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 춤 없이 무엇으로 살 건가요?
아름다운 오페라하우스를 전용 공연장으로 가지고 있는 뉴욕 발레단, 그곳의 부속 발레 학교 어퍼 스쿨 2학년에 재학 중인 사샤 세드린의 일상은 매우 반복적이다.
아침에는 흰 이불 뭉치에 몸을 파묻은 채로 알람이 5분 간격으로 총 세 번 울릴 때까지 귀를 막고 괴로운 신음을 흘리며 꿈틀거린다. 그리고 알람이 세 번 울리고 나서도 사샤가 제 발로 침대를 벗어나지 않으면 카렐이 다가와 이불째로 그를 번쩍 들어 올리곤 했다.
그렇게 아침이 차려진 식탁 앞에 앉으면 눈을 감은 채로도 어쩔 수 없이 아침을 먹을 수밖에 없다. 이불에 감싸인 채로 눈이 팅팅 부은 사샤와 달리 카렐은 한결같은 모습으로 식탁 앞에 앉곤 했다.
한 가지 신기한 것은 그토록 잠에서 깨기 어려웠는데도 우유에 빠진 시리얼을 오도독 씹고 있으면 어느샌가 잠이 달아난다는 점이다.
아직 정신이 멍한 채로 사샤는 카렐의 그림자처럼 그가 먹는 것들을 따라 먹었다. 카렐이 파니니를 한입 먹으면 저도 따라서 입을 크게 벌리고 먹었고, 그가 초록풀이 가득한 샐러드를 뒤적이면 저도 뺨에 드레싱을 묻혀 가며 커다란 풀을 입에 욱여넣고 씹었다. 마지막으로 카렐을 따라 케일사과 주스까지 꿀꺽꿀꺽 마신 후에 사샤는 곧장 샤워를 하러 갔다. 식탁 의자에 허물처럼 흘러내린 이불을 방치한 채로.
그리고 카렐이 사샤가 벗어 놓은 허물을 치우는 동안 사샤는 욕실로 가서 가볍게 샤워와 세수를 하고 뻗친 머리카락에도 물을 묻혔다. 그러면 그제야 잠이 완전히 달아난다.
사실 사샤는 학생답게 규칙적으로 잠자리에 들었고, 정해진 시간에 일어나는 편이었다. 그럼에도 최근 아침잠이 부족한 이유는 자기 전에 몰래 카렐을 훔쳐보는 버릇이 들었기 때문이다. 비몽사몽이 될 때까지 카렐을 뜬눈으로 지켜보다가 어느 순간 기절하듯 잠들기를 반복하는 사샤는 카렐과의 동거가 시작된 일주일 사이 잠이 모자라 자꾸만 수척해지고 있었다. 아직 카렐은 전혀 짐작하지 못하는 이유였다.
아무튼 어른의 위엄인지 카렐은 항상 사샤보다 늦게 자고 아침에도 흐트러짐 없는 모습으로 사샤를 기다리곤 했다.
사샤는 젖은 머리를 말리며 욕실에서 나와 식탁을 바라보았다. 카렐은 아직도 식사 중이었다. 항상 정해진 시간에 등교하는 사샤와 달리 일정이 들쑥날쑥한 카렐은 여유가 있을 때면 아침 식사를 더 길게 하는 편이었다. 그럴 때의 카렐은 노트북이나 패드 따위로 조간신문 기사나 간밤에 도착한 업무 메일을 확인하며 커피를 마시곤 했다.
샤워를 마친 사샤는 거실 가득 퍼진 커피 향기를 맡으며 옷을 입었다. 짙은 남색의 2학년 전용 타이즈를 신고, 그 위에 흰색 레오타드를 입는다.
날씬한 사슴 같은 몸의 굴곡을 그대로 드러내는 연습복을 입은 후에는 그 위에 질 좋은 트레이닝 바지와 스웨트 셔츠를 겹쳐 입었다. 로커룸에서 갈아입는 것보다 집에서 입고 간 뒤 훌렁훌렁 벗어내는 게 더 편하다는 것을 최근에 깨달았기 때문이다.
사샤가 가방까지 메고 카렐에게 다가가자 그가 배웅하기 위해 자연스레 자리에서 일어났다.
“슈즈는 챙겼어요?”
“두 개 있어요.”
현관으로 향하던 사샤는 가방을 급히 뒤지며 대답했다. 집에서 레오타드를 챙겨 입고 가기 시작한 이후로 연습 준비를 완전히 마쳤다는 생각 때문인지 종종 빈 가방만 달랑달랑 메고 갔다가 슈즈가 없어서 난감했던 적이 꽤 있었던 것이다.
그런 사샤의 이야기를 듣고 난 후 카렐은 매번 슈즈를 체크하고 있었다.
“점심 식사는 어떻게 할 예정이죠?”
“구내 카페테리아에서 먹을 거예요.”
“좋아요. 당이 너무 많이 들어간 건 먹지 말아요. 잼을 바른 비스킷, 초콜릿, 캐러멜시럽, 땅콩버터…….”
“카페라테도 안 돼요?”
카렐은 저를 올려다보며 물어보는 사샤의 가방 지퍼가 완전히 열려 안의 내용물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는 것을 발견하고는 대신 닫아 주었다.
“시럽이 안 들어가면 상관없습니다.”
“그럼 아이스티는요?”
“그건 과당이 많아요.”
“우유는요?”
“그건 괜찮아요.”
“카페모카는요?”
“모카가 초콜릿입니다.”
인내심 있게 대답해 주는 카렐이 좋아서 사샤는 일부러 꼬치꼬치 물었다.
그러다 이제 정말 나갈 시간이 되었다는 듯이 카렐이 손목시계를 한 번 바라보았다. 아침의 카렐은 보통 색이 옅은 셔츠나 니트만 걸친 채로 손목을 두 번 정도 걷어 올린 차림새였다. 그리고 그게 카렐이 보여주는 최대한의 해이한 모습이었다.
머리도 뻗쳐 있는 것을 단 한 번 본 적이 없다.
어른은 무시무시해. 사샤는 저도 모르게 그렇게 생각했다.
“오늘은 하교 후에 브라운 씨와의 개인 교습이 있네요. 늦지 않게 오세요.”
“네……. 다녀오겠습니다.”
“난 아주 늦게 들어와요. 그러니까 오늘은 기다리지 말고 정해진 시간에 잠자리에 들어요.”
막 현관문을 나서려던 순간 들린 말에 사샤는 저도 모르게 걸음을 멈추었다. 카렐은 사샤의 등을 토닥이며 문밖으로 나가도록 격려했다.
“어, 언제요?”
“……정확히는 새벽입니다. 출장을 갔다가 새벽 비행기로 돌아와요.”
“오늘 안에 못 오세요?”
“그렇게 됐어요. 잘 다녀와요.”
얼마 전 카렐이 직접 골라 사 준 하얀 러닝화를 신은 채 부드러운 카펫 위를 몇 걸음 걸어간 사샤는 이내 엘리베이터에 올랐다. 카렐은 열린 문간에 비스듬히 기대어 서서 팔짱을 끼고 있었다.
엘리베이터 문이 닫혔다.
갑작스러운 사실에 잠시 패닉에 빠졌던 사샤의 마음에 작은 원망이 솟아났다. 카렐이 또 교활한 화법을 썼다. 그것도 징징대지도 못하게 헤어지기 직전에 말을 해 주었다.
“사샤, 학교 가니? 잘 다녀와라.”
