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JaVu 리얼판타지아 [218 회] 2003-08-15 조회/추천 : 53 / 2 글자 크기 8 9 10 11 12
카오스
상자를 이리저리 돌려보던 사이토는 잠시 후 상자를 배낭에 넣었다. 어차피 여기서 나오는 물건의 90프로는 거의 약탈일 것이다. 아무리 품위 있고, 예의가 바르다 해도 그들의 명함은 PK... 플레이어 킬러들일 뿐이다. 더 이상 꼬치꼬치 캐물어 봤자 관계만 서먹해질 뿐이다. 사이토이기 때문에 이 정도까지 편이를 봐준 것일 뿐, 일반인이었다면 잔뜩 쫄아서 물건만 받고 날래게 튀었을 것이다.
“그럼 이만 저는 가보겠습니다.”
“아, 잠시만...”
마이어스는 잠시 인상을 찌푸리며 손짓으로 기다려 달라는 재스처를 취했다. 심각한 메시지를 받는 듯 그의 인상은 그리 좋아 보이지 않는다. 잠시 후 메시지를 끊은 마이어스는 미안함이 묻어있는 어조로 사이토에게 말했다.
“죄송합니다만, 길드 마스터께서 다시 한번 뵙기를 청하고 계십니다.”
요청을 구하고는 있지만, 간청을 하지는 않는다. 정중한 자세, 거절하기가 힘들다. 고압적인 자세를 보였다면 거절을 하겠지만 사이토는 마이어스의 태도가 마음에 들었다. 게다가 길드 마스터가 ‘배회하는 자’라는 말을 들을 때부터 흥미를 지니고 있었다. 200년 가까이 산 사람을 보는 것은 그리 흔한 경험이 아니었다.
“이야기 뿐이라면 기꺼이 승낙하겠습니다.”
“감사합니다. 다른 것은 없을 것입니다.”
사이토의 응낙에 마이어스는 감사의 인사를 한 뒤 두 명의 길드원에게 다시 창고를 지킬 것을 명령했다.
"가시죠."
"예."
마이어스가 앞서고 사이토가 뒤따랐다.사이토는 이미 마이어스에게 은연중에 밝혔듯이 아누비스와 실력을 겨누는 일 같은 것은 사양이었다. 한 편으로는 가슴속에서 호승심이 조금씩 솟구쳐 올라오기는 한다. 그러나 그 또한 사이토의 귀차니즘을 이기지는 못했다.
“여기입니다.”
“네?”
“여기라구요.”
일단 부하들을 풀어 주변을 포위하게 했지만 공격하기에는 목표물이 정말 소박했다. 이런 곳에 그 물건이 있다니... 지난 몇 칠 간의 노동이 너무나 무의미하게만 느껴진다. 200미터 정도 떨어진 곳에 작은 초막이 보인다. 주위를 둘러싼 거대한 나무들이 한차례 떨기만 해도 그대로 땅속으로 폭삭 주저앉을 듯한 초막... 사람이 살고 있는지 없는지는 모르겠지만 지금 하나 분명한 것이 있었다.
“이건 뭔가 아니야!”
“저는 가보겠어요.”
할일이 끝났다는 듯 오카리나는 손을 툭툭 털며 뒤돌아섰다. 당황하는 성기사들... 리더로 보이는 이는 현문에게 눈치를 주며 그녀를 잡아 줄 것을 종용했지만, 현문은 그런 그녀를 섣불리 잡지 못했다. 몇 몇 성기사들은 아직 그녀에 대해서 모르기 때문에 그들의 상관이 왜 이렇게 그녀를 잡기 꺼려하는지 어리둥절해 했다.
그들이 알기로는 저 여자는 인간이 아닌 NPC같은 존재, 자신들에게 귀속되어 있는 하나의 도구일 뿐으로 알고 있다. 한명이 성큼 성큼 걸어 나와 그녀의 어깨에 잡았다. 그녀의 뒷모습을 바라보던 현문과 성기사 리더가 놀라 외쳤다.
“오카리나! 안돼!”
