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eJaVu 리얼판타지아 [220 회] 2003-08-20 조회/추천 : 29 / 0 글자 크기 8 9 10 11 12
카오스
"크으으...“
“젠장! 왜 아직 안 오는 거지!”
아누비스의 공격을 가까스로 막아내는 사이토의 라이프는 계속해서 떨어져갔다. 작지는 않지만 그럭저럭 아누비스에게도 몇 개의 상처를 준 사이토, 그러나 전체 스코어로 봐서는 사이토의 압도적인 열세다.
[아직, 살아계십니까?]
얄밉디 얄미운 마이어스의 메시지...
[젠장! 살아있어서 미안하다!]
열 받은 사이토는 이를 뿌드득 갈며 소리쳤다. 2~3분이면 지원이 올 줄 알았건만 5분이 지나도 깜깜 무소식이었다. 방안 기물들을 방패막 삼아 간신히 버텨온 5분... 버틴 것이 신기할 지경이었다.
[죄송합니다. 아누비스님을 말릴 수 있는 것은 같은 배회하는 자셨던 나머지 두 분 뿐입니다. 그 분들은 평소에는 거의 메시지 창을 막아 버리시기 때문에 찾기가 힘듭니다. 지금 다른 이들과 함께 그 분들을 찾고 있으니 조금만 더 버텨 주십시오.]
[이런 씨...]
아누비스의 내려 찍기를 교차시킨 단도로 막아낸 사이토는 눈을 매섭게 떴다. 솔직히 지금까지는 최대한 아누비스를 전투불능으로 만드는데 치중했다. 할아버지의 죽음에 눈물을 흘리는 아누비스, 애써 살기를 일으켜도 사그라져 버린다. 그렇지만 그를 죽이는 한이 있어도 사이토에게는 지켜야할 것이 있다. 수세를 취하던 사이토는 자세를 전환했다.
“이판사판이군.”
아누비스가 사이토의 시야에서 사라졌다. 본능적으로 고개를 숙이는 사이토, 아누비스는 데들리 스텝의 형식으로 뒤에서 팔꿈치 공격을 해왔다. 머리 위로 흘리는 아누비스의 팔꿈치 밑으로 드러난 허점, 사이토는 놓치지 않았다.
“백 스텝!”
크로스카운터의 형식으로 사이토는 아누비스의 등과 옆구리를 되 찔러 들어갔다. 초반에 얻는 스킬이라 하지만 9계급의 손에서 펼쳐지는 백스텝은 가히 살인적인 수준이다. 공중으로 공중제비를 도는 아누비스, 그러나 사이토는 간신히 얻어낸 승기를 이대로 내 주고 싶지 않았다. 잡생각을 지우고 머릿속에는 살기만을 담았다.
“쫓아가라!”
가슴께에 위치한 와이어를 헬레네에 걸어 당긴 사이토는 아누비스를 쫓아 공중으로 올라갔다. 이미 한방에 보낸다는 희망사항은 버린 지 오래이다.
“크으으!”
이성을 잃은 상태에서도 고통은 느끼는지 아누비스는 난도질당한 팔을 부여잡고 뒤로 물러섰다. 사이토의 집요한 부분공격... 이성을 잃은 아누비스이기에 공격은 강했으나 다양성이 없었다. 순식간에 팔을 난도질 해버리자 전세는 순식간에 역전되었다. 집요하게 아누비스의 다친 팔 부분을 공격하는 사이토... 내리긋는 단도에는 일점의 망설임도 없다.
“이제 좀 정신 차리겠냐?”
아누비스가 한걸음 한걸음 물러서자 사이토는 눈을 사납게 부라리며 더욱 다가섰다. 힘없이 떨구어진 아누비스의 오른팔...
“카아!”
“제..젠장!”
아누비스의 왼쪽 어깨에서 푸른빛의 오오라가 넘실넘실 기어 내려온다. 전세가 역전되어 뒤로 슬금슬금 물러나는 사이토, 아누비스는 그리 호락호락한 상대가 아니었다.
“그레이브 스피릿...”
현재의 사이토에게는 가장 저주스러운 이름이었다. 아누비스의 손에서 형성된 2미터 크기의 거대한 그레이브 스피릿, 예전 사이토가 형성시켰던 그레이브 스피릿보다 거의 4배의 크기였다. 완성형의 크기... 게다가 아누비스는 그 엄청난 마나 소모량까지 가뿐하다는 듯 천천히 사이토에게 다가서고 있었다.
