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3. 만나고, 떠나가고 (11/30)

  3. 만나고, 떠나가고

유스 아메리카 그랑프리 예선 시즌이 다가오자 학교의 클래스 인원이 조금 줄어들었다. 몇몇 학생이 저마다 예선에 참여하기 위해 학교를 떠났기 때문이다.

지금 발레를 전공하기는 해도 아직은 프로 발레 무용수로서의 인생을 살 것인지 확실히 결정을 내리지 못한, 미래가 불확실한 아이들이 대다수였다. 발레 댄서가 되는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위한 경쟁의 농도는 진짜 발레단과 비해도 전혀 뒤지지 않았다.

“어제 조제하고 통화했다며?”

“그 얼간이 자식, 완전 신났더라.”

“신나겠지. 학교를 빠졌으니까!”

“아니야. 멍청해서 신이 난 거야. 거기까지 가서 신나기만 하는 놈이 어디 있어?”

로커룸 안쪽에서는 그랑프리 예선에 참가한 조제에 대한 이야기가 한창이었다. 사샤는 문이 조금 열려 있는 로커룸으로 들어서면서 슈즈 한 켤레를 바닥에 내던졌다. 밑창이 가죽으로 된 슈즈가 찰싹 소리를 내며 바닥에 달라붙었다.

소리가 난 쪽을 돌아본 아이들은 거기 앉은 게 말수 적고 조용한 사샤라는 것을 알고는 금세 주의를 거두었다.

“아무튼 부럽다. 넌 왜 안 나갔어?”

“난 그 정도는 아냐.”

“실력이? 아니면 돈이?”

약간씩 서로를 조롱하면서 농담을 하는 게 그 나이 대 소년들의 방식이었다. 한 놈이 다른 놈의 등을 우다다 패자 다른 놈이 발길질을 했다. 사춘기가 지난 아이들의 걸걸한 웃음소리가 터져 나왔다.

사샤는 그 아이들을 등지고 티셔츠를 훌렁 벗었다. 점 하나 없는 깨끗한 맨 등이 드러났다.

초여름도 지나 한창 때의 여름으로 접어들 무렵이라 요새는 많이 더워져서 옷 안에 레오타드를 겹쳐 입을 수가 없었다. 덕분에 사샤는 등교해서 옷을 갈아입기 위해 다시금 로커룸에 출입하고 있었다. 긴 타이즈도 덥고 거추장스러워진 지 오래라 사샤는 숏 타이즈를 꺼냈다. 비닐에 싸인 새 타이즈는 접어 놓으니 손바닥만 했다.

사샤는 새 옷의 포장을 뜯는 이 순간을 무척 좋아했다. 언제나 사치스러운 기분이 들기 때문이다. 비닐을 뜯어 한 번도 세탁하지 않은 새 옷을 펼치고 이로 태그를 끊어낸다.

사샤가 경건히 저만의 작업에 집중하고 있을 때에 다시 아이들의 실없는 이야기가 들려왔다.

“조제가 그러는데, 거기 예쁜 애들 완전 많대.”

“미친놈.”

“부러워서 그러지? 아무튼 진짜 요정같이 생긴 캐나다 출신 중국 여자애가 있는데, 어느 학교에서 왔냐니까 학교 안 다닌다고 그랬대. 하루 종일 발레만 하려고 자퇴하고 홈스쿨링 한다는 거야.”

“와. 그런 애를 어떻게 이겨?”

“더 짜증 나는 건 뭔지 알아? 내가 찾아보니까 걔는 이미 다른 국제 대회에서 상 받은 적이 있는데 또 나온 거더라고.”

“5개 대회 석권이라도 하려나 보지.”

“레전드의 탄생이네.”

사샤는 이내 바지도 벗고 숏 타이즈를 쭉 끌어 올려 입었다. 허벅지 중간보다 윗부분에서 마무리가 되는 타이즈는 피부에 찰싹 달라붙어 허벅지와 엉덩이의 움직임이 그대로 드러난다. 밝은 색 타이즈를 입으면 근육의 움직임이 너무 도드라지는 것 같아서 그나마 어두운 색을 찾아 입는 편이었다. 그리고 그 위에는 짧은 반팔로 된, 신축성이 있는 하얀 레오타드를.

최근 사샤뿐만 아니라 클래스에 참여하는 학생들의 복장은 더 이상 덜어낼 것이 없을 정도로 간편해졌다. 추위를 타는 아이들도 워머 없이 플리에부터 시작할 수 있는 날씨였다.

그렇게 연습복으로 갈아입은 사샤는 마지막으로 무언가를 찾기 위해 가방 안에 손을 넣어 더듬었다. 사샤의 손이 끄집어낸 것은 조그마한 헤어밴드였다.

흰 솜털이 보송보송한 헤어밴드를 쭉 당겨 머리에 집어넣은 사샤는 앞머리를 모두 넘기고 이마에 고정시켰다. 헤어밴드 위로 검은 머리카락이 자연스럽게 흐트러져 내려왔다. 고개를 숙여도 시야로 쏟아지는 것이 덜해 훨씬 편했다.

사샤는 헤어밴드에 손가락을 가져다 대고 만지작거렸다. 땀을 흡수하는 솜털 부분이 부드러워 자꾸 만지고 싶은 중독성이 있었다.

이 헤어밴드도 카렐이 선물해 준 것이었다. 단순히 그가 주어서 그런 것만이 아니라, 정말이지 무척 편해서 아주 마음에 들었다. 오늘 처음 착용해 보는 것인데도 왜 평생 이것을 하지 않았는지 의아할 정도였다.

사샤는 며칠 전의 일을 떠올렸다.

‘왜 헤어컷을 하지 않고요.’

집에서 연습할 때마다 머리를 높이 묶어 사과 꼭지 같은 헤어스타일이 되는 사샤를 보고 먼저 물어온 것은 카렐이었다.

‘커트 비용이 조금 비싸서요. 두 달에 한 번은 잘라야 하는데, 부담스러워요. 그래서 1년에 세 번만 자르려고…….’

그렇게 버티다가 머리가 길어서 거추장스러워지기 시작하면 사샤는 묶을 수 있는 부분의 머리카락을 모아 높은 반 묶음을 하곤 했다. 헤어커트 비용이 부담스러울 때마다 반복해서 이제는 익숙해진 습관이었다.

하지만 카렐의 앞에서 설명을 하고 보니 스스로가 궁상맞다는 생각이 들어 왠지 위축이 되었다.

‘그랬군요.’

그러나 카렐은 별다른 타박 없이 단순히 응답할 뿐이었다.

그러고는 아주 멋진 말을 덧붙였다.

‘하지만 이제 돈 걱정은 할 필요가 없지 않나요.’

그 말을 들은 사샤의 입은 감탄으로 조금 벌어졌다.

그러나 사샤가 카렐보다 잘하는 것이라고는 돈을 아끼는 것뿐이었다. 그래서 사샤는 카렐에게 부담을 주고 싶지 않다는 뜻에서 이렇게 말했다.

‘감사해요. 카렐, 조만간 머리를 자르러 갈게요. 저기…… 그런데 아주 짧게 깎아 버리면 어떨까요? 가끔 그렇게 하는 애들이 있어요. 머리가 귀찮으니까요.’

‘…….’

‘삭발하면 시원할 것 같은데…….’

그러나 사샤의 말을 듣고 왜인지 표정이 굳어 버린 카렐은 헤어커트는 좀 기다려 보라고 말한 뒤, 선물을 들고 왔다. 퇴근하는 그의 손에는 색색의 헤어밴드가 들려 있었다.

사샤는 로커룸 한쪽에 있는 작은 세면대 앞으로 가서 헤어밴드를 낀 제 얼굴을 들여다보았다. 조금 어색했지만, 역시 마음에 들었다.

‘머리를 자를 때는 내게 말을 해 줘요’

동시에 카렐이 했던 영문 모를 말도 떠올랐다. 사샤는 왜 커트할 때 그에게 보고를 해야 하는지는 끝내 이해하지 못했지만, 아무튼 카렐에게는 자신의 사소한 것도 전부 공유해 주고 싶었으므로 쉽게 알겠다고 대답했다.

“사샤. 너는 콩쿠르 안 나가냐?”

거울 속에 비친 누군가가 사샤에게 말을 걸었다. 사샤는 뒤를 돌면서 제게 말을 건 아이를 바라보았다.

“콩쿠르?”

“그래. 너보다 못한 애들도 잔뜩 나가잖아. 왜 안 나가?”

그 말에 사샤는 잠시 말문이 막혔다.

나가고 싶다고 나갈 수 있는 것이었나?

그랑프리 예선이 매년 7월 중순에 시작되는 것은 알고 있었지만 사샤는 사전 접수는 어떻게 하는지, 최종 참가자들을 거르는 오디션은 어떻게 진행되는 건지 전혀 알지 못했다. 모든 콩쿠르에는 부모님의 동의가 필요하다고 들어 애초에 포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콩쿠르에 가는 여비는 보통 어떻게 준비하는지, 의상은 어떻게 의뢰하고 구매하는 것인지, 비행기 표 값 같은 것은 모두 사적인 부담인지에 대한 것도…….

대부분 그런 역할을 해 주는 것은 열성적인 부모, 혹은 부모들의 그룹이었다. 그러나 사샤 같은 외국인 유학생은 아무래도 그런 정보에서 소외되기 마련이었다. 혼자서 하나부터 열까지 준비하는 게 불가능한 일은 아니지만, 사샤에게는 정보가 부족했다.

그런 것이 의지만으로 되는 일은 아니라는 것을 일찌감치 깨달은 사샤에게는 친구의 질문이 무척 이상하게 들리기만 했다.

“조제 같은 애보다도 네가 나가면 단박에 수상할 텐데.”

말을 걸었던 아이는 그 한마디만을 던지고 로커룸을 떠났다.

뒤늦게야 사샤는 방금 전에 자신이 큰 변화 한 가지와 직면했음을 알았다.

저 아이들은 최초에 어떤 콩쿠르에도 참가하지 않았던 데다가 영어도 서툰 사샤를 대놓고 무시했었다.

물론 모든 아이가 그렇지는 않았다. 다만 제 실력 부족에서 나오는 불안감으로 자기가 어디쯤 위치했는지를 분명히 하기 위해 같은 클래스의 학생들을 평가하고, 한계를 규정짓고, 깎아내리던 학생들이 일부 존재하던 것은 부정할 수 없었다. 그것이 아무리 작은 발레 클래스일지라도, 발레계란 그 어떤 곳보다도 경쟁이 심한 곳이니까.

그런데 1년 반 만에 자신이 그런 무리에게서도 처음으로 인정받게 된 것이다.

얼마 전에 이벤트 프로모션팀에 뽑혔기 때문일까?

아니면 옥사나처럼 눈에 띄는 아이와 고정적인 파 드 되 파트너가 되어서일지도 모른다.

센터 순서에서 바딤이 항상 첫 번째 그룹으로 뽑아 줘서일 수도 있고.

그래도 냉정하게 생각해 보면, 아마도 조제를 비롯해 콩쿠르에 밥 먹듯 참가하는 아이들에 대한 견제와 질투에서 발로된 발언이겠지만…….

그 무리를 따라 모닝 클래스 스튜디오로 향하면서 사샤는 생각에 잠겼다.

이전까지는 자신이 처한 환경 때문에 항상 물질적으로 허락된 행동반경을 정해 놓고 지레 포기해 버렸지만, 최근 카렐의 애정과 지지를 듬뿍 받게 된 사샤에게는 한 가지 새로운 능력이 생겼다.

바로 가능성에 대해 상상하는 능력이다.

사샤는 상상해 보았다. 진짜로 콩쿠르에 나가게 되어 비디오 접수용의 베리에이션을 녹화하는 모습을. 그리고 비행기를 타고 다른 나라로 가서 처음 보는 극장의 기념사진을 찍고 숙소에 짐을 푸는 모습을 아주 자세히 상상했다. 실제로 대회 참가의 첫 무대를 그려 보는 건 너무 흥분되어서 그전의 과정을 일부러 길게, 또 자세하게 상상해 본 것이다.

생각에 빠진 사샤의 걸음은 아주 느려졌다. 이미 대부분의 아이들이 잰걸음으로 복도를 빠져나간 사이에 혼자 남은 사샤는 고개를 숙이고 망상에 빠져들었다.

