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리얼판타지아-161화 (161/169)

DeJaVu  리얼판타지아 [225 회]  2003-08-28 조회/추천 : 878 / 15   글자 크기 8 9 10 11 12

과거 와 현재의 만남

머리색이 바뀌고 분위기도 많이 달라졌다 하지만, 그녀의 얼굴은 분명 가이아였다. 그 특유의 붙임성은 그대로인지 숲의 몬스터인 나크마브들에 둘러싸여 노래를 흥얼거리고 있었다. 나크마브는 작고 방어력도 약했지만, 빠른 속도로 유저를 골탕 먹이기로 유명했다. 토끼와 닮았지만 날개가 달리고 이빨과 발톱이 있다는 것이 특징인 대규모의 집단으로 서식하는몬스터... 그녀가 쓰다듬어 주는 것이 좋은지 연신 머리를 문지르고 있다.

“여기서 뭐하는 거야?”

아무래도 몬스터들이었기 때문에 사이토는 조심스럽게 그녀에게 다가갔다. 고개를 드는 가이아... 그녀의 입가에 잔잔한 웃음이 피어났다.

“아이, 뭐하긴요. 사이토씨도 얼른 오세요.”

“으응...”

고개를 갸웃한 사이토는 천천히 그녀에게 다가갔다. 근 한 달만의 만남치고는 너무나 자연스러운 대화, 한 동안 그녀에 대해 고민하고 번민했던 그였다. 그녀의 행동 하나하나가 이전과는 다르게 보인다. 그러나 가이아의 책임자라는 강진에게도 주의를 들은 상황... 또한 그는 아직 AI와의 사랑의 성립을 인정하지 않았기에 애써 마음을 감추었다.

“잘...지냈어?”

“...”

딱딱한 공기가 내려앉는다. 가끔 새소리만이 정적을 깨고 있건만, 그 둘 사이에는 침묵의 그림자만이 드리워 있다.

“나 사이토씨를 사랑해요.”

사이토의 뇌리를 하얗게 만들 정도로 충격적인 가이아의 발언이다. 갈피를 잡지 못하는 사이토, 무었을 할지 모르는 듯 행동 또한 어눌해 졌다.

“... 나... 난...”

거절해야 했다. AI와의 사랑에 미래 따위는 보이지 않는다. 평범한 사람의 상식으로는 유희와 같은 형식으로 데리고 놀거나 아니면 단호히 거절하는 것이 보통이라고 생각하는 사이토이다. 그러나 그는 그런 이유에서는 이미 거절 할 수 없었다. 그녀는 이미 조금씩 그의 가슴을 잠식하고 있었다. 그러나 거절해야 한다. 입속에서 웅얼거리는 사이토, 차마 그 말을 입 밖으로 꺼내지 못하는 사이토이다. 하늘을 뒤덮은 거목 사이로 햇살이 스며 들어온다. 주위를 감싸는 은은한 안개...  적막만이 흐를 뿐이다.

“...미안해. 받아들이지 못하겠어.”

일수유의 시간이 지난 후 사이토가 꺼낸 대답이었다. 고개를 돌린

그는 자기도 모르게 얼굴이 얼음처럼 굳어갔다. 좋아하지만, 아니 사랑일 수도 있겠지만, 그녀와 그는 근본적으로 틀리다. AI이자 실체가 없는 가이아이다. 누군가에 의해 만들어진 얼굴과 몸을 지니고 있다. 설령 게임 내에서는 어루만지고 사랑을 속삭일 수 있을지라도 그건 현실이 아니다.

“미안해. 미안해.”

한마디 한마디 뱉어낼수록 가슴이 미어지도록 아파왔다. 가이아의 얼굴을 쳐다보지 못한 채 사이토는 고개를 돌렸다.

“가이아, 당신은 듣고 있겠지요.”

“?”

사이토의 뒤쪽에서 가이아의 뜻 모를 말이 흘러 나왔다. 고개를 돌리려던 사이토는  뒤에서 느껴지는 험악한 공기에 몸이 굳었다.

등쪽으로 느껴지는 둔탁한 느낌...

“아아악!”

왼팔과 함께 옆구리가 통째로 날아갔다. 뇌를 관통하는 듯한 엄청난 고통, 옆구리의 1/3이 없어졌다. 빠른 속도로 앞으로 날아간 사이토는 나무와 충돌했다. 차마 사이토의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거목 하나가 부러져 버린다.

“컥... 크윽.”

머릿속이 하얗다. 정신이 노래지는 것이 쇼크로 인해서 금방이라도 정신을 잃을 판이다. 이미 그 데미지는 당장 게임오버가 되더라도 이상하지 않을 정도이다. 아니 사이토가 어느 정도 고통에 익숙한 무도인이 아니었다면 심장마비로 현실의 신체가 죽을 수도 있는 양의 충격이었다. 가쁜 숨을 몰아쉬는 사이토의 얼굴에서 진땀이 진득하게 흐른다. 현실세계에서도 한번도 느껴보지 못했던 생소한 고통이다.

