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JaVu 리얼판타지아 [204 회] 2003-07-25 조회/추천 : 3701 / 45 글자 크기 8 9 10 11 12
카오스
밀레나의 얼굴에 살짝 붉은 끼가 돌면서 조용히 대답한다. 밀레나의 손을 잡은 사이토 자신 쪽으로 가까이 새워 붙인 후 이마에 조용히 입술을 가져다 대었다. 조용히 눈을 감는 은발의 여검사.... 얼마간의 시간이 지난 후 둘은 서로 오붓하게 팔짱을 끼고 천천히 마을 안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거리는 이제 슬슬 정오를 지나 햇살이 가장 강렬한 2시로 들어가고 있었기 때문에 사람들은 보통 지금 같은 시간에는 바깥으로 나가길 꺼리는 것이 보통이었다. 물론 뜨거움이야 느끼지도 않는다지만 피부색이 거무스름하게 변해 버린 캐릭터가 다시 원 피부색으로 돌아오게 하는데 지금까지는 어떠한 대책도 없는 그냥 시간이 지나길 기다려야 하는 것도 그 이유 중 하나였다.
“...”
“...”
서로 말이 없지만, 그 어느 때보다도 편안하다. 사이토로써는 정말 오랜만에 느껴보는 편안함, 그 동안의 걸리적 거리던 잡생각들은 모두 사라져 버렸다. 밀레나와 함께 있으면 그 전까지 복잡하게만 생각되던 것들이 순식간에 별 것 아닌 것으로 변해 버린다. 사이토는 브랜과 스티브에게 발키리아길드의 위치를 가르쳐 준 뒤 밀레나와 함께 천천히 그 쪽으로 걷기 시작했다. 이제 모두 도착했으니 남은 일은 데이모스를 떠나 빌로아로 가는 일 뿐이었다.
원 계획은 데이모스에서 몇 칠간 더 채류하면서 데이모스의 이곳저곳을 보여주려 마음 먹고 있던 사이토였다. 하지만 사이토는 사이토는 아침부터 바쁘게 출발준비를 서둘렀다. 그 동안 데이모스에서 너무 지체했다는 것을, 슬슬 빌로아의 저택도 궁금해지기 시작했다는 것을 핑계로 대기는 했지만 그의 속 의중은 다른 곳에 있었다. 물론 이참에 밀레나나 브랜도 빌로아의 집으로 들이기로 계획도 잡아 그것에 대한 것도 해결해야 한다. 그리고 다른 '스틱스의검'회원들 중 미카엔이 이미 빌로아에 도착해 있다고도 한다. 거기에 아이아스 길드 또한 사이토를 포기하기로 했다는 발표가 있었기에 별로 거리낄 것이 없으니 이참에 빨리 떠난다는 핑계도 있었다.
하지만 이렇게 서둘러 데이모스를 뜨는 진짜 이유는 카이엔이라던가 발키리아길드의 길드원들이 밀레나와 브랜에게 사이토에 대한 영웅적 찬사라던가 그 동안 그들에게 쉬쉬해왔던 일들을 밝히기 시작해 슬슬 낯간지럽고 귀찮아지기 시작했기에 서둘러 출발 준비를 서두른 것이다.
“그럼 이제 로그그랜져가 된 거에요?”
“응.”
“거기에 루피아까지 이기고요?”
밀레나가 계속 옆으로 달라붙어오며 물어온다. 어디서 주워들었는지 밀레나는 루피
아의 일에서부터 테시미어길드에 대한 일까지 소상히 알고 있다. 아마 카이엔이 밀레나에게 나불거렸으리라. 웬만하면 이들에게까지는 알려지지 않았으면 하는 일들이었건만 카이엔이 자신의 허락도 없이 입을 놀린 것이다. 유명하다는 것은 귀찮아 진다는 말과 일맥상통이다.
