의 입 안이 너무나 뜨겁게 느껴져 해완은 속절없이 신음했다. 강현은 한동안 그렇게 해완의 좆을 빨아 주다가, 갑자기 고개를 들더니 옆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베개를 들어 해완의 허리 밑에 끼워 넣었다.

갑작스럽게 허리가 들리는 자세에 놀란 해완이 팔뚝으로 상체를 조금 일으켜 보려고 한 순간, 해완의 넓적다리를 잡고 위로 밀어붙인 강현이 이번에는 엉덩이 사이에 얼굴을 깊숙이 묻었다.

“아아!”

강현의 혀가 민감한 주름을 핥기 시작한 순간,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충격적인 느낌에 해완은 거의 비명을 지르듯이 높은 신음을 뱉었다.

“아! 가, 강현아, 응, 아응…….”

생각조차 해 본 적 없는 애무에 수치심과 쾌감이 뒤섞여 머리가 엉망진창이 된 해완은 고개를 옆으로 돌리고 허리를 비틀며 할딱이는 숨만 뱉어 냈다.

“흐, 흐윽…….”

이윽고 물컹한 혀가 꽉 닫힌 구멍을 비집고 짧게 오가는 것까지 느껴지자 해완은 입을 틀어막고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부들부들 떨었다.

마른 아랫배 위로 바싹 올라붙은 좆이 달아오를 대로 달아올라 선액을 뚝뚝 흘려 대기 시작했다. 그제야 고개를 든 강현은 손등으로 애액이 묻은 입술을 가볍게 문질러 닦고는, 해완의 좆을 다시 손으로 흔들어 주며 끝을 사탕을 먹듯이 입 안에서 굴리기 시작했다.

더 이상은 버틸 수가 없었다. 몇 번 빨리지도 않고 해완은 허리를 들썩이며 강현의 입에서 그대로 사정해 버렸다.

약이라도 먹은 것처럼 정신이 몽롱해서, 해완은 사지를 멋대로 펼쳐 두고 숨만 거칠게 몰아쉬었다. 그런 해완의 허벅지 깊은 곳을 빨고 깨물며 강현은 붉은 자국을 남겼다.

갑자기 화들짝 놀란 해완이 팔뚝으로 상체를 벌떡 일으켜 세웠다. 아직도 해완의 허벅지 사이에 머물던 강현이 무슨 일인가 하고 고개를 들었다.

“너, 너……. 이, 입 어떻게 했어?”

해완의 모호한 말에 강현은 순간 고개를 갸웃하더니, 이내 뜻을 알았다는 듯 대꾸했다.

“아, 그거. 삼켰어.”

태연하다 못해 산뜻하기까지 한 강현의 대답에도 불구하고 해완은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상체를 일으킨 해완은 강현의 팔을 잡아끌고는 마치 어린애한테 하듯 입 아래에 손바닥을 들이밀며 정신없이 떼를 썼다.

“미쳤어, 진짜. 뱉어. 빨리 뱉어.”

“이미 삼킨 걸 어떻게 뱉어.”

“그걸 왜 먹어, 더, 더러운데…….”

그 말에 강현은 한쪽 눈썹을 꿈틀하더니, 해완의 귀에 입술을 붙이고 속삭였다.

“왜, 맛있던데.”

그리고 새빨개진 해완의 귀를 깨물고 핥아 대는 통에, 해완은 강현의 몸에 반쯤 기댄 채 애꿎은 입술만 잘근잘근 씹었다.

사정 이후 나른한 쾌감에 잠겨 있던 해완은 강현의 앞섶이 터질 정도로 부풀어 있는 것을 보고 눈을 휘둥그레 떴다.

강현은 신경도 안 쓰고 저만 즐겼다는 죄책감이 갑자기 마음을 휩쓸었다. 급하게 손을 내려 강현의 앞섶을 꾹 누르자, 해완의 귓가에 강현이 윽, 하고 깊은숨을 내뱉는 것이 느껴졌다.

해완은 고개를 돌려 강현의 귀 뒤와 목선에 입을 맞추며 그의 바지를 풀어 내리고 손을 넣어 앞을 쓰다듬었다. 강현의 만족스러운 한숨에 용기가 생긴 해완이 작게 중얼거렸다.

“나도 빨아 줄까……?”

그 말에 강현이 살짝 고개를 들어 해완을 보았다. 그는 가늠하듯 눈을 가늘게 뜨고 해완을 보다가, 갑자기 손을 들어 올려 해완의 입술을 벌려 열었다.

한마디 말도 없이 입 안으로 손가락 하나가 불쑥 들어왔다. 엉겁결에 입을 벌린 해완은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가만히 있었다.

그러자 손가락이 두 개, 세 개까지 들어왔다. 턱이 좁은 해완의 입 안은 그것만으로도 금방 찼다. 그렇게 밀어 넣은 손가락으로 강현은 해완의 입 안 크기라도 재어 보듯 입 안을 헤집다가 벌렸다가 했다.

키스를 하도 많이 해서 민감해져서 그런지, 길고 두꺼운 손가락이 입 안을 쑤시는 것만으로 뭔가 야릇한 기분이 올라왔다.

해완은 저도 모르게 강현의 손가락을 살짝 깨물고 빨아들이듯이 입술을 오물거렸다. 그러자 강현의 동공이 맹수처럼 커지는 것처럼 느껴졌다.

“씨발.”

강현이 한숨처럼 내뱉은 욕설에 해완은 흠칫 놀랐다. 뜨거운 숨을 내뱉은 강현은 해완의 입 안에서 손가락을 잡아 빼고는 거칠게 말했다.

“……나중에 해, 그건.”

강현은 해완의 몸을 밀어 모로 눕힌 뒤 제 바지와 속옷을 허벅지까지 밀어 내리고 뒤에 바싹 붙어 누웠다.

그리고 강현은 해완의 마른 허벅지 사이로 제 발기한 성기를 끼워 넣고는 그대로 앞뒤로 퍽퍽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맨살이 쓸려 아플 만한데도, 회음부를 오가는 뜨겁고 두꺼운 성기의 느낌만으로도 다시 몸 안이 뜨거워졌다. 삽입을 하지도 않았는데 다시 흐르기 시작한 애액이 좆을 적시자 으르렁대며 해완의 입술을 잡아 돌린 강현이 잡아먹을 것처럼 입을 맞췄다.

강현의 팔에 단단히 안겨 인형처럼 흔들리며 숨을 할딱이는 사이, 해완을 끌어안은 강현의 온몸에 힘이 들어가는가 싶더니 깊고 낮은 신음과 함께 해완의 허벅지 위에 뜨거운 정액이 흘렀다.

해완은 몽롱한 눈으로 살짝 몸을 돌려 강현의 입술에 입을 맞췄다. 한동안 그렇게 서로의 얼굴 곳곳에 버드 키스를 하며 여운을 즐기다가, 몸을 일으킨 강현이 애액과 정액으로 엉망이 되어 있는 해완의 허벅지 사이를 휴지로 닦아 내 주었다.

해완은 그런 강현을 바라보다가 문득 물었다.

“아까 왜 나중에 하라고 그랬어……?”

그러자 강현은 해완의 볼을 손가락으로 툭 치며 아무렇지 않게 말했다.

“입도 작은 게, 간신히 먹여 놓은 거 토할까 봐.”

무뚝뚝한 목소리와는 달리 퍽 다정한 내용에, 해완은 볼을 붉혔다.

뒷정리를 끝낸 강현은 바지를 입고 옷매무새를 깔끔히 가다듬었다. 그는 누워 있는 해완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입을 열었다.

“나 볼일이 있어서 가 봐야 될 것 같은데. 괜찮겠어?”

해완은 흘끗 벽에 걸린 시계를 보았다. 아직 8시가 조금 안 된 시간이었다. 생각보다 빠른 작별 인사에 이래서 가까운 자신의 집으로 오자고 한 모양인가 보다 싶었다.

무슨 일인지 물어볼까 하다가, 괜히 강현을 늦어지게 할까 봐 말을 삼키고 몸을 일으킨 해완은 제 머리칼을 어루만지는 강현의 손바닥을 끌어당겨 입을 맞추고는 말했다.

“응. 오늘 와 줘서 고마워.”

강현은 씩 웃어 보이고는 몸을 일으켰다. 일단 바지만 허둥지둥 챙겨 입은 해완은 현관까지 강현을 따라 나갔다.

현관까지 가는 것도 몇 발자국이면 되다 보니 배웅이라고 할 것도 없는데도 한참을 키스를 나누고서야 강현은 해완의 집을 완전히 떠났다.

강현이 떠나고 혼자 남겨지자 이 좁아터진 집이 이상하게 넓게 느껴져, 해완은 잠시 멍하니 그 자리에 서 있었다.

괜한 감상을 고개를 저어서 털어 낸 해완은 일단 욕실로 들어가 샤워를 했다. 머리를 대충 말리고 나서는 집 안 창문을 모두 열고 환기를 시켰는데, 춥긴 했으나 강현의 페로몬이 워낙 길게 자취를 남기는 터라 유준이 돌아왔을 때 민망한 사태를 방지하기 위해서는 어쩔 수 없었다.

강현의 말마따나 끝까지 가지는 않은 탓에 이불이 그렇게 지저분하지는 않았다. 그래도 세탁을 하긴 해야겠다는 생각이 들어 이불을 개서 옆에 챙겨 두고 방바닥까지 말끔히 닦아 내고 나니 어느덧 30여 분이 훌쩍 지나 있었다.

원래도 별일이 없으면 일찍 자는 편인 데다 최근 들어 더욱 피곤을 많이 느끼는 해완은 길게 하품을 하고는 잠자리에 들었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어디선가 울리는 벨소리에 해완은 흠칫 놀라 눈을 떴다. 하지만 눈꺼풀이 무거워 잠시 뭉그적대던 사이 벨소리는 뚝 끊겼다.

시계를 보니 자정이 넘은 시각이었다. 이 늦은 시간에 전화를 할 사람은 강현 아니면 유준뿐이었기에 해완은 눈을 비비며 충전기에 꽂아 두었던 제 핸드폰을 들여다보았지만 아무런 알림이 보이질 않았다.

환청이라도 들었나 싶어 어리둥절해져 주위를 둘러보는데 이번에는 어디선가 메시지 도착 알림 소리가 들렸다. 당연히 해완의 핸드폰은 아니었다.

그 소리의 출처가 거실임을 눈치챈 해완이 방 밖으로 나가자 안쪽 벽 아래에서 반짝이고 있는 강현의 핸드폰이 보였다.

그러고 보니 아까 강현이 코트를 그쪽에 두었던 게 떠올랐다. 어쩌다 주머니에서 빠진 모양이라고 생각한 해완은 난감한 얼굴로 그것을 들어 올렸다.

제게 연락이 오지 않은 걸 보니 핸드폰이 없어진 것을 아직 모르는 모양이었다. 강현이 업무용으로 다른 핸드폰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 번호까지는 차마 알지 못해 그의 연락을 일단 기다려 봐야 할 듯했다.

그렇게 무심히 핸드폰 화면을 본 해완의 눈이, 익숙한 이름에 덫에 걸린 듯 멈췄다.

[김유준 : 형 어디에요?]

[김유준 : 저 벌써 와서 기다리고 있는데]

해완은 멈칫 눈을 깜빡였다. 동명이인일 것이라 생각하고 싶었지만, 강현을 ‘형’이라고 부를 만한 사람 중 유준과 같은 이름이 있다는 말은 한 번도 들어 본 적 없었다.

이러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해완은 저도 모르게 메시지를 확인하기 위해 화면을 터치했다. 잠금이 되어 있었지만 강현이 쓰는 비밀번호가 무엇인지는 이미 알고 있었다.

비밀번호가 풀리고 메시지가 화면에 뜨자 해완은 번호부터 확인했다. 김유준, 이라는 이름 밑에 뜬 번호는, 유준의 것이 맞았다.

머리가 혼란스러웠다. 왜지. 왜 유준이 강현과 개인적인 연락을 하고 만날 약속까지 잡은 거지. 오늘만일 거라고 믿고 싶었지만, 메시지 화면에 뜬 스크롤 길이는 일회성 연락이 아니라는 것을 뜻했다.

그때 갑자기, 요즘 들어 씀씀이가 커진 유준의 행동이 생각났다. 해완이 말을 하지 않아도 냉장고도 채워 넣고, 낡은 전기장판이며 전열 기구 같은 것도 며칠 전 유준이 뜬금없이 새로 사 와 교체했던 터였다.

확인해야만 한다는 생각에 사로잡혀, 해완은 입술을 파르르 떨며 스크롤을 위로 올렸다.

* * *

싸늘한 겨울바람 아래 서 있던 유준은 코를 훌쩍이며 땅을 괜히 발로 툭툭 찼다.

문자를 보낸 지 10여 분이 지났는데도 강현은 답이 없었다. 이 늦은 시각에, 그것도 왜 이곳에서 만나는지 그 이유도 모른 채 강현을 기다려야 하는 게 납득이 가질 않았으나 목소리를 내리깔고 중요하게 할 이야기가 있다고 하는 통에 차마 싫다는 소리를 할 수가 없었다.

“씨, 대체 언제 오는 거야.”

투덜대며 한 번 더 문자를 보내 볼까 하고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던 순간 유준의 앞에 낯선 SUV 차량 한 대가 스르륵 멈춰 섰다.

처음 보는 차였기에 유준은 흘끗 보고 말았지만 운전석 창문이 내려가며 나타난 것은 강현의 얼굴이었다.

“유준아, 내가 좀 늦었지, 미안.”

“아니에요, 형. 괜찮아요.”

“얼른 타. 춥겠다.”

조수석에 타기 위해 걸음을 옮기며 유준은 고개를 갸웃했다. 강현이 차가 세 대 있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유준이 듣기로는 모두 외제 차였기에 이런 흔한 국산 SUV도 타고 다니나 싶어서였다.

강현은 바로 차를 출발시키지 않고 임시 정차 깜빡이를 켜 놓은 채 유준에게 말을 걸었다.

“언제 왔어?”

“한 15분쯤 전에요. 문자 드렸었는데.”

“미안, 못 봤네. 핸드폰을 다른 데 놓고 와서.”

“아, 그러셨구나……. 형, 근데 이거 형 차예요?”

결국 궁금증을 참지 못한 유준이 묻자, 강현이 무덤덤하게 대꾸했다.

“아니, 빌린 거야.”

“왜요? 차에 무슨 문제라도 생겼어요……?”

설마 세 대에 한꺼번에 문제가 생기진 않았겠지만 굳이 차를 빌려 나온 것이 이해가 되지 않은 유준이 재차 물었다. 하지만 그는 빙긋이 미소만 지을 뿐, 아무 말 없이 운전대를 손으로 툭툭 건드리기만 했다.

이후로도 강현은 한참 동안 말이 없었다. 갑자기 차오른 침묵에 숨이 막히고 불편해져, 마른 입술을 혀로 축인 유준은 어색하게 입을 열었다.

“그런데 저 오늘 왜 보자고 하신 거예요?”

“응, 너랑 같이 만나 보고 싶은 사람이 있어서.”

“그게 누군……데요?”

그러자 강현은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냈다. 두고 왔다더니 뭐야, 싶었지만 강현이 일전에 제가 모르는 번호로 연락을 한 적이 있다는 것을 기억해 낸 유준은 하여튼 부자들은 돈이 남아도는 모양이라고 속으로 투덜거렸다.

그사이, 강현은 핸드폰 화면에 무언가를 띄워 유준에게 내밀었다. 별생각 없이 그것을 들여다본 유준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형, 이건…….”

더듬거리며 말을 내뱉은 유준이 고개를 들자, 강현이 조용히 말했다.

“이 사람들이지? 니가 돈 갖다 바치는 사람들.”

강현이 내민 화면 안에는, 지난번 집 앞으로 찾아와 해완을 때렸던 남자 둘의 얼굴이 들어 있었다.

대답을 하는 대신 유준이 홱 시선을 돌리자 강현이 입을 열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왜 자꾸 이 사람들한테 돈을 주는 거야?”

“…….”

“친한 사이라서 그렇다고 보기엔 너한테 잘해 주는 것도 아닌 거 같던데. 맨날 잘못이나 뒤집어씌우고.”

설마, 하는 기분에 유준이 다시 강현을 바라보자 그는 여상한 태도로 말했다.

“맨 처음 나한테 돈 받아 간 오토바이 사고도, 오토바이 명의만 네 거였지 네가 운전한 거 아니잖아.”

“…….”

“넌 뒤에 타고 있었을 뿐이지.”

유준은 바보같이 입을 벌렸다. 쉽게 말이 나오지 않아 몇 번이나 입술을 벙긋거리고서야, 말을 뱉어 낼 수 있었다.

“뭐예요, 지금? 내 뒷조사한 거예요?”

“응, 조금.”

남의 뒷조사를 해 놓고서 태연하기 그지없는 강현의 태도에, 유준은 말을 잃고 그를 바라보았다.

그 두 사람을 알게 된 것은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해완만 믿고 무작정 서울로 올라왔다가 그와 함께 살 수 없게 된 뒤의 일이었다.

