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외전 1 - Osmanthus in the wood (17/18)

외전 1 - Osmanthus in the wood

1.

그날은 눈을 뜰 때부터 이상하게 심장이 뛰었다.

별다르게 특이한 일이 있어서가 아니라, 그냥 기분이 그랬다. 아무런 이유 없이 내내 가슴이 울렁거리고 무엇에도 집중이 되질 않았다. 그래서 강현은 컵을 떨어뜨려 깨트리거나 발을 헛디뎌 넘어질 뻔하거나 서연의 요구로 잠시 서울로 올려 보낸 보리의 밥그릇에 넘치도록 사료를 붓는 등 멍청한 실수들을 아침 내내 해 댔다.

감정을 통제하지 못하는 것에 이제는 익숙해져 있었으므로 크게 신경을 쓰지는 않았다. 다만 그가 살면서 단 한 번도 믿어 본 적 없었던 예감이라는 게 실제로 있기라도 한 모양이라고 강현은 나중에, 아주 나중에 생각했다.

해가 머리 위로 오르기 전 언제나와 같이 바다가 보이는 도로로 향하기 위해 고적한 2층 저택의 문을 밀어 열던 강현의 발걸음이 문득 멈칫했다.

맨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아주 잠깐 그 밑에 서는 것만으로도 체온을 올리던 태양의 뜨거운 열기가 사그라짐에, 지나간 여름이 실감이 나서였다.

이제 곧, 은목서의 계절이었다.

어느새 그렇게 시간이 흘렀을까 하는 생각을 하며 강현은 한여름부터 초가을이 될 때까지 수없이 오간 길을 느긋하게 걸었다. 사람조차 거의 만나지 않고 단순하기 그지없는 하루를 보내고 또 보내면서도 지루한지 몰랐던 게 스스로 생각해도 신기했다.

물론 이유를 모르지는 않았다. 강현의 매일이 해완을 향한 기다림으로 채워져 있었기 때문이었다.

해완이 페로몬샘 재이식 수술을 받은 지, 벌써 3개월이 지나고 있었다.

수술은 순조로웠다. 첫 번째 이식 수술보다 경과도 명확히 좋다고 했다. 2주간의 입원을 마치고 퇴원한 그는 유준과 함께 새로 이사한 작은 아파트로 돌아갔다. 서울 외곽에 위치해 있었으나 지은 지 몇 년 되지 않아 깔끔하고 전에 살던 동네와는 달리 주변이 조용해 살기에 나쁘지 않은 곳이었다.

퇴원 후 일주일 만에 방문한 외래에서 받은 결과도 긍정적이었다. 어느 정도의 면역 억제제 부작용은 피할 수 없었으나 새로 바꾼 제제가 해완의 몸과 그럭저럭 잘 맞아떨어지는 모양이었다. 건강 상태를 잘 유지해야 이식받은 장기가 안정화되고 면역 억제제 또한 정상적으로 끊을 수 있다는 말에 해완은 할 수 있는 한 최선을 다해 체력을 기르려고 했다. 매일매일 산책을 하고 꾸준히 별도의 운동까지 하고 있었다.

물론 이런 이야기들을 해완에게서 듣지는 않았다. 직접 듣고 싶은 마음이야 굴뚝같았지만 그럴 수는 없었다. 해완은 강현에게 그를 용서할 수 있는 시간을, 다시 만날 수 있는 기회를 달라고 했으므로, 지금 강현에게는 그럴 자격이 존재하지 않았다.

그가 허락받은 일은 오직 기다림뿐이었으므로, 그것 말고는 할 수 있는 일이 없었다.

물론 쉽지만은 않았다. 기다린다는 행위는 그 자체로는 지극히 단조로웠으나 느끼는 감정만은 천차만별이었다. 매일 같은 일상을 보내면서도 하루에도 몇 번씩 천국과 지옥을 오갔고, 매번 같은 풍경을 보면서도 매번 다른 생각이 들었다.

너무 견디기 힘든 날에는 무작정 차를 몰고 서울로 올라갔다. 병원, 해완의 집, 그가 유준과 자주 가는 카페, 어디든 상관없었다. 먼발치서라도 해완의 얼굴을 보면 숨통이 트였다.

제 감정을 인식하지 못하던 세월이 무색하게 기분도 미친 사람처럼 널을 뛰었다. 어떤 때는 해완과 다시 만날 희망에 들떠 돌아오기도 했고, 어떤 때는 눈앞에 두고도 당장 껴안고 입 맞출 수 없는 현실에 대한 좌절감을 견디지 못하고 분노에 떨며 돌아오는 날도 있었다.

그래도 종잡을 수 없는 감정 변화 정도는 견딜 만했다. 겪다 보니 익숙해졌고, 컨트롤은 하지 못하더라도 무시할 수 있는 방법은 배울 수 있었다.

단지 강현이 끝까지 적응하지 못한 것은 어쩌면 해완을 다시는 되찾을 수 없을지도 모른다는 끔찍한 불안감이었다.

그가 해완에게 했던 거짓말들이나 서로에게 입혔던 상처들을 떠올릴 때마다 그런 불안감은 통제할 수 없이 부풀어 올랐다. 때로 믿을 수 없게 팽팽해진 불안이 견디지 못하고 터져 버릴 때면 어김없이 눈물이 났다.

감정을 제대로 느끼지 못할 때부터 강현은 남들의 울음을 싫어했지만, 제가 흘리는 눈물은 정말이지 끔찍하게 싫었다. 질리지도 않고 당황스러웠고 누구도 보고 있지 않은데도 이상한 수치심까지 느껴졌다. 신체적으로도 그랬다. 심하게 울고 나면 머리가 아프고 입 안이 바싹 마르고 눈가까지 짓물러서, 우는 게 이렇게 힘든 일인지 강현은 처음으로 알았다.

