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3. oxydation
향을 변질시키고 부산물을 만드는 산화 반응
집으로 돌아온 인하는 불조차 켜지 않고 소파에 깊게 등을 기대고 앉아 지끈거리는 관자놀이를 꾹꾹 누르며 고개를 위로 젖혔다.
지독하게 지치는 하루였지만 제주도까지 다녀온 탓은 아니었다. 잠시 멍하니 천장을 올려다보던 사이, 그의 입에서 허무한 조소가 새어 나왔다.
해완에게 연락을 받은 것은 인하가 쓰러진 그를 병원으로 옮긴 지 닷새가 지난 후의 일이었다.
해완은 처음 인하와 함께 갔던 병원에 입원해 있지는 않았지만 여강현이 그를 제 집안과 연계된 병원으로 옮길 것은 어렵지 않게 추론할 수 있었다. 마침 인하의 사촌 형이 그 병원에서 의사로 근무하고 있었기에 그를 통해 자신의 명함을 윤해완에게 몰래 전달해 둔 덕이었다.
전화를 걸어온 해완은 강현에게 알리지 않고 몰래 만나고 싶다며, 강현이 씻기 위해 들어간 사이에 잠깐 만나는 게 좋을 듯하니 자신이 입원해 있는 병동으로 저녁 늦게 와 주기를 요구했다.
그가 입원한 VIP 병실이 위치한 해당 층에는 방문객과 접견이 가능한 라운지가 따로 있었다. 인하가 그곳에 도착하고 10여 분이 지난 뒤에 나타난 윤해완은 평소보다도 훨씬 창백하고 핼쑥한 얼굴로 인하의 앞에 앉았다.
그 백지장 같은 얼굴에서 토해져 나온 붉은빛이 눈앞에 깜박인 나머지 오싹 소름이 돋은 인하는 잠시 숨을 멈췄다가 무뚝뚝하게 물었다.
‘몸은 괜찮아요?’
‘네.’
‘재이식 수술 날짜는 잡혔어요?’
인하의 질문을 무시하고 해완은 엉뚱한 말을 했다.
‘돈이 필요해요. 삼천 정도. 상속받을 유산에서 먼저 받고 싶어요.’
생각지도 못한 요구에 해완을 향해 시선을 준 인하는 인상을 찡그렸다.
‘……그 돈을 받아서 뭐 할 생각인데요?’
‘당신이 상관할 일 아니에요.’
‘아직 정식으로 상속 절차 안 밟았잖아요. 그러니 내가 지금 그 돈을 주게 되면 개인적으로 당신을 도와주는 겁니다.’
해완은 망설이지도 않고 서늘하게 대꾸했다.
‘당신이 날 도와주는 거건 뭐건 상관없으니까 줄 수 있는지 없는지나 말해요. 시간 낭비 하기 싫으니까.’
그런 말을 하는 해완의 눈은 테이블 어딘가에 고집스럽게 고정되어 있었다. 표정을 읽을 수 없는 매끄러운 얼굴을 보던 인하가 결국 툭 말을 뱉었다.
‘좋아요, 그 돈 내가 줄게요.’
‘그럼…….’
‘내가 그 돈 주면, 그거 가지고 여기서 도망이라도 칠 생각인가?’
정곡을 찔린 모양인지 반사적으로 멈칫하는 해완에, 인하는 짧은 한숨을 내쉬었다.
‘그냥 얌전히 여기서 치료나 받아요. 재이식해야 된다고 하면 재이식 받고.’
‘…….’
‘그깟 페로몬샘 때문에 죽을 이유 없잖아요.’
해완은 처음으로 시선을 올려 말없이 인하를 응시했다. 온갖 감정이 일렁이던 평소와 달리 죽은 호수처럼 고요한 눈에 인하가 주춤한 새, 해완이 메마른 목소리로 말했다.
‘당신, 나 때문에 해언이가 죽었다고 생각해서 날 원망하고 있잖아요. 그래서 굳이 날 찾아와서 흔들고 괴롭혔던 거고.’
‘…….’
‘그러니까 걱정하는 척 위선 떨지 말고 내가 원하는 대로나 해 줘요.’
인하는 해완의 바싹 마른 손목을 잡아서 거칠게 끌어당겼다. 조금의 저항도 하지 못하고 앞으로 휘청 고꾸라지는 몸을 재빨리 잡아 균형을 잡도록 도와준 그가 퉁명스럽게 말했다.
‘몸도 제대로 못 가누면서, 여강현 씨 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아요?’
‘…….’
‘돈은 며칠 내로 마련해 줄게요. 하지만 내가 머물 장소 구해서 차 보낼 때까지 일단 가만히 있겠다는 조건 아래서예요.’
해완의 얼굴에 못마땅한 기색이 노골적으로 떠올랐지만 그는 무언가를 생각하듯 잠시 입을 다물더니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인하는 주머니에서 자신의 서브 폰을 꺼내 해완에게 내밀었다.
‘가지고 있어요. 퇴원 일정 정해지면 알려 주고요.’
말없이 핸드폰을 받아 든 해완은 환자복 주머니에 넣고는 몸을 일으켰다. 인하의 곁을 스쳐 지나가려는 해완의 팔을 인하가 붙들었다.
해완의 시선이 멈칫 인하를 향했다. 인하는 조용히 물었다.
‘여강현 씨가 당신을 속여서 이러는 거예요?’
그 말에, 잠시 인하를 내려다보던 해완의 입이 작게 열렸다.
그때, 크게 울리는 현관문 벨소리에 상념에서 깨어난 인하가 감고 있던 눈을 번쩍 떴다.
벨을 누른 것만으로는 부족한지 문을 쾅쾅 두드려 대는 요란한 소리에, 찾아온 이가 누군지에 대한 직감이 든 인하는 몸을 일으켜 인터폰 화면을 들여다보았다.
아니나 다를까 미친 듯이 문을 주먹으로 치고 있는 여강현이 네모난 화면 안에 있었다.
제가 직접 가면 쉽게 꼬리가 잡힐까 봐 일부러 퇴원일에 맞춰 윤해완을 데리러 갈 차만 보냈던 것인데 그런 노력이 무색하게 빨리도 알아낸 모양이었다. 헛웃음을 흘린 인하는 깊게 숨을 들이마시며 인터폰 버튼을 눌러 현관문을 열었다.
문이 열리고, 닫히는 소리와 함께 모습을 드러낸 여강현은 인하를 보자마자 망설이지도 않고 걸어와 바로 주먹을 날렸다.
예상지 못한 강한 타격에 고개가 홱 돌아간 채 비틀거리는 인하를 향해 다가서며 강현이 쇳소리가 섞인 목소리로 낮게 물었다.
“윤해완 어디로 데려갔어.”
입가에 배어든 피를 손등으로 닦으며 강현을 노려보던 인하가 조소 어린 말을 뱉었다.
“윤해완? 그게 누구더라? 아, 당신이 윤해언이라고 부르던 사람을 이야기하는 건가?”
그 말에 눈이 반쯤 돌아간 강현이 다시 한번 주먹을 휘두르는 찰나 재빨리 피한 인하가 강현의 배를 거세게 발로 차며 반격했다. 퍽 소리와 함께 뒤로 몇 발자국 물러난 강현은 이를 뿌득 갈더니 즉시 인하에게 달려들었고, 두 사람은 함께 바닥에 나뒹굴었다.
서로의 멱살을 쥔 채 엎치락뒤치락하며 엇비슷하게 주먹이 오가던 것도 잠시, 체격이 우월한 강현이 결국 인하를 눕히고 바닥에 올라타 멱살을 쥐고 흔들며 소리를 질렀다.
“윤해완 지금 어딨어! 당장 말해!”
절규와도 같은 고함에 인하가 갑자기 피투성이가 된 얼굴로 웃음을 터트렸다. 그 웃음에 눈을 희번덕거린 강현이 다시 한번 주먹을 높게 들어 올린 순간 인하는 입을 열었다.
“나도 아직 못 찾아서 몰라.”
강현은 주먹을 들어 올린 채로 멈칫했다. 인하는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병원을 빠져나간 것까진 내가 도운 게 맞는데, 중간에 내가 보낸 차에서 내려서 사라졌어. 현금만 챙기고 핸드폰이나 카드 같은 건 모두 둔 채로.”
“…….”
“내린 직후에 탄 택시까지는 찾았는데, 그다음엔 정말 어디로 갔는지 못 찾았어.”
강현은 한동안 그의 말을 믿을 수 없다는 듯 굳어 있었지만, 그의 눈을 마주하는 인하의 시선에는 거짓을 말하는 기색이 전혀 없었다.
인하의 멱살을 쥔 손에서 힘이 스르르 풀렸다. 강현은 온몸의 기력이 빠진 사람처럼 옆으로 털썩 주저앉더니 망연자실해 중얼거렸다.
“김유준. 유준이는…….”
상체를 일으켜 앉은 인하는 머리를 쓸어 올리며 지친 듯 대답했다.
“안 그래도 오늘 유준이 있는 곳에 다녀왔어요. 그리로 가지도 않았고, 연락도 하지 않았다고 하더군요.”
“…….”
“유준이도 곧 서울로 올라오겠다고 했으니까 원한다면 만나게 해 줄게요.”
강현은 아무런 대답 없이 세운 무릎에 묻은 머리를 두 손으로 괴롭게 쥐어뜯었다. 잔뜩 옹송그린 그의 너른 어깨가 부들거리며 떨고 있었다.
완전히 넋이 나간 사람 같은 강현의 모습 위로 윤해완의 목소리가 흘렀다.
‘강현이는 해언이의 향을 사랑해요. 그게 나 때문에 사라지는 걸 보여 주고 싶지 않아요.’
‘…….’
‘그리고 해언이한테도.’
인하는 불쑥 건조한 말투로 입을 열었다.
“윤해완 씨는 당신이 해언이의 향만 사랑한다고 생각해요.”
그 말에 강현이 번쩍 고개를 들었다. 그는 어두워진 눈으로 멍하니 되물었다.
“뭐?”
“그래서 당신한테 보여 주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자기 때문에 그 향을 잃는 걸 보게 하고 싶지 않다고.”
얼이 빠진 사람처럼 인하의 얼굴을 바라보던 강현이 물었다.
“해완이가…… 해완이가 왜 당신한테 그런 얘길 해.”
“내가 자기 진심을 그쪽한테 절대 말해 주지 않을 거라고 생각하니까. 윤해완 씨는 내가 자기를 싫어한다고 믿고 있거든.”
눈이 휘둥그레진 강현은 어린애처럼 고개를 크게 저으며 입을 열었다.
“아니야, 아니야. 난…….”
그러나, 잘못된 곳을 향한 항변이라는 것을 깨달은 듯 강현의 눈이 텅 비었다. 비틀거리며 몸을 일으킨 그는 그대로 인하의 집을 빠져나갔다.
혼자 남겨지자 긴장이 풀리는 것과 동시에 온몸이 쑤시고 저렸다. 뒤로 털썩 누워 팔뚝으로 눈을 가린 인하는 그가 마지막으로 해언과 만났을 때의 대화를 떠올렸다.
해완에게 말한 것과는 달리 인하가 해언을 마지막으로 만난 것은 그가 세상을 뜨기 반년 전의 일이었다.
해언이 심장 이식 수술을 거부하고 한국으로 떠났을 때 인하는 정말 그 뒤로 해언을 다시 보지 않으려 했었다. 하지만 해언은 인하에게 꼭 유언에 관한 공증과 집행인을 맡겨야겠다며 끊임없이 메일과 전화로 연락을 하는 등 집요하게 굴었다.
그것은 해언이 가장 신뢰하는 사람이 인하였기 때문이었다. 때로 사람들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가장 솔직하지 못한 법이었고, 평생 동안 내면을 위장하고 살아온 해언에게 사랑하는 사람과 믿을 수 있는 사람의 존재가 분리되어 있는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그것을 아는 이상 해언의 청을 무시하기는 불가능했다. 결국 해언을 만나기 위해 한국까지 온 인하는 당시 해완이 잠시 자리를 비운 틈을 타 해언을 만나 유언장 작성을 했다.
반년 만에 본 해언의 얼굴은 많이 상해 있었다. 사무적인 일만 처리하겠노라고 그토록 마음을 다잡고 왔음에도, 병색이 완연한 그를 보고 치밀어 오르는 고통을 주체할 수 없어 인하는 인사조차 하지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그런 인하의 마음을 뻔히 알면서도 해언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아무렇지도 않은 얼굴로 해완과 어떻게 지내고 있는지, 그리고 제게 얼마나 잘해 주는지에 대해서 종알거리며 떠들어 대기만 했다.
인하는 별다른 대답을 하지 않고 묵묵히 제가 해야 할 일에만 집중했지만 유산 상속을 제가 사망한 해의 내후년에 집행할 것이며, 그때까지 윤해완이 여강현의 실체를 깨닫지 못하거나 벗어나지 못하고 있으면 그를 도와 달라는 말까지 듣자 참지 못하고 입을 열었다.
‘왜 여강현이 윤해완을 붙잡을 거라고 생각하는 거야?’
‘뭐?’
‘난 애초부터 네가 왜 그렇게 윤해완한테 집착하는지부터 이해가 안 가거든. 내 눈엔 하나 특별해 보일 것 없는 사람이라서.’
그 말에 인하를 빤히 바라보던 해언이 설핏 미소를 지었다.
‘형.’
저를 처음으로 형이라고 부르는 해언의 목소리에 인하가 멈칫 바라보자, 그는 급작스레 손을 뻗어 인하의 심장 위를 툭툭 두드렸다.
‘형은 여기가 비어 있는 사람이 아니잖아.’
‘…….’
‘그래서 이해를 못 하는 거야. 무슨 일이 있어도, 절대로 날 미워하지 않을 사람을 가지고 싶은 기분이 뭔지.’
‘……널 무슨 일이 있어도 미워하지 않으면 된다고?’
해언은 여전히 고운 미소를 띤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인하는 울분에 찬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나는?’
‘…….’
‘너 때문에 등신같이 여기까지 온 나는 뭔데.’
그 말에 해언은 소리를 내서 웃었다. 인하의 얼굴이 일그러지는 순간, 그는 가느다란 손가락으로 인하의 볼을 부드럽게 쓸었다.
인하가 움찔 몸을 피하자, 해언이 웃으며 여상하게 물었다.
‘형은 이미 날 미워하고 있으면서, 왜 그런 걸 물어보는 거야?’
타인의 감정을 돌볼 생각은 조금도 없는 주제에, 해언은 늘 사람을 잘도 꿰뚫어 보곤 했다.
얼굴을 가린 인하의 손 밑으로, 조용한 눈물이 흘러내렸다.
* * *
강현은 침대 위에 앉은 채 핏발 선 눈으로 어둠을 노려보았다. 수일을 혹사당한 몸이 물먹은 솜처럼 무거웠음에도 칼날같이 벼려진 정신은 잠을 허락하질 않았다.
도시에는 진정한 밤이 없는 법이지만, 문을 닫고 암막 커튼까지 굳게 쳐 놓은 방 안은 체면 없이 밤을 해치는 사소한 불빛들을 제법 효과적으로 가리곤 했다.
그 안에 앉아 있으면 바로 눈앞에서 손을 흔들어 보아도 아무런 움직임도 보이질 않았다. 눈을 떴다 감았다 하는 단순한 동작에도 혼란이 일고, 모든 것이 쉽게도 희미해졌다.
오로지 그의 존재만을 빼고는.
몸을 벌떡 일으킨 강현은 눕지도 앉지도 못하고 어둠 속에서 침실 안을 계속해서 서성였다. 머리가 깨져버릴 듯 두통이 심했다. 지독한 이명이 도무지 떨어져 나가질 않아, 두 손을 들어 올려 자신의 귓가를 퍽퍽 쳐 댔다.
해완이 사라진 지 어느새 한 달이 가까워지고 있었다.
인하나 유준조차 정말 그의 행방을 모른다는 것을 알고 나서 강현은 해완과 조금이라도 연관이 있는 사람이나 장소를 그야말로 샅샅이 뒤졌다. 그가 자란 보육원부터 시작해서 과거에 몇 년간 일했던 레스토랑은 물론이고 잠시 다녔던 대학, 스물한 살 때 서울로 막 독립했던 시기 전전하던 아르바이트처, 그리고 그런 곳들에서 해완과 연이 닿았던 이들까지 소식이 들리는 대로 직접 찾아가거나 사람을 보내 해완의 행방을 찾아다녔다.
그럼에도 아무런 소득 없이 지나가는 날들만이 이어졌지만 잠이 오지 않는 밤을 견디지 못해 해완이 일하던 편의점이나 이제 다른 사람이 살고 있는 그 낡고 허름한 집 같은 곳으로 차를 몰고 가 무작정 그를 기다린 시간들도 허다했다.
몇 주를 그렇게 밤낮없이 매달렸는데도 해완은 그 어느 곳에도 모습을 보이지 않았다.
인하가 해완에게 건네줬다는 돈에서 병원에 남기고 간 것을 제하면 그의 수중에는 약 칠백만 원가량이 남아 있어야 했다. 약간의 수표가 포함되어 있지만 대부분은 현금이었던 모양으로, 현금만을 사용하면서 다른 활동을 하지 않고 숨어 지낸다면 찾는 데 몇 달은 각오해야 할 수도 있었다.
그럼에도, 무의미하게 지나가는 하루하루가 강현에게는 질리지도 않고 지옥같이 느껴졌다.
‘윤해완 씨는 당신이 해언이의 향만 사랑한다고 생각해요. 그래서 당신한테 보여 주고 싶지 않다고 했어요. 자기 때문에 그 향을 잃는 걸 보게 하고 싶지 않다고.’
인하가 전한 그 말을 증명이라도 하듯, 해완이 그의 짐 중에서 유일하게 가져간 것은 퇴원 시 만약을 대비해 처방받은 소량의 면역 억제제뿐이었다.
이전에 비해 확연히 적은 용량이었지만 해완의 몸 상태를 고려했을 때 의사의 관찰 없이 지속적으로 복용하는 것이 어떤 영향을 끼칠지 알 수 없는 일이었다.
그리고 그것이 강현이 잠을 자기 위해 눈을 감는 것조차 힘겨워진 이유 중 하나였다.
눈을 감기라도 하면 찾아오는 어둠 사이로, 응급실에 실려 가서는 죽은 사람처럼 하얗게 질려 있던 해완의 얼굴이 생생하게 떠올라 신경을 온통 들쑤셔 댔다.
강현은 우리 안에 갇힌 짐승처럼 계속해서 방을 오가며 이미 스스로 낸 생채기로 엉망이 된 목덜미를 쥐어뜯듯이 긁었다. 딱지가 제대로 앉을 새도 없이 몇 번이나 반복해서 상처를 입힌 피부는 주위가 온통 붉었고 또다시 피가 배어 나오는 부분도 있었다.
결국 문을 벌컥 열고 밖으로 나선 강현은 차 키를 쥐고 주차장으로 향했다. 차에 탄 그는 어디로 향해야 할지 잠시 고민했으나 역시 해완이 나타날 가능성이 가장 높아 보이는 보육원으로 마음을 정하고 시동을 걸었다.
깊은 새벽의 도로는 통행량이 적었다. 그래도 이따금씩 옆을 스쳐 지나가는 자동차의 헤드라이트 불빛이 떨어져 나갈 듯 건조한 눈을 지독히도 괴롭혀서, 강현은 연신 눈을 껌뻑이며 반쯤 기계적으로 운전을 했다.
짙은 안개가 낀 것처럼 멍한 머리로 고속 도로를 달리며 그는 어쩔 수 없이 해완과 이 길을 함께 지나던 때의 기억을 떠올렸다.
해완을 감정적으로 압박해 그가 어디까지 허용해 줄 수 있는지 시험하고 싶은 것이 목적이었기 때문에 강현은 운전을 하는 몇 시간 내내 의도적으로 해완을 무시했었다. 그럼에도 해완은 강현에게 몇 번 말을 붙여 보려 했었지만, 냉랭한 태도만이 돌아오자 입을 다물고 내내 창밖만을 바라보고 있었다.
흘끗 옆을 바라보자 눈에 들어온 오래도록 붉게 물들어 있던 해완의 귓바퀴를 떠올린 순간, 강현은 피가 나도록 입술을 세게 짓씹었다.
보육원 앞에 도착했을 때는 어느덧 새벽 5시가 가까워져 있었다. 이미 몇 번 그랬던 것처럼 그는 시동을 끈 채 시선을 보육원 문에 고정시키고 앉아 있었다.
계절은 확연한 봄이었으므로 한 시간쯤 지나자 사위가 서서히 밝아지기 시작했다. 옅어지는 어둠 속에 앉아 강현은 아이러니하게도 그가 곁에 없는 동안에야 비로소 알게 된 윤해완이란 사람에 대해 생각했다.
이전에도 그랬듯이 강현은 이번에도 역시 그것들을 돈으로 사들였다. 해완이 강현의 앞에서 온전한 윤해완으로 선 순간은 그를 향해 고통스럽게 울부짖던 그 며칠간이 고작이었으므로, 어쩔 수가 없었다.
물론 그렇다고 해서 대단한 진실들은 아니었다. 그것들은 그저, 해완의 삶의 궤적들을 더듬어 나가며 만나게 된 낯선 타인들이 가지고 있는 사소하고 시시한 기억들이었다.
처음에는 관심이 없어서 묻지 않았고, 알고 싶어졌을 때는 거짓이 드러나는 게 무서워서 물을 수 없었던 것들이었으며, 강현이 그가 제 앞에서 해언으로 있기를 바랐기 때문에 해완이 말하기를 피해 왔던 것들이기도 했다.
때문에 강현은 해완이 쉬는 날에는 항상 찾을 정도로 좋아하던 작은 카페가 있었다는 것도, 뒤늦게 들어간 대학에 애착을 가지고 꽤나 열심히 다녔다는 것도, 그가 가장 오래 일했던 레스토랑이 어디였는지와 페로몬 향이 없는 장애 때문에 겪어야 했던 일들도 전부 며칠 전에야 알게 되었다.
스물한 살, 보육원을 떠나 혼자 서울로 올라왔을 때 해완은 일자리를 구하는 데 애를 먹었다고 했다. 그 또래들이 쉽게 시도해 볼 만한 서비스직에서는 페로몬 향이 없는 장애를 가진 해완을 고용하는 것을 꺼렸기 때문이었다.
그래서 처음으로 겨우 구한 아르바이트도 사람들이 기피하는 유흥가에 위치한 새벽 시간대의 편의점 일이었다. 하지만 왜 아무런 향도 나지 않느냐며 호기심 어린 눈으로 훑어보거나 시비를 걸리는 일까지 있어 20대 초반에는 사람과 직접적으로 부딪칠 일이 거의 없는 상하차 아르바이트나 제 할 일만 하면 되는 일용 건설직만 전전한 때도 있었던 것 같았다.
그러던 차에 페로몬 향이 없는 것이 오히려 장점이 될 수 있는 레스토랑의 주방에 취직하게 되면서 천천히 안정되기는 했으나 성격이 순한 탓에 고참들이 부리는 텃세에 고생도 많이 했다고 했다. 특히 페로몬 향이 없는 해완은 눈에 띄지 않는 이상 근처에 있는 것을 바로 알아차릴 수 없는 때가 있었기에 그것을 가지고 기분이 나쁘다며 얻어맞은 적까지 있었다고 했다.
대부분의 괴롭힘은 별다른 티도 내지 않고 참아 넘기던 해완이었지만 언젠가 한번 ‘장애인 새끼’라는 심한 폭언을 듣고 나서는 시중에서 파는 향수를 뿌리고 나온 적이 있었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그러나 일반적인 페로몬 향과는 같을 수 없었기에 오히려 대놓고 조롱을 당하고 난 뒤 다시는 그것을 뿌리는 일은 없었던 모양이었다.
그럼에도 묵묵히 버텨 결국 그 레스토랑 주방에 끝까지 남은 것은, 셰프의 신임을 얻은 것은 결국 그를 괴롭히던 고참들이 아닌 해완이었다고, 그렇게 마땅히 나눴어야 할 이야기들을 전부 다른 사람의 입을 통해서만 들었다.
우스운 것 한 가지는, 강현이 그렇게 해완의 흔적을 집요하게 찾으려 들 때마다 사람들이 던지는 질문의 내용이었다.
