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 두 사람이 추는 춤
[카레ㄹ 저 오늘은 바깓에 나가서 저녁 먹거요. 빠릴 집에 갈게요.]
사샤는 유니언 스퀘어 역 주변, 공사 중인 철골구조물 아래에 서 있었다. 아무래도 마음이 불편해 카렐에게 메시지를 보낸 참이었다. 길은 매우 붐볐고 좁은 도보에 세워진 철골구조물 사이로 사람들이 바쁘게 오고 갔다. 사샤는 인파를 피하다가 점점 가게 입구 문 앞까지 밀려들어 갔다. 어쩔 줄 모르고 문 앞에 바짝 붙어 섰을 때, 마침 안에서 나오던 사람과 어깨를 부딪치는 바람에 핸드폰을 떨어뜨렸다. 사샤는 크게 당황하여 사과하면서 사람들의 발에 채어 굴러간 핸드폰을 들고 다시 구석에 구겨지듯 섰다.
“아…….”
핸드폰을 줍고 난 사샤는 낮게 신음했다. 카렐이 선물해 준 새 핸드폰의 뒷면에 자잘한 실금이 여러 개 가 있었다. 안타까운 마음에 뒷면을 쓰다듬어 보니 까슬까슬한 유리조각들이 손을 콕콕 자극했다. 고치려면 얼마나 들까? 사샤는 얼마 남지 않은 현금을 떠올렸다.
깨진 핸드폰을 들여다보고 있던 와중에 진동이 울렸다. 카렐이 답을 줬을지도 모르니 반가운 마음으로 얼른 확인해 보았는데, 메시지를 보낸 것은 오늘 만나기로 한 레빈이었다.
[5분 정도 늦을 것 같아. 미안해.]
[갠ㅊ낳아.]
사샤는 카렐에게 메시지를 보낸 화면을 다시 들여다보았다. 아직도 답이 없었다.
이틀 전쯤 친구와 저녁 약속이 있다고 카렐에게 말했는데, 확실한 대답을 듣지 못했던 것이 마음에 걸렸다. 그때 마침 카렐은 업무를 보고 있었는지 심각한 얼굴로 미간을 굳히고 노트북 화면에만 집중했다. 아주 중요한 업무를 하느라고 자기 말을 못 들었던 건지도 모른다.
자기가 카렐의 바쁜 시간을 방해하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고 생각했던 사샤는 그가 앉아 있는 주변을 조금 서성거리다가 다시 제대로 이야기하지 못하고 그대로 잠들었다. 왜 허락을 받아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는지는 알 수 없다. 카렐이 어딜 나갈 때마다 허락을 받으라 한 적도 없었는데…….
사샤는 그다음 날 아침에 호텔로 찾아온 게오르크에게 다시 한 번 자신의 외출을 살짝 흘렸다.
‘저 내일 저녁에 약속 있어요. 개인 교습 시간 많이 줄였으니까 요즘에 한가하거든요. 그래서 친구랑 만날 건데…… 레빈이랑 율리안이에요. 뉴욕대 어디 있는지 아세요? 레빈이 뉴욕대를 다녀서 그 근처로 갈 건데요……. 저기, 듣고 있어요?’
‘친구 많아서 좋겠어요.’
게오르크는 영 정신이 딴 데 팔린 눈으로 그렇게 대답할 뿐이었다. 그는 사샤가 준비해 달라고 한 뿌리는 파스와 근육에 붙이는 테이프 따위를 챙기느라 정신이 없어 보였다. 그랬던 그가 오늘 자신의 외출을 과연 카렐에게 전해 주었는지는 알 수 없었다.
“사샤! 유튜브에 올라간 영상 봤어!”
갑자기 시야 안으로 뛰어든 사람의 목소리에 사샤는 고개를 들었다. 무표정하던 사샤의 입이 자그맣게 벌어지며 차차 미소가 피어났다. 늦은 시각을 의식하고 달려왔는지 모래색 머리카락이 조금 흐트러진 레빈이 눈앞에 서 있었다.
“레빈, 안녕? 유튜브에 올라간 거? 로잔 자기소개 영상 봤어?”
사샤가 신기해하며 묻자 레빈이 가볍게 숨을 몰아쉬며 고개를 끄덕였다.
얼마 전 프리 드 로잔 공식 계정에 사샤를 비롯해 로잔 콩쿠르에 출전하는 학생들이 직접 찍어 보낸 소개 영상이 업로드되었다. 참가자 전원이 보낸 것은 아니라 최종적으로 업로드된 것은 총 20명 정도였는데, 사샤는 그걸 알고 난 후에 안 보내도 되는 거였다면 나도 보내지 말걸, 하고 조금 후회했다. 수시로 올라가는 조회 수를 보면 자꾸만 부끄러워졌기 때문이다.
아무튼 사샤는 눈의 초점이 흐리멍덩해서 조금 바보같이 보이는 제 얼굴을 불만족스러워하면서도 레빈에게 유튜브 영상 링크를 보내주었다.
“조회 수가 엄청나던데? 네가 제일 높아.”
“정말? 얼마나 높은데? 내가 마지막으로 봤을 때는 8천 명 정도였는데.”
“응? 언제 확인하고 안 한 거야? 지금 10만이 넘었어.”
“와……. 10…… 10만 명이나?”
그게 얼마나 좋은 것인지 몰라 사샤는 그냥 기계적으로 반응했다. 레빈은 핸드폰으로 유튜브 영상을 찾으면서 사샤에게 확인시켜 주었다.
“이거 봐. 다른 애들 건 고작 4, 5천 정도인데, 너만 스무 배가 넘잖아. 굉장하다.”
“스무 배?”
깜짝 놀란 사샤는 무슨 일이 일어난 거냐고 물었다. 레빈은 사샤가 무언가 크게 잘못된 줄 알고 두려워한다는 것을 깨닫고는 별일 아니라며 대수롭지 않게 고개를 저었다.
“어딘가에 링크가 풀렸나 봐. 발레 팬들만이 아니라 그냥 네 얼굴을 보러 오는 사람도 있는 것 같아……. 크게 이상한 일은 아니니까 걱정하지 마. 댓글은 좀 봤어?”
“아니? 댓글도 달렸어?”
“응. 인스타그램 있으면 알려 달래. 그리고 어떤 사람은 네가 발레 하는 걸 빨리 보고 싶대. 또…… 악센트가 귀엽고 섹시하다는 사람도 있고. 세상에……. 이 사람은 며칠째 아침저녁으로 매일 보고 있대. 네 얼굴과 어눌한 말투를 함께 보고 있으면 마음이 치유된다고.”
레빈이 댓글을 읽으면서 내리는 화면을 사샤는 정신없이 좇았으나 영어를 읽는 게 느렸기에 그 속도를 따라가지 못했다.
“인스타그램이 뭐야? 그리고 왜 내 영상을 여러 번 봐? 내가 악센트가 있어서 그런가? 그 댓글 단 사람한테 설명해 주면 안 돼? 나 원래 러시아 사람이라고……. 그걸 말해야 되는데, 녹화할 때 잊어버렸어. 게오르크한테 다시 찍자고 했는데, 안 된다고 했어. 아무튼…… 근데 왜 여러 번 보는 거야?”
“음……. 귀여운 동물 영상 같은 건 여러 번 반복해서 보기도 하잖아. 넌 안 그래?”
레빈은 질문이 너무 많은 사샤를 일단 이끌면서 저녁을 먹기로 한 곳으로 향했다. 사샤는 영상을 다시 찍지 못한 것이 퍽 아쉬웠는지 계속 게오르크를 탓하며, 그 댓글 쓴 사람에게 답을 달아 줘야 한다고 주장했다.
잠시 후 레빈이 사샤를 데리고 간 곳은 근처의 타이 음식점이었다. 저렴한 가격에 맛이 괜찮아서 친구들과 자주 찾는 곳이라고 했다. 조도가 조금 낮은 듯한 어둑한 식당 안쪽으로 안내받은 두 사람은 좁은 테이블을 가운데 두고 마주 앉았다. 훌쩍 큰 키만큼 먹는 양이 급격하게 늘어난 사샤를 위해 레빈은 팟타이에 똠카가이, 그리고 고수를 잔뜩 얹은 양갈비 샐러드까지 시켰다.
그러나 맛있는 저녁을 먹으면서도 사샤는 영 걱정을 떨치지 못한 얼굴이었다. 댓글로 사람들에게 답을 해 줘야 할 것 같다면서 집착을 놓지 못했다. 레빈은 결국 난감해하면서도 저 역시 한 번도 해 본 적 없는 유튜브 댓글 다는 법을 사샤에게 알려주었다.
“내가 이렇게 하면 이 사람한테 말 걸 수 있어? 그럼 이 사람이 봐?”
“볼지 안 볼지는 모르겠지만, 네가 말을 걸 수는 있어. 이거 누르면 되는 건가? 아……. 된다. 이제 쓰면 돼.”
“응.”
[Miriam * 1일 전
악센트가 마음에 든다:)]
[Sasya.C 마음에 들어서 고마어ㅜ요. 저는 러씨아에서 왔어 그런대요.]
댓글이 잘 달린 것을 확인한 사샤는 만족하면서 일단 핸드폰을 다시 엎어 놓았다. 언뜻 보니 댓글이 아주 많아서 지금 전부 답할 수는 없었다. 집에 돌아가서 자기 전에 답글을 달아 주면 될 것 같았다.
레빈은 엎어 놓은 사샤의 핸드폰 뒷부분에 흘끔 시선을 주더니 사정없이 깨진 면을 보고 살짝 놀란 얼굴을 했다.
“아무튼, 콩쿠르 준비는 어떻게 되고 있어? 나도 로잔에 대해 조금 찾아봤는데…… 발레는 잘 몰라도 이게 대단한 거라는 건 알 것 같아. 심사 과정을 전부 스트리밍해 준다며? 꼭 챙겨 볼게. 정말 떨리겠다.”
“모르겠어. 난 아직 실감이 안 나.”
사샤는 레빈이 술 대신 시켜 준 콜라를 쭉 넘기면서 대답했다.
프리 드 로잔의 진행 방식은 콩쿠르 중에서도 꽤 특이하다. 70명의 학생들은 주니어와 시니어 그룹을 나누어 5일간 수업을 받고 공연을 선보인다.
로잔의 가장 특이한 점은 공연 무대에 오르기 전 수업을 듣는 모든 과정이 심사에 포함된다는 것이다. 기본기가 얼마나 탄탄한지 체크하는 클래스부터 발레 마스터의 지도를 얼마나 빠르게 습득하고 체화하는지 발전 가능성을 평가받는 개인 코칭 시간까지……. 또한 그 과정을 진행자들의 해설을 통해 실시간 스트리밍으로 전 세계에서 지켜볼 수도 있다.
“넌 분명히 잘할 거야. 학교에서도 제일 잘하잖아.”
“응……. 파이널에만 갈 수 있다면 소원이 없을 것 같아.”
그리고 6일째 되는 날, 심사위원들은 70명 중에서 5분의 1가량만을 남기고 마지막 무대에 오를 파이널리스트를 선정한다. 사샤의 목표는 적어도 그 안에 드는 것이었다.
사샤는 조금 시무룩한 얼굴로 턱을 괴며 뺨을 감쌌다. 사실 카렐이 준비한 기준에 맞추려면 파이널리스트로는 턱도 없다. 지금 주목받는 발레 스타들은 로잔에 참가할 때에 너무나 당연한 듯이 일등상을 거머쥐었고, 18세가 되자마자 세계 유수의 발레단으로부터 오디션 콜을 우수수 받았다. 그러고는 짧은 군무 단원 시절을 거쳐 빠르게 승급에 승급을 거듭해 팬을 몰고 다닌다…….
그러니까 그럭저럭 제 몫을 하는 발레 댄서가 되고 싶다면 적당히 파이널리스트에 오르는 정도로 만족하겠지만, 사실 그게 목표여서는 안 되었다. 더욱 탁월하고, 가장 눈에 띄어야 했다.
하지만 무리하지 말라는 조언 때문에 사샤는 현재 개인 레슨을 브라운 씨의 것 한 개만 남기고 모두 그만둔 상태였다. 카렐은 어디까지나 경험 삼아 나가 보라고 말했지만 내심 사샤는 자꾸 욕심이 나서 항시 초조한 상태였다.
사샤가 한숨을 내쉬고 있을 때 레빈이 말했다.
“율리안이 지금 오고 있다는데, 만날래?”
“율리안?”
갑작스러운 제안에 깜짝 놀라며 사샤가 말했다.
“율리안은 왜 자꾸 레빈을 따라다녀? 혹시 레빈 좋아해?”
사샤의 무신경한 말에 레빈은 차마 대답하지 못하고 핸드폰만 바라보았다. 그러나 소 뒷걸음질을 치다 쥐 잡은 격으로 정답을 말한 사샤는 그 순간 도착한 메시지에 정신이 팔려 레빈의 반응을 보지 못했다.
[알겠어요. 난 좀 빨리 들어왔는데, 저녁은 혼자 먹어야겠군요. 느긋하게 반신욕이나 하고 있을 테니 친구들과 천천히 놀다 와요.]
카렐에게 답장이 왔다! 언제나처럼 친절하고 자세한 답장이었다. 그러나 ‘반신욕’을 하는 카렐을 떠올린 사샤의 머릿속은 금세 노골적인 살색 망상으로 물들었다. 튼튼하고 잘 짜인 몸을 뜨거운 물이 가득한 욕조에 담그는 카렐, 체온이 올라 매끈한 목덜미가 따뜻한 땀방울로 젖은 카렐…….
내가 율리안을 꼭 만나야 할까? 만나서 뭘 하지?
사샤의 머릿속 우선순위가 마구 바뀔 때였다. 어딘가 넋이 빠진 듯한 사샤의 뒤에서 율리안이 나타나 어깨를 턱 짚었다. 퍼뜩 놀라며 뒤를 돌아보는 사샤를 내려다본 율리안의 눈은 크게 뜨여 있었다.
“사샤, 살 엄청 빠졌구나?”
