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 sur-dosage (4)
―연결이 되지 않아 소리샘으로…….
전화를 받지 않는 해완에 강현은 노골적으로 인상을 찡그리며 눈썹을 문질렀다.
고객에게 완성품을 전달한 직후였다. 이런저런 트집을 잡으며 까다롭게 구는 통에 예상외로 미팅이 늦어진 터라 해완이 이미 병원을 다녀왔으리라 생각하고 전화를 건 것이었는데 세 번이나 전화를 걸어도 그와는 연결이 되지 않았다.
[아직 진료 안 끝났어?]
메시지를 보내 봤지만 몇 분이 지나도 읽었다는 표시조차 없었다. 이상한 불안감이 욱신 심장을 움켜쥐었고, 몸을 일으킨 강현은 곧바로 코트를 집어 들고 작업실을 나가 차에 올라탔다.
그답지 않게 이리저리 차선을 바꿔 가며 과속까지 해서 집에 도착한 강현은 보안 요원에게 먼저 해완이 들어오는 것을 보았느냐고 물었다. 아니라고 하면 병원을 찾아갈 생각이었으나 그렇다는 답변이 돌아와 곧바로 엘리베이터를 잡아타고 집으로 향했다.
문을 열고 들어선 그는 항상 현관에 단정하게 놓아져 있는 해완의 신발이 한 짝은 집 안으로 들어가 있을 정도로 엉망으로 던져져 있는 것을 보고 인상을 찡그렸다.
그때, 보리가 꼬리를 내린 채 불안한 얼굴을 하고 낑낑대며 다가왔다. 그것을 보자 아까부터 스멀거리던 불안감이 급격하게 확대됐다. 강현은 다급하게 집 안으로 들어오며 입을 열었다.
“해…….”
당황한 나머지 해완의 이름을 부를 뻔한 걸 간신히 입 안에 가둔 그는 입술을 꽉 깨물고 현관에서 주위를 휘휘 둘러보았다.
거실에 해완의 모습이 보이지 않기에 침실로 향하려던 때, 문득 침실 반대편에 있는 서재에서 새어 나오는 불빛이 보였다. 강현은 반사적으로 몸을 돌려 그곳으로 향했다.
“너 대체 지금…….”
서재 문을 넘자마자 책상 옆에 보이는 실루엣에 불안한 목소리를 높이던 강현은 그대로 얼어붙은 듯 우뚝 멈춰 서 버렸다.
책상 옆에 힘없이 기대어 앉아 있던 해완이 텅 빈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그 옆에는, 제가 돈을 주고 사 모은 해완의 어린 시절 사진들이, 엉망으로 흩어져 있었다.
* * *
해완은 얼어붙어 버린 채 눈조차 깜빡이지 못하고 저를 응시하는 강현의 얼굴을 적막한 마음으로 바라보았다.
그의 얼굴을 눈앞에서 마주하면 지독히도 고통스러울 줄만 알았는데 아무렇지도 않았다. 마치 마비라도 된 듯, 아무것도 느껴지질 않았다.
그간 고막이 터져 버릴 것처럼 시끄럽게 악을 쓰며 해완을 괴롭혀 오던 내면의 소리도 잠잠해진 지 오래였다.
강현이 제가 누군지 알고 있을 리가 없다고.
그것을 알면서도 저를 해언으로 대했을 리가 없다고.
그리고 그 이전에는.
해완이 말한 거짓을 알고도 그를 용서해 줄지도 모른다고.
무섭게 화를 내더라도, 강현의 곁에 있어도 되는 아주 작은 여지쯤은 내줄지도 모른다고.
어쩌면 강현도, 그의 곁에서 지낸 시간 동안, 윤해완이라는 사람에게 작고 연약한 애정 정도는 가져 줬을지도 모른다고.
그렇게 마음을 시끄럽게 울려 대던 그 모든 초라한 희망의 소리가 죽은 자리는 이토록 조용하고 고요할 수가 없었다.
하지만 이상한 건, 해완의 앞에 있는 강현의 얼굴은 그렇지 않다는 것이었다.
온몸의 핏기가 빠져 버린 듯 창백한 얼굴을 한 채 입을 벙긋거리고 있는 그의 얼굴은 마치 일종의 공포에 질린 것처럼 보였다.
해완은 느리게 눈을 깜빡이며 대체 뭐가 그리 무서운 걸까 하고 생각했다.
강현이 그렇지 않았다 해도 저는 그를 사랑했으므로, 어쨌든 저런 얼굴을 하고 있는 것이 보기가 싫었다.
불현듯, 오래전 들었던 강현의 목소리와 얼마 전 들은 인하의 목소리가 마구 뒤섞여 해완의 뇌리를 스쳐 지나갔다.
‘이제 증명이 되는 거야? 내가 너한테 했던 말.’
‘해언이는 내가 자기를 좋아한다는 걸 믿지 않았어요. 자기 향에만 집착한다고 생각했지.’
그리고 그 목소리가 떠오름과 동시에, 믿지 않고 흘려 내 버렸던 인하의 말 한 조각이 뒤통수를 내리치듯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 남자가 자기를 사랑하지 않는다는 거, 바라는 건 향뿐이라는 걸 해언이는 알았거든요.’
‘그러니까 당신도 여강현을 사랑하지 않기를. 그걸 바라지 않았을까요?’
그것은 강현이 제 앞에서 무릎을 꿇었을 때 제가 직접 그의 눈 안에서 서투른 애정을 찾아낸 적이 있기에 믿지 못했던 말이었으나, 지금만큼은 전혀 다른 의미로 다가왔다.
그 애정은 해언을 향한 것이 아니라 그의 향을 향한 것이 맞았다고 말이다.
그런데 어떡하지.
이미 내 몸이, 네가 그토록 사랑하는 향을 망가뜨리고 있는데.
그걸 알게 되면 넌 나를 미워하게 될 텐데.
강현이 자신을 사랑하지 않는 것까지는 괜찮았다.
그러나 이 지경이 되고서도, 그에게 미움받는 것이 무서워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생각을 하자, 갑자기 마비되어 있던 정신이 고통스럽게 꿈틀거렸다.
강현이 그 사실까지 알게 되기 전에 도망치고 싶다는 생각이 해완을 몰아세웠다. 손가락 까딱할 기운 하나 없이 기진맥진한 상태였음에도 해완은 몇 번이고 비틀거리면서도 몸을 일으켜 세웠다.
해완이 일어나자 동상처럼 굳어 있던 강현이 한 발자국 그를 향해 다가섰다. 그는 눈에 보일 정도로 떨리는 손을 뻗어 해완의 팔을 잡으려 들었다.
“잠깐, 잠깐만…….”
그런 강현의 손을 움찔 피한 해완은 주춤거리며 돌아서 서재를 빠져나가려 했다. 그러자 다시 그의 팔뚝을 절박하게 붙든 강현이, 불쑥 입을 열었다.
“해완아.”
강현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을 처음으로 듣는 순간, 해완의 눈이 크게 열렸다.
그가 제 눈을 바라보며 해완이라고 불러 주는 순간이 오기를 그토록 바랐음에도 불구하고 지금 느끼는 것은 기쁨 대신 온몸이 어둠으로 꺼지는 듯한 절망감뿐이었다.
정말 알고 있었구나.
네가 나를 해언이라고 부르던 그 시간 내내, 너는 정말 내 이름을 알고 있던 거였어.
딱딱하게 굳어 버린 줄만 알았던 심장이 요동치는 것이 느껴졌다. 피가 나도록 악문 입술 사이로 뜨거운 흐느낌이 비집고 끓어올랐다.
해완이 누군지 알고 있었다 한들 강현은 해완에게 자신을 속이라고 한 적은 없었다. 그저 끔찍한 착각에 불과했을지라도, 해언이 얻었다 생각한 사랑을 빼앗고 싶어서 거짓을 말한 것은 해완 그 자신의 선택이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게 자신의 잘못임을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현이 내내 해완의 이름을 알고 있으면서도 한번 불러 주지 않았다는 것이 사무치게 아파 견딜 수가 없었다.
그 단순한 사실이, 간신히 버티고 있던 해완의 마음을 완전히 망가뜨리고 부숴 버렸다.
해완은 그대로 크게 울음을 터트렸다. 부끄러운지도 모르고, 온 힘을 다해 가슴을 퍽퍽 치며 엉엉 소리 내서 울었다. 하지만 소용없었다. 아무리 가슴을 쥐어뜯어도 마음에 박힌 칼날이 빠지질 않았다.
어린애처럼 소리 내어 우는 해완을 강현은 어쩌지도 못하고 그저 망연하게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내 번뜩 정신이 든 듯 강현의 눈에 빛이 돌아왔다. 그는 울고 있는 해완과 눈을 맞추려 애쓰며 입을 열었다.
“해, 해완아. 내 말, 내 말 좀 들어 봐. 잠깐만 진정하고…….”
그답지 않게 횡설수설 말을 더듬으며 해완을 붙든 강현의 손은 가득 밴 땀으로 젖은 채였다. 웬만해서는 속을 알 수 없던 얼굴도 파랗게 질린 채 그가 겪는 감정의 혼돈을 조금도 숨기지 못하고 고스란히 드러내고 있었다.
그러나 해완에게는 강현의 입에서 나오는 자신의 이름이 칼날처럼만 들렸다. 그는 오열하며 제 몸을 쥔 강현의 손을 뿌리쳤다.
“싫어!”
격렬한 반응에 해완을 놓친 강현이 다시 급하게 손을 뻗었다. 그러자 해완은 그의 손이 닿을 수 없도록 제 몸을 두 팔로 감싸고 뒷걸음질 치며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마, 만지지 마, 내 몸에 손대지 마!”
“…….”
“나갈 거야, 여기서 나갈 거야…….”
명확한 거부에 엉망으로 흔들리고 있던 강현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그는 더는 망설이지 않고 해완의 팔뚝을 덥석 잡아 품에 끌어당기려 했다.
팔을 붙든 악력은 멍이라도 들 것처럼 거셌다. 도망칠 수 없게 구속당했다는 생각이 그렇지 않아도 신경 줄이 끊어지기 일보 직전이었던 해완을 삽시간에 궁지로 몰았다.
“놔!”
해완은 패닉에 빠진 채 고함을 질렀다. 강현이 당황할 정도로 거센 힘으로 저항하기 시작한 그는 잡힌 손에서 벗어나기 위해 몸부림을 치고 강현의 몸을 마구잡이로 때리며, 제 입에서 무슨 말이 나오는지도 제대로 인식하지 못하고 악을 써 댔다.
“싫어! 나가게 해 줘, 여길 떠나게 해 달라고!”
“윤해완, 그만해, 이제 그만……!”
“네가 싫어!”
강현은 눈을 부릅뜬 채 멈춰 섰다. 이제 소리칠 기력도 없는 듯 몸이 늘어지기 시작한 해완은 고개를 푹 숙인 채 눈물을 뚝뚝 흘리며 같은 말을 중얼거렸다.
“네가 싫어, 싫어, 싫다고…….”
그리고 해완의 입에서 그 말이 흘러나올 때마다, 강현의 얼굴에 내내 서려 있던 공포의 감정이 증발하는 것과 동시에 눈에는 기이한 이채가 나타나기 시작했다.
순간, 해완을 반쯤 안은 채 몸을 거칠게 뒤로 밀친 강현은 서재에 놓인 소파에 그를 눕히고 위에 올라타 두 손목을 머리 위로 올려 결박했다.
그는 눈을 번뜩이며 해완의 몸을 완전히 짓누른 채 버럭 고함을 질렀다.
