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1. sur-dosage (3)
새카만 슈트를 단정히 갖춰 입은 강현은 거울을 바라보며 넥타이까지 깔끔히 매고서야 드레스 룸을 나섰다.
바닥 이곳저곳에 쓰러져 있는 물건들을 피해 거실을 지난 그는 부엌에서 물을 한 잔 마시며 시계를 봤다. 곧 있으면 가사 도우미가 도착할 시간이었다. 문을 열어 집 안에 들인 뒤 목적지로 출발하면 늦을 일은 없어 보였다.
잠시 후, 들려오는 현관문 벨소리에 강현은 인터폰 버튼을 눌러 문을 열었다. 이내 중문이 열리며 들어선 도우미 아주머니가 밝은 얼굴로 강현에게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날이 참 춥…….”
이어 거실로 시선을 옮긴 아주머니가 헉 하고 숨을 들이켜며 할 말을 잃었다. 그에는 아랑곳없이 시간을 한 번 더 확인한 강현은 식탁 의자에 걸쳐 두었던 코트를 들고 집을 나서며 아무렇지도 않게 말했다.
“옮기시기에 너무 무거운 건 건들지 말고 그냥 두시구요. 화분 깨진 거랑 유리 조각 같은 것만 조심해서 치워 주세요.”
“네? 아휴, 네, 그래요.”
“전 오늘 늦게 들어오니까 시간 되면 바로 퇴근하시구요.”
“예. 요즘 일이 많이 바쁜가 봐요?”
정말 궁금해서라기보다 입버릇에 불과한 말임을 알았지만, 중문을 나서려던 강현은 태연하게 대답했다.
“아뇨. 어머니 기일 때문에요.”
등 뒤로 아주머니가 무언가 말하려는 것을 흘려들으며 문을 탁 닫았다.
본가까지는 차로 20분가량 걸리는 거리였다. 도착하고 나면 가족들과 저녁을 먹고, 오늘에서 내일로 넘어가는 자정에 기제사를 드리고 나면 새벽 2시쯤 집으로 돌아올 수 있을 것 같았다.
퇴근 시간에 가까운 탓인지 생각보다는 차가 밀렸다. 신호에 걸려 정차해 있는 사이 강현은 엊그제 들었던 윤해완의 말을 의도적으로 떠올렸다.
해석되지 못한 채 마음에 가라앉은 감정들이 쉽게 폭발할 수 있다는 것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다. 신체화 장애로 시력을 상실한 이후 중점적으로 치료를 받았던 것 중에 하나가 그런 식으로 터지는 분노를 제어하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날, 강현은 제법 화가 났었다. 유준이 없는데도 해완이 집으로 돌아가겠다고 말하던 시점부터 쌓여 온 짜증 탓이기도 했다.
필요한 것을 다 주겠다는데도 싫다고 말하는 그 고집에 성이 났다. 고작 몇 푼의 돈을 벌자고 제 눈앞에서 그런 수모를 당하고도 기대지 않겠다고 말하는 윤해완을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 식으로, 네가 아니면 내 인생이 아무 의미도 없는 것처럼 말하지 말라고.’
하지만 그의 내면에 있는 시한폭탄의 버튼을 누른 것은 바로 그 말이었다.
제가 없이 윤해완의 인생이 존재할 수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뜨거운 분노가 차올랐다. 내내 뒤집어쓰고 있던 가면이 한순간에 벗겨짐과 동시에 그의 멱살을 틀어쥐고 문에 몰아붙였을 때, 믿을 수 없다는 듯 커다랗게 열렸던 연갈색 눈동자가 뇌리에 선명했다.
해완을 놓아주고 집에 홀로 돌아오고 난 뒤에도 끓어오르는 감정을 통제하지 못해 집 안의 기물을 깨부순 것도 그래서였다.
하지만 한차례 분노를 쏟아 내고 빈 마음에 차오른 것은 익숙한 허무함이었다.
그것은 오히려 평화로웠다. 제가 엉망으로 만들어 놓은 어두운 집 안에 앉아, 강현은 그런 평화를 오랫동안 잊고 있었다는 생각을 했다.
윤해완을 만나게 된 이후부터 말이다.
그 이후, 어지럽힌 집 안을 일부러 치우지 않았다. 물론 불편하기는 했지만, 피해 가니 적당히 살 만했다.
어지럽혀진 마음도 이렇게 피해 가면서 적당히 살 수 있지 않을까. 그런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윤해완에게 연락을 하지 않았다. 윤해완도 그에게 연락을 하지 않은 채 며칠이 지났다. 공허는 익숙했고, 그것을 밀어 낼 자극이 없으니 여전히 평화로웠다.
그때, 본가로 향해 가는 길의 신호가 푸른 불로 바뀌었다. 그 뒤로 강현은 한 번도 붉은 불에 걸려 멈춰 서지 않고 달렸다. 쓸데없는 생각을 할 여유가 없었으니, 여러모로 잘된 일이었다.
* * *
인하는 유준이 묵고 있는 곳이라며 어느 비즈니스호텔의 주소를 알려 주었다. 편의점에서 지하철로 한 시간 정도 걸리는 거리여서, 약속 시간에 맞추기 위해 해완은 저녁도 제대로 먹지 못하고 바로 목적지로 출발했다.
다시 시작된 구토 증세 때문에 요 며칠 동안 어차피 뭘 제대로 먹지 못하고 있었기에 상관없는 일이기는 했다. 어쨌든 빨리 유준을 봐야겠다는 생각만이 가득했다.
초조한 마음으로 호텔 입구에 선 해완은 방 호수를 한 번 더 확인하고 엘리베이터를 탔다. 줄줄이 늘어선 방들을 지나쳐 제일 안쪽에 위치한 룸의 벨을 누르는 손끝이 찼다.
문은 곧바로 열렸다. 유준이 나올 줄 알았는데 인하가 대신해서 나오자 해완은 흠칫 놀랐다.
“시간 맞춰 왔네요. 들어와요.”
“……유준이는요?”
해완의 미심쩍은 시선에 인하는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몸을 옆으로 비켜서며 방 안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해 주었다. 문가를 보며 엉거주춤 서 있는 유준의 모습이 보였다.
“김유준!”
해완은 곧바로 방 안으로 들어갔다. 유준은 고개를 숙인 채 입술을 질겅질겅 씹으며 삐딱한 자세로 서 있었다.
“너 지금까지 어딨었던 거야, 내가 얼마나……!”
하지만, 해완이 그의 몸을 향해 손을 뻗는 순간 유준은 몸을 살짝 비틀어 손길을 피하더니 퉁명스럽게 중얼거렸다.
“내가 어딨었는지 왜 말해야 되는데? 어차피 형은 윤해언이나 여강현에 대해서는 내가 뭐라고 해도 안 믿을 거잖아.”
유준은 그의 눈조차 바라보지 않고 그렇게 중얼거렸다. 해완은 말문이 막혔다.
“일단 앉아서 이야기할까요?”
묘한 긴장이 차오르는 사이로 인하가 부드럽게 끼어들었다. 그 말을 듣자마자 유준은 창가에 있던 둥근 테이블 한쪽에 털썩 주저앉았다.
“앉아요.”
해완이 움직이지 않고 서 있자 인하가 그의 등을 살며시 밀었다. 해완을 의자에 앉힌 후 저도 옆에 따라 앉은 인하는 분위기를 풀듯이 먼저 입을 열었다.
“어떻게 할까, 유준아. 내가 먼저 좀 얘기해 줄까?”
어느새 말을 튼 것인지 인하는 제법 친근한 말투로 유준에게 말을 걸었고, 유준은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일단 해완 씨가 알아야 될 건 나한테 연락을 한 건 유준이가 먼저라는 거예요. 그리고 유준이한테 들은 얘기에 대해 나는 나름대로 사실 확인을 거쳤구요. 그러니까 유준이나 내가 어떤 나쁜 의도를 가지고 모의해서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의심하지 않아 줬으면 해요.”
고집스레 고개를 숙이고 있는 유준에게 시선을 떼지 못하던 해완이 한숨을 내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인하가 차분한 목소리로 이야기를 시작했다.
“먼저, 유준이가 여강현 씨한테 돈을 빌린 일로 해완 씨가 화를 냈다고 들었어요. 유준이가 돈을 받은 건 맞지만 여기서 중요한 건, 그걸 제안한 사람이 유준이가 아니라 여강현 씨라는 거예요. 당신한테 절대로 알리지 않겠다고 하면서 자기한테 돈을 받아 가는 걸 익숙해지도록 만들었다고 하더군요.”
조금도 생각지 못했던 이야기에 해완의 얼굴에 뚜렷한 동요가 떠올랐다. 그런 해완의 반응을 예민하게 캐치한 인하가 느긋하게 물었다.
“참, 그런데 해완 씨는 유준이가 강현이한테 돈을 빌리고 있다는 걸 어떻게 알게 된 거예요?”
해완은 잠시 머뭇거렸다. 마음 안에 가지고 있던 의심을 입 밖으로 내면 진짜가 되어 버릴 것 같은 기분에서였다.
“……그날 강현이가 핸드폰을 우연히 우리 집에 두고 가서…….”
“기가 막힌 우연이네요. 일어난 결과를 보면 별로 우연 같진 않지만요.”
“네?”
“유준이에게 먼저 원하지도 않은 돈을 받아 가게 하고, 그 사실을 알리지 않겠다고 해 놓고선 우연히 핸드폰을 두고 가서 해완 씨가 알게 됐잖아요. 그래서 두 사람 사이가 벌어졌고, 여강현 씨가 원하던 대로 됐으니 핸드폰을 두고 간 것도 의도가 있어 보이는 게 당연하지 않을까요?”
“유준이와 내가 멀어지는 게 강현이가 바란 거라구요?”
“네. 유준이한테 그렇게 말했다고 하더군요.”
‘만약에 유준이가 독립해서 나가면…… 그럼 그땐 나랑 살 거야?’
해완의 품에 안긴 채, 강현이 작게 중얼거리던 목소리가 싸늘하게 뇌리를 맴돌았다.
눈앞이 지끈거려, 해완은 고개를 숙인 채 두 손으로 머리를 감쌌다. 그러자 인하가 불쑥 입을 열었다.
“벌써 지치면 안 돼요, 해완 씨. 중요한 얘기는 이제부터 시작이니까.”
앞에 있는 탁자에 뭔가가 달칵 놓이는 소리에 고개를 든 해완은 흠칫 놀라 몸을 떨었다.
“이게…… 뭐예요?”
해완의 앞에 놓인 것은 핸드폰이었다. 그 안에는 사진이 한 장 띄워져 있었는데, 그것은 의식 없이 누워 있는 심하게 다친 어느 환자의 모습이었다.
“유준이랑 만났던 그날 밤, 여강현 씨가 사고를 내게 해서 다치게 한 사람들이에요.”
귀로 듣기는 했지만 무슨 말인지 이해할 수가 없어 해완은 인하의 얼굴만 눈을 껌뻑이며 바라보았다. 그 멍한 시선을 집중시키듯 인하가 핸드폰 화면을 손끝으로 톡 건드렸다.
“혹시 이 사람들 기억나요? 전에 해완 씨 집 앞에 한번 찾아와서 깽판을 놓은 적이 있다고 하던데.”
사진 속 얼굴은 멍으로 잔뜩 부어올라 제대로 알아볼 수는 없었지만, 그 일에 대해서 기억은 하고 있었기에 해완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유준이가 이 사람들한테 집 보증금 때문에 돈을 빌렸다가 내내 협박을 받고 있었다고 하더군요. 여강현 씨한테 빌린 돈도 대부분 이들한테 가져다주는 데 썼구요.”
그 말에, 해완은 휙 유준을 쳐다보았다. 유준은 고개를 숙인 채 여전히 해완의 시선을 피하고 있었다. 그는 입술을 바르르 떨며 입을 열었다.
“나는, 난 그게 정착 지원금인 줄로만……. 왜, 대체 왜 나한테 말 안 했어!”
해완이 언성을 높이자, 코끝이 붉어진 유준도 바락 소리를 질렀다.
“돈 한 푼 없이 집에서 쫓겨나게 생겼는데 그럼 어떡해! 내가 이상한 데서 돈 빌려 왔다고 했으면 형 받지도 않았을 거잖아!”
해완은 말문이 꽉 막힌 채 유준을 하염없이 바라보다가, 메어 오는 목에 고개를 숙였다.
보육원 아이들은 성장 환경에서 제대로 된 경제관념을 확립할 기회가 거의 존재하지 않았다. 그래서 해완처럼 미련하고 성실한 성격이 아니면 착실히 자립하기도 전에 그 돈을 유흥이나 쇼핑 같은 데 탕진해 버리고 어려움에 처하는 경우가 허다하다는 것을 그는 이미 알고 있었다.
그러니 애초에 유준이 가져온 돈이 정착 지원금일 리 없음을 눈치챘어야 했다는 생각이, 저 스스로의 어려움 때문에 뻔히 보이는 사실을 눈감지는 않았나 하는 죄책감이 가슴에 세찬 못으로 박혔다.
“어쨌든…… 여강현 씨는 그 사실을 이미 알고 있다고 하면서, 유준이가 그 사람들에게 끌려다니는 게 해완 씨, 그러니까 해언이한테 피해를 끼쳐서 싫다고 했대요. 그러곤 유준이를 그 사람들이 술 마시고 있는 데 데려갔다고 하더군요.”
이후, 인하는 유준을 바라보며 말했다.
“유준아. 여기서부턴 네가 말하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유준은 그러고도 잠시 말이 없었지만, 무언가 결심한 듯 고개를 들고 겨우 입을 열었다.
“나한테, 저 사람들이 날 괴롭히지 못하게 경고를 해 주겠다고 했어. 그러면서 오토바이 타는 형들 뒤를 따라가니까, 그걸 알아챈 형들이 우리 차에 위협 운전을 했어.”
“…….”
“그래도 여강현은 눈 한번 깜짝 안 하더라. 너무 무서워서, 제발 그러지 말라고, 사고 날 거 같다고 제발 따라가지 말라고 빌었는데 내 말은 듣지도 않았어.”
“…….”
“그러더니…… 오토바이가 우리 앞에 끼어드는 순간에, 꼭 기다리기라도 한 것처럼 가, 갑자기 오토바이를 쳐 버릴 듯 속력을 올려서……. 그걸 피하려던 형들이 미끄러지면서 가드레일에 박고 사고가 났어.”
끔찍한 광경이 아직까지도 눈앞에 생생한 듯 진저리를 치는 유준을, 해완은 하얗게 질린 얼굴로 바라보기만 했다.
“그, 그리고 차에서 내리더니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알아?”
“…….”
“날 괴롭히는 사람도 이제 없어졌으니까 해언이랑 같이 살 필요 없지 않냐고, 자기가 집도 구해 주고 생활비도 지원해 줄 테니까 형이랑 따로 살라고 그러더라.”
머릿속이, 마음이 텅 비어 버린 것처럼 멍했다. 해완은 유준의 떨고 있는 얼굴에 붙박여 있던 시선을 느리게 내려 핸드폰 안에 들어 있는 참혹하게 다친 이의 사진을 다시 눈에 담았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인하가 말을 덧붙였다.
“오토바이에 타고 있던 두 명 중 한 명은 아직 의식이 없고, 한 명은 영원히 한쪽 다리를 못 쓸 수도 있다고 하더군요.”
왜, 대체 왜. 텅 빈 마음속에 떠오르는 생각은 오직 그것뿐이었다. 해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대체 왜…….”
“…….”
“대체 왜 이런 짓을…….”
그러자 해완의 반응을 기다리고 있던 유준의 얼굴이 벌겋게 상기됐다.
“미친놈이니까 그랬겠지, 왜 그런 게 뭐가 중요해!”
“…….”
“지금 이럴 때가 아니야, 형이 그 새끼 속인 거 알면 무슨 짓 할지도 모르는데, 그 전에 몰래 튈 생각부터 해야지!”
답답하다는 듯 침을 튀기며 벌컥 언성을 높인 유준을 향해 인하가 잠시 조용히 하라는 듯 손짓을 했다.
인하는 해완의 어깨에 부드럽게 손을 올렸다. 저를 바라보기를 요구하는 것이 분명한 손길에 해완은 유순하게 고개를 들어 그를 보았다.
“저희 아버지가 로펌 하나를 운영하시는데, 여강현 씨 집안이랑 오랜 연이 있어요.”
“…….”
“그래서 알게 된 건데 여강현 씨, 어린 시절에 정신과 진료를 오래 받았다고 들었어요. 물론 그 병명까지는 잘 몰랐지만, 유준이 얘기나 전에 말한 주변 사람들 이야기를 들어 보니까 짐작 가는 부분은 있더군요.”
“…….”
“사이코패스나 소시오패스에 관해서 들어 본 적 있어요?”
“…….”
“정신 병리학적 용어로는 반사회적 성격 장애라고 하는데, 성격 장애라는 말은 선천적으로 뇌에 문제를 타고났다는 거예요. 고칠 수 있는 게 아니라는 거죠.”
그러더니 인하는 핸드폰을 들어 화면을 해완의 눈앞에 들이밀었다. 핸드폰 안의 사진은 이미 충분히 봤던 것과 다를 바 없었지만 그 원인이 강현일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되자 차마 바라볼 수도 없이 괴롭게 느껴져, 해완은 반사적으로 홱 시선을 돌리며 눈을 감았다.
“이 사람들이 잘못을 했건 안 했건, 남을 이렇게 만들고 멀쩡한 사람이 정상일 리가 없잖아요.”
탁자 위에 올라와 있던 해완의 손이 바들거리며 심하게 떨렸다. 그것을 인하가 가볍게 감싸며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도망칠 수 있게 도와줄 수 있으니까, 잘 생각해 봐요. 윤해완 씨.”
“…….”
“그런 사람들은 절대로, 제대로 된 사랑을 못 해요.”
* * *
“아버지. 내일 어머니 뵈러 점심 전에 가시는 거죠?”
“그래야겠지. 강윤이는 너희 집에서 출발할 거니?”
“네. 근데 인도 지사하고 중요한 컨퍼런스 콜이 있어서 좀 늦을 수도 있어요. 애들은 정석 씨가 미리 챙겨서 그리로 갈 거예요.”
사용인들이 제사상을 준비하기를 기다리며 거실에 모여 앉은 가족들이 대화하는 동안 강현은 시선을 돌려 야외 정원에 설치된 조명이 빛나는 모양을 바라보았다.
어린 시절, 저 정원 한가운데에는 작은 온실이 하나 있었다. 기존에 있던 연못을 메워 버리고 세운 것이었는데 강현이 그 연못에서 나는 비린내를 못 견뎌 한다는 이유에서였다.
강윤과 강우는 그것을 싫어했다. 어린 시절의 추억이 가득 담긴 연못을 강현 하나 때문에 메워야 하는 것이 이해가 가지 않는다며 화를 내고 떼를 썼다.
하지만 그들의 어머니는 기어코 연못을 메우고 대신해서 온실을 하나 만들었다. 그 안에는 아름다운 꽃들과 강현이 놀 수 있는 각종 놀이 시설이 있었다. 어머니는 삼 남매가 같이 놀면 되지 않느냐 했지만 강윤과 강우는 강현보다 각각 아홉 살, 일곱 살이 많았다. 강현이 놀 만한 시설을 그들이 재미있어할 리가 없었다.
결국 온실은 온전히 어린 강현의 차지가 됐으나 애초에 그가 만들어 달라 한 곳이 아니기에 별다른 흥미를 가진 적은 없었다. 그것은 또 그것대로 형과 누나의 원망의 이유가 됐다. 그들은 강현이 그 온실을 원한 게 아니라 저들에게서 연못을 빼앗아 가기 위해 그런 시늉을 했다고 생각했다.
이상했다. 그들이 가진 것을 빼앗기를 바란 적은 한 번도 없음에도, 강현은 당연하다는 듯 그런 존재가 되어 있었다.
“여강현!”
갑자기 귀에 들어온 제 이름에 강현은 정원에서 시선을 뗐다. 이 가족들 사이에서 오가는 대화의 화살이 제게 돌아올 리가 없는데 하고 의아하던 찰나, 강우가 짜증스러운 말투로 입을 열었다.
“정신을 얻다 팔고 있어. 네 형수가 너한테 뭐 물어보잖아.”
아, 그렇군. 느리게 시선을 돌리자 강우의 옆에 붙어 앉은 그의 아내가 눈에 들어왔다. 국내 모 유통 관련 기업의 장녀라고 했던가. 아직 결혼한 지 1년이 되지 않아 강현과는 결혼식 때 한 번, 그리고 추석이나 설날에 얼굴을 본 것이 다라 아직까지도 낯이 별로 익지 않았다.
“죄송해요, 형수님. 뭐라고 하셨죠?”
“아, 도련님은 내일 어머님 뫼신 데 언제 가시냐고…….”
멍청한 질문이었다. 강현은 어머니가 죽은 이후 한 번도 그곳에 간 적이 없었고, 가족 중 누구도 그에게 함께 가자고 권유한 적도 없었다.
하지만 강현은 빙긋이 미소를 지으며 태연하게 거짓말을 했다.
“어쩌죠. 형수님. 저도 정말 가고 싶은데, 내일 일이 좀 있어서 가기 어려울 것 같아요.”
허무한 웃음이 몇 번 오갔다. 대화는 다시 시작됐다. 강현은 다시 고개를 돌려 비어 있는 정원을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자정이 가까워질 무렵 거실 한구석에 제사상이 차려졌다. 아버지, 강윤과 남편, 그리고 그들의 두 아이들, 그리고 강우와 그의 아내, 강현까지 하니 이전보다는 거실이 꽉 차 보였다.
상 한가운데에는 어머니의 영정이 모셔졌다. 죽은 당시의 나이에 비해서도 아름답고 젊은 외모였다. 항상 보여지는 것에 신경을 쓰던 그녀였으므로 종양이 몸을 완전히 갉아먹기 전에 차라리 사고로 죽은 게 기꺼웠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사용인들이 모두 물러가고 가족들만이 남았다. 강현은 무심코 강윤의 옆에 섰다. 강윤은 그를 바라보지 않았지만, 즉시 한 발자국 옆으로 옮기며 거리를 벌리는 것이 느껴졌다.
강현은 시선을 내려 저를 인정하지 않는 강윤의 고집스러운 얼굴을 비스듬히 바라보았다. 그런 그녀의 반응은 어머니가 뇌종양 판정을 받았음을 가족들에게 고백하던 날을 떠올리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죽기 바로 며칠 전 뇌종양 판정을 받았다. 뇌종양 중에서도 4단계에 해당하는 교모세포종으로 사실상의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하지만 그녀를 죽인 것은 종양도 사고도 아니었다. 바로 그 소식을 들은 강현의 반응이었다.
분위기는 엄숙했다.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쥐고 있었고,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강윤과 강우는 울음을 터트렸다.
하지만 강현은 울지 않았다. 무표정한 얼굴로 그저 고요히 있었다. 그때는 이미 주변의 반응을 따라 해야 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왜인지 도저히 할 수가 없었다.
그런 강현을 본 강윤과 강우는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지만 지금처럼 한 발자국 그와의 거리를 벌렸고, 그리고 어머니는, 말 그대로 반쯤 미쳐 버렸다.
어머니는 강현을 때리고 욕하며 울부짖었다. 너를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냐며, 네 곁에 있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고 있냐며, 엄마를 벌주기 위해 이러는 것이냐며, 그게 아니라면 증명을 해 보라고, 슬퍼해 보라고, 한 방울이라도 좋으니 눈물을 흘려 보라고 악을 써 댔다.
그럼에도 강현은 울 수가 없었다.
어떤 방법도 끝내 통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게 되자 어머니는 침착해졌다. 그녀는 아무런 말도 없이 강현을 차에 태웠다.
‘내가 널 이렇게 망쳐 놨다는 죄책감만 없었어도, 진작에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났을 텐데.’
아직 겨울이었고 비가 억수같이 퍼붓는 날이었다. 그 속도로 도로를 달리는 것은 의도된 자살행위였다. 어머니는 강현을 데리고 죽고 싶어 했다. 망가진 강현을 구하는 길은 함께 죽는 것밖에 없다고 생각해서였다.
강현은 그때야 알았다. 죄책감이라는 감정이, 죽음까지 뛰어넘어 누군가를 붙들어 놓을 강력한 족쇄가 될 수 있다는 사실을.
