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14. accord (15/18)

14. accord

향수를 만들기 위해 서로 조화를 이루는 향료들을 결합시키는 것

느리게 돌아온 해가 방 한구석을 비추었다. 선잠이 들었던 해완은 금방 깨어났다. 강현은 아직 잠들어 있었으나, 그의 얼굴에 와 닿는 햇살이 해완의 마음을 안심시켰다.

해가 강현의 얼굴을 비추는 모양을 보며 해완은 그가 눈을 뜨면 해야 할 일들에 대해서 마음속으로 하나하나 정리해 나갔다.

그렇게 시간을 보내는 사이 강현이 눈을 떴다. 새카만 속눈썹이 느리게 오르고, 멍한 눈을 한 그는 꽤나 오래도록 해완을 바라보았다.

피하지 않고 고요히 마주 닿는 시선에 강현이 느리게 미소 지었다.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듯 눈가를 붉힌 채였다. 해완은 그의 달아오른 눈가를 만지며 작게 속삭였다.

“강현아, 우리…… 같이 씻을까?”

그 말에 강현은 상이라도 받는 어린아이처럼 활짝 웃으며 고개를 크게 끄덕였다.

정말 오랜만에 침대에서 벗어나는 것 같았으나 몸을 움직이자마자 며칠 동안 영양 공급이 거의 되지 않은 배에서 요란하게 소리가 울렸다. 누구의 것이라 할 것 없이 동시에 울린 소리에 낄낄대며 웃음을 터트려 버린 두 사람은 일단 밥을 먹기로 합의하고 거실로 나가 배부터 채웠다.

욕조에 뜨거운 물을 가득 받고 입욕제까지 푼 뒤 강현의 가슴팍에 기대어 앉은 순간 해완은 이제까지의 인생에서 다시없을 듯한 평화로움과 행복을 느꼈다.

그것들을 잊지 않기 위해 가슴 깊은 곳에 아로새기며, 해완은 끊임없이 저 자신의 마음을 단단히 세워야 한다고 스스로에게 속삭였다.

다소 긴 입욕을 마치고 나서 해완의 몸에 묻은 물기까지 수건으로 닦아 준 강현은 욕실을 정리하고 가겠다며 드레스 룸에 가서 옷을 입으라고 다정하게 말했다.

샤워 가운을 입고 드레스 룸으로 걸어간 해완은 잠옷 대신 하얀 티셔츠와 청바지를 먼저 골랐다. 강현을 만난 것은 초겨울이었는데, 어느새 여름이 가까워졌다는 것이 새삼스레 믿기지 않았다.

빠르게 옷을 갈아입은 해완은 자신의 가방과 지갑이 있는 장소를 눈으로 확인한 다음에 거실로 나와 앉았다.

거실 한구석에 있는 보리의 집을 보니 유준이 낯설어할까 잠시 호텔에 맡겨 두었던 보리가 보고 싶어졌다. 원래 계획대로라면 오후에 함께 데리러 가기로 되어 있었으나, 아무래도 그건 어려울 것 같았다.

잠시 후, 편안한 실내복을 입은 강현이 해완을 찾아 두리번거리며 거실로 나왔다. 고작 몇 분 떨어져 있을 뿐이었는데도 불안한 표정이 여실했던 강현의 얼굴에 금세 미소가 피어났다.

해완에게 가까이 다가온 그는 해완이 편한 옷차림을 하고 있지 않음에 의아한 기색을 했다.

“……밖에 나갈 것처럼 입었네?”

뭔가를 가늠하는 듯한 강현의 목소리에 해완은 그저 웃으며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자 강현은 눈을 몇 번 깜박이더니 다시 입을 열었다.

“어디 가고 싶은 데 있어? 나가서 잠깐 산책이라도 하고 올까?”

해완은 그런 강현의 손을 잡았다. 뭔가 이상한 분위기를 감지했는지 강현의 몸이 어쩔 수 없이 경직되던 때, 그는 아주 부드러운 목소리로 물었다.

“강현아. 내가…… 페로몬샘 재이식을 받았으면 좋겠어?”

강현의 눈이 튀어나올 듯 커졌다. 그는 일말의 망설임도 없이 대답했다.

