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같은 계단
[21세기 로미오, 사샤 세드린]
사샤는 만족스러운 얼굴로 자신이 실린 뉴스의 헤드라인을 읽고 있었다. 21세기 로미오라는 낭만적인 칭호가 무척 마음에 들었다.
공연이 시작되기 전까지만 해도 사샤는 제 춤과 연기에 대해 대중이 어떻게 평가할지를 무척 궁금해했었다. 그 궁금증이 기분 좋은 자신감으로 화하는 데는 얼마 걸리지 않았다.
단 3일간 이어진 공연 이후 연이은 추가 공연 요청으로 몇 회의 갈라를 섰다. 그건 사람들이 제 춤을 좋아한다는 아주 분명한 증명이었다. 그리고 갈라의 후반으로 갈수록 사샤는 ‘로미오와 줄리엣’이 아닌 자신을 보기 위해 방문한 팬들을 만날 수 있었다. 깊은 감동으로 여운에 젖어 있거나, 눈물을 글썽이는 이들의 얼굴을 보며 사샤는 난생처음으로 태어나서 다행이라는 생각을 하기도 했다.
불과 수년 만에 사샤의 삶은 이전에는 없던 자기 긍정으로 가득 찼다. 그냥 춤을 추는 것이 좋아서 발레에 몰두하던 어린 소년이 이제야 비로소 진정한 직업적 소명 의식을 느끼기 시작한 것이다. 현재 사샤는 삶에 대한 의지로 불타고 있었다.
‘그런데 조금 바보 같은 사진을 넣었네. 더 잘생긴 거로 해 주지. 기사 조회 수가 200이 넘잖아. 그러면 벌써 200명이 봤다는 소리인데…….’
사샤는 기사에 함께 들어가 있는 사진을 물끄러미 보며 몰래 생각했다. 입을 멍하니 벌리고 있는 모습이 바보 같았다. 남들이 보기에는 우수에 찬 눈으로 어딘가를 응시하며, 발레에 대한 깊은 열정을 어필하고 있는 얼굴이었지만 사샤는 제 본인의 표정을 아주 잘 알았다. 아무 생각도 하지 않을 때 찍힌 사진이 분명했다.
“응?”
그러던 사샤의 눈에 한 기사가 눈에 띄었다. 잔뜩 목을 빼고 핸드폰 화면을 뚫어져라 보고 있던 사샤의 목이 앞으로 더 길게 나왔다. 바딤이 보면 등을 찰싹 때리며 ‘등 바로!’라고 외칠 만한 나쁜 자세였다.
“할리우드 셀럽의 고백……. 가장 핫한 침대 매너를 가졌던 남자는?”
딱 사샤가 흥미를 끌만한 노골적인 제목의 기사였다. 호기심에 본문을 클릭한 사샤의 눈이 똥그랗게 커졌다가 이내 불쾌감으로 팍 구겨졌다.
“뭐야. 왜 카렐 이름이 여기서 나와?”
* * *
과거를 물고 넘어지는 것은 성숙한 행동이 아니다. 게다가 카렐은 저보다 열여섯 살이나 연상이었다. 객관적으로 보아도 누구나 탐낼 만한 지위와 재산이 있었고, 외모도 매력적이었다. 그런 그가 경험이 없을 리 만무하다는 사실을 알면서도 사샤는 간헐적으로 울분에 찼다.
“카렐은 왜 저보다 16년이나 빨리 태어났어요?”
사샤가 충혈된 눈으로 물었다. 카렐은 손에 들고 있던 양장본 서적에서 눈을 떼고 사샤에게 시선을 주었다. 농담 삼아 넘기려고 했지만 사샤의 눈 밑이 발긋하고 코끝에 분홍기가 감도는 것을 보니 퍽 감정적인 상태인 것으로 보였다.
“갑자기 그걸 문제 삼는 이유가 뭐죠?”
“저랑 똑같은 날에 태어나면 좋았잖아요. 그리고 내가 카렐을 첫 번째로 만난 것처럼 카렐도 나를 첫 번째로 만나고……. 왜 그러지 못했냐고 책임을 묻는 거예요.”
“……빨리 태어난 게 잘못이다?”
카렐은 사샤와 눈을 맞춘 채로 책을 탁, 소리 나게 덮었다. 사샤는 패기 있게 물어온 것과 달리 카렐의 작은 행동 하나에도 흠칫 곤두선 반응을 보였다.
카렐은 잠시 사샤를 말없이 응시했다. 나이를 굳이 들먹인다면 할 말이 많은 것은 카렐도 마찬가지였다. 연애 경험은 물론이고 성적인 경험이 농익을 대로 농익은 삼십대의 남자가 3년 가까이 수절을 했다.
심지어 카렐은 어느 정도 의식이 깨어 있는 사람이다. 성적인 취향이 하드한 만큼 범죄의 영역에 있는 욕구들은 혐오했고, 자신의 변태성을 깨달은 이후에는 도리어 그런 면을 완전히 조절해서 취향이 맞는 성인들과 합의하에 올바른 방식으로만 즐기려고 노력했다.
그런 제 운명의 상대가 열다섯 살짜리 미성년자일지도 모른다는 사실을 알았을 때……. 그 사실을 가장 받아들이기 어려운 것은 카렐 본인이었다. ‘사샤 세드린’을 발견했다는 희열과, 지금까지는 단 한 번도 취향이 아니었던 어린 소년을 욕망한다는 자기 혐오 사이에서 그 역시 무척 괴로웠다.
카렐은 답하는 대신 눈을 가늘게 떴다. 그리고 카렐이 답이 없자 사샤는 서러워하며 외쳤다.
“다 카렐 잘못이에요.”
“……갑자기 왜 나를 비난하는지 모르겠어요. 이리 와요. 뭔가 이유가 있는 듯한데, 자세히 들어 봅시다.”
카렐이 한 손을 사샤를 향해 뻗었다. 셔츠 소매를 걷어붙인 단단한 팔이 사샤를 설득하고 있었다. 그러나 그 팔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샤는 완강히 거부했다. 자신이 질투심을 제어하지 못할 지경이 된 것이 실제로는 카렐의 잘못이 아니며, 제 존재를 알지도 못했던 시절의 그에게 과거를 추궁하고 따질 수 없다는 사실 때문에 사샤는 더욱더 치졸해졌다.
“싫어요.”
“흠…….”
“가면 저를 부드럽게 어루만지고 키스해 주려고 하는 거잖아요. 그렇게 내 화를 풀어 주려고……. 안 갈 거예요. 그러면 화가 풀려 버리니까…….”
중얼중얼하는 사샤의 눈꺼풀이 파르르 떨렸다. 무척 진지해 보였다. 속이 빤히 비치는 사샤의 솔직한 말에 카렐은 설핏 미소를 지을 수밖에 없었다.
반대로 사샤는 그 여유로운 모습에 더더욱 분한 기분이 들었다.
그래서였을 것이다, 하지 않아도 될 말을 해 버린 것은.
“카렐, 솔직히 말해 봐요. 지금까지 같이 잔 사람이 수십 명이 넘죠? 100명도 넘나요?”
“사샤.”
“잘 때마다 나한테 키스한 것처럼 키스해 주고, 그때만큼은 상대방을 진짜 원하고 사랑하는 거처럼 행동했을 거예요. 그랬다는 걸 생각하면…….”
사샤는 갑자기 서러움이 복받쳐 올라 크게 헐떡였다.
“내가 아버지에게 맞고 이불 속에 숨어 있을 때 카렐은 파티에 가고 미인들과 어울렸겠죠? 남자들은 고추가 크면 클수록 아무 데나 자랑하고 싶어 하니까! 막 자신감이 폭발하는 거잖아요. 카렐도 그 큰 고추를 여기저기 자랑하고 다녔겠죠! 다 알아요!”
“…….”
카렐은 말없이 손으로 지끈거리는 미간을 짚었다. 소리 없는 한숨을 쉬며 눈을 내리깔았다. 사샤의 밑도 끝도 없는 원망이 왜 터져 나왔는지 알 것 같았다.
“……그런 게 속상했군요.”
“그래요. 카렐이 지금까지 잔 모든 사람의 이름을 알아야 속이 시원할 것 같아요.”
하지만 갑자기 감정을 퍼붓는 이유가 질투심이라는 걸 알고 나니 카렐은 도리어 사샤가 안쓰럽게 느껴졌다.
“사샤, 그런 걸 아는 건 관계에 절대 긍정적인 영향을 주지 않아요.”
“왜요? 왜요? 그냥 말하기 싫은 건 아니고요? 숨기고 싶은 거잖아요. 카렐도 자기가 떳떳지 못하다고 생각하죠?”
그렇게 말하며 사샤는 인터넷 기사 하나를 들이밀었다.
“이 사람은 뭔데요? 왜 카렐의 침대 매너를 알고 있는데요?”
“하…….”
카렐은 주먹 쥔 손을 입가에 가져가며 언짢게 침음했다. 보통 사람은 제대로 된 기사로 취급도 하지 않는 수준 낮은 가십지의 기사였다. 그래서 그 기사 속 인물과 정말로 잔 적이 없냐고 묻는다면 ‘아니오’였지만, 그렇다고 공개적으로 떠들 만큼 특별한 관계도 아니었다.
카렐은 쓸데없는 이야기를 떠들어 사샤의 속을 긁은 인물의 얼굴을 유심히 기억해 두었다. 감히 사적인 문제를 떠든 대가를 치르게 만들겠다고 다짐을 하면서.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는군요.”
“거짓말쟁이.”
“정말입니다.”
진실을 말하는 것이 도움이 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한 카렐이 잡아떼자 사샤가 아예 큰 소리로 기사를 읽기 시작했다.
“카렐 클레멘츠는 침대에서 더더욱 위험해진다! 그는 채찍 같은 도구를 쓰지 않고 사람을 완전히 굴복시키는 방법을 알고 있다! 목이나 흉곽을 큰 손으로 조여 대고…….”
“그만, 그만…….”
카렐은 한 손으로는 눈가를 가리고 다른 한 손은 들어 항복의 표시를 보였다. 그러자 사샤는 울먹이는 눈을 하고 더욱 기세등등하고 사납게 외쳤다.
“이거 봐요. 맞잖아요! 이 사람은 사실을 얘기하고 있어요. 카렐이 좋아하는 섹스를 잘 알고 있다고요. 진짜 해 본 거잖아요.”
‘젠장.’
카렐은 속으로만 짓씹듯 내뱉었다. 눈앞에서는 사샤가 한탄을 이어 갔다.
“저는 너무 억울하고 서러워요. 나는 카렐 클레멘츠가 내 연인이라는 걸 아무 데도 말하지 못하는데……. 카렐의 말대로라면 누구인지 기억도 나지 않고 아무것도 아닌 이런 사람이 마구 떠들고 다녀요?”
“……사샤.”
“저는 싫어요. 다른 사람이 카렐에 대해서 이만큼 알고 있는 것도 싫고…….”
“…….”
“그리고 아무나 이 기사를 클릭할 수 있다는 것도 싫어요. 조회 수가 벌써 3000을 넘었어요. 3000명이 카렐이 변태인 걸 알게 되었잖아요. 이런 게 전부 다 너무 싫다고요.”
할 말이 없어져서 카렐은 반박 대신 한숨을 쉬었다. 그리고 과거를 들춰 저딴 발언을 해댄 상대와 기사화까지 시킨 기자를 향해 본때를 보여주겠노라고 다짐했다.
그러나 그보다 걱정스러운 것은 사샤의 멘탈이었다.
“사샤, 얼마든지 비난해요. 내게 화풀이를 하고, 속상한 건 전부 다 꺼내 놔요.”
“흐윽…….”