어느새 친해진 마이클이 아침 인사를 건넸다. 작게 대답하고 시무룩한 얼굴로 로비를 빠져나간 사샤는 호텔을 벗어나자마자 학교까지 심장이 터져라 달렸다. 오늘은 6분 37초 만에 도착했다. 아드레날린이 분비되자 분노인지 흥분인지 알 수 없는 감각으로 머리가 조금 어지러웠다.
사샤는 붐비는 로커룸을 지나쳐 곧바로 연습실로 향했다. 그러고는 아직은 한가한 스튜디오 안에서 훌렁훌렁 옷을 벗었다. 입고 온 옷들을 스포츠백 안에 잘 접어 넣고는 바닥에 주저앉아 양말과 슈즈를 신었다.
학교에서 지급해 주는 것보다 훨씬 고급품인 새 슈즈는 카렐의 추천으로 사게 된 것이었다. 처음부터 사샤의 발에 부드럽게 착 감겼던 슈즈는 갈수록 조금씩 발 모양에 맞춰 늘어나 완전히 편해졌다.
‘난 부모님한테 징징대는 어린애가 아냐. 난 성숙해……. 그러니까 카렐의 사정도 이해해 줄 수 있어.’
슈즈를 신은 채로 일어나 바에 손을 올리고 하이 업으로 서거나 발등을 거꾸로 꺾으면서 다리를 풀던 사샤는 이내 침착해졌다.
카렐은 매우 바쁜 사람이다. 그는 사샤가 이해하기 어려운 사업에 집중했고, 그런 복잡한 사업체를 한두 개 가진 것도 아니었다. 게오르크뿐만 아니라 많은 사람들이 그를 찾아대곤 했다. 얼마나 사람들이 카렐을 필요로 하는지, 정상적인 저녁 식사조차 하기 어려울 정도로 많은 전화가 걸려오는 날도 있었다.
사샤는 얼마 전의 기억을 떠올렸다. 카렐은 통화를 하느라고 자리를 떠버렸고, 사샤는 카렐이 돌아오면 함께 저녁을 먹으려고 느리게 스푼을 움직이다가 음식이 다 식어 버렸다는 것을 알았다.
한 시간이나 지나 테이블로 돌아온 카렐은 도리어 아직도 기다리고 있었냐고 놀라면서 미안한 얼굴을 했었다.
‘다음부터는 기다리지 말아요.’
‘……혼자 밥 먹으면 심심하시잖아요.’
‘괜찮아요. 난 배려하지 않아도 됩니다.’
그렇게 말하는 카렐에게 사실 혼자 밥 먹기가 싫었던 건 자기 자신이라고 털어놓기가 왠지 부끄러웠다. 그래서 사샤는 카렐이 저녁 식사 자리에 저를 혼자 남겨 두었다는 사실에 대해 투정부리지 않았고, 그날 자신이 한 뼘 정도는 성숙해졌다고 생각했다.
거울을 보면서 가볍게 스몰 점프, 이어서 무릎과 배에 힘을 주고 그랑 점프. 학교까지 달려오면서 이미 웜업이 된 몸이 용수철처럼 바닥에서 튀어 올랐다. 바닥을 딛고 크게 점프할 때마다 엄청난 힘이 들어가 절로 신음이 흘렀다.
저도 모르게 입술을 깨물자 마침 연습실 안으로 들어오던 바딤이 외쳤다.
“사샤. 편안하게, 표정은 언제나 편안하게! 입술을 깨물거나 괴롭다는 티를 내면 절대 안 된다!”
착지한 사샤는 무릎을 짚고 헉헉거렸다. 이내 바딤이 드물게 칭찬하는 말을 던졌다.
“그래도 높이는 좋았어. 센터에서도 그렇게 할 수 있겠지?”
“……네.”
사샤는 턱 아래로 조금 흐르는 땀을 훔치며 몸을 일으켰다.
어느새 스튜디오로 레오타드를 입은 아이들이 하나둘 바를 들고 모여들었다. 사샤 역시 옥사나와 함께 바를 옮기고 자리를 잡았다. 마침 사샤 바로 옆의 바에 선 것은 조제였다. 옥사나와 사샤를 흘끔대는 것을 보니 둘 사이에 무언가 있다고 의심하는 눈치였다.
탐색을 마친 조제가 먼저 말을 붙였다.
“사샤. 너 그 레오타드…….”
“응?”
“새거야?”
“아, 맞아. 새로 샀어.”
“좋은 거 샀네!”
그 말에 사샤는 자기 복장을 한 번 내려다보았다. 조제는 발레복 전문 브랜드의 이름을 전부 외우고, 매 시즌 새로 출시되는 상품을 꼭 둘러볼 정도로 관심이 많았다.
“이거 좋은 거야?”
“어. 나도 하나 살까 생각 중이야. 근데 그걸 하나 사면 다른 거 다섯 개를 살 수가 있거든. 그래서 갈등돼.”
“와…….”
사샤는 감탄하면서 새삼스레 제 레오타드를 만지작거렸다. 이 레오타드는 카렐이 선물해 준 것이었다. 아마도 그는 레오타드 가격이 100불이 넘으면 구매에 소극적이 되는 사샤의 갈등을 알아챈 듯했다.
“그래도 올해 로잔 비디오 오디션 접수 전엔 꼭 사야지.”
“아…….”
“장비가 좋아야 자신감이 붙으니까. 안 그래?”
스튜디오에 흐르던 음악이 플리에의 음악으로 바뀌었다. 바 스트레칭을 하던 아이들은 이내 일사불란하게 발레의 1번 자세를 취했다. 사샤 역시 1번 포지션으로 서서 가슴을 벌리고 흉곽을 모으고 아랫배를 끌어당겼다.
결국 조제는 올해 로잔에 참여하기로 결정한 모양이다. 간접적으로 그 사실을 알고 나니 부러움을 숨길 수가 없었다.
‘나도 콩쿠르에 나가 보고 싶어……. 인정받고 싶어. 아니면 혹평이라도 듣고 싶어. 그렇게 해서 내가 어느 정도 수준인지 알 수만 있다면…….’
플리에부터 시작되는, 반복되는 루틴. 발레를 처음 시작하는 다섯 살짜리 아이도, 수십 년을 발레에 매진한 프로 댄서도 매번 같은 루틴의 바 워크를 반복한다. 사샤는 똑같은 동작을 매번 신중하게, 또 정성스레 연마하는 것이 매일 신께 정성스레 기도를 드리는 수도사들의 행동과 비슷하다고 느꼈다.
그리고 사샤는 단 한 번도 이 과정이 지겹다고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이건 발레 무용수로 살기로 결심한 이상 당연한 일이었으니까.
다만 무대에 오르고 박수를 받는 일에 대한 갈증 역시 나날이 커져 갔다.
사샤는 카렐이 자신의 이런 바람도 이해해 줄지 궁금해졌다. 올해 생일 선물은 이미 받았으니까…… 내년에는 또 부탁드려 볼 수 있을지도 모른다.
그런 생각에 골몰하는 사이 사샤의 등에 송골송골 땀이 맺혔다.
* * *
―사샤. 곧 생일이지? 율리안이 선물로 뭘 받고 싶은지 한번 물어봐 달래.
오후 휴식 시간에 맞추어 레빈에게서 반가운 전화가 걸려왔다.
“생일 선물? 율리안 센스 없어. 그걸 왜 나한테 물어봐.”
복도의 창가 앞을 서성거리면서 사샤는 투덜거렸다.
―하하……. 실패하고 싶지 않은 거지. 그게 배려라고 생각하는 사람도 있는 거야. 그 말은 전달해 줄게. 그래도 내 선물은 서프라이즈야.