“그럼, 당연하지.”

“알았어. 그렇게 할게.”

간단한 대답에, 마치 반짝이는 것처럼 선연한 기쁨이 강현의 주위에 감돌았다. 붉게 상기되기까지 한 얼굴로 해완을 한참 끌어안고 있다 겨우 떼어 놓은 그는 해완의 팔뚝을 다정하게 쓰다듬으며 벅차오르는 목소리로 빠르게 말을 뱉어 냈다.

“잘 생각했어. 고마워, 정말 고마워, 해완아. 내가 잘할게. 내가 너한테 정말 잘할게…….”

“대신 조건이 하나 있어.”

차분한 목소리에 멈칫 입을 멈춘 강현이 여전히 미소를 잃지 않은 채 선뜻 물었다.

“뭔데? 뭐든지 말해. 다 들어줄게.”

해완은 숨을 크게 들이켜고, 애써 침착하게 입을 열었다.

“우리 잠깐 떨어져 지냈으면 해.”

해완이 별을 따다 달라면 그것마저 따다 줄 기세였던 강현이 순간 주춤했다. 해완의 말을 제대로 이해하지 못했다는 듯 그는 여전히 희미한 미소가 감도는 얼굴로 되물었다.

“그게 무슨 소리야? 떨어져 지내자니?”

“수술 받고 다 회복될 때까지, 그때까지 떨어져 지내고 싶어.”

“왜, 왜 그래야 되는데? 나 이해가 잘…….”

당황한 기색이 역력한 강현의 목소리만으로도 가슴이 아렸다. 한 번 깊게 숨을 들이마신 해완이 차분하게 다시 입을 열었다.

“나는 네 옆에서 수술을 받을 자신이 없어, 강현아.”

“……뭐?”

“재이식을 해야 할 수도 있다는 사실을 알고 매일같이 불안했어. 만약 내가 새로 이식받을 페로몬샘의 향기가 네가 싫어하면 향조라면 어떡하지? 그래서 네가 그걸 견디지 못하고 나까지 싫어하게 되면, 나는 그럼 어떻게 해야 할까, 하고.”

“…….”

“그러니까 수술은 나 혼자 받고 싶어. 그러고 나서 너를 다시 만나고 싶어.”

그 말에 강현의 얼굴이 무섭게 굳었다. 해완의 손을 쥔 강현의 손에 아플 정도로 힘이 들어갔다.

“안 그래, 안 그래. 해완아. 내가 말했잖아. 내가 사랑하는 건 너야. 네 몸에서 어떤 향이 나든지 난 상관없어.”

“…….”

“내가 윤해언 향 때문에 너를 속여서 그러는 거구나? 그래서 나한테 화나서, 내가 미워서 그러는 거지? 내가 잘못했어. 내가 정말 잘못했으니까, 그러니까 제발…….”

해완은 제 한쪽 손을 부서져라 잡고 있는 강현의 손을 다른 쪽 손으로 덮고 고개를 저었다.

“알아. 너한테 받고 싶은 건 이미 다 받았어. 그냥, 그냥 내가 내 마음을 추스를 시간이 필요해서 그래.”

“대체 무슨 시간이 필요하다는 거야!”

“내가 도망치지 않고 널 제대로 믿고 용서할 수 있는 시간.”

그 말에 강현이 멈칫했다. 해완은 그 틈을 놓치지 않고 붉어진 눈으로 말을 이었다.

“내 부모님도…… 해언이도…… 내가 이제까지 사랑한 사람들은 아무도 나한테 용서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않았어. 그래서 내가 그 사람들을 미워하지 않으려면, 나 스스로의 기억을 지워서 도망치는 수밖에 없었어.”

“…….”

“하지만 너만은 나한테 줘.”

“…….”

“너만은, 나한테 널 용서할 수 있는 시간을 줘…….”

해완의 간절한 목소리에도, 강현은 미친 사람처럼 반복해서 고개를 젓기 시작했다.

“난 그렇게 못 해. 어떻게 하는지 몰라.”

“…….”

“용서할 수 있는 시간이 필요하면 내 옆에서 해. 날 떠나지만 않으면 나한테 무슨 짓을 해도 좋아. 그러니까 내 옆에서 해.”