당시 유준에게는 정착 지원금 오백만 원과 원장 선생님이 후원금의 일부로 아주 적게나마 아이들 개개인마다 들고 있던 적금 이백만 원까지 총 칠백만 원이 있었는데, 갑작스럽게 해완과 사이가 멀어지고 타지로 올라와 사람이 고팠던 그는 만나는 사람들마다 돈을 펑펑 쓰면서 환심을 사려 들었었다.

그 둘도 그 과정에서 알게 된 사람들이었다. 배달 일을 하다가 만난 그들은 처음에는 유준에게 간도 쓸개도 빼 줄 것처럼 살갑게 굴면서 저희들 집에 살라고까지 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르고 유준의 돈이 점점 떨어져 갈수록 그를 막 대하고 심지어 손을 올리기까지 했다.

결국 참다못한 유준은 둘이 나간 사이 몰래 짐을 챙겨 무작정 해완의 오피스텔로 다시 향했다. 해언이 죽었는지 살았는지는 몰라도, 이런 저를 외면하지는 않으리란 생각에서였다.

그러나, 오피스텔 문을 열고 나온 해완은 1년 전 그가 봤던 해완과는 달리 마른 몸에 병색이 완연한 얼굴을 하고 있었고, 심지어 윤해언의 향을 풍기고 있었다.

수술 때문에 엉망이 된 몸에 빚까지 져 놓고서도 해완은 유준더러 네가 돌아와서 너무 좋다며, 그때 도와주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진심으로 가슴 아픈 얼굴을 했다.

저도 갈 곳이 없는 건 마찬가지였지만 그런 해완을 외면할 수는 없었다. 어린 시절 해완이 유준을 살뜰히 돌봐 준 만큼 유준도 해완을 도와주고 싶었다.

해완의 오피스텔 계약이 얼마 남지 않았기 때문에 집을 찾는 것이 급선무였다. 결국 유준은 그래도 유일하게 친하다고 할 만한 인맥을 찾아갔다. 그들은 유준이 없어진 지 사흘이 지났는데도 집을 나갔다는 것을 모르는 눈치였지만, 오히려 다행이었다.

유준이 어렵게 보증금이 필요하다는 이야기를 하자 그들은 믿기지 않을 정도로 선뜻 돈을 빌려주겠다고 했다. 물론 이자가 터무니없이 비싸기는 했지만 해완과 같이 살며 생활비를 아끼고 배달 일을 열심히 하면 금방 갚을 수 있을 것 같았다.

그게 제 발로 깊은 늪에 빠져드는 길이었다는 것을, 그때 당시 유준은 몰랐다.

반년이 지난 시점에 그들은 유준에게 받아 가던 이자를 멋대로 두 배로 올렸다. 유준이 항의하자 그들은 유준을 끌고 자신들이 일하는 ‘사무실’이란 곳에 데려갔는데, 알고 보니 그곳은 조직폭력배들이 운영하는 대부업 사무실이었고 제게 빌려준 돈도 거기서 끌어온 돈이라는 청천벽력 같은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렇게 약점을 잡힌 유준은 말도 안 되는 이자를 갚는 동시에 그 둘에게 사사건건 돈까지 뜯기고 있었다.

도움을 요청하고 싶어도 어떻게 해야 할지를 몰랐다. 아무도 이런 때 어떻게 해야 하는지 알려 주지 않았고, 그렇다고 해서 그것을 물어볼 사람도 유준의 주변에는 없었다.

해완에게 의논하기엔 그는 유준이 가져온 오백만 원을 그가 거짓말한 대로 정착 지원금이라고 철석같이 믿고 있었다. 게다가 두 사람분의 생활비며 수술로 인해 진 빚의 이자까지 감당하느라 쉬는 날 없이 온갖 아르바이트를 하면서도 그를 위한 적금을 드는 해완에게 그런 짐까지 떠넘길 수는 없었다.

끝이 없는 미로에 갇힌 기분에 울컥한 유준은 입술을 꾹 깨물며 눈물을 참았다.

“유준아, 왜 대답 안 해?”

강현이 옆에서 채근을 했다. 유준의 속도 모르고 울타리 없이 살아야 하는 인생이 얼마나 어려운지 영원히 알지 못할 그 태연한 목소리에, 울컥한 유준이 거칠게 답했다.

“뒷조사했다면 다 알 거 아니에요. 걔네한테 사채 빚 졌고, 그거 갚느라고 돈 준 거예요. 됐어요?”

“사채 빚 아니던데.”

“뭐라구요?”

“그 사람들, 새끼 조폭인 건 맞다던데 너한테 준 돈은 사채 빚 아니야. 그렇게 속인 거지.”

충격적이었다. 제가 이제까지 속아 왔다는 사실에 열이 오른 유준은 머리를 쥐어뜯으며 웅크리고 소리가 되지 않는 비명을 질렀다.

그런 유준에 아랑곳없이 강현은 또 말을 걸었다.

“이제 알았으니 그 사람들 안 만날 거지?”

눈에 눈물까지 고여 있던 유준이 고개를 홱 들며 반항적인 목소리로 말했다.

“그게 형이랑 무슨 상관인데요?”

그 말에 강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서늘한 목소리로 말했다.

“네가 자꾸 멍청한 짓을 하니까 해언이가 널 가만히 못 두는 거잖아.”

“…….”

“난 그게 싫어.”

그렇게 말하며 강현은 눈 한번 깜짝하지 않고 무표정한 얼굴로 유준을 보았다.

갑자기 이 차 안에 강현과 단둘이 있는 것이 조금 무서워진 유준은 저도 모르게 몸을 창가 쪽으로 기울이며 소심하게 중얼거렸다.

“나라고 만나고 싶어서 만나는 줄 알아요? 연락 안 받으면, 자꾸 나 일하는 데나 집으로 찾아와서, 지난번처럼 깽판 치고 그러니까, 그, 그래서…….”

그러자 강현은 좀 알겠다는 듯 부드러운 얼굴을 하고 눈썹 위를 문질렀다.

“아, 무서워서 그러는 거야? 너한테 해코지할까 봐?”

유준은 고개를 가만히 끄덕였다. 강현은 흠, 소리를 내더니 핸드폰으로 무언가를 흘끗 확인하고는 상냥하게 말했다.

“알겠어. 일단 가자. 마침 시간 됐네.”

그리고 강현은 곧바로 시동을 걸고 차를 출발시켰다. 유준은 휘둥그레진 눈으로 주위를 번갈아 보았다.

“지,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가 보면 알아.”

짧게 대답한 강현은 시선을 앞에 고정시켰다. 무언가 말을 더 걸어 보려고 해도 그 표정 없는 얼굴이 무서워서, 유준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침만 꿀꺽 삼켰다.

다행히 차는 오래 달리지 않았다. 5분 정도 지난 뒤에 정차한 곳은 어느 술집 앞이었는데, 곧 문이 열리는가 싶더니, 그 안에서 유준을 괴롭히는 두 사람이 나오는 것이 보였다.

“혀, 형……? 우리 왜 여기 온 거예요?”

“너 괴롭히지 말라고 내가 대신 경고해 주려고.”

“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너무나 예상치 못한 상황에 당황한 유준은 어쩔 줄 몰랐다. 하지만 강현은 그 둘이 오토바이 하나에 함께 올라타는 걸 보더니, 짧게 말했다.

“안전벨트 매.”

그때까지 안전벨트를 매지 않고 있었다는 것을 깨달은 유준은 떨리는 손으로 일단 벨트를 맸다.

요란한 오토바이 배기음 소리를 울리며 달리는 두 사람의 뒤를 강현은 차를 타고 따라갔다.

새벽임에도 불구하고 서울 시내를 시끄럽게 경적을 울리며 횡단하던 오토바이는 어느 외곽 도로로 휙 빠져 들었고, 강현도 그 뒤를 따랐다.

하천을 옆에 낀 좁고 외진 외곽 도로에는 오토바이와 강현과 유준이 탄 차 말고 다른 차들은 없었다.

그때, 빠른 속도로 달려가던 오토바이가 문득 속도를 늦추더니, 강현이 달리는 옆 차로로 빠져서 천천히 달리기 시작했다.

강현은 아랑곳없이 제 속도를 유지했다. 그런데 강현의 차가 오토바이에 가까워질 무렵 오토바이는 갑자기 속도를 올리며 강현의 차 앞으로 휙 끼어들었다가, 옆으로 다시 빠졌다.

사고가 날 뻔한 상황에 깜짝 놀란 유준은 소리를 지르며 조수석 옆에 달린 손잡이를 붙잡았다. 하지만 강현은 침착하게 브레이크를 밟았다가 약간 속도를 늦출 뿐이었다.

이제 강현의 차와 나란히 달리게 된 오토바이 위의 두 명은 운전석의 창문을 미친 듯이 두드리며 소리를 질러 댔다.

“야, 이 씹새끼야! 너 우리 따라오는 거 맞지? 너 뭔데, 이 개새끼야! 어?!”

그들은 한참을 창을 두드리면서 욕설을 해 댔지만, 강현은 아무 말 없이 묵묵하게 같은 속도로 차를 달렸다.

강현이 반응하지 않자 시들해졌는지 오토바이는 속력을 올렸다. 하지만 계속해서 강현의 차 앞을 오가며 위험천만한 위협 운전을 하는 통에, 심장이 떨려서 미쳐 버릴 지경이었던 유준은 울먹이면서 강현에게 애원하기 시작했다.

“혀, 형, 제가 그냥 피해 다닐게요, 그냥 제가 피해 다닐 테니까 그만하고 집에 가요. 네?”

하지만 강현은 대답하지 않았다. 그때, 가속 페달을 밟은 듯 갑자기 확 빨라지는 차량에 유준은 또 소리를 지르며 손잡이를 두 손으로 잡고 온 힘을 다해 매달렸다.

강현이 갑자기 속도를 올리자 연이어 위협 운전을 하려던 오토바이는 당황한 듯 급하게 옆으로 방향을 돌렸다. 그러자 강현도 오토바이의 뒤를 따라 핸들을 틀고 한 번 더 가속 페달을 밟아 속도를 단번에 올렸다.

“으악! 아악!”

당장이라도 충돌해 버릴 것 같은 상황에 유준은 목이 터져라 비명을 질렀다.

달려드는 강현의 차를 피해 급격하게 핸들을 튼 오토바이가 그대로 중심을 잡지 못하고 미끄러지며 가드레일을 들이받는 것이, 유준이 본 그들의 마지막 모습이었다.

차의 속도가 천천히 줄어들었다. 유준은 머리를 움켜쥐고 허리를 깊게 숙인 채 두 눈을 꼭 감고 벌벌 떨었다.

그렇게 얼마나 지났을까, 등에 와 닿는 손길에 유준은 소스라치게 놀라며 정신없이 몸을 창가 쪽으로 물렀다.

무슨 일이 있었냐는 듯, 차분한 얼굴을 한 강현이 말했다.

“내려.”

그리고 강현은 곧바로 운전석 문을 열고 내렸다. 제가 꿈이라도 꿈 것인지 헷갈릴 정도로 평소와 같은 강현의 태도에 넋을 놓고 있던 유준은 떨리는 손을 몇 번씩 헛디뎌 가며 간신히 안전벨트를 풀고 차 밖으로 내렸다.

그때까지도 다리가 후들거리며 떨리는 통에 차를 짚고 서는데, 강현이 약간 떨어진 앞쪽에서 마스크를 쓴 어떤 남자와 이야기하는 게 보였다.

차에서 내린 유준을 흘끗 확인한 남자는 빠르게 걸어오더니 운전석에 올라타 SUV를 몰고는 곧바로 사라져 버렸다.

그리고 아까 남자와 대화하던 곳 옆에, 유준에게도 익숙한 강현의 세단이 주차되어 있는 것이 눈에 들어왔다.

강현은 유준을 향해 저벅저벅 걸어오기 시작했다. 이미 겁을 있는 대로 집어먹은 유준은 조금씩 뒷걸음질을 쳤지만, 몸이 너무 떨려서 뛸 수조차 없었다.

어느새 유준의 앞에 선 강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유준아. 내가 생각해 봤는데, 이제 너 괴롭히는 사람도 없어졌으니까, 굳이 해언이랑 같이 살 필요 없는 것 같아. 그치?”

언뜻 들으면 다정하기만 한 목소리였으나 오히려 그게 더 소름이 끼친 유준은 정신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잘 생각했어. 내가 집도 구해 주고, 네 생활비도 당분간 지원해 줄 테니까 걱정은 하지 마.”

기분 좋은 목소리로 말한 강현은 유준의 등에 손을 올리며 말했다.

“차에 타. 늦었으니까 바래다줄게.”

유준은 뻣뻣해진 다리를 움직여 강현이 이끄는 대로 차를 향해 걸어갔다. 차마 무서워서, 뒤를 돌아볼 수조차 없었다.

집까지 가는 내내 유준은 눈을 감고 몸을 옹송그린 채 자는 척을 했다.

그 형들은 많이 다쳤을까? 죽었으면 어떡하지? 그저 강현의 옆자리에 앉아 있었을 뿐인데도 그런 생각을 하는 것만으로 토할 것 같고 머리가 어지러웠다.

직접적으로 치지는 않았더라도 본인이 유도한 사고를 냈는데도 평온해 보이기만 하는 강현의 태도가 너무나 오싹했다.

아니, 전후 사정을 생각해 봤을 때 전부 계획에 따른 움직임이었을 거라 생각하니 그게 더 무서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때 해완의 얼굴이 유준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유준은 자고 있는 척을 하던 것도 잊고 안전벨트를 흰 마디가 서도록 꼭 쥐었다.

고작 저를 괴롭힌 게 전부인, 일면식도 없는 놈들한테도 이런 짓을 했는데, 만약 해완이 자신을 해언이라고 속인 걸 그가 알게 된다면, 대체 해완에게는 무슨 짓을 할까?

그런 생각을 하자 오금이 저리고 소름이 끼쳤다. 제가 해완과 강현의 이상한 인연에 일조를 한 사실을 떠올리니 더욱 견딜 수가 없었다.

부드럽게 멈춰 서는 차의 움직임을 느낀 유준은 눈을 번쩍 떴다. 익숙한 풍경이 차창 너머로 펼쳐지자마자 그나마 칼날 같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빨리 여기서 벗어나야겠다는 생각에 가득 차 강현에게 인사조차 하지 않고 문을 열고 내리려던 때, 강현의 손이 유준의 팔을 턱 붙잡았다.

“유준아.”

“네, 네……?”

“오늘 일은 해언이한테는 말하지 마. 괜히 신경 쓸 테니까. 알았지?”

그렇지 않아도 당장 가서 해완에게 모든 걸 털어놔야겠다고 생각하고 있던 유준은 흠칫 놀랐다.

제 팔을 움켜쥐고 있던 강현의 손에 꽉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졌다. 유준은 겁에 잔뜩 질린 목소리로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아, 알았어요, 알았으니까, 이, 이거 좀 놔주세요.”

그러고서도 강현은 바로 손을 놓지 않고 생각을 알 수 없는 까만 눈으로 그를 빤히 응시하다가 어느 순간 탁 손을 풀어 주었다.

등 뒤에서 강현의 차 문이 닫히자마자 유준은 좁은 골목길 안으로 정신없이 내달렸다. 낡은 철문을 요란하게 밀어젖히고, 떨리는 다리 때문에 이리저리 벽에 부딪쳐 가면서 집 현관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간 그는 신발을 거의 던지듯이 허겁지겁 벗었다.

이내 방문을 벌컥 연 유준은 벽에 기대어 앉아 있는 해완과 시선이 마주치고는 멈칫했다.

벌써 2시가 다 되어 가는 시간이었고, 최근 해완은 이렇게 늦게까지 좀처럼 깨어 있는 법이 없어서 생각지 못한 마주침이었다.

한쪽 손으로 머리를 움켜쥐고 있던 해완은 왠지 붉게 달아오른 눈을 하고 유준을 바라보았다.

“……이렇게 늦게까지 어디 갔다 와?”

유준은 입을 반쯤 벌렸다. 해완에게는 말하지 말라는 강현의 서늘한 목소리가 귓가에서 맴맴 맴돌았다.

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그 사이코 새끼 옆에 해완이 계속 있다가는 무슨 짓을 당할지 몰랐다. 마음을 굳건히 한 유준은 떨리는 가슴을 진정시키려 애쓰며 해완에게 가까이 다가가 앉았다.

“혀, 형, 나 형한테 할 얘기 있어.”

“…….”

“내, 내가 오늘 강현이 혀, 형을 만났는데…….”

“니가 강현이를 왜 만나?”

해완은 묘하게 싸늘한 목소리로 유준의 말을 잘라 버렸다. 그러고 보니 표정도 냉랭하기 그지없었다.

무슨 일이지, 제 안에 있는 용기를 싹싹 긁어모아 입을 연 유준에게는 도움이 안 되는 일이었지만, 그래도 어떻게든 말을 이어 가려던 순간, 해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또 돈 뜯어내려고 만났어?”

그 말을 듣자마자, 유준의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어떻게, 어떻게 안 거지? 당황한 유준이 아무런 말을 잇지 못하고 있는 사이 해완은 드물게 격양된 목소리로 유준을 몰아세웠다.

“진짜 그랬구나.”

“…….”

“내가 그렇게 하지 말라고, 그러지 말라고 했는데, 도대체 왜 그러는 거야. 왜…… 왜 너 때문에 나까지 이렇게 비참하게 만들어. 어?”

