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 콩쿠르 준비
티 없이 미끈한 광택을 뽐내는 검은색 차체가 좁은 일방통행 도로 위를 소리 없이 굴렀다. 노란 가로등과 달빛만큼 먼 곳에서 쏟아지는 어딘가의 전광판 불빛, 이벤트 갈라를 위해 온통 빨간 네온으로 치장한 현대미술관에서 쏟아지는 빛으로 묵직한 차의 표면이 번들거리며 온갖 색으로 화려하게 빛났다.
차가 호텔 바로 앞에 부드럽게 선 직후, 내부에서 보이가 곧바로 뛰어나왔다. 흰 장갑을 낀 보이의 손이 익숙하게 문을 당겨 열자 달칵, 하는 가벼운 소리와 함께 차의 문이 활짝 열렸다. 다른 이가 문을 열어 주는 것이 몸에 익은 차의 주인은 평소에는 문이 열리자마자 내리기 바쁘다. 그러나 오늘따라 열린 문에도 미동이 없어, 호텔 보이는 저도 모르게 안을 살짝 들여다보았다.
카렐의 옆자리에는 아이보리색 드레스를 입은 여자 한 명이 앉아 있었다. 테니스 선수 출신으로 시작해 이른 은퇴 후 모델 활동을 거쳐 현재는 몇몇 영화를 통해 조금씩 두각을 나타내고 있는 배우였다. 오늘 행사에 카렐과 동행한 이이기도 했다.
“제가 끝까지…… 직접 모시지 못해 죄송합니다.”
“그냥 하는 말인 거 다 알아요. 말도 안 되죠.”
“왜 그렇게 생각하시죠?”
“왜긴요? 저희 집은 너무 멀어요. 시간 낭비잖아요. 경제적으로 살자구요.”
그녀의 소탈한 말에 카렐은 그저 미소 지었다.
“그럼 조심해서 들어가요.”
“당신도 좋은 밤 보내세요.”
안쪽을 향해 작별 인사를 건넨 카렐은 백미러를 바라보았다. 게오르크와 눈이 마주쳤다. 말없이 짧은 눈인사를 건네며 카렐은 몸을 돌렸다.
그때까지 문을 붙잡고 서 있던 보이를 올려다보며 가벼운 눈인사를 건넨 카렐은 이내 차에서 빠져나왔다. 오래 신어 은은한 광택이 도는 검정색 가죽구두가 먼저 코를 내밀었다. 다리 한쪽으로만 가볍게 땅을 딛고 몸을 빼내자마자 드러난 인물의 머리색은 빨간 네온에 물든 금발이었다. 어딘가에서 셔터 소리가 났다.
카렐은 바로 들어가지 않고 보이에게 말을 걸었다.
“날씨가 덥죠?”
“네, 하지만 일할 만합니다.”
“수고가 많아요.”
차가 다시금 도로 위를 느리게 구르며 빠져나갔다. 그사이에 다시금 셔터 소리가 여러 번 울렸다. 카렐은 고개를 돌려 떠나는 차의 뒷모습을 한참 바라보다가 다시 물었다.
“안쪽에 누가 탔는지, 사람이 보이던가요?”
“네? 아뇨……. 있는지도 몰랐습니다. 목소리가 들리지 않았다면 아예 몰랐을 겁니다.”
“그래요…….”
잠시 뜸을 들이며 카렐은 생각했다. 굳이 그녀를 이끌어 차에서 내리게 하고, 지하 바에서 칵테일 한 잔이라도 권하는 게 나았을지를.
원래의 자신이라면 그랬을 것이다.
그러나 요즘 하루에 한 번씩 꼬박꼬박 포털 창에다가 ‘카렐 클레멘츠’를 검색하기를 빠뜨리지 않는 누군가를 떠올리면 그러기가 꺼려졌다. 사샤는 황색 언론의 가십에 완전히 홀려서 이제는 할리우드 배우나 셀럽들의 결혼설, 임신설, 이혼설 따위를 흥미롭게 읽어댔다. 사샤는 잘 살고 있는 부부가 이혼한다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고, 또 재결합한다 하면 그 말을 곧이곧대로 믿으며 카렐에게도 떠들었다.
“지금 이 소리 들립니까.”
카렐의 고개가 셔터 소리 나는 곳으로 향하자마자 소리가 더 잦아졌다. 그의 미간이 살짝 찌푸려진 것을 알아챈 보이는 고개를 끄덕였다. 그러고는 작은 소리로 말했다.
“경찰을 부를까요…….”
그게 소용없다는 건 카렐이 더 잘 알았다. 손 큰 고객의 심기가 불편해진 걸까 저어한 보이의 얼굴이 근심에 찼다. 그의 기분을 풀어 주려고 카렐은 대수롭지 않게 말했다.
“난 그저, 왜 우리 둘을 찍어대는지 모르겠어서. 그러고 보니 당신도 검은 머리로군요.”
“아, 하하…….”