“아니야……. 나 살쪘는데? 조금…… 근육도 늘었어.”
“뺨이 앙상한데.”
율리안이 사샤의 작은 턱을 잡고 이리저리 휙휙 돌렸다. 젖살이 빠져 가파르게 떨어지는 턱 선과 날카로운 턱 끝이 놀라운 모양이었다.
“율리안. 사샤가 일어나면 깜짝 놀랄걸. 키도 엄청 컸거든.”
레빈의 말에 율리안이 의자를 끌어 그 위에 털썩 주저앉았다.
“고작 몇 달 못 봤다고, 그새 컸다고? 성장기 애들은 대단하구나.”
화제는 다시 사샤의 연말 공연과 콩쿠르에 대한 것으로 옮겨 왔다. 사샤는 콩쿠르에서 자기가 가장 걱정하는 부분들을 늘어놓았다. 원래 제 이야기를 잘 하지 않던 사샤가 먼저 고민을 털어놓는 것이 신기해서 레빈과 율리안은 꽤 성실하게 사샤의 푸념을 들었다.
“한 번에 여러 명이 점프를 하면 거리 조절이 힘들어. 근데 대형을 유지하는 것도 중요하거든. 거리 조절을 못 하면 서로 부딪히니까……. 그리고 센터 앙쉔느망도 걱정돼. 첫 번째로 나오면 순서 암기가 빠르다는 거니까 나를 어필할 수가 있대. 근데 나는 조금씩 내 마음대로 포르 드 브라를 바꾸는 버릇이 있어서…… 제대로 못 하면 의욕만 앞서는 애로 생각할 거야.”
클래스에 참여하는 모든 과정을 심사위원은 물론 세계 각지의 발레단에게 보여주게 되니 한순간도 소홀히 할 수가 없었다. 물론 수상을 하지 못하더라도 학생의 강점을 알아본 발레단은 스타일이 맞는 학생에게 입단을 권하기도 한다.
“그럼 콩쿠르에서 수상을 하면 장학생이 되는 거야?”
“주니어는 발레 스쿨에 유학을 갈 수 있는데, 난 시니어 그룹이니까 발레단 입단 제의를 받게 돼.”
“와……. 그거 좋다. 사샤, 너 발레단에 입단하는 게 꿈이었잖아.”
“응…….”
사샤는 조금 작은 목소리로 답했다.
아직 수상 가능성도 불투명하지만, 만약 정말 수상을 하게 된다면 어느 발레단에서 제안이 올지는 모르는 일이다. 그리고 그게 만약 유럽권이 되면 계획과는 크게 달라진다. 왜냐하면 지금의 사샤에게는 카렐이 있는 뉴욕을 벗어날 생각이 전혀 없었기 때문에.
사샤는 앞으로 흘러내린 머리카락을 여러 번 손가락으로 쓸어 넘기며 말했다. 조금 답답함을 느낄 때의 버릇이었다. 희고 가는 손가락들이 윤기 나는 까만 머리카락 사이에 파고들 때마다 이마가 드러났다가 머리카락이 사르르 앉았다.
“하지만 지금 카…… 아니, 후원자님께 장학금을 받는데 다른 나라로 가 버리면 섭섭해하실 거야.”
그리고 그 말을 듣는 순간, 율리안의 표정이 미심쩍게 변했다.
“후원자가 섭섭해한다고……?”
“응?”
“그럴 일은 없지. 네 성장을 바라는 사람이라면.”
“아…….”
“그나저나 그 사람의 사적인 감정을 네가 왜 걱정해?”
갑작스럽게 찔러 들어오는 질문의 의도를 완전히 이해하지 못한 사샤는 눈을 동그랗게 떴다. 머리를 쓸어 넘기던 손은 그대로 멈추어 버렸다.
제가 무슨 말실수를 한 건 아닌지 걱정스러워하는 사샤의 심장이 쿵쿵 뛰는 채로, 잠시 정적이 이어졌다.
그리고 그 순간, 눈치채지 못할 정도로 미묘하게 레빈의 표정이 어두워졌다.
레빈은 약 반년 전, 사샤의 초대를 받아 놀러 갔다가 우연히 사샤의 후원자로 추정되는 남자를 만난 적이 있었다.
평범한 이들과는 격이 맞지 않는 생활 방식을 가진 게 분명한 상류층의 남자. 언어를 구사하는 방식과 매너, 그리고 위압감이 느껴지는 체구까지……. 그를 앞에 둔 레빈은 자연스레 위축되고 말았다.
레빈 역시 한때는 백마 탄 왕자와의 로맨스를 그리는 할리퀸 소설을 종종 보곤 했었다. 그러나 실제로 그런 소설의 남자주인공 역으로 등장할 법한 남자를 대면해 보니, 그런 유의 사람은 마주 보는 것조차 부담스럽다는 걸 알게 됐다. 남자의 눈이 스치듯 닿는 제 머리카락은 윤기 없이 푸석푸석한 채로 아무렇게나 질끈 묶여 있었고, 옷차림은 평범하다 못해 조금 후줄근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그는 일견 친절했지만 ‘다시 만날 일 없는 사람’을 대하는 게 분명한 태도를 취하고 있었다.
어차피 인연도 없는 사람이니 평소라면 그러거나 말거나 넘겼을 테지만, 이상하게도 주눅이 들었다. 아마도 완벽한 신분의 격차가 자격지심을 불러일으켰던 것 같다.
레빈은 그때의 심정을 떠올리며 사샤를 바라보았다. 사샤가 머무는 초호화 펜트하우스는 지구상에서 일박 숙박비가 가장 비싼 곳으로 손꼽히는 곳이었다. 사샤가 한 번도 겪어 보지 못한 그런 드문 환경에 자연스럽게 적응하고 있다는 것이 믿기지 않았다.
어리고 순진해서 그럴지도 모른다.
당시 목이 늘어난 티셔츠를 걸치고 있던 것은 사샤 역시 마찬가지였지만, 사샤는 그런 면에서는 전혀 부끄러움을 느끼지 않는 듯했다. 후원자의 관대함을 믿기 때문일까……. 레빈은 저를 훑던 남자의 차갑고 짙은 녹색 눈을 떠올렸다. 빈말로도 무른 사람이라고는 할 수 없었다.
그리고 얼마 후 남자의 비서라는 이가 레빈을 찾아왔다. 그는 당시 상황에 대해 양해를 구하며, 후원자가 학생을 가까이 두고 보살피게 된 과정을 간략히 설명했다. 레빈 역시 잘 알고 있는 바였다. 사샤의 양친은 평범한 부모의 범주에 드는 이들이 아니며, 때문에 사샤는 아이들이 으레 누리게 되는 평범한 정도의 애정도 받지 못하고 자랐다는 것을.
그걸 누군가가 대신해 준다면 사샤에게는 좋은 일일 것이다. 레빈은 그렇게 결론을 내렸다.
‘……사샤는 편안하게 잘 지내고 있는 거죠?’
‘아이들에게는 꽤나 관대한 분이어서요. 학생이 원치 않는 일이라면 절대 하지 않으셨을 겁니다.’
그 후에 게오르크는 그동안 사샤를 잘 보살펴 주어서 고맙다는 명목의 사례금을 레빈에게 내밀었다. 그러나 그건 정말로 명목상일 뿐, 레빈은 이후의 대화로 그것이 입막음조의 돈이라는 것을 알아챘다.
‘만약 사샤가 훌륭히 성장해 스스로의 힘으로 자립할 때까지 지난 사적인 부분들에 대해 뜬소문이 나지 않게 지켜 주신다면…… 앞으로 졸업할 때까지 대학 등록금을 후원해 주실 겁니다. 보상에 후한 분이어서요.’
그리고 헤어지기 직전, 비서가 한 가지를 물어 왔다.
‘혹시 제 상관의 이름을 아십니까?’
‘모르겠어요. 통성명을 못 해서요.’
‘……가십에 관심이 없는 분이라 다행이네요. 앞으로도 찾아보지는 마십시오.’
그 말의 함의는 분명했다. 이름 모를 상류층 남자와 사샤의 동거를 이유불문 비밀에 부치라는 강권.
아무튼 그때 레빈은 무언가에 홀린 듯이 그 돈을 받았다. 거절하기에는 너무나도 아까운 금액이었기에.
후에 그렇게 큰 사례금을 지급하는 이의 정체가 궁금해 맨해튼을 본거지로 삼는 정재계 인사나 유명한 사업가, 언론인들을 조금 찾아보기는 했지만 받은 돈이 발목을 붙잡았다.
잠시 과거를 떠올린 레빈은 심란한 마음을 숨기기 위해 얼굴만큼 커다란 맥주잔에 손을 뻗어 목을 축였다. 율리안은 여전히 사샤의 빈틈을 파고들며 질문 공세를 해대고 있었고 사샤는 어리숙한 얼굴로 잔뜩 난감해하고 있었다. 영리한 율리안이 사샤와 후원자의 ‘특별한 관계’를 짐작해 내는 것은 시간문제 같아 보였다.
겨우 표정 관리를 하고 난 레빈은 화제를 싹둑 끊어 버리며 물었다.
“율리안……. 왜 사샤에게 또 그렇게 엄격하게 얘기하는 거야?”
그러자 율리안은 기가 막힌 듯 혀를 내둘렀다.
“내 말투가 엄격하다고? 네가 사샤에게 너무 무르다곤 생각 안 해? 얘 키 큰 것 좀 봐! 이제는 열다섯 살 어린애가 아니라고.”
“그렇긴 하지만 사샤는 어른도 아닌걸. 그렇지?”
레빈은 사샤에게 고개를 돌리며 물었다.
“그리고 사샤는…… 좀 독특하니까.”
레빈은 환청을 듣거나 자주 망상에 빠지며, 머릿속에 ‘작은 사샤’를 키우고 있는 사샤를 그렇게 표현했다. 부모에게 어리광을 마음껏 부려 본 적 없는 사샤의 마음속에는 정상적인 속도로 성숙해지지 못한 어린아이가 아직도 살고 있는지도 모른다.
사샤는 ‘독특하다’는 말이 좋았는지 부정하지 않으며 눈을 조심스레 내리깔았다.
“아무튼 그쯤 해 둬. 그만 혼란스럽게 하라구. 사샤는 지금 연말 공연하고 콩쿠르로 머리가 꽉 차서 정신이 없을 거야. 내 말이 맞지?”
“응…….”
사샤가 작게 고개를 끄덕였다. 레빈은 몇 마디를 더 덧붙였다.
“그래. 그리고 내 생각에는 뉴욕을 떠날 걱정은 좀 나중에 해도 될 것 같아. 콩쿠르는 아직 네 달이나 남았고, 파이널에 든 것도 아니니까. 오디션 콜이 정말 올지, 오지 않을지는 모르지만 모든 건 그때 가서 고민해도 늦지 않아.”
집에 가기 전, 율리안은 미리 준비해 온 작은 종이봉투를 사샤에게 내밀었다. 안에 담긴 레트로한 장식의 틴케이스 안에서는 쿠키가, 그리고 오팔색으로 빛나는 고급스러운 비닐포장지 안에서는 마시멜로가 나왔다. 사샤는 이제 자기는 수십 종류의 케이크 맛을 알기 때문에 마시멜로는 졸업한 지 오래라고 말하면서도, 율리안이 준 과자 선물을 꼼꼼히 뜯어보았다. 들뜬 티가 났다. 키는 훌쩍 컸지만 여전히 아이다운 반응에 율리안은 꽤나 흡족해했다.
“레빈, 안녕. 유튜브 댓글 다는 거 알려줘서 고마워. 오늘 밤에 자기 전에 다 달고 잘 거야. 그리고 율리안, 과자 고마워. 맛있는지 먹어 보고 알려줄게.”
가볍게 손을 흔든 사샤는 늦었다면서 길거리를 달려갔다. 검은 머리가 빌딩숲 불빛 아래서 찰랑이며 멀어지는 것을 바라보던 율리안이 입을 열었다.
“사샤가 맨해튼 안에 살아?”
“응?”
“지하철을 안 타잖아. 걸어갈 거린가? 센트럴 파크 방향이잖아.”
“…….”
사샤가 어디에 사는지 홀로 알고 있는 레빈은 대꾸하지 못하고 입을 다물었다.
“그나저나 좀 이상해. 들은 얘기 없어?”
“……어떤?”
“사샤가 후원자랑 계속 사적으로 접촉하고 있는 것 같지 않아? 그런 눈치야.”
“…….”
“보통 후원자와 피후원자는 적당히 거리를 두지 않나……. 어떻게 된 일이지.”
그에 대해서는 레빈 역시 같은 의문을 가졌었다.
그러나 의문을 더 진행시키지 않은 것은 거기에 파고들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사샤가 어려움에 처해 있더라도 자신에게는 사샤를 빼내서 구제할 만한 금전적 여유가 없었다. 심지어 사샤가 후원자와의 생활에 만족한다면 자신은 무례한 오지랖을 부리는 것일지도 모른다. 사샤는 현재 생활에 만족하고 있는 것처럼 보였으니까.
하지만 자기 판단이 미숙한 미성년자를 저대로 두어도 괜찮을까?
그렇다고 사샤의 부모님조차 참견하지 않는 문제에 자신이 끼어들 자격은?
생각할수록 마음만 복잡해지는 데다가 답도 나오지 않는 문제였기 때문에 레빈은 씁쓸히 미소 지었다. 게다가 그의 비서에게서 등록금을 받은 순간, 자신은 어쩔 수 없이 방관자이자 공범자가 되어 버린 거나 다름없었다. 또한 레빈은 생각했다. 율리안도 돈에 신념을 파는 것만 같은 죄책감을 느껴 본 적 있을까 하고.
레빈이 그렇게 저만의 비밀을 곱씹을 때였다. 율리안이 중얼거렸다.
“『키다리 아저씨』를 사 준 게 잘못이었나.”
“…….”
“사샤가 그 책을 보고 환상을 키웠다면 내 탓인데 말이야.”
율리안이 진지하게 자신을 책망하고 있었다. 그 모습을 본 레빈은 소리 없이 웃었다.