당장 다음 주에 사샤는 ‘로미오와 줄리엣’ 마지막 갈라 공연에 참여할 예정이었다. 장소는 맨해튼의 반대 방향인 서쪽 끄트머리에 있는 로스앤젤레스. 게다가 이번에 사샤는 갈라 공연만 하는 것이 아니라 짧은 인텐시브 코스를 듣고 오게 되어 있었다. 졸업 후 발레단에 입단하면 도리어 반복적인 생활을 해야 하니 그 전에 가능한 한 다양한 환경에서 다양한 방식의 가르침을 받게 하고 싶었던 것이다.
의도는 좋았지만 이 상태로 보냈다가는 가르침을 받기는커녕 사샤는 떨어져 있는 내내 혼자만의 땅굴을 파고 들어갈 것만 같다. 곁에서 함께 있어 주고 사랑을 확인시켜 주는 게 가장 좋았지만, 이번에는 카렐 역시 다른 일정이 있어 사샤와 함께할 수가 없었다.
“사샤, 제발 우울해하지 말아요. 이런 일로 감정 소모를 하면 쉽게 지쳐요.”
“모르겠어요. 내 마음이 내 마음대로 안 되는데 어떻게 하란 말이에요.”
“그럼 약속해요. LA에 가서는 차라리 원망스러운 나를 깨끗이 잊고 재밌게 시간을 보내다 오기로.”
“내가 어떻게 그럴 수 있겠어요? 카렐은 내가 진짜 그럴 수 있을 거라고 생각해요?”
“이런……. 미안합니다. 내가 어떻게 해 주면 되죠?”
“윽, 으윽……. 다시 태어나요. 다시 시작하란 말이에요. 그리고 깨끗한 몸으로 나를 기다려요.”
“깨끗, 한 몸…….”
사샤는 윽윽 울면서 말도 안 되는 요구를 하기 시작했다.
‘나에 관한 기사는 돈을 잔뜩 먹여서라도 완전히 틀어막든지 해야겠어.’
그런 생각을 하면서 카렐은 무척 난감한 채로 사샤를 달래 주기 위해 애를 썼다.
조금 시간이 지나자 사샤는 이제 어깨를 떨며 훌쩍이고 있었다. 카렐은 사샤를 향해 안쓰러움과 죄책감을 동시에 느꼈다. 성숙한 나이인 저조차도 사샤의 주변 인물들을 생각하면 질투심이 치밀곤 했다. 심지어 애정 관계에 있지 않은 인물들에게마저.
파 드 되의 고정 파트너인 사샤와 동갑내기 소녀를 향해서도 그런 마음이 들었었다면 말 다 한 것이다. 게다가 카렐의 질투는 사샤보다 더욱 병적이어서 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의 일까지 미리 질투하는 경향이 있었다.
그러니 저보다 성질이 더욱 예민한 사샤가 이미 바꿀 수 없는 문란한 과거를 가진 애인에게 털을 세우는 건 너무나 당연한 일이었다. 이성적으로 굴라고 첨언할 수도 없었다. 본디 연인 사이의 일이란 하나부터 열까지 다 감정적인 것이니.
그래서 카렐은 사샤의 감정을 고스란히 받아 주기로 다짐했다. 그는 언제나 그런 점에서 무척 관대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게오르크가 그랬는데 카렐이 카렐의 동정을 떼 준 여자와 결혼했다면 나만 한 아이가 있을 거라고 했어요.”
“…….”
“대체 얼마나 놀아난 거예요!”
물론 게오르크는 그 관대함의 덕을 볼 수 없겠지만.
“게오르크가 그런 이야기까지 했습니까?”
카렐의 얼굴에서 심상찮은 빛을 읽었는지 사샤의 목소리가 갑자기 수그러들었다.
“네에……. 하지만 게오르크에게 뭐라고 하지 마세요. 저는 제가 모르는 걸 알려준 게오르크가 고마우니까요.”
제게 비밀을 발설한 게오르크가 혼이 나지 않을까 걱정스러운 눈치다. 이 와중에도 타인의 사정을 헤아리는 여린 사샤를 몰래 사랑스러워하면서, 카렐은 일부러 표정을 차갑게 굳혔다.
“하지만 옛 상사의 사생활을 마구 떠들고 다니는 비서란 주인을 무는 개보다 쓸모가 없습니다.”
“카렐…….”
“아쉽지만 게오르크는, 다시는 이 집에 들이지 말아야겠어요.”
“네?”
사샤가 충격받은 얼굴로 외쳤다.
“사샤 당신이 그를 사 올 만큼 충분히 돈을 벌어도 다시는 부하로 들이지 않겠…….”
“카렐……!”
사샤가 뒤늦게 후회하며 카렐에게 성큼 다가왔다. 아까까지는 가까이 오라고 해도 고집을 부리더니 이제는 도리어 팔뚝에 매달리며 안절부절못한다.
“제가 먼저 궁금하다고 캐물었어요. 게오르크 잘못이 아니에요.”
“……나는 안 그래도 사생활이 널리 퍼진 사람이에요. 뒤를 캐는 기자들도 제법 붙어 있고요. 내가 가장 중요한 게 사생활을 지키는 일인데, 비서가 그걸 어기다니! 믿을 수가 없군요.”
카렐이 일부러 으르릉, 위협적으로 목을 울리며 말하자 사샤는 더욱 간절해졌다.
“아니에요. 게오르크는 원래 아무 말도 해 주지 않으려고 했어요! 그리고 따지면 다 문란한 카렐의 잘못이잖아요.”
“…….”
정곡을 찔려 카렐은 말을 잃었다. 사샤가 흐흐흑, 하며 카렐의 팔을 양손으로 잡고 흔들었다.
“철회해요! 철회해요.”
어디서 배워 온 단어인지 이전에는 한 번도 써먹지 않던 고급 어휘를 쓰며 졸라댄다. 카렐은 낮게 신음하면서 말했다.
“아무튼 지나간 과거나 내 사생활에 대해 알아 봤자 서로 언성만 높이게 될 뿐입니다. 하나하나 자세히 들었다간 당신은 미치게 될걸요. 나도 과거는 완전히 잊고 앞으로는 당신에게만 전념하고 몰두할 테니…….”
“까렐……. 까렐……. 그것도 카렐의 잘못이에요……. 그러니까 왜 더럽게 살았어요…….”
후회하듯 흐느끼는 목소리를 하면서도 끝까지 카렐의 과거를 비난하는 사샤의 말을 듣고 있자니 골이 띵했다. 카렐은 한숨을 쉬며 사샤를 제 허벅지 위로 끌어당겼다. 사샤는 카렐의 가슴팍에 뺨을 비비면서도 원망을 멈추지 않았다.
* * *
사샤는 카렐의 기사 하나를 찾아내어 마구 트집을 잡아댔지만, 사실 최근 인터넷의 버즈량은 카렐보다도 사샤가 압도적으로 많았다.
카렐은 막 사샤를 발견했던 3년 전부터 데이트 상대에 관련한 미끼를 절대 주지 않았고(실은 존재하지도 않았다) 최근 휴식을 선언하기까지 해 자연스레 대중의 관심으로부터 멀어진 상태였다. 그리고 사샤가 찾아낸 기사 역시 실제로는 그런 현상의 방증이었다. 최근 소식이 드물어지니 도리어 과거 일을 들추게 된 것이다.
사샤 세드린은 한때 카렐이 우려했던 것처럼 점차 거센 화제를 끌고 있었다. 수많은 할리우드 스타와 팝스타, 그리고 셀럽들이 살고 있는 이 도시의 파파라치들은 일개 발레 댄서 지망생에게도 초점을 맞추기 시작했다.
물론 맨해튼에서 이처럼 화제를 짧게 몰았다가 사라지는 이들은 무수히 많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외모와 패션 센스가 흠잡을 데 없었고, 언젠가 자신이 셀럽이 될 것을 알고 있었다는 양 파파라치 앞에서 미소를 짓고 유유히 걸어가는 애티튜드를 갖춘 이들이었다.
반면 사샤 세드린은 매일 같은 점퍼와 청바지를 입었다. 카렐이 값비싼 옷들로 옷장을 채워 주기는 했지만 매일 다른 옷을 입고 싶다는 욕망 자체가 없는 사샤의 손이 자주 닿는 옷들은 정해져 있었다.
때문에 파파라치 사진 속 사샤는 항상 비슷한 트레이닝복 차림에, 발레 슈즈가 들어간 망을 질끈 동여맨 스포츠 백을 크로스로 매고 있었다. 그 별것 아닌 것이 발레 전공생임을 나타내는 하나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어 사샤 세드린처럼 스포츠 백에 발레 슈즈 백을 묶고 다니는 전공생이 늘어났다.
뿐만 아니라 파파라치가 찍은 사진 속의 사샤는 표정도 한결같았다. 사진사들을 경계하는 표정을 짓거나 어딘가에 그들이 몰려 있는 것이 보이면 그 무리를 빠져나가기 위해 무작정 무표정으로 달리곤 했다.
그래서 초기 사샤의 파파라치 사진은 대부분이 옷자락이나 머리카락을 휘날리며 역동적으로 달리고 있는 것들이었다. 날씬한 발목이 트레이닝복 바지 아래로 슬며시 보이고, 지면에서 떨어진 탄력 있는 근육이 고스란히 드러나곤 했다. 그런 것마저 대중에게 사샤 세드린의 캐릭터를 각인시키기에 충분했다. (심지어 사샤의 달리는 사진은 유행이 되어서 파파라치가 눈에 띄기만 하면 냅다 뛰기 시작하는 사샤처럼, 어떤 셀럽들은 파파라치 앞에서 달리는 사진을 연출하곤 했다.)
이처럼 별 특징 없는 파파라치일지라도 사샤 세드린이 항상 사진을 찍히는 이유는 명백했다. 그의 외모가 ‘적당한’ 수준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매번 같은 옷을 입고 무심한 얼굴로 파파라치를 피해 달리고 있어도, 미모만큼은 다양한 각도에서 매번 다채로웠다. 대중에게 여러 번 얼굴을 보여서 눈도장을 찍을 필요도 없이 한 번 그 얼굴을 본 이들에게는 자신을 완전히 각인시켜 버렸다.
더해서 사샤의 직업이 유명한 부모를 둔 재능 없는 셀럽이거나, 워킹이 꽝인 모델이거나, 흥행을 증명하기 위해서는 더 많은 검증이 필요한 신인 배우 따위가 아니라 세계적인 콩쿠르를 석권한 발레 댄서 지망생이라는 점이 알려지자 삽시간에 기세가 올랐다.
처음 외모에 관심을 가지고 사샤 세드린을 검색하기 시작한 이들은 그가 다 해진 발레 슈즈를 신고 바닥에 발끝으로 롱 드 장브를 그리는 영상에 흥미를 느꼈다. 근육이 단단하게 붙은 몸으로 180도 이상의 스플릿을 어렵지 않게 해내고 마치 묘기처럼 제자리에서 팽이처럼 도는 것을 보면 순수하게 감탄할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사샤는 자신의 SNS에 상반신을 탈의하거나 숏 타이즈를 신어 맨허벅지가 온통 드러난 착의로 연습하는 영상도 거리낌 없이 올리곤 했다. 그것이 일종의 노출이라는 자각이 없었던 이유는 사샤가 둔한 탓도 있지만, 무엇보다도 그가 연습실 안에서의 제 몸을 그저 춤을 추는 도구로 인지하고 있었기 때문이다.
그렇게 사샤는 사람들에게 제 유연한 발등을 보여주었다. 염증이 자주 재발하곤 하는 탄탄한 안쪽 허벅지 근육을 사진으로 찍었고, 지방이 전혀 없어 근육이 선명하게 드러내는 납작한 배를 드러내기도 했다. 포르 드 브라의 등 움직임을 보여준다며 등 전체를 찍어서 올린 적도 있었다.
그렇게 드러난 사샤의 몸을 보면 발레를 전혀 몰라도 그가 얼마나 많은 노력으로 빚어낸 몸인지 누구나 알 수 있었다.
