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리얼판타지아-120화 (120/16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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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훗..-_- b

“음, 뭐 적당한 핑계 거리도 있으니...”

깁스를 한 다리를 조심스럽게 가상현실게임용 안락의자에 내려놓은 형민은 안락의자의 머리부분에 만들어 진 둥글게 감싸여 있는 유리 위쪽 고리에 걸어놓은 게임용 헬멧을 머리에 쓰고는 의자의 등받이를 조정했다.

“흐음, 다시 빌로아 쪽으로 가야겠지?”

어차피 데이모스에서의 일도 거의 끝났다. 게임에서 빠져 나온 지 3일째 되는 오늘, 게임 상으로는 벌써 한달정도 지났으리라. 한달이면 레드쉴드 기사단이 테시미어를 공격해서 완전히 데이모스에서 지워버리기에는 충분한 시간이었다.

“다리가 빨리 나아야 할 텐데.”

깁스를 한 다리를 물끄러미 쳐다본 형민은 혀를 차며 뒤로 편안히 누웠다. 어차피 다리가 다 나을 때까지는 바깥외출을 삼가야 한다. 거기에 지금은 방학, 요즘 들어 슬슬 재미가 붙기 시작하는 리얼판타지아에 중독에 대한 우려도 있었지만, 자신은 가상현실게임의 마스터 시험을 준비하는 학생, 실기를 한다는 생각으로 그 걱정을 꾹 눌러버린 형민은 자신의 다리를 이렇게 만든 그 괴물을 떠올렸다.  재수 없는 원 교수님, 지금 쯤 희희낙락 하며 다른 학생들을 괴롭히시는데 열을 올리고 계시리라.(물론 원 교수는 현재 입원 중)

찰칵!

차가운 기계음, 형민은 헬멧 안쪽에 붙어있는 새 개의 차가운 강철판들이 두부의 관자놀이와 미간을 지그시 누르는 것을 느끼며 천천히 눈을 감았다.

[바람을 머금고 있는 그대 방랑자여 지금 카마프라하왕국은 그대를 필요로 한다]

어슴푸레 흐릿하게 보이던 시야가 서서히 또렷하게 초점이 잡혀나가기 시작하자 사이토는 침대에서 몸을 일으켰다. 지금의 시간은 밤인 듯 창문 밖은 매우 어두웠고 밤하늘에는 작은 별들이 반짝이고 있었다.

“꽤 지난건가?”

사막의 도시답게 밤에는 꽤나 쌀쌀한 기분, 거리를 지나는 사람은 거의 없는 듯 거리에 다닥다닥 붙은 가게들의 문밖에 걸어놓은 등불만이 바람에 이리저리 흔들리고 있었고, 거리는 그 등불들의 흔들림에 따라 만들어지는 작은 음영들이 곳곳에 피어나고 있었다.

“별로 활동하기에 적합한 시간은 아니군.”

사이토는 배낭에 이것저것 짐을 점검하며 조용히 읊조렸다. 가끔씩 갑작스레 자신의 방으로 침투해 들어오던 가이아도 일이 있는지 불러도 나타나지 않고, 거리로 나가자니 아무도 없는 썰렁한 거리를 혼자서 궁상맞게시리 걸어 다닐 수도 없는 노릇...

“영락없는 혼자인가...”

창가에 서서 밖을 내다보던 사이토는 잠시 후 여관 1층에 위치한 펍으로 내려갔다. 이런 날일수록 할일 없는 여행자들은 펍으로 모여 서로 정보도 교환하고 또 간단한 보드게임도 하며 시간을 축내기 마련, 물론 공부를 하기 위해 리얼판타지아를 하는 사람들이야 밤낮이 별로 필요 없겠지만, 그런 괴물 같은 인간들까지 자신의 기억속에 남기고 싶은 마음은 추호도 없는 사이토였다. 아무튼 정보도 좀 얻고 새로운 퀘스트도 없을까 하는 마음에 펍으로 내려간 사이토는 곧 적당히 구석진 자리의 이인용 테이블을 발견하고는 걸어가서 자리에 털썩 앉았다.

“여기 주문!”

“네!”

