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JaVu 리얼판타지아 [219 회] 2003-08-16 조회/추천 : 11 / 1 글자 크기 8 9 10 11 12
카오스
“너는 누구지?”
강렬한 눈빛이다. 복잡한 감정들이 갈무리 된 고요한 눈빛으로 사이토를 바라보는 아누비스... 그러나 그 눈빛은 성난 야수를 짓누르는 듯 떨리고 있었다.
“사이토”
짧은 대답... 긴 침묵이다. 위험이 느껴졌기에 사이토는 몸을 충분히 긴장시켜 놓았다. 아누비스가 반말로 물었기에 사이토는 더 이상 존대를 쓸 이유가 없었다. 이미 아누비스의 클래스 파악은 끝난 상태이다. 그 또한 사이토와 같은 로그 그랜저... 로그는 맨손도 위험하다.
“그... 아이디의 전 소유자를 아는가?”
“안다. 나의 할아버지다.”
아누비스의 눈빛이 짧지만 강렬하게 빛났다. 상체를 사이토 쪽으로 가까이 붙이는 아누비스... 목소리가 떨린다.
“그...그분은 어떻게 되었지?”
“돌아가셨다. 몇 달 전에...”
“서...설마...”
꽤 큰 충격인 듯 아누비스는 소파에 몸을 기대고 한손으로 얼굴을 가린 채 중얼거렸다. 차분한 눈으로 그를 바라보는 사이토... ‘그분’이라는 높임을 쓴 걸로 봐서 할아버지와 큰 연관이 있는 듯 보였다.
“할아버지와는 무슨 관계지?”
“...”
침묵하는 아누비스... 사이토는 말없이 그를 쳐다보았다. 아누비스는 이를 악다물은 채 조그만 목소리로 중얼거리고 있었다.
“돌아가셨다? 돌아가셨다...그래... 흐흐, 모두 그렇게 가는 거지. 큭큭... 그렇게 다 떠나가는 거야.”
그는 울고 있었다. 남자의 눈물... 이를 악다물었지만, 이 사이로 신음소리가 흘러나온다. 눈을 가린 손 밑으로 작은 눈물방울이 하나 둘 떨어지고 있었다. 숙연해 지는 사이토... 그는 할아버지와 꽤 절친한 사이였던 듯 하다.
“괜찮나?”
“흐흑...”
조심스럽게 물었지만, 묵묵부답... 낮은 한숨을 내쉬며 그를 멍하니 쳐다보았다. 할아버지의 임종, 실제 시간으로는 2달여가 지났지만 게임시간으로는 벌써 1년 이상 지났기에 슬픔은 어느 정도 가셔 있었다. 문명의 발전은 각각의 자아가 가진 생체시계의 괴리를 가져온다.
“나..난 뭐지? 난...뭐야... 인간인가? 단순한 고깃덩어리인가. 난 아직 살아 있는가?”
“...”
아누비스가 중얼 중얼 말을 흘림에 사이토는 침묵으로 응해 주었다. 얼굴에서 묻어나는 나이는 대략 20대 초반... 그는 20대의 정신으로 근 200년을 버텨 왔을지도 모른다. 한 거대 길드의 길드마스터이기는 하지만, 사이토에게는 삶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는 한 어린 동생 보였다. 그 순간 그의 옆에서 들려오는 목소리... 긴장감이 가득한 마이어스의 목소리이다.
“사...사이토씨, 잠시 피하시죠.”
“예?”
마이어스는 한걸음 한걸음 물러나며 마이어스에게서 떨어지고 있었다. 마이어스의 기이한 행동에 어리둥절한 사이토, 그러나 그 행동의 의미는 마이어스의 급작스런 울부짖음에서 알게 되었다.
“난! 뭐냐고!!”
테이블이 두 동강나서 공중으로 산산이 분해됐다. 아누비스의 발작에 황급히 뒤로 몸을 피한 사이토, 그러나 아누비스의 처절한 괴성과 함께 날아온 주먹에 복부를 내주고야 말았다.