“진짜? 엄청 기대돼.”
―이사 간 지 얼마 안 됐으니까 생필품이 좋으려나? 필요한 가구 같은 건 다 있어? 아니면 작은 전자제품 같은 거라도…….
“아……. 그런 건 다 있어!”
혹시나 레빈이 쓸데없는 데 돈을 쓸까 봐 사샤는 허둥거리며 대답했다.
―그래? 알겠어. 좀 더 고민해 볼게.
“응.”
사샤가 한시름 놓았을 때였다. 레빈이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물어왔다.
―사샤. 나 궁금한 게 있는데, 그때 보던 다큐멘터리 제목이 뭐야?
“무슨 다큐멘터리?”
―너랑 이름이 같은 무용수의 다큐멘터리가 있다며. 나도 보고 싶어서.
그러나 한동안 그 영상에 대해 까맣게 잊어버리고 있던 사샤는 멍하니 입을 벌린 채 레빈이 뭘 말하는 건지 되짚어 보았다.
한참 후 사샤는 기억의 실마리를 잡아챘다.
“아! 카렐이 패드에 담아서 줬던…….”
―카렐이 누구지?
레빈은 혼잣말하듯 중얼거렸다.
그리고 사샤는 그 순간 자신이 그 패드를 어디다 처박아 놨는지를 생각하고 있었다. 분명히 호텔 룸에서 영상을 봤으니 집 안에 있을 텐데, 그 뒤로 한 번도 들여다보지 않아서 잘 기억이 나지 않았다.
“내가 집에 가서 제목 알려줄게.”
―그래, 알았어. 급한 건 아니야. 아, 그리고 율리안이 사 준 책은 읽었냐는데.
“책……? 무슨 책?”
다시 정신이 멍해진 사샤는 자기에게 책을 읽는 숙제가 있었는지를 어렵게 더듬어 봤다. 사샤는 살면서 지금까지 자기 의지로 책을 펼친 적이 단 한 번도 없었다. 일반 과목 시간에도 선생님이 펼치라는 책을 책상 위에 펼쳐 놓고 필기 한 번 하지 않은 채 멀뚱멀뚱 선생님을 구경할 뿐이었다. 활자를 읽는 건 세상에서 제일 지루한 일이었다.
레빈이 ‘율리안이 사 준 동화책 있잖아……’라고 부연설명을 했을 때야 사샤는 ‘아!’ 하고 약한 신음 소리를 냈다.
“집에 있어. 아마…….”
율리안이 사 주었던 책 역시 받은 즉시 존재를 잊었기 때문에 사샤는 당황하면서 대답했다. 그러나 호텔 룸에 가져다 놓았으니 버리지 않은 이상 아마도 잘 있을 것이었다. 방 청소를 자신이 직접 하는 것이 아니라 조금 불안해졌지만, 호텔의 하우스키퍼들은 방에 떨어진 구겨진 영수증조차 함부로 버리지 않았다. 매번 잘 펼쳐서 사이드테이블에 문진으로 눌러 놓고는 했다.
사샤의 당황을 읽은 레빈이 수화기 너머에서 쿡쿡 웃었다.
―안 읽었구나, 그럴 줄 알았어.
“아니? 난 읽으려고 했는데…… 그림이 많아서 마음에 안 들어. 내가 애들이 보는 책은 싫다고 했잖아.”
―알았어, 알았어. 그 말도 율리안한테 전해 줄게.
마침 휴식 시간이 끝나가고 있었다. 사샤는 레빈에게 좋은 하루 보내라고 인사를 한 다음 핸드폰을 곱게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그러고 보니 카렐이 사 준 옷에 최신 핸드폰, 생활감이 묻지 않은 흰 운동화까지 제 몸에 걸친 것은 전부 카렐이 선물해 준 것이었다.
금세 기분이 좋아진 사샤는 다시 학교 건물 안으로 뛰어 들어갔다. 성실히 남은 수업을 마친 후에는 호텔로 돌아와 카렐이 붙여 준 개인 교사 브라운 씨에게 작품 수업을 받기도 했다. 브라운 씨와의 수업은 천편일률적인 바 워크가 아니라 클래식 작품 위주라 제대로 된 춤을 추는 기분이 나서 재미있었다.
그리고 브라운 씨가 떠난 후, 사샤는 호텔 룸 안의 모든 서랍을 열어 결국 카렐이 선물해 준 패드를 찾았다. 다행히도 그건 카렐이 한때 서재 대용으로 썼을 방의 첫 번째 서랍에 고이 들어 있었다.
[레빈. 재ㅔ목은 문 샤인 워커야.]
사샤는 레빈에게 문자로 영상의 제목을 알려주었다. ‘낭만적인 제목이네’라는, 짧은 대답이 돌아왔다.
[재믿게 바.]
[알겠어. 너는 다 봤니?]
[아니,,,]
사샤는 멋쩍게 답장을 보냈다. 그러면서 레빈이 다 보고 나면 재밌었는지 물어봐야겠다고 생각했다. 아주 재밌다고 하면 저도 다시 흥미가 생길 것 같아서.
잠시 후 레빈은 다시 문자를 보내왔다. 사샤는 전혀 예상하지 못하던 내용의 답이었다.
[사샤. 그런데 그 제목이 맞아? 그런 다큐는 없다고 나오는데.]
레빈의 말을 들은 사샤는 의문에 빠졌다. 레빈은 구글은 물론이고 넷플릭스와 유튜브까지 검색해 봤으나 관련 영상은 찾을 수 없었고, 다만 위키에서 레전드 사샤 세드린의 별명 중 하나가 ‘문 샤인 워커’였다는 것은 알 수 있었다는 말을 덧붙였다.
그리고 자신이 가볍게 던진 화제 때문에 레빈이 허튼 시간을 소비하며 정보의 바다에 빠져 허우적거렸다는 사실을 알게 된 사샤는 금세 미안한 마음이 치솟았다. 레빈에게 사과하고 싶었다.
[레빈. 우리 집에 올레?]
사샤의 갑작스러운 제안에 놀란 레빈이 금세 답장을 보냈다.
[새로 이사한 집에?]
[응,,, 레빈 오면 내가 영샹 보여저는거도 돼고.]
오늘은 카렐이 출장 때문에 돌아오지 않는다. 먼저 자라고 했으니 자신이 푹 잠든 새벽에나 올 것이었다.
카렐과 함께 산 지 고작 일주일이었지만 사샤는 잠들 때마다 카렐이 곁에서 지켜봐 주는 상황에 금세 적응해 버렸다. 덕분에 처음으로 카렐이 없는 오늘 밤, 혼자서 잠들기가 무척 싫다고 생각했다. 그리고 레빈 역시 오늘은 파트타임 잡도 없고 마침 한가했다며 흔쾌히 받아들였다.
사샤는 호텔 주소를 구글 맵에서 찾아 레빈에게 보내주었다. 가는 길을 알아보겠다고 금방 답장한 레빈은 잠시 후 당황한 듯이 도로 메시지를 보내왔다.
[사샤, 제대로 된 주소 보낸 거 확실해?]
[응. 근데 마니클이 드러오지말라고 할지도. 내가 믿에 서서잇을개?]
사샤는 후다닥 몸을 일으켜 점퍼를 하나 걸치고 엘리베이터를 통해 밑으로 내려갔다. 프라이빗 도어 앞은 언제나처럼 마이클이 지키고 서 있었다.
마이클이 흰 치아를 드러내며 물었다.
“사샤. 이 밤중에 어딜 가니?”
“여기 서 있을 거예요. 친구가 놀러 오기로 했어요.”
“그래?”