해완이 무슨 잘못이라도, 빚이라도 졌냐고, 그럴 사람이 아닌데 뭔가 잘못 안 것이 아니냐며 그를 편들면서도, 강현이 해완을 곁에 두기를 원해 찾고 있다고는 좀처럼 생각하지를 못했다.
왜냐하면 그들이 기억하는 해완은 순하고 다정하고 성실해서 호감이 가는 사람이었으나, 정작 그가 가진 장애를 비켜 바라보는 노력은 해 본 적 없는 사람이었기 때문이었다.
그리고 저를 바라보는 그런 시선들에 대해 세상 그 누구보다도 잘 알고 있었던 건 바로 해완이었을 것이다.
지독한 두통이 가실 줄 몰랐다. 핸들에 올린 손 위에 이마를 대고 강현은 잠시 눈을 감았다.
얼마나 시간이 지났을까, 불현듯 환하게 밝아지는 사위에 강현은 고개를 들었다. 인공적으로 조성된 푸른 녹음 사이로 겨울의 냉기는 바깥에 두고 온 햇살이 쏟아지고 있었다.
분명히 차 안에 앉아 있었던 것 같은데 언제 이런 곳에 왔는지 모를 일이었으나, 문득 제 앞에 해완이 서 있는 걸 본 강현의 눈이 크게 열렸다.
하지만 곧 이것이 꿈일 수밖에 없다는 사실을 깨달은 강현의 얼굴이 서글프게 변했다.
해완은 그의 곁에 있고 싶지 않아 떠나 버린 터였으니까.
그럼에도, 꿈인 것을 알고 있음에도 그리워서 강현은 해완에서서 시선을 떼지 못했다. 두꺼운 패딩을 입고 고개를 살짝 숙이고 있던 해완은 난감해 보이는 표정을 짓고 있기는 했지만 마지막으로 본 모습보다는 훨씬 건강해 보여 강현은 옅은 미소를 지었다.
그때, 시선을 올려 강현과 눈을 마주친 해완이 희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아무도 아니에요.”
“…….”
“당신이…… 알 필요 없는 사람이라구요.”
그 말을 듣고서야 강현은 이것이 단순한 꿈이 아니라 자신이 깨끗이 잊고 있던 기억의 한 단면임을 겨우 떠올려 냈다.
그 식물원에서 해완을 두 번째로 만났던 날이었고, 그는 유준이 제게서 뜯어냈다고 생각한 돈을 돌려주러 온 참이었다.
그때 강현의 관심은 오로지 윤해언의 향에만 쏠려 있었기 때문에, 윤해완이라는 사람에 대해 무슨 인상을 받았는지는 기억조차 잘 나지 않았다.
그저 제 후각에 대한 확신에 취해 제가 윤해언이 아니라고 몇 번이나 부정하는 해완의 말이 짜증스러운 거짓말로만 들렸고, 몇 년 동안 지겹게 이어져 온 윤해언과의 줄다리기에서 어떻게 해야 우위를 점할 수 있을까 하는 생각뿐이었다.
그러나, 그러나 지금은 아니었다. 몸속 깊은 곳에서 해일처럼 여러 말들이 치받아 올랐다.
나는 너를 알고 싶어.
네가 어떤 사람인지 궁금해.
네 이름을 불러 주고, 너에 대해 네 입으로 해 주는 이야기들이 듣고 싶어.
그런 말들이 온몸을 터트릴 듯 거세게 두드려서, 더는 견디지 못하고 강현은 입을 열었다.
“아무것도 안 물어볼 거야.”
“…….”
“그러니까 걱정할 필요 없어.”
그런데 입에서 튀어 나간 소리는 의도와는 전혀 다른 형태를 띠고 있었다.
저를 바라보는 해완의 얼굴에는 멈칫 그늘이 끼었다. 그런 뜻이 아니었다고, 그렇게 말하고 싶었지만 이번에는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당황한 강현은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러자 해완은 입술을 파르르 떨더니, 마지막 용기를 쥐어짠 듯 물기 어린 눈으로 입을 열었다.
하지만 이번에도 입이 멋대로 움직였다.
“하지 마.”
“…….”
“말하지 마.”
자신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나오는 말인데도 스스로의 목소리는 이상하게 익숙하게 들렸다. 그러나 그 기시감의 정체는 언젠가 해완의 앞에서 제가 실제로 뱉은 말이기 때문이라는 것을 깨달은 강현이 눈을 크게 떴다.
하지만 강현이 현실에서 그의 입을 틀어막아 온 순간들처럼 꿈속의 해완도 모든 것을 포기한 듯 입을 천천히 다무는 게 보였다.
그와 동시에, 해완의 이목구비가 수채화 위에 물을 뿌린 것처럼 천천히 흐려졌다. 강현은 안 된다며 고함을 질렀다.
강현은 식은땀에 가득 젖은 채 튀어 오르듯이 놀라며 잠에서 깼다. 시간은 그가 눈을 감기 전보다 10분 남짓밖에 흐르지 않은 터였다. 눈을 붙였다고 하기도 어려운 잠깐의 잠이었을 뿐인데도 전력 질주라도 한 것처럼 숨이 가빠, 강현은 목덜미를 움켜쥐고 괴롭게 숨을 쉬었다.
그래서 강현은 운전석 옆에 놓인 핸드폰에서 전화 수신을 알리는 진동음이 연이어 울리고 있는 것을 바로 알아차리지 못했다.
때는 새벽에 더 가까운 이른 아침이었다. 이런 시간에 올 연락은 해완에 관한 소식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을 떠올리고 급히 핸드폰을 집어 들었을 때 이미 전화는 끊겨 있었다.
전화 발신인이 서인하임을 확인한 강현은 피곤한 눈을 의아하게 껌뻑였다. 서인하와는 그의 집에 찾아가서 몸싸움을 한 이후 해완에게 준 돈에 대해 듣기 위해 한 번의 전화 통화를 한 것을 제외하고는 그간 다른 연락을 한 적이 없었다.
그때, 인하에게서 온 메시지가 핸드폰 화면에 떠올랐고, 무의식중에 그것을 읽어 내리자마자 강현은 숨을 들이켜며 호흡을 멈췄다.
[윤해완 씨 찾았으니까 전화받아요.]
순간, 멈춰 있던 시간이 다시 흐르기 시작했다.
* * *
해완이 있는 곳이라며 인하가 전한 장소는 경기도 외곽에 있는 어느 작은 모텔이었다.
몇 주간 쌓여 온 지독한 피로 탓에 무슨 정신으로 차를 몰았는지도 몰랐지만 모텔 입구가 가까워질수록 신경이 곤두서고 날을 벼린 듯 머릿속이 선명해졌다.
인하가 미리 이야기를 끝내 놨는지 강현이 카운터에서 호실의 이름을 이야기하자마자 모텔 주인은 그에게 카드 키를 넘겼다. 엘리베이터가 오는 것을 기다릴 수조차 없어 강현은 그의 호실이 있는 4층까지 단숨에 뛰어 올라갔다.
해완을 찾을 수 있었던 것은 그가 이틀 전 어느 약국에서 십만 원권 수표 한 장을 썼기 때문이었다. 문제는 해완이 고열에 시달리고 있었으며 제가 낸 금액이 얼마인지도 헷갈려 할 만큼 상태가 좋아 보이지 않았다는 약사의 말이었다.
걱정하던 상황이 그대로 닥쳤다는 두려움과 해완을 드디어 찾아냈다는 흥분 사이에서 강현은 떨리는 손으로 잠금장치를 열고 해완이 묵고 있는 호실 안으로 벌컥 들어섰다.
낡고 작은 모텔은 입구에 들어서는 것만으로도 한눈에 방이 다 보였지만, 해완의 모습은 바로 눈에 띄지 않았다.
반사적으로 해완의 향을 맡아 보려 했지만 그곳에 감도는 건 그가 머문 것만이 확실한 희미한 흔적이 전부였다.
심장이 바닥 끝까지 추락하는 기분에 방 안으로 걸어 들어간 강현은 미친 듯이 주위를 둘러보며 단서를 가늠하려 애썼다.
침대는 방금 전까지 누군가 누워 있었던 듯 정리되지 않은 상태였고 침대 옆 서랍장 위에는 약국에서 구입했을 해열제와 면역 억제제로 보이는 약봉지들이 어지럽게 흐트러져 있었다.
강현은 초조한 손길로 서랍을 뒤졌다. 제일 아래 서랍을 열자 몇몇 옷가지와 몇백만 원에 달해 보이는 돈이 고스란히 들어 있는 것이 보였다. 그제야 해완이 이곳을 떠난 게 아니라 잠시 자리를 비웠으리라는 판단이 섰다.
겨우 숨을 몰아쉰 강현은 텅 비어 있는 면역 억제제 약 봉투를 집어 들어 확인했다. 조제 날짜는 3월 20일에, 퇴원 시 처방받은 것보다 훨씬 높은 용량으로 2주간 복용하도록 지시하고 있는 안내문을 본 그는 그것이 해완이 쓰러지기 직전에 처방받은 약임을 깨닫고는 입을 악다물었다. 입원해 있을 당시 해완의 부탁으로 집에 있는 짐을 몇 가지 가져다준 적이 있었는데, 아마 그 안에 들어 있었던 모양이었다.
면역 억제제 부작용을 그토록 지독하게 겪어 놓고도 미련하게 이것을 전부 먹은 해완을 떠올린 강현의 손 안에서 빈 봉투가 강하게 우그러졌다.
고열에 시달려 정상이 아니었다는 약사의 말이 머릿속을 한결 더 어지럽혔다. 대체 그 몸을 하고 이 이른 시간에 어디를 간 건지 생각만 해도 돌아 버릴 것만 같아, 강현은 도저히 가만히 있지 못하고 벌떡 일어나 뒤돌아섰다.
그때였다.
입구에 서 있을 때 그의 높은 시야에서는 보이지 않았던 화장실 문 옆 바닥에, 시체처럼 하얗고 앙상한 발이 삐죽 튀어나와 있는 것이 불현듯 눈에 들어왔다.
제가 보고 있는 광경이 바로 받아들여지지가 않아 강현은 눈꺼풀을 깜빡였다. 날카로운 이명이 머리를 쾅쾅 울렸다.
아니야.
그럴 리가 없어.
저게 해완이라면, 이렇게 향이 옅을 리가 없어.
마치 죽기라도 한 것처럼.
눈을 깜빡일 때마다 기억이 끊겼고 정신을 차려 보니 그 발을 앞에 두고 무릎을 꿇고 앉아 있는 채였다.
강현은 경련을 일으키듯 떨리는 손을 뻗어 그 발을 먼저 만졌다.
얼음장같이 차가웠다.
당장이라도 속에 든 모든 것을 게울 듯한 기분에 강현은 한동안 주저앉은 채 짧은 숨만 몰아쉬었다.
하지만 공황보다 더욱 강력한 어떤 필요성이 그의 몸을 홀린 것처럼 강제로 일으켜 세웠다.
비틀거리며 욕실 안으로 걸음을 옮긴 강현은 밑을 내려다보았다. 조금의 미동도 없이 차가운 화장실 바닥에 모로 누운 채 쓰러져 있는 해완의 마른 몸을 본 순간 눈앞이 흐려지고 귀가 먹먹한 가운데 가슴을 쾅쾅 두드리는 심장 소리만이 거세게 커져 갔다.
강현은 반쯤 정신이 마비된 상태로 무릎을 꿇고 팔을 뻗어 해완의 경동맥이 위치한 자리에 손가락 끝을 가져다 댔다.
해완의 맥박을 확인하는 그 몇 초의 시간 동안 그를 둘러싼 모든 것들이 아득하게 멀어져 갔다. 강현의 세상에 존재하는 모든 색도, 빛도, 움직임도 처음부터 존재하지 않았던 것처럼 그 모습을 감춰 버렸다.
그러나 손가락 끝에 약한 맥동이 잡힌 찰나, 멈춰 버린 세계가 깨어나는 소리가 고막을 터질 듯이 울렸다.
아드레날린이 급격하게 치솟아 오르는 것과 동시에 강현은 반사적으로 주머니 안에 들어 있는 핸드폰을 꺼내 119 버튼을 눌렀다. 스스로의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데도 어떻게든 구급차를 부르고 해완의 몸에 겉으로 보이는 외상이 없는지를 확인한 뒤 문까지 활짝 열어 두고 해완의 곁으로 다시 돌아온 그는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쓰러지듯 다시 주저앉았다.
그토록 안고 싶은 해완이 바로 앞에 있는데, 아주 살짝 건드리기만 해도 부스러질 것만 같아 어찌할 바를 몰랐다. 결국 어지러이 시선만 방황하고 있던 강현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축 늘어진 해완의 손을 간신히 움켜쥐는 정도였다.
전혀 힘이 들어가지 않는 손가락들이 땀에 젖은 손바닥 안에 늘어섰다. 뼈가 도드라진 손가락들을 조금 주물러 주던 그는 간신히 용기를 내서 다른 손을 뻗어 볼을 감싸 보았다.
그 얼굴조차도 지독히 차가웠다. 엄습하는 공황에 강현은 가빠오는 숨을 느꼈다.
결국 그는 지독한 긴장으로 뻣뻣하게 굳은 몸을 간신히 움직여 젖어 있는 바닥에 엎드리듯 몸을 숙여 해완의 심장 위에 귀를 가져다 댔다.
고막을 울리는 희미하고 여린 심장 박동 소리가, 사형대에 선 것처럼 조여 오던 숨통을 틔워 주는 것을 느꼈다.
그것이 저를 지옥에서 건져 줄 유일한 동아줄이라도 되는 것처럼 강현은 집요하게 그 심장 소리에만 집중했다. 구급차가 도착해 해완의 몸을 실어 가는 그 순간까지도, 한없이, 한없이 듣고 있었다.
병실 화장실 안에서 따뜻한 물을 대야에 담아 나온 강현은 병상 옆 탁자에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부드러운 수건을 살짝 적셔 물기를 짜낸 후 잠들어 있는 해완의 마른 얼굴을 조심스럽게 닦아 내기 시작했다.
커다란 손에 어울리지 않게 지극히 섬세한 손길로 얼굴, 이어서 목부터 가슴팍까지 잘 닦아 낸 다음 수건을 내려놓은 그는 해완의 축 늘어진 한쪽 손을 미리 준비해 둔 스팀 타월로 감싸고 혈액 순환이 잘되도록 마사지를 했다.
손이 충분히 따뜻해진 다음에는 침대 옆 탁자에 두었던 핸드크림을 넉넉히 짜서 건조한 피부 위에 문질렀다. 가는 손가락이 제 손가락 사이로 미끄러지는 느낌은 언젠가 해완이 제게 같은 일을 해 주던 기억을 어김없이 떠올리게 해서, 강현은 목이 꽉 메어 오는 느낌을 애써 참으며 목서 향을 풍기는 촉촉한 크림이 해완의 피부로 스며드는 느낌에 집중했다.
손가락 마디마디마다 꼼꼼히 크림을 바르고서야 해완의 손을 내려놓은 그는 해완의 발치로 이동해 같은 과정을 반복했다. 5월 중순이라는 계절에 어울리지 않는 수면 양말까지 신기고서야 다시 의자에 앉은 강현은 해완의 따뜻해진 손을 그러쥐고 입가에 가져다 댔다.
그 손에서 느껴지는 온기만이, 강현이 숨을 쉴 수 있게 허락하는 것 같았다.
쓰러져 있던 해완을 발견한 모텔 안에서 손에 닿았던 시체처럼 싸늘한 피부의 감촉이 끌로 새겨지기라도 한 것처럼 떠나질 않아서, 강현은 밤에도 잠을 이루지 못하고 한두 시간 간격으로 깨어나 해완의 피부에 어린 온기를 강박적으로 확인하고는 했다.
중환자실에 꼬박 닷새간을 입원해 있었던 해완이 겨우 일반 병실로 옮겨진 것이 바로 사흘 전의 일이었다.
병원으로 옮겨진 후 진단받은 병명은 폐렴이 원인이 된 패혈증이라고 했다. 죽은 사람처럼 차가웠던 피부도, 지독히도 흐렸던 페로몬 향도 패혈증으로 인한 체온 저하 증상 때문이었는데, 패혈성 쇼크가 오기 일보 직전이었던 듯 발견이 조금만 늦었어도 정말 목숨이 위험할 뻔했다고 했다.
패혈증은 치사율이 30프로에 달하는 무서운 병이었지만, 해완의 나이가 젊고 골든 타임 안에 병원에 당도할 수 있었던 덕에 염증 수치를 예상보다 빠르게 잡을 수 있었던 것이 천운이었다.
하지만 아직까지 해결되지 않은 심각한 문제가 하나 있었다.
그것은 신체가 위험에서 벗어나 회복기에 접어들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완의 의식이 돌아오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병원에서는 해완이 깨어나지 않는 게 패혈증 때문은 아닌 것 같다고 했다. 쓰러졌을 때 머리를 부딪쳤을 수는 있으나 눈에 띄는 외부 상처가 없고 MRI 검사로도 별다른 이상을 발견할 수 없었으므로 외부 충격에 의한 의식 소실로 진단하기에도 애매한 모양이었다.
그럼 대체 왜 정신을 차리지 못하느냐는 강현의 초조한 질문에 의사는 정신적 문제일 가능성도 아예 배제할 수는 없다고 조심스레 말을 건넸었다.
강현은 눈조차 제대로 깜빡이지 못하고 한동안 해완의 볼품없이 마른 얼굴을 바라보았다. 속눈썹 한 올까지 외울 수 있을 정도로 보고 또 보았는데 왜인지 눈을 감으면 흐릿하게 멀어지는 것만 같아 안달이 났다.
해완의 손을 쥔 채로 그의 목덜미 옆에 고개를 묻은 강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어느새 다시 진해진 페로몬 향이 후각을 어지럽혔지만 아랑곳하지 않고 해완에게서만 맡을 수 있는 향에 집중하려고 애를 썼다.
페로몬샘은 건강 상태에 예민하게 반응하는 기관이었다. 패혈증으로 전체적인 신체 기능이 바닥을 치자 사라질 듯 희미해졌던 페로몬 향은 그의 몸이 회복되기 시작하자 전만큼은 아니더라도 빠르게 짙어지고 있었다.
그리고 그것은, 해완이 지난 한 달간 면역 억제제를 계속 복용하고 있었기 때문에 페로몬샘의 기능이 예상보다 많이 떨어지지 않은 까닭이기도 했다.
다시 고개를 든 강현은 굳게 닫힌 해완의 눈가를 엄지손가락으로 천천히 어루만졌다.
만약 그가 영원히 눈을 뜨지 않는다면.
다시는 이 물기 어린 맑은 눈동자가 저를 담으며 부드럽게 휘어지는 모양을 볼 수 없게 된다면.
그런 생각만으로도 피부 밑을 작은 벌레들이 기어 다니는 듯한 소름 끼치는 감각이 빠르게 차올랐다. 반사적으로 손목 안의 그것을 긁어내려던 강현은 누가 그의 손을 붙들기라도 한 것처럼 불현듯 움직임을 멈췄다.
이미 이곳저곳에 새로 생긴 상처들이 너무 많았다. 스스로의 손톱으로 입힌 생채기를 볼 때마다 눈가를 붉히던 해완의 얼굴이 눈앞에 선명한데, 그런 식으로 그를 아프게 할 또 하나의 흉터를 늘릴 수는 없었다.
전처럼 피가 나도록 긁어 대는 대신 손목 위를 거칠게 문지르는 정도로 충동을 참아 낸 그는 두 손으로 피곤한 얼굴을 쓸어내렸다.
멍한 시선이 잠시 허공을 맴돌았다. 강현은 보통 사람들은 이런 상황 앞에서 무엇을 느낄지에 대해 생각했다.
자신처럼 존재하지 않는 신체적 증상을 느끼는 대신 어쩌면 눈물을 흘릴지도 모른다.
하지만 강현은 그 눈물을 흘리게 만드는 감각이라는 게 무엇인지조차 기억이 나질 않았다.
마지막으로 운 적이 언제였는지도 아득한데 그런 것을 떠올릴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해완에게는 단 한 번도 인정하지 않았지만 강현은 자신이 하는 행동이 명백한 자해라는 것도, 그리고 인지하지 못한 채 마음에 켜켜이 쌓인 감정이 신체화 증상으로 나타난 결과라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런 것들을 알기 위해서 그 오랜 기간 병원을 다니고 상담을 받았으니 모를 수는 없었다.
비정상적으로 둔감한 삶을 살고 있다고 해서 특별히 불행하다거나 평범하지 못한 생활에 타인을 끌어들이지 않겠다고 생각한 적은 없었다. 그런데도 마음에 들어오는 것은 무엇도 존재하질 않았다. 한순간 흥밋거리에 지나지 않는 TV 프로그램처럼 제 삶에서 지나간 것들과 앞으로 올 것들은 아무런 의미도 없는 듯이 느껴졌다.
그런데, 너만은 왜.
해완의 잠든 얼굴 위로 시선을 내린 강현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그는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일어나.”
“…….”
“일어나서 나 좀 봐.”
하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없었다. 강현은 해완의 손등에 입술을 묻고는 마치 신에게 기도라도 올리는 것 같은 간절한 목소리로 해완의 이름을 몇 번이고 되뇌었다.
“해완아.”
“…….”
“해완아…….”
“…….”
“제발, 제발 나 좀 봐 줘…….”
강현은 고통스러운 얼굴로 눈을 깊게 감았다.
그런데 문득, 그의 입술에 닿아 있는 해완의 손이 움찔거리는 것이 느껴졌다.
아주 미세한 움직임이었음에도 강현은 눈을 번쩍 떴다. 하지만 강현의 시선이 닿은 해완의 눈꺼풀은 여전히 굳게 닫혀 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심장이 쿵쾅거리며 미친 듯이 뛰었다. 강현은 한 번 더 그의 이름을 불러 보았다.
“해완아……?”
그리고 그 목소리에 반응이라도 하듯, 해완의 손가락 끝이 이번에는 육안으로 보일 정도로 까딱 흔들렸다.
강현의 동공이 순간 크게 확장됐다. 반사적으로 몸을 반쯤 일으킨 그는 다른 손으로 해완의 볼을 매만지고 쓰다듬으며 애타는 목소리로 연신 말을 붙이기 시작했다.
“해완아. 정신이 들어? 눈 뜰 수 있겠어?”
창백한 피부에 그림자를 드리우며 굳게 내려앉아 있던 긴 속눈썹이 파르르 떨리는가 싶더니, 아주 느리고 힘겹게 해완의 눈꺼풀이 위로 올라가기 시작했다.
그의 투명한 눈동자가 약 일주일 만에 빛을 마주하는 모습을 강현은 숨도 쉬지 못하고 지켜보았다.
해완은 멍하니 눈을 몇 번 깜빡이다가 천천히 강현을 향해 시선을 돌렸다. 아직 초점이 불확실하기는 했지만 마주한 눈동자에 가슴속 깊은 곳에서 뜨거운 무언가가 울컥 솟아올라, 강현은 떨리는 목소리로 또다시 해완의 이름을 입에 담는 것 말고는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다.
“해완아…….”
순간, 껍질이 희게 일어난 해완의 입술이 반쯤 열렸다.
그는 혼란스러운 시선으로 강현을 바라보다가 뭔가를 말하고 싶은 듯 입술을 두어 번 움직였다. 하지만 일주일이 넘게 물 한 모금 넘기지 못한 목에서는 바람이 새는 것 같은 소리만 나더니, 해완은 몸을 들썩이며 마른기침을 하기 시작했다.
해완의 아주 작은 행동 하나하나에 시선을 떼지 못하고 있던 강현은 즉시 물을 향해 손을 뻗었으나 의사의 확인 없이 먹여서는 안 될 수도 있다는 우려가 엄습했다. 결국 물컵을 집어 드는 대신 병상 위에 달린 너스 콜 버튼을 빠르게 몇 번 누른 그는 해완의 손을 다잡으며 정신없이 입을 열었다.
“미안해, 물은 조금 이따 줄게. 어, 많이 목마르면 얼음 한 조각만…….”