그렇게 첫날 참여한 무대에서 자신은 금세 극장 바닥의 컨디션을 익힌다. 바 워크와 센터 워크에서 몸이 아주 잘 풀려 푸에테를 32바퀴 돌고도 더 돌 수 있을 만큼 에너지가 넘치게 된다.

무대에 올라 음악을 듣는 순간 자신은 확신한다. 아주 잘 해낼 거라는 사실을. 객석과 조명, 그리고 오케스트라 피트 위로 삐죽이 올라와 있는 지휘자의 머리를 보면 확신은 더더욱 강해진다. 사샤는 강하게 뻗어낸 첫발의 포인을 느끼며 힘차게 무대 위로 뛰어나갔다.

“사샤! 이 느림보 거북이 녀석아, 얼른 뛰지 못해!”

망상을 깨고 귓가에 떨어진 벼락같은 목소리는 바딤의 것이었다. 사샤는 퍼뜩 고개를 들고 힘차게 복도를 달려 가장 마지막으로 연습실로 들어갔다.

* * *

학생이 빠지자 바딤은 그런 클래스 분위기를 바로잡기 위해 평소보다 더욱 엄격하게 굴었다. 사샤 역시 오늘따라 혹독할 정도로 근육을 쓰게 만드는 바딤의 순서에 따라 몸을 움직였다.

약간 빠른 템포의 클래식 음악, 바딤의 ‘업!’ 소리에 맞추어 사샤와 옥사나는 애티튜드 자세를 취했다. 바 하나를 사이에 두고 코너 방향으로 서로 마주 보게 된 사샤와 옥사나, 두 사람의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옥사나는 후들후들 떨리는 팔이 부끄럽다는 듯이 얼른 바를 고쳐 잡으며 밸런스를 유지했다. 바를 꽉 쥐는 티가 나는 것은 무척 초보적인 행동인 데다가 자기 몸을 컨트롤하지 못하고 있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바에서 먼저 팔을 뗀 것은 사샤였다. 양손을 앙 오로 만들며 침착하게 밸런스를 유지하는 사샤를 본 옥사나는 입술을 깨물면서 금세 밸런스를 찾았다.

“천천히, 아주 천천히 균형을 유지하며 다리를 길게 스트레칭. 탕뒤로 바닥을 디디고…….”

바딤의 말에 따라 옥사나는 천천히 다리를 뻗으며 내렸다. 밸런스를 찾은 건 사샤가 먼저였지만, 떨어질 때는 반대로 사샤가 빨랐다. 뒤로 든 다리가 볼품없이 툭 떨어지는 것을 보자마자 바딤이 크게 혀를 찼다.

“사샤! 내가 보지 않는다고 엉망이구나. 난 등 뒤에도 눈이 달렸다. 잊어버린 건 아니겠지?”

바딤의 말에 옥사나가 작게 킥킥댔다.

클래스를 마치고 나서 사샤와 옥사나는 사이좋게 가방을 챙겨 나왔다. 나란히 걷는 두 사람을 향해 여기저기서 흘끔대는 시선이 달라붙었다.

「요즘 너무 덥다. 그치?」

「응……. 그래도 몸이 빨리 풀려서 좋아.」

두 사람은 도란도란 수다를 나누며 다음 클래스가 있는 스튜디오로 향했다. 여자는 토슈즈 클래스, 남자는 추가 센터 클래스인데 마침 스튜디오 방향이 같았다.

「아, 맞다. 마누엘 있잖아.」

「응?」

지금 이 순간에 듣게 될 줄 몰랐던 누군가의 이름에 사샤는 걸음을 멈출 뻔했다.

「조만간 돌아온대. 재입학 처리를 한다고 사무실에 와 있는 걸 누가 봤댔어.」

「아…….」

사샤는 조금 복잡해지는 마음을 숨기며 고개를 숙였다.

그런 사샤의 옆모습을 살피던 옥사나가 다시 입을 열었다.

「미안. 신경 쓰이게 만들어서.」

「……아냐. 언젠가는 알았을 텐데.」

「네가 먼저 알아 두면 좋을 것 같았어.」

옥사나의 말이 맞다. 예기치 못한 순간에, 그것도 옥사나도 없이 혼자 있을 때 마누엘과 덜컥 마주치게 되었다면 자신은 크게 놀라서 아무런 행동도 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저 바보같이 덜덜 떨고만 있었을지도 모른다.

사실 그 이후로 마누엘이 학교를 바로 쉬게 된 데다가 사샤 자신의 신변에도 엄청난 변화가 있었기 때문에 그는 그 일에 대해서 완전히 잊다시피 하고 있었다.

사샤는 다짐했다. 다시 만나면 다치게 한 부분에 대해서는 사과해야겠다고.

그건 꼭 마누엘을 위해서만은 아니었다. 자신을 위한 것이기도 했다. 마누엘을 다치게 만든 것이 너무 미안해서, 그 죄책감을 덜기 위해서라도 꼭 사과하고 싶었다.

동시에 사샤는 마누엘도 자신에게 사과를 해 주기를 바랐다. 함부로 침대에 들어온 것에 대해, 그리고 자신이 게이라는 소문이 나도록 방치한 것에 대해…….

그렇게만 된다면 두 사람은 다시 좋은 친구가 될 수 있을지도 모른다.

함께 복도를 걸어가던 중에 옥사나가 갑자기 생각났다는 듯이 제 어깨에 멘 짐백에서 작은 그물가방을 꺼냈다. 안에는 분홍색 공단으로 감싼 토슈즈 한 켤레가 들어 있었다.

「새로 샀다. 멋지지?」

「귀엽다.」

사샤는 진심으로 그렇게 생각하면서 옥사나의 토슈즈에 시선을 빼앗겼다.

안은 돌덩이처럼 딱딱한 데다가 신는 사람에게 엄청난 인내를 요구하고 고통을 안겨 주는데도 겉모양만은 아름답고 화사한 토슈즈는 발레와 닮은 부분이 있었다. 인대나 관절순 따위를 잃고 무릎 연골이 닳을 정도로 혹독하게 훈련을 하면서도 겉으로는 아픔 따위는 없다는 듯이 우아하고 아름다운 모습을 유지해야 하는 점이.

그래서 사샤는 토슈즈를 신는 여자 댄서들을 무척 존경하고 있었다. 여자아이들이 토를 신기 시작하면 댄서로서의 성장은 남자아이들에 비할 수 없이 빨라진다. 토슈즈 위에 서 있기 위해 흉곽부터 등, 배, 허리와 고관절, 엉덩이를 이루는 모든 부분에 고루 힘을 주어서 코어가 탄탄해지고 균형 감각이 발달되기 때문이다.

물론 그 시기에 사샤와 같은 남자아이들은 남자 댄서들이 할 수 있는 부분을 연마한다. 타고난 근육량으로 엄청난 높이의 그랑 점프를 뛰거나 밸런스를 잃지 않고 빠른 속도로 피루에트를 연속으로 도는 것 같은…….

아무튼 자신은 속할 수 없는 토슈즈의 영역 역시 발레의 일부이기에 사샤는 토에 대해 동경과 부러움을 동시에 갖고 있었다.

옥사나는 토슈즈에 이어진 공단 끈을 잡고 슈즈를 허공에 휘두르다가 어깨에 탁 걸쳤다. 한 켤레의 토슈즈가 허공에서 부딪치면서 따각, 하는 경쾌한 소리를 냈다.

「근데 새거라서 오늘 처음 신는 거라 길들여야 돼. 네가 꺾어 줄 수 있어?」

「그럴까?」

옥사나와 사샤는 창가 턱에 가방을 올려 두고 얼른 바닥에 주저앉았다. 한 수업에서 다음 수업 사이의 쉬는 시간은 20분가량으로, 이미 5분여가 흘러간 뒤였다.

먼저 옥사나가 토슈즈에 발을 끼우고 올라서서 드미 포인을 한다. 그러면 사샤가 옥사나의 발에 맞추어 포인이 되는 지점이 어디인지 기억해 둔다. 그리고 그 부분을 양손으로 힘 있게 눌러 주는 것이다. 바닥에 캉캉 두드려서 단단한 토를 살짝 깨뜨리는 것도 좋은 방법이었다.

사샤는 토슈즈를 들고 복도 벽을 향해 망치질 하듯 때려 박으면서 옥사나에게 물었다.

「어느 정도로 해야 돼?」

「엄청 하드한 거니까 더 해도 돼.」

「네가 신으면서 길들이는 게 제일 좋지 않아? 바로 신고 춤춰야 해?」

「응. 전에 신던 거 완전 무너졌어.」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토슈즈를 길들이는 가장 좋은 방법은 신으면서 사용자의 발에 맞게 만들어 가는 것이다. 하지만 시간이 없다니 어쩔 수 없었다.

그리고 잠시 후 사샤가 힘으로 부숴 놓은 토슈즈에 한 번 올라선 옥사나는 아주 만족스러워하면서 왼발로 폴짝 뛰어 서서 애티튜드 자세를 취했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짝짝 손뼉을 쳤다.

「고마워. 꽤 괜찮은데? 오늘 수업에서 날아다닐 수 있겠어. 요즘 내가 너랑 친하게 다닌다고 질투하는 애들이 있거든? 실력으로 다 꺾어 줄 거야.」

그렇게 말한 옥사나는 그 자리에서 바로 잘 부숴 놓은 토슈즈의 리본을 묶었다. 신은 채로 수업에 들어갈 요량으로.

먼저 발바닥 부분에 작은 구멍이 뚫린 타이즈를 벗어내고 발가락 사이 필요한 부분에 스페이서를 끼운다. 그러고는 발가락 전체를 감싸는 토싱을 한 겹 씌웠다. 그 와중에 사샤는 하나 남은 토싱을 손가락으로 꾹 눌러 보았다. 말랑말랑한 질감이 퍽 마음에 들었다.

「그런데 있잖아. 한 가지 물어봐도 돼?」

「응?」

마침 헤어밴드를 고치던 사샤는 옥사나를 향해 고개를 돌렸다.

「너 전에 서른두 살 넘는 아줌마랑 키스했다고 했잖아…….」

「응…….」

사샤는 조금 긴장하면서 대답했다. 옥사나가 그 ‘서른두 살 아줌마’를 얼마 전에 우연히 목격했기에 더욱 말을 조심해야 했다.

「요즘도 만나?」

「응, 만나.」

「혹시 사귀는 거야?」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울적해진 그 표정을 읽었는지 옥사나가 다시 물었다.

「그럼 계속 짝사랑 중이야?」

「그건 그런데, 그렇게 말하기에는 조금 더 복잡한 상태야……. 하…….」

크게 한숨을 쉰 사샤는 창턱에 팔을 기대고 창밖을 바라보면서 말했다.

「그 뒤로도 한 번 키스했어.」

「와우…….」

「그리고 침대에서 뒹굴기도 해.」

「미쳤어, 미쳤어…….」

옥사나는 진솔한 감탄과 함께 흥미로 빛나는 눈을 하고 사샤를 올려다봤다.

사샤는 서글프게 가늘어진 눈을 한 채로 지난 몇 번의 밤을 떠올렸다.

사샤가 자신은 짝사랑에 지쳐 도무지 숨을 쉴 수 없다고 토로하거나, 이대로 더는 버틸 수 없으니까 술로 고통을 잊고 싶다고 말하면 카렐은 도무지 해석할 수 없는 표정으로 사샤를 가만히 바라보다가 겨우 잘 때에 팔베개를 해 주었던 것이다.

물론 그의 팔베개를 기대하며 엄살을 부린 것이 맞긴 하다. 하지만 그런 얕은 수를 써서라도 얻어내고 싶을 정도로 카렐의 팔베개는 중독성이 있었다.

그의 몸은 근육과 뼈 때문에 딱딱했지만 이불보다 편안했다. 또한 사샤는 옆에서 사람의 숨소리를 듣는 게 이렇게 좋은 일인지 미처 알지 못했다. 아무튼 카렐과 자신은 침대에서 한두 번 뒹군 게 아니었다.

「사샤, 그럼 너희 삼촌은 몇 살이야?」

「우리 삼촌? 아……!」

방금까지 제가 생각하고 있던 인물에 대해 옥사나가 묻고 있다는 것을 알아챈 사샤는 조금 놀랐다. 그러나 금세 표정 관리를 하고 답했다.