사샤 세드린이 졸업 공연을 끝내고 북미 다섯 개 주에서 로미오와 줄리엣의 갈라 공연을 하는 동안, 그는 완연한 뉴 셀럽으로 자리 잡았다. 그 열기와 화제성은 그대로 이어져 사샤 세드린이 그해 뉴욕 발레단의 오디션 없는 합격자라는 기사가 떴을 때 최고조를 기록했다.
[21세기 로미오, 파격 입단 콜. 전례 없는 노 오디션]
LA로 떠나기 단 나흘 전이었다. 사샤 외에는 모두가 예상하던 결과였지만, 그래도 사샤는 인생에서 가장 고대하던 한순간 앞에서 눈물을 글썽였다.
춤으로 돈을 벌고, 인생을 저 스스로 지탱할 수 있게 되는 것이 사샤의 목표였다. 미국으로 혼자 올 때만 해도 너무나 어렵게 느껴져서 확신하지 못하던 일이.
그렇게 염원하던 인생의 목적을 달성하는 순간 사샤는 그 소식을 카렐에게 가장 먼저 알렸다.
[카렐, 저는이제 프로무용수에요
방금 학교에서 알려졋어요
놀랐죠??
저를 오디션도 업시 봅아주기로 했대요
발레단은 진자 마음이 큰 사람들예요
이제 제가 돈을 버니까 걱정하지마새요
열심 일해서 부자가 되어 되지같은 애인을 먹여 살릴게요]
‘돼지 같은 애인’이라는 대목에서 흠칫했지만 카렐은 그것이 사샤 나름의 애칭이라는 것을 알았다. 어디선가 ‘토끼 같은 애인, 여우 같은 애인’ 이런 식의 동물 비유를 듣고는 어설프게 기억해서 적용한 것이 틀림없었다.
기사를 접한 카렐은 아직 학교에 있을 사샤에게 축하의 메시지를 건넸다.
[축하합니다. 사샤 세드린.
21세기의 레전드가 되세요.]
카렐은 애정을 담아 짧은 메시지를 보냈다.
21세기의 레전드, 21세기의 아이콘, 21세기의 사샤 세드린……. 무슨 단어든 어울렸지만 카렐은 ‘레전드’라는 단어를 택했다.
직후 사샤에게서 전화가 걸려왔다. 느닷없이 튀어나와 사샤를 괴롭게 만들었던 카렐의 과거사 때문에 조금 경직되어 있던 관계가 삽시간에 눈 녹듯 풀렸음은 물론이다.
그리고 그날 저녁, 사샤의 인스타에도 어김없이 감사의 글이 올라왔다.
[고마어 모두애덕분애내가 프로 발레댄서가 댓어.
다 한거 같은데 이제 시작이겟ㅅ지?
나는 제일 처음 게단에 서있어
앞으로 열심 올라갈게
나를 지켜봐져]
사샤는 자신의 프로 입단 소식을 팬들에게 전했다. 한 문장, 한 문장 진심을 꾹꾹 눌러 담은 글이라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리고 카렐 역시 사샤의 피드에 사샤가 좋아하는 ‘하트 모양’을 쿡, 눌러 주었다.
* * *
“아, 사샤 세드린? 알아. 발레 댄서도 섹시하더라.”
“그치. 발레가 이렇게 운동량이 많은지 몰랐어. 몸 좀 봐. 진짜 탄탄해.”
“난 실은 얘 얼굴이 제일 마음에 들어.”
“그래서, 다들 저거 보러 갈래?”
삼삼오오 모여 근처를 지나치는 학생들이 가리킨 곳에는 다가오는 뉴욕 발레단의 봄 시즌 안내 포스터가 붙어 있었다. 지나치는 이들에게서 ‘사샤’의 이름을 들으리라고는 짐작하지 못했던 카렐은 약한 당황을 숨기며 선글라스를 고쳐 썼다.
카렐의 손질하지 않은 머리카락은 잔뜩 빛이 바랜 채로 가볍게 흐트러져 있었다. 티셔츠에 면바지 차림인 그는 무척이나 편해 보였다. 과거의 카렐 클레멘츠를 떠올릴 만한 부분은 손목에 차고 있는 고가의 시계 정도였다.
그리고 이것은 카렐이 어느 정도 의도한 바도 있었다. 현재의 그를 보고 과거 언제나 완벽한 스리피스 슈트 차림을 고집했던 카렐 클레멘츠와 단번에 일치시키기는 어려울 테니까. 여간 눈썰미가 좋지 않으면 안 될 것이다. 최근 사샤가 명성을 얻게 되면서 반대로 카렐은 가능한 한 제 존재감을 죽이려 했다. 현재 시점에 두 사람 다 요란하게 이목을 모으는 것보다 비합리적인 일은 없었다.
카렐의 이러한 노력 덕분인지 그래도 예전보다는 그를 따라붙는 파파라치가 현저히 줄었다. 지금도 카렐은 벽에 한가히 기대어 한량 흉내를 내면서 자유를 만끽하는 중이었다.
[카렐 저끗낫어요 바깥에로 나갈개요]
진동이 울렸다. 메시지를 확인한 카렐은 사샤에게 답장을 보냈다.
[뒤로 돌아 나와요.]
타고난 시력으로 주변을 훑어봐도 당장 눈에 띄는 파파라치들은 없었다. 카렐은 다행스럽게 여기면서 사샤가 나올 출입구를 향해 걸었다.
LA에 가기 직전에 사샤의 발레단 입단이 확정되는 바람에 떠나기 전, 계약을 비롯한 일들을 진행하느라 며칠간 정신없이 바쁜 나날을 보내야 했다. 덕분에 아직 입단 축하 파티를 해 주지 못했다. 오늘 카렐은 사샤가 좋아하는 레스토랑을 통째로 빌려 그곳에서 오붓하게 식사를 할 예정이었다.
“카렐!”
등 뒤에서 사샤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부드럽고 나지막한 목소리 안에 숨길 수 없이 들뜬 기색이 섞여 있었다. 카렐은 미소 지으며 뒤돌았다.
“왜 그쪽에서 나오죠?”
“지름길이에요.”
“몰랐군요.”
“저는 세 개나 더 알아요.”
“잘했습니다.”
카렐은 사샤의 등을 두드려 주었다. 다행인지 불행인지, 카렐의 과거사를 가지고 감정적으로 굴던 것은 발레단 입단이 확정되자마자 쏙 들어갔다. 완전히 잊어버린 것만 같았다. 그저 도피하고 싶은 것만은 아니었지만 이미 벌어진 일들에 대해 ‘다시 태어나는 것’ 말고는 뾰족한 수를 찾지 못한 카렐은 내심 안도했다. 적어도 사샤가 LA로 떠나기 전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소풍 가듯이 들떠서 떠나기를 바랐으므로.
가방을 고쳐 맨 사샤가 카렐을 올려다보며 물었다.
“그런데 오늘은 택시 타고 왔어요?”
“차는 저쪽에 세워 놨죠. 당신이 운전해서 가 볼래요?”
“와, 완전 대찬성이에요!”
사샤가 들뜬 얼굴로 답했다. 사실 사샤는 이미 틈틈이 운전자가 되기 위한 면허와 연수 등의 모든 준비를 마친 상태였다. 그래도 카렐은 사샤에게 차 키를 아직 완전히 내어 주지는 않았다. 사샤가 광폭한 스피드를 즐긴다는 것을 알기에 그게 제어가 될 때까지는 자신이 컨트롤해야 한다고 생각했기 때문이다.
그래도 카렐은 오늘처럼 시내 주행일 경우에는 가끔 제 동행하에 운전을 허락하곤 했다. 그리고 그건 사샤에게 예고 없는 행운처럼 느껴졌다.
“차 어디 있어요? 무슨 차를 가져왔죠?”
“차는 저쪽에…… 아.”
차를 손으로 가리키던 카렐은 표정을 대번에 굳혔다.
“왜요?”
카렐이 왜 그러는지 알 수 없던 사샤는 주변을 둘러보았다. 그사이에 사샤 역시 찰칵거리는 셔터음을 듣고 말았다. 주변 어딘가에 파파라치가 있다는 것을 눈치챈 사샤의 얼굴 역시 긴장으로 굳었다.
“사샤? 이 앞에 서 봐요.”
카렐의 지시에 따라 그의 맞은편으로 걸음을 옮긴 사샤는 그가 갑자기 제게 악수를 청해 오는 것에 당황하면서도 그 손을 마주 잡았다.
“이제 날 스쳐서 그냥 걸어가요.”
“네?”
“우린 잠깐 우연히 만난 겁니다. 그리고 이제 간단한 안부를 물었으니 헤어지는 것이고.”
“그러면…….”
“아쉽지만 차 운전은 다음에. 일단 나가서 어디든 들어가 있으면 와야 할 장소를 알려줄게요.”
사샤는 답이 없었다. 그 모습을 물끄러미 내려다본 카렐은 사샤를 안아 달래고 싶은 마음을 꾹 눌러 참으면서 나직하게 말했다.
“택시를 타고 오세요.”
“네…….”
사샤가 시무룩하게 대답하자 카렐이 다시 그 등을 가볍게 두드렸다. 사샤 역시 평소 같으면 카렐이 이 타이밍에 제게 키스를 해 주었을 텐데 그러지 않아서 서글픔을 느꼈다. 그가 왜 그러는지 알 것 같아 애틋함은 배가 되었다.
“자, 그럼 이제 가요. 조금 이따가 다시 만나죠.”
카렐의 말이 떨어지자마자 사샤는 주머니에 손을 푹 꽂은 채로 카렐을 지나쳤다. 가기 싫은 발걸음이 어정어정했다. 몇 번이나 뒤를 돌아보고 싶었지만 그래서는 안 된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았다.
카렐과 이런 관계가 되기 전부터 그를 괴롭혀 대는 인터넷 기사를 잔뜩 접했던 사샤는 ‘카렐 클레멘츠’의 사생활을 제 사생활보다 더 중요하게 여겼다. 아무튼 그에게 폐를 끼치고 싶지 않았다.
그리고 사샤가 어깨를 늘어뜨리고 터덜터덜 걸어가고 있을 때, 카렐은 방금까지 사샤에게 보여주던 얼굴을 싹 지우고는 짜증이 완연한 표정으로 누군가에게 전화를 걸었다.
“우즈?”
―네, 클레멘츠 씨.
“지금 사무실인가요.”
―그렇죠.
“택시 타고 이 주소로 와줄 수 있겠습니까?”
게오르크만큼이나 충직한 비서는 당장 달려오겠다고 답을 하고는 전화를 끊었다. 이미 사진이 찍힌 이상 앞뒤 맥락이라도 창조해야 했다. 다른 사람과의 약속을 기다리던 중에 우연히 옛 피후원자를 만난 것처럼.
그리고 카렐이 누군가를 기다리는 척 무료한 얼굴로 핸드폰을 바라보고 있을 때였다. 누군가가 다가와 말을 걸었다.
“안녕하십니까, 카렐 클레멘츠 씨.”
“……음, 안녕하십니까.”
자주 본 사이처럼 친근하게 악수를 건네는 이의 얼굴이 낯익었다. 카렐은 그의 이름을 기억해 보려고 조금 노력을 했다. 그래도 끝끝내 이름은 기억해 내지 못했지만 그가 기자라는 것만은 알아차렸다.
심지어 과거 카렐에게 고소당한 전적이 있는 사람이었다.
카렐은 빙긋 웃으며 다시 악수를 청했다.
“이런 곳에서 뵐 줄은 몰랐군요.”
“저도 몰랐습니다. 완전히 우연입니다! 그나저나 클레멘츠 씨가 링컨 센터에는 웬일로…….”
카렐은 부드럽게 웃으며 응수했다.
“모르셨군요. 발레 스쿨을 후원하는 장학재단에 직책이 있습니다.”
