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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판타지아-147화 (147/169)

DeJaVu   리얼판타지아 [211 회]  2003-08-08 조회/추천 : 2149 / 20   글자 크기 8 9 10 11 12

카오스

눈매가 꽤나 예리한 이였다. 특히나 목과 어깨를 장식한 가느다란 금색 장신구가 눈에 띄는 이...꽤나 핸섬한 듯 하지만 굳은 인상이다.

“그렇습니까... 그런데 무슨 일로...”

상대의 의중을 알 수 없는 사이토는 눈을 가늘게 뜨며 물었다. 지금까지 게임을 하면서 이런 식으로 다가온 이에 대해 그리 좋은 기억이 없는 사이토였다. 단연 경계하는 눈초리...

“리얼판타지아사에서 가이아의 담당을 맡고 있는 사람입니다. 가이아의 일로 긴히 상담드릴 일이 있어서 이렇게 찾아왔습니다.”

“아...”

사이토는 가이아라는 말에 깜짝 놀라 일어났다. 근래 들어 연락도 없었기에 꽤나 걱정하던 차였다. 서둘러 옆자리를 마련해 주자 강진이라는 남자는 사이토의 옆에 앉았다.

“가이아의 일로 상의 드릴 일이 있습니다.”

“말씀하시죠.”

강진이 꽤나 심각한 표정으로 첫 마디를 끊었다. 긴장하는 사이토... 그도 조금 걸리는 것이 있었기에 그의 말에 집중했다.

“저번... 그러니까 2일전쯤에 가이아가 능력을 사용해 사이토씨를 도와드린 것을 알고 있습니다.”

현실 시각으로는 대략 2일이리라. 사이토는 고개를 끄덕이며 다음 말을 기다렸다. 그 당시 그는 정신이 하나도 없었기에 후에 카이엔에게 자세한 이야기를 들을 수 있었다. 확실히 가이아가 능력을 남용한 것을 알고 있었기에 한편으로는 그 부분을 걱정하던 차이다.

“가이아의 AI는 현재 휴면 상태에 있습니다. 저와의 약속이었죠.”

“그렇군요.”

저절로 한숨이 나오는 사이토...

“하지만, 이대로 계속 가이아를 잡아 두고 있을 수는 없습니다. 리얼판타지아 시스템에 끼칠 악영향은 이전에 겪어 보았으니까요. 이대로 방치한다 해도... 또 그녀에게 자유를 준다 해도...”

“악영향이요?”

사이토가 되물었다. 강진의 말에 따르면 이번과 같은 일이 예전에도 있었다는 것이었다. 자신이 모르는 그녀의 과거를 묻는 양 사이토는 조심스러웠고... 강진은 한숨을 내 쉰 뒤 그에 대해 설명해 주었다.

“아직 제가 입사하기 전의 일입니다. 당시는 리얼판타지아를 서비스한지, 5년째 되던 해... 당시에도 가이아는 지금과 같은 모습으로 존재했습니다. 그런데 어떤 이유에서인지는 몰라도 그녀는 갑자기 이상현상을 일으키면서 시스템을 부셔나가기 시작했죠. 후우...죄송합니다. 용건은 이게 아니었군요. 아무튼 가이아의 데이터를 검색하던 중, 사이토씨에 대한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이렇게 찾아 온 것이지요.”

더 이상 말하기 싫다는 듯 강진을 말을 끊었다. 그에게 있어 사이토는 난입자였다. 결코 환영하고 싶지 않은 이... 당시의 가이아가 어떻게 되었는지 그에게 말하고 싶지는 않았다. 단지 자신은 부탁을 하고 싶을 뿐...

“제가 이렇게 찾아온 이유는 단 하나입니다.”

뜸을 들이는 강진... 이미 사이토는 책을 내려놓았다. 그가 하지 않은 가이아의 뒷이야기는 대충 알 듯 하다. 그리고 그가 원하는 것이 무었인지... 강진은 사이토를 뚫어져라 노려보았다. 그도 이런 식의 말은 정말 싫었다. 그렇지만 애써 그녀를 위한 일이라 자신을 위로하며 마음을 다잡았다. 기분 같아서는 가이아의 내부를 건드려 그의 대한 것을 지워버리고 싶지만 그것도 너무나 위험한 일이다.

“그녀의 기억 속에서.. 아니 사고 속에서 잊혀져 주시길 바랍니다.”

침묵에 빠진 사이토였다. 상당히 차갑게 말하고 있는 강진이었지만 그의 눈 속에는 간곡함이 어려 있었다. 그도 한편으로는 가이아를 아끼는 녀석이리라. 어쩌면 그는 가이아에 대한 그의 감정을 끊어 주기 위해 운명이 내려 보낸 것이리라. 그렇게 느껴졌다.

“알겠습니다.”

사이토는 눈을 감고 또박 또박 대답했다. 그도 이런 식의 감정은 위험하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감사 합니다. 그럼”

강진은 벤치에서 일어났다. 어차피 오래 있을 생각은 없었다. 휴면상태라 하지만, 가이아가 눈치 챌 수도 있었다. 그것은 사절이었다. 강진이 꾸벅 인사를 한 뒤 잠시 후 벤치를 떠나가자 사이토는 자리에 털썩 앉았다.

“핫.. 내가 왜 이러지.”

헛웃음만 자꾸 나오는 사이토였다. 그에겐 아무런 변화는 없다. 하지만 마음속의 공허함은 계속 그의 심장을 얇게 할퀴고 지나간다. 이성과 감정의 불균형이다.