“끄아아아악!”
단발마의 비명과 함께 오카리나의 어깨에 손을 댔던 성기사는 눈을 까뒤집고 쓰러졌다. 게임에서의 비명소리라고는 믿기 어려울 정도의 처절한 비명소리... 황급히 다가가던 그의 동료들은 오카리나의 얼음장 같은 눈빛에 놀라 모두 행동을 멈추었다.
“건드리지 말아 주세요.”
공손한 듯하지만, 그것은 얼음칼과 같은 경고였다. 그녀가 먼지처럼 사라지자 쓰러진 성기사의 동료들은 서둘러 그에게 다가가 상태를 살폈다.
“캐릭터에는 이상이 없습니다.”
“그럼, 왜 일어나지 않는 건가!”
아무리 충격이 컸다고 해도 그래봤자 게임이었다. 그리고 이들은 모두 고통에 대해 어느 정도 훈련받은 사람들... 게임내의 고통 따위는 씹다 버린 껌만도 못한 이들이었다. 캐릭터에 별다른 외상도 없었다. 설사 목이 날아갔다 해도 그들은 게임오버 되지 않는다.
“아니, 이 사람은 지금 엄청난 고통을 입은 것이오.”
“고통이라니요?”
현문이 조용히 다가와 예의 그 날카로운 눈빛으로 성기사를 관찰하며 말했다. 반문하는 리더... 현문의 말이 이해되지 않는다.
“그녀라면 충분히 할 수 있지요. 그녀에게 있어서 고통의 강도조절 따위는 우스운 것, 설령 그녀가 물리적 타격을 주지 못한다 해도 그녀가 마음만 먹는다면 일상에서의 고통과는 비교도 되지 않을 정도의 감각신호를 주입할 수 있는 겁니다.”
현문의 말에 성기사들의 리더는 그녀가 사라졌던 장소를 씁쓸한 표정으로 쳐다보았다. 그녀가 이렇게 비협조적으로 나가는 이상 원활한 계획추진은 힘들어 질지도 모른다. 어찌 보면 그녀는 계획에 있어서 중추적일 수도 있는 위치... 상부에 보고 해야 할 필요성이 느껴지는 그였다.
“녀석이 깨어날 때까지 잠시 휴식이다.”
그는 어쩔 수 없이 잠정 휴식을 명령했다. 업거나 끌고서 데려갈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게다가 두고 가는 것도 상당히 위험한 노릇... 재수 없게 무급운영자들에게 발각당해 샘플로 잡혀가는 일 따위는 사양이었다. 계획이 준비단계에 이르기 전까지는 최대한 보안에 신경 써야 했다.
“큿, 빌어먹을 년...”
아무도 들을 수 없는 그만의 음성으로 나직이 읊조렸다.
아누비스는 아까 전 사이토가 나가기 직전 보았던 그 자세 그대로 소파에 앉아 있었다. 달라진 것이라면 테이블 위에는 그가 허리에 질질 끌고 다니던 두 자루의 숏소드가 검집 째 놓여져 있다는 것... 의도를 알 수 없는 사이토는 어리둥절하며 마이어스의 안내에 따라 그의 앞에 앉았다. 자신의 무기를 해제하여 탁자에 올려놓았다는 것. 그건 숏소드가 자유물품이라는 뜻이다. 소유하고자 마음먹는다면 집어 들면 그만... 그러나 사이토는 그런 것에 별 미련이 없었기에 앞에 앉은 아누비스를 정면으로 마주 보았다.
“마이어스...”
“예! 마스터”
“내 무기는... 잠시 가지고 있어라.”
“옙”
마스터가 왜 무기를 맡으라 했는지 그 이유를 잘 알고 있는 마이어스는 군말 없이 그의 무기를 챙겼다. 이것은 뭔가 심각한 이야기를 시작하기 전 마스터의 준비 자세였다. 중대한 이야기는 그 만큼 마스터의 평상심을 흔들어 놓는다. 제어가 느슨해 질 수도 있는 상황... 그것을 대비하고자 하는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