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JaVu 리얼판타지아 [210 회] 2003-08-06 조회/추천 : 3125 / 42 글자 크기 8 9 10 11 12
카오스
밀레나의 손을 잡고 사이토는 천천히 아리유의 성문으로 들어섰다. 대회까지는 앞으로 한달이 남았다. 물론 게임시간으로 한달이었기에 현실로는 대략 2일하고도 몇 시간... 일단 짐을 푼 다음 출전 신청을 한 뒤 여관에서 로그아웃을 하기로 계획 했기에 일행은 예전 사이토가 머물렀던 여관으로 발길을 향했다.
“아이구...”
게임기기에서 내려오던 형민은 다리가 뻣뻣하게 굳은 느낌에 신음을 흘리며 벽을 잡았다.
“너무 오래 했나..”
머리는 얼음물을 쏟아 부어 넣은 듯 맑디맑았지만 몸에는 힘이 들어가지 않는 나른한 느낌이었다. 가상현실 온라인을 너무 많이 하면 흔히 나타나는 일시적인 증상... 가상현실은 현대 사회에 신체와 정신의 불일치라는 새로운 병도 가져다주었다. 다행히 다리의 상처는 이전보다 많이 나아 있었다. 의사의 말마따나 일주일 이상 걸린다고 하더니 형민의 회복력이 평범 보다는 위인 듯... 다행일 따름이었다.
“이정도면 깁스는 풀러도 되겠는데...”
허벅지의 상처가 어느 정도 안정권에 들어섰다고 생각한 형민은 내일은 병원에 가서 깁스를 풀러 달라고 해야겠다고 생각하며 자리에서 일어났다. 주방으로 향하는 형민... 게임도 게임이지만 식사도 중요했다. 연구 발표에 따르면 장시간의 가상현실에서 필요한 실제 칼로리는 평소생활의 절반가량에서 1/3 이하라고 한다.
아무리 뇌가 활발하게 움직인다 해도 일단 몸의 활동이 없으니 그러하겠지만, 그 부작용은 가상현실이 게임에서만이 아닌 사회 전반적으로 쓰이는 현대사회에는 꽤나 큰 사회적 문제로 대두되고 있었다. 일단 학생들의 학업을 도와주는 가상현실은 그들의 뇌에 너무나도 과도한 지식을 주입하게 되어 뇌 이상을 일으키는 부작용을 낳았다. 그리고 과도한 가상현실의 사용자들이 공통적으로 겪는 운동 부족... 몇 칠전 메스미디어에 소개된 어떤 이는 몸무게가 44킬로였다고 한다. 키는 186센티 이면서... 또한 건강과는 상관이 없지만, 반사회단체들의 회합이 가상현실 안에서 많이 진행된다고 한다. 하지만 형민은 아주아주 평범한 대한민국의 대학생일 뿐... 그에게 그런 것은 남의 일이라 생각할 뿐이다. 그에게 직접 닥쳐오기 전에는 신경 쓰지도 않는다.
“아, 시켜다 먹을까?”
냉장고를 열어보던 형민은 너무나도 황량한 냉장고의 풍경에 우울증이 걸릴 듯한 기분이었다. 물론 예전부터 느끼던 것이었지만, 무작정 냉장고를 열어보았다가 보이는 거라곤 유통기한 지나 보이는 썩은 오이 쪼가리 같은 것들이 발견될 때에는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음식물들이 필요하겠군. 쳇...”
먹는 게 귀찮아지는 폐인 증세였다. 형민은 온라인을 통해 근처 마트에서 야채등을 주문 한 뒤 요즘 들어 뜸했던 시험준비를 위해 책상에 앉았다. 근처 공부방에 가서 가상현실기를 이용하면 더 오랜시간 공부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리얼판타지아를 너무 오래 한 탓인지 시간관념이 가물가물 해 진다. 이럴 때는 고전적인 방법으로 공부하는 것이 상수...