스스로의 취향을 자책하는 카렐의 우스운 농담에 보이의 얼굴은 그제야 풀어졌다. 그의 안내에 따라 로비로 들어가면서 카렐은 짧게 한숨을 쉬었다. 프라이버시 입구 앞에 약간 긴장한 표정의 마이클이 기다리고 있었다.
그는 일전에 자신이 잠깐 자리를 비운 사이 막무가내 기자 한 명의 출입을 허용하게 된 이후로 자존심에 큰 상처를 입었다. 카렐의 앞에서 제법 전전긍긍하기도 했다. 그의 긴장한 미소를 지나치면서 카렐은 시계를 확인했다.
일찍 돌아온다고 했지만 벌써 11시에 가까워졌다. 지금이라면 사샤도 스트레칭 수업을 마치고 잘 준비를 하고 있을 것이다.
엘리베이터가 최상층에 도착했다. 알람음이 울리고 작은 기계 소음과 함께 문이 열렸다. 카렐은 사샤가 너른 호텔방 어디쯤에 있을지를 상상하며 복도를 걸어가 문 앞에 섰다. 문이 열리면 사샤는 항상 급하게 현관까지 나와 카렐을 맞이해 주었다. 혼자 있는 내내 이 문고리가 돌아가는 소리만을 기다렸다는 듯이.
카드키를 대자 잠금장치가 안쪽에서 돌아가는 부드러운 소리가 났다. 열린 문으로 들어서면서 카렐은 내심 기대하며 안을 살펴보았다. 그러나 빛이 부족한 실내에는 사람의 그림자가 보이지 않았다.
가죽 슬리퍼로 조용히 갈아 신고 재킷을 벗어 팔에 걸친 카렐은 거실로 천천히 향했다. 그러나 완전히 복도를 빠져나오기 전에 작은 목소리를 들었다. 그 모습은 아직 보이지 않았지만, 그건 분명 사샤의 목소리였다.
카렐은 작게 웅얼대는 말투에 귀 기울이며 저도 모르게 발소리를 죽이고 소리가 들리는 쪽으로 향했다.
“……아니? 그런 거 아닌데……. 나 요즘 바빠. 엄청나게 바빠서 그래.”
사샤의 목소리는 소파 뒤에서 들려왔다. 소파 뒤로 삐죽 튀어나온 깨끗한 맨발과 웅크려 앉은 무릎을 감싸 안은 팔꿈치만이 보였다. 편한 자리를 두고 굳이 숨듯이 웅크려 앉아 있는 이유는 알 수 없었으나, 사샤는 남들 눈에 띄지 않는 구석에서 마음의 안정을 찾고는 했다. 최근 실내 연습을 위해 연습실 한편에 출장 반주자를 위한 그랜드피아노를 들였는데, 그 아래에 들어가 쿠션을 베고 누워 있을 때도 있었다. 아무래도 머리가 천장과 가까워야 안정을 찾는 모양이었다.
카렐은 그쯤에서 멈추어 서서 벽에 등을 기댔다.
“아무튼 레빈한테 소홀하고 그런 거 아닌데? 그냥 지금 내 인생에서 최고로 바빠서 그래. 이거 비밀인데……. 나중에 내가 사실 알려주면 레빈은 후회할 거야. 내가 바쁜 이유가 있는데 몰라줬다고……. 음……. 지금 알려달라고? 안 되는데……. 비밀이야.”
사샤는 레빈과 통화를 하는 모양이었다. 카렐은 사샤가 말은 저렇게 해도 알리고 싶어 안달이 났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러니 일부러 저렇게 뜸을 들이는 것이다.
“……나 사실 콩쿠르 나갈 거야. 로잔 알아? 스위스에서 하는 거……. 몰라? 진짜 몰라?”
레빈이 로잔을 모른다고 하니 서운했는지 사샤의 목소리에서 대번에 김이 빠졌다. 카렐은 입가를 가볍게 가리면서도 피식, 웃음소리가 새어 나오는 것을 참지 않았다.
“아무튼 잘하는 애들만 잔뜩 오고, 심사위원들도 엄청나. 거기서 상 받으면, 시니어 그룹으로 출전하면 발레단 입단도 가능해. 지금 제일 잘나가는 댄서들은 전부 로잔에서 상 받았어. 그러니까 내가 나중에 성공하려면 로잔에서 꼭 상을 받아야 돼.”
“…….”
“아…… 그건……. 돈은 하, 학교에서 지원받았어. 제일 잘하는 애만…… 나갈 수 있게 도와주신다고 했는데, 내가 뽑혔거든. 그래서…….”
거짓말을 지어내는 부분이 나오자 사샤의 말은 티가 나게 느려졌다.
아무튼 레빈이 용기를 북돋아 주었는지 사샤는 ‘응, 열심히 할 거야. 후회하기 싫어’ 같은 말을 하면서 말을 주거니 받거니 했다.
그러던 사샤의 입에서 뜬금없는 화제가 튀어나왔다.
“레빈, 근데 레빈은 몇 살쯤에 결혼할 생각이야?”