“나를 절대 싫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폭발한 분노에 저 스스로 놀란 것처럼 강현은 갑자기 온몸을 떨었다. 짓이기듯 누르고 있던 마른 손목을 놓아준 그는 해완의 얼굴을 덜덜 떨리는 손으로 감싼 채 절박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잘못했어, 해완아…….”
“…….”
“용서해 줘. 제발 용서해 줘. 응?”
그러나 이전과는 달리, 강현의 그 말은 해완에게 닿을 수 없었다.
소파에 눕혀져 제압당하자마자 완전히 탈진해 반쯤 정신을 놓은 해완은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눈을 감고 싫다는 말만 중얼거리고 또 중얼거렸다.
저를 영원히 외면할 것처럼 굳게 닫힌 해완의 눈을 본 강현의 얼굴이 엉망으로 일그러졌다. 그는 과호흡을 일으키는 듯 리듬이 맞지 않는 거친 숨을 몇 번 몰아쉬더니, 이를 뿌득 갈고는 해완의 얼굴을 붙잡고 돌려 듣고 싶지 않은 말을 끊임없이 벙긋거리는 메마른 입술에 거칠게 키스했다.
해완에게 그다음의 기억은 토막토막 끊긴 채로만 남았다. 우악스러운 손길에 바지가 찢겨지듯 벗겨져 나갔고, 준비조차 제대로 되지 않은 뒷구멍을 비집고 단번에 성기가 밀려들어 왔고, 해완이 움직이지 못하게 몸으로 완전히 압박해 끌어안은 강현은 그대로 거칠게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강현의 몸에 짓눌려 공중에 뜬 해완의 마른 다리가 힘없이 퍽퍽 흔들렸다. 제 몸이었으나 해완이 할 수 있는 것은 없었다. 그저 고개를 뒤로 젖힌 채 입을 반쯤 벌리고 괴로운 숨만 뱉어 내며, 끊임없이 몸 안으로 밀려들어 오는 강현을 받아 낼 수밖에 없었다.
그러는 사이, 강현에게 처음으로 안겼던 크리스마스 날처럼, 해완의 모든 것이 점점 잊혀져 갔다.
그런데 이상했다. 그때는 강현과 몸을 섞으며 비워진 빈자리를, 연결되어 있는 몸만큼은 진짜라는 뜨거운 안도감이 채웠지만 지금은 무엇으로도 채워지질 않았다. 그저 텅 비어 있었다. 크기를 알 수 없는 공허가 저를 전부 집어삼키는 것 같았다.
그게 무서워서 해완은 또다시 울음을 터트렸다. 강현이 한번 불러 주지도 않았던 이름처럼, 존재가 전부 지워지는 느낌이 너무나 무서워서, 해완은 강현이 제 몸을 억지로 범하는 내내 울고 또 울었다.
몸과 마음 어디에서건 느낄 수 있는 것이라곤 오로지 고통뿐이었다. 고맙게도 몸이 먼저 포기해 주었다. 해완은 그대로 정신을 잃었다.
* * *
오한이 들어 벌벌 떨며 잠에서 깨니 차가운 무언가가 온몸을 쓸어내리고 있었다.
추웠다. 너무나 추운데 눈만 불타는 것처럼 뜨겁고 머리가 깨질 듯이 아팠다. 해완은 연신 제 몸을 오가는 그 차가운 것을 몸에서 떼어 내기 위해 손을 허우적거렸다.
그런 해완의 손을 무언가 덥석 쥐었다. 해완은 흐린 눈을 커다랗게 떴다. 강현이 바로 옆에서 물수건으로 제 몸을 닦아 주고 있었다.
그는 해완의 얼굴에 연신 부드럽게 입 맞추고 뺨과 이마를 달래듯 보듬으며 무언가를 속삭였지만 웅웅대는 이명이 귓속에 가득 차서 하나도 들리지가 않았다.
눈꺼풀이 너무 무거워서 해완은 맥없이 눈을 감았다. 다행이도 금세 까무룩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그런 일을 몇 번 반복했다. 잠들었다가 이유도 없이 놀라 눈을 뜰 때마다 몸이 뜨겁고 아팠고, 흐린 정신으로 누구라도 도와 달라고 손을 뻗으면 언제나 강현이 그 손을 잡아 왔다.
하지만 그 손을 잡아도 고통은 사라지질 않았다.
* * *
해완은 적막한 집 안에서 혼자 깨어났다.
온몸을 태워 버릴 듯 뜨겁게 오르던 열은 어느새 내려 있었다. 하얀 천장을 바라보며 잠시 눈만 멍하니 깜빡이던 그는 상체를 일으키기 위해 팔에 힘을 주었다. 기력이 전부 빠지기라도 한 건지 팔이 심하게 떨려 몸을 일으켜 앉는 것만으로도 시간이 걸렸다.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고 앉은 해완은 멍한 시선으로 방 안을 둘러보았다. 방문은 살짝 열려 있었지만 인기척은 없었다. 보리도 어디론가 가 버린 듯 타닥이는 작은 발걸음 소리가 전혀 들리지 않았다.
분명히 오래도록 자고 일어난 것 같은데 아무 생각도 할 수 없을 만큼 여전히 지치게 느껴졌다. 때문에 해완은 한동안 망가진 인형처럼 구겨져 앉은 채 어딘지 모를 곳을 흐린 시선으로 응시하기만 했다.
얼마나 그렇게 앉아 있었는지 시간조차 흐릿하게 흘러가던 가운데, 갑자기 위에서 치밀어 오르는 구토감에 해완은 손으로 입을 가린 채 구역질을 했다.
먹은 것이 없으니 나올 것도 없었으나 지금의 몸으로 버티기에는 헛구역질조차 버거웠다. 한쪽 손으로는 입을 가리고 한쪽 손으로는 시트를 구겨 쥔 채 요동치는 속을 버텨 내던 와중, 어느 순간 손바닥으로 미량의 뜨거운 액체가 왈칵 쏟아져 나왔다.
어렴풋이 아마 위액 같은 걸 토한 모양이라고 생각하며 떨리는 손을 입에서 떼어 내는데, 눈에 들어온 손바닥이 온통 검붉었다.
잠시 손바닥을 응시하던 해완은 손등으로 입을 한 번 더 쓸어 보았다. 그러자 손등도 금세 검붉은 자국으로 물들었다. 그것을 보자마자 그는 멍하니 안 되는데, 하고 생각했다.
강현이한테 해언이의 향이 망가지고 있다는 걸 알게 하면 안 되는데.
제 입에서 흘러나온 피가 너무 붉어서, 이대로는 숨길 수가 없을 것 같았다.
들키기 전에 숨어야 돼. 그 생각이 순식간에 해완의 머릿속을 뒤덮었다. 그는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켰다. 너무 어지러워서 침대와 서랍장을 짚고서야 간신히 두 발로 일어설 수 있었다. 손에 묻은 피가 이곳저곳 자국을 남겼지만 그런 것을 의식할 정신조차 없이, 강현이 돌아오기 전에 숨어야 한다는 강박만이 그를 지배하고 있었다.
침실 화장실에서 피가 묻은 손과 입을 대강 씻어 낸 그는 비틀거리며 드레스 룸으로 향했다. 제 지갑과 외투가 모두 그 안에 있었다.
하지만 드레스 룸은 굳게 잠겨 있었다. 잠시 손잡이를 잡고 흔들던 그는 그냥 외투는 포기하고 현관으로 걸음을 옮겼다. 잠옷 차림이든 무엇이든 해완에게는 어쨌든 이 집에서 나가는 것만이 급했다.
그런데 현관에 놓여 있어야 할 자신의 신발조차도 없었다. 해완은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채로 그대로 현관문을 나섰다. 어차피 맨발이었어도 그 집에 더는 있지 않았을 터였다.
따뜻해졌어야 할 3월 말임에도 불구하고 꽃샘추위라도 온 건지, 복도에 나선 것만으로 오한이 들어 해완은 몸을 부르르 떨었다.
다행히 엘리베이터는 금방 왔다. 해완이 고층에서 엘리베이터를 타고 내려오는 사이 사람들이 몇몇 더 탔다. 잠옷 차림에 실내용 슬리퍼를 신은 채인 해완을 흘끗거리며 쳐다보는 시선이 느껴졌지만, 해완은 무감각한 얼굴로 엘리베이터 벽에 기대선 채 1층까지 내려왔다.
어디를 가는지 생각조차 하지 않은 채로 해완은 무작정 건물 입구로 걸음을 재촉했다. 빨리 걷고 싶었지만 몸이 말을 듣지 않아 어쩔 수 없이 발을 질질 끌며 느리게 걸었다.
그런데 그런 해완의 앞을 유니폼을 입은 보안 요원이 가로막고 섰다. 해완이 멈칫하자 보안 요원은 상냥하게 웃으며 해완에게 말을 걸었다.
“윤해완 님 되시죠?”
“…….”
“어디 가시는지 여쭤봐도 될까요?”
그가 제 이름을 알고 있는 것에 당황한 해완은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곧 까칠하게 대답했다.
“……내가 그걸 왜 말해야 되는데요.”
“지금 몸이 안 좋아 보이시니, 건물 밖에 나가시지 않는 게 좋을 것 같아서요.”
“내가 나가든 말든 당신이랑 무슨 상관이에요.”
해완의 거친 어투에도 보안 요원은 싱글싱글 웃으며 그의 앞에서 비킬 생각이 없어 보였다.
“특별히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그러니 양해 좀 부탁드립니다.”
주어는 없었지만 대상은 분명했다. 해완의 마음속에서 급격한 분노가 치밀어 올랐고, 그는 제 앞을 막아선 남자의 가슴팍을 거칠게 밀치며 말했다.
“당신이 뭔데 날 못 나가게 막아. 비켜!”
해완의 저항에도 아랑곳없이 짜증 섞인 한숨을 내쉰 보안 요원이 그의 팔뚝을 강하게 붙들고 휙 잡아당겼다.
“놔!”
“저기, 잠깐 진정하시고…….”
그때, 해완의 팔을 쥔 보안 요원의 손을 누가 움켜쥐고 막아서며 낮게 물었다.
“지금 뭐 하는 겁니까?”
해완은 갑자기 제 눈앞에 나타난 인하의 얼굴을, 흠칫 놀라 바라보았다.
* * *
본가 앞에 차를 세워 둔 강현은 입고 있는 셔츠의 목을 내려 이미 붉게 달아오른 목덜미를 몇 번 더 거칠게 긁었다.
서연이 5분 내로 도착한다고 했음에도 초조해서 견딜 수가 없었다. 빨리 들어가서 담판을 짓고, 그리고 해완에게 돌아가 그를 병원으로 데려가야만 했다.
지난 이틀간 해완은 열이 펄펄 끓어 크게 앓았다. 잠 한숨 자지 않고 밤새 찬 수건으로 그의 몸을 닦아 내고 의사를 따로 불러 수액과 주사를 맞힌 뒤에야 오늘 새벽부터 겨우 열이 떨어진 터였다.
원래 계획대로였다면 오늘 아침 일찍 병원에 입원시켜 검사를 받게 할 생각이었다. 하지만 해완이 제 뜻대로 따라 줄지가 미지수였다. 집에 가두는 것이야 뜻대로 할 수 있지만, 강제적으로 외부 병원으로 데려가려면 협조가 필요할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래서 그의 집안 전체가 VIP로 있는 병원에 연락해 협조를 구한 게 화근이었다. 주치의가 할아버지의 사람인 것이야 당연했지만, 그렇게 곧바로 연락을 넣을지는 몰랐다.
그의 조부는 사회적인 평판에 민감한 사람이었다. 단순한 재벌이 아니라 사회적으로도 존경받는 인물이 되기를 원했다. 공익 재단에 큰 힘을 쏟는 것도 다른 놈들처럼 절세를 위해서가 아니라 큰 뜻이 있는 거라고 입버릇처럼 말했다.