“혀, 형. 그건 내가 잘못했어. 얼마든지 나한테 화내도 괜찮아. 근데, 근데 일단 내 이야기 먼저 들어 봐.”

“아니, 듣기 싫어!”

손까지 잡아 가며 해완에게 제 말을 듣게 하려 했지만, 해완은 유준의 손을 뿌리치며 언성을 높이기까지 했다.

“너, 네가 강현이한테 사천만 원 받았을 때 내가 한 말 기억해?”

“…….”

“이번이 마지막이라고, 한 번만 더 이런 짓 하면, 두 번 다시 안 본다고 그렇게 경고했었잖아.”

그렇게 말하는 해완의 눈시울은 어느새 새빨갛게 달아올라 있었다. 그런 해완을 보는 유준의 눈에도 눈물이 차올랐다.

“그러니까…… 이제 각자 갈 길 가자.”

“형!”

“이 집 보증금은 네가 가져온 거니까 내가 나갈게.”

억울했다. 너무 억울해서 말이 나오질 않았다.

그래, 제가 강현에게서 돈을 받은 것도 사실이고, 그걸 개인적으로 쓰기도 했지만 대부분은 해완과 함께 살 이 집을 위해 빌린 돈의 이자로 들어간 것이었다.

하지만 해완은 그걸 몰랐다. 이럴 줄 알았으면 애초부터 털어놨어야 했다는 후회와 자책감이 뒤섞여 유준의 마음을 엉망으로 흔들었다.

그렇게 유준이 멍해 있는 사이 눈물을 닦아 낸 해완은 몸을 벌떡 일으켰다. 그는 망설임 없이 패딩을 입더니 미리 짐까지 싸 뒀던 건지 옆에 놓여 있던 배낭을 등에 메고는, 방문을 지나 걸어 나갔다.

유준은 정신없이 몸을 일으켜 달려 나가 신발을 신고 있는 해완을 붙들고 매달렸다.

“알았어, 형. 그 돈에 대해서 변명 안 할게. 근데 내 말 잠깐만 들어 봐. 여강현 그 인간, 정상이 아니야!”

그 말에, 유준의 손을 뿌리치려던 해완이 순간 멈칫했다. 유준은 빠르게 말을 이었다.

“그 새끼 완전 사이코야. 형이 윤해언이라고 속였다고 하지 말고 그냥 잠수 타. 보육원에라도 가서 숨어 있어. 형이 속인 거 알면, 형한테 무, 무슨 짓 할지도 몰라!”

유준을 보던 해완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졌다가, 갑자기 표정 없이 희게 굳었다. 그는 눈을 한 번 깜빡이고는, 지친 목소리로 말했다.

“강현이를 나쁜 사람으로 만들면, 니가 한 짓이 달라질 것 같아?”

또다. 가슴속에서 뜨겁게 치미는 울분에 유준은 이를 꽉 깨물었다.

9년 전 윤해언 때도 그랬다. 유준은 해완을 위해서 윤해언이 한 짓을 원장 선생님들에게 말했던 것인데, 해완이 그런 일은 없었다며 발뺌하는 바람에 저만 거짓말쟁이로 낙인이 찍혔었다.

그사이, 유준의 팔을 떼어 낸 해완이 몸을 일으켰다. 문이 열리고, 싸늘한 겨울바람이 집 안에 몰아닥치고, 이내 문이 닫힐 때까지, 유준은 이번에 해완을 잡지 않았다.

* * *

시계는 어느새 새벽 3시를 가리키고 있었고 몸 또한 제법 피곤했지만, 강현은 어떤 기대감에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언젠가부터 혼자 쓰기에는 넓게 느껴지는 침대에 누워 뒤척이며 밤을 지새우던 중, 거실에서 울리는 인터폰 벨소리가 들렸다.

강현은 곧바로 시트를 걷고 몸을 일으켜 거실로 나갔다. 인터폰을 받자 로비를 지키는 보안 요원이 누군가의 방문을 알리는 사무적인 목소리가 들렸다.

이렇게까지 빨리 찾아올 줄은 몰랐는데. 로비 한구석에 벙벙한 패딩을 입고 서 있는 해완의 모습을 보고 자꾸만 새어 나오려는 웃음을 강현은 간신히 참았다.

“해언아, 갑자기 무슨 일이야?”

걸음을 서두르며 놀란 목소리를 가장해 묻자 흠칫 놀라며 저를 보는 해완의 코끝이 붉었다. 추워서인지, 아니면 속상해서인지 이유까지는 알 수 없었다.

흰 얼굴에 뚜렷한 그늘을 드리운 채로 해완은 그의 집에 일부러 두고 간 핸드폰을 불쑥 내밀었다.

“이거 가져다주러 이 시간에 온 거야? 내가 내일 찾으러 가려고 했는데, 왜 그랬어.”

“……핸드폰 잃어버린지 몰랐어?”

“알긴 했는데, 볼일 좀 보느라 좀 늦게 알아서 너 자고 있을까 봐 연락을 못 했어.”

“무슨 볼일 봤는데?”

여기서부터가 중요했다. 말을 멈춘 강현은 약간 뜸을 들이고 대답했다.

“그냥, 작업실에서 해야 할 일이 있어서.”

“아니잖아.”

“……어?”

“오늘은 유준이한테 얼마 줬어?”

어설픈 대답보다는 침묵이 나을 것이다. 강현은 할 말이 있는 듯 입을 벌렸다가, 손을 들어 올려 입가를 만지며 난감한 척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화가 치밀었는지 눈가마저 벌겋게 변한 해완이 흥분한 목소리로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지 말았어야지.”

“……해언아.”

“왜 그랬어. 내가 그러지 말라고 했잖아!”

강현은 감정에 북받쳐 거친 숨을 내쉬는 해완의 손을 찾아 쥐었다.

“너 몸도 안 좋은데 유준이 일 때문에 스트레스 받게 하기 싫었어. 근데 내가 잘못 생각했나 봐. 내가 잘못했으니까, 진정해. 응?”

간곡한 목소리로 말하자, 아랫입술을 바르르 떤 해완이 이를 꽉 깨물며 속눈썹을 길게 내리깔았다.

어차피 저를 향한 분노가 아니라는 것을 잘 알았기에, 강현은 두 손으로 해완의 볼을 감싸 들어 올리며 나직하게 속삭였다.

“추운데 들어가서 얘기하자. 응?”

해완은 여전히 눈을 내리깐 채로 강현의 손 안에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해완의 어깨를 감싸 쥐고 제집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강현은 해완의 부드러운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강렬한 짜릿함이 솟구쳐, 절로 가빠지는 숨을 강현은 겨우 눌러 감췄다.

* * *

욕실에서 양치를 한 뒤 입을 헹군 물을 뱉어 내고 있던 해완의 허리를 부드럽게 감싸는 손길이 느껴졌다. 고개를 들고 거울을 보니 어느새 붙어 서 있던 강현이 뒤에서 해완의 볼에 쪽 입을 맞췄다.

“양치를 왜 이렇게 오래 해?”

해완이 거울을 통해 저를 보자 강현이 어린애처럼 투덜거렸다. 아까까지 소파에 붙어 앉아 있다가 떨어진 지 5분도 안 됐는데도 저를 혼자 뒀다 책망이라도 하는 것 같은 목소리에, 해완은 고개를 절레절레 저었다.

“별로 오래 안 했는데.”

“아냐, 오래 했어. 그래서 보리도 따라왔잖아.”

강현의 품에 안긴 채 뒤를 돌아보자 화장실 입구에 얌전히 앉아 헥헥대는 보리의 모습이 보였다.

저도 모르게 피식 웃어 버린 해완이 밖으로 나가기 위해 걸음을 옮기려 하는데도 강현은 해완의 허리를 감싼 손을 풀지 않아서, 결국 두 사람은 펭귄처럼 뒤뚱거리며 다시 거실로 가 소파에 앉았다.

강현의 집에 머문 지 벌써 사흘째였다. 유준이 강현에게 또다시 돈을 받았다는 사실에 가슴이 터져 버릴 것만 같아 무작정 화풀이를 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아무 불만 없이 해완의 마음을 달래 주고 집에 받아 주기까지 했다.

그간 강현은 달콤하다는 말 이외에는 표현할 길이 없을 만치 다정하게 굴었다. 게다가 방금처럼 해완이 잠깐이라도 제 곁에서 떨어지는 걸 못 견뎌 해서, 밥을 먹을 때도, 함께 영화를 볼 때도, 해완을 편의점에 데려다주거나 데리고 올 때도 항상 어딘가 살갗이 붙어 있어야지만 안심이 되는 것 같았다.

제게는 과분한 생활이었고, 당연히 행복해야 마땅할 일이었지만 유준을 떠올릴 때마다 해완의 마음 한구석은 무거운 추를 놓은 듯 우울한 쪽으로 기울어졌다.

해완이 집을 떠난 후로 유준에게서는 아무런 연락도 오지 않았다. 평소였다면 먼저 전화를 걸고도 남았을 해완이지만, 이번에는 반드시 버릇을 고쳐 놓겠다고 마음을 단단히 먹은 탓에 애써 연락을 참고 있었다.

그러나, 그날 밤 해완에게 자꾸만 무슨 이야기를 하고 싶어 하던 유준의 얼굴이 계속 뇌리를 맴도는 건 어쩔 수 없었다.

당시에는 유준의 변명을 들었다가는 언제나 그랬듯이 마음이 약해질까 봐 의도적으로 듣지 않으려 했었고 뜬금없이 강현을 욕하는 말에 화가 나서 더 외면한 것도 있었지만, 다시 떠올려 보니 표정이 꽤나 절박했던 것 같기도 했다.

해완은 강현이 바싹 붙어 있는 것도 잊고 입술 끝을 잘근잘근 씹었다. 유준과 이야기해야 할 일이 한둘이 아니라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며칠 전 유준에게 들은 해언에 관한 이야기도 그랬다. 그때 갑자기 토기가 치민 탓에 마무리 짓지 못한 이야기를, 왜인지 해완은 다시 입 밖으로 꺼낼 수가 없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옆에서 들려온 강현의 목소리에 번뜩 정신을 차린 해완은 어색하게 미소를 지었다.

“으응, 별거 아니야.”

“내일 우리 쇼핑 갈까?”

“어?”

“너 좋아하는 칼도 사고, 냄비도 사고 하게.”

뜬금없는 강현의 말에 해완은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갑자기 그런 걸 왜?”

“너 요리하는 거 좋아하잖아. 진짜 레스토랑 주방만큼은 아니어도, 너 여기 있는 이상 하고 싶을 때는 언제든 할 수 있었으면 좋겠어서.”

언제나와 같이 다정한 말이었지만, 해완이 집으로 돌아갈 것을 전혀 마음에 두지 않은 듯한 강현의 표현에 난감해진 그는 잠시 대답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해완은 제 허벅지 위에 얹힌 강현의 손등 위에 손을 얹고 조심스럽게 입을 열었다.

“강현아. 나…… 내일 집으로 돌아가려고.”

강현의 얼굴에 어려 있던 미소가 삽시간에 사라졌다. 그는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해완을 바라보다가 낮은 목소리로 물었다.

“왜? 유준이한테 화난 거 아니었어?”

“화났지. 화나긴 했는데, 그래도 그렇게 화내고 나왔으니까 정신 좀 차렸을 거라고 생각해. 그리고 며칠간 연락이 없어서…… 좀 걱정되기도 하고.”

해완은 애써 가볍게 이야기했지만,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해완에게 기대앉아 있던 강현은 허리를 똑바로 세우고 해완이 쥐고 있던 손까지 빼서 자신의 무릎 위에 놓고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마음 상한 기색을 숨기지 않는 강현에 미안한 마음이 든 해완은 다시 강현의 손을 찾아 쥐고는 애원하듯 작게 이름을 불렀다.

“강현아…….”

그러자 고집스럽게 발치를 맴돌고 있던 강현의 시선이 흘끔 해완을 향했다.

유리처럼 매끄럽기만 하던 까만 눈이 곤란한 얼굴을 하고 있던 해완의 얼굴을 한 번 맴돌고는 천천히 부드러워졌다.

그는 제 손을 움켜쥔 해완의 손등에 입술을 대고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알겠어. 내일 데려다줄게.”

같이 살자는 제안도 거절해 놓고 제멋대로 집에 쳐들어왔다가 또 제멋대로 나가겠다고 하는데도 결국 제게 져 주는 강현이 고마워, 해완은 마음이 뭉클해졌다.

다음 날, 강현은 아침 일찍 해완을 집 앞까지 태워다 주었다. 함께 들어가겠다는 것을 그가 유준과 마주치는 걸 바라지 않아 극구 만류하자, 강현은 결국 차를 타고 다시 집으로 돌아갔다.

만약 유준과 마주치면 어떤 얼굴을 해야 할까 긴장이 돼서 해완은 조금 머뭇거리다 깊은 심호흡을 하고 조심스레 문을 밀어 열었다.

살짝 열린 문틈 사이로 보이는 안은 어둑어둑해서, 아무래도 유준이 나간 모양이구나 싶어진 해완은 한숨을 내쉬며 안으로 들어갔다.

방 안은 한 치의 온기도 없이 냉골이었다. 고작 3일을 나가 있었다고 낯선 기분이 드는 게 우스웠다.

그런데, 방 안으로 들어가자마자 옷장 문과 그 안 서랍이 열려 있는 것이 보였다. 도둑이라도 들었나 싶은 생각에 흠칫 놀라 가까이 다가간 순간, 해완은 당황한 나머지 눈을 휘둥그레 떴다.

열려 있는 서랍은 유준의 옷을 넣어 두는 칸이었고, 그 안은 텅 비어 있었다.

잠시 그대로 멈춰 서 있던 해완은 다급히 옷장 안에 걸린 외투들을 확인하기 시작했다. 유준의 패딩, 코트, 그리고 해완이 크리스마스로 사 줬던 경량 패딩까지, 모두 있어야 할 자리에 걸려 있지 않았다.

해완은 허둥지둥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유준에게 전화를 걸었다. 신호가 끝까지 흘러가도 응답이 없자, 다시 걸고, 걸고, 또 걸었는데도 끝내 유준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일단 전화를 끊은 해완은 집 안 곳곳을 뒤지기 시작했다. 유준의 가방도, 양말도, 속옷도, 칫솔과 면도기 같은 생필품도 전부 사라졌음을 확인한 해완은 벽에 기대어 스르르 주저앉았다.

언제까지나 유준과 함께 살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이런 식으로 말도 없이 짐을 챙겨 이 집을 떠나 버렸다는 사실이 충격적이지 않을 수는 없었다.

유준이 아무리 잘못을 했다 해도 해완에게는 어린 동생이었다. 이럴 줄 알았으면 변명이라도 들어 줄 걸 하는 후회가 가슴을 꽉 옥죄었다. 이미 한 번 유준을 제 손으로 내친 적이 있어서 더 뼈아팠다.

한동안 맥없이 앉아 있던 해완은 마음을 다잡고 유준에게 문자를 쓰기 시작했다. 어디에 있냐고, 만약 이야기해 주기 싫으면 거처는 잘 마련했는지만이라도 알려 달라는 내용이었다.

그러나 한참이 지나도록, 유준에게서 답은 오지 않았다.

입술을 한 번 깨물고 몸을 일으킨 해완은 금세 퀴퀴해지는 집 안 공기를 환기시키기 위해 창문을 활짝 열고 방을 쓸고 닦기 시작했다. 몸이라도 움직여야 마음이 덜 공허할 것 같아서였다.

하지만 유준의 옷이 사라진 텅 빈 서랍을 본 순간 곧바로 다시 마음이 헛헛해졌다. 두 사람의 옷을 모두 담기에 옷장은 턱없이 작아서 해완의 몇몇 옷가지들은 옷장 위에 개어져 있었지만, 유준이 돌아올 때를 위해서 비워 두기로 결정한 그는 조용히 서랍을 닫았다.

나름대로 대청소를 한다고 했는데도 집을 모두 치우고 나니 고작 정오가 약간 지났을 뿐이었다. 입맛은 없었지만 면역 억제제를 챙겨 먹는 이상 식사를 빼먹을 수 없었던 해완은 냉장고를 열어 강현이 가져다줬던 죽 중 하나를 꺼냈다.

“이거라도 좀 챙겨 먹고 가지…….”

조금도 손댄 흔적이 없는 음식들을 보며 해완은 쓸쓸하게 중얼거렸다.

어릴 적 보육원이라는 사람이 북적북적한 환경에서 자랐지만, 해완은 혼자 있는 것을 싫어하지는 않았다.

그것도 그럴 것이 스물한 살 때부터 혼자 산 시간이 꼬박 6년이었다. 갓 서울에 왔을 때는 말 한마디 편하게 건넬 친구도 없었지만, 그래도 해완은 혼자서라도 서울 이곳저곳을 돌아다니고, 맛있는 음식들도 먹으러 다니곤 했었다.

해완이 무서워하는 건 혼자 있는 것이 아니었다. 혼자가 ‘되는’ 것이었다.

처음부터 몰랐으면 좋았을 테지만, 늘 혼자였던 것보다 누군가의 뒤에 남겨지는 것이 훨씬 외로운 일이라는 걸, 해완은 해언이 죽고 나서야 알았다.