강현은 정신이 나간 것처럼 중얼거리며 번뜩이는 시선으로 해완의 온 얼굴을 헤집고 다녔다. 그의 의지가 흐려지는 찰나라도 찾고 싶었던 것 같았으나, 원하는 걸 발견할 수 없음을 동물적으로 깨닫자마자 강현의 얼굴이 새파랗게 변했다.

감출 수도 없이 여실히 드러난 고통에 해완의 눈시울이 삽시간에 뜨겁게 달아올랐다. 자꾸만 목이 메어서, 몇 번이나 입을 열려고 애쓴 끝에야 겨우 소리를 뱉을 수 있었다.

“강현아, 난…….”

그런 해완의 말을 가로막고 강현이 목소리를 처절하게 높였다.

“사랑하는 법을 네가 가르쳤잖아!”

“…….”

“사랑하지 않는 법도 네가 가르쳐.”

대답할 수 없었다.

스스로도 알지 못하는 것을 가르칠 수 있을 리가 없었다.

해완이 아무런 대답도 하지 않는 사이, 강현의 눈에서 뜨거운 눈물이 뚝뚝 흘러내렸다. 앉아 있던 소파에서 일어나 쓰러지듯이 해완의 발치에 무릎을 꿇은 그는 손을 벌벌 떨면서 해완의 다리를 더듬어 잡으며 어떻게든 선처를 구해 보려 애쓰다가, 결국 어린애처럼 해완의 손에 제 얼굴을 비비며 흐느끼기 시작했다.

강현은 목구멍에서 치미는 흐느낌을 어떻게 다뤄야 할지 전혀 모르는 사람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울었다. 그러면서도 해완을 올려다보고, 어떻게든 눈을 맞춰 보려고 애쓰며 떠나지 말아 달라고 빌고 애원했다.

그런 강현의 눈물 하나하나가 전부 해완의 가슴에 커다란 못이 되어 박혔다. 하지만 이를 악물고 버텼다. 지금 이 자리에서 강해야 하는 사람은 그 자신임을 해완은 알고 있었다.

강현에게 시간을 달라 청한 것은 벌을 주기 위해서가 아니었다. 해완은 단 한 번도 강현을 진짜 원망할 수 없었다. 그가 미워 운다고 생각했던 그 낡은 모텔 안에서 보낸 지난한 밤에도 그랬다.

더군다나, 지난 며칠간 강현이 그 스스로에게도 해 본 적 없을 고해 성사를 전부 들어 놓고 조금이라도 미운 마음을 간직하기는 불가능했다.

그 고통스러운 고백을 듣는 내내 해완은 강현이 불쌍하고 가여워서 견딜 수가 없었다. 마음이 찢어지도록 그의 곁에 있고 싶었고, 안아 주고, 사랑해 주고, 나는 괜찮다고, 우리 사이의 모든 것이 다 괜찮다고 그렇게 말해 주고 싶었다.

그 수많은 순간들에서 해완이 확인한 것이라곤 이쯤 되면 질릴 법도 한데 지치지도 시들지도 않고 고개를 쳐드는 단순하고 지독한 사랑이었다.

오히려 그래서, 해완은 강현을 완전하게 용서하고 받아들일 수 있는 시간이 필요했다.

다른 사람이 아니라 강현이라서, 그래서 그것을 받아 내야만 했다.

해완이 그의 인생에서 무엇보다 간절하게 바랐으나 누구도 주지 않았던 용서할 수 있는 권리를 강현만큼은 그에게 주기를 바랐다. 그가 이미 한 번 거절한 바 있기에 더더욱 절실히 필요로 했다.

그렇게 다시 시작하고 싶었다.

조금의 거짓도 없이, 온전한 모습으로 서로를 바라보며.

제 허벅지에 고개를 묻고 흐느끼는 강현의 얼굴을 감싸 올린 해완이 조용히 입을 열었다.

“나도 너와 같은 꿈을 꿨어. 강현아. 그 버스 정류장에서, 9년 전에 우리가 만나는 꿈. 아무도 속이지 않은 채로, 누구도 속지 않은 채로, 그렇게 만나는 걸 너도 바랐던 거잖아.”