한 여인이 길가 노점상에서 과일들을 사고 있었다. 요리 스킬을 올리는 것이 아니면 그리 환영받지 않는 물품인 과일이었다. 그래도 심심찮은 소득을 올려주는 과일 노점상이었기에 주인은 이 자리에서 꽤 오랫동안 장사를 해 왔다. 여인과는 오랫동안 거래를 해온 듯 익숙하다는 얼굴로 그녀가 잘 쓰는 과일 몇 가지를 챙겨주고 있었다.

“잘가요.”

“네.”

과일이 든 작은 가방을 손에 든 여인은 손을 흔들며 그 곳을 떠나갔다. 여느 때처럼 손을 흔들어 주는 노점상주인... 언제나 일상과 같았다.

“저 여자는 항상 같은 시각에 오는군.”

과일 노점상 옆에서 시약 장사를 하던 유저는 과일 노점을 하는 그의 친구를 향해 말했다. 그녀는 참 비밀이 많은 여자였다. 지금껏 거래를 해왔음에도 그녀의 이름을 아직 모른다. 언젠가 한번 물었었는데 그녀는 난처한 얼굴로 거절 했다. 칠흑과 같은 검고 고운 허리까지 내려온 생머리가 인상적인 여인이었다. 눈은 선한 빛이 흐르는 얇은 쌍꺼풀이 아름다움 여인, 전투에는 관심이 없는 듯 무기를 들고 다니는 것을 한번도 본적이 없다. 뭐 어차피 그런 이들은 꽤 많이 존재했기에 그에 대해서 이상하게 느끼는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그녀의 행동 패턴은 이제는 거의 외울 정도로 잘 아는 그들이었다. 그녀는 이 곳에서 두 블록 떨어진 작은 단독 주택에 살았다. 솔직히 관심이 가는 여인이었기에 한번 쫓아봤기에 아는 사실...

“이제 술집에 들러서 작은 와인 하나 사고 집으로 돌아가겠지?”

“그렇겠지.”

이미 그녀의 행적을 꿰고 있는 둘이었다.

그들이 지금 한담의 주제로 올리고 있는 그녀는 막 작은 병에 든 와인을 사 가방에 넣고 있었다. 술집 주인을 맡고 있는 NPC남성 또한 그녀를 아주 잘 안다는 듯 연신 얼굴에 웃음을 지우지 않는다.

“오카리나씨, 언제나처럼 20실버요.”

“네. 하프씨... 그럼.”

돈을 셈한 그녀는 꾸벅 인사를 하고 술집을 나섰다. 시간은 저녁이 다되어 가고 있었다. 서두르고 싶지는 않았지만, 이 시간만 되면 항상 걸음이 빨라졌다.

“다 끝났네.”

식탁위에 두개의 초가 어두운 방안을 몽환적으로 밝히고 있다. 탁자 위로는 그녀가 정성껏 만든 듯한 음식들이 놓여있고, 두 개의 잔에는 붉은 와인이 빛에 반사되어 영롱한 빛을 뿌린다.

“하...아.”

언제나였다. 그녀는 언제나 저녁이 되면 이렇게 자리를 마련한다.

누구를 기다리는 것일까...

“훗...”

곱게 차려입은 물빛 원피스가 아름답다. 턱을 괴고 맞은편을 의자를 멍하니 쳐다보는 그녀... 아쉽게도 언제나 그 자리는 항상 혼자이다.

[오카리나씨... 잠시 이야기 좀 했으면 좋겠습니다.]

그렇게 한 시간이나 지났을까... 그녀의 머릿속을 울려오는 한 메마른 남자의 목소리, 익히 알고 있는 듯, 그녀는 인상을 찌푸리며 몸을 바로 새웠다. 그녀는 지금 시간을 방해받는 것을 가장 싫어했다. 그 누구라도 방해할 수 없는 그녀의 시간...

“뭐지요?”

공허한 방안 누군가 있는 듯 그녀는 어딘가를 쏘아보며 나직이 말했다. 순간 방안의 대기가 그녀의 기분을 대변하는 듯 급변하기 시작했다. 엄청난 양의 압력이 온 대기를 짓누르는 듯 부르르 떨린다. 누군가가 이 방안에 들어서는 순간 그 캐릭터는 압사로 게임오버 될 것이다. 그러나 그 와중에도 그녀의 테이블만은 미동도 없었다. 기이한 현상... 게임에 법칙에 엄연히 반하는 것이었다.

“부탁할 것이 있습니다. 와주세요.”

간곡한 어투... 그녀는 잠시 생각하는 듯 눈을 감았다. 그는 항상 자신을 위해 주는 이였다. 물론 그녀에게는 단지 친구일 뿐이지만, 그의 부탁이라면 거절하기 힘들다.

공기가 멈췄다. 테이블 위의 촛불을 나직한 숨으로 꺼뜨리는 그녀... 잠시간 이 의식과 같은 행동은 미뤄야 할 듯 하다. 몇 십 년... 아니 몇 백 년을 이어오던 하루였다. 그가 부탁이라는 말까지 꺼낸다면 짧게 끝날 일은 아니리라. 몇번 도와 준 적도 있었기에 그리 새롭지만도 않았다.

"보고 싶어요."

언제 다시 시작하게 될 지...  그녀에게 망각의 시간이라는 것이 허락되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녀에게 그 시간들은 모두 하루와 같은 일로 다가온다. 그래... 그가... 보고 싶었다. 그녀의 생명이었던 이가... 그녀에게 영혼을 선물해준 그가...

“흑...”

소중한 눈물이 흘렀다. 이것 또한 그가 가르쳐 준 것, 슬픔이라는 이름을 지녔으나, 그것 또한 그녀에겐 소중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만큼 슬픈 것... 어둠 속에 녹아들 듯 사라져갔다. 주인이 떠난 방 한 편, 누군가의 초상화만이 그 곳을 지키듯 그녀가 사라진 곳을 멍하니 쳐다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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