‘그때 윤해언이…… 형 심하게 때렸잖아. 그래서 앓아누웠던 거잖아.’

그때 문득, 며칠 전 들었던 유준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스쳐 지나갔다.

강현이 옆에 붙어 있을 때면 의식적으로 피하고 있었던 해언에 대한 생각을 홀로 있는 이 집 안에서는 도저히 피할 수가 없었다.

그 말을 들었을 때 바로 든 생각은 물론 말도 안 된다는 것이었다. 해언과 해완은 함께 자란 그 긴 세월 동안 한 번도 싸운 적이 없…….

아니, 아니다.

싸웠었다. 분명히 크게. 딱 한 번. 그 이유는 잘 기억나지 않았지만, 분명히 그랬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분명히 기억하고 있던 해언과의 싸움을, 마치 존재하지 않는 것처럼 만들려고 했던 스스로의 머리가 이해가 되질 않았다.

해완은 무릎을 세워 앉은 채 머리를 괴롭게 감싸 쥐었다.

보육원에 들어오기 전 부모에 대한 기억.

해언이 떠나기 전의 일.

너무나 중요한 기억들만 쏙쏙 구멍이 난 듯 흘려보낸 자신의 뇌가 싫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누군가 훔쳐 가 버린 것처럼 떠오르지 않는 기억을 어떻게든 떠올려 보려 애쓰던 해완은 불쑥 몸을 벌떡 일으켜 닫아 놓은 옷장 문을 다시 열었다.

가득 쌓여 있는 이불을 밑으로 끌어 내린 해완은 팔을 길게 뻗어 깊숙한 곳에 넣어 두었던 작은 상자 하나를 꺼냈다.

그 안에는 해완이 차마 버릴 수 없었던 해언의 유품들이 들어 있었다.

해완은 떨리는 손으로 상자 뚜껑을 열었다. 자신이 기억하지 못하는 게 있다면 혹시 해언이 남긴 흔적에서라도 뭔가 단서를 찾을 수 있을까 싶었다.

해언이 좋아하던 머플러, 자주 입고 있던 잠옷, 어릴 때부터 가지고 놀던 큐브, 여권과 주민 등록증 같은 물건들 아래에 놓인 해언이 미국에서부터 쓰던 핸드폰을 집어 든 해완은 충전기에 그것을 꽂고 전원을 켰다.

어둡던 화면은 곧 선명한 빛을 내며 밝아졌다. 해언이 죽은 이후로 처음 켜 보는 것이었는데, 다행히도 비밀번호는 걸려 있지 않았다. 무엇부터 둘러볼까 잠시 고민하던 해완은 일단 메시지 같은 것들을 확인해 보러 들어갔다.

그러나 메시지 함은 일부러 정리한 듯 텅 비어 있었다.

이어서 해완은 메모장과 문서 파일 따위를 찾아보려 했지만 그 역시 아무런 흔적 없이 깨끗했다.

허탈해진 해완은 잠시 텅 비어 있는 바탕화면을 바라보다가, 사진첩을 한 번 터치해 보았다. 그리고 그 안에 가득 있는 사진들의 섬네일에 해완은 눈을 크게 떴다.

엄지손가락으로 스크롤을 내리던 해완의 눈시울이 천천히 붉어졌다. 해언이 남기고 간 사진들은, 모두 저와 함께 찍은 것들뿐이었다.

두 사람이 함께 살았던 짧은 1년간 이곳저곳을 다니며 함께 찍은 사진들과, 그 좁은 오피스텔 안에서 이유도 없이 장난스럽게 찍은 셀카들, 그리고 해언이 해완을 몰래 찍은 것 같은 사진들이 그 안에 가득했다.

마치 해언의 세상에는 해완밖에 없는 것처럼, 그랬다.

스크롤을 한참 내리던 해완의 손가락이 멈칫했다. 그곳에는 해완과 해언의 학창 시절 사진이 있었다. 인화한 사진을 찍거나 스캔한 것처럼 보이는 것도 있었고, 해완은 기억조차 나지 않는 어린 시절의 사진들도 모두 그 안에 담겨 있었다.

그것을 보자 문득 해언이 아프도록 보고 싶어져, 해완은 핸드폰 안에서 환하게 웃고 있는 해언의 얼굴을 가슴에 대고 꼭 안았다.

해완은 스스로에게 확인시키듯 고개를 저었다. 남긴 것이라곤 자신과의 추억밖에 없는 해언이 그렇게 저를 때렸을 리가 없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유준은 해언이 자신을 때리는 것을 두 눈으로 똑똑히 봤다고 했지만, 아마 두 사람이 싸웠을 때의 일일 것이다. 잘은 기억나지 않지만, 갓 고등학교를 졸업한 남자애 둘의 싸움이니 주먹이 오고 갔을 수도 있고, 그걸 해언에 대해 반감이 있는 유준이 과장해서 얘기한 것일 테다.

불안한 마음을 지우듯이 해완은 해언의 핸드폰을 잘 챙겨 두었다. 제가 가지고 있지 않은 사진들도 많아서 보고 싶을 때면 꺼내 봐야지 하는 생각에서였다.

해언의 핸드폰을 손에 들고 몸을 일으킨 해완의 눈이 텅 빈 집 안을 향했다.

갑자기 불현듯, 미친 듯이 외롭고 두려웠다.

언젠가부터, 이럴 때 생각나는 사람은 오로지 단 한 사람뿐이었다.

해완은 허겁지겁 싱크대 위에 놓아두었던 자신의 핸드폰을 쥐었다. 면역 억제제 부작용이 또 어떻게 찾아올지 모른다거나, 그것을 강현에게 들켜서는 안 된다거나 하는 것들은 하나도 떠오르지 않았다.

―여보세요?

신호가 몇 번 가지도 않았는데 강현은 전화를 받았다.

“강현아. 나 오늘……. 너희 집에 가서 자도 돼?”

그러자, 유준이 해완의 곁에서 떠나 버린 걸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강현은 무엇도 묻지 않은 채 확고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지금 데리러 갈게.

전화를 끊은 해완은 살짝 입술을 깨물고는, 이번에는 다시 유준에게 전화를 걸어 보았다. 두 번, 세 번 더 걸었는데도 그는 받지 않았다.

풀이 죽은 해완은 혹시 유준이 돌아올 때를 대비해서 작은 쪽지를 썼다. 무작정 화내서 미안하다고, 이번에는 네 얘기를 들어 줄 테니 제발 다시 나가지 말고 내가 올 때까지 기다리라고, 뭐 그런 내용이었다.

혹시라도 유준이 놓칠까 봐서 같은 이야기를 여러 장 써서 이곳저곳에 붙여 놓았다. 그러는 사이, 집 앞이니 나오라는 강현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해완은 부엌등은 일부러 켜 두었다. 난방비 때문에 나갈 때면 무조건 꺼 두던 보일러도 집이 얼음장이 되지 않을 정도로는 올려 두었다.

이 정도면 유준이 와도 바로 뛰쳐나가고 싶어지지는 않을 것 같아, 해완은 문을 잘 잠그고 터덜터덜 골목을 걸어 나왔다. 대로변으로 이어진 골목의 끝에 강현이 그를 기다리고 서 있었다.

평소라면 제게 다가올 법한데도 왜인지 강현은 그러지 않았다. 그저 그 골목 끝에 무표정한 얼굴로 서서, 이번에는 해완이 제 품으로 걸어 들어오기를 기다리고 있는 것처럼 보였다.

해완이 마침내 강현의 앞에 서자 강현은 그제야 웃었다.

“……가자.”

그는 따뜻한 목소리로 말하며 해완의 어깨를 감싸고 걸음을 옮겼다.

이상하게도, 언제 돌아올지 모르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안녕하세요, 보리 데리러 왔는데요.”

“아, 오셨네요. 금방 데리고 올 테니까 이쪽에 앉아 계세요.”

며칠 동안 계속해서 강현과 함께 온 덕에 낯이 익은 강아지 유치원의 직원은 밝게 웃으며 보리를 데리러 자리를 비웠다.

최근 강현은 일이 많이 바빠서, 편의점까지 해완을 데리러 왔다가도 그를 제집에 두고 다시 작업실로 가기 일쑤였다.

오늘도 그랬다. 끝내야 할 작업이 있으니 저 대신 해완이 보리를 챙겨 작업실로 와 줬으면 한다는 부탁을 받은 참이었다.

그럼에도 혼자 온 것이 괜히 머쓱해 해완은 뒷머리를 어루만지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처음에는 강아지 유치원이라기에 귀엽고 아기자기한 곳이리라 상상했는데, 이곳은 호텔, 애견용품 샵으로 모자라 애견 동반이 가능한 레스토랑까지 겸한 곳이라 해완의 생각보다 규모도 훨씬 크고 인테리어도 고급스러워 보였다.

발랄한 발소리와 짖는 소리가 들리는가 싶더니 보리가 곧 모습을 드러냈다. 해완을 보자마자 꼬리를 치며 달려드는 보리의 얼굴을 어루만지며 해완은 활짝 웃었다.

“보리야. 공부 잘 하고 재밌게 놀았어? 선생님들 말씀도 잘 들었어?”

흥분한 보리를 곰살궂게 받아 주는 해완을 본 직원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어머, 보리 성격 좋은 게 보호자님이랑 참 닮은 것 같아요.”

직원의 칭찬에 괜히 쑥스러워진 해완은 얼굴을 살짝 붉히고 대답했다.

“아녜요. 전 보리 만난 지 오래 되지도 않아서……. 닮았으면 강현이를 더 닮았겠죠.”

“에이, 전 처음에 여강현 보호자님 봤을 때 보리 보호자님인지 상상도 못 했는데요. 뭐라 그래야 되나, 여강현 보호자님은 좀 카리스마……? 같은 게 있으시잖아요.”

무뚝뚝하다는 말을 애써 돌려 말하는 직원의 수다에 동의가 아예 안 되는 것도 아니라서, 해완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이가 좀 그런 면이 있긴 하죠. 표정 굳히고 있을 땐 말 걸기 무서워 보이기도 하고.”

“그러니까요. 오히려 너무 잘생기셔서 더 그렇다니까요.”

해완의 맞장구에 신이 난 듯 박수까지 치며 웃은 직원은, 갑자기 해완의 눈치를 봤다.

“근데, 저……. 뭐 하나만 여쭤봐도 돼요?”

“뭔데요?”

“혹시, 아이들 이름을 매번 보리라고 지으시는 이유가 있나요?”

무슨 말인지 곧바로 알아들을 수 없었던 해완이 되물었다.

“강현이가 예전에 키우던 보더콜리 말씀하시는 거예요?”

“네. 그 친구도 이름이 보리였잖아요. 근데 그 아이가 죽고 나서 바로 지금 아이 데려오시고 이름이 또 보리길래…….”

할 말을 찾지 못한 해완이 눈만 껌뻑이며 직원을 바라보자, 직원은 제가 실수했음을 알았는지 입을 가리며 호들갑을 떨었다.

“어머, 모르셨나 보다. 제가 괜한 소리 한 거 아니죠? 저는 그냥, 전에 있던 보리를 너무 사랑하셔서 같은 이름을 붙이셨나 해서 물어본 거예요.”

“……그런가 봐요. 저희 이만 가 볼게요.”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직원을 뒤로하고 애써 웃어 보인 해완은 보리를 데리고 건물 밖으로 나왔다.

‘강현이한테 지금 키우는 보리가 몇 번째 보리냐고 물어본 적 없어요?’

강우의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와 동시에 언젠가 서연이 했던 말까지 불쑥 튀어 올랐다.

‘난 또 개로 모자라 사람까지 수집하나 했네.’

이해할 수 없었지만 마음에 남아 있던 말들의 정체가, 겨우 윤곽이 잡히는 것 같았다.

싸늘한 겨울바람을 맞으며 혼란스러워지는 마음을 어떻게든 가다듬으려 했지만, 그럴수록 당장 해결할 수 없는 의문들만 자꾸 솟아올랐다.

“멍!”

보리가 짖는 소리에 해완은 번뜩 정신을 차렸다. 헥헥거리는 보리의 입에서 하얀 입김이 나오는 것을 본 해완이 급하게 말했다.

“미안, 보리야. 춥지? 얼른 가자.”

해완은 미리 예약해 놓은 펫 택시에 전화를 걸었다. 근처에 있었는지 이내 도착한 택시를 타고 익숙하게 강현의 집 주소를 불렀다.

따뜻한 온풍이 나오는 택시 안에서 무릎에 고개를 올리고 엎드려 있는 보리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해완은 자연스럽게 강현의 집으로 향하는 자신이 문득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원래 살던 집은 편의점과 도보 10분 거리이기 때문에 해완은 여전히 매일 꼭 집에 가서 유준이 다녀갔는지를 확인하곤 했지만, 유준은 며칠째 아무런 소식이 없었고 그 빈집에서는 자꾸만 강현의 곁으로 가고 싶은 충동을 이기기가 어려웠다.

검은 밤을 자동차 헤드라이트에서 뿜어 나오는 빛들이 빠르게 긁어내리는 광경을 멍하니 바라보는 사이, 택시는 어느새 강현의 빌라 건물 앞에 도착했다.

해완이 집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타이밍 좋게 강현에게서 전화가 왔다. 그는 추운데 보리는 무사히 잘 데리고 왔냐며, 오늘도 늦을 것 같으니 먼저 자고 있으라고 미안한 목소리로 말했다.

어제도 강현은 해완이 자고 있는 사이 들어왔기 때문에, 같이 잠들 수 없는 것에 저도 모르게 서운한 마음이 들었다. 그러나 어린애도 아니고 그런 데 서운함을 품는 스스로가 당황스러워, 면역 억제제를 먹어야 하는 시간에 강현이 없는 것이 다행이지 않느냐 애꿎은 마음을 달래며 내색 없이 전화를 끊었다.

간단한 저녁과 함께 면역 억제제를 먹고 울렁거림이 가라앉을 때까지 조금 쉰 해완은 보리와 바로 집 앞에 있는 공원으로 가벼운 산책을 다녀온 후, 보리의 목욕을 시키기 위해 욕실 안으로 데리고 들어왔다.

서툰 해완의 손길에도 보리는 제대로 한번 짖지도 않고 얌전히 목욕을 했다. 몸을 채 말리기도 전에 털을 마구 털어 내는 바람에 사방으로 물기를 날리는 버릇은 영 고쳐지지 않았지만, 그래도 해완이 보기에는 세상에 이런 천사 같은 강아지는 다시없을 것 같았다.

해완은 물기까지 깨끗이 말린 후 반지르르해진 보리의 털을 쓰다듬으며 다정히 속삭였다.

“우리 보리, 진짜 왜 이렇게 착해? 세상에 보리보다 착한 강아지는 없을 거야. 그치?”

그러자 보리가 맞는다는 듯, 멍! 하고 짖으며 꼬리를 마구 흔들었다.

하지만, 불쑥 머릿속을 파고드는 생각에 보리의 반짝이는 눈동자 안에 담겨 있던 해완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그 전에 강아지를 몇 마리나 키웠던 걸까? 그 아이들의 이름을 매번 다 보리라고 지었던 걸까?

저에게도 보리라고 부른 전적이 있으니 그냥 그 이름을 좋아하나 보다 하고 넘길 수 있는 일 같다가도, 세 사람이나 강현이 키우던 개에 대한 묘한 뉘앙스의 말을 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지기는 했다.

게다가 그렇게 개를 계속 키웠다는 걸 보면 우연찮게라도 말이 나올 법한데 강현은 보리 이전에 강아지를 키웠다는 사실을 한 번도 언급한 적이 없었다.

해완은 넓은 거실 안을 고개를 크게 돌려 둘러보았다. 애견인들이 흔히 그렇듯이, 혹시 강아지와 관련된 사진 한 장이라도 어디서 찾을 수 있지 않을까 싶어서였다.

그러나 해완이 앉아 있는 곳에서 시야에 들어오는 것이라곤 분명 고가일 게 분명한 모던한 그림 몇 점뿐이었다.

‘집 구경은 마음대로 하라고 했으니까…….’

언젠가의 강현의 말을 떠올린 그는 몸을 일으켜 먼저 강현의 침실로 향했다. 해완의 뒤를 졸졸 따라오는 보리의 발이 바닥과 맞닿을 때마다 찹찹 소리가 났다.

아마 이 집 안에서 해완이 가장 잘 알고 있는 곳이겠지만, 이렇게 새삼스레 둘러보고 있자니 지나치게 잘 정돈된 침실은 사람이 사는 집이라기보다는 모델 하우스라고 하는 편이 더 어울릴 것 같았다.

역시 아무런 사진도 찾지 못한 해완은 강현의 작은 작업실과 드레스 룸까지 가볍게 살피곤 거실과 복도를 지나 예전에 한 번 묵은 적이 있는 게스트 룸과 서재가 있는 방향으로 향했다.

지나가다 문밖에서 본 적은 있어도 한 번도 혼자 들어가 본 적은 없는 탓에 해완은 서재 앞에서 잠시 망설였으나, 결국 조심스레 문을 밀어 열었다.

그렇게 들어선 서재에서 제일 먼저 눈에 띈 것은 한쪽 벽면을 장식한 책장과 창문 앞에 놓인 거대하고 고급스러운 원목 데스크였다.