“……?”
“학교에 벌써 결혼한 사람도 있어? 와……. 그게 빠른 거지? 보통 서른 살 넘으면 다들 결혼하고 싶어 하지? 아냐? 사람마다 다른 건 나도 알아. 나는 ‘병균’ 물어보는 거야. 아……. 맞아, 평균. 평균.”
“…….”
“어쨌든 서른두 살 정도면 결혼하기 좋은 나이야……? 연애하면 바로 결혼해?”
레빈과의 이야기는 그 화제를 마지막으로 마무리한 모양이었다. 소파 뒤에서 ‘응, 잘 자’ 하는 말이 흘러나오더니 사샤는 한동안 말이 없었다.
통화를 마쳤는데도 일어나지 않는 사샤를 의아해하며 카렐이 벽에 기댄 등을 뗐을 때였다. 사샤의 입에서 다시 한 번 목소리가 흘러나왔다. 이번에는 러시아였다.
「엄마? 뭐 하고 있었어요?」
사샤의 목소리 톤은 조금 더 낮아졌으며 말투는 티가 나게 무뚝뚝해졌다. 한 사람이 습득한 두 가지 이상의 언어를 쓸 때 톤이 달라지는 경우는 흔했지만, 사샤는 특히 그 차이가 심한 편이었다. 그게 모국어와 서툰 영어의 차이인지, 아니면 부모에게 말할 때만 저러는 것인지 아직은 알 수 없었다.
「네……. 괜찮아요. 열심히 하고 있어요.」
―열심히만 하면 되니? 잘해야지.
목소리가 나직한 레빈과 달리 사샤의 어머니 갈리나는 톤이 카랑카랑했다. 희미하게 들려오는 수화기 너머의 목소리에 집중하면서 카렐은 천천히 소파로 다가갔다.
「……알아요. 엄마는 저번에 아프다고 한 데 괜찮아요? 아……. 아직도 아프면 얼른 병원에 가 봐요. 그때 드린 돈으로 치료는 하셨어요? 약은? 제발 엄마가 판단하지 말고 의사 말을 들어요…….」
가까이 다가가자 소파 너머로 사샤의 동그란 정수리가 내려다보였다. 사샤는 자기 머리카락을 여러 번 쓸어 넘기고 있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조각가가 섬세히 공들여 조각한 듯한 손가락 위로 윤기 나는 검은 머리카락들이 차르르 쏟아졌다. 다소 신경질적인 손동작인데도 그 행동의 의도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아름다운 손이었다.
사샤는 짧게 숨을 내쉬더니 빠르게 말했다.
「엄마, 나 콩쿠르 나가요.」
―콩쿠르에? 돈은 어쩌고.
「……후원회에서 지원받기로 했어요.」
―후원회 지원? 너만 나가는 거야? 그거 사기 아니니?
「네, 저만 나가요. 사기 같은 거 아니에요. 제가 확인했어요.」
―너는 나가고 싶어 안달이었잖아. 눈에 뭐가 씌었는데 네가 그런 거 구분할 수나 있겠니. 사샤, 돈을 받는 일은 항상 엄격하게 따져 봐야 돼. 세상에 공짜란 없어. 누구든 대가를 요구하거든. 게다가 성과가 안 나와서 나중에 너한테 도로 청구되면 어쩌려고? 엄마는 책임 못 진다.
「……책임지지 마세요. 어차피 제가 알아서 해요. 지금까지도 그랬잖아요.」
―다 널 생각해서 하는 말이야. 휴, 엄마는 모르겠다. 콩쿠르에 나가는 데 돈은 얼마나 드는데?
「……의상비가, 10만 루블……. 비행기 값 같은 걸 다 더하면…….」
10만 루블은 턱도 없는 금액이었다. 실제로는 콩쿠르용 의상 한 벌에 30만 루블, 그러니까 5,000달러를 호가하는 경우가 더 흔하다. 카렐은 사샤가 일부러 금액을 훨씬 낮춰 말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사샤가 말을 다 잇기도 전에 수화기 너머에서 벼락같은 탄식이 터져 나왔다.
―세상에, 그 돈이 있다면 차라리 엄마를 좀 줘라. 어디 가서 그 돈을 네가 벌어 올 수 있겠니.
「이 정도면 엄청 싸게 하는 거예요. 그리고 입고 나면 필요한 사람한테 팔아도 되고…….」
―판다고? 그걸 사는 사람이 있어?
「네. 있어요.」
―그럼 그 돈은 네가 가지고? 아무튼 발레는 정말 우리 같은 형편에 할 게 못 되는구나.
사샤는 이제 어머니를 설득하려고 하지도 않았다. 그저 이마를 가리고 한숨을 쉬었다.
레빈과는 달리 작별 인사도 없이 전화는 끊어졌다. 어머니의 일방적인 한탄이 이어지다가 사샤가 끊어 버린 것이다.