그러니, 자살에 가까운 역주행 사고로 죽은 며느리로 인해 휩싸인 추문이 얼마나 달갑지 않았을지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뻔한 일이었다.
그가 보기에 어릴 때부터 제대로 된 사람 노릇을 못 하던 강현 역시 눈엣가시인 것은 마찬가지였다. 그러니 그가 누군가를 입원시킨다는 이야기에 직접 와서 해명하라고 그토록 발작을 했을 테니까.
아무리 열이 내렸어도 해완이 그 몸을 하고 나갈 수 있으리란 생각은 하지 않았지만, 불안감을 떨칠 수 없어 현관에 나와 있는 신발까지 전부 모아 드레스 룸을 잠그고 카드와 현금은 조금도 남기지 않고 싹 다 챙겨서 집을 나섰다. 보안 요원에게도 해완이 건물을 떠날 수 없게 해 달라고 몇 번이나 부탁을 한 터였다.
거의 이틀을 자지 못한 탓에 눈이 지독히도 건조하게 느껴졌다. 그러나 핏발이 선 눈을 스르르 감자마자 눈앞을 덮치는 이미지에, 그는 얼마 쉬지도 못하고 눈을 치켜뜬 채 허공을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아무리 쉬고 싶어도, 해완의 무너지듯 우는 얼굴을 도무지 머릿속에서 지워 버릴 수가 없었다.
그토록 감추고 싶었던 진실이 고스란히 드러났다는 걸 알고 나서, 강현이 가장 먼저 느꼈던 감정은 극심한 공포였다.
잘못을 들킨 어린아이처럼,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머릿속이 하얘져서 아무런 생각도 들지가 않았다. 그래서 잠시 어떤 반응도 보일 수가 없었다.
미안하다고, 내가 잘못했다고, 그렇게 빌어야 한다는 생각이 번뜩 들었을 때 해완은 이미 어떤 대화도 할 수 없을 정도로 오열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렇게 무너지며 우는 해완의 입에서 싫다는 말이 나온 순간, 끊임없이 저를 거부하고, 외면하고, 눈을 감고, 저한테서 멀어지는 해완을 보는 순간, 평생을 그를 짓뭉개 온 족쇄 같은 목소리들이 그의 마음에 선연하게 떠올랐다.
‘사람 거죽만 뒤집어쓰고 있으면 뭘 해.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이지.’
‘너를 정상으로 만들기 위해서 내가 얼마나 노력했는지 알고 있어?’
‘네 곁에 있는 게 얼마나 괴로운지, 내가 얼마나 참고 있는지 알고 있어?’
‘내가 널 이렇게 망쳐 놨다는 죄책감만 없었어도, 진작에 이 지옥 같은 삶에서 벗어났을 텐데.’
‘넌 누군가를 사랑할 수 있는 사람이 아닐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떠나보낼 수가 없었어.’
‘너같이 훼손된 인간은 정상적인 삶을 살 수 없다는 것 정도는 알고 살아야 하잖아.’
그 목소리들이, 그의 뇌를 곤죽이 되듯 으깨 버리는 것만 같은 기분이 들었다.
강현은 고개를 툭 내려 핸들을 쥔 손 위에 올렸다. 넋이 나간 사람처럼 눈을 번히 뜨고 어딘지도 모를 곳을 하염없이 바라보고 있었다.
그때, 창을 두드리는 소리에 강현은 둔한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서연이 어리둥절한 눈으로 허리를 숙이고 차 안을 들여다보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강현을 본 서연이 멈칫하더니 걱정스럽게 물었다.
“너 엄청 피곤해 보여. 괜찮은 거야?”
“난 괜찮아. 그러니까 안에 들어가서 할아버지한테 같이 말 좀 잘 해 줘.”
“알았어. 할아버지도 진짜 유난은……. 근데 해언 씨 많이 아파?”
강현은 우뚝 발걸음을 멈췄다. 서연이 그를 바라보자, 강현은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윤해완이야.”
“뭐?”
“윤해언이 아니라, 윤해완이라고. 그 사람 이름.”
어리둥절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는 서연을 뒤로하고, 강현은 저택 안으로 걸음을 옮겼다.
* * *
보안 요원은 고급스러운 슈트를 차려입은 인하를 위아래로 훑더니, 다소 당황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여기 계신 윤해완 님을 보호해 달라는 부탁을 받아서…….”
“보호해 달라는 부탁이요? 해완 씨, 해완 씨가 그런 부탁 했어요?”
인하는 해완을 향해 곧바로 물었다. 해완이 얼떨떨하게 고개를 젓자, 인하는 다시 보안 요원을 향해 강한 어투로 입을 열었다.
“윤해완 씨가 보호해 달라고 부탁한 것도 아닌데 당신이 무슨 권리로 이분이 이 건물을 나가는 걸 막는 겁니까? 구속 영장을 가지고 있거나 범죄 현장에서 현행범을 체포하는 게 아닌 이상 사람의 신체적 활동의 자유를 침해하는 건 감금죄에 해당하는 거 몰라요?”
“…….”
“동의 못 하겠으면 지금 경찰 부르죠.”
인하의 단호한 목소리에 보안 요원은 난감한 듯 인하와 해완의 얼굴을 번갈아 보았다. 그러나 마땅한 방법이 떠오르지는 않았는지 강하게 쥐고 있던 해완의 팔을 슬쩍 놓았다.
인하는 저를 멍하니 올려다보고 있던 해완의 손을 쥐고는 빙긋이 웃으며 말했다.
“일단 여기서 나가죠, 해완 씨.”
그는 아무 말 없이 곧바로 걸음을 옮겼다. 인하의 손에 반쯤 끌려가며 뒤를 돌아보자, 보안 요원이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고 있는 것이 보였다.
망설임 없이 건물 밖으로 나온 인하는 바로 앞에 주차해 둔 자신의 차 조수석 문을 열며 말했다.
“타요.”
그때까지도 잡혀 있던 손을 뿌리쳐 놓게 만든 해완은 뒷걸음질을 치며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인하가 건물 안쪽을 향해 턱짓을 해 보이며 건조하게 말했다.
“무슨 일인지는 몰라도, 지금 여강현 씨를 피하고 싶은 거 아니에요? 보아하니 뭐 아무것도 안 들고나온 것 같은데, 걸어서 도망치긴 힘들지 않겠어요?”
꽃샘추위가 매서운 날씨에 잠옷 차림에 거실 슬리퍼를 신은 채인 스스로를 의식한 해완이 작게 움찔했다. 인하가 재빨리 말을 덧붙였다.
“아까 보안 요원이 전화하는 거 해완 씨도 봤잖아요. 시간 별로 없어요.”
인하를 바라보는 해완의 눈에 일순 날이 섰으나, 그는 이내 포기한 듯 고개를 숙였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인하는 해완의 등을 조수석을 향해 한 번 더 부드럽게 밀었다.
이어서 운전석에 탄 인하는 곧바로 차를 출발시켰다. 어디를 가고 싶은지 묻지도 않고 망설임 없이 운전하는 인하를 불안한 눈길로 홱 바라본 해완이 입을 열었다.
“지금 어디 가는 거예요?”
인하는 해완을 흘끗 곁눈질해 보았다. 그러고는 여상한 목소리로 말했다.
“오늘 윤해완 씨랑 해언이 생일이잖아요. 두 사람한테 특별한 날인데, 케이크라도 먹어야죠.”
생일.
그 말을 들은 해완의 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제가 며칠을 앓았는지도 모르고 있어 미처 생각지도 못했던 탓이었다.
“……그런 거 필요 없으니까 내려 줘요.”
“미안하지만 그건 안 되겠어요.”
“뭐라구요?”
“전에 내가 했던 이야기 기억나요? 해언이 생일에 해야 되는 중요한 이야기가 있다고. 그것 때문에 내가 윤해완 씨 만나려고 그 집까지 찾아간 거잖아요.”
해완은 대답을 하지 않았다. 인하는 여유로운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나도 회사에 다시 들어가 봐야 해서 오래 시간 안 뺏어요. 윤해완 씨가 절대 손해 보는 일 아니니까, 걱정 말고 잠깐만 나랑 얘기 좀 해요.”
그래도 해완이 대답을 하지 않자, 길게 한숨을 내쉰 인하가 어쩔 수 없다는 듯 덧붙였다.
“그다음에 원하는 데로 데려다줄게요. 그럼 됐어요?”
“……약속 지켜요.”
해완의 작은 목소리에 피식 웃은 인하는 여유롭게 핸들을 돌렸다.
* * *
인하가 해완을 데려간 곳은 이전에 몇 번 저를 데려간 적이 있는 프라이빗 룸이 있는 카페였다. 자리에 앉은 해완이 초조한 기색을 감추지 못하는 것에 비해 얄미우리만치 느긋하게 메뉴판을 보던 인하는 주인을 불러 주문을 했다.
“해완 씨는 뭐 마실래요?”
“저는 됐어요.”
어지간하다는 듯 고개를 슬쩍 저은 인하는 일전 해완이 시킨 적 있는 따뜻한 차 한 잔을 제가 고른 커피와 함께 주문했다.
머리가 지독하게 아파 해완은 저도 모르게 손을 들어 관자놀이를 꾹꾹 눌렀다. 소매가 흘러내리며 해완의 손목이 드러난 순간 살짝 눈살을 찌푸린 인하가 갑작스럽게 그것을 낚아채 자신에게 끌어당겼다.
“뭐예요!”
해완은 반사적으로 인하의 손을 뿌리치려 해 봤지만 그는 다소 강압적으로 소매까지 길게 밀어 올렸다.
인하의 눈길이 머문 곳을 무의식중에 따라 본 해완이 멈칫했다. 울긋불긋한 멍으로 손목이 엉망이었는데, 아마 강현의 손자국인 듯했다.
인하는 그런 해완의 반응까지 놓치지 않고 보고는 흥미롭게 말했다.
“멍이 심하게 들었네. 여강현 씨가 때리기라도 했어요?”
“그런 거 아니니까 함부로 말하지 마요.”
해완은 거칠게 인하의 손을 뿌리치며 즉시 부정했다. 인하가 나긋하게 대꾸했다.
“억측이었으면 미안해요. 꼴이 너무 엉망이어서.”
대답할 가치가 없는 말에 해완은 그냥 고개를 창밖으로 돌렸다. 다행히도 인하도 입을 다물어 주었다.
잠시 후, 주인이 덜그럭거리는 소리와 함께 주문한 음료를 가지고 왔다. 무심코 시선을 돌린 해완은 테이블 위에 놓인 딸기 생크림 조각 케이크 한 조각을 보고는 눈살을 찌푸렸다.
그런 해완을 향해 인하가 툭 말을 던졌다.
“말했잖아요. 당신이랑 해언이 생일이니까, 케이크 같이 먹자고.”
“…….”
“아, 정확히 말하면 해언이 생일인가. 당신 생일은 해언이 거에서 따온 거니까.”
굳게 다문 해완의 입술이 바르르 떨렸다. 인하는 해완을 향해 포크를 내밀었지만, 해완은 두 손을 테이블 밑에 내린 채 움직이지 않았다.
그런 해완을 뜻을 알 수 없는 얼굴로 바라보던 인하는 케이크를 포크로 헤집으며 비꼬는 어투로 물었다.
“궁금한 게 하나 있는데, 빌려 쓰던 생일을 혼자 차지하게 된 기분이 어때요?”
해완은 그대로 자리에서 몸을 일으켰다. 그러나 뒤를 돌기도 전에 인하에게 즉시 손목이 붙잡혔다. 그는 냉정한 어투로 말했다.