병실 냉장고 안에 있는 얼음을 떠올린 강현이 허둥지둥 몸을 일으키려는 찰나, 해완이 어디서 났는지 모를 강한 힘으로 강현의 손을 붙들었다.
흠칫 놀란 강현이 해완에게 시선을 주자, 해완은 지금 당장 무엇인가 말하고 싶다는 듯 입술을 끊임없이 벙긋거렸다.
“……게…….”
하지만 바싹 말라붙은 성대는 제대로 된 소리를 제대로 내질 못하는 모양이었다. 강현은 허리를 깊게 숙이고 해완의 입에 귓가를 바싹 가져다 댔다.
그러자 해완은 한 번 더 강현의 손을 강하게 쥐더니 입을 열어 말했다.
“어……떻게…….”
그때, 문이 벌컥 열리는 소리에 흠칫 놀란 강현이 반사적으로 고개를 돌렸다. 병실 안으로 들어온 간호사가 눈을 뜨고 있는 해완을 보고 깜짝 놀라 말했다.
“환자분 깨어나셨네요. 주치의 선생님 이 옆 병실에 계시니까 바로 모셔 올게요.”
간호사의 말대로, 나간 지 얼마 되지도 않아 해완의 주치의가 간호사와 함께 병실 안으로 들어왔다. 의사는 정신을 차린 해완을 향해 침착한 목소리로 질문을 던졌다.
“환자분, 정신이 드세요? 여기가 어딘지 알겠어요?”
해완은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고 강현의 손만을 더욱 강하게 쥐었다. 그러자 의사가 한 번 더 입을 열었다.
“환자분 이름은 아시겠어요? 이름 한번 말씀해 보실래요?”
왜인지 해완은 그 질문에도 역시 대답을 하지 않고 흔들리는 눈으로 강현을 쳐다보았다. 그의 눈에 여실히 어린 불안을 견디지 못한 강현이 무릎을 꿇고 물었다.
“왜 그래, 해완아. 여기가 어딘지 모르겠어?”
해완의 버석한 눈가에서 눈물이 뚝 떨어져 내린 것이, 바로 그때였다.
그 한줄기 눈물에 심장이 바닥까지 곤두박질쳤다. 하지만 곧바로 해완의 입에서 희미한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강현아…….”
그의 입에서 나온 제 이름에 강현의 눈이 기쁨으로 휘둥그레졌다. 이제 정신이 드냐고, 나를 알아보겠냐고, 벅찬 목소리로 물으려던 찰나, 해완이 다시 입을 열었다.
“어떻게…… 네가 그 이름을…… 알아?”
해완의 목소리는 믿을 수 없는 일을 마주하기라도 한 듯 혼란스럽기 그지없었다.
그리고 그와 동시에, 붉게 상기되어 있던 강현의 얼굴이 표백되듯 삽시간에 창백해졌다.
* * *
해완이 들어간 MRI 검사실 옆 복도 한편에 앉아 있던 강현은 벽면 어딘가를 하릴없이 노려만 보고 있었다.
어떤 이상을 예측해서가 아니라 만약을 위해 받는 검사였으므로 불안해서 그런 것은 아니었다. 단지 이제까지 경험해 본 적 없는 짙은 탈력감이 온몸을 가득 채워 손가락 하나 움직일 수가 없었다.
어떻게 네가 그 이름을 아느냐고. 그렇게 말하던 해완의 혼란스러운 목소리가, 머릿속에서 길고 긴 메아리처럼 연이어 울렸다.
긴 잠에서 깨어난 해완의 기억에는 공백이 있었다.
조금 더 정확히 말하자면 7주 정도의 기억이 통째로 사라져 있었는데 그가 마지막으로 기억하는 것은 3월 20일쯤으로 그의 생일 며칠 전이었다.
이에 대해 병원에서는 의식 없이 중환자실을 거쳤다 나온 환자들이 깨어나고 나서 기억에 혼란을 겪는 것은 흔한 일이라며, 신체가 회복기에 접어든 건 변함이 없으니 몸이 완전히 나아지면 기억 또한 돌아올 가능성이 높다고 말했다.
하지만 강현은 그렇지 않을 것임을 예감하고 있었다.
왜냐하면 해완이 기억하지 못하는 기간에 일어난 일들에 대해 그는 똑똑히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20분가량의 시간이 지나자 검사실 문이 열렸다. 간호사가 해완을 태운 휠체어를 밀고 나오는 모습을 본 강현은 즉시 몸을 일으켜 가까이 다가갔다.
간호사의 숙련된 손길을 받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어딘가 불안해 보이던 해완은 강현을 보자마자 감추지 못하고 안도하는 기색을 드러냈다.
그 얼굴을 보는 순간, 마음속 깊은 곳이 거세게 들끓었다. 입술을 꾹 깨문 강현이 휠체어 손잡이를 넘겨받자 간호사는 친절한 미소를 지으며 자세한 건 주치의가 설명해 주겠으나 일단 눈에 띄는 문제점은 없어 보인다 했다는 말을 전했다.
병실로 돌아온 강현은 휠체어에서 침대로 해완을 옮기기 위해 허리를 숙였다. 안아 드는 손길에 해완이 작게 움찔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그는 얌전히 강현이 저를 들어 올릴 수 있도록 강현의 목에 두 손을 감고 자신의 몸을 기댔다.
가슴에 닿는 온기를 영영 놓아주고 싶지 않은 충동을 겨우 참아 낸 강현은 침대 위에 해완의 몸을 조심스럽게 내려놓고 이불을 덮어 주며 물었다.
“불편하진 않아?”
해완은 강현을 바라보며 고개를 도리도리 저었다.
“목은? 물 줄까?”
그 말에는 고개를 끄덕이기에 강현은 빨대 컵에 생수를 따르고 그것을 해완의 입에 직접 물려 주었다. 목이 마른지 꿀꺽대며 마시려는 것을 달래 가며 천천히 먹이고 나서야 살겠다는 듯 해완이 크게 심호흡을 했다.
그것마저도 애틋해진 강현이 손을 들어 해완의 이마에 흐트러진 머리를 살살 쓸어 넘기자, 물기 어린 시선이 그의 얼굴을 향했다.
이제는 조금 촉촉해진 입술이 조심스레 달싹였다. 그가 묻고 싶은 것이야 뻔히 알 수 있었으나 제 입으로 먼저 내뱉을 용기는 없어 강현은 해완이 말을 꺼내기를 조용히 기다렸다.
그때, 등 뒤에서 노크 소리가 들려왔다. 두 사람의 시선이 동시에 문가를 향하자 문이 열리며 들어온 간호사가 곧 주치의가 회진을 올 것이라고 알렸다.
잠시 후 병실로 들어온 주치의는 오늘 해완이 한 각종 검사 결과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MRI로 검사한 뇌에는 역시 별다른 문제가 없었으며, 염증 수치가 좋아지고는 있지만 한번 크게 앓았던 위장이나 폐의 상태는 주의 깊게 관찰할 필요가 남아 있으므로 일주일 정도는 더 입원하기를 권유했다.
그리고 그는 해완에게 혹시 깨어났을 때보다 더 기억나는 게 있느냐 묻고는, 기억을 되살리기 위해 스트레스를 받기보다 자연스럽게 두는 편이 오히려 회복에 더 좋을 수 있다고 안심시켰다. 그러고는 일단 체력이 돌아오는 것이 우선이니 무조건 식사를 잘 챙겨 먹고 운동도 열심히 해야 한다고 당부하고는 병실을 떠났다.
그러나 의사가 밥에 대한 당부를 한 것이 무색하게 간호사는 며칠간 해완은 묽은 미음을 먹어야 할 거라고 일러 주고는 곧 저녁이 배달될 것이라 했다.
위가 상한 건 차치하고서라도 일주일 가까이 아무것도 먹지 못한 탓인지 식사라고 하기도 민망한 묽은 미음을 먹는 것조차 한참이 걸렸다. 먹여 주겠다는 걸 해완은 제 손으로 하겠다고 작은 고집을 부렸지만 숟가락을 드는 것만으로도 손이 심하게 떨리자 결국 강현이 먹이도록 허락할 수밖에 없었다.
강현이 식기를 정리해 밖에 내놓고 들어오자 해완이 우물쭈물 중얼거렸다.
“강현아. 나 좀 씻고 싶은데.”
“그럴래? 잠깐만 기다려.”
병실 안에 있는 욕실로 들어간 강현은 욕실의 온도를 높이고 욕조에 따뜻한 물을 절반 정도 받은 다음 샤워 도구까지 손닿을 곳에 미리 준비하고 나서야 해완을 데리러 다시 침대로 왔다.
마음 같아서는 바로 안아 들고 싶었지만 지금부터 조금씩 걸어야 한다는 의사의 말이 떠올라 몇 발자국 정도는 몸을 부축해 해완이 직접 걷게 했다. 하지만 물기가 어린 욕실 안에서는 미끄러질 수도 있다는 핑계로 안아 들어 욕조 앞에 내려놓았다.
그러고 보니 갈아입을 옷을 깜빡했다는 생각이 들어 해완을 잠시 그 앞에 두고 욕실 밖에 나갔다 온 사이, 해완은 거울 앞에 서서 그 안에 비치는 자신의 모습을 물끄러미 바라보고 있었다.
강현이 가까이 다가서자 해완은 어깨를 살짝 들썩일 정도로 놀라더니 갑자기 시선을 피했다. 뭔가 분위기가 이상하다 싶어진 강현은 잠시 입을 다물었지만, 이내 부드럽게 말을 걸었다.
“이제 씻게 옷 벗을까?”
그러고서 강현의 손이 해완의 환자복으로 향하는 순간, 해완은 움찔 몸을 틀어 그의 손을 피했다. 고개를 숙인 해완의 얼굴이 붉었다. 그는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나, 나 혼자 할 수 있어. 씻는 건 나 혼자 할게.”
노골적인 거부에 강현은 저도 모르게 얼굴을 굳혔으나, 빠르게 마음을 가라앉히고는 애써 나직하게 말했다.
“……혼자 못 두는 거 알잖아. 너 일주일 넘게 의식이 없다가 깨어난 지 몇 시간도 안 됐어.”
저도 할 말이 없는지 해완은 잠시 입을 다물었다가, 불현듯 중얼거렸다.
“나…… 보기 흉할 것 같은데…….”
이해할 수 없는 말에 강현은 이맛살을 잔뜩 찌푸리며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이렇게…… 살이 심하게 빠졌는지 몰라서…….”
환자복 목 부근을 움켜쥐며 중얼거리는 희미한 목소리에, 아까 거울 속 자신을 들여다보고 있던 해완의 모습이 뇌리를 스쳐 지나간 강현은 이를 살짝 악물었다.
해완은 강현이 모텔에서 그를 발견했을 때도 부스러질 듯 말라 있었지만, 의식을 잃고 누워 있는 사이 몸무게가 7킬로그램이나 더 줄어든 상태였다. 쇠약해진 몸에 영양 공급이 되지 않아 급속도로 빠진 체중이니 금방 회복될 것이라고는 했지만 스스로의 기억 속에 있는 마지막 모습과는 충격적으로 다를 터였다.
하지만 지금 무엇보다 가슴을 아리게 만드는 사실은 해완이 그런 자신의 모습을 강현이 흉하게 여길지 모른다고 생각했다는 것이었다.
도대체 어떻게 내가 너를 두고 그런 생각을 할 거라고 여길 수 있을까. 우스꽝스럽게도 배신감까지 차오를 지경이었지만, 저 스스로의 감상은 애써 미뤄 둔 강현이 해완의 어깨를 감싸 쥐었다.
“그러지 마. 해완아.”
강현의 입에서 흘러나온 제 이름에 해완의 눈동자가 흔들렸다. 강현은 그대로 해완의 어깨를 끌어당겨 안고는 떨리는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내가 어떻게 널 흉하다고 여겨.”
그렇게 말하며, 강현은 해완의 마른 어깨를 차마 꼭 끌어안지도 못하고 어루만지기만 했다. 잠시 후 해완의 몸을 다시 제 품에서 떼어 내자, 시선을 피하던 아까와는 달리 해완은 강현의 눈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그 시선에 용기를 얻은 강현은 조심스럽게 환자복 상의로 손을 뻗었다. 해완은 다행히도 이번에는 피하지 않고 얌전히 팔을 들었다.
따뜻한 물이 담긴 욕조 안에 해완을 앉힌 강현은 몸이 식기 전에 최대한 빨리 샤워를 끝낼 요량으로 행동을 서둘렀다. 익숙한 손길로 빠르게 머리를 감겨 준 뒤 샤워볼로 몸을 문질러 닦아 주기 시작하자 해완이 묘한 얼굴로 그를 보기에 강현이 입을 열어 물었다.
“왜? 혹시 어디 불편해?”
“아니…… 손길이 익숙해 보여서.”
“……전에도 여기서 이렇게 씻겨 준 적 있으니까.”
“내가 여기 또 입원한 적이 있어? 언제?”
거의 열흘을 입원했었는데도 그 사실을 전혀 기억하지 못하는 해완의 물음에 잠시 멈칫했던 강현은 낮게 대답했다.
“네 생일이 지나고 나서.”
그 말에, 해완의 시선이 흠칫 강현을 향했다. 그러나 그때 비눗기를 헹구는 것을 마무리한 강현이 몸을 일으켰고, 머뭇거리던 눈동자는 결국 제자리로 돌아왔다.
해완을 일으켜 세운 강현은 욕조 밖으로 나오게 한 다음에 커다란 수건으로 물기를 닦아 주었다. 뼈가 앙상하게 드러나지 않은 곳이 없을 정도로 마른 몸에 속이 타들어 가, 머릿속으로는 병원에서 나가자마자 영양사를 고용해서 살부터 찌울 계획을 세우며 깨끗한 환자복을 다시 입도록 도왔다.
저를 안아 들어 다시 병상으로 옮기고, 젖은 머리를 드라이기로 물기 하나 없이 말려 줄 때까지 해완은 말이 없었다.
손에서 쉽게 흐트러지는 부드러운 머리가 골고루 잘 말랐다는 판단이 들고서야 드라이기의 전원을 끈 강현은 눈을 감고 있는 해완의 얼굴을 가만히 바라보았다. 똑같은 눈 감은 얼굴이었으나 이 며칠 동안 지옥같이 강현을 괴롭혔던 의식 없이 누워 있던 모습과는 달리 말갛게 아름답기 그지없어 보였다.
공간에 차오른 침묵에 스르르 눈을 뜬 해완의 시선이 강현을 향했다. 그 부드러운 맑은 갈색 눈 안에 담긴 제 모습을 본 순간, 토할 것처럼 가슴속에서 치미는 정체 모를 감정의 덩어리에 입을 감싼 강현은 당황해 중얼거렸다.
“피곤할 텐데 이제 잘까?”
갑작스러운 말이었지만 내내 누워만 있다가 이런저런 검사에 끌려다니고 샤워까지 하고 나니 체력이 바닥이 난 듯 해완은 고개를 끄덕였다.
해완이 자리에 눕자 강현은 병실 안의 불을 껐다. 늘 보조등 하나가 켜져 있기 때문에 완전한 암흑은 아니었으나 그래도 안은 금방 어두컴컴해졌다.
이불을 매만져 주던 강현의 손을 해완이 잡았다. 그는 불안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같이 자면 안 돼?”
강현은 쉽게 대답을 하지 못했다. 좋았지만, 당연히 좋았지만, 해완의 부탁보다 스스로의 욕심이 앞서는 듯한 기분이 들어서였다. 하지만 곧 정신을 차린 그는 황급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래. 그럴게.”
침대 위로 올라간 강현은 옆으로 누운 해완의 등을 조심스럽게 끌어안았다. 왜인지 약간 긴장하고 있던 마른 몸이 천천히 강현의 품에 녹아들더니 해완은 제 몸을 감싼 강현의 손을 끌어당겨 꼭 마주 잡았다.
그에게 남아 있는 마지막 기억과는 달리 순수한 애정만이 어린 몸짓에, 강현은 위로를 받아야 할 사람이 자신이 아님을 잘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몸을 움츠려 해완의 온기에 조금이라도 더 가까이 다가서려 애를 썼다.
그런데 문득 해완의 희미한 목소리가 들렸다.
“강현아, 나 물어볼 게 있어.”
느슨해진 몸이 긴장으로 다시 움츠러들고, 티를 내지 않으려 애를 쓰는 것 같았지만 어쩔 수 없이 떨리는 목소리가 해완이 무슨 이야기를 하려는지 예고하고 있었다.
아니나 다를까, 깊게 숨을 들이마신 해완이 단숨에 말을 뱉었다.
“어떻게…… 어떻게 내가 해언이가 아니라는 걸 알았어……?”
순간, 모든 진실을 알고 울부짖던 해완의 모습이 심장을 칼로 가르듯이 날카롭게 스쳐 지나갔다.
머릿속이 새하얗게 변했다. 피해 갈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아무런 대답도 할 수가 없었다. 강현의 머리를, 가슴을, 온몸을 울리는 소리는 해완이 요구하는 진실 대신 품에 안은 이 온기를 다시는 놓아줄 수 없다는 그런 이기적인 것뿐이었다.
강현은 저도 모르게 해완을 안은 손에 힘을 주었다. 그는 반쯤 공황에 빠진 채 필사적으로 머리를 굴리려고 애썼다.
어떻게 해야 할까. 대체 어떻게 해야 네가 조금이라도…….
그런데 그때, 해완이 갑자기 다시 입을 열었다.
“혹시 내가 말했어……?”
해완은 쥐고 있던 강현의 손을 더욱 꼭 잡으며 더듬더듬 말을 이어 나갔다.
“해언이 생일이 되면 말하겠다고…… 그렇게 마음먹었었는데…… 내가 혹시 정말 그렇게 했어?”
강현은 눈을 부릅뜬 채 해완의 동그란 뒤통수를 멍하니 바라보았다.
해완이 곁에 없던 지난 한 달간, 수많은 불면의 밤 동안 강현을 괴롭혀 왔던 것은 끊임없이 꼬리를 물고 늘어지는 만약을 앞세운 가정들이기도 했다.
만약 그날 해완에게서 끝까지 시선을 떼지 않았더라면, 갑작스럽게 평온해진 해완의 태도가 뭔가 이상하다는 것을 미리 눈치챘더라면, 그날 그렇게 갑작스럽게 진실이 드러나지 않았더라면. 해완이 받아들일 수 있는 어떤 방법으로 알게 할 수 있었더라면.
만약, 강현이 기다려 온 대로 해완이 먼저 제게 진실을 털어놓게 만들 수 있었더라면.
절대 이뤄질 수 없음을 알면서도 멈출 수 없었던 가장 이상적인 가정이, 그의 눈앞에 갑자기 현실로 다가와 있었다.
그렇게 생각한 순간, 제멋대로 입이 움직였다.
“그래.”
“…….”
“네가 그랬어.”
그렇게 말하는 스스로의 목소리가, 멀리서 울리듯 아득하게만 들렸다.
“그럼 너는……?”
“…….”
“너는…… 날 용서해 준 거야?”
그렇게 묻는 해완의 몸은 겁에 질린 채 가늘게 떨고 있었다.
내가 너를 용서해 줬냐고?
너무도 어처구니없는 물음에, 강현은 웃음을 터트려 버릴 뻔한 것을 간신히 참았다.
그렇다고 대답하려고 입을 열었다. 그런데 이상하게도 말이 쉽게 나오질 않았다. 이 지경까지 와서도 아직 남아 있던 한 줄기의 수치심이 올가미처럼 목을 죄어서 쉽게 내뱉을 수가 없었다.
하지만 해완의 울부짖는 얼굴이, 온 힘을 다해 저를 거부하고 밀쳐 내는 손길이, 몸을 망쳐 가면서도 기어코 저를 떠난 빈자리가 떠오른 찰나, 강현은 주저하지 않고 목소리를 냈다.
“당연하지. 당연하지, 해완아.”
그 말에 해완이 붉어진 눈으로 뒤를 돌아보았다. 그는 강현이 무엇을 하기도 전에 와락 안겨 들더니 강현의 등을 몇 번이고 더듬어 안으며 울먹이는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미안해. 네가 너무 좋아서 그랬어.”
“…….”
“내 눈에 보이는 내가 너무 초라한 사람이라, 내 진짜 모습으로는 너한테 사랑받을 자신이 없어서 그게 너무 무서워서 그랬어.”
기억하지도 못하면서 해완은 또 같은 사과를 속삭였다. 고통에 가득 차 있던 창백한 얼굴이 눈앞에 선연한 것과 동시에, 해완이 그에게 했던 답할 수 없는 질문이 자연스럽게 따라붙어 강현은 숨을 멈췄다.
하지만 이번에 해완의 입에서 흘러나온 말은 전혀 다른 모습을 하고 있었다.
“고마워, 용서해 줘서. 용서해 줘서 정말 고마워…….”
얼어붙은 채 멍하니 어둠을 응시하던 강현은 천천히 손을 움직여 해완을 강하게 끌어안았다.
그를 드디어 품에 안았다는 만족감 이외에는, 부끄러움도 수치심도 더는 느껴지지 않았다.
* * *
집의 현관문을 연 강현은 해완이 먼저 안으로 들어가도록 몸을 비켜섰다. 거의 두 달 만에 해완을 집으로 데려오는 것이라, 괜히 가슴이 떨렸다.
문을 닫기가 무섭게 보리가 짖는 소리가 들려 강현은 흘끗 중문 창을 넘겨보았다. 도우미 아주머니께 미리 부탁해 둔 대로 불투명 유리가 씌워진 창 너머로 보리의 머리 위에 팔랑거리는 실루엣을 보고 강현은 해완에게 괜히 말을 걸며 그것을 보지 못하게 했다.
그리고 중문을 열고 앞에서 기다리고 있던 보리를 보자마자, 해완은 크게 소리 내어 웃었다.
몸을 굽힌 해완은 보리의 머리에 씌워져 있는 커다란 리본과 그 위에 적혀 있는 ‘Welcome Home’이라는 글자를 보고는 눈이 접히도록 환하게 미소 지으며 강현을 올려다보았다.
“뭐야, 너무 귀엽잖아.”
햇살같이 웃는 얼굴에, 강현은 어쩔 수 없이 그를 따라 커다란 미소를 지었다. 보리에게 시선을 돌린 해완은 보리의 얼굴과 목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말을 걸었다.
“나 환영해 주는 거야? 고마워, 보리야.”
그러고서는 한참을 보리를 데리고 놀 기세이기에 뒤에 서 있던 강현이 재촉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짐도 풀어야지.”
배시시 웃으며 고개를 끄덕인 해완이 몸을 일으켜 안으로 들어갔는데도 보리는 제 주인의 발치를 맴돌며 낑낑거렸다.
강현은 한쪽 무릎을 꿇고 앉아 보리의 얼굴을 가만히 들여다보았다. 이번에도 웃고 있었다. 그는 저도 모르게 상냥하게 속삭였다.
“……잘했어, 보리야.”
보리는 그것 보라는 듯이, 멍! 하고 소리 내어 대답했다.
원래대로라면 며칠 전에 퇴원했어야 했지만 입원일이 닷새 정도 늘어나는 바람에 해완은 거의 3주 동안 병원 신세를 져야 했다.
하지만 퇴원이 미뤄진 이유는 패혈증으로 인한 후유증 때문이라기보다, 페로몬샘 기능의 저하가 뚜렷해진 탓이었다.
기존에 복용하던 면역 억제제는 부작용이 큰 만큼 페로몬샘의 기능 저하를 막는 데 큰 효과가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던 것을 최대한 부작용이 없는 제제로 종류와 용량을 바꾸자 이미 몇 달째 면역 거부 반응을 겪고 있던 페로몬샘이 빠르게 망가지기 시작한 것이다.
물론 강현이야 아무런 상관이 없었다. 아니, 오히려 내심 반가웠다. 이제 해완의 건강 다음으로 그의 관심을 차지하는 것은 해완의 몸에서 윤해언의 흔적을 빨리 제거하는 일뿐이었으니까.
문제는 해완이 그 사실을 받아들이기 힘들어했다는 것이다.