하지만 강현은 이제, 해완을 홀로 울게 두기보다 제가 우는 게 훨씬 덜 고통스럽다는 것 또한 알고 있었다.

그것은 해완이 시간을 청한 그날에서야 어렵게 깨달은 사실이었다.

처음에는 해완을 놓아줄 수 없다고 생각했다. 해완이 곁을 떠난 찰나 느껴지는 것이라곤 불타는 듯한 마음의 고통뿐이었기에 어쩔 수 없었다. 내면에 갇혀 엉망으로 섞인 채 굳어 버린 감정의 잔해들이 지독한 냄새를 풍기며 전신의 혈관을 타고 흘렀고 스스로를 통제할 수 없는 상태로 강현은 해완에게 가기 위해 몸을 벌떡 일으켰다.

아니, 해완에게 가는 게 아니라 해완을 끌고 오려고 했다. 덫에 걸린 짐승처럼 두 다리를 부러뜨려서라도 다시는 떠날 생각을 하지 못하게 할 작정이었다.

제 잘못을 알게 되었다고 해도 갑자기 다른 사람이 될 수는 없었다. 사랑으로 성숙해질 수 있지 않느냐 물을 수도 있겠지만, 가슴을 찢어 내는 듯한 고통을 다루기에 그것은 너무 뜨겁고 서툴렀다.

그러나 해완이 나간 문 앞에 다다른 순간, 그 너머로 숨죽인 울음소리가 들려왔다.

이 집에서 나가기 직전까지 해완은 울지 않았다. 조용하고 단단한 목소리로 강현을 달래고 설득하기만 했다.

그럼에도, 이 문 너머에서 해완이 울고 있다는 벼락과도 같은 확신이 심장에 내리꽂혔다. 들린다고 말하기에는 너무나 희미했음에도 그랬다.

해완이 제 앞에서 울 수 없었다는 사실이 강현의 손발을 얽어맸다. 그리고 그 눈물이 주는 고통은 스스로의 이기심을 장작으로 불타오르던 심장의 화상보다 더욱 강렬하고 선명했다.

결국 강현은 아무것도 할 수 없었다. 그저 차가운 철문에 이마를 기대고 해완이 눈물을 그칠 때까지 가만히 기다렸다.

해완은 한참을 울었다. 겨우 울음을 그치고도 떠나는 기척은 오래도록 나지 않았다.

해완이 떠난 후에도 강현은 주저앉은 문 앞에서 한참을 일어나지 못했다. 저만 괴로웠다면, 저만 아팠다면 괜찮았을 것이다. 그러나 해완이 그렇게 울면서도 왜 저와 떨어지는 선택을 했어야만 했는지에 대해 스스로에게 던지는 질문이 온몸을 무겁게 채워 움직일 수 없게 만들었다.

다시 만나자. 우리. 이번에는 그럴 수 있어.

저를 버리기 위해 던지는 잔인한 미끼처럼 받아들일 뻔했던 말들이 진짜 약속으로 돌아온 것이 바로 그때였다.

아무도 속이지 않은 채로, 누구도 속지 않은 채로, 그렇게 온전히 만나기 위해 해완이 감수한 고통에 대해 불현듯 이해한 것도 바로 그때였다.

해완이 제 곁을 떠난 게 처음은 아니었으나 강현이 그를 기다린 적은 없었다. 어떻게든 제 곁으로 돌려놓을 욕구만 맹목적으로 좇았었다. 해완이 무엇을 원하는가는 중요하지 않았다. 난생처음 겪어 보는 낯선 고통을 해결하는 일에만 급급했다.

그러나 더 이상은 그럴 수 없었다. 이제는 해완을, 그가 약속했던 다시 만날 기회를 기다릴 시간이었다.

버스 정류장이라 부르기 무색하게 흔적만이 남아 있는 그곳, 가을이 낸 붉은 손자국이 점점이 물든 거목의 실루엣을 본 강현이 천천히 걸음을 멈춰 섰다.

이정표조차 사라진 지 오래인 곳이었으나, 강현은 이 버스 정류장에 다녀갔을 사람들의 수많은 기다림에 대해 생각했다.

누군가는 떠나기 위해, 누군가는 돌아가기 위해 이곳에 머물렀겠지만, 그 모두에게는 원하는 곳으로 향할 수 있다는 기다림 너머의 기대가 있었다.

그것이 해완과 강현이 이 버스 정류장에서 다시 만나는, 같은 꿈을 꾼 이유이리라 설명할 수 없는 확신이 들었다. 그래서 해완을 기다릴 장소를 선택할 때 강현은 단 한 번도 망설이지 않고 이곳을 찾았다.

자리에 앉은 강현은 도로 너머에서 눈부시게 빛나는 바다를 잠시 바라보았다. 누구도 오지 않는 폐쇄된 버스 정류장으로 남기에는 아까운 광경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런데 이상한 일이었다. 그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던 강현의 마음이 급작스럽게 9년 전 눈이 먼 채 이곳에 앉아 있던 소년에게로 내달린 것은.

반쯤 강요해 해완을 이곳으로 데려왔던 때 강현이 했던 말은 대부분이 거짓말이었지만 진실 또한 존재했다.

갑자기 눈이 멀고 하루 종일 어둠 속에 앉아 있어도 지겨운 줄 몰랐다. 이곳에 있는 내내 강현은 제가 존재하지 않는 사람 같았고, 그 스스로도 저를 느낄 수가 없었다.