“그래도 지금 사샤는 꽤…… 좋아 보여.”
“동의해.”
문득 레빈은 사샤와의 첫 만남을 떠올렸다. 자신이 들고 있던 전공 책에 형의 이름이 쓰여 있다며 충혈된 눈으로 무작정 시비를 걸어오던 앙상하게 마른 소년. 위태롭고 불안정해 보이던 아이는 레빈이 이끄는 곳에 순순히 따라왔다. 누구라도 저를 데려가 주기를 바랐다는 듯이. 그리고 말을 시킬 때마다 정제되지 않은 언어로 외로움을 드러냈다.
후에 레빈은 저와 이름이 같은 사샤의 형은 정작 사샤가 열 살 때 집을 나가 생사도 알지 못한다는 것을 알았다. 또 저와 있을 때는 악센트가 심한 영어로 하고 싶은 말을 아무렇게나 쏟아내던 사샤가 정작 학교에서는 말수가 워낙 없어 친구도 몇 만들지 못했다는 사실도……. 그런 것들을 떠올릴 때마다 마음 한쪽이 애틋하게 쓰렸다.
사샤는 나아지고 있었다. 육체적 성장뿐만 아니라 정서적인 성장 또한 거치고 있는 게 분명했다. 그러니 이대로라면 모든 게 나아질 것이다. 레빈은 그렇게 생각하며 조용히 피어나는 불안감을 잠재웠다.
* * *
율리안의 걱정과 다르게 사샤는 『키다리 아저씨』를 통해 환상을 본 적이 없었다. 제 현실이 소설과 다른 것은 아주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사샤의 머릿속은 보통 아름다운 망상보다는 아플 정도로 가혹한 현실로 가득 차 있었다. 특히 제 실수로 인해 일어나는 최악의 시나리오들을 상상해 보는 게 그의 특기였다.
‘내가 혹시 파이널리스트에 들게 된다면…… 발레단의 오디션 콜을 받고, 그리고 정단원으로 받아 주겠다는 약속을 받게 된다면…….’
레빈이 그런 것은 나중에 생각해도 좋다고 했지만, 만약 그걸 마음먹은 대로 조절할 수 있었다면 뇌에 곰팡이가 피는 일도 없었을 것이다. 사샤는 지금 해 봤자 쓸데없는 고민으로 잠을 축내는 스스로가 싫어 죽을 지경이면서도 며칠 밤 내내 그 생각을 떨치지 못했다.
‘콩쿠르에 나가서 일등상을 받지 못할 거면 힘 빼지 말고 적당히 하는 게 나아. 귀찮게 발레단 눈에 띄지 말고 딱 평균만 하라고. 그리고 돌아와서 카렐의 곁에서 기대에 못 미쳐서 죄송하다고 울어. 그럼 카렐이 그다음 로잔도 지원해 줄지 모르잖아. 그럼 그때까지 1년을 더 카렐의 곁에서 살 수 있어.’
발레는 사샤의 자존심이자, 언제나 가장 잘하고 싶은 것이었다. 그걸 무언가 다른 목적을 위해 이용한다는 것 자체가 용납되지 않았다. 사샤는 도무지 제가 생각해 낸 것 같지 않은 나태하고 교활한 마음이 어디에서 나오는지 금세 알아챘다.
이건 작은 사샤의 생각이었다. 그 애가 원망스러웠다.
작은 사샤는 이어서 율리안의 물음을 덥석 물고 사샤를 괴롭혀댔다.
‘네가 일등상을 받고 진짜로 덜컥 영국이나 파리 발레단의 오디션 콜을 받게 되면 어떡할래? 그럼 카렐은 잘됐다면서 네 어깨를 한 번 두드려 주고 짐이나 싸 줄걸? 이민 가방을 아주 꼼꼼히 싸 줄 거야. 매일 아침 등교 가방을 챙겨 주던 것처럼 말이지. 그럼 넌 러시아에서 혼자 왔던 것처럼 다시 혼자 유럽에 가는 거야.’
사샤는 입술을 아프게 깨물었다.
작은 사샤의 말에 휘둘리고 싶지 않았지만, 카렐은 정말로 그럴 것 같았다. 아쉬워하는 그의 표정이 눈에 선하게 그려졌다. 다정함과 약간의 유머감각이 느껴지는 말투까지도.
‘내 돈을 투자해 다른 발레단에 기여하는 것 같아 약간은 속이 쓰립니다. 하지만 사샤 세드린이라는, 이제 막 시작하는 무용수에게는 정말 잘된 일이죠. 당신의 친구로서 흔쾌히 보내줄게요.’
“싫어…….”
사샤는 작게 신음했다. 상상하는 것만으로 몸이 부들부들 떨렸다. 다시는 카렐의 목소리를 들으며 깨어나지 못하고, 그의 휘어지는 눈웃음도 가까이서 보지 못하고, 가끔 핑계를 대고 그의 팔베개를 빌리는 밤도 없이 혼자 잠들어야 한다면…….
사샤는 지금 당장 카렐의 곁에서 보내는 하루하루가 그 무엇보다도 소중한 자신과 달리, 오늘의 자신이 어제로 떠나가는 것을 카렐이 조금이라도 아쉽게 느낄지 의심했다. ‘오늘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부탁했지만, 카렐이 과연 그리워할까?
그는 열일곱 사샤 세드린에게는 관심이 없다. 그가 기다리고 있는 것은 미래의 자신이니까.
그때가 올 때까지 자신은 또 외롭게 혼자서 ‘무용수 사샤 세드린’의 가치를 증명하려고 애써야 할지도 모른다.
카렐이 돌아왔을 때 호텔 방 안은 깊은 어둠에 잠겨 있었다.
“사샤?”
대답 없는 방 안을 향해 카렐은 다시 말했다.
“사샤…… 아.”
침대 곁으로 걸어가던 카렐은 소파 근처에서 발을 멈추었다. 작게 뭉친 덩어리 같은 것이 소파 뒷면에 기대어 있었다. 한때 사샤가 웅크려 앉아 어머니와 전화통화를 하던 자리였다.
카렐은 가볍게 무릎을 굽혀 사샤의 앞에 앉았다. 얇은 이불을 둘둘 감싼 채 주저앉아 있는 것은 사샤가 맞았다.
눈이 마주치도록 시선을 정면으로 둔 채 바라보자 공허한 눈이 보였다.
“기분이 안 좋아 보이네요.”
“…….”
“……어머니와 통화를 했나요?”
“…….”
“아니면 친구와 말다툼이라도 했어요?”
“…….”
카렐은 언젠가 했던 것처럼 라이터를 찾아 사샤의 앞에서 가볍게 불을 보여주었다. 어두운 거실을 밝혔다 사라지는 짧은 불빛.
그리고 카렐은 그 짧은 사이에 보였던 사샤의 눈이 초점 없이 멍한 것에 조금 놀랐다.
“사샤.”
카렐이 다시 불빛을 보여주었을 때에, 어둠 때문에 눈동자를 먹을 정도로 커져 있던 사샤의 동공이 갑작스러운 빛으로 확 조여들었다. 겨우 사샤가 보여준 정상적인 반응에 카렐은 마른침을 삼켰다.
“……카렐?”
사샤의 입에서 제 이름이 흘러나왔을 때에야 카렐은 안도했다. 언제나 그렇듯이 ‘작은 사샤’가 머릿속에 망치질을 해대서 잠시 정신이 팔린 모양이었다. 카렐은 사샤에게 조금 더 가까이 다가갔다.
그 순간 사샤는 왜 카렐이 제 눈앞에 있는지 어리둥절해하고 있었다.
분명 조금 전만 해도 해가 지기 한참 전이었는데 어느새 주변이 깜깜했다. 마치 깊은 밤이 된 것처럼……. 사샤는 어리둥절한 마음에 저도 모르게 주변을 둘러보았다.
“11시가 다 됐습니다. 내가 너무 늦었죠.”
“11시…….”
사샤는 목이 잠겨 허스키한 목소리로 말했다. 믿기지가 않았다. 그럼 자신은 여섯 시간 동안 생각에 잠겨 있었다는 소리다.
“무슨 생각 하고 있었죠?”
“저는…….”
“일단 일어나요. 편한 곳에 누웁시다.”
읏차, 하고 가벼운 소리를 내면서 카렐이 사샤의 양쪽 겨드랑이 사이에 손을 끼워 달랑 들어 올렸다. 발이 공중에 뜨는 기분이 들자마자 사샤는 무의식적으로 카렐의 커다란 몸에 안겼다.
그러고는 그의 몸을 단단히 팔로 감아서…….
“떨어지기 싫어요.”
카렐이 저를 침대에 내려놓으려 할 때까지 고집스럽게 달라붙어 있었다. 지금은 떨어지기 싫었다. 그의 몸에 닿은 채로 체온을 느끼면서 이렇게 있고 싶었다.
평소에는 잘 하지 않던 대담한 행동에 카렐은 퍽 난감한 얼굴을 했다.
“어디 안 갑니다. 잠시…….”
“싫어요. 가지 마세요.”
사샤의 목소리는 무뚝뚝했고 아주 작았다. 칭얼거리거나 징징대는 느낌이라고는 조금도 없었다. 그게 어리광에 익숙하지 않은 소년이 부탁하는 방식이라는 걸 알아챈 카렐은 어쩔 수 없이 사샤를 품에 안은 채로 천천히 침대 헤드에 등을 기대며 자리를 잡았다.
“카렐?”
“네, 사샤.”
언제나 변함없는 카렐의 정중한 대답을 들으면서 사샤는 길게 한숨을 쉬었다.
“오늘 별로 기분이 안 좋았어요.”
“그래요? 왜죠.”
카렐은 꿈지럭거리며 제게 더 파고들기 위해 노력하는 사샤를 어르며 그 부드러운 귓바퀴를 매만졌다. 그 스킨십이 좋았던 모양인지 사샤는 카렐의 품 안에서 눈을 끔뻑거렸다.
“카렐, 만약에…… 아주 만약에.”
“네.”
“제가 콩쿠르에 나가고, 파이널에 뽑혀서…… 위너가 되면요.”
“네.”
“그렇게 해서 파리나 독일이나 영국에, 유명하고 좋은 발레단에서 오디션 콜이 오면 어떻게 할까요?”
카렐은 자신에게 푹 기댄 사샤의 작은 귀를 만지작대면서 생각해 보았다.
구체적인 상상을 떠올리기 전부터 한숨부터 나왔다. 그건 품 안의 작은 아이를 떠나보내는 안타까움에서 발로한 것이었지만…….
“하아…… 글쎄요.”
카렐의 한숨을 들은 사샤의 어깨는 굳어 버렸다.
그러나 카렐은 인지하지 못한 채로 생각을 정리했다. 최근 작은 소년의 예측 불가능한 사랑스러움에 마구 휘둘리고 있던 그는 나름 고심하면서 제법 이성적인 대답을 찾아냈다.
“유럽에도 수준 높은 발레단이 많아요. 특히 파리오페라 같은 곳은 들어가는 문이 아주 좁기도 하고…… 그런 곳에서 커리어를 시작할 기회가 오면 당신에게도 좋겠죠.”
“…….”
“사샤 세드린, 아, 당신이 아닌 레전드 이야기입니다. 그 사람도 러시아, 파리, 미국 많은 곳에서 활동했어요. 유럽에는 발레뤼스의 맥을 이은 발레단도 있으니 그런 곳에 ‘사샤 세드린’이 입단하면 큰 뉴스가 되겠군요.”
“…….”
“물론 뉴욕 발레단도 발레뤼스의 명맥을 잇는 발란신의 존재가 있지만…… 사샤?”
카렐은 대답 없는 사샤의 어깨가 살짝 떨려오는 것을 보고 그제야 놀라며 조금 고개를 기울였다. 그러나 그 얼굴을 보려고 하자 사샤는 반대로 얼굴을 돌려 버렸다.
“사샤. 왜 그러죠?”
“그럼 제가 가버려도 좋다는 거예요?”
“사샤?”
“보지 마세요.”
사샤는 상심한 얼굴과 빨간 코를 보여주기 싫다는 듯이 고개를 돌렸다. 카렐은 말없이 어깨를 떠는 사샤를 도닥여 주었다. 가끔 살짝 땀이 배어난 관자놀이에 달래듯 키스를 해 주기도 했다.
소년은 섬세하고, 자기만의 세계가 강하고, 종종 변덕스럽다. 어리숙하다가도 불시에 예민해지고, 신경질적으로 굴다가 잘못했다고 간청하기도 했다. 이번에는 그 속마음을 휘저어대는 대신 그냥 침묵하는 것이 나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카렐은 그저 사샤가 상심하지 않기를 바라면서 그의 등을 쓰다듬어 주었다.
“당신이 원한 대답이 무엇인지는 모르겠지만…….”
“…….”
“나는 정말로 당신이 성공하기를 바랍니다. 그리고 또 행복해지기를.”
「그건 미래의 저잖아요.」
갑작스러운 러시아어의 어조가 조금 날카로웠다.
카렐은 무슨 말이냐는 듯이 설명을 요구하는 얼굴로 사샤를 바라보았다. 거기에는 나약한 얼굴의 사샤가 카렐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었다.
「됐어요. 제가 이상한 말을 했어요. 카렐…… 죄송해요. 저는 이제 잘게요.」
사샤는 잠시 후 스스로 카렐의 품에서 떨어져 나왔다.
자신이 사샤가 상상하던 가장 최악의 대답을 했다는 것을 알지 못한 카렐은 제게서 등을 돌려 눕는 소년의 뒷모습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 * *
‘바보 같은 사샤 세드린. 그렇게 버릇없이 말하다니. 가지 말라고 말해 달라는 용기도 없으면서.’
‘네가 다 망쳤어.’
‘카렐은 변덕스러운 너한테 질렸을 거야.’
사샤는 훌쩍이면서도 작은 사샤의 목소리를 애써 무시했다. 억지로 열중한 핸드폰 게임 화면 안에서 번쩍이는 불빛이 쏟아졌다. 깊은 밤까지 뿅뿅거리는 소음이 들릴 텐데도 카렐은 저에게 꾸지람 한번 하지 않았다.
