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JaVu 리얼판타지아 [209 회] 2003-07-31 조회/추천 : 4943 / 42 글자 크기 8 9 10 11 12
카오스
“에잇..젠장, 어떻게 된 거야.”
유리는 도통 열리지도 않는 이 재수 없는 검은 상자를 탁자위에 내동댕이치며 투덜거렸다. 지금 그녀는 이 상자로 인해서 꽤나 심각한 고민에 빠져 있었다. 왠지 불길한 것을 주워온 듯, 아니 이미 불길한 물건이었다. 이 물건을 불로소득으로 얻은 뒤 데이모스에 돌고 있는 청천 벽력같은 소문은 그녀로 하여금 초필살 계급상승계획에 크나큰 차질을 주었다. 현재 데이모스는 때 아닌 무차별 PK(Player killer) 에 잔뜩 얼어 있었다.
들리는 소문에 의하면 이전 무급운영자의 스킬 실수로 인해 불로 소득을 얻었던 유저들을 중심으로 그 무차별 살인이 자행 된다고 한다. 그들에게 죽었던 이들의 말에 따르면 그들이 찾고 있는 것은 아무 광택도 없는 검고 네모난 상자... 지금 그녀가 소유하고 있는 물건과 너무나 흡사했다. 아니 .. 그녀는 부인하고 싶었지만, 그들이 찾고 있는 물건은 지금 자신의 발 아래 떨어진 이것이 맞는 듯 했다.
“신고할까?”
천하의 유리가 겁을 집어 먹고 벌벌 떨 것은 아니지만 리얼판타지아의 무급운영자가 끼어들 정도의 일이었다. 지금까지 게임생활을 하면서 단 한번도 보지 못했던 베일에 싸인 무급운영자... 그렇지만 그녀는 곧 고개를 가로 저었다. 신고한다면 리얼판타지아사에서 자신을 보호해 줄 수도 있겠지만, 무급운영자도 막지 못한 이들이었다. 거기에 신고하는 즉시 줏은 아이템도 모조리 회수당할 것 같다. 또 그들이 자신에게 올 때까지 게임사에서 지켜줄 수도 없을 노릇, 한편으로는 차라리 캐릭터를 지우고 새로 키울까도 생각했지만, 또 그것 또한 마음에 들지 않았다. 이 캐릭터를 키우는데 게임 시간으로 거의 3달간을 죽어라 키워댔다. 거기에 아이템도 아까워지는 그녀... 그러나 또 그들을 그냥 무시하기에는 그 살인자들의 능력도 마음에 걸렸다. 그들은 사람들을 죽이기 전 그들의 아이템들을 전혀 아무런 제약 없이 훑어 보았다고 한다. 그 소유자가 말해 주기 전에는 추측만을 할 수 있는 그것들을... 그냥 둘러보듯이 알아냈다고 한다. 그런 게임의 법칙에 어긋나는 이들을 강제하지 못하는 무능한 게임사...
“끄응, 에잇! 머리아파 죽겠네. 설마 날 찾아낼려구... 차라리 멀리 도망치는 게 제일 좋겠다.”
결론을 내린 그녀는 서둘러 짐을 챙겼다. 그녀 자신도 게임 내에서 맺은 인연과 인맥... 그리고 연줄을 따지자면 아무도 무시 못 할 세력들을 많이 알고 있었다. 그것은 자신감... 또한 거의 모든 아이템은 은행에 맡겨져 있기에 따로 챙길 것은 없었다. 오랜만에 여행이나 해 본다는 생각과 자기 자신을 믿는 마음으로 불안함을 덮어버린 유리는 앞으로 신세질 수 있는 자신의 연줄들을 머릿속에 하나하나 꼽아 보며 입가에 미소를 지었다.
“도착이군.”
말에서 내려선 사이토는 언제 봐도 웅장하게 자신을 압도해 오는 거성을 바라보며 중얼거렸다. 아리유... 거대한 카마프라하 왕국의 중앙 수도인 이곳... 고성의 위로 보이는 구름들은 고성의 첨탑 꼭대기를 중심으로 한 양 휘돌아 소용돌이 치고 있다. 그 한가운데로 보이는 거대한 양피지 조각...
[카마프라하 무투회 개최!]
“후흐, 벌써부터 가슴이 두근거리는군.”
사이토의 어깨너머로 브랜의 목소리가 들려온다.
“그러냐.”
약간 띠꺼운 듯한 사이토의 비이냥, 다 이유가 있는 법이었다.
“약속대로 출전해야 한다.”
“그래, 알았자 자식.. 귀찮게스리...”