강현이 정말 사람 거죽만 뒤집어쓴 채 존재하던 시간은 모두가 저를 그렇게 바라보던 때가 아닌 바로 그런 순간이었다.

그런데 문득, 오래도록 잊고 있었던 기억 하나가 심연을 헤집고 불쑥 솟아올랐다.

무관심 속에 증발하듯이 껍데기만 남아 가던 소년 시절의 강현을 조심스럽게 자극하던 하나의 감각이었다.

그것은 은목서 향이었다.

산들바람에도 흩어져 버릴 만큼 여리고 은은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으면 발견하기조차 어려운, 그런 향이었다.

당시 강현의 비정상적으로 발달된 후각이 아니었으면 느낄 수 없었을 만큼 희미하기도 했지만, 오히려 그래서 누구도 뚫을 수 없게 단단해져 가던 어둠의 좁은 틈새를 비집고 들어올 수 있었다.

그래서 강현은 마치 늪처럼 제 안으로 끝없이 잠겨 들어가는 기분이 들 때면 이 버스 정류장에 나와 앉아 그 은목서 향을 맡아 보려 애쓰곤 했었다.

하지만 그 이후로 윤해언이 제게 말을 걸었고, 은목서 향에 대한 관심은 그의 페로몬에서 나는 것으로 옮겨 갔고, 이곳을 떠난 이후로는 그 연약한 향에 대해서는 까맣게 잊고 있었다.

설명할 수 없는 기분에 감싸여 강현은 저도 모르게 고개를 휘휘 둘러 가며 꽃이 피어날 수 있는 자리를 찾았다.

원래 은목서는 가을에 피는 꽃이기에 시기상으로는 이상한 점이 없었으나, 아무리 주위를 둘러봐도 꽃나무가 있을 법한 곳처럼은 보이지 않았다.

그런데 그때, 언젠가 들었던 목소리가 직감처럼 뇌리에 몰아쳤다.

‘자전거를 타고 지나가는데 네가 그 버스 정류장 앞에 앉아 있었어.’

‘네가 너무 외로워 보여서 자꾸 마음이 쓰였어.’

‘그게 내 첫사랑이었어.’

‘그리고 지금도 널 사랑해.’

‘사랑해, 강현아.’

심장이 터져 버릴 것처럼 뛰고 호흡이 가팔라져, 강현은 몸을 부르르 떨며 눈을 질끈 감았다. 그렇게 눈을 감은 채로 휘달리는 감정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그러던 어느 순간, 강현은 바람에 실려 온 향을 느꼈다.

전신에서 악을 쓰듯 어떤 직감이 들끓었다. 그가 지치지 않고 바라 온 희망과 뒤섞인 그것을 이기지 못하고 강현은 눈을 떴다.

그곳에, 해완이 서 있었다.

해완의 몸을 스치는 바람에, 강현이 알지 못하던 시간까지도 그를 구원해 주었던 은목서 향을 실어 보내며.

그리고 해완은, 강현을 향해 크게 소리 내어 말했다.

“거기 있어. 이번엔 내가 너한테 갈 거니까.”

그렇게 끝내 돌아와 준 해완에게, 그의 은목서 향에 안겨 강현은 조용히 눈물을 흘렸다.

기묘한 눈물이었다. 슬프지도 불안하지도 절망하지도 않았는데 뚝뚝 방울져 흘러내렸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눈물이 조금도 아프지는 않았다.

2.

언젠가 이야기로만 들었던 강현의 별장은 고즈넉한 곳에 위치해 있었다.

잘 가꿔진 정원 안에 있는 고풍스러운 2층 건물은 아름다웠다. 건물 자체에는 세월의 흔적이 보였지만 그마저도 나름의 우아한 멋을 더하는 듯했다.

해완의 손을 단단히 붙들고 그곳까지 데려온 강현은 육중한 현관문을 여는 짧은 사이까지도 그의 손을 놓을 생각을 하지 않았다.

9년 전, 두 명의 소년이 처음 만났던 장소에서 약속이라도 된 것처럼 다시 만나게 된 기막힌 우연이라는 비현실적인 감각에 취해 있던 해완 또한 나눠 잡은 서로의 손만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층고가 높은 저택 안에는 전면 창을 통해 햇살이 쏟아지듯이 들어왔다. 그럼에도 혼자 지내기에 이 집은 너무 크고 고요하게 느껴져, 해완은 강현이 대체 언제부터 이곳에서 자신을 기다린 걸까 하는 생각을 아릿한 마음으로 했다.

집 안에 들어와서도 강현은 해완이 마음대로 행동하게 두지 않았다. 잠깐이라도 놓치면 사라져 버리리라 여기는 건지 쥐고 있던 해완의 팔을 몇 번씩 고쳐 쥔 그는 해완을 이끌어 거실 한가운데에 있는 소파에 앉게 만들었다.

옆에 앉는 대신 발아래 무릎을 꿇고 앉는 강현의 행동에 해완은 약하게 움찔했다. 그러나 아무런 말도 할 수가 없었다. 두 사람 사이를 감도는, 둘 다 너무나 간절히 바라 왔고 오직 이 순간에만 존재할 수 있는 행복감이 섣부른 말 한마디에 흩어질까 두려워서였다.

그래서 해완은 그냥 강현이 하고 싶은 대로 하게 두었다. 그는 한마디 말도 없이 해완을 가만히 올려다보다가 멍한 눈을 하고 손이 닿는 범위 내에서 해완의 몸을 쓰다듬었다.

