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설리스트

라 발스 : 그랑파 2권 완결-1. 백수 선언 (26/30)

  1. 백수 선언

그날도 여느 때와 다름없는 하루였다. 카렐의 연락을 받기 전까지는.

[오늘은 못 데리러 갑니다. 사무실로 와 줘요.]

막 학교를 나서며 카렐의 메시지를 확인한 사샤는 의아해하면서도 충실히 그의 말에 따랐다.

[조금느졋지만 걸어갈게요]

카렐에게 메시지를 보내고 사샤는 천천히 걸어서 광장을 가로질렀다. 카렐의 차를 타는 대신 오랜만에 길을 걸으니 퍽 상쾌하게 느껴지기까지 했다. 가끔은 이런 일상의 변칙도 필요한 것이라고, 사샤는 제법 어른스럽게 생각했다.

어른의 기분을 느끼기 위해 라테 한 잔을 사 먹는 것도 잊지 않았다. 화창한 여름이 지나고 가을의 초입에 다가선 맨해튼의 풍경은 사샤의 눈에 새삼스럽게 다가왔다. 어제와 오늘과 다가올 내일이 잘 구별이 되지 않을 만큼 동일한 훈련이 반복되는 규칙적인 하루에 조금 염증을 느끼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기실 졸업 공연을 위한 리허설 연습량이 조금 늘어난 것 빼면, 학생인 사샤의 하루는 작년과 크게 달라진 것도 없었다. 사랑을 쟁취하고, 로잔의 파이널리스트가 되고, 졸업 공연의 주역으로 발탁되고……. 또 멋진 차의 차 키를 손에 쥔 순간 잠깐이나마 진짜 어른이 된 것 같은 기분에 젖어 보기도 했지만 하루 일과가 연습으로 가득 찬 무용수의 일상 자체는 퍽 단조로웠던 것이다.

사샤는 이내 카렐의 집무실이 있는 고풍스러운 빌딩에 도착했다. 지은 지 백 년 가까이 된 이 건물은 존재 자체가 마법 같았다. 사샤가 안으로 들어서자 중세의 갑옷 대신 검은 슈트를 철갑처럼 두른 잘생긴 남자가 문을 열어 주었고, 캔디 숍의 할아버지는 오랜만이라며 사샤의 손에 갓 만들어 식힌 캔디가 잔뜩 들어 있는 종이봉투를 쥐여 주었다. 엘리베이터를 타고 카렐의 집무실이 있는 층에 오르자 게오르크가 말없이 안을 가리켰다. 카렐이 기다리고 있다는 뜻이었다.

“왔나요. 앉아 봐요.”

문을 밀고 들어서자마자 카렐의 다정한 목소리가 들려왔다. 보고 있는 서류에서 눈을 떼지도 않은 채로 인사를 해 온다.

무척 바쁜가 보다고 생각하면서 사샤는 유성 영화 촬영장의 세트 같은 카렐의 집무실을 둘러보았다. 빌딩이 지어진 시기의 물건들로 채워진 이 장소는 카렐의 고집스럽고 사적인 취향으로 가득하다. 물론 그 풍경에 정점을 찍는 것은 고전 영화의 배우처럼 생긴 카렐 본인이었고. (얼마 전 카렐의 추천으로 흑백 영화 몇 가지를 본 사샤에게는 카렐이 꼭 배우처럼 보였다.)

“왜 여기로 오라고 하셨어요?”

사샤는 발레 슈즈가 매달린 스포츠백을 안쪽 소파에 내려놓으면서 물었다. 카렐의 얼굴에 푸른 모니터 불빛이 비쳤다. 이 고풍스러운 사무실 안에서 그의 책상 한편에 놓인 현대적인 모니터와 패드 같은 것만이 이 방 안에서 유일하게 이질감이 드는 요소였다.

“카렐?”

사샤가 재차 그를 불렀지만 카렐은 사샤의 질문을 듣지 못한 듯 여전히 모니터에 시선을 고정하고 있었다. 웃지 않는 눈이 짐짓 심각하게 화면을 들여다본다. 카렐이 저를 봐줄 때까지 얌전히 기다려야겠다고 생각하면서 사샤는 소파에 앉았다. 마침 문이 열리고 게오르크가 들어와 사샤를 위한 라테 한 잔을 내주었다. 무척 반가웠지만 오는 길에 이미 한 잔을 마셨다.

“흠, 오늘 몫은 먹었는데요.”

“치울까요?”

게오르크가 칼같이 굴며 잔을 치우려 했다. 사샤는 그를 몰래 흘기면서 손을 뻗었다. 포기하기에는 카렐의 집무실에서만 맛볼 수 있는 게오르크의 특제 라테는 맛이 각별했기에.

사샤가 뻗는 손을 본 게오르크는 다행히도 순순히 라테를 내놓았다. 사샤도 고분고분 답했다.

“고마워요.”

“천만에요.”

그러더니 게오르크가 조금 홀가분한 목소리로 말했다.

“이것도 오늘로 마지막이 될 겁니다. 그렇게 생각하면 별로 번거로운 일도 아니죠.”

“네?”

‘마지막’이라는 소리에 깜짝 놀란 사샤가 입술에 우유 거품을 묻힌 채로 고개를 들었다. 그러나 게오르크는 이미 콧노래까지 부르며 깔끔하게 집무실을 나가 버린 채였다.

“좋은 소식 하나와 나쁜 소식 하나가 있어요.”

카렐의 목소리가 바로 뒤에서 들려왔다. 고개를 홱 돌리자 어느샌가 사샤의 뒤로 다가온 카렐의 그림자가 사샤를 덮쳤다.

“안녕?”

눈이 마주치자 카렐이 여상히 인사를 건넸다. 그러더니 몸을 숙여 사샤의 입가에 묻은 거품을 엄지손가락으로 가볍게 훔쳐 갔다. 이내 제 손에 묻은 거품을 아무렇지 않게 핥는 완벽한 슈트 차림의 남자를 보면서 사샤는 잠깐 넋을 놓았다.

“……제 입술도 그렇게 섹시하게 핥아 주세요.”

사샤는 카렐의 목에 매달리며 저도 모르게 그렇게 말했다. 카렐은 픽 웃더니 사샤의 등허리를 한쪽 팔로 받쳐 안았다.

“내가 섹시해 보였군요.”

“네…….”

사샤는 빈틈없이 단추를 채워 넥타이를 꽉 조인 카렐의 타이 끝을 손으로 가볍게 잡아당겼다. 딸려온 카렐이 사샤에 입술에다 쪽, 소리가 나는 아주 가벼운 키스를 건넸다.

“뭘 먼저 듣고 싶나요.”

“좋은 소식만 듣는 건 안 돼요?”

사샤의 물음에 카렐이 목 안으로 웃음을 흘렸다.

“그럼 좋은 소식부터 얘기해 줄게요.”

“기대돼요.”

카렐은 눈을 빛내는 사샤의 입술에 가볍게 제 입술을 비비고는 말했다.

“오늘부터 우리는 24시간 함께 있을 수 있어요.”

“네?”

“그것도 매일매일.”

사샤는 슬쩍 고개를 기울였다. 잘 이해가 가지 않는다는 표정이었다.

카렐이 명쾌한 설명을 덧붙였다.

“내가 회사를 가지 않아도 된다는 말입니다.”

그러자 사샤가 눈을 크게 떴다.

“사샤?”

좋아서 놀란 것인지, 아니면 그저 충격받은 것인지 구분하기 어려운 얼굴이었다.

한참 사샤를 바라보던 카렐은 얼음 동상처럼 그대로 굳어 버린 듯한 사샤의 이마를 손가락으로 톡 건드렸다. 그 손길에 겨우 깨어난 사샤가 중얼거렸다.

“그럼 나쁜 소식은…… 나쁜 소식은.”

사샤의 동공이 미세하게 떨리고 있었다. 앞으로 회사도 때려치우고 24시간을 함께 붙어 있을 수 있다고 말하면 그저 철없이 좋아할 줄만 알았는데 그게 아닌 모양이다.

카렐은 사샤가 기대와는 다른 반응을 보이는 것에 자못 놀라면서도 그 반응을 면밀히 관찰했다.

곧 사샤가 바들바들 떨리는 입술로 물었다.

“회사에서 잘렸다는 거예요?”

“음……?”

의외의 해석이었다. 그러나 카렐이 설명해 줄 새도 없이 사샤의 맑은 망막이 어룽거리더니 곧 눈물이 흘러넘쳤다.

“사샤?”

카렐은 적잖이 당황해서는 사샤의 어깨를 다정히 안았다. 사샤가 한 번 눈을 끔뻑이자 가득 고여 있던 눈물이 대롱거리며 속눈썹 끝에 매달렸다. 다시 한 번 눈을 꾹, 감자 투명한 눈물이 흰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사샤가 소리 없이 우는 얼굴은 꼭 물에 젖은 백합 같아서, 카렐은 상황도 잊고 저도 모르게 그 얼굴을 말없이 감상하는 시간을 가지고 말았다.

잠시 후 도로 정신을 차린 카렐이 물었다.

“사샤, 왜 우는 겁니까.”

무슨 이유로 이렇게 절망스러워하나.

내가 회사를 떠난다는 사실이 그토록 충격적인가.

카렐은 의문에 휩싸여 사샤를 도닥였다. 문득 미약한 의심이 고개를 치켜들었다. 혹 이 앙큼한 연인이 저의 재력과 지위, 사회적 명예를 좋아했던 거라면? 빈털터리여도 사랑해 달라고 주장할 만큼 뻔뻔한 타입은 아니었지만, 그런 요소가 후원자를 연애 감정으로 좋아하게 된 이유라면 조금 기분이 떨떠름할 것 같기는 했다.