사샤는 그러고도 한참을 거기 더 웅크려 앉아 있었지만, 그다음으로는 아무에게도 전화를 걸지 않았다. 그냥 숨죽이고 앉아 있을 뿐이었다.
카렐은 소파를 돌아서 사샤에게 건너갔다. 그러고는 그 옆에 소리 없이 무릎을 대고 앉아 날개뼈와 척추뼈가 툭 튀어나온 마른 등에 가만히 손을 얹었다.
“사샤.”
천천히 고개를 든 사샤의 눈가는 조금 젖어 있었다. 아이가 울고 있을 거라는 사실은 카렐도 예상한 일이었기 때문에 놀랍지도 않았다. 오히려 뺨을 적시며 운 것이 아니라 화가 난 것처럼 눈가에 붉은 기운만 도는 것이 의외였다. 눈 아래 점막이 반짝 빛났다.
“카렐? 언제 오셨어요? 아, 방금…….”
사샤는 여전히 카렐의 팔에 걸려 있는 재킷을 보고 그렇게 생각한 듯했다. 카렐은 방금 전에 엿들은 통화 내용은 모른 척하면서 고개를 끄덕였다.
“밤이 늦었습니다. 왜 안 자고 있었죠?”
“……카렐을 기다리다가요.”
사샤는 그렇게 말하며 부스스 웃었다. 울적하던 얼굴이 순수한 기쁨을 담고 활짝 웃으니 애 티가 났다.
카렐은 다리를 모아 웅크린 사샤의 무릎에 시선을 주었다. 드러난 흰 피부 위가 얼룩덜룩했다. 카렐은 저도 모르게 미간을 찡그렸다. 피멍이었다.
“아파 보이네요.”
“스트레칭 수업을 받다가 생겼어요. 근육 힘이 세면 누르는 힘이 있어서 어쩔 수가 없대요.”
“다음부터는 테이핑이라도 꼭 해요.”
“해 봤는데 소용없어요. 그리고 무릎보호대 같은 걸 하면 꾹 누를 때 틈이 생겨서 효과가 별로예요……. 저는 무릎이 튀어나온 편이라서 바닥에 닿을 때마다 멍이 자꾸 생기는 거래요. 무릎을 완전히 넣었으면 좋겠는데…….”
카렐은 사샤의 무릎을 살살 쓰다듬어 보았다. 피멍이 든 작은 무릎뼈는 한 주먹감도 안 되었다. 무릎뿐만 아니라 뼈대가 유독 가늘고 날씬한 종아리 위로도 수없이 푸른 멍이 남겨져 있었다. 발레 바에 부딪히거나, 서툰 파 드 되 파트너의 토에 채어 생긴 상처들이었다.
그러나 사샤는 통증 따위는 모른다는 듯이 그저 카렐의 손길만을 기분 좋은 얼굴로 느끼고 있었다. 방금 전 어머니와의 통화는 잊은 것 같은 표정이었다.
카렐은 사샤의 머리 안에 살고 있다는 난쟁이 사샤를 떠올렸다. 지난날 기계적으로 보고받던 사샤의 교우 관계나 학업 진척도에 관한 내용 말고, 직접 들을 수 있는 내용이 있을까 들렀던 학교에서도 사샤가 심하게 예민하고 가끔 강박증을 보인다는 관리사감 줄리아의 보고를 들을 수 있었다.
또한 카렐은 사샤의 어머니의 카랑카랑한 목소리를 떠올렸다. 사샤가 방금 전 통화에서 어머니에게 바란 것은 그저 ‘잘됐다, 최선을 다했으면 좋겠다’ 따위의 뻔한 말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사샤가 자라면서 제 부모에게 그런 말을 단 한 번이라도 들어 본 적이 있을까?
기가 막힌 일이지만 카렐은 어떤 아이의 인생이 그런 불운으로만 채워져 있을 수도 있다는 것을 방금 전에 깨달은 참이었다.
그런 인생을 살았으면서도 사샤는 금세 제 모든 불행은 잊은 듯한 얼굴을 한다.
카렐은 이유를 알 것만 같았다.
자신을 사랑하기 때문에.
사샤에게는 피멍이 든 부위를 조심스레 쓰다듬어 주는 이 작은 손길 따위가 정말로 소중한 것이다. 고작 이런 애정 어린 손길 한 번 베풀어 주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에…….
사샤의 무릎이 바들바들 떨렸다. 만져 보지 않았다면 알아챌 수 없을 만큼 자그마한 떨림이었다.
“아픈가요?”
카렐의 물음에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그럼 추워요? 에어컨을 끌…….”
“아니에요.”
사샤는 리모컨을 찾아 일어나려던 카렐의 손을 잡으며 말렸다.
“안 추워요. 근데 왜요?”
“떨고 있지 않습니까.”
카렐의 말에 사샤는 입술을 자근자근 씹더니 눈을 들고 말했다.
“……그건 카렐이 너무 가까이에 있어서 그래요. 카렐이 있으니까 흥분돼서요.”
카렐은 소리 없이 웃음을 흘렸다. 사샤는 그 휘어지는 눈가를 잠자코 바라보기만 했다.