“아하, 맞습니다. 무용수들에게 특히 관심이 많으시죠.”
“인정해 주시니 고맙군요. 각별한 주의를 기울이고 있습니다.”
뼈가 있는 말이 오고 갔다. 두 사람은 눈을 마주친 채로 빙긋이 웃었다.
“사실은 봤습니다. 방금.”
“뭘 말입니까?”
“모른 척하시기인가요! 사샤 세드린 말입니다.”
“아, 유망주죠.”
“개인적인 친분도 있는 사이신가요?”
카렐은 기자가 조금 전 두 사람이 함께 찍힌 사진을 가지고 있을 거라고 확신했다. 증거가 확실하니 겁 없이 뭔가를 더 캐내려고 달라붙은 것이다.
“발레단에서 눈에 띄는 학생들은 누구든지 이름을 외워 두죠.”
이미 찍힌 것을 확인하고 또 없애려고 하면 의심을 살 뿐이다. 카렐은 자연스럽게 사샤를 언급했다.
“사샤 세드린, 옥사나 스미노바. 그 두 학생은 전부터 아주 눈에 띄었습니다. 발레단에 나란히 입단해서도 좋은 모습을 보여줄 겁니다. 개인적으로 아주 기대하고 있습니다.”
“호오……. 역시 문화 예술의 애호가시군요.”
“그렇게 봐주시니 감사하군요.”
“사샤 세드린을 눈여겨보신 이유가 있습니까?”
끈질긴 자식.
카렐은 입술 안쪽을 짓씹으며 몰래 기자를 욕했다. 입가에는 미소를 올린 채로 눈에는 경멸을 담는 것도 잊지 않았다.
“현재 사샤 세드린의 화제성은 대단합니다. 그걸 모르는 사람도 있습니까.”
그때였다. 택시 한 대가 정확히 카렐의 앞에 멈춰 섰다. 그러더니 안쪽에서 건강한 피부를 가진 미녀가 나타났다.
카렐은 기자에게 다시 악수를 청하며 말했다.
“죄송합니다. 저는 약속이 있어서.”
“아……. 따로 약속이 있으셨던 겁니까?”
조금 전 카렐과 함께 있던 사샤를 보고 특종을 잡았다고 생각했는지 기자가 실망하는 눈초리로 말했다. 영 미련을 버리지 못한 눈치였다. 그러면서도 택시에서 내린 인물이 누구인지 확인하려고 고개를 기웃거리며 애를 썼다.
“혹시 새로운 데이트 상대?”
“음…….”
카렐은 눈을 느리게 내리깔았다가 뜨며 말했다.
“아직 이 관계를 특정하는 말을 당사자에게도 하지 않았는데.”
그러고는 우즈의 허리에 젠틀하게 손을 얹었다. 어디선가 셔터음이 연달아 들려왔다. 카렐은 일단은 이런 퍼포먼스를 하기를 잘했다고 생각했다.
“그렇게 발전했으면 좋겠군요.”
수많은 상상의 여지를 남기는 것 같으나 결론적으로는 아무런 정보도 주지 않은 말을 남기고 카렐은 뒤돌았다.
함께 돌아선 우즈와 한참을 걸어가던 중, 그녀가 성가신 표정으로 말을 걸어왔다.
“조용히 산 지가 꽤 되었는데 아직도 따라붙는 사람이 있네요.”
“그러게 말이야. 나는 상한 미끼 아닌가.”
“상했다고 할 것까지는…….”
“사샤와 나의 투 샷을 찍어 갔어.”
그 말에 우즈가 놀란 얼굴을 했다.
“아! 그럼 사샤 세드린 쪽일 수도 있겠군요.”
“사샤의 학교 앞이니 그럴 가능성이 크지.”
그리고 카렐은 다시 건물 뒤편에서 우즈와 함께 택시를 탔다. 차를 타고 일방통행을 벗어나기 위해 근처를 한 바퀴 도는 중, 카렐의 시야 안에 자신이 끌고 와 세워 두었던 차가 보였다.
만약 예정대로였다면 오늘 사샤가 저 차를 스스로 운전해서 레스토랑으로 갔을 것이다. 시무룩한 어깨를 하고 터덜터덜 택시를 타러 간 사샤가 눈에 선해 마음이 좋지 않았다.
“사샤, 무사히 잘 찾아왔군요.”
레스토랑에 도착하자마자 카렐은 사샤를 찾았다. 전체를 텅 비우게 하여 단독으로 예약한 레스토랑 안에서, 사샤는 먼저 도착해 너른 테이블 앞에 오도카니 앉아 있었다. 그 모습마저 짠했다.
“간단하게 뭘 먼저 먹고 있지 그랬어요. 날 기다렸나요?”
“뭘 먹고 싶은지 잘 모르겠어요…….”
사샤가 고개를 떨구었다. 그 모습에서 우울의 빛이 보여서 카렐은 급히 메뉴판을 집어 들었다.
“그래요. 내가 좋은 메뉴를 추천해 줄게요.”
“배가 안 고픈 것 같아요.”
“그럴 리가. 여기 음식 좋아하잖아요. 좀 먹다 보면 입맛이 돌 겁니다.”
그러나 식사 내내 사샤는 침울하고 의기소침한 상태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때문에 선심을 쓴 카렐이 샴페인을 한 병 따라주었으나 그래도 사샤의 얼굴에는 끝끝내 우울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LA로 출발하기 하루 전이었다.
* * *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도 두 사람은 혹시 있을 파파라치를 피해서 따로 움직였다.
각각 잡은 택시 안에서 카렐은 차창 밖을 바라보며 혼자인 사샤의 표정을 상상해 보았다. 혼자 돌아오게 하는 것이 신경 쓰이는데 뾰족한 수가 없다는 것이 안타까웠다.
같은 시각, 사샤는 택시 안에서 무표정한 얼굴로 핸드폰으로 인터넷을 뒤지고 있었다. 습관적으로 카렐의 이름을 검색했다가 갓 올라온 새로운 기사를 발견했다.
[충격! 독점!
카렐 클레멘츠의 새 애인?!
검은 머리, 슬렌더 취향의 미녀.
취향은 여전해…….]
사샤는 폭, 한숨을 내쉬며 핸드폰을 든 손을 힘없이 떨구었다. 어퍼웨스트사이드에 있는 집으로 올라가는 길이라 중간에 택시는 링컨 센터를 지나쳤다. 오늘 자신이 운전했을지도 모르는 차가 차창 밖으로 스쳤다.
얼마 전 카렐의 침대 매너에 대한 기사를 보고 과거를 마구 따져 묻던 사샤는, 도리어 그 기사에 대해서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집에 도착하고 나서는 카렐이 짐을 챙기는 것을 도와주었다.
“사샤, 캐리어 안에 사우어 젤리를 넣을까요?”
“…….”
“책도 한 권 넣겠습니다. 저번 주에 내가 본 거예요.”
사샤는 책을 읽지도 않을 거면서 여행의 짐을 싸는 기분을 내기 위해 꼭 한 권씩 캐리어에 넣어 가는 버릇이 있었다. 안쓰러운 것은, 열다섯 살에 러시아에서 맨해튼으로 올 때도 집에 굴러다니는 ‘사람은 무엇으로 사는가’를 넣어 왔다는 점이다.
이제 사샤는 어딘가로 떠날 때마다 카렐의 손때가 묻은 책을 들고 가기를 원한다. 그것이 책이 아니라 스스로의 안식을 위한 토템이라는 것을 알고 있는 카렐은 사샤에게 책을 흔들어 보였다.
“어때요?”
“다 좋아요. 다 넣어 주세요.”
사샤는 잠옷을 입은 채로 침대에 가만히 앉아 희미하게 미소 지었다. 카렐이 제 기분을 신경 쓰며 노력하는 것이 빤히 보였기 때문에.
카렐은 그렇게 출발 준비를 하는 사샤의 짐을 꼼꼼히 챙기며 내조에 힘을 썼으나 결국 사샤와 웃는 얼굴로 헤어지는 것은 실패했다.
* * *
다음 날 새벽 6시, 사샤는 운전기사와 함께 뉴어크 공항으로 향했다. 최근 기상이 늦어진 카렐은 배웅을 나가는 대신 사샤를 꼭 끌어안고 졸린 눈으로 얼굴 여기저기에 빈틈없이 입을 맞춰 주었다.
‘같이 가고 싶은데 그렇게 못 해서 미안해요.’
‘카렐 탓은 아니잖아요.’
‘알아줘서 고마워요. 내가 정말로 졸려서 못 가는 것은 아니에요.’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일부러 침대에 털썩, 등을 대고 누웠다. 진담인지 농담인지 구분할 수 없는 행동이 다소 과장되어 있었다. 그게 분위기를 풀기 위한 카렐 특유의 유머임을 알고 있는 사샤는 맥없이 웃으면서 그의 이마에 키스하고 집을 나섰다.
공항으로 가는 내내 차창 밖으로 보이는 하늘이 예뻐서 그나마 위안이 되었다. 사샤는 푸른 하늘을 가로로 길게 그어낸 비늘 같은 구름을 바라보며 음악을 들었다. 잠시 후 공항에서 함께 LA로 떠나는 비행 편에 오를 옥사나와 스태프들을 만나면 기분이 좀 나아지리라고 기대하면서.
그리고 어제 기사에 대해 카렐에게 아무 말도 하지 않은 이유는…….
기자들 앞에서 카렐이 자신을 보내 버린 이유, 또 사진에 카렐과 함께 찍힌 이가 그의 옛 비서인 것 등등, 기사의 전말을 자신이 모두 알고 있기 때문이기도 했지만 조금 더 다른 이유가 있었다.
사샤는 지금까지는 생각해 보지 못했던 새로운 문제에 직면했다. 한때는 카렐의 사랑을 쟁취하는 것만이 목적이었고, 그 후에는 자신의 애인이 첫인상과 달리 얼마나 장난기가 많고 내면이 따스한 사람인지 충실히 알아가는 나날을 보내느라 미처 생각하지 못한 것을.
별안간 시작된 고민은 지금까지 하던 것과는 전혀 결이 다른 문제였다. 고민에 얽힌 주체가 카렐과 사샤, 단둘만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난 계속 이렇게 카렐의 숨은 애인으로 살아야 하는 걸까? 만약 그렇다면, 언제까지?’
* * *
[카렐 클레멘츠 유명하잖아 뜸한가 싶더니 또 데이트 상대를 갈아치웠네]
[좋겠다 미남 엘리트 부자의 삶이란]
[또 검은 머리야? 페티시인가 봐]
오랜만에 뜬 카렐의 파파라치 사진 아래 무수한 댓글이 달렸다. 그걸 보는 사샤의 미간이 점차 심하게 찌푸려졌다.
사계절 온후한 날씨 덕분인지 LA에 위치한 발레 스쿨의 스튜디오는 천장부터 바닥까지가 전부 통창이었다. 바깥으로는 키가 큰 야자나무들이 줄지어 늘어서 있었고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는 한적한 풍경이 비춰 보였다. 맨해튼과는 인구의 밀도도, 뺨에 닿는 공기의 습도도, 태양 빛의 세기도 전부 다 다른 낯선 도시였다.
그리고 난생처음 LA에 방문해 갈라 리허설을 하면서도 사샤는 인터넷 세계에서 빠져나오지 못하고 있었다.
“네 기사 찾아보는 거야?”
곁에 와서 털썩 앉으며 말을 걸어온 것은 다름 아닌 옥사나였다.
사샤는 고개를 저었다.
“기사 의견을 보고 있었어.”
“웩, 그런 건 쓰레기야.”
옥사나의 반응을 물끄러미 바라보던 사샤는 턱을 괸 채로 입을 열었다. 왜인지 옥사나는 정답을 알고 있고, 또 제게 공감해 줄 것 같아서.
“사람들은 왜 모르는 사람에 대해 이렇게 함부로 말할까?”