“마이클이 그랬잖아요. 얼굴을 모르는 사람은 들여보내지 않는다고……. 그래서 오면 제가 데리고 올라가려고요.”
“그게 걱정됐구나. 친구 이름하고 간단한 인상착의만 알려주면 된다.”
마이클은 귀엽다는 듯이 사샤의 머리카락을 헤집었다.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고개를 살짝 흔드는 것으로 다시 정리한 사샤가 설명했다.
“이름은 레빈이고 키는 저랑 비슷해요. 머리는 모래색이에요.”
“알겠다. 언제쯤 도착하는지도 아니?”
“윌리엄스버그에서 와요.”
“그럼 40분은 넘게 걸리겠는데? 설마 여기서 그때까지 기다리려고 했어?”
마이클이 얼른 다시 올라가라는 듯 묵직한 프라이빗 도어를 당겨 열며 말했다.
“네……. 마이클이랑 이야기하면서 기다리면 시간이 금방 가잖아요.”
그 말에 마이클은 ‘사샤……’ 하고 중얼거리더니 양팔을 벌렸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그에게 한 걸음 다가가 풍채 좋은 가슴팍에 폭 안겼다. 낯선 사람의 체취가 났지만 안기는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사이 마이클은 ‘천사, 요정’이라고 칭송하며 사샤의 온몸을 간질거리게 만들었고, 잠시 후에야 다시 놓아 주었다.
“여기 펜트하우스에 거주했던 모든 사람 중 네가 가장 친절하구나.”
“네…….”
수줍은 기분에 바닥을 바라보며 수긍한 사샤는 다시 엘리베이터를 타고 방으로 올라갔다. 올라가는 길에야 방금 전에 대답으로 ‘천만에요’라는 말을 썼다면 회화가 더 매끄럽고 고급스러웠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조금 아쉬워졌다.
그리고 20분 후, 컨시어지로부터 콜이 도착했다. 받아 보니 마이클이었다.
―사샤. 레빈이라는 사람이 한 명 도착했는데, 네가 말하는 친구가 혹시 여자니?
“네, 맞아요. 레빈은 여자예요.”
―남자인 줄 알았는데……. 알겠다! 지금 바로 올라갈 거야.
많이들 하는 착각이었다. 예전에도 이런 경험이 적지 않았다. 특히 두 사람이 어딘가에 함께 갔을 때 사샤와 레빈이라고 이름을 소개하면 사람들은 여자인 레빈이 사샤인 줄 알고 사샤가 레빈인 줄 알았다. 그도 그럴 것이 레빈은 남자에게 주로 붙여지는 이름이었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샤는 사람들에게 쉽게 혼란을 주는 레빈의 이름이 아주 마음에 들었다. 제 친형과 이름이 같은 덕분에 그녀를 좋아하게 된 것이기도 했고. 정작 레빈은 제 이름에 별생각이 없는 것 같았지만.
마이클과의 전화를 끊고 나서 사샤는 레빈이 오는 소리를 들으려고 숨죽여 엘리베이터가 작동하는 소리에 집중했다. 그러나 집중한 것은 고작 20초뿐이고, 그 직후 사샤는 흥분해서 벌떡 일어난 뒤 거실을 이리저리 돌아다녔다.
연습실 주변에 아무렇게나 놓여 있던 슈즈가 마음에 걸려 허리를 굽혀 주워 들었을 때였다. 드디어 바깥에서 초인종이 울렸다! 사샤는 슈즈를 쥔 채로 현관으로 달려갔다.
“레빈!”
불행하게도 레빈은 양손에 가득 든 짐 때문에 저에게 뛰어드는 사샤를 받아 들지 못했다. 자신과 격렬하게 부딪힌 레빈이 세 번이나 뒷걸음질을 치고 나서야 사샤는 현관문에 등을 기댄 그녀를 부축했다.
“어떻게 이렇게 빨리 왔어? 뭘 이렇게 사 왔어?”
“집이 아니라 학교에 있었어. 이건 너한테 음식을 해 주려고……. 그리고 집들이 선물이랑. 사샤. 그런데 이게 다 뭐야? 여기가 네가 사는 집이야?”
호텔 로비에서 프라이빗 도어를 통과해 룸에 도달했지만 여전히 얼떨떨해 보이는 레빈은 실내를 넋 나간 얼굴로 둘러보았다.
처음 사샤는 레빈이 자신이 얻게 된 기가 막힌 행운에 함께 놀라고 기뻐해 주기를 바랐다. 그녀라면 아마도 그래 줄 것이라고 생각했다. 그러나 레빈의 얼굴에 드러난 것은 환희가 아닌 경악에 가까웠다.
그 얼굴을 보고 사샤는 뭔가 잘못되어 가고 있다는 걸 알았다.
“레빈……. 집이 조금 넓지?”
사샤는 눈치를 보며 물었다.
“응. 넓은 정도가 아니라…….”
“그치. 나도 그렇다고 생각했어. 근데 맨해튼에 부동산 매물이 없었대. 그래서 급하게……. 그때까지 마음에 들면 여기에서 지내라고.”
“아……. 그런 거야?”
“응.”
사샤의 말에 레빈은 고개를 끄덕이면서 일단 안으로 향했다. 얼굴에는 여전히 의혹이 남아 있었지만, 그녀는 일단 사샤의 말을 받아들였다. 레빈이 아는 사샤는 거짓말에 능숙한 아이가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사샤는 레빈의 짐을 빼앗아 힘껏 들어 식탁까지 옮긴 후 레빈이 사 온 것들을 하나씩 점검했다.
오렌지 다섯 개, 간단하게 손으로 집어먹을 수 있는 캘리포니아롤, 얇은 종이로 포장된 버거, 세제, 건조기에 넣는 티슈형 섬유유연제, 그리고 얇은 블랭킷까지 있었다. 바로 이 블랭킷이 레빈의 양손을 무겁게 만든 원흉일 것이다.
“사샤, 넌 추운 데서 잠을 못 자잖아. 우리 집에서 자고 갈 때도 얇은 담요를 세 개나 겹쳐야 잠을 잤지.”
“와…….”
“그런데 여기는 엄청 쾌적하고 따뜻해서……. 괜히 샀나?”
“아니? 고마워. 오늘부터 무조건 이것도 덮고 잘 거야. 내 이불 위에다가!”
그 밖에도 봉지 안에서는 양치컵이나 베이킹소다, 티슈 같은 생필품들도 굴러 나왔다. 이사를 왔으니 이런 게 필요할 줄 알았다며 멋쩍어하는 레빈 앞에서 사샤는 감격했고, 연신 고맙다고 말했다. 레빈이 자신을 이렇게나 생각해 주었으니 자신도 무언가를 해 주고 싶었다.
그래서 사샤는 카렐이 ‘셀러’라고 부르는 작은 냉장고에 가서 칠링한 와인을 하나 꺼내 왔다. 병목이 우아하게 길고 라벨에는 금박 장식이 붙은 멋진 술이었다.
레빈의 눈초리가 묘해졌다.
“사샤. 너 설마 술을 마셔?”
“아니? 이건 레빈 먹으라구…….”
사샤는 기대감을 접으며 면목 없는 얼굴로 병을 레빈 앞에 놓아두었다.
어쩌면 자신에게도 한 잔쯤 허락해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으나 레빈은 누나같이 딱 잘라 선을 그었다. 사샤는 대신 냉장고에 들어 있던 호텔 로고가 붙은 생수를 침울하게 온더록스로 따라 마셨다.