“크억!”
허리가 꺾이고 주위 사물이 빠른 속도로 멀어진다. 숨이 막혀오고 정신이 아찔하다.
쿠당탕탕...
사이토는 요란한 소리를 내며 뒤쪽에 놓인 갑옷 장식과 부딪쳤다. 재빠르게 몸을 가다듬고 헬리오스와 셀레네를 꺼내드는 사이토... 믿을 수 없는 파워였다. 라이프가 단 한방에 1/4이 날아간 것이다.
“저..저는 다른 동료를 데리고 오겠습니다. 그 동안 조금만 버텨 주십시오.”
마이어스는 당황한 얼굴로 문을 박차고 나갔다.
“미친! 메시지로 부르면 되잖아!”
사이토는 목까지 올라오는 육두문자를 애써 삼키며 이를 갈았다. 물론 클래스가 클래스니 만큼, 마이어스는 사이토처럼 한 두 대정도 버틸 수 있는 재간이 없다. 그러나 다른 이를 부르겠다며 황급히 뛰쳐나가는 마이어스의 모습과 이성을 잃어 눈이 돌아가 사이토를 노려보는 아누비스의 모습은 사이토의 분노게이지를 상승시키기에 충분했다. 완전 마른하늘에 날벼락도 유분수... 아주 싸움복이 터졌다고 생각하는 사이토였다. 자신을 통제하지 못해 자신을 공격하는 아누비스... 화가 치밀어 올랐다.
“씨발, 죽어도 난 몰라.”
사이토 또한 눈에서 살기를 일으키며 마이어스를 향해 헬리오스를 겨냥했다. 이유야 어찌되었건 두들겨 맞았다. 아무리 할아버지의 죽음에 이성의 제어를 놓친 아누비스라도 그것은 아누비스 자신이 떠안아야 할 문제였다. 가슴 속 한구석에서 호승심이 불같이 일어났다. 단 한방에 사이토의 분노게이지를 거의 끝까지 올려 준 아누비스... 눈이 휘끄덕 돌아간 채 사이토에게 조금씩 접근하고 있었다.
“크아아앗!”
아누비스의 발이 사이토의 복부를 노리고 로케트처럼 뻗어 들어왔다. 허점을 노리기 위해 발의 보법만을 이용해 아누비스의 사각으로 파고들어 보는 사이토... 실수였다.
“크큿!”
직선으로 찢고 들어오던 아누비스의 발이 순식간에 꺾이며 사이토의 머리와 어깨를 난타해댔다. 발에 실린 무게 또한 웬만한 기사 뺨치는 수준, 머리와 어깨를 난타하는 묵직한 발차기에 사이토는 양손의 단도를 들어 머리를 방어했다. 몸을 빼기에는 난해한 상황... 에테르 스킬마저 잠잠하다.
“젠장! 아무리 로그 그랜저 최상급이라지만, 너무 하잖아!”
몸에 닿아오는 충격과 스피드로 보아 확실히 사이토보다 우위였다. 유추를 통해 생각할 수 있는 것은 로그 그랜저 최상급... 다행히 갑옷으로 인해 더 이상 큰 충격은 입지 않는다고 하지만 아누비스는 빈틈을 주지 않았다. 아마 발차기와 관련된 스킬을 익힌 듯 흡사 뱀처럼 파고들어 라이프를 빼앗아 가고 있다.
“액션 피규어!”
아누비스의 뒤로 이동한 사이토는 주저 없이 몸을 뒤로 뺐다. 지금 그에게 필요한 것은 정신을 차릴 시간이다. 워낙 정신없이 두들겨 맞다 보니, 머리가 멍해질 지경이었다.
“젠장! 이게 초급과 최상급의 차이인가?”
아무리 차이가 난다고 해도 이것은 거의 사기에 가까웠다. 다행히 아누비스가 패시브 스킬인 발차기만을 사용했기 망정이지 거기에 그레이브 스피릿까지 사용했다면 생사를 장담하기 힘들 지경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