“그런 건 절대 보지 마. 열등감에 시달리는 사람들이 아무 데나 화를 분출하는 거니까. 나는 어떤 댓글 본 줄 알아? 내 사진을 보고 나보고 다이어트 좀 해야겠다고 하더라!”
“뭐? 너한테?”
옥사나는 사샤가 알고 있는 사람 중에 가장 체중이 덜 나가는 사람이었다. 말도 안 되는 지적이라고 생각한 사샤의 눈동자가 사정없이 흔들렸다. 옥사나가 과격하게 고개를 흔들었다.
“젠장, 여기서 살을 더 빼면 난 춤을 출 수도 없어! 발레 댄서의 몸이 그저 눈요깃거리인가? 우린 올림픽 선수들만큼이나 훈련하잖아!”
“맞아!”
“그래서 나는 그 밑에 댓글을 달았지!”
“뭐라고?”
“사람을 자기 기준으로 함부로 평가하는 네 면상을 한번 보고 싶다고 말이야. 그리고 이런 글을 쓰는 사람은 몸무게가 내 두 배는 나갈 게 분명하다고 썼어.”
“윽……. 지독해.”
사샤는 악플러에 준하는 댓글을 단 옥사나를 바라보며 어깨를 움츠렸다. 그러나 그녀는 도리어 고개를 젖히며 악마같이 깔깔 웃었다. 신나게 웃은 후에야 웃음을 뚝 멈췄다.
“바보야. 그런 말을 왜 해. 내가 먹잇감이 될 게 뻔한데.”
“그럼 아, 안 달았어?”
“그래. 아무 말이나 인터넷에 썼다간 인성 논란으로 시끄러워질걸. 아직 나는 ‘듣보’여서 그만큼 화제를 몰지도 못하겠지만…….”
옥사나는 팔짱을 끼고 사샤를 향해 말했다.
“넌 조심해야 해.”
“…….”
그녀의 걱정은 카렐의 걱정과도 닮아 있었다. 사샤를 아끼는 주변인들은 사샤가 갑작스러운 대중의 관심에 마음을 다치거나 휘둘릴까 봐 무척 마음을 쓰고는 했다.
“그래도 엄청 화가 나. 가끔은 반박하고 싶어.”
“음, 그러면 방법이 하나 있긴 한데…….”
“그 방법이 뭔데?”
답을 듣기도 전에 사샤가 쥐고 있던 핸드폰이 짧게 진동했다. SNS에 새로운 메시지가 도착했다는 알람들이었다.
[사샤, 인스타에 자주 등장하는 K는 혹시 크슈나의 이니셜인가요? 나는 옥사나에 대한 힌트를 찾으려고 노력했습니다. 그리고 옥사나의 러시아 애칭이 크사나, 크슈라, 크슈따라는 걸 알아냈어요! 너무 귀여운 암호예요.]
사샤가 물끄러미 읽는 글을 향해 옥사나도 슬며시 고개를 내렸다.
“사람들이 다 너랑 내가 사귀는 줄 알아.”
사샤가 툭, 말을 던졌다.
이건 정말 이상한 일이었다. 사샤는 진지한 문체로 인스타에 몇 번이고 ‘옥사나와는 그저 가장 좋은 친구일 뿐’이라고 밝혔었다. 하지만 제게 진짜 애인이 있다는 사실을 드러내지 않아서인지 사람들은 좀처럼 그 말을 믿어 주지 않았다.
사샤는 내내 카렐에게 피해가 될까 봐 공식적으로는 그의 존재를 숨겨 왔다. 그래도 흘러넘치는 사랑을 어찌할 줄 몰라 인스타에 잔뜩 간접적으로 매일의 진심을 표현해 대곤 했다. 그러나 사람들은 그런 사샤의 진심이 묻어나는 사랑 고백과 일기들이 옥사나를 향한 간접 표현이라고 믿었다. 사샤가 불을 지른 덕분인지 소위 ‘망붕’이라는 것이 무수하게 생성되었다.
갑갑했다. 둘을 응원해 주는 사람은 나날이 넘쳐나고 있었다.
“사람들이 나한테도 되게 많이 물어보더라, 사샤를 어떻게 생각하냐고.”
옥사나가 무심히 말을 던졌다. 사샤는 괴로워졌다.
“미안해…….”
“네가 미안할 건 없지. 흠……. 자꾸 너를 받아 주라고 말할 때는 좀 성가시기는 했지만.”
두 소년 소녀는 햇살이 드는 나무 바닥에 엎드렸다. 한 명은 턱을 괴고 한숨을 쉬고, 한 명은 토슈즈에 바느질을 하기 시작했다.
“왜 이런 소문이 돌지?”
사샤가 푸념했다.
“글쎄. 생각해 보면 학교 애들도 그걸 믿고 싶어 했잖아.”
옥사나가 눈을 가늘게 떴다.
“사람들은 자기가 믿고 싶은 걸 믿는 것 같아.”
“…….”
“넌 마음이 안 좋겠다. 여자 친구가 따로 있는데 이런 소문이 도니까.”
“응…….”
사샤가 수긍하자마자 옥사나가 토슈즈용의 굵고 휜 바늘에서 실을 뚝, 이로 끊어내며 뭐라 뭐라 물었다. 덕분에 발음이 뭉개졌다. ‘흐어아으응 괜챠나?’라고 들려 사샤가 눈을 동그랗게 떴다.
“응? 뭐라고?”
“아, 네 여자 친구는 괜찮냐구.”
“뭐가?”
“우리가 오해받을 때마다 날 질투하지 않아?”
옥사나는 약간 멍청한 얼굴을 한 사샤를 보며 눈을 한 번 깜빡였다. 사샤의 입이 헤벌어졌다. 이 모자란 녀석은 그런 경우는 한 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는 듯하다.
옥사나는 인상을 쓰며 소리를 높였다.
“네가 중간에서 행동을 잘해야지!”
“내가?”
“그래!”
사샤는 당황했다. 자신이 카렐을 질투하는 일은 있어도, 완벽한 어른인데다 제 감정을 컨트롤할 줄 아는 카렐이 옥사나를 질투할 수 있다는 가능성은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
하지만 옥사나는 어떻게 그런 걸 알려줘야 아느냐는 듯이 경악한 얼굴로 소리쳤다.
“진짜로 이건 중요해. 네가 잘 달래 줘야 해! 아무리 나이가 많고 어른스러운 사람도 사랑 앞에서는 다 똑같은 거야.”
“…….”
“그리고 난 너만큼이나 네 여자 친구랑 잘 지내고 싶거든. 왜냐하면 넌 내 가장 좋은 친구니까……. 네 여자 친구도 언젠가 내 친구가 될 거란 말이야. 그러니까 내 첫인상이 나쁘지 않았으면 좋겠어. 무슨 말인지 알지?”
옥사나의 말에 비로소 책임감을 느낀 사샤는 얼떨떨한 얼굴로 고개를 끄덕였다.
이곳이 맨해튼이고, 바로 곁에 카렐이 있다면 당장 물었을 것이다. 혹시나 당신도 이런 소문을 신경 쓰냐고, 또 거슬린 적이 있느냐고.
만약 거기에 그가 그렇다고 말해 준다면 무척 기쁠 것 같았다. 카렐이 자신을 무척 사랑한다는 증명이니까.
‘아, 이런 건가.’
갑작스러운 깨달음에 사샤의 심장은 기분 좋은 두근거림으로 쿵, 쿵 뛰었다. 자신이 질투심을 보였을 때 카렐이 걱정하면서도 이런 기분을 같이 느껴 주었을까, 생각하면 기분이 나쁘지 않았다. 그의 눈에 질투 많은 자신은 무척 사랑스러워 보였을 것이다. 그 생각만으로도 많은 게 괜찮아졌고, 동시에 강해지는 기분이 들기도 했다.
“그런데, 그건 그렇고.”
사샤는 옥사나에게 고개를 홱 돌렸다.
“반박할 수 있는 방법이라는 게 뭐야?”
* * *
갈라 공연 전날, 사샤는 컨디션을 위해서 일찌감치 침대에 기어 들어갔다. 숙소 대신 묵고 있는 호텔은 너무 넓어서 혼자는 잠이 잘 오지 않았다. 옥사나를 불러서 도란도란 수다 떨다가 잠이 들면 좋겠지만 그러면 더 많은 오해를 받을 것을 알기에 꾹 참았다.
사샤는 언제나처럼 목을 쭉 빼고 나쁜 자세로 흰빛을 내뿜는 핸드폰 화면을 보고 있었다.
[이 둘은 대체 무슨 조합? 제발 아무 사이도 아니길 바란다]
그러다가 왠지 제목이 끌려 클릭해 본 게시물에서 우연히 자신과 카렐의 투 샷 사진을 발견했다.
“우와…….”
사샤의 눈이 황홀한 빛으로 반짝반짝 빛났다. 한때 바라마지 않던 카렐과 자신이 같이 찍힌 사진이었다. 사샤는 코를 박을 듯 화면에 가까이 제 얼굴을 가져다 댔다.
그리고 그 사진이 어느 날인지는 카렐의 옷을 보고 어렵지 않게 알 수 있었다. 바로 그 날이었다. 파파라치가 몰려오는 것을 알고 카렐이 자신을 먼저 레스토랑으로 보내 버린……. 그때는 기분이 무척 울적했는데 이렇게 같이 찍힌 사진을 보니 나쁘지 않았다.
사샤는 저도 모르게 화면 속 카렐의 뺨을 손끝으로 간질였다.
사진을 하나도 빼놓지 않고 전부 저장한 사샤는 ‘진짜 커플’을 향한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져서 댓글도 살펴보았다.
[카렐 완전 소나무]
[또 검은 머리야! 사샤 도망쳐]
[아무 사이 아닐 리가. 카렐 클레멘츠가 검은 머리에 환장한다는 거 다들 알잖아]
└[그것도 무용수들, 모델 같은 체형을 가진 사람들만 골라서 만났지.]
└[취향이 너무 노골적이라서 기분 나쁘다:(]
[흠, 사샤 세드린 좀 핫해지자마자 바로…….]
└[사샤 여자 친구 있을걸?]
└[그냥 친한 친구라는데]
댓글들을 본 사샤의 눈이 가늘어졌다. 아무것도 모르면서 쉽게 말을 해대는 사람들을 보니 가슴에서 무언가 뜨거운 것이 치밀었다.
모든 것을 잘 알고 있고, 당사자이기도 한 자신이 한 소리를 해 줘야 할 것만 같았다. 게다가 옥사나가 좋은 방법을 하나 알려주었다.
‘절대 익명일 것.’
잠은 어느새 싹 달아났다. 사샤는 정의감에 불타서 가슴속에 잠자고 있던 뜨거운 펜을 꺼냈다. 가입할 때의 이름으로는 미안하지만, 율리안을 써서 냈다. 가입 절차가 포르노 사이트보다는 조금 번거로웠다. 그래도 사샤는 어렵지 않게 댓글 창에 진입할 수 있었다.
[두리 잘어울리는대 나는 사기면 좋헷다]
사샤는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사람들의 반응을 기다렸다. 하지만 당장 그 말에 반응해 주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사샤는 한마디를 더 적었다.
[카렐이 내러다보는 눈빝이 사랑스러운거 갓다..사샤를 존중하고 잇서]
[나이 차이는 크게나지만 조은 커풀이 댈거같은대요]
[나는 응언할레]
[사샤 새드린 엄청 잘셍겻어요 아 카롤도요]
혼자서 댓글을 다섯 개나 연달아서 단 사샤는 화면을 보다가 눈을 천천히 깜빡였다. 하고 싶은 말을 익명, 아니 율리안의 이름에 기대어 몰래 쏟아내니 비로소 마음이 풀렸다.