때로는 조심스럽고 때로는 거친 손길이 해완의 온몸 곳곳을 유영했다. 살이 좀 붙기는 했으나 아직까지는 여전히 마른 배와 가슴팍을 더듬고, 허벅지를 매만지고, 종아리의 선을 훑었다. 눈앞에 있는데도 그 존재를 확인하고 싶은 듯한 절박한 손길에 저와 떨어져 지낸 몇 달간 강현이 느꼈을 고통이 선연해, 해완은 어쩔 수 없이 눈시울이 붉어지는 것을 느꼈다.

이윽고 발목까지 손이 내려간 순간 몸을 살짝 뒤로 물린 강현은 해완의 슬리퍼를 벗기고 자신의 무릎 위에 해완의 발을 올려 입을 맞췄다. 제 앞에서 자존심 따위는 전부 내던진 듯한 강현의 태도에 놀란 해완은 저도 모르게 그의 어깨를 쥐어 막았다.

저를 멈추게 하려는 제스처에 강현은 겨우 입을 열었다.

“……싫어?”

의도와는 상관없이 아주 작은 거부를 표한 것만으로도 곧바로 떠오르기 시작한 상처 입은 기색을 예민하게 눈치챈 해완은 당황해 정신없이 고개를 저었다.

“그런 게 아닌 거 알잖아.”

해완은 소파에서 내려와 강현의 앞에 똑같이 무릎을 꿇었다. 해완의 등 뒤에 있는 창에서 비치는 오후의 햇살이 강현의 복잡한 얼굴을 비추었다.

그를 만난 지 얼마 되지 않았을 때 해완은 강현의 얼굴이 매끈한 가면 같다는 생각을 불현듯 하곤 했다. 그러나 지금 해완의 눈앞에 있는 강현의 얼굴은 마음에 소용돌이치는 수많은 감정들을 그 무엇 하나 감추지 못하고 있었다.

그 무엇보다 해완의 마음을 뭉클하게 만든 건 그 사실을 뻔히 알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강현이 해완의 눈을 피하지 않고 있다는 것이었다.

내가 변한 만큼 강현이도 변했구나.

그런 생각에 마음이 뭉클해진 해완은 떨리는 목소리로 울컥 말을 내뱉었다.

“보고 싶었어. 강현아.”

“…….”

“정말, 정말 보고 싶었어…….”

그 말에 강현의 얼굴이 금방이라도 울음을 터트릴 것처럼 일그러졌다. 이상한 표정을 지은 그는 끓어오르는 무언가를 참아 보려는 듯 입술을 굳게 다물었지만 아무 소용 없이 새카만 눈동자에 결국 눈물을 가득 괸 채 간신히 대답을 돌려주었다.

“나도, 나도 보고 싶었어.”

잔뜩 젖은 긴 속눈썹이 가린 눈동자를 마주하자, 마음을 사로잡힌 수많은 순간들이 가슴으로 다시 밀려들어 왔다.

더는 견딜 수 없어 해완은 달려들듯이 입술을 맞대었다. 그런 해완의 몸을 부서져라 껴안은 강현이 곧바로 마주 입 맞췄다.

적막한 집 안에 서로의 입술을 탐하는 소리가 적나라하게 울려 퍼졌다. 누구도 조심스러워하거나 망설이지 않는, 폭력에 가까워 보일 정도로 진득한 입맞춤이었다. 숨이 차오르고 머릿속이 새하얗게 탈색됐다. 그 어떤 생각도 머릿속을 파고들지 못했다. 통제할 수 없을 정도로 날뛰었다.

입술이 부어오를 정도로 거친 키스 속에 몸을 겹치고 누운 두 사람은 마치 처음으로 성적인 행위를 해 보는 소년들처럼 옷 위로 서로의 몸을 비비고 문대는 엉성한 행위만으로도 가쁜 숨을 헐떡이며 낮게 신음했다.

한참을 그렇게 엉겨 붙다가 누가 먼저라 할 것 없이 떨리는 손으로 정신없이 옷을 벗겨 냈다. 두 개의 몸이 완벽하게 맞닿기 위한 방해물이 모두 사라지고 마침내 피부가 온전히 드러났을 때 강현은 제 밑에 누운 해완의 나신을 반쯤 풀린 눈으로 가만히 응시했다.

그의 눈빛은 마치 숭배하는 대상을 바라보기라도 하는 것 같아서, 어쩔 수 없이 피부를 새빨갛게 붉힌 해완은 팔뚝을 들어 얼굴을 가렸다.

그러나 당연히 곧바로 얼굴을 가린 해완의 손을 잡아 내린 강현은 그의 눈을 똑바로 바라보며 몸을 낮췄다.

다시 입을 맞추려는 줄 알고 해완은 저도 모르게 입술을 살짝 벌렸지만, 강현은 그의 입술을 머금는 대신 높게 솟은 코끝으로 해완의 이마부터 턱까지 느리게 스쳐 지나갔다.

강현은 그대로 오랜 시간 공을 들여 해완의 냄새를 맡았다. 때로는 입을 맞추고 다정히 쓰다듬기도 하며, 해완의 머리칼, 귀, 귀 뒤, 양쪽 목덜미, 가슴팍, 배, 손가락 하나하나까지 그 무엇 하나 소홀히 하지 않고 꼼꼼히 훑어 내려갔다.

그런 강현의 모습을 바라보는 해완의 숨이 절로 거칠어졌다. 강현에게 있어 후각은 세상을 바라보는 가장 날카롭고 예민한 감각이었다. 다른 사람과 비할 수 없이 뛰어난 감각을 총동원해 자신의 온몸을 기억에 새기려는 듯한 그의 행동이 쾌감에 가까운 빠듯한 만족감을 불러일으켰다.