그러나 눈물을 실컷 떨군 사샤는 도리어 이를 까득, 갈면서 카렐을 향해 물었다.

“왜, 왜…… 누가 카렐을 해고했어요?”

“…….”

“인터넷 기사로 봤어요. 카렐이 ‘시험’받고 있다고요. 카렐이 앞으로 능력을 증명해야 될 거래요. 말해 봐요. 어떤 놈들이 카렐에게 시험을 줬어요? 그 시험은 탈락한 건가요? 그럼 이제 비서도 잃고, 이 멋진 집무실도 남에게 주고, 카렐은 거지가 되는 거예요?”

“그렇지는 않…….”

카렐은 사샤의 비약적인 논리에 감탄하면서 말을 얼버무렸다. 사샤는 아직도 꾸준히 ‘카렐 클레멘츠’를 인터넷에 검색해 보고 있는 모양이다. 그보다 더 놀라운 것은 이 조그마한 연인이 저의 상황을 진심으로 걱정해 주고 있다는 점이었다.

카렐은 순간적으로 사샤가 지나치게 사랑스럽게 여겨져, 정의감에 휩싸여 분노로 파르르 떨리는 사샤의 뺨에 제 뺨을 가져다 댔다. 눈물 젖은 축축한 뺨이 소년처럼 따스했다.

“그래서 충격받았군요.”

“카렐이 얼마나 열심히 일했는데요! 제가 다 알아요. 출장도 미친 듯이 가고 집에도 늦게 들어왔잖아요. 한 침대에서 자지 못한 날들도 많았어요. 그렇게 열심히 일했는데, 어떻게…….”

“…….”

카렐은 사샤의 어깨를 어루만지며 품 안의 사샤를 바라보았다.

그는 안식년을 얻었을 뿐이었다. 1년간의 장기 휴가.

카렐이 종종 시험에 들고, 때마다 제 능력을 설득시켜야 하는 것은 사실이었다. 창립자의 직계 후손이라는 존재는 명예 말고는 아무것도 증명해 주지 않았기 때문에. 그러나 현재 거대한 덩치의 다국적 기업이 된 이곳에서 카렐은 선조로부터 받은 유산과 최대 지분 5%는 철저히 수성하고 있었다. 방어전만 해도 충분한 상황에서 카렐이 시험대에 오르는 것은 거의 본인의 의지라고 볼 수 있었다.

사랑과 연애가 인생의 후순위였을 시절, 카렐은 무료함을 달래기 위해 일에 진심으로 몰두했다. 그는 정치적으로 싸우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기업 내의 정적을 찍어 누르거나 벼르던 대상을 착취하는 과정을 진심으로 즐겼다. 그렇게 현대의 전쟁터나 다름없는 곳에서 스트레스를 풀어댔다고 볼 수 있었다.

때문에 카렐은 종종 제 드러나지 않은 밑바닥 본성은 무척 야만적이고 음험하다고 생각할 때가 있었다.

살아 숨 쉬는 무언가를 발아래에 굴복시키고 싶은 욕구는 적에게만 발동하는 것은 아니었다. 간혹은 침대 위에 제물처럼 바쳐진 흐트러진 나신을 향해 가학적인 욕구가 들기도 했다. 그런 욕망을 제어하기 위해 카렐은 사냥과 사격에 몰두했다. 목표물을 쓰러뜨리고 도축해 해체하는 과정에 집중하고 나면, 그다음 날에는 다시 자의로 슈트를 갖춰 입고 잘 훈련된 사회인인 양 가면을 뒤집어쓸 기력이 생겼기 때문에.

언젠가는 그런 모습도 사샤와 공유할 날이 오겠지만…… 덜 여문 이 순수한 영혼이 지레 겁을 먹고 저에 대한 판단을 달리할까 봐, 카렐은 아직은 신사적인 모습을 표방할 때라고 생각하고 있었다.

생각에 잠긴 카렐이 턱을 괴고 사샤를 물끄러미 바라보는 사이, 사샤가 드디어 울분에서 빠져나왔는지 주먹으로 슥 눈가를 훔쳤다.

“하아…….”

사샤는 크게 한숨을 쉬었다. 손을 뻗어 카렐의 어깨를 폭 안아 주더니―그러나 체격 차이 때문에 꼭 사샤가 안기는 모양이 되었다― 마치 위로를 하듯 도닥였다.

“괜찮아요, 카렐.”

“……무엇이 말입니까?”

“무직자여도 괜찮다는 말이에요. 우리 고향에도 무직자들이 많았어요. 직업이 없는 게 부끄러운 일은 아니에요. 아내를 때리거나 알코올 중독자만 아니면 돼요.”

사샤의 얼굴에는 동정심이 어른거리고 있었다. 카렐은 그 표정이 참을 수 없이 깜찍하다고 생각했다. 게다가 제 어깨를 도닥이는 손길이 너무나도 귀여워서 카렐은 충동적으로 당분간, 아주 잠깐만 ‘무직자 연기’를 하기로 마음먹었다.

카렐은 일부러 무기력한 얼굴을 지어냈다.

“그럼 내가 다시 일을 구할 때까지 나와 함께 있어 주는 건가요?”

“당연하죠! 그걸 말이라고 해요? 카렐은 돈이 많거나 적거나 항상 저와 함께 있는 거예요.”

“파산해서 빚쟁이가 되어도?”

“저도 이미 카렐에게 빚을 졌잖아요. 제가 어릴 때 카렐이 후원금을 많이 내줬으니까 이제는 제가 카렐을 돌봐 줄게요.”

사샤의 말에 카렐은 심장 밑바닥이 지끈거리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사샤……. 너무 감동적입니다. 당신이 그렇게 받아들여 주니…….”

카렐은 괜히 손을 들어 눈가에 가져다 대고 눈시울이 뜨거워진 척했다. 그러자 사샤가 다시 울먹거리며 카렐에게 안겼다. ‘흐어엉’ 하고 카렐의 어깨가 젖을 때까지 울어댔다.

잠시 후 고개를 든 사샤가 훌쩍거리며 물었다.

“게오르크는 그럼 이제 다른 놈의 비서로 가나요?”

“당분간…… 아니, 네. 적절한 곳으로 부서 이동이 있을 겁니다.”

카렐이 눈을 굴리며 사실에 기반한 거짓말을 했다. 그러자 사샤가 결연한 얼굴로 말했다.

“우리 열심히 일해서, 돈을 많이 모아서, 게오르크를 다시 사 와요.”

사샤를 안은 채로 카렐은 큭, 하고 웃음이 터지려는 입을 가까스로 틀어막았다. 항상 서로 투닥거려서 거슬려 한다고만 여겼는데 당장 게오르크의 참견이 없어진다고 생각하니 퍽 섭섭한 모양이다.

카렐이 물었다.

“사샤, 게오르크가 필요해요?”

“모르겠어요. 게오르크는 가끔 쓸모 있어요…….”

‘이 말을 들으면 게오르크가 좋아할까, 아니면 빈정댈까. 역시 후자겠지. 자신은 가끔이 아니라 항상 쓸모 있다며 우길 것 같은데.’

아무튼 안식년이라고는 해도 완전히 회사를 등질 수는 없는 일이다. 백수 행세를 얼마나 하게 될지는 몰라도 안식년 기간에도 게오르크와 쭉 일하게 될 텐데, 더 완벽한 연기를 위해서는 그와도 미리 말을 맞춰 둘 필요성이 있었다.

그렇게 카렐은 충동적인 계획에 다소 진지하게 몰두했다. 그는 십대 시절에도 가까운 사람에 한정해 제법 장난기가 있던 편이었다. 오랜만에 되살아난 장난의 흥분감에 고양된 채로, 카렐은 더욱 맥없는 목소리를 꾸며냈다.

“사샤……. 돈은 조금 있습니까?”

“돈이요?”

사샤가 다시 흔들리는 눈을 들었다.

“네. 이제 봉급을 받을 수 없게 되었으니 저축으로 살아야 하는데…… 로드아일랜드의 대저택 유지비는 물론이고, 얼마 전 이사한 어퍼웨스트사이드 집의 관리비, 차 유지비에 카드 대금까지. 돈이 나갈 곳이 많아요. 이번 달은 그렇다 쳐도 앞으로 우리 데이트 비용은…….”

“카드 대금을 못 내면 카드를 쓰지 못하게 되는 거죠?”

“그렇죠.”

그 말에 사샤가 충격받은 얼굴을 했다. 귀엽지만 안쓰러웠다. 너무 괴롭힌다는 생각이 들어 카렐은 약간 양심의 가책을 느꼈다.

사샤가 지나치게 진지해지기 전에 이쯤에서 그만둘까?

카렐이 제 거짓말을 수습하기 위해 막 입을 뗐을 때였다. 사샤가 비장한 얼굴로 말했다.

“제가 졸업 공연의 주역이 되었잖아요? 그래서 특별후원금이 있어요. 학교에서 추가로 슈즈와 의상비가 나와요. 품위유지 돈도요.”

“아…… 그래요?”

“걱정 마세요, 카렐. 먹고 싶은 거 다 사 먹게 해 줄게요.”

“정말입니까?”

“네. 제가 애인을 위해서 그 정도는 할 수 있거든요?”

“너무 무리하는 것 아닌가요?”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서는 절대로 어려운 일이 아니에요.”

사샤의 눈이 퍽 진지했다. 카렐은 한숨을 쉬며 잠시 손으로 눈가를 가렸다. 장난기가 드글거리는 눈을 숨기지 못할 것 같았기 때문이다.

“정말 감동적입니다.”

“뭐 이 정도 가지고……. 저도 남자예요. 애인에게는 뭐든지 해요.”

“그렇군요. 제가 당신을 잠시나마 과소평가했습니다.”

“그러니까 걱정 말아요, 카렐.”