“앉아요. 해언이 생일에 해 달라고 부탁받은 일을 처리하러 온 거니까.”
반쯤 강요에 의해서이기는 하지만 해완은 자리에 앉았다. 인하는 그런 해완을 보며, 아까의 빈정대는 기색은 싹 지운 차분한 얼굴로 말했다.
“내가 무슨 일 하는지 말해 준 적 없죠?”
그리고 그는 지갑에서 명함을 한 장 꺼내 해완의 앞으로 내밀었다. 해완은 기계적으로 시선을 내렸다. 명함의 앞면은 최소한의 정보만이 담겨 있었다.
서인하, 변호사, 법무 법인 지서.
지금 이걸 왜 말해 주는지 이해가 가질 않아, 해완은 인하를 어리둥절하게 바라보았다.
“보고 있는 대로 변호사예요, 나.”
“…….”
“해언이의 유언 집행인이기도 하고.”
눈만 몇 번 깜빡이던 해완은 앵무새처럼 인하의 말을 따라 했다.
“유언 집행인……?”
인하는 테이블 위에 올려져 있던 핸드폰에서 무언가를 재생시키고는 다시 내려놓았다.
스피커에서, 선명한 해언의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나 윤해언은 사망 후, 현금 예금과 유가 증권을 포함한 전 재산 이십육억 칠천만 원을 윤해완에게 모두 상속한다.
―다만, 상기 유언의 집행일은 내가 사망한 해의 내후년 3월 23일로 한다.
제가 듣고 있는 것이 무엇인지, 이해가 되질 않아 해완은 눈을 깜빡이며 멍하니 인하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인하는 그런 그를 향해, 빙긋이 미소 지으며 말했다.
“생일 축하해요. 윤해완 씨.”
해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냥 희게 굳은 얼굴로 해언의 목소리가 흘러나오던 핸드폰만 응시하고 있었다.
그런 해완에는 아랑곳없이 인하는 제가 들고 온 서류 가방에서 문서를 꺼내 놓으며 차분하게 말했다.
“유언장 전문이니까 한번 읽어 봐요. 모르는 거 있으면 물어보구요.”
“…….”
“아, 재산의 출처에 대해서는 걱정할 필요 없어요. 스타트업 사업으로 초기 자본을 만들었고, 정상적인 투자를 통해서 불린 돈이니까.”
인하는 해완의 바로 앞까지 서류를 밀어 주었지만 해완은 그것을 건드리지도 않았다. 할 수 있는 게 무엇도 없는 사람처럼, 그저 똑같은 곳을 계속해서 바라보기만 할 뿐이었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갑자기 깊게 고개를 숙인 해완의 입에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지금 저를 둘러싼 상황, 그리고 해언이 제 앞으로 남겨 뒀다는 이 말도 안 되는 금액의 돈까지 그 모든 게 끔찍한 블랙 코미디 같았다.
정신 나간 사람처럼 보이리란 생각을 하면서도 도저히 웃음을 멈출 수가 없어 해완은 두 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큭큭대며 한참을 웃었다.
간신히 웃음을 그치고 나자 이번에는 아무 생각도 들지 않았다. 말 그대로 그냥 머릿속이 온통 표백된 것만 같아, 그는 텅 빈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대체 왜…… 대체 왜 이걸 이제 와서 주는 건데요?”
그런 해완의 앞에 말없이 앉아 있던 인하는 느릿하게 입을 열었다.
“글쎄요. 해언이가 그것까지 말해 준 적은 없어서.”
“…….”
“다만 몇 가지 짐작을 해 보자면…… 처음에는 오갈 데 없는 처지처럼 보여서 당신이 자기를 내치지 못하게 만들고 싶었을 수 있고, 그다음에는 당신 생활이 안정적일 때 여강현 씨를 만나면 쉽게 사랑에 빠질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을 수도 있지 않을까요?”
“…….”
“뭐, 다 내 어림짐작이지만요.”
빈곤한 자신의 처지와 그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강현 사이에서 겪어야만 했던 갈등들을 떠올린 해완은 고개를 푹 숙였다.
우스운 것은, 해언이 그렇게까지 않았어도 어차피 강현이 저를 사랑할 일은 없었을 거란 사실이었다.
바로 얼마 전 해완이 깨달은 것처럼.
기분이 널을 뛰었다. 이번에는 목구멍에서 터져 버릴 듯 끓어오르는 흐느낌을 어떻게 막아야 할지 몰라서, 떨리는 손을 들어 올려 눈가를 감쌌다.
“표정이 왜 그래요. 좋은 일인데.”
“…….”
“이제 그 사이코패스 새끼한테 붙어 있지 않아도 이 정도면 그럭저럭 먹고살 수도 있고, 당신한테 집착하는 해언이도 사라졌으니 그냥 행복하고 자유롭게 살면 되잖아요.”
인하의 냉소적인 목소리에 해완이 붉어진 눈으로 고개를 들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켜 자리를 벗어나려는 그의 손목을 또다시 인하가 움켜쥐어 막았다.
해완은 비스듬한 시선으로 인하를 내려다보며 건조하게 중얼거렸다.
“놔.”
“아직 내 얘기 안 끝났어요. 앞으로 상속 절차는 어떻게 할 건지…….”
“내가 당신 앞에서 죽어 줄까?”
“…….”
“그래야지 이따위 돈으로 행복하게 살라는 좆같은 소리 집어치울 거면,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줄게.”
그 말에, 마른 손목을 움켜쥔 인하의 손에 힘이 들어갔다. 해완의 얼굴을 바라보던 시선을 내려 어딘지 모를 곳을 응시하던 그가 불현듯 입을 열었다.
“내가 왜 그걸 바라겠어요. 그렇게 되면 해언이 죽음이 너무 허무하잖아요.”
“……뭐?”
인하는 다시 시선을 올려 해완을 바라보았다. 눈을 깊게 감았다 뜬 그는 차갑게 굳은 얼굴로 토해 내듯이 말을 뱉어 냈다.
“미국에 있을 때, 해언이 심장 이식 수술 받을 기회 있었어요.”
“…….”
“그런데 거부했어요. 자기가 죽지 않으면 당신 곁에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맨 처음 병을 진단받았을 때, 그게 당신이 용서해 줄 계기라 생각하고 기뻐했던 것처럼.”
인하의 말이 머릿속에 들어온 순간, 해완의 심장이 기괴하게 뛰기 시작했다.
제대로 숨을 쉴 수가 없어, 해완은 메마른 입술을 벙긋대며 한참을 애쓴 끝에야 간신히 한마디를 뱉을 수 있었다.
“아니야.”
“…….”
“거짓말이야. 당신이 거짓말하는 거야.”
“…….”
“내가 싫어서……. 그래서 그렇게 말하는 거잖아. 그치?”
해완은 어린애 같은 소망을 안고 인하의 대답을 기다렸다. 거짓말이라고, 겨우 해완에게 돌아오기 위해 해언이 죽음을 선택하는 어리석은 짓을 했겠느냐고, 그렇게 말해 주기만을 간절히 바라고 또 바랐다.
하지만 인하는 수분이 지나도록 아무런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인하 그 자신에게 뭔가를 납득시키기라도 하고 싶은 것처럼 해완을 고집스럽게 바라보기만 했다.
더 이상은 서 있을 수가 없었다. 쓰러지듯 무릎을 꿇은 해완은 뜨거운 눈물을 쏟으며 인하의 팔을 잡아 흔들고 악을 썼다.
“아니야, 아니라고 말해! 해언이가 그랬을 리가 없어, 일부러 죽었을 리가 없어!”
그럼에도 인하에게서는 원하는 답이 돌아오지 않았다. 지독히도 고통스러운 침묵에 해완은 두 손을 모아 빌기까지 했다.
“그렇다고 해 줘요. 아니라고 해 줘요. 제발…….”
해완의 절망 어린 애원 앞에 선 인하의 얼굴이 서서히 일그러지기 시작했다. 그는 우는 것도 웃는 것도 아닌 묘한 표정으로 해완을 내려다보다가, 무언가 말하기라도 할 것처럼 입을 열었으나 결국 아무 말도 꺼내지 못하고 입을 다물어 버렸다.
그렇게 지옥과도 같은 침묵만이 두 사람을 내리누르던 와중, 해완이 갑자기 고개를 들었다.
온몸의 핏기가 빠져나간 듯 창백해진 얼굴에 흐른 눈물을 손등으로 아무렇게나 닦아 낸 해완은 탁자를 쥐고 몸을 일으켜 세우고는 이곳을 빠져나가기 위해 뒤를 돌았다.
“……윤해완 씨, 잠깐…….”
흠칫 놀란 인하가 해완의 몸을 붙들려는 양 손을 뻗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해완이 더 빨랐다. 몸에 불이라도 붙은 것처럼 인하의 손을 쳐 낸 그는 동사하기 일보 직전인 사람처럼 벌벌 떨며 무작정 걸음을 옮겼다.
목적지도 없이 해완은 기계적으로 다리를 움직였다. 모든 것이 혼란스러운 가운데 눈을 감았다 뜰 때마다 짧은 블랙아웃을 연달아 겪었다. 그런 일이 반복되니 제가 걷고 있는 곳이 어딘지도, 얼마나 걸었는지도 모르게 됐다.
아주 잠깐 걸은 것 같기도, 아주 길게 걸은 것 같기도 한 와중, 문득 정신을 차려 보니 어느샌가 길 한가운데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일어서려 해 봤지만 몸을 일으켜 세울 만한 힘조차 남아 있지 않은지 꼼짝할 수가 없었다. 결국 해완은 무릎으로 기어 건물과 건물 사이에 있는 어두운 틈을 찾아 간신히 기대앉아 눈을 감았다.
다시 눈을 뜨니 세상이 온통 옆으로 뒤집혀 있었다. 이상한 일이었지만, 세상이 뒤집힌 게 아니라 제가 바닥에 누워 있는 것임을 잠시 후에는 알았다.
꽃샘추위가 매서운 날이었다. 거칠고 딱딱한 길바닥은 온몸을 주체할 수 없이 떨리게 할 만큼 차갑게 얼어붙어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완은 다시는 깨어나지 않기를 바라며 또 눈을 감았다.
하지만 일은 역시나 마음대로 되지 않았다. 미친 듯이 몸을 흔드는 손길에 눈을 간신히 홉떠 보니 바닥에 널브러져 있던 몸을 누군가 안아 드는 것이 느껴졌다. 지독히도 흐릿한 시야 대신 코끝에 맴도는 타바코 향으로 인하임을 알 수 있었으나 말을 할 기운조차 없어 해완은 저를 내버려 두라는 듯 손만 가로저었다.
격렬하게 치미는 구토감에 해완은 몸을 들썩이며 인하의 품에 무언가를 왈칵 쏟아 냈다. 새하얀 셔츠를 적시는 붉은빛을 마지막으로 해완은 또 눈을 감았다.
지진이라도 난 것인지 지면이 마구 요동치는 느낌에 그는 네 번째로 눈을 떴다. 이번에는 차가운 바닥 대신 부드러운 무언가 위에 누워 있었는데, 어디선가 토막토막 끊기는 아득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정신 ……세요? ……이름이 …… 되세요?”
아주 멀리서 들려오는 메아리처럼 들렸지만 묻는 것이 무엇인지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음에도, 그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입을 벌리고 멍하니 위를 바라보기만 했다.
이름. 내 이름이 뭐였지?
흐릿한 정신을 헤집고 강현의 얼굴이 불쑥 떠올랐다. 강현은 그를 보고 웃으며 이름을 부르려는 듯 입을 열었다.
그래, 강현이가 가르쳐 줄 거야. 안심한 그는 미소를 지었다.
‘윤해언.’