그리고 사샤는 잠시 후 레빈에게 영상을 보여주겠다며 카렐이 선물해 준 패드를 가지고 왔다. 다큐멘터리가 시작되고 얼마 지나지 않아 레빈은 영상 속 레전드에게 질투 날 정도로 금세 빠져들었다. 찬사도 아끼지 않았다.
가끔 집중이 흐트러지면 바스락거리며 종이를 벗겨내고 버거를 먹거나 자꾸만 레빈에게 맥락 없이 어제오늘 있었던 일을 종알거리며 내뱉는 사샤와 달리, 레빈은 특유의 집중력으로 영상에 집중하고 있었다.
“안타까워.”
레빈이 중얼거린 지점은 사샤가 보다가 울적해져 영상을 꺼버렸던 그 부분이었다. 무용수로서의 끝을 말하던 레전드 세드린의 인터뷰 장면. ‘왜?’라고 작게 묻는 사샤에게 레빈이 답했다.
“인생은 많이 남았는데도 삶의 목적을 빼앗긴 거나 다름없잖아. 그것도 자기만의 불운이 아닌, 너무나 당연한 노화 때문에.”
“…….”
“그럼 그다음엔 뭘 위해 살지?”
“……글쎄.”
“무용수는 힘든 직업이구나.”
그건 마치 자신에게 하는 말 같아서 사샤는 고개를 수그렸다. 무릎을 끌어안고 그 위에 턱을 기댔다.
그리고 레빈의 궁금증은 말미에야 풀렸다.
―은퇴를 예감하는군요.
질문을 던진 것은 틈틈이 등장하던 인터뷰어의 목소리였다. 그의 얼굴은 화면에 단 한 번도 잡히지 않았지만 목소리가 자주 등장한 덕분에 어느새 아주 친숙하게 느껴졌다.
“일부러 컷을 잘라서 편집했나 봐.”
“응?”
“아까 입은 옷이랑 똑같잖아.”
레빈의 말대로였다. 연습실의 작은 의자에 앉은 사샤 세드린의 얼굴을 비추는 자연광, 그로 인해 드리운 얼굴의 자연스러운 명암, 평생을 발레로 단련한 우아한 목이 드러나는 검정색 셔츠를 입은 사샤 세드린……. 그런 것들이 아까 보았던 장면과 동일했다.
그러니까 이건 앞에서 사샤 세드린이 ‘은퇴’를 입에 올리던 장면의 다음 부분이었다.
―이미 오래전에 결심했죠. 나는 너무 오래 일했어요.
―언제는 일할 수 있어서 행운이라면서요?
―음……? 네…….
―그렇게 일하기 위해 포기한 많은 것들이 있지 않나요?
―맞아요…….
―그런 것들과 등가 교환한 젊은 시절을 후회하지 말아요.
―알겠어요. 그만 혼내세요.
영상 속 사샤 세드린의 얼굴에 당황한 빛이 서리자 그의 영어에 지금까지는 없었던 악센트가 묻어나왔다.
그걸 보면서 사샤는 흥, 웃었다.
“사샤 세드린은 발레는 레전드지만 영어는 못하나 봐.”
사샤가 저도 모르게 투덜거렸다. 다른 사람을 흉보는 일이 잘 없는 사샤에게는 이 정도의 평가도 매우 드문 일이었다. 아무튼 사샤가 생각하기에 영상 속 사샤 세드린은 영어 발음뿐만 아니라 화술도 그다지 매끄러운 편 같지는 않았다. 그건 객관적 사실이었다.
그렇게 사샤가 본인의 생각을 정당화하고 있을 때였다. 레빈이 반대로 레전드의 편을 들며 나섰다.
“네이티브가 아닌데 저 정도면 엄청 잘하는 거지.”
“몰라…….”
“그런데 아까부터 생각한 건데, 네가 자꾸 ‘사샤 세드린’이라고 할 때마다 너 자신을 3인칭으로 말하는 것 같아서 조금 웃기다.”
“뭐? 그럼 이제부터 할아버지라고 부를래…….”
사샤는 일부러 쿡쿡 웃는 레빈에게 시선을 주지 않았다. 자신은 하나도 웃기지 않았다.
그다음으로 화면에 나온 것은 꽤 진지한 질문이었다.
―그럼 신이 당신에게서 춤을 빼앗아 가면 무엇으로 살 생각입니까?
아까 레빈도 짚었던 부분이었다.
그리고 사샤는 저보다 앞서 살았던 이의 대답을 숨죽이며 기다렸다. 작은 심장이 콩닥거렸다. 어쩐지 그를 통해 정답을 알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 질문을 들은 화면 속 사샤 세드린의 눈가에는 어느새 마법처럼 부드러운 주름이 졌다. 많이 웃으며 산 사람 특유의 표정 주름이었다.
그는 턱을 괴며 편안한 얼굴로 렌즈 너머의 누군가와 눈을 마주치며 나직하게 말했다.
―사랑.
예상치 못한 짧은 대답이 작은 사샤 세드린의 심장을 쿵, 떨어뜨려 놓고 갔다.
화면은 감상을 종용하는 대신 암전 화면으로 빠르게 바뀌었다. ‘사랑해야만 한다’ 영상 가운데 뜬 짧은 자막을 마지막으로 두 시간여의 영상은 완전히 끝났다.
숨이 막힐 듯한 여운 속에서 사샤는 이미 끝나 버린 검은 화면만을 못 박힌 듯한 시선으로 바라보았다.
그리고 한참 후, 먼저 입을 뗀 것은 레빈이었다. 그녀는 이미 끝난 화면의 앞뒤를 손가락으로 슬라이드하며 조금 살펴보더니 말했다.
“이걸 내가 왜 인터넷에서 찾을 수 없었는지 알겠어.”
“……왜?”
사샤는 고개를 삐거덕 돌려 레빈을 바라보았다.
“크레디트가 없잖아. 개봉작이 아닌 거야.”
“아…….”
크레디트가 뭔지도 모르면서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조금 넋이 나가 있는 사샤에게 레빈은 특별한 영상을 보여줘서 고맙다고 말했다. 이어서 시간을 들여 영상을 보는 건 오랜만이었는데 아주 좋았다고도 말했다.
사샤는 조금 후련해 보이는 레빈의 얼굴을 관찰하듯 들여다보았다. 그렇게 푹 빠져서 영상을 보았던 것치고 쉽게 감상에서 빠져나온 얼굴이었다. 마지막 장면으로 인해 마음이 복잡해진 것은 자신뿐인 듯했다.
그러다 문득 생각난 듯이 레빈이 말했다.
“그런데 내 착각인지 모르겠는데…….”
“응?”
“이름뿐만이 아니고 얼굴도 닮았어.”
“누가?”
“저 멋진 사샤 세드린이랑 이 꼬맹이 사샤 세드린 말이야. 분위기는 완전히 다르지만…… 아버지와 아들 같은? 적어도 먼 친척인 것 같은 느낌이 들 정도로……. 러시아인의 미남 골격은 저때나 지금이나 다 비슷비슷한 건가?”
그렇게 말하며 레빈이 사샤의 볼을 살짝 꼬집었다. 사샤는 퍼뜩 놀라며 부정했다.
“싫어! 완전 할아버지잖아.”
“아니, 내 말은 그 뜻이 아니라.”
그때였다. 두 사람과 조금 떨어진 곳에서 인기척이 들렸다.