사샤가 카렐의 어깨에 양손을 올리고 꼬옥, 힘을 주었다. 두껍고 너른 어깨에 올려진 날씬한 흰 손이 또다시 위로의 손길로 도닥도닥, 움직인다.

“사랑스럽네요. 사샤.”

카렐은 의지로 가득 찬 사샤의 앙다문 턱 끝을 손가락으로 만지작거렸다. 청년 태가 나는데도 여전히 매끈하고 작은 턱이었다.

‘심장이 녹을 것처럼 사랑스러워.’

그런 사샤에게 입을 맞추며 카렐은 조금만, 아주 조금만 더 이 재미를 느끼자고 생각했다. 예정에 없이 이렇게 되어 버린 이유는 사샤가 지나치게 사랑스러운 모습을 보여주었기 때문이라고, 그 원인조차 상대에게 돌리는 합리화를 하면서.

그래도 사샤에게 사랑을 흠뻑 느낀 만큼 이 백수 선언의 끝에서 더 큰 보답으로 돌려주면 되지 않을까?

“이제 갈까요, 사샤.”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자리에서 일어났다. 그가 홀가분한 손길로 슈트 재킷을 걸치고 간단한 소지품을 챙기고 있을 때 사샤는 사연 많은 얼굴로 집무실 안을 한 바퀴 돌아보았다.

‘여기서 카렐과 인터뷰를 했었는데…….’

추억에 잠긴 사샤를 향해 카렐이 말했다.

“아, 오늘 우리…… 집까지는 택시를 타야 합니다.”

불현듯 떠오른 것을 카렐이 내뱉자 사샤는 펄쩍 뛰며 충격적인 반응을 보였다.

“네에? 차도 빼앗겼어요? 그게 회사에서 준 차였나요?”

“빼앗긴 것은 아니고…….”

회사에 두었던 차가 고장이 나서 잠시 수리를 맡겼을 뿐이다. 그리고 바로 이것이 애초에 준비했던 나쁜 소식이었다.

하지만 사샤는 다시금 동정 가득한 얼굴로 카렐의 양 뺨을 감싸며 울먹이기 시작했다. 직장도 잃고, 차도 없는 불쌍한 카렐! 그렇게 외치면서.

덩달아 변명할 의지를 잃어버린 카렐은 ‘맞습니다’ 하면서 그저 사샤에게 맞장구를 쳤다.

* * *

건물 바깥으로 나온 두 사람은 번잡한 타임스 스퀘어를 가로질렀다. 공사 중인 철근 가림막과 지하철역, 도로의 통행을 막은 가드와 도로에 떨어지는 혼잡한 간판 빛 사이를 걷는 것은 사샤는 물론이고 카렐에게도 오랜만이었다.

“사샤, 제가 한 가지 제안을 해도 될까요?”

택시를 잡기 전이었다. 긴 다리로 사슬 가드를 건너면서 카렐이 말했다.

“제가 돈이 없어 본 적이 없어서 이래도 되는지 모르겠지만.”

“뭐든 말해도 돼요!”

사샤가 끼어들며 크게 외쳤다. 카렐은 나직하게 웃으며 말했다.

“저녁으로 먹고 싶은 게 생겼는데, 돈을 내지 않는 쪽에도 메뉴를 제안할 권리가 있나요?”

“잘 모르겠어요. 그게 불법은 아니지 않을까요?”

“아…… 법적인 문제로 들어가나요.”

“아무튼 저도 많이 그랬던 것 같은데요.”

사샤가 뒷머리를 만지작거리며 멋쩍게 말했다. 카렐은 고개를 끄덕였다.

“생각해 보니 그렇군요.”

“그래서 카렐은 뭐가 먹고 싶은데요? 제가 사 줄게요.”

카렐이 넌지시 던진 말의 함의를 용케 알아챈 사샤가 외려 약간 들뜬 얼굴로 말해 왔다. 애인에게 뭔가 해 줄 수 있다는 사실로 뺨이 조금 상기된 그 흰 얼굴을 내려다보던 카렐은 조금 고민하는 척하다가 말했다.

“음…… 칵테일 새우?”

카렐은 한때 사샤가 자신에게 보냈던 편지를 떠올리며 대답했다. ‘품이유지돈을 받으면 맛읻는 새우를 사주겠다’던. 사샤는 자신이 보낸 편지의 내용을 잊었을지도 모르지만 카렐은 전부 기억하고 있었다.

“물론이죠. 제가 얼마든지 사 줄게요.”

그리고 두 사람은 함께 카렐의 단골 레스토랑에 갔다. 사샤는 당연한 듯 자연스럽게 코트 체크를 하고 가장 조용하고 쾌적한 상석으로 안내받는 카렐을 신기하게 바라보았다. 돈이 없었지만 그는 어디서나 당당한 애티튜드를 지니고 있었다. 배워야 할 점이었다.

메뉴판을 보면서 이것저것 주문하던 카렐은 술과 드링크 메뉴에 다다라서야 사샤의 얼굴을 바라보았다. 사샤는 값이 쓰여 있지 않은 해산물 메뉴를 골몰하는 눈길로 미간까지 찌푸리고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나 가격표가 붙은 페이지로 갔을 때는 미간의 고랑이 더 깊어졌다. 자신이 돈을 낸다고 생각하니 감당 가능한 영역인지 생각이 많아진 모양이다.

‘습관처럼 이런 곳에 왔군. 치폴레나 갈 것을.’

가볍게 한숨을 쉬며 카렐은 드링크 메뉴를 치웠다.

“술은 마시지 않을게요. 한 병에 220불이나 하는군요…….”

“네에? 220불이요? 그거 엄청 비싸네요…….”

사샤는 고개를 쳐들고 창백한 낯빛으로 말했다. 마른침이 도드라진 목울대로 꿀꺽 넘어가는 것이 보였다.

“꼬, 꼭 드시고 싶으시면 글라스로 먹어도 돼요. 한 잔 가격을 보니까 55불이에요.”

메뉴판을 보며 글라스 가격을 찾아낸 사샤의 얼굴에 화색이 돌았다.

“이 정도는 사 줄 수 있어요.”

높은 가격대에 쩔쩔매면서도 어떻게든 원하는 것을 해 주고 싶어 한다. 정말이지 믿음직스러운 연하 애인이었다. 카렐은 당장 사샤를 꼭 껴안고 정수리에 입 맞추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말했다.

“괜찮아요. 이 김에 술을 아예 끊어 버리는 것도 낫겠죠.”

“진심이에요?”

“그럼요. 그건 당신이 라테를 열 번을 마실 수 있는 돈인데…….”

“……일주일에 한 번만 먹으면 돼요…….”

카렐은 눈을 내리깔고 고개를 저었다. 그러고는 정중한 목소리를 한껏 꾸며냈다.

“아닙니다. 내가 술을 끊을게요. 백수인데 알코올 중독자까지 되면 안 되니까요. 그렇죠?”

“음. 알코올 중독자…….”

사샤는 침울해지더니 이내 고개를 끄덕이며 말했다.

“네, 그건 안 돼요. 우리 같이 커피나 마셔요.”

“알겠습니다.”

“아니면 호텔에 가서 생수병을 가져와요. 거긴 매일 물을 채워 주잖아요. 우리가 가져가도 잘 모르고 다시 채워 줄 거예요…….”

“그것도 좋은 생각이군요.”

“카렐…….”

사샤는 조금 감격한 목소리로 자리에서 스르륵 일어나더니 카렐에게 다가왔다. 그러더니 카렐의 단단한 목덜미를 가녀린 양팔로 껴안고는 이마를 비비며 감격한 목소리로 말했다.

“제 지갑 사정을 이해해 줘서 고마워요. 내 애인이 얼마나 사려 깊은지 깨달았어요. 우리 힘들지만 이 시기를 같이 이겨내기로 해요.”

“……사샤.”

카렐은 제 연기력이 들통날까 봐 겨우 이름만 부르고는 입을 꾹 다물었다. 목구멍을 간질이며 올라오는 웃음을 참기가 힘들었다. 억지로 웃음을 삼키는 카렐의 모습은 일견 목이 메어 울음을 참는 것처럼 보이기도 했다.

“사샤…….”

겨우 한고비를 참아낸 카렐이 나지막이 중얼거리며 사샤의 팔목을 손으로 찬찬히 어루만졌다. 사샤는 진지한 얼굴로 카렐의 뺨을 만지작대더니 또다시 어깨를 도닥여 주고는 제자리로 돌아갔다. 마치 고양이의 보송한 앞발로 위로받는 듯한 기분이었다.

식사를 마치고 사샤는 카렐보다 더 빠르게 계산서를 낚아채 가격을 확인했다. 그러고는 당당히 현금을 끼워서 웨이터에게 내밀었다.

레스토랑을 나오면서 카렐은 흘끔, 걸음이 느린 사샤를 돌아보았다. 사샤는 얇아진 지갑 안을 정신없이 들여다보며 남은 돈을 세고 있었다. 그 모습이 퍽 안쓰럽고 또 귀여웠다.

* * *

그날 밤, 사샤는 빨리 잠들지 못하고 뒤척거렸다.

카렐과 나란히 침대에 누웠지만 막막한 미래 때문에 잠이 오지 않았다. 마음이 수선스러웠다. 방 안은 로드아일랜드 저택에서 손수 옮겨 온 아름다운 미술 작품과 화병, 백 년이 넘는 가구들로 가득했다. 사샤는 그것들을 하나하나 바라보며 언젠가 저걸 하나씩 팔아 생활비를 마련해야 할지도 모른다는 생각도 했다.

그중 가장 마음을 아프게 하는 것은 단연코 회사에서 잘리고 만 카렐이었다.

사샤는 잠든 카렐을 곁에 두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

“카렐…… 불쌍한 카렐.”