「삼촌은……. 삼촌도 서른두 살이야.」

옥사나의 동공이 흔들렸다.

「서른두 살? 그렇게 안 보여. 완전 멋있고 진짜 어른 같아. 키도 크고…….」

「그래? 네 눈에도 멋있어 보여?」

사샤는 조금 들떠서 그렇게 물었다. 옥사나는 강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발레 하는 애들은 하나같이 낭창하고 가녀리잖아. 내가 그동안 왜 남자에게 관심이 없었는지 알겠어. 도무지 설레지가 않잖아. 나는 그렇게 커어어어어어다란 사람이 좋아.」

「조제도 커다랗잖아…….」

「웩. 걔는 진짜 징그러워.」

그때였다.

“옥사나? 사샤? 2분 후면 수업 시작인데 아직도 복도에 있는 거니? 중요한 일이 있으면 클래스가 끝나고 점심시간에 하는 게 어떨까.”

마침 근처를 지나가던 관리사감 줄리아가 그렇게 말해서 퍼뜩 정신을 차린 두 사람은 벌떡 일어나 각자의 클래스로 향했다. ‘안녕’, ‘이따가 봐’. 잠시 헤어지는 것인데도 손을 흔들고 인사를 나누는 아이들을 보며 줄리아는 그저 미소 지었다.

옥사나가 복도를 뛰어가자 토슈즈 특유의 땅과 부딪치는 소음이 멀어졌다. 그리고 문이 닫히면서 복도는 다시 정적에 잠겼다. 클래스에서 새어 나오는 피아노 반주 소리가 복도를 희미하게 채울 뿐이었다.

아슬아슬 늦지 않게 수업에 도착한 사샤는 조금 전 우연히 마주친 줄리아에게 진짜 마누엘이 돌아왔냐고 한번 물어볼 걸, 하고 조금 후회했다.

* * *

게오르크는 표정을 해석할 수 없는 굳은 얼굴로 작은 노트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새두네스…….]

SADUNESS, 모두 대문자 알파벳으로 적은 한 단어로 시작하는 글은 바로 사샤의 다이어리에 쓰인 것이었다.

[슬품……. 고통, 아픔…….

혼자만에 사랑, 그건 아주 아픈 일이다,,,

무용수는 모두 아푼대가 있다…….

나도 아픔을 등에 엎고 살아가고잇ㅅ다.

육체는 언젠가 흑으로 도라가개 된다……..

이것 나의 숙명인대 거기에 더하기 사랑에 아픔이 더해졌다…….]

게오르크는 최대한 정적인 표정을 고수하며 입가를 만지작거렸다. 카렐이 자신의 바로 앞에 앉아 있었기 때문이다.

귀중한 업무 시간에 남의 일기장을 보면서 비밀스럽게 웃고 있다는 사실을 들켜서는 안 될 것이다. 어디까지나 사샤 세드린의 멘털 케어를 위해 보는 것이라는 명분이 있으니 더더욱.

‘흔한 사춘기 남자애의 일기장인데. 지나치게 진지하고 감성적이고 아무 데나 의미 부여를 하고 있어.’

게오르크는 그다음 메모로 눈을 내렸다.

[마약갇은 행복]

게오르크는 맞춤법이 엉망인 데다가 문어체와 구어체가 적절치 않게 섞인 부자연스러운 어법에는 굳이 관심을 두지 않으려고 노력하면서 일기 너머 사샤의 심중을 바라보려고 애썼다.

[카렐의 ㅍ부는 부드럽고 매끈하다.

만지면 잠이 살살 오고 게속 만지고 십다.

코를 갇다대면은 조은 냄세도 난다.

돈이 많나서 그런거 갓아요.

나도 카렐과 같은 냄세가 나고 싶은대요,,,

카렐이 향수 준거는 안 쓰고 잇습니다. 왜그러나먼 아까우니까.]

게오르크는 이 시점에서 확신했다.

사샤가 이 일기를 어른들이 훔쳐볼 거라는 걸 이미 알고 있다는 사실을 말이다.

게오르크가 한숨을 쉬며 일기장을 덮자 카렐이 슬쩍 시선을 주었다.

“영특하다고 해야 할지, 속이 다 들여다보이니 어이가 없다고 해야 할지.”

“그 정도면 귀여운 거지. 너나 내가 10대 때 어른들 몰래 무슨 짓을 교묘하게 벌이고 다녔는지 생각해 봐.”

“알고 계셨군요?”

그 말에 카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대놓고 봐달라고 잘 보이는 데다 펼쳐 놓고 다니던데.”

“문법 교정이라도 해 주시죠.”

“그런 식으로 접근하면 수치심만 느낄 거야.”

카렐의 말도 일리가 있었기 때문에 게오르크는 그저 깊은 한숨을 쉬며 마른세수를 했다.

“저는 육아는 못 하겠습니다……. 체질이 아니에요. 불러다가 원하는 게 뭐냐고 묻고 말 겁니다.”

“그건 나도 마찬가지야. 그냥 그건…… 어리광인 거지. 그렇게 생각하고 받아 주고 있어.”

“존경스럽네요.”

게오르크의 말에 카렐은 아주 가볍게 미간을 찌푸렸다.

“아, ‘대공’에 대한 기록 찾아봤습니다. 사샤 세드린이 냉전 시대에 했던 연설 말씀하시는 거죠? 과연, 상트페테르부르크 연설에서 대공에 대해 짧게 언급한 부분이 있더군요.”

“……음, 지금 보내줘.”

“알겠습니다. 아무튼 기억력이 대단하시네요.”

게오르크는 곧바로 패드로 문서 하나를 전송했다. 그걸 훑어보며 카렐이 가볍게 답했다.

“난 그의 모든 것을 알고 있으니까.”

레전드 사샤 세드린이 지금으로부터 백 년 전인 1919년에 발레뤼스에 입단해 유럽을 휩쓰는 대스타가 되기 이전, 그의 자세한 행적에 대해서는 알려진 바가 별로 없었다. 사샤 세드린이 불우한 시절에 대해 말하기를 꺼렸기 때문이다.

대신 훗날 그의 연설문을 통해 20대 초반에는 러시아 제국의 황실 발레단 수석이었다는 사실을 추측할 수 있었다.

거기에서 사샤 세드린은 대공의 부적절한 권력 남용을 피해 부득이하게 유럽으로 도망쳐야 했던 자신의 처지를 밝혔다. 고국을 도망치듯 떠나야 했지만 유럽에서 새로운 기회를 얻을 수 있었고, 그러니 모두 냉전 시대의 그늘에서 벗어나서 화합하자는 요지의 감동적인 연설이었다.

연설은 흐름이 매우 매끄러웠고, 요점이 명확했으며, 고급스러운 어휘를 구사하고 있었다. 대필일 가능성도 있었지만, 아무튼 그런 잘 쓰인 연설문이 사샤 세드린의 이미지를 대변하고 있음은 부정할 수 없었다.

카렐은 확신했다.

어린 사샤 세드린이 꿈속에서 ‘대공’을 언급한 것이 우연만은 아닐 거라고.

그러나 카렐은 그 매끄러운 연설문 전문을 읽으면서 점점 더 미궁에 빠져들고 있었다.

“……하지만 이 아이가 커서 ‘그’가 된다고……?”

환상과 현실에 괴리가 생기는 이유는 혹 자신이 함부로 끼어들었기 때문인지.

그래서 운명은 방향을 틀게 된 것일까.

그렇다면 이제 어떠한 방향으로 나아갈까…….

그것이 바로 현재의 카렐이 고민하고 혼란스러워하는 점이었다.

* * *

옥사나는 다음 날 모닝 클래스에 나타나지 않았다.

사샤가 시간을 딱 맞춰 연습실에 들어왔을 때, 안에서는 이미 웜업용의 음악이 흘러나오고 있었다. 옥사나가 수업에 빠진 것을 한 번도 보지 못해 처음에는 의아했지만, 바딤은 비어 있는 사샤의 옆자리를 보았으면서도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생각에 빠질 틈도 없이 익숙한 전주가 흘렀다. 무릎을 가볍게 굽히며 양발을 180도로 벌린 1번 포지션을 만들고 골반을 세운 사샤는 옆으로 쭉 뻗은 팔의 끝, 중지에 시선을 주었다. 이어 곧게 늘인 목선을 팔과 함께 조금 젖혔다가 팔 안쪽을 바라보듯 고개를 돌린다. 고정된 목의 자세를 바꾸지 않으며 사샤는 눈만 굴려 연습실 안을 탐색했다.

콩쿠르에 참여하느라 학교를 빠진 아이들에 옥사나까지, 오늘은 공석이 많았다. 두 발을 조금 떨어진 평행으로 놓은 4번 포지션의 플리에에서 사샤는 바를 잡았던 손을 하늘 높이 뻗었다가 뒤로 가져가며 지금까지 보지 못하던 연습실 뒤도 자연스러운 시선으로 훑었다.

연습실 어디에도 마누엘은 보이지 않았다. 저도 모르게 안도하면서도 사샤는 자책감을 느꼈다. 로커룸에서 혹시 마누엘을 마주치면 어쩌나 하는 걱정에 수업이 시작되는 시간에 딱 맞춰 들어왔는데, 기우였던 모양이다.

마지막으로 5번 포지션에서 마무리를 취한 사샤는 작게 한숨 쉬면서 발등을 가볍게 꺾었다. 오늘은 마누엘을 만나지 않았지만 언제까지나 피할 수 있는 것은 아니다. 언젠가는 마주치게 될 테고, 한 번은 지난 이야기를 해 봐야 할 것이었다. 그걸 상상하는 것만으로도 사샤의 심장은 긴장으로 빠르게 쿵쿵거리기 시작했다. 간혹 불규칙적으로 뛰는 듯한 심박은 마치 쓴 커피를 단번에 넘겼을 때의 느낌과도 같았다.

그리고 오전 클래스가 끝났을 때 조용히 가방을 챙기는 사샤를 향해 바딤이 손짓했다.

“사샤?”

“네?”

바딤에게 가까이 다가가자마자 그가 말했다.

“옥사나가 부상을 입어서 오늘 파 드 되 수업부터는 파트너가 바뀔 것 같다.”

“네?”

사샤는 크게 놀라 잠시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눈이 커져 굳어 버린 사샤를 본 바딤은 혀를 차며 말했다.

“미리 말해 주지 않으면 쭈뼛거리다가 시간만 날릴 것 같아 하는 소리야. 너는 주변머리가 없으니까……. 옥사나가 다 나을 때까지 당분간 파 드 되 수업은 다른 친구와 짝을 이뤄야 할 테니 그렇게 알아 둬.”

바딤이 걱정했던 대로 곧바로 패닉에 빠진 사샤는 조금 휘청거리며 연습실을 나섰다. 당장 파트너가 사라졌다는 사실보다도 옥사나가 어디를 다친 것인지, 얼마나 큰 부상인지 걱정되어 제정신이 아니었다.

그리고 사샤는 그다음 수업인 센터 베리에이션이 끝난 뒤에야 옥사나에게 전화를 걸 수 있었다. 앙 드당과 앙 디올 피루에트. 멈추지 않고 32바퀴를 도는 푸에테 턴과 천장을 터치할 만큼 높은 그랑 점프들을 될 때까지 무식하게 시도하는 수업이라 아직도 밭은 호흡이 흘러나왔다

사샤는 숨을 고르면서 전화를 세 번이나 걸었다. 생각해 보니 옥사나와 통화를 해 보는 건 처음이어서 전화를 받은 직후에는 어떻게 인사를 해야 자연스러울까 고민하면서 손톱을 만지작거렸지만, 그 고민이 무색하게 옥사나는 단 한 번도 전화를 받지 않았다.

사샤는 어쩔 수 없이 옥사나에게 문자를 보냈다. 항상 학교에서 만나기 때문에 문자를 하는 것은 처음이었다.

[옥사나? 학교 왜 안 와?]

[어디가 아픈데?]

[얼마나 못 와?]

연달아 메시지 세 개를 보내고 나서야 사샤는 아차, 하며 덧붙였다.

[나는 사샤야.]

어느새 땀으로 흠뻑 젖었던 레오타드의 등 쪽이 마르며 한기가 들었다. 사샤는 스포츠 타월을 등에 두른 채로 옥사나가 얼른 메시지를 봐 주기를 기대하면서 핸드폰의 화면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그러나 아무리 답장을 기다려도 전화는 오지 않았다.