카렐은 저를 앞에 두면 ‘흥분’된다고 말하던 사샤의 의도를 그간 지나치게 자의적으로 해석했던 자신을 책했다. 그건 문자 그대로 발기했다는 뜻이 아니라…… 사샤는 그저 설렘과 긴장을 그런 식으로 표현하는 것 같았다.
“그랬군요.”
카렐이 미소 지은 채 묻자 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네.”
“내가 그만 만지면 나을까요?”
“아니요……. 아니요. 카렐의 손길은 기분 좋아요. 멀어지지 마세요. 계속 만지셔도 돼요.”
그러면서 사샤가 조금 뒤로 물러나 앉은 자신에게 피멍 든 무릎걸음으로 다가오려 했기에 카렐은 얼른 몸을 일으켜 그를 말려야 했다. 사샤는 다시 제 무릎 위에 카렐의 손바닥을 올려놓고서야 안심했다.
카렐은 애정을 갈구하는 사샤의 노골적이리만치 순수한 행동에 조금 감탄했다. 사샤의 사랑은 어쩌면 이렇게 알기 쉽고 사랑스러운지 신기해하면서. 단순히 소년의 사랑이라 그렇다고 치부하기에는, 자신의 소년 시절 경험은 그렇지 않았다.
카렐은 문득 자신의 첫사랑을 떠올려 보았다. 누군가에게 처음으로 성적으로 끌렸던 때를.
자신은 여성의 나체보다 딱딱하고 마른 몸을 가진 남자의 나체에 끌렸고, 어렵지 않게 서로 성적인 쾌락을 채울 수 있는 상대를 찾아 ‘연애’했다. 그러던 자신은 곧 사랑을 재정의하게 만드는 존재와 조우하게 된다. 적당한 호감을 나누고 기분 좋은 체온을 나눠 가지는 상대가 아니라, 가슴이 타들어 가는 듯한 사랑의 고통을 알려준 상대.
그건 바로 흑백 영상 속에만 남은 사샤 세드린이었다. 카렐은 그가 이 세상에 없다는 사실에 통탄해하면서도 고통스러운 짝사랑에 몸을 던지는 것을 주저하지 않았다.
하지만 사샤에게는 가망 없는 사랑의 고통을 알려주고 싶지 않았다.
카렐은 가만히 팔을 벌렸다.
“이리 와요.”
사샤는 ‘흥분’해 분홍색이 된 뺨으로 카렐에게 다가갔다. 뺨뿐만 아니라 귀도, 입술도, 목이 깊이 파인 편한 티셔츠 위로 드러난 쇄골 언저리도 온통 붉었다.
“뒤돌아 봐요.”
카렐은 사샤에게 저를 등질 것을 종용했다. 저를 의자 삼아 등을 기대게 하고 뒤에서 안아 줄 생각이었다. 그러나 사샤는 미련이 남은 얼굴로 몸을 반만 비틀었다. 결국 사샤의 가는 흉곽을 두 손으로 꽉 잡아 억지로 돌리고 나서야 카렐은 사샤를 뒤에서 품어 줄 수 있었다. 그런 다음 카렐은 사샤를 제 가슴에 기대게 만든 뒤 그 몸을 아기에게 해 주듯 토닥여 주었다.
얌전히 카렐에게 기대어 앉은 사샤는 말없이 창밖에 시선을 주었다. 흰 달빛이 사샤의 종아리에 부딪쳐 사람의 살결 같지 않은 창백한 빛을 만들어 냈다.
얼굴을 보이지 않게 되니 사샤는 가끔 훌쩍였다. 어머니와의 대화를 떠올리고 있는지도 모르겠다.
그때 코를 슥 훔친 사샤가 반짝이는 손등을 몰래 제 바지에 문질러 닦았다.
“…….”
콧물이 분명했지만 카렐은 모른 척해 주었다.
잠시 후 훌쩍임이 완전히 멎은 사샤가 말했다.
“편안해요.”
“다행이네요.”
“카렐. 제가 말한 적 있어요? 좋아하는 사람이 카렐이라서 다행이라고요.”
그렇게 말하며 사샤는 고개를 꺾어 카렐을 보려 했다. 허공에서 시선이 마주쳤다.
“저는 운이 나빠요. 세상 사람들을 운 좋은 순으로 줄을 세우면 뒷줄에 있을 거예요.”
“…….”
“그런데 카렐을 만나고 나서 프리패스 티켓이 생긴 것 같아요. 하고 싶은 걸 말하는 것만으로 모든 걸 다 들어주시잖아요.”
“…….”
“저는 요즘에…… 그 프리패스의 유통기한이 궁금해요…….”
“그런 건 걱정하지 말아요.”
“예전에 약속한 대로 졸업할 때까지인가요? 182센티가 되고, 발레단에 입단해서 스물두 살에 프린시펄이 되면?”
말없이 카렐의 손등을 만지작대던 사샤가 말했다.