그리고 먼저 잠들었던 카렐은 사샤의 흐느낌에 희미하게 잠이 깼다. 완전히 잠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그는 처음에는 사샤의 중얼거림이 꿈이라고 생각했다. 눈을 감은 채로 저를 더듬는 사샤의 손길을 느끼고는 습관적으로 그 손을 마주 잡아 주려 할 때였다.

“카렐…….”

사샤가 카렐의 두꺼운 허벅지를 더듬더듬 만지며 긴 한숨을 내뱉었다. 그러더니 상심한 목소리로 중얼거렸다.

“이제 가진 건 큰 고추뿐이야…….”

사샤의 말에 잠에서 확 끌려 나온 카렐은 갑자기 사레가 들려 반사적으로 기침을 할 뻔했다. 호흡을 억지로 삼키고 참아내는 것이 고역이었다. 카렐은 새빨개진 얼굴로 가까스로 잠든 척을 계속했다.

“불쌍한 카렐……. 내가 먹여 살릴 거야.”

“…….”

“빨리 발레단에 들어가야 할 텐데…….”

“…….”

“그래야 봉급을 받아서 와인도 마시고, 차도 사고, 게오르크도 다시 사 올 수 있는데…….”

사샤는 카렐의 옆에서 눈물을 글썽이며 울먹이다가, 잠시 후 통곡을 하기 시작했다. ‘어헝헝’ 하며 목 놓아 우는 사샤 때문에 카렐은 잠결에 입을 틀어막았다. 참지 못한 웃음소리가 비어져 나올까 봐 괜히 뒤척이면서.

“카렐…….”

사샤는 카렐의 팔뚝에 이마를 붙이고 조금 꿈지럭거리더니 금세 곤한 잠에 빠졌다. 사샤의 숨소리가 고르게 잦아든 후에야 카렐은 천천히 어둠 속에서 눈을 떴다. 울다 지쳐 불쌍한 얼굴로 잠이 든 사샤의 뺨을 애정 어린 손길로 어루만져 주다가, 팔베개를 해 주고는 다시 바르게 누웠다.

천장을 바라보는 카렐의 녹색 눈은 이채를 띠고 있었다.

“내가 가진 게 빅 딕(big dick)뿐이라…….”

* * *

다음 날, 카렐은 사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게으른 생활에 전념했다. 사샤에게 무직자임을 어필하기 위해 게오르크의 방문도 다음 주로 미루었다.

학교에 가는 사샤를 늦잠으로 대강 배웅하고는 아침을 거른 후 점심을 푸짐하게 먹었다. 오후에는 일광욕을 받으며 수영을 하다가 선베드에 드러누워 낮잠도 잤다. 이렇게 지내면 금세 태닝한 피부를 가지게 될 수 있을 것이다. 일에 전념하기 전, 이십대 초반의 카렐은 남유럽을 여행하거나 요트 위에서 온종일 누워 지내며 건강한 갈색 피부를 가꾸곤 했다.

그렇게 오후 내내 수영을 하고 다시 배불리 저녁을 먹은 카렐은 사샤의 귀가를 기다렸다. 일단은 가난한 행세를 하고 있기에, 차고에 잠자고 있는 슈퍼카를 운전해 사샤를 직접 데리러 가는 것은 이 연극이 끝난 뒤에 하기로 하고.

“카렐! 저 다녀왔어요!”

“어서 와요. 피곤하죠?”

사샤는 문가에 그림같이 기대어 저를 맞이하는 카렐을 보고는 전속력으로 달려왔다. 품에 열렬히 뛰어와 안기는 사샤를 받아 들면서 카렐은 이런 삶도 나쁘지 않을지도 모르겠다고 진심으로 생각했다. 먼 훗날 사샤가 대스타가 되면 자신은 언론과 대중의 관심에서 물러나 남은 재산이나 유유자적 굴리며 내조나 하는 것도 좋을 것 같았다.

저녁을 먹으며 그날 있었던 일에 대해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눈 두 사람은 일과를 마치고 사이좋게 잠자리에 들 준비를 했다.

사샤는 자기 전에는 꼭 간단한 스트레칭과 함께 발레 동작을 하곤 했다. 그런 사샤를 등 뒤에 두고 패드나 노트북을 통해 자기 전 업무 이슈를 체크하던 것이 평소 카렐의 마지막 일과였다. 그러나 당분간 일에서 해방된 기분을 만끽하기 위해 카렐은 일부러 아무것도 손대지 않고 일인용 소파에 그저 백수처럼 앉아 있었다. 스트레칭을 하는 사샤를 빤히 마주 보면서.

동작에 집중하던 사샤는 어느 순간부터 카렐과 눈이 마주치자 그 시선을 의식하면서 조금 부끄러워했다. 마침 사이드 스플릿을 하고 있던 사샤는 앞쪽 바닥에 납작한 아랫배가 닿도록 허리를 유연하게 눕힌 채였다. 완벽하게 턴 아웃 된 다리는 아주 쉽게 180도로 벌려져 있었다.

“도와줄까요?”

카렐의 질문에 사샤가 고개를 저었다.

“혼자 해도 괜찮아요. 그리고 이제 다 했어요.”

“난 이제 한가하니까 할 일이 없어서, 뭔가 도와주고 싶은데요.”

카렐의 말에 사샤의 눈썹이 아래로 축 떨어졌다. 카렐은 자신이 사샤의 동정심을 자극해 버렸다는 것을 눈치챘다.

“흠…… 음…….”

사샤는 사이드 스플릿으로 찢었던 자세에서 그대로 앞으로 엎드리며 다리를 천천히 뒤로 돌렸다. 그러더니 개구리 자세를 한 채로 잠시 생각에 잠겼다. 카렐에게 뭔가 일거리를 만들어 주어야겠다고 생각한 모양이었다.

잠시 후에 벌떡 일어난 사샤가 침대를 가리키며 말했다.

“그럼 와서 제 등 좀 마사지해 줄래요?”

“마사지라…….”

카렐은 자세를 고쳐 앉았다.

해 달라면 해 주어야겠지, 그렇게 생각하면서도 조금 망설이는 이유는 다른 데 있었다.

저 가녀리고 야들야들한 몸은 가벼운 스트레칭으로 따끈해져 있을 것이다. 마사지를 하며 등에 솟은 근육을 짚다 보면 호흡으로 인해 섬세한 근육이 오르내리는 것이 선명하게 보인다. 허리는 통증으로 가볍게 비틀리고 밭은 신음을 내뱉곤 했다. 종종 그 뒷모습이 떠올리게 만드는 어떤 행위 때문에 곤혹스러움을 느낄 때가 잦아지고 있었다.

티가 나게 몸이 작은 어릴 때는 양심의 가책이 더 커서 파렴치한 상상을 억누를 수 있었지만…….

그러나 카렐이 갈등하는 이유를 알지 못했는지 사샤는 또 다른 조건을 제시했다.

“10분에 1불씩 드릴게요.”

의외의 발언에 카렐의 고개가 천천히 사샤를 향했다.

“나를 고용해 주겠다는 건가요?”

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저도 넉넉지가 않아서 많이는 못 드려요. 하지만 당분간 돈 벌 구석이 없으니까 마사지로 돈을 버세요. 그건 카렐의 특기잖아요. 마음에 들면 가끔 팁도 드릴게요.”

“팁을 받을 수 있을 만큼 성심성의껏 해야겠군요.”

카렐은 그렇게 말하며 소파에 푹 앉아 있던 몸을 가뿐하게 일으켰다. 사샤는 크고 육중해 보이는 카렐의 몸이 생각보다 날렵하게 움직이는 것에 새삼 감탄하면서 그를 올려다보았다.

“누워요.”

사샤는 후다닥 침대 위로 올라갔다. 시키지도 않았는데 벌써 잠옷 상의를 벗고 맨등을 드러내고는 길게 엎드리고 있었다. 그걸 보면서 카렐은 또 한 번 곤란함을 느꼈다. 적당히 피부를 직접 만지지 않는 건식 마사지로 끝낼까 생각했는데 사샤는 오일 마사지를 기대하고 있는 것 같다.

“오일 마사지로 할까요?”

“네, 그게 좋아요. 노곤노곤하고 손이 잘 느껴져요…….”

“미끌거리는 거 싫어하잖아요.”

그러면서 카렐은 사샤의 귀에 대고 은밀히 속삭였다.

“젤을 많이 쓰는 건 그렇게 싫어하면서.”

“그거랑은 달라요!”

사샤는 반박하면서 벌떡 일어났다. 그러고는 가까운 곳에 있는 장에 진열된 오일을 들여다보면서 스스로 오일 종류를 골랐다. 이번에 사샤가 고른 것은 레몬그라스 향이었다.

“이건 향기가 나니까요.”

카렐은 몸 안에 넣는 젤도 향기는 있다고 반박하고 싶은 것을 참았다.

직접 오일을 가져온 사샤는 병의 뚜껑을 열고 카렐의 손바닥을 가져가 펼친 후, 주르륵 넘치도록 가득 따라주었다.

“오일을 많이 쓸수록 부드러워요.”

물론 그저 마사지를 기대하는 것이라는 것은 알지만, 사샤의 그런 행동이 무척 적극적인 유혹처럼 느껴지기도 해서 카렐은 흥미롭게 사샤를 바라보았다. 다시 제 아래에 꿈틀거리며 자리 잡는 사샤를 보며 카렐은 속으로 생각했다.

‘뭐가 다르다는 거지.’

결국 안에 담게 될 텐데…….

그러나 다가올 미래를 섣부르게 설명하는 대신 카렐은 고개를 내려 사샤의 뒷덜미에 먼저 가벼운 키스를 했다. 손길 대신 다가온 따스하고 건조한 입술에 사샤가 흠칫 몸을 떨었다.