그리고 그날이 다 가기 전에 사샤는 옥사나의 부상 이유를 알 수 있었다.

우연찮게 복도 구석에서 마주친 아이들의 대화. 그중에 ‘옥사나’의 이름이 들려 순간적으로 발이 묶였다. 어쩌다 아이들의 대화를 엿듣게 된 사샤는 크게 충격을 받고 말았다.

“너도 봤어? 너무 끔찍하지. 토가 무너져서 순간적으로 옥사나 발목이 확 꺾였대.”

“완전히 돌아갔다던데. 으……. 상상도 하기 싫어.”

“나 그때 바로 뒤에 있어서 제대로 봤잖아.”

“왜 토가 무너질 때까지 안 바꿨을까?”

“유학생이잖아. 새로 살 돈이 없었던 거 아냐? 돈 아깝다고 끈질기게 같은 걸 신는 애들이 한둘이어야지.”

수군대는 아이들의 말은 사샤에게는 무척 이상하게 들렸다. 그날 수업 직전에 옥사나가 새로 산 토를 직접 신는 것을 두 눈으로 보았기 때문이다. 돌처럼 단단한 토를 직접 길들여 준 것이 사샤 자신이었다. 게다가 잠깐이나마 토 위에 올라서 밸런스를 잡는 옥사나의 발등은 거의 완벽해 보였다.

혹시 자신이 지나치게 힘을 주었던 것일까? 제 잘못으로 옥사나를 다치게 했을지도 모른다는 생각에 사샤는 급격히 우울해졌다. 아무리 생각해도 한 번도 신지 않았던 새 토가 단숨에 무너지는 것은 말이 되지 않으니 사샤는 본인에게서 이유를 찾을 수밖에 없었다.

사샤는 다시 그날로 돌아가 몇 번이고 옥사나의 토를 만지던 감촉을 생각했다. 옥사나와 마주 앉아 토를 꺾던 복도로 향해 이유 없이 그곳을 서성이기도 했다. 그렇게 생각을 거듭할수록 사샤의 머릿속에서 사실 관계가 변해 갔다.

‘내가 섕크를 너무 심하게 눌러서 어딘가 뚝 부러졌나 봐. 너무 높은 부분을 꺾었을 수도 있어. 새 토라서 바느질 처리도 안 해 놓았으니까 미끄러지기 쉬웠을 거야. 나는 바보같이 왜 그렇게 세게 힘을 줬을까? 조금씩만 꺾으면서 중간에 신어 보게 할걸……. 옥사나는 나 때문에 다친 거야. 내가 잘못해서……. 아, 지금쯤 나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고 있을까? 꼴도 보기 싫다고 생각하겠지? 그래서 내 전화를 받지 않은 거야. 그래서 답장도 안 주고…….’

멍청한 사샤 세드린. 네가 모든 걸 망쳤어.

그리고 며칠 후, 사샤는 복도에서 마누엘과 마주쳤다. 예고 없이, 아무런 준비도 없이. 또 언제나 저보다 앞에서 걸어 마음 놓고 숨을 수 있었던 옥사나의 등도 없이.

혼자였던 사샤와 달리 다시 학교로 돌아온 마누엘은 제 부모님과 함께였다.

* * *

사샤는 처음 이 학교에 입학하던 날을 떠올리고 있었다.

입학할 때부터 아이들은 본능적으로 서로의 수준을 나누었다. 백인 상류층의 자식들이나 유명한 발레 댄서의 아들딸이 피라미드의 꼭대기를 차지한다. 그런 아이들은 서로의 재산 수준이나 인맥을 금세 알아보고는 자기들끼리 무리를 형성했다. 든든한 백그라운드를 가진 아이들은 실력이 조금 떨어져도 아무도 트집을 잡지 않는 데다가 일부 선생님들은 오히려 줄을 대려고 노력하기 때문에 언제나 유리한 입장에서 수업을 들을 수 있었다.

그리고 입학 전부터 콩쿠르에 여러 번 참가해서 이름을 알린 학생들도 있다. 이름을 인터넷에 쳐 보면 콩쿠르 무대를 유튜브에서 직접 볼 수 있었고, 그중에는 가끔 진짜 프로 무용수보다도 인스타그램 팔로워가 많은 아이들도 있었다. 그런 아이들은 딱히 존재감을 드러내지 않아도 금세 선망의 대상이 된다.

그리고 사샤는 자기 수준을 정확히 파악할 수는 없었지만, 아무튼 뒤에서부터 세는 게 빠르다는 것을 본능적으로 알았다. 발레는 돈이 많이 드는 분야다. 사샤는 최우수 장학생으로 입학한 자신이 무척 자랑스러웠지만, 어떤 아이들은 직접 발레를 하는 비용을 댈 방도가 없어 누군가의 돈을 빌려 학교에 다니는 것을 큰 흠으로 생각했다.

‘그래, 난 가난해.’

사샤는 저도 모르게 손톱을 아프게 뜯었다. 카렐의 돈으로 좋은 레오타드를 사 입을 수 있게 된 지금에야 보는 눈이 생겨 깨닫게 된 것인데, 첫 수업 때 자신의 연습복은 형편없었다. 그때 사샤는 이 학교에서의 최초의 모닝 클래스를 잘 해내고 싶어서 가장 편한 옷을 입고 갔었다. 너무 여러 번 빨아서 거의 회색이 되어 버린 타이즈, 그것도 발끝에 구멍이 나 발목 부분을 잘라낸……. 흰색 레오타드의 등 부분에는 약간의 이염이 있었고, 가죽 슈즈는 수없이 바닥을 발끝으로 덧그리느라 하얗게 해져 있었다.

사샤가 얼마나 가난한지는 타이즈나 슈즈의 상태만 보아도 알 수 있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어떤 콩쿠르에도 참여한 적 없어 이름이 알려져 있지 않았던 사샤의 존재감은 센터를 시작하자마자 드러났다. 기대에 차서 새 입학생들을 받게 된 수업 첫날, 모든 발레 마스터들은 사샤에게 유독 오래 시선을 주고, 끈질기게 교정하고, 칭찬을 해 주었다.

복장만으로 업신여김을 받던 아이가 지나치게 뛰어난 실력을 가지고 있던 것은 오히려 독이었다.

그 이후로 사샤는 1년간 본인은 잘 인지하지 못하던 따돌림에 시달렸다.

‘난 영어도 서툴고, 미국인도 아니고. 가난하고, 돈도 쓸 줄 모르고, 재밌지도 않으니까…….’

사샤는 그렇게 생각하면서 아이들이 자신과 거리를 두는 이유를 납득하려고 애를 썼다. 그런 묘한 견제 속에서 사샤에게 가장 먼저 다가와 줬던 게 마누엘이었다.

마누엘을 떠올리니 마음이 아팠다. 사샤는 무릎 위로 고개를 수그렸다. 옥사나의 생각만으로도 머리가 터질 것 같은데, 마누엘까지 생각하니 더더욱 울적했다. 두 사람의 공통점이 있다면, 다른 아이들이 자신을 꺼릴 때에도 개의치 않고 다가와 주었다는 점이다.

한 가지 생각에 골몰하면 잘 벗어나지 못하는 사샤의 병적인 우울감은 금세 티가 났다. 울적한 얼굴에서는 생기 넘치는 표정이 사라졌고, 안 그래도 흰 뺨은 혈색이 사라져 창백해졌다. 피가 날 때까지 물어뜯는 입술만이 빨갛게 물들었다.

그리고 카렐이 그것을 모를 리 없었다.

“나도 아주 어릴 때는 이런 버릇이 있었어요.”

문득 들린 카렐의 목소리에 사샤는 고개를 비스듬히 들었다. 카렐은 소파에 대충 던져 놓은 빨래처럼 아무렇게나 구겨져 앉아 있던 사샤의 손끝을 가볍게 잡아 들었다.

“손끝을 뜯고, 또 뜯고.”

“아…….”

카렐의 앞에서 성숙하지 못한 버릇을 들켰다고 생각했는지 사샤는 부끄러워하면서 주먹을 쥐었다.

“디저트가 맛이 별론가요?”

카렐의 시선이 소파 곁 사이드테이블에 올려진 자몽 타르트에 닿았다. 타르트에는 자몽만 조금 떠먹은 자국만이 남아 있었다. 카렐은 엄지와 검지로 꿀이 발린 자몽 속살 하나를 집어 들고 입 안에 던지듯 넣었다. 맛은 나쁘지 않았다.

오늘 사샤는 저녁도 많이 먹지 않았다. 평소에는 메뉴로 나오기만 하면 뼈에 붙은 것도 없이 깨끗이 발라먹곤 하던 양갈비도 먹는 둥 마는 둥 하고는 남겼다. 사샤의 저녁이 부실했던 것을 걱정했던 카렐이 추가로 디저트를 방으로 올렸지만, 여전히 사샤는 먹는 데에는 관심을 두지 않았다.

“무슨 고민거리가 있군요? 학교에서 문제가 생겼나요?”

사샤는 혀로 입술을 축이면서 주저하다가 이내 카렐을 흘끔 올려다보았다. 피로로 눈 밑이 붉어져서 평소보다 그늘이 드리운 얼굴로 저를 올려다보는 그 표정에 카렐은 일순 섬뜩한 감각을 느꼈다.

그새 자란 탓인지, 누군가를 덧씌워 보고 있는 자신 때문인지…… 그 얼굴이 성숙한 사샤 세드린의 현신이라 할 정도로 닮게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샤는 몇 번이고 입술을 달싹거리고 한숨을 쉬다가 결국에는 눈물 고인 눈으로 입을 열었다.

“마누엘하고 만났어요.”

변성기가 지났지만 여전히 소년 같은 사샤의 목소리가 작게 벌린 입에서 흘러나왔다. 숨결이 많이 섞인, 속삭이는 듯한 목소리였다.

“걔는 부모님하고 같이 있었어요. 저는 눈으로 계속 말했어요. 저한테 먼저 인사해 달라고, 그리고 사과해 달라고……. 그러면 용서해 주겠다고요. 그리고 다시 예전같이 친구로 지내자고요.”

“…….”

“아마 마누엘도 저한테 사과하고 싶었을 거예요. 걔가 저를 진짜 친구로 생각한다면요. 하지만 엄마 아빠가 옆에 있으니까 나한테 말을 못 건 거예요.”

사샤는 마주친 그때 제 눈을 피하고 곁을 스쳐 지나가던 마누엘을 떠올렸다. 마누엘의 아버지는 아들을 감싸 안아주고 있었다. 보호하듯이 어깨에 손을 올린 것을 보고 사샤는 그 자리에서 알 수 없는 이유로 울 뻔했다.

그걸 떠올리니 속이 상해서 사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카렐이 곁에 앉는 것이 느껴졌다.

“걔는 잘못을 저질러도 괜찮다고 말해 주는 부모님이 있어요. 그러니까……. 그러니까 거짓말을 할 수 있는 거예요. 그런데 걔네 부모님은 날 벌레 보듯이 하고 갔어요. 내가 게이인 줄 아나 봐요. 나를 만진 건 마누엘인데! 내가 아닌데! 게이는 마누엘이에요. 난 게이가 아니, 아닌…….”

사샤는 더는 말을 잇지 못하고 손등으로 눈가를 가렸다. 손은 차가운데 눈가는 열이 오르도록 뜨거워 괴로웠다.

그리고 카렐은 사샤 안의 모순을 복잡한 눈으로 내려다보았다.

사샤가 자신은 남자를 좋아하는 ‘게이 따위’가 아니라고 애써 부정하는 이유를 알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또한 자신을 곤란하게 만든 친구를 끝내 미워하지 못하고, 제발 먼저 사과해 달라고 마음으로만 외치던 것 역시 안쓰럽게만 느껴졌다.

“말해 봐요, 사샤.”

카렐의 말에 사샤가 떨리는 손을 떼고 고개를 들었다. 손등이 눈물을 걷어냈지만 눈가는 여전히 물기로 반질거리고 있었다.

카렐은 마른 성대를 몰래 적시면서 물었다.

“내가 도와줄까요?”

“……네?”

“원한다면, 당신이 원하는 방식으로 오해를 벗게 해 줄 수 있어요. 얼마든지.”

사샤는 잠시 대답이 없었다.