입 밖에 낸 적은 없지만 쇠약해진 신체 때문에 전보다 희미해진 페로몬 향을 해완 스스로도 느끼고 있었던 모양이었다. 그런 데다 주치의로부터 만성 거부 반응이 빠르게 진행되고 있다는 이야기까지 듣자 부작용이 심하더라도 페로몬샘의 기능 저하를 막을 수 있다면 기존의 면역 억제제를 먹고 싶다고 고집을 부리는 바람에, 그런 해완을 설득하느라 강현은 꽤나 애를 먹어야 했다.
그러면서도 해완은 제가 왜 페로몬샘을 제거하고 싶지 않은지에 대해서는 입을 꾹 다물고 있었다.
물론 페로몬샘의 기능이 떨어지면 히트 사이클을 컨트롤할 수 있는 별도의 의학적 조치를 취해야 하기는 했다. 하지만 그런 것들은 지금 해완이 겪고 있는 부작용에 비하면 지극히 사소한 문제였다.
이러다가 이식 순번이 돌아오더라도 재이식을 거부하지나 않을지 머리가 지끈 아파진 강현은 관자놀이를 문질렀다.
물론 기억을 잃기 전에 해완이 도망친 이유가 강현이 그의 페로몬 향만을 원해서라고 생각했기 때문인 것은 알았지만, ‘지금’의 해완은 그렇게 여길 리가 없었다.
그렇다면, 남은 이유는 하나뿐이었다. 강현은 길게 한숨을 내쉬었다.
“무슨 한숨을 그렇게 쉬어.”
뒤에서 들려오는 해완의 다정한 목소리에 흠칫 놀란 강현이 어색하게 웃어 보였다.
“별거 아냐. 이리 와 앉아. 간식 먹자.”
“또? 나 배부른데…….”
해완의 투정 섞인 말투에 빙긋이 웃은 강현이 그의 허리를 감싸며 어린아이를 대하듯이 말했다.
“많이 먹어야 얼른 살찌지. 너도 살찌고 싶다고 했잖아.”
미음과 죽만 먹던 단계를 넘어서 이제 보통식을 먹기는 했지만 양 자체가 크게 줄었기에 최근 강현은 밥과 간식을 가리지 않고 칼로리가 높은 음식을 해완에게 먹이려 애쓰고 있었다.
그 결과 해완은 병원에서 나올 때 5킬로그램 정도 몸무게가 늘어나긴 했다. 그러나 그 전에 비해서도 비교할 수 없게 마른 상태였기 때문에 영양사를 고용해 짠 건강한 식단을 토대로 식사를 하되 시간대별로 간식까지 먹이려는 계획을 단단히 세우는 중이었다.
하지만 오늘은 해완을 놀라게 해 줄 또 다른 생각이 있었다. 해완의 반응을 떠올리니 이상하게 심장이 뛰어 강현은 반사적으로 가슴 위에 손을 올렸다.
그런 강현을 본 해완이 불쑥 그의 볼을 감싸며 말했다.
“얼굴이 빨개. 어디 아파?”
걱정스러운 목소리에, 제가 얼굴을 붉히고 있는지도 몰랐던 강현은 눈을 크게 뜨고는 흠칫 뒤로 물러섰다.
“아니, 그런 거 아냐. 잠깐만 소파에 앉아 있어. 간식 꺼내 줄게.”
황급히 뒤돌아선 강현은 얼굴을 마구 쓰다듬었다. 머리가 고장이라도 난 것인지, 최근 자꾸만 이런 식으로 몸이 멋대로 움직이는 일이 많아졌다. 그것도 하필이면 해완의 앞에서만 그랬다.
지금처럼 뜬금없이 얼굴이 빨개지거나, 아무것도 하지 않았는데 심장이 미친 듯이 뛰어서 숨이 차다거나, 갑자기 해야 할 말이나 행동을 잊어버리거나 하는 식이었는데 스스로도 그러는 이유를 몰라 갑자기 왜 이러는 것인지 난감하기까지 했다.
티가 나지 않게 심호흡을 한 강현은 미리 준비해 놓은 딸기 생크림케이크와 티라미수, 그리고 스콘과 휘낭시에들을 들고 거실로 가 탁자 위에 내려놓았다.
“뭘 이렇게나 많이…….”
별생각 없이 강현이 앞에 둔 간식들을 향해 시선을 내리던 해완의 입이 반쯤 벌어졌다. 그는 동그래진 눈으로 강현을 올려다보더니 믿을 수 없다는 듯 물었다.
“여기도…… 여기도 내가 말해 줬어?”
강현과 만나기 전 매주 갈 만큼 좋아하던 카페의 음식들을 보고 해완이 떨리는 목소리로 물었다. 강현이 가만히 고개를 끄덕이자, 해완은 볼까지 발갛게 붉히며 활짝 웃었다.
“나 여기 딸기 케이크랑 휘낭시에 진짜 먹고 싶었는데……. 고마워.”
고작 빵 몇 조각일 뿐인데, 창백한 얼굴을 벚꽃처럼 물들이고 들뜬 티를 감추지 못하는 해완을 보는 것만으로도 가슴이 터질 듯해진 강현도 활짝 웃었다.
보통 이런 간식류들은 해완이 다 먹고 남은 것들을 강현이 먹는 편이었지만 해완은 이번에는 유독 같이 먹자고 성화를 부렸다.
“맛있지?”
딸기 생크림케이크를 강현의 입에 직접 떠 넣어 준 해완이 웃으며 물었다.
“응, 맛있다.”
강현 또한 웃으며 대답했지만, 솔직히 말해 정말 맛있는 것인지 해완이 먹여 줘서 맛있는 것인지 분간이 잘 안 된다는 생각을 하고 있었다.
그때 문득, 포크를 내려놓은 해완이 나직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이렇게 같이 먹어서 좋다. 이 카페…… 언젠가는 너랑 꼭 같이 가 보고 싶었거든.”
그렇게 말하는 시선이 어쩔 수 없이 서글퍼서, 그 ‘언젠가는’이라는 단어 안에 생략된 해완의 생각이 고스란히 보였다.
아마 주인이 해완을 알아볼까 봐, 그를 해완이라는 이름으로 부를까 봐 함께 가자는 이야기를 할 수 없었을 것이다.
놓친 것이 너무나 많다는 생각에, 강현은 쓰린 속을 삼키고 그의 손을 감싸며 말했다.
“곧 같이 가자.”
고개를 끄덕인 해완이 강현의 손을 깍지 껴서 잡으며 대답했다.
“거기 가려면 둘째 주 금요일 오후에 가자.”
“왜?”
“새 메뉴 테스트하는 날이라, 운 좋으면 공짜로 하나씩 얻어먹을 수 있거든.”
사뭇 진지한 목소리에 강현이 풉 웃음을 터트리자 해완은 그렇게 얻어먹는 게 맛있는 거라며 깍지 낀 손을 심통이 난 듯 흔들었다.
강현은 해완의 어깨를 감싸 바싹 끌어당겨 제게 기대게 만들었다. 그렇게 기대 있던 와중 해완이 불쑥 물었다.
“내가 그 카페를 왜 좋아했는지도 얘기해 줬어…….?”
당연히 알 수 없는 이야기이기에, 강현은 고개를 저었다. 해완은 살짝 고개를 들어 눈을 맞추고는 조용히 말했다.
“거긴 골목이 어두워서…… 사장님이 일부러 간판 불을 끄지 않으셨거든.”
“…….”
“서울에 처음 왔을 때 밤에 하는 일을 많이 했었는데…… 일하러 갈 때나 일하고 나서 돌아올 때 항상 그 카페 불빛에 의지해서 집에 돌아가곤 했거든. 그래서인지 나도 모르게 정을 깊게 붙여 버렸나 봐.”
누군가를 알아가는 모든 순간이, 이렇게 애틋하고 외롭고 또 사랑스러운 걸까?
이제껏 알아보려는 노력도, 그걸 하고 싶은 마음조차 단 한 번도 가져 본 적 없는 강현에게는 너무나 어려운 질문이어서, 그는 아무런 대답도 하지 못하고 해완의 머리칼에 가만히 입술을 가져다 댔다.
소리 내지도 않은 마음에 응하기라도 하는 것처럼, 해완도 강현의 손등에 조용히 입을 맞췄다.
* * *
해완이 들어간 욕실 문으로 강현의 시선이 연신 흘끗거리며 향했다.
처음에야 그가 몸을 제대로 못 가눈다는 핑계로 강현이 매번 목욕 시중을 들었었지만 퇴원까지 한 마당에 해완이 그렇게 놔둘 리가 없었고, 억지를 부려 간신히 얻어 낸 타협이 욕실 문을 닫지 않는 것이었다.
원래 씻는 시간이 긴 편인 해완이기는 했지만 아무리 그래도 40분이 넘어가는 건 심한 것 같았다. 팔짱을 낀 채 못마땅하게 손가락을 톡톡 움직이고 있던 강현은 결국 몸을 벌떡 일으켜 욕실로 향했다.
살짝 열린 욕실 문을 밀고 들어서려는데 갑자기 문이 확 열리며 젖은 머리를 한 해완이 툭 튀어나왔다. 해완은 욕실 문 바로 앞에 서 있는 강현을 보자마자 인상을 찡그렸다.
“안 훔쳐보겠다고 했잖아. 너 자꾸 이러면 문 닫고 씻을 거야.”
“아니, 훔쳐보려던 게 아니라, 네가 너무 안 나와서…….”
변명을 주워섬기던 강현은 해완의 몸에서 강하게 풍기는 인공적인 냄새를 맡고는 의아하게 물었다.
“로션 발랐어?”
그 말에 멈칫한 해완은 반사적으로 손등을 들어 냄새를 맡더니 어물거리며 입을 열었다.
“응. 욕실 안에 있길래……. 이상해?”
“아니, 그런 건 아니고.”
욕실에야 강현이 좋아하는 제품을 구비해 놓으니 싫어하는 향일 리 없었지만, 해완의 자연스러운 향을 가리는 것 같아 강현은 머릿속으로 해완에게 무향 보디로션을 사 줘야겠다고 메모를 했다.
저녁 약을 먹은 해완이 졸린 듯 길게 하품을 하기에, 강현은 함께 침실로 들어가 해완을 품에 안고 그가 잠들 때까지 기다렸다.
품에 안긴 해완의 숨소리가 일정해지고 나서도 한참을 기다리던 강현이 낮게 물었다.
“해완아.”
“…….”
“해완아, 자……?”
해완은 입을 오물거리며 눈썹만 살짝 까딱할 뿐 강현의 말에 반응을 하지 않았다. 그런데도 안심이 되지 않아 깊이 잠든 게 맞는지 그의 손목을 잡고 흔들어 보기까지 한 뒤에야 강현은 문을 살짝 열어 두고 거실로 나왔다.
해완이 깨어난 이후 함께 잠자리에 드는 것은 강현이 유독 신경을 쓰고 있는 일 중에 하나였지만, 오늘은 작업실을 정리하는 데 있어 남은 문제 중 꼭 처리해야 할 게 있었다.
두 시간쯤 지났을까, 노트북을 들여다보던 강현의 귀에 희미하게 제 이름을 부르는 소리가 들렸다.
“가, 강현아, 강현아……!”
그 즉시 몸을 벌떡 일으킨 강현은 침실로 달려가 문을 열었다. 침대 위에 모로 웅크리고 있는 해완이 눈을 가린 채 강현의 이름을 부르며 흐느끼는 것이 보였다.
그는 방의 전등을 켜고 침대 옆으로 빠르게 다가가 해완을 품에 꼭 안고 다급히 말했다.
“괜찮아, 해완아. 나 여기 있어.”
그제야 눈을 굳게 가리고 있던 손을 떼어 낸 해완은 강현의 얼굴을 확인하고 나서 그의 품에 매달리듯 벌벌 떨면서 안겼다.
열흘을 넘게 의식을 잃고 있다가 깨어난 이후 해완은 혼자 잠드는 것을 힘들어했다. 처음에는 잠을 좀 설치는 정도였지만 점점 상태가 심해져서 이제 강현이 옆에 없으면 아예 잠을 자지를 못했다.
해완은 자신이 쓰러졌을 당시의 상황을 전혀 기억하지 못했지만 강현의 눈에는 그 어두운 모텔 화장실 안에 혼자 쓰러져 있던 해완의 모습이 아직까지 선명했다.
그 어둠이 해완의 마음속에 얼마나 스며들었을지 아득하기만 해 강현은 해완을 더욱 강하게 끌어안았다.
약간의 시간이 흐르고 해완의 가쁜 숨이 진정되자, 강현은 그의 땀에 젖은 이마에 붙은 머리카락을 떼어 내며 조심스레 물었다.
“불 끄지 말고 잘까?”
강현의 품에 깊게 묻힌 채로 해완은 고개를 가만히 저었다.
“진짜 괜찮겠어……?”
“……네가 옆에 있으니까 괜찮아.”
품 안에서 흘러나오는 자그마한 목소리에, 어린아이를 달래듯 껴안은 등을 상냥하게 토닥이자 마른 팔다리가 깊숙이 파고들어 왔다.
바싹 긴장해 있던 몸이 호흡을 맞춰 가는 리듬에 맞춰 천천히 느슨해졌다. 하지만 강현은 그 뒤로도 한참 동안 잠을 이룰 수가 없었다.
그것은 누구에게도 말할 수 없이 부풀어 오르는 스스로의 마음 때문이었다.
해완이 제가 없이는 혼자 잠들지 못하는 것이 좋았다.
어둠 속에서 울며 깨어나 저를 찾아 매달릴 수밖에 없는, 그의 약점이 기꺼웠다.
놀랍지는 않았다. 무너진 틀에서 태어난 마음이란 게 보기 좋을 리는 없으니까.
그런데 무슨 일일까.
평소라면 아무렇지 않았을 일그러진 마음에 두려움이 선명했다.
그것을 밀어 내듯이, 강현은 잠들어 있는 해완의 입술에 제 입술을 부드럽게 겹쳤다.
* * *
의사가 운동의 중요성을 신신당부한 까닭도 있었지만 강현은 하루에 한 번은 반드시 해완을 데리고 산책을 나갔다. 보리는 데려갈 때도 있고 집에 두고 오는 날도 있었는데, 보더콜리의 특성상 운동량이 워낙 많아 체력이 떨어진 해완이 감당하기 어려울 때도 있었기 때문이었다.
어느새 5월 말이었고 계절은 여름을 향해 가고 있었다. 강현은 해완의 손을 잡고 그의 보폭에 맞춰 천천히 걸었다. 오래 걷지는 않았으나 어느 순간 해완의 얼굴에 보이는 지친 기색에 강현이 물었다.
“잠깐 쉬고 갈까?”
“우리 얼마나 걸었어?”
시계를 보자 산책을 나온 지 20분 남짓 지나 있었다. 강현은 약간 시간을 보태서 입을 열었다.
“음…… 30분 좀 안 되게?”
해완은 좌절한 듯 짧게 한숨을 쉬었다. 병원에 있을 때는 5분만 걸어도 숨이 차서 벤치에 앉아 쉬어야 했기 때문에 이마저도 많이 좋아진 상태이긴 했으나, 일상생활이 약간은 버거울 정도로 체력이 바닥으로 떨어졌음을 매번 실감할 마음이 이해가 안 가지는 않았다.
강현은 해완의 어깨를 감싸고 벤치로 이끌며 다정하게 말했다.
“병원에 있을 때보다도 많이 좋아졌잖아. 더 좋아질 거야.”
해완은 고개를 끄덕이기는 했지만, 벤치에 앉은 얼굴은 여전히 어두웠다. 그러고 보니 어제도, 그저께도 해완이 구름이 낀 표정으로 멍하니 있었던 장면들이 생각난 강현이 멈칫했다.
괜찮으냐고 물으려던 찰나, 해완이 갑자기 먼저 입을 열었다.
“강현아, 혹시…….”
말을 꺼내 놓고도 해완은 선뜻 잇지 못하고 머뭇거렸다. 대체 무슨 일인가 싶어 마음이 조여 오는데, 손가락을 만지작대던 해완이 어렵게 말했다.
“혹시 나 아픈 동안…… 유준이한테 연락 온 거 없었어?”
“……어?”
그야말로 새까맣게 잊고 있던 이름에 당황한 강현은 바보처럼 되물었다. 그러자 해완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마지막으로 소식 들었을 때 멀리 지방으로 내려간다고 했는데…… 거기서 잘 지내나 걱정도 되고 해서.”
강현이 유준과 마지막으로 만난 건 해완이 병원에서 사라진 지 얼마 되지 않아서였다. 혹시라도 해완의 행방을 알까 해서 만난 것이었으나 아무런 소득도 없이 대체 해완에게 무슨 짓을 한 거냐며 악이나 바락바락 써 대는 유준을 상대하느라 피곤한 기억만이 남아 있었다.
그 뒤로는 사람을 붙여서 감시하다가 해완이 돌아온 뒤 그것도 끊어 버린 참이었지만 행방을 알려면 금방 알 수도 있긴 할 것이었다.
강현은 여전히 고개를 숙이고 있는 해완에게 머뭇거리며 물었다.
“유준이…… 보고 싶어?”
해완은 작게 끄덕하고는 고개를 들었다. 어느새 붉어진 눈시울에 강현의 심장이 철렁 내려앉았다.
“내가, 어, 그동안 유준이한테 형 노릇을 잘 못했어. 유준이 속상한 마음도 이해 못 해 줬고, 미안하단 말도 제대로 못 해서…….”
울먹이는 목소리와 금방이라도 뚝 떨어질 듯한 눈물에 안달이 나서 미칠 것 같았다. 강현은 해완의 눈 밑을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럽게 쓸어 넘기고 이마에 입을 맞추며 달랬다.
“내가 찾아볼게. 그러니까 울지 마, 기운 빠져. 응?”
물론 제 손으로 쫓아내려고 안달을 했던 유준을 찾고 싶은 생각이 있을 리가 없었으나, 어쨌든 지금 당장은 이런 말이라도 해야 눈물이 그칠 것 같아 강현은 마음에도 없는 소리를 했다.
그러자 강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해완이 겨우 미소를 지었다. 강현은 티가 나지 않게 속으로 깊은 한숨을 내쉬었다.
* * *
서울 중심부에 위치한 대형 빌딩의 문을 열고 들어서는 강현에게 사람들의 시선이 흘끔거리며 쏠렸다. 그런 시선들을 의식 한번 하지 않은 채 긴 다리로 성큼 안내 데스크에 다가선 강현이 이름을 말하자 예약자 명단을 확인한 직원이 싱긋 미소를 지으며 몸을 일으켰다.
안내를 받아 엘리베이터를 타고 올라간 23층에는 법무 법인 지서가 위치하고 있었다. 갓 세탁한 세탁물의 냄새를 언뜻 연상시키는 쾌적하고 도회적인 알데하이드 향조가 감도는 복도를 조금 걷자 ‘변호사 서인하’라고 적힌 문패가 달린 개인 사무실 앞에 당도했다.
안으로 들어가자 정장을 갖춰 입은 채 업무를 하고 있던 인하의 시선이 흘끗 그를 향했다. 그는 빙긋이 웃으며 말을 건넸다.
“오랜만이네요. 잘 지냈어요?”
강현이 대놓고 저를 노려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인하는 아무것도 모르는 척 제 책상 앞에 놓인 의자에 앉으라는 듯 손짓을 했다.
“대체 사람을 여기까지 끌어낸 이유가 뭡니까?”
“그게 무슨 소리예요. 나한테 먼저 연락한 건 여강현 씨잖아요.”
“내가 원한 건 김유준 연락처 하나예요. 그런 건 굳이 불편한 얼굴 보지 않아도 줄 수 있는 것 같은데.”
강현의 신경질적인 말투에, 인하는 피식 웃으며 고개를 살짝 숙였다.
해완이 유준의 이야기를 꺼낸 이후, 일단 거처는 확보해 두자는 생각에 유준에게 사람을 붙였던 흥신소에 연락해 보았지만 어느덧 유준은 다른 곳으로 떠나 버린 뒤였다. 다시 찾으려 하면 찾을 수야 있겠지만 제주도를 아예 떠났다면 찾는 데 시간이 걸릴 수 있다는 이야기가 돌아왔다.
그 와중에 해완은 하루에 한 번씩은 꼭 강현에게 유준과 연락이 되었느냐 물었고, 그렇지 않다고 하면 어김없이 실망한 얼굴을 했다. 결국 강현은 내키지 않는 마음으로 가장 빠르고 확실한 수단을 찾을 수밖에 없었다.
해완을 찾은 이후로 인하는 며칠간 집요하게 연락을 해 댔지만 강현은 그를 차단해 버리고 한 번도 연락을 받지 않은 상태였다.
그래서인지 제가 전화를 걸었을 때 인하의 말투에는 그답지 않게 불편한 기색이 가득했다. 그러더니 문자 하나로 해결할 수 있는 일로 여기까지 저를 불러낸 것이다.
강현은 손목에 찬 시계를 흘끗 보았다. 해완이 재활 PT를 받는 사이에 잠깐 빠져나온 것이기 때문에 마음이 급했다.
그런 강현의 의중을 귀신같이 눈치챈 인하가 입을 열었다.
“왜요, 당신이 없는 사이에 윤해완 씨가 또 도망갈까 봐 불안해서 그래요?”
“…….”
“그렇게 꽁꽁 숨겨 놓고, 뭐가 그렇게 불안한 거예요?”
비꼬는 것이 확연한 말투에도 강현은 태연한 태도로 대꾸했다.
“당신이랑 시간 낭비 하기 싫으니까 용건이나 빨리 얘기해 줬으면 좋겠는데.”
“나한테도 이 자리 시간 낭비예요. 내가 만나고 싶은 건 윤해완 씬데, 여강현 씨가 그렇게 감춰 두고 있으니까 연락도 할 수가 없잖아.”
인하의 입에서 튀어나온 해완의 이름에 강현은 즉시 몸을 곧추세우고는 나지막하게 물었다.
“당신이 윤해완을 만나서 뭐 할 건데.”
순식간에 날카로워진 태도에, 피곤하다는 듯 한숨을 내쉰 인하가 서랍을 열더니 어떤 서류를 꺼내 강현에게 내밀었다.
흘끗 시선을 주자 ‘유언장’이라는 글자가 들어왔다. 강현은 반사적으로 인하를 바라보았다.
“해언이가 윤해완 씨한테 남긴 이십육억가량의 유산이 있어요. 내가 유언 집행인이고, 올해 윤해완 씨 생일에 집행하기로 되어 있었어요.”
전혀 예상하지 못한 말에, 강현의 미간이 노골적으로 꿈틀했다. 그럼에도 인하는 차분하게 말을 끝마쳤다.
“해완 씨도 유언의 내용에 대해선 집행일에 들어서 이미 알고 있어요. 여강현 씨도 알다시피 이런저런 일들로 정식으로 상속 절차를 밟을 시간이 없었는데, 이제 행방을 알았으니까 그 처리를 좀 해야겠어요.”
“…….”
“찾는 데 내가 큰 역할 했으니까 그 정돈 하게 해 줬으면 하는데.”
감정의 동요를 감추려는 듯 강현은 고개를 사선으로 내리더니, 길고 섬세한 손가락으로 잠시 입가를 매만졌다.
그러나 곧 고개를 든 그는 단호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꼭 해야겠단 얘기란 게 그겁니까?”
“그래요.”
“그딴 돈 필요 없으니까 당신 마음대로 써요.”
그리고 벌떡 일어나 자리를 벗어나려는 강현의 팔뚝을 인하가 움켜쥐어 막았다. 그는 짜증스러운 감정을 숨기지 않으며 입을 열었다.
“지금 이게 무슨 애들 장난인 줄 알아요?”
“그 정도 돈은 내가 해완이한테 얼마든지 줄 수 있어.”
“액수가 문제가 아니잖아. 당신이 뭔데 윤해완 씨 의사로 결정되어야 할 일을 정하냐고.”
“…….”
“윤해완 씨 자기 의사 결정 능력 있는 성인이고, 나는 분명히 유언장 내용 전달했어요. 정말 이 돈 받고 싶지 않으면 이리 와서 상속 재산 포기 각서 쓰라 그래요. 아니면 무슨 수를 써서라도 내가 윤해완 씨 만나러 갈 거니까.”
순간, 강현의 동공이 감추지도 못하고 크게 흔들렸다. 한 번 눈을 깊게 감았다 뜬 그는 불확실한 시선을 하고 낮게 중얼거렸다.