책장에는 다양한 장르의 책이 꽂혀 있었지만 역시 가장 많은 비중을 차지한 건 조향에 대한 책들이었다. 그 외에 화학과 관련되어 보이는 책들도 많았는데, 강현이 화학을 전공했다는 사실이 떠올라 괜히 펴 보았다가 외계어 같은 수식들의 향연에 머쓱해진 해완은 다시 제자리에 잘 꽂아 두었다.

다음으로 다가간 넓은 데스크 위는 강현이 쓰는 노트북과 그에 연결된 모니터 외에는 무엇도 없이 심플했다.

손가락으로 매끈한 표면을 쓸며 조심스레 의자에 앉은 해완은 잠깐 주위를 둘러보다가 호기심에 서랍을 밑에서부터 조금씩 열어 보았다. 가장 아래쪽 서랍 안에는 각종 사무용품들이 정갈하게 잘 정리되어 있었고, 그 바로 위 서랍에는 이런저런 서류가, 그리고 위에서 두 번째 서랍은 별것 없이 비어 있었다.

아무 생각 없이 첫 번째 서랍을 열려던 손이 덜컥 멈췄다. 굳게 잠겨 있던 탓이었다. 가볍게 두어 번 흔들어 보았지만 역시 열릴 리가 없었다.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소리에 해완은 흠칫 놀랐다.

옆에서 맴돌던 보리도 해완과 같이 놀라 바깥을 바라보았다. 해완은 몸을 일으켜 거실로 걸어 나가 소파 위에서 울리고 있던 전화를 받았다.

“응, 강현아.”

―오늘 생각보다 일이 좀 빨리 끝나서 지금 들어가려고. 20분 뒤면 도착할 거야.

“알겠어. 조심해서 와.”

생각보다 일찍 들어온다는 강현의 말에 마음이 들뜬 해완은 기분 좋게 전화를 끊었다. 그는 괜히 살풍경해 보이는 집 안을 한 번 더 둘러본 뒤, 저를 쪼르르 따라온 보리와 눈을 맞춰 쪼그려 앉아 머리를 쓰다듬으며 작게 중얼거렸다.

“……사진이 없으면 같이 찍으면 되지. 그치……?”

해완의 말을 알아듣기라도 하는 것처럼 보리가 작게 낑낑거렸다.

해완이 보리와 함께 터그 놀이를 하는 사이 강현이 도착했다. 달려드는 보리를 대강 만져 주고 해완에게 키스를 한 강현은 옷 끄트머리가 온통 젖은 그를 보고 의아하게 물었다.

“지금 막 샤워한 거야?”

“어, 아니. 방금 보리 씻겨서 그래.”

그러자 강현은 해완의 귓가로 고개를 숙여 작게 속삭였다.

“그럼 너는 내가 씻겨 주면 되겠다.”

그 나른한 목소리에 이제는 익숙해질 법도 한데 해완은 어김없이 얼굴을 붉혔다. 물론, 그렇게 들어간 욕실에서 한 일은 씻는 것만으론 끝나지 않았다.

온몸이 따뜻하고 나른해진 채로 해완은 강현과 나란히 침대에 누운 채 입을 열었다.

“바쁜 일은 좀 끝났어?”

해완의 손가락을 만지작거리며 장난을 치던 강현이 무심하게 대답했다.

“일단 급한 불은 껐지 싶어.”

“왜 그렇게 바빴어?”

“꼭 좀 알아봐야 할 일이 있어서.”

“그게 뭔데?”

그 말에 강현은 눈꺼풀을 들어 올려 해완을 응시했다. 그는 잡고 있던 해완의 손가락에 입을 맞추며, 작게 ‘업무상 비밀’이라고 중얼거렸다.

그리고 강현은 잠시 말이 없어서, 해완은 잠이 솔솔 몰려오는 것을 느꼈다. 전신을 덮쳐 오는 수마로 인해 느슨해진 의식 사이로, 저녁 내내 마음에 걸리던 질문 하나가 불쑥 떠오른 해완은 무거운 눈꺼풀에도 불구하고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강현아.”

“응?”

“보리 전에도, 강아지 키웠었어?”

“응.”

“혹시, 그 친구는 이름이 뭐였어……?”

강현은 잠시 말이 없었다. 졸린 눈을 들어 올려 그를 보았더니, 그제야 대답을 했다.

“글쎄, 기억 안 나는데.”

이상하게 서늘한 어조에 해완은 갑자기 잠이 달아났다. 그러자 그런 해완과 시선을 맞춘 강현이 천천히 말했다.

“이름은 별로 중요한 게 아니잖아. 안 그래?”

순간, 말문이 턱 막힌 해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하고 눈만 깜빡였다.

의식하지 못한 새 천천히 쌓여 온 얇은 의문들이, 그 형태는 정확하지 않을지라도 뚜렷하게 마음을 조여 오기 시작한 지금, 강현의 대답은 어쩔 수 없이 어딘가 싸늘하게 느껴졌다.

하지만 갑작스레 말문이 막힌 해완에는 아랑곳없이 천진하게 미소 지어 보인 강현은 눈 한번 깜빡하지 않은 채로 해완의 손가락에 입을 맞췄다.

“이제 잘까?”

여전히 마음 한구석이 답답한 기분에서 벗어날 수 없었던 해완은 그냥 고개를 끄덕였다. 강현은 팔을 뻗어 불을 끄더니 해완을 품 안으로 깊이 끌어들였다.

해완의 향을 들이마시는 듯 맞닿은 가슴이 크게 부풀었다가 꺼지는 감촉이 느껴졌다. 해완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왜인지, 좀처럼 잠이 오지 않는 밤이 될 것만 같았다.

* * *

미묘하게 다른 다섯 개의 향료 혼합물을, 강현은 앞에 놓인 병에 섬세한 손길로 담았다.

오후에 있을 시향을 위한 작업이었다. 고객과의 소통에 있어 핵심적인 것이었기에 어찌 보면 조향 과정 중 제일 까다롭고 골치 아픈 부분이기도 했다.

페로몬 카피 향수를 조향하는 과정은 보통 다음과 같은 순서를 거쳤다.

제일 먼저 인터뷰로 사전 조사를 거치고, 그다음에는 고객의 향을 직접 관능한다. 인터뷰와 관능 기록을 통해 기본적인 조제 포뮬러를 만든 뒤 그 포뮬러를 응용한 네댓 개의 향료 혼합물 예시를 고객에게 직접 시향하게 함으로써 향의 뉘앙스나 비율을 조정한 최종 완성본을 만드는 식이었다.

시향에 쓰이는 향료 혼합물을 만들 때 강현은 고객의 페로몬 향과 가장 비슷한 것을 첫 번째로 만들곤 했다. 그다음에는 보통 고객이 좋아하는 향이나 혹은 고객과 밀접한 관련이 있는 사람들이 선호하는 노트들을 살짝 첨가한 버전을 만들었고, 때로는 페로몬 향에 포함된 노트 중 제일 특징적인 것을 강조하거나 그 뉘앙스를 죽이는 조합물을 조향할 때도 있었다.

지금 강현의 앞에 놓인 향료 혼합물의 경우에는, 그것이 타바코 향이 될 터였다.

강현은 다섯 개의 병을 자그마한 이동형 랙에 차곡차곡 넣어 두고 그 앞에 ‘서인하 님’이라고 써진 라벨을 붙인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났다.

원래 의뢰받은 순서대로라면 인하의 카피 향수의 본격적인 제조는 조금 뒤였어야 했지만, 최근 강현은 조금 무리하면서까지 시간을 쪼개 그 일정을 앞당긴 터였다.

무언가 조급해서 그런 건 아니었다. 서인하가 알고 있는 ‘윤해언’이 해완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이후로, 해완이 대부분의 나날을 그의 시야 안에서 머물게 된 이후로, 강현의 머릿속에서 내내 악을 쓰던 불안감은 어느 정도 사그라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다만 그가 서두르고 있는 이유는 최근에 강현이 알게 된 어떤 사실에 대한 의문점을 확인해 줄 수 있는 유일한 사람이 인하라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약속 시간 10분 전에 작업실 벨이 울렸다. 인터폰을 향해 그 앞에 서 있는 서인하의 모습을 확인한 강현은 지체 없이 문을 열었다.

“안녕하세요. 눈이 많이 오는데, 오시는 데 어려움은 없으셨나요?”

“네, 괜찮았어요. 걱정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늘 그렇듯 그 예민한 얼굴에 상냥한 미소를 띠고 있는 인하를 향해 강현도 희미하게 웃어 보였다.

복도를 지나 응접실로 가던 중 중정 안의 나무를 바라본 인하가 느닷없이 물었다.

“중정 안에 심겨 있는 나무가 뭔지 여쭤봐도 될까요?”

강현은 나무를 한 번 바라보았다가 인하를 보고 천천히 말했다.

“은목서예요. 주로 따뜻한 곳에서 자라서, 서울에서는 좀 보기 힘들지만요.”

“아, 한 번 본 적이 있는 것 같아요. 꽃의 향이 정말 좋았던 기억이 나는데, 혹시 작은 주황색 꽃이 피는 나무인가요?”

“아뇨. 그건 금목서예요. 같은 목서류긴 하지만 은목서에서는 깨끗한 흰색의 꽃이 핍니다.”

“향도 다른가요?”

“언뜻 맡아 보면 느낌은 비슷해요. 하지만 은목서의 꽃 향은 금목서의 향보다 훨씬…… 연약한 느낌이 들죠.”

“아…….”

인하는 흥미는 거기까지라는 표정으로 고개를 끄덕이고는, 강현을 향해 씩 웃어 보이며 말했다.

“향 이야기를 하니 오늘 시향할 것도 정말 기대되네요.”

그런 인하의 얼굴을 주의 깊게 바라보던 강현은 고개를 끄덕였다.

“준비는 다 됐으니 이쪽으로 오시죠.”

인하와 응접실로 들어간 강현은 준비해 둔 향료 혼합물 다섯 병을 그의 앞에 두고 설명을 시작했다.

“지금부터 올팩션이라는 과정을 거칠 겁니다. 조향사들이 하는 후각 트레이닝을 말하는데, 쉽게 말해 향을 분석하고 분류해서 내가 이해할 수 있는 언어로 머릿속의 데이터베이스에 저장하는 것을 의미한다고 생각하시면 됩니다. 물론 향을 분석하고 분류하는 일은 전문 조향사의 영역이니, 고객들께서는 본인이 이해한 언어로 향을 표현만 해 주시면 됩니다.”

“아, 네.”

“앞에 놓인 다섯 개의 시료의 향을 맡으시고, 각각의 시료에서 받은 주관적인 느낌을 앞에 놓인 종이에 서술해 주세요. 그 안에 어떤 노트가 들어가 있는지와 같은 부분은 신경 쓰실 필요 없습니다. 향을 맡고 떠오른 이미지들을 그게 어떤 것이든, 단어 하나라도 좋으니 솔직하게 부담 갖지 말고 적어 주세요.”

그 외에도 강현은 후각은 오감 중 가장 빨리 지치는 기관이니 서둘러서 맡으려고 하지 말 것을 당부하고, 후각이 둔해졌을 때 맡고 리프레시할 수 있는 커피 원두의 용도까지 설명한 뒤 인하가 천천히 향을 느낄 수 있도록 자리를 피했다.

약 30분 뒤 강현이 다시 응접실로 돌아오자 인하는 마침 종이에 마지막 부분의 작성을 끝마치고 있는 중이었다.

“작성은 끝나셨나요?”

“네. 제가 옳게 한 건지 모르겠네요.”

인하는 짐짓 앓는 소리를 하며 종이를 건넸으나 그가 작성한 올팩션 노트는 군더더기가 없었다. 사전 설문지를 봤을 때도 느낀 점이긴 하지만, 그는 본인의 의견에 확신을 가지고 망설임 없이 문장을 써 내려가는 타입의 사람인 듯했다.

각 향료 혼합물의 선호 순위를 매기는 마지막 질문에 대한 인하의 답변을 본 강현의 시선이 멈췄다.

1차 시향을 할 때 강현은 고객에게 무엇에 주안점을 두고 각 혼합물을 조향했는지 알려 주지 않았다. 그러면 대부분의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혹은 그랬으면 하고 바랐던 향을 1순위로 뽑는 경우가 많았다.

페로몬 향의 개성을 강조한 것은 호불호가 갈렸다. 한 인간에게 있어 가장 도드라지는 부분은 제일 좋아하는 부분이 될 수도 있지만 제일 싫어하는 부분이 될 수도 있는 법이니까.

거울을 볼 때도 무의식중에 가장 외모가 훌륭해 보이는 각도와 표정을 짓는 게 인간이라는 존재였다. 스스로가 바라보는 자신은 절대 객관적일 수 없을뿐더러, 그 본질과 마주쳤을 때 오히려 낯설어하기 일쑤라는 것을 강현은 몇 번의 경험을 통해 배웠다.

하지만, 인하가 작성한 가장 선호하는 향에는 그의 페로몬 향과 가장 흡사한 혼합물이 올라와 있었다.

“3번 혼합물이 왜 가장 마음에 드셨나요?”

강현의 물음에 인하는 멋쩍게 웃었다.

“사실 제가 단순히 제일 좋은 향이라고 느낀 건 1번이었는데요. 뭔가…… 제 향이 그렇다고 하기엔 너무 좋게만 느껴져서요. 그래서 제일 무난한 느낌이 드는 걸로 골랐어요.”

“……뭐든지 상당히 객관적으로 판단하는 편이신 것 같네요.”

“그러려고 노력하는 편이죠.”

이외에도 각 혼합물에 대한 느낌을 소상히 묻고 나서 강현은 종이를 내려 두었다.

“지금 나와 있는 조합물에 대한 부분은 이 정도면 될 것 같습니다.”

“제가 뭐 더 해야 할 일이 있나요?”

“네. 지난번에 말씀하신 좋아하는 향에 대해서 말인데요.”

강현은 몸을 일으켜 응접실 구석에 있는 선반에서 작은 향수 바이알 두 개를 꺼냈다.

“말씀만 들어서는 정확히 확인할 수가 없어서 한번 만들어 봤는데, 시향해 보시겠어요?”

그 말에 인하는 의아한 듯 강현의 얼굴을 보았다.

“해언이 향을 향수로 만들었다는 말씀이신가요?”

“네, 그리고…… 타바코 노트가 섞인 것도요.”

인하는 드물게 할 말을 바로 찾지 못했다. 그는 손가락으로 턱 주변을 어루만지더니,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네, 부탁드립니다.”

곧이어 들려온 대답에 강현은 시향지에 첫 번째 바이알에 담긴 향수를 뿌려 인하에게 건넸다.

강현이 건넨 시향지를 받아 든 인하는 그것을 코 밑에 가져다 대고 살짝 냄새를 맡고는, 잠시 굳은 듯 멈춰 있었다.

그러나 곧이어 두 번, 세 번 반복해서 냄새를 맡은 그는 시향지를 탁자 위에 내려 두고 조용히 입을 열었다.

“제가 기억하는…… 그대로네요.”

가슴속에서 기묘한 떨림이 차올랐다. 강현은 마음 안에서 이는 동요를 간신히 억누른 채 두 번째 바이알에 담긴 향수를 시향지에 뿌려 그 역시 내밀었다.

따로 설명은 하지 않았지만, 이번에는 해언의 향에 타바코 노트가 섞인 것임을 두 사람 다 알고 있었다. 인하는 복잡한 표정으로 그것을 받아 들었다. 강현의 손가락에 스친 인하의 손가락 끝이 찼다.

왜인지 조금 망설이던 인하는 이내 조심스러운 태도로 향을 맡더니, 이번에는 재차 맡을 생각을 하지 못하고 그것을 탁자 위에 바로 내려 두었다.

인하는 탁자 위에 팔뚝을 올리고 손가락을 맞댄 두 손으로 자신의 입가를 가린 채 그 시향지를 한참을 노려보았다.

그런 인하를 잠시 보던 강현이 낮게 물었다.

“기억하시는 거랑 많이 다른가요?”

그 말을 듣고서야 정신이 들었는지 인하가 흠칫 고개를 들었다. 그는 몇 번 헛기침을 하며 목을 가다듬고 나서야 겨우 말을 꺼냈다.

“아뇨. 거의 흡사하네요. 제가 생각했던 것보다 훨씬 더요.”

“다행이네요. 제가 해언이 향에 대해서 잘 알긴 하지만, 그게 서인하 씨 향과 섞였을 때 어떤 향을 낼지는 상상의 영역이라, 좀 걱정했었거든요.”

“……그렇군요.”

인하의 시선이 빨려들듯이 강현의 손에 들린 바이알로 향했다. 찰나였으나 그 눈에 어린 갈망을 놓치지 않은 강현이 느긋하게 말했다.

“드릴까요? 원하신다면.”

그 말에 허를 찔렸는지 인하는 눈을 커다랗게 떴다. 평온하려 애쓰고 있었지만 붉은 기까지 감돌기 시작한 그 얼굴은 그가 얼마나 치열하게 고민하고 있는지 뻔히 드러내고 있었다.

잠시 시간이 흐른 뒤, 인하는 어렵게 입을 열었다.

“네. 주신다면…… 감사히 받겠습니다.”