‘하지만 가지 않겠다고, 카렐 옆에 있겠다고 말할 순 없었어.’
‘그럼 한심하게 생각하실 거야.’
‘그분하고 약속했잖아. 훌륭한 무용수가 되기로…….’
‘사람들을 깜짝 놀래 주기로.’
‘그래도 옆에 있고 싶어.’
‘카렐하고 떨어지면서까지 크게 성공하고 싶지 않아. 적당히 카렐의 옆에서 머무를래.’
‘그러니까 콩쿠르에서는 적당히 할 거야…….’
‘아냐, 그럼 카렐이 실망할 거야.’
‘그래도 떨어지고 싶지 않은데…….’
‘그럼 언젠가 너보다 더 재능 있고 후원할 가치가 있는 다른 애를 찾으면?’
‘게으르게 굴다가는 버림받을걸.’
어느새 게임 플레이 화면은 게임 오버의 상태에서 멈춰 있었다. 사샤의 손가락은 아까부터 움직이지 않았다. 화면을 응시하고 있으나 정작 초점은 먼 곳을 보는 눈이었다.
사샤는 어떤 것이 진짜 자기 생각인지 어느 순간부터 구분할 수 없었다. 항상 머릿속에서 맴돌던 작은 사샤의 목소리가 점차 선명해졌다. 질감 있는 목소리가 분명하게 고막을 파고들었다. 그 순간 움직이고 있던 건 사샤 본인의 입술이었다.
깊은 고민에 발이 묶인 채로 사샤는 다시금 긴 침묵에 빠져들었다.
* * *
사샤는 하루에 열 개에서 열다섯 개씩 자신의 유튜브 영상을 보며 댓글을 달았다. 분명 처음 봤을 때는 하루 이틀 안에 모두 다 달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는데, 스크롤을 내리면 댓글이 끝도 없이 쏟아져 나왔다. 사샤는 얼마 후에야 페이지 안의 3,150이라는 숫자가 총 댓글수라는 것을 알았다. 심지어 시간이 지날수록 댓글은 점점 늘어났다.
[Tina spence * 3시간 전
지금 최신 댓글부터 답글 달면서 내려오는 Sasya가 혹시 본인이야? 맞으면 미친 것 같아. 너무 꼼꼼하고 귀엽잖아.]
[Sasya.C 네. 저 맞아요,, 댓글이 게속 생거서 어떡개 해요?]
[Danny Souza * 5시간 전
또 보러 왔어요:) 왜 모델이나 배우가 아니라 발레를 시작했는지 물어봐도 돼요?]
[Sasya.C 애기였을떼부터 해서 선새님이 잘한다고 했어요..]
[Marisa Flores *1일 전
이 얼굴은 혁명이다.]
[Sasya.C 미안한데 혁명 뜻이 몰라서,,.미안해요.]
[OreadNYC * 1일 전
나도 맨해튼에 살아! 뉴욕에 살고 있다니까 괜히 친근감ㅋㅋ 소호에 있는 베이커리 추천해 줄게. 늦게 가면 품절이니까 열두시 전에 가는 걸 추천.]
[Sasya.C 소호에 한번도 못가밧는대 감사합니다. 빵 좋핳애요.]
사샤는 침대 위에서 이불을 몸에 말고 옆으로 누운 채로 졸린 눈을 깜빡거리며 댓글을 달았다. 일단 한 번 댓글을 달기 시작하니 피곤해도 멈출 수가 없었다. 누군가는 달아 주고 누군가는 달아 주지 않으면 댓글을 받지 못한 사람들이 실망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그렇게 한창 댓글을 달던 중에 알 수 없는 문법의 알파벳 조합을 만난 사샤는 조금 지쳐서 그쯤에서 댓글 쓰기를 멈추었다. 아마도 프랑스어나 독일어 같은데, 정확하지는 않았다.
읽을 수 있는 글자만 보면서 댓글을 천천히 밑으로 내리던 사샤의 시선은 정확한 글씨로 눈에 들어오는 러시아어를 만날 때마다 잠깐씩 거기에 멈추었다. 러시아어를 하는 것도 들어보고 싶다든가, 자신도 러시아에서 발레를 배우고 있는 학생이라고 밝히는 댓글을 볼 때마다 그의 얼굴에 희미한 미소가 피어났다. 얼굴도 보지 못한 사람인데도 친밀감이 생겨났다.
그렇게 댓글을 내리던 사샤의 시선이 어느 순간 한곳에 못 박힌 듯 멈추었다.
[Levin * 5일 전
너무 커서 못 알아봤어.
사샤구나. 내 동생.
네가 자랑스러워.]
호흡도 멈추고 그 자리에서 얼어붙어 있던 사샤는 한참 후 몸을 벌떡 일으켰다.
핸드폰을 쥐고 있는 사샤의 두 손이 가늘게 떨렸다. 사샤는 화면에 빨려 들어갈 듯 고개를 푹 숙이고 그 구절을 수없이 반복해 읽었다. 그것을 쓴 사람의 이름도.
레빈, 레빈, 레빈……. 사샤구나, 내 동생.
네가 자랑스러워.
네가 자랑스러워…….
레빈이라는 글자를 하염없이 엄지로 문질러 보는 사샤의 눈가에 물기가 고였다. 사샤는 그 댓글에 당장 답을 하기 위해 키보드를 더듬거리며 눌렀다. 모래색의 금발을 가진, 프랑스에서 온 또 다른 레빈이 말하길, 댓글을 써도 상대방이 확인하지 않으면 댓글이 달린 것도 모를 수가 있다고 했다. 형이 댓글을 달아 준 시간은 5일 전이었다. 5일 동안 형은 자신이 이것을 봐 주기만을 기다렸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니 애가 타고 눈물이 났다.
사샤는 얼른 빠른 러시아어 자판으로 형에게 답글을 달았다.
[형, 나 사샤야.
사샤가 여기 있어.
형이 만나고 싶어. 우리 못 본 지 너무 오래됐잖아.
형, 어디 사는데? 전화번호 알려줘. 내가 전화할게.
형, 혹시 뉴욕에 살아?
아니면 멀리 살아?
혹시 올 수 있으면 오후 7시에 5번가 분수대 앞으로 와 줄래?
센트럴 파크랑 플라자 호텔 바로 근처야.
만약에 비행기를 타야 한다면 천천히 와도 돼.
나는 형이 올 때까지 매일 기다릴 거야.
그러니까 언제든 와 줘. 아무 때나.
오후 7시야.]
메시지를 남기는 사이 굵은 눈물방울이 화면 위에 뚝, 뚝, 떨어졌다. 사샤는 이불을 끌어당겨 핸드폰 화면을 닦아내면서 떨리는 손으로 지금까지 쓴 것 중에 가장 긴 댓글을 입력했다. 쓰고 나서도 내용을 살피며 몇 번이나 수정했다. 그리고 언제 형이 이 댓글을 봐 줄까 노심초사하며 반응이 오기만을 기다렸다.
그리고 며칠 후, 사샤의 댓글 아래 짧은 레빈의 댓글이 달렸다.
조만간 만나자는 내용이었다.
* * *
오후 6시 50분경.
5번가의 퓰리처 분수대 앞.
사샤는 한껏 초조한 마음으로 분수대가 잘 보이는 플라자 호텔 앞에 서 있었다.
오늘은 학교도 가지 않았다. 지나치게 긴장이 되고 형 생각만 나서 아무것도 할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배앓이를 핑계로 일어나지 않는 사샤를 본 게오르크가 대신 학교에 병결을 전해 준 덕분에 하루 종일 이불 안에 처박혀 있다가 나왔는데도, 어젯밤부터 한순간도 잠을 이루지 못한 사샤의 몰골은 수척했다.
사샤는 충혈된 눈으로 지나치는 인파를 훑었다. 지난 몇 분간 이 앞을 지나친 사람만 해도 수백 명이 넘을 것 같았다. 사샤는 약속 장소를 이곳으로 잡은 자신을 책망했다. 혹시라도 레빈을 놓치게 된다면 스스로를 용서할 수 없을 것이다.
하지만 자신이 과연 완전한 성인이 된 형의 얼굴을 잘 알아볼 수 있을까? 사샤는 두려운 마음으로 그렇게 생각했다. 시간이 많이 흘렀다. 레빈과 헤어질 때 형 레빈은 고작 열다섯 살이었다. 지금 사샤는 그때의 레빈보다도 두 살이 더 많았다. 사샤는 비로소 가출을 결심한 형이 얼마나 어렸는지, 또 얼마나 무거운 마음으로 고향을 떠났는지 알 것만 같았다.
모든 게 다 싫지 않았을까? 폭력을 행하던 아버지도, 노동에 지쳐 아이들의 고통에 무심하던 어머니도, 그리고 매일 놀아 달라고 울며 조르던 자신도……. 그러니 뒤도 돌아보지 않고 고향을 떠난 것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레빈은 한 번도 사샤에게 정색하거나 귀찮다고 화를 낸 적이 없었다. 사샤는 항상 외로웠기 때문에 레빈이 한 번 놀아 주기 시작하면 거머리처럼 떨어지지 않았는데, 레빈은 나이 차가 있어서 수준이 맞지 않는 어린 사샤의 한심한 놀이에 싫은 표정 한 번 지은 적 없이 어울려 주었었다.
그리고 이번에는 직접 맨해튼에 와 주겠다고 말했다…….
사샤는 어깨를 들어 옷자락으로 다시 더워지는 눈가를 닦았다. 레빈을 보면 하고 싶은 말이 너무 많았다. 그러나 만나지 못한 세월, 조금씩 마음에 쌓아 두던 그 수많은 말 중 무엇부터 꺼내야 좋을지 알 수가 없었다. 그래서 사샤는 둘에게 주어진 시간이 짧지 않기만을 바랐다. 머리가 나쁜 자신이 하나하나 그 말들을 묵힌 마음에서 건져 올리려면 시간이 필요할 테니까.
만약 레빈이 자신은 바쁘기 때문에 오늘 안에 다시 돌아가야 한다고 말하면 눈앞이 깜깜해져서 우느라고 아무것도 하지 못할 것 같았다.
오후 7시.
사샤는 인파를 다시 한 번 살폈다. 횡단보도를 건너 주변을 한 바퀴 돌기도 했다.
오후 7시 5분.
시간을 확인하려 핸드폰을 보았을 때 마침 전화가 걸려왔다. 미리 연락처를 주고받은 상대였다. 사샤는 허겁지겁 핸드폰을 들고 말했다. ‘여보세요?’
“여기 있었네. 와……. 생각보다 훨씬 인물이 좋잖아.”
사샤는 낯선 목소리가 들린 뒤로 천천히 돌았다.
거기에 레빈이 서 있었다.
금발, 훌쩍 높은 시야. 황혼이 막 지나간 도심 위로 빌딩숲에서 쏟아져 나온 환한 밝은 빛이 레빈의 머리카락을 비추었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조금 입을 벌리고 레빈을 마주 보았다.
“형…….”
“응, 그래. 내가 네 형이야.”
재회의 순간, 사샤에게 먼저 찾아온 건 감격보다도 어리둥절함이었다. 무엇보다도 과거 레빈의 인상이 희미해져서인지 얼굴만을 보고는 확신하기가 조금 어려웠다. 눈앞의 남자는 사샤가 상상으로 그려 왔던 레빈보다는 다른 누군가를 닮아 있었다.
“……형?”
사샤가 조금 주저하며 얼굴만을 살피자 레빈이 성큼 다가와 사샤와 같은 방향을 바라본 후 어깨동무를 하며 팔을 단단히 감쌌다.
“잠깐 조용한 데로 갈까?”
“응, 좋아…….”
사샤는 더 가까이 다가온 레빈의 옆얼굴을 올려다보았다. 모르는 향수 냄새가 훅 끼쳤다. 금발은 기대하던 것보다 훨씬 흐리고 짙어 거의 갈색으로 보였지만, 나쁘지는 않았다. 모든 것은 ‘조용한 곳에 가서’ 이야기를 나누면 차차 분명해질 것이다.
오늘 처음 만나는 남자를 보는 사샤의 순진한 눈이 깜빡거렸다. 그때마다 촘촘한 속눈썹 아래로 물 먹은 검은 눈동자가 흐려졌다.
“사샤.”
그때였다. 누군가 제 이름을 불렀다.
조금 멀리서 저를 불러 세우는 목소리……. 그러나 환청처럼 귓가에 속삭이는 것 같기도 한.
“……네?”
“뭐라고?”
사샤는 목소리에 반응하며 옆의 상대에게 대답했다. 그러나 그 순간 사샤의 팔을 억세게 잡아당긴 남자가 도리어 걸음을 빠르게 옮겼다.
그때, 다시 한 번 익숙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사샤!’ 이번에는 확실히 방향을 알 수 있었다. 등 뒤에서였다.
사샤가 걸음을 멈추고 뒤를 돌아보려 하자 옆의 남자가 팔을 당겼다. 잡힌 팔이 갑자기 아프게 느껴져서 사샤는 작게 신음했다. 이전까지는 둔중하게 느껴지던 현실감이 점차 날카로울 정도로 명료해지기 시작했다.
“사샤!”
그 순간, 사샤는 등 뒤의 인파를 바라보았다. 군중을 헤치고 달려오는 한 남자가 있었다.
이마 앞으로 조금 흘러내린 금발, 앞이 풀려 벌어진 재킷 사이로 보이는, 허리를 꽉 조인 단추 베스트. 사샤는 스리피스를 모두 갖춰 입은 남자의 저런 모습을 무척 좋아했다. 다만 의아한 것은 한 번도 뛰는 것을 본 적 없던 남자가 이번에는 전속력으로 저를 향해 달려오고 있었다는 점이다. 그 얼굴에 서린 불길한 표정을 본 사샤의 심장이 철렁, 가슴 밑바닥까지 떨어졌다.
“사샤……. 말도 없이 나갔다고 들었어요.”