하지만, 그의 얼굴에 어려 있던 미소가 순식간에 표백됐다. 왜 저를 보고 해언의 이름을 부르는지 이해할 수 없어서였다.
‘해언아.’
강현은 다시 입을 열었다. 그러나 강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건 역시 제 이름이 아닌 해언의 이름이었다.
당황한 그는 재차 기억을 뒤져 보려고 애써 봤지만, 제 이름을 부르는 강현의 모습은 어디서도 찾을 수가 없었다.
“……이름이요! …… 환자분……!”
답을 채근하는 목소리에도, 대답을 하지 못한 채 그는 결국 다시 눈을 감았다.
스스로의 이름이, 도저히 떠오르지 않았다.
* * *
찬물로 연거푸 세수를 한 인하가 고개를 들었을 때 시야에 바로 들어온 것은 거울 속에 비친 흰 셔츠에 윤해완이 토해 낸 붉은 핏자국이었다.
이를 꽉 다문 인하는 거칠게 단추를 풀고 셔츠를 벗었다. 안에는 날씨에 어울리지 않는 흰 반팔 티셔츠뿐이었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와이셔츠를 쓰레기통에 버린 후 슈트 재킷을 손에 쥐고 화장실 문을 나섰다.
응급실 앞으로 다가서자 마침 그를 발견한 간호사가 가까이 다가오며 물었다.
“윤해완 님 보호자 되시죠?”
이제 올 때가 됐는데, 응급실 문을 흘끗 본 인하는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네. 저한테 말씀하시면 됩니다.”
“윤해완 님 지금 CT 검사 중이시긴 한데, 일단 피 검사에서 면역 억제제 성분이 검출됐거든요. 혹시 관련 지병이 있으시거나 장기 이식을 받은 적이 있으신가요?”
면역 억제제. 그는 잠시 말문이 막혔지만 침을 꿀꺽 삼키고는 급하게 입을 열었다.
“……이식 수술, 페로몬샘 이식 수술을 받았어요.”
“네, 일단 알겠습니다.”
간호사가 다시 응급실 안으로 향하고 나서 털썩 의자에 주저앉은 인하는 당황한 기색을 숨기지 못하고 두 손으로 마른세수를 했다.
장기 이식 수술 이후 면역 억제제를 복용해야 한다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그가 조사한 바에 따르면 페로몬샘 이식의 경우 면역 거부 반응이 일어나는 일이 드물어 최대 6개월 이내에 면역 억제제를 중단하게 된다고 되어 있었다.
그런데 이식을 받은 지 이미 1년이 훌쩍 넘은 해완이 면역 억제제를 복용하고 있다는 것은 분명히 페로몬샘에 어떤 문제가 생겼음을 의미했다.
기분이 이상했다. 해언이 그렇게 자신의 곁을 떠난 이후 그토록 벼르던 말을 겨우 내뱉은 터였다. 게다가 해언의 뜻대로 일이 되지 않은 게 분명해 보이니 기뻐야 할 게 분명한데, 지금 느껴지는 건 오직 공허함뿐이었다.
고개를 깊게 숙인 인하는 머리를 감싸 쥐었다. 그렇게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문득 바닥에 긴 그림자가 드리워졌다.
인하가 고개를 들기 무섭게 멱살을 잡혀 끌어 올려진 몸이 벽에 퍽 소리가 나도록 부딪쳤다.
“윤해완 어딨어.”
저를 죽일 듯이 노려보는 여강현의 앞에서, 인하는 허무한 웃음을 흘려 보였다.
봄이라고 하기는 추운 날씨였음에도 불구하고 해완을 찾아 지독히 뛰어다니기라도 한 것인지 앞에 선 남자의 몸에서는 뜨거운 열기가 흘러나오고 있었다.
인하를 벽으로 몰아붙인 팔에 바싹 핏대가 서도록 힘을 준 강현을 향해 인하가 힘겹게 입을 열었다.
“……지금 CT 검사 하러 들어갔어요. 쓰러지면서 피를…… 토했는데, 위에서 출혈이 있는 것 같다고 하더군요.”
그 말을 들은 즉시 강현의 얼굴이 새파랗게 질렸다. 즉시 멱살을 쥔 손을 풀고 뒤돌아서려는 강현의 팔을 인하가 휙 붙들었다.
“지금 들어가서 어쩌려는 건데. 윤해완 씨 당신이 자기 비밀 안다는 거 모르잖아.”
순간, 반사적으로 입을 악다문 강현의 턱에 날카로운 근육이 섰다. 그 미세한 신호를 기민하게 잡아낸 인하의 입술이 반쯤 벌어졌다.
“윤해완 씨가…… 알았어요?”
아래를 향했던 강현의 시선이 인하의 얼굴에 살벌하게 꽂혔다. 그는 곧바로 저를 붙든 인하의 손을 뿌리치고는 뒤를 돌아 응급실 데스크를 향해 뛰다시피 걸음을 옮겼다.
잠시 망연히 서 있던 인하는 번쩍 고개를 들고 빠른 걸음으로 강현의 뒤를 따라가 그의 어깨를 한 번 더 잡아챘다.
“잠깐만, 당신이 들어야 될 얘기가 있…….”
그러나 뒤돌아서자마자 이번에 강현은 인하의 목을 한 손으로 움켜쥐고 벽으로 쾅 소리가 나도록 밀친 채 손에 힘을 주었다.
주변에 모인 사람들이 대놓고 웅성대는 소리가 들렸지만 강현은 조금도 아랑곳하지 않고 불타는 듯한 눈을 똑바로 고정시켰다.
숨을 쉴 수 없게 강하게 조이는 손아귀 힘에 인하는 인상을 찌푸리며 이를 악물었다. 그런 그에게 무표정한 얼굴을 바싹 가져다 댄 강현은 낮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당신이랑 윤해언이 꾸민 짓 따위 나는 관심 없어.”
“…….”
“두 번 다시, 윤해완한테 접근하지 마.”
고저 없는 목소리에는 흥분한 기색을 엿볼 수 없었지만 인하의 목을 틀어쥔 손은 손가락 마디마디가 희게 설 정도로 힘이 들어가 있었다. 풀릴 기미가 없이 강도를 더하는 손아귀에 숨이 막혀 눈앞이 아찔해졌고, 인하는 입술을 벙긋대며 강현의 팔뚝을 강하게 쥐었다.
강현은 그제야 겨우 손을 툭 놓았다. 갑자기 트이는 숨에 허리를 깊게 숙인 인하가 가슴을 움켜쥐고 쿨럭이며 격하게 기침을 뱉었다.
“아휴, 저기 괜찮아요?”
옆에 있던 누군가의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간신히 고개를 끄덕이며 허리를 폈을 때, 응급실 안으로 들어가기라도 한 것인지 강현은 이미 시야에서 사라지고 없었다.
숨을 헐떡이며 벽에 기대선 인하는 이마에 배어든 땀을 한 손으로 대충 훔쳐 닦았다. 의자에 놓아둔 자신의 브리프케이스에서 해언의 유언장을 꺼내 들고 무언가 깊게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핸드폰을 꺼내 어디론가 전화를 걸었다.
* * *
창백하다 못해 투명하기까지 한 해완의 잠든 얼굴 위로 붉은 노을이 비치는 모양을, 강현은 눈 한번 떼지 못한 채 내내 바라보고 있었다.
토혈을 한 것은 인하가 언급한 대로 극심한 위궤양으로 인해 일어난 위 출혈 때문이 맞았다. 수혈만 네 팩을 받고 내시경으로 위에 난 상처를 봉합해 지혈하는 응급 시술까지 받은 뒤 원래 입원시키려 했던 대학 병원으로 옮겨 VIP 병실에 막 들어온 터였다.
공교롭게도 해완이 이식 수술을 받은 병원이 바로 지금의 병원이었다. 케이스가 드문 페로몬샘 이식 수술을 할 만한 대형 병원은 애초부터 다섯 손가락 안에 꼽히는 정도였으므로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오히려 그 덕에 해완의 상태에 대해 빠르게 파악할 수 있어 다행스럽기만 했다.
원장의 지시로 VIP실로 찾아온 주치의는 현재 해완의 페로몬샘에 이식 후 만성 거부 반응이 나타나고 있으며 그 때문에 몇 달간 면역 억제제를 복용하고 있었다는 말로 서두를 뗐다.
그것을 듣자마자 즉시, 입에서 말이 제멋대로 튀어나왔다.
‘당장 제거해요, 그럼.’
‘네?’
‘그 페로몬샘 당장 제거해 달라고요. 바로 수술해 줘요.’
강현의 격렬한 목소리에 주치의는 어안이 벙벙한 얼굴로 잠시 말을 멈췄다가 안경을 추어올리며 당황스럽다는 듯 대꾸했다.
‘페로몬샘을 그렇게 무턱대고 제거할 수는 없습니다. 페로몬샘 없이는 히트 사이클 조절이 불가능하고, 저렇게 면역력이 떨어진 상태에서 자칫 히트 사이클 주기가 잘못 겹치면 쇼크로 목숨이 위험해질 수도 있어요.’
‘그럼 어떻게 하라는 겁니까!’
‘어차피 만성 거부 반응이 일어난 이상 면역 억제제로 기능 저하를 막는 것에는 한계가 있어요. 그러니 지금 페로몬샘의 기능이 떨어지면 재이식을 해야 합니다. 다만…….’
잠시 말을 멈춘 주치의는 병상에 누운 해완을 흘끗 보더니, 머뭇거리며 말을 끝맺었다.
‘환자가 페로몬샘 재이식에 대해서 큰 거부감을 가지고 있더군요.’
환자 동의를 얻지 않은 이상 수술을 할 수 없다는 주치의의 말을 떠올린 강현은 손바닥에 손톱이 파고들어 붉은 자국이 날 정도로 강하게 주먹을 움켜쥐었다.
그와 동시에, 윤해언의 향을 가지고 싶어서 안달하며 보냈던 지난 9년의 세월을 떠올린 강현의 얼굴에 그 자신을 향한 적나라한 조소가 비실거리며 떠올랐다.
그토록 집요하게 매달렸던, 오로지 유일하다고 느꼈던 그 완벽한 향이 해완의 몸에서 풍긴다는 이유만으로 증오의 대상으로 바뀌었음을 깨달은 것은 얼마 되지 않았다.
고작해야 화학적 결합물에 지나지 않는 그 향이 윤해완의 온기의 냄새를 가리는 것에 때로 참을 수 없이 분노가 치밀었다.
어쩌면 강현만이 알고 있을 해완의 은목서 향을, 그 질기리만치 짙은 윤해언의 냄새가 감추고 흩트려 내는 것이 너무나 싫었다.
죽어서까지 윤해완에게 영구적인 흔적을 남긴 윤해언의 존재가, 소름 끼치도록 증오스러웠다.
그러니 윤해언의 페로몬샘을 제거해야 될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강현의 마음을 즉시 차지한 것은 깊은 안도감이었다. 비열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그랬다.
그런데 해완이 끝까지 페로몬샘을 제거하는 것을 거부한다면.
그러면 그때는 어떻게 해야 되지?
‘네가 싫어, 싫어, 싫다고…….’
순간, 해완의 목소리가 들린 듯한 착각에 강현은 흠칫 침상을 바라보았다. 하지만 해완은 조금의 미동도 없이 유리로 만들어진 인형 같은 얼굴로 잠들어 있었다.
그 얼굴을 보고 나서야 강현은 그가 모든 사실을 알았던 지난밤 해완의 목소리를 환청으로 들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하지만 이미 멋대로 뛰기 시작한 심장은 숨이 멎기라도 할 것처럼 더욱 격렬하게 고동쳤다. 저를 거부하던 해완의 목소리와, 보안 요원에게서 해완이 기어코 그 건물을 떠났다는 연락을 받았을 때 느꼈던 날카로운 공포감이 뒤섞인 결과였다.