편안한 잠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사샤는 손에 들고 있던 핸드폰을 툭, 떨어뜨린 채로 혼자서 새록새록 깊은 잠에 빠졌다.
* * *
그리고 다음 날까지도 사샤는 자신이 쓴 글이 불러일으킨 반향을 싹 잊고 있었다. 무척 바빴기 때문이다. 오전에는 마지막으로 갈라의 최종 리허설을 했고, 스테이지에 적응하기 위해서 무대 위에 바를 옮겨 놓고 몸을 풀었다. 그러고는 의상을 갖추고 드레스 리허설까지 마쳤다.
학생일 때 매일 주어지는 클래스들만 소화하면 되던 것에 비하면 실제 공연을 하면서 컨디션 조절을 하는 건 더욱 어려운 일이었다. 그래도 사샤는 그 모든 것에 익숙해지는 것을 무척 즐겁게 받아들이고 과정에도 완전히 몰입했다.
그리고 어젯밤의 일을 잊어버릴 수 있던 이유는 그뿐만이 아니었다.
“우리 갈라 공연 끝나고 다음 날에 디즈니랜드 갈래?”
점심을 먹으며 옥사나가 던진 제안에 사샤는 감격해서 목이 멜 지경이 되었다.
“디즈니랜드?”
“응. LA에 있거든. 나 한 번도 안 가봤어.”
“나도 한 번도 안 가봤어!”
“그치! 네가 좋아할 줄 알았어.”
두 사람은 짝! 하고 하이파이브를 했다.
사샤의 머릿속은 난생처음 가 보는 디즈니랜드로 꽉 차 버렸다. 자신이 어젯밤 인터넷에 어떤 흔적을 남겼다는 사실은 완전히 잊고 말았다.
그렇게 사샤가 완전히 잊어버린 게시물 아래 사샤의 댓글에는 벌써 대댓글이 100개를 넘어가고 있었다.
사샤가 그걸 눈치챈 것은 갈라 공연의 직전, 분장을 받을 때였다.
화면을 들여다보는 사샤의 얼굴이 무척 심각하다는 것을 알아챈 옥사나가 물어왔다.
“왜 그래. 무슨 일이야?”
“아니, 아무것도 아니야…….”
그렇게 말하면서도 사샤는 손톱을 물어뜯었다.
[제정신인가? 어그로야?]
[초딩 같은데]
[어디서 기어들어 온 거지]
자신을 향한 비난부터,
[카렐 클레멘츠는 양심이 있으면 열여섯 살이나 어린 사샤 세드린을 어떻게 해 볼 생각은 접어야지]
└[나이 차이 구역질 나…….]
└[현대판 푸른 수염이네]
카렐을 향한 독한 비난, 그리고…….
[사샤 세드린은 헤테로 아닌가?]
└[발레 하는 남자는 대체로 다 게이임]
멍청한 편견이지만 자신이 마침 그 사례이기에 반박할 수도 없는 말들.
[왜 서로 이득을 취하는 관계일 수도 있지]
그나마 이 의견이 긍정적이었다. 그렇다. 카렐과 자신은 사랑이라는 상호 이득을 취하고 있었다.
사샤는 어질어질한 머리를 짚었다. 또다시 가슴속에서 뜨거운 것이 치밀어 올랐다.
옥사나와 저를 향한 지지는 그토록 쉽게 하면서, 카렐과 사샤의 투 샷이 자신이 원하는 그림이 아니라고 막말을 쏟아내는 그림을 보니 기분이 상했다. 자신들의 사랑이 남들에게 피해를 끼치지도 않았는데 왜 이런 말을 들어야 하는지 억울해졌다. 사샤는 입술을 깨물고 공연을 위한 에너지 드링크를 원샷했다. 갑자기 심장이 더욱 크게 뛰었다.
사샤는 이번에는 자기편이 많은 제 SNS 계정으로 향했다. 본능적으로 지지를 받고 싶은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다.
[너내가 사랑을앓아?
진자 사랑하지만 숨겨야대는 사랑말이에요..
너네가 그런 사랑을 해봇앗어?
사랑을 안다면 함부러 말하지마.. 플리즈,,
듣는 사람 눈에서는 피가 나니가]
사샤는 분노의 인스타를 작성했다. 그러고는 분장실 거울에 비친 화가 난 제 얼굴을 찍어 올렸다. 삽시간에 하트가 마구 찍히고 댓글이 달려 알람이 쏟아졌다.
공연 준비 중인 사샤의 실시간 피드는 반응이 좋았다. 그리고 대부분은 사샤의 한 맺힌 글귀를 로미오에 빙의한 것으로 받아들였다. 과거에도 사샤가 종종 로미오에 자신을 빗댄 아포리즘을 올리곤 했기 때문에 이번에도 그러려니 한 것이다.
그다음으로 사샤는 다시 그 댓글 창에 들어갔다. 듣지 않아도 될 막말을 쏟아낸 사람들이 꼴 보기도 싫었고, 그 페이지에 접근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쿵쾅쿵쾅 뛰어댔지만 할 말은 해야 했다.
[왜?? 왜 그들이 사랑을 하면안데는데.]
[사랑에는 규칙이업따]
[모두 사랑하고 사랑받을수잇어]
[할버지와 아이도 사랑할수잇어 그게 진리야]
[카렐은 비록 늘것찌만 고추는 힘이 세잖아]
[다들 악플 철회해! 철회해! 납븐 사람들아]
댓글을 마구 작성하면서 사샤의 눈에는 찔끔 눈물이 흘렀다. 슬퍼서 흘리는 것은 아니고 너무 화가 나서 솟구치는 울분이었다. 사샤는 도무지 손가락을 멈출 수 없었다. 그 순간만큼 사샤는 손가락이라는 창을 휘두르는 사이버상의 랜슬롯이나 다름없었다.
그때 사샤는 자신이 인지하지 못하던 것 하나를 깨달았다.
사샤 자신보다 카렐이 받는 비난이 훨씬 더 거세다는 것을. 댓글은 대부분 카렐을 향한 말도 안 되는 억측으로 가득 차 있었다.
카렐은 자신이 쌓아 온 과거만큼 더 거세게 비난받고 있었다. 아마 그는 이런 반응에 질리도록 익숙할 것이 분명했다. 그럼에도 제 앞에서는 티 내지 않았다는 사실에도 눈물이 났다. 자신은 이런 비난 속에서 카렐을 지키기는커녕 한패가 되어 카렐을 비난해 댔고…….
“사샤……. 또 우는 거야? 또 그렇게 몰입했어? 1막부터 울고 있으면 어떻게 해!”
옥사나가 자리에서 벌떡 일어나서 사샤의 멱살을 잡았다. 눈가가 눈물로 얼룩진 사샤는 솟구치는 감정을 어찌할 줄 모르고 허엉, 하고 분노의 눈물을 터뜨렸다. 떨리는 손으로 눈가를 자꾸만 찍어 누르느라 화장이 번졌다.
“미안해. 갑자기 너무 화나는 일이 생겨서…….”
“난 또 뭐라고!”
옥사나는 쿨하게 받아넘겼다.
“흣…….”
“아무튼 오늘 너 티볼트를 죽일 때 엄청나게 몰입하겠다.”
옥사나의 말은 사실이었다. 사샤는 악플러들을 찔러 죽이고 싶은 마음을 소품용 칼끝에 담아 마구 휘둘러 댔다. 사샤의 광기 어린 칼춤에 관객들은 베로나의 광장, 결투의 한가운데에 초대된 기분에 휩싸였다.
그리고 이어서 어린 로미오는 절규하면서 자신과 연인을 갈라놓는 세상을 비통하게 저주했다. 눈물로 얼룩진 흰 뺨과 처연히 흐트러진 검은 머리카락을 본 관객들은 저 어린 로미오를 따뜻하게 품에 안아 주고 싶은 감정에 사로잡혔다.
사샤는 악플러들을 떠올리면서 그들 때문에 짓밟힌 심장으로 마구 울었다. 감정에 휩쓸리면서도 수많은 연습으로 갈고닦은 테크닉은 전혀 흔들리지 않았다. 사샤는 분노를 실어 턴을 팽팽 돌았고 원망을 안고 폴짝폴짝 점프를 뛰었다.
사람들이 제 사랑이 틀렸다고 말하는 것이 열일곱 살 사샤에게는 무척 사무치는 일이었다.
그럼에도 어딘가에 인정받고 싶다는 생각에 사로잡혔다.
카렐이 아무것도 아니라고 강조하던 과거의 인물들은 오히려 마음껏 자신을 드러내는데 자신은 불가능했다. 아마도 앞으로도. 그가 자신을 숨겨서만은 아니었다.
저 역시 카렐이 상처받지 않기를 바라기 때문이다.
공연의 끝에서 관객들은 학생 신분의 갈라 공연에 어울리지 않을 만큼의 퀄리티와 몰입도를 보여준 사샤 세드린을 향해 기립박수를 보냈다.
사샤의 존재는 그 자리에 가벼운 마음으로 찾아온 사람들조차 완전히 매료시킬 만큼 극단적으로 독보적이었다. 관객들은 자신들에게 익숙한 로미오와 줄리엣이 어떤 경지를 넘어 완전히 새로운 것을 보여주었다는 것에 충격을 받았다.
세상에 대한 분노가 약간 부족했던 사샤 세드린의 로미오 연기를 한층 끌어올린 것, 그것이 악플러들의 딱 하나 순기능이었다.
* * *
갈라 공연을 마치고 사샤는 분장실에서 스태프에게 박수를 받았다. 땀에 흠뻑 젖은 채로 수분은 다 빨려 나가 완전히 탈진한 채로 돌아오던 사샤는 줄을 서서 자신에게 손뼉을 쳐 주고 있는 스태프들을 보고는 깜짝 놀랐다.
“오늘 훌륭한 공연을 보여줘서 진심으로 고맙구나.”
“다음번에도 꼭 LA에 와 줬으면 좋겠다.”
“이 다음번에 사샤 세드린을 투어에 부르려면 엄청 비싼 값을 지불해야겠죠?”
“물론이죠. 뉴욕 시가 쉽게 놔 주지 않을 거예요. 앞으로 3년간은 보기 힘들지도…….”
사샤는 스태프들이 준비해 준 꽃다발을 받고는 조그맣게 중얼거렸다. ‘감사합니다. 감사합니다.’ 하고.
곧이어 스태프들이 떠나고 사샤는 분장실에 혼자 남겨졌다. 많은 관객의 박수갈채를 받다가 이렇게 분장실에 앉아 있으면 조금 쓸쓸한 기분이 든다.
사샤는 치렁치렁한 소매로 코를 슥, 훔치며 훌쩍였다. 그다음으로는 괜히 조용한 분장실을 둘러보았다.
LA의 극장 분장실은 실내 장식까지 완벽한 맨해튼의 극장들과는 다르게 어딘가 음침한 구석이 있었다. 사막에 투박하게 지어 올린 수십 년 전의 건물 내부는 철골과 시멘트가 그대로 드러나 있었고 내부 인테리어는 빈약하기 그지없었다.
괜스레 주변을 둘러보며 사샤가 위축되어 있을 때였다. 갑자기 문이 벌컥 열렸다.
“으아악!”
사샤는 유령이라도 본 것처럼 깜짝 놀랐다. 그러나 안으로 얼굴을 들이민 것은 옥사나였다.
“사샤, 내일은 푹 늦잠 자고 11시에 만나.”
“응?”
“디즈니랜드! 그럼 내일 봐. 안녕!”
그리고 다시 쾅, 문이 닫혔다.
사샤는 또다시 괜히 코를 훌쩍이면서 거울을 바라보았다. 자신은 바보처럼 아직도 꽃다발을 끌어안은 채였다. 그 위로 땀에 화장이 번진 제 얼굴이 보였다. 거울 속 제 얼굴과 마주하고 나서야 왜 코가 자꾸 나왔는지 알 수 있었다. 공연에 몰입하면서 눈물을 흘려댄 바람에 콧물도 함께 나오는 것이었다.