손바닥에 넓게 오일을 펴 바른 카렐은 소매가 넓어 거치적거리는 실크 가운을 벗어냈다. 제 등허리 위로 후둑, 떨어지는 옷감의 가벼운 무게에 사샤가 또 흠칫거렸다. 날개뼈와 척추의 모양이 그대로 드러나는 가녀린 등판에 제법 굵은 척추 기립근이 보였다. 날개처럼 뻗은 탄탄한 광배근도. 오랜 기간을 훈련한 무용수의 근육들이다.

“긴장하고 있네요. 힘을 풀어요.”

카렐은 사샤의 겨드랑이 아래쪽을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힘이 들어가 경직한 근육을 부드럽게 잡으며 풀어 주자 오히려 접촉으로 인한 반동으로 조금 더 힘을 주는 것이 느껴졌다. 직후 사샤는 호흡을 하며 의식적으로 힘을 풀었다. ‘잘하고 있어요.’ 속삭이며 등을 넓게 힘주어 아래부터 위로 쭉 어루만지자 사샤의 입에서 신음이 흘렀다.

“하아…….”

“아픈가요?”

“아픈 건 아니고…….”

사샤는 뒤를 흘끔거리며 기분이 무척 야릇해서 그랬다는 말을 삼켰다. 카렐은 언제나처럼 신사적인 표정이었기 때문이다. 가운을 벗어 육감적인 곡선으로 가득 찬 근육질의 상체를 드러내고 있었지만 얼굴만큼은 꼭 책상 앞에 앉은 학자 같았다. 진중한 무게감이 어린 그의 얼굴을 보니 농담도 쏙 들어갔다.

‘이렇게 성실한 사람이 해고당하다니…….’

수시로 떠오르는 각박한 현실에 울적해진 사샤는 입을 다물고 다시 엎드렸다. 카렐의 정중하고 부드러운 손길이 이어졌다.

“압이 너무 세면 말을 해 줘요.”

“…….”

“마음에 들게 해서 꼭 팁을 받고 싶거든요.”

카렐이 귓바퀴를 살그머니 문질러서 사샤는 다시 ‘앗! 하고 짧은 비명을 질렀다. 손으로 만지는 것인데도 오일이 묻어 있어서 그런지 꼭 혀로 핥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등줄기를 검지로 그으며 따라 내려갈 때는 허리가 의지를 배반하고 제멋대로 비틀렸고, 엉덩이 바로 위를 꾹 누를 때는 신음이 터졌다.

“날개뼈 사이가 조금 뭉쳐 있네요. 여긴 익상거근이라고 합니다. 어깨를 의식적으로 내리다 보면 피로해지기 쉽죠. 겨드랑이 아래쪽도요.”

“으응, 흐읏…….”

“가장 심각한 건 바로 여기, 허리 아래예요. 왜 여기에 피로가 누적되었죠?”

“흐아…… 응, 거긴…….”

어느 순간 사샤는 정신없이 신음을 흘리며 베개에 얼굴을 문지르고 있었다. 카렐이 꾹 힘주어 누르는 허리 아래쪽은 평소에는 무리할 일이 없는 근육이었다. 하지만 왜 근육 뭉침이 생겼는지 알 것만 같다. 며칠 전 카렐과 관계를 가질 때 무리했기 때문이다.

그때 사샤는 두 다리를 허공으로 높이 들어 올려져 양 무릎이 귀에 닿을 정도로 허리가 꺾여서는 거칠게 삽입 당했다. 유연한 사샤에게 그다지 힘든 동작은 아니었지만, 문제는 카렐은 사정까지가 지나치게 길다는 점이었다. 허리가 완전히 꺾여 카렐의 체중을 받으니 힘들기도 했다. 관계 후에 카렐이 잘 달래 주면서 마사지도 해 주었고, 그의 조언대로 파스도 발랐지만 아직도 약간 후유증이 남아 있었다.

“엉덩이 아래 근육도 많이 뭉쳤군요.”

카렐이 사샤의 속옷을 신사적으로 들추었다. 평범한 드로어즈를 티 팬티가 되도록 골에 걸치고는 오일을 문지르며 말했다.

“무용수들은 특히 허벅지 뒤쪽 근육을 신경 써야 하죠. 여기는 다치면 정말 오래 가니까.”

“맞아요. 카렐은 정말 전문적이에요. 응, 으응…… 흐읏.”

“엉덩이에 긴장을 풀어 보세요. 안쪽을 마사지해 줄 테니까.”

잘 단련된 질 좋은 근육은 긴장을 완전히 풀었을 때 부드럽게 말랑거린다. 카렐은 손바닥을 넓게 펼쳐 피부 표면이 가볍게 흔들리도록 풀어 주다가 엄지손가락을 세워 둔근을 손가락 끝으로 꾹 지압해 주었다.

“흐, 너무 조아요…….”

평소 잘 만져질 일이 없는 깊은 근육에 닿아 오는 손길에 사샤는 홍알거리며 잔뜩 녹는 소리를 냈다. 이어 카렐은 큰 손을 펼쳐 엉덩이 바로 아래, 허벅지와 이어진 곳을 꾸욱 힘주어 눌렀다. 그때였다.

방심하는 순간 카렐의 손이 허벅지 안쪽으로 쑥 미끄러지며 회음 가까이에 손가락이 푹 꽂혔다.

“앗!”

사샤가 번쩍 허리를 쳐들었다. 어리둥절해하는 얼굴로 비명을 질렀다.

“카렐? 방금 뭐예요?”

사샤가 뒤를 돌아보자 카렐은 눈을 내리깔며 진지하게 사과했다.

“미안해요. 오일이 너무 많아서 미끄럽네요.”

카렐의 정직한 얼굴에 일부러 그랬냐고는 추호도 물을 수 없는 기분이 된 사샤는 다시 엉금엉금 엎드렸다.

“으응, 괘, 괜찮아요.”

“놀라지 않았죠?”

“네…….”

카렐은 다시 정중하고 차분한 손길로 사샤의 다리 근육을 지압했다. 엉덩이 바로 윗부분에 양손을 겹쳐 올리고는 체중을 실어 눌렀다. 끄응, 한숨을 쉬면서 사샤는 다시 몸의 긴장을 풀었다.

“카렐…… 저기.”

“네?”

“엉덩이에 뭐가 닿아요.”

“뭐가 말이죠?”

“미끌거리고 뜨거운 거요. 그것도 카렐 손인가요?”

사샤는 의아해했다. 현재 카렐의 양손은 사샤의 등허리 위에 신사적으로 놓여 있었다. 그러면 엉덩이골 사이를 자꾸 툭, 툭 건드리는 미끌거리는 것은 무엇이란 말인가?

“아, 이런.”

카렐이 혀를 찼다.

“미안합니다. 이러려던 게 아닌데.”

“뭐가요?”

“빠져나왔네요.”

설마?

사샤는 제 엉덩이 아래를 자꾸만 꾸욱, 꾸욱 누르는 것이 설마 자신이 예상한 그것인가 의심했다. 하지만 의심하기에 카렐의 목소리는 지나치게 절제되어 있었고 말투도 무척 정중했다. 흥분감은 조금도 찾아볼 수 없는 매너 있는 목소리였다.

주어가 확실하지 않은 설명에 의구심을 느낀 사샤는 고개를 뒤로 돌렸다. 그러고는 말 그대로 갑갑한 속옷 틈에서 ‘삐져나온’ 그 거대한 것이 꺼덕이고 있는 것을 발견했다.

“어, 허억……. 카렐, 저기 그건…….”

사샤는 의외의 상황에 말까지 더듬으며 눈을 크게 떴다. 그러자 카렐이 가라앉은 눈으로 시선을 마주쳐 왔다.

“아, 이건 신경 쓰지 않아도 됩니다.”

신경 쓰지 않아도 된다고?

사샤는 어안이 벙벙해져 카렐의 얼굴을 관찰했다. 그러나 카렐은 정말로 아무렇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참을 만한 것 같기도 했다. 그럴 리 없을 정도로 팽창되어 있는데도 불구하고.

사샤는 카렐에게 안쓰러움을 느꼈다.

“아…… 음, 카렐? 저기…… 그게 엄청 크고, 그래서 되게 힘들겠어요.”

“맞아요. 무척 번거롭죠. 마음대로 되지 않고.”

“저런…….”

동정심이 밀려왔다. 자연 상태의 그것을 보니 카렐이 항상 바지를 입고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 조금 불쌍하게 느껴질 정도였다. 저 정도라면 카렐은 아랫도리에 감옥을 차고 다니는 기분일 것이다.

“지금 완전히 커졌는데 정말 괜찮아요? 아무렇지 않아요?”

사샤는 재차 물었다.

“흠…… 참을 만합니다. 당신이 잠들고 나면 알아서 빼고 올게요.”

“제가 잠들고 나면요?”

“네. 지금은 마사지 중이지 않습니까. 제대로 된 마사지를 해서, 당신을 만족시켜서 팁을 받고 싶어요.”

카렐의 진실한 목소리와 그 눈에 사샤는 감명받고 말았다. 10분에 1달러를 벌기 위해 이토록 성실하게 마사지에 임하는 무직자 연인을 위로해 주고 싶기도 했다.

그래서 사샤는 스르륵 몸을 일으키고는 전신에 오일이 발린 미끌거린 몸으로 카렐에게 안겼다.

“지금 빼도 괜찮아요. 카렐.”

사샤는 카렐의 귀에다 속살거렸다. 그를 도와주고 싶은 마음이 솟구쳤다. 하지만 카렐은 난감해하며 몸을 틀었다.

“사샤…… 이러지 말아요. 나는 일하는 중이에요.”

“알아요. 그래도 괴로워 보여서요. 제가 도와주고 싶어요.”