일부 중 혹은 꽤 많은 사람들이 유명세를 즐긴다는 말이 있기는 하지만, 사이토에게는 귀찮을 뿐이다. 이런 유명세를 처음 겪어 본 것이라면 한편으로 우쭐하기도 하고 즐겁기도 했지만, 미안하게도 사이토에게는 처음 있는 일이 아니었다. 현실에서의 사이토 즉 형민은 과거 꽤 유명했었던 적이 있었다. 한 때 무술을 배우는 것에 심취했던 형민, 그 때는 태권도니 합기도니 유술이니 하며 이것저것 마구 손을 대보던 시절이었다. 그에게 있어서 그때는 참으로 질풍노도와 같은 시기였다. 무술에서의 대결이라는 것이 어떻게 보면 마약과도 같은 것, 계속해서 강해지며, 위험을 담보로 한 대련을 즐기던 형민은 어느 날 자신을 되돌아보았다. 전에는 꽤 즐겁기도 했던 유명세가 귀찮고 무서워지기까지 했다.
남은 것이라고는 몸에 남은 수 많은 보이지 않는 상처, 자신의 유명세를 알고 찾아오는 도전자들... 원래 무술이라 하는 것은 무조건 실력으로만 따질 수 있는 것이 아니었다. 누구누구는 정신적인 면이 가장 중요하다. 또 누구누구는 그 사람만의 필살기가 중요하다 같은 말들도 있었지만, 사이토가 생각하기에 대결이라는 것에서 무시 못할 비중을 차지하는 것은 바로 운이었다. 종잡을 수 없이 언제 어떻게 다가올지 모르는 운... 그것은 그에게 악으로도 다가올 수 있는 무서운 것이었다.
한 때는 그 운을 즐기기도 했지만, 나이를 먹어가면서 그 것이 얼마나 위험한 짓인지 알게 되었다. 그래서 그 때부터 그 전까지 알고 지내던 무술계 사람들과의 교류를 모두 끊어 버린 채 잠적해 버렸다. 그것이 이미 근 4년...이제 그들에게 형민이란 존재는 지워져 있었다. 유명세라는 것 그것은 사이토에게 있어서 무섭고 귀찮은 것이었다.
생각에 잠겨 있는 사이토에게 브랜이 다가왔다.
“둘이서 뭐하냐?”
“아.. 이것 저것..”
브랜... 그러니까 혜인과 알게 된 계기 처음에는 상당히 웃기는 일화가 있었다. 잠적하고 있던 형민은 한 동안 그를 괴롭히는 대련에서의 후유증에 시달리게 되었다. 낮에는 괜찮다가 밤만 되면 찾아오는 고통... 할 수 없이 형민은 같은 동네에 위치한 무술도장의 잘 알고 지내던 사범에게 도움을 청하러 들르게 되었고 거기서 만난 것이 혜인이었다. 당시 그 무술도장에서 가장 강하다고 하던 혜인은 대뜸 형민에게 대련을 청했고, 그 대련을 계기로 서로를 알게 된 것이다. 그러나가 직업을 구하기 위해 다시 다녀야 했던 전주대학교에서였다. 의무교육이 사라진... 그렇지만 다닌다고만 하면 언제든 무료로 다닐 수 있는 교육제도로 인한 대학교생활,
아무튼 당시에 다시 만난 혜인은 상당히 달라져 있었다. 예전에 그 날카롭던 눈빛이라던가 호전성은 많이 사라져 있었다. 많이 생소했던 전주대학교 게임마스터학과에서 둘은 어쩔 수 없이 친구가 되었고, 그렇게 해서 둘은 함께 다니게 되었다.
“꽤 유명하더라?”
“아아.. 나도 조용히 살고 싶다구..”
“그러냐?”
사이토의 과거에 대해 잘 모르는 밀레나로써는 어리둥절한 눈빛으로 둘을 쳐다보았고, 둘은 세상 다 산 노인네마냥 서로 어깨동무를 한 채 허허로운 웃음을 지을 뿐이었다.
다음날 아침 넷은 출발 준비를 마친 채 데이모스의 입구로 나섰다. 인원은 사이토를 포함해서 스티브와 밀레나 그리고 브랜... 카이엔도 따라가고 싶다고 칭얼거렸지만, 그 의견은 발키리아 길드의 안방마님이시자 진정한 실세이신 마사무네의 절대 반대에 부딪쳐 조용히 사라졌다.