철컥, 하고 닫히는 현관문 소리에 두 사람은 동시에 눈을 마주치며 말을 멈추었다. 자신들이 방금 동시에 들은 것이 착각이 아닌지 확인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어 현관의 카펫 위로 구두를 벗어 두는 듯한 분명한 기척이 들려왔다. ‘누가 왔나 봐’ 레빈이 소곤거렸다. 사샤는 ‘청소부일 거야’ 하고 따라서 작게 대답했다. 뒤로 고개를 꺾어 보았지만 아직 사람은 보이지 않았고, 다시 나가는 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이상하다. 하우스키퍼들은 안에 사람이 있으면 그냥 나가는데…….”
사샤는 그렇게 말하며 레빈을 바라보았다.
그러나 마주 본 레빈의 얼굴이 이상했다. 그녀는 사샤의 뒤쪽 어딘가를 조금 놀란 얼굴로 바라보고 있었다.
“이상할 거 없어요. 난 하우스키퍼가 아니니까.”
지금 이 시점에 들을 수 있을 거라고는 예상치 못했던, 익숙한 목소리였다. 심장이 멈출 정도로 크게 놀란 사샤는 차마 뒤도 돌아보지 못했다.
그 직후, 사샤의 마른 어깨를 한 번에 감쌀 정도로 큰 손이 어깨에 턱 얹어졌다. 왠지 숨이 막히는 기분으로 사샤는 천천히 위를 올려다보았다.
“클레멘……츠, 씨.”
거기에는 분명 오늘 새벽 비행기로 도착한다고 말했던 카렐이 자신을 내려다보고 있었다.
그의 얼굴에는 숨기지 못한 피로가 짙게 드리워져 있었다. 그리고 지금까지 카렐의 한정된 몇 가지 모습만을 보았던 사샤가 알아챌 수 있을 만큼, 현재 그의 기분은 좋아 보이지 않았다. 아마도 사샤가 카렐을 알게 된 후 최악의 상태였다.
잔뜩 주눅 든 사샤 대신 먼저 반응한 것은 레빈이었다. 레빈은 그에게 시선을 고정한 채로 의자를 밀며 일어나더니 먼저 인사를 건넸다.
“안녕하세요. 저는 레빈 로랑이라고 해요. 맨해튼에서 유학 중인 학생이에요.”
사샤 혼자 지내는 곳인 줄로만 알았던 곳에 누군가 갑자기 찾아오니 레빈의 얼굴에는 당황한 티가 역력했다. 그래도 그녀는 예의를 갖추려고 했다.
그리고 그녀를 웃음기 없는 얼굴로 응시하던 카렐은 약 5초간의 짧은 침묵을 지킨 후 대답했다. 짧았지만 사람을 매우 불편하게 만드는 간격이었다.
“사샤 세드린의 법적인 가디언입니다.”
“가디언…….”
그렇게 중얼거리면서 레빈은 처음 보는 남자를 무례하지 않게 살펴보았다. 그때 남자가 먼저 손을 내밀었다. 그렇게 맞잡은 레빈의 손을 강하지 않은 악력으로 마주 잡은 카렐은 눈을 마주치고는 깔끔하게 손을 거뒀다.
확실히 남자는 이런 종류의 매너에 익숙한 듯했다. 모로 봐도 부정할 수 없는 상류층이었다. 매너뿐만 아니라 스리피스로 제대로 차려입은 고급스러운 슈트와 은은한 결이 느껴지는 검은 코트, 그 위로 걸친 잿빛 머플러 따위도 그의 절제된 취향과 지위를 자연스럽게 드러냈다.
레빈이 다니는 대학에도 학생 때부터 일찍이 비즈니스를 시작하며 양복을 입고 어른을 흉내 내는 학생들이 더러 있었으나, 눈앞의 남자가 입은 옷은 그런 번질거리는 최저가 양복과는 차원이 다르다는 것쯤은 눈대중만으로도 알 수 있었다.
“클레멘츠 씨?”
레빈은 아까 사샤가 중얼거린 이름을 기억해 물었다. 자신을 가디언이라고만 말하고 이름을 알려주지 않는 바람에 추측할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매너를 모르는 남자가 아닌데도 통성명을 거부하는 이유는 단 한 가지뿐일 것이다. 그는 자신을 은근히 무시하고 있었다.
레빈의 추정이 사실인 듯, 그는 레빈의 말에 대답하는 대신 아직도 의자에 앉아서 두 사람을 올려다보기만 하는 사샤에게 고개를 돌렸다.
“저녁 식사로 먹은 게 이건가요.”
“레빈이 버거를 사 왔어요. 맛있었어요…….”
“그래요. 하루 한 끼 정도는 괜찮겠지요.”
어르는 목소리는 다정했지만 은연중에 부실한 저녁을 지적하고 있는 것이 틀림없었다.
레빈은 눈앞의 남자가 아주 어렵다고 느끼는 것과 동시에 당장 여기를 떠나고 싶어졌다. 그러나 주눅 든 사샤만 놔두고 떠나기에는 마음이 무거웠다.
“클레멘츠 씨. 사샤가 혼자 있기를 싫어해서 잠깐 같이 있었어요. 허락 없이 방문해서 죄송해요.”
“레빈은 사과하지 마. 내가 부른 거잖아.”
사샤가 용기 있게 외쳤으나 레빈은 눈빛으로만 그런 사샤를 말렸다. 잘 설명할 수 없지만 사샤가 자신의 편을 들어줄수록 남자의 눈빛이 차가워지는 듯했기 때문이다.
“아주 친한 친구인가 보죠.”
“……네. 그렇다고 볼 수 있지만.”
레빈은 대답이 궁색해져서 말을 멈추었다.
다섯 살 차이가 나는 사샤와 레빈은 겉보기에 평범한 조합의 친구는 아니었다. 친남매도 아니니 드물고 이상한 조합으로 여겨질 법도 했다. 그리고 남자는 분명 그런 부분을 꼬집는 것일 테다.
그리고 말을 멈춘 레빈 대신 남자가 말을 이었다.
“사샤는 혼자 있는 걸 상당히 싫어하죠. 그런 게 걱정되어서 출장도 빨리 마치고 와 봤더니……. 별로 내가 걱정할 필요가 없었네요.”
“…….”
“같이 있어 줘서 고마워요. 비서를 통해 꼭 사례하도록 하겠습니다.”
그렇게 말하면서 남자는 가볍게 눈짓하며 먼저 테이블 앞을 떠났다. 저를 따라 나오라는 무언의 종용이 느껴졌다.
레빈은 사샤에게 ‘잘 있어’라고 작게 중얼거리고 나서 제 가방을 챙겼다. 떠나기 전에 들여다본 사샤의 눈가와 코에 붉은 기가 가득한 게 왠지 울먹거리는 것 같았으나, 거실 한가운데서 남자가 우뚝 서서 기다리고 있는 바람에 달래 줄 수가 없었다. 시간을 더 지체하기란 어려워 보였다.
레빈이 거실로 나가자 남자는 기다렸다는 듯이 현관으로 향했다. 당장 나가라는 무언의 명령이었다.
그가 신발을 신는 레빈을 향해 말했다.
“연락처를 알려주면 고맙겠어요.”
레빈은 남자에게 자신의 전화번호를 알려주었다. 그 후에는 이제는 보이지 않는, 사샤가 있는 쪽을 한 번 바라보고는 그 호화스러운 방을 떠났다.
* * *
사샤는 여전히 테이블 앞에 가만히 앉아 있었다.
카렐이 일찍 온 것은 더없이 기쁜 일이었으나, 현재 사샤는 이루 말할 수 없이 두렵고 울적했다.
자신의 감정이 나락으로 빠져드는 이유는 대체 무엇일까.
사샤가 짐작할 수 있는 이유는 단 하나뿐이었다. 카렐의 기분이 좋아 보이지 않았기 때문에.