“만약 윤해완이 그 유언장의 존재 자체를 기억하지 못한다면?”
“뭐라구요? 지금 무슨…….”
그러나, 강현의 말이 의미하는 바를 곧 깨달은 인하는 잠시 말을 잃었다.
“설마, 또 기억에 문제가 생긴 거예요?”
강현은 작은 움직임으로 고개를 끄덕였다. 기가 찬 한숨과 함께 강현의 팔을 놓은 인하는 애써 침착하게 물었다.
“얼마나요?”
“한 달 반 정도.”
강현의 말만 들어서는 해완이 정확히 언제부터 언제까지의 기억을 잃었는지는 알 수 없었지만, 인하는 예리하게 되물었다.
“당신이 윤해완 씨를 속여 왔다는 걸 알고 나서의 기억인가요?”
대답이나 다름없는 침묵이 이어졌다. 다시 의자에 털썩 주저앉은 인하가 피곤하다는 듯 마른세수를 했다.
“보아하니 윤해완 씨한테 그 이야기를 하지 않은 건 뻔해 보이고, 설마 앞으로도 평생 하지 않을 작정이에요?”
“기억하고 싶지 않아 지운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게 무슨 소용이 있지?”
“…….”
“해완이가 잊어버렸던 윤해언의 기억을 떠올렸을 때 어떻게 반응했는지 당신이 제일 잘 알잖아.”
“……그래요, 내가 제일 잘 알죠.”
“그럼 당신 입으로 말해 봐. 그런데도 해완이한테 그 기억을 떠올리게 하는 게 옳은 일이라고 생각하는지.”
강현의 말투는 바싹 날이 서 있었지만, 희게 마디가 설 정도로 강하게 움켜쥔 손은 가늘게 떨리고 있었다.
그런 강현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인하가 문득 입을 열었다.
“해언이가 윤해완 씨 곁을 왜 떠났는지 알아요?”
느닷없는 질문에, 강현의 짙은 눈썹이 꿈틀했다. 인하는 아랑곳없이 말을 이었다.
“어차피 자기는 무슨 짓을 해도 온전한 윤해완은 절대로 가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
“자신이 옆에 있는 한, 해완이는 스스로의 조각을 끊임없이 버리게 될 거라고.”
인하는 강현을 향해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내가 보기엔 당신도 그럴 것 같네.”
왜인지 그 말이 가슴에 꽂혀 들어서, 강현은 아무런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는 사이 인하는 데스크 한편에 미리 준비해 둔 듯한 메모지를 강현에게 건넸다.
“유준이 연락처예요. 미리 말해 놨으니까 얘기하기 어렵지는 않을 거예요.”
인하의 손에서 그것을 받아 든 강현은 아무런 말 없이 저벅저벅 사무실을 걸어 나갔다. 인하도 더는 그를 붙잡지 않았다.
* * *
헬스장 입구를 나오던 해완은 그 앞에 서서 자신을 기다리고 있던 강현을 발견하자마자 환하게 미소를 지었다.
“오래 기다렸어?”
“아니, 한 10분쯤.”
그렇게 말하며 해완의 옆머리에 입술을 가져다 대던 강현이 멈칫했다. 이전까지 해완에게서 맡아 보지 못했던 향이 나서였다.
별다른 말을 하지도 않았는데 해완은 그런 강현의 마음을 읽기라도 한 것처럼 움찔 뒤로 물러서더니, 뒷머리를 쓰다듬으며 중얼거렸다.
“이 냄새 별로야? 필요하면 쓰라고 주셨는데 나쁘지 않은 거 같아서…….”
고가의 회원제로 소개를 통해서만 들어갈 수 있는 클럽이라 이곳에서 쓰는 제품들은 강현 또한 사용해 본 적이 있는 고급 브랜드였다. 게다가 해완의 몸에서 풍기는 냄새는 아로마틱한 라인으로 그의 페로몬 향과 비슷한 계열이라 나쁘지는 않았으나, 원래 향이 짙기로 유명한 브랜드인 바람에 해완의 살냄새를 지나치게 가리는 것이 강현을 멈칫하게 한 이유였다.
하지만 그것이 해완의 페로몬샘 기능이 떨어진 탓일 수 있다는 사실을 떠올린 강현은 불편해 보이는 해완의 기색을 살피며 황급히 고개를 저었다.
“아냐, 좋아. 잘 어울리네.”
그제야 강현을 바라본 해완의 볼에 옅은 홍조가 떴다. 그는 자신의 손등의 냄새를 맡고는 수줍게 말했다.
“그치? 나도 마음에 들어.”
그런 해완을 바라보던 강현이 아주 약간 살이 오른 부드러운 볼을 만지작거리며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럼 여기 제품 좀 사러 갈까? 근처에 스토어 있는데.”
고개를 끄덕이는 해완의 손을 쥐고 강현은 걸음을 옮겼다.
매장에 가서 오늘 해완이 바른 라인의 모든 보디 제품들과 무향의 보습제도 더해 구매를 한 뒤에는 오랜만에 외식을 했다. 길을 걷다가 해완이 마음에 드는 곳으로 골라 들어간 것이었는데, 어디를 가든 사전 조사와 예약을 거치는 계획형 인간인 강현은 미심쩍은 마음을 버리지 못했지만 음식도 생각보다 맛있었고 이런 식으로 같이 밥을 먹는 건 처음인 것 같다며 즐거워하는 해완에 그 또한 괜히 기분이 좋아졌다.
아침부터 운동하랴 쇼핑하랴 피곤할 법도 한데 간만에 쐬는 바깥바람이 좋은지 해완이 집에 들어가기를 아쉬워해서, 두 사람은 할 일 없이 번화가를 잠시 걸었다.
방금 지나온 카페에 걸린 조명이 예쁘다느니, 옆을 스쳐 지나간 아기가 방긋 웃었다느니, 솜사탕 매대에 놓인 토끼 모양 솜사탕을 봤냐느니 하며 재잘거리는 해완을 물끄러미 보던 강현이 불현듯 물었다.
“어떻게 그런 걸 다 보고 다녀?”
그 말에 멈춰 선 해완이 의아하게 물었다.
“그냥……. 걷다 보면 보이는데. 넌 안 그래?”
애초에 길거리를 다니는 것을 좋아하지도 않았지만 거리를 걷게 되더라도 강현은 그런 식으로 주위를 둘러본 적이 없었다. 지금만 해도 그랬다. 해완이 가리켜서 봤을 뿐이지 그 외에 눈에 들어오는 것은 하나도 없었다.
강현이 고개를 젓자 해완은 잠시 생각에 잠긴 표정을 하더니 휙 손을 뻗어 강현의 머리 위를 장난스럽게 쓰다듬었다.
“키가 너무 커서 그런가?”
마치 동생을 대하는 것 같은 태도에(나이로만 따지면 맞기는 했지만) 강현은 괜히 몸을 피하며 불퉁하게 중얼거렸다.
“뭐야, 그게.”
“네가 안 보이는 데는 내가 보고 있으니까 걱정하지 마.”
그렇게 말하며 연하게 웃는 해완의 얼굴에 강현이 시선을 빼앗긴 사이, 문득 다른 곳을 바라본 해완이 뒤를 가리키며 즐겁게 말했다.
“저기 우리 보리 닮은 강아지 지나간다.”
무심코 뒤를 돌아보자 주인과 함께 산책을 하는 레트리버 한 마리가 보였다. 꽤나 신이 난 듯 겅중겅중한 발걸음으로 꼬리를 치며 걷고 있었다.
같은 보더콜리도 아닌데 보리와 어디가 닮았다는 건지 몰라 강현의 의아하게 중얼거렸다.
“……쟤는 보더콜리가 아닌데.”
그러자, 강현을 말끄러미 바라보던 해완이 그의 어깨에 툭 기대며 부드럽게 중얼거렸다.
“웃는 얼굴이 닮았잖아.”
그제야 강현은 레트리버도 웃는 얼굴을 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어깨에 닿은 해완의 몸에서 풍기는 온기를 느끼며 그는 멍하니 해완이 보는 세상이 얼마나 풍성한지에 대해 실감했다.
그런데 무슨 일인지 아까 들었던 인하의 목소리가 불쑥 강현의 머릿속에 끼어들었다.
‘어차피 자기는 무슨 짓을 해도 온전한 윤해완은 절대로 가질 수 없기 때문이라고 했어요. 자신이 옆에 있는 한, 해완이는 스스로의 조각을 끊임없이 버리게 될 거라고.’
윤해완의 조각.
마음을 파고들었던 그 단어의 뜻도 제대로 알지 못하면서 강현은 충동적으로 입을 열었다.
“유준이 있는 곳, 오늘 찾았어.”
그 말에, 해완이 눈을 크게 뜨고 강현을 쳐다보았다.
* * *
부산에서 올라오는 유준이 도착하는 시간에 맞춰 역에 마중을 나온 강현은 역사 한구석에 기대어 섰다.
해완은 아침 내내 안절부절못했다. 특히 살이 많이 빠져 보이는 것이 신경 쓰이는 모양으로, 생전 바르지도 않던 립밤을 챙겨 바르면서 제 얼굴이 많이 안 좋아 보이냐고 몇 번씩 묻기도 했다.
그렇게 긴장한 탓인지 해완은 오늘 아침 식사를 하고 나서 살짝 체하기까지 했다. 그 덕에 혼자 집을 나설 수 있는 핑계는 되었지만 신경질이 나는 것은 어쩔 수 없었다.
대체 김유준 하나를 만나는 데 왜 그렇게 신경을 쓰는 걸까.
지난 며칠간 시시때때로 솟구치던 짜증을 억지로 참아 넘긴 여파 때문인지 머리가 지끈 울린 강현이 눈 앞머리를 꾹꾹 눌렀다.
그때 기차의 도착을 알리는 안내 방송이 들려왔다. 멀리서 들어오는 기차가 강현의 시야를 긁으며 지나갔다.
유준이 타고 있는 기차 칸 바로 앞에 서 있었기 때문에 강현은 자리에 가만히 서서 그가 나오기를 기다렸다.
잠시 후, 몇몇 손님들의 뒤를 따라 어깨에 커다란 더플백을 메고 나오는 유준이 보였다. 반가워할 것이라 생각하지는 않았지만 강현을 발견한 유준은 그 자리에 얼어붙은 듯 멈춰 버렸다.
“오랜만이네. 잘 지냈어?”
강현이 가까이 다가서자 유준은 더플백 손잡이를 두 손으로 쥐고 경계하는 눈초리로 물었다.
“해완이 형은요?”
“몸이 좀 안 좋아서 집에 있어. 짐 이리 줘. 들어 줄게.”
손을 내밀자 유준은 몸을 홱 피했다. 알아서 하겠거니 싶어져 그냥 어깨를 으쓱한 강현은 발걸음을 옮겼다.
“가자. 차 주차장에 있어.”
하지만 유준은 따라오지 않았다. 몇 발자국 앞서 나가다 멈칫한 강현이 뒤를 돌아보자 유준이 그를 노려보았다.
“지금 그쪽이 운전하는 차를 타고 가라고요?”
“내가 운전하는 거 불안하면 택시 부르고.”
그 말에 유준은 여전히 인상을 찡그린 채로 무언가를 가늠하듯 강현을 위아래로 훑었다. 그러고도 괜히 발로 땅을 탁탁 차며 망설이던 그는 결국 퉁명스럽게 입을 열었다.
“……됐어요.”
주차장까지 가는 길에도 유준은 강현과 약간 거리감을 두고 따라왔다. 차에 도착해서는 친절하게 조수석 문까지 열어 주었는데도 겁먹은 얼굴로 망설이기까지 했다.
그런 유준을 보자 어렴풋이 운전하는 제 옆에서 덜덜 떨던 얼굴이 떠오르기는 했다. 하지만 강현의 입장에서는 유준은 털끝 하나 다치지 않은 데다 저를 그리도 지독하게 괴롭히던 인간들이 다시는 손을 대지 못하게 해 준 것뿐인데 이렇게까지 피할 일인가 싶어 잘 이해가 가질 않았다.
어쨌든, 유준과는 진지하게 할 이야기가 있었기 때문에 강현은 참을성 있게 기다렸다.
잠시 후, 큰맘이라도 먹었다는 듯 유준이 겨우 조수석에 올라탔다. 강현은 뒤이어 운전석에 타기는 했으나 바로 시동을 걸지 않고 침묵을 지켰다.
그러자 유준이 곧바로 불안한 목소리로 물었다.
“왜 출발 안 해요?”
“너랑 잠깐 하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서.”
“뭐예요, 또!”
유준은 당장이라도 차 밖으로 튀어 나갈 것처럼 경계 태세를 했지만 강현은 차분히 말을 이었다.
“해완이가 많이 아팠던 건 알지?”
“……인하 형한테 대충 들었어요. 근데 얼마나 아팠던 건데요?”
“조금만 늦게 발견했어도 죽을 뻔했어. 중환자실에만 있던 4일을 포함해서 일주일 동안 의식이 아예 없었고.”
“네? 그럼 지금은요? 지금은 괜찮아요?”
“응. 많이 좋아졌어. 그래도 예전이랑은 비교도 할 수 없게 살도 많이 빠지고 체력도 안 좋아. 오늘처럼 조금만 긴장해도 금방 체하기도 하고.”
그러자 복잡한 얼굴로 고개를 돌린 유준이 입술 한구석을 초조하게 물어뜯었다.
인하가 어디까지 이야기했는지를 몰라 한번 떠봤던 것인데 의외로 최소한의 말만 전달한 모양이었다. 강현은 머릿속으로 유준이 알고 있을 정보를 가늠했다.
유준은 해완이 윤해언과 있었던 일에 대한 기억을 떠올렸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의 페로몬샘에 이상이 생겼다는 것도 알고 있었고, 그리고 강현이 이제는 해완이 누군지 알고 있다는 것과 해완이 모종의 이유로 강현의 곁을 떠나 잠적했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해완이 왜 강현의 곁을 떠났는지, 제가 언제부터 해완이 해언이 아니라는 것을 눈치챘는지는 몰랐다. 이야기할 내용의 가닥을 대강 잡은 강현이 다시 입을 열었다.
“그래도 해완이가 완전히 괜찮은 건 아니야. 큰 문제가 하나 있거든.”
“네?”
강현은 고개를 돌려 일부러 유준과 시선을 마주하며 나직이 말했다.
“해완이, 자기가 사라졌던 동안 있었던 일을 기억을 못 해.”
그 말에 유준이 눈을 튀어나올 것처럼 크게 떴다. 강현은 말을 이었다.
“일부러 기억을 되찾으려고 하는 게 더 큰 스트레스가 될 수 있다고 의사한테 권고받았어. 그러니까 해완이 만나서 괜한 소리는 안 해 줬으면 해.”
“…….”
“부탁할게.”
망연히 강현을 바라보던 유준은 이를 한 번 악물더니, 독한 목소리로 내뱉었다.
“그게 누구 좋으라고 하는 부탁인데요?”
“…….”
“나 바보 아니에요. 예전엔 잘 몰랐는데, 형 힘든 일 있을 때마다 기억 잊어버리는 거잖아. 근데 당신을 떠난 기억만 쏙 잊어버렸다고?”
“…….”
“대체 형한테 무슨 짓을 한 거야?”
강현이 물끄러미 그를 바라보았다. 속을 알 수 없는 까만 눈동자에 유준은 일순 위축되어 보였지만, 조금 떨면서도 눈을 부릅뜨고 시선을 피하지 않았다.
강현은 여전히 유준에게 눈을 고정시킨 채, 아무렇지도 않다는 듯 말했다.
“해완이와 나 사이에 무슨 일이 있었건 그건 네가 상관할 일이 아니야.”
“그게 무슨 개소리예요.”
“윤해언과 있었던 일을 해완이가 떠올리게 된 게 네가 제주로 내려가면서 한 말 때문이라고 들었어.”
발끈하는 유준을 가로막고 강현이 뱉은 말에 유준은 순간 움찔했다.
“넌 그냥 그렇게 가 버리고 끝이었지만 그 뒤로 해완이 정말 많이 힘들어했어. 보기 힘들 정도로.”
“…….”
“이번에도 그렇게 책임질 수 없는 말만 던져두고 도망칠 거야?”
공항에서 제가 소리를 질러 댈 때 시체처럼 하얗게 질려 있던 해완의 얼굴이 눈앞을 번뜩 스쳐 갔고, 유준은 입 안으로 욕설을 굴리며 바닥으로 시선을 내렸다.
“그리고 네가 무슨 소릴 하건 간에 나는 해완이 절대 안 놔줘. 그러니까, 해완이 괜히 힘들게 하지 말자, 우리.”
“…….”
“잘 생각해. 유준아.”
웃기지 말라고, 나는 네 뜻대로 해 줄 생각 없다고, 그렇게 말해야 했는데 왠지 목소리가 나오질 않았다.
강현 또한 마찬가지였다. 유준이 제 말대로 하게 만들 자신이 있다는 듯, 그의 대답도 기다리지 않고 시선을 돌리고는 차의 시동을 걸었다.
강현의 집까지 가는 동안 차 안에는 적막만이 감돌았다. 유준은 터져 버릴 것처럼 복잡한 머리를 안고 몸을 반쯤 돌린 채 창밖만 고집스럽게 바라보았다.
처음에야 해완에게는 제가 항상 뒷전이라는 데 배신감을 느껴 정말 해완과 연을 끊고 살 생각이었으나 조금 시간이 지나고 나자 공항에서의 해완의 얼굴과 목소리가 자꾸만 가슴에 걸렸다.
솔직히 말하면 해완이 해언과의 일을 정말 기억하지 못하는 게 이해가 안 가서인 탓도 있었다. 머리를 다쳤던 것도 아니고 본인의 기억에 문제가 있다는 걸 모른다는 것도 이상해서, 해완이 해언의 편을 드느라 기억나지 않는 척을 하고 있다고 생각했었다.
하지만 이후 인하에게 해완이 정말 그 일에 대한 기억을 잃었다는 것을 확인받고 나서야 제 생각이 틀렸다는 걸 알았다.
그러다가 해완이 강현과 어떤 일로 다툰 뒤 잠적해 버렸고, 사라질 당시에 몸이 크게 안 좋은 상태였다는 것까지 알자 마음에 죄책감마저 쌓이기 시작했다.
그것이 강현의 연락에 두말없이 서울로 온 이유였다. 하지만 또 다른 생각지 못한 상황에 가슴에 돌이 얹힌 듯 답답해진 유준은 노골적으로 긴 한숨을 쉬었다.
비싼 외제 차들이 즐비한 주차장에 도착한 강현은 유준에게 묻지도 않고 짐을 제가 챙겨 들었다. 그러곤 가는 길마다 문을 열어 주는 둥 퍽 다정스럽게 굴었지만 유준에게는 그가 하는 모든 짓이 의뭉스럽기만 했다.
딱 한 번 와 봤을 뿐이지만 눈이 튀어나오게 고급스러웠던 강현의 집 현관문을 열고 들어서자, 개가 요란하게 짖는 소리와 함께 현관 복도 끝의 중문이 벌컥 열렸다.
“유준아.”
전에도 본 적이 있는 보더콜리와 함께 나와 있는 해완이 그를 향해 환하게 웃었지만, 유준은 차마 마주 웃어 주지도 못하고 덜컥 멈춰 서 버렸다.
강현에게 미리 언질을 들었음에도 해완은 유준이 놀랄 정도로 허약해 보였다. 저보다 큰 키가 무색하게 툭 치면 부러지겠다는 생각이 들 만큼 마른 몸뿐만 아니라 안색도 마찬가지였다. 원체 하얀 얼굴이기는 하지만 뽀얀 느낌이 강하던 전과는 달리 지금은 혈관이 하나하나 비쳐 보일 만큼 창백해진 게 크게 앓고 난 사람이라 광고라도 하는 것처럼 보였다.
유준이 아플 때는 밤을 새워서 간호해 주더니 제 몸은 저렇게 상할 때까지 감춰 왔다는 생각에 울컥한 그는 인사도 하기 전에 성을 내듯이 말을 내뱉어 버렸다.
“형 얼굴이 그게 뭐야. 몸도 삐쩍 말라 가지고는.”
해완은 멈칫 자신의 얼굴을 만지더니, 민망한 듯 웃으며 말했다.
“그렇게 보기 싫어? 그래도 나 한 달도 안 돼서 5키로나 찐 건데.”
“그게 찐 거야? 어디 가서 그런 소리 하지 마. 형 돌 맞아.”
붉어진 눈시울을 감추기 위해 괜히 눈 앞머리를 문지르며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유준의 목소리에, 가까이 다가선 해완이 그의 팔뚝을 문지르며 조용히 말했다.
“나 이제 정말 괜찮아, 유준아. 걱정 안 해도 돼.”
유준은 그런 말을 하는 해완의 눈을 바라보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점심은 어느 유명한 호텔에서 포장해 왔다는 초밥이었는데 회를 좋아하는 유준을 생각해서 일부러 준비한 모양이었다. 양은 3인분이었지만 전부 먹어 치운 것은 유준뿐이었다. 해완은 아침에 뭘 잘못 먹어서 속이 좋지 않다고 했고, 강현은 해완이 수저를 들 때 저도 수저를 들었다가, 그가 내려놓을 때 저도 내려놓아서 그랬다.
해완이 워낙 열심히 질문을 해 댄 탓에 대부분의 대화는 유준이 어떻게 지냈는지를 중심으로 흘러갔다. 인하가 소개해 준 숙박이 모두 해결되는 게스트 하우스에서 두 달여간 성실히 일했지만 역시 연고가 없는 곳에서 일하는 게 힘들어 일단 친구가 있는 부산에 잠시 머물고 있다는 유준의 말에, 해완이 갑자기 상기된 얼굴로 물었다.
“그럼…… 서울로 다시 올 생각도 있어?”
유준은 멈칫 해완의 얼굴을 보았다가, 흘끗 강현을 보고는 어물거리며 대답했다.
“봐서. 아직 잘 모르겠어.”
해완은 잠시 침묵하더니, 강현을 향해 부드럽게 말했다.
“강현아, 잠깐 자리 좀 비켜 줄래? 나 유준이랑 둘이 얘기 좀 하고 싶은데.”
유준은 저도 모르게 강현을 먼저 봤다. 애초부터 못 박힌 듯 해완에게만 시선을 주고 있던 강현의 눈도 유준을 향해 돌아섰다.
순간, 강현은 소름이 끼칠 정도로 싸늘한 얼굴로 유준을 봤다. 그러나 유준이 어떤 반응을 보이기도 전에 가면을 바꿔 끼우듯 입가에 둥근 미소를 띤 그는 해완의 손을 토닥이며 제게 시선을 주게 한 뒤 다정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래. 나 서재에 가 있을게.”
그러고는 몸을 일으켜 서재로 향하는 강현의 뒷모습을 보며 유준은 저 새끼 이중인격 아니냐고 속으로 욕설을 퍼부었다.
유준이 그렇게 치를 떨고 있는지도 모른 채 해완이 말을 건넸다.
“유준아. 형이 너한테 많이 미안해.”
갑작스러운 사과에 흠칫 놀란 유준의 시선이 해완을 향했다.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해완이 무릎 위에 놓여 있던 자신의 두 손을 꽉 부여잡았다.
“그때 공항에서 네가 했던 말이 맞아. 너도 그때 어렸고 무서웠을 텐데 내가 네 생각을 못 했어.”
“…….”
“왜냐면…… 해언이가 나한테 그런 짓을 했다고 인정하면…… 그 애가 다시는 돌아오지 않을까 봐 무서웠거든.”
“…….”
“강현이 일도 마찬가지야. 너한테 이해하라고 할 일이 아닌데, 그냥…….”
눈을 꾹 감은 해완은 손을 들어 이마를 감쌌다. 확연히 떨리는 손에 유준이 황급히 입을 열었다.
“형, 됐어. 나 괜찮으니까 이제 그만…….”
그러나 고개를 든 해완은 끝까지 말해야 한다는 듯 고개를 저었다. 유준이 흠칫 입을 다물자 그는 침착하게 말을 이었다.
“내가 강현이를 잃기 싫어서, 그런 내 욕심이 제일 중요해서 네가 이해해 주길 바랐어.”
“…….”