사샤의 앞에 서서 잠깐 숨을 고른 카렐은 흔들림 없이 단단한 음성으로 나직하게 읊조리며 사샤의 왼팔을 가볍게 잡아당겼다. 카렐을 따라가려던 사샤는 그제야 모르는 남자가 반대편에서 저를 당기고 있다는 것을 알았다.
사샤가 의아해하며 그를 돌아보자 탁한 금발의 남자는 뭔가 초조한 표정으로 카렐을 흘끔대더니 곧 빠른 걸음으로 저만치 멀어졌다. 마치 예상치 못한 번거로운 일로부터 도망을 치듯이.
“아……!”
“아는 사람인가요?”
카렐이 물었다.
사샤는 조금 혼란스러운 표정으로 답했다.
“아니요. 오늘 처음 보는 사람인데요…….”
사샤의 대답에 카렐이 소리 없이 긴 한숨을 쉬었다. 내리깐 카렐의 눈꺼풀이 안도로 파르르 떨렸다. 사샤는 왜인지 그가 많이 지쳐 보인다고 생각했다.
“그렇습니까.”
카렐은 아무것도 묻지 않고, 질책하지 않으며 사샤의 등을 감싸 다시 호텔로 돌아왔다. 도보로 고작 10분 거리를 되돌아가는 사이에 사샤는 자신이 호텔 슬리퍼를 신은 채로 바깥에 나왔다는 사실을 알았다.
“카렐?”
사샤는 두려운 음성을 숨기며 카렐을 올려다보았다. 카렐이 내색하지 않아 몰랐지만, 그의 목덜미와 자신의 손을 꽉 잡은 손바닥이 땀으로 축축했다. 그제야 보이는 뚜렷한 긴장과 당황의 잔해. 사샤는 자신이 카렐에게 어떤 걱정을 끼친 것인가 싶어 심장이 조마조마했다.
“카렐……. 저는 형을 만나려고 했어요.”
“그랬군요.”
엘리베이터 문이 열렸다. 붉은 카펫을 따라 안전한 보금자리로 돌아오자 카렐은 사샤를 먼저 안으로 안내하고는 닫힌 문고리에 손을 올리고 잠시 뒤돌아서 있었다. 눈을 질끈 감고 이마를 가볍게 문에 댄 채로. 나쁜 것들은 모두 바깥에 버리고 오는 의식처럼 말이다.
“그런데 만나고 보니까 그건 형이 아니었어요……. 왜 형으로 착각했는지 모르겠어요.”
사샤는 저를 크게 걱정한 것 같은 카렐을 안심시키려고 그렇게 말했다. 그리고 오늘 일을 증명하려고 유튜브 댓글 창을 열어 지난날 형과 자신이 주고받은 메시지를 보여주려 했다.
그러나 멀거니 서서 핸드폰 화면을 한참 들여다보며 스크롤을 내렸는데도 사샤는 그 흔적을 찾을 수가 없었다. 무척 당황스러운 일이었다.
“형을 만나려고 했는데…….”
사샤는 증거를 찾지 못한 것을 아쉬워하며 카렐을 올려다보았다. 땀이 식은 카렐의 목울대가 한 번 크게 움직였다. 그건 마치 요동치는 감정의 기복을 다스리려 노력하는 모습처럼 보였다.
“사샤, 당신은 어제부터 한마디도 말을 하지 않았어요.”
“……제가요?”
“이제 겨우 말을 하니…… 다행입니다. 그것만으로 전부, 전부 다 괜찮아졌어요.”
그렇게 말하고 카렐은 조심스레 팔을 뻗었다. 왜인지는 모르겠지만 카렐이 저를 무척 안아 보고 싶어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자연스레 그에게 가서 안기자 맞닿은 카렐의 심장이 마치 지진이라도 난 것처럼 쿵, 쿵, 무척 빠른 속도로 뛰고 있는 것을 알고 깜짝 놀랐다.
어제부터라니? 그럼 오늘은 하루 종일 아무 말도 하지 않은 건가? 벌써 해 질 녘인데……. 사샤는 그럴 리가 없다고 생각하면서 오늘 하루 일을 꼼꼼히 되짚어 보았다. 그러나 레빈을 만나고 싶어 했던 것 말고는 아무것도 명료한 것이 없었다. 심지어 그마저도 만나고 싶은데 만나지 못했던, 안타까운 감정만 실마리로 남아 있을 뿐 그 외의 일들은 모두 현실감이 없이 희미했다.
그 순간 사샤는 등줄기가 쭈뼛 서는 한 가지 가정에 도달했다.
작은 사샤. 작은 사샤가 제 머릿속을 마음대로 헤집고 다닌 것인지도 모른다. 저와 치열하게 싸우던 그 애가 결국 이겨서, 누가 누구인지 모르게 될 정도로 혼란스러워 정신을 잃었던 것이다.
그제야 사샤는 유튜브 댓글을 보고 나서 레빈을 만나러 가기까지의 시간 흐름이 이상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망상 속에서 자신은 레빈의 대답을 며칠 동안 기다렸다. 그러나 카렐이 말하기를 자신은 고작 하루 정신을 놓고 있었을 뿐이다.
두려워 긴장한 사샤의 작은 몸을 어떻게 해석했는지, 사샤를 안은 카렐의 팔이 애타게 흉곽을 꽉 조여 왔다.
카렐은 입술을 꽉 깨물었다.
낯선 눈빛의 사샤를 본 것이 이번이 처음은 아니었다.
워싱턴 D.C.의 병원에 갔을 때도 사샤는 종종 넋을 놓았다. 바로 어젯밤 대화하기 전 소파에 웅크려 있을 때도 그랬다. 그리고 오늘도……. 그럴 때의 사샤는 말을 하지 않았다. 단순히 말을 거부하는 것뿐만이 아니라 그 어떤 소통도 불가능했다.
갖은 방법으로 카렐을 자꾸 침대로 끌어들이려 하고, 받아 주지 않으면 말없이 구슬프게 눈물을 흘리던 사샤. 자신이 곁에 있는데도 외로워하는 사샤를 보는 사이 카렐의 마음은 무너져 갔다.
과거의 레전드 사샤 세드린 역시 평생을 우울증과 망상, 환청에 시달렸다는 기록이 도처에 남아 있었다. 자신이 찾아낸 어린 사샤도 레전드처럼 정신장애를 가지고 있다는 것은 환생을 확신하게 만드는 또 한 가지 단초일지도 모른다. 그건 카렐을 잠시나마 저열한 기쁨에 젖게 만들었으나, 그걸 감당하는 것은 또 다른 차원의 문제였다.
“사샤…… 사샤.”
금발의 남자를 따라가던 사샤의 뒷모습을 떠올리면 도무지 가슴 깊은 곳이 진정되지 않고 미친 듯이 뛰어댔다.
카렐은 품 안의 사샤를 다시 한 번 꽉 끌어안았다.
* * *
카렐은 사샤에게 따뜻한 물로 목욕을 하게 한 후 맛있는 저녁을 잔뜩 먹였다. 사샤는 그저 카렐과 함께하는 저녁 식사에 무척 행복해하며 묻지도 않은 화제들을 늘어놓았다. 대부분이 곧 시작할 연말 공연의 단체 연습과 콩쿠르에 대한 것이었다.
그제야 카렐은 사샤가 제가 아는 원래의 사샤로 돌아온 것 같아 깊이 안심했다.
그 후 카렐은 의사에게 처방받은 신경안정제와 수면제를 물에 타서 사샤에게 먹였다. 물을 받아 마시며 카렐을 올려다보는 사샤의 눈길은 온순하기만 했다.
사샤가 잠든 후, 카렐은 말없이 그 곁에 앉아 평화로운 소년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러고는 머리맡에 놓인 사샤의 핸드폰을 확인해 보았다. 핸드폰의 뒷면은 완전히 파손되어 가끔 손끝을 찔렀다.
카렐은 어제 전부터 댓글 달기를 멈춘 사샤의 유튜브 댓글창과, 사샤가 여러 번 접속한 중고거래 사이트를 확인했다.
사샤의 핸드폰에는 중고거래 게시판 크레이그리스트(craigslist)에 접속해 글을 여러 개 남긴 흔적이 남아 있었다.
[제가 우리 형 찻고잇아요. 이름은 레빈이고 머리카락색는 금발애요.]
[형 찾는대ㅐ 형은 로시야 사람밉니다. 이름은 레빈이에요]
[레빈 형 나한테ㅔ 전하좀 해조 내 번호로 XXX-XXXX-XXXX]
[레빈형ㅇ이랑 내일 만나고십은데요? 5번가에 분수대애서...]
애처로운 게시판 글들을 보면서 카렐은 욱신거리는 미간 사이를 손으로 짚었다. 믿기지 않게도 그건 오래전 잊었던 눈물의 전조인 것 같았다.
사샤의 글 아래에는 어리숙한 10대 소년을 희롱하는 남자들의 천박한 언행과 당신이 우리 형이냐고 되물어보는 사샤의 대답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었다. 그리고 사방팔방에 팔린 번호로 도착한 온갖 광고, 더러운 희롱 문자들까지…….
카렐은 그 모든 흔적에 심장을 찌르는 듯한 아픔을 느끼면서, 핸드폰이 파손되었다는 핑계로 그것을 그대로 휴지통에 버려 버렸다.
* * *
양파와 베이컨이 들어간 폭신한 오믈렛, 케일과 사과를 함께 갈아낸 짙은 초록색의 주스, 따뜻한 크루아상과 버터, 딸기잼.
여느 때와 다를 바 없는 아침, 졸린 눈을 비비며 앉은 식탁 앞에는 사샤가 좋아하는 아침 식사 메뉴들이 놓여 있었다.
“더 먹고 싶은 것 있나요.”
접혀 있던 냅킨을 무릎 위로 펼쳐 주며 묻는 카렐의 다정한 말에 사샤는 홍조로 얼굴을 붉혔다. 자연스레 귀가 더워지는 감각에 사샤는 자신이 온 얼굴로 카렐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숨기지 못하는 애정을 감추려 고개를 조금 숙여 보았지만 카렐은 따뜻한 손끝으로 사샤의 붉은 귓바퀴를 슥, 한 번 스치고는 멀어졌다.
이제는 고정되다시피 한 아침 식사의 구성 외에도 따로 추가할 만한 것이 있는지 묻는 것은 언제나와 같았지만, 그래도 매번 신경을 써 주는 그 마음이 좋았다. 그래서인지 딱히 불만 없는 메뉴에도 굳이 먹고 싶은 것을 찾아 생각해 내서 말을 하게 된다.
“파인애플……. 청포도도 먹고 싶어요.”
“오늘은 단게 먹고 싶은가 보네요.”
가볍게 미소 지은 카렐은 그대로 테이블 위의 수화기를 들어 펜트하우스 전용 라인으로 과일 디저트를 추가 주문했다.
전화를 끊고 난 카렐이 의연한 말투로 물었다.
“오늘은 기분이 어때요?”
사샤는 카렐이 왜 그런 걸 묻는지 자세히 알지 못하면서도 솔직하게 이야기했다.
“기분 좋아요……. 새 핸드폰이 생겨서요.”
“그래요.”
선물을 해 준 사람은 카렐인데도, 그는 눈을 휘면서 받은 사샤보다도 기쁘다는 얼굴을 했다.
카렐은 아침에 사샤를 깨우자마자 박스에 담긴 새 핸드폰을 내밀었다. 그러면서 어젯밤 부서진 것을 우연히 보았다고, 앞으로는 바로 새것을 준비해 줄 테니 파손된 것을 굳이 가지고 다닐 필요 없다고 말해 주었다.
그 말을 듣는 순간 사샤의 눈가에는 의식하지 못한 눈물이 고였다. 어렸을 때부터 부주의한 면이 있던 사샤는 집안의 그릇이나 컵 따위를 많이도 깨먹었다. 그리고 그때마다 부모님의 벼락같은 꾸지람을 듣곤 했다. 그러니 이렇게 실수로 무언가를 깨 버리고 나서 단 한 마디도 제 부주의함을 지적받지 않고 도리어 새 물건을 선물 받는 경험은 처음이었다.
핸드폰은 필름도 떼지 않은 완벽한 새것으로, 사샤가 원래 가지고 있던 것과는 모양이 다른 걸 보니 새로 발매된 최신형인 것 같았다. 사샤는 얼른 학교에 가서 지루한 일반 과목 시간에 그걸 만지면서 놀고 싶다고 생각했다.
잠시 후 도어벨 소리가 울리고 과일을 가져온 직원이 호텔 방 안으로 들어왔다. 카렐이 손수 접시를 받으러 간 사이 사샤는 오믈렛을 먹다 말고 얼른 핸드폰을 손에 들어 붙어 있는 비닐들을 조심스럽게 벗겼다. 다시 카렐이 돌아오기 전에 핸드폰을 내려놓고 의젓하게 앉았으나, 카렐은 ‘밥 다 먹을 때까지 잠시만 내가 가지고 있죠’ 하고는 핸드폰을 가져가 버렸다. 어쩔 수 없었다. 카렐은 원래부터 식탁 앞에서 식사 외의 다른 행동을 하는 것을 무척 싫어했다.
사샤는 아쉬움을 삼키고 빠른 속도로 접시를 비웠다. 케일사과 주스를 밑바닥이 보이도록 전부 다 마시는 것을 마지막으로 의자를 밀며 일어나자 카렐이 곧바로 준비된 가방을 내밀었다.
오늘따라 카렐이 무척 친절하다는 생각에 사샤는 또다시 얼굴을 붉혔다.
“저도 혼자 할 수 있어요……. 카렐이 챙겨 주지 않아도 알아서 해요.”
그의 친절함이 좋아서 한 말이었는데, 막상 입 밖으로 나온 말은 조금 퉁명스러웠다. 사샤가 스스로의 부족한 말주변을 탓하면서 입을 꾹 다물자 카렐이 도리어 어깨를 토닥여 주었다.
“알고 있어요. 그냥 내가 해 주고 싶어서 그랬습니다.”
“카렐…….”
사샤는 신음하듯 중얼거리며 카렐의 허리를 덥석 껴안았다. 갑작스러운 포옹에 카렐이 조금 휘청였다.