강현은 슬쩍 미소를 짓고 상냥하게 말했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인하를 등 뒤에 두고 복도로 나온 강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작업실을 향해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작업실로 들어와 온전히 혼자가 된 순간, 강현의 잘 다듬어진 얼굴에 짜릿한 흥분이 고스란히 떠올랐다.

드물게 얼굴까지 붉힌 그는 입가를 쓰다듬으며 끓어오르는 감정을 주체하지 못하고 작업실 안을 이리저리 맴돌았다.

그동안 강현을 내내 괴롭혀 온 문제 하나가 완전히 풀렸으므로, 아무리 그라고 할지라도 기쁜 내색을 하지 않을 수가 없었다.

페로몬샘을 이식했을 때 아주 드물게 기증자와 수여자의 향기가 섞여 발향되는 케이스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된 건 얼마 전의 일이었다.

당연하게도 그 즉시 강현의 마음을 사로잡은 건 은목서 향이었다. 윤해언의 아로마틱하고 그리너리한 페로몬 향조에서 유일하게 이질적인 플로럴 향조이자, 발원지를 알 수 없어 돌아보지 않을 수 없게 만들던 바로 그 향.

어쩌면 윤해완의 것일지 모른다는 바람을 놓을 수 없었던 바로 그 향 말이다.

어떻게든 확인해 봐야겠다는 강한 충동에 휩싸인 그때, 그를 확인해 줄 수 있는 서인하가 바로 곁에 있음을 자각한 것 또한 운이 좋은 일이었다.

인하에게 준 해언의 향은 얼마 전 새롭게 조향한 향수로, 강현이 알고 있던 목서 향의 노트를 완전히 제거한 버전이었다.

그리고 인하는 그 향 자체가 제가 알고 있는 해언의 향과 똑같다고 말했다. 확인을 위해 한 번 더 줬던 타바코 노트가 섞인 향도 마찬가지였다.

윤해언이 해완과 떨어져 있던 미국에서 만난 서인하가, 그것도 윤해언과 함께 살고 관계를 가지며 누구보다 밀접하게 지냈을 그가 은목서 노트에 대해서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는 사실은, 은목서 향이 원래 윤해언의 페로몬 향에 존재하는 노트가 아니며 외부의 영향을 받은 결과라는 강현이 세운 가설의 확증이나 다름없었다.

그리고 그 외부의 영향은, 원래 은목서 향의 주인은, 윤해완인 것임에 분명했다.

아마 해완이 가졌던 장애는 페로몬 향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 게 아니라 일반인은 인지하기 어려울 정도로 희미한 향을 가진 수준이었던 듯했다. 그렇다면 8년 전 시각 상실을 보충하기 위해 지금보다도 훨씬 예민해져 있던 강현의 후각이 그 옅은 향을 어떻게든 인식했을 가능성이 얼마든지 있었다.

터져 버릴 것처럼 빠르게 뛰는 심장을 주체하기가 어려워 강현은 마른세수를 하며 깊게 심호흡을 했다.

잠시 마음을 가라앉힌 뒤, 그는 작업실 한구석에 위치한 보관함에서 미리 포장까지 해 두었던 10밀리리터짜리 향수를 들고 다시 응접실로 되돌아갔다.

“여기, 이걸로 가져가시면 될 것 같습니다.”

강현이 내민 향수병을 인하는 복잡미묘한 얼굴로 받았다.

“감사합니다.”

그러면서도 감사 인사는 빼놓지 않기에, 강현은 웃으며 나직하게 말을 건넸다.

“별말씀을요. 다시는 맡아 볼 수 없는 향을 간직하고 싶어 하시는 분들의 마음, 충분히 이해합니다.”

정말 윤해언을 좋아하기라도 했던 걸까?

그 말을 듣는 인하의 눈동자가 감추지도 못하고 크게 동요하는 모습을 보며 강현은 무심하게 생각했다.

잠시 후, 입술 끝을 살짝 깨물며 고개를 숙인 인하가 피식 옅은 웃음을 흘렸다. 그는 피곤한 듯 목덜미를 쓰다듬더니 건조한 어투로 말했다.

“지난번에는 제가 해언이 이야기를 꺼내는 것만으로도 불쾌해 보이시더니, 왜 이런 향수를 직접 조향해서 저한테 주시기까지 하는 건지 그 이유를 여쭤봐도 될까요?”

솔직한 질문에 허를 찔린 강현은 잠시 멈칫했지만, 곧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글쎄요. 사람은 누구나 변하는 법이니, 서인하 씨가 알고 있는 해언이가 내가 알고 있는 해언이와 같지 않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더군요.”

“…….”

“그런 생각을 하고 나니 이미 지나간 시절을 질투할 필요가 없어지더라구요.”

그 말에, 강현을 바라보던 인하의 표정이 미묘하게 변했다.

“어쨌든, 뒤에 일정이 있어 가 봐야 할 것 같은데, 제가 더 해야 할 일이 있나요?”

“아뇨. 추후 최종 완성본이 제작됐을 때 다시 연락드리겠습니다.”

“알겠습니다. 그럼 그때 다시 뵙죠.”

인하는 망설이지 않고 몸을 일으키더니, 강현에게 한 번 고개를 숙여 보이고는 곁을 비껴 작업실을 빠져나갔다.

등 뒤로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가 신호라도 된 것처럼, 간신히 억누르고 있던 흥분이 갑작스럽게 폭발하듯 솟아오른 강현은 제자리에 앉아 있지 못하고 손톱을 물어뜯으며 응접실 안을 반복해서 맴돌았다.

만약 저에게도 향이 있다는 걸 알게 되면 해완은 무슨 반응을 보일까.

그리고 그 향이 은목서꽃과 같다는 것을, 그리고 그걸 느낄 수 있는 사람은 오로지 강현뿐만이라는 것까지 알게 된다면, 기뻐해 줄까?

그런 어설픈 가정만으로도 강현의 심장이 우스꽝스럽게 쿵쿵 뛰었다.

당장이라도 해완에게 알리고 싶은 강렬한 충동이 끓어올랐다. 그러나 조급해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그는 부글거리는 욕구를 겨우 참아 넘겼다.

마음을 가라앉히기 위해 다시 자리에 앉은 강현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눈을 감고 그의 머릿속에 있는 그 희고 여린 꽃의 흔적을 조심스럽게 한 번 더 더듬어 보았다.

타고난 데다 오랜 훈련을 거친 강현의 후각으로도 바싹 붙어 있지 않은 이상 해완의 몸에서 은목서 향을 맡기는 쉽지 않았다. 강렬한 해언의 향 아래 숨 쉬고 있는 아주 작은 자취와 흔적을 따라가 보는 것이 고작이었다.

만약, 윤해언의 향이 덮지 않은 해완의 온전한 은목서 향을 맡을 수 있다면 어떤 느낌이 들지 맡아 보고 싶은 열망이 불쑥 가슴을 뒤덮었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해완이 해언의 페로몬샘을 이식받은 이상 해완의 살과 그가 가진 온기의 냄새가 담긴 그 은목서 향이 어떻게 느껴질지는 이제 영영 알 수 없게 되어 버린 일인 듯했다.

마치 윤해언의 향기에 해완의 존재가 잠식되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말이다.

그런 생각을 하자마자 방금 전까지 대중없이 들떠 있던 마음이 거짓말처럼 가라앉음과 동시에 사지의 말단에서부터 괴상한 불쾌감이 번져 갔다.

유준을 성공적으로 떨어뜨려 놓은 것으로 모자라 해완 그 스스로도 모르는 비밀을 알게 됐지 않냐는 생각을 하며 애써 불안감을 진정시킨 강현은 피부 밑으로 스멀스멀 스며드는 가려움을 잊기 위해 복도로 걸어 나갔다.

눈이 많이 내리는 날이었지만 중정 안의 세계는 고요했다. 매서운 겨울바람에 맞설 필요 없이 유리창을 통해 비춰지는 햇볕 안에만 안겨 있을 수 있는 은목서 또한 지극히 평안해 보였다.

그렇게 중정 안에 심긴 은목서를 바라보는 사이, 문득 그 은목서가 꼭 앞으로 제 곁에 있을 윤해완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강현이 만든 온실 안에만 있으면, 해완은 영원히 평안할 것이다.

그 생각을 하자, 간신히 기분이 나아진 강현은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었다.

* * *

같이 일하는 아르바이트생의 부탁으로 스케줄을 바꾼 덕에 오랜만에 평일에 쉬게 된 날이었다.

요즘 컨디션이 좋지 않아 내내 집에만 있었지만 간만에 쉬는 평일을 그냥 보내기도 아쉬워 근처 카페라도 갈 요량으로 강현과 함께 나선 해완은 비릿한 겨울 공기 사이로 풍기는 달달하고 고소한 향에 스르르 발을 멈췄다.

갑자기 두리번거리는 해완을 향해 강현이 어리둥절하게 물었다.

“뭐 찾아?”

“어디서 붕어빵 냄새 나서.”

해완의 대답에 피식 웃은 강현은 냄새를 찾아 주위를 슥 둘러보더니, 제 코트 주머니 속에 들어 있던 해완과 깍지를 끼고 있던 손을 들어 사람들이 북적이는 버스 정류장 부근을 가리켰다.

“저기 있네.”

사람들과 가로수 사이에 가려 보이지 않았던 주황색 포장 비닐이 덮인 작은 가판대를 그제야 발견한 해완이 활짝 웃으며 말했다.

“잘 찾네. 보리 대신 너 데리고 다녀도 되겠다.”

저를 놀리는 해완의 이마에 아프지 않게 콩 이마를 박은 강현은 손을 꽉 쥐며 물었다.

“먹고 싶어? 사 줄까?”

해완이 먼저 음식에 보인 관심이 꽤나 반가웠는지 강현의 목소리는 약간 들뜨게 들렸다. 그러나 해완은 쉽게 고개를 끄덕이지 못하고 대답을 망설였다.

스트레스 탓일까, 유준이 그렇게 집을 나가 버린 이후 해완은 자주 체했다. 게다가 요 며칠은 뭔가를 입에 넣는 것 자체가 곤혹스럽게 느껴질 정도로 식욕까지 바닥을 친 터라 그렇지 않아도 소화가 잘되지 않는 밀가루 음식을 먹을 수 있을지 자신이 없었다.

“한 입만 먹고 버려도 되니까, 조금이라도 먹고 싶으면 먹자. 응?”

해완의 망설임을 느낀 강현이 조심스럽게 말했다. 감추려고 노력은 했으나 요즘처럼 자주 붙어 있을 때 식욕 부진을 완전히 숨기기는 불가능해서, 강현은 최근 해완이 무언가를 먹는 것에 부쩍 예민하게 굴곤 했다.

그런 강현이 신경 쓰이기도 하고 원장 선생님이 붕어빵을 한 품에 가득 사 들고 올 때면 보육원 식구가 다 같이 모여 먹던 추억 또한 그리워진 해완은 미소를 지으며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먹을래.”

좌판에는 팥이 들어간 붕어빵 말고도 슈크림이 들어간 것들도 있었다. 옹기종기 구워져 있는 붕어빵을 전부 살 기세인 강현을 말려 팥이 들어간 것을 딱 두 개만 샀다.

사람들이 오가는 길에서는 손에 뭘 들고 먹기도 번잡스러운 일이라 근처에 있는 공원 벤치를 찾아 앉자마자 강현이 붕어빵 한 개를 휴지에 싸 내밀었다.

잘 구운 밀가루 반죽 특유의 고소한 냄새가 코끝을 맴돌았다. 그러고 보니 올겨울 들어 처음 먹는 붕어빵이라는 생각이 들자 좀처럼 흔적을 찾을 수 없었던 식욕까지 살짝 고개를 쳐드는 것 같아 해완은 조심스럽게 머리 부근을 베어 물고는 겉이 살짝 탄 바삭하고 쫀득한 반죽과 달콤한 팥을 오물거리며 씹었다.

오랜만에 뭔가가 맛있다는 생각이 들어, 그는 활짝 웃으며 강현을 바라보았다.

“맛있어?”

“응.”

해완은 크게 고개를 끄덕이다가, 정작 강현은 붕어빵을 꺼내 먹을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을 보고는 황급히 말했다.

“왜 안 먹고 있어, 너도 얼른 먹어.”

“난 괜찮아.”

“왜? 붕어빵 싫어해?”

“아니. 그냥……. 먹어 본 적 없어서.”

국민 간식인 붕어빵을 먹어 본 적이 없다는 대답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입을 반쯤 벌렸다. 그러자 강현이 미간을 살짝 찌푸리며 말했다.

“그게 그렇게 놀랄 일이야?”

“놀랄 일이지. 어떻게 한국에서 태어나서 한국인으로 살면서 붕어빵을 안 먹어 볼 수가 있어? 겨울에 걷다가 냄새나고 그러면 막 먹고 싶어지지 않아?”

그 말에 강현은 이해할 수 없다는 듯 어깨를 살짝 으쓱했다.

“첫째, 난 길거리를 잘 안 걸어 다니고, 둘째, 길거리에서 냄새나는 건 다 싫어.”

그럴 만하다는 생각에 해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길거리에서 나는 온갖 냄새를 못 견뎌 해서 해완과 함께 있을 때가 아니면 항상 마스크를 쓰고 다니는 강현이었다. 또 최근 알게 된 사실이지만, 후각뿐만이 아니라 온몸의 감각이 예민한 그는 늘 곁에 두던 것만 두고 먹던 것만 먹고 싶어 하는 경향도 있어 보였다.

“그래도, 한번 안 먹어 볼래?”

하지만 혼자 먹는 것이 영 민망했던 해완은 한 번 더 조심스러운 권유를 했다. 강현은 의문스러운 눈으로 그의 손에 들린 붕어빵을 잠시 응시하더니, 갑자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지 뭐.”

흔쾌한 대답에 해완이 강현이 들고 있던 붕어빵 봉지로 손을 내밀자 그는 고개를 가로저으며 말했다.

“네가 먹던 걸로 줘.”

“뭐? 왜. 새 걸로 먹지.”

“아냐. 일단 한 입만 먹어 보고 싶어.”

그러고서 강현은 아기 새처럼 입을 벌렸다. 덩치에 안 어울리게 귀여운 짓을 한다 싶어 씩 웃은 해완은 제가 먹던 붕어빵의 팥이 가득한 부분을 먼저 강현의 입에 물렸다.

강현은 뜻을 알 수 없는 얼굴로 그것을 열심히 씹었다. 왠지 모르게 긴장하고 있던 해완이 조심스레 물었다.

“왜, 별로야?”

“……나쁘진 않은데, 팥이 들어간 게 좀 별로야.”

원래 붕어빵을 먹는 이들은 두 부류로 갈리기 마련이었다. 해완은 냉큼 붕어빵 꼬리 부분을 강현에게 내밀었다.

“그럼 이쪽으로 먹어 봐.”

강현은 뭐가 다르냐고 묻는 것처럼 한쪽 눈썹을 치켜올리며 해완을 바라봤지만, 이내 바삭한 끄트머리를 베어 물었다.

“이건 괜찮네.”

고개를 끄덕이며 새어 나온 강현의 말에 활짝 웃은 해완이 반갑게 말했다.

“그럼 너 꼬리만 먹어. 팥 들어간 부분은 내가 먹을게. 나는 몸통이 더 좋거든.”

그러자 강현은 또 고개를 저었다.

“아니. 네가 주는 게 좋아.”

굳이 해완의 손에 들린 것을 다시 달라는 듯 입을 벌리는 강현을 보며 해완은 저도 모르게 멈칫해 버리고 말았다.

‘네가 주는 게 좋아.’

어린 시절 해언이 입버릇처럼 하던 말과 같았기 때문이었다.

많은 아이들이 모여 있는 곳에 살다 보면 물건을 가지고 일어나는 다툼은 흔한 일이었지만, 원장 선생님의 지론 덕에 먹는 것만큼은 풍족했던 보육원에서 아무리 똑같이 간식을 줘도 해언은 해완이 손에 쥔 것을 꼭 나눠 주기를 바랐다.

애초와 해완과 해언 사이에는 내 것 네 것에 대한 개념이 거의 없었기 때문에 해언의 그런 행동에 거부감을 가진 적은 없었다. 게다가 해언은 해완에게서 한 입을 얻어먹고 나면 제 몫은 손도 대지 않고 해완에게 대부분 넘겨 버리곤 했기 때문에 오히려 마지막에 손에 쥔 것이 많은 쪽은 늘 해완이었다.

가끔 왜 굳이 내가 먹던 것을 먹고 싶어 하냐고 물어보면, 해언은 그저 웃으며 네가 나에게 무언가를 나눠 주는 게 좋다고 그렇게 말하곤 했다.

“왜 안 줘?”

해완이 잠시 멍하니 있자 강현이 칭얼거리듯 말했다. 번뜩 정신이 든 해완은 반쯤 남아 있던 꼬리 부분을 강현에게 먹여 주었다.

둘이 나눠 먹으니 붕어빵 두 개는 순식간에 사라졌다. 해완이 아쉬운 듯 빈 봉지를 흘끗 쳐다보자, 강현이 잽싸게 말했다.

“좀 더 사 올까?”

해완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현은 여기 잠깐 앉아 있으라고 말하곤 몸을 일으켜 붕어빵 좌판을 향해 빠르게 걸어갔다.