강현은 힘겹게 해완에게 시선을 돌렸다. 핏기 하나 없이 창백한 안색을 한 해완의 얼굴은 비정상적으로 고요했다. 마치 호흡 이외에는 아무것도 할 수 없을 듯이 약하고 희미해 보였다.
이런 몸을 하고서도 해완이 그에게서 도망치려 했다는 사실에 대한 뜨거운 분노가, 앞으로 그를 어떻게 붙잡아야 하는지에 대한 중력과도 같은 압박감이 강현을 짓눌러 내렸다.
고개를 내린 강현은 두 손으로 얼굴을 쥐어뜯듯이 움켜쥐고는 숨을 헐떡였다. 스스로가 만든 어둠 사이로 그는 오로지 단 하나의 생각에 몰두했다.
절대 못 떠나.
무슨 일이 있어도, 너는 절대 날 못 떠나.
무슨 일이 있어도, 나는 절대 널 놔주지 않을 거야.
살기 위한 방법은 그것 하나뿐인 것처럼, 강현은 그 단순한 문장 몇 가지에 매달리고 또 매달렸다.
그때, 강현의 머리를 어루만지는 따뜻한 손길이 그를 급작스레 어둠 속에서 끌어냈다.
강현은 드물게 크게 놀라며 튕기듯이 허리를 바로 세웠다. 어느새 눈을 뜬 해완이, 그를 조용히 바라보고 있었다.
쓰다듬고 있던 강현의 머리가 떨어져 나간 탓에 어색하게 허공을 맴돌던 마른 손은 침대 위로 느리게 내려앉았다.
꼬박 반나절 동안 정신을 잃고 있었는데도 해완의 눈빛은 묘하게 명료해 보였다. 그 물기 어린 갈색 눈동자에 홀린 듯 시선을 고정시키고 있던 강현은 간신히 목소리를 쥐어짜 내 입을 열었다.
“병원이야, 여기.”
“…….”
“위궤양 때문에 심한 위 출혈이 있었어. 다행히 봉합하는 시술은 잘됐지만 당분간은 병원에 입원해서 또 출혈이 일어나지 않는지 경과를 지켜보게 될 거야.”
“…….”
“그리고, 몸 상태 회복되는 대로 페로몬샘 재이식 수술 날짜 잡을 거야.”
그 말에 신기하리만치 고요하던 해완의 얼굴이 잠시 흔들렸다. 그럼에도 강현은 일부러 더 딱딱한 어투로 말을 이었다.
“이식 대기자 등록해 놨고 케이스 생기면 1순위로 연락 주기로 했어. 그리고 면역 억제제는…… 재이식 전에 지금 페로몬샘 기능이 완전히 떨어지게 둘 수는 없으니 당분간 복용은 해야겠지만 제제를 바꾸고 용량도 크게 줄일 거야.”
지극히 일방적인 설명에도 해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느리게 눈꺼풀을 깜빡이며 강현의 얼굴을 바라보기만 했다.
이상하게도 어떤 말보다 그 침묵이 강현의 숨통을 더욱 졸랐다. 점점 흥분하기 시작한 강현은 신경질적으로 귀 뒤와 목을 강하게 긁어내리며 말을 뱉었다.
“수술을 안 받겠다는 말 따위는 할 생각도 하지 마.”
“…….”
“네가 싫다고 해도 어떻게든 하게 만들 거야. 내 옆에서 도망치려고 해도 소용없어. 넌 나한테서 절대 못 벗어나.”
“…….”
“내 말 알아들었어?”
그토록 싫어하던 강압적인 말투에 언성까지 높아졌음에도 불구하고, 해완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하얀 얼굴로 강현을 조용히 응시하다가 시선을 살짝 내려 그의 목덜미에 눈을 두었다.
그 시선이 닿자 불현듯 강현은 목에서 따끔한 통증을 느꼈다. 그제야 그는 목을 쥐어뜯고 있던 제 손톱 끝에 점점이 붉은 자국들이 묻어 있음을 알아차렸다.
그런 강현의 모습을 투명한 눈동자에 담던 해완이 갑자기 입을 열었다.
“……미안해, 강현아.”
뭐?
자신의 귀로 들은 말을 믿을 수 없어 강현은 입을 반쯤 벌렸다. 그럼에도 해완은 흔들림 없이 곧바로 말을 이었다.
“너한테 거짓말해서 미안해.”
고작 몇 마디조차 숨이 찬 듯 해완은 잠시 숨을 골랐지만, 바싹 메마른 입술을 열어 다음 말을 내뱉기를 조금도 주저하지는 않았다.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
“…….”
“내 눈에 보이는 내가 너무 초라한 사람이라, 내 진짜 모습으로는 너한테 사랑받을 자신이 없어서, 해언이가 아니라고 하면 너를 두 번 다시 못 볼까 봐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
“내가 비겁했어. 내가 정말 잘못했어, 미안해, 강현아.”
강현은 아무것도 하지 못했다. 대답을 위해 입을 달싹일 엄두조차 낼 수 없었다. 그저 바보같이 입을 벌린 채 하염없이 굳어만 있었다.
반면 해완의 태도는 지극히 고요할 뿐이었다. 약간이라도 마음에 거리끼는 상황이 생기면 쉽게도 표정을 드러내던 그 연한 갈색 눈동자에는 한 치의 망설임도 없었다.
그때야 강현은, 해완이 아주 오래도록 이 순간을 준비해 왔음을 깨달았다.
몸과 마음이 한계에 몰린 지금에 와서도 흔들림 없이 내뱉을 수 있을 만큼,
단 한 번도 강현 그 자신을 정말 속인 적 없었던 모든 시간 동안.
그것을 깨달은 즉시, 들불처럼 빠르게 번져 온 마음을 태우는 듯한 수치심이 강현의 온몸을 점령했다.
차마 해완의 눈을 바라볼 수가 없어 강현은 시선을 사선으로 내렸다. 온몸에 벌레가 기어가는 것처럼 곳곳에 들끓어 오르는 감정을 통제할 수 없어 뒤로 무르려는 손을 해완이 갑자기 꽉 틀어잡았다.
어디서 난 힘인지 모를 강한 악력에 강현은 그토록 피하고 싶었던 해완의 눈을 반사적으로 쳐다보았다. 저를 향한 눈빛은 결코 도망치지 않겠다는 듯 단단해 보였으나 아주 사소한 몸짓 하나만으로도 망가져 버릴 연약함을 동시에 지니고 있었다.
그러한 모순에 강현이 멈칫한 사이, 틈을 놓치지 않고 해완이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너도 나한테 말해 줘.”
왜인지, 갑자기 그 목소리는 지독히도 고통스럽게 변해 있었다.
무엇이든 물어보라고, 무엇이든 답하겠다고 강현이 불가항력적으로 입을 열려던 순간,
“너는 왜 나를 속였어?”
해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에, 강현은 덜컥 굳어 버렸다.
강현의 얼굴에 단단히 붙박여 있던 해완의 눈이 그제야 떨리기 시작했다. 삽시간에 달아오른 눈가에서 떨어진 뜨거운 눈물방울이 바싹 마른 볼 위로 뚝 흘러내렸다. 옆으로 돌아누워 강현의 손에 매달리듯 얼굴을 묻은 해완은 울음 섞인 목소리로 정신없이 중얼거렸다.
“네가 날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았어도 괜찮아. 그냥, 그냥 뭐라도 좋으니까 왜 그랬는지 듣고 싶어. 너를…… 이해하고 싶어.”
“…….”
“네가 그걸 말해 주기만 한다면, 나…….”
강현은 불에 덴 것처럼 잡혀 있는 해완의 손을 뿌리치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크게 열린 해완의 눈이 그의 얼굴을 향해 올라갔다.
과호흡이라도 일으킬 듯 강현의 숨이 거칠어졌다. 그는 몇 번 입술을 벙긋거렸지만, 무엇도 소리가 되어서 나오진 않았다.
미안하다고 말하라고 하면, 무릎 꿇고 용서를 빌라고 하면, 다시는 그러지 말라고 하면 그것은 얼마든지, 백 번 천 번이고 아무리 오랜 시간이 걸린다 해도 해완이 받아들일 때까지 하고 또 할 수 있었다.
하지만 그 자신을 드러내라고 하면, 그 일만은 할 수 없었다.
그가 아주 오래전에 잃어버린 것이 무엇인지, 그 때문에 제 어머니가 어떻게 죽었는지, 그러고도 제대로 된 인간인 척 흉내를 내며 해완에게 접근했다는 것을 알게 할 수는 없었다.
그렇게 하면, 해완은 절대로 자신의 곁에 머물러 주지 않을 터였다.
그러나 해완은 대답을 듣기를 포기할 생각이 없어 보였다. 흘러내리는 눈물만으로도 버거운 듯 몸을 떨면서도 강현의 얼굴에서 애원하는 시선을 떼지 않았다.
지옥과도 같은 대치를 견디지 못한 끝에 강현은 고개를 저으며 뒤로 천천히 물러섰다. 강현이 저에게서 멀어지기 시작하자 해완은 몸을 일으키려 애쓰며 그를 향해 손을 뻗었다.
“그러지 마, 가지 마, 강현아.”
해완의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에도 그대로 돌아선 강현은 병실을 빠져나가기 시작했다. 그런 강현의 등에 대고, 해완이 울부짖었다.
“가지 마! 너는 이러면 안 되잖아! 너만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절규와 같은 외침에도 강현은 멈추지 않았다. 강현이 나간 뒤 문이 완전히 닫히고 병실 안에 오롯이 홀로 남겨진 해완은 시트를 양손으로 움켜쥐고 오열하기 시작했다.
해완을 진짜 상처 입힌 것은 학대 끝에 부모에게서 버림받은 것도, 해언이 비뚤어진 방식으로 저를 사랑했고 그 때문에 자살에 가까운 죽음을 선택한 것도, 강현이 모든 사실을 알고 있으면서도 모른 척 저를 속인 것도 아니었다.
해완이 사랑했던 모든 사람들이 그에게 입힌 상처에 대해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줄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는 사실이었다.
부모님도 해언도 미워하고 싶지 않았다. 진심으로 사랑했던 그들을 미워하며 살아가야 하는 것이 더욱 고통스럽게 여겨졌다.
그러나 그들 중 누구도 해완에게 자신의 사정을 설명하고 잘못에 대한 용서를 구하지 않았다. 해완이 마땅히 그런 가치가 있는 인간이라는 것조차 인정해 주지 않고 철저히 무시하고 멋대로 떠나 버렸다.
하지만 강현만큼은, 그만큼은 그러지 않아 주기를 절실히 바랐다.
저를 조금도 사랑하지 않았더라도, 그래서 사랑한다는 말을 해 준 적이 한 번도 없는 것일지라도, 오로지 해언의 향이 좋아서 저를 곁에 둔 것일 뿐이더라도…….
단 한 번만이라도 그를 이해시켜 주려 노력하고 진심으로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주기만 한다면.
그렇다면 어떻게든 살아갈 수 있을 것 같았다.
고통스럽게 새어 나오던 흐느낌이 천천히 조용해졌다. 스스로를 방어할 길 없이 고스란히 노출된 마음에 스며드는 독과 같은 생각을, 해완은 조금도 부정하지 않고 고스란히 받아들였다.
해완이 간신히 붙들고 있던 희망이, 완벽하게 박살 나는 순간이었다.
늦은 시간이라고는 할 수 없는 밤이었으나 초저녁부터 졸기 시작한 해완은 어느새 깊은 잠에 빠져 있었다.