“그렇게 말씀하시면 저는 참을 수가 없어요.”
“뭘 말이죠?”
“저의 시한폭탄 같은…….”
“음…….”
카렐은 양팔을 어정쩡하게 든 채로 잠시 굳어 있다가 이내 한 손을 들어 사샤의 머리카락을 슥슥 쓰다듬듯 넘겨주었다.
“……오늘부터 연말 공연 리허설인가요?”
“네…….”
“집에 돌아오는 시간이 늦어지겠네요.”
“카렐보다는 늦지 않을 거예요.”
그렇게 말하며 사샤는 고개를 들었다. 카렐은 어딘가 착잡한 미소로 사샤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연습이 힘에 부치면 이야기해요. 누군가 괴롭게 만들면 내게 털어놓고요. 허리가 아파도 물론이고…….”
“네, 네.”
“당신이 혼자 힘들어 하는 건 내가 원치 않아요.”
그의 말에 사샤는 왈칵 눈물이 날 뻔했다.
그 순간 과거 모든 괴로움의 보상이 카렐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 어린 자신의 꿈에 찾아와 ‘너는 미래에 힘들었던 만큼 큰 행운을 만나게 될 거야’ 그렇게 말해 주기만 했다면 더한 고통도 참을 수 있었을지도 모른다. 또 힘들었던 만큼 행복으로 보상받는 것이 세상의 진리라면 실은 더 힘들어도 좋았을 텐데……. 그런 생각도 했다.
카렐은 학교에 갈 준비를 마친 사샤를 배웅하며 문가에 서서 손을 흔들어 주었다. 사샤는 현관에 비스듬히 기댄 카렐의 모습을 엘리베이터 문이 닫히는 틈 사이로 바라보다가 문이 닫히기 직전에 저도 작게 손을 흔들었다.
학교에 도착하니 사샤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줄리아였다.
“사샤? 이리 와 볼래? 기다렸거든.”
“네……. 잠깐은 괜찮아요.”
“오전 클래스 때문이지? 바딤에게 네가 늦게 들어갈지도 모른다고 허락은 맡았어. 그나저나 몸은 괜찮은 거지?”
“몸이요? 아…….”
사샤는 그제야 어제 자신이 학교에 나갈 수 있는 컨디션이 아니었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아무래도 카렐이 학교에 대신 결석계를 내주었나 보다.
줄리아는 오늘부터 돌아가면서 한 명씩 진로 상담을 하기로 했다며 사샤의 손을 이끌었다. 그대로 줄리아에게 이끌려간 사샤는 가방을 품에 안고 작은 원형 의자에 앉은 채 간단하게 최근 근황에 대해 이야기했다.
그리고 줄리아 다음으로 들어온 것은 안경을 쓴 갈색 머리의 여자 선생님이었다.
“안녕?”
“……안녕하세요?”
사샤는 작은 목소리로 인사했다. 처음 보는 사람이었는데 말투가 따뜻한 데다 항시 미소를 짓고 있어서 정감이 갔다.
조금 의외였던 점은 그 처음 보는 선생님이 ‘작은 사샤’의 존재에 관심을 기울였다는 점이었다. 누군가에게라도 좋으니 작은 사샤에 대해서 험담하고 싶었던 사샤는 아주 자세하게 대답했다.
“가끔 제 머리를 시끄럽게 만드는데요. 그 애는 망치질을 하기도 하고 저한테 말을 걸기도 해요. 화내거나 노래 부를 때도 있어요. 그런데 요즘에는 그 애가 누군지 조금 헷갈려요…….”
“그 애라고 부르는 걸 보니 아직 이름이 없구나?”
“네……. 이름을 붙일까요?”
사샤의 말에 안경을 쓴 선생님은 진지한 얼굴로 고개를 저었다.
“그 애가 네 머리를 어지럽게 만들 때가 언제니?”
“잘 모르겠어요. 아마 제가 한심하다고 생각할 때…….”
“그럼 당분간은 나올 일이 없겠네. 사샤는 발레도 잘하는 데다가 이번에 학생 중에는 유일하게 연말 공연에도 참가하게 됐다며? 너 자신보다 잘 해낼 사람은 없을 거야.”
“맞아요.”
사샤는 그렇게 대답하면서도 지난 몇 번에 걸쳐 정신이 암전되는 것처럼 멀어지던 때를 떠올려 보았다. 실은 카렐이 떠나갈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 그가 아무 미련 없이 자신을 놓을지도 모른다고 생각할 때에 그런 일이 벌어지는 것 같았다.
길고 긴 상담은 점심시간이 되어서야 끝났다. 오전을 꼬박 다 바쳐 다른 사람과 이야기한 사샤는 조금 지쳐서 제대로 된 식사를 하는 대신 샌드위치 하나로 점심을 때웠다.
복도 계단에 걸터앉아 샌드위치를 먹는 도중, 사샤는 창밖 나무 밑에서 상담 선생님이 누군가와 통화하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왠지 반가워서 그녀가 자신을 발견해 주기를 기다리다가 눈이 마주쳤을 때 살짝 손을 흔들었는데, 그녀는 조금 당황 섞인 웃음을 지으면서 사샤의 시선이 닿지 않는 곳으로 자리를 피해 버렸다.
* * *
“군무는 1막과 2막에 걸쳐 총 아홉 번 등장합니다. 공연은 4주 동안 계속되고, 주역은 매일 바뀌지만 군무는 그렇지가 않으니 체력적으로 많이 힘들 겁니다. 부상을 입거나 피로가 누적된 사람들을 대신해서 군무 단원은 공연 중에도 조금씩 변경이 될 거예요. 한 사람당 평균적으로 세 개의 춤을 맡고, 대타로 들어갈 수 있는 다른 안무들도 틈틈이 익혀 놓는 겁니다. 그러니 누가 어떤 군무를 맡을지 롤을 정하기 전에 모두 안무와 동선을 숙지하는 것부터 시작하죠.”
사샤는 조금 긴장한 상태로 거울에 등을 기대고 양팔로 무릎을 감싼 채 디렉터의 말을 듣고 있었다. 디렉터는 학교의 발레 마스터들보다 훨씬 젊어 보였고, 댄서 출신인지 키가 크고 몸이 늘씬했다.
연말 공연을 위한 리허설은 사샤에게 익숙한 학교의 발레 스튜디오가 아닌, 오페라 극장 안에서 이루어졌다. 창은 없고 대신에 사방에 거울을 바른 드넓은 연습실이었다. 한쪽에는 디렉터나 발레 마스터들이 앉을 수 있는 의자가 주르륵 놓여 있어 마치 심사위원들에게 춤을 평가받는 모양새였다.
자신이 학교를 나오지 않았던 날에 벌써 첫 미팅이 있었다고 들었다. 저 혼자 학생이고, 아는 사람이 아무도 없는데 미팅마저 빠졌다는 사실에 조금 위축되어 연습실로 들어온 사샤는 뜻밖의 인물들을 만났다. 군무 단원 중 일부가 사샤에게 ‘꼬마 유령!’ 하면서 반갑게 손을 흔들었던 것이다. 사샤는 자연스럽게 그들의 곁에 가서 몸을 붙이고 앉았다.
덕분에 현재 사샤의 주변에는 연습복으로 갈아입은 댄서들이 사샤처럼 바닥에 옹기종기 모여 앉아 있었다. 군무 단원은 올해 갓 입단한 1년 차 댄서부터 캐릭터 배역을 맡기도 하는 5년 차 단원까지 그 구성이 다양한 듯했다.
“여기부터 저쪽까지, 모두 앞으로.”
디렉터의 손짓에 따라 여덟 명 정도가 먼저 가운데로 나섰다. 이미 스텝을 알고 있는 걸 보니 일전에 같은 공연을 해 본 경험이 있는 이들인 모양이었다. 사샤는 그들의 동작에 정신없이 집중하면서 하는 데까지 안무를 외워 보려고 했다.
이어서 두 번째, 세 번째 그룹이 나섰다. 일부는 춤을 추다가 정확하지 않은 동작에 웃음을 터뜨리기도 하고, 그러다가 함부로 이를 보인다고 디렉터의 눈총을 받았다.
네 번째 그룹이 나설 때쯤에 사샤는 안무를 머리로 완벽히 그릴 수 있게 됐다. 멍하니 넋을 빼고 있는 사샤의 곁에서 처음 보는 어린 군무 단원이 팔을 툭 쳤다.
“야. 너 괜찮아? 왜 그렇게 멍해? 그나저나 너, 저거 알아?”
“……아뇨, 몰라요. 오늘 처음 봤어요.”
“하, 다행이다. 나만 모르는 줄 알았지. 같이 망신이나 당하자!”
그리고 다섯 번째 그룹으로 사샤가 앞에 나섰다.
네 명씩 두 줄을 이룬 대형에서 사샤는 뒷줄 가장 왼쪽에 서 있었다. 체격이 훌륭한 남자 댄서들 사이에서 덜 자란 사샤가 가장 자그마했다. 주변을 한 바퀴 돌아보며 간격이 충분한지 파악한 사샤는 이어서 흘러나오는 음악에 맞춰 기억에 남은 안무를 재현했다.
두 번 걸어가듯이 스텝, 턴 아웃을 완벽히 유지하면서 한 번 멈추고 포르 드 브라. 공간을 충분히 쓰면서 다시 한 번 포즈한다. 음악이 본격적으로 시작하기 전의 포즈에서 사샤는 거울을 통해 다른 사람들을 볼 수 있었다. 뒤늦게 사샤를 따라 포즈를 잡는 이들이 허다했다.
그다음은 외운 대로의 동작을 그려내는 데 집중했다. 미리 눈으로 따라 그릴 때부터 예상했지만, 생각보다도 체력의 소모가 컸다. 제대로 동작에 맞춰 호흡을 안배하지 않으면 빨리 지치는 춤이었다.
“뒷줄, 검은 머리.”
음악이 끝나자마자 다시 연습실 벽으로 돌아가 붙던 댄서들을 향해 디렉터가 말했다. 사샤는 처음에는 디렉터가 자신을 부르는지 몰랐으나, 누군가가 자신을 대신 돌려세워 줘서 겨우 대답할 수 있었다.
“네?”
“전에 춰 본 적 있습니까?”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아니요. 처음, 입니다.”
“흠. 알겠어요.”
디렉터의 말은 그걸로 끝이었다. 사샤는 조금 빠르게 뛰는 심장을 손바닥으로 지그시 눌렀다.
사샤가 조용히 원래 앉아 있던 구석 벽에 돌아와 앉자 누군가가 어깨를 찰싹 때렸다. ‘너도 안무 모른다며?’ 들리지 않게 조용히 속삭이듯 항의하는 이는 아까 전 그에게 말을 걸었던 군무 단원이었다.
“네……. 잘 몰라요.”
“진짜? 그럼 오늘 보자마자 외운 거야? 대단하네……. 너 처음 보는데, 객원이야?”
“아뇨? 저는 학교 다녀요. 여기 부속학교요.”
“뭐?”
어이없다는 듯한 군무 단원의 반응에 사샤는 눈치를 보면서 다시 양팔로 무릎을 끌어안았다.
정확히는 몰라도, 사샤는 자신이 무언가 눈에 띄는 짓을 했다는 것만은 알 수 있었다. 디렉터는 조연출들과 함께 무언가를 상의하듯 이야기를 나누다가 가끔씩 사샤가 있는 쪽을 흘끔거리고 손가락으로 가리키기도 했다.
어쩌면…….
사샤는 입술을 깨물었다. 처음부터 정말로 잘 해내면 배역을 따낼 수도 있다. 첫 무대에서 군무는 물론이고 솔로 베리에이션을 출 기회가 주어질지도 모른다.
‘너 자신보다 잘 해낼 사람은 없을 거야.’
예견되는 미래에 사샤의 가슴은 옅은 기대감과 흥분으로 도무지 가라앉을 줄 몰랐다. 발레로 다른 이들의 눈에 띄고, 또 주목받는 것은 사샤가 살면서 경험한 것 중 가장 짜릿한 일이었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무릎을 꽉 감싸 쥐면서 흥분으로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려 애썼다.
* * *
조용한 집무실 안에 공기를 불편하게 진동시키는 작은 소음이 들려왔다. 일부러 책상과 떨어진 먼 곳의 작은 테이블 위에 올려 둔 핸드폰에서 울려대는 진동이 불규칙했다. 전화가 아닌, 주고받는 메시지라는 뜻이었다.
지이이잉.
네 번째의 진동에 카렐은 결국 자리에서 일어났다.
소음의 근원지, 탁자 앞으로 다가간 카렐은 핸드폰을 집어 들고는 그대로 뒤집어 화면이 보이지 않게 엎어 놓았다. 그러나 통으로 된 원목을 깎아 만들어 나이테가 고스란히 드러난 투박한 테이블 위에서, 미묘하게 균형감이 어긋나게 놓인 핸드폰은 조금 전보다도 더욱 요란하게 울려댔다.
얼마 남지 않은 인내심을 시험받는 느낌에 카렐은 짧게 한숨을 쉬고는 결국 핸드폰을 푹신한 소파에 내던졌다. 쿠션으로 위를 덮어 놓으니 소음이 덜했다.
카렐이 애써 외면하려고 노력하는 핸드폰은 그의 것이 아니었다. 사샤의 핸드폰 뒷면이 파손되었다는 핑계로 새로 바꿔 주면서 복제한 또 다른 핸드폰이었다. 복제된 핸드폰으로 카렐은 사샤에게 걸려오는 전화, 메시지의 내용을 전부 사샤가 받는 것과 동일하게 확인할 수 있었으며 그 핸드폰에 어떤 앱이 깔리는지, 무엇을 검색했는지까지 전부 다 알 수 있었다. 마음만 먹으면 사샤의 사생활을 전 방위로 침범할 수 있는 셈이다.
그리고 카렐은 복제한 핸드폰을 근거리에 모셔 두고는 정작 한 번도 확인해 보지 않았다. 사샤의 자유를 완전히 옥죄는 것이나 다름없는 자기 자신의 행위에 환멸감이 들어서.