“…….”

“그러니까 다시 만나자. 우리.”

“…….”

“이번에는 그럴 수 있어.”

해완을 향해 집요하게 고정되어 있던 시선이 어지럽게 흔들렸다. 마치 온몸의 수분을 쏟아 내리기라도 하는 것처럼, 고개를 숙인 강현의 눈에서 끊임없이 눈물이 흘러내렸다.

한참을 해완을 놓아주지 못하고 억세게 얽혀 있던 손이, 어느 순간 스르르 아래로 떨어졌다.

그러고도 쉽게 움직이지 못하던 해완은 붙어 버린 몸을 떼어 내듯 힘겹게 몸을 일으켰다. 소리를 죽여 드레스 룸으로 향한 그는 옛집에서 가져온 가방에 지갑과 옷 몇 벌을 챙겨 넣은 뒤 다시 거실로 향했다.

그때까지도 강현은 해완이 그를 떠난 그 자세 그대로 고개를 숙이고 앉아 있는 채였다.

돌아오리라 믿고 있었고, 의심 없이 돌아올 작정이었으나 입으로 꺼내는 그 말이 너무나 가볍게 느껴져 침묵하던 해완은 조용히 발걸음을 돌려 강현의 집에서 나왔다.

하지만 등 뒤로 문이 닫히는 찰나, 온통 일렁거리는 눈앞에 무엇도 보이질 않았다. 고개를 숙인 해완의 어깨가 가늘게 떨리는가 싶더니, 결국 그는 무너지듯 무릎을 꿇었다.

두 눈에서 눈물이 정신없이 흘렀다. 가슴속 깊은 곳에서 치미는 울음이 입을 막아도 참아지지 않았다. 혹시라도 강현이 견디지 못하고 저를 붙잡으러 오기 전에 떠나야 한다는 것을 알면서도 도저히 움직일 수가 없었다.

홀로 남겨진 현관 앞에서 해완은 소리 죽여 울었다. 문을 열고 나오는 소리는 끝내 들리지 않았다.

* * *

“안녕하세요, 윤해완 씨. 그동안 잘 지냈어요?”

“네, 선생님.”

“얼굴 많이 좋아진 거 보니 이번엔 거짓말 아닌 거 같네.”

무뚝뚝한 얼굴로 농담을 건네는 주치의의 말에 해완은 멋쩍게 목 뒤를 쓰다듬었다. 그런 해완을 보고 슬쩍 웃은 의사는 곧 사무적인 말투로 말을 이었다.

“이미 알고 있겠지만 페로몬샘 공여자랑 적합도 검사 수치는 굉장히 좋게 나왔어요. 1차 수술보다도 수치가 좋으니까, 거부 반응 걱정도 좀 덜 해도 될 것 같아요.”

좋은 소식임에도 불구하고 복잡한 마음을 숨길 수 없었던 해완은 경직된 입가를 끌어 올리려 애쓰며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다만 이렇게 페로몬샘을 단기간 내에 두 번 이식한 경우에는 히트 사이클을 조절하기 좀 힘들어질 수 있거든요. 내분비계과 연결해 줄 테니까 퇴원하고 나서도 당분간 진료 봐야 할 거예요.”

“……네, 선생님.”

“아, 그리고 해완 씨가 안 물어봐서 먼저 이야기하는 건데, 이번에 이식받을 페로몬샘에서 나게 될 페로몬 향 말인데요.”

주치의의 말투는 별것 아닌 일처럼 들렸으나 굳게 다문 해완의 입술은 긴장을 감추지 못한 채 떨렸다.

새로 이식 받을 페로몬샘에서 나는 향에 대해 해완은 알고 싶기도 하고 알고 싶지 않기도 한 양가적인 감정을 가지고 있었다. 그 두 개의 감정이 너무도 치열하게 다툰 나머지 어떤 질문도 할 수가 없었다.

그리고, 공여자의 페로몬 향에 대해 미리 알고 싶지 않았던 것은 만약 그것이 강현이 싫어하는 향조라면 수술을 거부하지 않을 자신이 없어서였다.