의도치 않게 강현만이 살아남고 나서 강현은 어머니가 저를 구하려다 죽었다고만 이야기했다. 그 빗길에 어머니가 왜 그리 과속을 했는지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은 그를 계속 추궁했지만 강현은 같은 말을 반복했고, 그것이 가족들의 의심을 낳았다.
강현은 상관하지 않았다. 어쨌든 어머니의 의도는 그랬으므로, 그것을 존중해 주는 게 옳지 않은가 하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불현듯 손목에 따끔한 느낌이 들었다. 시선을 내려 보니, 어느새 스스로의 손톱이 살갗을 파낸 붉은 자국이 가득했다.
그것을 본 순간, 그 상처를 보듬던 희고 길고 끝이 단단한 손가락의 감촉이 급작스럽게 강현의 마음을 사로잡았다.
온몸에서 삽시간에 무언가가 끓어올랐다. 이 집에 올 때마다 어김없이 떠오르던 해묵은 추한 기억들보다 알게 된 지 얼마 되지 않은 그 손가락이 강현의 온몸에 뜨겁게 풀무질을 해 댔다.
도저히 이곳에 서 있을 수가 없었다. 강현은 그대로 뒤를 돌아 쿵쿵대며 거실을 빠져나갔다. 뒤에서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으나 어차피 곧 멎을 터였다. 겨우 빠져나간 이물질을 정말 되돌리고 싶은 사람은 없었다.
강현은 미친 사람처럼 2층으로 올라가 어머니의 침실을 찾았다. 아버지는 어머니가 죽은 이후 방을 옮겼기 때문에 그곳은 게스트 룸으로 바뀌어 있었지만, 가고자 하는 곳은 그대로 남아 있을 것이었다.
방문을 벌컥 열고 들어간 강현은 어두운 방 안의 불을 켤 생각도 하지 않고 걸음을 옮겼다. 눈을 감고도 갈 수 있었다. 이 집에 있는 내내 그의 마음은 언제나 그곳에 갇혀 있었으므로.
거침없이 드레스 룸을 열고 들어간 강현은 제일 안쪽에 있는, 어머니가 강현이 울 때마다 그를 가두곤 했던 옷장 문을 열어젖혔다.
옷이 가득했던 예전과는 달리 지금 그곳은 거의 비어 있었다. 하지만 좋았다. 어린 시절처럼 몸집이 작지 않아도 저를 그곳에 가두고, 그리고, 그곳에서 찾은 평화를 다시 느낄 수 있을 것 같았으므로.
강현은 바로 앞에 놓인 어둠을 응시했다. 한 발자국이면 됐다. 딱 한 발자국이면, 다시 마음을 비우고, 그만의 고요한 바다에서 다시는 흔들리지 않고 쓰러지지 않고 평안하게 살 수 있었다.
그런데, 움직일 수 없었다.
저를 보고 꽃이 피어나듯 웃는 해완의 해사한 얼굴이, 절대로 미워하지 않겠다고, 싫어하지 않겠다고, 말해 주는 그 목소리가, 다시는 돌아갈 수 없게 강현의 발목을 붙들었다.
이미 옷장 문은 환하게 열려 버렸다.
다시 돌아갈 수 없다.
이 어둠으로는, 다시는 그럴 수 없었다.
* * *
안방 벽에 기대어 몸을 옹송그리고 앉은 해완은 방 안 곳곳에 내려앉은 어둠을 하릴없이 바라보았다.
시간은 벌써 새벽 1시에 가까워져 있었으나 잠이 오지 않았다. 그렇다고 해서 무슨 생각을 하고 있는 것도 아니었다. 인하는 그에게 잘 생각해 보라고 했으나, 생각한다고 해서 결론이 날 문제인지도 몰랐다.
그때, 거칠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에 해완은 흠칫 놀라 고개를 들었다.
잠시 그대로 앉아 있었지만, 반응하지 않아도 문을 두드리는 소리는 멈추지 않았다. 오히려 점점 더 커져만 가는 소음에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해완은 조심스레 문 앞에 섰다.
누구세요, 하고 물을 수 있었지만 해완은 묻지 않았다. 보이지도 않는데, 문을 두드리는 이가 누군지 알 수 있을 리 없는데도 묘한 확신이 가슴을 휩쓸었다.
왜인지, 밖에 선 이도 그의 이름을 부르지 않았다.
그가 제 이름을 부르지 않았으니 이대로 열지 않고 넘어갈 수 있을지도 몰랐다. 모르는 척 눈을 감고 없는 척 외면하다 보면 조용히 밤을 넘기고 아침이 올지도 모르는 일이었다.
하지만 그런 고민을 한 것이 무색하게 해완의 손은 결국 현관 문손잡이 위로 올라갔다.
덜컥 소리가 나자 두드림은 그대로 멈췄다. 해완은 문을 조심스레 당겨 열었다.
그 앞에, 강현이 서 있었다.
중요한 일이라도 있었는지 그는 드물게 슈트를 차려입은 채였다. 머리 또한 평소와 다르게 깔끔히 빗어 넘긴 덕에 해완이 좋아하는 그의 희고 단정한 이마가 선명히 드러났다.
두 사람 다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강현은 한동안 해완을 내려다보다가, 조용히 물었다.
“들어가도 돼?”
무슨 일일까. 유달리 지쳐 보이는 얼굴에 가슴이 따끔거렸다. 해완은 강현이 안으로 들어올 수 있도록 몸을 비켜섰다.
강현이 완전히 안으로 들어오자 해완은 불을 켰다. 불빛은 빠르게 번져 강현의 그늘진 얼굴을 밝혔다. 눈이 부신 듯 그는 잠깐 눈살을 찡그렸으나, 해완에게서 시선을 떼지는 않았다.
언젠가의 데자뷔를 일으키는 상황에 해완은 먼저 왜 왔냐고 물으려 했다. 그런데 그 순간, 강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사과하러 왔어.”
해완은 눈을 크게 떴다. 강현은 해완의 두 손을 모아 쥐더니, 손등부터 손가락까지 차근차근 입을 맞추며 간절하게 중얼거렸다.
“거칠게 대해서 미안해.”
“…….”
“내가 잘못했어.”
“…….”
“용서해 줘.”
제 입으로 가르쳤던 그것을 착실하게 되풀이하는 강현의 말에 가슴 전체가 올가미에 걸려 꽉 조여 오는 듯 느껴졌다.
해완은 치밀어 오르는 감정을 애써 누르고, 눈을 깊게 감았다 뜬 다음 메마른 입술을 열었다.
“오늘 유준이 만났어.”
그 말에 해완의 손가락 끝에 입을 맞추고 있던 강현의 움직임이 멈췄다. 그는 손가락에 입술을 붙인 채, 눈동자만을 돌려 해완을 응시했다.
“다 정말이야?”
“…….”
“네가 했다는 짓.”
해완의 떨리는 목소리를 듣고도 강현의 얼굴에는 별다른 변화가 없었다. 오히려 사과를 속삭이던 간절한 얼굴 위로 차갑고 매끄러운 가면을 쓴 것처럼 그는 아무런 감정도 담기지 않은 표정으로 해완을 그저 내려다보기만 했다.
그렇게 해완을 응시하던 강현이 건조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내가 그랬어.”
이렇게 빨리 수긍하는 대답을 들을 줄은 몰라, 강현의 차게 굳은 얼굴을 절박하게 훑으며 어떤 감정이든 읽어 보려 애쓰고 있던 해완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변명할 의지조차 없어 보이는 태도에 묵직한 배신감이 해완의 가슴을 내리쳤다. 차라리 뻔뻔스럽게 아니라고 부정하는 편이 덜 고통스러우리란 생각이 들었다.
그런 사람들은 제대로 된 사랑을 할 수가 없다고.
제 치부를 고스란히 드러내고도 일말의 동요도 없어 보이는 지금 강현의 모습은 해완을 내내 괴롭히던 인하의 말의 증명 같았다.
일종의 울분에 차 해완은 말을 뱉었다.
“왜 그랬어! 대체 왜…….”
그런 해완의 말을 가로막고 강현은 망설이지도 않고 즉시 답했다.
“난 망가진 인간이니까.”
해완의 심장이 덜컥 내려앉았다. 강현은 크게 열린 해완의 눈을 바라보며 말을 이었다.
“그래서 그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너는 내 곁을 떠날 거니까.”
“…….”
“그래서 그랬어.”
저를 망가진 인간이라고 말하는 강현의 목소리는 마치 정해진 사실을 진술이라도 하듯 덤덤하기만 했다.
어떤 부정도 수치심도 느껴지지 않는 그 말을 듣는 순간, 해완은 본능적으로 그것이 강현 스스로의 언어일 리 없다고 생각했다.
그것은, 저 자신을 정의 내리기에는 너무나 무방비하고 연약하던 시절 뒤집어씌워진 채 성장할 수밖에 없었던 주형임에 분명했다.
처음부터 그렇게 만들어진 듯 차고 희게 굳어 있던 강현의 얼굴이 급작스럽게 꿈틀했다. 그때까지도 해완의 손가락을 그러쥐고 있던 강현의 손이 해완의 볼로 올라왔다.
붉어진 눈 밑을 쓸어내리는 단단한 엄지손가락에 해완의 조용한 눈물이 스며들었다. 강현은 눈물이 뚝뚝 흘러내리는 해완의 눈가를 닦고 또 닦으며 물었다.
“왜 우는 거야?”
“…….”
“이젠 정말 내가 싫어지고, 무서워진 거야?”
강현은 또 똑같은 것을 물었다. 해완은 그것이 답이 궁금해 묻는 질문이 아니라는 걸 알았다.
같은 질문을 반복해서 하는 어린아이들처럼, 정해진 답을 듣고 싶은 것이다. 네가 싫지 않다고, 밉지 않다고,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네 편이라고.
하지만 해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조용히 울기만 했다. 강현이 원하는 대답을 해 줄 수 없어서가 아니라, 강현이 한 짓을 알고서도 그 말을 하기가 너무 쉽게 느껴져서 울었다.
하지만 해완이 대답을 해 주지 않자 강현의 얼굴은 처참하게 일그러졌다. 고요하기만 하던 새카만 눈동자가 하염없이 흔들리고, 어떻게든 눈물을 담아 보려 애쓰던 손은 엉망으로 떨리기 시작했다.
결국, 쓰러지듯 해완의 발아래 무릎을 꿇은 강현은 매달리는 것처럼 그를 올려다보았다.
“그러지 마.”
“…….”
“내가 미워도 날 버리지 마.”
그렇게 말하며, 강현은 해완의 마른 허리를 끌어안았다. 배려 없이 강하게 끌어안아 가둔 주제에 해완의 몸을 재차 더듬어 안는 불안한 손길은 모순적으로 부드럽고 연약했다.
크게 숨을 들이쉰 해완은 제 가슴팍에 달라붙어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강현의 어깨를 밀어 낸 뒤 고개를 감싸 저를 바라보게 들어 올렸다.
강현은 해완보다 키가 많이 컸기 때문에 그가 서 있을 때면 눈을 들여다보기 쉽지 않았다. 하지만 제 앞에 무릎을 꿇은 강현의 눈은 시선을 돌릴 길 없이 깊은 곳까지 들여다볼 수 있는 듯했다.
해완은 마음껏 그 깊은 눈을 들여다보았다. 그 눈 안에서, 오늘 내내 인하나 유준이 찾아야 한다고 강권했던 것을 찾아보려고 애썼다.
하지만, 아무리 들여다봐도 찾고자 의도했던 것은 찾을 수가 없었다.
모른다.
어쩌면 너는 정말 사랑을 모르는 사람일 수도 있고, 어딘가 망가지고 결여된 인간인지도 모른다.
그런데 왜.
왜 나는 네 눈 안에서, 애처롭고 서툰 애정 말고는 다른 것을 찾을 수가 없는지.
그리고 그 연약한 마음을 내 손으로 보듬어 줄 수만 있다면 죽어도 좋다는 생각만 드는 건지.
오로지 그런 바람만이 온 마음을 휩쓸고 또 휩쓸었다. 모든 사실을 안 강현이 제게 무슨 짓을 해도 상관없다는 생각에, 해완은 그에게 어떤 말이든 할 수 있을 것만 같은 기이한 용기에 사로잡혔다.
하지만 그때, 해완의 손을 뿌리친 강현은 달려들듯이 해완의 허리를 다시 감싸 안았다.
그는 온 힘을 다해 해완의 옷을 구겨 잡으며 지독하게 절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윤해언.”
내내 그랬던 것처럼, 강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해언의 이름이 해완의 숨을 틀어막았다.
“8년을 널 기다렸어.”
“…….”
“너만 기다렸어.”
“…….”
“그러니까 넌 날 떠나면 안 돼. 네가 조금이라도 나한테 미안해한다면, 넌 이제 와서 그러면 안 돼. 날 떠나면 안 돼.”
참아 보려고 했지만 소용이 없었다. 맺히고 또 맺혔던 서러운 흐느낌이 치솟아 올랐다. 해완은 일그러진 표정을 감추기 위해 두 손을 들어 올려 얼굴을 감쌌다.
오로지 해완 그 자신만을 위한 눈물이었다. 이기적이라고 해도 할 수 없었다. 자신을 향하되 자신을 향하지 않은 강현의 애정이, 너무나 가지고 싶어서 사무치게 아팠다.
우느라 몸을 가누지 못하는 해완을 강현이 강하게 주저앉혔다. 어디에도 보내지 않겠다는 듯 팔과 다리로 얽맨 채 품 안에 끌어안았다.
그렇게 자신의 몸으로 해완을 끌어안아 가둔 강현은 해완의 귀에 대고 끊임없이 속삭였다.
넌 나를 버리면 안 돼. 조금이라도 내게 잘못했다고 생각한다면, 조금이라도 내게 미안하다는 생각이 든다면, 넌 내가 아무리 망가진 인간이어도 나를 떠나면 안 돼.
그렇게 끊임없이, 해완이 울면서도 끝내 고개를 끄덕일 때까지 강현은 집요하게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그래, 유준아. 공항에 내리면 그 펜션 주인분이 차로 데리러 오실 거야.”
―네, 정말 감사해요, 인하 형.
“어려운 일도 아닌데, 뭐. 그럼 다시 연락하자.”
―저기, 형!
“응?”
―혹시…… 해완이 형한테는 연락 없었어요?
유준의 조심스러운 물음에 인하는 잠시 입을 다물었다.
윤해완을 만나 여강현의 실체를 알려 준 것이 바로 이틀 전 일이었다. 세상이 무너질 것 같은 얼굴로 돌아가기에 생각보다 쉽게 일이 풀리리라 생각했는데, 그 뒤로 윤해완에게서는 아무런 연락이 없었고 그간 인하가 건 전화나 문자에도 답을 하지 않고 있었다.
“그렇긴 한데, 내가 지금 한번 연락해 볼게, 너무 걱정하지 마.”
하지만 말이 길어질 게 귀찮아 유준에게 적당히 둘러댄 인하는 전화를 끊고 소파에 털썩 주저앉은 채 입술을 매만졌다.
“골치 아프네…….”
한숨처럼 내뱉은 인하는 고개를 뒤로 젖혀 소파 등받이에 기대고 천장을 바라보았다.
그렇게 멍하니 허공을 응시하는 사이, 문득 인하의 뇌리에 해언이 처음으로 윤해완의 사진을 보여 줬던 날이 스쳐 지나갔다.
당시 해언은 대학생이었다. 아무리 학생이라지만 좁고 답답한 셰어 하우스에 사는 게 보기 싫어 제집에 불러들이기 시작한 것이 동거와 엇비슷하게 변해 가던 시점이었으나, 그는 인하의 집을 멋대로 드나들면서도 짐을 완전히 옮기지는 않고 있었다.
함께 사는 것인지 아닌지 애매한 그들의 생활처럼 그들의 사이 역시 애매했다. 거의 매일을 만나 함께 밥을 먹고, 섹스를 하고, 끌어안고 자고 깨어나면서도 누구도 관계의 정립에 대해 먼저 말하지 않았다.
해언은 그것을 원하지 않아서였고, 인하는 해언이 그것을 원하지 않음을 알아서였다. 이미 제가 가진 마음의 추가 훨씬 무겁다는 사실을 익히 알고 있었지만 그래도 그때까지는 괜찮았다.
해언이 ‘아직은’ 누구와도 그렇게 되기를 원하지 않는다고 착각하고 있을 때까지는 말이다.
해언을 품에 안고 잤던 어느 여름밤, 허전한 옆자리에 잠에서 깨어났을 때 인하는 베란다에 홀로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해언을 발견했다.
그는 하염없이 핸드폰 화면을 한동안 들여다보면서 옆으로 스크롤을 하고는 또다시 핸드폰 화면을 들여다보기를 반복하고 있었는데, 무언가를 읽고 있다면 밑으로 스크롤을 내리는 게 당연했으므로 인하는 그가 사진을 보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뭔가를 보느냐 직접 물을 수도 있었지만 그럴 마음은 들지 않았다. 베란다에 둔 어스름한 조명 아래 앉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는 해언의 얼굴에 내내 떠올라 있는 부드러운 미소가, 전에 본 적 없이 너무나 아름다워 보였던 탓이었다.
그 비스듬하게 내려앉은 상냥한 시선과 둥근 입매가 아직도 인하의 가슴속에는 인이 박인 듯 선명하게 남아 있었다.
그런 일이 몇 번 반복됐다. 호기심을 이기지 못해 무슨 사진을 보는 거냐고 물어보았으나 곤란한 질문을 할 때 늘 그렇듯이 해언은 듣지 못했다는 듯 말을 다른 데로 돌려 버렸다.
시간은 하릴없이 흘렀다. 그사이 인하는 해언이 누군가의 사진을 보는 것을 셀 수도 없이 여러 번 보았고, 캐묻고 또 캐물은 끝에 그가 어릴 적 보육원에서 함께 자란 친구이며, 이름은 윤해완이고, 지금은 연락을 하지 않고 있지만 언젠가는 꼭 다시 만나러 갈 거라는 조각난 사실들을 조금씩 주워 모을 수 있었다.
그리고 해언이 겨우 그에게 윤해완의 사진을 보여 준 것은 두 사람이 완전히 함께 살게 된 지 1년이 지나고서였다.
해언이 고집스럽게 윤해완의 얼굴을 감추는 사이 인하의 마음속 그에 대한 환상은 있는 대로 커진 상황이었기에 인하는 답지 않게 두근거리는 마음으로 해언이 내민 핸드폰 속 사진을 보았다.
그것은 해언이 한 소년과 얼굴을 맞대고 웃고 있는 사진이었다.
소년은 남자라고 하기에는 아직 얼굴이 어렸다. 첫눈에 단정하게 잘생겼다는 인상은 있었으나, 인하의 눈에는 해언에 비해 딱히 특별해 보이지는 않았다.
“어때?”
해언은 마치 제일가는 보물을 내어 보여 주기라도 한 듯 기대에 찬 목소리로 물었다. 그 반짝이는 눈이 왠지 거슬린 인하는 괜히 장난스럽게 물었다.
“귀엽고 잘생겼네. 한국 가면 소개해 줄래? 한번 꼬셔 보게.”
그러자, 곧바로 얼굴을 굳힌 해언은 바싹 붙어 누워 있던 인하의 몸을 발로 걷어찼다.
“아, 왜 그래!”
“넌 절대 안 돼. 해완이 털끝 하나 건드릴 생각도 하지 마.”
“내가 뭐 어때서? 나만 한 알파 찾기 쉬운 줄 알아? 잘생겼지, 똑똑하지, 집안 좋지, 돈 많지, 매력 있지.”
“너 걸레잖아. 따먹은 오메가가 셀 수도 없으면서.”
“말이 심하네. 나 상처 입었어.”
농담으로 한 말이었을 뿐인데, 해언은 더없이 단호하게 말했다.
“네 더러운 손으로 해완이 만지는 거 싫어.”
아무리 장난으로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런 말까지 진지하게 하는데 기분이 안 상할 수는 없었다. 심기가 불편해진 인하는 유치한 짓임을 알면서도 불쑥 입을 열었다.
“걱정 마. 네가 왜 그렇게 싸고도는지 몰라도, 내 눈엔 가지고 싶을 만큼 특별해 보이진 않으니까.”
그 말에, 해완의 사진에 고정되어 있던 해언의 눈이 언뜻 인하를 향했다. 마음에 들지 않는 것이 있으면 늘 거침없이 말하는 그이기에 인하는 잠깐 움찔했다.
하지만 그다음, 해언은 기분이 좋다는 듯 활짝 미소를 지었다.
“잘됐네.”
그리고 그는 다시 핸드폰 속 윤해완의 얼굴로 시선을 돌려,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나만 알아야 되거든.”
해언은 사진에 입술을 가져다 대고, 눈을 감았다.
그 얼굴을 보고서야 인하는 겨우 깨달은 것이다. 해언의 마음이 열리기를 기다리면 된다고 생각했던 건 그저 자신의 멍청한 착각이었음을.
그의 마음은 이미, 다른 방향을 향해 열린 지 아주 오래라는 것을.
그때 느꼈던 심장이 내려앉는 듯한 기분을 떠올린 인하는 느리게 눈가를 문지르며 다시 한번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윤해완의 번호 옆에 있는 통화 버튼을 눌렀다. 하지만 공허한 연결음만이 계속해서 흘러갔다. 단념하고 전화를 끊으려던 찰나, 목소리가 들렸다.
―여보세요.
“윤해완 씨. 왜 이렇게 통화하기가 어려워요?”
그 말에 해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가슴을 스쳐 지나가는 확신에 가까운 직감에 인하는 즉시 입을 열어 물었다.
“혹시, 지금 여강현 씨네 집에 있어요?”
―……네.
그런 이야기를 듣고도 그와 단둘이 있어야 하는 집에 기어들어 가다니 의외로 신경 줄이 단단한 모양이었다. 인하는 나오려는 한숨을 꾹 눌러 삼켰다.
“그래서, 내가 한 제안은 거절인가요?”
―……
“유준이 내일모레 김포에서 떠나요. 어떡할 거예요?”
해완은 또 잠시 말이 없었다. 그답지 않게 짜증이 솟구쳤고, 할 말이 없으면 전화를 끊겠다고 하려던 찰나,
―몇 시에 어디로 가면 되는지 좀 알려 줄래요?
의외의 대답이, 전화기 속에서 들려왔다.
* * *
인하와의 전화를 끊은 해완은 화장실에서 나와 조심스레 침실 안으로 들어갔다.
방금 전까지 자신이 누워 있던 곳을 향해 웅크린 채 잠들어 있는 강현의 옆에 다시 조용히 누운 해완은 그의 손목 부근에 새롭게 생긴 상처 위를 덮은 밴드를 가만히 쓸어 보았다.
이틀 전 불쑥 제집에 찾아왔던 그 밤이 어머니의 기일이었다는 것을 해완은 이제 알고 있었다. 강현은 그 이상의 이야기는 하지 않았지만, 그가 본가에 다녀올 때마다 스스로의 몸에 내는 생채기가 외로움의 나이테와 같을지도 모르겠다고 조용히 생각했었다.
너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그리고 나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
해완은 강현의 손목에 가만히 입술을 대고 눈을 감았다. 그리고 잠시 후 눈을 뜨자, 잠들어 있다고 생각했던 강현의 까만 눈이 저를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잠시 그 눈을 마주하던 해완은 불쑥 입을 열었다.
“네가 날 모를 때부터 나는 너를 알고 있었어.”
그 말에 강현의 눈이 의아하게 가늘어지는 것이 보였다. 다소 맥락이 없어 보일 것은 알았지만, 지금 해완이 해언과의 일을 개입시키지 않고 거짓 없이 저에 대해 이야기하려면 이 방법밖에 없었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데 네가 그 버스 정류장 앞에 앉아 있었어.”
“…….”
“처음에는 마을에서 보지 못한 얼굴이라 누군지 궁금했고, 그다음에는 오지 않을 버스를 기다리고 있을까 봐 걱정이 됐고, 그리고 그다음에는…… 바닷바람이 네 머리를 걷어 낼 때마다 보이는 하얀 이마가 참 예뻐서 자꾸 쳐다보게 됐어.”
“…….”
“그리고 그다음에는…… 네가 너무 외로워 보여서 자꾸 마음이 쓰였어.”
지난 이틀 동안 머릿속에서 수없이 곱씹고 또 곱씹은 말임에도 튀어 나간 목소리는 지독히도 서투르게 들려, 해완은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아직까지 해완은 단 한 번도, 강현에게 소리 내어 사랑한다고 말해 본 적이 없었다.
강현이 자신의 얼굴을 보며 해언에게 사랑한다는 말을 돌려줄 것이 무서워서였다.