사샤가 그렇게 거울 속 흰 얼굴과 가만히 눈을 마주치고 있을 때였다.
다시 끼익, 소리를 내며 문이 열렸다.
‘누구지?’
분장실에 더 방문할 만한 사람은 없었다.
이번에야말로 유령인가, 두려워하던 사샤가 고개를 돌렸을 때…….
“사샤 세드린?”
다정한 목소리가 귀를 파고들었다.
문으로 천천히 시선을 향한 사샤의 눈에 믿을 수 없는 사람의 모습이 나타났다.
문을 완전히 밀고 모습을 드러낸 것은 카렐이었다. 사샤가 처음 반했을 때의 모습처럼 완전히 정장을 빼입고 손에 꽃다발을 든…….
“무척 훌륭한 공연이었습니다.”
“카렐!”
“정말로 깊은 감동을 받았어요.”
문 옆으로 완전히 모습을 드러낸 카렐이 가슴팍에 가만히 손을 얹으며 말했다.
판에 박힌 대답도 그가 하면 의미 있어진다. 얼마나 깊은 진심으로 말하는지 알고 있기 때문이다.
“나날이 발전하는 모습을 보여주는군요. 역시 내 눈은 틀리지 않았습니다.”
“여긴 못 온다고…….”
“음.”
카렐은 손을 뒤로 돌려 문을 닫으며 말했다.
“공연 직후에 허무함을 느끼는 무용수들이 많다던데요.”
“…….”
“나는 당신만큼은 그런 기분을 몰랐으면 좋겠어요.”
“…….”
“하지만 그보다도…….”
“…….”
“그냥 내가 보고 싶어서 왔죠.”
그 소탈한 한마디가 사샤가 그에게서 가장 듣고 싶은 말이었다.
게다가 그는 이번에도 어김없이 꽃다발을 들고 분장실에 찾아오겠다는 약속을 지켰다.
사샤는 자리에서 스륵 일어나 카렐에게 다가갔다. 말없이 그의 가슴팍에 폭 안기자 카렐이 등을 두드려 주었다.
* * *
사샤는 카렐에게 공연 직전 자신이 어떤 기분이었는지를 침착하게 설명했다. 티볼트를 찔러 죽일 때 누구를 떠올렸는지도. 그리고 자신을 그런 감정으로 몰아넣은 인터넷 댓글들을―자신은 그 페이지에 다시 접속하는 것만으로도 심장이 너무 뛰어서 차마 볼 수가 없었기에 애써 눈을 피하면서―카렐에게 보여주었다. 또한 카렐과의 사이를 사람들에게 지지받지 못하는 것이 로미오가 느꼈을 참담함에 비할 바 없었다고 말하기도 했다.
카렐은 사샤의 그 모든 솔직한 이야기들, 그리고 인터넷에 사샤가 써 놓은 글들을 보면서 쿡쿡 웃었다.
그리고 사샤는 미소 짓는 카렐을 가만히 응시했다.
얼마 전에는 자신만 진지하고 카렐은 여유로운 것을 보면 부아가 치밀었는데 지금은 괜찮은 것이 이상했다. 그러다 금세 이유를 깨달았다.
그런 글들을 보고도 카렐이 상처받지 않은 게 다행스러웠기 때문이다.
“나의 과거를 어떻게 하면 좋을까요.”
핸드폰을 가만히 분장실 테이블에 올려둔 카렐이 미소 띤 얼굴로 말했다. 철골과 휑한 시멘트벽이 드러나 음침하던 분장실은 카렐이 앉아 있는 것만으로도 세상에서 가장 따스하고 익숙한 공간으로 변했다. 그 변화에 놀라워하면서 사샤는 카렐의 말에 기울였다.
“그건 전부 당신이 내 인생에 끼어들게 될지 모를 때의 일이에요. 그게 당신을 울게 만들 줄 알았다면 절대로 하지 않았을 겁니다.”
“카렐이 비난받는 건요?”
“그건 상관없어요. 그들의 비난은 정당하니까.”
“…….”
“아마도 내 실체는 더욱 더러울 테고…….”
그렇게 말하며 카렐이 이마에 가볍게 입을 맞춰 왔다. 키스에 밀려 고개가 뒤로 쭉 밀린 사샤가 겨우 눈을 들었다.
“왜 자신을 그렇게 깎아내려요…….”
“왜냐하면 나 자신을 가장 잘 아니까요. 또 나 역시 내 과거를 후회하고 있기도 하고.”
그 말에 사샤는 눈썹을 내려뜨렸다. 카렐은 사샤의 물기 어린 눈가를 손등으로 닦아 주면서 중얼거렸다.
“나보고 왜 그렇게 빨리 태어났느냐고 뭐라고 했지요?”
카렐은 사샤의 뺨을 검지로 툭 건드리며 말했다.
“그 말 그대로 다시 돌려주죠. 당신은 왜 이렇게 늦게 이 세상에 나타나서는.”
“…….”
“나도 당신과 같아요. 사샤 세드린이 왜 내 눈앞에 그보다 더 빨리 태어나지 않았는지 원망스러워요.”
“…….”
“우리가 아주 약간의 차이를 두고 태어나서, 당신은 발레 스쿨에 다니고 나는 그 근처 어퍼웨스트사이드의 하이스쿨에 다니며, 가끔 거리에서 마주치고 그렇게 서로를 인지하고, 마음을 확인하고 또…….”
“또?”
괜히 뜸을 들이는 카렐에게 묻자 그가 짓궂은 미소를 띠며 말했다.
“둘 다 동정인 채로 첫 관계를 가지고.”
그 말에 사샤의 얼굴이 붉어졌다.
“그러면 좋았을 텐데.”
“…….”
“갑자기 무척 아쉬워집니다.”
그렇게 말하는 카렐의 목소리에서 미련이 뚝뚝 묻어났다. 말보다도 눈으로 그의 진심이 전해졌다. 사샤는 말없이 눈을 내리깔며 카렐의 따뜻한 가슴팍을 만지작거렸다. 카렐을 위로하고 싶은 마음이 입 밖으로 불쑥 튀어나왔다.
“그러면 지금 약속해 주면 되잖아요.”
“무엇을?”
카렐이 제 가슴팍에 손을 올린 사샤의 손가락을 다정히 쥐며 물었다.
“다음 생에는 틀림없이 한날한시에 태어나기로.”
“…….”
“그리고 이왕이면 서로를 찾기 쉽게 바로 옆 동네에서 태어나면 좋겠어요.”
“하하.”
카렐이 즐겁게 웃었다.
“만약에 서로를 찾기 힘들 것 같으면 나는 풀밭의 들풀로 나란히 태어나는 것도 좋아요.”
사샤의 소박한 말에 카렐이 깊은 눈으로 응시해 왔다.
“그럽시다.”
“…….”
“그럴게요.”
그 말을 듣는 순간 코가 찡해져서 사샤는 카렐의 어깨에 가만히 고개를 묻었다.
잠시 후 카렐이 조용히 중얼거렸다.
“그래도 내가 먼저 태어난 게 다행이라 볼 수 있군요.”
문득 카렐이 던진 말에 사샤는 고개를 들었다. 카렐이 온화한 표정으로 저를 내려다보고 있었다.
“왜 그렇게 생각하세요?”
“만약 당신이 삼십대의 성공한 무용수이고, 내가 열여섯 살의 학생이었다면…….”
“그러면?”
사샤는 자신이 겪어 보지 않은 상황에 대해서 상상력의 빈곤함을 느꼈다. 카렐은 그런 사샤를 내려다보며 픽 미소 지었다.
“비극이 벌어지죠.”
“어떤 비극인가요?”
사샤는 정말로 궁금해져 그렇게 물었다.
“생각해 봐요. 내가 열여섯 살일 때 당신은 이미 손에 닿지 않을 만큼 높은 위치에 있었을 거 아닙니까. 발레 테크닉도, 커리어도 아마 정점에 있었겠지요.”
“카렐의 후원이 없었다면 아마 불가능했을 거 같지만……. 그래도 그렇게 생각해 줘서 고마워요.”
카렐은 겸손하게 말하는 사샤의 머리카락을 귀 뒤로 다정히 넘겨주며 이어 말했다.
“나는 아마 쉽게 당신에게 다가가지 못하고 혼자 열병을 앓았을 겁니다. 어렸을 때의 난 성격이 좀 음침했거든요. 치어리더들보단…… 늘씬하고 예쁘장한 남자애들을 침대에 깔아 눕히고 싶어 한다는 걸 알고 나 스스로에게 혐오감을 느끼곤 했죠. 그래서 내 스스로에게 별로 자신감이 없었어요. 멀쩡하게 여자 친구를 사귀는 또래들에게 열등감을 느꼈고, 바보 같은 말이지만 다른 사람들의 기대에 부응하기 위해 나 자신을 바꿔 보려고 노력해 본 적도 있습니다.”
사샤의 눈에 카렐은 이미 모든 걸 다 가진 완벽한 어른이었기 때문에 그가 말하는 과거 십대의 카렐이 왠지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또, 자신감이 넘치는 그가 한때는 이성애자들에게 열등감에 시달렸다니 믿기지 않았다.
“그래도 기회가 될 때마다 발레 티켓을 사서 당신의 공연을 보러 갔을 겁니다. 혹시라도 학교 친구들을 마주칠까 두려워하면서. 당신이 자기보다 키가 큰 십대 남자 팬을 두려워하거나 혐오할까 봐 직접 만나러 갈 생각은 하지도 못했을 거고요.”
그 대목에서 카렐은 갑자기 혼자 쿡쿡 웃었다.
“하지만 어떻게든 당신과 이야기를 나누고 싶어 ‘캐럴’이라는 가명으로 매번 팬레터를 보냈을지도 모르겠군요. 아니, 분명히 그렇게 했을 거예요.”
“…….”
“아무튼 간혹 극장 밖으로 나와 팬들에게 인사해 주는 당신을 멀리서 지켜보는 게 고작이었을 겁니다. 물론 사샤 세드린이라는 이름이 나온 모든 기사와 당신의 영상, 사진을 집착적으로 모으는 것도 잊지 않고……. 그렇게 스토커 짓이나 하다가.”
“…….”
“그러다 어느 날, 당신에게 연인이 있다는 사실이라도 접하게 되면…….”
카렐의 손가락이 사샤의 뺨을 간질였다. 애정 어린 손길이었지만 사샤는 왠지 오싹함을 느꼈다.
“글쎄요. 미쳐서 강간하는 것밖에는 떠오르지 않아요.”
“…….”
“비극이죠?”
카렐은 조용히 말하고는 사샤의 순결한 흰 손등에 입을 맞추었다. 그 키스는 너무나도 정중해서 카렐이 방금 말한 것이 모두 헛소리처럼 들리기만 했다.
“아니요. 어린 카렐은 그러지 않았을 거예요.”
“그럼?”
“사실 저 예전에 꿈을 꾼 적이 있어요.”
“꿈이라…….”
사샤는 희미한 기억 하나를 떠올렸다. 꿈인지, 아니면 전생의 조각인지 알 수 없는 기억이었다. 하여튼 카렐이 지금보다 어리다는 것만은 확실했다. 꿈속의 서툰 카렐은 언제나 사샤를 깨질 듯한 보석처럼 다루었다.
“제 말은, 짓지도 않은 죄로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말이에요.”
카렐은 대답 대신 사샤의 작은 코를 검지 끝으로 건드렸다. 어리다고만 생각한 애인이 하는 말이 제법 성숙하게 들렸다. 심지어 그 말은 카렐에게 기대하지도 않았던 위안을 가져다주었다.
가벼운 한숨을 내쉰 카렐이 말했다.