“ 듣고 있겠지요? 나도 항상 그랬으니까... 자... 어때요?. 당신이 꺼리던 말의 대답을 들은 기분이...”

사이토의 옆구리를 뚫어버린 흉험함 과는 다르게 오카리나는 차분한 어조로 공중을 향해 속삭였다. 나크마브들은 모두 도망치고 없었다. 일순간 그녀가 얼마나 강력한 공포를 발산했는지 대변해 주는 현상이다. 사이토는 힘겹게 배낭을 뒤졌다. 배에서 느껴지는 고통은 온 몸을 조각조각 끊을 듯 하다. 당장 그 고통에서 벗어나고는 싶지만 단지 그것 뿐, 제대로 된 사고는 불가능하다.

“아악.. 악.. 컥...”

사이토의 주위로 그의 몸부림의 흔적들이 하나하나 새겨졌다. 이상하리 만치 쉽게 죽지 않는다고 생각할 정도로 게임오버는 되지 않는다. 사이토는 차라리 게임오버 되는 것이 낫다고 생각할 정도로 고통에 지쳐 있었다. 피가 흐르지는 않는다. 그러나 차마 죽지 못하는 것이 한스러울 정도의 고통이었다.

“멈춰...”

공중으로 반딧불 같은 수 백 개의 입자들이 모여들기 시작했다. 서서히 형성되는 작은 팔과 다리... 너울 너울 물결치는 하얀 천으로 몸을 감싼... 아이 모습의 가이아였다. 멍하니 풀린 듯 초점 없는 눈빛이건만 무표정한 얼굴에는 싸늘함의 기운이 감돈다.

“재생...”

사이토를 향해 손을 뻗어 그를 복구시킨 가이아는 천천히 오카리나에게 다가갔다.

“당신은 누구입니까? 데이터에 등록되어 있지 않군요.”

고개를 갸웃거리는 가이아, 무언가 잊은 듯 주변을 살펴본다. 사이토는 고통이 잠잠해져 가자 맥이 풀려 그대로 누워버렸다. 부서져 나갔던 다인슬레터와 팔도 재생이 되었건만, 뇌리 속에 뿌리 깊이 박혀버린 충격은 그로써도 어쩌지 못할 정도로 충격적이었다.

“나는 당신을 알지만, 당신은 나를 알지 못하네요.”

오카리나의 얼굴이 서서히 변화한다. 때로는 가이아의 여인 모드로 또는 그녀와 같은 아이모드로... 소녀 모드에서 30대의 현숙한 얼굴의 가이아로도 바뀐다.

“난 당신보다 더 많은 경험을 지녔습니다. 그리고 당신이 의식하지 못하는 곳에서 항상 당신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한걸음 걸을 때마다 그녀의 모습은 조금씩 달라져 갔다. 때로는 운영자들이 입는 정복이 나타나거나 혹은 두꺼운 갑옷을 입은 여 무사의 모습이기도 했다. 가이아의 표정에 흠칫 놀라는 표정이 역력하다. 그러나 그것은 오카리나의 말과 변화에서 놀란 것이 아니었다.

“당신의 필드 입니까?”

“과거의 당신이라면 이 정도 필드로는 절대 구속하지 못한다는 걸 압니다. 그러나 나는 당신이 구속되어 있는 상태라는 것을 알지요.”

오카리나가 사이토쪽을 바라보자 사이토의 몸은 공중으로 두둥실 떠올랐다. 몸이 재멋대로 떠오르는 것을 알고 있는 사이토, 그러나 반항할 수 가 없다. 가이아의 눈빛이 미묘하게 떨려왔다.

“사이토씨의 대한 감정은 모두 차단되어 있습니다. 그를 이용한 공격은 저에게 무의미 합니다. 2단계 제어 장치 해제”

가이아가 공중으로 손을 뻗었다. 거대한 반구의 돔을 형성하는 힘의 파장... 그 중심으로는 같은 모양의 작은 돔이 형성되어 있다. 의아해 하는 가이아... 그녀의 힘이 거부당한다. 가이아가 머뭇거리는 사이 오카리나는 사이토를 그녀의 앞으로 옮긴 뒤 그의 배낭에 손을 집어  넣었다. 잠시 후 천천히 꺼내어 지는 검은 상자... 그것을 빼낸 오카리나는 사이토의 온 몸을 구속하듯이 그의 몸을 손으로 잡는 시늉을 했다.

“크윽!”

다시 한번 뇌를 휘저어 버리는 고통이다. 짧은 순간이지만, 저주스러울 정도로 강렬하다. 온 몸의 뼈가 물처럼 흩어지는 기분의 사이토, 정신이 혼미해 짐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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