“다음에 또 보자.”
“그래.”
카이엔과 짧은 인사를 나눈 사이토는 배웅 나온 몇몇 친하게 지내던 발키리아 길드원들과 일일이 인사를 나눈 뒤 일행들을 이끌고 성문을 나섰다. 다행이라고 할 만한 것은 그 전 아리유에서 멀린에게 얻어 둔 게이트스톤들이 있었기에 아리유 까지는 편하게 갈 수 있다는 점이었다. 그렇지만 일단 게이트 스톤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각 도시의 초보자 경계까지는 걸어야 했기 때문에 약간의 여행준비를 한 상태였다.
“출발 하자.”
사이토의 외침에 따라 일행들은 하나 둘 말을 이끌고 데이모스를 나섰다.
[일있으면 연락해라. 내 핸메(핸드 메신저) 번호는 XXX-XXXX다.]
데이모스 성문을 나서는 사이토의 머릿속으로 카이엔의 메시지가 들려왔다. 뒤돌아보니 꽤나 아쉬운 표정...
[잘있어.]
[그래...]
데이모스의 초보자 필드를 넘기 위해 길을 가며 일행은 서로 잡담으로 시간을 보냈다. 가장 선두는 브랜의 회색 바탕의 검은 점박이 말이 있었고 가운데로는 스티브의 회색말, 그리고 가장 뒤쪽으로는 사이토와 밀레나의 검고 하얀 말이 나란히 가고 있었다.
아직은 데이모스의 날씨를 완전히 벗어나지 못했는지 길가 대로 옆으로는 튼튼한 돌바닥으로 된 대로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모래땅이 황량하게 펼쳐져 있었다. 흡사 오즈와 마법사에 나오는 길과 같은 풍경...
“그런데 그 가이아라는 아이는요?”
“아아... 일이 있다고 나갔어.”
“일?”
밀레나가 물었다.
“음... 메인 컴퓨터잖아.”
“으응...”
별 생각 없는 듯 대답하는 사이토, 그러나 밀레나의 얼굴은 뭔가를 생각하는 듯 조용히 앞을 응시하고 있었다.
“무슨 생각해?”
“아뇨... 그냥 이것 저것..”
“그래...”
잠시 말이 끊긴 둘, 방금 전 사이토의 표정을 살폈던 밀레나는 그 전에 들었던 가이아에 대한 이야기를 다시 곰곰이 생각해 보았다. 아무리 컴퓨터라지만 신경이 쏠리지 않는다면 거짓말이다. 어쩌면 자신보다 더 오랫동안 사이토와 게임을 함께 했으리라. 의심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가이아에 대한 사이토의 생각을 좀 더 알고 싶었다. 그렇지만 막상 탁 터놓고 물어보자니, 왠지 그를 못 믿는 듯한 인상을 풍겨서 꺼려진다.
“하아...”
밀레나가 뭔가 고민이 있는 듯 한숨을 내쉬자 사이토는 고개를 갸웃하며 밀레나가 혹 고민에 대해 말할까... 그녀를 빤히 쳐다보며 다음말을 기다렸고, 밀레나는 사이토가 자신을 쳐다보고 있는지도 모른 채 계속 생각에 잠겨갔다.
“으음...”
사랑만 있으면 뭐든지 해결된다는 것은 왠지 거짓처럼 느껴졌다. 현실에서의 사랑은 상상속의 사랑과 엄연히 틀리다. 함께 하다보면 서로에게 묻기 꺼려지는 것들이 생겨나기 마련이고, 이런 것들을 터 놓고 이야기 할 수 있는 커플은 그렇게 많지 않다. 그 속에서 서로 간에 어떤 생각의 골이 생기는 것일까... 밀레나의 머릿속은 복잡해져만 갔다.한편으로는 아무리 여자라지만 AI라는데 설마 하는 마음이기는 했지만 또 마음 한구석으로는 가슴속이 계속 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