주치의는 무언가 확인하듯 컴퓨터 화면에 띄워진 차트를 잠시 들여다보다가 해완을 향해 고개를 돌렸다. 마치 사형 선고라도 기다리는 듯 해완의 온몸이 불안으로 바싹 조여들었다.

그러나, 주치의의 입에서 나온 말을 듣는 순간, 잠시 백지처럼 멍한 얼굴로 있던 해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숙이고 작은 웃음을 터트리고 말았다.

* * *

재이식 수술을 위한 입원을 사흘 앞두고 이런저런 처리해야 할 일들로 해완은 몇 주간 눈코 뜰 새 없이 바쁘게 지냈다.

일단 살 집을 빨리 구하는 게 우선이었다. 컨디션 관리를 하며 발품을 파는 것은 힘든 일이었겠지만 다행스럽게도 유준이 서울로 올라와 준 덕에 그의 도움을 받으며 집 계약까지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그리고 그간 해완을 많이 도와준 또 다른 한 사람이 있었다.

“안녕하세요, 서인하 변호사님 만나러 왔는데요.”

최근 연속해서 자주 방문한 덕인지 해완을 쉽게 알아본 안내 데스크 직원이 미소를 지으며 그를 인하의 사무실로 안내했다.

오늘은 해언이 그에게 남긴 유산의 상속 절차를 마무리하는 날이었다. 그간 인하는 그가 아무리 변호사라고 해도 도울 의무는 없는 세세한 절차 하나하나까지 전부 상세히 도와준 터였다.

강현의 집을 나오고 나서 어떻게 알았는지 먼저 해완에게 연락을 해 온 인하는 다른 이야기는 하지 않을 테니 유산 상속과 관련된 일만 처리하게 해 달라고 정중히 부탁했다. 해언의 남은 유지이니 이것만큼은 지켜 주고 싶다는 이유에서였다.

제가 뱉은 말대로, 인하는 해완을 마주하는 내내 절대 사적인 이야기는 하지 않았고 철저하게 프로페셔널한 태도로 그를 대했다.

하지만, 해언의 페로몬샘을 제거할 것이라는 이야기를 그에게 하지 않을 수는 없을 것 같았다. 어쨌든 해완이 아는 해언을 사랑한 것이 분명한 이는 그뿐이었으니까.

그래서 해완은 모든 법적인 절차가 마무리되고 인하가 산뜻한 얼굴로 그간 고생했다며 악수를 청할 때 그것을 받아 주는 대신 불쑥 입을 열었다.

“사흘 뒤에 페로몬샘 재이식 수술을 받게 됐어요.”

그러자 인하는 얼굴을 멈칫 굳히기는 했으나 곧 여상하게 말을 건넸다.

“잘됐네요. 이번에는 괜찮을 것 같대요?”

“아마도요. 첫 이식보다는 적합도 수치가 높다고 해서요.”

“병문안이라도 가면 좋을 텐데, 다음 주 월요일에 다시 미국으로 떠나게 돼서 그렇게는 못 하겠네요.”

원래 돌아갈 사람이라 했으니 갑작스럽지는 않았으나 유산 상속이 끝나자마자 돌아가는 것이 마치 제가 그의 미국행을 늦춘 듯해 해완은 괜히 마음이 불편해졌다.

“그래서 말인데 이 말은 꼭 해야겠어요.”

“…….”

“그동안 상처 입혀서 정말 미안했어요. 용서해 달라는 건 아니에요. 그래도 사과는 하는 게 도리인 것 같아서.”

그런 말을 하는 인하의 눈이 깊어 해완은 잠시 아무 말도 잇지 못하다가, 그냥 간신히 고개만 끄덕였다. 그러자 인하가 부드럽게 말을 이었다.

“그런데 해완 씨가 오해하고 있는 게 한 가지 있어요.”

“……뭔데요?”

“내가 복수하고 싶었던 건 당신이 아니에요.”

그때까지만 해도 평온하던 인하의 얼굴이 갑자기 흐려졌다. 마음을 다잡으려는 듯 눈을 깊게 감은 인하가 낮게 말했다.

“난 해언이한테 복수하고 싶었어요.”

그 말에, 해완은 저도 모르게 숨을 크게 들이마셨다. 눈을 뜬 인하는 시선을 밑으로 내린 채로 건조하게 말을 이어 갔다.