사이토를 향해 다가오는 웨이트리스, 긴 은발을 찰랑거리는 대략 24살에서 26살 정도로 보이는 성숙된 외모의 웨이트리스였다. 유저인가? 하고 잠시 머리를 갸웃거리던 사이토는 곧 위쪽에 위치한 그녀의 얼굴을 쳐다보곤 눈이 휘둥그레 해졌다.

“혹시 가이아?”

“네. 후훗”

가이아였다. 신체 나이를 다시 설정했는지 이번에는 꽤나 성숙된 분위기, 그 전까지는 대략 17살에서 19살 정도로 보이는 아가씨였다면 지금은 상당히 글래머스할 정도의 성숙한 여인의 이미지, 잠시 멍하니 가이아를 쳐다보던 사이토는 곧 정신을 차리고는 가이아에게 말했다.

“뭐야? 그건!”

“음, 아르바이트! 아르바이트에요.”

서빙용 쟁반을 자랑스럽다는 듯 내밀며 말하는 가이아였지만, 그제서야 펍 안의 남자들의 음흉한 눈길을 눈치 챈 사이토에게는 그리 좋게만 보이지 않았다.

“언제부터 시작한거야?”

“그러니까 현실로는 어제고 게임으로는 대충 이 주요.”

웬만하면 일상처럼 넘어갈 수도 있는 문제건만 사이토에게는 그녀를 보는 남자들의 눈길이 그리 기분 좋지만은 않았다. 단순히 서빙이라면 괜찮겠지만, 이 도시의 특성상 웨이트리스들의 복장은  몸을 가리는 천 조각이 매우 적었다. 일단 어깨와 가슴선 허리선 그리고 허벅지가 완벽하게 노출되는 천을 이용한 듯한 웨이트리스 복, 그런 이유에서인지 데이모스에는 유저들이 웨이트리스를 하는 일이 별로 없었다. 그런데 가이아가 그 옷을 입었다. NPC (Non player character)도 아닌데다가 몸매와 얼굴까지 황홀할 정도인 여성이 웨이트리스를 한다. 한 달도 되지 않아 데이모스의 명소가 되리라는 생각이 사이토의 머리를 진동시켰다.

“가이아! 난 네가 이거 그만 뒀으면 바래.”

“왜? 왜요?”

사이토의 말에 가이아는 당황한 표정으로 되물었다. 그녀는 그제 관리자중 한 명인 민아에게 심각하게 상담을 청했다. 아무래도 남자인 강진보다는 여자인 민아가 좀 더 확실한 조언을 해 줄 거라는 생각에 전부터 그녀에게 조금씩 조언을 구하고 있었고 그제 민아가 한 말은 사이토의 취향은 분명 성숙한 여인이라는 것이었다. 그 말에 용기를 받은 가이아는 과감히 체형 변화와 함께 섹시한 여성에 대한 남성의 반응 자료조사차 이렇게 데이모스에서 웨이트리스도 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사이토는 그런 자신의 노력도 모르고 냉담하게 그만 두라고만 말하다니... 화가 났다. 자신의 마음도 몰라주는 바보 같은 사이토...

"저기, 이 곳에는 저를 좋아해 주는 분들도 많고, 여러분들도 친절하고..."

"하아! 그래서 그걸 믿니? 아무튼 그만 뒀으면 해. 어차피 우린 빌로아로 돌아가야 하 잖아."

가이아는 종잡을 수 없는 기분으로 사이토를 바라보았다. 처음으로 자신에게 화가 난 듯 보였다. 처음, 처음이었다. 그가 자신에게 화난 듯 강요하는 모습은...

“사..사이토씨! 미워!”

“에?”

눈물방울이 송글송글 맺힌 큰 눈으로 미워! 단 한마디 남기고 안개처럼 사라져 버리는 가이아...

“설마...”

머리가 아파왔다. 가이아의 지금까지의 행동, 지금의 말, 그리고 평소의 자신을 바라보던 애처로운 눈, 가끔씩 보여주던 돌발적인 행동, 하지만 설마라고 생각하고 싶었다. 그래, AI와 인간일 뿐이야.. AI, 하지만 그의 가슴속을 찌르르 하고 치고 지나가는 건,

“아닐 거야. 아냐.”

고개를 모로 휘저은 사이토는 의자에 털썩 주저앉았다. 머릿속이 복잡해지기 시작했다. 누군가가 포크로 뇌를 휘휘 저어버린 느낌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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