그런 해완의 얼굴을 바라보던 강현은 조용히 손을 들어 해완의 하얀 이마 위에 흘러내린 머리칼을 살살 쓸어내렸다.
닿는 것마저 상처 입힐까 두려운 듯 조심스러운 손길이었다.
병원에 입원한 지 어느새 일주일이 지난 뒤였다. 내시경으로 봉합 시술을 받은 뒤 더 이상의 위 출혈은 없었으나 염증 수치가 잘 잡히지 않아 생각보다 입원이 길어지고 있었다.
해완의 침대 옆에 있는 의자에서 조용히 몸을 일으킨 강현은 피곤한 눈가를 꾹꾹 누르며 병상과 떨어져 있는 탁자로 자리를 옮겨 노트북을 켰다.
입원이 아무리 길어진다 해도 이식 수술을 바로 받지 못하는 이상 며칠 뒤에는 퇴원을 해야 할 테고, 그를 위해 강현은 해완을 병간호하는 틈틈이 고객 명부를 정리 중에 있었다.
예정된 작업까지는 전부 소화하고 휴업할 예정이었으나 해완을 데리고 집에 돌아가면 그를 혼자 두고 작업실을 다니기는 불가능할 것이었다. 그래서 위약금을 물고서라도 계약을 파기하는 쪽으로 생각을 바꾼 터였다.
한국에서의 일은 끝낼 마음을 일찍부터 먹고 받은 의뢰들을 쳐 내고 있었던 것이 그나마 다행이었다. 어차피 건물이야 제 소유이므로 작업실을 비울 필요는 없으니, 남은 계약들만 잘 마무리되면 더 이상은 신경을 빼앗길 일이 없었다.
그러나, 문득 마음에 스치는 서늘한 생각에 타자를 두드리던 강현의 손이 느슨해졌다.
언제까지 이런 식으로, 해완을 붙들어 둘 수 있을까?
엄습하는 불안감에 몸을 일으킨 강현은 다시 해완의 침대 곁으로 다가가 그의 잠든 얼굴을 가만히 내려다보았다.
최근 해완은 거의 대부분의 시간을 자면서 보냈다. 진료차 해야 하는 검사 같은 것들은 별다른 거부 없이 얌전히 받았지만 눈을 뜨고 있는 것은 거의 그때뿐이었다.
이에 대해 의사는 면역력과 체력이 심각하게 저하된 상태에 위 출혈 때문에 제대로 된 영양 보충도 불가능한 상태라 잠으로 에너지를 보충하려는 것은 자연스러운 현상일 수 있다고 말했다.
그러나 잠깐이라도 눈을 떼면 금방 잠들어 버리곤 하는 해완의 얼굴을 볼 때마다 어쩌면 그가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제게서 도망치고 있는 것이 아닌가 하는 직감이 따끔하게 그의 심장을 파고들었다.
대답할 수 없는 질문을 던지던 해완의 목소리가 귓가를 울렸다.
그의 절절한 물음에 답하지 못하고 도망쳐 버린 그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선명해, 어금니를 강하게 악문 강현의 턱에 날카로운 근육이 섰다.
그 밤, 강현이 병실로 다시 돌아왔을 때 해완은 지금과 같이 조용히 잠들어 있었다. 등을 돌릴 때 분명 우는 소리를 들었음에도, 흰 얼굴에는 더 이상 눈물의 흔적이 없었다.
그리고 다음 날 눈을 뜬 해완은 더 이상 강현에게 무엇도 묻지 않았다.
해완이 그만둔 것은 그뿐만이 아니었다. 그는 강현이 하는 모든 일들에 대해 어떤 거부도 하지 않았다. 사소하게는 해완이 가는 곳마다 강현이 따라붙는 것부터, 그의 몸을 씻겨 주거나 옷을 입혀 주는 등 평소라면 주저하는 기색이라도 보였을 일들에 대해서도 한마디 말도 없이 유순하게 받아들였다.
재이식에 관한 것도 그랬다. 해완이 깨어났을 때 강현이 지나칠 정도로 강압적으로 말한 이유는 그가 동의하지 않으면 애초에 수술이 불가능하다는 걸 알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그런 걱정이 무색하게 요 며칠간 해완은 재이식을 위한 검사나 상담까지도 별다른 말 없이 조용히 따르고 있었다.
하지만 그 위태로운 평온함이 오래 지속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타인은 물론이고 저 스스로의 감정까지도 무감하게 살아온 강현이라 하더라도 모를 수가 없었다.
그게 강현을 지독한 불안에 시달리게 만들었다. VIP 병실에는 보호자를 위한 침대가 따로 있었지만 약간의 거리를 두고 잠드는 것조차 참을 수가 없어서, 매일 밤을 해완의 침대 옆에 달린 보조 침대에서 자면서도 수십 번씩 잠에서 깨서 그의 잠든 얼굴을 확인하곤 했다.
하루의 대부분을 앉아 있던 의자에 다시 몸을 붙인 그는 해완의 마른 손을 잡고 가만히 입술을 가져다 대고, 그동안 수없이 반복해 온 기도와도 같은 구절을 속으로 되뇌었다.
내 옆에만 있으면 돼.
내 옆에만 있게 만들면, 그러면 언젠가는…….
스스로의 마음속에만 존재하는 뒷말을 흐리며, 강현은 눈을 감았다.
* * *
“……현아, 강현아.”
다음 날, 저를 부르는 목소리에 강현은 흠칫 놀라 잠에서 깨어났다. 튕겨 오르듯 몸을 일으키자, 어느새 눈을 뜬 해완이 보조 침대에 누운 저를 바라보고 앉아 있었다.
잠에서 완전히 깨기도 전에 머릿속에 바로 든 생각은 해완이 이렇게 저를 부르며 깨운 게 참 오랜만이라는 것이었다.
강현이 멍한 얼굴로 저를 바라보며 아무 말도 하지 않자 해완은 나직하게 한 번 더 말을 걸었다.
“오늘은 좀 잘 잤어? 너 그동안 계속 못 잤잖아.”
“……어?”
“매일 일하느라 늦게 잤지? 자면서도 계속 깨고.”
“알고…… 있었어?”
강현의 어리둥절한 물음에 해완은 또 미소를 지으며 말했다.
“옆에서 계속 부스럭대는데 어떻게 몰라.”
너무나 오랜만에 보는 해완의 미소에 시선을 빼앗긴 강현은 저도 모르게 그를 따라 웃었다. 그런 강현을 향해 해완이 머뭇거리며 입을 열었다.
“강현아. 나…… 보리가 보고 싶어.”
“……보리?”
생각지도 못한 말에 강현은 멍청하게 되물었고, 해완은 하얀 얼굴을 끄덕였다.
하지만 그가 무엇을 부탁했건 상관없었다. 해완이 무언가를 하고 싶어졌다는 것 자체에 마음이 터질 듯이 부풀어 오른 강현은 허둥지둥 답했다.
“어, 그럼 이따 잠깐 데려올까? 요즘 너무 갇혀만 있었으니까 이 앞에서 산책도 좀 하면 좋을 것 같은데.”
강현이 거의 집에 들어가지 못했기 때문에 보리는 서연의 집에 맡겨 놓은 터였다. 해완을 두고 병원을 떠날 수는 없었으므로 그녀의 비서에게 잠깐 데리고 와 달라고 부탁해야겠다는 계획을 빠르게 세우며 묻자, 해완은 배시시 웃으며 기쁘게 대답했다.
“응.”
“그럼, 어, 나 잠깐 전화 좀 하고 올게.”
몸을 벌떡 일으킨 강현의 손을 해완이 부드럽게 쥐었다.
“그렇게 안 서둘러도 돼. 너 요즘 밥도 잘 안 챙겨 먹었잖아. 식당에 가서 아침이라도 먹고 와.”
미음만 겨우 넘기는 해완을 곁에 두고 무엇을 제대로 먹을 수 없었던 건 사실이지만 병실을 멀리 떠나고 싶지 않았던 강현이 더듬거리며 입을 열었다.
“아냐, 나 괜찮아. 그러니까…….”
그러자 살짝 표정을 굳힌 해완이 강현의 손을 더욱 힘주어 잡으며 단호하게 말했다.
“나 어디 안 가. 그러니까 가서 먹고 와.”
도저히 아니라고 할 수 없어, 결국 강현은 병원 식당까지 내려가 며칠 만에 꾸역꾸역 제대로 된 식사를 했다.
밥이 코로 들어가는지 입으로 들어가는지 모를 정도로 빠르게 해치운 뒤 다시 병실로 올라오자 카디건을 걸치고 창가에 선 해완이 강현을 돌아보며 미소를 지었다.
그 얼굴을 보고서야 겨우 긴장이 풀렸다. 눈을 떼는 즉시 해완이 사라져 버릴 것만 같던 강박이 겨우 느슨해지는 기분에, 강현은 해완이 의아하게 제 이름을 부를 때까지 멍하니 서 있었다.
한 시간여 뒤, 서연의 비서로부터 보리를 데리고 왔다는 연락을 받은 강현은 해완의 나갈 준비를 도왔다. 겨울이 봄을 샘내는 일은 이제 끝난 모양인지 기적처럼 날씨가 좋은 날이었었음에도 그는 해완이 옷을 단단히 챙겨 입은 것을 몇 번씩 확인하고 나서야 병원 밖으로 길을 나섰다.
병원 안쪽 깊숙한 곳에 있는 산책로는 길다고는 할 수 없었지만 어차피 오래 나와 있을 수는 없는 노릇이라 오히려 다행이었다.
서연의 비서가 그곳으로 데리고 온 보리를 발견한 해완의 얼굴이 환해졌다.
“보리야!”
멀리서 제 주인과 제가 좋아하는 해완의 실루엣을 발견한 것만으로도 흥분하기 시작한 보리는 해완이 웃으며 그에게 다가가자 펄쩍펄쩍 뛰며 좋아 어쩔 줄을 몰랐다.
“보리, 앉아.”
“그러지 마. 강현아.”
오랜만에 두 사람을 본 터라 지나치게 날뛰기 시작한 보리를 짐짓 엄한 목소리로 진정시키려는 강현을 해완이 고개를 저어 말렸다.
보리 앞에 쪼그려 앉은 해완은 보리의 얼굴을 두 손으로 감싸 강현을 향해 돌리게 하며 밝은 목소리로 말했다.
“봐. 너 만나서 이렇게 좋아하잖아.”
그렇게 말하며 해완은 강현을 향해 해가 비치듯 활짝 웃었다.
처음 보는 것도 아닌데 해완의 환한 웃음이 마음이 저리도록 귀하게 느껴진 까닭에, 강현은 넋을 놓고 해완의 눈가와 입술이 곱게 휘어지는 모양만을 집요하게 눈에 담았다.
말한 의도와는 달리 제 얼굴에만 붙박인 시선에 얼굴을 살짝 붉힌 해완은 강현의 팔을 잡아끌며 보리 앞에 앉게 만들었다.
“나 말고 보리 보라니까.”
그럼에도 해완의 얼굴만 바라보던 강현은 해완이 그의 볼까지 살짝 밀어 내자 어쩔 수 없이 눈을 보리의 얼굴로 내렸다.
그렇게 보리를 바라본 그때, 그동안 한 번도 해 보지 못한 이상한 생각 하나가 들었다.
저를 보고 헥헥대고 있는 보리가 꼭 웃는 것처럼, 행복한 것처럼 보인다는 생각이었다.
개들에게 표정이 있다는 생각조차 해 본 적이 없는데, 왜 갑자기 보리가 웃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건지 이해가 가질 않아 작은 혼란에 빠진 강현은 살짝 인상을 찡그리고 전에 없이 보리의 얼굴을 진지하게 들여다보았다.
그런 강현을 본 해완이 기쁜 듯 물었다.