하지만 이제는 상관없었다. 강현의 사랑은 함부로 대한 주제에, 제 사랑만 귀해서 그 말을 감춘 벌을 받을 준비가 이제는 되어 있었다.
그것을 떠올리자 거짓말처럼 마음이 차분하게 가라앉았다. 손에 배어나던 식은땀도, 형편없이 떨리던 목소리도 평온해졌다.
해완은 미소를 지으며, 저를 향한 것은 아닐지라도 어쨌든 그가 찾아낸 보물같이 서툰 애정이 담긴 강현의 눈을 향해 선명하게 속삭였다.
“그게 내 첫사랑이었어.”
“…….”
“그리고 지금도 널 사랑해.”
“…….”
“사랑해, 강현아.”
해완은 강현이 해언을 향해 그 말을 돌려주기를 잠시 조용히 기다렸다. 하지만 강현은 아무런 말이 없었다. 그저 그 까만 눈으로 그를 가만히 보기만 했다.
그렇게 시간이 흐르는 사이 둥근 미소를 짓고 있던 해완의 입꼬리가 경련을 일으키듯 떨리기 시작했다. 계속해서 웃으려고 했지만 도저히 그럴 수가 없었다. 마음속에 공황이 빠르게 차오르고, 숨이 가빠지기 시작했다.
말하지 마.
내 눈을 보면서 해언이한테 사랑한다고 말하지 말아 줘.
그렇게 악을 쓰는 목소리를, 도저히 입 다물게 만들 수가 없었다.
그러지 않겠다고 수없이 다짐했음에도 불구하고 쉽게도 의지를 꺾어 버리는 스스로의 허약한 마음이 너무나 원망스러워, 해완은 얼굴을 일그러뜨리고 끝내 눈시울을 적셨다.
그 순간, 강현은 그대로 해완의 팔을 잡아당겨 난폭하게 입을 맞췄다.
해완은 망설임도 없이 즉시 강현의 목덜미에 손을 두르고 입을 벌렸다. 어떤 말도 내뱉을 수 없게 혀가 섞이자,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듣지 않아도 된다는 달콤한 안도감이 해완의 온몸을 순식간에 점령했다.
이틀간 옷을 걸칠 새도 없이 질리게 몸을 섞었는데도 강현은 말라 죽기 일보 직전인 사람처럼 해완의 몸에 거칠게 파고들었다. 온 피부가 아프고 쓰렸음에도 해완은 조금의 거부도 없이 제 위에 올라타는 강현을 위해 다리를 활짝 벌렸다.
해완은 강현이 저를 어떻게 대하든 쉽게 느꼈다. 강현이 그걸 원해서도, 이런 관계를 통해 그의 외로움을 위로할 수 있다고 생각해서도 아니었다. 해완 그 자신이 미치게 필요해서였다. 강현이 제 위에 다른 이의 모습을 뒤집어씌워 보고 있다고 하더라도 몸이 맞닿아 있는 시간만큼은 온전히 그 자신의 것이었다.
배려 없는 움직임에 정신없이 흔들리면서도 해완은 전에 없이 강현의 입술에 집착하듯이 매달렸다. 강현이 혹시라도 그의 귀에 해언의 이름을 속삭일까 두려워서였다.
하지만 어쩔 수 없이 입술이 떨어지는 사이에도 강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누구의 이름도 부르지 않았다. 그저 해완의 몸을 숨이 막힐 정도로 껴안고 또 껴안으며 귓가에 뜨거운 신음을 쏟아 내기만 했다.
절정을 맞고, 지칠 대로 지쳐 있던 해완이 또 꾸벅 졸고, 그런 해완의 몸을 닦아 주는 강현의 눈을 비몽사몽간에 바라볼 때도, 강현은 고맙게도 어떤 말도 돌려주지 않았다.
그의 몸을 다 닦아 내고 나서 강현은 기력이 없어 손가락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늘어져 있는 해완의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입을 맞췄다. 어느 곳 하나 비워 두지 않겠다는 듯 모든 피부를 살뜰하게 훑는 부드러운 입술에 다시 잠이 쏟아져 내렸다.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해완은 날짜를 셌다.
오늘은 3월 2일이었다. 21일까지는 3주의 시간이 남아 있었다.
그 3주만큼은 절대로 누구에게도 빼앗기지 않겠다고 다짐한 터였다.
오늘 하루를 무사히 넘긴 것에 진심으로 안도감이 들어, 해완은 안심한 채로 잠이 들었다.
* * *
다음 날은 월요일이었다. 언제나 그렇듯 강현은 해완을 편의점 앞까지 데려다주고, 작별 인사로 키스를 하고, 일이 끝나는 시간에 맞춰 데리러 오겠다고 약속하고는 또 한참 키스를 하고 나서야 겨우 차를 몰고 사라져 갔다.
일이 바쁜 오전은 빨리 흘러갔다. 가판대에 물건을 채우는 사이 딸랑 문이 열리는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리자, 오늘 오후 몇 시간 동안 해완의 대타를 맡아 주기로 한 저녁 타임 아르바이트생이 밝은 얼굴로 인사를 했다.
지난번 취객에게 해완이 대신 봉변을 당한 이후 그녀는 해완에게 꽤 호의를 가지게 되었는지 몇 시간만 대신 일해 줄 수 있겠냐는 부탁을 흔쾌히 수락해 주었다.
오늘 해완은 강현에게 알리지 않고 반드시 가야 하는 곳이 있었다.
편의점을 나서니 2시 반쯤이었다. 김포 공항까지는 지하철로 30분이면 가는 거리였지만 은행도 들렀다 가야 하는 통에 발걸음을 서둘러야 했다.
처음으로 와 보는 공항은 꽤나 혼잡해 하나도 정신이 없었다. 국내도 쉽게 비행기를 타고 다니는 시대라곤 하나 한 번도 비행기를 타 본 적이 없는 해완에게는 더욱 그렇게 느껴졌다.
‘다음에 꼭 같이 오자.’
언젠가 들었던 강현의 말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그럴 수 있을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마음에 오래오래 기억하고 싶은 다정한 목소리였다.
해완은 고개를 이리저리 저어 가며 익숙한 얼굴들을 찾았다. 사람이 많아 찾기 어려울까 걱정했는데, 인적이 그나마 드문 공항 한구석에 서 있는 인하가 먼저 눈에 띄었다.
다가오는 해완을 발견한 인하가 유준을 툭 쳤다. 역시 해완을 발견한 유준이 밝은 얼굴로 손을 크게 흔들며 그를 불렀다.
“형!”
해완은 유준을 향해 미소를 짓고는 토할 것 같은 기분을 억누르며 발걸음을 재촉했다.
이내 해완이 그들 앞에 서자 인하는 느긋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시간 맞춰 왔네요. 혹시…….”
하지만 그는 무엇인가 깨달은 듯 문득 말을 멈췄다. 인하의 눈이 아무런 짐 없이 가벼운 자신의 몸을 빠르게 훑어 내리는 것을 깨달은 해완은 조용히 시선을 피했다.
곧바로 상황을 파악한 인하는 고개를 살짝 숙이더니 헛웃음을 흘렸다. 하지만 유준은 여전히 아무것도 눈치채지 못한 듯 활기차게 말을 건넸다.
“형 티켓 발권 아직 안 했지? 저기서 하면 되는데 같이 가자.”
역시 비행기를 처음 타는 유준은 들뜬 기색을 감추지 못하고 해완의 팔을 잡아당겼다. 그런 유준의 손을 막아선 해완은 불안감으로 빠르게 뛰는 심장을 억누르며 차분히 말했다.
“난 오늘 너랑 같이 못 가, 유준아.”
유준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해완과 인하를 번갈아 보았다.
“뭐? 그게 무슨 소리야? 다른 날짜에 온다는 거야?”
순진하기까지 한 물음에, 해완은 크게 심호흡을 하고 애써 여상한 말투로 다시 입을 열었다.
“난 제주도 안 갈 거야. 이대로 아무 말도 없이 그냥 떠날 순 없어.”
“…….”
“해언이 생일이 되면…… 강현이한테 전부 다 내 입으로 사실대로 털어놓을 거야. 그리고 무슨 반응을 보이건 다 받아들일 거야. 그게…… 내가 한 거짓말에 대한 최소한의 책임이니까.”
이미 예상한 일이라는 듯, 인하는 아무런 표정의 변화 없이 해완을 가만히 보고 서 있었다. 그러나 유준은 다짜고짜 흥분해 언성을 높이기 시작했다.
“뭐? 형 미쳤어? 내가 말했잖아! 그 새끼 미친놈이라고! 형이 걔 속인 거 알면 무슨 짓 할지 모른다니까?”
해완은 저도 모르게 필사적인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안 그럴 거야, 유준아.”
“뭐?”
“강현이가 너 많이 놀라게 한 거 알아. 근데, 네가 생각하는 것만큼 나쁜 의도로 그런 거 아니야. 나중에 너도 알게 될 거야.”
열이 올라 씩씩대고 있던 유준의 얼굴이 갑자기 하얗게 비워졌다. 해완은 주머니에 넣어 둔 은행에서 인출한 돈 봉투를 꺼내 유준의 손에 억지로 쥐여 줬다.
“이거, 급하게 마련하느라 얼마 되지는 않는데 가져가서 써. 우리 집 보증금은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다 돌려줄게.”
“누가 이딴 거 달래?”
유준은 해완의 팔을 거칠게 뿌리쳤다. 거친 행동에 놀란 해완이 유준의 얼굴을 바라보자, 그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말을 마구 쏟아 내기 시작했다.
“형은 늘 이런 식이야. 내가 무슨 마음으로 어떻게 용기를 내서 형을 도와주려고 하는지는 신경도 안 써.”
“유준아. 잠깐…….”
“8년 전에도 그랬어. 내가 윤해언이 한 짓 말하는 데 얼마나 큰 용기가 필요했는지 알아?! 그 새끼가 그때 나한테 뭐라고 했는지 아냐고!”
난데없이 튀어나온 해언의 이름에 해완은 멈칫했다. 그러나 유준은 오랜 세월 마음에 쌓아 둔 둑이 무너지기라도 한 것처럼 말을 쏟아 내기 시작했다.
“나한테, 내가 본 걸 어디 가서 말하면 죽여 버리겠다고 했어. 너뿐만이 아니라 너 버리고 간 에미 애비까지 찾아내서 다 죽여 버리겠다고. 나는 그래도, 윤해언이 형한테 또 그럴까 봐 원장 선생님한테 형을 위해서 말했어. 근데 형은 윤해언이 그런 게 아니라고 해서 결국 날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잖아.”
“지금,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해언이가 나한테 무슨 짓을 했다고 그래!”
유준이 무슨 소리를 하는지 하나도 알 수가 없어, 해완은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자 유준은 완전히 폭발한 듯 꽥 소리를 질렀다.
“형을 목 졸라서 죽이려고 했잖아!”
뭐?
귀로는 분명히 들었지만 이해할 수 없는 말이었다. 해완은 입을 반쯤 벌리고 눈만 깜빡였다.
“발버둥 치는 형을 짓누르고 기절할 때까지 목을 졸랐잖아. 내가 그때 그 창고에 안 갔으면 그 새끼가, 그 새끼가 진짜 형을 죽였을 수도 있다고!”
유준의 절규와 같은 목소리에, 뒤통수를 몽둥이로 얻어맞은 것 같은 강한 충격이 해완의 온몸을 감쌌다.
해완의 반응을 기다리듯 유준은 숨을 씨근거리며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해완이 백지장처럼 질린 얼굴로 멍청하게 저를 바라만 보고 있자 그는 속이 터져 죽겠다는 듯 제 가슴을 치며 물었다.
“왜 그런 얼굴로 보기만 하는 거야? 진짜 기억이 안 나서 그러는 거야, 아니면 그때처럼 윤해언 감싸 주려고 모른 척하고 싶은 거야?”
“…….”
“말 좀 해 봐! 형 이럴 때마다 답답해 죽겠으니까, 씨발!”
유준은 숫제 눈물까지 고인 채 해완을 향해 악을 썼다.
그럼에도 혀뿌리가 잘려 버린 듯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텅 비어 버린 해완의 얼굴을 바라보던 유준의 표정에 자포자기한 기색이 비쳤다. 유준은 손등으로 눈물을 거칠게 닦고는 허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난 말이야. 왜 하필이면 형처럼 착한 사람 앞에 윤해언이나 여강현 같은 미친놈들이 자꾸 나타나나 그게 궁금했거든?”
“…….”
“근데 이제야 알겠어. 그런 사람들이 형 앞에 운 나쁘게 나타나는 게 아니라, 형이 그런 인간들을 끌어들이는 거야.”
그리고 유준은 해완을 똑바로 보며 독하게 중얼거렸다.
“그러니까, 난 이제 형 인생에서 빠질게. 형 옆에 있다가는 나도 무슨 꼴 볼지 모르겠으니까.”
유준은 곧바로 바닥에 놓아둔 짐 가방을 챙기더니 해완의 어깨를 강하게 치고는 인파들 속으로 사라져 갔다.
그 모든 과정을, 인하는 말 한마디 하지 않고 조용히 지켜보고 있었다. 해완은 멍하니 중얼거렸다.
“지금 유준이가 한 얘기 무슨 소리예요?”
인하는 해완을 무덤덤한 얼굴로 바라볼 뿐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해완은 그의 옷자락을 붙들고 매달리듯 재차 말했다.
“당신은 알잖아요. 그죠? 다 알고 나한테 온 거 맞죠?”
그러자, 인하는 조용한 목소리로 말했다.
“내가 경고했던 거 기억나요? 해언이랑 여강현 씨. 본질적으로 비슷한 사람들이라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영사기에 걸린 낡은 필름처럼 지지직거리는 기억이 어지럽게 눈앞을 번뜩였다.
‘너는 내 거야. 처음부터 그랬고, 앞으로도 영원히 그럴 거야.’
‘말해. 너는 내 거라고.’
‘싫어?’
‘그러면 그냥 죽어 버려.’
뇌를 들쑤시는 듯한 날카로운 기억의 파편에 해완은 머리를 움켜쥐고 허리를 푹 숙였다.
심장이 터질 것처럼 두근거렸다. 삽시간에 식은땀이 해완의 옷을 적셨다. 격렬한 토기가 배 속 깊은 곳에서부터 치밀어 올라, 그는 주체할 수 없이 떨리는 두 손을 들어 올려 입을 틀어막았다.
무엇으로부터인지도 모르면서 도망쳐야 한다는 충동에 사로잡힌 해완은 비틀거리며 바깥으로 나가기 시작했다. 오가는 사람들과 자꾸만 몸이 부딪쳤고, 그들이 이상한 시선으로 보거나 크게 욕설을 중얼거리는 것을 알았지만 상관하지 않았다.
‘나는 너밖에 없어. 너만 사랑했어.’
그러나 도망칠 수가 없었다. 저 스스로의 머리를 헤집는 기억에서 도망치는 것은 애초부터 불가능했다.
해완은 그대로 주저앉은 채 머리를 감쌌다. 잊고 싶었던 기억으로부터 저를 보호하려는 것처럼 온몸을 웅크리고 벌벌 떨었다.
그렇게 얼마의 시간이 지났을까, 몸을 만지는 손길에 해완은 경기하듯이 놀라며 고개를 번쩍 들었다.
무표정한 얼굴로 저를 내려다보던 인하가, 건조한 목소리로 물었다.
“괜찮아요?”
모든 답을 알고 있으면서도 해완은 질문할 수밖에 없었다.
“누구야.”
“…….”
“당신이 말한 해언이가 사랑했다는 사람이 누구냐고!”
인하는 뜻 모를 얼굴로 해완을 잠시 응시하다가, 비스듬한 미소를 머금은 채 느리게 말했다.
“당신이잖아요, 윤해완 씨.”
“…….”
“대체 누구라고 생각했던 거야?”
* * *
인하와 긴 대화를 마치고 나온 해완은 갑자기 속에서 치미는 토기에 급하게 입을 틀어막았다.
골목과 골목 사이에 있는 어스름한 틈으로 파고든 해완은 배 속 깊숙한 곳에 든 것을 전부 쏟아 냈다.
그러나 속이 뒤집힐 것처럼 구역질을 하고 또 해도, 오늘 떠올린 기억만큼은 다시 몸 밖으로 뱉어 낼 수 없는 모양이었다.
가쁜 숨을 내쉬며 몸을 일으킨 해완은 도로로 나가 택시를 잡고, 기계적인 어투로 해언의 유골이 안치된 납골당의 주소를 말했다.
고등학교 졸업식 며칠 뒤의 기억이 해완의 뇌리를, 마치 무덤에서 솟아난 것처럼 우글거리며 기어 다녔다.
* * *
더는 여기 오면 안 된다는 걸 알면서도, 마지막이라는 생각에 해완은 조심스럽게 체육 비품 창고 문을 열었다.
졸업식까지 끝난 학교는 한산하다 못해 스산하게까지 느껴졌다. 다시는 올 일이 없다고 생각하니 유달리 그리워지는 듯한 느낌에, 해완은 낡고 좁은 창고 안을 가만히 서서 둘러보았다.
아마 이곳이 괜히 특별하게 느껴지는 건 해완이 처음으로 가져 본 아지트 같은 존재이기 때문일 것이다. 물론 혼자만의 장소는 아니었지만 보육원 내에서는 찾을 수 없는 비밀스러운 안락함이 있었던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문득 뒤에서 들려온 문이 열리는 소리와 스치는 차가운 공기에 해완은 흠칫 놀라며 뒤를 돌았다.
놀란 것이 무색하게 그곳에 선 사람은 당연히 해언이었다.
창백한 피부가 추위에 발갛게 달아오른 해언은 왜인지 바로 들어오지 않고 문 앞에 선 채 인형 같은 얼굴로 한동안 그를 쏘아보기만 했다.
겪어 보지 못한 어색한 분위기가 두 사람 사이에 감돌았다. 평소라면 먼저 말을 붙이고도 남을 일이었지만 영 내키지 않았다. 제대로 된 대화를 나눈 게 벌써 며칠 전 일이어서 더욱 그랬다.
그러나, 결국 침묵을 견디지 못한 해완이 먼저 입을 열었다.
“왔어?”
그제야 마법에 풀린 것처럼 스르르 움직인 해언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왔다. 그는 두 손을 코트 주머니에 넣고 발로 바닥에 떨어진 공들을 툭툭 치며 무심히 물었다.
“추운데 여기서 혼자 뭐 하고 있어?”
“……그냥…….”
평소와 같이 마음에 떠오른 이런저런 감정들을 털어놓지 않고, 해완은 적당히 얼버무리며 시선을 내렸다. 숙인 고개 위로 쏟아지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불편한 느낌을 꾹 참고 모른 척 무릎 위에 올려 둔 손만 만지작거렸다.
어쩔 수 없었다.
얼마 전 버스 정류장에서의 그 장면을 본 이후로, 이상하게도 해완은 해언에게 더 이상 속을 다 내보일 수 없을 것처럼 느꼈다.
눈치 빠른 해언이 그것을 모를 리가 없었던 모양이었다. 창고 안에 짜증 어린 긴 한숨 소리가 맴도는가 싶더니, 어느새 그의 곁에 불쑥 다가온 해언이 해완의 턱을 잡고 들어 올려 저를 보게 만들었다.
“너 요즘 왜 그러는 건데.”
그렇게 말하며 턱을 쥔 해언의 손에 힘이 꾹 들어가기에, 해완은 고개를 돌려 그의 손길을 피하며 받아쳤다.
“내가 뭘?”
“요 며칠 동안 나 피해 다니고 있는 거 내가 모를 줄 알았어?”
해언의 말투에는 짜증스러운 기색이 가득했다. 해완은 고집스럽게 중얼거렸다.
“바쁜 건 너잖아. 대학 입시 준비한다고 집에도 잘 안 들어오고.”
“할 일이 있어서 바쁜 거랑 할 일도 없으면서 날 슬슬 피하는 게 같아?”
날이 선 말투에 해완은 입을 다물었다. 그러자 한쪽 입술 끝을 씹은 해언은 서늘하게 물었다.
“왜, 이제 보육원 나갈 때 되니까 내가 질리기라도 했어?”
억지에 가까운 해언의 말에 해완은 인상을 찡그리며 답했다.
“무슨 말이 그래. 내가 널 질리고 말고 할 게 어딨어.”
하지만, 그런 말은 소용이 없다는 듯 헛웃음을 치며 해완에게서 떨어져 나간 해언이 한층 더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걱정하지 마. 네 소원대로 곧 눈앞에서 사라져 줄 테니까.”
“뭐? 지금 대체 무슨 소릴 하는 거야.”
저도 모르게 해언에게 한 발자국 다가서며 초조하게 묻는 해완에게 해언은 비스듬하게 선 채 입을 열었다.
“……나 미국에 지원했던 대학 합격했어. 가게 되면 한 달 내로 출국할 거야. 가서 입학까지 이것저것 준비할 것도 많으니까.”
건조한 목소리에 해완의 심장이 쿵 떨어져 내렸다.
이미 몇 년 동안 유학 준비를 하고 있었으니 떠날 가능성에 대해서는 충분히 알고 있었으나 막상 해언과 정말 헤어지게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니 기분이 이상했다.
해언과 제가 정말 형제는 아니었으므로 태어나면서부터 함께였다고 하는 말은 틀린 것이겠지만, 적어도 해완의 마음 안에서는 그랬다. 이 마을을 벗어난 적도 몇 번 되지 않는 해완에게 해언이 다른 나라로 가 버릴 수도 있다는 사실은 마음 한구석을 베어 내 주기라도 한 듯 어쩔 수 없이 충격적으로 느껴졌다.
코끝이 찡해질 정도로 당황한 해완은 어물거리며 축하의 말을 건넸다.
“어, 해언아. 진짜 잘됐다. 정말 축하해.”
멀쩡한 척하려 애를 써 봤지만 목소리가 이상하게 떨려 나왔다. 그 목소리에 휙 해완을 향한 해언의 눈이, 삽시간에 부드러워졌다.
해언은 멀어져 있는 거리를 한걸음에 좁혔다. 그러곤 시선을 피하고 있는 해완의 양 볼을 감싸 고개를 들어 올리고 약간 붉어진 눈시울을 뚫어져라 들여다보았다.
“해완아, 울어?”
“아, 아냐, 그런 거.”
해언에게는 기쁜 일인데 제가 과민 반응을 해 초를 친다는 생각에 얼굴이 빨개진 해완은 황망히 고개를 저었다. 하지만 해언은 그냥 놓아줄 생각이 없다는 듯 집요하게 굴었다.
“왜 그러는데, 응?”
결국 해완은 시무룩한 목소리로 작게 중얼거렸다.
“……네가, 멀리 간다고 생각하니까 서운해서…….”
그 말을 들은 해언의 입술이 미묘하게 비죽 움직였다. 그는 즉시 되물었다.
“나 가지 말까?”
“뭐? 아냐, 그런 뜻으로 한 말 아냐.”
“그래도. 나랑 떨어지기 싫은 거 맞잖아. 그치?”
왜인지는 몰라도, 해언의 목소리는 어딘가 간절하게 들렸다.
해언의 발목을 붙잡을 생각은 전혀 없었지만 어쨌든 그와 떨어지고 싶지 않았던 것은 사실이었기 때문에 해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불현듯 해언의 얼굴에 꽃 같은 미소가 활짝 번졌다. 마치 세상 전부가 그를 위해 피어나기라도 한 것처럼, 모든 것을 다 가진 사람 같은 얼굴이었다.
망설이지도 않고 와락 해완을 껴안은 해언이 귓가에 대고 나직하게 속삭였다.
“사실 안 가려고 했어.”
“……응?”
“내가 어떻게 널 혼자 두고 떠나.”
“…….”
“우리 평생 동안 같이 있었잖아.”
해언 또한 같은 생각을 하고 있었다는 것에 해완은 괜히 울컥했다. 그러면 안 된다고, 나는 신경 쓰지 말라고 말해야 했지만, 잠시 미뤄 두고 해완은 해언의 허리를 감싸고 꼭 마주 안았다.
그때 해언이 고개를 돌려 해완의 볼에 살짝 입을 맞췄다. 이런 식의 가벼운 뽀뽀는 아주 어릴 때부터 종종 하던 것이었기에 해완은 별생각 없이 가만히 있었다.
그런데 해완의 볼을 마주 대고 있던 해언의 입술이 조금씩 뒤로 옮겨 가는 게 느껴졌다. 그렇게 부드러운 감촉이 귀 뒤 목선에 와 닿았을 때, 뭔가 기분이 이상해진 해완은 몸을 움츠리며 옆으로 살짝 피했다.