“그러지 않아도 돼요. 정말로 참을 만한…… 읏.”

사샤는 아랑곳하지 않고 카렐의 속옷을 완전히 벗기고는 그의 것 위에 부드럽게 올라탔다. 허벅지와 엉덩이, 회음부까지 오일에 미끌거려 마치 그네를 타듯 자극할 수 있었다. 카렐을 도와주는 것인데도 사샤마저 덩달아 기분이 야릇해졌다.

“이 시간도 계산에 더해도 돼요. 이것도 마사지로 쳐요.”

“……정말입니까?”

“네. 제가 카렐을 10분에 1달러에 살게요.”

사샤의 허락 아닌 허락이 떨어지는 순간이었다.

그래도 카렐은 한 번은 튕겼다.

“내일도 학교에 가야 하지 않나요.”

카렐이 학교를 들먹거리자 사샤가 갑자기 돌변해서 예민하게 반응했다.

“카렐? 우리 안 그래도 그거에 대해서 좀 얘기를 해 봐야 돼요.”

“무슨 이야기를요?”

“보세요! 저는 키도, 몸무게도, 근육도 많이 늘었잖아요. 컨디션 조절도 거의 완벽하게 할 수 있고 이 커다란 걸 몸에 넣었다고 몸살로 앓지도 않아요.”

“…….”

카렐이 말없이 사샤를 응시하자 사샤가 조금 누그러든 목소리로 말을 이었다.

“제 말은, 규칙을 다 없애자는 건 아니에요. 주말에만 하는 거…… 그거만 제외하면 좋겠어요.”

“그랬으면 좋겠나요?”

“네.”

사샤가 고개를 끄덕였다.

“우리가 섹스파트너가 아니고 연인인 이상, 하고 싶을 때 사랑을 나눌 권리가 있어요.”

사샤가 연설자처럼 목소리를 드높였다. 사샤의 입을 큰 손으로 턱, 틀어막은 카렐이 중얼거렸다.

“그것참 고맙군요.”

“으읍…….”

“기꺼이 그 제안을 받아들이겠습니다.”

이내 카렐은 사샤를 번쩍 들어 올려 눕히고 나서는 제 몸에도 오일을 펴 발랐다. 사샤가 넋을 놓은 눈으로 제 앞에서 세미 스트립쇼를 하고 있는 카렐을 바라보았다. 포르노를 처음 접한 지 얼마 되지 않은 사샤에게는 지나친 시각적 자극이었다.

온몸에 오일을 고루 펴 발라 빛나는 피부를 가지게 된 카렐은, 이내 사샤의 몸 위에 제 몸을 겹친 후 온몸으로 마사지를 해 주었다. 새로운 자극에 사샤는 눈앞이 핑핑 도는 듯한 감각을 느꼈다. 카렐이 가진 훌륭한 근육의 굴곡이 피부에 스쳤다. 그저 스치는 것만으로도 황홀하고 체온이 따뜻하게 전해져 전신이 녹을 것만 같았다.

“아, 응…… 카렐, 너무 좋아요. 아아…….”

“만족하는 것 같아 다행입니다.”

“으응, 좋아요. 계속 이렇게만 하면 팁을, 팁을 많이 드릴게요.”

사샤는 지갑 안에 남은 현금과, 만든 지 얼마 되지 않아서 아직 돈이 적은 은행 예금을 떠올리며 그렇게 말했다. 그러자 카렐이 무척 고맙다는 듯이 더욱 열렬하게 사샤의 몸을 마찰했다. 사샤는 남자에게 홀려 재산을 탕진하는 이들의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긴장이 완전히 풀린 사샤의 몸은 이내 흐물흐물 연체동물처럼 부드러워졌다. 심지어 전신에 쏟아지는 자극 때문에 엉덩이 안쪽 입구가 카렐의 두꺼운 손가락으로 헤집어지는 줄조차 몰랐다.

겉이나 안이나 할 것 없이 질척하게 오일이 발린 입구가 저항감 없이 손가락을 세 개까지 받아들였을 때, 카렐은 그 틈 안에 왼손 엄지도 조심스레 넣어 보았다.

양손으로 조심스레 벌린 분홍빛 안쪽이 우물거리고 있었다. 카렐은 망설임 없이 그 부드러운 몸 안쪽에 자신의 것을 푹 꽂아 넣었다.

“아!”

사샤가 작게 비명을 지르면서 고개를 푹 떨구었다.

“아픈가요?”

사샤가 크게 도리질을 쳤다. 아프기는커녕 아까부터 계속 근질거리던 감각을 해소해 주는 삽입에 거의 해방감에 가까운 기분을 느끼고 있었다. 사샤는 흐윽, 하고 눈물을 찔끔 흘렸다.

“아으, 읏, 흣, 으윽…… 하악.”

“어때요. 안쪽까지 닿나요?”

“기, 깊어요……. 아, 앗, 아앗!”

“전희가 길어서 그런지 아주 무리 없이 들어갔어요.”

그 순간 카렐은 홀로 실언을 자각했다. 무의식중에 마사지를 전희 취급했던 것을 입 밖으로 내고 만 것이다. 그러나 다행히도 쾌락 속에서 허우적대고 있던 맹한 사샤는 전혀 눈치채지 못하는 것 같았다. 그저 몸을 덜덜 떨면서 더 자극을 느끼고 싶어 어쩔 줄 몰라 하고 있었다.

“움직여요, 움직여 주세요. 카렐. 으응…….”

“좋아요. 어떻게 움직여 줄까요?”

“더 빠르게, 그리고 깊이…… 아!”

사샤의 요구에 맞추어 허리를 퍽, 박아 넣으면서 카렐은 제 아래의 아름다운 얼굴을 관찰했다. 속눈썹에 방울진 눈물을 달고 있는 긴 눈매와 발갛게 달아오른 눈 밑과 뺨을. 벌어진 분홍색 입술과 그 안쪽 점막은 방금 삽입한 깊은 곳과 닮았다. 카렐은 사샤가 더 입을 벌리도록 손을 뻗어 사샤의 턱을 쓰다듬으며 다정하게 반응을 이끌었다.

먼저 입술을 엄지손가락으로 문지르고 보드라운 혀와 말랑거리는 입 안쪽을 손가락으로 차례로 더듬었다. 손가락을 넣자 사샤는 반사적으로 그것을 빨기 시작했다. 그렇게 천천히 엄지를 깊게 넣었다가 빼기를 반복하며 카렐은 위아래로 삽입하는 감촉을 즐겼다. 아래는 진득하게 넣었다가 빼며 느린 자극을 주고, 위는 달래듯이 손가락을 빨게 했다.

“이렇게 깊게 넣으면 역합니까?”

“우음…… 읍.”

혀뿌리 안쪽을 살짝 건드리자 사샤의 눈가가 확 붉어졌다. 하지만 뱉어내거나 구역질하지 않고 참을성 있게 그 순간을 넘겼다. 카렐은 사샤를 칭찬하면서 콧잔등에 버드키스를 남겼다. 사샤가 얼굴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

“자질이 있네요.”

“……?”

“더 즐거운 걸 해 보고 싶어요?”

“……으음, 즐거운 거요?”

“근육을 늘리는 걸 좋아하죠? 찌릿한 고통을 참는 것도…….”

“네, 좋아해요.”

“그럼 도전해 봅시다.”

카렐이 언급한 ‘도전’이라는 단어에 사샤가 발그레한 뺨으로 호기 어린 얼굴을 했다.

“도전이요?”

“네, 아무나 못 하는 거죠.”

“저는 할 수 있을 것 같은데요?”

“자신만만하군요.”

카렐은 씩 웃으며 성기를 빼내기 전에 사샤의 안에 삽입한 채로 한 번을 꾹 비비듯이 눌렀다. 사샤가 움찔거리며 등을 떨고 신음하며 솔직한 반응을 보여주었다. 이어 카렐은 약간 아쉬움을 느끼며 아래에서 성기를 쑥 뽑아내고 사샤의 뺨을 다정히 붙잡아 몸을 일으키도록 인도했다. 천천히 이끌어 제 것을 빨 수 있는 위치로 유도하자 무언가를 짐작한 사샤가 뺨을 붉혔다.

“그런데요, 카렐. 이제는 제가 세울 필요가 없을 것 같아요. 이미 아주…… 아주 훌륭해요.”

아무래도 사샤는 펠라티오를 ‘세우는 것’으로 인지한 듯하다. 많은 포르노의 전희가 그렇게 시작하니 착각할 만도 했다. 하나같이 지루한 영상들이었다.

“그래요?”

“네. 엄청 단단하고요.”

사샤가 손을 펼쳐 카렐의 기둥을 문질렀다. 제법 늘씬하고 긴 손가락인데도 둘레가 한 손에 다 감기지 않았다.

“그래요. 핥아서 세울 필요는 없죠. 내가 말하는 건 그다음 단계…….”

“…….”

“여기로 삼킬 수 있을까요?”

카렐은 사샤의 가녀린 목울대를 손바닥으로 어루만지며 물었다. 사샤는 생각지도 못했다는 얼굴로 카렐을 바라보았다. 그 표정에 카렐은 심장이 요동치는 것을 느꼈다. 상대가 곤란해할수록 기대감이 커지는, 위험한 본능이 머리를 치켜들려 하고 있었다.

“아…….”

“무리일 것 같으면 도중에 그만둬도 됩니다.”

“…….”

“한 번에 성공하는 사람은 별로 없어요. 훈련이 필요하기도 하고.”

“…….”

“무엇보다 오늘은 당신이 서비스를 받는 입장이기도 하니까.”

더럽히는 것이 죄악처럼 느껴지는 예술품 같은 얼굴은 뺨을 붉히며 눈을 내리깔았다가 카렐의 것을 뚫어져라 바라보았다.