“그러면 카렐이 저를 애인으로 삼아 줄지도 모른다고 생각했어요. 그런데 그건 최소한의 기준이잖아요? 이미 그런 사람은 세상에 너무 많아요. 외모가 아름답고 몸을 열심히 단련하고…… 그리고 이미 프린시펄인 사람들이요.”
“…….”
“그 사람들보다 제가 나은 게 뭔지 모르겠어요.”
“가능성 아닐까요.”
“가능성.”
“당신이 그들보다 더…… 위대해질 수 있다는 가능성. 어리다는 건 그런 거예요.”
카렐은 제 말을 곱씹어 보았다. 다른 앞선 조건의 이들보다 훨씬 더…… 사샤 세드린과 닮게 자랄 가능성. 진실은 그것이지만, 왜인지 오늘따라 그것을 인정하는 것이 스스로도 내키지가 않았다.
사샤는 조언을 듣는 둥 마는 둥 힘없이 웃었다.
“안 좋은 생각인데…… 작은 사샤 세드린이 얼마 전부터 자꾸만 카렐이 저를 떠날 거래요.”
“여기 사는 난쟁이 말인가요?”
카렐이 사샤의 관자놀이 부근을 검지로 톡 건드렸다.
“네. 제가 카렐의 기준을 통과하면 카렐이 저를 떠날 거래요. 그러니까 일부러 못하는 척하면서 오래오래 카렐의 곁에 있으라고, 카렐의 관심을 붙잡아 두려면 평생 어린애처럼 구는 게 나을 거라고, 말도 안 되는 소리를 해요.”
“흠, 그 계획을 나에게 말해 줘도 돼요? 난쟁이가 화낼 겁니다.”
“네. 상관없어요. 왜냐면 전 걔 말을 안 들을 거거든요. 그 자식은 겁이 많아요. 성격도 급하고요……. 하지만 전 아니에요.”
카렐은 그저 상상력이라고 치부하기에는 기묘한 사샤의 말을 곱씹었다. 사샤는 역할극에 지나치게 몰입한 것 같았다.
“제가 유일하게 걱정하는 게 있다면……. 음……. 카렐은 노총각이잖아요……?”
그러나 바로 이어진 말에 허를 찔린 카렐은 진짜로 소리 내서 웃어 버릴 뻔했다. 겨우 웃음을 참아내자 사샤는 자기 말에 집중해 달라는 듯이 표정을 단단히 굳히고 이어 말했다.
“전 걱정돼요……. 제가 다 자랄 때까지 카렐이 기다려 줄지……. 만약에 카렐이 제가 아닌 다른 누군가 좋다고 말하고 그 사람과 사는 게 행복하다고 말하면, 전 보내 드릴 수밖에 없어요. 왜냐면…… 사랑은 그런 거니까요.”
“풋…….”
하지만 이번에는 참는 것이 역부족했다. SADUNESS로 시작하던 사샤의 슬픔 가득한 일기장이 떠올랐기 때문이다.
사샤의 말이 뚝 그쳤기에 카렐은 얼른 헛기침을 하며 표정 관리를 했다. 그러나 뒤돌아 있는 사샤의 등에서 작은 원망이 느껴졌다. 타이밍 나쁘게 웃어 버린 자신을 질책하고 있는 것 같았다.
그래, 오늘은 위로가 필요한 날이니까.
카렐은 사샤의 등을 손끝으로 톡톡 건드렸다. 사샤는 꿈쩍도 하지 않았다.
카렐은 사샤가 돌아볼 수밖에 없게 부드러운 손짓으로 그 마른 어깨를 흔들었다. 그러자 사샤의 검은 눈이 뒤를 살그머니 돌아보았다.
“가까이 오세요.”
사샤의 고개가 어쩔 수 없다는 듯 조금만 기울어지자 카렐은 사샤의 이마 위로 흐트러진 머리카락을 한 손으로 넘겨주었다. 그러고는 사샤에게서 사랑 고백을 받은 뒤로 한동안 완전히 멈추었던 이마 키스를 해 주었다.
촉, 소리가 나고 입술이 떨어진 뒤에도 사샤는 카렐을 똑바로 올려다보고 있었다. 젖살이 빠져 동글동글하던 선이 사라지고 이목구비가 더 선명하게 드러난 얼굴이 카렐을 고요히 바라보았다.
“카렐, 이런 거 말고요.”
사샤는 천천히 몸을 돌려 카렐을 마주 보았다. 아름답다고 생각했던 흰 손끝이 카렐의 뺨 위에 무게감 없이 조심스레 닿았다.
“이제 이런 거에 만족하기에는, 저는…….”
“…….”
“……성숙해졌는데요.”
사샤가 눈을 천천히 감았다 떴다.
「한 번만 진짜로 키스해 주시면 안 되나요?」
나직한 음성이 귀에 꽂혔다.
「적선이라도 괜찮아요.」
반짝이는 눈 아래 점막 위로 물을 먹은 눈동자가 드러났다. 눈물점이 박힌, 붉게 물든 눈가가 호소하듯 말했다.