끌어안고 있던 팔에 순간적으로 힘이 들어가는 것이 느껴지는가 싶더니 이내 해언은 해완을 놓아주고 몸을 떨어뜨렸다. 해언의 입술이 닿았던 목덜미가 아직까지도 간지럽게 느껴져 해완은 입술이 닿은 그곳을 쓱쓱 문질렀다.
해언은 이번에는 해완의 손을 잡고는 제 것처럼 가지고 놀았다. 해언의 가느다랗고 예쁜 손가락이 제 손에 얽히는 모양을 보던 해완이 조심스레 질문했다.
“정말 미국 안 갈 건 아니지? 너 계속 여기 떠나고 싶어 했잖아.”
그 말에 해언이 기분 좋게 웃으며 대꾸했다.
“미국이야 언제든지 갈 수 있으니까 상관없어. 일단 다음 일은 너랑 서울 가서 생각해 보지 뭐.”
“서울……?”
“서울에 있는 대학도 지원한 거 알잖아. 같이 가자.”
“너 대학 가서도 나랑 같이 살고 싶어……?”
“당연하지. 난 어딜 가도 너 데리고 갈 거야.”
너무나 확고한 해언의 목소리에 해완은 조용히 머릿속으로 계산을 했다. 각각 오백씩 정착 지원금이 나온다고 치면, 조금이라도 나은 주거 환경을 위해서는 돈을 모아 함께 사는 게 낫기는 했다.
물론 생활비는 여전히 해결해야 할 문제였지만 그래도 서울은 여기보다는 일자리가 많을 터였다. 해언은 학교를 다니느라 바쁠 것이니 당분간은 제가 열심히 일을 해서 생활비를 대고 나머지는 천천히 생각하면 되지 않나 싶기도 했다.
“무슨 생각을 그렇게 해?”
“넌 학교 다니느라 바쁠 테니까 나는 아르바이트라도 구해야겠다 싶어서.”
그러자 해언은 해완의 볼을 톡 건드리며 귀엽다는 듯 웃었다.
“네가 일을 왜 해. 해완아. 넌 너 하고 싶은 거 해야지.”
“그럼 우린 뭐 먹고 살아. 정착 지원금 받아 봤자 집 보증금으로 쓰면 끝일 텐데.”
그는 해완을 잠시 바라보다가, 무언가를 시험하듯이 입을 열었다.
“괜찮아. 여강현한테 도와 달라고 하면 되니까.”
불쑥 해언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해완은 어리둥절한 목소리로 되물었다.
“……지금 여강현이라고 했어?”
“응. 내가 이것까진 말 안 했던 거 같은데, 너 서경산업 알지? 걔가 거기 막내아들이야. 그니까 내가 부탁하면, 우리 잠깐 도와주는 건 일도 아닐 거야.”
생각지도 못한 대화의 흐름에 급속도로 당황한 해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해언의 말간 얼굴을 잠시 바라보기만 했다.
농담이라고 생각하고 싶었지만 해언의 얼굴은 진지했다.
그때, 며칠 전 버스 정류장에서 수줍게 입을 맞추던 소년들의 모습이 해완의 눈앞을 빠르게 스쳤다.
마음 한구석에 욱신 통증이 번졌다. 해완은 해언이 잡고 있던 손을 뺐다.
“……나는 그럼 너랑 같이 못 살겠네.”
“뭐?”
“너야 걔랑…… 친한 사이니까 괜찮을지 몰라도 내가 뭐라고 걔 도움을 받아.”
그러자 노골적으로 인상을 찡그린 해언이 다시 해완의 손을 찾아 쥐고는 말했다.
“내가 괜찮다는데 그런 걸 왜 신경 써. 어차피 걘 가족들이랑 사이도 안 좋고, 서울 올라가서도 혼자 살 거래. 딱히 걜 챙길 사람이 있는 거 같지도 않고.”
“…….”
“그니까 비위 조금만 맞춰 주면 얼마든지 우리가 원하는 거 얻어 낼 수 있어.”
가슴을 짓누르는 위화감에 해완은 잠시 멍하니 해언을 보기만 했다.
그래, 강현과 해언이 서로 좋아하는 사이라면 강현이 도움을 줄 수도 있고 해언이 도움을 받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하지만 지금 해언이 말하는 뉘앙스는 뭔가 이상했다. 그저 너, 나, 그리고 우리일 뿐이지, 강현의 의사는 전혀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이야기하고 있었다.
스스로 해결할 길 없는 거북함에 결국 해완은 입을 열었다.
“왜 그런 식으로 말하는 거야?”
“뭘?”
“왜 그렇게…… 걔를 이용하는 것처럼 말하는 거냐고.”
해언은 입을 다물고 해완을 빤히 보다가, 오히려 불쑥 되물었다.
“왜, 걔 좀 이용하면 안 돼?”
“…….”
“우리를 위해서 그러는 건데.”
어딘가 핀트가 다른 말을 하는 해언의 반응에 해완은 절로 인상을 썼다.
“그게 무슨…… 너랑 나랑 좀 편하게 살자고 강현이를 이용하자는 게 말이 돼?”
“왜 이렇게 과민 반응이야?”
“…….”
“걔한테 평생 얻어 먹자는 거 아니야. 조금만 기다리면 내가 너 얼마든지 먹여 살릴 수 있어. 그러니까 잠깐만 도움받는다고 생각하면 돼.”
“강현이가 그러고 싶다고 한 것도 아니잖아!”
갑자기 언성을 높인 해완에 해언은 멈칫 그를 바라보았다. 해완은 해언에게서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서며 괴롭게 중얼거렸다.
“걔는 날 알지도 못하는데…… 그게 무슨 도움받는 거야.”
“…….”
“나는 싫어. 난 그런 식으로 강현이 이용 안 해. 그럴 거면, 난 너랑 같이 서울 안 갈 거야.”
“……여강현을 이용하느니, 차라리 나랑 떨어져 살겠다고 한 거야, 지금?”
“그래.”
망설임 없는 대답에 해언의 얼굴이 미묘하게 일그러졌다. 그는 잠시 무표정한 얼굴로 해완을 바라보다가 천천히 물었다.
“그 문제가 너한테 왜 그렇게 중요한데?”
“뭐?”
“설마 너, 아직도 여강현한테 관심 있어?”
해완은 흠칫 해언을 바라보았다. 옅은 빛깔의 눈이 서로 부딪친 찰나, 해언은 뿌득 이를 갈았다.
“이런 말까지 내 입으로 해 줘야 될지는 몰랐네.”
“…….”
“걔 너한테 아무 관심 없어, 해완아.”
“…….”
“걔가 좋아하는 건 네가 아니라 나라고.”
해언의 말이 불러일으키는 수치심에, 해완은 입술을 꾹 깨물었다.
가슴 한구석에서 이상한 감정이 부글거리며 끓어올랐다. 다리를 놓아주겠다고 해 놓고 결국은 강현을 차지한 해언에 대한 것인지, 아니면 첫사랑인 소년에게 말 한마디 못 붙여 본 못난 그 자신에 대한 것인지 모를 원망과 배신감이 무차별적으로 뒤섞여 해완의 가슴을 뒤흔들었다.
결국 해완은 울컥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서 네가 나한테 한 약속 안 지킨 것도 아무 말 안 했잖아.”
“…….”
“사람들이 나보다 널 좋아하는 건 이미 익숙하니까. 나라도…… 나라도 그랬을 거니까.”
“…….”
“근데 그렇다고 해서, 나 혼자 좋아하는 마음까지 버려야 되는 건 아니잖아.”
그 말까지 내뱉고 나서야, 해완은 해언의 앞에서 강현을 좋아한다고 인정한 것이 처음이라는 사실을 깨달았다.
해완은 해언의 눈을 피해 고개를 돌렸다. 제 감정을 해언이 알지 못하리라 여기지도 않았는데 붉어지는 얼굴을 숨길 수 없어서였다.
해언은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길어지는 침묵이 의아해 조심스레 시선을 올린 해완은 저를 바라보고 선 해언의 표정을 보고 그만 멈칫 굳어 버렸다.
무언가를 억지로 참아 내듯 갸름한 턱에 깊게 근육이 선 채 부릅뜨고 있는 해언의 섬세한 눈은 더없이 매서운 빛을 띠고 있었다.
그제야 입을 연 해언의 목소리에는 쇳소리가 섞여 거칠게 들렸다.
“네가 자꾸 이러니까. 내가 그 새끼를 못 놔주는 거잖아.”
다음 순간, 해언은 해완의 멱살을 쥐고 벽에 밀어붙였다. 갑작스러운 행동에 놀란 해완이 눈을 휘둥그레 뜨고 그를 바라보자, 해언은 눈을 번뜩이며 입을 열었다.
“네가 여강현에 대해서 아무것도 몰라서 그래. 그 새끼, 정상이 아니야. 뭔가 정신적인 문제가 있다고.”
“지금, 지금 무슨 소릴…….”
“내가 그런 새끼가 좋아서 옆에 붙어 있었을 거 같아? 다 너를 위해서 그런 거야! 니가 그런 이상한 새끼한테 걸려들지 않게 막아 주려고 최선을 다한 거라고!”
이 정도로 흥분한 해언의 모습을 보는 것은 처음이라, 해완은 아연실색했다.
그뿐만이 아니었다. 지금 해언은 단 한 번도 강현을 좋아한 적 없다고 말했다. 오로지 해완이 그에게 다가가지 못하게 하려고 좋아하는 척을 한 것이라는, 해완이 단 한 번 상상조차 해 보지 않은 폭탄선언을 한 참이었다.
마음이 뒤죽박죽으로 엉긴 나머지 해완은 어떤 대답도 하지 못하고 멍하니 해언만 봤다.
그러나 이내, 만약 그랬다면 왜 솔직히 말하지 않았느냐는 불신이 속에서 불쑥 치솟았다.
게다가 좋아하지 않는다고 말하기에는 며칠 전 강현에게 입까지 맞추지 않았던가.
해언의 모순적인 행동들에 머리가 엉망이 된 해완은 저도 모르게 크게 언성을 높였다.
“내가 언제 그렇게 해 달라고 했어?”
“뭐?”
“다 니 마음대로 한 거잖아. 네 행동을 내가 어떻게 느낄지는 하나도 안 중요했잖아! 근데 그게 왜 날 위한 거야! 왜!”
억누르고 있다 겨우 입 밖에 풀어놓은 감정이 널을 뛰듯 고조되어, 해완은 악을 쓰다시피 말을 끝맺었다.
그런 해완을 핏발이 선 눈으로 노려보고 있던 해언의 얼굴이 무표정하게 변했다. 들끓던 감정이 그리도 빨리 증발할 수 있나 싶게 삽시간에 매끄러워진 유리구슬 같은 눈동자로 해완을 응시한 해언은 그때까지 쥐고 있던 멱살을 툭 놓고는 차분하게 입을 열었다.
“나 그동안 많이 참았어.”
“…….”
“네가 느린 거 아니까, 스스로 깨달을 때까지 기다려 주려고 했어.”
“…….”
“근데 네가 정신을 못 차리니까, 어쩔 수 없네.”
해언은 다시 해완에게 바싹 다가선 채,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속삭였다.
“내가 없었다고 해서 여강현 같은 애가 널 좋아했을 거 같아?”
“…….”
“걔같이 잘나고 민감한 우성 알파가, 너같이 아무것도 없는 애를, 그것도 향이 없는 장애나 가진 오메가한테 관심을 가졌을 거 같아? 너도 그걸 아니까 등신같이 말 한번 못 붙여 본 거잖아. 내 말이 틀려?”
깊은 콤플렉스를 정확하게 찌르는 말에 해완의 얼굴이 뜨겁게 달아올랐다. 격렬한 감정이 급격히 치밀어 오른 나머지 해완은 떨리는 목소리로 겨우 입을 열었다.
“……그만해.”
“그뿐만이 아니야. 내가 몇 번이나 말했지. 널 낳아 준 부모가 널 얼마나 싫어했고 개만도 못하게 취급했는지. 우리 엄마도 날 버리고 갔지만 너처럼 쓰레기 처리하듯 버리고 가진 않았어.”
“…….”
“그런데도, 그런 너를 내가 이만큼 사랑해 주잖아. 나 아니면 널 사랑해 줄 사람은 이 세상에 아무도 없어. 넌 나 없이는 아무것도 아니라고.”
고작 말뿐인데도, 숨을 쉴 수 없을 만큼 가슴이 아팠다. 그것을 말하는 이가 다른 사람도 아닌 그와 가장 가까운 해언이라서, 그리고 그런 해언이 의도적으로 제 상처를 잔인하게 헤집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더욱 그랬다.
뜨거워진 눈시울에서 삽시간에 눈물이 흘러내렸다. 악다문 입술에서 끅끅거리는 흐느낌이 새어 나오는가 싶더니, 결국 해완은 고개를 푹 숙이고 울음을 터트렸다.
해언은 잠시 해완이 그렇게 울도록 두었다. 잠시 후, 해언은 손을 뻗어 눈물이 뚝뚝 떨어지는 해완의 눈 밑을 상냥하게 훔쳐 내더니 부드러운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왜 내가 이렇게까지 말하게 만들어, 속상하게.”
“…….”
“그래도 나는 널 사랑할 거니까 걱정하지 마, 해완아.”
“…….”
“너는 내 거니까. 처음부터 그랬고, 영원히 그럴 거니까.”
“…….”
“그러니까 아무 걱정 하지 말고 그냥 내가 하라는 대로만 해. 알았지?”
마치 가면을 순식간에 뒤집어쓴 듯, 날이 선 분노로 해완을 상처 입히는 데 주저하지 않던 모습은 온데간데없이 천사같이 저를 달래는 해언의 얼굴을, 해완은 믿을 수 없게 바라보았다.
때때로 해언이 이런 식으로 저를 깎아내릴 때마다 들었던 의문을, 그러나 유일한 가족이나 다름없는 해언이 주는 상처를 인정하고 싶지 않아 떠올리기 무섭게 밀어 내곤 하던 의문을 지금 이때만큼은 도저히 밀어 낼 수가 없었다.
대체 해언이가 말하는 사랑이란 게 뭘까.
나는 해언이에게 저렇게 아픈 말들을 하고 싶었던 때가 단 한 순간도 없었는데.
저를 쓰레기처럼 버렸다는 부모를 다시 만나도 그런 이야기를 하고 싶을 것 같지는 않은데.
왜 해언이는 나한테 그런 말을 하면서도, 그게 다 나를 사랑해서 그런 거라고 하는 걸까.
사랑의 모습이 전부 다 다르다고는 하지만, 그게 해언의 사랑이라면 해완은 더 이상 그걸 견딜 자신이 없었다.
여전히 눈망울이 깊게 젖은 채로, 해완은 입을 열어 조용히 말했다.
“……그딴 거 필요 없어.”
그러자, 해완의 볼을 쓰다듬고 있던 해언의 손가락이 뚝 멈췄다.
“……뭐?”
“네가 그렇게 말할 때마다 나 너무 아파. 해언아.”
“…….”
“그런데도 그게 네가 나한테 애정을 표현하는 방식이라면.”
목구멍을 누가 조여 오는 듯 아팠다. 하지만 해완은 숨을 깊게 들이마신 뒤, 확고하게 말했다.
“나는 네가 주는 사랑 따위 필요 없어.”
죽음과도 같이 무거운 침묵이, 삽시간에 두 사람 주위를 감쌌다.
해언은 돌이 된 것처럼 그대로 굳어 버렸다. 숨 쉬는 법조차 잊은 사람처럼, 조금의 미동도 없이 해완의 얼굴을 믿지 못하겠다는 듯 응시하고 있었다.
마치 세상이 무너져 버린 것 같은 해언의 얼굴에 해완의 심장도 불안하게 뛰기 시작했다. 결국 압박감을 견디지 못한 해완이 입을 열려던 찰나, 해언의 고운 얼굴이 일순간에 야차처럼 일그러졌다. 해언에게서 단 한 번도 보지 못한 말 그대로 절망적인 표정이었다.
그리고 다음 순간, 해언은 그대로 해완에게 거세게 입을 맞췄다.
부드러운 입술이 맞닿자마자 사고가 정지했다. 해완은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려 피하려 했지만 해언의 입술은 집요하게 따라붙었다.
그런 짓이 몇 번 반복되자, 무언가를 생각할 겨를도 없이 해완은 팔을 들어 해언의 가슴팍을 온 힘을 다해 밀쳐 버렸다.
갑작스럽게 뒤로 밀쳐 내진 해언이 중심을 잃고 뒤에 있는 집기들과 함께 우당탕 소리를 내며 넘어졌다. 그 소리가 해완의 정신을 번쩍 들게 했다.
어릴 때 해언이 화가 나서 해완을 때렸을 때도 해완은 맞받아칠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었다. 쌍둥이처럼 자란 사이라도 해언은 그보다 두 살이 어리고 작은 데다 잔병치레도 많았기 때문에, 해완은 내심 해언을 제가 지켜 줘야 할 존재로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니 제가 해언의 몸에 손을 댄 상황에 해완은 스스로 큰 충격을 받았다.
바닥에 쓰러진 해언이 심장 부근을 움켜쥐고 콜록댔다. 화들짝 놀란 해완은 허둥지둥 해언에게 다가가 무릎을 꿇었다.
“어, 어떡해, 해언아. 괜찮아? 안 다쳤어? 미안해, 내가, 어, 그러니까…….”
해언이 제게 키스했다는 사실과 제가 해언을 다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패닉이 온 해완은 제가 무슨 말을 하는지도 모른 채 횡설수설하며 해언을 일으켜 주기 위해 몸에 손을 댔다.
그런데 바닥에 널브러진 해언이 갑자기 크게 웃음을 터트렸다. 몸을 웅크린 채 폭소하는 해언의 모습에, 해언을 잡아 일으키려던 해완은 멈칫 몸이 굳어 버렸다.
거의 발작적으로 보이는 웃음이 그치고, 해언은 제 손으로 상체를 일으켜 바닥에 앉은 채 깊게 고개를 숙이며 눈가를 손으로 가렸다.
그 상태로 해언은 잠시 말이 없었다. 종잡을 수 없는 해언의 행동에 있는 대로 겁이 난 해완이 떨면서 다시 해언에게 손을 뻗었다.
“해언아, 너, 너 오늘 대체 왜 그래. 괜찮…….”
고개를 든 해언이 해완의 왼쪽 뺨을 거세게 내려친 것이 바로 그때였다.
얼굴이 옆으로 홱 돌아갈 정도로 강한 타격에 해완은 그대로 뒤로 주저앉았다. 무슨 일인지 상황 파악이 되질 않아,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몇 초간 굳어 있던 해완은 얻어맞은 뺨에 손을 올리고 해언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그렇게 시선이 마주치자마자, 해언은 곧바로 반대쪽 뺨을 후려갈겼다.
“해, 해언…….”
방어할 새도 없이 가해지는 연이은 폭행에 머릿속이 하얗게 변했다.
그런 해완의 앞에서 해언은 표정의 변화 하나 없었다. 그저 거칠게 머리채를 휘어잡아 머리를 고정시키더니 재차 손을 높게 들어 올렸다.
철썩, 손바닥과 여린 뺨이 사정없이 연속해서 맞붙는 소리가 창고 안에 울렸다. 입 안이 터졌는지 혀에 쇠 맛이 번졌다. 귓속에서 날카로운 이명이 울렸다.
해언은 해완보다 키도, 체격도 작았다. 막아 내려고, 밀쳐 내려고 하면 얼마든지 그럴 수 있었어야 했다. 하지만 해완은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온몸의 근육이 얼어 버리기라도 한 것처럼, 손끝 하나 까딱하지도 못하고 해언의 폭행을 받아들이고만 있었다.
어느 순간, 해언은 쥐고 있던 해완의 머리채를 뒤로 확 밀어 버리듯 놓더니, 다시 뺨을 갈길 듯 손을 들어 올렸다.
그럼에도 해완은 얼굴을 가리는 것조차 하질 못했다. 숨을 씨근대며 크게 열린 눈으로 저를 보는 일 말고 무엇도 하지 못하는 그를 확인하고서야, 해언은 무언가 만족이라도 한 듯이 팔을 툭 내려놓았다.
해언은 평소와 다름없는 천사 같은 얼굴로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해완아, 왜? 몸이 안 움직여져서 놀랐어?”
“…….”
“어릴 때 맞고 커서 그런 건지, 너 누가 때리려고 하면 이렇게 완전히 굳어 버리잖아.”
“…….”
“네가 그런다는 걸 너 스스로도 모르고 있었겠지만, 나는 알았어.”
“…….”
“나만 알았어.”
또 가면을 갈아 끼운 듯 한순간에 해언의 얼굴의 미소가 사라졌다. 해완의 멱살을 팽개치듯이 놓은 해언은 그대로 몸을 일으켜 해완의 배를 거칠게 걷어찼다.
“윤해완 너 스스로보다 내가 너를 더 잘 아는데.”
컥, 하고 해완이 반사적으로 몸을 웅크렸다. 그럼에도 해언은 해완의 몸을 계속해서 걷어차며 중얼거렸다.
“네 이름도 내 거에서 따온 거고, 네 생일도 내 거를 빌려 쓰는 주제에.”
연이은 발길질이 힘에 부친지 해언은 심장 부근을 누르고 헉헉 숨을 몰아쉬었다. 그는 모로 웅크리고 있는 해완의 어깨를 발로 짓이겨 똑바로 눕히고는 목덜미를 발로 꾹 짓누르더니, 미친 사람처럼 악에 받친 목소리로 언성을 높였다.
“그런데 어떻게 너한테 내가 필요 없어! 어떻게!”
목을 압박하는 고통에 생리적인 눈물이 흘렀다. 해완이 숨을 꺽꺽대자 해언은 그제야 해완의 목덜미를 힘껏 압박하고 있던 발을 거뒀다. 그는 갑자기 몰아치는 산소에 정신없이 기침을 하는 해완의 멱살을 쥐고 상체를 홱 일으켜 세웠다.
해완은 망가진 인형처럼 벌벌 떨며 해언을 바라보았다. 반쯤 공황 상태에 빠진 탓에 그의 호흡은 숨을 쉰다기보다 그저 힉힉대고 있는 것처럼 들렸다. 빨갛게 부어터진 양 볼과 피가 맺힌 입술 위로 연신 뜨거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해완의 엉망으로 우는 얼굴에 해언의 표정이 일순 일그러졌다. 그는 달려들듯이 해완의 목덜미를 껴안았다. 힘을 주지 않고 있던 해완의 몸이 힘없이 뒤로 넘어갔고, 두 사람은 함께 바닥으로 쓰러졌다.
해완의 위를 덮치고 누운 채로 해언도 울음을 터트렸다. 얼굴이 맞닿아 있는 해완의 목덜미가 눈물로 젖어 들어 감과 동시에, 해언은 절박하게 중얼거렸다.
“사랑해, 해완아. 나는 너밖에 없어. 너만 사랑했어. 내가 사랑할 수 있는 건 너밖에 없어……. 그러니까 네가 나한테 이러면 안 돼. 너는 나한테 이러면 안 돼…….”
고개를 번쩍 든 해언은 떨리는 손으로 해완의 볼을 어루만지며 애원했다.
“말해, 너는 내 거라고.”
“…….”
“네가 그렇게만 말하면 우리 다 원래대로 돌아갈 수 있어. 그러니까 말해. 응?”
반쯤 넋이 나간 채, 해완은 한배에서 난 것처럼 모든 일상을 공유하며 자라 온 해언의 낯선 이면을 믿을 수 없다는 듯 바라보았다.
지금 제가 겪고 있는 일을 믿고 싶지 않았다. 간절히 시간을 되돌리고 싶었다. 차라리 전부 잊을 수 있기를 바랐다.
하지만, 해완은 고개를 저었다. 온몸이 마비된 것처럼 굳어 있던 탓에 미약했던 부정은 시간이 흐를수록 확고해져 갔다.
눈물을 철철 흘리면서도 고개를 젓는 해완의 모습에, 해언의 얼굴은 타오르는 분노로 무섭게 일그러졌다.
해언은 천천히 몸을 일으켰다. 여전히 해완의 배 위에 걸터앉은 채였다. 그는 손등으로 눈물로 얼룩진 얼굴을 닦아 내고는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싫어?”
“…….”
“그럴 거면 차라리 죽어 버려.”