카렐은 그 부드럽고 창백한 흰 뺨에 흥분을 아무렇게나 문지르고 싶은 것을 참으면서 사샤의 동그란 뒤통수를 부드럽게 어루만졌다. 사샤가 충분히 숙고할 수 있는 시간을 갖도록.

그때였다.

“그러면 이렇게 해요.”

사샤가 눈을 들어 올렸다.

“제가 만약에 이걸 잘해 내면 저한테 10분에 1달러…… 아니, 50센트를 주세요.”

“네?”

이상한 계산법에 카렐이 눈썹을 치켜올렸다.

“절대 카, 카렐에게 쓰는 돈이 아까워서 그런 건 아니에요. 하지만 이건 제가 해야 하는 일이잖아요? 맞죠?”

“그렇지요.”

“그러니까 우리 공평하게 주고받아요.”

“좋아요. 그런데 왜 50센트죠?”

“음…… 왜냐하면 솔직하게, 저도 하고 싶기 때문이에요.”

순수한 대답이었다. 문득 카렐은 사샤의 등 뒤에 가만히 손을 대 보았다. 흉곽이 좁은 몸은 등으로도 심장 박동을 느낄 수 있을 만큼 날씬하다.

확실히 사샤는 새로운 도전을 앞두고 고양감을 느끼고 있는 것 같았다. 자신이 충동질시킨 것은 사실이지만 싫어한다면 강제로 해 볼 생각은 추호도 없었다.

세상에, 10분에 50센트로 사샤 세드린과 구강성교를 할 수 있다니.

금전으로 치환할 수 없는 쾌락을 싸구려 동전과 맞바꾼다는 사실이 기묘했다. 만약, 정말 돈을 주고 거래할 수 있다면 자신은 1초에 백만 불도 낼 수 있었을 것이다.

카렐은 사샤의 순진함이 제 안의 변태성을 잘못된 방향으로 자극하고 있음을 감지했다. 경험을 쌓을 만큼 쌓아서 어느 정도 관계에 숙련된 서른셋이 아니었다면, 제 흥분보다 상대에 대한 배려를 우선하는 방법을 일찍이 깨우치지 못했다면 자신은 오늘 어떤 식으로든 사샤를 상처 입혔을 것이다.

행위에 앞서 카렐은 사샤의 앞 머리카락을 소중하게 넘기며 키스를 내렸다.

그것을 시작하라는 신호로 받아들인 사샤는 마른침을 꿀꺽 넘겼다. 그러고는 미끄러운 점액질로 푹 젖어 빛나는 귀두와 성기의 휜 방향, 그리고 지문처럼 두드러진 맥을 가지고 있는 혈관을 관찰했다. 숨결이 느껴지는 거리에서 사샤가 금방이라도 키스할 것처럼 제 좆을 관찰하는 것을 보며 카렐은 호흡을 골랐다.

이내 사샤는 크게 입을 벌리고 이를 세우지 않으려 노력하며 좆머리를 물었다. 입 안에 담고 이렇게 하는 것이 맞느냐는 듯이 카렐을 올려다보았다. 카렐은 침착한 눈으로 아주 조금 고개를 끄덕였다.

“물을 벌컥벌컥 마실 때를 생각하면서 그렇게 목구멍을 열어요. 천천히…….”

“음, 음…….”

말랑하고 보드라운 혀가 귀두를 반쯤 감쌌다. 끝이 혀뿌리에 닿자 사샤의 눈시울이 붉어졌다. 카렐은 사샤의 목덜미를 부드럽게 문질러 주었다.

“이제 목젖에 닿을 겁니다. 구역질이 나면 뱉어도 돼요. 하지만 참고 싶다면 목을 더 열어요. 갑자기 침을 삼키면 안이 자극당할 수 있으니까. 고비를 넘기면 수월해질 겁니다. 아주 천천히…… 네. 그렇게.”

“우음…….”

사샤는 막힌 목 대신 코를 울리며 신음을 흘렸다. 어느새 눈가에는 그렁그렁 눈물이 매달려 있었다. 사샤는 파들거리는 눈꺼풀을 내리깔았다. 믿기지 않게도 사샤는 단번에 성공시켰다. 안쪽으로 쑥 미끄러져 들어간 성기가 자연히 식도를 따라 휘었다. 카렐은 자신이 쓰다듬고 있던 목덜미가 불룩해진 것을 느끼며 크게 심호흡을 했다. 애써 흥분을 가라앉혔다.

“잘했어요. 정말 잘했어요.”

칭찬해 주면서 카렐은 사샤의 작은 입에서 성기를 쑥 빼냈다. 갑작스레 호흡이 편해지자 사샤가 캑캑거리면서 숨을 몰아쉬었다. 와륵, 딸려 나온 타액을 입술에 매달고는 코가 막힌 소리를 내면서 킁, 하고 헛기침을 했다. 카렐은 그런 사샤의 몸을 붙들고 도닥이며 꼭 안아 주었다. 괴로운 행위 뒤에는 꼭 보상이 필요한 법이니.

“하아, 하아, 카렐…….”

“힘들었어요?”

“아니요. 그렇게 힘들지는…… 흐읏…….”

“이런…….”

카렐은 사샤의 앞 역시 불룩해진 것을 발견했다. 그걸 보자마자 이성의 끈이 퉁, 끊기면서 시야가 깜깜해지는 듯한 기분이 들었다. 자신이 본 게 맞는다면 사샤는 목 안으로 남자의 좆을 빨면서 앞을 세우고 있던 것이다.

카렐은 다소 집요하게 사샤에게 물었다. 목으로 느꼈느냐고, 이 안으로 거대한 것이 헤집고 들어갈 때 괴롭기만 한 것이 아니라 무언가 흥분되는 점이 있었느냐고.

하지만 사샤는 그저 고개를 가로젓기만 했다. 카렐이 만져 주는 손길에 무척 흥분이 되어 머리가 잘 돌아가지 않았다.

“흐음, 모르겠어요. 으응…….”

사샤가 몸을 비틀며 카렐에게 매달렸다. 가슴팍에 앞이마를 비비다가 조심스럽게 물었다.

“카렐, 그런데 어떡해요? 제가 10분을 못 채웠는데…….”

“…….”

“50센트를 주실 건가요?”

사샤가 걱정이 묻어나는 눈초리로 물었다.

“하…….”

카렐은 고개를 꺾으며 천장을 바라보았다. 머리가 핑 도는 듯했다.

‘딴에는 진지하다는 점이 가장 미치게 해.’

카렐은 이미 너무 오래 참은 상태였다. 연인은 쾌락으로 인해 제 품 안에서 잔뜩 흐트러져 있었고, 심지어 싸구려 보상을 갈구해 댔다. 그리고 카렐은 50센트보다도 사샤가 당장 필요로 하는 것이 무엇인지 알고 있었다.

“물론이죠.”

직후, 카렐은 주저 없이 사샤의 몸을 눕히고 다리를 벌리게 해 안으로 쑥 삽입했다. 사샤는 먹히는 비명을 지르면서도 저항 없이 몸을 내주었다. 자극에 잔뜩 예민해진 몸은 단 한 번의 깊은 삽입으로도 크게 등을 떨었다.

“그건 걱정하지 말아요. 후우…… 내가 비록, 무직, 자여서 돈이…… 없긴, 하지만…… 그렇게 아량이 없는, 사람은, 아니니까.”

“아, 앗, 아앗, 윽, 으응, 카렐, 카렐!”

“내 주머니들을 잘, 뒤져 봐요. 50센트는, 있을 테니.”

“흐응, 읏, 으으, 응…… 카렐…….”

“동전이 나오면 당신이, 전부, 가져요.”

격한 삽입에 말이 뚝, 뚝 끊겼다. 그에 맞춰 사샤도 쾌락 섞인 신음을 뱉어댔다. 작은 엉덩이 안에 굵은 성기가 빠듯하게 꽂히는 음란한 광경을 보며 카렐은 입술을 깨물었다. 관자놀이를 타고 흐른 땀이 턱 끝에서 똑 떨어졌다.

“어때요. 이 서비스는 마음에 들어요?”

“으응, 읏…… 너무, 너무 좋아요. 카렐. 아아…….”

지나치게 느껴서 거의 울먹거리고 있는 사샤를 보면서 카렐은 생각했다. 사샤가 잠들고 나면 제 셔츠와 재킷은 물론이고 바지나 양말 틈새 모든 곳에 동전을 잔뜩 넣어 놔야겠다고.

‘카렐 코인’을 채굴하면서 하룻밤 안에 의도치 않게 큰 부자가 된 사샤가 저를 매일 밤 전속 마사지사로 고용할 수 있게끔 말이다.

* * *

그리고 다음 날.

사샤는 잠에서 깨자마자 아침 일찍 얼얼한 허리를 쥐고 카렐의 드레스룸으로 향했다. 혹시 있을지도 모르는 동전을 줍기 위해.

“어?!”

그리고 무작정 아무 바지 안에 손을 넣어 본 사샤는 깜짝 놀랐다. 손을 넣자마자 손끝에 차가운 금속 감촉이 느껴졌기 때문이다. 사샤는 바지 주머니에 더 깊이 손을 넣어 보았다. 그러자 동전이 수북하게 잡혔다.

“와아…….”

주먹 한가득 동전이 딸려 나왔다. 보물이라도 찾은 기분이었다. 사샤는 이 행운을 미심쩍어하면서 다른 재킷을 뒤집어 탈탈 털었다. 그러자 바닥으로 동전이 와르르 떨어져 여기저기로 굴러갔다.

“와아……!”