순간 카렐은 아무 반응도 할 수가 없었다.
어설픈 러시아어 발음을 주워섬기고 머리를 검은색으로 염색한 배우 따위가 아닌…… 진짜 사샤 세드린의 얼굴.
말 그대로 조금은 성숙해진 사샤와 정면에서 눈이 마주친 순간, 고막을 파고든 러시아어가 청각에서 다른 자극으로 순식간에 화했다. 정수리부터 척추를 타고 내려오는 물리적 자극이 전신의 통점을 건드리는 느낌에 카렐은 완전히 굳어 버렸다.
“카렐?”
카렐이 말을 잃은 것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사샤는 팔을 뻗어 억지로 카렐의 목덜미를 안으려 했다. 카렐은 그 손짓에 저도 모르게 두려운 감정을 느꼈다. 아직은 이렇게 휩쓸려서는 안 된다는 이성이 머리를 지배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작은 속삭임만으로 온몸의 신경을 곤두세워 버리게 만든 사샤 세드린은 몽마처럼 부지불식간에 이성을 무너뜨릴 것이다.
“사샤, 잠시…….”
카렐이 등을 조금 물리자마자 함께 딸려온 사샤의 멍든 무릎이 바닥을 쿵, 찍었다. 사샤는 항시 멍이 들고 빠지기를 반복하는 곳의 통증은 괘념치 않는다는 듯이 도리어 무릎걸음으로 기어 카렐에게 더 붙으려 했다. 결국 그를 보다 못한 카렐이 손을 뻗어 사샤의 허리를 양팔로 들어 올렸다. 티셔츠가 말려 올라가며 허리의 맨살이 드러난 것도 잠시, 어느새 사샤의 무릎은 카렐의 허벅지 위로 살포시 놓였다.
“카렐…….”
그의 의도를 알아챈 사샤는 감격하며 카렐의 이름을 입 안에서 웅얼거렸다. 딱딱한 목재바닥이 아닌 사람의 살과 근육 위에 무릎이 닿자 통증도 한결 가셨다.
사샤는 카렐 쪽으로 기울어진 상체를 버티지 않고 그대로 완전히 체중을 기대었다. 폭 안기자마자 카렐의 상체가 밀리며 소파의 뒤편에 쿵, 닿았다. 동시에 사샤의 젖은 입술이 굳게 다물린 카렐의 입술 위를 더듬었다.
“카렐?”
사샤는 항상 만져 보고 싶었던 카렐의 턱을 손끝으로 섬세하게 매만지면서 저와는 다른 감촉을 즐겼다. 밤이 늦은지라 굵은 수염들이 뿌리박힌 모근에서는 거친 느낌이 났다. 고개를 기울여 그 뺨과 턱 선에 일부러 쪽, 쪽, 소리가 나게 키스를 할 때에 사샤는 제 몸 아래 깔린 카렐의 긴장을 느꼈다. 하지만 그런데도 카렐은 사샤의 등허리를 받친 손을 떼지 않았다. 사샤가 허리를 움직이면 그의 손가락이 맨 등허리에 닿아 기분이 좋았다.
무용수들은 서로의 몸을 만지는 것만으로도 어디에 힘이 들어가 있는지, 어떤 근육을 쓰고 있는지를 느낄 수 있다. 사샤는 카렐의 기분을 알고 싶어 더더욱 그의 몸에 자신을 밀착했다.
한참 카렐의 뺨을 어루만지던 사샤의 손은 카렐의 목으로 내려갔다. 날씬한 흰 손가락들이 카렐의 목근 같은 목덜미를 양손으로 붙잡고 제멋대로 더듬어댔다. 고개를 내려 그의 툭 튀어나온 목울대를 앙 물어본 사샤는 다시 고개를 올려 애타게 그의 입술을 핥으면서 카렐이 입을 열어 주기만을 기다렸다. 맛본 입술이 달콤해 절로 앓는 소리가 났다.
잠시 후 사샤는 그의 뒷덜미가 약간의 땀으로 촉촉하게 젖어 있다는 것을 깨달았다.
‘더운가?’
사샤는 눈을 가늘게 떠서 카렐의 얼굴을 확인하려 했다.
너무 가까워 불분명한 시야 안으로 가장 먼저 들어온 것은 카렐의 속눈썹이었다. 사샤는 속눈썹마저 밝은 갈색인 카렐의 눈에 감탄했다.
그다음은 짙은 녹색 눈동자.
카렐은 눈을 감고 있지 않았다. 평소에 빛을 받으면 황금색 반점이 감돌곤 하던 눈동자는 지금은 짙은 암녹색이었다. 어둠 속에서 동공이 열린 카렐의 눈이 무섭도록 자신을 쏘아보고 있었다.
왠지 섬뜩해진 사샤는 저도 모르게 몸을 물렸다. 그때였다. 등허리를 받치고 있던 카렐의 손이 허리에 와락 감겨들었다.