해언은 그대로 해완의 목덜미에 두 손을 올리고 있는 힘껏 목을 조르기 시작했다.
정말 숨이 막히고 눈앞이 돌기 시작하자 해완은 발버둥을 쳤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체중을 실어 목덜미를 내리누르는 해언의 손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의식이 희미해지기 시작하자 해완의 눈이 반쯤 뒤로 돌아갔다. 점점 흐려지는 정신 사이로, 미친 사람처럼 중얼거리는 해언의 목소리가 독약처럼 스며들었다.
그냥 내 옆에 있겠다고 하면 됐잖아.
그럼 이렇게 아플 일도 없었을 텐데.
그러니까 이건 다, 너 때문에 일어난 일이야.
우리를 이렇게 만든 건 나를 거부한 네 잘못이야.
그것이 해완에게 남은 그 창고에서 해언과의 마지막 기억이었다.
* * *
정신이 들었을 때 해완은 어둠 속에 혼자 남겨져 있었다.
얼굴, 배, 그리고 목덜미에서 느껴지는 통증 외에도 얼음장 같은 바닥에 한참 누워 있던 탓에 몸이 굳어 상체를 일으키는 것만으로도 한참이 걸렸다.
바닥을 기다시피 해서 창고를 빠져나온 해완은 몇 번이나 쓰러질 뻔하며 보육원을 향해 비척비척 걸음을 옮겼다.
다행이도 저녁 시간이라 모두들 식당에 있는 모양인지 남들에게 들키지 않고 보육원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해완은 상처를 살필 기력도 없이 그대로 방 안에 누워 기절하듯이 다시 잠들었다.
밤새 고열에 시달리던 해완을 원장 선생님은 다음 날이 되어서야 발견했다. 목에 난 손자국이나 피멍이 든 복부는 숨길 수 있었지만 엉망으로 얻어터진 얼굴만큼은 숨길 수 없어서, 보육원 전체가 난리가 났다.
해완은 길을 가다가 모르는 사람에게 폭행을 당했다고, 너무 어두워서 그 사람의 얼굴을 보지 못했다는 말만 계속해서 반복했다.
다음 날, 원장 선생님이 유준의 손을 잡고 해완의 방으로 찾아왔다. 그러고는 해언이 너를 때리는 것을 유준이가 봤다고 하는데 사실이냐고 믿기지 않는 목소리로 물었다.
해완이 종종 그 창고에 가곤 한다는 사실을 유준에게 한번 알려 줬던 게 화근이었던 모양이었다. 어린 유준에게 그런 꼴을 보게 한 건 미안했지만 사실대로 말할 수는 없었다.
그랬다가는, 해언을 영영 다시 보게 될 수 없을까 봐 겁이 났다.
해완은 내내 심하게 앓았다. 온몸이 다 아팠지만 가장 고통스러운 것은 해언이 저와 다른 마음으로 저를 사랑하고 있었다는 사실로 인해 받은 충격과 그가 한 짓에 대한 마음의 상처였다.
고열과 통증으로 인해 해완은 대부분의 시간을 잠들었다 깨어나는 일만 반복했다.
그러던 어느 순간, 눈을 떠 보니 해언이 자신의 옆에 앉아 있었다.
사위가 어두운 가운데 옅은 미등의 불빛만이 어른거렸다. 해완이 눈을 뜬 것을 알면서도 해언은 그저 조용히 그를 내려다보기만 할 뿐 아무런 말도 하질 않았다.
결국 해완이 먼저 입을 열었다. 목을 졸려 기관지가 상한 탓에 쉰 목소리가 나왔다.
“……다신 안 그러겠다고 약속해.”
생각지도 못했던 말이었는지, 인형같이 무표정한 얼굴을 하고 있던 해언의 얼굴에 노골적으로 의아한 기색이 비쳤다.
울컥 눈물이 고여 해완은 메마른 입술을 꽉 악물었다. 서러운 흐느낌 또한 폭력적으로 북받쳐 올랐지만 반드시 해야만 하는 말이었다.
결국 해완은 끅끅 소리 내어 울면서도, 포기하지 않고 끝까지 말을 끝맺었다.
“다, 다시 그러지만 않으면 용서해 줄 테니까…… 다신 안 그러겠다고 야, 약속, 약속해…….”
그런 해완을 굳은 얼굴로 바라보던 해언의 표정이, 숨길 수 없게 참담하게 일그러졌다.
무릎 위에 단정하게 올라와 있던 손이 강하게 주먹 쥐어지는가 싶더니, 해언은 이제껏 해완조차 본 적 없는 감정의 동요를 일으키며 거칠게 입을 열었다.
“멍청한 새끼.”
“…….”
“나는 다시 그 순간이 와도 그렇게 할 거야.”
“…….”
“백 번이고 천 번이고, 너한테 그렇게 할 거라고.”
해언이 제게 가한 폭력보다, 그 말이 더욱 해완의 마음을 찢어 놓았다.
해완은 부들거리는 두 손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손 밑으로 새어 나오는 울음소리가 점점 커져 가는 사이, 해언은 그대로 자리를 박차고 해완의 곁을 떠나 버렸다.
한없이 울고 또 울다 지쳐 잠이 들었다. 그리고 깨어나니, 마음이 비어 있었다.
사라진 기억은 누더기 같은 거짓 알리바이들로 기워졌다. 그 스스로를 속이는 데는 딱히 정교함이 필요하지 않았다.
그래도 몸이 아픈 것은 어쩔 수 없어서 해완은 며칠을 더 앓았다.
그리고 언젠가 강현의 집에서 꿨던 꿈처럼, 해언이 제 이불 속으로 들어왔다.
“……해언아, 이제 들어온 거야?”
“……응.”
“손이 얼음장 같네. 추운데 이렇게 늦게 다니니까 그렇지.”
“…….”
“해언아, 얼굴이 왜 그래? 무슨 일 있었어?”
“…….”
“왜 말을 안 해, 서울에서 무슨 일 있었던 거야?”
“……서울?”
“서울 갔다 온 거 아니야? 너 요 며칠 동안 보육원에 안 들어왔잖아.”
해완이 해언의 차가운 손을 잡아 쥐어 따뜻하게 해 주려고 애썼을 때, 해언의 표정은 드물게 얼이 빠져 있었다.
하지만 곧바로, 그 똑똑한 머리로 모든 것을 파악한 듯 해언은 느리게 미소를 지었다.
“……응. 맞아. 서울, 서울 갔다 왔지.”
해완은 아무것도 모른 척 태연하게 거짓말을 하던 해언의 얼굴을 떠올렸다.
다정하게 머리를 쓸어 넘기고, 얼굴을 보듬고, 언제나 그랬던 것처럼 천사같이 상냥하게 웃던 얼굴을.
“해완아.”
“응?”
“날 미워한다고 말해 봐.”
“…….”
“날 싫어한다고 말해 봐.”
“안 미워.”
“…….”
“안 싫어.”
해완은 기억하지 못해도 해언은 알고 있었다. 제 말마따나 해완이 모르는 해완의 모습까지 알고 있는 해언이었으니, 해완이 왜 그 기억을 지워 버렸는지도 알고 있었을 것이다.
“넌 날 절대 미워하지 않을 작정이구나. 내가 무슨 짓을 해도. 그치?”
해완이 해언을 미워할 수 없었기 때문에 그랬다는 것을.
그걸 알고 있었으면서도, 해언은 죽는 그때까지도 어떤 용서도 구한 적이 없었다.
* * *
평일 늦은 오후의 납골당에는 사람이 없었다. 다행이었다. 조용히 끝날 이야기를 하기 위해 이곳에 온 것은 아니었으므로.
해완은 사진 속 해언의 얼굴을 노려보며,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니가 어떻게 나한테 그래.”
해언은 대답이 없었다. 사진 속 얼굴도 똑같았다. 변함없이 환하게 웃기만 했다.
그게 미친 듯이 화가 치밀어서, 해완은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버럭 소리를 질렀다.
“나한테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악을 쓰는 것만으로는 마음에 맺힌 응어리는 조금도 풀리지 않았다. 이제껏 단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폭력적인 충동에 휩싸여, 해완은 온 힘을 다해 납골함이 들어 있는 창을 주먹으로 내리쳤다.
“어떻게 그럴 수가 있어! 대체 어떻게! 대체 어떻게 나한테 그럴 수가 있어!”
“…….”
“찾아오질 말았어야지, 그딴 짓을 하고 떠난 거면, 다시 찾아오지도 말았어야지!”
쾅쾅 소리가 나도록 연속해서 내리치는 사이 납골당 창에 금이 갔다. 금이 간 유리에 베인 상처로 피가 흐르는 해완의 주먹이, 천천히 느려졌다.
“그러고도 뻔뻔하게 찾아올 거면, 이렇게 죽어 버리질 말았어야지…….”
몸을 가눌 수 없을 정도로 눈물이 쏟아져 내렸다. 해완은 그대로 납골당 차가운 대리석 바닥에 무릎을 꿇고 온몸을 옹송그렸다.
해완은 머리를 감싼 채 주먹으로 바닥을 내리치며 울었다. 울분에 가득 차 언어가 될 수 없는 그 흐느낌 사이로, 언젠가부터 누군가의 이름이 섞였다.
“……강현아…….”
그러지 말았어야 했다.
적어도 나는, 해언이가 너를 사랑했다고 믿게 만들지는 않았어야 했다.
“흑, 강현아, 흐윽, 강현아…….”
찢어져 내리는 마음을 그의 품에 안겨 위로받고 싶었다. 하지만 불가능했다. 자신을 해언으로 생각하는, 해언이 그를 사랑했다고 제 손으로 믿게 만든 그에게는 갈 수 없었다.
갈 수 없다는 것을 알아서 더욱 크게 그의 이름을 부르며 울었다.
* * *
조향대 앞에 앉아 작업 중이던 강현의 시선이 문득 흐려졌다. 눈과 귀와 코와 그리고 손끝, 그 모든 곳에 자꾸만 어젯밤의 기억이 맴도는 탓이었다.
‘사랑해, 강현아.’
그 말을 하는 해완에게서는, 어지러울 정도로 진한 꽃향기가 나는 착각이 들었다.
사람들은 남에게 받은 만큼만 제 것을 주고 싶어 한다. 그것이 딱히 나쁘다고 생각한 적은 없다. 누구나 다 상처받기는 싫어하는 법이니까.
그래서 해완이 제게 그 말을 했을 때, 저도 돌려주어야 될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강현은 눈앞이 아득해짐을 느꼈다.
이런 순간을 예상하지 못했던 것은 아니었다. 그러나 고작 말 한마디일 뿐이므로, 다른 사람들의 얼굴을 따라 하는 건 그가 평생을 해 온 일이었으므로 어려울 일이 없을 것이라 생각했다.
하지만 아무리 노력해 봐도, 어떤 말도 할 수가 없었다.
그 짧고도 긴 사이, 우습게도 강현의 머릿속에 떠오른 것은 예전 어느 겨울 윤해언과 마지막으로 나누었던 그 대화였다.
‘그러니까 네가 설명해 봐. 내가 널 만나야 되는 이유.’
해언이 서늘한 목소리로 저에게 그렇게 물었을 때, 왜 윤해언에게 들었던 ‘좋아한다’라는 말을 따라 답해야겠다고 여겼는지, 9년이 지난 지금에서야 겨우 깨달은 기분이었다.
그 말에는 아무 감정도 없었다. 그저 공허하고, 텅 비어 있었다.
그래서 그렇게 손쉽게 그 말을 따라 할 수 있으리라 생각했던 것이다.
하지만 해완의 사랑한다는 말은 너무 무겁고 깊어서, 감히 그것을 흉내 내어 입에 담을 엄두를 낼 수가 없었다.
제 안에도 해완을 향한 무언가가 있다는 것은 알았다. 하지만 강현은 그게 무언지 아직도 잘 알 수가 없었다. 아니, 그것이 사랑이라 해도 제대로 된 형태인지도 알지 못했다.
순간, 온몸에 소름이 오싹 끼칠 정도로 큰 공포가 몰려왔다. 섣불리 입 밖에 내었다가, 그 모든 게 가짜임을 눈치챈 해완이 저를 버리고 도망쳐 버릴까 봐.
그래서 해완에게 입을 맞췄다. 혹시라도 그가 제게 그 말을 돌려 달라고 요구할까 그게 무서워서 아무 말도 하지 못하게 키스하고 몸을 몰아붙였다.
그리고 그 밤 내내, 해완은 단 한 번도 자신을 사랑하냐고 묻지 않았다.
강현은 흐려진 시선으로 오래도록 미동 없이 앉아 있었다. 자꾸만 마음 깊은 곳에서 치솟는 불안감을 어쩌지 못해 손끝이 저릿저릿했다.
우스운 일이었다. 그가 난생처음으로 느껴 본 평화로움을 양분 삼아 태어난 것이 지독한 불안이라는 사실이 말이다.
그 불안을 가라앉히기 위해 강현은 어젯밤 꾼 꿈을 생각했다.
평소 강현은 거의 꿈을 꾸지 않았다. 상상력이나 감정적인 사고 처리가 부족한 감정 표현 불능증의 특징상, 어쩌다 꿈을 꿔도 다른 사람들처럼 비현실적인 종류가 아닌 오로지 현실에서 겪은 사건을 기반으로 한 재현적인 꿈만 꿨다.
하지만 어제만큼은, 몇 년 만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 그런 꿈을 꿨다.
꿈속에서 강현은 9년 전 그 버스 정류장 벤치에 앉아 있었다.
그 마을에 있을 때는 시력이 상실된 상태였기 때문에, 실질적으로 강현이 그 버스 정류장을 직접 제 눈으로 본 건 몇 개월 전 해완과 그곳을 찾았을 때가 처음이었다.
하지만 꿈속의 버스 정류장의 모습은 그때 봤던 모든 잎을 떨군 고독한 거목 밑에 낡을 대로 낡은 벤치가 버려져 있는 초라한 것이 아니라, 뜨거운 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초가을, 여린 붉은빛이 섞인 풍성한 푸른 잎이 머리 위로 드리워진 그런 화사한 풍경이었다.
그리고, 제가 앉아 있는 도로를 사이에 두고 교복을 입은 해완이 서 있었다.
해완은 강현이 봤다는 사실을 알지 못하는 그의 학창 시절 사진 속 모습 그대로, 그 도로 건너편에 서서 환하게 웃으며 저한테 손을 흔들고 있었다.
그 웃는 얼굴에 마음이 벅차 말을 걸려고 일어서려던 때, 강현은 그대로 잠에서 깼다.
고작 그 얼굴을 떠올렸을 뿐인데도 심장이 터져버릴 듯 두근거렸다.
그러나 엄밀히 말하자면 지금 강현의 가슴을 뛰게 하는 것은 그 꿈의 내용이 아니라 저도 모르게 떠올리게 되는 어떤 가정이었다.
만약 그게 우리의 첫 만남이었다면.
그랬다면 지금 우리의 모습은 뭔가 달라져 있을까.
이제는 이뤄질 수 없는 가정임을 알면서도 제멋대로 뛰는 마음을 어쩌지 못해 손을 들어 그 위를 꾹 내리눌렀다.
온몸 곳곳에서 신경이 곤두서고 피가 끓었다. 강현은 오늘 하루 수도 없이 쳐다보았던 시계를 다시 바라보았다.
해완이 퇴근하기까지는 한 시간이 넘게 남아 있었고 편의점까지는 차로 15분이면 가는 거리였지만 도저히 가만히 앉아 있을 수가 없어 조향대 위를 제대로 정리도 하지 않고 휙 몸을 일으켜 작업실 문을 나섰다.
편의점까지 운전하는 내내 강현은 초조하게 핸들을 쥔 손을 가만두지 못했다. 해완이 있는 곳에 가까워지면 가까워질수록 자꾸만 더해 가는 심장 고동에, 어린애라도 된 것처럼 입을 벌리고 크게 심호흡을 해야 될 정도였다.
편의점 앞에 차를 대고 좀 기다릴 생각이었지만 도저히 그마저도 할 수가 없었다. 결국 차 문을 열고 내린 강현은 성큼성큼 걸어 편의점으로 갔다. 쓸데없이 고지식한 해완이 제가 찾아왔다고 해서 일찍 퇴근을 해 줄 리 없겠지만, 얼굴이라도 보며 죽치고 있으면 좀 나을 것 같았다.
문을 열자마자 곧바로 계산대로 직행하려던 강현은 그 안에 해완이 아닌 다른 아르바이트생이 서 있는 것을 보고 멈칫했다.
어리둥절해진 그는 주위를 잠시 둘러보다가 계산대 앞으로 갔다.
“혹시 윤해완 씨 퇴근했나요?”
강현의 물음에 아르바이트생은 영문을 모르겠다는 얼굴로 대답했다.
“해완 오빠요? 오늘 일이 있어서 오전 근무만 하고 집에 갔는데요. 무슨 일이세요?”
금시초문인 이야기에 강현은 눈을 크게 부릅떴다. 그는 곧바로 코트 주머니에서 핸드폰을 꺼내 해완에게 전화를 걸며 편의점을 빠져나왔다.
해완은 전화를 받지 않았다. 강현은 연신 통화 버튼을 누르고 또 눌렀다. 하지만 아무리 신호가 가도, 해완은 끝내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온몸의 피가 발끝으로 쏟아져 내리는 기분이었다. 떠올리고 싶지 않은 가정이 일으키는 매서운 분노와 공포가 강현의 온몸을 부들부들 떨게 만들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분명 떠나지 않겠다고 했어. 버리지 않겠다고 했어.
강현은 무섭게 굳은 얼굴로 해완의 집까지 달리기 시작했다. 현관문은 굳게 닫혀 있었는데, 미친 듯이 문을 두드리고 이름을 불러도 안은 조용하기만 했다.
혹시 자신의 집으로 갔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번뜩 들어, 강현은 차로 되돌아와 정신없이 제집을 향해 차를 몰았다.
하지만 강현의 집에도 해완은 없었다.
그쯤 되자 머리가 터져 버릴 것 같았다. 몇십 통을 걸었는지 모를 전화를 누르고, 또 누르며 다시 해완을 찾아 나서려던 강현은 우뚝 걸음을 멈춰 섰다.
대체 해완이 갈 곳이 어디인지 떠오르질 않았다.
제가 해언이라고 속이고 있다는 것을 의식해서인지 해완은 좀처럼 자신의 과거 이야기를 잘 하려 들지 않았다. 강현은 해완이 잠깐 대학을 다닌 적이 있다는 것도 흥신소에서 보내온 자료를 통해 알았다.
강현이 알고 있는 해완과 유일하게 가까운 사람인 유준도 이제 해완의 곁에 없었다. 제 손으로 그의 곁에 있을 수 없게 보내 버렸다.
미친 사람처럼 차 앞에서 왔다 갔다 하며 머리를 쥐어뜯던 강현의 뇌리에 해완이 자란 보육원이 스쳐 지나갔다.
몇 시간이 걸리는 거리였지만 거기라도 가 봐야겠다는 생각에 강현은 차에 타 시동을 걸었다. 이대로 가만히 앉아 기다리기엔 돌아 버리고도 남겠다 싶었다.
그런데 그때, 품 안에서 전화 수신을 알리는 진동이 느껴졌다.
그의 서브 폰에서 울리는 알림이었다. 혹시나 하는 생각에 허겁지겁 전화를 꺼내 든 강현의 눈에, 액정에 뜬 ‘서인하’라는 이름이 보였다.
무시하려 했으나 왠지 이상한 예감이 가슴을 휩쓸었다. 강현은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안녕하세요, 여강현 씨.
“무슨 일이죠?”
예의 따위는 집어치운 단도직입적인 질문에 인하는 당황이라도 했는지 잠시 말이 없었다. 쓸데없는 소리를 하면 바로 전화를 끊어 버릴 생각이었으므로 달리 상관하지는 않았다.
―……혹시 해언이랑 같이 있습니까?
그러나, 인하의 입에서 흘러나온 이름에 강현은 생각할 겨를도 없이 급하게 물었다.
“당신이 왜 해언이를 찾아.”
무례한 말투에도 인하는 별다른 동요 없이 말을 이었다.
―오늘 잠깐 만나서 무슨 이야기를 했는데……. 그 이야기 때문에 꽤 충격을 받은 것 같아서, 걱정이 돼서요.
“뭐? 대체 무슨 이야기를 한 거야!”
해완이 또다시 저 몰래 서인하와 만났다는 사실에 반쯤 눈이 돈 강현이 버럭 소리를 질렀다. 인하는 그저 냉정한 어투로 받아쳤다.
―그 이야기는 그쪽한테 할 이유가 없고, 일단 해언이부터 찾는 게 낫지 않겠어요?
“당신이랑 마지막으로 만난 데가 어디야, 당장 말해!”
수화기 안에서 잠시 침묵이 흘렀다.
―좋아요. 대신 여강현 씨가 먼저 답해야 될 질문이 하나 있어요.
그리고, 인하는 강현이 뭐라 말하기도 전에 서늘한 목소리로 곧바로 말을 이었다.
―당신 정말, 그 사람이 윤해언이라고 생각하는 거예요?
순간, 강현은 누군가 목을 틀어쥐기라도 한 것처럼 말문이 막혀 버렸다. 찰나의 침묵이었는데도 인하는 모든 것을 눈치챈 듯 조소 어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역시 그럴 줄 알았어.
“…….”
―당신처럼 집착이 심한 사람이, 나한테 해언이 향을 만들어서 주는 게 이상하다고 생각했거든.
핸드폰을 부서져라 쥔 강현의 주먹이 부들거리며 떨렸다. 무슨 생각인지 잠시 입을 다물고 있던 인하는 길게 한숨을 내쉬더니, 피곤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공항에서 만났었어요. 당신 때문에 유준이가 하도 겁을 먹어서, 다른 지역으로 떠나고 싶어 했는데 해완 씨한테 같이 가자고 했거든요.
“…….”
―하지만 윤해완 씨는 안 가겠다고 하더군요. 당신 곁을 그냥 떠날 수 없다고.
“…….”
―그리고 나랑 얘길 나누고, 공항에서 헤어졌어요. 그래서 난 당신을 보러 간 줄 알았어요.
온몸에 힘이 풀려, 핸드폰을 쥐고 있던 강현의 손이 아래로 툭 떨어졌다. 바닥으로 떨어진 핸드폰에서 인하가 뭐라 말하는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지만 상관없었다.
강현은 허리를 깊게 수그리고 머리를 움켜쥔 채 숨을 씨근거렸다. 너른 어깨가 거칠게 들썩이다가 가라앉는 것을 반복한 뒤, 핏발이 선 눈으로 고개를 들고는 차를 출발시켰다.
무슨 일이 있어도 찾을 생각이었다. 일단 다시 처음부터 시작할 생각으로 강현은 해완의 집으로 차를 몰았다. 그러고 보니 집 안을 확인하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어서였다.
“해언아! 윤해언!”
해완의 집에 도착한 강현은 한 번 더 문을 두드리고 소리를 질렀지만 역시 아무런 반응이 없었다. 이를 악문 채 주위를 둘러보던 그는 마당에 버려져 있는 의자를 발견해 그것을 들고 거실을 향해 나 있는 창 앞에 섰다.
현관 옆 창을 향해 한 번 크게 휘두르자 유리는 와장창 소리를 내며 박살이 났다. 깨진 틈 사이로 손을 넣어 창의 잠금장치를 푼 강현은 창을 통해 집 안으로 들어왔다.
깨진 유리에 긁힌 손등의 상처에서 피가 흐르는 것도 무시하고 그는 숨을 거칠게 몰아쉬며 집 안을 둘러보았다.
사람이 드나든 흔적이 없이 어두운 집 안은 한 치의 온기도 느껴지지 않게 냉골이었다. 강현의 시선이 닫혀 있는 방문으로 향했고, 성큼 걸음을 옮긴 그는 곧바로 문을 열어젖혔다.
방 안은 역시 지독히 어두웠다. 언뜻 보면 텅 비어 있는 것처럼도 보였다. 그러나 곧, 방구석에 웅크려 있는 인영을 발견한 강현의 심장이 발밑으로 쿵 하고 떨어졌다.
온몸을 잔뜩 옹송그린 채 벽을 향해 누워 있는 해완은 마치 죽은 사람처럼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고 있었다.
제가 시끄럽게 문을 두드리는 소리도, 창을 깨고 들어오는 소리도 듣지 못했을 리가 없는데도 아무런 반응이 없는 해완에 아연실색한 강현은 털썩 무릎을 꿇고는 해완의 몸을 돌려 눕히기 위해 허겁지겁 손을 뻗었다.