햇살이 따뜻하게 비치는 날이었지만 혼자 남으니 문득 시리게 느껴져, 해완은 몸을 살짝 떨며 주머니 속에 손을 넣었다.

그렇게 넣어 둔 손 안으로 핸드폰 진동이 울리는 게 느껴졌다.

별생각 없이 핸드폰을 꺼내 들어 보니 02로 시작되는 저장되지 않는 번호에서 전화가 오고 있었다. 평소라면 모르는 번호는 잘 받지 않지만, 왠지 모를 이상한 기분에 해완은 수신 버튼을 누르고 핸드폰을 귀에 가져다 댔다.

“여보세요?”

수화기 너머에서는 아무런 말소리도 들리질 않았다. 혹시, 하는 생각에 해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다시 물었다.

“여보세요? 누구세요?”

이번에도 역시 정적이 흘렀다. 하지만 갑작스러운 직감에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유준이야?”

전화를 건 사람은 또다시 대답을 하지 않았지만 아까부터 고개를 들고 있던 예감이 들불처럼 번졌다. 해완은 다급하게 되물었다.

“유준이지? 너 유준이 맞지? 그치?”

―……

“유준아, 왜 전화를 걸어 놓고 아무 말도 안 해. 무슨 일 있어? 응?”

주변에 지나다니는 사람들이 제법 많았지만 해완의 온 신경은 오로지 수화기 너머에만 쏠려 있었다.

잔뜩 귀를 기울이고 있자 수화기 너머에서 들리는 어딘가 불안해 보이는 숨소리가 들렸다. 답답해서 미칠 것 같았던 해완이 안달을 내며 입을 열었다.

“유준아, 말 좀 해 봐. 어?”

수화기 너머의 숨소리가, 무언가 말하려는 듯 숨을 휙 들이켜는 것이 느껴졌다.

그런데 그때, 해완의 앞으로 훅 긴 그림자가 졌다.

“지금 누구랑 통화해?”

어느새 앞에 다가와 서 있는 강현을 해완은 눈을 둥그렇게 뜨고 올려다보았다.

“강현아, 잠깐만. 지금 유준이가…….”

그런데 덜컥 하고 전화가 끊어지는 소리가 났다.

“여보세요? 유준아? 유준아!”

전화가 끊긴 것을 뻔히 알면서도 해완은 수화기를 붙들고 유준의 이름을 불렀다. 그런 해완의 손을 어느새 옆에 앉은 강현이 당겨 감싸고는 걱정스러운 얼굴로 물었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어?”

목소리는 조금도 듣지 못했지만 그 불안하게 들리던 숨소리는 분명 유준이 맞는다는 강한 확신이 들었다. 해완은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지금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왔는데, 유준이가 확실해. 근데 아무 말도 안 하고 있다 그냥 전화를 끊어 버리잖아.”

“뭐?”

“아니야, 이러고 있을 때가 아냐. 나 경찰서에 좀 가 봐야겠어.”

“그게 무슨 소리야. 경찰서는 왜 가?”

“느낌이 이상해. 아무래도 유준이한테 무슨 일 생긴 것 같아. 경찰에 가서 실종 신고라도 할래.”

제게 화가 났으면 차라리 막말을 했으면 했지 일언반구 없이 사라져 버린 것이 유준답지 않다는 생각이 해완을 내내 괴롭혀 오던 터였다. 게다가 이유를 알 수 없는 불길한 전화까지 받고 나니 도저히 이대로 가만있을 수는 없다는 생각만 들었다.

해완은 경찰서로 가기 위해 몸을 벌떡 일으키려 했지만, 손을 강하게 쥔 강현 때문에 일어서지 못하고 그대로 주저앉았다.

“일단 흥분 좀 가라앉히고 내 말 좀 들어 봐.”

“나 흥분한 거 아니야. 지금 상황이 너무 이상하잖아. 너는 그렇게 생각 안 해?”

“유준이가 너한테 어린 동생으로만 보이는 건 잘 아는데, 유준이 벌써 스물두 살이야. 자기 앞가림 충분히 할 수 있는 성인 남자고. 게다가 자기 짐 싹 챙겨서 나간 거 뻔히 아는데, 실종 신고 한다고 해도 경찰들이 진지하게 생각 안 할 거야.”

노골적으로 긴 한숨을 내쉬며 말하는 강현의 태도에 해완은 잠시 멈칫했지만 꿋꿋이 입을 열었다.

“그럼 어떡해. 유준이가 돌아올 때까지 그냥 기다리라고? 만약 그동안 무슨 일이라도 생기면?”

“윤해언.”

그때, 강현의 입에서 오랜만에 나온 해언의 이름에 해완은 머리 위부터 찬물을 뒤집어쓴 듯 잠시 굳어 버렸다.

강현은 왜인지 서늘한 얼굴로 해완을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참아 내듯 낮게 물었다.

“대체 유준이를 왜 찾고 싶은 건데?”

“뭐?”

“내가 잘해 주잖아. 매일 네 옆에 있어 주려고 하고, 네가 빈자리 느끼지 않게 노력하고 있는데 내가 옆에 있는 것만으로는 뭐가 부족하기라도 해?”

강현은 해완을 이해할 수 없는 사람처럼 바라보고 있었지만 왜 그런 말을 하는지 이해할 수 없는 것은 해완 또한 마찬가지였다.

결국 해완은 입술만 몇 번 벙긋거리다가 어렵게 대답했다.

“그런…… 그런 차원의 얘기가 아니잖아. 네가 나한테 뭘 부족하게 해 주고 있다는 게 아니라 유준이가 혹시 나쁜 일이라도 당했을까 봐 걱정돼서 그러는 거야.”

그러고도 강현은 잠시 말이 없다가, 불쑥 입을 열었다.

“내가 한번 찾아볼게.”

“어?”

“주변에 사람 찾아 주는 일 하는 곳이랑 연결되어 있는 분들이 많거든. 그분들한테 물어봐서 유준이 행방 찾아보자.”

그런 말을 하는 강현의 얼굴에는 방금 전까지 서려 있던 찬 기색이 어느새 싹 사라져 있었다. 그는 해완과 눈을 맞추며 자상하게 말했다.

“경찰에 실종 신고 하는 것보다 그편이 훨씬 빠르다고 내가 장담할게.”

차분한 설득에도 해완은 바로 대답하지 못하고 입술을 살짝 깨물었다. 그런 해완을 달래듯 팔뚝을 양손으로 비비며 강현이 믿음직한 어투로 속삭였다.

“걱정하지 마. 유준이 아주 잘 지내고 있을 거야.”

결국, 해완은 강현의 눈을 바라보며 고개를 천천히 끄덕였다.

그러자 해완의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춘 강현이 그의 어깨를 감싸 벤치에서 몸을 일으키게 했다.

“날 더 추워지겠다. 우리 집에 가자, 이제.”

강현은 다정한 목소리로 말하며, 해완을 자신의 집으로 이끌었다.

* * *

서재에 앉아 아버지의 부탁으로 받은 업무와 관련한 서류를 검토하고 있던 인하는 피곤한 고개를 들어 이리저리 목 스트레칭을 했다.

벽에 걸린 시계를 보자 어느새 11시가 가까워지고 있었다. 오늘은 이만 업무를 마무리할 요량으로 몸을 일으키려는데, 데스크 위에 올려 둔 핸드폰에서 전화벨 소리가 들렸다.

액정에 뜬 것은 02로 시작하는 모르는 번호였기에 평소 저장되지 않는 번호를 잘 받지 않는 인하는 거절 버튼을 누르고 욕실로 걸음을 옮겼다.

그러나 몇 발자국 걷기 무섭게 같은 번호로 다시 전화가 왔다. 잠시 고민하던 인하는 일단 수신 버튼을 누르고 한강 야경이 비치는 창가로 걸음을 옮겼다.

“여보세요.”

―저기, 혹시 서인하 씨 핸드폰 맞나요?

“……네, 맞습니다만, 누구시죠?”

―아, 안녕하세요. 저 김유준이라고 하는데, 혹시 기억하시나요?

김유준이라.

당연히 기억하고 있는 이름이었으나 인하는 핸드폰을 귀에서 떼 액정을 다시 한번 확인했다. 일전 윤해완과 함께 만났을 때 분명히 번호를 교환했는데, 왜 모르는 번호로 전화를 했나 싶어서였다.

이 늦은 시각에 전화한 목적에 대한 의구심 또한 바로 들었지만, 그는 일단 부러 반가운 기색을 섞어 입을 열었다.

“그럼요, 유준 씨. 당연히 기억하죠. 잘 지냈어요?”

―네, 뭐, 그냥…….

“근데 이 번호는 무슨 번호예요? 우리 그때 번호 교환 했던 거 같은데.”

―어, 원래 핸드폰을 누가 가져가서 어쩔 수가 없었거든요.

묘한 뉘앙스를 가진 말이었다. 인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조심스레 물었다.

“핸드폰을 누가 가져가요? 혹시 강제로 뺏긴 거예요?”

―아뇨, 뺏긴 건 아니고, 제가 준 거긴 한데요. 그게 전부 다 제 의지는 아니고요…….

문맥을 알 수 없이 횡설수설하는 유준의 대답에 짧게 한숨을 내쉰 인하는 단호하게 말을 잘랐다.

“유준 씨. 나한테 왜 전화한 거예요? 혹시 해완 씨한테 무슨 일이라도 있어요?”

―그게, 해완이 형한테 무슨 일이 있는 건 아닌데요. 제가 형한테 전화한 건 해완이 형 때문은 맞아요. 저 대신 말 좀 전해 주셨으면 해서요.

“그게 무슨 소리예요. 유준 씨랑 해완 씨 같이 살잖아요.”

―지금은 같이 안 살아요. 제가 집 나왔어요.

“네? 아무리 그래도 하고 싶은 말이 있으면 직접 전화하는 게 나을 거 같은데.”

―그러려고, 그러려고 했는데…… 여강현이 바로 옆에 있어서 무서워서 도저히…….

여강현.

그 이름을 듣자마자 인하는 말을 뚝 멈췄다.

―원래 오늘 형이 편의점에서 일하는 날이거든요. 그래서 여강현이 옆에 없을 줄 알고 전화 건 건데, 같이 있어서 아무 말도 못 하고 끊어 버렸어요.

“…….”

―그 새끼 완전 사이콘데 해완이 형은 바보 같은 게 아무것도 모르거든요. 나도 그냥 눈감고 모르는 척하려고 했는데, 아무리 생각해도 너무 마음에 걸려서 안 되겠어요. 그러니까 해완이 형한테 여강현 조심하라고 말 좀 전해 주세요. 네?

순간, 해언의 낭랑한 목소리가 인하의 귓가에 생생하게 들려왔다.

‘해완이도 실체를 알아야 돼. 그러면 쓸데없는 미련도 다 버릴 수 있겠지.’

긴 손가락으로 턱을 쓰다듬은 인하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유준 씨. 지금 어디예요? 내가 만나러 갈게요.”

* * *

멍하니 편의점 계산대에 서 있던 해완의 손이 버릇처럼 유니폼 주머니로 향했다. 하지만 그 안에 들어 있는 핸드폰은 아무런 알림 없이 잠잠하기만 했다.

핸드폰을 꺼내 든 해완은 아무런 알림도 뜨지 않는 배경 화면을 잠시 노려보았다. 그러나 기다리는 연락이 올 기색은 없음에 그는 결국 긴 한숨을 흘렸다.

유준이 건 것으로 추정되는 전화가 온 지 벌써 이틀이 지난 터였다. 당장이라도 경찰에 신고하겠다는 해완을 강현은 제가 알아보겠다며 달래 말렸었지만, 아직 들려온 소식은 특별히 없는 듯했다.

강현은 저를 믿고 맡겨 달라고 했지만, 왜 유준을 찾고 싶은 거냐고 묻는 그의 서늘한 얼굴이 떠오를 때마다 묘하게 차오르는 불안감을 버릴 수가 없었다.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생각에 잠겨 있던 해완의 손 옆에서 전화 수신을 알리는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화들짝 놀라 급히 핸드폰을 들여다본 그는 얼굴을 딱딱하게 굳혔다.

발신자를 알리는 핸드폰 화면에는 ‘서인하’라는 이름 세 글자가 떠 있었다.

전화를 건 것이 유준이 아님에 실망을 느끼는 동시에 인하와의 지난번 만남에서 느꼈던 불쾌감이 아직도 선연했던 해완은 망설이지도 않고 수신 거절 버튼을 눌러 버렸다.

거의 곧바로 핸드폰에서 다시 짧은 진동이 울렸다. 설마, 하는 마음으로 피로한 눈을 돌려 그것을 흘끗 쳐다본 그는 허겁지겁 핸드폰을 다시 손에 들었다.

[유준 씨 어디 있는지 알고 싶지 않아요?]

인하가 보낸 문자 내용이 믿기지 않아 몇 번이고 그것을 다시 읽은 해완은 결국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

“지금 나한테 보낸 문자 뭐예요?”

작게 실소를 터트린 인하는 나긋하게 말했다.

―오래간만에 통화하는 건데, 안부 인사 할 시간도 안 주는 거예요?

“당신이 유준이 일 어떻게 알아요? 유준이 갑자기 사라진 거 당신 짓이었어요?”

―이거 참, 내가 해완 씨한테 미운털이 단단히 박힌 모양이네요. 다짜고짜 의심부터 하는 걸 보니.

“말 돌리지 말고 빨리 유준이 어딨는지나 말해요.”

―그렇게 자꾸 다그치는데, 어디 무서워서 무슨 말이나 하겠어요?

능글맞은 대꾸에 말문이 막힌 해완이 입을 다물자, 수화기 너머의 인하는 한 번 더 작게 웃고는 말을 이었다.

―이틀 전 밤에 모르는 번호로 전화가 하나 왔어요. 받아 보니 유준 씨였는데, 나한테 해완 씨와 연락할 수 있게 좀 도와 달라고 하더군요.

“그게, 그게 무슨 소리예요? 유준이가 지금 나한테 연락하지 못할 사정이라도 있다는 거예요?”

―그런 사정이 있긴 한데, 유준 씨 신변에 무슨 일이 생긴 건 아니니까 걱정 말아요. 사실 나한테 무슨 말을 좀 전해 달라고 했는데, 얘기를 들어 보니 내가 전해 주기엔 적절하지 못한 거 같아서 유준 씨한테 해완 씨를 직접 만나라고 설득했어요. 그러니까 오늘 따로 약속을 잡고 그때 유준 씨랑 같이 보는 걸로 해요. 언제 시간 돼요?

준비된 것처럼 쏟아진 인하의 말에 해완은 잠시 말을 골랐다. 당장 묻고 싶은 게 너무나 많았지만 유준과 만날 수만 있다면 그렇게 하는 것이 급선무 같았다.

“어, 저는, 일 끝나고 아무 때나 다 좋아요. 오늘도 좋고요.”

―아, 중요한 얘길 깜빡했네요.

“뭔데요?”

―여강현 씨한테는 유준 씨랑 만난다고 절대 알리면 안 된다는 얘기요. 유준 씨가 당신한테 연락을 못 하게 만든 게 바로 여강현 씨니까.

인하의 말을 바로 이해할 수 없어, 전화기를 귓가에 댄 채로 해완은 잠시 눈만 깜빡였다.

“그게 무슨 소리예요?”

―당신이랑 유준 씨 사이 갈라놓고, 그 집 나가게 한 사람이 바로 여강현 씨라고, 유준 씨가 나한테 그러더군요.

“…….”

―그 집을 나가던 날 밤, 해완 씨한테 말하려고 했는데 자기 말을 믿지 않았다고 했어요.

해완은 말문이 막혔다. 희미한 뇌리 너머로, 유준과 마지막으로 만났던 날 밤 그가 절박하게 이야기하던 것이 불쑥 떠올랐다.

‘여강현 그 인간, 정상이 아니야! 그 새끼 완전 사이코야. 형이 윤해언이라고 속였다고 하지 말고 그냥 잠수 타. 보육원에라도 가서 숨어 있어. 형이 속인 거 알면, 형한테 무, 무슨 짓 할지도 몰라!’

―아무튼, 자세한 이야기는 만나서 해요. 언제 만날까요?

인하의 차분한 목소리가 들려오고서야 정신이 번쩍 든 해완은 머리를 흩트리며 어물어물 입을 열었다.

“어, 그게…….”

해완은 쉽게 대답하지 못했다. 생각지도 못했던 인하의 말로 인해 머릿속이 곤죽이 된 것처럼 느껴진 탓도 있었지만, 아까는 그렇게 쉽던 질문이 강현에게는 알려서는 안 된다는 단서가 붙자마자 갑자기 답을 내기 어려워진 탓이었다.

강현의 집에 자주 묵게 된 이후 그는 해완이 편의점에 출근할 때는 자신이 직접 차로 데려다주었고, 퇴근할 때도 차로 데리러 왔다. 가끔 일이 있어 데리러 오지 못할 때도 항상 해완이 ‘자신의’ 집에 들어갔는지 자연스럽게 확인 전화를 했다. 그 외에 주말에도 붙어 지내는 게 당연했기 때문에 최근 해완은 강현 없이 시간을 보낸 적이 거의 없었다.

언제 이렇게 됐지.