“네가 그런 내 옆에 있기 싫어하는 것도 이해해. 그래도 나는 네가 어떻게 사는지 궁금하고, 만약 힘든 일이 생기면 도와주고도 싶어. 그러니까…….”
“…….”
“그냥 가끔…… 얼굴이라도 보여 주면 안 될까?”
그런 말을 하며 유준을 바라보는 해완의 눈시울이 붉었다.
해완의 사과가 과거 해언과 얽힌 일에만 관련되어 있다면 그럴 필요 없다고 이야기했을 터였다. 기억을 지울 정도로 큰 상처를 입은 해완이 정상적인 판단을 할 수 없었다는 것을 이제는 겨우 이해하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지금 해완이 하는 사과는 유준으로서는 절대 이해하지 못할, 여강현과의 관계를 놓지 못하는 것에 대해서이기도 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마음이 복잡해진 유준이 조용히 물었다.
“형은 여강현이 그렇게 좋아?”
“응. 내가 강현이를 많이 좋아해.”
해완은 망설이지도 않고 작지만 분명한 목소리로 답했다. 유준은 질리지도 않고 나오려는 한숨을 꾹 참고 한 번 더 물었다.
“그럼 여강현은?”
“……어?”
“여강현은 형을 좋아하는 거 같아?”
그 말에 해완의 입술이 작게 벌어졌다. 그는 시선을 내린 채 맞잡은 두 손을 만지작거리며 떨리는 목소리로 횡설수설 중얼거리기 시작했다.
“어, 강현이는…… 나한테 정말 잘해 줘. 나 아픈 거 알고 나서 먹는 거, 입는 거, 자는 거, 하나하나 다 과분할 정도로 신경 써 주고, 그리고…….”
“…….”
“그리고, 내가 그동안 했던 거짓말도 다 용서해 줬어.”
그런 말을 하는 해완의 얼굴이 수줍기라도 한 것처럼 온통 붉었다.
형이 기억하지 못하는 동안 무슨 일이 있었던 게 분명하다고, 지금이 그렇게 말할 절호의 기회일 수도 있다고 충분히 알고 있었다.
하지만 해완의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 앞에서, 유준은 왠지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 * *
강현이 잡아 준 호텔은 로비부터가 휘황찬란한 5성급 호텔이었다. 평소의 유준이었다면 제 돈으로는 절대 가지 않았을 비싼 호텔에 남의 돈으로 하룻밤 묵게 된 게 신이 나서 이곳저곳 사진을 찍거나 미니바를 털거나 하는 등 바빴을 테지만, 오늘 그는 싱숭생숭한 마음을 어쩌지 못하고 룸에 들어오자마자 침대에 털썩 드러누워 천장을 바라보고 있었다.
분명 강현의 차에서 내릴 때까지만 해도, 아니, 해완의 기억 상실을 안 그 순간부터 여강현이 가지고 있는 구린 구석을 해완에게 기필코 말하고 말겠다고 굳게 다짐하고 있었는데, 결국 아무것도 말하지 못하고 돌아온 탓이었다.
물론 그런 이유가 있기는 했다. 첫 번째로는 해완의 건강이었다. 떠올리는 것만으로도 마음이 따끔할 정도로 핼쑥하고 창백한 얼굴을 한 해완에게 충격적일 수도 있는 소식을 전했다가 건강이 악화되지는 않을까 하는 생각만 해도 심장이 서늘했다.
그리고 또 다른 것도 있었다.
그것은 해완이 안온한 곳에서 잘 보호받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며…… 또 행복해 보였기 때문이었다.
인정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해완의 말마따나 오늘 하루 잠깐 같이 있었던 것만으로도 강현이 해완에게 얼마나 지극정성으로 구는지 모를 수가 없었다. 단순히 몸이 아픈 해완을 잘 챙겨 주는지에 대한 문제가 아니었다. 그것은 마치, 뭐랄까…….
강현의 세상에는 오직 해완만이 존재하는 것처럼 보일 정도였다.
게다가 해완도, 강현을 그토록 좋아한다고 하지 않았던가.
대체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 몸을 벌떡 일으킨 유준은 머리를 벅벅 긁었다. 인하에게 물어보기라도 하고 싶었지만 그는 최근 연락이 뜸했다. 유준이 서너 번 전화를 해도 한 번 받을까 말까에 늘 바빠 보여서, 더는 연락하기가 꺼려졌다.
그때, 옆에 놓아둔 핸드폰에서 웅 하고 진동이 울렸다. 무심코 고개를 돌린 유준은 액정에 뜬 강현의 이름을 보고 이맛살을 찡그렸다.
호텔에 들어온 직후 해완과 잘 들어왔다고 통화를 했으니 안부 인사차 한 연락은 아닐 것이었다. 잠시 망설이던 그는 심호흡을 하고 전화를 받았다.
“여보세요?”
―유준아. 잘 들어갔어?
“아까 해완이 형이랑 통화한 거 옆에서 들었으면 알 거 아니에요.”
―그래. 부산에는 내일 5시에 내려가는 거지?
“알면서 왜 물어봐요?”
―서울에는 언제 다시 올 생각이야?
“내가 그걸 왜 당신한테 말해야 되는데?”
―내가 괜찮은 집도 구해 주고 생활비도 넉넉하게 주면, 서울로 다시 올래?
“……뭐라구요?”
―해완이가 널 자주 보고 싶어 해. 그러니까 근처에 있었으면 좋겠어.
갑작스러운 제안에 유준은 멈칫했다. 제주를 떠난 이상 그나마 연고가 있는 곳이라곤 서울밖에 없으니 올라오기야 할 생각이었으나 강현으로부터 이런 소리를 들을 줄은 예상하지 못했기 때문이었다.
문득, 사고가 났던 그 밤 강현이 비슷한 제안을 했던 것이 생각났다. 물론 그때는 해완의 곁에서 떨어지라는 정반대의 권유였지만 조건은 비슷했다. 종잡을 수 없는 행동에 울컥한 유준이 목소리를 높였다.
“날 해완이 형 곁에서 쫓아내려고 그 지랄을 해 놓고, 갑자기 왜 그런 소리를 하는 건데?”
통화를 하는 내내 거칠던 유준의 말투에도 평온하게 대답하던 강현이 갑자기 조용해졌다. 수화기 속에서 한참 침묵이 흐르는가 싶더니, 강현은 불현듯 입을 열었다.
―해완이한테는 너도 필요해.
“…….”
―나뿐만이 아니라.
마음속에 두었던 어떤 답보다도 가장 의외의 대답에, 유준은 그대로 말문이 막혀 버렸다.
“……생각해 볼게요.”
결국 유준은 그대로 전화를 끊어 버렸다. 혼란스러운 마음이 좀처럼 가시질 않았다.
“미치겠네, 진짜…….”
혼잣말을 내뱉은 유준은 머리를 마구 쥐어뜯으며 다시 털썩 뒤로 누워 버렸다.
일단 해완이 건강을 되찾을 때까지는 지켜봐도 괜찮지 않을까 하는, 그런 생각이 들어, 유준은 길게 한숨을 내쉬며 팔뚝으로 눈을 가렸다.
* * *
전화를 끊은 강현은 해완이 들어간 욕실에서 흐르는 물소리를 들으며 아까 해완이 유준과 나눴던 대화를 떠올렸다.
자리를 비워 달라는 해완의 말에 몸을 일으키기는 했으나 당연히 유준을 믿을 수 있을 리 없었다. 때문에 강현은 서재로 들어가는 대신 적당한 곳에 기대어 서서 두 사람의 대화에 신경을 집중하고 있었다.
그렇게 들려온 유준에게 가끔 얼굴이라도 볼 수 없겠냐고 이야기하는 해완의 간절한 목소리는 그의 가슴을 따끔하게 만들었지만, 그것이 아까 유준에게 그런 제안을 하게 만든 온전한 계기는 아니었다.
굳이 따지자면 그 계기는, 해완이 사라지기 직전, 함께 나간 산책길에서 보리의 웃는 얼굴을 처음으로 발견한 순간부터 일어난 어떤 변화에 관한 것이라고 해야 맞았다.
해완이 바라보는 풍성하고 이채로운 세상이 그의 마음 안에 스며들면 스며들수록 강현은 제힘으로는 설명할 길 없는 복잡한 무언가에 압도되는 무력감을 여러 번 느껴야 했다.
그것은 어린아이가 세상을 알아갈 때 느끼는 신비로움과 비슷하기도 했고, 그간 절대 인정하려 들지 않았으나 강현 혼자의 힘으로는 줄 수 없는 영역이 해완에게는 있다는 걸 인정할 수밖에 없는 고통이 섞인, 지극히 까다롭고 난해한 감정이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해완의 손끝에 달린 세상만 들여다볼 수 있는 강현에게는 더는 외면할 수 없는 변화이기도 했다.
하지만 지금 강현의 마음을 끊임없이 맴도는 소리는 유준과 해완의 사이에 관련된 것은 아니었다.
‘내가 그동안 한 거짓말도 다 용서해 줬어.’
강현에 대해 유준에게 필사적으로 변명하던 해완의 목소리였다.
존재하지도 않았던 거짓에 대해 용서받았다고 생각하도록 해완을 속인 것에 대한 수치심이 느껴져서는 아니었다. 그런 것을 마음에 간직하고 있기에는 이미 너무 먼 길을 왔음을 알고 있었다. 무슨 짓을 해서라도 해완을 옆에 둘 수만 있다면 족했다.
제 손끝을 내려다보던 강현의 시선이 잠시 흐릿해졌다. 뭔가 가슴을 불편하게 만드는 게 있는데 그 형체를 알아볼 수 없어서였다.
강현은 허리를 깊게 숙인 채 두 손으로 얼굴을 감쌌다. 좀처럼 정리되지 않는 감정을 갈무리하기에 스스로의 힘이 터무니없이 약하게 느껴졌다.
그런데 문득, 주변이 너무 조용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둠 속에서 호흡하던 강현은 고개를 번뜩 들었다. 물소리가 들려오던 욕실 안은 조용했다. 시계를 보자 해완이 욕실로 들어간 지 50분이 넘어 있었다.
몸을 벌떡 일으킨 강현이 곧바로 욕실로 향했다. 문이 살짝 열려 있는 욕실 앞에 선 그는 가볍게 노크하며 입을 열었다.
“해완아?”
대답이 돌아오지 않자 강현은 더 이상 망설이지 않고 문을 열어젖혔다. 안으로 들어서자마자 해완과 함께 샀던 보디 제품의 향기가 코를 찌를 정도로 물씬 풍겼다.
그리고, 무릎을 세우고 웅크리고 앉은 채 욕조 턱에 두 팔을 올리고 이마를 대고 있는 해완의 모습을 본 강현의 얼굴이 삽시간에 새파래졌다.
“해완아!”
심장이 발끝까지 내려앉은 그는 옷이 다 젖는 것도 아랑곳하지 않고 거품이 가득한 욕조 안에서 해완을 안아 들어 밖으로 꺼냈다. 뜨거운 물에서 나오자마자 눈을 희미하게 뜬 해완이 숨을 헐떡이며 입을 열었다.
“갑자기…… 좀 어지러워서……. 미안해…….”
입욕을 오래 해 현기증을 느꼈던 모양이었다. 심각한 상황은 아니라는 판단이 들어 겨우 한숨을 돌린 강현은 커다란 수건으로 해완의 몸을 감싸며 괜찮다고 달래 주었다.
강현은 해완의 몸에 묻은 비누 거품을 헹궈 준 다음 샤워 가운을 입혀 안아 들고 나와 침대에 앉혔다. 거실로 나가 급히 떠 온 물까지 한 모금 먹이고 나서야 희게 질렸던 해완의 입술이 겨우 불그스름한 빛으로 되돌아온 것이 보였다.
“입욕을 대체 언제부터 한 거야? 그렇게 오래 하면 안 되는 거 알잖아.”
“……미안.”
저도 모르게 울컥한 말투로 입을 열었으나, 해완이 시무룩하게 대꾸하자 강현은 어쩔 수 없이 목구멍까지 차오른 말들을 꿀꺽 삼켰다.
그는 해완이 듣지 못하게 작은 한숨을 내쉬며 협탁 위에 올려 두었던 잠옷으로 손을 뻗었다. 해완의 샤워 가운을 벗긴 그는 제 손으로 직접 잠옷을 입히고 단추 하나하나까지 꼼꼼히 잠그는 것에 집중했다.
다음은 젖은 머리였다. 드라이기로 제 머리를 말리는 강현의 손길을 얌전히 받고 있던 해완이, 문득 중얼거렸다.
“내 몸에 다른 사람 냄새 배는 거 싫어하잖아.”
드라이기 소음에 가려질 만큼 작은 목소리였으나, 강현이 놓칠 만큼은 아니었다.
순간, 강현은 아무 대답도 하지 못했다. 그렇지 않다고 거짓말은 얼마든지 할 수 있었으나 언젠가 제 입으로 스스로 뱉은 말들이 입을 틀어막았다.
‘알파 냄새잖아, 이거.’
‘너한테서 안 좋은 냄새가 나서 그래.’
‘내 향으로 짓뭉개 버리는 편이 더 빨라.’
드라이기를 툭 내려놓은 강현은 해완의 어깨를 돌려 저를 보게 만들었다. 막 말린 탓에 부슬부슬한 머리칼 사이로 연갈색 눈이 시선을 피해 내려앉는 것이 보였다.
강현은 그런 해완의 볼을 감싸 저를 보게 만든 다음 나직하게 중얼거렸다.
“유치하게 굴어서 미안해.”
“…….”
“질투가 나서 그랬어.”
그러자 강현을 말끄러미 보던 해완이 연하게 웃었다. 그 옅은 미소가 금방이라도 짓눌려 사라질 것같이 연약해 보여 강현은 그의 어깨를 잡아당겨 깊게 끌어안았다.
강현의 품에 몸을 맡기고 안겨 있던 해완이 불쑥 그의 옷자락 끝을 쥐고 위로 살짝 끌어 올렸다.
“나 때문에 다 젖었네. 벗어야겠다.”
해완의 미안한 듯한 목소리에 움찔 놀란 강현이 몸을 휙 떼어 냈다. 다소 과한 반응에 해완의 시선이 그의 얼굴을 향했다. 강현은 침대 밖으로 발을 내리고 어물거리며 말했다.
“어, 갈아입고 올게.”
자리를 벗어나려는 강현의 손목을 해완이 움켜쥐었다. 무엇인가 직감이라도 한 듯 투명한 시선으로 강현을 올려다보던 해완이 입을 열었다.
“여기서 벗어도 되잖아.”
“옷이 드레스 룸에 있으니까…….”
당황한 강현의 변명에도 불구하고 그가 해완의 앞에서 옷을 벗지 않으려 하는 진짜 이유를 알기라도 하는 것처럼 해완은 갑작스럽게 몸을 일으켜 강현의 앞에 섰다. 그러고는 그의 윗옷을 다짜고짜 위로 끌어 올리려 하는 것을 손을 잡아 막았다.
“해완아, 잠깐…….”
하지만 그런 강현의 행동이 더욱 의심을 부채질한 듯 해완은 단호한 태도로 눈을 치켜뜨며 물러서지 않겠다는 뜻을 분명히 했다.
해완이 집에 온 이후로 강현은 그의 앞에서 맨몸이 드러나지 않게 항상 조심해 왔다. 정확히 말해 맨몸이라기보다 해완의 행방을 알지 못하는 동안 스스로 몸에 낸 새로운 흉들을 보이지 않으려 애써 왔다.
난생처음으로 피부 위에 보습제와 연고까지 발라 가며 애를 쓴 덕에 그나마 많이 옅어지기는 했지만 민감한 해완의 눈에는 가시처럼 걸릴 것이 분명해 보였다. 아픈지도 모르고 낸 상처들인데, 고작해야 인간의 손끝으로 낸 생채기일 뿐인데도 흉터는 쉽게 옅어지질 않았다.
상처를 내기는 쉬워도 아물기는 어렵다는 새삼스러운 사실을, 강현은 요즘에 와서야 깨닫고 있었다.
강현이 움직이지 않자 해완은 입을 일자로 꾹 다물더니 강제로 그의 옷을 들추기 시작했다. 그런 해완을 힘으로 강제할 수 없어, 강현을 결국 그가 시키는 대로 얌전히 옷을 벗을 수밖에 없었다.
침실 안에는 어스름한 조명만이 켜져 있어 해완이 눈치채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희망을 언뜻 가져 보았지만, 그의 맨몸이 드러나는 순간 해완의 아랫입술이 파르르 떨렸다.
해완은 손을 들어 올려 이전에는 보지 못했던 강현의 상처들을 하나하나 어루만지다가, 삽시간에 붉어진 눈을 들어 나직하게 말했다.
“……나 때문이구나.”
강현은 간절한 표정으로 고개를 저었다. 모든 것은 그 자신의 문제였다. 해완이 그에게 잘못한 것은 세상에 그 무엇도 없었고, 존재할 수조차 없었다.
하지만 뭐라 입을 열기도 전에 해완이 와락 그를 끌어안아 왔다. 울음을 참으려는 양 맞닿은 가슴팍이 빠르게 오르내렸고, 마치 전염이라도 된 듯 갑자기 숨을 쉬기 어려워진 강현은 해완을 꼭 끌어안고 고개를 숙였다.
그렇게 해완을 안고 있는 사이 강현은 이제껏 그의 삶을 괴롭혀 오던 모든 칼날 같은 감각들이 멀어져 가는 이상한 경험을 했다. 그렇게 빈 자리를, 오로지 해완의 존재가 가득 채우고 있었다.
강현의 가슴에 얼굴을 묻고 있던 해완이 문득 제 몸을 살짝 떼어 냈다. 작은 움직임이었으나 해완을 붙잡으려 드는 강현의 손은 세상을 잃기라도 한 것처럼 간절했다.
그때, 해완은 고개를 쳐들고 조금 위로 몸을 당기고는 그의 입술에 입을 맞추었다. 몸이 굳어 버린 강현이 아무런 반응을 보이지 않자 해완은 아주 희미하게 눈을 떴다가, 다시 깊게 속눈썹을 내리고는 두 손으로 강현의 볼을 감싼 채 입술을 빨았다.
이렇게 농밀한 입맞춤을 나누는 것은 몇 달 만이었다. 해완의 몸을 망쳤다는 죄의식이 그에게 손을 대기를 주저하게 만들었으나 오랜만에 닿은 입술은 미치도록 달아서 강현은 넋을 잃은 사람처럼 눈을 감고 입술을 깊게 겹쳤다.
강현은 해완의 마른 등을 꽉 끌어안고 그 부드러운 입술이 민감해질 때까지 마음껏 빨고 깨물고 맛보았다. 연한 점막과 입 안을 쓸어내리고 말캉한 혀까지 깊게 빨아들이자 해완의 목에서 흘러나온 연약한 신음이 그의 입 안에 쏟아졌다.
순간, 정신이 번쩍 든 강현이 고개를 옆으로 돌려 버렸다. 요령 없는 거절에 어리둥절한 얼굴을 한 해완이 몽롱한 눈을 깜빡였다.
“……피곤할 텐데 쉬어야지.”
강현은 한쪽 손으로 얼굴을 쓸어내리며 당혹스러운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런 강현을 바라보던 해완이 아랫입술을 꾹 깨물었다.
해완은 두 손을 들어 강현의 몸을 뒤로 밀었다. 갑작스러운 움직임에 뒤로 밀려난 강현은 침대에 걸려 얼떨결에 털썩 주저앉았다.
그의 무릎 위로 올라앉은 해완이, 낮게 중얼거렸다.
“나는 너랑 하고 싶은데.”
“…….”
“너는 아니야?”
아니라는 대답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다. 그렇다고 선뜻 받아들일 수도 없어, 강현은 목소리라도 잃은 것처럼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그러자 해완은 아까 강현이 꼼꼼히 채워 두었던 잠옷의 버튼을 제 손으로 풀어 내리기 시작했다. 가슴팍까지 열린 셔츠 때문에 유난히 긴 목이 더욱 두드러졌다.
힘없이 늘어져 있던 강현의 손을 잡아 쥔 그는 제 고개를 뒤로 젖히고 잡고 있는 손을 목덜미에 가져다 댔다. 손 밑으로 가는 목울대가 떨리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졌다. 해완은 힘을 주지 않는 강현의 손가락을 양손으로 감싸 쥐고 제 입술부터 마른 가슴께까지 어루만지게 했다.
녹아내릴 듯 부드러운 살갗이 온전히 손에 감겼다. 섬세한 곡선을 입술로 훑어 내릴 때 해완의 입에서 새어 나오던 달콤한 한숨과 그 연약한 떨림이 마치 신기루처럼 선연하게 감각을 잠식했다.
강현은 저도 모르게 손끝에 힘을 주었다. 그것을 느낀 해완의 눈꺼풀이 살짝 올라갔다. 긴 속눈썹 사이로 달뜬 눈동자가 드러난 순간 홀린 사람처럼 고개를 숙인 그는 해완의 왼쪽 귀 뒷부분에 코를 묻고 냄새를 맡고 입술을 열어 닿아 있는 피부를 살짝 빨아 올리기도 했다.
고개를 옆으로 돌린 채 할딱이며 애무를 받던 해완이 체중을 실어 그의 몸을 뒤로 밀어 눕도록 만들고는 맞닿은 앞섶을 느리게 문지르기 시작했다.
이미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들이 문질러지는 감각에 두 사람 다 동시에 숨을 크게 들이켰다. 강현의 몸 위에 완전히 엎드린 해완은 허리를 들썩이며 작게 몸서리쳤다.
그것만으로도 머리가 새하얗게 변했다. 강현은 턱에 날이 설 정도로 이를 강하게 악물고는 해완의 허리를 끌어안고 몸을 단번에 뒤집어 그를 제 밑으로 눕혔다.
갑작스러운 체위 변화에 해완은 휘둥그레 뜬 눈으로 강현을 올려다보았다. 강현 또한 해완을 내려다보았다. 하지만 그는 섣불리 해완의 몸에 손을 대는 대신, 그의 손을 잡아 올려 자신의 볼을 감싸게 하고 꾹 눌렀다.
여기까지 와서도 한 번 더 허락을 구하는 행동에 해완의 눈이 부드러워졌다. 입술이 닿을 정도로 강현의 얼굴을 바싹 끌어당긴 해완은 달아오른 목소리로 속삭였다.
“내가 원해.”
“…….”
“내가 널 원해, 강현아.”
강현의 숨통을 죄던 줄을 그 목소리가 풀어 주었다. 강현은 더는 망설이지 않고 해완의 입술을 다시 머금었다.
강현은 해완의 몸을 잘 알았다. 그가 유일하게 알고 있는 몸이기도 했다. 강현은 집요하리만치 그가 알고 있는 성감대를 단 한 곳도 빼놓지 않고 애무했다. 귓불, 턱, 목울대, 유두, 아랫배, 성기, 애널까지 집요할 정도로 더듬고 물고 빨았다. 마치 짐승들이 제 영역을 마킹하는 행위 같았다.
그리고 강현이 만지고 애무하는 곳곳마다 해완은 어김없이 신음하고 허리를 뒤틀며 무엇이든 받아들일 수 있다는 듯 더 달라고 애원했다.
진이 빠질 정도로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애무를 하고 나서야 강현은 일방적으로 퍼부어지는 쾌감에 눈이 풀린 해완의 다리를 넓게 벌려 잡고 그대로 삽입했다.
손가락이며 입을 사용해서 풀어 줄 수 있는 만큼 풀어 줬는데도 몇 개월 만에 강현을 받아들이는 해완의 뒤는 너무나 뜨겁고 좁았다. 제멋대로 날뛰려는 욕망을 억누르며 아주 천천히 성기를 뿌리까지 밀어 넣은 순간, 강현은 눈을 질끈 감고 고개를 뒤로 젖히며 경련이라도 일으키듯 몸을 바르르 떨었다.
해완의 안에 깊게 묻힌 채 지금 그가 느끼고 있는 것은 쾌감이라는 말 따위로는 설명할 수가 없었다. 활짝 열린 몸으로 저를 받아 내는 해완이 주는 감각이 강현의 전부를 알알이 부수어 다시 조립하는 것만 같이 느껴졌다.