그러나 강현의 손이 해완의 어깨에 닿자마자, 해완은 그 손길을 거칠게 퍽 밀쳐 냈다. 그가 정신을 잃었다고 여기고 있었던 강현은 흠칫 놀라 그대로 굳어 버렸다.
해완은 몸을 더욱 깊게 웅크리며, 높낮이 없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한데 나 좀 혼자 쉬게 해 줘.”
“…….”
“내가 너무 피곤해서 그래.”
목소리에는 거부의 뜻이 분명했다. 돌아누운 뒷모습마저 너무나 완강해서, 강현은 그답지 않게 어쩌지도 못하고 멍하니 굳어 있었다.
잠시 그렇게 앉아 있던 강현은 아주 천천히 손을 뻗어 살짝 해완의 어깨 위에 올렸다. 순간 해완의 몸이 긴장하는 게 느껴졌지만, 그가 억지로 돌아 눕히려고 하지 않는 한 벗어나려고 들 것 같지는 않았다.
강현은 해완의 뒤에 조심스럽게 몸을 눕혔다. 등에 가만히 손을 댄 채로 함께 숨을 내쉬고 마시는 것을 반복하다가, 팔을 뻗어 마른 몸을 살며시 감쌌다.
물어야 한다는 것을 알았다. 무슨 일이냐고, 무슨 이야기를 듣고 이렇게 괴로워하는 거냐고.
하지만 지금 해완의 모습을 보기만 해도 그가 자신에게 사실대로 말할 리 없음을 모를 수 없었다. 그가 제게 거짓말을 하고 있다고 생각하는 한 영원히 솔직해질 수 없는 부분이 존재할 수밖에 없었으니까.
만약 지금, 네가 누군지 알고 있다고 이야기한다면…….
악다문 강현의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이미 해완은 제가 망가진 인간이라는 걸 알아 버렸다. 그런 데다 이 관계를 거짓으로 몰고 온 사람이 사실 저였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그는 절대로 자신을 용서하지 않을 터였다.
그러니 강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고작해야 목적 없는 애원이었다.
“……말해.”
“…….”
“나한테 말해, 제발…….”
그렇게 애원하며, 강현은 매달리듯이 해완을 떨리는 손으로 꼭 껴안았다.
등 뒤에서 강현의 온기가 몸을 감싸는 것이 느껴졌지만, 해완은 번히 뜬 눈으로 눈앞에 놓인 어둠만을 바라보았다.
머릿속을 잠식해오는 그 어둠 사이로 낮에 들었던 인하의 목소리가 떠올랐다.
도대체 해언이 왜 지난 8년간 강현과 연락을 지속하며 해언 자신을 기다리게 만들었냐는 해완의 질문에, 인하는 쓰게 웃으며 조용히 답했다.
‘그렇게 해야 여강현 씨가 쓸데없는 희망에 매달려서 영영 행복해지지 못할 테니까.’
‘왜, 대체 왜 그런…….’
‘해언이가 세상에서 그 남자만큼 증오한 사람이 또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
‘당신을 뺏어 갔잖아.’
이미 짓무를 대로 짓무른 해완의 눈에서, 질리지도 않고 조용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뭘 말하라는 걸까.
해언이는 조금도 널 사랑하지 않았다고.
나를 사랑했기 때문에 너를 증오했고, 그렇게 네 가치를 깎아내리고 조종하다가,
마지막에는 나까지 너를 미워하기 바라서 쓰다 질린 장난감처럼 나에게 던져 줬다고.
네가 유일하게 사랑한 사람은 널 이용만 했을 뿐이고, 그리고 그 공범이 바로 나라고.
그렇게 네게 말하라고 하는 걸까.
해완은 눈을 감았다. 눈을 떠도 감아도, 사라지지 않는 어둠은 달라질 것이 없었다.
* * *
쏟아지는 햇살에 잠에서 깨어나고 나서도 한없이 무거운 눈꺼풀에 해완은 한동안 애를 먹고서야 겨우 눈을 뜰 수 있었다.
아주 오래 잔 것 같은데도 이상하게 피곤이 가시질 않았다. 정신이 돌아오길 기다리며 멍하니 누워 있는 사이, 머리를 쓸어 올리는 부드러운 손길이 느껴졌다.
슬쩍 시선을 돌리자 어느새 제 옆에 다가와 앉은 강현이 옅은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일어났어?”
짙은 잠기운에 흐린 머리로도 해완은 어제 강현의 집에 왔다는 사실을 떠올렸다.
그 어둡고 찬 방 안에서 한동안 해완을 껴안고 있던 강현은 기회를 노려 살며시 해완의 팔을 끌어 앉혔다. 해완이 별 저항 없이 일어나 앉자 그는 해완을 꼭 끌어안고 볼에 입을 맞추며 이제 내가 다 알아서 할 테니 괜찮다는 말을 속삭였다.
뭘 다 알아서 한다는 걸까, 라는 의문이 들었지만 그것을 입 밖에 내어 묻는 것조차 너무나 지치는 일처럼 느껴졌다.
그래서 해완은 얌전히 강현이 이끄는 대로 집을 나서고 그의 차에 탄 다음에 그대로 강현의 집으로 향했다.
집에 도착한 강현은 따뜻한 물을 욕조에 받은 뒤 해완의 옷을 전부 벗겨 내고 그의 몸을 조심스러운 손길로 씻기고 다시 잠옷을 입혔다. 그리고 해완을 안아 든 채로 침실로 들어와 침대에 눕혀 주고는, 완전히 잠들 때까지 품에 안고 등을 쓸어내려 주었다.
내가 얼마나 잔 거지. 해완이 몸을 일으켜 앉으려 하자 강현이 부축해 주었다. 해완은 그의 팔을 붙들고 허둥지둥 중얼거렸다.
“강현아, 지금 몇 시야?”
“지금? 지금 12시 반인데.”
“뭐? 나 일하러 가야 되는데 왜 안 깨웠어.”
다급히 침대 밖으로 발을 내디디려는 해완의 팔을 강현이 붙들었다. 해완이 눈을 휘둥그레 뜬 채 바라보자, 그는 침착한 목소리로 차분히 물었다.
“어제 편의점 그만둔다고 했잖아. 기억 안 나?”
“……어?”
순간, 침대 위에서 제게 죽을 떠먹여 주는 강현의 모습과, 그가 해완의 손을 잡고 속삭이던 목소리가 번뜩 떠올랐다.
‘너 좀 쉬어야 돼. 그러니까 편의점 일 그만두자.’
그런 말을 하는 강현의 목소리가 너무 부드럽고 상냥해서, 해완은 그냥 아무 생각 없이 고개를 끄덕였었다.
강현의 집에 온 것이 어젯밤의 일이라고 생각했는데 아니었던 모양이었다. 또 기억이 뒤섞이는가 싶어 당황한 해완은 횡설수설 입을 열었다.
“그치만, 그만둔다고 가서 말이라도 해야…….”
“내가 잘 말했으니까 걱정하지 마. 참, 네 집도 정리했어. 짐도 오늘 아침에 전부 여기로 옮겼고.”
“…….”
“이제 유준이도 없는데 그런 집에서 혼자 살 필요 없잖아. 그치?”
“……하지만…….”
항변하고 싶어 하는 해완의 눈을 바라보며 강현은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무언의 압박에 해완이 언뜻 입을 다물자, 그는 힘 있고 나직한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너 지금 많이 지쳐서 그래.”
“…….”
“그러니까 여기, 나랑 같이 있으면서 푹 쉬면 돼.”
강현의 목소리는 한 치의 흔들림도 없이 단단했다. 마치 해완이 그렇게 하는 것만이 옳은 길이라는 듯이.
하지만, 해완은 멍하니 생각했다.
하지만 얼마 뒤 해언의 생일이 지나고 모든 사실을 털어놓으면 강현은 해언이 아닌 그를 더는 자신의 곁에 두길 원하지 않을 것이다.
그럼 그때 나는 어디로 가면 되는 걸까.
유준이도 이제 나를 보고 싶어 하지 않는데, 그 작은 집이라도 없으면 나는 어디로 돌아가면 되는 걸까.
그러나 곧, 저 자신이 얼마나 뻔뻔한가에 대한 생각이 해완의 얼굴을 수치심으로 벌겋게 달아오르게 했다.
이미 제가 누릴 가치가 없는 사랑과 안식을 충분히 누리고 또 누린 터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아직까지 제 안위나 걱정하는 스스로가 부끄러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수치심이 온 마음을 차갑게 얼리고 모든 생각을 지우게 만들었다.
마비된 마음으로, 해완은 희미한 미소를 지었다.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강현도 기쁜 듯 활짝 마주 웃어 주었다.
* * *
―지금 거신 전화는 전원이 꺼져 있어…….
인하는 핸드폰을 쥔 손을 밑으로 내리고는 난감한 얼굴로 짧게 한숨을 쉬었다.
지난 닷새간 윤해완의 전화는 내내 전원이 꺼져 있었다. 오늘 오전에는 그가 일하는 편의점까지 가 보았으나, 사장이라는 이에게 며칠 전 윤해완의 애인이라는 키 큰 남자가 찾아와 그만두겠다는 말 한마디만 갑작스레 던지고 갔다는 이야기만 전해 들었다.
그 애인이라는 남자야 어차피 여강현이 분명할 터이나 그 성실한 윤해완이 제 입으로 그만두겠다는 말을 하지 않은 게 영 수상했다.
게다가 전화가 꺼진 상태로 연락조차 되질 않으니, 여강현이 그를 감금하고 있기라도 한 건 아닌가 하는 생각까지 든 인하는 헛웃음을 지었다.
요즘 같은 세상에 감금이라니 우스운 소리여야 마땅하나 그 남자가 한 일을 알고 나니 그저 농담으로만 치부할 수 없는 것이 문제였다.
여강현의 집을 알아내 찾아가는 정도야 어려운 일은 아니겠지만, 어차피 윤해완의 안위가 걱정돼서 이러는 건 아니므로 해언의 생일이 되어 정말 맡은 일을 마무리해야 될 때가 오지 않으면 그렇게까지 하고 싶지는 않았다.
문득 모든 기억을 떠올리고는 세상이 무너지는 듯한 낯빛을 하고 있던 윤해완의 얼굴이 뇌리에 떠올랐다.
그 얼굴을 보며, 인하는 윤해완의 곁에 감히 돌아갈 생각을 하지 못하던 해언의 마음이 아주 조금은 이해가 된다는 생각을 했다.
해언이 이 세상에서 무서워했던 건 오로지 단 하나였다.
바로 윤해완이 자신을 미워하게 되는 것이었다.
해완이 그날의 기억을 지워 버렸다고 하더라도 제 얼굴을 계속 보고 있으면 결국 그때를 떠올리게 될까 봐, 그래서 끝내 저를 미워하게 될까 봐 그렇게 윤해완을 그리워하면서도 몇 년의 세월을 그에게서 떨어진 채 버텨 냈던 것이다.
제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걸 알게 되고 나서도 그런 강박은 사라지질 않았고, 이 말도 안 되는 짓을 꾸민 것도 그 때문이었다.
물론 해완의 마음속에 여강현이 아련한 첫사랑으로 남아 있는 것도 끔찍이 싫었겠지만, 혹시라도 그가 기억을 되살렸을 경우를 대비해 여강현이 문제가 있는 사람임을 알게 만들어 제가 그와의 사이를 방해한 사실만큼은 일말의 정당성을 부여하고 싶었던 모양이었다.
하지만 해언조차도 윤해완이 여강현에게 그런 거짓말을 하고, 그 남자가 한 짓을 보고도 곁에 남을 만큼 그를 사랑하게 된 현실은 예상하지 못했을 것이다.
물론 이제 와서 보면, 그럴 가능성을 예상하지 못했다기보다는 해언 스스로가 믿고 싶은 것만 믿었을지 모른다는 생각이 들기도 했다.
윤해완이 그처럼 망가진 남자를 사랑할 일은 절대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해언 그 자신도 윤해완이 주는 끝없는 애정에 그토록 매달렸기에 지극히 모순적인 생각이었으나, 원래 해언은 그렇게 보통 사람들의 사고방식에서는 훨씬 벗어난, 자기중심적이고 이기적으로밖에 사고할 수 없게 태어난 사람이었다.
인하는 그것을 알았다. 그것을 모두 알고도 해언을 사랑했다.
그래서, 윤해완에게 묻지 않을 수가 없었다.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였으면서도 정말 몰랐어요? 해언이가 보통 사람이랑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거.’
‘…….’
‘그냥 눈감아 버린 건 아니고? 지금 여강현 씨한테도 그러는 것처럼.’
‘…….’
‘당신이 그렇게 눈먼 사랑을 퍼부어 주는 게 해언이나 여강현 씨를 위한 것처럼 보일지 모르겠지만, 봐요. 지금 결과가 어떻게 됐는지.’
악의에 찬 그 목소리에도 윤해완은 떨기만 할 뿐 아무런 답도 하질 못했다.
그 말이 잔인하다는 것을, 불합리하다는 것을, 제게는 윤해완에게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없다는 것을 알았다.
하지만 인하는 윤해완이 멋대로 기억을 잃은 게 싫었다.
기억을 지워 버리고 도망치는 대신, 차라리 해언에게 제대로 화를 내고 원망하고 널 용서할 수 없다고, 그렇게 말했다면, 일이 이 지경까지 오진 않았을 테니까.
인하는 두 손으로 얼굴을 감싸고 허리를 깊게 숙였다. 심장 이식 수술을 받지 않으면 해언이 죽을 수도 있다는 진단을 받던 그날의 기억이 머리를 엉망으로 어지럽혔다.
그때 해언은 고작 스물네 살이었다. 젊다 못해 어린 나이였다. 그런데도 그는 제 여명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소리를 들으면서도 아무렇지 않게 태연해 보였다.
돌아가는 차 안은 조용했다. 한마디라도 입에 냈다가는 흐느껴 울어 버릴까 봐 인하는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고, 해언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내내 창밖을 바라보고 있었다.
신호를 기다리던 어느 순간, 해언이 불쑥 물었다.
‘이제는 해완이한테 돌아가도 괜찮은 거겠지?’
부정할 수 없이 들뜬 목소리였다. 제 귀로 들은 말을 믿을 수가 없어 인하는 해언을 홱 돌아보며 물었다.
‘……뭐?’
‘내가 이렇게 많이 아프다고 하면 불쌍해서라도 옆에 있게 해 줄 거야.’
‘…….’
‘만약 기억을 떠올렸다고 해도, 해완이는 착하니까, 그렇게 해 줄 거야.’
그런 말을 하며, 해언은 눈물이 고인 채 일그러진 인하의 얼굴을 앞에 두고 기쁜 듯 웃고 있었다.
그리고 인하의 마음을 망친 것은 바로 그, 말갛게 웃는 얼굴이었다.
“……완아, 해완아…….”
누군가 저 먼 곳에서, 저를 해완이라고 부르는 것만 같은 착각이 들었다.
온몸이 물에 빠진 듯이 무거웠다. 해완은 붙어 버린 것만 같은 눈꺼풀을 들어 올렸다. 흐릿한 시선이 제게 고정되어 있던 강현의 눈을 향하자, 딱딱하게 굳어 있던 그의 얼굴에 겨우 안도한 기색이 돌았다.
강현은 왜인지 땀이 밴 손으로 해완의 볼을 어루만지며 나직하게 물었다.
“정신이 들어?”
“어……?”
무슨 일인지 알 수가 없어 해완은 입을 벌리고 멍하니 되물었다. 그런 해완의 눈을 바라보며 강현이 한숨 같은 대답을 뱉었다.
“……너 또 정신을 잃었어.”
그 말을 듣고서야, 벗은 몸이 엉켜 있는 것이 느껴졌고 해완은 제가 강현과 관계를 하고 있었음을 깨달았다.
강현의 집에 온 지 얼마 안 돼서 가진 관계에서 해완은 웬일인지 오르가슴 후 잠시 블랙아웃을 겪었다. 격렬하게 한 것도 아니었는데 정신을 잃은 게 강현을 꽤나 놀라게 한 모양인지 그 뒤로 강현은 해완의 몸에 좀처럼 손을 대려 하지 않았다.
그러던 것을 매달리고 또 매달려서 겨우 시작한 섹스였다. 강현은 평소보다도 훨씬 부드러웠고 내내 해완의 상태부터 살피면서 그를 안았지만, 강현이 그를 꼭 껴안고 움직이기 시작한 지 얼마 되지도 않아 절정에 달한 후 또 정신을 잃은 모양이었다.
그러고 보니 강현이는?
흐릿한 시선을 아래로 내리자, 아직까지도 단단하게 서 있는 강현의 것이 보였다. 그가 만족하지 못했다는 것을 깨달은 해완의 머리가 새하얘졌다.
이러면 안 됐다. 해완이 얼마 남지 않은 시간 동안 그에게 해 줄 수 있는 일은 맞닿은 몸으로 할 수 있는 것뿐이었다. 그런데도 쓸모없이 제 욕구나 해결하고 말았다는 생각에 어쩔 줄 모르던 해완은 다짜고짜 강현의 성기로 손을 뻗으며 말했다.
“어, 내, 내가 끝내 줄게.”
강현은 드물게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며 재빨리 시트로 제 하체를 가리고는, 해완의 손목을 움켜쥐고 크게 고개를 내저었다.
“놔두면 가라앉을 거야. 그럴 필요 없어.”
하지만 해완의 귀에 강현의 만류는 들리지 않았다. 휙 몸을 일으킨 해완은 떨리는 손으로 시트를 잡아끌어 내리며 그의 몸을 향해 무릎으로 다가섰다.
“아냐, 내가 손으로라도 해 줄게.”
“그만, 하지 마. 잠깐, 이러지 말라니까…….”
해완이 달려들자 강현은 숫제 얼굴까지 빨갛게 붉힌 채 하체가 드러나지 않게 시트를 붙잡고 빠르게 몸을 뒤로 물렀다. 그런 노골적인 거부가 해완을 더 안달 나게 했다. 그는 제가 무슨 소릴 하는지도 모르고 떠들어 대며 강현의 몸에 닿으려 안간힘을 썼다.
“손이 싫으면 입으로, 입으로 해 줄게. 나 입으로 하고 싶어.”
그 말을 듣자 강현의 표정이 딱딱하게 굳었다. 강현은 해완의 팔뚝을 양손으로 잡아 제게 달려들지 못하게 하고는 몸을 살짝 흔들며 버럭 입을 열었다.
“그만해!”
높아진 강현의 언성에, 해완은 그대로 얼어붙어 버렸다. 그런 해완을 향해 강현이 떨리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제발 이러지 마. 응?”
해완이 강현의 얼굴만 바라보며 멍하니 눈을 깜빡이자, 강현은 그의 몸을 부서질 듯 꼭 끌어안고는 귓가에 입을 맞추며 연신 중얼거렸다.
“괜찮아, 괜찮아질 거야…….”
그러나, 왜 그가 자신을 위로하는지 모르겠다는 생각만 들었다.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은 제가 아니었다. 해언이나 저에게 바보같이 속아 상처를 입게 될 사람은 바로 강현이었다.
그리고 시간을 좀 미뤄 봐야 변할 건 없다는 것을, 하루라도 빨리 진실을 고백해서 강현을 제게서 벗어날 수 있게 해 줘야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이 며칠이라도 더 붙들어 보겠다고 입을 다무는 추한 짓을 하고 있는 게 바로 저였다.
진이 빠진 해완이 몸을 축 늘어뜨리자 강현은 오히려 더욱 강하게 그의 몸을 끌어안아 왔다. 거칠어진 숨과 빠르게 뛰는 심장에서 그가 무엇을 참고 있는지 뻔히 읽혀서, 해완은 건조한 목소리로 먼저 선수를 치듯 중얼거렸다.
“……기다려 준다고 약속했잖아.”
그 말이 정곡을 찔렀는지 강현의 몸이 노골적으로 움찔했다. 해완은 다시 한번 입을 열어 조용히 못을 박듯 말했다.
“생일이 되면 다 말할 테니까, 그때까진 기다리겠다고.”
그것은 강현이 제 곁에 있으면 된다고 말했던 그날 밤 해완이 그에게 받아 낸 약속이었다.
이미 제가 강현에게 무언가를 감추고 있다는 사실 자체를 알리지 않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러니 해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모든 진실이 드러날 때를 조금이라도 유예시키는 것이 다였다.
이를 악문 듯 맞닿아 있는 강현의 턱에 근육이 서는 것이 느껴졌다. 맞닿은 가슴이 불만족스럽게 크게 오르내렸다.
그러나 결국, 고개를 끄덕이는 강현의 움직임에, 해완은 겨우 안도의 한숨을 쉬었다.
* * *
배 속의 장기가 입 밖으로 튀어나오기라도 할 것처럼 격렬한 헛구역질이 자꾸만 치밀어 올라 해완은 한 시간이 넘게 화장실을 떠나지 못했다.
먹은 것이 없으니 나올 것도 없는 게 그나마 다행이었지만, 그럼에도 진이 빠질 대로 빠진 해완은 잠시 쉴 요량으로 떨리는 몸을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눕혔다.
낑낑대는 소리에 감은 눈을 떠 보자 화장실 문 앞을 초조하게 맴돌고 있던 보리가 걱정스럽게 제 몸을 주둥이로 미는 게 느껴졌다.
그런 보리를 안심시키려 부들거리는 손을 뻗어 얼굴을 쓰다듬어 준 해완은 천천히 상체를 세워 앉은 뒤에 또 시간을 들여 몸을 일으켜 겨우 화장실을 빠져나왔다.
최근 받은 극심한 스트레스 때문일까. 이미 면역 억제제 부작용으로 충분히 망가져 있던 위장의 상태가 다시 악화일로를 달리기 시작한 모양이었다.
해완이 비틀거리며 소파에 앉고 나서도 보리는 여전히 안절부절못하며 그의 발치를 맴돌았다. 보리에게 괜한 걱정을 끼친 것 같아 마음이 아려진 해완은 보리의 동그란 머리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작게 속삭였다.
“나 괜찮아, 보리야.”
물론 거짓말이었지만, 최근 그가 하는 말이라곤 거짓말밖에 없었으므로 아무렇지도 않았다.
강현의 앞에서까지 몇 번 토한 이후로 그는 일을 하러 나가면서도 항상 해완의 식사와 간식까지 손수 차려 놓고 나가고 저녁에 와서는 그것을 전부 먹었는지 확인까지 했다.
그때마다 해완은 태연하게 전부 먹어 치웠다고 했다. 먹을 수 있었던 양은 한두 수저밖에 되지 않았고, 나머지는 모두 버릴 수밖에 없었어도 그렇게 말했다.
제가 정말 어떤 사람인지 깨닫고 나니, 강현의 눈을 똑바로 보면서도 그렇게 거짓말이 쉬울 수가 없었다.
보리를 데리고 산책이라도 나가면 좋으련만 몸에 좀처럼 힘이 돌아오질 않아서, 해완은 담요를 끌고 창 옆에 앉아 멍하니 바깥 풍경을 바라보았다.
한동안 한 몸처럼 해완에게 붙어 있었던 강현은 요 며칠 낮에 꼬박꼬박 작업실을 나가기 시작했다.
무슨 일을 하는지는 자세히 말하지 않았지만 품 안에 해완을 안고 재운 이후에도 몰래 침대를 빠져나가 침실 옆 작업실에서 또 작업을 하는 걸 보니 꽤 바쁜 모양이었다.
그래도 강현은 저녁이 되기 전에 꼬박꼬박 들어왔고, 매시간 해완에게 전화를 걸어 무엇을 하고 있냐고 묻기도 했다. 그때마다 TV를 본다든지 책을 읽는다든지 보리와 산책을 다녀왔다든지의 대답을 하곤 했지만, 사실 해완이 하는 일이라곤 대부분 이렇게 창밖을 보고 앉아 멍하니 지나간 일들을 떠올리는 게 다였다.
예전에는 과거의 일을 딱히 추억하거나 한 적이 없었다. 당장 현실과 그리고 미래를 살고 대비하는 게 너무 바빠서 그랬다.
하지만 지금 해완에게는 앞으로의 미래가 전혀 보이지 않았다. 그러니 되돌릴 수 없는 것들을 따라가는 일 말고는 시간을 어떻게 보내야 할지 몰랐다.
그것은 때로는 강현이었고, 때로는 해언이었고, 때로는 유준이었고, 때로는 얼굴도 기억하지 못하는 제 부모와의 일이기도 했다.