고작 몇 주 만에 자신의 생활 반경이 강현을 중심으로 완전히 바뀌었음을 이제까지 느끼지 못한 것이 이상하게 느껴졌다.

“날짜는…… 조금 이따 다시 연락드릴게요.”

해완이 어렵게 말을 꺼내자 잠시 침묵하던 인하가 나직하게 대답했다.

―그래요, 그럼.

전화가 끊기고 나서도 해완은 한동안 핸드폰을 손에서 내려놓지도 못하고 동상처럼 굳어 서 있었다.

유준과 자신의 사이를 갈라놓고, 유준이 집을 나가게 만든 것이 강현이 한 짓이라는 인하의 말이 마치 메아리처럼 끊임없이 머릿속을 윙윙 맴돌았다.

맨 처음 든 생각은 거짓말일지도 모른다는 거였다. 그것이 인하의 입에서 나온 말이기에 그랬다. 처음에는 잘 몰랐지만, 인하가 하는 말들은 항상 애매하고 모호해서 해완을 혼란스럽거나 불쾌하게 할 뿐 그의 의문에 제대로 된 답을 준 적이 없었으니까.

하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이 거짓일 거라고 단언할 수 없는 부분이 있는 것 또한 부정할 수가 없었다.

강현은 왜 하필 그날 해완의 집에서 저녁을 먹기를 바랐을까.

왜 하필, 다른 날도 아니고 유준과 만나기로 한 날 핸드폰을 깜빡 놓고 갔을까.

한번 물꼬가 트이자 의문이 걷잡을 수 없이 샘솟음과 동시에, 인하의 근거 없는 말만 믿고 강현을 의심하게 되는 스스로가 괴로워졌다.

뇌가 징징 울리는 것만 같아, 해완은 허리를 숙인 채 카운터에 팔뚝을 올리고 머리를 감싸 쥐었다.

“안녕하세요!”

밝은 목소리에 흠칫 놀라 고개를 들자 다음 타임 아르바이트생이 문을 열고 들어오며 해완에게 인사를 건넨 참이었다.

“어, 일찍 오셨네요.”

“아닌데. 지금 6시 5분 전이에요.”

그 말에 벽에 걸린 시계를 보고서야 해완은 자신이 거의 10분을 꼬박 그렇게 멍하니 있었다는 사실을 겨우 깨달았다.

아르바이트생에게 카운터를 맡기고 퇴근할 준비를 하기 위해 일단 창고로 들어왔다. 유니폼을 벗어 잘 걸어 두고 코트를 입는 내내 얼이 빠진 듯 멍하던 해완은 주머니 속에서 울리는 핸드폰 진동을 느끼고 그것을 꺼내 들었다.

[차가 많이 막히네. 10분 정도 늦을 거 같으니까 일단 나오지 말고 안에 있어.]

강현에게서 온 문자였다. 그래, 오늘도 강현이 데리러 오는 거였지. 조금 난감해진 해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마음속에 이상한 의문을 가진 채 그를 어떤 얼굴로 대해야 할지 좀처럼 판단이 서질 않았다.

해완은 길게 한숨을 쉬며 창고 한구석에 쌓인 박스 위에 걸터앉았다. 일단 조금이라도 마음을 정리한 뒤 강현을 봐야 할 것 같아서였다.

“……거 아냐!”

그때, 밖에서 들려오는 남자의 고함 소리에 해완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창고 문을 열고 바깥으로 나온 해완의 눈에 계산대 앞에 삐딱한 자세로 선 남루한 차림의 남자 하나와 그를 마주 보고 선 아르바이트생의 울상이 된 얼굴이 바로 들어왔다.

“야! 니가 잠깐 나가서 가져다주면 되잖아! 그게 어려워?!”

술에 취한 게 틀림없는 불분명한 발음과 익숙한 레퍼토리에 해완은 짧은 한숨을 쉬었다. 낮밤을 가리지 않고 항상 술을 사 가는 단골손님이었는데, 굳이 이 편의점뿐만이 아니라 근처의 편의점들을 순회하며 주사를 부리는 것으로 악명이 높은 중년 남자였다.

저보다 한참 어린 아르바이트생이 쩔쩔매는 모습을 차마 볼 수 없었던 해완은 곧바로 걸음을 옮겨 남자에게 가까이 다가갔다.

“손님, 무슨 일이세요?”

한 손에는 뚜껑이 열린 소주병을 쥐고 술기운으로 얼굴이 벌겋게 달아오른 남자는 해완의 얼굴을 삐딱한 시선으로 보더니 언성을 높였다.

“이 계집애가 내가 물건을 잘못 갖고 왔다는데, 나보고 가서 다시 가져오래잖아!”

해완도 이전에 그가 이런 식으로 부리는 진상에 고생한 적이 있어 어떻게 해야 할지 고민이 됐다. 제가 대신 가져다주고 비위를 맞춰 줄 수도 있겠지만 한번 요구를 들어주기 시작하면 몇 번이고 다시 찾아와 내내 귀찮게 굴 것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게다가 지금 아르바이트생은 일을 시작한 지도 얼마 안 된 스무 살 대학생이었다. 해완이 퇴근하고 나면 지금부터 10시까지는 혼자 일해야 하는데 그를 감당할 수 있을 것 같지 않아, 해완은 그냥 지금 남자를 보내야겠다고 판단하고 강하게 말했다.

“손님. 편의점 직원은 카운터를 비울 수 없으니 물건은 손님이 직접 가져오시는 게 원칙입니다. 그게 싫으시면 술집에 가시는 게…….”

순간, 얼굴로 쏟아지는 차가운 액체에 해완은 눈을 질끈 감으며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아르바이트생의 작은 비명 소리와, 코를 아플 정도로 찌르는 진한 알코올 향이 동시에 느껴졌다.

정확히 해완의 얼굴을 향해 손에 들고 있던 소주를 냅다 뿌린 남자는 삿대질을 하며 고함을 쳤다.

“거지 같은 새끼가 손님이 가져다 달라면 가져다주면 되지, 얻다 대고 술집에 가라 마라야! 어?!”

아무리 해완이라도 이런 상황 앞에서 화가 나지 않을 수는 없었다. 치솟는 분노에 턱에 근육이 설 정도로 이를 악문 해완은 손으로 얼굴에서 줄줄 흘러내리는 소주를 쓸어내리며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해완이 무엇을 하기도 전에, 컥 소리를 낸 남자의 몸이 뒤로 거칠게 젖혀졌다.

깜짝 놀라 숨을 크게 들이쉰 해완은 남자의 뒷덜미를 거세게 움켜쥐고 있는 강현을 휘둥그레진 눈에 담았다.

강현의 얼굴은 무섭도록 차갑게 굳어 있었다. 그의 분노에 찬 새카만 눈동자가 남자가 뿌린 술에 젖어 있는 해완의 앞머리와 얼굴, 그리고 목둘레까지 빠르게 훑어 내려갔다.

“가, 강현아…….”

갑작스러운 등장에 어안이 벙벙해진 해완이 겨우 입을 열기 무섭게, 강현은 그대로 남자를 질질 끌고 편의점을 가로질러 가기 시작했다.

“커흑! 너, 뭐야! 컥!”

옷에 목이 졸린 남자는 발버둥을 치며 강현의 손에서 벗어나려 해봤지만 역부족이었다. 강현은 마치 쓰레기 봉지를 끌고 가듯 그를 거침없이 문까지 끌고 갔다.

“강현아!”

그제야 정신을 차린 해완은 급하게 강현의 뒤를 따랐다. 편의점 문에 다다른 강현은 문을 열고 남자를 그대로 바깥을 향해 내동댕이쳐 버렸다.

어제 내린 비로 단단히 얼어 있는 바닥에 퍽 소리와 함께 나뒹군 남자가 요란스럽게 비명을 질렀다. 해완은 바깥으로 나가려는 강현의 가슴팍을 끌어안고 말렸다.

“강현아, 이만하면 됐어. 이제 그만해!”

그 말에 남자에게 못 박혀 있던 시선이 해완에게 휙 향했다. 휘둥그레진 눈으로 저를 보고 있는 해완을 본 찰나, 강현의 무표정한 얼굴에 불현듯 한 조각의 감정이 깃들었다.

강현은 품에서 지갑을 꺼내 그 안에 들어 있던 명함을 허리를 움켜쥐고 악을 써 대고 있는 남자 위에 툭 던지고는, 해완의 손목을 강하게 움켜쥐었다.

“……가자.”

강현은 그대로 해완을 홱 잡아끌며 걸음을 옮겼다. 얼떨결에 따라가던 해완은 아직까지도 바닥에 널브러져 있는 남자와 편의점 문 앞에서 발만 동동 구르는 아르바이트생을 보다가 강현의 팔을 두드리며 입을 열었다.

“강현아, 잠깐만! 잠깐 멈춰 봐!”

하지만 강현은 멈추지 않았다. 기어코 제 차 앞까지 해완을 끌고 간 강현은 조수석 문을 열고 짧게 말했다.

“타.”

명령이라도 내리는 듯한 말투에 울컥한 해완은 강현을 바라봤지만 그는 조금도 물러날 기색이 없어 보였다.

입술을 깨문 해완은 일단 조용히 차에 탔다. 이어서 곧바로 운전석에 탄 강현은 그대로 차를 출발시키려는 듯 시동을 걸다가, 갑자기 해완에게 시선을 돌렸다.

아직까지도 온통 젖어 있는 얼굴과 밀폐된 공간에 진동하는 알코올 냄새를 의식한 해완은 저도 모르게 뺨을 붉히며 몸을 움츠렸다.

해완의 피부에 오른 열에 강현의 턱에는 날 선 근육이 섰다. 말없이 고개를 숙인 그는 콘솔 박스를 열고 티슈를 꺼내 해완의 젖은 얼굴을 닦아 내기 시작했다.

아까까지는 당황스러움이 더 컸던 탓에 의식하지 못했지만, 강현의 앞에서 그런 취급을 당하는 모습을 보였다는 사실에 괜히 눈시울이 뜨거워진 해완은 눈을 내리깔고 묵묵히 강현이 정리해 주는 손길을 받았다.

그때 강현이 음울한 표정으로 말을 내뱉었다.

“내일부터 거기 나가지 마.”

번쩍 고개를 든 해완이 어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강현아…….”

“지금 당장 전화해. 그만둔다고. 네가 안 하면 내가 해.”

강요에 가까운 말에 해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제가 닦아 내고 있는 해완의 목 주변에 고집스럽게 고정되어 있는 눈동자는 언뜻 본 것만으로도 잔뜩 성이 나 있었는데, 제가 강현이었어도 화가 났겠다 싶어 미안해진 해완은 그 손을 잡아 내리고 달래듯이 말을 건넸다.

“강현아. 그런 모습 보게 해서 미안해. 근데, 나 1년 넘게 거기서 일하면서 그런 일 겪은 거 이번이 처음이야.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한번 일어난 일이 다시 일어나지 않으리란 보장은?”

“그건…….”

그제야 해완의 눈을 바라본 강현이 날카롭게 받아쳤다.

“쓰레기 같은 새끼한테 그딴 취급당하는 거 내 앞에서 보이고도 그 일이 하고 싶다는 이유가 뭐야. 난 이해가 안 가니까 납득 가게 설명해 봐.”

방금까지 해완이 느끼고 있던 수치심을 정확히 헤집는 강현의 말에 아랫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해완은 눈을 감았다. 심호흡을 하며 마음을 가라앉힌 그는 가라앉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어차피 거기 그만둬도 사람 대하는 일 하는 이상 그런 진상들 만날 확률은 똑같아. 그냥 그 편의점 그만둔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라고.”

“누가 너한테 일하라고 했어?”

“뭐?”

“내가 먹여 주고 입혀 주고 네가 하고 싶은 것까지 다 하게 해 준다잖아. 그런데 대체 뭐가 부족해서 내 옆에 가만히 못 있고 나가고 싶어 안달인 거야. 어?”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 옆에 있기 싫은 게 아니라 나도 내 일을…….”

“네 일이 왜 필요한데!”

갑작스럽게 높아진 언성에, 해완은 할 말을 잃은 채 강현을 바라보았다. 강현은 손을 뻗어 해완의 얼굴을 움켜쥐고 눈을 똑바로 맞춘 채 낮게 말했다.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내가 다 알아서 해 주겠다잖아.”

“…….”

“그러니까 다른 생각 할 필요 없어.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해.”

“…….”

“전부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니까.”

또다. 또 이 말이다. 해완은 멍하니 생각했다. 크리스마스 때 들었던 말.

그리고 해언이 입버릇처럼 달고 살던 말.

어릴 적 해완의 등 뒤에 늘 따라붙던 ‘윤해언 짝퉁’이라는 아이들의 놀림보다, 해언과 강현의 입에서 나오는 그런 말들이 윤해완이라는 사람의 삶을 더욱 가치 없는 것처럼 만드는 듯했다.

심장을 할퀴는 것 같은 분노와 불쾌감이 급격하게 차올랐다. 해완은 제 얼굴을 감싼 강현의 손을 뿌리쳤다. 너무 화가 치민 나머지 해완은 입술을 부들부들 떨면서 겨우 말을 뱉었다.

“그런 식으로 말하지 마!”

“…….”

“그런 식으로, 네가 아니면 내 인생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누구도 먼저 입을 열지 않는 사이, 고요한 차 안에 두 사람의 씨근대는 숨소리만이 차올랐다.

그 침묵이 공기를 무겁게 내리누르는 것만 같아 숨이 막힌 해완은 몸을 돌려 조수석 문을 열고 내리려 했지만, 강현이 그의 팔뚝을 강하게 붙들었다.

“놔!”

해완은 그 팔을 뿌리치고 다시 조수석 문을 향해 손을 뻗었다.

그때, 강현이 해완의 어깨를 거칠게 돌려 멱살을 움켜쥐고 조수석 창 쪽으로 밀어붙였다. 쿵 소리가 나도록 부딪친 몸에 당황한 해완이 강현의 팔을 붙들었지만 그는 더욱 거칠게 멱살을 틀어쥐었다.

“윽!”

목덜미를 강하게 압박하는 손에 해완의 입에서 반사적인 신음이 흘렀다. 그에 아랑곳없이 얼굴을 바싹 들이민 강현이 으르렁대듯 거칠게 말했다.

“내가 놔주면 어딜 가겠다는 건데. 너 말고 아무도 없는 그 거지 같은 집구석?”

전에 본 적 없이, 강현의 얼굴은 엉망으로 일그러져 있었다. 그 얼굴 위로, 인하의 목소리가 무성한 안개처럼 내려앉았다.

‘당신이랑 유준 씨 사이 갈라놓고, 그 집 나가게 한 사람이 바로 여강현 씨라고, 유준 씨가 나한테 그러더군요.’

해완은 멍하니 강현의 눈을 응시했다. 어둠에 동화되듯 새카만 그의 눈동자는 창밖에서 비치는 헤드라이트들이 붉어질 때만 가끔 빛을 내는 것처럼 보였다.

울지 않기 위해 이를 악물었다. 멱살을 틀어쥔 손은 그의 하얀 목덜미에 붉은 자국을 남기고 있었지만, 해완은 빛이 비치는 찰나를 놓치지 않고 또렷하고 선명하게 입을 열었다.

“놔.”

“…….”

“이거 놓으라고.”

목을 밀어붙이는 강현의 손에 숨을 쉬기 어려울 정도로 바싹 힘이 들어갔다. 해완은 고통스럽게 미간을 찌푸렸다.

그러나 이내,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끼자마자 해완은 그대로 조수석 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거칠게 차 문을 닫은 뒤 돌아섰다.

긴장이 풀리며 머리가 빙빙 돌았다. 자꾸만 숨이 차서, 해완은 구겨져 있는 옷 앞섶을 추스르며 숨을 몰아쉬었다.

꼬박 며칠을 비워 뒀던 집으로 돌아가는 어두운 골목길을 휘청대며 걷는 내내, 강현의 싸늘한 목소리가 머릿속을 맴돌았다.

‘내 옆에 있기만 하면 내가 다 알아서 해 주겠다잖아.’

‘그러니까 다른 생각 할 필요 없어.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 해.’

‘전부 다, 널 위해서 그러는 거니까.’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네가 이렇게 멍청하고 순진하지만 않았어도 내가 이러겠어?’

‘내가 하는 건 전부 다 널 위한 거야.’

‘이해하지? 이해하는 거지, 해완아?’

어느 순간부터인가, 그것은 해언의 목소리로 바뀌어 있었다.

‘그냥 내 옆에 있겠다고 하면 됐잖아.’

‘그럼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러니까 이건 다,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건 나를 거부한 네 잘못이야.’

그러나, 기억에서 쉽게 들춰 볼 수 있던 말에 이어 들은 기억이 없는 말까지 뇌리를 스치자 해완은 그대로 우뚝 멈춰 서 버렸다.

눈꺼풀 뒤를 칼날로 스치는 듯한 날카로운 고통이 갑자기 엄습했다. 반사적으로 머리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허리를 굽히자, 해언의 목소리는 희미한 장막 너머로 금방이라도 사라질 것만 같이 느껴졌다.

가시지 않는 두통에 두 눈을 꾹 감은 채 해완은 주머니를 더듬어 핸드폰을 꺼냈다.

―네, 해완 씨.

통화 버튼을 누르고 귀에 대기 무섭게, 인하의 목소리가 들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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