“아무튼, 만약 우리가 그런 난관을 극복하고 어떤 식으로든 연인이 되는 것에 성공했다 하더라도…… 내가 당신의 과거 연인들을 그냥 과거라고 생각하고 넘길 수 있었을지는 모르겠습니다.”
“…….”
“그런 면에서 당신의 질투는 무척 정당하고 또 신사적입니다.”
신사적이라는 칭찬을 듣고 사샤는 그만 수줍어졌다. 그와 동시에 또 이렇게 카렐의 말재간에 넘어가고 마는구나, 하는 생각이 희미하게 스쳐 갔다.
그러나 자신이 사랑하는 것이 카렐 클레멘츠인 이상 어쩔 수 없는 일이었다. 또, 그에게 휩쓸리는 것조차 더없는 행복이었다.
* * *
카렐은 사샤의 이후 일정을 함께하며 내내 LA에서 머물렀다. 옥사나와 만나기로 한 자리에 끼어들어 두 소년 소녀의 보호자를 자처하여 디즈니랜드에 가기도 했다. 옥사나는 카렐이 언젠가 만나기를 그토록 고대하던 사샤의 애인이라는 사실을 모른 채, 멋진 성인 남자의 흠잡을 데 없는 매너에 가끔 뺨을 발그레 물들였다.
사샤는 옥사나가 제 애인을 마음에 들어 한다는 사실에 조금 위안받았다. 그 전날까지 아무에게도 인정받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사실에 울적했는데, 옥사나만은 미래에도 두 사람을 인정해 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리고 디즈니랜드를 떠도는 사이 어디에선가 파파라치에 찍혔을지도 모르지만, 이제 사샤와 카렐은 그런 것으로 상처받지 않기로 했다.
이후 사샤는 인텐시브 코스에 참여하며 일주일을 더 LA에 있었다. 그 직후 두 사람은 짧은 휴가를 얻어 카렐 소유의 나파 밸리 와이너리에도 다녀왔다. 카렐이 직접 조종하는 헬기를 타고 낮은 고도로 초록색 포도밭 위를 날 때 사샤는 잔뜩 흥분했었다. 이런 경험을 하게 해 줘서 고맙다며 조종 중인 카렐의 목덜미에 열렬하게 매달리기도 했다.
‘그 덕분에 헬기의 무게 중심이 살짝 흔들려 식은땀이 나도록 당황했었지…….’
그건 사샤가 코니아일랜드 관람차 꼭대기에서 발을 구르던 때보다도 아찔한 순간이었다. 하마터면 공들여 가꾼 포도밭에 헬기째로 추락해서 사샤와 한날한시에 눈을 감을 뻔했다.
다시 맨해튼으로 돌아온 카렐은 지난주의 추억을 곱씹으며 건물 벽에 기대었다. 자연히 그림자 사이에 그의 몸이 가려졌다.
카렐은 그사이 피부가 더 그을렸다.
LA에서의 생활도 맨해튼과 그다지 다르지 않았었다. 사샤가 학교에 간 사이 그는 LA의 해변에서 서핑을 하거나 산맥이 내려다보이는 말리부 별장에서 하루 종일 수영을 하곤 했다. 젖은 몸을 말리지 않고 선베드에 누워 낮잠을 자며 사막의 태양 아래서 피부를 태웠다.
아무튼 나쁘지 않은 휴가였던 셈이다. 카렐은 한가한 기분을 느끼며 시계를 바라보았다. 이제 곧 사샤가 나올 시간이었다.
링컨 센터의 광장 옆, 줄리아드 음대보다 더 안쪽에 있는 발레 스쿨에서 간간이 한두 명의 학생들이 걸어 나왔다. 카렐은 그중에서 사샤의 모습을 찾으며 주변을 둘러보았다. 마침 그의 눈에 큰 렌즈를 끼운 카메라를 든 덩치 큰 남성들이 도로에 서 있는 것이 보였다.
잠시 멈칫하던 카렐은 그저 씩 웃었다.
찍으라지.
그리고 마음껏 떠들라지.
지금까지는 사샤가 상처받을 것을 우려해 기를 쓰고 그를 보호해 왔다. 그러나 두 사람의 사이를 애써 숨기려고 할 때마다 도리어 사샤가 상처받는다는 것을 알았다. 게다가 사샤가 도리어 저를 걱정한다는 것을 알고 나서 카렐은 이제 쓸데없는 걱정은 그만두기로 했다.
얼마나 용감한 소년인가.
사샤는 자신이 생각하는 것보다도 훨씬 강했다.
그래서 언제가 될지는 모르지만……. 언제 둘의 사이가 대중에게 공개될지는 모르겠지만.
‘공개할 수 있는 것 역시 축복이 아닌가. 백 년 전의 그들과는 다르게.’
카렐은 그렇게 생각하고 있었다.
거기에 다다르니 모든 것이 거짓말처럼 후련해졌다. 마치 생을 이어서 염원해 오던 소망 하나를 찾은 것 같기도 했다.
어쩌면 그것이 바로 과거나 지금이나 ‘카렐 클레멘츠’가 항상 바라 왔던 것일지도 모른다. 이전 생에는 차마 이루지 못한 소원. 사샤 세드린의 공식적인 연인이자 생의 동반자로서 만인에게 인정받는 것.
언제나 난관은 있지만 지금은 완전히 불가능한 때도 아니었다.
그래서 두 사람은 약속했다. 자연스럽게 행동하기로.
그렇게 언젠가 사람들이 자신들을 자연스럽게 받아들이도록 놔두기로.
“카렐?”
가볍게 달려오는 발소리에 이어 듣기 좋은 사샤의 목소리가 카렐의 귀를 간질였다. 카렐은 기분 좋게 뒤돌았다. 트레이닝복과 저지로 날씬한 몸을 휘감고 스포츠 백을 아무렇게나 둘러맨 사샤가 저를 바라보며 다가오고 있었다.
“진짜 정신 나간 발레단이에요.”
인사 대신 쏟아진 갑작스러운 사샤의 말에 카렐은 멈칫했다. 약간 험악한 단어 선정과는 다르게 사샤의 눈은 기쁨으로 반짝이고 있었다.
“오늘 날 솔로이스트로 지명했어요.”
카렐은 진심으로 놀라 작게 탄성을 내뱉었다. 세계 각지의 발레단에서 탐내던 앞날이 창창한 보석을 손에 넣은 뉴욕 발레단이, 이제 사샤 세드린이 자신들의 것임이 확실시되자 세상에 과시를 해대고 있는 것이 분명했다.
“최단 기간 승급 아닌가요?”
카렐은 미소 지으며 물었다.
“그건 모르겠어요. 하지만 드문 일이긴 한가 봐요.”
이 어린 천재는 등장하자마자 발레계에 돌풍을 일으키고 있었다. 하지만 그에 대한 자각도 없는 듯, 어깨를 으쓱이며 가볍게 말할 뿐이다.
“당연히 드문 일이죠. 내일 헤드라인이 또 당신으로 채워지겠군요.”
카렐의 말에 사샤가 헤실헤실 웃으며 기분 좋은 미소를 보였다.
“그럼 나도 질 수 없으니 흠……. 지분을 매각해 볼까.”
서로 뉴헤드라인 차지하기 싸움을 해 보자는 카렐의 농담에 사샤는 그 자리에서 목을 꺾으며 유쾌하게 웃어 댔다. 그 바람에 행인 몇이 사샤를 알아보고 사인을 받아 갔다. 사샤는 그 자리에서 흔쾌히 셀피를 찍어 주기도 했다.
갑작스러운 만남이 끝날 때까지 조금 떨어져 기다리던 카렐은 모두가 떠난 후에 조용히 다가와 입을 열었다.
“축하해요. 이번 세기의 아이콘이 되기 위한 큰 첫걸음이군요.”
그 말에 사샤가 주머니에 손을 넣은 채로 폴짝 뛰었다.
“이건 글리사드예요. 점프 전의 도움닫기로 많이 해요. 그리고 빅 스텝은 발레에서 그랑 파라고 해요.”
“그랑 파.”
카렐은 사샤의 말을 따라 했다.
“좋아하는 단어예요. 전 무조건 큰 게 좋거든요. 스텝도 점프도…… 그리고 이것도.”
사샤가 겁도 없이 카렐의 바지춤 사이로 손을 뻗어서 카렐은 식은땀을 흘리며 몸을 물렸다. 사샤는 이제 영어가 능숙해지는 것을 넘어서 농담에도 거침이 없다.
두 사람은 차에 오르는 대신 천천히 걷는 것을 택했다. 가끔 두 사람을 흘끔대는 이들도 있었지만 대부분은 그들을 그냥 스쳐 지나갔다.
카렐이 문득 말을 건넸다.
“어때요, 사샤.”
“네?”
“열일곱 살에 굉장히 많은 것을 이루었는데…….”
“…….”
“아직도 자신이 저 아래 계단에 있는 것 같나요?”
언젠가 사샤가 했던 말을 떠올리며 카렐이 물었다.
러시아에서 온 빈털터리의 열다섯 살 소년은 자기가 가진 게 아무것도 없다고 생각하며 깊은 우울에 잠겨 있었다. 가족도, 친구도, 당장 몸을 눕혀 쉴 곳조차도……. 그러나 카렐은 알고 있었다. 그 소년의 안에 무엇과도 바꿀 수 없는 가치가 잠들어 있음을.
그리고 이제 그것을 세상에 증명할 때가 왔다.
“난 당신이 이미 훌쩍 올라온 것 같은데요.”
“…….”
“심지어 곧 앞질러 갈 것 같고.”
그렇게 말하며 카렐은 잠시 멈춰서 사샤의 손을 잡고 그가 한 계단 위에 올라가게 했다. 붉은 벽돌이 아름다운 저택의 계단 앞에 나란히 선 두 사람은 정확하게 맞는 눈높이로 서로를 바라보았다.
사샤는 빙긋 웃었다.
“내가 여기서 만약 한 걸음을 더 올라가면.”
그렇게 말하며 사샤는 한 칸 더 위로 올라갔다. 이제는 카렐이 사샤를 올려다보고 있었다.
카렐의 시야 안에서, 아름답게 성장한 청년 사샤 세드린이 환한 햇살을 받으며 미소 지었다. 사샤가 카렐에게 다시 손을 뻗었다. 그리고 잡은 손을 가볍게 이끌어 카렐을 제게로 끌어당겼다.
“그땐 내가 카렐을 끌어당겨 주면 되죠.”
“…….”
“우린 항상 마주 보는 거예요.”
* * *
그날 저녁, 사샤의 인스타에는 또 한 장의 사진이 올라왔다.
붉은 벽돌을 가진 저택의 사진이었다. 자동으로 태그된 위치는 그리니치 빌리지. 싱싱하고 키 큰 가로수들이 초록색 이파리를 계단에 떨궈댄 낭만적인 풍경이었다.
사샤가 잠들고 난 후, 카렐은 조심스레 침대에 기대어 앉아 먼저 잠이 든 사샤의 이마에 입술을 꾹 눌렀다.
그리고 사진 아래 사샤의 일기를 읽으며 카렐은 그 어느 때보다도 깊은 행복감에 잠겼다.
사진의 아래에는 언제나처럼 제멋대로의 스펠링으로 이런 글이 쓰여 있었다.
[사랑은 우릴 동동하개 해져요.
무슨 뜻이냐 우리는 같은 게단 위에 올라가서서잇다는 거예요.
우리가 처음 만났을 데는 그가 저 위 꼿대기에 있었지만
사랑이 우리가 같은 게단 위에 있께 해주웟어요.
우린 지금 같은 단에 서잇어요.
서로를 마주 보먼셔요.]
그에 대한 답례로 카렐은 사샤 말고는 아무도 찾아오지 않는 자신의 계정에 사진 한 장을 올렸다. 내일 사샤가 일어나면 확인할 수 있도록. 한 땅에 나란히 피어난 들꽃 두 송이의 사진을.
라 발스 : 그랑파 완결