“그것 봐. 엄청 귀엽지?”
강현은 해완의 웃는 얼굴을 돌아보았다가, 다시 보리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순간, 어떤 깨달음이 강현의 전신을 관통하며 스쳐 지나갔다.
지금 자신이 느끼는 이질감은 보리의 얼굴이 달라진 것도, 자신의 눈이 이상해진 탓도 아니었다.
그것은 해완이었다. 해완의 손이 닿는 곳마다, 숨어 있던 꽃이 피어나듯 강현의 적막한 세상이 바뀌고 있었다.
벼락같은 지각에 멍해져 있는 강현의 손을 붙잡고, 해완이 온유하게 속삭였다.
“이제 산책할까?”
왜인지 아무 말도 할 수가 없어 강현은 간신히 고개만 살짝 끄덕였다.
조금씩 봉오리가 피기 시작한 봄꽃들 아래에서 강현과 해완은 보리를 데리고 짧은 산책로를 천천히 걸었다.
겨울이 존재했다는 것조차 거짓말처럼 느껴질 정도로 따스한 바람이 두 사람 주위를 맴돌았지만, 아직 몸이 온전치 않은 해완은 산책로를 한 번 왕복한 것만으로도 지친 기색을 보였다. 결국 두 사람은 비서가 보리를 데려가기 전에 잠깐 벤치에 앉아 느긋하게 쉬기로 했다.
보리가 발치에 엎드려 있는 사이, 잡고 있던 해완의 손에만 물끄러미 시선을 두던 강현이 내내 마음에 얹혀 있던 말을 뱉었다.
“생일…… 못 챙겨 줘서 미안해.”
“어?”
“23일이 네 생일이었잖아. 처음으로 맞는 네 생일인데…… 아무것도 못 해 줬네, 내가.”
그 말에, 눈을 깜빡이며 강현의 얼굴을 잠시 바라보던 해완이 옅게 웃으며 입을 열었다.
“그날 진짜 내 생일 아니니까 괜찮아.”
“……어?”
“그날은, 원래 해언이 생일이야.”
해완의 입에서 나온 이름에 강현의 얼굴이 노골적으로 굳었다. 그럼에도 해완은 희미한 미소를 머금은 채 여상하게 말을 이었다.
“나는 이름도 생일도 없이 버려져서, 같은 날 같은 장소에 버려진 해언이 이름이랑 생일을 따서 내 걸 만든 거거든.”
“…….”
“빨리 말해 줬으면 좋았을 걸. 내 진짜 생일도 아닌데 괜히 신경 쓰게 했네.”
담담한 목소리가 심장을 더욱 아프게 짓눌렀다. 견딜 수 없는 충동에 강현은 그대로 해완의 팔을 잡아당겨 품에 안았다. 병적으로 마른 몸을 그렇게 세게 안아서는 안 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놓아줄 수가 없어 숨이 막힐 정도로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강현은 해완의 머리칼에 입술을 파묻고 힘을 주어 중얼거렸다.
“나한테 그날은 네 생일이야.”
“…….”
“윤해완 네 생일 말고 아무 의미도 없다고.”
그 말에, 강현의 품에 안긴 해완이 그의 목덜미에 고개를 묻었다. 마치 제 품으로 숨어드는 것만 같은 몸짓에 강현은 해완을 안은 팔에 더욱 힘을 주었다.
그 상태로 강현은 세상을 가로막듯 등을 돌렸다. 오로지 제 품에만 머물게 할 것처럼 길고 단단한 팔로 해완을 가두듯이 안고 또 안았다.
그 탓에, 해완이 어떤 얼굴을 하고 있는지는 차마 보지 못했다.
* * *
저녁 회진에서 해완의 주치의는 추가 위 출혈의 징조도 전혀 없고 염증 수치가 제법 좋아졌다며 빠르면 내일 중으로 퇴원을 해도 좋겠다고 이야기했다.
아무리 VIP실이라고 해도 병원은 병원이라 꽤나 답답했던 터라 해완은 물론이고 강현 또한 기쁜 기색을 숨기지 못했다.
물론 퇴원하고 나서도 당분간은 병원을 자주 드나들어야 할 터였으나, 그래도 해완과 함께 다시 집에 돌아간다는 사실만으로도 강현은 들뜨는 마음을 느꼈다.
아마도 그래서 그런 용기가 생겼을 것이다. 강현은 잠을 자기 위해 침대에 눕는 해완을 향해 불쑥 입을 열었다.
“해완아.”
강현의 입에서 나온 자신의 이름에 이불을 끌어 올리던 해완의 손이 멈칫했다. 하지만 그는 곧 고개를 들어 강현을 바라보며 부드럽게 대꾸했다.
“응?”
“나 오늘…… 너 안고 자도 돼?”
해완을 안고 잔 것이 한두 번도 아닌데, 이상하게 떨려 나오는 목소리에 당황한 강현은 눈을 깜빡였다.
요 며칠간 그러지 못한 탓인지 심장이 쿵쿵 뛰고 얼굴에 열이 집중되는 듯한 괴상한 느낌까지 들었다. 인생에서 거의 겪어 보지 못한 생소한 감정에 강현은 해완의 눈을 마주하지 못하고 고개를 휙 사선으로 내렸다.
해완의 고요한 시선이 그런 강현의 얼굴에 주의 깊게 머물렀다. 이내 손을 뻗은 그는 강현의 여리게 떨고 있던 손을 붙들었다.
강현이 흠칫 고개를 들자 해완은 미소 지은 얼굴로 자신의 옆에 누우라는 듯 손을 살짝 잡아끌었다. 해완의 허락을 받고서도 괜히 몸이 굳은 강현은 삐걱대는 몸짓으로 그의 옆에 누웠다.
항상 그랬듯이 오른쪽으로 돌아누운 해완의 등에 가슴을 대고 바싹 붙어 눕고는 품에 해완을 가득 안고 몸을 작게 웅크렸다.
이렇게 바싹 껴안을 때만 맡을 수 있는 해완의 냄새를 겨우 다시 맡은 찰나, 강현은 단 한 번도 겪어 본 적 없는 감정의 격류에 휩싸여 몸을 부르르 떨었다.
어둠 속에서 그렇게 서로의 온기에 기대어 눈을 감고 있는 사이, 품에 안은 해완의 숨소리가 일정해졌다.
하지만 강현은 잠을 잘 수가 없었다. 언젠가부터인가 강박적으로 되풀이하고 또 되풀이하던 혼자만의 희망이 자꾸만 터질 듯 부풀어 오르는 탓이었다.
결국 강현은 충동에 못 이겨 작게 입을 열었다.
“해완아.”
“…….”
“해완아, 자?”
깊이 잠이 든 듯 해완은 대답이 없었다. 강현은 해완의 부드러운 머리칼에 입술을 묻었지만, 도저히 새어 나오는 말을 틀어막을 길이 없었다.
“내가 많이 생각해 봤는데…… 나랑 외국 가서 살지 않을래?”
“…….”
“너 요리 좋아하니까 프랑스에 가면 어떨까 싶어. 거기서 요리 배워서, 작은 가게를 하나 내는 거야. 난 그 옆에 향수 공방을 차릴게. 그리고 같이 출근하고, 같이 퇴근하고, 그렇게 살면 안 될까?”
“…….”
“그리고, 그리고 그때가 되면…….”
너는 왜 나를 속였느냐고, 그 질문에 제멋대로 유예해 버린 대답을 돌려줄 수 있을 것이다.
순간 해완을 깨워 그에게 진짜 자신을 드러낼 수 있을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 달라고 하고 싶은 강렬한 욕망이 강현의 마음속에서 끓어올랐다.
나를 왜 속였는지 너를 이해할 수 있게 해 달라고.
해완의 그 질문이 그토록 강현에게 어려웠던 이유는 그것을 물은 이가 다른 누구도 아닌 해완이라는 데에도 있었다.
아무도 강현을 이해하지 못해도 괜찮았다. 사람 거죽을 썼을 뿐이지 제대로 된 인간이 아니라는 식으로 대해져도 상관없었다. 그것을 아쉬워하기에는 감정이란 것을 가둬 버린 지 너무 오랜 시간이 지났다. 스스로의 내면에 텅 빈 구석이 있다는 것조차 잊어버릴 만큼 긴 시간이었다.
하지만, 해완의 곁에서는 그럴 수가 없었다.
해완에게서 나는 온기의 냄새를 맡게 되고서, 해완에게서 넘쳐나는 마음이 세상의 숨겨진 틈을 어떻게 드러내는지를 보게 되고서는 제가 가진 결핍을 모른 체할 수가 없었다.
그 참담하게 망가진 자리를 갑작스럽게 다시 인지하게 된 순간, 강현을 가장 강력하게 지배한 건 이것을 보였다가는 해완을 잃을 수도 있다는 본능적인 두려움이었다. 이제껏 남을 따라 하며 겉모습만 꾸며 온 탓에 감추는 것 말고 다른 방법을 몰랐기에 더더욱 그랬다.
여전히 마음에서 사라지지 않는 두려움 속에서 강현은 고개를 숙이고 입술을 깨물었다.
아직은 때가 아니야.
해완의 곁에 저를 제외하고 믿을 것이 아무것도 남지 않았을 그때에,
주위를 둘러봐도 아무것도 보이지 않게, 오직 제 손을 잡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지는 없는 그때, 바로 그때가 되면.
그때가 되면 솔직하게 말하고 용서를 구할 거야.
해완과 지냈던 시간 동안 미뤄 온 수많은 기회들에 하나를 더 더하며, 강현은 눈을 감고 한결 깊은 어둠 속으로 빠져들었다.
* * *
퇴원일 아침, 해완은 들떠서 잠을 자지 못했다며 피곤한 얼굴을 했다. 추후 진료를 위한 스케줄 조정이 남아 있어 강현은 해완을 카운터 바로 뒤에 있는 의자에 앉혀 두고 짐들을 그 옆에 내려놓은 채 간호사와 5분 정도 짧게 이야기를 나누고 뒤를 돌았다.
5분, 정말 그뿐이었다.
그 잠깐 사이에, 해완은 사라지고 없었다.
해완이 방금까지 앉아 있던 자리에서 없어진 걸 알았을 때는 곧바로 상황 판단이 되지 않아 강현은 어리둥절한 얼굴로 제자리에 서서 주위를 둘러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곳곳을 둘러보아도 해완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병원은 오가는 사람으로 번잡했지만 그래서는 아니었다. 어느 장소에 있어도 그가 해완의 실루엣을 알아보지 못할 일은 없었다.
그것을 깨닫자마자 심장이 미친 듯이 뛰고 아드레날린이 치솟기 시작했다. 믿을 수 없는 현실에 미친 사람처럼 몸을 이리저리 돌려 가며 주위를 찾던 그때, 강현의 시야에 무언가가 낯선 것이 가시처럼 턱 걸렸다.
강현은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거친 숨을 내쉬며 해완이 앉아 있던 자리로 걸어갔다. 해완이 앉은 자리에는 모든 짐이 그대로 놓여 있었지만, 바로 그 짐 위에 강현이 알지 못하는 흰 봉투 하나가 올려져 있었다.
강현은 떨리는 손으로 그것을 주워 들었다. 몇 번이나 손을 헛디디며 그 안을 확인한 순간, 그들이 처음으로 함께했던 크리스마스 날의 해완의 목소리가 귀에 맴돌았다.
‘유준이한테 준 돈도 꼭 갚을 거야.’
‘우리가 다시 볼 수 없는 날이 온다고 해도.’
봉투 안에는 수표 한 장이 들어 있었다.
이천이백오십만 원.
그들의 관계의 시작, 정확히 해완을 붙들어 맸던 금액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