유준이 제주도에 간 지 벌써 열흘이 넘은 시점이었다. 무사히 잘 도착했는지, 일하기로 한 곳은 마음에 드는지, 그곳에서 친구가 될 만한 사람들은 사귀었는지 궁금한 것이 참 많았다.
하지만 물론, 유준에게 연락할 염치 따위는 해완에게 없었다.
9년 전, 그 일이 있었을 때 유준은 초등학생이었다. 해언이 그런 식으로 유준을 협박했는지는 몰랐지만 이제 와 생각해 보니 원장 선생님의 손을 잡고 해완이 앓고 있던 방에 들어오던 유준의 어린 얼굴은 분명 겁에 질려 있었다.
그럼에도 어린 유준이 힘겹게 냈던 용기를, 해완은 아니라고 거짓말을 함으로써 짓밟아 버렸던 것이다.
‘결국 날 거짓말쟁이로 만들었잖아!’
그 공항에서 유준이 울면서 악을 쓰던 소리가 귓가에 맴돌아서, 해완은 손을 들어 귀를 거칠게 긁어내렸다.
유준이 제게 항상 뭔가를 숨기고 사고를 친다고 생각했었지만, 실은 제가 유준이 믿을 만한 형이 되어 주지 못한 것뿐이었다.
그리고 그때 원장 선생님이 유준이 한 말을 그렇게 쉽게 거짓말로 치부할 수 있었던 건 유준이 해언에게 괜히 못되게 굴기로 보육원 내에 소문이 나 있었기 때문이기도 했다.
해완조차도 왜 유준이 해언에게만 저렇게 짓궂게 굴까 하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하나하나 되짚어 보니 이상한 점들이 많았다.
동생들을 좀처럼 상대하지 않는 해언이 왜 하필 유준과 부딪치는 일이 많았을까? 그리고 그 모든 충돌들이 왜 하필 다른 사람들이 보고 있는 앞에서였을까?
게다가 해언이 유준에게 흘리던 말들을 떠올려 보면, 아주 미묘해서 알아차리기는 힘들지만 예민한 어린 애에겐 금방 신경에 거슬릴 만한 종류였음을, 해완은 이제야 깨달은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그와 동시에 지난 며칠간 해완을 괴롭혔던 인하의 목소리가 질리지도 않고 다시 마음에 스며들었다.
‘누구보다 가까운 존재였으면서도 정말 몰랐어요? 해언이가 보통 사람이랑은 생각하는 방식이 다르다는 거.’
나는 정말 몰랐나? 정말 아무것도 몰랐다고, 해언이 제게 그런 짓을 할지는 꿈에도 생각하지 못했다고, 나는 그저 배신당했을 뿐이라고, 그렇게 말할 수 있을까.
아니, 정말 몰랐다고 해도 그 자체가 잘못된 것은 아니었을까? 해언의 마음을 미리 알았더라면, 그런 일이 일어나지 않게 할 수도 있었던 것 아니었을까?
더는 의미가 없다는 걸 알면서도 그렇게 떠올린 수많은 가정들은 칼날로 만들어진 소용돌이처럼 해완의 마음을 휩쓸고 다녔다.
그런 생각들이 머리를 터트려 버릴 것만 같아 차가운 창에 머리를 비스듬히 기댄 사이, 어린 시절의 기억 하나가 갑작스레 불쑥 솟아올랐다.
아마도 열 살 즈음이었나, 해완은 한때 해언에게 이끌려 동네를 돌아다니며 장난을 치는 짓궂은 아이들 무리에 낀 적이 있었다.
고작 여덟 살인데도 똑똑하고 야무진 해언에게 동네 아이들은 신기하리만치 쩔쩔매곤 했다. 당시 지극히 내성적이었던 탓에 보육원 아이들이 아닌 동네 아이들과는 거의 어울리지 못하던 해완이 무리에 섞일 수 있었던 것도 전부 해언의 덕분이었다.
하지만 해완은 순발력이 떨어지고 반응이 느려 장난을 치고 빨리 도망쳐야 할 때 어김없이 방해가 됐다. 물론 그때마다 해언이 해완을 챙겼기 때문에 걸려 혼이 난 적은 거의 없었지만, 딱 한 번은 해언도 화가 났는지 해완을 두고 도망가 버린 적이 있었다.
아이들이 장난을 치고 떠난 자리에 혼자 남겨진 해완은 무서운 동네 아저씨에게 걸려 엉엉 울 정도로 크게 혼이 났었다.
하지만 해완을 혼낸 것만으로는 성에 차지 않았는지 그는 해완의 목덜미를 잡고 보육원까지 질질 끌고 왔었는데, 그 모습을 본 원장 선생님이 왜 아이를 그런 식으로 대하냐며 크게 화를 내는 바람에 아이들 장난이 어른들 싸움으로까지 번진 일이 있었다.
그날 밤, 눈이 퉁퉁 부은 채 잠들어 있는 해완을 옆에 누워 있던 해언이 흔들어 깨웠다.
해완아.
일어나 봐. 해완아.
어릴 때부터 해완은 잠이 많았기 때문에 저를 깨우는 해언에게 짜증이 나 손만 휘휘 저었다.
하지만 해언은 포기하지 않았다. 그는 집요하게 해완을 흔들어 깨워서 반쯤 눈을 뜨게 만들더니, 불쑥 물었다.
오늘 나한테 화났어?
그런 말을 하는 이유를 이해할 수 없어서 졸린 눈만 깜빡이던 해완은 고개를 저었다.
아니.
오늘 내가 버리고 갔는데도?
으응.
왜?
너한테는 화 안 나.
해언은 잠시 말이 없었다. 해완이 다시 까무룩 잠에 빠져들 무렵, 다시 한번 해언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럼 앞으로도 나한테는 화 안 낼 거야?
으응.
무슨 일이 있어도?
으응.
그리고 해완은 잠들었고, 다음 날 해언과 꼭 마주 안은 채로 잠에서 깨어났다.
그 이후로, 해언은 항상 느린 해완의 손을 잡고 도망쳤다. 해완이 빨리 뛰지 못해도, 뛰다가 넘어져 버릴 때도 단 한 번도 그 손을 놓은 적이 없었다.
그리고 그것은 그가 죽는 그 순간까지도 마찬가지였다.
해언이 숨을 거두기 전 그는 사흘 동안 의식이 없었다. 하지만 해완이 해언의 바싹 마른 손을 잡을 때마다 매번, 그가 제 손을 아주 미약하게나마 마주 쥐는 듯한 기분이 들곤 했다.
남들은 해완의 착각일 뿐이라고 했지만, 아니라는 것을 해완은 알고 있었다.
눈이 보이지 않아도, 귀가 들리지 않아도, 와 닿는 것을 느낄 수 없어도 해언은 제 손을 잡는 사람이 누구인지 항상 알고 있었을 것이다.
그래서 그는 심장이 멎는 그 순간에도 해완의 손을 마주 잡을 수 있었던 것이다.
항상 두 손을 잡고 달리던 그 어린 시절처럼.
해완은 깊이 허리를 숙이고 몸을 웅크렸다. 흐느끼는 소리는 입 밖에 내지도 못한 채 뜨거운 눈물만 뚝뚝 흘리며 울었다.
차라리,
차라리 너를 마음껏 미워할 수라도 있으면.
절대 이뤄질 수 없는 바람이 고통스러워, 해완은 한동안 하염없이 눈물만 흘렸다.
* * *
완성된 향수를 케이스에 넣고 포장을 마친 강현은 무표정한 얼굴로 시간을 확인했다.
일정을 앞당기느라 며칠을 연이어 무리한 작업을 하다 보니 몸이 무겁고 피곤했다. 하지만 불현듯 어떤 생각이 마음에 떠오른 뒤로는 가지고 있는 일거리들을 최대한 빨리 쳐 내고 정리하지 않고는 도저히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게다가 오늘은 단순히 완성된 향수의 납품을 위한 미팅이 아니었다. 자꾸만 긴장이 되는 목뒤를 주무르는 사이 방문객의 도착을 알리는 벨이 울렸고, 느리게 몸을 일으킨 강현은 인터폰에 비치는 인하의 얼굴을 보고는 문을 열었다.
“생각보다 빨리 완성됐네요. 몇 개월은 더 걸릴 줄 알았는데.”
형식적인 인사를 마치고 자리에 앉은 인하의 앞에 완성된 향수를 내어놓자, 인하는 그것을 한 번 흘끗 보고는 지루해 보이는 얼굴로 입을 열었다.
역시나 별다른 관심이 없어 보이는 모습에, 강현은 건조한 말투로 대꾸했다.
“일을 좀 정리하려고 하고 있어서요.”
“…….”
“지금 시향해 보시겠습니까? 혹시 부족한 점이 있다면…….”
“아뇨, 됐습니다.”
“…….”
“오늘 진짜 해야 될 이야기는 다른 거란 걸, 피차간에 알고 있는 거 같은데요.”
강현은 입을 다문 채 앞에 놓인 따뜻한 차를 느긋하게 한 모금 마셨다. 침묵이 길어지자 인하가 낮게 물었다.
“모르는 척한다고 해결되는 문제가 아니잖아요.”
“…….”
“윤해완 씨는 아직도 모르나요? 당신이 자기가 누군지 알고 있는 거.”
“그게 당신한테 왜 중요한가요?”
“뭐라구요?”
“당신이 사랑한 사람은 해완이가 아니라 윤해언이잖아.”
“…….”
“그런데 왜 해완이를 찾아와서 상관도 없는 일에 끼어드는지 이해가 안 가서 그래요.”
“그건…….”
“윤해언이 사랑한 사람이 해완이라서, 그래서 해완이가 불행해지기라도 바라는 겁니까?”
정곡이라도 찔린 듯 인하의 표정이 차갑게 굳었다. 그런 인하를 본 강현은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당신이 잘하는 대로 적당히 넘겨짚어 본 거니, 그렇게 놀랄 필요 없어요.”
“…….”
“하지만 이건 그쪽이 대답해 줘야겠어요. 도대체 그날, 윤해언에 대해서 해완이한테 무슨 이야기를 한 겁니까?”
“그날 한 이야기가 해언이에 관한 거라고 확신이라도 하는 말투네요.”
“확신해요. 당신이랑 이야기를 하고 나서 해완이가 윤해언 납골당에 갔거든. 그리고 그 납골함이 담긴 창을 훼손했다고 하더군요.”
그것까지는 생각하지 못한 듯 인하의 얼굴이 미묘하게 찌푸려졌다.
해완을 집으로 데려온 날, 강현은 해완이 잠든 사이 그의 핸드폰으로 걸려 오는 한 통의 전화를 받았다. 납골당 관리 사무소에서 걸려 온 것으로 해완이 윤해언의 납골함이 담긴 유리창을 훼손하는 장면이 CCTV에 찍혔다며 변상을 할 것인지에 대해 묻는 전화였다.
그 전화를 통해 강현은 해완이 인하에게 듣고 그토록 충격을 받은 이야기가 윤해언과 관련됐으리란 실마리를 겨우 잡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강현이 뒷조사를 통해서는 답을 얻기가 불가능했던 수수께끼 중 하나인 윤해언이 저와 해완을 만나게 한 의도와 관련이 있을 거라는 직감이 들었다.
그날부터 매일 생각하고 또 생각했다. 해언과 나누었던 이야기들, 그리고 그가 자신에게 보낸 편지 내용이나 몇 년간 저를 조롱하듯이 가지고 놀던 일들, 그리고 해완이 얼마 전에 강현에게 한 고백을 하나하나 되짚어 보고 퍼즐을 짜 맞춰 보려고 안간힘을 썼다.
물론 완벽한 그림을 완성하기는 불가능했지만, 적어도 선이 분명한 스케치를 마음에 그리는 것까지는 가능했다.
해완은 제가 그의 첫사랑이라고, 해언이 나타나기 전부터 오래 그를 지켜봐 왔다고 말했다.
해언은 아무리 물어도 그가 강현을 어떻게 알게 되었는지 말해 준 적이 없었다.
그리고 해언은 오로지 해완의 존재에 대해서만 그에게 깨끗하게 숨겼다.
해언이 강현에게 숨기고 싶어 했던 두 가지의 사실을 통해 추측할 수 있는 내용이 있었다. 윤해언이 해완을 통해 저를 알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것, 그리고 강현 그 자신과 해완이 알게 되는 걸 막고 싶었다는 것.
강현은 이미 윤해언이 그 스스로의 말과는 달리 자신을 좋아하지 않았으리라는 것은 알고 있었다.
그러니, 저와 해완이 알게 되는 것을 해언이 굳이 방해할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윤해언이 사랑한 사람은 윤해완이었다는 것 말이다.
강현은 인하를 바라보며 천천히 입을 열었다.
“당신, 내 앞에서 몇 번이나 그랬죠. 죽은 친구한테 뭘 부탁받아서 왔다고. 왜 자꾸 그런 이야기를 내 앞에서 할까 궁금했는데 그 죽은 친구가 윤해언이라 생각하니 아귀가 맞더군요.”
“…….”
“해완이가 괴로워하는 게 윤해언이 부탁한 일 때문이었습니까?”
그때, 시선을 내린 채 어떤 생각에 골몰하고 있던 인하가 낮은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고개를 들더니 무표정한 얼굴을 했다.
“해언이가 나한테 부탁한 일이 뭔지 궁금해요? 당신한테서 떨어트려 놔 달라고 했어요.”
“…….”
“당신 말이 맞아요. 해언이가 죽을 때까지 사랑했던 건 윤해완 씨였고, 그 사람 마음속에 당신이 첫사랑으로 남아 있는 게 싫어서 당신 본성을 보여 주려고 만나게 했던 거예요.”
“…….”
“하지만 해완이는 착해서 당신이 어떤 사람인지 알고도 벗어나지 못할 수도 있으니까, 만약 그렇게 되면 나한테 도와주라고 하더군요.”
밝혀지는 진실에 인하를 바라보는 강현의 턱에 근육이 섰다. 그는 감정을 삼키듯 눈을 깊게 감았다 뜨고는 싸늘하게 물었다.
“그래서, 당신이 이 일에 개입해서 얻는 게 뭡니까.”
“…….”
“이미 윤해언은 죽었어. 그런데 당신이 윤해완 인생에 개입해서 남는 게 뭐냐고.”
“그게 문제예요. 이미 해언이가 죽었다는 거. 내가 가진 감정을 풀 데가 윤해완 씨밖에 안 남았잖아요?”
그 말에 강현의 눈이 뜨겁게 번뜩였다. 그와 반대로 냉정한 기색을 되찾은 인하는 아무렇지 않게 말을 이었다.
“어쨌든 아까 한 질문에 제대로 대답해 주자면 내가 윤해완 씨한테 한 이야기가 그 부탁에 관련된 건 아니에요. 그 사람이 잊고 있던 기억에 대해서 되살려 준 거지.”
“잊고 있던…… 기억이라구요?”
“해언이가 갑작스럽게 미국으로 유학을 결정한 건 윤해완 씨와 완전히 사이가 벌어지는 일이 있었기 때문이에요.”
“…….”
“해완 씨가 당신을 좋아하는 것 때문에 다투다가, 정신을 잃을 때까지 심하게 폭행했다고 하더군요. 해완 씨는 자기방어 기제 때문인지 그 기억을 지우고 살다가 나와 만났던 그날 그걸 떠올린 거고.”
인하의 말을 들은 강현의 굳게 다물린 입술이 부르르 떨렸다. 어둠에 녹아들기라도 원하는 것처럼 그 허름한 방 안에 웅크리고 누워 있던 해완의 모습이 플래시가 터지듯이 눈앞을 고통스럽게 스쳐 지나갔다. 강현은 저도 모르게 입을 열었다.
“왜, 대체 왜 그런 짓을…….”
그 말에 인하는 또 풋 웃음을 터트렸다. 그는 미소 띤 얼굴로 나직하게 물었다.
“정말 몰라서 물어요? 누군가한테 비뚤어진 집착을 한다는 게 어떤 감정인지, 다른 사람은 몰라도 당신은 알아야 되지 않나?”
강현은 아무런 대답을 하지 않고 인하를 날이 선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럼에도 그는 여전히 여유로운 얼굴로 말을 이었다.
“아까 그랬죠? 윤해완 씨 인생에 개입해서 나한테 남는 게 뭐냐고.”
“…….”
“생각해 보니까 맞는 말이에요. 그래서 당신이랑 윤해완 씨 관계에서는 이제 손을 뗄까 해요. 그러니 당신이 윤해완 씨를 이제껏 기만해 왔다는 걸 폭로당할 걱정은 하지 않아도 돼요.”
명백한 조롱이 어린 목소리에 강현의 목에 핏대가 섰다. 그런 강현의 얼굴을 관찰하듯이 한 번 훑은 인하가 나직하게 말했다.
“어차피 내가 뭘 하지 않아도, 당신이나 해언이나 윤해완 씨와의 관계에서 결과는 똑같을 거 같거든.”
그 말이, 간신히 유지하고 있던 이성의 끈을 끊어뜨렸다. 벌떡 일어난 강현은 인하의 멱살을 거칠게 잡아채고 으르렁대며 중얼거렸다.
“입 다물어.”
“…….”
“난 그 새끼랑은 달라.”
강하게 틀어잡힌 멱살에 숨이 막힌 듯 인하의 창백한 얼굴이 약간 붉어졌다. 그럼에도 그는 당황한 기색 하나 없이, 비스듬한 미소를 지으며 대꾸했다.
“그랬으면 좋겠네요. 나도.”
인하의 멱살을 쥔 강현의 주먹 마디마디가 더욱 희게 변하는가 싶더니, 강현은 이를 갈며 그를 놓아주었다. 목이 졸린 나머지 옅게 기침을 하는 인하를 향해 강현은 쉰 목소리로 말했다.
“나와 해완이한테 목적을 숨기고 접근해서 장난친 대가라고 생각해요.”
고개를 숙이고 피식 웃은 인하는 의자 위에 올려 둔 서류 가방에서 흰 봉투를 꺼내 탁자 위에 놓았다.
“이건 해언이가 당신한테 남긴 편지예요.”
“…….”
“윤해완 씨와 당신이 완전히 멀어지면 주라고 한 편진데, 지금 주나 나중에 주나 별로 다르진 않을 거 같아서.”
강현은 얼굴을 미묘하게 일그러뜨린 채 탁자 위에 놓인 흰 봉투를 바라보다가 거칠게 물었다.
“먼저 읽어 봤습니까?”
“아뇨. 하지만 좋은 내용은 아니겠죠.”
“…….”
“이제 알았겠지만, 해언이가 이 세상에서 제일 증오한 사람은 당신이었으니까.”
그리고 인하는 향수를 가방에 챙겨 넣으며 몸을 일으켰다.
“아무튼 향수는 잘 받아 갈게요.”
“…….”
“퀄리티에 대해서 의심하고 싶어도, 지난번 해언이의 향을 맡아 보니 그럴 수는 없겠더군요.”
그 말과 함께 몸을 일으킨 인하는 묘한 웃음을 흘리며 고개를 가볍게 숙여 보이고는 망설임 없이 작업실을 빠져나가 버렸다.
혼자 남겨졌음에도 강현은 바로 편지를 뜯어볼 생각을 하지 않고 그것을 한동안 가만히 응시했다.
지난 며칠간 해완과 해언의 관계에 대해 생각하며, 윤해언이 처음으로 줬던 편지와 제게 보낸 짤막한 이메일들을 전부 다시 주의 깊게 읽어 봤던 터였다.
그리고, 강현은 그제야 그 모든 메시지에서 윤해언이 공통적으로 하고자 하는 이야기가 하나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 편지들을 통해 윤해언의 행방만을 추구하던 때는 미처 제대로 읽지 못한 것들이었다.
전부 다 너 때문이라고.
해언이 그를 믿지 못하고 떠난 것도, 만나러 올 수 없는 것도, 약속을 해 놓고 바람맞히거나, 다른 사람을 내보내서 시험한 듯이 군 것도, 전부 다 그가 사랑을 할 수 없는 사람처럼 느껴져서이고, 해언 그 자신에게 믿음을 주지 못해서라고.
그렇게 저를 탓하고 깎아내리는 교묘한 문장들을 겨우 읽어 낸 순간, 강현은 해언이 자신을 단 한 순간도 좋아했을 리가 없다는 진실을 깨달았다.
해완이 제게 주는 사랑을 받아 본 이상, 그것이 가짜라는 것을 모를 수는 없었다.
그러니 지금 테이블 위에 놓인 윤해언의 마지막 편지가 무슨 내용일지는 뻔히 알 수 있었다. 아니, 그 내용은 몰라도 적어도 의도는 분명할 것이다.
강현은 편지를 뜯었다. 긴 내용은 아니었으므로 읽는 데 시간이 오래 걸리진 않았다.
* * *
강현아.
지금쯤이면 너도 알고 있을 거라고 생각하지만, 이게 네게 보내는 내 마지막 편지가 될 거야.
너와 나 사이에서 일어난 촌극에 대해, 네가 가지게 될 의문 한 가지 정도는 답을 해 줘야겠다는 생각이 들었거든.
그 마을에서 왜 네게 말을 걸었고, 왜 거길 떠나고 나서도 너와 연락을 계속했고, 그리고 왜 나와 같은 향을 가진 사람을 만나게 했느냐고. 그렇게 묻고 싶겠지.
나는 널 처음 본 순간부터 알았어.
너한테는 문제가 있다고, 어딘가 망가진 채로 태어났고 일그러진 채로 평생을 살 거라는 걸.
그런데 우습게도 넌, 그렇게 태어난 주제에, 사랑을 받기를 원하는 것 같더라.
그런 네가 참 불쌍했어.
너같이 훼손된 인간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살아야 하잖아.
그게 내가 너와 연락을 지속한 이유야.
깨닫게 해 주고 싶었거든. 너한테는 그럴 가치가 없다는 걸.
넌 누구도 사랑하지 못할 거고, 널 사랑하는 사람도 아무도 없을 거라는 걸.
그리고 그 모든 건 네 잘못이라는 걸 말이야.
내게 속았다고 생각해서 나를 원망하지는 마.
정말로 널 속인 건 내가 아니라 너 자신이라는 걸 알고 있잖아.
그러니까 가능하면, 날 위해서 평생 불행해 줘.
* * *
끝까지 무표정한 얼굴로 편지를 읽어 내린 그는 그것을 다시 봉투에 넣어 봉하고는 만약을 위해 캐비닛 속에 깊숙이 넣어 두었다.
어차피 죽어 이 세상에 없는 사람이었으므로, 별달리 화는 나지 않았다.
강현은 다시 조향대 앞에 앉았다. 당장 내일도 완성된 작업물을 받으러 올 고객이 있었다. 포뮬러는 미리 다 만들어 놓았으므로 조제만 하면 됐다.
그런데 손이 떨려서, 오차가 있어서는 안 되는 정확한 향료의 용량을 흘려 넣기가 조금씩 어려워졌다.
심장이 쿵쿵 소리를 내며 뛰었다. 결국 조향대에서 몸을 일으킨 강현은 두 손으로 머리를 움켜쥔 채 피가 끓어오르는 것 같은 느낌이 가라앉을 때까지 벽에 몸을 기대고 한참을 서 있었다.
‘너같이 훼손된 인간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살아야 하잖아.’
분명히 괜찮다고 생각했는데, 낙인처럼 적힌 편지의 문구와, 그리고 요즘 저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하고 비스듬하게 비껴가는 해완의 괴로운 눈이 자꾸 가슴을 맴돌았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강현은 그렇게 되뇌며 마음을 다잡았다. 조금만 기다리면 모든 일을 다 제대로 굴러가게 만들 수가 있었다.
생일이 지나면, 그가 모든 것을 털어놓으면, 자신의 과오가 완전히 덮일 기회를 잡기만 하면, 그때가 되면 상처 입은 해완을 위로해 주고, 얼마든지 새로운 시작을 할 기회를 가질 수 있었다.
최근 강현은 해완을 데리고 외국에 가서 살고 싶다는 혼자만의 생각에서 벗어날 수가 없었다. 더 이상의 의뢰를 받지 않고 무리해서까지 작업들을 털어 내려 하는 이유도 그 때문이었다.
가능하면 프랑스 파리로 가면 어떨까 싶었다. 해완에게 그곳에서 요리를 배우게 하고, 그다음에는 작은 가게를 하나 내고, 자신은 그 옆에 공방을 내서 함께 살면 어떨까 하는…….
해완이 괴로워하면 괴로워할수록, 오히려 그런 희망이 강박처럼 강현의 안에서 그를 지배했다.