사샤는 차근차근 자기 행동을 떠올려 봤다. 카렐을 기분 나쁘게 만든 자신의 잘못을 찾으려고.
카렐이 일찍 잠들라고 했는데 그 말을 어긴 것이 가장 문제였다. 게다가 테이블 위에 남아 있는, 레빈이 마시다 남긴 와인병은 음주 오해를 사기 딱 좋았다. 이제 와서 허겁지겁 숨겨 봤자 카렐은 이미 아까 전에 테이블을 눈으로 다 훑었을 것이다. 자기를 생각해서 여기까지 와 준 레빈이 즐겁지 못한 얼굴로 돌아가게 된 것도 슬펐다.
좋은 집에 살게 되었으니까 자신이 우울해할 때마다 레빈이 제 집에서 재워 주었던 것처럼 이제는 자신도 레빈을 재워 줄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바로 첫날부터 계획이 어그러졌다.
“사샤. 이리 오세요.”
거실에서 엄격한 카렐의 목소리가 들렸다. 동시에 그가 코트를 벗어 내려놓는 소리도. ‘사샤가 혼자 있을까 봐 빨리 돌아왔다’고 했던 카렐의 말이 사샤의 가슴을 콕콕 찔렀다.
“카렐? 죄송해요…….”
사샤는 미리 울면서 비척비척 카렐에게 걸어갔다.
코트를 벗은 후 그 안의 재킷도 마저 벗어 소파 위에 걸쳐 놓고 있던 카렐이 그런 사샤를 황당하다는 듯 바라보았다.
“왜 울고 있습니까?”
“카렐의 말투가 딱딱해요.”
사샤는 이미 눈물범벅인 뺨을 손등으로 문질러 닦았다. 아까 막 들어오자마자 저와 레빈을 차가운 눈으로 바라보던 카렐을 떠올리면 닦아낸 곳 위로 새로운 눈물이 자꾸만 샘솟았다.
“일찍 자라고 했는데 그러지 못한 것도 죄송해요.”
“…….”
“친구를 부르기 전에 허락받아야 했는데, 여기는 제 집도 아닌데, 마음대로 친구를 불러대서 죄송해요. 제가 주제넘었어요.”
“…….”
“그리고 버거랑 콜라를 먹은 것도……. 끕, 훌륭한 댄서가 대러면 식습간…… 습깐을 고쳐야 한다고, 끅, 까렐이 말, 마랬는데…….”
울면서 발음이 꼬이자 사샤의 영어에는 숨길 수 없는 러시안 악센트가 묻어나왔다. 된소리가 많은 그 독특한 발음을 듣자마자 아연해진 카렐은 사샤에게 다가갔다. 그러고는 제가 가까이 서는 것만으로도 흠칫 놀라는 소년의 마른 등을 쓰다듬으며 소파에 앉혔다.
“왜 그렇게 겁을 먹었죠?”
“카렐이 무서운 표정을 하니까요.”
“화를 내진 않았습니다.”
“화냈어요! 카렐은 화냈어요. 레빈한테 화내고 있었어요…….”
카렐은 짧게 한숨을 내쉬고는 사샤의 곁에 앉았다.
몸을 앞으로 굽혀 무릎에 팔을 기댄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겨 있던 그는 이내 소파 등받이에 등을 기댈 수 있을 정도로 깊이 앉았다. 카렐의 체중으로 소파가 움푹 파이자 자연히 곁에 앉아 있던 가벼운 사샤의 몸이 카렐 쪽으로 굴러 미끄러졌다.
“흣…….”
“이리 와요. 울지 말고 기대요.”
“흐윽…….”
“차갑게 대하려던 건 내 의도가 아니었어요.”
카렐이 어깨를 감싸 안아주자마자 사샤는 울지 말라는 말에 반대되게 더욱 서럽게 울었다. 물론 그 정도는 예상했다는 듯 카렐은 더 나무라지 않았다.
“서럽게 만들었다면 미안해요. 나는 일상이 번거로운 사람이라 그렇습니다.”
“일상이…… 번거로워요?”
“그래요. 알려주는 게 늦었군요……. 나는 사생활이 어느 정도 노출된 사람이라 내 사적인 공간을 타인이 침범하는 데 아주 예민해요.”
사샤는 카렐의 말을 정확히는 이해하지 못했다. 그저 그의 예민한 부분을 자신이 건드린 건지 아닌지만이 알고 싶었다. 그래서 자기가 번거로워졌는지 아닌지…….
카렐은 한숨을 쉬며 사샤의 머리를 쓸어 넘겼다. 사샤의 목이 뒤로 휘청 꺾였다가 돌아왔다.
“내 잘못이에요. 친구가 없다는 말을 너무 믿었어요.”
“친구 없어요…….”
“레빈 로랑은?”
“레빈은 누나예요. 친누나 같은 사람이에요.”
사샤는 카렐의 가슴팍에 기대어 제 어깨를 규칙적으로 도닥이는 그의 손길을 느꼈다. 혹시나 싶어 흘끔 눈을 들어 그를 올려다보자 이제야 제가 아는 표정으로 돌아와 있었다. 따뜻하고 누그러진 눈빛.
“레빈은 진짜로 엄마 같아요. 제 친누나였으면 좋겠어요.”
“마음에 드는 사람은 툭하면 가족으로 삼으려 하는군요? 나한테도 형이 되어 달라더니.”
카렐은 그렇게 말하며 피식 웃었다.
그를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사샤는 더듬더듬 입을 열었다. 자신과 레빈이 처음으로 만나게 된 계기였다.
사샤가 레빈을 처음 본 것은 지하철 안이었다. 그때 사샤는 뉴욕에 도착한 지 6개월이 조금 지난 상태였고 혹독한 연습량과 부족한 언어, 그리고 처음으로 어머니와 떨어져 살며 생긴 외로움에 많이 지쳐 있었다.
그런 사샤의 눈에 마침 맞은편 자리에 앉아 책을 읽는 모래색 머리의 대학생이 들어왔다. 그녀는 손에 두꺼운 책을 들고 있었는데, 그 책의 페이지 윗면에는 검은 글씨로 ‘LEVIN’이라고 적혀 있었다.
사샤는 홀린 듯 그 대학생 앞에 다가가서 말했다.
‘이거 우리 형 책인데?’
전공 책을 든 학생, 레빈은 처음에는 사샤가 자신에게 말을 걸었다는 사실도 눈치채지 못하다가 이내 저를 빤히 내려다보고 있는 검은 머리 소년에게 미소 지어 주었다. 그리고 아무 일도 없다는 듯이 다시 책으로 시선을 내렸다.
사샤는 다시 한 번 큰 소리로 말했다.
‘이거 우리 형 책이야.’
날카로운 목소리에 레빈이 다시 고개를 들었다.
‘너희 형 이름이 레빈이니?’
‘응……. 왜 네가 갖고 있어?’
‘나도 레빈이거든.’
하지만 상식적인 설명을 해 주어도 사샤는 고집스럽게 자기 형의 책이라고 우겨댔다. 그걸 보고 뭔가 이상하다고 생각한 레빈은 그 길로 사샤를 데리고 지하철에서 내렸다. 사샤는 그 뒤로도 계속해서 너도 우리 형을 아냐면서 강박적으로 캐묻다가, 레빈이 이끈 프랜차이즈 가게에 앉아 밀크셰이크를 빠르게 한 통 비우고 나서야 말을 멈췄다.
사샤가 먹는 속도를 보고 조금 놀란 레빈이 다시 물었다.
‘너 배도 고프니?’
‘조금…….’