처음 카렐은 사샤가 ‘원하는 방식’에 대해 고민하고 있다고 생각했으나, 가만 보니 멍하니 뜬 눈 아래 동공이 얕게 흔들리고 있었다. 자신의 말에 전혀 집중하고 있지 못하는 것 같았다.

“사샤?”

“네에…….”

사샤는 대답하면서도 또 손가락을 입술 위에 얹었다. 중지만 눈에 띄게 짧아진 손톱이 붉고 통통한 입술을 꾹 누른다. 그 입술 위에마저 불규칙한 핏빛 잔해가 남아 있는 것을 보면 아마도 손톱 이전에는 입술이 제물이었을 것이다.

사샤의 고개는 손톱을 물어뜯기 적당한 각도를 찾기 위해 조금 기울어졌다. 그리고 그 안에서 드러난 하얀 앞니가 손톱에 또 닿기 전에 카렐은 사샤의 주의를 끌기 위해 손을 들었다. 그러고는 일부러 사샤의 눈앞 시야를 가리듯 지나치며 이마 위로 흐트러진 앞머리를 크게 넘겨주었다.

사샤의 동공이 두 번 정도 멈칫거리며 카렐의 손을 따라 올라왔다. 카렐은 또 한 번 사샤의 머리카락을 넘겼다. 이번에는 조금 힘을 실어서 고개가 조금 뒤로 딸려 오며 젖혀지도록. 그러자 이제 손끝에서 입술이 꽤 멀어졌다.

“카렐?”

사샤는 카렐이 왜 갑자기 제 머리를 쓰다듬어 주는지 의아해하는 눈빛을 하고 있었다. 카렐은 일부러 ‘흠’ 하고 소리 나는 한숨을 울리며 말했다.

“가끔 섭섭해요. 당신이 내 목소리가 들리지 않는다는 듯이 굴 때면.”

“……네? 뭐가요……? 제가요? 제가 그랬어요?”

“그래요. 방금 전에 내가 뭐라고 말했는지 말해 봐요.”

“음, 카렐은……. 카렐은 뭐라고, 말했는데……. 그러니까……. 아…….”

사샤는 미간을 찌푸리며 성가신 듯이 갑자기 고개를 가로저었다. 지금까지 기운 없이 늘어져 있던 사람이라고 생각하기 어려울 만큼 그 동작이 단호하고 또 거세서 카렐은 내심 놀랐다.

“머릿속에 시끄러운 애가 살아요. 크기는 손톱만 한데 자기 몸보다 커다란 망치를 들고 다니고요.”

카렐은 도저히 맥락을 짚을 수 없는 사샤의 이야기를 주의 깊게 들었다. 또 꿈 이야기를 하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면서.

“저랑 목소리가 똑같은데, 소리를 지르면 머리 안이 온통 울리고 너무 듣기 싫어요. 그래서 저도 제 목소리가 싫어졌어요.”

“……그래요.”

“그런데 제가 자기 말을 안 들어주면 망치를 들어서 머리를 자꾸 때리거든요……. 텀블링도 하고요. 특히 의견이 다를 때 굉장히 성가셔요. 그럼 저는 걔 말을 들을 수밖에 없어요. 그래서 그걸 듣느라…….”

“…….”

“죄송해요. 카렐, 제대로 못 들었어요.”

사샤는 깊은 죄책감을 느낀 듯이 고개를 수그렸다. 질책하려는 것이 아닌데도 아이는 그렇게 받아들인 듯했다.

카렐은 잠시 턱을 매만지다 고개를 저었다.

“섭섭하다고 말한 건 농담입니다. 그냥 과장이에요.”

그 말에 사샤는 약간 의심이 어린 얼굴로 눈을 들었다. 그 순간 카렐은 사샤가 듣고 싶어 하는 말을 너무나도 쉽게 알 수 있었다. 카렐이 사샤보다 눈치가 빠르거나 똑똑해서가 아닌, 너무나도 당연한 어른과 아이의 차이였다.

카렐은 덕분에 사샤를 달랠 수 있어 다행이라고 생각했다.

“내가 유머감각이 부족해요. 웃으라고 한 이야기인데, 도리어 사과를 하게 만들었군요.”

“정말요? 웃으라고 한 말이었어요?”

사샤는 혼란스러워 보였지만, 이내 그 얼굴은 차차 안도로 물들어 간다. 얼마 후에 사샤는 적당히 수긍한 듯 이렇게 말했다.

“영어는 하면 할수록 어려워요.”

카렐은 피식 웃으며 사샤의 머리카락을 만지작거렸다. 그 손짓이 어떤 영향을 끼쳤는지는 몰라도, 내내 창백하던 사샤의 흰 뺨과 작은 귀가 순식간에 수줍은 홍조로 물들었다. 부끄럽고 설레서 도리어 무표정이 되어 버린 사샤를 내려다보며 카렐이 물었다.

“그럼 그 손톱만 한 난쟁이는 언제 나오지요?”

“모르겠어요. 아무튼 모른 척하면 자기를 무시한다고 난리예요.”

“음……. 잠들었을 때처럼 그 친구도 완전히 사라질 때가 있을 것 아닌가요.”

“네……. 음, 잘 때 없어지고요. 또…… 발레 할 때도 없어져요.”

카렐은 일단 고개를 끄덕였다.

……상상력이 지나치게 풍부했다. 망상이 이토록 구체적이라니, 그저 감수성이 유달리 발달한 예술가의 특성이라기에는 지나친 감이 있었다. 카렐은 전생의 사샤 세드린 역시 정신병을 앓았다는 사실을 알고 있었다.

한 번쯤 제대로 전문가의 상담을 받게 해 보는 것도 좋을지 모른다.

사샤의 상태를 그렇게 정리한 카렐은 다시 한 번 아까의 화제로 돌아갔다.

“내가 아까 물었던 건 이런 거였습니다. 오해를 풀기를 원하는지, 만약 그렇다면 어떤 식으로 풀기를 바라는지……. 방식이 어떻든 당신이 원하는 대로 해 준다고요.”

“네…….”

“음, 마누엘 때문에 사실이 아닌 오해에 시달린다고 했죠. 일단 발레단도 그렇고, 그 학교의 선생들과 스태프들은 그런 쪽으로는 완전히 열려 있는 사람들이라 사샤 당신이 생각하는 것만큼 동성애자를 터부시하지 않아요……. 그래서 도리어 아무것도 묻지 않았을 수도 있겠네요.”

“왜요?”

“왜긴 왜겠어요. 당신의 사생활이니까요.”

“하지만 마누엘은 제 사생활을 막 떠들고 다녔는데요? 물론 진짜도 아니지만…….”

“그러니 거기에 대해서 한번 생각해 봅시다.”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팔걸이에 한쪽 팔꿈치를 기대고 자연스레 턱을 괴었다.

“어떻게 하고 싶어요? 손봐 주고 싶어요? 오해를 풀고 사실을 전부 밝히고 싶나요?”

카렐의 말에 사샤는 말없이 침묵했다.

카렐은 사샤의 동공을 관찰했다. 촘촘한 속눈썹이 예쁘게 말린 눈꺼풀 아래 물먹은 까만 눈동자는 더 이상 아까처럼 흔들리지 않았다. 그저 차분하게 가라앉은 채로 제 생각에 집중하고 있었다. 머릿속을 돌아다닌다는 손톱만 한 난쟁이가 드디어 망치질을 그친 모양이었다.

잠시 후 사샤는 입을 열었다.

“음……. 저는 마누엘네 부모님이 걔한테 해 줬던 것처럼 부모님이랑 같이 학교에 가고 싶어요. 아, 저는 아버지랑 연락을 안 한 지 오래됐거든요……. 그래서 대신 아버지인 척 대역을 세워서, 물론 그게 카렐이면 좋겠지만…… 후원자라는 걸 들키면 안 되니까 게오르크도 상관없어요. 아무튼 카렐만큼 키가 크고 멋진 댜댜면 누구라도 괜찮아요.”

“그냥 같이 가 주면 되는 건가요?”

“네. 그냥 같이 링컨 센터 광장을 한 바퀴 걷고, 그다음 학교로 가서 로비부터 복도를 한 바퀴 쭉 걸으면 돼요. 그럼 애들이 누구냐고 다 쳐다볼 거예요. 저는 ‘우리 아빠’라고 말할 거고요.”

카렐은 목 안으로만 쿡쿡 웃었다. 젊은 나이에 졸지에 처음 보는 러시아인 아내와 사샤만 한 아이를 떠안게 될 게오르크의 모습이 그려졌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런 다음에는, 엄마는 바로 떠나지 말고…… 여기 한번 와 보셨으면 좋겠어요. 제가 원래 고향에서 살던 집은 더운물은 하루에 두 시간만 쓸 수 있어서 샤워를 하고 싶으면 물을 끓여서 찬물과 섞어서 씻어야 했거든요. 여기 욕실을 보면, 틀기만 하면 뜨거운 물이 콸콸 나온다고 엄마가 좋아할 거예요. 엄마는 관절이 안 좋아서 목욕을 좋아했는데, 욕조가 없어서 잘 못 하셨어요. 그리고 화장실도 자동이 아니라 물을 흘려보내야 내려가는 거라서…….”

그 말을 할 때 사샤는 부끄러워하면서 카렐을 올려다보았다. 자기를 원시부족처럼 생각할까 봐 걱정스러운 모양이었다.

“러시아 시골은 모든 게 다 후져요. 저희 집만 특별히 가난했던 건 아니에요…….”

“알고 있어요.”

사샤는 약간 불신이 섞인 눈으로 카렐을 보았다. 그건 당신이 진짜 가난을 알 리 없다는 눈빛이었는데, 어느 정도는 사실이었기에 카렐은 그저 웃어넘겼다.

“아……. 그런데 생각해 보니까 엄마는…….”

“음?”

“오는 게 좋을지 어떨지 모르겠어요. 한 번 오면 다시 가기 싫어하게 될 것 같아서요. 누군가는 이런 딴판인 세상에서 살고 있다는 걸 알고 나면 엄청 우울해져요. 저는 그랬거든요.”

말없이 사샤를 내려다보던 카렐은 그의 콧잔등에 붙어 있던 작은 먼지를 떼어 주었다. 사샤는 존재도 몰랐을 하얀 실낱이 카렐의 검지 끝에 묻어나왔다.

“당신이 성공한 발레 댄서가 돼서 어머니를 여기로 모시고 오겠다고, 평생 고된 일은 할 필요 없이 함께 살 수 있을 거라고 말씀드리세요. 사샤 당신의 실력이라면 충분히 할 수 있을 겁니다. 그러면 되잖아요.”

그 말에 사샤는 작게 웃었다. 그건 어딘가 석연찮은 미소였다.

아마도 그 자신은 오래된 생활방식을 버리지 않으려는 어머니의 고집을 알고 있기 때문이리라. 어머니 갈리나는 사샤가 발레 댄서로서 성공할 거라는 사실을 믿지 않았고, 만약 그렇게 되더라도 뉴욕에서 살기는 거부할 것이었다. 살인적 물가를 보면서 입고 먹는 것 모두를 사치로 취급하고, 자신에게 익숙한 시골마을이 좋다며 돌아가겠다고 고집을 부릴 것이 틀림없었다.

그 모든 건 그저 불평불만이 아니다. 자신이 살아온 지난 과거가 형편없다는 것을 부정하고 싶지 않은 사람의 자존심일 뿐이다. 사샤는 본능적으로 그걸 알고 있었다.

미래가 자연스레 그려졌지만, 어쨌든 사샤는 카렐의 말대로 되기를 무척이나 바랐다. 그래서 희망은 버리지 않기로 했다.

사샤는 한참을 망설이다 마지막 바람을 이야기했다.

“그리고 또…….”

“또?”

“콩쿠르에 한번 나가 보고 싶어요.”

“콩쿠르?”

“네…….”

“그게 마누엘과 무슨 상관이죠?”

“음…….”

할 말을 고심하던 사샤가 다시 입을 열었다. 이번에는 러시아어였다.

「저는 이 세계의 법칙을 알아요. 발레 실력이 월등하면 다른 애들은 저한테 함부로 못 해요. 저는 제가 얼마나 탁월한지, 얼마나 재능 있는지 알고 싶어요. 전문가들에게 평가받고 싶어요……. 마누엘하고 상관없는 일이지만 만약에 제가 수상하게 된다면…… 저는 안 좋은 일은 다 잊게 될 거예요. 1등을 했는데 중요한 게 뭐가 있겠어요.」

제법 일리 있는 주장이었다. 사샤는 본능적으로 카렐이 해결해 주려는 문제의 본질을 알고 있는 듯했다. 마누엘에 대한 것 역시 사샤 마음의 문제일 뿐이다.