“가, 강현아, 잠깐……!”

그러나, 강현이 해완의 다리 사이 깊은 곳에 코를 묻었을 때는 조금 이야기가 달랐다. 저 자신조차 본 적 없는 곳을 이미 강현에게는 충분히 내보인 바 있었지만 어쩔 수 없이 빠르게 차오르는 수치심에 해완은 강현의 머리를 밀어 내며 다리를 오므리려 했다.

해완의 허벅지를 움켜쥐고 있던 강현이 손에 강하게 힘을 주며 고개를 들었다. 무언가에 홀린 듯 뜨거워진 눈이 절대로 그냥 넘어가지 않겠다는 듯 해완의 눈을 마주했다.

그 눈과 마주한 즉시 힘이 풀렸다. 그 틈을 놓치지 않고 해완의 다리를 더욱 넓게 벌려 연 강현은 다시 고개를 묻고 숨을 깊게 들이마셨다.

“흐윽…….”

서늘하고 날카로운 코끝이 허벅지 안쪽의 연한 피부, 그리고 제 입으로 말하기도 민망한 곳곳을 빠짐없이 스치고 숨을 들이마시는 느낌에 해완은 두 손을 들어 터질 것만 같이 달아오른 얼굴을 가렸다.

해완에게는 너무나 느리게 흘러갔던 몇 분이 지나고서야 겨우 만족한 듯 다리를 억지로 잡아 벌리고 있던 악력이 느슨해지는 게 느껴졌다.

그러고도 해완은 얼굴을 가린 손을 쉬이 내리지 못했지만, 갑자기 허리 아래로 푹신한 뭔가가 끼워 넣어지는 느낌에 화들짝 놀라 강현을 바라보았다.

소파 위에 올려져 있던 쿠션들을 해완의 허리 밑으로 끼워 넣어 엉덩이가 높게 들리게 만든 강현은 해완이 무슨 말을 하기도 전에 넓적다리를 잡고 위로 밀어붙인 채 엉덩이 사이에 고개를 깊숙이 묻었다.

“아!”

예민한 주름을 길게 핥는 느낌에 전율한 해완이 고개를 뒤로 확 젖히며 신음을 내뱉었다. 본능적으로 뒤로 물리려는 해완의 몸을 꽉 붙든 강현은 이전에 겪었을 때보다 더욱 집요하게 민감하기 그지없는 구멍을 핥고 빠는 행위를 반복했다.

“아, 이상, 이상해, 으응, 응……!”

해완은 눈을 질끈 감고 도리질을 치며 울먹였다. 전에 한 번 강현이 이런 식으로 구멍을 빨아 준 적이 있었지만 수치심과 구분할 수 없게 뒤섞인 쾌락을 감당하기가 여전히 버거운 탓이었다.

당연히 강현은 아랑곳하지 않았다. 오히려 해완의 울먹임이 그를 더 돋우기라도 하는 것처럼, 질척이는 소리가 나도록 빨아들이고 움찔대는 구멍을 비집고 혀를 쑤셔 넣는 일을 마다하지 않았다.

머릿속이 엉망진창이었다. 해완이 온몸을 부들부들 떨며 마른 배 위로 프리컴을 뚝뚝 흘리기 시작하자 겨우 몸을 일으킨 강현은 지극히 만족스러운 표정으로 혀를 내어 젖은 입술을 핥았다.

그 의기양양한 얼굴에 갑자기 약이 올랐다. 해완은 강현이 방심한 틈을 타 그의 팔을 잡아당겨 바닥에 털썩 눕히고는 곧바로 배 위에 올라탔다.

일순 당황한 기색이 차오른 강현의 조각 같은 얼굴이 해완에게 불을 붙였다. 해완은 살짝 허벅지를 들어 올려 푹 젖어 있는 입구를 만져 보고는 손가락 끝을 조심스럽게 밀어 넣었다.

몇 달 만의 삽입인지라 구멍 안은 제가 느끼기에도 빠듯하게 좁았지만, 오랜 시간 집요하게 빨린 입구는 부드럽고 물렁해져 있어서 조금만 풀면 그대로 넣을 수 있을 것 같았다.

해완이 스스로 제 뒷구멍을 쑤시는 걸 본 강현의 표정이 변했다. 무릎을 세운 강현은 양손을 뻗어 한 손으로는 해완의 엉덩이를 잡아 벌리고 나머지 한 손은 이미 해완의 손가락이 드나들고 있는 구멍을 비집고 옆으로 밀어 넣었다.

“으응! 아!”

강현의 길고 마디가 굵은 손가락이 입구를 벌리는 느낌에 해완은 고개를 뒤로 홱 젖히며 신을 내뱉었다.

제 손가락과 강현의 손가락이 몸 안에 동시에 들어가 있는 생경한 기분에 해완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그런 해완에는 아랑곳없이 강현은 빠르게 손가락을 움직이며 넋이 나간 사람처럼 중얼거렸다.

“좁아, 해완아……. 아직까지도 이렇게 좁아서 어떻게 해……? 응?”

두 개의 손가락이 서로 다르게 움직이며 내벽을 자극하는 묘한 쾌감에 해완 또한 제 뒤를 쑤시는 것을 멈추지 못했다.

하지만 강현이 손가락을 하나 더 쑤셔 넣었을 때 해완은 그대로 몸을 무너뜨리며 그의 위로 웅크려 버렸다. 강현은 이를 악물고 해완의 뒤에서 흐르는 애액이 마찰로 인해 철퍽거리는 소리가 날 때까지 손을 계속해서 움직였다.

“아윽! 응! 가, 강현아! 아!”