과거 카렐은 자신이 무언가에 있어 집착이 덜한 편이라고 생각해 왔다. 사적으로 소유한 물건은 물론이고, 사람에 대해서도. 연인의 프라이버시나 인간관계를 공유하고자 하는 욕구도 평범한 수준에 훨씬 못 미쳤으며, 그렇게 상대방을 구속하지 않는 젠틀한 면에 반한 이들도 종국에는 섭섭해할 정도로 지나치게 관대했다. 그런 카렐이 단 한 가지 집착하고 있는 것이 있다면, 레전드 사샤 세드린 생전의 자취나 비물질적 유산 따위였다. 카렐은 그에 대해서 많은 이들이 취미를 가지고 애착을 쏟아붓는 것과 연결시키면서, 그저 지독한 팬의 입장이라고 생각하면 이 정도 집착은 이해 못 할 것도 없지 않은가, 그렇게 면죄부를 부여해 왔던 것이다.
그랬던 카렐은 자신의 집착적인 면이 사샤를 향해 드러나고 있다는 것을 곤혹스러워했다. 복제된 핸드폰을 만들었다는 것, 그리고 마음만 먹으면 사샤의 일거수일투족을 감시할 수 있다는 것은 지독한 팬의 행동 따위가 아니라 명백한 스토킹이었다. 게다가 어린 사샤는 자신이 신봉하던 레전드 따위가 아니라 엄연히 살아 있는 사람이었다.
“…….”
카렐은 불편한 마음에 재킷 앞 단추를 풀면서 조금 느슨한 포즈로 앉아 팔걸이에 팔을 기댔다. 더 이상 진동은 들리지 않았다.
안도 섞인 낮은 한숨을 내쉬며 카렐은 자신의 저열한 방식을 누군가에게 고백해 버리고 싶다고 생각했다.
복제된 핸드폰을 만든다는 사실을 누구에게도 납득시킬 수 없을 것 같아서 카렐은 그 모든 과정을 충실한 오른팔 게오르크에게도 부탁하지 않고 혼자서 처리했다. 그 말은 타인에게 숨기고 싶을 정도로 자기 행동이 잘못되었다는 자각 정도는 있다는 소리였다.
큰 손으로 제 눈가를 가리고 침묵을 지키던 카렐은 수화기를 들어 짧게 말했다.
“게오르크.”
대답도 듣기 전에 뒤에서 문 열리는 소리가 들렸다. 카렐은 자연스럽게 몸을 틀면서 게오르크에게 핸드폰을 내밀었다.
“이걸 버려 줘. 그냥 버리는 게 아니라 완전히 파기해서.”
“새것 같은데요.”
다가온 게오르크가 받아 든 핸드폰을 앞뒤로 살펴보며 말했다. 카렐은 그의 말을 잘라내듯 명령했다.
“지금 당장.”
“알겠습니다.”
게오르크가 떠났다. 문이 닫히는 소리가 들렸다.
카렐은 즉시 후회했다. ‘한 번 정도는 볼 것을 그랬나’ 하면서.
잠시 후 게오르크가 돌아올 때까지, 카렐은 자신이 사샤의 행동을 감시하지 않고 버틸 수 있을지를 생각했다. 복제된 핸드폰을 만들면서 스스로 생각해 냈던 명분은 ‘사샤를 보호하기 위해서’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사샤의 사생활을 확인할 수 있는 매개가 사라지자마자 알량하게도 의심이 고개를 치켜든다. 애초에 명분은 궁색한 핑계였다고 반증하듯이.
카렐은 눈가를 가리던 손을 내려 이번에는 입가를 감싸듯이 가렸다.
새 핸드폰으로 또 중고게시판에 들어가서 잃어버린 제 형을 찾아대지는 않을까.
또다시 무방비하게 번호를 뿌리고 낯선 이의 연락을 받는 게 아닐까…….
카렐은 아무 말도 하지 않던 사샤를 떠올렸다. 사샤가 잠든 자신의 침대 위로 기어 올라와 옷 속으로 불쑥 손을 집어넣는 것은 한두 번 있던 일이 아니었지만 엄격하게 충고를 하면 얼른 겁을 먹고 물러나던 것과 달리, 그때의 사샤는 통제가 불가능했다. 마치 길들이지 못한 야생동물과도 같았다.
얼핏 보기에 마르고 가녀린 몸은 전신의 뼈 위에 단련된 근육을 매끄럽게 발라 놓은 것과 마찬가지여서 카렐의 생각보다도 완력이 좋았다. 환각에 시달리던 사샤는 제 행동을 카렐에게 구속당한 것이 분하다는 듯이 카렐의 팔을 깨물기도 하고, 그 팔목을 잡아 가두면 억울한 소리로 신음하며 제 혀를 씹으려고 했다.
어쩔 수 없이 카렐은 사샤가 스스로를 상처 내지 못하도록 그 작고 부드러운 입 안에 억지로 제 손가락을 물렸다. 사샤는 카렐의 손가락을 분풀이 삼아 씹어대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저를 똑바로 올려다보는 검은 눈동자를 보면서, 그때 카렐은 사샤가 지나치게 낯설다고 생각했다…….
“완전히 파기했습니다.”
생각에 빠져 있던 카렐은 몸을 돌리며 ‘잘했다’고 대충 대꾸했다.
“웬 변덕이십니까?”
그 말에 카렐은 엄지로 미간을 문지르며 잠시 뜸을 들이다가 솔직하게 말했다.
“복제폰이었어.”
“……누구의?”
“사샤.”
그 말에 게오르크는 ‘하……!’ 하고 들으란 듯이 큰 한숨을 내뱉더니 일부러 이마를 짚어대다가 다시 ‘후……’ 하고 신음하며 손으로 미간과 콧등을 주물러댔다. 카렐은 떨떠름하게 돌아앉으며 그런 게오르크를 모른 척했다.
“언제……. 언제 그 지경이 되신 겁니까? 제 상관의 다소 변태적인 부분을 모르는 건 아닙니다. 하지만 이건 범죄라고요…….”
“그래서 지금 고해성사하잖아.”
게오르크는 난감한 얼굴로 카렐의 앞에 마주 앉았다. 두 남자의 시선이 허공에서 부딪쳤다.
게오르크는 영 꺼림칙한 얼굴로 카렐을 살피고 있었다.
게오르크는 카렐이 사샤 세드린의 숭배자라는 것도 질릴 정도로 잘 알고 있었다. 또한 카렐이 흑백 필름 속 그를 닮은 이들만 골라서 만나 왔다는 것도 익히 알고 있었으며, 그 사생활의 뒤처리를 싫은 티 한 번 내지 않고 도맡아 왔다. 그리고 그보다 더 나아가 레전드를 빼닮은 데다 발레 재능까지 겸비한 어린 소년을 만나 전폭적인 후원을 하는 과정을 모두 지켜봐 왔다.
그러나 여기까지 오면 조금 다른 문제가 된다.
점차 후원하는 목적이 불분명해지고 있었다.
입 밖으로 내지는 않았지만, 카렐도 게오르크도 모두 이 과제의 목표와 방향성이 미묘하게 바뀌고 있다는 것을 감지하고 있었다.
다만 언제부터 바뀌었는지, 어디로 향하고 있는지는 명료하지 않았다.
“흠…….”
게오르크가 침음하자 카렐은 변명할 방법이 없다는 듯 양손을 들었다가 털썩 내렸다.
그때, 카렐의 재킷 주머니 안에서 작은 진동 소리가 들렸다.
“혹시…… 그것도.”
“이건 내 전화야.”
카렐은 변명하며 핸드폰을 꺼내 보였다.
그리고 이어서 확인한 화면에는 카렐이 직접 고용해 학교로 보낸 정신과 의사의 이름이 떠올라 있었다.
* * *
‘우울증과 조증이 번갈아 가며 나타나는 양극성 장애 양상이 보여요. 어린 시절에 신체적으로 학대당한 경험이 있고 현재도 어머니로부터 정서적인 방임을 당하고 있어서 아마도 그게 큰 요인으로 작용하지 않았나 싶어요. 그리고 추측하신 내용이 맞습니다. 사샤는 언젠가부터 상상 속의 인물에게 인격을 부여하고 대화를 나눠 왔던 것 같네요……. 아이가 많이 외로웠나 봐요.’
해가 진 지 오래된 저녁이었다. 하루를 일찌감치 마감한 카렐은 요즘 연말 공연의 연습에 합류하느라 귀가가 늦어진 사샤를 기다리고 있었다.
보통 창밖을 응시할 때면 카렐은 어둠에 잠긴 센트럴 파크를 감상하곤 했다. 가로등 불빛이 점점이 수놓아진 공원 외곽과 달리 숲 깊은 곳은 다채로운 명암만 남은 짙은 어둠에 가깝다. 그러나 카렐은 이번에는 공원에서 눈을 돌려 변경의 거리로 시선을 내렸다. 그러자 매일 자신을 기다리며 사샤가 지켜보았을 밤거리가 눈에 들어왔다.
다소 느린 속도로 멈추었다가 움직이기를 반복하는 차량들의 빨간 라이트들, 바쁘게 걷는 작은 점들. 사람들이 개미처럼 보인다고 표현했던 사샤의 메일을 떠올리니 절로 웃음이 났다. 카렐은 창가에 손끝을 대고 한동안 가만히 사샤의 시선을 공유했다.
의사는 매일 사샤와 자연스럽게 접촉하고 있었다. 그리고 그 경과를 카렐에게 전해 오다가 오늘에야 확정한 진단을 꺼냈다.
의사의 말이 카렐의 머릿속을 떠나지 않고 계속해서 맴돌았다.
‘아이가 많이 외로웠나 봐요.’
네, 많이 시달렸다더군요.
‘그래도 귀여운 아이였어요.’
아주 사랑스럽죠.
‘하고 싶은 것도 많아 보였어요. 의지도 있고요.’
보고 있자면 내 학창 시절을 반성하게 될 만큼 바쁘게 살지요. 재능도 있고, 의지도 있으니 하고 싶은 건 전부 할 수 있을 겁니다.
‘네, 강한 아이예요. 분명히 나아질 거예요.’
카렐은 한숨을 쉬었다.
나아질 수 있느냐는 카렐의 물음에 의사는 조심스럽게 대답했다. 아마도 가능할 것이라고. 완벽한 결과를 섣불리 확신하지 않는 것이 그들 특유의 화술이라고 하더라도 애가 탔다.
그러면서 의사는 추가적으로 외부 자극을 줄이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꺼냈다. 아무래도 스스로의 한계에 부딪히면 치료에 애를 먹을 것 같으니, 극복할 수 있을 만큼의 과제만을 주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의견을.
의사의 말은 일리가 있었다. 사샤의 학교생활을 꾸준히 보고해 오던 바딤의 말에 따르면 이번 공연의 디렉터는 관대함과 거리가 먼 남자였다. 나약한 이들에게 더 엄격하면 엄격했지, 경험 없는 학생이라고 유리도자기를 다루는 듯한 특별 취급을 바랄 수는 없다는 이야기였다.
그때 카렐의 등 뒤에서 카드키가 인식되는 소리가 들렸다. 지금 이 시간에 올 사람이라면 사샤뿐이었다.
카렐은 문이 열리는 순간 천천히 뒤돌았다.
“카렐?”
그리고 현관부터 불이 켜지는 복도를 따라 흰 얼굴의 사샤가 모습을 드러냈다. 머리에는 헤어밴드를 착용한 채였고, 스포츠백을 크로스로 멘 한쪽 운동복이 비스듬히 내려가 있었다.
카렐은 사샤를 향해 천천히 몸을 돌렸다. 팔짱을 끼면서 ‘어서 와요’ 하며 가볍게 고개를 끄덕이자 사샤의 얼굴에 미소가 번져 나갔다.
사샤는 가방을 바닥에 벗어 던지면서 카렐의 앞까지 금세 달려왔다.
“카렐, 저 자랑하고 싶은 게 있어요.”
“그게 뭘까요.”
카렐은 무의식중에 사샤를 따라 미소가 번지는 입가를 느슨하게 풀며 창문에 등을 기댔다. 사샤는 카렐의 묵직한 체구가 유리창에 기대어 있는 것이 영 불안한 듯 흘끔거리는 눈초리로 살피다가 그를 제 쪽으로 살그머니 끌어당겼다.
“기대지 마세요. 유리가 깨져서 추락하면 어떻게 해요?”
“그럴 일은 없어요. 하지만 걱정이 된다면.”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사샤의 약한 힘에 이끌려 등을 세웠다.
“저는 가볍지만 카렐은 무겁잖아요. 혹시 모르니까 조심하세요.”
카렐은 수긍하면서 사샤의 팔을 이끌어 소파로 다가갔다. 카렐이 먼저 앉자마자 사샤가 그 옆에 얼른 올라와 앉았다. 보통 카렐을 상대할 때는 일정 간격을 두고 마주 보며 앉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게, 사샤는 이렇게 나란히 붙어 앉는 것을 좋아했다.
“자, 이제 이야기해 보세요. 뭘 자랑하고 싶어요?”
“벌써 말해요? 어……. 엄청 놀라실 수도 있는데요?”
“그럼 언제 말하고 싶은가요.”
“음……. 모르겠어요. 아무튼 오늘 자기 전에요. 그런데 지금은 아니에요.”
사샤는 뜸 들이고 싶은 마음과 자랑하고 싶다는 마음 사이에서 갈등 중인 것 같았다.
말없이 사샤를 웃는 눈으로 응시하던 카렐이 입을 열었다.
“실은 나도 한 가지 제안하고 싶은 게 있는데.”
“정말요? 뭔데요?”
사샤는 무척 궁금해하며 카렐에게 몸을 기울였다. 머릿속 생각이 다 드러나는 순진한 얼굴을 보면서 카렐은 오늘 사샤에게 자신의 의견을 제안하고 설득하는 일은 조금 힘들지도 모르겠다고 생각했다.
“음……. 당신의 자랑거리를 먼저 듣는 게 낫겠어요.”
“아니에요. 카렐이 먼저 말해요. 궁금해요…….”
“흠…….”