어제의 약속이었다. 데이모스의 경계에서부터 게이트 스톤을 사용해 쉴 새 없이 아리유의 경계까지 왔다. 그 날 저녁 그 마을 중앙 게시판에서 확인한 무투회 이벤트... 카모프 왕국과의 개전 D-day 100일을 준비한다는 명목 아래의 무투회였다. 물론 전쟁이 시작된다면 자신도 한번 정도 출전해 볼 생각은 있었다. 리얼 판타지아의 전쟁 이벤트... 그것은 여느 일반적인 전쟁이 아니었다. 리얼판타지아에서만 볼 수 있는 세계 유일의 대 장관이라고 한다. 이미 몇 세기 전에 사라진 대규모 인원의 대 충돌의 장관... 전쟁 이벤트가 시작되면 리얼판타지아는 변한다. 일단 죽음의 개념이 틀려진다. 전쟁 기간에 죽은 이들은 전쟁이 끝나는 순간 다시 살아나게 된다. 더 많은 유저들의 전쟁 참여를 바라는 리얼판타지아사의 전략, 그럼으로 인해 평소 얌전히 사냥이라던가 쇼다운(대결)만 하던 유저들은 눈에 불을 켜고 전쟁에 달려든다. 일년에 한번 있는 이 전쟁이벤트... 이미 그들의 기억 속에서는 현실의 전쟁은 사라진지 오래였다.
“그 재수 없는 것들은 잡는데 너도 일조를 해야지.”
“뭐.. 그렇기는 하지만...”
이번 무투회의 특징은 카모프 왕국과 동시에 열린다고 한다. 두 왕국의 최강자들이 참가하는 무투회... 그렇지만 브랜이 이렇게 열까지 내며 무투회에 참가하려는 이유는 카모프왕국의 유저들의 대부분이 북미인 이였기 때문이다. 물론 그 국가의 선택은 자유이기에 그쪽 나라에도 대한민국인 일본인등이 있고 이쪽에도 미국인, 유럽인, 아프리카쪽 사람들도 있었지만, 아무래도 서버의 특성상 그 쪽은 미국인들이 많았다. 거기에 그쪽 나라의 거대 길드들은 거의 미국인들의 소유... 무투회에 나올 사람들은 다 거기서 거기일 것이다.
지금은 대 우주병기가 완성되고 있는 시기이다. 더 이상 군인은 소수만이 필요할 뿐... 2011년... 세계의 경찰국가라 표방하던 미국은 드디어 대 위성 요격용 레이저를 완성하기에 이른다. 온 세계의 전율... 미국의 핵과 그 횡포를 견제하기 위해 핵을 개발해오던 각국은 절망했다. 당시까지 나왔던 최신의 수소폭탄의 위력에 거의 몇 만 배에 달하는 효과를 지닌 무기. 미국의 발표는 미래에 혹시나 있을 위성충돌에 대비해 요격용으로 개발했다지만 세계 그 어느 나라도 그 말을 믿지는 않았다. 그 후로 이어진 미국의 거의 초법적인 횡포... 하긴 나라하나 말아먹는 수준이 아닌 하나의 대륙.. 아니 지구 하나를 통째로 엎어버릴 수 있는 무기까지 지닌 미국의 횡포는 극에 달해 있었다. 미국은 그 권력을 이용해 요즘 한창 진행되고 있는 우주계발계획을 자신들 마음대로 구워삶고 있다. 그렇기에 아시아쪽과 유럽쪽의 미국에 대한 인심은 이미 한참을 돌아서 있었다. 이제는 미국 자체에 환멸을 느끼는 세계인 들이었다. 미국인들은 자신들이 마치 선민들인 양 세계 최고권력 국가라는 마약에 취해 자국의 실수도 재대로 알지 못하는 실정이었다. 일부에서는 자중하라... 또는 현 미국의 행태를 비판하는 미국인들도 있었지만, 그들도 약간 기준을 넓혀 바라보면 그놈이 그놈이었다. 아무튼 그런 카모프왕국과의 대결이었다. 그럼으로 브랜은 이렇게 흥분해 있는 것이고 또 사이토까지 말려들어 있다. 그날의 실수로 인해...
"국제 스트레스 해소의 시간이다! 하하하..."
"그래 그래.."
귀찮을 따름이다. 이 따위 것... 하지만 사이토도 어느정도 흥미가 가는 것이 사실이었다. 그가 참가한다고 한다. 브랜이 누차 말하던 그 케인이라는 인물... 그 인물을 만나 브랜이 더 이상 기억하지 못하는 부분에 대해서 알고 싶었다. 단순한 호기심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지만, 브랜의 말에 따르면 정말 엄청난 전투능력을 가진 이라고 한다. 끓어오르는 호승심... 사이토는 어쩔 수 없는 무술인이었다. 요즘 들어 리얼판타지아를 하면서 이전에 잊었던 몸의 감각이 다시 살아나는 듯 하다. 아마 신체는 약해지고 있지만, 머리는 아직 기억하는 듯... 하나 하나 일깨워지는 이전의 감각들은 사이토에게도 그리 나쁘지만은 않았다.
“같이 가자 브랜!”
“얼른 따라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