현재 사샤는 확신을 얻고 안정되기를 원한다.

카렐은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목적 설정으로는 아주 좋아요.”

그의 입에서 긍정적인 대답이 나오자 사샤의 얼굴이 단번에 활짝 펴졌다.

“하지만 모든 콩쿠르에는 장학 제도가 있어요. 수상하면 외국에서 또 수학 기회가 주어지고, 그뿐만 아니라 세계 각지의 발레단이 재능 있는 아이들을 발굴하러 오기도 하죠…….”

“…….”

“뉴욕에서의 생활을 그만두고 타지로 갈 생각도 있나요?”

거기까지는 생각하지 못했다는 듯 사샤의 눈은 조금 커져 있었다. 그걸로 일단 사샤의 의도를 캐치한 카렐은 제 질문을 거두어들였다.

“어쨌거나 그런 건 수상을 한 이후에 생각해 봅시다.”

“네……. 아!”

“그래요.”

사샤의 뒤늦은 깨달음에 카렐은 씩 웃었다.

“기회가 있으면 나가 봐요. 얼마든지 지원해 줄 테니까.”

“카렐!”

사샤가 카렐의 이름을 외치며 제멋대로 그의 품에 뛰어들었다.

카렐은 제 목을 양팔로 단단히 감싸 안은 사샤의 팔이 얼마나 가는지, 또 그 가는 굵기로는 상상하지 못할 힘으로 저를 얼마나 억세게 잡아당기는지를 느끼면서 그저 웃었다. 그리고 바짝 마른 등을 토닥여 주며 부드럽게 물었다.

“제일 중요한 게 남았잖아요.”

“중요한 거요?”

“마누엘 본인과 풀어야 할 게 있지 않을까요.”

“아…….”

“어때요. 한번 본때를 보여주고 싶어요? 사샤 당신은 눈에는 눈, 이에는 이 타입인가요. 아니면…….”

카렐의 물음에 사샤는 조금 생각에 잠겼다가 고개를 저었다. 카렐의 품에서 스르르 떨어져 나왔지만, 여전히 그 손은 카렐의 어깨에 올린 채였다.

“음……. 저는 싸우고 싶지 않아요.”

“그럼?”

“그냥 이야기하고 싶어요. 그리고 저한테 조금이라도 미안해했는지 물어볼 거예요. 저는 그게 궁금해요.”

“미안해했고, 또 죄책감을 느낀다면?”

“그러면 마누엘도 힘들었을 테니까 용서해 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사샤가 올려다보는 순간, 카렐은 그의 앞머리를 무심결에 슥 쓸어 넘겨주었다. 그리고 다음으로, 그다음으로는…….

무심결에 고개를 내렸던 카렐은 그대로 굳고 말았다.

키우던 고양이의 작은 이마에 뽀뽀하듯이 사샤의 그 이마에 상처럼 뽀뽀를 해 줄 뻔했던 것이다.

사샤는 제 이마에 가까워진 카렐을 올려다보면서 ‘카렐?’ 하고 조그맣게 읊조렸다. 앞머리가 넘어가 동그란 이마가 온통 드러나자 훨씬 어려 보이는 얼굴이 된 사샤가 말했다.

“카렐……? 저기…….”

“…….”

“카렐의 매끈한 목덜미가 눈앞에 있어서…… 흥분돼요.”

그 말마따나 사샤의 숨소리는 어느새 조금 커져 있었다. 작게 씨근거리는 사샤의 콧바람을 느끼면서 카렐은 뒤로 몸을 물리며 소파 등받이에 털썩 기대었다.

“후…….”

사샤의 순수한 헛소리 덕에 진전을 막을 수는 있었지만, 카렐은 무의식적으로 그런 행동을 한 자신에게 무척 놀랐다.

순간적으로 아주 사랑스럽다고 생각했던 것은 사실이다. 그저 조카뻘의 귀여운 아이들이나 칭찬을 바라고 장난감을 물어온 고양이를 보는 듯해 무심코 움직이고 말았다. 성애적인 느낌이 없는 버드키스를 하려고 했을 뿐이다……. 그런데도 순간이나마 그런 충동이 든 것이 무척 놀라웠다. 보통은 충동에 잘 휩쓸리지 않는 자신을 알기 때문이다.

카렐은 저를 맑은 눈으로 뚫어져라 관찰하는 사샤에게 고개를 돌렸다.

“……착하네요.”

아무튼 그런 마음을 들게 만들었던 동인에 대해서는 분명히 짚어 줘야 했다. 예민한 사춘기를 보내고 있는 아이들을 양육하는 방법을 알려주는 책에 그렇게 쓰여 있었으니까.

카렐의 말에 사샤는 금세 부정했다.

“저는 별로 착하진 않은데요…….”

“아닙니다. 아주 착해요.”

“저를 그렇게 생각하는 건 카렐뿐이에요. 엄마는…… 저를 15년이나 키워 주셨으니까 저를 가장 잘 아는 분인데, 제가 너무 예민하고 성격이 까다롭다고 했어요. 아기 때도 누구보다도 많이 울었대요.”

“…….”

“바딤은 저보고 최악의 말썽쟁이라고 했고요.”

“그건 그 사람의 입버릇이죠.”

사샤는 카렐을 물끄러미 보다가 물었다.

“혹시 바딤하고 친구세요?”

“음?”

“무척 잘 아는 것처럼 보여서요.”

카렐이 대답하지 못하고 굳어 있을 때에 사샤가 다시 말했다.

“그럼 혹시 친하시면 몰래 바딤한테 제 칭찬을 좀 해 주세요. 그리고 저는 칭찬을 많이 해 주면 더 잘할 수 있다고 살짝 말해 주세요……. 강요는 아니에요. 그냥 부탁이에요…….”

사샤는 ‘교활한 편법’을 쓰는 스스로가 부끄러워 차마 카렐의 눈을 보지 못하고 기어들어 가는 목소리로 말하다가 이내 말을 멈추었다. 카렐이 멀어지는 기척이 났기 때문이다.

사샤가 고개를 들었을 때 카렐은 사이드테이블에 놓였던 자몽을 가지고 와 태연히 먹고 있었다.

“맛이 별로였어요?”

사샤는 방금 전에 하던 이야기는 금세 잊어버리고 그의 물음에 응답했다.

“네? 네……. 쓰든지 시든지 하나만 했으면 좋겠어요. 맛이 이상해요. 진짜 이상한 과일이에요. 색은 예뻤는데요.”

자몽에 대한 신선한 평가에 카렐은 픽 웃고 말았다. 웃으며 휘어지는 그 눈가를 보면서 사샤는 ‘카렐은 눈웃음이 예쁘구나’ 하고 생각했다. 카렐은 ‘사샤에게는 자몽을 주지 말 것’이라는 정보를 머릿속에 새겨 넣고 있었다.

* * *

얼마 후, 카렐은 약속대로 게오르크를 사샤의 아버지 대역으로 보내주었다. 어머니는 모시지 못했지만 게오르크를 대동하고 학교에 가게 된 사샤는 무척 들떠 보였다. 반면 졸지에 애가 딸린 유부남이 된 게오르크는 제 부족한 연기력이 티가 날까 봐 말을 많이 하지 않았다.

그래도 사샤는 새로 생긴 제 아버지가 키도 크고 체격이 훌륭한 군인 출신의 남자인 게 무척 자랑스러웠다. 사샤는 자신의 청에 의해 칼 같은 정장을 차려입고 온 게오르크를 여러 번 올려다봤다.

‘학부모 초대 면담’을 빌미로 두 사람이 가장 먼저 들른 곳은 줄리아가 머무는 사무실이었다. 줄리아는 처음 보는 사샤의 친인척의 멀끔한 모습에서 눈을 떼지 못했다. 검은 머리에 흰 피부, 눈 밑 같은 위치에 점을 달고 있는 두 사람을 번갈아 바라보며 말했다.

“아버님이…… 굉장히 젊으시네요.”

“고등학생 때 사샤를 얻었죠. 그래도 하늘이 주신 선물이라고 생각하고 책임을 가지고 키웠습니다. 그나저나 저희 사샤는 학교에서 어떻습니까?”

사샤는 입에 발린 말을 척척 내뱉는 게오르크를 신기한 눈초리로 바라보았다. 그사이 줄리아가 대답을 했다.

“조금 수줍음이 많지만 발레에 대한 열정은 대단한 아이예요. 사샤가 가족 이야기는 한 번도 하지 않아서 걱정을 많이 했어요. 하지만 직접 뵈니 마음이 놓이네요.”

간단한 상담을 마치고 나서 사샤는 게오르크의 한쪽 팔뚝을 잡고 학교 복도를 이리저리 쏘다녔다. 자주 연습하는 스튜디오와 일반 과목을 듣는 교실, 구내 카페테리아까지 구경시켜 주었다. 그렇게 학교 안을 돌아다니며 사샤는 학생들과 여러 번 마주쳤고, 그때마다 일부러 크게 ‘아빠’라고 불렀다.

그러다 결국 사샤가 바라 마지않던 일이 일어났다. 링컨 센터 광장에서 마누엘과 마주친 것이다.

사샤가 걸음을 멈춘 채로 한곳을 응시하자 이내 상황을 알아차린 게오르크가 조금 허리를 숙이고는 물어왔다.

“저 친구인가요?”

“네……. 맞아요.”

“인사라도 하지요. 같이 갑시다.”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갑자기 마주치니 하고 싶은 말은 아무것도 생각이 안 나고 머리가 하얘졌다. 심지어 마누엘은 다른 동기들과 함께였다. 무리 지어 몰려다니는 아이들 사이로 걸어가는 게 무섭게 느껴졌다.

“사샤?”

제 뒤로 숨어드는 사샤를 이상하게 여긴 게오르크가 허리를 살짝 굽혔을 때였다.

마누엘 곁의 차도로 검고 육중한 차체가 우아하게 미끄러져 들어와 멈췄다. 사샤는 생각했다. 어디선가 본 적이 있는 차라고.

“어…….”

차의 존재감이 어찌나 큰지, 마누엘과 다른 아이들까지 눈이 휘둥그레져 그쪽을 바라보았다. 사샤는 몰랐지만 그 또래 남자아이들은 대체로 자신이 평생 가질 수 없는 가격의 차에 미쳐 있곤 했는데, 카렐이 타고 온 것이 바로 그런 차였던 것이다.

이어서 차문이 하늘 방향으로 비틀리며 열렸다. 그 괴상한 모습에 동기생들은 ‘우와아!’ 하며 탄성을 터뜨렸고 사샤는 저도 모르게 마른침을 삼켰다.

“카……!”

설마 했는데 차 밖으로 모습을 내민 것은 카렐이었다. 사샤는 게오르크의 팔을 꽉 잡고 그의 얼굴을 올려다보았다. 그는 왠지 이 상황을 짐작하고 있었던 듯, 감흥 없는 얼굴에 ‘그럼 그렇지.’ 하는 표정을 떠올리고 있었다.

차에서 내린 카렐은 웅성거리는 아이들을 지나쳐 천천히 다가왔다. 바로 사샤의 앞으로.

사샤는 보지 않아도 아이들의 시선이 제게 모이는 것을 알 수 있었다.

멋진 구두가 사샤의 딱 두 걸음 앞에서 멈췄다. 카렐은 가볍게 팔을 뻗어 사샤의 머리카락을 친근히 만져 주었다. 사샤는 왠지 그렁그렁한 눈으로 카렐을 올려다보았다.

“같이 점심이라도 먹을까 해서.”

사샤는 목이 메어 느리게 고개를 끄덕였다.

그렇게 사샤는 멋진 댜댜를 양팔에 끼고 차까지 걸어갔다.

“사샤!”

게오르크가 열어 주는 문 안으로 사샤가 막 들어가려 할 때였다. 선망하는 눈길로 차를 바라보던 동기생 하나가 사샤를 불렀다.

“친구가 부르는데요.”

게오르크의 말에 고개를 돌린 사샤가 가장 먼저 목격한 것은 마누엘의 약간 얼빠진 얼굴이었다. 그사이 사샤를 불렀던 아이는 제 앞으로 성큼 달려와 있었다.