결국 해완은 강현의 이름을 흐느끼듯 신음하며 그대로 사정했다. 끈적한 정액이 강현의 단단한 복근 위로 흩뿌려졌다. 절정에 달한 것은 해완인데도 강현의 숨도 거칠기 그지없었다. 그는 해완이 제 이름을 부르는 순간 마치 해완의 안에 들어가 있는 것처럼 허리를 들썩이기까지 했다.

한번 만지지도 않았는데 터질 듯 단단하게 발기한 성기가 꺼떡대며 선액을 질질 흘리는데도, 강현은 제 위에 웅크린 채 떨고 있는 해완의 등을 어루만지며 그가 진정될 때까지 부드럽게 달랬다.

잠시 후, 해완이 할딱이며 고개를 들었다. 하얀 얼굴은 멍했고 쾌감의 여운으로 눈가가 붉었다. 아직 해완의 몸 상태를 정확히 알지 못했기 때문에 몰아붙일 수가 없어, 강현은 나서서 해완의 몸을 제게서 떼어 내려고 했다.

그런데 그때, 상체를 세우고 손을 뒤로 뻗은 해완이 강현의 발기한 성기를 쥐었다.

“윽!”

오늘 처음으로 가해지는 자극에 강현은 미간을 찌푸리며 낮은 신음을 뱉었다. 고개를 살짝 돌리고 손에 쥔 좆을 느리게 몇 번 문지르던 해완은 그대로 허리를 들어 끄트머리를 자신의 입구에 맞추고 느리게 내려앉기 시작했다.

“으읏!”

두꺼운 선단이 좁은 구멍을 비집고 들어가는 찰나 강현은 목이 긁히는 듯한 신음을 내며 몸을 바싹 굳혔다.

해완은 그대로 강현과 눈을 맞추고 강현의 성기를 제 구멍 안으로 끝까지 밀어 넣었다. 정상위로 해도 버거운 물건을 이 자세로 넣고 있으니 배 속 깊은 곳이 꿰뚫리는 듯한 기분까지 들었지만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뿌리까지 삽입한 뒤에야 잠시 숨을 골랐다.

잠시 시간을 둔 후 해완은 강현의 몸통 양옆에 손을 두고 허리를 움직이기 시작했다. 무언가를 시험하듯 조심스럽기만 하던 움직임은 시간이 지날수록 대범해졌고, 땀에 젖은 살갗이 부딪치는 소리가 집 안의 고요를 해치며 울려 퍼졌다.

그동안 강현은 양손으로 해완의 엉덩이를 가볍게 쥔 채 반쯤 벌린 입을 다물지도 못하고 그가 하는 양을 바라보고만 있었다. 이미 한차례의 절정을 겪고 예민해져 있는 터라 약간의 움직임에도 해완의 구멍은 적나라하게 강현의 좆을 조였다. 그게 미치도록 좋아서 강현은 완전히 풀린 눈으로 더듬거리며 중얼거렸다.

“해완아, 예뻐, 너무 예뻐…….”

손을 길게 뻗어 쾌감으로 반쯤 벌어진 해완의 입술부터 곧게 뻗은 목덜미, 가슴팍, 그리고 배까지 탐욕스럽게 쓸어내린 강현은 어느샌가 다시 흥분해 선액을 흘리고 있는 성기까지 감아쥐었지만 해완은 오히려 싫다는 듯 인상을 찡그리더니 그의 손목을 잡아 옆으로 치웠다.

뒤로만 쑤셔 박히고 싶어 하는 그 행동이 강현을 자극한 듯 턱에 날카로운 근육이 섰다. 갑자기 눈을 번뜩인 강현은 해완의 골반을 강하게 틀어쥐더니, 허리를 퍽 위로 쳐올리며 쉰 목소리로 말했다.

“이게, 더 좋아? 뒤로 박아 주는 게, 헉, 더 좋아?”

깊은 곳을 단번에 자극하는 움직임에 고개를 뒤로 홱 젖힌 해완은 숫제 울먹이면서 신음했다.

“으,응, 좋아. 이게, 더, 윽, 좋아, 너무, 너무 좋아…….”

그대로 손을 뻗은 강현은 해완의 목덜미를 잡아당겨 다시 제 위에 엎드리게 만들고는 양팔로 가두듯이 상체를 강하게 끌어안고 골반을 퍽퍽 위로 쳐올리며 뒷구멍에 사정없이 쑤셔 박기 시작했다.

젖은 살갗이 부딪치며 내는 철썩이는 소리가 요란하게 울렸고, 해완의 신음 소리와 강현의 헐떡이는 숨소리가 끝없이 가팔라졌다.

“해완아, 읏, 해완아…….”

그 가쁜 숨 사이로 강현은 해완의 이름을 집요하게 불렀다. 귓속을 쑤시는 무섭도록 낮은 저음과 뜨거운 숨결에 해완은 와락 울음을 터뜨렸다.

강현이 저를 안으며 제 이름을 뜨겁게 불러 주는 것이, 너무 좋아서 미쳐 버릴 것만 같았다.

결국 해완은 허리를 비틀고 신음하다가 소리도 내지 못하고 또 한 번 절정에 달했다. 온몸이 움츠러들며 내벽이 확 수축하는 느낌에 눈앞이 희게 바래 버리는 듯 강현의 머리가 뜨겁게 달아올랐다.

곧, 강현이 해안의 내벽에 깊이 처박으며 사정했다. 품에 안은 몸 이외에는 모든 게 불타 없어져 버리는 듯한 절정이 지나가고 정신을 차린 강현은 오르가슴의 여운으로 아직까지 온몸을 벌벌 떨고 있는 해완을 틈 없이 꽉 끌어안고 입술이 닿는 모든 곳에 입을 맞추고 땀에 젖은 피부를 부드럽게 쓰다듬으며 달랬다.