“엿된건가...”
사이토는 진작에 왜 에테르스킬로 도망치지 않았는가 후회막심하며 머리를 짜냈다. 게임시간으로 근 1년을 썼건만 에테르 스킬은 아직까지 사이토에게 확률적 밖에 사용할 수 없는 스킬이었다. 물론 잠시 동안 마음을 가라앉히면 그럭저럭 쓸 수 있겠지만, 전투에서는 그런 부동심을 가지기 힘들다. 아무튼 간에 사이토에게 슬금슬금 접근하는 아누비스의 자세는 너무도 확고부동했다. 섣불리 움직이면 그대로 그레이브 스피릿의 밥이 되어버리고 만다. 맞받아치자니 확률 상으로 절대 불리, 그런 짓은 절대 사절이었다.
“그래도 죽는 것 보다는 낫겠지?”
영혼의 검 그레이브 스피릿... 스치기만 해도 엄청난 데미지를 준다는 것은 자신이 가장 잘 알고 있다. 사이토는 문득 배낭 속에 디스코어에 생각이 미쳤다. 크기는 좀 난감하지만, 성능 하나는 확실한 디스코어... 그러나 장비하기에는 상황이 그리 좋지 않았다.
“크어어!”
그레이브 스피릿의 차디찬 푸른색이 오늘만큼 저주스러운 날은 없으리라. 사이토는 직선으로 찔러 들어오는 그레이브 스피릿을 상체를 뒤로 완전히 젖히며 간신히 피해냈다. 찰나의 공격... 부적절한 회피, 그것은 곧 사이토의 후회로 다가왔다.
“제엔장!”
그레이브 스피릿의 날이 직선으로 꺾이며 사이토의 절반으로 갈라왔다. 더 이상 피할 곳도 없었다. 절망감이 머릿속을 파고든다.
그 때...
“포스 익스플로젼!”
그레이브 스피릿이 순식간에 사라졌다. 어리둥절하며 공중에서 몸을 회전시킨 사이토, 바닥을 짚은 사이토는 곧 공중으로 솟구쳐 올라가는 아누비스를 감상해야 했다.
꽈드드득!
그 단단하다는 길드벽이 통째로 우그러져 들어갔다. 갑자기 문을 박차고 들어온 인영의 주먹 한방에 아누비스는 이미 전투불능상태였다. 천장에 자신의 몸 치수를 복사한 아누비스는 중력에 따라 바닥으로 떨어져 내렸다. 봐 줄 생각이 없는지 다시 주먹을 그러쥐는 인영, 그는 처음 데스스타길드에 도착했을 때 봤던 인물이었다. 앳된 18살 정도로 보이는 미안의 엘프남자... 그러나 그의 입에서 튀어나온 소리는 걸쭉한 욕 한마당이었다.
“이 개X! 니 XX XXX할 놈의 XX새끼!"
떨어지는 아누비스를 도끼눈으로 쳐다보며 엘프남성은 구성진 욕 한자락을 풀어놓았다. 주먹을 꼬아 쥔 모양으로 보아 마무리 까지 지으려는지 살벌한 투기를 발산하고 있다.
“저스틴! 멈춰!”
뒤 따라 들어온 자그마한 하플링이 엘프남성의 행동을 제지했다.
“놔! 발데아라! 그동안 잠잠해서 좀 괜찮았나 싶더니 이 새끼 또 그 병 도졌어!”
“자식아! 그걸로 치면 너도 마찬가지잖아. 지는 이제 가상현실에 있다는 것도 잊어가는 주제에...”
저스틴이라는 엘프는 이미 더 이상 할 생각이 없는지 바닥에서 꿈틀거리는 아누비스를 말없이 쳐다보았다. 눈 안에 잠겨 있는 상념은 동질감과 고독... 그리고 슬픔, 그것이 그들의 일상이리라.
사이토는 몸을 일으키고 캐릭터창을 살폈다. 이미 라이프는 절반 이하로 떨어져 있었고, 감각기를 통해 들어오는 몸의 상태는 정상이 아님을 사이토에게 가르쳐준다. 한마디로 엉망진창... 비공식적으로 리얼판타지아를 시작한 이후의 첫 패배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