두 사람은 거의 틈 없이 바싹 끌어안은 채 흔들리고 움직이며 신음했다. 이마를 맞대고 서로가 주는 쾌감에 젖은 눈을 바라보며 입술을 핥고 혀를 섞었다. 마치 제 것이라도 되는 양 몸 구석구석을 만지고 입을 맞추며 함께 흔들리고 움직였다.
그렇게 강현이 허리를 거세게 몇 번 쳐올리던 어느 때, 해완은 경련하듯 숨을 몇 번 짧게 들이켜는가 싶더니 맞닿은 강현의 귀에 비명 같은 신음을 뱉으며 절정에 달했다. 맞닿은 땀에 젖은 복부 사이에서 미끄러지던 해완의 성기가 움찔거리며 액을 뱉어 내는 것이 적나라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강현 또한 해완의 안에 성기를 깊숙이 묻은 채로 그대로 사정했다.
온몸의 신경이 곤두서는 듯한 짜릿한 오르가슴의 가운데서도 강현은 해완의 몸에 더욱 깊게 묻히고 싶은 동물적인 충동을 이기지 못하고 헐떡이며 얕게 허리 짓을 했다.
절정의 여운이 가시기도 전에 강현은 흐릿한 눈으로 고개를 들어 해완을 바라보았다. 아직까지도 몸을 조금씩 떨고 있던 해완도 젖은 눈망울로 강현을 바라보았다.
해완의 눈과 깊이 연결된 순간 이제껏 그가 단 한 번도 느껴 보지 못한 이상한 격류가 전신에 해일처럼 몰아닥쳤다. 목구멍이 꽉 조여 오는 것과 동시에 눈이 화끈거리고 심장에서는 뜨거운 불덩어리가 치밀어 오르는 낯선 감각에 당황한 강현은 숨을 멈췄다.
마치 궁지에 몰린 짐승처럼, 강현은 곧바로 해완의 왼쪽 목덜미에 깊숙이 고개를 묻었다. 하지만 소용이 없었다. 언제나 마음을 안정시켜 주던 해완의 온기의 냄새는 오히려 강현이 지금 느끼고 있는 설명할 수 없는 무언가를 더욱 부추기는 것만 같아 그는 꽤 오래도록 고개를 들지 못했다.
그리고 그 탓에 강현은 제 어깨 너머로 빈 허공을 바라보던 해완의 눈이 우물처럼 깊어지는 것을, 미처 보지 못했다.
* * *
강현은 깊은 잠에 빠진 채 제 옆에 누워 있는 해완을 홀린 듯이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다.
벗은 팔다리가 어지럽게 엉켜 있었고 서로의 뜨거운 숨결이 피부에 바로 느껴질 정도로 가까이 누운 채였다. 그럼에도 강현은 눈을 깜박이는 것조차 잊을 정도로 해완이 가진 모든 선들을 집요하게 눈으로 따라 그리고 또 그렸다.
이렇게 누구보다 가까이 안고 있는데도 가끔 해완은 채도가 옅은 수채화처럼 물 한 방울에 번져 버릴 듯 연약하게 보였다.
그렇게 한없이 해완을 바라보는 사이 어제 그의 몸을 해일처럼 휩쓸었던 감정의 자취가 문득 떠올랐다.
강현은 가만히 입술을 깨물었다. 압도당했을 때는 무엇인지 알지 못했지만, 머리가 맑아진 지금은 그게 어떤 감정인지 아주 어렴풋하게나마 알 것 같았기 때문이었다.
그것은 강현이 잃어버린 지 가장 오래된 감정이기도 하고 단 한 번도 되찾기를 바란 적 없는 감정이기도 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제 더는 거절할 수 없으리라는 이상한 예감이 들었다.
스스로의 안으로 침잠하느라 흐려진 강현의 정신을 불현듯 눈 한구석에 걸린 반짝이는 무언가가 일깨웠다.
흠칫 고개를 든 그는 베개 사이에서 반짝이고 있는 자신의 핸드폰을 집어 들었다. 해완이 자고 있을 시간대에는 무음으로 지정해 둔 탓에 그의 잠을 깨우지 않아 다행이었다.
전화를 받지 않을 생각으로 집어 든 것이었지만 액정에 뜨는 병원 이식 센터의 번호를 본 강현의 눈이 넓어졌다.
만약 등록했던 페로몬샘 장기 이식 대기의 순번이 다가왔다는 연락이라면 시간 다툼이기 때문에 무조건 전화를 받아야 했다. 급히 몸을 일으킨 강현은 최대한 발소리를 죽여 침실 밖으로 나간 다음 통화 버튼을 눌렀다.
“여보세요?”
―네, 안녕하세요. 부영병원 장기 이식 센터 김연수 코디네이터입니다. 윤해완 님 보호자로 연락처 등록하신 여강현 님 맞으시죠?
“네. 제가 여강현입니다. 저한테 말씀하시면 돼요.”
그답지 않게 들뜬 목소리로 대답한 강현은 기대에 찬 표정으로 전화기 속에서 들려오는 코디네이터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그러나, 통화 내용을 들으면 들을수록, 강현의 얼굴이 무섭게 굳어 가기 시작했다.
* * *
잠에서 깨어날 때면 늘 그러는 것처럼, 해완은 한쪽 얼굴을 베개에 비비며 눈꺼풀을 움찔거렸다. 충혈된 눈으로 침대 옆에 앉아 그를 바라보고 있던 강현은 엄지손가락으로 부드러운 볼을 쓸어내리며 해완이 완전히 깨어나기를 인내심을 가지고 기다렸다.
이내 잠에 취한 연한 갈색빛의 눈동자가 강현을 향했다. 해완은 졸음을 쫓으려는 듯 긴 속눈썹을 몇 번 깜빡이더니 강현을 향해 희미하게 미소를 지었다.
“언제 일어났어…….?”
강현은 잠깐 입을 다물었다가, 몸을 숙여 그의 볼에 입을 맞추고는 나직하게 말했다.
“방금. 아침 먹자.”
해완은 입맛이 없는지 대답 대신 길게 하품을 했지만 약을 먹어야 하기 때문인지 얌전히 고개를 끄덕였다. 그런 그를 일으켜 세워 욕실로 들여보낸 강현은 거실로 나와 간단히 아침을 준비했다.
하지만 강현의 머릿속에 꽉 차 있는 것은 아까 들은 통화 내용뿐이었다. 엉망인 기분이 좀처럼 나아지질 않아 혹여 해완을 다그치게 되기라도 할까 이야기를 꺼내기를 미루고 있었지만, 해완이 씻고 나와 식탁 앞에 앉은 뒤에도 경직된 표정을 숨기는 건 도저히 불가능했다.
이내 해완은 이상기류를 감지한 듯 밥을 깨작이다가 아리송한 얼굴로 말을 건넸다.
“강현아. 어제 잘 못 잤어? 피곤해 보여.”
강현은 울컥 입술을 열었다가 순간적으로 자신을 통제하며 다시 입을 굳게 다물었다. 하지만 그 완고하게 닫힌 입술 안에 나오지 못한 말이 있다는 것을 예민하게 눈치챈 해완이 수저를 아예 내려놓고 걱정스러운 눈을 하며 재차 물었다.
“왜 그래? 혹시 무슨 일이라도…….”
“장기 이식 센터에서 연락 온 거, 나한테 왜 숨겼어?”
결국, 더는 참지 못하고 강현의 입에서 튀어나온 말에 해완의 얼굴이 희게 변했다. 동요를 감추지 못하는 커다란 눈동자에 강현은 또다시 속에서 불이 치미는 듯한 감정을 느꼈다.
강현에게 전화를 한 장기 이식 센터의 코디네이터는 조심스러운 목소리로 반년간 뇌사 상태에 빠져 있던 어느 환자의 가족이 한 달 이내로 연명 치료를 중단하고 이후 장기 이식을 진행하기로 결정했다며, 이식 의향이 있으면 최대한 빠른 시일 내에 적합도 검사를 받기를 바란다는 의견을 전했다.
문제는, 코디네이터가 이미 나흘 전 해완과 이에 관해 통화를 했고 생각해 보겠다며 전화를 끊은 해완이 그 이후로 연락을 받지조차 않았다는 것이었다.
그 이야기를 들었을 때의 당혹스러움이 여태껏 생생해서 강현은 격양된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까지 연락을 받지 않았으면 순서가 넘어갈 수도 있었어. 대체 무슨 생각으로 그런 거야?”
아무 말 없이 고개를 숙이고 있던 해완이 문득 시선을 올렸다. 동요가 분명하던 눈빛이 어느새 깊게 가라앉아 있었다.
이내 해완은 마른 입술을 달싹이며 고요한 목소리로 말했다.
“받고 싶지 않아, 수술.”
“뭐?”
“아직 완전히 망가진 것도 아닌데 그렇게 쉽게 포기하고 싶지 않아.”
전화를 받고 해완이 깨어나기를 기다리는 짧은 시간 동안 가정했던 수없는 시나리오 중에서 그가 가장 듣고 싶지 않았던 말이었다.
“왜?”
“…….”
“만성 거부 반응이 일어난 이상 이미 돌이킬 수 없는 일이란 거 알잖아. 그런데도 몸을 망쳐 가면서까지 그 페로몬샘을 붙들고 싶어 하는 이유가 뭐냐고.”
혼란을 감추기 위해 내뱉은 목소리는 불필요할 정도로 서늘하게 들렸다. 하지만 얼마 전부터 마음을 짓누르고 있던 불안감이 스스로의 감정을 제어하기 어렵게 만들고 있었다.
그것은, 해완이 재이식을 꺼려 하는 이유가 페로몬샘이 윤해언이 남긴 마지막 유산이기 때문일지 모른다는 불안이었다.
윤해언이 해완에게 비정상적으로 집착했다는 사실은 이미 충분히 알고 있었지만 해완에게 그가 어떤 존재인지에 대해서 강현은 정확히는 알지 못했다. 해완의 입으로 그에 대한 생각을 들을 기회는 가질 수가 없었기 때문이었다.
두 사람 사이에 침묵이 흘렀다. 해완은 꽤 긴 시간 동안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그저 불확실한 시선으로 테이블 어딘가를 바라보고 있었다.
저를 향하지 않은 그 눈길에 윤해언에 대한 그리움이 서려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을 하자마자 통제할 수 없는 질투심이 전신에 독처럼 퍼져 갔다.
“날 설득할 수 있는 이유가 없으면 수술 받아.”
“…….”
“지금 병원에 전화해서 적합도 검사 예약 잡을게. 내일이나 모레 중으로 하게 될 거야.”
강현은 대답을 기다리지도 않고 몸을 일으켰다. 솔직히 지금 같아서는 해완을 강제로 끌고 가서라도 저 지긋지긋한 페로몬샘을 떼어 내 쓰레기통에 처박고 싶었다.
그렇게 강현이 뒤돌아섰을 때 사라질 듯 희미한 목소리가 귓가에 와 닿았다.
“……이 향이 없어지면 네가 해언이를 기억할 수가 없잖아.”
순간, 이해할 수 없는 말에 몸이 뻣뻣하게 굳었다. 한동안 허공을 향해 멈춰 서 있던 강현은 느리게 뒤돌아서 해완을 바라보았다.
어느덧 저를 향하고 있던 해완의 시선이 강현의 충격받은 얼굴을 향했다. 굳어 버린 표정의 이유를 오독했는지, 하얀 얼굴은 삽시간에 구름이 끼어 어두워졌다.
“괜찮아, 강현아. 해언이 그리워해도 돼.”
온 힘을 다해 태연을 가장해 보았으나 형편없이 떨리는 목소리였다. 어느새 눈시울까지 달아오르기 시작한 해완은 그런 제가 당혹스러운 듯 눈가를 손가락 끝으로 꾹꾹 누르며 애써 침착한 목소리로 말을 끝냈다.
“나는 네가…… 네 곁에 남아 있을 수 있게 해 준 것만으로도 만족해.”
“…….”
“그러니까…… 나한테서 해언이를 찾아도 돼.”
하나부터 열까지, 무엇 하나 말이 되는 구석이 없는 이야기였다.
하지만 해완이 그런 황당하기 그지없는 이야기를 하고 있는데도 강현이 바보처럼 그를 바라보고만 서 있던 건, 지금 해완의 기억이 머물고 있는 시점을 잘 알고 있기 때문이었다.
지금의 해완은 아무것도 몰랐다.
윤해언을 잊지 못해 8년이나 기다렸다는 강현의 말이 새빨간 거짓말이었다는 것도, 그가 윤해언에게 원한 건 오로지 그의 향뿐이라는 것도, 해완이 강현에게 저를 해언이라고 속이며 연인으로서 함께 지냈다고 생각한 모든 시간들 동안, 사실 강현은 그가 누구인지 알고 있었다는 것도, 해완은 그 모든 것을 전부 알지 못했다.
그러니, 지금 강현이 ‘윤해언’의 자취를 원해 그를 옆에 두고 있다고 혼자만의 결론을 내린 것도 이상한 일은 아니었다.
아연한 기분에 강현은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해완을 하염없이 응시하기만 했다. 그러자 해완은 저를 바라보는 눈을 견디기 힘들다는 것처럼 고개를 푹 숙이고 제 손끝에 시선을 고정시켰다.
마치 눈앞에서 잘못을 들킨 사람처럼, 참담하고 죄스러운 얼굴을 한 채였다.
그제야 겨우 갑자기 이유도 모른 채 마음에 깊이 가라앉아 있던 몇몇 장면들이 불쑥 표면 위로 솟아올랐다.
지나치게 길어진 씻는 시간, 제게서 나는 냄새에 대해 묻던 질문들, 몸에 바를 향이 나는 제품들에 갑자기 신경을 쓰기 시작한 모습과, 그리고 또…….
‘여강현은 형을 좋아하는 거 같아?’
유준의 그 질문에, 끝내 고개 한번 끄덕이지 못하던 모습까지.
뱃속 깊은 곳에서 불덩어리가 치미는 듯한 느낌에 강현은 손톱이 살갗에 파고들 정도로 온 힘을 다해 주먹을 쥐었다.
어젯밤도 그래서였을까?
강현이 자해한 상처가 해완이 해언이 아니라는 사실을 알게 된 충격 때문이라 여겨서, 강현에게 보상이라도 해 주듯 윤해언의 향을 품은 제 몸을 내어 준 것이었을까?
그런 생각을 한 순간, 이미 오래전부터 인정하고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일그러진 두려움에 목구멍 깊숙이 억누르기만 했던 말이 폭발하듯 튀어나왔다.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
“…….”
“내가 유일하게 사랑할 수 있었던 건, 윤해완 너뿐이라고.”
제 입으로 뱉어 놓고도, 강현은 믿지 못하겠다는 듯 눈을 크게 떴다.
그러나 이전처럼 그 말이 진짜가 아닌 것처럼 들릴까 두려워서는 아니었다. 오히려 지금 강현의 마음을 채우는 것은 그의 흐린 안개와도 같았던 삶에서 느꼈던 그 어떤 감정보다도 선명한 확신이었다.
목이 메고 심장이 격렬하게 쿵쾅거렸다. 그의 인생 전부를 통틀어 지독하게 의심하고 억압해 온 사랑이라는 단어를 겨우 소리 내어 말할 수 있게 되었다는 해방감이 전신을 휩쓸었다. 어린애 같은 흥분에 가득 찬 강현은 떨리는 시선으로 해완을 바라보았다.
그런데 뭔가 이상했다.
당연히 기뻐할 것이라, 지금 저처럼 벅찬 감정을 느낄 것이라 생각했으나 강현이 눈에 담은 해완의 얼굴은 전혀 다른 빛을 띠고 있었다.
백지장같이 공허한 표정으로 강현을 바라보던 해완은 그와 눈이 마주치자마자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뜨릴 듯 얼굴을 일그러트리더니, 두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그렇게 두 눈을 가리고 있던 해완의 입에서 괴로운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그럴 필요 없어. 강현아.”
“…….”
“말했잖아. 나는 네가 날 용서해 준 것만으로 괜찮다고.”
전혀 예상치 못한 반응에 싸늘한 무언가가 마음을 거칠게 움켜쥐었다. 실망감과 의문, 그리고 배신감과 불안 같은 격렬한 감정들이 엉망으로 뒤섞여 강현의 손발을 잡아 묶었다.
그러나 곧, 성큼 걸음을 옮긴 강현은 의자에 앉아 있는 해완의 밑에 무릎을 꿇고 앉았다. 그때까지 얼굴을 가리고 있던 마른 손목을 잡아끌어 내리고 저를 바라보려 하지 않는 해완의 붉어진 눈과 어떻게든 시선을 맞춰 보려 애쓰며 절박하게 입을 열었다.
“왜, 왜 그렇게 말하는 거야?”
“…….”
“사랑한다고 했잖아. 내가 사랑하는 건 너라고.”
그런데 왜 나를 믿지 못하는 거냐고.
그렇게 말하려던 순간, 뒤통수를 강한 충격이 가해진 것처럼 고통스러운 깨달음이 강현의 전신을 삽시간에 점령했다.
해완은 강현의 말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었다. 그가 믿지 못하는 것은 강현에게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다는 사실 그 자체였다.
그리고 그 불신은 강현이 스스로의 손으로, 해완의 상처를 억지로 벌리고 헤집어 가며 심고 싹을 틔운 것이었다.
강현은 사랑한다고 속삭이면서도 그 말을 되돌려 받기는 원하지 않던 해완의 목소리를 떠올렸다.
강현에게 기만당한 것을 뻔히 알면서도 스스로의 과오를 먼저 고백하고, 용서를 청하고서는 왜 그랬는지 이유만 들려 달라고 애원하던 어느 밤의 기억 또한 떠올렸다.
그런데도, 해완이 유일하게 간절히 바랐던 답 하나를 주지 못해 그를 망가뜨린 주제에, 기억을 잃은 해완을 되찾았을 때 강현의 머리를 꽉 채운 것은 다시 시작할 수 있으리란 헛된 희망과 추한 욕심뿐이었다.
그가 제 입으로 진실을 고백했다고, 강현이 해완의 거짓을 용서했다고 생각하게 만들면 마치 순교자라도 된 양 해완을 영원히 가질 수 있으리라 멋대로 여기기까지 했다.
그렇게 옆에 둔 해완이 어떤 마음일지에 대해서 강현은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생각해 봐야 한다는 것조차 알지 못했다.
하지만 제가 완벽하다고 믿었던 그림 안에 얽매인 해완이 진짜 어떤 모습을 하고 있는지, 강현은 지금 이 순간 처음으로 직시하고 있었다.
이대로 강현의 곁에서 사는 한, 해완은 평생 자신을 미워하게 될 것이다.
허상인 죄책감에 얽매여, 스스로가 이용당하고 있다는 것조차 모른 채, 강현이 주는 사랑을 믿지 못하는 게 아니라 자신이 사랑받을 수 있는 존재인지를 믿지 못하고 살게 될 것이다.
불현듯, 눈앞에 있는 해완의 얼굴이 온통 뿌옇게 흐려졌다.
일순 강현은 다시 시력을 잃어 가고 있다는 착각을 일으켰으나 눈꺼풀을 한 번 깜박이자 세상은 갑자기 다시 또렷해졌다.
기묘하게도 눈꺼풀을 깜빡이는 순간마다 그런 일이 반복됐다. 장막을 씌운 듯 세상이 흐려졌다가, 깨끗해졌다가, 다시 흐려졌다.
그와 동시에, 왜인지 볼이 축축하게 젖어 들어가는 느낌이 들었다. 멍하니 손을 들어 제 얼굴을 만지자, 마른 손가락에 물기가 맺혀 났다.
그 젖은 손끝을 보고서야 강현은 자신이 울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자신이 왜 우는지도 몰랐다. 그저 지금 강현이 느끼는 감정은 언제 마지막으로 흘렸는지 기억조차 나지 않는 눈물에 대한 당혹스러움뿐이었다.
강현은 어설프게 들어 올린 손으로 눈물을 채 닦지도 못하고 고개를 숙였다.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두 눈에서 흘러내리는 뜨거운 눈물이 바닥으로 툭툭 떨어져 내렸다.
“……강현아…….”
해완이 엉망으로 흔들리는 목소리로 제 이름을 불렀다. 두 손으로 강현의 얼굴을 감싸 올린 해완은 떨리는 손가락으로 강현의 눈 밑을 문질러 닦았다.
그래도 눈물은 멈추지 않았다. 해완의 피부 안으로 자꾸 스며들기만 했다. 그렇게 스민 눈물이 해완의 것이라도 된 모양인지, 그의 커다란 눈에는 쉽게도 눈물이 고였다.
그것을 본 순간, 이번에는 입이 제멋대로 움직였다. 강현은 쉰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나는 널 용서하지 않았어.”
그 말에, 질리지도 않고 강현의 눈물을 훔쳐 주던 해완의 손이 얼어붙었다. 그럼에도 강현은 또다시 입을 열었다. 눈을 깜빡일 때마다 흘러내리는 스스로의 눈물이 입술을 적시며 흘러내렸다. 제 입에서 나오는 목소리가 제 것 같지가 않게 낯설었다.
“널 용서할 자격이 없어서 할 수 없었어.”
“…….”
“왜냐면, 너는 날 단 한 번도 속인 적이 없으니까.”
해완은 세상에서 가장 이해할 수 없는 소리를 들은 사람처럼 강현을 바라보았다. 입술을 몇 번 여닫던 그는 얼떨떨하게 말했다.
“지금…… 무슨 소릴 하는 거야?”
“네가 윤해언이 아니라는 걸 내가 일찍부터 알고 있었다는 거야.”
“…….”
“그 버스 정류장에 가기 전부터 알고 있었어. 그런데 모른 척하고 네가 그렇게 말하도록 널 몰아갔어. 윤해언의 향을 가진 너를 편하게 옆에 두고 싶었으니까.”
“…….”
“그 사실을 알게 된 네가 나한테서 도망쳤고, 내가 널 찾았을 때 너는 그 일에 대해선 아무 기억도 하지 못했고, 그래서 난…….”
강현은 깊게 숨을 들이쉬었다. 그는 눈을 질끈 감은 채 고해 성사를 하듯 괴롭게 남은 말을 토해 냈다.
“너한테 또다시 거짓말을 했어.”
강현이 이야기하고자 하는 바는 명확했으나 좀처럼 받아들여지지가 않아서, 해완은 혼이 빠진 사람처럼 창백한 얼굴을 하고 손끝 하나 까딱하지를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지나면 지날수록 강현이 말에 담긴 의미가, 그가 고백한 진실이 결국은 마음 안에 스며들었다.
그리고 그것이 열쇠라도 된 것처럼, 머릿속 깊은 곳에 접혀 있던 어떤 기억 하나가 불쑥 솟아올랐다.
‘어떤 사람이 해언이랑 네 어릴 때 사진을 큰돈을 주고 사 가겠다고 했다더구나.’
뇌리를 스쳐 가는 목소리에 해완은 제 손을 붙든 강현을 거칠게 밀쳐 내며 몸을 벌떡 일으켰다. 휘청 뒤로 밀쳐진 강현이 저를 향해 손을 뻗는 것을 알면서도 서재를 향해 비틀거리며 걸어갔다.
벌벌 떨며 서재에 들어선 해완은 곧바로 책상으로 향해 맨 위 서랍을 열어젖혔다. 파편처럼 떠오르는 기억과는 달리 그 안은 텅 비어 있었지만, 해완이 직접 부수었던 책상 바닥은 그의 기억 속의 모습처럼 여전히 수리되지 않은 채 남아 있었다.
그 균열을 비집고 떨어지던 저와 해언의 사진들처럼, 해완이 머릿속에 스스로 세운 장벽 틈으로 가려 두었던 기억들이 팔랑거리며 쏟아져 내렸다.
‘나를 절대 싫어하지 않겠다고 약속했잖아!’
‘내가 잘못했어, 해완아, 제발 용서해 줘.’
‘보고 있는 대로 변호사예요, 나. 해언이의 유언 집행인이기도 하고.’
‘미국에 있을 때, 해언이 심장 이식 수술 받을 기회 있었어요. 그런데 거부했어요. 자기가 죽지 않으면 당신 곁에 돌아갈 수 없을 거라고 생각했거든.’
‘강현아. 가지 마! 너는 이러면 안 되잖아! 너만은 나한테 이러면 안 되잖아!’
또 그랬구나.