해완은 강현의 몸 위에 엎드린 채로 움직이지 않았다. 강현도 그를 보내지 않겠다는 듯 여전히 두 팔로 꽉 끌어안은 채였다.

그렇게 한 몸이라도 되는 양 한참을 껴안고 있다가, 해완은 문득 고개를 들어 강현의 눈을 바라보았다.

새카만 눈동자는 어느 때보다도 선명하고 투명했다. 감출래야 감출 수 없는, 뚜렷이 해완을 향하고 있는 사랑이 고스란히 드러나 있었다.

마음이 벅차올라 해완은 크게 미소를 지었다. 강현 또한 같은 것을 느꼈는지 마주 웃었다. 해완은 다시 강현의 몸을 맞대고 누웠다.

크게 울리는 심장 소리가, 마치 태어날 때부터 하나인 것처럼 일정하게 함께 뛰고 있었다.

3.

은목서 나무가 가득한 숲속에서 편히 누워 쉬는 꿈을 꾸었다.

불현듯 잠에서 깨어났을 때 앞에 놓인 꿈보다 더 꿈처럼 느껴지는 광경에, 강현은 손끝 하나 까딱하지 못하고 오래도록 정면을 응시했다.

그에게 돌아온 해완이, 품에 안겨 고요히 잠들어 있었다.

창을 통해 비치는 햇살이 해완의 고운 얼굴선 위로, 하얀 어깨 위로 춤을 추듯 떨어지는 모양을 넋을 놓고 바라보던 강현은 손끝으로 살며시 해완의 볼을 어루만졌다.

그가 마지막으로 보았을 때보다 확실히 살이 올라 둥글어진 뺨에 사랑스러움이 터질 것처럼 차올랐다.

평생을 그렇게 바라보아도 질릴 일이 없는 얼굴이었으나, 무언가를 확인하고 싶은 필요성에 사로잡힌 강현은 아주 조심스럽게 몸을 일으켜 방 밖으로 나섰다.

층고가 높고 화려한 2층 저택 거실 한가운데 선 강현은 천천히 주위를 둘러보았다.

9년 전, 열아홉 살이었던 강현은 8개월이 넘는 시간을 이 집에서 보냈다. 두 눈의 시력을 잃고 모든 세계가 불투명한 장막에 둘러싸인 채였다.

길고 검은 속눈썹이 무겁게 내려앉는가 싶더니, 강현은 눈을 감고 몸을 반쯤 오른쪽으로 틀었다. 그러고는 속으로 숫자를 세며 천천히 걸음을 옮겼다.

꼭 스무 걸음을 걷고 눈을 떴을 때, 그는 정원으로 나 있는 전면 창 앞에 절묘하게 멈추어 서 있었다.

그렇게 오랜 시간이 지났는데도 기억은 여전히 선명했다. 좀 더 정확히 말하자면 몸에 공간이 익어 있었다. 맨 처음 이곳에 왔을 때는 갑작스러운 시력 상실에 미처 적응하지 못한 상태였기 때문에 집의 구조를 익히는 데 시간을 많이 들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그때 머물렀던 집이 지금 이 공간과 같은 곳인가?

푸른 정원이 새파란 가을 하늘에 안겨 있는 모습을 보며 강현은 멍하니 생각했다.

이 집에서 시간을 보내는 동안 강현의 곁에는 늘 사람들이 있었다. 시력을 잃은 강현의 재활을 도왔던 재활 치료사부터 집안일을 돌봐 주는 가사 도우미와 강현이 필요할 때 차를 운전해 주는 운전기사, 그리고 일주일에 한 번씩은 전문 심리 상담사 및 정신과 전문의와의 면담이 잡혀 있었다.

다만 그들은 강현의 ‘세계’에 존재하지 않았을 뿐이다.

극도로 예민해진 후각 때문에 사람을 피해 도망치듯 내려온 곳이었다. 대부분이 심리적인 문제에서 야기된 이상이었기에 시일이 지나자 누군가 제 생활을 돕도록 허락할 수는 있었지만 그뿐이었다. 희끄무레한 세상처럼 주위의 모든 사람들의 존재도 멀었다. 자초한 고립이었으니 고독한지는 몰랐으나 스스로 만든 어둠에 침잠되어 천천히 녹슬고 있다는 것 역시 알지 못했다.

누군가를 기다리게 되기 전까지 강현은 외로움을 몰랐다. 의지할 곳 없이 홀로 떠내려가는 나룻배 같은 삶이었다. 현재에 대한 의문조차 가지길 포기하고 그 전의 삶도, 앞으로의 삶도 없었다는 듯이 눈을 감고 있던 나날들이 이어졌었다.

그 모든 것이, 해완을 만나기 전의 이야기였다.

강현은 몸을 돌려 2층으로 걸음을 옮겼다. 9년 전 강현의 방은 눈이 불편한 탓에 1층에 있었음에도, 그가 가끔 시간을 보낸 곳이 또 한 군데 있었다.

가장 안쪽에 있는 방까지 걸어간 강현은 그 방문 바로 옆에 있는 좁은 문 하나를 열었다. 원래대로라면 창고로 사용할 용도였던 듯싶으나 설계에 미스가 있었는지 그 공간은 지나치게 작고 좁아서 무언가를 넣어 두기도 마뜩잖은 곳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하지만 열아홉 살의 강현은 가끔 이 안에 들어가 오래도록 나오지 않곤 했다.