조금 고민하던 카렐은 몸을 틀어 소파 등받이에 팔을 걸치고 사샤를 바라보았다. 사샤는 소파 위에 두 다리를 다 끌어 올려 무릎을 꿇어앉은 채로 카렐의 말을 기다리고 있었다.
“공연 연습은 어떻죠?”
“음…….”
사샤는 대답을 머뭇거리다가 그냥 히히 웃어 버렸다. 카렐은 사샤가 힘든 이야기는 굳이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아챘다. 사샤의 뺨 솜털에 묻어 있는, 어디서 붙여 왔는지 모를 작은 실을 떼어 주면서 카렐은 입을 열었다.
“여행 가고 싶은 생각…… 없나요.”
“여행이요? 카렐이랑요? 호, 혹시 저도 출장에 데려가 주시나요?”
“당신이 원하면요.”
“저 가고 싶어요. 무조건 갈래요.”
사샤는 카렐과 함께 워싱턴 D.C.에 다녀왔던 때를 떠올렸는지 조금 흥분한 기색이었다. 카렐은 고개를 끄덕이며 답했다.
“그래요……. 그러면 연말 공연은 빠져야 할 수도 있어요. 괜찮겠어요?”
“아…….”
“선택은 당신이 하는 겁니다. 하지만 내 개인적인 바람으로는…….”
“…….”
“어디까지나 내 개인적인 바람이지만, 당신이 콩쿠르 전까지는 푹 쉬었으면 해요. 허리나 무릎에 누적된 피로도 치료하고요. 연말 공연은 당신이 학교 측에서 보상으로 따낸 거니 잘 조율해서 내년 봄 시즌으로 미루어도…….”
그렇게 말하면서 카렐은 저도 모르게 눈을 내리깔고 있었다. 뭔가를 제안하거나 누군가를 설득할 때 약한 모습을 보인 적 없던 그로서는 매우 드문 경험이었다. 만약 자신이 사샤의 기대를 꺾은 거라면, 사샤가 실망하고 있다면 차차 좌절로 물들어 가는 얼굴을 들여다볼 자신이 없었다.
그리고 이렇게 돌려 말하고는 있지만 자신의 심중에 예민한 사샤는 제 속뜻을 알아챌 것이 분명했다. 은연중에 연말 공연을 포기하라고 권하고 있다는 사실을.
사샤에게서 대답이 없어 카렐은 천천히 눈을 들었다.
사샤는 고개를 푹 숙인 채였다.
“사샤.”
“……으……윽.”
“이런.”
카렐은 앉은 자세를 바꾸면서 사샤의 얼굴을 들여다보려 했다. 사샤는 손을 조금 떨면서 얼른 제 손을 숙인 눈가로 가져갔다. 투박하게 찍어낸 손등에서 눈물이 반짝였다.
“저한테 1막의 삼인방의, 흑…… 춤을 맡긴다고 했어요. 군무는 여러 명이 하는데 그건 세 명만, 세 명만 하는 거예요. 제가 안무를 빨리 외우고, 또 키는 조금 작지만…… 그래도 잘하니까 믿어 보겠다고, 그래서…….”
카렐은 바로 이것이 사샤가 오늘 자랑하고 싶어 했던 말임을 알아챘다. 생각보다 중요한 롤을 맡게 되었다고 자랑할 요량으로 부푼 가슴을 안고 왔는데 자신이 그 기대감에 찬물을 끼얹은 꼴이었다.
사샤의 좌절감을 이해한 카렐은 심각한 표정으로 사샤를 달랬다.
“미안합니다.”
카렐의 나직한 목소리가 떨어지자마자 사샤는 카렐의 품에 파고들며 애원했다.
“카렐, 공연을 하지 말까요?”
“…….”
“왜냐하면 제가 정상이 아니니까요? 너무 예민하고 머리에 곰팡이가 피어서…… 흐읏, 흡. 제가 하기에는 너무 어려운 일이라서…… 그래서?”
“…….”
“만약 카렐이 하지 말라고 하면, 저, 전 그 말을 따를 수밖에 없어요. 왜냐면 카렐의 말을 거스르는 게 무서우니까요. 카렐이 저를 성가시고 귀찮고 말도 안 듣는 애라고 생각하시는 건 싫어요.”
사샤는 눈물을 벅벅 닦아내더니 그다음에는 억울한 목소리로 말했다.
“하지만 너무해요. 어떻게 저한테 그런 말을 하실 수가 있어요?”
“…….”
“제가 얼마나 발레를 좋아하는지 아시잖아요!”
“……미안합니다.”
“제가 삼인방의 춤도 추게 되었는데…….”
사샤는 울음을 참기 위해 억지로 비틀리는 입술을 꾹 다물며 눈물을 삼켰다. 카렐은 사샤의 머리카락과 부드러운 눈가를 손등으로 쓸어 주었다. 그리고 뺨을 어루만지며 등을 도닥여 주었다.
사샤가 한숨을 내쉬자 검은 속눈썹이 파르르 떨렸다.
잠시 어물거리던 사샤가 작은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카렐 말이 맞을지도 몰라요. 하지만 미뤘다가 다음에 이번 같은 기회가 안 오면 어떻게 해요?”
“…….”
“저는 최선을 다했어요. 지금이 가장 중요해요. 이런 기회는 지금밖에 없을지도 몰라요…….”
‘오늘의 저를 기억해 주세요’라고 하던 사샤의 청은 이런 때를 위한 것이었을까?
카렐은 침묵을 지킨 채로 사샤를 응시했다. 사샤가 끊어질 듯한 목소리로 작게 애원했다.
“하고 싶어요……. 카렐, 하고 싶어요.”
사샤는 눈물 고인 눈으로 제 의지를 말했다. 나름 떼를 쓰고 있는 목소리가 너무나 허약해 안쓰러웠다.
그런 사샤가 사랑스럽다고 생각하는 동시에 카렐은 무력감을 느꼈다. 사샤가 제 의지를 관철시키고자 하면 자신은 허락해 줄 수밖에 없을 것이다. 아마도, 지금 이후로는 쭉…….
자연스레 앞으로의 모든 미래가 그려졌다.
카렐은 묵직하게 뛰는 심장 위를 덤덤한 손길로 짓누르며 말했다.
“……변명을 조금 해도 될까요.”
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실은, 당신은 인지하지 못했겠지만 계속 상담을 했어요. 밝히지 않고 진행해서 미안합니다……. 당신이 받아들일 수 없을까 봐, 스스로에게 흠집이 나 있다고 생각할까 봐 말하기를 주저했어요.”
“……그 새로 온 선생님인가요?”
“맞습니다.”
카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당신은 타고나길, 외부 자극에 약해요. 탓하는 게 아니니 오해하지 마세요. 그리고 자책도 하지 말았으면 합니다. 그건 단점이 아니니까. 누군가는 키가 작고, 누군가는 신체 일부가 약한 것처럼, 당신은 정신적인 스트레스에 조금 약할 뿐이죠.”
“…….”
“당신은 자기 자신을 보호하고 싶었던 겁니다. 그래서 머릿속으로 스스로와 대화하고, 그 친구에게 인격을 주고…… 그러다 혼란스러워지면 자기 자신을 잃기도 하고. 그 모든 게 상처받고 싶지 않았기 때문에 했던 방어기제, 즉 아주 자연스러운 행동들이죠. 그리고 의사는, 당신이 스트레스를 계속 받으면…….”
“…….”
“망상과 환각이 더 심해질지 모른다고…….”
카렐은 저도 모르게 사샤의 뺨을 향해 손을 뻗었다.
제 말에 집중하고 있는 온순한 눈길이 귀엽고 사랑스러웠다. 카렐이 무의식중에 뻗어낸 손끝은 사샤의 눈썹만을 스치듯 두어 번 문질렀다가, 더는 손대지 못하고 다시 멀어졌다. 카렐은 떨리는 손을 숨기기 위해 대신 주먹을 쥐었다.
“사샤, 사라지지 말아요.”
그리고 그 순간, 카렐은 최초로 깨달았다.
자신은 눈앞의 이 사샤 세드린을…… 아마도 유일하게 여기고 있다.
누군가의 대체재로서가 아니라 이 영혼 자체를.
그러나 사샤의 숨죽인 눈빛 앞에서 카렐은 더는 솔직한 마음을 내뱉지 못하고 말을 삼켰다.
“하…….”
카렐은 눈앞의 소년을 너무 일찍 만난 것을 후회했다.
사샤가 저를 이토록 애정 깊은 눈으로 바라보아도 이것이 제 둥지를 안온하게 보살펴 주는 어미 오리에게 의지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지, 의심을 거둘 길이 없었다. 사샤가 주체적으로 자라나서 스스로의 의지로 자신을 선택해 주었다면, 그러면 모를까.
“다시 말하겠습니다. 나는 지금 내 눈앞의 사샤 세드린을 잃고 싶지 않습니다.”
사샤는 말없이 무릎걸음으로 일어나 카렐과 시선을 맞추었다. 눈물기가 남은 눈가는 약간의 호기심을 담고 카렐을 살피고 있었다.
“카렐, 무서우세요?”
“내가요?”
“네, 겁먹은 얼굴이에요.”
“음, 아마도…….”
“그러면 제가 안아 드릴까요? 이건 ‘수작’은 아니고요, 위로예요.”
“그래요.”
사샤의 말투에 카렐은 긴장이 풀리는 것을 느끼며 그가 파고들 수 있도록 양팔을 벌렸다. 사샤는 카렐의 단단한 목덜미에 양팔을 조심스레 얽으며 중얼거렸다.
“부끄러워하지 마세요. 어른이 겁먹으면 안 된다는 건 법에도 없으니까요……. 그리고 제가 어디서 읽었는데, 어른들이 더 겁이 많대요.”
카렐은 소리 없이 웃으며 물었다.
“왜죠?”
“가진 게 많아서요. 조금만 잘못하면 살면서 쌓아 온 것들을 잃어버릴까 봐 무서워진대요. 저도 그걸 이해해요. 저도 카렐을 만나고 나서 무서운 게 많아졌거든요.”
카렐은 사샤를 지나치게 빨리 만난 것을 후회하면서도, 동시에 자신이 사샤 세드린을 더 빨리 만나지 못한 것을 후회하는 모순 안에 갇혔다. 이 사랑스러운 사샤 세드린이 요람에 누운 아기였을 때부터 좋은 것만 보고 완벽한 환경을 누리며 고민 없이 재능을 펼칠 수 있는 기회를 주지 못한 것이 후회되었기 때문이다. 아무런 흠집도 나지 않은 원석의 사샤 세드린이 얼마나 곱고 예뻤을지 생각하면 그런 아쉬움이 들었다.
그러나 반대로 사샤가 걸어온 생의 흔적, 운명이 조각한 고난마저 사랑스럽게 느껴지는 것도 사실이었다.
그 모든 것이 지금의 사샤 세드린이니까.
카렐은 다시 한 번 품 안의 사샤가 유일하다는 것을 확신했다. 자신의 뺨 가까이에 닿은 사샤의 귀 뒤쪽 목덜미에서 햇살에 말린 고양이 털 냄새 같은 것이 났다.
카렐은 사샤의 검은 머리카락을 손으로 빗으며 부드럽게 손가락 사이를 빠져나가는 감촉을 즐겼다. 이 머리카락 한 올 한 올조차 놓치고 싶지 않았다. 사샤가 코끝으로 작게 내쉬는 숨을 받아 마시고, 눈 아래 점막에 고인 눈물을 핥고 싶었다. 카렐은 내심 탄식했다. 지나치게 빨리 만난 것을 후회하면서…….
“머리가 많이 길었네요.”
“네……. 이제는 묶일 정도예요.”
“이번에 커트를 하면 머리카락을 내게 주지 않겠어요?”
카렐의 말에 사샤는 품 안에서 수줍어 떨리는 목소리로 답했다.
“흔쾌히 드릴 거예요.”
“고마워요.”
카렐이 대답하자마자 사샤는 안긴 품의 간격을 조금 떨어뜨리더니 카렐의 눈을 보고 말했다.
“그런데 한 가지 조건이 있어요.”
“뭐죠?”
“계속 공연에 참여하게 해 주시면…….”
그 말에 카렐은 잠시 사샤의 눈을 바라보다가, 어렵게 고개를 끄덕였다. 사샤의 의지를 거스르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았다.
사랑할 수밖에 없는 소년.
카렐은 다른 누구도 아닌 눈앞의 소년을 사랑하게 되었음을 더 이상 부정하지 못했다. 예측 불가능하도록 사랑스러웠던 소년의 존재가 언젠가부터 레전드의 그림자를 밀어내고 결국 카렐의 심장을 온통 차지해 버렸다.
“사샤 세드린…….”
사샤는 카렐의 목울대가 크게 울렁거리는 것을 신기한 눈으로 보다가 손가락을 들어 만지작거렸다.
사샤는 ‘라 발스’의 음률이 자신의 인생 같다고 말했다. 그 끝에 기다리는 게 뭔지 모르면서도 알 수 없는 이에게 이끌려 끝없이 춤을 수밖에 없다고 말하며.
아마도 사랑의 정체도 그와 비슷할지 모른다. 사샤는 예상치 못한 순간 제 인생에 등장해, 무의식중에 스며 들어와 짐작하지 못한 곳으로 저를 이끌었다. 미숙한 소년에게 진심이 될 거라고는 평생 생각해 본 적 없었기에 무방비했던 카렐은, 느리게 눈을 감았다 떴다.
“사샤.”
“네, 카렐?”
“왈츠는 두 사람이 추는 춤이죠.”
“맞아요.”
“당신은 그걸 언제나 혼자 추고 있었군요.”
카렐이 의미 모를 말을 한다고 생각한 사샤의 눈이 깜빡였다. 사샤의 손이 이번에는 카렐의 턱에 와 닿아 보이지 않는 수염이 돋아난 까슬까슬한 턱을 만지작거렸다. 아이 같은 손길에 카렐은 모든 말을 삼켰다.
아직 내뱉지 못한 말이 카렐의 심장에 응어리졌다.
라 발스 4권에서 계속