사샤는 크게 흥분했다. 이 드레스룸은 보물섬이었다! 그다음에도, 또 그다음에도. 옷가지를 털면 털수록 동전이 거의 무한대에 가깝게 쏟아져 나왔다. 바닥에 떨어져 흩어진 동전이 너무 많아서 하나하나 다 줍는 것도 일이었다. 그것들을 정신없이 쓸어모으며 사샤는 감탄하고 또 감탄했다.

‘부자는 온 주머니에 동전을 이렇게 가득 넣고 다니는구나. 정말 대단해…….’

언제나 카렐에게서 돈 냄새가 진동하던 것은 착각이 아니라 물리적 진실이었던 것이다. 양 주먹에 동전을 다 쥘 수가 없어서, 사샤는 모은 동전들을 뒤집은 모자 안에 모조리 부어 담은 뒤 드레스룸에서 나왔다.

그리고 그날 오후, 카렐은 분명 주머니가 두둑해졌을 사샤에게 슬쩍 물었다.

“50센트가 있던가요?”

사샤는 우물쭈물 대답을 미루었다. 그 동전이 원래는 카렐의 것이라는 생각과, 이 보물 동전들을 독차지하고 싶다는 생각 사이에서 갈등을 겪었기 때문이다.

“네, 음…… 조금 있었어요.”

“조금?”

“네. 그건 그렇고, 어제 마사지 대금을 드릴게요.”

얼른 화제를 돌린 사샤는 15달러를 동전으로 내밀었다. 어제 마사지와 섹스를 합친 150분만큼의 대금이었다. 무척 정확한 계산법이었다.

“흐음…….”

카렐은 동전을 받아 들고는 한 번도 사용하지 않아 보석처럼 앞뒷면이 깨끗하게 빛나는 동전을 바라보았다. 어제 새벽, 사샤가 잠들고 나서 급히 숨겼던 동전 일부를 그대로 돌려받은 카렐은 흡족한 표정을 지었다.

“이용해 주셔서 감사합니다. 덕분에 오늘 치폴레에서 한 끼를 먹을 수 있게 됐어요. 아, 이 돈이면 소다도 마실 수 있겠군요.”

카렐의 말에 사샤의 안색이 밝아졌다.

“카렐, 카렐은 치폴레에서 어떻게 먹는 게 제일 좋아요?”

“음, 전 브리또볼을 제일 좋아합니다.”

“저도 그래요. 우리 똑같아요.”

카렐과 대화를 나누며 사샤는 속으로만 생각했다. ‘동전이 원래 카렐의 것이면 어떤가? 기억도 못 하는 것 같은데!’ 그러면서 깔끔히 죄책감을 털어낼 좋은 방법을 떠올렸다. 앞으로도 카렐에게 매일 마사지를 부탁하면 된다. 그러면 이 동전은 도로 카렐에게 가게 될 것이고. 결론적으로 둘 다 이득을 보게 된다. 사샤는 스스로의 계획에 만족스러워했다.

“하지만…….”

그러나 바로 다음 순간 카렐이 한숨을 폭, 내뱉어 사샤는 조금 멈칫했다.

“이렇게 적게 벌면 저금은 꿈도 못 꾸겠어요. 하루 벌어 한 끼를 고작 먹는 수준이군요.”

그건 사실이었다.

“차는 어느 세월에 사지요? 또 게오르크는 언제 데려오고?”

“아…….”

카렐의 말에 공감한 나머지 사샤는 조금 전 들떴던 것도 잊고 약간 풀이 죽었다. 그런 사샤의 얼굴을 살피던 카렐이 이어서 말했다.

“더 빨리 돈을 벌려면, 역시 나가서 다른 사람들에게도 마사지 서비스를 해 주는 게 좋겠죠? 사샤 당신이 학교에 갔을 때 말이에요. 집에만 있으려니 심심하기도 하고, 당신 말대로 이건 내 얼마 안 되는 특기 중 하나니까 장점을 잘 살려서…….”

“그건 안 돼요!”

사샤가 벼락같이 외쳤다.

“왜죠?”

“그건 안 돼요…….”

“사샤, 하루에 15달러만 겨우 벌어서는 입에 풀칠도 못 해요. 그리고 사람이 매일 치폴레만 먹을 수는 없잖습니까. 저는 가끔은 레스토랑에도 가고 싶은데.”

“아, 안 돼요……. 카렐, 다른 사람들의 몸을 만지는 건 안 돼요.”

사샤가 쩔쩔매며 카렐에게 매달렸다. 카렐은 내심 흐뭇해졌으면서도 일부러 말을 멈추지 않았다.

“마사지를 하려면 상대방의 몸을 만질 수밖에 없는데. 만지지 않고 어떻게 마사지를 하죠?”

“그럼 마사지를 하지 마세요! 나 말고 아무에게도 해 주지 마세요.”

“하루에 15달러만 벌어서는 안 되는, 윽!”

도돌이표를 찍듯이 반복되는 대화에 사샤는 갑갑함을 느꼈다. 태연하게 말하는 카렐의 무릎 위로 뛰어 올라타며 카렐의 입을 손으로 막아 버렸다. 이제는 제법 근육 무게가 나가는 몸을 받아 들면서 카렐은 사샤의 허리를 단단히 받쳤다.

“제가 24시간 카렐을 살게요. 그러니까 제발 그런 말은 하지 마세요.”

“왜죠?”

“왜냐니요. 카렐은 너무 ‘육감적’이고 ‘원초적’이에요. 그건 사람에 따라서는 ‘위험한 유혹’이 될 수가 있어요.”

사샤가 포르노나 19세 미만 관람 불가의 영화를 통해서 배웠을 게 분명한 단어를 나열했다. 카렐은 어쩔 수 없다는 듯이 한숨을 내쉬면서도 사샤의 뺨에 키스해 주었다.

“이해했어요. 질투가 날 거라는 말이군요.”

“네, 맞아요…….”

순순히 수긍하는 사샤가 깜찍했다. 카렐은 흐뭇한 마음으로 사샤에게 물었다.

“그럼 오늘도 마사지를 이용할 생각이 있나요?”

“물론이죠?”

“당신, 제법 돈이 있나 보군요.”

카렐이 괜히 미심쩍은 표정으로 묻자 자존심이 건드려진 사샤가 강한 어조로 말했다.

“그럼요. 제가 그 정도 돈은 있거든요……!”

“흠, 내가 애인을 아주 잘 두었네요.”

카렐은 사샤의 뺨을 검지로 톡 건드렸다.

“저는 돈을 아주 많이 벌고 싶어서 긴 시간을 채워 줄 상대가 필요한데…….”

그 말에 사샤는 그게 바로 자신이라고 말하고 싶어 하는 열렬한 눈으로 카렐을 올려다보았다. 카렐은 씩 웃으며 대답했다.

“거래 성사입니다.”

다음 날도, 그다음 날도 드레스룸의 재킷과 바지 주머니에는 다시 동전이 채워졌다. 아무리 둔감한 사샤라도 거기에 직접 동전을 들이붓고 있는 사람이 따로 존재한다는 것을 알아챌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런 짓을 할 만한 사람은 단 한 명뿐이었다.

결국 3일째 되는 날, 사샤는 동전 꾸러미를 잔뜩 손에 든 채로 카렐에게 달려가서 곧장 진실을 추궁했다. 그러나 카렐은 시침을 떼며 ‘미국 부자들은 원래 세계 3차 대전 등의 위기에 대비해 동전을 쌓아 둔다.’며 아무도 믿지 않을 성의 없는 거짓말을 해댔다. 그리고 사샤는 의구심에 휩싸인 채로도 동전 수집을 멈추지 않았다. 은행에서 갓 바꿔 온 반짝이는 새 동전들은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만족감을 주었기 때문에.

며칠 만에 사샤의 작은 저금통은 동전으로 가득 찼다. 저금통에 동전이 더는 들어가지 않아서 콜라 페트병의 입구를 잘라 안을 대신 채워 넣어야 할 정도였다. 고작 그것만으로도 사샤는 부자가 된 기분을 느꼈다.

그리고 그때쯤에는 사샤 역시 카렐에게 여유를 부릴 만큼의 재산이 남아 있다는 것을 알아채고도 남았다. 얼마나 많은지는 추정할 수 없었지만 적어도 치폴레로 연명하지 않을 정도라는 것만은 확실했다.

그걸 알고 난 사샤는 카렐이 빈털터리가 되었다며 펑펑 울던 자신을 그저 가만히 내버려 두던 카렐에게 조금 화가 나기도 했다. 그 교활한 남자는 분명히 울고 있던 제 뒤에서 미소 짓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동시에 카렐을 거지 취급 하면서 그를 말도 안 되는 가격에 고용한 것도 사실이었기 때문에, 공평하게 서로 주고받은 셈 치기로 하고 넘어갔다.

그리고 이듬해, 카렐이 백수가 된 것이 아니라 안식년을 가졌을 뿐이라는 사실마저 드러난 뒤에도 두 사람의 암묵적 약속은 쭉 지속되었다. 카렐이 사샤에게 봉사를 해 줄 때는 10분에 1달러, 그리고 사샤가 카렐에게 봉사를 해 줄 때는 10분에 2달러로. (처음에는 50센트였지만 협상의 극적인 타결로 사샤는 제 몸값을 올릴 수 있었다.)

거기에 더해서…….

수년 후 두 사람이 은밀한 침대 위의 약속을 나누는 데 아주 익숙해졌을 때쯤 사샤는 그 싸구려 거래를 자유자재로 응용하기에 이르렀다는 후문이다. 카렐의 속옷 사이에 1달러 지폐 한 장을 끼워 넣으며 ‘어디 한번 벗어 보라’고 스트립쇼를 주문하는 등, 발칙한 짓을 요구해 대는 통에 카렐이 골머리를 앓은 것은 덤이다. 모든 게 카렐 저 자신의 장난기에서 시작된 일이었으니 그가 감내해야 할 일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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