“사샤, 이, 이 차 너희 집 거야?”

“우, 우리 집 거는 아닌…….”

사샤는 아직 차 바깥에 서 있던 카렐을 바라보았다. 대신 앞으로 걸어 나온 카렐이 매끄럽게 손을 내밀며 악수를 권했다.

“사샤 친구인가요? 잘 부탁합니다.”

“서, 선생님은……?”

“사샤의 대부이고…….”

“와…….”

“여기 장학재단의 이사장이기도 하죠.”

“……미친.”

저도 모르게 험한 감탄사를 내뱉은 소년은 큰 실수를 했다는 듯이 입을 틀어막았다. 그러고는 카렐의 손을 맞잡고 마구 흔들며 악수에 응했다. 친밀해 보이는 풍경에 어느새 남자아이들이 모두 우르르 다가왔다. 평생 한 번 직접 볼까 말까 한 멋진 차를 정신없이 훔쳐보며 침을 흘려댔다.

“모두 사샤의 친구들인가요? 반갑네요.”

그렇게 말하는 카렐은 왜인지 정말 즐거워 보였다. 사샤는 친구들 가장 뒤에 쭈뼛 따라온 마누엘을 발견했다.

그와 눈이 마주친 순간, 왜인지 이야기하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없던 용기가 피어올랐다. 뒤에 카렐이 서 있어서 그럴지도 모른다.

“아, 아빠, 저기…….”

사샤는 곁에 서 있던 게오르크의 팔을 어색하게 잡아끌었다. 그러고는 팔짱을 낀 채로 귀를 기울인 그에게 속닥였다.

* * *

카렐이 사샤의 동기생들에게 차 내부를 구경시켜 주며 환심을 사고 있을 때 사샤는 마누엘과 함께 분수대 앞으로 자리를 옮겼다.

마누엘은 의외로 피하지 않고 말없이 사샤를 따라왔다. 사샤는 바람에 흩날리는 작은 물방울을 뺨에 맞으며 마누엘을 물끄러미 바라보았다. 막상 단둘이 되니 당장 무어라고 말을 이어 가야 할지 몰라서.

먼저 입을 뗀 것은 마누엘이었다.

“사샤, 안녕? 너…… 정말 멋있어졌다.”

마누엘은 고작 반년 사이에 잿빛 털이 콕콕 박힌 아기 오리에서 화려한 백조로 탈바꿈하듯 성장한 사샤를 보고 완전히 기가 죽어 버린 듯했다.

그러면서도 마누엘은 사샤의 잘 손질된 머리카락과 우윳빛 피부를 선망하는 눈으로 훑었고, 훌쩍 자란 키에 맞게 적당히 근육이 붙은 사샤의 몸을 끊임없이 흘끔댔다. 게다가 명품 로고가 박힌 스포츠백, 새로 사서 신발장에 진열만 해 놓던 것을 바로 꺼내 신은 듯 약간의 때도 묻지 않은 새하얀 운동화―모두 카렐이 사 준 것이었다―를 보면서 더 거리감을 느끼는 것 같았다.

“난 학교 쉬는 동안 발레도 안 했어. 그래서 살이 좀 찐 것 같아.”

“…….”

양팔로 자신 없이 몸을 가리는 마누엘을 보면서 사샤는 부정하지 못했다. 마누엘은 확실히 전보다 토실해져 있었는데, 그게 그의 자신감을 갉아먹고 있는지도 몰랐다.

사샤는 마누엘의 몸에서 눈을 떼고 입을 열었다.

“마누엘, 할 말이 있어.”

“……응?”

“나 예전 일 사과하고 싶어.”

“사과?”

생각지도 못했다는 듯 마누엘이 눈을 크게 떴다.

“그때 크게 다치게 해서 미안. 그때 갑자기 그렇게 떠날 줄 몰랐어. 시간이 허락했다면 그때 사과했을 거야.”

“…….”

“너도 곤란했던 건 이해해. 게이인 건 아무에게나 말할 수 있는 게 아니니까.”

정확한 맥락을 짚는 사샤의 사과에 마누엘은 당황한 듯했다.

“그래도 너무했어. 나한테 뒤집어씌울 필요는 없었잖아.”

사샤는 상처받은 얼굴을 숨기려 노력했다. 덕분에 의도한 것은 아니지만 차갑게 굳은 얼굴이 되었고, 처음 보는 사샤의 표정에 마누엘은 제대로 겁을 집어먹었다.

잠시 후 마누엘은 눈물을 흘리며 훌쩍거리기 시작했다.

“미안해. 네 의사도 물어보지 않고 그런 짓을 해서……. 하지만 물어보는 게 무서웠어. 왜냐면 거절당할게 뻔하니까.”

“그래도 물어봤어야 했어!”

“네 말이 맞아. 넌 게이도 아닌데…….”

마누엘의 말을 들으면서 사샤는 그가 떠났다가 돌아온 사이 자신에게 얼마나 많은 변화가 있었는지를 깨달을 수 있었다.

좋은 집과 풍부한 식단, 셀 수 없이 많은 레오타드와 발레 슈즈. 자신을 둘러싼 많은 것들이 바뀌었지만, 그중 가장 큰 변화는 내면에서 일어나고 있었다.

이제는 남자인 카렐을 좋아하는 것을 인정하게 되었으니까. 그게 더 이상 역겹거나 두렵지 않고 가능하다면 그의 사랑을 독차지하길 바라게 되었으니까.

“……아니야.”

사샤는 천천히 고개를 저었다. 사샤의 부정에 마누엘은 의아한 표정으로 눈물을 닦았다.

“게이가 아니라서 거절한 게 아니야.”

“그럼?”

“널 좋아하지 않아서야.”

마누엘은 완벽한 실연 앞에서 눈물도 뚝 멈춘 얼굴로 창백해졌다.

“마누엘, 나한테 미안했어?”

사샤의 말에 마누엘의 입술은 쏟아져 나오는 울음을 막지 못해 비틀어졌다. 사샤는 그것만으로도 마음이 벌써 사르르 풀리는 것을 느꼈다.

“미안해, 으으……. 미안했어. 하지만 난 어떻게 해야 할지 몰라서…….”

“이해해.”

사샤는 고개를 끄덕이고는 이어 말했다.

“우리는 어렸잖아.”

“사샤…….”

마누엘은 새삼 놀란 표정이었다. 영어가 서툴러 말수가 적은 데다가 가끔 하는 말도 더듬기 일쑤이던 사샤가 명확하게 자기 의사를 전달할 수 있게 된 간극이 놀라웠다. 마누엘은 저도 모르게 예전에 짝사랑했던 아이의 얼굴을 멍하니 바라보았다.

“나한테 진짜 미안한 마음이 있다면 학교에 다시 증언해 줘……. 곧 재조사가 들어갈 거라고 했어. 그때 네가 다시 잘 이야기해 주면 나도 이 일은 완전히 잊을게.”

사샤는 뒤를 흘끔 돌아보았다. 믿음직한 댜댜들이 주머니에 손을 꽂은 채로 자신을 기다리고 있었다.

“난 가족들이 기다려서 이만 가 봐야 돼.”

마누엘은 눈물을 찍어내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가족들이 저를 기다리고 있다는, 한 번도 해 볼 일 없던 말을 하는 순간, 사샤는 이루 말로 다 할 수 없는 큰 만족을 느꼈다.

사샤는 마누엘에게 손을 흔들고 홀가분한 마음으로 카렐을 향해 달려갔다.

* * *

사샤는 노란 튤립과 프리지아, 흰 안개꽃으로 감싼 작은 꽃다발을 한 손에 든 채로 누군가를 기다리고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이 우중충한 낡은 건물과 어울리지 않는 화사한 꽃다발에 잠시 시선을 주었다. 더러는 사샤를 보고 미소 짓기도 했다.

왠지 부끄러워진 사샤는 꽃다발을 등 뒤에 감추었다. 주변을 두리번거려 보았지만 발레 스쿨에 다니면서 한 번도 가까이 와 본 적 없던 별관 기숙사 건물 앞에는 잠시 앉아 있을 벤치 하나 없었다.

붉은 벽돌 바깥으로 돌출되어 있는 철계단을 물끄러미 올려다보던 사샤의 귀에 불규칙한 발걸음 소리가 들렸다. 사람의 발소리라기보다는 쿵, 쿵, 쿵, 묵직한 것으로 바닥을 찍어대는 소음에 가까웠다. 사샤는 소리가 난 쪽으로 휙 고개를 돌렸다. 잠시 후 철문이 삐거덕 소리를 내며 아주 느리게, 느리게 열렸다.

사샤는 문 쪽으로 얼른 달려갔다. 그러고는 안쪽에서부터 힘겹게 밀어대고 있는 문을 잡아당기며 여는 것을 도와주었다.

「미안해. 기다렸지?」

안에서 긴 금발을 치렁치렁 늘어뜨린 여자아이가 고개를 내밀었다. 사샤는 조금 놀란 얼굴로 낯선 옥사나의 모습을 내려다보았다.

「……머리 길다.」

「처음 봐?」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항상 머리카락 전부를 한 올도 남기지 않고 틀어 올려 번헤어를 하고 있던 옥사나는 머리를 풀어 내린 것만으로 다른 사람처럼 보였다. 옥사나는 미소를 지어 보이며 문 바깥으로 완전히 빠져나왔다. 사샤는 그제야 옥사나가 왜 문을 그토록 힘겹게 열었는지 알 수 있었다. 또한 자신의 부름에 왜 이렇게 늦게 내려왔는지도……. 옥사나는 양팔을 목발에 의지한 채였던 것이다.

「아파 보여.」

「립밤을 안 발라서 그래.」

「그게 아니라…….」

사샤는 목발을 말한 것이었는데 옥사나는 완전히 민낯인 것을 부끄러워하며 그렇게 말했다.

그사이 문이 한 번 더 열리며 안에서 여학생 세 명이 빠져나왔다. 사샤는 얼굴을 모르는 어퍼 스쿨 1학년생들이었다. 사샤는 그 외모만으로 학교에서 이미 유명인이었기 때문에 1학년 학생들은 문 앞에서 갑자기 마주치게 된 사샤를 보고는 ‘히익’ 하고 숨 들이마시는 소리를 내며 차례대로 놀랐다. 그러더니 옥사나를 찾아온 사샤를 잔뜩 의식하며 곁눈으로 한 번씩 훔쳐보고 얼굴을 붉히며 모자를 눌러쓰거나 입을 가리고 자리를 떠났다.

그 순간 사샤는 열린 문틈으로 기숙사 내부가 보여 어색하게 고개를 돌리고 있었다. 여학생들만 이용하는 건물의 내부를 조금이라도 눈여겨보는 것은 왜인지 하면 안 되는 일처럼 여겨졌기 때문이다.

「잠깐 저기 스타벅스라도 갈래? 여기 있으면 방해되겠다.」

「그래. 그런데 걸을 수 있어?」

「천천히 걸어가면 돼.」

사샤가 아무 생각 없이 두 칸씩 밟고 올라온 건물 앞의 계단 일곱 개를 옥사나는 2분이나 걸려 내려왔다. 오래된 건물이라 유독 단이 높았기 때문이다. 노심초사한 마음으로 그녀를 지켜보면서 사샤는 옥사나의 한쪽 발을 완전히 감싼 흰 석고붕대를 빤히 바라보았다.

옥사나에게서 연락이 온 건 어제저녁이었다. 병원에 가서 치료를 하고, 청구된 치료비에 대한 보험 처리를 하고, 부모님과 연락을 하는 그 과정에 정신이 없어서 연락이 늦었다며 직접 전화를 해 주었다.

다행히 학교 피지컬 센터의 지원을 받아서 적절한 치료를 마쳤고, 현재는 기숙사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다고 했다. 사샤는 한창 때 제가 살던 기숙사를 떠올렸다. 아픈 사람이 휴식을 취하기에 좋은 곳은 절대 아니었다.

횡단보도를 지나 가까운 스타벅스에 도착한 두 사람은 초콜릿 머핀 하나와 쿨라임 한 잔, 라테 한 잔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그리고 그제야 사샤는 그때까지 손에 들고 있던 작은 꽃다발을 내밀었다. 그걸 보자마자 옥사나가 풋, 웃음을 터뜨렸다.