그래, 아직은 때가 아니야. 조금만 더 기다리면, 모든 게 다 괜찮아질 거야.
해완의 희게 굳은 얼굴의 기억을 밀어 내고, 새로운 곳에서 웃고 있는 해완의 얼굴을 몽상하며 강현은 끊임없이 그 스스로를 향해 되뇌고 또 되뇌었다.
* * *
소파에서 까무룩 잠이 들었던 해완은 얼굴을 쓰다듬는 손길에 눈을 떴다.
언제 집에 왔는지 제 옆에 앉아 볼을 만지작거리고 있던 강현이 부드러운 미소를 지었다.
“잘 잤어……?”
강현은 멍한 시선으로 저를 올려다보는 해완에게 말을 걸었다. 그 목소리가 얼마나 다정하고 상냥한지 해완은 스르르 미소를 지었다.
“오늘 일찍 왔네……?”
해완의 질문에 강현은 미안한 얼굴을 하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요즘 많이 늦어서 미안해. 정리할 일들이 있어서 시간이 좀 걸렸어.”
서운한 마음을 참고 해완은 고개를 저었다. 그와 함께할 날이 별로 남지 않았다는 것은 어차피 저만 아는 사실이었다.
그러자 싱긋 웃은 강현은 여전히 비몽사몽한 해완을 달래고 얼러서 일어나게 만들고는 미리 끓여서 식혀 놓기까지 한 죽을 해완의 앞까지 바로 가져다주었다.
강현은 해완이 속이 아파 제대로 된 식사를 하기 어려워진 이후로 가사 일을 봐주시는 이모님께 죽을 끓이는 방법을 직접 배우기까지 했는데, 손이 여물지를 못해 만드는 시간은 오래 걸려도 간은 잘 맞추는 편이라 맛이 꽤 좋았다.
간만에 깊이 잔 덕인지 입맛이 돌았다. 시간이 좀 걸리긴 했지만 해완이 죽 한 그릇을 다 비우자 강현의 얼굴에는 감출 수 없이 기쁜 기색이 피어났다.
해완이 위와 관련된 약을 먹고 강현이 식기를 정리하고 나서는 오랜만에 보리를 데리고 집 앞 공원에 산책까지 하러 다녀왔다.
두 사람은 말없이 천천히 공원을 한 바퀴 돌았다. 보리도 웬일인지 보채지 않고 느긋하게 걸었는데, 새순이 돋아나는 3월 중순이라 흙바닥에 관찰거리가 많아 그런 듯했다.
어둠이 완전히 내린 밤임에도 불구하고 날은 제법 따뜻했다. 아직까지는 꽃샘추위가 들락날락하는 시기라 해도 확실히 봄이 발을 디딘 게 느껴져 기분이 묘했다.
최근 모든 자극에 무감각해져 있던 마음의 한 귀퉁이가 그 온기에 함께 녹아 버릴까 무서워 해완은 입술을 깨물었다.
그때 불현듯 강현이 입을 열었다.
“생일에는 뭐 하고 싶은 거 있어?”
“……어?”
“며칠 안 남았잖아. 이제 4일 뒤니까.”
단 하루도 빼놓지 않고 세던 숫자임에도 불구하고 강현의 입으로 그 말을 듣자 새삼스럽게 마음이 욱신거리며 아팠다. 해완은 고개를 숙이고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그냥 집에서 조용히 보내고 싶어. 몸도 안 좋고 하니까…….”
그 말에 작게 한숨을 쉰 강현이 걸음을 멈추고 걱정스럽게 물었다.
“내일 병원에 가는 날인 거 맞지?”
해완은 창백한 얼굴로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원래는 면역 억제제를 재처방 받으러 대학 병원에 가는 날이었지만 강현은 그냥 위가 좋지 않아 내과에 가는 걸로 알고 있었다. 다행스럽게도 강현이 일이 있어 함께 가지 못하는 바람에 그렇게 속여 넘길 수 있었다.
깍지 껴 잡고 있는 강현의 손에 힘이 강하게 더해졌다. 해완이 고개를 들어 그를 바라보자 강현은 일그러진 얼굴로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보기 드물게 흔들리는 기색이 역력한 검은 눈동자에, 해완은 의아한 듯 입을 열었다.
“강현아……?”
해완이 소리 내어 그의 이름을 부르는 순간, 강현은 곧바로 해완의 팔을 당겨 그를 깊게 품에 안았다.
“약속한 거야.”
“…….”
“생일 때가 되면, 전부 말하겠다고. 잊지 마.”
그러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목소리에, 슬며시 마음에 발을 디디려던 온기가 삽시간에 어디론가 빨려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갑자기 숨이 막히고 눈앞이 보이지 않는 기분에, 공포에 질린 해완은 팔을 들어 강현의 몸을 움켜쥐었다.
그의 따뜻하고 단단한 몸을 붙잡고, 조금이라도 현실로 올라오려고 허우적대던 찰나,
“응?”
강현이 다시 한번 해완의 몸을 옥죄며 대답을 채근했다.
해완은 결국 고개를 끄덕였다. 한 번, 두 번 끄덕일 때마다 간신히 붙들고 있던 마음의 자취가, 조금씩 놓아지는 것이 느껴졌다.
“면역 억제제 농도는 다행스럽게도 유지가 잘되네요. 약 용량은 이대로 계속 가도 될 것 같긴 한데…….”
피 검사 결과지에 고정되어 있던 의사의 눈이 해완의 얼굴로 흘끗 향했다. 그렇지 않아도 초조한 기분에 사로잡혀 있던 해완이 시선을 피하자, 그는 피곤한 듯 두 눈을 꾹꾹 누르며 입을 열었다.
“정말 별다른 부작용이 없는 게 확실해요? 이런 부분은 환자가 말을 해 주지 않으면 감안해서 처방해 줄 수가 없어요.”
다시 의사를 바라본 해완은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아니요, 그런 거 없어요. 선생님.”
미심쩍은 듯 한숨을 내쉰 의사가 결과지를 다시 보며 말을 이어 갔다.
“부작용이 없어도 염증 수치가 여전히 높으니 컨디션 관리를 많이 신경 써야 돼요. 입원해서 검사를 좀 받아 보는 게 좋을 것 같은데 어때요?”
“지금은 입원은 불가능해요. 죄송합니다.”
“윤해완 씨 몸인데 나한테 죄송할 건 없죠.”
“…….”
“면역 억제제가 무슨 약인 줄 알잖아요. 환자분 몸의 면역력을 낮춰서 이식 장기를 공격하지 못하게 만드는 대신, 다른 감염에도 엄청나게 취약해지는 거예요. 그런 상태에서는 사소한 염증이 패혈증까지 번질 수도 있고, 그렇게 되면 초응급 상황이 되는 거예요. 그것도 알고 있죠?”
해완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해완을 보며 다른 대답을 기다리던 의사는 어쩔 수 없다는 듯 고개를 젓더니 다시 물었다.
“그럼 입원이 가능한 시기가 언제예요?”
“다음 달이면…… 될 것 같아요.”
“그럼 2주 정도 남았네요. 원래 한 달 치 처방하려고 했는데, 일단 2주 먹어 보고 다시 보죠.”
한 달 치를 처방받기를 바라던 해완은 번쩍 고개를 들었지만, 의사의 태도는 단호했다.
결국 2주간의 약만 받아 나온 해완은 병원 앞에 있는 벤치에 앉아 잠시 몸을 쉬었다. 요즘은 딱히 위가 아프지 않아도 번잡한 곳을 드나드는 것만으로도 쉽게 피곤함을 느꼈다.
강현에게 병원을 다녀왔다는 증거를 보여 주려면 적당한 내과도 골라 들러야 했지만, 이런저런 생각으로 머리가 너무 복잡해 쉽게 몸을 움직일 수가 없었다.
그간 해완은 강현에게 모든 것을 털어놓은 뒤 제가 어떤 상황에 놓일지에 대해 의도적으로 생각을 피해 오고 있었다. 강현의 반응을 예상해 보려 하기만 해도 바로 구역질이 치밀 만큼 속이 예민하게 반응을 하다 보니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하지만 몸이 엉망이라는 것을 이렇게 재확인받고 나자 새삼스럽게 앞일이 아득해졌다.
이제 그에게는 돌아갈 집도 없고, 가진 돈 대부분은 유준의 계좌로 보낸 터라 수중에 남은 돈도 거의 없었다. 그렇다고 해서 단기간에 돈을 벌 수 있는 일은 전부 체력을 요했기 때문에 이렇게 몸이 약해진 상황에서는 그런 일을 찾기도 힘들 것이었다.
따뜻한 해가 내리쬐는 날이었음에도 해완은 겨울 추위 속에 발가벗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몸을 조금 떨었다.
그때, 주머니 속에서 핸드폰 진동이 울렸다. 불확실한 불안 속을 헤매던 해완의 흐릿한 시선이 겨우 선명해졌고, 그는 느릿하게 손을 움직여 핸드폰을 꺼냈다.
발신인을 본 해완의 얼굴이 작게 움찔했다. 당연히 강현이겠거니 생각했는데 생각지 못한 의외의 인물에게서 온 전화였기 때문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해완은 목을 가다듬고 전화를 받았다.
“네, 사장님.”
―어, 해완 씨. 나예요. 그동안 잘 지냈어요?
갑작스레 그만둬 폐를 끼친 것이 분명한데도 사람 좋은 사장의 목소리에는 불편한 기색이 없었다. 오히려 그것이 더 미안해진 해완은 침을 꿀꺽 삼키고 대꾸했다.
“네. 그럼요. 갑자기 그만둬서 정말 죄송했습니다.”
―아녜요. 처음엔 좀 서운했는데, 사람이 몸이 아프다는데 어쩔 수 없지. 아무튼 내가 전화한 건 그거 가지고 뭐라고 하려고 한 건 아니고, 해완 씨 찾는 사람이 있어서.
“저를요? 누가…….”
―그, 해완 씨가 자란 보육원에서 오신 분인데, 원장님이라 하시더라고?
그다음 들려온 사장의 말을 들은 해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원장 선생님께서 편의점에 저를 찾으러 오셨다고요?”
―네. 꼭 해야 될 이야기가 있는데 해완 씨랑 연락이 안 된다고 찾아오셨네.
“…….”
―당분간 서울에 계실 거라고 숙소 연락처 주고 가셨는데, 알려 줄까요?
그 말을 듣자마자, 억누를 수 없는 강력한 충동에 휩싸인 해완은 곧바로 말을 뱉었다.
“네, 어디 계시는지 알려 주세요.”
* * *
사장이 알려 준 숙소의 주소는 편의점 근처에 있는 작은 비즈니스호텔이었다.
해완은 무엇에 홀리기라도 한 사람처럼 곧장 택시를 잡아타고 그곳으로 향했다. 택시를 잡고, 타고, 내리고, 그리고 원장이 묵고 있다는 호텔 룸 앞에 설 때까지도 해완의 머릿속은 텅 비어 있었다.
저를 부모처럼 보듬어 주고 아껴 주던 선생님을 만나고 싶어서 참을 수가 없었다. 그 품에 안기고 싶었고, 너무 힘들다고, 괴롭다고 토로한 뒤 위로받고 싶어서 견딜 수가 없었다. 오직 그 강렬한 충동이 해완을 이 문 앞까지 이끌었다.
하지만 벨을 누르기 위해 들어 올린 해완의 손이 사시나무 떨듯이 떨렸다.
해언이의 향을 풍기는 나를 보면 선생님이 뭐라고 생각할까, 아니, 해언이의 죽음에 대해서는 뭐라고 설명해야 하지? 그에 대해서 알리지 않은 이유를, 그 전에 해언이가 보육원을 떠나 살 수밖에 없었던 이유에 대해서는 어떻게 이야기해야 하지?
그런 공포가, 해완의 손을 좀처럼 움직이지 못하게 만들었다.
그런데 그때, 마치 약속이라도 한 것처럼 문이 벌컥 열렸다. 흠칫 놀란 해완이 한 발자국 뒤로 물러섰고, 외출을 하려던 참이었던 듯 옷을 갖춰 입고 나오던 원장은 해완의 얼굴을 보더니 눈을 휘둥그레 떴다.
“해완아……!”
그러나, 반가움에 가득 찬 목소리로 해완의 이름을 부른 원장의 표정이 멈칫 굳었다.
그녀의 얼굴에 스치는 경악에 가까운 의아함은 이식 수술 직후 유준의 얼굴에서도 보았던 익숙한 종류의 것이었다.
해완은 반사적으로 몇 발자국 뒤로 물러선 채 몸을 움츠렸다. 원장은 그런 해완을 보며 하릴없이 눈을 깜박이다가, 떨리는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해완아. 너…….”
통제할 수 없는 감정의 해일이 마음의 벽을 넘어서는 것은 그것만으로도 충분했다.
해완은 입을 열었다. 말할 수 없다는 이유로 내내 날카로운 가시로 박혀 있던 진실이 한순간에 뽑혀 나왔다.
“해언이가 죽었어요. 선생님.”
그와 동시에 해완은 그대로 얼굴을 일그러뜨리며 울음을 터트려 버리고 말았다.
가슴 깊숙한 곳을 지독하리만치 곪게 만들고 있던 죄책감이 엉망으로 뒤섞여 터져 나왔다. 갈무리할 길 없는 감정에 완전히 무너져 내린 해완은 정신없이 용서를 구했다.
“말 못 해서 죄송해요, 화내지 마세요, 제가 나빴어요, 제가 잘못했어요, 정말 잘못했어요…….”
제가 하는 말이 원장을 향한 것인지, 강현을 향한 것인지도 모른 채 해완은 몸을 가누지 못할 정도로 흐느끼고 또 흐느꼈다.
그런 해완을 아연히 바라보던 원장의 눈에도 눈물이 고였다. 그녀는 허둥지둥 발을 내디뎌 오열하는 해완의 어깨를 끌어안았다.
“괜찮아, 해완아. 선생님 화 안 났어. 괜찮아, 괜찮아…….”
주저앉아 버린 해완의 어깨를 감싼 채 원장도 눈물을 흘렸다. 그렇게 두 사람은 복도를 한참이고 떠나지 못했다.
해완을 방 안에 앉힌 원장은 울음을 그치고 나서도 떨고 있는 해완의 손을 잡고 연신 쓰다듬었다.
“이거 좀 마시자, 응?”
원장이 내민 따뜻한 꿀물을 받아 든 해완은 간신히 두 모금 정도를 넘겼다. 원장은 그런 해완을 안쓰러운 눈으로 바라보다가 사려 깊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동안 연락 못 한 것도 그래서였어……?”
여전히 원장의 눈조차 바라보지 못하고 해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한숨을 삼킨 원장은 해완의 흐트러진 머리를 가만히 정리해 주며 중얼거렸다.
“얼마나 마음고생을 했으면 살이 이렇게 많이 빠졌어.”
다시 눈물이 차올라 해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원장은 또 한동안 해완의 감정이 진정되기를 기다려 주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해언이 죽은 건 왜 말 못 한 건지 물어봐도 되니……?”
“해언이가…… 자기가 죽고 나서 다다음 생일이 돌아올 때까지는 아무한테도 말하지 않았으면 좋겠다고 했어요.”
“뭐? 대체 왜 그런 소릴……?”
해완은 모르겠다는 듯 가만히 고개를 저었다. 이제는 그 답을 어렴풋이 알고 있었으나 그것까지는 말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러자 원장이 불안한 듯 해완의 손을 꼭 쥐었다.
“해완아, 그럼 혹시, 수상한 사람이 네 앞에 나타났다거나 그런 일은 없었어?”
“네? 그게 무슨 말씀이세요?”
해완이 어리둥절한 얼굴로 묻자 원장은 머뭇거리며 말을 이었다.
“얼마 전에 보육원 사진첩을 정리하다가, 너랑 해언이 사진이 없어진 걸 알았어. 특히 네 사진이 아주 어릴 때 것까지 전부 없어져서……. 그래서 CCTV를 돌려 봤는데 정 선생님이 그걸 빼 가는 걸 발견했어.”
원장이 말하는 정 선생은 그녀의 남동생으로, 해완이 어릴 때부터 보육원에서 일하던 이였지만 사업을 한다며 큰소리를 치고 보육원에서 사라졌다가 몇 개월 혹은 몇 년 뒤 나타나는 일을 밥 먹듯이 하던 터라 아이들에게는 그다지 정이 가지 않는 인물이었다.
그런 사람이 저와 해언의 어릴 때 사진을 가져갔다는 것이 이해가 되질 않아, 해완은 여전히 아리송한 목소리로 물었다.
“정 선생님이…… 그걸 왜요?”
그 말에 원장은 무언가 갈등하듯 잠시 머뭇대더니, 심호흡을 한 뒤 입을 열었다.
“어떤 사람이 해언이랑 네 어릴 때 사진을 큰돈을 주고 사 가겠다고 했다더구나.”
“……네?”
“그것만이 아니라 네가 보육원에서 지낼 때 일들도 꼬치꼬치 캐물었다고 하더라고. 특히 해언이랑 네 관계에 대해서.”
기묘한 예감에, 심장이 가슴 밖으로 터져 나올 듯이 쿵쿵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누군가 해언과 제 관계에 대해서 뒷조사를 했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할 사람은, 인하, 혹은 강현 딱 두 사람밖에 떠오르지 않았다.
하지만 인하는 저 스스로도 기억하지 못하던 해언과의 사이의 일까지도 모두 알고 있는 사람이었다.
해완은 멍하니 눈을 깜박였다. 입 안이 바싹 말라 몇 번이고 애를 쓰고 나서야 겨우 입을 열 수 있었다.
“언제…… 언제 그런 일이 있었는데요?”
“맨 처음 그 남자가 접근한 건 작년 11월 중순쯤이고, 사진을 요구한 건 올해 들어서라고 했어.”
“…….”
“정 선생이 그런 짓을 한 건 일단 둘째 쳐도, 누가 큰돈을 들여서 네 뒷조사를 했다고 하니, 네가 이상한 일에 얽힌 건 아닌가 하고 걱정이 돼서…….”
11월 중순.
강현이 저를 만난 것은 11월 초였고, 그리고 제가 강현과 함께 그 버스 정류장에 갔던 것이 12월 초였다.
만약, 만약 그 사진을 사 간 사람이 강현이라면 그는 해완이 거짓말을 하기 전부터 모든 사실을 알고 있었다는 이야기가 됐다.
원장이 걱정스러운 얼굴로 무언가를 더 말하는 건 보였지만 아무것도 들리질 않았다. 미친 듯이 격렬하게 뛰는 심장 고동 소리가, 고막을 터질 듯이 울리고 있었다.
아니야. 아닐 거야. 강현이가 내가 누군지 미리 알고 있었을 리가 없어.
내가 누군지 알고 있었으면서도, 날 계속 해언이로 대했을 리가 없어.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당장 그것을 확인해야겠다는 격렬한 충동에 휩싸여 온몸에 아드레날린이 치솟은 해완은 자리에서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해완아?”
“저, 저 가 봐야겠어요. 죄송해요.”
원장이 놀란 얼굴로 그의 팔을 붙드는 것이 느껴졌지만, 해완은 그 팔을 뿌리치고는 곧바로 뒤를 돌아 빠른 걸음으로 방을 빠져나왔다.
호텔을 나온 해완은 곧바로 택시를 잡아타고 강현의 집으로 향했다. 엘리베이터를 기다릴 수가 없어 계단으로 뛰어 내려왔는데도 숨이 찬 것이 느껴지질 않을 정도로 흥분이 도저히 가라앉질 않았다.
흰 얼굴을 붉히고 숨을 헐떡이며 강현의 집에 들어온 그는 벗어 던지듯 신발을 벗고 저를 보고 좋아 달려드는 보리도 무시한 채 서재로 뛰어 들어갔다.
해완은 곧바로 책상으로 향해 일전에 잠겨 있는 것을 확인했던 첫 번째 서랍을 당겨 열어 보려 했다. 그러나 여전히 그것은 굳게 잠겨 있었다. 미친 듯이 손잡이를 잡고 흔들고 당겨 열어 보려고 했지만 원목으로 만들어진 책상은 꿈쩍도 하질 않았다.
하지만 포기할 수 없었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강현이가 나한테 그럴 리가 없어. 머릿속을 가득 울리는 그 생각을 잠재우기 위해서는 제 눈으로 이곳에 아무것도 없다는 증거를 찾아야 했다.
어느새 식은땀을 흘리고 있었던 해완은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이번에는 다용도실로 걸음을 옮겼다. 부릅뜬 눈으로 주위를 둘러본 그 안에 비치되어 있던 작은 손도끼와 망치를 챙겨 들고 다시 서재로 갔다.
두 번째, 세 번째, 마지막 서랍을 전부 꺼내 바닥에 내팽개친 해완은 가져온 손도끼로 잠겨 있는 첫 번째 서랍의 바닥을 온 힘을 다해 찍어 내기 시작했다. 그렇게 생긴 틈 사이로 망치 뒷부분을 밀어 넣어 서랍 바닥을 일부분 뜯어내고 손을 넣어 헤집자 종이 같은 것들이 잡혔다.
그것을 구겨 쥐고 좁은 틈 사이로 당겨 꺼낸 뒤 부들부들 떨리는 손으로 펴 내자마자, 해완의 안색이 백지장처럼 창백해졌다.
그가 손에 든 종이에는, 어색한 얼굴을 하고 있는 그가 고등학교 때 찍은 증명사진과 함께, 윤해완이라는 이름이 명백히 적혀 있었다.
이름과 나이, 보육원에는 언제 들어왔으며 학교는 어디를 나왔는지까지 전부 적혀 있는 서류를 경련을 일으키듯 떨며 내려다보던 해완은 다시 서랍 바닥에 손을 넣어 휘젓기 시작했다.
다음으로 잡힌 것은 해언에 관한 자료였다. 그것 역시 해언의 고등학교 때 증명사진과 함께 학교를 비롯한 모든 인적 사항이 적혀 있었다.
그다음은 해언과 해완의 학창 시절 사진이었다. 학교에서, 보육원에서, 때로는 해완 혼자, 때로는 해언과 같이, 어디서 구했는지 모를 다양한 사진들이 그 안에 있었다.
거칠게 갈라진 서랍 바닥에 손이 긁혀 생채기가 생기고 피가 맺혔지만 아픔조차 느껴지질 않았다.
그렇게 미친 듯이 서랍 속 내용물을 꺼내던 와중 바닥에 툭 떨어진 사진 한 장에 해완의 눈이 가 닿았다. 그리고 무심코 사진을 눈에 담은 순간, 그는 시간이 멈춘 것처럼 얼어붙어 버렸다.
그것은 누군가가 짐승처럼 때린 흔적이 가득한 어린아이의 사진이었다.
그리고 그 짐승처럼 맞은 어린아이는, 바로 해완 그 자신이었다.
해완은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한동안 사진을 내려다보기만 하다가, 뻣뻣해진 손을 간신히 움직여 그것을 집어 들었다.
처음 보는 사진이었으나 그는 본능적으로 이것이 보육원에 버려진 직후의 자신임을 깨달았다.
그는 혼이 빠진 사람처럼 멍한 얼굴을 하고 마치 모르는 이의 사진이라도 되는 양 낯선 시선으로 제 모습을 가만히 훑어 내렸다.
속옷 한 장을 제외하고 아무것도 입고 있지 않은 사진 속 아이는 많이 작고 어렸다. 그 마르고 여린 몸 전체가, 엉망으로 얻어맞은 흔적으로 가득했다.
하지만 해완의 눈이 머문 곳은 몸에 입은 상처가 아니라, 상처 하나 없는 얼굴에 드러난 표정이었다.
단 한 톨의 애정도 받아 본 적 없는 황량함이, 그 어린아이의 얼굴에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아주 오랜 시간 동안 그대로 멈춰 있던 해완의 눈꺼풀이 느리게 오르내렸다. 긴 속눈썹에 고여 있던 뜨거운 눈물이 쓰레기처럼 함부로 대해진 작은 몸 위로, 그리고 추하게도 사랑을 구걸하는 어린 얼굴 위로 툭툭 떨어졌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해완은 미친 사람처럼 웃음을 터트렸다. 이제야 명확히 드러난 진실이 너무나 우스워서였다.
해완이 이제까지 속여 온 사람은 강현뿐만이 아니었다.
해완이 가장 오래, 그리고 가장 잔인하게 속여 왔던 것은 바로 그 자신이었다.
나에게도 사랑받을 자격이 있다고.
내내 스스로를 속인 주제에, 다른 이들이 저를 속였다고 화를 낼 수는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