“심장 이식 수술을 받지 않겠다고 할 때, 해언이한테 애원했어요. 당신한테 돌아가서 두 번 다시 만나지 못해도 좋다고, 나를 영원히 사랑하지 않아도 좋으니 제발…… 살아만 있어 달라고.”

“…….”

“그렇게 빌고 또 빌었는데도, 내 말은 해언이에게…… 일말의 가치도 없더군요.”

거기까지 말한 인하의 눈시울이 새빨갛게 붉어졌다. 그는 허무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그래 놓고 나한테 남긴 마지막 말도 당신을 잘 부탁한다는 거였어요.”

“…….”

“그게 너무 화가 나서…… 당신을 망쳐 놓고 싶었어요.”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며 고개를 숙인 인하의 눈에 깊게 고여 있던 눈물이, 바닥으로 뚝 떨어졌다.

그런 인하를 바라보는 해완의 눈에도 눈물방울이 맺혔다. 그들 사이에 어떤 일이 있었건 인하와 해완 두 사람만이 공유할 수 있는 슬픔이 있다는 사실만큼은 부정할 수 없어서였다.

잠시 침묵 속에 서 있던 인하가 고개를 들었다. 인하는 해완에게 몇 마디를 더 건넨 후, 부드럽게 미소 지으며 정중하게 마지막 인사를 건넸고 해완은 그것을 받아 주었다.

인하의 사무실을 나오며 문을 닫던 순간, 창가에 서 있던 그의 어깨가 깊게 들썩이는 것 같았지만, 다시 돌아보지는 않았다.

건물 밖으로 나온 해완은 그대로 택시를 잡아탔다. 아직 반드시 가야 할 곳이 한 군데 더 남아 있었다.

30여 분을 달린 끝에 택시에서 내린 해완은 해언이 잠들어 있는 납골당 건물을 잠시 멍하니 바라보았다.

그렇게 한참을 마음을 다잡고 나서야 겨우 안으로 들어갈 수 있었다. 납골함의 위치는 눈을 감고도 찾아갈 수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해완은 몇 번씩이나 쉬어 가며 걸음을 옮겼다.

제 손으로 깨트린 창은 다시 멀끔하게 돌아와 있었지만, 해언의 납골함 앞에 서고 나서도 해완은 한동안 고개를 숙이고 그를 똑바로 바라보지 못했다.

하지만 겨우 용기를 내어 고개를 들자, 그가 스스로의 손으로 골라 넣은 해언, 그리고 함께 찍은 사진들이 변함없이 그를 바라보고 있었다.

그리고 그 사진 속 해언의 미소는 해완이 알던 것처럼 아름답고 깨끗했다. 해완은 인하가 마지막으로 남긴 말을 떠올렸다.

‘내가 왜 해언이를 진심으로 사랑하게 됐는지 알아요?’

‘……아니요.’

‘당신을 사랑하는 모습이 정말 예뻐 보였거든. 그래서 그걸 내가 가질 수 있으면 참 좋겠다 싶었어요.’

‘…….’

‘물론 알고 보니 끔찍하게 비뚤어져 있었고, 누구도 이해할 수 없는 방식의 것이었지만, 그걸 깨달았을 땐 이미…… 내 사랑도 비슷한 모습을 하고 있더군요.’

해완은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무슨 말을 하기 위해 온 것도 아니었다.

해완과 해언 사이에 있었던 기억을 해완이 가지고 있건 가지고 있지 않건 사진 속의 해언의 모습은 똑같았다. 앞으로 변할 수도 없었다.

앞으로 변할 수 있는 것은, 오로지 해완 그 자신뿐이었다.

그것을 떠올린 순간 거짓말처럼 마음이 가라앉았다. 그저 조용하고 복잡한 슬픔을 껴안은 채로, 해완은 영원히 그 자리를 지킬 해언의 미소를 하염없이 바라보았다.

* * *

“형, 이번엔 무조건 잘될 거야 알지?”

10분 뒤에 수술 대기실로 이송된다는 안내를 받은 해완이 깊게 숨을 들이마시자, 옆에 앉아 있던 유준이 짐짓 밝은 목소리로 입을 열었다.