변변한 전등조차 제대로 달려 있지 않은, 살짝 문을 열기만 해도 퀴퀴한 먼지 냄새가 코를 찌르는 어둑한 벽장을 강현은 조용히 응시했다.

해완을 기다리는 밤이 너무나 외롭게 느껴질 때면, 강현은 다시 이리로 돌아가고 싶은 충동을 느끼곤 했다.

그는 때로 어쩔 수 없이 물결 하나 일지 않던 고요한 마음을 그리워했다. 마음은 적막했으나 아프지도 않았다. 언뜻 보면 행복으로 착각할 수 있을 만큼 거침없이 매끄러웠다.

물론, 이제는 얼토당토않은 오착이었음을 안다. 그럼에도 너무나 오래 그런 착각에 젖어 산 나머지 관성처럼 그 어둠을 찾는 일부분을 완전히 버릴 수가 없었다.

그것에 끌려갈까 무서워, 강현은 혼자서는 이 문을 열어 보지도 못했다.

그가 바라보고 있는 어둠 위로 방금까지 눈에 담고 있었던 해완의 잠든 얼굴이 어른거렸다.

햇살과 함께 빛나던 하얀 얼굴이 제게 이끌려 이 어둠에 잠길 모습을 그려 보았다. 이 순간 처음 그려 본 모습은 아니었다. 해완을 만난 이후로, 그를 사랑하게 된 이후로 어쩌면 수없이, 그리고 강렬하게 원하던 풍경이기도 했다.

해완이 그를 절대 떠날 수 없는 곳, 누구도 강현의 곁에서 해완을 떼어 놓을 수 없는 곳, 영원한 어둠에 감싸여 붙어 있는 온기 이외에 무엇이 존재하는지는 전부 잊어버릴 수 있는 곳.

아직까지도 그 욕구가 선명했다. 언제라도 기꺼이 이 속으로 처박히고 싶을 정도였다. 조금도 발전하지 못한 스스로가 우스워, 강현의 얼굴에 저 자신을 향한 희미한 조소가 떠올랐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강현은 움직이지는 않았다.

어둠에서 한 발자국 물러선 곳에서 낯선 시선으로 열아홉의 저를 가두던 안을 바라보기만 했다.

겨우 그에게 돌아온 해완을 안고 잠에서 깨어난 오늘 아침, 바로 지금 강현이 서 있는 곳은 그가 원하던 어둠과는 절대 같을 수 없었기 때문이었다.

강현은 해완과 함께라면 영원히 이 안에 갇혀도 좋았으나 해완은 아니었다. 해완의 세상은 강현의 것마저 밝힐 정도로 환하게 아름다웠다. 잔인하게 짓밟고 때려 부수어 욱여넣기에 저 틈은 너무나 좁고 잔인했다.

강현은 손을 들어 방금까지 해완을 어루만지고 있던 제 손에 고개를 묻었다. 외로운 밤마다 눈물을 담기 위해 고통스럽게 파묻었던 손바닥과는 전혀 다른 냄새가 났다.

잠시 그렇게 서 있던 강현은 망설임 없이 제 앞에 놓인 까만 공간의 문을 닫았다. 다시는 열지 않을 것처럼 뒤돌아선 순간, 언제부터인가 제 뒤에 서 있던 해완과 눈이 마주쳤다.

해완은 강현이 왜 그 어둑한 벽장 앞에 서 있었는지 묻지 않았다. 그저, 말로 하지 않아도 전부 알고 있다는 듯, 말간 얼굴에 부드럽고 슬픈 미소를 짓고 있는 채였다.

그러나, 강현을 바라보던 해완의 얼굴이 일순 흐려졌다. 성큼 걸음을 옮긴 그는 숨죽여 흐느끼기 시작한 강현을 망설이지 않고 온 힘을 다해 끌어안았다.

강현은 해완의 어깨에 고개를 숙이고 뜨거운 눈물을 쉴 새 없이 흘렸다. 소리가 되어 나오지 않는 그 울음이 마음이 미어지도록 아파, 해완은 강현의 너른 등을 껴안고 또 껴안았다.

해완이 다시 만나자고 약속하던 날, 처음으로 울음을 알게 된 어린아이처럼 이상한 소리를 내며 울던 모습이 생생한데 언제 소리도 내지 않고 우는 법을 배웠을까 싶어서였다.

그 외롭고 낯설었을 날들. 그날들을 떠올리는 것만으로 가슴에서 격류가 울컥대며 치밀어 올랐다.

하지만 해완은 울지 않았다. 강현이 기댈 수 있게 등을 똑바로 세운 채, 떨고 있는 등을 어루만지고 뜨끈히 달아오른 눈가에 입을 맞추며, 강현에게 절실히 필요했던 말들을 단단한 목소리로 속삭이고 또 속삭였다.

“미안해.”

“너무 많이 돌아왔지.”

“노력할게.”

“노력하자, 우리.”

“사랑해.”

“정말 사랑해, 강현아.”

그러고도 강현은 한참을 울었다. 맞닿은 해완의 어깨가 흠뻑 젖고 나서야 겨우 고개를 든 강현의 눈이 맑게 그려 낸 수채화처럼 환히 비쳤다.

강현은 해완의 손을 잡았다. 두 개의 손이 다시는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단단히 얽혔다. 해완과 함께 강현은 걸음을 내디뎠다. 뒤돌아볼 생각은 영원히 사라져 있었다.

그렇게 맞닿은 손바닥을 타고 두 개의 향이 더욱 짙게 섞였다.

깊고 거대한 숲의 향 안에, 은목서 향이 안겨 있었다.

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