“카렐……. 아……!”
짧은 비명은 작은 입 사이로 먹혀들어 갔다.
자신이 카렐의 목덜미를 가는 손으로 죄던 것과는 비교도 안 되는 악력이 뒷덜미와 등에서 느껴졌다. 뒤통수부터 가는 목까지 쉽게 그러쥔 큰 손, 그리고 몸을 물릴 수 없게 단단히 등을 받친 다른 쪽 팔. 꽉 끌어안겨 맞닿은 가슴 사이에서 사샤는 미친 듯이 뛰는 심장 고동을 느꼈다.
“으응, 음…….”
입 안에 함부로 침범한 타인의 혀가 입천장을 건드릴 때마다 신음이 흘렀다. 상체가 뒤로 기울어져 카렐의 팔 힘에 온통 의지한 사샤는 그의 품 안에서 완전히 녹아내렸다.
혀를 섞는 키스를 한 번도 해 본 적이 없어서 서툰 것을 들키면 어쩌나 하고 한때 걱정했던 것은 기우였다. 격류에 휩쓸리듯 사샤는 그저 전신에 황홀하게 쏟아지는 감각을 느끼기에 바빴다.
마치 내밀한 대화를 나누는 것 같은 다정하고 따뜻한 혀의 움직임, 자연스레 고개를 비틀며 뺨을 쿡 찌르는 코끝의 감촉과 뺨에 닿는 떨리는 숨결, 등을 쓸어내리는 손길에 허리가 녹을 것만 같은 감각…….
카렐과의 키스는 온몸으로 나누는 포옹이었다. 사샤는 힘겹게 그의 목 뒤로 팔을 두르고 더더욱 몸을 겹쳤다. 저도 모르게 카렐의 금발을 손 안에 그러쥐었다.
카렐의 존재는 마치 운명이 준비한 상벌 중 상의 차례 같다. 자신이 가장 쓸모없게 느껴지고 최고로 나약해질 때에 나타나, 그래도 삶은 조금쯤 달콤한 것이라고 속을 만한 보상을 준다. 죽지 말고, 포기하지 말아야 할 이유를 만들어 주듯이.
사샤는 이 꿈같은 순간이 아주 오래 이어지기를 바랐다. 자신은 사라지고 카렐에게 흡수되어서 평생 그와 한 몸이 될 수 있다면 좋겠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래서 촉, 하는 낯간지러운 소리와 함께 잠시 입술이 떨어졌을 때 사샤는 몽롱하게 카렐을 바라보다 다시 고개를 숙이며 그에게 입을 맞췄다. 키스에 서툴러 타액으로 푹 젖어 번들거리는 사샤의 입술을 엄지로 훔쳐내 주던 카렐은 다시 저에게 열렬하게 돌진하는 사샤의 몸을 다급히 받아 들어야 했다. 카렐의 젖은 엄지손가락이 사샤의 흰 뺨을 문질렀다.
카렐의 따뜻한 입 안 점막과 도톰한 아랫입술을 적극적으로 핥고 빨면서, 사샤는 자꾸만 카렐을 타고 올랐다. 끝도 없이 그 몸 위로 달라붙고 기어올랐다.
사샤가 하도 꿈지럭대는 바람에 반바지는 말려 올라가 흰 허벅지가 온통 드러났고, 그런 사샤의 흉곽을 양손으로 잡은 카렐의 핏줄 선 손 아래로 티셔츠가 딸려 올라가 있었다. 등줄기가 움푹 파인 사샤의 맨 등허리가 환히 드러났지만 알아챈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샤가 입술을 떼어냈을 때 카렐이 앉은 자세는 허리부터 무너져 있었고, 어느새 사샤는 그의 아랫배 위에 걸터앉은 채였다.
“하아…….”
사샤는 지친 한숨을 내쉬었다.
카렐의 가슴팍을 양손으로 누르며 몸을 일으킨 사샤는 제 아래에 길게 누워 저를 올려다보고 있는 카렐의 표정을 말없이 바라보았다. 흉통이 꽉 찬 빳빳한 베스트가 조금 밀려 올라간 것 외에 그다지 흐트러진 기색이 없는 카렐이 눈도 깜빡이지 않고 저를 보고 있었다.
방금 것이 적선이냐고 물어도 그는 정확히 대답해 주지 않을 것이다.
그게 바로 그가 말했던 어른의 교활한 화술이기에.
하지만 사샤는 그래도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런 그의 교활한 부분마저 좋아서 죽을 것 같았으니까.
사샤는 카렐의 몸 위에 길게 늘어져 누웠다. 처음에는 엇박자로 뛰던 두 사람의 심장 고동은 어느새 차차 서로의 박자에 맞춰졌다. 카렐이 더 이상 저를 안아 주거나 토닥여 주지 않고 제 몸에 손끝도 대지 않았지만, 그래도 사샤는 위안을 느꼈다.
긴장이 쭉 풀린 사샤는 카렐의 숨소리를 들으며 새록새록 곤한 잠에 빠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