“그리고 이번엔 내가 수술하고 시중 빡시게 들어 줄 테니까 부작용도 없을 거야.”

호언장담하는 목소리에 해완은 결국 작게 웃음을 터트리고는 유준의 가슴팍을 손등으로 툭 건드리며 다정하게 말했다.

“알겠어. 너만 믿을게.”

그렇게 말해 놓고 수술 시간이 다가올수록 유준은 제가 긴장한 듯 괜히 팔을 이리저리 휘저으며 부산스럽게 굴었다.

잠시 후, 수술실 이송원이 해완을 데리러 왔다. 대기실 입구까지 따라온 유준이 파이팅을 외치는 모습을 뒤로하고 수술 대기실 문이 닫혔다.

“환자분, 성함이랑 생년월일, 그리고 무슨 수술 받으러 오셨는지 한번 말씀해 주실래요?”

“이름은 윤해완, 생일은 1994년 3월 23일이고, 페로몬샘 재이식 수술을 받으러 왔어요.”

“네, 확인되셨구요. 곧 수술방으로 이동할 거니까 긴장 풀고 편히 누워 계세요.”

간호사가 떠나고 난 뒤 잠깐 혼자 남은 시간 동안 해완은 병원의 하얀 천장을 응시했다. 그 위로, 얼마 전 들었던 주치의의 목소리가 흘러가듯 스쳐 지나갔다.

‘아, 그리고 해완 씨가 안 물어봐서 먼저 이야기하는 건데, 이번에 이식받을 페로몬샘에서 나게 될 페로몬 향 말인데요. 공교롭게도 이번 공여자도 페로몬 향이 없는 케이스네요.’

‘……네?’

‘하지만 문제의 원인은 해완 씨와는 달라요. 해완 씨는 페로몬샘에 자체에 문제가 있어서 그런 증상이 발생한 거라면 이분은 페로몬샘 기능은 정상인데 뇌하수체에서 나오는 오메가 호르몬에 문제가 있어서 페로몬 향이 사라진 거거든요.’

‘…….’

‘알다시피 페로몬 향은 페로몬샘의 기능과 오메가 호르몬의 영향을 모두 받기 때문에 어쩌면…… 이식 받은 뒤에는 해완 씨가 원래 가지고 있던 페로몬 향이 날 가능성도 희박하게는 있을 것 같아요. 어디까지나 이식을 받고 난 후에야 정확히 알 수 있는 거지만요.’

그의 향을 가지게 될 가능성과 페로몬 향이 존재하지 않는 원점으로 회귀하는 아이러니 사이에서 해완은 저도 모르게 씩 미소를 지었다.

어느 쪽이건 상관없었다.

만약 페로몬 향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이미 충분히 겪어 본 일이니 더욱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었고, 그리고, 만약 그의 페로몬 향을 가지게 된다면, 그러면…….

“환자분, 수술실로 이동할게요.”

갑작스럽게 들려온 간호사의 목소리가 상념을 깼다. 이제 진짜 수술을 받는다는 사실에 어쩔 수 없이 긴장한 해완이 침을 꿀꺽 삼키며 고개를 끄덕였다.

수술실 침대 위는 몸서리가 쳐질 정도로 차가웠지만 이상하게 두렵지는 않았다. 몇 번 더 신상명세와 오늘 받을 수술에 대해 대답하고 난 뒤 얼굴에 산소마스크가 씌워졌다.

자꾸만 빠르게 뛰는 심장을 진정시키기 위해 해완은 아까 하다 만 생각을 간절히 떠올려 냈다.

만약 페로몬 향이 존재하지 않게 된다면 이미 충분히 겪어 본 일이니 더욱 잘 대처할 수 있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가 페로몬 향을 가지게 된다면 강현이 그것을 사랑해 줄 것이다.

마취 약이 투입되는지 천천히 의식이 흐려졌다. 그 흐려지는 의식 사이로, 해완은 강현과 떨어져 있는 동안 매일같이 마음속에서 되뇌던 말을 다시 한번 되새겼다.

그러니 나는 너를 향해 갈게.

그러니까 제발, 조금만 기다려 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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