내가 또 도망친 거야.
앞을 다투며 나오는 기억들에 주체할 수 없이 흐르는 눈물을 머금고 해완이 자조적인 웃음을 터트렸다.
이상하다는 것을 알아야 했다. 제가 용서를 빌고 강현이 그것을 받아 줬다는 중요한 기억만 텅 비어 있는 이유에 대해서 의심조차 하지 않은 스스로가 한심하기 그지없었다.
아니, 어쩌면 의심하고 싶지 않았는지도 모른다. 강현이 자신을 용서해 준 것에 벅차 그저 안주하고 싶었을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은 어리석었을지언정 누군가를 속이는 일은 아니었다.
지금 여기, 존재하지 않는 사실을 믿게 만든 사람은 따로 있었다.
해완은 고개를 들어 문가에 서 있는 강현의 얼굴을 쏟아지는 눈물 속에서 바라보았다.
해완이 모든 사실을 알았던 그때도, 자신은 이렇게 책상 근처에, 강현은 저 문 앞에서 저를 바라보고 서 있었다.
그러나 어떻게든 변명을 주워섬기고 부질없는 설득을 강요하려 하던 당시와는 달리 그는 어떤 말도 없이 그저 해완을 바라보기만 했다.
그때는 조금도 비치지 않았던, 눈물을 흘리고 선 채였다.
“……미안해, 해완아.”
강현이 깊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내뱉은 말을 듣는 순간, 그가 저를 한 번 더 속였다는 현실이 실감이 나는 것과 동시에 숨이 막혀 왔다.
갑자기 빙글 도는 세상에 해완의 몸이 휘청 옆으로 기울었다. 하지만 곧바로 달려온 단단하고 따뜻한 몸이 곧바로 그를 지지해 부축하며 함께 무너져 내렸다.
고개를 숙이고 머리칼을 움켜쥐고 우는 해완의 몸을 강현이 끌어당겨 안았다. 그가 제 몸을 감싸 안으며 무엇인가를 연신 속삭이고 애원하는 소리가 들렸지만 머리를 종횡하는 고통 때문에 쉽사리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스스로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지나치게 선명해진 기억의 단면들이 무서운 속도로 튀어 올랐다. 그렇게 마구잡이로 휘달린 기억이 낡은 모텔방에서 혼자 보낸 시간들까지 다다랐을 때, 속이 메스꺼워진 해완은 허리를 숙이며 헛구역질을 하다가, 시야가 핑 도는 것을 느꼈다.
그 모든 것을 견디지 못하고 해완은 눈을 감았다. 어둠의 장막이 금세 의식을 가렸다.
* * *
허름한 모텔방에서는 퀴퀴한 침구와 벽지가 머금은 낡은 세월의 냄새가 났다.
어두운 방 안 유일한 불빛이라곤 무의미하게 틀어진 TV에서 흐르는 것뿐이었지만 반쯤 홉뜨고 있는 해완의 눈은 그 어지럽게 명멸하는 불빛을 향해 있으면서도 무엇도 담고 있지 않았다.
가벼운 기침으로 시작한 감기는 금세 병세가 지독해졌다. 이틀 전 반쯤 희미한 정신으로 겨우 다녀온 약국에서 사 온 해열제는 몸의 고통을 덜어 주는 데 별다른 역할을 하지 못했다. 피부에 닿는 모든 게 고통스럽고 이불이 젖을 정도로 땀이 흐르는 것이 위험할 정도로 열이 오르고 있는 모양이었지만 해완은 더는 저항하지 않았다. 그저 너무 지쳤다는 생각만 들었다.
그렇게 열에 들떠 시간이 흐르는 사이 해완은 몽롱한 의식 사이에서 꿈과 현실의 경계를 내내 헤맸다. 눈을 감았다 뜨면 보육원이기도, 그가 오래 일했던 레스토랑이기도, 강현의 아름다운 작업실 안이기도 했고, 그가 누워 있는 모텔방 안에 늦은 밤 항상 해완을 위로해 주던 좋아하는 카페의 빛나는 간판이 걸려 있는 환상을 보기도 했다.
물론 다양한 사람들의 꿈도 꿨다. 가끔은 아주 어린 해언과 흙장난을 치는 꿈을 꾸기도 했고, 초등학생 유준의 목말을 태워 주는 꿈도 꾸었다. 넘어져 울고 있는 저를 일으켜 세워 준 원장 선생님이 다른 아이들 몰래 사탕을 쥐여 주는 꿈을 꿨을 때는 그게 어찌나 생생한지 눈을 뜨고 나서도 그것을 찾아 주위를 더듬을 때도 있었다.
어젯밤에는 심지어 그를 버린 부모까지 꿈에 나왔다. 다른 사람들과 달리 그들은 어떤 기억을 떠올리게 만든다기보다 해완이 앓고 있는 침대 한구석에 등을 보이고 앉아 있었는데, 그 뒷모습마저도 어찌나 낯선지 해완은 꿈이라는 것을 금방 인지하고는 얼굴도 모르는 부모의 꿈을 어떻게 꾸냐고 그 스스로를 비웃기까지 했다.
그리고, 해완이 가장 원하되 원하지 않는 꿈도 있었다. 바로 강현에 대한 꿈이었다.
그를 떠나기 마지막 날 밤 저를 꼭 끌어안은 강현이 외국 어디론가 함께 떠나고 싶다고 속삭이는 목소리를 해완은 사실 전부 듣고 있었다.
그러나 그 달콤한 말들이 가슴 깊은 곳에 불러일으키는 건 오직 매일같이 그를 죽이고 있는 끔찍한 공허함뿐이었다.
해완은 강현을 속였고, 강현은 해완을 속였다.
마지막 희망을 가지고 그토록 애원했음에도 불구하고 강현은 해완이 유일하게 바랐던 대답을 건네주는 것조차 거부했다.
그렇다면 우리 사이에 존재하는 것 중에 진실한 게 단 하나라도 있는 걸까?
나 스스로 채워 온 너를 향한 사랑이 거짓이라면, 그렇게 비워진 빈자리를 어떻게 끌어안고 살아야 하는 걸까.
그런 의심들을 안고서, 강현의 옆에 있을 수 있을 리가 없었다.
그래서 해완은 강현을 떠나온 것을 단 한 번도 후회하지 않았다. 쇠약해진 몸으로 멀리 이동하는 게 불가능했기 때문에 이 낡은 모텔에 처박혀 말라 죽어 가는 날만 기다리는 듯한 편집증에 시달릴 때도 강현에게 돌아갈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완은 그간 그의 인생에서 가지리라 생각해 본 적 없는 불같은 증오를 느낄 때도 있었다. 해언이 제게 한 짓을 모두 떠올리고 나서도 가져 본 적 없는 강도의 분노였고 이성의 영역으로는 설명이 되지 않는 것이었다.
사랑했던 만큼 미웠고 기대하고 의지하고 희망을 가졌던 만큼 용서가 되지 않았다. 그래서 해완은 강현이 떠오를 때마다 그가 미워서 울었다.
물론, 꿈속에서도 그럴 수 있었다면 좋았을 것이다.
꿈에 강현이 나올 때마다, 직접적으로 나오지 않더라도 향수 작업실이나 보리같이 그와 연관된 작은 흔적들이 꿈결에 언뜻 비칠 때마다 해완은 강현이 보고 싶어 어린애처럼 울었다. 그리움을 견딜 수 없어서, 깨어나고서 한참을 가슴팍을 움켜쥐고 쉰 목소리로 흐느껴 울어야만 했다.
그것은 침대에서 욕실까지 향하는 그 몇 발자국을 버티지 못하고 쓰러져 버린 그 순간에도 마찬가지였다.
차갑고 어두운 모텔 화장실 바닥에 널브러진 채 해완은 간헐적으로 약한 경련을 일으켰다. 그런데 이상했다. 실이 끊긴 인형처럼 자신의 몸을 전혀 통제할 수 없는 끔찍한 무력감과 동시에, 지금껏 지고 있던 모든 무거운 짐에서 해방된 듯한 극도의 자유로움이 함께 찾아왔다.
소금기가 어린 축축한 바람이 해완의 볼을 스쳤다. 갑자기 내리쬐는 눈부신 햇빛에 어리둥절해진 그는 고개를 들어 새파란 가을 하늘을 비추고 있는 해를 올려다보았다.
한쪽 발로 타고 있던 자전거를 지탱하며 하얀 교복 소매로 이마에 밴 땀을 훔쳐 낸 해완은 짙고 푸른 바다를 바라보며 바다 내음과 섞인 가을 냄새를 만끽했다.
그리고 해완이 문득 뒤를 돌아보았을 때, 그의 눈에 들어온 것은 조금씩 단풍이 들기 시작한 거목 아래 앉아 있는 강현의 모습이었다.
강현 또한 해완을 발견하더니 그를 향해 크게 손을 흔들었다. 그는 눈이 멀지도, 외롭지도 않았으며 해완을 향해 미소 짓고 있었다.
네가 나를 다시 만나기 위해 와 준 거구나.
그런 생각에 마음이 벅차, 해완은 눈물까지 글썽이는 채 활짝 웃으며 마주 손을 흔들었다.
바로 그것이, 패혈증으로 인한 혼수상태로 빠지기 전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던 환상이었다.
* * *
해완이 불현듯 잠에서 깨어났을 때, 그의 귀에 가장 먼저 들려온 것은 강현의 메마르고 갈라진 목소리였다.
암막 커튼이 쳐진 방 안은 그가 지냈던 오래된 모텔방처럼 시간을 가늠할 수 없었지만 그때와는 달리 해완은 자신이 이 침대에 누운 이후 얼추 세 번의 밤이 흘렀다는 것 정도는 알고 있었다.
그간 해완은 물도 밥도 거부한 채 그저 이 침대 한구석에 모로 웅크려 있기만 했다. 그가 완전히 기억을 되찾은 첫날 강현이 하는 말이라고는 미안하다는 사과뿐이었으나, 해완의 침묵시위가 길어질수록 제발 물 한 모금이라도 마셔 달라고 눈물 섞인 애원을 하거나 들쳐 업고서라도 병원에 끌고 가겠다는 협박 어린 말들을 반복하기 시작했다.
건강이 괜찮았다면 좀 더 버텼겠지만 아직 성치 않은 몸은 물 한 방울 마시지 않은 채 하루가 지나가자 금방 탈수 증세를 보였다. 그것을 예민하게 눈치챈 강현은 해완이 기절하듯이 잠든 사이 수액을 맞히려고 시도했는데, 금세 깨어난 해완이 막무가내로 바늘을 잡아채는 바람에 피만 보고 실패에 그쳤다.
그럼에도 가만있을 수는 없었는지 그는 또다시 해완이 잠든 사이 입에 조금씩 물을 흘려 넣거나 작은 얼음 조각을 밀어 넣기를 반복했다. 그러나 그마저도 해완이 그것을 알아차리자마자 격렬하게 헛구역질을 하며 위액까지 토해 버리는 바람에 말짱 도루묵이 되었다.
이 지루한 교착 상태에서 강현 또한 먹지도 마시지도 않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음에도 해완은 아무렇지도 않았다.
그가 저를 또 한 번 속였다는 사실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제 몸을 무기 삼아서라도 벌을 주고 싶을 만큼 강현이 미웠다.
그런 해완의 끔찍한 마음을 알아차리기라도 한 것인지 강현은 어제 오후부터 갑자기 모든 시도를 멈추어 버렸다. 약간의 거리를 두고 누운 그는 무엇을 하는지 모르게 입을 다물고 몇 시간 내내 해완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보고만 있었다.
그리고 강현이 뜬금없이 이야기를 시작한 것은, 해완이 멍한 머리로 이제 너도 나에게 질려 버렸나 보다, 하고 생각하던 어느 순간이었다.
해완에게 전하는 사죄도, 제발 뭐라도 마시라거나 병원에 데려가겠다는 애원이나 협박도 아니었다. 그것은 그저 두서없고 뜻을 알 수 없는 혼자만의 이야기였다.
그 이야기의 시작은 강현이 어릴 때 들은 이해할 수 없는 할아버지의 목소리부터였다.
강현의 ‘첫 번째’ 보리가 죽은 이후 그가 보인 반응을 두고 할아버지는 사람의 거죽을 뒤집어썼다고 다 사람은 아니라며, 사람 노릇을 해야 사람인 것이라 말했다고 했다.
물론 그때는 무슨 뜻인지 전혀 이해하지 못했지만 엄마가 죽은 이후에는 그 의미를 이해하게 됐다고도 했다.
그렇게 시작된 강현의 이야기는 제멋대로였다. 그는 때로는 향을 시험하고 싶어 만났던 사람들의 이야기를 하기도 했고, 갑자기 어린 시절로 돌아가 엄마가 제게 제안했던 다른 사람들의 표정을 따라 하는 놀이에 대한 이야기를 하다가 더욱 과거로 돌아가 어머니가 심하게 울던 강현을 어두운 옷장에 넣기 시작한 일을 이야기했다.
그것은 며칠 동안이나 옷장 속에서 나오지 못했던 일과, 그 어둠 안에 갇힌 채 모든 ‘감정’이 희미해지던 순간들에 대해서, 그리고 신기하게도 그 이후부터 다시는 울지 않게 되었다는 이야기까지 이어졌다.
거기까지 듣고서 해완은 스르르 잠이 들었다. 그리고 문득 눈을 떴을 때 강현은 여전히 해완의 등 뒤에서 이야기를 하고 있었다.
해완은 아주 잠깐 제가 눈을 감았다 뜬 것 같은 착각을 일으켰지만 잔뜩 쉬어 버린 강현의 목소리와 암막 커튼 사이로 희미하게 스며드는 새벽빛이 그가 몇 시간째 혼자 떠들고 있었음을 알려 주었다.
이번에 해완은 그가 진단받았다는 ‘감정 표현 불능증’에 대해 들었고, 그것이 시력 상실을 불러온 신체화 장애의 원인이었다는 사실도 처음으로 알게 되었다.
거기까지 듣고 해완은 또 잠이 들었다. 그런데 깨어나고 나자 여전히 강현의 목소리가 들렸다. 그는 이미 들은 바 있는 첫 번째 보리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 있었는데, 해완은 강현이 그가 잠든 사이에 마친 이야기를 처음부터 다시 시작하고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 깨달음 위로 언젠가 절규하듯 내뱉었던 저 자신의 목소리가 스며들었다.
‘네가 날 단 한 순간도 사랑하지 않았어도 괜찮아. 그냥, 그냥 뭐라도 좋으니까 왜 그랬는지 듣고 싶어. 너를…… 이해하고 싶어.’
아마도 그때 주지 않았던 답을, 이제 주고 싶은 생각이 들었던 모양이었다.
그러나 해완의 마음속에 울려 퍼지는 것은 왜 이제 와서, 라는 냉소적인 목소리뿐이었다. 모든 일에는 때가 있는 법이었다. 이렇게 늦게, 모든 것이 다 망쳐진 다음에 주는 답이 무슨 소용이냐는 생각만 들었다.
하지만 강현은 이야기를 멈추지 않았고, 해완에게는 그만하라고 말할 힘이 없었다. 그렇게 또다시 시간이 흘렀다.
그의 이야기는 아까와 완전히 똑같지는 않았다. 자신의 인생을 책처럼 정리해 간추리고 사는 사람이 아닌 이상 당연한 일일지 몰랐다.
이번에 첫 번째 보리의 이야기를 끝낸 그는 할아버지의 사람 거죽에 대한 이야기를 건너뛰고 두 번째, 세 번째, 그리고 지금의 보리의 이야기로 옮겨 갔다. 세 번째 보리의 안락사를 그 자리에서 받아들여서 병원 사람들의 따가운 시선을 받아야 했다는 것과, 그래서 병원을 옮길 수밖에 없었지만 아직까지도 자신이 무엇을 잘못했는지 이해할 수 없다는 이야기를 말하면서도 강현의 태도는 무덤덤했다.
사실 대부분의 이야기가 그랬다. 객관적으로 들어도 평온할 수 없을 것 같은 이야기를 하면서도 강현의 어조는 사실만을 진술하듯 높낮이가 없었다.
그럼에도 오랜 시간 이야기를 지속한 탓인지 목에서는 쉬고 갈라지다 못해 가끔 바람 빠지는 소리까지 났다. 물론 장시간 떠들어 댄 탓만은 아니었다. 해완이 물과 밥을 거부하는 동안 강현 또한 그 무엇도 입에 대지 않았기 때문일 것이었다.
그 힘겨운 목소리를 들으면서도 해완은 강현에게 그만하라고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 그런 스스로가 모순적이라는 걸 알면서도 왜인지 입을 다물고 있었다.
그러나, 몇 문장을 이어 말하던 것이 한 문장으로 줄고, 그 한 문장마저 목소리가 제대로 나오지 않아 분절된 단어로 끊어 말하는 것이 이어지던 어느 순간, 해완은 결국 불쑥 입을 열었다.
“……목말라.”
물 한 모금 마시지 않은 채 내내 입을 다물고 있었던 해완의 목소리 또한 지독하게 가라앉아 있었으나 강현은 튕겨 오르듯이 몸을 벌떡 일으켜 탁자 위에 올려 두었던 생수병을 집어 들었다.
해완은 강현이 떨리는 손으로 제 몸을 일으켜 세워 주는 것을 거부하지 않았다. 생수병을 넘겨주는 대신 제 입에 대고 먹여 주려 하는 것도 받아들였다. 다만 한 모금 정도로 입 안을 축인 후에 칼같이 고개를 돌려 버렸는데, 어떻게든 더 먹여 볼 수 없을까 하는 기색이 강현의 얼굴에 빠르게 스치는 것을 무시하고 낮게 말했다.
“너도 마셔.”
그 말에 강현의 바싹 말라붙은 입이 벌어졌다. 그는 제 손에 들린 생수병과 해완의 얼굴을 번갈아 보더니, 마지못한 얼굴로 딱 해완이 마신 만큼 물을 삼켰다.
목을 축이는 정도면 됐겠지 싶어 해완은 다시 미련 없이 돌아누웠다. 뜻 모를 행동에 강현이 잠시 당황해하는 것이 느껴졌지만 해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잠시 후, 아까처럼 해완의 등 뒤에 누운 강현은 다시 이야기를 시작했다. 이번에 해완은 숨을 죽였지만 잠에 들지는 않았다.
다음으로 강현이 꺼낸 이야기는 그 마을, 그리고 해언에 관한 것이었다. 해언의 향을 처음 맡았을 때 어떤 충격을 느꼈는지, 폭주하듯이 날뛰며 저를 괴롭히던 감각이 그 안정된 향 안에서 어떻게 평온을 찾았는지에 대해서 말해 주었다.
또 그다음은 해언과 마지막으로 만났을 때의 일이었다. 해언이 사람들의 감정을 따라 하는 강현에 대해 간파했다는 것과 그가 남긴 편지가 강현에게 어떤 생각을 하게 만들었는지 대한 이야기였다.
어쩌면 제가 윤해언을 좋아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었지만, 해언의 죽음을 알고도 아무렇지도 않았기에 그것이 얼마나 멍청한 추측이었는지 깨달았다는 이야기까지 하고 나서 강현은 갑작스럽게 입을 다물었다.
이번에 침묵은 꽤나 길었다. 불규칙한 숨소리 때문에 잠이 들지 않았다는 것은 알고 있었으나 지쳤나 보다 생각할 즈음, 강현은 불쑥 다시 입을 열었다.
그리고 그는 해완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했다.
녹음된 것처럼 줄줄 내뱉던 이전의 말들과는 달리, 이번에 강현은 오래도록 쉬어 가고, 내뱉기를 망설이고, 단어를 몇 번씩 바꾸거나 말을 더듬기도 했으며, 목소리는 쉽게도 고조되었다가 어렵게 낮아지며 이야기를 끌어갔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들로 힘겹게 이어지는 말들은 때로 해완 혹은 저 자신에게 던지는 문답같이 들리기도 했으나 그 모든 것이 지독하게도 솔직하다는 점만은 같았다.
해완을 처음 봤을 때는 오로지 해언의 향에만 정신이 팔려 있어서 별다른 인상이 남지 않았다는 것도, 해완이 어디까지 받아들여 줄 수 있는지 시험하기 위해 일부러 그를 헛걸음시키고 먼 곳까지 데려가서 소외감을 느끼도록 조작했다는 것도, 해완이 처음으로 저를 속였을 때는 오히려 쉽게 이용할 수 있어 기껍게 느꼈다는 것도, 해완을 옆에 두기 위해 그에게 죄책감을 지우려고 마음먹었던 것도 그 무엇 하나 감추거나 숨길 생각이 없어 보였다.
그럼에도 강현이 무엇보다 가장 하기 힘들어했던 이야기는, 지금 입으로 내뱉는 수많은 말들을 꺼내기까지 얼마나 두려웠는지에 대해서였고, 그 불안은 언젠가 해완의 입으로 강현에게 설명했던 그 자신의 감정과 무섭도록 닮아 있었다.
그것을 느낀 순간, 해완의 눈에서 조용히 눈물이 흘러내렸다.
말라비틀어져 어디론가 다 증발해 버린 줄만 알고 있었는데 도대체 어디서 새어 나온 것인지 모를 일이었다.
입을 축인 정도로는 충분치 않았는지 강현의 목소리는 다시 갈라지기 시작했다. 그는 다 쉬어 버린 목소리로 지치지 않고 입을 열었다.
“얼마 전에 꿈을 꿨었어. 몇 년 만인지도 모르는 꿈이었는데…… 그 버스 정류장에 열아홉 살의 내가 혼자 앉아 있는 꿈이었어.”
“…….”
“그런데 고개를 드니까…… 교복을 입은 네가 내 앞에 서 있잖아. 네가 나한테 웃으면서 손을 흔들었고, 가슴이 터질 것처럼 심장이 뛰었어.”
아, 제가 생과 사를 넘나들던 그때 꿈꾸었던 것과 같은 이야기를 하는 강현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입을 반쯤 벌렸다.
뜨거운 여름의 열기가 채 가시지 않은 초가을.
여린 붉은빛이 섞인 풍성한 푸른 잎이 머리 위로 드리워진 화사한 풍경 안.
도로를 사이에 두고 서로를 바라보는 두 명의 소년들.
마치 약속이라도 한 듯 같은 꿈을 꾸었다는 생각에, 해완은 울컥대며 온몸에 넘쳐흐르는 감정을 억누르기 위해 입술을 꽉 깨물었다.
“만약, 만약 우리가 그때 만났었다면, 그랬다면…….”
이미 해완의 마음을 수도 없이 괴롭혔던 것과 같이, 깊은 후회와 절망으로 점철된 그 희미한 목소리에 해완은 더는 견디지 못하고 강현을 향해 돌아누웠다.
순간, 해완이 마주한 건 성숙한 얼굴 위에 고스란히 드러난 깨져 버릴 것처럼 연약한 눈동자였다.
예전 해완의 집 안에서 저를 올려다보는 얼굴에서 찾았던 그 서툰 애정이 서린 것과 같았으나, 이제 해완은 그 눈동자가 누구를 위한 것인지 정확히 알고 있었다.
눈시울이 삽시간에 뜨거워졌다. 해완은 눈물을 뚝뚝 흘리며 손을 뻗어 까칠해진 강현의 얼굴을 다정하게 쓰다듬고 보듬어 주었다.
조금이라도 움직였다가는 해완이 도망이라도 가 버릴 것처럼 바싹 굳은 채 손길을 받고만 있던 강현이 갑자기 그를 와락 껴안았다. 그러나 체격 차가 많이 나는 해완을 가두듯이 끌어안는 평소와는 전혀 달랐다. 오히려 해완의 품 안으로 웅크려 들려는 몸짓에 가까웠다.
그 몸짓이 얼마나 무르고 서툰지 애달파서 견딜 수가 없었다. 그런 그를 보호해 주고 싶은 충동이 몸이 아릿해질 정도로 해완을 괴롭혔다.
내가 지켜 줘야 해.
나 아니면 지켜 줄 사람이 없어.
해완은 그렇게 속으로 단단히 되뇌며, 온 힘을 다해 강현을 껴안으며 눈을 꼭 감았다.
그렇게 소년을 품에 안고 밤을 지새우는 동안, 해완의 마음속 모든 것이 선명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