「이게 뭐야? 정말 깜찍하다.」

「병문안을 갈 때는 꽃다발을 준비해 가라고…….」

「누가 그래?」

게오르크가 그랬다. 역시 게오르크의 말은 귀담아듣지 말 걸 그랬나, 생각하면서 사샤는 입을 꾹 다물었다.

「아무튼 고마워. 사샤 세드린이 줬다고 하면 난리 나겠지.」

사샤는 어떤 식으로 난리가 나는지 구체적으로 묻고 싶었지만, 그건 별로 중요한 화제가 아닌 것 같아 넘겼다.

대신 가장 먼저 해야 할 말을 입에 올렸다.

「엄청 걱정했어. 네 토슈즈에 문제 생긴 게 내 탓인 것 같아서…….」

「아니야, 어제 내가 말했잖아.」

「응…….」

「토슈즈에 올라섰을 때 느낌은 내가 알아. 좀 급하게 만지긴 했지만 네가 해 준 건 전혀 문제없었어.」

「그러면……?」

「나도 잘 모르겠어. 그런데 중간에 토를 한 번 벗을 일이 있었는데, 그때는 업을 서자마자 뭔가 이상하다는 걸 알았거든.」

옥사나는 미간을 찡그리며 머핀을 한입 크게 물었다. 사샤는 흩어지는 머핀 부스러기를 보면서 물었다.

「벗고 자리를 비웠어?」

「응.」

옥사나는 그때를 회상하듯 다른 곳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사샤는 침묵했다. 상상하고 싶지 않은 가능성 하나가 떠올랐다. 그러나 옥사나도 이미 그 점을 예상하고 있는 듯했다.

발레 스쿨의 학생들끼리 아름다운 우정을 쌓으며 건강한 경쟁만을 하리라고 추측하는 것은 큰 오산이다. 발레단이란 극소수의 프린시펄, 그 아래 소수의 퍼스트 솔로이스트와, 그보다는 조금 많은 솔로이스트들, 그리고 수많은 군무 단원들로 이루어져 있다. 실력에 따라 급을 나누는, 너무나 명확한 피라미드 구조이기 때문에 아이들 역시 일찌감치 영향을 받는다.

발레를 전혀 모르는 사람조차도 천재와 범인을 금세 눈으로 구분할 수 있는 잔인한 세계, 이런 곳에서 위로 올라갈 수 있는 가장 쉬운 방법은 없는 재능을 어딘가에서 구해 오는 것이 아니라 피라미드의 위를 차지한 누군가가 은퇴를 하거나 사고를 당해 그 자리가 비는 것이다. 경쟁 사회에서 선생들이 ‘춤보다도 동료가 중요하다’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강조하는 것은 오히려 그러지 못한 이들이 훨씬 더 많기 때문이다.

사샤는 시무룩하게 고개를 수그렸다. ‘영어를 못 알아듣겠다’며 말을 아예 무시하거나 눈도 마주쳐 주지 않거나, 센터에서 일부러 간격을 넓혀 주지 않으면서 진로를 방해하는 등…… 자신 역시 자잘한 견제에 시달려 왔다.

하지만 옥사나는 자신보다 성격도 활발하고 친구도 많아서 그런 일은 겪지 않을 줄 알았다. 그러나 사고는 이렇게 최악의 방법으로 터져 버리고 말았다.

「누군지 짐작은 가?」

「아니, 전혀……. 심증은 있지만, 그건 그냥 내가 그 애를 싫어해서 그렇게 생각하고 싶은 것뿐이야.」

그래도 사샤는 아마 옥사나의 추측이 맞을 거라고 생각했다. 괜히 그렇게 생각하는 것은 아닐 테니까.

「누군데? 나한테만 알려줘.」

사샤가 몸을 기울이며 묻자 옥사나가 눈을 크게 뜨며 물었다.

「네가 알아서 뭐 하게? 복수하게?」

「그런 건 아닌데…….」

「됐어. 넌 존재 자체로 복수해 주고 있어.」

「그게 무슨 소리야?」

옥사나는 대답 없이 노란 꽃다발의 향기를 맡았다. 진한 프리지아 향이 사샤에게까지 났다.

사샤는 몰랐지만 카렐이 방문하고 난 다음, 학교에는 재단 이사장이 사샤의 대부라는 소문이 쫙 퍼졌다. 소문은 덩치를 부풀려 사샤가 상속받을 재산이 어마어마하다느니, 작위가 있다느니 하는 곁가지 소문이 돌았다. 외모만으로도 그린 듯한 러시아 왕자님이었던 사샤가 진짜로 격에 맞는 지위까지 갖고 있었다는 것이 밝혀지자 그 인기는 하늘을 모르고 치솟고 있었다.

옥사나는 즐겁게 웃으며 말했다.

「걔가 널 좋아하거든. 이 꽃다발만 보여줘도 부들부들…….」

옥사나의 말을 듣던 사샤는 깜짝 놀라며 되물었다.

「설마 마누엘이야?」

그 말에 옥사나의 입이 황당하다는 듯 벌어졌다. 이쪽을 바라보는 눈이 휘둥그레 뜨여 있었다. 사샤는 아차 싶어 다시 입을 꾹 다물었다.

「세상에. 마누엘도 너를 좋아해? 걔 게이야?」

「……못 들은 걸로 해 줘.」

「사샤 세드린, 넌 진짜 최고야. 아니, 네 얼굴 말이야. 그럴 줄 알았어. 하긴, 솔직히 우리 학교 여자애들 중에 너에게 관심 없는 애는 단 한 명도 없을걸. 남자라고 그러지 말라는 법은 없지.」

「제발 잊어 줘…….」

사샤는 초조한 마음이 들어 그렇게 중얼거렸다. 마누엘이 저에 대해 이상한 소문을 냈다고 저도 똑같이 복수해 줄 마음은 없었다. 하지만 옥사나는 뭔가를 납득한 듯이 눈을 가늘게 뜨고 있었다. 사샤가 간절한 마음을 담아 바라보자 옥사나는 한참 후에 ‘흠’ 하고 중얼거렸다.

「비밀로 해 줄게.」

「고마워…….」

그리고 두 사람은 시답지 않은 이야기를 조금 더 나누었다.

앞에 놓인 잔의 음료를 다 마셔 갈 때쯤이었다.

사샤가 물었다.

「그럼…… 넌 언제쯤 학교로 돌아와?」

사샤는 그러면서 파 드 되 파트너를 따로 구하기 싫다고, 졸업 전까지 함께 너와 호흡을 맞추고 싶었다고 수줍게 덧붙이려 했다. 그러나 옥사나의 표정이 미묘했다.

옥사나는 드물게 한참 뜸을 들였다. 덩달아 사샤는 아무 말도 하지 못하고 마른침을 삼키며 왠지 불길한 다음 말을 기다렸다.

「나 수술했어.」

그 말이 의미하는 바를 생각하고 싶지 않았던 사샤는 그저 눈만 깜빡거렸다.

「골절되면서 발가락뼈가 너무 벌어졌대. 철심을 박았고 인대도 끊어졌어. 골절은 붙을 때까지 두 달이 걸리고 인대는 그보다 더 걸린대. 끝나고는 재활 훈련도 해야 하고…….」

「…….」

「그랑 주테를 예전처럼 뛰려면 반년이 더 걸릴지도 몰라. 토슈즈는 훨씬, 훨씬 오래 걸릴 거야.」

「……흐읏.」

「울지 마. 나도 한 번도 안 울었는데 왜 네가 울어…….」

사샤는 눈을 깜빡거리며 후드득 떨어지는 눈물을 황급히 손등으로 꾹 눌러 가렸다. 사람이 바글바글한 이런 곳에서 우는 것이 꼴사납다는 것은 자신도 알고 있었다. 그러나 청천벽력 같은 소식이었다. 지나치게 끔찍하고, 받아들이기 어려웠다.

「춤도 출 수 없는 데다가 보살펴 주는 사람도 없는데, 여기서 돈만 축내는 게 조금 그래서……. 고향에 가서 치료받고 다음 학기에 돌아올까 생각 중이야.」

「어, 어, 어떻게…….」

「울지 말라니까.」

「다시…… 다시 복귀할 수 있어? 깨끗하게? 다친 적 어, 없었던 것처럼…… 완벽하게 나을 수 있어?」

「그럼. 어리니까 뼈는 금방 붙을 거래. 잘 치료하면 후유증도 없을 거야.」

사샤는 흔들리는 눈으로 의지가 담긴 옥사나의 눈을 바라보았다. 100명에게 물어도, 다친 것보다 한 번도 다치지 않은 잘 관리한 발이 낫다고들 말할 것이다. 자신이라면 벌써 무너졌을 상황에 어떻게 이렇게 강한 것인지 사샤는 알 수가 없었다.

옥사나는 사샤의 어깨에 손을 올리고 말했다.

「우린 언젠가 한 번쯤은 이런 일을 겪게 돼. 운 나쁘면 여러 번 겪을 수도 있지. 부상이 없는 프로 무용수들마저 진통제와 각성제를 먹어 가면서 무대에 오른다는 거, 너도 알고 있잖아.」

「흣, 그, 렇지만…….」

「우리 엄마가 그랬어. 프린시펄 승급을 눈앞에 두고 다친 게 아닌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포스터에 내 이름이 가장 먼저 쓰인 큰 공연의 주역을 맡았는데, 그 공연을 앞두고 부상당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

「사샤, 난 진심으로 지금 다친 게 다행이라고 생각해. 일찍 배울 수 있었으니까 말야. 그리고 내 토를 망가뜨린 애는 언젠가 후회하게 될 거야. 난 왼쪽 발에 지금 철심을 박았다고. 다 낫고 나면 얼마나 강해지겠어? 사람 뼈와는 비교할 수 없이 훨씬 튼튼해져서 다 낫고 나면 난 아무에게도 지지 않게 될 거야.」

사샤의 눈물은 차차 멎어 들었다.

옥사나의 말을 듣는 사이 점차 마음에 안정이 찾아왔다. 놀랍게도, 상황은 하나도 변한 것이 없는데 그 말을 듣는 것만으로도 세상이 뒤집힌 것 같았다.

옥사나의 말대로 그녀는 훨씬 더 강해져서 돌아올 것이다. 사샤는 그 말을 믿어 의심치 않았다.

「넌 정말 멋져.」

「흥…….」

옥사나는 눈을 돌리며 괜히 꽃다발의 향기를 맡았다. 그게 그녀가 표현하는 유일한 수줍음의 방식이라는 것을 안 사샤는 코를 한 번 훌쩍이고 진심을 담아 다시 한 번 말했다.

「나도 너처럼 되고 싶어.」

「뭐, 굳이 나처럼 되어야 하나……. 따라서 다치고 싶다는 소리는 아니지?」

그 말에 사샤는 무의식적으로 웃음을 흘리고 말았다. 그걸 인지하고 얼른 표정을 굳혔으나 옥사나가 호방하게 웃고 있어서 같이 따라 웃었다.

「아, 맞다. 나 콩쿠르에 나갈 거야.」

「정말? 잘 됐다! 엄마가 허락해 주셨어? 어떤 콩쿠르야?」

「로잔에 접수해 보려고…….」

사샤의 말에 옥사나가 더 호들갑을 떨었다.

조만간 내년 로잔 콩쿠르 비디오 접수가 시작된다. 그를 위해서 카렐은 사샤에게 베리에이션을 코치해 주는 개인 교사를 하나 더 붙여 주었고, 개인 헬스 트레이너를 고용했다. 지금 받고 있는 케이티와의 수업 외에도 추가로 필라테스와 스트레칭을 알려주는 교사도 찾아올 예정이었다. 많이 바빠질 것이다. 다쳐서도 안 되고, 그럴 틈도 없었다.

옥사나는 프린시펄 승급 직전이나 주역 무대를 앞두고 다치지 않은 게 얼마나 다행이냐고 반문했다. 사샤에게는 그게 바로 지금이었다. 발레 댄서로서의 수명은 짧다. 자신은 그 짧은 기간 안에 할 수 있는 모든 것을 다 하고 싶었다. 카렐을 만나기 전까지 자신은 지나치게 뒤처져 있었기 때문이다.

「비디오 예선 통과하면 알려줘야 돼? 그리고…….」

「……?」

「내 몫까지 열심히 해야 해.」

「응, 그럴게.」

사샤는 고개를 끄덕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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