그 직후 레빈은 사샤에게 햄버거도 사 주었다. 배가 부르고 마음이 편안해진 후에야 자신이 모르는 사람에게 얼마나 이상한 짓을 한 건지 실감한 사샤는 매우 부끄러워했다. 자기가 왜 그랬는지 이해가 되지 않는다고, 머리에 곰팡이가 펴서 그런다며 거듭 사과도 했다.
그리고 한참 후에야 제 눈앞의 모래색 머리를 가진 레빈도 레빈이라는 것을 인정하게 됐다.
‘네 형도 대학생이야?’
레빈의 물음에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응……. 아니. 잘 몰라.’
‘잘 몰라?’
‘형은 내가 열 살 때 집을 나갔어. 아마 공부하러 간 걸 거야. 원래 똑똑했거든.’
‘그래, 그렇구나…….’
그날 사샤의 핸드폰 번호를 알아간 레빈은 그 뒤로 종종 사샤를 불러 맛있는 걸 사 주곤 했다. 사샤가 발레 스쿨의 장학생이라는 것을 알고 나서는 정말 굉장하다면서 칭찬해 주고 심적인 지지도 아끼지 않았다. 사샤의 몇 안 되는 맨해튼 인맥은 전부 레빈을 통해 얻게 된 것이었다. 정말 고마운 사람이었다.
그리고 율리안과 달리 레빈이 사샤에게 항상 너그러운 이유는 첫 만남 때 사샤가 보였던 정신적으로 불안정한 모습을 그녀가 여전히 기억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때의 이야기를 짧게 마친 사샤가 카렐을 향해 중얼거렸다.
“레빈이라는 이름을 가진 사람은 다 착해요.”
“…….”
“저는 아빠 말대로 뇌에 곰팡이가 피어서 가끔 이상해질 때가 있어요. 보통 제가 그러면 사람들은 무시하는데, 그런데 레빈은 절 귀찮다고 하지 않고 친절하게 제 얘기를 들어줬어요.”
“그랬군요.”
“그러니까 레빈한테 화내지 마세요. 다정하게 해 주세요…….”
카렐은 더는 말하지 않고 그저 제 팔 안의 사샤를 가만히 토닥였다.
“함께 사샤 세드린의 영상을 봤나요?”
“네. 레빈이 인터넷에서 못 찾겠다고 해서요.”
“……그 필름은 미개봉작이 맞아요.”
“그게 왜 카렐에게 있어요?”
“내게 사샤 세드린의 자료가 아주 많이 있거든요. 필름에 색을 입혀서…… 현대식으로 재편집을 해서 사샤 세드린을 지금 세대에도 널리 알리는 작업을 하려고 했죠.”
“왜요?”
사샤는 왠지 초조한 마음으로 물었다.
지금까지 사샤는 자신을 통해 레전드 사샤 세드린을 떠올리는 사람을 수없이 많이 만나 보았다. 그건 카렐 역시 마찬가지였고, 사샤는 그런 건 어쩔 수 없다고 생각했다.
그러나 카렐이 자신을 특별하게 여기는 데에 단순히 유명인의 후광, 그 이상의 의미가 있다면?
“음……. 뭐라고 설명해야 할까.”
카렐은 조금 뜸을 들이다가 건조하게 말했다.
“내 할아버지가 사샤 세드린의 양자였습니다.”
“와!”
의외의 연결점에 사샤는 순수하게 감탄했다. 카렐은 여전히 코가 빨간 채로 눈물을 잊은 듯 외치는 사샤가 귀엽다는 듯이 피식 웃었다.
“복원 사업을 하는 건 내 욕심이었어요. 굳이 그런 작업을 하지 않아도 워낙에 예술적 유산이 많은 분이니까.”
“네…….”
사샤는 카렐이 무슨 말을 하는 건지 조금 알 것 같다고 생각했다. 사샤 세드린은 무용계에서는 레전드가 맞았지만 일반인들은 그가 얼마나 대단한지 잘 실감하지 못한 채로 그저 유명한 아이콘으로 소비를 할 뿐이니. 어쩌면 카렐은 예술 감독이 항상 외치는 ‘발레의 대중화’를 사샤 세드린을 통해서 하려 했는지도 모른다.
“그런데…… 편집을 끝내고 나니 이걸 대중에게 공개해야 할지 말아야 할지 판단이 서지 않더군요.”
“왜요?”
“음…….”
카렐은 웃기만 했다.
“왜요……?”
사샤는 끈질기게 물었다. 그의 앞섶을 손으로 쥐고 흔들흔들 당겼다 놓았다 하는 사샤를 보자 어쩔 수 없이 털어놓을 수밖에 없다고 생각했는지, 카렐이 짧게 말했다.
“그냥, 나만 보고 싶었죠.”
흘리듯 말하는 목소리. 사샤는 의중을 읽을 수 없는 카렐을 빤히 바라보았다.
“어쨌든 레빈과는 그런 일이 있었군요. 몰랐습니다.”
“…….”
“작년에는 어땠죠?”
“작년?”
“뉴욕에 막 도착하고 첫 1년 말이에요.”
사샤는 카렐이 억지스럽게 화제를 바꾼다는 느낌을 받으면서도 곰곰이 생각에 빠져들었다.
재단에서 열린 파티에서 처음으로 카렐을 마주치고, 그에게 명함을 받은 후 1년.
사샤는 한 단어로 작년을 정의할 수 있었다.
“외로웠어요.”
“……지금도 외로운가요?”
“아니에요.”
“다행이네요.”
혼날 것을 예상하면서 울어 버리는 바람에 체력이 소진된 데다가 카렐의 따뜻한 품에 기대어 있다 보니 어느새 잠이 쏟아졌다. 그리고 카렐은 사샤 본인보다도 먼저 그것을 느낀 듯했다.
저에게 체중을 잔뜩 기댄 채로 축 늘어진 사샤를 꽤 부자연스럽게 안고 있던 카렐은 조심스레 사샤의 등과 무릎 밑으로 팔을 넣어 소년을 안고 일어났다.
갑자기 몸이 들리고 시야가 흔들리자 사샤는 일부러 눈을 크게 떴다. 저를 재워 버리려는 카렐을 알아채고는 반대로 잠을 깨려는 행동이었다.
“근데 혹시 작년에도 저를 알고 계셨어요? 파티 이후로 잊은 게 아니고요?”
“그럼요. 내가 장학금을 주는 학생 중에 아주 재능 있는 소년이 있다는 건 알고 있었죠.”
카렐의 말에 사샤는 작게 ‘와……’ 하고 감탄했다.
“그럼 가끔씩 보러 오기도 하셨어요?”
그렇게 묻는 사샤의 심장은 그를 안아 든 카렐이 느낄 수 있을 정도로 세게 요동치고 있었다. 카렐은 내색하지 않으며 사샤를 가만히 침대 위에 눕혔다.
“아주 가끔은.”
“와…….”
작년의 자신은 혼자였지만 실은 혼자가 아니었다는 사실에 사샤의 마음이 따뜻해졌다. 내내 후원자가 자신을 알아봐 주기를 바랐다. 꼭 그가 아니더라도 누군가가…….
그리고 비록 자신은 눈치채지 못했지만 그는 항상 저를 지켜보고 있었던 것이다.
잠들기 직전, 사샤는 불분명한 발음으로 그에게 물었다.
“그런데 왜 절 외롭게 두셨어요?”
막 잠에 빠져드는 사샤의 시야 안으로 카렐의 짙은 눈이 보였다. 아쉽게도 대답을 듣지 못한 채로 사샤는 깊이 잠들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