“보자... 기억이 가물가물하네.”
형민은 애써 기억을 다시 되살리며 공부에 집중했다. 시험까지는 5달이 남았다.
“오빠? 뭐해요?”
“응... 공부..”
잠시 쉰다던 사이토가 다시 게임으로 접속하자 막 로그아웃을 하려던 밀레나는 메시지를 이용해 물었다.
“로그아웃 하신다면서요.”
“아... 공부하려고 했는데, 영 안들어오네. 그래서 그냥 들어왔어. 근데 스티브씨랑 브랜은 어디 갔니?”
“여자 꼬신다고 둘이 히히덕대면서 나갔어요. 그런데 교제는?”
“변환시켜서 가지고 들어왔지.”
너무나 오랜만에 잡은 책이었기에 형민은 곧 싫증이 나버렸다. 리얼판타지아에 들어와 공부를 해야겠다는 생각에 사이토는 근처 아이템 상점에서 빈 책을 하나 구해다가 교제를 그대로 복사해서 옆구리에 끼었다. 그 과정이 조금 난해하기는 하지만, 게임운영자를 공부하는 그에게는 꽤 쉬운 작업 게다가 리얼판타지아는 간단한 교제라던가 텍스트는 그대로 게임 안으로 가져와서 볼 수 있는 방법이 많았다.
“저 로그아웃 할께요.”
“응...”
아리유는 맑은 하늘이었다. 무투전을 앞두고 강자둘이 하나 둘씩 모여들고는 있다지만, 이 넓은 아리유에 그 정도 인원은 아무것도 아니었다. 책을 바리바리 싸들고 중앙 분수가 있는 공원으로 나선 사이토는 적당한 벤치를 골라잡고 책을 펼쳤다.
“되...될 리가 없잖아.”
집중력 부족이었다. 오랜만에 책을 잡으려니 자꾸 손이 엄한 곳으로 움직인다. 한손에는 책을 펴들고 한 손에는 헬리오스를 장난스럽게 돌리는 사이토... 산만함의 극치였다.
“NPC 관리라...”
책 후반부의 작은 목차이다. 게임 내의 NPC들의 종류와 대략적 개념, 그리고 그 구조를 설명한 부분, NPC들의 AI 수준에 대한 부분에서 자연스럽게 가이아가 떠올랐다. 어떻게 잘 되겠지 하고 맘 편히 생각하기에는 이미 너무 커져버린 가이아의 대한 모든 것들...
“기분 나빠...”
사이토의 사고 기준에는 AI나 안드로이드 따위를 사랑할 수 있다는 개념은 없었다. 아무리 사랑이 때와 장소 안 가리고, 아무 때나 달려든다 해도, 애초에 인공물과의 사랑 따위는 상식으로도 납득할 수 없었다. 그러나 지금 사이토가 느끼고 있는 감정은... 서서히 아려오는 가슴이었다.
“기분...나빠.. 제기랄!”
인정하고 싶지 않았다. 그 자신에 대한 혐오감이 몰려왔다. 설령 가이아가 인간이라고 해도, 그의 사전에 양다리 따위는 없었다. 지금의 감정, 밀레나에게도 사랑의 감정을 느낀다. 거기에 가이아에게도 지금까지 한번도 가져보지 못한 야릇한 감정을 느낀다. 무심결에 외면하던 것들이었다. 그러나 가이아와 한동안 떨어지게 되자 그녀에 대한 생각들이 계속해서 사이토의 머리를 아프게 했다.
“사이토씨 되십니까?”
문득 그의 앞으로 남자의 발이 와 멈췄다. 딱딱한 대리석의 질감이 느껴지는 망토 자락... 가슴을 장식한 장신구는 평범한 듯하지만 은은한 광채가 느껴지는 것이 보통 물건이 아니었다. 특별한 무기를 지니지 않은 남성... 머리는 잘 정돈한 듯 짧은 머리카락이 날카로운 인상을 준다.
“강진이라고 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